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평전 지은이: 요아힘 C. 페스트 출판사: 푸른숲 봉사자: 숙명여자대학교 김성미, 김미자, 최은수 예비관찰 : 히틀러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인가? 잘 알려진 역사는 히틀러와 같은 현상을 적절하게 분류하지 못한다. 그 를 '위대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환호성과 히스테리. 그리고 치유에 대한 기대감을 히틀러만큼 많이 불러일으킨 사람은 없었다. 그토록 심하게 미움 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없었다. 불과 몇 년 동안 혼자만의 길을 가고 난 다 음에 시대의 흐름을 그토록 믿을 수 없을 수 정도로 재촉하고, 세계 정세 를 그토록 변화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처럼 엄청난 폐허를 자신의 뒤에 남긴 사람은 없었다. 거의 전세계가 연합전선을 펴서 6년여 동안 계 속된 전쟁을 하고 난 다음에야 마침내 그를 지상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독일 저항군 한 장교의 말을 빌자면 '미친 개처럼(게르스도르프 대령이 육 군 사령관 만슈타인에게 말한 것.)' 겨우 때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독특한 위대성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과도한 특성들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물론 거대하다는 것이 역사적 위대성은 아니며 아주 하찮은 것도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거대한 것만도, 하찮은 것만도 아니었다. 그가 뿜어낸 폭발력은 최후의 몇 주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단계에서 주도적인 의지력을 드러냈다. 연설을 할 때마다 그는 분명한 황 홀감을 감춘 채 처음 시작하던 시절을 기억해내곤 했다. "배우에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시절, 이름도, 재산도, 언론도,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그 시절을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이 '불쌍한 인간'이 독일의 지배자로, 그리고 이어서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기억했다. "그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 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유례없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냈으 며, 모든 것을 자신 안에 지녔다. 자기 자신의 교사, 정당의 조직자, 정강의 창시자, 전술가, 선동적인 복음전파사, 지도자, 정치가, 그리고 10년 동안 세계 정세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혁명은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다 는 경험법칙을 반박하였다. 그는 보통 말하는 대로 "자신이 일으킨 혁명에 서 루소, 미라보,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혁명 에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었다. 성격이나 본질로 보아서 그 는 위에 열거한 사람들 대부분보다 열등한 인물이었지만, 이상스럽게도 자 기 앞의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일을 이룩하였다. 그는 자기 혁명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였으며, 심지어는 그 혁명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것 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로 보아 그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힘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힘들에 대해서 비상한 육감을 가졌으 며, 시대의 주도적인 경향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던 시절 은 완전히 시민적 자유주의 체제의 특성을 보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체제에 감추어진 저항감을 포착하고, 실로 대담하고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그것을 자신의 정치 프로그램으로 삼았다. 그의 태도는 정치적 이성에 어 긋나는 것으로 보였다. 오만한 시대정신은 여러 해 동안이나 그를 진지하 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불러일으키는 비웃음은 그의 외모와 흥분된 연설, 그리고 그가 개발한 연극적인 걸음걸이 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는 설명하기 힘든 방법으로 언제나 자신의 진부하고 공허한 모습을 넘어서 있었다. 1935년에 네덜란드에서 (뮌헨의 동키호테)라는 이름으로 나온 초기 의 히틀러 전기에 지적된 것처럼 그의 특별한 강점은 공중누각을 세울 줄 알았다는 점이 아니라 대담하고 날카로운 합리성이었다. 한 시대를 장악한 개인 10년 전만 해도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실패한 정치가의 모습으로 뮌헨의 가구 딸린 어떤 방에 앉아서 정신나간 것으로 보이는 구상에다가 멋진 개 선문과 둥근 지붕 홀을 지어주고 있었다. 1923년 11월의 쿠데타 기도가 있 은 다음에 모든 희망이 무너져버렸는데도 그는 자신의 말을 하나도 철회하 지 않았고, 투쟁선언을 줄이지 않았으며, 세계 지배 야욕을 조금도 지우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당시 자기를 공사가로만 여겼다고 그는 나중에 말 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가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가 생각했던 모든 것은 현실이 되거나 아니면 실현가능한 프로젝트가 되 었다. 스스로 항구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던 힘들이 오히려 몰 락하였다. 민주주의, 정당국가, 노동조합,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의식, 유 럽의 연합체계와 국제연맹 등이었다. 히틀러는 승리감에 넘쳐서 이렇게 외 쳤다. "누가 옳았습니까. 공상가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입니까? 내가 옳았습니다." (1937년 5월 20일지 연설) 자신의 내적으로 시대의 정신 및 경향과 일치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이런 확신과, 시대의 경향을 밖으로 이 끌어내는 능력에는 분명 역사적 위대성의 요소가 들어 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유명한 에세이 (세계사 관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위대성이란 초개인적인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그 특성인 것 같다." 그리 고 중요한 개인의 이기심과 전체의지 사이에 '비밀스런 일치'가 이루어진다 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제로 보나 단면적인 삶의 과정을 보나 히틀러 의 삶은 바로 이러한 위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장들은 상 당한 정도로 그 사실을 입증해줄 것이다.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역사적 인물을 형성하는 나머지 조건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히틀러는 한 민족을 구태의연한 상태에서 그가 없었다면 생각도 못할 새로운 상태로 이끌어 가 는, 남이 대신할 수 없는 특성을 가졌다. 그는 시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 다. '한 정당의 정강과 분노'를 대표할 뿐 아니라 일반적인 욕구를 대표하 였다. '말에 올라타고 심연을 건너뛰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역사적으로 위 대한 인물은 사태를 단순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실질적인 힘과 겉보기에 힘처럼 보이는 것을 구별하는 재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일종 의 마적인 강제력을 지닌 비상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그러한 능력과 의지력을 가졌다. "가까이에서 저항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저항하려는 사람은 관계자의 영역 바깥에서 적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관계자는 오직 전쟁터에서만 만나야 한다."(클라우스 만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고트프리트 벤은 히틀러를 관찰하면서 명백 하게 부르크하르트의 관찰을 인용하고 있다. "오늘 여기서 당신은 다시 이 런 질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이 운동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이 운동이 그를 만들어냈는가? 이 질문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질문이 똑같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구별할 수가 없지요. 여기서는 부르크 하르트가 세계사 관찰에서 역사적인 대사건의 위대한 인물들을 묘사하면서 언급한 개인과 보편 사이에 마적인 일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위대한 남 자들, 모든 것이 여기 있습니다. 처음 시작의 위기, 거의 언제나 끔찍한 시 기에만 등장한다는 것, 무시무신한 지속성, 모든 것과 구조적인 기능에도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가벼움, 그리고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예감, 바로 그만을 필요로 하고 그만이 가능한 그 일을 그가 해낼 사람이라는 예 감 말입니다." ) 히틀러의 역사적 위대성에 대한 의문 그런데도 히틀러를 '위대하다'고 일컫기가 망설여진다. 이 사람의 정신 병자 같은 얼굴에 드러난 범죄적인 모습이 이런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세계사는 '도덕성이 지배하는' 토대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위대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관습 법에서 특별히 면제되었다'는 의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히틀러에 의해 서 계획되고 자행된 대량학살의 완전범죄는 그것과는 다른 종류가 아니냐, 그리고 그는 헤겔과 부르크하르트가 같은 의견을 보이는 문명이라는 맥락 의 한계를 넘어간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을 해볼수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미적인 특성을 보인다. 그리고 극히 드물게 만 도덕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히틀러는 도덕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특별면제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적인 영역에서는 그럴 수가 없 다. 오래된 미학의 명제는 온갖 뛰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어도 불쾌감을 주는 인간은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히틀러가 바로 그러한 불쾌감을 주는 인간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고, 금새 그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그에게 독 특한, 본능과 연관된 수많은 어두운 모습들, 너그럽지 못한 성격, 복수욕, 관대함의 결핍, 노골적인 물질주의, 그래서 오직 권력의 동기만 타당하고 그밖의 것은 모두 헛소리로 여겨서 언제나 가장자리로 다시 밀쳐내버리는, 분명하게 상스러운 이러한 특성들은 역겨울 정도로 비열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전통적인 위대성의 개념에 맞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비스마 르크는 어떤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상에서 출중하다는 것은 언제나 추락한 천사와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다. 추락한 천사는 아름답지만 평화가 없고, 계획과 노력은 위대하지만 성공은 못하고, 자부심이 강하고 슬픈 존재이다." 히틀러의 모습은 이것과는 무한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위대성의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토마스 만은 망명 중에 쓴 염세적인 정치 에세이에서 히틀러의 승리에 관해서 '위대성'과 '천 재'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망가진 위대성'과 열등한 단계의 천 재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개념은 기존의 의미와 작별을 고하게 된다. 어 쩌면 위대성의 개념은 부분적으로는 지난 시대의 역사 이해에서 나온 것일 지 모른다. 과거의 역사 이해 방식은 역사의 진행에 등장하는 배우들과 이 념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고, 힘들의 광범위한 그물망에 대해서는 무관 심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한 생각에 따르면 사 회 내부의 이해관계, 사정, 물질적 갈등에 비해보면 개인이란 그다지 중요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히틀러의 예에서 이러한 주장이 확 고하게 입증된다고 여긴다. 히틀러는 대자본의 '하인'이며 대자본을 위해 '칼을 잡은 팔'로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조직해서, 1933년에는 정치적, 사회적 자기 결정을 요구하는 대중을 종속으로 이끌어들였다. 그러고 나서 전쟁을 일으켜서 그러한 요구를 확장된 형태로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대단 히 다양하게 변조된 이러한 명제들은 히틀러를 근본적으로 대체 가능한 존 재로 여겼다. 1929년에 이미 좌익측의 파시즘 분석가들 중 한 명이 서술한 대로 그는 '극히 평범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는 것이다. 아니면 수많은 요인 들 중의 하나의 요인에 불과할 뿐 절대로 결정적인 인자는 아니라고 보았 다. 변명을 위한 전기 서술 근본적으로 이것은 전기 서술을 통해서 역사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생각 에 반대하는 생각이다. 대단히 뒤엉키고 모순투성이인 역사, 수없이 많고 쉬지 않고 바뀌는 긴장영역을 가진 역사의 진행과정을 어떤 개인이 드러내 보여줄 수는 없다는 비난이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개인 중심의 역사 서술 이란 옛날식의 궁정문헌과 숭배문헌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본다. 1945년에 제3제국 정권이 붕괴된 사건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옛날과 동일 한 방법에 징후만 바뀌었다고 본다. 구식 역사관처럼 여기서도 모든 것을 움직이는,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힘은 여전히 히틀러라는 개인이며, "다만 그 질만 바뀌었다. 전에 기사가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 악마적인 유혹자가 차지했을 뿐이다." 결국 전기 서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한때 수백만에 이르렀던 패거리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쓰이고 있다는 비난인 것이다. 이 패거리는 그토록 대 단한 지도자의 '위대성' 앞에서 스스로 희생자였다는 여길 수 있게 된다. 아니면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명령하는 악마적인 지 도자의 병적인 히틀러의 전기를 쓰는 것은 포괄적인 무죄 변명 전략의 일 부로서 위장된 면죄 공작이라는 것이다.(이러한 비난은 완전히 근거가 없 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히틀러 주변의 여성을 광범위하고 독립적으로 다 루고, 예를 들면 독재자의 약물남용이나 뇌염을 이데올로기적 기준점들, 세 계경제 위기, 혹은 도이치 국가관에 나타나는 권위적인 전통 등보다 더 중 요하게 취급하는 세밀한 생애 묘사에 들어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히틀러 가 산업가, 은행가, 대지주 등 '나치 패거리'들이 애써 '키워낸' 후보였다는 식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해석들도 비슷한 생각을 드러낸다. 엄격하게 보자면 남자들이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을 뒤집어 서 '자본가들'에게 덮어 씌워버린 것이다. 변명의 동기를 감추고 있는 부정 적인 숭배문헌들도 여기 작용한다. ) 이러한 비난은 실제로 히틀러가 개인 적인 특성만으로는 우리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그 개인은 여러 해를 통해서 이상할 정도로 색깔 없고 표 정 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 시대와 접촉을 해야만 비로소 그의 개성은 긴 장과 매력을 얻게 된다. 히틀러는 발터 벤야민이 '사회적 성격'이라고 부른 특성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시대의 두려움, 저항감과 희망을 거의 모 범적이고 할 정도로 결합시킨 성격이다. 