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죽음의 키스 (중) 지은이: 아이나 레벤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제 II 부 헬렌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 작가 소개 - 1920,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면서 추리문단에 혜성처럼 등장 - 1956년, 이 작품은 거드 오스왈드 감독, 로버트 와그너 주연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에서 영화화 - 1967년 공포 괴기 소설 로즈메리의 아기.(Rosemary's Baby, 1967)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드높임. - 이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 주연으로 파라마운트 사에서 영화화. - 그밖에 저서로 공상과학소설인 <이 완전한 시대(This PerfectDay, 1970)>, 괴기공포소설인 <스테포드의 아낙네들(The Stepfore Wives, 1972)> 정치공포소설인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The Boys from Brazil, 1976)> 심리 멜로드라마인<인터로크(Interlock,1958)>,뮤지컬인<성가신고 양이!(Drat!TheCat!,1965)>,공포극<베로니카의방(Veronica's Room, 1973)> 등이 있다. 제 1 장 레오 킹쉽에게 온 애너벨 코크의 편지 1951년 5월 5일 아이오와 주 블루 리버 스토다드 대학 여학생 기숙사 존경하는 킹쉽 선생님에게 신문에 났던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제가 누구인지 의아해 하시겠군요. 저는 지난 4월에 선생님의 딸인 도로시에게 벨트를 빌려줬던 여학생입니다. 저는 그녀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에요. 그 사건이 선생님에게 매우 가슴아픈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시 들춰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도로시와 제가 똑같은 초록색 옷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거예요. 그녀는 제 방에 와서 벨트를 빌려달라고 했어요. 저는 그것을 빌려줬고, 나중에 경찰이 그녀의 방에서 그것을 (제가 그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찾아냈지요. 경찰은 한 달 남짓 그것을 보관하고 있다가 제게 돌려주었는데, 그 때는 철이 지난 뒤라서 작년에는 초록색 옷을 다시 입지 않았습니다. 저는 올봄이 되어서 어젯밤에 봄옷들을 입어보았지요. 그 초록색 옷을 입어보았더니 딱 맞더군요. 그러나 벨트를 매려는 순간 저는 그것이 도로시의 벨트라는 것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답니다. 버클에 나 있는 구멍이 두 칸이나 제 허리보다 컸거든요. 도로시는 제법 날씬했지만, 저는 마른 편이거든요.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아주 말랐어요. 그리고 작년과 비해 몸무게도 줄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그 옷은 제게 꼭 맞았지요. 그러니 그 벨트는 도로시의 것이 틀림없잖겠어요? 처음에 경찰이 그것을 보여주었을 때, 저는 톱니의 금빛 도금이 벗어졌기에 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그때 우리 옷이 같은 회사 제품이기 때문에 버클도 똑같이 도금이 벗겨졌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요. 도로시가 자기 벨트가 망가지지도 않았는데 자기 것을 매지 않고 제 것을 빌려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때 저는 그녀가 단지 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제 벨트가 필요한 체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벨트가 도로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웬지 그것을 맨다는 게 우스운 일 같아요. 저는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결국 그것은 제 것이 아니라 가엾은 도로시의 것이니까요. 그것을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어리석은 행동 같아서 소포로 선생님에게 보냅니다. 그것을 보관하시든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세요. 어쨌든 올해도 이곳 여학생들은 넓은 가죽 벨트를 매니까 아직 그 옷은 입을 수 있어요. 애너벨 코크 드림 엘렌 킹쉽에게 보내는 레오 킹쉽의 편지 1951년 5월 8일 사랑하는 엘렌에게 지난번 네 편지를 받고 곧 답장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러나 일이 바빠서 부득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수요일인 어제 메리온이 저녁식사를 하러 이곳에 왔었다. 그 애는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더구나. 어제 내가 받은 편지를 그 애에게 보여주었더니 그것을 네게 보내라고 하더구나. 동봉된 편지가 있을 게다. 먼저 그것을 읽어보고, 내 편지를 읽거라. 코크 양의 편지를 읽었을 테니, 이제 내가 왜 그것을 보냈는지 설명하겠다. 메리온이 그러는데 -- 도로시가 죽고 나서 네가 그 애에게 냉담하게 대했다며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고 하는구나. 도로시가 '이야기 상대가 절실했다'는 코크 양의 유감스런 이야기가 메리온에 따르면, 그 이야기 상대가 네가 되었어야 했으며, 또 너밖에 없었을 거라고 네가 느끼고 있기 때문에 네가 쉽게 도로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구나. 비록 그 말이 메리온이 네 편지를 읽고 추측한 것일지라도, 너는 만일 도로시에 대한 네 태도가 달랐더라면 그 애가 그런 식으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을 게다. 나는 그것이 네 생각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메리온의 말을 믿는다. 작년 4월, 거론할 여지가 없는 증거인 유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도로시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일이 떠오르는구나. 너는 도로시가 자살했다면 어떻게든 네게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네가 도로시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받아들이는 데는 몇 주일이 걸렸으며, 또한 거기에 따르는 많은 책임감도 받아들였다. 코크 양에게서 온 이 편지로 보아, 도로시는 그 애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 그 여학생의 벨트를 빌리러 간 것이 확실해지는 것 같다. 그 애는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절실했던 게 아니었어. 그 애는 자기가 계획했던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거야. 그러니까 너희 둘이 지난번 크리스마스에 다투지 않았다면 먼저 너에게 갔을 거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완전히 없어진 거야. (그리고 그 애가 시무룩해 있었고 먼저 싸움을 걸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도로시 편에서 처음으로 차갑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 애가 네게 좀더 의지하려고 컬드웰로 가겠다는 것을 네가 스토다드로 가라고 한 말에 내가 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사실, 만일 그 애가 너를 따라 컬드웰로 갔다면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만일'이란 단어는 중요한 말이다. 도로시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혹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애는 그것을 선택했어. 나도 책임이 없고, 너도 책임이 없다. 아무도 도로시를 제외하고는 책임이 없어. 도로시의 행동에 대한 코크 양의 설명이 잘못된 것이니, 아직도 네 마음에 남아 있을 자책감은 모두 털어버렸으면 좋겠다. 너의 사랑하는 아버지 추신 ; 글씨가 엉망이어서 미안하구나. 편지 내용이 너무 사적인 것이어서 리처드슨 양에게 받아쓰게 할 수가 없었다. 버드 콜리스에게 보내는 엘렌 킹쉽의 편지 1951년 5월 12일 아침 8시 35분 사랑하는 버드 나는 특별열차에 앉아 콜라 한 잔과 (이 시간에 -- 우!) 연필과 종이를 놓고 흔들리는 기차 속에서 글씨를 쓰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블루 리버로 여행하는 이유에 대해서, 멀홀랜드 교수가 말한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설명하려고 해요. 오늘밤 농구경기는 미안해요. 하지만 코니나 제인이 내 대신 시합할 수 있겠고, 그러면 당신은 내 생각을 반밖에 할 수 없을 거예요. 무엇보다도 먼저 얘기하고 싶은 건 이번 여행은 충동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어젯밤 내내 그것에 대해 생각했어요. 당신은 내가 이집트의 카이로 같은 곳으로 떠났을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두 번째, 공부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이 과목마다 완전한 노트를 해놓을 테니까. 어쩌면 일주일이 더 걸리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수업을 너무 빼먹어 낙제할 거라고요? 세 번째,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러지 않고서는 잠시도 편안치 못하다니까요.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왜 내가 가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죠. 먼저 지금까지의 얘기를 간단하게 설명해야겠군요. 토요일 아침에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당신도 알겠지만 도로시는 컬드웰에 오기를 원했는데 내가 그 애를 위해 반대했어요.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확신했지요. 그런데 그 애가 죽고 나서는 그것이 내 입장만 생각한 이기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나 의심스러워졌어요. 비록 그때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집에서 나는 엄격한 아버지와, 나에게 의존하는 도로시 사이에서 많은 제약을 받아왔어요. 그래서 컬드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정말 내멋대로였어요. 처음 3년 동안 나는 꽤나 촐싹거리는 여자였지요. 맥주 파티나 빅 휠즈 등에도 많이 돌아다녔어요. 당신은 나를 잘 모를 거예요. 내가 도로시를 오지 못하게 한 이유가 그 애의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내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가 없어요. 컬드웰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지내는 그런 곳이니까요. 도로시의 죽음에 대한 내 반응에서 느낀 아버지의 판단은 (아마 간접적으론 메리온이 영향을 줬겠지만) 모두 옳아요. 나는 그 애가 자살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부분적으로 내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감정적인 의심 외에 다른 것들도 의심하고 있답니다. 예를 들면, 그 애가 내게 보낸 유서 말이에요. 그것은 그 애가 쓴 거예요 -- 그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 그런데 말투는 전혀 그 애 같지가 않아요. 말이 딱딱하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불렀어요. 그전에는 항상 '친애하는 엘렌,' 아니면 '가장 친한 엘렌'이라고 했거든요. 내가 경찰에 그것을 말했지만, 그들은 그 애가 유서를 쓸 때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평상시의 말투가 나오지 않은 것이며, 나에게 그런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그 애가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좀 이상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또 적당히 둘러댔죠. 경찰들 말은, 자살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는 고통을 동반한다는 거예요. 그 애가 지갑에 항상 가지고 다녔던 다른 물건들 (스토다드 학생증 등) 로도 충분히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 모양이에요. 내가 그들에게 그 애는 정말 자살할 애가 아니라고 말해 줬지만, 그들은 심지어 그 말에 대꾸조차 해주지 않는 거였어요. 내가 내세우는 것을 모조리 무시했죠. 그래서 내가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물론 결국은 도로시가 자살을 했으며 -- 어느 정도 나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죠. 그런데 애너벨 코크의 이야기가 맘에 걸려요. 도로시의 자살 동기가 웬지 내게 책임감을 느끼게 한단 말이에요. 요즈음 이성 있는 아이들은 임신했다고 해서 자살하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왔는데, 그 의지했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지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그러나 도로시의 임신은 다른 사람이 그 애를 거절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 그 애도 또 그 남자도. 내가 알고 있는 도로시는 절대로 섹스를 가볍게 생각하는 애가 아니에요. 그 애는 방탕한 애가 아니었어요. 그 애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그 애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고, 그리고 언젠가 그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애가 죽기 전 12월초에 도로시는 영어 시간에 만났다는 남자에 대해서 내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그 애는 자주 그 남자와 함께 외출했다고 했어요. 그 애는 크리스마스 휴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내게 말해 주었지요.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우린 서로 다투었고, 그 뒤로 그 애는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우리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는 거의 사무적인 내용의 편지만 나누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조차 몰라요.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 애가 그 편지에 썼던 게 전부예요. 그가 가을 학기에 그 애와 같은 영어강의를 들었으며, 잘생겼고, 렌 버논을 조금 닮았다는 것 -- 렌 버논은 내 사촌의 남편이에요 -- 곧, 도로시의 남자는 키가 크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는 말이죠. 나는 아버지에게 그에 대해서 말하고, 그를 찾아내어 복수를 하자고 졸라댔죠. 아버지는 도로시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그 사람이란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며, 또 혹시 증명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반대를 하셨어요. 그 애는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처벌한 거라고요 -- 아버지는 그것으로써 그 사건을 끝내셨죠. 이것이 내가 애너벨 코크의 편지가 동봉된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던 토요일까지의 일들이에요. 그래서 이젠 내가 나서서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이런 편지들은 우리 아버지가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어요 --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애너벨 코크의 이야기는 내가 괴로워하던 원인과는 관계가 멀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에 나는 이상스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만일 도로시의 벨트가 망가지지 않았다면 왜 그 애는 거짓말을 하고 애너벨의 것을 빌려갔을까요? 도로시는 왜 자기 벨트를 맬 수 없었던 걸까요? 아버지는 그 애에게 '그 애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냥 지나쳐 버리셨어요.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도로시가 죽던 날 논리에 맞지 않는 그 애의 세 가지 행동이 그 당시 나를 당황케 했으며, 그리고 아직도 그 행동들을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그 세 가지 행동은 다음과 같은 거예요. 1. 그날 아침 10시 15분, 그 애는 기숙사 건너편 가게에서 하얀 장갑을 샀어요. (가게 주인이 신문에 난 그 애의 사진을 보고 나서 경찰에 말했죠.) 처음엔 스타킹을 달라고 했는데, 다음날 밤에 있을 스프링 댄스 때문에 다 팔려서 그 애에게 맞는 사이즈가 없었어요. 그러자 그 애는 장갑을 달라고 하고는 1달러 50센트를 지불했다고 하더군요. 그 애가 죽을 때 그것을 끼고 있었지만, 그 애의 방 서랍 속에는 메리온이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사준 흠 하나 없는 예쁜 수제품 하얀 장갑이 있었어요. 그 애는 왜 그것을 끼지 않았을까요 ? 2. 도로시는 옷을 신경써서 입는 편이죠. 그 애는 죽을 때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 겉옷과는 어울리지 않게 축 늘어진 나비 리본이 달린 싸구려 흰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애 옷장 안에는 특별히 그 옷에 맞춰 입도록 마련한 깨끗한 흰 실크 블라우스가 있었어요. 왜 그 블라우스를 입지 않았을까요? 3. 도로시는 흰색과 갈색 액세서리를 달고 짙은 초록색 옷을 입었어요. 그런데 지갑에 들어 있던 손수건은 옷차림에 맞지 않는 엷은 하늘색이었어요. 그 애의 방에는 적어도 옷차림에 꼭 어울리는 손수건이 열 두 장은 있었을 텐데요. 왜 그 애는 그것들을 가져가지 않았을까요 ? 그 애가 죽었을 때 나는 그런 것들을 경찰에 말했어요. 그들은 내가 끄집어냈던 다른 문제들을 그냥 넘어갔듯이 그 일도 대강 처리해 버렸죠. 경찰은 그 애가 마음이 산란했기 때문에 평상시처럼 신경을 써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바로 그 장갑 사건이 그 애 마음이 산란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지적해 주었죠. 그 애가 직접 나가서 그것들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 만일 한 사건 뒤에 의식적인 준비가 있었다면 이 세 가지에 모두 어떤 목적이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들의 대답은, "아가씨는 자살자의 마음을 알 수 없소." 하는 거였어요. 애너벨 코크의 편지는 이 세 가지 외에 네 번째의 사실을 덧붙여 주는 거죠. 그 애는 자기 벨트가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도 애너벨의 것을 맸어요.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애는 적당한 것을 거부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을 선택한 거예요. 그 이유가 뭘까요? 토요일 내내 나는 그 문제로 머릿속 구석구석이 지근거렸어요. 내가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건지는 묻지 말아줘요. 나는 틀림없이 그런 것들에 모두 분명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 느꼈으며, 그 당시 도로시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알아내려고 해요. 물론 그것이 혀로 충치를 가려내는 식이지만 말예요. 나는 상반되는 네 항목들 사이에서 그럴 듯한 관계를 찾기 위해서 내가 겪었던 정신상태에 대해서 말해야겠군요. 그러한 생각들을 하게 된 의미와, 그 밖의 다른 수천 가지의 생각들. 그러나 어떤 것도 내게 의미를 주지 못했어요. 실제로 그 애가 입었던 구질구질한 것 가운데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하면 언제나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요. 나는 종이를 꺼내어 '장갑, 손수건, 블라우스, 벨트'라고 쓰고,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써놓았어요. 하지만 확실히 아무 의미도 없더군요. '크기, 나이, 물건 주인, 값, 색깔, 질, 구입 장소' -- 어느 것 하나 위의 네 가지 항목에 대해 아무런 특징을 나타내 주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종이를 모두 찢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자살자의 마음을 알 순 없으니까요. 한 시간쯤이 지난 뒤에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어요. 유행에 뒤떨어진 블라우스, 그 애가 그날 아침에 산 장갑, 애너벨 코크의 벨트, 엷은 하늘색 손수건...... 낡은 것, 새것, 빌려 온 것, 그리고 푸른색의 것. 그것은 어쩌면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른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을 믿지 않았어요. 도로시는 시청 건물에 갔어요. 그것이 블루 리버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려고 할 때 가는 곳이기 때문에 간 거예요. 그 애는 낡은 것과 새것, 빌려온 것과 푸른 옷가지를 입었어요 -- 감상적인 도로시 -- 그리고 그 애는 열여덟 살이 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갔던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 그런 데에는 혼자 가지 않죠. 도로시는 자기에게 임신하게 한 남자,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고, 그 애가 사랑했던 바로 그 남자 -- 그 애와 가을 학기 영어수업을 함께 들은 잘생기고 파란 눈을 가진 금발의 남자와 함께 갔던 거예요. 그는 어떻게 해서 그 애를 옥상까지 데리고 올라갔겠죠. 나는 사건이 바로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유서? 그것에는 단지, '나 때문에 당신이 불행하게 되어 정말 미안해요. 나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어요.' 라고만 쓰여 있었어요. 도대체 어디에 자살이란 말이 있어요? 그 애는 결혼 쪽을 말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애는 그렇게 성급한 절차를 밟는 것에 아버지가 실망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결혼할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지요. 그 애의 말투가 딱딱했던 것은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경찰이 말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것은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망가는 신부로서 긴장했기 때문이었을 뿐이에요. '헌것과 새것'은 내 생각을 확실하게 해주기에 충분했지만, 그것은 경찰들이 자살을 미해결 살인사건으로 재수사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어요 -- 특히 작년에 자기들을 꽤나 괴롭혔던 나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버드도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찾아서 셜록 홈즈 탐정처럼 행동하려는 거예요. 내가 의심하는 것들을 받쳐줄 만한 것이나 경찰의 관심을 끌 만한 확실한 것을 찾아내면 즉시 그들에게 맡기고 곧장 돌아가겠어요. 나는 영화 속에서 여자 주인공이 방음장치가 된 방에서 살인자를 추궁하면 그 살인자가, "그래, 내가 했어. 그러나 너는 살아서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할 거야." 하고 말하는 장면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러나 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해 하지는 마세요. 또, 우리 아버지에게 편지하지도 말고요. 아버지가 법석을 떨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이런 식으로 이 일에 뛰어드는 것이 '분별없고 충동적인' 행동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데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어요?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군요. 지금 막 블루 리버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에요. 창문으로 시청 건물이 보여요. 숙소와 일이 진행되는 과정까지도 덧붙여서 이 편지를 부치겠어요. 비록 스토다드가 컬드웰보다 열 배나 크다고 해도, 나는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그럴 듯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행운을 빌어줘요...... 제 2 장 웰시 학생처장은 번쩍이는 불그레한 얼굴에 단추처럼 동그란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목사들이 입는 검은 플란넬 옷을 즐겨 입었으며, 한쪽 가슴에는 파이 베타 카파 클럽 (성적이 우수한 미국 대학생 및 졸업생으로 조직된 모임)의 열쇠 마크를 달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어두운 예배당처럼 검은 나무와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방 한가운데는 깔끔하게 장식된 넓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학생처장은 사무실 스피커의 버튼을 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의 습관대로 침바른 입술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신에 명목상 자기가 책임맡고 있는 동안 목숨을 잃은 여학생의 언니를 만나는 데 적당하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정오를 알리는 답답한 종소리가 그 방까지 들려왔다가 커튼에 감싸여 사라졌다. 문이 열리고 엘렌 킹쉽이 들어왔다. 그녀가 문을 닫고 그의 책상으로 다가올 때, 그 학생처장은 오랫동안 젊은 사람들과 지내온 경험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말쑥했다. 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예뻤다. 숱이 많은 적갈색의 단발에 갈색 눈. 불행과 과거를 알고는 절제하는 미소...... 확고한 외모. 아마 머리가 뛰어나지는 못하더라도 노력파는 될 것이다...... 반에서 중상위권에 드는 정도 -- 그녀의 코트와 옷은 짙은 푸른기가 돌았는데, 그것은 여러 색깔로 된 옷을 입는 다른 학생들과 좋은 대조가 되었다.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였지만, 그러나 요즈음은 모두들 그렇지 않은가 ? "킹쉽 양......"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손님용 의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학생처장은 불그레한 손을 모아쥐었다. "아버지는 편안하신지요?"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숨이 가빴다. 학생처장이 말했다. "작년에...... 그분을 만났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어요......" 그녀는 딱딱한 등받이 의자에서 약간 몸을 움직였다. "저희 -- 아버지와 저는 -- 어떤 남자 -- 이 학교의 남학생을 찾으려고 해요." 학생처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동생이 죽기 몇 주 전에 동생에게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려주었거든요. 동생의 편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지난주에 우연히 그 애의 수표장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어요. 하지만 거기엔 그 애가 그 돈을 갚았다는 표시가 없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그 애에게 돈을 갚으라고 말하기에는 난처한 입장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죠." 학생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 " 엘렌이 말했다. "사실은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가 가을 학기 영어수업을 도로시와 함께 들었고, 금발이라고 말한 것은 생각나요. 선생님이 그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것은 정말 굉장한 액수였거든요......" 그녀는 깊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소." 학생처장이 말했다. 그는 마치 두 손의 크기를 비교해 보듯이 조심스럽게 포갰다. 그리고 엘렌에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도와줄 수 있지요." 그는 군인처럼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대로 있다가 사무실 스피커의 버튼을 눌렀다. "플레이트 양 -- " 하고 짧게 부르고는 버튼을 놓았다. 그는 긴 연설을 준비하는 것처럼 의자를 책상 쪽으로 바싹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고, 유능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학생처장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자기의 계획을 그려보며 엘렌 머리 너머에 있는 벽을 응시했다. 