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어디 있었나 이러한 과정들은 공공의식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그때까지는 정치 이전 공간에 움츠리고 있던 광범위한 계 층이 갑작스럽게 정치적인 정열, 희망, 절망 등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또한 육군병원에 있는, 서른 살 가량된 히틀러를 사로잡은 것이 기도 했다. 막연하지만 과격한 불행과 배신감이었다. 그것은 그를 정치에 한걸음 더 가까이 데려오기는 했다. (나의 투쟁)에 보면 정치가가 되려는 결심을 1918년 11월 사태와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일년쯤 지나서 그는 어떤 작은 집회에서 열기에 취한 듯 일어서서 말하는 중에 연설가로서의 자기 재능을 발견하고, 희망 없이 막혀 있던 존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출구와 미래를 갑자기 보게 된 다. 어쨌든 이런 해석은 다음 몇 달 동안의 그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히틀 러는 그 사이에 눈이 다 나아서 11월 말에 파제발크 육군병원에서 나오자 뮌헨으로 가서 자기 연대의 보충대대에 신고하였다. 뮌헨은, 11월 사태 과 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도이치 영주가문의 붕괴가 시작된 곳으로, 정치적인 흥분과 활기에 넘치는 도시였지만 그는 거기 끼여들지 않았다.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고 거기 휩쓸려들거나 자극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빨갱이의 지배가 싫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뒷날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공화국 관심이 적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는 못한 다. 어떤 활동이든지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는 2월 초에 오스트리아 국 경에서 멀지 않은 트라운슈타인 근처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위병근무를 자 청하였다. 그러나 몇백 명의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포로들이 한 달쯤 뒤에 석방되고 나자 그는 다시금 당혹스런 처지에 빠졌다. 아무런 결심도 못한 채 그는 뮌헨으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다시 위풀밭 있는 막사에 숙소를 얻었다. 아마도 그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 지배 하고 있던 공산군대에 속해서 붉은 완장을 차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붉 은' 군대 바깥에 있는 의용군이나 단위부대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 쨌든 붉은 군대 안에서 지배적인 혁명사정을 계속 들여다볼 기회를 덤으로 얻었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 의식이 얼마나 미약했고 감수성이 얼마나 약 했던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일은 없다. 뒷날 그는 '볼셰비즘'이란 말 만 들어도 흥분하고 화를 냈다. 뒷날의 온갖 양식화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에 그는 세계혁명의 본부에서 병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모욕감보다는 정치 적 무관심이 더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1918년부터 19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계속되었다. 1919년 4월에는 뮌헨 시 일대에 소련식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의 지배 아래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이 공산주의 폭동을 과거의 군인 들과 의용군의 힘을 빌어 진압하였다. 히틀러는 반공주의자였으면서 뮌헨 의 공산군대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군대 바깥에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군대 세계는 그가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체제였다. 제대 결심은 난파한 인간 들의 이름 없는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개인적 상황이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다. "이 시기에 내 머리 에서는 끝도 없는 계획들이 줄을 이었다. 하루종일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색의 종말은 언제나, 이름 없는 인간인 나는 그 어떤 행동을 하기에 가장 형편없는 전제조건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확인이었다." 이 말은 노동이나, 생업, 시민적인 지위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 얼마나 멀 리 있었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름 없다는 의식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삶에 관한 서술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정치계에 진출해서 소비에트 정 부 '중앙 위원회의 불쾌감'을 사게 되었고, 그래서 4월 말에는 체포될 지경 에 이르렀지만 자기가 지니고 있던 기총을 들고 체포명령을 피해서 도망쳤 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때 중앙위원회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오히려 당시 그가 당혹감, 수동성, 기회주의적인 적응력 등이 뒤섞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용군 에프의 군대가 다 른 부대와 힘을 합쳐 뮌헨을 떨게 만들고, 소비에트 지배를 붕괴시켰던 5 월 며칠 시끄럽던 시기에도 그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한 동안 그의 추종자였던 오토 슈트라서는 뒷날 명백하게 질문했다. "이날 히틀러 는 어디 있었나? 우리 대열에 끼어서 싸웠어야 마땅한 이 병사는 뮌헨의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진압군에 섞여 있지 않았 다. 뮌헨에 진입하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가 그를 아는 몇몇 장교들이 개입해준 덕분에 석방되었다. 중앙위원회가 체포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아 마 이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에프의 뮌헨 진군에 뒤이어서 소비에트 지배 시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 조사작업에서 히틀러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 지 추측들이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제2보병연대에서 투입한 조사위원회 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덜 끝난 전투의 영향을 받아서, 심문은 시작되자마자 너무나 냉혹한 판결로 끝나곤 하였다. 이러한 심문을 위해서 히틀러는 정보를 물어오고, 소비에트 정권에 합류하였던 동 료들을 찾아내는 등 자신의 의무를 아주 충실하게 실천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 되어서 '국민적 사고'를 위한 교육과정에 파견 되었 다. 혁명에 대항하는 혁명가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러온 익명성에서, 그 리고 얼굴 없는 대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조사위원회를 위 해서 '최초로 어느 정도 순수하게 정치적인 활동'이라 부를 만한 임무를 맡 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방향은 그에게, 반사회성과 소명의식의 이상한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만 빛나는 성장기를 갑자기 종결지어 주었다.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정치적으로 세기의 현상이 될 아돌프 히틀러가 서른 살이 되도록 정치에 아무런 활동적인 참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극 히 이상하다. 비슷한 나이에 나폴레옹은 이미 제1통령이 되어 있었고 레닌 은 추방기를 거쳐 망명중이었으며,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적인 (아반티(전 진))지의 주간이 되었다. 그에 반해서 히틀러는 곧 그를 세계정복 의지로 몰아갈 이념들 중 어느 것도 이렇다할 정도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빈의 반유대인 단체말고는 어떤 정당이 나 그 시대의 그 많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활동 욕구를 암시라도 해주는 증언은 없으며, 시대의 상투어들에 더듬거리며 참가한 사 실 이상을 암시해주는 것도 없다. 정치에서 이토록 거리를 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성장과정 의 특별한 외적 상황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빈의 고독, 일찍이 뮌 헨으로 이주한 것, 그곳에서 외국인으로 취급당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전선 으로 갔다는 것 등이다. 그런 인상은 이 시절에 그와 함께한 사람들의 특 성에 의해서도 생겨나는 것이다. '젊은시절의 친구'와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어쩌면 그가 정말 그랬던 것보다 더 결함투성이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가 그에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자신 1939년 11월 23일 권력의식의 절정기에 자신의 군 최고사령관들 을 앞에 놓고 혼란스러운 발언을 하였다. 자신은 아주 오랫동안 내적인 싸 움을 한 끝에 1919년에야 비로소 정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심'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발언은 시작의 어려움 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경력을 앞에 놓고 내면적으로 망설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발언에는 아마도 위대한 창조적 활동에 비해 '시사 정치'를 개념적으로 하위에 두는 도이치의 전통적인 정 치 경시 풍조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젊은 날의 꿈, '독일 최고의 건축가는 아니라도 최고 건축가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꿈과 관련시켜 보면 더욱 그렇다.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차라리 '이름 없는 화가'가 되어 이탈리아를 떠돌아 다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다만 자기 종족이 맞이한 죽음의 위협이 낯선 정치의 길로 자신을 몰아 넣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혁 명이 그에게 정치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지 이해가 된다. 11월 사태, 모든 권위의 붕괴, 왕조의 몰락, 세상을 뒤덮은 혼란 등이 그의 보수 적인 본능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를 적극적인 저 항으로 몰아가지는 못하였다. 소동과 혁명적 책동에 대한 반감은 정치에 대한 불신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25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는 원탁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서 11월 혁명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혁명가들을 범죄 자들과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반사회적인 도당'에 불과하고 일찌감치 때려 죽여야 할 존재였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동기, 그리고 자신의 연설의 재능을 체험하고 난 뒤에야 그는 모든 망설임을 물리쳤다. 정치 경력에 대한 망설임과 질서파괴자라는 무서 운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그는 정치로 다가갔다. 4년 뒤 뮌헨 국민재판 앞에서 변명한 것에 따르면 혁명에 대항 하는 혁명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세계치유의 열망과 괴물 같 은 특별한 재능에 의해 정치로 이끌려 들어간, 생에 지치고 억눌린 예술인 은 아니었을까? 그의 생이 진행되면서 이 질문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게 된 다. 정치는 그에게 오히려 수단으로서 더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질문해보 게 된다. 즉 정치의 도움을 받아서 연설의 위압, 행진, 퍼레이드, 전당대회 의 연극적 요소, 전쟁에서 군사력을 사용한 멋진 장관 등을 연출해보려 했 던 것이 아닐까? 낡은 질서의 붕괴가 그에게 그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물론 옳은 말이 다. 시민세계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정치가 시민의 경력인 시절에 그는 이 름과 성공을 얻을 전망이 극히 적었다. 그의 불안정한 기질로 보면 이 세 계가 형식적인 엄격성과 진지한 요구를 가지고 있는 한 출세 가능성이 별 로 없었다. 1918년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라린 근심만 만들어주었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에 큰소리로 웃지 않 을 수 없었다."고 그는 썼다. 그렇게 그는 정치 장면으로 들어섰다. 중간관찰 : 거대한 공포 1차대전이 끝났을 때 민주주의 사상의 승리보다 더 확실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전후의 혼란과 계속되는 민족간의 다툼과 새로운 국경선들 위로 민주주의 사상은 시대의 통일원칙으로서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높이 솟 아 있었다. 전쟁은 권력요구뿐 아니라 지배체제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려주 었다. 거의 모든 중부와 동부 유럽국가들이 붕괴되고 혁명과 소요를 겪으 면서 수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생겨났다. 그 국가들은 철저히 민주적 질서 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1914년에 유럽에는 세 개의 공화국과 열 일곱 개의 왕조들이 있었는데 4년이 지난 지금 왕국과 공화국의 수가 같아졌다. 의심의 여지 없이 시대정신은 다양한 형식으로 국민주권을 지원하는 듯이 보였다. 독일은 잠깐 이 사상에 휩쓸려 보고 난 다음 이런 시대의 경향에 저항하 였다. 민족정당과 클럽들, 전투적인 질서의 의용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의 혼란 속에서,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 거부감이 조직화되어 갔다. 이 런 집단들의 눈으로 보면 혁명은 배신행위였으며, 의회민주주의는 낯설고 강제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란 '연합국(1차대전 승전국) 자본에 의한 착취 기관'이 아니면 고작해야 '도이치 국민의지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 는 말이라고 여겨졌다. 독일의 적국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국가적 저항의 징후들을 보 고, 반항적이고 영원히 권위주의적인 도이치 민족이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 결권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이라고 여겼다. 물론 여기서 전례 없는 정치적, 심리적인 부담을 부인할 수 없다. 충격적인 패전체험, 저주받을 형식들을 포함함 베르사유 조약, 영토 상실, 전쟁배상금 요구, 광범위한 계층의 빈곤 과 영적인 혼란 등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언제나 도이치 사람들과 이웃 나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문화적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웃나라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나라가 원한을 품고서 교화시킬 수 없는 태도로 옛날의 낡은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시대에 뒤떨 어진 상태를 민족의 특별의식으로 삼고 서유럽의 이성과 휴매니티를 거부 할 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에도 항거하려 한다고 여겼다. 수십 년이 지나 도록 이러한 생각은 국가사회주의의 발생원인에 대한 탐구에서 지배적인 입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희망들을 약속하고 있는 승리에 찬 민주주의의 이미 지는 사실은 망상에 불과했다.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인 순간이 바로 민주주의 위기의 시작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민주주의 이념의 원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문시되었으며, 방금 승리한 것은 또 다 른 운동의 훨씬 더 거친 승리에 추격당하거나 아예 치명적인 위협을 당하 였다. 그러한 반민주적 방향은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거의 비슷한 징 조를 보이면서 나타났다. 전쟁이 뚜렷한 불만상태를 만들어냈거나 의식화시킨 나라들, 전쟁에 뒤 이어서 좌파 혁명운동이 일어났던 나라들에서 이러한 반민주적 운동은 가 장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운동들 중의 일부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것이었고, 그 추종자들은 인간이 아직 존중받고, 골짜기는 평화롭고, 돈이 더 가치가 있던 저 좋던 옛날을 그리워하였다. 