이 모든 것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 되고 왜곡되고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끼워넣은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시 대배경과 무관하거나 합당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개인을 넘어선 경향과 상황들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히틀러의 생애를 서술하고 해석할 가치가 없 다. 그의 전기는 언제나 시대의 전기일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모든 비난 에도 불구하고 이 전기 서술은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이런 사정은 보통의 전기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배경을 드러내 보이도록 강요한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격려하고, 자신을 앞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잠시 붙잡기도 하는 객관적인 인자들을 앞에 두고서 스스 로 발전해 나갔다. 물론 도이치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과 바 이마르 공화국을 뒤덮은 불쾌한 '잿빛'도 그런 인자에 속한다. 베르사유 조 약을 통한 국가의 추락, 인플레이션과 세계 경제위기를 통한 광범위한 계 층의 이중적인 사회적 추락도 거기 해당한다. 독일에 민주주의 전통이 약 하다는 사실, 공산주의 진영의 혁명 위협, 전쟁의 체험, 불안해진 보수진영 의 계산착오, 그리고 친숙한 질서에서 새롭고 낯선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 에 생겨나는 광범위한 불안감. 여러 모로 뒤얽혀 꿰뚫어볼 수 없게 된 불 쾌감을 단순한 해결공식을 내주고자 하는 욕구, 시대가 마련해준 혼란상태 에서 명령적인 권위의 품 속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가 이런 배경들과 합쳐졌다. 개인심리와 사회심리의 결합 히틀러는 시대의 모든 동경, 두려움, 원한 등의 합일점으로서 역사의 인 물이 되었다. 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그가 없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히틀러라는 인물을 통해서 한 개인이 역사 진행을 지배하는 놀라 운 힘을 한 번 더 보여주었다. 이 책은 선동의 천재, 탁월한 전략적 재능, 이미 앞서 이야기한 '마적인 일치'의 능력이 한 개인 안에 합쳐지게 되면 한 시대의 몹시 뒤엉킨 목소리들을 한데 모아 어떠한 강력함과 독성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역사는 때때로 한 인간 안에 응축 되어 나타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전세계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히 틀러의 부상은 일반적인 전제들과 개인의 전제들이 특이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지경이다. 이 남자와 이 시대가, 이 시대와 이 남자가 하나가 된, 풀기 어려운 일치관계를 통해 서 그것이 가능했다. 이런 시대와의 연관성은 히틀러가 특별한 능력을 가 졌다고 인정하는 생각들과 거리가 먼 것이다. 악마적인 특성이 아니라 모 범적인 특성들, 그러니까 '정상적인' 특성들이 그의 길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삶의 과정은, 그가 시대와 그 인간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대 립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론들이 얼마나 문제가 많고 이데올로기에 빠진 것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앞으로 끊임없이, 이러한 동일성의 흔적들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특별히 끼워 넣은 중간관찰들을 통해서 형식상으로도 사회의 객관적 전제들의 중요성을 암시할 것이다. 이토록 객관적 전제들이 중요하다면 다음의 질문을 해보게 된다. 역사진행에서 히틀러의 특별한 적 용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1920년대가 지나는 동안 민족적인 통합운 동은 그가 끼여들지 않고도 반향을 얻고 추종자를 얻었으리라는 주장은 물 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의 맥락에서 보면 약간 주목할 만한 정치 그룹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히틀러는 그의 본 질인 상상력과 투철성의 혼합을 이 운동에 상당한 정도로 덧붙여주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나 요제프 괴벨스의 과격주의는 적절한 게임규칙을 위반 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위반에 그들의 지속적인 가치가 있다. 그에 반해서 히틀러의 과격주의는 현존하는 전제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전 에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비 상사태들과 불쾌감은 언제라도 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인물이 없었다면 분명히 그토록 날카롭고도 폭발적인 형태로 발전되지 는 않았을 것이다. 1921년 여름, 당의 최초의 위기부터 시작해서 그가 괴링과 히틀러를 쫓 아낸 1945년 4월까지 그의 위치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념이 자 기보다 더한 권위를 가지는 것을 절대로 참지 못했다. 참으로 대단한 방자 함으로 그는 역사를 만들었다. 자기 시대에 이미 시대착오였고, 아마 앞으 로 다시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이었다. 주관적인 발상들이 사슬을 이루고, 놀 라운 기습과 발상의 전환, 숨가쁜 배신 행위와 이념상의 자기 부정, 그리고 집요하게 추구한 비전을 배경에 두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독특 한 성격, 주관적인 요소의 어떤 부분을 역사에 강요하였고, 그러한 측면이 '히틀러-파시즘'이라는 공식으로 표현되어 나왔다. 그것은 1930년대에 이르 기까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널리 퍼져 있던 공식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사회주의(나치즘)를 히틀러 주의라고 정의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개인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개인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해 불 수 있다. 히틀러는 상황과 이해관계의 중요성 을 전반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던 최후의 정치가가 아니었을까? 객관적인 인자들의 강제성이 점차 강해지고 위대한 행위자의 역사적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등급이란 행위자가 상황에 대 하여 확보하는 자유에 달려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히틀 러는 1939년 초여름에 어떤 비공개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 될 수 없다. 차라리 상황 을 요구에 적응시키는 편이 낫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상가'라고 불 린 그는 극단까지 추진하다가 마침내 실패한 모험적인 시도에서 분명히 위 해한 인물의 모범을 좇아서 살았다. 다른 수많은 일들처럼 이것도 그와 더 불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베이징에도 모스크바에도 워싱턴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혼란스런 꿈의 모습을 좇아 세계를 변 화시키는 일은 두 번 다시 생길 수 없다... 이제는 정상에 있는 단 한 사람 이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그는 결정들을 조정할 뿐이다. 결정은 긴 손의 모범에 따라서 짜여진다. 히틀러는 고전적인 '위대한' 정치의 마지막 실천 자였다." 전통적인 영웅문학이 오랫동안 전제로 해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자들 이 역사를 만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한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극히 비상한 방식으로 역 사가 그를 만들어냈다. 다음 장들 중 한 곳에서 그는 '비개성'이라고 불리 게 된다. 미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이 '비개성' 속으로 들어간 경우는 없 었다. 그러나 그의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것을 통해서 무서울 정도의 역동 성을 얻었다. 히틀러의 전기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매우 집중적인 상호교환 과정의 역사이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적 위대성이란 무가치한, 혹은 존경할 만하지 못한 개인의 생활 상태와 짝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히틀러를 우선 깨워 일으켜서 수백만 명의 분노 및 방어 콤플렉스의 대변인으로 만 들어낸 저 상황을 역사가 그에게 허용해주지 않았더라면 거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까 그려보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다. 그는 사회의 변두리 어 디에서 무시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분노와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착 서 위대한 운명을 동경하면서, 자신에게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영웅의 역 할을 허용해주지 않은 삶을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고 히틀러 는 정치에 입문하던 시기에 관해서 적었다. 질서의 붕괴, 시대의 불안과 변 화의 분위기가 그에게 이름 없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위대함이란 무서운 시대의 필요성이라고 한다. 히틀러의 출현은 위대함이 보잘것없는 개인을 동반하고 나타날 수도 있 다는 사실을 모든 경험을 압도할 정도로 가르쳐준다. 한참 동안이나. 이 개 인 해체되어버린 듯이, 비현실 속으로 도주해버린 듯이 보였다. 바로 이런 허구의 특성이 그렇게 많은 보수주의 정치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이상스럽게도 한 목소리를 히틀러를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여기 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위대함, 정치적 혹은 역사적 등급과 극히 무관 하게 그는 이상적인 '중개인' 유형의 인물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양측은 다같이 실망하였다. 소시민드렝 대항한 계급상이 원한이 만들어낸 이런 착 오를 정치로 만들어낸 것은 히틀러의 전술적인 성공비법이었다. 그의 전기 는 또한 모든 면에서 서서히 진행된 각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출현을 보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언제나 솟아 나와서 오직 희생자의 모습을 보고서만 중단되는 저 아이러니컬한 과소평가도 그에게는 맞지 않 는다. 이 사람의 삶의 길, 사건들의 과정이 이 책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와 나 란히 사고의 실험은 회의에 빠져들 뿐이다. 히틀러가 1938년 암살의 제물 로 쓰러졌더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가 도이치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들 중 한 명이었다, 혹은 도이치 역사의 완성자였다고 부르기를 망 설일 것이다. 공격적인 연설들과 (나의 투쟁), 반유대주의, 세계 지배의 계 획 등은 어쩌면 초기의 공상으로 여겨져 잊혀졌을 것이고, 어쩌다가 비판 자들이 국민의 의식 속으로 불러들이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6년 반의 시간이 히틀러에게서 이 명성을 떼어놓았다. 물론 폭력에 의한 종말만이 그에게 그러한 명성을 안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파괴를 위한 사람이었고, 자신마저도 그 점에서 예외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명성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우리는 그를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 을까? 1부 욕망에 사로잡힌 소년 제1장 출생과 시작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또한 미화시키는 것은 그의 생애의 근본적인 노력 들 중의 하나였다. 역사상의 어떤 현상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토록 억 지로 양식화되고, 개성을 드러내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한 인가의 것이라기보다는 기념동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생 동안 그는 그 이미지 뒤에 숨으려고 애썼다. 일찍이 소명에 대한 의식으로 딱딱하게 굳어져서 서른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위대한 지 도자의 모습, 집중하고 얼어붙은 접근 불가능의 모습 뒤로 숨어 버렸다. 전 설을 만들어내는 어둠과 특별한 선민의식의 광채가 그의 삶의 전사를 뒤덮 고 있다. 또한 불안, 비밀스러움, 특이한 역할 특성이 그의 존재에 각인되 었다. 상승을 위해 애쓰던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DAP)의 당수 시 절에 그는 이미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을 모욕이라고 느꼈다. 수상이 되었을 때는 자기 사생활에 대한 모든 출판을 금지시켰다. 학교 친구부터 가장 친근한 저녁의 술자리 모임을 통해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세심하게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감추려고 노력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일생 동안 이상스럽게 거리 를 만드는 요소를 가졌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남자들만의 하숙집 에서 살았다. 그러나 거기서 그를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뒷날 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는 낯설고도 눈에 띄지 않게 그들 곁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뒷날 수소문을 해보아도 그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정치 경력을 쌓던 초기에 그는 자신의 사진이 출판되지 않도록 열렬히 애를 썼다. 이런 점을 보고 자신의 효과를 확신하는 선동가 의 신중한 면모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는 처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 아서 신비에 둘러싸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은폐 노력은 단순히 '오래된 예언자 방식'이나, 혹은 카리스 마의 마법적인 요소를 자기 생으로 도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 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압도된 은폐된 인간의 염려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언제나 흔적 을 지우고 동일성을 확인하지 못하게 만들고, 꿰뚫어보기 어려운 출생 기 원과 가족적 배경을 더욱 흐르게 만들기 위해서 세심한 노력을 하였다. 1942년에 슈피탈 마을에서 그를 위한 기념패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전혀 거침이 없는 그 유명한 분노의 폭발을 일으켰다. 자기 조상들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의 직업은 세관원이었건만 '우체 국 직원'이라고 거짓말하고, 자신에게 접근하려고 애쓰는 친척들을 가차없 이 밀쳐 내버렸다. 그리고 윗소금산에서 임시로 집안일을 보아주던 누이동 생 파울라에게는 다른 이름을 쓰라고 강요하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개인적인 서신교환이 전혀 없었다. 인종주의 철학의 창 시자인 요르크 란치 리벤펠스에게서 그는 초기의 몇 가지 막연한 생각들을 얻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이후 그가 편지쓰는 것을 금지시켜버 렸다. 그리고 남자 하숙집의 친구였던 라인홀트하니쉬를 죽이라고 명령했 다. 그는 그 누구의 학생도 되고 싶지 않았고, 모든 깨달음은 오직 자신의 영감, 특권, 수호정령과의 대화 등에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마찬 가지로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싶었다.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부모의 모습은 생애의 전설을 떠받쳐주는 한도 내에서 도식적으로만 등장하고 있 다,. 가려져 있는 가족사 국경 저편 출신이라는 사실은 주변을 은폐하는 의도에는 이로는 것이었 다. 알렉산더 대왕에서 나폴레옹을 거쳐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많은 혁명가 나 역사상의 정복자들처럼 그도 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이었다. 