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더운 밤- 찰리는 올해 열두살인 소년으로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은 편이었다. 이와 어울리게 찰리는 작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은 즉 어린이만의 세계 였다. 그러나 찰리에겐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린 찰리에게는 또 하나 의 세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상의 세계였다. 찰리는 홀트 거리 20번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으로, 여름엔 몹시 덥고 겨울엔 몹시 추 운 곳이었다. 찰리네 가족은 엄마 아빠 찰리 단 세 식구 뿐이었으며 밖에 나가도 함께 놀 친구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찰리에게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으므로 그다지 외롭지만은 않았다. 그 곳에서는 찰리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나 할수 있었고, 가고 싶은 곳 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게다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여러가지 일들이 머리에 떠오르는 즐거운 상상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찰리는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했다. 하지만 이 비밀 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젠가 한번 아빠에게 말씀드렸다가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때 큰 소리를 내서 호통을 치셨다. "또 다시 그런 거짓말을 하면 다시는 그런 생각을 못하도록 때려 줄테니 그렇게 알아." 그러자 엄마는 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요일에 본 영화 탓이에요.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애들한테 영화 같은 건 보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사건은 바로 그날 밤에 일어났던 것이다. 몹시 무더운 밤이었다. 너무 더워서 지붕이 녹아 내릴 지경이었다. 올 7월 은 어느 곳이나 무더웠지만 특히 홀트 거리는 지옥 같았다. 아빠는 야근을 하러 나가셔서 집에는 엄마와 찰리 두사람 뿐이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너무 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대 시트가 땀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 붙었다. 찰리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비상 계단으 로 나왔다. 시원한 곳을 찾아 찰리는 가끔 이곳으로 나오곤 했었다. 비상 계단의 층계참에는 쇠로 된 난간이 달려 있어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그러 나 그곳도 방과 별 차이 없이 무더웠다. 찰리네 집은 6 층이었는데 "7층으로 올라가 볼까.." 하고 찰리는 중얼거렸다. 조금 위층은 시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7 층도 별 차이는 없었지만 가끔씩이나마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찰리는 어느새 낮동안의 피로가 몰려와 비상 계단에 서 잠이 들고 말았다. -2. 이상한 어른들- 어느새 아침이 밝은 것 같았다. 빛이 눈꺼풀을 찌르는 듯 찰리는 눈이 부 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빛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하늘은 깜깜했다. 아직 밤이었다. 빛은 다른 곳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찰리의 눈 높이 정도에 위치한 창문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불빛이었다. 창 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러나 틈이 벌어져 방 안이 들여다 보였다. 두 사람의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찰리는 어른들의 세계에는 흥미가 없었 지만 갑작스러운 눈앞의 광경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남자는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잠이 든 것 같았다. '술 취했나...' 하고 찰리는 생각했다. 앞에 술병과 술잔이 2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 자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손에는 남자의 양복 저고리를 들고 있었다. 아마 남자가 잠들기 전에 의자에 걸쳐 놓은 것을 방금 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찰리의 눈에는 그 다지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여자는 테이블을 한바퀴 돌자 멈춰 서서는 양복 주머니를 마구 뒤지기 시 작했다. 여자는 엎드려 자고 있는 남자와는 등을 지고 서 있었으나 찰리에 게는 그녀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였다. 여자는 무언가를 겁내고 있는 듯, 가끔씩 주위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 찰리 의 눈을 끌었다. 그리고 찰리는 곧 어떤 사실을 알아차렸다. 잠자고 있는 남자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자 움직이 던 손이 딱 멈췄다. 여자는 안심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내 여자의 손은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냈다. 그러자 여자는 곧 웅크리고 앉아 돈뭉치를 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기쁜듯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갑자기 찰리는 앗! 하고 숨을 죽였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살금살금 팔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소리를 죽여 먹이로 다가가는 뱀과 같았다. 팔이 테이블 끝에 다다르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그런 모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 기 찰리의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찰리는 위험이 닥쳐온 것 을 알려주고 싶었다. "위험해요, 아줌마! 뒤를 보세요!" 그러나 여자는 돈을 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갑자기 남자는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의자가 넘어지고 테이블도 쓰러졌다. 남자는 억센 손으로 여자 의 목덜미를 쥐고 마구 흔들어댔다. 여자는 손에 돈을 꽉 움켜쥔 채 놓지 않으려 했다. 여자는 입고 있는 옷 주머니에 돈뭉치를 감추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의 팔을 비틀었다. "아악!"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여전히 돈뭉치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걸 이리 내놔!" 남자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지만 모처럼 기분좋게 자고 있는데 잠을 깨우다니. .. 자, 돈을 이리 내!" "제발 놓아 주세요..." 여자는 괴로와하며 말했다. "제발, 제발 손을 놓아 주세요..." 그러나 남자는 꼼짝 못하게 여자를 을러대며 더욱 여자의 팔을 비틀었다. "돈을 안 돌려 주는데 누가 손을 놓아 주겠어, 응?" 그러자 여자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조, 빨리좀 와 주셔요...." 큰소리는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까지 들리는 것을 꺼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 ?-3. 앗! 살인이다!- 안쪽 문이 열리며 또 한사람의 남자가 얼굴을 나타냈다. 그 남자는 옆방에 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했다. 눈썹이 짙고 눈매가 무서운 그 남자는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남자 의 등 뒤로 급히 다가갔다. 남자는 여자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었으므로 뒤 를 돌아볼 수 없었다. 조라고 불린 그 남자는 얼른 덤벼들지는 않았다. 상대의 얼굴이 때리기 쉬 운 곳에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힘껏 남자의 얼굴을 갈겼다. 쿵 소리를 내며 남자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러자 여자는 바닥에 흩어진 지폐를 주워 모으 기 시작했다. "서둘러! 빨리 달아나자." 조는 여자에게 재촉했다. "위험할뻔 했어. 