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 앞으로! 파펜은 정말로 자신이 정치적인 걸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슐라이허레게 복수를 했고, 히틀러 길들이기 작전을 실현하였다 예상치도 않았 던 수상직 역임 이후로 부조리하게 피어난 명예욕도 내각에 복귀함으로써 만족 시켰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국가를 양도하지 않고 책임 속으로 끌어들였다. 국가 사회당의 당순느 대통령 내각의 수상이 아니고 의회 다수파 수상직을 수락하였 기 때문이다. 그는 힌덴부르크의 특별한 신임도 얻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기, 프란츠 폰 파펜의 것이다. 히틀러가 대통력과 만나는 자리마다 동참한다는 유보조항을 넣은 것도 협상의 성과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부수상이며, 프로이센의 주인이었다. 내각에서 나치당원은 고작해야 내부장관직을 차지했을 뿐이다. 지방 경찰은 내무장관에 속하지 않앗 다. 그리고 다른 장관직이래야 괴링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 실질 적인 권한은 갖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괴링은 플이센 내무 장관직도 겸임하겠지 만 파펜은 자신이 완강하게 그의 길을 막을 것이다. 내각에서 외무, 재무, 경제, 노동, 농업부는 보수파의 손에 있었고, 방위군에 대해서는 정처럼 대통령이 통수 권자였다. 어쨌든 저 치명적인 히틀러 씨를 기업가와 대지주의 요구에 봉사하도 록 만들고, 권위적인 새 국가를 위한 파펜 자신의 계획에 봉사하도록 만들 것은 날카롭고도 절묘한 배합이라고 생각했다. 수상직에서 실패한 파펜은, 위기에 처한 현대의 산업국가가 지나간 시대의 대 표자들에 의해서 통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 같다. 약간 수상쩍은 이 대중 조련사(히틀러)와 더불어 민중 없는 지도층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극복될 것도 같았다. 파펜은 경고하는 사람들에게 정치 흥행사같은 말투로 자신감에 차 서 대꾸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군요, 우리가 그를 참여시킨 겁니다. " 히틀러는 무론 처음부터 이런 의도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 새로운 선거의 요 구는 바로 그에 대한 전략적 대응책이엇다. 선거에 승리하면 그는 모든 약속을 깨고 파펜이 만들어낸 틀을 부수고 자기에게 마련해준 꼭두각시 수상직을 극복 해버릴 속셈이엇다. 힌덴부르크가 "여러분, 이제 신과 함께 앞으로 나갑시다!" 하 는 말로 작별을 고하기도 전에 벌써 이 '민족주의농축 내각'은 서로 엇가리는 속 셈들을 감춘 체제가 되었다. 빌헬름 거리는 괴벨스가 소집한 말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의심, 희망, 행운, 낙담 사이에서 이리저리 찢기면서' 맞은편 황제궁 호텔에서도 히틀러의 추 종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른스트 룀은 쌍안경을 들고서 신경질적으로 수상 관저 입구를 관측하였다. 맨 먼저 괴링이 나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외쳤고, 곧 이어서 히틀러의 자동차가 입구를 떠났다. 그ㅌ 선 채로 대중 의 환호성을 맞았다. 몇 분 뒤에 추종자들에 둘러싸여서 황제궁에 들어섰을 때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어떤 목격자가 전한다. 하느님이 자기를 도우시는 한 자기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이미 여러 번이나 선언했다. 1월 30일 오후에 그는 최초의 조치로 이러한 의도를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지 체 없이 이어진 각료회의에서 그는 이제 아무런 소용도 없어진 후겐베르크의 반 대를 무릎쓰고 의회 해산과 새로운 선거를 결정하였다. 파펜 자신이 교묘한 심 리전략으로 반대하는 후겐베르크를 대통령이 싫어하는 '당리당략' 이라고 밀어붙 여서 그의 의혹을 물리쳤다. 이어서 힌덴부르크가 이 결정에 서명하였다. 횃불행진 그날 저녁 국가사회당원들은 어마어마한 횃불 행진을 하였다. 정부청사들이 자리잡고 잇는 지역의 시위행위가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길에는 구경꾼들이 흥 분하고 소란스럽게 때를 이루어 몰려들었다. "베를린은 오늘 밤 완전히 사육제 기분에 빠져 있다. " 그 사이로 중요한 일을 한다는 기쁨에 사로잡힌 공무요원들 이 질서를 잡았다. 저녁 7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제복을 입은 2만 5천 명의 히틀 러 추종자들이 철모단과 함께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서 수상관저 곁을 지나 행 진해 갔다. 얼굴들과 집의 담벼락에 불안한 그림자를 던지는 정열적인 횃불부대 였다. 불이 켜진 창문 한 곳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가볍게 오락가락하는 히 틀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옆에는 괴링, 괴벨스, 헤스가 있었다. 창문 몇 개 떨 어진 곳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근심스럽게, 행진해 가는 집단을 바라보면서 막대기로 악단의 음악에 장단을 맞추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책임자들의 항의를 무릎쓰고 괴벨스는 이 시위 장면을 라디오로 중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히틀러 가 불쾌한 태도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오직 뮌헨 방송국만 끝까지 거부하였다. 자정이 지나서야 마지막 중대가 정부청사 지구를 지나쳐 행진해갔다. 괴벨스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는 가운데 '도취의 비틀거림... 이 위대한 기적의 밤이 끝났다.' 승리냐, 음모냐?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권력장악은 '기적'과 '동화'라고 찬양되엇다. 마법의 영역에 서 가져온 단어들이 정부의 선전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 사건에 초자연적인 축복 의 후광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었다. 히틀러 자신이 1월 30일에 어떤 추종자에게, "항구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음모에 짓눌리고, 재정적 곤궁에 시달리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 다니는 1천 2백만 명의 무게에 짓눌려서 좌초하련느 것처 럼 보일 때" 오직 신의 섭리를 통해서 구원되었다고 말햇다. 그러한 형식들은 사 건에 분명히 어떤 급전의 요소, 믿을 수 없는 요소를 덧붙일 때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당이 파열돠려는 위기에서 갑자기 대통령 방 쪽으로 발기길을 바꾼 것,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보잘것없는 출발, 무 기력과 추락에서 갑작스렵게 권력의 정상에 선다는 급전이었다. 사실상 '거기서 는 뒤틀리기는 했지만 동화의 요소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괴벨스가 도입한 기적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해석 애 몇 가지 특징을 부여하였다. 그것은 히틀러를 악마로 여기고, 그의 성공을 어 떤 모르는 힘이 배후에서 작용한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복수욕에 불타는 기 사 폰 파펜의 음모에 역사전환의 거대한 무게를 실어주려는 등의 모든 해석의 시도에 쓸모가 있다. 이런 해석은 다양한 변이형태로, 권력 장악이 역사적 우연 이었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분명히 히틀러의 길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 성들은 우연, 경박, 불행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스스로의 길 을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역사적이고 일부는 정치적인 특성을 가진 강 력한 성향들이 사태를 1월 30일까지 몰아갔다. 저항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아 마 그것이야말로 진까 기적이었을 것이다. 브뤼닝이 해임된 이후부터 공화국과 히틀러 사이에는 오직 정신이 흐릿해진 노인의 흔들리는 의지력과 슐라이허의 음모, 픈란츠 폰 파펜의 눈먼 단순성 밖 에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바라본 사람이라면 배후의 음모, 이익 집단의 개입, 독재적인 권모술수 등에는 오직 부찾거인 의미만을 부여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공화국이 붕괴했다는 상황에만 영향을 주었을 뿐이지, 붕괴 자체를 가져 온 것은 아니었다. 1932년 여름 이후로 그가 권력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고 해도, 그 거 리는 너무 멀어 권력은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따. 