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신화다 지은이: 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공저/승영조 역 출판사: 동아일보사 차 례 ======= 차례 인터넷버전을 만들며... 1장 생각할 수 없는 생각 2장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3장 악마의 모방 4장 완벽한 플라토니즘 5장 영지주의 6장 예수라는 암호 7장 잃어버린 사람 8장 바울은 영지주의자 였는가? 9장 유대인의 미스테리아 10장 예수신화 11장 거짓교회 12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차례 인터넷버전을 만들며... 川龍 소개글 - 해외언론평 - 일러두기 - 역자서문 1장 생각할 수 없는 생각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영지주의 예수의 미스테리아 명제 거대한 은폐 신비한 그리스도교의 재발견 2장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엘레우시스에서의 신성한 장관 암호화된 은밀한 가르침 국제적인 미스테리아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예수 그리스도 결론 3장 악마의 모방 하나님의 아들 탄생 세례 기적 신인과 그의 사도들 나귀 타기 의로운 자와 폭군 빵과 포도주 신인의 죽음 신성한 희생양 부활절 신의 어머니 영적 재생 결론 4장 완벽한 플라토니즘 도덕적 순결 사랑 겸손과 가난 천국과 지옥 새로운 시대 유일신 로고스 미스테리아의 용어 결론 5장 영지주의 이교도 철학 이교도 신화 플라톤의 신 미스테리아 의식의 히에로판데스 은밀한 미스테리아 믿음너머의 앎 너 자신을 알라 보편적 다이몬 환생 남녀평등 자연 도덕 결론 6장 예수라는 암호 신화적 비유 신성한 수학 다이몬 예수 환상설 영적 부활 신성한 결혼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 입문식의 여러 수준 문자적, 신화적, 신비적 결론 7장 잃어버린 사람 33 유대 역사가들 복음서는 절대적 진리? 신약에 대한 학문적 연구 사도행전이라면? 가장 초기의 증거 신화의 발달사 결론 8장 바울은 영지주의자 였는가? 진짜 바울? 바울과 이교도 미스테리아 영지주의자 바울 부활의 사도 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가르침 바울과 여호와 작성자 시간:미중부 조회 도끼를 휘두르는 할례의 무리들! 결론 9장 유대인의 미스테리아 세계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화된 유대 경전 모세의 미스테리아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결론 10장 예수신화 유대인의 신화적 주제 과거 문헌의 개작 역사가 된 신화 대안으로 나타난 메시아 세계의 구원자 문자주의의 탄생 결론 11장 거짓교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주교들의 교회 발렌티누스파 정통은 없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신약 <성서> 만들기 영광스러운 상처 로마인과 박해 그리스도교의 성장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교도의 반응 로마 가톨릭 교회 역사의 날조 28 성자 본디오 빌라도! 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 이교 신앙의 파괴 영지주의의 말살 본래부터 편협한 종교 결론 12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하나의 진실 웹사이트 인터넷버전을 만들며... 책의 내용에 대한 평은 독자들에게 맡기겠다. 각자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를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이 책의 히스토리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책은 (Harmony Books, NY, 1999.)를 승영조씨가 번역하고 동아일보사에서 2002년 6월에 출판한 책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반기독교적이라 하여 기독교측에서 출판을 못하도록 동아일보사에 압력을 가했고(신문 불매운동 등), 동아일보사가 이에 굴복 출판을 취소했다. 그래서 지금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독자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책을 읽어보는 것은 서양문화를 이해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터넷 버전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두달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이책을 만들었다. 원본책과 똑같이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약간의 부주의와 실수로 더러는 오자가 있을수 있다. 이점 양해를 구하며, 원본에 있는 어느 목사님의 추천의 글과, 찾아보기는 생략했다. 조금이라도 읽는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책의 판권 소유주인 동아일보사와 승용조씨께 무단복제에 대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사장되는것 보다는 이렇게라도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낫다고 자위해본다. - 川龍 - 소개글 그리스도교가 이교도의 신화를 조합한 종교임을 증명한 책. 지은이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신비주의 연구의 권위자로 고대 이교도 신앙에 해박하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로마 제국이 유포한 체제 유지 이데올로기였다고 한다. 실제 로마인들이 믿었던 것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Mysteria).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불렸던 신의 이름이다. 그는 12월 25일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며, 결혼식 때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 냈으며, 영성체 의식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눈 이다. 4 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의 행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곧, 기독교는 이교도의 신화를 차용한 종교로 유대인들의 종교와 로마인들의 종교가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누가 들어도 황당한 이 주장은 인용문의 출처, 참고 서적, 기타 보충 내용에 대한 풍부한 각주에 의해 지탱된다. 영국에선 이 책의 출간으로 학계와 종교계에 광범위한 토론이 이루어졌을 정도. '데일리 텔레그라프'지가 선정한 '올해의 책'(1999)이란 타이틀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존 셀비 스퐁 주교가 이들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점에서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책이다. 저자소개 티모시 프리크 (Timothy Freke) - 철학박사이며 세계 신비주의의 권위자이다. 그가 지은 20여 권의 책은 세계적으로 번역.출판되었다. 피터 갠디와 함께 <세계의 신비주의, 연금술에 대한 완벽한 입문서The Complete Guide to World Mysticism, Hermetica>, <잃어버린 파라오의 지혜The Lost Wisdom of the Pharaohs>, <이교도 철학자들의 지혜The Wisdom of the Pagan Philosophers> 등의 책을 썼다. 피터 갠디 (Peter Gandy) - 고대 문명을 전공해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대 이교 신앙에 대한 전문가이다. 지은책에 티모시 프리크와 같이 쓴 <세계의 신비주의, 연금술에 대한 완벽한 입문서The Complete Guide to World Mysticism, Hermetica>, <잃어버린 파라오의 지혜The Lost Wisdom of the Pharaohs>, <이교도 철학자들의 지혜The Wisdom of the Pagan Philosophers> 등이 있다. 승영조 - 199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된 후, 번역과 문학평론을 하고 있다. 옮긴책으로 <전쟁의 역사>, <종꾸어(中國)>, <7호법정>, <사랑의 신드롬> 등이 있으며 지은책으로 <창의력 느끼기> 등이 있다. 해외 언론평 <예수는 신화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혼란스러워질 것이고 복음주의자들은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분명히 이 책을 사악한 것으로 돌릴 것이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의식들은 상당 부분 이교도 전통에 기인한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 논쟁적인 명제는 많은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거부당할 수 있겠지만 고대와 현대 문헌을 두루 망라한 꼼꼼한 주석 등을 보면 요즘의 새로 쓰는 역사서들보다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 영국 아마존 치밀한 역사 탐구 명료한 사고, 탐정소설 식 스타일이 탁월하게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이 책은 수세기 동안 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을 집대성해서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풀이한 역작이다. 그리스도교의 은밀한 비밀이 상아탑을 벗어나 우리에게 환히 드러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비밀을 이 책은 용감하게 웅변적으로 밝혀낸다. -로저 휴스든 (<근대세계에서의 신성한 아메리카와 신성한 여행>의 저자) 이 책의 명제가 더욱 널리 알려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수용되기 시작하면 분명 혁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이 책의 명제는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종교적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세실리 테일러 (<월간 퀘이커교도>지) 생생하고 열정적인 문체로 쓰여진 이 책은 소위 '고대의 뉴 에이지' 라 불리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모호한 기원에 대한 진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학자들은 수백 개의 각주와 철저한 문헌고증 동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 앨바 엘리거드 교수 (<예수 : 그리스도 이전의 100년>의 저자) 일러두기 미스테리아 Mysteries: 영어 Mysteries, 그리스어 Mysteria 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11세기 이상 성행한 신비한 의식이나 비밀가르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다. 우리말로는 보통 '신비의식'으로 번역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렇게 번역하면 문맥이 통하지 않는 곳이 너무나 많다. 의식 이상의 한 종교, 혹은 교리를 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 이 명사에는 기본적으로 '신성한 비밀' 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미스테리아'로 음역했다.---좀더 정확히 음역하면 '미스터리야' 지만. 그리고 경우에 따라 문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의식' 이나 '종교', 혹은 '신앙'이라는 말을 '미스테리아' 뒤에 덧붙였다.---영문 원서에서도 그런 경우가 꽤있다. 한편, <성서>에서는 'mysteria' 가 신성한 '비밀' 의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신약 복음서에는 이 말이 세 번 나온다.(마태복음13:11, 마가복음 4:11, 누가복음 8:10) 그리스도교 Christianity, 그리스도교인 Christian : 대중적으로는 '그리스도교' 보다 '기독교' 라는 말이 우리에게 더 친근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리스도'를 '기독' 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 이라는 말이 죽었는데도 기독교 라는 말을 쓰는 것은 다소 얄궂다. 번역어로 채택한 '그리스도교', 혹은 '그리스도교인Christian' 이라는 용어가 발음하기엔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스도 Christ' 는 그리스어 'Christos(크리스토스)'를 음역한 말로, 메시아 곧 구세주를 뜻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호칭에 있어 '하느님'과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개신교에서 쓰는 '하나님'으로 표기 했다. <성서> 인용문은 대부분 우리말 개역 <성서>대로 옮겼지만, 명료한 의미 전달을 위해 다소 번역을 바꾼 곳도 있다. 이때, 저자가 인용한 <성서>와 번역이 다른 을 참고 했다. 중요 용어와 인명, 도서명에 대한 영문자는 '찾아보기'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영문 원서 : (Harmony Books, NY, 1999.) 역자서문 인식의 전환을 위하여 지구상에서 한반도만큼 온갖 이질적 종교가 활성화되어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샤머니즘, 명리학(사주팔자 등)은 물론이고 원불교, 동학에서 파생한 종교, 단군 신화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신앙 등 온갖 종교가 모두 활성화되어 있다.-이슬람교의 교세가 비교적 약할 뿐이다. 단일 교회로는 그 규모와 신도 수가 세계 최대인 순복음교회가 한반도에 있다. 한반도는 통일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지금도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 꽤 있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로마신화도 여간 인기가 높은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종교적으로 그만큼 성숙해 있을까? 이 책은 현대에 밝혀진 결정적인 여러 증거를 기초로 해서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추적하여 여러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일단 가벼운 충격부터 짚어 보자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그리스-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물론 이것은 옮긴이의 과장 어법이다). 올림포스의 제신 숭배는 권력자들의 국가 체제 유지용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로마 민중들은 과연 어떤 신을 믿었는가? 오늘날 그리스-로마 신화를 유포하는 신화학자라는 사람들 가운데 그것을 아는 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열렬히 믿은 신화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그 신화를 얘기해 주는 그리스-로마 신화 서적을 역자는 본 적이 없다(과문한 탓이겠지만). 이 책의 두 저자는 증거에 입각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권력을 등에 업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이교 신앙을 철저히 말살하고 중상 모략했다고. 현대의 대다수 신화학자들조차 진상을 모를 정도로! 어쨌거나 그리스-로마 신화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데가 있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마의지식인들은 올림포스의 온갖 신들 이야기를 경멸했다. 그런 사실도 모르면서 그 신화를 유포하는 것은 당시의 참된 종교상을 말살하는데 은연중 동참하는 행위일 수 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너무나 유치하다. 변덕스럽고 끼리끼리 파벌을 만들고, 걸핏하면 인간을 강간한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고대 그리스인들이 고작 그런 신들을 믿었다고 보는 것은 우리 인류의 정신사를 자기 비하하는 것일 수 있다. 이교 신앙은 원시적이고, 미신적이며, 비도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신앙에 비하면 그리스도교가 더 뛰어난 종교이므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시사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교 신앙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문자주의)보다 영적, 도덕적으로 훨씬 더 뛰어난 신앙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민중들은 과연 어떤 신을 믿었기에 그런 말을 하는가? 그들이 믿은 신의 이름은 사실 중요치 않다. 그들은 여러 신이 아니라 하나인 신을 믿었고 그 신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 신의 화신인 신인(神人)의 이름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우시르),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 로마 시대에는 바쿠스나 미트라스등으로 불렸다. 저자는 이 모든 이름을 오시리스-디오니소스로 묶어서 얘기한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12월 25일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며 결혼식 때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 냈으며, 영성체 의식으로써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혹은 나무에 매달려) 죽었으며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했다! - 예수 이야기와 똑같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런 신인(神人)을 믿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부터였다! 이 신앙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미스테리아 Mysteria(영어로 Mysteries)이다. 이 미스테리아에 대한 언급은 역사의 아버지로 통하는 기원전 5세기의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플라톤의 저술 등 여러 곳에 나온다. 문자주의자들이 미스테리아를 말살했지만 100퍼센트 말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미스테리아는 조지프 캠벨(1904~1987) 등의 연구를 통해 비로소 부각되기 시작한 것 같다. 두 저자는 주장한다 - 그리스도교는 고대 미스테리아에서 기원한 것이다! 역사에 느닷없는 단절이란 없다. 변화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은 예수 미스테리아를 만들었다. 이 예수 미스테리아를 그리스도교로 발전시킨 핵심 인물은 바울이다. 그런데 바울은 사실상 영지주의자였다. 바울은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울에게 예수는 디오니소스와 동일한 신화적 인물이었다! 저자가 제시한 증거에 따르면, 문자주의자들은 바울의 편지를 위조하고 첨삭해서 바울을 문자주의자로 날조했다. 저자는 정동 혹은 가톨릭(보편적) 그리스도교라는 말 대신 문자주의 Literalism,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정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했다 하더라도 예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문자주의가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들 문자주의자들은 예수의 탄생과 부활의 신화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으라고 강요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편협하게 변질시켰다. 또한 광범위하게 <성서>를 위조하고 변조했으며, 이교 신앙과 영지주의를 철저하게 말살했고 중상 모략했다. 이 책에는 그것에 대한 증거가 폭넓고 깊이 있게 제시되어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이단으로 치부되는 그노시스파, 곧 영지주의자들의 그리스도교가 원래의 그리스도교이다! 그렇다면 과연 영지주의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교였는가? 두 저자는 다음에 펴낼 책에서 깊이 있게 다루겠다고 했지만, 이 책에도 영지주의의 핵심이 충분히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고대 그리스-로마 민중이 믿은 이교 신앙의 가르침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진짜 종교는 미신적이고 원시적인 게 아니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된 고등 종교였다. 이교 신앙에서 발전한 영지주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본문을 잠깐 인용해 보겠다. 이미 너는 부활했다 너 자신이 이미 부활했음을 깨닫도록 하라. 너-참된 너-는 타락한 것으로 보이는가? 너 자신을 살펴보라, 그러면 너는 이미 부횔 했음을 알리라(이미 부활을 했다는 생각은 나그 함마디의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 저자 주. 이런 생각을 비롯해서 영지주의의 여러 핵심 사상은 선(禪) 사상과 놀랍도록 흡사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너는 이미 부처다! 육조 혜능이 이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7세기 중반이었다. 그런데 나그 함마디 문서의 집필 시점은 줄잡아 3~4세기니까 몇 백 년 앞서 있다 : 옮긴이 주) 선불교에서 육조 혜능과 신수화상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혜능의 동문 사형인 신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썼다. 몸은 곧 깨달음이 자라는 나무이며, 마음은 깨달음이 비치는 밝은 거울이다. 때마다 부지런히 마음거울을 털고 닦아, 먼지가 앉는 일이 없게 하라 이 게송은 몸과 마음을 열심히 닦아야 한다는 인간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게송을 반박한 혜능의 게송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 자라는 나무가 따로 없으며, 깨달음이 비치는 마음도 따로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本來無一物), 어디에 먼지가 앉겠는가. 이 게송은 몸과 마음을 닦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곧 불성 자체, 부처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깨달은 부처, 이미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인식의 전환만이 필요할 뿐이다. 혜능이 본래무일물을 말하듯이, 영지주의자들은 오직 하나님만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나의 참된 정체성은 '육체적인 나'가 아닌 불멸의 영혼 이라는 것을 깨달은 영지주의 입문자들은, 나는 곧 하나님 God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하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하나님 혹은 부처만 존재할 뿐 본래무일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영지주의와 선 사상의 경지는 너무나 흡사한 데가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이교 신앙의 가르침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교 신앙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 물론 고대 그리스-로마의 주류 철학은 동양사상과 큰 차이가 있다. 동양사상이 땅과 하늘의 조화 곧 음양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서구 주류 철학은 땅, 곧 육체를 경시했다. 그래서 서구사상이 이성적 진리를 추구했다면 동양사상은 심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차이 등이 발생한다. 아무튼 원래의 그리스도교, 곧 영지주의는 지극히 합리적이며 개방적인 종교였다.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가르쳤으며,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입문자에게 불합리하게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천국이 보장된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역자에게는 항상 궁금했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예수를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 치고, 예수는 왜 다른 성자들보다 500년이나 뒤늦게 출현했을까 하는 것이다. 기원전 5, 6세기는 경이로운 시대였다. 이때에 공자와 노자, 인도의 석가와 마하비라(자이나교의 시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등의 성자, 혹은 현자들이 대거 출현했다. 역사상 위대한 천재가 출현할 때에는 항상 집단으로 대거 출현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승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만이 5, 6세기 늦게 홀로 출현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은 명쾌히 설명한다. 예수 이야기는 기원전 5, 6세기신화의 연장 선상에 있다. 이 책을 이해하면 서구 종교사의 문맥이 제대로 보인다. 이 문맥을 끊어 놓은 것이 문자주의자들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두 저자는 그리스도교를 해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교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 아마도 저자의 주장이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견강부회한 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며, 예수가 다만 신화적 인물일 뿐이라는 증거는 압도적이라고 말하며 증거를 제시할 뿐,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로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큰 맥락에서 저자는 오로지 인류의 영적 진화를 돕고 싶다는 일념에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그리스도교가 편협성을 버리고 영지주의의 열린 자세를 회복함으로써 종교적 진화의 흐름을 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저자는 바울의 잊혀진 가르침을 회복하고자 한다. 바울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보편적 영혼, 곧 하나님의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교의 핵심 비밀은 다음과 같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골로새서 1 :27)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곧 그리스도(구원자)이며, 우리 모두가 곧 부처이다. 다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승영조(문학평론가) 1장 생각할 수 없는 생각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비밀 Mysteres을 들을 만한 자에게만 들려준다' -도마의 복음서 오늘날 로마 교황청이 있는 자리에는 한때 이교도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거기서 이교도 사제들은 신성한 의식을 거행했다. 이 의식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너무나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 의식이 거행되어 왔다는 증거를 모두 지워 버리려고 했다. 그처럼 충격적이었던 이교도 의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소름 끼치는 희생 제물 바치기였을까? 아니면 외설적인 술판 벌이기였을까? 그런 허구를 믿도록 우리는 설득 당해 왔다. 그러나 진실은 그런 허구와는 사뭇 다르다. 오늘날 독실한 신도들이 그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그곳에서 고대인들은 다른 구세주 신인(神人)을 숭배하고 찬양했다. 놀랍게도 이 구세주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12월 25일에 태어났다. 또, 예수와 마찬가지로 하늘로 올라갔으며, 종말의 날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지상에 내려오기로 약속된 존재였다. 오늘날 교황이 성찬 미사를 드리는 그곳에서, 고대의 이교도 사제들 역시 그들의 구세주를 기념하여 빵과 포도주 의식을 치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세주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되고, 나 또한 너와 더불어 하나가 되도록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러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 이야기와 이교도 신화가 이토록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경악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교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관점이 전적으로 대립된다고 믿는 문화 속에서 자라 왔다. 그렇다면 이토록 놀라운 유사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더 깊이 파고들수록 더욱 많은 유사성이 드러났다. 우리는 수많은 증거를 발굴해 냈다. 그 많은 증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이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며,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여러 가능성을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단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을 통해 우리는 그 동안 축적해 온 수많은 증거를 더없이 간단하게, 그리고 더없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수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유서 깊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하나의 '신화'라고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새롭고 유일무이한 계시 종교였던 게 아니다. 유대인 방식으로 각색된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진짜' 예수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을 늘어놓는 책이 허다한 마당에 이런 주장은 처음부터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렇지만 혁명적인 이론에 대해서는 마땅히 건전한 의심의 눈길을 던져야 한다. 이 책도 물론 아주 예외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그저 여흥을 위한 공상이 아니고, 물의를 일으키기 위한 억측도 아니다. 우리는 이용 가능한 역사적 자료와 가장 최근의 학구적 탐구를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우리의 주장을 아주 철저히 분석하고 싶어하는 독자를 위해 인용문의 출처, 참고 서적, 기타 보충 내용에 대해 풍부한 각주를 달아 놓았다(각주 분량이 이 책 원서의 3분의 1에 달하고 전문가를 위한 내용이 많아 이 역서에는 '저자주'로 일부만 옮겨 놓았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우리가 밝힌 수많은 아이디어는 아주 급진적이고 도전적이지만, 사실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찾았다. 19세기 접어들어서도 몽상적인 학자들은 우리의 결론에 비견되는 추측을 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현대의 고전학자들도 우리가 생각한 가능성들을 되풀이해서 지적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끌어낸 것과 같은 명백한 결론을 과감히 진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성하고 유일무이하며, 이교 신앙은 원시적이고 악마적인 활동이라는 믿음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서구 세계를 지배해 왔다. 때문에 이교 신앙이 부분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동일한 전통을 지녔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진실이 처음부터 명백해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직시하려면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 완전히 등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헌한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며 메마른 학구 서적이 아닌 대중 서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 복잡한 주제에 대한 최후의 결론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의 결론이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완벽한 재검토를 요청하는 값진 결론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울려 퍼지는 합창은 주인공의 운명을 예고한다. 이처럼 우리가 가야 할 험난한 길과 목적지를 미리 안다면 그 여정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더 섬세한 얘기로 접어들기 전에 우리의 발견 과정을 되짚어 보고 이 책의 간략한 조감도를 먼저 보여 드리고 싶다. 우리 두 사람은 일평생을 온 세계의 신비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지닌 채 살아왔고, 최근 들어서는 고대세계의 영적 신앙까지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예리한 학구적 탐구의 결과가 대중에게 널리 이해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우리도 처음에는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이교 신앙에 대해 부정확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사실 이교 신앙을 원시적인 미신으로 치부하도록 배워 왔다. 이교도들은 우상 숭배와 피의 제사에 사로잡혀 있었고 토가(로마 시민의 외투)를 걸친 삭막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오늘날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향해 장님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왔다고 배웠다. 우리는 올림포스의 남신과 여신들이 변덕스럽고 파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여러 고대 그리스 신화를 늘 들이 왔다. 대체로 이교 신앙은 원시적이며 근본적으로는 황당해 보였다. 그러나 수년 동안 연구한 후 우리는 전혀 달리 이해하게 되었다. 이교도의 영적 신앙은 사실상 고도로 발전한 문화의 세련된 산물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포스 신들을 숭배한 것은 국가적 권장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국교라 할 만한 이 같은 숭배는 화려한 겉치장과 축제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들의 참된 영적 신앙은 신비하고 역동적인 '여러 미스테리아종교 Mystery religions'를 통해 표출되었다. 미스테리아는 처음에 이단적인 지하 운동을 통해 고대 지중해 전역에 퍼져 번성해 갔고, 이교도 세계의 영적 지도자들을 고무시켰다. 영적 지도자들은 미스테리아를 문명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전통적으로 각각의 미스테리아는 공개적인(외적) 미스테리아나 은밀한(내적) 미스테리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공개적인 미스테리아는 참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는 의식과 상식적인 신화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은밀한 미스테리아는 강렬한 입문 절차를 거친 자에게만 전해지는 신성한 비밀이었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입문자들은 의식의 신비한 의미를 알게 되면서 미스테리아 신화의 비밀을 전수 받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개인적으로 탈바꿈해서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 고대세계의 철학자들은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영적 스승들이었다. 그들은 신비주의자였고,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케케묵은 학자라기보다는 힌두교의 구루(영적 지도자) 같은 인물이었다. 예컨대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오늘날 수학 정리를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불꽃 같은 신비주의 현자였다. 기적적으로 바람을 잠재우는가 하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로 신봉되었던 것이다. 미스테리아의 핵심에는, 죽어서 부활한 신인(神人)과 관련된 신화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신인은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이집트어로는 우시르),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로 불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 신인은 모두 동일한 신화적 존재이다. 이 책에서는 일찍이 기원전(BCE) 3세기에 통용된 이름들을 합성해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신인의 세계적이며 혼성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개별적인 미스테리아 전통을 언급할 때는 개별적인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저자는 기원전을 나타내는 'BC' 대신 'BCE[Before the Common Era]' 를 사용했고 또 AD 대신 CE를 사용하면서 이 용어들의 종교적 중립성을 주목해 달라는 각주를 달았다. 'BCE'는 '예수 이전' 이 아니라 '공동 시대 이전'을 뜻한다. 그러나 역서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BC, AD를 사용키로 했다 : 옮긴이 주). BC 5세기부터 크세노파네스와 엠페도클레스 등의 철학자들은 남신과 여신들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비웃었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를 인간의 영적 경험의 비유로 보았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닌 상징적 언어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상징적 언어로 이루어진 신화는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가르침이 암호화된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이 신화는 문화가 다른 곳에서는 다소 다르게 채택되어 발전해 나갔지만, 그 핵심만큼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미스테리아의 여러 신인들 신화는, 세기적인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동일한 해부 구조'라고 부른 것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모든 인간이 신체적으로 유일무이한 존재이지만 인체의 일반 해부구조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여러 신화도 유일무이하면서 동시에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전자는 부유한 이탈리아의 가문에 대해 쓴 16세기 영국의 비극작품이고, 후자는 거리의 갱들에 대해 쓴 20세기 미국의 뮤지컬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달라 보인다. 그러나 두 작품은 근본적으로 같은 이야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인들 신화는 형태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이다. 우리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의 다양한 변형들을 연구하면 할수록 예수의 이야기 역시 그 변형들이 지닌 온갖 특성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우리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신화의 골자를 추려내면 예수의 전기를 사사건건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육체를 가진 신이며 구세주이고 '하나님God의 아들 이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며 어머니는 인간처녀(동정녀)이다 그는 3명의 양치기가 찾아오기 전인 12월 25일에, 동굴이나 누추한 외양간에서 태어난다 그는 신도들에게 세례 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다. 그는 결혼식장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다. 그가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찬송하며 그를 맞이한다 그는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부활절 무렵에 죽는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해서 영광되이 하늘로 올라간다. 신도들은 최후의 날 심판 자로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 기념된다. 이것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이야기와 예수의 전기에 똑같이 나타나는 것들 가운데 핵심만 추린 것이다. 이처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전혀 몰랐던 것일까? 나중에 우리는 초기 로마 교회가 그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을 말살하기 위한 잔혹한 계획을 세우고 이교도의 신성한 문헌들을 체계적으로 말살했다. 이 계획은 너무도 완벽하게 수행되어 오늘날 이교 신앙은 '죽은' 종교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지만, AD 첫 몇 세기 동안의 작가들에게 있어 새로운 그리스도교와 고대 미스테리아 신앙 사이의 유사성은 명백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풍자가 켈수스 Celsus(AD 약 170) 같은 이교도는 새롭게 나타난 종교가 자신들의 옛 가르침을 엷게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AD 100-165), 테르툴리아누스(AD 160-220), 이레나이우스(AD 130-202) 등 초기 '교회의 아버지(교부(敎父))'들도 분명 너무나 곤혹스러운 나머지, 그 유사성이 악마의 모방 탓이라고 필사적으로 주장했다. 일찍이 제시된 불합리한 주장 가운데 하나였던 악마의 모방 이론을 채택한 그들은 악마가 '예상에 의한 표절'을 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즉 어수룩한 사람들을 오도할 목적으로, 예수의 진짜 이야기가 실제로 발생하기 전에 악마가 미리 예상을 해서 사악하게 모방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보기에 이 교부들은 그들이 죄를 덮어씌운 악마들 못지않게 사악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그리스도교 주석가들은 여러 미스테리아 신화가 예수의 실제 도래에 '앞서 울린 메아리', 즉 예언이나 예견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악마의 모방 이론을 좀 누그러뜨린 것이지만, 여전히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수 이야기가 그보다 먼저 있었던 수많은 신화의 역사적 완성 판이라고 보는 것은 문화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편견 없이 바라보면, 예수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똑같은 이야기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이교도 신화에서 인기 있던 테마가 예수 전기에 접목되었다고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건 다수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일찍이 언급한 대로이다. 예컨대 동정녀의 성령 잉태는 후대에 외래신화를 추가한 것이어서 문자 그대로 이해되면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테마는 이교 신앙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그 같은 차용은 이교도 축제들을 그리스도교 성자들의 날로 삼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축적된 신화의 잔재에 깔려 숨겨진 '진짜' 예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이론을 받아들인다. 일견 매력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설명이 부적절한 것 같았다. 우리는 유사성 전체를 포괄적으로 대조해 보았다. 그 결과, 예수의 전기 가운데 이교 신앙에 미리 나타나지 않은 테마는 거의 찾아들 수 없었다. 나아가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조차도 독창적인 게 아니라, 이교도 현자들이 이미 앞서 말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모든 것의 배후 어딘가에 '진짜' 예수가 실제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진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후대에 이교도 신화를 덧붙인 기록들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도 어쩐지 터무니없어 보였다. 이러한 수수께끼에 대해 좀더 우아한 해답이 분명 있지 않을까? 영지주의 앞서의 발견은 정말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초기 교회가 받아들인 것들에 하나하나 의문을 제기하면서 스스로 증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성자와 순교자들이 모두 한결같은 믿음을 지닌 것으로 배워 왔다.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달리, 성자와 순교자들은 사실상 여러 이질적인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큰 범주로 보면 이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문자주의자 Literalists 라고 부르는 집단이다. 이들은 예수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AD 4세기에 로마 제국이 받아들인 그리스도교가 바로 그것! 이는 로마 가톨릭 신앙이 되었으며, 훗날 여러 갈래로 분화되었다. 이와는 급진적으로 다른 그리스도교 집단이 있었는데, 영지주의자 Gnostics가 바로 그들이다(영지주의자Gnostics를 '정통' 교회 입장에서는 보통 '그노시스파' 라고 번역한다. '그노시스파'의 사전적 의미는 '그노시스[靈知] 개념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설명하려던 AD 2세기경의 이단 그리스도교인' 이다 : 옮긴이 주). 영지주의자들은 잊혀진 그리스도교인들이다. 훗날 로마 교회 문자주의자들의 박해를 받아 철저히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그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의 저술 외에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원래의 영지주의 문서가 한줌 남아 있을 뿐인데, 그것도 19세기 이전에는 출판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1945년에 이집트의 한 농부가 나그 함마디 근교의 한 동굴에 감춰져 있던 영지주의 장서를 우연히 발견했다(나그 함마디 Nag Hammadi는 나지 함마디 Naji Hammadi라고도 쓴다 : 옮긴이 주). 이 장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널리 배포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장서는 훗날 신약 <성서>에 포함되지 못했다. <도마의 복음서>, <빌립의 복음서>, 베드로와 12 사도의 행적을 기술한 텍스트, <바울의 계시록>과 <야고보의 계시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장서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그런 문서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새로 발견된 말씀들을 읽어 보려고 안달을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신약 <성서>로 채택된 몇 개의 복음서에만 매달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영지주의가 추방된 지 2천여 년 가까이 지났고, 그 동안 로마 교회에서 프로테스탄트(신교)가 갈라져 나갔으며, 수천의 개신교 집단이 생겼지만, 영지주의는 아직도 합법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영지주의 복음서를 탐구해 보면 그들에게 친숙한 종교와는 매우 이질적인 그리스도교의 한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집정관들의 본질>, <노레아의 생각>과 같은 낯선 제목의 문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마치 영화 <스타 트랙>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지주의는 진정한 '정신의 우주 비행' 이었다. 영지주의는 생명의 기원과 의미를 탐색했고 내면 우주의 마지막 미개척지를 대담하게 탐구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가였으며, 창조적인 자유 사상가였다. 그들이 문자주의자 교회의 주교들에게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는지는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문자주의자들에게 영지주의자는 이단자였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이단자! 반영지주의 저술들---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지녔던 힘과 영향력을 반증하는 자료들---을 보면, 영지주의자들은 '토착화된' 그리스도교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주위의 이교 신앙에 오염되어 참된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한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전통을 지켜 가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문자주의자 주교들을 '교회를 위조한 자'라고 생각했다. 또, 문자주의자들이 갖지 못한 은밀한 그리스도교의 미스테리아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영지주의의 믿음과 실천을 탐구하면서, 문자주의자들이 한가지만은 옳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와 별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를 논한 철학자들처럼 그들은 다시 육체를 부여받음(환생)을 믿었고, 여신 소피아(지혜)를 찬양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신비한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다. 영지주의자Gnostics란 '아는 자' 라는 뜻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은밀한 가르침이 영지Gnosis. 곧 직접 경험에 의거한 '신에 대한 앎'을 전하는 힘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교도 입문자가 하나의 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리스도교 입문자의 목표는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가 충격을 받은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예수 이야기가 지닌 의미는, 이교도 철학자들에게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지닌 의미와 동일했다. 주 예수 이야기는 은밀하고 신비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하나의 비유였다.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주목할 만한 가능성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교도 신화와 예수 전기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설명은 사실 항상 있었지만, 우리는 그 설명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로소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미스테리아 명제 로마 교회 당국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역사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한 유대인 메시아의 가르침에서 발전했으며, 영지주의는 훗날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이 뒤집혀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영지주의야말로 참된 그리스도교라면 어쩔 것인가? 정통 가톨릭 신앙이 영지주의에서 갈라져 나온 훗날의 한 분파라면? 그리고 영지주의가 유대인과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을 합성한 것이라면? 이러한 생각이 바로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의 출발점이었다. 대담하게 말해서, 우리 앞에 출현한 그림은 다음과 같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더 먼 옛날의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여 민족적 취향에 따라 각색을 했으며, 죽은 후 부활한 신인 신화의 여러 버전을 만들었다. 그 중 일부 유대인들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여 우리가 오늘날 영지주의로 알고 있는 것을 만들어 냈으며, 유대인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의 유력한 상징들을 자신들의 신화로 각색했다. 그 신화의 주인공이 바로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 godman 예수이다. 만일 이 같은 대담한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 이야기는 결코 전기가 아니라, 유대인 영지주의자들의 영적 가르침을 암호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교묘히 꾸며 낸 것이 된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종교에서처럼, 영지주의의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하면 신화의 우의(寓意)적 의미가 밝혀지게 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입문을 하지 못한 자가 실수로 예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는 바람에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탄생했을 수도 있다. 영지주의자들이 가르쳤지만 문자주의자들은 부인해 온 그리스도교의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따르면, 예수 이야기는 하나님이 지구 행성을 유일하게 한 번 방문했다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예수 이야기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꾸며 낸 신비한 가르침일 뿐이다. 예수 이야기는 신화로서의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어차피 새로 발견된 영지주의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들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일 사람도 없다. 그 복음서는 당연히 신화로 보인다. 그런데 신약 <성서>의 복음서들을 마찬가지 관점에서 보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문화적 편견의 소산일 뿐이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들 또한 우리가 잃어버렸다가 최근에 새로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대체 누가 그 복음서를 열렬히 읽을 것인가? 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인간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며, 물 위를 걸었고, 죽은 후 부활했다는 것을 누가 사실로 믿겠는가? 오시리스 · 디오니소스 · 아도니스 · 아티스 · 미트라스, 기타 이교도 미스테리아 신앙의 구세주 이야기는 모두 비유라고 생각하면서, 근본적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유대인식(式)으로 각색한 베들레헴의 한 목수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인으로 자라 온 우리 두 사람은 수년 동안 열린 마음으로 영적 탐구를 했으면서도 감히 그런 의문을 갖는다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교리를 주입하면 아주 깊이 침투한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우리는 예수가 이교도의 신이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이교 신앙의 이단적 산물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런 발언은 위험천만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명제에 따르면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들 사이의 유사성이 간명하고 우아하게 설명되었다. 이들 이야기는 발전하고 있는 신화 체계의 일부인 것이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는 당혹스러운 많은 질문에 답한다. 하지만 새로운 딜레마를 낳기도 한다. 예수라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증거는 정말이지 전혀 없는가?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인으로 알려진 바울이 반 영지주의를 그토록 크게 부르짖었다는데, 영지주의가 어떻게 원래의 그리스도교 신앙일 수 있는가? 유대인처럼 근성이 강한 반이교도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믿을 만한가? 의식적으로 꾸며 낸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영지주의가 진짜 그리스도교를 대표한다면, 문자주의자들의 그리스도교가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세계를 장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여러 질문에 모두 만족스럽게 답해야만 우리는 그처럼 급진적인 이론을 진심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거대한 은폐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설명이 터무니없는 말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오직 기존의 견해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구를 더욱 밀어붙이자 전통적인 그림이 완전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종교적 분파와 권력 투쟁, 위조 문서와 허위 인물들, 편집되고 추가된 편지들, 역사적 증거의 대대적인 말살의 세계에서 우리는 허우적거렸다. 결국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에만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는 추리소설 속의 범인을 알아내기 직전에 있는 탐정과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배달 착오로 알려지지 못한 고대의 정의(justice)를 밝히기 직전에 있는 것 같았다. 남아 있는 진짜 증거가 무엇인지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 엄밀히 검증하는 동안, 우리는 로마 교회가 우리에게 물려준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진실을 총체적으로 왜곡한 것임을 알아냈다. 실제 증거에 따르면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가 전적으로 옳았다. 우리는 기만을 당해 왔으며, 영지주의야말로 원래의 그리스도교였고, 그들의 무정부적인 신비주의는 제도권 당국자들에 의해 말살되었으며 이윽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은폐 행위가 잔혹하게 자행되었다는 것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이토록 거대한 은폐 행위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은 유세비우스(AD 263-339)라는 인물이다. 그는 AD 4세기 초에 전설을 수집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이고 날조해서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를 집필했다. 이후의 모든 역사는 유세비우스의 의심스러운 주장을 토대로 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인용할 다른 정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죄다 이단자로 낙인 찍혀서 제거되었다. 이런 식으로 4세기에 편집된 거짓 문서가 우리에게 확고한 사실로 전해 내려왔다. 유세비우스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에게 고용되었다. 이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고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에게 권력을 부여해서 이교도와 영지주의자들을 말살하게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주장인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하나의 신, 하나의 종교'를 원했다. 그는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신조인 니케아 신경(信經)을 만들게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이라는 이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은 제국에서 추방되거나 침묵해야 했다.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 '그리스도교인' 황제는 니케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내를 목졸라 죽였고 아들을 살해했다. 그는 임종할 때까지 일부러 세례를 받지 않았다. 잔혹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 받고 천국의 자리를 보장 받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교회 박사'인 유세비우스로 하여금 아첨으로 가득한 자기 전기를 쓰게 해서 자신을 미화시켰지만, 사실상 그는 앞서의 로마 황제와 똑같은 괴물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가 로마인 폭군에게 고용된 한 사람이 지어낸 것이고, 그것이 온통 거짓말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정말이지 놀라운 일 아닌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학자 가운데 하나인 일레인 페이절스는 이렇게 썼다. 역사를 쓰는 자는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제멋대로 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 설명에서 자기들은 '정통'이고 적들은 '이단'이라고 정의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고-종교적 용어로 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고-선전했다. 그들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그 함마디에서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발견됨으로써 근본적인 의문이 다시 제기되었다. 역사는 철저히 승리자에 의해 씌어진다. 적절한 역사를 꾸며 낸다는 것은 항상 정치적 조작을 위한 병기를 제작하는 것과 같았다. 2천여 년 후 할리우드에서 '서구가 어떻게 졌는가'가 아니라 '서구가 어떻게 이겼는가'를 말하기 위해 '카우보이와 인디언' 이야기를 꾸며 내는 것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로마 교회는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승리의 역사를 꾸며 냈다. 역사는 단순히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너무도 빈번하게 역사는 단지 현상을 정당화하고 찬양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역사는 드러내는 것 못지않게 감추는 게 많다. 받아들여진 역사에 감히 의문을 단다는 것은 쉽지 않은 노릇이다.어렸을 때부터 사실이라고 들이 왔던 이야기가, 알고 보니 날조된 허구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친절한 '우리 아저씨' 스탈린 이야기를 들으며 커 온 러시아인들이, 사실은 스탈린 때문에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탈린 정권에 반대한 사람들은 스탈린이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영웅들을 실제로 살해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런 주장도 전혀 믿기지 않았다. 스탈린이, 심지어는 정적들의 이미지를 아예 말살시켜 버렸고 역사적 사건들을 완전히 날조했다고 주장했을 때에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 아닌가!. 다른 모든 사람이 믿는다면 그것은 진실임에 틀림없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감히 의심함으로써만 밝혀 질 수 있다. 너무나 널리 믿어져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도 의심해 봐야 한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는 그처럼 열린 정신의 산물이다. 처음 우리에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은 터무니없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명백하고 평범해 보인다. 로마 교황청은 고대 이교도의 성지에 세워졌다. ---새로운 것은 항상 옛 것 위에 세워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자체도 앞서 존재한 이교도의 영적 신앙을 토대로 삼고 있다. 끊이지 않은 역사적 연속체의 형태로 그리스도교가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에서 비롯함으로써, 영적 아이디어가 점진적으로 진화했다고 보는 것보다 더 그럴듯한 가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이단적이고 충격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오직 역사적으로 너무나 오래, 너무나 널리 믿어온 탓이다 신비한 그리스도교의 재발견 퍼즐의 마지막 조각들을 끼워 맞추고 있을 때, 우리는 우연히 한 고서(古書)의 부록에 삽입된 작은 그림을 보게 되었다. AD 3세기의 부적 그림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인물 그림인데, 누구나 그걸 보면 예수 그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 밑에는 그리스어로 '오르페우스가 바쿠스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우리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라고 표기해 온 바로 그 인물인 것이다. ---이 그림이 실린 책의 저자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부적에 그려진 자는 정말 누구였을까? 십자가에 못 박힌 이교도 신격이었을까? 아니면 이교 신앙과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의 합체였을까? 어느 쪽이든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적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뜻밖에도 이 부적은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가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것은 예수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미스테리아 입문자에게는 둘 다 근본적으로 같은 인물에 대한 두 가지 이름일 뿐이었다. 이 부적의 '우연한' 발견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 알아낸 것들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고 우주가 우리를 격려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는 신비가와 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창해 왔지만, 결국에는 항상 무시당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인정 받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쓴다는 것이 정말 걱정스러웠다. 불가피하게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의 분노를 살 텐데, 그것은 우리가 전혀 바라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거짓말과 불공정한 판단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 영지주의에 대한부정적인 허위 진술에 대해 다소간 분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교도 문화가 얼마나 기름진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면, 그 문화가 무도하게 파괴당했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 그리스도교를 부르짖을 생각이 전혀 없다. 우리의 다른 저서를 읽으신 분이라면 우리의 관심사가 분열을 조장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모든 영적 전통의 심장부에 놓인 통일성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이 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초기의 문자주의자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이야기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이야기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예수만이 신화적 인물이 아닌 역사적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이 다른 신앙과는 반대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계속 진화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의 영적 신앙의 참된 기원을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스스로 부과한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우리는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로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이 참 그리스도교에 해를 미친다고는 보지 않는다. 역으로 이 글은 우리가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풍요로운 그리스도교를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예수 이야기는 구하는 자에게 영지를 전해주는 힘을 지닌 항구적인 신화이다. 이 신화는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예수 이야기는 약 2천여 년 전에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원래 예수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영적 신앙, 곧 공개적 미스테리아를 믿는 첫 단계였다. 구하는 자가 영적으로 성숙했을 때에는 계몽된 교사로부터 미스테리아의 의미를 전수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 은밀한 미스테리아는 교리에 대한 단순한 믿음 너머에 있는 신에 대한 신비한 앎을 깨우쳐 주었다.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은 직관적으로 심오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을 하나의 문화로 물려받았다. 우리는 그 형식은 지켜 오면서 내적 의미는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이 책이 참되고 신비한 그리스도교 유산을 회복하는데 작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바랄 게 없다. 2장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저 행복한 자는 복이 있도다, 신들이 마련한 미스테리아를 알고, 자신의 삶을 신성케 하며, 신비한 합일 속에서 영혼과 영혼을 결합하고, 마땅히 순수해진 의식(儀式)으로 산상 고독의 황홀경에 드는 자여, 위대한 어머니가 이르신 신비한 관례를 지키는 자여, 머리에 담쟁이덩굴을 쓰고 디오니소스를 경배하여 지팡이를 흔드는 자여. - 에우리피데스 이교 신앙은 '죽은' 종교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살된' 종교이다.그냥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억압당했고 학살되었으며, 그 신전과 성소는 능욕당하고 파괴 되었으며, 위대하고 신성한 책들은 화톳불에 던져졌다. 그 고대의 신앙을 설명하는 글 한 줄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래서 이교 신앙의 세계관은 외부 문헌들과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조각 그림 맞추기와도 같다. 이교도 Pagan란 원래 시골 거주자를 경멸해서 일컫는 말이었다.그리스도교인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고대인의 영적 신앙이 원시적인 시골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원시적인 게 아니었다. 이교 신앙은 기자(이집트 카이로부근의 도시)의 피라미드, 파르테논의 절묘한 건축물, 그리스 조각가 피디아스(BC 약 500-432)의 전설적인 작품, 에우리피데스와 소포클레스의 강렬한 희곡 작품,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웅대한 철학과는 또 다른 장엄함을 고취시키는 영적 신앙이었다. 이교도 문명은 거대한 도서관들을 세웠다. 그 도서관에는 문학과 과학의 천재성이 발휘된 수많은 작품이 담겨 있었다. 당시의 자연철학자들은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했다고 추론했다.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다른 여러 행성과 더불어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 둘레의 근사치를 계산해내기까지 했다. 고대 이교도 세계의 인구 수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에 살고 있는 인구수 보다도 많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교도 문화는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합리적 철학, 공공 도서관, 극장, 올림픽 게임을 탄생시켜서 우리의 현대 세계를 위한 청사진을 창조해 냈다. 이토록 기념비적인 문화적 성취를 고취시킨 영적 신앙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교 신앙이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헤시오도스(BC 8세기)와 호메로스(영어식으로는 호머)가 기록한 올림포스 신들의 신화나 조악한 마법을 연상한다. 사실 이교도의 영적 신앙은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시골 사람들은 전통적인 샤머니즘에 따라 자연을 숭배하며 대지가 계속 비옥하기를 기원했고 도시 당국자들은 공식적인 국교를 장려했다. 올림포스의 신들을 숭배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장려된 종교(국교)였는데,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정치권의 현상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샤머니즘과 국교 외에 세 번째로 이교도의 좀더 신비한 정신을 표현하는 신앙이 있었다. 그것은 고대세계의 위대한 정신을 고취시켰다. 사상가, 예술가, 낡은 것의 혁신자 등은 미스테리아로 알려진 다양한 종교의 입문자들이었다. 주목할 만한 이 사람들은 미스테리아가 그들 문화의 심장이자 영혼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조시모스는 '신성한 미스테리아는 모든 인종을 포용했다'는 이유에서 미스테리아가 없으면 '그리스인들의 삶은 유지될 수 없을 것' 이라고 썼다. 또 유명한 로마 정치가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했다. 이들 미스테리아는 조악한 야만성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서 세련되고 계발된 문명을 일구게 했다. 미스테리아의 여러 의식은 '입문식initiations' 이라고 불리며, 우리는 진실로 이를 통해 삶의 최초 원리를 배웠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나은 희망을 안고 죽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어 왔다.(조지프 캠벨의 <법에 관하여 0n the Laws>에서 재인용) 사회적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공식 국교의 전통 의식과 달리 미스테리아 신앙은 개인적 계몽과 신비한 비전을 제공하는 개인적 형태의 영적 신앙이었다. 입문자는 비밀 입문식 절차를 거쳤고, 이 절차는 의식의 상태를 심오하게 탈바꿈시켰다. 그리스의 서정 시인 핀다로스는 미스테리아 입문자가 '신이 부여한 삶의 시작과 끝을 안다'고 말했다. 로마의 시인 철학자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자신의 입문 경험이 영적 신생이었다면서, 그날을 생일로 삼았다. 그 경험에 대해 그는 '갚을 길이 없는 감사의 빗'을 졌다고 생각했다.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비전을 보며, 진정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미스테리아의 세계에 입문했다. 우리는 순결한 상태에서 의식을 거행했다. 고요하고, 행복하고, 단순하고, 영원한 비전, 순수한 빛을 내뿜는 찬란한 비전들을 보았다.(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파이드로스>) 위대한 이교도 철학자들은 계몽된 미스테리아의 스승들이었다. 오늘날에는 흔히 메마른 학구적 지성인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들은 사실상 수수께끼 같은 구루(영적 지도자)들이었다. 엠페도클레스는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일으키는 자였다. 소크라테스 또한 별난 신비가였다. 그는 홀연히 황홀경에 빠져서 몇 시간씩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하곤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입법가가 되어 달라는 에페소스 시민들의 부탁을 받았지만 한마디로 거절해 버리고 계속 신전에서 아이들과 놀며 지냈다. 아낙사고라스는 '더욱 지고한 철학'에 평생을 바치기 위해 자신의 농장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보통의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신전 입구에 있는 항아리 안에서 살았다. 영감을 받은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외딴 동굴에서 고독하게 살며 그의 최고 걸작을 집필했다. 이 모든 특이한 현자들은 미스테리아의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철학을 통해 신비주의를 표현했다. 플라톤의 제자인 올림피오도루스의 말에 따르면 플라톤은 미스테리아를 항상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술은 고대에도 너무나 난해하고 불가해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디오게네스는 그처럼 불가해한것이 미스테리아 입문자에게는 수정처럼 투명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연구한 그는 이렇게 썼다. 어둠으로 가득 찬 그의 길을 뒤따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입문자가 그대를 안내한다면, 그의 길은 태양 빛보다 더 밝아진다. 이교도 철학의 핵심에는 모든 것이 하나0ne라는 깨달음이 놓여있다. 미스테리아는 입문자의 내면에서 이 하나됨의 숭고한 체험이 일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로마의 역사가 살루스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입문식은 우리가 그 미스테리아의 세계 그리고 신성과 하나됨을 목표로 한다'. 이집트 태생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개별 자아로서의 한계를 초월한 입문자가 신비하게 신과 합일하는 체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떤 신god에게 사로잡힌 듯, 혹은 신들린 듯한 상태에서 그는 결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 집착함이 없고, 자아로 법석거림도 없는 고요 속에서 고독에 도달하며, 완전한 휴식 상태에 들어서서 휴식 자체가 된다. 그는 이미지가 아닌 신성 자체와 대화를 한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관조의 한 방식이다. 그것은 자아로부터의 초월이고, 자아의 단순화와 자아의 항복이며, 하나됨의 열망이다. 이 고요와 명상은 탈바꿈을 지향한다. 누구라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보는 자는 신God과 닮은 상태에 도달했다. 그는 자아를 포기하고 여행의 목적을 발견한다. '미스테리아 홀에서 나온 나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입문자 소파트로스가 시적으로 이렇게 노래한 것은 전혀 이상할 개 없다 엘레우시스에서의 신성한 장관 그와 같은 경외감과 진심 어린 감회를 고취시키는 고대 미스테리아는 정작 무엇이었을까? 미스테리아 신앙은 수천 년 동안 계속 이어져, 여러 형태로 고대세계 전역에 펴졌다. 더러는 광란적이었고, 더러는 명상적이었다. 더러는 동물 희생제 형태를 띠었고, 더러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지켰다. 역사상 어떤 순간에는 미스테리아 의식이 전체 인구가 참여한 공개적 의식이 되었고 국가 권력에 의해 장려되거나, 적어도 관용이 된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어떤 시대에는 비동조적인 권력자의 박해가 두려워 규모가 작아지고 은밀해졌다. 그러나 이런 모든 미스테리아의 핵심에는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엘레우시스에서 거행된 고대 그리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은 위대한 어머니 여신을 기렸는데, 모든 미스테리아 신앙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는 디오니소스 신인이었다. 성소인 엘레우시스는 AD 396년에 광신적인 그리스도교 수도사 무리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런 잔혹한 행위가 있기까지 엘레우시스에서는 11세기 이상 미스테리아 의식을 치러 왔다. 