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위대한 도이치 사람, 뤼거 그렇지만 히틀러는 또 다른 소시민 반유대주의의 대표자인 칼 뤼거 박사 에게서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빈 시장이며 기독교사회당의 말 잘하는 당 수인 그는 (나의 투쟁)이 가장 경탄하는 인물이다. 그는 '진짜 천재적'이고 '모든 시대의 가장 강력한 도이치 시장'이라 불리고 있으며 또한 '동부국경 의 마지막 위대한 도이치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프로그램, 특히 느슨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짜여진 반유대주의 프로그램과 썩어서 무너져내 고 있는 다민족 국가가 아직도 생존능력이 있다는 그의 믿음에 대해서 히 틀러는 솔직하게 비판하였다. 그럴수록 뤼거의 선동가적인 위대성은 더욱 더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가 주도적인 사회적, 기독교적, 반유대적 감정이나 확신들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전략적인 유연성도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강력한 상대방에 대해서 건방지게 원칙을 고수하려 함으로써 영향력을 잃어버린 쇠너러와는 달리 뤼거는 온화하고 능숙하며 인기가 있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했을 뿐이고 속으로는 경멸하였다. 그는 전술적, 실용적 인 사고를 하면서 이념보다는 현실을 더욱 중히 여겼다. 그가 대략 15년간 시장직에 있는 동안 교통망이 현대화되고, 교육체계가 완성되었으며 사회 보장이 개선되고, 녹지대가 만들어지고 빈에 거의 1백만이 일자리가 확보 되었다. 뤼거는 카톨릭 노동자 계층과 소시민 계층을 기반으로 해서 상승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산업화를 통해서 사회적 추락이나 빈곤의 위협을 받고 잇는 사무직과 하급공무원, 영세상인, 임대업자, 성직자 등이 그의 지지기반이었 다. 그도 또한 쇠너러와 마차가지로 널리 펴진 공포감을 이용하였는데 다 만 선별되고 극복될 수 있는 적에 대항해서만 이용하였다. 그는 어둡게 칠 해진 공포감을 불러들이지 않고, "소시민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와 같 은 말투에 나타나는 분명하고 인간적인 상투어들을 공포심에 대항하여 내 세웠다. 히틀러의 지속적인 경탄은 능숙한 마키아벨리 신봉자였던 뤼거 시장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남자의 교훈적이고도 친근한 모습에서 자 기와 개인적인 일치점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 자신이 소박한 계층에서 나왔듯이 뤼거도 온갖 반대와 사회적인 멸시를 딛고 일어섰으며, 그를 시 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세 번이나 거절한 황제의 반대를 딛고 마침내 그토 록 열망하던 사회의 인정을 받아냈다. 용감하지만 무의미하게 사라질 적대 감을 가진 쇠너러와는 달리 뤼거는 지배계층과 조직화된 결속을 맺고서 확 고하게 위로 향한 길을 만들어나갔다. 히틀러는 그를 숭배하면서 결코 잊 을 수 없게 된 이 교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오래된 힘의 원천에서 자신의 운동을 위해 가능한 한 최고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존 재하는 모든 권력수단을 이용하고, 현존하는 강력한 힘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뤼거가 감정적인 총체적 표어들의 도움을 받아서 결성한 대중정당은, 1 백 년 전에도 이미 성과가 있었듯이 두려움이란 계급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강력한 유럽의 새로운 표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헤미아 국가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 국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점점 커지던 산업지대의 도이치 노동자 들은 1904년에 트라우테나우에서 도이치 노동자당(DAP)을 결성했다. 시골 에서 공장지대로 흘러 들어와서 파업 대체노동자로 일을 하는 싸구려 체코 인 노동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곧 여 러 가지 형태로 유럽 전지역에 작동될,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딜레마를 해 결하려는 시도의 전조였다. 공산주의는 민족간의 대립을 절대로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인류 전체의 구호에 합당한 형태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보헤 미아와 모라비아에서 도이치 노동자의 민족적인 특별의식은 계급투쟁 이론 안에 설 자리가 없었다. 새로운 정당의 참가자들은 이전의 사회민주당원들 에서 상당수를 충원하였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연대정책이 이 지역의 체 코 다수인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근심에서 자신들의 이전의 이념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도이치 노동자당 강령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프롤레 타리아 연대정책은 '실패했으며 중부유럽의 도이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손해'였다고. 민족적 이해와 사회적 이해의 일치는 이들 도이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 로 중요한 보편적인 진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그러한 진실 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주의와 대립시켰다. 민족공동체의 이념에서 그 들은 사회주의와 민족감정의 화해를 구했다. 정당의 강령은 방어와 자기주 장 요구를 하나로 합쳤다. 그것은 확고한 반자본주의, 혁명적, 자유주의적, 민주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 처음부터, 주로 체코, 유대 등 이른바 이방민족들에 대한 공격과 결합된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형식을 지닌 것이었다. 초기의 당원들은 소규모 광산 노동자와 방직공장 노동자, 철도 노동자, 수공업자, 노동조합원들이었다. 그들은 못 배운 체코 노동자 들보다는 도이치 시민들, 약사, 기업가, 고위 공무원이나 상인들에게 더 가 까운 감정을 느꼈다.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선구자 집단을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1차 세계 전쟁이 끝난 직후 일시적으로 원래의 국가사회주의 집단과의 관계가 상당히 밀집했는데도 그랬다. 보헤미아의 동지들은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DAP)의 지도자 히틀러가 20세기를 결정하는 자신의 원래 이 념보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너무나 분명하게 문제시하였 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쇠너러와 뤼거 사이를 확실하게 비교함으로써 자 기자신의 이념을 전개하려고 시도하였다. 자신의 생각이란 두 사람의 요소 를 어느 정도 결합시킨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기독교 사회당이 광범위한 계층을 잘 이해학 위해서 '모든 도이치 운동' 처럼 종족문제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민족주의적 노 선을 취했더라면, 혹은 '모든 도이치 운동'이 유대인 문제의 목적과 민족감 정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 사회당이 가졌던 실용적인 지혜, 특히 그 사회주의적 생각을 받아들였더라면 내가 확신하기로 이 운 동은 당시에 이미 성공적으로 도이치의 운명 속으로 끼여들 수 있었을 것 이다. 이러한 비난을 해서 그는 자기가 이 두 정당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은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 시절에 오랫동안이 사색을 통해 얻은 정치적 계획을 갖지 못하고 쇠너러와 비슷하게 극히 일반적으로 민족주의 적인 증오심을 방어심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유대인 과 다른 '열등종족'에 대한 몇 가지 우중충한 선입견들, 그리고 실패한 희 망에서 솟아 나온 충동적인 말참견 욕구가 여기 덧붙여진다. 그는 자기 주 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성적이기보다는 기분에 따라서 파악하고, 공개된 사건들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적 세계라기보다는 정치 화의 도중에 있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는 처음에 예술가의 꿈에 부풀어 정치에 대해서는 '곁다리' 관심을 가 졌을 뿐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운명이 주먹'이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쓰라 린 적대감을 품은 젊은 건축노동자의 이야기는 뒷날 모든 교과서에 실려서 히틀러 전설의 확고한 일부가 되지만, 그 이야기에서도 그는 노동조합에 들어오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사태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라는 재미 있는 이유가 붙어 있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보아 정치는 오랫동안 괴로움 을 덜어내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세계가 잘못했다고 비난하고 자신이 운명 을 세계질서의 부족 탓으로 돌리면서 거기서 희생제물을 찾아내는 방법이 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반유대주의자 단체에 가입하였다. 극단적인 비참 상태 히틀러를 쿠비체크와 헤어진 다음에 들어간 펠버 거리의 집을 금방 다시 나와서 1909년 11월까지 여러 번 이사했다. 그때마다 자기 직업을 '순수화 가', 한 번은 '문필가'라고 소개하였다. 몇 가지 사실은 그가 법적 의무인 국방의무를 위한 '기록'을 피했으며,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해서 관청의 체포 를 피하려 했다는 짐작이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한 것은 아버지의 유산과 그이 목적 없는 불안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일지 모른다. 이 시기의 묘사들을 보면 그는 창백하고 움푹 팬 모 습에 머리카락을 이마에 깊숙이 드리우고 성급하게 움직이곤 했다. 그 자 신이 나중에 확인해준 것에 따르면 그는 당시 매우 두려움이 많았고, 유명 한 사람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다섯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하지도 못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처럼 고아연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어떻게 해서인지 미술 아 카데미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해서 고아연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 동안 근 심 없고 속박 없는 삶을 살도록 해주었던 아버지의 유산도, 부모의 집을 팔아서 남은 돈도, 1909년에는 다 떨어졌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9월에 시 몬 기념 거리에 세든 사람 집에 다시 방 한 칸을 세들었다가 11월에 그 집 에서 나왔다. 처음으로 중요한 히틀러 전기를 쓴 콘라트 하이덴은 히틀러 가 그 당시 '극단적인 비참'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며칠 밤은 지붕도 없이 공원 벤치와 커피숍에서 잠을 잤지만 겨울이 닥쳐오자 그럴 수도 없게 되 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909년 11월은 특별히 추웠다. 비가 많이 내리고 드물지 않게 비에 섞여 눈까지도 내렸다. 같은 달에 벌써 히틀러는 집 없는 사람을 위한 마이틀링 수용소 앞에 저녁마다 늘어선 사람들 대열에 끼여들었다. 여기서 그는 라 인홀트 하니쉬라는 이름의 떠돌이를 알게 되었다. 하니쉬는 나중에 손으로 쓴 보고서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끝에 마이틀링의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수용소를 찾아냈다. 왼 쪽 간이침대에는 완전히 상처투성이의 발을 가진 야윈 젊은이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강한 베를린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그는 독일을 꿈꾸고 있 었다. 나는 그의 고향인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를 지나왔기에 그의 이야기 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떠돌이 하니쉬와 함께한 생활 1910년 여름까지 대략 일곱 달 동안 히틀러와 하니쉬는 가까운 친구이자 사업상의 동지로 지냈다. 물론 하니쉬 역시 당시의 다른 증인들보다 더 믿 을 만하지는 못하다. 그렇지만 하니쉬가 히틀러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지 내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강조하고, 그에게 함께 일자리를 찾아보자 고 설득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심리적으로 상당히 그럴싸한 부분이다. 사실상 히틀러의 시민계급에 대한 동경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라인홀트 하니쉬 같은 문제투성이 실패자들과 함께 보낸 이 수용소 시절보 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다. 1938년에 하니쉬를 잡게 되자 히틀러는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인생 의 절정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독특한 독선의 태도로 이 시절의 억누 르는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환상 속의 궁전에 살았 다." 살아가는 수완이 있고 자기 계층의 온갖 곤궁, 술책, 기회 등을 잘 알고 있던 하니쉬는 어느 날 히틀러에게 어떤 직업을 가졌었냐고 물어서 화가라 는 대답을 들었다. 페인트공인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대꾸했다. 하니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심들이 있지만 그 래도 다음의 보고에서 히틀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모욕감을 느끼 고 자신은 그런 종류의 화가가 아니라 공부한 사람이고 예술가라고 대답 했다." 하니쉬의 제안에 따라서 그들은 함께 사업을 벌였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들은 20구연 멜데만 거리에 있는 싸구려 대중숙박시설인 남자 하숙집으 로 거처를 옮겼다. 침실 정리가 이루어지는 낮 동안에 히틀러는 독서실에 신문을 펼쳐놓고 앉아 있곤 했다. 그는 대중적인 과학잡지를 읽거나 아니 면 빈 풍경을 담은 우편엽서들을 그렸다. 정밀한 수채화들이었다. 하니쉬는 그것을 그림 판매상들, 목수들, 때로는 양탄자 짜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그 들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서 "안락의자나 소파의 높다란 등받이 속에 그 그 림을 넣었다." 수익금은 나누어 가졌다. 히틀러는 이런 초라한 옷차림을 하 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처지에 있 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하니쉬는 자신이 '때로는 아주 좋은 주 문을 따낼' 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여러 주가 지나갔다." 남자 하숙집의 거주자들은 온갖 계층 출신이었다. 주변의 공장과 기업체 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와 사무직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함께 부 지런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니쉬는 악보 베끼는 사람, 가격표 그리는 사람, 이름 머리글자 파는 사람 등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실 패자들이 그 구역의 상태를 더 잘 보여준다. 여러 가지 모험가들, 파산한 상인들, 악사, 거지, 채무자, 혹은 쫓겨난 관리 등이 주요 거주자들이었다. 다민족 국가의 모든 지방에서 모여든 떠돌이들이었다. 그리고 행상이나 가 두 판매를 해서 사회적 상승을 시도하려는, 제국동부에서 온 유대인들이었 다. 그들 모두를 결합시키는 것은 그런 가난에서 벗어나서 위를 향한 도약 을 엿보고 있는 의지였다. "연대감의 결핍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추락자 계 급이 중요한 특징이다." 히틀러는 하니쉬를 빼면 남자 하숙집에서 친구가 없었다.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의 참을성 없은 성질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영혼 에 거슬리는' 빈 사람 타입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 니쉬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빠져나온 이후로 그가 더 이상 우정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친밀한 관계를 그를 화나고 지치게만 했다. 그 대신에 그가 배운 것은 천박한 사람들 사이의 동료관계였다. 그것 은 접촉과 익명성을 보장하고, 아무 때라도 철회할 수 있는 충성을 제공하 였다. 그것은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거의 언제나 동일한 개성을 가지고 겪 는 늘 새로운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전쟁의 참호에서 자신의 당번병과 운전수들 한가운데서-그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을 그는 당수 시절이나 나중에 제국수상 시절에도 언제나 좋 아했다. -그리고 총통 사령부의 방공호 속에서 언제나 히틀러는 남자 하숙 집의 생활방식을 되풀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황홀한 공동생활 방식이었고,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과 상당히 일치 하는 것이었다. 집의 관리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툭하면 정치 이야기를 해서 자극하는 사람이었고, 하니쉬의 보고에 따르면 "주변이 뜨겁게 달구어지는 수도 많았고, 서로간에 불쾌하게 사나운 눈길 을 주고받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생각을 상당히 날카롭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과격한 대 안들, 모든 사건에 대한 지나친 관심 등은 그의 사색의 기본이었다. 