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죽음의 키스 (하) 지은이: 아이나 레벤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제 III부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 작가 소개 - 1920,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면서 추리문단에 혜성처럼 등장 - 1956년, 이 작품은 거드 오스왈드 감독, 로버트 와그너 주연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에서 영화화 - 1967년 공포 괴기 소설 로즈메리의 아기.(Rosemary's Baby, 1967)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드높임. - 이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 주연으로 파라마운트 사에서 영화화. - 그밖에 저서로 공상과학소설인 <이 완전한 시대(This PerfectDay, 1970)>, 괴기공포소설인 <스테포드의 아낙네들(The Stepfore Wives, 1972)> 정치공포소설인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The Boys from Brazil, 1976)> 심리 멜로드라마인<인터로크(Interlock,1958)>,뮤지컬인<성가신고 양이!(Drat!TheCat!,1965)>,공포극<베로니카의방(Veronica's Room, 1973)> 등이 있다. 제 1 장 메리온 킹쉽이 학교를 -- 엘렌이 들어갔던 중서부 20세기 폭스 사의 영화에 나오는 놀이터와는 달리 꾸준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그녀의 아버지는 바로 킹쉽 코퍼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광고대행사의 사장에게 그 사실을 말해서 메리온은 카피라이터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녀도 광고문안을 쓰고 싶긴 했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그녀는 화장실의 배수관에 킹쉽이라는 이름이 찍힌 작은 대리점에서 간신히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광고문안 작성하는 것이 비서업무에 방해되지 않기를 바라며, 머지않아 작은 회사들의 광고문안을 작성해 주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1년 뒤에 도로시가 불가피하게 엘렌의 뒤를 따라서 미식 축구 응원이나 캠퍼스의 들뜬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메리온은 아버지와 둘이서 방이 여덟 개나 되는 아파트를 지켜야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 표류하며 지나치면서 절대로 부딪치지 않는 장전된 총알 같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말로는 안했지만 분명히 반대할 것을 무릅쓰고라도 자기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메리온은 이스트 50번가에 붉은 벽돌로 싸인 건물의 맨 위층에 있는 두 칸짜리 아파트를 빌렸다. 그녀는 상당히 신경을 써서 가구를 들여놓았다. 그 방은 그녀가 있던 방보다 훨씬 작아 집에서 쓰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갖다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 가져갈 물건들을 골랐다. 그녀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 가장 필요한 것들만 골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서, 또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들을 걸고 선반에 책을 꽂아놓으면서, 그것들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언젠가 그녀의 아파트에 찾아오게 될 방문객 -- 물론 남자겠지만, 아직 신분을 알 수 없는 그 방문객도 보게 될 거라는 걸 의식했다. 물건 하나하나가 그녀 자신에게는 모두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가구와 전등, 재떨이 (최근의 것이지만 현대적인 분위기가 나진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의 모조품 (찰즈 디머스의 '나의 이집트'-- 아주 사실주의적이지는 않지만 예술가의 눈에 의해서 공간의 의미가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 레코드 (몇 장은 재즈이고, 몇 장은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 하지만 대부분은 캄캄할 때 듣기 좋은 그리그와 브람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책들 -- 그 사람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책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 (소설과 희곡, 평론과 시, 모두 그녀의 취미와 표현에 맞추어 고른 것들이다) -- 이런 것들은 구인광고를 간단하게 요약한 것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충동질하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일을 그르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중에서도 그녀는 아주 조금씩 일을 그르쳐 가고 있었다. 고독 -- 만일 그녀가 화가였다면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었으리라. 언젠가 어떤 방문객이 인정해 주고 이해해 줄 물건들로 두 칸의 방을 장식하는 대신에 -- 그리고 그 방문객은 그런 이해를 통해서 그녀 스스로 발견했지만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던 능력과 동경을 모두 알아줄 것이다. 메리온의 일주일 예정표는 두 가지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 아버지와 저녁을 함께 하는 수요일 저녁, 그리고 두 칸의 방을 대청소하는 토요일. 처음의 것은 의무의 노동이었고, 두 번째 것은 사랑의 노동이었다. 그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나무에 윤을 내고 유리를 닦고 먼지를 털고 물건들을 정리했다. 손님들이 있었다. 도로시와 엘렌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오면 무의식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있는 메리온을 부러워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찾아왔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층계를 올라와서는 작은 침실과, 그보다 더 작은 부엌을 의아스러운 눈길로 둘러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자들도 왔었다. 그녀들은 마치 인생과 명예가 걸려 있는 것처럼 커내스터 (트럼프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리고 한번은 남자가 찾아왔었다. 매우 멋지고 지적인 젊은 경리부장이었다. 아파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긴 소파를 곁눈질로 보며 나타냈었다. 도로시가 자살했을 때 메리온은 2주일간 아버지의 아파트에서 머물렀으며, 엘렌이 죽었을 때는 한 달간 머물렀다. 그들이 서로서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전된 총알보다 더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그 달 말쯤에 그녀의 아버지는 그답지 않게 자신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자기가 있는 곳으로 이사오라고 했다.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파트를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집안에 틀어박힌 채 자물쇠로 잠기는 것 같은 거였다. 그래서 그 뒤로 그녀는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아버지와 함께 하던 저녁식사를 세 번씩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는 방 청소를 했으며, 책이 빳빳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책을 한 달에 한 번씩 모두 펼쳐보았다. 9월 어느 토요일 아침에 전화가 울렸다. 앉아서 유리로 된 커피 테이블을 닦고 있던 메리온은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푸른빛이 도는 유리를 통해서 납작해진 먼지닦는 헝겊을 내려다보면서, 누군가가 전화를 잘못 걸었다가 곧 알아차리고 끊기를 바랐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그녀는 한 손에는 여전히 먼지닦는 헝겊을 든 채 마지못해 하며 일어나서 긴 소파 옆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여보세요."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 "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메리온 킹쉽입니까?" "그런데요." "당신은 아마 나를 모를 겁니다. 나는......엘렌의 친구입니다." 메리온은 갑자기 거북해졌다. 엘렌의 친구라 -- 잘생기고 똑똑하고 말이 빠른 사람...... 어딘지 불쾌하고, 어쨌든 그녀가 신경쓰고 싶지 않은 사람. 거북스러움이 이내 사라졌다. "내 이름은 -- " 그 남자가 말을 이었다. "버튼 콜리스입니다......버튼 콜리스." "아, 예, 엘렌이 당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난 그를 매우 사랑해.' 하고 엘렌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이렇게 말했었다.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고.' -- 메리온도 그녀가 행복해 하는 게 기뻤지만, 그날 그녀는 저녁 내내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우울해 있었다.) "당신을 만났으면 하는데요." 그가 말했다. "엘렌에 관한 일이 좀 있어서요. 그녀가 내게 책을 몇 권 빌려줬었지요. 얼마전에......그녀가 블루 리버에 가기 전에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걸 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마 무슨 월간 추천도서쯤 되겠지 -- 메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 좁은 소견을 탓하며 말했다. "예,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그러세요." 잠시 수화기 저쪽에서 침묵이 흘렀다. "지금 당장 가져다 드릴 수 있는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바로 근처에 살고 있거든요." "아니에요." 그녀가 얼른 말했다. "나는 지금 막 외출하는 중이에요." "그렇다면 내일 아무때나......" "나......나는 내일도 없는데요." 그녀는 불편하게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 그가 자기 아파트에 오는 것이 싫어서 하는 거짓말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는 아마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엘렌을 사랑했었고, 엘렌은 죽었다. 그는 엘렌의 책을 그녀에게 돌려주려는 것뿐이다......"오늘 오후 어디서 만났으면 하는데요." 그녀가 제안을 했다. "좋습니다 -- " 그가 말했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나는 5번가 근처로......갈 건데요." "그러면 약속장소를 록펠러 센터의 동상 앞에서 하죠. 온 세계를 받치고 있는 아틀라스 중 하나에서 -- " "좋아요." "3시에 어때요?" "그러죠, 3시.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아닙니다 -- " 그가 말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메리온." 잠시 침묵이 흘렀다. "킹쉽 양이라고 부르는 게 어쩐지 우스운 것 같아서요. 엘렌이 당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말을 해주었거든요." "아니, 괜찮아요......" 그녀도 다시 어색해지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 봐요......" 그녀는 그를 버드라고 불러야 할지 콜리스 씨라고 불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이따 봐요."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잠시 전화기를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돌아서서 커피 테이블로 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는 어설프게 먼지닦는 헝겊을 집어들고 빠르게 원을 그리며 닦았다. 왜냐하면 이제 오후 시간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 2 장 치솟아 있는 동상 그림자 안에서 그는 회색 플란넬 옷을 입고 종이로 싼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주춧돌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는 버스들과 성급하게 움직이는 택시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묵묵히 지나갔다. 그는 찬찬히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5번가에 도착했다. 어깨에 패드를 넣지 않고 가늘게 넥타이를 맨 남자들. 마치 저 아래 길에서 사진사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맞춤옷에, 목에는 스카프를 매고, 아름다운 머리를 위로 치켜들고 걷고 있는 여자들. 그리고 새장 속에서 갇혀 온 참새들처럼 촌스러운 분홍빛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동상과 길 건너에 태양을 받아 뾰족하게 서 있는 성 패트릭 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 모두를 주의깊게 쳐다보았다 -- 아주 오래 전에 도로시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스냅 사진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면서. "메리온도 예뻐질 수 있을 거예요. 머리를 이렇게 한다면 -- " 그는 도로시가 자기 머리카락을 홱 뒤로 잡아당기면서 잔뜩 얼굴을 찡그리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미소지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꾸러미를 싼 포장지를 장난스럽게 매만졌다. 북쪽에서 그녀가 오고 있었다. 30 미터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 정말 아주 깡말랐다 -- 보통 여자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갈색 정장에 금빛 스카프, 요즘 유행하고 있는 듯한 작은 펠트 모자, 어깨에 매는 핸드백.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거기에다가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틀어올렸다. 그녀는 도로시와 비슷한 커다란 갈색 눈을 가졌지만 그녀의 찡그린 얼굴에는 너무 컸고, 그녀의 동생들에게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던 광대뼈도 메리온의 얼굴에서는 너무 날카롭게 눈에 뛰는 것이었다. 그녀는 좀더 가까이 다가와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의문스런 미소를 머금고, 그리고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립스틱 색깔이 자기의 한창때를 희미하게 연상시켜 주는 엷은 장미빛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메리온?" "그래요." 그녀는 주저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어요." 그녀는 그의 눈 아래를 보면서 아주 잠깐 미소를 보냈다. 그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은 길고 차가웠다.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곧장 모퉁이 주위에 있는 미국 초창기식 칵테일 라운지로 갔다. 약간 머뭇거리다가 메리온은 다이커리를 주문했다. "난......난 오래 있을 수 없어요." 그녀는 자리 끝에 걸터앉아서 칵테일 잔을 꽉 쥐고 말했다. "아름다운 여자분들은 항상 그렇게 바쁘게 다니나 보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 그리고 곧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긴장된 미소를 지으며 점점 더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말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죠, 그렇죠?" "캠든 앤드 갤브레이스에서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컬드웰 대학에 다니나요?" "아닙니다." "엘렌이 3학년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랬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학교를 그만뒀어요." 그는 마티니를 한 모금 마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가 일하시는 걸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아, 미안해요......" "아마 내년에는 졸업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야간대학에 다니거나. 어느 대학을 나왔죠?" "컬럼비아. 당신은 뉴욕 출신인가요?" "매사추세츠입니다." 그는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매번 메리온은 화제를 그에게로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날씨나, 아니면 놀랍도록 클로드 레인즈를 닮은 웨이터에 대해서 -- 마침내 그녀가 질문을 했다. "그게 그 책이에요?" "그래요. 。앤터니의 저녁。 -- 엘렌은 내게 이것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책의 앞뒤에 그녀가 써놓은 것이 있어서 당신이 갖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가 그녀에게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 " 그가 말했다. "난 좀더 의미 있는 책을 좋아합니다." 메리온이 일어섰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잖습니까?" "미안해요." 그녀는 손에 든 꾸러미를 내려다보면서 얼른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요. 일 문제로. 늦으면 곤란한 약속이에요." 그가 일어났다. "하지만......" "미안해요." 그녀는 어색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았다. 그들은 5번가를 다시 걸어 올라왔다. 모퉁이에 이르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만나게 되어 반가웠어요, 콜리스 씨." 그녀가 말했다. "잘 마셨어요. 그리고 책도 고맙고......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돌아서서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멍청하게 잠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면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갈색 펠트 모자에 반짝이는 금색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그는 그녀 뒤쪽으로 10 미터 가량 간격을 두고서 걸었다. 그녀는 54번가로 올라가서 길을 건넌 뒤 메디슨 가를 향해서 동쪽으로 돌았다. 그는 그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전화번호부에 있던 주소를 기억했다. 그녀는 메디슨 가와 파크 가를 건너갔다. 그는 모퉁이에 멈춰서서 그녀가 갈색 석조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 문제로 약속이 있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자기가 기다리는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잠시 동안 기다리다가 돌아서서 천천히 5번가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제 3 장 일요일 오후에 메리온은 현대미술관에 갔다. 1층에서는 그녀가 전에 보았던 자동차 전시를 아직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2층은 평소와는 다르게 사람들로 꽉 차 있어서 그녀는 층계를 올라가 3층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주 낯익은 그림들과 조각 작품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감상했다. '머리감는 여인'의 하얗고 부드러운 곡선, '공중을 나는 새'의 완벽할 정도의 예리한 선. 남자 두 명이 램부르크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방에 있었다. 메리온이 그곳으로 들어가자, 그 두 사람은 남녀 조각상이 있는 어둠침침한 공간에 그녀 혼자를 남겨둔 채 나가버렸다. 두 조각상은 방의 서로 맞은편 모퉁이에 있었는데 남자는 일어서 있고 여자는 무릎을 꿇고 있었으며, 그들의 몸은 가늘고 수척했지만 아름다웠다. 조각상의 가는 선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거의 종교적인 예술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에 메리온은 평소에 누드 조각상을 볼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 없이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젊은 남자의 조각상 주위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녀 뒤에서 명랑하고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세상 참 좁군요."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난 아래층에서부터 바로 당신 뒤를 따라왔는데, 당신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잘 지냈습니까?" "덕분에, 고마워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잘 지냈나요?" 그녀가 덧붙였다. "덕분에요." 그들은 조각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녀는 그렇게 얼굴이 달아오를까? 그가 잘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엘렌의 친구였기 때문일까? 함께 미식축구 응원도 가곤 했던 캠퍼스 커플...... "여기에 자주 옵니까?" 그가 물었다. "예." "나도 그렇습니다." 그 조각상이 지금은 그녀를 당황케 만들었다. 바로 옆에 버드 콜리스가 있으니까.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려서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상 쪽으로 갔다. 그가 그녀 옆으로 따라왔다. "그때 약속시간엔 늦지 않았습니까?" "예." 그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 그는 여기에 온 것일까? 그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엘렌을 팔에 끼고 센트럴 파크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들은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에 그가 말을 꺼냈다. "아래층에서 본 그 사람이 당신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요?" "글쎄, 엘렌은 미술관엔 다니지 않았거든요......" "형제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무릎꿇고 있는 조각상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컬드웰의 미술대학에는 작은 미술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대부분이 모조품과 복사품이긴 하지만. 한두 번 엘렌을 데리고 그곳에 갔었지요.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애는 예술엔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요." 그가 말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자기 취미를 밀어넣으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요." 메리온은 조각상의 맞은편에 서서 자기를 쳐다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번 엘렌과 도로시를 데리고 여기에 왔었어요 -- 도로시는 내 막내 동생이에요 -- " "압니다......" "그 애들이 10대가 되었을 때 이곳에 데리고 왔었지요. 그러나 지루해 하더군요. 나는 너무 어려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르겠는데 -- " 그는 그녀를 향해 반원을 그리며 따라가면서 말했다. "만일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우리 고향에 미술관이 있었다면......당신은 열두세 살 정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습니까?" "예." "그래요?" 그가 말했다. 그는 엘렌과 도로시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양 미소지었다. 어떤 남녀가 아이들 두 명을 데리고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나갑시다." 그가 그녀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나는......" "오늘은 일요일이에요." 그가 말했다. "일 문제로 약속이 있을 수도 없잖습니까." 그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 10· 아주 근사한 미소 --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 "난 혼자예요, 당신도 혼자고......" 그는 살며시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자, 갑시다." 그는 설득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3층을 지나 2층 층계참까지 내려와서는, 그들이 보았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건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번쩍거리는 자동차들을 지나서 유리문을 나와 미술관 뒤쪽의 정원으로 갔다. 그들은 조각상들 앞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그 사이를 산책했다. 두 사람은 눈에 거슬리는 전라(全裸)의 마이욜의 여신상 앞에 이르렀다. "붉게 타오르는 가슴의 최후라 -- " 버드가 말했다. 메리온이 미소를 지었다. "말할 게 있는데 -- "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런 조각상을 보면 항상 좀 당황하게 된답니다." "나도 조금 얼떨떨한데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누드가 아니라 발가벗은 거지요."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들은 조각상을 모두 보고 나서 정원 뒤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과 엘렌은 굉장히 사이가 깊었던 걸로 아는데요?" "정확하게 말해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내 생각엔......"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학교 안에서 만나는 것은 학교 밖에서 만나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메리온은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주로 표면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같은 수업을 듣고, 똑같은 사람들을 알고......