절정기에는 당시 알려진 세게 모든 곳에서 입문식을 치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노예와 황제, 심지어 인도의 브라만 사제들까지도 참여했다. 해마다 약 3만 명의 아테네 시민들은 디오니소스의 가을 미스테리아 의식을 치르기 위해, 해변에 있는 엘레우시스 성소까지 맨발로 30킬로미터에 이르는 순례 행진을 했다. 이 중요한 종교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은 며칠 동안 금식을 하고, 희생물을 바치고, 정화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엘레우시스까지의 '신성한 길'에서는 열광적인 음악이 울려 퍼졌다. 입문하려는 자들이 춤을 추며 걸을 때,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그들을 욕하며 모욕을 주었고, 더러는 지팡이로 때리기까지 했다. 선두에서는 디오니소스상(像)을 실어 나르며 행렬을 이끌었다. 바다에서 나체 목욕 등의 정화 의식을 치른 후, 군중들은 거대한 입문식 홀인 텔레스테리온Telestrion의 대문 앞에 이르렀다. 이미 입문식을 치른 사람과 이제 비로소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하게 될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대문 뒤에서는 어떤 의식이 치러졌을까? 고대세계의 위대한 철학자, 예술가, 정치가, 과학자들을 그토록 깊이 감동시킨 경외로운 의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모든 입문자는 비밀 서약을 했다. 그들은 미스테리아가 너무나 신성해서 서약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많은 암시와 단서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극적이고 장엄한 광경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현란한 빛을 보았고 놀라운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거대한 불길 속에서 목욕을 했고, 위력적인 종소리의 진동에 몸을 떨고 말았다. '히에로판테스Hierophantes(신성한 환상이라는 뜻, 미스테리아 의식의 진행자이자 비의[秘義]해설자 : 옮긴이 주)' 라고 불린 미스테리아의 제사장은 말 그대로 쇼를 연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성한 신화를 소름 끼치도록 극적으로 재연했다. 또한 그는 몸소 핵심 인물인 신인 디오니소스로 분장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따라서 미스테리아 의식은 곧 한 편의 신성한 드라마였다. 소수의 선택된 관객이 경외의 눈길로 지켜보는 동안 갈등과 고통, 수호신의 승리, 자연의 산고(産苦) 이야기가 전개되고, 결국에는 삶이 죽음을 이기고 고통 속에서 기쁨이 탄생한다. 미스테리아의 모든 의식은 특히 정서적 삶을 자극하고자 했다. 이 수난극에서는 자극을 주어 주의를 끌 목적으로 정서를 자극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강렬한 정신적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금욕 기간을 두고, 침묵을 지키게 하고, 행렬을 시키고, 공들여 장관을 연출하고, 크고 격렬하거나 부드럽고 황홀한 음악을 연주하고, 춤에 몰입하게 하고, 알코올 음료를 마시게 하고, 육체를 수척하게 하고, 짙은 어둠과 현란한 빛을 교차시키고, 휘황찬란한 복장들을 착용하고, 신성한 휘장을 다루고, 히에로판테스의 쇼를 연출함으로써 정신적 기대감은 고조되었다. 이 밖에도 은밀하게 정서를 고양시키는 수많은 방법이 사용됐다. 디오니소스 신화를 이런 드라마로 만든 것은 비극 작품과 극장의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입문자들은 수동적인 관객이 아니었다. 죽어서 부활한 신인이 입문자 각각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신인과 수난을 함께하는 참여자였다. 이 신화의 현대 권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디오니소스는 가장 복된 황홀경의 신이었고, 가장 황홀한 사랑의 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박해 받은 신이었고, 고통을 당하다 죽은 신이었다. 그가 사랑한 모든자, 그를 섬긴 모든 자들은 비극적 운명을 그와 함께해야 했다. 경외로운 디오니소스 비극을 목격하면서, 엘레우시스에서의 입문자들은 상징적으로 디오니소스와 함께 수난을 당한 뒤 죽어서 부활했고, 그럼으로써 '카타르시스'라고 알려진 영적 정화를 체험했다. 이 미스테리아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교리를 제시한 게 아니라 안으로 뛰어들어서 동참해야 할 신화를 제시했다. 입문식은 뭔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각성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이교도 제사장이었던 플루타르코스는 입문자들이 자신이 획득한 믿음의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이렇게 주장했다. '입문자는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 다만 강한 인상을 받고 어떤 정신의 기틀을 세우면 된다'. 철학자 프로클루스는 미스테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입문자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신적인 의식(의식)에 영혼이 공명함으로써, 더러는 신성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더러는 신성한 상징과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신들과 어우러지며 신들림을 체험한다'. 그런데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연극으로 공연된 신화가 그토록 큰 효력을 지녔던 이유는 무엇일까? 암호화된 은밀한 가르침 고대에 신화mythos라는 말은 오늘날과 달리 '비사실적인' 어떤 것을 뜻하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보면 신화는 즐거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입문자에게 신화는 심오한 영적 가르침을 담고 있는 신성한 암호였다. 플라톤은 이렇게 평했다. '우리를 위해 입문식을 설정한자들 또한 바보가 아니어서, 그들의 가르침에는 감춰진 의미가 있다'. 플라톤은 또 '참된 철학에 삶을 바친 자'야 말로 미스테리아 신화의 암호화된 '감춰진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신비한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 신인과 완전히 일체가 될 수 있다고 풀이했다. 고대 철학자들은 미스테리아 신화가 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철학자들은 충분히 현명해서, 미스테리아의 핵심에 자리잡은 심오하고 신비한 철학을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 바로 신화라는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살루스티우스는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에게 신들의 진실을 가르치고자 하면 바보들은 배울 수가 없어서 철학을 싫어하게 되고, 잘 배우는 자는 게을러지게 된다. 반면에 신화 속에 진실을 숨겨 놓으면 바보는 철학을 싫어하지 않게 되고, 잘 배우는 자는 열심히 연구하게 된다. 미스테리아 신화 속에 감춰진 영적 의미의 심연을 파헤치는 것이 미스테리아 철학자와 사제들의 역할이었다. 사제였던 헬리오도루스는 이렇게 풀이했다. 철학자와 신학자는 이들 신화 속에 감춰진 의미를 보통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화의 형태로 초보적인 가르침을 줄 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미스테리아에 도달한 자들은 은밀한 성소에서, 강렬한 진리의 횃불에 투사된 빛 속에서 입문식을 거치며 명료한 앎을 얻게 된다. 입문식은 여러 수준으로 나뉘어 있어서, 입문자는 단계별로 점점 더 심화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입문식은 여러 미스테리아 전통에 따라 수준이 다양했지만 어떤 입문자든 반드시 공개적 미스테리아에서 시작하여 은밀한 미스테리아로 넘어갔다. 공개적 미스테리아에서는 신화가 종교적인 이야기라고 피상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거치면 신화가 영적 비유로 이해되었다. 먼저 입문자는 의식을 통해 정화되었다. 그런 다음 1 대 1로 은밀한 가르침을 배웠다. 입문자가 여러 가르침의 참 뜻을 이해하게 되면 최고 단계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스미르나(현재의 터키 서쪽 항구)의 테온(4세기 후반의 천문학자 겸 수학자)이 '신과의 우호와 내적 교섭' 이라고 부른 것을 체험하게 된다. 국제적인 미스테리아 미스테리아는 이교도 세계를 지배했다.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유적에서 디오니소스만큼 많이 나타나는 신격은 없다. 그는 여러 이름을 가진 신격이었다. 이아코스, 바사레우스, 브로미오스, 에우이오스, 사바지우스, 자그레우스, 이히오네우스, 레나이오스, 엘레우테레우스 등 다른 수많은 이름이 모두 그를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에서만 쓰인 이름이 그렇게 많다! 디오니소스 신인은 고대 지중해 전역에 널리 알려진 신화적 인물이었지만,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수가 탄생하기 5세기 전에,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고대 이집트를 여행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나일강 삼각주의 어느 신성한 모래톱에서 그는 대규모 축제를 목격했다. 해마다 열린 그 축제에서 이집트인들은 '수만 명의 남녀'가 보는 가운데,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연극 공연을 했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그리스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 그래서 그는 '오시리스 수난극'이 엘레우시스에서의 입문자들이 지켜본 디오니소스 수난극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들 수 있었다(헤로도토스의 <역사> 제2권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호수에서 이집트인들은 밤중에 그들이 미스테리아라고 부르는 누군가의 수난극을 공연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리스의 모든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처럼 헤로도토스는 그것을 비밀에 부치겠다고 엄숙히 맹세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집트에서 똑같은 의식이 공개적으로 공연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역사>에서 흔히 다른 입문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 고의로 웅변적인 침묵을 유지한다. 그처럼 선택된 소수만을 위해 엄격히 비밀리에 공연된 드라마가 이집트에서 공공연히 공연되는 것을 보고 그는 놀랐음에 틀림없다. 그는 은밀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그 공연의 모든 세부 내용을 나는 환히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 저자주).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는 미스테리아 신인에 대한 최초의 신화이며, 선사 시대까지 소급되는 것이다. 오시리스 이야기는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4천500여 년 전에 기록된 피라미드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헤로도토스는 또 다른 위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선례를 따랐다. BC 670년 이전의 고대 이집트는 폐쇄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고대 이집트는 국경을 개방했다. 이때 고대의 지혜를 찾아 그곳으로 여행한 최초의 그리스인 가운데 1명이 바로 피타고라스였다. 역사적으로 피타고라스는 서구 최초의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고대 이집트에서 고대 그리스로 수많은 수학 이론을 수입해 온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당대인들에게 그는 현대적 의미의 과학자와는 사뭇 다른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희고 헐렁한 의상을 걸치고 황금 화관을 쓴 채 방랑하는 현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카리스마를 지닌 사제였으며 , 과학자였고, 마법사였다. 그는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 22년을 보내며, 고대 이집트의 미스테리아 입문자가 되었다. 그리스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기가 배운 지혜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기적을 행했으며,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웠고 예언을 했다. 피타고라스에게 감화된 제자들은 이집트의 미스테리아를 모델로 한 그리스의 미스테리아를 만들었다. 그들은 토착 주신(酒神)인 디오니소스를 선택했다. 디오니소스는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무시한 작은 신이었다. 그들은 디오니소스를 이집트의 막강한 오시리스에 필적하는 신인으로 탈바꿈시켰다. 이것은 아테네를 문명 세계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 종교 문화적 혁명의 시작이었다.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은 미덕과 배움의 모범을 보였고 이웃 사람들에게 금욕주의자로 간주되었다.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던 그들은 모든 생물에 대한 비폭력을 가르쳤고, 동물을 죽여서 제사 지내는 신전 의식을 멀리했다. 그래서 그들은 올림포스의 신들을 받드는 아테네 전통 종교에 참여할 수 없었다. 도시 외곽에서만 살도록 강요된 그들은 공동체를 형성해서 모든 소유물을 공유했고 자유롭게 살면서 수학과 음악, 천문학, 철학에 대한 신비한 연구에 몸을 바쳤다. 그런데도 미스테리아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었고 몇 세대 지나지 않아서 이집트 오시리스의 미스테리아, 곧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는 아테네의 영광을 드높이게 되었다. 오시리스가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토착신인 디오니소스와 합성되어 그리스의 미스테리아가 태어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지중해 문화권에서도 미스테리아가 유입되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토착신 가운데 하나를 탈바꿈시켜, 죽었다가 부활한 미스테리아 신인으로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오시리스로 알려진 이 신인은 고대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가 되었고,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 등등이 되었다. 이처럼 형태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신인들은 동일한 존재였다('오시리스는 곧 디오니소스' 라고 헤로도토스는 기술했다. 디오도루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저술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 : 저자 주). 고대인들은 다양한 미스테리아 신인들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신화적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신화와 서로 다른 의식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넘나들며 결합하고 재결합해서 새로운 형태의 미스테리아가 만들어졌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티모테오스라는 현자는 의식적으로 오시리스와 디오니소스를 합성해서 세라피스라는 새로운 신인을 만들었다. 그는 또 미스테리아 신인인 아티스의 신화를 자세히 해설하기도 했다. 로마의 저술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페르시아의 신인 미트라스의 이름을 딴 한 사제를 통해 이집트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치렀다. 로마의 동전에는 한 면에 디오니소스가 새겨졌고 다른 면에는 미트라스가 새겨졌다. 이 신화의 현대 권위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비밀 의식들에 대해 알게 된' 미스테리아 입문자는 '유행하는 다른 어떤 신앙에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훗날 그리스도교가 그랬던 것처럼 미스테리아도 국경을 넘어 전파되어 인종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적합한 영적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디오게네스와 소크라테스 등 BC 5세기의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특정 국가나 특정 문화의 사람이 아닌 '세계인' --세계시민--이라고 일컬었다. 이러한 사실은 미스테리아의 국제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여러 미스테리아 전통들의 합병과 결합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러한 현상은 민족이 다르면 신들도 다르다는 유치한 개념에서 탈피하여 모든 민족, 모든 지방의 신들은 다만 하나의 위대한 힘Power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쪽으로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등의 종교가 일어남으로써, 그리스-로마의 모든 신들이 끊임없이 디오니소스로 합병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예수 그리스도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그처럼 세계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 신인이 각 입문자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전인적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미스테리아 신인의 우의적 신화를 이해함으로써 입문자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처럼 그들 또한 '육체를 가진 신'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물질적 육체 안에 갇힌 불멸의 영혼이기도 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죽음을 공유함으로써 입문자들은 상징적으로 '죽었다' . 또한 부활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은 영적으로 재생했고 영원하고 신성한 실체를 체험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을 위해 암호화 되었고, 입문자들은 그 진리를 스스로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영국 박물관의 골동품들을 지키고 있는 월리스 버지 경은 고대 이집트의 미스테리아 신인 오시리스에 대해 쓴 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시기의 고대 이집트인들은 다음과 같이 믿었다. 오시리스는 신격을 지녔으며, 악의 수중에 사로잡혀서 수난을 당하다 죽었고, 악의 세력들과 위대한 투쟁을 벌인 후 다시 부활했으며, 그 후 지하세계의 왕이 되어 죽은 자를 심판하게 되었다. 그가 죽음을 정복했기 때문에 의로운 자 또한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오시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었다. 모든 시기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오시리스는 인간의 질병과 죽음을 동정할 수 있는 존재를 상징했다. ---한 인간으로서 수난을 당하고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시리스가 인격을 가졌다는 개념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열망을 만족시켰다. 부분적으로 신이지만, 인간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 존재와의 교섭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원래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를 한 인간으로 우러러보았다. 오시리스가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살고 먹고 마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한 인간이면서도, 어떤 신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인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시리스가 한 일은 그들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모든 미스테리아 신인들의 신화를 특징짓는 핵심 테마이다. 버지 경이 오시리스에 대해 말한 것은 디오니소스와 아티스, 아도니스, 미트라스 등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 신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육체를 가진 신이며, 부활의 신이다. 예수 또한 신성한 수난의 공유를 통한 영적 재생을 신도들에게 약속한다. 결론 미스테리아는 고대세계에서 분명 지극히 위력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것들을 정리해 보자.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는 고대세계의 위대한 정신을 고취시켰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여러 형태의 미스테리아 의식이 거행되었다. 미스테리아는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은밀한 미스테리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개적 미스테리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은밀한 미스테리아는 강력하고 신비한 입문식을 치른 자에게만 알려졌다. 미스테리아의 핵심에는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자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영적 가르침을 암호화한 영적 비유임을 깨달았다. 우리의 호기심을 강하게 끄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예수의 전기로 전해진 것은 정말 미스테리아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인가? 여러 이교도 미스테리아 신인들과 달리, 전통적으로 예수는 신화적 인물이 아닌 역사적 인물로 여겨졌다. 즉, 문자 그대로 신의 화신인 인간이었고, 수난을 당하다 죽은 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부활한 역사적 존재로 여겨 겼다. 그러나 예수 이야기의 이런 요소들은 정말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 물려받은 것일까? 우리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더욱 정밀히 연구해서, 예수이야기와 유사한 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설마 그토록 많은 유사점이 드러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3장 악마의 모방 그리스도가 도래할 것이며 인간에 속하는 죄인으로서 불의 처형을 당하리라는 것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미리 들었으므로, 사악한 악령들은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자들을 미리 만들어 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 시인들의 말과 마찬가지로 단지 경이로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인간들에게 미리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순교자 유스티누스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수 그리스도 전기 사이의 놀랄 만한 유사성이 오늘날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AD 첫 몇 세기 동안에는 그 유사성이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교도 철학자이자 풍자가인 켈수스는 예수 이야기가 사실은 이교도 신화의 저급한 모방일 뿐인데도 그리스도교인들이 그것을 새로운 계시인 양 유포시키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 특수한 사건들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유일무이하단 말인가? 우리의 것은 왜 신화로 여겨져야 하고, 그들의 것은 왜 사실로 믿어져야 한단 말인가? 그리스도교인들은 무슨 근거로 자신들의 믿음에 특수성을 부여하는가? 사실 그리스도교인들이 믿는 것에는 특수한 것이 전혀 없다. ---그들에게 특수한 것이 있다면, 더욱 폭넓은 신에 대한 진리를 모두 배제해 버린 채 신을 믿는다는 점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비난이 너무나 통렬했다. 그리스도교보다 수백 년은 앞선 이교도 신화가 어떻게 하나이며 유일한 구원자 예수의 전기와 그토록 공통점이 많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필사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교부(敎父)들은 앞에서 말한 가장 터무니없는 이론들 가운데 하나에 호소했다. AD 2세기의 순교자 유스티누스 시대부터 그들은 악마가 사람들을 호도하기 위해서 예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절했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문자 그대로 도래해서 지상을 거닐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악마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그의 생애 이야기를 베껴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미트라스 미스테리아를 만든 악마의 모방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진실을 곡해하는 것을 일삼는 악마는 성사(聖事)의 정확한 전말을 흉내 낸다. 악마는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수(聖水)로 인해 죄가 용서된다고 약속하며, 신도들을 미트라스 의식에 입문시킨다. 그래서 악마는 성찬 봉헌식을 행하며 부활의 상징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흉내 내는 악마의 간교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스테리아 신화를 연구해 보면, 이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런 해명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이유가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의 이야기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이교도 신화는 하나도 없지만, 유대인 신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신화적 주제들은 이미 수세기 전에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위대한 예언자들의 여러 이야기 속에 다 들어 있었다. 이제 예수의 전기를 훑어보고 너무나 닮은 점들을 일부 살펴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God의 독생자'라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러 형태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찬양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와 동격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 본질적으로 가장 무서우면서도 인간에게는 가장 자애로운 신'이다. 예수는 '참다운 신 중의 참다운 신Very God of Very God'이다.(니케아 신경) 디오니소스는 날 때부터 신중의 주인인 신'이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띤 신이다. 요한은 예수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썼다(요한복음 1:14). 바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 (로마서8:3). 디오니소스는 바쿠스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인 <바카이Bacchae>의 주인공은 디오니소스인데, 이 희곡에서 디오니소스는 '죽어야 할 육체 속에' 자신의 '신격'을 감춘 것은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들에게 현시'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는 사도들에게 말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불멸의 형태를 변화시켜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여러 신화에서 이교도 신인은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 처녀(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 소아시아에서 아티스의 어머니는 동정녀 키벨레이다. 시리아에서 아도니스의 동정녀 어머니는 미르Myrh(몰약)라고 불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아이온은 동정녀 코레에게서 태어난다. 고대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는 동정녀 세멜레에게서 태어난다. 세멜레는 전성기 때의 모습을 한 제우스를 만나고자 했다가 불가사의하게 번갯불에 의해 임신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비 정통 문헌에 따르면 예수는 마리아의 자궁에서 오직 일곱 달만 보냈다. 이교도 역사가 디오도루스(BC 80-20)의 기록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 역시 오직 일곱 달만 수태를 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이교도 신화 사이의 유사성을 인정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를 위하여 말씀Word이 예수 그리스도로 태어나실 때, 성적 결함이 없었다는 얘기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자들 또한 그러했다는 얘기와 전혀 다른 데가 없다 고대 미스테리아의 고향인 고대 이집트보다 '하나님의 아들' 신화가 발달한 곳은 없었다. 그리스도교인인 락탄티우스조차도 전설적인 고대 이집트의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그 아들에 대해 모든 것을 말했다는 점에서, 그는 어느 정도 진리에 도달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수천 년 동안 오시리스 신인의 화신으로 여겨졌고 하나님의 아들로 찬양되었다. 저명한 이집트 학자는 이렇게 썼다. 모든 파라오는 그의 나라와 백성들에게 신의 화신이자 다산의 수여자이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의 어머니여야 했다, 여러 전설에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예언자들 또한 구세주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아폴론의 아들이자 파르테니스Parthenis라는 여자로 일컬어졌다. 파르테니스는 '동정녀'를 뜻하는 파르테노스Partheno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플라톤 또한 사후에 아폴론의 아들로 신봉되었다. 필로스트라투스는 아폴로니오스 전기에서 이렇게 기술했다.---이 위대한 이교도 현자는 제우스의 아들로 간주되었다고 엠페도클레스는 혼란에 빠진 인간들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온 신인이자 구세주로 여겨졌다. 그는 광인처럼 되어서 '사람들에게 이 속세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원래의 장엄하고 숭고한 세계로 돌아가라고 목청껏 외쳤다'. 로마 황제들조차도 정치적 이유에서 미스테리아의 신화적 주제를 차용했다. 황제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연관될 수 있도록, 황제가 신적인 본질을 지녔다는 전설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개인의 불멸성을 믿지 않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조차도 '신의 화신이자 인간 생명의 공동 구원자`로 불렸다.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도 마찬가지로) '세계 인종의 구원자'로 불렸다. 폭군 네로조차도 제단에서는 '영원한 구원자 하나님'으로 불렸다. BC 40년에 로마의 시인이자 입문자인 베르길리우스는 미스테리아 신화를 묘사하며, 동정녀가 하나님의 아이를 낳을 거라는 예언을 기술했다. AD 4세기에 문자주의자 그리스도교인들은 그것이 예수의 도래를 예언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당시에 이 신화는 아우구스투스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 되었다. '아폴론의 아들'로 일컬어진 아우구스투스는 지상을 다스려서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도록 명해진 자였다. 아우구스투스 전기를 쓴 수에토니우스는 이 황제의 신적 본성을 가리키는 다수의 '징조signs' 를 제시했다. 현대의 한 신화의 권위자는 이렇게 썼다 이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와 현저하게 닮은 점이 많다. 전혀 있음 직한 일이 아닌데도 로마의 왕이 태어났다는 것을 가리키는 징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해에 로마에서 남자아이 양육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다. 무고한 이 학살의 정점에는 수태고지(受胎告知)라는 게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아폴론 신전을 방문했을 때, 아폴론이 뱀의 모습으로 찾아온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아홉 달 후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났다. 예수가 살았던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새겨진 한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날 대지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었다. 그가 지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이미 멸망했으리라. 이 탄생의 날에 생명의 시작을 인지한 자의 판단은 정녕 옳았도다. 이제 인간들이 탄생을 슬퍼하던 시대는 끝났다. 모두에게 축복 가득한 이 탄생의 날로부터 모든 개인과 사회가 축복을 받았으니, 다른 어느 날도 이날로부터의 축복을 능가하진 못하리라.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우리와 다음 세대들을 위한 구원자로 그를 임명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온갖 능력을 부여 하셨도다. 그는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며, 온갖 값진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의 도래와 더불어 우리 조상들의 소망은 성취되느니, 그의 선행은 과거 어느 때의 선행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훌륭한 자는 다시 도래할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탄생일에 온 세상은 기쁨의 물결로 넘실거렸느니, 이 기쁨의 물결은 그에게서 샘솟는 도다. 그의 탄생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도다. 그런데 이것은 어느 그리스도교인이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말이 아니다. 미스테리아 신인을 찬미하는 말도 아니다. 바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말인 것이다. BC 1세기 무렵에는 이러한 신화적 주제가 분명 너무나 흔한 것이어서, 살아 있는 황제의 전설을 날조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할 때에도 이런 주제가 사용되었다. 켈수스는 신의 혈통과 기적적인 탄생 운운하는 유사한 전설적 인물들 다수를 열거한 후,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의 동정녀 잉태 이야기를 날조할 때' 분명 이러한 이교도 신화를 차용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해석한 그리스도교인들을 비아냥거리며 하나님이 인간 여자를, 말 그대로 잉태시켜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은 명백히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그는 단정했다. 탄생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스테리아 입문자들도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탄생을 축하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하나님의 경이적인 아기이며, 신성한 비밀Mystery'이었고, '기적적으로 탄생한 존재' 였다. 교부(敎父) 히폴리토스는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드라마 연출자인 히에로판테스처럼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신성한 탄생을 선언한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엘레우시스의 신비한 아기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 즉, 이들 고대인들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신성한 교리를 스스로 만를었고, 밤중에 이렇게 외쳤다. '신성한 아기가 태어나 우리에게 온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온다.' 오시리스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선포되기도 했다. '온 땅의 주께서 태어나신다'. 고대 이집트의 찬송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대 신성한 사람의 아기여, 지상의 왕이며, 지하 세계의 왕자여'. 고대 이집트 시 한 편 가운데 그리스도교 찬송가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그분이 태어나셨네! 그분이 나셨네! 어서 와서 찬미하라! 생명을 주시는 어머니들, 그분을 잉태한 어머니들이여, 새벽을 밝히는 하늘의 별들이여 아침의 별, 오, 그 조상들이여 여자들과 남자들이여, 어서 와서 찬미하라! 아기가 밤에 나셨네. 그분이 태어나셨네! 그분이 나셨네! 어서 와서 찬미하라! 다우트(지하세계)에 사는 자들이여, 기뻐하라 하늘의 신들이여, 가까이 와서 그분을 보라 지상의 인간들이여, 어서 와서 찬미하라! 그분 앞에서 절하고,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왕이 밤에 나셨네. 그분이 태어나셨네! 그분이 나셨네! 어서 와서 찬미하라! 빛나며 변하는 달님처럼 어리네 하늘 위로 그분의 발자취가 퍼지네 별들은 쉬지 않고 별들은 지지 않네 하나님이 몸소 잉태시킨 아기를 경배하라! 하늘과 땅이여, 어서 와서 찬미하라! 그분 앞에서 절하고, 그분 앞에서 무릎을 끓어라! 그분을 경배하고 찬미하라 그분 앞에 엎드려라! 신God이 밤에 나셨네. 예수는 누추한 외양간에서 태어났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성스러운 아기를 낳게 될 신성한 결혼식이 보우콜리온boukolion, 곧 '황소 외양간'에서 치러졌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보통 '외양간stable' 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카탈렘나Katalemna인데, 이것은 원래 임시 움막이나 동굴을 뜻하는 말이다. 널리 퍼진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동굴에서 태어났다. 고대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즉, 동굴이란 어머니 대지의 자궁이다. 고대세계 도처에 퍼진 디오니소스의 또 다른 이름인 판pan신은 동굴을 신성시했다. 페르시아의 신인 미트라스도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제우(신화상[上]의 디오니소스의 아버지)도 크레타 섬의 한 동굴에서 태어났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 또한 동굴에서 태어났고, 그 동굴에서 곧바로 '세계의 왕'으로 옹립되었다. 아기 예수는 '동방박사 3명'과 양치기 3명의 방문을 받았다. 복음서의 '동방박사'는 실제로 마기Magi라고 불렸는데, 마기는 페르시아의 미트라스를 섬기는 사제였다. 미트라스의 탄생 축일은 12월 25일이다. ---예수의 성탄일과 정확히 똑같다. 미트라스 또한 3명의 양치기가 탄생을 목격했다고 한다! 마기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가져왔다. 이교도 현자인 엠페도클레스는 신을 경배할 때 '순수한 몰약과 유향을 드리고, 황금빛 꿀 음료를 땅에 뿌렸다'고 말했다. 몰약은 아도니스 축제일에 신성한 방향제로 쓰였다. 일부 신화에서는 아도니스가 몰약나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아도니스의 어머니 이름이 몰약Myrrh이었다는 신화도 있다. 예수는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베들레헴Bethlehem이라는 말은 '빵집'이라는 뜻이다. AD 4세기경에 라틴어역 <성서>를 완성한 성 제롬은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했다. 미스테리아 신인 아도니스는 옥수수의 신으로 여겨졌고 아도니스를 상징하는 것이 빵이었는데, 아도니스가 신성시한 작은 숲 속에 '빵집'인 베들레헴이 감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 이야기에서, 3명의 현자는 하나의 별빛을 따라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를 발견한다. 고대 안디옥에서 아도니스 미스테리아 의식은 '구원의 별이 동녘에 나타났다'는 외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구원의 별은 곧 금성Venus(베누스)이었다. 베누스는 일부 신화에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배우자 여신의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 여신이 이시스로 불렸다. 수천 년 동안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상징하는 오리온자리의 발치에 있는 밝은 별 시리우스와 관련이 있었다. 시리우스가 일출 직전에 떠오르면 그것은 해마다 일어나는 나일 강의 범람을 알리는 전조였다. 나일 강의 범람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오시리스의 위력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시리우스는 주의 출현을 예고하는 별이었다. 문자주의자 에피파니우스(AD 315-403)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알렉산드리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곧 아이온의 탄생 축일은 1월 6일이었다. 전날 밤 신전은 악기 연주와 노랫소리로 떠들썩했고, 새벽 무렵 절정에 이르렀다. 미리 정해진 사람들이 새벽에 횃불을 들고 지하 성소로 내려가서, 나무로 새긴 신상을 가져왔다. 그 신상의 '두 손, 두 무릎, 그리고 머리에 십자표시'가 있었다. 이 미스테리아 의식은 다음과 같은 포고와 더불어 절정에 이르렀다.'오늘 이 시간에 동정녀 코레가 아이온을 낳았다'. 에피파니우스는 초기의 다른 많은 그리스도교인과 마찬가지로 1월6일에 예수의 탄생을 축하했다.---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날을 축하한다. 그는 이와 같은 우연의 일치가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두 손, 두 무릎, 그리고 머리에 십자표시'를 했다니! 대체 그건 무슨 뜻인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인가 1월6일인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아무도 탄생일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미트라스의 탄생일은 12월 25일이고 아이온의 탄생일은 1월 6일인데, 어느 날이 되었든 그것이 미스테리아 신인의 탄생일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논쟁을 했을까? 그 두 날은 아무렇게나 선택된 날이 아니었다. 두 날 모두, 한때는 날이 가장 짧은 동지Winter solstice였다. 동지는 해가 바뀌어 생명을 주는 태양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상징하는 날이었다. 분점세차(分點歲差 : 지구 자전축의 주기적인 세차운동preadssion에 따라 황도상의 춘분점과 추분점이 이동하는 것) 때문에, 동지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동지가 1월 6일에서 12월 25일로 점차 이동했지만, 일부에서는 전통적으로 같은 날을 동지로 삼았다. 오늘날 동지는 12월 22일 무렵이다. 해마다 거행된 미스테리아 신인의 탄생 의식은 동지에 묵은해 죽고 새해가 기적적으로 재생하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곧 태양을 의미했고, 태양으로 묘사되었는데 예수도 그러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교부 : AD150-215)는 예수를 '정의의 태양'으로 불렀다. 이런 사실과 잘 어울리도록, 디오니소스의 동정녀 어머니 세멜레는 처녀인 달의 여신 셀레네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예수의 수태고지를 위해 마리아를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는 달과 동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세례 예수의 사명은 세례 요한의 세례와 더불어 개시된다. 조지프 캠벨등의 신화학자들은 이 스토리 이면에 놓인 고대의 신화적 의미를 발견했다. 캠벨은 이렇게 썼다. 세례 의식은 고대 수메르의 신전 도시인 에리두에서 유래한 고대 의식이었다. '물의 집의 신'인 에아Ea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에아는 오아네스Oannes라고 불렸다. 오아네스가 그리스어로는 이오아네스Ioannes, 라틴어로는 요하네스Johannes, 헤브라이어로는 요하난Yohanan, 영어로는 존John(우리말로는 요한)이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요한John이나 예수Jesus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물의 신과 태양의 신이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여러 이야기를 꼼꼼히 살펴본 우리는 그 얘기들이 분명 신화학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완벽하게 서로를 반영한다. 즉, 둘 다 기적적으로 태어난다. 요한은 늙은 여인에게서 태어난다. 예수는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난다. 요한의 어머니는 수정할 수 없는infertile 여성이다. 예수의 어머니는 수정하지 않은unfertilized 여성이다. 요한은 해가 쇠약해지기 시작하는 하지에 태어난다. 예수는 여섯 달 후 해가 다시 강해지기 시작하는 동지에 태어난다.---그래서 요한은 예수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요한은 점성술상의 게자리에서 태어난다. 고대에 게자리는 육화되려고 하는 영혼의 문을 상징한다. 예수는 점성술상의 염소자리에서 태어난다. 고대에 염소자리는 육화에서 벗어나 불멸화하려는 영혼의 문을 상징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고 예수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12월 25일은 태양이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이교도의 축제일이다. 세례 요한의 탄생을 축하하는 6월은 이교도들이 한여름 물의 축제를 연 때이다. 세례는 미스테리아에서 핵심적인 의식이었다. 아득한 옛날 호메로스의 시에도 정화 의식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고대인들은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리기 위해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오시리스의 화신으로 탄생하는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피라미드 문헌에 나온다. 일부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세례는 단지 상징적으로 성수를 뿌리는 것이었다. 다른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세례가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이었다. 세례를 위한 물탱크가 입문식 홀과 성소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엘레우시스에서의 입문자들은 바다에서 목욕하며 스스로를 깨끗이 했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입문식을 치를 때 고해기도를 한 후 정화를 위한 목욕을 했고, 나중에 성수 세례를 받았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자들은 죄를 씻어내기 위하여 되풀이해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한 입문식은 3월과 4월에 치러졌다. 그런데 초기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이 카테코우메노스katechoumenos(영어로는 캐터큐민catechumen)라고 불린 새로운 귀의 세례를 받은 것도 바로3-4월이었다. 그리스도교인과 이교도 의식 사이의 유사성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새로운 회원이 입문할 때에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으면 갱생해서 죄 값을 면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몸을 전부 담그는 세례에는 세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매장을 의미하며, 다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세례에 대한 이러한 우의적 해석은 미스테리아와 완벽하게 서로 통한다. 미스테리아의 세례 의식도 신비한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초기 교회에서, 새로 세례를 받는 자는 흰옷을 입었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으며 꿀을 먹었다. 마찬가지로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영적으로 '재생' 한 입문자들은 두 손에 꿀을 받아서 혀에 댔는데, 그것은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행한 관습이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인 작가들이 그리스도교 세례에 대해 묘사한 내용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의 세례 행위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는 알몸으로 세례를 받았고, 물 밖으로 나온 후 흰옷을 입고 관을 쓰고 촛불을 든 채 교회당basilica으로 가는 행렬에 끼어 걸어갔다. 그것은 엘레우시스에서의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행렬과 일치한다. 그 행렬에서도 입문자들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쓴 채 손에는 횃불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성소로 걸어갔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와 이교도의 세례 의식이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곤혹스러워했다. 그는 또다시 악마의 모방 주장에 매달렸다. 그는 사악한 악마가 이교도 의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패러디 하도록 충동질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세례를 통한 정화는, 물로만이 아니라 공기와 불로도 이루어졌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자기가 신성에 접근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전에 먼저 '모든 원소들을 통과하는 여행'을 해야 했다고 한다. 세르비우스는 이렇게 썼다. 모든 정화는 물이나 불이나 공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어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든 이와 같은 세 가지 정화 방법을 쓴다. 황을 태워서 입문자를 소독하거나, 물로 씻거나, 바람으로 환기시킬 수도 있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후자를 썼다. 복음서들 또한 삼중 원소의 세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도래를 예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그는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깨끗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3:11-12). 이 문장에서 친근한 용어인 성령holy sprit은 '성스러운 숨holy breath'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분명 공기에 의한 세례를 나타낸다. 요한은 예수가 키질을 할 거라고 말한다. 키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낼 때 쓰는 농기구이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공기로 세례를 할 때 키를 사용했다. 도자기 그림 등에 그려진 입문자들을 보면 베일을 쓰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키가 흔들리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키질하는 자'로 알려져 있었다. 입문자들이 영적 재생을 할 때 상징적으로 키질을 당하듯이, 디오니소스는 태어났을 때 요람대신 키 속에서 흔들렸다고 한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사람이 공기에 의한 정화를 거처 재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는 숨에 의한 재생을 약속한다.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물었다. "사람이 늙은 나이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breath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breath로 난 것은 영breath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바람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breath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5-8). 기적 초기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인 바실리데스(AD 117년경에 활약환 영지주의 현자)는 예수가 1월 6일에 세례를 받았다고 믿었다. 이날은 수세기 동안 고대 이집트에서 '오시리스의 날'로 축하해 온 날이었다.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물을 거룩하게 한'날로 이날을 기념했다. 그들은 1월 5일 한밤중에 기도를 한 다음 물을 얻기 위해 주전자를 들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물은 신성하며 정화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 이전의 수백 년 동안 고대 이집트인들은 정확히 같은 때에 정확히 같은 행위를 해 왔다. 1월 5일 밤은 오시리스의 은총으로 나일 강의 물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얻는 때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이 물이 모든 악을 물리친다고 믿고서 주전자에 담아 집에 보관했다. 1월 5일 밤은 또 디오니소스가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시간이다. 로마의 작가 플리니우스(AD 23-79)의 말에 따르면, 안드로스 섬에서 포도주가 샘솟아 이레 동안 계속해서 디오니소스 신전으로 흘러 들었다. 그러나 그 포도주를 떠서 성소 밖으로 가져가면 곧바로 물로 바뀌었다. 또, 낙소스의 한 샘에서는 향기로운 포도주가 샘솟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다. 튀이아Thyia라고 불린 그리스 축제 기간에는,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보는 가운데 3개의 빈 대야를 방에 넣어 두었다. 그 방은 굳게 잠겨서 봉인이 되었다. 자기가 붙인 봉인을 가져가고 싶은 사람은 다른 봉인을 붙여야 했다. 이튿날 봉인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는데, 그 방에 들어가 보니 3개의 대야에 포도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스의 작가 파우사니아스(AD 170년경)의 말에 따르면, 시민들과 외국인들 모두 이것이 사실임을 맹세로써 보증했다고 한다. 신화에서 물이 술로 바뀌는 기적이 처음 일어난 것은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결혼식 때였다. 가나에서의 결혼식 때 예수도 같은 기적을 일으켰다. AD 4세기에 에피파니우스는 1월 6일에 여전히 같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샘에서 솟아난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디오니소스가 아닌 예수 때문에 일어난 기적으로 보았다. 에피파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기적은 '예수가 잔칫집 주인에게 물을 길어 오라고 명해서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꾼 시간'에 일어났다. 예수의 다른 기적들 역시 이교도 신인과 관계가 있다. 히포크라테스가 신봉한 '약의 아버지'인 아스클레피오스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 냈다는 신화 속의 인물이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는 신인'이었다.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며 쓴 저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아스클레피오스와 예수의 기적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비교에 대해, 초기 그리스교인들은 '예수가 아스클레피오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의사였다고 응수했다. 이교도 켈수스와 그리스도교인 오리게네스는 각자 아스클레피오스나 예수의 상대적 장점들을 확신하며 우월성 논쟁을 벌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수많은 비문을 강탈해서 이름만 예수로 고쳐 놓았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예언자들 다수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예수가 떠돌아 다니며 일으킨 기적과 정확히 똑같은 기적을 일으켰다. 피타고라스의 기적은 특히 유명했다. 그는 예수처럼 수많은 병자를 고쳤다. 그가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옮겨 갈 때에, 그는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치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피타고라스의 생애>를 쓴 이암블리코스(AD 250-325)는 피타고라스의 무수한 기적 가운데 '사도들이 쉽게 건너갈 수 있도록 강과 바다의 물결을 잔잔케 한' 기적도 많았다고 주장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사도들이 갈릴리 바다(갈릴리는 원래 호수이지만 국역<성서>에는 바다로 표기했다. 영어로 the sea of Galilee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옮긴이)를 건널 때 같은 기적을 일으킨다. 이 기적은 분명 다수 이교도들의 전설적 전기에 기록된 기적들과 일치한다. 이암블리코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러한 종류의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지닌 자로는 아그리젠토의 엠페도클레스, 크레타 섬의 에피메니데스, 북방정토의 아바리스 등이 있었고 그들은 많은 곳에서 같은 기적을 일으켰다. 요한복음(21:11)에서 예수는 시몬 베드로에게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리게 했다. 수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철학자 포르피리오스(AD 232-303)가 기록한 전설 속의 피타고라스도 이러한 재주를 선보였다. 피타고라스는 잡게 될 물고기의 정확한 수까지 예견해서 알아맞혔다는데, 그것이 몇 마리였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같은 복음서에서 예수는 몇 마리를 잡게 될지 예견하진 않았지만, 그 수가 정확히 153마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숫자는 특별할 것이 없는데도 복음서 작가가 그저 구체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이 신중하게 계산된 것이며, 고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피타고라스가 예견한 물고기 수는 분명 정확히 153마리였을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으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는 '153'을 신성한 수로 여겼다. 이 숫자는 아르키메데스가 '물고기의 척도'라고 부른 수학적 비율에 사용된다. 이 비율로 신비한 상징인 '베시카 피시스vesica piscis', 곧 '물고기 기호'를 만든다.---이 비율대로 두원을 교차시켜서 물고기 모양을 만든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물고기 상징은 바로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 물고기 상징이었다. 예수가 기적을 일으켜 잡은 물고기의 숫자로 신비한 물고기 상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이 기적이 원래 피타고라스의 기적에서 차용한 것이며, 이 기적의 이야기가 기하학적 공식을 암호화한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물고기 기호'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기호는 일부 이교도에게 신성시된 기하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혼과 물질을 상징하는 2개의 원이 신성한 결혼으로 결합된다. 각 원주가 다른 원의 중심과 만날 때, 서로 겹치는 부분에서 베시카 피시스로 알려진 물고기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 모양의 높이와 길이의 비율은 153 : 265이다 이 비율이 바로 BC 3세기에 아르키메데스가 '물고기의 척도'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강력한 수학 도구로서, 3의 제곱근에 가장 가까운 정수의 비율이며, 정삼각형을 지배하는 비율이다. 피타고라스의 사도인 엠페도클레스 또한 기적을 일으키는 자였다. 피타고라스나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는 스스로 신인이라고 부르짖었으며, 아크라가스 사람들에게 스스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불멸의 신'이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그를 따라다니며, 그를 리본으로 치장하고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다. 예수처럼 그는 미래를 예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예수처럼 그는 영적 진리를 가르쳤고, 병자를 치료했다. 그는 '바람을 잠재우는 자'로 알려졌고 역시 예수처럼, 바람과 비를 다스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가르침을 배운 사도들은 죽은 자를 지하세계에서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고 그는 장담했다. 예수가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려 낸 것처럼, 엠페도클레스는 죽은 지 30일이된 여자를 살려 냈다고 한다. AD 1세기경의 철학자 아폴로니오스 또한 병자를 고치고, 미래를 예언하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 떠돌이 신인이었다. 예수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낸 것처럼, 아폴로니오스는 로마 집정관의 딸을 살려 냈다. 그런데 그는 그 딸을 찾아가지도 않고 살려 냈다고 한다. 예수처럼 아폴로니오스도 악령을 쫓아냈다. 그는 또 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五餠二魚)' 로 5천 명을 먹인 것과 비슷한 기적을 일으켰다. 켈수스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재주가 수많은 현자들이 행한 '환각'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교도 전설 속의 신성한 인간들은 공통적으로 고향에서 배척을 당했다. 아폴로니오스는 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고향에서는 아직까지도 나를 무시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나를 신과 동일시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복음서에서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는 얘기 가운데, 귀신들이 스스로를 군대Legion이라고 말하는 게 나온다. 귀신의 수가 '거의 2천'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 귀신들은 예수에게 쫓겨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서 바다에 빠져 몰사한다. 이와 똑같은 주제가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에서도 발견된다. 입문을 하기 전에 정화 의식의 일부로써 약 2천 명의 입문자들이 모두 어린 돼지를 안고 바다에서 목욕을 했다. 이러한 목욕 의식은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후 입문자들의 불순의 상징인 이 돼지들을 깊은 구덩이로 몰아넣어 희생시켰다. '방언으로 말함' 이라는 오순절의 기적도 이교도 신화에 이미 나온 것이다. 예수가 죽은 후 사도들은 청중이 사용하는 온갖 토속어로 말을 하게 되었다(사도행전 2장). 몇 세기 전 트로포니우스와 델로스에서 갈은 현상이 보고되었다. 그곳에서 신전의 여사제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온갖 지방의 토속어여서 해당 지방의 출신들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최고의 현대 고전학자 가운데 1명인 버키트는 이러한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기적들이 '아무리 견주어 봐도 막상막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하나이며,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기적으로 입증된다고 단언한다. 그러한 단언이 켈수스가 듣기엔 헛소리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과 이적은 사실상 모든 곳에서 모든 시대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 유명했던 수많은 이교도 현자와 신인들을 열거했다. 그러한 이교도 비평가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은 다음과 갈다. 즉, 예수의 기적은 신성함의 표시였던 반면, 이교도의 기적은 악마의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켈수스는 분개해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하나님 맙소사! 똑같은 활동을 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신이고 그의 라이벌은 그저 '마법사'일 뿐이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논법인가? 신인과 그의 사도들 예수에게는 주변에 12사도가 있었다. 이것은 보통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2부족이라는 개념 자체는 바빌론의 점성술에서 황도(천구에서 태양이 지나는 길)상의 12궁에 대한 상징적인 언급이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幽囚) 때 이것을 받아들였다. 황도는 이교도 세계에서 지극히 중요한 상징이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12궁으로 표현되는 변화의 수레바퀴에서 고요히 자리를 지키는 영적 중심으로 상징된다. 미트라스, 디오니소스, 아이온, 헬리오스 등도 모두 선회하는 황도의 중심으로 묘사된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치르는 동안 신인 둘레에는 12사도가 자리를 잡는다. --- 12사도가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똑같다. 미트라스 사도들은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입문자 주위를 돈다. 이때 입문자는 미트라스를 상징한다. 중심원 둘레의 12개 원은 기하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사도들에게는 그것이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고대세계에서 수학 지식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완벽한 구(球)로 상상했다. 하나의 구가 똑같은 차원의 다른 구들에 둘러싸여 있고 모든 구가 서로 맞닿도록 하면, 중앙의 구는 정확히 12개의 구로 둘러싸이게 된다는 사실을 고대인들은 발견했다. 신인과 12사도의 이미지는 기하학의 그러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것이다. 복음서에서, 처음에 예수는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누가복음 9:29). 마찬가지로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바카이>에서, 디오니소스가 처음 사도들에게 나타났을 때는 유랑하는 현자였지만 나중에는 성스럽게 변모한다. 그의 참된 신성을 알아차린 사도들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보라! 저 궁전 문 위로 솟으신 이는 누구인가? 더 이상 인간으로 변장하지 않고, 신성의 광채에 휩싸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디오니소스가 아닌가! 사도들에게 예수는 구원자였다. 디오니소스도 마찬가지로 '구원하러 오신 이'였다. 사도들은 그에게 외쳤다. "어서 오소서, 그대 구원자여!'' <바카이>에서 그들은 이렇게 환호한다. 우리는 구원 받았도다! 오, 바쿠스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이 기쁨이여! 우리는 모두 혼자였고 버려져 있었건만, 당신이 오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예수는 일견 파격적인 행동 때문에 공격을 받기도 했다. 누가복음(7:31)에서 예수는 '이 세대의 사람들'을 꾸짖는다. ---사람들은 처음에 세례 요한이 '빵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이제 '먹고 마시는 사람의 아들'이 오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 라고 비난한다고. 디오니소스의 사도들 또한 행위가 파격적이고 귀신 들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의 '술잔치' 는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사실, 그 술잔치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벌였던 '사랑의 향연' 에 비하면 그리 성적인 것도 아니었다.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도 먹고 마셨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심오한 영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디오니소스는 신성한 도취의 신이었고, 종교 권력자와 속세의 권력자들에게 걸핏하면 능욕당하고 위협당한 '사람들의 신' 이었다. 예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스테리아 종교가 좀더 고행을 강조한다. 그 고행은 세례 요한의 내핍 생활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대수도원장 안토니우스에 의해 시작된 초기 그리스도교의 수도사 전통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퍼저 있었던 금욕적인 피타고라스 공동체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나귀 타기 복음서 이야기에 따르면,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이때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며 그가 지나갈 길에 나뭇가지를 펴서 깔았다. 전통에 따라 이들 무리는 종려나무 잎사귀를 흔들었다고 한다. 종려나무는 미스테리아 신앙에서 상징적인 나무이다. 플라톤은 '디오니소스의 지혜의 종려나무'라는 말을 썼다. 미스테리아 신인인 아티스의 대 향연은 '갈대를 지닌 자의 입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런 뒤 '나무를 든 자의 입장'이 이어졌다. 이 상록수 소나무 위에는 신인의 인형을 매달았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종려나무를 든 자들에 둘러싸인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그리고 그의 주요상징이 된 십자가, 곧 나무를 나르는 행위가 이런 신화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기필코 나귀를 타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가 나온다. 도자기 그림에서, 디오니소스 또한 흔히 나귀 옆에 그려진다. 이 나귀는 그가 수난을 당할 곳으로 데려간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BC 445-385)는 '미스테리아를 실어 나른 나귀'에 대해 썼다. 아테네에서 순례의 무리가 미스테리아를 기념하기 위해 엘레우시스로 가는 신성한 길을 걸을 때, 나귀는 신성한 도구가 든 바구니를 실어 날랐다. ---이 도구는 디오니소스의 우상을 만드는 데 쓰일 것들이었다. 이때 무리들은 큰소리로 디오니소스를 찬미하며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이와 같이 디오니소스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처럼 환호를 받으며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나귀 타기,라는 신화적 주제는 흔히 겸손의 징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이상의 심층 의미를 아울러 지니고 있다. 고대인들에게 나귀는 육욕과 잔혹함과 사악함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나귀는 상징적으로 더 낮은 수준의 '동물적' 자아를 나타냈다. 그것은 미스테리아 입문자가 극복하고 진압해야 하는 것이었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황금 나귀>라는 이야기를 썼다. 그것은 입문식에 대한 우의적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서 루키우스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나귀로 변해 수많은 모험을 한다. 각 모험은 다 입문 단계를 나타낸다. 그는 마지막 입문식에서 다시 인간으로 변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입문자가 더 낮은 본성을 극복하고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거쳐 참된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것을 상징한다. 고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루키우스에게 말한다. 나귀는 모든 짐승 가운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거라고. 나귀는 오시리스의 살해자인 세트 신이 신성시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풀루타르코스는 고대 이집트의 사육제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의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나귀를 벼랑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린다. 세트 신은 입문자의 수준 낮은 자아를 상징한다. 수준 낮은 자아는 영적으로 수준 높은 자유, 곧 오시리스를 살해한다. 수준 낮은 자아는 수준 높은 영적 자아의 재생을 위해 은유적으로 사망해야 한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에서도 나귀는 더 낮은 '동물적' 본성을 상징했다. 도자기 유물 가운데 우스꽝스러운 나귀 그림이 그려진 것이 있다. 이 나귀는 디오니소스의 사도들에게 에워 싸인 채 생식기를 발기시키고 춤을 춘다. 포도주 주전자 유물 가운데 나귀들이 교미하는 모습이 그려진 것도 나타난다. 순례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귀 꼬리를 잡아당기는 그림도 있다. 사후 지하세계에서의 고난을 나타내는 멋진 그림 가운데, 자신의 나귀가 끊임없이 먹어 치우는 밧줄을 영원히 꼬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 사람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낮은 수준의 자아가 수준 높은 자아의 영적 성취를 끊임없이 먹어 치우려 함을 상징한다. 의기양양하게 나귀를 타고 가는 신인의 모습은 그가 낮은 수준의 '동물적' 본성의 주인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의로운 자와 폭군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죄가 없고 의로운 자이다. 유대인 제사장들의 선동에 따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간 예수는 허위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런데 그보다 5세기 전에 씌어진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바카이>에도 똑같은 신화적 주제가 등장한다. 예루살렘의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한 자로서 장발에 수염을 기른 과묵한 이방인이다. 복음서에서 유대인 제사장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그의 가르침은 백성을 미혹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바카이>에서,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를 믿지 않은 폭군이다. 그는 '이 땅을 오염시킬 새로운 질병'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디오니소스를 꾸짖으며, 부하들을 보내 죄가 없는 신인을 체포하게 한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자마자 돌로 쳐 죽여라 그는 바쿠스의 미스테리아를 테베에 전파한 것을 후회하리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에 깜짝 놀란 유대인 제사장들처럼,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의 신성한 출생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게 어떤 인간이든 간에, 그의 오만불손함은 참람하지 아니한가? 목에 밧줄을 걸겠다는 짓이 아닌가?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는 잠자코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를 체포한 병사가 펜테우스 왕에게 말한다. 그를 체포하여 데려왔나이다. 폐하,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그 짐승은 얌전하였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나이다. 그저 두 손을 내밀어 결박을 당했고, 낯빛도 바뀌지 않았나이다. 화사한 얼굴로 미소를 띠며 우리에게 말하기를, '나를 묶어 체포하라. 너희를 전혀 수고롭게 하지 않으리라. 다만 너희를 기다렸도다.' 그러하니 저는 저절로 당황하여 그에게 말했나이다. '선생이시여, 용서하소서, 선생을 체포하고 싶지 않으나, 이것은 왕의 명령입니다.' 병사는 디오니소스의 기적을 목격했다면서 펜테우스 왕에게 경고한다. '주인이시여, 이 남자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며 이곳에 왔나이다'. 그러나 왕은 디오니소스를 심문한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는 왕에게 절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예수가 대답한다(요한복음19:11).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도 펜테우스의 위협에 이렇게 답한다. '정해진 일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 박해자들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누가복음 23:34)고 예수가 말한 것처럼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에게 말한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네가 정작 무엇인지도 너는 알지 못한다'. 예수가 십자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자기를 처형한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또 말한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하며 작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누가복음 23:29-30) 이와 마찬가지로, 형으로 끌려가는 디오니소스는 신이 복수하리라고 겁을 주며 말한다. 그러나 경고하노니, 죽었노라고 너희가 말할 디오니소스는 이 신성모독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속히 돌아올 것이다. 미스테리아 전통을 지킨 여러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의로운 자'였다. 그들은 폭군들에게 부당한 죽음을 당했다 소크라테스가 한 예이다. 예수처럼 그는 백성을 미혹케 한다고 고소를 당했다. 아테네 법에 따르면 그러한 '죄'에 대한 벌은 사망이었다---재판관들이 수용할 만큼의 벌금을 내면 사형을 면할 수는 있었다. 유월절에 죄수 1명을 풀어 주는 관습이 있어서 예수를 풀어 주겠다고 제안한 빌라도처럼, 아테네 법정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벌금을 내고 조용히 추방됨으로써 기술적으로 사형을 피하기를 바랐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박해자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모욕적으로 적은 금액인 1미나mina만을 벌금으로 내겠다고 함으로써 재판관들로 하여금 사형을 선고하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은 30(냥)' 을 대신 내겠다고 제안했다. 그것은 참되게 자기 원칙에 따르고자 한 소크라테스의 소망에 배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제는 복음서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예수를 배신한 대가로 유다는 '은 30(냥)'을 받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처형 방식대로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임박한 처형에 대해 묵상하던 예수는 이렇게 기도한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는 예언을 확신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심문을 받을 때 예수가 한 행동은 미스테리아 현자가 취한 행동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예수는 권력자들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견유학파(犬儒學派 :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한 그리스 철학의 한 파. 무욕의 자연 생활을 이상으로 함. 