그이 기피적인 의식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몰고가고, 별 것 아닌 사건을 형이상 학적인 파국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일찍부터 그는 위대한 모티프들의 유 혹을 받았다. 영웅적인 것, 숭고하게 장식적인 것, 이상적인 것을 향한 그 의 단순하고도 예술가 같은 회고적인 경향은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신들, 영웅들, 거대한 것으로 확장된 의도, 혹은 무시무시한 최상급 등이 그를 자 극하고, 현재의 지겨운 생활상태를 덮어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그를 밝은 불꽃으로 데려갔다."고 하니쉬는 서투르지만 분명하게 적었다.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이 이미 당시에 베를린 개축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끊임없는 계획입안의 충동도 이런 맥락에 들어 있다. 건축청부업자에게 고용된 일도 옛날이 건축가의 꿈을 도로 일깨웠다고 한 다. 몇 가지의 모델 팸플릿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거대한 비행기 제조 회 사의 소유자가 되어서 '매우 부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꿈꾸었다. 그 사이에 그라이너의 소개로 머릿기름 광고판과 이불깃털 사업을 위한 광고판, 그리고 '테디'라는 이름의 땀날 때 쓰는 파우더를 위한 광고판을 그렸다. 분명하게 히틀러의 서명이 들어있는 작품이 발견되었다. 그 작품은 경직된 학생 같은 서투른 솜씨로 두 명의 우편배달부를 그린 것이다. 한 명은 지쳐 주저앉아서 굵고 푸른 색 땀방울이 양말에서 배어 나오고 있는 데 다른 사람은 자신의 '친애하는 형제'에게 매일 1천 개의 계단을 오르내 려도 '테디 파우더만 있으면 즐거움'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또 다른 광고판 에는 성 슈테판 교회의 탑이 비누더미 위로 장엄하게 솟아 있다. 히틀러 자신은 이 시기의 생활상태에 대해서 자신이 마침내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이 기억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교외의 자그마한 싸구려 찻 집에 신문을 펼쳐들고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곤 했으며 반유대주의 신 문인 (도이치 민족지)를 즐겨 읽었다. 위대한 바그너와의 내적인 동류의식 그 모든 것을 합쳐보면 이 스무 살 청년이 삶과 담을 쌓고 엄격한 의미 에서 비정치적인 괴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에도 자신이 별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시 기에 '음악'에서만 우상이었던 것이 아니다. 초기엔 삶에 실망하고 좌절도 겪었지만 완강한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가 마지막엔 '세계적 명성을 얻어낸 그의 삶'을 히틀러는 자신의 삶이 모범으로 여겼다. 바이로이트 대 가의 모습에서 자신의 성취와 실책을 찾아내려는, 낭만적인 천재개념의 유 혹이 분명하게 보인다. 한 세대가 바그너는 통해서 혼란을 겪고 제압당하 고 시민세계에서 멀어졌다. 젊은 히틀러가 학업을 포기하고, 약속들로 채워진 유혹적인 대도시로 탈 출해서 최초이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도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경탄에서 연유한다.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이 비슷한 기대를 가지고 밟았던 길이기도 했다. 재주 잇고 위태로운 아웃사이더들의 왕도였던 것이다. 린츠의 세관원 아들의 억눌린 잿빛 모습은 낭만에 젖은 도망친 학생들이 무리에 끼여든 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토마스 만, 하인리히 만,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헤르만 헤세 등이 있고, 학교에서 도망친 청소년 유형은 세기가 바뀔 무렵 수많은 작품들에 등장한다. 에밀 슈트라우스의 1901년이 단편소설 (친구 하인), 릴케의 (체육시 간)(1902년), 로버트 무질의 (젊은 퇴를레스)(1906년), 헤르만 헤세의 (바퀴 아래서)(1906년), 프랑크 베데킨트의 (봄의 깨어남)(1906년), 그리고 일년 뒤에 나온 프리드리히 후흐의 (마오) 등에 이런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도망치거나 혹은 몰락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 그들은 시민사회에서 겪는 고통을 미화하고, 일상의 의무목록에 짓눌려 있는 아버지들의 평범한 세계에 맞서 사회적 생산성이 없는 '예술가'라는 이상형을 내세웠다. 그 뒤에서 끊임없이 예술가와 시민성, 천재와 시민성이 라는 낭만적인 대립이 전개되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시민의식을 칼모 어(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도둑떼)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한 명)와 수많은 다른 도둑 두목들, 그리고 우수에 젖은 반항자들 이후로 바로 이런 낭만적 인 대립에서 경탄할 만한 반주인공들을 얻었던 것이다. 시민성이란 질서, 헌신, 지속성 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쓸모있는 것을 만들어 냈다. 그에 반해서 정신이 유례 없는 자기상승, 그 명성의 행위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극단적인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나 천재 등 복잡한 인간은 내면 깊숙이 시민세계에 속하지 않으 며,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는 저 멀리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이런 유형을 처음으로 분석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언급하고 있듯이 거기서부터 자살자들의 관을 두는 곳, 불멸의 전당 등은 사회와 비슷한 거리만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고 보면 젊은 히틀러가 고차원적인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했던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엉성한 것이었 던가. 그의 재능이란 얼마나 의문 투성이었던가, 남자 하숙집에서의 생활은 그 비천한 고등사기술, 기생습관, 반사회성 등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 것인 가. 그는 후기 시민사회적인 천재관념에서 이 모든 자기변명을 찾아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부정할 수 없는 모범을 찾아내고 있다. 히틀러는 뒷날 스스로 밝히기를 리하르트 바그너를 빼면 "모범의 될 만 한 것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음악가와 드라마 작가로서 의 바그너뿐 아니라 '도이치 민족을 사로잡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 모습'을 가졌던 그의 강력한 개성 전체를 들고 있다. 그는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서 '도이치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바그너가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지녔는지 지적하곤 하였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이고 하는 의지 없이' 정치적으로 작 용한 바그너의 용기와 에너지를 경타하고 있으며, 이 위대한 남자와의 내 적인 동류의식이 자신에게는 '히스테리적인 흥분'을 일으켰다고 했다. 히틀러와 바그너의 유사성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일치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젊은 히틀 러의 모방으로 인해 더욱 비슷해진 기질상의 접근은 이상하게도 가족 같은 유사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토마스 만이 처음으로 '히틀러 형제'의 초상화 를 그렸는데, 그는 1938년에 히틀러가 승리의 절정에 있을 때 이렇게 썼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 현상에서 예술가의 한 출현양식을 보아야 하지 않 겠는가? 특별히 부끄러운 방법이지만 모든 것이 여기에도 나타나 있다. '힘 든 특성', 게으름, 어린시절을 정의하기 어려움, 어느 한 곳에 밀어 넣기 어 려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성격, 가장 깊은 사회적, 영 적 보헤미안 상태 안에 반쯤 멍청하게 식물처럼 들어 있기, 근본적으로 오 만한 거부, 자신은 너무 훌륭해서 이성적이고 명예로운 활동을 할 수 없다 고 거부하는 것 등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인가? 무엇인가 규 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을 아껴두려는 어두운 예감에서다. 그 규정할 수 없는 것을 이름 붙여 말한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게다가 양심의 가책, 죄의식, 세상을 향한 분노, 혁명 본능, 폭발적 인 보상욕구의 무의식적인 퇴적,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입증해야 한다는 끈 질긴 의식... 이 모든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유사성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 앞에서 눈을 감지는 않겠다." 그밖에도 둘은 아주 특이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조상의 신원을 확인하 기 어렵다는 점, 학교에서의 실패, 군대 도피, 병적인 유대인 증오, 채식주 의 등이다. 바그너의 경우 채식주의는 거의 광적인 상태여서 인간은 채식 을 통해서 구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정상태가 좌절과 열광, 승 리와 파국이라는 양극단까지 직접 교차한다는 점도 두 사람이 비슷하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수많은 오페라에서는 자신의 법칙만 따르는 아웃사이더 와 전통에 결부된 완강한 질서와의 고전적 갈등이 나타나곤 한다. (리엔 치), (로엔그림), (슈톨칭), (탄호이저) 등을 보면서 미술아카데미에서 거절 당한 히틀러는, 남자 하숙집의 독서실에 그림물감을 펼쳐놓고 앉아 있을 때의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의 대립을 본다고 느꼈다. 때로 그는 그토록 추종하는 사람의 모범인 바그너를 따라서 살거나 바로 그 모습을 따라 스스로를 양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양쪽 다 지나치게 흥분된 권력의지와 폭군적인 성향을 가진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은 억 제할 수 없는 광범위한 정복의지의 도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대규모이면서 위엄 있는 것에 대해서 항거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예술적으로 이중적인 취향, 마취시키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애착 등은 바 로 이러한 성향에 근거한다. (리엔치) 이후 바그너의 최초의 대규모 작품은 2백 명의 남성 코러스와 1백 명의 관현악단을 위한 것이었다. 날카로운 콜로포늄의 섬광 아래서, 전 사한 혼령들의 저당인 발할라, 열병식, 예배의식이 뒤섞이면서 펼쳐지면 바 그너 음악의 특징인 거리낌없고 노골적인 효과, 공허하게 위대한 잠파노 효과를 통한 자기유혹 등이 나타난다. 제3제국의 행사양식은 바그너 오페 라의 전통, 이 선동적인 예술형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다 고도의 섬세한 심리적 감각을 보인다. 이것은 놀랍게도 진부 함에 대한 불감증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천민적인 참칭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이야기되는 평가에 나타나 있다. 고트프리티 켈러는 이 시인 작곡가를 '미용사 악당' 이라고 불렀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동시대 사람 하나는 히틀러를 가리켜 '낙인 찍힌 급사장'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수사적인 강간살인자'라고 불 렀다. 그러한 표현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이고 저급한 평판의 특성은 두 사 람에게 공통적이다. 그것은 천재적인 사기술과 고취된 사기도바꾼의 모습 인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혁명가 역할을 하면서 왕의 친구 노릇도 했듯이-칼 마르크스는 '국가 음악가' 라고 빈정거렸다-젊은 아돌프 히틀러 또한 정확 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회에 대한 자신의 미움을 기회주의적인 본능과 화 해시킬 어떤 상승을 꿈꾸었다. 바그너는 예술을 존재의 목적이며 규정으로 삼고 예술가를 존재의 최고 심판자라고 칭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난 삶의 모순들을 없앴다. "정치가가 절망하고 손을 내려놓을 때, 사회주의자가 쓸모없는 체계들로 자신을 괴롭힐 때, 철학자도 겨우 해석만 할 뿐 미리 예고할 수는 없는" 시간에 언제나 예술이 구원하며 개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표현한 예 술의 이끌림에 따라 삶을 전체적으로 미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예술작품의 수준으로 올라가고, 정치는 예술의 정신에서 새롭게 완 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3제국에서 공식적인 생활이 연극화되고, 정부는 연출의 정열을 보이고, 연극학은 정치적인 실제가 되고, 드물지 않게 정치 의 목적이 된 듯이 보이는데 이러한 바그너 강령의 요소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공통점들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당시 경탄하던 친구(바그너)에 대해서 그 유명한 '시대에 안 맞는 관찰 4번'에서 말했던 '딜레탕트가 되려는' 타고난 성향은 젊은 히틀러에게서도 나타난다. 두 사 람은 모든 영역에 독단적으로 간섭하려는 두드러진 욕구를 보였다. 사람들 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여 칭송받으려고 하는 고통스러운 명예욕, 금 세 활기를 잃어 버리는 어제의 명성을 오늘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려 는 욕구를 가졌다. 두 사람 다 소시민들과 가까웠다. 그것은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생각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러한 성향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바그너와 히틀러의 차이점은, 히틀러에겐 자제력과 노력이 완전히 결핍 되어 있다는 것, 거의 최면적인 게으름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 태도임 을 알 수 있다. 어느 날인가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절의 이 모든 고통스런 굴욕과 고통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복수를 할 것이라는 번쩍이는 예감으로 강화된 존경스러운 의지력의 작업이었다. 비정치적인고 연극적인 세계관 리하르트 바그너의 표지를 지닌 히틀러가 세계에 대해서 비정치적이고 연극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징후들에 나타난다. 그 자신 이 표현한 대로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파고드는' 여러 날을 보내고 난 다 음 어느 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빈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 위를 구경하게 되었다. 약15년이 지난 다음에 이 체험을 기억해서 서술한 내용 속에 이 '끝없는 4열 행렬'이 그에게 얼마나 엄청난 인상을 불러 일으 켰는지 담겨 있다.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그는 링 거리의 가장자리에 서 서 '숨을 죽이고 천천히 지나쳐가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의 움직 임'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려운 압박감을 느끼면서' 돌아서서 집으로 달려왔다. 그 행렬이 남긴 장엄한 효과에 압도된 상태였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의 정치적인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이 대규모 인간집회가 어떤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문 제에만 몰두하였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연극의 문제였으며 그가 본 것은 정치가에게 무대연출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히틀러가 간혹 연극작품을 시도하면서 '가능한 한 장엄한 연출'에 얼마만한 의미를 부여하 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친구인 쿠비체크의 눈에도 띄었던 일이다. 이 최초의 히틀러 숭배자는 뒷날 연극의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지만 친구 가 '엄청난 경비'를 생각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바그너가 무대 에 요구했던 규모도 '완전히 뒤로 물러서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5년 간의 빈 시절에 지적인 교양체험을 했다고 선전하고 '무한히 많이, 그리고 철저한' 독서를 하였다고 지적하였 다. 건축물과 오페라 극장을 방문한 것을 빼면 그는 '책들을 유일한 벗으 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절의 중요한 인상들은 지적인 것이기보다 는 오히려 선동가적이고 정치책략적인 차원에서 구했다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다른 건축 노동자들이, 자만심 때문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서 접촉을 기피하는 시민계급의 인물을 '현장'에서 쫓아버리려 한 사건을 통해 서 그는 이런 논쟁들을 간단히 끝내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은근 히 경탄하는 말투로 말한 바로는 '감히 반항하려 드는 자의 골통을 부숴 놓는' 것이다.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정치적 각성을 다루고 있는 부분은 이론적 배경이 약하기 때문에 그가 인정한 당시의 이념들을 비판적으로 다 룬 흔적이 없다. 그는 여기서 분명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도이치 시민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좇고 있을 뿐이다. 