컬드웰 대학과 관련된 일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대학을 떠나게 될 것이고, 모르겠습니다, 우리가......우리가 결혼하게 되었을는지는." 그는 자기 담배를 쳐다보았다. "난 엘렌을 좋아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알았던 어떤 여자보다도 그녀를 좋아했지요. 그녀가 죽었을 때 무척 괴로웠습니다. 하지만......그녀와는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내 말을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메리온은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이 저 미술관 일 같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호퍼나우드처럼 별로 난해하지 않은 미술가들에게 흥미를 갖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그녀는 그런 것엔 하나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 밖에 책이나 정치,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그녀는 항상 색다른 행동을 하기를 원했지요." "그 애는 집에서 억압된 생활을 해왔어요. 그래서 그것을 메꾸려고 그렇게 했을 거예요." "맞아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보다 네 살이나 어렸지요." 그는 담배를 껐다. "그러나 엘렌은 아주 달콤한 여자였습니다." 잠깐 말이 끊겼다. "경찰은 아직도 누가 그녀를 죽였는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것도, 끔찍한 일이에요......" 그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뒤 그들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둥, 미술관은 정말 쾌적한 장소라는 둥, 방금 지나온 마티스의 작품은 어떻다는 둥 --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압니까?" 그가 물었다. "글쎄, 누군데요?" "당신이 그 사람 작품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찰스 디머스라고 -- " 제 4 장 레오 킹쉽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앉아서, 우유가 담긴 부연 유리잔 주위를 손가락으로 꽉 쥔 채 그것이 마치 아름다운 빛깔의 포도주라도 되는 것처럼 자세히 바라보았다. "네가 그를 자주 만난다지?" 그는 애써 별일 아니라는 투로 물어보았다. 메리온은 조심스럽게 푸르고 금빛이 도는 에인슬린 접시에 커피잔을 놓고 나서 은과 크리스탈과 장미빛으로 장식된 테이블 너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불그스레한 그의 얼굴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빛에 반사되어 아버지의 안경 렌즈가 보이지 않았다. "버드 말씀이세요?" 그녀는 아버지가 버드를 말하는 건 줄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킹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 10· " 메리온은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를 자주 만나고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오늘밤에, 15분만 있으면 그가 올 거예요." 그녀는 대답을 바라는 눈초리로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다툼이 없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말이 그녀가 버드에게 느끼는 감정의 강도를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쯤은 말다툼이 있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그의 직업 말이다 -- " 킹쉽은 우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전망이 어떠냐?" 잠시 차가운 분위기가 돈 뒤에 메리온이 말했다. "그는 지금 지배인 교육을 받고 있어요. 몇 달 안에 지배인이 될 거예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그녀가 입술을 살짝 움직여서 웃어 보였다. 킹쉽은 안경을 벗었다. 그의 푸른 눈이 메리온의 차가운 시선과 어색하게 마주쳤다. "네가 저녁식사에 그를 부른 모양이구나, 메리온?" 그가 말했다. "전에는 저녁식사에 사람을 초대한 적이 없었잖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질문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니냐?" "그는 하숙하고 있어요." 메리온이 말했다. "저와 함께 먹지 않으면 그는 혼자 먹어야 해요. 그래서 오늘 저녁식사에 부른 거예요." "나와 함께 먹지 않는 날에는 그와 식사를 하니?" "예, 대부분은요. 우리 두 사람이 각각 혼자서 먹을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들 집은 겨우 다섯 블럭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녀는 자기가 왜 이렇게 둘러대고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잘못을 저지르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함께 있으면 즐겁기 때문에 같이 먹는 거예요." 그녀는 강조하듯이 말했다. "서로 아주 좋아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더욱 내게 몇 가지 물어봐야 할 권리가 있겠구나, 그렇지 않니?" 킹쉽이 은근히 말했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킹쉽 코퍼에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예요." "메리온......" 그녀는 은 컵에서 담배 하나를 뽑아 은으로 된 테이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아버지는 그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죠?"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가난해서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야, 메리온. 너도 그것을 잘 알잖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그래." 킹쉽이 말했다. "그가 가난하다는 것은 괜찮아. 그는 어느 날 밤에 그것을 분명하게 세 번씩이나 말하려고 애쓰더구나. 어머니가 삯바느질한다는 얘기까지 -- " "그의 어머니가 삯바느질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 "아니야, 메리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너무 생각 없이, 아주 생각 없이 그 이야기를 하더구나. 그를 보면 난 누가 생각나는지 아니? 내가 다니는 클럽에 약간 다리를 절름거리는 남자가 있단다. 그는 우리가 골프를 칠 때마다 이렇게 말하지. '자, 어서 계속하시오. 늙은 목발이 따라잡을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아주 천천히 걸어간단다. 만일 사람들이 그를 이긴다면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껴질 테니까." "그런 비유로 말씀하시면 전 도망가 버리겠어요." 메리온이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거실로 가버렸다. 킹쉽은 몇 가닥 안되는 노리끼한 머리카락을 절망스럽게 손으로 긁적이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이스터 강을 내다볼 수 있었다. 메리온은 그 앞에 서서 두꺼운 커튼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거실로 들어와서 그녀 뒤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메리온, 나를 믿어라. 나는 다만 네가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는 어색하게 말했다. "내가 항상 네게......신경쓰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도로시와 엘렌 사건이 있은 뒤에는 좀더 신경을 쓰고 있어......" "알아요."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대답했다. 그녀는 커튼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제 저는 스물다섯 살이에요...... 성숙한 여자라고요. 아버지는 저를 마치 어린애처럼 -- " "나는 다만 네가 너무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을 원치 않을 뿐이다, 메리온." "저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것 전부다." 메리온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아버지는 그를 싫어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난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글쎄, 모르겠다......" "제가 아버지를 떠날까 봐 걱정이 되세요?" 그녀는 그 생각에 자신도 깜짝 놀란 듯이 천천히 물어보았다. "너는 벌써 내게서 떠나 있지 않니? 아파트에서 -- " 그녀는 창문에서 몸을 돌려 방 옆에 서 있는 킹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버드에게 고맙게 생각하셔야 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는 그가 여기에 와서 저녁식사하는 것을 바라진 않았어요. 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금방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가 고집했지요. '그분은 당신 아버지예요.' 하고 그가 말하더군요. '그분의 기분도 생각해 줘야죠.'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버드는 가족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렇지 못하지만. 그런 점에서 아버지는 그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셔야 할 거예요. 만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버지와 저를 좀더 가까와지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고요." 그녀는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좋아 -- " 킹쉽이 말했다. "괜찮은 청년이겠지. 네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말씀이죠?" 그녀는 다시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아주 빳빳하게 굳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 "다만, 네가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이다." 킹쉽은 모호하게 말했다. "그에 대해서 또 물어보실 것이 있으세요?" 메리온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나요? 혹시 사람을 시켜서 그의 뒷조사를 하진 않았나요?" "그렇지 않아!" "엘렌에겐 그렇게 하셨잖아요?" "엘렌은 그때 열일곱 살이었어. 그리고 내가 옳았다. 그렇지 않니? 그 녀석이 어디 괜찮은 녀석이었니?" "저는 스물다섯 살이고,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어요! 만일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서 버드에 대해 뒷조사를 하신다면......"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메리온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 버드를 좋아해요." 그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전 그를 정말 좋아해요. 아버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메리온, 나는 -- " "만일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신다면 -- 그가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어떤 일을 하신다면...... 절대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에게 맹세코, 제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아버지와 말도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다시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메리온, 맹세하지만......" 그는 씁쓸히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나서 지친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몇 분 뒤에 문에서 벨이 울렸다. 메리온은 창문에서 떨어져 방을 가로질러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이중 문으로 갔다. "메리온." 킹쉽이 일어섰다. 그녀가 멈춰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중얼거리듯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있으라고 해라...... 한 잔만 마시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킹쉽은 그녀가 나가는 것을 지켜본 뒤에 돌아서서 벽난로 쪽으로 갔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는 340달러짜리 양복에 한 달에 700달러짜리 거실에서 사는 뚱뚱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바로 서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는 돌아서서 현관쪽으로 걸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게, 버드." 그가 말했다. 제 5 장 메리온의 생일은 11월 초의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그녀는 서둘러서 아파트를 청소했다. 1시에 그녀는 파크 가의 조용한 골목에 있는 조그만 건물로 갔다. 하얀 문 옆에 달린 은빛 장식판으로 보아, 그 건물에 정신과 의사나 실내장식가가 아니라 레스토랑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오 킹쉽은 하얀문 안에 있는 루이스 퀸스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곳에 있는 '미식가'라는 책을훑어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잡지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메리온의 뺨에 키스를 하고,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지배인이 손가락을 흔들고 이를 드러내며 다가와서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하고, 예약 카드를 치우면서 프랑스식 말투로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 중앙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메리온의 자리에는 하얀 종이에 금빛 리본으로 묶은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킹쉽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체했다. 그가 와인 카드를 보고, "제가 권해 드리고 싶은 것은, 선생님......" 하고 지배인이 말하는 동안, 메리온은 흥분해서 뺨을 붉히고 눈을 반짝거리며 금빛 리본 상자를 풀었다. 상자 밑에 깔린 솝 사이에는 가장자리가 진주로 장식된 금빛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메리온은 탄성을 질렀다 지배인이 가고 나자 그녀는 자기 손 가까이에 놓여 있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면서 행복하게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브로치는 그녀가 고를 만한 그런 모양이 아니었다. 그 디자인은 그녀의 다른 장신구에 비해서 너무 정교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선물 때문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과거에 레오 킹쉽이 딸들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란 5번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100달러짜리 선물 교환권이었다. 그것도 비서가 기계적으로 전달해 주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뒤, 메리온은 잠시 미장원에 들렀다가 아파트로 돌아왔다. 오후 늦게 벨이 울렸다. 그녀는 아래층 문을 여는 단추를 눌렀다. 몇 분 뒤에 심부름꾼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굉장히 무거운 것을 운반하기라도 한 듯이 지나치게 숨을 헐떡거리며 꽃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25센트를 주자 그의 숨결이 가라앉았다. 초록색 파라핀 종이 밑에 코사지 (여자의 가슴이나 어깨에 다는 작은 꽃다발)로 장식된 하얀 난초 한 송이가 있었다. 함께 들어 있는 카드에는 '버드'라고만 쓰여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메리온은 그 꽃을 머리, 손목, 어깨에 꽂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부엌으로 들어가 꽃을 그 상자 안에 넣어서 허리 높이 만한 냉장고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굵은 결이 있는 열대 꽃잎에 물을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는 정확하게 6시에 도착했다. 그는 메리온 문패 옆에 있는 단추를 세게 두 번 누르고 나서, 회색 수에드 가죽 장갑을 벗어 푸른색 코트 깃에 묻은 실오라기 하나를 떼어내며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 곧 현관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거무죽죽한 커튼이 쳐 있는 문이 열리고 메리온이 나타났다. 검은 코트 위에서 난초가 하얗게 반짝였다. 그들은 서로 굳게 손을 잡았다. 가장 행복한 생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인사하고, 그는 그녀의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도록 뺨에 키스를 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립스틱이 훨씬 짙어졌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52번가에 있는 스테이크 집으로 갔다. 그곳의 음식값은 그녀가 점심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값이 쌌지만, 메리온은 버드의 눈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엄청나게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두 사람 음식을 주문하라고 했다. 그들은 검은 양파 수프와 서로인 (소의 허리 윗부분의 살) 스테이크를 먹었고, 샴페인 칵테일을 들어올리며, "메리온을 위해서." 하고 건배했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웨이터의 쟁반에 18달러를 놓은 버드는 메리온이 얼굴을 약간 찡그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당신 생일이잖아."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식당에서 택시를 타고 '성 조안'이 상영되고 있는 극장으로 갔다. 그들은 아래층 무대 앞쪽에서 여섯 번째 줄의 중간에 앉았다. 그녀는 쉬는 시간에 평소와 다르게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녀는 토끼 같은 눈을 반짝이면서 버나드 쇼와 그의 연출, 그리고 그들의 앞줄에 앉은 유명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에 -- 그날 저녁에 버드가 돈을 너무 많이 썼다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 자기 아파트에 가자고 했다. "성당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은 순례자 같은데." 그는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넣으면서 말했다. 그는 열쇠를 돌리고 손잡이를 돌렸다. "환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메리온이 얼른 말했다. "모두 현실이에요. 방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그저 그렇고 부엌은 아주 작아요." 그는 메리온에게 열쇠를 주며 문을 열었다. 그녀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 문 옆에 있는 벽 스위치를 찾았다. 전등에서 나오는 빛들로 방안이 가득찼다. 그는 들어와서 손을 뒤쪽으로 돌려 문을 닫았다. 메리온은 그의 얼굴을 보려고 뒤로 돌았다. 그의 눈은 짙은 회색 벽과 파란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커튼, 참나무로 된 가구 위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작지요?" 메리온이 말했다. "하지만 훌륭한데." 그가 말했다. "정말 멋있어." "고마워요." 그녀는 코트에서 난초를 떼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갑자기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녀는 코사지를 옆 테이블에 놓고 나서 코트를 벗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거들어주었다. "가구가 아름답군." 그는 그녀의 어깨 위에서 말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코트를 옷장에 걸고 나서 장식장에 붙은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적갈색 옷의 어깨에 난초를 꽂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뒤쪽에 있는 버드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가 방 가운데로 걸어왔다. 그는 커피 테이블 앞에 서서 네모난 청동 접시를 들어올렸다. 옆으로 돌린 그의 얼굴에는 그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암시를 주는 표정이 없었다. 메리온은 문득 자신이 꼼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흠 -- "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침내 말을 꺼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인 것 같은데?" "아니에요." 메리온은 거울 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엘렌이 준 거예요." "오 -- " 그는 잠시 그것을 보고 나서 내려놓았다. 메리온은 옷의 칼라를 만지작거리면서 거울에서 몸을 돌려 천천히 세 발자국 정도 방을 가로질러 오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낮은 책꽂이 앞에 서서 그 위의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메리온은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의 옛친구 디머스 -- "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웃으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도 따라서 미소지었다. 그는 다시 그림을 쳐다보았다. 잠시 뒤 메리온은 앞으로 나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난 왜 디머스가 양곡기 그림을 '나의 이집트'라고 이름붙였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버드가 말했다. "그게 그런 그림이었나요? 나는 몰랐는데." "아무튼 아름다운 그림이야." 그는 메리온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 내 코에 뭐라도 묻었나?" "왜요?" "당신이 바라보는 게 좀 --" "아, 아니에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으 -- 흠." "포도주 밖에 없는데." "좋아." 메리온은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기 전에......" 그는 주머니에서 화장지로 싸인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생일을 축하해." "오, 버드, 이럴 필요는 없어요." "이럴 필요는 없어요!" 그는 메리온의 말을 흉내냈다. "하지만 그래도 기쁘잖아." 상자 안에는 단순한 모양의 삼각형 은제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오, 고마워요! 정말 귀여운데!" 메리온은 탄성을 지르며 그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귀걸이를 달아보려고 서둘러서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 뒤로 다가와서 거울 속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양쪽 귀걸이를 모두 달고 나자, 그는 그녀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정말 예쁜데." 그가 말했다. 또다시 키스를 하고 나서 그가 말했다. "아까 말하던 그 포도주가 어디에 있지?" 메리온은 쟁반에 라피아 뚜껑으로 막힌 바돌리노 병과 컵 두개를 얹은 채 부엌에서 나왔다. 재킷을 벗은 버드는 책꽂이 앞의 마루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당신이 프루스트를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그가 말했다. "오, 무척 좋아해요!" 그녀는 커피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이쪽으로 -- " 그가 책꽂이를 가리켰다. 메리온은 책꽂이로 쟁반을 옮기고, 잔 두 개에 포도주를 따른 다음 하나를 버드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다른 잔을 들고 신발을 벗은 뒤,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는 책장을 죽 넘겼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을 보여줄께." 그가 말했다. 그는 스위치를 눌렀다. 암이 뱀 머리 모양으로 천천히 흔들리면서 돌고 있는 레코드 판 위에 닿았다. 그는 전축 뚜껑을 닫고서 방을 가로질러 와 파란 덮개가 씌워진 긴 소파의 메리온 옆에 앉았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제2번의 첫부분인 심오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아주 잘 어울리는 음악이에요." 메리온이 말했다. 버드는 벽을 따라 놓여 있는 두꺼운 베개에 기대면서 램프 하나만이 켜져 있는 방을 훑어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아주 완벽한데." 하고 그가 말했다. "왜 전에는 나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안했지?" 그녀는 자기 옷의 단추 하나에 걸려 있는 라피아 실오라기를 집어올렸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당신이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내가 들어오고 싶지 않다니, 그럴 리가 있겠어?" 그가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단추 줄을 어루만지면서 내려갔다. 따뜻한 그녀의 손이 가슴 사이에서 그의 손을 덮으면서 막았다. "버드, 나는 한 번도......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알고 있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 "나는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없어요." "나도 그래. 나도 어느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메리온을 만나기 전에는." "정말이에요, 응?" "오직 당신뿐이야." "엘렌도 사랑하지 않았나요?" "오직 당신뿐이야. 맹세할 수 있어." 그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그의 뺨으로 올라갔다. 