퀴닉 학파라고도 함)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기존 권위에 적대적이며, 종교 계율을 거부했고, 왕과 관료들을 조롱'한 것으로 유명했다. 로마 당국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교한 철학자가 많았는데, 예수처럼 그들 또한 기꺼이 처형당했다. 스토아 학파의 현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썼다. '내 몸이든 재산이든 모두 가져가라. 그러나 내 도덕적 목적을 지배하려고 하지는 말라'. 그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해서 처형을 받게 된 한 철학자 얘기를 남겼다. '너는 네 할 일을 하라. 나는 내 할 일을 하겠다. 그러면 무슨 불평할 것이 있겠는가'. BC 4세기 무렵에, 플라톤은 '의로운 자'에게 예상되는 운명을 이렇게 기술했다. '의로운 자는 채찍질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극단적인 수난을 당한 후, 이윽고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의로운 자' 예수의 수난 또한 그러한 예상과 일치한다. '부당하게 고소된 의로운 자'는 고대세계에 허다해서, 예수가 유일무이한 수난을 당했다고 주장하려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켈수스는 통렬하게 비웃었다. 그는 위트와 풍자를 동원해서 이런 제안을 했다. ---그들이 만일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자 했다면, 역시 '영웅적인 죽음'을 당한 수많은 유명 이교도 현자들 가운데 1명을 선택해서 종교의 기초를 세웠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면, 영웅적인 죽음을 당해서 그것으로 인해 존경 받은 옛 사람 --- 이미 한 신화의 주인공이 된 사람---가운데 1명을 중심으로 해서 당신들의 종교를 세우는 것이 휠씬 더 좋았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나 아스클레피오스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약하다면, 오르페우스도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오르페우스는 선하고 성스럽지만, 가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 사람을 다른 종교가 이미 써먹어 버렸다면? 글쎄, 그렇다면 아낙사르코스는 어떨까? 그는 몰매를 맞으면서 정면으로 죽음을 직시한 사람이다. 그는 박해자들에게 말했다. '때려죽여라. 그러나 너희가 때리는 것은 아낙사르코스가 아니다. 아낙사르코스라는 빈 자루일 뿐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사람은 여러 철학자들이 이미 주인으로 모셔 버렸다. 글쎄, 그렇다면 에픽테토스는 어떨까? 그는 주리를 트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빙그레 웃으며, 완전한 평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부러뜨려라: 다리가 부러지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러라고 했지.' 당신들의 신도 형벌을 받을 때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빵과 포도주 죽기 전에 예수는 빵과 포도주로 상징적인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다. <바카이>에서 에우리피데스는 빵과 포도주를 '인간사에서 최고의 두 힘'이라고 일컬었다. 빵은 육체를 보존케 하는 주식이고, 포도주는 정신을 도취게 하는 액체이다. 고대인들은 미스테리아 신인이 인간에게 옥수수와 포도를 재배해서 빵과 포도주를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었다고 믿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복음6:35). 최후의 만찬 때 예수는 빵을 떼어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한다. '받아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가복음 14:22). 미스터리야 신인 또한 빵, 그리고 빵을 만드는 옥수수와 상징적인 관계가 있었다. 오시리스는 사지가 찢겨 죽었으며, 죽은 아도니스의 뼈는 맷돌에 갈려서 바람에 날려 보냈다고 한다. 그것은 옥수수를 타작해서 밀가루로 만드는 것을 상징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또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한복음 15:1).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들에게 포도주를 나누어 주며 말한다. '이것은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복음 14:24).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도, 포도나무는 물론이고 포도주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는 '포도주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 신화에서 그의 팔다리가 잘려 죽는 것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를 밟아 으깨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가 나누어 준 빵과 포도주를 같이함으로써 사도들은 상징적으로 예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 그렇게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섭한다. 신을 먹음으로써 신과 교섭한다는 아이디어는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서도 발견되는 아주 오래된 의식이다. 그 책에서 죽은 자들은 사후세계에서 신을 먹음으로써 신과 교섭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몸' 과 '피' 를 먹고 마시는 영성체 의식을 거행한다. 그런 '신성한 교섭(holy communion: 대문자로 표기된 고유명사일 경우에는 '영성체領聖體'라고 번역된다 : 옮긴이 주)' 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행해졌다. 입문하지 않은 자들은 그러한 의식을 오해해서 야만적인 식인풍습이라고 비난했다. ---그 후 영성체 의식을 행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도 그와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 이교도들도 그리스도교와 똑같은 영성체 의식을 치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나의 피'라고 말하며 예수가 사도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했을 때 예수는 그러한 의식을 사도들에게만 베푼 것인데, '사악한 악마들은 그것을 모방해서 미트라스 의식을 치르게 했다'고 그는 비난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체 의식과 마찬가지로,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입문자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기 전에 먼저 신비한 신조를 낭송해 주었다.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 참여자들은 먼저 오랫동안 준비를 거친 다음 '신성한 교섭'이 허용되었다. 충분한 준비 단계를 거친 입문자에게는 성체인 빵과 포도주 섞은 물, 혹은 십자가 표시가 새겨진 성체를 받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당연히 경악했다. 한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네가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되고, 나 또한 너와 더불어 하나가 되도록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러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것은 미트라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과 너무나 유사하다. 인자(人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요한복음 6:56).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에서 신과의 교섭, 곧 영성체는 더 옛날의 의식에서 발전한 것이다. 옛 의식에서는 환각을 일으키는 하오마Haoma라는 식물의 즙을 탄 물과 빵을 성체로 사용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에서는 서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식물인 하오마 대신 포도주를 사용했다. 포도주는 오늘날의 우리보다 고대인들에게 휠씬 더 강력한 도취효과를 냈을 것이다. 좀처럼 술을 마시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포도주가 지닌 계시적인 위력에 열광하며, 그것은 '인간의 제 정신이 아닌 신의 광기'라고 썼다. 저명한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신과 교섭을 해서,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신과 그 힘을 자기 몸 속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체 의식에 상징적으로 예수는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가 마시는 포도주가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에우리피데스는 디오니소스가 포도주가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물로서 자기 자신을 잔에 '따른다'. 일부 도자기 그림에는 빵과 포도주가 디오니소스의 우상 앞에 그려져 있다. 그리스도교인이 상징적인 성체 과자로 '구원'을 받듯이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입문자는 상징적인 성체 과자로 '마카리아makaria', 곧 '축복'을 받았다. 한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대 그리스 사모트라키 섬의 미스테리아 사제가 '입문자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고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고 아티스의 미스테리아 입문자 또한 영성체 의식을 치르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탬버린으로 먹고 심벌로 마셨다'. 그러한 신성한 악기로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빵과 포도주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인들은 영성체 의식의 빵(밀떡)과 포도주가 말 그대로 '육체를 가진 예수의 살과 피'라고 믿어 왔다. 일부 미스테리아 신앙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영성체'를 말 그대로 믿기도 했던 것 같다. 좀더 계몽된 입문자인 키케로는 '빵과 포도주가 곧 신이라는 것은 다만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어했다. 상징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참지 못한 그는 이렇게 썼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기가 먹는 음식이 실제로 신이라고 믿는단 말인가?' 신인의 죽음 예수는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십자가cross'라고 번역한 말은 원래 '형주stake'를 뜻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돌로 쳐 죽인 사람의 시신을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고 표시로 형주(刑柱)에 매달아 놓는 관습이 있었다. 사도행전(5:30)에서 베드로는 십자가가 아닌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얘기한다. 바울의 편지인 갈라디아서(3:13)에도 '나무에 달린 자'로 기록되어 있다. 교부(敎父)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는 아티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젊은 신인의 상이 소나무에 묶였다는 얘기를 전해준다. 아도니스는 '나무에 달린 자'로 알려져 있었다.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신인을 나타내는 가면이 나무 장대에 매달렸다. 형주에 매달려 가시 면류관을 썼다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 또한 덩굴 면류관을 썼다. 로마 병정들에게 조롱을 당할 때 자색 옷, 혹은 홍포를 입었다는 예수처럼 디오니소스도 자색 옷을 입었고, 엘레우시스에서의 입문자들도 자색 띠를 몸에 둘렀다. 죽기 직전의 예수에게는 '쓸개 탄 포도주'를 먹이려 했다(마태복음 27:34).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의식 참여자들에게는 포도주가 주어졌는데, 디오니소스 역을 한 히에로판테스에게는 쓸개즙(담즙)을 마시게 했다. 예수는 두 강도 옆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도둑 1명은 예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다른 1명은 지옥에 떨어진다. 이와 유사한 주제가 미스테리아 신화에서도 발견된다. 소박한 미스테리아 그림 하나에는, 미트라스의 양 옆에 횃불을 든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횃불로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상징하고, 땅을 가리키는 다른 사람은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디오니소스 양쪽에 서서 횃불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두 사람이 나온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여자이다. 미트라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횃불을 든 두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초기 신화에 나오는 두 형제 카스토르와 폴룩스에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두 형제는 하루씩 걸러 가며 교대로 한사람이 죽고 다른 사람이 살아난다. 그들은 각각 높은 수준의 자아와 낮은 수준의 자아를 상징한다. 두 자아는 동시에 둘 다 살아 있을 수 없다.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우레(천둥)의 아들' 로 알려져 있었다. --- 마가복음(3:17)에서 예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불가해하게도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일부 신화에서는 입문자의 수준 낮은 자아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의 적이 신인 대신 죽는다. <바카이>에서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를 죽이러 가지만, 자기 자신이 나무에 매달린다. 이와 비슷한 시칠리아 신화에서, 디오니소스의 적인 리쿠르구스 왕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 어떤 미스테리아 전통에서는 디오니소스가 나무에 매달리지만, 다른 전통에서는 그의 적이 처형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의로운 자'의 상(像)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이 신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제시한 것일까? 그래서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신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신화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플라톤이 언급한 것일까? 이교도 철학자가 수세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는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을 알게 된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십자가 교리>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십자가는 고대인들에게 신성한 상징이었다. 십자가의 네 갈래는 물리적 세계의 네 원소인 흙, 물, 공기, 불을 상징한다. 다섯번째 원소인 영혼은 이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물질에 속박되어 있다. 따라서 네 갈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상은 영혼이 육체에 속박되어 있는 곤경을 상징한다. 영혼을 육체에 굴레 씌우는 못은 육체적 욕망을 상징한다고 플라톤은 말했다. 두 팔과 두 다리에 박힌 4개의 못은 감각적 욕망의 상징이며, 이 못이 네 원소의 세계에 영혼을 붙잡아 둔다는 것이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가 예수와 정확히 똑같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는 것은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증거로 입증된 사실이다. 교부 아르노비우스는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이 신성한 십자가 주위를 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어떤 도자기 그림을 보면 디오니소스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AD 2-3세기 로마 시대의 한 석관에는 나이 든 사도 1명이 어린 디오니소스에게 커다란 십자가를 갖다 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 십자가를 '아이가 겪게 될 비극적 운명의 통고'로 해석한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부적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인물이 새겨져 있는데 처음 보면 예수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사실 그것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이다. 이 인물 아래에는 '오르페우스-바키코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오르페우스가 바쿠스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는 최고의 시인이자 하프의 달인인데, 디오니소스의 탄생을 예언한 자이기도 하다. 그는 너무나 존경을 받아서 흔히 신인으로 여겨졌다. 바쿠스는 디오니소스의 사도였는데, 디오니소스와 완전한 동격이 되었다. 따라서 그 부적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디오니소스를 나타내며, 입문자가 수준 낮은 본성을 죽이고 신으로 재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겉보기에 이상한 고대 그림이 로마 시대의 돌기둥 뒤에 새겨진 게 있는데, 그 연대는 AD 193년과 235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것은 머리가 나귀인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 아래에는 '알렉스메노스가 자기 신을 숭배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이교도가 그리스도교를 모독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해석되어 왔는데, 전혀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디오니소스의 수준 낮은 '동물적'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나타낸 그림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나귀는 동물적 본성을 상징한다. AD 5세기 이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像)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돌기둥 그림과 오르페우스 부적은 예수보다 수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교에서 그 두 가지를 참조했다면, 최초의 십자가상에 나타난 예수는 곧 오르페우스였던 셈이다! 결코 그럴 리가 없었을 것 같지만 일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서 신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간단명료하게 시사한다. 신성한 희생양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세상의 죄를 대속해서 죽었다고 믿는다. 고대 그리스에는 특별한 개인을 '희생양(속죄 염소)'으로 삼는 전통이 있었다. 희생양은 상징적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한 사람은 파르마코스pharmakos라고 불렸다. 그것은 단지 '마법사'라는 뜻이었다. 그 사람을 처형한 것은 분명 종교적 행위였다. 처형하기 전에, 비용을 갹출해서, 특히 순수한 음식으로 그를 배불리 먹였고 신성한 옷을 입혔고 신성한 식물로 만든 관을 씌웠다. 그리고 신성한 희생을 통해 도시의 죄가 사면되었다고 믿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신성한 파르마코스였다. 예수처럼 그는 세상의 죄를 대속해서 죽었다. 파르마코스는 모욕을 당하고, 매질 당한 후 죽음에 처해졌다. 디오니소스의 대속적 죽음을 같이하기 위해 엘레우시스를 향해 신성한 길을 걸었던 사람들 역시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위협과 모욕과 매질을 당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와 유사한 운명을 당할 거라고 예언했다. '그들은 [인자를]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마가복음 10:34). 바울은 이렇게 썼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의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예수는 희생으로 바쳐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 으로써 '재생' 한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은유는 고대 아티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 의식은 동물을 제물로 쓴 희생제였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음식으로 쓸 동물이 도살되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아주 원시적인 의식이었을 거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먹기 위해 동물을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리 혐오스럽지 않을 것이다. '타우로볼리움Taurobolium', 곧 황소 희생제에서 황소는 밑에 구멍이 뚫린 제단 위에서 도살되고, 밑에 서 있는 입문자는 구멍을 통해 흘러내린 피로 몸을 씻었다. 그러면 입문자는 '재생' 된 것으로 여겨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크리오볼리움Criobollium' 의식을 치렀는데, 희생물로는 양을 썼다. 입문자는 말 그대로 '양의 피로 씻김' 의식을 치렀던 것이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말 그대로보다는 상징적으로 희생제를 치렀다. 실제로 도살을 하는 대신, 황소를 도살하는 미트라스의 성화(聖畵)를 제단 그림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다소 으스스해 보이는 그림이기는 하지만,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는 사람을 그려 놓은 그리스도교 성화에 비하면 덜 폭력적인 셈이다. '그대는 영원히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했도다'라고 적힌 비문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가 아닌 미트라스에게 바쳐진 비문이다. 그런데 수세기 후 그리스도교인들도 그들의 구원자 신인에게 똑같은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게 된다. 익명의 고대 이집트 시인은 죄를 대속해서 죽은 후 부활한 구원자 오시리스를 다음과 같이 찬미했는데, 이 찬미의 말은 예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대를 희생시켰는가? 그대가 그들을 위해 죽었다고 그들은 말하는가?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살아 있다! 그는 신비한 희생자이기에, 그들보다 더 생기가 넘친다. 그들의 주님이신 그는 영원히 살아있고, 영원히 젊다.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미스테리아 종교도 '원죄' 교리를 갖고 있었다. 플라톤은 죄목을 알 수 없는 고대의 어떤 죄에 대한 형벌로 영혼이 육체 속으로 추방된다고 가르친다. 엠페도클레스는 우리가 신의 세계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로 네 원소를 거치며 떠돈다고 말한다. 미스테리아 종교에서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곧 원죄라고 가르쳤다. 신인의 대속적 죽음, 혹은 입문자가 희생 동물을 죽이는 것은 입문자의 수준 낮은 '동물적' 본성의 상징적 죽음과 신적 본성의 재생을 뜻한다. 그것은 신과의 합일, 그리고 원죄에 대한 속죄를 뜻한다. 부활절 4세기에 익명의 저자가 쓴 글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들과 미스테리아 신인 아티스 교인들은 두 종교의 신인들이 똑같이 죽어서 부활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두 종교의 교인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티스의 부활을 모방했다고 주장했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아티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악마가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티스 미스테리아의 봄철 축제로 메갈렌시아Megalensia라는게 있었다. 그것은 부활절처럼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는 수난극을 공연했다. ---예수의 이야기도 중세에 수난극으로 공연했다. 공연 때 아티스의 시체 인형을 신성한 소나무에 매달고, 고 인형을 신성한 꽃으로 치장한 다음 묘지에 매장한다. 그러나 예수와 마찬가지로 사흘째 되는 날 아티스는 다시 살아난다. 밤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그의 열린 무덤을 비춘다. 그때 무덤 곁에 서 있던 사제는 입문자들의 입술에 성스러운 기름을 발라 주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도 고통으로부터 구원되리라'. 신화학자 제임스 프레이저경은 이렇게 썼다. 그러나 밤이 되면 숭배자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느닷없이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르고 빛났다. 무덤은 열려 있었다. 신이 부활한 것이다.사제는 슬피 우는 자들의 입술에 향유를 발라 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희도 구원되리라고 그들은 신의 부활을 열렬히 찬양했다. 그것은 신도들 또한 무덤에서 썩지 않고 되살아날 거라는 약속이었다. 이튿날인 3월25일, 신의 부활을 축하하는, 환희의 축제가 요란하게 열린다. 이날은 당시의 춘분이었다. 로마에서, 그리고 아마도 다른 모든 곳에서도, 축하 의식은 사육제 형태를 띠었다. 그것은 환희의 축제였다. 고대에 널리 퍼진 그리스도교의 한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3월 2일에 죽었다.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아티스의 부활을 축하했던 날과 같은 날이다. 그러나 교부(敎父) 락탄티우스가 보고한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3월 23일에 죽었고 25일에 부활했다. 아티스의 죽음과 부활의 날도 바로 그날이었다. 봄철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의식인 '안테스테리아Anthesteria' 또한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그 축제에 대해 현대의 전문가는 이렇게 평했다. '성금요일(예수의 수난일)이나 부활절 날짜가 일치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그리스와 시칠리아,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서 오늘날 거행되고 있는 부활절 의식은 아도니스의 미스테리아 의식과 현저하게 닮았다. 아도니스 축제 때에는 사방에서 신인의 죽음을 곡하는 소리와 달콤한 향기가 진동했다. 그런 다음 향유를 바른 아도니스상이 관에 담겨 무덤으로 실려 갔다. 그리나 신도들은 신인이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달랠 수 있었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죽은 자에게 그러하듯 아도니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사흘 후에는 그가 살아난 이야기를 한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시체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근쯤' 발라서(요한복음 19:39-40) '세마포'로 쌌다(마태복음 27:59).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시리스의 상징 또한 몰약을 발랐고 세마포로 쌌다. 마찬가지로 아도니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신인의 시체상은 잘 씻은 다음 향료를 발랐고, 세마포나 모직으로 감쌌다. 예수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다.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따르면, 오시리스도 죽은 지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 고대 이집트의 한 비문에는 입문자 또한 그의 주와 함께 부활할 거라는 약속이 적혀 있다. '참으로 오시리스가 살아 있듯이 그는 살아 있을 것이며, 참으로 오시리스가 죽지 않았듯이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하늘로 올라간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오시리스가 '생명을 되찾아 하늘로 올라간' 젊은 신이었다고 썼다. 아도니스의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해마다 그 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애달프게 피리를 불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만, 사흘 만에 그가 부활해서 숭배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다. 디오니소스 수난극으로 공연된 일부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무덤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갔다. 미트라스의 미스테리아 입문자들도 유사한 부활 장면을 공연했다.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친 미트라스는 태양의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승천 후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있다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스가 세계의 지배자인 빛의 신으로 즉위했다고 믿었다. 또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스는 하늘에서 종말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종말의 날에 그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죽은 자를 깨워서 심판할 것으로 믿은 것이다. 이러한 신화학적 주제들은 미스테리아 현자들의 전설에서도 발견된다. 세네카(BC 4-AD 65)에 따르면, 예수와 마찬가지로 철학자 카누스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 밖으로 다시 나타나서 한 친구를 찾아가 '영적 부활에 관한 얘기' 를 들려주겠다고 예언했다. 헤라클레이데스(BC 4세기)의 말에 따르면, 엠페도클레스의 기적가운데 하나를 축하하는 잔치 후, 위대한 현자 1명이 홀연 천상의 빛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지혜를 찾아 하데스로 내려갔고, 죽은 후 사도들에게 다시 나타나 하늘로 올라갔다. 초기 피타고라스의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부터 죽음과 지하세계로의 하강과 재생은 중요한 주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든 이교도 신인들과 현자들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고려해볼 때, 예수가 유일무이하다는 그리스도교 주장에 켈수스가 분개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분명 신화일 뿐인데 그리스도교인들이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에 놀라며 이렇게 썼다. 예수가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거라고 미리 말했다는 당신들의 믿음은 '사실'을 기초로 한 것인가? 글쎄, 그렇다고 치자. 그가 실제로 부활을 예언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리석은 청중을 미혹시키는 비슷한 얘기를 고안해 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가? 피타고라스의 하인인 자몰릭스는 한 동굴 속에 수년 동안 숨어 산 후, 자기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스키치아 사람들을 속였다는 밀이 있다. 이탈리아의 피타고라스 자신은 또 어떠했는가? 이집트의 팜프시니투스는 또 어떠했는가? 또 누가 있을까? 그래, 오르페우스는 어떠했는가? 테실리아의 프로테실리우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모두 죽은 후 부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얘기는 접어두고, 우리는 육체의 부활이 인간에게 과연 가능한지 질문해 봐야 한다. 당신들은 다른 이야기가 모두 전설일 뿐임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나 또한 인정한다. 그런데 당신들의 부활 이야기, 그 비극의 결말만큼은 믿을 수 있는 사실이고 숭고한 사실이라고 당신들은 계속 주장할 것이다. 신의 어머니 성스러운 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또한 육체를 지닌 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며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된다(가톨릭 교리에서 : 편집자주).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의 인간 어머니인 세멜레는 후일 하늘로 올라갔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아들과 더불어 불멸의 존재로 추앙 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 마리아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과 동일한 여러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8월 15일 성모 승천 축제는 고대 이교도의 여신 축제를 몰아내 버렸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가 신성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여러 모습의 모델이 되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닮았다. 그래서 가끔 무지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아기를 안은 이시스를 찬미한다. 중세기에 어떤 프랑스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로 숭배된 검은 처녀상들은 정밀 검사 결과 현무암으로 만든 이시스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한 전문가는 이집트 여신이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며 이렇게 썼다. 이시스 여신의 장중한 의식, 면도를 하고 삭발한 사제들, 아침과 저녁의 기도,딸랑거리는 음악 소리, 성수 세례와 성수 뿌리기, 그 엄숙한 행렬, 보석과 같은 어머니 신의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은 가톨릭 신앙의 의식이나 행렬과 닮은 데가 아주 많다.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운 별명인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 곧 '바다의 별'은 원래 이시스의 별명이었다. 폭풍우를 만난 선원들은 마리아를 스텔라 마리스로 찬미하는데, 이시스 또한 선원들의 수호 여신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전통에서, 빈 무덤과 부활한 그리스도를 먼저 목격한 것은 예수의 남자 사도들이 아닌 여자 신도들이었다. 마가복음의 원래 결말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만이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 ---이것은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가 인정한 전통이다. 또 다른 초기 전통에 따르면, 세 여자 모두 이름이 마리아이다. ---예수를 따랐던 막달라 마리아,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마리아. 요한복음(19:25)에는 이들 세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3명의 마리아 외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도 십자가 아래 서 있어서 모두 4명이기 때문에, 저자의 다음 논의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런데 원래의 <성서>에 구두점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4명이 아니라 3명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없지 않다.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오늘날 권위 있는 그리스어 <성서>에는 이런 식으로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등위접속사 and를 두 번 사용하고 가운데에 쉼표를 한 번 찍었는데, 원래의 <성서>에는 쉼표가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누이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이므로 4명 아닌 3명의 마리아로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할 수도 있다 : 옮긴이 주) 3명의 마리아가 제시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분명 고대 신화학적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교도 세계에서 삼중의 여신triple goddess은 1명의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엘레우시스에서 그녀는 데메태르, 페르세포네, 헤카테로 나타난다. 1명인 그녀는 세 가지 운명, 세 가지 사랑, 세 가지 은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는 흔히 3명의 여성 신도들과 관련된다. 디오니소스의 새로운 성소가 세워졌을 때, 마이나스maenas라고 불린 3명의 여사제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그곳에 가곤 했다. 그들 각자 여자 성가대를 불러 모아서 미스테리아 의식을 돕도록 했다. 디오니소스의 세 여자 사도는 오이노트로피오Oinotropio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신인 축제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고대의 신성한 무덤 가운데 가장 흔히 나타나는 것은 신의 동굴 상징물이다. 그곳에서 세 여자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를 따라 빈 동굴로 들어간다. 그것은 3명의 마리아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의 무덤이었던 빈 동굴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영적 재생 예수는 카탈렘나katalemna, 곧 동굴에서 태어나 어머니 마리아 품에 안기고 죽은 후에는 동굴에서 부활하여 세 마리아 앞에 나타난다. 이러한 '순환적' 신화 주제는 미스테리아에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일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서, 그의 기적적인 탄생과 기적적인 부활은 동일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희생양으로 죽은 그는 곧바로 다시 신성한 아기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났고 그가 죽어서 묻힌 동굴은 자궁과 무덤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리스도교인 작가 미누키우스 펠릭스의 글에 따르면, 오시리스 수난극에서 사제들은 죽은 오시리스를 위해 이시스를 애타게 찾았다. 결국 작은 소년의 출현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신인의 재생을 상징한다. 재생한 신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해마다 찾은 것을 잃고, 잃은 것을 찾기를 그치지 않으리라'. 부활의 신화를 이해하는 열쇠는, 미스테리아 신화에서든 예수 이야기에서든 죽음이 곧 재생을 뜻한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팔린게네시스palingenesis, 곧 '재생'을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한다.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가 '자발적인 죽음'이라고 부른 것을 행하는데, 그런 행위를 통해 그들은 영적으로 재생했다. 예수가 사도들에게 '재생' 할 기회를 준 것과 마찬가지로 오시리스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두 번째로 태어나게 하는 자'이며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들이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자'였다. 오시리스의 낮은 수준의 자아가 '죽으면' , 미스테리아 입문자 또한 진통을 겪으며 높은 수준의 자아로 태어난다. 진통을 하는 여인들에게 주는 쓸개즙을 디오니소스의 대역인 히에로판테스에게 주었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며 죽음과 탄생을 동일시한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진통을 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한복음 16:19-22). 낮은 수준의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재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 암호화된 비밀 가르침의 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 이야기 또한 하나의 신화일 수 있을까? 그 신화 또한 동일한 영적 가르침을 암호화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 사탄이 정말 완벽한 악마의 모방 솜씨를 발휘했던 것일까? 수많은 유사성은 다만, 말 그대로 불가사의한 일일 뿐일까? 증거를 다시 정리해 보자. 예수는 인류의 구윈자이며 인간이 된 신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버지와 동격인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인간 처녀에게서 태어나고, 그의 어머니는 사후에 하늘로 올라가 신적 존재로 추앙되는데,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12월 25일 혹은 1월 6일에 태어나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의 탄생은 한 별에 의해 예고되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베들레햄에서 태어나는데, 그곳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에게 신성하게 여겨진 작은 숲 속에 감춰져 있는 곳이었다. 예수는 마기의 방문을 받는데, 마기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섬긴 사제였다. 마기는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치는데, 그것은 BC 6세기의 이교도가 신을 숭배하는 방법이었다. 예수는 세례를 받는데, 세례는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수세기 동안 행해져 왔던 것이다.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준 성스러운 인간(세례 요한)은 이교도의 물의 신과 이름이 같으며, 이교도들이 물의 축제를 벌인 하지에 태어난다. 예수는 신도들에게 물과 공기와 불의 세례를 주는데,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그랬다. 예수는 장발에 수염을 기른 이방인으로 그려지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결혼식 때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데, 마찬가지로 결혼식 때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예수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의 음식을 베풀고, 어부를 도와 물고기를 잡게 하고, 사도들을 위해 물을 잔잔케 하는데, 이교도 현자들도 그 모든 기적을 행했다. 미스테리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유랑을 하며 기적을 일으키고, 고향에서는 존경 받지 못했다 예수는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고 비난을 당하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도들 또한 그렇다 예수는 처음에 사도들에게 신격을 인정 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성스러운 변모를 보여 주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12사도에게 둘러 싸여 있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무리들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동안 나귀를 타고 성으로 입성하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이설과 새로운 종교를 퍼뜨린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은 의로운 자인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위선자들의 공격을 받고 폭군 앞에 불려가고 기꺼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거라고 예언하는데, 이교도의 성자들 또한 그랬다 예수는 은 30(냥)에 배신을 당하는데,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런 주제가 발견된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와 동일시되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의 사도들은 상징적인 빵과 포도주를 먹고 예수와 교섭하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도들 역시 그렇다. 예수는 나무 혹은 십자가에 매달리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는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죽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의 시체에 몰약을 바른 후 세마포로 싸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시체 또한 그렇다. 죽은 후 예수는 사흘 만에 부활해서 사도들 앞에 나타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옆에 서고, 다시 지상에 나타나 심판할 종말의 날을 기다리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렇다. 예수가 죽어서 부황했다는 날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가 죽어서 부활했다는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수의 빈 무덤에 3명의 여신도가 찾아오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3명의 여신도가 빈 무덤을 찾는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자신의 수난을 같이하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는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또한 그랬다. 우리는 처음에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했다. 즉, 예수의 진짜 전기에 후일 이교도 신화가 덧씌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동정녀 잉태의 예처럼 분명 신화적으로 보이는 예수 이야기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가능성은 흔히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수 전기 사이의 유사성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덧씌워졌다는 정도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교도 신화에 이미 나타나 있는 예수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이 후일 첨부된 것이라면, '진짜' 예수는 대체 얼마나 남아 있는가? 그러한 이론이 옳다면, 우리가 아는 예수는 하나의 신화이고,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우리에게 떠오른 다른 가능성은 좀더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것이었다. 예수의 이야기는 사실상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또 다른 버전일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두 사람이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믿기 어려운 얘기들을 신화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까?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유대인을 배경으로 한 똑같은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떻게 믿어야 할지 곤혹스러운 상태에서 우리는 예수의 영적 가르침에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는 신화의 이면에서 예수에 대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4장 완벽한 플라토니즘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많은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더 잘---그리고 더 일찍이 ---표현되어 왔다. 그러한 표현들의 이면에는 과거부터 이미 존재해 온 고대의 교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켈수스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이교도들은 예수 이야기를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의 차용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또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이교도 미스테리아 철학을 복제한 것이라고 보았다.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 경멸하듯 이렇게 말했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체계적 개악과 아주 아름답고 단순한 철학적 원리들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 얘기해 보자---물론 그들은 완전히 서툰 짓을 했다.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 지성인들은 이교도 철학을 배운 사람들이었고 그 철학이 그들 자신의 교리와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교부(敎父) 클레멘스는 복음서들을 '완벽한 플라토니즘'으로 간주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헤라클데이토스와 소크라테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그는 공통의 영적 유산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다. 유스티누스는 그 유사성을 또다시 악마의 모방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본질적 차이를 바보들에게 숨기기 위해 악마가 모방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악령들이 사악한 가면을 쓰고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교리를 휘저어 놓은 것을 발견했을 때, 나로서는 다른 사람이 그들과 합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만 그런 거짓을 날조한 자들을 비웃고, 가면 자체를 비웃고, 대중적인 소신을 비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비웃는 것은 플라톤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달라서가 아니다. 모든 면에서 유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표절을 했으면서도 전적으로 똑같이 하지 못한 것이 가소롭다는 뜻 : 옮긴이 주). 스토아 학파들, 시인들, 역사가들의 교리 또한 그러하다. 그리스도교 교리가 플라톤 철학을 차용한 것이라고 이교도들이 워낙 끈질기게 비난했기 때문에 암브로스(AD 340-397)는 반박 논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사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플라톤이 모세를 표절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유사성을 해명했다! 유세비우스 주교가 4세기에 세운 가짜 연대기를 기초로 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BC 400년 전후)이 유대인 예언자 예레미야(BC 600년 전후)를 모방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해명 했다. 플라톤이 이집트 여행을 했던 그 시설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저명한 주교가 입증하지 많았던가. 그리고 플라톤이 예레미야의 예언 덕분에 우리 문헌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가 그날을 돌이켜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플라톤의 저술을 통해 배운 게 아니라(더없이 어리석은 자들은 그렇게 믿겠지만), 그들 철학자들이 우리 문헌을 통해 좋은 것과 참된 것을 얻어 배워서 말했을 뿐이라는 게 훨씬 더 개연적이다(<신시city of God)제28장) .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이교도들이 이교 예언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부정하면서, 고대 현자들의 지혜가 모두 그리스도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선생들이 올바르게 말한 모든 것은 원래 우리 그리스도교의 것이다'. 그러한 전통에 따라 성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후일 이렇게 선언했다. 철학자라고 불리는 자들 그리고 특히 플라톤주의자라는 자들이 뭐든 우리 신앙과 조화되고 참된 것을 말했다면 우리는 그런 사실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말씀을 불법적으로 소유한 자들이 우리의 것을 도용했다고 주장해야 한다(<신시city of God>제40장). 이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교도의 비난에 맞서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그처럼 뒤틀린 표절 주장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가르침과 미스테리아의 가르침은 정말 그토록 유사한 것일까? 그것을 살펴보자. 도덕적 순결 그리스도교인들은 고도로 도덕 적인 교리를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 한편 그들은 종종 미스테리아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강변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이교도 역사가이자 입문자인 디오도루스는 이렇게 썼다. '미스테리아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경건하고, 더 올곧고, 모든 면에서 더 나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사바지우스 미스테리아 입문자 1명은 의식이 끝난 후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악을 물리쳤으며 선을 발견했다'. 또 소파트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입문식 덕분에 나는 모든 도덕적 요구에 응할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갖추게 될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생애>를 쓴 이암블리코스는 이교도 행렬을 언급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미스테리아에시 이런 종류의 연출은, 흐뭇하게 장관을 바라보며 동시에 모든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이러한 의식에 수반되는 섬뜩한 거룩함을 체험함으로써 방탕한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자 계획된 것이다. 미스테리아 입문식은 도덕적 정화의 원천이자 죽음의 준비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미스테리아 의식에 참여한 모든 자들은 순결하며 고요하고 성스러운 삶으로 인도되었다. 그들은 지복의 세계에서 발하는 빛을 바라보며 죽었다'. 포르피리오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죽음의 순간에 영혼은 미스테리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있어야 한다. 모든 결점, 정욕, 시기,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켈수스는 입문식이 '어떤 불결함도 없이 성스러우며, 어떤 사악함도 의식하지 않는 영혼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자신의 순결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접근하지 말라'고 선언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예수는 신도들에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도덕적으로 순결하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교부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성소에 들어가려는 자는 순결해야 한다. 순결purity은 신성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성소에 바쳐진 다음과 같은 고대 비문을 되뇐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순결은 오로지 성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교도 현자인 섹스토스(AD 2세기)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도 말라'. 켈수스는 또 이렇게 썼다. 낮이나 밤이나 정녕 우리의 정신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선함이다. 공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할 때든, 침묵 속에서 반성을 할 때든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양심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고,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물려받았다. 양심conscienad은 원래 '내면의 앎'이라는 뜻이다. 양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내면의 영적 앎, 곧 높은 수준의 자아가 지닌 그노시스를 따르는 것이라고 이교도 현자들은 말했다. 피타고라스 신도들은 밤마다 그날의 모든 사건을 떠올리며 수준 높은 자아의 견지에서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입문자 세네카는 도덕적 완벽성을 위한 자신의 부단한 노력을 다음과 같이 평이한 언어로 기술했는데, 이 글은 현대 그리스도교인의 글처럼 보인다. 날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탄원한다. 빛이 꺼지고, 내 습관을 아는 아내가 침묵을 지키면, 나는 지난 하루를 돌아보며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떠올리고 저울질한다. 나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나는 잘못을 직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 잘못들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는 죄를 고백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쳤다. 죄의 고백은 지금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자신의 모든 잘못과 그릇됨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스스로를 순결케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사제는 입문자가 평생 행한 것 가운데 가장 나쁜 짓을 고백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경건한 행위였다. 포학했던 로마 황제 네로는 입문식을 치를 때 그가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입문식을 회피해버렸다. 고대세계의 가장 신성한 관습 앞에서 독재자조차도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체면 손상을 감수했던 것이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미스테리아 종교는 '가톨릭보다 앞서서 고해 관습을 확립했다. 참회 체계와 죄 사면 같은 요소도 지녔는데 다만 덜 엄격했을 뿐이다. 사제들은 신도들이 제 입으로 고해하도록 요구하며, 미스테리아 신인의 대변인 구실을 했다'. BC 1500년의 고대 이집트 <사자의 서>에는 사람이 행하기를 기피한 악마들의 '부정적 고해' 가 기록되어 있다. 미스테리아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입문식이 도덕적 신생을 위한 것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물론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의식은 다른 모든 종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선적으로 남용되기도 했다. 피타고라스의 유대인 사도 필론은 이렇게 불평했다. '선한 사람들이 입문식을 치르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데 사제나 히에로판테스에게 뇌물을 주기만 하면 강도든 살인자든 음탕한 여자든 입문식을 치를 수가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말은 입문식이 남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말은, 입문식을 치른 자가 도덕적으로 개선되었음을 보여 주지 못하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사랑 유대인이 전통적으로 '의로운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예수는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혁명적인 새 개념을 설파한다. 예수의, 최초이자 핵심적인 명령은 신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개인이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한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미스테리아의 핵심이기도 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미스테리아가 같은 시기의 다른 여러 신앙과 구별되는 현저한 특징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그들이 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갈구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신에 대한 신도들의 태도는 두려움이나 무관심의 태도가 아닌 사랑의 태도였다. 다수의 원시적인 종교의 동기는 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정당한 수단으로든 속임수로든 신들이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미스테리아의 경우에는 그 동기가 정반대이다. 그 종교는 신을 최고의 친구로 여김으로써 신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한다. 형제애라는 그리스도교의 정서 또한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기 6세기 전에 이미 존재한 미스테리아의 한 특징이었다. 엘레우시스에서의 입문자들은 아델포이adelphoi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형제들'이라는 뜻이다. 필라델피안philadelphian은 '형제애'를 실전하는 사람을 가리킨 말이다. 미트라스 신도들 또한 '형제'로 불렸다. 미스테리아 신인 유피테르 돌리케누스를 섬긴 사람들은 '프라트레스 카리시미fratres carissimi'라고 불렸는데,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는 신도들에게 같은 신도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마태복음(7:12)에서 예수는 이렇게 가르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러나 이 가르침 또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 두루 발견되는 해묵은 개념이었다. 이교도철학자 섹스토스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너의 이웃이 너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너의 이웃에게 행하라'. 그러나 예수는 거기서 좀더 나아간다 그는 우리가 적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야' 한다(마태복음 5:39). 아름답고 심오한 이 가르침은 영적 혁명으로 보인다. 낡은 유대 율법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 가르침은 유대인 정서와의 급진적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입문자에게 잘 알려진 것이었다! <피타고라스의 사도 섹스토스의 말씀>이라는 책에 똑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너희가 적들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기를 바라노라. 피타고라스 자신 또한 아무리 공격을 당하더라도 맞서 싸우지 말라고 가르쳤다. 에픽테토스도 비슷한 글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의 길이다. ---나귀처럼 채찍질을 당하는 것, 자기를 치는 자들 사랑하는 것,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자 형제가 되는 것. 그러나 고대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르침으로는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플라톤이 기술한 것을 들 수 있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당신들 그리스도교인은 이와 같은 말씀을 알고 있다.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 그가 네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이 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 특히 플라톤이 더 잘 말한바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리토에게 차근차근 심오한 깨달음을 전해 준다. 그 깨달음은 500년 후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것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에 이를 무렵의 논법은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 : "그러면 우리는 결코 그릇된 행위를 하지 말아야겠군요?" 크리토 : "네, 결코" 소크라테스 : "그러면 우리는 결코 그릇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그릇된 행위를 당했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는 것과 달리, 그릇된 행위로 복수하려고 하지도 말아야겠군요?" 크리토 :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크리토 :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군요''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손해를 손해로 갚는 것이 정당한가요, 부당한가요?'' 크리토 : "부당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 :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그릇된 행위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겠지요" 크리토 :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니 우리는 결코 복수를 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남에게 해를 당했다 하더라도 결코 남에게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릇된 행위를 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으며, 복수를 하는 것도 결코 옳지 않습니다. 악한 것을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에게 악한 짓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짓으로 복수를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켈수스는 다음과 같이 신랄한 촌평을 했다. 예수의 그 말씀은 플라톤이 이미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했듯이, 그의 말은 오래 전에 영감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한 말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원문의 일부를 삭제하여 위대한 사상을 불구로 만들어 버린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미스테리아의 위대한 현자들은 그들의 보편적인 사랑의 윤리를 더욱 확대해서 동물까지 포함시켰다. 일부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동물 희생제를 치르기는 했지만, 피타고라스 사도들은 채식주의자였고, 엠페도클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가 '어떤 제단도 부정하게 도살한 황소의 피에 물들지 않은 때'였다고 회고했다. 깨달음을 얻은 이교도 현자들은 모든 종교적 전통의 계몽된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영적 의미를 깨닫기 위해 낡은 행위는 과감히 배제하는 쪽으로 입문자들을 이끌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오르페우스 미스테리아를 이렇게 평했다. '아마도 서구세계 최초로 순결과 비폭력의 드높은 윤리를 부과한 종교'라고.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디오니소스 신도와 피타고라스 사도들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성 프란시스st. Francis와 같은 소수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들의 사랑을 동물의 왕국까지 확대시켰다 겸손과 가난 예수는 신도들에게 겸손하고 가난해지도록 애쓰라고 가르친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12사도를 내보내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면서 전파하며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의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복음 10:7-10). 그렇게 행한 사도들은, 영적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유랑을 한 이교도 견유학파의 철학자들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1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흔히 눈에 띈 모습 가운데 하나는, 누추한 옷을 입고 구걸 행랑을 짊어진 채 가시 지팡이를 든 견유학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설교를 했는데, 일상어로 고매한 사상을 전파했다. 예수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 그들도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이곳 저곳을 유랑했다. 견유학파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모두 누추한 옷을 입었고, 모두 그들의 종교를 '길Way' 이라고 불렀다. 에픽테토스가 견유학파인물 1명을 묘사한 다음 글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보낸 전령이다. 그는 선악에 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잘못 알고 있다고, 있지도 않은 곳에서 선악의 진리를 찾고 있다고, 진리가 진정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고. 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는 비극의 무대에 올라선 듯이 감동을 고조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한다. '오, 인간이여 ,그대는 어디로 실려 가는가? 그대는 무엇인가? 그대 비참한 자여! 장님처럼 그대는 이리지리 헤매는구나 그대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대는 있지도 않은 곳에서 평화와 행복을 찾는구나 평화와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누군가 가르쳐 준다 한들, 그대는 믿지 못하는구나'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의 겸손이 이교도 성자들의 자발적인 겸손을 억지로 모방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분개해서 이렇게 말했다. 놀랄 거야 없지만, 그들은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들의 경우에는 이 미덕의 필요성을 따진다. 이 점에서 그들은 또다시 플라톤의 숭고한 사상을 타락시킨다. 그들은 철학자들의 말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을 왜곡시켜서 예수가 처음 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는 예수가 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들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리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리라(마태복음 19:24). 하지만 우리는 플라톤이 더욱 순수한 형대로 그런 생각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플라톤은 말했다 '유난히 선한 사람이 유난히 부유해지기는 불가능하다' 이 말이 예수의 말보다 더 고무적이지 아니한가? 예수의 가르침이 독창적이고 차별적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켈수스가 비판한 것은 정당했다. 예수가 가르친다. '너희의 보물을 하늘에 두어라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할 수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2:33). 마찬가지로 켐스토스는 이렇게 권고했다.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 갈수 없는 것을 소유하라. 예수가 세계의 왕인 것은 그가 만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명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스토아 학파의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유일한 참왕은 현자이다'. 예수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지, 혹 저물때 올지, 밤중에 올지, 닭울때 올지, 새벽에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마가복음 13:35-36).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썼다. '언제든 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라. 너희가 없을 때 주인이 너희를 부르는 일이 없도록'. 예수는 가르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마가복음 10:15).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썼다. '왕국은 어린이의 것이다.' 예수는 가르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18). 4세기 앞서서 플라톤은 하나님God을 '선Good'으로 정의했다. 그러한 정의에 따라,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선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수와 비슷한 어조로, 피타고라스는 자기가 현자로 일컬어지는 것을 거부하며,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피타고라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 곧 '철학자'라고 자신을 일컫기를 좋아했다. ---철학자philosopher라는 말은 그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천국과 지옥 미스테리아가 고대 이집트에서 고대 그리스로 처음 소개되었을 때, 고대 그리스인에게 사후라는 개념은 새롭고 이단적인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구약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복음서들에서는 핵심 개념이다. 복음서의 이 개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이 개념과 마찬가지로 신약 복음서의 이 개념은 미스테리아에서 도입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신도들에게 사후 천국의 삶을 위안으로 제공한다. 반면 사악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으로 위협한다.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썼다 죽기 마련인 인간으로서 이러한 미스테리아를 간직함으로써 죽음의 집에서 떠나 있는 자는 얼마나 축복 받은 자인가. 그런 자에게는 생명이 부여되지만, 다른 자에게는 온갖 불행이 닥치리라 사랑하는 어린 딸 티모세나의 죽음을 겪은 플루타르코스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아름다운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아내에게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의식의 신비한 상징'을 잊지 말라고 일러준다. 아내가 그것만 잊지 않으면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를 그치며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디오니소스의 계시를 함께 나눈 경험'을 통해, 그와 아내는 '영혼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죽음이란 조롱 속의 새가 자유롭게 풀려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영원 속에서 재생' 한다고. 한 히에로판테스(미스테리아 의식 진행자)의 조사(弔辭)에 의하면, 죽은 자는 이제 알게 된다.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나쁜 것이 아니라 축복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 글라우코스는 이렇게 썼다. '은총의 신들이 우리에게 안겨 준 미스테리아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죽어야 할 인간에게 죽음은 더 이상 악이 아닌 축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 미스테리아의 한 사제인 필립은 입문자에게 마련된 하늘의 축복에 대해 열렬하게 설교했다. 어찌나 열렬했던지 이런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빨리 죽어서 그것을 즐기지 않는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미스테리아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한다!' 고 불평했다(<신시> 제7장) 그러나 사실 미스테리아는 입문자에게만 영원한 구원을 약속했다. 그 점은 그리스도교가 신도들에게만 영생을 약속한 것과 같다. 한 찬가에는 이렇게 경고되어 있다. 이 땅의 인간들 가운데 그것을 본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신성한 입문식을 치르지 않은 자, 자기 몫을 갖지 못한 자, 입문의 행운을 갖지 못한자는 죽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떨어지리라. 고대 세계에서 오르페우스의 미스테리아는 악을 행한 자들에게 닥칠 사후의 고통을 생생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르페우스 신앙은 그리스도교에 연옥 개념을 가르쳐 주었다'. 정말이지, 프란츠 쿠몽이라는 학자는 오르페우스는 신앙 서적에서 발견되는 축복 받은 자의 행복과 죄 지은 자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유대인의 <에스드라서Books of Esdras>에 채택되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경전은 AD 1세기에 씌어졌고, 그 내용은 일부 신약판본의 외경에도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사후의 삶에 대한 이교도의 개념은 암브로스에 의해 발전되었고, 마침내는 가톨릭의 대표적인 개념이 되었다. 타르타로스Tartaros(고대 그리스 신화의 지옥)에서 영혼이 받게 될 형벌에 관한 플라톤의 글을 본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무척 곤혹스러워했던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들은 어떻게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의 지옥의 불 교리를 미리 알 수 있었는지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예컨대 플라톤의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인 <파이돈Phaidon>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엄청난 불길이 이글거리며,.... 불과 진흙이 뒤섞여 들끓는 거대한 호수'. 비 정통 그리스도교 경전인 <베드로 계시록>에서는 지하세계에 마련된 죄인들의 운명을 보여 준다. 그 운명은 '맹렬히 들끓는 진흙으로 채워진 거대한 호수'에 빠지는 것이다. 켈수스가 보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천국과 지옥 개념을 미스테리아에서 차용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그리스도교인들은 지상에서의 혹독한 노고 후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7개의 하늘이 있다는 고대 체계에 동의하며, 그러한 하늘들을 경유하는 것이 영혼의 길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미트라스 신앙과 관련된 고대 페르시아의 미스테리아에 나타나는 유사한 믿음 체계를 살펴보면, 그들의 체계가 먼 고대의 가르침에 기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미트라스 신앙은 저주 받은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의 창자 속 공포와, 축복 받은 자들에게 주어질 천상 낙원의 기쁨을 가르쳤다. 