그 대신 이념들의 조직화 문제, 대 중동원에 적합한 특성 등이 그에게 탐욕적인 관심을 일깨우고 최초의 번쩍 이는 깨우침들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날의 연설들과 공고문에 나타나는 수많은 특징적인 어법들은 빈 시절에 이미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대중에게 강요하는 '배후의 인물들' '어두운 조종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하니쉬의 보고에 따르면 어느 날 히틀러는 베른하르트 켈러만의 소설 (터 널)을 대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완전히 도취된 상태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영화에서는 민중연설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 남자 하숙 집에서 열렬한 연설들이 이루어졌다."고 하니쉬는 확인해주고 있다. 요제프 그라이너는 거짓 감사편지와 위조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비밀제조법에 따라 만든 머리털 나는 약을 선전하는 안나 칠락이라는 여자를 히틀러에게 소개시켜주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히틀러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여자의 기술을 보며 감탄하고 나서 심리적인 영향력의 무서운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전이야, 선전, 아주 오랫동안 선전 해서 마침내 믿음이 생겨나고 어떤 게 상상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모를 정 도가 되기까지 선전하는 거지." 선전이란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정수거 든... 하늘나라가 됐든, 머릿기름이 됐든 말이야." 물론 히틀러가 사회민주당의 선전을 보고-사회민주당의 신문, 데모, 연설 등-이끌어낸 결론을 읽어보면 더욱 확실한 근거를 보게 된다. 이 결론들은 독특한 실천법을 규정하고 있다. 광범위한 대중심리는 어중간하거나 약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 여 자의 영적인 감수성은 추상적인 이성의 근거를 통해서 규정되기 보다는, 보충적인 힘을 향한 정의 내리기 어렵고 감정적인 그리움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여자는 약자를 지배하기보다는 강자에게 굽히기를 좋아한다. 마찬 가지로 대중은 간청하는 사람보다는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주의적인 태 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독불장군처럼 자기주장만 펴는 이론에 대해 내심 더욱 만족한다. 대중은 자유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며 심지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뻔뻔스러운 정신적 테러 나, 인간적인 자유를 함부로 없애버리는 일 따위는 그들의 의식 속으로 들 어오지 않으며 그들은 그런 이론이 숨기고 있는 내적인 망상을 전혀 짐작 도 못한다. 대중은 오직 목적 의식이 확고한 표현들의 가차없는 힘과 잔인 성만을 보며, 그러한 잔인성 앞에 마침내 스스로 몸을 굽힌다... 개인을 향 한 육체적인 테러가 대중에게 미치는 의미도 역시 이해가 되는 일이다. 여 기서도 심리작용의 정확한 계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터, 공장, 집회장의 테러, 그리고 이따금 열리는 대규모 시위 등은 같은 정도의 테러가 그에 맞서지 않는 한 언제나 효과가 있는 법이다. 1910년 8월 초에 히틀러와 하니쉬 사이에 결별이 찾아왔다. 히틀러는 여 러 날 걸려서 빈 의회의 풍경을 그렸다. 그는 고전적인 사원양식에 매혹되 어서 그것을 '도이치 땅에 세워진 헬레니즘의 경이로운 걸작'이가고 불렀고 극히 양심적으로 열성을 다해서 그렸다. 어쨌든 그는 이 그림이 50크로네 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으나 하니쉬가 그것을 10크로네를 받고 팔았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있은 후 하니쉬가 나간 사이 히틀러는 하숙집 동료의 도움 을 받아서 그를 체포해서 고소했다. 하니쉬는 8월 11일 심문에서 7일간의 구류를 받았다. 그는 남자 하숙집에서 프리츠 발터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 기 때문에, 양보를 해서라도 소송을 유리하게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그림을 산 사람의 아내는 나중에 자기 남편이 정말로 그림값으로 10크로네를 지불 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하니쉬는 그 사람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어서 한동안은 역시 남자 하숙집에 사는 노이만이라는 유대인이 그림 판 매를 맡았다. 그리고 때로는 히틀러 자신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손수 고 객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3년 반 동안 히틀러의 이러한 교양 체험은 계속되었다. 거기서 인간에 대한 그의 견해들과 사회에 대한 관점이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그가 드높 은 야망을 가진 채 이러한 환경에서 증오와 반역의 콤플렉스를 발전시켰다 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에도 그는 특히 자신이 살던 구역을 통과하는 길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쓰 레기, 역겨운 더러움과 어두운 가난의 모습들'을 기억만 해도 소스라쳐 놀 라곤 했다. 공감이라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시기의 체험들과 생활환경들은 히틀러에게 무엇보다도 전쟁철학의 토 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그의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생각, 즉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그가 뒷날 수많은 연설들과 발언문, 책의 페이 지들 혹은 총통 사령부의 원탁 대화에서 '가장 잔인한 싸움'의 이념, '가차 없는 자기주장'의 이념, 근절, 냉혹함, 잔인성 혹은 강자의 권리 등에 대한 이념을 고백할 때마다, 그 속에는 언제나 이 남자 하숙집 시절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비속한 학교에서 얻은 잊을 수 없는 숙제였다. 사회적 다윈주의 히틀러의 생각에 들어 있는 사회적 다윈주의는 흔히 말해지듯 남자 하숙 집의 개인적인 체험에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과학에서 권위 를 얻은 한 시대의 성향이 그런 생각 속에 들어 있다. 스펜서와 다윈이 전 개한 생명체의 발전과 도태의 법칙들은 수많은 사이비 과학 출판물의 상위 심급기준처럼 되었다. 그것은 '생존을 둔 싸움'을 기본법칙으로 삼고, 인간 과 민족들이 함께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강자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널리 유행시켰다. 이른바 사회적 다윈주의 이론은 19세기 후 반에 어쨌든 잠시 동안은 모든 진영과 노선들, 정당들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 그것은 초창기에 통속적인 좌익 계몽주의의 요소를 지녔다. 그러다가 점차 우익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서 민주적 혹은 인간적 이념의 반자연성 을 입증하는 역할을 떠맡기에 이르렀다. 자유 사냥터처럼 민족들의 운명과 사회적인 대립들도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도태와 육종양성을 포함하는 엄격 한 선별과정을 통해서 결함이 발전되는 것을 막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 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상의 잡문들을 써서 널리 인기를 얻고 있던 조르주 바셰 드 라푸지, 메디슨 그랜트, 루트비히 굼플로 비츠, 오토 아몬 등의 수많은 글에서 이러한 사상을 위한 풍부한 어휘와 상상력이 제공되었다. 무가치한 생명 없애기, 민족정책의 목표 만들기, 쓸모없는 인간들을 강제 수용해서 불임으로 만들기, 머리 크기, 귀의 모양 또는 코의 길이 따위로 생존경쟁을 위한 유전적 특성을 가려내기 등이 거론되었다. 약자를 두둔하 고 선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은 드물지 않게 기독교 도덕, 관용, 문명 진보 등을 단호하게 거부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다윈주의는 포괄적인 체계 로 만들어지지 못했고 그 대표자들에 의해서 주장이 철회되기도 했기 때문 에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효과를 내지는 못 했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시민 시대 고전적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였고, 제국주의적인 책략과 억센 자본주 의적 관철의지를, 피할 길 없는 자연법칙의 형식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그 시대의 반민주적 경향들과 결합했다는 사실이 더 욱 중요하다. 자유주의, 의회주의, 평등이념, 국제주의 등은 자연법칙에 반 하는 것이고 종족혼합을 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최초의 중요한 종족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킨 고비노 백작은 (인간종족의 불평등에 대하여, 1853 년) 냉혹하고 귀족주의적인 보수주의로 민주주의, 민중혁명, 그리고 그가 경멸적으로 '시골감각'이라고 불렀던 그 모든 것의 반대자로 나섰다. 그러나 광범위한 도치이 시민계급에 더 큰 작용을 한 것은 원래 영국인 이었다가 나중에 도이치로 귀화한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작품이었 다. 이름있는 장교집안 출신이고 교육을 받은데다 신경질적이고 허약한 성 격의 그는 대학공부, 문필업,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히틀 러가 태어나던 해에 몇 주간 예정으로 빈으로 들어왔다가 20년 간 이 도시 에 머물렀다. 그는 합스부르크 다민족국가와 만난 결과로 종족적 역사이론 을 발전시켜서 경탄도 받고 배척도 받았다. 특히 그의 잘 알려진 작품 (19세기의 기반)(1899년)은 개별적으로 파고든 해석을 통해서 고비노의 광범위한 생각들을 뒷받침하고 대담한 사색을 펴 서 유럽 역사를 종족싸움의 역사로 해석하였다. 로마 제국의 붕괴를 보면 서 그는 이 몰락과정의 고전적인 모델을 혈통 혼합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종족의 우세가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 옛날의 로마 제국 이나 현재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어떤 특정한 국민, 어떤 민족, 어떤 종 족이' 파괴과정을 수행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집중'이 혼합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가벼운 재능, 때로는 독특한 아름다움, 프랑스 사 람들이 '육감적인 매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혼혈아들의 특색이다. 이러 한 것을 오늘날 빈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모이는 도시에서는 매일같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독특한 불안정, 약한 저항력, 성격의 결함 등 도덕적인 퇴화를 볼 수 있다." 체임벌린은 로마의 성문 앞으로 몰려드는 게르만족 고귀한 종족 프로이 센과 비교하였다. 프로이센은, 종족이 뒤죽박죽인 다민족국가와 비교해 볼 때 당연히 우세하다고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엘리트 개인주의자에겐 두려움과 방어의 느낌이 압도적이다. 계속 되풀이되는 염세적인 비전을 가 지고서 그는 게르만 사람들이 '생사를 건 말없는 싸움에서 종족의 심연 가 장자리에' 몰려 있다고 보았으며 혼혈아가 되는 망상에 시달렸다. "아직 아침이지만 어둠의 세력은 그 촉수를 뻗쳐 우리 몸 수백 군대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어둠으로... 끌어당기려고 한다." 그러므로 히틀러의 사 회적 다윈주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단순히 '집없는 자들의 철학' 만 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접에서 히틀러와 시민 시대의 깊은 결속이 뚜 렷해지는 것이며, 그는 다만 시대의 불법적인 아들이고 그 파괴자였을 뿐 이다. 근본적으로 그는 교외의 카페에서 제공되는 신문이나 그 밖의 책, 저 질 잡지, 오페라, 그리고 정치가들의 연설에서 얻은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 다. 그외 세계관에서 특별히 망가진 부분만이 하숙집의 경험을 반영한다. 다름 아닌 저 저급한 표현방식이다. 그는 정치가로서 대륙의 지배자가 된 뒤에도 여전히 '동쪽에서 온 더러운 것들' '신부 새끼들' '병신 같은 예술 쓰레기', 처칠을 가리키는 '네모 주둥이' 따위의 표현들을 썼다. 그리고 유 대인을 '한꺼번에 때려죽여야 할 돼지새끼들'이라고 불렀다. 히틀러는 이 시절의 분위기와 색채를 결정하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을 예 술에서 배운 감수성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어떤 개인이 아니라 시대가 그 에게 이념들을 주었다. 반유대주의와 사회적 다윈주의말고도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가진 사명의식 역시 그렇다. 그것은 염세적인 두려운 꿈의 다른 측 면이었다. 처음에는 극히 혼란스럽다가 우연히 정리된 세계관에는, 세기가 바뀔 무렵의 훨씬 더 일반적이고 지적인 유행의 영향을 받은 이념 조각들 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의 철학, 이성과 휴매니티에 대한 회의, 그리 고 본능, 피, 충동에 대한 낭만적 찬양이었다. 초인의 힘과 빛나는 반도덕 성에 대한 니체의 주장은 저속화된 현실 감각, 명랑성과 이성을 향한 의지 등은 받아들이지 않고 '야만적으로 열광하고 유혹되려고만' 한다고 말한 적 이 있다. 증명할 길 없는 의지 이론, 개인의 부정, 천재의 대한 몽상, 동정 론, 유대인에 대한 증오, 학문에 대한 증오 등만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것이 다. 현실에 맞선 꿈들 한 번 더 리하르트 바그너가 등장한다. 그의 예를 들면서 니체는 위의 오해를 언급했다. 바그너는 젊은 히틀러의 위대한 생의 모범일 뿐 아니라 스승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그의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아 들였다. 그를 통해서 시대의 부패한 정신이 중개되었다. 히틀러는 세기가 바뀔 무렵 널리 읽히던 바그너의 정치적 글들을 좋아했다. 바그너 문체의 과장된 광대함은 히틀러의 문법감각에 영향을 남겼다. 오페라와 함께 바그 너의 이런 글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에서 히틀러가 얻게 된 세계 관의 종합적인 이데올로기 배경을 이루게 된다. 즉 다위주의, 반유대주의("나는 유대종족을 순수한 인류와, 인류가 지닌 그 모든 고귀함의 천적으로 여긴다.") 게름나적인 힘의 표상, 해방의 야만 성, (파르시팔)의 혈통정화에 대한 신비주의, 작곡하는 연극인의 연극예술 세계 전부 등이었다. 그의 연극예술에서는 선과 악, 순수한 것과 타락한 것,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들이 날카롭게 이중적인 위치에서 적대적으로 대 립하고 있다. 황금의 저주, 지하에서 우글대는 열등종족, 지크프리트와 하 겐의 갈등, 보탄의 비극적 정신 등이었다. 피의 증기, 용 죽이기, 지배욕, 배신, 성욕, 이교도, 그리고 마침내 구원과 연극 수난의 종소리 등으로 이 루어진 비상하게 해석능력이 있는 세계, 바로 이것이 히틀러의 두려움과 승리의 욕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데올로기적 환경이었다. 보편적으로 타 당한 세계관을 향한 독학자의 열망을 품고서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세 계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미 확신이었고 '단단한 기분'이었다. 히틀러는 빈 시절을 자기 생애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긴 하지만 가장 힘 든 학교'라고 불렀으며 거기서 '진지하고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일생 동안 그는 이 거절과 모욕의 도시를 미워하였다. 이 점에서도 모범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비슷하다. 바그너는 젊은 시절에 경험한 파리에서의 실망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지 못 하고 파리가 화염 속에 몰락하는 환상을 사랑했다. 한 츠를 도나우 강변의 문화적 대도시로 만들려는, 이 모든 자연적인 조건들 을 넘어서는 히틀러의 거대한 계획이 빈에 대한 줄지 않는 원한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은 억지가 아니다. 빈을 잿더미로 만들려는 환상으로 때늦은 만족을 얻으려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1944년 12월에 빈에 대공포를 추가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면서, 이 도시는 포탄전을 배워 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그를 점점 억압하였다. 모든 증언이 똑같지는 않았지만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바뀔 무렵에 그는 아주머니인 요한나 ㅍ 츨에게서 상당한 돈을 송금받았다. 그러나 이 돈은 새로운 시작, 어떤 진지 한 출발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목적 없이 방황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학생, 예술화가 혹 은 작가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여전히 건축가로서의 불 확실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면서 그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꿈들만이 원대하고 위대한 운명을 지향하였다. 그가 현실에 대항하여 이꿈을 지속적으로 가졌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게으름과 수동적인 목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전체에 분명한 내적인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확정되지 않고 임시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조 합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시민적인 욕구를 유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남자 하숙집에서도 천재성과 미래의 명성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근심은 시대적 상황이 위대한 운명을 향한 자신의 요구를 망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건 없는 시대를 두려워했다. 