제 6 장 [뉴욕 타임스 지, 1951년 12월 25일 월요일] 메리온 J 킹쉽 토요일에 결혼할 예정 킹쉽 양은 뉴욕의 스펜스 고등학교와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했다. 지난주까지 그녀는 캠든 앤드 갤브레이스 광고대행사에 근무했다. 한편, 2차 대전 동안 군대에 복무했고, 윈스콘신 주의 컬드웰에 있는 컬드웰 대학을 다녔던 장래가 유망한 신랑은 최근에 킹쉽 코퍼 주식회사의 국내 판매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 7 장 책상에 앉은 리처드슨 양은 오른손을 죽 뻗고서 포동포동한 자기의 손목에 죄어 있는 금팔찌를 쳐다보며 참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 어머니에게는 너무 젊어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다른 것을 주고 그 팔찌는 자기가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의 손 뒤쪽이 갑자기 푸른색으로 변했다. 하얀 세로 줄무늬로 --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치 독충이라도 본 것처럼 미소를 그쳤다. "안녕하세요." 어떤 남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리처드슨 양도 서랍을 열고는 바쁘게 하얀 타이프 종이 가장 자리를 구겼다. "회장님은 아직 점심식사 중이세요." 그녀는 쌀쌀맞게 말했다. "아가씨, 그분은 아까 12시에 점심식사를 했어요. 지금은 3시이고. 그분이 코뿔소입니까?" "만일 주말쯤에 약속을 원하신다면......" "난 오늘 오후에 그분을 만나고 싶은데." 리처드슨 양은 거칠게 서랍을 닫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예요." 그녀가 말했다. "회장님은 오늘까지 주말 나흘간은 아무도 안 만나십니다. 무척 바쁘시다고요. 어떤 이유이든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셨어요. 어떤 이유이든 -- " "그렇다면 그분은 점심식사 중이 아니군요." "회장님이 지시를......" 그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한쪽 어깨 위로 코트를 걸치고 있는 그는 리처드슨 양의 전화기 옆에 있는 선반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써도 되겠소?" 그는 종이를 들고 나서 물어보았다. 그는 구부린 채로 들고 있던 커다란 푸른색 책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리처드슨 양의 마노 펜대에서 펜을 꺼내어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갖다드리진 않을 거예요!" 하고 리처드슨 양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서요!" 그 남자는 다 쓰고 나서 펜을 제자리에 놓고는 종이 위로 입김을 불었다. 그는 종이를 4등분으로 조심스럽게 접어서는 리처드슨 양에게 주었다. "그분에게 이것을 전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문 아래로 밀어넣어도 괜찮습니다." 리처드슨 양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종이를 펼쳐서 읽어보았다. 기분이 언짢은 얼굴로 그녀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로시와 엘렌--?"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회장님은 어떤 이유에서든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마치 주문에서 방법을 찾아내듯이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냥 그것만 갖다주시오, 천사처럼." "이것 보세요......" 그는 밝은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표정으로 아주 심각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리처드슨 양도 얼굴을 찡그리며 한 번 더 종이를 쳐다보고는 다시 접었다. 그녀는 육중하게 보이는 나무문 쪽으로 움직였다. "좋아요." 그녀가 희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회장님이 지시를 내려놓았다고요." 그녀는 가볍게 노크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변명하듯이 종이를 앞에 들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1분 뒤에 그녀는 배신당한 듯한 표정으로 나왔다. "들어가 보세요." 그녀는 문을 열고 서서 앙칼지게 말했다. 남자는 어깨에 코트를 걸치고, 책을 겨드랑이에 낀 채 그녀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처럼 계속 웃으시지 않고?" 그가 속삭였다. 살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레오 킹쉽은 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서 눈을 떼어 올려다보았다. 그는 윗도리를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채 와이셔츠 차림으로 책상 뒤에 서 있었다. 안경도 붉은 이마 위로 치켜올려져 있었다. 베니스풍의 블라인드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땅딸막한 몸집에 줄무늬를 그렸다. 그는 카펫이 깔린 방을 가로질러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 -- " 남자가 햇빛이 가려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킹쉽이 그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말을 꺼냈다. "자네." 그는 종이쪽지를 내려다보고는 그것을 구겼다. 걱정스러웠던 표정의 얼굴이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안녕하십니까, 킹쉽 씨?" 남자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킹쉽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리처드슨 양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지."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손님용 의자에 앉아서 무릎에 코트와 책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네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군." 킹쉽이 말했다. "그랜트이었던가?" 그가 말했다. "갠트입니다." 그는 긴 다리를 편안한 자세로 꼬았다. "고든 갠트." 킹쉽은 계속 서 있었다. "난 매우 바쁘네, 갠트 군." 그는 서류결재 책상을 가리키며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니 도로시와 엘렌에 관한 정보가 -- " 그는 구겨진 종이쪽지를 들어올렸다 -- "블루 리버에서 자네가 설명하던 것과 똑같은 '이론'이라면......"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하네. 난 듣고 싶지가 않아." "제가 선생님의 인기 순위에서 1등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자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건 그렇지 않네.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난 자네의 동기가 아주 훌륭한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엘렌을 좋아했어. 그리고 젊은이다운 열정도 보여줬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정말 고통스럽게 만드는 잘못된, 정말 잘못된 길로 들어섰어. 엘렌이 죽고 난 뒤에 금방 내 호텔 방에 뛰어들어서...... 그런 때에 과거를 들춰내고......" 그는 호소하듯이 갠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도로시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는 걸 내가 믿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나?"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유서." 그가 지친 듯이 말했다. "유서가 있네." "그 유서는 자살을 제외하고도 열두 가지로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모호한 문장이었습니다. 아니면 그녀가 그것을 쓰도록 유도될 수도 있지요." 갠트는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도로시는 결혼하기 위해서 시청 건물에 간 겁니다. 엘렌의 생각이 옳았던 거죠. 그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가 않네." 킹쉽이 잘라 말했다. "그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자네도 경찰 이야기를 들었잖나--?" "가정집 강도 말입니까!" "그렇다네. 어째서 강도가 아니라는 건가?" "왜냐하면, 저는 우연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그건 자네가 아직 어리다는 증거야, 갠트 군." 잠시 뒤 갠트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것은 두 번 다 같은 사람의 짓입니다." 킹쉽은 지친 듯이 책상을 꽉 잡으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왜 새삼스럽게 그 일을 다시 들먹이는 겐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어서 -- 자네는 내가 어떻게 느낄 거라고 생각해 보았나?" 그는 안경을 다시 내려쓰고 장부를 넘겼다. "자, 그만 나가주겠나?" 갠트는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전 방학이라 집에 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제 집은 화이트 플레인스입니다. 저는 작년 3월에 이미 말씀드렸던 것을 단지 고쳐 말하기 위해서 뉴욕 중심가에서 한 시간이나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뭔가?" 킹쉽은 턱이 긴 그의 얼굴을 지친 듯이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타임스에 기사가 실렸더군요......사회면에." "내 딸에 대해서 말인가?" 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앞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버드 콜리스에 대해서 무엇을 아시죠?" 그가 물었다. 킹쉽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대해 무엇을아느냐고?"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는 내 사위가 될 사람이네.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알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와 엘렌이 사귀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네." 킹쉽은 벌떡 일어섰다. "자넨 뭘 끌어내려는 건가?" "좀 이야기가 깁니다." 갠트가 말했다. 짙은 눈썹 아래에 있는 파란 눈이 예리하고 확고했다. 그는 킹쉽의 의자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렇게 계속 서 계시면 제 이야기가 더 고통스러우실 텐데요." 킹쉽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다시 일어날 것처럼 앞쪽 책상 가장자리를 꽉 잡고 있었다. 갠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잠시 조용히 앉아서, 마치 신호를 기다리는 듯이 심각하게 담배를 지켜보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뒤에 그는 편안하고도 부드러운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엘렌은 컬드웰을 떠나면서 -- " 그가 말했다. "버드 콜리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엘렌이 블루 리버에 도착한 직후에 저는 우연히 그 편지를 읽게 되었죠. 그것은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저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살인 혐의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으니까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두 번이나 아주 신중하게 그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엘렌이 죽던 그날 밤, 한번 본 증거면 죄다 믿어버리는 엘든 체서 경찰서장은 제게 엘렌이 제 여자친구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의 직업적인 경험에 의한 추정적인 질문이었겠죠. 그것으로 저는 콜리스라는 친구에 대해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만이 아는 곳에서 무기를 든 살인자와 함께 있을 엘렌에게서 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고, 한편으로는 그녀를 좋아했기에 그녀가 어떤 종류의 남자를 좋아했을까 궁금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경쟁자 버드 콜리스에 대한 유일한 정보인 그 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갠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계속해 나갔다. "처음에는 아무 내용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름 -- 버드에게, 그리고 편지 봉투에 있는 주소 -- 윈스콘신 주 컬드웰 루즈벨트 가 몇 번지 버튼 콜리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좀더 생각을 해보고 나서, 저는 엘렌의 편지에서 몇 가지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들을 이어맞춰서 버드 콜리스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격에 대한 암시보다는 주로 그의 외형적인 사실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제가 찾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 계속 제게 머물러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중요하게 보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계속하게." 갠트가 담배를 집어들자 킹쉽이 말했다. 갠트는 편안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무엇보다도 먼저, 엘렌은 자기가 컬드웰을 떠나 있다고 해도 학업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에게서 노트들을 빌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당시 엘렌은 4학년이었으니까, 주로 전공과정을 밟고 있었을 겁니다. 각 대학에서 4학년 과정은 1학년에게는 제한되어 있지요. 2학년들에게 제한되는 경우도 있고요. 만일 버드가 수업을 모두 엘렌과 함께 들었다면 -- 두 사람은 아마 함께 시간표를 짰겠지만 -- 그가 2학년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에서 보면 그는 3학년이나 4학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두 번째로, 엘렌은 편지에서 컬드웰에서의 처음 3년 동안의 그녀의 생활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것은 도로시가 죽고 난 뒤의 그녀 생활과는 달랐다고 했죠. 그녀는 자기가 아주 '극성스러운 여자'였다고 썼으며, 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는 '당신은 나를 잘 모를 거예요......' 하고 써놓았습니다. 그것은 버드가 처음 3년 동안은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런 일은 스토다드 대학처럼 커다란 학교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죠. 그러나 문제는 세 번째에서 걸립니다. 세 번째로, 컬드웰 대학은 아주 작은 학교죠. 엘렌은 스토다드 대학의 10분의 1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잘 모르고 대충 이야기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연감을 찾아보았습니다. 스토다드 대학은 1만 2천 명이 넘는데 비하여 컬드웰 대학은 겨우 8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더군요. 엘렌은 편지에서, 도로시가 컬드웰 대학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알고 지내고, 그들이 무엇을 한다는 것까지도 아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죠. 첫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의 사실을 합쳐서 생각해 볼 때 버드 콜리스는 적어도 3학년은 되었을 텐데, 엘렌은 4학년이 시작될 때까지도 그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아주 작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가 알기론 그곳은 학구파 학생들에게는 귀찮은 곳이지요. 이런 것들로써 저는 단 한 가지 방법을 설명할 수 있고, 간단한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 작년 3월에는 중요해 보이지 않다가 오늘 갑자기 엘렌의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버드 콜리스는 '전학온 학생이고', 더군다나 그 시기는 도로시가 죽고 난 뒤 엘렌이 4학년이 시작되는 1950년 가을에 그곳으로 전학갔다는 뜻입니다." 킹쉽은 얼굴을 찌푸렸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네 -- " "오늘은 1951년 12월 24일입니다." 갠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면서 말했다. "어머니께서 이 방탕한 아들의 침실로 아침 식사와 함께 가져온 뉴욕 타임스의 사회면에는 킹쉽이란 이름이 있었습니다 -- 메리온 킹쉽 양, 버튼 콜리스와 결혼하다. 제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정말로 분석적인 제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것은 국내판매부의 한 신입사원이 킹쉽 코퍼 주식회사와의 도박에서 승리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더군요." "이것 보게, 갠트 군 -- " "그래서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 " 갠트는 계속했다. "어떻게 동생이 살해되고 나서 곧장 그 언니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킹쉽 집안의 두 딸들의 애인. 세 딸 중의 두 명. 나쁜 점수는 아니지요. 그리고 나자, 제 머릿속에서 분석적인 면과 더러운 면이 섞여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950년 9월에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간 버튼 콜리스에게는, 세 딸 중에서 세 번째 딸에게 도전한 것이 승리였구나 하고요." 킹쉽은 갠트를 쳐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요." 갠트가 말했다.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의심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침식사 쟁반 아래에서 빠져나와 책꽂이로 가서 1950년도 연감인 '스토다드 플레임'을 꺼냈습니다." 그는 겉장에 하얀 글씨가 쓰인 커다란 푸른 가죽책을 내보였다. "2학년 칸에 -- " 그가 말했다. "재미있는 사진들이 몇 개 있더군요. 도로시 킹쉽과 드와이트 파웰이었지요. 지금은 두 사람 다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고든 갠트의 것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엔 제 얼굴을 영원히 남길 수 있는 5달러가 없었으니까요. 그 밖에 2학년 학생들 중에는 사진이 없는 애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 중에 -- " 그는 신문지 조각을 끼워둔 면을 펼쳐서 책을 한 바퀴 돌려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손가락으로 장기판만한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그는 그 옆에 쓰여 있는 말을 외고 있는지 줄줄 읊어댔다. "콜리스 버튼, 가로 열고 버드 가로 닫고, 매사추세츠 주 메나세트, 교양학부." 킹쉽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거의 우표 크기만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갠트를 쳐다보았다. 갠트는 앞으로 나와서 몇 장을 넘기고 또 다른 사진을 가리켰다. 그것은 도로시였다. 킹쉽도 역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갠트가 말했다. "갑자기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선생님이 꼭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킹쉽은 딱딱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가?" "그것에 대답하기 전에 제가 질문 하나 할까요, 킹쉽 씨?" "어서 해보게." "그는 선생님에게 스토다드에 다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래. 하지만 우린 그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네." 그는 재빨리 설명했다. "하지만 메리온에게는 말했을 거네. 메리온은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저는 그녀가 알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 모른다는 건가?" 킹쉽이 물었다. "타임스 말입니다. 메리온이 그 기사에 대한 정보를 주었겠지요, 그렇죠? 대개 그런 것을 신부될 사람이 말하니까요." "글쎄." "그런데 거기엔 스토다드 대학에 대한 말이 없었습니다. 다른 결혼이나 약혼기사를 보면, 어떤 사람이 한 학교 이상을 다녔다면 그 학교 이름을 모두 말하는 게 상례입니다." "아마 그 애가 모두 말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을 걸세." "글쎄요. 아니면 그녀가 몰랐겠죠. 어쩌면 엘렌도 몰랐을 겁니다." "좋아, 도대체 자네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제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킹쉽 씨. 사실들은 그것들 스스로가 말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갠트는 연감을 덮고 무릎에 내려놓았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그가 말했다. "콜리스가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고 말했다면, 그 경우 우연의 일치라고 추측했겠지요. 그가 스토다드에 다녔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는 제가 아는 것 이상으로 도로시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또 한 가지는, 그가 그곳에 다녔다는 것을 메리온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지?" 킹쉽이 물었다. "그것은 그가 어떤 면에선 도로시와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그것을 숨겼겠습니까?" 갠트는 무릎에놓여 있는 연감을 내려다보았다. "도로시에게 임신을 하게 만든 남자는 그녀를 없애버리고 싶었을 겁니다......" 킹쉽이 그를 노려보았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군! 누가 도로시를 죽였고, 그리고 나서 엘렌을 죽였다...... 자네는 받아들여야 하네 -- 그것이 터무니없는 영화 같은 이론이라는 것을 말이야. 물론 인정하고 싶지야 않겠지만......" 갠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드?" 킹쉽이 말했다. 그는 뒤로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동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 보게 -- " 그가 말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야. 미친 소리라고!" 그는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 "자네는 그 녀석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미친 녀석?" -- 그는 미소를 지었다 -- "자네는 지금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좋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것이 미친 생각이라고 해두죠. 당분간은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도로시와 관련이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도로시와 관련이 있다면, 그리고 엘렌과 관련되었고, 지금은 메리온과 관계를 갖고 있다면 -- 그 빌어먹을 선량한 사람은 선생님 딸들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겁니다! 누구든 상관없이!" 킹쉽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지더니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의 손은 책상 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킹쉽은 안경을 벗었다. 그는 두어 번 눈을 껌벅거리고 나서 벌떡 일어났다. "메리온에게 물어봐야겠네." 그가 말했다. 갠트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 " 킹쉽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는 전화기를 떼냈어. 결혼식 날까지 나와 함께 있으려고 아파트를 처분했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신혼여행 뒤에 그 애들은 내가 마련해 준 아파트로 들어가서 살게 될 거야......서튼 테라스......메리온이 처음엔 받지 않겠다고 하는 걸, 그가 그 애를 설득했지. 그는 그 애에게 아주 잘해 주고 있어......덕분에 우리 두 사람 사이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그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갠트의 시선은 확고하고도 도전적이었으며, 킹쉽의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킹쉽이 일어섰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갠트가 물었다. "그 애는 집에서......짐을 싸고 있을 거야." 그는 윗도리를 입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 애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서 말했을 걸세......" 그들이 사무실을 나오자 리처드슨 양이 잡지책에서 눈을 들었다. "오늘은 들어가겠어, 리처드슨 양. 내 책상을 치워도 좋아." 그녀는 호기심이 좌절되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예, 킹쉽 씨.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리처드슨 양." 그들은 긴 복도를 걸어나갔다. 복도의 벽에는 위아래에 청동 받침대가 받쳐 있고 두꺼운 판유리에 끼워진 흑백 사진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지하탄광과 노천탄광, 제련소, 용광로, 화덕, 압연공장, 구리 철사와 튜브의 모습이 정교하게 확대된 사진들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킹쉽이 말했다. "나는 그가 그 애에게 말했을 거라고 확신하네." 제 8 장 "고든 갠트?" 메리온은 그와 악수를 하면서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제가 알지 않느냐고요?" 