일곱 하늘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에서 처음 유래한 것이 아니었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자라(고린도 후서 12:2). 여기서 '한 사람' 은 바울 자신이다. 저주 받은 자에게 주어질 지옥의 고통에 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열광하는 것을 지켜보며 켈수스는, 그들이 바쿠스의 미스테리아 입문자들보다 더 미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밤이나 낮이나 불경스럽고 불명예스럽게 하나님에 대해 떠벌린다. 그들은 죄지은 자들을 기다리는 형벌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묘사를 빙자해서 문맹자를 협박한다. 그러한 그들의 짓거리는 바쿠스 미스테리아 의식의 수호자처럼 보인다. 훨씬 더 계몽된 미스테리아 현자들은 그러한 공포가 다만 도덕적 행동을 개선시키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지하세계의 여러 공포를 '(도덕적) 개선을 위한 신화'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도 마찬가지로 지옥의 공포가 말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어리석은 신자들을 겁주기 위해 널리 선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교도 현자들과 오리게네스는 모두 환생을 믿었다. 천국과 지옥은 또 다른 인간으로의 환생에 수반되는 일시적인 보상과 처벌 상태로 이해되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을, 되풀이되는 '순환적' 과정의 일부로 보았다. ---영원한 보상이나 영원한 저주로 이어지는 단 한번의 사건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지옥이란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연옥적 체험을 하는 곳이었고, 그런 체험을 통해 모든 영혼은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리게네스를 사후에 이단자라고 비난했다. 오리게네스는 모든 영혼이 계속적인 연옥 체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로마 교회는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는 영혼도 있으며 독실한 자는 영원한 구원을 즐기게 된다는 것을 믿도록 요구했다. 이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하나의 교리인데, 켈수스는 이것을 그리스도교만의 교리로 간주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자신들의 신앙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인간들이 어떻게 남들을 자기 종교에 합세하도록 설득할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갖가지 설득 방법을 사용하여, 온갖 끔찍한 자극을 고안해 낸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영원한 처벌과 영원한 보상이라는, 지독히 공격적인 교리를 조작해 냈다. 이 교리는 철학자들(불의한 자의 처벌이나 축복 받은 자의 보상을 부정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일찍이 상상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극단적이다 로마 교회는 또 최후의 심판 때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모든 자들이 불길 속에 던져질 것이고, 독실한 자는 육체적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켈수스는 깜짝 놀라서 이렇게 썼다. 그들의 신이 불을 사용할 때(요리를 할 때처럼!) 다른 모든 인간은 완전히 불 구이가 되고, 그들만은 그을리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 교인들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종말의 때에는 오래 전에 죽었던 자들도 전에 살았던 때와 똑같은 육체를 지니고 되살아날 거라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묻고 싶다. 그건 혹시 벌레들의 소망이 아닌가? 썩은 시체가 된 몸뚱이에 연연하는 인간 영혼이라는 건 대체 어떤 종류의 영혼인가? 일부 유대인과, 심지어 일부 그리스도교인들까지도 시체가 되살아난다는 그런 가르침을 거부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인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그건 메스껍고 불가능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은, 대체 그 몸뚱이가 어떤 종류이기에 썩어 비리기 전과 똑같이 원래의 자연상태로 돌아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답이 없는 다른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렇게 한마디 하긴 한다. '하나님한테 불가능한 건 없다'고. 하지만 이처럼 기묘한 불의 계시와 육체적 재생의 교리조차도 미트라스 신앙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이처럼 별난 미스테리아 전통은 현생의 종말의 날에 하나님이 세계를 절멸시킬 거라고 가르쳤다. 그런 다음, 예수의 '재림'과 마찬가지로 미트라스가 다시 지상에 내려와 죽은 자를 무덤에서 살려 낼 거라고 가르쳤다. 마태복음(25:31-3)에 따르면,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이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나누고, 전자는 구원되고 후자는 저주를 받을 거라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트라스 신도들은 마지막 날에 인간이 모두 한데 모인 후 선한자와 악한자로 나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후 이윽고 '아름다운 기도'를 하는 자들의 기도에 따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파괴적인 불덩이를 떨어뜨림으로써 모든 사악한 자들을 학살할거라고 그들은 믿었다. 사탄이 그리스도에게 최후의 패배를 당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계시록과 마찬가지로, 미트라스 신앙에서도 어둠의 악령과 그의 불순한 마귀들이 큰 불길에 휩싸여 멸망하고, 다시 젊어진 우주는 영원토록 끝없는 행복을 누리게 될 거라고 믿었다. 새로운 시대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다가올 계시와 새 시대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복음 24:7-8). (염문 <성서>)에서는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위한 진통이니라' 혹은 '이 모든 것은 다만 탄생을 위한 진통의 시작이니라' 등의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개역 <성서>에서는 이처럼 새로운 '탄생'을 강조하지 않고 '재난'을 강조하는 쪽으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이교도들 또한 천문학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예견했다. 고대인들은 대략 매 2천 년마다 점성술적으로 새로운 '큰달'에 접어든다고 믿었다.(태양이 황도의 12궁 가운데 한 궁에서 다른 궁으로 넘어가는 데 대략 2천 년이 걸린다. 이러한 주기인 2천 년을 고대인들은 큰 한 달a Great Month이라고 했다. 큰 한 해a Great Year는 약 2만 5천 년이다 : 저자주) 그들은 숫양자리라는 큰 달에 살고 있었고, 이것은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 숫양자리(백양궁)의 시대는 수컷 양으로 상징되었고, 디오니소스는 흔히 숫양의 뿔로 묘사되었다. 물고기자리(쌍어궁)의 시대는 BC 145년경에 시작되었다. 2040년경에는 물병자리(보병궁)로 바뀐다(고대까지는 주기가 거의 일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차운동 때문에 주기가 일정치 않다 : 옮긴이 주). 물고기자리는 당연히 물고기로 상징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새로운 물고기자리 시대의 새 종교라고 본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데 가장 흔히 쓰인 기호가 바로 물고기 기호이다---그 기호, 곧 피타고라스 학파의 베시카 피시스는 앞에서 논한 바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 마가복음1:17). 사도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 알려져 있었고, 초기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스스로를 '작은 물고기' 라고 불렀다.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크티스ICTHYS'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가리키는 암호로 사용했다. 이 말은 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두문자어로 간주되었다. 정통파 그리스도교인의 대변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물에서 태어난 우리의 위대한 물고기(ICTHYS)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작은 물고기이다. 그런데 이크티스는 수세기 전 시리아의 미스테리아 신인이었던 아도니스의 그리스어 이름이었다! 물고기자리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황도상의 맞은편 궁인 처녀자리(처녀궁)는 서쪽 수평선에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교도 신화학에서는 물고기자리 시대의 구원자가 처녀자리에서 태어날 것으로 예견했다. BC 1세기의 로마 시인이자 입문자인 베르길리우스는 시빌이라고 알려진 이교도 신탁의 여사제가 한 예언을 상기시키며, 기적적인 탄생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우리는 시빌의 찬가처럼 마지막 시대에 이르렀다. 시간의 여신은 잉태를 했고, 위대한 일련의 시대가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정의의 성처녀가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오리라. 새로운 시대의 첫 탄생은 이미 높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길을 떠났다. 이 탄생과 더불어 철의 족속은 멸하고, 황금의 인간이 온 세계를 물려받으리라. 아기의 탄생을 웃음으로 맞이하라. 영광스러운 시대가 밝아 오리라. 황소는 사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으리라. 너의 요람은 꽃으로 장식되어 너를 애무하리라. 들어오라, 시간이 임박했으니. 모든 창조물이 다가올 시대를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라! 그러니 아기여, 너의 어머니를 미소로 맞이하라.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예언을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도래를 예언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널리 퍼진 이교도 믿음을 언급한 것이었다. 새로 도래할 물고기자리의 시대는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태어날 아기는 바로 오시리스-디오니소스였다. 고대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옛 것의 파괴에 의해 명시된다고 믿었다. 황소자리(금우궁)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황소인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황소를 도살하고 있는 미트라스를 그린 제단 그림이 사실은 황소자리 시대의 마감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뒤이어 도래한 숫양자리의 시대는 양으로 상징된다. 따라서 이 시대의 마감이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를 살해하는 것으로 명시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이러한 이교도 교리에 따르면, 예수는 최후의 희생양인 동시에 최초의 희생 물고기를 상징하는 셈이다 : 저자주) 페르시아의 미트라스 신도들은 큰 한 달이 하나의 계시로---한번은 홍수로, 한 번은 불로---명시된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인들 또한 파괴와 정화의 힘을 동시에 지닌 홍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홍수는 데우칼리온(프로메테우스의 아들로, 아내와 함께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인물 : 옮긴이 주)의 신화에도 언급되어 있다. 같은 식으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물에 의한 정화(노아의 홍수를 돌아보며, 불에 의한 정화(다가올 심판)를 고대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비전이 고대 이교의 가르침을 또다시 표절한 것이라고 켈수스가 주장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예컨대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가 구름을 탄 정복자로서 돌아올 거라고 가정한다. 메시아는 공기의 왕자들을 거느리고 벌이는 전투 중 지상에 불을 뿌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제외한 모든 세상 사람이 불에 타서 재가 될 거라고 가정한다. 그건 참 흥미로운 생각인데, 독창적인 데는 전혀 없다. 그러한 생각은 고대 그리스 등지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즉, 주기가 바뀜에 따라, 그리고 어떤 별들이 예기치 않게 결합함으로써 큰불이나 대홍수가 일어난다. 마지막 홍수 후 데우칼리온의 시대에, 우주가 번갈아가며 변천하는 이치에 따라 큰불이 일어난다고 그리스인들은 믿었다.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와서 불을 뿌릴 거라는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차용한 것이다. 유일신 이교 신앙은 전통적으로 다신교로 분류된다. 이교도들이 여러 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교는 일신교로 분류된다. 교인들이 오직 하나인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가혹하게 이교말살 운동을 벌일 때, 그들은 소위 다신교 신앙을 원시적인 우상숭배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미스테리아 현자들이 주장한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철학적 이해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도래하기 500년 전에, 크세노파네스는 이미 이렇게 썼다. '신은 하나이다. 신은 항상 고요하게 쉬시면서 오직 생각으로써 만물을 움직인다' (신이 하나라는 것은 당시 철학자들에게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제논, 멜리소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 또한 크세노파네스와 생각이 같았다: 저자주). 전설적인 고대 이집트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고 한다. '그대는 여러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터무니 없는 생각이다. 신은 하나이다'. 이교도 현자인 티로스의 막시무스는 그 무렵 그리스도교인들은 유일신 교리가 이교도 교리와 반대된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의 교리로 온 세상이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의 신이 만물의 왕이며 아버지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조차도 피타고라스가 유일신 교리를 설교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피타고라스의 말을 인용했다. 신은 하나이다. 그리고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신 자신은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한다. 신은 만물의 순환 속에 전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세대를 끌어안는 존재이고, 모든 시대를 규정하는 요소이며, 자신의 권능과 소임을 행하는 분이고, 만물의 최초 원리이며, 하늘의 빛이며, 만물의 아버지이며, 우주의 지성이자 활기찬 영혼이며, 모든 궤도의 움직임이다. 이런 개념은 피타고라스 시대에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이미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인 신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였고, 석상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이집트의 미스테리아에서 오시리스는 그처럼 지고한 존재였고 '세계의 상속자이자 유일한 신'으로 선언되었다. 여러 고대 이집트 비문을 보면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인의 신에 대한 개념이 사실상 얼마나 유사한지 여실히 나타난다. 신은 오직 하나이시며 함께 존재하는 다른 신은 없도다. 신은 만물을 만든 분이시다 신은 처음부터 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도다. 다른 어떤 것도 존재치 않을 때에도 존재했으며 신이 존재하게 된 후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도다. 신은 태초의 아버지이시다. 고대 이집트의 신 아문은 '하나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 이집트인 학자 월리스 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신은 또 '2인자가 없이without a second' 존재한다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신은 하나이며 2인자가 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 의미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그들의 신을 유일한 신으로 선언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그처럼 하나인 신God은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어서 '신들gods'이라고 불려 온 자연계의 힘이나 존재들의 의인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이교 신앙 또한 미신적이며 원시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이교 신앙에는 서로 다른 신을 믿는 많은 종파가 있었다. 그러나 버지가 설명한 대로, 소위 '신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자연의 일부 국면들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god' 이라고 번역하는 고대 이집트 낱말은 네테르neter이다. 네테르는 영적 본질, 혹은 원리를 뜻한다. 고대 이집트의 여러 네테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한 존재Being의 여러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신들gods이란 하나인 지고의 하나님God의 다른 모습이나 다른 국면들이었다(이 번역서에서 '하나님'으로 번역한 말은 모두 'God' 이다 '신god' 과 혼동되지 않도록 불가피하게 '하나님'으로 번역한 곳이 많은데, 이 '하나님God'은 여성성도 지니고 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일관되게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필멸의 육체를 무시하고 오로지 불멸의 영혼을 중시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God은 --- 나아가 이교도 주류 철학의 God까지도---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땅님[陰, 물성]' 이 배제된 '하늘님[陽,영성]'일 수밖에 없다. : 옮긴이 주). 고대세계에서 개별 신들gods은 흔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신God의 한 국면을 특별히 형언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모든신'을 뜻하는 말인 판테우스pantheus도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라틴어 비문들 가운데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세라피스나 리베르로 나타낸 것이 있는데, 그 경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인은 곧 '세라피스 판테우스'나 '리베르 판테우스'로 불렸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교도들은 모두 개별 남신이나 여신 숭배를 통해 하나인 신을 숭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의 다른 국면을 선택한 이웃들과도 충돌할 일이 없었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지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혹은 그리스어 이름들로, 혹은 인도의 이름들로, 혹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공식적으로 사용한 이름들로 부르든, 그건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의 신god이었던 여호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격의 여러 국면들을 부정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인들은 위와 같은 상식적 이해에서 벗어나 배타성을 갖게 되었다. 이교도들은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이교도의 종교적 관용의 정신에서 볼 때 그러한 배타성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티로스의 막시무스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다.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신성을 알게 합시다. 그리고 신은 하나라는 것을, 피디아스(BC 5세기의 조각가)의 작품이 그리스인에게 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이집트인들에게는 동물 숭배를, 다른 이들에게 강의 숭배를, 또 다른 이들에게는 불의 숭배를 떠올리게 한다면 나는 그처럼 다른 것에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봅니다. 그들로 하여금 다만 알게 하고, 다만 사랑하게 하고, 기억하게 합시다. 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관용한다고 해서 미신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동료 이교도들이 맹목적인 미신을 믿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이교도들이 우상숭배를 한다고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난했을 때, 사실상 그들은 미스테리아 현자들의 말을 되뇐 것에 불과했다. 미스테리아 현자들은 원시적인 믿음을 지닌 이교도들을 수세기 동안 완곡하게 조롱해 왔다.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 이런 비판을 했다. 그들의 윤리적 가르침에는 새로운 것도, 인상적인 것도 없다. 정말이지 다른 가르침들과 비교해 보면, 그들의 어리석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혐오를 살펴보자. 헤로도토스가 증언한 것처럼 오래 전에 페르시아인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한 장인(대부분 가장 천시된 신분의 사람!)이 만든 우상이 신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이다. 현명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상을 신으로 숭배한 사람은 벽에 대고 말을 거는 사람만큼 어리석다'. 아테네 철학자 디아고라스(BC 5세기)는 신들을 조롱한 것으로 유명했다. 디오게네스가 그랬듯이, 그는 석상에게 소원을 비는 이유를 질문 받자 냉소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거절 당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묘사한 신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공박했는데, 풍자적으로 이렇게 평했다. 사람들은 신들이 태어나자마자 말을 했고 옷을 입었으며, 자신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신이 들창코를 지닌 흑인이라고 말한다. 트라키아인들은 신이 푸른 눈에 빨간 머리칼을 가졌다고 말한다. 암소와 말이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신의 모습을 암소와 말처럼 그릴 것이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허구 인물인 모무스를 내세워, 동물의 머리를 가진 기괴한 신들이 나타난 것에 대해 제우스에게 불평한다. 제우스는 '신들의 그런 모습이 꼴사납다'는 것을 자기도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런 신들의 대부분은 상징일 뿐이므로 미스테리아에 입문하지 않은 자는 그런 신들을 비웃지 말아야 한다'고 해명한다. 마찬가지로 켈수스도 이교도 신들의 모습이 입문자들에게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뿐이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실명한다. 그런 신들은 '보이지 않는 관념들의 상징이며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수의 이교도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개념이 원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여러 국면을 '신들'로 의인화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지고한 하나님을 인간의 용어로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인동형동성설(신과 인간이 모습도 같고 본성도 같다는 이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이 손과 입과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은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이적을 일으켰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한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이 아니라고 평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손도 없고 입도 없고 목소리도 없으며, 우리가 아는 그 어떤 특성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심지어 인간을 위해 창조한 동산을 걷기까지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화를 내며, 질투를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유감스러위하며, 졸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모든 면에서 그것은 하나님이기보다는 인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고한 신에 대한 그들의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또한 천사들을 숭배하지 않는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은 이교도가 보기에 여러 남신이나 여신과 똑같은 천사들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이교도와 똑같이 '신들'에 대해 얘기했다! 교부(敎父)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영적 계몽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될 미래의 삶을 대비한 가르침'이라고. 계몽된 자들은 신들gods이라고 불린다고 그는 설명했다. 계몽된 자는 '구원자 하나님이 먼저 임명한 다른 신들과 더불어 왕좌에 앉게 될 것으로 정해진 자'이기 때문이다. 이교도 입문자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하나의 신임을 알라'. 같은 식으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한 바리새(바리사이)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너희 율법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신들이노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들gods이라 하느니, 이러한 <성서>는 폐하지 못하느니라.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0:34-36)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논할때 '두 하나님'과 같은 말을 사용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두 번째 하나님'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물론 삼위일체 교리에는 결정적으로 다신교적 교리가 담겨 있다.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개념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지고의 유일한 하나님의 여러 국면에 대한 이교도 개념과 일치한다. 유대교에는 신성한 삼위일체 개념이 없다. 그 개념은 일찍이 이교 신앙에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피타고라스 교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전체와 모든 것은 수 3으로 이해된다. 끝과 중간과 시작은 삼위일체인 전체의 수를 갖기 때문이다'. 수백년 앞서 존재한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한다. '하나인 나는 셋이 된다'. 또 다른 문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신은 모두 셋이다. ---아몬, 라, 프타. 그들과 같은 존재는 달리 없다. 아몬이라는 이름 속에는, 그가 라이며, 그의 육체는 프타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그는 라와 프타와 더불어 아몬으로 현시되며, 셋은 하나로 통합된다. 소위 일신교라는 것과 다신교 사이의 행간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배워 온 것과는 달리 둘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구분은 유동적이어서 사실상 구분을 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로고스 흠정역 <성서>(17세기 초에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지지를 얻어 계획 발행된 영역 <성서>)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1-4). 이러한 문장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묘한 감동을 느끼면서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교도 철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위 문장의 뜻을 환히 알 수 있다. 위의 '말씀Word'은 그리스어 '로고스Logos'를 번역한 말이다. 로고스 개념은 유대인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고, 전적으로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BC 6세기에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에 공유된 로고스'를 발견했다(C. H. 칸은 이렇게 평했다. '지혜는 자기에 대한 앎에서 비롯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에 대한 앎을 찾다가, 자신의 내면에 우주와 맞먹는 로고스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주)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썼다. 나 자신에게가 아닌 로고스에 귀를 기울인 결과, 현명하게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교도 현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설파했다. '철학자들의 로고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로고스를 통해 선언한 것과 같은 평화를 우리에게 약속한다'. 로마인 비트루비우스는 BC 27년경에 이렇게 썼다. '내가 로고스를 믿는다면 아무도 내가 그르다고 생각지 못하리라'. 클레멘스도 그 점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들이 신성한 로고스를 약간은 엿보았다고 기꺼이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교도의 전설적인 현자 오르페우스의 선언을 인용했다. '신성한 로고스를 보라. 인생의 좁은 길을 가며 로고스를 바라보라. 세계의 위대한 지배자, 우리의 불멸의 왕인 로고스를'. 그러나 이런 이교도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문헌에 이미 이런 개념이 담겨 있다. 그문서는 그리스도가 오기 2천500년 전쯤에 씌어졌다! 그러한 고대의 로고스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대 그리스에서 로고스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우리의 용어인 '말씀'의 뜻으로는 쓰이지 않았다. 교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는 로고스의 여러 의미 가운데 '생각중의 생각'이라는 의미로 로고는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최초의 생각인 셈이다. 전설적인 이교도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도 정확히 같은 뜻으로 그 말을 사음했다. 그는 로고스, 곧 생각 중의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그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위대한 마음Mind에 떠오른 첫 생각이며 그 생각으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다고 보았다.---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또한 그렇게 보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로 의인화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 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이교도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존재의 다른 국면이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패러독스는 요한의 말에도 나타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고대 이교도의 교리이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또한 로고스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했고, 그 밖에도 여러 현자들이 그런 말을 해 왔다. 마음과 생각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사실상 하나인데, 서로 분리되면 둘로 나타난다고 헤르메스는 설명한다. BC 6세기에 헤라클레이토스도 같은 말을 했다. '그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존재이다'. 클레멘스는 에우리피데스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묘하게도 미리 알아맞혔다'고 인정했다. 하나님과 로고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불가사의한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아들son은 하나님의 의식이다. 아버지는 다만 아들에게 반영된 세계를 본다. 로고스는 스스로를 의식하는 하나님이다. 또 로고스는 우주의 한영혼0ne sou1인데, 만물을 통해 의식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스스로를 발견하려고 했다가 '만물에 공유된 로고스'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가 공유한 정체성이 바로 로고스라는 것을 그는 발견했던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개체로 이루어졌지만 각기 한 영혼One soul과 결속되어 있듯이, 하나의 무한한 생명체인 우주 또한 한 영혼One Soul ---하나님의 로고스---과 결속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가 로고스의 화신이라고 요한이 말하듯이, 이교도 입문자인 플루타르코스 또한 오시리스가 '초월적이며 고통을 느끼지 않는 로고스 자체'라고 가르쳤다. 이교도에게 오시리스-디오니소스가 곧 로고스이듯 예수 그리스도와 로고스를 동일시함으로 요한은 예수가 인격화된 우주의 한 영혼One soul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안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공유한 신성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시대에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철학적 원리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고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썼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인과 이교도의 로고스에 대한 이해에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서 말했지만, 이교도 로고스의 화신인 신인의 이야기는 '신화'인 반면 철학적 원리의 화신인 예수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 차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 철학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교도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육체의 의지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다만 하나님의 의지로 태어났다고.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은 오직 한 인간만이 말 그대로 육신이 된 로고스였다고 믿는다. 그것이 고대세계의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인을 나누는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교도들에게는 우리 모두가 공유한 로고스가 단 하나의 인간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리스도교인의 로고스 개념이 이웃 이교도의 개념과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사렛의 한 목수가 실제로 로고스의 화신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러한 주장이 정말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 수세기 동안 논란을 거듭했다 미스테리아의 용어 막스 뮐러 교수는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로고스 곧 '말씀', 모노게네스monogenes 곧 '독생자', 프로토코스protokos 곧 '장자(첫아이)', 히오스 토우 테오우hyios tou theou 곧 '하나님의 아들'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한 종교적 사고의 원형을 차용하는 자'라고. 신약 <성서>를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저술들에는 그러한 이교도 개념이 수없이 많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런 개념은 원래의 그리스어를 빈약한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사용한 용어는 사실상 미스테리아신도들의 용어와 너무나 유사하다. 비문만 보아서는 죽은 자가 그리스도교인인지 이교도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예컨대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의 영으로 비밀mysteries을 말함이니라'(고린도전서 14:2)고 썼는데, 이교도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나 영성체 의식도 '미스테리아Mysteries'라고 일컬어졌다. 이 의식을 주관하는 주교는 '미스타고구스Mystagogus'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미스테리아의 지도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미사는 '미스타고기아'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오늘날 그리스 정교회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미스타고기아Mystagogia'는 '미스테리아 전수'라는 뜻이다 : 옮긴이 주). 현대의 고전학자의 말에 따르면 이 말들은 모두 '미스테리아의 용어' 이다. 그리스도교인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 의식을 '텔레테telete'라고 불렀다. 이 말은 '입문식'이라는 뜻이다. 이교도 비평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도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이 미스테리아 의식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보고, 그것을 '새로운 텔레테' --- '새로운 입문식'이라고 불렀다. 사도 바울은 대게 '성숙한', 또는 '온전한' 그리스도교인으로 불리지만 그러한 수식어에 해당하는 원래의 그리스어를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입문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뜻이다. 어떤 교리를 해설할 때 오리게네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선포했다. '입문자는 내 말의 뜻을 안다!' (조지프캠벨의 저술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은 미스테리아 의식으로 제시되었다. '두려움에 떨게 하는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이것을 안다'와 같은 구절이 초기의 모든 그리스어 설교에 나타난다 : 저자주) 이교도 철학자 파우사니아스와 플루타르코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등이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비밀을 언급할 때에도 그와 똑같은 말을 사용했다. 교부 클레멘스의 저술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용어에서 직접 차용한 낱말로 가득하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신성한 미스테리아', '신성한 비밀', '비밀의 로고스', '로고스의 미스테리아'라고 썼다. 클레멘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한 미스테리아의 교사'였다. ---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나의 히에로판테스', '나는 입문식을 치르는 동안 신성해진다'고 클레멘스는 썼다. 이교도 입문자의 말과 다를 게 없는 말로 그는 열변을 토한다. 오, 진실로 성스러운 미스테리아여! 오, 순수한 빛이여! 이글거리는 횃불 속에서 나는 하나님과 천국을 본다. 나는 입문식을 통해 거룩해진다. 주님은 미스테리아를 나타내신다. 주님은 숭배자에게 봉인을 찍으신다. 원컨대 그대들도 입문하라. 그리하면 유일한 참 하나님의 주위를 맴돌며 천사들과 함께 춤을 추리라. 그리스도교는 미스테리아 신앙의 조직 체계까지 물려받았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학자는 그 점을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미스테리아 신앙은 원시 그리스도교의 선구가 된 종교적 연합체를 결성했으며, 조직과 행정 체계 또한 새 종교에게 물려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 종교를 개인적 확신의 문제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위해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죄의 대속redemption이 무엇인지 가르쳐서 사람들이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미스테리아의 복음 전도자들이 미리 길을 닦아 놓음으로써, 이제 사람들은 예수가 구원자라는 그리스도교의 선포에도 기꺼이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미스테리아는 범민족적인 신들을 숭배하도록 했고, 인류의 형제애를 지향했으며, 불멸성에 대한 열망을 자극했다. 신도들에게 신앙의 전파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사람들을 열렬한 전도자로 만드는 선례를 보여 주었다. 그들의 신격을 통합된 신격의 대표자로 삼음으로써, 유일신 신앙을 촉진시켰다. 결론 신약 <성서>는 정말 새로운 것이었을까? 전통 유대인들에게는 분명 새로웠고 이단적이었다. 예수의 비유를 통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유대인 교리는 소크라테스의 '적을 사랑하라'는 교리의 도전을 받았다. 천국과 지옥의 성격에 대한 미스테리아의 가르침은 내세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을 뒤바꿔 놓았다. 따라서 신약 <성서>는 유대인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 그러나 이교도에게는 새롭지 않았다. 이교도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그런 교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 과거 이교 신앙의 가르침과 똑같았어도 이교도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독창적인 진리보다는 항구적인 진리를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굴해 낸 증거 일부를 정리해 보자. 예수는 신도들에게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도덕적으로 순결하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쳤는데, 미스테리아 현자들도 그랬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데, 미스테리아 입문자들도 그랬다. 예수는 신도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미스테리아 현자들도 그랬다 예수는 신도들에게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미스테리아 현자들도 그랬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서로를 '형제'처럼 사랑하는데, 미스테리아 입문자들도 그랬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겸손과 자발적인 가난의 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미스테리아 입문자들도 그랬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교에 없는 천국과 지옥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미스테리아의 개념을 직접 도입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불의 계시와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기다리는데, 미스테리아 입문자들도 그랬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 상징은 이교도 점성술의 상징을 도입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데, 미스테리아 현자들도 그랬다. 이교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인들도 '신들godd' 얘기를 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숭배를 공격하는데, 미스테리아 현자들도 그랬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도 발견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로고스의 화신으로 보는데, 그것은 유대교에는 없는 이교도의 개념이다. 신약 <성서>를 포함해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저술은 미스테리아의 용어를 대거 사용하고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조직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의 조직을 본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똑같은 것을 고대 미스테리아의 교리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수의 행적과 똑같은 이야기를 이교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두 사람은 명백히 알게 되었다. 약 2천여 년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유일무이하며 혁명적인 계시종교라고 믿어 왔지만 그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로 결심했다. 로마 교회가 우리에게 물려준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는 전혀 역사적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AD 첫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인들 공동체는 여러 파로 갈라져있었다. 로마 교회가 된 문자주의자들 집단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자들로 알려진 집단도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급진적으로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문자주의자들은 그것을 너무나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 했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자, 문자주의자들은 그들 특유의 견해를 강화시키는 한편, '이단'을 잔혹하게 말살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전동 역사는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 간의 파벌적 싸움에서 이긴 자의 입장에서만 기술되었다. 그 역사가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입증됨으로써, 우리는 패배한 자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영지주의는 생존의 싸움에서 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덜 타당하다고는 불 수 없다. 로마 교회가 그토록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던 영지주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5장 영지주의 최근의 조사 결과 전통적인 견해, 전통적인 결론, 전통적인 '사실들'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아직은 소수겠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는 다수가, 열렬히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유난히 어리석고 방탕한 이단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부상할 수 있었는가의 질문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대단했던 영지주의 운동을 뿌리치고 부상할 수 있었는가? 영지주의의 역동적인 생각이 어떻게 독단으로 치부되고 말았는가?- 램플러그(목사) 그리스도교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는 훗날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운 문자주의자들의 견해와 정반대되는 점이 너무나 많다. 문자주의자들은 엄격한 권위주의자였다.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신비를 중시한 개인주의자였다. 문자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신조를 강화하고자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다양한 믿음과 실천에 관용적이었다. 문자주의자들은 수많은 복음서 가운데 넷만을 <성서>로 채택했고, 나머지는 악마적인 이단으로 간주해서 불길 속에 던져버렸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수백 가지의 복음서를 썼다. 참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주교가 설교한 대로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문자주의자들은 가르쳤다. 참된 그리스도교인 이라면 그노시스, 곧 신비한 '앎'을 스스로 체험해서 스스로 1명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는 혹독하게 억압을 당했다. 그래서 최근까지 우리가 그 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전부가 그들을 비방하며 그들의 기록을 말살한 사람들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가 그리스도교 사상을 곡해한 것---이교도 교리를 동원해서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혼란시킨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2천여 년 동안 그런 생각을 고수해 왔다. 성공적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모든 증거를 말살함으로써, 그런 생각은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45년에 이집트 나그 함마디 인근의 한 동굴에서 영지주의 장서가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장서는 영지주의와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리의 기존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영지주의자는 오늘날 이단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스스로를 진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영지주의 복음서에는, 부활한 예수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거짓 교회imitation church(모방 교회)'라고 질타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지주의자가 보기에 참그리스도교를 곡해한 것은 문자주의자들이었다. 원래의 그리스도교는 모든 입문자가 신비한 앎, 곧 그노시스를 개인적으로 체험케 하는 영적 종교인데, 문자주의자들은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문자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 ---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에게나 맞는 '세속적 그리스도교' --- 만을 가르쳤다. 반대로 영지주의는 참된 '영적 그리스도교'였고,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 그리스도교의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가르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의 말은 이단 영지주의자가 한 말이 아니다. 초기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도교인 두 사람---알렉산드리아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 학교를 운영한 클레멘스와 그의 후계자 오리게네스---의 저술에 나오는 말이다. 두 사람은 평생 대단히 존경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두 사람은 현대의 주류 그리스도교보다는 영지주의를 훨씬 더 닮은 그리스도교를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가톨릭 교회의 성자로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영지주의에 대한 책을 썼고, 영지주의자를 참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렀다(클레멘스의 저서 <스트르마타stromata> 7장 1절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영지주의자만이 진정으로 경건하다.…. 참 그리스도교인은 영지주의자이다' : 저자 주).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처럼 영향력 있고 존경을 받는 지성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것과 달리, 영지주의자가 그리스도교의 변방에서 어슬렁거린 이상하고 하찮은 이단자였던 게 아니라는 증거이기에 충분하다. 반대로 영지주의에는 폭넓고 역동적이고 세련된 영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영성은 AD 첫 몇 세기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지성인들을 매료 시켰다. 이단자로 낙인 찍혀서 거의 잊혀진 발렌티누스나 바실리데스와같은 위대한 성자들뿐만 아니라, 명성에 전혀 금이 가지 않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사람들까지도 영지주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교도 철학 문자주의자가 영지주의자를 겨냥해서 가장 자주 되풀이한 비난의 핵심은, 영지주의자가 본질적으로 이교도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초기 문자주의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단자 사냥꾼이었는데,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케케묵은 고대 그리스의 낡은 헝겊으로 새 옷을 깁는다고 비난했다. 그는 영지주의 현자인 시몬 마구스의 추종자들을 '미스테리아의 사제들'이라고 일컬으며 그들이 '제우스를 닮은 시몬의 이미지'를 숭배한다고 비난했다. 광적인 반영지주의 저술을 남긴 테르툴리아누스는 영지주의 입문식을 엘레우시스에서의 이교도 입문식에 비유했다. 이레나이우스의 제자인 히폴리토스는 영지주의자 집단을 이집트의 세트 신 숭배자라고 부르며 이렇게 주장했다. 그들은 미스테리아 종교와 의식을 전파한 고대 신학자인 무사이우스, 리누스 오르페우스 등에게서 모든 교리를 차용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세속 철학자들의 이미지'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동일시하며 똑같이 숭배한다는 것에 격분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 축제에 참석했고, 자신들의 모임에 이교도들을 받아들였다. 그 점에 대해 테르툴리아누스는 비난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단자들이 수많은 마법사, 보따리 약장수, 점성술사, 철학자 등과 교류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 문자주의자는 영지주의자들을 기괴한 무리로 몰아붙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옳은 말을 했다. 즉, 영지주의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너무나 닮았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자들과 달리 이교 신앙을 적대시하지 않았고, 이교 신앙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했으며, 고대 철학 연구를 장려했다. 실제로, 나그 함마디의 동굴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영지주의 문서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문서도 함께 발견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교도 철학에 심취했다. 그는 이교도 철학이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신성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풀이했다. 그리스 철학은 영혼을 순결케 하며, 믿음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한다. 진리는 이 믿음을 초석으로 삼아 그노시스의 건물을 세운다. 오리게네스도 마찬가지로 완벽한 신앙심을 가지려면 이교도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교도 철학을, 그는 세련된 미각을 만족시키는 훌륭한 요리에 비유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인을 '미사를 위한 요리사'에 비유했다. 그는 이교도 현자(고대 그리스 철학자) 암모니오스 사카스에게 철학을 배운 사람이었다. 이교도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는 암모니오스나 오리게네스와 '오랫동안 교제'했다. 그는 두 사람이 '플라톤주의자'이며 '통찰력에 있어서 당대인을 훨씬 능가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암모니오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인 철학자 오리게네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이교도 철학자 가운데 1명인 플로티느소의 스승이기도 했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철학 교실에서 영지주의 그리스도교를 언급하면서, 영지주의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열등한 버전이며 지나치게 복잡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모든 전문 용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빚진 것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영지주의자 친구 몇을 존경하는데,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 전에 그런 용어를 만들어 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몰라도 계속 그런 용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교도 신화 영지주의 저술들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과 이교도 점성술, 마법, 철학 개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예컨대 <구원자의 책>에는 이에오우Ieou(최고신)가 다른 위대한 다섯 신, 즉 이교도의 신 크로느스·아레스· 헤르메스·아프로디테·제우스를 거느리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또 영지주의 문서에는 이교도 신화와 유대인 신화가 서로 뒤섞여있다. <바룩Baruch>이라고 불리는 영지주의 문서에는 이교도 점성술과 유대인의 천사 개념이 합성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12천사를 창조했고, 이 천사들은 이교도의 12황도와 동일한 우주를 에워싸고 지배한다. 이 문서는 하나님을 유대인처럼 엘로힘Elohim이라고 칭하지만, 엘로힘을 제우스와 동일시한다. 또 엘로힘이 이교도 영웅인 헤라클레스를 예언자로 선택했다며, 하나님을 디오니소스의 다른 이름인 프리아포스Priapus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곧 프리아포스이다. 그는 어떤 것도 존재하기 전에 만물을 창조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었기에 프리아포스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피조물의 존경을 받으며, 모든 신전에 그의 상이 세워져 있다. 히폴리토스는 나세네스Naassenes라고 불린 영지주의 집단에 대한 얘기를 전해 준다. 나세네스는 이교도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의 모든 신화에 내재된 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세네스는 위대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 죽은 신화적 인물인 아티스를 예수와 동일시했다. '여러 모습을 지닌 아티스'는 그들의 찬송가에서 아도니스, 오시리스, 판, 바쿠스, 흰 별들의 목자 등의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모두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이름이다!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동일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고 히폴리토스는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모두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미스테리아 의식을 통해 재생의 비밀을 배웠다. 대모신(大母神)은 고대세계를 지배한 여신이었다. 이 여신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시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데메테르로 알려져 있었다. 이 여신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이거나 누이이거나 배우자였고, 흔히 그 세 가지 모두였다---신화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 두 사람은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탐구하며 여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조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이교 사이의 유사성을 조사했는데 정통 그리스도교에는 여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다소 막연한 양성적 성령만이 있고, 여성 신격은 없다. 영지주의 신화에서는 좀더 자연과 균형이 맞도록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모라는 삼위 일체가 있다. 영지주의 문헌에서 여신은 '만물의 어머니', '살아 있는 것의 어머니', '빛나는 어머니', '더 높은 신', '성령', '우측의 그이'와 대응하는 '좌측의 그녀'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성모 소피아는 이교도 여신처럼 신성한 천상의 존재이면서도,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구원자/남매/연인인 예수를 찾는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여신 이시스도 자신의 구원자/남매/연인인 오시리스를 찾는다. 영지주의자들은 시적으로 상상한다---'모든 습한 것'은 소피아가 흘린 눈물이라고, 그런 상상은 이교도 현자 엠페도클레스의 상상을 반영한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5세기 앞서서 모든 물이 페르세포네 여신의 눈물이라고 말했다. 소피아는 일부 영지주의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어서, 공개적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는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영성체 의식만을 거행하고 소피아는 언급하지 않았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영적'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성체 의식 때에 비로소 여신 소피아의 수난을 환기시켰다! 플라톤의 신 앞서 언급했듯이, 이교도 현자들은 여러 남신과 여신을 얘기하면서도 전적으로 신비하며 초월적인 최고신에 대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플라톤의 시대 이후, 그들은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보는 것을 비관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최고신은 모든 특성을 초월한 하나Oneness이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영지주의자들 역시 이처럼 추상적이고 신비한 신에 대한 개념을 채택했다. 하나님God을 하늘에 있는 어떤 위대한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만물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보편 정신Mind of the Universe(우주의 마음)으로 이해한 것이다(만물을 통한다고는 하지만 만물을 '종'으로 보고 정신을 '주'로 보는 것이 서구의 주류사상이다. 이 사상에는 음양의 상보 개념이 없다. 그래서 God은 역시 '땅님'을 배제하는, 혹은 지배하는 '하늘님' 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는 mind를 별 고민 없이 정신이라고 번역하게 되었지만, 동양사상에서는 땅의 음기를 精과 하늘의 양기를 神이라고 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된 것을 정신이라고 했다. mind에는 땅의 음기, 곧 물성이 담겨 있지 않다: 옮긴이 주). 문자주의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상(像)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구약에서 파벌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때로는 전제군주 격인 부족의 신으로 나타나는 유대인의 신god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상을 횡포한 제우스로 그리는 것을 플라톤이 공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여호와만을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치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하나님상을 공격했다. 영지주의 현자 발렌티누스는 플라톤의 용어인 '조물주demiurge'라는 말로 여호와를 설명하며, 여호와는 참 하나님의 도구로서 봉사한 종속적 신격이라고 규정했다. 여호와가 하위의 신격인데도 주제넘게 자신을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애굽기 20:3-5). 그러나 영지주의의 <요한의 비밀서>에서는 그것을 '광기'라고 일컬으며 이렇게 평했다.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는 다른 신God여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다른 신이 없다면, 질투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다른 영지주의 문서에서 스스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여호와는 그의 어머니 여신 소피아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건방진 애들처럼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영지주의자에게 예수는 유대인의 작은신 여호와의 예언자가 아니었다. 플라톤과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 곧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하나님의 예언자였다. 영지주의 교사 케르도는 이렇게 설명했다. 법으로 선포된 하나님이나 예언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알려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는 유대인의 전통 관점인 신인동형동성설과는 정반대로, 이교도 교리를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일종의 형언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명명된 모든 이름 위에 계신다'. 미스테리아 의식의 히에로판데스 문자주의자들의 예수는 여호와가 약속한 메시아로 그려진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의 예수는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의 히에로판테스를 닮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라는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부활한 예수는 사도들에게 위대한 빛의 천사로 나타난다. 그는 사도들이 공포에 떨며 경악하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그들에게 '비밀Mysteries'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 <피스티스 소피아>(피스티스pistis는 믿음faith, 소피아sophia는 지혜wisdom를 뜻한다 : 옮긴이 주)라는 영지주의 문서에서 예수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너희를 순결케 하는 비밀을 발견할 때까지 밤낮으로 찾기를 멈추지 말라'.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가 그를 찬양하며 이렇게 말한다. 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정녕 빛의 왕국의 비밀Mysteries 열쇠를 가져오셨음을, 이제 우리는 거리낌없이, 분명하게, 정녕코 아나이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round danad'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 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낸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 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예수를 중심으로 해서 사도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Mystery'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한 학자가 썼듯이, 원무는 '분명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반영한 신성한 입문식 춤'이다. 입문식 춤에 수반되는 찬송가는 분명하게 세 가지 목소리를 낸다. 세 목소리를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히에로판테스인 그리스도, 그의 보조자들, 그리고 입문자로 나뉘어 있어서 이것이 입문식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입문자 "나는 구원 받으리라" 그리스도 "내가 구원하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든 자유를 얻으리라" 그리스도 "내가 자유를 주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못 박히리라" 그리스도 "내가 못 박으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태어나리라" 그리스도 "내가 태어나게 하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먹으리라" 그리스도 "내가 먹히리라" 보조자들 "아멘" 입문자 "나는 들으리라" 그리스도 "내 말이 들리리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바는 그대의 등불이니, 나를 들어 올려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나는 그대의 거울이니, 나를 보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나는 그대의 문어니, 나를 두드려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그대 여행자여! 나는 그대의 길이니라" 보조자들 "아멘" 그리스도 "이제 내 춤에 응답하라. 말하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을 보아라. 내가 하는 것을 그대가 보았거든, 내 비밀에 입을 다물어라" 은밀한 미스테리아 이교도 미스테리아에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오랫동안의 영적 준비와 순결 기간을 거친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만 공개되는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있었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초보자를 위한 작은 미스테리아와 더 고차원의 비밀 지식인 큰 미스테리아가 있었고, 후자는 완전한 '입문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참된 영지의 비밀 전통'은 '문자로써가 아니라 스승의 구전으로써 소수에게' 전수되었다.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갖는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이교도의 본을 받았다는 것을 오리게네스는 시인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 너머에 있는 교리, 대중에게 전수하지 않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만의 특성이 아니다. 모든 철학의 특성인 것이다. 이교도 철학자들도 공개적인 교리와 은밀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교도 입문자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입문자들도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이단자 사냥꾼 히폴리토스의 말에 따르면,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미스테리아를 큰소리로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처음 5년 동안 묵계를 지켰는데, 이교도 미스테리아 신앙 가운데 하나인 피타고라스 신앙의 입문자들도 그랬다. <위대한 로고스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들 미스테리아는 엄격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들을 만한 자가 아닌 자에게 발설하면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누이와 형제에게도, 어떤 친척에게도 발설하면 안되며 고기나 술을 얻기 위해, 여자나 금이나 은이나 세상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도 발설하면 안 된다.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꿈에서도 영혼이 순결해 본 적이 없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신성모독을 하는 자에게도 로고스의 미스테리아를 가르쳐 주면 안 된다. 또 다른 영지주의 현자는 이렇게 요구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인간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고, 모든 좋은 것들 위에 존재하는 하나the One(유일자)를 알고 싶다면, 장차 알게 될 미스테리아를 비밀에 부치겠다고 맹세하라. 맹세는 다음과 같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하나, 최고의 선을 두고 맹세한다. 이들 미스테리아를 비밀에 부치겠으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으며, 최고의 선에서 벗어나지 않겠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마가는 신약에 나오는 복음서 하나만 쓴 것이 아니라, 입문 수준에 따라 내용이 다른 세 가지 복음을 전했다. 신약의 마가복음은 믿음을 갖게 된 초보자에게 어울리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다른 복음서인 <마가의 비밀 복음서>는 완벽해지려는 자, 곧 '입문자'를 위한 것이다. 그노시스를 전하는 다른 한 가지 복음은 구전으로 전해졌다. 클레멘스에 따르면, 마가의 두 복음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씌어졌으며, 계속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 담긴 가르침은 워낙 비밀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클레멘스는 이 복음서가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부정해야 한다고 제자에게 충고했다. '모든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의 빛은 정신적으로 눈먼 자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맹세코'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는,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그노시스를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온갖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영적인 복음'인 이 책에서도 마가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폭로'하지 않았으며 '주님의 은밀한 가르침을 기술하지도 않았고, 다만 이미 씌어진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고, 나아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격언과 해석을 삽입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은밀한 성소로 인도하고자 했다'. 마가는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만 복음서 이상의 가르침, 곧 그노시스를 구전으로 전수했다. 이러한 최후의 복음은 너무나 신비해서 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일부 파편을 참조하면, 신약 내용 가운데 모호한 구절의 의미가 아주 명료해진다. 이 복음서에는 예수가 이미 죽은 한 젊은이를 살려 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학자들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려 낸 요한복음 1장 이야기의 초기 버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서 되살아난 젊은이는 즉각 입문식을 치른다---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 또한, 원래는 입문식의 비유였음을 시사한다.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은 입문식을 통한 영적 재생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자,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아주 이상한 말을 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요한복음 11:16) 죽은 나사로를 살리겠다는 예수를 도우러 가자고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한다! 이상야릇한 이 구절이 '입문식'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의미가 명료해진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속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나사로의 이야기도 원래 입문식을 비유한 거라면 도마의 해괴한 말이 명료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 듣게 한 말의 의미는, 가서 입문식을 치르자---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나자---는 것이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서, 입문식을 치르려는 젊은이는 나사로처럼 알몸에 베옷만 걸치고 예수에게 다가온다. 그날 밤 '예수는 하나님 왕국의 미스테리아(비밀)를 그에게 가르쳤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마가복음의 또 다른 이상한 사건도 이해할 수 있다. 예수가 배신을 당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는 순간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옷(linen cloth 혹은 linen sheet. 개역 <성서>에는 '베 홑이불'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만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옷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 (마가복음 14:50-52). 이상한 이 인물은 신약에서 딱 한 번, 이 대목에서만 등장한다. 수세기 동안 <성서> 독자들은 알몸의 이 청년이 도대체 누구이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마가의 비밀 복음서>는 이 청년이 입문식 후보자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믿음너머의 앎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테이토스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소신이란 어린이 장난감 같은 것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현자들은 단순한 믿음이나 소신을 멸시했다. 