그의 상대방들이 그에게 그 모든 것, 즉 정당과 으회의 배제, 계속된 선거전, 헌법 남용의 습관 등을 가져다주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저항하려고 일어서기만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나서서 그 행위를 가로막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의심의 여지 없이 마지막까지 상대바의 힘이 그의 힘보다 원 등하엿다. 그러나 그 힘들이 서로 싸우면서 그들은 서로를 상쇄시켰다. 국가사회 주가 모두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어렵지 않았다. 시민, 공산주의자와 마 르크스주의자, 유대인, 공화국주의자들의 적이었다. 그러나 눈멀고 허약한 상태 에서 자기들 모두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 참여하엿던 사람들의 자기 변호는 아직도 여전히 히틀러의 수상 임명은 국가사회당이 가장 강력항 정당으로 부상한 결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핑곌 르 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회 민주당이 공화국 전기간 동안 1933년 1 월 30일 직전 몇 달 동안은 빼면 똑같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내각의 다수 파조차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헌법의 정신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지만, 히틀러가 철저히 헌법 의 공공연한 적대자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역시 놓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가사회주의잗르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온갖 저항 에 부딪쳤을 것이다. 사실상 히틀러의 보수파 조력자들은, 자기들의 의도가 비천 하기만 하지만 효과적으로 히틀러의 내면에도 간직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너무 늦게서야 그가 자기들과 자기들이 보호하려고 애쓴느 세계에 대해서 텔만 과는 다른 방법이지만 그 못지 않게 과격한 방법으로 대립되는 인물이라는 사실 을 깨달았다. 어떤 이름 없는 바이에른의 수사과 공무원이 1921년 여름에 국가사회당의 집 회를 방문한 다음에 보고하였다. 히틀러는 "제2의 붉은 군대 지휘자일 뿐이다. " 이 공무원이 1933년의부패한 유명인사들보다 히틀러의 본질을 더욱 날카롭게 파 악하였다. 그토록 많은, 유리하게 작용한 힘들과 상황들을 보면서 이 몇 주 동안 히틀러 의 남다른 공ㅈ이란 대체 무엇일까 물어보게 된다. 사실상 1930년 1월 30일 직 전에 그의 독특한 능력이 이렇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공적이란 수동적인 천성이었다. 극히 초조한 상황에서도 그는 기다리고 완고한 추종세력을 제어하 고 붕괴의 와중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대통령의 옆방 에서도 위대한 도박꾼의 냉정함으로 모든 위험에 맞서서 자신의 판세를 지킬 줄 알았다. 영 안에 반대하는 국민청원 이후 몇 년을 돌아보면 그가 소동과 선전의 국면 을 지나면서 정치가로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 수 있다. 지난 몇 주 동안의 경 험은 다시금 그의 도박사 기질을 강화시켰다. 이 시기에는 그는 자기가 포기하 고 난 다음엔 언제나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자신의 생애에서 놀라운 일이라고 말 했다. 수상직에서 하는 독백 그날 방, 환호성이 가라앉고, 음악과 행진의 발걸음 소리가 멎었을 때 히틀러 는 이른 새벽까지 수상의 접견실 옆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렀다. 그 자리제 참 석한 사람 중 한 명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깊은 감동 상태에서 그는 끝없이 장 황한 독백에 빠져들었다. 그는 오전에 있었떤 선서식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신 의 성공들을 기억하였다. '빨갱이' 적들이 말을 잃었음을 지적하고, 그 다음 자신 의 선전 원천으로 넘어갓다. 이번 선거처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 선거전은 없 엇다고 확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 신의 활약은 지구의 지배권을 놓고 백인, 즉 아리안족의 결정전을 벌이는 것이 다. 아리안 이외의 종족, 유색인종, 몽골인종은 볼셰비즘의 지배 아래 이끌려가 려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세계사게서 가장 위대한 게르만 종족 혁명'이 시작된다. 종말론적인 전망들이 건축의 전망들과 뒤섞였다. 자신은 맨 먼저 수상관저를 개축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수상관저는 '담배곽'일 뿐 이다. 아침 무렵에야 그는 뒤쪽으로 난 작은 물을 지나 건물을 떠나서 호텔로 건너갔다. 이날의 마비시키는 경험들, 그이 만족감과 보상 체험 등은 아직도 목적이 아 니었다. 그것은 목적으로 이르는 도중의 한 단계일 뿐이었다. 이날 밤의 긴 연설 에 나오는 선언이 아무리 불확실하게 울리는 것일지라도 그의 의도는 이제 전보 다 더욱 확실한 전망으로 다가오는 전망으로 다가오는 혁명을 지향하는 것이었 다. 진짜 혁명가처럼 그는 자기와 함께 역사의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특징적인 일이지만 그는 이러한 생각에 부정적인 색채를 입혔다. 이 시기에 그 는 벌써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바로 독일의 마지막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다." 중간 관찰 : 도이치의 파국인가, 도이치의 계승인가? 히틀러가 수상직을 넘겨받으면서 행산 횃불행진, 대중행진, 박수갈채를 동반한 극적인 기념식은 사건의 헌법적인 의미에는 도무지 맞이 않은 것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사건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정부 내각 개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 사건을 이전의 내각 개편과 비교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연합내각인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실패한 오스트리아 화 가를 제어하겠다."는 화려한 의도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처 음부터 권력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전략적인 목적의식, 그리고 계획적인 연출에 의해서 진행된 열광의 압력파도는 새로운 ㅅ 가의 궤적을 만들어냈다. 그 궤적은 짧은 시간 안에 보수파를 붙들어 쫓아내게 된다.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축하하며, 함께 통치하려는 파펜과 그의 동지들은 온갖 시도는 숨을 헐떡이며 따라 뛰려 애쓴다는 인상만을 만들어냈다. 내각에서 의 수적인 우세,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 경제, 군대, 관리의 통제력 등을 확보하 고도 경쟁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했다. 비밀 암호에 따르기라도 한 듯이 1월 30일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사 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갓다. 혁명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릉 수 있으며, 배신, 계산, 두려움이 시대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한 번 더 확인되었다. 그러나 성격도 없는 아첨 패거리만 대중의 정치적 전환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고 드물지 않게 자발적인 으지가 나서서 모든 선입견, 이념, 사회적 한계를 부수고 새로운 물결에 동참하였다 "우리 모두가 기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고트 프리트 벤이 옛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소란그럽게 진행되는 출발의 분위기 에 휩쓸려 들어갔던 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강력한 전통적 정당들과 연맹들이 이러한 돌진의 와중에 무너져내려서 강제해 산과 금지령이 나오기도 전에 지도자 없는 도당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공화국, 내면의 붕괴, 무기력 같은 과거는 끝났다. 