그가 말한 것에 따르면 소년시절에 그는 이미 자신이 "너무 늦게 지상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고 하며 자기 "앞에 높은 평화와 질서의 시대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운명의 비열함이라고 보았다." 혼란스러운 미래, 소란가 무너 지는 질서만이 현실과의 단절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극단적인 꿈들에 유혹되어서 실망스런 삶보다는 차라리 파국을 맞는 삶을 바라는 사 람이 되었던 것이다. 제4장 뮌헨으로의 도주 1913년 5월 24일에 히틀러는 빈을 떠나서 뭔헨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 그는 스물네 살이었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동경과 원한이 뒤섞 인 감정으로 바라보는 우울한 젊은이였다. 은둔시설의 실망들이 그의 본질 에 들어 있는 외곬적인 폐쇄적 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빈에 친구도 없었다. 비현실을 지향하는 그의 성격에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는 오히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인물들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리하르트 바그 너, 리터 폰 쇠너러, 뤼거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운명의 억압' 아래서 얻은 '개인적 세계관의 줄기' 는 몇 개의 절대적인 원한으로 이루어져 있 다. 그러한 원한들은 어두운 부화기를 지난 뒤 때때로 정열적으로 폭발하 곤 하였다. 그는 나중에 언급한 대로 '절대적 반유대주의자,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전체의 적대자, 도이치 사람이 되어서' 빈을 떠났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자기 묘사가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가 일찍이 정치 적 판단력을 가졌다는 양식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양식화 의도 는 (나의 투쟁)을 쓰는 동안 줄곧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 이치 제국 수도인 베를린이 아니라 뮌헨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은, 그가 아 직도 비정치적인 동기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혹은 예술적, 낭만적 동기에 더 많이 이끌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세계전쟁 이전의 뭔헨은 예술의 도시, 사랑스럽고 감각적, 인간적인 예술 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예술화가의 삶은 여기서 극히 합법적인 것이었다." 뮌헨은 잊을 수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강조되고 눈에 띄기도 하는 특성은, 위협적이고 현대적이고 바빌론 같은 베를린에 대립하 는 요소들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미적인 것을, 이데올로기가 문화적인 것을, 즉 정치가 예술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었다. 뮌헨은 빈의 영향권 속에 들어 있었으며 그래서 히틀러는 자신이 저항하 는 것을 도로 선택하였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베를린이 아닌 뮌헨을 선택한 것은 아주 일상적인 감정에 따른 것이지 실용적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막연한 문화영역 의 동기를 따른 것이다. 1931년판 (도이치 사회를 위한 안내서)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 더 큰 영역'을 찾아내려고 뮌헨으로 옮겨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제국 수도 베를린으로 가야 했 을 것이다. 절박한 우월감의 욕구 이미 빈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내면적인 게으름과 접촉 빈곤은 뮌헨 시 절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래서 때로는 그가 아주 거대하고 공허한 공간 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는 정당이나 어떤 정치 그룹 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고독하였다. 인간들을 연결시켜 주는 분위기를 가진, 지적으로 아주 불안한 이 도시에서는 고정관념도 독 창성의 증거라고 평가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민족 사상은 가장 극단적인 변이형태까지도 추종자를 가졌다. 특히 경제 적으로 불안한 소시민 계층에 추종자들이 있었다. 반유대주의와 극히 상이 한 좌익 과격파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ㅁ헨의 풍토를 통 해서 온건해지고 즐겁고 수사적이며 친근한 형식을 지니게 된 것들이었다. 뮌헨 교외 슈바빙에는 무정부주의자. 보헤미안, 세계개혁가, 예술가, 턱없이 새로운 가치의 전파자들이 모여 들었다. 창백하고 젊은 천재들은 세계가 엘리트주의로 개편되기를 꿈꾸었고, 타락한 인류의 구원, 피의 등불, 정화 의 파국, 야만적 회춘요법 등을 꿈꾸었다. 커피집 등에서 인물이나 이념을 중심으로 뭉치던 중요한 모임들 중에서 중심을 이룬 인물은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였다. 그는 한패의 재능있는 추 종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앞을 다투면서 시민도덕을 경멸하고, 청 춘, 본능, 초인을 찬양하고, 엄격한 예술적 이상이란 면에서 그를 모방하였 다. 또한 태도와 양식화된 인상에 이르기까지 그를 닮았다. 그의 제자들 중 하나인 알프레트 슐러는 도이치 영역을 위하여 잃어버린 갈고리 십자가를 재발견하였고, 루트비히 클라게스는 때때로 그와 가까워져서 '정신이 영혼 의 적'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비밀스런 몰락의 분위기를 분석하고 카이사르와 같은 인물들을 역사 속으 로 불러냈다. 그들은 피할 길 없는 서구문명의 몰락을 한 번 더 연기시켜 줄 것이라고 했다. 슈바빙의 지크프리트 거리에는 전에 레닌이 살았다. 지 금은 히틀러가 불과 몇 집 건너 있는 슐라이스하임 거리 34번지에서 재봉 사인 포프 크바르티어가 세든 집에 다시 셋방을 얻었다. 뮌헨에서도 빈처럼 지적인 불안이 당시 예술적 출발을 부추기고 있었지 만, 그런 것은 히틀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 르크, 파울 클레 등은 수바빙의 바로 이웃한 곳에 살면서 회와 예술에 새 로운 차원을 열고 있었지만 이 화가 지망생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 했다. 뮌헨에 머무는 몇 달 동안 그는 겸손한 그림엽서 화가로 남아 있었 다. 그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악몽과 두려움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 러한 것들을 예술영역으로 옮겨놓을 줄을 몰랐다. 진부하고 충실한 붓으로 그는 자신의 콤플레스와 공격성으로 이루어진 유령세계를 순수한 목가로 변화시켰다. 그 목가 세계는 성벽의 모든 돌, 풀포기 하나, 지붕의 기왓장 하나까지도 정밀하게 잡아냈다. 이런 충실한 붓놀림은 보상받지 않은 것, 이상화시키는 아름다움을 향한 비밀스런 요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적 능력이 불충분하다는 느낌,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이 내면 에 뚜렷하게 자리잡을수록 그는 더욱더 절박하게 자신의 우월성의 이유들 을 찾아낼 필요를 느꼈다. 냉소주의로써 그는 인간의 '무한히 원시적인 생 각'들을 알아보려고 했다. 어디서나 가장 천박한 충동의 작용을 찾아내는 성향은 냉소주의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즉 부패, 배신적인 권력욕, 가차없음, 질투, 미움 등이 어디서나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세상 에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포착하려는 성향이었다. 종족적인 소속감도 개인 적인 우월감의 욕구에 도움을 주었다. 자기 길을 가로막는 다른 모든 프롤 레타리아, 떠돌이, 유대인, 체코인 등과 자신은 다르고 그들보다 더 낫다는 확신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반사회분자, 가난뱅이, 프롤레타리아 등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까 지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그를 짓눌렀다. 과거 남자 하숙집 에서 거의 곁을 스쳐갔던 수많은 모습들, 그 많은 망가진 희망과 개인적 몰락을 반영하고 있는, 독서실과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그 를 억눌렀다. 세기가 바뀔 무렵 빈은 세기말적 분위기를 가진 도시로서 아 주 지쳐빠진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의 학교는 정말로 그에게 무엇보 다도 몰락을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다름아닌 공포가 그의 성장기의 주도적인 체험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보 겠지만 마지막에도 그랬다. 공포는 그의 삶의 숨막히는 역동성의 추진력이 었다. 야무지게 작용하게 될 거의 세계상과 인간상, 냉혹함과 비인간성 등 은 몇 명 안 되는 증인들이 젊은시절 그에게서 관찰하였던 '깜짝 놀라는 본성'의 방어하는 몸짓이며 합리화 과정이었던 것이다. 어디를 바라보든 그 는 오직 탈진, 해체, 이별의 징후만을 보았다. 그리고 혈통의 오염, 종족적 인 우월감의 표지를 보았다. 또한 폐허와 파국을 보았다. 그는 이런 기본 분위기를 지나오면서 19세기의 특성에 속하는 염세적 생활감정을 받아들였 다. 이러한 생활감정은 19세기 진보의 신념과 즐거운 학문에 분명히 어두 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두려움을 특별히 과격 하고 무분별한 방식으로 느낌으로써 그것을 자기만의 독특한 것으로 만들 었다. 이러한 의식의 복합체는 그가 여러 해 동안이나 아무런 활동도 없이 극 단적인 백일몽에 사로잡힌 채 끊임없이 상상세계로 도망치곤 하던 세월을 보낸 다음 마침내 빈을 떠난 이유의 배경에도 나타난다. 빈에 대한 증오를 설명하는 그의 말은 에로틱하고 감상적인, 모든 도이치 운동의 이유들을 혼합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에 나타난 있던 인종 혼합이 역겨웠다. 체코, 폴 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의 온갖 민족의 혼합이 역 겨웠다. 그 중에도 인류의 영원한 분열분자인 유대, 유대인들이 역겨웠다. 이 거대한 도시는 혈통 오염의 화신처럼 보였다... 이 모든 이유들로 해서 점점 더 강하게 그리움이 생겨났다. 젊은 시절부 터 내 은밀한 소망과 은밀한 사랑이 나를 이끌었던 그곳, 마침내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그리움이었다. 그곳에서 언젠가는 건축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운명이 내게 점지해주는 크거나 작은 테두리 안에서 민족을 위해 나의 정 직한 의무를 다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조국인 도 이치 제국에 내 고향을 합치려는, 타는 듯한 내 마음의 소망이 성취되어야 할 그곳에서 활동하는 행운을 누리고 싶었다. 실제로 그러한 동기도 빈을 떠나는 데 한몫을 했다. 그밖에 다른 생각들 도 이런 결심에 작용하였다. 그는 뒷날 '빈의 속어를 배우기'가 불가능했다 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도시에서 '순수하게 문화적인, 혹은 예술적 인 사건들의 영역에서 무기력의 온갖 징후들'을 보았으며 더 이상 머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건축가에게 있어서 '링 거리가 완성된 다 음에는 적어도 빈에서의 과제란 중요하지 않은 것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병역 기피로 체포당함 그러나 이 모든 이유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정상적인 것 과 의무에 대한 그의 거부감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시 등장한다. 50 년대에 그의 병역관련 서류가 다시 발견되었다.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 로 진군한 직후 그는 매우 열성적으로 그 서류를 찾았다. 그 서류들은 그 가 군대기피, 즉 병역 의무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이 사실을 지우기 위해서 그는 뮌헨의 입국 신고소에 무국적자라고 신고했을 뿐 아니 라 이력서에도 빈을 떠난 날짜를 속였다. 신고서에는 1912년 초에 빈을 떠 났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듬해 5월에 빈을 떠났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병무청이 조사를 했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1913년 8월 22일에 조사를 담당한 린츠의 위병 차우너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곳이나 우어파로 출두하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방향으로도 그의 거처를 알아낼 수 없음." 이전에 히틀러의 후견인이었던 레온딩 군수 요제프 마이프 호퍼도 히틀러의 소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 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두 명의 누이인 앙겔라와 파울라도 그에 대해서 는 "1908년 이후로 이무것도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빈의 조사 결과 그가 뮌헨으로 이주했으며 슐라이스하이머 거리 34번지에 산다는 사실의 밝혀졌 다. 1914년 1월 18일 오후에 놀랍게도 형사가 그곳에 나타나서 용의자 체 포했고, 다음날 그를 오스트리아 영사관으로 인도하였다. 그가 당면한 죄목은 무거운 것이었다. 히틀러는 오랫동안 안전한 줄 알 았는데 결국 판결받을 위험에 처하였다. 그것은 나중에도 여러 번이나 생 기는 일이지만 그의 인생행로에 전혀 다른 방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평범 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그가 특히 사회적으로 체면이 안 서는 병역기피 전과를 달고서 수백만 명을 징집하고 절반쯤 군대식 동원령을 내릴 수 있 었으리라고 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셀 수 없이 여러 번 일어났지만 우연이 그를 도왔다. 린츠 병무당국이 출두날짜를 너무 짧게 잡아서 그는 소환에 응할 수가 없 었다. 소환날짜가 연기되면서 그는 세심하게 계산된 서면상의 서유서를 제 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러 장으로 된 '린츠 시청 제2과'에 보낸 사유 서에서 그는 자기 변명을 하였다. 그 사유서는 그의 젊은 날의 가장 포괄 적이고 중요한 문서이다. 이 편지는 그의 도이치 말 지식과 철자법이 상당 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의 서술을 보면 그 의 빈 시절의 사생활이 전체적으로 불규칙하고 목적 없는 궤도로 흘러갔음 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소환장에서 예술화가라고 지칭되었습니다. 나 또한 그 이름을 정당 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일부만 옳은 것입니다. 나는 재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버지는 국가공무원이었습니다) 계속 공부를 하려고 독립적 예술 화가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내 시간의 일부만 밥벌이에 쓰고 있습니다. 나는 우선 건축화가가 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의 수입은 별 것이 나리고 겨우 지출을 감당할 정도입니다. 나는 그 증인으로서 나의 세금증명서를 동봉하며 그것을 이곳으로 다시 보내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 서류에서 나의 수입은 1천 2백 마르크로 되어 있습니다. 너무 적다기보다는 너무 많은 편이죠. 그러나 정확하게 한 달에 1백 마르크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달마다 수입은 매우 유동적 인 것이고 지금은 매우 나쁜 상태입니다. 이 시기 뮌헨에서 미술품거래는 겨울잠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내세운 설명은 뻔한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최초의 징집기한을 놓쳤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자진 신고를 하였지만 아마 서류가 가는 도중에 분실된 것 같다는 내용을 적었 다. 완전히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비굴한 약삭빠름을 보이는 애처로운 이유 를 달아서, 그는 징집에 출두하지 못한 것을 빈 시절의 절망적인 생활사정 탓으로 변명하려고 하였다. 1909년 가을 나의 태만죄로 말하자면 이것은 내게는 정말 힘든 시기였습 니다. 나는 어리고 경험없는 인간이었고, 아무런 보조금도 없이 그렇다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누구에게서 돈을 받는 일도 없었고 하물며 구걸하 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없이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고 작품을 팔 아서 얻는 몇 크로네, 때로는 동전 몇 닢은 잠자리를 마련하기에도 모자랐 습니다. 2년 동안이나 나는 근심과 곤궁 이외에는 친구도 없었고,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허기 외에는 동반자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단어인 청춘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추억은 손 가락과 손과 발에 동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절을 기억하면 어 느 정도의 기쁨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장 나쁜 것을 넘어선 상태 니까요. 극히 힘든 곤궁 속에서, 절망보다 더한 환경 속에서 나는 내 이름 을 항상 깨끗하게 지켰으며 법과 내 양심 앞에 아무런 흠도 없이 나설 수 있습니다... 약 14일 후 1914년 2월 5일에 히틀러는 잘츠부르크의 심사위원 앞에 출 두하였다. 히틀러에 관한 소견이 이렇다. "병역의무와 보조의무에 적합하지 않음. 너무 약함. 무기를 다룰 능력 없음." 곧 이어서 그는 뮌헨으로 돌아 갔다.