그들은 앎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주장했다.---믿음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는 반면, 앎은 이면의 실재를 꿰뚫어 본다고. 정신이 앎의 대상과 일체가 됨으로써 앎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이해의 최고 수준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러한 이교도의 가르침을 물려받아서 피스티스, 곧 믿음을 멸시하고 그노시스, 곧 앎을 중시했다. 그노시스는 확신을 갖지 않고 의심을 하는 사고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진리에 대한 앎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노시스는 즉각적이며 확연하고 전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맹목적 믿음의 가치를 찬양하며, 주교가 한 말을 의심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교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 스승들은,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치르면 입문자가 직접 그노시스를 체험하고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믿음이란 그노시스에 이르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었다. 영지주의 교사 헤라클레온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처음에 다른 사람의 증언을 믿음으로써 진리를 믿기 시작하지만,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클레멘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믿음은 초석이다. 그노시스는 그 위의 건축물이다. 믿음은 그노시스를 통해 완벽해진다. 안다는 것은 믿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노시스는 믿음을 통해 받아들인 것의 증거이다. 이교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교리가, 다만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진리 자체는 말과 개념을 뛰어넘으며, 스스로 그노시스를 체험함으로써만 발견될 수 있다. <빌립의 복음서>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말은 기만적일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정확한 것에서 부정확한 것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God' 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정확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것을 인식할 뿐이다. '성부', '성신', '성령', '삶', '빛' , '부활', '교회', 기타 모든 말 또한 그렇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정확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확한 것을 인식할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명령이 적혀 있다.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가 찾는 그노시스는 자신에 대한 앎Self-knowledge(자각)이었다. 영지주의의 <옹호자 도마의 책>에도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알게 된자는 동시에 모든 것의 심연에 자리잡은 그노시스를 이미 얻은 것이다. <진리의 증언>에서 예수는 한 사도에게 충고한다. '진리의 아버지'인 '자기 마음의 사도'가 되라고. 영지주의 현자 실바누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문을 두드리듯 너 자신을 두드리고, 곧은 길을 밟고 가듯 너 자신을 밟고 가라. 네가 그 길을 간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으리라. 네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스스로 그 문을 열어젖혀라. 그런데 자기 자신이란 무엇일까? 이교도 현자들은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할 낮은 수준의 자아인 에이돌론eidolon과 높은 수준의 자아인 불멸의 다이몬Daimon(Daimon은 고대 그리스어이다. 고대 로마어로는 Daemon으로 표기된다. 이것이 영어로는 demon, 곧 악마이다. 그리스어 Daimon의 사전적 의미는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이다. 초기에는 '신성한 힘, 신' 등의 뜻으로 쓰였고, 다음 본문에 나오듯이 나중에는 '수호천사', '수호령' 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악마나 악령이라는 뜻은 전혀 없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이 말이 악마나 악령, 혹은 이교도의 신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백과사전에도 이와 비슷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다만 '문자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옮긴이 주)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에이돌론은 육체적 자아이고 몸뚱이이며, 한 개인이다. 다이몬은 영혼이며 누구나 하나님과 영적으로 이어진 참된 자아이다. 에이돌론은 거짓 자아이며, 불멸의 다이몬이야말로 자신의 참된 정체성임을 입문자가 깨닫도록 돕는 것이 바로 미스테리아 의식이었다. 에이돌론의 관점에서는 다이몬이 한 개인의 수호천사로 보인다. 아직 에이돌론과 동일시되는 입문자는 다이몬을 자신의 참된 자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목적지로 자기를 인도하는 영적 안내자라고만 생각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가르쳤다. '사람soul에게서 가장 믿을 만한 부분은 수호 영혼임을 알아야 한다'. 수호 영혼은 하늘의 고향으로 우리를 들어올리시는 하나님이 부여한 것이다'. 영지주의 성자들은 미스테리아의 교리와 정확히 똑같은 것을 가르쳤다. 발렌티누스는 인간이 자신의 수호천사로부터 그노시스를 받지만, 이 천사는 사실상 자신의 수준 높은 자아라고 풀이했다. 수천 년 동안 고대 이집트에서는 다이몬을 에이돌론의 거룩한 쌍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에서도 발견된다. 영지주의 현자인 마니는 4세부터 수호천사를 의식했으며, 12세에는 그것이 거룩한 쌍둥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나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한, 또 다른 모습'이라고 불렀다. <요한 행전>에서 요한은 예수가 이따금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쌍둥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주님의 모는 사도가 게네사렛의 한 집에 잠들어 있을 때, 나 홀로 잠들지 않고 주님이 무엇을 하는지 몰래 지켜보았다. 먼저 나는 주님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요한, 너는 가서 자거라.' 그래서 나는 거짓으로 잠든 체했다. 나는 주님과 닮은 자가 주님께 다가가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예수여, 그대가 선택한 자들이 아직도 그대를 믿지 않는가?' 그러자 주님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도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피스티스 소피아>에서는 처음으로 거룩한 쌍둥이와 만난 아기예수에 대한 매력적인 신화를 언급한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회상한다. 어렸을 때 네가 요셉과 함께 포도밭에 있을 때, 성령이 아직 너에게는 임하지 않았을 때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집 안에 있던 내게 왔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너와 똑같았기에, 나는 그가 너인 줄 알았다. 그가 내게 말했다. '나의 형제 예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마리아는 예수에게 말한다. 예수의 거룩한 쌍둥이가 마침내 예수를 발견했을 때 그가 너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너 또한 그에게 입을 맞추었고, 너희는 하나이자 동일한 존재가 되었다'고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입문식의 목표는 수준 낮은 자아가 수준 높은 자아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는 '하늘에 속한 것도 아니고 땅에 속한 것도 아니며, 수호천사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믿는다고 이레나이우스는 기술했다.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인 발렌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인간적 자아와 신적 '나' 가 서로 연결될 때, 그들은 완벽한 영원성을 얻을 수 있다. 보편적 다이몬 '자각'을 추구함으로써 이교도와 영지주의 입문자는 경이로운 발견 여행을 떠나게 된다. 처음에 입문자들은 스스로를 에이돌론---육체를 가진 개인---으로 여기며 다이몬을 수호천사, 곧 거룩한 쌍둥이로 여긴다. 입문자는 더욱 성숙함에 따라 다이몬이 수준 높은 자아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 완벽한 자각, 곧 그노시스를 체험한 축복 받은 자에게도 다이몬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 여겨진다. 발렌티누스가 말했듯이, 이때의 다이몬은 진실로 '신성한 나' 이다.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다이몬, 곧 수준 높은 자아를 지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깨달음을 얻은 입문자는 만물에 내재한 하나의 다이몬---보편적 자아--- 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만물에는 하나인 보편적 자아가 깃들여 있다. 각 영혼은 하나인 하나님의 영혼의 일부이다. 따라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가르침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종교와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에 모두 나타난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다(I am Thou, and Thouart I)'라는 고대 이교도 현자의 가르침은 영지주의 문서인 <피스티스 소피아>에도 나타난다. 신약의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요한복음 6:56). 이교도 현자 섹스토스는 이렇게 썼다. '네가 너를 만드신 그분을 알게 되면 너는 너 자신을 알게 되리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철학자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큰 자는 자신을 아는 자이다. 인간이 자신을 알 때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교 입문자에게 '하나님이 되는 연습'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참된 영지주의자는 '이미 하나님이 된 자'라고 가르쳤다(클레멘스의 <파이다고구스>3장 1절 : 저자 주). 영지주의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통해 물려받은 신비한 가르침 가운데, 영지주의 현자 모노이모스의 이런 가르침이 있다. 자기 자신 안에서 그분을 찾아라. 그대 안에 지닌 모든 것,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영혼spirit, 나의 앎, 나의 사람됨soul, 나의 몸뚱이'에 대해 배워라. 그리고 슬픔과 기쁨, 사랑과 미움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발견하라. 원치 않아도 잠에서 깨어나고, 원치 않아도 잠이 들고, 원치 않아도 화가 나고, 원치 않아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어디서 비롯하는 것인지 깨닫도록 하라. 그대가 그 모든 것을 관조하면, 그대 안에서 그분을 발견할 것이다. 영지주의자Gnostic는 '아는 자'라는 뜻이지만, 영지주의자가 아는 것은 단편적인 영적 정보가 아니다. 영지주의자가 한 가지를 알게 되면 다른 모든 것---아는 자, 체험하는 자, 수준 높은 자아, 신적인 '나', 다이몬---을 저절로 알게 된다. 참된 영지주의자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계몽된 입문자처럼 다이몬이, 사실상 보편적 영혼---우리 모두에게 깃들여 있는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각을 얻은 이교도와 영지주의 현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마침내 알게 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는 오직 신God만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환생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는, 한 영혼이 여러 생애를 살며 그노시스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믿었다. 이교도 입문자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에 따르면, 계몽되지 않은 영혼은 습관의 힘 때문에 거듭해서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영혼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영혼이 육체를 입는 것은 새가 새장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영혼이 육체 속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이번 생에 길들게 되면, 일종의 인연involvements과 오랜 습성 때문에 거듭해서 다시 태어나 육체로 돌아오게 되고, 세속적 욕망과 인연을 끊어 버리지도 떨쳐 버리지도 못하게 된다. 주류 그리스도교는 이교도의 이러한 관념을 배척했지만, 초기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관념을 받아들였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는 그노시스가 수많은 환생을 하며 노력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요한의 비밀서>에서는 한 영혼이 계속해서 환생한다고 가르친다. '영혼의 무지에서 벗어나, 그노시스를 얻어 온전해질 때' 비로소 환생을 멈추고 '더 이상 다른 육체에 들어가지 않는다'. <피스티스 소피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영혼은 수많은 생애를 거치며 모든 미스테리아를 이해할 때 비로소 빛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번 생애에서 영적 여행을 하며 성취를 이루면, 다음에 환생할 때에는 '진리의 신과 수준 높은 미스테리아를 발견할 수 있는 올바른 육체'를 얻게 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죽은 자가 '기억의 샘물'을 마시고 오른쪽 길로 가면 하늘에 이르고, '망각의 잔'을 마시고 왼쪽 길로 가게 되면 환생하게 된다. 영지주의의 <구원자의 책>에도 같은 교리가 담겨있다. 즉, 올바르게 산사람은 이번 생에서 배운 지혜를 잊지 않고 환생하게 된다. 환생하기 전에 '망각의 잔'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산 사람은 환생하기 전에 '망각의 잔 대신 '직관과 지혜의 잔'을 받는다. 그 잔 덕분에 올바르게 산사람의 영혼은 잠들거나 망각하지 않게 되고, '빛의 미스테리아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 영적 여행을 하게 된다 . 플라톤은 환생할 때 필요한 인간의 몸뚱이를 일종의 감옥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의 <요한의 비밀서>에서도 환생이 '차꼬(족쇄)를 차는 것' 이라고 가르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영혼은 죄 값을 다 치를 때까지 벌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환생이 일종의 형벌이라고 가르쳤다. 죄의 비중에 따라 영혼은 여러 유형의 육체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혼은 순결해질 때까지 거듭해서 '형벌을 위한 여러 몸뚱이에 봉인'된다. 그래서 영혼이 '원래의 순결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완전히 몸뚱이와 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의롭고 동정적인 하나님이 어떤 인간에게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내린다고는 차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환생을 되풀이함으로써 궁극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영혼이 태초부터 존재했다. 따라서 영혼은 이미 여러 세상을 거쳤으며, 최종 완성에 이를 때까지 또 다른 여러 세상들을 거치게 될 것이다. 영혼은 지난번 생애에서의 승리로 강화되거나 패배로 약화된 채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오리게네스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장 권위가 있던 인물이었지만, 사후에는 가톨릭 교회의 이단자로 몰렸다. 위와 같은 고대의 교리를 가르쳤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위와 같은 사상이 신약에도 담겨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의 환생이냐'고 묻는다(요한복음 1:21). 또 마가복음(8:27-28)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세례 요한의 환생인지, 선지자 엘리야의 환생인지, 다른 선지자 가운데 하나의 환생인지를 논의한다! ( '논의한다discuss'는 것은 다소 비약이지만, 여백 읽기를 통해 충분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예수를 누군가의 환생으로 보았고 예수도 그것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그 시대에 환생 사상이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성서>에서 직설적으로 '환생' 이라는 낱말을 쓰지는 않았다 : 옮긴이 주) 남녀평등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식은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디오니소스를 가장 중심으로 섬긴 사제는 여성들이었다.---그들은 마이나스maenas라고 불렸다. 이탈리아 지방에서는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전적으로 여성이 주관했다. 옛 그리스의 올림포스 신들 숭배 하에서는 여성이 가사만 돌보며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했지만, 디오니소스 의식의 도래와 더불어 여성은 고삐가 풀리게 되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종교에서는 유명한 여사제와 여자 예언자가 수없이 많았다. 레스보스 섬의 위대한 시인 사포와 그녀의 자매들은 아도니스 미스테리아의 여사제였다.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를 가르쳤다는 전설적인 여사제(무녀)이다. 고대세계의 유력한 정치가와 유명 철학자들은 델피의 아폴론 신전 여사제인 피토네스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놀라운 업적을 이른 이교도 여성들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유명한 여성 시인과 화가는 물론이고,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여성 철학자 1명과 플라톤과 동문 수학한 두 여성 철학자를 비롯해서 아리그노테, 테미스토등의 여성 철학자들을 언급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존중한 것으로 유명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문헌에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아리스톡세누스의 말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테미스토클리아라고 불린 델피의 여사제에게서 윤리적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크로톤의 여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타고라스는 '여성은 선천적으로 신앙심이 더 깊다'고 언명했다.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쓰는 일을 맡긴 것도 여성인 그의 딸 다모였다. 그의 여성 제자인 아리그노테는 <디오니소스 의식>등의 철학서를 집필했다. 이교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 또한 여성을 존중했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여겼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여성들과 공개적으로 얘기를 나눔으로써 유대 전통을 어긴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예수의 가까운 수행자 가운데 항상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처음 발견한 것도 여성들 이었다. 클레멘스는 겸손이라는 용어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된다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 따로 있지 않다'.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여성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구원자의 대화>에서 마리아는 '완전히 깨달은 여성'이며 예수와 특히 가까운 사이로 그려져 있다. 현명한 막달라 마리아는 어리석은 여성 혐오자인 베드로와 자주 다툰 것으로 그려진다. <피스티스 소피아>에서 베드로는 마리아가 예수와의 대화를 독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우선권과 다른 남성 사도들의 우선권을 빼앗는다고 투덜거린다. 그는 예수에게 그녀가 입 좀 다물게 해 달라고 탄원하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에게 화를 낸다. 나중에 마리아는 감히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다고 예수에게 말한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내 말을 막았고, 나는 그가 두려웠으며, 그가 여자 족속을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남자든 여자든, 성령이 임한자는 말을 하라는 신성한 명을 받은 것이라고. 이레나이우스는 여성들이 특히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에 매료되는 것에 분개했다. 영지주의자들 가운데 영적 권능을 지닌 여성 리더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에 문자주의자들의 교회에서는 여성이 이류급의 인간 취급을 받았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 현자 마르쿠스가 여성들에게 영성체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 역을 맡겼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한편 테르툴리아누스는 권위를 지닌 '이단자들 속의 여성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그들이 남자를 가르치고, 토론에 참여하고, 귀신을 몰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그는 여성들이 주교처럼 행동하며 세례를 베풀기까지 하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글을 남겼다! 자연 도덕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에서,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를 '숭배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법도 지키지 않도록 하는 신'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모독하려고 했다. 그러자 디오니소스가 답했다. '그러한 너의 모독이 디오니소스에게는 찬사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는 흔히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노시스를 체험한 사람에게 전통적인 도덕 개념은 하찮은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미스테리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적 자유였지, 도덕적 예속이 아니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또 '선하거나 악한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인습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비난했다. 또,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영적 자유가 사실은 방탕하게 살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모든 세속의 권능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두려워할 자가 없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심판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신비한 의식을 통해 참하나님인 예수를 체험함으로써 영지주의자들은 전제적인 여호와가 유대인에게 부과한 온갖 계율과 여호와의 권능으로부터 '해방', 혹은 '방면' 되었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 입문식 과정에서 입문자는 거짓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영지주의 현자 시몬 마구스의 말에 따르면, 여호와의 권능에서 벗어나 참된 아버지Father를 알게 된 입문자들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현대의 권위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바실리데스와 그의 후계자 발렌티누스, 이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들은 엄격한 무도덕성amorality(도덕적이지도 않고 비도덕적이지도 않은 것)을 좋아했다. 유일한 계율은 계율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수 입문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선호했는데, 그의 성향이 금욕적이라면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지없이 방탕하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의 현자들이건 영지주의자들이건 간에 비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밖에서 부과된 윤리적 계율보다 더 심오한 영적 깨달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성한 본성과 교섭하는 인간이라면 직관적, 자발적으로 총체적인 삶과 조화를 이루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는 '영적'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천성적'으로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덕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그노시스에 이르는 정화 과정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일단 그노시스에 이르게 되면, 입문자가 자연스럽게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윤리 규범도 불필요해진다는 것이다---올바른 행동이 반드시 전통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클레멘스는 이렇게 썼다. 영속적인 조화의 상태에 이른 자에게는 외부적 규범의 준수가 더 이상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으며, 더 이상 욕망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명상하며 쉰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다함이 없는 축복이며 영원한 축복일 것이다. 따라서 그노시스를 지닌 자의 모든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다. 그노시스를 지니지 못한 자의 행동은 그릇된 행동이다.---그가 규범을 준수하더라도 결론 영지주의자들은 로마 교회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과는 현저하게 다른 초기 그리스도교의 실상을 전해 준다. 우리는 예수의 전기와 신약의 가르침이 고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화와 가르침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지주의에서 우리는 다른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에서는 그 요소들---그노시스의 추구, 여신의 역할, 여성의 중요성, 다이몬/에이돌론 교리 등---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요소들은 물론 미스테리아의 핵심을 이룬 것이기도 했다.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와 이교도 미스테리아 종교 사이의 주목할 만한 유사성 일부를 되짚어 보자.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이교도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 철학을 가르쳤고, 예수와 더불어 이교도 철학자들도 존경했으며, 자신들의 모임에 이교도를 초대했고, 심지어 이교도 미스테리아에 입문하기까지 했다. 영지주의 문헌에는 이교도의 신화적 주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영지주의자들은 그런 주제를 통해 보편적인 철학을 통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여러 모습을 지닌 아티스', 곧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예수를 동일시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소피아라는 여성 신을 숭배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현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은 정통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인동형동성설을 비판했다. 그들은 유대인의 신 여호와를 거짓 신으로 간주했고, 예수는 여호와의 아들이 아니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 하나인 하나님은 플라톤과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최고선과 동일시되었다 영지주의자에게 예수는, 춤과 노래를 통해 사도들을 미스테리아에 입문시키는 이교도의 히에로판테스와 닮은 존재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초보자를 위한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입문자를 위한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지니고 있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입문자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마가는 신약에 나오는 복음서 하나만 쓴 것이 아니라 입문 수준에 따라 내용이 다른 세 가지 복음을 가르쳤다. 신약의 마가복음은 '초보자'를 위해 쓴 것이다. 다른 복음서인 <마가의 비밀 복음서>는 온전해지려는 자, 곧 '입문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노시스를 전하는 다른 한 가지 복음은 구전으로 전해졌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의 목표는 그노시스 곧 '앎'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노시스는 단순한, 혹은 맹목적인 믿음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방편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쳤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다이몬(수준 높은 자아)과 에이돌론(수준 낮은 자아)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처럼 영지주의자들은 다이몬이 일단 수호천사로 나타나며, 그 후 입문자 자신의 수준 높은 자아로 체험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만물에 깃들여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된다고 가르쳤다. 이교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환생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처럼, 영지주의에서도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교도와 영지주의 현자들은 모두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들은 신비한 자연 도덕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와 같은 압도적인 증거에 맞닥뜨린 우리 두 사람에게는, 영지주의 그리스도교가 분명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각색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찾고 있던 단서일까? 영지주의가 원래의 그리스도교일 수 있을까? 죽었다가 부활한 미스테리아 신인의 신화를 유대인식(式)으로 각색한 예수 이야기를 밑바탕으로 삼은 이교도 미스테리아가 그리스도교로 발전한 것일까? 그것이 사실이라고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정확히 예수 이야기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정밀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은 문자주의자들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실존 인물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예수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다만 신화적 비유의 주인공이었을까? 6장 예수라는 암호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예수(누가복음 8:10) 이교도 현자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바뀌거나 각색되면 안 되는 역사적 사실로 여기지 않았다---다른 신화와 합성될 수 있고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는 비유로 간주했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도 복음서를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창조적으로 발전시키고 더 다듬어서 표현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암호화한 비유적 문학 작품으로 보았다. 실제로 영지주의 입문자들은 그들이 받아들인 가르침과 신화를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대로 단지 앵무새처럼 되뇌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노시스를 체험했다는 것을 독창적으로 입증해 보일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힐난했다. 그들은 너나없이 물려받은 전통을 자기 기질에 맞게 뜯어고친다. 제멋대로 뜯어고쳐 놓고는 선대에 이미 뜯어고쳐진 전통을 물려받은 것처럼 군다. 마찬가지로 이레나이우스도 경악해서 이렇게 힐난했다. 그들은 모두가 매일같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엄청난 허구를 꾸며 내지 않으면 입문한 자, 곧 성숙한 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하나Living One'와 개인적으로 직접 만남으로써 영적 창조성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오로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차적 증언이나 전통 이전에 개인적 체험이 더 중시되었다. 신화적 비유 이교도 입문자들은 은밀한 미스테리아 의식을 치를 때 공개적 미스테리아 신화의 비유적 의미를 전수 받았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도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가르쳤으며, 그때 그노시스를 전수했다---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는 단지 사전 준비일 뿐이었다. 문자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에 어떤 은밀한 가르침이 있다는 생각자체를 비난하자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예를 들었다. 예수 또한 대중에게는 비유로 얘기했고, 가장 가까운 사도들에게만 그 비유의 참뜻을 가르쳤던 것이다. 예컨대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춘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마가복음 4:22-23. 4:33-34). (요한복음 16:12와 16:25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더욱 명료하게 말하겠다고 약속한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 저자 주) 신비한 가르침이 신화적 이야기로 암호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인 필론은 비유가 '그리스 미스테리아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교도 철학자 데메트리오스는 이렇게 썼다. '명명백백한 것은 벌거벗은 사람처럼 멸시당하기 쉽다. 그래서 미스테리아 또한 비유의 형태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마크로비오스는 이렇게 설명 했다. 대자연Nature은 평범하게 알몸으로 노출되는 것을 싫어한다. 대자연은 자신의 비밀이 신화로 씌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미스테리아 자체는 비유적 표현의 암굴 속에 숨겨진다. 입문자들에게도 참모습이 알몸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소수만이 지혜를 갖춘 해석을 통해 참된 비밀을 알 수 있고, 나머지는 미스테리아를 숭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미스테리아는 진부하지 않은 비유적 표현으로 보호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성한 문서에 대한 이교도의 이런 비유적 접근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영지주의의 <빌립의 복음서>는 마크로비오스와 똑같은 교리를 가르친다. '진리는 알몸이 아니라 비유의 이미지로 세상에 나타났다. 다른 방식으로는 진리를 접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달리 문자주의자들은 <성서>를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였다. 이교도 풍자가 켈수스는 그처럼 천진난만한 사고방식에 놀라워하며, <성서>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이렇게 꼬집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을 위해 만든 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한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노릇이지만, 그 세계가 창조된 방식은 더욱 어리석다. 그들은 창조의 날들을 할당한다. 하늘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땅이 정해지지도 않았으며, 하늘에는 태양도 달도 별도 없는데 어떻게 날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더없이 위대한 하나님이 벽돌공처럼 '오늘은 이런 일을 하고, 내일은 저런 일을 하겠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또 이런 일, 넷째 날에는 저런 일, 다섯째와 여섯째 날에는 또 어떤 일을 하는 등 자기 일을 나누어 처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지 아니한가! 그런 하나님이라면 보통의 일꾼처럼 지쳐서 여섯째 날 후에 쉬는 날이 필요하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을 것이다. 휴식이 필요한 하나님, 두 손으로 일하는 하나님, 막노동 십장처럼 지시를 내리는 하나님의 행동은 도무지 하나님답지 않다고 촌평할 거리도 못 된다. 켈수스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가 피상적이며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평했다. 오리게네스는 그런 이야기가 명백한 비유인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오늘날에도 수많은 근본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을 알면 그는 분명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늘이 없는데 첫째 날이 있고, 해도 달도 별도 없는데 낮과 밤을 명명하고,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을 운운한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수긍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농부처럼 여러 나무를 심었다고,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백치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러한 것들을 누구나 마땅히 비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오리게네스는 <성서>가 신화적 비유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름다운 전통'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예수 이야기에 암호화된 감춰진 의미를 밝혀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성서> 이야기는 실제 사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건들처럼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서 비밀을 드러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리게네스는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문자 그대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실제 사건처럼 기록된' '그런 구절이 복음서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 거라고 썼다.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예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마귀가 또 예수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한다(마태복음4:8-9). 오리게네스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실제로 천하 만국을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으냐고 지적하며, 그것을 비유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복음서 안에서 그런 구절을 수천 가지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클레멘스도 '뒤얽힌 말들의 문맥과 수수께끼의 답'을 이해함으로써 <성서>의 비유적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지주의자야말로 참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입문자가 그노시스를 체험함으로써 완벽한 진리를 파악하게 된다고 가르쳤다---그럴 때 비로소 <성서>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불 수 있지만, '믿는 자'는 그저 겉만 핥게 된다고. 이러한 맥락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해석하지 않고, 심오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영적 비유로 해석했다. <베드로의 여행>이라고 불리는 한 문헌에서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이면에 숨겨진 비유적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내가 매달린 수직의 줄기는 로고스를 상징한다. 십자가의 수평 가지는, 최초의 인간이 있을 때 잘못된 변화를 겪었다가 하나님이자 인간인 자의 도움으로 다시 회복한 인간성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중앙에서 둘을 하나로 결합하고 있는 못은 고행과 귀의와 참회를 상징한다. 신성한 수학 오늘날 이교도 미스테리아 신화와 예수 이야기의 암호를 풀고자 할 때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암호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선배 피타고라스 학파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상징과 비유는 물론이고, 수와 수학 공식까지 동원해서 신비한 가르침을 암호화했다. 이교도 현자들은 수학과 기하학이 하나님의 마음의 작용을 드러낼 수 있는 신성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는 수를 '불멸의 신들' 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입구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 문자주의자인 히폴리토스는 영지주의자들을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제자들' 이라고 일컬으며, 그들이 '산수 같은 학문'을 '그들 교리의 근본 원리'로 받아들인다고 비난했다. 사실 클레멘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음악적 화음의 밑바탕에 수학 법칙으로 표현될 수 있는 비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비율을 <성서> 해석에까지 적용시키려고 했다. 영지주의 현자 모도이모스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신성한 수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들은 일곱 구(球)로 나뉜 하늘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일곱 구는 입문자가 차례로 올라가야 할 신비한 단계를 상징했는데, 이것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 발견되는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다. 학자들은 <피스티스 소피아> 문서와 <이에오우의 책> 같은 영지주의 복음서가 무의미한 것을 신비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수 상징주의의 세련된 형태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상징주의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가 게마트리아gematria이다. 게마트리아는 각 알파벳이 나타내는 숫자를 이용해서 그 단어가 지닌 뜻을 풀어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알파벳 각 문자는 하나의 수를 나타냈다. 그래서 각 낱말은 수치로 치환될 수 있어서, 낱말을 숫자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신들의 이름은 문자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수치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이교도 신인의 이름인 미트라스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수치는 360이다. 그래서 미트라스라는 낱말은 경우에 따라 한 해의 날 수를 의미했다. 여러 고대 작가들은 좀더 정확한 태양력을 의식해서, 그 이름의 수치를 365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여분의 문자를 덧붙이기도 했는데 제롬이 지적했듯 미트라스는, 수치로 보아도 태양신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영지주의자들도 게마트리아를 채택했다. 이교도 신인 미트라스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의 태양신 격인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은 365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게마트리아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수라는 이름 자체이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Jesus라고 번역하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이에소우스Iesous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에소우스라는 말을 여전히 사용했는데, 이 낱말은 '모든 이름 위의 이름' 이라는 뜻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낱말이 이교도의 신격보다 더 마법적인 효험을 지녔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이름)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이니 666이니라'(요한 계시록 13:18). 이처럼 '짐승' 이라는 낱말의 수치가 666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예수'의 수치가 무엇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마트리아에 의하면, 그리스어 이름 이에소우스(예수)는 888을 나타낸다. lESOUS 10 + 8 + 200 + 70 + 400 + 200 =888 888이라는 수는 고대인들에게 신성하고 마법적인 수였다. 또 피타고라스 학파가 신성시한 음악적 화성에서, 666은 완전 5도 음정의 비율인 반면 888은 모든 음정의 비율이다. 예수의 이름이 888이라는 사실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 이름 이에소우스는 헤브라이어 이름 '여호수아'를 자의적으로 번역한 것이다---복음서 저자들이 888 이라는 상징적인 수치를 갖도록 만들어 낸 것이다. 문자주의자들도 예수의 이름이 수 상징주의에 따라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렇게 썼다. 부름 받은 자에게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이에소우스는 산술적으로 상징적인 이름이다. 예수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이름들도 게마트리아를 사용해서 수로 번역하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는 사도인 시몬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준다(요한복음 1:42). '반석(혹은 바위)'을 뜻하는 '게바Adpas' 가 그리스어로는 '베드로Peter'로 번역된다. 베드로를 게마트리아로 계산하면 729가 된다. 729는 이교도에게 중요한 수였다. 델피 신전의 사제였던 플루타르코스는 729가 태양의 수이며, 한 해의 날과 밤을 나타내는 수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729가 '인생이 날과 밤, 해와 달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인생과 가장 관련이 깊은 수'라고 말했다. 학자들은 예수가 사도들로 하여금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는 신약의 이야기가 수학적 수수께끼라는 것을 알아 냈다. 153은 '근원적이며 의미 깊은 기하학적 도형'을 나타낸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기적 이야기는 신성한 수학의 구루였던 피타고라스가 행한 유사한 기적을 토대로 삼고 있다. 이들 두 기적 이야기는 신성한 수학 공식을 암호화한 것으로, 입문자들은 이 수가 은밀한 가르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5병2어로 5천 명을 먹이고 7병2어로 4천 명을 먹였다는 신약의 이야기도 신비한 기하학적 도형과 관계가 있다. 마가복음에는 그것이 명백하게 암시되어 있다. 그러한 기적을 통해 예수는 제자들에게 분명 신비한 수학적 수수께끼를 제시했는데도 그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도 못하느냐! 내가 떡 5개를 5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7개를 4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마가복음8:19-21) 그때 깨닫지 못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인들 또한 지난 2천 년 동안 이 사건을 문자 그대로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일 뿐 이 사건이 사실은 섬세하게 꾸며 낸 신화적 비유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영지주의자들의 은밀한 미스테리아 교리를 말살함으로써 여러 비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잃어버린 탓에, 우리는 예수 이야기 속의 심오한 비유의 뜻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이몬 예수 영지주의자들에게 신인(神人) 예수는 불멸의 자아, 곧 다이몬을 상징했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흔히 예수의 '쌍둥이 형제' 도마는 환생한 자아인 에이돌론을 상징했다. <옹호자 도마의 책>에서 예수(다이몬)는 그의 제자이자 쌍둥이 형제인 도마(에이돌론)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나의 형제 도마여, 네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하면 네가 마음에 든 것들을 너에게 나타내 보이리라. 너는 나의 쌍둥이이며 참된 동반자라고 전해져 왔으니, 너 자신을 살펴서 네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서 어떤 자가 될 것인지를 배워라. 너는 나의 형제라 불릴 것이니, 네가 너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나는 네가 이미 이해했음을 안다. 너는 내가 진리의 앎 자체라는 것을 이미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나를 따르는 동안, 비록 네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상 너는 이미 앎에 이르렀으니, 너는 '자신을 아는 자'라 불릴 것이다. 예수와 모든 점에서 닮은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전설이었다. 이런 전설은 문자주의자들에 큰 고민 거리를 안겨 주었다. 예수의 쌍둥이 형제가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예수가 죽었다가 문자 그대로 부활했다는 그들의 주장과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전설이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의 부활과 관련한 정통 교의의 기초를 뒤흔들 게 분명한데도, 그러한 전설을 만들어 낼 만큼 어리석은 그리스도교인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답은 자명하다. 영지주의자들이 고대의 다이몬/에이돌론 교리의 비유로서 예수의 쌍둥이 형제 전설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도마의 복음서>의 사람은 디디모스 유다 도마이다. 아람어 (Aram語 : 고대 오리엔트의 시리아·팔레스티나 등지에서 쓰이던 여러 언어를 두루 이름) 이름인 도마와 그리스어 이름인 디디모스는 둘 다 '쌍둥이'를 뜻한다. 따라서 이 복음서 저자의 이름은 '쌍둥이 유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래의 예수 이야기에서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곧 다이몬을 배반한 에이돌론을 상징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신약에는 다이몬/에이돌론 교리가 암호화된 또 다른 언급이 있다. 마태복음(27:17)에서 빌라도 총독은 두 사람 가운데 1명을 풀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두 사람은 곧 두 예수---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바라바---를 암호화한 것이다. 한 예수는 살해당한 무죄한 인간이고, 다른 예수는 풀려난 살인자이다. 두 예수는 수주 높은 자아와 수준 낮은 자아를 상징한다. 환상설 이교도의 다이몬/에이돌론 교리는 '도케티즘'으로 알려진, 곤혹스러운 영지주의 가르침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살과 피로 된 육체를 지닌 게 아니라,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았지만 마법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처럼 보였다고 믿는 것이 도케티즘이라고 반영지주의자들은 설명한다(백과사전에도 그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어서, 영지주의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도케티즘Docetism'은 '~인 듯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dokein' 에서 나온 말인데, 영어로는 'Illusionism' 으로 번역된다. 우리말로는 대개 가현설(假現說)'로 번역되고 있지만, 그것은 문자주의 관점에서 번역된 말이다. 영지주의 관점에 따르면 '환상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옮긴이 주) 도케티즘을 믿는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아예 역사적 사건으로 보질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두 부분, 즉 고통을 받다가 죽는 세속적 부분(에이돌론)과, 고통에 초연한 채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환상으로 체험하는 영원한 영적 목격자(다이몬)로 이루어져 있다는 신비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신화로 본다. <빌립에게 보낸 베드로의 편지>를 보면, 예수는 환생한 순간부터 고통을 겪지만, '고통의 국외자'로서 고통을 겪는다. 예수로 상징되는, 환생한 수준 높은 자아는 에이돌론이 고통을 겪을 때 함께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초연한 목격자인 것이다. <요한행전>에서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너는 내가 고통을 겪는다고 들었으나, 나는 고통을 겪지 않았다. 나는 고통을 겪지 않는 자였지만, 고통을 겪었다. 나는 못 박힌 자였으나,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 나는 매달린 자였으나, 매달리지 않았다. 내게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예수는 어떻게 고통을 겪는 동시에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가 설명하듯이 '나는 인간과 나 자신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그는 초월적인 수준 높은 자아, 곧 다이몬과 동일시되는 존재이며 고통을 겪는 수준 낮은 자아인 에이돌론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영지주의 입문식의 목적은 입문자를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입문자는 물질적 십자가에 매달린 에이돌론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환상으로서 삶을 목격하는 다이몬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영지주의자 예수는 이렇게 가르친다. 네가 어떻게 고통을 겪는지 안다면, 너는 고통을 겪지 않게 되리라. 고통을 꿰뚫어 보라 그리하면 너는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그래서 예수의 에이돌론은 고통을 겪고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예수, 곧 다이몬은 고통을 겪지도 죽지도 않는다. 500년 앞서서 에우리피데스는 펜테우스 왕이 디오니소스를 결박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결박하지 못한 것으로 그렸다.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를 우롱했다. 그는 나를 결박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붙잡지도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랬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베드로 계시록>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두 손과 발에 못 박혀 '기뻐하며 웃는' 예수를 본다.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너는 나무에 매달려 기뻐하며 웃는자를 보느니, 그는 실아 있는 예수니라. 그러나 저들이 못을 박은 두 손과 발을 지닌 이 자는 그의 육체적 부분이니, 이 자는 수치를 당하는 대리적 존재이며, 모습이 닮은 자이니라. 그와 나를 보라. 일부 이교도 신화에서도 에이돌론을 상징하는 대리 인물이 고통을 겪다가 죽는다. 신인은 고통을 겪지도 죽지도 않는다. <바카이>에서 '고통당하는 인간'을 뜻하는 펜테우스 왕은 디오니소스 대신 나무에 매달려 사지가 찢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 영지주의 신화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은 구레네Cycrene(키레네 : 북아프리카 리비아 동부 지역) 사람 시몬이다. 예수는 멀리서 웃으며 지켜본다. <위대한 세트 신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은 또 다른 시몬 이었다. 가시 면류관을 쓴자는 또 다른 자였다. 나는 높은 곳에서 다만 기뻐하며 그들의 무지를 비웃었다. 구레네의 시몬은 이교도 신화 속의 펜테우스 왕처럼 고통을 겪다가 죽는 에이돌론을 상징한다. 웃고 있는 예수라는 인물은 승리를 거둔 디오니소스와 같은 다이몬(목격하는 영혼)을 상징한다. 영지주의 현자 바실리데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는 영혼이기에 고통을 겪지 않았다'. 구레네의 시몬이 대신 고통을 겪는 동안 예수는 웃었다. '그는 누구에게 붙잡힐 수도, 보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마법을 써서 고통을 피했다고도 믿지 않았다. 혹은 좀더 사악한 마법을 써서, 구레네의 시몬을 자기 모습으로 둔갑시켜 시몬이 자기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동안 멀찍이 안전한 곳에서 웃고 서 있었다고도 믿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러한 교리는 문자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혐오스러울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그런 주장은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잘못 안 것이다---아니,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사실상 도케티즘, 곧 '환상설'에 따르면, 십자가 처형 이야기는 다만 고대 이교도의 다이몬/에이돌론 교리가 암호화되어 있는 입문식의 비유일 뿐이다. 신약의 마가복음(15:21)에는 이러한 가르침의 파편이 살아남아 있다.---난데없이 구레네의 시몬이 끌려 나와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다. 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시몬 '베드로', 곧 '반석' 이라고 불린 제자와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몬 베드로는 여러 영지주의 신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때의 시몬은 에이돌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영지주의 교리의 메아리는 무슬림의 <코란>에도 살아남아 있다. <코란>에서는 예수의 가상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으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다. 그들을 위한 하나의 비유로 그런 얘기가 만들어진 것이다(수라 4:156-7) 영적 부활 이교도 현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할 존재인 에이돌론과 불멸의 다이몬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에이돌론이라는 개인적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죽어서는 다이몬이라는 영원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미스테리아 입문식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방법이었다. 에이돌론의 신비한 죽음을 겪음으로써 입문자는 다이몬으로 재생하게 된다. 영지주의자들도 이와 똑같은 미스테리아 교리를 가르쳤다. 영지주의 현자 레기노스의 익명의 스승이 가르친 바에 따르면, 보통의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필요가 있다. 엘레우시스에서의 웅장한 미스테리아 의식 행렬에 참가한 이교도 입문자들은 은유적으로 디오니소스와 더불어 수난을 당하고 영적으로 재생했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미스테리아 의식의 입문자들도 비유적으로 신인 예수와 더불어 고통과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레기노스의 스승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고통을 겪고, 그와 더불어 일어서며, 그와 더불어 하늘로 올라갔다. 비유적으로 예수와 더불어 수난을 겪고 자신의 신비한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입문자들은 요한복음의 예수와 더불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한복음 10:17-18).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의 믿음은 역사적으로 실존한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되살아났다는 가상의 기적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또 그런 기적이 '심판의 날'에 자신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할 거라는 증거라고 여긴다. 이와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문자 그대로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을 '바보들의 믿음' 이라고 일컬었다. 그 부활은 과거에 어떤 특정인에게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고, 미래의 어떤 계시 후 시체가 되살아날 거라는 약속도 아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바로 '지금 이자리'에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인 다이몬을 인식하기만 하면 누구나 신비한 부활을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자주의자들은 개인적 부활의 체험을 아득한 훗날에나 가능한 소망으로 여겼고, 그리스도 재림 후에 육체적으로 불멸성을 얻게 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빌립의 복음서>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비웃으며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부활'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죽은 다음에 부활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부활은 단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의 드러남'이었다. 따라서 '볼 눈'을 가진 입문자에게는 이러한 부활이 '이미 일어난 것'이었다. 부활은 미래의 사건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부활이란 지금 이 순간 실재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입문자의 정체성은 입문식 과정을 통해 다이몬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입문자는 처음부터 항상 다이몬이었다. 사실상 부활은 다만 인식의 변화인 것이다. 레기노스의 스승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미 너는 부활했다 너 자신이 이미 부활했음을 깨닫도록 하라. 너---참된 너---는 타락한 것으로 보이는가? 너 자신을 살펴보라, 그러면 너는 이미 부활했음을 알리라(이미 부활을 했다는 생각은 나그 함마디의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 저자 주. 이런 생각을 비롯해서 영지주의의 여러 핵심 사상은 선禪 사상과 놀랍도록 흡사한 데가 있든 것 같다. 너는 이미 부처다! 육조혜능이 이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7세기 중반이었다. 그건데 나그 함마디 문서의 집필 시점은 줄잡아 3~4세기니까 몇 백 년 앞서 있다. : 옮긴이 주) <부활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세계는 환상이다! 부활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의 계시이며, 만물의 탈바꿈이며, 새롭게 변하는 것이다. 차별divisions과 차꼬(족쇄)로부터 자유롭도록 하라, 그리하면 너는 이미 부활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부활을 비유로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활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영적 부활의 신비한 체험이 입문자에게는 정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소위 현실reality이라고 여기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었다. 레기노스의 스승은 이렇게 설명했다. 부활이 환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부활은 환상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은 현실적인 것이다. 부활은 현실적이되, 이 세계가 환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성한 결혼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중시된 신화적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신인과 여신의 신성한 결혼이었다. 이 결혼은 상대적인 것의 신비한 통합을 상징한다. 크레타 섬에서 이교도는 데메테르 여신과 이아시온 신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아테네에서 해마다 '출현'한 디오니소스는 '신랑'으로 불렸고, 여신을 상징하는 아테네 도시와 결혼을 했다.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입문자는 흔히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부로 여겨졌다. 입문식은 특별한 '혼례의 방'에서 치러졌다---이런 방이 이교도의 신전에서 속속 발견되었다. 고대의 프레스코 벽화를 보면 입문식 준비를 한 자들이 신부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입문식 후에 그들은 '신부' 라고 불렸다. 신부는 환생한 자아, 곧 에이돌론을 상징했고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환생의 고리를 끊은 자아, 곧 다이몬을 상징했다. 입문자의 두상대적 부분은 결혼식을 거치며 통합되었다. 문자주의자 에퍼파니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몇몇 사람이 혼례의 방을 준비한 후 신비한 의식을 진행하는데, 그들은 입문자에게 그것이 영적 결혼이라고 선언한다. 이교도의 신성한 결혼이라는 주제가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주제였다. 그들은 예수와 소피아의 신성한 결혼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타락한' 상태로 그려진 소피아는 소생한 자아를 상징한다. 그녀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근원Source을 찾아 헤매다가 이 세상에서 길을 잃은 것으로 그려진다. 사랑을 찾으며 온갖 곳을 헤매던 그녀는 매춘부가 된다. 마침내 그녀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한다. 하나님은 그녀를 하나님의 첫째 아들---그녀의 형제인 예수---의 신부로 삼는다. 신랑이 도착하자 그들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며 하나가 된다. 이 이야기는 환생한 자아, 곧 프시케pshche를 구하기 위해 도착한 다이몬, 곧 영혼Spirit의 비유이다. <빌립의 복음서>에 따르면, 프시케와 영혼이 '재결합'한 사람만이 자기 파괴와 악을 추구할 수 도 있는 육체적 충동을 이겨 낼 수 있게 된다. 신성한 결혼은 영지주의의 목표인 신비한 통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도마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네가 둘을 하나로 합하고, 안팎을 같게 하고, 위아래를 같게 하고, 남성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은 여성이 아니도록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하나로 합하면, 너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리라. 일부 영지주의 집단은 입문식의 일환으로 신성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혼례의 방을 준비하고 미스테리아 의식을 치렀다'. 영지주의 현자인 마르쿠스의 추종자들은 '공식적인 선언'과 더불어 입문식을 치렀는데, '그들은 이것을 영적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영지주의자 시인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은 혼례의 방에서 천사들과 함께 영적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나세네스는 입문자가 '옷을 벗어 던지고 성령에 의해 임신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빌립의 복음서>에 따르면, 입문식은 신비한 통합을 이루는 '혼례의 방'에서 절정에 이른다. '혼례의 방은 신성한 것 가운데 신성한 것이며, 혼례의 방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 이야기에서, 타락한 소피아(프시케)는 막달라 마리아로 나타난다. 예수(다이몬)는 매춘부 막달라 마리아를 구해 준다. 영지주의 현자 헤라클레온의 말에 따르면, 신성한 결혼이라는 주제는 예수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가나에서의 결혼식 때 예수는 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물을 포도주로 바꾼다. 헤라클레온은 이러한 기적을 동반하는 결혼식이 인간을 신격으로 탈바꿈시키는 '신성한 결혼식'을 상징한다고 풀이 했다. 이러한 주제는 마태복음에도 나타난다. 마태복음(25:1)에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예수는 말한다. <도마의 복음서>에서, 신비한 통합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단계의 입문식을 위해서는 각 입문자가 홀로 혼례의 방에 들어가야 한다고 예수는 가르친다. 많은 사람이 문 가에 서 있지만, 혼례의 방에 들어갈 자는 1명뿐이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입문자는 개인적 다이몬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상 보편적 다이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이교도 현자들은 가르쳤다. 보편적 다이몬은 파편으로 찢겨서 모든 의식을 지닌 존재속에 분배된 것으로 그려졌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너는 하나님에게서 찢어진 하나의 파편이다. 너의 내면에는 신의 일부가 담겨 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이러한 보편적 다이몬---모든 살아 있는 것들 속에서 의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징한다. 수많은 신화에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죽음을 당한다. 이것은 흔히 빵을 만들기 위해 옥수수를 찧거나,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를 밟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자는 이러한 주제를 더욱 신비한 차원으로 이해했다. 즉, 악의 힘에 의한 보편적 다이몬의 사지절단에 대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컨대 오시리스 신화에서 신인은 사악한 형제인 세트 신에게 살해되어 사지가 절단된다. 그 후 이시스 여신이 오시리스의 수족을 수습해서 그를 복원한다. 이러한 신화는 하나님이 '복원될remembered' 필요가 있으며, 영적인 길은 곧 보편적 다이몬의 파편을 재통합하는 과정이자, 모든 것 속의 하나One를 자각하는 과정이라는 미스테리아의 가르침을 암호화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오시리스의 죽음을 묘사한 후 이렇게 썼다. 세트는 신성한 로고스를 파괴하고 흐트러뜨린다. 이시스 여신은 그런 로고스를 모으고 접합해서 입문식을 치르는 자들에게 전달한다. 이교도의 사지절단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영지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교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개인적 자아가 거룩한 하나인 존재의 파편이라고 믿었다. 거룩한 존재의 파편인 개인적 자아는 거룩한 기원에 대한 모든 기억을 빼앗긴 채 개인적 육체 속에 감금되었다고 믿은 것이다. 이교도 신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인 예수는 사지가 절단된 보편적 다이몬, 곧 로고스를 상징한다. <피스티스 소피아>에서 예수는 이렇게 선포한다. '나는 나 자신을 두 동강내어 이 세상에 왔다'. <요한 행전>에서 '십자가 주변에 있는 군중'은 '한데 모아야 할 하나님의 수족'을 상징한다고 예수는 가르친다. <위대한 로고스의 책>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내 수족을 구하여라. 산산이 흩어진 내 수족은 세계의 기초이므로, 그 모든 것을 한데 모아서 빛으로 맞아들여라. '최고의 입문식 날'에 불려진 영지주의 찬송가 가운데, 예수에게 이렇게 탄원하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그대의 동료, 그대의 수족(지체)이니, 우리에게 오소서. 우리 모두는 그대와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동일합니다. 그대는 하나이고 동일합니다 이교도 현자 프로클루스의 말에 따르면 '모든 입문식의 최대 비말'은 '우리 안의 영혼'이 '디오니소스의 참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노시스, 곧 자신에 대한 앎을 얻은 입문자는 자신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 곧 보편적 다이몬의 구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한 입문자는 1명의 오시리스, 혹은 1명의 디오니소스로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의 <빌립의 복음서>에서 참된 영지주의자는 '더 이상 1명의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1명의 그리스도' 라고 일컬어진다. 제목이 없는 영지주의 계시록 하나에서 예수는 자신의 '아이들'을 소리쳐 부른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이들 내면에서 형성될 때까지 함께 노력한다. <피스티스 소피아>에서 예수는 1명의 그리스도가 된 사람만이 최고의 영지를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영지주의 금언집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물이나 거울에 비친 너 자신을 보듯이, 너의 내면에 비친 나를 보아라'. <빌립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선언한다. 너는 영혼을 보았고, 너는 영혼이 되었다. 너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너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너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고, 너는 하나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에서도 발견된다. 누가복음(6:40)에서 예수는 이렇게 약속한다. '입문한 제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개역<성서>에는 '입문한 제자' 대신 '온전케 된 자'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플라톤이 자주 인용한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용어 가운데 소마 세마soma sema---'육체는 무덤이다'---라는 말이 있다. 영지주의 입문자들도 마찬가지로 환생한 육체적 자아를 지닌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재탄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비한 부활을 체험한 입문자들은 그리스도가, 곧 그들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예수 이야기에 나타나는 여성들처럼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육체는 참된 정체성이 아니다. 참된 정체성은 한때 살다가 죽는 에이돌론이 아니라, 영원토록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목격자이다. 입문식의 여러 수준 이교도와 영지주의자의 철학 체계에 따르면, 인간의 정체성에는 네 가지 수준이 있다. 육체적 수준, 심적(심리적) 수준, 영적 수준, 신비한 수준. 이 네 수준을 영지주의자들은 육체, 가짜 영혼, 영혼. 빛으로 나누었다. 육체와 가짜 영혼(육체적, 심적 정체성)은 에이돌론, 혹은 수준 낮은 자아라는 두 국면을 이룬다. 영혼과 빛(영적 수준과 신비한 수준의 정체성)은 불멸의 다이몬의 두 국면---개별적 차원의 수준 높은 자아와 만물에 공유된 보편적 자아라는 국면---을 이룬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 수준의 인간을 '물질적Hylikos' 이라고 일컬었다. 영적인 것이 완전히 죽어서 의식이 없는 물질, 곧 '힐레hyle'와 같기 때문이다. 개성personality, 곧 프시케psyche를 가진 수준의 인간은 '심적Psychikos' 이라고 일컬었다. 영혼과 동일시되는 인간은 '영적Pneumatikos' 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분리된 정체성 수준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리스도, 곧 보편적 다이몬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인간은 그노시스를 체험했다. 이와 같은 신비한 깨달음을 통해 입문자는 참된 영지주의자 곧 '아는 자'로 탈바꿈했다(즉, 이런 인간은 '영지적Gnostikos' 이라고 일컬어졌다 : 옮긴이 주). 이교 신앙이나 그리스도교에서 이러한 깨달음의 수준은 네 가지 원소인 흙, 물, 공기, 불과 상징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한 원소의 세례에서 다른 원소의 세례로 이어지는 것은 하나의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이어지는 입문식을 상징한다. <위대한 로고스의 책>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과 공기와 불의 세례를 준다. 물의 세례는 물질적 인간의 탈바꿈을 상징한다. 오직 육체와 동일시되었던 인간은 이제 심적 입문자로 탈바꿈해서 개성, 곧 프시캐를 갖게 된다. 공기의 세례는 심적 입문자가 영적 입문자로 탈바꿈해서 수준 높은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을 상징한다. 불의세례는 최종 입문식을 상징한다. 