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위대한 연설가 1920년 봄, 그가 정치에 들어서던 힘들고도 취한 것 같던 시절 히틀러는 도이 치 미래에 대한 어떤 요구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밤마다 맥주거품이 부글거 리고 담배연기가 자욱한 맥주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처음에는 거의 적대감을 드 러내는, 아니면 그냥 재미로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만 들려고 애쓰는 뮌헨의 지역 선동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명성은 점점 더 올라갔다. 극단적인 몸짓에 쉽 게 넘어가는 수사적인 도시의 분위기는 이 연설가의 연극적인 자기연출 스타일 과 통제되지 않은 폭발성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분위기는 다른 역 사적 요인들 못지 않게 그를 자극하였다. 히틀러의 출세는 시대의 조건들에 의 해서 결정적으로 촉진되었다는 주장은 그가 사회적 상승을 시작한 장소인 뮌헨 의 특별한 조건 아래서만 완전한 타당성을 가진다. 그가 보여주었던 목적의식과 사고의 정도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는 비상하 고도 여성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감수성으로 그는 시대의 분위기 를 조절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게오르크 쇼트(Georg Schott)는, 그의 내부에서 말하고 있는 악마적인 힘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근심스 러운 경탄을 지닌 채 그를 '꿈을 우물거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게오르크 쇼트 (G. Schott). 1924년에 간행된 인기 있는 히틀러 묘사(Das Volksbuch vom Hitler)의 서문.) 히틀러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혹은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몽유병자의 본능으로 '(본능적인 정확성으로 :역주) 자신의 길을 갔다. 히틀러가 이렇듯 본능의 인간이라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어서 그이 합리성 과 냉정한 계획의 능력을 흔히 지나쳐버리곤 한다. 합리성은 그의 행동방식의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온갖 능력들 못지 않게 그이 출세의 바탕이 기도 했다. 히틀러의 합리성과 짜맞추는 능력 사람들은 특히 그의 비상한 학습능력, 이 시절 그를 지배하고 있던 충족되지 않는 배웅의 열망을 간과해버리곤 한다. 연설가로서의 승리로 얻게된 열병 같은 상태에서 그의 감수성과 흡수능력은 보통보다 훨씬 컸다. 그의 '짜맞추기 능력' (하이덴,(Geschichte), 11쪽 히틀러의 다음 언급에 대해서는 라우슈닝 (Rauschning).(Gesprache),225쪽.)은 극단적으로 상이한 요소들을 붙잡아서 김밀 한 형태로 짜맞추었다. 자신의 선배들이나 동료들한테서 배우는 것 이상으로 그 는 적들에게서도 배웠다. 자신은 언제나 적에게서 매우 많은 것을 배웠고, 바보 나 약자만이 적에게서 배우는 도중에 원래 자신의 생각들을 잃어버리는 법이라 고 확언하였다. 그래서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 , 레닌, 고비노, 니제, 르 봉(Le Bon), 루덴 도르 프, 노스클리프 경(Lord Northcliffe), 쇼펜하우어, 찰 뤼거 등을 조합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제멋대로이고 기묘하여, 잘 모르는 사람의 대담성으로 이 루어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결성이 없는 것도 아니였다. 이러한 이미지 안에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도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시온의 현자들과 분명하게 위조된 그들에 관한 기록도 스승으로 삼았다.(이른바 보고문에 대해서는 귄터 슈베르트. 위의 책, 33쪽 이하. 최초로 완벽하게 기록된 1920년 8월 13일자 연설에서 그는 펠프스(R.H phelps)가 입증 한 대로 이른바 보고서의 수많은 주제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특히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오랫동안 배웠다. 내면적으로는 이 데올로기에 무관심했으면서도 그가 국가사회주의 세계관을 만들어내기 위해 바 쳤된 에너지는 마르크스주의가 그에게 모범으로 작용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전통적인 시민 정당은 좌익의 대중조직이 가진 힘과 투쟁 에너지에 못 미친다는 것이 그가 처음부터 가졌던 생각이었다. 좌익 조직과 비슷하게 조직되고, 더욱더 단호한 세계관을 가진 정당만이 마르크스주의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 다.(Mein Kampf. 186쪽 이하 참조. 여기서 히틀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특 별한 정신적 기반을 가진 운동들은... 스스로가 새로운 사상 , 이념 혹은 세계관 을 지닌 적들에 의해서만 붕괴될 수 있다" 두 페이지 뒤에 다시 이렇게 적고 있 다. "권력수단들을 가지고 세계관을 물리치려는 시도는 이 싸움이 새로운 정신적 태도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 한 결국 실패했다." 비슷한말이 1920년 8월 13일자 히틀러의 연설에도 나온다. 위의 책 415쪽, 417쪽.) 그는 특히 혁명시대의 경험에서 전략을 배웠다. 러시아의 사건들과 바이에른 의 소비에트 지배는 그에게 목적의식이 확고한 몇 명의 주축인물이 원력을 장악 하는 기회를 보여주었다. 레닌이 혁명적인 충동을 어떻게 상승시켜서 이용하는 가를 가르쳐주었다. 히틀러는 나중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사실을 거리낌없이 고백합 니다. 지겨운 사회이론과 유물사관 따위의 부조리한 것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나 는 그들의 방법을 많이 배웠어요. 소매상과 비서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유순하 게 시작하였던 일을 나는 진지하게 여겼던 것이죠. 국가사회주의는 전부 그 안 에 들어 있습니다. 좀더 정밀하게 들여다보십시오... 이새로운 정치적 투쟁방식 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는 다만 이 방법을 받아들여 서 발전시키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나는 사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 틀 안에서 혁명을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열 번씩이나 중단한 일을 꾸준히 계속해올 뿐이죠. 국가사회주의란, 마르크스주의에서 부조리하고 인위적 인 민주주의와의 결속만 끊으면 가능한 형태입니다.(라우슈닝 147쪽이하) 그는 자기가 받아들인 것에 일관성만 부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그 것을 발전시켰다. 그이 본질에는 남을 능가하는 위대한 몸짓을 지향하는 유아적 요소가 들어 있다. 최고를 꿈꾸고, 가장 과격한 이데올로기와, 뒷날에는 가장 막 강한 건축물, 가장 무거운 탱크를 확보하려는, 경탄받고 싶어하는 욕구였다. 그 는 자신의 세계관, 전략 목표들을 '삶의 길 양쪽에 나타나는 온갖 덤불 숲에서' 긁어모았다. 그는 모든 일에 부여한 단단함과 일관성, 그리고 최종적인 조치를 보고도 물러서지 않는 특성은 그 자신의 것이다. 합리적인 배려는 처음부터 그의 전략의 특징을 이룬다. 그는 처음에 이름 없 는 자의 소굴에서 빠져나오고 경쟁관계의 집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단연 돋보 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였다. 뒷날 그의 정당사 연설에 거듭 등장하는 무명의 출발에 대한 언급은, 오랫동안 기회를 잡지 못한 그의 공명심이, 자신이 위대하 지만 알려지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아래서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증언해 주고 있다. 단호함은 그의 데뷔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였고, 규칙이나 인 습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에도 나타난다. 숨이 멎을 듯한 단호성으로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쉬지 않고 활동하고, 소동과 스캔들을 이 용하고, 도당을 이루었다. 법칙 이외에 테러가 사람들의 침묵을 깨뜨리고 매일 매일의 이름을 만들어줄 전망만 보이면 테러까지 감행하였다. "그들이 우리를 어 릿광대로 묘사하든 범죄자로 묘사하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 이야기를 한다 는 사실, 그들이 계속 우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는 사실이다."(Mein Kampf 544쪽) 붉은 깃발과 제복의 힘 이러한 생각은 모든 활동의 양식과 수단을 결정하였다. 깃발들의 요란한 붉은 색은 심리적으로 효과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좌익의 색깔을 도전적으로 찬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임을 알리는 거대한 벽보들은 완전히 붉 은 색인데 평이한 구호들 사이 거대한 크기로 인상적인 사설을 담고 있었다. 위 대하다는 인상과 단호한 타격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서 국가사회당은 툭하면 거리행진을 벌였다.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누어주고 벽 보를 붙이는 일이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히틀러는 내놓고 좌익의 선전술을 모방하면서 사람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도록 했다. 자동차 위에는 시민들의 거주지역에서 혐오감을 얻 었던, 주먹을 휘두르는 소련식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제대군인들의 단정한 과 격주의가 올라앉아 있었다. 이들은 전쟁의 포화가 멎고,모두 제대를 하였으면서 도 구가사회당의 돌격기 아래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전투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히틀러의 행사에 위협적이고 군사적인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히틀러는 뮌헨에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행사들이 파도처럼 계속되도록 계획하였다. 군인들은 당의 사회적인 얼굴을 점차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과 영 세 기업자들로 이루어진 단골 모임을 폭력에 익숙한 직업군인의 단단한 모습으 로 바꾸어 나갔다. 당의 가장 초기 당원명단에 보면 193명의 이름 중에 직업군 인이 22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정당활동에 시민적인 생존문제를 피할 가 능성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참호속에서 전우애를 체험하면서 확인했던, 새로운 공동체 형식을 향한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시대가 그들을 그렇게 키워냈 던 것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삶과 죽음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려고 하 였다. 군대식의 엄격한 복종, 기율, 헌신에 익숙한 이 새로운 가입자들의 도움으로 히틀러는 점차 당의 확고한 내부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뮌헨의 방위군 사 령부는 새로운 사람들을 적잖이 그의 휘하로 보냈다. 히틀러는 뒷날 자신은 이 름도 없이, 아무런 방책도 없이 오직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적들로 둘러싸인 세 계에 맞서 일어섰노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그가 지배적인 시대의 성향에 맞 섰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오히려 상당한 정도로 방위군가 의용군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후 원이야말로 이러한 형태의 데뷔를 가능케 해준 것이었다. 에른스트 룀의 후원 누구보다도 에른스트 룀이 국가사회당을 지원하였다. 그는 대위계급으로 에프 연대 사령부에서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바이에른 위장 군사정권의 실질적인 수뇌였다. 그는 당의 추종자, 무기, 재정 등을 이끌었다. 이러한 노력을 하면서 그는 방위군과 의용군 연합의 감시위원회 장교들의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이 불법적인 활동을 돕고 있었다. 그 동기의 일부는 독일의 시민 전쟁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일부 는 사방에서 시끄러운 좌익에 대항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자기 동료들 이 과거의 적을 눌러 이기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겠다는 소망밖에' 없었던 룀은 전쟁 말기에 총사령부 에서 일하면서 탁월한 조직능력을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고참병 유형의 인물 이었다. 탄환으로 망가진, 언제나 불그스레한 얼굴을 가진 이 작고 뚱뚱한 남자 는 대단히 저돌적인 사람이었고 전쟁에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사람들을 간단히 병사와 시민, 친구와 적으로 분류하였다. 정직하고 책략이 없고 실팍하고 무미건조한고 사려 깊고 솔직한 병사였고, 양심의 가책 따위로 구애받지 않았다. 불법적인 책략을 쓰던 옛날 동지들중의 누군가가, 룀은 어디에 나타나든지 '모임 에 활기를' 가져왔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많았다. 바이에른 방식의 세속성을 지닌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망상과는 무관하였고, 언제나 서둘러 만들어내는 온갖 형태의 소란을 통해서 국가 안에서 병사가 우위 를 차지하도록 노력하렸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총사령부 안에 선전 및 정치 그룹들에 대한 정보업무를 위한 특별 부서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부서 의 명령을 받고 아돌프 히틀러는 도이치 노동자당의 모임을 방문했다. 거의 모 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젊은 선동가의 천재성에 감명받은 그는 히틀러가 정 치가들과 군인들과 접촉하도록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었다. 그 는 아주 일찍이 당에 가입해서 당적 번호 623번을 얻었다. 룀의 부하들이 당에 도입한 군지휘부적인 특성은 정치적 상징과 장식을 써서 요란스럽게 단장되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주장하듯이 갈고리 십자가 기 는 그 자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원의 한 사람인 치과의사 프리드리 히 크론(F.Krohn)이 1920년 5월 중순에 슈타른베르크 지역의 창립집회를 위해서 초안한 것이었다.(프란츠 빌링. 초기 당원의 한 사람인 크론은 수 많은 이데올로 기상이 자극과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었는데 슈타른베르크의 당 창설모임에 안톤 드렉슬러도 초대하였다. 드렉슬러가 홀에 들어서면서 연당에서 깃발을 보았을 때 그는 소리쳤다. "어. 여기 우리 당기가 있네!" 다음날 국가 사회당의 당위원회 는 기를 넘겨받고 그 모범에 따라서 당휘장을 부착하였다. 크론은 왼쪽으로 꺾 어지는 갈고리 십자가를 반납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또한 검정...하 양...빨강 색깔을 선택하였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검정은 패전 으로 인한 슬픔의 상징이고, 하양은 1914~1918년 전쟁에 대한 우리의 죄 없음을 , 그리고 빨강은 고향에 대한 사랑의 상징, 특히 잃어버린 국경지대에 대한 사랑 을 나타낸다." 그에 대해서 히틀러의 설명은 이렇다. "빨강에서 우리는 운동의 사회적 성격을 보고, 하양은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갈고리 십자가는 아리안 인종 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사명과 아울러 영원히 반 유대주의적이었고 앞으로도 반 유대주의적이 도리 창조적 과업의 사상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나타낸다."(Mein Kampf)557쪽 참조. 히틀러의 역할은 마저에 의해서 훨씬 더 강력하게 부각되어 있다.) 히틀러이 공적은 최초의 발상에 있지 않고, 이 널리 알려진 상징물이 가 지는 심리적 효과를 첫눈에 알아보고 그것을 당의 상징물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 다. 그가 이탈리아 파시즘의 군기를 도입해서 돌격대에 군기로 준 것도 비슷한 태 도다, 그는 '로마식' 인사법을 도입하고, 계급과 제복을 군대식으로 정확하게 만 드는 것을 중시하고, 형식적이 ㄴ문제들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다. 등장방식을 연출하고, 세부장식을 하고, 군기수여식, 행진, 열병식 등을 점점 더 거대한 의식 으로 만들었다. 그는 전당대회 날이면 거대한 돌배경 앞에서 인간 사각형 방진 을 지휘하였고, 그러면서 자신의 희극적이고도 건축적인 재능을 잔뜩 부풀려 만 족시켰다. 그는 오래된 예술잡지와 뮌헨 국립도서관의 문장 코너를 오랫동안이나 뒤진 끝에 독수리 도안을 찾아서 당의 인장에 사용하도록 했다. 1921년 9월 17일자 국가사회당 당수로서의 최초로 회람 장은 특별히 세심하게 당 상징물을 위한 것 이었다. 이어서 지역구 지도부에 "회의를 위해서 철저하게 당 휘장을 선전하고, 어디서나 언제나 당 배지를 달고 다니라고 지시하였다. 그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유대인에게는 즉각 가차없이 응수해줄 것"을 명령하였다.(프란츠 빌링. 위의 책 87쪽에서 베낌) 연설가로서 명성이 커지다 제의적인 형식과 경직된 테러 형식의 결함은 옹색하나마 초기의 시작을 결정 지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가장 효과적인 광고발상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독일에서 정치에 인기를 만들어준 전통적 요소들이 이러한 형식으로 시대에 알 맞는 형태가 외어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국민오락이자 미화시키는 구경거리 로서 팔을 높이 쳐드는 일은 절대로 거부감을 주지 않았고 운명적인 진지함을 덧붙여주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역사의 순간에는 어쨌 전통적인 당 운영 방 식의 거짓 친절보다는 더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국가사회당이 예전의 민족주의 정장처럼 사회적인 배타성을 요구하지 않는 정 당으로 출발하였다는 점도 대단히 유리한 부분이었다. 계급의식에서 벗어난 있 었기에 이 정당은, 원래 애국심이란 유명인사들의 특권이며 재산가 교양을 갖춘 사람만이 조국을 가진다는 전통과 단절하였다. 이것은 민족적이며 동시에 대중 적이고, 거칠고 주먹질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국가 사회당은 민족주의적인 생각 을 길거리와 합쳤다. 대중을 철저히 사회적 위협 요소라고만 여기고 방어적 생 각만을 가비던 시민계급은 이 정당이 처음으로 공격적인 보호를 제공한다고 생 각하였다.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우린 폭력이 필요하다".고 히틀러는 거듭 확 인하였다. "다른 사람들이야.... 자기들의 클럽의장에 깊이 파묻히겠지만, 우리는 맥주탁자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다".(1920년 8월 13일자 뮌헨 호프 양조장의 연 설.VJHFZ 1968/4, 418쪽에서 베낌. 나아가 1920년 5월 15일 뮌헨 호프 양조장 연설, 도이얼라인(Hilters Eintritt), in:VJHFZ 1959/2 213쪽(Dok. 21).) 그를 따 라다닐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맥주홀과 서커스 천막에서 대중을 흘리고 있는 이 연극적인 선전꾼은 자신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을 터득한 사람으 로 보였다. 그의 수완은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무슨 일인가를 벌였 다. 원칙은 일주일에 한번씩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1919년 11월에서 1920년 11월까지 48회의 정당행사에서 그는 31번이나 연사로 출연하였다. 그의 등장이 점점 더 성과를 거두는 것은 대중과의 만남이 열광적인 성격을 띤다는 사실에 드러나고 있다. "히틀러 씨가..... 