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히티 끊임없이 돌아다니기는 했어도 마티스가 멀리 여행을 떠난 경우는 드물었다. 1930년 남태 평양을 다녀온 이후 그는 상상 속에서 티히티로 거듭 돌아갔다. 베르데: 타히티 체류가 당신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까? 마티스: 타히티 체류는 대단히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적도만은 편 세계에서 빛을 체 험하고 싶었습니다. 그곳의 나무를 만나고 그곳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 든 빛은 자기만의 조화를 내보이는 법입니다. 풍토가 다르니까요. 태평양의 빛, 그곳 섬들은 빛은 마치 짙은 황금빛 색안경을 끼고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처음에 도착하고 먼저 실망부터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러다가 조금씩 섬의 아름다운에 눈떴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거세게 불어오는 무역풍에 뒤로 몸을 젖히며 비단처럼 사각거리던 키 큰 야자수 잎들, 거기에 화답하듯 섬을 에워싼 산호초를 철썩철썩 때려대던 파도. 나는 추호에서 곧잘 멱을 감았습니다. 검은 해삼의 날카로운 윤곽과 대조되어 더욱 찬란 하게 빛나는 산호 속에서 헤엄을 쳤지요.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추호의 물 속 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머리를 쑥 집어넣었습니다....그러다 갑자기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 어 눈부신 세상을 바라보았어요... 타히티...섬...그러나 고요한 무인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유럽인의 불안은 그곳까지 따라가니까요. 그런데 그 섬에는 걱정 근심이 없어요. 그래서 유럽인은 권태에 빠집니다. 그 들은 숨막히는 무료함 속으로 즐겨 빠져들고 권태를 극복하거나 기분을 돋울 짓은 아무 것 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그들 위에, 또 그들 주위에 이 태초의 경이 로운 빛, 이 장엄한 광채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빛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유럽인은 공장 문을 닫고 원주민은 동물적인 쾌락을 탐합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졸고 있 는 아름다운 땅. 고요한 무인도, 외로운 낙원은 단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면 누구라도 금세 권 태를 느낄 겁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앙드레 베르데와 앙리 마티스의 인터뷰, 1952년 "아무런 걱정도 간섭도 없이 그림을" 방스 성당을 설계하면서 마티스는 일에 깊이 몰입하여 한때는 수도자가 될 생각까지 했 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그림이었다. 나는 아무런 걱정도 간섭도 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여건만 마련된다면 독방에서 수도자로서 살아가고 싶다. 평생 동안 나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 널리 받아들여 지던 지배적 여론에 영향받았다. 그 지배적 여론에 따르면 화가는 오직 자연에서 관찰한 내 용만을 그릴 수 있고 상상력이나 기억에서 나온 것은 조형예술로서의 값어치가 없는 사입 작품으로 폄하되었다. 미술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강조하곤 했다. "자연을 우직하 게 모사 하라." 화가로 활동해 오면서 나는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도저히 그런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 었다. 내가 사실적인 모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분할법, 야수파 같은 다채로운 사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투쟁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런 저항은 자연스럽게 나를 드로잉, 색채, 명암, 구도 같은 그림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분석으로 이끌었다. 다른 요소들의 존재에 의해 이 요소 하나하나가 자신의 설득력을 상실 하는 법 없이 하나의 종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 구성물 안에서 이 요소 들의 내재적 가치가 훼손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한마디로 그것은 수단의 순수성을 존중하자는 말이었다. 이전 세대의 화가들의 작품은 시대마다 다르게 받아드여진다. 순수한 색으로 구성된 인상 파 그림은 다음 세대의 화가들로 하여금 색은 비록 대상이나 자연현상을 묘사하는 데 쓰이 기는 하지만 대상과는 무관하게 그 색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이렇듯 색은 그것이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 가령 파랑은 강렬한 보색을 동반할 때 날카로운 징소리처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빨강이나 노랑도 마 찬가지이다. 화가는 필요할 경우에 적절한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성당에서 나의 주된 목표는 하얀 바탕에 검은 선이 그려진 단단한 벽과, 빛과 색의 표면 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성당은 나의 필생의 작업이며 벅차고 진지하고 힘겨웠던 예술적 노력의 결실에 해당하 는 셈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작업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내 예술적 탐구 의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나에게 점지된 작업이다. 성당은 그 탐구를 종합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에게 열어 주었다. 이 작업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지금은 지나가 버린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 한 예술 시기의 표현으로 내내 자리잡을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새로운 운동이 완전히 실현 되기 전까지는 아직은 확신을 갖고 단언 할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 이다. 그러나 조형적 전통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주는 생명력은 여전히 살아 남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명력을 나의 계시라고 부르고 싶으며, 뿌리를 더듬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 로 그 계시가 넉넉하고 힘있게 표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로사리오 성당' '방스 도미니크 수도회 로사리오 성당',1951년 "아름다운 올리브 나무" 마티스와 샤를 카무앵의 우정은 두 사람이 귀스타브 모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할 때 싹텄 다. 요즘은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뙤약볕 아래 작업을 하고 있지. 작업이 끝나면 녹초가 된 다네. 아무래도 시간을 바꿔야 할까 봐. 내일부터는 아침 6시 반이나 7시부터 시작할까 하 네. 한두 시간 열심히 그려야지. 올리브 나무는 그 시간에 가장 아름다워. 한낮도 괜찮지만 너무 위압적이라서 말이야. 세잔은 이 색조의 조화를 기가 막히게 포착한 것은 견디기 어려 운 휘황찬란함이 아니었지만 말이야. 조금 전에 나는 올리브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잤네. 그곳 에서 본 색의 조화가 너무나 감동적이었어. 그런 낙원을 분석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지만, 자네나 나나 화가이니까 별 수 있겠나! 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네! 눈부시면서도 포근하고 부드러운 햇살. 왜 그런지 나는 니스의 햇살에서 자꾸만 투렌을 떠올린다네. 투렌의 햇살이 좀더 금빛에 가깝다면 이곳은 은빛이야. 햇살이 스치는 대상은 풍요한 빛깔에 물든 다네. 예 컨대 나는 녹색을 그리려다가 등줄기가 뻐근해질 때가 왕왕 있지. 작업을 끝내고 난 뒤 나 는 나의 졸작들이 걸려 있는 방안을 빙 둘러본다네. 그리고 나의 의도와 맞아떨어지는 작품 을 가끔씩 발견하곤 해. 아직 확신은 못 하지만 말이야 마티스가 샤를 카무앵에게 1918년 5월 23일 스타일 카무앵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 마티스는 이른바 장식적인 '웅장한 스타일'의 개념 을 새롭게 정의하자고 제안한다. 자네는 이것이 사물의 일면만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웅장한 스타일 의 겉모습만을, 진정으로 웅장한 스타일의 어설픈 윤곽만을 그릴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 지 않겠는가? 고갱과 코로 둘 중에서 누가 더 웅장한 스타일을 가졌느냐고? 스타일은 그 화가의 마음에 있는 질서와 품위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 질서가 습득된 것이든 개 발된 것이든 직관적인 것이든 말이야. 그러나 특정한 편견에서 기인된 스타일은 얼치기밖에 만들어 내기 못해. 이것 어디까지나 내 진심일세. 마티스가 샤를 카무앵에게 1918년 5월 2일 영국모델 시인이며 작가인 앙드레 루베이르의 꿈을 마티스는 현실로 이루어 낸다. 꿈에 그리는 영국 처녀가 있다고 자네가 말 한적히 있지. 결국은 사라져 버렸다는 그 처 녀보다 어쩌면 더 아름다운 영국 처녀와 한 시간 전에 세 번째 작업을 했네. 나의 모델은 지금 이곳에 있고 내일 모레 다시 올 거야. 와서는 내 눈을 바라보겠지. 작업에 몰두해 있을 때 내 눈은 아무런 불안도 방패막이도 없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노출되곤 한다네. 변화무쌍 한 그녀의 눈은 어제만 하더라도 개암나무처럼 엷은 갈색이었는데 오늘 보니 색깔을 못 알 아보겠더군. 