몇 분 지나서 그가 말을 꺼냈다. "도로시 킹쉽의 1949년 가을 학기 수업 카드를 가져와요. 그 학생이 어느 영어수업을 들었는지 보고, 그 반의 등록 학생들의 명단을 가져와요. 그 명단에 있는 남학생들의 서류철도 -- " 그는 비서를 쳐다보았다. "알겠지?" "예, 선생님." 그는 그녀에게 그의 지시를 반복해 보게 했다. "좋아." 그가 말했다. 그녀는 방을 나갔다. "서두르도록......" 그는 닫힌 문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엘렌에게 고개를 돌리고 만족한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답례로 미소를 보냈다. 차차 군인 같은 딱딱한 태도가 사라지고 큰아버지 같은 엄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학생처장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부드럽게 모았다. "단지 이 일 때문에 블루 리버에 온 것은 아닐 텐데?" "친구들을 만날 일이 있어서요." "아 -- " 엘렌은 핸드백을 열었다. "담배 피워도 될까요?" "물론." 그는 유리 재떨이를 그녀가 있는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도 피우니까." 하며 그는 부드럽게 허락했다. 엘렌은 그에게 담배를 권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그녀는 구릿빛 글씨로 엘렌 킹쉽이라고 쓰인 하얀 성냥갑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학생처장은 유심히 그 성냥갑을 바라보았다. "돈 문제에 대해서 무척 철저하군요." 하고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양심적이라면 -- " 그는 구리로 만들어진 레터 오프너 (편지 봉투 자르는 칼)를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지금 실내경기장과 체육관을 새로 짓기 시작했소. 그런데 기부금을 내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요." 엘렌은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버지께서 기부금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고 학생처장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학생 동생을 위한 기념비......"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보겠어요." "그래 주겠소? 정말 고마워요." 그는 레터 오프너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 기부금엔 세금이 공제되지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몇 분 뒤에 비서가 마닐라 종이로 된 서류 뭉치를 가지고 들어와서 학생처장 앞에 놓았다. "영어 수강생은 51명이었으며 -- " 그녀가 말했다. "여섯 반에 남학생은 열일곱 명이었어요." "좋아요." 학생처장이 말했다. 비서가 나가자, 그는 의자를 바로 하고 손을 비비며 다시 군인 같은 태도로 돌아갔다. 그는 서류 겉장을 열고 수강신청서가 나올 때까지 내용물을 죽 넘겼다. 그 종이의 한쪽 구석에는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검은 머리." 그는 그 종이를 왼쪽에 놓았다. 그가 그것을 모두 보고 나자, 골라낸 서류 더미가 두 개 생겼다. "검은색 머리가 열두 명, 연한 머리색이 다섯 명인데." 하고 학생처장이 말했다. 엘렌은 앞으로 몸을 숙였다. "도로시는 그가 아주 잘생겼다고 했어요......" 학생처장은 다섯 장의 서류를 책상 가운데로 밀어놓고는 맨 위에 있는 것을 열었다. "조지 스페이서 -- "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 스페이서를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수강신청서를 집어들어 엘렌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의 얼굴은 턱이 없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는 두꺼운 안경을 쓴 허약해 보이는 학생이었다. 세번째는 쉰다섯 살에, 머리가 금발이 아니라 백발이었다. 지갑을 잡고 있는 엘렌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학생처장은 네 번째 서류를 펼치고, "고든 갠트." 하고 말했다. "이런 이름과 비슷하지는 않았소?" 그는 수강신청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금발에 의심할 바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에 반짝이는 눈, 길고도 굳은 턱, 남자다운 미소.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예, 바로 그 사람이......" "혹시 드와이트 파웰일지도 모르겠군." 학생처장이 다른 손으로 다섯 번째 수강신청서를 내밀며 말했다. 다섯 번째 사진은 각진 얼굴에 뾰족한 턱과 엷은색 눈을 가진 아주 성실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어떤 이름이 귀에 익소?" 하고 학생처장이 물었다. 엘렌은 이 사진과 다른 사진을 힘없이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으며 잘생겼다. 그녀는 학적과 건물을 나와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돌계단 위에 멈춰섰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지갑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학생처장의 메모 수첩에서 찢어낸 종이쪽지를 들고 있었다. 두 명......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뭐 상관없다. 두 사람 중에서 그 남자를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를 지켜볼 것이다. 어쩌면 그를 만날지도 모르지 -- 물론 엘렌 킹쉽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노려보는 그 시선을 향해 도전하리라. 살인자에게는 분명히 표시가 나는 법이다. (그는 살인자야. 그게 틀림없어.) 그녀는 발길을 재촉하면서 손 안에 든 쪽지를 바라보았다. 고든 C. 갠트 웨스트 26번가 1312번지 드와이트 파웰 웨스트 35번가 1520번지 제 3 장 그녀는 캠퍼스 건너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서 그저 습관적으로 서둘러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통 바쁜 생각들로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들의 친구부터 접근해 볼까? 이것 참,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친구들을 알아내고, 그들에게 접근해서 작년에 그의 동정에 대해 알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낸다? 시간, 시간, 시간이...... 만일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블루 리버에 머무른다면 버드는 아마 아버지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그녀는 조급한 생각에 손가락을 탁 퉁겼다. 누가 고든 갠트와 드와이트 파웰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을까? 그들의 가족, 만일 그들이 다른 지방 출신이라면 하숙집 아주머니나 같은 과 친구들 -- 그들의 가까운 사람들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성급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시간은 절약할 수 있겠지...... 그녀는 여전히 손가락을 퉁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뒤 그녀는 반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탁자에서 일어나 전화 박스로 갔다. 그녀는 급히 얄팍한 블루 리버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하지만 갠트도, 35번가의 파웰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이 전화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면 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안내에 전화를 걸어 웨스트 26번가 1312번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2-2014 -- "여보세요?" 무뚝뚝한 중년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엘렌은 침을 삼켰다. "고든 갠트 있어요?" 잠시 뒤, "누구세요?" "친구인데, 집에 있나요?" "없어요." 그녀는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지금 전화받으시는 분은 누구시죠?" "집주인이에요." "언제쯤 돌아올까요?" "오늘밤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귀찮은지 그 여자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리고 찰칵 하고 전화를 끊는 소리가 났다. 엘렌은 끊긴 수화기를 쳐다보며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는 것이다. 어디에 갈까?......주인집 여자와 이야기해 보면 갠트가 도로시와 다녔던 그 남자인지를 알아낼 수도 있겠지. 혹시 아니라면 파웰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셈이다. 그 주인집 여자와 이야기를 하자...... 그런데 무슨 구실로? 아무 구실이나 만들어내지 뭐! 주인집 여자가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 비록 주인집 여자가 갠트에게 이야기하면 금방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이 나겠지만. 그가 친구나 친척인 체하는 이상한 질문자에게 당황해 한다면, 그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이 맞을 것이다. (A) 그는 도로시를 죽이지 않았으므로 이상한 질문자에 대해 당황해 할 것이다. 아니면 -- (B) 그가 도로시를 죽였다 -- 그러면 어떤 여자가 그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몹시 불안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안은 그녀의 계획에 별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나중에 그를 알게 된다고 해도 그는 주인집 여자에게 질문을 한 여자와 자기를 연관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불안은 도리어 그를 긴장하게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배신하기 쉽도록 함으로써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요행을 바라지 않고 이 도시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 그러면 그것은 그녀의 의심을 경찰에게 확인시키는 데 아주 멋진 이유가 될 것이다. 경찰이 수사를 하게 되면 증거를 찾아낼 수 있겠지...... 그래, 정면으로 곧장 뛰어들자. 너무 성급한 행동인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했을 때 곧바로 실행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1시 5분, 전화를 건 뒤 곧바로 찾아가서는 안되지. 주인집 여자가 두 가지 일을 연관시켜 의심할지도 모를 테니까. 억지로 의자에 다시 앉은 엘렌은 여종업원의 눈치를 보고는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2시 15분에 그녀는 웨스트 26번가의 1300번지 블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겨울이 지났는데도 아직 거칠거칠한 갈색 잔디가 돋아 있는 뒤쪽으로, 생기없어 보이는 2층집들이 자리잡고 있는 조용하고 우중충한 거리였다. 낡은 포드 자동차와 시보레 자동차 몇 대가 길가에 죽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 몇 대는 아주 낡았고 몇 대는 새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밝은색의 페인트가 어설프게 칠해져 있었다. 엘렌은 태연한 체하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걸었다. 구두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대기에 울려퍼졌다. 고든 갠트가 사는 1312번지는 모퉁이에서 세 번째 집으로 겨자색이 칠해져 있었으며, 갈색의 창틀은 썩은 초콜릿색으로 보였다. 잠시 그 집을 쳐다본 뒤, 엘렌은 죽은 잔디 한가운데로 난 깨진 콘크리트 길을 따라 현관으로 갔다. 그녀는 한쪽 기둥에 붙어 있는 우체통에서 문패의 이름을 읽었다. 미나 아퀴트 부인 --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초인종은 꽤 오래 된 종류로, 문 가운데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평평한 모양의 금속 제품이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는 빠르게 초인종을 두 번 눌렀다. 집안에서 초인종 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울렸다. 엘렌은 잠시 기다렸다. 이내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집안에서 나온 그 여자는 말처럼 긴 얼굴 위로 잿빛 고수머리가 흘러내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사람이었다. 불그레한 눈은 촉촉해 보였으며, 현란한 무늬의 옷을 각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엘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시죠?" 무뚝뚝한 중서부 출신의 전화 목소리 그대로였다. "아퀴트 부인이시죠?" 엘렌이 말했다. "그런데요?" 그 여자는 고르지 못한 이를 모두 드러내 보이며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자 엘렌도 따라 웃었다. "전 고든의 사촌이에요." 아퀴트 부인의 가느다란 눈썹이 올라갔다. "그의 사촌?" "오늘 제가 올 거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글쎄, 못 들었어요. 사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 한마디도." "이상하네요. 제가 들르겠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저는 시카고로 가는 길이에요. 그래서 그를 만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요.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 " "편지를 언제 했죠?" 엘렌은 주춤했다. "그저께, 토요일에요." "아." 다시 한 번 미소가 떠올랐다. "고든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가기 때문에 10시까지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해요. 아가씨 편지는 아마 지금 그의 방에 있을 거예요." "아, 예......" "그는 지금 여기 없는데 -- " "잠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엘렌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정거장에서 전차를 잘못 타서 열 블럭이나 걸어왔거든요." 아퀴트 부인은 집안 쪽으로 한 발자국 발을 들여놓았다. "물론, 자, 들어와요." "정말 감사합니다." 엘렌이 문턱을 넘어 쾨쾨한 냄새가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자 현관문이 닫히고 희미한 불이 켜졌다. 계단이 오른쪽 벽을 따라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왼쪽에는 거실쪽으로 통하는 아치형의 복도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듯한 딱딱한 모양의 방이 있었다. "아퀴트 부인?" 집 뒤에서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엘렌 쪽으로 돌아보며, "부엌에 앉아도 되겠지요?" 라고 말했다. "그럼요." 엘렌이 말했다. 아퀴트 부인의 이빨이 다시 빛났다. 엘렌은 그 큰 몸집을 따라 현관을 내려가며 이렇게 친절한 여자가 왜 전화에서는 그렇게 신경질적이었는지 의아해 했다. 부엌은 집의 바깥 부분과 똑같은 겨자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곳 중앙에는 사기로 덮인 하얀 탁자가 있었으며, 그 위에는 글자 수수께끼 놀이 기구가 한 무더기 놓여 있었다. 나이가 든 대머리 남자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탁자에 앉아서 술병에 남아 있는 것을 치즈를 담았던 꽃무늬 병에 붓고 있었다. "옆방에 사는 피시백 씨예요." 하고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글자 맞추기를 하고 있었어요." "한 단어에 5센트지." 그 노인이 엘렌을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올리며 덧붙였다. "이쪽은 미스......" 아퀴트 부인은 기다렸다. "갠트예요." 엘렌이 말했다. "고든의 사촌인 갠트 양이에요." "처음 뵙겠수." 피시백 씨가 말했다. "고든은 좋은 청년이지." 그는 안경을 내리고는 눈을 위로 치켜떴다. "당신 차례예요." 그가 아퀴트 부인에게 말했다. 그녀는 피시백 씨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아요." 그녀는 엘렌에게 빈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실 것 좀 드릴까?" "아니, 괜찮아요." 엘렌이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코트를 벗어 의자 뒤에 걸쳐놓았다. 아퀴트 부인은 글자들을 올려놓는 나무 눈금 고리의 비어 있는 열두 칸을 바라보았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캘리포니아." "고든이 서부에 친척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아니에요. 그곳에는 잠깐 머물렀던 것뿐이에요. 저는 동부 태생이에요." "오." 아퀴트 부인은 피시백 씨를 쳐다보았다. "내가 졌어요. 모음 없인 아무것도 만들 수 없잖아요." "내 차례인가?"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씩 웃으며 피시백 씨는 올려놓는 글자들을 쓸어갔다. "부인은 그걸 생각하지 못했어. 그것을!"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C -- R -- Y -- P -- T. 크리프트(토굴) 말이오. 죽은 사람을 묻던 곳." 그는 글자들을 끌어당겨서 자기 앞에 놓인 다른 것에 낱말을 덧붙였다. "그건 불공평해요." 아퀴트 부인이 대꾸했다. "당신은 내가 나가 있는 동안 내내 생각할 시간이 있었잖아요." "게임은 정정당당하게 하자고요." 피시백 씨가 잘라말했다. 그는 글자를 두 개 더 올려서 고리 중앙에 놓았다. "오, 이럴 수가!" 아퀴트 부인이 의자 뒤로 기대며 웅얼거렸다. "요새 고든은 어떻게 지내나요?" 엘렌이 물었다. "아, 좋아요. 학교에다 프로그램에다 벌처럼 바쁘지." "프로그램?" "고든의 프로그램을 모른단 말이에요?" "글쎄, 오랫동안 그의 소식을 못 받았거든요......" "그는 벌써 세 달째 그 일을 해왔는데!" 아퀴트 부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레코드를 틀며 이야기를 하지요. 디스크 자키 말예요. 그는 자기를 '원반던지기 선수'라고 부르더군요. 일요일만 빼고 매일 밤 8시에서 10시까지 KBRI에서." "멋있는데요!" 엘렌이 탄성을 질렀다. "물론 그는 유명인사라고요." 주인 여자는 피시백 씨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글자를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2주일 전 일요일 신문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어요. 기자가 여기에 와서 모든 것을 알아갔지요. 그리고 모르는 여학생들이 매일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다오. 스토다드 여학생들이 -- 학생기록부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는, 단지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려고 전화를 하지요.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내가 적당히 둘러댄다오. 정말 그것도 미칠 노릇이지." 아퀴트 부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글자 게임을 보았다. "자, 해요, 피시백 씨." 그녀가 말했다. 엘렌은 탁자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고든은 작년에 편지에 쓴 여자와 아직도 사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하고 물었다. "누구 말이오?" "금발에 키가 작고 예쁘장하다고 했어요. 그는 작년 편지에 몇 번이나 그 여자 얘기를 썼거든요 -- 10월, 11월, 그리고 4월까지. 저는 그가 정말 그 여자를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4월 이후로는 그 여자 얘기가 뚝 끊어졌지 뭐예요." "글쎄 -- " 하고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나는 고든과 함께 다니는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그가 프로그램을 맡기 전엔 일주일에 네댓 번씩 외출을 했어요. 하지만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나는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나야 뭐 하숙집 주인일 뿐이니까요. 그는 전혀 자기 여자친구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요. 전에 여기 있던 다른 청년들은 내게 자기 여자친구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하며 떠들어댔지만 -- 그때 대학생들은 더 어렸던 것 같아요. 요즈음 학생들은 대부분 여자 경험이 있고, 내가 보기에는 나이도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들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거든요. 고든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그 여학생 이름이 뭐였수? 이름을 알면, 고든이 아직도 그 여학생과 사귀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가끔 그가 저기 계단 가까이에서 전화를 하기 때문에 내가 복도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듣게 되거든." "이름은 생각나지 않아요." 엘렌이 말했다. "작년에 그가 사귀었다는 것밖에 -- 아주머니가 그가 그때 만났던 여자들의 이름을 말해 주면 제가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글쎄 -- " 아퀴트 부인은 건성으로 단어를 찾기 위해 글자를 배열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루엘라라는 여자가 있었지. 내 시누이 이름하고 똑같아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가만 있자, 또......"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축축한 눈을 감았다 -- "......바바라. 아니야, 그 앤 재작년이었지. 1학년 때 -- 가만 있자, 루엘라......"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또 다른 여자들이 있기는 한데, 그 이름들을 기억해 내려면 내 목이 빠지겠는걸." 잠시 조용한 가운데에서 글자맞추기 게임이 계속됐다. 마침내 엘렌이 말했다. "그 여학생 이름이 도로시였던 것 같아요." 아퀴트 부인은 피시백 씨에게 어서 빨리 하라고 손짓했다. "도로시......?"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야...... 도로시라면 고든이 지금은 사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최근에 도로시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건 확신할 수 있어. 물론 그가 진짜 사적인 전화나 장거리 전화를 할 때는 저 구석에 가서 하곤 하지만." "그럼, 작년엔 도로시와 함께 다녔나요?" 아퀴트 부인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모르겠어요......--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그 이름 말고는 기억나는 이름이 없수?" "도티." 엘렌이 한번 해봤다. 아퀴트 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호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부인 차례요." 피시백 씨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무토막이 아퀴트 부인이 움직이는 대로 부드럽게 소리를 냈다. "제 생각엔 -- " 엘렌이 말했다. "그의 편지에 그녀 이야기가 끊어진 4월에 도로시란 여자와 헤어진 게 틀림없는 것 같네요. 그러니까 4월말쯤엔 그의 기분이 퍽 안 좋았을 거예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그녀는 물어보듯이 아퀴트 부인을 쳐다보았다. "고든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작년 봄에 그는 정말 바람이 났었다우. 항상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지. 내가 그것을 놀려댄 기억이 나는군." 피시백 씨가 참지 못해 안달했다. "오, 어서 해요."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피시백 씨는 술을 들이키고, 다시 글자 게임에 달려들었다. "당신 또 한 개를 놓쳤군!" 그는 글자를 모두 그러모으며 소리쳤다. "F -- A -- N -- E. 페인(신전)!" "무슨 소리예요? '페인'이라니, 그런 단어가 어디 있어요?" 아퀴트 부인은 엘렌 쪽을 돌아다보았다. "'페인'이란 단어를 들어봤어요?" "그건 나한테 따져봐야지!" 피시백 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단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어디에서 본 기억이 있다고!" 그는 엘렌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책을 세 권씩 읽는다오." "'페인'이라 -- " 아퀴트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사전에서 찾아봅시다!" "포켓용 사전에 나와 있지 않으면요? 당신이 말한 단어가 거기에 나와 있지 않으면 당신은 늘 사전을 탓하잖아!" 엘렌은 서로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고든이 사전을 갖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방을 가르쳐 주시면 제가 가져오겠어요." "좋아요." 아퀴트 부인이 명확하게 말했다. "그에게 사전이 있었지." 그녀가 일어섰다. "앉아요, 아가씨. 내가 그게 어디 있는지 아니까." "그럼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고든 방을 보고 싶어서요. 내게 아주 좋은 곳이라고 했거든요......" "따라와요." 아퀴트 부인이 부엌을 나오면서 말했다. 엘렌은 서둘러 그녀 뒤를 따라갔다. "나와 있을 거요." 뒤에서 피시백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부인이 아는 것보다, 아니 부인이 백 살까지 산다고 해도 훨씬 더 많은 단어를 알 거요!" 그들은 거무스름한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아퀴트 부인은 앞장서서 올라가며 분한 듯이 계속 투덜거렸다. 엘렌은 문을 지나 계단 앞까지 그녀를 따라갔다. 방은 꽃무늬 벽지로 인해 밝았다. 초록색 시트가 깔린 침대, 서랍, 안락 의자, 탁자......가 있었다. 책장 위에서 책 한 권을 재빨리 꺼낸 아퀴트 부인은 창가로 가져가서 한 장씩 넘겨보았다. 엘렌은 책장으로 다가가서 그 위에 죽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일기장으로 보이는 것과 노트도 몇 권 있었다. <1950년대의 빛나는 이야기> <역사 개요> <라디오 아나운서의 발음 교본> <용감한 사나이> <미국 재즈의 역사> <백조의 길> <심리학 기초> <세 가지 걸작 살인 소설> 그리고 <미국인 웃음의 보물 유래> "오, 이런!" 하고 아퀴트 부인이 외쳤다. 그녀는 펼친 면을 손가락으로 짚고 서 있었다. "페인 -- " 그녀가 읽었다. "신전 또는 성당." 그녀는 사전을 거칠게 닫았다. "그 양반이 어디서 이런 단어를 얻어 들었을까?" 엘렌은 편지 세 통이 펼쳐져 있는 탁자 쪽으로 옮겨갔다. 아퀴트 부인은 책장 위에 사전을 놓고 그녀를 보았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가 없는 게 아가씨 편지인 모양이군?" "예, 그래요." 엘렌이 말했다. 나머지 두 통은 뉴스위크와 국영방송국에서 온 거였다. 아퀴트 부인은 문간에 서 있었다. "안 나가요?" "나가요." 엘렌이 말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와 피시백 씨가 기다리고 있는 부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피시백 씨는 축 늘어진 아퀴트 부인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성당이라는군요." 그녀는 의자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그는 계속 웃어댔다. "아유, 제발 그만 웃고 게임이나 계속해요." 아퀴트 부인이 투덜거렸다. 피시백 씨는 글자 두 개를 내놓았다. 엘렌은 자기가 앉은 의자에 걸쳐둔 코트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섭섭한 체했다. "가려고요?" 아퀴트 부인은 가는 눈썹을 모으며 올려다보았다.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든을 기다린 게 아니었어요?" 엘렌은 섬뜩했다. 아퀴트 부인이 문 옆에 있는 냉장고 위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 "2시 10분이군. 마지막 수업이 2시에 끝났을 테니까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그녀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퀴트 부인의 위로 치켜올린 얼굴이 구역질나게 어른거렸다. "아주머니가...... 아주머니가 그는 하루 종일 나가 있는다고 하셨잖아요......" 결국 그녀는 긴장하고 말았다. 아퀴트 부인이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수! 그를 기다린 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앉아 있었지?" "전화로......" 주인집 여자의 턱이 내려갔다. "그게 아가씨였나? 1시쯤 전화한 사람이?" 