이런 아웃사이더의 느낌과, 거칠고 광대한 계획을 위해 한 국민을 몰락에 이르 기까지 몰고 가는 마음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연관성은 그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2차대전의 국면이 바뀌고 있던 시점, 피의 지구전이 계속되고 있 을 때 그는 새로 투입된 장교들에게서 막대한 인명손실이 난다는 보고를 받자 짤막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젊은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타지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히 은폐될 수는 없었 다. 질서와 규칙, 시민성에 대한 그의 감각은 어둡게 가려져 있는 가족사와 언제나 갈등을 빚었다. 출생과 요구 사이의 거리감, 자신의 과거에 대한 두 려움은 한 번도 그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1930년에 그의 집인 배경 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밝혀지자 히틀러는 지나치게 불안한 태도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가문 출신이지 알아서는 안 된다." 아버지 쪽으로나 어머니 쪽으로 보아서 이 집안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왕국의 멀리 떨어진 가난한 지역 출신이었다. 그곳은 도나우 강과 보 헤미아 국경 사이의 숲이 우거진 지역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친 근친 결혼 으로 복잡한 친척관계로 얽혀 있는 농사꾼들이 모여사는 곳, 은둔지역으로 알려진 될러스하임, 슈트로네스, 바이트라, 슈비탈, 발터슐라크 등의 이름으 로 고대사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무성한 숲 사이로 협소하게 자리잡은 지 역 여기저기에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있는 곳이었다. 히틀러, 히들러, 혹은 휘틀러라는 이름은 체코 이름으로 보인다. 여러 지역을 전전한 끝에 1430 년대에 처음으로 이 삼림지역에 그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세 대에 걸쳐서 소작인들만 나왔을 뿐 아무도 이곳의 사회적인 한계를 뚫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1837년 6월 7일에 슈트로네스 13번지에 소작농 요한 트룸멜슐라거의 집 에서 결혼하지 않은 하녀 마리아 안나 쉬클로루버가 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같은 날 알로이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될러스하임 군 이 출생기록부에 아이 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난은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5년 뒤에 일정한 일자리도 갖지 못한 방앗간 견습공 요한 게오르 크 히들러와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같은 해에 자기 아들을 남편의 형제인 슈피탈 출신의 요한 네포묵 휘틀러 에게 주었던 것 같다. 아이가 아무 연고도 없이 자랄까 봐 두려웠던 모양 이다. 어쨌든 히틀러 일가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너무나 가난해서 '잠자 리도 없이 가축의 여물통에서 잠을 잤을' 정도였다. 베일에 싸인 할아버지의 존재 방앗간 견습공인 요한 게오르크 히틀러와 그의 동생인 농부 요한 네포묵 히틀러는 추측컨대 두 사람 다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 같다. 히틀러의 가까운 주변에서 나온, 상당히 무모한 확인에 따르면 세 번째 아버지 후보는 그라츠의 유대인 프랑켄베르거이다. 마리아안나 쉬클 그루버는 임신했을 때 그 집에서 집안일을 해주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오랜 기간 히틀러의 변호사였고, 나중에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 는 뉘른베르크 해명서에서 다음가 같이 증언했다. 히틀러는 1930년에 이복형의 아들에게서 아마 협박 목적으로 쓰여진 편 지를 한 통 받았다고 한다. 그 편지는 히틀러 집안 역사의 '매우 특별한 상 황'에 대한 암시를 하였다. 프랑크는 사태를 극비리에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사해본 결과, 프랑켄베르거가 히틀러의 할아버지라는 추측에 대한 몇 가지 자료를 얻었다.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물론 극단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크도 뉘른베르크에 서 히틀러가 유대인 조상을 두었다고 주장할 동기가 없었다. 최근의 조사 결과 그가 말한 내용의 신빙성이 더욱더 의심스럽게 되어서 이 주장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거의 없다. 이러한 주장의 본래 의미는 객관적인 신빙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히틀러가 프랑크의 조사 결 과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을 의심하게 되었으리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 고 심리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다. 1942년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을 받고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리 고 요한 네포묵 히틀러가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라는 생각도 '절대 적 확실성에 가까운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기는 하였지만 그밖의 다른 할아버지 이론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저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입증하는 것 같은 말투로 자신의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히틀러가 아내가 죽기까지 (1873년) 기다렸다가 합법화 절차를 밟은 사실을 놓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강력한 뒷받침이 된 다고 여기고 있다. 실은 생각한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휘틀러가 자신이 아버지고 알로이스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어야 할 것 이기 때문이다. 모든 논거들도 이와 비슷하게 의심스럽다. 전체적으로 보아 서 마저도 휘틀러의 행동에 대해서 오직 자기 견해만을 뒷받침하고 그밖의 해석들은 의심스럽게 만드는 어떤 행위동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휘틀 러가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를 상속인으로 지정하는 조건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는 가정도 등장하고 있다. 그밖에도 이러한 맥락에서 할아버 지에 대한 의문이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암시도 적지 않다. 다만 한스 프랑 크의 견해만은 이 문제에 새로운 심리적 차원을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심 리적 차원을 넘어서면 그것은 하잘것없는 흥미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같이. 곤궁과 우중충함과 시골의 경건한 척하는 태도로 특징 지어지는 혼란스런 상황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이름 바꾸기 마리아 안나 쉬클그루버가 '늑막염에 의한 기력소모'로 슈트로네스 근처 의 작은 모텐에서 죽은 지 29년이 지나서,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죽은 지 19년이 지나서야 그의 동생 요한 네포묵은 세 명의 증인을 동반하고 될러 스 하임의 목사 찬쉬름에게 왔다. 그리고 자신이 '키운 아들', 그새 거의 마 흔 살이 다 된 세관원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신원확인을 하겠노라고 신청 하였다. 물론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죽은 형 요한 게오르크가 아이 아 버지라는 것이다. 요한 게오르크가 살았을 때 그 사실을 고백했고, 함께 온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했다. 목사는 정말로 속았든지 아니면 설득당했다. 오래된 출생기록부에서 그 는 1837년 6월 7일자 기록의 짤막한 비고란에 적혀 있는 '미혼'을 '혼인'으 로 고치고 아버지의 신상을 요한 네포묵이 원하는 대로 적어넣었다. 그리 고 가장자리에 거짓으로 이렇게 토를 달아 놓았다. "아버지로 기록된 게오 르크 히틀러는 서명한 증인들이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아이 어머니 안나 쉬클그루버에 의해서 알로이스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그는 자기 이름을 이 기록부에 적어넣기를 요청하였다. 그 사실을 증인 요제프 로메더, 증인 요한 브라이테네더, 증인 엥겔베르트 파우크가 확임함." 세명의 증인이 자 기 이름을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세 개의 십자가로 서명을 하였고, 목사가 그들의 이름을 옆에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날짜를 적어넣 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서명과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 이 부모의 서명도 물론 빠져 있다. 법적으로 어긋난 일일지 몰라도 어쨌든 이 서류는 법적인 효력을 가졌다. 1877년 1월부터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는 알로이스 히틀러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런 시골식 음모는 의심할 바 없이 요한 네포묵 히틀러가 꾸며낸 것이 다. 그는 알로이스를 길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를 자랑스럽게 여 겼다. 알로이스는 승진했고, 결혼도 했고, 히들러 일가 중 누구보다 성공하 였기 때문이다. 요한 네포묵이 자기가 키운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얻어 줄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은 매우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알로이스도 이름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력적이고 의무 에 충실한 남자였고 그새 상당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결혼에 의한' 이름 을 가짐으로써 경력에 더욱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 다. 열세 살에 그는 빈으로 나가서 어떤 구두장이의 견습생을 들어갔다. 그 러나 곧 이 수공업 일을 포기하고 확고한 결심을 한 후 오스트리아 세부관 리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승진을 했고, 결국 자신이 받은 교육수준으로 는 최고직인 세무장이 되었다. 관청의 대표자로서 그는 공식석상에 나타나 기를 좋아했고, 정확한 직함으로 불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와 같은 세관에서 근무한 한 동료는 그를 가리켜서 '엄격하고 정확하고 꼼꼼하다'고 평했다. 그는 아들의 직업선택에 대해서 도움말을 구하는 친척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재무관리 일은 절대 복종과 의무감을 요구하며, '술마시는 사람, 빚지는 사람, 카드놀이 하는 사람과 그밖에 부도덕한 생활태도를 가진 사 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대개 승진의 기회에 찍곤 하였던 사진들은 변함없이 당당한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의심 많은 공무원의 얼굴 속에 거칠고 시민적인 실속과 체면욕구를 드러내 보이 고 있다. 제복단추를 빛내면서 어느 정도 품위와 자만심을 지닌 모습을 보 여준다. 그러나 정직함과 엄격함 뒤에는 분명히 불안정한 성질이 감추어져 있었 다. 그것은 충동적인 결심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없이 이사를 한 일은 세관원 일의 필요성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불안을 암시하 는 부분이다. 25년 동안 적어도 열한 번 이사를 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중 몇 번은 물론 직업적인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벌써 두 번째 부인이 임신을 하였고, 두 번째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세 번째 부인이 임신을 했다. 첫째 부인 안나 글라슬은 그보다 열네 살이 위 였고, 마지막 부인 클라라 ㅍ츨은 그보다 스물세 살이 젊었다. 클라라는 처 음에 그의 집의 가정부였다. 히들러 혹은 휘털러 일가와 마찬가지로 슈피 탈 출신이었고, 이름을 바꾼 뒤에 적어도 법적으로는 그의 조카로 되어 있 었기 때문에 결혼을 위해서는 교회의 특례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녀가 정 말로 그와 혈족이냐 하는 질문은 알로이스 히틀러의 아버지에 대해서와 마 찬가지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가정의 의무를 눈에 띄지 않 게 양심적으로 해냈고, 남편의 소원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갔으며, 결혼계약이 성립된 뒤로도 그 집에 처음 들어올 때처럼 하녀와 정부의 티 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 자신이 세관장의 아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서는 여러 해 동안이나 노력을 해야 했으며 남편을 '알로이스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다. 그녀의 사진들은 진지하고, 움직임이 없고, 약간 의기소침한 태도를 가진 겸손한 시골처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 교외 219번지에 서 이 세 번째 결혼의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세 명의 형제자매들이 1885,1886,1887년에 태어났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두 명의 동생 중 에서는 누이인 파울라만 살아남았다. 이 작은 국경도시는 아돌프의 성장에 거의 의미가 없다. 다음해에 벌써 아버지는 저지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로 스 쇠나우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시 파사우로 이사했을 때 아 돌프는 세 살이었고, 다섯 살 때 아버지는 다시 린츠로 자리를 옮겼다. 람 바하 군 근처에 있는 유명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여섯 살짜리 아돌프는 소년합창단원과 미사의 복사 노릇을 했다. 그 자신의 서술에 따르면 거기 서 '극단적으로 빛나는 교회 축제의 화려한 행사에서 거듭 감격할' 기회를 가졌다. 1895년에 아버지는 근처에 4헥타르의 토지를 샀다가 곧 다시 되 팔았다. 2년 뒤에 린츠 교외에 있는 작은 레온딩 군에 집을 사고 은퇴하였 다. 천재적인 조숙함 신경질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드러나지만, 그래도 일관성과 신중함, 시민 적인 착실함과 확신감을 보여주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과는 반대로 히틀러 자신은 비참한 상황, 가난, 협소한 집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나쁜 상황과 게다가 이해심 없는 아버지의 폭군적인 복종의 요구 를 이 특별한 소년이 확고한 의지력으로 이겨냈다는 내용이지만, 아들은 심지어 몇 가지 효과적인 결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뒷날 아버지를 주정 뱅이로 만들고 말았다. 자신이 빌고 욕을 하면서 '끔찍한 수치'의 장면에 '냄새나고 연기자욱한 술집에서' 아버지를 집으로 끌고 와야만 했다는 것이 다. 천재적인 조식에 어울리게 그는 마을의 공동 목장과 오래된 요새의 탑 근처에서 또래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 모험과 대담하게 앞을 내다보는 사려 깊은 탐색계획들을 만들어내서 언제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을 뿐 아니라 타고난 지도자로서의 천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순진한 놀이에서 영감을 얻은 전술과 용병술에 대한 관심은 그의 미래를 예측케 해주는 대목이다. (나의 투쟁)의 저자는 옛날을 돌아보면서 '열한 살도 채 되기 전'에 나타 난 '특별한 중요한 두 가지 탁월한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자신이 민족주 의자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역사를 '그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하고 파악 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 궁핍, 사랑하는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그리고 '열일곱의 나이에 객지로 나가서 자신의 밥 벌이를 해야 하는' 가련한 고아소년의 출발 등이 이 전설의 아주 효과적이 고도 감동적인 결말부분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는 영리하고 활동적이고 분명히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는, 규칙적인 노동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 탓으로 약화되어버리고 말 았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특성에다가 다루기 힘든 폭발적인 성질까지 있었 으며, 언제나 변덕스러운 기분과 학교의 증명서들은 그가 완벽하게 우수한 학생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1899년의 학급사진에서 그는 맨 뒷줄에서 보 란 듯이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초등학교 이어서 부모가 보내준 실업학교에서 그는 놀랍게도 완전히 실 패하고 있다. 