분노에 사로잡혀서 소리지르는 바람에 뒤쪽에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어떤 보고서가 전하고 있다. 1920년 5월에 벌써 그의 등장을 알리는 어떤 벽보에서 그는 '빛나는 연설가'라 고 불리고 있으며 방문객들에게 '특별히 자극적인 저녁'을 예고하고 있다. 이때 부터 집회 보고서는 참석자 수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3천 명이나 그 이상이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가 제복을 고쳐 만든, 푸 른색 물들인 양복을 입고 연단에 등장하면 "우레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프란츠 빌링. 위의 책71쪽, 도이얼라인, 위의책, 펠프스, 위의책301쪽 이하 참조)는 말이 자꾸 나타나다. 이 시기에 쓰여진 보고서들은 연설가의 승리를 일종의 거울글씨 처럼 반사해주고 있다. 그 졸렬함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진짜라는 인상을 받는 다. 집회는 7시반에 시작해서 10시 45분에 끝났다. 강연자는 유대주의에 대해서 연설했다. 강연자는 어디를 바라보나 유대인이 있다고 했다. 독일 전체가 유대인 에 의해서 지배된다. 도이치 노동자들이 머리가 되었든 손이 되었든 모두 유대 인의 지시를 받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물론 유대인이 손에 돈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정부안에 앉아서 암거래를 하고 있다. 유대인이 호주머니를 다시 두둑이 채우면 노동자를 사주하여 다시금 정권을 잡고, 우리 가련한 도이 치 사람들은 그 모든 일을 참아야 한다. 유대인은 러시아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누가 그 모든 것을 끝냈던가? 물론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도이치 사람들 이여, 하나가 되어서 유대인에 맞서 싸우자. 그들은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한 조 각까지 뺏어먹는다. 연설자의 마지막 말은 이와 같다. 우리는 마지막 유대인이 도이치 땅에서 떠나기까지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쿠테타나 심지어는 혁 명에 이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연설자는 큰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는 언론 에 대해서도 욕을 했다... 지난번 모임에서 어떤 지저분한 놈이 모든 말을 받아 적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리에 1920년 8월 28일자 호프 양조장 연설을 되풀이하면서 이런 말 이 나오고 있다. 연설자 히틀러는 전쟁 이전에 우리 형편이 어땠는지, 그리고 오늘날 형평이 어떤지 상세히 묘사하였다. 사채업자와 암거래자들을 모두 교수대로 보내야 한 다. 나아가 용병대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젊은이들은 나이든 사람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다. 이들은 기율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연설자는 당 강령에서 매우 많은 박수 갈채를 얻은 항목들은 나열하였다. 홀은 만원이었 다. 히틀러 씨를 원숭이라고 부른 남자는 모두가 조용해진 가운데 밖으로 쫓겨 났다.(도이얼라인 , 위의 책211쪽과 215쪽) 점점 커지는 자의식을 가지고서 정당은 '질서인자'라고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좌익집회를 해산시키고, 토론 연사는 고함을 질러대고, '팸플릿'을 나누 어주고, 이른바 국민정서에 안맞는 조각품 하나를 공공전시장에서 치우도록 했 다. 1921년 1월 초에 히틀러는 킨득 맥주집에 모여든 천중들에게 이렇게 장담하 였다. "뮌헨의 국가사회주의 운동은 앞으로 가차없이 모든 행사와 강연들을 방해 할 것입니다-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말이죠- 이미 병든 민족정서에 파괴적 으로 모든 행사와 강연들 말입니다."(하이덴(Geschichte)42쪽 인용) 카프 쿠테타 당이 그 사이에 뮌헨 방위군 사령부의 비호를 받을 뿐 아니라 비이에른 주정 부의 '버릇없는 응석받이 귀염둥이'(올덴 위의책 75쪽)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독 자적 행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3월 중순에 베를린 우익집단에서 그때까지 이름 이 없던 지역 풍경을 관리하던 총감독 카프 박사(Dr. Kapp)가 에르하르트 (Ehrhardt)연대의 후원을 받아서 쿠테타 시도를 하였다. 이 시도는 자체의 미숙 함과 총파업으로 인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바이에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의 용군 연합의 시도는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3월 13일에서 14일 밤에 호프만이 이끄는 사회민주당 시민정부는 실질적인 권력주체에 의해 밀려나고 '강한 남자' 구스타프 카르(G.v Kahr)가 이끄는 우익정부가 들어섰다. 이 과정은 당연한 일이지만 좌익측에 경종을 울렸다. 좌익 과격파 핵심 세력 은 자신들의 혁명적인 목적을 위한 투쟁과 우익세력의 저항감을 결합시킬 가능 성을 알아보았다. 카프에 반대하는 총파업 기간에 좌익세력은 특히 중부 독일과 루르 지방에서 지도권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무장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쉽사리 동조 분위기를 얻어냈다. 곧 이어서 거의 마찰도 없이 군대식으로 조직해서 라인과 루르 강 사이에만 5 만 명이 넘는 '붉은 군대'를 정비하였다. 며칠만에 이들 좌익세력은 루르 동업 지대를 거의 전부를 장악하였다. 이 전진에 맞섰던 허약한 방위군과 경찰력은 패배하였고 여기저기서 정식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살인, 약탈, 방화의 파 도가 이 지역을 휩쓸었다. 중부 독일, 작센과 튀링겐 지방에서도 이 어설픈 혁명 의 진압과정에서 밀려났던 사회적...이데올로기적인 긴장들이 단번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어서 투입된 군대의 피의 보복, 즉 즉석 체포, 복수전, 총살 등은 골이 깊은 원한과 참을 수 없는 갈등을 드러냈다. 역사상 언제나 분리된 상태에서 다양한 대립들로 찢겨온 이 나라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질서와 화해를 갈구하게 되었 다. 그러나 질서와 화해 대신에 출구도 없이 증오, 불신, 무정부 상태의 혼란 속 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 덕분에 바이에른은 지금까지보다 더 우익세력의 결집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질서와 화해 대신에 출구도 없이 증오, 불신, 무정부 상 태의 혼란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 덕분에 바이에른은 지금까지보다 더 우익세력의 결집 장소가 되었다. 연합국의 강요에 따라 내려진 준군사조직을 해체하라는 요구는 바이에른의 카르 정부의 저항에 부딪쳤다. 카를 정권은 그러한 준군사조직체에 권력기반을 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30만 명 이상을 헤아리던 민방위와 의용군대에 점점 더 많은 공화국 적 대자들이 밀려들어왓다.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국가 공권력에 밀려 났거나 아 니면 형사처벌까지도 각오하지 않은면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도망친 카프 추종 자들, 동부지역에서 해체된 의용군 잔당들, '국민사령관'루덴도르프, 정치적 암사 자들, 온갖 모험가들, 극히 다양한 방향의 혁명가들, 그들 모두가 증오하는 '유대 공화국'을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만큼은 같았다. 그들은 프로이센...개신교세력...베를린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전통적인 바이 에른의 선별의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선별의식은 이제 '질서의 중심지 바이에른'이라는 구호 아래서(베를린, 즉 공화국 정부에 대한) 전통적 원한에 민 족적인 사명감을 덧붙였다. 점점 더 공개적이고 도전적으로 주정부의 지원을 받 으면서 그들은 무기창고를 설립하고, 지역의 성과 수도원을 비밀거점으로 이용 하였고, 암살, 전복, 시위계획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음모 를 꾸미고, 서로 겹치는 수많은 국가반역 계획들을 꾸몄다. 권력자들의 은총 이러한 사태전개는 발돋움하려고 애쓰는 국가사회당에 어느 정도 성공을 보장 해 주었다. 이제부터 이 정당은 언제나 분명하게 군사적 권력을 쥔사람 , 준군사 적 권력을 쥔 사람, 시민적 권력을 쥔 사람들의 은총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의 계획이 성공할 때마다 더욱더 열렬한 은총을 얻었다. 폰 카르가 히틀러를 받아들인 다음에 히틀러 추종자 중의 한 사람인 대학생 루돌프 헤스는 주 정부 수반인 카르에게 이런 편지를 써보냈다. "대중 세력, 특 히 노동자들을 민족주의 편으로 끌어들려야만 재기가 가능하다는 것 이 히틀러 의 핵심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히틀러 씨를 잘 압니다. 거의 매일 그 를 만나 이야기하고 인간적으로고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극히 단정하 고 순수한 사람이며, 마음은 깊은 선의에 가득차 있고, 경건하고 선량한 카톨릭 교도입니다. 그는 단 한가지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지요. 즉 조국의 안녕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그는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주지사가 마침내 주 의회에서 히틀러를 찬양하고, 경찰 총수 푀너가 점점 더 많은 것을 그에게 허용하였을 때, 파시스트 세력의 부상과 권력장악 과정에 특 정적인 정치적 역할도구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히틀러는 언 제나 안정된 보수세력과 결탁하게 된다. 그는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자에 대한 싸움에서 자신이 언제나 보수세려그이 보호자라고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다. 보 수세력은 이 버릇없는 선동가의 에너지와 최면기술을 이용하고 적절한 순간에 자신들의 정신적, 경제적, 정치적 이점을 이용해서 그를 눌러버리겠다고 생각하 였다. 반면에 그의 생각은, 선의에 넘친 지도세력의 비호아래 구축한 전 부대가 적들을 물리치고 난 다음 파트너를 향해 행진해 나가서 권력 자체를 장악하겠 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환상과 배신과 수많은 거짓 맹세들로 뒤얽힌 권력 게임이었다. 이러 한 권력 게임 덕으로 히틀러는 거의 모든 성공을 얻었고, 카르와 뒷날 후겐베르 크, 파펜, 체임벌린등을 속였던 것이다. 반대로 전쟁에서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그의 실패들은, 그가 초조함이나 변덕에서, 혹은 성공에 자만한 나머지 이러한 권력구도를 위태로운 도박에 걸었다가 실패하고,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도 그 러한 구도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실패의 여러 이유들 중 하나였다. 디트리히 에가르트 미래의 남자를 점점 더 보살펴주는 영향력 잇고 부유한 사람들 덕으로 1920년 12월에 <민족관찰자>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에른스트 룀 은 구제할 길 없이 빚을 진 이 잡지를 사들일 기금으로 6만 마르크를 조성하였 다. 이 잡지는 당시 일주일에 두 번 발행되고 대략 1만 1천 명의 구독자가 있었 다. 돈을 낸 사람들 중에는 수많은 뮌헨 상류층 인사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히 틀러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도움을 받아서 뮌헨 사교계로 들어가서 자신의 관 계를 확대할 수 있었다. 두텁고 둥근 머리모양을 가진 다부지고 익살맞은 에카르트는 포도주를 즐기고 유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성공은 못했지만 시인이며 극작가였다. 입센의 <페르 귄트>를 모방한 작품이 그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두 었다. 그는 정치적인 보헤미안 그룹에 끼어들었다. '도이치 시민사회' 라는 정치 적인 결사를 만들었지만 물론 성공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발간하느 잡지<좋 은 도이치>로 날카롭고 어느 정도 교양 수준을 갖춘 상태에서 널리 퍼진 반유 대주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트프리트 페더를 따르면서 그는 이자에 대한 의한 노예상태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켜 '참다운 사회주의'르 건설 하고자 요구하였다. 란츠 폰리벤펠스의 영향을 받아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종족 혼합 금지를 위하여 싸우고 순수한 도이치 혈통의 영향력 확보를 요구하였다. 소련을 가리켜서 '기독교도를 죽이는 유대인 구세주 레닌의 독재'라고 불렀고, 자신은 "모든 유대인을 한 기차에 태우고 그들과 함께 홍해로 뛰어들고 싶다."고 확언하였다. 에카르트는 일찍이 히틀러를 알게 되었다. 1920년 3월에 카프 쿠테타가 일어 나고 있던 때에 이 두 사람은 민족주의 배후인물들의 명을 받고 관찰을 위해서 베를린에 갔다. 책을 많이 읽고 인간을 잘 알고 광범위한 지식과 수많은 선입 견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그는 촌스럽고 어쩔 줄 모르는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복잡하지 않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히틀러는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의 열등감을 터뜨리지 않고 시민적인 교양을 지닌 이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 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책들을 추천해주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을 만날 때의 행동 방식을 가르치고 표현을 고쳐주고 그에게 여러 곳으로 통하는 문들을 열어주었 다. 한동안 그들은 뮌헨 사회에서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 되어 돌아다녔다. 1919년 에카르트는 기교적인 시에서 국민적인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하기도 했 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런 인물은 "기관총 소리를 들을 수 잇는 친구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장교는 아니다. 장교들에 대해서 민중은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 가장 좋기로는 말을 아주 잘하는 노동자일 것이 다.. 그런 사람이 그다지 큰 지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정치란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업이므로 ." 빨갱이들에게 언제나 '외설적인 대답'을 해줄 준비가 된 사 람,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는 "한 무더기의 학식 풍부한 교수보다 더 낫다. 교수 들이란 두려워 벌벌 떨면서 사실이라는 바지에 오줌이나 싼 채 앉아 있는 존재 다." 그는 이렇게 요구한다." 젊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여자들을 우리편으 로 얻는다." 그는 히틀러를 보자 바로 이 모델을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 였다. 그리고 1921년 8월에 <민족관찰자>의 어떤 기사에서 처음으로 그를 '지도 자'라고 부르고 있다. 국가 사회당 초기의 투쟁가들 중 하나인 <폭풍, 폭풍, 폭풍이여!>라는 노래는 그가 만든 것이다. 후렴같은 마지막 구절에 당의 가장 효과적인 구호인 "독일이 여 깨어나라 !"라는 말이 붙은 노래다. 히틀러는 어떤 찬사에서 에카르트는 "괴 테처럼 멋있게 시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시인을 공개적으로 '아버지 같은 친구'라고 부르고 자신은 에카르트의 제자라고 했다. 그는 로젠베르크와 발트 3 국 출신 도이치 사람들과 더불어 이 시절 히틀러에게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 쳤던 사람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는 히틀러에게 처음으로 본래의 서열에 대한 안목을 열어주었다.<나의 투쟁> 제 2권은 강조된 글씨체로 인쇄된 이 시인의 이름으로 끝맺고 있다. 뮌헨의 사교계 에카르트가 안내해준 뮌헨 사교계에서 히틀러가 거둔 성공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국 출신의 한프슈텡글 부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살롱에 그를 받아들 여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 교류를 가지고 있던 작가, 화가, 바 그너 해석자, 교수 등 고상한 보헤미안들의 모임에 그를 받아들여 주었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이 집단은 무시무시한 생각들과 세련되지 못한 태도 를 가진 이 젊은 민중연설가의 특이한 모습을 오히려 기묘한 재미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11월의 범죄자들'에 대해서 거칠게 흥분하였고, 포도주에 설탕을 타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런 충격적인 행동은 그를 맞아들인 살롱 주인들에게는 황홀한 것으로 여겨졌다. 마법사의 묘한 분위기, 서커스 세계와 비극적인 분노의 분위기, 유명한 괴물'의 날카로운 광채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접촉점은 예술,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바그너에 대해서 그는 언제라도 연설하면서 몽상하 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 바그로이트 예술가를 통해서 극히 안 어울리지만 마음 을 사로잡는 결속이 이루어졌다. '히틀러 형제'는 궤도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 만 정치적 상황에서 모험을 한 것이다. 이 시절 그의 등장에 대한 묘사들은 극단적이고 좌익적인 성향이 뒤섞인 모습 을 보여준다.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상대로 히틀러는 억눌리고, 궁리하면서 비굴 한 자세도 드러냈다. 이 무렵 루덴도르프와의 대화에서 그는 장군이 문장을 맺 을 때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반쯤 절을 하면서 극히 공손한 목소리로 '그렇 습니다. 각하!' 아니면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하고 말하곤 했다. 시민 시민사회에 대한 그이 불확실성과 고통스런 아웃사이더 의식은 오랫동 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위에 나온 보고를 믿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장면에 어울 리기 위해서 무지 애를 썼다. 그는 늦게 나타났고, 특히 커다란 꽃다발을 가져왔 으며, 몸을 더욱 깊이 굽혀 절하였다. 무뚝뚝하게 침묵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흥분하여 말을 내뱉고 했다. 그이 목소리는 거칠고, 무의미한 일들조차도 몹시 정열적으로 말했다. 어떤 증언에 따르면 한 번은 한 시간 동안이나 말없이 피곤한 태도로 앉아 있 을 때 여주인이 친절하게 유대인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시작하자 끝이 없었다. 잠시 뒤에 그는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서더니 여전히 연설조로 아니, 차라리 소리를 지르면서 너무나 쟁쟁한 목소 리로 말을 해서 옆방에 있던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울기 시작하였다. 반시간이 넘게 유대인에 대해서 대단히 재미있는 그러나 극히 일방적인 연설을 하고 나더 니 갑작스럽게 중단하고 여주인에게로 달려나가서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손에 키 스를 한 다음 사라져버렸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할까 하는 두려움이 분명히 그를 괴롭혔다. 한때는 피난민 이었던 그의 두려움은 시민사회에 대해서 돌이킬수 없이 혼란된 관계속에서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나중에 돌격대의 최고 지휘자가 되는 페퍼폰 살로몬이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히틀러는 낡은 모닝코트를 입고 누런 가죽구두에 등에는 륙 색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 의용군 대장은 말을 잃어버리고 자기 소개를 포기해 버렸다. 