당의 재정적 원천 히틀러가 루르 투쟁 참여를 반대하기로 한 사실을 당시 겨우 몇 사람밖 에 몰랐다는 사실은, 국가사회당이 프랑스 자금으로 조직을 확장하고 선전 활동을 하고 제복과 장비를 갖추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 러한 소문은 한 번도 믿을 만한 입증자료를 제시한 적이 없다. 그리고 도 대체 어떠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해단체가 확장 일로에 있던 이 정당에 영향을 미치려 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도 오늘날 이르기까지 오직 짐작 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어쨌든 국가사회당이 사용한 경비는 특히 히틀러가 당수직을 맡은 뒤로 당원의 수와 맞지 않는다. 재력이 있는 기부자를 찾으려 한 일은 좌익측의 악마 콤플렉스만으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좌익은 자기들이 '역사에 역 행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잊을 수 없는 패배를 맛본 것에 개해 서 국가사회당이 독점자본가와 배후에서 결탁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하였 다. 국가사회주의자 본인들도 재정문제를 알리지 않고 히스테리컬하게 감 추려 애썼기에 가장 대담한 추측에도 여지를 남겨준 셈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계속 새로 고발되었다가 조정 받기에 이른 수많 은 명예훼손 재판의 서류들은 1933년 이후에 없애거나 소각하였다. 아주 처음부터 기부금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당사무소 일지는 아주 드물게만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남기 고 있다. 대개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다. '드렉슬러가 개인적으로 처리 함'. 때때로 히틀러는 뮌헨 지하술집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보고한 거래의 세부사항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저 (Hitler) 405쪽 수많은 다른 세부사항들도 여기서 인용) 당의 재정적 근거는 의심할 바 없이 회원의 당비, 자발적인 헌금, 히틀러 연설이나 그밖에 당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서 걷은 입장료 등이었 다. 이것은 자주 수천 마르크에 이르곤 하였다. 초기에 추종자들 중 일부는 예를 들면 11월 9일 장군 홀 앞에서 죽은 오스카 쾨르너 같은 사람은 조그 마한 장난감 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강을 위하다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 렀다. 가게 소유자들은 할인권으로 도움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장신구나 예술품을 기부하기도 하였으며 혼자 사는 여성들은 밤 집회에서 히틀러의 모습에 도취해서 꿈도 못 꾸던 감동이 격앙 상태에 이른 다음에 국가사회 당에 유산을 기증하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베히슈타인, 부르 크만, 에른스트 '푸치' 한프슈텡글 같은 재산이 있는 히틀러의 친구들은 상 당한 기부금을 내서 당을 도와주었다. 당은 또한 당원들에게 당비 말고도 채권을 발행해서 비용을 장만하였다. 대개 당원이나 추종자들이 이 채권을 샀는데, 경찰 통계에 따르면 1921년 전반부에만 10 마르크 짜리 채권이 4 만 장 이상 발행되었다.(프란츠 빌링, 뤼데케는 50세 여인이 히틀러 연설을 듣고 난 다음에 당 사무소를 찾아와서 당에 유산을 기증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은 초기 몇 년간 지속적인 자금부족으로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1921 년 중기에도 입출금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초기 당원이었던 사람의 보고 에 따르면 때로는 벽보 붙이는 데 필요한 접착제 비용조차 없을 때도 있었 다. 1921년 가을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열기로 계획되었던 대규모 행사를 재정적인 이유로 포기한 적도 있었다. 물질적인 형편은 열렬한 활동 덕분에 당이 점점 더 사람들 눈에 뜨기 시 작한 1922년 여름부터 좋아졌다. 그때부터 당은 헌금자들과 밀접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들 헌금자들은 원래 당원은 아니지만, 재산은 가지고 있고 공산주의 혁명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시민사회의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은 우익의 군사적인 전투조직부터 종파적인 주간지 혹은 저항적인 생각을 가 진 수많은 잡문작가들 패거리까지 모든 우익 방어조직을 지원해주었다. 그 들은 히틀러를 출세시키려 했다기보다는 공산주위 혁명에 반대하는 가장 정력적인 힘을 이용하였다. 히틀러가 바이에른 사회의 영향력 있고 재력이 막강한 그룹과 관계를 가 지게 된 것은 디트리히 에카르트 덕분이었다. 에카르트 다음으로는 특히 막스 에르빈 폰 쇼이브너 리히터 루덴도르프의 덕을 입었다. 루덴도르프는 스스로 실업가와 대지주의 대표자들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지ㅝ을 받아서 임으로 여러 민족주의 전투조직에 나누어주었다. 에른스트 룀이 돈, 무기, 장비 등을 동원할 때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친구인 에밀 간서 박사는 '국민 클럽'에서 결성된 바깥 지역의 경제계 인사들과 접촉을 만들어 냈다. 히틀 러는 1922년에 처음으로 그 런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밝혀 보였다. 기부자 들 중에는 기관차 제조업자 보르지히 제철소 연합의 프리츠 티센, 추밀 고 문관 키르도르프, 다이믈러 공장, 바이에른 산업연합, 그밖에 체코슬로바키 아,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경제계도 성공적으로 등장한 당에 재정적 후원을 해주었다. 1923년 가을에 히틀러는 취리히로 여행을 하여T다. 그리고 소문에 다르 면 '스위스 프랑과 달러 지폐가 가득 든 대형 트렁크'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속을 알 수가 없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쿠어트 뤼데케도 지금까지 확 인되지 않은 외국의 어떤 단체에서 상당한 금액을 지원 받아왔고, 그 돈으 로 마침내 단원이 50명이 넘은 '자신의' 돌격대에 재정지원을 했다. 헝가리 에서도 기부금이 왔고, 러시아, 발트 지역 도이치 이민자 그룹에서도 기부 금이 들어왔다. 당 임원들 몇 명은 인플레이션 기간에 외국돈으로 봉급을 받았다. 예를 들면 돌격개 지휘부 상사이며 뒷날 히틀러의 기사가 된 율리 우스 슈레크(J. Schreck)나 돌격대의 임시 사령관 호프만 대위가 그런 사 람들이었다. 쇼이브너 리히터의 제안을 받고 예전의 장교였던 사람이 베를 린 타우엔트치엔 거리에 만든 유곽도 민족의 일에 봉사하기 위해서 수익금 을 뮌헨 중앙당으로 보내왔다. 당에 주어진 이러한 재정적 후원은 그 원천이 다양한 만큼이나 후원의 동기도 다양하였다. 1922년 이후 히틀러의 대규모 사업들은 이러한 후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광포하게 상승하던 선동가 히 틀러가 오랜 고독의 세월을 보낸 다음 처음으로, 그리고 취한 듯이 항거할 수 없는 자신의 힘을 체험한 지금 물질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어떤 구속 력이 있는 의무를 지지 않았다는 주장 역시 옳다. 국가사회주의의 반자본 주의 감정은 그들을 질투하던 좌익측에 의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 여진 적이 없었다. 이러한 감정은 막연히 합리적 근거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고리대금업자, 밀매상, 백화점 등에 대한 항거에서 온 것이기에 집사와 가게 소유자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아무런 빛나는 체계도 제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분노에 신뢰를 얻어주었다. 이러한 감정은 유산계급의 도덕성 을 문제삼았을 뿐, 그 물질적 기반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초기의 당 연설 가들 중 한 사람이 절망하고 불안한 대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쳤을 때 그는 이 운동의 선전효과가 큰 비합리성을 잘 표현해낸 것이다. "여러분, 잠깐만 참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여러분을 부르면 저축은행을 보호하십 시오. 우리 프롤레타리아들은 그곳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맡겨놓으니까요. 그러나 큰 은행으로 몰려가서 거기 있는 돈을 모두 꺼내다가 거리에 뿌리 고 무더기로 태우십시오! 그리고 거리전차를 교수대 삼아 유대인의 목을 매답시다!" 히틀러도 인플레이션과 비참한 대중을 배경으로 그와 비슷한 요구들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기만성을 되풀이 공격함으로써 엄청난 추종세력을 얻었다. 자본가들로부터 상당한 기부금을 얻었으면서도 그랬다. 당의 사무장 막스 아만은 1923년 11월 쿠테타 시도가 끝난 직후 뮌헨 경찰 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히틀러는 헌금자들에게 "영수증 조로 당 강령만 을 주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고 백 이상을 그에게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밖에 부 정부패는 히틀러의 이미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의 확고함, 그 사이 커진 자신감과 그의 망상의 힘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전투동맹 1월말에 공권력에 맞선 힘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일은 국가사회주의를 바이에른 극우파 그룹들의 선두에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파도처럼 연속된 집회, 시위, 행진 등에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전보다 더 소란을 피웠고 미 래를 확신하였다. 쿠테타 소문, 정부전복 계획 등이 자꾸 나타났다. 국가사 회당의 지도자가 정열적인 구호로 선전한 여러 가지 분위기들은 상황이 전 체적으로 바뀔 시기가 임박했다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히틀러가 표현하였 듯이 '경박한 쿠테타가 아니라 전례 없는 전체적 청산작업'이 눈앞에 왔다 는 분위기였다. 그와 동시에 지난 몇 주 경험을 이용하여 지도자 선전이 강화되었다. 이 경험자들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지도자라는 후광이 충분히 퍼지기만 한다 면 예기치 못한 도전적인 결정들도 추종자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그 에게 가르쳐주었다. 이 선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히틀러는 '운동 전체의 이념을 분명하게 눈앞에' 가지고 있다. 그는 '새로운 민족주의 독일 을 위해 부름받은 지도자'다 . '우리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널리 퍼져서 종교적 형식이 된 지도자 숭배는 히틀러의 생일이 들어 dT는 4월 하반기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는 <민족관찰자>에다 히틀러라는 이름의 '신화적 울림'을 찬양하는 찬사를 썼다. 왕관 서커스에서는 당 지도부, 국민연합 대표자들, 9천 명의 추종자 들이 모여서 이 투쟁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서 히틀러 헌금이 모금되 었다. 사뢰자 헤르만 에서는 히틀러를 보고 그 잎에서 길을 비키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맞아들였다.(VB,1923년 4월 18일부터 23일까지.1923 년 1월 31일과 3월 22일자) 그토록 분명하게 다가오는 결단의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서 2월초에 벌써 룀의 재촉에 따라 국가사회당은 몇 개의 국수주의 민족적인 군사조직체와 동맹을 맺었다. 하이스 대위가 이끄는 '제국기'와 그밖에도 '고지연합' '뮌 헨 조국연합' '저지 바이에른 전투연합'등이었다. '조국전투연합들의 노동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공동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모임의 군사적 지휘권 은 헤르만 크리벨 대위에게 맡겨졌다. 그럼으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던 국수주의 단체들을 상부조직인 '바이에 른 통일 조국연합'에 맞서는 대응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조국연합은 예전의 주지사였던 폰 카르와 김나지움 교사였던 바우어의 지휘 아래 극히 다양한 단체들, 즉 하양, 파랑운동, 모든 도이치 운동, 왕당파, 그밖에도 제각각의 종족적인 단체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크리벨의 검 정, 하양, 빨강 전투동맹은 군국주의적이고 과격하고 '파시즘적인' 성향이었 으며, 무솔리니 혹은 터키의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의 예를 복 국가전복에 대한 생각을 얻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지금까지 무제한이었던 자신의 명령 권을 일부 빼앗아간 당의 이런 확장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것인가 하는 것 을 5월 1일에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도박에서 의 행운에 익숙해져 서 국가 공권력에 한번 더 대립을 시도하였다. '전투동맹'에 강령을 마련해주겠다는 시도가 벌써 파트너들의 병사적인 이성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봄이 지나는 동안 그는 크리벨, 룀, 방위군 등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혁명군대로 쓰기 위해서 만들었던 돌격대를 빼앗 아 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10만 병사를 비밀리에 양성하겠다 는 목적으로 그들을 돌격대 연대들을 훈련시키고 밤 훈련과 분열식을 계획 하곤 하였다. 그 자리에 히틀러는 언제나 보통 시민의 차림으로 등장하곤 하였으며 때 로는 인사말을 하기도 하였으나 지휘권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화가 잔뜩 나서 돌격대 부대가 자기 목적에서 멀어지고, 전위적인 세 계관에 의해서 방위군의 보충 부대로 전락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독자적인 명령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몇 달 뒤에 자신의 옛 전우인 요제프 베르 히톨트 소위에게 일종의 사령부 수비대를 만들라고 위임하였다. 수비대는 '히틀러 돌격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것은 뒷날 친위대의 토대가 되었 다. 5월 1일의 실패 4월 말 히틀러와 전투동맹이 모여서 회의를 한 끝에 좌파 정당들의 연례 적인 5월 1일 집회를 도전으로 간주하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 동시에 그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종말을 고한 4주년을 기념하 기 위하여 자기들의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였다. 우유부단한 폰 크닐링 (바이에른 주정부) 정부는 지난 2월의 패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전투동맹의 최후통첩을 절반만 승인하였다 좌익 측에는 테러지아 풀밭의 집회를 허가하였으나 시가행진은 거부하였다. 그 러자 히틀러는 잔뜩 흥분한 모습을 드러냈다. 1월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민간의 판결에 대해서 군사적 힘을 개입시키려고 시동하였다. 4월 30일 극단적으로 긴박한 상황에서 크리벨, 바우어, 신임 돌격대장 헤르만 괴링 등이 정부청사에 출두하여 죄익측에 대하여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하였다. 그 동안 히틀러는 룀과함께 다시 폰 로소브 장군을 찾아가서 방위군이 개입해줄 것, 합의에 따라 병참기지에 있는 조곡연합의 무기들을 내줄 것 을 요청하였다. 히틀러로서는 끝도 없이 놀라운 일이었지만 장군은 두 가 지 요청을 다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국의 안전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야 하는지 안다고 했다. 그리고 소동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는 쏘겠다고 말 하였다. 바이에른 주경찰국장 자이서(Seisser)도 그 비슷한 말을 하였다. 히틀러는 다시 전망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시끄럽게 예고된 5월제 방해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특징 적인 행동으로 패배를 부인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준비를 강화하였다. 