엘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가씨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고 그런 여자인 줄 알았지. 전화를 건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낮에는 그가 없다고 말한다오. 그가 집에 있어도 말이오. 고든이 내게 그렇게 하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는......" 아퀴트 부인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흐릿한 눈과 얇은 입술의 입이 점점 냉정하고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낮에는 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 " 그녀가 느린 말투로 따지고 들었다. "도대체 왜 여기에 왔어요?" "저...... 저는 아주머니를 만나뵙고 싶었어요. 고든이 편지에 하도 많이 써서......"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했수?" 아퀴트 부인이 일어섰다. 엘렌은 손을 뻗어 코트를 들었다. 갑자기 아퀴트 부인이 뼈가 앙상한 긴 손가락으로 엘렌의 팔을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가게 해주세요......제발......" "왜 그의 방을 기웃거렸지?" 그녀는 말처럼 긴 얼굴을 엘렌에게 가까이 들이댔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동그래졌으며, 거칠거칠한 얼굴이 붉어졌다. "무엇을 하려고 했지? 내가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무엇을 훔쳤지?" 엘렌의 뒤에서 피시백 씨의 의자가 끌리며 겁에 질린 듯한 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자기 사촌에게서 무엇을 훔치겠어요?" "누가 그의 사촌이라고 했는데?" 하고 아퀴트 부인이 쏘아붙였다. 엘렌은 그녀의 손아귀 속에서 무력하게 움직여 보았다. "제발, 아파요......" 희미한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이 아가씨가 기념품이나 뭐 그런 것들을 훔치는 그런 끔찍한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했지?" "저는 그의 사촌이에요! 사촌!" 엘렌은 목소리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저는 지금 가고 싶어요. 아주머니는 저를 여기에 붙잡아 놓을 수 없어요. 나중에 와서 그를 만나겠어요." "지금 그를 만나게 될 거야."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고든이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요." 그녀는 엘렌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피시백 씨, 뒷문으로 가세요." 그녀는 눈으로 피시백 씨가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따라가며 기다렸다가 엘렌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재빨리 문 쪽으로 가서 문을 닫고는 가슴 위로 팔짱을 끼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아야겠어." 그녀가 말했다. 엘렌은 아퀴트 부인에게 손가락으로 잡혔던 팔을 비볐다. 엘렌은 부엌 양쪽 끝의 문을 막고 서 있는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돋보기 안경을 끼고 신경질적으로 눈을 껌벅이는 피시백 씨, 돌처럼 엄하게 서 있는 아퀴트 부인. "이러시면 안돼요."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코트를 들어 팔에 걸쳤다. "나가게 해주세요."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꽝 닫히고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든이야!" 아퀴트 부인이 소리쳤다. "고든!"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아퀴트 부인?" 주인집 여자는 돌아서서 현관 입구 아래로 달려갔다. 엘렌은 피시백 씨를 쳐다보았다. "부탁이에요 -- " 하며 그녀는 애원했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저는 아무 피해도 끼치지 않았어요."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녀는 등뒤에서 흥분한 아퀴트 부인의 쉰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오고,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저 여자가 작년에 학생이 사귀었던 여자들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고선, 심지어 나를 속여 학생 방에까지 데려가게 했지 뭐야. 학생 책과 탁자 위에 있던 편지들도 뒤져보았어......" 갑자기 아퀴트 부인의 목소리가 부엌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 저 여자야!" 엘렌은 돌아섰다. 아퀴트 부인은 한쪽 팔을 들어 피고를 가리키고는 탁자의 왼쪽에 섰다. 갠트는 문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엷은 파란색 프렌치 외투를 입고, 한 손에 책을 든 키가 크고 늘씬한 청년이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구부려 긴 턱 가득히 미소를 짓고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는 그녀를 바라본 채 문설주에서 떨어져 냉장고 위에 책을 올려놓고 안으로 들어왔다. "웬일이야, 헤스터......" 그는 신중하게 눈을 다시 위아래로 깜박이면서 자연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젠 아주 어른티가 나는구나......" 그는 천천히 탁자를 돌아와서 엘렌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는 다정하게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제 4 장 "저......저, 정말 이 여자가 학생 사촌인 거야?" 아퀴트 부인이 숨을 헐떡였다. "아퀴트 아주머니 -- " 갠트는 엘렌의 왼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우린 아기 때 빨리 이가 나라고 물던 고무 고리도 같이 썼는걸요." 그는 엘렌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지 않아, 헤스터?"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입을 벌린 채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탁자 왼쪽에 서 있는 아퀴트 부인에게로, 그 너머의 현관 입구 쪽으로, 코트와 자기가 들고 있는 지갑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순간 오른쪽으로 돌아 재빨리 탁자를 지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퀴트 부인이, "도망간다!" 하고 외쳤을 때 그녀는 이미 현관 입구로 내려가고 있었다. 갠트가 쫓아오며 소리쳤다. "저 애는 정신병 증세가 있어요!"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그녀는 그 집에서 나와 콘크리트 길을 달렸다. 보도의 오른쪽으로 돌아 보폭을 넓게 하여 급하게 걷는데 코트 자락이 자꾸만 발에 걸리는 거였다. 오, 하나님, 모두 엉망이 되어버렸어! 그녀는 뜨거운 눈물이 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갠트가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와 긴 다리로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는 얼굴에 무서운 눈초리를 던지고서 똑바로 앞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몸 전체가 자기 자신과 그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로 짓눌려 있었다. "무슨 비밀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가 물었다. "내 손에 쪽지를 쥐어주며 '서던 컴포트'나 뭐라고 속삭이려 했소? 아니면 검은 양복을 입은 녀석이 하루 종일 따라와서 가까운 집으로 숨어들은 거요? 나는 어떻든지 모두 괜찮아요......" 그녀는 참기 어려운 침묵을 지키며 계속 걸었다. "세인트의 소설을 읽어봤어요? 나는 읽어보았지요. 노련한 사이먼 템플러는 항상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뛰어들었지요. 언젠가는 그 여자들 중 하나가 한밤중에 그의 요트로 헤엄쳐 왔어요. 아마 그녀는 해협을 헤엄쳐 오다 길을 잃었다고 했을 거예요. 내가 알기론 나중에 보험회사 조사원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 "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헤스터 -- 나는 아주 끔찍이도 질긴 호기심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팔을 빼려고 잡아당겼다. 그들은 택시 한 대가 돌아다니고 있는 길 반대쪽의 교차로에 이르렀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그 택시가 U자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냥 장난이었어요." 하고 그녀가 앙칼지게 말했다. "미안해요. 단지 내기를 했던 것 뿐이에요." "요트에 온 그 여자도 세인트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장난은 장난이고, 내 지저분한 과거에 대해서 물어봤다고요?" 택시가 와서 멈췄다. 그녀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의 손이 문을 꽉 잡았다. "잠깐, 사촌, 내 디스크 자키 말투로 놀리지 마, 난 농담하는 게 아니야......" "제발 -- " 그녀는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지친 듯이 중얼거렸다. 운전사가 앞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그들을 올려다보고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보시오......" 하고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위협하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한숨을 내쉬며 갠트는 문을 놓았다. 엘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재빨리 문을 닫았다. 낡았지만 부드러운 가죽 의자였다. 갠트는 차에 기대어 손을 문에 얹은 채 마치 그녀의 얼굴을 조목조목 기억하려는 듯이 창문을 통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운전사는 그녀가 행선지를 말하고 나서야 차를 움직였다. 엘렌이 학생처장을 찾아가기 전에 예약해 둔 뉴 워싱턴 하우스까지는 10분이 걸렸다 -- 10분 내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급하게 담배를 빨아댔다. 그녀는 극심한 자기책망에 빠졌다. 갠트가 나타나기 전에는 긴장이 풀렸었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도전에 붙들려 그것이 모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헤스터 사촌이라니! 오, 모든 일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어! 그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반을 걸었지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그 남자인지 확인하지도 못했으며, 게다가 그녀는 그 사람이나 그 주인집 여자에게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다. 만일 파웰을 조사해서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 곧 갠트가 바로 그 남자라면 -- 항상 두 번째에 중요한 '만일'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 갠트가 도로시를 죽였다면 그는 엘렌의 얼굴을 알고, 그녀가 아퀴트 부인에게 물어봤던 질문들로 그녀가 무엇을 뒤쫓는 것인지 알고서는 경계하게 될 것이다. 감시를 받고 있는 살인자는 아마 다시 살인 준비를 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위험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진실을 밝혀내고 죽는 것보다는 의문 속에서 사는 게 훨씬 나은 것이다. 그녀에게 다른 방법이란 경찰에 가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헌것과 새것'이라는 것밖에 더 이상 알려줄 것이 없으며, 그들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정중하게 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우, 사실 출발은 아주 좋았었는데! 호텔 방엔 베이지색 벽과 조잡스러운 갈색 가구가 있었고,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에 놓여 있는 비누 포장지의 조그만 그림처럼 깔끔하고도 인정미가 없이 밋밋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방에 사람이 묵고 있다는 유일한 표시라면 더블 침대 아래쪽의 그물 선반 위에 있는 컬드웰 딱지가 붙은 여행용 가방이었다. 엘렌은 코트를 옷장 안에 건 뒤 창문가의 책상에 앉았다. 지갑에서 만년필과 버드에게 보내는 편지를 꺼냈다. 주소는 적혀 있지만 봉하지 않은 편지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웰시 학생처장과 만났던 이야기와 갠트에 관한 큰 실수를 덧붙여 쓸까말까 망설였다. 아니야...... 드와이트 파웰이 그 남자인 것으로 밝혀지면 갠트의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틀림없이 갠트가 아니라 파웰일 거야.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 그렇게 밝은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닐 거야. 그런데 그가 뭐라고 했지? '내 디스크 자키 말투로 놀리지 마. 난 농담하는 게 아니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누구세요?" "수건 가져왔습니다."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엘렌은 방을 가로질러 문 손잡이를 잡았다. "난......나는 옷을 벗었어요. 밖에 놔두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그녀는 2분 동안 그곳에 서서 가끔씩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와 홀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잡음을 들었다. 손잡이가 그녀의 손으로 축축해졌다. 이윽고 그녀는 자기 자신이 잠자기 전에 침대 밑을 들쳐보는 고약한 늙은 하녀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과잉반응에 씩 웃었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갠트가 문기둥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금발을 위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어이, 헤스터 사촌 -- " 그가 말했다. "나는 지칠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잖소." 그녀는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그의 발이 끼어들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데, 그 택시를 따라왔지!" 그는 오른손으로 지그재그 코스를 그려 보였다. "워너 브러더스의 영화처럼 -- 운전사는 눈치를 채고 팁까지 거절하더군요. 나는 그에게, 당신이 내 침대에서 도망쳤다고 말했거든." "나가요!" 그녀가 사납게 소리쳤다. "나가지 않으면 지배인을 부르겠어요!" "헤스터 -- "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당신을 불법침입이나, 아니면 사촌 행세를 한 죄로 고발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내게 탁 털어놓는 게 어때요? 호텔 보이가 이상하게 생각할 게 걱정되면 문을 열어놓아도 좋고 -- " 그는 엘렌을 뒤로 한 걸음 물러나게 한 뒤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착한 여자로군." 그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옷을 보고 과장되게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옷을 벗었어요.'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녀가 당신이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란 것을 알았어야 하는 건데." 그는 침대로 걸어가서 끝에 걸터앉았다. "글쎄, 제발 떨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잡아먹으러 온 게 아니니까." "뭘...... 뭘 원하는 거지요?" "설명." 그녀는 활짝 열려진 문을 닫고, 마치 그곳이 그의 방이고 그녀가 손님인 듯이 문 쪽에 서 있었다. "그건...... 아주 간단한 거예요. 나는 늘 당신 방송을 듣고 있어요." 그는 여행 가방을 흘끗 보았다. "윈스콘신에서 왔어요?" "그곳은 겨우 150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도 KBRI를 들어요. 정말 듣는다니까요." "계속해요!" "난 늘 당신 방송을 듣고, 당신 프로를 매우 좋아해요...... 그래서 블루 리버에 있는 동안 당신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보자마자 도망쳤어요." "그런 경우,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난...... 난 당신에 대해 -- 당신이 어떤 여자들을 좋아하나 -- 그런 것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당신 사촌인 체했을 뿐이에요."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턱을 쓸면서 일어섰다.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지요?" "학생기록부에서." 그는 침대 아래쪽으로 구부려서 여행 가방을 만졌다. "컬드웰에 다닌다면 어떻게 스토다드 학생기록부를 얻었을까?" "여기 있는 여학생에게서 -- " "누구?" "애너벨 코크. 내 친구예요." "애너벨......" 그는 그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엘렌을 쳐다보았다. "그게 사실이에요?" "그래요."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알았지만, 나는 당신의 프로가 너무 좋아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가 말했다. "미련하고 바보스런 사람들이야......" -- 그리고 실망한 눈으로 그녀 뒤쪽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돌아다보았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다시 갠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돌아서서 창문 쪽으로 향했다. "헤스터 -- " 그가 말을 꺼냈다. "엉터리 설명 뿐인걸." -- 그는 윗도리에서 손을 빼며 돌아다보았다 --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말이고." 그는 약간 열린 욕실 문을 흘끗 보았다. "당신의 물건을 써도 되겠소?" 하고 묻더니, 그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자물쇠가 찰칵 소리를 냈다. 엘렌은 갠트가 자기의 말을 믿는 건지 믿지 않는 건지 궁금해 하면서 멍청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무릎이 떨렸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책상으로 가 지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불을 켜는 데 성냥개비가 두 개나 부러졌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서서, 지갑밖에 놓여 있지 않은 책상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만년필을 앞뒤로 굴렸다. 아무것도 없다......편지......버드에게 보내는 편지! 갠트는 책상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교묘하게 문 쪽으로 돌리고 난 뒤 다시 창문을 보고 있다가 윗도리 안에서 손을 빼며 몸을 돌렸다...... ! 그녀는 미친 듯이 욕실 문을 두드렸다. "편지 내놔요! 내게 달란 말이야!" 잠시 뒤 갠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호기심은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는 가짜 사촌들에 대해선 특히 지칠 줄 모르지." 그녀는 여전히 닫혀 있는 욕실 문과 현관 쪽을 보면서, 한 손으론 문기둥을 잡고 다른 손으론 코트를 들고 서 있다가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씁쓰레한 미소를 보냈다. 호텔 보이가 뭐 도와줄 것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이윽고 갠트가 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봉투 안에 접어넣고서,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자 -- " 그가 말했다. 그는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 -- " 그는 약간 거북하게 웃었다. "우리 할머니는 전화에서 남자가 래너 터너를 찾으면, '이봐요, 전화 잘못 걸었소!' 하고 말했지." 엘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실 -- " 그가 말했다. "난 정말 그녀를 몰랐어요. 한두 번 인사한 적밖에 없었으니까. 그 반에는 금발 녀석들이 몇 명 있었지. 나는 신문에 그녀의 사진이 실릴 때까지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어요. 교수는 자리 번호로 출석을 확인했으니까. 이름을 부르지 않고 -- 나는 정말 그녀 이름도 몰랐어요." 엘렌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침대 옆에 있는 탁자로 걸어와서 기디온 성경을 집어올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었다. "난 성경에 대고 맹세하지만, 절대 당신 동생과 사귄 적이 없어. 기껏해야 두 마디 정도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물론 다른 짓도 하지 않았고." 그는 성경을 내려놓았다. "됐소?" "도로시가 살해됐다면 -- " 엘렌이 말했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성경에 대고 열두 번이나 맹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애가 그 남자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정도면, 그는 훌륭한 배우일 거예요." 갠트는 눈을 위로 올리고는 수갑을 채우라는 듯이 손목을 들어올렸다. "좋아."그가 말했다. "이만 조용히 돌아가지." "당신이 이 일을 장난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손을 내렸다. "미안해요."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당신을 확신시킬 수 있겠소?" "당신은 할 수 없어요." 엘렌이 말했다. "그냥 가주는 게 좋겠어요." "그 반에는 금발 녀석이 몇 명 있었는데." 그가 고집스럽게 말하면서 깍지를 꼈다. "그녀와 늘 함께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고! 캐리 크랜트 같은 턱에 키가 크고......" "드와이트 파웰?" "맞았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의 명단에 벌써 올라 있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녀석일 거야!" 엘렌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좋아, 이젠 포기했소. 당신은 곧 그 녀석이 파웰이란 것을 알게 될 거요." 그는 문 쪽으로 움직였다. 엘렌이 복도 쪽으로 물러섰다. "당신 부탁대로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군." 갠트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는 복도 쪽으로 나와서 말했다. "계속 헤스터라는 이름을 듣고 싶지 않으면 당신 진짜 이름을 말해 줘야죠." "엘렌." 갠트는 좀처럼 갈 것 같지 않았다. "이젠 무엇을 할 거요?" 잠시 뒤에 그녀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만일 파웰에게 뛰어들 거라면 오늘 오후 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요. 그는 나처럼 어슬렁거릴 어리석은 친구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갠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비밀임무를 띤 여자라 -- " 그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봤었는데." 그는 가려고 하다가 뒤로 돌아섰다. "나를 와트슨 (셜록 홈즈의 친구이자 조수) 으로 써줄 수 없겠소?"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그녀는 문간에서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나도 당신이 신임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소. 그럼, 행운을 빌겠소." 그는 돌아서서 천천히 복도를 내려갔다. 엘렌은 방으로 돌아와 천천히 문을 닫았다. ......지금 7시 30분이에요, 버드. 난 뉴 워싱턴 하우스의 아주 멋진 방에 편안히 묵고 있어요 -- 방금 저녁을 먹고, 목욕할 준비를 했어요. 곧 잠자리에 들 거예요. 나는 오후 시간을 학생처장 방에서 기다리느라고 보냈어요. 결국 그분을 만나서 도로시가 가을 학기 영어수업을 함께 들었던 금발의 미남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꾸며댔죠. 여러 기록부를 들쳐보고, 수강신청서에 있는 사진을 조사해서 그 남자를 알아냈어요 -- 웨스트 35번가 1520번지에 사는 드와이트 파웰. 내일 아침부터 사냥을 시작할 거예요. 정말 멋진 출발이었죠? 이젠 여자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요! 사랑하는 엘렌 8시에 그녀는 잠시 옷을 입지 않은 채 쉬면서 침대 옆에 놓인, 동전으로 작동되는 라디오에 25센트짜리 은화를 넣었다. 그리고 KBRI라고 표시된 단추를 눌렀다. 나지막한 노래가 들리더니 이내 부드럽고 낭랑한 갠트의 목소리가 방안에 흘러들었다. "'......원반던지기 선수'와 한때를 -- '고든 갠트와 함께' -- 그것은 바로 순수과학 교육의 한계를 보여주죠. 여기 메모가 있군요. 오늘 저녁 첫곡은 옛날 곡으로, 윈스콘신의 헤스터 홈즈 양에게 보냅니다......" 빠른 템포의 오케스트라 전주곡이 향수를 일으키며 흘러나오다가 어린 소녀의 달콤한 노래 소리로 바뀌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면 코트 단추를 채우세요. 당신 몸을 잘 돌보세요. 당신은 나의 것이니까...... 미소를 지으며 엘렌은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로 타일 벽이 울렸다. 그녀는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문 옆의 고리에 가운을 걸었다. 그녀가 욕조 안으로 들어가자 물이 넘쳐흘렀다. 갑자기 정적이 흘러들었다. 옆방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말벌의 테일(꼬리)에 앉지 말아요, 오 -- 오 -- 아니, 네일(손톱)에도, 오 -- 오 -- 아니, 세 번째 레일(철로)에도, 오 -- 오 -- 제 5 장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 " 엘렌이 말했다. "드와이트 파웰 있어요?" "아니, 없는데요." "언제 돌아올까요?" "확실히 말할 수가 없군요. 수업 사이사이와 수업이 끝난 뒤에 폴저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언제 올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주인 아주머니 되세요?" "아니에요. 며느리예요. 일을 도와주러 왔어요. 호니그 부인은 다리 때문에 아이오와 시에 있어요. 지난주에 다리를 잘랐는데 감염이 됐대요. 남편이 아이오와 시까지 그분을 데려다 드렸어요." "아, 안됐군요." "드와이트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지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오늘 두 시간짜리 수업을 함께 듣는 데, 그때 만나죠......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좋아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엘렌은 전화를 끊었다. 주인 아주머니와는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파웰이 도로시와 함께 지냈던 그 남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단지 좀더 확실히 하고 싶어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알아보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의 친구들에게서 아주 쉽게 알아낼 수도 있으리라. 아니, 파웰 자신으로부터도...... 그녀는 그가 일하고 있는 데가 어떤 곳일까 하고 궁금해 했다. 폴저 가게라. 그가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가는 곳이라면 캠퍼스 근처일 것이다. 만일 가게라면 그는 손님들을 접대하겠지...... 그녀는 전화번호부를 집어들고 F로 시작되는 부분을 펼쳐서 죽 훑어보았다. 폴저 약국, 대학로 1448......2_3800 그곳은 캠퍼스 건너편의 28번가와 29번가 사이에 있었다. 지붕에 초록색 간판이 기다랗게 걸려 있는 땅딸막한 벽돌 건물이었다. 폴저 약국 -- 그리고 작은 글씨로 '처방,' 또 더 작은 글씨로 '식수 준비'라고 쓰여 있었다. 엘렌은 유리문 밖에 멈춰서서 살짝 두드렸다. 그리고 마치 무대에 등장하는 듯이 몸을 위로 올려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수는 왼쪽에 있었다. 거울과 크롬 도금, 회색빛 대리석, 그 옆에 붉은 가죽이 씌워진 의자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 아직 오후가 되지 않아서인지 겨우 몇 명만이 앉아 있었다. 드와이트 파웰은 꼭 맞는 하얀색 짧은 윗도리에, 배를 뒤집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흰 모자를 아름다운 금발에 쓰고서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거기에다가 홀쪽하고 네모난 얼굴에 콧수염이 나 있었다. 