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탐정 The Dancing Detective - William Irish (1946) 내가 로비를 거쳐서 성큼성큼 들어가보니 패스티 마리노는 여느때와 다름 없이 dancer들의 출근시간을 적고 있었다. dancer들이 들어오는 걸 볼 때마 다 제시간에 왔는지 시계를 두번씩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아니면 어쨌든 그런 시늉을 해야만 되는 것 같았다. dance hall에 나가기전에 이렇게 일찍 나와서 야회복을 입고 얼굴이라도 화장해 본 것은 요즘들어서 처음이었다. "왠일이야, 어디 불편해?" 마리노가 물었다. "아니 여기에 나와 밥벌이를 하려면 꼭 신체검사라도 해야되나요?" 라고 나는 쏘아부치고 어깨에 두른 낡아빠진 싸구려 털목도리 너머로 상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 시간에 나왔기에 물어본거야. 아무데도 아프지 않단 말이야?" 하고 꼬 리를 빼는 것이 아무래도 빈정대는 것이었다. "흥, 계속 그래봐요." 나는 대꾸했으나 목소리를 낮추었기 때문에 마리노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기야 내가 먹고 사는 것이 그자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홀은 영안실 같았다. 8시전에는 언제나 그랬다. 벽에 붙은 뾰죽한 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홀 분위기를 빚어내는 뿌옇고 붉은색 전등말이다. box 에는 고양이 한마리도 없었고, 빈 번쩍거리는 의자 5개와 연주대가 놓여있 을 뿐이었다. 큰 길쪽 벽에는 큼직한 창들이 있어 환기장치를 겸했다. 이게 댄스 홀인지 곧이 보이지않을 정도였고 찬 바람을 그대로 들이마실 수 있었 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탈의실로 가는데 하이 힐 뒤꿈치가 통이 빈 소리를 냈 다. 반짝거리는 마루에 거꾸로 비친 내 그림자는 마치 허깨비처럼 나를 따 라왔다. 기분이 으스스한 것이 오늘 저녁은 재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언제나 기분이 으스스할 때는 꼭 재수가 좋지 않았다. 탈의실 문을 밀어 젖히자마 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줄리! 왜 날 기다리지 않았어. 도도해지셨군."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줄리는 이 방에도 없었다. 아무 데도 없으니, 도 대체 어딜 간걸까? 핸더슨 할멈 밖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타블로이드판 의 내일자 조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됐어?" 나를 보자 할멈이 말했다. "그래요, 좀 쉬세요, 속이 통통 빈 채로 일하게 됐으니 운도 없지 뭐예요" 나는 말하고 목도리를 고리에 걸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서 구두를 벗 어 속에 분가루를 집어넣고 다시 신었다. "오면서 줄리의 방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대답도 없잖아요, 일하기 전에 언 제나 진한 커피를 한잔씩 하거든요. 오늘 열 다섯번이나 춤을 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말했다. 그 순간 하찮은 의심이지만 마음을 스치는게 있었다. 매일 저녁에 늘 같이 한잔씩 했었는데 오늘은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하숙에 는 비상구가 있기 때문에 방 안에서 차를 끓일 수 있게 하지만 내 하숙에서 는 못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의심을 씻어버렸다. 줄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렇다면 그녀에게서 슬립을 벗겨 버릴만도 하지, -그러나 그녀는 슬립은 입지않고 브래지어만 했었다. "그게 어때서, 커피 사마실 돈도 없었어?" 할멈이 비웃었다. 돈이야 있었지만 버릇이란 우스운 것이지, 단짝하고 함께 차를 마신다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려서. "오늘밤에는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데" 나는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 다. "일어나고 말고, 아마 여기서 짤릴지도 모르지." 할멈이 말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올려보이고 의자에 앉은채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할 멈은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요새는 멋진 살인사건이 하나도 안 일어난단 말이야." 할멈이 슬픈듯이 말했다. "제기랄, 가끔 가다가는 멋지고 신나는 살인사건이 생기면 좋겠 어." "꼭 여기서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같군요." 나는 거울에 비친 그녀를 노려 보면서 쏘아부쳤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왜 그 남부에서 온 여자애가 당했을 때도 당신 여기에 있었수? 아마 이름 이 셀리라고 했지." "없었어요, 아니 내가 할멈처럼 늙은 줄 아나봐, 내가 여기서 평생 춤추고 있을 걸로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잘라 말했다. "하루는 그 여자가 일하러 나오지 않았거든, 그러자 그녀가 그렇게 된 줄 알았지 뭐야, 그게 불과...그러니까" 하면서 손가락을 헤아리더니 "삼년 전 일이었어." "집어치워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나빠 죽겠는데" 할멈은 그제서야 신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말이 났으니 말인데, 프레데릭의 댄서는 언제 당했더라, 당신이 오기 얼마전이었지?" "나도 알아요. 그 얘기 듣던 일이 생각나요. 제발 그런 얘기 그만둬요." 할멈은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갖다 대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상한 생각이지만 둘다 같은 놈이 짓일거라고 여겨지거 든." 할멈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같은 놈 짓이라면 세번째는 누가 당할지 알고 싶어."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다행히도 그 때 다른 댄서들이 몰려들어왔다. 그 래서 그 기분 나쁜 얘기는 중단되었다. 금발머리 댄서가 들어왔다. 그다음 엔 레이몬드가 들어왔다. 말라깽이 이태리 댄서도 들어왔다. 다른 여자들 도 모두 들어왔다. 그러나 줄리가 보이지 않았다. "줄리가 이렇게 늦는 일이 없었는데" 나는 말했다. 아무도 누구 얘긴지, 무슨 얘긴지조차 몰랐다. 아랑곳조차 하지 않았다. 지독한 여자들이다. 바깥에서 트럼펫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악사들도 다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핸더슨 할멈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숨을 쉬었다. '내게는 흰빛 타일 기와와 출렁이는 물결을..' 하는 음악에 맞추어 비틀비틀 걸어나갔다. 나는 문을 살며시 열어 틈새로 바깥을 내다보면서 줄리를 찾았다. 등이 다 켜졌고 손님들이 벌써 매표구에서 표를 사고 있었다. 시간제 직업댄서들도 모두 줄을 서 있었다. 그러나 줄리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내 등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야, 그 문 닫아. 여기서 우리가 무슨 공짜 구경시키는 건 줄 알아?" "그런 낡은 옷을 주워입고서는 누구 하나 끌지못할텐데 뭘"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다.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은 닫았다. 마리노가 와서 바깥에서 문을 쿵 치며 고함을 쳤다. "어서들 나와! 뭣들 하는거야, 뭣때문에 돈을 주고 있는지 알아" 그러자 누가 쏘아댔다. "나도 모르지" 악사들이 트럼펫을 불어댔다. 서너 블록 떨어진곳에서도 들릴정도로 요란 했다. 거리가 떠나갈것만 같았다. 밴드가 이쯤 되고보니 다음은 우리 차례 다. 