로 소브 앞에서 '빨갱이 시위'는 시위대가 오직 자신의 '시체를 넘어서 행진'할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면서 허풍스러운 운명론과 흥 행주의 싸구려 정열도 함께 내보였다. 이때나 뒷날이나 지나치게 긴장된 진지함을 통하여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자신의 존재를 전부나 무냐하는 양 자택일에 내놓은 극단적인 과격함이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준비를 재촉하였다. 무기, 대포, 자동차 등이 준비되었 고 마지막에 방위군을 기습적으로 속이기까지 하였다. 로소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룀과 몇 명의 돌격대 대원들을 병참부로 보내서 5월 1일 좌 익 세력이 폭력행위를 할까 봐 주 정부가 염려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 특 히 기총과 기관층을 구했다. 쿠테타 비슷한 그런 행동을 보고 동맹 파트너 몇 명이 주저하면서 토론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는사이 사건 자체가 사건 주동자들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다. 경계명령을 들은 히틀러의 부하들이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프라이 징 등에서 뮌헨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상당수는 무장상태였다. 툇츠 온천에서 온 패거리는 화물차량에 낡은 야포를 매달고 왔다. 그레고어 슈 트라서와 하인리히 히믈러가 이끄는 란츠후트 부대는 몇 대의 경기기관총 을 가지고 오T다 모든 사람은 히틀러가 수백 번도 더 약속하였다고 여러 해 동안이나 기다려온 혁명봉기를, '11월 수치의 제거'를 기대하고 있었다. 경찰총장인 노르츠가 크리벨에게 경고하였지만 겨우 이런 대답을 들었다.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유혈사태가 벌어지든 말 든 마찬가집니다."(에두아르트 노르츠가 대화를 계속하면서 , 드레세 검사 에게 보낸 1923년 5월 23일자 편지, 국가사회당의 예전의 중앙문서고) 동이 트기도 전에 벌써 위풀밭, 막시밀리안 광장과 그밖의 몇 군데 도 시 중심지에 '조국연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른바 위협적인 사회주의 쿠테타를 막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약간 늦게 위풀밭에 등장하였다. 그는 군대의 야영지 비슷한 가장자리로 들어서서 매운 극적인 태도로 철모를 머 리에 쓰고 1급 철십자 훈자을 달았다. 그이 수행원 중에는 괴링, 슈트라이 허, 루돌프 헤스, 그레고어 슈트라서, 그리고 뮌헨 돌격대를 지휘하는 의용 군 대장 게르하르트 로스바흐 등이 섞여 있었다. 돌격대가 아직도 오지 않 는 진군명령을 기다리면서 훈련을 시작하였다. 룀이 약속한 신호를 보내오 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지휘자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의견도 일치하지 않 은 채 점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사이 테레지아 풀밭에서는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이 전통적인 혁 명적 구호들도 간간이 외치긴 하였지만 평화롭게 공동의식으로 뭉쳐서 5월 제를 지냈다. 경찰이 위풀밭에서 도시로 통하는 방향을 상당히 넓게 차단 하였기 때문에 예상되었던 죄우익간의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룀은 이 순간에 자신이 상관인 전해듣고 화가 잔뜩 나서 훔쳐간 무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정오가 조금 지나서 룀 대위는 무장병사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위풀밭에 나타나서 장군의 명령을 전했다. 슈트라서와 크리 벨이 좌익과 충돌을 일으키면 방위군이 마지막에는 자기들 편을 들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진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서 포기하였다. 즉석에서 무기를 돌려주는 치욕은 피하여"T지만 족구연합은 어쨌든 무기를 자진 반납하였다. 분명한 참패였 다.. 그날 저녁 왕관 서커스 무대를 가득 채운 추종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 의 강렬한 빛도 그러한 패배를 지우지는 못하였다. 첫 번째 위기 수많은 징후들은 히틀러가 상승하던 시절에 여기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5월 1일의 실패를 동맹 파트 너들, 특히 까다롭고 고집 센 민족주위 연합에 의존한 탓으로 돌릴 수 있 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트너들의 태도 뒤에는 분명히 자신의 약점과 실책도 들어 있다고 혼자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 다도 그는 잘못된 생각을 좇았다. 급한 성질이 멋대로 튀어나와서 완전히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힘이 되어 주었 던 공화국 방위군을 자신의 배후세력으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맞선 위협적인 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일년 간 폭풍같은 상승을 경험한 다음 겪어보는 최초의 퇴각이었다. 여러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디트리히 에카르트를 찾아가서 베르히테스가덴에 은둔했다. 가 끔 가다가 연설하러 나타나거나 아니면 기분전환을 하러 뮌헨으로 갔다. 그의 전략적인 행동방식은 그때까지 주로 의존본능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 제 그는 이 5월제의 인상아래서 논리적인 전략 시스템의 특성들을 발전시 켜 나갔다. 그것은 국가 공원력과 대립하지 않고 공권력을 자기편으로 만 들어서 성공하는 것 '주지사의허가를 받은 혁명'이라고 적절하게 표현된 '파시스트' 혁명개념에 대한 최초의 윤곽 들었다. 그는 자기 생각들 중 일 부를 기록하였고 그것은 나중에 <나의 투쟁>안에 삽입된다. 그러나 여론의 비판적인 반응은 더욱 의심쩍은 것이었다. 수많은 채찍질 하는 연설에서 히틀러는 지도자의 행동, 의지, 이념 등을 화려하게 묘사했 다. 5월 1일 행사가 있기 일주일 전만 해도 영웅이 필요한데 수다쟁이자만 쳐다보는 민족을 언변 좋게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몽상적인 행동의 믿음을 찬양하였다. 위풀밭에서 보여준 망설임과 어쩔 줄 모르는 태도의 코미디는 그런 자화자찬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히틀러와 그 패거리들이 허풍 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당시 어떤 보고에 나타나고 있다. 헤르만 에서 가 6월초에 <민족관찰자>에 억지 비명을 지르면서 밝힌 '위대한 아돌프'에 ,뮌헨 포스트>지가 아이러니컬하게 이런 수식어를 붙였다. 대한 암살 음모 설도 그의 인기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미 4월에 비슷한 폭로가 출간괴기 도 하였지만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자들 쪽의 창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히틀러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다."고 <뉴욕 신문> 의 어떤 특파원은 적어보냈다. 사태를 잘 아는 당시의 관찰자가 5월초에 지적하였듯이 그의 볕은 '대단히 빛바래' 보였다.(뷔르템베르크 공사 모저 의 상세한 보고서, 도이얼라인 61쪽에서 인용) 베르히테가덴의 풀죽은 고독 속에서 매우 감정적인 그의 눈에 아마 이별 의 빛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매우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대단히 위축되었다. 완전히 기가 죽어서 로소브와 깨진 유대를 회복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고트프리트 페더, 오스카 쾨르너와 그밖에 몇 명 의 추종자들이 그를 정상으로 회복시키고, 특히 '푸치' 한프슈텡글을 제외 시키고 시도해보았지만 그는 거의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프슈텡글은 그에게 '아름다운 여인들'을 소개해주었고 그녀들은 도전적으로 '비단바지 를 입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술판'을 벌였다. 옛날의 무기력과 무관심 상태에 다시 떨어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뮌헨 지방법원 감찰측이 5월 1일 사건에 대해서 이끌어 낼 처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유죄판결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 는 상황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발러슈테트는 사건으로 두 달간의 금고형 을 살아야 할 처지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바이에른 내무장관 슈바이어는 히틀러가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옛날의 의도를 실행에 옮겨서 그를 추 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힘있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국수주의적인 성향 을 이용하여 교묘한 역습으로 선수를 쳤다. 담당검사에게 보낸 진정서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조국에 바치는 경의에 알맞은 공개적인 변호의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 몇 주전부터 언론과 지방의회가 아주 끔찍하게 나 를 욕하고 있기 때문에,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경 의에서 일체 자유로워지는 일이 내게 허락된다면 나는 운명에 감사할 따름 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 진정서를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러한 암시는 물론 제대로 이해되었다. 담당 검사의 걱정스런 소견서와 함께 이 편지를 받게 된 국수주의적인 법무장관 귀르트너는 이 편지를 보 고 아직도 유효한 옛날의 합의들을 기억해냈다. 그 자신이 국가사회주의자 들을 가리켜 "우리 살 주의 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하이덴 130쪽 참조) 인플레이션, 대규모 파업, 루르 투쟁, 배고픈 폭동자들 여러 가지 소요 등 은 좌익에 의해서 폭발점으로 이끌려가는 상황이었고, 매일 심해지는 이러 한 곤경은 국수주의적 지도자를 보호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비록 그 자 신이 이러한 국가적 곤경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사건조사의 경 과를 궁금하게 여기는 내무장관에게 알리지도 않고서 귀르트너는 검찰청 에, 이 사건을 '좀더 조용한 시기'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는 소망을 알렸다. 1923년 8월 1일 조사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듬해 5월 22일에 계속되었다. 극적인 반전 9월초의 사건을 보면 히틀러가 그 동안 얼마나 엄청난 체면손상을 입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조국연합이 세당 승리 기념일에 뉘른베르크에서 '도 이치 알' 행사를 위해 모였다. 이것은 해만다 바이에른의 여러 지역에서 번 갈아 가면서 화려하게 벌이는 행사였다. 깃발, 꽃들, 퇴역장정들이 화려하 게 둘러선 가운데 수십만 인파를 앞에 두고 연설과 행진을 벌이면서 모독 받은 국민감정과 더 아름답고 나은 미래 전망의 필요성을 찬양하였다. 이날 1922년 9월 2일 행사에 대해서 뉘름베르크 퓌르트 소속의 어떤 장 관은 직무를 잊고 열광하여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천둥과도 같은 만세소리가 내빈과 행렬을 둘러쌌다. 손수건을 든 수 없는 팔들이 행렬을 향해 뻗어 나왔다. 꽃과 화원의 불경이 사방에서 행렬을 향해 쏟아졌다. 수 십만의 낙담하고 짓밟히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노예상태와 곤궁에서 해방되 리라는 희망의 빛줄기가 뻗쳐 나와서 즐거워 외치는 것 같았다. 남자고 여 자고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서서 눈물을 흘렸다.(도이얼라인 170쪽에서 인용)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수십만 행진 참가자들 중에 국가사회주위 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러나 하늘로 솟아오르는 환호성 한가운데에 루젠도 르프가 이었다. 그 사이 자신이 잃어버린 영역을 잊지 않고 있던 히틀러는 이런 대규모 행사의 영향 아래서 다시 대열에 끼려고 하였다. 그는 하위스 대위의 '제국기' 연합과 프리드리히 베버가 이끄는 '고자 동맹'과 연합하여 '도이치 전투동맹'을 만들었지만 지도자 자리를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5월 1일 패배뿐 아니라 뮌헨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빠른 몰락 을 예비했다. 그가 등장하여 센세이션을 만들어내지 않게 된 순간 벌써 이 름 권위 선동가의 영광 등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끈질긴 룀이 3주 동안이나 쉬지 않고 졸라서야 전투 동맹 지도자들 사이에서 친구인 히 틀러는 명성을 겨우 어느 정도 되찾았다. 이제서야 히틀러는 동맹의 정 치적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모든 힘을 소진하며 계속되는 루르 투쟁을 중단하기 로 한 중앙정부의 결정이 그가 지휘권을 장악하게 된 외적인 요인을 만들 어주었다. 정부를 떠맡은 지 6주 만인 9월 24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소 극적 저항을 중단하고 프랑스에 대한 전쟁비용 보상금 지불을 다시 시작하 였다. 히틀러는 지난 몇 달 동안 소극적인 저항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인 목적의식은 이렇게 인기 없는 정부의 새로운 조치를 수치스 런 반역의 증거라고 낙인찍고 그럼으로써 정부전복을 위한 명분을 얻어내 려고 하였다. 벌써 다음날로 그는 전투동맹 지도자들인 크리벨, 하이스, 베버, 괴링 룀 과 모임을 가졌다. 두 시간 반 동안 계속된 열렬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들과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도이치 전투동맹'의 지휘권 을 넘겨잘라는 부탁으로 연설을 끝맺었다. 룀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이스는 마지막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베버도 감동되었고, 룀 자신은 울리면서 마음속으로는 흥분해서 몸이 떨렸다. 사건 발전이 결정적 인 순간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그는 다음날로 군에서 제대하고 완전히 히틀러에 합세하였다. 전투동맹의 지도자들로서 히틀러는 자신의 결심의 힘을 보여주어서 모든 회의론자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일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적으로 그는 1만 5천 명의 돌격대 부대에 경계태세를 취하라고 명령하 고, 자신의 폭발력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사회당원들에게 다른 민족주의 연 합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과격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이 모든 계획들, 전략, 명령 등의 원래 목적은 거칠 고 화려한 선진활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란스런 선전활동 장면은 그에 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우세하다는 느낌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미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는 9월 27일 저녁에 한꺼번에 14개의 대규모 집회를 열어서 14번이나 똑같이 무한히 상승하는 느낌을 만들어 내 기로 계획하였다. 전투동맹의 의도는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노예상태와 수치에서' 해방을 , 그리고 수도 베를린으로 진군하여 국수주 의적 독재정부를 만들어내고, '내부에 있는 저주스런 적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벌써 3주인 전인 9월 5일에 그러한 의도를 발설하였다. '베를린이 행군하여 뮌헨에서 끝을 맺느냐 아니면 뮌헨이 행군하여 베를린 에서 끝을 맺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볼세비스트의 북부 독일과 민족주위 바이에른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어떤 계획을 추구하고 있었는지, 특히 그가 쿠테타 를 계획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말만 하는 것이었는지 분명치가 않다. 상당 수의 증거들은 그가 자신의 작용력과 대중의 분위기에 따라서 앞으로의 일 을 결전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선전술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대중의 열광을 통해서 국가권력까지 조종해보려고 하였다. 