다른 일부는 혁명지향 적이고 기존질서를 더욱 무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부는 소시민 대 중을 이끌었고 다른 일부는 농민이나 노동자층을 이끌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운동에서 사회계층, 이익, 표지들이 서로 뒤섞였지만 그들 모두는 사회의 더욱 어둡고 더욱 생동적인 심층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였 다. 국가사회주의는 세계상태를 뒤집어엎을 준비를 하는 유럽 스타일 저항 운동의 게임규칙을 따른 것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비웃은 것처럼 지루하고 고루한 모임들이었다. 그들은 뮌헨의 선술집에서 보잘 것 없는 모임을 가 지면서 국가와 가족의 곤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이러한 작은 집회 들이, 강력하고 고도로 조직화된 대중을 이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에 도전하고 능가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 몇 년 동안 이 촌스런 연설가들의 모임이 제대 제군들과 프롤레타리아 시민들 이 합세하면서 엄청난 역동성이 생겨났다. 그리고는 적절하게 일깨워지고 집결되고 제자리에 투입되기만 기다리게 되었다. 처음에 이런 모임들이 다양했던 만큼이나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추진요소 들이 있었다. 1919년에 뮌헨에만 일시적으로 50개 정도의 정치적인 모임들 이 있었다. 그 추종자들은 주로 전쟁 이전 정당의 남은 찌꺼기들로서, 전쟁 과 혁명을 통해서 깨지고 해체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조국' '정신 노동 위원회' '지크프리트의 반지' '우주당' '노바 바코니아' '사회주의 여성 회' '자유 사회주의 학생회' '오스타라 당' 따위의 이름을 내걸었다. '도이치 노동자당'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고, 개념상으로나 현실적으 로 한데 모든 힘은 다름 아니라 압도적인 공포감이었다. 우선 아주 직접적인 것으로 혁명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 후로 19세기 내내 유럽 시민 계급을 꿈속에서 괴롭힌 저 '거대한 공포'가 그것이었다. 혁명이란 자연의 폭력과 같다는 인상, 참가자들의 의지를 고려 하지 않고 원초적인 자연의 힘으로 독특한 결과를 초래하고, 강제로 공포 정치, 파괴, 살인, 혼란 속으로 이끌어들인다는 인상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 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얻게 된 체험은 칸 트가 말하는 인간의 개선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공포심이었다. 이 공포심은 특히 독일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서 모든 실질적인 혁명의지를 변 조시키고 저 '평화의 광신주의'를 만들어냈다. 1918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 서는 평화와 질서의지를 호소하는 것만으로 거의 모든 혁명봉기가 막혀버 렸다. 혁명의 위협 독일 안에서 혁명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지 이 오래된 공포가 되살아났 다. 특히 러시아 10월 혁명과 그 결과 드러난 위협들을 보면서 이 공포는 더욱 커졌다. 러시아 혁명을 피해 뮌헨으로 모여든 도망자들과 망명자들을 통해서 야만적인 피의 축제인 붉은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민족의 상상력을 정열적으로 사로잡았다. 뮌헨의 민중지 하나는 1919년 10월에 그 시대의 공포심과 망상을 잘 보여주는 이런 기고문을 싣고 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할례받은 아시아 사람들은 어디서나 피를 뚝뚝 흘리 는 손을 쳐들고 우리를 집단으로 목조르려고 하는 슬픈 시대다! 이사샤르 체더블룸, 본명 레닌이라는 유대인이 행한 기독교도 학살은 칭기즈 칸을 무색케 할 정도이다. 헝가리에서는 그의 제자인 콘, 본명 벨라 쿤이 살인과 약탈의 훈련을 받은 유대인 테러집단을 거느리고 불행한 나라를 휩쓸면서 끔찍한 교수대 사이로 다시 이동 교수대 기계까지 끌고다니며 시민과 농부 들을 학살하고 있다. 훔쳐서 만든 궁중행렬, 화려하게 치장된 하렘이 명예 로운 기독교도 처녀들을 열 명 이상씩 유린하고 치욕을 주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의 장교인 사무엘리는 지하감옥 한 군데서만 60명의 기독교 사제 를 잔인하게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의 몸을 찢고 살이 피범벅이 되도록 팬 다음에 그 시체를 토막냈다. 여덟 명의 살해된 성직자는 자기가 봉직하던 교회문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뮌헨도 이제... 이와 똑같은 잔혹장면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쪽에서 건너온 잔인한 소식을 들으며 얻게 된 공포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으며 믿음직한 증언들도 있었다. 소련 비밀경찰 우두머리의 한 사람인 레테 라치스는 1918년 말에, 죄냐 무죄냐가 아니라 사회적인 소속계층이 바로 형벌과 숙청을 뜻하게 된 이유를 이와 같이 제 시하였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을 근절시켜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개인이 소비에트 권력에 해로운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필요가 없 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질문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이렇다. 즉 그는 어떤 계급에 속하고 있는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교육을 받았고, 직 업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피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것이 붉은 테 러의 정수다." 이것은 국가사회당 지도부의 초기 호소문에 대한 답변처럼 들린다. "여 러분은 도시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로등 기둥에 내달리는 것을 보려고 하는가? 여러분은 러시아와 비슷하게 볼셰비키 살인 위원회가 각 도시에서 활동하기를 기다리려는 것인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처자식의 시체를 넘 어가려는 것인가?" 혁명의 위협이 흘러나오는 원천은 유럽 전체에 퍼져 있 는 몇 명의 배신자들이 아니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러시아, 히틀러가 표 현한 대로 '잔인한 권력 덩어리' 자체였다. 러시아의 새로운 혁명정부는 승리를 확신하고서 국제프롤레타리아의 단 결된 힘으로 독일을 정복하는 것이 세계혁명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한 걸음 이며, 승리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이것은 필립포 투라티가 '볼셰비키의 도취'라고 명명한 증세의 일부였다. 소비에트 밀정들 의 보이지 않는 활동, 계속되는 불안,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혁명, 1920년 루르 지방의 소요, 그 이듬해 중부 독일의 궐기 함부르크의 반란, 뒤에는 다시 작센과 튀링겐 지방의 반란 등, 소비에트 정권의 항구적인 혁명위협 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되고 국민적인 거부감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위협은 특히 초기 히틀러의 연설에서 지배적인 것이었다. 그는 '붉은 학살사령부'의 활동, '살인집단' '볼셰비즘의 피의 늪' 등을 날카로운 색채로 묘사하였다. 그의 말로는 3천만 명 이상이 러시아에서 "고문을 받 아 천천히 죽어가고, 일부는 단두대에서, 일부는 기관총이나 그 비슷한 방 법으로 일부는 진짜 도살장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백만 명의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굶주림의 파도가 계속 밀려오고 있 음을 안다... 그리고 이 재앙이 가까이 다가와 독일 위로 넘쳐들어오는 것 을 본다."고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지식인층은 집단학살로 근절되어버렸고, 경제는 아예 망가졌으며, 네바에 있는 수천 명의 도이치 전쟁포로는 물에 빠뜨려 죽였 거나 아니면 노예로 팔았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끝없이 계속되는, 영원 한 두더지 방식으로' 독일에서도 혁명적인 파괴를 위한 전제조건들이 무르 익어 간다고 했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주장은 '러시아가 우리 앞에 있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이미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도 히틀러는 경 력의 초기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국제적인 공산주의의 증오독재에 대한 두 려움'을 다시 이용하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혼란이 성공하게 될 경우, 사 람으로 가득 찬 이 오래된 대륙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립니 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혁명 위협에 대한 거부감에 힘입어서 국가사회주의 는 정열, 공격성, 내적인 결속 등을 얻었다. 히틀러는 언제나 국가사회당의 목표는 "극히 간단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이 절멸과 근절"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도 "비할 바 없는, 천재적으로 만들어진 선전기관과 계몽 기관"의 힘으로, 그리고 "모든 마르크스주의 테러에 대해서 그보다 10배나 큰 테러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가차 없는 힘과 가장 잔혹한 결단력"의 운동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비 슷한 시기에 무솔리니가 '전사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운동은 그로 부터 '파시스트'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혁명공포만으로 저 격렬하고 집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추세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도록 하고, 게다 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뜻하고 있던 혁명에 의문을 가지도록 만드는 에너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하고 원소적인 추진력이 덧붙여 져야 한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전통적인 표상을 향하여 훨씬 더 광범위한 공격을 펼치는 혁명의 전위로서 두려운 것이었다. 은유적인 전복 이념의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현상, 즉 근본적으로 '유럽의... 문화에 대한 선전포고'가 두려운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자체는 이러한 시대의 공포심 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극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였다. 유럽의 문명비관주의 공포심은 단순한 정치적 전복이념을 넘어서서 시대의 지배적인 기본감정 이었다.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위대성, 친근감, 왕조들, 극히 확실한 서류 등을 지닌 전쟁 이전의 유럽뿐 아니라 한 시대의 작별을 고했다는 막연한 느낌이 공포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낡은 지배형식과 아울러 삶의 친근한 형태들도 망가졌다. 불안, 정치화된 대중이 과격주의, 혁명의 혼란 등은 전 쟁의 후유증이었을 뿐 아니라, 낯설고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시대의 전조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낯선 시대에는 전에 유럽을 위대하고 친근하게 만들었 던 것들이 더는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발밑에서 딸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한 시대가 스스로의 과도기를 이토록 뚜렷하게 느낀 경우는 역사 상 매우 드물었다. 전쟁은 분명하게 이 과정을 촉진시켰고 변화과정에 대 한 표상을 아주 일반화시켰다. 이제 처음으로 유럽은 미래의 삶의 형식이 어떤 모양이 될까 하는 개념을 가졌다. 그 동안은 극소수의 기본감정이었 던 염세주의가 이제 시대 전체의 기본 분위기가 되었다. 시대는 유명한 책 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내일의 그림자 속에' 들어 있었다. 그 그림자가 모든 것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전쟁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시대의 현상으로 만드는, 새롭고 거대한 조직화 형식들을 도입하였다. 합리화와 컨베이너 벨트, 기업합동, 재벌 등의 현상들은 모든 작은 존재들의 구조적인 무기력을 전례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세 계전쟁 이전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대도시의 자영업자 수는 이미 절반 가 량이나 줄었다. 이제 그 숫자는 다시 급격하게 줄었다. 전쟁과 인플레이션 이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개인을 빨아들여서 소비하고 내버 리는 익명의 경쟁사회에 대한 공포가 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게 되었 다. 수많은 당시의 상황분석에 보면, 이러한 공포가 확대되어 개인의 존재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는 공포가 되었다. 개인은 해체되어 기능이 되고, 인간은 '의식 없는 기계'가 되어서 조망할 수 없는 과정 속의 일부로 편입 된다. 그것은 광범위한 거부문학이 내용이었다. "존재는 다름아닌 공포로만 보인다." 규격화된 흰개미 같은 존재방식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가는 도시화, 엄 청나게 많은 집들, '잿빛 도시의 벽' 등에 대한 표현들에도 나타난다. 그리 고 고요한 골짜기에 부패처럼 번져나가는 공장 굴뚝을 가진 산업체에 대한 탄식 등에도 나타난다. 가차없이 계속되고 있는, '지구가 지상의 재료와 에 너지를 다 써버리는 단 하나의 공장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으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뒤집혔다. 문명이 세계를 파괴할 것이며 지구는 "농업지역이 섞여 있는 시카고"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항의의 말이 나왔다. (민족관찰자)지의 초기 발행본들은 이렇게 친숙한 것이 몰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기록이다. "우리 도시들은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 반대 의 움직임이 나타날 때까지, 막사들을 부수로 돌더미를 깨뜨리고 구멍들을 만들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성벽들 사이에 정원을 만들고 사람들이 숨을 쉬게 될 때까지인가?" 미리 생산된 부분들을 조립해서 만드는 조립식 건축물, 르 코르뷔지에의 거주용 기계, 바우하우스 양식, 강철관으로 만든 가구 등은 '기술 신즉물주 의'로서 전통적인 의식에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의식은 이 새로 운 양식을 오직 '감옥 양식'이라고만 여겼다. 현대 세계에 반대하는 정서는 20년대의 광범위한 전원주택 운동, 특히 아르타만동맹에서 나타난다. 이 운 동은 땅과 결합된 단순한 생활의 행복을 '아스팔트 문명'에 대비시키고, 대 도시 대중세계의 인간성 상실에 맞서 자연과의 결합을 내세웠다. 갑작스럽 고도 도전적으로 ,타당한 규범과 결별하는 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가장 두 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산주의의 성윤리)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나쁜 소산'일 뿐이다. 혁명은 결혼제도를 없애고 낙 태, 동성애, 이중결혼, 근친 상간 등에 대한 형벌규정도 없앨 것이라고 했 다. 그러나 '규범적 도덕의 대표자이고 옹호자'라고 자처하면서 도덕에 대한 도전을 개인적인 위협이라고 느끼는, 광범위한 중간계층 시민들이 감정에 있어서, 초기 소련에서 생각하듯이 결혼이 단순한 등록업무라는 생각은 참 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적인 욕구는 갈증처럼 하나의 기본적인 욕 구이므로 다른 사정 없이 간단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여긴 '컵의 물 이론' 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폭스트롯 춤과 짧은 치마, '제 국 하수구 베를린'에서의 오락욕구, 성 병리학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의 '지저분한 그림들'이나 시대의 남성상 ('찰스턴 바지에 크레이프 신발창을 댄 고무신사, 올백으로 빗어넘긴 번쩍이는 헤어스타일') 등은 대다수 사람 들의 의식에 상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 돌아보면 역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다. 20년대의 도전적인 연극 무대에서는 부친살해, 근친상간, 범죄, 시대 의 저급한 취향 등이 시대를 비웃고 있었다. 브리히트와 바일의 오페라 (마하고니)에서 배우들은 무대 앞쪽 가장자리로 나와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적인 플랜카드를 보여주었다. '우리 도시들의 혼란 상황을 위해서!' '사랑을 사고팔기 위해서!' '살인자의 명예를 위해서!' '비열함이 영원히 계속되도 록!' 미술에서의 혁명적인 시작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완성되었다. 히 틀러 자신이 처음에 빈에서, 그리고 뒷날 뮌헨에서 참여하지 않은 증인이 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줌 몽상가들의 아웃사이더 행위로 여겨 지나쳐버렸지만, 전복, 혁명, 해체에 관한 그림들이 홍수를 이루게 된 지금 전통적인 유럽의 인간상에 대한 선전포고로 여겨지게 되었다. 