왜 이자에게 수면제를 먹이지 않았지?" "먹였어요. 그런데 알아차리고는..." "알았어, 알았어. 자, 가자." 조는 이미 문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에게 얻어 맞은 남자는 정말로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기절한 체 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갑자 기 남자는 몸을 일으켜 조의 양다리에 자신의 양팔을 감아 힘껏 당겨 넘어 뜨렸다. 그리고는 그 위에 재빨리 올라 탔다. 또 다시 한바탕 난투극이 벌 어졌다. 남자는 조보다 힘히 세었고 조는 저항할 힘을 잃은채 축 늘어졌다. 그러자 여자는 미친듯이 방안을 가로질러 가서 옷장 서랍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꺼내든 것이 전등 불빛에 반짝하고 빛났다. 재빨리 여자 는 그것을 조에게 넘겨 주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가 상대를 향해 그것을 들어 올렸을 때 찰리는 깜짝 놀랐다. 날카로운 칼끝이 눈앞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침내 칼 끝은 남자의 등 뒤에 꽂혔다. 싸움은 이렇게 해서 어이없이 끝 나고 말았다. 그러나 조는 칼을 뽑아 다시 한번 남자를 찔렀다. 이제 남자 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조는 선 채로 멍청히 쓰러져 있는 남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여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죽었나요?" "기다려, 살펴볼 테니까." 조는 몸을 구부려 남자의 가슴에 손을 대어 보고는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 여 보였다. "조, 이제 어떻게 하죠?" 여자는 겁에 질려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위가 조용했으므로 여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찰리의 귀에 똑똑히 들려 왔 다. 조는 여자의 팔을 잡았다. "조용히 해.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모두 경찰에 잡히는 것은 아니야. 겁낼 것 없어. 잘 처리할 테니." 여자가 침착을 되찾을 때까지 조는 잠시 기다렸다가 방 안을 한바퀴 휘둘 러 보았다. "빨리 신문지를 가져와. 피가 밖으로 흘러 나가면 큰일이니까." 신문지를 가져오자 조는 시체의 양 겨드랑이에 신문지를 끼워 넣어 피가 스며들게 했다. "이번에는 문 쪽을 살펴보고 와. 누가 밖에서 엿듣지 않나." 여자는 문 앞에 가서 살짝 문을 열고는 밖을 살폈다. 그리고 살그머니 문 을 닫고 조에게로 와, 아무도 없다고 알렸다. "좋아, 그럼 다음에는 창 쪽을 살펴보고 와." 여자가 창 쪽으로 다가왔다. 한발짝 한발짝을 옮겨 놓을 때마다 발자국 소 리가 커지는 것 같았다. 찰리는 너무나 무서워 온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 짝할 수가 없었다. -4. 잔인한 범인- 찰리는 바닥에 납작 몸을 엎드렸다. 낡은 이불이 비상 계단의 난간에 걸쳐 있는 것이 보였다. 찰리는 재빨리 끌어당겨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찰리는 몸을 작게 작게 웅크리고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하나님, 제발 들키지 않게 해 주셔요..' 그 순간, 찰리의 머리 위로 한 줄기의 빛이 지나갔다. 여자가 살짝 커튼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기 뭔가 하얀 물체가 있어요." 찰리는 여자의 소리를 듣고 심장이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찌는 듯한 더 위였으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찰리는 숨을 죽이고 너무나 겁이 나 눈을 꼭 감은 채 죽은듯이 가만히 있었다. "아, 맞아." 하며 여자가 안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어제 널어 놓았던 이불어 저 곳에 떨어져 있군... 난 또 누가 층계참에서 자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어이, 밤새도록 밖을 내다보고 있을 참이야?" 조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불빛이 사라졌다. 그러나 찰리는 공포로 인해 몸 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에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방 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소리만이 들려왔으나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찰리의 소원은 오직 이곳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찰리가 내는 소리도 상대편에게 들릴 것이 틀 림없었다. 따라서 찰리는 가만 가만 몸을 움직여 갔다. 그 비상 계단은 낡은 것이었으므로 밟으면 삐걱 삐걱 소리가 날지도 몰랐 다. 찰리는 몸을 구부려 네 발로 살금살금 계단을 짚으며 내려갔다. 그 사 이에도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녀석의 신분증이 있었지?" 이것은 조의 목소리였다. "크리프 프리스톨. 직업은 선원이야. 잘 됐어." "뭐가 잘 됐어요?"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은 가끔 행방을 감추곤 하거든. 없어져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아. 이 자의 신분이나 드러나지 않도록 주머니 속을 비워." 여자는 아마도 울고 있는 듯,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을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이 사람은 죽어 버렸어요. 어서요 조, 빨리 함께 달아나요......" "그래, 서둘지 마. 지금부터 둘이서 시체를 옮기는 거야. 당신이 이 자와 함께 있었던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 는 사람도 한 사람 없어." "그래도 전 무서운걸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우리 둘이 시체를 버리고 달아나 봐. 둘 다 경찰에게 쫓기게 돼." 찰리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는 거야. 그러면 우리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 도 없어." "그렇지만 시체를 어떻게 옮기죠?" "지금 가르쳐 줄께. 가서 당신 여행 가방을 2개 가져와." 찰리는 계단에 몸을 찰싹 붙이고 엎드려 있었다. "여행 가방엔 시체가 너무 커서 안들어가요." "자, 잠자코 보고만 있어. 내 면도칼 있지?" 찰리는 이번엔 난간에 턱을 바싹 밀어 붙였다. 구역질이 나왔던 것이다. 그 때 계단이 삐걱 하고 울렸다. 그러나 여자의 신음 소리에 묻혀 버렸다. "보고 싶지 않으면 문 밖에 가 있어. 만약 누군가 올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재빨리 들어와." 찰리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입 속에 쓴 물이 고여왔다. "방을 나가기 전에 오래된 신문지와 밖에 걸린 이불을 가져와. 트렁크 바 닥에 깔아야 하니까." 조라는 사나이는 무슨 일이 닥쳐도 침착할 것 같았다. 몹시 악한 사람임에 틀림 없었다......? -5. 잠들 수 없는 밤- 찰리는 그때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자신의 아파트가 눈앞에 있음 을 보고 '살았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찰리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고 말았 다. 당황한 나머지 몸에 감고 내려온 이불을 문 앞에 그냥 두고 자기 방으 로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이어서 7층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여자의 겁 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불이 저아래 떨어져 있어요, 아까는 요 밑에 있는 것을 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서 이불이나 가져와!" 여자는 이불을 가지러 내려왔다. 발 소리를 죽인 채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에 찰리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잠시 뒤 계단을 살금 살금 오르는 소리 에 이어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참 이상하네.. 바람도 없는데 어째서 떨어진 거지?" 마침내 창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찰리는 침대에 오를 기운도 없었다. 아니, 바닥에 누운 채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무더운 여름 밤이었으나 찰리 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몹시 떨렸다. 찰리의 귀에는 아직도 계속해서 발자 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시트는 곧 찰리의 땀으로 축축해졌다. 찰 리는 몸을 시트 속으로 더욱 파고들며 귀를 기울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왔다. 