한프슈텡글은 히틀러가 푸른 양복에 보라색 셔츠, 갈색 조끼에 새빨간 넥타이를 매고 엉덩이의 돌출부는 자동 무기에 앉았던 자국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 회고하였다. 히틀러는 아주 느리게 스스로를 양식화하는 법을 배우고 거대한 민족무대에 어울리는 모험적인 작업복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도 내면에 깊이 자리잡 은 불안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때의 '리엔치'의 꿈, 알 카포네. 루덴도르프 장군 등에게서 얻은 요소들을 가장 진기한 방식으로 합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런데도 '당시의 묘사들에는 그가 자신의 불안을 이용하려 하고 서투른 태도를 자기 연출의 수단으로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그 는 편안하게 활동하려는 소만보다는 자신의 출현을 인상깊게 만들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칼 알렉산더 폰 밀러는 히틀러가 정치가로서의 자의식을 만들어 나가 던 시절에 그를 만났다. "에르나 한프슈텡글의 집에서 수도원장 알반 샤흘라이터 가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에 따라 이루어진 커피 모임에서였다. 내 처와 나 는 이 모임의 장식품 정도였다. 우리들은 모두 4시 정각에 이미 창가에 있는 번 쩍이는 마호가니 탁인에게 거의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 였다. 그는 승마용 채찍, 비롤드 모자, 트렌치 코트 등을 벗더니 연발권총이 달 린 혁대도 풀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그것은 신기한 광경이었으며 칼 마이를 연 상시켰다. 우리는 당시만 해도 의상이면 행동이 세밀한 데 이르기까지 벌어진 아름답지 않은 코밑에 눈에 뛸 정도로 너무 짧게 깎은 콧수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길에는 벌써 성공에 대한 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 색한 요소가 여전히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린 것을 기분 나쁘게 여겼다. 얼 굴은 너무나 좁고 창백하였으며 거의 고통스러운 인상이 나타난 있었다. 다만 둥글고 푸른 눈만이 이따금 냉혹한 모습으로 쏘아보았다. 강력한 미간 사이 코 부리 근처에 단단하게 솟구쳐 오른 형태로 광신적 의지력이 뭉쳐 있었다. 이번 에도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대부분 특별한 주의력을 가지고 경청하였다. 그가 불러일으킨 이러한 효과로 부인네들이 몰려와서 그를 보살펴주기 시작하 였다. 특히 나이든 귀부인들은 이 성공한 젊은 연설가의 경련과 열등감 뒤에는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본능적으로 어떤 갈등이 있으리라 고 추측하였다. 그러한 갈등은 문제를 잘 아는 손길을 통해 해결되기를 갈망하 는 것이다. 히틀러 자신은 뒷날 어머니 같은 확고함으로 열렬히 자기 주변을 둘 러쌌던 이 부인네들의 질투심을 비꼬았다.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다 른 여자와 몇 마디 말만 주고받아도 흥분해서 그녀의 음성이 쉬어버렸다."고 했 다. 그는 뮌헨 교의 졸른에 있는 어떤 고등학교 교감의 미망인, '히틀러 엄마' 카 롤라 호프만의 집에서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느꼈다. 체임벌린의 작품 을 출판하였던 출판업자 브루크만부인은 유럽의 오래된 고위귀족 출신의 여자였 는데 그를 위해서 자기 집을 개방하였다. 그리고 피아노 공장주 베히슈타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 아들이면 좋겠어요."라고 그녀는 말한 적이 있 다. 그리고 나중에 감옥에 있는 그를 면회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의 양어머니라 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모든 여자들, 그들의 집과 그들의 사교계는 히틀러의 주변 범위를 넓혀주었고 그에게 명성을 만들어 주었다. 주변의 인물들 그에 반해서 당에서 그는 우직한 중간층과 절반 범죄적인 뜨내기의 환경속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뜨내기 속성은 공격성과 물리적 폭력을 행한 마음 속 깊은 곳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몇 안 되는 친한 친구중에는 싸움꾼 유형의 에밀 모리스 뚱뚱한 배를 가진 말 장수 크리스티안 베버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수상쩍은 맥주집의 경호원 노릇을 했다. 히틀러처럼 언제나 회초리를 가지 고 다녔다. 푸줏간 견습공 울리히 그라프도 가까운 친구 서클에 들었다. 그는 동 시에 보디가드 노릇도 했다. 히틀러의 옛날 상사인 막스 아만은 우직하고 충직 한 수행원으로 때로는 당과 출판사의 대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거의 끊임없이 히틀러를 둘러싸고 있었고 시끄럽고 부지런하였다. 그 는 저녁에 당의 행사가 끝나고 나면 그들에 둘러싸여서 성모 교회 근처에 있는 '오스체리아 바바리아'나 '구운소시지 집'으로 몰려가곤 하였다. 그들과 함께 화랑 거리에 있는 '카페 울타리'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잡담하 면서 보내곤 하였다. 그 곳 어둑한 뒷자리에 단골 손님 테이블을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자기 모습은 남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길다란 커피집을 관찰할 수가 있 었다. 일찍부터 그는 혼자 있는 일을 고통스럽게 여겼다. 그는 언제나 주변에 사람 들을 필요로 하였다. 청중, 경호원, 하인, 운전사, 그리고 이야기 상대자, 혹은 예 술의 친구들과 이야기꾼, 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 에른스트 푸치, 한프슈텡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그의 모임에 '보헤미아 세계와 용 병 대장 스타일'이 뒤섞인 색채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뮌헨의 왕'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아주 늦은 시각에야 그는 티어슈 거리에 있 는 가구 딸린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주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젊은 헤르만 에서다. 그는 신문사에 견습사원으로 있으면서 방위군 지역사령부위 언론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히 틀러를 빼면 당이 이용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그가 유일하게 선동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일을 히틀러보다도 더의 더 잘 할수 있는 소동꾼, 저급한 지옥 출신이기는 하지만 연설의 악마"였다. 그는 깬 사람이었고 민속적인 비유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대인과 암표상들의 집에서 밝혀냈 다는 거실비밀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당의 정직한 소시민들은 곧 그의 캠 페인의 '빌어먹을 목돌 같은 말투'를 비난하였다. 이미 고등학생 때 그는 군인위 원회에 몇몇 시민들을 목매달아 죽이라고 요구하였다.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더 불어 그는 가장 초기에 가장 열렬하게 히틀러 신화를 퍼뜨린 사람들에 속하였 다. 자료들을 믿을 수 있다면 히틀러 자신은 이 과격한 동료를 그다지 좋아하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에서가 불량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를 써먹을 수 있는 동안에만 그를 데리고 있었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여러 가지 점에서 에서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교감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와 비 슷하였다. 그는 외설적이고 지저분한 반유대주의 대표자 노릇을 하였고 인신 제 물, 유대인의 욕정, 세계모반, 근친상간 등에 관한 온갖 난잡스런 상상에 사로잡 힌 듯이 보였다. 순결한 아리안 여자들의 살을 탐하는, 검은 털로 뒤덮인 호색적 인 악마들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슈트라이허는 더 편협하고 멍 청하기는 하였지만 지역적인 성공이라는 점에서 히틀러와 겨룰 만하였으며, 처 음에는 상당한 정도로 히틀러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뮌헨 국가 사회당 지도자인 히틀러는 자신이 목표를 위하여 슈트라이허의 인 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신도 또한 이러한 증오의 콤플렉스와 강박관념들에 결부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슈트라이허를 얻으 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일부 자료들이 보여주고 있다. 모든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크 지방의 지도자'에게 충실하게 머물렀으며 전쟁중에도 이렇게 선언 하였다.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슈트라이허가 많은 점에서 바보라고 말하였지만 히틀러는 이 '성급한 사람'에 대한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상 슈트라이 허는 유대인을 이상화 시켰다." 대중적인 추진력에도 불구하고 당에 협소한 양식을 부여하고 당을 천박하고 편협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이 모든 사람들과 달리, 전설적인 전투비행대대 리흐 트호펜의 마지막 지휘자 출신 공군대위인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의 주변에 사교 적인 분위기를 가져왔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주변을 경멸적으로 내려다보던 고독한 한프슈텡글 혼자만 보여주었던 것이다. 당당하고 쾌활하고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괴링은 히틀러 추종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인 기 묘하고도 정신병적인 모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당이 방종과 활동 과 전우를 필요로 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이기 때문에 당에 가입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주장하듯이 '잡동사니 이데올로기'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여 행을 많이 했고 상당히 폭넓은 관계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력적인 스웨덴 아내 를 동반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서, 바이에른 바깥에도 사람들 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당이 어느 정도 눈을 뜨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가 고등사기꾼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막스 에르빈 폰 쇼이브너리히 터와 비슷한 점이었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활동적인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고, 이 익을 가져오는 정치적 뒷거래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모험가였다. 돈을 구하는 그의 능력 덕분에 히틀러는 초기 몇 년 동안 활동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관청의 기록에 따르면 '엄청난 액수위 돈'을 모아 들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상당한 사회적인 안정성을 지 녔고 말재주가 있었으며 재계와 비텔스바흐 왕가, 키릴 대영주, 종교계에 수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은 상당한 정도였다.. 1923년 11월 9일 장군홀에서 죽은 동지들 중에서 히틀러가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애석 해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수많은 발트 3국 출신 도이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 은 과격한 러시아 이민자드로가 함께 초기 국가사회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 사하였다. 히트러는 나중에 우스갯 소리로 이 시기의 <민족 관찰자>는 '발트3국 판'이란 부제를 달아야 옳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로젠베르크는 쇼이브너 리히터 를 이미 리가에서 알았다. 로젠베르크는 정치에 무관한 젊은 대학생일 때 쇼펜하우어, 리하르트 바그너, 건축상의 문제들과 인도의 지혜에만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이 그에게 반 볼세비키와 반 유대주의 특성을 가진 세계관을 만들어주었다. 히틀러가 가지게 된 공포스런 표상들과 은유들은 상당 부분 로젠베르크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당내 러시아 전문가로 꼽히고 있었다. 그밖에도 공산주의와 세계관에 덧붙여준 것이었다. 히틀러가 처음에 했던 식민지 반환의 요구를 포기하고 광범위한 러시 아 땅에서 도이치 사람의 생존공간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적지 않은 자극이 그에게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권력장악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 용하는 실용적인 히틀러와 뒤틀린 성격의 로젠베르크는 거의 종교적인 진지함을 가지고 자신의 요구를 고집하였고 수많은 환상적인 생각들이 섞여든 가운데 부 조리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의 세력확장 강령을 발표한 지 근 일년이 지나자 당은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뮌 헨에서 40개 이상의 행사를 치렀고 바깥 지역에서도 거의 그 정도였다. 슈타른 베르크, 로젠하임, 란츠후트, 포르츠하임,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지구당이 설립되 거나 적어도 당원을 얻었고 당원 수는 10배 이상 불었다. 국가사회당이 민족운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은 '뮌헨 게르만 기사단'의 '디트리히' 형제가 1921년 2월초에 키일의 동지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 나 있다. " 일년이 지나는 동안 정당이 45회 이상의 대중행사를 치른 곳이 있는 지 말해보십시오. 뮌헨 지구당 중 그와 비슷한 숫자를 자랑하는 곳이 있습니 까?" 그는 쾰른, 빌헬름스하펜, 브레멘에 있는 기사단 형제들과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모두들, 히틀러 정당이 미래의 정당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점차 실현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모욕감을 불러일으키게 된 베르사유조약 규 정들이 이러한 상승의 배경이 되었다. 그것은 화폐가치의 하락을 부채질하고 경 제적 위기를 증가시켰다. 1921년 1월에 연합군의 손해배상회의는, 독일이 앞으로 42년 동안 총 2,260억 황금 마르크에 이르는 손해배상을 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나아가 같은 기간 수출액의 12퍼센트를 양도하라는 결정도 나왔다. 뮌헨에서 조국 결사대, 민방위대와 국가사회당이 2만 명의 사람들에게 오데온 광장에서 열리는 항의 시위에 모이라고 호소하였다. 이 집회 주체자들이 히틀러 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다음날 저녁에 독자적으로 대중집회를 열 준비를 하였다. 드렉슬러와 페더는 그가 마침내 절도와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깃발과 구호합창대, 급히 만든 구호 플래카드를 실은 트럭들이 돌아다니며서 시민들에게 2월3일 왕관 서커스 장으로 오라고 선전하였 다. '아돌프 히틀러 씨'가 '미래냐, 몰략이냐!'에 대해서 연설하게 될 거라고 예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장래를 걸고 내건 구호였다. 그가 들어섰을 때 이 거대한 천막은 가득 차 있었다. 6천 5백명의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그를 맞아들 였고 마지막에는 국가를 함께 불렀다. 히틀러는 오래전부터 어차피 자기 힘으로 만들어진 당의 당수가 될 기회를 기 다려 왔다. 그 시대가 '강한 남자' 유형에 끌리던 시대였으므로 히틀러에게 유리 하였고 그의 의도에도 장 맞았다. 당 지도부에서는 때때로 이 선전 담당자의 과 잉활동에 대한 근심이 표현되어왔다. 1921년 2월 22일자일자에는"히틀러 씨에게 활동을 자제하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고트프리트 페더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히틀러의 건방짐에 대 해서 탄식을 하자 안톤 드렉슬러는 "모든 혁명 운동은 독재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며 그 때문에 나는 바로 히틀러를 우리 운동에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본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배경으로 밀려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섯 달 뒤 에 드렉슬러는 배경으로 밀려났다. 히틀러의 일생 동안 가장 막강한 동맹자였던 상황과 적들이 그에게 기회를 만 들어주었다. 그는 위기 때마다 보여주곤 하는 냉혹함과 계략, 단호함, 위험에 대 한 각오 등으로 국가사회당의 권력을 장악하고, 동시에 민족운동 내부의 지휘권 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1921년 여름 위기 몇 달 전부터 시작된 경쟁적인 정당들, 특히 도이치 사회주의자 정당과의 밀 접한 협력을 위한 협상이 1921년 여름 위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모든 결합의 시 도는 번번이 히틀러의 비타협적인 주장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상대방 정당들의 완전한 굴복을 요구하면서 그들이 정당 차원에서 국가사회당과 연합하 는 것을 반대하였다. 각 정당이나 모임들이 우선 해체된 다음 그 회원들이 개별 적으로 국가사회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고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드렉슬러의 무능은 절대적인 권력욕구 와 당 창설자의 협조적인 특성의 차이를 보여준다. 당내의 적수들이 당을 이끌 어 가면서 분별없는 결정에 이르도록 내버려둘 속셈으로 히틀러는 이른 여름에 6주 예정으로 베를린으로 출발하였다. 헤르만 에서아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그 동안 당에 남아서 관찰하고 그에게 신속하게 보고 하였다. '광신적으로 잘난 척 하는 '히틀러를 따돌리려는 친구들의 영향 아래서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드렉슬 러는 실제로 이 시간을 이용하여 중단된 당 연합협상 혹은 모든 사회주의 우익 정당의 협조에 대한 협상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베를린에서 히틀러는 민족주의 클럽에서 연설하고 보수적 극우 동지들과 연락 을 가졌다. 그는 루텐드르프를 알게 되었고, 레벤틀로브 백작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내 달레몽 백작부인은 그가 이전의 의용군 대장 발터 슈텐네스와 다시 힘을 합치도록 주선하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그를 '장래의 메시아'라고 소개 하였다. 이 도시의 그 유명한 20년대의 과격한 광란 증세, 그 경박함과 욕구들은 히틀 러의 거부감 에 새로운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이 도시는 그의 음울한 기분에 너 무나 맞지 않았다. 그는 이곳의 지배적인 상황을 몰락하는 로마의 상황에 견주 기를 좋아하였다. 