야수파, 푸른 기사파, 다리파 혹은 다다 등은 혁명만큼이나 과격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인기있는 용어였던 '문화 볼셰비즘'이란 말은 이러한 내면적인 맥락의 의식 을 보여준다. 무정부주의, 멋대로 구는 것, 형식 없음 등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현대예술이란 '혼돈의 졸작' 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으 며, 이 모든 징후들이 뭉쳐서 복합적인 공포심이 되었다. 시대의 유행이던 염세주의는 이러한 공포심을 위해서 '서양 몰락'의 형식을 찾아냈다. 이 모 든 원한들이 뭉쳐져서 단 하나의 절망적인 방어의 행동이 되는 날을 두려 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거대한 경향 시대에 뒤진, 혹은 체면을 잃은 사회적, 문화적 형식들에 대한 파괴욕구 는 도이치 사람들의 보수적 기질에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저항감은 바로 독일에서 19세기 말의 분위기와 논점들과 결합될 수 있었 다. 기술적, 경제적 현대화 과정은 독일에 뒤늦게 나타났지만, 다른 어느 곳 보다 빠르고 과격하게 진행되었다. 도어스타인 베블렌이 요약한 것처럼 이 나라는 과격하게 산업혁명을 수행하였다. 그 정도로 빠른 발전의 "전례는 서유럽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따라서 이 과정은 더욱더 거친 극복의지를 일깨웠고 더욱 격렬한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 널리 퍼진 생각과는 달리 독일은 성취와 뒤늦음, 봉건적 요소와 진보적 요소, 권위적 요소와 사회국 가적 요소가 거의 해체할 수 없도록 결합된 가운데 다채로운 모범이 되어 서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유럽의 가장 현대화된 국가로 간주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국민총생산은 두 배 이상이 늘어났고, 납세의무를 질 정 도의 수입이 있는 인구가 30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늘었고, 강철 생산량은 1887년에 영국의 절반 수준이던 것이 대전 직전에는 영국의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식민지들이 정복되고 주식회사의 수는 2,413개에서 5,340개로 늘 었고, 함부르크 항의 화물 선적량은 뉴욕, 암스테르담에는 뒤지지만 런던을 앞질러서 세계 3위에 올랐다. 동시에 이 나라는 정확하고 절도있게 통치되 었으며, 온갖 부자유스런 잔재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도로 내면적인 자유, 행정상의 정의, 사회적인 안정 등을 누렸다. 독일 제국의 전체 이미지에 나타나는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인 표현은 경 제외적인 현상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측량하기 힘든 봉건적 구 조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바쁜 나라, 성장하는 대도시와 산업지구 위에는 상당히 낭만적인 하늘이 덮여있 었다. 이 하늘의 어둠 속에 신화적인 인물들, 고대의 거인과 신들이 살고 있었다. 독일의 뒤처짐은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반계몽주 의, 게르만 민속학, 시민계급의 장식욕구 등이 여기에 작용하였다. 시민계 급은 스스로 그토록 쉬지 않고 열심히 추구하던 물질적 목적들을 넘어서 장식에 더욱더 높은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취향의 바 탕에는 여전히 현대세계에 대한 문화시민적인 저항감이 드러나 있었다. 그 러한 저항감은 정열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자극을 받게 된다. 새로운 산문적인 현실에 대한 저항의 몸짓은 회의적인 정신이 아니라 염세적, 낭 만적인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며, 반혁명적 저항을 위한 준비상태가 되어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은 특히 확장된 문명비판적인 분위기에서 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파울 드 라가르드, 율리우스 랑벤, 오이겐 뒤링 등이 대표하는 문인 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불쾌감은 일반적인 문 명위기의 분위기 징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재치없고, 실용적인 낙관론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 그러한 문명위기의 분위 기는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보였다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 행동파, 혹은 모 라와 바레스의 선언에서 공감과 추종자를 볼 수 있다. 가브리엘 다눈치오, 엔리코 코라디나, 미구엘 우나무노, 디미트리 메레슈코브스키, 블라디미르 솔로브요브, 크누트 함순 , 야콥부르크하르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등 도 각각 아주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슷한 두려움과 저항을 표 현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을 그 우직한 은둔주의에서 갑작스럽게 현대성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계속 고통스러운 단절과 이별을 요구하였던 저 급격하고 자른 듯 한 변화는 이곳의 저항이 유럽 다른 어떤 곳보다도 과격한 음조를 갖도록 만들었다. 현실에 대한 과격한 두려움과 혐오감은, 이미 사라져버린 낙원의 질서를 향한 낭만적인 그리움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전통도 아주 멀리서 온 것이다. 문명화 과정의 '황폐화'에서 고통 받는 것은 루소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불쾌감을 표현한 사람들은 진보를 경멸하였고, 어느 정도 긍지를 가지고 시대에 뒤처진 것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철저히 시대에 맞 지 않는 관찰자들이었다. 라가르드가 쓰고 있듯이 이런 사람들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독일을 보고 싶어하였다. 자 기들에게 마주서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그들은 오만한 경멸을 드러냈으며 '외눈박이 이성'을 비웃었다. 부분적으로는 예리하기도 한 비합리주의로써 그들은 주식거래, 도시화, 강제접종, 세계경제, 실증과학 등에 반대하였고, '빨갱이'와 최초의 비행 시도에 반대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세계 전 체의 해방과정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파국에 이른 '영혼의 몰락'이라는 총체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분노한 전통의 예 언자'로서 파괴과정에 정지를 명령하고 "옛날의 신들이 다시금 파도에서 떠오르는" 날이 오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들이 현대세계에 마주 세운 가치관은 자연성, 예술, 과거, 귀족주의, 죽 음에 대한 사랑, 강한 개성의 권리 등이었다. 특이하게도 도이치 문화의 붕 괴를 고발하는 항의는 자주 제국주의적인 사명의식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공포는 공격으로 바뀌고, 절망은 위대한 것에서 위로를 구하 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대추세를 반영한 가장 유명한 책은 율리우스 랑벤 의 (교육자 렘브란트)였다. 그것은 1890년에 출간되었는데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서 2년 만에 40판을 거듭하였다. 거대한 공포, 반현대, 민족주의적인 소명에 대한 망상 등을 다룬 극단적인 문서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는 이 책 자체가 정열적이고 분노한 위기의 표현이라는 사실 뒷받침해준다. 이 반문명적인 감상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된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낸 것은, 사회적 다원주의와 종족이론들의 경우에도 비슷했지만, 반민주적인 이념들과 결합되면서였다. 반문명적인 감상주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의 원칙에서 정치질서를 얻은 자유주의적인 서구사회의 몰락을 진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도 전유럽적인 성격을 가졌다. 줄리앙 방다는 뒷날 이 렇게 썼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890년경의 문필가들은 "절대적 권위, 기율, 전통, 자유정신의 멸시, 전쟁과 노예제도의 도덕적 정당성 등의 신조가 자부심 강하고 굽히지 않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놀 라울 정도로 날카롭게 의식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신조가 감상적인 자유주 의와 휴머니즘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였다." 현대성의 문제는 온갖 문학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적인 소수 계층의 문제였지만-다시 독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반문명적 감 상주의의 정서는, 특히 그 정서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정서 를 몽상적이고 순수하게 표현하였던 젊은층의 운동을 거치면서 점차 지속 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도이치 사람들의 성향은 계몽주의에 반대하고, 계몽주의의 결과라고 오해되고 있 는 사회의 혁명에 반대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심은 과거 에 존재한 적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뀌려는 경향을 가졌다. 심정과 정신은 기존의 것으로 가득 차서 미래와 새로운 목적을 위한 자리 가 남지 않을 정도다. 감정 숭배가 이성 숭배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마지막으로 시대의 반문명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와 결합되었다. 헤르만 바르는 전 유럽에 걸친 조사의 결과 "도이치 반유대주의는 반동적이다."라 고 적고 있다. "산업발전에 대항하는 소시민의 폭동이다." 유대인과 모더니 즘의 동일시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본주의의 경쟁체제에서 유대인이 특별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온갖 공포의 가장 강력한 근거였다. 베르너 조바르트 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시키는 것이 유대인의 사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아직도 보수적인 초기 자본주의 조직의 찌꺼 기를 없애고, 최후의 수공업 및 수공업적인 소매방식을 없애는 것"도 역시 유대인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발전을 배경에 놓고 보면 전통적으로 종교적 동기를 가진 유대인 에 대한 증오가 19세기 후반기에 생물학적인 혹은 사회적인 근거를 가진 반유대주의로 발전하였다. 독일에서 특히 철학자 오이겐 뒤링과 실패한 언 론인 빌헬름 마르는 ((비종파적인 관점에서 관찰한, 게르만에 대한 유대의 승리, 패배자여 슬퍼하라!)는 특별한 제목을 가진 책에서) 이러한 경향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서 애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유럽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한 반성이었다.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분명히 프랑스보다 더 강하지 않 았다. 그리고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이중왕국의 반유대주의보다 훨씬 약했 다. 그래서 당시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 출판물들이 그토록 널리 퍼져도 이념 자체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러나 비합리 적인 동경이 주인 잃은 개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던 시절에 반유대주의는 바 로 절반의 진실만을 가진다는 이유로 광범위한 불만을 담는 그릇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인 크기로 확대된 불안의 표현형식에 불과하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리하르트 바그너가 모든 현상들에 나타나는 현대세계의 탈마법화 과정에 반대하면서 예술의 마법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분 위기를 신화적으로 번역하여 작품 속에서 압도적인 효과를 내도록 만든 것 이 바로 그의 작품의 효과와 반항의 원천이었다.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 황 금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의식, 종족적인 두려움, 반물질적인 의도, 천박한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대한 경악, 다가오는 몰락의 예감 등이 바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시대분위기였다. 전쟁은 시민 시대가 자기 자신의 반항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마구 풀어놓 고 과격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황폐한 문명의 일상에서 사라져버린, 들어보 지도 못한 자기상승의 가능성을 존재에 되돌려주었으며, 폭력을 신성한 것 으로 만들고 구조해체에 승리를 마련해주었다. 에른스트 융거가 끈 것처럼 화염방사기로 이룩된 '허무에 의한 거대한 청소'였다. 전쟁은 자유주의적이 고 인문주의적인 문명이념의 거부였다. 다시금 유럽 스타일의 폭넓은 변용 문학에서 불려나온, 다양한 개혁이념의 출발점이 된 전쟁 체험의 마적인 힘은 바로 이러한 체험에 그 원천을 두고 있었다. 동시에 전쟁은 그 후계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성급하고 고독한 결정의 감각, 절대적인 복종 과 일치단결한 마음의 감각을 가르쳐주었다. 의외주의 질서의 타협적 성격, 허약한 결정력, 빈번한 마비상태 등은, 전쟁에서 완벽한 군사적 업적집단의 신화를 불러온 세계에게는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하였다. 베르사유의 배신 이러한 맥락들은 어째서 민주공화국과, 비록 패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었다고 해도 베르사유 조약 체계 속으로 독일을 편입시키는 것이 쉽지 않 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반문명적인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 주공화국이나 베르사유 조약이란 정치상황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자기 민 족에 대한 하나의 죄악, 형이상학적인 배신행위, 깊은 불충행위로 여겨졌 다. 그것은 낭만적이고 생각이 깊고 비정치적인 독일을, 순간의 입장을 위 해서 서유럽적인 문명이념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민족관찰 자)는 베르사유 조약을 '매독평화'라고 불렀다. 그것은 매독처럼 "짧은 한 순간의 금지된 쾌락에서 생겨나와 조그만 종기로 시작되어서 점차 사지와 관절로 퍼져나가서 마침내 죄인의 심장과 뇌속까지 덮치는" 질병이라는 것 이다. '체제'에 대한 정열적이고 근본적인 저항은, 친권, 진보측의 선동, 계몽의 불길, 통속성, 부패, 복지를 찬양하는 '문명의 제국주의' 등에 대한 참여거 부로 나타났다. 당시 수많은 고발장에서 충성, 신의 은총, 조국애 등과 같 은 도이치 이상들은 '혁명과 혁명 이후 시대의 태풍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민주주의, 폭로운동, 거침없는 자연주의, 동지애적 결혼' 등이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공화국이 계속되는 동안 언제나 빌헬름 시대의 반문명적인 출발점을 이 어받은 우파 지식인 쪽에서 소비에트 연방, 혹은 정확하게 말해서 러시아 와의 결속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게 된다. 러시아는 어머니의 땅, 심정의 땅, '제 4차원', 기대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내부의 영 국'에 대한 전쟁을 촉구하였다면, 민족의 영적인 동일성을 찾으려는 저항의 기수, 에른스트 니키쉬는 이렇게 썼다. "눈길을 동쪽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이미 도이치의 각성이다... 서쪽으로 가는 것은 도이치의 몰락이었다. 동쪽 으로 돌아서는 것은 도이치이 위대함을 향해 다시 상승하는 일이 될 것이 다." 서유럽의 '천박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프로이센-슬라브 원칙'을 내 세웠다. 유물적이고 탈신화된 서유럽 세계를 통해서 도이치 본질이 압도될 까 하는 두려움이 여기서는 공산주의 세계지배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전후 처음의 상황은 혁명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반문명적인 원한을 활 성화시켰다,. 그 두가지는 합쳐져서 독자적으로, 그러나 번갈아가며 상대방 을 밀쳐올려 주면서 비상한 역동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밑바탕까지 흔들린 사회에서 생겨난 증오와 방어 콤플렉스와 결합되었다. 이 사회는 황제의 영광, 시민질서, 민족적 자의식, 복지, 권위, 사회적인 상하 체계까 지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분노에 사로잡혀 부당하게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 는 것을 되찾으려고 하는 사회였다. 이런 전반적인 불만은 충족될 길 없는 다양한 집단 이기주의를 통해서 커지고 점점 과격하게 되었다. 특히 점점 늘어가던 샐러리맨 계층은 전체 적인 비판의 거대한 몸짓이 특별히 민감하였다. 