위에 언 급한 행사에서 그는 '끝없는 말싸움에서' 새로운 독일이 자라 나온다고 말 했다. 어쨌든 전투동맹 회원들에게는 엄격한 명령이 전달되었다. 뮌헨을 떠 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심각한 경우에 대비하여 암호가 전달되었다. 뮌헨 정부는 떠도는 쿠테타 소문에 밀리고 '공산주의'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과 여러 가지로 특수한 바이에른의 원한을 가지고, 또한 구석에 처박 히고 싶어하는 소망들을 가지고 히틀러를 앞질러 버렸다. 사전예고도 없이 주지사인 폰 크닐링은 9월 26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이미 1920년에 도 한 번 그랬지만 이번에도 구스타프 폰 카르를 독재적 전권을 가지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카르는 전투동맹과 협조하는 것은 환영이라고 말 했지만 히틀러에게는 일체 '과격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계획되어 있던 14개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히틀러는 화가 나서 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뒷날 여러 자기로 묘사된 발작 형태로서 자신의 열변과 분노의 외침에 스스로 열이 올라서 일종의 의식불명 상태로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이다. 그러한 광란상태에서 히틀러 는 혁명과 유혈사태로 협박을 하였지만 카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가장 막강하고 폐쇄적인 방위력인 전투동맹의 대표로서 히틀러는 자신이 국가권 력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카르는 그를 공권력의 한 대 상으로 격하시켰다. 한 순간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듯했다. 밤이 지나면서 룀, 푀너, 쇼이브너 리히터 등이 그를 설득하여 이 의도를 거두어 들이게 만들었다. 어차피 사태는 이미 히틀러의 의도를 훨씬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베 를린에서는 공화국 대통령 에버트가 의장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각의를 소집하였다. 폰 카르는 너무나 자주 '조국을 구하기 위한 바이에른 의 사명'을 부르짖어 왔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공화국의 붕괴와 보스적인 귀족정권의 수립, 바이에른의 계속적인 독립상태와 바이에른의 왕정복고를 의미한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자신이 새로운 직위에 오른 다음 너무나 분명한 걱정거리를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라의 화폐가 붕괴되고 경제가 무너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센과 함부르크에서 공산당이 영향력을 확보하였고 서부의 분리주의 운동을 놓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마구 흔들리 고 있어서 뮌헨 사태는 실제로 정세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신호가 될 수 있 는 상황이었다. 이토록 극적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나라의 장래는 방 위군에 달려 있었다. 반위군 사령관 제크트 장군은 그 자신이 광범위한 사람들에 의해서 우일 독재권력의 대상자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비상한 상황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약간 늦게 회의장에 나타났다. 실질적 인 권력자로서 냉정한 특별의식을 지닌채 그는 흥분한 각료회의 탁자로 걸 어갔다. 에버트가 이 순간 방위군은 어디 있는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 였다. "방위군은 지금 제 뒤에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그럼으로써 한 순 간 실질적인 권력 상황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같은 날 국가 비상사태 선포와 더불어 공화국 전국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자 적어도 형식 상의 충성심을 가지고 정치 지도층 복종하였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소란스럽고 예측이 되지 않는 가운데 다 음 몇 주간의 사건이 진행되었다. 제크트는 두 가지 주요문제를 서둘러서 해결하였다. 9월 29일에 퀴스트린에서 불법적인 검은 방위군이 부흐루커 소령의 지휘를 받아 궐기하였다. 이 부대는 루르 투쟁이 중단된 이후 자기 들이 해체될까 두려워서 수많은 혼란스런 표지들을 만들어 내서 우익, 특 히 방위군에게 진군 신호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성급하게 이루 어져서 충분한 협조도 얻지 못한 이런 시도는 짧은 시간 포위를 당하고 난 다음에 곧장 무너지고 말았다. 곧 이어서 제크트는 혁명시대의 잊지 못할 감정들을 증명하는 단호한 행동으로 작센, 튀링겐, 함부르크 등에서 좌익의 위협을 물리쳤다. 그런 다음 그는 바이에른과의 힘겨루기에 나섰다. 그 사이 바이에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전략적 구성에 맞게 카르를 자기 편으로 삼았다. 카르와 로소브는 어떤 분노하고 모욕적인 기사 때문에 <민 족 관찰자>를 발간 금지하라는 제크트의 요구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이어 서 로스바흐, 하이스 소령, 에르하르트 대위를 체포하라는 명령도 역시 무 시되었다. 로소브가 파면되자 바이에른 계엄사령관은 헌정 중단상태에서 그를 바이엘는 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서 베를 린과의 갈등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서 가능한 일을 다하였다. 마지막에 그 는 중앙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고, 에버트 대통령의 편지에 대해서 공개 적인 선전포고를 답하였다. 대법원에서 지명수배한 이전의 의용군 지휘자 에르하르트 대위를 잘츠부르크 은신처에서 데려다가 베를린 진군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진군계획서는 최초의 공격날짜를 11월 15일로 잡았다. 이런 간한 행동에 이어 강경한 말들이 나왔다. 카르 자신은 바이마르 헌 법의 비 도이치 정신을 공격하였다. 정부를 가리켜서 '점토덩이' 라고 불렀 다. 자신은 국제 공산당 유대주의에 맞선 세계관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사 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끄러운 반응을 보여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된 데 따르는 다양한 기대들을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히 틀러의 의도를 도와준 꼴이었다. 5월 1일의 운명적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 는 카르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민족 관찰자>의 기사 하나로 충분하였다. 베를린과의 갈등은 히틀러에게 바이에른 권력자들과의 동맹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히틀러는 중앙정부에 맞서 혁명적인 출발을 하기 위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제크트가 로소브의 퇴진을 요구하자 베를린과 대림하 기 위해서 민족주의 연합이 모두 모여들었다. 히틀러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거대한 기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면 결정이 날 것이라고 그는 <이탈리아 소식>지와의 인터뷰에서 말 했다. 짧은 간격으로 여러번이나 로소브를 찾아가서 화해를 하려고 하였 다, 자기들은 이제 공동의 이해와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고 행복하게 말 할 수 있었다. 한편 로소브도 자기는 "히틀러의 생각과 열에 아홉까지 완 전하게 일치한다."고 확언하였다. 진다 그런 일을 바라지도 않았건만 바이 에른 방위군 사령관 로소브는 중심 역살 하나를 떠맡고 무대중심부로 나오 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자 역할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비정치적 인 군인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꺼리고 자신이 빠져든 갈등상황 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히틀러는 그를 계속 앞으로 밀어 붙여야 했다. 로 소브의 딜레마를 그는 적절하게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토록 광범위한 우익 을 거느린 지도자가 "자신의 상관에 반항하려면 마지막 순간도 넘어갈 정 도로 확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폭도나 모반자일 뿐이다." 카르와 합의를 보기는 이보다 더 어려웠다. 히틀러는 9월 26일에 이 계 엄 사령관이 배신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반면 카르는 자신이 이 과격하 고 어떤 공격적인 미친 짓도 할 각오가 된 선동가를 하얗고 푸른이성으로 데려올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히틀러에 대한 그의 관계 는 이 허풍선이 재주있는 소동꾼에게 언제든 '정치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리고야 말겠다는 속셈을 가진 것이었다. 이 모든 속셈과 상호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와의 대치상황은 그 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의견차이는 지휘권에 관한 것이었으 며 특히 진군시기에 관한 것이었다. 로소브, 자이서와 더불어 재빨리 합법 적인 힘의 '3거두'가 된 카르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신중을 기하고 히 틀러의 대담한 말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히틀러는 초 조하게 행동을 촉구하였다. "단 하나의 질문만이 민족을 움직일 것입니다. '언제 시작합니까?'라고 그는 소리치고 거의 몽상적으로 종말론적인 표현을 하면서 임박한 붕괴를 축하하였다.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 자 이제 운동이 이 순간을 위하여 준비해온 그 날이 왔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을 위해서 싸워온 그 순간이 된 것입니 다.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독일의 승리를 위하여 행진을 할 순간입니다1 우 리는 한번의 선거를 위해서 결성된 겋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두려움과 절 망에 가득차서 붉은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최고 위기에서 최후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 운동이 결성된 것입니다. 우리 운동에서 이제 구원 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미 수백만 그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새로운 종교적 신앙처럼 확고한 것이 되었습니다!" 쿠테타를 준비하다 10월이 지나는 동안 모든면에서 준비를 강화하였다. 음모, 비밀, 배신의 분위기에서 쉬지 않고 토론들이 이루어지고 어사 계획이 세워졌다. 진격의 순간을 위해서 암호들이 교환되었다. 무기도 집결되고 전투연습도 이루어 졌다. 10월초에 이미 히틀러 일파의 쿠테타가 임박하였다는 소문이 아주 확실한 것이 되어서 전투동맹의 군사 지휘자 크리벨 중령은 폰 크닐링 지 사에게 편지를 보내 모든 혁명의도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여T다. 덤불처럼 뒤엉킨 이해타산, 조약, 견제작전, 잠복 속에서 서로 감시하고 수천명이 그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의 담벼락에는 구호와 반대 구호들이 쓰여지곤 했다. '베를린 진군'은 한꺼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약속하는 마법공식이 되었다. 여러 주전부터 히틀러는 출발 징후를 퍼뜨렸 다. "이 11월 공화국은 이제 끝입니다. 점차 뇌우는 올 것입니다. 폭풍 속 에서 공화국은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성숙하였으니까요" 카르에 비해서 히틀러는 어느 정도 확고한 입장인 듯이 보였다. 3거두가 히틀러를 빼놓고 진군하거나 아니면'베를린으로 진군!"이라는 혁명적 표어 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덜어지자!"는 분리주의자들의 구호를 가지고 대중을 동원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때때로 히틀러는 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면 10월 초에 벌써 그는 어떻게 동맹자들을 속여서 시작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시기만 놓치지 않는다면 갈등이 벌어질 경우 주민 들이 카르가 아니라 자신의 편에 서리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 둔감한 부르주아지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의 잘못된 오만, 대중 앞에서의 무능 등을 경멸하였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그에게서 대중을 빼앗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카르를 '전쟁 이전의 허약한 관료'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역사는 낡은 체제의 인물이 정대로 혁명을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직 혁명가만이 혁명을 장악 할 수 있다."고 했다. 권력은 물론 3거두가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그러나 '국가 사령관' 루덴 도르프와 '두 다리로 굳건하게 서 잇는 군단'을 자기편으로 하고 있다. 그 는 군대의 정치적 한계성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온갖 멋진 말로 그들을 이 용하는 법을 알아냈다. 그는 당시 이미 무한 자신감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 다. 그의 동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비웃었지만 그는 자신을 감베타 아니면 무솔리니에 견주었다. 크리벨을 어떤 방문객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히틀 러는 지도적 위치에 대해서는 물론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선전에 대한 생 각만 머릿속에 잔뜩 넣고 다닌다고 했다. 히틀러 자신은 로소브 측근의 어 떤 고위 장교에게 자신은 독일을 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위군을 얻기 위해서 루덴도르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는 정치에서는 내게 전혀 간섭하지 않아요. 나는 베트만 홀베크가 아닙니 다. 아시다시피 나폴레옹도 통령이 되는 도중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 람들만을 주변에 두지 않았습니까?" 10월 하반기에 베를린에 진격하려는 뮌헨 쪽의 계획은 더욱 확고한 윤곽 을 잡았다. 10월 16일 크리벨은 북부에 국경수비를 세우라는 명령에 서명 하였다. 그것은 물론 불안한 튀링겐 지역에 맞서기 위해 경찰의 필요에 따 라 세우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전쟁에 대비한 것이었다. '진군거점' '적대 감의 표출'이라는 말이 나왔고, '공격정신' '전투 열의 ' 적대 세력의 '섬멸' 이라는 표현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민전쟁을 위한 공개적인 동원령의 가 능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임시지원병들은 베를린 시의 지도를 손에 들고서 전투훈련을 받았다. 특히 포병학교의 기수들 앞에서 히틀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혁명의 속성을 찬양하였다. "제군들의 국기 맹 세의 최고 의무는 국기를 꺾어버린다는 것이다." 동맹자들의 전투력을 혼 란시키기 위해서 국가사회주의 자들은 지방 경찰 소속 경찰관들에게 돌격 대에 가입하라고 호소하였다. 나중에 히틀러의 진술에 따르면 60에서 80대에 이르는 야전 유탄포 , 유 탄포, 중포 등을 조심스럽게 은닉처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10월 23일 전투 블랙 리스트를 준비할 것을 권고하였다. "가장 잔혹한 테러가 행해져야 합 니다. 별 어려움 없을 만한 사람들을 쏘아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제거가 필 요한 지도자들은 한 사람 한사람 찾아내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사람은 본보 기로 포고가 떨어지자마자 즉시 사살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앙카라'가 출발을 위하여 무장하였다. 