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유사 신화와 유사 신화의 해석 방식 유사 신화의 발견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다양한 민족들과 상면하게 되면서 여러 방면에서 예기 치 않은 결과들이 야기되었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그리고 초기의 탐험가들을 놀라게 한-결과는 지리 상 엄청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문화권들 사이에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종교 관행과 신화가 존재한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일 게다. 예컨대,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 종교들과 카톨릭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 랐다. 19세기의 미국 역사가 윌리엄 프레스코트는 자신의 저서[멕시코 정복]에서 스페인의 신앙과 멕시 코 아즈텍족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아기들의 이름을 짓는 의식을 보면 기독교 의식과의 일치점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즈텍 사람 들은 갓난 아기의 입술과 가슴에 물을 뿌리며...중략...'이 신성한 물방울들이 세상이 확립되기 전에 아기 에게 주어진 죄를 씻어, 이 아기가 새롭게 태어나게 되기를 신께 비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도문 은 기독교 윤리를 연상시킨다. 기독교인들은 기도문에 일정한 형식을 사용한다. '오 주여, 영원히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겠습니까? 이 벌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바로잡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파괴하기 위함인가요?' 그리고 나서 다시 이렇게 기도한다. '크나큰 자비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의 공 로만으로는 당신의 은혜를 입을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의 비전들은 외부 세계로 누설되지 않은 채 신성하게 지켜졌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고해 상사가 아즈텍 사람들에게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페루와 볼리비아의 잉카 제국 사람 들이 카톨릭과 유사한 종교 의식을 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 설명은 제럴드 L. 베리의 세계의 종교]에서 발췌한 것이다. 세례식과 신앙 고백이 행해졌다. 갓난 아기를 제물로 바치는 관행은 피를 흘리되 생명에는 지장이 없 게 하는 의식으로 대체되었다(이것은 남자들의 할례식에 견줄 만한 관행이다). 아버지의 죄값으로 아들 을 바치는 잉카의 관습에서 우리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 다. 또 잉카 사람들은 희생양의 피(양은 아마라였을 것이다)를 뿌린 상쿠(sancu)라고 하는 성스런 빵으 로 성찬식을 행하기도 했다. 19세기 미국 화가이자 여행가인 조지 캐틀린은 북아메리카의 대평원에서 각기 다른 여러 부족들과 함 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캐틀린은 이 부족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의식이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 대인들의 의식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은 캐틀린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풍속, 관습 및 현황]에서 뽑은 구절이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관습들을 목격하고서 그들의 관습이 유대인들의 관습과 너무나도 비슷 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러 가지 관습과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러 가지 관 습들이 신기할 정도로 닮아, 틀림없이 원시 상태의 두 민족이 우연히 서로 아주 비슷한 관습들을 생각 해 내 실행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유대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 중에서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놀랍고도 중요한 사실은 대정령 숭배 이다. 헤브루인들이 신성한 율법에 따라 야훼를 섬겨야 했던 것처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대정령을 섬긴다. 고대의 이교도들이나 다신교도들이 여러 신을-그리고 그들 자신의 형상을 한 우상들을-섬겼던 데 반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오로지 대정령만을 섬길 뿐이다. 또한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어느 경 우에도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며, 실제 인물이든 상징적 존재이든 간에 중재자라는 것을 모른다. 인디언 부족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추장과 상징물, 기장 등을 가진 소집단으로 나뉘어 생활한다. 그런 데 내가 보아 온 소집단들의 예배 양식은 모세 율법에 의한 예배 양식들과 대단히 비슷하다. 유대인들 에게 지성소가 있었다면, 인디언들에게도 그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디언들은 집회소 나 주술소를 늘 신성한 곳으로 여기니 말이다. 고대 헤브루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디언들 역시 여자들 이 남자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금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남자와 여자는 식사도 따로 한다. 인디 언들은 종교 의식의 일환으로 계절에 관계없이 몸을 씻거나 사죄식을 갖는데, 이러한 침례식들을 행할 때도 남자와 여자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한다. 이점 역시 유대인들과 비슷하다. 그리고 여자들이 월경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는 관습 역시 모세 율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별거 기간이 끝 난 뒤 여자들 가족들의 처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반드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써 몸을 신성하게 해야 하는데, 이 관습도 유대인들의 관습과 아주 똑같다. 이것은 두 민족이 미개 상태일 때 행하던 특별한 관습들 가운데 하나이다...... 인디언들의 종교 축일이나 금식, 제물 등도 고대 유대인들의 그것과 대단히 비슷하다. 많은 인디언 부 족들이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매우 흡사한 절기를 쇤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의 초막절과 비슷한 명절이 있는데,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며(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이 축제 때 사람들은 버드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며칠씩 금식을 했다고 한다) 헤브루인들의 속죄 제물과 아주 비슷하게 첫 수확한 과 일과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을 제물로 삼는다. 캐틀린은 자기가 당시에 유행했던 이론, 즉 인디언들이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난 뒤로 자위를 감춘 이스라엘 10부족의 후예라는 주장(모르몬교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을 받아 들인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캐틀린은 아메리카 인디언과 고대 유대 민족이 접촉한 사실이 있었을 거라는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정신 의학이나 근대 인류학이 대두하기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글을 통해 두 민족간의 유사성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했던 것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역사에서의 '축의 시대'에 관한 이론(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깊 이 있게 다룰 것이다)의 일부로, 일본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 불교 종파가 유럽의 루터교와 눈에 띄게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가 정토교라고 알고 있는 이 불교 종파는 '신앙(이 경우에는 아미타 붓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비를 얻음 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정토교의 교리에 따르면 죄인들은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이들은 오직 아미타 붓다 의 자비를 얻을 때만 정토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루터교의 믿음과 유사하다. 식민지로 이주해 간 유럽인들과 선교사들은 이렇게 유사한 신앙의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상야릇 한 논리를 전개했다. 특히 멕시코로 진출했던 스페인 선교사들 사이에는 자신들의 참된 신앙을 사악하 게 모방한 것이 비유럽 종교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또 다른 주장은 앞으로 우리가 고찰하게 될 정신 의학적 이론들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은 것으로, 토착 종교들이 한때는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 고 이해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와해된 신의 계시를 증명한다는 견해이다. 카톨릭과 페루 종교간의 유사성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론들 가운데서 내 개인적으로는 성 도마가 서기 1세기에 인도를 거쳐 페루까지 여행했다는 관점(스페인 신부인 가르실라소데 라 베가는 페루의 툰파전설에 대단한 매력을 느 꼈다. 전설의 내용인즉,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혜로운 스승 툰파가 십자가와 비슷한 것을 만들 었다는 것이다. 데라 베가는 툰파가 다름 아닌 성 도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 도마는 초대 교회의 선 교 영역이 확장되던 때에 전도를 위해 인도까지 갔던 걸로 유명했다. 데 라 베가는 성 도마가 인도에서 태평양을 건너 페루로 가서, 페루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믿었다)을 선호한다. 구세계와 신세계에 거의 동 일한 종교 관행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종된 이스라엘 부족'론이 극성을 부렸던 19세기-'실종된 이 스라엘 부족'론은 미국 내전이 발발할 무렵까지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 들었다. 그렇지만 1900년으로 접어들면서부터 비교 종교와 비교 신화가 본격적인 학문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 다. 그리하여 전혀 다른 문화권의 신화들이 보이는 유사성에 접근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이 확립되 었다. 첫 번째 접근법은 '확산론'이다. 즉 몇 안되는 신화 창조 지역(예컨대 인도 같은)에서 신화들이 만 들어진 다음 초기 시대에 문화간의 접촉을 통해 그 신화들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심리학적 관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신화의 핵심적인 요소들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요소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현재는 이 두가지 관점이 팽팽히 맞서고 있을 뿐 아니라 절충안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 이전의 역사로서의 신화 : 모권론 신화가 대부분의 경우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온 구전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신화는 세상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 따라서 신화는 그야말로 역사 이전의 역사이다. 19세기의 스위스 고전학자 요한 야콥 바호펜과 20세기의 영국 작가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가모장제(여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와 이를 대신하려는 신흥 가부장제(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간의 유사 이전의 투쟁에 관한 흔적-때로는 두꺼운 베일에 가려진 상태로 나타나고 때로는 아주 명백하 게 드러나기도 한다-을 찾아 냈다. 바호펜과 그레이브스는 이것을 유럽 고대사의 축을 이루는 계기들 가운데 하나에 대한 기록이라고 여긴다. 오늘날 이런 저런 신화들을 읽다 보면, 우리는 두 번 놀라게 된 다. 한 번은 비할 데 없이 고상한 철학적 내용에, 또 한 번은 여성들에 대한 지독하게 잔인한 태도에. 요한 야콥 바호펜(1815-1887) 스위스 바젤 태생인 바호펜은 법학을 전공했으나 고고학을 공부하여 그리스 고전학자가 된 사람이다. 바호펜은 신화에 매력을 느꼈으며, 유럽 고대사에 대한 단서들을 찾기 위해 신화를 철저하게 검토하려 고 노력했다. 결국 바호펜은 유럽 초기 문화가 뚜렷하게 세 단계로 나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 번째는 야만의 단계이고, 그 뒤를 이어 가모장제가 나타났으며, 그 후에는 가모장제가 가부장제로 대체 되었다는 것이다. 바호펜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투쟁의 역사 및 투쟁으로 인한 발전 초기 국면으로의 퇴보, 그리고 가부장제의 최후 승리가 많은 신화에 대단히 명쾌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바호펜은 야 만의 단계를 둘 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헤테로에서 파생된 헤타이리즘(hetairism, 성적 혼란 상태)라는 말로 불렀다. 이 단계에서는 남성이나 여성 어느 한 쪽이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잡지 않았다. 이 단 계는 성적으로 몹시 혼란한 시기여서,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여자들은 무방비상태였 다. 강간이 결혼을 대신했고, 가정 생활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바호펜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이 시기의 특성을 대표하는 여신은 질서나 도덕 같은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라고 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리를 이루었고, 이로 인해 헤타이리즘의 혼란을 대신하는 가모장제 사회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처음으로 문명이니 법이니 농업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이 꽃을 피웠다. 모성애와 어머니 여신 숭배를 이 시기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바호펜은 곡 물의 여신 데메테르가 이 시기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다. 어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지하 세계의 왕 하이데스가 데메테르의 딸 코레(혹은 페르세포네)를 강제로 붙잡아, 어머니에게서 떼어 놓는다. 바호펜에 따르면 흉포한 여전사족 아마존에 관한 그리스 신화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무리지어 다니던 여성들에 대한 조상 전래의 기억이다. 바호펜은 오이디푸스 신화가 이 투쟁의 세 번째 단계를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오이디푸스는 헤 타이리즘이라는 구시대의 상징인 스핑크스(스핑크스는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암수 동체이다)를 죽인다. 그러고 나서 테베의 통치자인 자기 어머니와 결혼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어머니 의 몰락을 묘사하는 비국적 사건들은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전환을 비교적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기록 으로 해석되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바호펜에게서 영향을 받아 오이디푸스론을 발전시켰다.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으로, 정신 분석의 EH 다른 선구자인 알프레드 아들러 역시 바호펜에 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아들러는 성인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는 것은 그들이 어릴 때 어머니에게 느꼈던 의존심을 보상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레이브스나 바호펜이라면 이런 현상을 성인 여자가 성인 남자를 지배했던 시절에 대한 조상 전래의 무의식적 기억이 의식의 영역으로 연장된 것이라고 설 명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있었던 흥미 있는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하겠다. 미국 평등권 수정안 승인을 위한 싸움이 전개될 때, 이 법안 반대자들은 남녀평등의 결과로 일종의 헤타이리즘(물론 이 용어를 사용 하지는 않았지만)이 야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고전학자이자 비평가로, 또 소설가인 동시에 시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였 다. 아일랜드 작가인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레이브스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타 고났다. 그레이스는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카이얌의 [4행 시집]공동 번역자이며, [런던 타임즈]는 그레이 브스를 존던 이래 영어권에서 나온 가장 훌륭한 사랑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다. 그레이브스는 [나, 클라우 디우스], [신 클라우디우스]와 같이 고대 로마를 다룬 역사 소설들로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잘 알려져 있 다. 특히 [신 클라우디우스]를 각색하여 만든 BBC-TV 연속극은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레이브스는 그리스, 게르만족, 켈트족, 셈족의 신화를 연구한 결과, 유럽 신화는 '하얀여신'(그레이브 스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이 유럽 전역에서 보편적인 어머니 대지 신격으로 통했던 원시 모권제 시기의 관점에서 볼 때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전 세대의 신들을 타도하고 그리스 신들 의 남성 지배자가 된 제우스에 관한 신화들을 그레이브스는 모권제에 대한 부권제의 승리의 기록들로 본다. 그레이브스는 모권제와 부권제의 투쟁 및 부권제의 투쟁 및 부권제의 최종 승리를 고대 유럽의 역사적 사실로 확신한다. 다른 문화권의 경우가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레 이브스는 그 유명한 저서 [그리스 신화] 서문에 이렇게 썼다. 고대 유럽에는 남신들이 없었다. 반면 대여신은 영원불멸하고 전지 전능한 존재로 여겨졌다. 뿐만 아 니라 아버지 노릇이라는건 개념조차도 없었다. 여신은 애인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쾌락을 위해서일 뿐, 상대를 아버지로 삼아 자식을 낳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여자 족장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으 며, 그에게 순종했다. 초기 시대 사회 생활의 중심지였던 동굴이나 오두막집에서 여자 족장이 돌보던 화 로와 모성은 남자들에게는 최고의 수수께끼였다...... 그렇지만 여자들이 종교 문제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음에도 남자들이 여성의 감독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그때까지는 남자들이 스스로를 약한 성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남자들은 가 모장제 하의 법질서를 위배하지 않는 한 사냥, 낚시를 비롯해 음식물을 채집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이나 침입자들로부터 부족의 영토를 지키는 일 등을 담당할 수 있었다. 바호펜과 마찬가지로 그레이브스도 달을 모권시대의 중요한 종교적 상징으로 보았다. 남동생 아폴론 이 문화와 예술의 수호신으로 태양과 동일시될 때,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고대 로마의 디아나)는 달과 동일시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사냥을 여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사냥의 신이라는 아르테미스의 역할은 초기 가모장제 시대의 사고 방식의 흔적으로 해석됨직하다. 그레이브스 는 아르테미스의 역할이 가모장제 시기의 유럽에서 남자들이 여자 족장의 용병이 되기 이전에는 여성들 이 사냥꾼과 전사의 역할까지 맡았음을 나타내준다고 보았다. 그레이브스는 가모장제 시대에는 시간이 달을 기준으로 측정되었는데, 이는 여성들의 월경 주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레이브 스의 주장은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예나 바호펜의 이론과도 일맥 상통한다. 시간 측정법이 태음력에 서 태음력으로 바뀐 것은 물론, 달을 근간으로 하는 종교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로 바뀐 것은 모 두 가모장제에서 가부장제로의 이행을 예증한다. 