이때 영적 입문자는 보편적 다이몬, 로고스, 그리스도, '빛'---요한복음(1:9)에 기록되었듯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비추이는 참빛'---이 곧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입문자는 그노시스를 깨달은 것이다.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의 입문식 수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입문식 수준 정체성 수준 정체성의 실체 원소 물질적 육체적 정체성 육체 흙 심적 심리적 정체성 가짜 영혼 물 영적 영적 정체성 영혼 공기 영지적 신비한 정체성 참빛 불 문자적, 신화적, 신비적 이교도의 공개적 미스테리아 입문자는 경이적이며 압도적인 장관을 이루는 화려한 행렬을 통해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재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자는 그 신화 속에 암호화된 비유적 의미를 전수 받았다. 또한, 미스테리아의 스승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시켰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입문자들은 그노시스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예수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영지주의 깨달음의 세 가지 수준은 문자적, 신화적, 신비적인 깨달음으로 나눌 수 있다 · 문자적 :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먼저 물의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에 입문했다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이해했다. 문자 그대로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믿은 것이다. · 신화적 :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두 번째로 공기(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교의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했다. 그들은 예수 이야기를 비유적 신화로 이해했다. 이 신화는 각 입문자가 거쳐야 할 영적인 길을 암호화한 가르침이었다 신비적 : 영지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 곧 영지주의자는 마지막으로 불의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보편적 다이몬 혹은 로고스)가 곧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예수 이야기를 비롯한 어떤 가르침도 초월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썼다. 그 동안 오해가 너무나 많았다. 대다수의 독자들이 성스러운 문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의 말에 따르면, 그 올바른 방법이란 <성서>에 적용되는 세 가지 수준을 이해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가장 수준이 낮은 것이다. '다소 진보한 자'에게 가능한 다음 수준은 비유적 수준이다. 비유는 영혼을 깨우친다. 그노시스를 드러내는 마지막 수준은 '영적 원리에 따라 온전해진 자'를 위한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삼중의 길을 통해 그리스도교 입문자는 믿음에서 그노시스로 도약한다고 가르쳤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가상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의 필수 부분이었고, 새로운 입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서의 역사성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이야기는 첫 단계의 영적 초보자에게만 문자 그대로 해석되었다. 이 신화의 참된 의미는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자에게만 밝혀진다. 오리게네스는 예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보는 관점을 뛰어넘지 못하는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며, 그것을 '육체적 그리스도교'로 이어지는 '대중적이며 불합리한 믿음'이라고 불렀다. 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리게네스는 '육체적somatic 그리스도교'라는 말이 복음의 역사를 기초로 한 신앙을 의미한다고 명백히 밝혔다. 역사적 이야기를 기초로 한 가르침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을 위한 방법으로는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노시스를 얻은 자, 곧 현자는 더 이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지닌 '영원한', 혹은 `영적'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모든 것---비유의 말씀으로 나타낸 비밀이든 몸소 행한 기적이든 그 모든 것---이 분명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나세네스라고 불린 영지주의 집단은 이렇게 가르쳤다---공개적인 미스테리아만을 이해한 문자주의자들은 여호와라는 거짓 하나님에게 홀린 것이며 여호와의 주문은 로고스의 '신성한 황홀경'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마찬가지로 바실리데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는 아직도 유대인의 신에게 예속되어 있는 자이다. 그것을 부정한 자는 자유를 얻은 자이며, 자식을 낳지 않은 아버지의 계획을 아는 자이다. 오리게네스는 놀랍게도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평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아기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결론 영지주의자들에게 예수는 여러 수준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영지주의가 말살된 탓에 우리는 가장 낮은 수준의 가르침만 받아 왔다. 예수 이야기의 참된 비유적 성격을 밝혀 주는 영지주의의 은밀한 가르침에 접근하는 것이 차단되어 온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역사적 인물이라고 잘못 생각해 온 것도 그래서일까? 증거의 일부를 다시 살펴보자.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영지주의자들은 <성서>를 신화적 비유로 이해했다.---이 신화는 손상되지 않게 보존해야만 하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 변경될 수 있고 개선될 수 있는 신화라고 생각했다. 이교도 철학자들처럼, 영지주의자들은 게마트리아와 수 상징주의를 사용해서 복잡하고 신성한 수학적 가르침을 암호화했다. '예수'로 번역된 '이에소우스' 라는 이름은 유대인의 이름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알파벳 문자의 수치가 신비한 수인 888이 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만든 것이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처럼, 예수는 입문자의 다이몬을 상징한다. 이교도 신화에서처럼, 때로 에이돌론을 상징하는 다른 인물이 상징적으로 예수라는 신인 대신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교도 현자들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비유적 가르침으로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이야기가 영적 부활을 유도하기 위한 신비한 입문식 신화라고 이해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처럼, 영지주의자들은 입문식의 일환으로 다이몬과 에이돌론의 신성한 결혼식을 치렀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처럼, 영지주의자 예수는 보편적 다이몬을 상징한다. 이 다이몬은 사지가 절단되었으며, 복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보편적 다이몬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스테리아 입문자는 1명의 '오시리스', 혹은 1명의 '디오니소스'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영지주의 입문자들은 1명의 '그리스도'가 되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처럼, 영지주의는 인간이 네 가지 수준---육체적 심적, 영적, 영지적 수준---의 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이들은 흙, 물, 공기, 불이라는 네 원소와 연계되어 있다. 입문자들은 수준에 맞추어 이들 원소의 세례를 받았다.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서의 역사성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지만, 오직 첫 단계에 들어선 초보자만이 예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 이야기는 초보자가 믿음을 갖도록 일단 하나의 역사로 가르쳤다가, 수준이 높아지면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가르쳤다는 게 정말 사실일까? 예수의 이 신화는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기초로 했다는 게 정말 사실일까? 영지주의 신앙이 원래의 그리스도교이며, 그리스도교는 이교도 미스테리아가 유대인 버전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증거는 정말 옳은 것일까?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을 채택해서 후대에 발생한 '이단' 이라는 게 정말 사실일까? 처음에는 그런 증거가 우리 두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 전체를 재고함으로써 우리는 그런 증거가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예수 이야기가 이교도 신화에서 발전한 신화라고 간주하면 소름 끼치도록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유사한 이유도 자명해진다.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유대인 버전이라고 간주하면, 복음서에서 예수의 입으로 말한 가르침이 이교도 현자들의 가르침과 너무나 닮은 이유도 자명해진다. 역사적 증거로 미루어 볼 때, 영지주의가 문자주의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견해는 영지주의가 후대의 한 분파라는 전통적 견해보다 훨씬 더 일리가 있다. 자체 증거로 미루어 볼 때에도 문자주의자들의 설명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문자주의를 믿은 모든 이단자 사냥꾼들은 소위 이단이라는 영지주의가 시몬 마구스라고 불린 현자에게까지 소급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시몬 마구스를 원조 이단자로 간주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된 그노시스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주장하듯이 시몬의 추종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시몬 마구스는 예수와 동시대인으로, 사도행전(8:9-24)에도 언급되어 있다(사마리아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서,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라(사도행전 8:9) <베드로 행전>에 따르면, 베드로가 로마에 이르렀을 무렵 그곳에는 시몬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이단자와 마법 대결을 벌였다. 결국에는 광장에서 하늘을 나는 솜씨를 겨루었다! 물론 시몬이 져서 추락사했다 : 저자 주). 좀더 신빙성 있는 증거에 의하면, 시몬은 사마리아인 이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일부 학자의 말에 따르면 시몬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인 유대인 필론에게 직접 배웠다. 전통적인 견해가 옳다면 동시대인이었던 시몬이 역사적 예수의 독창적인 가르침을 곡해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과연 그토록 빨리, 그토록 심오하게 곡해할 수가 있었을까? 시몬이 예수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자 했다면, 그리스도교와 전혀 관계없는 자신의 종교를 세울 수도 있었는데 왜 곡해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단자 사냥꾼들은 시몬에 앞서서 도시테우스라는 영지주의 현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도시테우스는 BC 100년경, 혹은 그 이전의 사람이다! 문자주의자들이 몸소 제시한 이런 증거에 의하면, 영지주의는 예수가 살았다는 시대 이전에 이미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먼저 존재한 영지주의가 나중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곡해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조차도 게마트리아를 이용해서 신비한 수인 888과 일치하도록 조작해서 만든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라는 이름을 영지주의자들이 만들어 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러한 온갖 증거에 맞닥뜨린 우리 두 사람은 전통적인 견해를 완전히 뒤집어서,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이었던 원래의 '예수 미스테리아'가 타락한 것이 문자주의 신앙이라고 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이처럼 급진적으로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자, 우리 두 사람은 이것을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라고 불렀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느 면에서 지중해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이교도 미스테리아신앙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신앙을 민족적 취향에 따라 각색했다. 어느 면에서, 기원전 몇 세기 동안 유대인들도 그러해서 미스테리아의 유대인 버전을 만들게 되었다. 유대인 입문자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화를 각색하여 한 유대인 신인이 죽었다가 부활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세월이 흐르자 이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해석되기에 이르렀고,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생각은 너무 혁명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역사적 증거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와 같은 급진적인 이론을 채택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탐구해야 할 더 중요한 주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라고 불린 유대인 교사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정말 없는가? 그런 증거가 있다면, 예수 이야기는 유대인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각색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냈고, 기적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였고,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그가 죽었을 때에는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졌고, 무덤들이 열려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났고, 온 땅이 초자연적인 어둠에 뒤덮였다. 그가 정말 신화 이상의 존재였다면, 분명 누군가가 당대의 문헌에 그러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7장 잃어버린 사람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결과보다 더 부정적인 것은 없다. 역사적 예수의 존재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공개적인 구세주로 이세상에 왔으며, 하나님 왕국의 율법을 가르쳤고. 지상에 하늘의 왕국을 세웠으며,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었다는 나사렛 예수의 이미지는 차례로 파괴되었다.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차례차례, 표면으로 떠오른 구체적인 역사 문제들로 인해 조각나고, 쪼개지고, 붕괴된 것이다.---앨버트 슈바이처(20세기 초에 씌어진 슈바이처의 이 말은 독일의 여러 신학대학에서 수세기 동안 해 온 연구에 바쳐진 묘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 저자 주)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해 우선 고대 로마인들부터 추적하기 시작했다. 로마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데 로마인들은 모든 활동에 대해 꼼꼼히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법적 소송은 특히 그랬다. 우리는 로마인들이 예수 사건과 같은 유명한 사건을 분명 기록으로 남겼을 거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재판을 하고 처형을 했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당시 로마 시대는 인류 역사상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시기였다. 예수가 살았다는 시대 무렵에 글을 쓴 이교도 작가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아노스 플리니우스 마르티알리스 페트로니우스 아피아노스 플루타르코스 세네카 유베날리스 아폴로니우스 디온 프루세우스 스미르나의 테온 파우사니아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다미스 프톨레마이오스 루키아노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퀸틸리아누스 디온 크리소스토모스 겔리우스 헤르모게오네스 파보리누스 스타티우스 리시아스 루키누스 콜루멜라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이들 작가의 저서를 한데 모아 놓으면 도서관 하나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한 로마 작가로는 플리니우스,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소아시아 비타니아의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61-113)는 112년에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아주 짧은 서신을 보냈다. 말썽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분명하게 지시해 달라는 서신이었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69-122?)는 잡다한 법률 문제(주점에서 음식을 파는 것에서 전차 기수의 행동에 이르기까지)에 관한 메모에서 AD64년에 '새롭고 사악한 미신을 믿은 그리스도교인들이라는 한 부류의 인간들에 관한 처벌이 가해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고대 로마 세계에 소수의 그리스도교인이 존재했다는 것뿐이다---그것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교인의 존재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는 또 AD 41년과 54년 사이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의 부추김을 받아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크레스투스Crestus는 흔한 이름이었지만, 흔히 '그리스도'의 변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리스도는 그저 '메시아(구세주)'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일 따름이며,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주도한 자칭 메시아가 많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언급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아무튼 예수가 로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록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말썽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처리해야 했다는 기록뿐인데, 유대인들은 로마 역사상 거의 정기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55-117)는 좀더 많은 기록을 남겼다. AD64년의 로마 대화재에 대한 기록에서, 그는 네로 황제가 직접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잠재우지 못한 나머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죄를 전가했다고 썼다. 네로는 타락한 것으로 악명 높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치밀한 계획에 따라 희생양으로 조작해서 처벌했다. 그들의 시조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미신이 새롭게 일어나서, 유대 지방(그 해악이 시작된 곳)뿐만 아니라 로마에도 퍼졌다. 수도에서 온갖 타락하고 수치스러운 행사를 벌이며 번성했다. 그러나 타키투스의 증거는 당대에 수집된 것이 아니다.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지 50년쯤 지난후 수집된 것이다. AD 약 112년에 아시아의 총독이었던 그는 친구였던 플리니우스가 표현한 대로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로 알려진 그리스도교인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타키투스의 기록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믿고 있는 것을 단지 옮겨 쓴 것이 아니라, 예수가 존재했다는 독자적인 증언일 수 있을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정보가 로마인들이 남긴 풍부한 기록을 통해 얻은 것인가의 여부를 밝히는 것뿐이다. 그러나 답은 부정 적이다. 왜냐하면 타키투스가 빌라도를 '총독procurator(자치령이나 식민지의 행정장관)' 이라고 기록했지만, 사실 빌라도는 당시에 '사령관praefectus' 이었기 때문이다 (1961년에 발견된 빌라도의 묘비명에 '유대 사령관praefectus Iudaeae'이었다고 새겨져 있다 : 저자주). 따라서 타키투스는 분명 옛 기록을 참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시대에 퍼진 풍문을 기록한 것이다. 로마인들이 기록과 역사에 집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관계 문헌을 조사한 우리의 결론은 위와 같다. 한편으로는, 예수를 언급한 다른 로마 문헌이 긴 세월을 거치며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헌이 있었다면 로마 교회가 제국시대에 일단 권력을 잡은 후에는 그 문헌들을 분명 소중하게 보존해 왔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순교자 유스티누스처럼 교육 수준이 높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문자주의 신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문헌들을 최소한 인용은 했을 거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 로마 문헌에 예수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가능한 해석은 두 가지밖에 없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거나, 아니면 로마인에게 전혀 중요치 않아서 언급할 가치도 없었거나 둘 중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로마를 떠나 유대인 역사가들을 찾아보자 유대인들에게는 예수가 오래 기다려 왔던 메시아였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중을 자극하고 신성을 모독한 사기꾼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누군가는 그를 언급했어야 마땅하다. 유대 역사가들 필론(BC 15?-A45?)은 예수가 살았다는 시대에 활동한 유명한유대인 작가이다. 그의 저술은 오늘날까지도 약 50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역사와 철학, 종교를 다루었고,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 준다---그러나 메시아 예수의 도래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전혀 없다. 필론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티베리아스(이스라엘 북부 도시)의 유스투스는 가버나움(Capernaum : 가파르나움, 갈릴리 바닷가의 마을) 인근에 살았던 유대인인데, 가버나움은 예수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는 모세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당대까지 이르는 역사를 기술했지만, 역시 예수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 100?)라는 인물이 남아 있다. 그는 사도 바울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2권의 유명한 역사책을 남겼다. <유대 전쟁사>와 기념비 적 작품인 <유대 고대사>가 그것이다. 이 2권의 책은 그리스도교인이 나타난 첫 세기의 유대 역사에 대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해 주는 책이다. 기대한대로,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우리가 찾던 증거를 마침내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썼다 이 무렵에 예수가 살았다. 그는 현명한 인간이었다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으며, 새로움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많은 그리스인을 감화시겠다.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사회의 요인들이 그를 고발한 탓에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에도, 처음부터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거룩한 예언자들이 미리 말했듯이, 그리고 그가 이미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듯이,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다시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는 무리들은 이날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기적을 행하는 자'가 빌라도 앞에 끌려왔을 때, 빌라도는 예수가 '범죄자나 선동자나 자칭 왕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자'라고 결론지었다. 예수가 빌라도의 병든 아내를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자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유대인 제사장들이 나중에 빌라도에게 뇌물을 바치고, '모든 유대 전통을 무시한 죄'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예수가 기적적으로 부활했다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간 후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는데, 그 점에 대해 요세푸스는 시체를 훔쳐 갈수가 없었다고 썼다. '그의 무덤 둘레에 로마인 30명과 유대인 1천 명이 지키고서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요세푸스가 남겼다는 이 기록은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인 역사가들이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해 왔다---학자들이 좀더 비판적으로 문헌을 점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늘날 진지한 학자들은 앞서의 기록이 실제로 요세푸스가 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훨씬 후대에 추가된 기록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되었던 것이다. 앞서의 기록은 요세푸스의 문체와 전혀 달랐다. 또 그 기록만 문헌에서 제거하면 요세푸스의 원래 주장은 일관성을 갖게 된다. 초기 교회사에서 가장 양심적인 학자 가운데 1명으로 간주되는 오리게네스는 3세기 초의 글에서, 요세푸스는 예수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도 믿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나아가서 요세푸스는 어떤 유대인 메시아도 믿지 않았다고 오리게네스는 기술했다. 요세푸스는 사실상 친로마파 유대인이었다. 동족 유대인들은 그를 매국노라고 여기며 증오했다. 그래서 그는 유대 지방을 떠나 죽을 때까지 로마에서 살았다. 로마에서 그는 두 황제의 후견을 받으며 로마귀족이 되어 부유하게 살았다. 요세푸스는 여러 명의, 자칭 유대인 메시아를 언급한다. 그들에 대해 그는 전혀 찬사를 바치지 않는다. 그가 글을 쓸 당시에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 유대 민족을 해방시킬 거라는 유대인의 오랜 믿음이 강박증에 이를 정도였다. 요세푸스는 스스로 '고대의 신탁' 이라고 일컬은 그런 믿음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가했는데, 그것이 신성한 예언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족 유대인들이 그것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세계의 왕으로 도래할 거라고 예언된 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였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지방에 머무는 동안 황제로 선포되었다고 그는 기록했다. 같은 책에서 그렇게 썼던 요세푸스가 문체를 바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철학적 신념을 뒤엎고, 자신의 정치적 처세술도 죄다 포기하고 느닷없이 예수를 숭배하는 글을 썼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역사적 증거를 찾고자 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런 결정적인 증거를 놓쳤을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요세푸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요세푸스를 처음 언급한 것은 4세기 초의 유세비우스 주교였다. 로마 교회 선전자였던 그는 앞서의 구절이 추가된 요세푸스의 책을 느닷없이 제시했다. 바로 이때부터 요세푸스는 예수의 역사성을 증언한 자가 되었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찾지 못한 그리스도교인들은 복음서를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증거를 나중에 위조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위조는 실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탈무드> 유대인 역사가의 저술 속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없다. 그런데 때로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약간의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동원되는 몇몇 구절이 <탈무드>에 담겨 있다. 그런 구절은 분명 그리스도교인들의 위조가 아니다. 그것이 어떤 구절인지 살펴보자.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 : 유월절 전야에 그들은 예수Yeshu를 매달았다. ....예수가 주술을 행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케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랍비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 예수에게는 다섯 제자---마타이, 나키아, 네처, 부니, 토다---가 있었다. 랍비 엘라자르 벤 다마가 독사에 물렸을 때, 케파르 소마의 한 남자인 야곱이 예수 벤 판데라의 명을 받아 그를 도우러 왔다. 내가 한때 세포리스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나사렛 사람인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1명을 만났다. '예수Yeshu'는 '여호수아Yehoshua/Joshua'의 축약형이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이에소우스Iesous'는 여호수아를 번역한 말이다. 그렇다면 <탈무드>의 예수에 대한 구절은 복음서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러나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섯 제자만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을 덮어두더라도, 이 구절이 우리가 찾고 있는 증거가 아니라는 다른 근거가 있다. '나사렛 사람인 예수Yeshu the Nasarene' 라는 말은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한 종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 '나사렛 출신' 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너무나 흔한 이름이어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주 많았다. 요세푸스는 헤브라이어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적어도 10명은 언급했다. 혹시 그 중 1명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로 번역될 수 있다 할지라도, 헤브라이어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다! <탈무드>의 이 구절을 깊이 연구한 학자가 인정하듯이 위 구절이 수많은 예수Yeshu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이 구절은 너무 늦게 씌어졌기 때문이다. 옛 기록을 기초로 삼았다 할지라도. <탈무드>가 씌어진 것은 AD 200년 이후이다. 그리고 기초가 된 옛기록이 있었는가의 여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위 구절에서 예수와 동시대인으로 나오는 랍비들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가 살았다는 시대와 족히 200년 차이가 난다. <탈무드>에도 도움이 될 만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그럼 우리는 다시 어디서 증거를 찾아봐야 할까? 우리는 예수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모든 잠재적 증거를 살펴보았다---기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앞에서 언급한것 외에는 역사적 증거로 제시된 것이 전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증언뿐이다. 바로 그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그들의 증언은 역사적 자료로 간주될 수가 있을까? 복음서는 절대적 진리? 사실상 그리스도교 복음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신약의 네 복음서 외에도 수백 종이나 있었다. 그러나 외경이나 영지주의 복음서가 신화 이상의 역사적 증거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이들 복음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쓴 예수 생애의 목격담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목격담이 하나뿐인 게 아니라 넷이나 된다는 사실은 이들 목격담이 진짜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를 더해 준다. 하지만 사실상 이들 복음서는 흔히 동일한 사건에 대해 일치되지 않는 진술을 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세계(世系 :족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장문의 족보를 나열한다.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가 유대인의 믿음과 맞아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예수의 아버지를 요셉으로 본다. 여기까지는 일치한다. 그런데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마태는 '야곱' 이라고 말하는데, 누가는 '헬리'라고 말한다. 두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족보라는 게 고작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벌써 할아버지부터가 다르다.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도 두 족보는 전혀 다르다! 그것을 직접 살펴보자. ## 마태복음 예수 - 요셉 - 야곱 - 맛단 - 엘르아살 - 엘리웃 - 아킴 - 사독 - 아소르-엘리아김 - 아비훗 - 스룹바벨 - 스알디엘- 여고냐 - 요시야 - 아몬- 므낫세 - 히스기야 - 아하스 - 요담 - 웃시야 - 요람 - 여호사밧 - 아사 - 아비야 - 르호보암 - 솔로몬 - 다윗 ## 누가복음 예수 - 요셉 - 헬리- 맛닷- 레위 - 멜기 - 얀나 - 요셉 - 맛다디아 - 아모스 - 나훔 - 에슬리 - 낙개 - 마앗 - 맛다디아 - 서머인 - 요섹 - 요다 - 요아난 - 레사 - 스룹바벨 - 스알디엘 - 네리 - 멜기 - 앗디 - 고삼 - 엘마담 - 에르 - 예수 - 엘리에서 - 요림 - 맛단 - 레위 - 시므온 - 유다 - 요셉 - 요남 - 엘리아김 - 멜레아 - 멘나 - 맛다다 - 나단 - 다윗 마태는 다윗 이후 아브라함에서 끝나지만, 누가는 아브라함에 이어 계속해서 아담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든 족보는 거의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두 복음서의 저자들은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고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이며, 누가복음 족보상의 남자 77명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예수의 아버지가 된다. 마태는 분명하게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가 잉태하신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 이 모든 일은 주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마태복음 1:20-23)' 두 복음서의 저자가 전혀 다른 족보를 장황하게 나열한 것은 단지 그런 족보를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라는 뜻에서 그런 것일까? 한편 마가는 다윗에 이르는 혈통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베들레헴과 동정녀 잉태도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는 그토록 중요한 얘기를 빼 버렸을까? 바로 그 점에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네 복음서는 그처럼 서로 일관성을 잃은 데가 많다. 누가복음에서는 수리아(시리아) 총독이 된 구레뇨(퀴리니우스)가 호구 조사를 할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 어법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AD 6년이었다. 마태는 예수가 헤롯(헤로데스)왕 치하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헤롯 왕은 BC 4년에 죽었다. 누가복음 속의 내용들 간에도 일관성을 잃은 구절이 있다. 누가는 '유대 왕 헤롯 때에(누가복음 1:5)' 요한과 예수가 6개월 간격으로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한 후, AD 6년의 호구 조사 때에도 마리아가 여전히 임신 중인 것으로 그려 놓았다---그렇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 동안은 임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이야기를 앞부분(2:13-25)에 기록했지만, 마태는 복음서 뒷부분(21:12-13)에 기록했다---시차가 크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 지역에서만 가르쳤고, 유대 지방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유일하게 생애 막바지에 예루살렘에 갔을 뿐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와 유대에서 비슷하게 가르침을 펼쳤다.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주로 예루살렘에서 설교했고, 갈릴리에서의 설교는 드물다. 놀랍게도,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을 기초로 한 것인데도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사건들조차도 복음서들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유대인 장로들의 심리를 받고 사형을 선고 받는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의 심리를 받지만, 형을 선고 받지는 않는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지 않고, 곧바로 로마의 법정[官廷]으로 끌려간다. 그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아니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을까?' (사도행전에서는 십자가 처형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5:30과 10:39에서 베드로는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언급은 사도행전이 로마에서 씌어졌다는 학자들의 의심을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은 2세기 말에 이레나이우스가 난데없이 제시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면 로마인들은 예수가 선동죄로 처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의 카타콤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전혀 없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놀랍게도 AD 5세기 이후에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나타난다. 로마인들은 나무에 매달린 아티스 신인의 상을 예전부터 보아 왔다. 나무에 매달렸다는 것은 범죄자 처형이 아닌 신인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신인 아티스가 신화적으로 수행한 운명을 현실적으로 수행한 자로서 로마인들에게 제시되었다 : 저자 주) 또 바울은 흔히 '십자가에 못 박한 그리스도'를 언급하지만, 갈라디아서 3:13에서는 우리에게 내린 율법(구약)의 저주를 풀어 주기 위해 예수가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렸다고 말한다. 목격자라는 사람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나무에 달렸는지를 혼동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의 배반자 이스가리옷 유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일관성이 없다. 마태복음(27:5)에서 유다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그러나 사도행전(1:18)에서는 예수를 판 돈으로 밭을 사고, 그 후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서' 죽었다.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이라고 우리가 믿을 수밖에 없는 복음서의 저자들은 스승이 한 마지막 말까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시편 22:1의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구절을 예수는 마지막으로 외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시편31:5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외치고 운명한다. 이러한 두 구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요한복음에서는 다르게 말한다.---예수는 '내가 목마르다'고 말한 후, '다 이루었다' 하고 운명한다. 마가복음(15:43)에 따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서 매장해도 좋으냐고 묻자, 빌라도는 예수가 그렇게 빨리 죽었다는 것에 놀란다. 그러나 요한복음(19:31-38)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했을 때, 빌라도는 이미 그전에 예수가 빨리 죽도록 다리를 꺾고 창으로 찌르도록 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이미 죽어 있어서 다리를 꺾지 않았고, 다만 창으로 찔러 보긴 했다 : 저자주). 요한복음이 옳다면, 마가복음에서 빌라도가 놀랐다는 것이 놀랍다. 마태복음(12:40)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예언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아니! 그렇다면 예수가 계산을 잘못했단 말인가? 복음서들의 말에 따르면, 예수는 금요일에 죽었고, 일요일 이른 아침에 살아났다. 그렇다면 '땅 속'에서 예수는 다만 이틀 밤만을 보냈다(요나 1:17에 의하면 요나는 '삼일삼야(三日三夜)'를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 옮긴이 주). 마가복음(16:5)에서 예수의 여성 제자들 몇은 빈 무덤을 발견한 후 동굴속에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누가복음(24:4)에는 동굴 속에서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결에 섰다(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28:2-3)에서는 다음과 같이 훨씬 더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위에 앉았는데, 그의 형상(얼굴)이 번개 같고, 그의 옷은 눈같이 희었다. 마가복음(16:9)과 마태복음(28:9)에서, 부활한 예수는 갈릴리의 다른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부활한 예수는, 먼저 갈릴리에 가 있을 테니 다른 제자들도 갈릴리로 가도록 하라고 여성 제자들에게 명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그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자연적인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다른 제자들은 담담하기 짝이 없다. 한편 누가복음(24장)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 부근에서 다른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사도행전(1:4)에 따르면,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라는 신성한 명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한다. 예수의 말조차도 이렇게 일관성이 없다. 마가복음(9:40)에서 예수는 자애롭게 말한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그러나 마태복음(12:30)에서는 독단적으로 경고한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다. 같은 복음서 내에서도 예수의 말이 너무나 일관성이 없을 때가 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가 묻는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는 완벽한 용서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을 준다. 네게 이로노니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그런데 베드로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가 도무지 석연치 않다. 같은 복음서의 고작 한문단 앞에서 예수가 이미 용서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인데, 그때 예수는 위와 같은 아름다운 용서를 가르치지 않았다. 죄를 범한 형제에게 일단 훈계한 후, 말을 듣지 않으면 실용적으로 대처하라고 충고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둘이서만 만나서)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너는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증인을 데려가서 시시비비를 가려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도록 하여라(마태복음 18:15-17) 위와 같은 대처도 용서라고 할 수 있다면, 세 번만 용서 받을 기회를 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짜 스승의 가르침일까?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세 번만 용서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네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라면, 우리는 확실하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도 여느 인간 못지않게 오류를 범하는 존재라고. 예수는 당시 살아 있는 자들이 죽기 전에 계시를 목격하게 될 거라고 예언했지만, 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누가복음 9:27). (그날에)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두려워 떨며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너희의 구원이 다가오고 있으니 일어나 머리를 들라.......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나리라(누가복음 21:25-32).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주장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태복음 16: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선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태복음 24:34). 하지만 모든 제자들이 죽어서 묻힌 지 대략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든 일 가운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구약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그런 사실 자체는 전혀 놀랄 게 없다. 다만 놀라운 것은 예수가 인용한 구절이 구약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구절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어 구절 자체는 예수가 주장하는 것을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원래의 헤브라이어 구절은 예수가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는 구절이다. 예수가 정통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유대인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오역한 것을 일부러 인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더 이상 헤브라이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어만 쓰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는 수많은 유대인 가운데 1명이 그런 사건을 꾸며 냈다면 말이 된다---그 유대인 가운데 1명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구약을 인용하고, 그것을 예수가 인용한 것인 양 꾸며놓았다고 불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가복음 7:6-7에서 예수는 이사야 29:13을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을 인용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잘못 번역된 구절을 인용한다. 또 사도행전 15:13-18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구절은 아모스 9:11-12를 그리스어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마태복음 27:9에서 마태는 스가랴가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말한다 : 저자 주). 신약에 대한 학문적 연구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다음 둘 중 하나는 논란의 여지 없이 확실하다.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이 주장하듯 복음서들은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혼동을 잘하는 존재이다. 자체 성격상 하나님이 혼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복음서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도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실을 전해 준다고 믿는 것이 옳을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복음서들은 원래 그런 이름으로 알려진 게 아니었다. 원래는 특정한 저자가 없었던 것이다. 각 복음서는 각 그리스도교 분파의 '가르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후대에 가상의 저자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복음서들은 사실상 익명의 작품이다. 복음서 안의 모든 내용은 예외 없이 대문자로 씌어져 있고, 제목이 없으며, 장이나 절의 구분도 없고, 실제로 낱말들 사이에 구두점이 없다(대부분 중세기까지 그런 상태로 전해졌다 : 저자주). <성서>는 유대인의 아람어로 씌어지지 않았으며, 오직 그리스어로만 씌어졌다. 복음서는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용이 바뀌었고 덧붙여졌다.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내용을 비판하는 주장들을 무마할 목적으로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다'고 지적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밝혀 냈다. 3천여 종의 초기 원고를 세심하게 연구한 결과, 기록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드러난 것이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3세기의 저술에서, 변해 가는 신학적 풍토의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 원고가 편집되고 보완 개편되어 왔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오늘날 수많은 판본의 원고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필경사의 부주의 때문이거나, 일부 사람들이 주제넘게 원문을 고쳤기 때문이거나, 더러 교정자로 자처하며 제멋대로 첨가하거나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입증하기 위해, 한 학자는 완전히 무작위로 복음서 일부를 선택했다---이때 선택된 것은 마가복음 10장과 11장이었다. 그는 여러 초기 원고들 간에 다른 점이 얼마나 많은지 점검했다. 그 결과 '전체 내용으로 불 때 48곳 이상이 달랐고, 상호 비교하면 2곳만 다른 것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3곳 이상이 달랐고, 어느 경우에는 6곳까지 달랐다'. 학자들은 복음서 내용 가운데 후대에 추가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예컨대 원래의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난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여자들이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끝난 것이다. 소위 '긴 결말long ending' 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초기 원고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신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수많은 편집과 수정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복음서들 간에 모순되거나 일관성이 없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 수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는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혼자서 신약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복음서 내용들 간의 모순을 알아낼 기회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16-17세기 종교개혁과 더불어 모는 것이 달라졌다(루터는 로마 교황청에 맞서서 일반인도 혼자 <성서>를 읽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저자 주. 루터는 일반인이 읽을 수 있도록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기여를 했다 : 옮긴이 주)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되고자 열망했던 독일 신교도 학자들은 복음서들을 연구해서 예수의 역사적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런 연구를 한 학자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독일 대학의 신학 과정을 이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세기 동안의 집중적인 연구 결과, 그들이 바란 대로 그리스도교의 확고한 역사적 기초가 세워지기는커녕 문자주의의 예수상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섬세한 연구 결과, 그들은 요한복음이 너무 후대에 씌어진 거라서 목격담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역동적인 비유로 가르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유창한 그리스어로 축어적인 장문의 설교를 한다---그것은 분명 유대인 목수의 아들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전혀 다른 사건들을 다수 기술한다. 독일의 언어학자 카를 라흐만과 다른 유명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에는 같은 내용이 아주 많은데, 그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사실상 마가복음을 고쳐 쓴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은 가장 단순하며 가장 초기의 복음서이다. 요한복음이 아주 후대에 씌어졌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예수의 생애에 대한 목격담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마가복음밖에 없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AD 70년에서 2세기 초 사이에 씌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가장 빠른 시점을 받아들인다면 마가가 목격자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가는 예수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초기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의 복음서를 정경(正經)으로 채택하는 것을 반대했다. 마가는 기껏해야 베드로의 비서였거나 통역자였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불가능하다. 마가복음을 보면, 현대의 고전학자가 말한 대로 마가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리에 대해 어이없을 정도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7장 31절에서 예수는 '두로(티레) 지역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역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른다. 그런데 시돈은 정반대방향에 있을 뿐만 아니라, AD 1세기에는 시돈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이 없었다. 두로에서 곧바로 갈릴리로 가는 길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5장 1절에서 갈릴리 바다의 동쪽 해안을 거라사 사람(게라세네스)의 지방이라고 말하지만, 거라사(오늘날의 예라시)는 바다에서 동남쪽으로 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거라사에서 더러운 귀신들이 들어간 돼지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지리적인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마가는 그 지방의 풍속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마가복음(10:12)에서 예수는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말한다. 유대인 세계에서는 그런 말이 전혀 의미도 없다. 그 세계에서 여자들은 이혼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신약을 가르친 빌헬름 브레더는 가장 초기의 원시적인 마가복음조차도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신학적 도그마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1919년에 또 다른 독일 학자 카를 루드비히 슈미트는 마가복음이 만들어진 방법에 대한 연구서를 펴냈다. 그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기존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엮어서 복음서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예수 이야기는 이미 있었던 단편적 이야기들을 편집한 것이었다(수많은 사람을 먹인 이야기가 좋은 예이다. 마가복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처음에는 5천 명을, 다음에는 4천 명을 먹인다. 테일러 박사가 지적했듯이, 이 기적 이야기는 2개의 독립된 이야기라고 보기 어렵다. 두 번째 기적 때 제자들이 묻는다.[마가복음8:4] '이 광야[이렇게 황량한 곳]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불과 얼마 전에 오병이어[마가복음 6장]의 기적을 본 제자들이 이렇게 물을 수는 없다 : 저자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에 없는 탄생과 혈통 이야기를 추가한 것은 예수 이야기가 시간이 가면서 진화했음을 보여 준다. 독일 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더 이상 역사적 사실로 간주할 수 없었다. 결국 학자들은 복음서들의 기록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겠다는 기대를 모두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마가복음·마태복음·누가복음이 씌어진 시기를 2세기로 보아야 한다는 독일 신학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약을 가르친 루돌프 볼트만(1884-1976)은 평생 복음서를 연구한 사람이며, 신약에 대해서는 가장 권위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복음서를 분석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했다.---그것은 '형식비평form-criticism' 이라고 불렸다. 그 방법에 의한 분석결과,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나는 정말이지 우리가 예수의 생애와 실재성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자료 가운데 그것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자료들은 단편적이며, 대부분 전설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이라면? 복음서가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탐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신약의 다른 내용은 어떨까? 놀랍게도,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 야고보서, 요한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은 예수의 역사성에 전혀 관심이 없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제자들에 대한 얘기를 한다. 만일 제자들의 존재가 확실히 증명된다면 그 증명을 기초 삼아 예수의 존재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네 복음서에서는 12사도의 이름 외에는 뾰족한 기록이 별로 없다. 게다가 12사도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일관성을 잃고 있다. 마가복음·마태복음·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가장 중요한 제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사소한 역할을 할 뿐이고, 야고보와 요한은 언급되지조차 않는다(요한복음 21장에서 '세베데의 아들들'이 언급되고 있지만, 통설과 달리 이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요한복음 21 장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며, 원래는 20장이 마지막 장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 저자주).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나다나엘과 니고데모를 사도에 포함시키는데, 다른 세 복음서에는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사도들의 이름 목록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아주 서툴게 제시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도들의 수가 원래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 이름들도 후대에 삽입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요한복음은 이름들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6장을 보면 '여럿' 이라거나 '많이' 라고 제자를 묘사를 하다가, 곧이어 느닷없이 '열두 제자'를 택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교회 역사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예수 부활 후 12사도가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가 12명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면서도 12명 중 9명에 대해서는 이름밖에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은 사실상 12명 가운데 베드로에게만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15장 이후부터는 베드로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거기서부터는 바울 얘기만 나오는데, 바울은 12사도 가운데 1명이 아니었고, 예수를 만난 적도 없다는 사람이다. 사도행전은 믿을 만한 사건의 기록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신약을 번역한 그리스도교인 A. 가우스가 시인했듯이, 사도행전은 '잡화점에서 파는 대중 서적'을 닮았다---잡다한 모험과 환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5장에서 아나니아라는 신도가 자기 땅을 팔아서 일부만 사도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제 몫으로 챙긴다. 베드로가 그를 꾸짖자 느닷없이 엎어져 죽어 버린다! 베드로는 그의 죽음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세 시간 후 그 가난한 신도의 아내에게 똑같은 재주를 펼쳐 보인다. 베드로가 '네 남편을 매장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너 또한 메어 내가리라'하고 말하자마자 그녀는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어져 혼이 떠나' 버린다. 당연히 '이 일에 대한 얘기를 들은 모든 사람과 온 회중이 크게 두려워했다. 베드로는 재산을 공유하지 않고 부정직하게 숨긴 자를 즉석에서 죽게 했지만, 그 정도의 재주는 별것도 아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빌립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원격 이송' 될 수도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거세된 남자에게 세례를 준 후 갑자기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즉각 아소도에 나타난다(사도행전 8:38-40). 또 '베드로와 큰보자기' 이야기의 과장법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6시(정오)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할 때에,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그 안에는 땅에 있는 모든 네 발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사도행전 10:9-13). 이러한 사도행전에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거를 찾지 않는 게 안전할 것이다. 게다가 사도행전은 1명의 저자가 쓴 것이 아니다. 16장과 27장, 28장에서 느닷없이 이야기가 3인칭 진술에서 1인칭 진술로 바뀐다('그들'이 '우리'로 바뀐다. 개역 <성서>는 직접화법을 큰따옴표로 묶어 놓지 않아서 아주 꼼꼼하게 읽어야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 개역 <성서>에서 그들They 은 '저희'로 번역되어 있는데, 예컨대 16장 10절에서는 '저희' 가 '우리'로 바뀐다 : 저자 주). 따라서 사도행전은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스크랩하여 편집한 작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도행전이 내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예컨대 9장에서 바울은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에서 비춘 빛을 보고 신성한 소리를 듣는다. 같이 가던 사람들에게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9:7). 그러나 22장 9절에서 바울은 그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또한 사도행전에 적힌 바울의 증언은 갈라디아서에 적힌 그의 증언과 모순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앞에서 언급한 경험을 한후, 눈이 멀게 된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나라는 명을 받는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안수(按手)하여 눈이 다시 보이게 해 준다. 그 후 예루살렘으로 간 바울은 바나바의 소개로 여러 제자를 만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은 두번째로 예수를 보고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바울이 직접 썼다는 편지 내용과 사뭇 다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아나니아를 언급하지도 않으며 개종 체험 후 3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17). 이어서 그는 열정적으로 이렇게 기술한다. '하나님 앞에서 확실히 말하노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에서 나는 거짓말을 하지않노라'(1:20). 그렇다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마가복음에서처럼 사도행전에서도 헤브라이어 구약을 잘못 인용한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자기 말을 입증하기 위해 구약을 인용하지만, 그 인용문은 그리스어로 전혀 잘못 번역된 구절이다. 원래의 헤브라이어 구절은 뜻이 전혀 다르다. 또 사도행전(15:13-41)에서,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헤브라이어 원전을 왜곡한 그리스어 구절을 인용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을 설득하려고 한다---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증거만 놓고 불 때에도, 사도행전을 예루살렘 교회의 역사적 기록으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학자들은 결론지었다. 사도행전이 씌어진 시대에 대한 증거는 그런 결론을 뒷받침한다. 사도행전은 2세기 말에 살았던 이레나이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성서>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 세대 일찍 살았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사도행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사도행전은 AD 177년 이전에 인용된 적이 없다. 그러니 사도행전은 분명 당대에 씌어진 것이 아니라 AD 150년에서 177년 사이에 씌어졌을 것이다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사도들의 행위를 기술한 여러 판본의 원고가 유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경(正經)으로 인정 받지 못한 이 원고를 역사적 증거 자료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계시적 사도행전>, <요한 행전>, <베드로 행전>. <바울 행전>, <안드레 행전>, <도마행전>, <베드로와 12사도 행전> 등이 있었다 : 저자 주).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가 사도행전을 역사적 자료로 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것을 신약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5세기에 대교황으로 일컬어지는 레오 1세(?-461)는 요한, 베드로, 바울, 안드레, 도마의 신화적 업적을 다른 행전을 위험한 이단적 거짓말로 평가하고 금서로 지정하는 한편 모두 불태워 버리게 했다. 사도행전만이 그런 운명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그것이 로마교회의 '정책 노선'을 뒷받침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가장 초기의 증거 사도행전 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어두자. 그럼 신약의 베드로서, 야고보서, 요한서는 어떨까? 그것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안타깝게도 현대의 고전학자들은 이들 편지가 초기 교회 내부의 이단적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훨씬 후대에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런데 탁월하게 위조하지도 못했다. 번역자인 A. 가우스가 베드로후서에 대해 썼듯이. 이 편지에서는 사도들이 이미 죽어서 묻혔다는 듯이 사도들을 '조상들' 이라고 일컫는다(베드로후서 3:4에서 '조상들이 잔[죽은]후' 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가우스와 이 책의 사람은 이 '조상들'이 곧 사도들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아무튼 베드로후서 3:2에는 '사도들'이 전한 구주의 명을 환기시키겠다는 말이 나온다. '사도'인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베드로가 고작 다른 사도들의 말을 환기시키기나 하는 정도의 존재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옮긴이 주). 따라서 이것은 분명 베드로의 글이 아니다. 다만, 반이단적 메시지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베드로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베드로전서와 후서는 베드로와 바울의 우호적 관계를 보여 주기 위해 3세기에 위조된 것이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 사이가 나빴다. 베드로후서 3:15에는 낯간지럽게도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 이라는 말이 나온다. 유세비우스는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와 삼서를 문제가 많은 것으로 간주했고 디디무스는 AD398년에 베드로후서를 위서라고 선언했다 : 저자 주). 베드로서는 널리 위서로 간주된 탓에 신약의 정경(正經)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바울의 편지는 어떨까? 적어도 바울만큼은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학자들은 '목희 서간' 으로 알려진 그의 후기 편지들, 곧 디모데서와 디도서가 위조된 것이라고 믿는다. 후기 편지는 초기 편지와 내용이 모순된다. 다른 사도들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목회 서간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AD 2세기에 씌어졌다. 그러나 초기 편지들은 그것이 스크랩 편집되고 추가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울이 쓴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바울은 AD 70년 이전에 편지를 썼다. 그러니 바울의 편지는 사실상 네 복음서보다도 먼저 씌어진 셈이다. 바울의 편지야말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 문서이며, 기본 내용에 있어서 일부 편지는 바울의 진짜 편지다. 적어도 이 편지만큼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가치가 있다! 그러나 너무도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그런 관심은 전적으로 신비한 가르침에 중점을 둔다. 바울은 스스로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밟힌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는(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얻은 것이다'(갈라디아서 1:12). 바울은 예루살렘이나 빌라도를 언급하지 않는다. 나중에 더 깊이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관원들', 혹은 '이 세대의 지배자들'---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악마의 세력---이 선동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한다. 사실상 바울은 예수를 어떤 역사적 시대나 장소와 관련시키지 않는다(신빙성이 없는 목회 서간 가운데 하나인 디모데서에서는 빌라도를 언급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는 다만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말할 뿐이다 : 저자 주). 바울의 그리스도는 이교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초월한 신화적 인물이다. 바울은 나사렛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며, 나사렛 예수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세례 종교로 묘사하지만, 세례 요한을 언급하지 않는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특정 산에서 설교하는 예수, 그의 비유,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로마 관헌과의 충돌 등에 대해 그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심지어 주기도문도 모른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하며,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8:26)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개역 <성서>에는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애매하게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바울이 실제로 얼마 전에 죽은 메시아를 섬긴 인물이었다면, 자신의 전도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사도들을 찾아갈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찾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자신의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예수가 신화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면, 바울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정식으로 인용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생애를 결코 언급하지 않았고, 예수의 말을 단 한 번만 인용한다. 그런데 그 인용문은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영성체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는 공식 문구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린도전서 11:24-25).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그는 예수가 '잡히시던 밤에', 혹은 다른 번역에 의하면 '배반당한 밤에' 그런 말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쪽 번역이든 간에, 그런 번역은 예수의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스어 원문을 왜곡한 것이다. 원래의 그리스어로는 '넘겨지는delivered up' 때에 그런 말을 했다. 넘겨진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음으로 넘겨지는 자, 곧 파르마코스 희생양)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바울은 예수를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의 권위로 윤리적 가르침을 베푼다.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싶을 때에는 구약을 인용한다. 예수의 말을 인용해도 효과가 마찬가지이거나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때에도 구약만 인용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유대 율법은 의미를 잃었다고 가르치지만 정확히 그러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예수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다. 천국을 위해 결혼을 포기한 자를 예수가 칭찬한 구절이 있지만, 바울은 자신의 독신 생활을 변호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부활할 때 사람의 육체가 변한다고 바울은 주장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가복음 12:25). 