로마에서 '이질적인 기독교'가 로마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하였 다면 오늘날 볼세비키주의가 독일의 도덕적인 몰락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절 히틀러의 연설은 대도시 죄악, 부정부패, 성적인 방탕 등에 대한 공격으 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거리나 선제후 갬 지역에 이글거리는 아스팔 트 위에서 이러한 악덕을 관찰하였다. "우리의 비참함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사 람들은 즐기고 춤춘다."고 그는 가끔씩 외쳤다. "계속 새로운 즐거움이 만들어지 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인공적으로 우리의 신경을 진정시킨다." 17세기 빈에 도착했을 때처럼 그는 이 대도시 현상을 보고 어쩔 바를 모르며 낯선 모습으로 서 있었다. 수많은 소음, 소란, 온갖 것이 뒤얽힌 대 도시의 은둔, 전체적인 조망의 가능성, 질서잡힌 도덕 등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대도시의 밤의 행태에서 그는 원수종족 유대인의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즉 "한 종족의 자명한 위생규칙들을 뒤집으려는" 체계적 책략을 본 것이다. "그들은 밤을 낮으로 만들고 악명이 자자한 바의 생활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천 천히, 그러나 아주 분명히 작용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체를 망가뜨리고 , 어떤 사람은 정신을 ,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에 미움을 키우는 것이다." 극장이란 "리하르트 바그 너 같은 사람이 최고 수준의 신성함과 진지함을 만들어내기를 바라던 장소인데, 개인이 온갖 근심과 비참에서 벗어나는 일들이나 하고 있으니 죄악과 몰염치의 산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 도시가 뚜쟁이들로 가득 차 있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최고 행복 아 니면 최고 불행을 의미하는' 사랑이 상품이 되고 ' 사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가족 생활을 비웃는 것, 종교의 쇠퇴 등을 탄식 하고 모든 것이 망가지고 격하되었다고 했다. "오늘날 이 비천한 기만과 어지럼 증의 시대에 여기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이 남아 있 다. 절망해서 목을 매달거나 아니면 비참한 룸펜이 되는 것이다." 그는 베를린에서 드렉슬러의 독단적 행태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없이 뮌헨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힘과 자신감을 갖게된 당 위원회가 그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자 히틀러는 예상도 못한 극적인 방식으로 반응하였 다. 7월 11일에 그는 짤막하게 탈당선언을 했다. 사흘 뒤에 보낸 상세한 설명서 에서 끝없이 비난을 퍼부은 다음 자기가 당으로 돌아가기 위한 조건들을 최종적 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전권을 가진 당수 자리'와 오늘날 당 속으로 들어온 이질적인 요소들의 정화'를 요구하였다. 당명도 당의 강령도 변경시킬 수 없다. 뮌헨 국가사회당의 절대적 우위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다른 정당과의 연합 은 있을 수 없으며 흡수 통합만이 가능하다. 이미 뒷날의 히틀러의 면모를 보이 는 확고함으로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측에서의 보상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히틀러의 명망과 힘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었는가 하는 것은 당 위원 회가 다음날 날짜로 지체없이 보낸 답신에 드러나 있다. 감히 그에게 맞서려고 하지 않고 위원회는 히틀러의 비난을 고분고본 받아들였다. 완전히 굴복하고 심 지어는 지금까지의 당수였던 안톤 드렉슬러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 언하였다. 뒷날의 신격화하는 비굴한 톤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니 글의 결정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위원회는 이미 당신의 엄청난 지식을 인정하고 있으며, 당신이 보기 드문 희 생정신을 가지고 이 운동의 번영을 위해서 정직한 공을 쌓아 올린 것을 인정하 고 있습니다. 연설가로서의 희구한 재능을 인정하여 당신에게 독재적 권한을 양 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위원회는 당신이 당으로 돌아와서 드렉슬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번이나 당신에게 양도하려고 한 당수의 직분을 맡아 주시다 면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러고 나면 드렉슬러는 위원으로 남게 되며 당신이 바라신다면 당 행동위원회에도 위원 자격으로 남게 됩니다. 그가 이 운 동에 완전히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다음번 연례 전당대회에서 그 사실을 발표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시작과 정점이 히틀러가 위기상황에서 얼마나 능숙하게 키를 잡고 헤엄쳐나가는지 보여주고 있다면, 사건의 결말은 그가 성취한 승리를 지나치게 부풀려서 망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 위원회가 굴복하 자마자 그는 자신의 승리를 실컷 맛보기 위해서 독단적으로 임시 전당대회를 소 집하였다. 굴복하려던 드렉슬러도 더 이상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7월 25일 드 렉슬러는 뮌헨 경찰국 6분과에 출두해서 임시전당대회 소집의 서명자들은 고 히 틀러는 혁명과 폭력을 의도하고 있지만 자신은 당의 목표를 합법적이고 의회주 의적인 방식으로 실현할 생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경찰국은 자기들 소관 이 아니라고 응수했다. 동시에 히틀러는 어떤 익명의 팸플릿에서 배신자라고 공 격을 받았다. '권력의 망상과 개인적인 명예욕'이 그를 부추겨서 "우리 대열에 불화와 분열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유대인과 그 동조자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당을 깨끗하지 못한 목적을 위한 도약대로 이용하는 것이 다. 그가 사생활과 출신배경을 그렇게 감추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다고 했다. "그가 무엇으로 사는가, 전에 어떤 직업을 가졌는가 하고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질문을 하면 그는 언제나 분노와 흥분상태에 빠져들곤 했다. 그의 양심이 깨끗 하지 못한 모양이다. 특히 그가 부인들과 지나치게 교류하는 일, 그는 자주 '뮌 헨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니까. 그런 교류는 분명 많은 돈이 드는 일이다." 경찰 의 허락을 받지 못한 어떤 불법 팸플릿은 히틀러를 가리켜서 '병적인 권력욕 망 상가' 라고 비난하였으며 이러한 요구로 끝을 맺고 있다. "독재자들를 쓰러뜨려 야 한다."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중간에 끼여들어서야 겨우 싸움을 조정할 수 있었다. 1921년 7월 29일의 임시 전당대회에서 위기는 끝났다. 히틀러는 자신의 승리를 화려하게 자랑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히틀러가 탈당한 사이 드렉슬러가 헤 르만 에서를 형식적으로 국가사회당에서 추출해 버렸지만 히틀러는 전당대회를 자기 심복인 에서의 사회로 치러냈다. '끝날 줄 모르는 박수 갈채'로 환영을 받 으면서 그는 그간의 싸움을 교묘하게 표현해서 554명의참석자 가운데 553명의 찬서을 얻었다. 드렉슬러는 당고문직으로 만족해야했다. 정관은 히틀러 마음대로 고쳐졌다. 위원회는 온통 그의 추종자들로 채워졌으며 그 자신은 독재적 당수 자리를 차지하였다. 국가사회당을 손아귀에 쥐게 된 것이다. '지도자'로 칭송되다 같은 날 저녁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건물에서 헤르맨 에서에 의해서 '우리 지 도자'라는 호칭으로 축하를 받았다. 에서는 온갖 음식점이나 맥주집에서 거의 종 교적인 열광으로 지도자 신화를 열렬하게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민족관찰자>지에 계획적인 추켜세우기 글을 연재하였다. 8월 4일 자에 그는 이미 히틀러에 대해서 '자신을 잊고 희생정신을 가진 헌신적이고 정 직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어 있다'고 찬양되었다. 며칠 뒤에 그는 같은 자리에, 에카르트가 그 려낸 남성적인 윤곽에다가 초지상적인 은총의 윤곽을 덧입혀 그린 그림으로 나 타나고 있다. 그것은 루돌프 헤스가 만든 것으로 히틀러의 '너무나 순수한 의지' 그의 힘, 연설가로서의 재능, 경탄할 만한 지식과 명료한 이성 등을 찬양하고 있 다. 짧은 시간 안에 히틀러 개인을 둘러싼 숭배의 과도함이 어느 정도까지 과장적 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대략 일년 뒤에 루돌프 헤스가 쓴 찬양문에 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을 다시 높여줄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헤스는 자신의 묘사의 바탕에 히틀러의 그림을 놓고 있다. 국가 생활과 역사의 모든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능력, 자신의 일이 순수하며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 무제한의 의지력이 그에게 대중이 환호성을 지르는 감동적인 연설의 힘을 주었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선전술, 구호, 거리행진 등과 같은 적들의 무기를 이용하는 것도 꺼리지 않 는다. 그 자신은 대중과 관계가 없으며 위대한 사람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시대의 곤궁이 그런 일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는 피를 흘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위대한 문제들은 언제나 피와 강철로 결정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일념뿐이며 그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 차 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독재자의 상을 가지고 있다. 정신은 날카롭고 분 명하게 참되고, 정열적이면서도 자신을 통제하고 , 차갑고 대담하고, 결단을 거 침이 없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가차없고, 무자비하도록 냉정하면서도 국민에 대한 사랑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노동에 지칠 줄 모르고 부드러운 장갑 속에 강철 같은 주먹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언제 구원하러 나타날지 우리는 모른다. 이 '사람' 말이다. 그러나 그가 온다는 사실은 수백만 명이 느끼고 있는 일이니..... 돌격대, 공격과 정복의 도구 당을 장악한 직후인 1921년 8월 3일에 돌격대도 창설되었다. 그 이니셜은 원 래는 스포츠 혹은 방어부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당내 반대세력들은 이미 히틀러 가 '훔치거나 약탈한다는 이유로' 쫓겨난 의용군 출신들을 이용하여 유급친위대 를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돌격대는 전쟁을 벗어나서도 계속 무장을 생 각하는 폭력조직으로만 여겨져서는 안되고, 좌익의 유사한 테러부대에 대항한 우익의 방어개념으로 생각도리 수도 없다. 이런 생각이 처음부터 상당히 개입된 것은 사실이다. 좌익의, 예를 들면 사회민주당의 '에어하르트 아우어 친위부대'처 럼 군사적인 전투조직이 존재해Y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입증되고 있다. "다른 어 떤 시대적인 현상보다 더 많이 테러에 의존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파벌은 우리 운동에 대해서도 이 수단을 사용하였다."고 히틀러는 돌격대 창설의 이념 하나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돌격대 이념은 방어적인 목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 부터 공격과 정복의 도구였다. 히틀러는 이 시기에 '권력 장악'을 오로지 혁명적 인 폭력행위의 범주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돌격대 창설 요강에 따르면 그것은 '파괴조'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원들을 복종시키고 무한한 혁명 의지를 키우는 역할도 맡고 있다. 히틀러의 특징적인 사고 방식에 어울리는 것 이지만 시민세계가 마르크스주의에 종속하게 된 원인은 정신과 폭력을 분리시키 고,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분리시킨 시민사회의 원칙에 있다고 보았다. 시민적인 세계에서 정치가들은 오로지 정신적인 무기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으며, 따라 서 병사는 정치에서 엄격하게 제외되어 있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에 반해서 마르크스주의는 "전신과 잔인한 폭력을 조화시켰다." 돌격대는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부대지침서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하 고 있다. 돌격대는 "운동의 보호를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장차 다 가올 내부의 해방 전쟁을 위한 예비학교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관찰자>도 '과 감한 돌격 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사설 부대를 창설하기 위한 외적인 조건은 1921년 6월 민방위 부대의 해체였 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고지 슐레지엔 지방에서 귀향하는 고지 의용군의 해체였 다. 이 부대의 속했던 수많은 병사들이 갑자기 친밀감, 병사의 낭만, 그와 더불 어 삶의 의미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렸다고 믿고서 낙오된 용병 무리와 모험에 굶 주린 젊은 건달 패거리에 합류했다. 그들은 모두 국가 사회당에 받아들여졌다. 전쟁 체험을 간직하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은 군대식으로 조직된 돌격대에서 계급과 사령부 제복 등을 보고 , 무질서하게 보이는 공화국 사회에서 그리워하 던 저 친숙한 생활 방식을 다시 발견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소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이 계급은 독일에서 오랫동안 사회적 신분상승에 제약을 받다가 전쟁에서 장교계급의 인명손상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지휘자 계급으로 올라갔다. 거칠고 지치지도 않고 행동을 열망하는 그들은 전쟁 이 끝난 다음에도 새로운 경력을 기대하고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 규정들이 국 민적인 치욕 말고도 그들을 사회적으로 다시 추락시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초등 학교 강단, 가게의 계산대, 관청의 창구, 이런 생활방식은 너무 협소하고 비참하 고 낯선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히틀러를 정계로 몰아넣은 것과 똑같은 규범 으로부터 도피가 그들을 히틀러에게로 데려온 것이다. 히틀러 자신은 이와 같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당이 펼치는 운동의 군사적 전초부대를 위해 알맞은 자 원이라고 여겼다. 이 사람들의 원한과 에너지와 폭력에 대한 신념을 권력을 향 한 자신의 전략에 포함시켰다. 제복을 입은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매력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 테러는 독특한 선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그이 심리적, 논리적인 원칙들에 포함되어 있었다. "잔인 성은 경탄을 받는다."고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였다. "사람들은 치유력을 가진 두려움을 필요로 하죠 그들은 두려워할 그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누군가 두려운 사람을 필요로 하며, 떨면서 복종할 누군가를 원하는 거죠. 어디 서든지 싸움이 있고 나면 실컷 두들겨 맞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새로운 회원으 로 당에 가입하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잔인성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 면서 고통에 대해서 격분하는 겁니까? 대중이 그것을 원해요. 대중은 잔인성을 위한 그 무엇을 원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확신으로 히틀러는 수사적이고 제의적인 선전수단에만 의존하 면서 완력의 선전효과를 무시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주의하였다. 그의 심복 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구호를 가지고 돌격대 집회를 격려하였다. "제군들은 상대방 몇 명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더욱더 악착같이 대들어라. 그것은 해롭 지 않은 일이다." 호프 양조장의 싸움 돌격대가 자기들의 신화로 만든, 1921년 11월 4일의 이른바 '호프 양조장 싸 움'도 적지 않게 히틀러의 이러한 발언들에 자극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호프 양조장에서 어떤 항의시위를 하겠다고 예고했는데 상당수의 사회민주당 방 해공작대가 찾아왔다. 히틀러는 그들의 수가 7,8백 명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 다. 그에 비해서 돌격대는 이날 당 사업부가 이사가는 바람에 겨우 5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히틀러 자신이 묘사한 바에 다르면 그는 미리부터 불안해하는 소수부대를 열 정적인 인사말로 격려해서 싸울 각오를 하도록 만들었다. 꺾느냐, 꺾이느냐의 문 제라고 그는 외쳤다. 죽어서 시체로 들려나가는 것이 아니면 홀을 떠나선 안 된 다. 자기가 손수 겁쟁이들에게서 완장과 계급장을 뜯어버리겠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고 소리쳤다. "세 번의 '하일' 하는 인사말이 대답이었다. 이번 이 인사는 전보다 훨씬 더 거칠고 더 쉰 소리였다." 이 보고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러고 나서 나는 홀에 들어가서 내 눈으로 직접 사태를 볼 수 있었다. 그들 은 빽빽하게 들어앉아서 벌써 눈으로 나를 꿰어버리려고 들었다. 이글거리는 증 오를 품은 수많은 얼굴들이 나를 향했다. 다른 패거리들은 비웃듯이 얼굴을 찌 푸리고 아주 분명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오늘 '우리를 끝장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장을 잘 간수해야 할거라는 말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는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연설을 계속 할 수가 있었다 고 한다. 그리고 이미 상황을 장악했다고 믿을 무렵 갑자기 어떤 남자가 의자위 로 뛰쳐 오르더니 "자유!"하고 외쳤다. "몇 초만에 홀 전체가 한데 어울려 으르렁거리고 소리지르는 사람들의 덩어리 로 가득 찼다. 유탄자들처럼 커다란 맥주 잔들이 수 없이 이리 저리 날아다녔 다. 그 사이에 의자 다리 부러지는 소리, 맥주 잔 째지는 소리, 우악스럽게 소리 지르고 악쓰는 소리, 외침소리가 쉴새없이 터져나왔다. 정말 엄청난 장관이었다. 춤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나의 돌격대원들은 -이날부터 그들은 이런 이 름이다- 공격을 하고 있었다. 늑대처럼 그들은 여덟이나 열 명이 떼를 지어 적 들에게 덤벼들어서 그들을 두들겨 패서 정말로 홀에서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5 분이 지나자 나는 피투성이가 되지 않은 적을 거의 볼 수 정도였다. 그때 갑자 기 홀 입구에서 단상을 향해서 권총이 두 번 발사되었다. 이제 거칠게 폭발하고 말았다. 옛날 전쟁체험이 그렇게 되살아나는 것을 보자 마음이 기뻐서 거의 환 호성이 나올 지경이었다. 약 25분이 지났다. 홀은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모습이다. 나의 추종자들 은 상당수가 붕대를 감고 있었고 일부는 들여나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사태 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에 모임의 사회를 맡았던 헤르만 에서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모임은 계속됩니다. 