그 발소리는 찰리의 방 안 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벽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 아마도 여 행 가방을 든 모양이었다. 찰리는 너무나도 무서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감아봐도 잠들 수가 없었다. 시간에 너무 느리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날이 밝을 무렵, 7층까지 올라오는 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벽에 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이 내 잠잠해졌다. 잠시 후 엄마가 잠에서 깨어났다. "찰리?"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리는 옷을 입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엄마 에게 갔다. 엄마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나, 찰리. 어디가 아프니?" 엄마는 찰리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말했으나 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어젯밤의 일을 찰리는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6. 꾸며낸 이야기- 아빠가 밤일에서 돌아오시자 언제나처럼 식탁에 둘러앉았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뜨자 찰리는 얼른 아빠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얘기해 보렴, 찰리." 아빠는 빙그레 웃으시며 말했다. 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빠에게 털 어놓았다. "우리 위층에 남자와 여자가 살고 있지요?" "음.. 살지." 아빠는 베이컨을 입 속에 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요.." 찰리는 의자를 아빠 쪽으로 더욱 바싹 끌어당겼다. "그런데 아빠.." 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엊저녁에 그 사람들이 어떤 남자 한명을 죽였어요. 그리고는 그 남자 몸 을 토막을 내어 여행 가방 2개에 넣었어요!" 아빠는 손을 멈추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무 서운 눈초리로 찰리를 쏘아보았다. 그 순간 찰리는 어젯밤의 자기처럼 아빠 도 무서운가 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빠는 찰리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아빠는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고 엄마가 오시자 이렇 게 말했다. "이 애가 또 시작했어." 아빠는 질렸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 애한테 영화를 보여 줘서는 안된다고 했잖아!" "또 이야기를 꾸며대기 시작했나요?" 엄마는 갑자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에요." 찰리는 주장했으나 아빠는 찰리를 계속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이 애가 아주 끔찍한 이야기를 했어." "어머, 무슨 이야기인데요?" "하여간, 너무 끔찍해서 당신에겐 말할 수 없어." 그 순간, 찰리는 뺨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아빠가 손등으로 찰리를 때 린 것이다. 찰리는 순간적으로 뺨에 손을 가져갔다. "두번다시 그런 얘기를 꾸며댔다간 아주 혼내 줄테다." "얘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엄마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아빠는 아직도 잔뜩 화난 말투로 찰리에 게서 들은 이야기를 엄마에게 했다. 그러자 이번엔 엄마가 몹시 놀란 듯, "겔라만 부부가 사람을 어쨌다고? 찰리,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 니? 말도 안돼.." "하지만..." "찰리야, 그 부인은 몹시 상냥한 사람이야. 그다지 친하지는 않지만 만나 면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하는 사람이야." 찰리는 아직도 아픈 뺨을 어루만지면서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찰리야,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꾸며대는 거지?" 엄마는 어두운 얼굴로 찰리에게 물었다. 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얘는 나도 당신도 안 닮고 누굴 닮아 그러지?" "그러게 말이에요..." 아빠의 말에 엄마는 맞장구를 쳤다. "어찌 됐든, 찰리의 거짓말하는 버릇을 고쳐 놓아야지 안되겠어. 당장은 안되겠지만 어떻게든...." 아빠는 팔을 걷어올리고 찰리에게 말했다. "네 방에 가서 얘기하자." 옆방으로 가며 아빠는 찰리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자, 찰리. '거짓말이었습니다.' 하고 솔직하게 말해." 찰리는 단단히 혼날 각오를 했지만, 정말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 창문으로 제가 봤단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찰리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말이란 것을 아빠가 믿어 주길 바랬다. 그러 나 아빠는 무서운 눈으로 찰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들어가 있어." 그리고 아빠는 손을 뒤로 해 방문을 닫았다.....? -7. 방에 갇혀서- 그다지 심한 벌은 아니었다. 찰리의 말을 믿지 않는 아빠는 찰리가 거짓말 을 했다는 고백을 듣기 위해 찰리를 한차례 더 때리셨다. 몸도 아파왔지만 그것보다 찰리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아빠가 더 원망스럽고 야속했 다. 아빠는 계속 찰리를 다그쳤다. "또 말을 꾸며댈 테냐?" 아빠는 훌쩍이며 서 있는 찰리에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다시 회초리 있는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찰리는 하는 수 없이 체념하고 아빠에게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안그럴께요." "그러면 아까 한 말이 거짓말이었다고 인정하는 거지?" 찰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어서 대답해라, 찰리!" 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실을 말하면 아빠에게 또 매를 맞을 테고,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기는 더욱 싫었다. "저어, 제가 직접 본 것이니까 사실이에요.." 아빠는 정말로 화가 잔뜩 나신 듯 했다. 갑자기 찰리의 목덜미를 세게 움 켜잡으셨다. 찰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 또 매를 맞겠구나...' 그러나 아빠는 더 이상 때리진 않으시고 찰리를 무섭게 노려보시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셨다. 곧이어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이라고 바른 대로 네 잘못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이 방에서 절대로 나오지 못할 줄 알아!" 아빠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잠시 후 침대의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빠는 언제나 밤일에서 돌아오시면 아침 식사 후에 잠자리에 드신다. 그리고는 저녁때가 되면 다시 일하러 나가시곤 했다. 그러나 엄마라면 아빠가 일하러 나가시기 전에 찰리를 이 방에서 꺼내 주 실지도 몰랐다. 찰리는 살그머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 엄마!" 찰리는 열쇠 구멍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불렀다. 잠시 뒤 발뒤꿈치를 들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엄마, 거기 있어요? 제발 저를 좀 꺼내 주세요, 예? 엄마.." "아빠가 이렇게 하는 것도 전부 너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란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부엌으로 가셨다. "후...." 찰리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도 아빠와 마찬가지였다. 역시 찰리에게 거짓 말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믿어주려 하시지 않는다. 도대체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찰리는 어젯밤의 일을 누군가에게 털 어놓고 싶었다. 자기 혼자서 알고 있기엔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었다. 게다 가 살인한 것을 보고도 그것을 알리지 않는 것은 커다란 죄인 것 같았다. 찰리는 어젯밤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밝은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창 쪽을 바라다보았다. 