경쟁자들의 질투 잘못된 경쟁의 분위기에서 이런 저런 기도들이 이루어졌다. 10월 24일에 로소브는 방위군 사령부에 방위군, 지방경찰, 조국연합의 대표들을 집결시 켰다. 그들에게 베를린 진군시 방위군의 동원계힉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구 호는 '해돋이'라고 했다 이 모임에 그는 전투동맹의 군사지휘자 헤르만 클 히벨을 초대했지만 히틀러와 돌격대 지휘자들은 빼놓았다. 그에 대한 대답 으로 히틀러는 즉시 당시 어떤 목격자가 표현한 것처럼 '거대한 군사쇼'를 벌였다. "이른 아침에 벌서 북소리와 음악소리가 도시에서 울려나오는 것 을 들었다. 하루종일 온갖 장소에서 히틀러의 갈고리 십자가를 칼라에 붙 이거나 아니면 고지 에델바이스를 모자에 붙인,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소문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카르는 자발적으로 자신은 현재의 중앙정부와 모든 협상을 거절한다고 선언하였 다. 그것은 조용하고 분노한 경쟁과도 같았다. 누가 먼저 맨 먼저 출발해서 마침내 구원된 국민의 손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받아 쓰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지역적으로 채색된 열광이 모 든 계획을 철저히 환상적인 요소로 채웠다. 그리고 수많은 활동계획에는 병졸들의 인디언 놀이 요소가 덧붙여졌다. 실질적인 역학관계를 오랴 생각 해보지도 않고서 이 주인공들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제는 '행군에서 어떤 무제들은 마침내 비스마르크 식으로 해결해야할 할' 시간이라고 도 어떤 사람들은 '질서 세포 바이에른', 혹은 '베를린의 돼지우리를 깨끗이 치울 바 이에른 주먹' 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수도 베를린을 거대한 바빌론으로 묘사하는 익숙한 이미지에는 마음 편 한 어둠이 깃들여 있었다. 수많은 연설자들은 "차돌 같은 바이에른이 베를 린으로 형벌의 출정을 떠나서. 이거대한 묵시록적인 매춘부에게 승리를 거 두고 어쩌면 그녀와 약간 재미도 본다."는 그림을la을 그려 보여서 인기를 끌었다. 함부르크에서 온 어떤 증인은 히틀러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북 부 독일의 수백만 명이 앙갚음의 날 그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출신, 모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가 출정하기만 하면 뮌헨 의 폭동에 가담하게 돌 것이고 "도이치 민족이 1813년에 그랬듯이 이른 봄 처럼 일어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했다. 10월 30일에 히틀 러는 카르에게 돌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회하였다. 카르 자신도 물론 거사를 결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카르나 로소브는 스스로 앞장서서 쿠테타의 길로 나설 생각은 거의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 히려 3거드는 그 모든 도전들, 위협 출정계획들을 가지고 단순히 제크트와 보수적인 '북쪽의 신사분들'을 자극하여 꾸며낸 독재개념을 실현하도록 만 들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이 계획의 전망에 따라서 그리고 바이에른의 이익을 가져다줄 순간에 끼여들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11월 초 그들은 사정을 살펴보라고 자이서 국장을 베를린으로 파견하였다. 그의 보고는 물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광범위한 지지를 기대할 수는 없고, 특 히 제크트는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11월 6일 조국연합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열정적인 톤으로 알렸다, 자기들만이 앞으로 닥쳐올 행동에 대한 권한과 명령권을 가지며 모든 독단적 힘을 꺾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수 많은 심정의 말들과 현재의 망설임 사이에서 잃어버렸던 행동의 법칙을 되 찾으려는 최후의 시도였다. 히틀러는 이번 모임에서도 배제되었다. 같은 날 저녁 전투동맹은 가장 가까운 기회를 잡아 출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거 두와 아직 결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행동으로 자극하여 가능하면 많은 사람 이 베를린 진군에 동참케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흔히 이 결정은 히틀러의 연극적이고 과민하고 망상적인 성격의 증거라 고 이야기되어 왔다. 그리고 '비오 홀 쿠테타'니 '정치적 사육제'니 '뒷계단 쿠테타' 아니면 '서부극 놀이' 등의 말로 공개적인 조롱을 받아 오T다. 이 행동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도한 히틀 러의 상황 판단 능력, 용기, 그의 전략적 일관성 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토록 뒤얽힌 상황에는 익살극, 도둑놀이의 요소와 아울러 냉정한 합리성도 들어 있는 것이다. 히틀러의 딜레마와 정당화 실제로 1923년 11월 6일 저녁에 히틀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월 1일의 심각한 패배가 있은 다음에 이러한 행동을 할 절박성은 분명하 였다. 그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수많은 정당들과 정치가들 중에 서 단연 돋보였고 신뢰를 얻는 중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과격하고 거의 실존적으로 진지한 분노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어느 경우에도 굽히지 않아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이므로 이제 와서 은밀히 타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 투 동맹 지도자로서 그는 병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병력의 행동의지는 집단지도체제의 알력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고 게다가 돌격대도 초조하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불안은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주간이나 준비를 해온 다음 마침내 출정하여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직업군인의 모험 욕구를 반영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의 민족주의 독재가 베르사유 조약 의 제한을 무시하고 방위군을 확대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몇 주 동안이 나 행군준비 상태에 있으면서 일부 동맹은 방위군의 '가을철 연습'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는사이 모든 물자가 동났고 히틀러의 비축물자도 바닥났 다. 대원들은 굶주리게 되었다. 오직 카르만이 동맹을 후원할 수 잇는 상황 이었다. 에르하르트 대위는 뉘른베르크의 실업가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2 만 달러를 가져왔다. 히틀러가 빠져든 딜레마는 뮌헨 돌격대 연대 지휘자인 벨헬름 부뤼크너 가 나중에 진행된 재판의 비밀회의 진술한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방 위군 장교들도 베를린 행군이 시작되지 않아서 불만스러워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히틀러도 다른 사람들처럼 거짓말쟁이라고들 말했지요. 당신들은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작하든 우리한테는 마찬가지였죠. 우린 무조건 따라갈 참이었으니까요. 히틀러에게도 직접 말했어요. 그날이 오면 나는 람들은 배신할 거라고 말이죠. 이들 중에는 실업자들이 상당수 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옷, 마지막 남은 신발, 마지막 남은 10페니 히까지 교육받는데 다 썼어요. 그리고 이렇게들 말했죠. 이제 곧 시작될 거 야. 그럼 우린 방위군으로 들어가는 거고 그럼 이 모든 곤란에서 벗어나는 거지, 하고 말입니다." 히틀러 자신이 11월초에 자이서와 나는 대화에서 이 제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한다. 안 그러면 전투동맹 대원들은 경제적 곤궁 에서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전투동맹 부대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히틀러의 고민에다가 시 간이 흐르면서 너무 오래 끌다가 혁명적인 불만이 스러질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까지 덧붙여졌다. 루르 투쟁이 끝나고 좌익이 패배한 것은 사회가 정 상화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인플레이션도 전보가 분명하게 통제되는 듯이 보였다. 이모든 위기가 사라지면서 유령들도 함께 물러갔다. 그 동안 국가의 위기상태가 히틀러에게 엄청난 선동의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 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 망설일 수가 없었다. 이런 결심이 자기가 산 이런 저런 약속에 어긋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자기의 전략적 개념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지사 각하의 동의 없이 혁명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의 행동결심을 통해서 각하의 동의와 심지어는 참여를 얻어 내기를 희망하였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위하여 하나의 의지가 나타나면 거사가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습니다." 라고 뒷날 히틀러는 법정에서 말했다. 거사를 해야 할 그 모든 이유에 맞서서 계획된 쿠테타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거두를 끌어들이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 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위험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이 어차피 계획해 왔던 일을 강요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판은 마지막에 전체 계획을 망치고 히틀러의 현실 감각 부족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물론 이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현 실을 무시한 자신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성공적인 결말에 대해 51퍼 센트의 확신만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은 쿠테타에 동참하였을 것이라는 로소 브의 유명해진 말을 일종의 희망 없는 현실감각의 예라고 해서 어느 정도 경멸하였다. 그러나 계산 가능한 이유에서만 이러한 행동 결심이 옳았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붕괴로 끝나버린 이 쿠테타 기도는 히틀 러에게 권력을 향하여 나아가는 결정적인 통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 문이다. 바이로이트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벨린 이 모든 과격한 준비며 작전이 펼쳐지고 있던 9월말에 히틀러는 바이로 이트에서 '도이치의 날' 행사를 개최하면서 반프리트 저택에서 리셉션을 요 청하였다. 깊이 감동한 마음으로 그는 방들을 둘러보고 커다란 도서관이 딸린 바그너의 작업실을 살펴보고 정원에 있는 무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사위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을 소개받 았다. 그는 젊은 날 히틀러가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한 권을 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거의 마비상태에 이른 노인은 아주 힘들게 그를 맞아들였으나 히틀러에 게서 뿜어나오는 에너지와 목적의식을 알아보았다. 일주일 뒤인 10월 7일 자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히틀러는 더 위대한 사람을 위한 선구 자이며 동반자일 뿐 아니라 히틀러야말로 기사 자신이고 도이치 반혁명의 주동적 인물이라는 찬사를 서보냈다. 그는 보통 수준의 광신적 인물을 만 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자신의 감각은 히틀러는 다른 사람과 다르며 훨씬 더 창조적이다. 그리고 qs명하게 느껴지는 의지력에도 불구하고 폭력 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했다. 자기는 마침내 안심하게 되었으며 영혼의 상태는 갑자기 변했다고 말했다. "독일이 가장 큰 곤궁의 순간에 히틀러 같은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독일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준 다."고 했다. 불안으로 동요하면서 오직 거친 환상 속에서만 확신을 가졌던 선동가는 거대한 생애의 결심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서 바이 로이트의 선생님이 자신을 격려하는 소리라고 여겼다. 제 4장 쿠테타 11월 8일가지 이틀동안 신경질적인 활동들이 이어졌다. 모두들 서로 협 상하고 뮌헨 전체가 전쟁 준비롸 소문들로 와글와글하였다. 전투동맹의 원 래 계획은 11월 10일 저녁 어둠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뮌헨 북부에 있는 프뢰트마닝 들판에서 대규모 야간연습을 실시하고 다음날 새벽에 보통 행 진 듯이 뮌헨으로 들어와서 민족주의 독재체제를 선포하고 3거두에게 행동 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준비회의를 하는 동안에 카르가 11월 8일 저녁에 시민 양조장에 서 강연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곳에는 주정부 내각과 로소브, 자이 서 곤청과 경제계의 책임자들, 조국연합 대표들도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카 르가 자기보다 선수를 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히틀러는 다음 순간 모든 계획을 뒤집어엎고 바로 이튿날로 거사 날을 잡았다. 급히 서둘 러서 돌격대와 전투동맹 부대들이 소집되었다. 서막을 알리는 총소리 집회는(1923년 11월 8일0 20시 15분에 시작되었다. 길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철십자 훈장을 매단 히틀러는 시민 양조장으로 차를 달렸다. 최근에 구입한 빨간 벤츠 자동차의 옆좌석에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울리히 그라 프와 아무것도 모르는 안톤 드렉슬러가 앉아 있었다. 안톤 드렉슬러는 이 날 저녁 마지막으로 중요한 모임에 등장하였다. 비밀을 지키려는 이유에서 그에게는 시골의 집회에 가는 중이라고만 말했다. 이 자동차 속에서 비로 소 히틀러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8시 반에 거사가 시작된다고 알리자 드렉 슬러는 침울하게 이 모든 계획을 위해 행운을 빈다고 말하고 소극적인 태 도로 물러서 버렸다. 홀 입구 앞에는 대규모 대중이 모여 있었다. 계획대로 방금 시작된 집회 를 덮치지 못할까 두려운 나머지 히틀러는 그곳에서 경비를 맡은 경찰 간 부에게 재빨리 입구를 비워놓으라고 명령하였다. 카르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독재의 도덕적 권한'의 근거를 말하고 있을 때 히틀러가 홀문 에 나타났다. 증인들의 보고에 다르면 밖에서 대원들의 차가 도착하고 히틀러 돌격대 가 몰려들어 건물을 전시처럼 봉쇄하자 그는 몹시 흥분하였다. 그의 특징 이지만 과장된 장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면서 맥주잔을 높이 쳐들었다가 무거운 기관총이 자기 옆에 세워지자 마지막으로 연극처럼 맥주를 쭉들이 키고 잔을 바닥으로 내리쳐서 깨뜨렸다. 그러고는 권총을 빼서 높이 쳐들 고 무장한 돌격대의 선봉에 서서 홀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주위에서 맥주잔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의자가 뒤집어지는 동안에 그는 탁자위로 뛰 어올라가 유명한 일화가 되어버렸지만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천장에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리고는 어찌할 바 모르는 청중을 뚫고 단상으로 나 아갔다. "민족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고 그는 외쳤다. "이 홀에 6백 명의 중무장 병사들이 장악하였습니다. 아무도 홀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얼른 조용해하 지 않으면 기관총을 회랑에 배치하겠어요. 바이에른 정부와 중앙정부는 제 기되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세워질 것입니다. 방위군과 지방경찰 청사들은 점령되었습니다. 