거의 색이 없는 듯한 머리처럼 조심스럽게 다듬은 얇은 콧수염은 빛이 비칠 때만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는 학생처장이 보여줬던 그 사진을 찍은 뒤 몇 번 수염의 모양을 바꾼 듯했다. 파웰은 양철통에 있는 생크림을 끈적끈적한 선디 아이스크림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부루퉁한 것은 분명히 그가 그 일을 싫어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엘렌은 카운터 끝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손님 앞에 선디 아이스크림을 놓고 있는 파웰을 지나갈 때 그가 흘끗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어 있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는 코트를 벗어 비어 있는 의자에 지갑과 함께 놓았다. 그녀는 옆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대리석 탁자에 손을 펴고, 맞은편 벽에 달린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대리석 탁자에서 손을 떼어 푸른색 스웨터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파웰은 카운터 뒤의 통로를 지나 다가와서 물 한 잔과 내프킨을 그녀 앞에 놓았다. 짙은 푸른색의 눈 밑에는 회색 기미가 끼어 있었다. "무엇을 드릴까요?"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눈길을 아래로 내려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는 거울이 달린 벽과 거기에 붙어 있는 샌드위치 크림을 보았다.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는 석쇠가 있었다. "치즈버거 하나 -- "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눈과 그녀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리고 커피 한 잔." "치즈버거와 커피." 하고 말하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듯이 재빨리 사라지는 딱딱한 미소였다. 그는 돌아서서 그릴 아래에 있는 찬장의 문을 열고 종이로 싸인 다진 고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발로 찬장문을 차서 닫은 뒤, 고기를 그릴에 놓고 뒤에 붙은 종이를 벗겼다. 고기가 지글거렸다. 그는 그릴 옆에 있는 커다란 상자에서 버거 빵을 꺼내어 긴 칼로 가운데를 갈랐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도 흘끗 올려다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로 답례했다. '관심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는 햄버거 옆에 반으로 자른 빵을 놓고 엘렌 쪽을 돌아보았다. "커피를 지금 드릴까요, 아니면 나중에?" "지금 주세요." 그는 카운터 밑에서 황갈색 컵과 접시, 그리고 찻숟가락을 꺼냈다. 그것들을 그녀 앞에 놓고 나서 통로 쪽으로 몇 발자국 움직여 유리 커피 포트를 가져왔다. 그는 그녀의 컵에 김이 나는 액체를 따랐다. "스토다드에 다녀요?" 그가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는 대리석 탁자 위에 커피 포트를 내려놓고, 아무것도 안든 손으로 카운터 밑에서 크림이 가득 담긴 작은 컵을 꺼냈다. "당신은?" 엘렌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터 밑에서 찻숟가락이 유리잔에 부딪쳤다. 파웰은 입술을 샐쭉하게 움츠리면서 대답했다. 잠시 뒤 그는 돌아서서 주걱을 들어 햄버거를 뒤집었다. 그는 다시 찬장을 열고 아메리칸 치즈 한 조각을 꺼내어 고기 위에 얹었다. 그가 접시에 빵과 피클 두 조각을 놓는 동안, 그들은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엔 처음이죠?" 그가 말했다. "예, 블루 리버에 온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어요." "오, 오래 머물 거예요, 아니면 지나다가 그냥 들른 거예요?" 그는 마치 빙빙 돌고 있는 사냥꾼처럼 천천히 말했다. "좀 머물 거예요.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면." "어떤 일자리?" "비서." 그는 한 손에는 주걱을, 다른 손엔 접시를 들고 한 바퀴 돌았다. "아마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이야기가 잠시 멈춰졌다. "어디서 왔어요?" 그가 물었다. "데모인." "그곳이 여기보다 일자리 구하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여자들이 모두 데모인으로 와요." 그는 그릴 쪽으로 돌아서서 주걱으로 치즈버거를 들어올려 빵 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그녀 앞에 접시를 놓고 카운터 밑에서 케첩 병을 꺼냈다. "여기에 친척이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직업소개소 여자만 빼고." 카운터 밑에서 다시 찻숟가락이 유리잔에 부딪쳤다. "거 참 --" 그가 투덜거렸다. "이런 일자리는 어때요?" 그는 천천히 어디론가 가버렸다. 잠시 뒤에 그가 돌아왔다. 그는 주걱 끝으로 그릴 위를 가볍게 긁기 시작했다. "치즈버거 맛이 어때요?" "맛있는데요." "또 주문할 것이 있어요? 커피를 더 드릴까요?" "아니, 됐어요." 그릴이 완전히 깨끗해졌는데도 그는 거울 속으로 엘렌을 쳐다보면서 계속 긁어댔다. 그녀는 내프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말했다. "얼마예요?" 그는 돌아서서 허리춤에 달려 있는 연필과 초록색 수첩을 꺼냈다. "글쎄 -- " 그는 계속 쓰면서 말했다. "오늘밤 패러마운트에서 아주 근사한 영화를 재상영한데요. '잃어버린 지평선'이라고 -- 그거 보지 않을래요?"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좋아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는 위를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신나는데.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뉴 워싱턴 하우스 로비에서요." "8시에, 괜찮죠?" 그는 수첩에서 계산서를 뜯었다. "내 이름은 드와이트예요." 하고 그가 말했다. "아이젠하워와 똑같은 드와이트 파웰." 그는 그녀를 보면서 기다렸다. "내 이름은 에블린 키트리지." "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답례로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웰 얼굴 위로 어떤 표정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놀라움일까?...... 아니면 기억 ? "뭐가 잘못됐어요?" 하고 엘렌이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당신 웃음이......" 그가 어색하게 말했다. "전에 알았던 여자애와 아주 똑같아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엘렌이 명확하게 말했다. "조안 베이컨인가 배스콤이겠지요. 나는 이곳에 온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두 사람이나 내게 조안 누구와 닮았다고 했거든요." "아니 -- " 파웰이 말했다. "그 여자 이름은 도로시예요." 그는 계산서를 접었다. "점심은 내가 살께요." 그는 앞쪽에서 계산하는 사람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목을 죽 빼어 계산서와 엘렌,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고는 주머니에 계산서를 집어넣었다. "잘 가요." 그가 말했다. 엘렌은 일어나서 코트를 입었다. "뉴 워싱턴 하우스 로비에서 8시에 -- " 그는 되풀이했다. "거기에서 묵고 있나 보죠?" "예."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는 순간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오다가다 쉽게 만난 사람, 이곳에 처음 온 사람, 호텔에 머물고 있고......"점심 잘 먹었어요." "천만에." 그녀는 지갑을 집어들었다. "오늘밤에 봐요, 에블린." "8시에 -- "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의식한 채 -- 천천히 가게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 앞에서 돌아섰다. 그가 손을 들어 웃어 보였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밖에 나오자 그녀는 갑자기 무릎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6 장 엘렌은 7시 30분에 로비에 나와 있었다. 그래야 파웰이 키트리지 양 방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안내원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8시 5분쯤에 날카로운 미소 위에서 가느다란 콧수염을 번득이며 그가 도착했다. (오다가다 쉽게 만난 사람......이곳에 처음 온 사람......) 그는 '잃어버린 지평선'이 8시 6분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다섯 블럭 떨어진 곳이었는데도 극장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영화가 반쯤 상영되었을 때 파웰이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 도로시의 몸을 애무하고는 밀어 떨어뜨렸을 그 손을 -- 옆눈으로 계속 지켜보았다. 시청 건물은 극장에서 세 블럭 떨어져 있었고, 뉴 워싱턴 하우스는 겨우 두 블럭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곳을 지났다. 길 건너에 있는 희미한 건물의 위층 창문 몇몇 개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저것이 이곳에서 제일 큰 건물이죠?" 엘렌이 파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요." 그의 눈길이 6미터 앞쪽의 길로 모아졌다. "높이가 얼마나 되나요?" "14층." 그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엘렌은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에게 앞에 있는 건물의 높이를 물어보면, 혹시 그가 그 높이를 확실히 안다고 해도 자연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마련이다. 그것을 쳐다보고 싶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은 -- 그들은 검은 벽으로 둘러싸이고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울리는 호텔의 칵테일 라운지에서 위스키 샤워를 마셨다. 그들의 대화는 자주 중단되었다. 파웰의 느리고 신중한 말투를 엘렌이 조급하게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때 한껏 부풀어오른 쾌활함은 시청 건물을 지날 때 사라졌다가 호텔로 돌아서면서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빨간 의자에 앉아 있는 지금은 더 이상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자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웰은 자기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그 일을 해봤지만, 좀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면 당장 그만둘 거라고 했다. 그는 여름에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 걸까? 그의 전공은 영문학인데.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걸까? 그는 자기 자신도 확실하지 않았다. 광고업계나, 아니면 출판사에 뛰어들겠지. 그의 장래계획은 단지 구상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 대학 여자들이라면 골치가 아파요." 그가 말했다. "어리숙하고......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단 말이야." 엘렌은 이 말이 어떤 대화를 꺼내려는 건지 알고 있었다. '당신은 섹스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면 함께 침대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문제겠어?'-- 뭐 이런 거 아닐까......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도 않았다.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초조한 듯이 세 번째 칵테일 잔을 들어올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 여자에게 걸려들면 -- " 그의 푸른 눈이 흐려졌다.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꼭 일을 당하고 말지......" 엘렌은 눈을 감았다. 매끄럽고 까만 탁자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런 사람들에겐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계속했다.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하지." "어떤 사람 말이에요?" 그녀는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던져버리는 사람들......" 그는 손바닥으로 탁자 위를 쳤다. 엘렌이 눈을 떴다. 그는 웃으면서 탁자 위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나는 위스키 샤워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게 탈이지." 그가 말했다. 그녀의 담배에 성냥불을 갖다대는 그의 손이 떨렸다.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봐요." 엘렌은 나이 많은 프랑스 남자가 운영하는 데모인의 비서학교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는 아이들이 보지 않을 때면 침바른 종이를 던졌다고 꾸며댔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파웰이 말했다. "자, 여기에서 나갑시다." "어디 다른 데로 가자는 거예요?" 엘렌이 물었다. "당신이 좋다면 -- " 그는 시원치 않게 대답했다. 엘렌은 옆에 놓아두었던 코트를 들었다. "웬만하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거든요." "좋아요." 파웰이 말했다. "문까지 바래다 줄께요." 저녁때와 똑같은 날카로운 미소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구릿빛 꼬리표가 달린 열쇠를 든 채 자기 방문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멋진 저녁이었어요." 두 사람의 코트를 걸치고 있던 그의 팔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가 그녀에게 입술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뺨에 키스를 받으려고 했다. "수줍어하지 말아요."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거칠게 입술에 키스를 했다. "들어가서...... 담배 한 대만 피웁시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에비......"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그것은 거절하는 말이었지만, 부드럽게 넘어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른 밤이면 일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두 번째 키스를 했다. 그녀는 뒤에서 그의 손을 떼어 어깨 위로 올렸다. "제발......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약간 뒤로 물러서면서 웃었다. 그녀도 아까 가게에서 그에게 보냈던 것처럼 활짝 웃어보려고 했다. 그것이 제대로 들어맞았다. 그것은 노출된 신경에 전류가 흐르는 철사를 갖다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를 안은 채 더욱 가깝게 그녀를 끌어당겨 그녀의 어깨 뒤로 턱을 가져갔다. 마치 그녀의 미소를 피하려는 듯이. "아직도 내가 그 여자를 생각나게 해요?" 그녀가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도 다른 여자들처럼 단 한 번만 만났었겠지요?" "아니 -- " 그가 말했다. "그녀와는 오랫동안 사귀었어요." 그는 몸을 뒤로 젖혔다. "내가 당신과 단 한 번만 만날 거라고 말했었나? 내일밤에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니, 없어요." "그럼, 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어때요?" "당신이 좋다면 -- " 그는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다시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왜 그랬어요?" 그녀가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떨렸다. "그 여자 말이에요. 왜 그 여자와 헤어졌지요?" 그녀는 지나가는 말투로 가볍게 물어보았다. "하긴 그 여자 실수 때문에 내가 이익을 보긴 했지만." "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엘렌은 청회색 실로 꼼꼼하게 짜여진 그의 윗도리 옷섶을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아래층에서 말한 것처럼...... 우린 너무 빠져들었거든. 그래서 헤어져야 했지."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너무 어렸어." 그가 덧붙였다. 잠시 뒤 엘렌이 방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젠 들어가야겠어요." 그는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 아주 오랫동안.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팔에서 벗어난 그녀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문에 열쇠를 넣었다. "내일 밤 8시에 -- " 그가 말했다. 그녀는 코트를 받기 위해서 뒤를 돌아봐야 했고, 그래서 그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안녕, 에비." 그녀는 등뒤로 문을 열고, 계속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안녕." 그리고 문을 닫았다. 그녀는 여전히 코트를 든 채 침대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5분 뒤에 전화벨이 울렸다 -- 갠트였다. "늦게 걸어야 있을 줄 알았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에게 말하면 좀 도움이 될까요......?" "그럼!" 그는 길게 말을 끌었다.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내 결백을 분명히 증명해 줄 것들을 보았소?" "그래요. 파웰이 그 애와 함께 지냈던 그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 생각대로 그애는 자살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옳았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던지고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그런 일에 빠지는 여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경계하는 듯한 긴장감이 무너지고 그녀의 말투가 빨라지면서 어지럽게 쏟아져 나왔다. "오, 하나님! 당신의 능력엔 항복하겠어요.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들었지요?" "그에게서." "뭐라고?" "그가 일하는 가게에서 그를 끌어냈지요. 나는 아이오와의 데모인에서 온 에블린 키트리지라고 했어요. 저녁 내내 그와 꼭 붙어 있었거든요." 갠트 쪽 전화기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모두 말해 봐요." 마침내 그가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그에게서 자백서를 받아낼 거지요?" 그녀는 갠트에게 파웰이 시청 건물을 지날 때 우울해 했으며, 그 우울한 기분과 위스키 샤워의 취기에서 그가 한 말과 행동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말해 주었다. 갠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바꾸어서 말했다. "이봐, 엘렌, 이것은 누구와 놀자는 게 아니오." "왜요? 그가 나를 에블린 키트리지라고 생각하는 한 -- "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도로시가 그에게 당신 사진을 보여줬을지도 모르잖소?" "그 애는 내 사진을 단 한 장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 얼굴이 나무 그늘에 가려 있고, 또 아주 여러 명이 함께 찍은 스냅 사진이에요. 그가 그것을 보았다고 해도 거의 1년 전의 일이어서 아마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만일 날 의심했다면 그는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 아마 그러지 않았겠지." 갠트는 억지로 인정했다. "이젠 뭘 할 거요?" "오늘 오후 도서관에 가서 도로시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모두 읽어봤어요. 거기엔 세부적인 것들은 몇 가지밖에 실려 있지 않더군요 -- 모자 색이나 그 애가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것 정도밖에는요. 나는 내일밤에도 그를 만날 거예요. 만일 내가 그에게 그 애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애와 함께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그런 종류의 말을 흘릴지도 몰라요." "그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어." 갠트가 말했다. "그는 그때 건물 안에 있다가 그녀가 죽은 뒤에 그녀를 본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잖소." "난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망상이 아니라고 경찰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만 찾아내면 돼요. 그때 그 애 가까이에 파웰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경찰에게 그 일을 다시 수사하도록 할 수 있어요." "그럼, 그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하면서 어떻게 그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바보가 아니라고." "아무튼 최선을 다해 볼 거예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밖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갠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게 오래 된 둥근 쇠망치가 있는데 -- " 그가 말을 꺼냈다. "그것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범죄현장에 끌고가서 자백하게 하는 건 어떨까?" "당신도 알겠지만 -- " 엘렌이 심각하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졌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 있었소? 끊어졌는 줄 알았지." "생각 좀 하느라고요." "오, 제발 진지하고......신중해야 해요. 알겠소?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일 저녁에 내게 전화 좀 해줘요. 당신이 어디에 있으며, 일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려달란 말이오." "왜요?" "안전하게 해두기 위해서지." "그는 내가 에블린 키트리지라고 알고 있어요." "글쎄, 어쨌든 내게 전화해요. 해롭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머리가 곧 허옇게 될 거요." "알았어요." "잘 자요, 엘렌." "안녕, 고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생각에 골몰할 때면 늘 하는 식으로 아랫입술을 깨문 채 손가락을 두드리며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제 7 장 지갑을 찰칵 닫으며 엘렌은 눈을 들어 로비를 가로질러 오는 파웰에게 미소지었다. 그는 푸른색 양복에 회색 코트를 입고 지난밤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 --" 그는 그녀 옆의 가족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시간 약속을 아주 잘 지키는데." "몇몇 사람에게는 그렇지요." 그의 미소가 퍼져 나갔다. "일자린 어떻게 되었어?" "아주 잘 되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일자리를 얻게 될 것 같아요. 변호사 사무실에 --" "그거 잘됐네. 그럼, 블루 리버에 머물겠군, 응?"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멋진데...."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리고 시계 쪽으로 잠깐 눈을 돌렸다. "뛰어보는 게 어때? 이곳에 오는 길에 글로레이 볼룸을 지나왔는데 줄을 죽 서 있던데--" "아--" 그녀가 신음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할 일이 있어요. 변호사에게 -- 그에게 편지 한 통과..... 신원 증명서 한 통을 가져다 줘야 하거든요." 그녀는 지갑을 열었다. "비서에게도 신원증명서가 필요한진 몰랐는데. 내 생각엔, 단지 속기나 뭐 그런 것을 테스트해 보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지난번 사장에게서 추천장을 받았다고 했더니 그것을 봤으면 좋겠대요. 그는 8시 30분까지 사무실에 있겠다고 했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괜찮아." 엘렌은 그의 손을 잡았다. "춤추러는 가지 않는 게 낫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디 가서 술을 조금 마시고...." "좋아." 그는 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들은 일어섰다. "변호사 사무실은 어디에 있지?" 파웰은 그녀 뒤에서 코트 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물어보았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엘렌이 말했다. "시청 건물이니까요." 시청 건물 앞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파웰은 걸음을 멈췄다. 엘렌은 회전문 안으로 들어가 손으로 밀려다가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비에서 새어 나오는 회색 조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 아래에서 기다릴께, 에비." 그의 턱이 굳어졌는지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려왔다. "함께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말했다. "나는 8시 전에 이 서류를 가져올 수 있었는데도, 그가 저녁에 가져오라고 한 게 좀 이상해요. 그는 좀 능글맞아 보이는 사람이거든요." 그녀가 씩 웃었다. "당신은 내 경호원이잖아요." "오!" 파웰이 말했다. 엘렌은 문을 밀며 들어갔고, 잠시 뒤에 파웰이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돌아서서 그가 문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약간 입을 벌린 채 숨을 쉬고 있었으며, 얼굴은 완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넓은 대리석 로비는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네 대의 엘리베이터 중 세 대는 금속 격자문으로 잠겨 있었으며, 네번째 것만이 벌꿀색의 나무 벽에 노란 불이 켜져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둥그런 천장에 울려 또각또각 메아리치는 가운데 그들은 나란히 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안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흑인 안내원이 '룩'이란 잡지를 읽으면서 서 있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그 잡지책을 끼고서 커다란 금속 미닫이 문을 열기 위해 층 단추를 누르고는 뒤에 있는 격자문을 잡아당겼다. "몇 층입니까?" 그가 말했다. "14층이에요." 엘렌이 말했다. 그들은 문 위에 있는 캄캄한 숫자판에 불이 켜지는 숫자 위치가 차츰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키보며 서 있었다. 7.....8......9...... 파웰은 집게 손가락 옆으로 콧수염을 비볐다. 불빛이 13에서 14로 넘어가고 엘리베이터는 제일 꼭대기 층에서 부드럽게 멈췄다. 안내원은 문을 잡고 바깥문을 여는 가로놓인 막대기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엘렌은 적막한 복도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파웰이 그녀 뒤를 따랐다. 그들 뒤에서 덜컹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사르르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어 '윙' 하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에요." 엘렌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1405 호에요." 그들은 복도가 구부러진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들 앞에 죽 뻗어 있는 복도의 뿌연 유리문 중 단지 두 개만이 불이 켜져 있었다. 윤이 나는 고무 타일 위를 걷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렌이 머뭇거리며 말을 껴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저 서류만 그에게 주면 되니까요." "거기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이에요. 서류가 괜찮은 편이니까요." 그들은 복도 끝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았다. 왼쪽 벽의 위쪽 문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고, 파웰은 그쪽으로 비스듬히 다가갔다. "아니, 그쪽이 아니에요." 