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기든스 : 제3의 길 [올린이의 말: 이 글은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한상진, 박찬욱의 번역으로 출간한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The Third Way)입니다. 한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옮긴이의 말, 서문, 5장으로 된 본문 및 부록 1: 저자와의 대담(한상진)과 부록 2: 고등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주 요 용어 해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책 후반부의 부록 1과 부록 2는 생략하였음 을 알려드립니다.] THE THIRD WAY: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 by Anthony Giddens Copyright Anthony Giddens, 1998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Thinklng Tree Publishing Co. Ltd., 1998 The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Andrew Numberg Associates London, England through Eric Yang Agency. Seoul, Korea. 본 저작물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에릭양 에이전시를 통한 저작권사와의 독점계약으로 (주)생 각의 나무가 소유합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제 3의 길 The Third Way 차례 옮긴이의 말/(제3의 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문/사회민주주의의 미래와 제3의 길 제 1장 사회주의와 그 이후 1. 정치적 이상주의의 부흥을 위하여 2. 사회주의의 사망 3. 구식 사회민주주의 4. 신자유주의적 견해 5. 원리의 비교 6. 최근의 토론 7. 정치적 지지 구조 8. 사회민주주의의 운명 제2장 다섯 가지 딜레마 1. 다섯 가지 딜레마 2. 범세계화 3. 개인주의 4. 좌파와 우파 5. 정치적 행위체 6. 생태적 쟁점들 7. 제 3의 길 정치 제3장 국가와 시민사회 1. 제 3의 길 프로그램 2. 민주주의의 민주화 3. 시민사회의 문제 4. 범죄와 공동체 5. 민주적인 가족 제4장 사회투자 국가 1. 제3의 길 정치와 국가 2. 평등의 의미 3. 포용과 배제 4. 적극적 복지사회 5. 사회투자 전략 제5장 범세계화 시대로 1. 범세계화 시대의 민족의 새로운 역할 2. 세계주의적 민족 3. 문화적 다원주의 4. 세계적 민주주의 5. 유럽연합 6. 범세계적 관할 7. 세계적 규모의 시장근본주의 결론/새로운 대화를 위하여 주 부록 1 : 저자와의 대담/한상진 성찰적 현대화의 길 제 3의 길 부록 11 : 고등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주요 용어 해설 옮긴이의 말 <제3의 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앤서니 기든스의 가장 최근의 저서인 <제3의 길>은 좌우 이념 대립의 역사가 끝나면서 공 허해진 지식인과 독자들의 마음에 새로운 비전에 관한 상상력과 자극을 제공하는 책이다. 특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서 시장경제의 논리와 시민적 연대 및 정 의의 원리를 결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제3의 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보적 지식인의 최소한의 양식과 개방적 사고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중도 좌파 정부가 집권한 상태이고 보면 현실적인 영 향력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뿐만 아니라 탈냉전의 세계사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좌우 대 립의 낡은 유습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민주화 과정의 분단 한국에게 제3의 길은 특히 암시하는 바가 클 것이라는 예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일차적으로 학문적인 저술이다. 이로부터 많은 정책 프로그램을 끌어 낼 수 도 있겠지만, 이 책은 급변하는 오늘날의 세계 질서 하에서 제3의 길을 논의할 수 있는 근 거와 의미 및 효과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학문적 담론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서 방법으로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제3의 길이 과거에도 논의된 적이 많기 때문에 개념 의 구조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둘째는 이 책을 기든스의 전체 저술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제3의 길은 기든스가 펴낸 저술들의 예견 가능한 후속물인가, 아니면 일종의 돌연변 이인가? 아니면 중대한 궤도 수정 또는 새로운 출발을 뜻하는 것인가? 셋째는 제3의 길을 오늘의 서구사회의 변동에 접목시켜 이해하는 방법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제3의 길이 유 럽에서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일까? 넷째는 제3의 길을 한국사회에 적용하여 이해하는 방법이 다. 제3의 길은 우리에게 과연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누가, 어떻게 제3의 길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적지 않은 독자들이 세 번째의 질문에 관하여 자유연상하는 몫이 클 것으로 보인다. 제3의 길, 개념의 문제 우선 개념 문제를 살펴보자. 제3의 길을 규정하는 가장 평범한 방법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 도 아닌 쌍방부정의 방법이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것,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것,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것, 개인주의도 아니고 집단주의도 아닌 것, 자유무역 도 아니고 보호무역도 아닌 것 등이 그 예이다. 기든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제3의 길을 주창한 사람들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이 과거와 어떻 게 다른가를 규명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나 A도 아니고 B도 아닌 쌍방 부정 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은 기든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차이가 있다면, 기든스는 고전적 의미 의 좌우 대립을 극복할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새로운 도전으로 범세계화(globalization)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종래의 제3의 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주의적 (cosmopolitan) 민족, 정치, 담론, 정체성 등을 과감히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쌍방 부정의 방법만으로는 제3의 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제3의 길에 대한 긍 정적인 개념 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는 전혀 반대의 방법이 사용될 수도 있 다. 즉 A도 아니고 B도 아닌 것이 아니라, A와 B의 좋은 점을 뽑아 절충시키는 방식으로 제3의 길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별 항목으로는 훌륭하지만 서로 연 결시켰을 때 모순적일 수 있는 정책 수단들이 나열되는 경향마저 있다. 이런 결함이 혹시 기든스의 저술에도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독자의 고유한 임무가 아닐 수 없다. 학문적 담론으로서 제3의 길이 성공하려면 쌍방 부정이나 절충주의를 넘어 제3의 길을 이끌 어 가는 일관된 철학과 원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있다면 제3의 길은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좋은 것을 임의적으로 뽑아 조립하는 방식으로 제3의 길을 제시 한다면, 학문적 평가는 오래가기 힘들 것이다.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에는 일 관된 철학과 원칙이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든스는 서울에서 가진 연설에서 앞 으로 20년 동안은 제3의 길 정치가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는데, 그는 다소 정 치적인 감각으로 말했는지 모르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20년간의 학문적 비판을 버 틸 수 있는 일관된 원칙이 과연 제3의 길에 있는지, 또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진 지한 학문적 토론이 필요한 영역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기든스의 학문 세계와 제3의 길 기든스의 학문 활동은 다채롭고 폭이 넓다. 그는 1970년부터 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서 가르쳤으며, 미국의 하버드나 버클리, 보스턴, 뉴욕, 스탠퍼드 같은 명문 대학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저명한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강의했다. 1997년부터는 런던 정치경제학 대학(LSE)의 총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기든스의 장점은 유럽 대륙과 영미국가를 가로지르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이론 체계를 개성 있게 만든다는 점이다. 구조주의와 행동이론은 곧잘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그는 이를 결합한 구조화(structuration) 이론으로 명 성을 얻었다. 그는 자본주의 분석에도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현대성(modernity) 을 둘러싼 서구의 논쟁에서도 독보적 위치와 역량을 과시했다. 지난 30여 년 간 그는 모두 30여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대표적 저술로는 <자본주의와 현대사회 이론>(1971), <선진사회의 계급구조>(1973), <사회 학 방법의 새로운 규칙들>(1976), <사적 유물론의 최신 비판>(1981), <국민국가와 폭력 >(1985), <모더니티의 결과들>(1990), <모더니티와 자아 정체성>(1991), <친밀성의 변동 >(1992),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1994), <성찰적 현대화>(1994, 국내에서는 <성찰적 근대 화>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음) , <사회학의 변론>(1996) 등이 있다. 기든스의 저술은 모두 22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기든스의 학문세계를 다루는 단행본만도 이미 12권이나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정도의 방대한 저술로 학문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학자의 생각을 몇 마 디로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주제가 너무 방대하고 각기 전문 화된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현대성, 탈현대성, 비판이론, 마르 크스주의, 해석학, 언어학, 기능주의, 실증주의, 체계 이론 등 그가 다루는 주제는 무궁무진 하다. 인문사회과학의 중심적인 주제 가운데 그의 손을 거쳐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두 가지 분류 기준에 의해 기든스의 저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 것처 럼 보인다. 하나는 그가 다루는 대상이 거시적인가 미시적인가의 구분이다. 자본주의, 계급 구조, 국가, 시장경제, 관료제 등은 거시적 주제이다. 반대로 성, 가족, 사랑, 결혼, 자아정체 성, 친밀성, 성찰성 등의 주제는 미시적이다. 다른 하나의 구분은 주제가 순수 이론적인 것 인가, 아니면 보다 실용적인 성격을 갖는가에 관련된다. 예를 들자면, 사회학 방법론이나 구 조화 이론 또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저술들은 순수한 이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반면에 생 활정치, 위험사회, 신사회운동, 신뢰, 성찰적 현대화 등에 관한 분석은 실천적 개입을 요구하 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든스의 최신 저서 <제3의 길>은 거시적인 문제를 보다 실용적 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즉 좌우 이념의 대립을 넘어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국가와 경제, 시민사회의 관계를 탄력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목표를 갖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거시정치의 관점에서 본 제3의 길이라고 하겠다. 반면 기든스의 이론체계에서 보자면 미시적인 문제를 실용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이 방향으로 그가 많은 작업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본 제3의 길은 아직 정교하게 가꾸어진 것 같지는 않다. 이 부분이 잘 발전되면 더욱 흥미 있고 명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주창하게 된 것은 그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브레인으로 일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잘 알려진 것처럼, 블레어는 기든스의 1994년 저서 <좌파 와 우파를 넘어서>에서 제3의 길에 대한 개념을 얻었다고 한다. 얼마 전 세계 각지로 보낸 기고문에서 그는 제3의 길을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재생과 성공으로 가는 길 로 파악하면서 이것은 단순한 좌우의 타협이 아니라 중도 또는 중도 좌파의 핵심적 가치를 취하여 근본적 인 사회경제적 변화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기든스가 블레어와 함께 사회민주주의의 복원에 운명의 주사위를 던졌음을 느낄 수 있다. 영국을 포함하여 유 럽의 여러 나라에 중도 좌파 정부가 들어섰지만, 영국 안에서 보자면 대처리즘, 더 넓게 보 자면 신자유주의의 공격 앞에서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진보 진영의 한계를 넘 어서기 위하여 기든스는 대담하게 제3의 길이라는 낯설지 않은-그러나 신선미는 떨어지는- 화두를 꺼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선택이 기든스에게 뜻밖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이론적 입장과 최신 저술들이 자 연스럽게 제3의 길로 모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가에 대해 서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병폐와 함께 사회주의의 실패를 진단했던 서구 의 지식인들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 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들의 열린 사고 방식과 현실 정치 사이에는 아직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기든스를 포함하여 그 주위의 인물들, 예컨대 데이비드 헬드나 울리히 벡 등의 생각 은 매우 개방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급진적인 면도 있지만,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의 석학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위르겐 하버마스나 쟈크 데리다 같은 학자들처럼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대안이 제3의 길로 구체화되었을 때 실제로 이것을 이끌어 가는 정 치 세력과 사회적 주체는 아직 구태의연한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이 상당히 개성적인 이유는 그가 거둔 학문적 결실이 이 안에 농 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비판이론의 진영에 서 있었지만 사적 유물론과 함께 사회주의 체제의 결함을 갈파했다. 또한 마르크스나 베버의 이론을 빌려 서구 자본주 의 체제의 모순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진단했다. 이런 그의 입장은 1980년대에 와서 현대성 의 비판으로 확장되었으며, 결국 폭력과 전쟁, 생태계 파괴, 환경 오염, 인간 소외, 관료적 지배, 계급 차별과 같은 현대성의 부정적 결과들을 극복하는 새로운 개념, 즉 성찰적 현대화 의 개념으로 이어졌다. 사실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작게는 한 국가의 시민, 크게는 온 인류의 삶이 갈수록 위험에 직면한다는 인식은 더 이상 좌우의 이념으로 판별할 수 있는 것 은 아니었다. 따라서 좌우의 구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위험사회나 성찰적 현대화의 개념은 이런 필요에 부응한 것이며, 이 안에 이미 제3의 길은 암시되어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제3의 길은 성찰적 현대화의 길인 것이다. 기든스의 사상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범세계화의 복합성에 대한 그의 치열한 대결 이 아닌가 여겨진다. 기든스의 사고 방식은 개방적이고 탄력적이다. 금융 투기자본의 행태에 서 드러나듯이, 범세계화는 분명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세계의 시민들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협력할 수 있는 새로 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기든스가 전자 매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하 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3의 길이란 결국 이 새로운 국제 연대의 가능성을 적극 활용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과거에 주창되었던 제3의 길과 비교할 때 기든스는 놀랄 만큼 세계주의적 입장을 택한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삶의 현주소가 있다. 서구 사회와 제3의 길 서구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데 그 특징 이 있다. 물론 이 전통을 단순히 계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전통을 철저하게 분해하고 수선하여 재구축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된 환 경 속에서도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기본 가치, 즉 자유, 정의, 연대와 같은 가치를 계속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대립이 한창일 때 독일이나 스웨덴 등의 사 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제3의 길을 표방했던 적이 있다. 당연히 종주국 소련은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수정주의라 비난하고 동구권의 이런 운동을 탄압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틀로 사회 경제적 개혁을 추진했던 서구의 정당들은 대부분 성공의 길을 걸었다. 물론 원래의 변혁 목 표가 실현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중요한 파트너로 노동자 세력을 정치 기 반으로 삼아 중요한 개혁을 선도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서구 복지국가였다. 복지국가의 등장은 분명 역사의 빛나는 승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류의 이상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또한 역사적 대타협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복지국 가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누적되는 국가의 재정 적자, 비대해진 국가 관 료제, 시민사회 기능의 약화, 국민의 노동 의욕 감소, 국가경쟁력 하락 등으로 인하여 복지 국가는 이제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경쟁과 효율, 개인 의 선택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세력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환경운동, 여성 운 동, 소비자 운동들이 복지국가 안에 내장된 생산 제일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다. 서구 복지국가가 위기에 빠진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금융을 핵으로 한 경제의 범세계화 도 매우 중요한 원인이다. 과거에는 국가 권력이 자본의 이동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속수무책이다. 자본은 이제 자본의 논리에 따라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뿐이다. 세계 무역기구(WTO) 체제로 요약되는 이 거대한 세계 질서의 변화 앞에서 개별 국가는 무력감 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된 현실에 대한 새로운 대응이 바로 제3의 길이다. 물론 중도 좌파 정부들의 관심 은 이론적인 데 있기보다는 실제적이고 정치적인 데 있다. 그 한 예로, 이들은 환경 문제나 개인적 창의성을 중시하며 이른바 탈물질적 가치 를 정치에 접목시킨다. 독일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이 성립되는 것은 좋은 예이다. 이들의 관심은 또한 역동적인 정부와 역동적 인 시장경제의 결합과 함께 시민사회의 재구성으로 특징된다. 이것은 기존 복지국가의 결함 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것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범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어떻게 정의와 연 대의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고통스러운 탐색이기도 하다. 서구 사회에서 제3의 길이 성공하려면 기존의 복지국가를 뛰어 넘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 고, 노동자를 포함하여 보다 광범위한 개혁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러나 이에 대한 그림은 아직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 동안 형성 된 지지 기반을 떠나 미래를 생각하기는 힘들다. 때문에 제3의 길 정치가 과거의 사회민주 주의 정치와 어떻게 다른지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다만 우리 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제3의 길 정치가 오늘날 지향해야 할 목표와 방향은 과거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와 제3의 길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제3의 길을 한국 사회에 연관시켜 탐색해 보겠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서구 중심적 사고를 경계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서구의 경험을 유일 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있어야만 우리도 제3의 길을 논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서구의 경험을 참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제3의 길을 요구하는 역사적 경험은 다양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3의 길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는 쉽게 논증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고질적인 좌우 이념 대립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극히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이며 본질적으로 증오와 적대에 기반한 이념 대결 풍조는 이제 청산될 때가 되었다. 대신 상호공존의 대화 관계를 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를 관통해 온 지역 대결 유습도 이제는 극복될 때가 되었다. 같은 논리로 노사간의 갈등과 반목, 세대나 남녀간의 불신도 유연한 공존의 파 트너십으로 풀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요컨대 급속한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인 양극 대립과 갈 등이 그 동안 현저했다면, 이제는 산업 평화와 함께 시민 생활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하의 위기를 고려한다면 이런 대타협의 필요 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발전 과정 안에서 제3의 길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그 동안 우리는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에 이끌려 급속한 변동을 경험 했다. 돌진적 근대화는 문자 그대로 국가가 정한 목표를 향해서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가면 서 눈부신 성장을 거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른바 국가의 시대를 살아온 셈이다. 우리의 경험은 또한 대기업, 특히 재벌기업의 눈부신 성장으로 특징된다. 경제력의 재벌 집중도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높다는 점에서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를 재벌공화국이라고 부른 다. 국가 관료제와 재벌기업은 우리 나라를 이끈 양두 마차임에 틀림없다. 정치 권력이 청와 대에 집중되었듯이 경제권력이 재벌 회장에게 집중된 것도 유사하다. 이러한 거울상이 한때는 한강의 기적을 가져온 성공의 원인이라고 했으나 이제는 거품과 부 패, 비효율의 모태로 진단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근본적인 수정 없이 과거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경 유착, 관치 경제, 부패 구조 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만 비로소 제3의 길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해답은 우리 사회의 높은 교육 수준과 사회 운동의 전통 때문에 시민사회 안에 젊고 개혁적인 세력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국가 기구나 재벌기업 등에 포섭되지 않은 채 이 로부터 독립해서 공익을 요구하고 추구할 수 있는 양식을 갖춘 전문가와 시민 집단, 즉 중 민이 제3부문에 많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이 어떤 집단보다 정부 개혁, 금융 개혁, 재 벌 개혁 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제3 부문의 발전 역량을 조직화해서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의 에너지로 투입시키는 데 제3의 길이 있다는 생각도 가 능하다. 이 경우 제3의 길은 참여민주주의로 구체화될 것이다. 즉 국가 중심 시대나 재벌 중 심 시대에 더 이상 안주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패러다임을 적극 활용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민본시대가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아울러 역사적 대타협의 길로 제3의 길을 생각한다면 중용철학의 재조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뿌리가 튼튼하면 좌우의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중용은 양극단을 포용하 는 정치로서, 급진적으로 열려진 의사 소통을 전제한다.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중용의 핵심은 여러 의견을 다 듣되, 합리적 중심을 택하는 데 있다. 이것은 개방적 공론 과 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교육과 합리적 토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용을 중시하는 문화적 유산이 우리에게 강하다면, 이것을 시류에 편승하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소신 있는 합리적 토론문화로 가꾸어 갈 경우, 상호공존의 미래를 여는 데 중용의 철학이 귀중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든스의 제3의 길을 소개하면서 다소 빗나간 듯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동양이란 무엇인 가의 질문이 제3의 길에 대한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을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동양의 중용 사상은 탁월한 실용주의가 될 수도 있지만 보편적 철학이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넓게 열려진 공론의 정치를 열어 준다는 장점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 주주의의 핵심이 열려진 의사소통 구조에 있다고 한다면, 서양의 이론을 많이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양의 문화 유산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서양과 대화하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제3의 길은 서구 논쟁의 단순한 모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주옥같은 내용들을 다 섭렵하되 우리는 동양의 정체성을 살려 가는 자세를 가지고, 그 동안 서양이 주도해 왔던 역사에 대한 새로운 대안 을 찾는다는 관점에서 제3의 길을 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많은 연구 와 토론을 요구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역사에 도전하는 자는 다루어 볼 만한 주제이다. 끝으로, 이 소중한 책의 번역본 출간을 위해서 수고해 준 이들께 감사의 말을 드린다. 서울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 과정의 고원, 전재성, 구자선, 원시연 네 사람들이 번역 일을 성심껏 도와주었다. 도서출판 생각의 나무에서는 훌륭한 읽을거리를 많은 독자들에게 제공 하려는 일념에서 이 책의 번역을 적극 권했고, 이 책을 출간하는 모든 과정을 열성으로 뒷 받침해 주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내에 서둘러 한 작업으로, 뜻하지 않은 오류와 결함이 있 다면, 이것은 역자들의 책임이다. 일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부록에 주요 용어 해설 을 포 함시켰는데, 이것 역시 미진한 감이 없지 않다 잘못되고 모자라는 점들은 재판이 나오게 되 면 고칠 것을 약속드리며 독자 제현의 조언을 부탁드린다 . 1998년 11월, 한상진, 박찬욱 서문 사회민주주의의 미래와 제3의 길 이 작은 책은 현재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미래에 관한 논의에 보탬이 되고자 저술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쟁이 제기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1970년대 말까지 산업국가를 지배했던 복지에 대한 합의(welfare consensus) 의 파괴, 마르 크스주의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불신,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불러일으킨 매우 중대한 사회 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가 바로 그 이유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대응하여 무엇을 할 것인 가, 도대체 사회민주주의가 독특한 정치 철학으로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명확하지 않다. 나는 실천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사회민주주의가 앞으로 살아 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욱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여태껏 해온 것보다 더욱 철저하게 기존 견해를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사회민주주의자 들은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3의 길 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과거에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사회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저술가와 정치가들에 의해서도 여러 번 쓰였다. 이 책에서는 이 용어를 사회민 주주의의 쇄신, 즉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과거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행해야 했던 주기적 인 사고 전환의 현대적 의미로서 사용한다. 영국에서 제3의 길은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이른바 새 노동당(New Labour) 의 정책에 서 찾아볼 수 있다. 토니 블레어의 정치적 신념은 미국 새 민주당의 신조와 빈번히 비교되 는데, 실제로 이 두 정당 사이에는 밀접하고도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다음 과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대처 정부와 메이저 정부처럼 블레어 정부도 영국 해협을 건너 서가 아니라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감을 찾고 있다. 블레어 정부의 미사여구는 미국적이고, 그 국정 계획을 형성시킨 지적인 영향력도 미국적이며, 그 정치 스타일도 미국적이다. (주1) 위의 말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예를 들어, 노동당이 내세운 일하기 위한 복지(Labour s welfare to work) 프로그램은 명칭은 미국식이지만 프로그램 자체는 미국보다 스칸디나비 아의 적극적 노동시장 프로그램에서 착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레어 정부가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강조하는 바를 수정할 필요는 있다. 새 노동당이라는 슬로건을 둘러싼 논쟁은 활발하고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주의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진행되어 온 그에 못지 않은 논의가 대부분 간과된 채 전개되고 있다. 토 니 블레어의 낡은 노동당(old Labour) 과의 결별은 의미 있는 성과물이지만, 사실상 대륙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별이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점에 비추어 볼 때 영국에서의 논쟁은, 대륙 사회민주주의의 보다 앞선 부문을 좇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영국은 새롭게 생성되는 이념에 능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즉 영국은 미국의 경향과 사고를 단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 쓰기보다 는 미국과 유럽 대륙 사이의 창조적인 상호 작용을 위한 점화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과 달리 유럽 대륙의 많은 국가들은 오랜 기간 지속된 신자유주의 정부를 경험하지 않 았다. 대처리즘이 그 무엇을 하였든 못 하였든 간에, 영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것만은 확 실하다. 대처는 다른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평범한 보수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다. 대처는 자유시장 의 기치를 내세우고 기성 제도와 엘리트를 공격했다. 동시에 대처의 정책은 이미 사회 전체 를 휩쓸고 있던 변화를 강하게 촉진했다. 이에 대해 노동당과 노동당에 지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구좌파의 견해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노동 당은 선거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필연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영국에서의 정치 토론은 대륙의 사회 민주주의권보다 어떤 점에서 좀더 자유로운 사고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발전된 생각들은 대륙의 논쟁과 상이한 배경에서 전개되고 있기는 하 지만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나와 이안 하그리브즈(Ian Hargreaves), 그리고 지오프 멀간(Geoff Mulgan) 사이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비공식적인 저녁 토론 모임에서 발전되어 나왔다. 이 두 사람에게 고 마움을 느낀다. 원래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부활에 관한 공동 문건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러한 논의가 구체화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모임에서 많은 착상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데이비드 헬드(David Held)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그는 초고의 여러 판을 세심하게 읽어 주었으며 그의 논평은 내가 후에 본문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 다. 그 밖에도 마틴 알브로우(Martin Albrow) 울리히 벡(Ulrich Beck), 앨리슨 치버즈(Alison Cheevers). 미리엄 클라크(Miriam Clarke), 아만다 구달(Amanda Coodall), 피오나 그레이엄 (Fiona Graham), 존 그레이(John Gray), 스티브 힐(Steve Hill), 줄리앙 르그랑(Julian Le Grand), 데이비드 밀리반드(David Miliband), 헨리에타 무어(Henrietta Moore), 그리고 앤 파워(Anne Power)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알리나 레데네바(Alena Ledeneva)에게 각별 한 신세를 졌다. 그녀는 이 책 전체에 광범하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자주 용기를 잃 을 때면 언제나 다시 일을 계속하도록 독려해 주었다. 제1장 사회주의와 그 이후 (Socialism and After) 제3의 길 이란 이미 새로워진 세계에 사회민주주의를 적응시키고자 하는 사고와 정책의 틀 인 동시에 구식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이다. 1. 정치적 이상주의의 부흥을 위하여 1998년 2월, 토니 블레어는 워싱턴에서 미국 지도자와 정책 세미나를 마친 후에 21세기를 향한 중도 좌파의 국제적 합의를 도출하고자 하는 야망을 피력했다. 새로운 접근을 통해 범 세계적 질서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틀을 개발하려는 것이었다. 구좌파는 변화에 저항 했다. 신우파는 변화를 관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변화를 관리하여 사회적 연대와 번영을 창출해야만 한다. (주1) 이 임무는 엄청나게 어렵다. 왜냐하면 블레어의 성명이 가리 키는 바와 같이 기존의 정치 이념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150년 전에 마르크스(K. Marx)는 한 망령이 유럽에 자주 출몰하고 있다 고 했다. 즉 사회주 의 또는 공산주의의 망령이었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것과는 그 이유가 다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사라져 가고 있으나 우리를 여전히 사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추동시켰던 가치와 이상을 그냥 제쳐 둘 수가 없다. 그 중 어떤 것은 좋은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고, 실현해야 할 사회적, 경제 적 발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전해야 할 과업은 사회주의 경제 프로그램이 신뢰 받지 못하고 있는 곳에 이러한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오늘날 정치 이념은 영감을 불어넣는 활력을 상실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지도력을 잃은 것 처럼 보인다. 공공 토론은 타락해 가는 도덕규범, 점점 심해지는 빈부 격차, 그리고 복지국 가가 당면한 중압감에 관한 우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확고하게 낙관적으로 보이는 집 단은 기술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기술 적 변화는 반드시 좋은 결과만 낳지는 않으며, 게다가 어떤 경우든 기술은 효과적인 정치 프로그램의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 정치적 사유가 영감을 주는 본래의 특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것이 일상적이고 국지적인 것 에 단선적으로 반응하거나 거기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삶은 이상이 없다면 별 의 미가 없고, 이상은 현실의 가능성과 결부되지 않으면 공허하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회를 창조하길 원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 수단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목표가 실현될 수 있으며 정치적 이상주의가 부흥할 수 있는지 제시하 고자 한다. 나의 주된 준거점은 영국이지만 내 주장은 대체로 그보다 더 널리 적용된다. 현재 영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이론이 실천에 뒤떨어져 있다. 좌파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부들은 예전에 가졌던 확신을 완전히 상실하고 곧 폐기될 정책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의 정책 형성 골격에 이론적인 살이 덧붙여져야 한다. 정부가 수행하는 바를 인정만 할 것이 아니라, 정치에 좀더 강한 방향 감각과 목적 의식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좌파는 항상 사회주의와 연결되어 왔으나 적어도 경제 관리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 사회주의의 사망 사회주의(socialism)의 기원은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산업사회의 초기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사회주의의 주된 상대, 즉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 로서 형성된 보수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는 개인주의를 반대하는 사상 체계로서 시 작되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관심은 훨씬 뒤에야 나타났다. 공산주의는, 소련의 등장으로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기 전까지, 사회주의와 겹치는 것이 많았으며 사 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사회적, 즉 공동 생활의 우위성을 옹호하고자 하였다. 사회주의는 무엇보다도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충격이었으나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경제 원리 로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에 정교한 경제 이론을 제공한 것은 바로 마르크스 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주의에 역사성을 부여하여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 속에 사 회주의를 포함시켰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그들 사이의 견해차가 아무리 현저하더라도, 마 르크스의 기본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인간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통 째로 전복시키기 위하여 그것의 한계에 정면으로 맞서려고 한다. 사회주의 경제 이론은 자 본주의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고, 사회적으로 분열적이며, 장기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적 경제 관리를 통하여 인간적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수단에 대한 많은 상이한 설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 고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많은 부를 창출 하고 그 부를 더욱 공평하게 확산시키는 사회를 이루어 낼 역량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융 성하거나 몰락한다고 보았다. 만약 사회주의가 지금 죽은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요구들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4반세기 동안, 사회주의적 계 획은 서방이나 동방 세계에서 유지될 것처럼 보였다. 탁월한 경제 관측통인 더빈(E. F. M. Durbin)은 1940년에 우리는 지금 모두 계획론자이다. ... 세계대전 이래로 전세계에 걸쳐 ... 자유방임에 대한 일반적인 신념의 붕괴가 굉장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고 썼다.(주2) 서방에서의 사회주의는 복지국가를 공고히 다진 바탕 위에 세워진 사회민주주의, 즉 온건하 고 의회주의적인 사회주의였다.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복지국가는 좌파뿐만 아 니라 우파의 창조물이기도 했는데, 전후에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이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주 장하였다. 왜냐하면 적어도 얼마 동안은, 소비에트형 사회에서 채택된 훨씬 더 포괄적인 계 획조차 언제나 정치적으로는 전제적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효과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다. 1960년대에 미국의 역대 정부는 소련이 30년 안에 미국 경제를 따라잡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소련이 미국을 추월하기는커녕 뒤떨어져 결국은 붕괴하였으며, 사회민주주의 자 체가 위기에 봉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사회주의 경제 이론은 늘 자본주의가 쇄신하고 적응하여 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과소 평가하였다. 또한 시장 이 구매자와 판매자를 위해 필수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정보 장치로서 갖는 중요성을 포착하 지 못하였다. 