가모장제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종말을 맞은 것은 아니다. 가모장제와 가부장제의 투쟁은 오늘날 우리 문화에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의 여성 운동을 그레이브스는 고전기 이전부터 사회 를 지배해 온 가부장제의 횡포에 대한 반발로 보았다. 그레이브스는 유사 신화들에 대한 설명으로 확산 론을 지지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레이브스는 주로 유럽에만 관심을 두었으니 말이다. 그레이브스는 고대의 근동 지역과 유럽의 인도 유럽어권을 확실한 신화 산출 중심지로 보았다. 그리스 신화들은 신화의 두 진원지에서 유래한 전통들을 혼합한 혼합주의의 결과물이라는 게 그레이브 스의 견해이다. 신화 해석에서의 과도기적 견해 아돌프 바스티안(1826-1905) 베를린 사람인 바스티안은 의학이 전공이었으나 곧 의학 실습에 흥미를 잃어 자기가 정말로 관심을 갖게 된 민족학 분야에 전념했다. 바스티안은 이 분야를 주로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두루 여행했다. 그러면서 아주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문화권의 신화들이 아주 비 슷하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스티안은 이런 현상이 지역이나 시대를 뛰어 넘어 모든 인간들 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인가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견해를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었다. 이러한 바 스티안의 견해는 오늘날 신화의 현대 구조주의 학파와 심리학파에 모두 반영되어 있다. 바스티안은 신 화의 두 가지 구성 요소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신화의 두 가지 구성 요소란 기본 사고(모든 인간에 게 공통된, 특히 뇌에 집중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신화의 기본 양식들) 와 민족의 사고(특정한 시대에 특 정한 인종 집단에 의해 기본 사고가 독특하게 윤색된 것)을 말한다.인도 학자 아나다 쿠마라스와미와 미 국인 조셉 캠벨이 똑같이 지적했듯이, 바스티안의 접근법은 유사 신화에 대한 힌두의 전통적 견해와 유 사하다. 힌두교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신화의 요소들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마르가, 즉 보편적 통 로라고 한다. 이것이 바스티안이 말하는 기본 사고이다. 또 힌두교에서는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마르가 가 취하는 특수한 형태를 데시 마르가(데시는 '그 나라의'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이다. 한 가지 부 연해서 설명하자면, 방그라데시는, '벵갈리 민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레오 프로베나우스(1873-1938) 프로베니우스는 낮에는 독일 브레멘의 수출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그리스어와 인류학, 신화학을 공 부하던 아마추어 신화학자였다 프로베니우스는 이미 생전에 선사 시대 예술에 관한 세계 최고의 구너위 자로 인정받았다. 1898년 프로베니우스는 '문화권론'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혁명적인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인도에 이르는,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인도네시아와 오세아니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까지 이어지는 핵심적 신화 산출 지역이 있다고 믿었다. 달리 말하자면, 프로베니우스는 최초의 철 저한 확산론자였던 셈이다. 프로베니우스는 이 지역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가지 신화와 문화상 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면서, 유사 신화들은 학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이루어졌던 고대 민족들 간의 문화 교류로 인해 빚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고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뉴질랜드, 타히티, 이스터섬(칠레 해안), 하와이 같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섬들에 거주했던 것을 볼 때, 그들이 해로를 통해 아주 먼 지역까지 여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프로베니우스는 초기의 폴리네시아 사람 들이 이스터섬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고, 그들이 여행을 계속하여 역시 남아메리타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페루에 닿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 로 프로베니우스는 하와이 사람들이 해류를 타고 미국 북서부 해안까지 이동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프 로베니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노르웨이 탐험가 토르 하인에르달이 서사시 [콘 티기]에서 1947년의 여행 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하이에르달은 페루 문화와 폴리네시아 문화의 접촉이 가능했 음을 증명할 목적으로, 남아메리카산 발사 재목으로 만든 배를 타고 페루에서 폴리네시아까지 여행했다 는 것이다. 콘 티키는 페루의 여러 신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인데, 페루 신화에서는 콘 티키가 창조신의 이름이고 티키는 신의 형상을 나타내는 폴리네시아 말이다. 뤼시앙 레비 브륄(1859-1939) 저명한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부륄은 '원시 시대' 사람들, 혹은 '전통 사회' 사람들의 사유 과정을 집 중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 그는 '전통 ' 문화에서는 객관적 세계와 신화가 구별되지 않으며, 신화와 역사 또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렸다. 그러한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화가 유일한 역 사라는 것이다. 레비 브륄은 유사 신화에 관한 영향력 있는 이론을 진전시켰다. 그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신화의 모티브나 집단 표상-동일한 구성이나 등장 인물-이 분명히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에밀 뒤르케(1858-1917) ......종교에는 영원한 그 무엇이 있다. 신앙이나 숭배 같은 것 말이다. 태고의 신들을 숭배한다는 것은 제물을 매개로 하여 현실의 삶에 대비하는 행위이다. 이승에서의 삶이 신들의 삶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 이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세속화된 종교라 할지라도 과학으로는 도저히 해명되지 않는 아주 특별한 논 리를 버릴 수는 없으며, 그 점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 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몇 차례 에밀 뒤르켐의 글을 접해 본 바 있다. 에밀 뒤르켐 은 사회를 결속시키는 신화의 힘을 강조한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학자이다. 뒤르켐의 주장에 따르면, 신 화의 핵심 기능은 개인의 행위를 집단의 규범에 순응시키는 것이다. 원래 랍비가 되고자 했던 뒤르켐은 신화와 종교가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단히 흥미를 느꼈다. 특히 그는 사회 윤리의 요체라는 신화의 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물론, 국가 건립의 초석이 되기도 한 공면 신화라는 개념에 강한 인상 을 받았다. 뒤르켐은 시간상으로나 지리상으로나 전혀 연관이 없는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들이 지닌 놀 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집단 의식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했다. 그는 신화의 기본 원료들과 구성, 등장 인물 들이 인간 두뇌의 신경학적 기능에서 나온 결과물이며, 따라서 이런 것들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화의 보편적 양식들이 신화를 찍어 낸 틀이며, 각각의 독특한 문화들은 그 틀에 그들 나름의 성분을 쏟아 넣었다는 것이다. 뒤르켐은 [종교 생활의 기본 형태]라는 저작에서 이 렇게 말한다. 집단 의식은 정신(뒤르켐이 사용하는 정신이라는 용어는 영혼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시케에 가까운 말 이어서, 초자연적인 것,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을 뜻하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활동의 최고 형태이다. 왜냐하면 집단 의식은 의식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집단 의식은 모든 개인적, 지역적 우연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들을 볼 때 그 사물의 고정 불변하는 핵심적 측면을 본다. 그리 고 사물의 고정 불변하는 핵심적 측면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구체화한다......집단 의식 만이 모든 사물에 적용 가능한 틀을 정신에 공급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정신으로 하여금 사물들에 대 해 생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신화가 집단 의식-즉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조상 전래의 기억과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공도의 저수지-의 산물이라는 뒤르켐의 견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창시 한 구조주의 신화 해석 학파는 물론 칼 융이 제시한(그리고 조셉 캠벨이 발전시킨) 심리학적 신화 해석 법이 나오게 되었다. 뒤르켐 본인의 생애는 대단히 비극적이었다. 신경이 약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뒤 르켐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참담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독일인의 혈통을 물려 받은 교수가 사회학이라는 외국 학문을 가르쳤다고 비난받았다. 당시에는 사회학이 혐오스런 독일 수입 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난에는 반유대주의적 요소도 한몫했을 것이다. 비극은 이것만으 로 끝나지 않아, 다음 해에는 뒤르켐이 불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 듯이 뒤르켐은 신화 해석 분야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학자였다.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신화는 그것이 미개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서, 다시 말해 원시적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서 단 순히 말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다. 신하는 꾸며낸 이야기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태고적에 한 번쯤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생각되는 일, 그리고 그후로 계속해서 이 세계와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성서의 창조 이야기와 타락 이야기,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구원 이야기를 믿듯이, 미개인들은 신화를 믿는다. 성서의 이야기가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 살아 남아있듯이, 그리고 그 이야기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지배하고 행동을 제어하듯이, 미개인들에게는 신화가 똑같은 구실을 한다. 브로니슬라프 말리노 프스키는 폴란드계 영국인으로 원시 문화, 특히 그의 전공 분야인 태평양 트로브리앤드 제도의 문화에 서 신화가 잦는 힘에 대해 연구한 인류학자이다. 말리노프스키는 원시 시대 사람들이 신화를 유일한 역 사로 여겼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의 실제 생활들이 모두 신화에 묘사되어 있는 사건들의 재연 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말리노프스키는 신화가 전통 문화에서만 중심이 되었던 게 아니라 현재에 이르 는 역사상의 모든 문화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신화가 모든 의 례와 윤리 규범, 사회적 관계의 원천이며 한 민족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말리노프스키는 뒤르켐의 입장을 따랐지만 유사 신화에 대한 견해는 프로베니우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말리노프스키는 소수의 신화 중심지들로부터 신화의 주제들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신화의 유사성에 대한 심리학적 이론들 피에르 자네(1850-1947) 신들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종교가 여태껏 존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1900년 무렵까지 심리학계와 의학계는 무의식의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능을 증명하고 그것을 일반적 으로 받아들여 왔다. 1. 보존 기능 : 사사로운 기억들을 기록한다. 2. 해소 기능 : 한때 의식적이었던 것들이 무의식적인 것(예를 들어 습관 같은 것)이나 억압된 것으로 변한다. 3. 창조적 기능. 4. '신화 만들기 기능' 이것은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아마추어 심리학자인 프레데릭 아미어스가 만 들어 낸 용어이다. 아마도 마이어스는 신화나 서사시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 인간 정신 구조의 일 부분(그것도 변하지 않는 부분)이며, 그런 이야기들이 개개인의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연출된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밝힌 사람일 것이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피에르 자네, 칼 융이 막 활동을 시작하거나 활동 초기 단계에 있었던 것도 이때 일이다. 1900년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44세의 나이로 기념비적 저서[꿈의 해석]을 출간했다. 신화가 무 의식에 내재해 있는 이미지들의 표현이라는 이론이 처음으로 개진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피에를 자 네는 1900년도에 41세였고, 융은 25세의 의학도였다. 프랑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자네는 미국 심리학 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친구(베르그송은 자네와 같은 해에 태 어났다)였다. 특히 베르그송과 자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친구인 제임스)그 유명한 저서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자네 역시 종교와 신화가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 서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네는 그 시대에는 가장 저명하고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지만 오늘날에 는 프로이드, 융, 아들러 같은 동시대인들의 그늘에 가려 거의 잊혀진 상태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자 네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네는 프로이트의 첫짜가는 제자이자 프로이트 전기 작가인 어니스트 존스에게 심한 비난을 당하기까지 했다. 융과 마찬가지로 자네는 인간의 정신적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여러 가지 유형의 인간 행위를 이해하 는 데 관건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자네는 영성은 인간의 기본 요소이지, 낡아빠져 과학적 사고로 대 체된 문화 발전의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후자쪽 입장을 견지한 사람이 프로이트였다. 자네는 영매들에 관한 연구에 착수했는데, 만년에는 카톨릭 당국의 협력을 얻어, 마들렌이라는 종교적 무아경에 사로잡힌 여인에 대해 연구했다. 마들렌의 몸에는 성흔, 즉 역사상의 많은 성인들에게 나타났 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손에 난 못자국 모양의 실제 흉터도 있었다. 자네는 그러한 종교적 무아경을 병 적 흥분, 그러니까 히스테리의 아주 독특한 형태라고 진단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신의 신화적 기능들 을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자네는 카톨릭 신앙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종교관에 대해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자네가 불가지론자였다는 얘기도 있고 독실한 카톨릭 신 자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지만 자네가 마들렌을 실제로 접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자네는 자신은 카톨릭 신앙에 몰두해 있었으면서도 자녀들만은 개신교 신앙 속에서 자라도록 배려했다.) 자네는 전신의 기능을 경제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정신이 건강한 개인 안에서 가 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정신적 자원을 할당하기 위해 작용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자신의 감정을 희생 시켜 가면서까지 냉철한 논리를 지키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다. 반대로 논리보다 감정이 우세한 사람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네는 장신의 작화 기능(fonction fabulatrice)을 믿었다. 인간의 정신에 동일한 사유 공정이 있어, 그 공정을 통해 신화와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자네는 신화와 종교 의 발전에 관해 명확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들은 지극히 원시적인 단계에서부터 제의를 행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 제의는 아주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엄밀한 형식이 정해져 있는 복잡한 행 위이다. 이러한 제의들은 거래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도 모른다.(예를 들어, 비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비를 얻기 위해서이다.) 제의가 행해지고 난 뒤에는 그러한 제의를 정당화하고 제도화하기 위한 장 치로 신화가 만들어진다. 이 점에 대해서는 로버트 그레이브스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정령 숭배라 는 이러한 종교적 사고의 단계에서는 바위나 호수 등등의 자연물들에 영혼을 부여하거나 그것들을 인격 화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네는 이렇게 말한다. '정령 숭배는 인간들이 자신과 똑같이 말 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자기 뒤에 숨어 있으되,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적을 구별할 필요성 을 느끼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저절로 싹튼다.' 자네에 의하면,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신화가 요구된다. 모든 사회는 어느 곳에서 나 하나의 신, 혹은 여러 신들과 동맹관계 내지는 계약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 이유를 자네는 두려움 때문에, 혹은 도덕이나 사랑, 지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라고 설명한다. 한 사회에서 사제나 무당은 신으 로 하여금 뭔가 말을 하게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신이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신 화를 버린다. 많은 사회에서 이러한 예가 발견된다.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경우가 그러하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그들 사회의 요구에 응답하기를 중단하자, 사람들은 이시스 숭배니 미트라(페르시아의 빛의 신) 숭배니 하는 동양의 신비 종교들을 찾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이러한 신앙들-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이 낡 은 종교의 자리에 완전히 눌러 앉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들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인간에게 말한다.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 경로 가운데 하나가 기도이다. 자네는 기도를 개인과 그 개인의 정신이 나누는 내적 대화, 혹은 개인과 신경학에 근거한 신 사이의 대화라고 보았다. 