엄마와 아빠가 믿어 주시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이 사 건을 알려야만 한다는 생각이 찰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누가 이 사건을 믿어 줄까?" 이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경찰에 알리는 거야.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했을까?' 찰리는 얼른 일어나 창을 넘어 비상 계단으로 나왔다. 경찰서에 가서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아빠가 깨어나시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있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8. 경찰서에서- 찰리는 아파트를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경찰서를 향해 걸었다. 경찰서가 가까워 오자 찰리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구나 찰리만한 나이엔 경 찰서가 무서워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마침내 경찰서의 문 앞에까지 왔 을때 찰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마음을 크게 먹고서는 힘을 내어 문을 밀고 들어갔다. 한낮인데도 경찰서는 다소 어둠침침했다. '혹시 잘못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찰리의 머리를 스쳤다. 게다가 접수를 보는 경찰관 아저 씨도 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셨다. 웬지 찰리가 먼저 말을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상대편에서 빨리 찰리에게 말을 걸어주길 바라며 찰리는 그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이윽고 찰 리가 와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경찰관 아저씨가 상냥하게 물어왔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강아지라도 없어졌니?" 찰리는 쭈삣쭈삣 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저.. 사실은 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찰리는 겨우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경찰관 아저씨는 보고 있 던 서류로 다시 눈길을 돌리며 찰리에게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어서 이야기해 보렴." "저.. 사실은 사람이 죽었어요. 어떤 남자가 그 사람을 죽였어요." 찰리는 단숨에 말해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관 아저씨도 눈을 크게 뜨고는 사실이냐고 찰리를 몇 번이나 다그쳤다. 아저씨는 찰리의 눈을 살핀 후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문을 똑똑 두들기자 방 안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찰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마치 학교에서 교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과 비슷했다. 들어온 사 람이 어린 아이였으므로 방의 주인은 잠시 놀라는 빛을 보였으나, "무슨 일로 왔지?" 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건넸다. 잔뜩 긴장한 찰리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어젯밤에 목격한 사건을 차근차근 이야 기해 나갔다. 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저씨는 별로 놀라는 빛도 없이 찰리에게 주 소와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는 "꼬마야, 너 혹시 어젯밤에 무서운 꿈을 꾼 게 아니니?" 하고 물었다. "절대 아니에요. 제 눈으로 직접 봤는걸요....." 찰리가 대답하자, 그는 책상 위에 있는 인터폰을 누르고는 "로스, 내 방으로 좀 와 주게나." 하고 말했다. 로스라고 불리운 남자가 들어오자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한참 이야기하며 가끔씩 찰리 쪽을 건너다 보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로스는 찰리 에게 물었다. "꼬마야, 이 일을 엄마나 아빠에게 말씀드렸니?" 그것은 찰리가 가장 걱정하고 있던 물음이었다. "저.. 그건..말씀드렸어요...." 찰리가 들릴듯 말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엄마나 아빠가 경찰서에 알리러 오지 않으셨니?" "그건..아빠나 엄마가 제 이야기를 믿어 주지 않으시기 때문에..." "왜 부모님들이 네 이야기를 믿지 않으시지?" "그것은... 언제나 제가 이야기를 꾸며댄다고 해서..." 그러자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의미있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9. 로스 형사- 그 방에 있던 두 사람은 사복 형사들이었다. 모두 찰리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튼 매우 젊어 보였던 로스라는 형사가 전기 제품 판매원을 가장해서 아파트로 가서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찰 리의 말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 그럼 갔다오마, 꼬마야." 로스 형사는 모자를 한 번 들어 보이고는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로스 형 사가 돌아올 때까지 찰리는 혼자 어두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 다. 아무도 자기를 믿어 주지 않자 찰리는 슬픈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야 말로 로스 형사가 돌아오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므로 애써 참기로 했다. 몹시 긴 듯한 30분 가량이 지나가자 마침내 로스 형사가 마침내 로스 형사 가 돌아왔다. 찰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곧 경찰서 안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경관 아저씨들이 출동하겠지. 그리고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밝혀질 거야.' 그러나 찰리의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잠시 후 찰리가 먼젓번 방으로 불 려 들어갔을 때 로스 형사는 찰리에게 다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얘, 꼬마야. 어젯밤에 네가 본 것은 라디오 연속극이었더구나." 찰리는 잠시 머뭇거리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로스 형사가 계속 말했다. "매일 밤 11시 30분 경에 방송되는 '당신의 집 앞에서 범죄가' 라는 연속 수사극을 듣고 있었더구나. 너도 그 방송을 알고 있지? 그리고 그 방 안에 는 여행 가방도 2개가 놓여 있더구나. 그래서 내가 슬쩍 볼펜을 떨어뜨려 줍는 척 하면서 건드려 보았지. 빈 가방이더구나." 찰리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에요!" 그러나, 찰리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찰리의 말 을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얘야, 다음부턴 이런 거짓말을 하면 혼난다. 어쨌든, 아저씨가 집까지 바 래다주마." 하고 로스 형사가 말했다. 찰리는 하는 수 없이 로스 형사를 따라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경찰서를 나온 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힘없이 걷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 한없이 슬펐다. 하지만 로스 형사와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야단맞을 일이 실은 더 걱정스러웠다. -10. 무서운 엄마- 홀트 거리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찰리 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로스 형사도 6층까지 오르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침내 찰리네 집 문 앞에 다다랐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그럼 아무도 모를 텐데... 아니야.. 잡히면 더 혼 나겠지.. 아.. 왜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지?' 로스 형사는 찰리의 심정은 전혀 모른 채 문을 두들겼다. 소리를 듣고 나 온 사람은 다행히도 엄마였다. 엄마는 찰리와 낯선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것 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더구나 로스 형사가 신분증을 보이자 엄마는 더더욱 놀란 듯 아무 말씀도 못하는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시 이 애가 무슨 사고라도..." "아, 사고는 아닙니다. 