산업혁명은 이제 처음으로 사무실을 기습하여 '자본주의의 하사관'들을 '현대적 노예제도'의 마지막 희 생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노동자와는 달기 자기들만의 계급 의식이나, 아니면 현존질서가 붕괴될 경우 자기들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일종의 유토피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대기업, 백화점, 합리화된 경쟁자 등에 대해서 공포심을 느낀 중간층 상인들 역시 적잖이 민감하였 다. 전통적으로 행동이 느리고, 방책도 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시대에 뒤떨 어진 구조에 붙박여 있던 광범위한 농업계층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지식 인층과 예전의 견고한 시민계층도 사회가 프롤레타리아화하는 이 거대한 궤도에 자신들이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찬가지 기분을 느꼈다. 생계대책이 없으면 "금방 쫓겨나고 신분이 추락하고 실업자가 된다. 그것 은 공산주의자와 같이 되는 것이다." 라고 당시 설문지에 어떤 사람이 썼 다. 인플레율, 자살자 통계, 파산 등에 대한 어떤 통계도 실업, 빈곤, 실직 등 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혹은 아직은 무엇인가 를 가지고 있지만 수없이 쌓인 불만의 폭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근심을 표현해주지 못한다. 공공기관들은 언제나 허약한 태도로, 흔들리는 기반 위 에서 마구 뒤섞인 집단 감정에 대항하여 어떠한 안심도 제공하지 못하였 다. 두려움은 이제 라가르데와 랑레벤의 시대처럼 무기력한 말만으로 국한 되지 않았다. 전쟁이 공포심에 무장을 시켜준 것이다. 일부는 개인 주도로, 일부는 위장된 국가기관 주도로, 특히 공산주의 혁 명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민방위대와 의용군은, 상황 전체에 대한 막연하지만 확고한 저항심리 속에서 자기들을 새로운 질서로 안내해줄 어 떤 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처음에는 군대 에너지를 저장한 저수 탱크 같은 대규모의 귀향군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후에 도 군대막사에서 목적 없는 군인생활을 계속하였다. 어쩔 줄 모르는 태도 로 청춘의 야망이었던 전쟁의 꿈과 작별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전선의 참 호 속에서는 불확실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윤관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단하게 시작되고 있는 이 평화시대에는 의미 같은 것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옛날 적들의 찌꺼기에 밀려가는 이토록 허 약한 정부를 위해서 4년 동안이나 드높은 이상을 가지고 전선에서 싸우고 고통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귀향군인들은 전쟁을 체험한 다음 이제 시민적 일상에서 자기들을 추락시키는 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파시스트 유형 히틀러 히틀러는 처음으로 이러한 불만들, 시민들의 불만과 군인들의 불만을 한 데 합치고 거기서 영도력과 추진력을 찾아냈다. 실제로 그의 출현은 이 모 든 불안, 염세주의, 이별과 자기방어의 느낌들을 종합한 것처럼 보인다. 그 도 전쟁 중 강력한 구원 및 성장체험을 쌓았다. '파시스트적인' 유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그런 유형이었다. 그가 얼마간 망설이면서 활동을 시작 한 뒤로 급격하게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한 추종자들 중 누구도 히틀러 자 신만큼 심리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인 추진력을 드러낸 인물은 없었다. 그는 그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들의 대표자였다. 이미 초년의 체험들이 그에게 강력한 공포의 체험을 마련해 주었다. 그 것은 그의 사고와 감정의 전 체계에 각인되었다. 그의 모든 말과 반응의 배경에서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모든 것 뒤에 공포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고, 공포는 일상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을 보였다. 린츠의 대부, 대모 와 아우구스트 쿠비체크, 그라이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초기의 관찰자들 은 그가 창백하고 '깜짝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것은 일찍부터 환상적인 생각들의 토대가 되었다. 낯선 사람이 건드리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일이나, 사람을 극단 적으로 불신하는 것이나, 뒷날 점점 강해지는 결벽증 등은 바로 여기에 근 거하고 있다. 성적인 오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떤 형태든 전염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이다. "미생물들이 나를 공격한 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도이치 운동이 표방했던 외세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유대인이 메 뚜기 떼처럼 덮여'오는 것, '도이치 사람들이 깜둥이로 변화되는 것', 도이 치 사람들이 '독일에서 쫓겨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근절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민족관찰자)에 그는 이른바 프랑스 병사의 시를 게재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후렴구를 가진 것이었다. "도이치 사람들아. 우리가 너희 딸들을 소 유하리라!" 미국의 기술, 슬라브인의 출생률 증가, 대도시, 제한도 없고 해 로운 산업화, 국민의 경제적 낭비, 익명의 주식회사, 진흙창 같은 대도시 향락문화, 그리고 푸른색 초지와 녹색 하늘을 그려서 '민족의 영혼을 죽이 려고'하는 현대 예술 등에 대해서도 불안감이 있었다. 이러한 부패과정을 막아보려는 확고한 의지에서 히틀러는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광적인 배타성이 그를 다른 사람 과 구별시켜준다. 그는 이제껏 느낀 공포의 모든 요소들을 단 하나의 원인 으로 돌렸다. 거대하게 쌓아올린 공포체계 한복판에 검은 ㅌ복숭이 유대인 의 영원히 오염시키는 모습이 서 있다. 나쁜 냄새가 나고, 입맛다시며 금발 처럼, 아리안족보다 '종족적으로 더욱 강한' 유대인이었다. 이렇게 제압당한 다는 고정관념에 깊이 사로잡힌 채 그는 독일이 음모의 대상이라고 여겼 다. 볼셰비키 당원들, 프리 메이슨, 자본주의자, 예수회 등이 사방에서 포위 하고,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전략적으로 '피와 돈에 굶주린 유대인 폭군 들'의 명령을 받으며 독일 멸망작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세계자본의 75퍼센트를 이용하고, 주식과 공산주의를 지배하고 있으며, 황금 인터내셔널과 붉은 인터내셔널을 장악하고, 산아제한과 이민 사상을 전파하고 있으며, 국가들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고, 종족을 오염시 키고, 형제살해를 조장하며, 내전을 조직하고, 천박한 것을 정당화하고, 고 상한 것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 운명의 조종자'였다. 전세계가 이 '히드라의 마수의 걸려'들어서 위험에 빠졌다고 히틀러는 외쳤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독'을 보았고, 유대인들이 '구더기' '회충' '민족의 몸을 파먹는 독사'라고 여겼다. 공포를 표현할 때 가장 재치 있고 우스꽝스 러운 표현들을 이용하고, 그러한 표현들은 인상적인 혹은 매우 지속적인 이미지들이 되었다. 그는'우리 영혼의 유대인화' '우리의 짝짓기 욕구의 배 금주의', 그리고 '거기서 유래하는 민족의 매독 감염'이라는 표현들을 찾아 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유대인이 공산주의 신앙고백으로 이 세계 민 족들을 정복하면, 그의 왕관은 인류의 죽음의 화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이 혹성은 수백만 년 전처럼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대기를 가르며 흘 러갈 것이다." 지도자 이념 위태로운 조건 아래서 정치적으로 거대한 힘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에너지는 히틀러가 가세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파시스트 운동은 사회 적인 배경으로 보아 세 가지 요소에 기반하였다. 첫째 도덕적, 경제적, 반 혁명적 불만을 가진 소시민의 요소, 둘째 군사적, 합리적 요소, 셋째 독특 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라는 요소였다. 지도자란 혼란시에 명령을 내리는 질 서의 확고한 목소리이고,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할 줄 알며, 절망도 알지 만 구원의 방책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지도자 유형은 도이치 민중설화에 거슬러오르기까지 수많은 문학적 약속 들 안에 드러나 있었다. 역사상 불행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의 신화도 그렇 듯이 도이치 민중설화도 수백 년 동안 잠에 빠진 채 산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돌아와서 민족을 구 하고 죄 많은 세계를 벌줄 것이다. 그리고 20년대에도 염세적인 문인들은 바로 이러한 동경과 연결된 수많은 주문들을 읊어대고 있었다. 슈테판 게 오르게의 유명한 시에서 그런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일어나 폐허에 질서를 일으키고, 길잃은 자를 채찍질하여 올바른 곳으로 돌려보내다. 그곳에선 위대한 것이 다시 위대해지고 주인이 다시 주인이 되고, 기율이 다시 기율이 되다. 그는 민족의 깃발에 참된 상징을 덧붙이도다. 폭풍과 거친 신호를 뚫고 안내하시고 새벽 여명에 충실한 부하들을 일터로 보내 밝은 대낮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나니. 같은 시기에 막스 베버는 탁월한 지도자의 품성에 대한 이미지를 전재하 였다. 그는 국민적인 정당성, '맹목적인' 복종에 대한 요구 등을 들었다. 그 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미래의 비인간적인 관료주의 이 시대는 매우 다른 원천과 매우 다양한 동기에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막연하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시에서, 그리고 과학적인 이성에서도 이러한 이념에 대 한 지지가 있었다. 파시스트 운동에서 발전해 나가는 지도자 이념은 다시금 전쟁의 체험에 서 활성화를 얻었다. 이러한 운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동활동이 아니라 군사적 세계관을 가진 단체, '정당들 위에 있는 정당' 이었다. 전쟁의 어두 운 상징과 확고한 얼굴로 단행한 싸움은 전쟁의 수단을 거의 고스란히 이 용해서 정치영역에서 전쟁을 계속하였다. "현재 우리는 계속적인 전쟁상태 에 있다."고 히틀러는 거듭 외쳤다. 이탈리아의 외무장관 치아노 백작은 파 시스트가 '전쟁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도자 숭배는 '항구적인 전쟁이라는 허구' 안에서 군사적 서열 원칙을 이 운동의 내부조직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지도자의 출현은, 초인간적인 높이까지 오도된 믿음의 요구이며 헌신의 열망으로서, 마법의 영역으로 올 라선 장교상이었다. 유럽의 모든 포도 위에 울려퍼진 행진의 발검음 소리 는, 사회문제들도 군대식 모델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비로 이러한 엄숙주의가 장래를 생각하는 젊은층에 게 강력한 매력 포인트였다. 그들은 전쟁, 혁명, 혼돈에서 '기하학적' 질서 계획을 찾아냈다. 동일한 동기에서 파시즘 운동은 준군대적인 방식으로 출현하게 된다. 즉 제복입기, 인사, 신고, 직립부동 자세 등 의ㄹ적 부분, 몇 가지의 기본요소 로 축약되는 요란한 상징성, 특히 여러 가지 형태의 십자가들, 노르웨의 '의외'의 올라프 십자가부터, 포르투갈 급진노동자들의 붉은 색 안드레아스 십자가에 이르까지 여러 가지 십자가들, 화살, 고대 로마의 속간(권위를 상 징하는 막대기), 큰 낫 등 모든 것이 끊임없이 깃발, 휘장, 군기, 완장 등에 그려졌다. 이러한 요소들은 코트와 깃을 치켜세우는 오래된 시민적 관습만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엄격하고 기술적이며 익명성의 윤리로 무장한 현대정신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동시에 제복과 군인 장식 아래서 사회의 대립들이 감추어지고, 시민사회 이상이 광채 없고 감 정 없는 상태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했다. 문화혁명으로서의 파시즘 무엇보다도 국가사회주의의 특징이 되는 소시민적 요소와 군사적 요소의 결합은 처음부터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에 독특한 이중성격을 부여 하였다. 국가사회주의 돌격대와 정치기구를 조직적으로 분리하였다는 점에 도 나타나며, 추종세력이 매우 다양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확산 을 가진 이상주의자들이 사회적 실패자들, 절반 범죄자들이나 기회주의자 들과 어울려서 업적을 세우려고 열올리고, 보수윤리와 노동 혐오, 이익 찾 기, 비합리적인 행동주의 등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집단이었다. 대부분의 파 시스트 조직에 특징적인 엉터리 보수주의는 이 사실에서 유래한다. 망가지 고 모욕당한 세계질서를 지키려 한다는 주장하면서도, 힘을 얻게 되면 전 통과 무관한 변화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중세와 현대성의 혼합은 그들 의 특성이 되고 있다. 미래에 등을 돌린 전위의식과, 전체주의적 강제국가 의 아스팔트 위에서 민속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아득하게 빛 바랜 선조들의 꿈을 한 번 더 꾸고, 과거를 찬양하였다. 그것이 로마 제국 이었든, 에스파냐 카톨릭의 지배였든, 대 벨기에, 대 헝가리, 대 핀란드 되 었든 간에 과거의 몽롱한 윤곽 속에서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미래의 약속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현대 기술수단의 모든 도움을 받은 가운데, 가장 계획적이고 냉혹하고 현실주의적인 기도로 이루어진 히틀러의 권력장악 출발은 복잡하고 소도구 와 상징들을 동반하였다. 그것은 초가지붕, 세습농지 농지계급, 민속춤, 태 양 축제, 어머니 십자가들이었다. 토마스 만은 그것을 '폭발하는 고대풍'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성을 모르는 반도의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히틀 러의 요구는 세계의 치유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 좋던 옛 시절을 단순히 불러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며, 그의 길을 눈 감고 따 라갔던 감상적인 반동주의자들이 생각했듯이 과거의 봉건제도를 불러오겠 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아니라 문명 화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의 자기소외 현상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경멸했던 경제적 혹은 사회적 방법으로 그러헥 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파시즘 지도자의 한 사람처럼 그는 사회주의를 '오른쪽 배 위편의 역겨운 자극'이라고 여겼다. 그의 의지는 피와 영혼의 어둠에서 내적인 갱신을 지향하였다. 정치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본능의 복권을 지 향한 것이다. 의도나 구호로 보면 파시즘은 계급혁명이 아니라 문화혁명이 다. 그것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하였다. 파 시즘이 공감을 얻은 것은, 인간정신의 자연적인 움직임에 따라 모든 잃어 버린 낙원이 있는 곳, 즉 그 옛날 신화적인 원초상태에서 유토피아를 찾았 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시 지배적이던 미래에 대한 불안은 모든 신성한 것을 과거에 두려는 성향을 강화시켰다. 파시스트 '보수주의'에는 역사 발전을 혁명적으로 바꾸 어서 한 번 더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작용하였다. 이 모든 오류가 시작되기 이전의, 자연적이고 조화로우며 더 나은 시대로 돌아가려 는 소망이었다. 1941년의 한 편지에서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지난 1,500 년은 하나의 단절에 불과하며, 역사는 '그 옛날의 길로 되돌아' 가려고 한 다고 썼다. 예전의 상황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측면 에서 터져나오는 해체의 힘들을 보며서 그 옛날의 가치체계, 그 스타일, 그 도덕성 등을 회복하는 것이 히틀러에게 중요했다. "다가오는 혼돈을 막을 댐을 건설하자!"고 히틀러는 부르짖었다. 감정의 동일화 혁명적인 요소를 아무리 강조해도 국가사회주의는 한 번도 방어적 기본 자세를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의 본질이며, 툭하면 내보이곤 했던 대담한 검투사 자세에 모순되는 것이다. 콘라트 하이덴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도망중의 허풍'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상승에 대한 공포, 새 로운 경향과 모르는 별들에 대한 공포이며, 쉬지 않는 정신에 대항하며 새 로운 경향과 모르는 별들에 대한 공포이며, 쉬지 않는 정신에 대항하며 쉬 고 싶은 육체의 항의"라고 했다. 이러한 방어자세에서 히틀러는 대소련 전 쟁 발발 직후 자기는 이제서야 중국인들이 어째서 만리장성을 쌓였는지 이 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도 "중앙 아시아의 대중으로부터 새로운 동유럽을 지켜줄 거대한 성벽을 소망하였다. 방벽 안에서는 힘이 약해진다 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는데도 그렇다." 수많은 경쟁세력들에 비해서 파시즘이 우세했던 것은 그것이 시대위기의 본질을 더 날카롭게 파악했다는 것과 상관이 있다. 파시즘 자체가 바로 위 기의 징후였다. 다른 모든 정당들은 산업화와 해방과정을 긍정하였다. 