이러한 부적합성은 1970년대 초부터 범세계화(globalization)와 기술 발전이 강 화되는 과정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1970년대 중반부터 소련이 붕괴하기 훨씬 전까지의 시기 동안에 사회민주주의는 특정적으로 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의 등장,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신자유주의라고 묘사되는 자유시장 철학에 의하여 점차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보다 이전 시기에는 시장 자유화라는 생각이 과 거의 것, 즉 이미 폐기된 시대의 것으로 여겨졌다. 자유시장 경제의 주도적인 옹호자인 프리 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다른 자유시장론자들은 좀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는데, 이제는 갑자기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세력이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유럽 대륙 대부분의 국가보다는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와 라틴 아메리카에 더 많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 대 륙에서도 자유시장 철학이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 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의 범주는 폭이 넓어 다양한 정책과 신조를 내세우는 집단, 운동, 그리고 정당들을 포괄한다. 예를 들면, 로널드 레이건 정부와 마가렛 대처 정부는 서로 영향을 미쳤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서로 다른 정책을 추구 하였다. 대처가 처음 집권했을 당시에 그녀는 충분히 발전된 이념을 갖지 못했으나 집권을 계속하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서와 같이 좌파(left) 정당이 추구했던 대처리 즘 정책들은 주요 정책 신조에 또 다른 특색을 제공하였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중심 갈래는 보수주의적이다. 이것이 신우파 (the new right) 라는 말의 기원이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 많은 보수주의 정당들 의 견해가 되었다. 이와 달리 자유시장 철학과 연관된 중요한 사고의 형태가 아울러 존재하 는데, 이는 보수주의적 사고와는 대조적으로 경제뿐만 아니라 도덕적 쟁점에서 자유지상주 의적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대처리즘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예를 들어 성의 자유 또는 마 약에 대한 처벌 면제에 찬성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모호한 말이다. 나는 영국 노동당을 포함하여 개혁적 좌파 정당과 집단들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회민주주의를 사용하고 있다. 전후 초기에 많은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유사한 시각을 폭넓게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을 구식 또는 고 전적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그후 1980년대부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어디서나 신자 유주의의 등장과 사회주의의 문제점에 대응하여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실제적으로 그것이 가꾸어 온 복지 제도만큼이나 상당히 다양하다. 유 럽 복지국가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제도 집단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모두 공통의 역사 적 기원, 목표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영국 제도 : 사회 복지 서비스와 의료를 강조하며 아울러 소득에 따른 혜택을 제공한다. - 스칸디나비아 또는 북유럽 복지국가: 과세 표준이 매우 높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공 여를 제공하며, 의료 서비스를 포함한 혜택과 재정이 잘 마련된 국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 중유럽 제도 : 사회 복지 서비스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 서비스가 원활 하게 조달되며. 주로 고용에 의해 재원이 마련되고 사회 보험 기여금에 기반을 두고 있다. - 남유럽 제도 : 형태 면에서는 중유럽 제도와 유사하지만, 범위가 더 좁고 더 낮은 수준의 부조를 제공한다.(주3) 이러한 차이점을 감안해 볼 때,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는 확연히 다른 두 가지 정치 철학을 드러낸다. 나는 이러한 상이점들을 글상자 안에 요약해 보았다. 이러한 개괄적 인 비교는 회화화될 위험을 명백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드러난 대조점은 현실적이 고도 중요하며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의 잔재는 어디서나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글상자 안의 내용에 대한 올린이의 설명: 다음의 표는 고전적 사회민주주의(구좌파)와 대처 리즘 또는 신자유주의(신우파)를 비교한 것임. a 는 고전적 사회민주주의(구좌파), 그리고 b 는 대처리즘 또는 신자유주의(신우파)에 해당함. a) 사회적 경제적 생활에서 광범한 국가 개입, b) 최소한의 정부, a)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지배 b) 자율적 시민 사회 a) 집산주의 b) 시장 근본주의 a) 케인즈적 수요 관리와 코포라 티즘, b) 도덕적 권위주의와 강한 경제적 개인주의, a) 시장의 제한적 역할 : 혼합적 또는 사회적 경제, b) 다른 시장과 마찬가지로 노동 시장개방, a) 완전고용, b) 전통적 민족주의, a) 강한 평등주의, b) 불평등의 수용, a) 시민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호하는 포괄적 복지 국가, b) 안전망으로서의 복지 국가, a) 단선적 근대화, b) 단선적 근대화, a) 생태계에 대한 낮은 수준의 의식, b) 생태계에 대한 낮은 수준의 의식, a) 국제주의, b) 국제 질서에 대한 현실주의적 이론, a) 양극적 세계에 귀속, b) 양극적 세계에 귀속) 3. 구식 사회민주주의 구식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마르크스가 진단한 수많은 문제들을 낳는다고 보 았으나, 국가의 시장 개입을 통해 그 문제들이 완화 또는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국가는 시장이 조달할 수 없거나 왜곡된 방식으로만 조달할 수 있는 공공재를 제공할 의무를 가지 고 있다. 경제, 그리고 사회의 다른 부문들에도 강한 정부의 존재는 정상적이며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민주 사회에서 공공의 힘은 집단 의사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정부, 기업과 노조가 관여하는 집단적 결정이 부분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을 대체한다.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에서 가족 생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필수적이며 긍정할 만하다. 국가 의 혜택은 궁핍한 가계를 구제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하다. 국가는 개인이 이 런저런 이유로 자활할 수 없는 곳에는 어디에나 간여해야만 한다. 몇 가지 현저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구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발적 결사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 다. 이러한 집단들은 흔히 선보다 악을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 복지 서비스와 비교해 볼 때 이 집단들은 비전문적이고 즉흥적이며 그들이 상대하는 사람들 에게 시혜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후 복지에 대한 합의 를 경제적 측면에서 고취시킨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나 마르크스와 사회주의가 강조한 몇 가지 점에 공감했다. 케인즈는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불합리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케인즈는 이런 문제점들을 통제하여 자본주의를 그 자체로부터 살려 낼 수 있다고 믿 었다. 마르크스와 케인즈는 모두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케인즈 이론이 경제 의 공급 측면에 비교적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실은 사회민주주의의 우선적 관심사와 잘 부합한다. 케인즈는 시장 자본주의가 수요 관리와 혼합 경제의 확립을 통해서 안정될 수 있 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비록 그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으나 영국에서 혼합 경제의 한 면모 는 국유화로 나타났다. 어떤 경제 부문들은 시장의 결함뿐만 아니라 국익에 중요한 산업이 개인의 손에 매달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시장으로부터 제외되어야 했다. 평등 추구는 영국 노동당을 비롯하여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다양한 수 평화 전략으로 더 많은 평등이 성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지국가에서 시행되는 누진세는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취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도록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이다. 복지국 가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더욱 평등한 사회를 창조하는 것과 개인의 생활을 주기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시작한 초기의 복지 조치들은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이 도 입하였고, 종종 조직된 노조가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전후 복지국가의 강력한 기반은 일 반적으로 육체 노동 계급이었으며, 이 계급은 20년 전까지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위한 지지의 핵심적 근원이었다. 1970년대 말에 쇠퇴의 길을 걷기까지 사회민주주의는 어디서나 단선적 근대화 모형, 즉 사 회주의의 길(the path of socialism) 을 추구하였다. 영국에서 복지국가 등장에 대한 가장 저 명한 해석가인 사회학자 마샬(T. H. Marshall)은 이런 모형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 시했다. 복지국가는 시민권이 진화하는 장기적 과정에서 높은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전후 초기에 마샬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지 제도가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경제적 발전과 병행하여 사회적 권리를 더욱 충실하게 보장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대체로 구식 사회민주주의는 생태적 관심사에 적대적 태도를 갖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수용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구식 사회민주주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적 강조, 완전 고 용 지향. 그리고 복지국가에 우선적으로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당면한 생태계 문제에 체계 적으로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실제적으로 강력한 범세계적 전망도 갖고 있지 못했다. 지향하는 바가 국제주의였던 사회민주주의는 범세계적 문제들에 정면으로 부닥치기보다는 서로 뜻을 나누는 정당들 사이의 연대를 창출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양극 적 세계에 강하게 묶이게 되었고, 미국의 복지 최소주의와 공산주의의 통제 경제 사이에 자 리잡게 되었다. 4. 신자유주의적 견해 신자유주의적 견해의 가장 큰 특징인 큰 정부(big government) 에 대한 적대감은 여러 가 지 근원으로부터 비롯된다. 영국 보수주의의 원조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국가 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였다. 국가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자유와 자립의 적이 된다는 것이다. 미국 보수주의는 오랫동안 중앙 집중화된 정부를 적대시하였다. 대처리즘은 이러한 생각뿐 만 아니라 시장의 우월적 성격을 강조한 경제적 주장에 바탕을 둔,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 전적 자유주의의 회의론까지 끌어들였다. 최소 국가론은 시민사회를 사회적 연대에 의해 자 연적으로 발생하는 메커니즘으로 보는 독특한 견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시민사회를 이루는 작은 단위들은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간섭으로 제약받지 않는다면 번영할 것이다. 시민사회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다면, 고상한 인격, 정직, 의무, 자기 희생, 명예, 봉사, 자기 규율, 관용, 존경, 정의, 자기 향상, 신뢰, 품위, 의연 함, 성실성, 근면, 애국심, 타인에 대한 배려, 근검절약과 공경심 을 포함한 덕목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주4) 이렇게 쓴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의 귀에는 이러한 덕목들이 골동품 같 은 매력 으로 들리는데, 이것은 국가 권력이 시민사회를 방해하여 그 덕목을 억압해 왔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국가, 특히 복지국가는 시민적 질서를 파괴하는 데 비해, 시장은 개인의 창의성에 힘입어 번 영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 시민적 질서와 마찬가지로 시장이 방임된다면 사회에 최대선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시장은 끊임없는 성장을 조달하기 위해 법적인 틀과 정부의 불간섭만을 필요로 하는 영구적 운동 장치이다 .(주5) 신자유주의자들은 구속받지 않는 시장 세력을 전통적 제도, 특히 가족과 민족의 옹호와 연 결시킨다. 그들은 개인의 창의성이 경제에서 발휘되어야 하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의무와 책 무가 고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 가족은 전통적 민족과 마찬가지로 사회 질서를 위한 기능적 필수 요소일 뿐이며, 결손 가정이나 동성애 관계처럼 전통적 가족 유형과 다른 가족 유형은 사회의 퇴화를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적 저술가나 정치인의 말과 글에서는 보통 외국인을 혐오하 는 함축적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들은 다중문화주의에 대한 매우 극심한 혹평 만큼은 어느 정도 숨기고 있다. 대처리즘은 불평등에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사회적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그릇되고 해롭다 는 생각은 고지식하고 받아들여지기 어렵 다 .(주6) 결국, 대처리즘은 평등주의에 반대한다. 평등주의적 정책, 이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 게 소비에트 러시아가 추구했던 정책은 암울한 획일성의 사회를 초래하며 전제적 권력을 구 사해야만 실행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은 기회의 균등을 바람직하고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존 메이저(John Major)는 마르크스의 말을 흉내내어 계급 없는 사회를 창조하려는 그의 의도를 피력하였다.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하는 사회는 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할지 모르지만, 의지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능력에 걸맞는 지위에 오르는 한, 그 불평등이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지국가에 대한 적개심이다. 예전에 혁명 적 좌파가 자본주의를 바라보았던 것과 매우 동일하게 복지국가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간주 된다. 어떤 저술가는 우리는 노예제가 효과적이고 동기 부여된 노동을 조직하는 수단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경멸 섞인 즐거움으로 복지국가를 뒤돌아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복지 국가는 그것의 예정된 수혜자, 즉 취약하고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엄 청나게 파멸적인 해악을 끼친다. ... 남성과 여성 개개인의 진취적 자립 정신을 마비시키고 우리 자유 사회의 기초 그 바로 밑에 터질 위험이 가득한 폭발물을 장치해 놓는다. (주7) 복지국가가 해체되면 무엇이 복지를 제공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시장 주도의 경제 성장 이다. 복지란 국가의 혜택이 아니라 시장이 그 기적을 만들어 냄으로써 경제 향상, 곧 전체 적인 부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 방향은 흔히 생태계 문제를 겁주 는 이야기쯤으로 무시해 버리는 것과 상통한다. 대처는 녹색 자본주의(green capitalism) 의 방향에 수긍했으나 평상시에는 일종의 적의를 드러냈다. 생태적 위험성은 과장되거나 존재 하지 않으며 멸망론으로 재미 보는 장사치들의 발명이라고까지 일컬어 왔다. 현실적으로 나 타나는 증거는 오히려 예전보다 큰 보편적인 번영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 은 경제 발전의 어떠한 한계도 거의 고려하지 않는 단선적인 근대화관이다.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신자유주의는 범세계화 이론이며 범세계화 세력에 매우 직접 적으로 공헌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지 문제 해결에 지침이 되었던 철학을 세계 수준에 적용한다. 세계는 시장이 거의, 또는 전혀 간섭받지 않고 작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가장 잘 움직여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민족의 수호자로서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제 관계에 대한 현실주의 이론을 채택한다. 범세계 사회는 아직 국민국가의 사회이고 국민국가의 세계 에서는 권력이 중시된다. 전쟁을 위한 준비와 군사력 유지는 국제 체제에서 국가 역할의 필 수적 요소이다. 구식 사회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도 양극 질서에서 발전되었고 그 태생적 조건이 깊이 새겨져 있다. 5. 원리의 비교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적 혼란에 빠져 있다. 50년 전에 모든 사람이 계획론자였다고 한다면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그 렇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대단한 역전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한 세기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역사의 전위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도전 받지 않고 있다기 보다는 곤경에 빠져 있다.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주된 이유는 두 가지 구성 요소인 시장 근본주의와 보수주의가 긴장 관 계에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란 언제나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신중하고 실용적인 접근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라는 구원의 외침에 직면하여 버크가 취한 태도였다. 전통의 지속이 보수주의 이념의 핵심이다. 전통은 과거에 축적된 지혜를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미래에 대한 지침을 준다. 자유시장 철학은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시장 세력의 해방에 의해 만들어지는, 끝없는 경제 성장에 걸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유시장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가족과 민족에 헌신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 다.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가족, 또는 민족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는 경계선에 이르 면 그 순간 갑자기 개인주의는 기능을 멈추고 선택의 여지는 없어진다. 그러나 시장 세력의 영구 혁명(permanent revolution) 만큼 전통을 해체시키는 것도 없다. 시장 사회의 역동성은 전통적 권위 구조를 훼손하고 국지적 공동체를 파괴한다.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위험과 불확 실성을 만들어 내면서 시민들에게는 그것들을 무시하라고 요구한다. 게다가 신자유주의는 시장 그 자체의 사회적 기반을 간과하고 있다. 시장이란 시장 근본주의가 무관심하게 도외 시해 버리는 바로 그 공동체적 형태에 의존하고 있다. 구식 사회민주주의는 어떠한가? 케인즈적 복지에 대한 합의 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련의 사회적 특성을 알아보자. 이 모든 것들은 연달아 해체되어 왔다. - 사회 제도, 특히 남편이 생계 부양자이고 아내가 주부이자 어머니인 가족 형태 : 이것이 완전 고용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능하게 했다. - 동질적인 노동 시장 : 이 시장에서 실업의 위협을 받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확보할 만한 임금만 주어진다면 어떠한 일도 기꺼이 할 의사가 있는 육체 노동자들 이었다. - 경제의 기본 부문에서 대량 생산의 우위 : 이것은 많은 노동 인력을 위해, 보수가 낮아도, 안정적인 노동 조건을 조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 공익 정신이 있는 전문가 소집단을 가진 엘리트 국가 : 국가 관료제 내의 이 전문가들은 재정과 금융 정책 추진을 관장했다. - 주권이 미치는 경계 내에 사실상 포함되는 국민 경제 : 케인즈주의는 재화와 용역에서 대 외 무역보다 국내 경제가 지배적 우위성을 가진다고 추정했다.(주8) 구좌파의 평등주의는 그 의도는 고귀했지만 우파 비평가들이 말하듯 가끔 왜곡된 결과로 이 어졌다. 그것은 예를 들어 사회 공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사회 공학에 의해 주택 단 지를 건설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쇠퇴해 가는 우범 지대로 변모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라고 본 복지국가는 오늘날 그것이 해결하는 만큼이나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6. 최근의 토론 유럽과 다른 지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 도 1980년대 초부터는 그런 문제들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는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그들의 필요성에 더욱더 역동적인 힘을 부여했다. 대부분의 서방 공산주의 정당들이 당명을 바꿨고 사회민주주의에 근접하게 되었는가 하면, 동유럽 국 가에서는 신생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출현하였다. 영국에서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원리로부터 이탈하는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는 1987년 10월의 노동당 연례 대회 때 설치된 노동당 정책 심의 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때 7개 심의기 구가 설치되어 각각 다른 정책 영역을 다루었다. 이 심의 기구에는 일반인도 참여하기로 되 어 있었으나, 공개 집회에 일반인들이 별로 참석하지 않아 결국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정책 심의 기구 사이에서는 대처리즘이 대중들의 호소력을 얻어 감에 따라 노동당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기업 공유화를 확대하겠다는 종래의 약속은 폐기되었고, 케인즈적 수요 관리는 명시적으로 포기되었으며. 노조 의존도는 약화되었다. 생태적 주제가 도입되었지만 중요하게 부각되지 못하여 정책틀의 나머지 부분 과 효과적으로 통합되지 못했다. 유사한 개혁 과정이 대부분의 유럽 대륙 정당들에서도 전개되었다. 대륙에서는 대체로 좀더 일찍 시작되었으며, 때로는 더욱 철저한 이념적 변화를 낳기도 하였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은 경제적 생산성, 참여적 정책, 공동체 개발, 그리고 특히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더 이상 자원 배분문제를 놓고 다투지 않고, 이제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서 생산의 물리적, 사회적 조직, 소비의 문화적 조건을 다루기에 이르렀다 .(주9) 예를 들면, 노르웨이에서 노동당은 대처 정부의 한 임기가 끝난 후인 1986년부터 1988년까 지 자유에 관한 토론(Freedom Debate) 을 개최하였다. 여섯 가지 주제가 전국적으로 지방 의 연구 모임에서 토론되었다. 그 여섯 가지 주제는 공과 사의 균형, 노동 일수의 유연성, 교육 기회, 환경, 주택, 그리고 경제적 민주주의였다. 개인 이익을 주장하는 것이 더 이상 비 판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이 정당은 다양한 집단이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울 수 있는 개방 정당(an open party) 이 될 수 있었다. 1989년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 참가한 콜럼비 아의 한 대표는 이러한 정책 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나의 정당은 자유당이 라고 불리지만 근본적으로는 상당히 사회주의적이다. 유럽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반 대이다. (주10) 몇몇 주요 서방 공산당들이 1980년대에 비슷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91년 에 좌파 민주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전에 이 정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들이 토론했던 바와 같은 주제들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좌파와 우파라는 범주가 여전히 얼마나 의미를 갖는가에 대하여 중요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생태적 관심, 공동체 참여, 그리고 헌정 개혁이 전면에 부상하였다. 아마 가장 중요한 토론은 독일에서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목표 는 자유시장 철학의 등장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정책 변화 요구는 강력한 녹색 운동의 존재 에 의하여 크게 영향받기도 했다. 5년에 걸친 심도 있는 토론이 상징적인 해인 1989년에 새 롭게 제정된 사회민주당 기본 강령으로 연결되었다. 이 강령은 생태적 관심사에 역점을 두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1970년대 말 사회민주주의 정당 중에서 생태에 관한 관심을 표명한 최초의 정당이었다.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사고 방 식은 경제 발전과 환경 보호가 양립할 수 없으며 적당히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생태적 현대화라는 새로운 주제에 따르면, 환경 보호는 경제 성장과 상반되는 것이라기보다 는 경제 성장의 근원이다. 이 기본 강령은 또한 선진 국가에서 나타나는 탈물질주의(post-materialism) 충격을 인정했 다. 이는 정치학자인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에 의하여 가장 폭넓게 탐구된 관념 이다. 어느 수준의 번영이 성취된 다음에는 유권자들이 경제적 쟁점보다는 그 자신들 삶의 질에 관심을 두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 기본 강령은 풍요로운 다수(affluent majority) 라는 견해가 집산주의와 연대라는 사회민주주의 정신으로부터 멀어졌다고 결론지었다. 개인적 성 취와 경제적 경쟁이 더욱 부각되어야 했다. 1959년의 획기적인 바트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성명 이래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시 장질서(discipline of the market) 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이제는 국가개입주의로부터의 더 많 은 후퇴라는 현실의 명제와 결합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국가의 역할은 독단적 교리가 아니 다. ... 기준은 삶의 질이 민간소비의 증가에 의하여 제고될 것인가, 아니면 국가 수행 실적 의 향상에 의하여 제고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기본 강령은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안전을 조화시킬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개성과 연대가 대립적인 것으로 놓여서는 안 된다 고 강조 했다. 그것은 중요한 유권자층이 사회민주당을 경제 현대화 과업 측면에서는 신뢰하지 못하 고 단지 사회적 안전 장치 확보라는 측면에서만 신뢰한다면 사회민주당은 다수당이 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라고 하면서 끝을 맺었다.(주11) 7. 정치적 지지 구조 앞서와 같은 정책 변화의 필요성은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따라야 했던 정치적 지지 유 형의 변화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투표와 정치적 제휴의 기반이었던 계급 관계는 육체 노 동 계급이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했다. 또한 여성이 대대적으로 노동 인력으 로 유입됨으로써 계급에 기반을 둔 지지 유형이 더욱 불안정해졌다. 일정 규모의 소수는 더 이상 투표조차 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정치 과정 밖에 존재한다. 과거 수년 동안에 크게 성장한 정파는 투표하기를 기권한 무당파(non-party of non-voters) 로서(주12) 이는 전혀 정치의 일부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부분적으로는 세대 교 체의 결과로서, 또 부분적으로는 다른 영향력에 반응함으로써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는 확연 한 증거가 있다. 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한 증거는 두 가지 추세를 가리키고 있다. 바로 시사된 바와 같이 희소성 가치(scarcity values) 로부터 탈물질주의 가치(post-materialist values) 로의 전환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계급 구분이나 우파 좌파의 양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 분 포의 변화이다. 여러 방면에서 비판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하트의 가치 변화론은 상당 한 경험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주13) 잉글하트는 여러 산업국가에서 수집한 조사 자료를 종합하여 경제적 성취와 성장의 가치들 이 점증하는 번영과 함께 위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자기 표현, 그리고 의미 있는 노동에 대한 욕구가 경제적 보상의 극대화를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사는 권위를 향한 회의적 태도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탈정치화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현재 통상적 정치에서 주어지는 것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참여를 강하게 추구한다. 몇몇 국가에서 수행된 사회 조사를 보면 위에서 말한 태도 변화나 현실을 포착하는 수단으 로서 좌파 우파의 구분이 부적합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존 블런델(John Blundell)과 브라이언 고스초크(Brian Gosschalk)는 영국에서 사회적, 정치적 태도에 따라 보수주의적,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적, 권위주의적이라고 일컫는 네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경제적 자유, 즉 자유시장에 대한 신념이 한 축에서, 그리고 개인적 자유가 다른 한 축에서 측정된다. 앞서의 보수주의적(conservative) 입장은 신자유주의적인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시장의 자 유에 찬성하지만 가족, 마약, 낙태와 같은 쟁점에서는 강력한 국가 통제를 원한다. 자유지상 주의자들(libertarians) 은 모든 방면에서 개인주의와 낮은 수준의 국가 개입을 좋아한다. 사 회주의자들(socialists) 은 보수주의자들과 반대이다. 그들은 경제 생활에서 더 많은 국가 개 입을 바라고 시장을 불신하고 있으나 도덕적 쟁점에 관한 한 정부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권 위주의자(authoritarian) 는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양자를 포함하여 모든 영역에서 정부 가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기타 다른 사람들은 훨씬 모호한 정치적 견해를 갖 고 있다. 조사 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정의에 따라 영국 인구의 약 3분의 1이 보수주의자이며, 20퍼센 트에 약간 못 미치는 사람들이 자유지상주의자이며, 18퍼센트가 사회주의자, 13퍼센트가 권 위주의자, 그리고 기타가 15퍼센트이다. 1997년 선거 직전에 토니 블레어에 의하여 재건된 노동당은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한 집단들에서 제1위를 차지했다. 보수당에 투표하겠다는 사 람들 가운데 84퍼센트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지상주의자들 집단에 속했다. 조사 결과, 연령별로 현저한 차이가 나타났는데, 이는 잉글하트의 주장에 부합하였다. 55세 이상인 사람들의 54퍼센트가 보수주의자들이었던 데 비해 15세에서 24세까지의 연령 집단은 18퍼센트만이 보수주의자였다. 15-24세 사람들 가운데 72퍼센트가 국가는 어떤 종류의 성 행위이든 동의하는 성인들 사이에 행해진다면 금지할 권리가 없다 는 진술에 찬성했으나, 55 세 이상의 연령 집단에서는 단지 36퍼센트만이 찬성했다.(주14) 이러한 발견과 미국에서의 연구를 비교하면서 여론 조사 전문가인 로버트 워세스터(Robert Worcester)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오늘날의 노동당과 보수당은 더 이상 좌파(left)와 우파(right)로 간단하게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이들을 좌파와 우파로 규정하는 것은, 지난 20년에 걸쳐 두 정당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오늘날 그들의 역할을 묘사함에 있어서, 지난날의 좌와 우를 뜻하는 구분을 얼마 나 모호하게 만들었는가를, 밝히지 못하고 숨기는 것이다. ... 미국에서 발견되는 바와 새 노 동당의 영국에서 그러한 바를 비교하는 통계들은 두 국가의 이념이 지난 50년 동안 일반적 으로 매우 상이했던 바와 같이 그 상이함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하다. (주15) 더욱 다양한 사회를 비교하게 되면, 정치적 호소와 지지의 유형이 일반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실상 모든 서방 국가들에서 투표는 더 이상 계급 구분과 부합하지 않으며, 좌파 우파 양극화로부터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유권자들을 사회주의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입장으로 분리하곤 했던 경제의 축은 훨씬 저조한 수준의 현시성을 갖게 되었 다. 반면에 자유지상주의 대 권위주의 또는 현대적 대 전통적 대조는 강화되었다. 리더십 스타일과 같은 다른 우발적 영향 요소가 예전보다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지지의 다양한 딜레마와 더불어 합의 형성의 새로운 가능성이 여기에 상존한다. 사 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더 이상 의존할 만한 일관적인 계급 블록(class bloc) 을 갖고 있지 않 다. 이 정당들은 과거의 정체성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문화적으로 복잡한 환경에 서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주16) 계급 투표가 통상 두드러진 국가의 하 나인 스웨덴에서조차 계급의 예측 가치는 1967년의 53퍼센트에서 1985년에는 34퍼센트로 떨 어졌다. 쟁점에 대한 견해가 갖는 예측력은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스웨덴에서는 젊은 유권자들과 여성 유권자들이 계급적 지위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적다. 8. 사회민주주의의 운명 앞서와 같은 일련의 변화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정치 주변적인 위치로 떨어뜨리지는 않았 다. 1998년의 중간 현재에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또는 중도 좌파 연합이 집권하고 있으며 동유럽에서는 점차 현저히 부상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선거에서 이기긴 했지만 아직 새롭고 통합적인 정치 전망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사회민주주의는 항상 사회주의와 연계되어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는 세계에서 그 방향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전후 사회민주주의는 양극 세계의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기는 했으 나, 적어도 몇 가지 시각은 공산주의와 공유하였다. 공산주의가 서방에서 완전히 좌초하고 사회주의는 대체로 해체된 현시점에서 좌파에 속한다는 것이 도대체 조금이라도 의미를 갖 고 있는 것인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유럽에서 전개된 정책 토론은 확실히 사회주의를 변형시켰고 많은 이념적 혼란을 낳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기본 강령 제안에 참여한 한 인물은 사정을 다음과 같이 명약관화하게 요약하였다. 강령 심사 착수 결정은 세계와 사회 발전에 대하여 명료한 그림 그리기가 엄청나게 어려운 상황에서 내려졌다. 이것이 당이 인식하는 딜레마이다. 당은 이 변화하는 시대에 사고 전환 이 필수적인 듯이 보이면서도 변화 자체가 사고 전환의 성공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과학은 이 시대에 어떠한 진단, 즉 무엇이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전혀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주17) 우리는 시나리오의 측면에서 제3의 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제3의 길이란 말은 금세기 초에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는데, 1920년대에 우파 집단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가 지금까지는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해 왔다. 전후 초기에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시장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길을 모색한다 고 아주 명시적으로 생각하였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1951년에 재건되었을 때 제3의 길 이 이런 생각을 담은 말로 쓰여졌다. 그 뒤 약 20년이 지나 체코의 경제학자 오타 식(Ota ik)이나 다른 사람들은 시장 사회주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제3의 길이라는 말을 구사하였 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1980년대 말에 강령의 쇄신을 지칭하려고 언급한 제3의 길은 최근 판이다. 좀더 최근에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가 채용한 제3의 길 은 각 국가에서 구좌파에 속한 비 평가들은 물론 많은 대륙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미온적인 환영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이 치장된 제3의 길이 진부한 신자유주의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미국에서 매우 역동적인 경제 와 아울러 발전된 세계에 존재하는 극심한 수준의 불평등 사회를 보았다. 클린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복지를 종식 시키겠다고 약속하여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의 태도를 얼마간 반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평가들은 블레어와 새 노동당이 일단 권력을 잡자 마가렛 대처 의 경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뒷부분에서 나는 이러한 관찰이 타당한가의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토론이 어디에 와 있는가를 살펴보겠다. 내가 사용하는 제3의 길 은 지난 20년 혹은 30년에 걸쳐 근본적으로 변한 세계에 사회민주주의를 적응시키고자 하는 사고와 정책 형성의 틀을 가리킨다. 이것은 구식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 시도라는 의미 에서 제3의 길이다. 제2장 다섯 가지 딜레마 Five Dilemmas 제3의 길 정치 의 전반적 목표는 시민들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중요한 혁명들, 즉 범세계 화 , 개인 생활의 변화 ,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길을 개척하도록 돕는 것이다. 1. 다섯 가지 딜레마 지난 10년에서 15년 사이에 이루어진 사회민주주의 미래에 관한 논쟁에서 일반적 문제들과 난점들이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이것은 정책들이 얼마나 불확실한지 보여 주는 척도가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 최소한 잠정적으로라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위한 어떤 통합 의제도 진전시킬 수 없다. 여기에서 나는 그 논쟁에서 크게 부각된 다섯 가지 기본적인 딜레마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나는 이들 각각에 대한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관용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중요한 문제들인데 여기에서는 개략적인 답변만을 개진할 지면밖에 없으며,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 해 회의론자들을 납득시킬 만큼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딜레마는 다음과 관계 있다. - 범세계화(globalization) : 그것은 정확히 무엇이고,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 개인주의(individualism) : 만약 현대 사회가 보다 더 개인주의화되어 가고 있다면 어떠한 의미에서 그러한가? - 좌파와 우파(left and right) : 그것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 정치적 행위체(political agency) : 정치는 민주주의의 정통 메커니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 는가? - 생태적 문제들(ecological problems) : 그것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속으로 흡수 될 수 있는가? 2. 범세계화 별로 애착이 가지 않는 범세계화(globalization) 라는 용어의 역사는 흥미롭다. 약 10년 전만 해도 이 단어는 학술적 저술이나 대중 매체 어느 것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던 말이 지금은 모든 곳에서 쓰이고 있다. 범세계화란 말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어떤 정치 연설도 완벽하지 않고, 사업용 편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의 새로운 친 밀감은 학계와 사회민주주의의 문헌에서 강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최근 몇 년 사이 에 범세계화가 대부분의 정치 담론과 경제 논쟁에 있어서 중심이 되어 왔다는 것은 매우 타 당한 말이다.(주1) 범세계화는 여러 가지 측면들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 용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 는가, 그것은 새로운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따위이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범세계화에 대한 상당히 대조적인 두 가지 관점이 나타났는데,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에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범세계화가 대개는 신화이거나 기껏해야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추세의 연장 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 놀랍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입장은 구식 사회민주주의의 양상 을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들은 범세계화를 신자유주의자들의 발명품으 로 간주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속임수를 일단 간파한다면, 우리는 이전처럼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다른 한편에는 범세계화란 현실일 뿐만 아니라, 이미 깊숙이 진전 되고 있다고 말하는 저술가와 정책 결정권자들이 존재한다. 경영의 선각자인 오마에 겐이치 가 말하듯이 우리는 지금 국경 없는 세계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국민국가는 하나의 허구 이며 정치가는 모든 유효한 영향력을 상실해 왔다는 것이다.(주2) 범세계화는 보통 경제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뿌리가 시사하듯, 세계적으로 뻗친 결합 관계들을 수반한다. 폴 허스트(Paul Hirst)와 그레이엄 톰슨(Graham Thompson)은 이 주제 에 관한 그들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흔히 진정한 세계경제는 출현했거나 출현하 는 과정에 있으며, 국민 경제와 국민 경제적 경영의 대내적 전략은 갈수록 부적절해지고 있 다고 한다. (주3) 그들은 이 같은 견해에 대해 공격을 가한다. 