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범죄,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게 된 경위 미리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오 히려 더 잘되었다고 그는 뒤에 생각했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면 오히려 모든 면에서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 잘못된 흉기를 자기도 모르게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너무 면밀한 계획을 세우면 누구나 신경과민이 된다. 어떤 것을 잊지 않으 려는 긴장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런 예는 일일 이 들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일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잊을 게 없었다. 무엇하나 기억할 필요 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연습도 없이 시종일관 냉정하게 행동하 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만으로 만사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것이 다. 일분 일초를 따지는 시간표일 경우 그것을 엄수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즉흥적인 경우에는 시간이라는 요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상황 자체는 케케묵고 진부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케케묵고 진부한 상황도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그로서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는 결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진부한 문제도 언제나 새롭고, 금방 딴 과일처럼 신선해 보이 는 것이다. 그는 독신이었고 어떤 고민거리도 없었다. 자동차도 가지고 있고 직 업도 있고, 건강미 넘치는 호남자였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몸이었다. 밤 열시에 들어오든 새벽 두시에 들어오든, 또는 한잔을 마시든 몇 잔을 마시든 잔소리를 할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 었다. 또한 그는 남성다운 활력 그 자체였다. 쉴 새없이 두리번거리는 그 활력이 그를 모험에 빠지도록 했다. 모든 상황이 그를 모험으로 유도 했고 그것은 예정된 운명의 길이었다. 별이 빛나는 오월의 어느 날 밤, 그는 75달러가 든 지갑을 안주머니 에 넣은 95달러짜리 양복을 입고 어디든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코 버터블 새 자동차를 밖에 세워둔 채 코린느라는 아가씨와 춤을 추고 있었다. 코린느는 매우 귀여운 아가씨였고, 두사람은 능숙하게 멀어 졌다 다시 다가서며(특히 그들이 좋아하는 스텝으로) 마주잡은 손과 손으로 머리 위에 아치를 만들어 그 밑을 그녀가 지나가는 동작을 계속했다. 훌륭한 악단이 연주하는 '샴페인이 발명된 밤'의 멜로디를 타고, 훌륭한 리듬, 훌륭한 타이밍으로 모든 춤의 동작은 계속되었다. 보고만 있어도 아름다운 춤, 동시에 이것은 운명의 춤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두 사람의 첫만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 람의 운명은 반드시 서로 등을 돌려 멀어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차를 갖 고 있는 청년 특유의 자랑스러운 미소를 그가 짓자, 그녀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 그녀의 집까지 도착하자, 두사람은 한동안 앉아 서 별을 바라보고 키스를 나누고 또 나누고, 다시 별을 바라보고........ 이런 식으로 일은 진행됐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저녁. 같은 댄스, 같은 차, 같은 밤 하늘, 같은 키스-는 아니라도 어쨌든 같은 입술과 입술-. 그녀는 돌아올 생각으 로 외출했다. 그는 그녀를 돌려 보내지 않을 생각으로 외출했다. 그 리고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모텔로 갔다........ 일은 같은 식으로 진행 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결혼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만족스 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현재의 상태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 다. 그녀는 꼭 다짐을 받아야겠다고 물은 것도 아니고 일의 순서로서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잃는 것이 두려웠 다. 인연이 끊어지는 것보다는 현재의 상태로라도 유지되는 편이 낫 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화제를 입에 담지 않았다. 평화롭고 쾌적한 관계가 계속됐다. 지저분한 요소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 자신이 욕심이 많은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거 리에서 만나 결혼으로 발전해 가는 여느 보통 아가씨들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었다. 단지 그녀의 경우는 거리에서 만난 것까지는 같지만, 결혼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였지만 사랑하는 것뿐, 그 상황에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던 것 이다. 즉 그녀는 행동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그의 손에 맡겼던 것 인데, 이것은 결국 남녀 사이의 끝없는 투쟁의 전략적인 측면에서 그 녀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가련한 한 종 병이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동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 은 말하자면 어떤 일종의 영구적인 기초 위에서 사귀고만 있을 뿐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전화로 그녀를 불러 내자 그녀는 몸이 안 좋다고 말했다. 꾀병이 아니라는 것은 그로서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오한과 발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알자 그는 의사를 불렀고 진찰 중에도 쭉 그녀 곁에 있었다.(다른 사람들 앞에서 필요할 경우 에는, 그녀는 그를 약혼자라고 했다.)병은 심각한 것은 아니고 단순한 유행성 감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녀는 앓아 누워야 했다. 그의 명예를 위해 한마디 해 두지만 그는 결코 이런 상태의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나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처량 한 기분이 들어 혼자있게 해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안 그는 키스를-그것도 입술에만-하고 떠나기로 했다. 본래 그의 생각은 -적어도 현관에서 차로 가기까지는-곧장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 이 뜻밖의 고독한 밤을 최대한 유용하게 보내는 것 이었다. 하지만 밤하늘은 또 그 음란한 유혹을 시작하고 있었고 손목 시계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9시 48분). 게다가 28세. 그는 유행성 감 기에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의 이름은 아리였다. 그녀는 코린느와는 달랐다. 