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뮌헨에서는 행운이 없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는 이 도시를 향한 '내면의 사랑'이 첫 순간에 자신을 가득 채웠다고 말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애착은 무엇보다도 "자연 그대로의 힘과 섬세한 예술적 분위기가 놀랍게 결합되었다는 점, 호프 양조장으로부터 오데온, 10 월 축제, 피나코텍에 이르는 이 단 하나의 선" 덕분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호감의 바탕에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고독하게 슐라이스하임 거리에 웅크리 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결핍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재봉사인 포프와 그의 이웃과 친구들하고만 느슨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 모두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밖에는 출생지도 신분도 묻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슈바 빙의 맥주집에서 그는 유일하게 견딜 수 있는 교제형태를 찾아냈다. 그러 한 교제는 그에게 친근감과 낯선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그것은 쉽게 생겼 다가 쉽게 사라지는 맥주집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야기 하는 '작은 모임'들이었다. 거기서 그는 '대학나온 사람'으로 여겨졌고, 오스 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무너져가는 상태, 도이치와 오스트리아 결합의 필연성, 합스부르크 왕조의 반도이치, 친슬라브적인 정책에 대해서, 유대인 에 대해서, 혹은 민족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처음으로 반대 의견 보다는 더 많은 찬성을 얻었다.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이고 극단적인 의견과 등장방식을 대하고 그 뒤에 천재성이 숨겨져 있으려니 추측하는 환경에서 그는 전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어떤 질문이 그를 흥분시키면 그는 드 물지 않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아무리 정열적 으로 떠들어댄 것이라고 해도 그 논리성으로 해서 눈에 띄게 되었다. 그도 또한 예언하고 정치적 발전을 예측하기를 좋아했다. 적중된 예감 벌써 거의 10년 전에 학교에서 도망치면서 그 이유로 들먹였던 결심은 그 사이 벌써 잊혀졌다. 이때쯤 이미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고 나중에 그는 확인해주었다. 물론 그 대신에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생계를 유지하고 대학공부 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나 공부하겠다는 의도를 실현시 키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기 방 창가에 앉아서 그는 그 지방 의 풍경을 담은 소품 수채화들을 그렸다. '호프 양조장' '젠들링 성문' '국립 극장' '식료품 시장' '사령관 저택' 그리고 다시 '호프 양조장', 여러 해 뒤에 그것들은 장관령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신고 대상품이 되었다. 때때로 그는 여러 시간 동안이나 시내의 카페에 앉아서 말없이 엄청난 분량의 케이크를 먹으면서 신문을 읽었다. 아니면 창백한 얼굴로 호프 양 조장 바에 앉아서 약간 흥분상태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때때로 그는 맥주 집의 어둠 속에서 이웃 테이블 풍경이나 시골풍의 인테리어를, 끼고 다니 는 스케치 북에 끄적거리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옷차림에 세심한 주 의를 기울였다. 집주인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특힌 긴 프록코트를 좋 아했다. 그밖에도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그는 속을 알 수가 없 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집에 대해서, 친구들이나 여자에 대해서도 절대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는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기 보다는 사회적 으로 추락하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요제프 그라이너는 당시 뮌헨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그에게 어떤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가 물었더니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곧 전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직업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군대에서는 총지배 인이 강아지 이발사보다 더 나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예감은 적중했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전쟁 이전 몇 년 동안을 기 억하면서 아주 인상적으로 지진이 일어날 것 같은 당시의 분위기를 서술하 고 있다. 파악하기 힘들고 감당하기도 힘든 긴장감. 그것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장들이 이 책에서 문필적으로 성공 적인 부분들에 속한다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빈 시절에 이미 발칸 반 도에서는 태풍을 예고하는 저 후덥지근한 잿빛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리고 때로 밝은 섬광 줄기가 번쩍였다가 재빨리 끔찍한 어둠 속으로 사라 지곤 하였다. 그러더니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최초의 바람이 신경이 날카로워진 유럽으로 불어왔다. 다가오는 시간이 무거운 악몽처럼 사람들을 짓눌렀고 열대의 더위처럼 푹푹 쪘다. 그래서 파국이 다가온다는 느낌은 계속된 근심의 결과 마침내 동력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늘이여, 이 제는 막을 길 없는 운명을 차라리 내려주소서, 최초의 강력한 번갯불이 땅 위로 떨어졌다. 뇌우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천둥 속으로 세계전쟁의 배터리가 진동하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아름다운 환상의 시간 1914년 8월 1일에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을 때 뮌헨의 오데온 광장에서 환 호하는 군중들을 찍은 사진 속에 아돌프 히틀러가 보인다. 그의 얼굴과 반 쯤 벌린 입, 반짝이는 눈길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다. 이날은 그를 자기 존 재의 그 모든 당혹스러움, 어찌할 바 모름, 고독에서 해방시켰다. 그래서 그는 자기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내게는 당시의 시간들이 화나는 청 춘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여겨졌다. 나는 오늘날에도 부끄러움 없이, 그날 폭 풍 같은 열광에 넘쳐 무릎을 꿇고서 하늘에 감사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 전체가 느꼈던 감사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1914년 8월에 자신이 전쟁시넹 사로잡혀 있었다고 묘사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평 화가 사라지던 날을...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도덕적인 동 경'이 이루어졌다고 느끼기 위해서 빈둥거리는 예술가 생활의 출구없는 상 태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깊은 권태에 빠져 있던 독일과 유럽 전체 의 지배적인 의식은 전쟁이 이런 규범성의 지옥에서 해방시켜줄 거라고 느 꼈다. 다시금 이 사실을 감안해보면 히틀러와 그의 시대 사이에는 매우 강력한 일치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철저히 시대의 필요성과 그 동경을 함께 나누었다. 다만 좀더 날카롭고 과격한 형태였을 뿐이다. 시대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에게는 절망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환호성 을 올리며 무기를 잡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근본적으로 한 시대가 종말에 이르렀고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려 한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시대의 탐미적인 경향에 맞게 전쟁은 정화 과정으로 여겨졌고, 평범함과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려는 거대한 희망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노래들'에서 전쟁은 '보편적인 생명의 오르가슴'으로 찬양되었다. 그것은 혼돈을 만들어 내고 수태시킨다. 그 혼돈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유럽에서 빛들이 꺼 졌다는 사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말했듯이 이별의 형식이었을 뿐 아니라 희망의 형식이기도 하였다. 8월 처음 며칠 간의 그림은 과격한 축제, 출발의 분위기, 기대의 기분을 포함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럽 대륙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꽃들 속의 동원령, 거리 가장자리의 만세, 발코니 위에는 색색깔의 여름옷 을 입은 부인들, 국민적 축제 분위기이면서 동시에 즐거운 생동감이었다. 유럽의 민족들은 결코 얻지 못할 승리를 축하하였다. 독일에서는 이 처음 며칠 동안 견줄 데 없는 공동체 의식을 체험하였다. 요술 방망이를 내리친 것처럼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오던 대립이 사라지고 널리 알려진 도이치의 반목이 끝났다.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특성을 지닌 경험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옛날에 그것을 체험 한 어떤 사람이 말하듯이 그 처음 며칠 동안의 경험은 "그것을 함께 체험 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되었다. 거리나 사람들이 모여든 광장에서 목소리를 합쳐서 생겨난 표현은 1848 년 자유주의 혁명가의 독일 노래였다. 그것은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지 은 것으로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국가가 된 것이다. 8월 1일 저녁 베를린 성광장에 모여든 1만여 명의 군중을 향해 빌헬름 2세가 말한 문장이 환호 를 받았다. 그는 "어떠한 당파도 종파도 모르며, 오직 도이치 형제들만을 알 뿐"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인기 있는 발언이 되었다. 서로 대립 하면서 고통받는, 내면 깊숙이 전통적으로 분열된 국민에게 그것은 잊을 수 없는 한순간에 수많은 장벽들을 걷어 냈다. 정확하게 50년 전에 이루어 진 도이치의 통일은 이제야 실현된 듯이 보였다. 그것은 아름다운 환상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통일의 느낌은 그러한 장벽 을 정말 없앤 것이 아니라 감추기만 했기 때문이다. 화해한 국민의 모습 뒤에는 여전히 낡은 대립들이 살아 있었고 터져나오는 환호성에는 제각기 다른 동기들이 숨어 있었다. 개인적이고 애국적인 소망들, 혁명적인 충동과 넌더리, 반사회적인 반항심, 헤게모니를 쥐려는 의도, 그리고 시민적 질서 의 일상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험심 많은 마음의 동경 등, 이 모든 것 이 보여들어서 단 한순간 조국을 구원하려는 헌신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히틀러의 느낌도 그렇게 끼여들어온 여러 가지 생각들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자랑스런 행복감으로 마 음이 부풀어올랐다."고 그는 썼으며, 그러한 기쁨은 마침내 국민으로서의 마음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8월 3일 그는 바이에른 왕에게 직소를 올려서 자신은 오스트리아 태생이지만 바이에른 연대에 지 원병으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그의 병역기피와 자원입대 사이의 모순은 실 은 모순이 아니다. 군대생활은 그를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강제상태에 밀어 넣겠지만 전쟁은 불쾌감, 이해되지 못한다는 감정의 고민, 방향 없는 삶으 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870~1871년의 전쟁에 대한 두 권의 애국주의적 인 민간서들은 애송이 시절 처음으로 읽은 몽상적인 책이었다고 했다. 이 제 그는 어린시절 책 속에 있던 모험의 광채로 빛나는 강력한 군대로 들어 가려는 것이었다. 지금 생애 처음으로 그는 거대하고 두려운 단체의 세력 에 동참할 의무와 기회를 보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간의 곤궁과 동경과 두려움을 가르쳐주는 몇 가지 체험들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 적인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운명의 동일성에 대한 감정 없이 아웃사 이더로 남아 있었다. 이제 그에게 이 내면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가 직소를 올린 다음날 벌써 답장이 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편지를 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거기에는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리스트 연대라고 도 불리는 바이에른 제16 예비보병 연대에 출두하라고 되어 있었다. 히틀 러에게는 이제 "내 생애의 가장 잊지 못할, 가장 위대한 순간"이 시작되었 다. 제5장 전쟁을 통한 구원 겨우 10주간의 훈련기간을 거친 뒤 10월 후반에 리스트 연대는 서부 전 선에 배치되었다. 자신이 참전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초조 한 근심에 가득차서 히틀러는 수송을 기다렸다. 그러나 10월 29일 이프레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른바 총알세례를 받으면서 그는 방금 시작된 전쟁 의 가장 치열한 전투 하나를 경험하였다. 해협 쪽으로 뚫고 나가려는 도이 치 군의 결정적인 대규모 시도에 맞서 이 지역에 투입된 영국 부대는 격렬 하게 대응하여 마침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4일 동안이나 전투는 이리 밀 리고 저리 밀려왔다. 히틀러는 재봉사 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대는 이 전투에서 3천 5백 명 중 6백 명 정도를 잃었다고 보고했다. 연대기록을 보 면 이 최초의 전투에서 349명이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연대는 바로 뒤 이어 베셀레르 마을 근처에서 지휘관을 잃었다. 그리고 대개는 경박한 명 령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민중적 특성'을 얻었다. (나의 투쟁)에서 최초의 참전에 대한 묘사는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일 일이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 부분에 바친 특별히 세심한 문체 와 시적인 노력은 이 체험이 그에게 얼마나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주었던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자 우리가 말없이 행진하고 있던 플란더스 지방에 축축하고 차 가운 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개 속에 낮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우리 머리 위로 강철로 된 아침인사가 쉭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폭음과 함께 작은 총알들이 우리 대열 사이로 쏟아져서 축축한 땅에 박혔 다. 그러나 그 작은 구름이 걷히기도 전에 2백 개의 목구멍으로부터 죽음 의 사자를 향해 최초의 만세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총소리, 대포소 리, 노랫소리, 외침소리가 시작되었다. 열에 들뜬 눈으로 모두가 앞을 향해 점점 더 빨리 나갔다.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순무밭과 울타 리 있는 곳에서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멀리서부터 노랫소리가 우리 귀로 울려오다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중대가 서로 맞붙었다. 그리고 죽 음이 재빨리 우리 대열 속으로 들어왔을 때, 적의 노랫소리가 바로 우리 코앞에서 들리게 되었을 때, 우리도 다시 소리 높이 노래하였다. 독일, 모 든 것 위에 독일, 세상의 모든 것 위에! 1급 철십자 훈장을 받다 히틀러는 전쟁 내내 연대 사령부와 전초부대 사이에서 연락병 노릇을 했 다. 이 역할은 그의 고독한 천성에 알맞는 것이었다.. 그의 상관들 중 한 명은 그가 "조용하고 군인처럼 보이지 않는 남자였으며, 처음에는 다른 병 사들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히틀러는 믿음직하고 의 무를 잘 알고 있었고, 진지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히틀러는 별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료들이 거의 한 목소리로 확인해주고 있지만 '몽상가'였다. 자주 그는 "헬멧을 머리에 쓰고 귀퉁이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를 그런 무심한 상태에서 이 끌어낼 수 없었다." 4년여에 걸쳐 비교적 많은 수의 사람들의 증언은 거의 그런 식이고 아무것도 그를 생생하게 묘사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묘사 의 특성 없음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특성 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남의 주목을 받는 극단적인 그의 특성들조차도 특별히 비개성적인 특성 을 가지고 있어서 개성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가 추구하는 원칙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터져나오는 폭발도 군대생활의 무사한 불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염려, 배신이나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의심 등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윤곽을 보여주는 일화도 그 어떤 특성을 보여주지 않는 다. 전해내려 오다가 나중에는 교과서의 일화로 실리게 된 어떤 이야기도 그저 교과서 일화일 뿐이다. 그것은 히틀러가 몽디디에 근처에서 명령을 전달하려 가는 길에 스물 다섯명의 프랑스 군대와 마주쳤는데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용감하게 기습해서 그들 모두를 사로잡아 상관애게 끌고왔 다는 이야기다. 그의 모범적인 열성은 애국적 연감에서 흔히 그렇듯이 실제인물을 하나 의 이미지 뒤에 감추어버린다. 