나는 리디아를 가까이 불러서 눈동자 빛깔을 말해 달라고 했지. 그녀의 말로는 자기 눈과 내 눈이 같은 빛깔이라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지.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 는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일더니 눈동자 빛깔이 변했음을 깨달았어. - 맹세코 나는 아무 짓 도 하지 않았네 - 눈동자가 진해졌다 이 말이야. 나는 그녀의 눈동자 빛깔이 변한 것은 얼 굴이 후끈 달아올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그녀의 눈동자, 입술, 부드러운 턱의 곡 선이 빚어내는 감미로운 조화를 아마 상상하기 힘들 거야. 그걸 자네한테 어떻게 전달해야 좋을지....그녀는 놀란 비둘기처럼 내 손안에 앉아 있어. 영국 아가씨는 자네의 기대 수준에 서 벗어나지 않을 걸세. 게다가 이틀 뒷면 다시 나에게 온다 이 말씀이지. 마티스가 앙드레 루베이르에게 1947년 4월 5일 벼락같은 영감을 기다리며 정물화를 그리는 방법? 먼저 '아리따운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일 필요가 있다. 작업에 몰두하려고 애쓰는 중이란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꽃과 과일을 그리려고 마음먹 었지. 작업실도 그에 맞게 꾸며 놓았단다. 하지만 주변상황이 뒤숭숭하다 보니 마음먹은 대 로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구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일깨우기 위해서 얼굴을 맞대 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대상부터 그려 나가기로 결심했단다. 영화사 몇 군데에다 교섭을 해서 미인들을 몇 명 소개받았지. 요즘은 오전에 세 시간, 오후에 세 시간씩 서너 명의 미인 과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꽃과 과일 속에 파묻혀 있는 셈이지. 때때로 어떤 모티프가 떠오르면 나는 아틀리에 한구석에 멈 추어 선단다. 표현 성이 풍부하지만 나의 능력을 벗어난 곳에 있는 그런 모티프, 나는 벼락 같은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단다. 그럼 어김없이 영감이 떠오르지. 그런 영감은 내 생명 력을 몽땅 빨아들인단다. 마티스가 피에르 마티스에게 1940년 9월 1일 인간 마티스 이시레물리노와 니스에서의 월요일은, 편지를 정리하고 소소한 사무를 처리하거나, 작가, 화가, 전기작가, 가까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날이었다. 마티스와 피카소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관계를 자주 불꽃이 튀었다. 1943년부터 1953년까지 피카소와 지낸 프랑수아즈 질로가 두 화가의 우정을 자신의 회고록에 소개했다. 그녀는 마티스를 우 호적으로 평가했다. (마티스는)파블로를 아들처럼 자상하게 대했다.....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을 사귈 때 주 는 쪽은 상대방이고 파블로는 늘 받기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파블로는 능동적이었고 마티스는 수동적이었다. 파블로는 무희처럼 마티스의 마음을 사로잡 으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마티스가 파블로를 정복하곤 했다. "우리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해."라고 마티스는 언젠가 파블로에게 말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잃게 될 테니까" 뒤에 마티스가 사미에의 레지나 호텔을 다시 거처로 삼았을 때 우리는 2주일에 한 번 꼴 로 마티스를 보러 갔다. 파블로는 그때마다 최근에 그린 그림이나 스케치를 들고 갔고, 나도 종종 그럴 경우가 있었다. 마티스는 리디아를 시켜 최근에 완성된 자기 그림을 갖고 오게 하거나, 오려붙이기 작업을 했을 때에는 오려 낸 종이를 벽에다 붙여 보였다. 어느 날 마티스는 얼마 전에 구입한 연한 자줏빛이 도는 연분홍색 중국 옷을 보여 주었 다. 고비 사막의 호랑이 가죽을 안감으로 댄 아주 긴 옷이었다. 마티스는 연한 자줏빛 아랍 장식물 앞에 그 옷을 놓았다. 옷은 아주 두툼했고 목깃의 하얀 털이 솟아 있었다. "새로 구한 모델에게 입힐 작정이야."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그전에 프랑수아즈가 입은 모습을 보고 싶군." 파블로는 내켜 하지 않았지만 마티스가 고집을 꺾지 않는 바람에 나는 중국 옷을 입어 보았다. 나는 머리까지 옷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마티스가 소감을 털어놓았 다. "여, 괜찮은 작품이 나오겠는걸." "정 그리고 싶거든, 그림은 내게 주고 옷은 프랑수아즈에게 주구려." 파블로가 말했다. 마 티스는 물러서기 시작했다. "글세, 옷이 프랑수아즈에게 잘 맞기는 하지만 자네 그림에는 어 울릴 것 같지 않은데." "상관없어요." 파블로가 응수했다. "그렇다면 자네한테 더 어울리는 물건이 있지. 뉴기나 건데. 미개인의 전신상이야. 그게 나올 거야." 리디아가 전신상을 자 기러 갔다. 고사리처럼 생긴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는 데, 파랑, 노랑, 빨강으로 강렬한 줄무늬가 아로새겨져 있고 아주 야만스러워 보이는 조각이 었다. 그리 오래 된 물건 같지는 않았다. 실물보다도 큰 그 조각은 어딘가 쭈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다리는 끈으로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었고 머리에는 깃털장식이 있었다. 그때까지 본 뉴기니아의 토속미술품보다 훨씬 근사했다. 파블로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차에 싣 고 가기가 어렵겠다고 대답하고는 나중에 사람을 보내서 가지고 가겠다고 덧붙였다. 마티스는 좋을 대로하라고 했다. "하지만 가기 전에 플라타너스를 구경하지 그래."나는 마 티스가 어떻게 플라타너스를 호텔 방까지 갖고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때 어마어 마하게 키가 큰 처녀가 - 나이는 스무 살 남짓, 키는 180cm이상으로 보였다. - 방안으로 들 어왔다. "자, 플라타너스를 소개하지." 마티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티스가 호텔에서 나온 뒤 파블로가 말했다. "거기서 무언가 이루어지는 것 같기는 해. 하 지만 그 나이에 여자들과 그런 식으로 지내는 게 좀 지나치다고 생각되지 않아? 체통을 좀 찾아야 할 텐데 말이야........좌우지간, 그 뉴기니 물건은 겁나더군. 마티스도 어지간히 겁이 났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하루빨리 없애려고 그렇게 안절부절이지. 귀신을 다루는 데는 내가 자기 보다 한 수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파블로는 그후 곧바로 파리로 떠나 거기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마티스는 그 일을 잊어 버리지 않았다. 그는 파블로가 파리를 간 줄도 모르고 라미에 도예소로 전화를 걸어 물건을 찾아가라고 독촉했다. 나중에는 파블로에게 직접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서 왜 물건을 안 찾 아가느냐고 성화였다. 빨리 파블로에게 넘기지 못해 애가 단 사람 같았다. "그렇게 무시해도 좋을 물건이 아니야. 그렇게 으스스한 말 건도 아니고." 마티스는 편지에 썼다. 그러나 파블 로는 마티스가 중국 옷보다 뉴기니 조각이 자기 기질에 맞는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여전히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마티스가 자기는 지성적인 화가, 파블로는 감성적인 화가로 생각한다 는 사실에 반감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마티스는 그 물건을 발로 리로 보내왔다. 일단 물건 을 손에 넣자 파블로는 그런 대로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는 마티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시미에까지 찾아갔다. 프랑수아즈 질로와 킬턴 레이크 '피카소와의 생활', 1964년 루이 아리공의 방문 초현실주의 작가 아리공이 마티스의 창조성을 지탱하는 정서적인 밑바탕을 살짝 보여준 다. 드디어 화가를 만나러 그가 사는 '궁전'을 찾아갔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티스의 간접적인 초상화가 될 책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였다. 그리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서 거의 매일 나의 '주제'를 만나러 갔다. 내가 포즈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면 마티스는 선 선히 수락했다. 나는 내 모델을 더듬었다. 그 어깨를, 몸통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는 모습을 이해해야 했다...느닷없이 그가 자신의 모로코 여행, 자기가 택시에서 본 여자, 어떤 옷감 에 대해서 입을 열시 시작했다. 화가들과 나 같은 사람의 차이점은, 그들이 스케치와 거친 밑그림을 통해 유사성을 지향하면서 작업하는 반면, 나의 경우는 내가 쓰는 글이 대상의 주 위를 끝없이 뒤엉킨 리본처럼 휘감아 돈다는 사실아.ㄷ 나는 아무 것도 자르지 않고, 아무 것도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완성된 초상화는 모델에 관한 나의 생각, 내가 눈을 들어 창 밖 을 바라보거나 전화기를 바라볼 때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모두 담고 있게 된다... 요컨대 화가들이 말하는 초상화는 내가 글로 표현하는 초상화와 다르다. 햇살이 밝거나 땅거미가 깔릴 무렵 마티스의 불에 갑자기 주름살이 나타나고 그의 입술이 창백해지는 날도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짐짓 시치미를 뗐다. 그럴 때 내 가 머뭇거리면 마티스는 당장 눈치를 채고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소?" 나한테? 천만 에요. 일단 평정을 되찾으면, 나 역시 그 은밀하게 엄습하는 고통을 체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양리 마티스의 그늘을 바라보았다. 냉소를 머금은 어렴풋한 형상을 보았다고 상상하면 서... 