그것은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밤하늘을 즐길 줄 알았고 키스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녀가 공인된 약혼녀와, 더 나아가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으로서의 두 가지 입장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도 모두 그가 먼저 원 한 것이었다. 그녀는 시간적인 감각도 훨씬 뛰어났다. 처음 만난 날, 그는 서너 번의 키스가 왠지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그녀를 만나 그 부족한 양을 채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 만 그녀는 언제나 헤어져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도 그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아 다시 한번만 더 만나고 싶다 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이미 그는 구제할 수 없을 정도 로 그녀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부족감을 없애는 방법은 단 한가지, 그녀와 결혼해서 살아가면서 없앨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녀간의 사랑 전쟁에 있어서는 오성장군이었다. 그것도 타 고난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만나기 전까지 한번도 남자 경 험이 없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처음 한동안 그는 두 명의 여자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었다. 일주일 중에 이틀을 아리와 만나면 코린느에게도 이틀 밤을 할애했 다. 사실은 그도 양다리를 걸친 생활을 계속해 나가고 싶었다. 하지 만 어려움은 그녀들이 아리나 그에게 있었다. 몇번인가 코린느와 만 나는 동안에, 그는 얼마인가 그녀가 감기에 걸렸던 밤을 떠올리게 되 었다. 별은 머리 위에 빛나고 손목시계도 언제나 팔에 채워져 있었지 만 이미 코린느를 위한 밤하늘이 아니고, 코린느를 위한 시간도 아니 었다. 그는 아리와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코린느와의 밤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마지막 짧 은 안내 광고를 끝으로 그 프로는 더 이상 방송되지 않았다. "당신은 내게 관심을 잃었군요. 나는 장님이 아니에요.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그럴 위험은 당연히 있는거야. 연애를 하자면." "하지만 어째서 당신만 그렇게 되고 난 그렇게 안 되는 거죠? 우린 같이 시작했는데." "연애에 있어서는 '같이'란 없어. 누군가가 언제나 늦는 거야."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조만간 전화할게." 이 말은 사랑의 투쟁이 끝났을 때, 남자가 흔히 이별의 뜻으로 여자 에게 하는 말이다. '언젠가 그녀도 누군가 다른 상대를 찾아낼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했 다. 자기에게 쉽게 넘어온 여자니까 다음 남자에게도 간단히 넘어갈 것이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끝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떻게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게 세가지 있다. 죽음 과 세금과......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여자. 아리와 그는 결혼의 문전에 다다라 있었다. 두사람이 댄스장에서 반 원을 만들려고 양손을 위로 올리는 순간, 그녀의 약혼 반지에서 다이 아몬드가 반짝하고 조명에 빛을 발하며 이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이건 내거야. 손대지마.' 물론 이 말은 보석 도둑한테가 아니라 남자도둑한테 하는 말이다. 여러 가지 풍속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녀의 법적인 결합의 주위를 이 세상의 모든 주장이 에워싸고 있었다. 먼 친척들과의 인사, 점심식사, 만찬, 파티, 패물 주고받기. 결혼예복의 선택, 신혼부부의 주택, 그리고 그들 가정에 들여놓을 가구의 구입........... 날짜가 정해지고 증명서 신청도 끝나면 예식장이 예약되고 꽃다발 이나 피로연 음식과 샴페인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혈액 검사가 실시 되어 둘 다 순결하다는 게 증명된다. 이제는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기 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신랑의 친구들이 모여 그를 위한 독신결별파티를 열어 미혼 으로는 마지막인 떠들썩한 밤이 되었다. 야단법석도 대단한 야단법석 이었다. 시내의 각각 다른 곳에서 그들은 세 번이나 단체로 체포되었 는데 그 중 두 번은 체포한 경찰이 석방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 웅까지 해줬고, 세 번째는 축복의 말을 한 다음, '조금만 조용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로써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두 사람-그를 무사히 데려다 주겠다고 끝까지 버틴-이 그를 문 앞까지 데려와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어깨동무를 한채 휘청거리는 다리로 그를 안으로 밀어넣고 문을 닫고 돌아갔다. 순간 그는 술이 번쩍 깨며 돌이나 얼음처럼 몸이 굳어버리는 느낌 이었다. 파티 전체가 술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코린느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늦었군요." 그녀는 온화하게 불평을 했다. "아직도 여기 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줄 알 았어요." "음....... 파티가 있었거든........." 그는 대답했다. 이미 술은 다 깼지만 혀만은 몸의 다른 부분과 균형 을 맞추지 못했다. 그의 내부에서 경계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녀는 알고 있는 것일까? 대체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잔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친구와 노는 건 당신의 자유니까..... 어떤 밤이라도 당신의 자유예요. 당연한 거죠. 하나도 나쁘지 않아 요." 경계의 벨이 갑자기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 다. 그녀는 모르고 있다. 적어도 내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담배를 만지는 동작으로 시간을 때우며 그녀에겐 거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곧 돌아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늦은 시간인 건 알아요." 그녀는 말했다. 그는 두사람의 짧은 만남 속에서 배신자 역할을 한 그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이미 늦었다는 의미로.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하지 않겠지. 제발 부탁인데 그것만은 안 돼! 사랑은 일방통행이라고. "일은 나가고 있어? 아침에 일찍 나가야 되는 거 아냐?" "지난 주에 그만뒀어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서야 그가 말하는 뜻을 알아챘다. "피곤하시군요. 알고 있어요." "당신은 어때?"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꼭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꼭 얘기하지 않 으면 안돼요. 무척 중요한 일이에요." 이번에는 그가 어느 정도 알아챘다. 이세상에서 그리고 모든 인생에 있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애정이나 돈인 것이다. 애정 쪽에 가망이 없다면 남는 건 돈이다. 그는 한 가 지 더 눈치챘다. 그녀가 매우 신경을 써가며 어떤 의미로든 그에게 반항하거나 혼란을 주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그는 건성으로 말했다. "난 피곤해. 완벽하게 지쳤어. 내일 내가 찾아갈게." "정말이죠?"