연사께서 말씀하시 겠습니다.' 실제로 이날부터 히틀러는 뮌헨에서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말을 하게 되 었고 그 자신의 보고 에 따르면 1921년 11월 4일부터 이 거리는 국가 사회당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듬해가 시작되면서 그것은 바이에른 지방으로 점점 넓게 퍼 져 나갔다. 주말이면 그들은 지방으로 선전 여행을 나가서 시끄럽게 행진하였 다. 처음에는 오직 완장으로만 구분이 되었지만 다음에는 잿빛 방풍 재킷을 입 고 이른바 '하켈 지팡이'를 들고서 지역을 통과해가면서 , 울리는 음성으로 돌격 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일찍이 히틀러를 추종하였던 사람의 묘사에 따르면 그들의 모습은 '예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들은 오히려 '가능하면 거칠고 호전적인 모습'을 가지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집과 공장 담벼락에 구호들을 붙이고 적대자를 만나면 붙어 싸우고 , 검정, 빨강, 금색 깃발을 끄집 어내리거나 아니면 군대의 기본원칙에 따라서 암거래상이나 자본주의적인 고리 대금업자에 대항하는 지휘부를 조직하였다. 그들의 노래와 구호들은 피비린 내 나는 과도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 양조장에서 열린 어떤 모임에서는 참석자들에게 "유대인 학살을 위해서 기부금을 냅시다"라는 구호가 붙은 모금 상자를 내밀었다. 이른바 '조정자들'이 여러 가지 행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회를 방해하였 다. "우리는 대단한 싸움꾼!' 이라는 것이 돌격대의 익살스런 구호였다. 실제로 돌격대의 유례없이 난폭한 등장은 히틀러의 기대에 맞게 당의 성장을 전혀 방해 하지 않았다. 견고하고 성실한 시민 계급 안에서도 그것은 운동의 매력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전쟁과 혁명에 의해서 풀어져버린 규범 탓만을 할 수 는 없다. 오히려 히틀러 정당은 바이에른 스타일의 촌스러움을 이용할 줄 알았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정치적 유희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리저 리 쓰러진 의자들과 뒤엉킨 맥주잔들이 널린 맥주 홀 싸움들, '학살' 운운하는 말, 살인 의지를 드러낸 노래들, '대단한 싸움꾼'등은 모두 폭력적인 농담들이었 다. 특히 이 시기에 '나치'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것은 원래는 '국가 사회주의자'의 약자였지만 바이에른 사람들의 귀에는 오히려 '이그나츠'라는 사 람들의 의식 속에 널리 자리잡게 되었다. 돌격대의 초기 핵심을 이루었던 전쟁참가자 세대에 뒤이어서 곧 젊은 세대가 들어왔다. 그러면서 이 운동은 실제로 '불만스러운 젊은이들의 반란'이 되었다. 폭력에 대한 애착, 엘리트 남자들의 공동체, 이데올로기로 감싼 모반 등의 요소 가 뒤섞여서 새로이 강하고 낭만적인 매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이 시기의 대중연설에서 이렇게 확인해주고 있다. "사람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이상을 함께하는 것과 악당노릇을 함께 하는 것이다." 돌격대에서 그 두 가지는 구별할 수 없도록 서로 뒤섞여 있었다. 1922년이 경 과하는 동안 돌격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해서 가을에는 벌써 루돌프 헤스의 지휘 아래 순수하게 대학생으로만 만들어진 11번째 백인부대가 만들어졌다. 같은 해 에 에드문트 하이네스 소위가 이끄는 예전의 바흐 의용군 그룹이 돌격대에 단 체 가입하여 독립부대가 되었다. 수많은 독자조직을 이루면서 돌격대에 점점 더 군사적인 특성이 생겨났다. 로스바흐 자신은 자전거 부대를 만들었다. 그밖에도 정보 부대, 오토바이 부대, 포병대, 기마대 등이 있었다. 중산층의 불안감을 이용하다 '돌격부대'들의 중요성어 커지면서 그것은 국가사회당에 새로운 유형의 정당 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돌격대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회고록에서 변명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가장 일반적인 민족적 투쟁 및 돌격 프로그램을 넘어선 어떤 특 징적인 이데올로기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깃발을 휘날리며 거리를 행진할 때 에도 새로운 사회질서를 향한 행진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돌격대는 유토피 아적 이상을 갖지 못한 채 다만 거대한 불안이었을 뿐이며 어떤 목적도 갖지 못 한 채 스스로 통제도 못하는 역동적인 에너지였을 뿐이었다. 엄격하게 보자면 이 집단으로 들어간 사람들 대부분이 다 S한번도 정치적 병 사들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허무주의, 불안, 복종의 욕구 등을 그럴싸 하게 들리는 정치적 용어들 뒤에 감추어 보이려는 건달들에 가까웠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란 대단히 불확실한 일반적인 신념과 복종의 욕구라는 배경 뒤에 숨 은 활동이었다. 거의 동성애에 가까운 남자들만의 특성을 가지고서 '지도자들' 이외에는 별다른 강령도 없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평균적인 돌격대 사나이의 헌 신의 욕구를 일깨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히틀러는 공식적인 호소문에서 이 렇게 말하고 있다.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 필요할 경우에는 죽음 속으로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오시오!"(1922년 12월 6일자 경찰 기 록, 바이에른 내무장관의 서류, 프란츠 빌링)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무관심이 돌격대를 모든 분파적인 고유성 과 무관하게 어떤 명령이든지 따르는 극단적인 핵심집단으로 만들어 냈다. 그것 은 전통적인 시민정당이 몰랐던 당 전체의 결속을 가져왔다. 그리고 아주 상 이한 분위기와 불만 집단에 하나의 통합된 당이 되도록 하는 기회를 만들어냈 다. 돌격대에서 형성된 핵심집단이 규율이 잡히고 믿을 만할수록 히틀러는 거의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계층을 향하여 자신의 호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사회당의 특징이 되는 통합되지 못한 이미지의 원인을 이런 특성에서 찾 을 수는 없다. 이 정당의 불확실성은 '중간층 정당'이라는 널리 퍼진 공식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물론 소시민적인 중간층이 당에 상당히 많은 특성들을 부여하 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예고한 강령도 '노동자 당'이라는 표현 을 하고는 있지만 많은 점에서 중산층의 두려움과 공황적인 심리를 요약하고 있 다. 대기업과 백화점들에게 경제적으로 압도될까 두려워하는 마음, 쉽게 만들어 진 부에 대한 소시민의 원한, 고로 중산층을 겨냥한 것이며 예를 들면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같은 사람은 중산층을 '세계의 기만에 대항하는 '유일한 계층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히틀러는 빈 시절의 존경하는 선배 칼 뤼거에게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다. 그는 '몰락의 위협을 받는 중산층'을 동원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감동시키기 힘 든 추종세력이 상당한 희생과 단단히 싸움의 각오'를 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 이다. "중산층 세력에서 투사들이 나와야 한다. 우리들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대열 에는 우익과 좌익의 상속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 초기의 여러 가지 회원 명부는 이러한 이미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약 30퍼 센트가 공무원이나 샐러리맨이고,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다시 거의 30퍼센트, 상 인이 16퍼센트, 그들 중 상당수는 국가사회당이 노동조합의 압력에서 자기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중소기업 소유자들이었다. 나머지는 군인 학생 자유직이고, 당 지도부는 낭만적인 대도시 보헤미안들이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고 있다. 1922년 당지도부의 지시에 따르면 각 지구당은 지역내의 사회학적 이미지를 반 영해야 하며, 당 지도부에 대졸자가 절대로 1/3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 고 있다. 이시기에 당이 모든 출신 계급, 모든 사회적 색채의 사람들을 끌어들이 고, 상충하는 집다, 이해, 감정 등을 통일하는 운동으로 역동성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1921년 8월에 린츠에서 '계급정당'이라고 규정했을때 이 자리에 히틀러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국가사회당을 언제나 계급간의 엄 격한 통합이라고 보았고, 민족 대립을 위해서 계급대립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여 겼다. 1922년 12월의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중산층과 시민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매 우 많은 노동자들이 국가사회주의 깃발을 따르고 있다. 오래된 사회주의 정당들 은 자기들의 존속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고 보고 있다." 사회주위가 지적하는 수 많은 사회적 모순과 대립들에서 공통분모를 얻었지만 방어적인 태도가 된 것이 다.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는 국가사회당에 서 F자리가 없다. 계급의식을 가진 시민도 마찬가지"라고 히틀러는 확언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초기에 국가사회주의의 말이 먹혀들고 추종자를 얻게 된 것은 계급이 아니라 마음상태였다. 비정치적인, 그러나 실제로는 권위를 좋아하 고 지도를 필요로 하는 의식상태는 모든 계층과 계급에 존재하고 있었다. 공화 국 체제로 변화된 상황에서 공화국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에 버림받았다. 그들을 채웠던 막연한 공포심은, 새로운 국가형태가 자신들의 충 성심에 어울리는 권위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강화되기만 하였다. 패배라는 재앙에서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전승국들, 특히 프랑스에 의해서 복 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추구된 황제시대의 원한 맺힌 죄악에 대한 보복정책, 굶주린, 혼란, 화폐가치 하락 등 두려운 체험들, 민족적인 파렴치의 표현으로 오 해된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이행 등은 국가질서와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도 이치 사람들의 전통적인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도이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일부를 국가와의 동일시에서 얻 어온 사람들이었다. 광채도 없고 비굴한 이런 국가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 었다. 그것은 국민의 충성심을 얻을 만한 의미가 없었고, 상상력을 위해서도 아 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혼란스런 시대를 지나면서도 암담한 저항의 심정으 로 보존해 왔던, 질서와 존경이라는 엄격한 개념은 공화국 치하에서 민주주의, 언론자유, 논쟁, 정당교섭 등을 통해서 헌법 자체에 위해서 이미 문제시되는 것 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형태에서 세계를 더 이상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에 빠져 있던 그들은 단호한 거동으로 자기들의 혼란을 정치적으로 조 직해낸 국가사회당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여러모로 기묘한 인생배경을 가진 히틀러 정당의 모험가적인 대표자들이 자기들의 질서, 도덕, 혹은 충성, 신 념 등에 대한 욕구를 가장 잘 이해했다고 그들이 느꼈다는 역설적인 사실은 이 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는 질서, 청결, 정확성만이 전부였던 전쟁 전 의 독일을 현재의 혁명 독일과 비교하였다."고 히틀러의 초기 연설에 대한 어떤 보고가 전하고 잇다. 나날이 상승하던 선동가 히틀러는 바로 민족의 특징이 되 는 질서와 기율에 대한 본능에 하소연해서 점점 더 많은 동조를 얻었던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세계는 질서가 잡혀 잇거나 아니면 아예 참을 수 없는 것으 로 여겨졌다. 히틀러는 공화국을 도이치 역사와 도이치 본질의 부정이 라고 불 렀다. 그것은 소수계층의 일이며 사업이고 경력이라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평화를 원할 뿐이지 돼지우리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1923년 4월 20일자 연설 문) 히틀러는 아직 1923년 여름의 끔찍한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산층 대부분의 실질적인 재산상실을 야기했던 인플레이션을 시대의 핵심 문제로 잡 았다. 1920년에 마르크는 전쟁 이전 가치의 1/10에 이르렀다. 2년 뒤에는 무려 1/100에 이르렀다(페니히 마르크). 전쟁 이후 1천 2백 억의 빚을 졌고, 아직 미결 상태인 손해배상 협상에서 새로운 부채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국가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부채를 벗어났고, 대신에 국민이 그 빚을 떠 안았다. 빚을 끌어쓴 사람들, 상인들, 제조업자들, 특히 거의 세금 없이 최저 임금으로 생산하는 수출업자들에게 인플레이션은 유리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통화가치 하락에 관심이 있었다. 어쨌든 적어도 돈 가치를 떠받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돈 가치가 떨어지면서 점점 더 싸게 먹히는 싸구려 돈을 가지고 그들은 태연하고도 거침없이 자기 나라 돈에 불리한 투자를 하였다. 재빠른 사 업가들은 몇 달 안에 신화적인 부를 쌓았다. 그리고 거의 한푼도 없는 상태에서 엄청난 경제 왕국을 건설하였다. 자기들의 경제적 부가 거의 모든 사회 집단의 빈곤화, 프롤레타리아화에 기초한 것이고, 차용증서를 가진 사람, 연금생활자, 소 규모 저축생활자들이 전재산을 날리는 상황이 벌어져도 그런 광경은 오히려 도 전의식만을 부추겼다. 환상적인 자본가들의 경력과 대중의 빈곤화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막연한 추측은 당사자들에게 사회적인 냉소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지속적인 원 한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반자본주의적인 분위기 는 이러한 체험과 적잖이 연관이 있다. 전통적인 관념으로 보면 사욕이 없고 올 바르고 통합적인 기관이어야 하는 국가가 인플레이션의 힘을 빌어 국민에게 기 만적으로 파산을 떠넘겼다는 인상도 마찬가지로 파급효과가 컸다. 엄격한 질서 의식을 가진 소시민들, 특히 파산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인식은 그들의 얼 마 안 되는 재산의 상실보다도 오히려 더 파괴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타격을 받으면 그토록 엄격하게 신중했던 세계가 철회할 수 없는 형태 로 몰락하게 마련이다. 지속적인 위기는 사람들이 다시 믿을 수 있는 음성, 따를 수 있는 의지를 찾도록 만들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공화국의 불행을 거의 전부 묘사할 수 있을 정도 다. 그러므로 대중선도가 히틀러라는 현상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그의 특이하고 도 기만적인 연설가 재능의 덕을 입었다. 그가 이렇게 분노한 보통 사람들의 기 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고, 그들의 소원을 어느 정도 그려 보일 수 있는 감수성 을 가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 자신 바로 그러한 현상에 위대한 연설가의 비밀을 두고 있었다. "그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필요한 말 들이 바로 청중들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도록 언제나 광범위한 대중의 소리에 귀 를 기울였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한때의 실패한 미술 학교 지원자가 체험했던 일이 초개인 적인 차원에서 한번 더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생활감정과 동경에 맞지 않는 현 실에서 고통을 당하는 일이었다. 히틀러 개인의 상황과 사회 병리적 상황의 이 런 일치를 모르면 일반적인 감정에 대해서 그토록 마법적으로 작용한 히틀러의 부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민족이 이 순간 비로소 체험한 일, 즉 마법에서 깨어나 는 체험, 몰락과 계급추락,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대상을 찾는 감정 등 을 그는 이미 오래전에 겪었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이유와 변명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형식과 책임자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그이 본래의 의식에 모범 적인 특성을 부여하였고, 사람들은 전기에 감전된 듯이 그에게서 그 사실을 확 인하였던 것이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논거가 반박할 수 없는 것이거나, 그의 구호들이 대단히 예리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한 시민 아돌프 히틀러가 어찌할 바 모르고 똑같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불러일으켰던 똑같은 체험, 똑같은 고통과 희망의 감정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광증과 신들린 상태, 특별하게 달라붙은 비속성의 혼합 속에 드러나는 그의 특별한 카리스마는 대부 분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역사는 때때로 한 인간 속에 응축되 어 나타나기를 좋아하며 세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의 말은 그에게서 현실로 나타나 것이다. 시대와 사람이 하나의 위대하고 신비 로운 계산착오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연극무대 히틀러가 장악한 '비밀'은 그가 가진 다른 본능들과 마찬가지로 실은 합리적 계산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중요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이 깨달았지만, 그러한 깨달음이 대중 심리적인 계산을 포기하도록 만들지는 않 았다. 그 시대의 과장된 양식에 따라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련의 사진들은 상당 히 재미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선동가적인 천재성에 대해서 얼마나 연구하고 시험하고, 실수를 통해서 배웠는가 하는 인식이 그러한 재미 속에 파묻혀 슬며 시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그는 일찍부터 무대에 등장할 때의 특별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특수한 양식은 심리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으며, 특히 그이 연극적인 특성을 통해서 전통적인 정치집회의 과정과 구별된 것이었다. 선전 트럭들과 '거대한 공식적 광 고'를 위한 벽보로 요란스럽게 선전하면서 그는 서커스와 대형 오페라의 구경거 리 요소를 교화적인 교회의식과 교묘하게 혼합하였다. 높이 매단 깃발들, 행진 곡, 혼영의 구호, 노래들, 언제나 되풀이되는 '하일' 하는 외침 등은 지도자의 연 설을 위해서 점점 긴장 넘치는 준비과정이 되곤 하였다. 연설의 예고적인 특성 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상 깊게 선전되었다. 