두 번이나 진급을 못하고 한 번은 재시험을 보고서야 겨우 진급을 했다. 성적표들은 거의 4등급(양)으로 채워져 있다. 행동발달, 그림 그리기, 체육에서만 미 혹은 그보다 나은 평가를 받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 과목에서 그는 가 혹은 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1905년 9월의 성적은 국어, 수학, 속기에서 '불가'를 맞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이어서 '학급에 서 남보다 앞서나갔다'고 말한 적이 있는 지리와 역사도 겨우 양을 맞았고, 전체 평균점수 가를 맞아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기질 이토록 이상한 실패는 물론 복합적인 원인과 동기를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농사꾼들이 모여사는 레온딩에서는 친구들의 대장이라는 특별의식 을 아무런 문제 없이 확인할 수 있었지만 린츠라는 도시에서는 학가, 상인, 고위직 공무원의 아들들 사이에서 시골 출신의 가련한 아웃사이더에 불과 하다는 체험이 적지아니 작용했을 것이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인구 5만 명의 도시 린츠는 단 하나의 오페라 하우스, 단 하나의 시가전철을 당시 도시의 상징으로 갖추고 있었지만 시골의 한적함과 나른함이 아직 남아 있 었다. 그래도 이 도시는 젊은 히틀러에게 사회적 계급질서에 눈뜨도록 해 주었다. 어쨌든 그는 실업학교에서 '친구도 동료도 없이' 지냈고. 같은 나이 또래 의 친구들과 함께 임시로 하숙하고 있던 늙고 못생긴 재키라 부인 집에서 도 그는 무뚝뚝하고 조용하게 홀로 지냈다. 당시 그와 함께 지냈던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하숙생 다섯 명 중에서 누구도 그에게 가 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우리들 사범학생들끼리는 당연히 서로 '너'라고 불 렀지만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그 점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특이하게도 히틀러 자신에 의해서 이 시기에 처음으 로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확신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장차 그의 스타일과 모습을 뚜렷하게 특징짓게 된다. 린츠의 어리숙한 멋쟁이나, 빈의 프롤레타리아 시절 그에게 '계급의식'과 그것을 지탱하려는 의지를부여해준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뒷날 실업학교에서의 실패에 대해서 아버지가 자신을 관리로 만들려고 해서 그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대립을 두 명의 굽히지 않는 의지의 인간 사이의 싸움으로 극화시켜서 오 랫동안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상당부분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 다. 아버지가 그를 린츠의 세관본부로 데리고 갔던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 지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 직업의 좋은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데려 갔지만 그 자신은 오직 '역겨움과 혐오'에 가득 차서 '늙은 남자들이 원숭 이들처럼 서로 바싹 붙어서 웅크리고 있는 국가의 원숭이 우리'를 보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버지가 아들의 직업적인 성장과정에 대해서 그토록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기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는 아버지가 열성을 가졌다고 꾸며내서 자신의 실패를 변명하려 했 던 것이고, 또한 어린 나이부터 확고한 결단력을 가졌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였다. 물론 아버지는 부족한 학교교육으로 자신에게 닫혀 있던 고위직 공무원의 길을 아들에게 열어주고 싶어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묘사한 대로 지속적인 긴장의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서 로 기질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아버지 자신이 오랫동 안 품어온 소망,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아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꿈을 실현시 키려는 아버지의 결심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1895년 여름에 쉰여덟의 나이로 은퇴를 해서 마침내 직업적인 의무에서 벗어난 한가함을 누리며 자신을 취향대로 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그것은 심한 행동의 제약을 뜻하였다. 갑자기 어디서나 존경과 규율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강력한 모습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가차없이 복종을 요구하였다. 아들의 직업선택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차이보다는 오히려 이런 점이 분명 한 갈드의 이유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실업학교 시작부분만을 보았다. 1903년 초에 그는 레온딩에 있는 비스빙거 술집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시켜서 첫 모금을 마 시다가 그만 옆올 쓰러져 의사와 사제가 달려오기도 전에 옆방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공평한 (린츠 일보)는 그를 위해서 상당히 긴 추모기사를 실었다. 그의 진보적인 생각, 소박한 명랑함과 정력적인 시민의식을 지적하 고, 그가 '노래의 멋'이었고, 양봉 분야에 권위가 있었으며, 절제 있고 가정 적인 남자였다고 찬양하였다. 아들의 변덕스러운 투정으로 흥미가 없는 학 교를 그만두었을 때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죽은지 이미 2년 반이 넘 어 있었다. 병치레 잦은 어머니가 관리가 되라고 위협했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어 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끊임없이 조르는 것을 얼마 동안 막았 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기적으로 독선적인 기질에 맞설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자식들을 잃고 난 뒤에 남은 두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는 특별한 것이어서 무엇이든 양보하는 지경이 되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방법을 재빨리 터득하였다. 1904년 9월에 그가 다니던 학 교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진급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는 마지막 시도로 그를 슈타이르에 있는 실업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첫 번째 성적은 '가'로 판정이 났고. 히틀러 자신이 말한 바에 따르 면 술에 취해서 성적표를 화장지로 써버렸기 때문에 성적표 사본을 받으려 고 애써야만 했다. 1905년 가을의 성적도 나아지지 않자 어머니는 마침내 포기하고 그가 학 교를 그만두는 것을 승낙하였다. 물론 이번에도 그녀는 완전한 자유의사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나의 투쟁)에서 슬쩍 고백한 바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병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가 또다시 진급을 못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로 보인다. 예술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 그것은 히틀러가 가끔 축하하곤 했던 파국적인 승리의 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도 그는 불량한 학교 성적을 통해서 강력한 아버지에게 증명을 해보였다.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관리직으로 나가는 길을 자신에게 영원히 막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었다. 동시에 그는 '원초적인 증오심을 품 고서' 학교를 떠났다. 그의 생애에서 학교는 증오의 주제였다. 천직에 대한 암시로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불안을 억지로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지만, 실 패한 자의 원한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실용적인 교육기관의 요구에서 벗어나자 이제 그는 자신이 생애를 '완전히 예술에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화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이 선택은 그가 지니고 있던 실질적인 스 케치 재능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화가들은 자유롭고 속박 없는 생활을 한 다는, 시골 출신 관리 아들의 상당히 촌스러운 상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는 이미 일찍부터 독특한 스타일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 에 있던 하숙인 한 사람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그는 밥을 먹는 도중에 갑자기 종이에다가 미친 듯이 건물들, 아치문이 나 기둥을 스케치하곤 했다는 것이다. 몰론 거기에는 예술의 도움을 받아 서 자기가 속한 좁은 시민세계의 강요와 제한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합당 한 필요성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의 그림 연습, 음악, 꿈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광적인 열성이 이러한 정역에 한 줄기 혼란 스런 빛을 주고 있다. 그는 특정한 직업, 그 자신이 경멸한다고 말한 '밥벌 이 직업'을 거부하였다. 분명하게 그는 사회적 의미에서 예술을 통한 신분상승을 하려고 했다. 성장기에 보이는 그의 모든 집착과 결심 뒤에서 어떤 '높은 존재'가 되려는 매우 강한 욕구를 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지나친 정열과, 예술이 '더 나는 사회'의 특권이라는 생각과 적잖이 결부되어 있다. 어머니는 아버 지가 죽은 뒤에 레온딩에 있는 집을 팔고 린츠의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여 기서 열여섯 살 난 히틀러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상당한 액수에 이 르는 어머니의 연금으로 미래의 계획들은 모두 뒤로 미뤄둔 채 자기가 중 요하게 여기던 특권적인 게으름을 누릴 수 있었다. 매일같이 그는 산책을 하였고, 규칙적으로 '지방극장'에 가고, 음악협회에 가입하고, 국민교육연합 의 도서관 회원이 되었다. 나중에 그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성에 대한 관심이 깨어나기 시작해서 밀랍 박물관의 성인을 위한 전시장에 가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쯤 그는 남부역 근처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전해 지는 서술을 보면 그는 키가 크고 창백하고 수줍었으며 언제나 지나칠 정 도로 꼼꼼하게 옷치장을 하고 대개의 경우에는 화려한 상아장식이 붙은 검 은 색 산책용 지팡이를 휘두르며 대학생인 듯 행동하였다. 아버지는 사회 적인 명예옥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이룩한 것을 하찮은 경 력이라고 여겼다. 그가 '아버지'의 경력을 추억하면서 상당히 관대하게 내 비친 말을 보면 자기 자신의 목적은 훨씬 더 높은 데 있다는 사실이 드러 난다. 그는 현실과 별개로, 혹은 현실 위쪽에다가 세운 꿈의 세계에서 천재 로서의 기대와 자의식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기증명의 요구에서 실패한 뒤로 그는 점점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선생들 앞 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극복했다고 여기고, 적들로 둘러싸인 세계에 대한 고독한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곳으로부터 그는 악의에 가득 찬 세상에 대 해서 최초의 저주 판결을 내던졌다. 나중에 그를 기억한 모든 사람들은 그 의 진지하고, 폐쇄적인고 '소스라쳐 놀라곤 하는' 특성을 기억하였다. 아무 런 하는 일도 없이 모든 일에 열중하면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구석구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깊은 밤까지 린츠 시의 도시계획 변경에 대한 서투른 계획에 열을 올렸고, 극장건물, 호화주택, 박물관이나 혹은 도 나우 강에 세울 다리의 설계도들을 그리곤 하였다. 그 모든 설계도들을 그 는 35년 뒤에 독단적인 만족감에 휩싸여 애송이 시절의 계획대로 새우라고 지시하였다. 비현실적인 사랑 그는 체계적인 작업을 할 능력이 없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거리, 새로 운 매혹, 새로운 목표를 필요로 하였다. 그가 졸라서 어머니는 피아노를 샀 다. 잠시 동안 그는 레슨을 받았다. 그러나 넉 달이 자나자 벌써 지겨워져 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젊은날의 유일한 친구인 린츠의 실내장식가 아 들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결합되었는데, 그에게 생일선물로 자신이 꿈의 세계의 일부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집 한 채를 선물하였다. "그는 완성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나 계획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차이가 없었다." 복권당첨에 대한 생각이 한동안 그를 비현실 세계로 이끌어갔다. 그 비 현실 세계에서 그는 도나우 저편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진 훌륭한 집 (린츠 우어파, 교회거리 2번지)의 2층에서 살았다. 당첨이 있기 여러 주 전 에 이미 그는 시설들을 고르고, 가구며 재료들을 검사하고, 장식문양들을 계획하고 친구에게 고귀한 자유의 생활, 예술에 대한 관대한 사랑으로 넘 친 생활 계획을 들려주었다. '벌써 머리가 희끗해진, 그러나 대단히 고귀한 부인'이 그러한 생활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화려 하게 불을 밝힌 계단에서 잘 선별된 고결한 마음을 가진 친구들'을 손님으 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밀 맛보았다. 그것은 당첨날이 와서 그가 거의 확신 하고 있던 꿈을 망치기 전에, 그리고 그가 끝도 없는 분노의 광란 속에서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고, 점점 더 흥분해서 믿기 잘하는 인간의 기질, 국가 의 복권체계, 그리고 마침내 사기꾼 같은 국가 자체에 대해서까지 근본적 으로 저주를 퍼붓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가 이 시기에 자신을 가리켜서 '별난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은 옳은 것 이었다. 실제로 그는 집중적이고 억누른 방식으로 오직 자기만의 삶을 살 았다. 어머니와, 최초의 청중 노릇을 했던 순진하게 믿기 잘하는 친구 '구 스틀(아우구스트의 애칭)'을 빼면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절의 풍경에는 사 람 모습이 없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과 아울러 근본적으로 사회를 떠난 것 이다. 매일같이 중심가의 산책길에서, 어머니와 함께 언제나 일정한 시각에 대 장간 앞을 지나쳐가곤 하는 소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친구의 보고에 따르 면 그는 곧바로 정열적인 애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집요하고 낭만적 인 애정으로 여러 해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소녀에게 말 을 걸고 자신을 알리는 일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러한 거부는 자연스러 운 수줍음 탓만은 아니고, 현실에 대항해서 공상을 지키고 항상 몰취미한 현실이 상상의 왕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소원과도 관계된 것이 었다. 친구가 확인해준 것을 믿을 수 있다면 히틀러는 소녀에게 바치는 '헤 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랑의 시들'을 썼다고 한다. 그중 하나에서 그녀는 '꽃 이 핀 들판 위에서 백마를 타고 짙은 청색으로 나부끼는 빌로드 옷을 입은 성주의 딸'로 등장하고 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황금빛 파도처럼 어깨 에서 흘러내렸다. 밝은 봄하늘이 그 위로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은 순수하 고 빛나는 행복이었다"고 한다. 바그너 음악과의 첫 만남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 그 정열적인 효과와 매혹적이면서도 폐부를 찌 르는 듯한 음색, 유괴하는 힘을 지닌 그 음악은 그가 한번 빠져든 뒤, 그리 고 매일 밤 오페라를 방문하게 된 뒤로 적잖이 최면술적인 자기암시의 수 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음악만큼 그의 현실도피적인 성향에 잘 맞는 것도 없었고, 현실에 대해서 자신을 그토록 절대적 우위에 서게 만들 것도 없었 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같은 시기에 이 음악에 잘 어울리는 그림을 사랑 하였다. 