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지만 그래도 무리하게 요구해서 그 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배려가 나타나 있었다. "무슨 소리야, 코린느." 그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제까지 내가 거짓말한 적 있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한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단 사소한 일에서만 그랬지만. 그녀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었다. "전에 살던 곳에서 이사했어요." 이렇게 말하고 새로운 주소를 그에게 가르켜 주었다. 그는 약속했다. 그녀를 쫓아내고 싶은 나머지 그는 그녀 보는 앞에 서 조금씩 문을 열며 대답을 했다. "알았어. 찾아갈게, 아리." 순간 그 문이 도로 닫히게 되었다. "아리라고요? 아리가 누구죠?" "알이야." 그는 황급히 정정했다. "오늘 밤 같이 논 친구 이름이야. 거의 오분마다 그 녀석의 이름을 불러서...그만." 그는 겨우 그녀를 보내고 '휴우'라고 온몸으로 한숨을 쉬었다. 돈 그 것뿐이야. 그녀는 돈을 원하는 게 분명해. 일을 그만뒀다는 말도 임 시적이야. 약간의 돈을 주자. 그걸로 끝을 내자. 약간의 돈을 주어야 할 정도의 일은 있었다. 그는 다음 날 점심 시간에 예금 중에서 5백 달러를 인출했다. 그 정 도로는 아직 끄떡없었다. 신혼여행 비용과 신혼생활을 두세 달 즐길 정도의 돈은 충분히 남아 있다. 게다가 그는 괜찮은 봉급을 받는다. 막 은행을 나오는데, 정면에서 아리의 오빠인 당을 만났다. 당은 은 행을 한번 쳐다보고 그의 모습을 한번 훝어보고 나서 이렇게 말을 걸었다.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이걸 받게나. 나도 이런 경험이 있어. 3년 전에는 나도 꽤나 고생했다고." 턱! 당에게서 받은 2백 50달러가 그의 손바닥에서 기분 좋을 소리를 냈다. 그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어차피 가깝게 지낼 사이가 아닌가. 처음에는 그 2백 50달러를 자신의 예금통장에 넣으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쳤다. 쩨쩨하게 굴 필요는 없다. 모두 그녀에게 주 어 버리자. 대단한 액수도 아니지 않는가. 이것으로 그녀는 작년의 헌 신에 대한 보수를 받게 된다.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목에 매달 려 올 게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 밤엔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면 안 돼. 재빨리 용건을 끝내고 돌아와야 한다. 그 간이 주택은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지역에 있었기 때 문에 흐릿한 어둠 속에 음산하게 보였다. 앞의 도로는 아직 포장도 되어 있지 않았고 뭔가 검은 재료를 표면에 깔아 놓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집 외에도 간이 주택이 많이 들어서고 있는 듯했다. 그녀 의 집까지 가기 전에 이미 건축에 들어간 목조의 구조물을 몇 갠가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점차 드문드문해지다가 결국 토대 만 몇 개 보이다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불도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답게 깨끗하게 장식하고 살고 있었다. 사랑에 실패한 여 자라도 여자는 역시 여자다. 사라사 목면의 커튼이 키스를 유혹하는 붉은 입술처럼 창가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그녀는 현관에서 벨을 누를 여유를 주지 않았다.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커튼에 어울리는 작은 에이프런을 하고 있 었다. 지난해의 사랑, 그녀 혼자만의 집을 꾸미며 이미 끝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와 주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는 눈썹을 치며 올렸다. "이제까지 내가 약속을 안 지킨 적이 있던가?" "그래요, 적어도 말로 하는 약속은 지켰어요. 하지만........" 그녀는 셰이커로 칵테일을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 마티니를 제일 좋아했죠?" "이제 마티니는 싫어졌어." 그는 그 말이 그녀에게 새겨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셰이커에 묻은 습기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거울처럼 반짝 이며 빛나는 표면이 드러났다.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 "말할 필요 없어. 이게 잘 말해 줄거야. 이게 제일 잘 말해 줄 거 야." 그는 돈다발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무슨 뜻이죠?" 놀라움과 굴욕과 분노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모른다면 왜 내게 요구했었나." 그녀는 한동안 의자에 않은 채 자제력을 되찾으려고 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장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감정이 둔한 편이었다. 실은 이 순간까지도 그는 그녀에게 감정 따위가 있는 지 없는지를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얼굴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면에서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럼 대체 어떻게 하면 돼?" 솔직히 그에게는 그녀의 폭발적인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그 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상황은 점점 흥분되어 갔다. "대체 어떻게 하면 되냐고요? 내 곁에 있어주면 그걸로 돼요! 난 도 저히 혼자서는 살 수가 없어요!" 그  이미 목소리가 거칠어졌고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비명에 가까운 어조로 물었다. "곁에 있어 달라고? 그건 어떤 뜻이지?" 그녀가 손바닥으로 탕하고 테이블을 쳤기 때문에 셰이커의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짤랑 났다. "난, 당신 애를 가졌어요. 이게 바로 그 뜻이에요." 충격으로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였다. 그는 손을 뻗어 뭔가로 몸을 지탱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어째서 내가............?" "당신도 아다시피 난 내 인생에서 당신 외엔 남자를 몰라요." 그 점은 그도 알고 있었다. "좋아." "뭐가 좋아요?" "전부 내가 책임을지지. 병원도........." 결국 그녀는 격정과 고통을 참지 못하고 내리꽂는 듯한 비명을 그 에게 던졌다. 원래 비명 따위를 지르는 여자가 아니었는데도. "병원? 병원은 싫어요. 내가 원하는건 남편이에요!" 아까의 충격과 그 위에 더해진 이 새로운 충격이 그의 자제력을 완 전히 파괴시켜 버렸다. 이제 지적인 반응은 사라지고 오직 육체의 반 사운동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남아 있는 삶을 다 바쳐서 그녀가 입에 담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그 녀의 남은 모든 삶을 바쳐서.......... "나와 결혼해 달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는 거라 고요!" 그 순간 그 물체는 마치 스스로 그에게 뛰어든 것처럼 '척'하고 그 의 손에 잡혔다. 그때까지 시선을 준 적도 없고 그 물건이 방 안에 있는지도 몰랐었다. 그녀는 최초의 일격과 동시에 거의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친 듯이, 제정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일종의 환각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몇번이고 몇번이고 그녀를 공격했다. 결국 그녀는 죽 고 모든 것은 끝났다. 