죽음보다 재수가 없는 건지 내가 맨 뒤에 서게 되었다. 홀은 천장쪽으 로 로프를 사방으로 걸어놓았고, 거울이 달린 부분이 천장에서 빙빙 돌기 시작하더니 은빛 빛줄기처럼 불빛을 사방으로 뿌렸다. 마리노가 말했다. "어딜 가는거야, 진저?" 그 남자가 남의 이름을 그렇게 부를 때는 언제나 골탕을 먹이려고 할 때다 "줄리한테 잠깐 전화해 볼께요,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요." 내가 대답 했다. "아주 나가지 그래." 다부지게 그가 말했다. "몇시부터 일하는지 알고 있 을거 아냐? 그 애가 일한게 언제부턴데. " "하지만 그녀를 해고할거 아니예요." 나는 슬퍼했다. 마리노는 시계를 쳐들어보였다. "벌써 짤렸어."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 일자리가 꼭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 을 하고 싶을 때는 꼭 하고야만다. 그 때 재즈음악 악사인 손님이 내 쪽으 로 다가왔다. 한번 달라 붙으면 떨쳐버리기가 여간 힘들지않은 거머리같은 작자이다. 그자가 재즈 악사라는 것을 안 것은, 그 사람은 일주일치 표를 한꺼번에 사기때문이다. 진짜로 약삭빠른 사람들은 꼭 표를 한꺼번에 사는 법이다. 그러다가 홀에 불이 날지도 모르지. 나는 그 악사의 표를 받아쥐고 반으로 찢었다. 그러자 마리노는 돌아서 다 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악사에게 부탁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전화를 먼저 걸어야해요, 일초도 안 걸릴거예요." 손님이 말했다. "난 춤추러 온거야." "제 여자친구한테 거는 거예요." 나는 거듭 말했다. "나중에 잘 해드릴께 요." (전화기에 동전을 집어넣고 5-8-111번을 돌렸다) "네? 정말 잘 해드릴께요, 자 약속." 나는 그 사람의 소매를 재빨리 잡았 다. "다른 곳으로 가지말고 여기 서 계세요." 줄리의 하숙집 주인이 받았다. "줄리 아직 안 돌아왔어요?" 내가 물었다. "몰라, 어제부터 보이지 않네요." 그녀는 말했다. "좀 찾아봐 주세요, 여기 아직 오지 않았거든요, 이러다간 일자리 날리겠 어요." 나는 간청했다. 마리노가 나를 보았다.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 내가 뭐라고 그랬어!" 나는 반 찢은 표를 그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일하고 있어요, 지금 이 손님 시간을 빌린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 손님에게 활짝 웃어보이며 한 손을 그의 팔에 얹었다. 그 자는 불위에 놓은 아이스크림처럼 기분이 풀렸다. "괜찮네, 마리노" 그가 말했다. 마리노가 다시 가버렸다. 하숙집 주인이 이층에서 내려와서 말했다. "문을 두드려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어요, 아마 바깥에 나간 모양이지." 나는 전화를 끊고 말했다. "친구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집에도 없고 여기도 없으니, 한마디도 없이 떠나버릴 애는 아닌데" 이렇게 되니 손님이 들먹거렷다. "이봐, 나하고 춤을 추는거야? 아니면 그렇게 멍청히 서있기만 할거야?" 나는 팔을 내밀었다. "자, 어서 이걸 잡아요." 하고 화를 냈다. 그 자가 막 다가왔을 때 밴드가 멈췄고 휴식시간이 되었다. 그는 흉한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욕을 하면서 다른 상대를 찾으러 가 버렸다. 어떤 일이 일단 벌어진 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내 성격이다. 어쨌 든 나한테 불리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다. 아무것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전화는 했으니까. 나는 로프가 늘어진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손님들을 슬슬 피했다. 두번째 휴식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줄리가 오늘밤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 각했다. 설사 나오더라도 마리노가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더이상 마리노 앞에서 그녀를 감싸줄 수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 이 생겼을까 되풀이 걱정만 되었다. 어쩐지 오늘밤은 운이 나쁠 것같다는 언짢은 느낌이 더욱 커졌다. 휴식시간이 될때마다 손님들이 사준 음료수를 마셔도 신이 나지 않았다. 마리노가 음료에서도 얼마씩 돈을 뜯어내고 있으니 잔을 되보낼 수도 없었 다. 그날 밤은 여느 밤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줄리 생각이 간절한게 다를까, 줄리는 원래 꼼꼼한 편이어서 다른 누구보다 나와 가까웠다. 그날 밤도 별 의별 손님을 받았다. "스텝을 잘 밟으세요, 스텝을. 허리띠가 닿지 않도록 하세요." 나는 지쳐서 그렇게 말했다. "아니 둘 사이에 벽을 쌓아놓자는거야?" "그럼요, 삼마일 정도는 떨어져있어야지요." 하고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마루에서 갑자기 산을 타는 것처럼 하지 말아요, 제가 알프스산인 줄 아세요?" 그리고 나는 눈을 굴리면서 마리노를 찾았다. 그 손님은 점잖아졌다. 누구 나 저 모양이라니까. 그러나 댄서가 너무 화를 내면 매니저는 오히려 말썽 꾸러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벌이가 안 된다. 그들이 나타난 것은 열두시쯤이었다. 세시간 반을 내리 춤을 춘 것이다. 앞으로 한시간만 더 추면 된다. 먹고 살려면 이보다 더 형편없는 직업도 있 겠지. 그들이 로비에 들어오는 모습을 나는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엇다. 손님들이 이렇게 늦게 오는 일이 좀처럼 없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표를 산 밑천을 얼마 뽑지 못할것이다. 그들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했다. 또 한 사람은 멋장이였다. 중간키에 머리카락은 밝은 색이고 말쑥해서 근사해보였다. 내게 아직도 꿈이 남아 있다면 그 꿈속에 나타날 그런 남자였다. 그러나 꿈은 없었다. 그래서 휴식시간이 시작되자 탈의실로 곧장 가서 표를 세어 보려고 했다. 돈을 어떻게 버는지 아는가? 반으로 찢은 표를 다시 갖다주면 얼마 씩 받게되는 것이다. 그들은 선 채로 홀을 두루 살피더니 마리노를 불렀다. 그러더니 내가 막 문턱에 다가섰을 때 세 사람이 몸을 돌리면서 나를 보았다. 마리노가 손짓 을 했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면서 그 쪽으로 갔다. 밴드의 다음곡은 룸바 였다. "헛소리라도 해보시지, 가만 안 둘테니까" 나는 혼잣말을 했다. "진저, 소지품가지고 나오지." 마리노가 말했다. 둘 중의 누가 나를 데리고 나가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댄서를 빼낼 때 매니저와 얘기가 되면 데리고 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과히 나쁠 것은 없었 다. 어디 동전세탁소같은데 가서 점잖게 앉아서 그 사람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잘 빠져나오고 아니고는 각자에 달린거지. 나는 어둑한 뒤쪽으로 나갔다. 막 돌아왔을 때 마리노가 "그러면 내가 그녀의 보석보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라고 말하는 것을 들 었다. 뚱보가 말했다. "그럴 건 없어요, 뭐 뒷조사를 좀 하자는거니까" 그래서 나는 윽박질렀다. "뭐라구요? 도둑이라구? 내가 뭘 했단 말이에요 ? 어디를 가자는거죠?" 마리노가 달랬다.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함께 나가자는 거야, 진저. 화 내지 말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만 해." 그리고 그들에게 뭐라고 했는데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제발 우리 이름은 빼주시오, 아시다시피 6개월동안 적자 운영이니 말입니 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끼어 그들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층계를 내려오면서 울상이 되어 물었다. 