새로운 것을 향한 격렬한 고백의 물결 에 끼지 않은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어 소수파가 되면서 점차 고립되었다. 그 들은 수십만 명이 동참한, 불켜진 대성당 아래의 대중 맹세, 지도자의 인사말, 밤의 불놀이, 합창 등 새로운 공동체 의식의 압도적인 시위에서 제외되엇다. 최 초의 테러 표지들도 환호성을 줄어들게 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환호성을 동반하 였다. 대중의 의식은 테러를, 오랫동안 기다려 온 터져나오는 에너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커져가는 소음이 돌격대 참모진의 '영웅술집'에서 터져나도는 외 침들보다 더 컸던 것이다. 역사 기록자들의 고민 이렇게 열광적인 동반 상황이 히틀러의 권력장악에 불안정한 성격을 부여하였 다. 이런 열광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역사적인 사고로, 음모나 어두운 배신으 로 표현하는 모든 주장에서 힘을 빼앗았다. 이 시기의 사건을 해석하다 보면 언 제나 되풀이해서, 국가사회주의가 도이치 민족처럼 정신적, 영적 모험을 겪은 오 랜 문화 민족에게서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힘도 들이지 않고 권력을 차지하고 다수를 정복하였는가, 그리고 열광과 믿음과 헌신의 히스테릭한 상태로 이끌어 갈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민족들 중에 고급귀족'으로 여겨진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안정성들이 어떻게 그토록 분명하게 마비될 수 있었단 말인가. 당시의 어떤 관찰자는 히틀러가 취임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피 할 수 없는 결과들이 나타날 것인지 서술하였다. "독재, 의회 폐지, 모든 정신적 자유의 억압, 인플레이션, 테러, 내전 등이 나타날 것이다. 반대파를 간단하게 없 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총파업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국기당과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히트러가 방위군을 장악하고 무기를 사 용한다고 해도, 수백만의 확고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수백만의 확고한 사람들은 없었고, 피의 공격도 없었다. 히틀러는 도둑 처럼 밤에 몰래 온 것도 아니었다. 다른 어떤 정치가도 그런 적이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그는 모든 우회로와 전략적 조작을 통해서 자신이 민족을 어디로 이끌 어가려는지 분명하게 밝혔다. 곧 독재, 반유대주의, 생존공간의 정복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도이치 성향이라는 이론 권력 장악의 쾌감은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수많은 관찰자들에게 독일이 이 몇 주 동안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갔다는 인상을 일깨웠다. 공화국 헌법과 게임 규 칙들이 아직 타당한 것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독특한 방식으로 극복되고 버 려져서 낯선 것처럼 여겨졌다. 한 민족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이성과 진보라는 유렵 전통을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나타나는 이 그림이 수십년 이 지나도록 이 사건에 대한 이해의 열쇠로 여겨졌다. 30년대에 이미 국가사회주의의 성공을 도이치 심성에 뿌리내린 어떤 특이성으 로 설명하려는 최초의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집스러운 자부심을 지닌채 문 명과 교화에 대한 거리감을 선택된 문화민족의 '세계 불쾌감'이라고 이념화 시키 는 도이치 특성, 즉 결점으로만 가득 찬 해도하기 힘든 도이치 본질과 연관시키 려는 해석들이다. 비스마르크, 프리드리히 대왕을 거슬러 루터, 아니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9세기에 토이부르크 숲에서 라틴 사람이 도 이치 땅에 침입하는 것을 막아냈던 게르만 영주 아르마니우스까지 포함하는 조 상들을 예로 들면서, 히틀러 이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도이치 역사에 잠재해 있 던 히틀러주의의 전통을 구성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프랑스의 게르 만 학자 에드몽 베르메유의 저서에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잇다. 그것은 또한 한 동안 앵글로색슨계의 해석 방향을 특징지었다. 월리엄 쉬러의 책에서도 독일의 이미지에 몇 가지 특성을 부여하였는데 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메유는 이렇게 썼다.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도 이치 사람들은 내면의 혼란과 허약함에서 아니면 반대로 제압되지 않고, 지지 않는 힘의 표상에서 나온 절망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자신들이 신의 사명을 완수 해야 하며 독일은 섭리에 의해 선택받았다고 믿었다. 로마 제국 찬탈, 한자 동맹, 종교개혁, 도이치 신비주의, 프로이센의 부상, 낭만 주의 등에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명 욕구가 은폐된 형태로 드러나 있다고 하였 다. 이러한 사명은 비스마르크의 '피와 강철의 정책', 황제제국의 세계권력의지와 더불어 점점 더 공개적인 권력정책의 방향을 취하는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자면 도이치 역사에 '죄없는 현상'이란 없다. 목가에서도 복종, 군국주의, 팽창의지 등을 읽을 수 있으며, 무한성을 향한 도이치의 동경 또한 현실에서는 권력수단이 부족하지에 유령에 세계에서 지배권 행사를 하려는 시도라고 한다. 그 모든 것은 마지막에 히틀러에게 집중된다. 그는 당시 어떤 유 명한 책의 제목처럼 '도이치 파국'(수없이 덧붙인 관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수백년 역사의 소실점을 두려는 시도들은 국가사회주의 해석과 비슷해질 위험에 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사회주의해석은 스스로 한자동맹 신비주의, 프로이센 정신, 낭만주의를 찬탈하고 제3제국을 도이치 역사의 자기실현이라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시도, 곧 구가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전통과뿌리깊 은 질서를 거부하는 민주 시대의 위기현상으로 보고, 그 사회적 반항심과 경제 적 허약함을 묘사하고, 이것을 도이치의 특성이 아니라 현대의 특성이라고 정 의하려고 한느 시도 역시 문제가 많다. 그것을 19세기의 수많은 염세적 예언들 이 말한 대로 전체주의 국가의 부정적 유토피아가 실현된 것으로 여겨ㅆ. 도이 치 쪽이세 나온, 이런 해석의 풀발점을 가진 묘사에서 히틀러는 이따금 지나치 게 낯선 현상으로 서술된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치우친 모든 해석의 시도들은 현상의 특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마르크스주의 해석모델의 경우에 그것이 가 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자신들의 원칙에 얽매이고, 한때는 굴복한 동지들에 대한 경건한 심정에 얽매여서 이쪽 대표자들은 잘 알려진 자본에서 가장 반동적인, 국수주의적,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이 공개적인 테러의 독재"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사상을 마지막까지 추적해보면, 히틀러, 괴벨스, 슈트라이허가 아니라 후겐베르크, 크루프, 테센 등을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인물로 볼 수 밖에 없게 된다.)이 아니라 도이치의 계승이라는 것이다. 시대이론 물론 국가사회주의에는 분명하게 도이치 특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베르메이유 나 쉬리가 말한 것과는 다른, 더 복잡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악의 계통나무라는 말이나, 개별적인 설명은 이 사건의 본질은 정당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또 한 그것의 기원을 오직 현상에서만 추적하는 것도 맞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 속에는 검은 구름 속에 번개가 숨어 있듯이 파국적인 성향에 분명히 숨어 있는 것이다. 수많은 단순한 태도들, 혹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문제시되지 않은 태도 를, 미덕과 가치 개념들조차 국가사회주의의 성공을 도와주었다. 