대부분의 무역은 지역 내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의 국가들은 주로 그들 사이에서만 무역을 한다. 유럽연합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양은 지난 30년 동안 근소하게 증가해 왔을 뿐이다. 미국은 좀더 개방적이어서 같은 기간 동안 수출이 무려 두 배나 증가했지만, 그 같은 발전도 완전 히 범세계화된 경제(fully globalized economy) 를 창조하는 데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역내 및 역외 무역의 진전은 우리를 19세기 후반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당시에 도 오늘날과 같이 자유 무역 경제가 존재했다고 허스트와 톰슨은 말한다. 이상과 같은 후자의 관점은 사실 쉽게 논박당한다. 비록 현시기가 1세기 전을 재연한 데 불 과할지라도, 그것은 전후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시기와는 매우 다르다. 국민 경제는 지금 보다 그때가 훨씬 더 폐쇄적이었다. 1950년에 교역 가능한 상품 수출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들 국내 총생산의 7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1911년의 12퍼센트에 비 교되는 수치이다. 12퍼센트 수준은 1970년에 다시 도달할 수 있었고, 1997년에 17퍼센트로 상승하였다. 게다가 지금은 많은 형태의 용역을 포함하여 1세기 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상품 들이 교역되고 있다. 그리고 훨씬 많은 나라들이 상호간의 무역 편제 속에 포함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세계 금융시장의 역할 확대인데, 그것은 점점 더 실시간(real-time) 처 리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통화 교환 거래를 통해 하루 1조 달러 이상이 회전된다. 무역 거래 에 비해 금융 거래의 비율은 지난 15년 동안 다섯 배 가량 증가했다.(주4) 불연속 자본 (disconnected capital) , 즉 기관에 의해서 관리되는 자금은 다른 형태의 자본에 비해 197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1,100퍼센트나 증가했다. 미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기관 투자가들만도 1996년 자산으로 11조 1천억 달러를 점하고 있다. 민영화된 연금 기금 그리고 연금 사업 계 획에 자금을 조달하는 유동 채권은 이런 거대한 금액들 중의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1995년 에 미국의 연금 기금, 개방형 투자 신탁, 재단 기부금은 기관 주식으로 3,310억 달러를 차지 했다.(주5) 그러므로 경제적 범세계화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부터 있어 온 추세의 연 장선 혹은 그것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많은 무역 거래가 지역 내에 한정되어 있지만, 금융시 장의 수준에서는 완전히 범세계화된 경제 가 존재한다. 그러나 만약 범세계화에 관한 생각 들을 글자 그대로 범세계적인 연결이라는 점에만 적용하거나,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다룬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앞으로 그것에 관해 얘기하겠지만, 어쨌든 범세계화 란 경제적 상호 의존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형에 관 한 것이기도 하다. 경제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먼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역으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취한 결정들은 종종 세계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개인의 식사 습관은 세계의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식품 제조업자들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일 수도 있다. 통신 혁명과 정보 기술의 확산은 범세계화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은 경제적 영역에 서는 매우 흔한 일이다. 24시간 화폐 시장은 인공 위성과 컴퓨터 기술의 결합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다른 많은 분야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최빈국 사람들조차 포함되는 초 고속 전자 통신의 세계는 지방의 제도와 일상 생활의 패턴을 뒤흔들고 있다. 텔레비전의 영 향력만 해도 엄청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논자들은, 19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만약 텔레비전이 없었더라면 그 같은 방식으로 펼쳐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오마에의 말처럼 과연 국민국가는 허구 가 되어 가고 있는가? 그리고 정부는 폐물이 되어 가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것들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을 뿐이다. 케인즈주의적 경 제 관리의 토대가 되었던 권력을 포함하여 국가가 가지고 있던 권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의 미에서 범세계화는 국민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 그러나 범세계화는 동시에 아래로 내려 뻗기 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수요와 지방적 정체성 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한다. 최근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코틀 랜드 민족주의의 발흥을 다른 문제와 관계없는 고립된 사례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퀘 벡이나 카탈로니아(Catatonia)와 같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일한 구조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응이다. 지방적 민족주의가 반드시 분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스코틀랜 드가 영국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듯이, 퀘벡은 캐나다로부터 분리해 나갈 수 있다. 아니면 각 자 좀더 넓은 민족적 실체 속의 준자치 지역으로 남은 카탈로니아의 길을 따를 수도 있다. 범세계화는 또한 옆에서 압박하면서 때때로 국민국가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경제 적, 문화적 지역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카탈로니아의 일부이자 스페인의 일부이기도 한 바르셀로나는 남부 프랑스에 이르는 경제 지대에 포함된다.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는 범 세계화는 전세계적으로 국가의 주권과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 주권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 럼 전부가 아니면 아예 포기해 버리는 그런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다. 특히 유럽연합의 맥락 에서 국경선은 전보다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국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범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정부의 범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축소되기보다는 확장되고 있다. 몇몇 상황에서 어떤 국가들은 이전보다도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었는데, 공산주의 붕괴 이 후의 동유럽 국가들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국가는 자국민들에게, 그리고 대외 관계에 있어서 상당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보 유하고 있고, 가까운 장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들은 종종 서로간에, 국내의 크고 작은 지방자치 단체와 함께, 그리고 초국가적 집단 및 결사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만 그 같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통치 는 국가의 정부와 덜 동일시되고, 영 향력의 범위가 넓어진다. 관할 이라는 말은 몇 가지 형태의 행정 또는 규제 능력을 지칭하 기 위한, 보다 적절한 개념이 되고 있다. 결코 정부의 한 부분이 아닌 비정부 조직이거나 성 격상 초국가적인 기관들이 관할에 기여한다. 범세계화는 아주 종종 자연적인 힘인 것처럼 얘기되지만 그렇지는 않다. 국가, 기업, 그리고 여타 집단들은 적극적으로 범세계화의 진전을 촉진해 왔다. 최근에 인터넷 구축의 초기 단 계에서도 많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는 위성 통신을 만드는 데 기여한 많은 연구들에 투자했 다. 정부들은 대내 공약을 위한 돈을 모으려고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세계 금융시장의 확장 에 공헌하였다. 자유화와 민영화 정책은 세계 무역과 경제 거래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해 왔 다. 기업들은 해외 직접 투자를 늘려 왔다. 1997년에 초국적 기업 자회사들의 판매고는 전세 계 재화와 용역의 수출량보다 20퍼센트나 더 높다. 요약하자면, 범세계화는 정치적 경제적 영향들의 혼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과정의 복합적 영역이다. 그것은 새로운 초국가적 체제와 세력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특히 선진국에 서, 일상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현대 정책들의 배경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범세계화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제도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사회민 주주의의 논쟁에서 크게 부각된 새로운 개인주의(new individualism) 의 부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3. 개인주의 연대는 오랫동안 사회민주주의의 주제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본래의 고유한 유산은 개인주의 대 집산주의의 주제에 관해 양면적이었다. 마르크스는 완전히 성숙한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그와 함께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될 것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모두 연대와 평등을 창조하는 데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에 확고한 강조점을 두었다. 이념적 으로 개인(the individual) 을 훨씬 더 강조하는 보수주의와 달리, 집산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의 가장 뚜렷한 특성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집산주의적 태도는 오랫동안 유럽 대륙의 국가들 에서는 기독교 민주주의 이념의 일부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1970년대 후반 이후 많은 부분들이 역전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신 자유주의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방 국가들에서 진행된, 그리고 대처리즘에 이념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기여했던, 변화들이다.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자면, 고전적 사회민주주의는 소규모 국가들 혹은 동질적인 민족 문화를 가진 나 라들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잘 발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서방 국가들은 부분 적으로는 복지사회(welfare society) 가 창출한 바로 그 풍요의 결과로서 생활 양식이 다양 해짐과 더불어 문화적으로 더욱 다원화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새로운 자세는 적극적인 동기에 의해서 움직이기보다는 낡은 견해로부 터의 마지못한 후퇴에 보다 더 많은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개인주의와 다양한 생활 양식의 중요성이 증대되는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써 왔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개인주의가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이기주의적 인 개인과 어느 정도 동일한지 결정할 수 없었고 따라서 개인주의를 어느 정도 제약해야 하 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자율적 개인(autonomous individual) 이라는 관념은 바로 사회주 의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발전시킨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개인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 것은 지금 확대되고 있는 시장의 역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는 자기 중심(me) 세대 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공통의 가치와 공공적 관심사를 필연적으 로 손상시키는 자기 우선(me-first) 사회로 귀결될 것인가? 만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과거 보다 개인적 자유를 더 많이 강조하게 된다면, 자유와 평등 사이의 관계라는 오래 된 문제 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좌파와 우파는 모두 자기 우선 사회 와 그것이 사회적 연대에 미치는 파괴적 결과들을 걱정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우선 사회의 원인을 각각 다른 곳에서 찾는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저술가들은 그것의 기원을 대처리즘의 이념적 영향력과 아울러 국가에 대한 의존보 다는 개인의 자활을 강조하는 시장의 힘에서 찾는다. 대신에 신자유주의자들과 다른 보수주 의자들은 1960년대의 자유방임에 주목하는데, 그것 때문에 도덕적 쇠퇴의 과정이 뒤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두 가설 모두 타당하지 않다.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보면 전반적인 논쟁이 다시 제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중심 세대는 새로운 개인주의에 대한 그릇된 묘사이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도덕적 쇠퇴 과정의 전조가 아니다. 조사에 따르면,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서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걸쳐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다.(주6) 그렇지만 그들 은 도덕적 가치들을 전통과 관련시키거나, 전통적인 형태의 권위가 생활 양식의 문제를 금 지한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와 같은 몇몇 도덕적 가치들은 잉글하트가 말한 관념에서 본다면 확실히 탈물질주의적이다. 이것들은 예를 들어 생태적 가치, 인권 또는 성적 자유와 관계가 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새로운 개인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대처리즘이 아니고, 시장 개인주의도 아니며, 원자화도 아니다. 그와 반 대로 그것은 제도화된 개인주의(institutionalized individualism) 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복 지국가에서 대부분의 권리와 수혜 자격은 가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개인을 위해서 마련된 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들은 고용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고용은 교육을 의미하고, 이들 양자는 직업이나 주소 따위의 잦은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요건에 의해서 사람들은 자신을 개인으로 설정하도록 유도된다. 즉 개인으로서 스스로를 계획하고, 이해하 고, 설계하는 것이다. (주7) 요컨대 새로운 개인주의는 우리 생활에서 전통과 관습의 후퇴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단 순한 시장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범세계화의 충격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복지 국가는 그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해 왔다. 복지 제도는 집산주의의 옹호 아래 수립되어 개인 을 과거의 몇 가지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 우리는 현시대를 도덕적 쇠퇴의 시기로 바라보기보다는 도덕적 과도기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만약 제도적 개인주의가 이기 주의와 똑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회적 연대에 보다 덜 위협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 러나 그것은 진실로 우리가 그와 같은 연대를 창조할 새로운 수단을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사회적 응집력은 국가의 상의하달식 작용이나 전통에 대한 호소에 의해 보장될 수 없다. 우 리는 이전 세대에 적용되었던 것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야만 한 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의 결과와 우리가 채택한 생활 습관의 결과에 대한 책임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책임 또는 상호 의무라는 주제는 구식 사회민주주의에서도 있었지만, 그것이 집단 공급이라는 개념 속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휴면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오늘날 개인과 집단적 책임 사이의 새로운 균형을 찾아 야만 한다. 많은 좌경 비평가들은 새로운 개인주의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기 성취, 잠 재력의 실현은 치료를 위한 대화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부자들의 자기 도취가 아 닌가? 분명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면 사람들의 태도와 열망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게 된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보다 많은 민주화를 향한 압력과 서로 협력하며 나란히 나아간다. 우리 모두는 이전 세대보다 더 개방적이고 사려 깊게 살아가야 한다. 지금의 변화는 결코 유익하지만은 않다. 새로운 근심 과 걱정거리들이 표면화되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긍정적 가능성들도 나오고 있다. 4. 좌파와 우파 18세기 후반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좌파와 우파 사이의 구분은 애매해서 꼭 짚어 말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파시즘을 연구한 프랑스의 역사가 지브 스테르넬 (Zeev Sternhell)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 라고 자칭한 정치 집단과 정당들의 역사에서, 좌파 와 우파를 구분하는 성격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는지 기록하고 있다.(주8) 좌파와 우파는 시대에 따라 의미를 변화시켜 왔다. 정치 사상의 발전 과정을 슬쩍만 봐도, 우리는 동일한 생각이 어떤 시기와 맥락에서는 좌파적으로, 또 다른 어떤 시기와 맥락에서 는 우파적으로 간주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자유시장 철학의 옹호자들이 좌파에 속했지만, 오늘날에는 통상적으 로 우파에 속한다. 좌파 우파의 구분이 소멸했다는 주장은 1890년대에 생디칼리즘 (syndicalism) 과 연대주의(solidarism) 의 옹호자들이 제기했다. 그 주장은 몇 년마다 규칙적 으로 반복되었다. 1960년대에는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이런 노선에 따른 주장 을 펼쳤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우파 출신 사람들도 그만큼 자주 제기했다. 1930년에 역 사가 알랭 에밀 샤르티에르(Alain Emile Charti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파와 우파의 구 분이 아직도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우선 그 질문을 한 사람이 좌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주9) 1994년,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노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는 좌파와 우파 문제와 관련하여 근대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을 출판하였다.(주10) 그 책은 이탈리아에 서 초판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첫해에만 20만 부가 팔렸다. 보비오는 좌우 구분은 진부하 다고 선언하는 많은 저작물에 대하여-이것은 지금은 주로 우파보다는 좌파 쪽에서 나온다- 좌우 구분이 여전히 타당하다는 주장을 옹호하고자 했다. 보비오의 주장은 경청할 만한 가 치가 있다. 그는 정치란 필연적으로 대립적이기 때문에 좌파와 우파 구분이 정치적 사고에 계속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의 본질은 상반되는 견해와 정책들의 투쟁이다. 좌파와 우파는 동일한 몸통의 양면에서 나온다. 비록 왼편에 있는 것과 오른편에 있는 것 이 뒤바뀔지라도, 어떤 것도 좌우 양쪽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 구분을 통해 한쪽은 다 른 쪽과 다른 특성을 갖게 된다. 보비오는 정당들이나 정치 이념들이 다소 고르게 균형을 이를 때에는 좌우 구분의 타당성에 대해 거의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쪽 혹은 다른 쪽이 너무 강해 져서 늘상 하는 유일한 게임(the only game in town) 인 것처럼 보일 때에는 양쪽이 그것 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게 된다. 마가렛 대처가 주장하듯이, 보다 더 힘이 강한 쪽은 어떤 다른 대안도 없다 라고 선언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힘이 약한 쪽은 그의 사조가 인기가 없 어졌으므로 보통 상대편의 몇 가지 견해를 모방하고자 애쓰며, 그것들을 자신의 견해로 선 전한다. 패배한 쪽의 고전적인 전략은 상대방의 입장을 끌어들여 그것을 중립화시킴으로써 실제로는 살릴 수 있을 만큼까지 자신의 입장을 살리려는 의도를 갖고 상반되는 입장들의 종합 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주11) 각 진영은 새롭고 극히 중요한 방침을 세우기 위해 낡은 좌우의 구분을 넘어선다든지 또는 구분의 기본 요소들을 결합시킨다고 스스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파시즘이 붕괴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치적 우파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 다. 살아 남기 위해 우파 정당들은 좌파 정책 몇 가지를 채택해야만 했고, 복지국가의 기본 틀을 수용해야만 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부상과 공산주의의 몰락 때문에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했다. 토니 블레어가 대처리즘의 관점을 받아들여 그것을 새로운 어떤 것으로 재활용했다는 주장은 그런 견지에서 보면 이해될 만한 것이다. 지금 낡 은 범주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어야 하는 쪽은 바로 좌파이 다. 보비오에 따르면 좌파 우파의 구분은 이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나타날 것이 다. 그리하여 사회민주주의가 다시 소생하고, 신우파가 그다지 새롭지 않게 되면, 사회민주 주의자들은 머지않아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진부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에 주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보비오의 견해에 따르면, 좌파 우파의 차이는 순수하게 양극적인 문제는 아니다. 한 가지 주 요한 기준이 우파로부터 좌파를 구별해 내는 데 있어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즉 평등에 대한 태도이다. 좌파는 보다 많은 평등을 원한다. 반면에 우파는 사회가 불가피하게 계층적이라고 파악한다. 평등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만 한다. 누구 사이의 평등 인가, 무엇의 평등인가 그리고 어느 정도의 평등인가? 좌파는 불평등의 축소를 추구한다. 그 러나 평등이란 목표는 여러 가지 다른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좌파는 모든 불평등을 축 소시키려 하는 것은 아니며, 우파는 늘 불평등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차이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근래에 들어온 이민 인구를 가진 어떤 나라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의 차이는 이민 온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기본적인 시민권과 물질적 보호 가 제공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표출된다. 보비오는 좌파 우파 사이의 구분이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구분이 이전만큼의 가치를 얻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책에 대한 비평가 를 상대로 한 응답을 끝맺고 있다. 오늘날 좌파가 방향을 상실한 이유는 전통적인 좌파 운동이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현 대 세계에서 출현했고, 그들이 사회 변혁을 위한 활력과 계획의 바탕으로 삼았던 몇 가지 가정들이 구체화되지 못했기 때문임은 부인할 수 없다. ... 어떤 좌파주의자도 오늘날 좌파가 과거의 좌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주12) 좌우의 구분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비오의 말은 확실히 옳다. 그리고 불평등을 그 문 제의 핵심으로 바라본 것 역시 옳다. 비록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수는 있지만, 평등이나 사 회 정의에 대한 사상은 좌파 견해의 기초를 형성한다. 우파 사람들은 그 사상을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그러나 보비오의 정의는 다소 세련되어질 필요가 있다. 좌파는 사회적 정의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그 같은 목표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는다. 좌파 쪽에 선다는 것은 사회적 정의 그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해방의 정치를 신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보다 더 정확하다. 평등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기회를 주고, 잘 살게 하고, 자기를 존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 문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철학자 조지프 라츠(Joseph Raz)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양한 불평등에 대해서 우리를 염려케 하는 것은 ... 굶주리는 사람들의 기아, 가난한 사람 들의 빈곤이다. ... 다른 것과 관련된 측면에서 그들이 이웃보다 더 나쁜 처지에 있다는 것은 적절하다. 그러나 다른 것과 관련 없는 그 자체의 악으로서 불평등이 적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적절하다는 것은 그들의 굶주림이 더 크고, 그들의 가난이 더 절박하며, 그들의 고통 이 더 비통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 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평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다. (주13) 또한 평등에 대하여 걱정할 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매우 불평등한 사회는 시민들의 재 능과 역량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를 해친다. 더욱이 불평등은 사회적 응집력 을 위협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거대한 불평등을 내 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대중민주주의 시대에는 상황이 매우 다르 다. 거대 규모의 불평등을 낳는 민주주의 사회는 광범위한 불만과 갈등을 산출할 가능성이 크다. 공산주의의 해체와 더불어 범세계화는 좌파 우파의 외형을 변화시켜 왔다. 산업국가들에 이 렇다 할 만한 극좌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우파는 존재한다. 그들은 범세계화에 상 응하여 자신을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점은 미국의 패트릭 뷰캐넌(Pat Buchanan), 프랑스의 장 마리 르팽(Jean-Marie Le Pen)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폴라인 핸슨(Pauline Hanson)과 같은 우파 정치가들의 공통적인 추세이다. 미국의 패트리어츠(the Patriots)와 같 은 더 과격한 우파 단체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유엔과 연방 정부를 둘 다 국민적 통합 성에 반하는 음모 집단이라고 본다. 극우파의 주제는 경제적 문화적 보호주의이다. 예를 들 어 뷰캐넌은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 를 외친다. 그는 국가 고립주의, 그리고 허튼 세 계화 의 적절한 대안으로서 이민 온 사람들에 대한 강경책을 옹호한다. 좌파 우파의 구분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그 구분이 과거만큼 정치 영역을 담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보비오가 제시하듯, 우리는 좌파와 우 파가 다시 충분한 힘을 가진 세력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과도기에 처해 있을 뿐인가? 혹은 그것의 타당성에 있어서 어떤 질적인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인가?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지난 수년 동안 의 사회민주주의의 논쟁에서 잘 탐구되어 왔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대부분의 좌파 사상가들과 활동가들은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전진(forward march of socialism) 과 밀접하게 결합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 기 술의 진보와도 관련을 맺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규모가 큰 비현실적인 계획에 회의적 이었고, 사회 발전에 실용적 태도를 견지했으며, 연속성을 강조했다. 오늘날 이 같은 대조는 약화되었다. 좌파와 우파 공히 과학 기술이 커다란 이익을 낳지만 새로운 위험성과 불확실 성을 초래하기도 한다는 양면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경제 관리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사망과 함께 좌우파를 나누는 중요한 구분선 중의 하나 는, 사라졌다. 좌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그것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고 자 했다.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또한 자본주의가 그것을 규정하는 특성을 잃어버리도록 진보적으로 수정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대신할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남은 논쟁은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자 본주의를 통제하고 규제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논쟁들은 확실히 의미를 가지고 있 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었던 과거의 논쟁들에 미치지는 못한다. 환경이 변화하면서 좌우파 구도의 범위 속에서는 없었던 문제들과 가능성들이 전면에 대두 되었다. 여기에는 생태적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 노동, 그리고 개인적 문화적 정체성의 질적 변화와 관계되는 여러 가지 쟁점들이 포함된다. 물론 사회 정의와 해방의 가치는 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문제와 쟁점들은 사회 정의 및 해방의 가치와 서로 엇갈 리기도 한다. 우리는 고전적 좌파의 해방의 정치에다가 내가 다른 곳에서 생활 정치(life politics)라고 부른 것을 덧붙여야 한다.(주14) 이 용어는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용어를 씀으로써 내가 의미하려는 바는, 해방의 정치가 생활에 기회를 주는 것과 관련 있다면, 생활 정치란 생활의 결정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택, 정체성 그리고 상호성의 정치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구 온난화 가설에 대응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원자력 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노동은 얼마나 생활의 중심 가치로 남아 있어야 하 는가? 우리는 권력의 지방 이양을 찬성해야 하는가? 유럽연합의 장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들 중 어느 것도 명확한 좌우파의 쟁점이 아니다. 이러한 고찰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치적 중도주의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함을 나타낸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대개 기회주의적인 이유를 들어 중도를 향해 이동해 왔다. 물론 좌 우의 이분법적 맥락에서 본다면, 정치적 중도주의는 단지 절충, 두 개의 좀더 선명한 대안들 사이의 중간 정도의 의미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와 우파가 예전보다 덜 명확 한 경계를 갖게 되었다면 이 결론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최근에 사회민주주의자들 사 이에 꽤 널리 토론된 적극적 중간(active middle) 또는 급진적 중도(radical middle) 라는 개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중도 좌파(centre-left) 가 반드시 온건 좌파와 동일하지는 않음을 의미한다. 위에서 언급된 생활 정치에 관한 거의 모든 질문들은 정부에게 다양한 수준의 급진적 해답을 요구 하거나 급진적 정책들을 제시한다.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분열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처 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과 동맹은 반드시 경제적 이해관계의 구분을 따르지는 않는다. 경 제학자 갤브레이스(J. K. Galbraith)는 그의 책 <만족의 문화>에서 현대 사회의 부유층은 소외된 사람들의 운명에 관심을 잃었다고 말한다.(주15) 그러나 유럽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많은 점에서 그와는 반대의 사례를 보여 준다. 하의상달식 연합이 구축될 수 있고, 이것은 급진적 정책을 위한 기반들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적 문제들의 해결은 종종 급진적 견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주의는 대체로 광범위한 합의를 필요로 한다. 범세계화에 대한 대응으로부터 가족정책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에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중도 좌파 라는 용어는 아무런 뜻도 없는 순수한 명칭이 아니다. 쇄신된 사회민주 주의는 중도 좌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 정의와 해방의 정치가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에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도(centre) 란 그 실체가 공허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양한 생활양식의 실마리들로부터 짜낼 수 있는 연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 문제들뿐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문제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사고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개혁된 복지국가는 사회 정의를 위한 기준을 충족 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능동적인 생활 양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흡 수해야 한다. 생태적 전략들과 융합하고 새로운 위험 시나리오들에 대응해야 한다. 자칭 혁명가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을 단지 개량주의자(reformers) 일 뿐이라고 간주했던 사람들로부터 차별화하려 했기 때문에, 급진주의(radicalism) 는 좌파를 우파에, 좌 파를 좌파에 대항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좌파라는 것과 급진적이라는 것의 동일시는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다. 과거에는 성립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 같은 상황이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이득을 제공한다. 왜냐하 면 과거에는 훨씬 높았던 정치 장벽을 넘어 교환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복지국가의 예 를 들어보자. 복지국가의 미래에 관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에는 커다 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차이들은 좌파와 우파의 경계 주변에 밀집해 있다. 대부분 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복지 지출을 높게 유지하길 원한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자들은 보다 최소한의 복지 안전망을 선호한다. 그러나 좌우를 불문하고 모든 복지 개혁가들이 직면하게 되는 공통된 쟁점 또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노령 인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는 단 순히 연금 수준을 정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노령화 자체의 성격, 건강과 질병이 변화 하는 패턴 그리고 그 밖의 더 많은 것들과 관련하여 보다 급진적인 재고를 요구한다. 5. 정치적 행위체 정치 쇄신을 위한 모든 시도에는 행위체의 문제가 제기된다. 일관된 정치 강령이 수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원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19세기 후반과 20 세기 초반에 사회 운동으로서 출발하였다. 오늘날 이들은 이념적 위기를 겪고 있는 외에도 새로운 사회 운동과 다른 정당들에 의해 측면에서 협공을 받고 있고, 정치가 가치를 상실하 고 정부가 뚜렷하게 힘을 잃어 가는 상황 안에 얽매여 있음을 발견한다. 신자유주의는 사회 적, 경제적 생활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계속 비판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세 계에서 반향을 얻는 것 같다. 지금은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그러한 견해에 반격을 개시해야 할 때이다. 면밀히 살펴보면, 신자유주의의 그런 견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의 종언 그리고 세계적 시장에 의한 국가의 침식이라는 주제는 최근의 문헌들에서 너무 나 두드러져서 오늘날의 세계에서 정부는 어떤 일을 달성할 수 있는지 다시 언급할 만한 가 치가 있다. 정부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 다양한 이해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을 대표하기 위한 수단들의 제공 - 이해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의 경쟁적인 요구들을 조정하는 공론장의 창출 - 정책 쟁점에 관한 토론이 제한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개방된 공공 영역의 창출과 보호 - 집단의 안전과 복지를 포함한 다양한 공공재의 공급 - 공공 이익에 입각한 시장 규제, 그리고 독점의 위협에 맞서 시장 경쟁을 촉진 - 폭력 수단의 통제와 치안의 제공을 통한 사회 평화의 진작 - 교육 제도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인적 자본의 적극적 개발을 촉진 - 효율적인 법률 제도의 유지 - 사회 간접 자본의 공급 외에도 거시적, 미시적 경제 개입 속에서 주요한 고용자로서 직접 적인 경제적 역할 담당 - 보다 논쟁적인 것으로서 문명화의 목표를 담당-정부는 교육제도와 그 밖의 영역에서 광 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규범과 가치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형성을 조장 - 지역적, 초국가적 연합의 추진과 범세계적 목표의 추구 물론 이 임무들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광범위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비정부기구들(국 제사면위원회, 국경 없는 의사회, 그린피스 등의 민간 기구들 : 역주)과의 중복되는 영역도 존재한다. 위의 목록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들이어서 정부가 시대에 부적절해졌다고 가정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시장은 이들 영역들 중 어느 곳에서도 정부를 대체할 수 없다. 사회 운동이나 다른 종류의 비정부기구들 역시 그것이 아무리 중요해졌다고 할지라도 정부를 대신하지 못한다. 1980년 대와 199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사회 운동과 소위 도전자 정당(Challenger Parties) 은 대륙 국가들에서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범세계화에 의해 파생된 변화들은 모 든 곳에서 정통적인 정당들을 위협적으로 잠식해 왔다. 1980년대에 사회 운동이나 다른 단 체들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정치 바깥에서 생겨난 쟁점들-이를테면 생태 환경, 동물 권 리, 성, 소비자 권리 등-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던 반면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에 효과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이념적 틀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탈정치화 과정으로 보여졌던 것, 즉 정부와 정당들의 영향력 고갈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치 참여와 행동주의의 확산이었다. 울리히 벡은 하위정치(sub-politics) -의 회로부터 사회의 단일 쟁점을 다루는 집단으로 이동해 가는 정치-의 출현에 대해 말한다. (주16) 그린피스(Greenpease)나 옥스팜(Oxfam)과 같은 많은 단체들이 세계적 규모로 활동 하고 있다. 브렌트 스파의 일화는 울리히 벡을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었 다. 1995년 쉘 석유회사는 브렌트 스파(Brent Spar)의 석유 굴착 장치를 해저에 빠뜨려 없 애 버리려고 계획했다. 이에 환경 단체들은 강력한 항의를 전개하였고, 많은 나라에서 소비 자들은 쉘의 석유를 불매하였다. 그 이후에 생긴 쉘의 태도 변화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1998년에 쉘은 기업의 책임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담은 방대한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 보고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 우리의 활동들을 설명하기 위한 세계적 토론 에의 참 여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업이 윤리적으로 나머지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경영되도록 보장할 책임 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입증된 보 증을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고 말한다. 쉘은 유엔의 인권 선언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첫 번째 주요 에너지 회사임을 공언한다. 1997년에는 쉘 의 사업과 정책을 평가하기 위해 사회 책무위원회가 설립되었다.(주17) 쉘사의 총회장인 코어 허크스트로터(Cor Herkstroter)의 연설은 의미심장하다. 환경과 소비 자 단체들에 대해 우리는 이들 단체들이 권위를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다소 둔감했다. 우리는 이런 변화들의 정도를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이들 새로운 단체들과의 진지 한 대화에 참여하는 데 실패했었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간단히 말해, 기술이 개인과 조 직 사이의 관계를 재규정하면서 세계 사회의 제도들이 재창조되고 있다 라고 덧붙인다. 새로운 운동, 단체들 그리고 비정부기구들은 세계적인 조망 위에서 압력을 행사할 수 있고, 세계적 기업들조차도 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벡은 정부 기구의 경직성 과 사회 기관 들의 기동성 , 정치의 쇠퇴 와 하위정치의 활성화 를 비교한다. 그는 시민 주도의 단체들이 정치가들을 기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힘을 획득해 왔다고 주장한다. 정치가가 아닌 그들은 생태적 쟁점들을 비롯한 많은 새로운 쟁점들을 의제로 제기한다. 시민단체들은 1989년 동유 럽에서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복사기나 전화기 없이 광장에 집결하는 것만으로 그들은 지 배자들이 퇴각하고 무너지게 만들 수 있었다. (주18) 문화비평가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는 독일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국가에 대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정치가들은 모욕받고 있다. 