백색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시미에에 있는 마티스의 방이다. 거기에는 하늘이 있다. 잠재력으 로 충만한 그 야릇한 하늘은 천장에 떠 있지 않고, 이 공간의 주인이 문자 그대로 '들어 올려 '고상하게 표현한 여인들의 얼굴을 둘러싸면서 벽에 걸려 있다. 그것은 백색 하늘, 마 티스의 하늘이다. 이 하늘을 배경에 두고 있는 얼굴들 또는 정물화들은 하늘의 선명함을 조 금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대기의 균일한 백색을 조심스럽게 보존하고 있다. 선이 펼쳐지는 방식, 선이 표면을 제한하는 방식은 모두 그 백색을 존중하도록 계산되어 있다. 마티스는 이렇게 유지되는 백색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는 나에게 거듭 그 점을 강조했다. 자신 의 그림책에서 페이지 구성의 중요성, 글과 삽화 사이의 균형에 많은 배려를 했던 것처 럼...여기서 말라르메가 쓴'하얀 불안'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그림의 하얀 불안," "안녕"...옳은 말이지만, 텅 빈 백지에 대한 시인의 예찬, 백지를 검게 물들이는 것에 대한 시인의 예찬, 백지를 검게 물들이는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은 화가에게는 출발 점에 불과하다. 그는 백지를 검게 물들이지 않는 요령을 알고 있다. 그가 선을 그어 나가는 종이는 깨끗한 백지보다 더 하얗다고 단언 할 수 있다. 그것이 더 하얀 이유는 자신이 하얗 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마티스는 드로잉으로 빽빽이 뒤덮인 벽을 가리켰다. "보시다시 피 어디를 보아도 같은 흰색입니다...나는 어디에서도 흰색을 제거하지 않았어요." 사방의 백색. 이상한 도미노 게임. 내가 방문할 때마다 이 도미노 패들은 체스의 명인들의 수처럼 자신들의 위치를 아주 느리게 옮기면서 게임을 완성해 나갔다. 여백이 드러나는 곳 마다 새로운 백색의 드로잉으로 불완전한 무대를 채우며... 루이 아라공 '소설 앙리 마티스',1971년 마티스의 생활 레지나 호텔의 마티스를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던 자클린 뒤엠은, 마티스의 하루 일과와 계절에 따라 파리와 니스를 오가던 생활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마티스의 거처에서 빛이 치지 한 역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올이 가느다란 베이지색 모직 바지와 목깃이 뾰족한 헐렁한 재킷을 입고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참 뒤어야 나는 마티스가 친구 피에르 르베르디 와 함께 자기 옷을 방돔 광장에 있는 유명한 의상점 샤르베에서 맞춰 입는다는 사실을 알았 다. 단추가 달리지 않은 재킷 안에는 낙낙한 녹색 스웨터와 분홍색 셔츠를 받쳐입었는데, 단 정하게 솔질된 짧은 흰 수염이 얼굴을 둘러싸고 있었다. 일흔 아홉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예리하고 형형한 눈이 작은 금테안경 너머에서 고 있었다. 이 밝고 넉넉한 방에는 화가의 하얀 침대, 벽에 걸린 그림들, 꽃, 멧비둘기가 있었다. 가구 위에는 분홍 질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 방의 유일한 파란색은 마티스의 눈동자였다. 그의 눈 동자는 하늘색에서 남색으로 바뀌었고 있었다. 마티스는 부탁으로 나는 밖에 나가서 평범한 베이지색 포장지와 교과서를 싸는데 쓰는 파 란 종이를 사 왔다. 마티스는 내가 사 온 종이를 처음에는 벽에 나란히 가로 대고, 다음에는 겹쳐 붙이면서 농담에 변하를 주었다. 그런 다음 미리 짜 놓은 구도에 따라 백지를 갈매기 나 물고기 같은 다양한 형태로 오렸다. 그의 자신에 찬 손놀림은 번번이 나를 놀라게 만들 었다. 종이를 다 오리고 나서 마티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에게 오려 낸 종이를 색종 이 바탕 위에다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이 작업은 미리 찍어 둔 점을 따라 이루어졌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구근의 다양한 요소들을 새롭게 배열해 나갔다........ 마티스의 일과는 시계처럼 정확했다. 그의 일과는 오전 8시에 시작되었다. 온 '식구' - 리 디아, 나, 요리사, 가정부 - 는 준비를 단단히 해놓아야 했고, 어김없이 제자리에 가 있어야 했다. 야간간호사는 '주인 어른'이 아침에 먹을 약을 꼬박꼬박 대령했고 세수를 시키고 옷을 입혔다. 그 일을 끝낸 뒤에야 그녀는 눈을 붙였다. 요리사는 우유를 탄 커피, 빵, 잼을 준비 하고 약을 내놓았다. 나는 그것을 쟁반에 담아 가져갔다. 면도를 마친 마티스는 향수냄새를 풍기며 쿠션을 등에 대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반듯하게 정리된 시트에는 데이지 꽃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마티스는 애연가였으므로 이따금씩 담뱃재가 시트에 구멍을 뚫곤 했다. 마티스는 그 구멍을 볼품없이 깁기보다는 데이지 꽃무늬로 덮어야 한다고 우기곤 했다. 그는 침대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다리오 뉴스를 들으면서 아침을 먹어싿. 식사를 마친 다 음에는 손을 씻고 작업에 들어갔다. 수술을 받은 뒤로는 하루에 한 두 시간밖에 침대 밖으 로 나갈 수 없었는데, 그것도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했다 그는 점심때까지 일하곤 했다. 그 무렵 마티스는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라는 책에 들어갈 삽화의 예비스케치를 그리고 있 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모델이 필요했으므로 내가 모델이 되었다. 그는 모델이 움직 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요청에 따라 연필을 깎 거나 종이에 수채화 물감을 칠하곤 했다. 그는 색칠한 종이를 많이 사용했는데, 집에서 색칠 한 종이만을 고집했던 것이다. 코발트블루 같은 마티스 특유의 멋진 색상의 비결은 바로 거 기에 숨어 있었다... 마티스는 길게는 1주일 내내 목탄 초상화 작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다 시 시작했다. 그는 윤곽, 양감, 광선을 모두 기억에 담아 두었다가 단 한 번의 붓질로 그것 을 재현할 수 있었다...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자제력이 강한 사 람이었다. 그의 집중력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오전 내내 일만 하다가 점심을 들고는 낮잠을 잤다. 오후에 마티스는 침대에서 나왔다. 그는 집안에서 걸어다니거나 때로는 시내로 산보를 나 갔다. 가끔은 친구들 방문하기도 했다... 마티스는 자신이 세심하게 선택하여 배열해 놓은 물건들 속에 있어야 마음을 놓은 사람이 었다. 물건들은 자기가 볼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어야 했다. 물건들은 자기가 볼 수 있는 곳 에 놓여 있어야 했다. 하다못해 가구 위의 항아리 하나를 닦아도 원래 있던 자리에 제모습 대로 놓아두지 않으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마티스 주변에는 허투루 놓이는 물건이 없었다. 그는 주변의 형태들을 예리하게 살펴보고는 기억에 담아 두었다. 그는 물건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아직 쓸 수 있는 데 버려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 철저한 감시에 때로는 숨이 막힐 것 같았 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지라 절약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어린 마티스는 동생과 손가락에 침을 묻혀 마루 틈새에 낀 씨앗을 집어내곤 했는데, 씨앗 100g를 모으면 아버지에게 1수를 받을 수 있었단다... 오후 5시경 마티스는 연한 차를 마셨다.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에는 내가 책을 읽어 주었다. 그는 기분 좋게 들었다. 한번은 샤토 브리앙의 '무덤 저편에서의 회상'을 읽은 적도 있다... 6월말이면 우리는 파리로 떠났다. 마티스는 몽파르나스에 아파트를 한 채 갖고 있었다. 여 름을 마티스는 그 아파트에서 보냈다. 그는 남프랑스의 여름은 너무 덥고 많은 사람들로 북 적댄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프랑스 국영 철도회사에서는 마티스를 위해 '응접실과 커다란 침대칸'이 있는 특별 차량 을 내주었다. 리디아는 특실에 딸린 침대 칸을 차지하고 간호사, 요리사, 나는 그 옆에 나 란히 붙은 세 개의 침대 칸을 썼다. 고양이들은 방스의 정원사가 보살펴 주었다. 리옹역에 도착하면 우리는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앙리 마티스 일행'이라는 데서 적지 않은 자 부심을 느꼈다. 일단 파리의 안락한 아파트에서 여장을 풀면 우리는 종전의 규칙적인 생활 로 되돌아갔다. 많은 방문객이 찾아왔다. 에드몽드 샤를 루가 인터뷰를 하러 왔다. 롤랑 프티는 발레 작품 을 무대장식을 의뢰하러 왔지만 마티스가 내켜 하지 않았다. 루이 아리공은 삽화로 쓰겠다 며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어느 날 오후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솔로이스트인 이베트 쇼비레가 찾아와 앙리 마티스를 위해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춤을 리파르(1905~1986, 발레에서 음악이나 무대장식보다 무 용을 중시한 러시아의 안무가: 역주)풍으로 추었다. 무용수의 몸놀림 하나하나를 가까이서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섬세한 동작으로 연기하기까지 무용수가 얼마나 맹렬한 연습을 했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마티스는 연필을 허공에 들고 도취된 듯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다시 니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제는 레지나 호텔에서 묵을 차례였다. 그 호텔의 로비는 으리으리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었고, 호텔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과이나 사월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박물관 같은 공간을 이루는 다른 방들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고색 창연한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니스와 방스의 마티 스 거처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이한 빛 - 은 마치 수도자가 생활하는 그리스 어느 사원에 온 듯한 느낌 이을 주었다. 