백명, 천 명의 남자가 해 온, 자신에게만은 결 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 그 일을 결국 해버린 셈이다. 백번 이나 천번이나 책에서 읽은 그것이 지금은 책 속이 아닌 현실로서 자신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는 물체에 시선을 돌리며 그것이 무엇 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토록 이상한 일이 어디에 있을 까? 그것은 기다한 검 같은 것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다. 잠시 후 그는 겨우 그것의 정체를 알았다. 실제 눈으로 보고 겨우 깨달은 것이다. 사무라이의 검. 옛날 일본과의 전쟁이 준 선물이다. 그는 그 제야 그녀에게 오빠가 하나 있고, 태평양 전쟁 때 현지에 갔다가 귀 환 후 얼마 안 돼서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 다. 당시에는 이런 물건을 흔히 기념품으로 가지고 오곤 했었다. 잡았던 손을 놓자 그것은 땡그랑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잠시 후 그는 그녀가 벽에 박아 놓은 받침대를 발견했다. 거기에 걸 려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쪽으로 다가가려던 그는 받침대를 발견 했다. 거기에 걸려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쪽으로 다가가려던 그는 받침대 밑에 찢어진 끈과 빈 칼집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 의식적인 마음이 그것을 무기라고 찾아낸게 틀림없었다. 그것을 집은 기억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의 두뇌가 맹목적인 폭발을 일으켜 살인 을 한 건 틀림없었다. 그는 아주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을 에워싸고 있 던 충격이 서서히 녹아 느슨해졌기 때문이었다. 셰이커의 내용물을 유리 컵에 한잔 따라 마셨다. 두 개의 유리컵 바닥에 그녀가 넣어둔 올리브도 하나 집어먹었다. 비정한 게 아니었다. 만약 살기를 원한다 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의 본능이 가르쳐 주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살고 싶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죽음을 목격하니 한층 그 런 기분이 들었다. 계속해서 두 잔째를 따랐지만 그것은 마시진 않았 다. 그는 셰이커에 남은 것을 싱크대에 버렸다. 가망이 없어 보였다. 손을 댈수가 없었다. 방 전체가 더럽혀져 있었 다. 마치 페인트공이 양동이에 그녀의 피를 받아 그것에 솔을 담갔다 가, 이쪽저쪽 사방의 벽에 칠한 것 같은 상태였다. 자신한테도 피가 튀었지만 다행히도 검은 색 계통의 옷이라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래 서 그 일은 나중으로 미뤘다. 우선 그녀를 이곳에서 치워야 한다. 어떤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는 그녀의 옷장으로 가서 불투명한 플라스틱 의상보존용 가방을 많이 찾아냈다. 일을하다 보니 오히려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많았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지퍼를 잘 닫고 우선 옷장 속에 기 대어 놓았다. 다음으로밖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가서 트렁크를 열어 공간을 만들 었다. 그리고 운전석으로 가서 그곳에 놓아둔 석간을 꺼내 트렁크 전 체에 신문지를 깔아, 부주의로 인해 혈액이 묻는 것을 방지했다. 그 근방은 놀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가끔 주위를 한 번씩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의상 가방들을 옮겨와서 트렁크에 넣고 열쇠를 잠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집으로 들어간 그는 전등을 전부 끄고 또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그녀의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나온 뒤, 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까지의 순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몇시간 동안 계속 차를 몰았다. 그는 오히려 느린 속도록 막연 하게 흐르듯 차를 몰고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상하게 도 전혀 공포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공포가 급박하 고 날카로운 것을 아니었다. 그리고 전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고 말 하는 것도 엄밀하게 말해서 진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포심이란 사건이 자신에게서 멀리, 혹은 객관적으로일어났 는가, 아니면 바로 절박하고 직접적인 자신의 문제로 일어났는가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평소의 조심성과 신중함을 얼 마나 잘 유지했는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 순식간에 끝났기 때문에 신경이 뼈를 깎아 내리는 듯한 긴장을 경험할 틈도 없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그의 신경은 거의 보통 사람과 같았으며 방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신경을 아니었다. 한번은 아직 열려 있는 상점을 발견하고는, 차에서 내려 새 담배를 한 갑 샀다. 그리고 차를 가게 앞에 세워둔 채 한참동안 담배를 피우 다가 다시 차를 몰기도 했다. 겨우 행선지가 정해지자, 목적 없는 드라이브는 끝나고 차는 확실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고 그는 여전히 서두르지 않았다. 단지 무의미하게 길을 꺾는 횟수가 조 금 줄었고 속도가 시속 5마일 정도 빨라졌을 뿐이었다. 목표가 정해졌지만 차는 계속 달렸다. 그는 현재 도심에서 상당히 먼 곳에 와 있었다. 그는 마지막 관문을 향해 역시 한가롭게 철도 노 선과 평행한 도로를 달렸다. 때때로 반대편에서 헤드라이트가 빛나면 서 낯모를 차가 나타났다간 사라져 갔다. 누군가에게 기억될 염려는 아무것도 없다.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문 거무스레한 사람의 그림자 가 핸들을 잡고 천천히 차를 모는 모습뿐이었다. 폭이 넓은 도로였지 만 주요 간선 도로는 아니었다. 이미 한밤중에 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운전을 계속했다. 이것을 어 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뭔가를 할 때는 아무리 많은 시 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 커다란 도시의 외곽에 점차 접근함에 따라 철도 선로는 무수한 갈 래로 퍼져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것은 여러 칸으로 연결시킨 화물 열차의 대열이 되었다. 화물 열차는 겨우 두세 칸을 연결한 게 있는 가 하면 끝없이 연결된 것도 있었다. 마침내 그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회중전등을 가지고 차에서 내렸 다. 그리고 늘어선 화물 열차 사이의 어둠 속으로 잠깐씩 그의 모습 이 보였으며 때때로 부드러운 모래 밟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다른 경 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천천히 시간을 보내며 곧바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찾는 손님이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찾을 때가 지는 그 이하의 물건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쇼핑을 계속하고 있는 듯 한 모습이었다. 차로 돌아와서부터 일은 쉬웠다. 우선 도로의 중앙으로 나가 좌우를 살폈다. 그래서 이쪽으로 오는 차의 불빛이 아주 먼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차로 돌아가 교묘하고도 빠른 동작으로, 게 다가 무서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뒤트렁크를 열어 의상 보존용 가방을 꺼냈다. 