사람들이 점점 그들에게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 (그러나) 요 즘 얼마 동안 혁신과 미래에 대한 결정은 정치가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 ... (독일) 연방 정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성공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거 벽보 속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싱긋 웃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독일이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 니다. ... 독일에는 무능한 정부가 태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상의 뉴스 속에서 우리를 지 겹게 만드는 그 사람들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19) 이와 같은 논평은 정치가들과 기계적인 정통 정치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다는 조사와 일치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1964년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당신은 얼마나 자주 정부가 일을 잘하고 있다 고 믿는가? 라는 질문에 항상 또는 대부분 이라고 답변한 사람이 76퍼센트였다. 그런데 1994년의 똑같은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25퍼센트로 떨어졌다. 정부에 대해 계속적인 신뢰를 표명한 사람들 중에 61퍼센트가 이전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는데, 이는 덜 신뢰한다고 답 변한 사람들의 35퍼센트에 비교되는 수치이다. 젊은 층은 하위정치의 쟁점들에 대해 구세대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의회 정치에 대해서 노인들보다 더 유보적인 태 도를 취하고 있다. 1910년에서 1940년 사이에 출생하고, 오랫동안 공덕심을 간직한 세대 는 정치가들에 대해 가장 신뢰하고, 가장 많이 투표할 경향이 가장 짙다.(주20) 1981년과 1990년에 11개 서유럽 국가들에서 행해진 여론 조사에서는 정부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6개국에서 떨어지고, 4개국 에서는 안정적이지만 상당히 낮은 편이었고, 단지 1개 국가(덴마크)에서만 상승한 것으로 나 타났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이 과거보다 정치가들만을 덜 신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태도는 경찰이나 변호사 혹은 의사 등과 같은 권위적 인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주 21) 도전자 정당 들은 정통적인 정당들을 직설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사람들의 이 같은 감정들을 이용하려 해왔다.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에서 녹색 정당들과 극우 민중주의 정당들은 권력의 분점을 위해 도전해 왔다. 두 유형의 정당은 모두 더 광범위한 사회 운동들과 연결되어 기 성의 정당들과 정부 기관에 대항하여 노골적으로 맞선다. 1998년 현재 녹색주의자들은 유럽 11개국의 의회에 의원들을 진출시키고 있다. 대부분 1980년대에 형성된 우익 민중주의 정당 들은 더 다양한 분포를 나타내는데, 오스트리아의 자유당처럼 몇몇 나라에서는 20퍼센트에 이르는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고,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노르웨이와 같은 국가들에서는 사 실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이러한 정당들은 권력 중개인의 지위를 구가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것보다 더 많은 투표 지지율을 얻으리라는 조짐은 없다. 사회 운동들과 활동가 단체들처 럼 그들의 지위는 대개 상징적이다. 그들은 쟁점들을 정치적 의제로 부각시키기도 하고, 그 들을 둘러싼 투쟁에 구체적 형태를 부여하기도 한다. 만약 극우 정당들과 운동이 소수 사람 들의 관심 수준을 넘어 선다면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에 녹색주의자들은 몇 가지 사회민주주의적 기본 방향을 의문시하게 만드는 무시 못할 이념적 질문들을 던진다. 생태적 현대화(ecological modernization) 에 관한 10년간의 토론에 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생태적 사고에 충분히 동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는 없다. 대부분 국가들의 기성 좌파들은 야당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후 반까지도 새로운 쟁점들에 관한 그들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확신을 보여 주지 못했다. (주22)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쟁점들에 포함되는 지적, 정책적 문제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분열되어 있어서 구좌파적 사고들이 현저하게 잔존해 있고, 충분히 성숙한 어떤 대안들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은 어정쩡한 곳 에 바로 그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위정치 는 어느 정도까지 전통적 정치와 정부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정당과 의회 정치에 대한 쇠퇴하는 관심이 탈정치화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벡의 주장은 옳다. 사회 운동들, 단일 쟁점으로 형성된 집단들, 비정부기구들 그리고 여타 시민 단체들은 지방에서 세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기반 위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확실히 수 행할 것이다. 조합과 기업 집단들이 그러는 것처럼, 정부는 기꺼이 그들로부터 배우려 할 것 이며, 그들이 제기하는 쟁점에 반응하고, 그들과 협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들이 정부가 실패하고 있는 영역들을 인수하거나, 정당의 지위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국가와 정부는, 그 형태를 변화시킬지 모르지만, 현대 세계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소위 일상의 뉴스 속에서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사람들 은 중요하며,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그러할 것이다. 사실 동유럽에서 1989년에 일 어났던 변화들은 적어도 국가와 국가 지도자들의 묵인-특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던 소련 지도부의 결정-에 의존했었다. 사회 운동과 특수 이익 집단들이 아무 리 중요할지라도 그 자체가 통치할 수는 없다. 정부의 주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는 정확하게 말하여 특수 이익집단들의 다양한 요구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 조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정부(government) 는 단지 국민국가의 정부 이상의 좀더 일반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 부가 그 시대의 필요 요소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가장 잘 재정비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6. 생태적 쟁점들 생태 정치는 녹색 사회 운동이 획득한 영향력이나 녹색 정당들이 얻은 득표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현실 정치에서 생태주의적 집단들의 영향력은 이미 괄목할 만하다. 특히 독일에서 두드러지는데, 하위정치 의 개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독 일의 좌파(The German Left)>라는 저서에서 안드레이 마르코비츠(Andrei Markovits)와 필 립 고어스키(Philip Gorski)는 1980년대를 통하여 정치적 쇄신, 전략의 수립, 생활 양식 ... 새로운 개념들이 녹색당과 그 주위에서 생겨났다는 점에서 녹색당은 독일 좌파를 사회화시 킨 촉매로 발전했다 라고 말한다.(주20) 독일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수상은 녹색당을 사회민주당의 잃어버린 자식 이라고 즐겨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사회민주당은 생태주의 운동과의 어쩔 수 없는 대결을 통해 소생하였다. 그 결과는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에너지 효율성(국민소득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에너지 양)이나 탄산가스, 황화탄 소 등 1인당 오염 물질의 방출량이라는 환경 측정치 면에서 독일은 선진적인 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물론 환경 운동이 완벽하지는 않으며, 생태적 분야에 대한 논쟁은 끊임이 없다. 세계적 재난 의 가능성에 대한 경고는 1960년대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곧 본격적인 예측으로 발전하였다. 지구의 자원은 놀라운 속도로 소모되고 있는 반면에, 오염은 자연의 지속성을 좌우하는 결 정적인 요소인 생태 균형을 파괴하고 있다고 선언되었다. 경제의 무제한적 성장이 가능하다 고 주장하는 비판가들은 이 무서운 경고들에 대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주장은 주 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시장 원리는 성장이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 고 보증한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만약 천연자원이 부족해진다면 그것의 가격은 상승하 고 소비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상품의 가격이 떨어지면 그것은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있 음을 의미한다. 경제학자 줄리안 사이먼(Julian Simon)은 1980년에 환경주의자 폴 엘릭(Paul Ehrlich)과 유명한 내기를 하였다. 사이먼은 엘릭이 지명하는 어떤 일련의 천연자원들의 가 격이 구체적으로 지정된 미래의 시점에서 하락할 것이라는 데 승부를 걸었다. 엘릭은 1990 년을 택하였고, 구리, 크롬, 니켈, 주석, 텅스텐을 들었다. 1990년까지 이 자원들의 가격은 10 년 전보다 24퍼센트 내지 78퍼센트가 하락하였다. 엘릭은 당연히 돈을 지불해야 했다. 사이먼과 기타 그와 유사한 견해를 표명하는 사람들은 환경 오염과 관련하여 우려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그저 부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는 진행되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인간 활동에 의해 초래되기보다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연이란 인류가 환경에 가할지 모를 충격 이상의 복원력을 지니는데, 자연이 동물의 종들 을 파괴함과 동시에 새로운 종들을 창조하는 현상이 그 대표적 예라는 것이다.(주24) 이러한 견해는 과연 옹호할 만한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시장의 원리에 의해 다양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시장 근본주의를 선택해 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환경 위험에 대한 낙천적 태도는 그 자체로 매우 위험스런 전 략이다. 이러한 점을 인정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정확히 이해해 왔듯 이,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나 생태적 현대화(ecological modernization)와 같은 사고의 수용을 의미한다. 지속 가능한 개발은, 부룬란트 위원회(Brundtland Commission)가 1987년 보고서에 그것을 포함시킨 이래로, 환경 단체들의 지배적 관심사가 되었으며, 시대의 조류에 잘 대응하는 정 치인들은 적어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입에 발린 소리라도 해야 할 정도이다. 브룬란트 위 원회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힘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 면서 현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을 보장하는 현세대의 능력이라고 미심쩍을 만큼 단순하 게 정의하였다.(주25) 미래 세대들의 필요가 무엇일지, 또는 기술 변화가 얼마나 자원 이용 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은 정확성을 기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40개 이상의 정의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개념은 정확한 공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지침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룬란트 위원회가 기울인 노력의 세부적 후속 작업으로서 유엔이 지원 한 행동 강령인 의제 21에 수용되었다. 많은 나라들이 그러한 개념을 자신들의 경제적 사고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놀랍게도, 1988년에 영국의 보수당 정부는 자국의 경제 정책을 지속 가능한 개발 원칙에 발맞춰 나갈 것임을 표명했는데, 이는 그 개 념이 얼마나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영국 정부의 자세는 일부 대륙 국가들의 자세와는 매우 대조 적이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는 1989년에 생태적 기준을 모든 정부 부서의 일상 업무에 통합하기 위한 전국적 계획을 수립했다. 각 부서는 환경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목표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확정된 일정표를 갖고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초기부터 오염을 제거하 거나 제한하기 위해 설계된 생산방식을 취함으로써 파이프의 끝 만 손질하는 식의 기술을 회피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시민 단체와 산업계의 대표들은 환경 목표를 정하는 작업을 주 도할 회의에 참석한다. 그러한 계획이 일반적으로 각종 어려움과 장애물에 부딪친 것도 사 실이지만, 네덜란드가 최상의 환경 성과를 지닌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지속 가능한 개발 개념은 생태적 현대화와 같은 보다 광범위한 개념에 부합한다. 생태적 현 대화에 관한 주도적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인 마아르텐 하이제르(Maarten Hajer)는 생태적 현대화라는 개념이 여러 가지의 믿을 만하며 매력적인 이야기 줄거리들 을 한 곳으로 묶어 주리라 기대한다. 즉 한정된 성장(defining growth) 대신에 지속 가능한 개발, 사후 처방보 다는 예측에 대한 선호, 그리고 환경 오염과 비효율성의 동일 개념화, 환경적 조절과 경제 성장을 상호 호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주26) 정부 개입은 건전한 환경 원칙을 장려하기 위해 필수적인데, 희망컨대, 그것에는 생태적 현대화가 산업계에도 이 득이 될 것이라는 인식을 통해 산업계가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하는 것 따위가 포함한다. 생 태적 현대화는 정부와 업계, 온건한 환경주의자, 그리고 과학자들이 환경적으로 보다 옹호할 만한 입장을 좇아 자본주의 정치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데에 협력하는 형식의 동반자적 관계 를 의미한다.(주27) 너무나 좋은 것은 진실이 되기 어려운가? 사실인즉 그렇다. 생태적 현대화가 사회민주주의 와 생태적 관심사를 이전보다 더욱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 은 그 이름에 걸맞는 실질적 성취를 가져온다. 생태적 현대화라는 개념에 영향을 받은 대부 분의 나라들은 산업국가들 중 가장 깨끗하고, 쾌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태적 현대화는 가장 앞서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생태적 문제가 사회민주주의 사상에 제기하는 몇 가지 주요한 도전을 회피하고 있다. 환경 보호가 경제 발전과 잘 들어맞을 것이라고 가정하 는 것은 실제로 설득력이 없다. 환경 보호는 때때로 경제 발전과 갈등 관계에 빠져들 수 있 다. 게다가, 생태적 현대화는 대체로 국가 정책의 문제이지만, 환경 위험은 대개 국경을 뛰 어넘게 되며, 어떤 것은 그 범위가 전세계에 이른다. 생태적 현대화와 관련된 다소 안이한 가정들은 생태를 고려할 때에 제기되는 두 가지 근본 적인 문제, 즉 과학의 진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위험성에 대해서 우리 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부분적으로는 범세 계화의 결과로서 과학 기술의 변화가 가속화되어 왔고, 그러한 변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 향은 보다 직접적이고 심오하게 되었다. 우리는 환경(the environment) 을 자연 세계로 생 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과거에 자연적이었던 것들 가운데 많 은 것이 이제는 인간 행위의 산물이 되었거나 인간 행위에 영향받는다. 그것은 지구 기후를 포함한 외적 환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내적 환경(internal environment) 도 포함한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과학 기술은 신체를 침범해 들어왔으며, 인간 이 성취할 수 있는 것과 단지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여야 만 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다시 설 정해 주고 있다. 과학 기술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 이런 관점은 낡은 것이 되었다. 우리 들 모두는 과거보다 더 과학 기술 혁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살고 있다. 새 고속도로와 쓰 레기 소각장들 그리고 화학 공장 및 원자력과 생물 공학을 이용하는 공장들, 연구 조사 기 관들은 그것에 직접 영향을 받는 주민들의 저항에 봉착한다. 그러한 저항과 (초기의 산업화 단계에서처럼) 공업 발전에 기뻐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다.(주28) 이러한 맥락 에서 의사 결정은 전문가들 에게만 맡겨져서는 안 되고, 정치가와 시민을 참여시켜야 한다. 요컨대, 과학 기술은 이제 민주주의적 정치 과정의 외부에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 이 좋은지 알기 위해 무조건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는 없으며,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늘 명 확한 진리를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은 공개적인 검토를 받는 자리에서 자신 이 내린 결론과 제시한 정책이 정당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영국에서의 광우병 파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 불거져 나온 영국의 문제로 보여진다. 일 부 좌파는 이것을 대처리즘의 규제 실패로 본다. 그런데 이것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광우 병 소동은 자연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닐 때 , 전개될 수 있는 전형적인 위험성 상황의 하나 로 이해해야 한다. 새로운 위험성 상황의 특징은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전문가들은 연구를 통해 정책 결정권자들을 위한 명료한 결과보다는 모호한 결론과 논쟁적인 해석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많은 전형적인 위험성을 통해서 일정한 경향이 역사적으로 정립된다. 위험성은 과거의 경험 을 기반으로 하여 계산될 수 있다. 어떤 주어진 시간대에 교통 사고를 당할 운전자의 위험 성은 통계를 기초로 하여 쉽게 계산된다. 그러나 새로운 위험성 상황은 이와 같지 않다. 우 리를 안내해 줄 과거의 경험을 갖고 있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위험성이 상존 해 있는지의 여부조차 소란스럽게 논의된다. 활동 중인 과학자들 대부분은 지구 온난화가 진행 중이고, 그 원인이 인간에게 기인하며, 그것이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올 정도로 진행되 었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소수의 유수한 전문가들은 이것들을 전혀 믿지 않으며, 우리가 살 펴본 것처럼, 환경 관련 문헌에 기고한 일부 과학자들이 소수 견해에 동조한다. 광우병 파동은 결코 끝나버린 것이 아니다. 누구도 어느 나라에서 광우병이 발생할지, 혹은 그것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동물의 종들간에 그것이 전염되는 정확한 방 식은 하나의 미스터리인데, 그것이 밝혀지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것이 순수하 게 경제에 가한 충격은 이미 상당한 정도에 이른다. 1998년에 실시된 광우병에 관한 가장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영국 경제에 그때까지 30억 파운드의 비용이 쓰였다. 이 비용은 단지 농부들에 대한 보상과 광우병에 감염된 소들을 도축하고, 그 사체를 처리하는 데에만 들어 간 것이었다. 광우병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들에서조차 쇠고기 소비는 줄어들었 다. 광우병 소동은 생태적 위험성이 현대 정치의 한 구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핵 심 영역으로 밀려들어올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의료 정책은 환경 오염의 통제가 단지 환경 이라는 명백히 분리된 영역의 문제인 것처럼, 또는 그러한 정책이 기술적 변화 과정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세워질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생 태적 위험성에 적절히 대처하는 일은 가까운 장래 동안 중차대한 사안이 될 것이다. 생태적 현대화를 주제로 다룬 문헌들 가운데, 예방 원칙은 생태적 위협에 대처하는 수단으 로 보통 제시된다. 그 개념은 1980년대 독일에서 가장 먼저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정도는 그 나라 공공 정책의 일부를 이룬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그것은 과학적으로 근거 가 불확실할지라도 환경적 쟁점들에 관한 조치가 취해져야만함을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를 들어, 이를 여러 대륙국가들에서는 1980년대에 산성비에 대응하기 위한 강령이 채택된 반면, 영국에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산성비와 관련된 문제 및 다른 환경 오염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무기력한 조치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그러나 예방 원칙이 언제나 유용하고,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태적 위험성이란 종종 예방 원칙이라는 방식으로 정상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자연과 밀접 하게 머물러 있는 그러한 선택권을 더이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는 과학 기술의 진 보로부터 오는 이득과 위험 간의 균형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조심스러워 하기보다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대담하게 지지할 필요가 자주 있을 것이다. 새로운 위험성 상황의 복잡한 성격은 공개 토론으로 번지는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광우병의 예를 들어보자. 그 당시에 정부는 처음에 광우병이 사람의 건강에 위험하다는 점 을 부정하다가, 나중에 과학적 증거가 새롭게 제시되자 입장을 바꿨다는 이유로 상당히 비 난을 받았다. 이런 비일관성을 정부의 무능력으로 일축해 버리는 것 역시 안이한 태도이다. 새로운 위험성이 상존할 때, 그리고 과학적 증거가 완전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당연히 어둠 속에서 뛰는 식으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기본적인 불확실성은, 새 과학정보를 이용해야 진상이 정확히 드러나는, 아직까지는 가능성만 보이는 위험을 언제 어떻게 발표하느냐에 관 련되어 있다. 새로운 위험성 시나리오를 발표한다는 것은, 광우병 소동이 입증하듯이, 중대 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떤 위험성이 공개되고서-정부의 개입에 의해 공식적인 (official) 지위가 부여되고서-너무 과장된 것 또는 있지도 않은 것으로 입증된다면, 비판가 들은 재앙을 막연히 유포하고 있다 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당국이 위험성은 미미하다고 믿 거나, 발표에 신중을 기한다면, 비판자들은 은폐하고 있다 고 하면서, 왜 일찍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혹평할 것이다. 다음에 관련된 문제는 앞의 경우보다 더욱 까다롭다. 때때로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게 하거 나, 여러 가지 위험 및 특정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취해져야 하는 조치들을 수용하도록 설 득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겁줄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세계적 수준의 효과적인 조치는 정부나 여타 기관들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을 경우 계속 발생 할지 모를 재난들에 대해 상당히 동요했을 때에만 취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정컨대, 공개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재앙의 수효는 한계가 있다. 만일 그것들이 많다면, 아무도 그것 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시민들을 안전하게 하는 문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오랜 관심사였다. 복지국가는 그러한 안전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생태적 문제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 는 그 위험성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험성이 새롭게 부각됨에 따 라,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율성,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 기술 변화의 광범한 영향과 연관된다. 위험성은 우리가 당면한 위협에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인데-그리고 동시에 위협을 동반하는 기회에 주목하게 한다. 위험성은 회피하거나 최 소화해야 하는 단지 부정적 현상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전통과 자연으로부터 이탈한 사 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근원이기도 하다. 전통과 자연은 그것이 직접 작용하지 않으면서 많은 결정의 객체가 된다는 점에서 비슷하 다. 행동과 사건들은 언제나 이러한 방식 으로 행해지거나, 자연적 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단 자연과 전통이 변형되면, 미래지향적인 제반 결정들이 취해져야만 하고, 우리는 그러한 결정이 야기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주체가 개인이건, 집단이건, 아니면 국가이건) 현재의 행위로 인한 미래의 결과에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새로운 정치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하나이다. 사태가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누가, 어떻게, 무슨 자원을 가지고 안 전을 제공할 것인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기회와 혁신은 위험성의 긍정적 측면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위험성에 대한 수동적 경험과 위험성 환경에 대한 적극적 탐색 사이에는 근본적 차 이가 있다. 위험성에 대한 적극적 대처는 사회적, 경제적 동원의 필수 요소이다. 우리는 일 부 위험성에 한해서는 그것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자 한다. 반면에 그 밖의 투자 결정에 수반되는 위험성과 같은 것들은 긍정적이며 성공적인 시장경제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부 분이다. 감수할 수 있는 위험성이란 단순히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위협과 똑같지 않다. 위험성은 우 리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평가하고자 하는 위협적 사태를 가리킨다. 미래 지향적이고 정보 의 바다에 흠뻑 빠져 있는 우리 사회에서 감수할 수 있는 위험성이라는 주제는 서로 각각 떨어져 있는 많은 정치 영역들을 통합한다. 그 영역들은 복지국가 개혁, 세계 금융시장에 대 한 대처, 기술적 변화에의 대응, 환경 문제 및 지정학적 변동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위험성에 대해 예방할 필요가 있지만, 아울러 생산적인 방식으로 모험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필요하다. 7. 제3의 길 정치 지금까지 나는 다섯 가지 딜레마를 마치 서로 독립적인 것인 양 분리해서 논의해 왔다. 물 론 그것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장과 다음 장에서 종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3의 길 정치 의 전반적 목표는 시민들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중요한 혁명들, 즉, 범세계 화 , 개인 생활에서의 변화 ,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길을 개척하도록 돕는 데 있다. 제3의 길 정치는 범세계화에 대해 긍정적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범세계화가 세계적 시장보다는 훨씬 더 광범위한 현상일 때에만 그러하다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 은 범세계화를 국민 통합과 전통적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극우파의 영역인 경제적 문 화적 보호주의와 논쟁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범세계화는 분명히 지방적 자급자족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호주의는 현명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보호주의가 실행된다면, 그것 은 이기적이고 아마도 적대적인 경제 블록의 세계를 창조할 것이다. 제3의 길 정치는 범세 계화를 자유무역에 대한 맹목적인 인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자유무역은 경제 발전의 엔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의 사회적, 문화적 파괴력에 비추어, 그것의 광범위한 결과 를 항상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제3의 길 정치는 좌우의 구분을 벗어나는 질문의 범위들이 이전보다 더 넓어지고 있음을 인 정하는 동시에, 사회 정의에 대한 핵심적 사항들을 보존해야 한다. 평등과 개인의 자유는 충 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등주의적 조치들은 종종 개인에게 열린 자유의 범위를 확대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자유란 행위의 자율성을 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나아가 보다 넓은 사회 공동체들의 관여를 요구한다. 제3의 길 정치는 집산주의를 버리고,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새로운 관계, 즉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재규정을 모색한다. 우리는 책임 없이 권리 없다(no right without responsibilities) 는 말을 새로운 정치의 주요 모토로서 제시할 수 있다. 정부는 약자 보호를 포함하여 국민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일련의 책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식 사회민주주의는 권리를 무조건적인 요구로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개인주의의 팽창과 함께 개인적 의무의 확대가 이어져야만 한다. 예를 들어 실업 수당은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야 할 의무를 수반해야 한다. 복지제도가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좌절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정부에 달려 있다. 도덕적 원리로서, 책임 없이 어떤 권리도 없다 는 것이 복지 수혜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적 권리에도 그런 경향이 있듯 이, 그렇지 않으면 그 원칙이 궁핍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두 번째 원칙은 민주주의 없이 어떤 권위도 없다(no authority without democracy) 는 것이어야 한다. 우파는 국가, 정부, 가족 제도 등 그 어디에서든 항상 권위를 정당화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전통적 상징들에 의존한다. 우파주의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은 전통과 전통적 형태의 순종이 없다면 권위가 무너지고 만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들은 올바 른 것과 그릇된 것을 구분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는 결코 부분적인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같은 견해에 반대해야만 한다. 전 통과 관습이 영향력을 잃어 가고 있는 사회에서 권위를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를 통한 길이다. 새로운 개인주의가 필연적으로 권위를 잠식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개인주의 는 권위가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기반 위에서 다시 형성되기를 요구한다. 제3의 길 정치와 연관된 여타의 쟁점들은 해방의 정치 틀에 속해 있지 않거나 단지 부분적 으로만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범세계화, 과학 기술의 변화, 그리고 자연 세계와 인간의 관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대응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주어지는 질문은 사회 정의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전통과 관습의 쇠퇴 이후에 우 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재창조할 것인가, 생태적 문제에 어떻 게 대응할 것인가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응답은 범세계적 가치들과 철학적 보수주의라고 불려지는 것들을 강조해야 한다. 생태 위기의 시대에 현대화란 순수하게 직선 적일 수 없으며, 경제 성장과 단순하게 같을 수 없다. 제3의 길 가치 : 평등 ; 약자 보호 ;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 책임 없이 권리 없다 ; 민주주 의 없이 권위 없다 ; 범세계적 다원주의 ; 철학적 보수주의 현대화라는 쟁점은 새로운 정치를 위한 기초이다. 생태적 현대화는 하나의 해석이다. 그러나 또한 다른 해석이 있다. 예를 들어 토니 블레어의 연설은 현대화라는 말투성이다. 현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분명히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한 가지는 고전 적 사회민주주의로부터의 탈피라는 사회민주주의 그 자체의 현대화이다. 그러나 좀더 폭넓 은 의제로서 현대화 전략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 개념에 대해 좀더 세련되게 이해할 때만 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생태적으로 민감한 현대화는 점점 더 많은 근대성 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화 과 정에서의 문제점과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근본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과학 기술 혁신의 에너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변칙적 전환의 세계에서, 연속성과 사회적 응 집력을 재확립할 필요성을 알아차리는 일이기도 하다. 철학적 보수주의는 중심적 주제이다. 물론 현대화와 보수주의는 보통 반대되는 것으로 취급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을 넘어서고 , 인간 본성의 다른 측면이 발현되는 세계, 그래서 위험성과 책임성이 새로이 혼합되는 세계에서 생활에 대처하기 위해 현대화의 수단을 사용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는 정치적 우파들이 인식하는 방식과는 느슨한 친밀성만을 갖는 것이 다. 철학적 보수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시사한다. 즉 변화에 대응하는 데 있어서 실용주의 적 태도,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양면적인 결과를 인식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바 라보는 미묘한 견해차, 과거와 역사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환경 영역에서 현실적으로 가능 한 경우 예방 원리의 채택이다. 이 목표들은 현대화의 의제와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과학 기술은 이전 세대들에게보다 우리의 생활에 더 직접적이고 광 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 이상 민주주의의 범주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현대 정치의 가장 치열한 논쟁들에서 나타나는 가족의 예를 들어보자. 가족 생활의 지속성, 특히 아동의 복지를 보호하는 일은 가족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 가족 을 복원하려는 반동적인 시도를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내가 앞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민주화에 관한 의제를 현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는 점이다. 제3장 국가와 시민사회 State and Civil Society 국가와 정부의 개혁은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정부는 공동체 의 복원과 발전을 위해, 이른바 신 혼합경제를 기반으로, 시민사회의 행위체들과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1. 제3의 길 프로그램 이 장에서는 사회의 주요 부문들을 망라하는 통합 정치 프로그램의 윤곽을 제시하고자 한 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하나의 윤곽일 뿐이다. 국가와 정부의 개혁은 제3의 길 정치의 근본 방향을 설정하는 원칙이어야 한다. 즉 국가와 정부의 개혁은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확장시 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정부는 공동체의 복원과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시민사회의 행위체 들과 동반자로서 활동해야 한다. 이 동반자 관계의 경제적 기반은 바로, 내가 앞으로 사용할 명칭인, 이른바 신혼합경제(new mixed economy)이다. 신혼합경제는 현존하는 복지 제도가 완벽하게 현대화될 때에만 효과적일 수 있다. 제3의 길 정치는 하나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 는 정치이다. 세계주의적 민족은 사회 통합을 증진시키도록 할뿐만 아니라, 초국가적 관할 체제를 촉진시키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개념들 각각에 대하여 앞으로 좀더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나는 내가 제안하는 개 념들 가운데 어떤 것도 논쟁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는커녕, 거의 모든 개념들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고 난해하다. 우리가 범세계화와 기술변화가 만 들어 내는 세력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새로운 위험성 환경은 위협 적 요소와 유리한 요소가 난마처럼 얽혀 있다. 다음에 제시된 틀은 아직은 미완성인 프로그 램이다. 제3의 길 프로그램 : 급진적 중도 ; 새로운 민주 국가(적이 없는 국가) ; 활발한 시민사회 민주적 가족 ; 신혼합경제 ; 통합으로서의 평등 ; 적극적 복지 ; 사회 투자 국가 ; 세계주의 적 민족 ; 세계적 민주주의 2. 민주주의의 민주화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축소를 원했지만,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가를 확장시 키고 싶어했다. 제3의 길은 정부를 적이라 말하는 우파와 정부가 해답이라고 말하는 좌파 를 넘어서서 국가를 다시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오늘날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 이유는 반세기 전처럼 적대적 경쟁자 들에 의해 위협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경쟁자도 없기 때문이다. 양극 시대가 끝났기 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뚜렷한 적을 갖고 있지 않다. 적이 아니라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국 가들은 과거의 것과는 다른 것에서 정당성의 원천을 찾아야만 한다. 근대 국가는 전쟁의 혹 독한 시련 속에서 형성되었고, 전쟁이나 전쟁 준비는 국가 제도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주었다. 시민권과 복지 정책은 국가들이 국민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할 때 에 주로 형성되었는데, 이 현상은 냉전 기간을 통해 지속되었다. 이 점은 자유민주주의와 복 지국가의 발전을,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폐쇄적인 과정으로 보는 많은 사회민 주주의 저술가들이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마샬까지 포함하여 -간과해 온 사실이다. 세계 시장의 진전과 대규모 전쟁의 퇴각이 국가의 구조나 정부의 정당성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그 밖의 요인에는 바로 민주화의 확산이 포함되며, 이것은 전통과 관 습의 영향력 감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매력적인 이유는 전적으로 아니면 일차적으로라도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다른 정치 제도들을 꺾고 승리했다는 데 있는 것은 아 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매력은 더 깊은 힘에서 나온다. 그 힘은 개인의 자율성을 요구하고, 더욱 자기성찰적인 시민의 출현을 촉진하며, 세계 사회를 재정립하고 있다. 민주화가 민주주 의를 측면에서 압도하고 있는 것이며, 불안정은 틀림없이 처리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가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앞장에 서 논의되었듯이, 정치인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는 사람의 비율은 지난 30년간 계속 떨어졌 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미국 국민 가운데 90퍼센트는 민주적인 정부 형태에 만족하고 있다.(주1) 1981년에서 1990년에 걸친 유럽 11개국 조사에서도 응답자 의 90퍼센트 이상이 민주적인 정부 체제 를 지지함을 보여 주었다. 같은 비율의 사람들이 우리는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킬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는 데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 활동의 범위라기보다는 국가 운영이 범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의 정당성 문제와 함께 권위가 적극적인 토대 위에서 새로워져야 한 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탈전통 사회에서 권위는 더 이상 전통적인 상징에 의해서, 또는 이제까지 늘 이렇게 일이 처리되어 왔다 라고 말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개혁들이 추진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들은 부분적으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나라들은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발 전해 왔고, 다양한 헌정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강조점들은 어디에서 나 같을 것이다. 그러한 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국가는 범세계화에 구조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무엇보다 먼저-일 방통행식 과정이 아닌-탈중앙화를 내포한다. 세계화는 아래로의 권력 이양뿐만 아니라, 위 로의 이양을 위한 강한 자극과 논리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이중적 이동, 즉 이중적 민주화 운동은 단순히 국민국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거듭 주장하기 위한 조 건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동은 국가로 하여금 사방에서 허를 찌르는 요인들에 대해 좀 더 잘 대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의 경우에 이것은 잔여 권력의 하부 귀속성 을 말 그대로의 원리적 용어 이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은 초국가 기구도 아니 고 단순한 자유 무역 지대도 아닌, 정치 질서를 건설하는 길이다. 동시에 이것은 국가에 새 로워진 영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2) 국가는 공공 영역의 역할을 확장시켜야 한다. 이것은 부패에 대항하는 새로운 안전 장치 의 도입일 뿐만 아니라 투명성과 개방성의 증대를 지향하는 헌정 개혁을 의미한다. 