오직 파시즘만이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를 함께 느꼈다. 그래서 파시즘은 사람들 을 소란스런 행동과 드라마 속에 몰아넣고 두려움을 잊게 만들려고 했다. 낭만적인 의식을 통해서 산문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잊게 만들려고 했던 것 이다. 횃불행진, 해골들, '하일'하는 외침과 전투의 외침, '삶을 위험과 짝짓 게 만들기' 등이었다. 파시즘은 과거를 암시하는 가장행렬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현대적인 과제 를 내주었다. 파시즘의 성공은 물질에 대한 관심을 맨 끝으로 돌리고 '정치 를, 개인들이 이념을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하는 영역'으로 취급한 데서 온 것이다. 대중에게 더 높은 기준임금을 제시한 다른 정당들보다 파 시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깊은 욕구를 제대로 맞춘 것이다. 파시 즘은, 공산주의나 자유주의 진영처럼 오직 이성과 물질에 관심만 따르는 인간은 괴물 같은 추상이라는 사실을 모든 경쟁자들보다 앞서서 제대로 인 식하였던 듯하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동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전면적인 변화 에 대한 시대의 동경에 경쟁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오직 파 시즘만이, 모든 것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세계는 엄청나게 잘못된 길로 빠 져버렸다는 시대의 감정을 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는 계급 정 당이며 낯선 세력의 보조부대라는 명성 때문에만 매력이 적었던 것은 아니 다. 공산주의는 바로 이 잘못된 길을 자기편으로 삼고 처방을 내놓고 있지 만, 실은 공산주의야말로 저 질병의 원인균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공산주의 에 치명타를 입혔다. 공산주의는 시민적 물질주의의 과격한 부정이 아니라 물질주의를 뒤집은 것이라는 것, 부당하고 무능한 질서의 극복이 아니라 오직 그 질서의 원숭이며 위아래가 바뀐 거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권위를 위한 궐기 히틀러의 분명한, 그리고 과도한 성공에 대한 확신은 자신이 기존 질서 에 대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혁명가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인 간의 본능을 다시금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본능과 결탁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꺾이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다. 본능은 '경제적인 이익에 맞서서, 여론의 압력에 맞서서, 심지어 이성에 맞서서' 언제나 스스로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본능을 끌어들인 일은 수많은 열등감과 인간적인 약점들을 드러냈다. 파시즘이 명예 회복시키려고 하는 전통도 실은 일그러진 전통상 이며, 파시즘이 축하하는 질서도 단순한 질서의 연극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파시스트 추종세력을 '인간 쓰레기'라고 얕잡아보았다면, 그것 은 인간과 인간의 욕구와 그 충동에 대한 좌익세력의 무지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좌익은 스스로 인간의 정신과 그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주장 하면서도 시대를 판단하는 데 수많은 심각한 오류들을 범하였다. 파시즘은 단순히 낭만적인 욕구에만 답변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불안 에서 생겨난 파시즘은 권위를 위한 원초적인 궐기, 질서를 위한 폭동이기 도 했다. 이러한 표현이 보여주는 모순이야말고 파시즘의 본질이다. 파시즘 은 궐기이며 복종이고, 모든 전통과의 단절이며 그 복구이고, 민족공동체이 며 가장 엄격한 위계질서이고, 사유재산과 사회적 정의이고 했다. 그러나 파시즘이 자기 것으로 삼은 그 모든 요청들은 강제로 만들어진, 강력한 국 가의 권위를 포함하였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민중은 권위, 인도, 질서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무솔리니는 확인하였다. 시대경향의 급전환 그는 '자유여신의 약간 부패한 시체'에 대해 말하면서 자유주의는 '사람들 이 떠나버린 사원의 문을 닫으려고' 한다. '현대의 모든 정치 체험은 반자 유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 특히 1차 세 계대전 말에 자유주의적인 의회 체제로 바꾼 국가들에서 의회주의의 능력 에 대해 점차 더 많은 의구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국가들의 현대화가 단호하게 이루어졌을수록 이러한 의심은 더욱더 강했다. 과도기의 폭발적 이고 힘든 위기 조선에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수단들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는 느낌, 자의식을 가진 대중에게 민주주의의 지도력은 너무 미약하다는 느낌이 사방으로 퍼졌다. 정당간의 쓸데없는 다툼, 정당 정권의 온갖 유희 와 힘없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정사실을 앞에 놓고 아무런 선택권도 없던 옛시절에 대한 동경이 되살아났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중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모든 중부와 동부 유럽 국가들, 그리고 상당수의 남부 유럽 국가에서 의회제도가 몰락하였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에스파냐, 포르투갈, 그리고 독일 등이었다. 1939년 에는 아홉 개 나라만 의회국가로 남았다. 그들 중 일부는 프랑스 제3공화 국처럼 '이상한 국가'였으며 일부는 군주제에 의해서 안정을 얻고 있었다. '파시스트 유럽이 가능한 상황' 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국민의 공격적인 원한만이 세계상황을 전복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염증과 경멸과 체념의 분위기가 국경선에 관계 없이 자 유주의 시대에 작별을 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동적인 형태로도 진보 적인 형태로도 나타났으며, 탐욕스런 형태로도 사욕없는 형태로도 나타났 다. 1921년 이후로 독일에는 신념을 가지고 의회주의를 표방하는 의회의 다수파가 없었다. 자유주의 사상은 거의 옹호자가 없었고 수많은 잠정적인 적대자들만 있었다. 이러한 의회주의의 적대자들에게 하나의 동기, 불붙이 는 구호, 지도자만 나타나면 되는 상황이었다. 2부 선동가에서 정치가로 제1장 도이치의 미래 1919년 이른 여름 히틀러의 등장은 바이에른의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꾸 바뀌면서 등장하는 수많은 배우들을 순식간에 어둠에서 날카로운 무대조명을 받는 자리로 밀어내면서 빠르게 밀려가는 혼잡한 흐 름 사이에서 차츰 창백하고 뚜렷하지 않은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혁명과 반혁명의 혼란 속에서, 아이스너, 나키쉬, 루덴도르프, 로소브, 로스바흐, 카 르 같은 사람들 중에서 히틀러보다 덜 중요한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재력, 그보다 더 이름 없는 출발점을 가진 사람은 없었으며, 그보다 더 아무 방책 없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영원히 병영에 사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뒷날 자신이 '1차 대전의 이름없는 상병'이었다고 말하기를 좋아했 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 했던, 오직 신화적인 맥락 에서만 이해되는 자신의 출세를 설명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3년이 지나자 벌써 그는 1919년 전반기에 저항하면서, 혹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 섰던 정치무대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어떤 도시도 뮌헨처럼 심하게 혁명적인 사건들과 전쟁 직후의 저항에 사로잡히고 뒤흔들린 곳도 없었다. 베를린보다 이틀이나 앞서 1918 년 11월 7일에 이곳 뮌헨에서 좌파 성향을 가진 몇몇 아웃사이더들이 세계 를 개선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해 온 바이에 른 천년 왕조 (1180~1918년)를 무너뜨리고 기습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수염을 기른 보헤미안이며 (뮌헨 포스트)의 연극비평가였던 쿠어트 아이스 너의 지휘를 받은 그들은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 해서, 독일의 상황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서 '국제연맹을 위해 무장시키고' 이 나라를 '가장 나쁜 상황에서 보호해 줄 평화를 일깨우려고' 하였다. 미국 대통령의 허약함과 자기부정, 우파의 증오심이 아이스너의 모든 전 망을 망가뜨렸다. 우파의 증오심은 오늘날까지도 '나라도 종족도 다른 떠돌 이들'과 슈바빙의 볼셰비스트들을 헐뜯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이스너 혹은 새로 등장한 사람 중 그 누구도 바이에른 출신이 없었고, 반시민적 지식인, 드물지 않게 유대인 지식인 유형이 각광받았다는 사실에서 지역감 정이 분명한 이 지역에서 혁명정부의 실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이스너의 구경거리 정권이 만들어낸 쉬지 않는 시위며, 공개 음악회, 깃발 대행진, 그리고 '빛과 아름다움과 이성의 왕국'에 대한 열화 같은 연 설도 그의 위치를 확정해주기에 전혀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 러한 통치방식은 비웃음과 분노만 불러일으켰을 뿐, 아이스너가 '선의를 통 한 통치'에서 기대했던 애착은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너무나 먼 철학적 지평을 배경으로 서류상으로만 권력을 입증하였던 유토피아 상황은 현실의 입김을 받지 무너져버렸다. 아이스너 '쿠어트 1세'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붕 괴된 왕가의 전통과 결합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비웃음을 표현한 후렴구를 가진 유행가 하나만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스너가 레비엔, 레비네, 악셀로트 같은 기이한 극좌 파 세계혁명의 지도자들과 별로 좋지 못한 관계에 있었고, 문필가 에리히 뮈잠의 무정부주의적 몽상에 대해서 비판하고, 널리 퍼진 바이에른의 분리 주의 분위기에 대해서 말로만이라도 동조한 것 등도 그의 처지를 개선시키 지 못했다. 그는 베른의 사회주의자 회합에서 전쟁발발에 대해서 독일이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직후 잘 조직된 항의 캠페인에 포위되었다. 이 캠페 인은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공략해서 마침내 그의 시계를 멈추게 만들었 다. 뒤이어 치른 선거에 참패하면서 그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21 일 두 명의 동지와 더불어 정계은퇴를 선언하러 주의회로 가는 길에 그는 스물두 살 난 우파 안톤 포아르코 발라이 백작이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죽 었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사실상 불필요하고, 파국을 부르는 살인행위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살해된 사람을 위한 추모식이 벌어지는 동안 극좌 파 성향의 정육업자 겸 술집 종업원인 알로이스 린트너가 주의회로 뛰어들 어오더니 아우어 장관을 쏘아 쓰러드리고 주변으로 총을 마구 쏘아대는 바 람에 두 명이 더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회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 로잡혀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아르코 발라이가 희망했던 것과는 달리 여론은 좌파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의 살해 직후처럼 이 암살행위는 힘을 모아서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으려는 반 동측의 행위로 여겨졌다. 바이에른 전체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총파 업이 실시되었다. 학생들 중 일부가 아르코 발라이를 영웅으로 추대하지 대학이 문을 닫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엄격한 검열이 실시되었 으며 은행과 공공건물들은 붉은 군대에 점령되었다. 그러는 동안 병사를 가득 실은 전차들이 거리를 달리면서 확성기를 통해서 "아이스너를 위해 복수합시다!"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 달 동안 사법권은 에른스트 니키쉬 가 이끄는 중앙위원회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고 난 뒤에야 의회정부가 구 성되었다. 그러나 4월 초에 헝가리에서 벨라 쿤이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포하였으며, 그로써 소비에트 시스템이 러시아 밖에서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막 안정되기 시작 하던 상황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독일이여, 뒤를 따르자!" 라는 구 호 아래 소수의 좌파 몽상가들은, 분명하게 보이는 대중 의지에 반하고, 전 통과 여론의 감정에 반해서 대중의 지지도 없이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 였다. 에른 스트 톨러와 에리히 뮈잠 등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낭만주의, 세계 에 대한 몰이해, 허약한 지도력 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포고문에서 세상 은 이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몫을 꺾을' 수 있는 '꽃들로 가득 찬 들판' 으로 변했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노동, 억압상황, 법적 사고 등은 이미 없어졌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신문 표제면에는 최근의 혁명 포고문과 나 란히 휠덜린이나 쉴러의 시들을 싣도록 명령하였다. 밤베르크로 피신했던 정부의 장관들과 에른스트 니키쉬는 그 사이 사임해버리고, 지도자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정부를 시인들의 정신나간 복음, 카오스, 시민들의 공 포 속에 그대로 맡겨두었다. 이어서 일단의 냉혹한 좌파 직업혁명가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압류 위원회, 인질 체포, 시민계급 사 람들에 대한 압류, 혁명의 자의, 점점 커지는 굶주림 등이 러시아 10월 혁 명의 끔찍한 이미지들을 일깨워서 현실로 만들었다. 그때의 공포심은 아주 끈질기게 작용해서 5월 초에 우파인 방위군(정규군)과 의용군 동맹이 뮌헨 으로 들어와서 자행한 잔혹한 살상행위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만들어주었 다. 이들 우파 동맹군은 풀려난 러시아 전쟁포로 50명 가량을 수용소에서 살 해하였다. 슈타른베르크에서 멀지 않은 철도 둑에서는 소비에트군의 의료 반이 살해되었다. 카톨릭 장인조합에 소속된 회원 21명은 아무 죄도 없이 뮌헨의 집단거주지에서 체포되어 카롤리네 광장의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총 살당했다.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던 페를라하 출신 노동자 12명도 살해되었 다. 이들은 모두 뒷날 조사 보고서가 말한 대로 '스스로 경박함이나 심술 궂 은 우연 때문에' 살해당한 184명에 끼게 된 사람들이다. 맞아죽거나 총맞아 죽은 소비에트 체제실험의 지도자들, 쿠어트 에글호퍼, 구스타프 란다우어, 오이겐 레비네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재빨리 잊혀서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그에 비해서 모반을 일으켰던 극우파 툴레 결 사 소속 인질 8명은 좌파정권에 의해 루이트폴트 고등학교 지하실에 갇혔 다가, 어떤 하급 공무원의 비행에 대한 보복을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공포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당시 어떤 일기에 기록되어 잇듯이 우파 진입부대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수건 을 흔들고, 모두들 창문을 통해 내다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보다 더 큰 열광은 있을 수 없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혁명의 땅이었던 바이 에른은 이제 반혁명의 땅이 되었다. 반혁명의 조직화 전후 처음 몇 달 간의 체험은 좀더 냉정하고 덜 낙담한 시민계층에서 새 로운 자의식을 일깨웠다. 이 혁명의 의지력은 혼란스럽고 전체적으로 지나 치게 허약한 것이어서 도이치 좌파의 무기력과 개념의 혼란을 드러내 보였 다. 그것은 혁명적인 용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의 과도한 열정에 의해 움직 였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을 강력한 질서의 인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이에 른에서 소비에트 방식의 지배를 시도해본 결과 그러한 시도는 권력에 대해 서나 민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몇 달 동안의 혁명기간에 처음으로 시민계급, 혹은 이 소란에 무관한 도이치 노동자 계급에게 자기들이 절대로 군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에 도돌 하였다. 시민계층에 이 새로운 자의식을 불어넣어주려고 애쓴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중간급 장교들, 즉 행동을 열망하는 대위와 소령들이었다. 에른스트 융거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포도주를 즐기듯 전쟁을 즐기는 사람 들이었고 아직도 여전히 전쟁에 도취되어 있었다. 