그것들을 잠시 차에 기대 세워두고 트렁크를 닫아,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가 지날갈 경우 쓸데없이 주의 를 끌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는 절반은 들고 절반은 끌면서 의상보존용 가방들을 화물 차량이 만든 어두운 골목 안으로 가져갔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문을 잠그 지 않은 화차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그것이 닫히는 소리가 들렀다. 모두 끝난 것이다. 자동차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단지 홀가분할 뿐이었다. 돌아올 때도 갈 때와 마찬가지로 무사했다. 만약 그에게 냉소적인 성향이 있었다면 이렇게 자문했을 것이다. 살인이란 무엇인가? 무엇 을 걱정할 필요가 있는가? 차는 이윽고 그녀의 간이주택에서 뻗어온 도로와 자신의 아파트로 가는 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에 도달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 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도박이었 지만 그렇게 큰 도박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승산은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았고 게다가 이 시간에 그녀의 집에 가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 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이 하루이틀 사이에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찾아왔다 하더라도 무리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피투성이인 방은 일단 그대로 두고 아파트로 돌아가 청소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는 자신의 아파 트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탁상 시계를 아홉시에 맞추고 그때까지 세 시간을 잤다. 즉 보 통 범죄자가 범행 후의 첫날밤에 자는 것보다 세 시간 더 잤다는 계 산이 나온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 그는 아침도 먹지 않고 시의 반대편에 있는 페인트가게로 갔다. 그리고 그곳 점원에게 아파트의 관리인이 방을 다시 칠해 줄 생각을 안 해 할 수 없이 스스로 해야 한다고, 짜증 섞 인 어투로 말했다. 페인트 가게의 점원은 동정적이었다. "어떤 색으로 하시겠습니까?" "당신이라면 어떤 색을 권하겠소?" "현재 무슨 색이 칠해져 있죠?" 점원이 꺼내 놓은 색채표 중에서 그는 절대적인 정확함으로 어떤 한 색깔을 선택했다. "글쎄요, 그 위에 칠하시려면 중간 정도의 눅색이나 중간 정도의 갈 색이 좋겠는데요." 점원은 말했다. "그 이외의 색깔로는 아무래도 지금 칠해져 있는 색이 비쳐서 이중 으로 칠을 하셔야 하는데요." 그는 마른 피의 색을 연상해 금방 갈색을 선택했다. 붉은 빛이 연한 계수나무색이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색조의 목조용 페인트 한 통 과 사다리, 필요한 솔 종류, 용해액 등을 샀다. 다음으로 옷 가게- 양 복점이 아니고 작업복 따위를 파는 잡화점-에 가서 작업복을 상하로, 그리고 페인트가 손톱 밑 같은 데 남아 있으면 곤란하므로 긴 장갑 을 샀다. 손톱 밑에 남은 페인트란 악마에게 진 빛과 마찬가지인 것 이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곳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겨우 아침 10시경이었다. 비포장도로에서 차 를 집 뒤로 돌려 집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주차했다. 실제로는 그렇 게까지 주의할 필요가 없었다. 토요일이라 근처에는 인기척도 없고 목공도 주민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예상밖의 부랑자까 지 염두에 두고 만전의 경계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 정면으로 돌아나와 우선 두구류를 가져오기 전에 현관의 상태를 조사했다. 모든 것이 떠났을 때 그대로였다. 자신의 도박을 승리로 끝났다는 증거, 즉 사건 이후 아무도 이 집에 접근한 사람이 없다는 증거가 그곳에 갖추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약속이 되고 만 그 약속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이루어졌을 때, 그녀가 생각없 이 내뱉은 말로써 이 집에 전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 설 예정 리스트에는 올랐지만 아직 순번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에 사귈 때 그녀가 신문을 별로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변두리에서 그녀가 정기 구독 계약을 하고 있으 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우유도 배달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마시고 싶어지면 근처의 시장에서 샀던 게 틀림없었다. 마지막이 우편물인데 현관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불리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만일을 위해 다시 한번 주위를 살펴보고 현관문을 그녀의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그는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현장 의 상태는 전날 밤의 기억보다도 훨씬 심했다. 그녀를 운반하는데 정 신이 팔린 나머지 이렇게까지 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무사한 벽은 한 쪽뿐이었다. 다른 두 벽은 그저 그랬다. 그런 데 마지막 한 쪽 벽은 사방에 혈관이 그려진 듯했다. 그것은 마치 흰 색과 갈색이 뒤섞인 거대한 대리석 판이 세워져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런 모양이 생겼는지는 금방 알수 있었다. 피가 자연스럽게 뿜어나온 게 아니라, 쓸데없이 사무라이의 검을 휘둘렀기 때문에 그 렇게 피보라가 튀었던 것이다. 힘에 겨운 작업으로 보였다.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을 고쳤다. 그 녀의 시체도 처리하지 않았던가. 그게 가능했으니 이것도 불가능할 리가 없다. 그는 이제까지도 그랬듯이 장소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 그는 셰이커와 진과 벨모트를 꺼내 마티니를 두 잔 만 들었다. 올리브는 띄우지 않았다. 마티니로 자신감을 회복하자 그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구두도 벗고 양말만 신고 있었다. 구두에 묻은 페인트는 잘 떨어지지 않아, 손톱 밑에 낀 페인트처럼 범죄의 증거가 되기 쉽기 ㄸ문이다. 페인트를 칠하다 보니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칠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페인트를 칠하는 수준이 고급이 아니라고 설마 형무 소에 집어 넣지는 않을 것이다. 작업은 교통 위반을 보고 쫓아가는 경찰의 오토바이에 뒤지지 않는 맹렬한 속도로 금방 끝났다. 거의 의 식하지도 못하는 동안에 불필요한 한쪽 벽을 포함한 사면 전부의 벽 이 칠해졌다. 불필요한 한 쪽 벽은 그의 예술적 감각으로 칠한 것이 다. 삼면이 같은 색이고 한면만 다른 색이면 방 자체의 조화가 깨질 테니까. 사다리를 접고, 양동이 따위를 치우고, 작업복과 긴 장갑을 벗자 그 는 방 중앙에 서서 자신의 일을 총괄적으로 검토했다. 그리고 '휴우'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결코 일찍이 찾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 가 지만 보증할 수 있었다. 벽에는 한 방울의 피도 보이지 않았다. 저주 하고 싶은 피의 오점은 완전히 칠해져 있었다. 물론 가구 등의 또 별 문제였다. 