공공 영 역의 역할을 확장해야 하는 이유는 최근 수년간 전세계 정부들이 부패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왔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부패 증가 추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환경의 성격이 변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상당히 개방적인 자유민주주의적 제도들은 실 제로는 막후 거래, 특권과 후원에 의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정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가 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정부와 시민이 점차 하나의 정보환경 속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업무처리 방식들이 다시 검토되기에 이르렀고, 부패나 허용될 수 없는 일로 간주되 는 것의 범위가 넓어졌다. 영국의 특별한 어려움-어쩌면 기회라고 할 수 있는-가운데 하나는 헌법을 현대화하는 데 이중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헌정 개혁은 10년 전 헌장 88 이 제정된 이래 줄곧 의제가 되어 왔으며, 노동당 정책 의제의 일부가 되어 왔다. 처음에 헌정 개혁이 제안되었을 때, 영국은 다른 곳의 더 발전된 헌법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 고취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보다 포괄적인 추세에 반웅해야 한다는 생각이 추가되었다. 실제로 영국은 다른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 달리 성문 헌법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관습,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판례법 속에 정부의 기능과 시민의 권리 및 의무가 규정되어 있다. 헌정 변화는 이러한 원칙들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영국의 고유 제도에 침투되어 있는 비밀주의 문화와 싸울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행정부는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고, 지금의 책임 행정 형태는 취약하다. 즉 의회의 위원회들은 하원의 정당 구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좀처럼 날카롭게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현 상태로 보면, 상원은 민 주 사회에서 시대착오적 기관이다. 얼핏보면, 이러한 영역들의 개혁이 동시에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어느 하나의 개혁도 엄청나게 어려워 보인다. 결국, 개혁은 문제가 있는 바로 그 제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노동당은 이미 대담하게 개혁을 시작하였다. 깊게 뿌리 박힌 업무 처리 방식도 적극적으로 대처할 때 변화를 향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3) 정당성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서, 적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정부의 행정 효율을 높여야 한다. 모든 수준에서 정부는 부분적으로는 성가시게 하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불신 을 받는다. 변화에 대한 기업 조직의 대응이 재빠르고 행보가 훨씬 민첩한 세계에서, 정부는 뒤쳐질 수 있다. 결국 관료적 형식주의라는 부수적인 의미를 갖는 관료제 라는 용어는 정부 를 지칭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정부 재편은 적게 들여 많이 얻는다 는 생태학적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 원칙은 규모 줄이기가 아니라 공급 가치의 확대라는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정부는 기업의 훌륭한 관행들로부터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이를테면, 목표 조정, 효과적인 회계감사, 유연한 의사결정 구조, 노동자 참여 증대가 그것이다. 이것들 가운데 마지막 것은 민주화의 요소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가 제도가 시장질서의 부재 때문에 나태해지고,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이 조잡해진다는 비판에 반응을 나타내야 한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디온(E. J. Dionne)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주장은 훌륭한 학교, 공립 병 원, 공원의 존재를 무시한 채 정부를 마치 비효율과 동의어인 것처럼 풍자하는 것이기 쉽 다.(주2) 그렇다고 해서 가능성이 적은 곳마다 시장 또는 준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은 아니다. 정부가 경쟁의 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데이비드 오스본 (David Osborne)과 테드 개블러(Ted Gaebler)의 책 <정부의 재창조(Reinventing Government)>의 중심 주장이다.(주3) 그들의 저작물은 1990년대 초반에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정부의 재창조는 확실히 때때로 시장에 기반한 해법의 채택을 의미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시장에 맞서는 정부의 효율성을 재차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4) 범세계화의 하향 압력은 전통적인 투표 과정 이외의 민주주의 형태에 대한 가능성뿐만 아니라 필요성까지 불러온다. 민주주의의 실험 -지방 수준의 직접민주주의, 전자 국민투표, 시민 배심, 그리고 그 밖의 가능한 것들-을 통해 정부는 시민과, 시민은 정부와 한층 더 직 접적인 접촉을 재확립 할 수 있다. 이것들이 지방과 중앙의 통치에서 투표 메커니즘을 대체 하지는 않겠지만, 투표 메커니즘을 지속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 20년 전 스웨덴에서 사용된 접근 방법이 하나의 모델이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에너지 정책의 형성 과정에 일반인들을 직접 참여시켰다. 정부, 노조, 정당, 교육 기관들은 에너지에 관한 일일 강좌를 개설했다. 이 강좌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정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건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책을 확고히 형성하는 이 실습에 7만여 명이 참여했다. (5) 적이 없는 국가는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국가의 위험성 관리 능 력에 의존하게 된다. 이미 강조되었듯이, 위험성 관리는 복지국가의 정황 속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던 방식처럼 단지 안전 제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경제 위기에 관한 것만도 아니다. 과학 기술로부터 비롯되는 위기도 직접적으로 통치에 영향을 준다. 통치는 필연적이고도 본질적으로 과학 기술의 변화를 조절할 뿐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처리해야 할 직무를 갖는다. 이미 논의되었듯이, 위험성의 규정을 단지 전문가에게만 떠맡겨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그것 은 일반인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상황 가운데에는, 심각한 위해가 우려되지만 담당 기관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위험성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서는 단계마다 신중하게 논의해야 하며 이 과정에는 보통 전문가, 당국자,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위험성을 규정하는 까닭은 실천적으로 선택할 것이 무엇 이며, 이용할 수 있는 과학 기술 지식의 한계를 밝히기 위함이다. 많은 위험성 상황이 복합 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논의의 틀이 흔히 확장될 필요가 있다. 캘리포니아의 위험성 비교 분석 프로젝트는 위험 진단과 시민의 심의 참여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보건, 생태 보호, 사회복지에 관한 세 개의 기술 위원회가 설립되어, 각각의 영역에서 위험성 순위를 독자적으로 매기게 되었다. 그리고 일반인도 참여 한 또 다른 세 개의 위원회가 위험성 관리 방법과 그 법적 경제적 의미를 검토하기 위해 설 치되었다. 그리고는 이 두 가지 유형의 위원회는 함께 모여 결론을 도출하도록 요청 받았다. 일반인이 참여한 위원회들은 기술위원회들이 간단히 무시해 버린 많은 관심사들을 찾아내 제기하였고, 위험성의 기준에 관한 심도 있는 공개 토론을 이끌어 냈다. 논의된 것들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공공 정책에 반영되었다. (6)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단지 지방적 또는 국가적인 수준에서 그칠 수 없다. 상향적인 민주 화는 지방 수준에서 멈춰서는 안 되고, 국가는 세계주의적인 전망을 지녀야 한다. 하향적 민 주화는 차후에 더욱 두드러질 시민사회의 부흥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이 합쳐져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추진하는 목표가 될 정부 형태, 즉 새로운 민주국가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민주국가(적이 없는 국가) : 권력의 지방 이양 ; 이중 민주화 ; 공공 영역의 쇄신 - 투명성 ; 행정적 효율성 ; 직접민주주의 메커니즘 ; 위험성 관리자로서의 정부 새로운 민주국가는 이상적이고, 게다가 개방적인 어떤 것이다. 나는 실제 살을 붙이는 데에 필요할 세세한 부분까지 보따리 풀 듯 자세하게 설명하는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도, 모든 개혁은 고유의 복잡성을 수반한다. 이를테면 탈중앙화와 권력 이양은 매력적인 외 침이다. 지방, 도시, 이웃에게 권력을 반환하라! 모든 민주화 과정이 그러하듯이, 권력 이양 의 혜택은 수반되는 부대 조건들과 함께 얻을 수 있다. 권력의 지방이양은 만일 위로의 권 력 이양과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면 권력이 조각조각 갈라질 수 있다. 권력의 지방 이양은 본질적으로 민주화라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권력의 지방 이양은 기존의 정치적 중앙에 있는 관료 권력층에다가 지방의 관료 권력층을 덧붙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흔히 영국의 가난하고 슬픈 도시들 이 훌륭한 자치를 통해 회생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 왔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주4) 그러나 명백한 위험 가운데에는, 몇몇 도시나 지역들이 그렇게 다른 도시나 지방을 제치고 앞서 나감으로써 이미 영국에 존재하는 두드러진 지역적 불평등을 더 심화시킨다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3. 시민사회의 문제 활기 넘치는 시민사회 육성은 제3의 길 정치의 기본적인 일부분이다. 시민 의식의 쇠퇴에 대한 걱정을 무시하는 경향을 지녔던 구좌파와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정치는 그러한 걱정들 을 절실하게 받아들인다. 시민 의식의 쇠퇴는 보수 정객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현대 사 회의 많은 영역에서 실재하는 가시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일부 지방 공동체와 도시의 인근 지역들간의 연대 의식 약화, 높은 범죄율, 이혼과 가족의 해체에서 발견된다. 우파는 이런 문제들과 경제적 박탈감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 나 구좌파가 종종 그러했듯 시민의식의 쇠퇴를 단지 경제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도 가난 과 권리 상실의 영향을 부인하는 것만큼이나 잘못이다. 우리는 공중 도덕의 쇠퇴가 복지국 가 탓이라고 비난할 수 없거니와, 시민사회에 해결을 내맡김으로써 공중 도덕이 회복되리라 고 생각할 수도 없다. 정부는 시민문화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 고 또한 담당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쇄신 : 정부와 시민사회의 동반자 관계 ; 지방 주도를 통한 공동체 쇄신 ; 제3 부문의 관여 ; 지방 공공 영역의 보호 ; 공동체에 기반한 범죄 예방 ; 민주적 가족 국가와 시민사회는 서로 돕고 서로 통제하면서 동반자 관계로 움직여야 한다. 공동체라는 테마는 단순한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근본적인 주제이다. 범세계화의 진전 은 그것이 가하는 하향 압력 때문에 공동체에 관한 관심 형성을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필 연적이게 만든다. 공동체 란 잃어버린 국지적 연대 형태를 다시 찾기 위한 노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웃, 마을, 더 큰 지방의 사회적, 물질적 쇄신을 위한 실천적인 수단을 의미한다.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의 항구적인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어떤 때는 정부가 시민 영역으로 더 많이 들어갈 필요가 있고, 어떤 때는 후퇴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직접 개 입으로부터 손을 뺀 지역에서, 특히 가난한 지역에서, 정부의 자원은 지방 단체들이 넘겨받 거나 도입한 활동들을 지원하는 데 여전히 필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주도 와 관여를 촉진하여 큰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은 가난한 공동체이다. 정치인과 당국자에 대한 신뢰 감소는 때때로 전반적인 사회적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 석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아마 그 반대일 것이다. 점점 더 자기 성찰적 으로 되어 가는 사회는 높은 수준의 자치 조직이 특징이다. 미국, 영국과 그 밖의 나라에서 의 연구는 적어도 몇몇 지역과 경우에서라도 시민 영역의 출현을 가리키는 추세에 있다. 몇 몇 오래 된 형태의 시민 결사나 활동이 그 시민 영역의 장점을 잃어버리고 있지만, 다른 종 류의 공동체적 동력이 그것들을 대체하고 있다. 요점은 이러한 것들을 동력화하여 지방 공 동체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이득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좀더 광범위한 사회적 목적에 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우드나우(Robert Wuthnow)는 미국의 소집단 운동의 발전을 연구해 왔다. 그가 말하 는 소집단은 정기적으로 모여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소수 사람들의 단체를 의미한 다. 그는 광범위한 조사에 기초하여, 40퍼센트(약 7,500만)의 미국인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하나 이상의 소집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집단 속에서 단지 한 지역에 살 고 있다는 일반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 게다가, 유사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평생을 함께 가는 여로 를 추구한다. 소집단은 소집단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을 하고 있다. 그 들이 창조한 공동체는 좀처럼 약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살핌을 받는다고 느낀다. 그들은 서로를 돕는다. ... 소집단 회원들 사이에서 개발된 애착심은 우리가 완전히 혼자 가길 원하 는 세련되지 못한 개인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니고, 오히려 혼란해져 가는 사회 속에서도, 우 리는 상호 부조의 유대로 묶일 수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주5) 많은 소집단들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광범하게 확산된 집단 해결 방식에 대한 생각을 반영한다. 어떤 집단들은 잉글하트가 탈물질주의적 이라 부른 유형의 가치를 매우 분명한 목표로 삼는다. 특정한 관심 분야가 무엇이든, 집단 치료 모델이 이러한 집단들 대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자조적 집단들이 특히 두드러졌다. 모든 집단들과 공동체들이 그러 하듯이, 소집단들도 한계와 문제점을 확실히 갖고 있지만 소집단들은 풍요로운 시민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1950년 이후 영국에 관한 연구에서 피터 홀(Peter Hall)은 제3부문, 즉 자원 봉사 활동이 지 난 40년간 확장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좀더 전통적인 집단들은 쇠퇴했으나, 새로운 단체들, 특히 자조집단과 환경 운동 단체들에 의해 보강되었다. 중요한 변화는 여성 참여의 증대이 다. 자선 단체들이 상당한 증가를 보였다. 1991년에 영국에서 등록된 자선 단체만 해도 16만 개 이상이었다. 연간 평균으로 인구의 거의 20퍼센트가 자발적 형태의 활동에 종사한다. 그 리고 약 10퍼센트가 주당 한번 정도 활동에 참여한다. 흘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이전 세대 만큼 자주 자발적 활동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중요하게도, 시민 활동 증가의 대부분이 좀더 풍요로운 계층들에서 발생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까운 친족들과의 비공식적인 사회적 접촉에 더 몰두하기 쉽다. 사회적 후원이 없을 때, 가난한 계층보다 풍요로운 계층에서 고통받는 비율이 낮다.(주6) 정부 개입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집단들 사이에서 시민적 질서를 회복하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단합된 노동 계급 공동체라는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시민 참여는 사회적 경제적 변동에 휩쓸려 주변 화된 지역에서 가장 덜 발전되었다. 빈곤한 지방 공동체의 쇄신은 폭넓은 시민사회를 만들 어 내는 수단으로서, 경제 사업 촉진을 상정한다. 1960년대 사회 공학의 교훈은 지금까지 모 든 곳에서 학습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를 보면 적절한 외부 지원과 함께 추진되는 지방 주 도 사업은 뿌리 깊은 쇠락의 과정조차 되돌릴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주7)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단지 유럽이나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도 도출된 다. 브라질 북동부 체아라(Ceara) 지역의 사례가 그 한 예이다.(주8) 이 지역의 개혁은 텔레 비전 산업, 소매업, 서비스업과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는 젊은 재계 지도자 집단에 의해 시작 되었다. 체아라의 전통적 엘리트들은 농산물을 해외로 수출했고, 지역 발전보다는 임금을 낮 게 유지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개혁가들은 정부 기관과 협력하여, 참여적 계획 수립 기법들을 활용하고 공동체 조직과 접 촉하였다. 토착적 개발을 촉진시키기 위해 이 지역에 새로운 기업들을 유치하는 계획이 수 립되었다. 가장 가난한 가정에게 최저 임금을 받는 일거리를 가구당 하나씩 배분했다. 탁아 소들이 설립되었는데, 그것은 정부가 아니라, 최저 임금을 보장받는 지원자들에 의해 운영되 었다. 근린 집단들과 공동체 조직들은 소액 대출을 지원 받았다. 이를테면 여성들에게 재봉 틀을 살 돈을 빌려주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987년에서 1994년 사이 에 브라질 전체 경제가 1.4퍼센트 성장했지만, 체아라의 경제는 4퍼센트나 성장했다. 사회적 기업가 정신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은 언급할 만한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러한 종류 의 프로그램들이 1980년대 후반이래 여러 나라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로 성장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국과 일본의 여러 도시에 도입된 적립식 자원 봉사 프로그램(service credit) 이다. 자선 사업에 참여하는 자원 봉사자들은 다른 자원 봉사자가 기증한 시간으로 봉사의 대가를 지불 받는다.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벌고 쓰는 모든 타임 달러(time dollar) 가 기록되고, 참 가자들은 정규 계좌를 제공받는다. 타임 달러는 비과세 대상이고, 적립해 두었다가 의료비 용, 그리고 의료 보험료의 감면 등 다른 의료 서비스 비용으로 지불할 수 있다. 뉴욕의 타임 달러 연구소는 직업 알선, 훈련 및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할 고용 기관을 개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용하여 구직 정보를 얻거나, 자기 직장에서 버는 통상적인 임 금과 별도로 근로 시간당으로 지급받는 타임 달러를 벌 수 있다. 타임 달러는 교육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혹은 실직을 대비하는 자원으로 적립되고 사용될 수 있다. 1998년에 시작된 새로운 사업은 전 세계 52개 도시에 센터를 설립하여 교육과 보건에 관련된 사업가들의 후 원을 받는 자원 봉사 프로그램을 제공할 것이다. 이 사업은 타임 달러 프로그램에 토대를 두고, 정교한 컴퓨터 기술을 이용하여 자원 봉사 시간의 경제를 확립하려 한다. 정부는 이러한 노력들에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각종 형태의 상향식 의사 결정과 지방 자율성을 촉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소규모 신용 대부 계획은 지방 주도의 경제 사업을 장려하는 수단으로서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 어떤 활동들은 지방 공동 체에 의해서 발전될 수 있으나, 종종 정부가 이를 인가하고 감독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교육 활동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학교에 새로운 형태의 권한이 부여될 수 있으나, 그것을 행사하 는 방법은 국가에 의해 조절되어야 한다. 도심의 저소득층 거주 지역에 지속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적절한 노동 기술을 익히게 하고 주 민이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건물들의 재개발을 위한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 정부는 자본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이 투자를 늘이고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지방 주도 사업을 육성하도록 유인하는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 미국의 여러 주들 가운데 캘리포니아는 성공적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사업 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진전된 다양한 기획안들이 제안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사업 지역에서 사는 사원들에게 주식을 배당하는 방법으로 기업의 수익이 재투자된다면, 자본소 득세를 면제해 주는 것이다. 또 다른 안은 기술 훈련을 제공하는 비영리 조직들에 기업의 수익이 재투자될 때, 자본소득세를 면제해 주는 것이다. 공동체 회복 정책들은 공공 영역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개방적인(open) 공공 영역은 전국 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방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또한 민주화를 공동체 발전과 직접적 으로 연결시키는 하나의 통로이다. 그것 없이는, 공동체 회복 계획들이 공동체를 더 넓은 사 회로부터 분리시킬 위험이 있고, 부패에 노출되기 쉽다. 여기서 공공 이라는 것에는 물질적 인 공공 장소도 포함된다. 지방 공동체의 퇴락은 보통 전반적인 황폐화뿐만 아니라, 거리, 광장, 공원, 그 밖에 사람들이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인 안전한 공공 공간이 사라지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국가는 시민사회를 침식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주의 경제에서 발생 했는데, 이들 나라에서는 공공 영역이 개발되지 못했고, 일상적 교제 공간이 가정으로 한정 되었다. 대체로 레스토랑, 카페, 혹은 사회적 교류를 위한 공공 시설이 거의 없었다. 건강한 시민사회는 압도적인 국가 권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한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몇몇 사람들이 단순하게 상상하듯 자발적인 질서와 조화의 원천은 아니다. 공동체 회복은 그에 따른 문제와 긴장을 낳을 수 있다. 마을의 자율 방범대는 어느 만큼의 권한을 가져야 하는 가? 지역 운동 단체들이 공동체의 미래에 관하여 의견을 전혀 달리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 겠는가? 하나의 공동체 가 끝나고 또 다른 공동체가 시작되는 경계는 누가 설정하는가? 정 부는 이러한 질문을 비롯하여 그 밖의 어려운 질문에 관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 국가는 또 한 시민사회에 늘 내재하는 이익의 상충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는 시민사회로 넘어 갈 수 없다 즉 국가가 어디에나 있다면, 국가는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주9) 4. 범죄와 공동체 범죄를 막고,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것은 모두 공동체의 쇄신과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 최근의 몇 년 동안을 살펴볼 때, 범죄학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 중의 하나는 일상 적인 공중 도덕의 쇠퇴가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오랫동 안 강도, 폭행, 혹은 폭력 등 심각한 범죄에 거의 배타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 소한 범죄들과 공공 질서 문란이 누적되는 경향이 많아졌다. 유럽과 미국의 도시들에서 고 충이 많은 동네의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이야기하라면, 버려진 자동차들, 낙서, 매춘, 나이 어린 깡패들, 그 밖에 이와 유사한 일들을 언급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자기들이 느끼는 걱정거리에 따라 행동한다. 가능하다면 그 들은 문제 지역을 떠난다. 또는 묵직한 현관문 자물쇠를 사고, 창문에 창살을 대고, 공공 편 의 시설 이용을 포기한다. 무질서한 행동이 저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 지역이 안전하 지 않다는 신호이다. 겁먹은 주민들은 거리에 나가지 않고, 어떤 동네는 피해서 다니고, 평 상적 활동과 회합을 줄인다. 이와 같이 그들이 실제 활동에서 뒤로 물러설 때, 이웃 주민들과 서로 도와야 한다는 그들 의 의식까지도 뒤로 물러서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지역 공동체 내에서 공중 도덕을 유지하 는 데 이바지했던 사회적 통제력을 포기해 버린다. 도시 생활의 짜임새와 사회적 교제가 뿌 리부터 흔들린 동네는 궁극적으로 더욱 늘어나는 질서 파괴 행위와 심각한 범죄의 쇄도에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주10) 우리는 이 명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명제는 바람직하지 못 한 사람들을 거리에서 소탕시키는 경찰력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경찰이 지 방 공동체의 생활 수준과 시민의 행동 양식을 개선하기 위해 소송 대신에 교육, 설득, 상담 을 통하여 시민과 밀접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테픈 카터(Stephen Carter) 변 호사는 최근 그의 저서에서 현대 사회에서의 공중 도덕의 운명을 도표로 나타냈다. 그는 공 중 도덕을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해야 하는 많은 희생들의 총합 으로 정의했다. 공중 도덕 은 낯선 사람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즉 한 번도 결코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과 공공 장소에서 마주쳐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주11) 흔히 사람들은 범죄에 대해 비합리적인 공포를 갖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노인들, 특 히 가난한 지역에서 사는 노인들은 종종 습격 당할 것을 걱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발 생하는 일은 드물다. 젊은이가 노인보다 훨씬 더 폭행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해가 진 후 에 외출을 삼가는 등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범죄의 희생자 가 될 위험성은 실제보다 낮은 것 같다. 협동적 치안은 시민들을 치안 업무에 참가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경찰에 대한 특징적인 시 각을 변화시키는 것까지 의미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도입된 전문적 치 안 유지 모델 을 채택하고 있다. 전문적 치안 유지 는 주로 심각한 범죄에 집중하고, 강력 범죄에 맞서기 위한 초국가적 수준까지 포함하여 경찰당국을 중앙 집중화하는 것을 수반한 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처럼 범세계화의 권력 이양 효과는 치안문제에도 적용된다. 법 집 행보다 범죄 예방을 다시 강조하는 새로운 경향은 치안 유지와 공동체의 재통합과 병행될 수 있다. 봉사하기로 되어 있는 대상으로부터 경찰이 고립되는 것은 종종 경찰에게 포위 당 한 압박감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경찰은 일반 시민들과 정기적인 접촉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 형사 처벌 제도, 지역 단체와 공동체 조직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제 집단과 인종 집단을 포괄해야 한다.(주12) 정부와 기업은 도시의 쇠락을 막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하나의 모델은 상업 진흥 구역을 만드는 것이다. 이 런 구역에서는 전략적인 계획에 참여하고 지정 공간에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조세 감면 조치 가 취해져야 한다. 이러한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목표에 대한 장기적인 헌신이 요청된다. 이러한 전략들을 강조한다고 해서 실업, 빈곤, 및 범죄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회적 질병에 대항하는 투쟁이 공동체에 기반을 둔 범죄 예방 접근법에 따 라 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사실상 직, 간접적으로 사회 정의를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공공 서비스와 건물처럼 시민적 질서가 퇴락하는 곳에서는 그 밖의 다른 기회들도 줄어든다. 이것들은 동네에서의 삶의 질을 향상시킴으로써 부활시킬 수 있다. 5. 민주적인 가족 가족은 시민사회의 기본적인 제도이다. 가족 정책은 새로운 정치의 핵심적인 시금석이다. 신 자유주의와 구식 사회민주주의를 초월하는 가족의 정치가 있는가? 다른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배경이 변하고 있다. 이는 통계 수치를 통해 잘 나타 나 있다. 지역별로 편차가 있지만 거의 모든 서구 국가에서, 전반적으로 이혼이 급격하게 증 가해 왔다. 편부모 가정의 비율과 미혼 부모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의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 고 있다. 1994년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32퍼센트가 혼외 출산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겨우 7퍼센 트였지만, 프랑스에서는 35퍼센트, 덴마크에서는 47퍼센트, 스웨덴에서는 50퍼센트였다. 독신 인구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현재 많은 나라에서 소수의 아이들만이 친부모와 함께 전통적 인 상황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전통적인 상황이라 함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 고, 한 집안에 살고, 아버지가 돈벌이를 하고, 어머니는 가사일을 하는 가정을 말한다. 요즘 많은 이들이 가족의 붕괴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실제로 가족 붕괴가 발생한다면, 이 것은 엄청나게 중대한 문제이다. 가족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련의 추세, 즉 남녀 평 등의 증대, 여성의 광범한 노동 참여, 성적 행동 양식과 성적 기대의 변화, 가정과 직장 사 이의 관계 변화 등이 만나는 지점이다. 우파는 이러한 변화의 결과에 대해 독특한 논리를 갖고 말한다.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우파가 제시하는 처 방은 다음과 같다. 결혼의 신성함이 재확인되어야 한다. 결혼은 떠도는 남성들을 위한 중요 한 정서적 훈련장이다. 결혼은 그들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떠맡지 않았을 책임과 의무로 그 들을 묶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아버지가 없는 것은 이 세대의 가장 해로운 인구학적 추세이다. ... 그것은 또한 범죄, 미성년자 임신,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 등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 (주13) 가족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혼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동성애자 가족과 같은 이단적인 가족 관계가 정부나 종교 기관으로부터 후 원 받을 수 있어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억제되어야 한다. 동성 결혼은 계속 불법화되어야 한다. 편부모 가정을 조장하는 복지 정책도 그러한 효과를 없앨 수 있도록 개혁되어야 한다. 많은 사회민주주의적 좌파들과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아주 다른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그들 에게 현대에 나타나는 가족의 양상은 왕성한 자기 증식의 양상이다. 결국 다양성과 그것에 대한 선택이 이 시대의 표어라면, 왜 이러한 것들이 가족의 문턱에서는 중단되어야만 하는 가? 우리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도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 동성애자들도 이성 애자들처럼 적절하게 자녀를 양육시킬 수 있고, 적당한 자원만 주어진다면 편부모도 부부처 럼 만족스럽게 자녀를 키울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는 가족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전통적인 가족으로 되돌 아간다는 생각이 얼마나 엉뚱한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열거할 가치가 있다. -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심도 깊은 변화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정치 행위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 전통적 가족에 대한 향수는 과거를 이상화한다. 19세기 영국에서도 비록 이혼이나 별거 보다 배우자 사망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편부모 가족은 오늘날만큼 일반적이었다. 역사적으 로 연구해 보면 전통적 가족의 폐해가 더 많이 드러난다. 당시에 아이들에 대한 폭력이나 성적 학대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빈번하게 존재했다. - 무엇보다 전통적 가족은 경제 단위이자 친족 단위였다. 결혼관계는 현재처럼 개인화되지 않았고, 요즘처럼 사랑이나 정서적 유대가 결혼의 으뜸 원인이 아니었다. - 전통적인 결혼은 성적 불평등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법적 소유권에 기반하고 있었다. 영 국법에서 여성은 동산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아이들도 거의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했다. - 일반적으로 전통적 가족은 이중적인 성 규범을 수반했다. 부계 혈통보장이 중요했기 때 문에 기혼 여성은 정숙 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더 많은 성적인 자유가 허락 되었다. - 자녀들은 결혼의 존재 이유였다. 대가족은 정상적인 것으로 기대되거나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현재 아이가 소중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 는 존재가 아니라, 주로 경제적 비용이 투여되는 대상이다.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 녀 양육의 성격이 아주 많이 변화되었다. 전통적 가족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출발이 더딘 경주마나 다름없다. 전통적 가족을 옹호 하는 이유는 어떤 것이든 그 자체가 전통 가족의 복원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파 논객들이 이야기하는 전통적 가족은 사실은 전통적 가족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직 후인 1950년대의 이상화된 과도기적 가족 상황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0년대에 는 이미 전통적 가족이 사라졌지만, 여성은 아직 대규모로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고, 성 적 불평등이 현저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우파의 시각과 다른 시각은 설득력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가족 형태의 증가가 바람직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혼이 아이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 기 때문에, 항상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행된 연구들 가운데 가장 철저한 연구 는 편부모가 양쪽 다 있는 부모만큼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주14)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혼에 따른 갑작스런 수입 감소)이다. 그럼에도 편부모에게 돌 아가는 단점의 절반 정도는 부모의 관심 부족과 사회적 유대의 결핍 때문에 발생한다. 이 연구의 장본인들이 보여주듯이, 별거와 이혼은 아이들과 아버지의 연계를 약화시키고 게다 가 아버지 친구 및 동료들로 이루어지는 복잡한 인간 관계에 대한 연계도 약화시킨다. 광범 한 경험적 연구에 기초하여, 저자들은 아이들을 혼자 키우는 엄마에게도 강력한 지원 조직 이나 광범위한 가족적 유대 관계가 주어진다는 것은 헛된 생각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결혼, 가족, 그리고 자녀 부양에서 만사가 잘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을 개선할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 무엇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이상적 가족 상황이 무엇이냐 는 것이다. 최우선적이고도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는 남녀 평등의 원리에서 시작해야 하며 이 지점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설 수 없다. 오늘날 가족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 는 바로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다. 가족은 대중민주주의의 과정을 따르는 식으로 민주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민주화는 가족 생활이 어떻게 개인적 선택과 사회적 연대를 결합시 킬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좇아야 할 기준들은 놀랍게도 가까이 있다. 공공 영역에서 민주주의는 형식적 평등, 개인적 권리, 폭력 없이 전개되는 쟁점에 대한 공개 토론, 전통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협상 의 대상이 되는 권위를 수반한다. 민주화된 가족도 이러한 특성들을 공유하는데, 그 일부는 이미 국내법이나 국제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가족의 관점에서 민주화는 평등, 상호 존중, 자율성, 소통을 통한 의사 결정,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거의 동일한 특성들이 부모와 자식 관계에도 적용된다. 물론 부모는 아이들 에 대해 여전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고 그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보다 한층 더 개방적이고 타협적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남녀로 구성된 가족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 고, 동성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민주화된 가족은 또 하나의 이상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그리고 정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도 자율과 책임의 균형을 확보하는 데에 확실한 강조점이 두어져야 한다. 그 균형은 적극적 형태의 장려와 제재 행위의 병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는 가족이 안정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열망이 폭넓게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가족이 이 세상의 다른 측면들을 보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반영되기 도 한다. 작업장에서는 유연성과 융통성이 강하게 요구된다. 개인이 결혼하고 가족 관계를 꾸리는 데도 동일한 능력이 요구된다. 변화 속에서, 심지어 이혼과 같은 급진적 변화에도 불 구하고 관계를 지속시키는 능력이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만 아니라, 아이들과의 관계를 지속 시키기 위해서도 중요하게 된다. 아이들의 보호와 양육은 가족 정책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이다. 이혼하기 어렵게 만 들자는 안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런 방책은 이혼율을 떨어뜨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별거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며, 결혼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는 엄격한 이혼법 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효과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민주적 가족 관계는 자녀 양육에 대한 공동 책임을 수반한다. 특히 남자들과 여자들, 부모들 과 부모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큰 책임 공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 사 회에서 어머니들이 양육에 대한 불균형한 비용 분담을 감수하고 (그리고 균형이 맞지 않는 만큼의 정서적 보상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부모 역할은 늘 함께 결합된 것으 로 생각되었지만, 아이를 갖는 문제가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결정되는 탈전통화 가족에서는 결혼과 부모 역할이 분리된다. 결혼 관계 밖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비율이 줄어들 것 같지 않고, 평생 가는 성적 동반자 관계가 거의 확실하게 점점 더 일반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래서 아이에 대한 계약적 헌신이 결혼과 분리될 수 있고, 두 부모는 자녀 양육을 법률로 구 속되는 문제로 만들어 갈 수 있고,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아버지들은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주15) 남성과 여성은 성적인 접촉이, 신체적인 학대로부터의 보호를 포함하는, 평생의 책임으로 연 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부성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다른 문화적 변화와 더불어, 이러한 부성애의 재건은 편부모 라는 생각 자체를 약화시킬 것이다. 아버지 역할에 대한 계약을 강제하는 것이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위험성과 책임의 균형을 찾는 또 다른 양식이 분명히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영역에서 그렇듯이, 가족 관계에서도 민주주의는 성취되기 어렵고, 민주적으로 살아가 는 것이 힘들 수 있다. 자녀 양육에 관한 한, 민주주의는 비록 현재 상황에서 거리가 먼 이 야기이기는 하지만 공동 양육을 의미한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에 관한 우파의 관점은 남성 의 한계 문제로 구체화되는 경향이 있다. 즉 남자들은 본시 경솔하고 도덕적으로 무책임하 므로, 전통적인 결혼 형태로 안전하게 묶어 두지 않으면, 남자들은 사회적인 파괴력으로 작 용한다는 것이다. 민주적 가족 : 정서적, 성적 평등 ; 관계에 있어서 상호 권리와 책임 ; 공동 양육 ; 평생 양 육 계약 ; 아이들에 대한 타협적 권위 ; 부모에 대한 아이들의 책무 ; 사회적으로 통합된 가 족 이러한 생각은 여전히 연구를 통해 지지 받지 못하고 있다.(주16) 이혼은 여성에게나 대부분 의 남성에게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경험이다. 대다수의 남성들이 자기 자식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편안할 리 없다. 대부분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고 시도한다. 아이들과의 접촉을 상실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릇된 생활 방 식을 추구하려는 갈망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아이들과의 접촉 상실에 수반되는 정서적 상 흔 또는 전 부인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 때문이다. 어떤 학자가 지적하듯이, 이혼 이후에도 자식들과 가깝게 지내는 아버지들과 그렇지 못한 아버지들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결정 변수는 아버지의 태도가 아니 라,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여기에 덧붙여 특정 방식으로 일을 몰고가는 우발적인 사건이다. 많은 아버지들은 자식들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편력적인 남성 이라는 관점과 반대로, 이것은 성차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미국 통계국의 한 연구는 이혼 후 아이를 맡지 않은 어머니들이 같은 처지의 아버지들보다 법정이 부과한 자녀 양육비를 지불할 가능성이 더 적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주17) 공동 양육은 많은 혁신들에 힘입어 촉진될 수 있다. 