나제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들은 선천적으로 자신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따라서 자네는 악마에 사로잡히는 것 역시 기도의 역효과라고 생각했다. 의식을 지닌 인격은 한걸 음 뒤로 물러선 상태에서 악이 영혼에게만 전가될 때, 사람의 영혼이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자네는 신 화보다 제의가 먼저이고, 제의 다음에 철학적 논리를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화가 나와서 종교가 되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개인과 영혼간의 체계적인 대화가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일정한 형태로 자리잡은 것이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종교이다.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에 모라비아 지방의 프라이브르크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빈에서 보 냈다. 현대 정신 분석의 시조로 여겨지는 프로이트는 꿈을 연구하는 것이 인간의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 한 핵심적인 요소라고 믿었다. 프로이트에게 신화는 무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이 집단적으로 투 사된 것으로, 일종의 공유된 꿈이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바스티안이나 융과는 달리 이러한 이미지들이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의식적 언어로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이러 한 이미지들이 오로지 개인의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의 산 물은 아니라는 게 프로이트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신화의 유사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하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무의식에서 나오 는 이미지들은 문화권에 상관없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프로이트 본인은 열성적인 신화 연구자였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유아적 단계의 성애를 느낀다는 오이 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면서,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에 손을 뻗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인물이다(뒤에서 소개한 '오이디푸스 신화'참고). 프로이트는 과도한 자 기애를 설명하는 데 적절한 용어가 필요해지자 또 다시 그리스 신화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지금은 일상 적인 단어가 되어 버린 나르시시즘(나르키소스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프 로이트는 자신의 사생활에서까지 신화를 비유로 사용하곤 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세상에 퍼뜨린 프로이트는 자기 딸이자 제자이기도 한 안나 프로이트를 자신의 안티고네(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가 자 기 어머니 요카스타 여왕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다)라고 불렀다. 프로이트는 이런 표현을 통해 안나가 단 순한 딸 이상으로 자기와 가깝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프로이트는 신화를 과학적 세계관으로의 불가치한 이행 과정에 따르는 과도기적 국면으로 여겼다. 정 통파 유대교 신앙 속에서 성장했음에도(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카톨릭 신자인 유모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프로이트는 자기가 아버지의 종교는 물론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고 썼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글에서 자신을 무신론자로 소개하기도 했다. [정신 분석 운동의 역사] 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템과 터부에 관한 네 편의 글에서 나는 분석을 매개로 하여 인종심리학의 문제를 논의하고자 했다. 이러한 논의는 근친상간을 금지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며 양심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 는 문제로 곧바로 연결된다. 인간의 우주관이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경우......그 진화 과정에 따르면 정령 숭배의 단계 뒤에는 종교의 단계가, 그 다음에는 과학의 단계가 이어졌다. 이 세 단계를 거 치면서 사유의 전능한 힘이 어떤 운명을 겪었는지 추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령 숭배의 단계에 서 인간은 전능한 힘이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의 단계에서는 그 힘을 신들 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전능한 힘을 진정으로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 간들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신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신들을 통제할 권한 만은 자신들에게 남겨 두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과학적 태도에는 인간의 전능한 힘이 들어설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인식하고, 체념의 심정으로 죽음 을 비롯한 불가피한 운명들을 감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실의 법칙들에 대항하는 정신 의 힘을 신뢰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사유의 전능한 힘에 대한 원초적 믿음은 아직도 단편적으로나마 살 아 있는 모양이다. 프로이트는 신화의 요소들을 모든 무의식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로도, 무의식의 선천적 특질로 도 보지 않았다. 즉 신화의 요소들이 인류의 무의식에 들어 있는 내밀한 집단적 이미지의 투사라고 보 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록 개인의 무의식이기는 하지만 무의식이 외부로 투 사된 것이 신화라고 여겼고, 꿈의 이미지들과 신화의 이미지들이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프로이트가 한때는 자신의 후계자였다가 나중에는 적대자가 된 칼 융을 위 해 발판을 마련해 놓은 셈이다. 헨리 F. 엘렌베르거는 엘렌베르거판 정신 분석 운동의 역사랄 수 있는 [무의식의 발견]에서 바호펜의 모권론과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이론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지적 하고 있다. 신화와 개인의 심리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바호펜도 감지하고 있었는데, 유럽 초기 문화의 발전에 관한 바호펜의 이론과 인간의 발전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바호펜 프로이트 원시적 난교의 헤타이리즘기 유아기의 성, 다양한 형태의 성 도착 가모장제 : 어머니들에 의한 사회지배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고 전적으로 의존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시기 디오니소스 시기 : 주신 숭배로의 복귀, 헤타이 남근 숭배 단계 : 남자 아이가 자신의 남근을 의식 리즘으로의 퇴행 하고 남성다워진다 오이디푸스 신화 : 가모장제에서 가부장제로의 남자 아이가 어머니에게 성적 애착을 느끼고 아버 이행에 대한 증거, 과도기의 사회적 압박감 지를 질투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단계를 체험 하고 압박감에 시달린다. 가부장제 : 아버지들에 의한 지배 성적으로 어른이 되는 단계 : 남자 아이들은 이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여자 아이들은 자신 을 어머니와 동일시한다. 가모장제와 헤타이리즘의 억압, 이제 이 둘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억압되는 초보적 단계의 기 신화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다. 억 상실 오이디푸스 신화를 읽어 보면 오이디푸스 신화와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유아기의 성 이론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요카스타(이오카스테)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라이오스는 왕 위를 이을 자식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무녀가 그에게 들려준 신탁은 너무나 끔찍했다. 라이오스에게는 자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것인데, 라이오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커서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이오스는 이 예언에 기가 질려, 요카스타를 왕궁의 작은 방에 가두도록 명령했다. 요카스타는 절대로 라이오스와 동침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받았다. 그렇지만 요카스타는 이 일로 마음이 상했지만 여전히 자식을 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라이오스와 동침할 수 있을지 궁리하 기 시작했다. 요카스타는 하인들과 공모하여, 라이오스를 과음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보 통 포도주를 물과 섞어 마신다. 알콜 농도를 낮추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하인들은 라이오스를 취하게 만 들려고 희석시키지 않은 포도주를 주었다. 이 음모가 성공하자, 요카스타는 취한 남편을 유혹해 아들을 잉태했다. 라이오스는 사내아이를 얻자 예언이 생각나, 아이의 양쪽 발에 못으로 구멍을 뚫은 다음 두 발을 한 데 묶은 채 아이를 산에 죽도록 버려 두었다. 그러나 신들은 라이로스의 아들이 장수를 누리도록 운명 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지나가던 양치기가 아가 울음 소리를 듣고, 아기를 집으로 데려가 키웠다. 구멍 뚫린 아이의 발을 보고 양치기는 아이 이름을 오이디푸스(부은 발이라는 뜻)라 지었다. 나중에 양치기는 주운 아이를 코린트로 데리고 가서 폴리보스 왕의 하인들에게 선물했다. 아이는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 은 듯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폴리보스와 그의 아내 페리보에아는 자식이 없어 왕위를 이을 후사가 필요 하던 참이었다. 폴리보스는 오이디푸스를 양자로 삼았다. 이 이야기의 다른 판본에는 라이오스가 아기의 발에 구멍을 뚫고 두 발을 한데 묶은 다음, 아이를 나 무 상자에 담아 바다로 떠내려 보낸 걸로 되어 있다. 상자가 해변으로 떠밀려 올라왔을 때 페리보에아 왕비가 그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왕위 이을 자식을 낳아야 했던 페리보에아는 그 아기를 숲 속으로 데 리고 들어가 마치 자기가 출산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는데, 하인들이 그 비명 소리를 들었고, 페리보에 야가 마침내 대 이을 자식을 낳았다는 소문이 이내 왕국 전체에 퍼졌다는 것이다. 경위야 어떻든, 폴리 보스와 페리보에아는 오이디푸스를 사랑하여 그를 응석받이 왕자로 길렀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가 커 갈수록 그가 폴리보스와 페리보에아의 친 아들일리 없다는 사실이 외양에서부터 드러났다. 아이들은 오 이디푸스를 주어 온 아이라고 놀려댔다. 오이디푸스의 친부모가 누구일까에 대해 숱한 소문이 나돌았다. 오이디푸스는자신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조언을 구하러 신전을 찾아갔다. 무녀는 그가 친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 났다고 얘기해 주었다. 신탁을 전하는 무녀는 오 이디푸스에게 말했다. '이 성스런 곳에서 썩 사라지거라, 이 소름끼치는 놈아, 이 괴물아!' 오이디푸스는 무녀의 말에 놀란데다 아직은 폴리보스와 페리보에아를 친부모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코린트에 있는 부 모의 궁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코린트에서 나오는 길에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진짜 아버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 일행과 마주쳤다. 라이오스는 그 사내에게 왕의 행렬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키라고 했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자기 도 왕가의 아들이니 라이오스보다 못할 게 없다고 대꾸했다. 라이오스는 자기 마부에게 길을 계속 가라 고 명령했다. 오이디푸스는 머리끝까지 화가나 마부에게 창을 던져 마부를 죽이고 말았다. 그 순간 말들 이 놀라 앞발을 쳐들었고, 라이오스는 마차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이렇게 해서 예언은 실현되었다. 오이 디푸스가 친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라이오스는 어떻게 하면 자기 왕국에서 스핑크스를 없앨 수 있는지 상담하기 위해 델포이의 신탁소로 가는 길이었다. 스핑크스는 여자의 머리와 뱀의 꼬리, 그리고 사자의 몸과 천사 같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테베로 가는 길목에서 행인들의 길을 가로막고 수수께끼를 냈다. 나그네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스핑크스는 나그네를 죽여서 먹어 버리곤 했다. 이 때문에 교역이 끊겨 테베의 국고가 고갈되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거의 다 가서 스핑크스와 마주쳤다. 예외 없이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수수 께끼를 냈다.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였다가 낮에는 두 개가 되고, 저녁에는 세 개로 변하는 게 무엇이 냐?' 아직까지 이 수수께끼를 푼 나그네는 없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인간 이다.' 사람은 갓난 아기 때는 두 다리와 두 팔로 기어 다니다가 성장하면 두 다리로 걷고, 늙은이가 되 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니 세 다리로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맞추 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테베 사람들은 스핑크스에게서 해방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테베는 다시 그리스에서 최고의 번영 을 누리는 도시가 되었다. 테케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테베의 왕으로 맞이했다. 라이오스가 세상을 떠 난 상태였기 때문에 요카스타는 흔쾌히 그 젊은 영웅과 결혼했다. 사실 요카스타로서는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예언은 고스란히 현실로 옮겨졌다. 신들의 기본법 을 무시한 이같은 근친 상간에 형벌이 따르지 않을 리 없었다. 테베에 무서운 역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 다. 오이디푸스는 테베 사람 하나를 신전으로 보내, 어떻게 하면 이 역병을 퇴치할 수 있는지 알아 오게 했다. 무녀는 이렇게 말했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를 없애시오. 그러면 역병이 사라질게요' 오이디푸 스는 순순히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저주하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범인을 찾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 하여 수사가 시작되었다. 몇 달이 지나도 범인이 잡히지 않자, 오이디푸스는 끝내 역병을 퇴치하지 못하 게 될까봐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리스에서 제일 유명한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찾아와, 할 얘기가 있으니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테이레시아스 자신도 흥미로운 인생 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한번은 그가 교미하려고 하는 뱀 두 마 리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뱀들의 시도가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말더라는 것이다. 뱀들이 테이레 시아스를 공격하자 테이레시아스는 지팡이로 암컷을 쳐서 죽였다.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남자가 뱀 암 컷을 죽이면 그 남자는 동성애자가 되거나 심하면 여자로 변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테이레시아스 의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음탕한 창녀가 되었다. 그런데 테이레시아스가 뱀들이 있던 곳으로 돌 아가 수컷 뱀을 죽이자 상황이 원래대로 되어, 테이레시아스가 남성을 되찾았다. 테이레시아스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테이레시아스가 우연히 처녀 여신 아테나가 알몸으로 목욕하는 모습을 엿보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일 때문에 테이레시아스는 장님이 되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아테나 를 찾아가, 테이레시아스가 아테나의 목욕 장면을 본 것은 고의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연이었을 뿐이 라고 설명했다. 아테나는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뜨게 해 주지는 않았지만 애완용 뱀에게 그의 귀를 핥게 하여, 테이레시아스가 새들이 지저귀는 예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하여 테이레시 아스가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예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다른 판본에는 헤라가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멀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헤라와 제우스가 여느 때나 다름없이 제우스의 외도 때문에 부부 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우스는 남자들보다 여자 들이 성관계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로 자기 행동을 변호했다. 그러나 헤라는 제우스의 말에 승복하지 않고 테이레시아스를 불러,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가름해 달라고 했다. 남자이면서 여자가 되 어 본 적이 있는 테이레시아스가 심판관으로는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테이레시아스는 다음과 같 은 시를 지어 그 문제에 답했다. '성적 쾌락의 요소가 열이라면, 아홉은 여자의 것이요 남자의 것은 하 나뿐이로다!' 제우스는 자기 견해를 지지하는 이 싯귀를 듣고 호탕하게 웃었으나 헤라는 불 같이 진노 하여 그 예언자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테이레시아스는 판결을 내려 준 보답으로 남달리 장수 를 누리게 되었다. 이 예언자가 아주 동떨어진 시기를 다루고 있는 수많은 신화들에 등장하는 것도 바 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테이레시아스의 폭넓은 지식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 때문인지, 왕들이 이 눈먼 예언자에게 분쟁 조정 이나 범죄 사건 해결을 부탁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사건 해결을 돕겠다는 테이레시아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테이레시아스는 라이오 스의 살인자가 히드라 이빨에서 나온 사람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히드라 이빨을 가진 자가 죽으 면 역병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히드라는 이미 죽어 없어진 괴물이었다. 그런데 히드라의 이빨들이 땅에 뿌려지자 그 자리에서 장성한 인간들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히드라 이빨에서 나온 자손 가운데 한 사 람이 요카스타의 아버지이자오이디푸스의 외할아버지인 메노에케오스였다. 테이레시아스의 얘기를 들은 메노에케오스는 자기가 이미 연로하여 어차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성벽에서 뛰어내렸 다. 그러자 역병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테이레시아스가 염두에 둔 사람은 메노에케오스가 아니었다. 문제의 인물은 바로 메노에케 오스의 손자인 오이디푸스였다. 오이디푸스 역시 히드라 이빨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테이레시아스가 테 베의 법정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 노인의 손자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자, 요카스타는 메노에케오스에 게는 손자가 없다고 대꾸했다. 