그녀는 웃으면서 한 손으로 킹쉽의 팔을 잡아끌며, 다른 손으로는 윗도리 칼라에 달려 있는 진주가 박힌 금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블루 리버 -- " 킹쉽 씨는 딱딱하게 긴장된 목소리로 소개했으나, 메리온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에 대해서 네게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예. 엘렌을 안다던 바로 그 사람인가요?" "맞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의 등에서 손을 떼어 축축하지 않은 곳으로 팔을 좀더 내렸다. 그는 킹쉽이 자기를 소개할 때 너무 흥분하지 않기를 바랐다. 타임스에 실렸던 메리온의 사진에는 빛나는 눈동자와 윤기나는 뺨, 그리고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나는 토요일에 결혼할 거예요'라는 말 이상의 것은 나타나 있지 않았었다.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방으로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다. "앉을 데가 없어서 어떡하죠." 그녀는 신발 상자가 쌓여 있는 의자 쪽으로 갔다. "신경쓰지 말거라." 킹쉽이 말했다. "우리는 곧 일어날 거다. 1분이면 된다. 사무실에 일도 많이 쌓여 있고 해서." "아버지, 오늘밤 잊지 않으셨겠죠?" 메리온이 물었다. "7시쯤이 좋겠어요. 그분은 5시에 도착할 거예요. 아마 먼저 호텔에 들르고 싶어하실 거예요." 그녀는 갠트를 돌아보았다. "시어머니 되실 분이 오시기로 하셨어요."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오, 하나님!' 갠트는 생각했다. '결혼하신다고요?'--'예, 토요일에요.' -- '축하합니다. 행운이 따르고, 원하는 일들이 모두 잘되길 바랍니다!' 그는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영광스럽게 찾아와 주셨는데 어떻게 대접해야 하죠?" 메리온은 말로 인사치레를 했다. 갠트는 킹쉽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메리온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특별한 용건이 있으신 건가요?" 잠시 뒤 갠트가 말을 꺼냈다. "나는 도로시도 알고 있죠, 아주 조금." "오!" 메리온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나와 한 과목 수업을 함께 들었지요. 나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하지만 버드와는 수업을 함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버드?" "버튼 콜리스. 당신의......"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버드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니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의 말을 고쳐주었다.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습니다, 킹쉽 양." "아니에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컬드웰 대학에 다녔어요." "아뇨, 스토다드 대학에도 다녔고, 컬드웰 대학에도 다녔습니다, 킹쉽 양." 메리온은 묘한 표정으로 킹쉽을 바라보며 웃었다 · 10· 마치 아버지가 데려온 손님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아버지가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었다, 메리온." 킹쉽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책을 보여주게." 갠트는 연감을 열어, 사진을 가리키면서 메리온에게 건네주었다. "오, 이런 일이 -- " 그녀가 말했다. "내가 사과를 해야겠군요. 난 전혀 몰랐어요......" 그녀는 그 책의 표지를 흘끗 보았다. "1950년." "그는 1949년도 연감에도 나와 있습니다." 갠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2년 동안 다니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간 겁니다." "그렇다면 -- " 그녀가 말했다. "우습게 됐네요? 그는 도로시를 알았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마치 이것이 그녀와 약혼자 사이에 또 다른 공통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쾌하게 말했다. "그가 그런 것에 대해 당신에게 말하지 않던가요?" 갠트는 킹쉽이 그만두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어보았다. "아뇨. 말한 적이 없는데......" 그녀는 그제서야 두 남자 사이에 흐르고 있는 긴장과 어색함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녀는 호기심에서 물어보았다. "아무 일도 아니다." 킹쉽이 말했다. 그는 확실한 대답을 바라듯이 갠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두 분이 왜 이렇게 서 계신 거죠? 마치......" 그녀는 다시 책을 보았다가 아버지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목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오신 건가요? 이 이야기를 하려고요?" "우리는......다만 네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것뿐이야." "왜요?" 그녀가 물었다. "우린 다만 궁금했어. 그게 전부야." 그녀의 시선이 갠트에게로 움직였다. "왜요?" "왜 버드가 그것을 숨겼을까요?" 갠트가 진지하게 물었다. "만일-- " 킹쉽이 말렸다. "갠트!" "그것을 숨겼다고요?" 메리온이 말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는 숨긴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엘렌 때문에 학교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와 결혼하려고 하는 여자가 그가 스토다드 대학에 2년 동안 다녔었다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요?" 갠트는 매정한 투로 다시 말했다. "만일 그가 도로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 " "관련되었다고? 도로시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진 그녀의 눈이 갠트에게로 향해지더니 점점 작아지면서 마침내 킹쉽에게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일이죠?" 킹쉽은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것처럼 약간 불편하게 껌벅거렸다. "아버지가 이 사람에게 돈을 얼마나 주었나요?" 메리온이 차갑게 말했다. "돈을 주다니?" "그런 걸 캐내기 위해서요!" 그녀가 발끈 화를 냈다. "더러운 일을 캐내기 위해서 말이에요! 더러운 일을!" "이 사람은 자기 발로 나를 찾아온 거다, 메리온!" "오, 예, 아주 때맞추어서 갑자기 나타난 거군요!" 갠트가 말했다. "나는 타임스에 난 당신의 기사를 봤어요." 메리온은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겠다고 저하고 맹세하셨어요." 그녀가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분명히 맹세하셨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거나, 뒷조사를 하고 그를 죄인처럼 다룬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으셨다고 했잖아요? 오, 아니에요. 그런 건 대단찮은 일이에요!" "난 사람을 시킨 적 없다." 킹쉽이 날카롭게 말했다. 메리온은 등을 돌렸다. "아버지 마음이 변하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정말 아버지가 버드를 좋아한 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도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세요." "메리온......" "아니에요. 아버지가 우리 두 사람을 좋아한다면 이런 일을 하실 리가 없어요. 아파트며, 일자리......그리고 이런 것에 따라서 모든 것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메리온. 내가 맹세하마......" "아무것도 없다고요? 제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나 정확하게 말씀드리죠." 그녀는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제가 아버지를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버드가 도로시와 관계를 맺었으며, 도로시를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엘렌과 사귀었다. 그리고 지금은 너와 결혼하려 하고 있고 -- 모두 돈을 위해서, 오로지 아버지의 귀중한 돈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꾸미고 있는 일이라고요 --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고요." 그녀는 연감을 그의 손으로 쑤셔넣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군요, 킹쉽 양." 갠트가 말했다. "그건 모두 내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지, 당신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게 아닙니다." "알겠니?" 킹쉽이 말했다. "이 청년은 자기 발로 나를 찾아왔다." 메리온은 갠트를 노려보았다. "당신 누구예요? 뭣 때문에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죠?" "난 엘렌을 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당신, 버드를 알아요?" "불행하게도 그런 영광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의 뒤에 숨어서 그를 고발하려는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그건 긴 이야기입니다." "그만두게, 갠트." 킹쉽이 끼어들었다. 메리온이 말했다. "버드를 시기하나요? 그런 거예요? 엘렌이 당신보다 그를 더 좋아했었다고 해서요?" "그렇습니다." 갠트가 냉담하게 말했다. "나는 온통 질투심에 불타고 있습니다." "명예훼손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킹쉽은 비스듬히 문 쪽으로 가서 갠트에게 눈짓을 했다. "좋아요." 메리온이 말했다. "두 분 모두 나가시는 게 좋겠어요." "잠깐만요." 갠트가 문을 열 때 그녀가 말했다. "당신, 이젠 이 일에서 손을 뗄 건가요?" 킹쉽이 말했다. "손을 떼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메리온."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누구든간에." -- 그녀는 갠트를 바라보았다 -- "그것에서 손을 떼세요. 우린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굳이 엘렌이 끼어 있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잖겠어요? 우리는 단순히 이야기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네 말이 맞다, 메리온." 킹쉽이 말했다. "맞아." 그는 갠트를 따라 홀에 나가서 문을 잡아당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 일은 제발 그만두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는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밤에 집에 오겠지, 응, 메리온?"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했다. "저는 버드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킹쉽은 문을 닫았다. 그들은 렉싱턴 가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서 갠트는 커피와 체리 파이를, 킹쉽은 우유를 시켰다. "지금까지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킹쉽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종이 내프킨을 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적어도 우리는 현재 우리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그는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그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겁니다 -- " "자네도 메리온 말을 들었지?" 킹쉽이 말했다. "그들은 엘렌 때문에 학교 이야기를 안했다고 했네." 갠트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 "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만족해 할 겁니다. 그녀는 그에게 빠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약혼녀에게 자기가 다녔던 대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건 그가 메리온에게 거짓말한 것과는 달라." 킹쉽이 날카롭게 말했다. 갠트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들은 다만 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죠." "상황을 고려해 보면 난 그걸 이해할 수 있네." "물론이죠. 그가 도로시와 관계를 맺었다는 상황을 고려해 보면 말입니다." "자네 멋대로 그런 가정을 만들지 말게." 갠트는 천천히 커피를 젓고서 한 모금 마셨다. 그는 크림을 좀더 넣고 다시 저었다. "선생님은 그녀가 두려운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메리온이? 엉뚱한 소리 말게." 킹쉽은 우유잔을 탁 내려놓았다. "사람이란 죄가 있다고 밝혀질 때까지는 무고한 걸세." "그렇다면 증거를 찾아봐야겠군요." "이것 보게. 자네는 시작하기도 전에 그가 돈을 노리고 있다고 추정했네." "전 그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태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갠트가 파이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는 그것을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킹쉽은 다시 내프킨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그 두 사람이 결혼하게 내버려두실 겁니까?" "내가 반대하고 싶어도, 지금으로서는 두 사람을 막을 도리가 없어. 두 사람 모두 스물한 살이 넘었잖은가?" "탐정을 고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직 나흘이나 남아 있으니까요. 아마 탐정들은 뭔가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킹쉽이 천천히 말했다. "찾아낼 것이 있다면 -- 어쩌면 버드가 그걸 눈치채고 메리온에게 말할지도 모르지." 갠트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선생님과 메리온에게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 같군요." 킹쉽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할 말이 있네." 그는 갠트를 보지 않고 말했다. "난 아내와 세 딸이 있었지. 딸 둘은 이미 내게서 떨어져 나갔네. 아내는 내가 밀어서 내보냈어. 어쩌면 세 딸 중의 하나는 내가 밀어낸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지금 내게는 하나밖에 없네. 나는 쉰일곱 살에 딸 하나와, 골프치고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두세 명의 친구가 있을 뿐이야. 그게 전부일세." 잠시 뒤 킹쉽은 몹시 굳은 얼굴로 갠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떤가?" 그가 물었다. "이 일에 자네가 그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뭔가? 어쩌면 자네는 그저 자네의 분석적인 두뇌를 움직여 보고, 사람들에게 자네가 얼마나 명석한가를 과시하며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자네는 그렇게까지 들쑤셔놓을 필요는 없어. 자네는 내 사무실에 와서 엘렌의 편지에 대해서 말했네. 그리고 내 책상 위에 연감을 펼쳐놓고서, '버드 콜리스는 스토다드에 다녔습니다.' 하고 늘어놓았네. 모두 자네가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갠트는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선생님의 딸들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살인자는 처벌되어야 한다는 돈키호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킹쉽은 우유를 다 마셨다. "자네는 그냥 욘커즈에 돌아가서 방학이나 즐기는 게 좋겠군." "화이트 플레인스입니다." 갠트는 포크 옆으로 파이 조각에 남아 있는 시럽을 그러모았다. "위궤양인가 보죠?" 그는 빈 우유잔을 바라보며 물었다. 킹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갠트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옆에 있는 사람을 훑어보았다. "13㎏ 정도 살이 찌신 것 같군요." 그는 빨갛게 시럽이 묻은 포크를 입에 넣어서 싹 빨아먹었다. "버드는 선생님이 10년 이상은 자리를 지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는 3~4년은 참았다가 계속 선생님을 재촉할지도 모르죠." 킹쉽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돈뭉치에서 1달러를 꺼내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잘 가게, 갠트 군." 그는 말하고 나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이 와서 그 돈을 가져갔다. "또 시키실 게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갠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화이트 플레인스 행 5시 19분 차를 탔다. 제 9 장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버드는 아주 어렴풋하게 킹쉽의 재산에 관해서 비쳤었다. 한두 번 킹쉽 코퍼 주식회사 이야기를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을 쓴 적은 없었다. 사춘기의 유흥에 관한 바람만큼이나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은 부(富)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가 아들이 그러한 대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선 거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메리온과 그녀의 아버지를 소개하는 순간, 그리고 킹쉽의 웅장한 아파트에 둘러싸이는 순간을 고대해 왔었다. 어머니는 무늬가 박힌 테이블과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킹쉽의 능력의 증거가 아니라, 버드 자신의 능력의 증거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은 실망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에 빗나가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입을 헤 벌리고,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하나가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기적을 보는 것처럼 '씩씩'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정장으로 차려입은 집사! -- 부드러운 카펫의 촉감, 종이가 아니라 정교하게 짜여진 헝겊으로 된 벽지, 가죽으로 장정된 책들, 금시계, 집사가 샴페인을 가져온 은쟁반 -- 샴페인! -- 크리스탈 가블릿 (긴 받침이 달린 잔)에 넣어서......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아름답구나. 정말 아름다워." 최근에 퍼머한 듯한 뻣뻣한 잿빛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 그녀는 그러한 물건들은 자신에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배를 들며 그녀의 시선이 버드와 마주칠 때면, 일로 거칠어진 한쪽 손으로 앉아 있는 긴 의자의 천을 은밀히 감탄하면서 그녀는 터질 듯한 자부심으로 키스를 퍼부을 것처럼 그에게로 몸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의 어머니의 태도는 부드럽고 훌륭했다. 단지, 그날 저녁의 실망은 메리온과 레오 킹쉽이 말다툼을 한 것 때문이었다. 메리온도 피할 수 없었을 때만 아버지에게 말했다. 게다가 그 다툼은 버드 때문인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로 그런 적이 없었던 메리온이 분명하고도 대담하게 감정을 내보이며 그에게 달라붙어서 그를 '내 사랑'이나 '자기'라고 부르는 반면, 레오는 머뭇거리며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희미한 근심이 신발 속에 들어 있는 돌멩이처럼 그를 찌르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역시 음울한 분위기였다. 레오와 메리온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았고, 그 옆에 그의 어머니와 그가 앉았다. 하지만 대화라고는 겨우......가장자리 근처에서만 오고갔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아들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거라야 구경꾼 같은 이 사람들 앞에서는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래서 메리온은 그를 '자기'라고 불렀고, 그의 어머니에게는 서튼 테라스 아파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어머니는 레오에게 '아이들' 이야기를 했으며, 레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에게 빵을 건네달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마치 빵을 고르듯이 천천히 포크와 스푼을 들며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보고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 말이나 신호도 없는 애정어린 음모가 그들 사이의 결합을 단단하게 해주어 식사를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메리온과 레오가 자기들의 음식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미소 --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빠져들게 된 예상치 못했던 행운 때문에 훨씬 더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 식사가 끝나고 나서, 테이블에 은제 라이터가 있었지만 그는 자기 성냥으로 메리온과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의 어머니가 하얀 성냥갑 위에 구릿빛으로 버드 콜리스라고 찍힌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식탁보 위에 있는 책을 공연히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의 신발에는 여전히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나중에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들은 교회에 갔고, 예배가 끝난 뒤 버드는 메리온을 레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는 어머니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다. 그러나 곤란하게도 메리온은 그녀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며 호텔까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레오는 버드가 여자들을 택시에 태우는 동안 혼자서 가버렸다. 그는 두 여자 사이에 앉아서, 어머니에게 자기들이 탄 차가 지나가는 곳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운전사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차를 몰았으며, 한 번도 뉴욕에 와본 적이 없는 콜리스 부인은 타임스 광장의 밤경치를 보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묵는 호텔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매우 피곤하시죠?" 그가 물어보자 어머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약간 실망했다. "가서 바로 주무시지 마세요." 그가 말했다. "나중에 전화드릴 테니까요." 그들은 작별 키스를 했고, 여전히 버드의 손을 잡고 있는 콜리스 부인은 메리온의 뺨에 행복하게 키스했다. 레오의 집으로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메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 자기?" "아무 일도 없어요." 그녀는 내키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아파트 문 앞에서 그녀와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걱정의 돌멩이가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서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킹쉽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거실로 들어가서, 메리온이 라디오를 켜는 동안 버드는 담뱃불을 붙였다. 그들은 긴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그에게 어머니가 매우 좋으신 분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는 상당히 기쁘며, 자기 어머니도 메리온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녀의 목소리가 딱딱해진 것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눈을 반쯤감은 채 뒤로 기대어 앉아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말을 멈출 때와 목소리가 바뀔 때, 그리고 그녀의 억양이 올라가는 순간이면 그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무의식적으로 다소 거칠게 대했거나 무슨 약속 같은 걸 잊어버린 정도겠지 뭐. 무슨 일이야 일어나려고......그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갖고 자기가 할 말을 다시 생각해 보고, 또 그 말에 대한 영향을 생각해 보곤 했다. 마치 체스를 두는 사람이 말을 움직이기 전에 한수 한수 생각해 보듯이. 그녀는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두 명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무릎에 있던 왼손으로 바지 주름을 잡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세 명." 그가 말했다. "네 명이 어떨까?" "두 명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야 하나는 컬럼비아 대학에 가고, 하나는 컬드웰 대학에 가지요." 컬드웰. 컬드웰 대학에 대한 것. 엘렌? "우리 애들은 아마 미시건 대학이나 뭐 그런 곳에서 졸업하게 될 거야." 그가 말했다. "만일 한 명만 낳는다면 -- " 메리온이 계속해 나갔다.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했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하면 되겠군요. 아니면 거꾸로 하든지." 그녀는 웃으면서 몸을 앞으로 숙여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눌렀다. 그는 그것이 평소에 그녀가 담배를 끄는 것보다 훨씬 더 신중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을 간다, 컬드웰 대학으로......그는 조용히 기다렸다.