편모 라는 용어처럼 법률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비동거 부모 라는 용어가 부모 중 한 사람(보통 아버지)이 주변적인 존재로 간주 되고 그렇게 대우를 받는 상황을 영속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경제적인 변수도 관련된다. 유 아 돌보기와 방과 후 아이 보기가 독신 엄마에게 주어지듯이 그런 일들이 함께 살지 않는 아빠에게도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버지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자녀 양 육권을 가져야 한다. 다만 아버지들에게는 필요한 곳에서 그들의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수 단이 제공되어야 한다. 정치가들은 사회 통합을 촉진하려면 강한 가족이 필요하다고 종종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지만, 몇 가지 유보 조건이 있다. 첫째, 가족은 부모가 아이들을 기르는 것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단지 부모들만이 자식들에게 책임을 갖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도 그들의 부모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을 법적으로 구속해야 되는지 아닌 지는 적어도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실제로 미국의 연방정부는 1983년에 저소득층 의료 부 조 프로그램의 일부로 자식들이 노부모를 봉양하는 데 일조하도록 강제하려고 했다. 이 제 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26개 주가 궁핍한 부모들에 대한 자식들의 지원 의무를 법 률로 정하고 있다.(주18) 이것들이 좀처럼 집행되지는 못했으나, 아마도 이제 그러한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이를테면, 그러한 의무가 평생 양육 계약과 결합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강한 가족이 반드시 사회적 연대를 창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멀 리 둘러볼 필요가 없다. 이탈리아 남부는 하나의 대표적 사례를 제공하는데,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것이 사실일 수 있다. 이를테면 가난한 동네에 범죄 가족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강력한 유대와 의무가 바로 불법 활동의 기반이 된다. 법을 완벽하게 잘 지키는 가족들조차 더 넓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세상에 대한 책임을 포기할 수도 있다. 가족 사이 의 강력한 유대는 그 가족들이 내향적으로 볼뿐만 아니라 외향적으로 볼 때에만 비로소 시 민적 통합의 효과적인 자원이 될 수 있다. 대내외적으로 볼 수 있고 강한 유대를 가진 가족 이 내가 말하는 사회적으로 통합된 가족이다. 가족 관계는 사회 생활이라는 더 넓은 구조의 일부이다. 제4장 사회투자 국가 The Social Investment State 국민들에게는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 국가의 보호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인 생의 주요한 전환기를 통과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물질적, 도덕적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 다. 1. 제3의 길 정치와 국가 고전적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적 보장과 재분배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고, 부의 창조는 부수적 인 것으로 여겼다. 신자유주의는 경쟁력과 부의 산출을 좀더 중요하게 여겼고, 제 3의 길 정 치도 이러한 능력을 매우 강조한다. 이는 지구촌 경쟁의 장에서 긴급하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개인들이 경제라는 소용돌이치는 물 속에서 가라앉거나 수영하기를 포기한다면 그들은 발전이 없다. 정부는 기업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과 기 반 시설에 대한 투자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제3의 길 정치는 신혼합경제(new mixed economy)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구혼합경제 에는 두 가지 다른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영역과 민간 영역을 구분하지만, 상당 부 분의 산업을 공공의 손에 맡기는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시장이었다. 양자에서 시 장은 정부에 상당히 종속적이다. 신혼합경제에서는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사이의 상승 효 과를 추구하며, 공익을 염두에 두고 시장의 역동성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것은 첫째, 국가와 지방 수준뿐만 아니라 초국가적 수준에서도 규제와 탈규제 사이의 균형을 수반한다. 둘째, 사회 생활의 경제적인 것과 비경제적인 것 사이의 균형을 포함한다. 두 번째는 첫 번째를 통해서 상당 부분 달성되지만 첫 번째 만큼이나 중요하다. 기업 설립과 해체의 비율이 높은 것은 역동적인 경제의 특성이다. 이러한 유동성은 복지 제 도가 만들어 낸 습관을 포함해서,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습관이 지배적인 사회와는 양립하지 않는다. 정부, 기업, 노동시장에서 책임 있는 위험 부담자들 로 이루어진 사회를 개발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복지국가에 수반되는 위험성(risk)과 안전(security) 사이의 관계 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국민들에게는 일이 잘못될 경우에 국가의 보호가 필요할 뿐만 아니 라, 그들의 인생에서 주요한 전환기를 통과할 수 있는 물질적, 도덕적 능력이 필요하다. 평등이라는 주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평등과 개인의 자유는 서로 상충 될 수 있다. 또한 평등, 다원주의, 그리고 경제의 역동성이 항상 병립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은 소용없는 일이다. 불평등의 확대는 구조적 변화가 불러일으킨 것이므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높은 수준의 불평등이 경제적 번영에 기여한다거나, 불평 등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무엇이 평등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할뿐만 아니라, 과거에 종종 불평등에 집착했던 강박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평등은 다양성에 기여해야 하지, 그것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에서 설명할 이유 때문에 재분배는 사회민주주의의 의제로부터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 러나 현재의 논의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강조점을 가능성의 재분배 로 옮겨가고 있는데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인간의 잠재력 개발이 일이 일어난 후의 재분배 를 가능한 한 대체 해야만 한다. 2. 평등의 의미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평등의 유일한 모델은 기회의 균등, 혹은 능력지배라고 말한다. 이것 은 신자유주의 모델이다. 왜 이러한 입장이 유지될 수 없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달성될 수 있다면, 철저한 능력지배 사회는 결과적으로 심각한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이것은 사회 결속을 위협할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시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승자 독식 현 상을 고려해 보자. 다른 사람보다 단지 근소하게 더 나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보 다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 일류 테니스 선수 흑은 일류 오페라 가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번다.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조금밖에 뛰어나지 않다면 보수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능력지배 원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겨우 인지할 수 있는 근소한 차이가 상품의 성공이나 실패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면, 이것이 기업에 적용될 때 이해 관계는 엄청나게 크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조금 뛰어나다고 인식된 개인 은 위와 같은 논리에 맞지 않는 불균등한 보상을 받는다. 이들은 알려지지 않은 명사 (주1) 라는 새로운 범주에 속한다. 만일 말 그대로 과도적일 수밖에 없는 직업 배분에서의 구조적 변화가 함께 수반되지 않는 다면, 능력지배 사회는 상당한 정도의 하향 이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향 이 동하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하향 이동한다. 그러나 여러 연구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널리 확산된 하향 이동은 사회적으로 혼란스런 결과를 만들어 내고, 여기에 영향받은 사람들에게 소외감을 유발시킨다. 대규모의 하향 이동은 사회에서 배제되어 불만을 품은 계급의 존재만 큼이나 사회적 결속을 위협한다. 사실 완전한 능력지배는 이러한 계급, 즉 배척 당하는 계급 의 극단적인 예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집단이 사회의 하층부에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 은 능력의 결여가 이런 처지를 정당하고 적절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상상할 수 없다. 어떠한 경우라도 완전한 능력지배 사회는 실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모순적인 관념 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능력지배 사회는 결과적으로 볼 때 매우 불평등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질서 하에서 특권층은 그들 자녀에게 유리한 점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능력 지배를 파괴할 것이다. 결국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비에트 형태의 사회, 즉 부가 자녀의 출세 를 보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조차 특권층은 그들의 후손에게 유리한 점을 전해줄 수 있다. 이 말은 능력지배 원칙들이 평등과 무관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원칙들 이 평등을 철저히 구현할 수 없거나, 혹은 평등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평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새로운 정치는 평등을 포용 (inclusion)으로, 그리고 불평등을 배제(exclusion)로 규정한다. 이 용어는 자세한 설명이 필 요하다. 포용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시민권을 가리킨다. 포용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형식 적으로 뿐만 아니라 삶의 실재로서 가져야만 하는 정치적 권리 및 의무를 지칭한다. 이것은 또한 기회와 공적 영역에 대한 참여를 말한다. 노동이 자존심과 생활 수준의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접근은 기회의 주된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교육은 또 다른 의미이 다. 교육은 그것이 관련되는 고용 가능성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경우에도 기회라는 의미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배제가 두드러진다. 하나는 밑바닥 층을 배제하는 것으로, 그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기회의 주류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상층부에서의 자발 적인 배제, 즉 엘리트의 반란 인데, 이것은 좀더 부유한 집단이 공공 제도에서 물러나는 것 이다. 이들은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생활을 선택한다.(주2) 특권층은 요새 같 은 지역에서 살기 시작하고, 공공 교육 제도와 공공 의료 제도로부터 철수한다. 포용과 배제는 불평등을 분석하고, 불평등에 대하여 반응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되어 왔다. 왜냐하면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대로 산업국가의 계급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들 때문이 다. 4반세기 전에 노동 인구의 대다수는 육체 노동, 특히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보 기술은 제조업 생산의 성격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고, 비숙련 노동자의 수요를 극적으로 감 소시켰다. 컴퓨터를 사용한 디자인과 주문 생산 자동화된 저장과 유통 체계 그리고 공급자 및 소비자와의 생산 연계 따위가 이전에 손으로 하던 작업을 대신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 의 선진국에서 노동력의 20퍼센트 이하가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고, 그 비율은 계속 떨어지 고 있다.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대부분 소멸되었고, 석탄, 선철, 그리고 강철 생산, 혹은 조선 업을 중심으로 한 과거의 노동계급사회는 그 성격을 바꾸어 왔다. 어떤 것들은 새로운 활력을 찾은 반면, 다른 것들은 쇠퇴하였다. 퇴락한 도심 지역과 같은 것들은 더 광범위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왔다. 소수 민족이 강력하게 존재하는 곳에서는 종족적 편견이 그 배제 과정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 미국의 도시들이 오랫동안 그랬던 것 처럼, 유럽의 도시들은 수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고, 런던, 파리, 베를린, 로마와 다른 도시 지역에 새로운 빈민 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경제적 배제는 또한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것 이기도 하다. 쇠퇴해 가는 지역에서 주택은 점점 노후화되고 취직 기회의 결여는 교육 유인 을 저해하였으며, 사회적 불안과 해체를 야기하고 있다.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런던 시 주변에 있는 지방자치 단체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주민의 60퍼센트 이상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곳과 매우 가까운 도시 공항은 충분히 숙련된 노동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주3) 3. 포용과 배제 배제는 불평등의 정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집단들을 사회의 주류로부터 격리시키는 역할 을 하는 메커니즘이다. 상층부에서의 자발적 배제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하여 발생된다. 더 광범위한 사회로부터 물러날 수 있는 경제적 수단을 갖는 것이 필요 조건이 되지만, 왜 물 러나는지 완전하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상층부에서의 배제는 하층에서의 배제처럼 공적 영 역, 혹은 공통의 유대를 위협한다. 그리고 양자는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양자가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은 브라질이나 남아프리카에서 형성된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서 쉽게 볼 수 있다. 엘리트들의 자발적 배제를 제한하는 것은 하층에서 좀더 포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에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상층부에 특권이 누적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소득 불평등은 넓은 범위에 걸쳐 증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1980년에서 1990년까지 60퍼센트의 소득 수입이 인구의 상위 1퍼센트에게 돌아갔다. 반면 빈곤층 25퍼센트의 실질 수입은 30년 동안 일정한 수준에 머물렀다. 영국은 덜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유사한 경향이 나타났다. 최고 소득 노동자와 최저 소득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과거 50년보다 확대되었다. 노동인구의 대다수는 실질 소득 측면에서 20년 전보다 더 좋아졌지만, 빈곤층 10퍼센트는 실질 소득이 감소했다. 포용적인 사회 : 포용으로서의 평등 ; 제한적인 능력지배 ; 공적 영역(시민 자유주의)의 부 흥 ; 노동 사회를 넘어서 ; 적극적인 복지 ; 사회투자 국가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지속될지, 흑은 악화될지는 알 수 없다. 기술 혁신은 평가하기 어렵고 어느 시점에서 불평등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역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어떤 경우라도 처음에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장 철저한 연구들에서 측정된 것처럼, 일부 선진국에서 소득 불평들은 과거 30년 동안 증가하기보다는 감소해 왔다. 물론 우리는 소득에 대한 자료가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제2 경제의 측정은 단지 추 측이기 때문이다. 제2 경제가 불평등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할지라도 다른 영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비공식적인 경제활동, 물물 교환과 사적인 현금 거래는 보통 빈곤 층 사이에서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 자유주의 정부를 오랫동안 경험했던 국가들이 다른 국가들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의 증가를 보여 준다. 대표적인 국가 들은 바로 미국, 뉴질랜드, 그리고 영국이다. 정치 저널리스트인 미키 코스(Mickey Kaus)는 미국에 대해 쓴 글에서 경제 자유주의 와 시민 자유주의 를 구별할 것을 제안했다.(주4)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격차는 계속 증가할 것이고, 아무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적 영역은 시민 자유주의 를 통해서 재건될 수 있다. 코스는 공적 영역이 비워지는 것이 중단될 수 있고, 상층부에서의 사회적 배제에 대처하는 것이 단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올바로 지적했다. 그러나 경제 적 불평등은 확실히 배제 메커니즘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줄이기 위한 노 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유럽의 경우에 중요한 요소는 복지 지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근본적인 개 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복지제도는 자원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다른 전략들도 고려될 수 있다. 그 중 어떤 것은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 면 종업원 주식 소유제는 실질적인 재분배를 의미한다. 소득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기본 요 인의 하나는 성적 평등의 증대이다. 사회가 점점 불평등하게 변하고 있다는 단순한 주장과 는 대조적으로 성별에 따른 소득 불평등은 감소하고 있다. 가족의 변화가 불평등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영국에서는 1994년에서 1995년까지 상위 20퍼센트의 소득자 중에서 절반이 혼자 사는 전업 근로자이거나 전업으로 맞벌이하는 부부였다.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편부 또는 편모의 노동시장 참여를 지지하는 정부의 정책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을 회복하는 시민 자유주의 가 상층부에서 포용적 사회를 만드 는 데에 기본적인 부분이 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이런 자유주의가 부활되고 유지될 수 있을 까? 세계주의적 민족을 성공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자신을 민족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 내부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을 쉽게 인정한다. 책임 있는 기업 정신의 개발 또한 적절한 것이다. 사회적 유대라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은 새로운 부유한 기업가뿐만 아니라 전문적이 고 재력이 있는 중간 계급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적 영역에서 퇴출하도록 위협하는 구분 선에 가장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공공 교육의 질적 개선, 재원 조달이 제대로 되는 의료 서 비스의 유지, 안전한 공공 편익시설의 증진, 범죄율 통제 등도 관련이 있다. 이것은 복지국 가의 개혁이 안전망에 국한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이익을 주는 복지제도만이 시민들의 일반적인 도덕성을 고양할 것이다. 복지 가 소극적인 의미만을 갖고, 미국에서처럼 빈민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곳에서는 결과가 분열적으로 나타난다. 미국은 다른 산업국가들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쟁적 개인주의의 본고장인 그 사회에서조차 엘리트들의 반란 이 억제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원인이 존재한다. 사회학자 알란 월프(Alan Wolfe)는 최근의 연구에서, 상층 중간 계급이 보다 광범한 사회로부터 탈퇴하고 있다는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는 미국에서 동부 해안 지역의 자유주의자들만큼이나 보수적인 기독교도들에 의해 공유되 는 사회정의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발견하였다.(주5)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에서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학문 분야에서 자유방임적 접근법을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최고 경영자의 높은 보수가 심지어 지나치게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익이 된다. 왜냐하면 비효율적인 회사나 혹은 제대로 높은 보수를 받지 못하는 경영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의 이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중간 계급의 시각으로 볼 때, 기업의 높은 보수는 이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기적인 개인과 조 직들은 균형을 깨기 때문에 민감한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 (주6) 공적 영역을 잠식하기보다는 그것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정책을 구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의료 혜택은 각계각층 광범위한 사람들의 필요에 부합해야만 한다. 여기서 의료 혜택 은 넓은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하고, 나중에 논의할 적극적 복지 라는 관념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또 다른 예로 환경 오염의 감소는 보편적인 이익을 준다. 실 로 생태 환경적인 전략들은 생활 양식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생태적 이득은 계급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상층부에서의 사회적 배제와 마찬가지로 하층에서의 배제는 자기증식을 하는 경향이 있다. 빈곤의 순환 고리를 깨기 위한 전략들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기초 기술이나 일정한 자격이 없는 성인들이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새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오랜 실직으로 의욕이 떨어진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고양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 불가결하다.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보다 실직률이 다섯 배나 높다. 결국 고용은 취업하기에 적합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주7) 교육과 훈련은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들의 새로운 주문이 되었다. 토니 블레어는 정부의 세 가지 주요 역점 사업을 교육, 교육, 교육 이라고 표현하였다. 진보된 교육기술과 기술훈련은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특히 빈곤 계층과 관련되어 있는 한 명백히 필요하다. 훌륭한 교육 을 받은 국민이 어느 사회에서나 바람직하다는 것을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교육에 대한 투자는 오늘날 정부의 필수사업이고, 가능성의 재분배 를 위한 핵심 기반이다. 그러나 교육 이 직접적인 방법으로 불평등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미국과 유럽에 대한 수많은 비교 연구를 보면 교육이 광범위한 경제적 불평등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막다른 일이 아니라 노동력에 편입되는 것이 비자발적 배제를 방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노동은 다양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개인의 소득을 창출하고, 일상의 안정 감과 목표 의식을 제공하며, 전체 사회의 부를 창조한다. 그러나 포용은 노동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확대되어야 한다. 어느 시점에서나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 할 뿐만 아니라, 노동 윤리가 지나치게 지배하는 사회는 살기에 그리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 기 때문이다. 포용적인 사회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수단을 제공해야 만 한다. 그리고 인생의 목표가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부한 빈곤 계층 구제 프로그램은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더 효과적이어야 할뿐 만 아니라, 민주적인 참여를 더 많이 허용하는 접근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공동체 건설은 저소득층 거주 지역의 경제적 재생을 꾀하는 수단으로서 지원 연줄망, 자조, 그리고 사회 자 본의 형성 따위를 강조한다 빈곤과 싸우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원의 투입이 필요하다. 그런 데 그것은 지방 주도 사업을 지원하도록 적용되어야 한다. 사람들을 혜택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그들을 더 큰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인이 노동을 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혜택을 줄이는 것은 이미 포화 상태인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그들을 몰아넣는 것과 같다. 공동체 건설 사업은 개인과 가족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 제들, 즉 직업의 질, 의료, 자녀 보육, 교육, 그리고 교통수단 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주 8) 4. 적극적 복지사회 복지국가보다 최근에 좌파와 우파를 심각하게 양극화시킨 쟁점은 없었다. 한편에서는 격찬 이, 다른 한편에서는 통렬한 비난이 쏟아진다. 복지국가 (이 용어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 일 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자인 월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는 이 용어를 매우 싫어하였다)의 내용은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적 변화를 겪었 다. 복지사회의 기원은 좌파 사상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 사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회주의 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19세기 말 독일 제국에서 사회보험제도를 만들어 낸 통치 집단은 사회주의를 혐오했던 만큼이나 자유방임경제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 스마르크의 모델을 많은 나라에서 모방했다. 베버리지는 1907년 이 모델을 연구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하였다.(주9) 현재 유럽에 존재하는 복지국가는 국민 권리의 여러 측면과 마찬가 지로 전쟁의 와중에, 그리고 전쟁에 의해 형성되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설립한 제도는 흔히 복지국가의 고전적 형태로 여겨진다. 그러나 독일 에서의 복지국가는 늘 제3부문의 집단과 단체로 이루어진 복잡한 조직을 이용해 왔다. 정책 당국자들은 복지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이들 집단과 단체들에 의존해 왔다. 목적은 그 집단과 단체들이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아동 보육 같은 분야에서 제3부문 집단들은 공급을 거의 독점하였다. 독일에서 복지국가가 성장함에 따라 비영리 부문은 줄어 들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었다. 복지국가들은 제3부문에 대한 의존이나 통합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많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에서는 주로 비영리 조직들이 사회 서비스의 주요 공급 체 계이다. 반면 스웨덴에서는 비영리 조직들이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벨기에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처럼 사회 복지 서비스의 절반 정도가 비영리 집단에 의해 제공된다. 네덜란드 정치학자인 키스 반 케르스베르겐(Kees van Kersbergen)은 현재 (복지국가에 대 한) 논쟁에서 가장 주요한 통찰력의 하나는 과거에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동일시했던 것이 오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주10) 그는 기독교 민주주의가 유럽 대륙의 복지제도와 사회적 시장의 발달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고찰한다. 유럽의 기독교 민 주당들은 제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에서 아주 중요했고, 프랑스 와 이탈리아에서는 다소 덜 중요했던 가톨릭당을 계승하였다. 가톨릭 노조 지도자들은 사회 주의를 적으로 인식하였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계급 타협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공 격하고자 하였다. 1981년에 로날드 레이건은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했던 것들을 정부가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유럽의 가톨릭 전통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교회,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사회적 연대의 주된 요소들이다. 국 가는 이런 기구들이 자신의 의무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만 간섭해야 한다.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문제가 많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제3의 길 정치는 우파가 제기한 일부 비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혜택 배분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 에 복지국가는 비민주적이다. 복지국가의 동력은 보호와 관심이지만, 개인의 자유에 대해 충 분한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몇몇 복지제도의 형태는 관료적, 비효율적이고 소외를 유발시 킨다. 그리고 복지 혜택은 애초에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손상시키는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제3의 길 정치는 이러한 문제를 복지국가의 소멸을 알리는 신호로서가 아니라, 복지국가를 재건해야 할 이유로 인식한다. 복지국가의 문제점들은 부분적으로만 재정과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서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지출 비율이 과거 10년 동안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영국에서는 국내총생산에서 복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1970년대 말까지 근 1세기 동안 꾸준히 증가하였다. 총계 수치가 세출의 분배나 세입의 원천에서의 변화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복지에 대한 지출은 안정되어 왔다.11) 영국에서 복지 예산의 복원력은 마가렛 대처 행정부가 삭감을 결정한 후 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국내총생산에서 교육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5년에서 1995년 사이에 6.7퍼센트에서 5.2 퍼센트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의료 혜택에 대한 지출은 이 기간에 증가하였다. 1975년에 국 내총생산의 3.8퍼센트였던 것이, 1995년에는 5.7퍼센트로 증가하였다(다른 선진국들보다는 낮은 비율이다). 공공 주택 공급은 가장 큰 폭으로 삭감되었는데, 1975년 국내총생산의 4.2 퍼센트에서 20년 후에는 2.1퍼센트로 감소하였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 지출은 대 부분 증가하였다. 1973년부터 1974년까지는 국내총생산의 8.2퍼센트였고, 1995년부터 1996년 까지는 11.4퍼센트에 달하였다. 이 기간에 사회보장 관련 지출은 실질적으로 100퍼센트 이상 신장되었다. 이러한 증가의 기초가 되는 주된 요인은 높은 실업률, 직업을 가진 빈곤층의 증 가, 인구학적 패턴의 변화, 특히 한쪽 부모만 있는 가정의 증가, 그리고 노년층의 증가 등이 다. 이러한 발전은 심각한 종류의 구조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복지제도 전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는 스칸디나비아같이 더욱 포괄적인 복지국가들에게 근본 적인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식 평등주의는 단지 보편적인 복지국가의 산 물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북유럽에서는 대중이 대부분의 다른 서구 국가들보다 높은 조세 수준을 폭넓게 용인하고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업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보험 제도는 압박을 받는다. 상대적 규모가 크기 때문에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주된 고용주이며, 특히 여성을 많이 고용한다. 그러나 그 결과 고용에서의 성별 격리가 다른 산업국가에서보 다 심화되었다. 사회보장 지출의 대규모 증가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제도를 공격하는 주된 원인이다. 그 들은 복지에의 의존이 만연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에 기생하는 사람들 의 수효를 걱정하는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바라보는 좀 더 세련된 방법이 있다. 복지 처방은 종종 최적 미달이거나 흑은 도덕적 해이의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도덕적 해이라는 개념은 개인 보험에서 위험률을 검토할 때 광범위하게 이용된다. 도 덕적 해이는 사람들이 보험의 보장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보험 든 위험성을 다시 규정함으로 써 행동을 변경할 때에 발생한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 보장되는 보험금이 다시 규정된다. 복 지 공급이 의존적 문화를 생성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제공된 기회를 합리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국민보험 급부는 실업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러나 만일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피난처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실제로 실업을 양산할 수 있다. 스웨덴 복지 제도를 배경으로 저술한 경제학자 아싸르 린드벡(Assar Lindbeck)은 강력한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실업, 질병, 장애 또는 복지국가가 보상하는 다른 표준적 위험성에 영 향받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부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국민보험 급부금이 많을수록 의도적인 실업뿐만 아니라 도덕적 해이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는 도덕적 해이가 단기간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심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왜냐 하면 사회적 습관이 장기간 축적되어 무엇이 정상적 인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 면 심각한 혜택 의존도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여겨지지 않고 단순히 기대되는(expected) 행 동이 된다. 그 결과로 사회적 부조를 요청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건강을 핑계로 결근하는 경 우가 많아지며, 구직이 줄어든다.(주12) 원래 의도한 목적을 성취하든 않든 혜택은 한번 만들어지면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갖는다. 이렇게 되면 기대는 고정화(locked in) 되고 이익 집단들은 자신의 입장을 굳히게 된다. 예 를 들면, 연금제도를 개혁하려고 하는 국가들은 일치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늙었기(60세 나 65세) 때문에, (비록 비용을 다 부담한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몫을 납부했기 때문에, 이전에 다른 사람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정년퇴직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등등, 많 은 사람들이 연금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정체 현상은 그 자체가 개혁의 필요성을 반영한다. 왜냐하면 복지국가는 정부의 다른 부문만큼이나 광범한 사회적 추세에 대해 반응하고 역동적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복지제도가 만들어 낸 고착된 이해 관계 때문에 복지 개혁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근본적 사업 계획의 윤곽은 매우 쉽게 그려 낼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복지국가는 자원보다는 위험성을 공동 부담하는 것이다. 사회 정책의 결 속을 형성하는 이유는 남달리 특권을 가진 집단들이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과 위험성 의 재분배에 공통된 이해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주l3) 그러나 복지국가는 새 로운 형태의 위험성, 즉 기술적 변화, 사회적 배제 흑은 결손 가정의 가속적 증가 등을 보상 할 태세가 되어 있지는 않다. 두 가지 종류의 부당한 결합이 존재한다. 보상되는 위험성은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과 적합하지 않은 집단들이 보호를 받는 것이다. 복지를 개혁하려면 앞서의 논의에서 위험성에 관하여 주장된 요점들을 인식하여야 한다. 효 과적인 위험성 관리(개인적 또는 집단적)는 위험성을 최소화하거나 그것에 대하여 보호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위험성의 긍정적 혹은 활력적인 측면을 이용하고, 위험의 감수에 대하여 자원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극적인 위험 수용은 기업 활동에 고유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노동 인구에도 적용된다. 혜택을 포기하고 직업을 찾는 것, 혹은 특정한 산업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은 위험성으로 고취된 활동이다. 그 러나 이러한 위험 수용은 개인에게, 좀더 넓게는 사회에게 종종 이익을 준다. 1942년에 <사회 보험과 관련 혜택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를 썼을 때, 베버리지는 궁핍, 질병, 무지, 불결, 그리고 나태와의 전쟁을 선언하였 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초점은 완전히 소극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적극적인 복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개인과 정부 외의 다른 기관들이 적극적 복지에 공헌해야 한다. 적 극적 복지는 부의 창조에 순기능을 한다. 복지는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개념이 아니고, 잘 사 는 것과 관련되므로 심리적인 개념이다. 경제적 혜택이나 이득은 사실상 복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복지는 복지국가 외의 다른 맥락과 영향에 의해 만 들어진다. 복지 제도는 경제적 혜택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혜택의 육성과도 관련되어야 한다. 매우 평범한 예를 살펴보자. 상담은 종종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비록 이런 제안들이 복지 제도의 현실적인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들릴지라도, 복지 개혁과 관계없거나 복지 개혁을 조명해 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않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 다. 명심할 것은 경제적 부양비를 직접 제공하기보다는 되도록 인적 자본(human capital) 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지국가 대신에 적극적인 복지사회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사회 투자 국가(social investment state) 를 건설해야 한다. 복지국가 가 복지사회 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복지 문제를 다룬 최근의 문헌에서는 통상적인 것이 되었다. 제3부문 기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못 하는 곳에서는 그것들이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좀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혜택의 하향식 배분은 좀더 지 방적인 차원에서 분배되도록 바뀌어야 한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복지 제공의 개선이 시민사 회의 적극적인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과 통합되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5. 사회투자 전략 흔히 복지국가라는 항목 아래에는 여러 가지 제도와 서비스가 함께 분류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사회보장에 대한 논의에 한정하고자 한다. 사회투자 국가는 사회보장 제도의 측면에 서 어떤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 두 가지 기본 영역, 즉 노령인구와 실업에 대한 대책을 살펴보자. 노령인구에 대한 급진적 관점은, 연금 지급에 대한 논쟁이 흔히 이루어지는 테두리를 벗어 나 좀더 근본적으로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대부분의 산업사회에는 노령인구가 존재하는데, 연금이라는 시한 폭탄 때문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과 같은 몇 몇 국가에서 적당한 수준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에조차 연금 약정은 제공할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고 있다. 영국과 같은 다른 사회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국가연금 약정을 적극적으로 줄여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국은 연 금을 평균 소득이 아니라 평균물가 지수에 연동하도록 하였다. 적절한 수준의 국민연금은 필요하다. 또한 의무 적립 계획을 유지시키는 합당한 이유도 있 다. 영국은 다른 법령 규정 없이 소득보다는 물가에 연금 인상을 연동시킴으로써 많은 정년 퇴직자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1998년에 50세인 사람이 61세에 퇴직한다면 성인 남자 평균 소득의 단지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의 정부연금을 지급 받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직 업연금이나 개인연금을 가지고 있지 않다.(주14) 다른 국가들은 좀더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 해 왔다.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이 결합되어 연금을 적립하는 예가 많고, 이 중 몇몇 경우는 일반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핀란드식은 소득과 수입에, 국가 보증의 기본 최소 연금과 함께, 규정된 민간 부문 급여를 결합시킨다. 그러나 연금 문제에 대한 관심은 누가, 얼마만큼, 어떤 방법으로 지급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넘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야 한다. 