결국 예언자는 오이디푸스가 메노에케오스의 손자이자 라이오스와 요카 스타의 아들이며, 요카스타의 현재 남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친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더욱 끔찍한 일은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가 근친 상간으로 딸 안티고네를 낳았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 얘기를 처음에는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이디 푸스는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깨끗하게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페리보에아에게 연락해, 자기의 출생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페리보에아와 폴리보스의 아들인지 아닌지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페리보에아는 편지로 답해 주었다. 몇 년 전에 폴리보스가 페리보에아에게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탁의 충격적인 예언을 말해 주었던 것이 다. 페리보에아의 편지에는 그 예언의 내용은 물론, 아기를 어떻게 발견해 키웠는지에 대해서도 적혀 있 었다. 페리보에아는또 라이오스가 살해될 당시 오이디푸스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전했다. 페리보에아의 편지는 테이레시아스의 주장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요카스타 왕비는 목을 매 자살했고, 오이디푸 스는 양심의 가책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제 손으로 두 눈을 파냈다. 오이디푸스의 누이이자 딸인 안티고네가 그를 이끌고 멀리 떠났다. 오이디푸스는 그 후 여려 해 동안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나 중에 영웅 테세우스를 만났다고 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 가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얘기도 있고, 콜로노스에서 복수의 세 여신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우리 삶 속에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많은 고통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체험하거나 어떤 사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진리의 희미한 윤곽을 순간적으로나마 감지할 수 있다. 우리 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생각하다가 어렴풋이나마 진리라는 것을 감지하기도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서 당하는 고통은 동시에 하나님이 자청해서 겪는 하나님 자신의 불가피한 고통이기도 한 것이다. 또 눈먼 오이디푸스의 죽음에 관한 신화 같은 것을 읽다가 진리를 감지할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는 너무 잔인하고 부당하게 고통을 겪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신화에 내포되어 있는 화해의 의미는 목전의 삶 과 관련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빅터 콜랜츠 (1893-1967)영국 출판업자 겸 작가, [어둠에서 빛으로} 칼 구스타프 융 신화는 무의식적 인식과 의식적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없어서는 안될 지극히 자연스러운 중간 단계 이다. 우리가 우주 속에서 인간의 실존이 갖는 의미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세계관을 갖게 도리 때, 즉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작용하는 온전한 정신으로부터 나온 세계관을 갖게 될 때, 신화적 발언에 대 한 욕구는 충족된다. 무의미는 삶의 충일을 저해하며,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란 병과 같은 것이다. 의미 는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많은 것들을-어쩌면 모든 것을-견디게 만든다. 과학은 결코 신화를 대신하지 못하며 그 어떤 과학으로도 신화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신이 신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속 에 내재해 있는 신적인 삶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우 리가 아니다. 오히려 신화가 우리에게 신의 말로서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독일어 사용 지역인 스위스 바젤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평생 을 바젤과 취리히를 오가며 스위스에서 보냈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요한 야콥 바호펜이 융의 친 할아버지(할아버지의 이름도 칼 구스타프였다.)와 친구 사이였다는 점이다. 연로한 바호펜은 이 정신 의 학의 선구자가 어린 시절에 바젤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내과 의사 겸 신경과 의사로 수련을 받았던 융은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한동안 융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 니, 자기 뒤를 이어 국제 정신 요법 운동을 이끌 '후계자'니 하는 말로 지칭했었다. 하지만 1912년에 이 르러 두 사람은 결별했다. 융은 자네나 그 밖의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사상 형성에 기여한 바를 스스럼 없이 인정했다. 그러나 프로이트 본인은 이것을 인정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융은 프로이트의 그 거 룩한 오이디푸스 콤풀렉스 이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융은 사내아이가 어머니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고 아버지를 질투한다는 가정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융은 또 바스티안이라든가 레비 브륄, 뒤르켐 같은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들의 연구 성과를 통합하여 자신의 심리학 이론을 확립했 다. 하자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가 여전히 프로이트의 주장대로 꿈과 신화 속의 이미지들이 확하 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융은 꿈이나 신화의 이미지들이 개인의 기억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융은 꿈의 상징과 신화에서 발견되는 상징들 간의 연관에 대해 초기에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찍이 1909년에 나는 잠복성 정신병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내가 신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융은 프로이트가 신화와 종교를 개인 무의 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단순하게 처리해 버리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융은 신화와 종교의 이미지들을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보았다. 융의 이러한 이론은 1970년대와 80 년대를 거치면서 조셉 켐벨에 의해 일반화되었다. 캠벨은 이렇게 썼다. 칼 구스타프 융은 전혀 다른 신화 접근법을 제시했다. 그는 신화와 종교의 이미지들이 삶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목적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우리 신체의 모든 기관들-성기만이 아니 라-은 각자 나름대로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은 의식의 통제를 받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외부 지향적인 우리의 의식은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에 신경을 쓰다 보면 자칫 이러한 내부 세력 과의 조화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신화를 제대로 읽을 경우, 신화는 우리가 내부 세력과의 조 화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된다고 융은 말한다. 신화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인지되고 완성 되어야 하는 정신의 힘에 대해 사실적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 힘이란 인간의 정신에 언제나 공 통적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수천 년 간에 걸쳐 세파를 견뎌 나올 수 있게 해 준 인 류의 지혜를 의미한다.......따라서 과학이 신화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프로이트가 신화를 개인 무 의식의 투사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신화적 사고는 어쩔 수 없이 과학적 사고로 대체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는 점은 여러분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수면중에 들어가는 심층 세계가 아닌 외부 세계와 관련을 맺는다. 우리는 꿈을 통해, 그리고 신화 연구를 통해 이러한 내부 세력과 대화를 나눔으 로써 더 깊이 있고 지혜로운 우리 자신의 내적 자아라는 넓은 지평과 만나 화해할 수 있게 된다. 마찬 가지로, 신화를 소중히 지켜 가는 사회는 인간 정신의 가장 온전하고 윤택한 층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게 되는 것이다. 융은 바스티안이 개진한 '기본사고'라든가 뒤르켐의 '집단 의식', 레비 브륄의 '집단 표상'과 같은 맥 락에서 '집단 무의식'을 믿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꿈과 신화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무의식의 요소 를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고 본 것이다. 집단 무의식에는 꿈과 신화의 원본들이 내포되어 있다. 융 은 꿈과 신화속의 등장 인물들을 원형(archetype)이라 부른다. 예컨대, 융과 캠벨은 영웅을 모든 유사한 영웅 신화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과 동일시한다. 마찬가지로 '협잡꾼' 역시 비슷한 신화들에 원 형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고 보았다. 집단 무의식에 대해 융은 이렇게 말한다. 경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무의식의 표면층은 두말할 나위없이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이것 을 개인 무의식이라 부른다 그러나 개인 무의식은 더 깊은 층에 의존하고 있다. 무의식의 깊은 층은 개 인의 경험에서 기인하지 않으며 개인에 의해 획득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다. 나는 이 깊은 층을 집단 무의식이라 부른다. 내가 집단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는 이 무의식 층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신과 달리, 집단 무의식은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어떤 개인 의 경우에나 거의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집단 무의식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존재 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정신은 각자의 개성에 앞서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집단 무의식 이라는 이 정신의 공통 분모는 현재의 우리 개개인 안에도 자리잡고 있다. 이제 내 논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직접적인 의식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이 경험에 입 각한 유일한 정신이라고(우리가 이 직접적인 의식에 개인 무의식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고는 해도)믿고 있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의식 외에도 집단적이고 보편적이며 비개인적인 성격을 띤 제2의 정신 체계 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제2의 정신 체계에는 개인차라는 것이 없다. 누구나 똑같은 집단 무의식을 지니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미리 존재하고 있는 형태들, 즉 원형들로 이루어지는데, 원형들 은 종속적으로만 의식에 떠오르며 정신의 특정한 요소들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한다. 융은 원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형이라는 개념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고 여겨지는 정신의 일정한 형태를 가리킨다. 신화학에서는 이를 동기라 부른다. 이것은 원시 심리학에 서는 레비 브륄의 '집단 표상'개념에 상응한다. 그리고 비교 종교학 분야에서는 위베르와 모스(마르셀 모스는 위르켐의 조카였다.)가 이것을 '상상력의 범주'라고 정의했다. 아돌프 바스티안은 오래 전에 이것 을 기본 사고 또는 근본 사고라 불렀다. 이런 견해들에 비추어 볼 때 나의 원형-문자 그대로 미리 존 재하는 형태-개념은 독불장군이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들에서 이미 인식되고 명명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원형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말이 신화나 비교의 가르침, 전설 등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지금까지 신화학자들은 태양, 달, 기상, 식물 등 이런 종류의 다양한 개념에 의지해 왔다. 하지만 신화가 영혼의 성격을 밝히는 최초의 정신(혹은 마음) 현상이라는 사실을 신화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절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원시인은 명백한 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 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대신 절실한 욕구를 하나 가지고 있다......외적인 경험들을 고스란히 내적, 정신적인 사건들과 일치시켜 보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여름과 겨울, 달의 추이, 우기 등등 과 같은 자연의 신화적 가공들은 결코 객관적 경험을 비유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내밀하고 무의식적인 정신의 극적 사건(이것은 투사를 거쳐 인간의 의식으로 떠오른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이다. 융의 원형 개념과 빅토르 위고가 설명하는 문학에서의 전형 개념 사이의 여러 가지 유사점이 눈길을 끈다. 다음은 리처드 엘만과 찰스 피델슨 주니어가 엮은 [현대의 전통]에서 발췌한 위고의 글이다 ......전형은 살아 있다. 만약 전형이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 환영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전이라고 불리 우는 비극은 화신들을 만들어 낸다. 다 시 말해 드라마가 살아 있는 전형들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이 전형들의 견본은 인간이다. 인간의 얼굴 을 한 신화는 너무도 생생하여 거울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진다......전형들은 미리 보여지 는 신의 모습이다. 천재들은 그것을 알아본다. 신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확신을 고취시키기 위 해 인간을 통해 가르침을 주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시인은 살아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를 걷는다. 시인은 그들의 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형들이 효력을 갖는 것이다. 인간이 전제라 면 전형은 결론이다. 신은 현상들을 창조하고, 천재는 신이 만들어 낸 현상에 이름을 붙인다. 전형들은 예술에서나 자연에서나 평범하게 통용된다. 전형들은 현실로 옮겨진 이상이다. 이런 형상들 속에 인간의 선과 악이 들어 있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런 형상들 하나 하나에서 인간의 속성이 드러난다. 융은 신화가 인간의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융은 뉴멕시코의 푸에블로족을 방문했을 때 그 러한 예를 발견했다고 한다. 융은 푸에블로족이 외부 사람과 그런 문제에 대해 얘기하기 꺼린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늙은 추장이 융에게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태양이 신입니다. 누구나 신을 볼 수 있지요.' 그러고 나서 추장은 푸에블로족의 의식 춤은 태양으로 하여금 계속 빛을 발하고 정해진 궤 도를 유지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푸에블로족이 태양의 무사를 기원하는 것은 자신 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라고 했다. 그 노인은 자신들의 태양춤이 잊혀질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몹시 염려했다. 융은 집단 무의식론을 계기로 비교, 영지주의, 연금술, 신화 등을 폭넓게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동일한 우너형의 일 관된 패턴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융 본인은 자신의 종교관에 대해 똑부러지게 설명한 적이 없다. 조셉 캠벨은 융을 다신론자라고 편한 다. 힌두교도들이 여러 신들을 브라흐만의 현시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과 유사하게, 융은 하나뿐인 신 의 현시로서의 여러 신들이 원형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융은 목사인 자기 아버지에 대해 대 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신앙의 위기를 경험했지만, 너무 나약한 나머지 위기 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에게 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융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개신교의 어법으로 하느님에 대해 종종 얘기했다. 원형이 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모든 인간의 정신 속에 원형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고려할 때, 어쩌 면 융은 이 t상 모든 것 안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만유 내재신론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만 은 확실하다. 융은 종교 생활의 요소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들을 프로이트처럼 단 순히 투사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내가 판단하기에, 융은 별개의 선험적 하느님을 믿었던 것 같다. 원형 들을 통해 인간의 경험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느님을. 융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나치가 지원하는 독 일 정신 의학회 회장을 맡았던 전력 탓에 융은 나치 동조자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융은 자기가 그 모 임의 회장직을 맡음으로써 독일의 많은 유대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러한 비난에 분노를 표시했다. 융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제자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는 융이 나치에 동조적이었다고 해석됨직한 논문을 몇 편 발표했지만 1940년 이후에 나온 그의 글은 한결같이 친연합국 색채를 띠고 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타고난 영적 행위를 이해하고 종교를 인간 속성 의 변하지 않는 일부-시효 지난, 하나의 단계가 아닌-로 보는 데 신화와 종교에 대한 융의 접근법이 많 은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미국 개신교 신학자 H. 리처드 니버가 융의 말을 인용했고, 개신교, 카톨릭, 동방 정교회의 여러 신학자들이 융의 글을 이용해 왔다. 융은 '하느님의 자녀됨'과 성령의 역할이 기독 교 신앙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추측함으로써 교회 내부에서 광범위한 영성 운동이 전개될 것임을 예보했다.(로버트 L. 무어가 편집한 [칼 융과 기독교 영성]을 보시오.) 뉴에이지 종교는 종교와 신화에 대한 융의 접근법과 나란히 융의 원형을 새로운 다신주의를 정당화하 고 종교를 비의 의 상징으로 단순화하는 데 적용해 왔다. 여기에서 융의 이론은 신영지주의(기독교의 한 형태로, 신앙이 아닌 선택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비밀스런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를 위한 심리학적 근거로 제시된다. 여하튼 융이 장례식을 집전한 개신교 목사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20세기의 사상가들이 신앙 생활의 존엄성과 지적 위상을 팽개쳤으나 융이 그것을 도로 회복시켜 놓았다며 융을 칭송했다. 