루벤스의 화려함과 루벤스를 퇴폐적으로 모방한 한스 마카르트였 다. 친구인 쿠비체크는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를 함께 관람하고 난 다음에 히틀러가 보인 열광적인 반응을 서술하고 있다. 그 작품의 장엄하고 극적 인 음악성에 압도되고, 주변의 몰이해로 인해서 낯설고 비극적으로 부서져 간 중세 후기의 반란자 호민관 리엔초의 콜라의 운명에 완전히 감동을 받 은 히틀러는 친구를 프라인 산으로 끌고 가더니 밤의 어둠에 잠긴 린츠를 내다보면서 연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막혀 있던 강물이 터진 둑을 통해 흘러내리듯이 말들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위대하고도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으로 그는 내게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30 년도 더 지난 다음이 청년기의 친구들이 바이로이트에서 다시 만났을 때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에 시작되었어!" 1906년 5월에 히틀러는 2주 예정으로 빈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는 수 도의 광채에 눈이 먼 듯했다. 마치 '(천하루 밤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처럼' 보이는 링 거리, 박물관들, 우편엽서에 써보낸 대로 오페라의 '강력한 존엄 성'. 그는 궁정 극장을 방문하고 (트리스탄)과 (방랑하는 네덜란드 사람)을 관람하였다. "그 강렬한 음의 파도가 홀 안으로 넘치고, 살랑거리는 바람소 리가 무서운 음의 파도에 압도되면(문법적인 오류!)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네." 하고 그는 쿠비체크에게 써보냈다. 그가 빈에서 돌아온 다음 그곳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 출발하 기까지 어째서 일년 반이나 더 기다렸는지 이유가 분명치 않다. 1907년부 터 점점 더 병약해진 어머니가 염려에 가득 차서 반대한 것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결정적인 이유는 그 자신이 이상적이라 여긴 빈둥거리는 생활을 끝내고 새로이 학교에 종속되는 발걸음 내딛기 가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매일매일을 기분내키는 대로 지내면서 꿈꾸고 스케치하고 산책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곤 하였다. 아니 면 끊임없이 방 안에서 오락가락하였다고 한다. 그는 여러 번이나 린츠에 서의 삶을 자기 생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불렀다. '아름다운 꿈'이라 고 물론 그 그림은 학교에서의 실패의식에 의해서 쉽게 흐려지는 것이긴 했기만 말이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 옛날 도시를 누가 서 "무엇인가 이루지 않고는 고향마을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자기 칭찬을 하는 모습을 서술해 놓고 있다. 그는 1907년 9월에 같은 의도를 품고서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예전의 계획과 희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동안에도 그 소망만은 남았다. 성공해 서 당당하게 린츠로 돌아서 그 도시가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경탄으로 자기 발밑에 놓여 있는 것을 복 싶고, 한때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시켜보고 싶 다는 소망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었다. 전쟁 동안에 그는 자주 지치고 초조 해져서, 린츠에다가 노후를 위한 집을 짓고 박물관을 건립하고 음악을 듣 고 책읽고 글쓰고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고 싶다는 의도를 이야기 하곤 하 였다.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아주 고귀한 노부인과 고결한 심성의 친구 내 부에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1945년 3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 코 앞에 당도했을 때 그는 제국수상관저 지하에 있는 벙커에서 새로운 린츠의 건설계획을 가져오게 하더니 선 채로 오랫동안 그것을 꿈꾸었다고 전해지 고 있다. 제2장 무너진 예술가의 꿈 20세기로 넘어오던 시기에 빈은 여러 세기의 명성과 유산을 간직한 유럽 의 대도시였다. 그곳은 영광에 넘치는 모습으로 오늘날의 러시아와 발칸 반도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였다. 이곳으로부터 열 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 과 종족들로 이루어진 5천만 명의 인구가 통치되고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 다. 그들은 바로 도이치, 마자르, 폴란드, 유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 르비아, 이탈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루테니아 사람들이었다. '이 도시의 천재성'은 모든 대랍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다민족 국가의 갈등을 조정해서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에 있었다. 모든 것은 확고한 기반 위에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는 1908년 60년 간의 통치를 축하받으며 마치 국가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는 품위와 지속성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나라를 지배하는 높은 귀족의 지위 또한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서 시민계층은 부를 이루기는 하였으나 이렇다 할 영향력을 얻지 못하 고 있었다. 이즈음, 정당과 선동가들은 아직 보통, 평등 선거권이 없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산업과 상업계의 소시민과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현대적 요소와 번화함을 보여주고 있어도 이미 어제 의 세계였고, 의혹, 부서짐,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의혹에 가득 찬 세계였 다. 20세기로 넘어오던 시기에 빈이 보여주고 있던 영광은 몰락의 분위기 가 짙게 물든 것이었다. 문학 속에까지 스며들어간 그 모든 소모적인 축제 에도 불구하고 밑바탕에는 한 시대가 생명력을 다 썼고 이제 오직 아름다 운 현상으로만 남게 되리라는 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피로, 패배감, 불안감,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는 민족들간의 갈등, 지배계층의 근시안적인 행태 등이 풍부한 추억들로 가득 찬 건물을 서서히 붕괴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이별과 탈진의 분위기가 이보다 더 잘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시민시대의 붕괴를 빈보다 더 화려하고 우수에 넘쳐서 체험한 곳은 없었다. 다민족 국가의 위기 이미 19세기 말에 다민족국가의 내적인 모순이 점점 더 날카롭게 불거져 나왔다. 특히 1867년 헝가리가 저 유명한 '협상'에서 중요한 특별권을 얻게 된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은 수없이 틈이 나 서 갈라진 항아리를 낡은 철사줄로 겨우 한데 묶어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 되곤 했다. 그 사이 체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도이치 말과 대등하게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불거져나왔다. 히틀러가 태어나던 해에는 제국 황태자인 루돌프가 마이얼링에서 자살을 하여 겨우 복잡한 정치적, 개인적 사정에서 벗어났다. 20세기 초에는 렘베르크의 대로에서 갈리치아의 총독이 암살당했다. 군대 기피자 수는 해마다 늘어만 가고, 빈 대학에서는 소수민족 학생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중심가인 링 거리에서는 더러운 빨간 색 깃발을 내 걸고 노동자 집단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제국의 모든 분야에서 불안과 탈진의 조짐들이 보였고 그 모든 것은 오스트리아가 해체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1905년 독일과 러시아 신문에는 베를린과 페테스부르그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보도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국에 종 말이 올 경우에 이웃 국가들이 예상되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미리 합의를 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이 너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서 베를린 외무부는 11월 29일에 특별히 이 문제를 위해 이루어진 담화에서 오스트리 아 대사를 안심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이 시기의 여러 가지 경향들, 즉, 민 족주의, 사회주의, 종족의식, 사회주의, 의회주의들은 이 불안정한 국가에서 자연스럽게 특별한 폭발력을 보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정부가 사실상 용 납될 수 없는 승인을 통해서 개별 그룹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의 회에서 어떠한 법도 통과되지 못했다.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도이치 사람 들은 교육, 부, 개화상태, 등에서 다른 민족을 능가하였다.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배후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는 무심한 임시변통 정책을 펼치면서 도이치 사람들의 충성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 다보니 그들을 소홀히 대했다. 불안한 소수민족들을 만족시킬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방어 이데올로기 여기에 덧붙여서 각 민족의 민족주의는 전통적으로 침착한 도이치 지도 층하고만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전염병처럼 퍼져나간 민족주의는 1866년 오스트리아가 독일 정책에서 배제된 이후로 특수한 국가동일성 감정을 지 니게 되었다. 쾨니히그래츠(사도바, 비스마르크가 '작은 독일'이라는 구호 아래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프로이센 대 오스 트리아 전쟁의 주요 전투지, 보헤미아 지역에 위치한다. 프로이센은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게 된다.) 전투는 오스트 리아의 얼굴을 독일에서 발칸으로 향하도록 만들었고, 오스트리아의 도이 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소수민족의 지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분노하여 이중 왕국을 비난하였고, 특히 왕국이 친 슬라브 정책을 통해 외 국세력을 키우는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의 분노 는 자기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이치'란 말은 이제 윤리적 인 내용을 가진 개념이 되었고, 지배자의 요구로 모든 낯선 것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바탕에 깔린 두려움은 일반적인 적응 위기라는 광범위한 배경에서 보아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소리 없는 혁명 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중왕국 영토에서 특히 시대착오적으로 오래 지속 되어 온 낡고 세계시민적이고 봉건적으로 농민적인 유럽이 붕괴되고 있었 다. 그리고 그러한 붕괴와 결합된 실망과 갈등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 니었다. 특히 시민 계층과 소시민 계층은 사방에서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 꼈다. 진보에 의해서 무서울 정도로 커지는 도시들에 의해서, 기술, 대량 생산, 경제력 집중 등을 통해서 위협당한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신뢰할 만 한 개인적 혹은 사회적 유토피아를 뜻했던 미래라는 개념은 이 시기부터 점점 더 광범위한 계층에게 불안이라는 범주로 바뀌었다. 빈에서만 1859년 이후 30년 만에 거의 4만 개의 수공업체가 파산였다. 이러한 불안은 점점 커지는 현실도피 욕구를 담은 수많은 저항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위 협받고 있는 세계의 구원론이라고 자칭하는 민족, 종족적인 방어 이데올로 기들이었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불안감을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림으로 바꾸어 보여주었다. 반유대주의 방어 콤플렉스는 특별히 유대인 배척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게오 르크 리터 폰 쇠너러의 '모든 도이치 당'부터 칼뤼거의 기독교사회당에 이 르기까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수많은 당의 강령에 공통을 나타났다. 19 세기의 70년대 초의 발생한 경제위기 동안에 반유대인 감정이 폭발하였다. 그런 감정은 나중에 갈리치아, 헝가리, 부코비나 등에서 이민 행렬이 늘어 나자 다시 생겨났다. 합스부르크 대도시(빈)의 온건하고 균형잡힌 영향력에 힘입어 탄생한 유대인 해방은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문에 더욱더 많은 유대인들이 동유럽에서 나와 자유로운 지역으로 들어왔 다. 1857년부터 1910년까지 대략 50년의 기간에 빈의 유대인 인구비율은 2 퍼센트에서 거의 네 배가 넘는 8.5 퍼센트로 늘어났다. 그것은 중부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개별 구역, 특히 레오폴트 구역 같은 데서 유대인은 주민의 1/3을 차지하였다.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 활습관대로 전통의상을 입었다. 길다란 검은 카프탄을 입고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쓴 그들의 낯선 모습은 신비스러운 세계의 두려움을 일으키면서 거 리의 모양을 이상하게 지배하였다. 유대인의 역사적 상황은 그들에게 특별한 역할과 경제적 활력을 부여하 였다. 그것은 선입견 없는 태도와 활동성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위기감과 상대를 능가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숫자가 고학력 직업으로 나가고 언론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빈의 거의 모든 대은행들과 상당수의 토착산업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광범위하게 전통과 감상과 절만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보는 구식의 시 민적인 유럽 사람들과 견주어볼 때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은 새 시대 대도시 의 합리적 스타일에 훨씬 더 들어맞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해서 위협받는다는 의식은 특별히 다음과 같은 비난의 형태 로 나타났다. 즉 유대인은 뿌리가 없고 파괴적이고 혁명적이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이란 없다. 그들의 '차가운' 지성은 도이치 사람의 내면성과 심성 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등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수많은 유대 지식인들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그들은 여러 세대 동안이나 배척받아 온 소수민족의 반항심과 유토피아의 성향을 가지고서 노동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그들이 원래 가졌던 역할에 거대한 모반이라는 치명적인 이미지가 합쳐졌 다. 두려움에 사로잡힘 영세 영업계층은 자본주의와 당시 다가오고 있던 혁명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사업도, 시민적인 지위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일종의 이중공격을 받는다는 두려움이었다. 거기다가 종족의 특성 까지 가세하였다. (유대주의에 대항한 아리안 종족의 절망적 싸움)이란 제 목을 달고 있는 헤르만 알바르트의 책은 '사실기록'을 과거의 독일 상황에 서 인용하였다. 90년대 베를린에서 반유대주의가 유행했을 때도 그 책은 어떤 아웃사이더가 화가 나서 쓴 망상 정도로 여겨졌다. 반면 이곳 빈에서 는 광범위한 계층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내용이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이 도시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다음 몇 년 간 을 보내게 된다. 그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빈으로 왔다. 자신을 압도할 만한 인상들을 갈망하면서, 어머니의 돈으로 지속했던 과거 몇 년 간의 사 치스런 생활을 더욱 화려하면서도 도회적인 환경 속에서 계속할 속셈이었 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 이 썼듯이 '자부심 강한 확신'에 넘쳐 있었다. 1907년 10월 그는 쉴러 광장에 위치한 미술 아카데미에 스케치 시험을 보겠다고 신청하였다. 