멋장이가 택시 안에서 대답했다. "줄리 베네트의 방으로 가는겁니다, 진저" 내 이름은 마리노한테 알았을테 지.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나는 반 울상이 되어 말했다. "지금 말해두는 것이 낫겠군." 뚱보가 말했다. "아니면 거기에 가서 소동 이 날 것 같아." 닉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친구인 줄리가 그만 참변을 당했어요." 라고 말하고는 손가락 하나를 목덜미에 그어보였다. 나는 뚱보 말은 아랑곳없이 택시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머리를 감 싸고 나직하게 말했다. "바로 어젯밤에도 저와 함께 홀에 나갔었는데요, 어제 이맘 때는 탈의실에 서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웃었어요, 그럴 수가 있어요? 참 친한 친구였는 데." 그리고 나는 두살박이 어린애 처럼 바닥을 보면서 울었다. 닉은 한참동안 무척 난처해하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브랜디병을 꺼내면서 "이거 좀 마셔요." 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줄리의 방 층계를 올라가면서 나는 여전히 브랜디 를 마셨다. 줄리 방 앞에서 나는 주춤했다. "줄리가 아직 방안에 있어요?" 하고 물었다. "아니, 없어요. 볼 것 까지는 없지." 닉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 줄리의 시체가 방안에 없었기 때문이에 보진 않았지만 시체가 있었던 것 보다 더 좋지 않았다. 하느님 맙소사, 저 핏줄기가 쭉 뻗은 시트 좀 봐, 병 아리가 비틀렸듯이 - 나는 몸을 휙 돌렸다. 처음 눈에 띈 것에 몸을 기대고 보니 닉이란 사람의 가슴팍이었다. 닉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듯이 잠자코 서 있었다. 그러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빌어먹을 것을 어디다 치워버려!" 내가 진정되자 심문이 시작됐지만 심문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들 말한대로 줄리의 과거를 알아보는 걸로 그쳤다. "그러니까 줄리가 살아있을 때 그 애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소? 줄 리는 잘 돌아다니는 편이었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 자주 만나던 사람이 라도 있었는지?" "오늘 아침. 아니 어젯밤 -아무래도 좋아요- 한시반에 줄리와 이 집 바깥 에서 헤어졌어요." 그들에게 말했다. "문이 닫히자 곧 조이랜드 홀에서 곧장 집으로 걸어왔어요, 그녀는 나다니 는 편이 아니예요, 나도 그러지않구요." 내 말을 듣자 닉의 왼쪽 눈썹의 바깥쪽 반이 위로 올라갔다, 꼭 테리어가 뭘 보고 귀를 쫑긋 세우는 것 같이. "누가 당신들을 뒤따라오는 걸 보았소?" "우리가 일하는 데선 늘 그래요, 그러나 다섯블록쯤 걸어가면 남자들이 지 쳐버리지요, 조이랜드 홀에서 여기까진 열블록이나 되거든요." "아니 하루밤을 내리 춤추고 걸어서 집엘 간단말이예요?" 뚱보가 기가 차 다는 듯이 물었다. "번 돈을 가지고 택시를 탔어야 하나요? 어젯밤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뒤따라 왔는지 확실히 말 못하겠어요. 돌아보면 쫓아오라는거 나 다름없죠." "그건 잊지 말아야겠군" 닉이 무심코 말했다. 나는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곧 기운이 빠졌다. "그러니까 -그 일이 바로 이 방안에서 일어났어요?" "그래요, 이렇게 된거지, 줄리는 당신과 헤어진 후 다시 나갔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쏘아부쳤다. "그런 소리 말아요, 엉터리 같으니 라구, 이걸로 콧등을 쳐버릴거예요." 나는 목도리를 그에게 휘둘렀다. 그는 작은 상자를 움켜쥐고 내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이걸 사러 나갔어" 그는 말했다. "아스피린, 억측하지말아요. 6번가에 있 는 24시간 여는 약국에서 벌써 알아냈지." 그는 깊게 숨을 한 두번 들이쉬더니 기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의자에 앉았 다. "그녀가 밖으로 나갔지, 그런데 방문을 잠그지 않았소, 귀찮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문 틈새로 종이 한장을 끼워놓고 나간거지. 그동안 5분쯤 지났을 까말까 한 사이에 길 건너에서 지켜보던 어떤 사람이 살짝 안으로 들어와 서 이층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렸단 말이오. 큰 길에서 그녀에게 덤벼들었 다간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을테니." "줄리가 돌아올 거라는 걸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문이 잠겨있지 않을 걸 보고 알았겠지요, 또하나 약국점원의 얘긴데 줄리 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지만 발을 식히려고 한 것인지 슬리퍼를 신고 있 었다는군, 범인도 그걸 봤을거고." "이 방 주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잠자고 있었는데 그녀가 왜 소리를 안 질 렀을까요?"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범인은 그럴 틈을 주지않았어요, 그녀가 방문을 열려고 할 때 그녀의 목 을 누르고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 문을 닫고 이쪽으로 끌고 와서 목을 졸라 죽인거요. 범인은 나오다가 마루에 굴러떨어진 아스피린 생각이 나서 그걸 주웠거든, 한 알을 못보고 나머지는 다 주웠는데 우리가 발견한 건 그 한 알이지. 그녀는 문 바깥에서 아스피린을 한알도 먹지 않았고, 이 부분은 그래서 알게 된 거요." 그 피묻은 시트는 눈앞에서 없어졌는데도 쉴새없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지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범인이 그녀를 목졸라 죽였다면 그 피는" 여기서 나는 창백한 표 정을 지었다. "어디서 나온거죠?" 뚱보가 대답하려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부분은 말하고 싶지않 다는 듯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 역시 지겨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뚱보 의 눈이 방안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는 걸 따라서, 이 부분을 뜯어 맞출수 있었으니 이쯤되면 나 자신도 거의 형사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의 눈초리를 읽고 있는 줄은 뚱보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이리저리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뚱보의 눈길은 줄리가 탁자위에 얹어놓았던 휴대용 축음기에서 멈췄 다. 대나무 바늘을 써서 줄리는 밤늦게까지라도 축음기를 조용히 틀 수 있 었고 아무도 그 소릴 듣지 못했다. 축음기 뚜껑이 열려져 있었고, 턴테이블 에는 음반이 한장 얹혀있었다. 그러나 대나무 바늘은 쓰고 또 써서 그런지 반쯤 닳아버려고 거의 갈라져 있었다. 그 다음 그의 시선은 종이쪽지 위에 떨어졌다. 종이 위에는 여덟개 혹은 열개의 반짝거리는 동전들이 보였다. 증거물로 종이 위에 놓아 둔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전 몇개는 반짝거리기도 했지만 작은 갈색 점이 있었다. 끝 으로 그의 눈은 마루에 깐 양탄자로 갔다. 그것은 군데군데 주름이 잡혀있 었다. 특히 가장자리가 그랬는데, 마치 무겁고 무감각한 것이 여러 번 질질 끌려서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무서워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 다. 헐떡거리면서 나는 말했다. 뚱보가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하기를 바랬기 때문이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게 사실이었구나. "그러니까 범인은 줄리가 죽은 후에 그녀를 안고 춤을 췄단 말이예요? 한 번 씩 돌때마다 동전을 주고 줄 때마다 찌르고 또 찔렀단 말이예요?" 