신 화 해석에 대한 융의 접근법이 사회학, 인류학, 문학 비평과 정신 의학을 혼합함으로써, 유사성에 대한 흥미있는 심리학적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의 비심리학적 접근 : 구조주의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아마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지금의 나를 구조주의자로 불리우게 만든 어떤 요소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내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나는 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아 당연히 글을 읽을 줄 몰랐던 때부터 내가 정말로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우기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나한테 왜 글을 읽을 줄 안 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상점의 간판을 볼 때-예컨데 boulanber(제과점을 뜻하는 프랑스어)라 든가 boucher(정육점을 뜻하는 프랑스어)같은 것-뭔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 가 뭔가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모양 면에서 볼 때 두 단어에 확실하게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그 비슷한 점이란 문자로 표현하면 두 단어에 똑같이 사용된 첫음절 'bou'에 지나지 않 는다. 구조주의적 접근법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표면상의 차이들 속에서 변하지 않 은 것, 혹은 변하지 않는 요소를 발견하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 이전의 현대적 신화 해석, 즉 프로베니우스, 바스티안 레비 브륄, 뒤르켐 등의 신화 해 석은 문화사와 각 문화권 내부의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삼고 있다. 자네, 프로이트, 융(캠벨도 융과 같은 입장이다)의 심리학적 접근에서는 신화가 문화사와는 달리 내밀한 심리학적 근원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 다. 그러나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에서는 제3의 접근법이 제시된다. 1960년대에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여 과학계와 인류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인간 사고의 변하 지 않는 구조를 해명할 수만 있다면 인간 행위의 법칙이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확실하고 명쾌하게 공식 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브뤼셀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에서 성장했고 일생의 대부분 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가 루시앙 레비 브륄과 에밀 뒤르켐의 후계자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여러분도 기억하겠지만 뒤르켐은 유사 신화들이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신화의 틀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빈 헤리스는 자신의 저서 [문화적 유물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뒤르켐의 선례에 따라, 정신이 모든 사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틀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틀이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이다. 이러한 틀은 지극히 기본적인 형 태로 모든 인간의 정신에 자리잡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뇌에서 작용하는 신경 생리의 일부이다. 하지만 각 문화는 이 틀을 그들 나름의 독특한 내용-그들 나름의 생각-으로 채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른바 원시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현재의 우리와 똑같은 두뇌 구조를 가지고 있다 는 뜻에서, 전통 문화에 대해 말할 때 원시라는 용어를 피하는 신중함을 보인다. 원시적인 사람은 신체 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원시적이 라는 말에는 유치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의 현대적 사고 방식은 과학과 기술의 산물 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 사고나 신화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우 리의 사고는 부족민들의 사고와 똑같은 기본 구조속에서 작용한다. 현대 신화 해석가들의 글 가운데서 레비 스트로스의 글이 가장 읽기 힘들다는 느낌이 들때가 더러 있다. 그의 저작들은 추상 명사와 복합 어, 그리고 구조들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도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략적으로 얘 기하자면 구조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구조는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체도 아니요, 문화사의 주제나 경향도 아니다. 뒤르켐이나 다른 초기 인류학자들의 신화관-신화가 집단 문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본다-과 달리, 구조는 인간의 기본 적인 사고 메카니즘이 발현된 거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어떤 사회를 연구할 때 연구 대상이 되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체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구조라고 말한다. 2. 모든 인간은 신경학상 기본적으로 동일한 사고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다. 뇌의 이러한 기본 구조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라는 점이 유사 신화들을 설명해 준다. 레비 스트로스는 뒤르켐의 틀을 기본 세포라고 부른다. 신화들이 유사한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기본 세포를 가지고 있기 때 문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 세포들은 독특한 문화라는 소프트웨어로 채워져 있다. 3. 인간들은 변증법적 술어로 사고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신/악마, 밝음/어둠, 선/악 들과 같이 서로 대 립되는 것을 짝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문화의 신화에 등장하는 주제가 무슨 조각 그림 맞추기라도 되는 양 다른 문화의 신화와 짝지어지기 전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데, 이것은 우리의 이 원주의적 사고 방식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신화에 여러 가지 주제가 등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각각의 주제들을 그에 반대되는 주 제들과 연결시키다 보면 구조 분석은 몹시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견해 중에 서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신화의 구조와 음악의 구조를 비교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나 음 악이나 그것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일 때만 의미가 살아나는 특수한 형태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와 의미]에서 뽑은 구절이다. ......내가 말하고자 한 요점은 악보의 경우가 꼭 그렇듯, 신화를 시간이나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사건 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건 무리라는 점이었다. 신화를 무슨 소설 읽듯이 한 줄 한 줄 읽어서는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신화를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해야 하며, 연속되는 사건들 을 통해 신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각각의 사건들 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서로 다른 시점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서로 다른 시점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사건들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묶어서 보아야만 신화의 의미가 전달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케스트라 총보를 읽듯이 신화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각 파트별 악보 가 모여 이루어지는 오케스트라 총보를 대할 때처럼 신화를 다루어야만 우리는 신화를 총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으며, 그 신화에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 구조주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첫째 이유는 구조주의의 방법이 신화로부 터 진실을 거세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수천 년 간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어 온 제 재를 몹시 메마르고 생기 없게 다루는 듯하다. 비평가들은 구조 분석이 신화 연구를 필요 이상으로 복 잡하게 만들고 신화 연구를 선택받은 소수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만든다고 말한다. 구조주의가 신화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너무 복잡하고 추상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 방식에 대한 또 다른 비판 은 누구나 구조를 찾고자 하면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융이나 프로이트식의 심리 학적 접근을 거부한다. 기본 세포들은 두뇌 구조의 일부이지, 꿈이나 신화에서 드러나는 잠재 의식의 요 소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융이나 캠벨의 이론은 물론 우리가 이 책에서 만난 다른 신화 해석가들의 이론과도 상반된다. 하지만 구조주의에 대한 가장 혹독한 비판은 구조주의가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 과 문학 평론가들은 말한다. 구조주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그리고 실제로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기 본 구조가 있다면-우리는 생물학상으로 생각하는 기계 내지는 인공 두뇌에 지나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 떻게 인간이 감정이나 신앙같은 것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구조주의는 인간의 기능 가운데서도 가장 인 간적인 기능인 신화에 냉철한 과학을 들이댄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에 구조주의는 사회 과학 분 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특히 그랬다. 그렇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아직 중력의 법칙처럼 확실하고 명쾌한 사고의 법칙을 공식화하지는 못했다. 신화에 대한 철학적 시각 폴 리쾨르(1913-) 프랑스의 기독교 철학자 폴 리쾨르는 같은 나라 사람인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와는 정반대로 인간의 감각기능에 관심이 많았다. 인생에서 의미감이 잦는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탓에, 리쾨르는 인간을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실존의 양극 사이에서 헤매는, 나약하고 오 류에 빠지기 쉬운 존재로 본다. 리쾨르에 따르면 신화는 파토스의 부르짖음이다. 즉 신화는 객관적이고 유한한 세계를 무한한 세계와 조화시키려는 고뇌에 찬 시도인 것이다. 리쾨르는 인간이 이 두 개의 극 단을 조화시키기 위해 초월적인 신의 생각에 늘 마음을 열어 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 스도를 성육신으로 보는 기독교의 관점 안에서 이 두 극단이 조화를 이룬다고 믿는다. 리쾨르는 미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전환에 관심을 보인다. 미토스는 신화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이다. 미토스는 원래 논쟁으 여지없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확실하고 궁극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의 '신화' 항목을 참고하시오)반대로 로고스는 '말'을 뜻 하 는 그리스어로, 논쟁이나 토론의 여지가 있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미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이행이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화에 근거한 세계관에서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철학적 사 변으로의 이행이다. 미토스가 로고스가 되면서 확실성은 사라지고 확실성과 함께 의미감도 사라졌다. 인 간은 인간이 우주에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잃고 나약해졌다. 한때 신화가 제공했던 안정감을 대신 메우기 위해 이제 인간들은 삶에 필요한 의미감을 줄 수 있는 감각 능력에 의지하고 있 다. 리쾨르의 논리는 실존주의 철학과 신화 해석의 접점인 탓에 흥미를 끈다. 신화는 느껴진 것이기에 현실이다. 칼 야스퍼스(1883-1969) 독일 올덴부르크 태생인 칼 야스퍼스는 신경 병리학과 신흥 의학 분과인 정신 의학 분야에서 연구 활 동을 시작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그를 장 폴 사르트르, 마르틴 하이데거 등과 나란히 금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사상가 대열에 들게 이끌었다. 하이델베르트와 바젤에서 교수로 일하던 야스퍼스는 역사상 비교적 짧은 기간-대략 500년-에 걸쳐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제각기 유사한 과정을 거쳐 발전하게 된 점에 남다른 흥미를 느꼈다. 이 기간 동안 중국, 인도, 이란, 팔레스타인 등지 에서 각기 예언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것이 미토스에서 로고스로, 혹은 신화적 세계관에서 철학적 논증으로, 그리고 현재 통용 되고 있는 의미의 종교로의 대전환을 나타내는 최초의 현상임을 알아차렸다. 신화적 사유의 시대에는 신들과 의 관계가 거래의 성격을 띠었고, 섬김이나 제물 헌납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신들은 이제 유일신 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들이 그들 조상의 다신주의를 버리고, 단일화된 세력으로서 의 신에 대해 처음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야스퍼스는 이와 같은 일이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수많 은 지역들에서 동시에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파헤쳤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라 일컬었 다. 그가 축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사역 활동이 그들 역사 의 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축이라는 개념은 유럽과 아시 아의 다른 문화권 구석구석까지 뻗어 나갔던 모양이다. 대단히 특이한 사건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중국에는 공자와 노자가 살고 있었고, 묵자, 장자, 열자 등의 철학을 비롯한 중국 철학의 온갖 학파가 대두했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경전)가 만 들어지고 붓다가 나왔으며, 중국과 마찬가지로 회의주의, 유물론, 변증론, 허무주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철학적 공론이 등장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를 필두로 예레미아를 거쳐 제2의 아사야에 이르기까 지 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났다.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가 등장했고 철학자들-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 스, 플라톤-이 나타났으며 투키디데스, 아르키메데스 같은 비극론자들이 나타났다. 불과 몇 세기 동안에 중국과 인도 그리고 서구 등 서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지역들에서, 그것도 거의 동시에, 이런 이 름들과 결부된 모든 분야가 발전을 이루었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을 한 마디로 정신적 사유의 대대적인 진보라고 요약했다. 제사를 매 개로 여러 신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보편적인 하나의 신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사유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와 함께 신화의 기능도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 았다. 평온하고 모든 것이 분명했던 신화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예언가들의 신관이 비신화적으로 돌아섰 듯이 그리스와 인도, 중국의 철학자들도 비신화적인 직관을 견지했다. 합리성과 합리적으로 규명된 경험 이 신화를 상대로 투쟁에 돌입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투쟁은 유일신의 초월성 확보를 위한 실재하 지 않는 악령들과의 싸움으로 발전되었고, 급기야는 신들의 거짓 형상에 반기를 든 윤리적 반란으로 이 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종교는 윤리적인 모습을 갖추었고, 이와 함께 신의 위엄이 한결 높아졌다. 신들이 말하기를 그칠 때 사회가 신들을 버리게 된다고 한 피에르 자네의 말을 기억하는가? 축의 시대 에 일어났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신화는 언어의 재료가 되었는데, 신화를 재료로 삼은 언어는 신화가 원래 의미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 신화는 우화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신화들은 재구성되 고 새로운 의미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시류에 따른 신화 만들기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는 살아 남았다. 그러나 신화는 더 이상 그 자체로서 의문의 여지없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위한 수단으로 발 전했다. 야스퍼스는 인류가 새로운 축의 시대의 문턱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축의 시대는 전세계 가 전기 통신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는 역사상 최초의 시기이다. 야스퍼스는 이 새로운 축의 시대 역시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 중대한 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야스퍼스는 과학을 현대의 신 화로 보았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눈에 그것은 불완전한 신화로 비쳤다. 많은 옛 신화들이 그랬듯이 과학 역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과학은 '어떻게'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왜'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신화의 종교사 학파 미르케아 엘리아데(1907-1986) 신화와 종교는 인간의 의식이 거쳐 온 어떤 단계가 아니라 의식체의 일부이다. 미르케아 엘리아데는 루마니아에서 태아났으나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와 미국에서 보냈다. 아마도 엘리아데는 성스런 역사 로서의 신화를 연구하고 성과 속을 구분한, 세계 최고의 신화학자였을 것이다. 엘리아데에게 신화는 초 원적인 것이 우리의 세계로 침투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엘리아데는 신화와 종 교가 변하지 않는 인간 의식의 일부이며, 초월적이거나 무한한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인 간적인 일이라고 여겼다. 엘이아데는 신화의 심리학파와 신중하게 거리를 두었다. 한 예로 그는 원형이 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말이 융이 사용했던 원형이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을 강조했다. 엘리아데는 인간의 선천적 종교 기능이 심리적 투사로 단순화되는 것을 몹시 염려했다. 그 래서 그는 신화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을 은총으로부터의 또다른 타락이라고, 즉 에덴 동산에서의 타락 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엘리아데는 한 사회의 성사를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 회든 그 사회의 모든 제도와 도덕과 문화는 초월적인 것이 그 사회로 침투해 들어 온 성스러운 역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아데는 유사 신화들을 확산론으로 설명한다. 신화를 창 출해 내는 문화의 중심지가 있다고 본 프로베니우스의 이론에서 특히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엘리아 데는 의미의 문제에 관해서는 기독교가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신화적 이미지 들을 완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엘리아데는 기독교를 사회적 신화로 치부해 버리기보다는 기독교 신앙 을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반드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 신화 - 네 것, 내 것, 우리 것 신앙의 현대적 문제 기독교 신화 신화라는 말이 이 책 제목에서는 한정된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앨런 워츠의 말을 빌자면, 신화는 우주와 인생의 내밀한 의미를 표현하는 상징적 이야기이다. 