그러면서 이 학교의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까다로운 요구조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는 첫날의 필기시험에 합격하 였다. 여기서는 120명의 지원자 중에서 33명이 낙방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종합평가를 담고 있는 등급기준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인다. '시험스케치 불가 판정, 다음 사람들은 다음 단계 시험에 응시할 수 없음. ...아돌프 히 틀러,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 1889년 4월 20일생, 도이치, 카톨릭, 부친 파 리, 실업학교 4년, 실력이 없고 시험스케치 점수 불가.' 그것은 직접적이고 냉혹한 추락이었다. 히틀러는 깊이 실망하여 아카데 미 교장을 찾아갔다. 그는 히틀러에게 건축공부를 해보라고 설득하였다. 동 시에 그의 그림이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 화가로서는 부적합'하 다고 했다. 히틀러는 이 결과를 나중에 '날카로운 일격, 번쩍이는 번개'였다 고 표현했다. 그리고 실제로 꿈과 삶의 현실이 이토록 급격히 벌이진 적은 없었다. 그가 실업학교를 너무 일찍 포기한 것도 이제와서 불리하게 작용 하였다. 건축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 합격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도 그는 이러한 교육과정의 전제조건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고 고등학교 졸업시험이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척도로 보면 나의 예술가로서의 꿈은 실현가능하지 않은 것이었 다." 그토록 비참한 실패를 한 후 겸손하게 린츠로 돌아가서, 특히 최초의 실 패였던 이전의 학교로 돌아가기 싫어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 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빈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시험에 떨어진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풍당당하게 산책하고 오페라 구경을 가고 그밖의 거창한 몸짓으로 '연구'라고 부르던 수많은 어설픈 계획들을 그만두 고 진지한 활동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 져서 임종이 임박하였는데도 그는 돌아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 몇 주 동 안 근심스러운 태도로 아돌프는 '마치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자기 길을 가느라고 바쁘다고 말했다. 1907년 12월 21일 어머니가 죽은 직후에 아들은 린츠에 나타났다. 임종 전까지 어머니를 보살핀 의사는 "그토록 고 통스러워하고 슬픔에 찬 젊은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자신 의 말에 따르면 그는 울었다. 실제로 그는 실패를 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부터는 도피처도 없어졌다. 이 경험은, 그렇지 않아도 극단적인 성향을 더욱더 심하게 하여 고독에 휩 싸이게 하였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였다.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이 상하게도 가족의 구성원 한 명을 향한 감정을 빼면 그가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애착마저도 끝나고 말았다. 후견인 아저씨, 전 빈으로 갑니다! 히틀러는 아마도 이러한 두 가지의 충격 때문에 빈으로 돌아가려는 생각 을 더욱 강하게 한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린츠에 있는 친척들의 물어보 는 듯한 눈초리, 질책들으로부터 대도시의 익명성 석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소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밖에도 고아연금을 타기 위해서는 공부를 끝 마칠 것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형식적 행사와 유산문제가 타결되자마자 그는 후견인인 레온딩 군수 마이르호퍼에게 가-그가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오래 이야기하지도 않고- '거의 건방진 태도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후견인 아저씨, 전 빈으로 갑니다!" 며칠 뒤인 1908년 2월 에는 그는 린츠를 아주 떠났다. 하나의 추천서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의 주인인 막달레나 하니쉬는 당시 가장 유명한 무대장치가였던 알프레트 롤러와 아는 사이였다. 그는 궁정오페라의 장치감독 겸 미술실업 학교 교사이기도 했다. 1908년 2월 4일자 편지에서 막달레나 하니쉬는 빈 에서 살고 있는 자기 어머니에게 젊은 히틀러를 위해서 롤러와 만나도록 주선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는 진지하고 열성적인 젊 은이예요. 열아홉 살이지만 나이보다 성숙하고 신중하고, 친절하고 확고하 며 좋은 집안 출신이에요... 그는 훌륭한 것을 배우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 답니다! 지금까지 그를 쭉 보아왔지만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절대로 '빈둥거리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무가치한 사람을 위해서 애쓰 시도록 하고 싶지 않거든요! 좋은 일을 해 주세요." 며칠 지나지 않아서 룰 러가 히틀러를 만나볼 생각이 있다는 답이 왔다. 린츠의 집주인 여자는 다 시 편지로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어머니가 이 젊은이의 행복한 표정을 보 셨더라면 정말 수고한 보람을 느끼셨을 텐데요. ...그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주고 롤러 감독의 편지를 읽게 했어요. 마치 편지를 외우려고 하는 것처럼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조용히 편지를 읽으면서 거의 경건하고 행복한 표정 을 보였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그는 편지를 내 앞에 도로 내려놓더 군요. 그리고 감사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어머니께 편지를 써도 되는지 내 게 물었어요." 이틀 뒤 날짜 적힌 히틀러의 편지는 아주 애써서 관청서기 필체를 흉내 내고 있는데 이것은 보존되어 있다. "지극히 존경하는 부인, 제가 무대장치 의 위대한 대가 롤러 교수님을 만나뵐 수 있도록 주선해주신 노고에 대해 서 이 편지로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로서는 외람되게도 부인 에게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해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런 데 부인께서 이토록 성과가 있는 행동을 취해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 사드리며, 아울러 저에게 쓰라고 내주신 명함에 대해서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번 더 깊이 감사하며 존경심으로 부인의 손에 키스를 올립니다-아돌프 히틀러." 사실상 이 추천서는 그를 위해서 꿈의 세계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과 그림을 오페라의 장엄한 가상세계와 결합시켜주는 자유로운 예술가 생활로 안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롤러와의 만남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겨진 게 없다. 히틀러 자신은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경탄할 만한 사람이 그에게 일하면서 배우다가 가을에 다시 아카데미에 지 원하라고 충고했던 것이 분명하다. 히틀러는 다음 5년을 뒷날 자기 생애에 '가장 슬픈 시절'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많은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가 빠졌던 위기는 그의 성격의 특성을 만들어내고, 다시는 포기하지 않는, 돌처럼 확고한 성 취형식들을 찾아내도록 해주었다. 이 덕분에 행동을 갈망하는 그의 삶은 완고하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곤궁과 힘든 현실'이 이 시기의 가장 잊지 못할 체험이었다는 표현은 히 틀러 자신이 조심스럽게 삶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덧입힌 전설의 일부다. "나에게 있어서 이 사치스런 도시의 이름에는 5년 간의 비참과 곤 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5년 동안 처음에는 조수로, 다음에는 싸구려 화가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평소의 허기를 달래기에도 충분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빵을 위해서 일했다. 배고픔은 당시 나의 충실한 파수꾼 이었으며 유일하게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당 시 그의 수입을 계산해보면 처음 빈 체류기간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산과 고아연금 덕분에 그 자신의 수입을 빼더라도 매달 80내지 100크로네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배석판사의 한 달 월급과 같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이다. 잦은 공격성과 그 격렬함 2월 중순에 히틀러에게 설득당한 아우구스트 쿠비체크도 빈으로 왔다. 음악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함께 슈툼퍼 거리 29번지에 있는 마리아 차크라이스라는 이름의 늙은 폴란드 여자의 집 뒤채의 '위안 없고 가난한'방에서 살았다. 쿠미체크는 공부를 하였지만 히틀러는 이미 버릇이 되어버린 계획 없이 빈둥거리를 생활을 계속하였다. 언제나 자신이 자기 시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점심 때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거리나 혹은 쇤브룬 공원을 산책하고, 박물관들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오페라 극장에 갔 다. 나중에 고백한 바로는 거기서 완전히 열광하여 그 몇 년 동안 (트리스 탄과 이졸데)만 30~40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책 속에 파묻혀서 독학자로서 마음내키는 대로 영감이나 변덕에 따라서 이것저것을 읽었다. 아니면 링 거리의 화려한 건축물들 앞에 넋을 잃고 서서 스스로 세우게 될 위풍당당한 건축물을 꿈꾸곤 하였다. 그는 거의 병적으로 공상에 빠져들었다. 깊은 밤까지 계획을 세우느라 열을 오리곤 했는데, 이 계획에는 실질적인 능력의 결핍, 아는 체하기, 참 을성 없음 등이 서로 다투어 나타났다. "그는 자기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벽돌이 '기념건축물 을 위해서는 견고하지 못한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왕국을 부수 고 새로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극장 건물, 성들, 전시회장 등을 구상했고, 알 코올 없는 국민음료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담배 대용물을 찾으려 애쓰 고, 학교 운영 개혁계획도 세워보고 집주인, 관리 등에 대한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관심, 원한, 잘난 척하는 비전 등을 담은 '도이치 사람 의 이상국가'를 구상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도 이룩하지도 못했으면서 어떤 충고도 거부하고 가르침을 미워했다. 작곡 기법의 지식도 없이 리하르트 바그너가 중도에서 그만둔 피비린내 나는 근친상간을 다룬 오페라 (대장장이 빌란트)의 구상 을 게속 할 궁리를 하였다. 그는 게르만 종족의 전설적인 소재들을 다루는 극작가로 자처하고 (극장)혹은 (이념) 등을 썼다. 때때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으나 세부묘사에 치중한 작은 수채화들은 그가 느끼고 있던 압력을 보 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이 천재임을 입증해 보 이겠다는 초조감에 사로잡혀서 쉬지 않고 말하고 계획하고 몽상하였다. 그 러면서도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는 말만큼은 방친구에게 하 지 않았다. 낮 동안에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는 이 렇게 대답했다. "나는 빈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모든 특이한 과장과 순수한 공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태도에서 이미 뒷 날의 히틀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자신의 말은 세계개혁 의지와 신분 상승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무기력가 지나친 긴장, 무관심과 발작적인 활동성의 독특한 결합이 장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쿠비 첵은 불안이 섞인 태도로 히틀러의 갑작스런 분노와 절망적인 발작을 적어 놓고 있다. 잦은 공격성과 그 격렬함,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한한 증오감, 쿠비체크는 자기 친구가 빈에서 '완전히 규형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극히 격양된 흥분상태가 급작스럽게 좌절의 기분과 교차하곤 하였다. 그럴 때 는 부당함, 미움, 적대감만을 보디고, "자신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전인류에 고독하게 맞섰다. 그는 인류 전체에 의해 쫓기 고 기만당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디에나 "오직 그의 상승을 방해할 목 적으로 덫"이 쳐져 있다고 느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1908년 9월에는 히틀러는 한 번 더 아카데미 회화반에 들어가려고 노력 하였다. 지원번호 24번에는, 그가 미리 제출한 작품이 시험의 기준에 합당 하지 않아서 '응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더욱더 결정적인 이 거절은 한 해 전의 모욕적인 경험을 상기시키고 다 시 한 번 확인해 준 것이었다. 학교와 아카데미에 대해서 그는 일생 동안 줄지 않는 미움을 가졌다. 학교는 '비스마르크와 바그너'도 잘못 평가하고, 안셀름 포이어바흐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바보 같은 자식들'이나 학교를 다니고 '천재를 죽이기 위한'곳이라고 했다. 35년이나 지난 뒤에 사령부에 서 총통이며 사령관인 그가 전에 마을 학교 선생을 지낸 가난한 사람들을 놓고, 그들의 '더러운' 외양, '지저분한 칼라와 깎지 않은 수염 등'을 향해서 이런 장광성을 늘어놓을 정도였으니 그가 어느 정도의 모욕감을 느꼈는지 는 짐작할 만하다. 그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자기 정당화 의 욕구로 진정시키기 위해서 거듭 애쓰곤 했다. 예를 들면 그는 30년대 초에 당의 위기를 맞이하여 쓰게 된 공개편지에 서 자신에게 부당한 운명을 원망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돈 많은 부모의 자식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인생이 라는 가장 혹독한 학교에서 곤궁과 비참을 통해 교육받았다. 표피적인 것 을 중히 여기는 세상은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지 않고 언제나 어떤 증명서 를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는다. 수많은 우리 지식인들보다 내가 더 많은 것 을 배웠다는 사실은 한번도 관심을 끌지 못했고 언제나 내가 학위증이 없 다는 것만을 관심을 끌었다." 히틀러는 이 두 번째 실패 이후에 겸손하고 극단적으로 조용한 태도로 모든 사람의 눈에서 사라졌다. 결혼해서 빈에 살고 있던 이복누이 앙겔라 와 소식이 끊어졌고 후견인도 짤막한 우편엽서 한 통을 받았을 뿐이었다. 쿠비체크와의 우정도 동시에 끝나버렸다. 그가 잠시 빈을 떠나 있는 사이 히틀러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함께 살던 집에서 나가서 도시의 집 없 는 사람들의 숙소와 남자들만을 위한 하숙집에 숨어버렸다. 쿠비체크는 30 년이 지나서야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처음에 히틀러는 슈툽퍼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를 세냈다. 15 번 구역 펠버 거리 22번지 16호였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어느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그의 본질의 어두운 층을 특징짓고, 그의 삶에 전체적인 방 향을 제시해주는 이념들과 생각들의 공간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오랫동안 성격의 강인함과, 조숙한 천재성과 세상의 몰이해의 증거라고 해석했던 이 번 실패는 구체적인 의미와 구체적인 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즉흥적인 감정은 시민세계를 향했다. 시민사회의 성과규범, 그 엄격성과 요구에서 실패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성향과 의식을 보면 그 자신의 시민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그가 이제부터 시민사회에 대해서 가지 는, 수없이 거듭 표현된 분노는 그의 존재의 파라독스의 일부였다. 