전체주의적 권 력체계는 한 민족의 퇴화된 혹은 범죄적인 성향들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 리 차드 3새를 악당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없듯이 한 민족을 악당이라고 규정할 수 는 없다는 것이 시대이론이다. 수많은 나라에 독일의 그것과 견줄만한 역사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들이 존재 하였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차이가 겨우 파시즘 지배를 막아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민주적 경향들과 실질적, 효과적으로 결합되지 못했던 뒤처진 국가의 식은 도이치의 특성만은 아니었다.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대립,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대립 역시 도이치의 특성만은 아니었다. 또한 독 일의 복수욕, 전투 이데올로기, 혹은 거대 권력의 꿈 등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 다 더욱 강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히틀러의 사고를 그토록 결정적으로 규정했떤 반유대주의도 도이치의 특수 현 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도이치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약했다. 어쨌든 국가사회주의는 종족 감정으로 대중과 열광을 얻은 것은 아 니었다. 히틀러가 그 사실을 얼마나 잘 의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권력 장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잘 드러나고 있다. (루마니아의 파시스트 지도자인 쿠드레아누는 20년대 초에 독일에 머물면서, 이 나라에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반유대주의가 없다고 불평하였다.) 이 이기에 이탈리아, 터키, 폴란드,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등지에서 파시즘 혹 은 파시즘 아류 정권이 탄생하였다. 국가사회주의에서 분명한 도이치 특성이었 던 것은 이런 여러 나라들에 나타난 체제들과 비교해볼 경우에만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파시즘의 가장 과격한, 가장 절대적인 출현 방식이었다. 국가주의적 요소들 지적인 영역과 실천적인 영역에 출현한 이러한 원칙적 과격함은 본질적으로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에 덧붙인 부분이었다. 사상을 날카롭게 현실에 대립시키 고, 현실에 맞서 사상에 힘을 부여하는 그의 방식으로 보면 그는 분명 도이치 사람이었다. 지역정치가로 실패하고 티어쉬 거리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시절에 그는 죽은 다음 명성을 위해 개선문과 둥근 지붕 홀을 구상하였다. 수상이 되어 서는 인간의 나이로 생각하지 않고 온갖 비웃음을 무릎쓰고 천 년 단위로 생각 하였다. 베르사유 조약과 독일의 무기력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게르만 민족 이동의 결과들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게르만 민 족 이동의 결과들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무솔리니의 명예욕이 역사적인 위대성 을 회복하자는 목적을 가졌고, 모라는 구제도와 '여신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 려고 하였고, 그 밖의 다른 파시스트들도 미화된 것이긴 하지만 과거의 상태에 서 유혹을 받았다. 히틀러는 머리에서 만들어낸, 현실의 담보가 없는, 구조적인 목적을 실현시키 려고 생각하였다. 즉 종족적인 자기 주장 의지로 대서양에서 우랄, 나르빅에서 수에즈에 이르는 세계왕국을 쟁취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그에 반대 한다고? 그 나라들을 때려눕힐 것이다. 민족들이 자기 의지에 맞서 이주한다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것이다. 종족들이 자기 구상에 맞지 않는다고? 현 실이 자기의 생각에 맞게 될 때까지 그들을 선별하고, 더 훌륭하게 배양하고, 말 살할 것이다. 그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였다. 그의 발언에는 언제나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무모함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광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무 시무시하고도 냉혹한 선입견 없음으로 모두에게 마주서 있다. "고 그는 선언하였 다. 극단적인 과격성게서만 그는 본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사 회주의는 그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히틀러가 자신의 극단적인 과격주의를 위해 언제나 순종적인 하수인들을 찾아 냈다는 사실도 국가사회주의를 다른나라의 파시즘 운동과 구별하게 해주는 분명 한 민족적인 특성의 하나다. 이 정권의 인상을 분명하게 특징짓는 집중된 냉혹 함과 성실성의 인상을 어떤 인간적인 정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정권의 두 려운 모습은 주로 살인자와 고문관들이 계획적으로 실시한 잔인성에서 생겨난 다. 그리고 이 정권을 이해하는 인기 있는 이해방식은 이렇게 분명하게 범죄적 인 요소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렇나 요소들이 문학 아니면 연예물의 서술에 등장하고 있다. 국가사회주의는 주먹에 채찍을 움켜쥔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정권은 스스로를 그런식으로 유형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정권 은 특히 초기에 이러한 현상을 철저히 이용하기는 했으나, 그렇게 범죄적인 본 능을 풀어놓아서는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사회주 의의 본질을 구성하는 과격성은 감정을 동원하는 것이나, 책임 없는 충동 만족 의 약속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은 범죄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도착된 도덕 적 에너지의 문제였다. 국가사회주의는 방향성이 없기는 하지만 강력한 도덕적 동경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호소하였다. 특히 친위대를 통해서 이러한 유형을 끌어들이고 엘리트 방식 으로 조직하려고 하였다. 이 공동체에게 끊임없이 요청되고, 밤의 제전의 횃불 아래서 낭만적으로 강조되었던 '내적인 가치'의 요구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생각 에 따르면 다음의 덕목들을 포함하였다. 충성, 정직, 복종, 강건, 단정, 빈곤, 용감 등이었다. 물론 모든 불필요한 관계체계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정권의 목적만을 지향하는 방향을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도덕적 명령 아래서 그들 중 한 명이 썼던 것처럼 '차갑고 돌같은 태도'를 지니고, '인간적인 감정을 갖기를 중단' 하였던 무감정의 하수인 유형이 양성되었다. 이 유형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 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말 그대로 시체를 넘어가는 능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죽였다. 이것은 제3자가 보기에는 범죄적 감정보다 더 과 격하게 보이는, 확고하고 기계적인 일관성이었다. 이러한 일관성의 즐거운 잔혹 성에는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여전히 압도적인 사회적, 지적, 혹은 인간적 원한 이 드러나 있다. 현실감 상실 도덕적 요구는 특별한 사명의식으로 보충되고 확대되었다. 묵시록적인 대립 상황 속에 있다는 느낌, '더 높은 법칙'을 따른다는 느낌, 이념의 사도라는 느낌, 그밖에도 무엇이 되었든 형이상학적인 확신의 그림과 구호들이었다. 이러한 형 이상학적인 확신이야말로 무자비함에 특별한 성스러움을 부여하였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사명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민족의 적'이라고 청했다.(히틀러는 1938년 2월 20일자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임무를 방해하는 사람은 그가 볼셰비스트든 민주주의자든 혁명적 테러리스트든 반동적 공상가든 상관없이 민족의 적입니다." 특별 사명을 받았다는 이런 사상은 형이 상학적인 요구를 바탕에 깔고서 한스 프랑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37년 2월 10일자 일기에 이런 기록을 하고 있다. "나는 독일에 대한 신앙을 고 백한다. 