이것은 주변세계에서 도망쳐서 상투적 이미 지 속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전달사항을 물으러 갔다가 그는 갑자기 날아온 적군의 대포알을 보고 지휘관을 끌어당겨 '보호하는'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연대가 짧은 시간에 두 번째로 지휘관을 잃어버리지 않도 록" 해달라고 그에게 간청하였다. 뒷날 정치적인 동기에서 많은 의심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전쟁터에서 용 감했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1914년 12월에 그는 2급 철십자 훈장을 받 았다. 그는 재봉사 포프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동료들은 거의 모두 줄었습니다만."1918년 5월에 는 적을 앞에 두고 용감했다는 이유로 연대훈장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4일 에 사병에게는 극히 드문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수여의 구체적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알려져 있 지 않다. 히틀러 자신은 그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대의 유대인 부관 후고 구트만의 제안에 따라서 훈장을 받았다는 고백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연대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밖의 다른 보고들 은 서로 심하게 말이 틀리다. 어떤 보고에 따르면, 위에 언급한 일화와 비 슷하게 히틀러가 열다섯 명의 영국 정찰조를 사로잡았다고 주장하기도 하 고, 또 어떤 것은 열, 열둘, 심지어는 스무 명의 프랑스 군을 극적으로 체 포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에 따르면 히틀러가 프랑스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사실상 아주 쉬운 말 몇 가지밖에 할 줄 몰랐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대포알이 무섭게 날아오는 한가운데를 뚫 고 포병부대로 들어가서 아군이 심각한 포격을 당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 다. 그러나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거가 행한 어떤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증명해 보인 끊임없는 노력의 덕으로 훈장을 받았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런 전쟁 장식품들은 히틀러의 미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것들은 오스트리아 사람인 그에 게 독일에서 더 높은 권리를 갖도록 해주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경력의 탄 탄한 시작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주었다. 이 훈장들은 정치적인 발언권과 복종권을 확보하고 정당화해주었다.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욕망 전쟁터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그의 과도한 책임의식과 군대 전체를 위한 여러 가지 걱정이 자주 비판이 대상이 되었다. 어떤 동료 하나가 '우리 모 두 그를 욕했다."고 뒷날 그를 기억했다. 다른 병사들은 "저 미친 놈이 지 휘까지 하려 드네."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르고 누르스름한 얼굴에는 언제나 우울한 기색이 보였다. 물론 히틀러는 아주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 니다. 오히려 그쪽에서 동료들과 자신을 갈라 놓는 거리감을 보여주었다. 그들과 달리 그는 가족도 없었고 거의 편지를 받거나 쓰지도 않았고, 그들 의 성향, 근심, 여자 이야기, 웃음 등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쓸데없는 일들보다 더 싫은 것이 없었다."고 이 시기를 돌아 보며 말하고 있다. 그런 일 대신 오히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 하고, 호머, 복음서, 쇼펜하우어의 책 등을 읽었으며 전쟁은 자기에게 30년 간의 대학생활을 대신할 만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주 고집스럽게 자 기 혼자만 문제의 핵심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고독과 접촉기피증을 가 지고 독특한 선민의식을 맞들어낸 것이다. 그 시절에 찍은 사진들에서 동 료들에 대한 뚜렷한 이질감과, 동기나 체험이 같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히 틀러는 창백하고 말없이, 다가갈 수 없는 태도와 뚫어질 듯한 표정으로 그 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이런 인간 관계의 무능력이 아마도 히틀러가 4년 동안 상병까지만 진급 한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리스트 연대에서 여러 해나 부관을 지낸 사람이 히틀러를 하사관으로 진급시켜야 할까 하는 이야기가 한두번 나왔다가 마지막에 취소되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에게서 하사관으로서 필요한 지도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 자신도 진급에 끼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전쟁과 막사, 그리고 병사들의 숙소에서 찾아낸 것은 그의 본직에 잘 어울리는 종류의 인간관계였다. 그것은 비개성적인 기회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만난 것은 다시 남자 하숙집의 생활방식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그의 사회적인 특권의식, 내면의 불안, 숭고한 취향 등에 만 족을 준다는 점에서 달라진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테두리는 그의 수줍음과 인간혐오증, 접촉기피증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없는 고향을 전쟁터에서 찾아냈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이 세계야말로 그의 집이었다. 예전에 그의 상관이었던 사람의 말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준다. "히틀 러 상병에 있어 리스트 연대는 고향이었다." 이러한 암시는 전쟁 동안 거 이 잊어버린 사회편입 의지와 지난 몇 년간 보인 아웃사이더로서의 반사회 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준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부터 그는 어느 곳에서 도 고향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후로 모험과 질서를 향한 욕구, 자유와 기 율을 향한 욕구가 이곳 전방 본부와 참호, 그리고 방공호 속에서처럼 이토 록 지속적으로 만족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은 지나간 여러 해의 상 처 많은 체험과는 달리 아돌프 히틀러의 긍정적인 교양체험이었다. 그 자 신이 표현한 대로 '굉장한 인상'이었고, '압도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행복 한' 것이었다. 은유의 영역에서지만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체험이었다. 히틀러 자신도 전쟁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도 그것은 감상적인 젊은 남자에게 힘과 자기 가치 의식을 마련해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다시금 친척들 앞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1917년 10 월과 1918년 9월의 휴가를 그는 슈피탈에 있는 친척들 곁에서 보냈다. 그 는 전쟁터에서 연합의 쓸모, 부분적인 자기억제와 운명에 대한 신뢰를 배 웠다. 운명에 대한 신뢰는 그가 속한 세대의 열정적인 비합리주의의 전반 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그가 격전지 한가운데를 뛰어다니면서 보여준 용기 와 냉혹함은 동료들 사이에서 그에게 일종의 후광을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히틀러와 함께 있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 한 체험은 그 자신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실패의 세월 동안 고집스럽게 간직했던 특별한 소명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 켜주었다. 전쟁은 비판적 사고에 대한 히틀러의 성향도 키워주었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전쟁터에서 기존의 지도층이 실패하고 있다는 인식을 얻 었고, 자신이 옹호하고자 하는 질서가 내적으로 탈진상태에 있다는 인식도 얻었다. "나는 이 전사자들에 대해서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고 그 는 멍청해진 동료를 향해서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동기가 거의 없는 시 민계급 청년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다고 여겼던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욕 망이 막연히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말한 대로 처음에 그는 '정치화되지 않 았다',혹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빈 시절에 '당시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랬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된 그의 사색은 모든 생각들을 뒤죽박죽 뒤섞었다. 그는 머지 않아 "소시민의 원시적인 방식으로 정치 문제들과 세계관 문제들을 사색한다." 는 것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전쟁 초기에 그가 뮌헨의 아는 사람에게 쓴 열두 쪽 길이의 편지는 이러한 관찰을 뒷받침해준다. 그가 참여했던 기습 공격을 상세히 묘사한 다음에 ("거의 기적처럼 나는 여전히 멀쩡했어요.") 편지는 다음가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자주 뮌헨을 생각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돈이야 얼마가 들든 빨리 이 관계를 영원히 청산해버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서 행운을 얻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다시 보기를, 고향이 더욱 순수해지 고 외국세력에서 깨끗이 벗어났음을 보게 되기를, 그리고 지금 매일같이 우리들 수십만 명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통을 통해서, 여기서 매일매일 국 제적인 적군에 대항하여 흘리는 피의 강물을 통해서 외부에 있는 독일이 적이 섬멸될 뿐 아니라 우리 내부이 국제주의도 섬멸되기를 바라는 단 하 나의 소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토를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와의 간계는 언제나 내가 이야기한 대 로 될 것입니다. 이 문장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빈 시절의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것이다. 외국세력에 의해 압도될까 하는 두려움, 적들의 세계에 대 항한 방어감정 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모든 도이치 운동'의 생각에서 발전되어 나온 생각아 여기 처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뒷 날 국내정치의 가장 중요한 방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 국가의 내적인 결 속이 국가의 외적인 권력확장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도이치 땅은 우선 도이치가 실현되고 나서 위대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꿈꾸다 1916년 10월 초에 히틀러는 르 바르케 근처에서 왼쪽 허벅지에 가벼운 부상을 입고 베를린 근교의 벨리츠 육군병원으로 수송되었다. 1917년 3월 초까지 거의 다섯 달 동안이나 그는 고향에 머물렀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볼 때 이 기간에 그는 정치에 더욱 접근하였다. 1914년 8월과 전선에서의 체험들은 그에게 특히 민족의 내적 톡일이 경 험으로 의미가 있었다. 2년 간 이것은 하나의 행복하고도 손상받지 않은 확실성이었다. 고향의 주소도 없었고 그 어떤 지향하는 곳도 없었기에 그 는 거의 모든 휴가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이 가상세계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후에 그는 그리운 어조로 "그것은 옛날의 훌륭한 영운군대의 전선이었다." 고 회상하고 있다. 벨리츠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베를린을 방문해서 정치 적, 사회적인 풍경들과 다시 만났을 때 충격은 한층 더 컸다. 절망스럽게도 시대는 전쟁 초기의 그 모든 열광을 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 다. 고양된 운명의 결속 대신에 다시 당파들, 당파들 간의 싸움, 의견차, 대 항 등이 나타나 있었다. 베를린 시에 대한 그의 일생 동안의 원망은 어쩌면 이 초기 체험에 원인 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불만, 배고픔, 체념 등을 경험하였다. 화가 잔 뜩 나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기들이 '더 똑똑하다'고 떠벌리는 징병기피자들 을 만났으며, 위선, 이기주의, 전시의 여러 이득들을 보았다. 그리고 빈 시 절의 고정관념에 충실하게 이 모든 현상들 뒤에 유대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여겼다. 거의 다 나온 상태에서 뮌헨의 예비대대로 돌아와보니 그곳도 사정이 마 찬가지였다. 그는 고향을 '더는 알아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허한 노여 움을 품고서 그는 마법에서 깨어나는 이런 체험을 만들어낸 자들, 내적인 통일의 아름다운 꿈, 어린 시절 이후 최초의 긍정적인 사회 체험을 망가뜨 린 자들을 증오하였다. 한편으로는 저 '헤브라이의 민족 파괴자'들에 대한 증오였다. 그들 중 1만 2천이나 1만 5천 명을 '독가스 아래' 세워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가와 언론인에 대한 증오가 생겼다. 뒷날에도 그가 이용하는 언어표현들은 그의 격분의 정도를 보여준다. '수다 쟁이들', '해충', '혁명에 대한 거짓증언자들'은 없애버려야 마땅하다고 했다. '모든 군사수단을 다 동원해서라고 이 나쁜 질병들을 쓸어버려야 할 것이 다." 아직도 그는 정열적으로, 거의 신경질적으로 승리를 열망하였다. 이름 없는 상태에서 일어서기 위해서는 오히려 패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감 도 못하고 계산도 못했다. 1917년 초에 전선으로 돌아가지 그는 다시금 해방된 듯이 느꼈으며, 한 번도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었던 문명세계로부터 다시 멀어졌다. 군대서류 는 그가 프랑스 플란더스 지방 진지 확보전투, 아라스의 봄 전투, 가을에는 격렬했던 슈망 데 다메 전투에 참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동안 '생각 없는 여자들의 무의미한 편지'들이 세심하게 전쟁에 지친 고향의 분 위기를 전선에 전파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시기에 자주 화가 출신인 동료 에른스트 슈미트와 자기의 미래 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슈미트는 히틀러가 당시에 정치 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하였다. 물론 그는 아직 결심이 완전히 서지는 못했다. 한편 그가 여전히 화가로서의 경력을 믿고 있다는 증거들도 있다. 1917년 10월, 제국의회의 논란 많은 평화결의가 있 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리고 제국이 동부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하기 바로 직전에 그는 휴가를 얻어서 독일의 정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갔다. 거기 서 그는 슈미트에게 보내는 엽서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박물 관들을 더 잘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중에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당시 얼마 안 되는 친구들에게 자주 전쟁터에서 귀환하게 되면 건축 가로서의 직업과 나란히 정치활동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연설가가 되려고 했다. 선전은 대중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조종이 가능하다는 빈 시절의 확신 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를 두렵게도 만들고 동시에 매혹하기도 하는, 숨어 서 일하는 인형조종자들에 대한 생각은 언젠가는 스스로 인형조종자가 되 리라는 생각으로 대단히 마음이 끌렸다.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한 임의성도 부정하는 것이다. 약간 어리둥절한 태도로 그 자신이 말한 것에 따르면 올바른 인형조종자가 제때에 올바른 지체를 움직이게만 하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으며 '무섭고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결말들'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민족들, 계급들, 혹은 정당들이 흥하고 망하는 역사의 진행을 아주 얼토당토 않게 선전의 능력이 크냐 작으냐의 결과로서 평가하였다. 그는 (나의 투쟁)의 유명한 제6장에서 도이치군과 연합군이 예 를 들어 선전술을 해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형식상 불충분하고 본질적, 심리적으로 잘못된' 선 전을 했기 때문에 패전했다고 한다. 선전이라는 무기의 실로 무시무시한 작용을 계산할 줄 몰랐던 지도부의 무능이 선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 려운 선전이나마 방해하면서, '막연한 평화주의의 멀건 국물'만을 허용하였 다. 그것은 '사람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홀리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 이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극히 천재적인, 영혼의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자격이 있지만' 도이치군 측은 아는 체나 하는 허풍선이 실패자에게 그 일 을 맡겨서 이익은커녕 손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의견에 따르면 상대방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연합군측이 혐오 감을 불러일으키는 선전의 '가차없도고 천재적인 방식'에서 그는 깊은 인상 을 받았고, 이 거짓말의 절대적이고 뻔뻔스럽고 일방적인 완고함에 대해 전문가적인 탐닉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식에서 "끝없이 배웠 다."