예수를 신화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가 전설 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생애와 메시지가 우주와 인생의 내밀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시도였다는 뜻 이다. 신화의 말과 내용은 힘의 계시라고한 찰스 롱의 표현대로 신화는 세계가 인간에게 유용해지는 명 확한 방식을 나타낸다. 혹은 A. K. 쿠마라스와미가 관찰한 대로 신화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 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있는 것이다. 신화라는 말을 특수하게 정의했음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내가 신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 했다. 그들은 신화라는 단어가 환상이라는 냄새를 조금이라도 풍길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신화라는 말은 종교 역사가들이나 문학 평론가, 사회 과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신화라는 단어는 대단히 효과적이고 유용한 쓰임새를 지닌 말이다. 이러한 학문 전통들이 신화라는 말을 통해 전 달하는 의미를 대신할 만한 다른 단어는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 단어에 대한 두려움을 거두고 , 이 단어 가 자신의 신앙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얼마든지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 다.-앤드류 그릴리 신부, [종교의 신화] 기독교 신화든 다른 신화든, 신화는 이야기의 형태로 진리를 드러낸다. 19세기에 신화에 부여된 의미- 즉 신화는 허구라는-는 대중 문학과 시사 문학에 계속해서 끈질기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의 경 전이라든가 신학 체계, 종교 관행에 다양한 신화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인식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거부 하게 된 것도 바로 신화를 허구로 보는 19세기식 신화관 때문이다.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에게서 물려 받은 신화의 주제들은......기독교의 역사 개념과 기독교 교리 발전에 의해 변형되어 왔다. .....기독교 신화 의 기능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의미심장한 물음들에 대해 상상력이 한껏 담긴 술어로, 더러 는 극적인 술어로 답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따위의 물음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물음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서구 문명 속에서는 기독교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인식과 상상의 요소들이 주로 이 문제들에 답을 제시해 왔다. 인간의 본성과 기원, 운명, 그리고 인간이 속한 사회와 세계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 신화는 이러한 인간 조건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설 명하고자 한다. 그것도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즉 오감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는-사실들에 대한 단 순한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방식으로. 개념들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상상력을 체택함으로써 기독교 신화는 정신의 영역-즉 의미와 가치의 영 역-과 관련을 맺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자기가 속한 사회와 세계, 그리고 성스러운, 혹은 거룩한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는 이 영역은......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15판, '기독교 신화 와 전설 항목' 유대교 신화 물론 신화와 전설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통속적인 말로, 신화는 신들이나 공상적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엄격한 유일신 종교이다. 따라서 신화를 이렇게 좁은 의미로 해석할 경우, 유대교 신화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그렇지만 신화라는 용어가 좀더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면, 다시 말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서 시간을 초월하여 지속성을 갖는 관심사만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면, 신화는 실제로 유대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상의 사건들은 이렇게 넓은 차원으로 옮겨질 때만 단순한 고증학적 자료에 그치지 않고 영속적인 유효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대교에서 이집트 탈출을 신화로 볼 경우, 이집트 탈출은 특정한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변화된 다. 그리하여 이집트 탈출은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겪을 수 있는 상황과 체험에 대한 표본이 되기에 이른다. 즉 신화로서의 이집트 탈출은 몽매주의(무지 몽매한 상태, 또는 무지나 어리석음을 야기하는 상태)의 굴레로부터의 탈출이라든가 각자의 시나이산에서 각자가 받은 계시라는 의미로, 또 각자의 상징적인 황 야 여행이나 그 황야에서의 죽음-그들은 비록 황야에서 죽더라도 그들의 자녀, 혹은 그 자녀의 자녀는 결국 상징적인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있으리라-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 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도 신화로 해석될 경우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 반목에 대한 예로 변형된다. 한편, 전설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공상을 가미해 윤색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와 달리 전설은 정해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15판, '유대교의 신화와 전설' 항목 이 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장이다. 물론 신화 연구는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종 교, 계시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신화는 이러한 유일신 종교의 신앙 개념 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신화의 원료를 이루는 것은 다신교의 남신이나 여신들-기 독교 전통에 따르면 거짓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내 의도는 기독교나 유대교의 신앙을 변질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속에 분명히 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물론 여 기에는 신화가 제대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우리의 신앙에 신화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신앙을 허위나 허구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독교 신화니 유대교 신화니 하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신화를 꾸며낸 이야기나 허구 또는 폭넓게 믿음을 얻고 있는 허위 따위로 정의하는 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즉각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심지어 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반응을 보인다. 기독교라는 말과 신화라는 말을 같은 문장에 사용하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의 진실성이나 타당성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19세기에 는 초자연적이니 초월적이니 하는 꼬리표가 붙은 것들은 모두 허구로, 그러니까 신화로 간주되었다. 오 늘날에는 에이즈에 관한 열 가지 신화니 중산층 세금 삭감의 신화니 천하 무적 일본의 신화니 하는 따 위의 신문 기사 표제들이 신화에 대한 그릇된 정의를 끊임없이 부채질하고 있다. 폭넓게 믿음을 얻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을 타파할 의도로 쓰여진 기사들 앞에 이러한 표제들이 붙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 역사학자인(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미르케아 엘리아데가 신화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것, 혹은 초자연적인 것이 우리 세계로 침투해 들어온 내력을 그린 성스런 역사가 바로 신화라고 말한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는 분명히 이 정의와 맞아 떨어진다. 이 문맥에서 볼 때 신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 신앙에 허위의 혐의를 씌우는 행위 라고 보기는 어렵다. 신화란 무엇이며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신화라는 단어를 더 이상 위협적이거나 공격적인 대상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 고 긍정하게 되는 계기로 여기게 될 것이다. 기독교와 이스람교, 유대교의 신화들이 과연 우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가? 이 신화들이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는 하느님의 성스런 역사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 이 신화들이 우리에게 도덕 체계를 제공하는가? 물론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신화들을 지침으로 삼 아 살아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화를 위해 목숨을 바쳐 왔다. 그런 신화들이 허구이고 허 위라면, 혹은 단순한 심리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의 유구한 역사에서 신화들이 중요한 힘 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신화 연구가 신앙인들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독교의 신화들과 다른 문화권의 신화들을 비교하다 보면, 타락이라든가 처녀 수태, 부활 등에 관한 유사 신화들이 눈에 띈다. 비기독교권의 신화가 기독교의 성스런 이야기들과 놀라우리만치 닮은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의 전통(기독교적 전통: 역주)이 선택 가능한 여러 가지 초월적 존재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한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법도 하다. 원시적인 혹은 이교적인 민족들에게도 우리 와 똑같은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하다 보면, 우리의 신앙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다. 다음 체험담은 기 독교인들이 신화 연구에 대해 보이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실감나게 예증해준다. 몇 년 전, 나는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신화를 연 구한 경험에 대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두 여성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한 여성은 신화나 신화학 에 대해서 조금도 좋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 여성은 신화들의 내용이 거짓 신들을 찬양하는 것 일색이 라고 지적했다. 그 여성에게는 신화를 공부한다는 것이 기독교를 평가절하하고 기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무마하기 위해 전폭적으로 노력하는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의 손에 악마의 무기를 쥐어 주는 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여성은 신화를 공부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 다. 그 여성은 자기 자녀들이 공립 학교에서 신화를 공부하는 게 못마땅하다고 했다.(저자는 카톨릭계 학교에서 그리스 신화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그 여성에게서 처음 들었다고 한다.)그 여성은 신화에 관한 책을 모두 내다 버렸을 정도였다. 자기네 가정이, 그리고 자녀들과 자기 자신의 마음이 그 책들로 인해 오염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단다. 다른 한 여성은 신화 연구에서 앞의 여성과 상반되는 결론을 끌어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두 번째 여성이 자유주의적 기독교인이라든가 뉴에이지 운동 지지자라든가 전혀 정통파 신자가 아닐 거라고 생 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독자들은 생각을 고쳐야 할 것이다. 그 여성은 미국 성서 지대 (기독교 근본주의 신자들이 밀집해 있는 미국 남부 지방:역주)의 심장부인 앨러배머 출신으로, 자기 자 신을 거듭났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많은 교단의 성령파, 또는 오순절파 기독교인들 은 성령 세례의 체험을 중시한다.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방언을 한다든가 병을 치유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초자연적 현상들로 증명된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여성을 세속적 인본주의자로 분류할 수는 없었다. 이 여성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한 대학에서 비교 종교학을 전공하고 이t는 3학년 학생이었는데, 신화 연구가 자신의 종교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몹시 감격해했다. 생소한 문화권의 신화들과 성 서의 이야기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 이 여성에게는 매우 흥미있게 느껴졌고, 그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방편으로 보게 만들었다. 이 여성은 처녀 수태나 부활에 관한 유사한 이야기들을 접하고서 위협감이 아닌 매력을 느꼈다. 이 여성은 처녀 수태나 부활과 같은 모티브들이 허구가 아닌 진실이기 때문에 신화에 살아 남은 것이라고-그리고 기독교에도 나타난 것이라고-생각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비롯해 신자는 아니지만 이 종교들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의미 심장한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ek라 창조되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짐승들 은 신화를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짐승들이 초월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는 징후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신화의 핵심 요소들은 감각이라는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과 연관 된 인간 특유의 의식을 보여준다. 오직 인간만이 본능적으로 우주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간늠 해 보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조셉 캠벨이 신화에 대해 이야기한 대로, 하느님의 생김새가 인간의 얼 굴에 온갖 멋진 모습으로 변조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현대의 인류학과 종교사, 심리학만이 신화가 갖는 힘과 항구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화의 힘과 항구성은 고대적부터 인식되어왔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교부들은 신자, 비신자를 떠나서 모든 인 간에게 하느님의 형상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하느님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선천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의식 밑바탕에 하느님의 존재에 대 한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성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신약의 로마서)에 이렇게 썼다. '하느 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하느님의 영원하신 힘과 신성 같은 것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복도 깨 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물론 바울은 인간들이 하느님의 힘과 신성을 알게 된 결과가 우상을 만드는 일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우상 숭 배와 참다운 기독교 신앙의 차이를 설명했다. 마이모니데스 같은 유대교 사상가들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카톨릭 신학자 들, 그리고 마르틴 루터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계시 종교를 접하기 전부터 본능적으 로 하느님과 초자연적인 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들의 믿음을 서슴없이 시인했 다. 신들이 말하기를 그칠 때 사회가 신화를 버리게 된다고 한 피에르 자네의 말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 이다. 사회가 신화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무시하고 종교를 소흘히 할 때, 신화에 바탕을 둔 도 덕 체계를 따르지 않을 때, 또는 신들이 말하기를 그쳤다 하여 신화에 근거한 체계를 뒤흔들려 할 때, 그 사회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화를 버린다. 프랑스 혁명 세력이 내세웠던 이성의 종교라든가 소비에트 신화와 같이 신화에 대한 인간의 선천적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하는 인공 신화는 반드시 실패한다. 진정 한 신화만이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악독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독일 침공이 임박했을 때 '신성 러시아'라는 짜르 시대의 공면 신화에 호소하고 교회를 개방했던 것 이다. 이렇듯 계시 종교의 모든 원료가 우리의 유전자에 입력되어 있는 것이라면 계시 종교가 필요한 이유 가 무엇일까? 신화를 연구하는 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신 화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신화의 요소들이 개개인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우리의 영적 욕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을 탐색하는 뉴에이지식 통찰력에 의해 충족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라이놀드 니버의 말대로, 계시라는 기준이 없으면 우리의 종교 체험은 공통 분모를 잃고 제멋대로의 장난으로 전락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신화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접착제 구실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민 신화라든가 공통의 도덕감이 개인 차원이 아닌 집단 차원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미국 같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사회에 서 유대, 기독교 윤리라는 공통의 전통과 그리스 고전 문학 및 미학에 대한 지식은 기독교인, 유대교인, 이슬람교인, 불가지론자,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유산이다. 이러한 유산이 모여 하 나의 도덕 체계를 이룬다. 다시 말해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신화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동 일한 판단 기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신앙에 따른 성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우 리를 결속시켜 주는 세속의 성스런 역사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계시 종교가 신화에 대한 인 간의 본능적 욕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한 가지 비유를 사용해 보기로 하겠다. 잔디 깍는 기계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기계가 작동하지 않 을 경우, 엔진에서 가솔린을 점화시키는 점화 플러그에 이상이 생겼다든지 연료가 떨어졌다든지 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 문제만 해결하면 십중팔구 잔디를 깍을 수 있게 된다. 