방위군과 지방경찰은 이미 갈고리 십자가 아래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카르, 로소브, 자이서에게 '거친 명령조로' 자기를 따라 옆방으로 오라고 요구하였다. 그 사이 정신을 되찾고서 큰소리로 "연극이 다!" "남아메리카냐!"하고 외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돌격대가 지난번 맥줄홀 전투때와 같은 방식으로 질서를 잡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이상한 방식으로 유령 같은 국가권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승리냐, 죽음이냐! 전체 맥락이 온통 모슨 투성이고 불확실한 것이지만 그래도 사건의 기본 적인 윤곽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권총을 거칠게 흔들어대면서 히틀러는 그 들 중 아무도 살아서 이 홀을 떠나지 못하리라고 세 사람을 협박하였다. 그러면서도 형식적인 태도를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 것을 사 과하였다. 자신은 세분께서 새로운 직책을 떠맡은 것을 쉽게 해드리려는 것 뿐 이라고 했다. 어차피 그들은 동참하는 길밖에 없다고. 푀너는 독재적 전권을 가진 바이에른 지사로 임명되고 카르는 통치자, 그리고 자신은 새로운 중앙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베를린을 행한 행진에서 국민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고 자이서는 경찰 장관직을 맡으라고 하였다. 그는 점점 더 흥분하면서 계속하였다. "이런 발걸음이 여러분들에게 힘들게 여겨지리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도약을 쉽게 해드려야지요. 여 러분은 각자 맡은 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존재근거가 없는 거죠. 여러분은 나와함께 싸우고 나와 함께 승리하든지 아니면 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나는 총알 네발을 장전하 겠습니다. 세 발은 나를 떠나는 동료들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 한 발은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보고에 다르면 근 연극적인 몸짓으로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 에 갖다대고 확인하였다고 한다. "내일 오전에 승리자가 안되어 있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히틀러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세 남자들은 그다지 감동을 받지 않았고 특히 카르는 이 상황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런 미친 도둑질과 자신 에게 해당된 역할에 기분이 상해서 그는 말했다. "히틀러 씨 , 당신은 나를 쏘라고 명령할 수도 있고 당신 자신이 나를 쏠 수도 있소 하지만 죽거나 안 죽거나 내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자이서는 히틀러가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고 로소브는 침묵하였다. 문 과 창문에는 이따금 무장한 히틀러 추종자들이 나타나서 무기로 위협을 하곤 하였다. 한순간 이 세상의 말 없는 무관심 탓으로 기습작전은 실패한 듯이 보였 다. 히틀러가 맥주잔을 바닥에 던져서 기습신호를 주자 쇼이브너 리히너 는 자동차를 타고 출발해서 거기 참석하지 않은 루덴도르프를 데리러 갔 다.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와 그의 권위를 통해서 사태가 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사이에 그는 한 번 더 불안한 호로 돌아갔다. 자신의 실패에 실 망해서 신경질적으로 그는 자기가 좀더 확실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대중 에게 돌아간 것이다. 역사가인 칼 알렉산더 폰 뮐러는 중인의 한 사람으로 이곳에 붙잡혀서 조롱당하고 거친 돌격대 지휘자 히틀러는 흥분해서 연단으로 달려갔다. 배 경이 없고 불손한 이 젊은 남자는 정신이상의 발작증세가 있었고 보통 사 람들에 대해서 특이한 작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스꽝스럽고 술집 웨이터 같기도 했으며 검은 코트로 위장한 듯한 모습으로 이 지방의 자신 만만하고 냉정한 유력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대단히 능숙한 연설을 해서 그는 "집회의 분위기를 단 하나의 문 장으로 뒤집었다. 마치 장갑처럼. 나는 그런 일은 겪어본 적이 거의 없었 다. 그는 연단으로 갔지만 소동이 너무 커서 주목을 받기 위해서 총을 한 방 쏘았다. 나는 그 움직임을 보았다. 그는 브라우닝 권총을 뒤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그는 10분 만에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자신의 예언이 맞지 않은 것을 보러온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 서서 얼굴들 이 자기를 향하고 있고. 그 얼굴들이 기대에 차 있으며 불안한 목소리들이 잦아들어 속삭임으로 변하는 것을 보자 그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이 사람들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사실들을 나열하듯이 짤막하고 명령적인 말투로 그때까지 희망과 예감과 소원의 극 단적인 집합체에 불과한 것을 되풀이하였을 뿐이다. 새로운 이름들, 새로운 직위들, 그리고 새로운 제안들을 말했다. 그러고 나서 소리쳤다. "임시 도이치 민족정부의 과제는 이 나라의 온 힘을 다해서, 그리고 도 이치 관구들의 모든힘을 끌어모아서 죄악의 바벨탑인 베를린으로 행진하고 도이치 민족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저밖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카르와 로 소브와 자이서 말입니다. 이 결심이 그들에게는 정말 어렵답니다. 여러분은 도이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 은 자만과 이기심이 아니고 우리는 우린 도이치 조국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에 싸움을 떠맡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방국가를 건설하고자 합니 다. 연방국가 내에서 바이에른은 바이에른에 어울리는 것들을 유지하게 되 지요. 내일 이 나라에는 도이치 민족정부가 서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죽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청중에게 펼쳐 보인 설득력과, 카르, 로소브, 자이서도 이미 자기와 한편인 것 같은 기만술책은 '완벽하게 뒤집기 효과'를 일으켰다. 히틀러는 홀을 나설 때 "카르가 합류한다면 홀 전체가 자기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 고 말 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게 되었다." 루덴도르프 등장 그러느 s사이 루덴도르프가 나타났다. 그느 히틀러의 비밀주의와 제멋대 로 관직을 분배하고 자신에게는 군대만 떠맡긴 것 때문에 초조하고도 화가 나 있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사방을 둘러보지도 않고 근 말하기 시작하였 다. 세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고 자기도 놀라기는 했지만, 그러는 위대한 역 사적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설적인 민족영웅의 모습을 직 접 보고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한 삶씩 굴복하기 시작하였다. 로소브는 루 덴도르프의 말을 장교식으로 일종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자이서도 그를 따랐다. 오직 카르만이 고집스럽게 반항하였다. 히틀러가 흥분해서 그가 자 기들과 함께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말 하자 카르는 냉정한 태도로 자신은 그런 일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대꾸 하였다. 효과만 노리는 히틀러의 연극적 기질과, 정치적 관료의 냉정한 권 력이해 사이의 차이가 이 두 문장 안에 분명하게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는 사방에서 압력을 받고 카르도 마침내 굴복하였다. 이삶들은 함게 동지와 같은 장면을 연출하면서 홀로 돌아왓다. 겉보기에 합의가 이루어진 듯한 모습을 보고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열화와 같은 환성을 들으며 주연배우들은 악수를 하였다. 특히 루덴도르프와 카르 가 창백하고 굳은 표현으로 과열된 태도를 보이는 대중 앞에 나섰던 반면,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기쁨으로 빛나고 카르를 움직여서 동참케 한 것 을 행복해' 하였다. 짧고 소중한 한 순간 그는 그 동안 꿈꾸어온 것을 성취한 듯이 보였다. 유명인사들 사이에 섞여 환호성을 듣고 있었다. 그들의 박수갈채는 빈 시 절 이후 수많은 개인적인 쓰라림을 보상해주는 것이었다. 카르와 국가 공 권력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국민 사령관 루덴도를프와 나란히 서서 잠정적 인 국가 독재관의 역할을 이미 거머쥐게 되었으니, 그토록 오랜 세월 동 안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수없이 실패를 거듭해 온 실업자인 그가 그토록 출세한 것이다. '이 일은 후세에 동화처럼 여겨질 것'이라고 그는 자기 생애의 대담한 전진을 바라보며 놀라워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사 실상 이 쿠테타가 어떻게 끝나든지 상관없이 그는 이순간부터 지난 몇 해 동안의 지방무대에서 놀지 않고 전국적인 무대로 진출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충심으로 그러면서도 모르는 사이 우스꽝스러운 어조로 그는 인사말 을 끝맺었다. "나는 5년 전 육군병원에서 눈먼 병신의 몸으로 자신에게 맹세하였던 일 을 이제 실현할 것입니다. 11월의 배신자들이 땅에 쓰러지기까지 현재의 비참한 독일의 폐허에서 권력과 위대함, 자유와 장엄함의 독일이 부활해 일어나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아멘!" 대중이 소리 지르고 환호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짤막한 인사말을 하였다. 카르는 군주제, 바이마르 고향, 도이치 조국 등에 대한 몇 마디 알 아들을 수 없는 고백을 했다. 루덴도르프는 전환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여전히 히틀러의 태도에 대해서 화가 난 채로 단언하였다. "순간의 위대성 에 사로잡히고 깜짝 놀라서 나는 자신의 권리에 따라 도이치 민족정부에 자신을 맡겼다." 흩어지면서 그들은 주지사인 폰 크닐링과 현재의 주장관들. 경찰청장을 체포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들이 돌격대 대학생부대 지휘장인 루돌프 헤스에 민족 출판사 율리우스 레닌의 저택으로 호소오디는 동안 히 틀러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공병부대 막사 앞에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22시 30분경 홀을 떠나자마자 로소브, 카르, 자이 서는 동지와 같은 태도를 루덴도르프에게 인사를 하고서 그 밤중으로 사라 져버렸다. 약속위반 대 약속위반 쇼이브너 리히터와 되돌아온 히틀러가 그들이 의십스럽다는 말을 하자 루덴도르프는 잔득 성이 나서 도이치 장교의 약속을 의심하는 행위는 사절 이라고 소리쳤다. 두시간쯤 전에 자이서는 히틀러에게 이 쿠테타 시도로 약속을 깨드렸다고 비난했다. 이 두 개의 장면은 두 세계의 대립을 보여주 는 것이다. 한편에는 기본원칙, 명예심 예비소위의 특징적인 명예심 등을 지닌 시민세계가 다른한편에는 권력목적만을 지향하는 새로운 남자의 아무 런 배경도 없는 세계가 있었다. 시민적인 규범과 명예개념은 히틀러가 무 시하는 게임 규칙을 언제나 다시 불러들이곤 하였다. 시민세계는 그런 규 범과 명예개념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여러해 동안이나 상당한 정도로 감상적이지 않은 실질적인 우월성을 확보해 주었다. 기본적 원칙들 을 믿지 못하며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변세계 한가운데서 히틀러 에게 성공의 원칙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날 밤에 히틀러는 "약속 위반에 대해서 약속위반으로 응답하고 게임에서 이기는 상대자들을"을 보았다.( 집 회가 해산되었을 때 거기 참석한 내무장관 슈바이어는 히틀러에게 다가가 서 그날 저녁의 승리자가 느끼고 있던 히틀러의 가슴을 '화난 학교선생처 럼' 툭 치고 " 이 승리는 약속위반"일뿐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그것은 히틀러에게는 위대한 밤이었다. 그가 소원하는 모든 것을 다 담은 밤이었다. 극적 요소, 환호성, 반발, 행동할때의 병적인 쾌감, 현실 이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반쯤 실현된 상태에서의 느끼는 비할 바 없는 흥분 등이 있었다. '승리의 행진'을 점점 더 과장된 화려함으로 준비하는 뒷날의 기념식에서 그는 바로 이순간의 체험가 위대함을 보존하려고 하였 다. 그는 룀의 포옹하면서 열렬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더 좋은 시절이 옳거야 독일을 곤궁과 수치에서 구한다는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 모두 밤낮없이 일하게 될 거야." 도이치 민족에게 보내는 성명서 하나와 두 개 의 포고문이 만들어졌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범죄를 판결하기 위한 정치 법정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8년 11월 9일 국가반역 주모자들에게 오늘 날짜를 추방을 선언하고" 그들을 "죽여서는 산채로든 민족국가 정부 에 양도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써 요구하는 내용이다. 위기와 결말 그 사이에 반대행동이 시작되었다. 로소브는 시민 양조장에서 돌아오자 마자 지도급 장교들에게서 위협적으로 들리는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히틀 러와의 단결장면은 협박에 의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소 브 장군은 꿰뚫어 볼 수 없는 마음속에서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였던 간에 격분한 장교들 앞에서 쿠테타 의도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곧 이어서 카르도 하나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자심의 쿠테타 동의를 철회한다 고 밝혔다. 해면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밝히고 있듯이 쿠테타 동의는 위 협을 받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국가사회당과 전투동 맹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계엄사령관 카르가 히틀러 추종세력이 뮌헨으로 진입하는 길을 차단하라 는 명령을 내렸을 때도 히틀러는 아무것도 모른채 계획된 베를린 대행진을 위해서 아주 바쁘게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혁명적인 시작의 분위기 속 에서 돌격대는 사회민주당의 <뮌헨 포스트>건물을 파괴하였고 다른 소대 들은 집에서 인질을 끌어내고 이리저릴 돌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기 도 하였다. 한편 룀은 쇤펠트 거리에 있는 방위군 지휘본부를 점거하였다. 아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가볍고 축축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 다. 자정이 지나서도 카르와 로소브에 대한 소식이 없자 히틀러는 불안해 졌다. 심부름꾼을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프리크는 체포된 듯했다. 시 간이 좀더 흐르자 푀너의 소식도 끊겼다. 이때쯤 히틀러는 자신이 속았다 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생애에서 후퇴나 실망이 있을 때만다 그랬지 만 모든 것도 함께 무너졌다. 밤이 지나는 동안 슈트라이허가 대중에게 정 열적으로 하소연해서 밀어 붙여보자는 시민 양조장의 제안을 가지고 나타 났을 때 슈트라이허의 보고에 다르면 히틀러는 멍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 더니 체념하고 어찌할 바 모른 체 종이쪽지에 적어서 '조직 전체'를 그에게 엄4겨주었다. 히틀러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무감각의 단계를 지나자 절망의 발작이 뒤따랐다. 그 통제되지 않은 히 스테리 발작은 뒷날의 경련과 미친 듯한 분노의 발작을 미리 보여주는 모 습이었다. 미칠 듯한 저항을 결심했다가 모든 것을 과격하게 내던지듯이 다음날 시위행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잘되면 좋다. 잘되지 않으면 우리 는 목매달아 죽자"고 그는 말했다. 이 말도 두 번째로 승리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몰락을 기대하는 말로 승리와 자기 파괴 사이에서 흔들리는 뒷날 의 모습을 예견케 한다. 