고 한다. 그는 대체로 상대방의 예를 들어서 자신의 확신과 원칙들을 보여주는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세계전쟁에서 적대자의 선전을 모범으로 들어서 심리학적 영향에 대한 자신의 원칙들을 전개해 보이고 있다. 상대방이 심리적 전쟁에서 우세했다는 주장은 도이치 여론 안에 널리 퍼 져 있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군대를 자랑삼던 국가가 너무도 이해가 되지 않는 패배에 대해서, 군대 아닌 이유들로 설명하려고 하는 여 러 가지 전설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일이 모든 전쟁터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고 그토록 애쓰고 수많은 희생을 지불한 다음에 전쟁에서 진 것에 대 해서 말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영리한 측면을 보이곤 했는데 이렇 게 특징적인, 명료함과 어리석음의 혼합 속에서 선전의 본질과 효과에 대 한 자기 생각의 결말부분을 예리하게 설명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선전이란 민중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받은 계층을 지향해서는 안 되고 '영원한 대중을' 지향해야 하며 그런 대중들 중에서도 정신적 수용력이 가장 제한 된 사람에 맞추어 수준을 잡아야 한다. 표어처럼 주입하기 쉬운 형태로 극 소수의 설득력 있는 목표에 집중하여야 한다. 언제나 감정을 지향하고 절 대로 이성을 향해서는 안 되고 모든 객관성은 명백하게 포기해야 한다. 자 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의심의 그림자도 보여서는 안 된다. 오직 "사랑이냐 미움이냐, 옳으냐 그르냐,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이 있을 뿐 절대로 반 은 옳고 반은 그르다는 것은 없다."는 등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전혀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것 을 생각한 에너지와 자유로운 태도는 대중의 사랑을 얻는데 있어서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상당한 우위를 확보해주는 요인이 된다. 그는 이러한 자 유로운 태도로 대중, 고루함, 협소함, 확고함 등을 전혀 경멸감 없이 완전 히 도구적으로 자신의 목적의식에 종속시켰다. 벌써 그는 이러한 우월성을 처음으로 느꼈다. 전쟁 마지막 국면의 이러 한 체험을 보면서 그는 대중 없이, 대중의 약점과 장점과 민감성에 대한 지식 없이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빈 시절의 체험을 확인하였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동가들인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 등이 그가 한때 경탄했던 칼 뤼 거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약간 창백하고 생각이 약하기는 하 지만 미국 대통령 윌슨도 여기 속한다. 히틀러의 생각에 따르면 언제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도이치의 열등성의 주요 이유 하나는 연합군측의 이러한 민중지도자들에 대응할 만한 독일 쪽 상대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민중과 괴리되고, 민중이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도이치 지도부는 보수적인 완고 함에 잠겨 오만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 전통적인 입장에 붙박여 있었다. 이 러한 실패의 인식은 이 시절의 히틀러에게 거대한 인상들을 남겼다 .주춤 거리는 지도층의 특징적인 약점에서 벗어나, 선입견 없이, 그리고 냉정하 게, 이기심과 감상에서 벗어나 히틀러는 오직 효과만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상대방 선전의 몰취미한 우화적 작품들에 대해서 도 감탄하였다. 예를 들면 도이치 병정들이 어린이 손을 토막내거나 임신 부의 배를 가르는 학살자들로 묘사된 것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러한 그림 들이야말로 두려움의 마력과, 천박한 환상 속에서 두려움의 상상으로 끊임 없이 자신을 확대하는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승리의 팡파르에서 패배의 묘지송으로 이념이 가진 동원력도 끈질긴 힘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연합군은 야만과 심연의 힘에 맞서 세계와 그 거룩한 재보를 구한다는 수많은 아름 다운 가상을 십자군 형식에서 가져왔다. 상대방의 이러한 종교적 자기과시 에 대해서 도이치측은 맞설 것이 없었다. 초기에 군사적으로 성공한 듯한 인상이 남아 있는 동안 순수한 방어전쟁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였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독일은 합병을 좋아하는 지크프리트라고 내세우면서 그러한 노력이 세계의 눈앞에 변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 다는 것은 더욱 치명적인 일이었다. 스스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국민 이 공간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고 발전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는 어쨌든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사이 사회적인 구원이념의 약속에 사로잡혀 1917년 말에 패배한 러시 아에서, "모든 나라의 지치고 고생한 노동자 계급과 일하는 계층이 열렬히 그리워하던, 국가 병합이 없으며 민족 자결권에 따른 올바르고 민주적인 평화"의 제안이 나왔다. 다른 한편 1918년 초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 에서 포괄적인 평화개념을 밝혔다. 그것은 '세계를 사람들의 삶을 위해 쓸 모 있고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이었다. 폭력도 공격도 없는,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자결권과 정의의 질서라는 자극적인 그림이었다. 이 념이 없어져버린 제국의 힘에 맞서 이러한 이념이 지쳐버린 나라 안에서 끈질긴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대를 특징짓 는 일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도이치의 참모장교 한 사람이 1918년 가을에 갑자기 깨닫고서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이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리 고 우리가 이 이념들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게 되리 하는 사실도 말이야!" 도이치의 패배는 군대 외적 요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수많은 변종 으로 만들어져서 뒷날 우익의 세력확보 전략에 포함된다. 그것은 정식 전 투에서보다는 오히려 음모와 배신으로 인해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도이치 민족의 지크프리트 콤플렉스 탓만은 아니었다. 이런 주장은 훨씬 더 올바 른 핵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 으로였지만 독일은 실제로 전쟁터 바깥에서도 패배하였다. 시대착오적이고 낙후한 정치 체제가 시대에 더 잘 맞는 민주질서에 굴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는 처음으로, 이념에 대항해서는 단순한 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 이념에 맞설 만한 다른 이념의 도움을 받아야 성공적으로 대응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권력수단으로 세계관에 맞서 싸우려 는 모든 시도는, 싸움이 새로운 정신적인 태도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 지 못할 경우 마지막에 실패하고 만다. 두 세계관의 싸움이 될 경우에만 지속적이고 가혹하게 투입된 과격한 힘이라는 무기를 가진 쪽에 유리한 결 판이 나는 것이다." 전쟁 시절의 이런 사색은 뒷날 만들어낸 것으로 당시 에는 아직 막연하고 어슴푸레한 것이었으며 문제를 의식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예감한 것에 불과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불명확함 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들은 전쟁 때 얻은 사색들을 표현해주고 있다. 1918년 여름에 한 번 더 도이치의 승리가 다가오는 듯이 보였다. 몇 달 전에 제국은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제국을 더욱더 쇠약하게 만드는 이 런 순간적인 전투의 승리뿐만이 아니었다. 3월 초에는 러시아에 브레스트 리토브스크 조약을 강요하였다. 약 한 달 뒤에는 부카레스트 조약에서 루 마니아를 향해 한 번 더 인상적으로 힘을 과시하였다. 그로써 동부전선의 전투가 일단락되고 도이치 서부전선은 2백 개 사단 거이 350만 병력으로 연합군 세력에 맞서게 되었다. 장비와 무기는 여전히 열세였다. 예를 들면 적군의 총기 1만 8천 정에 대해서 도이치측은 1만 4천 정 밖에 없었다. 그 러나 깨지지 않은 공식적인 자신감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병력을 지원받아 서 총사령부는 3월 말 이후로 다섯 개의 대공세 중 최초의 공격을 개시하 였다. 미군 병력이 개입하기 전에 병력을 최고로 투입하여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으려는 시도였다. 도이치 민족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루덴도르프 장군은 어떤 담화문에서 밝혔다. 그것은 뒷날 히틀 러를 사로 잡은 것과 같은 거대한 도박을 향한 정열이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수많은 승리들을 거두고 난 끝에 굳은 결심으로, 남 은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넓은 전선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도이치 중대들은 공격에 나섰다. 히틀러는 리스트 연대와 더불어 이 전투 에 참여하였다. 특히 몽디디에 느와용 근처의 추격전과 뒤에는 스와송과 렝스 전투에 참전했다. 초여름에 도이치 군대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파 리 근처 60킬로미터가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격이 얼어붙었다. 도이치 군대는 한 번 더 겨우 껍질뿐인 승리를 얻기 위해서 치명적으로 제한된 병력을 다 썼던 것이다. 그런 성과 를 얻기 위해 지불한 지나치게 많은 인명 손상 등이 도이치군이 전선을 꿰 뚫은 이후에 전선을 다시 고착시켜버린 것이다. 국내여론에 대해서 이 모 든 일을 부분적으로는 감추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 국내여론이 지나칠 정 도로 현실을 거부하였다. 도이치군의 작전이 정지되고 한참이나 지났다. 연 합군측이 공세로 전환하였고 도이치 전선, 특히 아미엥 전선이 붕괴된 8월 8일에도 최고 사령부는 여전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령부는 과격한 양자택일 결과 승리가 멈춘 직후 패배를 고백해야 할 처지에 있었 다. 사령부는 죽은 색깔의 물감을 써서 패하지 않는 독일이라는 전체 그림 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모든 이유에서 독일의 여론은 패배가 바로 눈앞에 닥쳐와 있던 1918년 여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이번 전쟁이 승리로 끝나리라고 믿고 있 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망상은 도이치의 선전이 무력하고 효과가 없다는 히틀러의 생각을 아주 잘 입증해주었다. 물론 히틀러 자신도 부정확한 상 상으로 인해서 올바른 결론에서 벗어났다. 책임있는 정치가들과 고위 장교 들조차도 잘못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1918년 9월 29일 총사령관 루덴도르프가 성급하게 정치지도부 를 소환해서 조속한 정전 요청을 해달라고 청했을 때, 이런 갑작스런 현실 의 붕괴는 더욱 날카로운 일격으로 모든 사람을 한방 먹였다. 신경의 힘이 완전히 소모된 상황에서 그는 모든 전술적인 안전장치를 비난하였다. 이상 한 일이었지만 그는 대공세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군사적 기도를 정치적으로 떠받쳐 주려는 모든 의견을 아주 못마땅히 여기면서 물리쳤다. 그는 분명하게 표현할 만 한 전략적 목표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그 점을 캐 묻는 황태자의 질문에 대해서 그답기는 하지만 몹시 흥분된 대답을 내놓았 다. "우리는 한 구멍을 팝니다. 다음 구멍도 나타나겠지요." 바덴의 막스 왕자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물었을 때도 루덴도르프는 이렇게 대답했 다. "그러면 독일은 망하는 거지요." 심리저긍로나 정치적으로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채 '마치 복음서를 믿듯 이' 자기 나라 병력이 우세하다고만 믿었던 국민은 바닥도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였다.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해하기도 힘든 힌덴부르크 장 군의 말은 국민의 망상이 얼마나 사라지기 힘든 것이었던가를 증언해주고 있다. 패전했다는 루덴도르프의 고백을 듣고도 여전히 늙은 야전 사령관 힌덴부르크는 외무장관에게 곧 벌어질 협상에서 로트링겐 지방의 금속 광 산을 합병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 로 저 현실거부의 독특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현실거부의 태도로 전후 여러 해 동안 국민적인 곤궁과 의기소침을 견뎌냈고 마침내 1933년 봄의 소란스런 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승리의 팡파르에서 패배의 묘지송'으로 이렇듯 충격적으로 전환된 결과는 극히 중 요한 것이다. 뒤통수를 맞고 망상에서 깨어나는 이런 경험은 다음 15년 역 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이 사실에 대한 이해 없 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1차대전에서의 패배 이 소식은 지휘관의 폭넓은 관점에서 전쟁을 관찰하고 있던 리스트 연대 의 사색적이고 과민한 상병에게 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중대는 1918년 10월에 플란더스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영국군은 10 월 13일에서 14일 밤에 이프레 남쪽에서 가스 공격을 해왔다. 워빅 근처의 한 언덕에서 히틀러는 여러 시간 동안이나 빗발치는 가스 수류탄의 불꽃 속에 있었다. 아침 무렵 그는 심한 통증을 느꼈고 7시쯤 그는 눈이 멀었다. 그가 자기 상태를 기술한 것을 보면 눈이 불타는 석탄 덩어리로 변한 것 같다고 한다. 곧 이어서 그는 포메른에 있는 파제발크 육군병원으로 수송 되었다. 육군병원 숙소에서는 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왕조가 붕괴되었다느니, 전쟁이 곧 끝날 거라는 등의 어지러운 소문들이었다. 히틀러는 특유의 책 임감으로 그 지역의 불안, 파업, 불복종 등을 걱정하였다. 물론 그는 자기 가 보게 된 여러 징후들을 '각 개인들의 상상력이 폭발'한 것으로만 여겼 다. 그는 이상스럽게도 전국민 사이에 퍼져 있는, 벨리츠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한 불만과 피로의 분위기를 보지 못했다. 11월 초에 눈이 상 태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신문을 읽을 수가 없었고, 동 료들에게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말도 했다. 어 쨌든 독일 혁명은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붉은 넝마조각'을 휘날리기 위해서 전선이 아니라 이른바 '임질병원'에서 나온 '유대인 몇 놈'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주동한 것이라고 그는 믿었 다. 1918년 11월 10일에야 그는 '내 인생의 가장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병 원 목사의 부름을 받고 모여든 입원환자들은 혁명이 일어나서 호엔촐레른 왕가는 붕괴되고 독일에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히틀러는 이 과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늙은 성직자는 안으 로 조용히 눈물을 삼키면서 왕가의 공적을 생각했고, 거기 참석한 사람 중 누구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가 전쟁은 패배하 였으며, 제국은 적의 수중에 넘겨졌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이 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 주변이 다시 캄 캄해져서 나는 더듬고 비틀거리며 침대로 돌아와서 내 자리에 몸을 던졌 다. 타는 듯한 머리를 이불 속에 틀어박았다. 어머니의 무덤에 섰던 날 이 후로 나는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히틀러에게 그것은 새로운 환멸이었다. 인생이 초기에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던 기억만큼이나 과격하고 이해되지 않는 환멸이었다. 그는 이 환멸을 신화화시키는 과장법으로 자기 인생의 지속적 주제의 하나로 만들었다.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도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 다. 그로써 그의 초개인적인 주장의 의지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격분한 것 이었는지 드러난다. 거이 모든 중요한 연설에서 그는 거의 제의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거 론하였으며, 혁명을 가리켜서 자기 인생을 각성시켠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언제나 역사서술이 뒤를 이었다. 전쟁의 그런 급격한 변화가 자 기에게 불러일으켰던 내동댕이치는 인상은, 심지어 1918년 10월 눈이 먼 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히스테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만들어 냈다. 