엘렌이 말했다. 그녀는 오른쪽의 불이 켜지지 않은 문으로 갔다. 그것의 뿌연 판에 '프레드릭 H. 클로즌 변호사' 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가 헛되이 손잡이를 돌려보고 손목 시계를 쳐다보자, 파웰이 그녀 뒤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쌀쌀맞게 말했다. "15분이 아니라 8시 30분까지 여기에 있겠다고 말했었는데." (전화로 비서가, '사무실은 5시에 닫습니다' 하고 말했었다) "어떻게 할거야?" 파웰이 물었다. "문 밑으로 넣어둬야겠어요." 하고 말하고는 지갑을 열었다. 그녀는 커다란 흰 봉두와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는 뚜껑을 열어 지갑에 봉투를 편편하게 대고 쓰기 시작했다. "춤추러 가지 못해서 미안한데요."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파웰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는 마치 풋내기 곡예사가 줄의 중간쯤을 지나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면서 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엘렌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 편지를 두고 간다고 해도 어차피 내일 다시 와야 할 거예요. 그러니 차라리 아침에 다시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다시 만년필 뚜껑을 닫고는 도로 지갑에 집어 넣었다. 그녀는 비스듬히 달빛에 봉투를 비춰보고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봉투를 빠르게 흔들었다. 그녀는 복도 건너편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문에는 '계단'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내가 어떻게 하려는지 알아요?" 그녀가 물었다. "글쎄?" ".....우리, 돌아가기 전에 왕창 마셔요...." "뭐를?" 그가 웃었다. 그녀도 계속 봉투를 흔들면서 따라 웃었다. "아니, 그냥 옥상으로 올라가 보자구요." "왜 옥상에 올라가자는 거지?" 하고 그가 천천히 물었다. "아까 달을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별도? 오늘은 멋진 밤이에요. 밤 경치가 굉장할 거예요." "글로레이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가 말했다. "어머, 그렇게 꼭 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는 봉투를 지갑에 넣고서 닫았다. "한번 가봐요." 그녀는 명랑하게 말하며 그에게서 몸을 돌려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어젯밤에 그 홀에서 말했던 로맨스는 어땠어요?"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밀어젖히고 뒤를 돌아다보며 그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에비, 나는.... 높이 올라가면 어지럽단 말이야." 그는 살짝 웃어보이려고 했다. "내려다보지 않으면 돼요." 그녀는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가장자리 쪽으로 가지 않으면 괜찮아요." "만일 문이 잠겼으면...."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잠그지 않을 거예요. 소방법에 의해서." 그녀는 넌덜머리가 난 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 어서와요! 마치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뛰어들라고 한 것 같군요!" 그녀는 복도를 지나 층계참에 서서 문을 잡은 채 그를 기다리며 웃었다. 그는 마치 그의 일부분이 그녀를 따라가라고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넋을 잃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층계참에 다다르자 엘렌은 붙잡고 있던 문에서 손을 놓았다. 쉬잇 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면서 복도의 불빛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단지 10 와트짜리 전구만이 계단의 어둠과 손해보는 싸움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여덟개 올라가 돌아선 뒤, 다시 여덟 개를 더 올라갔다. 거기에는 커다랗게 흰 글씨로 경고가 쓰인 시커먼 금속 문이 있었다.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출입 엄금' 파웰은 '엄금'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크게 읽었다. "형식적인 거예요." 엘렌은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손잡이를 열어 보려고 했다. "분명히 잠겼을 거야." 파웰이 말했다. "만일 잠겼다면 그런 걸 써놓지 않았을 거예요." 엘렌은 경고문을 가리켰다. "당신이 열어봐요." 그는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잠겼어." "오, 좀더 세게 밀어봐요."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구." 그는 마치 지옥에 가서나 그만 둘 것처럼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가 온 힘을 다해 어깨로 문을 밀었다.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그는 하마터면 나동그라질 뻔했다. 그는 문턱을 넘어서 타르가 칠해진 옥상으로 나갔다. "자, 에비---" 그는 몸을 죽 펴고 문을 활짝 열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나와서 멋진 달을 구경하시지." "화가 났군요." 엘렌은 심각하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서있는 그를 얼르듯이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문턱을 넘어 계단의 그림자에서 나와 혹시 살얼음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며 스케이트 타는 사람처럼 넓은 옥상쪽으로 나아가는 파웰의 곁을 가벼운 걸음걸이로 지나갔다. 그녀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잠시 뒤 파웰이 그녀의 왼쪽으로 다가왔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그 단단한 문에 어깨를 부숴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야." 그는 거북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은 KBRI 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별이 반짝이는 검붉은 하늘 위로 시커멓게 해골처럼 솟아 있었다. 그 탑의 꼭대기에서 깜박거리는 빨간빛이 가끔씩 옥상을 잠시 비추었다가는 사라졌다. 빨간 깜박등 빛 사이로 머리 위의 초승달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엘렌은 고개를 들어 파웰의 긴장한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희끄무레하더니 이내 빨간빛으로, 다음엔 다시 하얗게 바뀌었다. 그 너머로 환기통을 둘러싸고 있는 벽과, 밤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하얀색 돌이 보였다. 그녀는 어느 신문에 실렸던 그림이 떠올랐다. 저 네모난 곳 남쪽에 X표시 -- 그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쪽이었다. 갑자기 그녀는 그쪽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고, 도로시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고통의 파문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시선이 가장자리가 하얗게 테두리진 파웰의 옆모습에 고정되었다가 가까스로 다른 쪽으로 돌려졌다. '이젠 됐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안전해 -- 칵테일 라운지에서 이것저것 캐묻는 것보다 더욱 안전해. 난 괜찮아, 난 에블린 키트리지이니까....' 그는 차츰 그녀의 눈빛을 의식하게 되었다. "당신은 하늘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는 위로 치켜든 얼굴을 조금도 내리지 않고 말했다. 그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고개를 쳐드니 어지러웠다. 별들이 빙빙 돌고.... 그녀는 고개를 내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옥상의 바깥 가장자리로 갔다. 거칠거칠한 면을 손으로 짚으면서 그녀는 차가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그는 그녀를 죽였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경찰서에 가기에 충분한 일이다. 나는 안전하다.... 마침내 그녀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녀는 아래에 펼쳐진 파노라마를 -- 무수한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드와이트, 와서 저것 좀 봐요!" 그는 돌아서서 난간 쪽으로 오다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섰다. "아름답죠?"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래, 아름다운데." 그가 말했다. 그는 미풍에 부드럽게 탑의 케이블이 흔들거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아 환기통을 마주 보았다. 그는 그 난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오른쪽 발을 내디디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이 다리는 마치 주정뱅이가 한 잔만 마시러 술집으로 가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아주 잔인하게 그를 앞으로 데려갔다. 그는 환기통 난간 앞으로 똑바로 가서 차가운 돌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는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엘렌은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면서 희미한 초승달빛 아래에서 그를 찾아보았다. 잠시 뒤 탑의 붉은색 불빛이 환기통 벽에 있는 그를 비쳐 주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놀란 듯이 마구 뛰었다. 붉은 빛은 사라졌지만,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엘렌은 탄력있는 타르 위를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며 앞쪽으로 나아갔다. 파셀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켜진 창문에서 나오는 몇몇 개의 노란빛 줄기가 환기통의 네모난 구멍 안에서 서로 엇갈렸다. 하나는 멀리, 바로 바닥의 벽들이 한 점에서 만나는 초점인 작은 회색 콘크리트 사각형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 높아서 어지러운가 보죠?" 그가 빙그르 돌았다. 그의 눈썹과 콧수염 위에 구슬땀이 맺혔다. 신경질적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스켰다. "그래--"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내려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 스스로 고문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게 내 특기지." 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만 내려갈까?" 그가 물었다. "온 지 얼마 안됐잖아요?" 엘렌은 가볍게 반대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가늘고 긴 환풍기 굴뚝 사이를 지나 옥상의 동쪽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파웰은 마지 못해서 따라갔다. 가장자리에 이르자, 엘렌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그들 옆으로 솟아있는 빨간색 빛의 탑을 올려다 보았다. "여기서 보니 훨씬 멋있군요." 그녀가 말했다. 파웰은 난간을 잡은 채 시가지를 둘러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에 여기에 와본 적이 있어요?" 엘렌이 물었다. "아니--" 그가 말했다. "오늘이 처음 와보는 거야!" 그녀는 난간 쪽으로 돌아서서 몸을 구부려 2층 아래에 불쑥 튀어나온 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얼굴을 찡그렸다. "작년에--" 엘렌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여기에서 어떤 여자가 떨어졌다는 기사를 읽은 것 같아요...." 환풍기의 캡이 찰칵 소리를 냈다. "그래--" 파웰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자살이지, 떨어진 게 아니야." "오, 그랬나요." 엘렌은 그 불쑥 튀어나온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서 떨어져 죽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겨우 2층 밖에 안되는데." 그는 한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환기통." "아, 맞아요." 그녀는 몸을 쭉 폈다. "이제 생각났어요. 데모인 신문에 아주 커다랗게 났었지요." 그녀는 난간 위에 지갑을 올려 놓고, 마치 지갑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해 보듯이 양손으로 그것을 꽉 쥐었다. "스토다드 여학생 아니었던가요?" "그랬었지." 하고 말하고 나서 그는 멀리 지평선 쪽을 가리켰다. "저기 불이 켜진 둥그런 건물이 보이지? 저것이 스토다드 천체 관측소야. 자연과학 과제 때문에 한번씩 가곤 하지. 그들은 한 개--" "아는 여학생이었어요?" 빨간 불빛이 그의 얼굴에 지나갔다. "그런 건 왜 묻는거지, 에비?" 파웰이 말했다. "단지 당신이 그녀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생각해 보는 게 당연하잖아요, 당신이 스토다드에 다니니까...." "그래--"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아는 여자였어. 아주 멋진 여학생이었는데.... 자, 이젠 다른 이야기나 하지." "그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그녀가 말했다. "모자 때문이에요." 파웰은 화가 나서 한숨을 내쉬고 지겨운 듯이 말했다. "무슨 모자?" "그녀는 나비 리본이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대요.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났던 날 나도 나비 리본이 달린 빨간 모자를 샀었거든요." "그녀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누가 그래?" 파웰이 물었다. "그렇지 않았나요? 데모인 신문에는 분명히 그렇게 실려 있었는데...." 그 신문이 틀렸다고 말해 봐, 어서. 그녀는 간절히 바랬다. 말해 봐, 그것은 초록색이었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클레리온 지에는 빨간 모자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는데." 파웰이 말했다. "난 그 기사를 꽤 주의깊게 읽었거든. 아는 여자였으니까...." "다만 블루 리버 신문이 그것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빨간 모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엘렌이 말했다. 파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렌은 그가 곁눈질로 자기 시계를 보는 것을 보았다. "이봐--"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25분전 9시야. 난 이 광대한 장면을 이젠 지겹게 보았어." 그는 몸을 돌려 서둘러 계단 쪽으로 나아갔다. 엘렌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아직 갈 순 없잖아요." 그녀는 경사진 지붕 그림자 바로 바깥에서 파웰의 팔을 잡으로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왜 갈 수 없다는 거야?" 미소 뒤에서 그녀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나... 담배 좀 피우고 싶어요." "아...." 그는 주머니를 뒤지다가 잠시 멈췄다. "하나도 없는데. 아래층에 내려가서 사면 돼지 뭐." "내게 있어요." 하고 말하며 그녀는 지갑을 뒤적였다. 엘렌은 뒤로 물러나 마치 신문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녀 뒤에 있는 환기통으로 갔다. 바로 X표시가 되어 있던 그곳으로-- 그리고 살짝 돌아서서 그가 있는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뒷걸음질 치고는 지갑을 열고, 파웰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서 담베를 피우면 멋있을 거예요." 그녀의 엉덩이가 난간에 닿았다. X. 엘렌은 지갑 안을 더듬거렸다. "한대 피우겠어요?" 그는 사양하고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화가 난 듯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녀는 하얀 원통형 담배가 나올 때까지 구겨진 담뱃갑을 흔들면서 생각에 잠겼다 -- 오늘밤에 해야 해. 이제 더 이상 그는 에블린 케트리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 있어요." 그녀가 내밀었다. 그는 거칠게 담배를 낚아챘다. 그녀는 한 개비 더 빼려고 손가락 끝을 넣으면서 두리번거리다가 환기통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있는 쪽으로 살짝 몸을 돌렸다. "여기가 그곳이지요....?"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파웰의 눈이 가늘어졌고, 턱은 단단한 인내의 마지막 실로 팽팽하게 굳어졌다. "잘 들어, 에비." 그가 말했다. "그것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말자고 부탁했어. 그 정도의 호의는 베풀어 줄 수 있잖아. 응? 부탁이야." 그는 입술 사이로 담배를 찔러 넣었다. 엘렌은 파웰의 얼굴에서 눈의 떼지 않았다. 담잿감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담뱃갑을 침착하게 다시 지갑 안에 집어넣었다. "미안해요." 왼쪽 팔 아래로 지갑을 끼면서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난 당신이 뭣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상했는지 모르겠어요." "이해 못하겠어? 그 여학생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단 말야." 그녀는 성냥을 켜서 그의 담배에 붙여주었다. 노란 불꽃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긴장되어 이글거리는 파란 눈과 피아노 줄처럼 팽팽해진 턱이 보였다. 한번 더, 한번 더.... 그녀는 그의 담배에 불이 붙자, 성냥을 그의 얼굴 쪽으로 들어올렸다. "신문에서는 왜 그녀가 자살했는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었죠. 그렇죠?" 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분명히 그녀는 임신했을 거예요." 엘렌이 말했다. 성냥불이 꺼지고 탑의 불빛이 비치자, 그의 얼굴이 노란 불빛에서 강렬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철사처럼 빳빳해진 근육이 터지고 푸른 눈이 댐이 폭발하듯이 활짝 떠졌다...... 지금이다! -- 엘렌은 승리감에 차서 생각했다 -- 지금이다! 유리해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겠지...... ! "맞아 -- "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맞아! 당신은 왜 내가 그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려는지 알고 있어? 당신은 왜 내가 여기에 올라오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아? 왜 이 빌어먹을 건물 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는지 알아?” -- 파웰은 담배를 내던졌다 -- “왜냐하면 여기서 자살한 그 여자가 어젯밤에 당신에게 말했던 바로 그 여자란 말이야. 당신처럼 웃는 그 여자!” 그의 눈이그녀 얼굴에서 떨어졌다. “내가 알던 그 여자는 -- ” 그의 말이 단두대에 잘린 듯이 갑자기 끊어졌다. 그녀는 아래로 떨구어진 그의 눈이 놀라면서 커지는 것을 보았다. 탑의 불빛이 사라지고 그녀는 앞에 있는 희미한 형태로서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갑자기 그가 엘렌의 왼쪽 손목을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붙잡았다.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녀의 입에서 담배가 밀려나왔다. 파웰은 그녀의 손가락을 비틀면서 팔을 꺾었다. 그녀의 겨드랑이에서 지갑이 미끄러져 발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의 오른손이 그의 머리 위에서 헛손질했다. 그는 그녀 손의 힘줄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져서 억지로 손가락을 펴게 했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파웰은 뒤쪽으로 걸어갔고, 다시 희미한 형체만 보이게 되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뭘 가져간 거예요?”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몸을 구부려 지갑을 주워들었다. 그녀는 왼손을 구부리고, 불쾌한 생각에서 그에게 잡혔던 손에 생긴 자국을 없애보려고 애썼다. 잠시 뒤 다시 빨간빛이 비쳤고, 엘렌은 파웰의 손바닥에 어떤 물체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구릿빛으로 찍힌 글씨가 날카롭고 분명하게 반짝거렸다. 엘렌 킹쉽이라고 -- 싸늘한 기운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매스꺼운 공포가 차올라와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비틀거렸다. 그녀의 등에 딱딱한 환기통의 난간 끝이 느껴졌다. 제 8 장 "그녀의 언니......" 파웰은 더듬거렸다. "바로 그녀의 언니였군......" 그녀는 눈을 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성냥갑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그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발에 성냥갑을 내던지고는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게 뭘 원하는 거지, 말해 봐?"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엘렌은 얼른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의 눈빛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그는 그녀와 계단의 그림자 사이에 서 있었다. 만일 그녀가 그를 한바퀴 돌게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난간에서 등을 떼고 왼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웰은 이마를 쓸어내렸다. "당신은...... 당신은 일부러 나를 찾은 거야...... 나에게 그녀에 대해서 물어보고...... 여기 옥상으로 나를 데려왔어......" 이제 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투로 바뀌었다.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옆걸음질을 했다. "그렇다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앞쪽으로 나오려고 몸을 구부렸다. "잠깐." 엘렌이 소리쳤다. 엉거주춤하게 구부리고 있던 다리가 힘없이 얼어붙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 그녀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썼다. "당신에 대해서 모두 아는 사람이 또 있어요. 내가 오늘밤에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과, 또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무슨 일이......" "만일 무슨 일?" 파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야?" "내가 뭘 말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어요. 만일 이곳에서 내가 떨어진다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파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런 사람처럼 보이나......?" 그의 한쪽 손이 힘없이 난간 쪽으로 늘어졌다. "제기랄!" 그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당신 혹시 정신나간 사람 아니야?" 엘렌은 그에게서 5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난간에서 떨어져서 그의 오른쪽 뒤에 있는 계단 문으로 똑바로 가로질러 갔다. 그는 천천히 그녀가 조심스럽게 가로질러 가는 데에 따라서 몸을 돌렸다.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그가 다그쳤다. "뭘 안다는 거야?" "모든 것을 -- " 그녀가 말했다. "전부. 그 사람은 지금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만일 내가 5분 안에 내려가지 않으면 그가 경찰을 부를 거예요." 파웰은 지친 듯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내가 졌군." 그가 중얼거렸다. "이젠 아래층에 내려가고 싶다고? 가고 싶다는 거야? 그럼, 어서 내려가!" 그는 몸을 돌려 환기통 난간으로 -- 엘렌이 처음에 문 쪽으로 가기 전에 서 있었던 지점으로 다가갔다. 그는 뒤에 있는 돌에 팔꿈치를 대고 서 있었다. "어서 가! 어서 가라고!" 엘렌은 그가 자기를 때려서 못 가게 막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문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만일 내가 체포되기로 되어 있다면 -- " 파웰이 천천히 말했다. "그 이유나 알고 싶어. 아니, 그것을 물어봐서도 안되는 건가?" 엘렌은 손으로 문을 열고 나서야 대답했다. "난 당신이 대단한 배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도로시가 당신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믿도록 했으니까." "뭐라고?" 그는 너무 놀라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결혼할 거라고 그녀에게 믿게끔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그건 모두 그녀 쪽에서, 모두 그녀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어." "거짓말 -- " 엘렌은 증오스럽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추악한 거짓말쟁이야." 그녀는 열린 문 뒤로 머리를 숙이고 높은 문턱을 넘었다. "잠깐만!" 그는 자기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엘렌이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난간을 따라 뒤로 떨어져 그 길을 나와 방금 엘렌이 갔던 길을 따라갔다. 그는 문의 반대쪽에서 약 6 미터 되는 곳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 속에서 엘렌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한 손으로는 문 손잡이를 잡고 닫을 준비를 한 채. "제발 -- " 파웰이 진지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줘야지!" "당신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은 정말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제기랄......" 그는 거칠게 중얼거렸다. "좋아요." 엘렌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말해 주지요. 첫째, 그 애는 임신을 했어요. 둘째, 당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 " "임신?" 그 말이 바위처럼 그의 가슴을 쳤다. 그는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도로시가 임신을 했다고? 그게 바로 그녀가 자살한 이유야? 자살한 이유냐고?" "그 애는 자살한 게 아니에요!" 엘렌이 소리쳤다. "당신이 그 애를 죽였어!" 그녀는 문을 잡아당겨 닫아버리고는 돌아서서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철계단을 덜컹거리며 뛰어 내려갔다. 구둣굽이 흔들거려 계단 손잡이를 꽉 움켜잡고 계단참마다 방향을 돌렸다. 그녀가 계단을 두 칸 반을 내려가기도 전에, "에비! 엘렌! 기다려!" 하고 그가 뒤에서 큰소리치며 내려오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녀는 복도를 돌아서 줄곧 뛰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기에는 이미 늦었으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면 그가 그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엘렌의 가슴은 쿵쿵 방망이질쳤다. 옥상에서 로비까지 14층의 계단은 중간에서 구부러지니까 28개나 된다. 엘렌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두컴컴한 계단이 아래로 휘감겨 있었고, 그가 뒤에서 점점 가까워지며 목소리도 점차 커졌다. 그녀는 겨우 팔로 벽을 짚으며 돌아서서, 그 빌어먹을 구둣굽 때문에 반쯤 미끄러지듯이 1층으로 굴러 내려갔다. 대리석 복도를 지나 미끄러운 로비 바닥에 딸각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울리면서 뛰어가자 깜짝 놀란 흑인 안내원이 엘리베이터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육중한 회전문을 간신히 밀고 나와서 미끄러지기 쉬운 대리석 계단을 몇 개 더 내려갔다. 