신고를 해 왔어요. 하지만 거짓말이더군요." "찰리, 너 이분에게도 그 얘기를 했니? 경찰서에 가서?" 엄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로스 형사는 흥미있는 말투로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하고 엄마에게 물었다. "네.. 가끔이요." 엄마는 겸연쩍어 하시며 대답했다. 그러자 로스 형사는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그러시면 학교 선생님이나 병원 의사하고 한번 상담을 해 보시는 게 어떨 런지요?" 하고 물었다. 그 때 7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찰리가 위 를 흘끗 보자 겔라만 부인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 때 겔라만 부인을 본 로스 형사가 엄마에게 황급히 인사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찰리는 겁이 나서 엄마에게 재빨리 말했다. "엄마, 빨리 들어가요, 저 아줌마와 만나고 싶지 않아요. 빨리요.." 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엄마는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안돼, 찰리. 어서 아줌마께 사과해야지!"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겔라만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이들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으셔요? 안색이 안좋으시네요?" 하고 겔라만 부인이 다정스레 말을 걸어왔다. 엄마는 처음엔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고 말했으나 겔라만 부인이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결국 말을 하 고 말았다. "우리 애가 경찰서에 가서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대는 바람에......" 찰리는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무의식중에 겔라만 부인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겔라만 부인도 찰리 쪽을 보고는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 불에 스프를 올려놓고 깜빡 잊고 왔네요.. 올라가 볼께요." 겔라만 부인은 급히 7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엄마는 몹시 속이 상하신 듯했다. 찰리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가 나도록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찰리를 무섭게 노려보셨다. 찰리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찰리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엄 마에게 말했다. "왜 그 아줌마에게 그런 말을 하셨어요? 이제 그 사람들이 다 알아버렸잖 아요!!!"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엄마는 찰리의 이 말을 다른 뜻으로 듣고 계셨다. "찰리야, 네가 한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다행이다만." 하시며 시계를 흘긋 보셨다. 엄마는 매일 오후에 잠깐씩 일을 하러 나가시 는데 나갈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찰리의 방을 나가시며 "문을 잠그고 나갈 테니 방에서 꼼짝 말고 있거라. 엄마가 돌아와 문을 열 어줄 테니." 하고 말씀하셨다. 방 안에 털썩 주저앉은 찰리는 방안이 몹시 무더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더 위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져 왔다. '그들이 다 알아버렸어... 아.. 이젠 어떡한담?' 이윽고 해가 지고 저녁 무렵이 되었다. 밤의 어둠은 찰리에게는 가장 무서 운 적이었다. 도움을 청해도 아무도 찰리를 믿어 주고 도와 주는 사람은 없 었다. 찰리의 편이 되어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1. 이상한 전보- 엄마가 일터에서 돌아오셨다. 부엌 쪽에서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시는 소리가 들렸다. 찰리의 방문이 열렸다. 찰리가 일어서자 아빠는 찰리에게 다가오라는 손짓 을 하셨다. 그리고는 찰리에게 다정하게 물으셨다. "이제 좋은 아이가 될 결심이 섰니? 이제 거짓말 다시는 안할 거지?" "예, 아빠." 찰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좋아. 그렇다면 가서 저녁 먹자." 찰리는 아빠 뒤를 따라 식탁으로 갔다. 엄마는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찰리는 속으로 휴! 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저녁을 먹으며 엄마는 낮에 지각해서 공장장에게 불려간 이야기를 무심코 아빠에게 하셨다. 아빤 왜 지각했느냐고 계속 따져 물으셨다. 엄마 는 결국 낮에 경관이 다녀갔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충 이야기 를 들으신 아빠는 몹시 화가 나셨다. 아빠는 찰리에게 큰소리를 치셨다. "찰리! 도대체 너 왜 그렇게 말썽을 부리는 게냐?" 아빠가 한마디 더 하시려는 순간,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보였다. 그것을 찰리의 이모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급한 일. 전보를 받는 즉시 와 주기 바람.' 이라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무슨 일일까 몹시 궁금해 했다. 찰리의 이모는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살고 있었다. 넉넉치 못한 살림이었으므 로 찰리네와 마찬가지로 전화가 없었다. 전화가 없는 것은 이럴 때 몹시 불 편했다.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어서 준비하고 가보도록 해." 아빠의 말에 엄마는 서둘러 갈 준비를 하셨다. 그러나 찰리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찰리는 엄마에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가지 마세요, 엄마. 틀림없이 속입수일 거에요! 전보를 친건 그들이에요. 저를 혼자 있게 하려고 그런 거에요. 엄마, 제발 가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엄마는 오히려 더 화가 났다. "너 또 그 타령이냐? 이젠 그만두지 못해!!" 엄마는 찰리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아빠에게 찰리를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가셨다. 이제 남은 것을 아빠와 찰리 둘 뿐이었다. 찰리는 아빠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빠, 저 혼자있고 싶지 않아요. 그들 두 사람이 저를 잡으러 올 거란 말 이에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아빠는 찰리를 냉정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공장에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네, 아빠? 말썽 안 부리고 한구석에 가 만히 있을께요, 예? 아빠, 제발 부탁이에요!!!" 아빠는 찰리를 무섭게 노려보셨다. "언제까지 그 얘기만 계속할 테냐? 안되겠다. 너 내일 당장 나랑 의사에게 가 봐야겠다"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문을 밖에서 잠그려 하셨다. 찰리는 깜짝 놀라 서 아빠에게 애원했다. "아빠, 제발, 제발 문을 잠그지 마세요!!"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창문 마저도 아빠에 의해 못으로 쳐졌다. 이 어서 밖의 문도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아빠가 일터로 나가 버리신 것이었다. 찰리는 이제 혼자였다. -12. 발자국 소리가- 찰리는 완전히 혼자였다. 소리쳐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움을 청 해도 아무도 와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더 위험할지 도 모른다....... 찰리는 전등을 껐다. 어두운 것이 무서웠지만 방이 어두우면 그들 두 사람 이 어쩌면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이라고 여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찰리는 제발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은 계단에 숨어 아빠가 나가시는 걸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위층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 전히 무더운 밤이었으나 찰리는 두려움 때문에 더위조차 잊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교회 종 소리가 들려 왔다. 