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사실은 우리 애가 그렇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해요." -- 그녀는 결코 바보스러운 잡담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집요하게 자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면 신임을 잃을 거예요. 전학이란 매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뒤따르니까요." 그들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고요?" 그녀가 물어보았다. "그래 -- " 그가 말했다. "난 조금도 신임을 잃지 않았어." "당신은 전학을 한 적이 없잖아요?"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 " 그가 말했다. "내가 메리온에게 말했잖아." "아니, 안했어요. 그런 말은 전혀 -- " "했어, 자기. 나는 메리온에게 분명히 말했어. 난 스토다드 대학에 다니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갔어." "그곳은 내 동생 도로시가 다니던 곳이에요, 스토다드 대학은!" "알고 있어. 엘렌이 내게 말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 애를 안다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엘렌이 그녀 사진을 보여줬을 때, 나는 그녀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미술관에서 말했었잖아." "아니, 안 그랬어요. 틀림없이 말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군. 난 스토다드 대학에 2년 동안이나 다녔었어. 메리온이 몰랐었다고 말하려는 뜻은 -- " 메리온은 자기가 의심했던 것을 갚으려는 듯이 열렬하게 그에게 키스해 댔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분 뒤에 그는 자기 손목시계를 보았다. "난 그만 가보는 게 좋겠어." 그가 말했다. "이번 주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자둬야겠어. 다음주에는 잠을 충분히못 잘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단지 레오가 어떻게 해서 그가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이다. 위험스러운 일은 없다. 없어! 곤란한 문제가 있다면 결혼 그 자체도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 오, 하나님! -- 그러나 위험은 없다. 경찰이 추적해 올 위험도 없어. 돈많은 여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법에 걸리지는 않는다.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서야? 만일 네오가 그를 조사해 보고 싶었다면 왜 좀더 빨리 하지 않았을까? 왜 오늘?......타임스 지에 발표......그래! 누군가가 그 기사를 보았겠지 --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던 누군가가. 레오 친구의 아들이거나, 뭐 그런 사람이 신문기사를 보고 말했을 것이다. "내 아들과 자네 사위 될 사람이 스토다드 대학에 함께 다녔었다는군." 그래서 레오는 둘씩 둘씩 묶었겠지. 도로시, 엘렌, 메리온 -- 황금 벌레. 그가 메리온에게 말을 했고, 그 문제로 부녀가 말다툼을 했을 것이다. 제기랄, 처음부터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 말했었으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레오는 곧 의심했을 것이고, 메리온은 그의 이야기에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그 문제를 들먹이는 걸까! 그래도 겨우 의심하는 것만으로 레오가 뭘 할 수 있을까? 그건 단순히 의심일 뿐이다. 그 노인은 그가 도로시를 알았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혹시 레오는 그의 정보가 메리온에게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증거를 모두 메리온에게 주어서 그녀를 확신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 레오는 확신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에게 확신시킬 수 있었을까? 어떻게 스토다드 녀석들, 지금은 4학년이 되었을 그들이 누가 도로시와 함께 다녔었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크리스마스고! 방학중이다. 그들은 각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있을 것이다. 결혼식까지는 단지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레오는 메리온에게 연기하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계속 의심만 하고 있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그리고 토요일. 일이 더럽게 되어 그가 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해도 그것이 레오가 증명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는 도로시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그는 미시시피 강의 20피트(약 6·)나 되는 진흙 아래에 묻혀 있을 그 권총을 끄집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은 계획대로 치러지겠지. 그리고 나서 스토다드 녀석들이 기억을 해낸다고 해도 레오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이혼? 취소? 두 가지 모두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 메리온에게 한 가지를 택하라고 설득한다고 해도 아마 그녀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까? 아마 레오는 그에게 돈을 주어서 헤어져 달라고 하겠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레오는 자기 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지독한 황금 벌레에게 얼마나 줄까? 어마어마한 액수겠지, 아마도. 하지만 메리온이 물려받을 것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꿩먹고 알먹는 것이 어떨까?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제 전화 때문에 깨신 건 아니세요? 메리온의 집에서 걸어서 돌아왔어요." "괜찮다, 애야. 오, 버드. 그 애는 아주 아름다운 여자더구나! 사랑스러워! 그렇게 상냥하고......나도 아주 기쁘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킹쉽 씨도 아주 좋은 분이더구나! 애야, 그의 손을 보았니?" "손이 어때서요?" "아주 깨끗해!" 그는 웃었다. "버드 -- "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들은 틀림없이 굉장한 부자일 게야. 굉장한 부자......"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니." "그 아파트는 말이야......영화에서나 나오는 저택 같더구나! 오, 하나님......!" 그는 어머니에게 서튼 테라스 아파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금 기다리시면 보시게 될 거예요, 어머니!" -- 그리고 제련소 방문에 대한 이야기도 -- "그분이 화요일에 데려간다고 하셨어요. 그분은 제가 모든 조직에 익숙해지기를 원하시거든요!" --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쯤 그녀가 말했다. "버드, 네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니?" "무슨 생각이요?" "학교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 말이다." "아, 그거요 -- " 그가 말했다. "그건 바뀌지 않았어요." "오......" 그녀는 실망했다. "어머니, 면도용 크림 아시죠?" 그가 말했다. "단추를 누르면 생크림처럼 깡통에서 그게 나오죠?" "응?" "글쎄, 그것은 바로 그런 거예요. 그 생각이 저를 그리로 몰아붙여요." 그녀는 가엾다는 듯이, "오 -- " 하며 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면......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거라, 알았지?" "예, 그것들은 단지 저를 몰아붙일 뿐이에요." "글쎄 -- "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그 같은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그건 확실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생각도......" 어머니와 통화를 끝낸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간다고 느끼며 침대에 죽 뻗어 누웠다. 레오와 그의 의심들은 그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완벽하게 될 것이다. 그가 단 한 가지 해야 할 일은 -- 그녀가 돈을 얼마나 가졌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제 10 장 스탬포드와 브리지포트, 그리고 뉴 헤이븐과 뉴 런던을 지난 열차는 왼쪽으로는 눈에 덮인 평지, 오른쪽으로는 잔잔한 물 사이를 지나 코낵티컷의 남쪽 경계를 따라 계속 동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흥미 없는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복도와 통로는 크리스마스 인파로 가득 들어찼다. 갠트는 통로의 먼지낀 창문을 마주보고 서서 광고판들을 세고 있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끔찍스럽게 보내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6시가 조금 지나서 기차는 프로비던스에 도착했다. 역에서 갠트는 안내소에 있는 우둔한 안내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나서 시계를 보며 건물을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넓은 진창길을 지나 스파 (약국을 겸한 다방) 라고 불리는 곳으로 들어가서 즉석 스테이크 샌드위치와 민스미트, 그리고 커피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식사 -- 그는 스파를 나와서 다음다음에 있는 약국에 가서 1인치 폭짜리 스카치 테이프를 샀다. 그는 정거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불편한 벤치에 앉아서 보스턴 태블로이드판 신문을 읽었다. 7시 10분에 다시 역을 나와 근처에 버스 세 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메나세트 -- 서머시트 -- 폴 -- 리버라고 쓰여진 푸른색과 노란색 줄무늬 버스에 올랐다. 7시 20분에 버스는 메나세트에서 네 블럭 떨어진 메인 가(街)에 잠시 멈춰서 승객 몇 명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 사이에 갠트가 끼어 있었다. 그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1910년대 건물로 보이는 약국에 들어가서 얇은 전화번호부를 뒤져 어떤 주소와 전화번호를 베꼈다. 전화 박스에서 번호를 돌렸는데, 신호가 열 번이나 울려도 저쪽에서 받지 않자 전화를 끊었다. 그 집은 까만 창틀에 눈이 쌓여 있는 회색의 초라한 단층집이었다. 갠트는 지나가면서 그 집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집은 길에서 겨우 몇 야드 떨어진 뒤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에서 길 사이에 있는 눈 위에는 발자국도 없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삭막한 블럭 끝으로 걸어갔다가 돌아서서 다시 그 회색빛 집을 지나오면서, 이번에는 그 집의 양쪽에 있는 집들을 더욱 관심을 기울여서 보았다. 유리창 틀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린 한 집에서는 스페인계로 보이는 가족들이 잡지 커버에 나오는 듯한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집 다른쪽에서는 한 남자가 쓸쓸히 무릎에 지구본을 올려놓고 돌리다가 갑자기 멈춘 뒤에 손가락이 어느 나라를 짚었나 알아보고 있었다. 갠트는 그 집을 지나 블럭의 저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몸을 돌려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 그가 그 회색 집을 지날 때는 그 집과 스페인 식구 집 사이에 멈춰서서 홱 돌아섰다. 그는 그 집의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작은 현관이 있었다. 그것 맞은편에는 빨랫줄이 쳐진 좁은 뜰 너머로 높이 올린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갠트는 현관으로 올라갔다. 문 하나와, 창문 하나, 쓰레기통, 그리고 빨래 집게 바구니가 보였다.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창문도 역시 닫혀 있었다. 창문 안쪽 턱에는 네 면에 5, 10, 25, 그리고 X라고 인쇄된 아이스크림 회사의 네모난 포스터가 기대어 있었다. 그것은 X라고 인쇄된 면이 위쪽으로 향해 있었다. 갠트는 주머니에서 스카치 테이프를 꺼냈다. 그는 25㎝ 길이로 잘라서 열두 개의 유리문 중 중앙 걸쇠 밑에 있는 창에 그것을 붙였다. 그는 그 창문 위에 테이프를 붙이고서 다시 25cm를 잘랐다. 몇 분 동안 그는 셀로판 테이프로 직사각형의 창유리를 전부쌌다. 그리고 나서 장갑낀 주먹으로 그것을 쳤다.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깨진 유리 조각이 테이프에 붙은 채 제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갠트는 틀에서 테이프를 떼어냈다. 그리고 나서, 사각형의 셀로판을 잡아당기자 창문에서 유리가 떨어져 나왔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창문을 통해 손을 넣어 걸쇠를 풀고는 아랫부분을 올렸다. 아이스크림 포스터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연필만한 손전등을 꺼내어 열린 창문 사이로 비추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앞에 신문들이 쌓여 있는 의자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의자를 한쪽으로 밀고서 기어 들어간 뒤 창문을 닫았다. 손전등의 희미한 빛이 갑갑하고 꾀죄죄한 부엌을 이리저리 비춰나갔다. 갠트는낡은 리놀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양쪽 손잡이 부분이 대머리처럼 벗겨진 벨벳으로 된 푹신한 의자들이 있었다. 꽃모양의 종이 커튼 옆의 창문에 크림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온통 버드의 사진들이었다. 짧은 바지를 입고 있는 어렸을 때의 버드, 고등학교 졸업 때의 버드, 군복을 입은 버드, 까만 양복을 입고 미소짓고 있는 버드. 웃고 있는 커다란 얼굴과 작은 얼굴의 스냅 사진들이 사진틀에 끼어 있었다. 갠트는 거실을 나와 복도로 갔다. 복도에서 첫번째 방은 침실이었다. 화장대 위에는 로션 병, 침대 위에는 빈 옷상자와 휴지, 그리고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결혼사진과 버드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두 번째 방은 목욕탕이었다. 전등빛이 축축한 벽에 그려져 있는 백조 무늬에 가 닿았다. 세 번째는 버드의 방이었다. 그곳은 이류 호텔 방 같았다. 침대 위의 고등학교 졸업장을 제외하고는 방주인의 개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삭막한 방이었다. 갠트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주로 대학 교과서였으며, 고전 소설이 몇 권 있었다. 일기장이나 약속 수첩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서랍을 하나씩 조사해 보았다. 문방구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 지나간 '라이프'와 '뉴요커', 대학의 논문, 뉴 잉글랜드의 길 안내도, 약속이 적혀 있는 편지나 달력은 없었으며, 이름이 쓰여진 주소록도 없었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옷장 쪽으로 갔다. 서랍은 거의 반이나 비어 있었다. 나머지에는 여름 셔츠와 수영복, 마름모 무늬가 있는 양말 두 켤레, 속옷, 변색된 커프스 단추, 셀룰로이드 칼라 스테이, 클립이 망가진 나비 넥타이 등이 들어 있었다. 잊고 간 종이쪽지도 없었고, 사진도 없었다. 형식적으로 벽장을 열어보았다. 구석에 작은 회색 금고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잠겨 있었다. 그는 그 금고를 흔들어 보았다. 그 안에서 종이 뭉치 같은 것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금고를 내려놓고 열쇠고리에 달린 작은 칼날을 자물쇠에 집어넣고 나서,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서랍에서 드라이버를 찾아내어 그것으로 열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콜리스 부인의 생활비가 들어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신문지로 그 금고를 쌌다. 그는 창문을 열고는 바닥에서 아이스크림 포스터를 집어들고 나서 현관 쪽으로 기어나갔다. 그리고는 창문을 닫고 잠그고 나서, 포스터를 적당한 크기로 찢어서 창문 안으로 끼워 덮어 가렸다. 그는 겨드랑이에 금고를 끼고 조용히 골목길을 지나 찻길 쪽으로 걸어갔다. 제 11 장 레오 킹쉽은 수요일 밤에 크리스마스 때문에 빼앗겼던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10시에 자기 아파트로 돌아왔다. "안에 메리온 있나?" 그는 집사에게 코트를 주면서 물어보았다. "콜리스 씨와 나갔습니다. 일찍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거실에서 데트웨일러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데트웨일러?" "리처드슨 양이 유가증권 문제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작은 금고를 하나 가지고 왔던데요." "데트웨일러?" 킹쉽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고든 갠트는 난로 주위에 있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킹쉽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오후에 리처드슨 양이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가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 " 그는 주먹을 쥐어 옆구리로 들어올렸다. "여기서 나가게." 그가 말했다. "메리온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증거물 A입니다." 갠트는 양손에 팜플렛 하나씩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버드 콜리스 사건에 대한 -- " "난 듣고 싶지 않네 -- " 그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킹쉽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왔다. 그는 갠트의 손에서 팜플렛을 빼앗았다. "우리 회사의 선전물......" "버드 콜리스의 소유로 -- " 갠트가 말했다. "어젯밤까진 메나세트의 그의 집 벽장 안에 있던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옆 바닥에 놓여 있는 금고를 발로 가볍게 찼다. 뚜껑이 열려서 구부러져 있었다. 안에는 마닐라 종이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봉투가 네 개 들어 있었다. "제가 이것을 훔쳐왔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훔쳤다고?" 그는 씩 웃었다. "불에는 불로 대항하라. 저는 그가 뉴욕의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 몰라서, 먼저 메나세트를 공격하기로 했죠." "자네 미쳤군......" 킹쉽은 난로 바로 앞에 있는 긴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는 팜플렛을 쳐다보며, "오, 하나님!" 하고 말했다. 갠트는 긴 소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신다면, 증거물 A의 상황을 관찰해 보시죠. 팜플렛의 가장자리가 낡았고, 수많은 지문들로 때가 묻었고, 스테이플러로 가운데를 찍은 것이 느슨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팜플렛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여러 번 들춰봤다는 것도 말입니다." "저런......치사한 놈......" 킹쉽은 그 말이 익숙치 않은 듯이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내뱉었다. 갠트는 발끝으로 금고를 툭툭 쳤다. "버드 콜리스라는 인간의 역사가 이 네 통의 편지 안에 한 편의 드라마처럼 들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편지 1 -- 고등학교 시절 영웅으로 부각되던 신문기사 -- 반장, 무도회 준비위원회 회장, 가장 성공할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 기타 등등. 편지 2 -- 명예상이기장과 동성 훈장을 받고 명예스러운 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재미있는 음란한 사진들과, 필요없는 돈 200달러가 있으면 손목시계를 찾을 수 있는 전당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 3 -- 대학시절 -- 스토다드와 컬드웰 대학의 성적증명서. 편지 4 -- 킹쉽 코퍼 주식회사의 낡은 팜플렛 두 권, 그리고 이것......" -- 그는 주머니에서 파란 줄이 있는 노란 종이를 접은 것을 꺼내어 킹쉽에게 건네주었다 --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끝을 맺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킹쉽이 그 종이를 펼쳤다. 그는 그것을 반쯤 읽어 내려가다가 말했다. "이게 뭔가?" "그건 제가 선생님에게 묻고 싶은 겁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일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게 팜플렛과 함께 금고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킹쉽은 고개를 흔들며 갠트에게 그 종이를 다시 돌려주었고, 갠트는 그것을 받아서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킹쉽의 눈길이 팜플렛으로 떨구어졌다. 그가 손으로 팜플렛을 꽉 움켜쥐자 두꺼운 종이가 구겨졌다. "어떻게 메리온에게 말하지?" 그가 말했다. "그 애는 그를 사랑하는데......" 그는 우울한 얼굴로 갠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그는 팜플렛을 쳐다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갠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그것이 금고 안에 들어 있었다는 걸 믿지? 어떻게 그것들을 자네가 금고 안에 집어넣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나?" 갠트의 턱이 축 늘어졌다. "오, 그것은......" 킹쉽은 긴 소파 끝으로 가서 방을 가로질렀다. 조각으로 무늬를 새긴 테이블 위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그는 번호를 돌렸다.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갠트가 투덜거렸다. 조용한 방에 전화번호를 돌리는 소리만이 찰칵찰칵 들렸다. "여보세요? 리처드슨 양? 킹쉽이오. 부탁이 있는데, 미안하지만, 어려운 부탁이야. 그리고 은밀하게 해야 해요." 수화기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사무실에 가주겠소? -- 그래, 지금 당장. 리처드슨 양에게 시키고 싶진 않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서. 그리고 내가 -- " 다시 소곤거리는 소리. "광고선전부로 가요." 킹쉽이 비밀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서류를 조사해서 우리가 선전용 간행물을......버드 콜리스에게 보낸 적이 있나 알아봐요." "버튼 콜리스입니다." 갠트가 말했다. "아니면 버튼 콜리스나. 그래, 맞아 -- 콜리스. 나는 집에 있을 거요. 리처드슨 양, 알아내는 대로 빨리 내게 전화해 주시오. 고맙소, 정말 고마워, 리처드슨 양. 정말 고마워......" 그는 전화를 끊었다. 갠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겁니까 ?" "난 확실히 해야만 하네." 킹쉽이 말했다. "자네도 이 같은 일에 있어서는 증거를 확실히 해야 하고." 그는 다시 방을 가로질러 돌아와서 긴 소파 뒤에 섰다. "선생님은 이미 확신하고 있고, 그리고 선생님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킹쉽은 긴 소파를 잡으며, 그가 앉았던 쿠션의 오목한 곳에 놓여 있는 팜플렛을 내려다보았다. "선생님은 자신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갠트가 되풀이했다. 잠시 뒤 킹쉽이 피곤한 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긴 소파를 돌아와서 팜플렛을 집어들고 자리에 앉았다. "메리온에게 어떻게 말해야겠나?" 그가 물었다. 그는 자기 무릎을 쓰다듬었다. "그 치사한 놈......빌어먹을 놈의 자식......" 갠트는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그를 향해 앉았다. "킹쉽 씨, 이번 일에서는 제 생각이 거의 옳았습니다. 제가 모든 것에서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모든 것이라니, 그게 뭔가?" "도로시와 엘렌에 대해서 말입니다." 킹쉽은 화가 난 듯이 숨을 들이마셨다. 갠트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는 것을 메리온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로시와 관계가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가 그녀를 죽였고, 파웰과 엘렌은 어떻게 해서 그가 그 남자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죽여야 했던 거지요." "유서는......" "속임수를 써서 그것을 쓰게 할 수도 있잖습니까!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죠 -- 바로 지난달 신문에 그런 짓을 한 녀석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 여자가 임신을 한 겁니다." 킹쉽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믿네." 그가 말했다. "그가 메리온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 뒤에는, 웬지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자네 이론에는 허점이 있어, 커다란 허점이." "그게 뭐죠?" 갠트가 물었다. "그는 돈을 노리고 있는 거야. 그렇잖은가?" 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네는 도로시가 헌것, 새것, 빌려온 것, 푸른 것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갠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 " 킹쉽이 말했다. "만일 그가 도로시를 곤경에 빠뜨린 녀석이라면, 그리고 그 애가 그날 그와 결혼할 준비를 했었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도로시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도로시와 결혼해도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갠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일에 대해서는 자네가 옳았네." 킹쉽은 팜플렛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로시 문제에 대해서는 틀렸어. 모두 틀렸단 말일세." 잠시 뒤 갠트가 일어났다. 그는 몸을 돌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가 비약해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에서 벨이 울리자 갠트는 창문에서 돌아섰다. 