여러 모로 압도적인 반 대세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패배했다고 느끼지 않았다. 중앙정보 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자 그들은 저항하는 반군과 소비에트 군사위원회들 을 평정하고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기도를 제거하였다. 불안정한 도이치 동 부국경, 특히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접하는 국경에서 그들은 방위기 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베르사유 조약과, 군대를 10만 명으로 제한한다는 규정이 장래 의 전망을 없애자 자신들은 사회적으로 추락하였고 민족적으로는 망신이라 고 느꼈다. 자의식과 상실감이 합쳐진 상태로 그들은 정치계로 몰려갔다. 많은 사람들은 무질서한 군대생활과 무기 다루는 기술, 남자들간의 동지애 따위를 버릴 수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전쟁에서 얻은 체험과 폭력 을 사용하는 기술 등을 이용해서 그들은 혁명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군을 조직하였다. 국민의 두려움과 질서의식 속에서 혁명은 이미 제압되어버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곳곳에서 생겨난 사조직 민병대는 각 지역을 군대병영으로 바꾸어버렸 다. 겉으로는 민족적 장식과 정치투쟁이라는 영광스런 외관을 내세웠다. 그 들은 전쟁중에 가지고 있다가 비밀장소에 감추어두었던 기관총, 수류탄, 대 포 등으로 무장하고서 정치기관들이 무능한 것을 이용하여 지역마다 다르 지만 상당한 정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바이에른에서는 특히 소비에트 시 절의 악몽 같은 체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들은 거의 활동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모든 수단을 다 써서 반혁명군을 조직하라."는 것이 사회민주당 정부가 소비에트 지배 시절에 내린 명령이었다. 정규군은 방위군과 나란히, 또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방위군과 힘을 합쳐서, 에프 의용군, 고지 결사 대, 무쇠주먹 장교단, 에셔리히 부대, 도이치 민족 수비공격대, 옛 제국기 부대, 바이로이트 의용군, 뵈르츠부르크 의용군, 볼프 의용군, 보겐도르프 멸동대, 프롭스트마이르 별동대와 그 밖에도 수많은, 명예를 갈구하면서 정 상적인 생활을 기피하는 정치군사 조직체들이 활동하였다. 이 모든 부대들은 정부와 국가관료뿐 아니라 광범위한 민족계층의 소리 가 자기들을 지지하는 것을 보았다. 군사전통에 익숙한 사회의 오해이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행동하는 의용군이 제복을 입고 발걸 음을 맞추어 행진하는 것을 보자, 곧바로 민족적, 도덕적 타당성을 인정해 준 것이다. 혁명과 소비에트 정부라는 혼란스런 배경을 놓고 보면 군대조 직은 그 자체가 이미 모범적인 반대세력, 가장 타당한 형태의 생활과 질서 이념으로 여겨졌다. 엄격한 태도로 보무도 당당하게 에프 의용군 단위부대 들은 루트비히 거리를 행진하였고, 발트 해 연안 전투에서 앙블렘을 가지 고 돌아온 에르하르트 연대의 단위부대도 마찬가지 였다. 그 앙블렘은 부 대의 통합 행진곡에서 뽑아낸 것으로 '철모에 달린 갈고리 십자가... '였다. 그들은 지나치게 도발적인 방식으로, 이제는 오직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영 광과 안전이 지배하던 지나간 시대의 어떤 것을 구현하는 존재로 일반의 의식에 비쳤다. 제국방위군이 1919년 6월의 바이에른 제4지역사령부의 기 본노선을 가리켜 '토대'라고 부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당시의 지배적 인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 토대에 맞추어서 '모든 국내 사정을 의 미심장하게 새로 건설'해야 하고, 활발하고 광범위한 선전활동의 정당화도 바로 이 토대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당들이, 두려움과 희생 을 무릅쓰고 전쟁을 수행한 병사들에게 전쟁과 민족학살에 대한 거부감을 순진하게 떠넘긴 반면, 우파는 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의 상 처받은 자존심과 그 많은 기대들이 좌절된 데 대한 충분한 설명의 요구 등 을 받아들인 것이다. 히틀러, 연설 실습과정을 갖다 지역사령부 계몽과, 혹은 선전과가 맡고 있는 수많은 활동 중에는 부지 런한 마이르 대위가 담당한 '국가시민적 사유'를 위한 강좌도 있었다. 히틀 러는 소비에트 공화국 추종자들에 대한 색출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 이 강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학 강의실에서 열린 이 강좌들은, 수강자들이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유명한 대학교수들을 통해서 특히 역사, 민족경제, 정치문제에 접촉해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기가 어떤 확실한 영향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려는 열망에서, 이 강좌들이 지식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그를 통해서 얻게 된 여 러 관계들이라는 측명에서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생 각을 가진 몇 명의 동료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시국에 대해서 깊 이 있게 토론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경제이론 분야에서만 고트프리트 페더를 통해서 생전 처음으로 '국제증권 및 차관자본에 대한 원칙적인 설 명'을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 강좌의 중요성은, 히틀러가 가진 격렬함과 지적인 기질로 이와 같이 정선된 청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 다. 참가자들의 토론에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우연히 만난 상대가 아닌 사 람들을 청중으로 가지게 되었다. 선생 중 한 사람이었던 칼 알렉산더 폰 뮐러는 어떤 강의가 끝나고 난 뒤 점점 비어가는 강의실에 남아 있던 몇 사람이 자신의 시선을 붙잡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한가운데 어 떤 남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그는 이상한 후두음을 내는 목소리로 쉬지 않고 점점 더 정열적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가 사람들 을 흥분상태로 몰아가고, 동시에 사람들의 흥분이 그를 더욱 열렬히 말하 도록 만들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군인답지 않게 머리카락을 앞 으로 떨어뜨리고, 짧게 자른 콧수염을 기른 창백하고 깡마른 얼굴이 보였 다. 그는 이상하게 키가 크고, 밝은 금발에 광적으로 냉혹하게 번쩍이는 눈 을 하고 있었다." 다음번 강의가 끝난 뒤 연단으로 부르자 그는 '공손하게, 일종의 뻣뻣한 당혹감으로, 옆으로 움직여서'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대화 는 별 소득이 없었다'. 이러한 관찰에서 초기의 히틀러에게 들어맞는 특이한 현상을 만나게 된 다. 중요하지 않은 개인적인 대화에서 자신의 연설능력에 대한 도발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유대인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도전적으로 격렬한 답변을 해서 최초의 잊을 수 없는 설득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폰 뮐 러는 마이르 대위에게 자기 과목 수강생들 중에 천부적인 언변을 가진 사 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두었다. 히틀러는 지역사령부가 '신뢰하는 인물'이 되어 뮌헨 연대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 이어서 이른바 레히펠트 귀향자 수용소를 위한 사령부 계몽팀 명단 17변에 히틀러의 이름이 나타난 다. '보병 히틀러, 아돌프, 제2보병연대, 청산부' 이 팀의 목적은 포로수용소 에서 귀향하는 병사들 중에서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는 병사들에게 민족적으 로 반공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연설가 및 선동가 코스의 실 습'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레히펠트 수용소의 막사와 숙소에서 히틀러는 연설가 로서 수사적, 심리적 체험들을 쌓았다. 여기서 그는 고정된 세계관이라는 미리 준비된 재료에 시사적인 내용을 채워넣는 법을 배웠다. 원칙들을 저 항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정치적 일상사들이 운명적인 크기의 전망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고집스러운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이데올로기에 원칙이 없다는 인상을 주는 기회주의적인 속성들도 상당 부 분 이 초보 연설가 시절의 불확실성이 원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열광 상태가 공적으로 효과를 얻는지 시험해보고, 자신의 과도한 고정관념을 위 해 공감을 얻는 형식들을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이 주제는 참석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고 수용소의 어떤 체험수기가 연설자 히틀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자신의 청춘에 위대함과 무게를 주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느끼는 귀향자들의 깊고도 공격적인 실망감을 향해 서, 그토록 헛되이 바친 영웅주의, 그 수많은 허망한 승리와 부조리한 신뢰 등을 설명하고 나서 그는 원수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 보이곤 했다. 그의 연설연습을 들은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뚜렷한 특징들은 연사의 '인기있는 무대등장' '파악하기 쉬운' 묘사방법, 정열적인 '광신주의' 등이었다. 이러한 연설의 중심점은 그가 뒷날 '11월 범죄자들'이라고 불러서 유명하게 되는 집단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자들)을 향한 공격이었다. '베르사유 수치', '망 할 놈의 국제주의'에 대한 분노의 표현들이 타나난다. 이 모든 것은 '유대 인 공산주의의 세계음모'라는 배경설명에서 한데 합쳐지고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유대인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끼치는 위험' 슬쩍 읽은 것,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지적인 부끄러움도 없이 한 데 엮어서 내놓는 그의 능력이 여기서 입증되고 있다. 레히펠트에서 행한 그의 강연들 중 하나는 극히 최근에 고트프리트 페더에게서 전수받은, 자 본주의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매우 근사하고 분명하고 열광적으 로'전달한 것이다. 생각을 움켜쥐는 그의 능력은 난폭하고도 지속적인 것이 었다. 이 시기에 개별적인 확신들이 지하 벙커의 수난까지 계속될 최종적 인 형태를 어느 정도나 얻었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인 정치문제에 대한 히 틀러의 최초의 문서상의 발언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끼치는 위험'에 대한 편지였다. 뮌헨 지역사령부에서 예전에 '신뢰받는 인물'이었던 울름 출신의 아돌프 겜리히가 마이르 대위에게 입장표명을 청하였다. 마이르는 이 편지를 군대 의 서열체계에서 보면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매우 존경하는 히틀러 씨'라 는 칭호로 시작되는 의견서를 붙여서 히틀러에게 답장하라고 넘겨주었다. 상세한 서술에서 히틀러는 우연하고도 개인적인 인상들에 근거하는 , 널리 퍼진 감정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하였다. 정치운동으로 만들어야 할 반유 대주의란 '사실의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와 같습니다. 우선 유대인은 종족집단이지 종교집단이 아니라 는 점입니다. 보통 가장 협소한 집단 내에서 1천 년간의 동족교배(철자 틀 림!)를 통해서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섞여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 들보다 자기 종족과 자신의 독자성을 훨씬 더 예민하게 보존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는 도이치 아닌 낯선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 의 종족상의 특성을 희생하거나, 자기들만의 독특한 감정, 생각, 욕망을 부 정할 마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종족이 정치적으로 우리와 똑같은 권리 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감정이 순수하게 물질적으로만 움직인 다면 그 생각과 욕망은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을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모든 것은 종교,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이라고 말하지만, 유대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돈과 권력욕을 만족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 다. 유대인의 활동은 다른 민족들에게 종족 폐결핵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결론이 나오는 것이지요.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유에서 나온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박해 (철자 틀림!) 라는 형태로 최종표현을 얻 게 됩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특권에 대해서 계획적 이고 법적인 투쟁을 벌여서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최종적인 목적은 유대인 자체를 확실히 제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민족의 힘을 지닌 정권 만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능력이 있으며 민족적 무능의 정권은 절대 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기 4일 전 1919년 9월 12일에 마이르 대위는 신뢰하는 인물 히틀러에게 과격협회와 도당들이 마구 뒤섞여 만들어진 작은 정당들 중 하 나를 방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도당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만 하 나를 방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도당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만 격 렬한 활동을 위한 활기를 얻고, 서로 결합했다가는 새로운 단체로 탄생하 기도 전에 다시 흩어져버리곤 했다. 그것은 공명과 추종세력으로 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이었다. 종파적이고 두서없는 특성은 오랫동안 정 치적 관심이 없던 시민계급이, 자신들이 느끼는 민족적인 저항감과 사회적 위기감을 진정시키주기를 거의 맹목적으로 갈ㄱ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툴레 결사와 도이치 노동자당 툴레 결사는 음모적인 기획과 특별한 선전활동의 출발점으로서, 그리고 극우 세력들의 접촉장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결사는 특급 호텔 '사계절'에 본부를 두고 바이에른 사회의 광범위한 계층과 연결되어 있었 다. 한때는 회원이 대략 1천 5백 명까지 이르렀던, 영향력이 있는 회원들도 일부 가진 모임이었다. 그들은 갈고리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고, (뮌헨 관찰 자)라는 독자적인 신문을 발행하였다. 수상쩍은 과거를 가지고 있는 정치 적 풍운아가 결사의 대표자였다. 그는 근동지역으로 밀려간 오스트리아 귀 족에게 입양되었던 덕분에 제보텐도르프의 루돌프 후작이라는 상당히 그럴 싸한 이름을 가진 사내였다. 어떤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테오도르 프 리치나 란츠 폰 리벤펠스 같은 과격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생 각 없고, 심령술적인 특성까지 지닌 종족이론은 젊은 히틀러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었다. 제보텐도르트에 의해서 1917년 1918년 해가 바뀔 무렵 창설된 상당히 열 에 들뜬 활력을 가진 툴레 결사는 전쟁 전 민족적, 반유대적인 모임들의 전통에 선 것으로, 이름만 보면 1912년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졌던 게르만 툴레 종파를 연상시킨다. 그 회원들은 '아리안 혈동'이어햐 했다. 프리메이 슨 비슷한 이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체 어느 부위에 털이 있는지 없 는지 말해야 하고 동시에 종족상의 인식표로서 발의 모형을 제출해야만 했 다. 제보텐도르프의 결사는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18년 1월에 특히 반유대주의 색채를 띤 통제되지 않은 선전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선전은 유대인을 '도이치 민족의 철천지 원수'라고 보았고, 나중에는 소비에트 혁 명 시대의 혼란스런 유혈체험들을 그에 대한 증거라고 내놓았다. 이것은 증오의 거칠고도 과격한 구호들을 만들어서 본질적으로 의식 없고 지저분 한 종족 증오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민족적 과격주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1918년 10월 이미 이들 모임에서는 우파에 의한 정부전복 계획들을 만들 어냈다. 