다행히도 소파나 의자에 놓은 쿠션 은 떼고 붙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융단의 경우는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방 자체가 꽤 작았기 때문에 융 단도 특대형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말아서 현관의 안 쪽 구석에 세웠다. 예정된 다음 작업은 벽을 칠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아니었지 만, 오히려 그 이상이 큰 위험성을 갖고 있다. 잘못하면 방화죄로 잡 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집에서 빠져나온 그는 짓는 중이라서 골조만 있는 주택의 내부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처음 세 집은 그녀의 집과 너무 가까워서 목적에 맞지 않았다. 즉 너무 간단히 추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은 겨우 토대를 만들어 시멘트를 부어 놓았을 뿐이 었다. 그 한집 앞의 것은 이미 벽도 쌓았지만 바닥도 지붕도 없다. 그 더 앞의 것은 목재의 양도 적당하고, 게다가 대팻밥도 충분히 있 어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왕복은 세 번으로 충분했다. 말아 놓은 융단, 빼낼 수 있는 소파나 의자의 쿠션, 소형 시트 테이블, 양피지로 된 스탠드의 갓, 그 외에 혈액에 묻은 물건은 전부 그 간이 주택으로 옮겨왔다. 전날 밤에 입 고 있던 그 자신의 양복도 잊지 않았다. 그것들을 다 모아서, 그 맨 위에 페인트가 묻은 작업복, 긴 장갑, 솔들을 놓고 페인트 통에 남아 있던 매우 타기 쉬운 액체를 부었다. 다음으로 그 짓다만 집에 있는 깡통을 이용해서 집에 돌아갈 만큼 의 양만 남겨두고 차에서 가솔린을 빼내, 물건 더미는 물론 주위의 목재에까지 충분히 스며들어가게 부었다. 그는 차를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돌리더니 엔진을 끄고 사방에 주 의를 기울이면서 운전대에 않아 대기했다. 드디어 갓 태어난 고양이 가 우는 듯한 소리로 아주 낮게 시동을 걸고, 접은 신문지를 꺼내 들 었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두 번 정도 켜보고 고장이 없는지도 확인했다. 그리고 금방 올라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 채 차에서 내 려 그 미완성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는 뛰다시피 해서- 그녀를 죽인 후로 그가 민첩한 행동을 보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차에 올라타고는 곧장 달리기 시작 했다. 차 문을 닫은 것도 이미 액셀레이터를 밟아 질주하기 시작한 후였다. 다른 때야 어쨌든 이때만은 민첩한 행동이 필요했고 한순간 이라도 늦출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 그 집이 보이는 거리에 있는 동안은 어른거리는 연기도 불길 이 솟아오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들이 나오고 산이 나왔 다. 그는 집 앞까지 와서 차를 세웠다. 차문을 잠그고 열쇠꾸러미를 공 중으로 던졌다가 손으로 받았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 양다리를 넓게 벌리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다 끝났다는 의미의 큰 한숨을 쉬었다. "자,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할 테면 해 보라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다 더욱 훌륭하게 말을 고쳤다. "자,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말한다면, 증명해 보라지." ------------------------------------------------------- 한번 증명해 보세요.... 어디에... 그 증거가 있을까요??? 많은 호응 부탁합니다. *^^* 마프리가~~~ 『추리문학동호회-일반연재 (go CHURI)』 1135번 제 목:[해 답] 한 방울의 피..(추리, 증명) 올린이:미스마플(장현정 ) 98/01/30 13:38 읽음:109 관련자료 없음 ----------------------------------------------------------------------------- 2. 추리, 어떻게 증명되었는가 그들은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 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 듯이 그들은 즉시, 매우 용의주도하게, 그리고 아주 작은 단서에서부 터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벨이 울렸다. 두 명의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당신이........" "네, 그렇습니다." "물론 들어오시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전 괜찮아요. 그렇지 않을 이 유가 없으니까요." "당신은 코린느 마슈드를 알고 계십니까?" "한때는 그랬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 것을 언제죠?" "지금이 6월이죠? 2월 말인가 3월 초였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군 요." "그후로는 전혀 만나지 않으셨나요?" "방금 대답한 대로입니다. 그후에 만났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죠." "그후에는 만나지 않았다는 걸 당신의 진술로 간주해도 될까요?" "저의 진술요? 네에, 좋습니다." "저희와 함께 경찰서까지 가 주시겠습니까? 좀 더 자세하게 묻고 싶 은 게 있어서요." "당신들은 경찰입니다. 그 말씀에 반대할 수는 없겠죠." 그날 저녁 경찰이 다시 찾아왔다. 그 다음날 그는 다시 경찰서로 갔 다. 그리고 또 돌아왔다가 다시 갔다. 그리고....... 계속 거기에 있게 되었다. 살인 용의로 구류당한 것이다. 안쪽의 방. 여러 다른 방도 많았지만 그는 특별히 안쪽 깊숙한 방에 넣어졌다. "이제부터 나를 지독하게 때리려는 거죠."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안 해. 우리는 네가 범인 이라는 건 충분히 확신하고 있어. 우리는 역효과 나는 걸 원하지 않 아. 앞으로 너를 양가죽 장갑을 끼고 다룰거야. '안락의자'에 앉을 ㄸ 도 희망한다면 양가죽 팬티를 입혀주지." "어째서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해요?"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 짓도 안했는데." 그러자 상대는 충고하듯 말했다. "기도문을 외려거든 나중에 해. 곧 필요한 때가 올테니까." 길고도 지겨운 하루 내내 확인에 확인이 계속되었다. "당신 상점에서 담배를 사고 피묻은 1달러짜리 지폐로 돈을 낸 사람 이 이 남자가 맞소? 앞면에는 피묻은 엄지 손가락의 지문이, 뒷면에 는 검지 손가락의 지문이 묻은 화폐로." "그래요, 이 남자예요. 처음에는 저도 무슨 선전물인 줄 알았어요. 너무 지문이 선명해서요. 괴기영화 같은 데서 손님 끌려고 하는 거 있잖아요. 왜, 영화관 앞 도보에서 피로 발자국 같은 걸 그리거나 하 잖아요? 일종의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잔돈을 챙기는 남자의 얼굴을 봤죠. 그런데 아주 자연스럽고 아무 신경도 안 쓰기에 저도 아무 말 안했죠. 그리고도 한참 차 안에 앉아 담배를 피우더군요. 아 무튼 이 남자가 틀림없어요!"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황갈색 2번 페인트를 한통 사간 사람이 이 남자가 맞소? 그리고 니 스와 솔과 사다리도." "이 남자예요."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당신 가게에서 작업복 상하를 산 사람이 이 남자요?" "이 남잡니다."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확인을 위한 증인들은 방에서 다 나갔다. "결국 넌 그 재료를 갖고 182번지의 집에 가서, 거실을 조작한 거 지?" "그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방을 다시 칠한 걸 부정하는가? 하지만 네가 산 페인트와 그 거 실은 색도 등급도 같은 제품이야!" "전 부정한다고 한 기억은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건 어떤 뜻이지?" "내가 그곳을 칠했다는 것을 증명하세요. 