히틀러 자신도 때로는 그러한 추측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기도 했 다. 1942년 2월 장교와 사관 후보생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이 완전 히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자기 민족이 노예가 된 세상만을 보 아야 한다면 눈의 빛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라고 그는 말했다. 1944년 패전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알버트 슈페어에게 의기소침해서 자신은 1차 대전 말에 그랬 던 것처럼 다시 눈이 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의 투쟁)의 한 구절도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히틀러는 거절 할 수 없이 귓속으로 울려오는 외침소리에 깨어났다고 한다. 그 외침은 자 신이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로부터 깨어난 것이었다. 천재란 "깨달음으로 인도되기 위해서... 형식적인 자극"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 뜻이다. "평범 한 일상사에서 보면 중요한 사람들도 자주 중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고 자기 주변의 평균수준을 거의 넘어서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 람들이 실패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상황이 닥치면 눈에 보이지도 않던 평 범한 인간의 내부에서 갑자기 천재적인 천성이 솟구쳐 나오는 것이다. 그 때까지 시민적인 사소한 일상에서만 그를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시련의 시간이 오지 않는다면, 보통 사람은 이 수염도 안 난 어린 소년이 몸에 젊은 영웅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짐 작도 못할 것이다. 운명의 망치질은, 어떤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 지만 어떤 사람은 연마하여 강철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한 언급은 물론 특수한 소명의식을 중개하기 위해서만 생각해낸 것 이다. 옛날 보헤미안, 무감각, 어두운 몽상의 시절을 선별된 인간의 천재성 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11월의 체험은 그를 마비시키고 어쩔 줄 모르 게 만들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음을 알았다." 4년 간의 전쟁은 증오스 런 시민세계의 의무와 질서의 요구에서 그를 보호해 주었다. 직업과 생존 의 문제들을 미루어주었다. 그 모든 일이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밀려왔다. 전보다 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직업도, 목적도, 거 처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패배와혁명이 소식을 듣고 그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국민적인 상실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상실감을 느꼈던 것이다. 종전은 상병 히틀러에게서 전쟁터에서 얻은 역할을 빼앗아갔다. 그는 군 에서 제대했을 때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찌할 바 모른 채 자기 군대 의 명예였던 군기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동지들, 그리고 가까웠던 사람들이 4년 간 견뎌온 짐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병사생활의 두려움과 굴종을 애국심 뒤에 감추는 일을 중단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헛일이었다. 희생도 결핍도 헛일이고, 때로는 여러 달이나 계속된 굶주림도 갈증도 헛 일이고,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의무를 행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 헛일이고 이 전쟁에서 죽은 2백만의 죽음이 헛일었다." 혁명의 진행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히틀러를 그토록 가슴아프게 한 것이 었다. 왕가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제국 지도층에 대한 존경심만큼이나 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우익' 만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패 전, 그리고 주어진 역할이 상실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혁명을 가능케 한 우울한 상황은 그에게 아무런 보충 역할도 제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위대함, 정열, 죽음의 예찬 등을 부정하였을 뿐이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동기에서 나온 군사 파업이었다. 그 동기는 그에게는 극히 진부한 것으로서 살아남으려는 의지였다. 이념이 결핍된 혁명 실제로는 혁명이 아니었던 이 혁명은 무엇보다도 어찌할 바 모르는 천박 한 몸짓으로 나타났다. 독일 전역에서 11월에 탈영병들이 길거리로 몰려다 니면서 장교사냥을 벌였다. 그들은 떼를 지어서 장교들을 노리고 있다가 붙잡기만 하면 조롱섞인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그들의 훈장, 견장, 계급장 등을 떼어냈다. 그것은 몰락한 정권에 대한 때늦은 폭동이었으며 이해가 되면서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상당한 정도의 상처입 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장교들과 법과 질서를 옹호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혁명에 대한 원한을, 그리고 아울러 이러한 부작용을 수반하고 시작된 정권에 대한 원한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게다가 역사는 이 혁명에 적정의 순간을 주지 않았다. 혁명은 그런 절정 을 통과해야만 비로서 국민의 의식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1918 년 10월에 벌써 새로운 수상인 바덴의 막스 왕자는 미국 대통령과 국내 여 론에 따라 국내정치의 개혁을 행하였다. 독일의 의회주의 정부형태를 도입 하는 것이었다. 11월 9일 오전에 어느 정도 독단이 개입된 형태로 황제의 왕권포기 결정이 선포되었다. 혁명은 채 시작도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 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의지 를 보존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프랑스 혁명에 나타나는 정구장 맹세의 바스티유 함락과 같은 기회는 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은,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전망만을 가지게 되었다. 즉 모든 새로운 현상의 매력적인 힘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 나 새로운 권력자인 프리드리히 에버트와 사회민주당은 부지런하고 걱정 많으며 회의에 가득 차고 선량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처음 부터 왕실 고문관과 상공업 고문관을 없애고 훈장과 명예훈장 등을 없애버 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들의 전체적인 행동방식은 매우 꼼꼼하 고 심리적인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현재 이 순간이 요청을 헤아리는 감각과 사회적인 구상도 가지지 못했다. 당시의 체험자가 말하듯이 '그것은 이념이 결핍된 혁명'이 었던 것이다. 어쨌든 패배하고 실망한 국민의 감정적인 고통에 대한 답변 은 아니었다. 1919년 전반기에 초안이 짜여서 8월 11일에 바이마르에서 가 결된 헌법 (바이마르 헌법)은 스스로의 의미를 설득력있게 정의내리지도 못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헌법은 민주적 권력질서의 기술적인 도구로 서만 이해되었을 뿐, 권력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혁명세력은 우유부단과 용기의 결핍으로 인해 아주 일찌감치 두 번째 기 회를 잃었다. 새로운 권력자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탈진상태와 러시아 혁명 의 끔찍한 모습에 대한 국민의 공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무 력감과 패전국의 수많은 문제들에 짓눌려서 노동위원회와 사병위원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개혁의지를 제한시켰다. 여러 가지 사건 들은 이제 쓸모없게 되어버린 전통적인 과제를 수행할 준비만을 위한 것이 었다. 혁명은 심지어 우익측에서도 환영받았고 '사회주의'와 '사회화'는 보 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상황을 해결해주는 요술공식으로 여겨졌다. 그에 반해서 새로운 지도부는 안정과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정치 계획밖 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권력들과 결탁하여 안전과 질 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단 한 번 소심한 사회화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토지 소유라는 봉건적 상황은 전혀 개혁되지 않았고 관료계급은 서둘러서 자기 지위만을 확보하였다. 왕조만 빼면 그때까지 결 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회 계층은 새로운 국가체제로 넘어가는 과정 에서 거의 권력 손실을 입지 않았다. 히틀러가 나중에,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했더란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 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웃은 것도 근거가 없는 일은 아니다. 좌익 과격파는 혁명의 미래상을 구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중의 추종도 없었고, 그들이 오랫동안이나 갈망하던 '반역자의 에너지'도 없었다. 저 유명한 1919년 1월 6일에 1만여 명을 헤아리는 혁명지지 대중 이 베를린의 승리가도에 모여들어서, 저녁때까지 쉬지도 않고 토론을 벌이 던 혁명위원회의 신호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떨면서 지치고 실망하여 흩어졌다. 이 사건은 사상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극복하 기 힘든 것인가 하는 사실만을 보여주었다. 좌익 혁명파가 특히 반혁명 군 부와 대립하면서 1월 중순에 나라 안은 큰 소요와 불안과 내전 비슷한 대 립상황까지 치닫게 되었고 공산당의 탁월한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가 살해당하였다. 혁명은 역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결과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방향을 상실한 여론은 그 국면의 싸움과 논쟁에서 공격이 아니라 오직 방어만 새온 바이마르 공화국에 오히려 불리하게 돌아갔다. 국민의 의식 속에서 이 모든 것은 '혁명' 탓이었다. 이렇게 불행한 시기에 태어난 국가 가 암암리에 모반, 패배, 민족적 치욕 등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여겼다. 그 리고 이러한 생각이 전부터 국민이 무질서의 이미지들과 뒤섞였다. 공화국 이 '더러운 혁명', 그러니까 절반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만큼 국민 의 의식 속에서 공화국과 그 성공을 해친 것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던 국민 다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수치심, 슬픔, 혐오감을 느꼈다. 평화를 경시한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평화협정은 분한 마음만 더하게 만들었다. 국민감정에 따르면 전쟁은 방어전이었다. 전쟁 후반부에는 과장된 전쟁을 위한 토론 같은 것 은 국민의식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발언은 독일 국민에 게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왕조가 몰락하고 서유럽의 헌법을 받아들이면 전 승국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미리 만들어진 정권을 위하여 사후업무를 수 행하는 사람들에게 화해의 마을 가질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베르사유 조약 의 기본 원칙이 되는 '세계평화의 질서'라는 선언서는 모든 보복행위, 명백 한 부당함, 강제적인 조약형식 등을 금지하고 있었다. 합리적이면서도 비현 실적인 이 희망의 시대를 '평화협정 기간의 꿈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다가 1919년 5월 초에 평화를 위한 조건들이 공표되었을 때 온 나라는 더욱더 제정신을 잃고 분노로 들끓었다. 공적인 흥분상태는 정 치적으로 필립 샤이데만 수상과 브로크도르크 란차우 외무장관의 퇴진으로 표현되었다. 외적인 상황은 악의와 모욕적인 생각을 가진 전승국들에 의해 결정되었 다. 1919년 1월 18일로부터 정확하게 50년 전에 도이치 제국이 선포되었다. 1월 18일에 회의가 열리고 서명장소도 50년 전과 동일한 선택된 것은 이해 된다고 치자,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에서 암살당한 5주기가 되는 6월 28일을 조약서명 날짜로 정한 것은 윌슨 선언의 야단스런 순진성에 대한 냉소적인 반대행위였다. 이 조약에서, 우익이나 좌익 가리지 않고 모든 진영과 당파들에 이르기 까지 잊을 수 없는 치욕감을 느끼도록 만든 악몽은 물질적인 부담보다 오 히려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회의에서 논쟁의 대부분을 이루는 영토반환 요 구, 전비 보상, 수리비 요구 등은 '카르타고식의 냉혹성'만을 가진 것이 아 니라, 의심할 것이 없이 제국이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에서 러시아를 향해서, 그리고 부카레스트 조약에서 루마니아 향해서 얻어냈던 부당한 조 건들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수치감'은 머지않아 우익의 선동에서 가장 공격 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것은 국가적인 체면문제였다. 무엇보다도 일 일이 지명된 도이치 장교들이 연합군 군사재판의 판결을 받도록 인수하라 는 제228조항과 독일이 전쟁발발에 대해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 는 그 유명한 제231조항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440개 항목이 조약 문안에는 너무나 명백한 모순과 부당성이 드러나고 있다. 전승국은 세계 심판자 같은 몸짓으로 자신들의 합법적인 요구에 대해서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사실은 모두가 이해득실이 달린 문제들이었다. 이 조약문안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도덕성의 무의미한 행진으로 아주 많 은 증오와 정당한 비웃을 샀다. 연합국 내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예를 들면 미국 대통령의 선언문에서 세계를 화해시키는 원칙의 품위를 지녔던 민족자결권 조항도 그것이 도이치 제국에 유리하게 작용하 게 될 성싶으면 언제나 제외되곤 하였다. 남부 티롤, 수데텐 지방, 단치히 같은 순수한 도이치 영토들도 분리시키거나 독립시켰다. 그에 반해서 분열 된 합스부르크 왕조의 도이치 부분이 독일에 통합되는 것도 금지하였다. 여러 민족이 섞인 지역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주왕국의 경우에는 파괴 되고, 유고슬라비아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는 새로 건국되었다. 민족주 의는 전체적으로 승인되었으나 국제 연맹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는 거부되 었다. 이 조약은 1차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등장하였던 원래의 갈등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평화조약의 최고 목표는 평화'라 는 생각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경시하였다. 그 대신에 조약은 전쟁과 고통을 넘어 세대를 지나면서도 보존되어 온 유럽의 연대감과 공동의 유산이라는 의식을 광범위하게 파괴하였다. 새로 운 평화질서는 이러한 의식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엄밀하게 살펴보면 독일은 언제나 배제되어 있었고, 민족단합조차 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도이치 사람들이 유럽의 결속에 감정적으로 더욱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전승국들의 말꼬리를 잡아서 그들의 위선을 강제로 보여줄 남자가 나타 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실제로 히틀러는 처음에 충실하게 윌슨과 베르사유 조약문의 가장 중요한 신봉자인 척함으로써 외교적인 성공을 거 두었다. 이 조약은 사라져버린 낡은 질서의 반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 을 옹호하였다. 당시의 눈 밝은 어떤 관찰자가 파리에서 펴오하조약이 승 인되던 날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 무시무시한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 그것 은 아마도 세계대전 보다 더욱 무서운 폭발로 끝나게 될 폭풍 전야의 무더 위"라고 적었다. 국내정치적으로 보면 평화조약의 결정에 대한 분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원한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공화국은 이러한 '치욕적 강제명령'의 강 도와 수차를 모면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공화국이 적어도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무능한지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당황, 우연, 평화의 기대, 피로의 결과였다. 공화국의 무능에서 생겨난 수많은 의심 말 고도 이제는 대외적인 약점에서 생겨난 악평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수치, 불명예, 무기력과 동의어로 여기게 되었다. 기만과 강요를 통해서 완전히 낯선 공화국이라는 형태가 도이치 민족에게 억지로 주어졌다는 감정은 이제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부담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기회가 없지도 않았다는 것 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그 행운의 기간 동안 공화국은 "사 람들의 충성심도 정치적인 상상력도 진짜 자기편으로 삼을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