그가 파견한 정찰조가 유리하게 들리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는 순 간적으로 선동의 힘에 대한 희망과 열광과 신뢰를 되찾았다. "선전이야 선 전, 이젠 오직 선전에만 달렸어." 하고 그는 외쳤다. 즉시 그날 밤을 위해 서 자신이 주요 연사로 등장하는 14개의 대규모 군중집회를 기획하였다. 두 번째 행사는 그 다음날 1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의 궐기를 기념하여 쾨 니히 광장에서 축하를 하는 것으로 정했다. 새벽 무렵에는 벌써 그 행사를 위해서 플래카드를 주문하였다. 그것은 특이한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히틀러에게 남겨져 있는 유 일하게 성공적인 해결책이기도 하였다. 역사서술에 일관해서 등장하는 비 난 즉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가로서의 능력이 마비되었다는 비난은 그다지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비난은 히틀러의 전제와 목적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신경은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신국도 내각부서도 점거하지 못했고, 정거장도 군대막사도 아직 그 의 통제 아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뮌헨에서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할 길 이 없었고, 오직 뮌헨의 힘을 등에 업고서 베를린으로 행진해가려는 의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 그의 체념은 비판자들의 판단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현실적으로 동지들이 떨어져나간 것과 동시에 쿠테타 기도 전 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간파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시위행진과 계획된 선동의 물결을 통해서 그는 분명히 어떤 구면의 전환 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근본적으로 두터운 여론의 벽을 형성 하여, 내란 기도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치적, 형사상의 결과에서 보호할 장 치를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그날 밤 여론이 미친 듯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대중을 함께 끌여 들여서 뮌헨을 너무 오래 기다려온 베를린 행 진을 시작할까 하는 생각이 간혹 떠오르기도 하였다. 자기의 상상력에 이 끌려서 히틀러는 아침 무렵 선동대를 거리로 내보냈다. 그들은 "깃발을 답 시다!"하고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갔다. "우리가 호응을 받는지 보고 싶다" 는 것이다.(빌헬름 회그너) 실제로 이러한 기획이 전망이 그다지 불리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분명해졌지만 여론의 소리는 완전히 히틀러와 전투동맹 편에 있었다. 시청 에 , 그리고 도시의 수많은 건물과 주택에도 갈고리 십자가 깃발이 내걸렸 다. 일부는 손수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신문들은 간밤 시민 양조장 사 건을 호의적으로 보도하였다. 전날부터 당은 287명의 신규등록을 받았고 전투동맹이 도시 여러 곳에 만들어둔 하급장교와 일반병사들이 노골적으로 히틀러의 행동과 행진계획에 동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슈트라이허가 거리 로 내보낸 연설자들은 쌀쌀한 11월 아침에 열에 들뜬 분위기에서 생생한 박수갈채를 얻었다. 목적 없는 행진 그러나 공식 여건과 차단된 채, 사방에서 사람들의 추진력과 격려에 둘 러싸여 있었지만 오전이 경과하는 도안 히틀러는 다시 주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대중은 완전히 헌법상의 의미에서 , 그와 그의 안전, 에너지, 그의 용기를 북돋우거나 아니면 꺾어버리는 요소처럼 보이게 되었 다 그는 이른 아침 전투동맹의 정보책임자 노인체르트 소위를 베르히테스가 덴의 왕세자 루프레히트에게 보내서 중재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소위가 돌 아오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시위대가 무장병력 과 충돌할 수도 있으며 잊을 수 없는 5월 1일의 패배가 훨씬 더 비참한 방 식으로 되풀이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였다. 히틀러가 망설이고 절망하면서 노인체르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랜 토론을 거친 다음 루덴도른프는 정열적으로 "행진합시다!"하는 한마 디로 모든 말을 끝냈다. 이어서 정오 무렵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수 뒤 에 대열을 만들었다. 지휘자들과 장교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덴도르프는 시민 복장이었고 히틀러는 지난밤의 프록코트 위에 트렌치코 트를 입었다. 그이 옆에는 울리히 그라프와 쇼이브너 리히터, 다음에 베버 박사, 크리벨, 괴링 등이 섰다, 히틀러는 뒷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것 이 마지막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걸었다. 우리가 출발할 때 저 바깥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이제 마지막이군!'하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각자가 이 런 확신을 마음에 지니고 있었다. "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출발하였다. 이자르 강의 다리 위에서 행렬을 막아선 강력한 주경찰 초소 한 곳은 암 발만 쏘면 체포된 인질 전부를 죽이겠다는 괴링의 위협을 받고 당황하였 다. 불안해진 경찰관들은 시위대에게 순간적으로 밀려서 군중 한 가운데서 무장해제 당아혹 군둥들이 뱉은 침과 따귀를 맞았다. 뮌헨 시청 앞 마리아 광장에서 슈트라이허는 몰려든 군중을 앞에 놓고 높은 단상에서 연설을 하 였다. 히틀러가 군중이 '구세주'인 양 자기에게 몰려드는 것을 보고도 묵묵 히 행진만했다느 사실에서 그가 처해 있던 위기의 정도를 읽어낼 만하다. 그는 쇼이브너 리히티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 기댈 곳을 찾는 종속적인 태도로 그가 말하는 지도자의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태 도였다. 행인들의 환호를 받음녀 행렬은 목적도 없이 나가다가 도시 중심 부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왕궁 거리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 지휘부는 <오 명예로운 독일이여>를 불렀다. 오네온 광장에서 다시금 경찰의 바리 케이트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어떻게 깆행되었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일부는 상상력이 넘치고 일부는 변명조로 말한 혼란스런 증언들에서 오히려 성급 한 교전이 60초 정도 계속되었다. 맨 먼저 쇼이브너 리허터가 총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그과 함께 히틀러도 휩쓸려 쓰러지면서 팔을 삐었다. 두 번 째로 당수 노릇을 했던 오스카 콰르니도 쓰러졌다. 고지 재판소 판사인 푀 너도 쓰러졌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 14명과 경찰관 3명이 거리에서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 중에는 헤르만 괴링도 끼여 있었다. 비오듯 하는 총알 속에서 쓰러지거나 모두들 뿔뿔이 도망치는데 루덴도 르프만 분노에 몸을 떨면서 꼿꼿한 자세로 경찰 바리케이트 한가운데로 걸 어갔다. 단지 몇 명의 용감한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더라도 그날의 결과 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대부분 의 사람들을 바닥에 누워있게 만든것음 비겁함이 아니고 국가공권력의 총 구에 대한 우익의 본능적인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총사령관 루덴도르프는 동지들의 비굴한 관점을 훨씬 넘어서는 장대한 자부심을 진고 광장에서 담당 장교를 기다렸다가 체포되었다. 그와 더불어 브뤼크너, 프리크, 드렉슬러, 베버 박사 등도 체포되었다. 로스바흐는 잘츠 부르크로 도망쳤고, 헤르만 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저편으로 도망쳤 다. 오후가 지나는 동안 방위군 지휘본부를 점령하였던 에른스트 룀도 짧 은 교전 끝네 전투동맹소속 대원 2명이 목숨을 잃었다ㅡ 사실을 알게 되었 다. 이날 그의 기수는 안경을 쓴 여자 같은 얼굴에, 뭔헨의 명망있는 한 고 등학교 교장의 아들이었는데 이름은 하인리히 히믈러 였다. 죽은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무기도 없이 말도 없이 이별의 행진을 하면서 연맹은 도시 중 심부를 지나서 해체되었다. 룀은 체포되었다. 체포당하다 루덴로드프의 단단한 용맹성은 특히 히틀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ㄷ. 그는 같은 날 두 번이나 마비되었다. 오직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에서만 그의 추종자들의 증언이 서로 모순된다. 그는 모든 것이 겨정되기 전에 엄 호하는 추종자들이 물에서 몸을 일으켜 무모하게 멀리 내다보았다고 한다. 죽은 사람과 부상자들을 뒤에 버려두었다. 그는 혼란중에 루덴도르프가 이 미 죽은 줄 여겼다고 나중에 사과하듯이 말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거기 머룰렀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전체적인 혼란중에 구급차의 도움을 받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 그 자신이 만들어서 전파한 전설에 따르면 그가 어찔할 바 모르는 아이를 포화중에 구해냈다고 하면서 자기 주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아이를 보여주기까지 하였지만 루덴도르프 일파에 의 해서 반박받았다. 히틀러는 뭔헨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슈타벨 호숫가 우핑에 있는 에른 스트 한푸슈텡글 부부는 그를 만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틀 뒤에 그는 체 포되엇다. '창백하고 지친 얼굴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모습이 었다. 그는 레히 강변에 있는 란츠베르크 요새로 이감되었다. 생애의 이런 파국상황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그는 끌려가기 전에 체포 조의 장교에서 일급 철십자 훈장을 달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감옥에서도 그는 어두운 절망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에 그는 '총살 될 것'을 믿었다. 다음 며칠 동안 아만, 슈트라이허, 디트리히 에카르트, 드 렉슬러 등이 이감되어 왔다. 뮌헨의 감옥에는 베버 박사, 푀너, 프리크 박 사, 룀과 같은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루덴도르프만은 체포되지 않았다. 히 틀러 자신은 그가 자기에서 부당하게 행동햇다고 느꼈다. 그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자기 일을 망쳐놓았다. 며칠 동안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 다 앞장서야 하며, 단식투쟁으로 생명을 끝내야 겠다는 생각을 지녔다. 안 톤 드렉슬러는 나중에 그의 이런 생각을 말렸다고 주장하녔다. 죽은 친구 인 쇼이브너 리히터의 미망인도 그가 이 어두운 시절의 절망을 이겨내도록 도왔다. 장군홀 앞에서 벌어진 예기치 않았던 총격은 쉬지 않고 계속되던 3년간의 상승과 전략적 전제조건들에 갑작스런 종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 라 현실과의 무서운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초의 관란적인 연설 체험 이후로 그는 위대한 영웅 역할의 박수갈채와 소음에 휩싸여서 점점 더 환상적인 가상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꿈결과 같은 높이에서 대중최면과 자기 최면의 기만술을 발전시켰고, 깃발과 군대와 승 리의 행진을 보고 있던 참인데, 백일몽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갑자기 사납 게 찢겨나간 것이다. 정상적인 재판절차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그는 이상하게도 잃 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한순간 그는 위대한 장면의 낌새를 알아채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연극적인 등장, 청중, 박수갈채 등이었다. 그는 나중에 1923년 11월 9일의 실패한 시도는 자기 생애에서 '어쩌면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표현하였다. 물론 재판의 기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 기회는 그를 절망과 자포자기의 분위기에서 빼내서 바라던 연지자로서의 ㅊ로 되 돌려놓았다. 새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되찾고, 계획도 없이 부끄럽게 끝나 버린 쿠데타의 파국을 민족 선동가의 승리로 바꾸어놓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1924년 2월 24일에 블루텐부르크 거리에 있는 예전의 사관학교 건물에서 열린 쿠데타 관련자 재판은 모든 사람들이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은 절대 로 건들지 않겠다. "는 침묵의 합의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히틀러, 루덴도르프, 룀, 프리크, 푀너, 크리벨, 그리고 네 사람이 더 고발되 었다. 반면에 카르, 로소보, 자이서 등은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런 재판 절차상의 대립에서 히틀러는 모든 이점을 이끌어냈다. 피고와 증인 사이의 이런 대립은 복잡한 과거의 사정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 다. 그는 카프 쿠데타의 주동자들처럼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맹세하지는 않 았다. "각자 모두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 맹세하는 자세를 취하며 자기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햇다. 자기ㅡ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으며 바 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고백하고 의장 앞에 나서서 '그렇 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전복시키려 했습니다'라 고 말할 용기를 갖지 목했다는 사실이 시민세계를 파괴시켰다. " 그에 반 해서 히틀러는 분명하게 자신이 의도했던 것을 고백하였다. 그러면서도 내 란죄라는 비난만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죄가 있다고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런 행동을 했다고는 고백하지만 내란죄를 범했다고는 고백하지 않겠습니 다. 1918년 국가반역죄에 대항하는 행동에 내란죄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11월 8일과 9일의 행동만으로 내란죄가 구성될 수는 없습니다. 적 어도 그보다 몇 주, 몇 달 전부터 행동과 관계들이 다 포함되어야합니다. 우리가 내란을 꾸미고 있었다면, 당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 이상합니다. 우리와 더불 어 같은 행동을 했던 저 신사분들이 자기들도 함께 이야기 하고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준비하였다고 시인하지 않는 한 나도 내란죄를 지었다 는 부분을 거부합니다. 나는 스스로 내란죄인이라고는 느끼지 않으며 그저 민족을 위하여 최상의 것을 바란 도이치 사람이라고만 느끼고 있습니다. " 공격받은 사람 중 누구도 이런 주장에 맞서지 못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이런 방법으로 어떤 증인이 서술했듯이 재판을 '정치적 카니발'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피고의 역할을 고발자의 역할로 바꾸어버렸다. 검사는 어쩔줄 모르고 한때는 3거두의 변호사 노릇을 맡게 되었다. 의장은 거의 아무런 이의도 달지 못했다. 우레퍼럼 쏟아지는 관중의 박수갈채가 온화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푀너가 '에버트 프리체'에 대해 말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을 가리켜서 "그 조직도 법도 나에게는 무관한 것"이라고 표현했을 때도 전혀 제지를 받지 않았다. 재판정은 당국이 "피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목하였다."고 3월 4일 내각회의에서 바이에른의 주 장관 한 사람이 말했다. 카르와 자이서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곧바로 체념하였다. 