점점 개선되면서 연설자 과정과 안내서에도 등장하는 행사규칙들은 단한 가지 세부사항도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벌써 당 전략이라는 거대한 노 선을 결정할 뿐 아니라 가장 하찮은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집요한 관심을 가지는 히틀러의 성향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때때로 뮌헨의 모든 중요한 집회 장소들의 음향을 손수 조사하였다. 하커 양조장이 호프 양조장이나 킨들 지하술 집보다 더 큰 음량을 요구하는지 알아내려고 했으며, 집회장소의 분위기, 통풍, 전략적 위치 등을 세밀하게 검사하였다. 어떤 홀은 너무 작아서 추종자의 1/3만 와도 가득 차게되겠다는 등의 일반적인 지적도 나타난다. 소시민적인 중산층 운 동이라는 인상을 피하고 노동자들의 신뢰도 얻기 위해서 히틀러는 추종자들 사 이에서 때때로 '바지주름에 반대하는 싸움'등을 주도하였다. 부하들을 넥타이와 칼라 없이 선전에 내보내기도 하였다. 적들의 주제와 전략을 알아내기 위해서 부하들을 상대방 교육과정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1922년부터 그는 자신이 주요 연사로 등장하는 여덟, 열, 혹은 열 두개의 행사 를 시리즈로 하룻밤에 열곤 하였다. 그러한 방법은 그의 수량 콤플렉스와 반복 욕구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고 게다가 집중적인 선전활동의 원칙에 맞는 일이었 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오늘날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점차 상승 하는 군중집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실내와 거리에서 항의를 거듭하는 것이다. 정 신적인 저항이 아니라 저항, 항의, 쓰러진 분노의 타오르는 파도가 우리 민족 속 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뮌헨의 '사자 양조장'에서 열린 시리즈 행사에 참석하였 던 어떤 증인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나는 이미 이 홀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집회를 체험하였던가. 그러나 들어서면 서부터 벌서 그토록 후끈 달구어진 최면상태의 대중적인 흥분의 기운이 불어오 는 경우는 전쟁중에도 혁명중에도 겪어보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생각하였다. '독자적인 투쟁가, 독자적인 깃발, 독자적인 상징들, 독자적인 인사법, 군대와 비 슷한 정돈자들, 하얀 바탕에 검은 갈고리 십자가를 그린 새빨간 깃발들의 숲, 군 인과 혁명가의 혼합,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이상한 혼합이로군-청중도 마찬가지다. 추락하는 중산층이 압도적인데-중산층은 여기서 다시 결집될 것인 가?' 여러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는 끊임없이 꽝꽝 울리는 행진 음악, 여러 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하급 지도자들의 짤막한 연설들, 그는 언제 오는 걸까? 그 사이에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생겼나? 자신을 둘러싼 이 분위기 속의 열기 를 아무도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뒤쪽 입구에 움직임이 일어났다. 명령 의 구호들, 단상의 연설가는 문장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모두들 일어서면서 '하 일' 하고 외쳤다. 소리 지르는 대중과 펄럭이는 깃발 한가운데로 지금껏 기다려 온 사람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빠른 걸음으로 연단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로 내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는 내가 여 기저기 개인 집에서 만났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의 연설 구조는 언제나 똑같은 모범을 따랐다. 현실을 대단히 헐뜯는 말로 청중의 동의를 얻고 최초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모든 영역으로 분노가 퍼져나가 고 있습니다, 1918년 약속했던 것은 품위도 아름다움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2년 9월에 어떤 연설을 그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러 고 나서 역사적 회고, 다의 강령 해설, 유대인, 11월 범죄자들에 대한 공격, 아니 면 조건이행 정책을 펴는 자들에 대한 공격을 하고 난 다음 대개는 개별적으로 소리지르는 사람들, 아니면 돈주고 고용한 박수부대를 통해 점점 더 흥분상태에 빠져서 황홀한 일체감의 호소로 끝을 맺는 것이다. 그 사이에 언제나 순간의 열 기, 박수 갈채, 맥주 냄새, 혹은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말들을 슬쩍 끼워놓곤 했 다. 그런 경향을 그는 회가 거듭할수록 점점 더 확실하게 파악해서 이용할 수 있 게 되었다. 패배한 조국에 대한 탄식, 제국주의의 죄, 이웃나라의 질투심, '도이치 여자의 공유화', 자기 과거 낮추기, 아니면 천박하고 좀스럽고 웃기는 서유럽에 대한 적대감 등이었다. 새로운 국가형태와 베르사유수치조약, 연합국의 통제 위 원회, 검둥이 음악, 여자들의 단발, 현대음악 등은 다 서구에서 온 것이고, 직업, 안전, 방 등은 그곳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은 민주주의로 굶어죽는다!" 라고 그는 인상 깊게 요약하였다. 신화적으로 음울한 맥락에 대한 집착은 장광 설에 폭과 깊이를 주었다. 일시적인 맥주집의 행사장 앞에 세계 드라마의 전망 전체가 펼쳐지는 것이다. "오늘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세께 전쟁보다 더 위대 합니다."라고 언젠가 그는 외쳤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해서 독일 땅에서 결정 될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희생양이 되거나 아니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1923년 9월 12일자 연설) 현학적으로 사려 깊던 안톤 드렉슬러는 그와 같은 자아도취적인 발작 직후에 때때로 끼여들어서 히틀러에게는 몹시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냉정한 이성으로 정정하는 맺음말을 덧붙이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가 위대한 선동가의 몸짓으 로 자기가 권력을 잡으면 평화조약을 넝마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하거 나 자기는 프랑스와 새로 전쟁을 벌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확언해도 아무 도 그의 말을 고치지 않았다. 한 번은 '쾨니히스 베르크에서 슈트라스부르크에 이르고, 함부르크에서 빈에 이르는' 강력한 제국의 전망을 제시한 적도 있었다. 사람이 점점 더 몰리는 것은 이 대담하고 불합리한 도전의 어조야말로 사람들이 당시의 체념의 분위기 속에서 듣고 싶어하던 목소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 이다. "체념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겉보기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감행하 는 것이 중요하다." 원칙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널리 퍼진 이미지는 분명히 히틀러의 가차없음과 독창적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천박한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다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라는 신화를 예비한 남성다 움, 분노, 경멸 등의 분위기를 그의 주변에서 만들어냈다. 그가 스스로 양식화한 역할은 아웃사이더 역할이었다. 그것은 공공연한 불만 의 시대에 엄청난 인기를 만들어 주었다. <뮌헨 포스트>지가 그는 '현재 뮌헨에서 못된 짓을 일삼 는 가장 교활한 선동꾼'이라고 비나하자 그는 이 비난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다, 우리는 민족을 선동하고 끊임없이 부추기려고 한다!" 처음에 자신이 등 장하는 천박하고 야비한 형식들이 그에게도 역겨웠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이 서 커스 천막에서 인기를 만들어줄 뿐 아니라 사교계의 살롱에서도 점점 더 큰 흥 미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근 점점 더 거침없이 그러한 방법을 쓰게 되었다. 말썽꾸러기들에 대해서 비난하자 근 프랑스 백작보다는 차라리 도이치 뜨내기 가 되겠다고 대꾸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동술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반유대주의자 행패꾼이라고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풍을 일으키려는 겁 입니다. 사람들은 잠만 자지 말고 뇌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 다. 우리 독일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일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비인간적이 라고 해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가 독일을 구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성취한 것입니다." 극단적인 수사적 점층법을 위해서 종교적 이미지들과 모티프들을 사용하는 것 은 어린 시절의 감동을 반영한다. 람바흐 수도원에서 복사로 일한 기억들과, 승 리에 찬 구원의 확신을 뒤에 둔 고통과 절망의 이미지들에 의해 정열적으로 압 도당했던 기억들이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그런 결합을 통해 보여준 심리적인 지식과 천재성에 경탄하고 그것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적인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망설임도 없이 '나의 구세주'를 뻔뻔스럽게 불러댔다. "나는 기독교 로서 무한한 사랑에 가득 차서, 주님께 마침내 몸을 일으켜서 채찍을 움켜쥐고 고리대금업자, 뱀과 독사의 무리를 성당에서 쫓아내셨다는 성경구절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독에 대항하는 주님의 무서운 싸움을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는 봅니다. 그분이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다 는 사실에 너무나도 깊이 감동되어서 말입니다. 방황하는 자들을 사로잡다 그의 연설 구조가 똑같다는 것은 감정의 단조로움을 드러내 준다. 아무도 이 연설에서 무엇이 개인적이고 고정관념이고 무엇이 심리적 고려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시절 그이 지나치게 손질된 원고들을 읽어보면 그가 자기를 사 로잡았던 수백 가지 원한들을 똑같은 고발, 비난, 복수의 맹세로 바꾸는 숨가쁜 장면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오직 저항과 증오, 증오 그리고 다시 증오가 있을 뿐!"이라고 외친 적이 있다. 의기소침하고 불안한 국민의 한가운데 서 소리 높여 적에 대한 미움을 외치면서 대담한 뒤집기 원칙을 자기 것으로 삼 았다. 자신은 적에 대한 증오를 동경한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연설 중 어느 것 도 자의식의 구호를 포기한 것이 없다. "우리가 키를 잡으면 우리는 물소처럼 앞 으로 나갈 것입니다."라고 그는 정열적으로 외쳤다. 그리고 집회의 보고서에 언 급한 것처럼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해방을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신중한 정책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긍지, 의지, 반 항, 증오, 또다시 증오가 필요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과장법은 시대의 모든 일에서 거대한 부정부패와 광범위 한 국가반역의 전략이 작동중인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연합국측 외교 통첩, 프랑스 의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연설 뒤에서 인류의 적의 음모를 보았다. 그런 말을 할 때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팔을 비스듬하게 앞으로 뻗쳐 땅을 가리키 면서 특징적인 자세를 취하고서 이 신기한 스타일의 바이에른 지역 선동가는 연 설에 도취된 상태에서 정부와 나라 사정뿐 아니라 바로 세계정세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구합니다. 복수 를!" 그는 우스꽝스럽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것의 치명적인 효 과도 무시해버렸다. 그는 뒷날의 황제와 같은 몸짓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상태 였다. 그리고 대중에 대해 이질적인 예술가의 느낌을 완전히 통달하지 못했기에 그는 드물지 않게 토속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에는 청중들에게 맥주 잔을 높이 쳐들어 보이거나 아직 서투른 "쯧쯧"하는 소리를 내서 자기가 불러일으킨 소란을 진정시켰다. 사람들도 분명히 정치적 동기보다는 연극적인 동기에서 구경삼아 모여들었다. 어쨌든 1922년 초만 해도 등록된 회원이 6천 명이었지만 청중은 1만여 명이나 되고 있다. 움직임도 없이 사람들은 고저오딘 눈길로 그만을 응시하였다. 때로는 폭발하는 것 같았다. 마치 수천 개의 자갈돌이 갑작스럽게 북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고 어떤 관찰자가 묘사하였다. '웅크렸던 인간'의 소박하고도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히틀 러는 이 열광과 중심의식을 우렸다.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10개의 홀을 돌면서 어디서든지 사람들이 열광하여 소리치는 것을 경험 하면 정말 격양된 느낌이 든다." 드물지 않게 그는 충서의 맹세를 하고 모여든 사람들이 복창하는 가운데 연설을 끝맺었다. 때로는 홀 천장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거칠고도 실성할 듯한 정열로 계속 이렇게 외쳤다. "독일! 독일!" 마침내 사 람들이 끼어들어서 외침 소리는 전쟁노래나 유대인 박해의 노래로 넘어가는 것 이다. 그러한 노래 소리는 이어서 밤의 길거리로 퍼져나가곤 하였다. 히틀러 자 신은 연설을 끝낸 다음에는 "흠뻑 젖어버리고 4 내지 6파운드의 몸무게가 빠지 곤 했다." 그이 물들인 유니폼 양복은 "모임이 있을 때만다 속옷을 푸르게 물들 이곤 하였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 모든 선전술을 완전히 익혀서 '이 분야의 전문가'라 고 느끼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였다. 자기가 처음으로 미국 선전방식을 응용하였고, 그때까지 가장 창의력이 풍부하던 정치적 투쟁개념을 자신의 선동 가적인 상상력과 결합시켰다고 지적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세계무대>지 가 나중에 표현한 것처럼 어쩌면 저 위대한 바넘(Barnum)이 그이 스승이었을짇 모른다. 그러나 이 잡지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는 것은 바로 그 우스꽝스러운 수단을 보고 목표도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짐작한 것은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자신감에 넘친 수많은 당시 사람들의 오류였다. 그 는 쉬지 낳고 하나의 세계를 붕괴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자리에 새로운 세계를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삼고 있던 세계전쟁과 종말론은 그가 서커스의 심리학을 이용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온갖 성공에도 불구하고 배경에는 더욱더 돌출한 현상이 있었으니, 바로 민족주의 진영의 통합적인 대표자, 민족 사령관 루덴도르프의 모습이었다. 히틀러는 적지않은 존경에 찬 눈길로 자신을 단순히 앞서 길 닦는 사람으로만 여겼다. 1923년 초에 말한 것처럼 '아주 작은 세례 요한'으로서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위대한 사람에게 민족과 칼을 마련해주 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점점 A더 메시아적이 되었다. 그보다 먼저 민중이 그가 바 로 자기들이 기다리는 기적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그들은 '마치 구세 주처럼' 그를 향하여 몰려갔다고 어떤 주석에 표현되어 있다. 수많은 자료들은 이 전체주의 운동이 준종교적이고 구원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각성 체험들과 개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시기에 처음으로 그의 연설을 들었던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은 온갖 비난에고 불구하고 이 연설과 더불어 자기에게 '새로운 삶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한동안 히틀러의 중요한 추종자였으며 나중에는 체포 되어 오라니엔부르크 수용소에 들어갔던 상인 쿠어트 뤼데케는 연설자 히틀러와 의 만남이 자신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던 히스테리컬한 감정의 흥분상태를 외국으로 도망친 다음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일순간 나의 비판적인 능력들이 멈추었다. 이 남자가 연설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감정들을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그가 독일의 수치를 말하면 나는 어떤 적을 향해서도 덤벼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다. 도 이치 남자의 용기에 호소하는 것은 무기를 들라는 외침 같았고, 그가 설교하는 가르침은 계시가 되었다. 그는 마치 제 2의 루터처럼 보였다. 나는 이 사람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것은 잊었다. 주의를 둘러보자 그의 최면술은 수천의 사람 을 사로잡아 단 한 사람처럼 만들었음을 알았다. 물론 나는 이런 체험에 대해서 충분히 성숙한 상태에 있었다. 서른 두 살의 남자로써 실망과 불쾌감에 지쳐 있 었고, 삶의 내용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활동영역을 찾지 못하고 영웅적인 것 에 열광하지만 영웅을 갖지 못한 애국자였던 셈이다. 이남자의 의지력, 그이 정 직한 설득의 정열이 내 위로 넘쳐 들어오는 듯했다. 나는 종교적 개종에 비할 만한 체험을 하였다. 1922년 초에 당원의 숫자도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집단으로 당에 가입하는 일이 여러 번이나 생겨서 여름에는 벌써 대략 50개의 지구당을 가지게 되었고 1923년 초에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드는 통에 뮌헨 당 사무소를 임시 폐 쇄해야 할 정도였다. 1922년 1월말에 6천 명 정도 되던 당원 숫자가 이듬해 11 월에는 5만 5천명이 넘었다. 이러한 번창은, 당원 한 명당 3개월마다3명의 신규 당원과 한 명의 ,민족 관찰자. 정기 구독자를 확보하라는 다의 명령에 의한 것만 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설가로서, 행사 지휘자로서 히틀러의 위치가 점차 확고해 진 것과 관련이 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의 소망에 따르기 위해서 국 가사회당은 당원들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당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도록 애썼다. 그러한 점에서도 국가사회당은 사회주의 정당들의 실천방안을 받아들였 다. 매주 열리는 연설의 밤의 의식-당원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함께 하 는 소풍, 음악회, 하지의 횃불 놓기 의식, 다함께 노래하기, 야외캠프, 손 쳐들기 등은 유쾌한 형식이 되어서 점차 당의 회합과 돌격대 숙소에서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특성들은 이미 사회의 정당들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으로,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고향을 잃어버린 심정의 욕구를 폭넓 게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초기 당원들을 위해서 당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종의 종교적이고 세련 된 대체 세계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여러 가지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비교하였다. '도이치 크리스마스 축제'는 당의 가장 인기 있는 행사들 중의 하나 였다. 