마티스의 작업실은 실제로 수도자의 생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방스의 도미니 크 수도회 성당의 모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자클린 뒤엠 '선과 그 밖의 것들', 1986년 마티스의 화실 파리의 수수한 화실에서 니스의 빛으로 충만한 널따란 아틀 이까지 화가가 수십 년 동안 잡업해 온 공간들을 따라가 본다. 캐 생미셜 화실 마티스가 파리에 온 직후에 구한 캐 생미셸 가19번지의 작업실은 화가의 말에 따르면 "천 장이 낮고 점잖지 못한 가구가 딸려 있지만 전망은 기가 막히게 좋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이었다. 나는 캐 생미셸가에서 살았다. 베를렌의 작품을 내는 바니 에 출판사가 바로 밑에 있었다. 내 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은 5층 아래로 센 강의 작은 지류를 굽어보고 있 었다. 전망이 아름다웠다. 오른쪽에 노틀담, 왼쪽에 루브르가 있고, 정면에는 법원과 경찰청 이 있었다. 일요일 오전이면 부두는 늘 북적거렸다. 부두에 정박한 거룻배, 작은 의자를 깔 고 앉은 낚시꾼들, 낡은 책들이 담긴 상자를 뒤지는 사람들, 그곳은 파리의 심장부였다. 마티스 '흑점', 1976년 이실레물리노화실 1909년 마티스는 가족과 함께 파리 교외의 이시레물노에 있는 쾌적한 집으로 이사 간다.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그 집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마티스는 멋진 수영장과 온실 옆에다 당장 화실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 처음으로 1919년 5월 베르냉 화랑에서 마티 스의 개인전이 열린 것을 계기로 북구의 평론가 라그나르 호패가 다음달 파리에서 마티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마티스 씨. 여기에는 대작이 보이지 않는 군요. 벽에 걸려 있는 것 은 초상화를 위한 습잡 아니면 야외에서 그린 스케치뿐입니다. 큰 그림은 이제 안 그리시나 보죠?" "그립니다. 하지만 이 작은 방에서는 그릴 수가 없어요. 대작을 그리려면 공간과 거 리가 필요합니다. 이시레물리노의 별장에다 화실을 만든 것도 그래 서지요. 거기서는 장식용 작품을 그릴 수가 있어요. 그뿐인가요, 거기에는 꽃들이 만발한 멋진 정원도 있답니다. 색을 구성하는 요령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정원은 나의 가장 큰 스승입니다. 꽃들은 나의 망막에 지울 수 없는 강하 인상을 남기곤 해요. 팔레트를 한 손에 쥐고 캔버스 앞에 상태에서 말이 지요. 그때 내 마음의 눈에 어떤 기억이 또렷이 살아나 도움을 줍니다. 그럼 나는 붓을 놀리 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보면 나도 자연주의 화가인가 싶군요. 자신의 기억에 귀기울이고 모 든 창조적 재능에 긴밀히 결부된 선별의 본능에 귀기울이는 것을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한다 면 말입니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번 놀러 오세요. 오후 아무 때나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산 책하기에 안성맞춤이거든요. 아시다시피 오늘 이 작은 방에다 전화를 놓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스웨덴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파리의 전화 사정에 대해서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 다. 그리고 악수를 한 다음 헤어졌다. 라그나르 호패'내가 만남 마티스', 1920년 투명한 방의 신비 "그림에는 빛을 발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마티스는 사위인 미술학자 조르주뒤티에 게 말했다. 영롱한 수정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니스의 변함없는 색채는 마티스에게 엄청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1월의 풍요롭게 투명한 은빛 햇살"은 마티스의 발길 을 해마다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1940년대에 루이 아라공 - 당시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시인 으로 이미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 은 마티스와 가깝게 지냈다. 마티스를 주인공으로 한 책에서 아라공은, "이제까지 드로잉과 그림에서 한 번도 표현된 적이 없었던 두 가지 진 실"을 전하면서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시미에 언덕에 자리잡은 미궁 같은 궁전의 밝은 방에서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가 낯선 실 험을 하고 있다. 이 방에는 그런 실험의 사례가 적어도 100개는 있다. 한 곡조의 무한한 변 주처럼, 마티스는 결코 완성될 수 없을 이 '완성된'이미지들 속에서 작업을 해 나가는 이유 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듯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이제까지 드로잉과 그림에서 한 번도 표현된 적이 없었던 두 가지의 진 실이 드러나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라고 한 뷔퐁의 유명한 격 언과 "보라리 부인은 나 자신이다."라고 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말이다. 루이 아라공'소설 앙리 마티스', 1972년 니스의 카니발 고시 한복파넹 자리 자은 마티스의 화실에서 바라본 거리의 가장행렬은 그의 작품공간으 로 흘러 들어갔다. 마티스는 니스에 와서 처음에는 퐁셰트 구역에서 살다가 나중에 시미에 언덕으로 거처를 옮겼다. 니스는 마티스의 명성과 관련이 깊다. 이 관련은 화가가 말라르메 또는 롱사르와 맺 었던 교우 못지 않게 중요하다. 어떤 위대한 화가가 유독 한 곳을 골라 작업의 거점으로 삼 았다는 것은 무심히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마티스의경운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그 이유는 이 화가의 정직성 때문이다. 이 말을 쓰고 보니 이제까지 한번도 내가 정직함 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 앞에 나 스스로도 놀란다. 정직성은 합리성보다 마티스 의 작품세계를 훨씬 정확하게 담아 내는 말이다. 정직성은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벌써 눈앞에 떠오른다. 마술 이 왕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정직성'은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딱한 노릇이 다. 어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마술에서 벗어나시기를, 마티스의 화실에는 속임수가 없다. 카 지노는 한참을 더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나온다. 마티스의 창은 니스를 향해 열려 있다. 그의 작품에서 말이다. 그 경이롭게 열린 창 너머 에는 안경 너머 마티스의 눈동자처럼 파란 하늘이 있다. 거울과 거울의 대화가 펼쳐진다. 니 스는 화가를 바라보고 화가의 눈에 투영된다. 참으로 별난 보바리 부인인 셈이다! 마티스의 입에서 "니스는 나 자신이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그러기에는 마티스는 너무나 자신만만하고(처음에는 '겸손하고'라고 썼다가 '자신만 만 하고'로 바꾸었다.)너무나 정직하다. 결국 플로베르는 자신을 헐뜯은 셈이었다. 플로베르는 너무 정직했지만 적어도 겸손하지는 않았다. "왜 니스냐고? 나는 예술에서 내 마음에 수정처럼 맑게 다가오는 무대를 만들려고 노력해 왔지. 거기에 필요한 투명함을 뉴욕, 오세아니아, 니스 등등 세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었 다. 아마 3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북쪽으로 가서 그렸더라면 그림은 달라졌을 거야. 구름과 잿빛과 아스라이 사라지는 빛깔들을 담았을 거고, 그런데 뉴욕에 가면 화가들이 이렇게 말 합니다. 이 금속성 하늘 밑에서는 그림을 못 그린다.!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멋있어! 모든 것이 맑고, 수정 같고, 정확하고 투명하거든, 그 점에서 니스는 나에게 도움을 주었어. 내가 그리는 대상을 조형적 수단으로 구상된다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라네. 나는 눈을 떴을 때보 다 눈을 감았을 때 사물을 더 잘 볼 수 있어. 우연적인 속성들을 벗어 던진 알맹이, 바로 그 것을 그리지." 더욱이 니스는 빛과 열대의 화초뿐 아니라 또 다른 영감의 원천까지도 제공했다. 프랑스 의 그 어느 도시도, 심지어는 파리도 니스보다 국제적이지 않다. 관광객의 숫자만을 두고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지구 구석구석에서 자기 고향의 흙먼지와 전통 과 관습을 가지고 니스로 왔다. 더구나 마티스는 자기가 원하는 모델을 이곳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런 모델은 니스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시아, 러시아, 심지어는 남태 평양 출신의 모델을 통해 그는 드넓은 바깥 세계를 호흡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그 강력한 유혹이 느껴진다. 새롭게 구성된 세계와... 루이 아라공 '소설 앙리 마티스', 1972년 "나의 농장" 아름다운 무대, 규칙적인 생활 - 그것은 마티스가 꿈꾼 화가의 낙원이었다. "드디어 내가 농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왔습니다."고 마티스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하루 에도 몇 시간씩 이곳에서 꾸물거립니다. 