신화와 계시 종교의 관 계도 이 경우와 같다. 엘리아데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신화는 성스러운 것이 우리 세상에 침투한 것-즉 계시-이다. 우리는 심리학상으로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그리고 신경학상으로는 공통된 신화적 상징이나 이미지의 소자라는 점화 플러그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작동하도록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계시 종교이다. 스페인계 미국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거의 90년 전에 말했다. '복음이 원래 마 음 속에 들어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복음이 기쁜 소식을 전한단 말인가?' 산타냐나는 계 속해서 그리스도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느낌은 파토스로 가득 찬 신화에 알맞게 무르익었다. 예수 의 초라한 삶과 예수가 겪은 수난들은 예수의 신비한 탄생이라든가 영광스런 부활, 신성 회복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비극성이 경감됨으로써 한층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이다. 피에르 자네의 말을 되새겨 볼 때, 지금과 같은 현대 사회가 형성된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이 말하기를 그쳤을 때 그리스와 로마는 기독교 의 신 하느님에게로 돌아섰고, 유대교의 경전에 의지했다. 아라비아의 점성술적 우상들이 말하기를 그쳤 을 때 무하마드의 계시가 근동 및 북아프리카 전역과 스페인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지역을 휩쓸었다. 이 러한 유일신 신앙들은 인간의 의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신화적 구조에 호소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 람교에 신화가 존재하는가? 거의 확실하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는 진리가 신화 라면, 그리고 초자연적인 것이 우리 세계에 침투해 들어 온 성스러운 역사가 신화라면, 한 예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가 내려졌던 일을 신화라고 해도-그리고 그 일이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구체 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이었으며, 그 사건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비유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모순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사건을 신화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건이 성스러운 역사의 일부라는 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성 바울은 미토스(신화)라는 그리스 단어를 신약에서 다섯 차례나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듯이, '말'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로고스'-로고스는 토론과 논쟁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와는 반대로 미토스라는 용어는 한때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어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말을 의미했었다. 바울은 미토스라는 말을 자신의 전도 대상인 이교도들의 신화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즉 바울은 그리 스, 로마인들의 신화와 기독교의 신앙 선언을 뚜렷하게 구분해 설명하기 위해 미토스를 허위를 뜻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13세기 에 자신의 저작을 통해 충실한 신도들에게 경전 을 연구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행로]에 다음과 같이 썼다. '경전에는 삼중의 의미 가 있다. 인간을 정화시키고 좀 더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비유의 의미, 이해를 돕는 우화의 의미, 영혼 에 지혜를 불어넣어 주는 유추의 의미가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경전이 비유, 우화, 유추로서의 이야기 양식을 통해 진리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스위스 태생의 20세기 독일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 됨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여러 신들을 섬기는 이교적 신앙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 비신화화와 역사화 의 과정이 구약보다는 신약에서 훨씬 더 진척되기는 했지만, 복음서는 사실상 신화적 사고의 시대에 신 화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씌여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화 -인도 신화든 호메로스의 신화든 고대 로마, 또는 중세의 신화든 현대의 대리 신화든-가 인류의 진화와 개별 민족들의 진화에 끼친 막대 한 영향을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다. 종교,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분야에서의 비교 연는 의미를 확립하 고 사회적 융합을 이루어 내는 신화의 힘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 왔다. 단지 숭배(여기에서는 숭배라 는 단어가 '제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의 관점에서 세계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데 신화가 담당하는 기 능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까지도 포괄적으로 밝혀 온 것이다. 복음서가 집필될 당시 에는 신화, 전설, 상징 등을 사용하여 생생한 이야기체 양식으로 신앙을 선언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 다......합리적 사고와 기능적 사고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생생한 이야기체 형식의 신앙 선언은 여전히 필 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고래의 형식들-넓은 의미에서의 신화 형식-이 여전히 유용하지 않은가? ......인간 의 집요한 욕구에 관한 한 의혹이 있을 수 있을까? 현대인들(그리고 현대의 매스 미디어)이라고 해서 논리와 개념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현대인들 역시 이야기에, 그리고 이미지-더러는 지극히 원시적인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는가? 현대인이라고 해서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는 효과적인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인가? 스위스 개신교 신학자 에밀 브루너의 신화 정의는 정통파 기독교의 견해와 일치하면서 이 책에 소개 된 정의들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다음은 월터 A. 엘웰이 편집한 [신학 복음 사전]에서 뽑은 구절이다.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신화에 대한 EH 다른 정의가 있다. 이 정의는 신화를 사실상 상징과 동일시하며, 본성상 인간의 언어로는 하느님의 일들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신화라는 것이 나왔다고 본다. 따라서 에밀 브루너는 '기도교 신앙 선언은 신화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 하 면 기독교인의 발언은 불트만(독일 실존주의 신학자 루돌프 볼트만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다룰 것 이다.)도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신화의 특징이라고 보았듯이, 반드시 의인 법(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으로 여겨진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 서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화는 이 세상 일이 아닌 것을 이 세상의 말로 표현하기 위해, 신 의 일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이미저리를 사용한다. 이런 표현법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인간이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말 이외에는 다른 표현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통파 기독교 신학자로 꼽히는 스위스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바르트는 '성서와 철학의 유일한 주제는 이 하느님과 이 인간의 관계, 이 인 간과 이 하느님의 관계'라고 말했다.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성서와 철학의 관심사는 우리가 아닌 각 개인이 성스러운 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속에 신화가 있지만 이것이 신 앙의 타당성에 관한 평가는 아니라고 말한다면 신화라는 단어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확립될 것 같다. 그렇다면 신화라는 단어가 우리의 신앙에 적용될 때 어떻게 해서 공격적인 말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일까? 유대교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비신화화 원인적 사고와 목적적 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주의의 역사에는 유익한 면이 있다. 모든 과정을 원인과 결과로 이해하려는 노력 탓에 현대 과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은 갈수록 점점 더 많은 분야로 확산되었다. (과학 적)방법을 엄밀하게 적용하려면 모든 현상을 원인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목적이라든가 목적론적 관점, 우연 같은 것들은 배제된다. 다윈의 자연 도태설이 갖는 최고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 이론이 생명의 기원을 목적론적 관점이 아닌 순수하게 원인적 관점에서 설명했다는 점일 것이다.......합리주의의 보편적 적용이 사유의 최종 형태라고, 즉 인간이 도달하도록 정해져 있는 궁극적 결과라고 가정하는 것 은 오류일 것이다. 합리주의는 목적을 부정하거나 목적을 원인으로 전환시키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개별 현상들이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의 우연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는 것 은 곧 인식을 위한 투쟁이다.-프란츠 보아스, 인류학의 선구자, [인류학과 현대의 삶] 그 동안 신화를 읽으면서 우리는 신화가 과학, 역사, 종교, 철학으로, 그리고 각 문화권의 구전 문학으 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과학과 신화를ㄹ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 러나 과학과 신화-혹은 더 넓게 말해 과학과 종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물음에 초점을 두고 있 는, 전혀 다른 실체이다. 과학은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고,신화(그리고 종교)는 어떤 일이나 현상의 원인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의 오감, 우리의 감각 능력 너머에 있는 것들에 의존한 다. 전통 문화 속에서는 사람들이 일정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고 방식에 비 추어 볼 때, 구시대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이 부족한 탓에 쓸데없이 재난과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과학 으로 인해 삶의 질이 급격히 개선된 지금, 개개의 인간들은 저마다 의미 결여로 고통을 겪고 있다. 역사 상 최대로 진보된 현대의 문화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의 결여와 관련된 질병과 사회 문제들을 안고 있 다. 자살, 알콜 중독, 정신 이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전통 사회가 아닌 현대 사회와 연관을 맺 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에서 과학과 종교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은 일천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더러는 종교 가 안고 있는 신화적 요소들을 모조리 없애려는 시도마저 자행되고 있다. 종교상의 근본주의자들은 합 리주의적 입장을 세속적 인간주의라고 일컫는다. 이 용어에 온갖 조롱이 퍼부어지기는 했지만, 이 용어 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의 세계관은 이 세계에 초자연적인 것이 작용하고 있 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볼 때 세속적이다. 하지만 현대의 세계관을 고전적 의미의 인간주의라 고는 볼 수 없다. 인간주의란 본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를 의미했다. 즉 인간주의는 인간의 진정한 연구 대상은 바로 인간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개인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산 업 사회, 그것도 후기 산업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슨 단위나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결과가 야기되는 것은 전통적으로 신화가 제공해 주었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 다. 세속적 인간주의의 본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신화 없는 삶이다.(어쩌면 신화 없는 삶이 아니라 신화는 있되, 그것이 새로운, 불완전한 신화로 대체된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과 신화가 두 개의 전혀 다른 문제를 지향하는 별개의 실체라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과학과 신화를 철천지 원수지간으로,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과학 혁명의 부산물 가운데 하나가 원인적 사유이다. 원인적 사유란 모든 현상을 오감에 의한 관찰(경험)을 통해 그러한 현상을 야 기한 원인으로 환원시킨 다음 앞으로의 행위를 예측하기 위해 법칙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신화와 종교는 원인적 사유에 의거하지 않는다. 신화와 종교는 경험적 관찰이 아닌 인간의 감각 능력과 믿음에 의존한다. 신화와 종교는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라든가 이 세계에서 개인이 차지 하고 있는 위치 등과 같이 우리의 감각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손목 시계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원인적 사고와 목적적 사고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손 목 시계를 용수철은 용수철대로, 기어는 기어대로 완전히 분해할 수 있다. 그렇게 분해해 놓고 나면 무 엇으로 인해 시계가 작동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시계를 분해하는 데는 도사다. 그런데 분 해한 것을 다시 조립하는 데는 아직도 애를 먹고 있다!) 그러나 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몇 시인지를 왜 알아야 하는가, 또는 우리가 왜 시간의 정확성-시계의 목적-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장에 지각할 경우, 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거의 없다. 원인적 사고에 유익한 측면이 많다고들 한다. 하지만 프란츠 보아스의 말대로 원인적 사고가 인간 사 유의 최종 형태는 아니다. 19세기에는 원인적 사고에 젖은 사람들이 유달리 많았다. 그들은 목적적 사고 를 한결같이 거부했다. 원인적 사고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경험적으로 관찰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그 타당성을 의심받게 된다. 어떤 현상이 특정한 원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경우, 원인적 사고에서는 그 현상을 실제가 아닌 걸로 간주한다. 많은 현대인들이 원인적 사고 방식에 빠져 있는 탓에 원인적 사고 가 우리 문화의 주요 요소로 자리 잡았다. 유물주의의 관점은 초자연적 것이나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유물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초자연적인 것이나 신은 실재하지 않는 것, 비현실적인 것이다. 신화가 허구 를 의미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동안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화를 원인적 사유를 통해 재고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행해져 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은 기독교나 유대교를 비신화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한스 큉의 말처럼 신화와 함 께 그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까지 폐기되어 버리고 말았다. 신화가 허위로 정의내려진 것은 어베 오늘 의 일이 아니다.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 겔에 이르게 된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우리는 흔히 철학, 철학자 하면 지루하고 딱딱하게만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은 삶의 질에 관한 현대적 사고 방식을 낳은 중요한 모태이다. 튀빙겐 대학 졸업생이었던 헤겔은 친구 셸링에게 편지를 보내, 독일 에서 살기 좋은 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겔이 말하는 살기 좋은 곳이란 훌륭한 역사책들 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맥주 맛도 좋은 곳이었다. 헤겔은 꽤 많은 돈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자 기가 원하기만 하면 어디든 가서 살 수 있는 입장이었다. 셸링은 예나가 맥주 맛도 좋고 책도 많으며 역사 철학에 관한 토론과 논쟁이 활발한 곳이라며 헤겔에게 예나로 가라고 조언했다. 헤겔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서적을 독파하고 난 뒤, 역사란 관찰 가능한 특정 궤도를 따라 움직 인다고 공표했다. 모든 역사는 거역할 수 없는 인류의 진보이다. 기술, 철학, 심지어 도덕마저도 역사의 전 단계에 비해 더 계몽된 새로운 4단계로 전진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기독교나 유대교의 역사관과 마찬가지로 직선적 이다. 역사가 유토피아라는 종말을 향해 곧장 나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기독교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기독교를 시대에 뒤떨어졌다, 비과학적이다. 비합리적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헤 겔의 논변을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로 사용해 왔다. 헤겔은 역사란 확실한 법칙과 끊임 없이 인간의 진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 작용하는 원인들을 지닌, 관찰 가능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역 사는 단순히 임의의 사건들을 연대기순으로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실제로 작용하는 어떤 정신을 나타내는 빈틈없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과정은 하나의 우세한 민족에 의해 지배된다. 문명화된 역사의 초기 단계-헤겔은 이 시기를 셈족 단계라 부른다-에는 유대 민족과 다른 근동 지역 민족들이 중요한 문명의 수호자였다. 그 다음의 고전기에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문명의 수호자 역할을 맡았다. 헤겔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게르만 기로 보았다. 독일인, 영국인, 그밖의 다른 북유럽인들이 역사를 추진해 나가는 지배적 세력으로 작용한 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헤겔 철학은 근대적 자유 민주주의와 나치즘, 공산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헤겔의 역사관을 전통 사회의 역사관과 비교해 보라. 전통 사회에서 인간의 역사 그 자체는 별 가치가 없었다. 인간의 역사란 신화에 그려져 있는 사건들의 재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역사가 변증법을 통해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변증법을 사용할 경우, 하나의 진술(테제)은 그에 반대되는 진술(안티테제)과 대비되어 새로운 견해(진테제)를 낳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론 은 노동자(테제)와 자본가(안티테제) 간이 계급 투쟁이 사회주의(진테제)를 낳는다고 설정한다. 이런 식 으로 해서 모든 역사가 순수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를 향해 추동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선형 역사관을 채택한 훌륭한 본보기이다. 