독일에 봉사하는 것은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어떤 고백도, 어떤 신앙 도,, 오늘날 그리스도가 온다면 도이치 사람일 것이라는 이 신념처럼 강한 것은 없다. 우리는 진길로악을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이름 으로 유대인과 볼셰비즘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하느님, 우리를 보호하소서!") 끊임없이 더 깊은 깨달음과 더 높은 사명을 불러대는 이러한 엄숙주의에는 도이 치의 전통적인 정치에 대한 무관심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민족의 현실에 대한 혼란스러운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이념은 현실에서 형태를 얻고 사람들이 체험하고, 사상은 현실 속에서 절망, 공포, 미움, 놀라움 등으로 바꾸는 법인데 그런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강령이 있고, 히틀러가 말한 바에 따르면 강령의 실현에서 오직 긍정적 활동과 부정적 활동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시대의 주역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로 널리 알려지게 된 유머능력의 결핍은 바로 이러한 현실감 상실의 표현이엇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사회주의에 나타난 분명하게 특징적인 도이치 요소였다. 그리 고 몇가지는 이러한 특성에서 여러 가지 연결통로가 멀리 도이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놓쳐버린 혁명 역설적인 한 주장에 따르면 근대 도이치 역사의 가장 결실 풍부한 사건은 '일 어나지 않은 혁면'이었다. 혁명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 나라의 각시대의 정치적 특성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완고한 목가상태를 마련해주었다. 혁명능력이 없다 는 것은 특별히 복종적인 특성의 표현이라고 여겨졌으며, 선량하고 전투적이지 않고 몽상적인 도이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자의식이 강한 이웃의 조롱을 받았 다. 사실상 모든 혁명에 대한 깊은 의구심은, 역사적 체험이 거의 철저히 위기감 으로만 체워진 한 민족의 반동일 뿐이었다. 지리상 유럽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관계로 이 나라는 아주 일찍부터 봉쇄 콤플렉스와 방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나라 전체가 황무지로 변했던 30년 전쟁(1618~1648년 유럽전체의 종교전쟁, 독일 영토에서 대부분의 전투가 이루어졌고, 전쟁이 끝났 을 때 독일은 완전히 황폐한 상태였다.)의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 잔혹체험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30년 전쟁의 가장 확실한 유산은, 완전히 남의 손에 떨어지는 악몽같은 느낌 과, 모든 혼란상태에 대한 깊은 공포심이었다. 그런 혼란상태는 여러세대에 걸쳐 서 자기 나라 영주들과 외국의 영주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착취되었다. 시민의 첫 번째 의무로 여겨지는 평화는 또한 당국에 대한 시민의 첫 번째 요구이기도 하였다. 공포와 곤궁을 나라에서 멀리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에 서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파악되었던 계몽주의 독일에선느 영주 계급 에 의해서 보호되고, 개별적으로 찬양받을 정도였다. 과거의 두려움이 너무 깊었 던 것이다. 도이치의 의식에 그토록 깊이 뿌리박은 질서, 기율, 자신에 대한 엄격성에 등 의 범주들, 국가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심급이며 '악을 멈추게 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 지도자에 대한 신앙 등은 그토록 잊을 수 없는 역사의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보호 욕구를 잊을 수 없다는 역사의 경험에 기 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보호욕구를 히틀러는 효과적으로 파악하며 약간의 소질만으로 벌써 자신의 지배욕에 쓸모있게 만들었다. 복종에 대한 요구 를 이념으로 만든 지도자 숭배 사상으로, 혹은 혼란상태에 대한 뿌리깊은 방어 본능을 눈에 보이게 만든 기하학적인 군대 행진을 통해서였다. 독일에 혁명이 없었따는 관점은 오직 절반의 진실이다. 이 민족의 왕의 머리 를 자른 적도 없고 승리에 찬 시민봉기도 알지 못하였지만 세계를 혁명으로 동 원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른바 혁명의 시대 에 도이치 민족은 가장 도전적인 인식들, 가장 날카로운 혁명의 구호들을 만들 어냈다. 그리고 피히테의 고양된 말이 따르면 사고의 바윗덩어리를 마구 쏟아내 서 이 사고의 바윗덩어리들로 미래 시대의 집을 지었다. 그러나 독일의 지적인 과격성은 자신의 집을 짓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도이치 정신에 위대성과 능숙 함을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실용적인 능력의 결핍 에 불과하다. 실용적인 대토에서 비로소 사고와 삶은 서로 화해하고, 이성은 이 성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도이치 정신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 도이 치 정신은 말뜻 그대로 반사회적었고 우익 쪽에도 좌익 쪽에도 서지 않았으며 주고 삶에 대해서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절대적이고 집중되어 있고, '난 달라질 수 없어' 하는 태도이며, '지적인 낭떠리지를 향한'거의 묵시록적인 '성향' 이었다. 세계의 뇌우가 내리칠 때에 심연의 가장자리에 인간의 진부한 현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들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삶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 신 이 나를 도와주실 텐데. 사색의 영역을 정치의 영역에서 이렇게 분리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대체행 동이라는 성격을 가졌다. 이념의 과격성은 의지의 무기력을 감추려는 것이엇다. 사색이 현존하는 것에 대항하는 힘이 되었다는 헤겔의 말은 승리에 찬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위로의 뜻을 품고 있다. 삶의 곤궁을 지닌 시골풍 도이치 소국들 의(19세기 초까지 독일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두 개의 대국과 상당히 독 립적인 수많은 소공국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백 년 묵은 딜레마는, 사상이 아 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거시적인 영역으로 상승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신력이 부족한, 혹은 프랑스를 모방하는 영주들을 통해서 사상이 오랫동안 무 시되어 왔다는 사정도 역시 사상이 거시적 영역으로 도주하는 일을 도왔다. 19세기 초의 가장 조잡한 글에서 1920년대의 정치적 잡문들에 이르기까지 이 러한 글들이 아무리 종속적이고, 읽히다 맑, 위축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정신 의 특이한 기본동작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외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맞서는, 이상적인 내면의 왕국 건설 종사하려는, '시대를 시대 자신에게 떠맡기는' 정신 이었다. 정신은 판단의 과격성에 드러나는 복수의지를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은 현실에 대한 섬세한 복수욕이었다. 이제 현 실이 정신에 걸려서 멸망할 차례였다. 19세기 동안 정치적 해방 노력 과정에서 시민의식이 체험한 수많은 실망들을 통해서 현실의 소외 과정이 더욱 강화하였다. 그 흔적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볼 수 있다. 정치 사상의 허구적 특성에서, 빙켈만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신화화 이데올로기에서, 그리고 비현실적인 도이치 교양개념에서 볼 수 있다. 교양 개념 은 예술과 숭고에 의한 정신의 왕국만을 자신의 요소로 삼았다. 정치적인 것은 교양의 바깥으로 밀렸다. 그것은 민족문화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러한 경향들이 집중된 사회적 유형의 인물은 도이치 본질을 극히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그러한 인물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사회적인 특권을 누려 왔다. 