보도에서 어떤 여자와 거의 부딪칠 뻔하면서 계속 왼쪽으로 돌아 적막한 작은 도시로 내려가는 워싱턴 가(街) 쪽으로 뛰어갔다. 가슴이 쿵쿵 세게 고동치는 가운데 속도를 줄여 모퉁이를 돌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에서 파웰이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면서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기다려! 기다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서 다시 달렸다. 지나가던 남녀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차를 타고 있는 녀석들이 태워주겠다고 소리치는 것을 무시한 채 -- 그 블럭 끝에 있는 호텔 광고처럼 번쩍이는 호텔의 유리문 쪽으로 달려갔다 -- 그도 역시 점점 더욱 가까워졌으나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뛰었다 -- 마침내 엘렌이 반짝이는 유리문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즐기듯이 문 한쪽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녀는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안전하고 포근한 로비, 호텔 보이와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들이 있는 곳......그녀는 의자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곧장 구석에 있는 전화 박스로 갔다. 왜냐하면 그 지방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갠트가 그녀와 함께 경찰에 간다면 그들은 엘렌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녀를 믿고 재수사를 시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는 전화번호부를 집어들고 K로 시작되는 면을 뒤적였다 -- 지금이 5분 전 9시이니까 그는 스튜디오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전화번호부를 넘기며 숨결을 가다듬었다. KBRI -- 5_1000. 그녀는 지갑을 열고 동전을 찾았다. 5_1000, 5_1000, 그녀는 전화번호부 선반에서 몸을 돌려 위를 쳐다보았다. 파웰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고 금발이 헝클어진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섭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곳에는 밝은 불빛과 사람들이 있다. 증오가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빙하처럼 매끄럽게 만들었다. "당신은 다른 길로 도망갔어야 했어. 뭐 그래 봤자 소용없겠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지금이라도 도망갈 텐데." 그리고는 그는 병든 개가 애원하듯이 매우 애처롭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한 표정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진정으로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하는 슬픈 얼굴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심각하게 말했다. "엘렌,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나는 전화할 데가 있어요." 엘렌이 말했다. "저쪽으로 비켜줘요." "제발,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 파웰은 호소했다. "그녀가? 그녀가 정말 아이를 가졌었어?" "전화할 데가 있다니까요." "그녀가 아이를 가졌었느냐고?" 그는 다그쳐 물었다. "그녀가 그렇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신문엔 그런 말이 없었어! 아무 말도......" 파웰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낮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몇 개월이었지?" "제발 나가줘요." "그녀는 몇 개월째였지?" 그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오, 하나님! 두 달째였어요." 그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 제발 이제 비켜주겠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행동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비켜줄 수 없어. 에블린 키트리지로 행세한 이유를......"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파웰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정말로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는 여전히 가늘게 뜨고 있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그때 뉴욕에 있었어!" 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난 그걸 증명할 수 있어! 난 지난 봄 내내 뉴욕에 있었다고!" 그 말에 엘렌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난 당신이 이집트의 카이로에 있었다고 말할 줄 알았죠." "제기랄......" 그는 거칠게 내뱉었다. "5분간만 내게 말할 시간을 줄 수 있겠어? 단 5분간만?"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뒤에서 얼른 신문을 들어올리며 사라지는 어떤 남자의 머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듣고 있어." 그가 말했다. "자, 단 5분만 칵테일 라운지에 들어가자고. 그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잖아. 거기선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어. 만일 당신이 그런 걸 걱정하고 있다면 -- "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녀가 대들었다. "만일 당신이 그때 뉴욕에 있었고 그 애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왜 어젯밤에 시청 건물을 지날 때 시선을 돌렸지요? 그리고 왜 오늘밤에 옥상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 그렇게 환기통 안쪽을 내려다보았을까요?" 파웰은 기가 막힌 듯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거라면 설명할 수 있지." 그가 사납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아니, 당신은 알 거야. 나는 느끼고 있어......" -- 그는 어떤 낱말 하나를 찾아내려고 말을 멈췄다. "......나는 그녀의 자살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거든."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라운지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의 자리에서 유리잔들이 마주치고, 피아노가 거시윈의 작품을 감미롭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엘렌은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태도로 소파 뒤에 등을 대고 빳빳하게 앉아 있었다. 웨이터가 오자 그들은 위스키 샤워를 주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마실 것이 놓이고 나서야 파웰은 엘렌이 아무 말 없이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기 잔을 들고 홀짝거렸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황한 목소리가 천천히, 그리고 거북하게 흘러나왔다. "재작년에 수업이 시작된 지 2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그녀를 만났어." 그가 말했다. "지지난 학기 -- 재작년 9월에 말이야. 난 그전에도 그녀를 본 적이 있었어 -- 그녀는 나와 두 과목을 함께 듣고 있었고, 1학년 때도 한 과목을 함께 들었었지 -- 그러나 난 그때까지 한 번도 그녀와 말해 본 적이 없었어. 왜냐하면 나는 대개 첫번째나 두 번째 줄에 앉았고, 그녀는 항상 뒤쪽 구석에 앉았으니까. 내가 그녀와 말하기 전날 밤에 두세 녀석과 함께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중 한 녀석이 얌전한 여자애가 사실은 어떻다는 둥......그런 이야기를 하더구먼." 그는 말을 멈추고 잔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았다. "'너는 얌전한 여자애와 사귀는 게 어울릴 거야.' 하고 녀석들이 말하더군. 다음날 그녀가 항상 앉던 구석 뒷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녀석이 한 말이 떠올랐어. 난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면서 처음 그녀에게 이야기를 걸었지. 난 그녀에게 과제물 적은 것을 잊어버렸는데, 그것을 알려주겠느냐고 말했어.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 그것은 단지 그녀에게 말을 걸 구실이었고,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그녀는 내게 대답을 해줬어...... 아주 진지하게. 나는 깜짝 놀랐지. 내 말은, 대부분 예쁜 여자애들은 그런 일을 시큰둥하게 받아들이고 대충 대답하게 마련이거든. 당신도 알겠지만...... 하지만 그녀는 너무...... 순진해서 나는 어느 정도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였어. 그래서 우린 토요일 밤에 만나서 극장에 갔다가 프랭크의 플로런타인 룸에 갔지. 우린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어. 우스개 장난이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멋진 시간을 보낸 거야. 우린 다음주 토요일 밤에 또 만났고, 그 다음주엔 두 번, 그리고 다음에는 세 번씩 만났어. 마침내 우리는 헤어지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 밤 만났지. 서로를 잘 알게 되고 보니 그녀는 정말 재미있는 여자였어. 강의실 안에서의 그녀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나는 행복했어 -- 난 그녀를 좋아했지. 그러다가 11월초에 그 녀석들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어 -- 얌전한 여자애들이 사실은 어떻다고 말하던 것이. 도로시에 대해서도 -- " 그는 고개를 들고 엘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지?" "그래요." 그녀는 재판관처럼 차갑고 무감각하게 말했다. "이것은 그녀의 언니에게 하기엔 좀 곤란한 말인데." "계속해 봐요." "그녀는 아주 멋진 여자였어." 파웰은 여전히 엘렌을 보면서 말했다. "그것은 단지 그녀가......사랑에 굶주렸다는 말이야. 섹스가 아니라 사랑에." 그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집과 어머니 -- 당신 어머니,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그런 이야기를 했지." 엘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그녀는 그것은 단지 자기의 뒷자리에 누가 앉는 바람에 생기는 흔들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동안 그렇게 진행되었지." 파웰은 이제 고백하는 만족감에 부끄러움이 녹아 없어졌는지 좀더 빠른 말투로 계속해 나갔다. "그녀는 정말 사랑에 빠져서 줄곧 내 팔에 매달려서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지었어. 언젠가 내가 마름모 무늬의 양말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그것을 세 켤레나 떠주었어." 파웰은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를 쓸었다. "나도 그녀를 사랑했지. 하지만 그 사랑은 다른 거였어. 그것은......동정에서 나온 사랑이었어. 난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 그녀는 내게 너무 잘 해주었으니까. 12월 중순쯤에 그녀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어. 아주 간접적으로 -- 크리스마스 휴가 바로 전이었는데, 난 여기 블루 리버에 머물 예정이었어. 난 가족이 없었고, 시카고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야 사촌 두 명과 고등학교 친구 몇 명, 그리고 해군 친구들뿐이지. 그녀는 함께 뉴욕으로 가서 자기 가족을 만나자고 하더군. 난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계속 그 애길 꺼냈어. 할 수 없이 나는 현실을 이야기했지. 난 아직 정착할 준비가 안됐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많은 남자들이 약혼만 해두었다가 심지어 스물두 살에 결혼하기도 한다더군. 그리고 만일 내가 걱정하는 게 장래문제라면 자기 아버지가 내게 자리를 하나 줄 수도 있다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원치 않았어. 난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거든. 언젠가 내 계획에 대해서 말하게 될 때가 있겠지. 그녀는 학교를 마치고 나면 우리 두 사람 모두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난 그녀에게 여지껏 부유하게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런식으로는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 마침내 그녀는 자기가 날 사랑하는 것만큼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했어. 그것에는 물론 몇 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었지만. 끔찍한 소동이 벌어졌지. 그녀는 울부짖으면서 내가 후회하게 될 거라며, 보통 여자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말을 해댔어. 잠시 뒤 그녀는 작전을 바꾸었는지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더군 · 10· 때를 기다렸다가 우리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러나 난 줄곧 그녀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그런 틈이 생긴 것이어서 나는 방학 전에 그것을 완전히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나는 그녀에게 이제는 모두 끝났다고 말했어. 그녀는 그냥 울기만 하더군.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 이렇게 해서 끝이 났지. 그리고 며칠 뒤에 그녀는 뉴욕으로 떠났고." 엘렌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그 애는 내내 우울해 있었어요. 툭 하면 화를 내고...... 트집이나 잡고......" 파웰은 유리잔 바닥으로 테이블에 동그란 물자국을 만들었다. "방학이 끝난 뒤에 -- "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참 불편했어. 우리는 여전히 두 과목 수업을 함께 들어야 했으니까. 나는 강의실 앞자리에 앉아서 감히 뒤를 돌아볼 엄두도 못 냈지. 우리는 캠퍼스 안 여기저기에서 서로 부딪쳤어. 그래서 난 스토다드에 진절머리가 나도록 있었으니까 뉴욕 대학으로 전학 신청서를 제출했어." 그는 엘렌의 축 늘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가 말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난 그것을 증명할 수도 있어. 난 뉴욕 대학에서 입학허가증을 받았고, 도로시가 내가 준 팔찌를 돌려줄 때 내게 보낸 편지도 가지고 있어." "아니에요." 엘렌은 멍청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예요." 파웰은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했다. "내가 떠나기 바로 전인 1월말쯤, 그녀는 다른 녀석과 어울리기 시작했지. 내가 봤어--" "다른 남자?" 엘렌은 앞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난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어. 그래서 내 일이 결국 그녀에게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 때문에 나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어. 심지어 약간 떳떳함마저도 느끼면서." "그가 누구였어요?" 엘렌이 물었다. "누구?" "다른 남자." "몰라. 나와 한 과목을 함께 들은 녀석이라는 것밖엔 -- 이것으로 그녀와의 이야기는 끝이야. 그리고 난 5월 1일에 그녀의 자살기사를 읽었어. 단지 뉴욕 신문에 실린 단 한 줄의 기사를 통해서 -- 나는 타임스 광장의 시외 신문판매대로 뛰어가서 클래리온 레저 한 부를 손에 넣었어. 그리고는 그 주 내내 빠뜨리지 않고 클래리온 지를 사봤어 -- 그녀가 당신에게 보냈다는 유서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사는 더 이상 실리지 않았어. 끝내 그녀가 왜 자살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단 말이야...... 당신은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난 그녀가 단지 나 때문에 자살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 그것은......일반적인 절망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이 어떻든 주원인은 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 일이 있은 뒤 내 성적은 뚝 떨어졌지. 나는 너무 괴로웠어. 내가 그녀에게 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험지를 받아들면 식은땀이 흘렀고, 결국 점수는 아주 형편없었어. 나는 스스로에게 그건 학교를 옮겼기 때문이라고 위안했지. 뉴욕 대학에서 나는 스토다드에서 이수하지 않았던 여러 교양 과목을 들어야 했으니까. 게다가 거의 16학점이나 무효로 되었어. 그래서 난 9월에 스토다드에 돌아가서 정상적인 내 생활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확인시키고도 싶었고. 어쨌든 그것은 실수였어. 나는 그녀와 함께 갔던 곳들 -- 시청 건물 같은 것을 볼 때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나는 계속 내 자신에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었으며, 만일 다른 여자였다면 그것을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었을 거라고 말했지......하지만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어. 나는 내가 그 건물을 지날 때면 내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 오늘밤 환기통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알아요." 엘렌은 그를 재촉하면서 말했다. "나도 역시 그곳을 보고 싶었어요. 사실 그것은 자연스런 반응이지요." "아니 -- " 파웰이 말했다. "당신은 몰라.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는 엘렌의 싸늘한 미소를 보고 말을 멈췄다. "왜 웃는 거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글세...... 바로 그거야. 지금 당신은 그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자살한 거라고 말했어......두 달째. 물론 그것은 유감스런 일이긴 하지만, 내게는 좀더 부담감을 덜어주는 이야기야. 나는 만일 내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내가 일이 그렇게 되어가리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어? 내 말은 책임감에도 한계가 있다는 거야. 만일 계속 그런 식으로 추궁해 올라간다면 누구라도 비난받지 않을 사람이 없단 말야." 그는 남아 있는 술을 들이켰다. "당신이 경찰로 가는 것을 단념해서 일단은 안심이야." 그가 말했다. "그런데 어디에서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당신이 생각하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 애는 살해된 거예요." 엘렌이 말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는 뒷자리에 있는 사람의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파웰에게 모호하게 쓰여진 편지, 출생증명서, 헌것과 새것, 빌려온 것과 푸른 것 등에 대해서 죽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하게 그녀의 말을 다 들었다. 그리고 나서, "오......그건 우연의 일치일 리가 없어." 하고 그는 그녀가 자살을 부인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 애와 함께 있는 걸 보았다던 그 남자 -- " 엘렌이 말했다. "정말 그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난 그와 그 학기 수업 중 한 과목을 같이 들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을 때는 시험이 시작되었던 1월말이어서, 그 이후로는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나는 뉴욕으로 떠났고." "그를 다시 본 적은 없어요?" "모르겠어." 파웰이 말했다. "확실치 않아. 스토다드 캠퍼스가 워낙 넓은 곳이라서." "그러면 그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건가요?" "지금은 알 수 없어." 파웰이 말했다. "그러나 한 시간 안에 그의 이름을 알아낼 수는 있어."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난 그의 주소를 가지고 있거든." 제 9 장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두 번 보았다고 했지?" 파웰이 말했다. "그러니까, 두 번째는 어느 날 오후에 캠퍼스 건너편에 있는 간이음식점에서였어. 거기에서 도로시를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그곳은 사람들이 드문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음식점을 이용했던 거야. 난 자리에 앉고 나서야 그들을 알아보았어. 하지만 일어나서 나가고 싶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그녀가 이미 거울 속으로 날 보았으니까. 나는 구석 자리 끝에 앉아 있었으며, 다음에 여자애들 두 명, 그 다음에 도로시, 그리고 그 녀석. 그들은 우유를 마시고 있었지. 그녀는 날 보는 순간 그의 팔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 시작했어. 내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 나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불쾌했고, 또 다소 당황하게 되었지. 잠시 뒤 그들은 나갈 준비를 하더군. 그녀는 우리 사이에 앉아 있는 여자애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녀석 쪽으로 돌아서서 필요 이상의 큰소리로 말했어. '자, 당신 집에 가서 함께 공부해요.' 나에게 얼마나 자기들이 친한가를 나타내 보이려고 한 거겠지. 그들이 나가자마자 여자애들 중 하나가 다른 애에게 그가 참 잘생겼다고 말하더군. 그 여자는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어. '그는 작년에도 그런 애들하고 어울려 다녔었잖아. 그는 돈이 있는 여자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하고 말이야. 나는 도로시가 손쉬운 목표가 되었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난 그녀가 그런 돈을 노리는 녀석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지. 나는 간이음식점을 나와서 그들 뒤를 따라갔어. 그들은 캠퍼스의 북쪽으로 몇 블럭 떨어진 집으로 가더군. 그는 벨을 두 번 누르고 나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고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더구먼. 나는 길 옆으로 걸어가서 그 집 주소를 노트에 적어놓았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찾아가서 그의 이름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 나는 그에 대해서 학교 주변의 여자애들에게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 하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기로 했지. 캠퍼스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죽 생각해 봤어. 다만 신 포도 (여우가 아무리 애써도 따먹을 수 없는 포도를 가리키며, '저 포도는 시어서 먹을 수 없을 거야' 하고 말했다는 속담에서 유래된 말) 같은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자애들에게 그 녀석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본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아무튼 그는 내가 그녀에게 한 것보다 더 가혹하게 도로시를 다루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반발'이라는 말 -- 어떻게 내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어?" "지금도 그 주소를 가지고 있어요?" 엘렌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가지고 있을 거야. 나는 오래 된 수첩들을 모두 가방 속에 보관해 두니까. 당신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것을 볼 수 있어." "좋아요 -- " 그녀는 곧 동의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가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가 바로 그 남자가 아닐 수도 있지." 파웰은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그 남자가 틀림없어요. 그보다 더 나중에 그 애가 함께 다닌 남자가 있을 순 없으니까요." 엘렌은 일어섰다. "그곳으로 가기 전에 전화할 데가 있어요." "당신의 보조자에게? 5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준비를 하고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다던 사람?" "그래요." 그녀는 웃으면서 인정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녀는 조명이 흐릿한 방의 뒤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벽에 맞춰 검은색으로 칠해진 전화 박스가 마치 관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5_1000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KBRI입니다."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고든 갠트 좀 바꿔주세요." "미안합니다만, 갠트 씨는 지금 방송중인데요. 10시에 다시 전화하시면 그가 나가기 전에 통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방송 레코드가 나가고 있는 동안 통화할 수 없을까요?" "미안합니다. 방송중인 스튜디오에는 전화가 연결될 수 없을 거예요." "그럼, 메모를 해주시겠어요?" 그 여자는 기꺼이 메모를 하겠다고 말했다. 엘렌은 그녀에게 킹쉽 양이라고 철자를 말해 주고는 파웰 (이것의 철자도 불러주었다)이 아닌 것 같아서 킹쉽 양이 파웰의 집으로 가서 10시까지 있을 예정이니, 갠트가 그 시간에 그곳으로 전화해 달라고 말했다. "전화번호는요?" "잠깐 -- " 엘렌은 무릎에서 지갑을 열며 말했다. "전화번호는 모르지만 주소는 알고 있어요." -- 지갑을 떨어뜨리지 않고 종이쪽지를 펴려고 애쓰면서 -- "웨스트 35번가 52번지." 그 여자는 또박또박 메모를 다시 읽었다. "맞아요." 엘렌이 말했다. "틀림없이 그에게 전해 주시겠지요?" "물론이죠." 그녀가 쌀쌀맞게 말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엘렌이 자리로 돌아오자, 파웰은 옆에 서 있는 웨이터가 들고 있는 작은 은쟁반 위에 동전을 몇 개 올려놓았다. 순간 웨이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으며, 우물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가버렸다. "다 됐어요." 엘렌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 걸쳐 있는 코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어떻게 생겼어요? 여자애들이 아주 잘생겼다고 말했다는 건 말고." "금발에, 키가 크고......" 파웰은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또 금발이군." 엘렌이 한숨을 쉬었다. "도로시는 우리 같은 북유럽 타입의 사람을 좋아했지." 엘렌은 코트를 입으며 미소지었다. "우리 아버지가 금발이에요 -- 비록 지금은 머리카락이 죄다 없어졌지만. 그리고 우리 세 자매도 모두 -- " 엘렌이 코트에 팔을 집어넣다가 그녀의 빈 소맷자락이 간막이 위를 살짝 스쳤다. "미안해요." 그녀는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테이블 위에는 칵테일 잔과 1달러짜리 지폐, 그리고 종이 내프킨이 정교하게 레이스 그물처럼 찢겨져 있었다. 파웰은 그녀가 소매를 끼는 것을 도와주었다. "됐어?" 그가 코트를 입으면서 물어보았다.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택시가 파웰의 집 앞에 선 것은 9시 50분이었다. 웨스트 35번가는 조용하고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가로등 빛은 얽혀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길 양쪽에서 마주보고 있는 노란 창문의 집들이 마치 깃발을 나부끼며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겁먹은 군인들처럼 보였다. 택시가 떠나가는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엘렌과 파웰은 어둡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열쇠 구멍에서 몇 번 열쇠를 돌리고 나서 파웰은 문을 밀어서 열었다. 