헤겔은 종교 발전의 가장 원시적인 단계가 자연 종교 혹은 무술의 단계라고 말한다. 인류는 이 단계에서 유일신 종교의 단계-헤겔의 표현을 빌자면 신이라는 정신 적 개체를 인식하는 단계-까지 진보해 왔다. 이 단계에서 신은 더 이상 역사를 통해 발언하는 인격화된 투영체가 아니라 역사에 직접 작용하는 것으로 인지되는 초월적 정신이다. 헤겔은 신과 인류를 화해시 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야말로 역사에서 신이 행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죽음 으로 인해 신과 인간의 합일이 현실로 구현되지는 못하지만, 신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삶 을 인도라고 인생에 목적을 부여하는 중대한 개념이다. 신헤겔주의 뉴헤겔리언(신헤겔파)은 무슨 영국의 펑크 록 밴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신헤겔파는 서구 문화 비신화 화의 역군들이었다. 헤겔이 죽은 뒤 그의 추종자들 중 한 집단, 그러니까 구헤겔파는 신헤겔파라는 다른 추종자 집단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헤겔의 철학 체계를 이용했다. 신헤겔파는 스코틀랜드의 철 학자 데이비드 흄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흄은 경험적으로(즉 오감을 통한 관찰에 의해)증명될 수 없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하더라도 무효하다고 보았다. 신헤겔파는 역사의 진보가 기독교의 합리 적 검토를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신헤겔파의 눈에 기독교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쳤다. 역사 의 진보는 경험적 연구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관을 요구한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합리주의자요, 경험주의자들이었던 신헤겔파는 신화와 종교의 초자연적 요소들이 객관적 검증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허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든 계시 종교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계시 종교들이 비이성적 신앙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신화에 바탕을 둔 종교 체계가 과학의 시 대인 19세기에 살아 남겠느냐고 의문을 품었다. 신헤겔파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독일의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1808-1874)였다. 슈트라우스는 기독교가 헤겔의 철학 체계에 따른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슈트라 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평범한 역사상의 인물로, 즉 마리아와 요셉의 친아들로 묘사한 책을 집필해 논 란을 불러일으켰다. 슈트라우스는 복음서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헤겔과 슈트라우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에른스트 르낭(1823-1892)이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빼 버린, 비신화화된 예수의 전기를 역사화된 복음서라 불렀다. 슈트라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르낭도 서구의 새종교는 예 수를 역사적 인물로 보고 그의 윤리적 가르침에 역점을 두는, 합리적이고 비신화화된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신헤겔주의자로는 슈트라우스의 동료이자 한때 칼 마르크스의 협력자였던 브루노 바우어 (1809-1882)를 꼽을 수 있다. 바우어는 복음서들이 헤겔식의 역사적 검증을 통과할 수 없는, 순전히 날 조된 문서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바우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 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들이 말하는 데 실패하면 사회가 신화를 버리게 된다고 한 자 네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중반 무렵, 아마도 신들은 할 말이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독일의 성서 양식 비평 일단의 독일 성서 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성서를 역사 비평에 입각해 분석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들의 작업은 성서학과 문화의 비신화화에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공헌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서 양식 비평 학이라는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르(1792-1860)였다. 바우르는 신약,, 그 중에서도 성 바울의 서신을 그것이 씌여진 역사적 상황에 입각하여 연구했다. 바우르는 특히 초대 교회 내부의 갈등에 관심이 많았다. 바우르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1930)였다. 하 르나크는 초대 교회에서 신경이 발전되어 온 과정을 연구하여, 교회와 영지주의 이단 간의 갈등이 신경 의 발전을 낳았다는 결론을 끌어 냈다. 하르나크는 신경에 포함되어 있는 경전의 신화적, 혹은 초자연적 부속물들을 그러한 갈등의 산물로 여겼다. 하르나크의 저작들은 전통 기독교의 옹호자인 칼 바르트와 성서의 신화적 요소들을 밝혀 내기 위해 노력했던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에게 영향을 끼쳤다. 성서 양식 비평을 언급하면서 빼놓고 지나갈 수 없는 인물이 또 하나 있다. 지금은 인도주의자, 의료 선교사, 오르간 연주자로 기억되고 있는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가 바로 그이다. 슈바이처는 [역사 적 예수 탐구]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가 하나의 메시지-하느님의 나라가 곧 올 것이라 는-를 전달하고자 한 전형적인 유대인 전도자였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성서 이야기에 덧붙여져 있는 초자연적인 부속물들을 벗겨 냈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전도 활동의 의미를 부각 시킬 목적으로, 복음서를 집필할 때 초자연적 요소들을 가미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심심치 않게 논 란을 불러 일으켰던 독일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1884-1976)을 소개한다. 불트만은 신약 성서를 본질상 신화로 보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에서 신화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을 구분해 내고자 했다.(그러나 불트만이 신화를 성스러운 것이 역사에 침투한 것으로 정의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증주의와 논리 실증주의 초자연적인 것의 타당성에 대해 맹렬하게 공격을 가한 철학이 오귀스트 콩트의 철학에 전례를 두고 있다. 콩트는 인간의 행위는 물론 그 어떤 현상에든 과학적 방법이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 때문 에 콩트는 사회학을 비롯한 여타 사회 과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관찰될 수 없는 것은 실재하는 게 아니다. 콩트는 겸손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확립 한 실증주의가 인류 역사의 세 단계 중 마지막 단계라고 주장했다. 첫 번째 단계, 그러니까 신학적 단계 에서는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와 신화가 요구되었다. 두 번째 단계인 형이상학적 단계는 관념 적인 것 내지는 절대적인 것에 관한 철학적 논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실증주의의 단계에서는 과학적 관찰만 있으면 모든 것이 충족된다. 콩트에게는 원인적 사고가 사유의 최종 형태였다. 콩트는 초자연적인 것에 근거한 종교적 믿음은 곧 폐기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카톨릭 교의 전례 의식을 상당 부분 차용하여 인간의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콩트는 법복, 향, 기도문 등 을 다 갖춘 정교한 종교 의식을 제정했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이 종교를 기독교적 신앙이 빠진 카톨릭 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콩트는 각 달의 명칭을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따위로 바꿈으로써 달력을 비신 화화했다. 악의 없는 괴짜들의 경우가 대개 그렇듯, 콩트에게도 모순된 일면이었다. 콩트는 주로 아내의 수입에 의존해 생계를 꾸렸으면서도-그는 매춘부와 결혼했는데, 그의 아내는 부유한 고객들을 접대하겠 다고 나서서 콩트를 놀라게 했다- 자기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잔돈을 비롯해 수입과 지출을 한푼도 빼놓지 않고 가계부에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새로운 종교의 제의를 걸치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20세기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콩트 철학의 후예들이다. 논리 실증주 의자들은 경험에 이해 증명될 수 없는 진술은 무엇이든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논리 실증주의는 언 어를 사용한 엄밀한 검증을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논리 실증주의가 과연 생명력 있는 철학 체계인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유대교의 과학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비신화화 과정은 유대교에서도 진행되었다. 19세기의 독일 지성인들-개 신교도이든 카톨릭 신자이든 유대교인이든-은 과학적인 사람이라는 소리 듣는 것을 최대의 찬사로 여겼 다. 18세기 유럽의 계몽 운동이 시작되기 전, 그리고 유대교의 계몽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하스칼라(계몽 을 뜻하는 헤브루어)가 시작되기 전에 유럽의 유대교에는 정통파라는 단 하나의 종파밖에 없었다. 세파 르디와 아시케나지(독일, 중유럽, 러시아에 살며 독일어와 이디시 말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아시케나 즈는 독일을 뜻하는 헤브루어다. 세파르는 스페인계유대인을 이르는 말이다.-스페인은 헤브루어로 세파 라드-이들은 1492년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 추방당한 뒤로 네덜란드, 북아프리카, 터기, 그리스 들 지에 정착했다.)의 의식 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유대교는 철저하게 정통적이 고 완전히 신비적인 세계관을 견지했다. -일신교이자 r시 종교인 유대교의 경우 신화적 요소가 다른 세 계적 종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또한 성서와 탈무드에 기록되어 있는 유 대교의 본성은 대단히 보수적이다. 하지만 경험주의 세력이 유럽의 유대인들, 특히 독일의 유대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위대한 유대인 계몽 사상가 모제스 멘델스존(모제스 멘델스존은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콜디의 할아버지이다. 펠 릭스 멘델스존은 루터교로 개종하고, 루터의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바탕으로 교향곡 종교 개 혁을 작곡했다.)은 다음과 같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했다. '사실 나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으로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는 진리 이외의 영원한 진리라는 것을 인정 하지 않는다.' 비신화화와 동화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유럽 유대교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독일에서의 개혁 운 동을 그러한 변화의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나폴레옹 시대에 유대인들이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온전 히 보장받기 위해 추진했던 해방 운동이 유대교의 개혁을 가속화했다. 곧 많은 독일계 유대인들이 유대 교를 근대 독일에서 개신교, 카톨릭과 나란히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 여러 독일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혁 유대주의는 동화와 비신화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노렸다. 독일어가 헤브 루어를 밀어내고 공중 예배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대인에 대해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는 기도문들 은 모두 폐기되었다. 실제로 초기의 개혁 예배들은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에서 보다는 예배당에서 드려 졌다. 루터교의 예배 방식과 아주 비슷하게. 모제스 멘델스존의 제자인 다비드 프리들렌더(1756-1834)가 개혁 유대주의의 아버지였다. 프리들렌더는 베를린의 루터교 당국자들에게 자기를 루터교도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요였다. 물론 한 가지 전제 조건을 달기는 했다.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결국 프리들렌더와 그의 추종자들은 거부당했다. 1810년 이스라엘 야콥존이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 최초의 개혁 유대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에서는 설교와 찬송을 독일어로 하고 예배에 오르간 음악도 사용했다. 이전의 유대교 예배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들이었다. 개혁의 흐름은 꾸준히 진척되어, 1849년 베를린 교회의 사무엘 홀트하임은 (금요일이 아닌)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에 이르렀다. 이런 혁신적 움직임에 발맞추어, 아브라함 가이거는 개혁파 유대인들에게 경전을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검토하라고 권고했다. 간단히 말해, 경전에 서 신화를 벗겨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음식물에 관한 규정이라든가 할례라든가 토라의 신성한 유래 같은 전통적 관습들을 거부하는 반면 유대교의 도덕적 가르침을 강조한다. 독일에서 유대교의 비신화화를 위해 가장 애쓴 사람은 (개신교의 비신화화를 위해 신헤겔주의자들이 가장 큰 공을 세웠듯이) 레오폴트 춘츠였다. 춘츠는 유대교의 과학이라고 하는 운동을 주창했다. 유대인 들과 그들의 역사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물론 독일어로)하는 것이 춘츠의 목표였다. 춘츠는 유 대교의 종교적 측면보다는 공동체적 측면을 더 강조했다. 개혁 유대주의는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으로 이식외었다. 미국에서는 개혁 유대주의가 독일 창시자들의 기대치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각광받았 다. 비신화화된 개혁 유대주의의 기본 입장을 1885년의 피츠버그 강령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자연과 역사 분야에서 과학적 연구가 거둔 근대의 성과물들이 유대교 교리와 대립되지 않는다 고 여긴다. 성서는 성서 시대의 원시적인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신의 섭리나 인간의 정의 같은 개 념들을 때때로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담아 표현하고 있다......우리는 음식과 성직자의 순결, 복장 등을 규 정해 놓은 모세의 율법과 랍비 교리의 율법들이 현재 우리의 정신적, 영적 상태와는 전혀 맞지 않는 시 대적, 사상적 배경 하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그러한 율법들은 현대 유대인들에게 성직자들이 거룩한 존 재라는 느낌을 심어 주는 데 실패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율법을 준수한다고 해서 현대인들의 영적 사 기가 고양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가 십상이다. 신헤겔파의 사상은 19세기에 독일계 유대인들의 정신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성서의 양식 비평은 시약보다는 구약에 훨씬 더 치우쳐 있었다. 체하리아 프랑켈은 유대교 연구에 실증주의라 는 용어를 채택하여, 역사 실증주의 유대학파를 창시하기도 했다. 비신화화된 유대교에 대한 반발로 보 수주의 유대교가 등장했다. 영국의 솔로몬 섹터가 유대교 보수파의 거두였는데, 쉑터는 이성과 전통적 유대교 간에 갈등이 있을 필요가 없으며 유대인들의 공동체적 역사가 종교 관행과 분리될 필요도 없다 고 보았다. 쉑터는 양식 비평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몇 년 전 구약 성서에 대한 고등 비평의 물결이 이 나라의 해안까지 밀려 들어왔을 때, 그리고 모세 5경의 잡다한 구성이라든가 시기상으로 비교적 뒤늦은 레위기의 입법 문제, 또 시편은 물론 특정 예언 들의 기원이 유대인의 바빌로니아 유수 이후라는 것들과 같은 문제들이 신문지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계에서까지 공공연하게 논의되기 시작했을 때, 유대교의 마지막 보루인 율법이 뿌리가지 흔들리고 있는 지금, 과연 유대교는 어떻게 될까? 하는 괘씸한 얘기가 심심치않게 나오곤 했다.......형이상학적 체 계들-옛것이든 새로운 것이든-가운데서 그 동안 유능한 논리학자들이 자기네 신조에다 적용시키지 않은 체계는 거의 없었다. 이 새대에 우리는 불가지론의 찬란한-신기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으나-스펙타클이 신학 여왕의 충성스런 시녀로 변해 가는 모습을 보아왔다. 진짜 위험은 모든 현상에서 엄격한 법칙과 불변성을 찾아내려는 자연(자연 과학) 속에, 그리고 성급하게 진리를 역설하는 단순한 의미(혹은 언어 학) 속에 도사리고 있다. 쉑터의 이러한 발언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지배했던 실증주의와 신헤겔주의 세력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쉑터는 유럽 문화를 향해, 또 자신이 동료인 개신교 신학자들을 향해 발언한 것 인지도 모른다. 신화적 세계관과 달리 과학적 세계관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주 었다. 초자연적 존재의 타당성 신은 죽었다 - 니체 니체는 죽었다 - 신 -1980년대의 어느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리히 니체(1884-1900)는 일찍이 1880년대에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 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비신화화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 EH 다시 토마스 알티처-과학자가 아니라 신 학자이다-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해 세계적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현대의 독일 여성 신학자인 도로테 죌레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이 선언을 회고하며 이 선언이 역사상의 유명한 무의미한 진술들 가운 데 하나라고 단언했다. 신은 믿는 사람들이 '신은 죽었다'는 선언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역시 그 말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우리네 삶에 초자연적인 것을 위한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헤겔의 역사적 사유와 실증주의의 유산이 150년 간에 걸쳐 뿌리내려 온 결과라 하겠다. 동 양의 종교나 공상 문학이나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들에 대한 폭넓은 관심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도 역 시 1960년대의 일이었다. 신화란 이제 대중들이 사용하는 어휘에서 허위를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신화학자들은 신화가 허위가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수단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 분투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종교에 대한, 특히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거세게 고 개를 쳐들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상,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 기독교 교회의 카리스마적 탈바꿈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을 유달리 강조하는 뉴에이지 운동, 그리고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 등을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시기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폴 존 슨이 [현대]라는 저서에서 말한 것처럼 어쩌면 1880년대에 비해 1980년대에 무신론자의 수가 줄었는지 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신화적 세계관은 여전히 건재할 뿐 아니라 서서히 옛 영화를 되찾아 가고 있 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신화는 우리를 따라다닌다. 신화적 세계관은 결코 거세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