화초에는 손이 많이 가거든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녀석들을 보살피면서 나는 녀석들의 형태, 무게, 유연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건 그림 에 많은 도움이 되지요." "요컨대 지상으로 돌아오셨다 이 말이군요" "당연하지요...언젠 안 그랬던가요?" 그러면서 안경 너머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내 가 싫증을 모르고 지내는지 이제 아시겠어요? 지난 50년 동안 나는 잠시도 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일을 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먹고 나서 한숨 잔 다음 2시에 다시 붓을 들고 오후 내내 저녁때까지 줄곧 일을 합니다. 상상이 안 가실 겁니다. 일 요일에는 온갖 감언이설로 모델들을 꼬드겨야 합니다. 일요일 같은 특별한 날에 와서 포즈 를 취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번에 마지막이라고 장담하지요. 물론 모델료는 두 배를 주 어야 해요. 그래도 상대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면 나는 주중에 하루 쉬게 해주겠다고 약 속합니다. 한 모델이 이르더군요. '하지만 선생님, 몇 달 째 계속 말만 앞세우고는 하루도 쉬게 한 날이 없잖아요.' 서글퍼요! 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일요일을 희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입장을 한번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지중해 호텔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밖에서 가장행렬이 벌어졌을 때는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요란한 음악과 환호와 웃음소리라니! 프란시스 카르코 '마티스와의 대화' 1941년 마티스의 미술 강의 마티스는 미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상세히 표현했다. 그가 글을 쓴 것은 이해 받 기 위해서였지, 이론을 구성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결국 마티스의 발언은 방법에 관한 기 존의 모든 통념, 모든 공식 미술에 반기를 들었던 그의 창작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 는 창문인 셈이다. 마티스는 자기 눈에 드러난 '예술의 진실'을 때로는 강의하듯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간다. 1908년 12월 25일 ≪르그랑드 르뷔≫지에 실린 '화가의 메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색체의 역할 내가 실내를 그린다고 가정하자. 내 눈앞에는 찬장이 있다. 찬장은 나에게 선명한 빨강의 감각을 주며 나는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빨강을 칠한다. 이 빨강과 캔버스의 백색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한다. 이제 그 빨강 옆에 녹색을 칠하고 바닥을 노랑으로 칠한다고 가정하 자. 역시 녹색과 노랑, 캔버스의 백색 사이에 나를 만족시키는 어떤 관계가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한 색조는 서로를 약화시킨다. 내가 바른 이런저런 색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색과 색의 관계는 개별 색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방식이라야 한다. 처음의 관계 대신 이제 새로운 색의 조합이 나타나 나의 생각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여러 번 수정을 거쳐 그림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보일 때까지 나는 그림을 계속 고쳐야 한다. 나는 자연을 비굴하게 묘사할 생각이 없다. 자연을 해석하여 그것을 회화의 정신에 복종 시켜야 한다. 내가 모든 색조에서 찾아낸 관계는 색들의 살아 있는 조화, 음악을 작곡할 때 의 그런 조화를 낳아야 한다... 색들의 표현적인 측면은 본능의 차원에서 나에게 과제를 남긴다. 가을의 정경을 그리기 위해 나는 이 계절에 맞는 색이 무엇인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직 가을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느낌에서만 영감을 얻으려고 한다. 오직 가을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느낌에서만 영감을 얻으려고 한다. 낙엽만이 가을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서늘한 파란 하 늘의 얼음 같은 투명함도 가을을 훌륭히 전달한다. 나의 느낌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가을 은 여름의 연장선 위에서 따사롭고 포근할 수도 있으며 이미 겨울을 예고하는 차가운 하늘 과 황갈색 나무의 스산한 분위기처럼 아주 춥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하여 색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관찰, 감각, 체험을 통 해 선택한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시냐크 같은 화가는 보색효과에 흠뻑 빠 져들었다. 보색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색을 써야 할지를 그에게 자연 스럽게 알려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감각을 잘 표현하는 색을 쓸 뿐이다. 색조의 균형을 이루려는 충동은 인물의 모습을 바꾸게 하거나 구성 자체를 바꾸도록 몰아간다. 하나의 구 성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균형에 이를 때까지 나는 작업을 계속한다. 바야흐로 모든 부분이 자기에게 걸맞은 관계를 찾아내는 그런 순간도 도래한다. 그 순간 만일 내가 그림에 붓질을 한 번 이라도 더 가하면 나는 그림을 완전히 다시 그려야 한다. 현실적으로도 나는 보색 이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능과 감정을 밑바탕으 로 하여, 또 자기 감각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밑바탕으로 삼아 색을 구사했던 화가들의 그림 을 연구하면, 특정한 색을 법칙을 정의할 수 있으며 지금 통용되고 있던 색 이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화가의 노트', 1908년 정서를 여과 없이 순수하게 옮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용 수단의 범위를 폭넓게 꿰뚫고 있어야 하며 그 수단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젊은 화가는 실수 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그림이란 가장 황당한 모험과 부단한 탐구를 일컫는 말 이 아니던가?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당시에 나는 오직 색채만을 가지고 어떤 균형과 표 현적인 율동을 얻으려고 애썼다. 또 어떤 때는 아라베스크의 힘만을 파고들었다. 색이 지나 치게 강렬해졌을 때는 형태들이 더 큰 안정감을 얻을 수 있고 명확히 정의될 수 있도록 색 을 죽였다.(그렇다고 색을 어둡게 만들었다는 소리는 아니다.)조금 방황한들 어떠리? 한번 방황할 때마다 그 사람은 그만큼 성장하는 것을. 가스통 딜의 ' 오늘의 화가들' (1943년)에서 색이 다시 표현 성을 얻었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전까지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오랫동 안 색은 드로잉의 보완 물로 머물러있었다. 라파엘로, 만 테냐, 뒤러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 은 모두 드로잉으로 구성한 다음 색을 덧붙였다. 반면에 르네상스 직전의 이탈리아 화가들, 특히 근동 화가들은 색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 았다... 멀게는 들라크루아, 반 고흐, 특히 고갱,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이 닦아 놓은 길 위에서 세 잔은 확고한 방법론을 구축했으며 색채에 양감을 도입했다. 그것은 색의 복권, 정서적 환기 력의 복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색의 역할과 양식' 가스통 딜의 ' 회화의 문제들'(1945년)에서 조각 내가 조각에 손을 댄 이유는 내 생각을 좀더 명료히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 하자면 내 감정에 질서를 부여하고 나에게 맞는 스타일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림에 도 도움이 되었다. 내가 궁극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 아래 작업을 계속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나의 모든 감각에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장 기샤르 메일 리의 ' 마티스' (1967년)에서 구성과 표현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표현이다. 나에게 어느 정도 기량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 만 나의 야심은 제한되어 있어 그림을 바라보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시각적 만족 너 머로 나아 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화가의 생각을 그의 회화적 수단과 분 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수단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 다. 생각이 깊을수록 물론 표현은 더욱 완전에 가까워질 것이다. (완전하다고 해서 반드시 복잡할 이유는 없다.)나는 인생을 느끼는 감정과 그 감정을 옮기는 방식을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다...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타오르는 정염, 격렬한 몸짓으로 드러나는 열정이 표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그림을 전체적인 구성 자체가 표현적이다.