그가 먼저 한쪽으로 발을 옮기고 엘렌이 그를 따라 들어가자, 그는 한 손으로 문을 밀어 닫으면서 다른 손으로 전등 스위치를 켰다. 그들은 단풍나무 가구로 가득찬 안락해 보이는 거실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하고 파웰이 말하고는 방 왼쪽에 있는 계단 쪽으로 갔다. "모든 게 지저분한 2층에 있어. 주인 아주머니는 병원에 있고 찾아올 친구도 없어." 그는 첫번째 층계에서 멈춰섰다. "아마 그 책을 찾는 데 몇 분 걸릴 거야. 저기 뒤쪽 부엌에 인스턴트 커피가 약간 있는데, 마시겠어?" "좋아요." 엘렌은 코트를 훌떡 벗으며 말했다. 파웰은 층계를 올라가 난간 기둥에서 돌았다. 그의 방 문은 계단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는 들어가서 불을 켜고 코트를 벗었다. 오른쪽 창문 쪽으로 붙여놓은 침대에는 파자마와 벗어던진 옷이 널려 있었다. 그는 코트를 아무데나 던져놓고 침대 밑에서 가방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러다가 급히 손을 빼며 몸을 똑바로 세우고 돌아서서 벽장 문과 안락의자 사이에 끼어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맨 윗서랍을 열고는 종이와 작은 상자, 넥타이, 망가진 라이터 등을 뒤적였다. 그가 찾는 종이는 맨 아래에 있었다. 과장된 몸짓으로 그것을 잡아당긴 파웰은 홀에 나가서 계단 기둥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엘렌!" 그가 소리쳤다. 부엌에서 엘렌은 물주전자 밑에서 흔들리는 가스불을 조절하고 있었다. "왜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서둘러 식당을 나와 거실로 들어갔다. "벌써 찾았어요?" 그녀는 층계 쪽을 올려다보며 물어보았다. 파웰의 손과 어깨가 층계 안으로 불쑥 나왔다. "아니, 아직 -- " 그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것을 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 그는 빳빳한 종이 한 장을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했다. "당신이 아직도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 " 그것은 엘렌의 앞쪽 층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겉에 '학생사본'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뉴욕 대학의 성적증명서를 복사한 것이었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 "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건 그렇지." 파웰이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는 층계에서 사라졌다. 엘렌은 그 성적증명서를 다시 보았다. 그의 점수가 정말 형편없다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 성적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그녀는 식당을 지나 부엌으로 돌아왔다. 부엌은 구식 설비에, 스토브 뒤쪽과 모퉁이가 갈색으로 변한 크림색의 벽으로 둘러싸인 우중충한 곳이었다. 그러나 뒤쪽에서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엘렌은 찬장에서 찻잔과 접시, 그리고 네스카페 깡통을 찾아 찻잔에 커피 가루를 넣고 저으면서, 스토브 옆쪽의 선반 위에 플라스틱 케이스가 깨진 라디오가 놓인 것을 보았다. 그녀는 라디오를 켜서 소리를 크게 했다가, KBRI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주파수를 돌렸다. 셀룰로이드 진동이 갠트의 목소리를 생소하고 가늘게 하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그냥 지나갈 뻔했다. "......정치성을 띤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 " 그가 말하고 있었다. "자, 이제 음악을 들읍시다. 정확하게 한 곡을 더 들을 시간이 남았군요. 고(故) 버디 클라크가 부른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입니다." 파웰은 엘렌에게 성적표 사본을 떨어뜨리고 나서 한 바퀴 돌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 앞에 엎드려 아래쪽으로 손을 죽 내밀었다 -- 손끝이 가방에 탁 부딪쳤다. 그 가방은 보통때 벽 쪽에 놓여 있던 곳에서 조금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손을 잡아당겨 손가락을 흔들고 입김을 불면서, 책상 밑에 그의 신발을 감춰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가방을 잡아당겨 놓은 주인 아주머니의 며느리를 욕해 댔다. 그는 다시 침대 밑에 엎드려 이번에는 좀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납덩이처럼 무거운 가방을 죽 밖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내어 알맞은 것을 찾은 뒤 두 개의 자물쇠에 넣고 비틀었다. 열쇠를 빼내고 그는 가방 뚜껑을 올렸다. 가방 안에는 교과서, 테니스 라켓, 캐너디언 클럽 병, 골프 신발......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맨 밑에 깔린 노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위에 놓인 좀 커다란 물건들을 바닥에 꺼내놓았다. 노트가 아홉 권이 있었다. 나선 모양으로 옆으로 철해진 초록색 노트들 -- 그는 그것을 한꺼번에 모아 팔에 안고 일어서서 한 권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앞뒤 겉장을 살펴보고 나서는 차례차례 노트를 가방 안으로 떨어뜨렸다. 그것은 일곱 번째 노트 뒷장에 쓰여 있었다. 연필로 쓴 주소가 뭉개져서 희미해졌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그는 나머지 두 권을 가방 안에 떨어뜨리고 돌아서서 승리에 찬 목소리로 엘렌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표정이 마치 멈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잠시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의 입은 점점 틈이 벌어지면서 서서히 미끄러져 나갔다. 마치 두꺼운 눈더미가 갈라지면서 비스듬한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리듯이 -- 벽장문이 열리고 트렌치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키가 크고 금발에, 장갑을 낀 오른손에는 커다란 총이 들려 있었다. 제 10 장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식은땀이 아니라, 바람이 통하지 않는 벽장에서 축축한 트렌치 코트를 입고 서 있었기 때문에 흐르는 뜨거운 땀이었다. 그의 손도 역시 땀으로 축축했다. 갈색 가죽 장갑 안쪽엔 가는 털이 있었고, 바람이 통하지 않도록 고무 커프스가 달려 있었다. 그의 손에서 땀이 너무 많이 흘러나와 가는 털 안감이 흠뻑 젖어 뭉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자동권총 (저녁 내내 그의 주머니 안에서 무겁게 질질 끌고 다녀 이제는 마치 그의 몸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가벼웠다)은 움직이지 않았다. 좌표에 찍힌 점처럼 공간에서 피할 수 없는 분명한 총알의 궤도. 점 A -- 돌처럼 확고한 입, 점 B -- 아이오와 주에서 산 듯한 산뜻한 양복 깃 아래의 심장. 그는 너무 가벼워서 싸늘한 강철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 콜트 45구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선분 AB의 사이를 한 발자국 줄이면서 벽장 입구에서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는 드와이트 파웰의 얼굴이 천천히 무감각하게 녹아내리는 것을 즐기면서 생각했다. 이야기를 꺼내봐. 변명을 해보라고. 아마 할 수 없을 테지. 아니, 어쩌면 그는 기탄없이 모두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었지? 칵테일 라운지에서 '로고레아(logorrhea)' -- 좋은 말이지. "너는 '로고레아'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 그는 총을 쥐고 기세당당하게 서서 말했다. 파웰은 그 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바로......도로시와 함께 있었던 -- " 그가 말했다. "그것은 네가 가진 것을 뜻하는 거야. 입에서 터져나오는 것 말이야. 잘도 지껄이더군. 칵테일 라운지에서는 내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지." 그는 둥그렇게 커진 파웰의 눈을 보고 웃었다. "난 가엾은 도로시의 죽음에 책임이 있어." 그가 파웰의 흉내를 냈다. "동정, 진정한 동정." 그는 좀더 가까이 걸어왔다. "그 노트, 이리내놔." 그는 왼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리고 서툰 짓 하려고 들지 마." 아래층에선 노래 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겨울은 여름...... 그는 파웰이 들고 있던 노트를 빼앗아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는, 권총과 시선을 파웰에게 고정시킨 채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반쯤 세로로 구부려서 겉장을 찢었다. "네가 이걸 찾아내서 무척 유감스러워. 나는 네가 못 찾기를 바라면서 저 속에서 서 있었지." 그는 접힌 노트를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네가 그녀를 죽였구나......" 파웰이 말했다. "목소리를 낮춰." 그가 위협하듯이 총을 움직였다. "저 처녀 탐정을 끼어들게 하고 싶진 않겠지, 응?" 드와이트 파웰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방법으로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너무 어리석어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넌 지금 사태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은 진짜 권총이고 장전되어 있는 거야." 파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권총만 쳐다보고 있었다 -- 아니, 지금은 노려보지도 못했다 -- 다만, 약간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그 해 들어 처음 보는 무당벌레라도 되는 듯이. "이봐, 난 널 죽일 거야." 파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너를 아주 잘 분석하는 놈이야 --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틀림없이 네 무릎이 떨리고 있을 거야, 그렇지? 식은땀이 몸 전체에 주르르 흘러내릴 텐데?" 파웰이 말했다. "그녀는 결혼하기 위해서 그 건물에 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녀 일은 잊어버려! 네 자신에 대해서나 걱정하라고!" 왜 이 녀석은 떨지 않는 걸까? 지능이 좀 모자라는 녀석인가? "왜 그녀를 죽였지?" 파웰의 눈길이 마침내 총에서 떨어졌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냥 그녀 곁을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그녀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거야." "그 이야기는 그만둬!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지금 내가 말로만 협박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 " 파웰은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가 15 채 센티미터도 가기 전에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선분 AB는 납덩어리에 의해 굳어졌고 끝이 났다. 엘렌은 부엌에 서서 닫힌 창문 너머 밖을 내다보면서 고든 갠트 프로그램의 주제 음악이 차츰 사라지는 것을 들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는 창문이 닫힌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걸까? 방 뒤쪽 구석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가서 뒷문을 보았다. 손잡이 가까이에 유리창이 깨져서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드와이트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가 알았더라면 모두 쓸었을 텐데 -- 그 순간 그녀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집 전체가 크게 흔들렸고,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는 2층에서 무엇이 넘어지는지 천장의 불빛이 흔들거렸다. 그 뒤 침묵이 흘렀다. 라디오에서 말이 흘러나왔다."차임벨로 정확한 시계가 저녁 10시를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 차임벨이 한 번 울렸다. "드와이트?" 엘렌이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이름을 더 크게 불렀다. "드와이트?" 거실로 나온 그녀는 층계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위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번엔 메마른 목소리로 불안스럽게 그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드와이트?"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엘렌. 올라와." 그녀는 쿵쿵 뛰는 가슴으로 서둘러 층계를 올라갔다. "이쪽으로." 그 목소리는 오른쪽에서 났다. 그녀는 난간 기둥을 돌아서 불켜진 복도로 갔다. 엘렌이 첫번째 본 것은 방 한가운데에 손발을 축 늘어뜨린 채 등을 대고 누워 있는 파웰의 모습이었다. 그의 윗도리는 가슴에서 멀리 젖혀져 있었다. 그의 하얀 셔츠의 가슴 위로 피가 꽃무늬 모양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문기둥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뜨고는 파웰 옆에 총을 쥐고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이 커지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의문들로 가득찬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권총을 쏜 지점에서 장갑낀 손바닥 위로 총의 무게를 한번 어림해 보면서 권총을 옮겨두었다. "난 벽장에 있었어."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저 녀석이 -- 저 가방을 열고 이 권총을 꺼내잖아. 아마 엘렌을 죽이려고 했을 거야. 난 이 녀석에게 뛰어들어서 총을 쏘았지." "아니야......오, 하나님......" 그녀는 어지러운지 이마를 문질렀다. "하지만 어떻게......어떻게 당신이......?" 그는 코트 주머니에 권총을 집어넣었다. "난 칵테일 라운지에 있었어." 그가 말했다. "바로 엘렌 뒷자리에. 나는 이 녀석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 그래서 엘렌이 전화 박스에 간 사이에 자리를 떠났던 거야." "그가 내게 한 말은......?" "이 녀석이 엘렌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아주 뻔뻔스런 거짓말쟁이더구먼." "오, 하나님! 난 그를 믿었는데......그를 믿었는데......" "그게 바로 엘렌의 문제점이야." 그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렌은 모든 사람을 믿지." "오, 하나님......"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는 파웰의 벌어진 다리 사이를 지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난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어떻게 거기에 있었지요, 라운지에 말이에요." "난 로비에서 엘렌을 기다리고 있었어. 엘렌이 이 녀석과 함께 외출할 때 엘렌을 놓쳤거든.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모든 걸 내 자신에게 책망했지. 그래서 그때부터 죽 기다린 거야. 뭐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잖아?" "하지만 어떻게......어떻게......?" 그는 마치 귀향한 군인처럼 그녀 앞에서 팔을 활짝 벌렸다. "이것 봐, 여주인공은 위급할 때에 구해 준 구원자에게 질문을 퍼붓지 않는 거야. 엘렌이 나에게 그의 주소를 말해 준 것이 정말 다행이었어. 난 엘렌이 어리석은 여자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떻게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안도와 공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빳빳한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위로하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이젠 괜찮아, 엘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게 잘됐어."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 버드." 그녀는 울먹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버드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11 장 아래층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받지 마." 엘렌이 내려가려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난 누구 전화인지 알고 있는데요." "아냐, 받지 마. 이것 봐 -- " 그는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누군가 분명히 총소리를 들었을 거야. 몇 분 있다가 경찰이 여기로 올지도 몰라. 기자들도 -- " 그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이 일이 신문에 크게 실리는 것을 원치는 않겠지? 그렇게 되면 도로시에 대한 모든 것이 파헤쳐질 테고, 또한 엘렌의 사진도......" "하지만 그것을 막을 방도가 없잖아요......" "아냐, 있어. 아래층에 차가 있어. 엘렌을 호텔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나는 다시 여기로 돌아오겠어." 그는 불을 껐다. "만일 그때까지도 경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그들을 부르겠어. 그러면 엘렌은 여기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이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는 경찰과 단둘이 있게 될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그러면 그들이 나중엔 엘렌에게도 질문을 하겠지만, 신문에서는 엘렌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거야." 그는 복도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그때까지 엘렌은 아버지를 오시게 하는 거야. 그분은 엘렌이나 도로시에 관한 경찰의 활동을 막아줄 만큼 충분한 영향력을 갖고 계시니까. 그들은 파웰이 술이 취해서 나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거나 뭐라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 전화벨이 그쳤다.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옳은 것 같진 않은데......"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왜 그래? 총을 쏜 사람은 나지 엘렌이 아니야. 다시 말해서, 엘렌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나중에 내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기 위해서 엘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때가 있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것은 신문이 이 일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거야." 그들은 거실로 내려갔다.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날 믿어 줘, 엘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어깨에 힘을 빼고는 책임의식을 떨쳐버리려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 "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날 태워다 줄 필요는 없어요. 택시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이 시간에는 안될 거야 -- 전화를 걸지 않고서는. 그리고 전차는 10시에 끊어지는 걸로 알고 있어." 그는 그녀의 코트를 집어들고 그녀가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디에서 차를 구했어요?" 그녀가 덤덤하게 물어보았다. "빌렸어." -- 그는 그녀에게 지갑을 집어주었다 -- "친구에게서." 그는 전등불을 끄고 현관문을 열었다. "서둘러 -- " 그가 말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그가 차를 세워둔 길 건너 쪽으로 15 미터쯤 보도를 내려갔다. 그것은 2~3년 된 검은색 뷔크 세단이었다. 그는 엘렌에게 문을 열어준 뒤, 반대편으로 가서 차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점화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엘렌은 무릎 위로 손을 포개놓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기분은 괜찮아?" 그가 물었다. "예 -- " 그녀는 가늘고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그가 날 죽이려고 했었다는 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도로시에 대해서는 내가 옳았어요. 나는 그 애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녀는 원망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번 여행을 못하게 하려고 했지요......" 그는 시동을 걸었다. "그래 -- " 그가 말했다. "엘렌이 옳았어." 그녀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어쨌든, 이 사건 때문에 한 가닥 밝은 빛이 생겼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뭔데?" 그가 기어를 바꾸자 차가 앞으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해 줬다는 거 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내 생명을 구해 줬어요.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당신을 반대한다고 해도 물리칠 수 있는 좋은 무기예요. 당신이 아버지를 만나 우리 문제를 말할 때 말이에요." 그들이 잠시 뒤 워싱턴 가를 내려오자, 그녀는 그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엉덩이에 딱딱한 것이 눌리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권총이란 것을 깨달았으나 떨어지고 싶진 않았다. "엘렌 -- " 그가 말했다. "엘렌도 알겠지만, 이번 일은 번거롭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살인죄로 체포될 거야." "하지만 당신은 의도적으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었잖아요. 당신은 그에게서 권총을 빼앗으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알아. 하지만 경찰은 어떤 구실을 둘러대서라도 나를 체포할 거라고......" 그는 실망한 얼굴로 옆에 앉아 있는 엘렌을 흘끗 훔쳐보고는 앞에 있는 신호등으로 눈을 돌렸다. "엘렌......호텔에 도착하면 얼른 엘렌 물건을 챙겨 가지고 호텔을 나와. 우린 두 시간 안에 컬드웰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버드!" 그녀는 나무라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해서는 안돼요." "왜 안돼? 그 녀석은 엘렌 동생을 죽였잖아? 그 녀석은 응당 자기가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거야. 왜 우리가 그 일에 말려들어야 하지--?" "그렇게 할 순 없어요." 그녀가 대들었다. "그런 일 -- 그렇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돼요. 경찰이 어떻게든 당신이......그를 죽였다는 것을 알아낼 거라고 생각해 봐요. 그렇다면 경찰은 진실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도망간다면!" "경찰은 나를 찾아낼 수 없을 거야." 그가 말했다. "난 장갑을 끼고 있었어. 지문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고. 또, 아무도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어 -- 엘렌과 그 녀석을 빼놓고는." "그러나 경찰이 당신을 찾아낸다고 가정해 봐요! 아니면 그 일로 다른 사람이 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해 봐요! 그럼, 당신 기분이 어떻겠어요?" 엘렌은 말을 멈추었다. "내가 호텔에 도착하는 대로 아버지에게 전화하겠어요.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변호사나 그 밖의 문제를 돌봐 주실 거예요. 그렇게 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하지만 도망가는 것은......"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가 말했다. "나도 엘렌이 동의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 "그래요, 버드, 당신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그냥 마지막 수단으로 해본 소리야." 그가 말했다. 그는 갑자기 차를 왼쪽으로 돌려 밝은 워싱턴 가에서 어두컴컴한 북쪽길로 접어들었다. "워싱턴 가엔 들르지 않을 거예요?" 엘렌이 물었다. "이쪽 길이 더 빨라. 신호등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 "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 " 그녀는 계기반 재떨이에 담뱃재를 톡톡 털면서 말했다. "그가 왜 옥상에서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그녀는 왼쪽 다리를 몸 아래로 죽 뻗으며 버드 쪽을 향해서 자리를 고쳐앉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담배의 온기가 차 안에 퍼져갔다. "밤에 그곳에 간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받을 만한 행동이야." 그가 말했다. "그 녀석은 엘리베이터 보이나 누가 자기 얼굴을 기억할까 봐 두려워했겠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죽이는 것보단 덜 위험하지 않았을까요?" "그 녀석은 자기 집에서 엘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 강제로 엘렌을 차에 태우고 멀리 교외로 빠져나가려고 했겠지." "그는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훔칠 수도 있어. 차를 훔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가로등 빛이 하얗게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다시 계기반의 흐릿한 초록빛만이 반듯하게 잘려진 형체를 비추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나는 뉴욕에 있었지. 나는 책임감을 느꼈어!' 하고 그가 말한 것도 거짓말이겠군요!" 엘렌은 머리를 세게 흔들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오, 하나님!"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그는 홱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고통스러워하는 투로 바뀌었다. "그는 내게 성적증명서를 보여줬어요......뉴욕 대학의 성적표. 그는 틀림없이 뉴욕에 있었어요......" "그건 아마 속임수였을 거야. 그 녀석은 틀림없이 뉴욕 대학의 학적과에 아는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의 일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 봐요......그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이에요!" "그 녀석은 권총을 들고 엘렌을 찾으려고 했어. 그것만으로도 녀석이 거짓말을 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잖아?" "확신할 수 있어요, 버드? 당신은 그가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신할 수 있어요? 어쩌면 다른 것을 찾기 위해서 총을 꺼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말하던 노트는?" "그 녀석은 권총을 들고 문 쪽으로 가고 있었어." "오, 하나님! 하지만 만일 그가 정말 도로시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경찰이 조사를 할 거예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경찰은 그가 바로 여기 블루 리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거예요! 그리고 그가 도로시를 죽였다는 것도요!" "맞아." 그가 말했다. "하지만 비록 그가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버드, 비록 그것이 -- 지독한 실수였다고 해도 경찰은 당신에게 어떤 벌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은 알 수 없었잖아요. 당신은 단지 총을 가진 남자를 보았던 거예요. 경찰은 절대로 당신에게 벌을 줄 수 없어요." "그렇겠지." 그가 말했다. 그녀는 거북하게 몸을 틀면서 몸 아래로 꼰 다리를 풀었다. 그녀는 계기반 불빛으로 자기의 시계를 비춰 보았다. "10시 25분이에요. 벌써 컬드웰에 도착해 있어야 할 시간이잖아요?"