이 행사에서 당이 마련하는 대체 세계는 원래의 이상에 이르렀다. 이 행사 들은 바깥의 어둡고 적대적인 세계에 맞서서 감상주의, 선별의식, 안전하다는 느 낌 등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당시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운동의 최 고 의무는 "무엇인가를 구하면서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어딘가에 서 마음에 평화를 주는 장소를 찾을'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하였다. 추방 위협 상당 부분 이러한 이유에서 히틀러는 무조건적으로 당을 확대하는 일을 포기 하였다. 그리고 유능하고 개인적으로 확신을 가진 지도자기 나오는 경우에만 새 로운 지구당을 만들었다. 그런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분명히 공허감에 이르게 되 는 저 권위의 욕구를 작은 일에서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어쨌든 초기에 당은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한 집단보다 그 이상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일상의 사건들에 몰두하느라, 당원들에게 비극적인 진지함이라는 세계해 석과 천박한 위안을 마련해 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상의 곤 궁과 외로움에서 그러한 위안을 필요로 하였다. 고향이 되고, 존재의 중심점이며 인식의 원천이 되고자 하는 당의 경향에는 뒷날의 전체주의 요구들이 씨앗이 이 미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년 이내에 국가사회당은 당시 어떤 관찰자의 말처럼 '남도 이치 민족주의의 가장 강력한 권력인자'가 되었다. 수많은 민족단체들은 국가사 회당에 흡수되었다. 북도이치 그룹들도 점점 더 이쪽으로 휩쓸려 들었다. 특히 붕괴되고 있던 도이치 사회주의 정당의 퇴물들이 상당수 이쪽으로 흘러들었다. 1922년 6월에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어떤 민족주위 모반자 그룹에 의해서 암살되자 프로이센, 바텐, 튀링겐 등 일부 지역들은 이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였 다. 그러나 소비에트 시절의 기억들을 잊지 못하는 바이에른에서 국가사회주의 는 가장 과격한 반공 전초기지로 남았다. 뮌헨 시 경찰국에는 수많은 히틀러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경찰청과 푀너와 국장인 프리크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 국가사회당에 반대하 는 광고들을 억압하였다. 그리고 추진증인 활동에 대해서 당 지도부에 정보를 주거나 이러한 활동들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도록 노력하였다. 프리크는 나 중에 이때만 해도 국가사회당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억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사회당과 히틀러씨에 대해서 보호의 손길을 유 지하였다." 히틀러 자신도 프리크의 원조가 없었다면 "작은 집단을 벗어나지 못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22년 바이에른 주 내무 장관 슈바이어가 그를 부담스런 외국인이라는 이유 로 오스트리아로 쫓아 보내야 하지 않을까 고려했을 때 히틀러는 진짜 위협을 느꼈다, 당시 모든 정당 지도자들이 인정한 바로는 뮌헨 거리의 건달 패거리, 싸 움질, 시민들을 괴롭히고 선동하는 일 등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당수인 에어하르트 아우어가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원 칙들'에 근거하여 히틀러를 추방하는 일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계속 방 해받지 않고 공화국을 '온갖 외국인 사기꾼들의 피난처'라고 모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권력을 잡게 되면 "신께서 너희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를!" 하고 외치고 국가반역자인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는 "단 한가지 형별, 즉 교수대i가 기다리고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대면서 정부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가 만들어낸 흥분상태는 공화국 내에서 뮌헨 시를 거의 반공화국적 적성지 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쿠테타, 내전 군주제 부활 등의 소문이 무성하였다. 공화국 대통령인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1922년 여 름에 뮌헨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역전에서 이미 욕설과 야유, 그리고 빨간 수 영팬티 등으로 환영인사를 받았다. 중앙정부 수상인 비르트는 예정되어 있던 뮌 헨 여행을 중단하라는 경고를 측근에서 받았다. 반면에 힌덴부르크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망명중에 죽은 비텔스바흐 왕가의 마지막 군주 루트비히 3세의 유해가 이송되어왔을 때는 도시 전체가 상복을 입고서 슬픔과 추모의 심정으로 거리로 몰려나왔다. 대외활동을 시작하다. 뮌헨 안에서의 성공은 히틀러에게 용기를 주어서 최초의 대외활동을 벌이게 되었다.1922년 10월 중순에 코브르크의 조국 연맹은 시위를 기획하고 히틀러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몇 명의 수행원'을 데려오라는 요구를 그는 도전적으로 잔 뜩 부풀려 해석해서 이 모임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스스로 압도하려는 속셈으 로 약 8백 명 가량의 임시부대를 이끌고 깃발을 날리고 대규모 음악을 연주하 며 코부르크로 들어갔다. 당황한 그 지역 우지들이 이렇게 대열을 이루어서 들어오지 말라고 요청하자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그런 요청을 '쌀쌀맞게 거절하고' 자기 도당들에게 '풍악 을 울리며'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길 양편에 적대감을 품은 무리가 잔뜩 몰려 들어 있었는데도 기대한 대로 신문의 제목을 장식할 만한 패싸움이 벌어지지 않 자 히틀러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시위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오던 길을 되돌 아가라고 시켰다. 이번에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연극적인 발상으로 음악을 빼고 북만 치도록 만들었다. 결국 기대했던 개로 거리의 패싸움이 벌어져서 일부 패 거리들이 하루종일, 그리고 밤까지 계속 싸워대는 것을 보고 국가사회주의자들 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여겼다. 이것은 국가 공권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도전들은 이 듬해에도 계속될 참이었다. 이상스럽게도 코부르크는 국가사회당의 가장 믿음직 한 근거지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날 참가자들은 기념메달을 받았다. 히틀러 패거리들이 지나친 반응의 결과 다음 몇 주 동안 새로운 쿠테타 소문이 나돌자 슈바이어는 히틀러를 불러서 그이 거침없는 행동의 결과들에 대해서 경고하였 다. 폭력 사용에 이르게 될 경우 자신은 경찰에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것이었 다. 그러나 히틀러는 '평생 절대로 쿠테타를 일으키지 않을 것 '이라고 장관에게 명예를 걸고 장담하였다고 한다. (하이덴 165쪽) 그는 이제 자기 차례라는 확신을 점차 키웠다. 금지령, 소환장, 경고 등은 자 신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그사이 얼마나 많은 것을 떠맡았나 하 는 사실만을 확인해주었다. 자기 도취 상태에서 그는 스스로 위대한 시대적 역 할을 떠맡았다. 그것은 무솔리니 패거리가 방금 성공적으로 로마로 향하여 행진 해가고, 터키에서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권력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에게 확신을 주 s역할이었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심복이 보내오는 보고에 귀 를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 다원들이 온갖 열광과 확고한 결단력으로 동시에 군대가 선의의 수동성으로 맞아주는 덕분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폭풍 과 같은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면서'빨갱이 '들을 물리치며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 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 '역사의 전환점'이 자신에게 전례 없는 격려를 보내주었다고 말했다. 1923년 대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은 그이 이름을 '히틀러, 게오르크'라고 잘못 적고, 몇 줄 안 되는 설명만을 붙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가 이미 오래전 에 초월해버린 현실이었다. 마치 소년 시절처럼 줄지 않는 적극성으로 그는 자신의 부풀어오른 상상력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리고는 갈고리 십자가 깃발이 '베를린 성과 농부들의 초가지붕 위에서 펄럭이는'모습을 아주 뚜렷하게 눈앞에 그려보곤 하였다. 혹은 길가에서 어떤 평화로운 커피 타 임에 느닷없이 먼 꿈나라에서 떠오른 듯이, 다음번 전쟁에서는 "폴란드와 우크라 이나의 곡창지대를 장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점점 더 자신이 모범으로 삼았던 사람들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코 브르크에서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부터 나는 내 길을 홀로 가련다.'고 그는 선언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고한 s 사람으로 자처하고 "어느 날인가 어쩌 면 더러운 장화를 신고 있지만 순수한 양심을 가 강력한 주먹을 가진 강철의 사 람이 나타나서 이 관람석 영웅의 연설을 중단시키고 민족에게 행위를 선물할 것"을 꿈꾸었지만 이제 그는 망설이고 기회를 보아 가면서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을 나폴레옹과 견주기도 하였다. 전쟁터의 상관들은 그가 존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 하사관으로 승진 시키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충성심을 만들어내는 비상하고 때로 파괴적인 재능을 통해서 그는 이제 천부적인 지휘능력을 드러냈다. 그의 추종자들은 오직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꺼리지 낳게 되었고, 오직 그이 모습이 보여야만 희생과 수치스러운 일과 특히 처음부터 범죄적인 행위를 할 각오가 되는 것이었다. 그 리하여 국가사회당은 점점 더 정치적 정당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잗당한 공동체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측근들은 그를 '늑대'라고 부르곤 하였다. 남성적인 브루크만 부 인은 그를 이 이름으로 부른 특권을 누렸다. 그는 이 이름을 '아돌프'의 게르만 어 원형태라고 생각하였고, 이 이름은 세상이 정글이라는 그의 생가, 그리고 강 인함과 공격성, 고독의 이미지와 잘 맞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볼프라는 이름 을 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뒷날 자기 집안 일을 맡아 하는 누이에게도 이 이름을 주었다. 폴크스바겐 자동차 도시의 이름도 이런 유래를 가졌다. "당신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는 '늑대성'이라는 이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로버트 라이가 공장이 완성되기 직전에 그에게 설명하였다. 자기양식화의 시작 이 시기부터 그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자기 자신의 출현을 양식화하면서 전설 적인 모습들과 뒤섞기 시작하였다. 이미 일찍부터 그는 자신의 일거일동을 "역사 의 여신"의 눈 아래 둔다는 의식을 가졌다. 이제 그는 자신의 실제 당원번호 555 번을 계속 부인하고 스스로 당원번호 7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으로써 빠른 번호를 가질 뿐 아니라 이 마법적인 숫자의 후광을 얻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 는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을 지워 나가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측근 도 원칙적으로 자기 집으로 초대하지 않게 되었고 가능하면 한 사람씩 멀어졌 다. 이 시기에 어린 시절에 그를 알고 있었고 이제 뮌헨에서 다시 만난 어떤 사 람에게 그는 "누구에게도 , 자신의 가장 가까운 당 동지에게도 빈과 뮌헨 시절 자신의 청년기에 대해서 일체의 정보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옛날 전우들 중 한 명은 뒷날 어느 정도 감동을 지닌 채 히틀러가 이보다 얼마 전에만 해도 때때로 자기 아내와 춤을 추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자세와 몸가짐, 조각상 같은 태도를 배웠다. 처음에는 많은 것이 서투른 상태로 남아 있었고 경직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습득한 자기 통제와 글 자 그대로의 분별없음, 카이사르식 거만함과 멍청함, 꾸며낸 태도와 자연적인 태 도 사이의 쉴새없는 변덕은 자세히 관찰해보면 완전히 구분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기 양식화 과정 초기에 그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낸 이미 지의 일관성을 완전히 유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요소들은 서로 어 울리지 않고 겉돌았다. 어떤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그를 가리켜 '티롤식 모자를 쓴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어쨌든 그의 청춘의 꿈은 이제 거의 다 이루어진 셈이었다. 부담스러운 '밥벌 이 직업'을 갖지 않고도 속박 없고 오직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시간의 주인 '이 되었고, 그 위에 극적인 무대 효과, 광채와 박수갈채까지 얻었다. 그는 빠른 자동차를 몰았고, 살롱의 중심인물이었고, 귀족, 실업가들, 명사들, 학자들, 사이 에 섞여 '큰 세상'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불안한 순간에 그는 자신이 현존하는 삶의 상황속에 시민적인 형태로 적응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그러 고 나서 자신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저 이 운동이 계속되고 나는 <민족 관찰자>의 발행인으로 착실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기분일 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과도하게 언제나 전체 를 지향하는 그이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균형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이 에너지는 그를 언제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갔다. "그이 내부에서 모든 것 은 과격하고 전체적인 해결을 자향하였다."고 젊은날의 친구가 판단했다. 다른 사람은 그를 가리켜 광신자이며, "광증의 경향이 있고 응석꾸러기로 전혀 거침이 없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무명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히틀러는 알았다. 돌아보면 놀 라운 길이 놓여 있었다. 초기의 히틀러에게 폭력적 요소를 덧붙이지 않는 편견 없는 관찰자라도 여기서 뚜렷한 단절을 보게 된다. 그가 이제는 3중으로 극복하 였지만,30년 세월을 창백하고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것을 그냥 슬쩍 지나쳐버릴 수는 없다. 그이 삶은 접합되지 않는 두 개의 부분을 합쳐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비상함 대담성과 냉담으로 비천한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제 몇 가지 전략 적인 불확실성들을 극복하고 몇 가지 판에 박힌 형태를 얻기만 하면 되었다. 나 머지는 위대하고 가차없는 상황들 덕분이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자신이 처한 상 황들의 절정에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 이해관계, 힘, 이념 등을 한눈으로 파악하 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그 목적이란 권력의 상승이었다. 경직된 사람 그리 전기작가들이 자주 특별한 단절체험을 찾으려 했다는 것도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었다. 잠복기, 불확실한 결합, 심지어 악마의 힘이라는 오래된 생각들 을 애써서 찾아냈다. 그러나 그가 이전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요소들을 하나의 새로운 개성형식으로 정리해내는 전체적인 접착제를 찾아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괴짜였던 사람이 이 제 힘을 가지 선동가 되고 '몽상가'가 '천재적인'사람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가 대중에게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 않고도 위기 과정을 강력하게 촉진하는 작용 을 하는 대중의 촉매였듯이 대중도 그에게 촉매작용을 하였다. 대중은 그의 피조물이었고, 그는 그들의 피조물이었다. 그는 뒷날 대중을 향하여 거의 성서 같은 말투로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현재의 여러분은 나를 통 하여 드러나고, 현재의 나는 오직 여러분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거의 처음부터 이 현상을 지배하는 독특한 경직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세계상은 그가 강조하곤 하였듯이 사실상 빈 시절 이 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같은 요소들이 그대로 남았고, 대중의 기상신호가 이 요소들을 강력한 긴장으로 가득 채웠다. 감정들도 그대로였다. 분노와 열광, 히 틀러의 예술적 취향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의 개인적인 기호도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이후로 완전히 고착되어 있었다. 트리스탄과 푸딩, 신고전주의, 유대인 에 대한 증오 , 그리고 크림 케이크를 한없이 좋아하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은 계 속 되었다. 그가 뒷날 빈 시절 자기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우유로 키운 아이'였 다고 말했다면 그는 많은 점에서 언제나 그랬다. 세기가 바뀌고 나 다음에 일어난 어떤 지적인 혹은 예술적인 사건도, 어떤 책 도 어떤 사상도 그에게 도달하지 못했으며 그에게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 고 스무 살 시절 우편엽서 화가의 스케치나 꼼꼼한 수채화를 세계대전의 용사, 혹은 20년 뒤 수상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갑작스러운 경직이라는 똑같은 인상 을 받게 된다. 어떤 개인적인 체험도, 발전과정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는 과 거의 모습 그대로 돌처럼 응고된 상태에 멈추어 있는 것이다. 오직 방법론과 전략적 차원에서만 그는 적응력이 있었으며 끊임없이 배울 각 오가 되어 있었다. 1923년 여름부터 도이치 국민은 위기와 곤궁으로 포위된 듯 하였다. 상황은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풍성한 기회의 전망을 주는 듯했다.. 