오래된 초상화에 그려진, 세상과 거리가 먼, 사유에 잠긴 남자들이 그런 유형이다. 그들의 교수와 같은 얼굴은 이상적인 엄격함과 원칙에 대한 충실성을 사유의 강조와 결합하엿고, 그들의 우직성을 내면에 심연도 포함하고 있다. 그들 은 거대한 크기로 사유하였고, 체계들을 파괴하고 새로 세우리도 하였으며, 그들 의 눈길은 먼 곳에서 온 것이었다. 동시에 분명한 사생활의 요소인 친밀성과 협 소한 가정적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파울 드 라가드네가 말한 것처럼 '책 들과 꿈들'이 그들의 요소였다. 그들의 창의력은 실질적인 현실의 결핍에 대하여 풍부한 보상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자의식은 정신적인 지거업에서 온 것으며, 문 화에서, 그리고 자신이 문화에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냈다. 비정치적인 정치의 욕구 현실에 대한 경멸에 맞게 정치에 대해서도 점점 두드러진 경멸감이 나타낫다. 정치는 가장 끈질기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현실이었다. 정치란 비천한 요소이고, 20년대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열등한 자들의 지배'였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 기까지 독일의 정치 사상은, 도적적으로나 지적으로 비천한 현실보다는 어느 정 도 우월한 음조를 지녀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배후에는, 이상적인 '비 정치적 정치'를 향한 욕구가 작용하였다. 이러한 욕구는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정치적 무기력에서 나온 것이다. 고립상태에 빠진 극소수를 제외하면, 독일의 여 론은 정치에 대해서 무관한, 드물지 않게 당혹한 태도를 보였다. 여전히 정치를 고달픈 관심사고, 자기설득이며, 널리 퍼진 견해에 따르면, 자기 소외엿던 것이 다. 도이치 세계는 개인적인 개념들, 목적들, 미덕들을 지향하였다. 어떤 사회적 인 약속도 개인적 세계의 파토스와 견줄 수 없었다. 그것은 가족의 행복, 자연에 대한 감동, 학식있는 인식을 향한 조용한 열의였고 전망이 가능한 만족의 영역 이었다. 도이치 사람들은 숲의 신비가 아니라 '시장판의 소음'을 꿈의 자유가 아 니라 헌법의 권리를 얻으려고 그러한 영역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정치에 반대하는 정서 이러한 감정도 과격화되었다. "정치적 인간은 역겹다."고 리하르트 바그너는 프란츠 리스트에게 썼다. 그리고 그의 숭배자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자기 민족의 어떤 표현이었다면, 어쨌든 그가 도이치 였다면, 최고의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도이치 사람, 도이치 시민이었다면, 정치에 대한 미움이라 는 측면에서 그렇다." 반정치적인 정서는 권력에 대한 도덕의 옹호,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간성의 옹호, 정치에 대한 정신의 옹호라고 양식화되었다. 언제나 새롭고 깊은 논쟁적인 사유과정에서, 시민적인 자기 반성의 중요한 주제들은 이러한 대립 쌍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러한 정서의 최고봉은 상당히 복잡한 고백으로 가득찬, 1918년에 출 간된 토마스 만의 <비정치적 인간의 관찰>이었다. 그것은 계몽적이고 서유럽적 인 '정치 테러리즘'에 대항하여 문화적인 자부심에 넘친 도이치 시민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미 제목에서 현실과 등을 돌린 낭만적인 목적의식, 비정치적 정치에 대한 전통적 동경이 드러나고 있다. 예술을 통한 구원 점차 광범위하고 미로 같은 논문들에서도 읽을 수 잇는 정치에 대한 미적, 지 적 원한은, 19세기 중엽부터 특이한 작용을 해온 구원의 표상에서 극단적인 표 현을 얻었다. 즉, 예술을 통한 구원이라는 사상이었다. 민족의 모든 이루어지지 않은 꿈, 모든 실망한 동경들이 이 사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처음에 정치와 문학의 밀접한 상호침투에 대한 낭만주의의 요구로 나타났다. 쇼펜하우어는 삶 의 투쟁에 비극적으로 휘말리는 일에서 특히 음악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생각으 로 여기에 주관적인 색채를 부여하였다. 그러다가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그것은 "'정치의 종말'과 인간성의 시작이라는 문화적인 꿈"이라는 형태로 극장을 통해 서 절정에 도달하엿다. 정치는 대형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고, 국가는 예술 작품 이 되고, 예술가가 정치가를 대신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예술은 신비고, 그 사 원은 바이로이트이며, 성사는 값진 한 사발의 아리안 피였다. 그 피는 쓰러진 암 포르타스에게 치유를 선물하고, 클링조르 안에 구현되어 나타난 유대주의, 정치, 성애의 대립되는 힘을 상상의 성의 폐허 아래 묶어두었다. 세기말에는 랑벤이 렘브란트의 이름을 혁신 욕구의 상징으로 이용해서 바그너 의 성공에 거의 뒤지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 예술이 광증에 이른 세계에 단순 성, 자연성, 직관성을 되돌려주고, 상업과 기술을 제거하고, 계급들을 완하시키고, 민족을 합치고, 평화로워진 세계 속으로 잃어버린 통일성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예술은 위대한 정복자였다. 맨 마지막에는 모든 정치를 제거하고, 정치를 도취, 권력, 카리스마, 천재성 등으로 되바꾸어 놓는 작업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일관성 있는 태도로 동경하는 새시대를 지배하는 일을 은총 입은 천재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위대한 예술적 영웅' '카이사르 같은 예술가의 개성'의 몫이 었다. 도이치 사람들의 도피 행동은 이러한 동기들이 나타났다. 제1차 세계전쟁과 전후 시대를 통해서 전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정치에 마주서게 되었을 때, 그들 은 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이러한 도피행동으로 반응하였다. 전통적인 도피 통로 는 그들을 미적인 혹은 신비적인 대체 영역으로 데려갔다. 정치에 대한 거부감 은 '더러운'혁명에 반대하는 정서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바이마르 시대의 지평선 을 어둡게 물들인 수많은 음모설에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후광의 배반설, 붉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황금(자본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중 위협설, 반유대주의, 혹은 널리 펴져ㅣ던 프리메이슨과 예수회에 대한 공포 콤플렉스 등, 간단히 말 하면 현실에서 물러나서 배신, 고독, 기만당한 위대함 등 낭만적인 범주들로 가 득찬 공상적인 가상의 세계 속으로 물러나려는 온갖 징후들로 나타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고로 전쟁체험의 이데올로기들, '젊은 민족들' '총체적 동원령' 혹은 '야만 독재 군주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인 이미지들과 범주들의 지 배를 받앗다. 이른바 보수파 혁명의 민족주의 유토피아적인 발상들과 표어들의 홍수엿다. 그러한 표어들은 피히테의 말을 뒤집어서 세계에 비합리주의의 제복 을 입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정치 현실의 쉽ㅈ 않은 균형에 대비해서 부조건적인 구호들을 내걸고, 장엄한 신화의 모습 안에 일상을 내세ㅇ다. 그러한 것들은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으나, 혼란스러운 낭만적인 대안 노릇을 해서 공화국의 지적인 기아 상태에 적지 않게 공헌하였다. 더욱이 '정치 에 대한 혐오감'은 증오스런 현실을 보면서 전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불타오 르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옹호자들은 부패하고 희망없는 체제의 옹호자들처럼 여겨 졌고, 자신들의 열정과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불쾌감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을 메울 길이 없었다. 그에 반해서 우익측의 공격자들은 상상력에 넘치고 구상 력 풍부하게 신화, 몽상, 섬세한 쓴맛 나는 소재들을 이용해서 공화국에 대한 이 미지를 만들어냈다. '체제'를 향한 가장 경멸적인 비난들 중에는, 공화국 체제가 국민의 소비와 소시민적 쾌락이라는 '작은 행복'에 길들인다는 것도 있엇따. 그에 반해서 모험, 비극, 몰락 등이 시대의 매혹적인 용어들이었다. 칼 폰 오 시에츠키는 지식인들 사이에 수많은, '이기적이지 않은 파국의 연인들, 세계정치 의 불운의 미식가들'을 보았다. 