칼은 - 아니 무엇이었던 간에 -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범인의 지문을 뜨려고 경찰서에 보냈거나 아니면 그자가 도로 가져갔을 것이다. 이 방안에 일어난 일에, 죽음의 춤이 벌어진 일에 생각이 미치자...내가 느낀 것은 밖으로 나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 이상 더 견딜 수가 없었 다. 그러나 닉의 부축을 받으면서 비틀거리고 바깥에 나가기 전에 축음기에 걸 린 음반의 이름을 힐끔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여운 나비>였다. 문 밖으로 나가서 간신히 말했다. "줄리는 그 판을 틀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걸 싫어했어요, 청승맞다고 말 했어요. 언젠가 그녀와 함께 있다가 그 곡을 틀려고 하던 일이 생각나요. 그녀는 그걸 뺐어요. 못들어주겠다면서 부숴버리려고 하는 걸 제가 말렸거 든요. 그녀는 사랑도 잃고 남자들한테서도 떠났거든요. 감상적인 곡이라 그랬지요, 그녀가 산 것도 아니예요. 그 축음기를 중고로 샀을 때 딸려 온 판들이예요." "그렇다면 범인이 좋아하는 곡이 무엇인지 알겠군. 그녀가 싫어하는 곡이 었다면, 판 중에 제일 밑에 있어야 할 거고 위쪽에 있지는 않았겠죠. 범인 은 일부러 뒤져서 좋아하는 곡을 꺼냈을거야. 이미 죽은 그녀를 안고서 말 이야!" 이 마지막 말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이었다. 층계에 서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아래층 마루가 갑자기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때 닉의 팔이 닻처럼 나를 꼭 안았다. 나는 고리처럼 매달렸다. 남자한테 안겨서 기분이 아무렇 지도 않았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닉은 줄리의 방에 서 서너집 떨어진 식당의 카운터 앞 의자에 나를 앉혀놓고 커피를 받쳐들고 있었다. "진저, 기분이 어때요?"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무릎을 보면서 슬피 말했다. "닉 당신은?" 이렇게 해서 줄리가 죽은 날 밤이 지나갔다. 조이랜드 홀은 그 다음날 밤 한산했다. 나는 클로브를 씹으면서 늦게 나갔 다. 그 날만은 마리노가 딱딱거리지 않았다. 아마 그도 인정이 있었나보다. 그 옆을 급히 지나갈 때 그가 말했다. "진저, 춤 출땐 그 얘긴 하지마, 알겠어? 누가 묻거든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래, 말했다간 장사가 다 망할테니" 탈의실로 가는데 프론트맨인 듀크가 나를 세워놓고 말했다. "어젯밤 형사들이 그 집으로 데려갔다면서?" "누가 누굴 데려가요? 털보씨" 나는 잡아뗐다. 탈의실로 들어가니 줄리 생각이 간절했다. 나중에 홀에 나갔을 때보다 더 생각났다. 홀에 나가면 주위에 사람들이 붐비고 시쓰럽고 음악도 있었다. 그러나 탈의실에선 줄리의 유령이 내 곁에서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옷을 걸던 옷걸이 밑에는 연필로 씌어진 그녀이름이 그대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핸더슨 할멈은 신바람이 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할멈 이 떠벌리고 있었지. 오늘따라 타블로이드 신문을 한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 를 들고 있었고 기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할멈은 내 내 댄서들의 등 뒤로 허리를 굽히면서 분가루를 훅훅 불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 눈꺼풀에도 동전이 하나씩 있었대, 그리 고 입술에도, 손바닥에도 하나씩 올려놓고 손가락을 오무려놓았다는구만.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 그녀석이 당신들에게 단단히 눈독을 들인 모양 이야." 나는 문을 홱 열어젖혔다. 그리고 발에 힘을 주고 할멈을 홀안으로 밀어뜨 렸다. 아마 그렇게 밀린 것은 이십년동안에 처음이었을거야. 다른 여자들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자기네들끼리 마주 보았다. 그 모양이 '저애 꽤 신경 질적이군.'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서들 나와, 뭣때문에 돈을 주는지 알아?" 마리노가 문간에서 꽥꽥 거렸 다. 트럼본 소리가 슬펐다. 우리는 죄수처럼 행진곡 스텝으로 줄지어 나왔다. 지겨운 밤이 또다시 시작된것이다. 열번째 휴식에 탈의실로 돌아와 구두를 잠깐 동안 벗어놓고 담배를 피웠다 . 줄리의 유령이 또 나에게 다가왔다. 그저께 밤에 내 귀에 대고 하던 그 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진, 그 성냥불 들고 있어, 어떤 사람을 따돌리려고 그래, 얼빠진 권투선 수처럼 추잖아. 꼴이 넓이뛰기를 하려는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네 손은 뭐땜에 있는거야? 거꾸로 춤췄니?" "그 사람이 이렇게 하더라니까, 손을 구부려서 밑으로 젖히고, 이렇게 말 이야, 팔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어. 그 녀석 반지때문에 생긴 것 좀 봐." 딸기 크기의 멍이 생긴 게 보였다. 어스름한 불빛 아래 혼자 않은 채 나는 중얼거렸다. "그 놈이 바로 범인일거야, 틀림없어, 그 놈의 얼굴을 한 번 봤더라면, 그 애가 손짓만 해보였더라면 분명히 봤을텐데, 그래 줄리가 살아있을 때 그 렇게 해놓고 좋아했으니 죽고난 후에 춤을 추면서도 기뻐했을거야." 담배맛이 없어졌다. 담배를 던져버리고 홀로 급히 걸어나가서 사람들 틈에 끼려고 했다. 누군가가 표를 나한테 불쑥 내밀었다. 누군지 쳐다보지도 않고, 표를 반으 로 찢었다. 홀 건너편으로 가는데 줄곧 따라오면서 내 귀에 나직하게 말했 다. "어때요, 진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를 알아봤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에 배치되었어." 닉이 말했다. 음악소리에 몸이 떨렸다. "범인이 그래 놓고서 또 나타날 것 같아요?" "그 자는 댄스 홀 살인마야." 닉이 말했다. " 그 놈이 셀리 아놀드와 프레 데릭스를 죽였소, 둘다 같은 홀에서 일했었지, 그리고 시카고에서도 한 명 을 죽였어, 줄리 베네트의 레코드판에서 뜬 지문이 앞의 두 사건의 것과 일치했어, 그리고 시카고의 경우는 - 지문은 없었지만 - 그 여자 손에 동 전이 쥐어져 있었어. 언제고 또 나타날거요. 오늘밤은 뉴욕의 모든 댄스 홀에 경찰이 깔려있어요, 그 놈이 나타날 때까지 지키고 있을거야."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요?" 나는 물었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몰라" 마침내 실토했다. "그래서 문제야. 사람들 틈에 보이지 않게 끼어있다는 거지. 그놈이 그만 손을 떼진 않았을 거라고 보는 것 뿐이에요. 우리가 그놈을 잡기 전까지는 계속 사람을 죽일거야." 나는 말했다. "그날밤 여기 와있었어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기서 줄리 와 춤추고 있었어요, 틀림없어요." 그러면서 나는 그에게 바싹 다가갔다. 남자에게 꼭 안기면 언제나 짱짱대 던 내가 말이다. 그놈의 반지가 줄리의 손에 남긴 자국얘기며, 그놈이 춤을 어떻게 췄는가를 닉에게 말했다. "중요한 얘기군." 닉이 말했다. 그리고 나를 홀에 남겨둔 채 전화하러 갔 다. 다음 춤이 시작되었을 때 닉은 또 나와 추었다.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줄리와 춤추던 녀석이 바로 범인이었소. 감식과에 서 그녀 손에 생긴 생생한 자국을 또 하나 찾아냈어요. 처음것보다 약간 떨 어진데 있었지. 처음 것은 그 때 거의 지워져 있었다는군. 그러니까 두번째 자국은 죽은 후에 가해진 것이고 그래서 지워지지 않았던 거예요.그 자국을 틀로 떴다고 그러는데 덕분에 그놈의 반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되었소. 방패모양의 반지에 뾰죽한 보석이 두개 붙어있는데 하나는 위 오른쪽 에 있고 하나는 아래 왼쪽에 있다는군." "무슨 글씨라도 있었대요?" 나는 기가 질린 채 물었다. "없어요, 그러나 귀중한 걸 알아냈소, 그는 보석상한테나 부탁하지 않고는 반지를 뺄 수 없고, 지금와서 그런 일을 부탁하기를 꺼리고 있을거야. 반 지가 줄리에 손에 꾹 눌렸다는 것은 그놈이 반지를 뺄 수 없다는 증거요. 