킹쉽은 일어나서 난로 앞에 서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정교하게 쌓인 나무장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갠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팜플렛을 만 것을 옆구리에 든 채 마지못해서 몸을 돌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들어오겠어요?" "아니야, 됐어, 메리온. 우리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할 테니까."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7시 30분에 집 앞에 있을께." "검은색 양복을 입는 게 좋을 거예요. 제련소는 틀림없이 지저분한 곳일 테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잘 가요, 버드." "안녕." 문이 닫혔다. 킹쉽은 팜플렛을 더 단단하게 말아쥐었다. "메리온 -- " 그가 불렀으나 그 목소리는 너무 낮았다. "메리온 -- " 다시 좀 큰 목소리로 불렀다. "가요."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남자는 갑자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의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빳빳하고 흰 긴 소매 블라우스의 깃을 세우며 넓은 복도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뺨이 바깥의 차가운 날씨로 상기되어 있었다. "오 -- "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 " 그녀는 갠트를 보았다. 그녀의 손이 굳어지더니 뚝 떨어졌다. "메리온, 우리는......" 그녀는 홱 몸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메리온!" 킹쉽은 서둘러 복도를 나가서 현관의 홀로 들어갔다. "메리온!" 그녀는 거칠게 다리를 올리며, 굴곡이 진 하얀 계단을 반쯤 올라가고 있었다. "메리온!" 그는 명령조로 엄숙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멈춰서서 한 손을 난간에 대고 굳은 얼굴로 계단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이리 내려오거라." 그가 말했다. "내가 할 말이 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잠시 시간이 흘렀다. "어서 내려오거라." 그가 말했다. "내려가지요." 그녀는 몸을 돌려 당당하고 냉담한 태도로 층계를 내려왔다. "아버지는 제게 말씀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죠. 제가 2층에 올라가서 짐을 꾸려 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요." 킹쉽은 거실로 돌아왔다. 갠트는 방 한가운데의 긴 소파 뒤를 잡은 채 거북한 자세로 서 있었다. 킹쉽은 걱정스러운 듯이 머리를 저으면서 그의 옆으로 갔다. 메리온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두 남자는 그녀의 눈을 보지 않은 채, 그녀가 문 가까이에 있는 긴 소파의 끝으로 가서 갠트가 앉았던 곳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로 가는 모습을 죽 지켜보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모으고, 빨간색 모직 스커트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서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자기 왼쪽의 긴 소파 뒤에 서 있는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말씀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킹쉽은 그녀의 시선에 억눌려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갠트 군이......어제......갔었는데......" "예?" 킹쉽은 어쩔 수 없이 갠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갠트가 말했다. "어제 오후에 -- 당신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 나는 메나세트에 있는 당신 약혼자 집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 " "뭐라고요!" "--그리고 나는 그의 방 벽장에 있었던 금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 그녀는 의자 뒤로 푹 기대어 앉아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손을 움켜쥐고서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걸 집에 가져가서 뚜껑을 쇠지렛대로 억지로 열었습니다 --"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지며 반짝거렸다. "무얼 찾아냈나요? 원자폭탄 계획서라도 들어 있던가요?"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얼 찾았죠?" 그녀는 이글거리는 분노로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되풀이했다. 킹쉽은 긴 소파 끝으로 내려가서 팜플렛을 펴서는 어색하게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바라보았다. "낡았죠." 갠트가 말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킹쉽이 말했다. "그는 너를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메나세트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너를 만나기 전부터 그 팜플렛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무릎에 있는 팜플렛을 어루만졌다. 몇 면의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똑바로 폈다. "엘렌이 그에게 줬을 거예요." "엘렌은 우리 회사의 간행물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메리온. 너도 잘 알잖니. 그 애는 너와 마찬가지로 회사엔 거의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팜플렛을 뒤집어서 뒷면을 살펴보았다. "이 사람이 금고를 열 때 아버지도 계셨나요? 이 팜플렛이 금고 안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실 수 있어요?" "지금 그것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 킹쉽이 말했다. "하지만 갠트 군이 왜 거짓말을 하겠니......?" 그녀는 팜플렛 하나를 들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 마치 대기실에 있는 잡지를 훑어보는 것처럼. "좋아요." 그녀가 잠시 뒤에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처음에는 그가 돈에 매혹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녀의 입술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일생에 단 한 번 아버지의 재산에 고마움이 느껴지는군요." 그녀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까요? -- 부잣집 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가난한 집 딸만큼이나 쉬운 일이에요." -- 그리고 또 페이지를 넘기면서 -- "아버지는 정말로 그렇게 혹독하게 그를 비난해서는 안돼요 -- 그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는요. 환경의 영향이에요......" 그녀는 일어나서 팜플렛을 긴 소파 위로 던졌다. "그밖에 아버지가 원하시는 게 또 있나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밖에?" 킹쉽이 노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니?" "충분하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무엇에 충분하다는 거죠? 제가 결혼을 포기하기에 충분하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 "그렇지 않아요. 그건 충분하지 않아요." "너는 그래도 그와 결혼하고 싶냐?" "그는 저를 사랑해요." 그녀가 말했다. "어쩌면 처음에 그는 돈에 이끌렸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 만일 제가 아주 예쁜 여자라고 가정해 보세요. 만일 그가 제 외모에 이끌렸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결혼을 그만둬야 하나요?" "처음이라고?" 킹쉽이 말했다. "아직도 그는 돈을 노리고 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실 권리가 없어요!" "메리온, 지금 이 상태에선 너는 그와 결혼할 수 없어......" "왜 결혼할 수 없어요?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시청으로 갈 거예요!" "그는 좋지 않은 음모를 꾸미고 있다 -- " "오, 예! 아버지는 항상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것만 알지요, 그렇죠! 아버지는 엄마가 나쁘다고 여겨서 엄마를 버렸어요. 그리고 도로시를 나쁘게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우리를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방식만으로 키웠기 때문에 그 애가 자살하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좋고 나쁘고를 가리는 것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한 거 아녜요?" "너는 돈만 보고 따라온 남자와 결혼할 수 없어!" "그는 저를 사랑해요! 우리 나라 말인데 정말 이해 못하시겠어요? 그는 저를 사랑해요! 저도 그를 사랑하고요! 우리는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느끼고 있어요! 우린 똑같은 책, 똑같은 연극, 똑같은 음악, 똑같은 것들을 좋아한다고요 -- " "똑같은 음식은요?" 갠트가 끼어들었다. "당신들은 이탈리아 음식과 미국 음식을 좋아하겠군요?" 그녀는 입을 약간 벌린 채 그에게 돌아섰다. 그는 주머니에서 파란 줄이 쳐진 노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쳐 들었다. "그리고 책들은 -- " 그는 종이를 보면서 말했다. "프루스트, 토마스 울프, 카슨 매컬러즈의 작품을 좋아하시죠?"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당신이......? 도대체 그게 뭐죠?" 그는 긴 소파의 끝을 한 바퀴 돌았다. 그녀는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앉으시죠." 그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그녀가 뒤로 움직였다. 긴 소파의 가장자리가 그녀의 무릎 뒤쪽으로 눌렸다. "자, 앉으시죠." 그가 말했다. 그녀가 앉았다. "그게 뭐죠?" "이것은 팜플렛과 함께 금고 안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가 말했다. "같은 봉투 안에. 그가 쓴 글씨입니다 -- 내 생각으로는." 그는 노란 종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미안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바라보고 나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프루스트, T. 울프, C. 매컬러즈, <보바리 부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엘리즈 B. 브라우닝 -- 읽을 것. 미술 (가장 현대) -- 호플리 아니면 호퍼, 디머스 현대 미술에 관한 책을 읽을 것. 고등학교 시절의 핑크빛 말. 엘렌을 질투하느냐? 르누아르, 반 고호. 이탈리아와 미국 음식 -- 뉴욕 시에서 음식점들을 찾아볼 것. 극장 : 버나드 쇼, T. 윌리엄즈 -- 대개 심각한 내용들...... 심각한 내용들...... 그녀는 뺨이 빨갛게 물들어서 깨알같이 써진 글의 4분의 1 가량은 간신히 읽어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접었다. "글쎄 -- " 그녀는 다시 종이를 접으며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만일 제가 믿지 않는다면......" 그녀는 소파 끝을 조용히 돌아가서 그녀의 옆에 힘없이 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정신이 나간 듯이 미소지었다. "제가 미리 알았어야 하는 건데요." 피가 그녀의 뺨으로 거꾸로 올라와서 빨갛게 물들였다. 그녀의 눈이 번쩍거렸고, 손가락은 갑자기 종이를 세게 구겨서 비틀었다. "제가 이 사실을 알았어야 하는 건데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종이를 잡아당겨 찢으면서 웃었다. "정말 미리 알았어야......" 그녀가 노란 종이 조각을 떨어뜨리자, 그것들이 그녀의 얼굴로 날아갔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킹쉽은 그녀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구부린 어깨에 팔을 얹었다. "메리온......메리온......더 늦게 알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녀의 등이 그의 팔 아래에서 흔들렸다.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해요."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다.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신다고요." 울음을 그치고, 그녀는 킹쉽이 준 손수건을 쥐고서 카펫 위에 흩어져 있는 노란 종이조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2층으로 데려다 주련?" 킹쉽이 물었다. "아녜요, 제발......그냥......그냥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그는 일어나서 갠트가 있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도 잠시 묵묵히 강 건너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킹쉽이 말을 꺼냈다. "나는 그에게 보복을 해야겠네. 맹세코 보복을 할 거야."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갠트가 말했다. "따님이 선생님의 '선과 악'에 대해서 말하던데, 선생님은 딸들을 아주 엄하게 키우셨나 보죠?" 킹쉽은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엄하지는 않았네." 그가 말했다. "제 생각엔 -- 따님의 말한 것으로 보아서 선생님이 엄하게 대하신 것 같습니다." "그 애가 흥분해서 말한 걸세." 갠트는 강 건너의 펩시 콜라 광고판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에 우리가 메리온의 아파트를 나온 뒤 약국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은 딸 하나를 밀어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뭘 뜻하는 거였죠?" "도로시 말일세." 킹쉽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엄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말입니까?" 갠트가 넌지시 말했다. "아니야, 나는 그렇게 엄하지는 않았어. 난 애들에게 올바로 행동하라고 가르쳤네. 어쩌면 내가......조금 지나쳤을지도 몰라......그건 애들 엄마 때문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로시가 자살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어." 그가 말했다. 갠트는 담뱃갑을 꺼내어 한 개비 빼냈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돌렸다. "킹쉽 씨, 만일 도로시가 선생님과 의논하지 않고 먼저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나서 아기를 갖게 됐다면......너무 일찍......" 잠시 뒤 킹쉽이 말했다. "모르겠네." "아버지는 그 애를 내쫓았을 거예요." 메리온이 조용하게 말했다. 두 남자가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긴 소파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벽난로 선반 위에 비스듬하게 걸린 거울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갠트가 킹쉽에게 말했다. "그 애를 내쫓지는 않았을 걸세."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아버지는 내쫓았을 거예요." 메리온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킹쉽은 창문 쪽으로 돌아섰다. "글쎄 -- " 그가 이윽고 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결합한 부부는 결혼의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갠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로 그겁니다." 그가 말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가 그녀를 죽인 겁니다. 그녀는 분명히 그에게 선생님에 대해서 말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그녀와 결혼한다고 해도 돈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안 거예요.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가 곤경에 빠져들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는 두 번째 음모를 꾸미기로 결정한 겁니다. 엘렌과. 그러나 그녀는 도로시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사실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엘렌과 파웰을 죽여야 했던 거죠. 그리고 나서 세 번째 시도를 한 겁니다." "버드!" 메리온이 말했다. 그녀는 마치 자기의 약혼자가 식사 예절이 좋지 않다고 핀잔을 들은 것처럼 멍청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잠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킹쉽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난 그것을 믿네." 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난 그걸 믿어......" 그러나 그가 갠트에게 돌아섰을 때 그의 눈에서는 확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자네는, 그가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을 끄집어냈네. 그렇지만 우리는 그가 도로시를 알았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그가 그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은 젖혀두고라도 말일세.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하네." "기숙사에 있는 여학생들 말입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 중 몇 명은 그녀가 누구와 같이 다녔었는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겁니다." 킹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시켜 그곳에 가서 알아보도록 하지." 갠트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지금은 방학이기 때문에 가까스로 그걸 말해 줄 수 있는 여학생을 찾아낸다고 해도 그땐 너무 늦게 됩니다." "너무 늦다니?" "그가 결혼식이 취소된 것을 알면 -- " 그는 메리온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 "그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기다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를 찾아낼 거야." 킹쉽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리고 어쩌면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감쪽같이 사라질 테니까요." 갠트는 깊이 생각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도로시는 일기 같은 것을 쓰지 않았나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킹쉽은 조각이 새겨진 테이블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갠트는 메리온을 보았다. 그녀는 앞으로 엎드려서 바닥에서 종이조각들을 줍고 있었다. "언제?" 킹쉽이 물었다. 그녀는 종이조각들을 왼손에 놓고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 옆에 있는 긴 소파 위의 두 권의 팜플렛에 종이조각을 올려놓았다. "고맙소." 킹쉽이 말했다. "정말 고마워." 수화기 놓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갠트는 고개를 돌려 킹쉽을 쳐다보았다. 그는 굳은 분홍빛 얼굴로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리처드슨 양이네." 그가 말했다. "선전용 간행물이 1950년 10월 16일에 윈스콘신 컬드웰 대학에 있는 버튼 콜리스에게 보내졌다는군." "바로 그가 엘렌을 만나기 시작했을 때가 틀림없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킹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건 두 번째였네." 그가 천천히 말했다. "1950년 2월 6일 아이오와 주 블루 리버에 있는 버튼 콜리스에게도 보내졌어." 갠트가 말했다. "도로시......" 메리온이 신음소리를 냈다. 갠트는 메리온이 2층으로 올라간 뒤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우리는 엘렌과 똑같은 배에 타고 있는 겁니다." 그가 말했다. "경찰이 도로시의 유언장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의심과 상황에 의한 간접증거들 뿐입니다." 킹쉽은 팜플렛 하나를 집어들었다. "내가 확실하게 할 거네." 그가 말했다. "경찰은 파웰의 집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나요? 지문이나 헝겊 쪼가리 같은 거라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킹쉽이 말했다. "파웰의 집에서도, 엘렌이 묵은 그 호텔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네." 갠트가 한숨을 쉬었다. "비록 선생님이 경찰을 시켜 그를 체포케 할 수 있다고 해도, 법과대 신입생이라도 단 5분 안에 그를 석방시킬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그를 잡을 거네." 킹쉽이 말했다. "먼저 상황을 확실히 해두고서 말일세." 갠트가 말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그녀에게 그 유서를 쓰게 했으며, 또 그가 파웰과 엘렌을 쏜 권총이 어디에 있는지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도 토요일이 되기 전에." 킹쉽은 팜플렛 표지의 사진을 보았다. "제련소......" 그가 비통하게 말했다. "우린 내일 그곳에 가기로 했네. 나는 그에게 두루 구경시켜 주고 싶었지. 메리온도. 그 애는 전에는 전혀 회사에 관심이 없었어." "그녀가 결혼이 취소됐다는 것을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킹쉽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팜플렛을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그녀가 결혼이 취소됐다는 것을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 -- " 킹쉽이 말했다. 그는 다시 팜플렛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사람을 잘못 골랐어." 그는 여전히 제련소 사진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을 택했어야 하는 건데." 제 12 장 지금까지 이렇게 완전한 날이 있었는가? 그것이 그가 알고 싶은 전부였다 -- 있었는가? 그는 비행기를 보고 미소지었다. 비행기도 자기만큼 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는 활주로 앞으로 죽 뻗어 있었다. 반짝이는 탄탄한 몸체에 옆쪽에 구릿빛으로 새겨진 킹쉽이라는 글씨와 왕관 모양의 상품 마크가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상업 비행기가 서 있는 저 아래쪽의 부산스러운 광경을 보고 씩 웃었다. 그곳에는 쇠울타리 뒤쪽으로 승객들이 말 못하는 짐승처럼 떼를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마음대로 탈 수 있는 개인 비행기를 가질 수는 없겠지! 그는 짙푸른 하늘을 보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나서 가슴을 활짝 펴자, 숨이 위로 치솟아오르면서 행복에 겨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다, 그는 공정하게 결정을 내렸다. 정말로 결코 이런 완전한 날은 없었다. 없었다고? 그래 없었어! 결코 없었어? 글쎄......지금까지는 거의 없었지! 그는 돌아서서 길버트와 설리번의 가극을 흥얼거리며 격납고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메리온과 레오는 입을 꼭 다물고 그늘 속에 서 있었다. "저도 가겠어요!" 메리온이 고집을 부렸다. "뭐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까?"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면서 미소를 지었다. 레오가 돌아서서 가버렸다. "무슨 일이야?" 그는 메리온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좀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하세요." 그녀의 시선은 뒤쪽에 있는 비행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부의 신경과민인가?"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좋지 않은 것뿐이에요." "오." 그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들은 잠시 비행기 연료 탱크를 정비하는 두 명의 기술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레오에게로 갔다. 이런 날에는 모든 걸 다 메리온에게 맡기자. 그래, 그게 아마 좋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생활의 변화를 위해서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갈 준비가 다됐나요?" "잠시만 기다리게." 레오가 말했다. "데트웨일러가 오기로 되어 있어." "누구요?" "데트웨일러. 우리 회사 이사의 아들일세." 몇 분 뒤에 금발에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상업용 격납고 쪽에서 다가왔다. 그는 긴 턱과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메리온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레오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킹쉽 씨?" "잘 있었나, 데트웨일러." 그들은 악수를 했다. "내 사위가 될 버드 콜리스일세. 버드, 이쪽은 고든 데트웨일러일세." "처음 뵙겠습니다." "글쎄요 -- "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 그는 압착 롤러처럼 악수를 했다 -- "당신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예, 무척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 남자의 천성이 그런 건지, 아니면 레오와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하는 탓에서 이러는 건지도 모른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준비됐습니까?" 한 남자가 비행기 안에서 물어보았다. "준비됐네." 레오가 말했다. 