반면 어떤 프랑스의 관찰자는 30년대 초에, 독일 은 '너무 많은 정열과 과격주의로 위기를' 맞고 잇는 것이 아닌가 무었다. 사실 상 '지적 낭떠러지를 향한 성향'은 독일의 위기가 전체적으로 출구 없는 절망적 인 특성을 가진 데 대해서 부분 책임이 있다. 그러한 특성은 현실로부터의 도주 의 필요성을 대중 현상으로 만들고, 알지 못하는 것 속으로 낭만적, 영웅적으로 도약하려는 이념을 극히 친숙한 생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현상은 이러한 이념적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 그는 이러한 태도와 콤 플렉스의 저질스런 생산품과 같다. 신화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가 사회적으로 소 외된 지성의 극단적인 과격성 안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그의 연설에는 거의 알 려진 모든 반정치적 감정의 수사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당에 대한 증오, '체제'의 타협적 특성에 대한 증오, '위대성'의 결핍에 대한 증오 등이 나타난다. 그는 언 제나 정치를 운명의 이웃개념으로 보았다. 스스로는 무능하여 강한 남자, 예술, 혹은 '섭리'라고 표현되는 더 높은 힘을 통하여 해방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여 겼다. 권력 장악 과정에 행한 중요한 연설들 중의 하나인 3월 21일 포츠담 연설 에서 그는 정치적인 무능, 예술을 통한 대체의 꿈과 구원 등의 맥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도이치 사람은 내면적으로 허물어지고, 정신으 통일되지 못하고, 의지는 갈라 지고, 행위는 무기력해서 자신의 삶을 주장할 힘을 잃고 있습니다. 그는 별에서 의 권리를 꿈꾸면서 지상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결국 언제나 내면으로 향한 길만이 도이치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가수, 시인, 사상가로서 도이 치 민족은 다른 사림들이 살았던 세상만을 꿈꾸다가, 곤궁과 비참이 비인간적으 로 강타해 오면 그제애 비로소 높은 상승, 새로운 왕국, 새로운 삶을 향한 동경 이예술에서 솟아나오곤 했지요. 예술가의 꿈에서 벗어난 이후로 그는 자신이 이러한 구원자 현살이라고 생각 하였다. 예를 들어 정신적 전통의 맥락애서 보면 그는 자기가 비스마르크보다 랑베렌의 '위대한 예술가 주인공'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그의 이런 여러 가지 발언들로 미루어보아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위대 한 인간의 미적인 현상이라는 측면헤서 경탄하였다. 히틀러 자신에게 있어서도 정치는 위대함으로 데려가는 수단이고 화려한 대체 역할로서, 불충분한 예술적 재능을 보충해 주는 비할 바 없는 기회를 의미하였 다. 그는 정치가로서의 모든 요소를 배워 익혔고 그것을 임시 역할로 받아들였 다. 순간적인 영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히 신화적, 미적, 비현실적으로 생각하 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어떤 사람이 관찰한 대로 그는 예술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측근에 말에 따르면 '휴머니티'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초기의 연설 이나 후기에 총통사령부의 원탁대화 같은 임의발언의 기록들은 그 사실을 증언 하고 있다. 아마도 그를 가리켜 1923년 체임벌린이 10월이 편지에서 '정치가와는 정반대 유형'이라고 말한 것 이상의 칭찬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체임벌린은 당 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정치의 이상이란 아마도 정치를 갖지 않는 것인가를 봅 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치는 솔직하게 알려지고 세상에 보여야 하겠지요." 이 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정말로 정치를 갖지 않았다. 다만 거대하고, 암시적인 세 계이념과 운명 이념을 가졌다. 그는 광적인 집념으로 그 이념의 실현을 자기 삶 의 목표로 삼았다. 정치의 미학화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을 가리켜 '정치의 미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이치 민족의 정치에 대한 관념은 전부터 이미 언제나 미학적인 것이었으므로 파시즘 은 도이치 사람들을 특별히 격렬한 힘으로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 국이 도이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정치를 오직 정치로만 알았다는 사실이 바 이마르 공화국 실패 원인의 일부엿따. 히틀러가 비로소 당당한 연막술로 연극적 인 장면들을 통해, 도취와 우상화 소동을 통해 동식적인 사건들을 친근하 ㄴ모 습으로 보여주었다. 그 적절한 상징으로 조명을 받은 것이 대성당들이었다. 대성 당들이 마법과 빛으로 이루어진 벽들이 어둡고 위협적인 바깥 세상을 차단할 것 이다. 도이치 사람들은 히틀러의 공간 열망, 그의 반유대주의, 그에게 붙어 잇는 저속하고 잔인한 특성들에 공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다시금 거대 한 운명의 소리를 주고, 정치를 다시 전율과 뒤섞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박수갈 채를 보내고 그의 추종 세력이 되었다. 히틀러가 예술과 정치에 대한 생각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고, 정권을 예술과 정치의 최종적인 화해라고 찬양한 것은 비정치적인 '아름다움의 국가'라는 이데 올로기와 잘 맞았다. 그는 자신을 페리클레스의 후예라고 여기고 그에 견줄만한 것을 발전시켰다. 알버트 슈페어가 전한 바에 따르면 그는 고속도로를 자신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극히 진지한 의도로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 히 히믈러도, 루돌프 헤스도 '비음악적인 인간들'이기에 자신의 후예가 될 자격 이 없다, 반면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관념 세계에서는 '음악적 인간'이고, '예술가' 고, '천재' 이기에 앞으로 높이 출세할 것이고, 자신의 총통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전쟁 초기에 예술가들을 풀어주었지만 학자들, 기술자들은 아니었따. 새로운 무기를 선보이는 자리에서도 그는 미적인 형태를 자세히 뜯어보았으며, 대포 총신의 '우아함'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예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는 음악적인 인간만이 야전 사령관 노릇을 제대 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학자와 기술자의 석방은 슈페어의 노력에 의해 서 1942년에야 이루어졌다. 슈페어가 사석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지 역 방위군 사령부에 예술가들의 군대 서류를 요청해서 없애버림으로써 그들이 석방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승리를 거든 다음에 정복자로서 파리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박물관 방문객 자격으로 그 땅을 밟았다. 일찍부터 나중에는 점점 더 초 조하게 되어버린 그의 사적인 복고적 노스탤지어도 이런 특성에서 나온 것이었 다.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정치가가 되었다."고 그는 말하곤 하였다. "정치는 내게 오직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내가 지금처럼 활동하지 않으면 힘들어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다! 정계에서 물러나서 이 모든 근심, 걱 정, 분노 따위를 뒤로 하게 되면 그것은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것 이다... 전쟁은 왔다가 스러져간다. 남는 것은 오직 문화의 작업들 뿐이다." 한스 프랑크는 그러한 느낌들을 시대적 경향이라고 여겼다. 즉 "국가, 전쟁, 정 치 등과 결부된 모든 것을 쫓아버리고 문화적 활동이라는 높은 이상을 맨 앞에 세운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국가사회주의 지도부의 상당수 가 행렬에 끼여들지 못한, 혹은 실패한 절반 예술가라는 사실이 무의미한 것만 은 아니다. 히틀러 이외에 디트리히 에카르트도 그런 사람이었고, 괴벨스는 소설 가가 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로젠베르크는 건축가로 시작하였고, 시라흐와 한스 프랑크는 작가, 풍크는 음악가 노릇을 흉내냈다. 