반지 둘레의 손가락 살이 불어났다는 얘기지, 그렇지 않았다면 반지가 손 가락을 눌렀을 때 그 압력때문에 반지가 약간 옆으로 돌아갔을테니까요." 그는 내 발을 꾹 밟으면서 간추려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이 춤을 어떻게 추는지, <가여운 나비>를 좋아하는지, 어떤 반지를 끼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거요. 또 조만간 나타나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나도 내몸을 돌봐야 했다. 밟힌 발이 아파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될 수 있는대로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춤만 추고 있어서야 그놈을 잡을 수 있겠어요?" "아마 못잡을거라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저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으면 모든게 허사가 되겠지, 그놈이 멀리서 냄새를 맡고 달아나 버릴거야. 내가 여기 와있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마리노야 물론 알고 있지만." 홀이 닫히고 내가 아래층으로 해서 거리로 나가보니, 닉이 다른 건달들과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오더니 내 팔을 잡고, 자신의 여자인것처럼 끌 고 갔다. "왜 이래요?" 내가 말했다. "연극이지만 진짜처럼 해요." 그가 말했다.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가 보지않게 혼자서 눈웃음을 지었다. 그 후부터는 다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칠일이 지났다. 그러더니 십사일, 이십일이 지나갔다. 조금 있으면 줄리가 죽은지 한달째가 될 것이다. 그런 데도 누가 범인인지, 어디에 숨어있는지 또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런 단서 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었던 밤만 하더라도 조이랜드홀에서 그자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너무 붐볐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놈의 지문 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론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줄리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서 자취를 감춘지도 오래 되었다. 또 얼마가 지 나자 탈의실의 이야기거리도 되지 못했다. 마치 줄리가 존재했던 적이 전혀 없었던 듯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만은 그녀를 잊지 않았다. 내 친구였 으니까 그리고 닉 발렌스티어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일이 그가 맡은 일이 었으니까. 핸더슨 할멈도 잊지 않았을 것 같다. 워낙 병적이라 할만큼 피비 린내나는 살인사건을 들추어 내는 걸 좋아하니까. 그러나 우리 세 사람외에 는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을 잘못한 것 같다. 닉의 상사인 살인사건 담당자들 말이다. 닉 한테 그말은 하지 않았다. 분명히 나를 놀려댈테니까, 얘기한다면 닉이 이 렇게 말했을것이다. "아무렴, 댄서가 국장보다 경찰을 더 잘 다룰 줄 알겠지, 왜 경찰에 가서 이렇게 해보라고 말하지 그래." 그러나 내 얘기는 이렇다. 댄스홀은 처음부터 그러니까 살인사건이 일어난 서너주일은 지금 형사들이 그랬듯이 꼭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친 사람이든 멀쩡한 사람이든 범인이 그렇게 빨리 또 나타나진 않으리라 는 걸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경찰은 첫 몇주일 동안을 저렇게 잠복경계 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지. 범인은 어디 깊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까 경찰은 한달쯤 후부터 범인을 꼭 지켜보기 시작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경찰은 반대로 했지 뭐야. 한달동안 닉은 매일 밤 나왔다. 그 후론 어쩌다 가 이틀씩 간격을 두고 나왔고, 홀이 문닫을 때까지 붙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자 나는 닉이 그 사건에서 거의 손을 뗐고, 그저 기분을 내기 위해 들 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루는 그에게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아직도 이렇게 와야해요?" 그는 홍당무가 되면서 말했다. "아아니, 경찰은 벌써 이 사건에서 손을 뗐 어. 나는 뭐랄까 버릇이 되어서 계속 오는거야." "그렇군요."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그가 찾아오는거야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의 춤솜 씨는 조금도 늘지않았고 그런만큼 내가 단단히 단련받는 것이 마음에 걸렸 다. 그와 춤추는 것은 마치 스팀롤러를 끌고 이리저리 도는 것과 다름없었 으니 말이다. 하루는 그가 그 큰 구두로 내 발을 밟고 온몸으로 나를 눌렀을때 드디어 사정을 했다. "닉, 여기에 나와 지키는 건 좋지만 나하고 춤만은 추지 말아줘요. 아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는 철부지같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춤이 그렇게 형편없어?" 나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가 춤은 그모양이었지만 무척 잘 대해줬기때 문이다. 그 다음날 밤에 닉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좀 지나치지 않았나 했다.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된 뚱뚱한 친구는 춤이 고 뭐고 간에 닉처럼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상상이지만 그 사람의 다리를 몇 번 발길질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거예요?" 그리고 혼잣말을 했다. "돌았어? 그러지말라고 했잖 아!" 그리고 제일 가까이에 보이는 표를 손에 쥐고 반으로 찢은 다음 다른 사람 과 춤을 췄다. 그날 밤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그러나 그 다음날은 사건이 일어난 밤처럼 기분이 으스스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재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기분이 드는 밤은 꼭 무슨 일이 생긴다. 닉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와는 정이 들었지, 그뿐이야. 그리고 그는 이제 오지 않는거다. 될대로 되라. 그러나 기분나쁜 느낌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오늘 밤이 지나기전에 무슨일이 일어날 것 같다, 좋지 않은 일이. 핸더슨 할멈은 자리에 앉아 다음 날의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고 있었다. "요즘은 멋진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는군 그래. 가끔 가다간 신바람나는 살인사건이 나면 얼마나 좋을까." "집어치워요, 마귀할멈!" 나는 쏘아부쳤다. 그리고 구두를 벗고 속에 분가 루를 집어넣고 다시 신었다. 마리노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 "어서들 나와, 뭣때문에 돈을 주는지 알아?" 누군가 빈정거렸다. "나도 모르지." 우리는 한 줄을 지어 나갔다. 죽음보다 재수없는 운명인지 내가 맨 뒤에 서게 되었다. 나는 손님을 쳐다보지 않는다. 눈 높이에 보이는 셔츠의 앞쪽을 물 끄러미 봤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지내온지 꽤 오래다. 언제나 똑같은 셔츠 모양. 셔츠는 대개 흰색이었다.더러는 푸른 색이었고 한번은 보라색이었다. 