예전의 계엄사 령관인 카르는 어두운 표정으로 앞만 쏘아보다가 수많은 모순점에도 불구 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만 들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시도 가 얼마나 히틀러를 돕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로소브만은 정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였다. 거듭해서 그는 상대방의 수 많은 약속위반을 비난아혔다. "히틀러씨가 아직도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그는 자기 계급의 경멸감을 모두 내몽며 국가사회당의 당수가 "전략도 업고 고루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난폭하고 때로는 감상적이 며 어쨌든 열등하다."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심리적 전문가의 견해를 펼쳤다. "그는 도이치의 무솔리니, 도이치의 감베타로 자처하며, 군 주제의 비잔틴 양식(아첨)을 계승한 그의 추종세력은 그를 가르켜 도이치 의 메시아라고 한다. " 히틀러가 격분하여 장군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의장의 의견에 따르면 '실 질적인 가치도 거의 없는' '무례죄'를 얻지는 않았다. 다만 자제하라는 경고 만 들었을 뿐이다. 수석검사조차도 구형의 근거를 히틀러의 눈에 띄는 태 도하고만 연결시켰다. 그의 '독특한 연설능력'을 칭찬하고 "그렇다고 그를 민족선동가라고 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선의의 존경심에 넘쳐서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는 사생활을 언제나 순수하게 유지하였습니다. 정당의 당수로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유혹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인정할 만 한 특성입니다... 히틀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서 단순한 환경에서 나와서 공적인 분야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쟁취하였습니다. 물론 진지하고 열심히 일해서 쟁취한 것입니다. 그는 풍부한 발상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였으며 병사로서 최고로 자기 의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지위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였다는 비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를 역이용하다 이 모든 상황의 이점이 함께 작용해서 히틀러가 재판을 역이용하기 쉽게 해주었다. 그러나 수없이 비웃음을 산 실패한 쿠데타를 가지고 하나의 승 리를 만들어내고, 11월 9일 새벽의 고통과 우유부단함을 대담한 민족적 거 사처럼 만들어버린 것은 결국 그 자신의 능력이었다. 히틀러는 무거운 패 배를 겪은 직후에 심문을 받으면서 실패한 거사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 맡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 행동은 조국을 위한 것이고 역사적 의무를 이행 한 것이었다고 더 높은 차원에서 정당화하였다. 그러한 주장에 나타나는 직관적이면서도 도전적인 확신은 의심의 여지없 이 그의 가장 인사억인 정치적 성공에 속하는 것이다. 그의 재판태도의 자 신감 넘치는 특성을 반영하는 최후 진술에서 그는 로소브가 자기를 가리켜 '선전꾼이면 기상신호'라고 부른 말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인배란 생각이 얼마나 작은지요! 내가 장관자리를 얻는 것을 그다지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십시오. 장관이 되었다 는 사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고 하는 것이 위대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 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추구하였던 것은 첫날부터 장관보다는 1 천 배나 더 큰 것이엇습니다. 나는 마르크시즘을 파과한 사람이 되고자 하 였습니다. 나는 이 과제를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과제를 이루면 장관이란 직합은 내게는 웃기는 것에 불과하지요, 내가 처음으로 바그너의 무덤 앞에 섰을 때, '여기 추밀고문관 음악감독 리하르트 폰 바그너 각하가 잠들다'라고 쓰지 못하게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자랑 으로 넘쳐 흘렸습니다. 나는 이 남자와 도이치 역사의 수많은 남자들이 후 세에 자신의 직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사실 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나는 겸손해서 '북치는 사람'이 되고자 했 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최고이고 다른 것이 작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전환점 그가 스스로 위대한 남자라고 자처하고 로소브에 맞서서 자신을 방어한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굴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칭찬하는 어 조로 말을 한 것이 처음부커 기습적인 작용을 하였으며, 재판과정에서 자 신을 중심인물로 부상시켰다. 공식적인 기록은 엄격한 서열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졌기에 끝까지 루덴도르프 - 히틀러 서열을 지켰다. 그러나 1차대전 의 총사령관을 보호하고자 하는 다방면의 노력은 히틀러에게 또 하나의 기 회를 마련해주었는데, 그는 그 사실도 알아채고 이용하였다. 오직 혼자서만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그는 루덴도르프라는 인물을 넘어서 공석으로 남아 있는 민족운동 전체의 지도자 역할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가지들의 시도에 들어 있던 도둑의 속성, 비 현실성, 완전한 절망 등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대단히 수동적이고 어찌할 바 몰랐던 거사일 아침 자신의 행동도 슬며시 없어지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어리둥절하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건의 경과는 점점 더 똑똑하게 계획되고,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멋진 걸 작품이었다는 인상을 얻게 되었다. "11월 8일의 행동은 실패하지 않았다. " 고 그는 이미 법정에서 선언을 했을 정도였다. 그럼으로써 아주 공공연히 뒷날 신화를 만들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감동적으로 정치와 역사에서 자신의 승리의 비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가 양성한 군대는 나날이 시간 시간 더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바 로 이날 나는 이 거친 떼거리가 대다가 돠고, 대대는 연대가, 연대는 사단 이 될 순간이 다가온다는 자랑스런 희망을 가졌습니다. 낡은 포를 먼지 속 에서 꺼내고 낡은 깃발을 다시 펄럭일 시간, 우리가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는 영원한 신의 최후의 심판에서 용서를 얻을 시간이 다가온다는 희망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뼈, 우리의 무덤에서 법정의 소리가 들리게 될 것 입니다. 오직 우리를 재판할 권능을 가진 법정 말입니다. 우리에세 판결을 내릴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고발에 판결을 내리는 것은 바로 영원한 역사라는 법정입니다. 여러분이 내릴 판결을 나 는 압니다. 그러나 저 법정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내란을 꾀했는가, 아닌 가?' 하고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법정은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낡은 군대의 병참감을, 그 장교와 병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도이치 사람으로서 자기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싸우다가 죽으려 한 이 사람 들을 역사라는 법정이 심파할 것입니다. 여러ㅈ분이 우리가 유죄라고 1천 번이나 판결하여도 영원한 역사 법정의 여신은 미소지으며 검사의 구형과 이 법정의 판결을 찢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여신은 우리에게 무죄를 선 고하기 때문입니다. 뭔헨 국민법정의 판결은 정확하에 말하자면 히틀러가 예견한 '영원한 역 사법정'의 판결에 가까운것이었다. 의장은 아주 애써서 3명의 민중판사들이 유죄 선언을 내리도록 만들 수 있었다. 히틀러를 바른 시일 내에 사면한다 는 확답을 주고서야 겨우 그들의 동의를 얻어ㅓ냇던 것이다. 선고 자체가 자시들이 말썽꾼을 축하하는 뭔헨 사회의 한 사건이었다. 판결 근거는 한 번 더 피고의 '순수한 애국정신과 가장 고귀한 의지'를 높이 평가한 것이었 다. 히틀러에게 5년 간 금고형이라는 최저형량이 선고되었고 6개월의 형기를 마치면 집행유예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는 무죄선고를 받 았다 부담스런 외국인 강제추방 규정은 '히틀러처럼 도이치 방식으로 생각 하고 느끼는'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자 법정에 있던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판사들이 법정을 떠날 때 부휘크너는 두 번이나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옳아!"하고. 이어서 히 틀러는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법원건물의 창문에 모습을 보였다. 그의 뒤 에는 꽃다발이 쌓였다. 국가는 한 번 더 대립에서 패배하였다. 그러고 나자 히틀러에게 상승의 시기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11월 9일 직후에 뭔헨의 대중은 때를 지어 모여들어서 그를 위해 억지 시위를 하였 다. 이어서 실시된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와 전국의회 선거에서 민족주의자 들은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당, 혹은 당활동이 금지된 이후 만 들어진 위장 단체는 히틀러의 마력과 마키아벨리적인 능력에 근거한 결집 력이 없어지자 짧은 기간에 서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의미도 없이 싸 우는 집단들로 찢어지고 말았다. 드렉슬러는 이미 히틀러가 "당을 그 빌어 먹을 쿠데타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고 불평했다. 1923년 말에 나라 안의 사정이 점차 안정되자 거의 오로지 공공연한 불 평에서 양분을 얻었던 선동의 기회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무렵 인플레 이션이 극복되엇고 운도 없이 시작된 바이마르 공화국에 그런대로 '행복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온갖 지역적인 충돌들에도 불구하고 11월 9일 사건은 바이마르 역사라는 대규모 드라마의 급전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사건 은 전후 시대를 종결지었다. 장군홀 앞의 총격전은 특이한 각성을 가져왔 다. 비현실성에 빠져들어 방황하던 국민의 눈길을 부분적으로라도 현실로 돌리는 데 기여하였다. 히틀러 자신과 그의 당 역사에도 실패한 11우러 거사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거기서 이끌어낸 전략적 교훈들과 개인적인 교훈들은 그의 앞길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의 뒷날 해마다 연기오르는 물들 사이로 기념 행진을 하고 쾨니히 관장에서 저 희미한 11월 아침에 죽은 자들에게 청동 의 관에서 나오라고 외치곤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이러한 어두운 제례의 식은 역사적 재로를 가지고 정치적 쇼를 보여줄 기회로 삼곤 하던 그의 연 국적 성격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성곡한 정치가가, 자 신의 중요한 정치적 성장체험에 바치는 숭배 의식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그의 생애 '가장 큰 행운'이었고, 당의 '진짜 탄생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선 바이에른을 훨씬 넘어서는, 독일까지도 넘어서는 여론을 그 에게 마련해 주었다. 당에는 순교자들, 전설, 박해받은 열성이라는 낭만적 후광, 그리고 확고함의 영광까지 마련해준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뒷날 기념 식사에서 이 모든 이점들을 찬양하고 그것을 '섭리의 지혜' 덕으로 돌렸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 당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절대로 혁 명적인 운동을 창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당신도 다른 사람 들처럼 말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말이 옳았을 것입니다. " 장군홀 앞에서 국가 공권력의 총구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국가의 힘에 대한 히틀러의 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었고, 계속적인 권력장악 과정 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과정을 그는 다음 여러 해 동안 서서히 전개시키 고 모든 저항과, 자시편의 초조함에서 나온 반항에 맞서서 지켜나가게 된 다. 그는 전에도 이미 권력과 그 총애를 구했다. 그리고 "1919년부터 1923 년까지는 오직 쿠데타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을 말 그대로 받 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느 이제 권력의 비호 속으로 들어가려는 본 능적인 충동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고,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략체계로 발전시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선동가에서 정치가로 11월의 체험은 현대 국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전망없 는 일이며 권력장악은 헌법의 토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물론 히틀러가 권력욕을 향한 행진에서 헌법을 구속력이 있는 제한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순히 합법 성의 보호 안에서 불법적인 일을 해나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다음 여러 해 동안 행한 수많은 헌법에 대한 선서가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의 적법성 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헌법을 청산할 시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하였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1923년 9월 24일 자 기념 글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민족주의 혁명은 정치 권 력의 인수를 전제로 해서는 안되며, 국가의 경찰력 확보가 민족주의 혁명 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동시대의 어떤 아이러니컬한 표현처럼 '합법적인 아돌프'로서 히틀러는 엄격한 ㅈ거의 사나이가 되었다. 유력인사들과 권력을 가진 기고나의 호감 을 얻으려 애썼으며 언제나 좋은 행동을 하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은 통편에 서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혁명적인 의도를 감추었다. 폭력적인 공격성을 지 닌 초기의 어조들은 누그러지고 아주 가끔씩만 두려운 모습을 드러내곤 하 였다. 그는 국가를 패배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다듬어 나가려고 했다. 그것 이야말로 히틀러의 혁명적인 야심에 대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찰자와 해설자들을 기만하고, 보수적인 아니면 평범하게 반동적인 소시 민 정당이라는 단순하게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낸 전략적인 자세였다. 히틀 러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방위군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키도록 만들었다. 11 월 9일의 실패를 그는 무엇보다 군가 지도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목 한 탓으로 돌렸다. 뮌헨 재판의 최후진술이 이미 방위군을 자기편으로 끌 어들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 자세는 뒤집을 수 없는, 거의 절대적 으로 옹호된 새로운 전략원칙이 되엇다. 