슈페어도 비정ㅊ거인 고립의지 라는 측면에서 이렇나 부류에 속하였고, 미화시키는 격문을 써서, 공허하고도 가 열차게 국가사회주의의 상승을 촉진하였던 저 지식인 유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적 세계태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식인들의 일그러진 현실개념은 히틀러의 이념세계를 본 질적으로 특징지엇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화중에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곤 하는 그의 경향을 증언하였다. 그러한 지대에서 그를 다시 '현실의 바탕으로 끌 어내려야 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윗소금산이나, 산장 위쪽 해발 2천 미터 높이의 목바위에 세운 독수 리 둥지에서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였다. 공기가 희박한 이곳 산들의 운명적인 모습을 앞에 놓고 그는 자신의 계획들을 곰곰히 생각했으며, 그 자신이 가끔 말 했듯이 모든 중요한 결정을 이곳에서 내렸다고 한다. 우랄 산맥까지 이르는 거대 왕국의 상상, 거대 공간과 세계분할의 지정학적인 과대사상, 민족들과 종족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포함하는 유전학적인 비전들, 초 인들의 꿈들, 혈통이 순수성과 성스러운 잔에 대한 환상들, 대륙 전체에 걸친 활 석 레일 체계, 군사 시설, 방어 마을 체계 등은 그 자체로 보아서 전혀 '도이치' 가 아니고 가깝거나 먼 원천들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여기서 도이치적인 것이 있다면 그가 단편 조작들을 이어맞춘 지적이고 거친 일관성뿐이었다. 어떠한 결 론에 부딪쳐도 물러서지 않는 엄숙주의도 도이치적인 것이었다. 히틀러의 확고함은 기형적인 성격의 전제조건들과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그 의 과격성에도 밑바닥의 과격성과 대담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의 확고함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이 나라의 지적 전통에 속하는 저 반정치적,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는 종족 투쟁적인, 혹은 확장적인 목 표 설정들로 도이치 역사의 연속선에 선 것이 아니었다. 이론적 확신에 가득차 서 현실을 거대한 높이에서 나온 범주적인 원칙들을 종속시킨 지식인의 한사람 으로서 그는 도이치 역사의 연속선에 서는 것이다. 실현된 허구들 그를 비슷한 유형들과 구분지었던 것은 정치적인 능력이었다. 그는 실질적으 로 권력을 이해하였던 예외적 지식인들이었다. 민족적 저술의 문학적 쓰레기더 미에 이르기까지 선구자들의 텍스트에서 그가 주장한느 것보다 더 과격한 주장 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의 공포에 대해서도, 현실 부정을 미화시 키는 데에 대해서도 더욱 격렬한 증언들이 있다. 예를 들면 마리네티는 '파렴치 한 현실'에서 벗어나 구원받기를 바라고, 1920년의 어떤 성명서에서는 '모든 권 력을 예술가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하였다. 지배권은 '널리 퍼져있는 천재 프롤레 타리아들'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성명서들은 지식인 들이 무기력을 향해 그럴싸하게 애교를 부리면서 스스로를 우쭐대는 것에 지나 지 않았따. 마리네티는 '복수하는 바다'를 향해서 현실에 반대하는 주문을 말하 였다. 히틀러가 여기서도 예외엿던 것은 자신의 지적 허구를 말뜻 그대로 받아 들이고, 수백년 묵은 흥분된 사상의 표현들을 그 형태 그대로 집어삼켰다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전례가 없는 인물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이 독재자 페이시스 트라토스의 출현에 놀란 것처럼 도이치 사람들도 식탁에 앉아있다가 히틀러의 출현에 놀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세계가 그랬듯이 도이치 사람들도 충분히 경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지적인 비축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 도로 자신의 의도를 언제나 노골적으로 표현하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 속의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전통적으로 분리해 왔기에 말은 별것이 아니라는 생 각이 오래 전부터 일깨워져 있었다. 그의 말처럼 사람들이 하찮게 여긴 말도 없 었다. 그것만이 히틀러에 대한 거대한 오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 대의 오판이기도했다. 의회의 사회민주당 의원대표인 루돌프 브라이차이트는 결 국 바이마르 근교의 너도밤나무숲 수용소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히틀러 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그가 몰락하게 되었다고 기뻐서 손뼉을 쳤다. 다른 사람들은 히틀러를 언제라도 표로 눌러버릴 수가 있을 것이 며 그가 절대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정족수 2/3의 다수표를 얻을 수 없을 것이 라고 계산하였다. 역시 사회민주당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율리우스 레버는 온 세상이 그랬듯이 마침애 '이 운동의 정신적인 토대를 알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도이치 시민 계급 대중에게 있어서 양심업슨 모험가의 손에 떨어졌다는 생각은 '대단히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수많은 사회민주당원들은 히틀 러가 성급하기 파펜 및 힌덴부르크와 대립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이 제 3자로서 미소지으며 무대에 등장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1918년과는 달리 청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프로이센의 전임 국무비서 아베그 가 그라프 케슬러와의 대화에서 위협하였다.) 위험 히틀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 같다. 다만 바라보는 거 리에 따라 시각의 날카롭기가 달랐을 뿐이다. 기다리던 외국의 제재조치들은 없 었다. 오히려 상당수의 외국 수도들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맹목, 제어의 희망, 허 약 등이 복합된 가운데 다가오는 몇 년을 위한 협정과 조약들을 맺을 채비를 하 엿다. 그러나 이렇게 매혹된 가운데서도 불안한 예감들이 개별적으로 나타났다. 파리에 있던 어떤 도이치 사람은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마치 이웃 나라에서 화 산이라도 폭발한 듯한 감정"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폭발은 언제라도 자신들 의 들판과 도시를 페허로 만들 수 있으므로 두려운 마음으로 그 화산의 가장 작 은 움직임도 주시하고 있다. 거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맞이하는 자연 현상이다. 독일은 오늘날 다시... 위대한 국제 스타가 되었다. 공포, 이해할 수 없음, 역겨운 경탄 등이 뒤섞인 모습으로 신문마다, 극장마다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심술궂은 기쁨도 들어있다. 거대하고 비극적이고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모험의 인물이다." 이 나라가 모험을 시작할 때 내건 이념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이 나라만의 것 은 없었다. 비인간적인 진지함이 도이치적인 것이다. 그러한 진지함으로 독일은 상상 속의 존재에서 밖으로 나왔다. 위의 말한 경향과 감정들은 그 사이 모든 것 위에 견딜 수 없게 뒤덮인 긴장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은 수백년 동안 형성된 혁명적 사상과 고정적 사회적 상황 사이의 긴장이었다. 이러한 경 향과 감정들은 그의 등장에 유례없는 무게와 때늦은 반동의 극단적인 특성을 부 여하였다. 도이치의 천둥이 마침애 목표를 이룬 것이다. 과거지향적인 유토피아 의 표지 속에서 현실을 부인하려는 절망적 시도는 이 천둥이 울려퍼지면서 붕괴 되었다. 그러나 과격하게 이상화된 관념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실 거부는 억누르기가 어렵다. 현실 거부는 자발적인 상상력과 관계가 있고, 사유의 위허성과 관계가 있다. 그 정치적 문제성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도이치 정신은 과거의 유산을 주로 현실 거부의 태도에서 얻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도이치의 모든 길이 아무런 재치도 없이 언제나 아우슈비츠로만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