타이의 무늬는 늘 달랐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가씨 기분이 왜 그래?" "나처럼 손님도 이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받고 있으면 기분이 우울해지실 걸요." 그러자 손님은 아무말 안했다. 휴식시간이 되었다. 밴드가 왈츠곡을 연주 했다. 뭔가 잠시 끼익 거렸다. 원래는 슬픈 스윙이었어야하지만 그게 아니 었다. 누가 주문한 곡일지도 모른다. 왈츠곡이 나올 때는 벽등을 끄고 푸른 불을 켰고, 천장에 달린 거울이 돌면서 은색 빛이 번득여 시원스럽고 희미 하게 보였다. 다이아몬드 무늬가 있는 하얀 셔츠와 전에도 춤춘적이 있었다. 그리고 매 듭 한 끝을 실로 짠 타이도 생각이 났다. 올려다보기가 힘들어 그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머리 속에서 어떤 가사를 외우면서 허 전한 마음을 없애보려고 했다. 가사는 내가 애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곡에 맞아 들어갔다. 그러니 바로 그 곡의 가사일것이다. '꽃잎에서 기다리는 가 여운 나비' 내 손이 아팠다. 그 사람이 괴상하게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손을 틀어 서 빼려고 했다. 그럴수록 이 사람은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내 손을 젖히 곤 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반지를 낀 손으로 내 손을 꼼짝 못하게 잡고 있는 녀석들이다. 게다가 이 자는 왈츠의 초보도 몰랐다. 오른쪽으로 세발 을 괴상하게 성큼성큼 내딛는 것이었다. 신경에 몹시 거슬렸다. "그렇게 뛰기만 하실거예요 -" 줄리의 목소리가 기억속에 떠올랐다. 줄리 도 똑같은 녀석에게 걸렸었구나. '나는 죽어야 할 가여운 나비라오!'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는 몹시 흥분했다. "올려다 보지 마, 그러면 끝장이야." 혼자서 되풀이 마음먹었다. 나는 계 속 한쪽 매듭이 풀린 타이만을 지켜보았다. 등불이 흰 빛이 되었다. 그리 고 휴식시간이 되었다. 우리 둘은 떨어졌다. 그자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는 그자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고 떨어져갔다. 나는 다섯을 세고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 그 순간 그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하고 춤췄으니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는 뜻으로 돌아 보았을 뿐인것처럼 말이다. 그 자의 얼굴에는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다. 어쨌든 보기에는 그랬다. 다 른 손님들보다 못한 얼굴은 아니었다. 40대쯤 되어보였다. 머리는 아직 숱 이 많았다. 눈은 생각에 빠진 듯 했는데 내 눈과 마주쳤을 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사람은 내 꾸민 웃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속을 들여다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로 갔다. 뭐가 그렇게 아프게 했는지 보려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그자가 보 고 있을지도 몰라서 손을 올리지도 않았고, 고개를 수그리지도 않았다. 그 자의 반지가 꼭 눌렀던 자리에 작은 딸기만한 크기의 붉은 자국이 보였다. 서 있는 자리에서 밴드악장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고개를 그에게 내저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 둘은 우연히 만난듯이 벽을 따라 걸었다. "아까 왜 <가여운 나비>를 연주했어요?" "신청곡이었어." 그가 말했다. "손짓하지 말아요, 돌아보지도 말구요. 그렇지만 누가 부탁했어요?" "너하고 아까 두번 춤춘 사람이 그랬어, 왜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알겠어, 그가 전혀 주지 않았군, 좋아, 아가씨" 그러면서 그자가 그 곡을 부탁하면서 준 5달러의 반을 나한테 주었다. 그 는 내가 내 몫을 받아내려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 돈을 받았다. 그에게 말한들 별 소용이 없다. 닉 발렌스티어에게 말해야 한다. 나는 1달 러 한장을 동전으로 바꿨다. 그리고 나서 전화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 갔다. 1미터 앞까지 갔을 때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지 않는가! 그자가 갑자 기 내 옆에 와 있었다. 줄곧 내 뒤를 따라다닌게 분명하다. "어딜 가려고 했나?"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이 전화기쪽으로 향하는 걸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 치는 않았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눈속에 머뭇거림이 없어지고 결의의 빛이 보인 것이다. "아무데도 안가요." 나는 순순히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면서 생 각했다. 여기서 이 사람을 조금만 붙잡고 있으면 닉이 나타날지도 모르겠 다고. 그래서 둘이 홀로 나갔을 때 그가 말했다. "더 춤추지 말고 나가지." 나는 겉으론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겁에 질린채 말했다. "그렇지만 표를 벌써 찢었는데요, 이번 거만이라도 추지 않으시겠어요?" 그리고 하는데까지 아양을 떨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 니 마리노에게 손짓을 했다. 마리노의 양해를 얻기위해서다. 그는 등을 내 게서 돌렸다. 나는 그 어깨너머로 마리노를 보면서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 안 가요, 안 가, 이 사람하고 나가고 싶지않아요 라고. 마리노는 나를 묵살했다. 마리노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더 들어오게 되니까. 둘의 협상이 끝나가는 걸 보자, 나는 쏜살같이 전화부스로 가서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 노한테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 곧이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괜치 그자 와 나가기 싫어서 꾸며대는 줄 알 것이다. 또 내가 소리를 지른다면 아무도 붙잡기 전에 그가 층계를 뛰어내려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닉한테 말 해야 한다. 닉만이 그를 여기서 처리할 수 있다. "경찰을 부탁해요, 급해요!" 나는 교환수에게 말하고, 홀의 건너편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마리노만 보였다. 그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홀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다음 춤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화에서 말소리가 났다. 나는 말했다. "닉 발렌스티어 있어요? 좀 바꿔주세요, 급한 일이에요." 그때 밴드가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분명히 경찰쪽에도 들렸을 것이다. 내 앞의 벽에 그림자가 보이는데 내 뒤에서 어 깨 너머로 비친 것이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전화에 귀를 기 울였다. 나는 말했다. "괜찮아, 페기. 나한테 빌린 5달러를 언제쯤 갚을 건지 알고 싶어서 전화 한거야."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닉이 전해 듣는다면 무슨 소린지 알아 차릴까? 이 렇게 전해지겠지, '어떤 여자 목소리던데 자넬 찾더군. 어딘지 모르지만 음 악소리가 났어. 그 여자가 한 소리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더군.' 그러니 행운을 빌기에는 너무나 가냘픈 실오라기가 아닌가. 