시민세 계는 사회적인 추락에 대한 공포,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에 대한 너무나 도 분명한 두려움에서 양분을 얻고, 또한 그것과 경계를 이루는 세계였다. 그는 9나의 투쟁)에서 예상 밖의 공개적인 태도로 '노동자 계층에 대한 소 시민의 적대감'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적대감은 그 자신에게도 나타났다. 그것은 '오래되고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이 계층으로 다시 추락할까 봐서, 아니면 그렇게 여기질까' 두려워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양친의 유산의 일정액을 받을 수 있었고, 다달이 받는 보 조금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성이 그를 억압하였다. 그는 옷차림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계속 도시의 오페라 극장, 카페 등을 드나들면서 그 자신이 언급한 대로 세련된 언어와 신중한 태도로 더 가난한 계층을 향해 서 시민적인 계급의식을 보여주었다. 뒷날의 수많은 관찰자들처럼 어떤 이 웃집 여자도 그가 친절하고 특별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눈 여겨 보았다고 했다. 이 빈 시절에 대한 또 다른 약간 불확실한 증언을 보 면 그는 이 시기에 제복을 입은 아버지 사진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 서 자신의 "작고한 아버지께서는 황제폐하의 세관장으로 은퇴를 하셨다." 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거부보다는 참여를 때때로 나타나는 적대적인 몸짓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방식은, 그가 본질적으로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소속감의 필요를 느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시민계층의 기본적인 요구다. 자기가 일찍이 예술 과 정치 영역에서 '혁명가'였다는 그의 주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금 음 미해보아야 한다. 사실상 이 스무 살 청년은 시민세계와 그 세계관에 한번 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는 솔직히 존경심을 가지고서 그 영광과 부유함에 압도된 채 시민세계로 접근하였다. 린츠 출신의 몽상적인 관리 아들은 시민세계에 경탄을 하였지 그것을 뒤집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거부 보다는 참여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물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시민세계로부터 거부 당하고 깊은 모욕감을 느끼기는 하였으니 그렇다고 시민사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특이한 이 초기 시절에서도 가장 특이한 사건 에 속하는 일이다. 이미 20년 전부터 유럽에 퍼지고 있던 체면을 중시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수많은 고발이 그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스스로 굴욕받은 것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키고 비판을 통해 시민사회에 앙갚음하 라고 도와주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고 나서도 이상스럽게 이런 시대적 현상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 사이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 한 전 체적인 가면 벗기기 분위기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그 시대의 모든 예술 적 흥분과 이념논쟁들, 그리고 지적인 모험심은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세기가 바뀌기 직전에 이러한 시작의 중심지의 하 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음악을 통해서 청춘의 위대 한 해방을 경험한 젊은이, 감수성 있고 항의하고 싶어하는 젊은이가 쇤베 르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가 자기 문하생들인 안톤 베베 른, 알반 베르크와 함께 바로 히틀러가 빈에 머물고 있던 시절에 '빈의 콘 서트 홀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가장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나 리 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도 못 들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1907년 당시의 비평가 한 사람이 '음악세계의 폭풍 중심부'라고 불렀던 현 상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 대신에 그는 바그너나 브루크너 등 아버지 세대의 도취체험을 뒤쫓아가고 있었다. 쿠비체크는 1905년 (시도시집)을 냈던 릴케나 호프만스탈같은 이름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히틀러가 미술 아카데미 에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분리파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구스타프 클림트, 에콘 쉴레 혹은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분리파 화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했다. 그는 전전 세대에게서 예술감각을 자극받았고 안셀름 포이어바흐, 페르디난트 발트 뮐러, 칼 로트만이나 루둘 프 알트를 존경하였다. 원대한 계획들을 지닌 장래의 건축가는 자기 말대로 라면 몇 시간씩이나 매료되어서 링 거리의 고전적인 혹은 신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앞에 서 있 곤 했으면서도 바로 이웃하고 있는 새로운 건축의 혁명적인 주도자들에 대 해서는 전혀 몰랐다. 오토 바그너,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 등에 대해 서 아무것도 몰랐다. 아돌프 로스는 1911년에 미하엘 광장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왕궁 정문 바로 맞은 편에 매끈하고 장식 없는 얼굴을 가진 상사 건물을 완성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뻔뻔스럽게 여겨지는 태도로 '장식과 범죄' 사이에 내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글을 썼다. 히틀러 는 그러나 빈의 살롱들과 귀족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양식에 대해서만 소 박하면서도 단호하게 열광하였다. 그는 예술에 나타나는 불안과 붕괴의 조 짐들을 못 보고 지나갔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예술적인 혁명의 결과를 겪 었던' 시대의 소란스러움이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숭고함이 격하되는 경향만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가 쓴 글에 따르면 그의 시민적 본능으로는 놀라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는 어떤 낯설고 이상한 것 의 시작을 눈치챘던 것으로 보인다. 저항자로는 안 어울리는 사람 정치적 현실과의 첫 만남도 이상스럽게 그와 비슷한 조짐을 보이는 가운 데 이루어졌다. 그 모든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이념들은 그에게 조금도 매력이 없었다. 정치 분야에서도 그는 자기가 배척하는 질서를 옹 호하는 기득권자의 지지자로 나타난다. 이 거절당한 인간은 거절하는 쪽의 일을 자기 일로 여김으로써 자신의 굴욕감을 없앴다. 이러한 심리적 과정 은 히틀러의 성격에 하나의 단층선을 만들어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건축노동자 시절 어느 날 그는 점심휴식 시간에 '어딘가 한구석에서' 우유와 빵을 먹고 있었다. 그 때 노동자들 사이에서 들리는 격렬한 사회적 거부의 감정에 '극단적으로 '놀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민족이란 '자본주의' 계층의 창안이라고 거부하고, 조국은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부르주아 계급의 수단이라고 거부하 였다. 법의 권위는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다. 학교는 노예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리고 노예감독자도 만들어내기 위한 기관이다. 종교란 착취하도록 만들어진 민중을 우둔하게 만들려는 수단이다. 도덕은 멍청한 양 같은 참을성의 표지다, 하는 식이었다. 무시무시한 깊이의 진창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건축노동자들에 대항하여 그가 옹호하는 개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민족, 조국, 법의 권위, 학교, 종교, 도덕 등 거의 완 벽한 시민사회의 규범목록을 포함하고 있다. 그 자신 이 시기에 이런 규범 목록들에 대해서 최초의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일생 동안 여 러 차원에서 언제나 새로 나타나는 분열된 관계였다. 시민적 요소를 경멸 하면서도 그것과 연합한다는 정치적인 책략에도 나타나고, 예를 들면 여비 서들에게 핸드키스로 인사를 한다거나 오후 휴식시간에 총통사령부에서 그 들에게 달콤한 생크림 빵을 대접한다는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의식절차에도 나타나는 분열이었다. 온갖 반시민적인 원한을 가진 가운데 그는 시골의 왕처럼 '옛날식' 남자 의 면모들을 길렀다. 그러한 특성들은 열렬히 소망하던 사회적 소속감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젊은 히틀러의 이미지에서 오스트리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특별한 권위의식이었다. 그러한 권 위의식을 가지고서 그는 시민이라는 특권을 옹호하였다. 모든 존재, 모든 활동에 사회적인 등급을 부여하려 하고, 지나칠 정도로 호칭을 중히 여기 는 사회에서 그는 극히 제한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신사'가 되 려고 했다. 그리고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시대의 저항적인 힘들에 합류 하지 못하자 오직 신사가 되고자 하는 생각 이외에는 달리 하지 않았다. 말투나 옷처럼 외적 행동방식의 선택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나 미적인 선 택들도, 별 거부감 없이 시민세계를 따르고자 하는 그의 욕구로 설명될 수 있다. 사회적인 비참보다는 사회적인 무시를 더욱더 힘들게 받아들였으며, 그가 낙담했다면 세계 질서의 잘못으로 고통스러워한 것이 아니라 세계질 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불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항의를 피했고, 오직 의존과 동의만을 구했다. 대도시의 위대함과 매 력에 마비된 것처럼, 닫혀진 문들 앞에서 동경에 가득 차서 혁명적인 생각 을 키운 것이 아니라 오직 외로웠을 뿐이다. 저항자로 그보다 더 안 어울 리는 사람도 없었다. 제3장 사상적 토대 어떤 연구에 따르면 그의 숙소에서 멀지 않은 펠버 거리에 잇는 담배공 장에서 종족주의를 다룬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발행부수 10만 부 정도였고 특히 대학생들과 중간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문화 창조자고 문화 보존자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당신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금 발과 남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책들을 읽어라!" 제1면에 큰 표제어로 이렇 게 광고하고 있었다. 수사노릇을 하다가 그만둔, 요르크 란츠 폰 리벤펠스 라는 그럴싸한 귀족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발행하는 잡지였다. 그것은 게르 만의 봄의 여신인 '오스타라'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 잡지는 아싱족 (혹은 영웅족) 대 원숭이족 (혹은 숲의 종족)의 싸움에 대해서 상당히 변덕 스럽고 살기를 띤 이론을 전개하였다. 저지 오스트리아에 있는 기사단의 성인 베르펜슈타인을 중심으로-그곳의 수입이 그에게 산업의 촉진자 노릇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란츠 폰 리벤펠스 는 아리안 영웅의 남자기사단을 창설하고 조직했다. 그 기사단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주인 종족이 열등한 혼합종족과 벌이는 피의 투쟁에서 주 인종족의 선발대 노릇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1907년에 벌써 갈고리 십 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내걸고, 사회주의 계급투쟁에 맞서서 '거세하는 칼' 에 이르기까지 종족투쟁을 계속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짐승인간의 멸종을 위해서, 더 높은 새로운 인간의 발전을 위해서' 사육방법과 멸종방 법을 체계화하겠다고 했다. '원숭이 숲'의 불임 조치와 추방 프로그램, 그리 고 강제 노동이나 상인을 통한 청산 프로그램은 육종을 선별하고 종족을 개량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움이 섞인 환호성을 울렸다. "여신께 공물을 바쳐라. 신의 아들들아. 일어나라. 그분께 숲의 종족을 바쳐라!" 아리안 족의 이상형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도록 그는 종족간의 미의 대결을 제안하였다. 히틀러는 간혹 란츠를 방문하였다. 란츠의 설명에 따르면 히틀러가 이 잡지의 옛 판 몇 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고, 창백했으며, 겸손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초기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현존하는 자료로는 란츠가 히틀러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지, 혹은 '이 념의 전수' 했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우스꽝스러운 기사단 창설자의 의미는 구체적인 충격이나 이념의 중개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현상 이 드러내는 징후에 있었다. 그는 노이로제 증상이 보이는 시대 분위기를 두드러지게 대변하는 사람의 하나였고, 당시 빈에서 싹트고 있던 상당히 공상적인 이데올로기 분위기에 특징적인 색깔을 덧붙인 인물이었다. 이러 한 사실은 그가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정짓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자체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는 병리적 징후에 흔 적을 남기고 있다. 히틀러 자신이 젊은 시절 지식의 원천이었다고 부른 적이 있는 신문 논 설과 싸구려 잡지에서 얻은 여러 가지 지식들과 이런저런 영향들을 놓고 결론을 내려보면, 그의 세계관은 시민문화에 대항하는 도착적인 하위 이질 문화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시민적 교양과 휴머니즘에 맞선 이 천박한 대항의식은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시 민문화는 얼마간 자신의 하위문화에 물들어서 스스로 자신의 모든 기반을 부정하고 모독하기에 이르렀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세기가 바뀌던 무렵에 민에서 히틀러가 란츠 폰 리벤펠스와 다른 현상들을 통해서 만나게 된 하 위 이질 문화란,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적 가치체계의 부정이 아니라 그 가 치체계의 타락한 모방형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시민적 결속의 필 요성을 느끼고 어디를 향하든지 싸구려 잡지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생 각들, 열등감, 공포심을 만났다. 다만 약간 더 고상하고 더 까다로운 형식 을 가진 것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방향을 잡도록 도와준 저속 한 생각들을 하나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존경심으로 가득 찬 놀라움을 품고 이 대도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들의 어떤 생각도 그에게 특별하게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인기 가 있고 가장 자주 공연되던 작곡가의 작품들과 최고급의 궁정오페라를 보 아도 평소의 친숙한 생각들이 다만 더욱 기교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란츠,오스타라 잡지,쓰레기 같은 논문들은 그가 소속하고자 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뒷문을 열어주었다. 뒷문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문은 문이었다. 이러한 소속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꽉 붙잡을 필요를 느낀 그는 자신의 원한에 이데올로기적인 겉모양을 보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적 추락의 취협을 받고 있는 인간의 병적으로 격앙된 자기가치 의식을 가지고 그는 선량한 빈 사회의 편견들, 구호들, 두려움과 요구들을 점점 더 많이 받아들 였다. 