정치가 아니라 운명에 도전하고, 상황을 개선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과격하게 전면적으로 뒤집어엎으려는 사람이었다. 히틀러는 사정을 이렇게 요약 하였다. "불가능한 일이 언제나 잘되는 법이라고 여러분께 보장합니다. 가장 있 을 법하지 않은 일이 가장 확실한 일입니다. 제 3장 권력의 도전 히틀러는 1923년 1월의 마지막 며칠 간 뮌헨에서 전당대회를 열겠다고 광고하 였다. 이 전당대회에서 그는 자기의 권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바 이에른 지역 5천 명의 돌격대 대원들에게는 지휘자를 앞세우고 시 외곽의 어떤 광장, 이른바 연병장으로 모여들어서 최초의 화려한 돌격대 연대기의 축성식을 하라는 소환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대형행사를 위해서 시내의 홀 12개에서 행사 준비가 이루어졌다. 민속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이해서 악단들, 바이에른 민속 춤 단체, 코미디언 바이스 페르들을 참석시켰다. 이대규모 준비와 이미 몇 주전 부터 떠돌던 국가사회당의 쿠테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은 정계에서 히틀러의 의미 가 커졌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이에른 당국이 히틀러의 도전적인 예고에 대해서 보인 반응은 국가사회당에 대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당국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당의 빠른 상승은 아직 본래의 역할이 정해지지 않는 권력판도를 만들어 냈다. 당은 민족주의적이고 좌 파에 대항하는 쓸모있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국가사회 당은 게임 규칙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고, 스스로 질서를 주장하면서 쉴새없이 질서를 파괴하였다. 국가에서 허용하는 권력의 한계를 히틀러에게 보여주려는 당국의 의도에 따라 그는 3개월의 금고형을 받고 1922년 7월에 4주 동안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다. 부하들과 더불어 '바이에른 연합'의 집회를 방해하고 연합의 대표인 기술자 오토 발러슈테트(O.Ballerstedt)를 두들겨팬 탓이었다. 구류를 살고 나서 처음으로 다 시 태어났을 때 그는'끝없이 이어지는 환호성 속에서 손으로 쳐들여서 연단으로 운반되어' 갔다. <민족 관찰자>는 그를 '뮌헨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미움받는 남자'라고 불렀다. ((VB) 1922년 8월 2일자) 그것은 그 자신으로서도 계산할 수 없는 위기를 품은 상황이었다. 1923년에 전략적으로 선전과 위협을 번갈아 해가 며 규정하기 힘든 구가권력에 대한 관계를 명백하게 하려는 히틀러의 노력이 계 속되었다. 약간 수상쩍지만 분명히 민족주의적인 남자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 불확실 한 상황에서 당국은 타협안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노천에서의 연대기 축성식을 금지하고 히틀러가 예고한 시위도 역시 금지하였다. 경찰청장으로 국가사회주의 에 동정적이었던 에른스트 푀너의 자리를 물려받은 에두아르트 노르츠는 히틀러 가 금지를 풀어달라고 애원하여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되면 민족주위 애국 운동에 무서운 타격이 될뿐더러 조국에 대해서도 재앙이 될 것이라는 말에도 끄 떡하지 않았다. 이 냉정하고 머리 희끗한 사람은 몇 마디 짤막한 말로 국가의 권위를 알려주 었다. 국가권위 앞에서는 애국자들도 반드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밖으로 나와서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격대 대원들을 행진시키겠다. 경찰 따위는 무섭지 않다. 자기 자신이 맨 앞에서 행진하겠다. 경찰이 쏠테면 쏴봐라 고 소리치기 시작했는데도 이 사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임시로 소집된 각의 는 오히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그럼으로써 전당대회의 모든 행사를 금지시켜 버렸다. 국가사회당의당수에게 게임 규칙을 알려줄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절망하였다. 한 순간 동안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장래가 걸린 문제였다. 그가 이해하는 게임 규칙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도전을 받아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자신의 요구들이 국가의 노력보다 더욱 일 관된 것이고 더욱 과격한 표현이다. 드렉슬러 시대 이로 당을 후원해온 방위군이 개입해서야 비로소 해결책이 열 리는 듯이 보였다. 에른스트룀과 리터 폰 에프는 바이에른 군사령관인 로소브 장군이 히틀러와 협상을 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상 태에서 빠신 국가사회당 당수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 다. 그는 1월 28일 정당대회 직후에 '다시 각하께 출두'할 것을 약속하였다. 히틀 러의 극단적인 행동방식을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로소브는 정부측에 "국가방위의 관점에서 민족주의 단체들 간에 충돌이 있다면 유감스러울 것"이라 고 알렸다. 곧 이어서 금지령이 풀렸다. 그러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노르츠는 국가사회당 당수를 다시 만나서 집회의 숫자를 여섯으로 제한하고 연대기 축성 식은 연병장에서 하지 말고 바로 이웃한 왕관 서커스 장에서 하라고 청했다. 자기가 승리했음을 알아챈 히틀러는 불확실하게 동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는 "독일이여 깨어나라!'는 기치 아래 12번의 집회를 모두 열었다. 그리고 짙은 눈발 사이로 5천 명의 돌격대 대원들은 그가 기획한 대로 연병장에게 성대한 축 성식을 가졌다.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은 독일 미래의 운동입니다. 그렇 다면 어떤 악마라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운동은 파 괴되어도 마땅합니다."라고 그는 추종자들에게 외쳤다. 돌격대는 환호하면서 수 많은 자체 군악대를 거느리고 비상사태를 알리는 벽보와 플랭카드을 지나쳐서 거리를 행진하고, 유대 공화국에 반대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백조골 거리에서 히 틀러는 제복을 입은 연대의 분열식 사열하였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인상적인 승리였다. 동시에 다음 몇 달간의 갈등의 종결점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경과를 보고 히틀 러가 상대방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설하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더 능숙하고 배짱도 더 두둑한 증거라고 여겼다. 등장할 때의 광포한 열정으로 해서 그가 언제나 오래전부터 당의 심리적 이미지를 결정해 온 분노한 단순한 사람들 이외에 미래에 대해 섬세한 후각을 가진 사람들도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2월부터 11우러 사이에 국가사회당의 신규 가입은 대략 3만 5천 건에 이 르렀고, 돌격대는 거의 1만 5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의 재산도 황금 17만 3천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선동과 행사를 위한 그물망도 바이에른 전역에 빽빽하 게 만들어졌다. <민족 관찰자>는 2월 8일자 이후로 일간지가 되었다. 성격이 까 다롭고 명으로 골골하면서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몇 달 더 발행인으로 일하였지 만, 그러나 이 신문의 책임자는 3월초에 이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넘어가 상태였다. 루르 투쟁에서 이탈하다 히틀러가 군사상의 문제나 민간의 문제에서 드러내 보였던, 상당히 성과가 있 는 양순한 태도는 이 나라를 뿌리까지 흔들어 놓은 위기 탓이라고 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웃 나라 독일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지 못한 프랑스는 1923년 1월 초반에 문자 그대로의 베르사유 조약에 근거하여 루르 지방을 점유하였다. 그로 써 위기를 억제하고 있던 인자들에서 마지막으로 안전장치를 풀어내는 신호를 울린 셈이 되었다. 전후의 불안들, 엄청난 손해배상 액수, 일반적인 자금도피와 온갖 종류의 생필 품 부족은 전재의 상처에 경제를 되살리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 가 독일 안정에 대한 어차피 빈약한 외국의 신용은 좌익과 우익 과격파의 지속 적인 활동을 통해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1922년 6월 도이치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암살되었을 때 마르크화는 처음으로 엄청나게 곤두박질 쳤다. 프랑스 측이 공격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 이 시점에서 인플레 이션은 파국적인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속도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기묘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 마음에서 현존 질서를 긍정할 동기를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한참 동안이나 감정을 파괴하였다. 사람들은 '불가능성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그 개념, 규범, 도덕을 붕괴시키는 일이었다. 그 파급효과는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순간 여론의 관심은 국가적인 자기 주장에 매우 강렬하게 집중되었다. 마 지막에는 무게로 달아서 지불될 지경에 이르는 지폐는 사건의 환상적인 배경일 뿐이었다. 1누어 11일에 정부는 소극적 저항을 호소하였다. 곡 이어서 공무원들 에게 프랑스 점령당국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루르 지방에 진입한 프랑스 군대는 거리에 모여들어 차갑고 분노한 태도를 '라인 강 수비'라 는 옛 노래를 부르는 거대한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해서 프랑스군은 굴종목록을 공표해서 답변했다. 가 혹한 점령군의 법 진행은 멋대로 중벌을 내렸고, 수많은 충돌들은 양측의 분노 를 점점 높였다. 3월말에 프랑스군은 에센에 있는 크루프 제철 공장 난간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기관총을 쏘아서 13명의 사망자와 3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거의 50만 명의 사람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한편 해당지 역 프랑스 군법회의는 회사의 사장과 간부 8명에게 15년에서 20년형을 선고하였 다. 이런 사건들은 1914년 8월 전쟁이 터지던 무렵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단결심 을 일깨웠다. 그러나 이러한 단결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힘이 각기 자기 들의 이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금지된 의용군들 은 이 시간을 이용 하여서 불법성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중앙정부의 호 소한 소극적 저항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좌익 과격파는 작센과 중부 독일에서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하였고 하였다. 한편 우익은 바이에른의 아성을 확고히 하 였다. 주 경계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백인 부대와 에어하르트 의용군 부대들이 한때 무장대립하기도 하였다.(놀테 (Krise) 92 쪽) 수많은 대도시에서 굶주림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서부에서 프랑스와 벨기에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 용하여 분리 운동을 호소하였다. 그것은 어차피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금세 실패하고 말았다. 적대적인 상황에서 건설되어 4년간 힘들게 버텨온 바이마르 공화국은 붕괴에 직면한 듯이 보였다. 히틀러는 도전적이고 대담한 태도로 새로 얻은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는 민 족적인 통합전선에서 이탈하였다. 그리고 갈팡질팡 하는 추종자들에게 프랑스에 대한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는 모두 국가사회당에서 제명시키겠다고 위 협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런 위협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흐리멍덩한 화해 는 우리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다."면 서 그는 모든 이의를 엄격하게 물리쳤다.(1923년 1월 6일자 노이마이어 카페에서 행한 히틀러의 연설에 대한보고 ) 그는 이러한 결정의 문제점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이 특별 의식과 전략적 고려가 그런 결정을 하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다른 단체들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민족저항 운동에 끼어서 무명의 존재로 격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었다. 그는 루르 투쟁을 통해 국민이 정부를 따르게 되고, 현정권이 강화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자신의 방해공작을 통해 야기된 혼란 상태가 정권 전복 의도 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를 희망하였다. <민족 관찰자>에 그는 이렇게 썼다. "한 국민이 국경선 안의 살인자들을 몰아내지 않는 한 밖을 향한 성공은 불가능한 법이다. 프랑스에 대항하여 구호나 글로 항거가 이루어지는 동안 도이치 민족 의 진짜 원수가 이 성벽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특이할 정도로 일관되게, 모든 적대감에도 맞서고 심지어는 루덴도르프의 권 위에 대항하면서까지 그는 우선 내부의 적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를 고집하였다. 육군 총수인 제크트 장군이 3월초에 어떤 담판에서, 적극적인 저항으로 넘어가 는 경우에 히틀러가 방위군에 합류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우선 정권을 무너 뜨려야 한다는 답변이 나왔다.. 2주 뒤에 수상 쿠노(Cuno)의 대리인을 향해서도 그는 우선 내부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가 아니라 조국의 배신 자들, 11월 범죄자들을 타도해야 합니다."(하이덴 113쪽, 히틀러가 제크트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마이벨커에 나옴) 국내정치 우선정책 이런 히틀러의 태도는 완전히 원칙이 없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가 인기 없는 모호한 결정을 위해 보인 단호함은 오히려 그 의 원칙들이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런 선택으로 자기 경력의 핵심적인 결단 하나를 내린 것이다. 그의 상승 을 함께하고 촉진시켜준 사람들, 명사들과 보수 진영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자 기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와 친근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엇보다도 이 국수주의적인 남자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특성을 넘어선 히틀러의 최 초의 정치적 결단은 카르부터 뒷날 파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동지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그 자신은 선 택을 앞두고 진짜 혁명가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노골적으로 그는 민족적인 태도보다 혁명적인 태도를 우선으로 여겼다. 실제 로 그는 뒷날에도 다르게 반응한 일이 없었다. 1930년에도 그는 폴란드가 침입 할 경우 현정권을 위해서 방어전에 나서기보다는 동 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지방 을 임시로 포기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그는 '갈등의 순간에 우선 도이치 사람' 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경멸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패거리들보다 냉정하고 효과적으로 그의 전략은 애국적인 장광 설에 이끌리지 않았다. 게을름을 부려서 적을 물리치겠다는 소극적 저항에 대해 서, 그리고 태업을 통해서 프랑스의 무릎을 끓게 만들겠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웃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독일에 국제주의자는 한 명 도 없고 오직 국가사회주의자들만 있다면 오늘날 프랑스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6천만의 사람들이 단 하나의 의지만을 가진다면, 광신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생각에 몰입해 있다면, 주먹은 무기가 될 것이다." 히틀러의 모든 생각이 여기 들어 있다. 괴물 같은 의지력을 통해서 높여진 합리적인 사색이 나타난다. 그 뒤 에는 자극적인 비전이 숨어 있다. 물론 히틀러의 방어의지가 모든 다른 세력이나 정당보다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저항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저항이 소극적이며 절반의 저항일 뿐이라는 사실 이 위에 언급한 이유 말고도 그의 거부감을 만들어냈다. 일관되고 성공적인 외 교정책은 오직 하나로 뭉친, 혁명적으로 통합된 민족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가능 하다는 생각이 그 뒤에 숨어 있다. 독일의 정치적 전통과는 반대로 그것은 일종 의 과격한 국내정치 우선 정책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1915년에 전선에서 보 낸 편지에서 말했던 것이고 마지막 권력의 순간까지 전략적인 원칙이 되었던 생 각이다. 소극적 저항이 중단되고, 히틀러가 멜로드라마 같은 생각으로 독일의 새 로운 붕괴와 루르 지방의 분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정열적인 연설에서 정부를 향하여 진정한 저항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1945년 3 월 '불타는 지구' 명령을 미리 보여주는 비전을 여기서 전개하고 있다. 현재의 난국 속에서 산업지역이 붕괴된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용광로들 은 터지고, 탄갱은 막히고 집들은 잿더미가 될지도 모릅니다. 한 민족이 그 뒤 에서 일어나기만 한다면, 강하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확고한 민족 말입니다! 도이치 민족이 일어서기만 한다면 나머지 모든 것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서 있다 해도 민족이 내면의 게으름으로 몰락해간다면, 벽난로며 산업체이며 집의 담벼락들은 이 민족의 묘비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루르 지역 은 도이치의 모스크바가 되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1923년의 도이치 민족이 더는 1918년 그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어야 합니다. 명예를 빼앗 기고 수치를 얻은 민족은 이제 다시 영웅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 민족이라 면 불타는 루르 지방을 보고 생사를 걸고 저항을 조직하였겠지요. 그렇게 행동 했더라면 프랑스는 오직 망설이는 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난로에 이어 난로를, 다리에 이어 다리를 파괴하였겠지요! 독일이여 깨어나라! 프랑스 군대는 그러한 세계 붕괴의 두려움 속으로 감히 들어서지 못했겠지요! 맹세코 우리는 다른 모 습으로 여기 서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