돌아보기가 무서워서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야무지게 들렸다. "어서 소지품 가지고 와, 밖으로 나가지. 오늘밤은 그 5달러 걱정 더 할 것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에는 어떤 숨은 뜻이, 경고가 들어있었다. 탈의실에는 창문이 없었고, 들어온 문 외에는 나가는 길이 없었다. 그는 문턱 바로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슬퍼했다. "왜 닉이 오지 않을까?" 정말이지 겁이 났다. 내 주의에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지만 아무도 도 와줄 사람이 없다. 그는 여기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닉이 올때까지 그를 잡아두는 길이란 따라 나가서 운을 비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일분마다 문틈 사이로 그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그자가 나를 봤을거라고 생각하지 않 았지만, 분명히 봤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뒷축으로 문을 세차게 찼다. 그 바람에 나는 펄쩍 뛰었다. "숨바꼭질 집어치워! 여기서 기다리고 있잖아!"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핸더슨 할멈의 타블로이드판 조간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립스틱으로 갈겨써놓았다. "닉, 그가 데리고 나가려고 해요, 어딜 가는지 몰라요. 표 조각을 찾으세 요. 진저" 그 다음에 나는 그날밤 모은 반쪽짜리 표뭉치를 꺼내서 겉옷 호주머니 속 에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자한테 갔다. 벽에 붙은 전화가 울리는 소 릴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음악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확실치 않았다. 우리 둘은 층계를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한블록 걸은 후에 나는 말했다. "저기 동전세탁소가 있어요. 우리가 자주 가지요." 그러면서 세탁소를 가 리켰다. "닥쳐!" 그가 말했다. 나는 길위에 표를 한장 떨어뜨렸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계속 떨 어뜨렸다. 네온불빛이 점점 줄어들더니 곧 어둑하고 한적한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주머니속엔 표가 거의 없어졌다. 그가 택시를 잡지 않은 것이 운이 좋았다. 둘이 가는 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해서 그랬을 것이다. "너무 걷게 하지 말아요. 몹시 피곤해요." 나는 사정했다. "이제 다 왔어. 바로 저기야." 그 다음 길모퉁이에 붙은 간판을 보고 나는 속았다. 중국식당이 보인 것이 다. 2류식당이었지만 그리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곳과 우리 사이는 길고 음산한 거리였고 주저않은 집들과 빈터 가 여기저기 보였다. 게다가 표는 다 떨어졌다. 목숨을 구해보겠다고 하룻 밤의 수입을 날린 것이다. 멀리 보이는 간판을 보면 그쪽으로 가지는 않는 다는 걸 내가 믿을거라고 미리 짐작했을 것이다. 가는 길 어디에서라도 비명을 지르고 사람들을 끌어모으게 할 수도 있었을 거라구? 그자한테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야 컸지만 그보다 더 하고싶은 것 이 한가지 있었다. 그를 닉에게 잡아다 주는 일이었다. 그가 또 어둠속으로 달아나게 놔두고 나중에 다시 손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소란을 피 우면 바로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내말을 조금도 믿으려 하 지 않을 거고 오히려 내가 속이고 있는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적당히 핑계를 대고 재빨리 자취를 감추고 말겠지.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실은 얼마나 무관심하고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지 알려면 내가 겪었던 것처럼 밤을 지내보면 알 것이다. 철모를 쓴 경 찰도 별 도움이 안 될거야. 내 말과 그의 말을 비교해보고 가던 길을 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고작일테니까. 아마 이런 생각을 바로 그때 우리쪽으로 경찰이 걸어오는 걸 보았기 때문 에 했던 것 같다. 어둠속에서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걷 는 모양으로 봐서 경찰인 것을 알았다. 우리가 그 경찰옆을 지나치기 전까 지는 말을 붙일 생각도 안했다. 우리 셋은 그 빌어먹을 판자로 창문을 막은 집앞에서 마주쳤다. 그 때 나 는 나의 마지막 기회가 흘러가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내가 마지막으 로 떨어뜨린 표와의 거리를 닉이 이젠 메꿀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 가 너무 벌어진 것이었다. 나는 죽은 듯이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낮고 긴장된 목소리롤 말을 시작했다. "경관아저씨, 이사람은.." 줄리를 죽인 녀석은 순식간에 나를 놓고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래서 경 찰의 등뒤에 가서 붙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손잡이 에서 튀어나오는 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경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둠 속에서 흰자위를 볼 수 있었다. 그러더니 바로 내 얼굴에 더운 입김을 내뿜 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 그의 몸은 둔한 소리를 내면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두어번 구르더니 잠 잠해 Ф다. 그러나 칼은 경찰의 몸에서 벌써 빠져나와 칼끝이 내 옆구리에 닿아 있었 다. 그리고 경찰이 일 초전에 서 있던 자리에 그가 서있었다. 다시 둘밖에 안 남았다. 차갑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소릴 질러봐, 저 놈옆에 눕혀놓을테니 - " 나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을 뿐이다. 그가 말했다. "앞으로, 저리 가 -" 그리고는 칼끝으로 나를 누르면서 그 판자로 막은 집으로 통하는 어두운 길을 몇 걸음 움직이게 했다. "거기 서있어, 가만히." 발길로 경찰을 어떻게 하더니 경찰의 몸이 내가 온 길쪽으로 굴러떨어졌다 . 나는 뒤로 물러섰다. 내 등이 그 집의 지하실문에 닿았다. '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모양이지, 그렇다면 문이 열려있겠지.' 나는 생 각했다. 그자한테서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가 그를 피할 수는 있 을지 모른다. 나는 돌아서서 문을 더듬었다. 나무로 된 장애물이 조금 열리 고 간신히 들어갈만한 틈이 생겼다. 그가 지난 몇 주일 동안을 이 안에 숨 어 있으면 들락거린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경찰이 찾지 못한 것도 당연하 지. 장애물 뒤는 다른 문은 없었다. 내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그가 눈치 를 챘다. 벌써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깜깜한 홀 복도를 더 듬어 나가고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네 발로 몇 계단을 기어올랐다. 그리 곤 일어섰다. 그는 멈추어 성냥을 켰다. 나는 성냥이 없었지만 그자의 불빛이 도움이 되 었다. 사방이 어렴풋이 보인 것이다. 나는 일층 홀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 갔다. 너무 높이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윗쪽 어딘가 막다른 곳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한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지나갈 때 부러진 의자가 내 다리에 닿았다. 