그리고 내가 다른 어떤 곳 에 칠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세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떤 다른 곳에 칠했는지 그 장소를 말해 봐." "아니, 그건 안돼요. 그건 당신들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닙니다. 난 어 디 다른 곳을 칠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수구에 버리지 않았다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선물했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동안 내버려뒀더니 그 사이에 누군가 훔쳐가거나 했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 명의 형사는 잠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명이 머리를 꽝하고 치며 혼자말처럼 했다. "아,아... 저녁석! 아가리가 잘도 돌아간다." 플라스틱 의상 가방 몇 개와 잔혹한 내용물이 발견되었다. 주가 서 로 다른 듀루스나 탠자스 시티, 그리고 애비린 근처의 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들은 결코 드러내놓고 발견 장소를 얘기하지 않았지만 질 문 상태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 그는 그것을 느꼈다. 드디어 범죄의 근본적인 사실은 나왔지만, 역시 그것 또한 결정적 단서가 될 수는 없었다. 경찰들은 그날 밤 화물 하역장 근처에서 그 를 본 단 한명의 목격자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안 그는 음습 한 만족감을 맛보았다. 차에 대해서도 철저히 검사한 결돠 한 방울의 피도 없는 게 확인된 것 같았다. 그것도 그의 세심한 배려가 낳은 결 실이었다. 게다가 의상 가방은 원래 그녀의 소유품이었다. 그를 범인이라고 증명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무라이의 검- 그는 대담하게도 그것을 그녀의 나일론 스타킹에 싸서 시체와 함께 버렸던 것인데-도 그들에게는 무가치한 것이었다. 원래 그녀의 소유품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물건의 출처를 알 아내는 것은 총기류처럼 가능하지 않았다. 전시의 기념품이기 때문에 등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알리바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었다. 그 것도 그에게 불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역할을 했다. 원래 처음부터 그는 전혀 알리바이를 제출하지 않았고 무엇 하나 주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깨려고 해도 깰 것이 없었다. 단지 집에서 쭉 혼자 있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알리바이가 증명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간이부택에 갔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증명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한 가능성이 다른 가능성을 상쇄시켜 무승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사에 더 진전이 없자 이윽고 질문과 질문 사이에 보다 강 력한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주 먹을 치켜 드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신체에 흔적이 남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협박도 회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말로 표현 되지 않는 압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알고 그들고 알고 있었다. 그 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고,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 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일부러 주문해서 주는 엄청나게 짠 음식을 그는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청어 자반, 또는 훈제 청어. 하지만 물은 주지 않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들어서는 숨막히게 더운 밤에 보일러실에 불을 넣 고 지하 유치장의 라디에이터를 활짝 열었다. 여전히 물은 주지 않았 다. 그것도 모자라서 전열기가 그가 앉아 있는 의자의 등 뒤에서 수직 으로 방사 되었다. 그는 강제로 모포를 두세장 둘러 쓰고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즉시 발 밑바닥은 흐르는 땀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물은 주어지지 않았다. 뚜껑을 막은 유리로 된 물병이 투명하고 맑은 물을 가득 담고 유혹 하고 있었다. 얼음 조각을 띄운 그 물병은 그의 손이 미치는 테이블 위 한 곳에 놓여졌다. 하지만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고 할 때마다 질 문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 물병 가까이에 있는 형사가 마치 무의식적인 행동처럼 물통을 자기 쪽으로-그의 손 이 닿지 않는 곳으로-조용히 당기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연필로 장난을 치거나 낙서를 하는 동작과 비슷했다. 무 작정 물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대로 드시죠. 당신 눈앞에 있잖소. 일부러 가져다 놓았는데."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도 무척 신경을 썼다. 그는 한잔의 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서로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후에도 그들은 두세 가지의 기묘한 수단을 썼다. 한 번은 담배로, 또 한번은 그 건물의 용변시설을 사용 못 하게 하는 것으로. 하지만 효과는 더 적었다. 어느 것도 갈증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기 때문이 다. "딱 한방울의 피만 있으면 돼." 형사는 계속 말했다. "한 방울의 피만 있으면." "내게서 그걸 얻을 순 없어요." "우리는 시체를 확인함으로써 적어도 어딘가에서 범죄가 일어났다는 걸 제시했다. 또 네가 사용한 물품-예를 들자면 점원에게 건넨 1달러 짜리 지폐-에서 혈액을 검출해 네가 어딘가에서 뭔가 범죄에 관계했 다는 것을 제사했다. 그리고 그 집 근처에서 네 발자국 같은 것을 발 견했다. 작업복아니 페인트 통의잔해, 솔의 손잡이 등을 화재 현장의 재 속에서 입수했다. 이제 남은 겅 범행, 그 자체가 어디서 이루러졌 는가를 증명할 수 있으면 돼. 그걸로 일은끝나. 한 방울의 피만 발견 되면 돼. 한 방울의 피만 있으면." "그런 정중한 요구도 들어주지 못하고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의 빈정대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외로 그는 갑자기 풀려났다. 뭔가 법률상의 문제가 있어서 너무 무리하게 일을 진행 시키면 결과적으로 완전히 그를 놓 치게 되므로 그것을 피하려 한 것 같았다. 아니면 보다 면밀히 그를 감시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풀려났다. 형사 한 명이 들어와 선 채로 가만히 그를 바라 봤다. "안녕하세요." 결국 그쪽에선 눈싸움을 포기하고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여기서 나가 싶지?" "여기보다 좋은 장소는 얼마든지 있죠." 형사는 고개짓을 했다. "좋도록 해주지. 돌아가도 좋아. 당분간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졌어. 접수대에 가서 사인하면 소지품계가 신변 물품을 반환해 줄 거야."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경호원이 딸린 건 아니겠죠." "어쩌라는 거야. 용서라도 구하라는 거야?" "아뇨, 단지 내 입장을 알고 싶어서요. 