찰리는 어둠 속에 웅 크리고 앉아 교회 종 소리를 세어 보았다. 어느새 10시였다. 찰리는 엄마의 일을 생각했다. '엄마에게 온 전보는 당연히 가짜야. 그들이.. 저녁이면 일나가시는 아빠 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엄마만 밖으로 나가게 하면 내가 혼자 남게 된다 는 것을 노렸겠지... 그렇다면 엄마가 이모 집에 갈때까지 한시간 반, 우리 집에 올때까지 한시간 반... 그러나 엄마는 분명히 오랫만에 만난 이모랑 이야기를 나누겠지. 그렇다면 엄마는 집에 최소한 1시는 되어서야 올 텐데....' 교활한 두 사람은 이미 그런 걸 모두 알고 다른 이웃이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교회 종소리가 11시를 알렸다. 찰리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한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 것이다. 찰리는 깜깜한 밖을 내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한시간만 더 참으면 돼... 12시가 넘으면 엄마가 돌아오실 시간이 금방 될 테니까.' 찰리는 마음을 굳게 먹고 엄마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자박.. 자박.. 자박.. 그 소리는 바로 위층에서 계 단을 살며시 내려오고 있는 소리였다. -13. 움직이는 빛- '헉... 이럴 수가..' 찰리는 너무 무서워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또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소리 였다. 찰카닥.. 찰카닥 하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찰리는 재빨리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창문의 차양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었다. '아차... 차양이 있었지..'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창은 어두웠으나 사람 그림자가 창을 더욱 어둡게 했 던 것이다. 찰리는 몸을 움츠려 벽에 딱 붙어 섰다. 마침내 걱정하고 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시 가짜 전보였다. 갑자기 한줄기 빛이 방 안을 갈랐다. 회중 전등의 빛 이었다. 찰리는 그 빛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미 찰리를 스쳐간 그 빛은 정면으로 찰리의 얼굴에 쏟아졌다. 순간, 찰리는 눈을 감았다. 빛은 곧 사라졌다. 적은 찰리가 혼자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독안에 든 쥐. 지금 찰리의 처지가 바로 그랬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가 없었다. 창은 못을 박아 열수 없게 되었고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덜컹덜컹 창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창은 꼼짝도 하 지 않았다. 이것만은 찰리도 아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조용해 지더니 이번에는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걸까?' 하고 찰리는 생각했다. 현관문도 아빠가 잠그고 나가셨으므로 그곳으로는 들어올 수가 없다. 교회 종소리가 11시 30분을 알렸다. 찰리의 심장은 방금 마라톤을 하고 돌 아온 선수처럼 무섭게 방망이질치고 있었다. 약 5분 가량, 주위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푹풍 전야의 고요함.... 방안은 몹시 무더웠지만 찰 리는 아무런 더위도 느끼지 못했다.....? -14. 또 하나의 열쇠-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찰리 는 엄마가 돌아오셨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실 리가 없다. 그리고 엄마라면 아무리 늦어도 '찰리!' 하고 부르셨을 것이다. 그 때 찰리에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 여벌의 열쇠다! 상대는 여벌의 열쇠 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찰리의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찰리 방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는 또 다시 열쇠를 꽂는 소리. 이젠 끝장이다. 우물쭈물할 새가 없었다. 찰리는 순간적으로 창을 향해 의 자를 힘껏 내던졌다.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다. 찰리는 재빨리 몸을 날려 그리로 빠져나갔다. 뒤에서 서둘러 쫓아오는 소 리가 들렸다. 남자였다. 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는 한 팔을 창밖으로 내밀어 찰리를 움켜잡으려 했다. 위험하다고 느낀 순간 찰리는 재빨리 몸을 피해 달아났다. 이렇게 되면 몸집이 작은 찰리 쪽이 유리했다. 찰리는 그 때 아무런 생각 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구르듯이 계단을 뛰어내려왔 다. 그래도 자신의 발이 몹시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15. 큰길 쪽으로- 일층까지 뛰어 내려온 찰리는 지하실 쪽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만 약 남자가 그리로 쫓아온다면 지하실은 어느 곳보다도 위험했다. 큰길 쪽으 로 가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큰길로 나와 찰리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뒤에서 급하게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다리가 짧은 찰리가 불리했다. 찰리는 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어느 집이나 불이 꺼진 채 현관문이 굳게 닫혀져 있었다. 뒤이어 찰리는 조금 멀리서 들리는 또 하나의 발 소리 를 들었다. 그 여자임에 틀림없다. 둘이서 찰리를 쫓고 있는 것이다. 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며 눈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쓰레기통이 쓰레 기를 가득 담은 채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마치 벽과도 같았다. 너무 높이 쌓여 있어 그것을 뛰어 넘기란 어린 찰리에게 불가능해 보였다. 잠시 멈칫하는 사이 남자는 찰리의 바로 뒤에까지 쫓아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남자에게 붙잡히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남자가 뒤에서 팔을 뻗어 찰리를 잡으려 했다. 몸집이 작은 찰리는 쓰레기통 사이를 요리 조리 빠져 나가며 용케 몸을 피했다. 몸집이 큰 남자는 이리저리 부딪치며 좀처럼 찰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쓰레기통 사이로 몸을 피하 고 있는 사이 어느 새 여자가 가까이까지 쫓아온 것이다. 오랫동안 달린 찰 리는 숨이 차고 괴로웠다. 이제는 꼼짝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된 것이다.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찰리는 순간, 눈앞의 석탄재를 집어 남자의 얼굴에 힘껏 던졌다. 남자는 심하게 기침을 해대며 눈을 비볐다. 그 사이 찰리는 남 자에게서 빠져나와 죽을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16. 시내 전차- 찰리는 문득 앞에서 건들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순간 찰 리는 '살았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얼른 그 사람에게 달려가 팔에 매 달렸다. 숨을 몰아쉬며 찰리는 말을 하려 했으나 너무 달려왔기 때문에 아 무런 말도 목에서 나와 주지 않았다. 찰리는 손가락으로 겔라만이 오고 있 는 쪽을 가리키며 헐떡이고 있을 때, 그제서야 그 사람은 혀 꼬부라진 소리 로 "대체, 무, 무슨 일이지?" 하며 멍청한 눈으로 찰리를 쳐다보았다. 찰리는 비로소 그가 술에 잔뜩 취 해 비틀거리며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겨우 살았다고 생각했던 찰 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술에 취한 남자가 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찰리는 알았다. 찰리가 매달렸던 팔을 놓자 남 자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또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찰리는 또 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달려오던 겔라만이 쓰러져 있는 술취한 남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걸 려 넘어져 뒹구는 소리가 났다. 덕분에 찰리는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수가 있 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달리던 찰리는 레일을 발견했다. 시내 전차의 레일이었다. 