아울러 노령이 무엇이고 사회 변화가 노인의 지위에 어 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재고해야 한다. 적극적인 복지는 다른 경우처럼 이런 경우에도 적용 된다. 단지 경제적 혜택의 관점에서만 사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령 문제는 과거 형태인 듯이 보이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위험성이다. 과거 노령화는 지금보다 더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노령화되는 신체는 단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더욱 적극적이고 반응적인 사회에서 노령화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 측면에서도 훨씬 열려진 과정이 되었다. 늙는다 는 것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회를 제공한다. 정년퇴직 연령부터 시작되는 연금의 개념, 그리고 연금 생활자 라는 꼬리표는 복지국가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노령화의 새로운 현실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분명한 복지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것은 무능력을 암시한다. 많은 사람들 에게 퇴직은 자존심을 잃게 만든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퇴직이 60세나 65세의 노령 으로 처음 정해졌을 때, 노령층의 상황은 현재와 무척 달랐다. 1900년에 20세가 된 영 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겨우 62세였다. 우리는 고정된 정년퇴직 연령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노령인구를 문제 라기보다는 자원으로 인식해야 한다. 연금 생활자라는 범주는 연금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사 라질 것이다. 연금 기금을 정년퇴직 연령 에 도달하는 것에 고정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면 이러한 재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일정한 시기에 노동시장을 떠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양육할 때 학자금을 조 달하거나 노동 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주15) 개인들이 어떤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찍 그 직업을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 법 률의 정년퇴직 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노동시장에 주는 의미에 비추어 중립적일 것이다. 국 가가 미래의 연금 약정을 과도하게 확대한 곳에서는 이러한 규정들이 그 자체로는 연금 지 급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공적인 재원과 사적인 재원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금 문제를 둘러싸고 혁신적인 사고 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노령인구를 다수로부터 분리하여 퇴직자 거주지에 몰아넣는 사회는 포용적이라고 할 수 없 다. 다음과 같은 철학적 보수주의의 교훈이 다른 경우에서와 같이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노령이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시기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버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유 명하다. 사회란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일 뿐만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그리고 태어날 사람들 사이의 동반자 관계이다. (주l6) 이러한 동반자 관계는,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맥락에서, 공동 연금이라는 개념에 의해 성립된다. 공동 연금 이 세대간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간 계약은 분명히 이것보다는 심화될 필요가 있다. 젊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들 에게서 기꺼이 모범을 찾아야만 하고, 늙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미래 세대들에게 봉사한 다고 여겨야만 한다.(주17) 존경이 사라지고, 연령이 더 이상 지혜를 가져다준다고 여기지 않는 사회에서 이러한 목표가 현실적인가? 몇 가지 요인들은 아마 그럴 것이라고 암시한다. 노인 으로 사는 기간이 과거보다 더 길 것이다. 인구 분포 중에는 훨씬 더 많은 노년층이 존재하고, 그러므로 노년층은 사회적으로 더욱 눈에 띌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과 공동체 에 대한 노인 참여의 증가는 노인들을 젊은 세대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 다. 지속적인 보호가 필요한 허약한 노년층의 존재는 더욱 어려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85세 이상의 인구가 1900년보다 20배나 많다. 많은 비교적 젊은 노인들 은 두서 너 세대 이전의 동일한 연령 집단과는 매우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상당수가 어렵 게 지내고 있는 나이 많은 노인 은 사정이 다르다.(주18) 어떠한 공동 재원이 허약한 노년층 에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단지 배급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매우 근본적 인 종류의 도덕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이 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당면 문제들이 있다. 실업은 어떤가? 완전 고용이란 목표는 더 이상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 는 것처럼, 고용과 탈규제화된 노동시장 사이에 직접적인 교환이 있는가? 미국이 낳은 일자 리의 기적 (jobs miracle) 과 유럽의 동맥경화증을 대비시키는 것인가? 우리는 먼저 미국 과 유럽 모델 사이의 단순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경제학자 스테픈 니켈 (Stephen Nickell)이 보여 주는 것처럼, 유럽에서의 노동시장들은 많은 다양성을 보여 준다. 1983년에서 1996년까지 유럽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들 사이에는 다양한 실업률의 편차가 존재했다. 최저는 1.8퍼센트인 스위스였고, 최고는 20퍼센트인 스페인이었다. 이 기간에 이 기구에 가입한 국가들 중 30퍼센트는 미국보다 낮은 평균 실업률을 기록했다. 실업률이 낮 은 나라들, 특히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노르웨이가 가장 탈규제화된 노동시장을 가지고 있 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엄격한 고용 입법과 같은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실업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높은 실업률은 무제한적으로 지속되는 후한 실업 급여, 그리고 배제 현 상으로서 노동시장 하층부에서의 빈약한 학력과 관련이 있다.(주19) 제3의 길의 입장은 전면적인 탈규제가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지 지출은 미국 수준보다는 유럽 수준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능한 한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 로 전환되어야 한다. 도덕적 해이가 야기되는 곳에서 급여 제도는 개혁되어야만 한다. 그리 고 가능하면 유인책을 통해서, 필요하다면 법적인 강제를 통해서, 좀더 능동적으로 위험을 수용하는 태도를 촉진시켜야 한다. 이 단계에서 네덜란드모델 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이 아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모델은 때때로 사회민주주의를 새로운 사회 경제적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용시켰다고 평가된 다. 16년 전 바쎄나르에서 체결된 협약에서 네덜란드 노동조합들은 작업 시간의 점진적인 축소와 교환하여 임금의 경감에 합의하였다. 그 결과 노동 임금은 과거 10년 동안 30퍼센트 이상 감소한 반면에 경제는 번영하였다. 이러한 번영은 1997년 6퍼센트 이하라는 낮은 실업 률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네덜란드 모델은 적어도 일의 창출과 복지 개혁이라는 측면 에서는 그리 인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실업자로 간주되는 상당 수효의 사 람들이 장애 국민 보험 급부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사실 이 나라에는 공식적인 실업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 부적격자로 등록되어 있다. 전일제 근무를 하는 15세에서 64세까지 의 인구는 51퍼센트로 1970년보다 감소하였다. 1970년에는 유럽 평균인 67퍼센트에 훨씬 못 미치는 60퍼센트 정도였다. 과거 l0년 동안 창출된 직업 중에 90퍼센트는 시간제 근무였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소득 중 사회보장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큰 국가이며, 복지 제 도는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주20) 직업 창출과 노동의 미래를 위한 전략은 새로운 경제적 위급성에 대한 방향 설정에 기초할 필요가 있다. 기업과 소비자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위해 요청되는 기준의 측면에서 점점 세 계적인 규모로 활동하고 있다. 유통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따라서 최상품 이 더 이상 서 비스, 상품의 생산지와 일반적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 소비자들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구매 한다. 이러한 기준에 부합해야 하는 압력이 또한 노동 인구에게도 더욱더 많이 적용될 것이 다. 어떤 맥락에서 이러한 압력은 사회적 배제 과정을 심화시킬 것 같다. 육체 노동자와 지 식 노동자 사이, 혹은 고숙련공과 저숙련공 사이의 격차뿐만 아니라, 견해가 국지적인 사람 들과 더 세계주의적인 사람들 사이의 격차도 생겨날 것이다.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가 기업이 주요 경제 부문에서 힘을 발휘하는 수단의 주된 원천이라 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는 서로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700개의 대기업을 비교하였다. 연구 결과는 인적 자원 투자 지수에서의 미세한 차이가 주식 배당금 을 4만 1,000달러까지 증가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주21) 기업 분석가 로사베트 모스 캔터 (Rosabeth Moss Kanter)는 정부 정책이 직업 창출을 도울 수 있는 다섯 가지 주요 영역을 밝혀 냈다. 중소기업의 창업이나 기술 혁신과 관련된 기업가 주도 사업(entrepreneurial initiatives) 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많은 나라들, 특히 유럽에서는 고용을 창출하기 위 해, 공공 부문을 포함하여 이미 확립된 경제 장치에 아직도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 소비 자가 사실상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세계에서, 기업가 정신에 따른 새로운 사고 없이는 경쟁력이 결여된다. 기업가 정신은 직업창출의 직접적인 원천이다. 그것은 또한 기술 발전을 추진해 내고, 직업을 전환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영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부 정 책은 기업가 정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벤처 자본의 형성을 도와주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또한 기업가의 모험이 잘못되었을 때, 안전 장치를 제공하도록 복지 제도 를 재조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1년 단위가 아니라 2년이나 3년 주기로 세금 을 낼 수 있도록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이다. 정부는 평생 교육을 강조하고, 개인들이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 일생 동안 지속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만 한다. 직업을 바꾸는 데 특별한 기술 훈련이 많이 필요하긴 하 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황을 인식하고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정 책은 무조건적 국민보험 급부에 의존하는 대신에 저축, 교육 자원과 다른 개인적인 투자 기 회를 이용하도록 장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공 사업에서의 협력은 공익이 중심이 되면서도, 사기업이 과거에 정부가 제공했던 활동에 서 더 많은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되면 이번에는 공공 부분이 기업의 번영을 돕는 동시에 그것 없이는 공동 사업이 실패할지도 모르는 자원을 기업에게 제공할 수 있다. 모스 캔터는 미국에서 일하기 위한 복지 프로그램이 때때로 통근 문제로 좌초했음을 지적한다. 기업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노동자들은 적당한 교통 수단이 없어서 쉽게 취업할 수 없었다. 정부 정책은 교육에 공통 기준을 마련하거나 연금 권리를 다른 곳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함으 로써 휴대 가능성(portability) 을 높일 수 있다. 이를테면 교육 현실과 기준을 조율하는 것 은 범세계적인 노동 인력을 위해 바람직하다. 세계적인 규모를 갖춘 몇몇 기업은 이미 표준 입사 자격을 설정했는데, 정부가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다른 분야에서처럼 조율은 교 육의 다양성과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고, 심지어 그것을 유지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가족 친화적 작업장 정책을 촉진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공공과 민간의 협력을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 기업들이 다양한 것처럼, 각 나라에서 제공하는 아동 보육 지원 수준은 매우 다양하다. 아동 보육뿐만 아니라 재택 근무 혹은 안식년제 같은 또 다른 노동 기회들은 고용과 가사를 조화시키도록 도울 수 있다. 기업들이 인적 자원을 강조할수 록 더욱더 경쟁적으로 가족 친화적인 작업 환경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그들을 돕는 정부는 내적 투자를 유도하려고 할 것이다.(주22) 이러한 전략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완전 고용, 즉 많은 일들이 충분히 있어서 그것을 원하 는 누구에게나 고루 돌아갈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무도 쉽게 대답할 수는 없 지만, 어쨌든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전업이나 장시간 근무하는 일자리의 비율은 서방경 제에서 줄어들고 있다. 미국 혹은 영국 같은 완전고용 경제 와 독일 혹은 프랑스 같은 높은 실업 사회 사이의 비교는, 일자리의 수효가 아니라 창출된 노동 시간을 비교할 때 더욱 모 호해진다. 1986년에서 1996년까지 10년 동안 안정되고 좋은 보수를 받는 숙련 노동에 대한 직업 창출의 순증가는 미국과 독일에서 2.6퍼센트로 동일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노동 생산성은 독일에서 두 배로 증가한 반면 미국에서는 단지 25퍼센트만 증가하였다.(주23) 범세계적 자본주의가 미래에 충분한 직업을 창출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명확히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그럴 것처럼 논의를 진행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직업의 적극 적인 재분배 가 역효과를 일으키지 않고 가능한가? 아마도 정부에 의해 고정된 주당 노동 시간의 제한이라는 형태로써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 계획이 가진 난관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러나 만일 이것을 좀더 넓은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는 직업의 재분배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 한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고, 주안점은 그것의 긍정적 인 측면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레노블에 있는 휴렛 패커드 공장에서의 실험이 많이 인용되 고 있다. 그 공장은 일주일 내내 24시간을 한 주기로 가동된다. 고용자들의 주당 노동 시간 은 평균 30시간을 약간 상회한다. 그러나 주당 37.5시간 노동했을 때만큼의 보수를 받는다. 노동 생산성은 상당히 증가했다.(주24) 시민 문화의 부활은 제3의 길 정치의 기본적인 열망이기 때문에, 사회적 경제에 정부가 적 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말 그대로의 완전 고용이 문제시되는 상황에서 우 리는 사회적 경제에 더욱 참여할 것인지, 혹은 불법적인 문화 의 성장에 직면할 것인지 단 호하게 선택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타임 달러 계획과 그림자 임금, 즉 사회적 경제에서 일 한 시간만큼 감면되는 세금 등 가능성은 많이 존재한다. 유럽 전반에 걸친 다양한 연구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직업과 함께 직업 말고 다른 부문에 헌신할 기회를 모두 추구하고 있다. 만일 사회가 이런 헌신적 정신을 드높이고 보상하여, 수 익이 있는 일자리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결속을 둘 다 만들어 낼 수 있다. (주25) 요컨대, 급진적으로 개혁된 복지국가, 즉 적극적인 복지사회에서의 사회투자 국가는 어떤 것 인가? 적극적인 복지로서 이해되는 복지에 대한 경비는 전적으로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업을 포함한 다른 기관들과의 결합을 통해 작동하는 국가에 의해 생성되고 분배될 것이 다. 여기서 복지사회는 단지 국가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위와 아래로까지 확장된다. 예를 들면, 환경 오염의 규제는 정부 혼자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확실히 복지와 직접적 으로 관련된다. 적극적인 복지사회에서는 개인과 정부 사이의 계약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개 인적 책임 확장의 매개물인 자아의 발전과 자율성이 주된 초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 적 의미에서 복지는 빈자뿐만 아니라 부자와도 관련된다. 적극적인 복지는 베버리지가 제기한 각각의 소극적 요소들을 적극적인 것으로 대체시킬 것 이다 궁핍 대신에 자율성을, 질병이 아니라 활력적인 건강을, 무지 대신에 생활의 지속적인 일부로서의 교육을, 불결보다는 안녕을, 그리고 나태 대신에 진취성이 그것들이다. 제5장 범세계화 시대로 Into the Global Age 사회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한 의제와 실천 계획들은 논쟁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여러 국가, 여러 차원으로 확산될수록 바람직하다. 1. 범세계화 시대의 민족의 새로운 역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세계화 시대에서 민족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등장하고 있는 범세계적 질서는 순수한 시장(pure marketplace) 으로서 지속시킬 수 없다. 시장은 통합시키 는 것만큼 분열시킨다. 누군가가 예측했던 대로, 수천 개의 도시 국가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울 것이다. 파편화에 대한 반대 요인으로서, 즉 안정화 세력으로서 민족 역할을 재정 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체성과 명확한 소속감은 잠재적으로 분열적이다. 민족에 소속된다 는 것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이 얼마나 현실적인가? 어쨌든 국 민국가와 민족주의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민족은 시민권이라는 통합적 메커니즘 을 제공한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실제로 민족주의자들의 열 망이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수많은 파괴적인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의 분열적인 속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속성을 제 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민족에 대한 세계주의적인 해석이다. 이러한 세계주의 는 민족국가들 간의 대규모 전쟁이 사라질 수 있게 하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조건이기도 하 다. 강한 국가(strong state) 는 전쟁에 잘 대비한 국가를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의미 는 변화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주권의 새로운 한계를 수용할 만큼 그 스스로 에 확신을 갖는 민족이다. 2. 세계주의적 민족 국민국가는 전통적인 국가의 속성이던 확실치 않은 변경(frontiers) 대신에 분명한 국경 (borders) 이 발전되면서 최초로 형성되었다. 국경은 지도에 명확히 그어진 선이다. 국경은 민족의 영토를 나타내며, 이를 침범한다는 것은 그 민족의 통합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 다. 국가는 다시 국경보다는 변경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동일한 이유 때문에 그 러한 것은 아니다. 초기 국가들은 부적절한 정치적 기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변경을 갖 고 있었다. 초기 국가들은 경계선 바깥에서는 권위를 내세울 수 없었다. 오늘날 국가들의 국 경은 다른 지역들과의 유대와 모든 종류의 초국가적 집단들에의 관여로 인해 변경이 되고 있다. 유럽연합이 바로 그 원형이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경계의 유연화가 일어나고 있다. 민족적 정체성은 이중성 혹은 다중적 소속에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만 좋은 영향 요인이 될 수 있다. 잉글랜드인인 동시에 영국인이요 유럽인이며, 동시에 범세계적 시민 의식을 지닌 개인들은 이것들 중 어느 하나를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들 중 어느 하나의 특별한 정체성을 가진다고 해서 다른 정체성들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외국인에 대해 혐오적인 민족주의는 이것과는 정반대로 다음과 같은 입 장을 갖는다. 국가는 하나이고 나누어질 수 없다. 민족은 문화적 보호주의를 내세우고, 그 것이 운명 을 지니고 있다는 점, 즉 그 민족이 다른 민족과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 른 민족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러나 민족은 운명을 지니지 않으며 모든 민족 들은 예외 없이 혼혈 민족(mongrel nations) 이다. 민족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 다. 민족은 초기의 종족 공동체와 어느 정도의 소원한 연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적으 로 최근 역사의 산물이다. 민족들은 모두 다양한 문화적 부분 집단들로부터 형성되었다. 정치 철학자인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는 민족주의에 관한 그의 저작에서, 민족과 민족 주의에 대하여 좌파들이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두 개의 견해를 반박한다. 하나는 민족주의 가 본질적으로 감정 혹은 정서의 문제이며 합리적인 내용이 결여되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가 본질적으로 좌파의 가치들에 적대적인 정치적 우파의 신조라는 견해이 다. 밀러는 우리는 이미 상이한 형태들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반면, 이런 견해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단일한 것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민족의 원리(the principle of nationality) 는 수많은 주장에 기초한다. 민족 정체성은 개인적 정체성의 확실한 원천이다. 민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그들의 정체성의 요소로 개인이 경험하는 것은 환상이 아니다. 그들이 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것은 도덕 적으로 옹호할 만하다. 민족은 관련된 사람들이, 외부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렇지도 않지만, 다른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의무를 지고 있는 윤리 공동체이다. 민족은 자기 결정을 위한 초 점을 제공한다. 민족은 시민들이 일반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그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허용하 는 국가 구조를 발전시켜야 한다. 민족은 또 다른 특성으로 인해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을 각별히 일관성 있게 결합한다. 민족은 자발적인 결사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공동체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운명 공동체 내부에서 동포들과 결속을 이룬다. 게다가 이러한 공동체들은 ... 스스로를 역사적으로 확장된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의 의무는 현재의 구 성원들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구성원들에게도 주어진다. ... 우리는 문화적 다원주의와 현대 문화의 변환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민족의 원리를 고수해야만 한다. (주1)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민족 개념이 종족적, 문화적 다원주의와 공존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보수주의적 민족주의의 대답은 이렇다. 통합된 민족 (unitary nation) 은 최고의 위치에 군림해야만 한다. 즉, 한 민족(one nation) 이 과거로부터 전수된 것이고 문화적 오염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 민족 공동체의 값어치는, 어떤 우파 학자가 주장하듯이, 신성성, 완고성, 배타성 그리고 삶의 의미가 복종과, 적에 대한 경계에 기인한다는 의식 이다.(주2)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일부 좌파의 급진적 다중문화주의는 매우 상이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보다 광범위한 연대를 위해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문화적 다원주의를 포용해 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견해에서는, 민족 정체성은 다른 문화적 주장들에 대해 어떤 우월 성도 가지지 않는다. 사실, 민족 정체성은 종종 기원이 불분명하고, 인위적으로 구성되었으 며 지배 집단의 이익에 이용된다고 여겨진다. 3. 문화적 다원주의 오늘날 특수한 집단에 소속되는 것이 반드시 민족 정체성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개인과 집단들이 그들의 이웃 혹은 종교에 대해 지니는 충성심은 민족적 소속감과 충돌하지 않는 다. 종족 정체성과 때때로 종교 정체성은 그 포괄적인 속성 때문에 가장 큰 문제들을 만들 어 낸다. 그러나 이런 집단들에 관한 급진적 다중문화주의의 주장은 사실을 오도하고 있다. 종족 정체성은 민족 정체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모든 종족 정 체성은 상당 부분 권력 사용의 결과이며 다양한 문화적 원천으로부터 창조된 소산이다. 종 족의 영역에는 민족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라는 것이 없다. 게다가, 급진적 다중문화 주의는 그것이 거부하도록 만드는 민족 공동체를 상정하고 있다. 다중문화주의적 정치의 목 적은 억압받는 집단들에 대한 착취를 반대하는 것인데, 이는 전적으로 칭찬할 만하다. 그러 나 이것은 광범위한 민족 공동체의 지원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집단들의 요구나 불평을 넘 어선 사회적 정의감이 없다면 성취될 수 없다. 다중문화주의자들이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그 집단 다수가 갖는 공정 의식에 달려 있다. 이 공정 의식은 만약 요구를 제 기하는 집단들이 다수와 같이 동일한 공동체에 속한다는 정체성을 거부한다면, 약화되기 쉽 다. (주3) 물론 현재의 사회적 경향이 세계주의적 민족 형성의 가능성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할 수 도 있다. 한편에는 종족적 부족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국가들의 지역적 분할에 직면하 여, 민족 정체성이 무너짐과 동시에 앞에서 언급된 파편화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분열되었다. 벨기에가 계속 유지될지 이탈리아 북부가 남부로부터 분리될지 혹은 바스크 사람들이 독립 국가를 형성할지 그 누가 알 수 있 겠는가? 그러나 모든 것이 파편화되는 것은 아니다. 두 국가였던 독일이 하나가 되었고 똑같은 일이 아마 결국은 한국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부족주의(tribalism) 는 어떤 지역과 맥락에서는 약 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북아일랜드에서의 종족적 갈등은 유럽에서는 예외적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이것에 반대하는 헌법적 타협이 모색될 것처럼 보인다. 세계주의적 민족은 적극적인 민족이다. 그러나 민족 형성은 그것이 현실주의적 국제 관계 체제의 일부였던 이전 세대와는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 과거의 민족은 대부분 다른 민족 들에 대한 적대감으로부터 형성되었다. 린다 콜리(Linda Colley)가 제시하듯이 영국의 경우는 가톨릭계인 프랑스에 대해 적대적이 었다.(주4) 오늘날 민족 정체성은 예전과 같은 수준의 포괄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다 른 충성심이 그와 더불어 존재하는 협조적인 환경에서 지속되어야만 한다. 사회의 다른 영 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 정체성은 보다 공개적이고 반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이 암시되고 있다. 이 점이 민족과 민족의 열망과 관련하여 독특한 바를 이전보다는 다소 덜 당연하게 여겨지는 방식으로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국경이 불분명해지고, 지방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집요해 짐에 따라 민족 정체성이 재구성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수수께끼가 되고, 일관성 있는 답변이 요청되 고 있다. 어쨌든 영국인다운 것 은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의문스럽다. 정치 사상가인 버나드 크릭(Bernard Crick)이 언급한 것처럼, 나는 동의된 구어체 이름이 없는 나라의 시민이다. (주5) 많은 사람들은 브리튼(Britain) 을 의미하면서 잉글랜드(England) 라고 말하는데 때때 로 그와 반대로 하기도 한다. 여기서 브리튼 은 영본국(Great Britain, 잉글랜드, 스코틀랜 드, 그리고 웨일즈) 혹은 연합왕국(United Kingdom, 영본국과 북아일랜드) 과 기술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권력의 지방 이양이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민족 의식을 첨예하게 만들 것 이다. 사실은 스코틀랜드가 완전 독립을 주장할지도 모른다. 북아일랜드는 만약 협정이 효력 을 발생하게 되면 아일랜드와 영국 본토에 모두 연계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국에는 많은 종족 및 소수 집단들이 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이 다. 이런 이질성은 포괄적인 민족 정체성을 재형성하려는 시도를 좌절시킬지도 모른다. 그러 나 이질성 그 자체가 장벽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주의적 민족이라는 의미의 일부이 고 단위이다. 많은 국가들이 당면한 주요 쟁점들 중의 하나는 이민이다. 미국은 그 시초부터 이민 사회였 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20년 전보다 훨씬 더 이질적인 인구를 지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은 명목상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사실상 이민 국가이다. 독일의 인구 구성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변모되어 왔다. 1990년 프랑스 이민자의 4배나 되는 많은 이민자가 독일로 갔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에 유입된 이민자의 8배가 된다. 독일은 1995년에 1,100만 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반면 미국으로 간 이민자는 72만 명이었다.(주6) 전세계의 연구들이 이민은 이주국에 이익이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은 오랫동안 인종주의를 형성시키는 풍부한 토양이 되어 왔다. 보통 이민자들은 일하기를 원하 고 때때로 토착 인구보다 훨씬 더 근면하다. 이민 온 사람들은 번영하길 원하고, 그렇게 함 으로써 소비자가 되며, 직장을 빼앗기보다는 창출한다. 반감 혹은 증오를 유발하는 바로 그 문화적 차이들이 그 사회 전체를 활성화하는 경향이 있다. 국경을 개방한다는 1985년의 쉥엔(Schengen) 협정에 서명한 국가들은 역외경계(external boundaries) 를 가진 유럽연합의 회원국가들이 순찰을 엄격하게 행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1998년 6월, 프랑스는 쿠르드족 피난민들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국경 에 지원 경찰을 파견했다. 독일은 이탈리아에 도로상 검문소를 설치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 고 폴란드와의 국경 지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쉥엔 협정은 유고슬라 비아와 이후 알바니아로부터의 망명자들이 유입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유효하다. 세계주의와 다중문화주의는 이민 문제를 둘러싸고 결합된다. 세계주의적 관점은 범세계화되 는 질서 속에서 다중문화적 사회의 필요조건이다. 세계주의적 민족주의는 그런 질서와 병존 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민족 정체성이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독일은 민 족 정체성을 새로이 검토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 독일은 양극적 세계에 의해 실제로 둘로 갈라졌던 유일한 사회였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이 평등한 다른 국 가들 중에서 최고가 되는 유럽연합에 일정 수준의 경제적, 문화적 자율성을 이양하는 반면 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야만 한다. 독일은 유럽적 상황에서 세계주의적 민족주의의 시험적 사례이다. 왜냐하면 독일은 공식적 으로 다중문화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귀화는 현재 출생지가 아니라 혈통에 바탕을 둔다. 독일에서 태어난 이민자 자녀들은 외국인으로 머물러 있는 반면, 다른 나라에서 독일 혈통 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독일 시민권을 주장할 수 있다. 세계주의적 정체성을 선구적으로 개척하기 위해서 시민권법은 변화되어야 하고 중요한 문화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 주의적 민족은 시민 모두가 그것에 헌신적일 수 있는 가치와 그들이 편안해할 수 있는 정체 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세계주의적 민족은 또한 모호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지녀야만 한 다. 선량한 세계주의적인 민족주의는 실제로 가능한가? 앞에서 논의된 다른 개념들처럼, 그것은 이상에 불과하지만 범세계적 질서가 변화하는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현실로부터 그렇게 동떨 어진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의 냉정한 영국(Cool Britainnia) 과 영국의 인상바꾸기 (rebranding Britain) 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것들이 비록 서툴다 해도, 다른 정체성과의 대화 속에서 민족 정체성이 적극적으로 형성될 필요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현실주의 이론에 의하면, 자신의 이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행동을 하는 민족들과 권력 블록들은 세계 무대에서 권력의 중재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규정적 이론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국가 지도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범세계화 의 영향과 더불어 양극화 시대의 종언이 국가 주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범세계화는 국제화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범세계화는 민족들 사이의 더 욱 긴밀해진 유대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범세계적 시민사회의 등장과 같은 과정에도 관련된다. 적이라기보다는 위험성과 위협에 직면한 국가들은 세계를 현실주의적 개념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현실주의 는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신념이 진부 해지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용어이다. 4. 세계적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와 세계주의적 민족은 단순히 외부적(external) 이라고 다루어질 수 없 는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적 경합장과 연계되어 있다. 세계주의적 민족은 범세계적 규모로 작동하는 세계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주7) 현재 이런 쟁점들은 국가 그리고 심지어 지역 정치에 대한 논의로부터도 분리된 채 남아 있다. 나머지 세계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들 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의 수준을 넘어선 민주주의 개념은 이상적인 것인 반면, 우리는 현 실적으로 바로 뒷마당에 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학계의 담론에서, 이런 분리는 연구 범위가 단지 이런 외부적 경합장 에만 한정되는 국제 관계학 의 존립에 의하여 오랫동안 형식화되 어 왔다. 그러나 범세계화 질서에서 이런 구분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세계가 범세계적 관할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로부터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즉 양극 체제의 붕괴는 점증하는 상호의존보다는 무질서를 창 출했다고 한다.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하비(Robert Harvey)는 범세계적 혼란은 완전히 피할 수도 있다 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천년의 시기가 끝나가면서 ... 범세계적 무질서의 씨앗, 심지어는 무정부의 씨앗이 ... 뿌려지고 있다 (주8)고 말한다. 프랑스 사상가인 알렝 밍크 (Alain Minc)는 갈등, 적대감, 그리고 권위 없는 회색지대의 범람으로 규정되는 새로운 중세 의 도래에 대하여 유사하게 말한 바 있다.(주9)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묘사했다기보다는 아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런 해석들은 암흑 사회 즉 현존하는 긍정적 가능성들이 안고 있 는 재난의 측면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의 영향을 고려해 보자. 그 이전의 어떤 세기 보다도 지난 몇백 년 동안에 일어났던 전쟁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만약 민간 인 사망자까지 포함한다면, 이전의 그 어떤 세기 동안보다도 더 높은 비율의 세계 인구가 전쟁으로 죽었다. 약 1천만 명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이와 더불어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백만 명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훨씬 더 높은 비율의 민간인 사상자들을 발생시켰다. 사망자 5천만 명중에서, 군인은 절반이 채 안 됐다. 5천만 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1945년부터 현재까지 또 다른 갈등으로 인하여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최근에는 보스니아와 르완다의 유혈 사태가 또 다른 수백만의 희생 자를 낳았다.(주10) 그런데 폭력에 관한 이런 일화가 끔찍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국민국가 초기의 지정학적인 전쟁으로부터 전쟁 패턴이 변화했음을 보여 준다. 우발적 사고는 논외로 하고, 거대 규모 전 쟁의 쇠퇴는 양극 시대에 이미 분명해졌다. 핵무기의 개발은 칼 폰 클라우제비츠(Kar1 von Clausewitz)의 널리 인정되던 명제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제 전쟁이 외교의 최종 수단이 아 니고, 외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적어도 핵 갈등이라는 차원에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되 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군비 경쟁을 종결지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전쟁이 쇠퇴했음을 명백히 인정하였다.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편의주의를 훨 씬 넘어서는 문제였다.(주11) 민족간의 대규모 전쟁이 미래에는 발생될 가능성이 적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이상 공 상적이지 않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세계는 더 이상 두 개의 군사화된 권력 블록으로 나뉘 어 있지 않다. 민족간의 경계는 거의 어디서나 국제적 합의에 의해 고정되었고 승인되었다. 정보화 시대에, 영토는 과거의 국민국가에서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지식과 경쟁력이 자 연 자원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주권은 점점 모호해지거나 다중적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점점 확대되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결코 서로간에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는 진실이 존재 한다. 결국, 세계는 19세기 말의 기간을 포함해서 이전보다 훨씬 서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국가적 그리고 범세계적 관할이라는 쟁점들을 연계시키는 것은 더 이상 유토피아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장 의 유동성과 기술 혁신의 추동력 하에서, 범세계적 수준으로 활동하는 수많은 협동 조직들 의 수가 대대적으로 증가해 왔다. 예를 들어, 금세기 초에 약 20개의 국제적 정부조직들이 있었고, 180개의 초국가적 비정부조직들(NGOs)이 있었다. 오늘날 전자는 300여 개, 후자는 5,000여 개가 있다. 이미 범세계적 관할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범세계적 시민사회가 존재한 다.(주12) 아래로부터 등장하는 주요 형태의 세계주의가 있다. 그린피스 흑은 국제사면위원회 (Amnesty International)같은 집단들은 인류 전체에 관련된 목표들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국제사면위원회는 엄정한 공평성과 독립성 이라는 원칙을 따르고, 그 구성원들은 자국의 사 건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한다. 비정부조직들은 연속적인 정상회담을 소집하면서 궐기를 외치는 성명서들을 채택하였다. 그들 중 가장 큰 회담이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것 으로 5만 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범세계적 과정들은 권력을 국가로부터 탈정치화된 범세계적 영역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다른 사회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것의 보편적 중요성으로 보아 훨씬 더 이런 새로운 영역은 권리와 의무를 도입하는 규제가 필요하다. 사회가 있는 곳엔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한 다. (주13) 현재로서는 지역적 관할과 범세계적 관할 사이에는 분리가 존재한다. 지역적으로 볼 때, 특 히 유럽연합(European Union),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그리고 다른 집단들의 형태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는 제도에 있어서 협력이 전개되고 있다. 유럽연합 외에도 아프리카단 결기구(OAU),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아랍국가연맹(League of Arab States), 카리브 공동체(CARICOM), 그리고 남미공동시장(MERCOSUR)이 있다. 이 모두가 과거에는 분열과 갈등을 겪었던 국가들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예이다. 한 편 진정한 세계적 수준에 서, 기존 제도는 여전히 정부간에 존재한다. 그것은 국가간의 협약에 따라 기능하고, 국가간 에 간섭할 권한을 거의 지니고 있지 않다. 유엔은 특히 국가간 결사이다. 무역과 경제적 교 류에 관련된 기구들, 예컨대 세계무역기구(WTO),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세계은행(World Bank) 등이 국가간의 기구이다. 5. 