난 유죕니까, 무죕니까? -어 느 쪽이에요?" "실제로 구속된 건 아니었잖아. 아무런 불만도 없을텐데?" "그야 구속되진 않았지요. 하지만 무척이나 자유를 속박당해야만 했 죠."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가 금방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부탁해. 시 경계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말이야." 마침내 그는 형사의 뒤를 따라 밖으로 걸어 갔다. 그는 담배의 빈 갑을 바닥에 내던지며 물었다. "이 일이 신문에 났나요?" "난 스크랩하는 취미가 없어서 잘 몰라." 형사는 대답했다. 신문을 한 부 사 보니 사건은 역시 나와 있었다. 이제까지 쭉 실렸던 것 같고, 앞으로도 계속 실릴 게 뻔했다. 풀려나서 처음으로 한 행동은 아리에게 전화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족들이 못 받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녀가 병으로 뭄져 누웠다고 말했다. 거기까지는 그도 의심하지 않았 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의 목소리에는 얼음과도 같은 냉 랑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그들을 매우 분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곧 다시 한번 걸었다. 또 다시. 또 다시. 포기하 지 않았다. 잔신의 모든 행복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결국 끝애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열쇠로 문을 열자 전화가 울리 고 있었다. 아까부터 울렸다면 이제 막 끊길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저예요." 아리의 슬프고 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 옆의 전화로 걸고 있어요. 집안 사람들이 알면 안되니까요. 그 렇게 되면....." "당신은 신문기사 따위를 믿지는 않겠지?" "당신이 믿지 말라면 믿지 않겠어요." "그건 단지 의례적인 신문이었어. 아주 옛날에 알던 여잔데, 그들은 자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가 봐." "계획을 모두 바꿔야 해요. 우리끼리만 몰래 일을 진행시켜야 해요. 그래도 난 괜찮아요." "만나고 싶어. 내가 찾아 갈까?" "안 돼요!" 그녀는 울음섞엔 목소리고 말했다. "아직 안돼요. 좀 더 기다려 줘요. 좀더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만나지?" "내가 옷을 입고 어딘가로 나가겠어요." "나올 수 있겠어?"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당신 목소 리를 들으니 의사가 주는 안정제보다 훨씬 효과가 좋아요." "'연인들만을 위해서'라는 작지만 조용한 클럽이 있어. 시그럽지도 않고 번잡하지도 않아. 그 제일 구석자리에서 봐." "한 번 간 적이 있죠. 기억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그날 밤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와." 이것으로 모든 게 다시 시작되었다. "서둘러. 당신의 키스를 기대하고 있겠어." 너무도 힘차게 셔츠를 벗는 바람에 한쪽 소매가 반쯤 찢어졌다. 그 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셰이빙 크림 병을 부셔져라 꽉 쥐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꽃집을 불렀다. "난꽃을 전해 주세요. 구석 자리에요, 엷은 노랑색 드레스를 입은 여 자 분에게. 15달러짜리로 하면 어떨까요? 좋아요, 그럼 15달러짜리를 두 개 해 줘요. 그리고 카드에는 이렇게 부탁해요. '그에게서 그녀에 게'라고." 그는 젊었고 사랑에 빠져 있었다. 지금의 자신의 사랑처럼 그를 사 랑했던 여자를 죽였지만, 그의 사랑은 완전하고 진지했다. 오랫동안 의 긴장이 풀리면서 그는 활기에 넘치기 시작했다. 그는 인디언 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방안을 뛰어다니며 춤을 추고, 등을 낮게 굽혀 입에 손을 대면서. "우-와-와-와!" 이겼다! 해냈어. 앞으로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자칫 함부로 입을 놀 리지 않도록만 하면...... 나는 경찰을 이긴 천 명 중의 한명이야! 그때 조용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형사 한 사람이 침대에 누운 뒤 한 시간 가량 몸을 뒤척거리다가 마침내 다시 일어났다. 손으로 구두를 찾는 소리를 부인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물이라도 마시고 싶어요?" "아니, 한 방울의 피가 필요해." "낮에 찾아도 찾이 못한 한 방울의 피를 밤중에 찾으려 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휴~!" 불쌍한 부인은 한탄하듯이 말했다. "왜 형사 따위의 부인이 됐을까?" "으응?" 그가 문 앞에서 되받았다. "어째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 "우-와-와-와!" 문 쪽에서 조용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가 문을 열어보니 또 그들 형사 중의 하나였다. 그는 그 형사의 얼굴을 안됐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쳐다보고 한숨을 섞어 말했다. "또 뭐죠?" "이번엔 진짜야." "그럼 이제까지 뭐였죠. 의상을 입지 않고 공연한 리어설이였나요?" "말귀를 못 알아 듣는 남자로군, 공식적으로 말해주지." 형사는 정중하게 말했다. "코린느 마슈즈 살해의 용의자로 너를 체포한다. 이후 일체의 발언 은 증거로서 채택된다. 동행하길 바란다." "오호, 역시 형사라는 사람은 다르군요." 그래도 그는 자신을 잃지 않고 웃어 보였다. 형사는 차를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차에 탔다. "이런 일을 하시면 기소를 당합니다. 알고 있어요? 난 부당한 체포 로 고소할 생각입니다. 백만 달러의 배상금을 시에 요구할 거요." "음, 과연 뜻대로 될까?" 두 사람은 전에 코린느 마슈즈의 소유였던 간이 주택으로 가서 차 를 세웠따. 그리고 나란히 집으로 들어갔다. 형사는 이미 만일에 대 비해 그의 손에 수갑을 체우고 있었다. 형사는 방을 어두운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회중 전등을 꺼내더니 그 빛을 벽의 한면에 비추어 커다란 빛의 원을 만 들었다. "잘 봐." "왜 불을 안 켜죠?" "우선 이걸 잘 보라고." 새로 칠해서 오점 하나 없는 벽, 그리고 한 쪽에 전등 스위치가 내 려져 있는 상태였다. "자, 여길 잘 보고 있어." 형사는 회중전등을 끄더니 탁하고 벽의 스위치를 올려 방을 밝게 했다. 역시 오점 하나 없는 벽, 그리고 그 스위치가 올라가 있는 상 태였다. 그리고 올라간 스위치 밑부분에 약간의 피가 묻어 있었다.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 봐, 손에 넣었잖아." 저주받은 사내는 털썩 주저 앉았고 수갑으로 연결된 고발자는 그의 팔꿈치 높이에 팔을 내린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살인자는 중얼거렸다. "네가 그녀를 죽인 건 밤이었어. 전등이 켜져서 스위치가 이렇게 올 라가 있을 ㄸ였지. 네가 돌아와 페인트 칠을 한 건 낮이니까 전등이 켜져 있지 않을 때였어. 우리는 백 시간을 들여 백 번이나 이 방을 조사했지만 그때는 언제나 낮이었고 전등을 켜지 않아 스위치는 내 려가 있을 때 뿐이었어. 낮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부분, 스위치가 꺼 졌을 때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은 곳에 피가 남아 있었던 거야. 오늘 밤까지 말야." 살인자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이젠 해 봐야 쓸모도 없는 말을. "네, 맞아요. 그렇게 된 거예요." 그가 고개를 떨구자 뜨거운 한숨이 가슴을 메웠다. 그의 깊은 한숨 에 남은 생명력이나 저항의 의지인 듯 넥타이에 잔물결이 희미하게 일었다. 이것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이것으로 하나의 생명도 끝이 났다. * END * *작가 : 코넬 울리치 (Cornell Woolrich 1903-1968) *원제 : One drop of Bl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