찰리는 기적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전차가 레일 위에서 막 떠나려 하고 있었다. 찰리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전차 뒤에 매달렸다. 곧 전차가 출발했다. 찰리가 가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몰래 전차 뒷꽁무늬에 올라 타곤 했던 경험이 이때 도움이 될 줄이야! 찰리는 그 때 막 달려오고 있는 겔라만을 발견했다. 겔라만이 힘껏 달려오 고 있었으나 찰리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숨을 돌리며 찰 리는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았다. 겔라만은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포기하지 않고 전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얼마를 달린 후, 전차는 갑자기 속도를 떨구었다. 정류장이 보였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었으나 정류장에는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전차가 멈추어 서고 사 람들이 차를 갈아 탔다. 멀리서 아직도 겔라만이 쫓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으므로 찰리는 조마조마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승객이 모두 차에 오르고도 전차는 좀처럼 움 직이려 하지 않았다. 찰리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천 천히 발차의 벨을 울렸다. 찰리는 차에서 내리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차가 출발하지 않으면 겔라 만에게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때 막 달려온 겔라만이 찰리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앗! 하는 순간이었다. 힘에 밀려 전차에서 떨어진 찰리와 겔라만을 남겨 두고 전차는 사라져 갔 다. 주위는 다시 어둡고 고요해졌다. -17. 부모와 함께 가는 아이- 찰리가 겁에 질려 겔라만에게 한참을 끌려 갔을 때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 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양쪽에서 찰리의 겨드랑이를 꼭 끼고 걸었다. 그런 찰리의 모습은 마치 양친에게 매달려 가는 아이와도 같았다. 찰리는 이제까지의 모든 고생이 수포로 돌아갔으나 눈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두 어른 사이에 끼어서 끌려가고 있는 찰리는 몹시 지쳐 있었다. 겔라만 부부는 찰리를 데리고 다시 큰길로 나와 어디론가 말없이 걷고 있었다. 그 들은 도중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의 남자와 마주쳤다. 겔라만 부부 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찰리는 도와달라고 소리쳤으나, 겔라만 부부의 태연 한 연극으로 인해 그들 역시 무심히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겔라만 부부는 그들 앞에서 마치 자기들의 아이를 나무라듯 발버둥치는 찰 리를 야단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길모퉁이로 사라지자 겔라만은 찰리 의 팔을 힘껏 비틀며, "몹시 애먹이는 녀석이군." 하고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찰리를 데리고 큰길을 지나는 것이 위 험하다고 느꼈는지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리고는 찰리에게는 들리지 않도 록 뭐라고 한참 소곤거렸다. 찰리는 겨우 "......빈 집이 좋겠어......" 하는 소리밖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둘은 나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여기에서 또 겔라만 부부 의 연극이 시작되었다. 찰리는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음을 깨닫고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여자는 마치 아이를 나무라는 엄마처럼, "앞으로 밤에 영화를 보러가는 건 용서하지 않을 테다, 엄마 말 알아들었 지?" 하고는 슬쩍 운전수의 눈치를 살폈다. 겔라만은 운전수에게 암하스트 거 리 20번지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앉은 위치를 슬쩍 바꾸어 운전수 에게 찰리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잠시 후, 찰리는 눈앞에서 불꽃이 보이는 것 같았다. 겔라만이 찰리의 턱 을 갈겼던 것이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에 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턱도 얼얼하게 아파왔지만 찰리의 마음은 더 쓰리 고 아팠다. 마치 온 세상 사람들이 찰리의 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와 아빠마저도 찰리가 이런 곤경에 처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리는 문득 눈 앞에 빨간 불빛을 발견했다. 택시가 급하게 멈춰 섰다. -18. 순찰차- 빨간 불빛이 무엇을 뜻하는 지 찰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순찰차였다. 마 침내 경관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찰리는 그 순찰차가 자신을 찾아 나선 것으로 알고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자 여자는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는 찰 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찰리는 재빨리 얼굴을 돌리고는 여 자의 손가락을 물었다. 그리고는 바깥을 향해 힘껏 소리쳤다. "도와 주세요, 도와 주세요, 아저씨!" 경관은 곧 순찰차에서 내려 택시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경관은 전혀 서 두르는 빛이 없이 천천히 창으로 다가와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찰리에게 물 었다. "왜 그러니 꼬마야, 왜 울고 있지?" "집에 돌아가면 야단 맞을 줄 알고 그래요." 하고 여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경관은 찰리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아저씨도 어릴 적엔 부모님께 야단을 많이 맞았단다. 그렇지만 다 너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란다. 꼬마야!" 그러나 찰리는 울면서 대답했다. "다 거짓말이에요. 이 사람들은 어젯밤 사람을 죽였단 말이에요." 그러자 경관은 잠시 움찔하더니 찰리의 얼굴을 더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왔 다. "어! 얘, 꼬마야, 너는 오늘 아침에 경찰서에 왔던 애가 아니냐?" 순간 차 안에는 긴장의빛이 감돌았다. 찰리의 마음은 갑자기 확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너 오늘 아침에도 경찰서에 와서 같은 이야기를 했던 아이지?" 찰리도 생각이 났다. 접수일을 보던 경관이었다. "그래서 우리 형사가 너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지. 이분들이 너희 부모님 들이시냐?" "부모가 아니라면 이런 아이를 어떻게 참고 보겠어요." 하고 겔라만이 잘라 말했다. "예, 정말 그러시겠습니다, 아저씨." 하고 경관은 겔라만에게 동정어린 말투로 말했다. 경관은 어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는 순찰차를 타고 떠 나 버렸다. 택시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찰리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가 없었 다. 눈물만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이윽고 택시가 멈추고 그들을 내려 놓고 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두 사람은 찰리를 끌고 모퉁이를 돌았다. "저기다." 하고 겔라만이 소리쳤다. 그 곳에는 금방 쓰러질 듯한 낡은 목조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이들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도 틀림없이 이곳으로 옮겨졌을 것이라고 찰리는 생각했다. 집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19. 낡은 집- 겔라만은 갑자기 찰리의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자 는 낮은 목소리로 겔라만에게 물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있었죠? 그걸 처리한 곳도 여긴가요?" "응, 맞아. 지나다니다 보아 둔 곳이야." 하고 겔라만이 태연스레 말했다. 겔라만은 회중전등을 꺼내 계단을 비추고 는 여자에게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게 한 뒤 찰리를 끌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공포에 질려 제대로 발걸음도 떼어 놓지 못하고 있는 찰리를 겔 라만은 질질 끌다시피 하며 올라가고 있었다. 