메리온이 앞으로 나왔다. "메리온, 너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 그러나 그녀는 레오를 지나서 세 계단 올라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데트웨일러가 메리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가 말했다. "먼저 타게, 버드." 그는 터벅터벅 계단 세 개를 올라가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6인승 비행기로, 내부가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는 날개 뒤쪽의 오른쪽 끝자리에 앉았다. 메리온은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레오는 데트웨일러 건너편의 맨 앞자리를 잡았다. 엔진이 덜컹거리며 부르릉거리기 시작하자 버드는 안전벨트를 맸다. 이런 것까지 청동 버클로 되어 있다니!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창문 너머로 울타리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기를 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출발......레오가 아직도 의심하고 있다면 제련소로 그를 데려갈까? 아니야! 뭐라고, 아니라고? 그래, 아니야, 결코! 그는 몸을 구부려 메리온의 팔꿈치를 탁 치고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지만, 몸이 안 좋기 때문인지 곧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오와 데트웨일러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레오 씨?" 그는 유쾌하게 물어보았다. 레오가 돌아보았다 -- "세 시간. 바람이 좋다면 덜 걸릴 걸세." -- 그리고 다시 데트웨일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는 어느 누구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는 땅을 쳐다보았다. 벌판 가장자리에서 비행기가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엔진이 더 높이 컹컹거리며 출력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청동 버클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련소로 가는 길......제련소! 공장! 재산의 원천지 ! 도대체 왜 어머니는 비행기를 무서워할까? 오, 어머니를 데려왔더라면 굉장했을 텐데 ! 비행기는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앞으로 날았다. 그가 그 지점을 첫번째로 알아맞추었다. 멀리 앞쪽에서 눈(雪) 위에 작고 검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집단 -- 구불구불한 철로의 줄기 끝에 달린 지선(支線) 같은 작고 시커먼 집단. "저것이 그것일세." 그는 레오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메리온이 통로를 건너와 그 앞자리에 앉는 것도 겨우 알아차렸다. 그의 입김에 창문이 부옇게 흐려졌다. 그는 그것을 깨끗이 닦았다. 그 작은 지선이 비행기의 날개 밑으로 사라졌다. 그는 기다렸다. 비행기가 낮게 내려갈 때, 그가 침을 삼키자 귓속에서 꼴깍 소리가 났다. 제련소가 날개 밑으로 미끄러져 나오면서 그의 바로 아래쪽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직선으로 죽 늘어선 갈색 지붕이 여섯 개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연기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건물들이 태양 아래에서 거대하게 그림자도 없이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주차장이 갑옷의 부스러기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선로가 그러한 모습을 둥그렇게 에워싸면서 여러 갈래가 하나의 줄기로 합해졌고, 아래로는 화물열차가 기어오르는 가운데 연기가 그 뒤에서 커다란 깃털처럼 뻗어나가 있었다. 열차의 사슬이 은어색 섬광을 받아 번뜩였다. 그는 머리를 천천히 돌려 비행기 꼬리 부분으로 미끄러져 가는 제련소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에 덮인 벌판이 그 뒤를 따라 나타났다. 군데군데 집들이 보였다. 제련소가 사라졌다. 더 많은 집들이 보이고, 그 집들을 블럭으로 나누는 길이 있었다. 훨씬 더 많은 집들이 점점 가까이 보이고, 가게들과 표지판과 삑삑거리는 차들과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 공원, 입방형의 주택단지...... 비행기가 원을 그리며 기울어졌다. 지면이 기울어져 수평으로 되었다가 좀더 가까이서 지나갔고, 마침내 비행기 날개 아래로 완전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비행기가 한 차례 요동을 쳤다. 안전벨트의 버클이 그의 배를 때렸다. 그리고 나서 비행기가 부드럽게 착륙했다. 그는 청동 버클에서 하늘색 띠를 잡아당겼다. 그들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리무진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검고 깨끗하게 닦여진 주문품 패커드. 그는 데트웨일러 옆의 점프 시트(접혀지는 좌석)에 앉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여 운전사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길게 뻗어 있는 시내 중심가에서 지평선 저 멀리 하얀 언덕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의 꼭대기에서 연기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제니(아라비아 동화에 나오는 마귀)의 손가락처럼 하늘로 검게 휘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중심가를 지나자 눈이 덮인 벌판 사이로 뻗어 있는 2차선 고속도로가 나왔고, 또다시 언덕 기슭의 만곡을 감싸고 있는 아스팔트 길로 나섰다. 그 아스팔트 길은 철로가 빽빽한 지점을 덜컹거리게 하는 자갈길이 되어 왼쪽으로 돌아 철로와 나란히 언덕 중턱을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엔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기차를 추월했고, 그 다음에 또 한 량을 추월했다. 광석을 쌓아올린 무개화차에서 금속빛이 반짝거렸다. 앞쪽에 제련소가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갈색 건물들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조잡하게 몰려 있었고, 거기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은 더욱 큰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좀더 가까이 가자 그 건물이 솟아 올라오면서 분명하게 보였다. 절벽 같은 벽들은부분부분 뇌문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매연으로 얼룩진 유리가 있는 줄이 쳐진 갈색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건물의 모양은 딱딱하고 기하학적이었다. 건물들은 비탈진 도랑과 좁은 통로 경계에 자리잡고 있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들이 다시 합쳐졌고, 그들 사이로 하늘이 불쑥 튀어나온 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그것들은 하나의 덩어리 모양이 되었으며, 커다란 폐선(廢船)이 연기가 치솟는 거대한 공원의 성당 안으로 더 큰 폐선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산더미처럼 나타났다가, 갑자기 리무진이 방향을 바꾸자 옆으로 휩쓸려 지나가 버렸다. 차가 낮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섰다. 문 앞에는 짙은 회색 양복에 호리호리하고 머리가 하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또 점심식사 시간이라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창밖으로는 회갈색의 흙더미에서 반짝거리는 청동을 제련시키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는 창문에서 눈을 떼어 방을 살펴보고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크림 치킨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조를 맞춰주기를 바라면서 좀더 빨리 먹기 시작했다. 신경을 써서 옷을 입은 하얀 머리의 남자가 제련소 지배인인 오토라는 것을 알았다. 레오가 버드를 소개해 주자, 오토는 그들을 회의실로 데리고 가서 부족한 점들을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긴 테이블 끝의 한쪽이 거의 드러나 보이는 테이블보에 대해서까지 웃으며 해명했다 -- "여기는 뉴욕의 사무실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 그리고 차가운 음식과 미지근한 포도주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해명해 주었다 -- "대도시처럼 시설이 잘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토는 뉴욕 사무실로 옮겨 가고 싶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수프를 다 먹고 나서 그는 청동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그것은 당국의 경감조치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가끔씩 그는 청동을 '붉은 금속'이라고 말했다. "콜리스 씨 -- "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데트웨일러가 테이블 건너에서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조심해서 드십시오."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제 음식에서 뼈 하나가 나왔거든요." 버드는 거의 다 먹은 그의 접시를 흘끗 쳐다보고 데트웨일러에게 미소를 보냈다. "제련소를 빨리 보고 싶어서요." 그가 말했다.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데트웨일러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음식에 뼈가 있었다고요?" 오토가 물었다. "이런 여자가 있나! 내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이곳 사람들은 심지어 닭 하나도 제대로 요리하지 못한다니까요." 그들은 왼쪽의 갈색 건물을 지나, 아스팔트 구내를 건너 제련소 본 건물로 갔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코트를 벗은 채 앞에서 서둘러 걷고 있었으나, 그는 이 순간의 기분에 황홀해 하며 뒤에 처져 있었다. 그는 원광(原鑛)을 실은 기차가 건물 왼쪽의 강철 벽 뒤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른쪽에서 기차 하나가 짐을 싣고 있었다. 크레인이 청동을 차 안으로 옮겼으며, 단단한 불꽃 같은 거대한 사각 석판도 각각 300 킬로그램은 될 것 같았다. 그는 하늘로 점점 더 치솟아 올라가는 괴물 같은 갈색의 형태를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 나쁜 피를 빨아들여 좋은 피로 뿜어내는 미국 산업의 거대한 심장! 그는 거의 그 안에 들어갈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 서서 들끓는 힘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치솟아 있는 강철 벽 밑에 있는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오토가 현관 안에서 손짓을 하며 웃고 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애인에게 가듯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성공은 보장된 것이다! 약속된 것이다! 팡파르가 울려야 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팡파르를 울려라 ! 요란한 휘파람 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어두운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휘파람 소리가 다시 한 번 날카롭게 울렸다. 마치 정글 속의 새소리처럼. 제 13 장 그는 쇠사슬을 쳐놓은 좁은 통로에 서서, 마치 거대한 붉은 나무 기둥이 서 있는 숲처럼 그 앞에 점점 작아지며 배열되어 있는 거대한 원통 모양의 용광로들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밑에서 몇몇 남자들이 알 수 없는 제어기를 조절하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가 뜨겁고 유황 냄새가 났다. "노상(爐床)이 여섯 개 있죠. 각 용광로에 하나씩." 오토가 설명해 나갔다. "원광은 위에서 들어옵니다. 가운데 굴대에 달려 있는 회전 벨트에 의해서 아래로 천천히 노상에서 노상으로 회전하면서 유황이 제거되는 거죠." 그는 주의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놀라움을 나타내려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단지 그의 오른쪽에 있는 메리온만이 하루 종일 그랬듯이 굳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레오와 데트웨일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버지와 데트웨일러는 어디 갔지?"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 보여줄 게 있다고 하셨거든요." "오." 그는 다시 용광로 쪽을 보았다. 레오가 데트웨일러에게 보여줄 거란 게 무엇일까? "얼마나 있습니까?" "용광로 말입니까?" 오토는 입술 위쪽에 접힌 손수건을 갖다대며 땀을 닦았다. "쉰네 개." 쉰네 개! 오, 하나님! "하루에 얼마나 많은 원광이 그 용광로를 통과합니까?" 그가 물었다. 굉장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한 가지에 깊은 흥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굉장히 많은 질문을 해댔고, 오토는 황홀해 하는 그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메리온이 뒤에서 보이지 않게 따라오는 동안 두 사람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건물에는 더 많은 용광로가 있었다. 벽돌 벽으로 된 것, 편편한 것, 30 미터가 넘는 것 등등. "반사로입니다 -- " 오토가 말했다. "뜨겁게 달궈진 용광로에서 나오는 원광에는약 10퍼센트의 청동이 들어 있지요. 여기에서 그것을 용해하는 겁니다. 가벼운 광물질들은 슬래그(용해된 쇠녹)처럼 날아가 버리고, 철과 청동만이 남게 되죠 -- 여기에서는 그걸 '매트'라고 부르죠 -- 청동이 40퍼센트 들어 있습니다." "연료는 뭘 사용합니까?" "가루 석탄을 사용합니다. 남은 열은 전력을 일으키는 데 사용되지요." 그는 이 사이로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토가 물었다. "놀랐습니까?" "굉장하군요." 버드가 말했다. "정말 굉장한데요." 그는 아래로 끝없이 뻗어 있는 용광로를 바라보았다. "저것을 보고 있으니 이곳이 얼마나 위대한 곳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 " 오토는 주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전체 제련 과정 중에서 가장 볼 만한 부분일 겁니다." "오, 저런!" "전로(轉爐)들입니다." 오토는 큰소리로 말했다. 건물은 사람들과 기계들이 내는 천둥 같은 요란한 소리를 견디고 있는 거대한 강철 조개 같았다. 청동빛 연기가 어둡고 위로 높이 치솟은 지붕의 창문에서부터 크레인과 트랙, 그리고 좁은 통로를 거쳐 기둥처럼 내려오는 노랗고 파란 햇빛 광선 주위를 허우적거리며 저 멀리까지 덮어버렸다. 건물 끝 근처의 양쪽으로 마치 거대한 강철통 같은 검은색 원통형의 용기들이 연이어 여섯 개 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철로가 깔린 플랫폼 위의 일꾼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각 용기들의 맨 위쪽에 입구가 있었다. 그곳에서 불꽃들이 뿜어져 나왔다. 노란색, 주황색, 빨강색, 파랑색 불꽃이 머리 위의 깔대기 모양의 굴뚝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올라갔다. 전로 하나가 그것을 받치고 있던 톱니 롤러에서 앞으로 돌았다. 그러자 응고된 금속들이 달라붙은 거칠거칠한 둥그런 입구가 옆에 붙어 있었다. 반짝이는 목구멍에서부터 액화가 돌진해 나와서는 바닥에 있는 거대한 도가니 안으로 부어졌다. 전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굴렀다. 그것의 입에서는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도가니의 이음쇠가 올라가서 뭉뚝하면서 거대한 고리에 엇물려 있었고, 받침에서는 열두 개의 케이블이 흔들리지 않도록 전로보다 더 높이 좁은 통로의 중앙 스핀보다 더 높게 올라가서 까마득한 지붕 밑의 레일 트랙에 달려 있는 때묻은 운전대 밑으로 올라가 있었다. 케이블들이 줄어들었다. 도가니가 천천히 무중력 공중부양처럼 들어올려졌다. 그것은 전로보다 더 높이 땅에서 약 7 미터 높이까지 올려졌고, 그리고 나서 운전대, 케이블, 도가니는 건물 북쪽 끝에 있는 청동빛 연기 속으로 물러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다! 심장 중의 심장! 버드는 홀린 듯한 눈으로 떨어지고 있는 도가니 위에서 가물거리는 공기의 열기둥을 따라갔다. "슬래그입니다." 오토가 말했다. 그들은 두 개의 전로 둑 가운데 중간 길과 바닥에서 몇 피트 올라온 남쪽 벽에 이어져 있는 철로가 깔린 플랫폼에 서 있었다. 오토는 손수건을 이마에 갖다댔다. "반사로에서 용해된 매트는 이 전로 안으로 쏟아집니다. 실리카가 첨가되어, 뒷면에서 파이프를 통해 압축된 공기가 안으로 넣어집니다. 그러면 불순물이 모두 산화되지요. 다시 말해서, 슬래그가 굳어져서 밖으로 쏟아지는 겁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매트가 많이 첨가되면 될수록 슬래그는 더 많이 굳어지지요. 그리고 청동은 점점 더 풍부해져서 다섯 시간 뒤에는 순도가 99퍼센트가 됩니다. 그 다음에 그것은 슬래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밖으로 쏟아져 나오죠." "금방 청동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까?"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로는 엇물리는 식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청동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보고 싶군요." 버드가 말했다. 그는 전로 하나가 오른쪽으로 슬래그를 쏟아내는 것을 보았다. "왜 불꽃들 색깔이 다르죠?" 그가 물었다. "불꽃의 색깔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따라서 변합니다. 그것으로 기사들은 안에서 어떤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내죠." 그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버드가 고개를 돌렸다. 레오가 메리온 옆에 서 있었다. 데트웨일러는 문 옆의 벽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자네 아주 관심이 많은 모양이로군?" 레오가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굉장합니다, 레오 씨!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저기에서 청동을 쏟아내려고 하고 있군요." 오토가 큰소리로 말했다. 크레인이 왼쪽에 있는 전로 하나 앞에다 도가니보다 더 커다란 쇠통을 내려놓자, 그 안으로 슬래그가 쏟아졌다. 그것의 옆면은 가파르고 사람 키만한 높이에 7㎝ 두께가 되는 육중한 회색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테두리는 직경이 2 미터는 될 것 같았다. 전로의 거대한 실린더가 제자리에서 돌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이 그 응고된 입구에서 터져나왔다. 그것이 멀어지면서 분화 같은 빛이 안쪽에서 뿜어져 나와 흰 베일의 연기를 토하고,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작열하는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반짝거리며 거대한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용해되어 흐르는 것이 전로와 주조용 용기 밑바닥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서 굴대처럼 반짝였다. 전로가 좀더 돌려졌다. 새로운 늑재(肋材)들이 굴대 밑에서 유동적으로 뒤틀리더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주조용 용기 안에서는 용액의 표면이 천천히 올라오면서 나타났고, 꾸불거리는 연기의 흐름이 온통 뒤덮였다. 고약한 청동 냄새가 공기중으로 올라왔다. 전로가 뒤로 구르기 시작하자 스팀 굴대는 뒤틀리면서 얇아졌다. 용액의 가는 흐름도 없어지고, 마지막 몇 방울이 실린더의 돌출된 부분에 떨어져서 시멘트 바닥으로 불꽃이 튀었다. 주조용 용기에서 나오는 연기들도 엷은 안개처럼 되었다가 사라졌다. 가장자리에서 몇 피트 올라와 용해된 청동의 표면은 반짝이는 깊은 바다 같은 녹색의 원반처럼 보였다. "초록색이네요." 버드가 놀라면서 말했다. "식으면서 원래의 색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오토가 말했다. 버드는 쉴새없이 소용돌이치는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거품이 생겨 부풀어 올라갔다가는 표면에서 끈적끈적하게 터져버렸다. "무슨 일이냐, 메리온?" 그는 레오가 묻는 소리를 들었다. 주조용 용기 위로 마치 셀로판지가 흔들리듯이 뜨거운 공기가 흔들렸다. "뭐가요?" 메리온이 말했다. 레오는, "얼굴색이 안 좋구나." 하고 말했다. 버드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메리온은 평소보다 그렇게 창백해 보이진 않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창백하구나." 하고 레오가 말하자, 데트웨일러도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뜨거운 증기 같은 것 때문일 거예요." 메리온이 말했다. "증기 -- " 레오가 말했다. "증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오토, 딸아이를 관리건물로 데려다 주겠소? 우리는 조금 있다 따라갈 테니까." "정말, 아버지 -- " 그녀가 피로한 듯이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 소리 마라." 레오는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 "몇 분 있다가 바로 네가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귀찮은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돌아서서 문으로 갔다. 데트웨일러가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오토는 뒤를 따라갔다. 그는 문 앞에서 멈춰서서 레오 쪽으로 돌아보았다. "콜리스 씨에게 애노드를 만드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는 버드를 돌아다보았다. "놀랄 만한 작업이죠."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 버렸다. 데트웨일러가 문을 닫았다. "애노드라니요?" 버드가 물었다. "밖의 기차에 싣고 있는 석판 말일세." 레오가 말했다. 버드는 그의 목소리에 야릇하게 기계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처럼 -- "그것이 뉴저지에 있는 정련소로 수송된다네. 전해 제련을 하기 위해서 -- " "오 -- " 버드가 말했다. "그런 과정도 있었군요." 그는 왼쪽 전로 쪽을 돌아보았다. 머리 위에서 구부러진 마름모꼴의 핸들이 크레인으로 청동이 담긴 주조용 용기를 막 들어올리려고 하는 중이었다. 열두 개의 케이블이 흔들리며 늘어나더니 갑자기 고정되었다. 주조용 용기가 바닥에서 올려졌다. 뒤에서 레오가 말했다. "오토가 좁은 통로를 보여주던가?" "아니오." 버드가 말했다. "한번 구경해 보는 게 좋을 걸세." 하고 레오가 말했다. "올라가겠나?" 버드가 돌아섰다. "시간이 있습니까?" "물론." 레오가 말했다. 사다리에 기대고 있던 데트웨일러가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가시죠." 그가 웃었다. 버드는 사다리 쪽으로 갔다. 그는 금속으로 된 사다리의 발딛는 가로대 하나를 잡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스테이플처럼 생긴 사다리의 가로대는 점점 좁아지면서 갈색 벽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는 좁은 통로의 바닥에서 직각으로 15 미터쯤 위로 불쑥 나와 있는 트랩에 초점을 맞췄다. "아주 좁은 통로로군요." 데트웨일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다리의 가로대는 따뜻했으며, 위쪽 표면은 잘 닦여 있었다. 자기 앞에서 내려가는 벽을 바라보면서 규칙적인 리듬으로 계속 올라갔다. 데트웨일러와 레오가 그의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좁은 통로에서 보게 될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어마어마한 공업력의 광경을 내려다보면...... 그는 트랩을 지나 사다리를 올라가서, 좁은 통로의 딱딱한 금속 바닥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기계들의 요란한 소리는 사라졌으나 공기는 더욱 뜨겁고, 청동 냄새도 더욱 짙어졌다. 쇠기둥 사이에 육중한 쇠사슬로 깔려 있는 비좁은 통로는 건물의 아래쪽으로 죽 뻗어 있었다. 그것은 건물 높이를 반쯤 내려가다가 끝났으며, 그곳에서 넓은 쇠 칸막이 조각에 의해 막혀졌다. 그 조각은 좁은 통로보다 3.5 미터쯤 더 넓은 것으로 지붕에서부터 바닥까지 걸려 있었다. 머리 위 양쪽으로는 크레인 트랙들이 통로와 나란히 나 있었다. 그 트랙은 좁은 통로가 막힌 부분을 지나서 건물의 북쪽으로 반 가량까지 계속되어 있었다. 버드는 허리 높이에 있는 기둥 하나를 잡고서 좁은 통로의 왼쪽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여섯 개의 전로들과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6 미터 아래의 좁은 통로에서 3 미터 바깥으로 이 건물의 저쪽 끝으로 천천히 움직여 가는, 청동이 담긴 녹색 강철통이 매달려 있었다. 연기의 망령들이 표면의 투명한 액체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쇠사슬의 들어간 부분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어서 그것을 따라갔다. 그는 주조용 용기에서 훨씬 뒤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복사열을 느낄 뿐이었다. 레오와 데트웨일러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조용 용기의 양쪽으로 여섯 가닥씩 달려 있는 케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그의 머리 위 3.5 미터 높이에 있는 운전대로 뻗어 있었다. 그는 다시 청동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많이 있을까? 몇 톤이나 될까? 값은 얼마나 나갈까? 1천 달러? 2천 달러? 3천? 4천? 5천 ? 그는 강철 벽으로 가까이 가서, 좁은 통로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양쪽으로 2 미터 정도의 거리로 갈라져서 발이 긴 T자형의 머리처럼 강철 벽의 가장자리로 이어졌다. 이제 청동이 담긴 주조용 용기가 강철 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T자의 왼쪽 날개 쪽을 돌아보았다. 1 미터 정도의 쇠사슬이 좁은 통로 끝에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모퉁이 쪽의 기둥을 잡고, 오른손은 강철 북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아주 따뜻했다. 그는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쑥 들어간 주조용 용기의 강철 벽을 자세히 보았다. "저것이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뒤에서 레오가 말했다. "제련 용광로인데, 다음에 틀 안으로 부어진다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오와 데트웨일러가 어깨를 맞대고 그 T자 길을 막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는 왼쪽에 있는 강철 벽을 두드렸다. "이 뒤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제련 용광로가 있지." 