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 리, 그들 주위의 비어 있는 공간, 비례, 모두가 제 몫의 표현 성을 갖고 있다. 구성은 화가가 이 다양한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여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한 그림에서 모든 부분은 주연은 주연대로 조연은 조연대로 주어진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것은 그림 속 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림 안에서 제 몫을 찾지 못하는 부분은 해로운 부분이다. 예술품 은 전체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필요한 세부묘사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관건으 로 작용하는 핵심적 묘사를 가려서는 안 될 것이다. 구성은 어디까지나 표현에 목적을 두고 있지만, 구성이 이루어질 대상의 표면에 따라 내 용이 바뀐다. 반듯한 정사각형의 종이가 눈앞에 있다고 하자. 나의 드로잉은 종이의 모양과 필연적인 관계 아래 놓인다. 가령 나는 이 정사각형 위의 드로잉을 이것과 비례가 다른 직 사각형의 종이에 또다시 똑같이 써먹지는 못할 것이다. '화가의 노트',1908년 사물의 본질 그러나 조개, 파란 화분, 커피 잔, 커피포트, 검은색과 녹색의 대리석 탁자 위에 놓인 세 알의 녹색 사과로 이루어진 정물화 - 무려 서른 번이나 위치를 바꾸었는데 -에서 나는 명 상, 시점을 다양한 조정, 군더더기의 제거를 통해 내가 추상적인 방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믿네. 당분간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반복하다 는 것도 불가능한 노릇이지. 그것만큼은 분명해. 그래서 나는 별스럽지 않고 전보다 육체 성이 강조되는 방식 을 고수하기로 나 자신을 다그치고 있어. 그렇게 하면 사물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거든, 그 래서 얼마 전부터 굴을 그리고 있지. 거기에는 미각이 깃들여 있어야 해. 그림 속에서 굴은 조금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금은 네덜란드 풍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어. 이것은 내가 이 주제로 그린 세 번째 작품이라네. 물론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방과 주변의 공간을 감 안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나는 나 자신에게 자유를 부여했네. 나로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 지. 나는 내가 오래 전부터 억눌러야 했던 자연의 속성, 그림이 주는 유쾌한 맛을 다시 발견 하기에 이르렀네. 나는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귀착될지 몰라. 내가 어제 막 성취한 것의 가 치에 대해서 아직은 확신을 못 가진다네. 갓난아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러나 이것 하 나만은 분명해. 비록 내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것은 선과 색채, 수채화 등의 표현수 단이었지만,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야 할 이런 그림들은 오직 유채로만 그려질 수 있다는 사 실을 말이야. 중요한 것은 다양한 색채와 다양한 비례의 표면을 표현력 있게 섞는 작업이지. 나는 그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해. 이전의 작업으로 되돌아가서 나의 최근 작업이 거기에 무 엇을 보탤 수 있을지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네. 테오도르 팔라디에게 1940년 12월 17일 그 신비의 요소 여자의 몸을 그린다고 가정하자. 먼저 나는 우아함과 매력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신체를 이루는 본질적인 선을 찾아내 그 의미를 웅축시킬 것 이다. 첫눈에는 매력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좀더 폭넓은 의미, 좀더 인간미 넘 치는 의미를 가지는 새로운 이미지에서 서서히 매력이 배어 나올 것이다. '화가의 노트', 1908년 실마리를 찾아서 나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하나의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면, 아니 예민한 감수성이 방법의 도움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인생은 얼마나 괴롭겠나. 나는 완전히 흔들리겠지 만, 생각해 보면 평생을 살아오면서 안 그런 적이 없었지. 절망의 순간에 이어 행복한 계시 의 순간이 찾아온다네. 그런 계시 덕분에 나는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나 는 선으로 이루어지는 드리옹보다 풍부한 수단(색)을 써서,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 도록 논리적으로 이끄는 실마리를 찾는 데 관심이 쏠려 있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에 감정을 불어넣음으로써, 나는 나를 감동시키는 부분을 자연에서 가져온다네. 궁극적으로 사 랑의 감정을 투입해야겠지. 인생에서는 사랑을 쏟아 붓는 만큼 고통이 뒤따를 수 있지만 그 림에서는 그렇지 않거든. 앙드레 루베이르에게 1941년 10월 6일 가슴으로부터 바로 나는 정신이 나간 늙은이지. 만족에 겨워 눈을 감기 위해서 죽기 전에 그림을 새롭게 시 작하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으니 말이야. 헌테,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나는 나의 그림이 나의 드로잉 - 지극히 단순하게 가슴으로부터 바로 나오는 선 말일세 - 과 조금이라도 더 밀착될 수 있도록 일부러 험한 길을 택했네. 나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 면 그건 터무니없이 먼길이지.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있 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표면적 현실과는 무관하게 나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즐겨 쓰는 색들의 관계를 보면, 나는 내가 대상을 원근법 없이, 그러니까 바로 정면에서 - 아주 코앞에서 바짝 - 내 느낌과의 관련 속에서 표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네. 그렇게 되면 색들 의 신비로운 관계에서 모종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논리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반사광 없이 국부적인 색만을 쓰고 사람의 형상을 모두 같은 평면 위에 놓아야 하겟지? 이처럼 그림 속 의 단순화된 요소들에다, 자연 그 자체가 내 안에 일깨우는 감정을 충실히 반영한 완전히 허구적인 색을 칠해야 하겠지? 하지만 나의 인공적 그림에서도 나는 표면적 현실을 위한 공 간을 남겨 두기로 했어. 그리고 그것이 갖는 장점도 있다는 요소도 본질적인 요소 못지 않 게 쓸모가 많은 법이거든. 앙드레 루베이르에게, 1947년 6월 3일 선과 감성 선은 내 감정을 가장 순수하게 직접적으로 옮긴 것이다. 매질이 단순하지 않았다면 그렇 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드로잉은 드로잉과 스케치를 혼동하는 몇몇 사 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 나의 드로잉은 빛을 낳는다. 우중충한 날이나 간접광 밑 에서 보면 그 안에 선의 특성과 섬세함뿐 아니라 색에 비견될 만한 빛과 농담의 차이가 담 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들은 밝은 대낮에 보아도 꽤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보통 드로잉을 그리기에 앞에 목탄 같은 좀더 느슨한 매질로 습작을 하곤 한다. 그 과정에서 모 델의 성격, 인간적 표현, 주변을 에워싼 빛의 특성, 분위기, 오직 드로잉으로만 표현될 수 있 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고찰한다. 어떤 때는 며칠씩 이어지기도 하는 그 탐색에 지쳐 버 릴 때쯤, 정신은 오히려 맑아진다. 바로 그때 나는 펜을 들고 거침없이 그려 나가기 시작한 다. 순간 나는 손놀림 속에 감정이 표현되고 있음을 명료히 깨닫는다. 감정에 젖은 선이 하 얀 백지의 빛을, 그 소중한 백색 성을 그대로 형상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나는 아무 것도 덧붙이거나 뺄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종이에는 선이 그어졌다. 수정은 불가능하다. 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곡예사의 아슬아슬한 묘기처럼... 나는 드로잉을 한번도 특별한 솜씨를 요구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게 드 로잉은 무엇보다도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고 마음의 상태를 기술하는 수단이었다. 어눌함 없 이 감상자의 마음에 곧바로 다가갈 수 있도록 단순하고 가식 없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호 나는 수단이었다. 실내에서 나의 모델, 곧 사람은 결코 '조연'이 아니다. 그들은 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 이다. 나는 전적으로 모델에 의존한다. 나는 모델을 마음껏 관찰하면서 '그 모델의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포즈를 잡아낸다. 새로 모델이 오면 나는 그녀가 자기를 의식하지 않을 가장 편안한 자세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그 뒤로 나는 그 포즈의 노예가 된다. 때로는 싫 증날 때까지 같은 모델을 몇 년씩 쓰기도 한다. 나의 조형기호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관심 을 두고 있는 모델의 영혼(내가 싫어하는 말이지만)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거 기에 무엇이 있겠는가? 모델의 모습은 언제나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표현할만한 것이 있다. 