맨 위층까지 찰리를 끌고 간 겔라만은 회중전등을 바닥에 내려 놓고 찰리 를 벽으로 밀어 붙였다. 깨어진 유리창 사이로는 밤하늘의 별들이 무심히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겔라만은 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와 두 손으로 찰리의 목을 졸랐다. 발버둥치기엔 찰리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 찰리의 목을 누르는 힘이 점점 강해져 왔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괴로움 속에서도 찰리는 어떤 사실이 반작 떠올랐다. 그건 바로 사람의 위가 급소라는 사실이었다. 겔라만이 찰리이 몸을 누르고 있었으므로 찰리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자 찰리는 무릎을 굽혀 있는 힘을 다해 겔라만의 배를 공격했다. 순간 뜨거운 입김이 찰리의 얼굴로 확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찰리의 목을 누르 던 손에 힘이 빠지는 것 같더니, 곧 손을 자기의 배로 가져갔다. 순간, 찰리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구부리고 있는 겔 라만의 배 있는 곳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겔라만은 뒤로 나자빠졌다. 겔 라만이 쓰러지며 바닥에 놓여 있던 회중전등을 건드렸으므로 불빛이 마구 천장으로 흩어지며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찰리도 바닥에 엎드린 채 기진 맥진한 상태였다. 잠시 후의 일이었다.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건물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삽시간에 유리창들이 모두 박살이 나더니 요란한 소리를 냈다. 뒤로 나가떨어진 겔라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때 또 다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아래층에서 는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판자 조각들이 사방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얼마 후, 그 소리들이 멈추었을 때 여자의 비명 소리도 멎어 있었다. 찰리 의 눈앞에 심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어 숨쉬기에 매우 곤란했다. -20. 현기증-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찰리는 어둠 속에 누워 꼼짝 않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면 위험하리란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져 왔다. 찰리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여러 줄기의 불빛과 함께 사람들의 말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 았다. 그러나 그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몹시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한 줄기의 불빛이 찰리를 발견해 냈다. 그 때는 이미 아래쪽 계단 은 다 무너져 내렸고 몇 개의 판자들만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찰리는 그 중 하나에 겨우 몸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확성기에 대 고 말하는 긴장된 목소리가 찰리의 귀에 들어왔다. "꼬마야! 아래쪽을 내려다보지 말고 눈을 꼭 감고 잠시만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저씨들이 곧 구출해 주마!" 찰리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지만 그 소리만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잠 시 후 빠른 동작으로 경관들에 의해 아래쪽에 그물이 쳐졌다. "꼬마야, 내 말 들리니? 아래쪽에 그물이 쳐졌단다. 이제 뛰어 내려도 안전 하단다. 팔다리를 되도록이면 몸에 붙이고 하나 둘 셋! 하면서 뛰어 내리거 라. 알았지?" 찰리는 눈을 뜨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물이 쳐지긴 했지만 몹시 현 기증이 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뛰어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찰리는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함께 용기를 내어 뛰어내렸다. 잠시 정신을 잃은 찰리가 깨어나 보니 차에 타고 있었고, 옆에는 로스 형 사가 앉아 있었다. 로스 형사는 미소를 띄우며 찰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저씨,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찰리도 미소를 지으며 로스 형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로 스 형사가 손을 내저으며 찰리에게 "아니야, 찰리. 너는 우리가 구해 준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난 거야. 찰리, 우리들이 어리석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고 부드럽게 말하며, 찰리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찰리는 차를 타고 집 으로 가면서 경찰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찰리가 궁금하게 여겼던 모든 일 들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던 로스 형사는 지난 밤에 선거 연설을 방 송하느라고 연속 수사극이 방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상한 생각이 들어 급히 겔라만의 아파트로 달려간 로스 형사는 빈 집에서 몇 가 지의 증거품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급히 수소문하여 순찰차와 택시 운전수 로부터 찰리가 있는 곳을 알아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찰리의 짐작대로 낡은 건물의 한구석에서 시체가 들어 있는 여행 가방 2개도 발견되었다. 피로에 지친 찰리는 집에 도착해 로스 형사의 부축을 받으며 아파트 계단 을 올라갔다. 로스 형사가 문을 두드리자 엄마가 문을 열고 뛰어나오셨다. 그리고는, "찰리야!" 하고 부르시더니 찰리를 가슴에 꼭 껴안아 주셨다. 엄마의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엄마 품에 안긴 찰리의 눈에 서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작가설명』 윌리엄 아이리시 (William Irish) 본명은 코넬 조지 호플리-울리치(Cornel George Hoply-Woolrich, 1903- 1968)이다.('비상 계단'은 '코넬 울리치'라는 본명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그가 추리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 코넬 울리치 명의로 쓴 처녀 추리장편 '검은 옷을 입은 신부' 이다. 이 작품 역시 서스펜스의 걸작으로, '환상의 여인' 을 쓸 때부터 필명인 '윌리엄 아이리시' 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 공포추리의 걸작인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에서는 그의 중간 이름을 딴 '조지 호플리' 의 명의로 썼다. 이 세 작품은 아이리시의 대표작 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아이리시-울리치는 세 개의 필명으로 열 여섯 편의 추리소설을 지 었다. 이 중 특히 '환상의 여인' 은 그의 최고 걸작일 뿐만 아니라 세계 추 리문학사상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장편 이외에 250편의 단편을 썼으며, 1948년에는 추리단편 분야에의 공헌으로 미국 추리작가협회의 에드거 앨런 포우 상을 받았다. 그의 단편으로는 단편집 '춤추는 탐정'(The Dancing Detective, 1946)이 가장 유명하며, '뒷창문'(Rear Window, 1944)은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 어트, 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하다. 아이리시-울리치는 그의 작품에서처럼 어둡고 쓸쓸한 삶을 살았으며, 사생 활은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알려진 바로는 한번 결혼했으나 곧 이 혼하고, 어머니와 함께 죽을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죽은 뒤에 남겨진 100 만 달러의 유산은 모교 콜롬비아 대학에 기증했다. 이 '비상 계단' 이나 '춤추는 탐정' 등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가난한 사람 의 힘든 삶에 대해서 많은 애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주특기인 놀랄 만 한 서스펜스 못지 않게 그런 서민적인 요소들이 아이리시의 인기를 더해 주 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