쿠어트 아이스너 암살을 위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꾸몄고, 1919년 4월 13일에는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쿠데타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중에 뮌헨에 본부를 둔 러시아 이민자 그룹과의 수많은 관계 들이 생겨났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라는 이름의 발트 출신 어떤 젊은 건 축학 대학생은 소비에트 혁명의 악몽이 너무 깊은 방에서 모임이 있는 날 이면 다음 몇 년 간 바이에른의 풍경을 극적으로 지배하게 될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기 모여들었다. 미래 히틀러 당의 대표자 몇 명도 여기서 처 음으로 서로 만났다.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폰 한스 프랑스, 루돌프 헤스, 칼 하러 등의 이름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있다. 툴레 결사의 위임을 받고 스포츠 기자인 칼 하러는 공구 제조공인 안톤 드렉슬러와 함께 1918년 10월에 '정치적인 노동자 서클'을 만들었다. 이 서 클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연구할 목적으로 선택된 사람들 의 모임'으로 되어 있었으나 발기인들의 의도는 대중과 민족주의 우파 사 이의 이질감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회원은 드렉스러의 직 장동료 몇 사람에 한정되었다. 드렉슬러는 조용하고 무뚝뚝하고 약간 기묘 한 인물이었다. 그는 뮌헨의 철도공작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정치 적 활동의 욕구가 현존하는 정당들에 의해서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다고 여 겼다. 1918년 3월에 그는 스스로 발기인이 되어서 '평화를 위한 자유 노동 자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 목적은 고리대금업자와 싸우고 노동자 계급의 승리의지를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민족문제를 극복하 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답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 공 구 제조공의 정치적 체험이었다. 이 안경 쓴 진지한 사람이 1918년 1월에 발표한 기사의 제목에 이런 인 식이 반영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의 실패와 형제애 이념의 좌절". 그것은 1914년 8월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에 찬성했을 때 확인된 것 과 동일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1904년에 도이치 보헤미아 노동자들이 트라 우테나우에서 도이치 노동자당을 창설하게 만든 체험이기도 했다. 같은 '도 이치 노동자당'이라는 이름으로 안톤 드렉슬러는 자기 직장의 노동자 25명 과 함께 1919년 1월 5일에 영주 저택에서 자신의 당을 만들었다. 며칠 뒤 에 이 당은 툴레 결사의 자극을 받아서 '사계절 호텔'에서 민족적인 조직체 가 되었고, 칼 하러가 스스로 '전국의장'직을 맡았다. 그것은 과장된 직함이 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골짜기 54변지 '별모서리 양조장'의 방에서 모임을 갖는 새로운 정당의 면면은 사실상 이루 말할 수 없이 보잘것없은 것이었 기 때문이다. 드렉슬러가 때때로 시인 디트리히 에카르트나 고트프리트 페더 같은 유 명인사를 연사로 모셔오기도 했지만 그들의 상황, 동기, 목적 등은 시시한 정치 이야긴 주고 받는 수준에 불가했다. 이상하게도 이 정당은 공적인 활 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정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절 뮌헨의 특징이 되었던 비밀결사와 초저녁 맥주 마시는 모임을 뒤 섞여놓은 꼴이었다.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필요성이 그들 을 한데 끌어모으는 힘이었다. 참석자 명단은 대체로 10명에서 40명 사이 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일의 수치, 패배한 전쟁의 악몽, 반유대주의 분위기, '질서, 권리, 도덕의 유대'가 깨진 것을 탄식하는 일이 이 모임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었다. 드렉슬러가 창설모임에서 낭독하였던 '당 노선'은 이 정당이 부자들, 프 롤레타리아, 유대인, 바가지 요금, 민족들의 선동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물거리는 정직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연간 이자액 을 1만 마르크까지로 한정시킬 것을 요구하고, 도이치 외무부와 동등한 내 국인 부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직업훈련을 받은 정착한 노동자들을... 중 간층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하였다. 행복이란 '관용구나 공허한 말투, 모임, 시위, 선거에 ' 있는 것이 아니고 선량한 것이 아니고 '선량한 노동, 가득 찬 요리 냄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당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매우 편협하고 지적으로 별볼일 없는 것처 럼 여겨지지만 그래도 이 '노선'의 첫 문장은 어떤 사상을 담고 있다. 그것 은 역사적 체험과 광범위한 필요성을 정책으로 바꾼 것으로, 어찌할 바 모 르고 뒤틀린 안톤 드렉슬러를 '별모서리 양조장'의 방에서 시대정신의 높이 까지 끌어올리는 사상이었다. 도이치 노동자당은 계급과 무관한 "사회주의 조직으로, 도이치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영도받는다."고 되어 있다. 드렉슬 러의 '위대한 사상'은 민족과 사회주의를 화해시키는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런 생각은 드렉슬러 혼자만 가졌던 것도 아니고 또 최초의 것도 아니 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요리냄비에 대한 염려가 그에게서 모든 정열을 빼 앗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소박한 생각이었고 민족적 안전에 대한 평범한 갈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마르크스주의 세계해석 및 역사해석 체계로는 측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상을 발전시킨 드렉슬러가 처해 있던 상황이 이 사상에 강력한 메아리를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패배 하고, 모역당하고, 혁명의 도전을 받은 나라의 병적으로 열에 들든 상황과, 이 정당이 아돌프 히틀러와 결합된다는 사정이었다. '내 생애 가장 결정적인 결심' 1919년 9월 12일 도이치 노동자당 모임에서 고트프리트 페더는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수단으로 자본주의를 제거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약 40명 가량의 참석자들 주에는 마이르의 명을 받은 아돌프 히틀 러도 끼여 있었다. 페더가 잘 알려진 주장을 펼치고 있는 동안 이 손님은 이 새로운 당에 대해서 "다른 수많은 정당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속물근성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페더가 마침내 말을 끝내가 나는 기뻤다. 그것은 이미 실컷 보았다." 이어서 벌어진 토론 이 끝나기를 히틀러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바이에른을 제국에서 분리시켜서 오스트리아와 통 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자 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다. "그 때 나는 안 그럴 수가 없었다." 는 그 연설자를 정열적으로 공격하였고, 드 렛슬러는 자기 옆에 앉은 기관사 로터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저봐, 저 사 람 연설할 줄 아네. 쓸모가 있겠는걸." 히틀러가 '지겨운 모임'에서 연설을 마친 다음 곧바로 돌아가려고 나가는데 드렉슬러가 그를 쫓아 와서 또 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문간에서 그는 손수 쓴 조그마한 팸플릿 책자를 히틀 러의 손에 쥐어주면서 "나의 정치적 각성이요"하고 말했다. 힘깨나 들인 이 장면의 묘사에서 히틀러는 다음날 아침 병영에서 쥐새끼들이 흘린 빵부 스러기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다투고 있을 때 이 글을 읽기 시작하였고, 드렉슬러의 인생역정에서 자기 자신의 발전과 같은 요소들을 발견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테러를 통한 일자리 폐쇄, 절반쯤 예술적인 활동을 해서 밥 벌이를 한 일 9드렉슬러의 경우에는 야간 카페에서 바이올린 연주), 그리 고 어느 정도 공포의 느낌을 가지고 알게 된 일인데, 어떤 안트워프 유대 인이 독살 기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깨닫게 된, 유대종족이 세계를 파멸 시킨다는 인식 등, 그의 관심을 일깨운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유사 점들이었다. 히틀러가 지치지도 않고 거듭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체험 들은 노동자의 삶에서 얻은 것이었다. 며칠 뒤에 청하지도 않았는데 555번 번호가 붙은 당원카드가 배달되었을 때 그는 약간 불쾌하고 약간 재미있다는 기분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뚜 렷하지 않은 당혹감에서 위원회 모임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나중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헤렌 거리에 있는 '옛 장미관'이라는 '아 주 허름한 음식점'의 탁자에서 '절반쯤 부서진 가스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앉아 있는 몇 명의 젊은 사람들을 보았다. 방 바깥에는 음식점 주인 내외 와 한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작은 카드놀이 패거리의 간부처 럼' 회의록을 낭독하고, 남은 회비를 계산해보고 (잔고 7마르크 50페니히), 장부를 기입하고, 북부 독일의 뜻이 통하는 단체들에게 보낼 편지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것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종류의 협회 관리모임'이었다. 이틀 동안이나 히틀러는 혼자 심사숙고하였다. 그리고 뒷날 자기 인생의 결정적인 상황을 서술할 때마다, 결심이 어려웠다고 회고할 때마다 그렇듯 이 '힘들고' '무겁고' '쓰라린' 기분을 느꼈다. 어쨌든 선전과 홍보를 담당하 는 7분과 위원회 소속으로 그는 도이치 노동자당에 가입하였다. "이틀간 고통스러운 천착과 숙고 끝에 나는 마침내 이 일을 하겠다는 확신에 도달 하였다. 그것은 내 생애의 가장 결정적인 결심이었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어법에는 뒷날 자신의 삶의 궤적에 극적인 조명을 하려는 히틀러 의 성향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상황의 효과를 전부 빼고라도 이러한 결심 자체를 고독하고 고난에 찬 투쟁  결과라고 표현한 것은 모 든 자료들과 잘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을 상당히 주저하고 깊이 두려워하였다. 뒷날의 상황에서 도 보고되는 것이지만, 그는 어떤 문제를 어지럽고 모순에 이를 정도로 생 각해본 다음 지쳐빠져서, 우연에 내맡기고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성향을 가졌다. 그러한 성향은 운명과 섭리를 신봉하는 경지로 치닫게 되는데 쉽 게 결심을 못하는 성향을 그는 그렇게 변명하곤 하였다. 그의 모든 개인적인 결정들과 심지어는 일부 정치적인 결정들도, 절박하 게 느껴지는 다른 대안을 위해서 일종의 대피수단으로 나온 것이라는 생각 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학교를 그만둔 것, 빈과 뮌헨으로 옮긴 것, 전쟁에 지원한 것, 그리고 정치에 입문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 든 일에서 일종의 도피 동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도피 동기는 또한 어찌할 바 모른 채 맞아하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나오 는 수많은 행동방식의 원인이 된다. 제대해서 시민의 생활 속으로 쫓겨들어가기 전에 시민세계의 의무와 질 서의 요구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의 귀향자 숙소에 사는 이 남자의 모든 행 동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점차 그를 바이에른 정 치무대로 이끌어갔다. 현재도 직업이 없지만 앞으로도 직업을 갖고 싶지 않은 이 삶은 정치를 이해하고 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굉장한 몸짓을 하면서 이루어진 1919년 가을 도이치 노동자당 입당 결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전의 생의 결심들이나 마찬가지로 시민질서에 대한 거부 였고, 시민적 사회규범의 엄격함과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 온 것이었다. 일생 동안 도피 동기의 흔적들은 아주 격렬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격렬 함으로 히틀러는 여러 해 동안이나 막혀 있던 활동욕구를 위한 공간을 드 디어 찾아낸 것이다. 마침내 형식상의 요구들로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그 가 가지고 있는 전제들만을 요구하는 영역을 만나게 된 것이다. 즉 정열, 상상력, 조직의 능력, 선동가의 재능 등이었다. 막사에서 그는 지치지도 않 고 집회 초청장을 쓰고 타이핑하고, 그것을 손수 배달하였다. 그는 주소들 을 추천받아서 추천받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관계와 후원, 새 로운 회원들을 찾아다녔다. 처음에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행사에서 모르 는 얼굴을 만나면 열심히 기록해두었다. 여기서 히틀러가 다른 경쟁자들보 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날 거의 신성하게 추앙되는 카페 가 스타이크 구석구석 탁자에서 매주 한 번씩 모이던 7인 당위원회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갔다. 생각이 많고 능숙하고 정열적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의 껍질을 깨다 당의 조용하고 협소한 상황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여기는 당원들이 당 황한 눈길을 보내는 가운데 그는 이 '지루한 모임'이 공식적으로 활동할 길 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16일에 노동자당은 이 새로운 남자의 선택을 따르게 되었다. 111명이 참석한 최초의 공식적인 집회에서 히틀러 는 그날 저녁의 두 번째 연사로 연설하였다. 30분에 걸쳐 계속된 연설은 점점 상승하는 능변으로 화려한 효과를 냈다. 남자 하숙집 시절 이후로 우 울한 독백 속에 담아두었던 증오의 감정들, 말없고 사람 접촉 없던 은둔시 절 쌓아두었던 것들에서 문장들, 망상적인 이미지들, 고발들이 터져나왔다. 마지막에는 '작은 방안에 모인 사람들이 저기가 오른 듯' 했다. 히틀러는 전에 '알아채지는 못하고 다만 막연히 느끼기만 했던 일이 현실을 통해서 입증되었다."고 이 놀라운 체험을 적고 있다. "나는 연설할 수 있다!" 알을 깨고 나와 자신으로 되는 순간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일상의 껍질'을 깨뜨리는 '운명의 망치질'이었다. 그것이 가진 구원의 의미가 이날 저녁의 회상에 황홀한 어조를 불어넣고 있다. 그는 이미 지난 몇 주 동안 연설의 힘을 되푸이해서 시험해보면서 설득력과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힘을 깨닫고 있었다. 그가 말하 ㅎ고가 사 실이라면 이날 저녁의 연설에서 처음으로 연설의 주관적인 힘, 땀을 흘리 고, 어지럼증을 일으키고, 힘이 쭉 빠지는 망아의 경지를 경험하였다고 한 다.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폭발하였다. 두려움, 자의식, 혹은 1백 번도 넘게 들었던 (트리스탄)의 황홀경 등을 그는 광포한 연설 안에 쏟아부었다. 이 시절은 회상하면서 자신을 가리켜 말한 대로 이 '가련한 놈'의 욕망이 여기 서 단 한 번 일깨워진 다음에는 모든 정치적인 정열보다 앞에 놓이게 된 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이 그를 단상으로 몰아가서, 그 옛날 느꼈던 망아의 충만감을 찾아서 자기 확인을 하도록 만들었다. 정치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파제발크 야전병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저 '11월의 배신'을 보고 깊이 절망한, 그러나 흔들이지 않는 애국자의 반응이 었다고 그는 전설적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1919년 가을의 데뷔 체 험이 더 가까이 있다. 당시의 회원 및 참석자 명단에 그는 자산을 화가라 고 혹은 가끔 작가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위대함과 예술에 대한 젊은날의 사라져 가는 꿈을 붙잡아두려는 생각에서 나온 당혹스런 진술이 었던 것 같다. 1919년 11월 중순에 기록된 뮌헨 경찰 정보라 보고서에는 "그는 상인이 며 직업적인 선전 연설가"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도, 정치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지 일년이나 지났건만 그런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연설 을 하려 하고,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이미 쿠비첵이 관찰 한 바가 있었다. 그는 연설의 재능이 가진 압도적인 힘을 깨달았다. 서른 살 된 이 남자는 이런 연설재능으로 실패한 경력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보 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 그는 직 업적인 선전 연설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것은 한 번 더 도피행동이었다. 이 러한 도피행동과, 일찍이 자기 머리에 수많은 소명의 광채가 쏟아졌다는 뒷날 그의 주장 사이의 차이는, 정치 입문에 대한 개인적인 동기와 사회적 인 동기 사이의 차이다. 많은 증거들은 도피 의도가 더욱 강력한 동기였다 는 것을 보여준다. 어쨌든 히틀러는 정치적인 각성체험을 갖지 못했다. 