그런데 그가 스승의 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결코 인용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까?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지 않지만, 흔히 복음서에 언급되는 두 사도인 것으로 간주되는 요한과 야고보의 이름을 언급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이름만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야고보에 대해서는 '주의 형제' 라고 칭한다. 이러한 호칭은 바울이 역사적 그리스도를 인정했다는 증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형제인 야고보를 만났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다. 마태복음(28:10)과 요한복음(20:17)에서 예수는 추종자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부른다. 이 형제들은 물론 예수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다. 영지주의 복음서인 <야고보의 계시록>에는 야고보가 '순수한 영적 의미에서만 주의 형제라 일컬어진다'고 씌어져 있다. 바울은 또 어떤 '게바'를 언급한다. 전통적으로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진다. 베드로는 원래 시몬이라고 불렸지만, 복음서마다 다른 상황에서 예수가 그에게 '게바', 곧 '반석' 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아람어 '게바'는 그리스어로 '베드로'이다. 그렇다면 게바는 베드로와 같은 인물일까?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단 한 번 '베드로'를 언급하지만, 게바와 베드로를 동일 인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사도들의 편지>라는 초기 그리스도교 <성서>는 11 사도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세 번째 사도는 베드로라 불리고, 마지막 11번째 사도는 게바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분명 게바와 베드로를 동일시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그들을 반드시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현대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게바가 베드로의 다른 이름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예수와 알고 지낸 베드로가 곧 그 게바일까? 우리는 복음서 이야기에 너무 친숙한 나머지 그렇게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만난 게바가, 개인적으로 예수와 만난 적이 있는 복음서의 베드로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그의 편지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그의 편지에 등장하는 게바와 바울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게바가 역사적 메시아의 오른팔이 아니었다는 심증만 굳혀 준다. 바울은 게바에게 너무나 적대적이어서, 강한 어조로 그를 비난한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갈라디아서 2:11). 바울이 게바를 책망한 것은 게바가 유대 율법을 따를 뿐만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교인과 함께 먹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게바가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라면, 예수가 죄인들이나 매춘부와 함께 먹고 마셨으며 유대 율법을 어겼다는 비난에 대해 당당히 자기 변호를 했다는 사실을 게바는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바울은 게바를 외식하는 자(위선자)라고 책망한다(갈라디아서2:13). 그러나 책망하는 이유가 핵심에서 빗나간다.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와 함께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을 자버린 나머지 예수의 책망을 받았고,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으며, 마가복음(8:33)에서는 예수가 직접 베드로를 '사탄'에 비유했을 정도의 인물이다. 게바가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라면 바울은 바로 그런 점을 책망했어야 마땅한데, 비교적 사소한 것을 책망할 뿐이다. 바울의 편지에 등장하는 게바가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와 같은 인물이라는 믿음을 정당화시키는 데 쓰일 수 있는 것은 짧은 한 구절 밖에 없다. 부활한 예수에 대한 기록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성서>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500명 이상의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맨 나중에......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5-8). 이것은 아주 이상한 구절이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이스가리옷 유다는 이 무렵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예수는 11명의 제자에게만 나타날 수 있었다. 게다가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니 또다시 우리는 어느 기록을 믿어야 할지 곤혹스럽다. 위 구절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위 구절에 따르면, 수백 명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어떤 게바라는 사람도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는 신비한 체험을 했으며, 바울 자신도 그러했다. 이때 바울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것일까? 혹시 신비한 의식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이것은 급진적인 해석처럼 들릴 것이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수천 명의 입문자들은 역사적 인물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만나지 않았어도 부활한 신인을 체험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일리가 있지만 달리 해석하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갈라디아서(3:1-3)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구원에 대한 영적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육체(물질)' 에 연연한다고 꾸짖는다. 이들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가 못 박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까?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이 감히 역사적 목격자들을 꾸짖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 수난의 극적 재현을 목격한 것이라면, 바울의 말은 이치에 맞게 된다. 갈라디아서(3: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Having begun by the Spirit, are you now being perfected by the flesh? 개역 <성서>의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는 번역은 의미가 애매해서, '육체로 죽겠느냐?' 정도의 뜻으로 이해되기 십상인데, 영문으로 보면 이런 뜻이다 '육체적으로 온전해지려고 하느냐?' : 옮긴이 주). '온전해진다'는 것을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입문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책망을 받는 게바는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의 지도자였고, 바울과는 신학적 라이벌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 문서인 바울의 편지들도 역사적 예수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사실은 그리스도교인 공동체가 이미 1세기 중반에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옛 유대율법을 대체했다고 보는 바울 등의 무리와, 예루살렘의 친유대적 그리스도교인 무리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편지에 나타나는 게바, 요한, 야고보가 복음서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는 것은, 우리가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바울의 편지보다 늦게 씌어진 것이다.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실존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볼 수 없다---바울은 그런 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네 복음서는 바울의 편지 이후에 씌어졌고, 역사적 문서라기 보다는 신학적 문서인 것으로 밝혀져 왔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바울이 먼저 언급한 게바, 야고보, 요한이라는 이름을 채택해서 예수 전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신화의 발달사 이제까지의 증거에 따르면, 신약은 실제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화의 발달사를 보여 준다. 가장 초기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미 존재한 파편들을 편집한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마가복음을 수정하고 덧붙여서 새로운 버전의 예수 생애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 저자들은 마가복음을 손상시키면 안 되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으로 보지 않았다고. 그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을 변경시켜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도 않았다. 필요에 따라 윤문할 수 있고 첨삭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믿은 게 분명하다. 그것은 이교도 철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발전시키고 다듬어 왔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마가복음은 예수 이야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아니다. 가장 초기의 기록은 바울의 편지이다. 바울의 여러 편지가 네 복음서보다 먼저 씌어졌으며, 사도행전보다 약 100년은 먼저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편지는 신약 뒷부분에 실려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바울의 글이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뒤에 씌어졌고, 그 반대가 아니라는 잘못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바울의 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주목조차 하지 않기 십상이다. 그러나 씌어진 순서대로 배열한 신약을 읽게 된다면, 우리는 예수 이야기가 발전해 가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신화적으로 죽어서 부활한 바울의 그리스도는 마가복음에서 원시적인 이야기 형태로 발전한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에 의해 내용이 추가된다. 그 후 좀더 철학적으로 전개된 요한복음이 등장한다---'로고스' 교리가 추가되며, 예수는 세련된 장문의 그리스어로 가르침을 펼친다. 이윽고 사도들에 대한 전설 모음집이 나타나고 위조된 여러 편지가 나타난다. 이 편지들은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예수를 전제로 하며, 이단적 그리스도교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도들의 권위를 빌린다. 이런 식으로 신약을 살펴보면, 그리스도교의 발달사가 저절로 드러난다. 바울의 여러편지 서기 약 50년 예수는 신화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이다. 마가복음 서기 70-110년 예수 신화는 역사적,지리적 배경을 갖는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서기 90-135 예수의 탄생과 부활에 대한세부 이야기가 추가되고, 이야기가 윤문된다 요한복음 서기 약 120년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한다. 사도행전 서기 150-177년 역사적 예수에 대한 환상이 다 만들어졌으니 이제 그의 사도들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사도들의 편지 서기 177-220년 문자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수많은 '미혹하는자' (요한2서 1:7)를 공격하며, 영지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 바울과 사도들의 편지를 위조한다. 가장 초기의 예수 전기인 마가복음의 원래 버전에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그처럼 추가되기 이전의 마가복음은 여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고, 예수가 약속대로 부활했다는 것을 암시만 하고 끝난다. 아주 특이하게도, 영지주의의 여러 복음서는 마가복음이 끝난 곳에서 시작한다. 영지주의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비밀 가르침을 기술한다. 이러한 사실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마가복음에 기록된 원래의 준(準)역사적 예수 이야기가 영적 초보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꾸며 낸 공개적 미스테리아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공개적 미스테리아는 초보자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의 입문식을 치르도록 유도한다. 영지주의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비유라는 것을, 비밀 가르침을 통해서만 알려 준다. 입문자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 단계에서 참된 미스테리아 단계로 넘어간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신비한 단계로 넘어가면 그리스도, 곧 영원히 사는 보편적 다이몬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론 우리 두 사람보다 먼저 앞서의 탐구를 행한 무수한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찾는다는 것이 헛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온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유일한 성육신이었다고 일컬어지는 한 인간의 역사적 존재에 대한 실질적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정말 우리에게는 증거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로마인이 남긴 광범위한 모든 역사 기록 가운데, 크레스투스라고 불린 사람의 추종자들과 '그리스도교인들'이 남긴 몇 마디의 말. 유대인들의 모든 실질적 역사 기록 가운데, 요세푸스의 저서에 삽입된 위조 구절 <탈무드>의 광범위한 문헌 가운데 몇 구절 : 예수Yeshu라는 어떤 사람이 존재했으며, '마타이, 나키아, 네처, 부니, 토다'라는 다섯 제자를 거느렸다는 구절. 예수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세부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저자 불명의 네 복음서 AD 70년에서 110년 사이에 씌어진 마가복음 : 목격담으로 쓰겠다는 의도에 따라 집필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지리에 무지했고, 헤브라이어 <성서>를 잘못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분명 목격담이 아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 마가복음을 토대로 해서 씌어졌으며, 완전히 다른 족보를 제시한다. 요한복음 : 다른 세 복음서 이후에 씌어졌으며, 사도 요한이 쓰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역사적 증거가 없는 12사도의 이름. 사도행전 : 판타지 소설 같은 내용이 담겨 있으며, 헤브라이어 구약을 잘못 인용했고, 바울의 편지 내용과도 모순되며, 2세기 후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의 이름을 빌려 위조한 편지들. 바울이 쓴 소수의 진짜 편지 : 역사적 예수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다만 신비하게 죽어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신약이 실제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화의 진화사라는 것을 시사하는 수많은 증거. 우리가 절실히 믿고 싶다면,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은 역사적 예수의 증거일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가 신화적 인물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가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우리 두 사람이 그런 증거를 묵살할 수 있으려면 위의 증거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마침내 기존의 가정 하나를 완전히 포기했다. 즉, 예수의 진짜 전기를 이교도 신화에 덧씌워서 왜곡시킴으로써 복음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가정을 포기한 것이다. 또 우리는 1920년대에 독일의 한 수도사 집단이 '미스터리 이론Mystery Theory' 이라고 부른 별난 생각도 포기했다. 이 이론은 예수 전기와 미스테리아 신화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한 후, 과거에는 그저 신화였을 뿐인 예수 이야기가 신성한 계획의 클라이맥스로서 마침내 역사적으로 구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사실상 악마의 모방 이론을 다소 부드럽게 변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이야기는 신화로 보고, 예수 이야기만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는 관점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것은 그저 문화적 편견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예수가 존재했어야만 그리스도교가 힘을 얻고 호소력을 갖는다고 흔히 주장되어 왔다. 카리스마를 지닌 창시자의 성령감응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생길 수 있고, 어떻게 고대세계 전체에 퍼질 수 있겠는가?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는 그런 의문을 풀어준다.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 없이도 가능하다! 디오니소스의 미스테리아, 미트라스, 아티스, 세라피스 등 신화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한 온갖 신인들의 미스테리아가 그랬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도 처음에는 예수 미스테리아로 생겨나서 고대세계에 널리 퍼졌다고 불 수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그런 가정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을 연구하면서 의심의 영역이 더욱 넓어졌다. 우리가 역사적 실존 인물로 알고 있는 바울이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인이며,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내로 영지주의자들이 원래의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분명 우리는 바울이 영지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바울이 열렬한 반영지주의자인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명제에 큰 결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또 다시 기존의 견해에 감히 도전해서 직접 여러 증거를 면밀히 살펴보기로 했다. 8장 바울은 영지주의자 였는가? 바울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초기 여러 편지에 대한, '객관적' 분석으로 통용되는 것의 대부분은 2세기 이교 연구자들의 해석이거나 분석이다. 그들의 말처럼 바울이 명백히 반영지주의자였다면, 어떻게 영지주의자들이 바울을 위대한 영적 스승으로 받들 수 있단 밀인가? 그들이 '입문자'들에게 지혜와 그노시스의 비밀 가르침을 줄 때, 어떻게 바울을 모범 사례로 들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의 부활 신학을 어떻게 그들 신학의 윈천이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정통 그리스도교의 육체적 부활 교리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어떻게 그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단 말인가?---일레인 페이절스 사도 바울은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교인이다. 신약에는 그가 썼다는 13종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 분량은 그리스도교 정경(正經) 전체의 4분의 1에 달한다. 게다가 사도행전의 대부분이 바울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정작 바울은 누구인가? 전통적으로 바울은 이단적 영지주의자에 맞서 싸운 십자군 전사이며 정통파의 요새로 여겨진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 바울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정반대로, 2세기초의 위대한 영지주의 현자들은 바울을 '위대한 사도' 라고 일컬었고, 최초로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의 영감을 준 자로 바울을 숭상했다. 발렌티누스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선택된 소수의 사람을 그리스도교의 '더욱 심오한 미스테리아'에 입문시켜서, 하나님의 비밀 가르침을 전수했다고 한다. 이들 입문자 가운데 발렌티누스의 스승인 테우다스가 포함되어 있다---테우다스는 물론 발렌티누스를 입문시겼다. 다수의 영지주의자 집단은 바울을 영지주의의 창시자라고 주장했다. 스스로를 '바울의 사람' 이라고 주장한 영지주의자들은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를 받으면서도 10세기 말까지 계속 번성했다. 바울은 일곱 도시의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2세기에 그 도시들에는 영지주의 그리스도교 본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공동체는 영지주의 현자 마르키온이 이끌었다. 마르키온에게는 바울이 유일한 참사도였다. 만일 바울이 문자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반영지주의자였다면, 영지주의 문헌들이 그토록 많이 바울의 말을 인용할 뿐만 아니라 그 문헌들이 바울의 글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그 함마디의 장서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와 <바울의 계시록>이 포함되어 있다(<바울의 계시록>에는 바울이 10개의 하늘---낮은 수준의 일곱 하늘과 신적인 세 하늘---을 보았다는 기술이 나온다. 바울은 고린도후서(12:2)에 나오는 것처럼 '셋째 하늘'에만 올라간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문헌인 <집정관들의 본질>에서는 바울을 '위대한 사도'라고 일컬으며, 골로새서1:13에 나오는 '흑암의 권세'에 관한 가르침을 설명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흑암의 권세는 운명을 다스리는 행성과 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저자 주). 또 <바울의 승천>이라고 불리는 문헌에는 '사람이 감히 입에 담을수 없는 신성한 말씀'이 담겨 있는데, 고린도후서에는 셋째 하늘에 올랐을 때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암시만 되어있다. <바울 행전>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문헌에는 바울이 테클라와함께 여행을 하는 얘기가 담겨 있는데, 테클라는 세례를 행한 여자는이다! 진짜 바울? 진짜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 영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그는 정말 영지주의자였을까?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현대의 고전학자들은 바울의 편지 가운데 상당수가 위조된 것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신약에 나오는 바울의 편지 13종 가운데 오직 7종만이 진짜인 것으로 간주된다(로마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 저자주). 바울의 초기 편지 모음집에는 목회 서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이레나이우스(약 190년)가 제시하기 이전에는 목회 서간의 존재에 대한 언급도 없다. 목희 서간은 190년 이후에 항상 한 세트로 묶여서 정전의 일부로 나타나는데,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이것을 위조라고 생각했다. 정통 선전자인 유세비우스(약 325년)조차도 이것을 자신의 <성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이 반영지주의자로 나타나는 문헌은 목회 서간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진짜 편지와 달리, 목회 서간에서 바울은 교회의 조직자이자 교회 기강의 버팀목이며, 모든 이단자에 대한 확고한 적대자로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은 영지주의 신화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디모데전서 4:7)라고 비난한다(영문 <성서>에는 '늙은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부정한[세속적인] 이야기'라고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그리고 바울은 추종자들에게 '외래의 교리를 가르치지 말며, 헛된 생각만 일으키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관심을 두지 말라'(디모데전서 1:3-4)고 훈계한다. 2세기 말 무렵에 영지주의 교사로서의 바울의 견해는 분명 너무나 위협적이어서, 대옹논리로서 문자주의자 바울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자주의자 바울은 특히 이렇게 충고한다. 디모데야 네게 전해 내려온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Gnosis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그노시스를)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디모데전시 6:20-21). 바울은 또 교회의 권위를 강화한 자로 나타난다---'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라'(디모데전서 5:20). 그는 특히 '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영지주의 스승인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공격한다(디모데후서 2:17-18). 그러나 그의 진짜 편지에서 바울은 스스로 이미 '부활한' 자라고 주장한다. 세례를 행한 테클라라는 여자와 함께 바울이 여행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자를 남자와 평등한 존재로 여긴 영지주의 관례를 공격하는 자로 나타난다. 여자는 전적으로 순종하며 묵묵히 배우라(지시를 받아라).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용납치 않으리라(디모데전서 2:11-12). 이후 2세기 말에 바울은 반영지주의자이자 권위주의자인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으로 그려진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사실상 그것은 문자주의자들의 관점일 뿐이다. 당시에서 몇 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그들의 관점은 정반대였다. 2세기 초반에 로마의 클레멘스 주교는 바울을 이단자라고 맹렬히 공격하는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 의하면, 베드로는 바울을 사도라고 할 수도 없다고 격렬히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만이 사도로 간주될 수있는데, 바울은 사실상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보았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악한 악마나 거짓 악령의 계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의 '적'인 바울에게 '화'를 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설교가 예수의 가르침과 모순 되기 때문이다. 이 편지에 의하면, 베드로는 바울을 '적'으로 여긴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유대 율법을 버리라고 가르쳤고 '율법에서 벗어난 어리석은 가르침'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이단적인 복음을 만들어 냈다는 비난을 받는다. 예수의 참사도들은 그러한 이단적 가르침을 바로잡기 위해 '참복음'을 은밀히 펴내야 한다. 동시대인인 원조 이단자 시몬 마구스처럼, 바울은 악마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한 자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에서 추방해야 하는 위험한 자이다. 바울과 이교도 미스테리아 바울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잠시 잊고 열린 마음으로 증거를 살펴보면, 위와 같이 바울을 적대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바울의 편지는 영지주의적이며 이교도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고대 그리스 문화를 수용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처음 배운 것이 그리스어였다. 그는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만을 인용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지배를 받는 이교도 도시에서 설교했다. 그 도시들 가운데 안디옥은 아도니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고, 에베소(에페소스)는 아티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으며, 고린도(코린토스)는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다소(타르수스 : 오늘날 터키의 중남부)에서 출생했다. 당시에 그곳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이교도 철학의 최고 중심지였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가 발생한 곳도 바로 다소였다. 그러니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리스도교 교리와 미트라스신앙의 가르침 사이의 현저한 유사성을 바울이 몰랐다고는 보기 어렵다(다소는 당시 킬리키아 왕국의 수도였다. BC 67년에 다소에서 미트라스 미스테리아 의식이 거행되었다는 플루타로코스의 기록이 있다 : 저자 주) 바울운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용어와 구문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예컨대 프뉴마pneuma(영혼), 그노시스gnosis(신성한 앎), 독사doxa(영광), 소피아sophia(지혜), 텔레이오이teleioi(입문자) 등이 그것이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더욱 위대한 카리스마타를 열심히 추구하라'. '카리스마타charismata'는 미스테리아 용어인 '마카리스모스makarismos'에서 유래한 말인데, 미스테리아를 목격한 사람의 축복받은 본성을 가리킨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의 미스테리아의 집사' 라고 일컬었다. 이 말은 원래 세라피스 미스테리아의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세라피스와 그의 배우자 이시스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인들의 숭배는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 닐리 퍼져 있었다. 바울은 실제로 세라피스 '미스테리아의 집사' 였을 수도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 시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곳에는 세라피스를 숭배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있다. 세라피스 숭배자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주교라고 부른다'. 이러한 말은 신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신약의 한 구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고린도 동편 1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항구 겐그레아에서 수리아[시리아]로 가는 배를 기다릴때 바울은 '일찍 서원한 바가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다'[사도행전 19:18]. 이것은 유대 율법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한 말이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단발을 해야 했다. 사실 겐그레아 근처에는 이시스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서 고대 그리스 선원들은 단발을 한 후,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머리카락을 '스텔라 마리스[이시스]' 여신에게 바쳤다 : 저자주) 바울은 이교도 현자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한다---아라투스는 수세기 먼저 다소에 살았던 인물이다. '우리는 그(하나님)의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사도행전 17:28)는 구절은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바울은 또 미스테리아 교리를 가르친다. 자신이 현명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 이교도 현자 소크라테스처럼,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따히 알 것을 알지못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8:2). 플라톤은 이렇게 썼다. '지상의 복제품에는 영혼에게 소중한 이데아의 빛이 없으므로, 그것들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인다(<파이드로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불 것이다 (고린도전서 13:12). 바울의 이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실재의 곤혹스러운 반영이다. 우리는 작은 거울로 풍경을 보는 사람과 같다. 때가 되면 우리는 실재 전체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될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바울의 가르침이 명백히 플라톤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플라톤은 동굴에 간힌 죄수의 이미지를 비유로 사용했다. 동굴 벽에 드리워진 바깥 세상의 그림자만 볼 수 있는 죄수는 궁극적인 실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실재라고 잘못 알고 있다. 그런 죄수의 상태는 우리의 현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실재의 곤혹스러운 반영이다'. 동굴에서 해방되어 밖으로 나가 눈부신 햇빛 속에서 직접---'얼굴과 얼굴을 맞대고'---실재를 보는 자가 바로 철학자라고 플라톤은 가르졌다. 이러한 구절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공식 문구이다. <바카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나에게 미스테리아를 건네 준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입문식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아래의 신들과 위의 신들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숭배한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시인했다. '플라토니즘의 목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영역에 존재하는 '참세계' 의 신전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루어지는 신들과의 교섭'에 대해 쓰기도 했다 영지주의자 바울 바울의 예수는 신비하게 죽었다가 부활한 영지주의의 신인이다. 문자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적 인물이 아닌 것이다. 바울이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다루는 듯이 보이는 유일한 편지는 디모데서이다. 디모데전서(6:13)에서 바울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말하지만, 이 편지는 위조된 것이다. 진짜 바울은 영지주의의 도케티즘(환상설) 교리를 가르치며, 예수가 한 인간으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육신의 '탈likeness'을 쓰고 왔다고 말한다---로마서(8:3)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탈을 씌워 보내셨다(sent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 (개역 <성서>에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모양'보다는 '탈'로 번역할 때 의미가 좀더 명료해진다. 예컨대 'God in the likenessof a man' 이라는 문장은 '사람의 탈을 쓴 신' 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주). 또 빌립보서(2:7-8)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이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 '인간의 탈을 썼다'(bearing the human likeness, 혹은 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an : '사람들과 닮은꼴이 되었다'고 번역할 수 도있다. 개역 <성서>에는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번역 되어 있다 : 옮긴이 주) 바울의 편지는 그처럼 명백하게 영지주의 교리로 가득 차 있다. '셋째 하늘' 까지 올라갔다는 바울의 유명한 주장이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여간 어리둥절하지 않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나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라면 그것은 전혀 어리둥절한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일곱 천체(눈에 보이는 다섯 행성과 달과 태양)와 연계된 일곱 하늘이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처럼 바울은 종교 외적인 것---의식, 성스러운 날, 율법, 법규 등---을 지극히 멸시한다. 다른 영지주의자들처럼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베일로 얼굴을 가린 것처럼 아니'하고, '베일을 다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예수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른다'(고린도후서3:12-18). 영지주의자들은 바울을 은밀한 '영적' 입문자들의 스승으로 보았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어떤 영적 은사pnumatic charisma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다'(로마서 1:11). 바울이 열렬히 나누어 주고 싶어한 것이 복음이라면, 그 복음의 내용을 왜 편지에 쓰지않았을까? 영지주의자들은 이렇게 답한다 '영적 은사'란 입문식이라고. 입문식은 직접 만나서 '은밀히' 거행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린도전서 2:9) 입문자라면 이러한 말이 미스테리아 입문식 때 선언된 공식 문구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것이다. 영지주의 현자 유스티누스의 추종자들이 한 비밀 맹세에도 이러한 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지주의의<도마의 복음서>에도 예수가 그런 말을 하는 대목이 있다.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듣지 못했고, 만져지지도 않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 바울의 편지들이 영지주의의 독특한 문구와 가르침으로 가득 차있다는사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부적절하게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지주의의 일파인 발렌티누스파는 바울이 그리스도교인들을 '소피아의 미스테리아'에 입문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미스테리아 신화에는 소피아 여신의 타락과 구원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발렌티누스파는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 편지를 증거로 인용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입문자들과 더불어 소피아에 대해 말한다'(고린도전서 2:6). 독자께서는 이처럼 결정적인 영지주의적 문장을 고린도전서에서 본 적이 없다는 게 이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문장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전한 자들과 더불어 지혜를 말한다'. 이런 번역은 그럴듯한 정통파의 말처럼 들리지만, 전체 문맥상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전통적인 번역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 자들과 더불어 지혜를 말한다. 하지만 이는 이 세상world의 지혜가 아니며, 이 세상world의 없어질 관원들rulers의 지혜도 아니다. 오직 우리는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지혜는 감춰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world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world의 관원들 가운데 아무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린도전서 2:6-8). 이해가 되는 듯싶을지는 몰라도, 이런 번역은 바울의 살제 말뜻을 왜곡한 것이다. 현대의 고전학자인 S. 브랜던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문장의 참뜻은 결정적으로 두 곳에서 애매하다. 여기서 단수형이나 복수형으로 여러 차례 'world'로 번역된 말이 원래 그리스어로는 아이온aion이다. aion은 물리적 세계나 지상을 뜻하는 게 아니라 '시간time', 혹은 '시대age' 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aion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각 '세속 시대world-age'라는 비교(秘敎)의 용어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world' 대신 전부 'age'로 번역한 영문 <성서>도 있다. 개역 <성서>에는 절충되어 있다. 아무튼 이 말은 번역에서 느껴지는 것과 달리 특정 세상을 언급한 말이 아나라, 보편적인 인간 세대를 가리킨다는 듯이다 : 옮긴이주) 다음으로, '관원들' 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아르콘테스archontes는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것과는 달리, 예수를 처형한 책임이 있는 로마인이나 유대인 당국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행성들과 관계가 있으며, 지상의 삶을 지배한다고 믿은 악마적 존재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문장에서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일련의 세속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인류를 위해, 선재(先在)한 신적 존재를 세상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세속의 악마적 지배자들은 신적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처형을 했으며, 따라서 어느 면에서는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렸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바울은 천문 현상과 관계된 악마적 존재들에 의해 인류가 노예화된 것으로 상상했다. 바울은 악마적존재를 '세속 시대의 아르콘테스'나 '우주의 근본 원소들(stoicheia tou kosmou)'과 같은 여러 용어로 표현한다. 인류는 신적 존재에 의해, 죽어야 할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되었으며, 예수라는 인격으로 환생한 신적 존재는 '아르콘테스'에 의해 실수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아르콘테스는 본의 아니게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바울은 영지주의를 설교하고 있는것이다. 바울은 '완전히 입문한 자' 에게만 가르칠 수 있는 그노시스에 대해 얘기했다. 바울은 기도를 하며 '너희 사랑이 지식Gnosis으로 더욱더 풍성하게'(빌립보서 1:9) 되기를 빌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Sophia와 지식Gnosis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다'(골로새서2:3)고 썼다. 이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비밀Mystery의 지식Gnosis인 그리스도'(골로새서 2:2)라고 썼다(개역 <성서>에서는 '그노시스' 곧 '지식' 이라는 낱말이 삭제된 채, 다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그노시스가 곧 그리스도' 라는 바울의 중요한 말을 왜곡한 셈이다. 참고한 영문 <성서>에는 삭제되어 있지 않다. <성서>는 인간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이라면서, <성서>의 중요 낱말을 그렇게 무단 삭제해 버리고 번역했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옮긴이 주). 영지주의자가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비밀을 지키듯이, 바울은 낙원에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고린도후서 12:4)을 들었다고 단언했다. 영지주의자답게 그는 교리가 아닌 깨달음을 강조하며 이렇게 썼다. '문자letter는 죽이는 것이나, 영은 살리는 것이다'(고린도후서 3:6). 또 영지주의자답게 바울은 <성서>상의 이야기가 '비유'(갈라디아서 4:24)라고 말했으며 '그런 일들' 은 '상징symbol' (고린도전서 10:6)이라고 썼다(개역 <성서>에는 '상징' 대신 '거울'로 다른 영문<성서>에는 '예exanples' 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부활의 사도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바울의 말을 인용해서 재림의 날에 죽은 자가 실제로 물리적 육체를 지닌 채 무덤에서 일어날 거라는 기이한 믿음을 뒷받침하려고 했다(문자주의자 이레나이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특히 그러했다 : 저자주).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관점을 지녔던 것이 분명하다.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부활을 영적 사건으로 보았다. 바울은 명백히 이렇게 썼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린도전서 15:50). 영지주의 현자 테오도투스는 바울을 '부활의 사도'라고 일컬었다.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부활을 약속된 미래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날수 있는 영적 체험으로 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그의 말은 분명 신비하고 비유적인 메시지이다. 바울에게 부활이란 죽은 후 보상으로써 소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입문자가 이미 체험한 어떤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은)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에베소서 2:5)고 과거형으로 썼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다 (에베소서 2:6)고 과거형으로 썼다(개역 <성서>에는 분명하게 과거형으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시제가 애매하다 : 옮긴이주). 영지주의자들처럼 바울은 예수의 수난이 과거사가 아니라 신비하고 항구적인 현실이라고 설교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함으로써 각 그리스도교 입문자는 낮은 수준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로 부활한다(로마서 6:4에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과거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죽음은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같이 우리도새 생명'을 얻기 위함이었다 : 저자주).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함께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야' 한다고 썼다(빌립보서 3:10-11).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과거에). 이제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갈라디아서 2:20).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예수의 수난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며 이렇게 썼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문한 우리는 그의 죽음에 입문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그의 죽음에 입문함으로써)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을 얻은 육체로 걸을 수 있도록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 또한 그가 부활한 대로 부활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우리의 옛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몸이 멸하며 다시는 우리가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로마서 6:3-6. 위 개역 <성서>의 '우리 옛 사람' 이라는 애매한 번역이 참고로 영문 <성서>에는 '우리의 옛 자아Our old self' 라고 명료하게 번역되어 있다 :옮긴이 주). 골로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이 힘을 다하여(골로새서 1:29) 복음을 전하고 '만대를 거치며 만세 동안 감춰진' '이 비밀'(골로새서 1:26)을 밝히는 임무를 하나님께 받은 자인데, '이 비밀' 이 '이제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썼다. 그렇다면 '이 비밀' 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울을 정통파 사도라고 생각하면 '이 비밀' 이란 예수가, 문자그대로 이 땅에 와서 거닐었고, 기적을 행했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죽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희소식' 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비밀 이란 영지주의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항구적인 신비주의의 말씀이다. 즉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보편적 영혼---로고스, 보편적 다이몬, 하나님의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비밀'인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골로새서 1:27)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보았다는 유명한 구절을 기록할 때 그가 '하나님이 나에게to me 그의 아들을 나타내셨다'고 쓰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이 문자주의자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썼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속에in me' (갈리디아서 1:17) 나타내셨다고 썼다. 바울의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보편적 다이몬의 상징이다---우리는 이 다이몬의 수족(지체)이다. 바울에게 예수는 다이몬처럼 여러 지체를 가진 한 몸이다---'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니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12:12). 또 '우리는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 12:4-5).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다.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의 지체이기 때문이다(에베소서 4:25).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예수를 보는 것은 일시적인 초보자 단계---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공개적 미스테리아---에만 국한된다고 가르쳤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영적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이야기를 비유로 이해했다. 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가르침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은 영지주의자들과 문자주의자들 모두에게 숭상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이야기가 두 가지 수준에서 동시에 유효하다고 가르쳤다. 공개적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위한 예비적 이야기, 그리고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신비한 알레고리,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수준으로 이해되면서도 얘기 자체는 동일하다. 영지주의자들의 말에 따르면 바울의 편지도 두 수준에서 유효하도록 꾸며졌다. 영지주의 현자 테오도투스의 말처럼 바울은 '동시에 두 가지 방식으로 가르쳤다'. 바울은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주를 알고 있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테오도투스는 주장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바울은 '태어나서 수난을 당한' '육체적' 구원자에 대해 가르쳤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선포된 복음'을 그가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르친 것은 '그것을 계기로 해서 그들이 앎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바울은 '영적인'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입문자는 수준에 따라 자기가 들을 수 있는 말을 취해서 듣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것이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2:14).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서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편지도 입문 하지 않은 자와 입문자가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밀 가르침을 암호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밀리에 구전되는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자들만이 바울의 심오한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이렇게 썼다. 발렌티누스는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발렌티누스파들은 그노시스에의 입문을 통해 바울의 편지를 다른 <성서>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수준에서 읽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의도한 것이라고 말한다.---이러한 영적 독서를 통해서만 비로소 단순한 외부적 '인상'이 아닌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은 바울의 편지에 감춰진 비유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암호를 체계적으로 풀이했다. 예컨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단순한 일상적 상황, 즉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비유한다. 즉 바울이 '유대인'을 언급하면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뜻하며, '이방인'을 언급하면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뜻한다.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을 의미하는 바울의 말로는 '이방인' 외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그리스인(헬라인)', '이면적 유대인Jews inwardly', '참된 이스라엘 사람'등이 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바울은 추종자들에게 영적 가르침을 주고 싶지만 그들이 '육신'의 수준에 속해서 영적 가르침을 줄 수가 없다는 실망감을 표현한다. 그래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가장 기초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만을 가르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먹이지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감당치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하는 마음과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리오(고린도전서 3:1-3). 바울은 추종자들이 아직도 기본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날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히브리서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도(교리)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께 향한 신앙과 세례의 가르침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또 다른 입문의 수준으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리하리라. 한번 비추임을 얻고(일단 계몽이 되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자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그런 다음)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음이라(히브리서 6:1-6) 바울이 사도들에게 버리라고 한 '교리의 초보'는 영지주의자라면 마땅히 말할 만한 것들이다. 회개, 믿음, 세례, 안수, 죽은 자의부활, 영원한 심판, 이러한 것들이 문자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의식이고 도그마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이런 것들은 다만 심적 수준의 공개적 미스테리아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이 사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영적 입문의 성령을 맛본 후 심적 관심사를 버리고 완전한 영적 수준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울과 여호와 영지주의자들처럼 바울은 예수 미스테리아가 유대인의 신 여호와의 율법을 능가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새 언약,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주었으므로 바울은 전통 유태주의의 낡은 언약을 평가 절하한다는 사실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이것을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이미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한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브리서 8:13). 영지주의자들처럼 바울은 율법에의 예속이 아니라 그노시스를 통한 영적 자유를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바울에게는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다'(로마서 14:14). 다만 속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속되다. 카르포크라테스와 같은 후대의 영지주의자들은 도덕성을 잃었다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자연 도덕성(natural morality)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인용했다.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먼저 말한 것은 '미치광이' 영지주의자들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게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린도전서 6:12.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을 연상시킨다. 일흔 살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옮긴이 주). 또 바울은, 심지어 유대교의 기초인 여호와의 신성한 전통 율법이 저주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라디아서 3: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라디아서 3:13).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함께 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입문자가 율법으로부터 구원 받아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얽매었던 율법에 따라 우리가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다'(로마서 7:6). 바울은 율법을 '중보mediator' 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갈라디아서 3:19). 유일한 하나님이자 만물의 창조주로 여겨지는 여호와를 바울은 왜 '중보(중재자)' 라고 일컬었을까? 여호와는 대체 누구와 누구 사이를 중재한단 말인가? 문자주의자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즉각 알아듣는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중재하는 작은 신인 플라톤의 '조물주demiurge'가 바로 여호와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중보는 하나가 아니나, 하나님God은 하나이시니라'(갈라디아서 3:20).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가 가르치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신god이' 혼미케 한 '믿지 못하는 자들의 마음'(고린도후서 4:4)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편지를 번역한 수많은 <성서>에는, '이 세상의 신'이라는 난해한 구절을 설명하는 짧은 주석이 덧붙여져 있다. 일반적인 정통파 주석에 따르면, 그 신은 곧 사탄이다. 그러나 사탄을 왜 '신god' 이라고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바울의 말뜻이 너무나 명백하다. 바울은 여호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 민족을 다스려 왔던 시대도 이제 종말에 이르러서, 예수의 참하나님을 위해 물러가야 하는 유대인의 작은 신 여호와가 바로 바울이 말한 '이 세상의 신'인 것이다. 도끼를 휘두르는 할례의 무리들! 바울의 반영지주의적 편지는 위조된 깃으로 밝혀졌다. 진짜 편지들에서 바울은 '다른 예수'(고린도후서 11:4)를 가르친 초기 교회의 사람들과 적대한다. 그들은 영지주의적 이단자들이 아니라, 친유대적 그리스도교인들이다. 그들은 교회가 할례라는 유대인의 관습을 유지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바울은 그들을 가차없이 공격한다.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다. '개들을 조심하고, 행악하는 자들을 조심하고, 손할례당(도끼를 휘두르는 할례의 무리들)을 조심하라'(빌립보서 3:2).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선언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결코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갈라디아서5:2). 또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너희를 선동하는 자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는 편이 나으리라 : 갈라디아서 5:12). 바울이 가르친 비밀을 보는 자는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심적 수준의 교인들이 아니라, 영적 수준의 교인들이다. 손할례당을 조심하라는 말에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을 숭배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스러워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빌립보서 3:3).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은 영지주의적 예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한다. 예컨대 <도마의 복음서>에서 사도들이 할례의 이로움에 대해 묻자, 예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이 이롭다면, 그들의 아버지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할례된 채 잉태되었을 것이다. 영혼의 참된 할례야말로 이로운 것이다. 바울과 맞서 싸운 그리스도교인은 바울의 문자주의에 맞서 싸운 영지주의자도 아니고, 바울의 영지주의에 맞서 싸운 문자주의자도 아니다. 당시에 영지주의와 문자주의는 전혀 쟁점이 아니었다. 바울의 시대에 불붙은 교회 내부의 다툼은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 간의 다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교인들 간의 다툼이었다. 즉,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 전통 사이의 관계 설정, 그리스도교가 비유대인에게 개방되어야 하는가의 여부, 개방된다면 어떻게 개방되어야 하는가의 문제 등에 대해 내부적으로 다투었던 것이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좀더 전통적인 유대인 그리스도교인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신약에 언급된 베드로 등의 사도가 바로 그들인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런 해석은 사실상 부당한 선입관에 사로잡힌 잘못된 해석이다. 전통적으로 로마 교회가 상상한 것과 달리 사도들의 예루살렘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실제로 160년에 사르디스의 멜리토 주교가 전설적인 예루살렘 교회를 발견하기 위해 유대 지방에 갔을 때, 그는 사도들의 후계자를 만나지 못해 낙담했다. 대신 영지주의자들의 작은 집단만 발견했다! 스스로 에비오니테스Ebionites(에비온파), 곧 '가난한 자들' 이라고 일컬은 이들 집단은 자기들만의 복음서를 지니고 있다. <에비오니테스의 복음서>, <헤브라이 사람들의 복음서>, <열두 사도들의 복음서>, <나사렛 사람들의 복음서>가 그것이다. 이 모든 복음서는 신약의 복음서와 상당히 달랐다(그들이 나사렛의 전설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저자주). 유대인 그리스도교인이 쓴 이들 영지주의 복음서는 수백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자주의 선전자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교회가 영지주의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증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즉, 처음에는 분명 문자주의자였으나 '변절'을 해서 이단자가 되었다고. 그러나 그는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상 그 증거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처음부터 영지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1세기에 그리스도 공동체는 전적으로 영지주의의 여러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 그렇다면 바울은 영지주의자였는가? 우리가 발견한 증거를 일부 되돌아보자.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계보가 바울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비밀 가르침을 구두로 전수 받았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위대한 사도'인 바울이 썼다는 많은 복음서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영지주의자 집단이 바울을 그들 집단의 창시자라고 주장했다. 2세기 중반에 바울의 편지를 받은 여러 공동체는 마르키온파 영지주의본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의 반영지주의인 목회 서간은 2세기 후반에 위조된 것이다. 진짜 편지들을 살펴보면 바울은 반영지주의자가 아니며, 결코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지 않는다. 2세기 초의 문자주의 그리스도고인들은 바울을 공격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예수의 참된 가르침과 '모순' 되며 바울은 '예수의 적' 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났다. 다소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편지에서 미스테리아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의 미스테리아의 집사'라고 일컬었다. 이 말은 이교도의 세라피스 미스테리아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이교도 현자들의 말을 인용했고, 이교도 교리를 가르쳤다. 올바르게 번역하기만 하면, 바울의 편지들은 강력한 영지주의의 가르침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바울은 정식으로 영지주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영적 입문자의 스승이었다. 그는 신비한 셋째 하늘을 여행했다. 그는 예수가 다만 인간 육신의 탈을 쓰고---혹은 육신과 닮은꼴로---왔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 의례적인 종교를 비난했고, <성서>를 '비유'와 '상징'으로 보았다. 또 그는 '중보(중재자)' 이며 '이 세상의 심'인 여호와의 율법을 거부했다. 문자주의자들은 부활이 그리스도 재림 후에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재림 후 무덤에서 되살아나 육체적 불멸성을 얻게 된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부활이 지금 이 자리에서 가능한, 신비한 체험이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가르쳤다. 바울이 나타내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한 위대한 비밀은 복음서에 적힌 대로, 예수가 문자 그대로 이 땅을 걸었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한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한 계시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편지도 비밀 가르침을 암호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동시에 두 가지 방식으로'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은일한 미스테리아를 가르쳤다. 바울의 편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동시에 여러 수준으로 읽힐 수 있도록 꾸며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도들을 안타까워했다. '초보적인'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더 심오한 수준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증거는 바울이 진정 영지주의자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을 영지주의자라고 일컫는 것은 어느 면에서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발견한 증거들을 살펴보면 볼수록, 1세기의 그리스도교에 '영지주의' 나 문자주의 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다. 바울의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 그리스도교 공통체가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분열은 영지주의와 문자주의 사이의 분열이 아니었다. 그런 분열은 2세기 말에나 나타난다. 바울은 반영지주의자도 아니고, 친영지주의자도 아니다. 그의 시대에는 영지주의와 문자주의의 분열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시대에는, 장차 영지주의자가 될 것인가 문자주의자가 될 것인가의 경향은 존재했지만. 그런 경향은 예수 미스테리아의 외적(공개적)·내적(은밀한)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바울이 참여한 신학적 다툼은 예수 미스테리아 입문자들 사이의 다툼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 입문자와, 바울처럼 그들의 새로운 미스테리아를 완전히 '현대적' 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 입문자로 나뉘었던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 미스테리아의 창시자에게서 기대할 만한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점은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하나의 이론이 참이면, 모든 것이 착착 들어맞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이론은 증거와 들어맞았고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었으며, 아름답도록 단순했고 놀랍도록 역설적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꺼림칙한 데가 남아 있었다. 유대인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같은 예수를 내세워 고대 미스테리아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낸 것이 곧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전통 역사는 유대인들을 편협한 민족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다른 지중해 문화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완고하게 민족주의적이었으며, 그들의 종교에 광적으로 헌신했고, 그들의 유일신 여호와만을 숭배했다. 이웃 이교 신앙에는 전적으로 적대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들이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기 어렵다.---그것이 사실이라면 다행이련만. 9장 유대인의 미스테리아 유대인 사제들이 면류관을 쓰고 피리와 북 소리에 맞추어 찬송을 하곤 했다는 것, 그리고 황금 덩굴이 신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 그것을 미루어보면 그들이 숭배한 신은 디오니소스였다는 생각이 든다. ---타키투스 전통적으로 예수는 고대세계의 변두리 마을에서, 목동과 어부들 사이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예수가 살았다는 시대에 유대지방은 다른 여러 지방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고대 그리스 문명에 물들어서 '헬레니즘'화 되어 있었다. 예수가 성장했다는 나사렛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1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나사렛에서 한 시간쯤 걸으면 헬레니즘화된 세포리스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 세포리스의 한 극장에는 디오니소스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이 새겨져 있었다. 나사렛에서 동쪽으로 하루쯤 걸으면 중요한 이교도 철학파가 있었던 가다라에 갈 수 있었다. 갈릴리 바다의 남쪽 변두리에 있던 스키토폴리스는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이 도시는 디오니소스가 세웠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예루살렘은 라리사와 아스칼론 동 철저하게 헬레니즘화된 도시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 도시는 로마까지 이름을 떨칠 만큼 유명한 이교도 철학자들을 낳았다. 또, 유대인 경전 <마카베오Maccabees2서>(개신교의 외경)에는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고대 그리스 신전으로 바뀌어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 야손은 고대 그리스풍의 교육 기관---육체적·지적·영적 교육을 위한 이교도 '대학'---을 신전 옆에 세웠는데, 유대인 성직자들은 전통적인 교육 방식보다 이 '대학'의 교육 방식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2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사제들은 제단에서의 의무에 더 이상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신전을 경멸했고, 제사를 소홀히 했으며, 율법을 무시한 채 시작 종소리만 울리면 서둘러 레슬링을 배우러 달려갔다. 유대인 문화와 이교도 문화의 이 같은 통합은 수세기 동안 진행되었다. 고대 유대인의 역사는 여러 민족에게 반복적으로 정복을 당한 역사이다. BC 922년에는 이집트인들에게, BC 700년에는 아시리아인들에게, BC 586년에는 바빌로니아인들에게, BC 332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BC 198년에는 시리아인들에게, 마침내 BC 63년에는 고대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고, AD 112년에 유대라는 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처럼 정복을 당하면서 유대인들은 불가피하게 정복자들의 문화를 흡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가 되어 지중해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바빌론 유수 이후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 무리)' 를 형성했다.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이교도 문명과 동화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은 후에도 대다수는 돌아가지 않았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전통과 이교 신앙을 통합했다. 예컨대 바빌론에서도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점성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최대 조상인 아브라함 자신도 점성술 교리에 통달한 바빌론의 유대인이었다. 철학자 아리스토불루스와 필론, 역사가 요세푸스와 같은 유명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점성술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유대인들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도 받아들였다. 바빌론에서 그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담무스(타무스)의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 구약에는 선지자 에스겔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여호와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러 보니,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에스겔 9:14). 성 제롬의 말에 따르면, 베들레헴에는 시리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아도니스의 신성한 숲이 있었다. 시리아 공회당의 벽에는 유대교의 전통 상징과 더불어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게 발견되었다. 소아시아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 여호와를 프리지아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사바지우스와 동일시했다. 유대인들은 BC 139년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바지우스 미스테리아를 로마에 퍼뜨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이 신은 '이아오Ioa'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아오는 곧 디오니소스이다. 