나는 그걸 쳐들고 한걸음 돌 아서서 층계쪽으로 그를 향해 내던졌다. 그자한테 맞았는지는 모르지만, 성 냥불이 꺼졌다. 그 때 그는 이상한 말을 했다. "뮤리엘, 당신은 언제나 화를 냈었지."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성냥불이 꺼지기 전에 앞쪽 벽에 틈이 벌어진 것을 봤다. 시커먼 것이 보였을 뿐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 헤엄을 치듯이 쑥 들어가보니 난로같이 생긴 것위에 튀어나온 선반에 손이 닿았 다. 나는 주저앉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구식의 큰 벽난로였다. 머리 위로 더듬어 보니 거친 벽돌로 쌓은 거미줄이 걸려있는 굴뚝이 있었다. 그러나 좁아서 기어오를 수는 없었다. 나는 난로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그자가 나를 찾아내지 못하기를 빌었다. 그자가 또 성냥을 켰다. 성냥불이 나를 쫓아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난로의 틈사이로는 그의 다리만 보이고, 허리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 가 있는 곳까지 오지 않았다. 불빛이 더 밝아졌다. 촛불을 켠 것이다. 그러 나 그의 다리는 나를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허리를 구부리지도 않았고 얼 굴을 들이밀지도 않았다. 그자의 다리가 방을 이리저리 쉴 새없이 움직였다 .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마침내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방이 싸늘하군." 그가 신문지를 주섬주섬 모으는 소릴 들을 수 있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한동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자가 나에 대해 잊어버렸을까? 그렇게까지 미친걸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말속에는 악의에 찬 조소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의 다리가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다리를 굽히지도 않고 신문지 덩어리를 내 쪽으로 쑤셔넣었다. 가려서 볼 수가 없었다. 마룻바닥에 성냥 을 그어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불이 켜지고 한동안 잠잠해졌다. 메스꺼 웠다. 빨리 죽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불길이 올라오고 내 앞이 화해지고 종이가 온통 빨갛게 됐다. '닉, 닉, 어디 있는거야, 죽을 것 같은데' 나는 불꽃과 불타는 신문지를 헤치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자는 만족스럽 다는 듯이 웃으면서 태연히 말했다. "안녕, 뮤리엘. 나하고는 만날 일이 이제 없는 줄 알았는데, 내 집에서 뭘 하고 있는거지?" 그는 경찰관의 피가 묻어있는 칼을 여전히 들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난 뮤리엘이 아니예요, 조이랜드 댄스홀의 진저 앨런이예요, 제발 날 놔 주세요. 나가게 해주세요!" 얼마나 무서웠고 질렸는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제발 내보내 주세요" 그를 올려다 보며 외쳤다. 그자는 여전히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네? 뮤리엘이 아니시라구요? 내가 프랑스로 출정하기 전날 밤 나와 결혼 하지 않았었다구요? 내가 죽은 줄 알고, 다시 볼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하 고 보상금을 받으려는 생각을 안했다구요?" 그리고 나더니 독기어린 말투로 변했다. "그러나 난 널 속였지, 포탄을 맞았지만 죽지는 않았어. 들것에 실려오기 는 했지만 돌아왔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뭘 봤지? 넌 내 생사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지. 다른 녀석과 결혼해서 내 돈을 가로채고 있었어. 어설프게 꾸며대려고 안 한건 아니지, 뮤리엘, 그래 젤리를 들고 병원으로 날 찾아 왔었어. 내 옆의 침대에 있던 친구가 그걸 먹고 죽었지. 뮤리엘, 그리고 나서 난 너를 찾아내려고 온 세상을 뒤졌어. 지금 널 찾아낸거야." 그는 칼을 손에 쥔 채 뒷걸음을 쳤다. 빈 상자위에 낡아빠진 축음기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축음기의 손잡이를 몇 번 돌리더니, 판위에 바늘을 올려 놓았다. "뮤리엘, 지금부터 춤을 추는거야. 내가 군복을 입고 넌 참 아름답게 보였 던 그날밤에 했듯이 말이야. 그러나 이번만은 끝이 다를거야." 그자가 나한테 다가왔다. 나는 움츠린 채 떨었다. "아니예요, 내가 아니예요. 당신은 뮤리엘을 죽였어요. 몇번이나 죽였다구 요. 지난 달에도 죽였는데 몰라요?" 그는 애처로울만큼 순진하게 말했다. "죽인 걸로 생각할때마다 또 살아난단 말이야." 그는 나를 질질 끌어 앞으로 당겼다. 칼을 잡은 손이 내 옆구리에 닿았다. 그 축음기가 허공 속에 소리를 터뜨렸다.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바깥거리에 서도 들렸을 것이다.<가여운 나비>였다. 끔찍하고 몸서리치게 하는 것이었 다. 그리고 촛불이 켜진 방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커다랗게 떠오르는 가운데 미친 사람들처럼 빙빙 돌앗다. 나는 머리를 바로 세울 수가 없었 다. 머리는 익어버린 사과처럼 어깨너머로 젖혀졌다. 머리카락이 흩어져서 그자가 앞으로 당기고 빙 돌리고 끌고 다닐때마다 흘러내렸다. 제 목 : [아이리쉬] 춤추는 탐정 (잘린 부분) 올린이 : caph (김지영 ) 97/01/10 22:43 읽음 : 77 관련자료 없음 ----------------------------------------------------------------------------- 제한행수를 무시하고 써버렸더니 역시 짤렸군요그래서 뒷부분을 여기에 올립니다. 3개로 나눠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어긋나버렸어요. 양해를 바랍니다. < 춤추는 탐정> 완결 "나는 죽어야 할 가여운 나비지요~" 나를 붙잡은 채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번쩍이는 동전을 한줌 꺼내 내 얼굴에 뿌렸다. 그때 집의 정면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칼에 찔린 경찰이 있었던 입 구쪽에서 났다. 총소리가 연달아 다섯번이나 났다. 커다란 음악소리를 듣고 상처입은 경찰이 쏘았을 것이다. 다른 경찰이 더 왔는지도 모른다. 그자는 판자로 막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의 품에서 뛰쳐나와 뒤로 물러섰다. 칼끝이 옆구리쪽으로 길고 둥그렇게 스쳐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제 때에 칼끝을 내 몸에 찌르지 못했고, 칼은 나한테서 빗겨나갔다. 그가 나를 붙잡기 전에 홀쪽으로 뛰어나갔다. 그 다음은 악몽에 쫓겨 달아 난 기억뿐이었다. 계단을 어떻게 내려가서 지하실로 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 는다. 아마 다치지않고 그대로 뛰어내린 모양이다. 술주정꾼이 곧잘 하는대 로. 내려가자 굴같이 생긴 통로로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손전등에 불과했을 것 이다. 그러나 그 빛은 점점 커지면서 나를 스쳐갔다. 그 뒤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잇달아 뛰어들어오면서 내 옆을 지나갔다. 지나는 사람들을 차례로 세우면서 나는 물었다. "닉은 어디 있어요? 닉이 아닌가요?" 그 때 윗층에서 총소리가 났다. 무시무시한 죽음의 절규가 들렸다. "뮤리엘!"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나서 들은 소리가 닉의 목소리였다. 그의 팔이 나를 감더니 닉은 내 얼굴에 붙은 거미줄이며 눈물을 그의 입술로 닦아내고 있었다. "진저, 괜찮아?" 그가 물었다. "괜찮아요. 닉, 당신은?" 내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