재판정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언젠가 방위군이 우리편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ㅇ면 1934년 6월 30일 유혈사태 때까지 정당 내부의 장체 군대의 역할을 엄격하 게 이 목적에 종속시켰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돌격대가 군대에 종속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돌격대는 방위군의 일부도 라이벌이 되어서는 아되는 것 이다. 히틀러가 장군홀 앞의 패배에서 이끄러낸 것은 강화된 전략뿐은 아니었 다. 그것은 나아가서 정치에 대한 그의 관계 자체를 변회시켰다. 그때까지 만 해도 그는 무엇보다도 범주적인 절대성을 통해서, 과격하 ㄴ대안을 통 해서 두드러지게 되엇고 마치 '자연의 힘처럼' 작용하였다. 정치란 전쟁터 에서 배웠떤 존재방식대로 적을 향한 돌진이며, 전선을 뚫고 나가는 것이 고, 격돌한 다음에는 승리냐 패배냐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제야 비로호 히틀러는 정치적 게임, 전략적 술책들, 겉보기 타협, 지루 한 훈련 등을 완전히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그저 감정적인, 단순하게 선동가적이고 '예술가적인'관계를 마침내 극복한 것으 로 보인다. 사건들과 자신의 충동적인 반응에 이끌려가던 선동가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11월 9일의 실패한 쿠데타는 히틀러의 생애 에서 위대하고 결정적인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는 수업시절을 끝낸 것 이다. 정확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히틀러의 정치입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자 체질 히틀러의 변호사이며 뒷날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는 위른베르 크 조사 보소서에서 이렇게 말햇다. 히틀러의 '역사상의 삶의 전체', 그리고 '그의 성격 전체의 본질'이 11월 쿠데타 과정에 핵심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 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히 모순되는 상태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자기상승과 감정의 팽창, 이것은 애송이 도시 계획가, 작곡가, 발명가 시절 의 히스테리컬한 백일몽과 공상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바로 이 어서 폭삭 주저 앉는 태도, 절망한 도박꾼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몸짓이 나타난다. 무감각 상대로 침몰해 버리는 것이다. 9월에만 해도 그는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 자신감에 넘쳐서 이렇게 말 했다. "로마 역사를 아시오? 나는 마리우스고 카르고 술라요. 나는 민족의 지도자지만 그는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번에는 마리수스 가 이길거요." 그러나 최초의 저항의 표지가 나오자 그는 행위의 인물이 아니라 행위를 알리는 사람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 았다. 분명히 그는 위대한 과업에 자신을 맡길 능력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의 신경이 그의 행위욕구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는 '거인족의 싸움'을 예 언하였고 시민 양조장에서 흥분의 순간에, 후퇴란 없다고 확언하고 사태는 '이미 세계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계가를 마주 보며 수치스럽게 멀리 도망치고, "이 허위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그는 한 번 더 위대한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였다가 판을 잃었떤 것이다. 연설의 능력으로 그는 모든 것을 구하였다. 패배를 뒤집은 일은 그가 얼 마나 현실에 정통하지 목한지, 또한 현실을 표현하고 채색하고 선전으로 마무리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비상하게 통달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가 법정에 등장하는 태도의 냉정함과 침착함은 그의 행동의 성급함, 무모하고 흔들리고 졸렬한 불안상태에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모습 이었다. 노름꾼 기질, 행운을 찾는 모험가적 요소는 출구 없는 상황으로 뛰어드 는 성향 속에 나타난다. 1923년 결정적인 상황마다 그는 전략적인 후퇴 가 능성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성향을 입증하였다. 처음에는 등을 기댈 벽을 찾는 듯하다가는 어차피 캄캄한 사태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 인다. 정말 자살자 체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느 무 자비한 대안을 피하려고 하는 정치적 노력을 '정치적인 난쟁이'의 이데올로 기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결코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 멸감을 표현하였다. 비스마르크가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한 것은 '싸구려 변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1905년 이후로 일련의 자살 위헙들이 그 의 존재를 늘 따라다녔던 것은 분명이 멜로드라마적인 기질의 표현 이상이 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극단적인 도전으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세계권력이 냐 몰락이냐 하는 대안 없는 돌진에 나타났다가, 제 3제국 수상관저의 지 하 벙커에 있는 소파에서 끝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위대하 ㄴ 정치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그러한 자살의 위협이 함께 등장하였다. 그의 수많은 등장들은 분명히 훨씬 더 긴장된 것이고, 그가 벗어버리지 못했던 장중한 익살의 경향을 띤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에 흥분된 쿠데타 주동자 의 주변에 이미 거대한 파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말 한다면, 그것은 뒷날의 체험을 그의 이전 생애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일 까? 1923년 11월 9일을 돌파구였다. 그날 낮에 시위행렬이 오데온 광장에 접 근해 가고 있을 때, 어떤 행인이 저기 행렬 맨 앞에 있는 히틀러가 "정말 저 거리 모퉁이에 있던 그 자식"인가고 물었다. 이제 그는 역사 속에 있게 되었다. 11월 9일이 그의 생애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가 패배를 이용하여 역사로 통하는 출구를 억지로 열었다는 사실도 포함한다. 뒷날에 도 그렇지만, 파괴적으로 커진 틀 안에서 파국의 도움을 받아서 지속적인 역사의 장소에 억지로 도달했던 것이다. 3부 <나의 투쟁> 제 1장 국가 사회주의의 세계상 히틀러가 ㄹ츠베르크 요새에 있는 자기 감방 벽에 걸어두었던 월계관은 걔지지 않은 의도에 대한 도전적이 ㄴ암시 이상의 것이었다. 체포 당해서 정ㅊ거 사건에서 강제로 격리된 일이 그에세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너무나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1월 9일의 재앙이 당에 가져온 결과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분노하도 ㅉ어진 추종자들이 불만을 멀리서 관팔하고, 게다가 민족주의를 위한 순교자라는 고난의 영광까지 둘러쓰게 되었다. 몇 년을 거의 아무 정신 없이 불안하게 보낸 다음 자기 자신을 돌 아볼 기회도 생겼다. 자신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돌아보게 된 것이 다. 격앙된 감정이 잦아드는 동안, 처음에는 머뭇거리면서 요구했지만, 재판 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강해진 민족 우익의 지도자 역할이 메시아적 과업 을 지닌 유일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점차 확고한 윤곽을 잡아나갔다. 일관 성과 아주 높은 역할의식을 가지고 히틀러는 자신이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의식을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 퍼뜨렸다. 이 순간부터 이 선별의식은 그의 외양에 가면을 쓴, 얼음장 같은 ㅁ모를 부여하였다. 그것은 미소도, 독특하지 않은 몸짓도, 자신을 잊은 태도로 일 체 없애버렸다. 알 수 없는, 거의 추상적인 비개성의 모습으로 그는 장차 자기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통과하게 된다. 11우러 쿠데타 전에 이미 디트 리히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위대함의 망상, 그의 '메시아 콤플렉스'에 대해 불평했다. 이제 그는 점점 더 의도적으로 조각상의 자세로 얼어붙어 버린 다. 그것은 위대함과 지도자 능력에 대해 그가 가진 이미지의 기념비적인 영역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감방생활은 계획적인 자기 양식화 과정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이어진 판결에서 40명의 쿠데타 참가자들이 선고를 받고 란츠베르크로 이송되었 다. '히틀러 돌격대' 대원들인 베르히톨트, 하우크, 모리스, 아만, 헤스, 하이 네스, 슈레크와 대학생인 발터 헤벨이었다. 교도소측은 히틀러에게 별 갱제 없이, 오히려 친근한 방식으로 이런 추종세력 한가운데 머무는 것을 허용 해주었다. 그의 특별한 요수들은 거의 모두 받아들여지다시피 했다. 거대한 회의실에서 식사시간에 그는 갈고리 십자가 아래서 의장 노릇을 하였고 다 른 죄수들이 그의 방을 정돈하였으며 그는 유회와 잡일에 끼지 않았다. 그 의 뒤를 이어 감옥으로 온 동료들은 '즉시 지도자께 신고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어떤 체험자의 보고에 의하면 바 10시에 규칙적으로 '대장이 참석 한 가운데 강연'이 있었다. 낮 동안 히틀러는 광범위한 서신교횐에 몰두하였다. 언어적으로 특기할 만한 숭배문서는 요제프 괴벨스라는 어떤 젊은 문헌학 박하과정 학생의 글 이었다. 거기에는 히트럴의 법정 최후진술에 대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이 거기서 말한 것은 붕괴되고 신을 잃어버힌 세계의 절망 한다운데 서 나온 새로운 정ㅊ거 신념의 신앙 고백입니다... 어떤 신이 당신에게 우 리가 고통받는 것을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말로 우리 민족 의 고통을 파악하엿습니다... " 그리고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도 그에게 편지를 썼다. 로젠베르크는 '수백만 개로 갈라진 우리 지도자의 상징'이라 는 '히틀러의 엽서'를 전파하였다. 외부 세계가 수감된 사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자주 감옥의 뜰을 산책하엿다. 그는 아직도 옛날의 불아정한 스타일을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심복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카이사르의 얼 굴을 하였고, 짧은 가죽바지, 민속적인 제킷을 입고 모자를 자주 썼다. 그 가 이른바 동지들의 밤에 연설을 하면 "바깥 계단실에서 소리 없이 교도관 들이 모여서 연설을 들었다." 패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이 그는 자기 생애의 전성들과 비전들 을 전개하였다. 아누 특이한 연관성 속에서 들려주곤 하였다. 뒷날의 언금 에 따르면 고속도로 건설과 국민차 이념으 바로 이 시기에 나온 것이었다. 면회 시간은 일주일에 여섯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히틀러는 매일 여 섯시간까지 추종자들, 청원자들, 친한 정치가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으 란츠 베르크로 찾아왔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여성들도 아주 많았다. 그러 므로 이 감옥을 '최초의 갈색집'(갈색집이란 뒷날 국가사회당의 당사 건물 을 칭한다)이라고 말한 것도 틀리지만은 않는다. 재판이 끝난 직후 있었던 히틀러의 서른다섯 살 생일에는 이 유명한 죄수에게 배달되어 온 꽃다발과 소포들의 여거 개의 방을 가득 채웠다. 변칙적인 독서 억지로 숨돌릴 시간을 얻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고조사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감정들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전에 읽다만 것, 절반 쯤 생각해 둔 것 등을 최근의 독서결과와 합쳐서 세계관 체계의 윤곽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 시기는 나에제 그때까지 오직 본능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수많은 개념들을 분명히 할 기회를 주었다. " 그가 실제로 무엇을 읽었는가는 저체적으로 간접증거에 따르거나 아니면 제 3자의 발언에서 얻어온 것들이다. 그 자신은 정신적 종속이라는 의심을 받을지 모른다는 독학자의 근심에 사로잡혀서 책이나 어떤 작가를 언급하 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만 여러 번이나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등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히틀러는 이미 전쟁중에도 지니고 잇었 다고 하며, 상당히 긴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었다. 니체, 쉴러, 레시으이 경 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인용을 피하였고, 이러한 방 법으로 독자적으로 깨달았다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1921년의 자전적인 묘사엣 그는 천년기에 "민족경제 이론들을 철저히 연 구하였다. 당시 이용할 수 잇는 반유대주의 문현도 전부 연구하엿다."고 말 햇다. "스물두 살부터 나는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군사정치 문헌들을 잡았 으며, 아주 집중적으로 일반적인 세계사 문제를 탐구하는 일을 결코 중단 한 젓이 없다. "그러나 한 번도 어떤 작가나 제목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어느 정도 동떨어진 방식으로 분량을 말하고 자기가 공부하는 전체 적인 영역만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상당히 멀리 내다보는 몸짓으로 예술사, 문화사, 건축사, '정치적인 문제들'을 읽는다고 거론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때까지 원전들이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손을 거친 요약으로만 지식을 섭취했다는 의심이 든다. 한스 프랑크는 란츠베르크 시절에 그가 읽은 책들로 니체, 체임벌린, 랑케, 트라이치케, 마르크스, 비스마르크 등을 거론하였고, 도이치측과 연합 국축의 전쟁 회고록들을 거론하엿따. 그러나 그런 책들과 나란히, 그리고 그보다 먼서 그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의 찾아내기도 힘든 원전들에서 추려낸, 학문적이지 않은 소책자들이 제시하는 침전물에서 자신의 세계상 을 걸러냈다. 즉 종족주의적이고 반유대적인 책자들, 게르만 정서에 대한 이론서, 혈통의 신비와 우생학, 역사철학적인 논문들과 다원주의 이론 같은 것들이었다. 히틀러의 독서에 대한 상당수의 동시대 증언들에서 믿을 만한 것은 그 집중도와 열의이다. 쿠비체크는 히틀러가 린츠에서 이미 세 개의 도서관에 동시에 등록하고 있었고, '책들에 둘러싸인 모습밖에는' 기억에 없다고 증 언하고 있따.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는 책을 '그냥 열어보았거나' 아니며 '얼추 읽곤'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원탁대화에 이르기까지 히틀러 의 연설과 글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기억은 이상할 정도로 정신적인 무 관심과 문자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준다. 거의 2백 번의 원탁독백에서는 간 혹 두세 명의 고전작가가 등장할 뿐이다. <나의 투쟁>은 단 한 번 몰취미 한 유대주의 맥락에서 괴테와 쇼펜하우어를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지식은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지식의 높은 감정도 수 고도 알지 못했고, 오직 그 쓸모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올바른 독서의 기술'이라고 말한 연습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 해서 사용형식을 찾고 존경받는 선서보증인을 찾는 행위에 불과하였다. '어 떻게든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적합하게 꾸려넣는 방법'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