유럽연합 유럽연합은 양극 체제의 일부분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범 세계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유럽 이라는 하나의 실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를 넘어서고 개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간의 협력에 의해 창조된 유럽연합은, 국가들 의 지역적 결사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물론, 유럽연합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유럽연합 자신이 유럽연합에 가입을 신청한다 고 해도 가입을 거절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럽연합은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 형태로도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 가능한 모델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유럽연합 은 모델을 제공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연합은 대중적인 지지를 잃어 가고 있는 동시에 유럽 시민들의 삶에서 점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연합은 전체 회원국 경제 법안의 75퍼센트 이상과 국내 입법의 50 퍼센트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두서너 사회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 나, 대부분의 회원국들에게는 이전에 유럽연합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열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결과의 일반적인 원인들은 유럽연합의 민주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일반 사람들의 관심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범세계화의 관점에서, 그리고 시 민들의 일상적인 관심사에 보다 더 반응하도록 만든다면, 유럽연합은 경제적인 역할만큼이 나 정치적인 역할에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측면에서 그것은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도 앞서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그 어떤 전통적인 틀에도 맞지 않는 선구적 형태의 지배이 다. 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은 유럽적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그 외부에서도 세계주의적 민족들 로서 행동할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 노동당의 1994년 선거 강령의 기초자인 조스 드 베우스(Jos de Beus)는 유럽연합 의 미래를 고려해 볼 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피해야만 할 세 가지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 압력을 의식하는 사고 : 범세계화는 유럽연합이 독자적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 기보다는 오히려 보다 광범위한 세계로부터의 압력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소망어린 사고 : 단일 시장, 유로화, 그리고 유럽 중앙 은행은 자동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적 이상을 촉진할 것이다. - 파멸론적 사고 : 유럽연합은 사회민주주의의 적이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목적은 개별 국가들에게 권력을 회귀시키는 것이어야 한다.(주14) 드 베우스가 유럽연합의 미래가 열려 있다고 시사하는 것은 옳다. 냉전 시기 동안, 유럽연합 의 민주적 한계는 그것의 진화에 심대한 장애물은 아니었다. 브뤼셀에서 국민국가들이 동 의한 결정들은 유권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1990년대에는 이런 상황이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 유럽의회의 보다 큰 권력을 보다 효과적인 초국가적인 정당 조직과 연결시켜야만 한다. 초국가적 정당 조직은 점차 강력하게 될 수 있다. 현재, 유 럽의회 선거는 유럽인의 선거 라기보다는 제2차적 수준의 국가 내 경쟁 으로 치러진다. 상 이한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있었던 선거는, 유럽의회 선거가 별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동유럽과 중유럽 국가들의 유럽연합으로의 예정된 참여가 명백히 중요한 도전이다. 조기 가 입을 대기하고 있는 국가들은 체코 공화국, 에스토니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슬로베니아 이다. 다섯 개의 다른 국가들, 즉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라트비아, 그리고 리투아 니아는 가입 준비를 돕기 위한 자원들을 분배받았다. 대부분의 이들 국가들의 국내총생산은 현재 유럽연합 평균의 3분의 1 흑은 그 이하이다. 더구나, 거의 예외 없이 자유민주주의적 제도와 시장 원리를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다. 체코 공화국이나 폴란드처럼 가장 수월하게 이행을 겪고 있는 국가들조차 정치적 수준과 경제적 수준에서 모두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확대 로 인해 초래될 것 같은 긴장이 유럽 계획 전체를 침몰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확대는 재구성 과정을 가속화시킴으로써 유럽연합을 도울 수도 있다. 결국, 이미 언급한 대로, 비민 주적인 조직이 다른 조직에 민주적인 기준을 부과하는 것에는 희미한 아이러니 그 이상이 있다. 동유럽과 중유럽 사회의 통합이 유럽연합 제도를 민주화하고 재형성하는 데에 자극제 가 될 수 있다. 만약 확대가 성공하려면, 유럽연합은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 임무와 정통성 의 복잡하고 어려운 쟁점들, 그리고 이 쟁점들이 유럽에 걸쳐 유발하는 의구심과 불안에 대 처해야만 한다. (주15) 6. 범세계적 관할 유럽연합 제도의 기본 편제가 앞으로 수년 동안 확연히 변화될지의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 다. 유럽연합 내의 권력의 분립은 언급된 쟁점들에 비추어 중요한 재편을 필요로 할지도 모 른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범세계적 관할 체제는 유럽연합이 가지고 있는 기구, 즉 대표 기구(의회), 행정 기구(위원회), 정부간 협의체(이사회), 그리고 연방 법원(사법 재판소) 등과 같은 공식적인 기구들을 가지는 것 또한 가능하다. 물론, 범세계적 수준에서의 이러한 제도 적 편제는 현존하는 기구들과는 그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칙 적으로, 제도들이 어떻게 이런 방향으로 개혁될 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 않 다. 예를 들어,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세계은행(World Bank)은 단일 한 기구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현재의 유엔은 의회와 이사회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유럽연합을 흡수하고 유럽연합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동일한 권력을 다른 회원국들에게로 확대할 수만 있다면, 이 기구는 보다 광범위한 범 세계적 질서로 가는 교두보가 될 수도 있다. 저개발 국가들에게, 이것은 적극적인 행보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경제개발협력기구는 더 이상 배타적인 클럽이 아니라, 자격을 가지는 모든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가입할 수 있는 집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과 연계되어 새로운 회의체 또는 의회가 설치될 수 있다는 이상은 지난 몇 년 동안 광 범위하게 논의되었다.(주l6) 유럽의회는 새로 형성될 의회에 대한 모델이 될 수 있다. 그것 은 초기에는 유엔 헌장의 제22조에 의거하여 유엔총회의 보조 기구로 창설될 수 있다. 회원 국의 의회가 우선 대표자들을 파견하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선출된 의회를 위한 계획을 발 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선거제도는 소규모 국가를 위한 보정 장치와 함께, 각국의 인구 비례에 의한 대의원수를 가진 유럽의회의 선거 제도와 유사할 것이다.(주17)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사법 재판소의 발전이 세계의회와 병행하여 이루어지는 중대한 조치가 될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뉘른베르크와 도쿄 법원이 개인들과 그들의 국가에 대한 관할 권의 원칙을 확립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부간의 법 개념을 여전히 대표하고 있다. 국 제 인권법 위반을 조사하고 기소하기 위해 설립된 유고슬라비아의 법원도 유사한 권한을 가 지고 있다. 그 법원은 세계주의적 법과 연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 다. 세계주의적 법의 기본 쟁점은 법원의 관할권이 국가들과 시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1998년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이 국제형사법원의 창 설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필요에 대해 합의한다는 표시이다. 이런 제안들은 실현될 수 있는가? 대의적 의회를 특징으로 하는 범세계적 민주주의가 국가 적 수준에서 당면한 냉담 혹은 반감의 문제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두 번째 질문에 관 한 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는 권력의 확산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적 민 주주의는 세계적 수준으로 관할을 이동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지방으로 관할을 확 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의심하는 이들은 유럽연합에서 성취한 것에 대해 고려해야만 한다. 단지 50년 전만 해도 유럽은 국가들간의 오랜 긴장에서 비롯된 전쟁으로 소진되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초국가적이면서도 아래로 이양된 새로 운 권력 체제를 창출하는 데에 협력해 왔다. 이 국가들은 주권의 일부를 공동으로 결집시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법정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런 일을 단지 이상주의에 의해서뿐 만 아니라 자국 이익, 그리고 오늘날 모든 국가에 관련된 범세계적 관할에 대한 유사한 이 해 관계에 의해 수행하였다.(주18) 세계적 민주주의의 확장은 세계경제를 효과적으로 조절하고, 범세계적 경제 불평등을 해소 하며, 생태적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한 조건이다. 국지적 수준에서는 시장근본주의와 경쟁하 지만 범세계적 수준에서는 시장근본주의가 군림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다. 범세계적 자유방임주의는 새로 등장하는 세계경제의 역사 속에서 최종 지점이 아니라 하나 의 계기이다. ...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세계경제를 단일한 범세계적 자유시장으로 조직 하는 것은 불안정성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범세계적 자유방임주의는 노동자로 하여금 새로 운 기술과 무제한적 자유무역이 초래하는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범세계적 생 태 평형을 위협하는 활동들을 억제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 (그것은) 사실, 이러한 막 대한 위험이 진솔한 이윤 추구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써 해결될 것이라는 가정에 지구의 미래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무모한 도박을 생각하기 힘들다.(주l9) 7. 세계적 규모의 시장근본주의 시장근본주의는 제한되고 모순적인 속성으로 인해서 국내 정치에서 퇴각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시장근본주의는 국지적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세계적 수준에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따른다면 범세계적 시장이 자유롭게 지배하도록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시장과 마찬가지로 범 세계적 시장은 문제 해결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균형 상태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변동은 실제로 압축된 문제 해결 활동이며, 그것은 곧 새롭고 재조 정되는 균형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세계시장의 역동성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시사한다. 즉 가격 자체보다는 가격 변동에 대한 기대가 결정에 이르게 하고, 기대는 통상 순수하게 경제 현상이라기보다는 심리 현상에 의하여 좌우된다. 위기, 불 규칙적인 변동, 특정 국가들과 지역으로부터 또한 그곳들로 자본이 급속히 이동하는 것과 같은 현상은 길들여지지 않은 시장의 주변적 특징이 아니라 핵심적 특성이다. 세계경제에서 금융시장을 규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쟁점이다. 1994년의 멕시코 위 기와 동남아시아에서 계속 발생되는 어려움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느 곳에서 도 탈규제와 자유를 동일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 무역에 대한 범세계적 관여는 효 과적인 규제의 필요성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의존한다. 이러한 개입 의 목적은 쉽게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책이 추진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 정책들이 실행될 수 있는지는 분명 더 문제거리이다. 다음과 같은 일들이 필요하다. 즉 통화의 과도한 회전과 남발을 진정시키고 통제하는 것, 단기적 통화 투기와 투자를 분리하는 것, 그리고 세계경제 관리에 관여하는 초 국가적 조직을 재편할 뿐만 아니라, 그 조직에 대한 책임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매일 환전되는 미화 1조 달러 중 오직 5퍼센트만이 무역이나 실질적 경제 거래와 관련된다. 거대한 금액을 회전시키는 거래자들이 환율의 변동과 이자율 차이에 의한 급속한 이윤을 추 구하기 때문에, 나머지 95퍼센트는 투기와 중개 매매로 구성된다. 이런 행위들은 시장이 장 기적인 유통 증권과 교역을 위해 보내는 신호들을 왜곡시킨다. 유가증권 투자 자본도 투기 적 유동성을 갖는다. 수천억 달러의 핫머니(hot money) 가 하나의 시장 혹은 국가쯤은 하루 아침에 황폐화시킬 수도 있다. 중앙 은행은 취약한 화폐의 평가 절하를 두고 도박하는 투기 꾼들의 집단적인 압력에 견뎌 낼 정도로 충분한 보유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멕시코 위기에 이어, 많은 사람들이 금융 관리를 위한 보다 효과적인 수단을 창출할 필요성 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아시아 호랑이들이 겪는 혼란은 새로운 양식의 규제가 필요함을 훨씬 더 분명하게 하였다. 결국, 아시아 국가들 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산업적 성공 모델로부터 고군분투하는 경제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본의 이동이 그렇게 쉽게 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96년, 930억 달러가 인도네시아, 한국, 말레이시아, 태국, 그리고 필리핀 으로 유입되었다. 1997년에 갑자기 이런 흐름이 역전되어 120억 달러가 이 국가들로부터 유 출되었다.(주20) 자본시장을 더 자유롭게 하려는 신자유주의적 대응책이 지난 몇 년 동안 고통을 가져온 것 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로운 화폐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 효율성을 떨어 뜨린다는 논리는, 위기가 낳은 사회적, 경제적 비용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위기에 직면한 국가들은 자본의 회귀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자율을 높이고 국내 자산을 매각하게 된 다. 결국 자본의 자유로운 유동성이 가져오는 이득에 대한 주장들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다 른 국가들 중에서 중국과 일본은 자본금 계정의 태환성 없이도 높은 성장률을 지녀왔다. 유 럽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 태환성의 방향으로 충분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아일랜드와 포 르투갈이 그러했다. 어떻게 금융시장이 규제될 수 있을까? 한 가지 핵심적 측면은 환투기이다. 유로화의 도입은 엔화가 의문시되기는 하지만 세 가지 세계 통화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은 통화 블록 간의 경쟁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세계경제에서 적극적인 협력으로 나아갈 수 도 있는 점증하는 조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금융가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유로화와 미국 달러가 안정화 장치로서 공식적으로 연계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안정적인 환율은 금융 제도, 기업, 투자가, 그리고 정부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장기적인 투자와 대여는 보다 더 큰 안정성에 의해 촉진된다. 수출업자와 수입업자가 치러야 하는 비 용은 낮추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환율 변동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는 정부의 보다 많은 자율성과 중앙 은행의 효과적인 개입을 추구 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정환율 체제에 대한 한 대안으로서 토빈세(Tobin tax)가 많이 논의된다. 이것은 그 창안 자인 토빈(Tobin)이 25년 전에 제안했던 것이다.(주21) 이 조세는 무역과 직접 투자의 자금 조달에 필요한 통화 교환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순수 금융 투기를 좌절시키는 수준에서 정 해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1996년에 적용되었던 0.5퍼센트의 과세가 세계 규모로 부과되었다 면 1,500억 달러를 창출했을 것이다. 비판가들은 거래자들이 결국 그것을 회피할 방식을 찾 아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된 장벽은 회피, 보다 일반적으로는 실행의 문제보다는 지금까지의 정치적 의지의 부재와 관련된다. 지역적 수준에서, 칠레의 준비제도가 상당한 관심을 끌 만하다. 즉 칠레에 투자하려는 사람은 이자 율 0의 수준에서 1년간 중앙 은행에 예탁해야 한다. 그 결과 순수한 투자와 보다 투기적인 금융거래가 분리될 수 있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그리고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은 오늘날이 아니라 1920년대 와 1930년대의 범세계적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브레튼 우즈 일반협정(Bretton Woods-GATT) 체제는 제한적인 무역정책과 흔히 파국의 시기 로 알려진 시기인 대공황을 포함해서 제1차 대전 이후 발생했던 난관들을 회피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다. 그 목적은 확대 되고 개방적인 세계경제를 통해서 국제적인 경제 협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들은 대부분 성취되었다. 유해한 경제적 민족주의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으며, 그 체제의 핵심에 있는 국가들간에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부분적인 그 성공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일련의 문제들이 초래되었다. 유엔에 경제안보이사회(Economic Security Council)를 설립하는 것을 심각히 고려해야 한 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른 개혁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중 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유엔 헌장의 개정과 과감한 수준의 정치적 의 지 를 요구한다.(주22) 산업국가의 정책 틀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세계 최강국 클럽인 G8은 현행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통화 시장 관리와 생태적 위험성에 대한 대응을 포함하여, 여러 국가들과 집단들의 집단적 행위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많은 쟁점들이 존재 한다. 심지어 가장 자유주의적인 국민 경제조차 거시경제적 조정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세 계경제는 다르다고 가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범세계적 생태 관리의 쟁점은 세계 사회 내 심각한 경제적 구분의 쟁점과 광범위하게 중첩 된다. 민족과 지역 내의 배제와 범세계적 규모에서의 배제 사이에는 현실적인 평행선이 존 재한다. 많은 사람들의 점증하는 번영이 다른 이들을 좌초시키고, 주변화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0개 국가들은 1980년 이래로 꾸준한 발전을 경험하였다. 전세계 인구의 약 4 분의 1이 이 국가들에 거주한다. 경제적 침체 혹은 절대적인 쇠퇴가 보다 가난한 사회들의 다수들을 규정하고 있다 세계 인 구의 약30퍼센트가 하루에 미화 1달러에 해당하는 소득으로 빈곤하게 살고 있다. 남아프리 카공화국을 제외하고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는 사실상 전체 대륙이 배제된 자로 구성 되어 있다. 더욱이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상층부에서의 배제가 심각하다. 어떤 기준으로 보아 도 풍요로운 소수의 엘리트들은 거대한 다수로부터 물리적, 문화적으로 고립된 채 살고 있 다. 종종 그들은 공공연하게 돈세탁, 무기 거래 혹은 마약 거래를 통해 소득을 얻는다. 세계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은 진정으로 위압적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범세계적 관할을 향한 진보 없이 이런 문제들에 의미있는 충격이 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생태적 위험성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환경적인 위협 이 봉쇄될 수 있는지 뿐만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발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가져오 는 효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에 이해되는 것처럼, 생태적 현대화는 농업 경제에서 공업 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전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세계 생태의 관리는 말할 것도 없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환경을 훼손하는 경제 성장을 향한 압력 때문만이 아니라, 생태적 위험 성, 보다 광범위하게는 기술 변화와 관련된 위험성이 본질적으로 너무나 논쟁적이기 때문이 다. 불필요한 재앙 유포에 대한 비난은 우파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 들은 사태는 결국 해결될 것이다 라는 관점에 빠져 있다. 위험성에 대한 정의로 보아 어느 누구도 그것을 계산할 수 없으며, 미래의 기술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충분히 설득 력 있는 어떤 시나리오도 작성될 수 없다. 범세계적 문제들은 지방 주도의 대응뿐만 아니라, 또한 범세계적 해결책을 요구한다. 우리가 만약 안정, 형평성, 그리고 번영이 함께하는 세계 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변칙적 혼돈이 가득한 범세계적 시장과 상대 적으로 무력한 국제 기구에 맡겨 놓을 수 없다. 결론 새로운 대화를 위하여 1990년대 초에 사회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의에 기고한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을 둘러싸고 있는 실망의 분위기를 언급하였다.(주1)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유시장 철학의 흥성과 동유럽의 현존 사회주의(Actually existing socialism) 의 붕괴에 당면하여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 (George Bush)가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영국과 독일에서는 두 사회민주주의 대정당이 오 랜 기간 동안 야당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남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건재했으나, 선거에서나 개념상으로나 사회민주주의는 좌절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2) 1992년 빌 클린턴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포함한 주요사건들은 흐름을 역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빔 콕(Wim Kok)이 네덜란드에서 수상이 되었는가 하면,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과 로마노 프로디(Romano Prodi)가 각각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았다. 또 한 영국 노동당의 승리는 많은 국가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여겨졌다. 1998년에 유럽 사회민 주주의가 처한 상황을 논한 한 단행본에서 필자들은 그리고 그때 토니가 있었다 고 외치면 서, 토니 블레어가 1980년대 사회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적 상징인 대처 보수주의 를 패퇴시 켰다고 덧붙였다.(주3) 하지만 그 승리의 규모를 예찬하는 많은 사람들은 새 노동당의 국정 계획을 공허한 것으로 본다. 새 노동당이 획득한 압도적 다수는 미국에서 개발된 대중 매체 기법을 활용한 매우 적극적이며 전문적인 선거 운동의 결과였다. 대체로 새 노동당은 대중 매체 위주의 정치에 의존하고, 디자이너 사회주의(designer socialism) 를 창출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개인적 이 미지, 상징적 연출, 음향의 짜릿한 자극, 시각적 효과가 있는말 들이 쟁점, 주장, 국정 계획, 그리고 선거 공약 평가 보다도 전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주4) 그렇지만 성공적인 홍보가 준 교훈은 이미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선전의 자극 뒤에 무엇인가 알찬 것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아주 재빠르게 그 허울을 꿰 뚫어본다. 만약 새로운 노동당이 제공해야 했던 것이 온통 대중 매체를 통한 재치에 불과하 다면, 노동당은 정치 무대에서 단명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민주주의 부홍에 제한적으로만 공 헌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하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사회민주 주의의 논쟁으로부터 실질적인 의제와 실천 계획이 만들어지고 있다. 영국은 이 의제와 실 천 계획에 이바지할 바가 많다. 이 논쟁이 진정으로 여러 국가로 확산될수록 더욱 바람직하 다. 유럽 내부에서조차 가능한 만큼 많은 상호 작용이 국가적 맥락을 가로질러 전개되지 못 하였다. 그렇지만 중도 좌파들 사이의 대화는 범세계화 지향이 실제로 요구하는 바와 같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펼쳐져야 한다. 주 서문 1) David Marquand: The Blair paradox . Prospect. May 1995, p.20. 제1장 사회주의와 그 이후 1) Tony Blair, interview, Guardian, 7 February 1998. 2) E. F. M. Durbin : Problems of Economic Planning. London : Routledge, 1949, p. 41. 3) Fritz W. Scharpf : Flexible integration , in Ian Christie : Euro Visions. London : Demos, 1998. 4) David Green : Reinventing Civil Society. London : 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1993, p. viii. 5) John Gray : Enlightenment's Wake. London : Routledge, 1997, p. 103. 6) David Marsland : Welfare or Welfare State?. Basingstroke : Macmillan, 1996, p. 212. 7) Marsland : Walfare or Welfare State?, p. 197. 8) Egon Matzner and Wolfgang Streeck : Beyond Keynesianism. Adelshot : Elgar, 1991, pp. 3-4. 9) Herbert Kitschelt :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Democracy.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33. 10) Knut Heidar : The Norwegian labour party , in Richard Gillespie and William E. Paterson : Rethinking Social Democracy in Europe. London : Cass, 1993, p. 62. 11) Quoted in Stephen Padgett : The German Social Democrats , in Gillespie amd Paterson : Rethinking Social Democracy, pp. 27 and 29. l2) Ulrich Beck : The reinvention of politics , in Ulrich Beck, Anthrony Giddens and Scott Lash : Reflexive Modernization. Cambridge : Polity Press, 1994. 13) 잉글하트의 저작은 무수한 비평과 평가를 야기시켰다. 유용한 요약으로서는 다음을 참 조할 것. Clive Bean and Elim Papadakis : Polarised priorities or flexible alternatives? , 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Opinion Research. vol. 6, no. 3, 1997. 14) John Blundell and Brian Gosschalk : Beyond Left and Right, London : 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1997. 15) Robert Worcester : Introduction , in Blundell and Gosschalk : Beyond Left and Right, p. 3. l6) Kitschelt : Transformation of European Social Democracy, p. 33. 17) Kurt Sontheimer. 이는 다음에 인용되고 있다. Padgett : German social democrats , p. 38. 영국에서의 최근 토론에 대해서는 넥서스 가상 두뇌 집단 에 기고한 흥미로운 글들을 볼 것. 이는 다움과 같이 단행본 형태로 다시 발간되었다. David Halpern and David Mikosz : The Third Way. London: Nexus, 1998. 제2장 다섯 가지 딜레마 1) Pervenche Beres : The Social democratic response to globalisation , in Ren Cuperus and Johannes Kandel : European Society Democracy : Transformation in progress. Amsterdam : Friedrich Ebert Stiftung, 1998. 2) Kenichi Ohmae : The End of the Nation State : The Rise of Regional Economies. London : Harper Collins, 1995. 3) Paul Hirst and Graham Thompson : Globalization in Question. Cambridge : Polity Press, 1996, p. 1. 4) David Held : Democracy and globalization , in Daniele Archibugi, David Held and Martin Kohler : Re-Imagining Political Community. Cambridge : Polity Press, 1998. 5) Jeffrey R. Gates : The Ownership Solution. New York : Basic Books, 1998, pp. 2 and 36. 6) Helen Wilkinson and Geoff Mulgan : Freedom's Children. London : Demos, 1995. 7) Ulrich Beck : The cosmopolitan manifesto , New Statesman, 20 March 1998. 8) Zeev Sternhell : Ni droite ni gauche. Paris : Seuil, 1983. 9) Quoted in Donald Sassoon :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London : Tauris, 1996, p. 776. 10) Norberto Bobbio : Left and Right. Cambridge : Polity Press, 1996. 11) Bobbio : Left and Right, p. 16. 12) Bobbio : Reply to the critics , in Left and Right, p. 133. 13) Joseph Raz : The Morality of Freedom. Oxford : Clarendon Press, 1986, S. 86. 14) Anthony Giddens : Beyond Left und Right. Cambridge : Polity Press, 1994. 15) J. K. Galbraith : The Culture of Contentment. London : Sinclair-Stevenson, 1992. l6) Ulrich Beck : The Risk Society. London : Sage, 1992. 17) Shell : Profits and Principles. London: Shell, 1998. l8) Ulrich Beck : The reinvention of politics , in Ulrich Beck, Anthony Giddens and Scott Lash : Reflexive Modernization. Cambridge : Polity Press, 1994, pp. 17-19, 19) Beck : The reinvention of politics . p. 22에서 인용. 20 University of Washington Graduate School of Public Affairs : Trust in Government Project. Seattle, 1998. 2l) Joseph Nye : In government we don t trust , Foreign Policy. Fall 1997. 22) Ferdinand M ller-Rommel : The new challengers: greens and right-wing populist parties in Western Europe , European Review, vol. 6, 1998, p. 201. 23) Andrei Markovits and Philip Gorski : The German Left. Cambridge : Polity Press, 1993 ;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p. 269. 24) Julian L. Simon and Herman Kahn : The Resourceful Earth. Oxford : Blackwell, 1984. 25)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 Our Common Futur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 8. 26) Maarten A. Hajer : The Politics of Environmental Discourse. Oxford : Clarendon Press, 1995. 27) John Dryzek : The Politics of the Earth.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145. 28) Beck : The reinvention of politics , p. 29. 29) Julian Le Grand : Knights, knaves or pawns , Journal of Social Policy, vol. 26, part 2, April 1997. 제3장 국가와 시민사회 1) Joseph Nye : In government we don t trust , foreign Policy, Fall 1997. 2) E. J. Dionne : They only look Dead.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96, p. 290. 3) David Osborne and Ted Gaebler : Reinventing Government. Reading: Addison-Wesley, 1992. 4) Will Hutton : The State We re In. London : Cape, 1995, p. 293. 5) Robert Wuthnow : Sharing the Journey. New York : Free Press, 1994, p. 12. 6) Peter Hall : Social capital in Britain . Mimeo, Center for European Studies, Harvard University, 1997. 7) Anne Power : Estates on the Edge. London : Macmillan, 1997. 8) Judith Tendler : Good Government in the Tropics. Baltimore :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9) Emile Durkheim, in Anthony Giddens : Durkheim on Politics and the State. Cambridge : Polity Press, 1986, p. 57. 10) George L. Kelling and Catherine M. Coles : Fixing Broken Windows.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97, p. 20. 11) Stephen L. Carter : Civility. New York : Basic Books, 1998. 12) Kelling and Coles : Fixing Broken Windows, pp. 234-5. 13) Judith Stacey : Transatlantic traffic in the politics of family values , Mimeo, University of California, 1997, p. 4, 14) Sara McLanahan and Gary Sandefur : Growing Up with an Single Parent.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994, p. 1 15) Adrienne Burgess : Fatherhood Reclaimed. London : Vermilion, 1997, pp. 214-17. 16) Adrienne Burgess : A Complete Parent. London : IPPR, 1998. 17) W. J. Doherty : The best of times and the worst of times , in A. J. Hawkins and D. C. Dollahite : Generative Fathering. London : Sage, 1997. 18) Daniel Callahan : Setting Limits.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87. 제4장 사회투자 국가 1) Robert H. Frank and Philip J. Cook : The Winner-Take-All Society. New York : Free Press, 1995. 2) Christopher Lasch : The Revolt of the Elites. New York : Norton, 1995. 3) Anne Power : Estates on the Edge. London : Macmillan, 1997. 4) Mickey Kaus : The End of Equality. New York : Basic Books, 1992. 5) Alan Wolfe : Our Nation, After All. New York : Viking, 1998, p. 237. 6) Wolfe : One Nation, After All, p. 248. 7) Report of the Social Justice Commission. London : Vintage, 1994, p. 175. 8) John Walsh : Stories of Renewal : Community Building and the Future of Urban America. Report to the Rockefeller Foundation, 1996. 9) Nicholas Timmins : The Five Giants. London : Fontana, 1996, p. 12. 10) Kees van Kersbergen : Social Capitalism. London : Routledge, 1995, p. 7. 11) Howard Glennerster and John Hills : The State of Welfare. 2nd edition.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l2) Assar Lindbeck : The end of the middle way?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85, 1995. 13) Peter Baldwin : The Politics of Social Solidarity.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p. 292. 14) Stuart Fleming : What we ll earn when we re 64 , New Stateman, 5 June 1998. 15) Will Hutton : The State We re In. London : Cape, 1995 16) Edmund Burke :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London : Dent, 1910, pp. 93-4. 17) Daniel Callahan : Setting Limits.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87, p.46. 18) Callahan : Setting Limits, p. 20. 19) Stephen Nickell : Unemployment and labour market rigidities ,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vol. 11, 1997. 20) Dominic Vidal : Miracle or mirage in the Netherlands? , Le Monde Diplomatique, July 1997. 21) Rosabeth Moss Kanter : Keynote address , Centre for Economic Performance : Employability and Exclusion. London : CEP, May 1998. 22) Moss Kanter : Keynote address , pp. 65-8. 23) Ulrich Beck : Capitalism without work , Dissent, Winter 1997, p. 102, 24) Jeremy Rifkin : The End of Work. New York : Putnam s, 1995, p. 225. 25) Beck : Capitalism without work , p. 106. 제5장 범세계화 시대로 1) David Miller : On Nationalism. Oxford : Clarendon Press, 1995, pp. 416 and 420. 2) Roger Scruton : In defence of the nation , in The Philosopher on Dover Beach. Manchester : Carcanet, 1990, p. 310. 3) Miller : On Nationalism, p. 140. 4) Linda Colley : Britons.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92. 5) Bernard Crick : The English and the British , in National Identities. Oxford: Blacwell, 1991, p. 90. 6) Hermann Strasser : The German debate over multicultural society . Canadian Journal of Sociology, vol. 22, 1997. 7) 세계적 민주주의라는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나는 그것의 주요 선각자인 데이비드 헬 드의 저작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 특히 다음을 보라. Democracy and the Global Order. Cambridge : Polity Press, 1995. 8) Robert Harvey : The Return of the Strong. London : Macmillan, 1995, p. xv. 9) Alain Minc : Le nouveau moyen ge. Paris : Gallimard, 1993. 10) John Keegan : War and Our World. London : Hutchinson, 1998, p. 3. 11) Mike McGwire : Perestroika and Soviet National Security. New York : Bookings, 1991. 12) Davicl Held et al. : Global Transformations : Politics, Economy and Culture. Cambridge : Polity Press, 근간. 13) Alberto Tita : G1obalisation : a new political and economic space, requiring supranational governance . Mimeo, Universit Cattolica del Sacro Cuore, 1998, p. 2. 14) Jos de Beus : Modernised social democracy and the fundamental democratisation of Europe . in Ren Cuperus and Johannes Kandel : European Social Democracy : Transformation in Progress. Amsterdam : Friedrich Ebert Stiftung, 1998. 15) Mark Leonard : Rediscovering Europe. London : Demos, 1998. 16) Daniele Archibugi, David Held and Martin Kohler : Re-Imagining Political Community. Cambridge : Polity Press, 1998, p. 141. 17) E. Childers and B. Urquhart, Renewing the United Nation System. Uppsala : Dag Hammarskj ld Foundation, 1994, p, 297. 18) Fred Halliday : Global goverance-prospects and problems , Citizenship Studies, vol. 4, no. 1, 근간. 19) John Gray : False Down. London : Granta, 1998, pp. 199-200. 20) Jagdish Bhagwati : The capital myth , Foreign Affairs, vol. 77, 1998. 21) Mahbub ul Haq et at. : The Tobin Tax.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22) Mahbub ul Haq : The case for an economic security council in the United Nations , in Albert J. Paolni et al. : Between Sovereingty and Global Governance. London : Macmillan. 1998. p. 229. 결론 1) Richard Gillespie : A programme for social democratic revival? . in Richard Gllespie and William E. Paterson : Rethinking Social Democracy in Western Europe. London : Cass. 1993. 2) Ren Cuperus and Johannes Kandel : The magical return of social democracy , in European Social Democracy : Transformation in Progress. Amsterdam : Friedrich Ebert Stiftung, 1998, p. 13. 3) Cuperus and Kandel : The magical return of social democracy , pp. 13 and 15. 4) Thomas Meyer : Basic values, communication and party organisation , in Cuperus and Kandel : European Social Democracy, p.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