반유대주의와 억압된 도이치 민족의 근심이 반영된 주인이론들이 여 기 속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에 대한 적대감과 이른바 사회적 다원주의 (적자생존)도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은 지나치게 자극된 민족주의에 기초 를 두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지배자들의 생각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기 간에 가졌던 전반적인 생각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로 이 같은 세계관을 얻은 것 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즉 꿰뚫어보는 관찰력과 부지런한 인식의 결과 스 스로 그런 세계관을 얻었다고 표현하곤 하였다. 모든 결정적인 영향을 부 정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원래 가졌던 선입견 없는 입장도 검토하고, 예 를 들면 린츠 시절에 유대인들에 대한 '불리한 발언들'이 자기에게 혐오감 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세계관의 싹과 방향은 고지 오스트리아 지방의 주요도시인 린츠의 이데올로기 환경에서 만들어졌 을 가능성이 크다. 린츠는 세기가 바뀔 무렵 민족주의 그룹과 그 성향의 중심지 중 한 곳이 었다. 특히 히틀러가 다녔던 실업학교는 확고한 민족주의 분위기가 지배하 였다.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도이치 민족을 상징하는 푸른 색 달구지국화꽃 을 단추구멍에 끼우고 다녔다. 그들은 도이치 통일운동의 상징 색인 검정, 빨강, 노랑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만세(하일)!'라는 말로 인사하였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황제친미가 대신 같은 멜로디에 붙인 독일 노래를 불렀다. 그 들의 저항적인 민족주의는 특히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학 교예배와 성체축일 행렬에 반대하는 청소년 저항운동은 '개신교' 제국과의 일체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전쟁 중 원탁모임에서 털어놓은 것 에 따르면 그는 동급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자유주의적인 발언들을 했고 종교선생인 살레스 슈바르츠를 "절망에 빠뜨려서 어찌할 바 를 모르게 만들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의 대표자는 도이치 교구위원이며 실업학교 역사선생인 레 오폴트 푀치 박사였다. 그는 젊은 히틀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 분 명하며, 수업시간에 능변과 두 세대 이전의 다채로운 그림을 통해서 소년 들의 상상력에 방향을 제시하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그에게 바친 페이지들이 과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히틀러가 역사과 목에서 겨우 '양'을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국경지대 주민들의 두려움, 혼합 된 민족과 종족을 가진 제국에 대한 감정과 히틀러의 기본적인 반유대주의 성향은 의심할 것 없이 그곳에서 나온다. 그가 당시 린츠에서 발간되던 쇠너러 운동의 풍자적인 신문 (외괴의사, 예술과 생활에 나타나는 정치와 기분을 위한 월간 티롤 화보)를 읽은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 화보는 기고문과 만화에서 '교황숭배자' (카톨릭교도) ,유대인, 의회, 여성해방, 풍기문란, 알코올 등에 반대하였다. 이 화보잡지는 1899년 5월에 나온 제1호에 이미 도이치 민족 감정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 갈고리 십자가상을 내걸었다. 이것은 게르만 신화에 따르면 세계창조의 원래 재료를 뒤섞었던 '불 방망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아가 젊은 히틀 러가 학생시절과 그 뒤 몇 년 동안 목적 없이 지내던 시절에 (모든 도이치 신문)과 도이치 민족주의 시민들 사이에 널리 읽히던 (남부 국경연감), 그 리고 공격적인 반유대주의를 선언한 (린츠 팸플릿)지를 읽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나의 투쟁)의 저자가 주장하듯이 반유대주의는 정치사회적 변화 의 동반현상 중 하나로서 빈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지방에서도 이에 못지 않게 격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2년 간의 영혼의 투쟁 히틀러는 2년 간 계속된 '영혼의 투쟁'이 자신의 '가장 힘든 변화'였다고 말한다. '허약한 세계시민에서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로 변화되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이 감정은 가차없는 이성에 맞서 '수없이' 저항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사실상 파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의식적인 적대감으로, 단순한 기 분이 이데올로기로 발전되는 시기였다. 그때까지는 아직 타협이 가능했던 목가적인 린츠의 반유대주의가 원칙의 날카로움을 얻고, 광범위한 폭과 구 체적인 적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부모의 주치의였던 유대인 에두이르트 블로흐에게 히틀러는 처음에 빈에 서 '겸손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변호사 요제프 파인골트, 특짜는 목수 모르겐슈테른 등은 그의 소품 수채화들을 여러 번이나 사주어서 예술 적으로 그를 격려해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남자 하숙집의 유대인 친구 노이만에게 그는 터무니 없는 의무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모든 유대인들 은 그의 인생 초기에 길 가장자리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 이 몇 년이 지 나는 동안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그들의 모습 대신 점점 더 많아져서 신화 의 유령처럼 커지는 '검은 고수머리에 긴 카프탄을 입은 모습'(유대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모습은 그가 '언젠가 도시 중심부를 지나쳐' 갈 때 그 의 눈에 띈 것이다. 그 일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 우연한 인상이 그의 뇌리 에서 어떻게 '빙빙 돌고' 점차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으로 변해 갔는 가를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유대인을 처음으로 유심히 지켜보자 빈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어디를 가든지 오직 유대인만 보였으 며, 그들을 많이 보게 될 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게 보였 다. 특히 도시 내부, 도나우 운하의 북쪽 지역에는 얼핏 보아도 도이치 사 람과 닮지 않은 종족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매력적 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선택된 민족의 육체적인 불결함을 넘어서 도덕 적인 얼룩들을 보게 되면 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문화생활의 영역이든지 유대인이 한 명이라도 끼지 않은 재앙과 파렴치 행위가 있었던 가? 조심스럽게 그런 종양을 갈라놓고 보면 썩어가는 몸에 들어 있는 구더 기처럼 갑자기 비춘 빛에 눈부셔하는 유대인을 볼 수가 있었으니... 나는 차츰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광신적 반유대주의자'로 변함 란츠 시절의 평범한 반유대주의가 광적으로 변해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 혀 문자 그대로 생애 최후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유대인 증오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 시절의 히틀러의 믿음직하지 못한 친구 중 한 명은 그 이유를 추락한 시민계급 아들의 성적인 질투심으로 돌렸다. 그리고 어떤 금발 소녀, 유대 혼혈인 라이벌, 그 소녀에 대한 히틀러의 강 간 시도 등에 대해 기묘하고도 별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일찍부터 나타나는 초긴장과 어두운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성에 대한 히틀러의 생각은 그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에 어느 정 도 무게를 더해준다. 어디서든 유대인이 등장하기만 하면 나타나는 그의 표현법과 논리적 근거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의 투쟁) 곳곳에 들어 잇는 노골적인 음란성의 냄새는 우연히 겉으로 나타난 특징이 아니고, 젊 은날 깨달음을 얻은 오스타라 잡지나 저속한 팸플릿의 음조와 문제에 대한 기억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원한의 특별한 특성을 드러내주는 것이 다. 전쟁이 끝난 뒤에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그의 애인들 목록이 출간되어 나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부유한 집안 태생의 아름다운 유대인 여자도 들어 있었다. 그가 린츠나 빈 어디서도 '어떤 아가 씨와 실제로 만난'적이 없다는 확인도 상당히 믿을 만하다. 어쨌든 연극적 인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 정도의 정열적 사건이 없었던 것만큼 은 확실하다. 이러한 결핍에 맞서 특이한 꿈들이 나타난다. 그 자신이 확인해준 것에 따르면 그것은 '역겹고 다리가 구부러진 유대인 놈들이 수백수천 명의 아 가씨들을 유혹하는 악몽'이었다. 란츠도 아름다운 금발의 귀족여인들이 검 은 털투성이 유혹자들의 팔에 안겨 있는 끔찍한 모습에 고통을 받았다. 그 의 종족이론은 성적인 질투심과 마음속 ㄱ이 자리잡은 반여성주의 감정으 로 물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여자는 이 세상에 죄악을 가져오는 존재이고, 짐승같은 하급인간들의 쾌락적인 기술에 쉽게 넘어가는 그들의 특성이 북 방 혈통을 오염시키는 주요원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도 비슷한 형태로 뒤늦고 억압된 남성의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의 유대 청년이 얼굴에 악마적인 기쁨을 드러낸 채 몇 시간 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아가씨를 자기 피 로 더럽히고, 그럼으로써 아가씨의 종족에서 그녀를 훔쳐내려는 것이다." 란츠나 히틀러나 다같이 불만스러운 몽상가들의 반반하고 몰취미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 세계관의 전망에서 광범위하게 피어 올라 오는 역겨운 냄새는 시민세계 내부에 나타난 억압된 성이라는 현상에서 나 오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젊은날의 친구 쿠비체크와 빈의 어두컴컴한 지하세계 친구들은 히틀러가 일찍부터 온세상과 사이가 나빴고 어느 쪽을 바라보든 증오를 느꼈다는 사 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반유대주의는 그때까지 목적 없이 헤 매고 있던 그의 증오가 고정된 형태로 자리를 잡고, 마침내 확고한 증오의 대상을 유대인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투쟁)에서 히 틀러는 적이 여럿이면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절대로 여 러 적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원칙 은 그 자신에게도 타당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분열되지 않는 강도로 단 하나의 현상에만 집중시키곤 했다. 그 하 나의 현상에 세계의 모든 재앙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구체적 인 하나의 형태를 향해서 모든 비난을 집중시켰고,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원인들의 조직망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위압적인 히틀러의 유대인 콤플렉스를 설명할 만한 것이 간단하게 파악되지 않더라도, 명예욕 강하고 절망한 아웃사이더가 개인 문 제를 정치 문제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출발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한 걸음씩 추락의 길을 걸었고 따라서 자신의 계급추락의 두려움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었다. 유대인 현상으로부터 그는 자기 같은 '가련한 인 간'이 역사와 자연의 법칙을 자기편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히틀러 자신의 묘사한 내용은 그가 부모의 유산이 다 떨어졌을 때 반유대주의 이 데올로기로 전환했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정말 힘든 처 지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힘들었고, 특히 예술가, 천재, 공적인 경탄 등을 꿈꾸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훨씬 깊이 추락하였다. 원칙에 사로잡힌 분노한 인간, 쇠너리 세기가 바뀔 무렵 도이치 시민의 도시이자, 히트럴가 사회적인 결속의 욕구를 가지고 들어섰던 도시 빈은 세 가지 지배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었 다. 정치적으로는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와 칼 뤼거의 영향 아래 있었다. 히틀러의 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정치와 예술의 밝게 채색된 중 간영역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히틀러는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의 '추종자이며 숭배자'로 빈에 등장하 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히틀러의 침대 위쪽에는 이 남자의 격언들 이 액자에 담긴 채 걸려 있었다고 한다. '유대왕국 없는, 로마 없는/게르만 왕국을 건설하자. 만세!' 하나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도이 치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국경 저편의 조국에 결합되기를 바란다는 내용 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격언은 인기 있는 방식으 로 쇠너러의 '모든 도이치 운동'의 본질적인 프로그램을 이루고 있었다. 그 것은 독일에 있는 같은 이름의 단체와는 달이 '도이치 세계정책'이라는 표 어 아래 확장하는 제국주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쇠너러의 운 동은 모든 도이치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 안에 합쳐지는 것을 목표로 하였 다. 그것은 독일의 '모든 도이치 연합' 과는 반대로,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 국의 도이치 아닌 지역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고, 다민족 국가의 존립 자 체를 반대하고 있었다. 이 운동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인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는 히틀러 일가 도 잘 알고 있는 저 국경 지역의 숲지대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과 격한 민주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과도한 외국세력 콤플렉스에 사로잡 힌 듯 그는 어디서나 도이치 민족과 정신이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만 보았다. 유대인, 로마 카톨릭, 슬라브 사람, 사회주의자, 합스부르크 왕 조,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국제화도 도이치 민족과 정신을 위협하는 것으 로만 여겼다. 편지에는 '도이치의 인사를 드리며' 서명을 했고, 게르만 관습 의 부활을 위해서 다양한 행사들을 마련했다. 침버 사람들과 튜튼(도이치) 사람들이 로마군대를 절멸시키고 승리한 노레이아 전투가 있었던 기원전 113년부터 도이치의 기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쇠너러는 절망에 빠진 인간이었다. 원칙에 사로잡힌 분노한 인간이었다. 그는 저지 슬라브 성직자의 민족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답변으로 '로마에서 벗어나기 운동'을 조직했다. 그로써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적대자가 되었으며, 그때까 지는 주로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로 전개되던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처음으 로 정치사회적으로 특히 생물학적인 반유대주의로 변화시켰다. 유치한 것들의 효과가 얼마나 강한지를 직감한 선동가인 그는 '종교는 상관없다. 난잡성은 유전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동화의 경향들에 반대하였다. 유대인을 세계의 모든 재앙과 두려움의 원인으로 보는 편집증 뿐 아니라 선전포고의 과격적으로 보아도 그는 히틀러의 선구자 중 하나였 다. 옛날 오스트리아의 우유부단하고 관용적인 삶의 분위기에서 그는 처음 으로 종족적, 민족적 두려움을 조직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들을 보여준 인 물이었다. 그는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도이치 소수민족이 압도되고 '학살되 는' 날이 다가온다고 느꼈다. 그는 반유대 특별법을 요구하였고, 그의 추종 자들은 목매단 유대인을 나타내는 반유대 표지를 시계줄에 매달고 다녔다. 그들의 빈 의회에서 유대인을 살해하면 돈이나 아니면 살해된 사람의 재산 으로 현상금을 주자는 주장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