그 리고 '세계의 불의가 산의 홍수처럼 가슴으로 쏟아져내려서' 마침내 착취자 겸 사기꾼을 절멸시키기로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을 알지 못했다. 공개적 활동을 시작한 노동자당 히틀러는 노동자당 입당 직후에 활동이 없고 두려워하는 위원회 모임을, 공개를 염두에 둔 시끄러운 전투적 정당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하였다. 툴레 결사에서 이어받은 구식의 비밀결사적인 특성을 버리지 못하고 노동 자당을 계속 정치적인 남자들의 서클 정도로 이끌어 가면서, 친밀한 양조 장 방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특별의식을 지키려 하는 칼 하러의 반대를 무 릅쓰고 히틀러는 처음부터 대규모 대중정당을 지향하였다. 대규모 대중정 당이 협소한 서클에는잘 들어가지 못하는 그의 사고방식에 맞을 뿐 아니라 오래된 보수정당들의 실패의 원인에 대한 그이 통찰에도 들어맞았다. 하러 의 견해에는 우스꽝스럽게도 황제시대 시민적인 유명인사 정당들의 약점이 었던 배타적인 성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소시민 대중과 보수적인 생각 을 지닌 노동자 계층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19년 말이 되기도 전에 노동자당은 히틀러가 몰아붙은 끝에 아치형 천 장을 가진, 빛도 들지 않는 별모서리 양조장의 지하실에 상설 사무소를 차 리게 되었다. 임대료는 원 50마르크였다. 히틀러는 계약서에다가 자기 직업 을 '화가'라고 적었다. 탁자 한 개와 빌린 의자 몇 개가 놓였고 전화기 한 대, 당원 카드와 당비를 보관하기 위한 금고가 마련되었다. 이어서 옛날의 독수리표 타이프라이터 한 대와 인장이 마련되었다. 기분이 나빠진 하러는 보통의 관공서 같은 이런 설비를 보고 히틀러가 '과대망상' 이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히틀러는 위원회의 수를 처음에는 열, 다음에는 때로 열둘이 나 그 이상까지 확대하였다. 그는 주로 자기의 개인적인 추종자들이나, 드 물지 않게 막사에서 알게 된 동료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사무실을 갖추고 보니 손으로 적은 종이 쪽지에다가 원시적이고 효과도 없는 행사광 고를 하는 대신, 기계를 이용하여 다채롭고 만들어진 초청장으로 바꿀 필 요가 생겼다. 동시에 (뮌헨 관찰자)지에다 광고를 냈다. 행사장의 탁자들에 는 선전문구와 팸플릿들이 펼쳐 놓였다. 히틀러는 처음으로 상당히 근거가 없고 현실적으로 뒷받침되지도 않은, 따라서 대단히 도전적으로 여겨지는 선전기술상의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한 자신감은 그렇게 작고도 알려지지 않은 정당의 공개행사로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들을 감행하고, 입장료를 올 려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타나고 있다. 연설가로서 점점 명성이 커지면서 히틀러의 당내 지위도 확고해졌다. 해 가 바뀔 무렵에는 별써 완고한 하러는 당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최초 의 길이 그의 앞에 방해 없이 열렸다. 곧 이어서 당수 드렉슬러는 회의적 인 태도로, 그리고 공개석상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몹시 염려하면서 도 야심만만한 선전담당 위원 히틀러의 고집스런 요청에 굴복하여 대중에 게 호소하기로 하였다. 히틀러가 입당한 지 채 반 연도 지나지 않은 2월 24일에 당은 호프 양조장의 연회실에서 최초의 대규모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이 집회를 알리는 새빨간 벽보에 히틀러의 이름 은 나와 있지 않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이름난 민족주의 연설가인 의사 요하네스 딩펠더 박사였다. 그는 게르마누스 아그리콜라기를 기묘한 방식 으로 설명한, 지적으로 형편없는 경제이론을 내놓은 인물이었다. 그의 염세 적인 생각에 따르면 자연의 생산성이 파업을 일으켜서 농산물이 줄어들 것 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해충들이 먹어치우게 되니 인류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것인데 국민적으로 새 로운 다짐을 한다는 희망을 통해서만 겨우 빛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날 저녁에도 연설에서 이런 내용을 말하였다. 경찰보고서에 따르면 "철저히 냉정한 태도였고, 자주 깊은 종교적 정신을 드러내 보였다."고 한다. 25개 조항 공표 그러고 나서 히틀러가 나섰다. 그는 이러 대규모의 청중에게 노동자당의 의도를 알릴 단 한 번의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의 강령을 만들어내 자고 주장했다. 당시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연설에서 정부의 비겁함과 베 르사유 조약을 비난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을 비난하고 유대인 과 암매상과 고리대금업자 등 '거머리 도당'을 비난하였다. 그러고 나서 여 러 번이나 박수와 소동으로 중단되는 가운데 새로운 강령을 읽어나갔다. 마지막에 "어떤 외침이 끼어들었다. 이어서 거대한 소란이 일어났다. 모두 들 의자와 책상 위로 올라갔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나가 자'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이 집회는 전체적인 소동 속에서 막을 내렸다. 과격좌파 당원 몇 명은 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구호를 큰소 리로 외치면서 호프 양조장에서 시청문까지 행진해갔다. "그밖의 소동은 없었다."고 경찰보고서가 밝히고 있다. 대중적인 노선을 취한 언론들조차, 온갖 소란 속에서도 일상적인 면모를 드러낸 이 집회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이 루어진 자료연구를 통해서 아닐 집회의 사건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물론 히틀러는 집회가 상당히 강력하였고, 싸움으로 시작되어서 끝도 없는 확신 의 환호 속에서 계속된 대중의 고백으로 이어졌다고 신화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여기 모여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점점 더 한 목소리로" 25개 조 항들에 공감하였고, "마지막 조항이 대중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자, 내 앞에는 하나의 새로운 확신, 하나의 새로운 믿음, 하나의 새로운 의지로 뭉친 사람들이 가득 찬 홀이 놓여 있었다." 히틀러는 이제 이토록 불붙은 대중을 바라보면서 바그너 오페라식의 상 상에 빠져들어간다. "이 불꽃에서 게르만의 지크프리트에게 자유를... 찾아 줄 그 옛날의 칼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는 "용서를 모르는 복수의 여 신이... 1918년 11월 9일의 그 수치스런 행동에 복수하려고"내려오는 소리 를 들었다. 그에 반해서 민족주의적인 (뮌헨 관찰자)는 단순히 히틀러가 딩 펠더 박사의 연설에 이이서 "몇 가지 적절한 정치적 이미지들을 전개하고" 노동자당의 정치강령을 읽었다고만 적고 있다. 더 큰 의미에서 보면 (나의 투쟁)의 저자가 옳았다. 이 행사와 더불어 드 렉슬러가 창설한 보잘 것 없는 맥주모임이 아돌프 히틀러의 대중정당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은 뒤쪽에 숨은 조종자의 역할 만 했다. 그런데도 그날 모여든 대략 2천 명의 사람들은 호프 양조장 대형 홀을 가득 채우고 히틀러의 정치적 생각을 인상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이 제부터 계속적으로, 점점 더 오직 자신만을 상승시키면서, 그의 의지, 그의 스타일, 그의 연대가 당을 앞으로 밀어붙이고 성공이나 실패를 결정하게 된다. 나중에 정당은 1920년 2월 24일의 행사를 마르틴 류터가 비텐베르크 성 문에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인 일에 비교하였다. 그러나 루터나 이날 행사 나 전해내려 오면서 원래의 역사적 의미에 별로 맞지 않는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역사는 극적인 장면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무시하는 경향을 가 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날의 정당 창설이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주요 연사는 당원도 아니었으며, 히틀러는 이 행사를 정당운동의 창설이라고 뒷 날 거듭 축하한 것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날 저녁 낭독한 강령은 안톤 드렉슬러가 아마도 어느 정도 고트 프리트 페더의 영향을 받아서 작성한 다음 꼼꼼히 검토하라고 위원회에 넘 겨준 것이었다. 히틀러의 참여는 항목별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몇 개의 항 목에 나타난 표어식의 표현에서 교열과정의 참여를 짐작할 수 있다. 전부 25개 조항으로 나뉘어 있지만, 옛날 민족적인 이데올로기 현재 국민적인 항의욕구 및 현실거부 성향과 제멋대로 결합되어서 전체적으로 감정적인 매력을 통한 통일성을 지닌다. 부정의 조항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 두드 러진다. 그것은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반의회주의, 반유대주의 등이고 전 쟁의 종결과 결과를 극히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중산층이 보호를 위한 다양한 요구 같은 긍정적인 조항들은 대단히 모호하고 드물지 않게 안톤 같은 소시민의 두려움과 욕망을 자극하 는 요구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노동을 통하지 않고 번 수입은 모두 몰 수할 것(11조), 전쟁 동안 거둔 모든 이익은 압류할 것 (12조), 대기업은 노 동자에게 이익분배를 해 줄 것(14조) 등이다. 그밖의 강령조항들은, 대규모 백화점들을 지방 자치단체가 인수해서 '싼 가격으로' 소규모 기업체에 임대 해 줄 것(16조),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토지투기를 금지할 것(17조) 등을 포 함한다. 기회주의적이고, 서둘러서 즉석에서 만들어진 요소들이 들어 있지만 이 강령의 의미는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하찮은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그것은 장차 당 지도자인 선동가적인 능력의 전개를 위해서 유혹적으로 빛 나는 배경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것은 적어도 소질 면에서 뒷날 국가사회주의 지도이념이 모든 본질적인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공격적인 생존공간 조항(3조), 반유대주의 원칙(4,5,6,7,8,24조), 그리고 해롭지 않게 지방자치단체 뒤에 숨은 형태로 나타나서 분명 굉장한 박수갈 채를 받았을 전체주의적인 요구, 즉 언제라도-공동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 에 앞선다는 형식으로- 전체주의 국가의 원칙으로 바뀔 수 있는 원칙들로 뒤덮이고 하지만 그래도 국가사회주의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남용되 고 있는 자본주의를 제거하겠다는 것, 공산주의의 계급투쟁 노선을 극복하 겠다는 것, 마지막에는 강력하게 통합된 국가 공동체 안에서 모든 계층의 화해를 이룩하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민족적, 사회적으로 깊이 분노한 나라에서 특별한 매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지배적인 두가지 사상을 하나로 합친 '(민족)국가 사회주의'라는 이념 혹은 공식은 시대의 수많은 정치적 강령들과 질서계획들의 토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능공 안톤 드렉슬러가 자신의 '정치적 각성'에 대해서 쓴 소박한 체험적 보고서 에도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1918년에 이미 산업체의 후원을 얻어서 '반볼 셰비키 연합'을 결성한 에두아르트 슈타틀러의 베를린 강연들에도 나타나 는 생각이었다.그것은 뮌헨의 방위군 지역사령부에 의해서 도입되었던 계 몽강좌의 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제목을 가진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에 대해 도발적인 공명을 불러 일으킨 사싱 이기도 했다. 이 생각은 사회민주당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서, 제2차 인터내셔널 의 실패에 대한 실망에서 전쟁 발발 무렵에 몇 명의 독립적인 인물이 국가 사회주의 혁명 계획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도이치 사회주의 노 동자당'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철도 기술자 루돌프 융이 1919년에 펴낸 광범위한 이론서의 제목은 (민족국가적 사회주의의 형성과 목적)이었다. 국 가사회주의는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서 자기들이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를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시대적 정치사상이라고 자신하였다. 모든 인터내셔널의 노력들과 아주 다르게 융은 1918년 5월에 벌써 오스트리아의 동지들과 힘을 합쳐서 '도이치 국가사회주의 노도자당'이라고 이름을 바꾸 고 있다. 호프 양조장의 모임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노동자당도 이름을 바꾸었 다. 수데텐 지역과 오스트리아 그룹을 본받아서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 자당'이라고 바꾸었다. 동시에 국경 저편 동지들의 전투상징을 받아들여서 갈고리 십자가를 상징으로 채택하였다. 오스트리아 국가사회당 당수인 발 터 릴 박사는 바로 직전에 모든 국가사회주의 정당을 결속시키는 서비스를 맡을 '국가간 사무처'를 만들었다. 이제 여러 가지 댜앙한 결속을 위해서 국가사회주의 강령들 간의 활발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특히 뒤셀도르프의 기술자 알프레트 브루너의 '도이치 사회주의당'과 활발한 접촉을 했다. 이 정당은 "극좌이며 우리의 요구는 볼셰비키들의 요구보다 더 극단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중간급 도시에 지구당을 두고 있었고, 뉘 른베르크 지구당은 교사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이끌고 있었다.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1920년 4월 1일에 히틀러는 마침내 군에서 제대하였다. 이제 그는 대안 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적으로 정치에 헌신하여서 국가사회 당의 지휘를 맡고 당을 자기 생각대로 개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자 르 강 가까운 곳에 있는 티어슈 거리 41번지에 방 하나를 세웠다. 하루 대 부분 시간을 그는 지하실에 있는 당사무소에서 보냈다. 그러나 당의 직원 이 되는 것만은 절대로 피했다. 당이 최초의 위기를 맞이하자 그가 어떤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갔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셋방 주인집 여자는 언제나 똑같은 일을 하는 더러운 젊은 남자를 '진짜 보헤미안' 이라 고 생각했다. 그는 더 잃을 것도 없었다. 그의 자신감은 주로 연설가로서의 재능과 냉 정함과 위험에 대한 각오에서 나온 것이지 이념의 확신에서 나온 것은 아 니었다. 이념 자체가 아니라 이념이 제공하는 도구적 가능성, 그 자신의 말 로는 그것이 '강력한 구호'를 내놓는가 하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고루 한 민족 이론가들'과 '말만 하는 인간들'과 '사상 도둑들'에 대한 '불쾌함과 깊은 역겨움'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그가 정치적으로 형성 가능한 실체가 없는 단순한 사상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리고 자기가 논쟁에서 남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폭발적 인 연설을 시작했다는 사실에도 드러나고 있다. 그는 사상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사상의 입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숙 한 사용을 통해서라고 여겼다. 진실이 아니라 무기로서의 속성의 사상에 설득력을 부여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반박하기 힘든 불확실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모든 이념은 최고의 이념이라고 하더라고 이념 자 신이 목적이 될 경우에 위험하게 된다. 사실상 이념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 일 뿐이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정치투쟁에서 폭력은 언제나 이념의 뒷받 침을 위해서 필로 하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제 자기 가 들어선 '국가사회주의'도 그는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야심만만한 목적 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그가 무대에 가지고 들어선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표어가 되 었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포함하고 있는 화해의 이념은, 특히 전선에서 남자들 사이의 유대라는 전쟁을 경험하고 난 다음 그들의 미래의 일부를 빼앗아가기 시작한 계급투쟁의 구호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시대에 가까 운 것으로 여겨졌다. 세기가 바뀐 직후에 벌써 국가사회주의적인 생각을 보여주었던 작가 아르투어 묄러 반 덴 브룩크는 국가사회주의는 이제 '도 이치 미래의 일부'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것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간교하 고, 건강한 인간이성을 경멸하는, 발상이 풍부한 정치가의 손 안에 들어가 자 그것은 정말 그렇게 되었다. 이 이념은 수많은 지원자를 얻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히틀러가 대중의 환호성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야말로 바로 도이치의 미래라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