모 델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모델의 몸 자체에 특별히 나타나 있지 않고 완전한 조 화, 조형성을 이루는 종이나 캔버스 전체에 분산된 선이나 특수한 농담에 나타나 있다. 그러 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간파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아직 모든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승화 된 관능적 쾌락이다. 그림자나 반 농담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명암이나 변조를 거부하려 고 한다. 나는 선의 무게에 변화를 줌으로써, 무엇보다도 선이 백지 위에서 경계를 정하는 영역을 가지고 변조의 효과를 낳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 백지 위의 다양한 부분들 간의 관 계를 통해 바꾸려는 것이다. 렘브란트, 터너, 색채주의자들의 그림에 대체로 이 점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이론 없이'작업한다. 나는 내가 이용하는 무르익으면서 나에게 포 착되는 나의 생각에만 기대어 그림을 그린다. 샤르댕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바르게 보일 때까지 덧붙인다."(혹은 뺀다고 말해도 좋다. 나는 많이 지우는 편이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만일 화가가 올바른 원칙 위에서 작업한다면 집을 짓는 것처럼 논 리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측면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 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을 뿐이다. 만일 인간적 측면이 있을 경우 그것은 불가피하게 작품 전체를 물들일 것이다. '요점',1939년 "나는 이끌린다." 드로잉 작업을 할 때 나의 연필이 종이 위에 남기는 궤적은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는 사 람의 몸짓과 비슷하다. 내 앞에는 길이 나 있지 않다. 나는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끌릴 뿐이다. 나는 나의 모델 속에 있는 한 점에서, 나의 연필이 잇따라 거치게 될 다른 점들과는 무관하게 늘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내 눈에는 보이는 또 다른 점을 향해 움직인다. 나는 그 때그때 생기는 내부적 충동을 그림에 옮겨 놓을 뿐이다. 내 눈이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아 직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 이상의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외부적 장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희미한 불빛을 향해 나아가서 일단 거기에 이르면 내 앞에는 저 멀리서 또 하나의 불빛이 어른거린다. 나는 다시 그곳을 향해 창조의 일보를 내디뎌야 한다. 그 길은 참으로 흥미롭다. 마치 거미가 한 코 한 코 거미줄을 짜 나가듯이. '커다란 주제들'은 아직 나에게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큰 주제는 신중함을 요구하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다. 그런데 '신중함'은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것은 본능의 거리낌없는 발산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루이 아라공 ' 소설 앙리 마티스' , 1971년 "우리는 시대에 속해 있다" 원칙은 개인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 유능한 교수가 라신 같은 천재를 능가하 수 없 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공식을 반복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공식의 의미를 간파하는 일은 아무나 못 한다. 마네 나 르누아르의 작품보다는 라파엘로나 티치아 노의 그림을 연구했을 때 좀더 완전한 창작의 지침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을 나도 굳이 부 인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마네 와 르누아르가 따랐던 원칙은 그들의 기질에 맞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 르비노의 비너스'(티치아노)나 '오색방울새의 마돈나' (라파엘로)를 흉내내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의 그림보다는 마네 나 르누아르의 소품을 더 좋 아한다. 그런 모작들은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속 해 있으며 시대의 사상, 감정, 심지어는 망상까지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가에 게는 시대의 각인이 찍혀져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런 각인이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사 람이다. 예컨대 플랑드랭보다는 쿠르베가, 프레미에보다는 로댕이 우리 시대를 더 잘 표현한 다.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설령 우리가 스스로를 고집스레 유배자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시대와 우리는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으며 어떤 작가도 그 끈에서 놓여날 수 없다. 후세의 미학자들은 우리 중의 그 어느 누구도 레오나르도 다 빈 치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시대에 쓰인 레오나르도 다 빈 치의 책을 예로 들게 될는지도 모 른다. '화가의 노트', 1908년 그림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흔히 나는 작업을 시작할 때 처음의 신선한 표층감각을 기록한다. 몇 년 전까지 나는 그 결과에 만족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여기에 만족한다면, 비록 안목이 넓어지기 는 했지만 내 그림에는 모호한 구석이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지 않고 따라서 다음날이면 거의 알아보지 않고 따라서 다음날이면 거의 알아보지 못할 한순간의 덧 없는 감각을 기록해 두었어야 했다. 나는 그림을 만드는 그런 감각의 응축상태에 이르고 싶었다. 한자리에서 이루어진 작업에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작품을 곧잘 뜯어고치 는 편이다. 그래야 나중에 내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그것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 다. 한때는 벽에 내 그림을 걸어 놓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림을 보면 과도한 흥분의 순 간이 떠오르는데 나는 평온한 상태에서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요즈 음 나는 그림에 평온함을 담는 데 애쓰고 있다. 평온함이 성공적으로 담길 때까지 그림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화가의 노트', 1908년 오래 바라보기 그림을 그릴 때는 먼저 모델이나 주제를 오래 바라보고 색채의 전반적 초안을 짜도록 하 라.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떤 풍경을 그리는 이유는 그것이 색채라든가 구성의 차원에 서 어떤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그림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라. 그런 다음 작업에 들어간다. 나의 마음에 나타난 특성이 그림의 중요한 부분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유 념하면서, 완성된 작품에서 보여질 모든 것을 암시해야 한다. 작업과정에서 모든 것이 내적 연관성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쓸데없는 것을 보태서는 안 된다. 때때로 붓을 놓고 주제가 조화를 이루는지 확인해야 한다. 당신이 우선 지향하는 것은 통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색에서 질서를 찾을 것, 내가 이해한 서너 가지의 색을 캔버스에 바르라. 할 수만 있다면 또 하나의 색을 바르라. 그러지 못하겠으면 캔버시를 옆으로 밀어 두고 처음부 터 다시 시작하라. 사라타인의 강의 노트에서 1908년경 후배화가와 마티스 마티스는 배우기를 좋아했고 한 대는 선생 노릇도 즐겼다. 그는 젊은 화가들을 어떻게 받 아들였는가? 그들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르누아르에서 폴록까지 마티스는 신진 화가들에게 피카소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새로운 조류를 피 카소보다 덜 단정적으로 대했다. 마티스는 뉴욕에서 미술상을 하는 아들 피에르가 보내 온 도록 몇 종을 보여 주었다. 거 기에는 잭슬 폴록과 그 비슷한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런 그림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가 도록을 다 보기를 기다렸다가 마 티스가 입을 열었다."다음에 올 자기 작품을 어떤 식으로 그려야 할지 늘 판단에 애를 먹는 것과 같은 이유지. 사람은 앞서 활동했거나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화가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수 있어. 후배 화가들에 대해서도, 만일 그 화가가 나를 깡그리 잊은 것이 아니라면 나 는 조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그가 나를 앞질러 나간다 해도 말이지. 하지만 만일 그가 내가 그림이라고 받아들이는 부분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면 더 이상 그를 이해할 수는 없게 돼. 따라서 판단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내 능력 밖의 일이거든. 