레오가 말했다. "또 물어볼 것이 있나?" 그는 두 남자의 어두운 표정에 의아해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네." 레오가 말했다. 그의 눈이 안경 뒤에서 마치 시퍼런 대리석처럼 번뜩였다. "자네는 도로시에게 어떻게 그 유서를 쓰게 했지?" 제 14 장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 좁은 통로, 제련소, 온 세상이 모든 것이 모래성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녹아 없어졌다. 그를 노려보는 대리석 같은 시퍼런 눈이 공간 속에서 그를 공포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레오가 물어보는 목소리가 격해져서 마치 쇠종 안에 있는 것처럼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잠시 뒤 레오와 데트웨일러가 다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련소에서 으르렁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강철 벽을 잡은 그의 왼손이 미끌거리고, 기둥을 잡은 오른손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리고 좁은 통로 바닥은......그러나 바닥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의 발 밑에서 닻없는 배가 파도에 출렁이듯이 흔들거렸다. 왜냐하면 그의 무릎이 -- 오, 하나님! --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 -- " 그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로시 말이오." 데트웨일러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어. 단지 돈 때문에.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한 거야.그렇게 되면 당신은 돈을 갖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그래서 당신은 그녀를 살해 했어." 그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대항하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그가 말했다. "아냐! 그녀는 자살한 거야! 그녀는 엘렌에게 유서를 보냈어! 당신도 그것을 알잖습니까, 레오!" "자네가 그 애를 속여서 그걸 쓰게 한 거야." 레오가 말했다. "어떻게......? 레오,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말해 줘야 하는 거야!"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거의 몰라요." "자네는 그 애를 전혀 알지 못했지." 레오가 말했다. "메리온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나는 그녀를 전혀 모릅니다." "방금 자네는 그녀를 거의 모른다고 말했어." "난 전혀 그녀를 모릅니다!" 레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네는 1950년 2월에 우리 회사 팜플렛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어!" 버드는 강철 벽을 꽉 잡고 있는 손을 노려보았다. "무슨 팜플렛 말입니까?" 그것은 거의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되풀이했다. "무슨 팜플렛 말입니까?"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메나세트의 당신 방 금고에서 내가 발견한 팜플렛들." 좁은 통로가 미친 듯이 기울어졌다. 금고! 오, 하나님! 팜플렛들과 그 밖의 것들? 신문기사들은? -- 그는 그것을 버렸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팜플렛들...... 하지만 메리온에 대한 목록! 오, 주여! "당신은 누구야?" 그가 폭발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남의 집에 뛰어들어서 -- " "뒤로 물러서!" 데트웨일러가 경고했다. 버드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발을 뒤로 옮기면서 다시 기둥을 잡았다. "당신 누구야?" 그가 소리쳤다. "고든 갠트."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갠트! 라디오에 나오는 그 사람, 끈질기게 경찰을 귀찮게 하던 그 사람! 도대체 어떻게 그가 -- "난 엘렌을 알았지." 갠트가 말했다. "난 당신이 그녀를 죽이기 며칠 전에 그녀를 만났어." "나는 -- " 그는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 미쳤군!" 그가 소리쳤다. "정말 미쳤어! 내가 누구를 죽였다고?" 그는 레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친구가 말하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미쳤군요! 나는 절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갠트가 말했다. "당신은 도로시와 엘렌, 그리고 드와이트 파웰을 살해했어!" "그리고 메리온도 죽이려 들겠지!" 레오가 말했다. "그 애가 그 목록을 보았으니......" 그녀가 목록을 보았다고! 오,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절대로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 도리는 자살한 거고, 엘렌과 파웰은 강도에게 당한 겁니다!" "도리?" 갠트가 그의 말을 되받았다. "나는 -- 사람들이 그녀를 도리라고 부르더군요! 나는......나는 절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단 한 명의 일본군밖에. 그리고 그건 군대에 있었을 때야."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다리를 떨고 있지?" 갠트가 물었다. "그리고 뺨 아래로 땀이 흘러내리는 이유는 뭐야?" 그는 뺨을 닦았다. 억제! 자기억제! 그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천천히......그들이 증명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어떤 것도 ! 그들은 목록에 대해서, 메리온에 대해서, 팜플렛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뿐이야 -- 좋아 -- 하지만 그들은 증명할 수 없어. 어떤 것에 대해서도......그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하나도 증명할 수 없어." 그가 말했다.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신들은 미쳤어. 두 사람 다." 그는 넓적다리에 손을 닦았다. "좋아 -- " 그가 말했다. "난 도리를 알았어. 열두 명의 다른 녀석들처럼, 그리고 나는 내내 그녀의 돈에 눈독을 들였지. 그것이 법에 걸리는 건가? 그래, 토요일에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군. 괜찮아." 그는 빳빳한 손가락으로 윗도리를 똑바로 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장인으로 갖느니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게 낫지. 자, 길을 비켜 주시지요. 나는 두 미치광이들과 이렇게 서서 이야기한다는 게 몹시 불쾌하니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2 미터쯤 떨어져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비켜 주시오." 그가 말했다. "뒤에 있는 쇠사슬을 만져봐." 레오가 말했다. "지나가게 길을 비켜 주시오." "뒤에 있는 쇠사슬을 만져봐!" 그는 돌같이 굳은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쇠사슬을 잡을 수 없었다. 단지 바라봐야만 했다. 기둥의 금속 고리가 헐겁게 C자 모양으로 구부러져서 무거운 첫번째 고리와 간신히 연결되어 있었다. "오토가 자네를 구경시킬 때 우리는 여기로 올라왔지." 레오가 말했다. "그걸 만져."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서 쇠사슬을 흔들어 보았다. 그것은 부서져 있었다. 풀어진 쇠사슬 끝이 철컥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미끄러져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철 벽에 부딪쳤다. 15 미터 아래의 시멘트 바닥이 입을 벌리고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도로시가 떨어졌던 곳만큼 높지는 않아." 갠트가 말했다. "그러나 충분해." 그는 기둥과 강철 벽을 꽉 잡은 채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발꿈치 뒤가 허공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 "당신들은 이래서는 안돼!" 그는 자신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 이유가 충분하지 않나?" 레오가 물었다. "자네는 내 딸들을 죽였어!" "나는 아닙니다, 레오! 하나님께 맹세해요, 난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도로시란 이름을 말했을 때 땀을 흘리며 벌벌 떤 이유가 뭐야 ? 그것이 지나친 농담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이며, 죄없는 사람이 반응하는 방법인가?" "레오, 죽은 우리 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맹세합니다......" 레오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는 기둥을 잡고 있던 손 위치를 옮겼다. 그 자리가 땀으로 번질거렸다. "당신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안할 거라고?" 레오가 말했다. "자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는 기둥을 가리켰다. "렌치의 입구는 헝겊으로 싸여 있어. 고리에는 아무 표시도 없고. 우연한 사고, 비참한 우연의 사고라고 알려질 걸세. 180㎝ 키의 남자가 높은 열에 시달린 낡은 철조각에 매달려 있는 쇠사슬에 발이 걸려 넘어지자 낡은 쇠조각이 구부러졌다. 비참한 사고 -- 어떻게 자네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나? 소리를 쳐서? 아무도 자네 소리를 듣지 못할 거네. 팔을 흔들어서?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정밀한 일을 하고 있고, 가령 그들이 올려다본다고 해도 연기가 끼어 있고, 너무 거리가 멀어. 우리에게 덤벼든다! 우리 중 한 사람이 밀면 자네는 끝이야." 그가 말을 멈췄다. "말해 보게. 내가 무죄방면이 되지 않겠나, 응?" "물론 -- " 그는 잠시 뒤에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네. 자네를 그냥 경찰에 넘겨주고 싶어." 그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부터 3분 동안 여유를 주겠다. 나는 배심원을 확신시킬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해. 배심원이 자네를 체포하는 데 전혀 놀라지 않고, 자네의 온몸에 쓰여 있는 죄를 볼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단 말이야." "권총은 어디에 있지?" 갠트가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 레오는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리고 시계를 보기 위해서 오른손으로 왼쪽 소매 끝을 걷어올렸다. 갠트는 옆구리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어떻게 도로시에게 유서를 쓰게 했지?" 갠트가 물었다. 강철 벽과 기둥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마비된 채로 벌벌 떨렸다. "협박하고 있군."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이 그의 말소리를 듣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당신들은 나에게 협박하고 있어 -- 나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어." 레오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시계를 보았다. 잠시 뒤에, "2분 30초." 하고 그가 말했다. 버드는 왼손으로 기둥을 잡은 채 오른쪽으로 홱 돌아서서 전로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도와줘요!" 그는 소리쳤다. "도와줘요! 도와줘요!" -- 그는 커다랗게 소리치며 기둥을 잡은 오른팔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도와줘요!" 저 아래에 멀리 있는 사람들이 마치 그림처럼 보였다. 그들의 관심은 청동을 쏟아내는 전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레오와 갠트를 돌아보았다. "알겠나?" 레오가 말했다. "당신은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거요!" "권총은 어디에 있지?" 갠트가 물었다. "권총은 없어! 난 권총을 가져보지도 못했어!" 레오가 말했다. "2분." 이 사람들은 협박하는 거야! 분명히 그런 거야! 그는 절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은 통로의 주축, 지붕, 크레인 트랙, 창문 몇 개......저 크레인 트랙! 그는 그들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천천히 오른쪽을 보았다. 전로가 뒤로 굴러 있고, 그 앞에 있는 주조용 용기는 청동으로 가득차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으며, 케이블은 위쪽 운전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주조용 용기는 곧 올려질 것이다. 지금 60 미터 떨어져 있는 운전대는 트랙을 따라 다가오면서 주조용 용기를 앞쪽으로 운반할 것이다. 그럼 운전대에 있는 사람은 -- 3.5 미터 위? 1 미터 밖으로? -- 그렇다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운전대가 충분히 가까이 올 때까지 그들을 지체시킬 수 있다면 좋겠는데 ! 주조용 용기가 올라온다...... "1분 30초 -- " 레오가 말했다. 버드는 눈을 홱 돌려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몇 초 동안 자기를 노려보는 그들의 시선을 바라보고 있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조심스럽게 오른쪽을 보았다. 그들이 그의 계획을 눈치채서는 안된다. 그래, 계획! (지금 이 순간에도 계획이라니!) 멀리에서 주조용 용기가 바닥과 좁은 통로 사이에 매달렸고, 케이블 가닥이 열기 때문에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상자 같은 운전대는 트랙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그러더니 주조용 용기를 품고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커지면서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오, 하나님! 좀더 빨리 오게 해주소서 ! 그는 그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린 협박하는 게 아니야." 레오가 말했다. 그리고 1분 뒤에, "1분." 하고 말했다. 그는 다시 보았다. 운전대가 더 가까워졌다 -- 50 미터? 40 미터? 그는 새카만 사각형의 창문 뒤로 희미한 형체를 분간할 수 있었다. "30초." 어쩜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갈 수 있을까? "말하죠." 그가 흥분해서 말했다. "도로시에 대해서 -- 말할 게 있습니다. 그녀는......" 그는 더듬거렸다 -- 그리고 나서 눈을 크게 뜨고는 말을 멈췄다. 좁은 통로 저 멀리 끝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게 있었다. 누군가가 여기로 올라오고 있다! 구세주 ! "도와줘요!" 그는 팔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여보세요! 여기예요! 도와줘요!" 희미하게 움직이는 물체는 서둘러서 좁은 통로를 따라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오와 갠트는 당황해서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잠시 뒤에 그는 그 형체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메리온. 레오가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 여기서 나가! 제발, 메리온, 내려가!"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의 뒤쪽으로 올라왔다. 그들의 단단한 어깨 위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과 휘둥그래진 눈을 내밀면서 -- 버드는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스쳐서 다리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떨리는 다리......만일 내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면......"메리온." 그가 애원했다. "이 사람들을 막아! 이 사람들은 미쳤어! 날 죽이려고 하고 있어! 제발 막아! 메리온 말이라면 들을 거야! 그 목록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어. 모든 것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어! 맹세하지만,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 " 그녀는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이유처럼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건가요?" "나는 메리온을 사랑해! 하나님에게 맹세할 수 있어! 내가 처음에 돈 때문에 메리온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지금은 메리온을 사랑해! 메리온은 내가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거야!" "어떻게 내가 알지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맹세해!" "당신은 아주 많은 것을 맹세하는군요......" 그녀의 손가락이 그들의 어깨 곡선 위로 나타났다. 핑크색 매니큐어를 칠한 길고 하얀 손가락들. 그것이 그를 밀어 떨어뜨릴 것처럼 보였다. "메리온! 안돼! 우리는......우리는 나중에......" 그녀의 손가락이 두 남자의 어깨를 눌렀다...... "메리온." 그는 간청했다. 갑자기 그는 제련소의 천둥 같은 소리와 이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오른쪽 옆으로 열기가 퍼졌다. 운전대! 그는 양손으로 기둥을 잡고 돌아다보았다. 바로 그것이 보였다! -- 6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 복부에서 케이블을 내려뜨린 채 머리 위의 트랙을 따라 삐걱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앞쪽의 입구를 통해서 회색 챙모자를 쓰고서 머리를 구부리고 있는 사람 모습이 보였다. "여봐요!" 그는 턱 근육을 세우며 큰소리로 외쳤다. "운전대에 있는 사람! 도와줘요! 이것 봐요!" 다가오는 주조용 용기에서 나오는 열기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와줘요! 운전대!" 회색 모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귀머거리인가? 바보 같은 귀머거리 자식인가? "도와줘요!" 그는 계속해서 울부짖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절망감에 울부짖으며 휘말려오는 열기를 피해서 몸을 돌렸다. 레오가 말했다. "제련소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이 저 운전대 위야." 그는 그 말을 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갠트가 그의 옆으로 움직였다. 메리온이 뒤를 따랐다. "이것들 보세요." 버드는 왼손으로 다시 벽을 잡으면서 달래듯이 말했다.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글거리는 눈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 같은 그들의 얼굴을 그는 노려보았다. 그들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왔다. 좁은 통로가 흔들리는 담요처럼 가라앉았다가 흔들렸다. 그의 오른쪽에 있던 찌는 듯한 열기가 등 쪽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노린 게 바로 그거야! 나를 협박하는 게 아니야. 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좋아요." 그가 소리쳤다. "좋아요. 그녀는 스페인 어를 해석해 달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스페인 어로 글을 써서 그녀에게 번역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 " 그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그게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들의 얼굴......가면 같은 멍청한 표정이 사라지고 -- 당황함과 메스꺼운 경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도 내려다보았다. 바지 앞쪽이 얼룩으로 새카매졌다. 그것은 오른쪽 바지 가랑이로 내려가면서 점점 옅어졌다. 오, 하나님! 일본군......그가 죽였던 일본군이......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하며 식은땀을 흘리던 그 우스꽝스런 얼굴의 남자 -- 그 사람이 바로 자기인가?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란 말인가? 대답은 그들 얼굴에 쓰여 있었다. "아냐!" 그가 소리쳤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거기에서 어른거렸다. "아냐! 나는 그 남자와는 절대 달라!" 그는 그들에게서 물러났다. 바닥의 물기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한 번 비틀거렸다.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뜨거운 공기가 그에게로 덮쳐왔다. 그는 떨어지면서 반짝이는 커다란 초록색 원판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았다. 속이 텅 빈, 끊임없이 가물거리는 원판 -- 그의 손에 딱딱한 것이 잡혔다! 케이블! 불쑥 튀어나온 강철줄에 손이 찢기고, 겨드랑이가 잡아 끌리면서 그의 몸이 아래로 한 바퀴 돌았다. 그는 팽팽한 케이블에 걸려 있는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위로 손 안에서 바늘처럼 콕콕 찌르고 있는 낡은 섬유가 보였다. 혼잡한 소리 --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여자의 비명, 위에서 나는 목소리들, 아래서 나는 목소리들. 그는 옆눈으로 자기의 손을 보았다 -- 피가 손목 안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찜통 같은 열기에 숨이 막히고 현기증이 났다. 지독한 청동 냄새가 그를 삼켰다. 그를 향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는 한쪽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손을 놔버렸다. 그가 원했기 때문에 -- 그것은 숨막힐 것 같은 공기나 손 안에서 바늘처럼 콕콕 찌르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원했기 때문에 놔버린 것이다. 바로 그가 좁은 통로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 그러나 본능이 그에게 케이블을 잡게 만들었고, 지금 그는 본능에 압도되어 있었다 -- 그의 왼손이 느슨해지며 풀어졌다 -- 그는 오른손으로 매달린 채 용광로에서 나오는 열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살짝 올렸다 -- 그의 손등에는 기둥이나 쇠사슬 같은 데에서 묻은 듯한 기름이 묻어 있었다 --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그를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 누구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그는 스스로 뛰어내렸고, 지금은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을 놓아버린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었고, 그의 무릎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 떨렸던 것은 아니다. 그가 다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무릎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 그는 오른손이 풀렸는지 바라보지 않았으나 분명히 풀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열기 속으로 떨어지고 있으니까. 케이블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환기통 안으로 떨어지는 도리처럼, 첫번째 총알을 맞은 엘렌처럼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그 사람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 그리고 갑자기 그것이 그 자신이 되었다.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왜 그는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왜? 도대체 왜 비명을 질러야 하는 것일까? 제련소의 정적을 자르는 듯한 갑작스러운 비명이 끈적거리는 청동 안에서 끝나버렸다. 주조용 용기의 다른쪽에서 초록색 판지가 튀어올랐다. 그것은 원을 그리며 바닥 아래로 떨어졌으며, 그곳에서 수백만 개의 작은 방울들이 튀었다. 그것들은 시멘트 위에서 쉬 소리를 내며 천천히 초록색에서 청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 15 장 킹쉽은 제련소에 남아 있었다. 갠트는 메리온과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비행기 안에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얼마 뒤에 메리온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에 갖다댔다. 갠트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저 그의 자백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는 변호하듯이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는 자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뭣 때문에 그가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뒤에야 그녀에게서 말이 나왔다.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는 아래로 내려뜨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군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군데군데 젖어 있는 자기의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접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그들은 킹쉽의 아파트로 갔다. 집사가 메리온의 코트를 받아들고서 말했다 -- 갠트는 그의 코트를 들고 있었다 -- "콜리스 부인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 하나님." 메리온이 말했다. 그들은 거실로 들어갔다.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콜리스 부인은 도자기 상(像)의 밑바닥을 살펴보면서 골동품 진열장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상을 내려놓고서 그들 쪽으로 돌아섰다. "아주 빨리 왔네?" 하고 그녀는 미소지었다. "재미있었어--?" 그녀는 햇빛 속으로 갠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오, 나는 당신이......" 그녀는 그들 뒤쪽의 텅빈 현관을 바라보며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는 다시 메리온을 바라보면서, 눈썹을 치켜올리고 미소 지었다. "버드는 어디에 있지?" 하고 그녀는 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