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불빛도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별만 반짝이는 높고 캄캄한 하늘 아래는 칠흑 같은 벌판뿐이었다. "버드, 이건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에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 앞으로 고속도로의 하얀 선이 헤드라이트가 닿는 너머로 끝없이 좁아지면서 이어졌다. "버드, 길을 잘못 들어섰어요!" 제 12 장 "내게 원하는 게 뭔가?" 엘든 체서 경찰서장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뒤로 죽 기대어, 친스 천으로 싸인 소파 옆 받침 밑에 긴 다리를 쓰러지지 않게 괴고서, 손을 붉은 플란넬 셔츠 앞에 느슨히 올려놓고는 커다란 갈색 눈으로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차를 추적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고든 갠트는 거실 한가운데에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아!" 체서가 말했다. "아하, 검은색 차에 대해서는 옆집에 사는 남자가 아는 것이 전부네. 그는 총소리를 듣고 나서, 곧 이어 한 남자와 여자가 블럭을 내려가 검은 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어. 남자와 여자가 탄 검은 차 -- 자네도 얼마나 많은 검은 차가 남자와 여자를 싣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지 알잖나. 우리는 자네가 이곳에 뛰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여자의 인상조차 몰랐네. 그때까지 그들은 시더 래피즈까지 반도 못 갔을 거야. 아니면 여기서 두 블럭 떨어진 어떤 차고에 차를 세워두었겠지.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라네." 갠트는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기다릴 수밖에 없지. 고속도로 경관들에게 지시를 해놓았네. 아마 여기에는 현상금이 붙을 거야. 좀 앉는 게 좋겠군." "물론 앉아야죠." 갠트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살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체서는 침묵을 지켰다. "작년엔 그녀의 동생이 -- 올해는 그녀가." "다시 말해 줘야겠군." 체서가 말했다. 그는 지친 듯이 갈색 눈을 감았다. "그녀 동생은 자살했네." 그는 천천히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했다. "바로 내 눈으로그 유서를 확인했어. 그녀가 직접 손으로 쓴 -- " 갠트가 부스럭거렸다. "그런데 누가 그녀를 죽였다고?" 체서가 다그쳤다. "자네는 파웰이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네만, 지금 상황으로는 그 사람일 수가 없어. 왜냐하면 그녀가 자네에게 파웰이 아닌 것 같다는 메모를 남겼으며, 자네는 여기에서 그가 작년 봄에 이곳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뉴욕 대학의 서류를 보았네. 그러니 단 한 명의 혐의자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된 거겠나? 그것은 아무도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야." 갠트는 화가 나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그녀는 메모에서 파웰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범인은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파웰이 -- " "오늘밤까지 범인은 한 명도 없었어." 체서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녀의 동생은 자살한 거야." 그는 눈을 깜박이더니 다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갠트는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비통한 기분에 잠겼다. 잠시 뒤 체서가 입을 열었다. "모든 걸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군." "예?" 갠트가 말했다. "하, 자네는 내가 여기서 게으르게 누워만 있었다고 생각했나?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지 -- 다리를 머리보다 높게 하여 피가 머리까지 올라가게 하는 것 말이야."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 녀석은 10시 15분쯤에 침입했네 -- 옆집 남자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런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는군. 다른 방에는 들어간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파웰이 처음 만난 사람은 분명히 그 녀석이었을 거네. 몇 분 뒤에 파웰과 그 여자가 들어왔지. 그 녀석은 2층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네. 파웰의 벽장 안에 숨어 있었어 -- 옷들이 모두 양쪽으로 밀려나 있었거든. 파웰과 그 여자는 부엌으로 들어갔어. 그녀는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고 라디오를 켰네. 파웰은 코트를 걸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어떤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2층으로 올라갔어. 그런데 그 녀석이 나타난 거야. 파웰은 그때 가방을 열려고 하고 있었지 -- 우리가 그 위에서 얼룩진 장갑을 발견했으니까. 그 녀석은 파웰이 가방을 열고 안을 뒤져보도록 내버려두었네. 물건들이 온통 바닥에 널려 있었거든. 파웰은 돈 같은 것이라도 찾아낸 모양이야. 아무튼 파웰은 그 녀석에게 뛰어들었을테지. 그러자 그 녀석이 파웰을 쏘았네. 당황해서 그랬겠지. 그 녀석은 아마 쏘려고도 하지 않았을 거야 -- 그런 녀석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으니까. 그치들은 단지 사람들을 위협하려고 총을 가지고 다니지. 그리고 항상 위를 향해 쏜다네. 45구경. 대부분이 군대에서 사용하는 권총 같은 것이지. 그런 종류는 수만 개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니까. 다음에 그 여자가 2층으로 올라왔겠지 -- 문틀에는 부엌의 컵과 다른 그릇에 있는 것과 똑같은 지문이 찍혀 있었네. 그 녀석은 당황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그래서 강제로 그녀를 끌고서 달아난 거야." "그렇다면 그 녀석은 왜 여기에서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까요?......파웰과 같은 방법으로?" "내게 물어보지 말게. 아마 용기가 없었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생각이 있었던가. 권총을 가지고 있고, 또 예쁜 여자가 있을 때면 다른 생각을 갖게 마련이지." "고맙군요." 갠트가 말했다. "그 말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데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체서는 한숨을 쉬었다. "앉게." 그가 말했다. "기다리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갠트는 자리에 앉아서 손등으로 이마를 비비기 시작했다. "체서는 마침내 천장에서 얼굴을 돌렸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갠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누군가? 자네 여자친구인가?" 그가 물었다. "아닙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는 엘렌의 호텔 방에서 읽었던 편지를 떠올렸다. "아녜요, 그녀는 윈스콘신에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제 13 장 헤드라이트가 닿는 대로 질주하는 수목들을 뒤로 하면서, 차는 콘크리트가 깨진 틈을 타르로 메꾼 고속도로를 규칙적인 리듬을 내면서 달렸다. 속도계의 야광 바늘이 눈금 50을 기준으로 해서 양쪽으로 나뉘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은 동상에라도 걸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운전하면서, 가끔씩 최면에 걸린 듯한 고속도로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약간씩 핸들을 좌우로 움직였다. 엘렌은 온몸을 꽁꽁 묶인 듯이 문에 움츠리고 기댄 채, 무릎 위에서 손수건을 비틀고 있는 손을 가끔씩 쳐다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장갑을 낀 그의 오른손이 총을 든 채 놓여 있었다. 그것은 뱀처럼 총부리를 그녀의 엉덩이에 대고 있었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 길게 쥐어짜내는 듯한 동물의 신음소리로. 실제의 슬픔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 어둠 속에서 초록빛이 감도는 그녀의 얼굴을 자주 쳐다보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는 자주 머뭇거렸는데, 마치 휴가를 받아 고향에 온 군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훈장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적의 배를 찔러댔는지 떠벌이기 전에 잠시 망설이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훈장을 받게 되었느냐고 성급하게 물어보는 탓에 더욱 당황해 하면서. 하지만 그는 말을 해나갔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배를 찔러보지 않은 온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나가듯이 약간은 짜증스럽지만 부드럽게 말을 했다. 그는 그 극약과 옥상에 대한 얘기, 그리고 도로시를 죽여야 했던 이유와 합법적인 과정으로 컬드웰로 옮겨가서 엘렌을 쫓아다닌 이유 등을 설명했다. 그는 도로시를 통해서 엘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냈으며, 어떻게 해야 그녀가 원하는 남자가 될 수 있는지도 알아냈다. 그가 그런 정보를 알고 그녀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고도 필연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그의 불운한 과거에 대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확실하게 보상받는 방법이었다고 -- (법의 헛점을 노려 남의 등뒤를 쳐서 만족을 얻는 과정이겠지만) -- 그는 이런 이야기들을 약을 올리며 구역질나게 늘어놓았다. 공포에 질려 손으로 입을 막은 엘렌에겐 모든 것이 은쟁반 위에 놓인 것처럼 분명해졌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성공의 단단한 땅을 향해 어떻게 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조금씩 움직여서 실패의 깊은 구렁 너머 흔들리는 좁은 통로에 붙어 살아서 도망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엘렌은 그의 총부리에 엉덩이를 찔린 채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처음에는 단지 고통스럽다가 곧 마비가 되어, 마치 엉덩이 부분은 이미 죽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죽음은 빠른 총알이 아니라, 접촉되어 있는 그 지점에서 천천히 발사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울부짖었다. 그녀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고, 충격을 받아서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길게 쥐어짜내는 듯한 동물의 신음소리 같았다. 실제의 슬픔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그녀는 무릎 위에서 손수건을 비틀고 있는 자기 손을 가끔씩 쳐다보았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그는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컬드웰에 그냥 있으라고 했잖아." 그는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너는 여탐정처럼 행동하고 말았지! 그리고 결국 여탐정은 이런 꼴을 당하고." 그는 고속도로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만일 내가 월요일부터 내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았더라면 -- " 그는 주먹을 쥐고, 엘렌이 전화했던 월요일 아침 그에게서 온세계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 '도로시는 자살하지 않았어요! 나는 블루 리버로 가야겠어요!' -- "정거장으로 뛰어나가 간신히 너를 붙잡아서 네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너는 기차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 '곧 편지를 쓸께요! 모든 것을 설명해 줄께요.' 하고 말했지 --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미끄러져 가는 너를 지켜보았어. 땀이 흐르고 모든 것이 두려웠어.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어." 엘렌은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경찰이 당신을 잡을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가 말했다. "얼마나 많은 범인이 잡히지 않는지 알기나 해? 50퍼센트 이상이야, 굉장한 숫자지. 아니, 사실은 훨씬 더 많을 거야." 다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그가 말했다. "어떻게 경찰이 나를 잡을까? 지문? -- 아무것도 없어. 증인? -- 아무도 없어. 동기? -- 그들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어. 경찰은 심지어 나는 생각해 내지도 못할 거야. 권총? -- 나는 컬드웰로 돌아가려면 미시시피 강을 지나야 해. 안녕, 권총. 이 차? -- 새벽 2시나 3시에 가져왔던 곳에서 두 블럭쯤 떨어진 곳에 가져다 놓을 거야. 경찰은 그 사건이 정신이 나간 고등학생 녀석들의 짓이라고 생각하겠지. 불량청소년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젯밤에도 일을 꾸몄었지. 나는 극장에서 엘렌과 파웰이 앉아 있는 뒤쪽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고, 그 녀석이 엘렌에게 작별 키스할 때는 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 그는 엘렌의 반응을 보려고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길 쪽으로 돌아갔고, 다시 그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너의 그 편지 -- 내가 그것을 받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알아! 처음 그것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지. 엘렌은 도리가 가을 학기 영어수업에서 만난 사람을 찾고 있었어. 나는 1월에 그녀를 만났으며, 가을 학기 그 시간엔 첫 수업이 있었지. 그 뒤에 나는 엘렌이 실제로 찾고 있는 그 녀석이 누구인지 알아냈어 -- 낡은 마름모 무늬 양말을 신는 내 선배. 우리는 함께 수업을 들었고, 그는 내가 도리와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어.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알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네게 자기는 도로시의 죽음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킬 거라는 것도 알았어......만일 그가 네게 내 이름을 말해 준다면......" 갑자기 그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삑 소리를 내면서 멈췄다. 그는 왼손을 뻗어 기어를 잡아당겼다. 그가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차는 천천히 뒤쪽으로 움직여 갔다. 그들의 오른쪽으로 주차장의 넓은 공간과 낮게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집 한 채의 모습이 시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뒤로 움직이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고속도로 가장자리에 서 있는 커다란 표지판을 비췄다. '릴리와 돈스'-- 스테이크 별식. 좀 작은 표지판이 커다란 표지판 기둥에 흔들흔들 매달려 있었다. '4월 15일 재개장' 그는 먼저 후진을 하고,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린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는 주차장을 가로질러서 엔진을 켜둔 채 낡은 건물 한쪽에 세워두었다. 그는 경적을 눌렀다. 커다란 소리가 밤의 정적을 뚫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경적을 울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느 창문도 올라가지 않았고 불도 켜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 같군." 그는 헤드라이트를 끄며 말했다. "제발......" 그녀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어둠 속에서 차가 앞으로 나아가 왼쪽으로 돌아서, 주차장의 아스팔트가 포장된 좀더 좁은 지역으로 이어진 집 뒤로 움직였다. 차는 커다랗게 모퉁이를 돌아 거의 아스팔트 끝을 벗어나 검은 하늘과 맞닿을 것 같은 진흙 벌판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왔던 방향으로 되돌리려고 차를 여러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고 엔진을 껐다. "부탁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라고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내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우리는 약혼을 하려고 했었어!" 그는 왼쪽 문을 열었다. "너는 좀더 영리했어야 했어......" 그는 웅크리고 있는 그녀 몸에 여전히 총을 겨눈 채 아스팔트 쪽으로 걸어갔다. "이리 와." 그가 말했다. "이쪽으로 나와." "제발......" "내가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 엘렌? 너를 그냥 가게 할 순 없잖아, 응, 안 그래?" 그는 권총으로 찌르는 몸짓을 했다. "이리 나와." 그녀는 지갑을 집으며 자리에서 몸을 당겨 아스팔트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벌판에 등을 대고 설 때까지 권총은 반원을 그리며 그녀를 향했고, 그녀와 차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제발......" 그녀는 지갑을 들어올려서 막아보려고 했다. "부탁이에요......" 제 14 장 [블루 리버 클래리온 레저, 1951년 3월 15일 목요일] 이중살인 경찰이 수수께끼의 총잡이를 찾고 있다 어젯밤 두 시간 동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총잡이가 두 건의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다. 희생자들은 뉴욕 시 출신의 스물한 살 된 엘렌 킹쉽과 시카고 출신의 스토다드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스물세 살의 드와이트 파웰이다. 파웰은 저녁 10시에 웨스트 35번가 1520번지에 있는 엘리자베스 호니그 부인 집에서 살해되었다. 파웰은 그곳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경찰은 9시 50분에 친구인 킹쉽 양과 집으로 들어온 파웰이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그들보다 먼저 뒷문을 통해서 집안으로 숨어 들어온 무장 살인범과 마주쳤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시체검시반은 킹쉽 양의 살해시간을 자정쯤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체는 오늘 아침 7시 20분에 랜달리아 근처에 사는 열한 살 난 월러드 헤른이 벌판을 지나 식당으로 가다가 발견했다......경찰은 KBRI 아나운서이자 킹쉽 양의 친구인 고든 갠트에게서 그녀가 작년 4월 블루 리버 시청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도로시 킹쉽의 언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킹쉽 코퍼 주식회사 회장이며 피살자의 아버지인 레오 킹쉽 씨는 큰 딸인 메리온 킹쉽 양과 함께 오늘 오후 블루 리버에 도착할 예정이다. [클래리온 레저의 사설에서, 1951년 4월 19일 목요일] 고든 갠트의 해고 고든 갠트가 해고된 데에 대해 KBRI 경영자측에서는, "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찰을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서 마이크(KBRI)를 사용했다." 라고 지적했다. 갠트는 지난 달에 있었던 킹쉽 -- 파웰 살인사건에 대해 개인적으로 신랄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에 대한 그의 공적인 비난은, 경솔하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순 없지만, 사건이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타당성은 없다고 해도 이해할 만하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 제 15 장 학년말이 되자 그는 메나세트의 집으로 돌아와서 우울한 기분으로 틀어박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으나, 그는 도리어 그것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두 모자는 서로에게 불꽃을 돋우어주며 활활 타는 석탄처럼 다투었다. 그는 집과 우울한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옛날에 일했던 신사용품 가게에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 30분까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릿빛 테두리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진열장 카운터 뒤에서 있어야 했다. 7월 어느 날 그는 벽장에서 작은 회색 금고를 꺼냈다. 그것을 책상 위에다 올려놓고 열고서, 도로시의 살인에 대한 기사를 오려낸 것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그는 엘렌과 파웰에 대한 기사도 똑같이 찢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킹쉽 코퍼 팜플렛을 꺼냈다. 엘렌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두 번이나 그것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팜플렛을 잡고 찢으려다가 그는 문득 후회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도로시, 엘렌...... 그것은 마치 '믿음, 소망......'이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서 튀어올랐다. 도로시, 엘렌......메리온. 그는 혼자 씩 웃고 나서 다시 팜플렛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찢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책상에 내려놓고서는, 자기가 손으로 만든 구김살을 어루만졌다. 그는 금고와 팜플렛을 책상 뒤쪽으로 밀어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에 메리온이란 글씨를 쓰고 세로로 줄을 그어 종이를 반으로 나눴다. 그는 한쪽에는 찬성, 다른쪽에는 반대라고 썼다. 찬성 밑에는 늘어놓을 것이 매우 많았다. 도로시와 이야기하던 말들, 엘렌과 이야기하던 말들, 메리온에 대해서 슬쩍 지나가는 투로 한 말들이 온통 꽉 차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녀의 생각, 그녀의 과거. 그는 비록 그녀를 만나 보지 못했지만,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처럼 그녀에 대해 환하게 알 수 있었다.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서 살고 있는 여자......그녀는 완벽한 그의 먹이였다. 그의 감정은 찬성 쪽으로 기울어졌다. 또 한 번의 기회. 홈런을 쳐서 먼저 있었던 투 스트라이크를 말끔히 없애버리리라. 그리고 3이라는 행운의 숫자가 있다......세 번째의 행운......동화에 나오는 세 번째 시도, 세 가지 소원, 세 번째 구혼자...... 그는 반대 밑에 목록을 만들려고 했으나 한 가지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는 찬성과 반대 목록을 모두 찢어버리고, 메리온 킹쉽의 성격, 생각,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몇 가지 주석을 만들고, 그 다음주 내내 규칙적으로 그 목록에 새로운 사항을 덧붙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도로시와 엘렌과 이야기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간이식당에서, 수업시간에, 산책하면서, 춤추면서 하던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의 기억의 연못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낱말, 구절, 문장들을 위로 끌어올렸다. 때때로 그는 저녁 내내 등을 대고 누워서 방사선 측정기처럼 메리온에게 붙어, 좀더 넓게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면밀히 조사하고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목록이 점점 늘어나자 그의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덧붙일 사항이 없는데도 금고에서 그 종이를 꺼내보곤 했다 -- 거기에 나타나 보이는 그 민첩함과 계획성, 그리고 가능성들에 대해서 감탄하면서. 그것은 도로시와 엘렌에 대한 신문기사를 오려낸 것만큼 도움이 되었다. "미쳤군." 하루는 목록을 보면서 자신에게 소리내어 말했다. "너는 미친 놈이야." 그는 정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대담하고, 뻔뻔스럽고, 재치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8월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뭐라고?" 그녀는 헝클어진 허연 머리 사이로 난 가리마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작고 여윈 몸으로 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몇 주일 뒤에 뉴욕으로 갈 거예요." "넌 학교를 마쳐야 한다." 어머니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뉴욕에 가면 누가 일자리라도 준다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자리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저 나름대로 계획 같은 것이 있거든요." "하지만 넌 학교를 끝내야 한다, 버드." "'해야 한다'라는 말에 이젠 질렸어요!" 그가 대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번 계획에 실패한다고 해도 내년에 학교를 끝낼 수 있어요." 그의 어머니는 초조하게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버드, 너는 스물다섯 살이 넘었다. 너는 -- 어서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해. 때가 지나면 공부를 다시 계속할 수가 없어 -- " "제발, 저를 제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바로 네 아버지가 내게 하던 그대로구나." 그녀는 조용히 말하고 나가버렸다. 그는 잠시 동안 책상 옆에 서서 부엌의 설겆이대에서 나는 요란한 칼질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신경쓰지 않는 체하면서 잡지를 집어올려 펼쳐보았다. 몇 분 뒤에 그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설겆이대에 서 있었다. "어머니 -- " 그는 호소하듯이 말했다. "어머니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고 걱정하는 것만큼 저도 걱정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 계획이 중요한 게 아니라면 제가 왜 학교를 그만두려고까지 하겠어요. 어머니도 제 성격 잘 아시잖아요?" 그는 테이블에 앉아서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일이 잘 안된다면 내년에 학교를 끝마치겠어요. 그러겠다고 약속할께요, 어머니." 마지못해 그녀가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떤 계획인데?" 그녀는 천천히 물어보았다. "발명이라도 하겠다는 거니?" "아니에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는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건 겨우 계획단계거든요. 죄송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수건에 손을 닦았다. "내년까지 미룰 수 없는 거니? 네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말이다." "내년이면 너무 늦어요, 어머니." 그녀는 수건을 내려놓았다. "글쎄, 그게 뭔지 말해 줬으면 좋겠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저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그건 어머니가 이해하실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에요." 그녀는 그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잠시 근심스럽게 치켜올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글쎄다 -- " 그녀는 그의 어깨를 꽉 누르며 말했다. "나는 그게 틀림없이 좋은 생각일 거라고 믿는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행복하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