젊었을 때 나는 르누아르의 그림에 심취했어. 1차 대전이 끝나 갈 무렵 나는 남프랑스에 있었는데, 르누아르는 아주 연로했고, 나는 그를 여전히 숭배했으므로 카뉴에 있는 그의 집 을 찾아갔지. 르누아르는 나를 아주 따뜻이 맞아 주었어. 몇 차례 방문이 더 있은 뒤 내 그 림을 들고 갔어. 르누아르의 반응이 궁금했거든. 그는 그림을 보더니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네. '솔직히 말하겠네. 자네는 좋은 화가가 못 된다는 것, 아 니 아주 엉터리 화가라는 것이 나의 속마음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하지 못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네. 자네가 찍은 검정은 캔버스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가 있더군. 감 정을 쓰면 캔버스에 구멍이 숭숭 뚫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평생을 지론이었어. 검정은 색이 아니라는 소리야. 자네는 색으로 말을 하지. 그런데 자네가 바른 검정은 캔버스에 찰싹 달라붙어 있더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네의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생각 같아서는 자 네는 형편없는 화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자네를 화가로 볼 수밖에 없네.'" 마티스는 빙긋 웃었다. "이젠 알겠지, 다음 세대를 이해하고 평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언어를 조금씩 만들어 나갈 뿐 아니라 미적 규범도 함께 발전시켜 나가지.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신이 창출한 가치를,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세우는 것이지. 그러니 자기가 도달한 지점보다 앞에서 출발하는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그런 그림은 토대가 완전히 다르니까 말이야. 우리가 무대 에 나타났을 때 그림의 운동은 우리를 잠시 담고 꿀꺽 삼켜서 사슬에다 약간을 보태지. 그 러나 운동은 계속되어 머지않아 우리를 지나쳐 가. 우리는 운동밖에 있게 되고 그림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야." 그러자 파블로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오호라, 이제 보니 우리 중에 인과의 사슬을 말하 는 불교도가 계셨구먼요."파블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그림을 판단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 그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나는 체질적으로 그런 일에 안 맞아. 신진 화가들의 제스처에 기죽거나 놀아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과시적인 행동 앞에서 굴복하는 것, 그것처럼 볼썽 사나운 일도 없고요, 그렇다고 내가 그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 는 건 아닙니다. 나는 푸생 같은 화가와는 전혀 공통성이 없어요. 그러나 무의식은 너무 강 력한 것이어서 유파는 달라도 어차피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인류는 바로 그 저변의 뿌리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뿌리는 어차피 드러나요, 그런 데 우리가 왜 스스로를 포기해야 한단 말입니까?" 프랑수아즈 질로와 칼턴 레이크 ' 피카소와의 생활' , 1964년 추상에 대하여 "오늘날의 추상미술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마티스의 답변 "먼저, 추상미술은 단 한 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미술은 일 화적 특성을 벗겨 낸 근본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추상적이다. 하지만 말장난은 하지 말자...... 문제는 비형상적 미술이라는 소린데........ 오늘날의 미술이 자신의 물질적 조성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상을 종합으로 표현하는 화가는 언뜻 대상에서 벗어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대상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화가는 불가피 하게 대상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금 강조하지만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대상에 대한, 그리고 대상이 자기으 l마음에 불러일으킨 반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잇 어야 한다. 우리는 대상에서 출발한다. 감각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허공에서 출발하지 않는 다. 무에서 유가 생길 수는 없다. 오늘날의 추상화가들은 대부분 허공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는 근거가 없고, 힘이 없고, 영감이 없고, 느낌이 없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 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들은 추상을 흉내낸다. 우리는 그들이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 색채들 간의 관계에서 어떤 표현성도 찾아내지 못한 다. 그들이 관계를 만드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모든 색을 헛되이 쓰는 셈이다. '관계'는 사물간의 친근성이며 공통언어이다. 관계는 사랑이다. 그렇다. 사랑이다. 관계 가 없으면, 이 사랑이 없으면 관찰의 기준이 성립되지 못하며, 예술작품도 존립할 수 없게 된 다. 앙드레 베르데와 앙리 마티스의 인터뷰 1952년 마송이 본 마티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예술가가 바라본 화가 마티스. 그 사람은 실제보다 컸다! 실제보다 크게 그는 약간 무미건조하고 뻣뻣한 사람으로 나타 났다... 무미건조하고 진지하고 초연한 사람, 알겠는가?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화가에게 쏟았던 관심이었다. 그것은 작품 에 대한 의례적인 관심 이상이었다. 그는 나를 주시하면서 나의 방법론에 대해서 질문을 던 졌고 나 역시 그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앙드레 마송 ' 조르주 샤르보니에와의 대화' , 1958년 가르침에 대하여 마티스는 왜 자기가 학교를 열었다가 나중에 닫았는지를 설명한다. 나는 젊은 화가들이 내 전철을 되밟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학생 수는 많았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시도를 하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주력한 것은 그들에게 전통 감각을 심어 주는 일이었다. 혁명적인 실험으로 널리 알려진 스승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쿠르베의 말이 나왔을 때 학생들이 느낀 실망감은 당연히 컸다. "나는 전통에 대한 폭넓은 지식 안에서 내 개성을 독자적이며 합리적인 감정을 내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학생 개개인에게 뚫고 들어가려는 과정에서 나는 그만 지쳤다. 내 눈에는 잘못된 방향으 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정작 그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제 방식입니다." 서글픈 것은 그가 ' 마티스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은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화가가 되던가 선생이 되든 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 문을 닫았다. 자크 귀엔, '마티스와의 대화' ' 라브 비방' 지 1925년 12월 15일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젊은 화가의 가능성과 책임. 앞선 세대의 영향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 젊은 화가는 그 안에 휩쓸리기 쉽다. 숭배하는 선배 화가들의 작품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화가는 자기 기질에 맞는 다양한 문화 권의 예술품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민감한 화가는 앞선 세대가 기여한 내용을 놓치지 않는다. 아무리 본인이 부인하고 싶어 도 그것은 그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롭고 참신한 영감으로 스스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젊은 화가는 모든 것을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이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작품들에 표 현되어 있는 다양한 견해들을 마음속에서 조화시킴과 동시에 자연에 곧바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표현수단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면 화가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원 하는가?"라고,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단순하건 복잡하건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만일 그가 자신의 내면적 감정을, 스스로를 속이거나 스스로에게 너무나 관대함이 없이, 진지하게 탐구할 수만 있다면, 그런 탐구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나이가 들어서도 젊었을 때와 똑같이 일에 대한 열정과 배움에 대한 의지를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림에 대한 단상' ' 베르브' 지 194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