예루살렘에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동전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이 동전에는 여호와가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의 창시자로 묘사되어 있다. 정말이지,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도루스, 코르넬리우스 라보, 요하네스 리두스, 타키투스등 고대의 수많은 저술가들이 유대인들의 신을 항상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평했다. 고대의 모든 신들 가운데 디오니소스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과 가장 집요하게 동일시되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교 신앙과 영적으로 전혀 달랐다는 관점은 후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조작해 낸 것이다---그리스도교가 이교 신앙과 전혀 다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사실상 과거의 유대인들은 이교도 문화에 대해 서로 다른 여러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일부는 전통적 근본주의자였고 일부는 열정적으로 이교도 방식을 채택했다.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전통과 이교 신앙을 종합해서 장점을 취하려고 했다 세계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 유대 문화와 이교도 문화의 대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4세기 말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도와 첩자나 용병 구실을 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알렉산드리아라는 새 도시에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대규모의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세련된 이교도 문화의 혜택을 누렸다. 이때 알렉산드리아 초기 인구의 반은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부터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방대한 제국 내에서는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쓰였고, 온갖 민족이 알렉산드리아로 건너와 새로운 다민족 도시의 시민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첫 지배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에 작은 그리스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계몽적인 그의 정치 철학에 따라 도서관과 박물관이 들어섰고, 고대세계의 지식이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다. 절정기에는 도서관에 수십만 권의 장서가 보관되었다고 한다.---50만 권이 넘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세계에서 아테네를 능가하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는 새로운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엘레우시스에서의 대규모 행렬은 더욱 웅장하고 극적인 장관으로 발전했으며, 여러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를 상징하는 여러 층의 무대에서 연극 공연이 이루어졌다. 아테네에서와 달리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러진 미스테리아 의식은 비밀 엄수 규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누구나 신비의식mystical rites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처럼 세계적이고 관용적인 환경 덕분에 자연스럽게 여러 영적 전통의 결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세련된 이교도 문화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 유대인들은 이교 신앙에 물들 것을 염려하여 대중적 연회, 축제, 연극공연 등에 참석하는 것을 종교적 금기로 삼았다. 당연히 그들은 위대한 문명의 일원이 되는 엄청난 이점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금기를 어기고 이교도 사회에 동화되고자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또, 너무나 짧은 기간에 그들의 모국어를 버리고 공용어인 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 유대 지방에서 이집트로 끊임없이 이주자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아람어와 헤브라이어가 계속 사용되기는 했지만, 지배적인 언어는 그리스어였다.---도시 안에서 다른 민족과 거래를 할 때뿐만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공회당의 예배 때와 집안의 예배 때에도 그리스어가 사용될 정도였다. BC 2세기 무렵에 이러한 문화적 동화 과정은 더욱 심해져서 유대인 극작가 에스겔은 유대인의 출애굽기를 에우리피데스 스타일의 그리스어 희곡으로 고쳐 쓸 정도였다! 유대 지식인들은 조상의 신앙과 타민족의 지혜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중재하려고 했다. 그들은 유대 경전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보는 근본주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신비한 비유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유대 철학이 활짝 꽃을 피웠고, 모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빛'으로 알려지게 된 알렉산드리아의 랍비들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했다.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신 여호와를 그들 부족의 신으로 보았다.---항상 유대인을 도와서 압제자를 무찌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교 신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보았고, '지고의 하나the supreme oneness' 인 플라톤의 신과 동일시했다. 그들이 전통을 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이교도 철학이 원래 유대인의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헤르미푸스는 피타고라스가 유대인들에게서 지혜를 얻었다고 단언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발전시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세의 지혜를 차용했다고 선언했다. 아르타파누스는 이집트 미스테리아의 창시자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와 그리스 미스테리아의 신비한 창시자인 무사이우스를 모세와 동일시한 허구 역사서를 집필했다. 터무니없는 발상인데도, 그런 발상 덕분에 유대인들은 수월하게 민족적 자긍심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이교도 이웃의 철학을 수용해서 세계시민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헬레니즘화된 유대 경전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지혜가 유대인에게서 비롯했다고 주장한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이교 신앙과 유대교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종교 전통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런 주장 덕분에 이교도 철학과 개념을 유대교에 도입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2세기에 헤브라이어 경전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도 수많은 새 경전을 만들었는데, 이 경전에는 유대인과 이교도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 경전들은 유대 구약과 그리스도교 신약 사이의 언약이라는 뜻에서 '간약적 (間約的)intertestamental' 저술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여호와와 제우스를 동일시하며,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조화를 주장한다---두 민족이 올바른 삶에 대해 같은 문화와 같은 견해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또 다른 경전인 <마카베오 4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문헌은 경이로운 모순, 혹은 좋게 말하면 모순의 해소를 보여 준다. 표면적으로는 헌신적인 정통파 유대인이 안티오코스 4세(BC 169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으며 유대교률 박해한 시리아의 왕 : 옮긴이 주)를 공격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이 문헌은 그리스 사고의 훈련을 받은 철학자가 현란한 그리스어로 쓴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논법을 사용하고 있다. <에녹의 서>도 역시 이교도의 주제를 차용한다. 이들 경전은 고대 유대인의 조상인 에녹이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헬레니즘화된 유대인에 의해 에녹은 위대한 신화적 인물로 탈바꿈해서, 전설적인 이집트 현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와 동일시되었다. 한 학자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경이적이고 초월적인 시적 비전을 지닌 이들 문서에는 범민족적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이 이야기를 고대세계의 다른 위대한 신화와 연계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간약적 '지혜의 문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다만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만을 구분한다. 이 문헌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영적 신앙을 강조하며, 여호와를 유대인의 작은신이 아닌 전세계의 주로 묘사한다. 유대인들은 이교도의 <시빌의 신탁>을 각색하기도 했다. 수백 년 전의 여자 예언자로 숭배된 시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원래의 이교도 신탁은, 시빌이 황홀경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BC2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유대인이 유대인 시빌을 만들어서 완벽한 6보격(步格) 운율의 그리스어로 그녀의 신탁을 새로 썼다. 유대인의 간약적 문헌에서는 고대 이교도가 그랬던 것처럼 흔히 지혜를 소피아로 의인화한다. 현대의 고전학자가 주석을 단 것처럼 이 문헌은 '전부 그리스어로 씌어졌으며, 정통 유대교 신학과는 전혀 다르다'. 유대인의 소피아는 이미 BC 3세기경부터 나타난다. 이때 소피아는 구약 잠언에서 여호와의 배우자로 묘사된다.---여호와께서는 소피아를 시켜 땅을 세우셨다(잠언 3:19) 3세기가 지난 후 이교도 미스테리아 교리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을 철학자 필론은 모세를 '전혀 오점이 없으며 청렴 결백한 부모의 아이'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다른 모든 존재의 아버지인 하나님이며, 그의 어머니는 이 세계를 존재케 한 소피아이다'. 영지주의자들처럼 필론에게도 소피아는 '로고스의 어머니' 였다. 이교도 철학자들과, 간약적 저술의 시대에 살았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과, 후대의 영지주의자들이 모두 여성 신격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은 이들 세 전통이 서로 연계되어 진화해 왔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모세의 미스테리아 그 후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지혜와 자신들의 영적 전통을 통합하고자 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를 통해 예견한 유대인 버전의 미스테리아를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20-AD40)이 남긴 저술 속에서 발견된다. 필론은 매우 존경 받은 유대인 지도자이자 유명한 철학자였다. 필론은 유대교에 헌신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헬레니즘화되어서 이교도 철학에도 심취해 있었다. 그는 '자기들과 같은 세계적 도시에 사는' 세계시민들의 범민족적 형제로 간주한 철학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바쳤다. 그러한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도시에서 지혜의 불씨를 은밀히 지켜 왔다. 우리 인류의 마음에서 미덕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필론은 고대인들 가운데서도 특히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 플라톤을 숭배했다. 그는 두 사람을 '위대한', 그리고 '가장 신성한자'라고 일컬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필론을 '피타고라스 학파'로 보았다. 피타고라스의 다른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은 음악과 기하학, 점성술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그리스 문헌에도 능통했다. 여느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필론은 유대인 경전이 은밀한 영적 가르침을 암호화한 비유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그가 '미스테리아의 방법' 이라고 부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모세와 출애굽기의 '역사적' 이야기가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신비한 은유라고 해석했다. 이 여행의 안내자는 이교도에게 친숙한 '로고스' 라는 인물이다. 미스테리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에게도 로고스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 미스테리아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필론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경이가 인간을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 체험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필론은 미스테리아의 철학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입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는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교도 입문식을 치르지 말라고 촉구했다. 자신들만의 유대인 미스테리아를 가졌기 때문이다---다름 아닌 모세의 미스테리아를! 필론의 말에 따르면, 모세는 위대한 창시자였고 '신성한 교사이자 신성한 의식의 히에로판테스'였다. 필론도 스스로 유대인 미스테리아의 창시자이자 히에로판테스라고 자칭했다. 그는 '가장 신성한 입문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입문자들에게 전수할 비전(秘傳)'에 대해 썼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그의 입문자들은 비밀 종파를 형성했고, 도덕적으로 순결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그들은 입문하지 않은 자들에게 '참으로 신성한 미스테리아'를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혹시 무지한 자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전해서 어리석은 대중들이 미스테리아를 비웃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필론에게 입문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세계는 '정화된 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순결하고 무구한 본성을 묵상할 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였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처럼 입문식의 목적은 종교적 황홀경 체험을 통해 입문자가 신적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미스테리아와 마찬가지로 필론은 엔토우시아제인enthousiazein(신적 영감 상태), 코루반티안Korubantian(신비한 열광 상태), 바큐에인bakeuein(신적 광기 상태), 카테케스타이Katechesthai(신들림 상태), 에크스타시스ekstasis(황홀경) 등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유대인 미스테리아 입문자의 황홀경을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입문자의 신성한 열광과 예언적 영감상태에 비유하며 이렇게 썼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디오니소스의 신비의식에서 신들린 자와 같이 신성한 열광에 휩싸이고, 신들림을 통해 예언적 영감을 얻도록 하라. 마음이 입을 다물고, 다만 거룩한 열정으로 황홀경에 휩싸이는 그러한 순간이야말로 네가 물려받은 유산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로마 교회가 고대 문헌을 대규모로 파괴할 때, 필론의 저술은 역사의 이상한 변덕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4세기의 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 주교는 필론의 저술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필론의 책 가운데 테라페우테Therapeutae('병을 고치는 자들'이라는 뜻 : 옮긴이 주)라고 불린 유대인 집단에 관한 구절 하나에 매달렸다. 그 집단의 봄철 축제에 대한 필론의 언급이 그리스도교의 부활절 축제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유세비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인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라페우테의 고위층이 최초의 주교와 사제·부사제 등이며, 이들이야말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물론 봄철은 이교도가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의 축제를 연 때였다. 그러니 유세비우스의 가정은 옳지 않다. 필론은 AD 10년의 테라페우테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때보다 20년쯤 앞선다. 그러니 유세비우스의 주장과 달리, 테라페우테는 초기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세비우스의 말은 어느 면에서 옳다고 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건 그가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테라페우테는 분명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유대인 버전을 행한 유대인 집단---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수 이야기를 합성했다고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에서 제창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테라페우테는 유대인 집단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의 오순절 축제를 열었고, 안식일을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방식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공동체와 닮았다. 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테라페우테는 흰옷을 입었고, 모든 재산을 공유했으며, 여자들을 평등한 존재로 인정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열정을 지녔고, 남자와 똑같이 사려 깊은 선택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필론은 <관조적 삶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테라페우테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관조적 삶' 이란 고대세계에서 피타고라스 학파가 그들의 금욕적 공동체 삶의 방식을 묘사할 때 사용한 말이었다. 실제로 필론은 테라테우테가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든 완벽한 선을 공유하며, 그리스와 비그리스 세계 온갖 곳에서 발견된 인종' 이었다고 기록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필론은 '피타고라스 학파'로 알려져 있었고 피타고라스 추종자들만의 신비한 수학적 언어로 테라페우테에 대한 글을 썼다. 특히 그들은 일곱 번째 주말마다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7일이라는 단순한 날만이 아니라, 7의 제곱이 되는 날도 신성시했다. 7이 영원한 처녀처럼 순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곱 번째 주말의 축제는 쉰 번째 날에 여는 가장 큰 축제의 서곡이었다. 50은 수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자연스러운 수이며, 완벽한 직각삼각형의 각 변의 거듭제곱의 합과 같다. 그들에게 50은 우주 원소들의 생성 기원으로 간주되었다(완벽한 직각삼각형은 각 변의 길이가 3:4:5가 되는 직각삼각형을 말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직각을 이루는 두 변의 제곱이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신성시했다 : 옮긴이 주). 고대 이교도 현자들처럼 필론은 종교를 잘못 배운 자들이 반지성적인 허례허식을 숭배하는 것을 배척했다. 그리고 그는 테라페우테처럼 관조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을 칭송했다. 이교도 입문자들처럼 테라페우테는 그들의 <성서>가 은밀하고 신비한 의미를 감추고 있는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성한 저술의 주석은 비유로 전달된 내적 의미를 다룬다'고 그들은 믿었다. 필론은 이렇게 썼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그들은 공부에 몰두한다. 그들은 신성한 저술을 펼쳐 놓고, 조상들의 암호를 해독하고 철학화하며 시간을 보낸다. 축어적 의미의 말은 이면적 의미에 의해서만 밝혀지는 상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론은 특히 테라페우테 구성원들의 신성한 소명 의식을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입문자들이 체험하는 신비한 열정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신성한 소명에 몸을 바치는 것은 어떤 관습이나 타인의 충고, 혹은 부탁 때문이 아니다.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처럼 그들은 다만 거룩한 사랑으로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을 보게 될 때까지 신명을 불태운다. 테라페우테의 의식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무리가 따로 모여드는 것을 묘사하며 필론은 이렇게 썼다. 디오니소스 의식에서 사람들이 순수한 포도주를 마시듯이 두 무리는 신의 음료를 마시며, 따로 향연을 연 후 함께 모여서 두 무리가 한 목소리로 찬송한다. 그것은 홍해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후 홍해 제방에서 유대인들이 한 목소리로 찬송했던 것을 본받은 것이다. 테라페우테의 무리를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입문자에 비유하면서 동시에 홍해의 제방에서 찬송한 모세의 추종자들에 비유하고 있는 필론의 위 문장을 보면, 이교도와 유대인 전통이 어떻게 종합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문장으로 미루어 볼 때 일부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이교 신앙을 포용했고, 그것을 유대교와 결합시켜 고대미스테리아에 대한 유대인 버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우리는 예수 미스테리아를 능히 만들 수 있었던 공동체를 발견한 셈이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대로 이교도와 유대인 문화의 위대한 용광로였던 알렉산드리아 근방에서 살았다 필론은 이렇게 썼다. 그들 무리는 이집트의 모든 지방에서 살았지만, 특히 알렉산드리아 둘레에 많이 모여 살았다. 모든 면에서 가장 진보한 그들은 식민지 개척자로 이 땅에 왔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곳을 찾아서, 알렉산드리아 남쪽 접경 지역의 마레오티스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꽤 높은 지대에 홰를 틀고, 테라페우테의 뿌리를 내린 것이다. 마레오티스 호수는 헤로도토스가 500년 앞서서 도착해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시리스 미스테리아 의식이 거행되는 것을 목격한 곳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곳이다. 필론의 말에 따르면 테라페우테도 '신성화된 삶의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자들이었다. 또 그들 이전의 이교도 미스테리아 현자들처럼, 그리고 그들 이후의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인들처럼 그들은 '선보다 더 낫고, 하나One 보다 더 순수하며 더 오래된 것'을 직접 체험하고자 했다. 결론 유대인들이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처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지만,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문화만 없었다면 그것은 그리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유대 문명을 주변의 이교도 문명과 반대되는 별개의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문화 때문이다. 지중해 세계의 다른 모든 문화는 미스테리아를 포용했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이 범민족적 신비 신앙을 유대 신앙과 통합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우리가 발견한 증거 일부를 되돌아보자. 이교도와 유대인 문화는 역사 시대 내내 서로 만나서 통합되어 왔다. 예수가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갈릴리는 헬레니즘화된 도시들로 에워 싸여 있었고, 그 도시들은 이교도 철학자들의 고향이자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중심지였다.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은 이교도 점성술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고, 담무스(타무스)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 다른 곳도 아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이 구약에도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와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관련시켰고, 사바지우스 미스테리아를 유포한다는 이유로 로마에서 추방되기까지 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어를 일상어로 채택했고, 그리스 '대학'에 다녔으며, 출애굽기를 그리스 스타일로 고쳐 썼고, 이교도 철학의 방식대로 유대인 경전을 번역했으며, 유대인 문화와 이교도 문화를 결합한 새로운 경전을 쓰기도 했다. 유대인 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구약의 지혜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교 신앙과 유대 신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종교 전통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인 필론은 자신이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닮은 모세 미스테리아의 히에로판테스라고 주장했다. 테라페우테는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였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처럼 테라페우테는 그들의 신화가 은밀하고 신비한 진리를 암호화한 것이라고 믿었다. 필론은 테라페우테를 디오니소스 추종자에 비유했다. 테라페우테는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호숫가에 살았는데, 그곳은 오시리스 미스테리아의식이 수백 년 동안 거행되어 왔던 곳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테라페우테는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이었을까?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후기에 이교도 신비 신앙의 중심지였고, 유대 지방을 떠난 유대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또, AD 첫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그노시스의 최대 스승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클레멘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초기의 신약인 마가복음이 씌어진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이야말로 예수 미스테리아가 창조된 곳이 아닐 수 없다. 고대 미스테리아의 유대인 버전을 발전시킨 테라페우테는 논리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쳤을까? 그들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 신화를 받아들여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 신인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미스테리아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은, 테라페우테와 같은 유대인 집단이 예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한몫 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미스테리아의 신비한 지혜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에 암호화되어 있었다. 유대인 양식의 특별한 미스테리아를 만들어낸 후, 위대한 고대 신화까지 수용한다는 것은 분명 거역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를 에우리피데스 스타일의 그리스어 희곡으로 새로 썼다. 그렇다면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 또한 유대인 양식으로 새로 쓰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바카이>에서 디오니소스가 테베에 도래하듯이, 유대인 희곡에서 그 신인이 예루살렘에 도래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가 이제까지 살펴본 모든 증거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명제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예수 이야기가 신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역사로 해석되기에 이르렀을까? 어떻게 바울의 신비한 그리스도가 나사렛 출신의 남자로 탈바꿈하게 되었을까?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에 대한 이교도 이야기들은 그것이 실제 사건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이야기는 왜 문자 그대로 실제 전기라고 믿어지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 신화 자체를 분석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신화가 어떻게 창조되었고, 어떻게 역사화 되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 신화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는 너무나 명백한 나머지 쉽게 지나쳐 버렸던 것을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유대인 미스테리아 신화의 주인공은 혼성적인 인물이다. 예수는 앞서 존재한 두 신화적 인물---이교도 신인과 유대인 메시아---의 종합인 것이다. 10장 예수신화 내가 가장 선호하는 종교의 정의는 '신화의 오역' 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상징에는 마땅히 역사적 준거가 있다고 생각할 때 어김없이 오역이 이루어진다. -조지프 캠벨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집트의 미스테리아를 그리스로 들여왔을 때, 그들은 단지 오시리스 신앙을 제시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시리스 미스테리아에는 BC 5세기의 아테네인들에게 너무나 이단적으로 보인 여러 교리가 담겨 있었다.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교리가 특히 그랬다. 그래서 단순히 외래의 미신을 들여왔다는 비난과 박해를 피하기 위해,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리스의 작은신 디오니소스를 오시리스의 그리스 버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인들은 그들 땅에서 자생한 신앙인 것처럼 이집트의 미스테리아를 도입했다. 다른 모든 지중해 문화권에서도 이런 식으로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였다. 그들 역시 토착의 신격을 탈바꿈시켜서,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으로 만들었다. 고대 미스테리아를 도입하고자 했던 테라페우테와 같은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 공동체도 5세기 앞서서 피타고라스 학파가 맞닥뜨린 것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미스테리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면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유대인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토착의 신화적 인물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여러 남신이나 여신이 없었다. 오직 유일신 여호와만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하나One라는 플라톤의 최고신과 동일시될 수 있었지만, 이교도의 신들처럼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신화적 이야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주변 문화와 달리 유대인들은 작은 신격을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시리스-디오니소스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유대인의 신화적 인물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메시아가 그것이다. 메시아Messiah라는 헤브라이어 낱말은 '기름 부음을 받음(혹은 받은 자)' 이라는 뜻인데,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Christos' 이다. 이 말은 원래 왕이나 제사장을 가리킬 때 쓰인 말이었다. 그들은 의식을 거행할 때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군림하고 있는 왕을 가리킬 때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 후 유대인들이 정복당한 민족이 되었을 때, 압제자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도래할 미래의 구원자---위대한 다윗 왕의 혈통을 지닌 왕으로 군림하며 과거와 같은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 도래할 구원자---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BC 63년에 로마가 유대 지방을 점령한 후, 유대인들의 상황은 점점 더 절망적이 되었다. 그들을 박해하는 강대한 제국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것 같았고, 따라서 메시아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기 위해 도래할 초자연적인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수 이야기의 구성을 살펴보면, 유대인 미스테리아의 창작자는 죽었다가 부활한 미스테리아 신인과 유대인의 메시아를 종합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들에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예수가 그러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메시아라고 일컬어진다(마가복음8:29). 그는 여호수아(그리스어로 이에소우스)라고 명명되었는데, 그건 메시아가 갖게 될 것으로 정해진 이름이었다(요세푸스가 기록한 여러 메시아들도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 저자주). 하지만 사실상 '메시아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 예수'라는 전혀 다른 인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한 얇은 베일에 지나지 않는다. 탄생 이야기를 보면 그 점이 특히 분명해진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제시하는 길고 상세한 족보는 요셉이 다윗의 혈통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두 복음서 모두 예수가 전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토록 수많은 주석가들이 두 복음서 안의 그런 기이한 모순을 간과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태와 누가는 자기가 한말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것이 후대에 덧붙인 것이고 잘못 편집된 결과라 할지라도, 그러한 모순이 아무런 의도 없이 복음서 안에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에 의하면 이런 이상한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명제에 의하면 복음서 작가들은 스스로 설정한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기록이 비밀 가르침을 암호화한 신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이며,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족보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들을 귀 있는 자' 에게는 예수가 사실상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이며 하나님과 동정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와 마태가 제시한 족보는 전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 이유는 그 족보가 문학적 허구이며,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메시아라는 매개자를 통해 유대인들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화 속에 암호화된 비밀 가르침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가 설명한 대로 '이야기 구성상의 모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상황'은 모두가 고의로 그렇게 꾸며진 것이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너무 오래 저차원적인,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매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이야기가 철두철미하게 우아하고 일관성이 있다는 게 명백하면, 우리는 명백한 의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성서>에 함축되어 있다고 믿지 않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 '어떤 함정'과 '장벽과 불가능성'을<성서> 안에 함께 엮어 놓은 것은 독자가 '문자에 얽매여서 더욱 신성한 의미를 터득하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 이야기는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에 최대한 부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메시아가 예수의 참된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마태복음(22:41-46)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아(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묻는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가 말한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러자 '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었다'. 또 예컨대 유대인의 메시아는 적의 수중에서 유대 지방을 해방시키고 다윗의 계보를 다시 세우기 위해 도래할 전사 형의 왕이어야 했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예수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추종자)들이 맞서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18:36-37). 마가복음 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다고 말하자, 예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만 사람의 아들은 죽어서 부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예언한다. 유대인 메시아가 그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를 꾸짖는다(개역 <성서>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했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문 <성서>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를 한쪽으로 데려가' '꾸짖는다rebuke'. 다음 구절에서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는다'고 할 때와 똑같은 동사가 쓰였다 : 옮긴이 주) 베드로의 꾸짖음에 대해 예수는 역으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일컬으며 꾸짖는다! 베드로는 승리자 메시아로서의 구원자라는 유대인의 사고에서, 희생양 신인으로서의 구원자라는 이교도의 사고로 전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의 모든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 메시아가 범죄자처럼 처형당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구약 신명기(21:23)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메시아는 그렇게 저주 받은 자일 수 없었다. 유대교에서는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죽음으로써 구원을 하는 자가 메시아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역할이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할 때, 예수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어 유대 민족을 해방시켜야 할 사명을 띤 유대인 메시아가 아니라, 영적 승리를 거두어 신비한 자유를 얻는 미스테리아의 신인인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가 불명예스럽게 처형되고, 압제자에게 명백히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런 어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해 예수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주장하는 자로 그려진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을 완수한 후 예수는 속히 재림할 거라고 약속한다. 적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유대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유대인의 신화적 주제 예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예수 미스테리아의 창작자들이 기존의 유대인 신화를 채택해서,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의 신화와 유대신앙을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예컨대 예수가 몸과 피의 상징으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줌으로써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는 미스테리아의 신성한 식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유월절은 구약의 출애굽기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이집트(애굽)에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들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간다. 이것은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 특히 필론이 가장 좋아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예수 이야기 속의 수많은 요소의 핵심을 이룬다. 신비주의자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를 영적 입문식의 비유로 이해했다. 유대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포로'로 시작해서 모세에 의해 '이집트 밖으로 부르심'을 받고, 마침내 '선택된 사람들'로서 선지자 여호수아에 의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앞서 영지주의와 이교도 미스테리아에서 발견한 입문식의 세 단계가 담겨 있다. 즉, 입문자가 처음에 '포로' 였다는 것은 육체적 단계를 가리키며, 다음에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아 심적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선택' 된다는 것은 입문을 해서 영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고 육체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포로'로 간주되었다. 이집트는 '육체'의 은유로 여겨졌고, '이집트 밖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육체적 단계에서 초월한다는 것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기적적으로 홍해가 갈라진 것은 물에 의한 세례의 은유로 이해되었다. 세례를 받은 입문자는 영적 여행으로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 간주되었다. 유대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겪은 고난은 확신의 결여와 의심으로 인해 입문자가 겪는 고통의 은유로 여겨졌다. '선택'된 자는 약속된 땅에 이른 자들이었는데, 그것은 곧 영적 여행 끝에 약속된 그노시스를 얻게 됨을 비유한 것이다. '이집트 밖으로 부르심' 이라는 주제는 마태복음에도 나타난다. 임신한 마리아는 헤롯을 피해 이집트에 가 있다가 유대 지방으로 돌아와서 예수를 낳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언한다. '이집트 밖으로 내 아들을 불러냈다'(마태복음 2:15. 호세아 11:1에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는 구절이 있다 : 옮긴이 주) 감춰진 의미를 찾는 데 골몰했던 시대에, 예수 신화의 창작자들은 이 주제가 두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출애굽기 이야기로 입문식을 비유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이집트 밖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출애굽기 이야기는 예수 미스테리아가 발생한 곳이 고대 이집트라는 것을 입문자 독자에게 말해 준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것은 예수가 40일 주야로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으로 변용되었다. 모세가 독사들에게 시달린 것처럼 예수는 악마의 형태로 나타난 의심과 유혹에 시달린다. 모세는 약속된 땅에 몸소 이르지 못하지만, 선지자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해서 선택된 백성을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여호수아(예수)는 신화적 재생이라는 약속된 땅으로 선택된 사람들을 이끄는 유대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여호수아는 유대인 미스테리아의 신약을 제시해서, 모세가 제시한 옛 율법과 전통을 대체한다. 그의 첫 임무는 12사도를 임명하는 것이다('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12명을 택하라') (여호수아3:12. 저자주). 마찬가지로 예수 신화에서 예수가 처음 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12사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 이야기의 다른 여러 요소들은 분명 유대인 신화에서 채택한 것이었다. 예컨대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이교도 신화를 채택한 것이면서, 동시에 구약의 스가랴를 반영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기뻐하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XX니라'(스가랴 9:9). 그러한 구절은 복음서 작가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예언으로 즐겨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에 따르면, 나귀 타기는 신화를 구성하는 데 흔히 쓰였던 이야기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유대인 경전을 뒤져서 이교도 철학이나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화와 닮은 점을 찾아내려고 했다. 여러 구약 문서는 고대 이집트의 시와 지적 문헌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시편이 특히 그렇다. 그래서 얇은 베일만 걷어 내면 그것이 오시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시편은 BC 1000-750년경의 제19왕조와 제20왕조 때 씌어진 고대 이집트의 종교 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잠언은 아멘호테프 왕의 훈령에 기초한 것이다. 첫 5경의 저자인 모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고, 이집트의 사제로 길러졌다. 그가 일으킨 것과 똑같은 기적 이야기가 상당수 이집트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과 그 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이집트 마니아가 되어 모세가 이집트 태생이라는 것을 유난히 강조했다. 사도행전 7:2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다' : 저자주). 그처럼 오시리스 신화는 유대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오시리스 신화가 구약에도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구약을 기초로 해서 유대인 버전의 오시리스 신화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은 특히 신약에 포함되지 않은 <베드로의 복음서>를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이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에 관한 거의 모든 문장은 구약을 기초로 한 것이다. BC 2-3세기에 유대인 경전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 의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이때 그들은 유대인 신화를 이교도 신화와 비슷하게 만들 기회를 얻었다. 예컨대 이사야(7:14)에는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다'(이사야7:14)라는 예언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어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다'로 잘못 번역되었다(우리말<성서>도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주). 이런 고의적인 오역은 동정녀 잉태라는 이교도의 개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구절을 핵심 '증거'로 인용하며 이렇게 주장하게 되었다---유대인들이 고대했던 메시아가 곧 예수라는 증거가 유대 경전 속에 이미 들이 있다고! 마가복음(15:34)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다음과 같은 시편(22:1)의 구절을 인용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22:16)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그래서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처형을 당한다. 시편은 이렇게 계속된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22:18). 그래서 복음서들에서 로마의 군병들은 제비 뽑기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진다. 과거 문헌의 개작 예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유대 미스테리아 입문자들은 간약적 문헌도 인용했다. 그 문헌에는 이미 이교도와 유대인의 신화적 주제가 합성되어 있었다. 이 간약적 문헌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예시함으로써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예컨대 유대인의 <시빌의 신탁>은 심판의 날에 도래할 불의 계시와 믿는 자를 위한 지상의 평화에 대한 얘기이다. 이 문헌에는 열정적으로 믿음을 전도하는 모습이 부각되어 있는데, 그런 모습은 유대인 문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미스테리아와 그리스도교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모습이다. 이 문헌은 또 그리스도의 도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성취할 거라고 주장하는 소망이다. 미스테리아를 반영하고 그리스도교를 예시한 주제들은 <에녹의서>에서도 발견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에녹은 육체를 지닌 채 승천했다는 인물이다(엠페도클레스도 그렇게 승천했다는 고대 기록이 있다 :저자주). 하늘에 도착한 에녹은 예수가 물려받게 될 호칭인 '사람의 아들(인자)' 로서 환영을 받는다('사람의 아들'은 BC 2세기에 씌어진 간약적 문헌에서 흔히 발견되는 호칭이다 : 저자주). 이 호칭은 에녹과 예수가 신비하게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헤브라이어로 '-의 아들' 이라는 표현은 '-의 화신'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은 원초적 인간이라는 개념의 화신이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를 육화된 로고스라고 말할 때, 요한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전달하는 또는 다른 방식이다. 예수와 에녹은 보편적 다이몬의 화신---모든 존재를 활성화시키는 하나인 의식(유일자의 의식)의 화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로고스의 화신인 예수와 마찬가지로, <에녹의 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한 신적 존재이다. 또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사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이방인들에게 비추인 빛' 으로 일컬어진다. 간약적 지혜의 문헌은 이 세상에 지혜를 전하기 위해 보낸 신성한 사자인 '의로운 인간'에 대해 얘기한다.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의로운 인간'을 반영한 이 인물은 그리스도교의 '의로운 인간' 예수가 된다. 예수처럼 이 인물은 인간들에게 배척당하며, 적을 만드는 주장을 하며, 학대 당하고, 관원들과 충돌하게 되며, 죽음에 이르고, 마침내 적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인성을 받는다.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초기 영지주의 복음서들 가운데, 비교해서 읽으면 기존의 문헌이 얼마나 쉽게 그리스도교화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두 문헌이 있다. <선한 영지주의 입문자>라고 불리는 비그리스도교인의 논문 하나에 나오는 말들은 임의로 재단이 된 다음, 예수가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말로 이용되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그리스도교인의 문헌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이다. 후자의 문헌이 예수와 제자들을 덧붙였다는 것만 빼면 두 문헌의 내용은 거의 똑같다. 간단히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한 영지주의 입문자>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분'은 이루 마태가 그에게 말했다. '주여, 아무도 주를 형언할 수 없다. 통하지 않고는 진리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어떤 원리도, 권위도, 복종도, 그러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 태초로부터의 어떤 인간도 구원자가 말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분은 그분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어떤 원리도, 권위도 다만 그가 홀로…… 복종도, 태초로부터의 어떤 인간도 그분을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그가 홀로…… 보이는 것들 가운데 그 어떤 빌립이 말했다. '주여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이 것도 보이기 전에, 그분에게 온전한 자들에게 나타나셨나이까?' 온전한 내제한 위엄과 권위, 전체중의 구원자께서 그에게 말했다. '보이는 것들 가운데 전체를 그분은 감싸시나 그 어떤 것도 보이기 전에, 그분에게 내재한 아무것도 그분을 감싸지는 못한다. 위엄과 권위, 전체 중의 전체를 그분은 그분은 모든 마음이기에. ... 감싸시나 아무것도 그분을 감싸지는 못한다. 그분은 모든 마음이기에……' 우주 이전에 나타난 최초의 마태가 그에게 말했다. '주여 구원자이시여, 그분은 스스로 자란 분이시며, 인간은 어떻게 계시를 받으리까?' 온전한 스스로 세워진 아버지이시며, 구원자께서 말했다. '너희는 이것을 알기 찬란하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바라노라. 무한한 우주 이전에 나타난 최초의 빛으로 가득하시다. 그분은 스스로 자란 분, 스스로 세워진 아버지, 찬란한 빛으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다.' 역사가 된 신화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인들은 분명 신화적 인물이었다. 신인들의 전기는 '시간 바깥에', 꿈과 상상의 세계 속에 존재했다. 신인들이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졌다 할지라도, 고대에 그런 실존 인물은 신화의 인물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대인의 신인 신화인 예수 이야기는 왜 역사적 사실로 제시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의 진짜 편지는 1세기 전반기에 예수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었다는 암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바울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추종자들의 재생을 가능케 하는 신비한 메시아에 대해 가르친다. 그런 예수 신화의 원시적 형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회자되어온 것일 수도 있다(한 전통에 따르면, 시몬 마구스의 가르침은 BC 100년경의 현자인 도시테우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저자주). 그 신화가 처음에는 유대인 미스테리아의 비밀 신화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원시 신화가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튼 그 예수 신화는 역사화되는 게 불가피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도래한 역사적 인물이기를 바랐다. 그런 이유에서 메시아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는 다시 역사적 드라마로 각색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인처럼 아득한 과거에 존재한 듯이 그려질 수는 없었다. 그런 메시아는 현재의 백성을 정치적으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가까운 과거에 도래한 것으로 그려져야 했을 것이다. 메시아가 도래했다는 것을 왜 아무도 들어 보지 못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메시아의 정체가 비밀에 부쳐지도록 그려져야 한다. 사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예수가 죽은 후까지도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필론처럼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에 의해 구약이 신비한 비유로 해석되긴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구약이 역사 기록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를 실제 사건의 기록인 듯 그리는 것은 유대 경전의 일반적 스타일과 잘 들어맞는다. 그리고 예수의 삶과 죽음을 위한 무대로 선택된 시간과 공간은, 비유에 능한 유대인 입문자들이 상징적 메시지를 암호화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될 수 있었다. 유대인 신인은 출애굽기의 선지자 '여호수아 벤 눈Joshua benNun'의 이름을 따서 여호수아/예수라고 명명되었는데, 그 이름은 '어부의 아들 예수'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점성술상의 새로운 시대인 물고기자리 시대의 구원자 이름으로 안성맞춤이다. BC 7년은 점성술에서 중시되는 별들의 회합이 이루어진 때인데, 이 회합은 물고기자리의 새 시대를 안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예수의 '탄생'을 위해 선택된 시간은 바로 이런 회합과 예수를 연계시킨 것이다. 이 별들의 회합은 이교도 신화에서 신인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는 상징적으로 새 시대의 새 구원자가 된다. 예수가 태어났다는 시대는, 또한 예수 미스테리아의 창작자들이 상징적으로 다른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 이용될 수 있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헤롯 치하에서 태어난다. 헤롯은 예수가 유대인들의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 BC 4년에 죽은 헤롯은 로마인의 꼭두각시였고,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한 인물이었다. 아기 예수가 그처럼 혐오스러운 왕과 곧바로 갈등 관계에 놓이는 것은 '부당하게 고발된 의로운 인간'의 상과 잘 들어맞는다. 유대인들을 지켜 주기 위해 도래한 메시아에게 잘 어울리는 설정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에서는 10년 후인 AD 6년의 호구조사 때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비슷한 것을 강조한다. 그 무렵 로마 제국은 마침내 유대 지방을 합병했다. 호구 조사는 유대인들에게 직접 세금을 거두는 데 이용될 수 있었다. 유대 지방은 더 이상 꼭두각시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이제 직접 로마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더욱 절실해졌다. 누가는 바로 이때에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구원자에 대한 소망이 달성되어 왔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었다 예수를 역사적 문맥 속에 설정한 다른 유일한 사건은 예수가 유대의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요세푸스와 필론의 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유난히 혐오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첫 로마인이 되는 등 유대교의 금기를 수없이 어겼다. 그래서 빌라도는 신인을 처형하는 악한 통치자 역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예수 이야기의 배경으로 갈릴리를 설정한 것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갈릴리는 철저하게 헬레니즘화 되어서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의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수호하기 위해 로마인들과 싸우는 것을 거부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신앙에 충실하지 않았고 이교도 문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곳은 유대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고향으로서 이상적인 곳이었다. 원래 초시대적이고 무지역적이었던 예수 이야기는 이렇게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갖게 되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 그 과정을 엿 불 수 있다. 학자들은 갈릴리를 언급한 모든 구절이 후대의 추가라는 것을 주목하게 되었다. 예컨대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를 보았다'(마가복음 1:16)는 구절에서, '갈릴리 해변' 이라는 말이 그리스어 구문에서는 전적으로 비문법적인 곳에 씌어져 있다( 'And passing along by the sea of Galillee he saw Simon and Andrew'. 'passing[혹은 going] along'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 뒤에는 전치사 by가 사용되지 않는다. 'by the sea of Galillee' 만 빼 버리면 올바론 구문이 되므로, 원래 구문에는 없었던 구절이 삽입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 저자 주). 이런 사실 때문에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들 대다수는 이 구절이 원래 구문에는 없던 지리적 배경을 부여하기 위해 추가된 것이라고 믿는다. 대안으로 나타난 메시아 AD 66년에 유대 지방의 유대인들은 로마 압제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 결과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는데,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유대인 300만 명 가운데 100만 명이 죽었고. 10만 명은 노예로 팔려갔다고 한다. 마침내 함락된 예루살렘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썼다. 그 도시를 둘러싼 모든 요새는 완전히 평지가 되어서,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유대인 혁명가들의 광기 어린 어리석음 때문에, 땅 끝까지 명성을 떨친 장엄한 도시 예루살렘이 그렇게 종말을 맞은 것이다. 전통 유대교는 BC 63년 이후 사멸의 고난을 겪어 왔다. 당시 부패한 신전 사제들은 내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인들을 끌어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나라에는 로마의 도로가 깔리게 되었다. AD 70년 무렵,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을 때 수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 여호와에게 철저히 배신 당했다고 생각했다. 적들로부터 그들을 전혀 보호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신감은 당시의 유대 문헌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예컨대 <바룩의 계시록>에서 선지자 바룩은 여호와가 피고라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여호와를 추궁한다. 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왜 성전이 파괴되고 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도록 했는가? 바룩은 유대인 사제들에게 말한다. '성소의 열쇠를 모두 가져다가 하늘을 향해 내던져 버리라'고! 여호와로 하여금 자기 집을 지키게 하라고! 이처럼 냉혹한 글 속에 담긴 유일한 소망은 메시아가 마침내 도래하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재앙을 당한 후 예수 신화는 처음으로 역사적 문맥이 추가된 마가복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 미스테리아의 창작자들이,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의 신화를 준(準)역사적 기록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는 그러한 위기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철저한 민족적 재앙을 당한 유대인들은 바울의 신비한 그리스도와는 다른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도래해서 약속대로 그들을 구해 줄 메시아를 간절히 필요로 했다. 유대교의 위기는 수많은 자칭 메시아들을 낳았지만, 그들 모두가 실패했다. 경멸하는 말로 유대교 광신자zealots나 산적이라고 불린이들, 자칭 메시아는 현대의 무슬림 근본주의자에 비견할 만한 방식으로 정치적 혁명가 역할과 종교적 광신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친로마파인 요세푸스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이 사기꾼들은 군중들이 신들린 듯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임박한 자유의 징표를 보여 주신다는 것을 빙자해서 군중들을 광야로 데려감으로써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려고 했다. 이들 자칭 메시아의 대부분은 여호수아/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유대 지방에는 '백성을 기만하는', 그리고 '해방을 약속하는' 그런 '사기꾼', '산적',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더러는 여호와가 그들을 구원할 거라는 사막으로 추종자들을 끌어내서 출애굽기의 기적을 재현하려고 하기도 했다. 한 사람은 여호수아처럼 자기가 명을 내리면 도시의 모든 성벽이 무너질 것이며 그때 추종자들을 이끌고 로마 수비대를 학살하겠다고 약속하며 올리베트 산 위에 대규모 군중을 끌어 모았다. 이와 달리 예수 신화는 전혀 다른 메시아를 제시한다.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다. 세금에 대한 질문을 받자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말한다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고(마가복음 12:17). 그의 메시지는 신비한 구원에 대한 것이지 민족 해방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의 배반자 유다가 갈릴리의 유다와 이름이 같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갈릴리의 유다는 모든 광신도 지도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예수 이야기는 혁명가 메시아들이 단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재앙만 초래하게 된 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혁명에 대한 환상이 깨진 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일 수 있다.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민족적 전통에 충실하고 민족주의자적인 포부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 광신자들을 끔찍이 혐오했다---현대의 서구화된 무슬림이 광적인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을 혐오하듯이. 그들은 광신자들이 그들 나라에 재앙을 불러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실상 AD 70년의 사건은 그들이 겪은 재앙 가운데 가장 최악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난민이 되어 유대 지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절망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필요할 때에 도래한 민족주의자 메시아들의 실패를 경험함으로써, 결국 예수 미스테리아의 신비한 메시아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산산조각이 난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고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되살리는 한편, 더 큰 이교도 사회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메시아가 제시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준역사적 이야기를 듣고 예수 미스테리아에 일단 마음이 끌렸다. 그 후 차츰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해서 예수 이야기가 신비한 비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산도 모두 잃고 절망감에 사로잡힌 유대인 난민들은 그런 식으로 소망을 갖게 되었다. 유대 백성을 자유롭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정치적 구원자는, 신비한 그노시스를 통해 개인적 자유를 얻게 해 줄 영적 구원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 미스테리아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 새로운 신앙의 운명은 정말 기이하게도, 당시 아무도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대인들이 이교도 미스테리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대인 메시아로 변장한 이교도의 신인은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정반대 작용을 했다---유대인의 전통을 이교도들에게 전파하게 된 것이다! 세계의 구원자 예수는 유대인 메시아로 남아 있지 않고 세계의 구원자가 되었다. 이런 세계화 과정은 바울이 에비온파 그리스도교인들과 열띤 논쟁을 하던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에비온파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자들로 유대교의 핵심을 보존하고 과장했다고 한다 : 옮긴이 주). 바울은 예수 미스테리아가 유대교와 불필요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청산하기 위해 싸웠고, 자신처럼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을 더욱 많이 예수 미스테리아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바울은 전통 유대 율법이 조금이라도 필요하다면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예수 미스테리아의 새로운(본질적으로 이교도의) 가르침은 옛 유대 방식들을 사족으로 간주했다. 그와 달리, 바울과 싸운 '할례당'은 예수 미스테리아를 유대인만의 것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이처럼 더욱 전통적인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교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에 모여 살았던 반면, 바울처럼 헬레니즘화된 유대인은 이교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인들을 예수 미스테리아에 귀의시키는 데 실패했다. 에베소(에페소스)의 공회당에서 바울은 석달 동안 설교를 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은 그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를 유대인 메시아로 변장시켜 이교도 신인을 몰래 유대교에 접목시키려고 한 것은 교묘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런 음모를 쉽게 꿰뚫어 보았다. 범죄자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는 메시아는 그들이 기다려 온 구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실패한 메시아의 이단적 종교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일순간에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리스도교에는 한편으로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사고에 순응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다-내가 잘못 안 것이 아니길 바란다. 단지 역사적 관점에서만 보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의 영웅 숭배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이 영웅이 유대인 메시아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교도들에게는 이것이 새롭고 이국적인 미스테리아 종교였다. 이 미스테리아에는 흥미로운 유대 전통의 여러 요소가 합성되어 있었다. 매력적이지 못한 옛 유대 율법들을 바울이 폐기해 버리자, 이방인들이 예수 미스테리아를 수용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일단 이 신화가 역사화되자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는 더욱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신인이 최근에 이 땅을 실제로 걸었다는 것은 정말 참신한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2세기 중엽에 유대인 공동체는 예수 미스테리아를 거부했지만 이방인들은 이를 수용했다. 예수는 더 이상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도래한 것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모든 인간을 구하기 위해 도래한 것으로 그려졌다.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은 바울이 바란 대로 옛 유대 전통을 거부했고,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무렵,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시 둘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문자주의와 영지주의로. 문자주의의 탄생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잿더미로 만든 AD 70년 이후, 유대인들은 난민이나 노예가 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다만 공개적 미스테리아에 입문해서, 그리스도교를 제한적으로 반쯤 수용한 유대인들은 메시아 예수의 '생애' 라고 믿는 것을 마음에 간직한 채 더욱 멀리 달아나서 고대세계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서부 지역으로 간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예수 미스테리아 중심지와 연결이 끊기고 말았다. 그러자 완전한 입문식을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수백 마일 이내에는 그노시스를 전수해 줄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 미스테리아는 혼란스러운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 이내에, 서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죽었다가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핵심 교리로 삼은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어떤 은밀한 미스테리아도 수용할 여지가 없었다. 이 종교는 복음서들을 비유로 보지 않았고, 오로지 실제 사건에 대한 역사 기록으로만 보았다. 2세기 내내,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집단 리더들은 감독자나 주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수할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갖지 못한 이들 주교는 예수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참이라고 믿기만 하면 누구나 영원한 구원을 보장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을 기초로 한 제한적인 형태의 그리스도교인데, 결국 이것이 로마가톨릭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영지주의라고 일컫는 원래의 예수 미스테리아는 발생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계속 번성했다. 이 도시는 2-3세기의 위대한 영지주의 스승인 가르포크라테스, 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을 배출했다. 한편 문자주의는 동부의 영지주의 스승들과 연락이 단절된 지역에서 세력을 넓혀, 결국에는 로마시에 본부를 두게 되었고, 당시의 로마인처럼 편협하고 독재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예수 미스테리아의 초기 입문자들은 각지에 독립된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흔히, 특정의 한 스승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들만의 복음서를 지니고 활동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주의와 다양성과 관용의 전통을 유지했다. 그와 달리 문자주의자들은 중앙집권화된 종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자들이 문자주의의 성장에 아연실색 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문자주의자들은 이제 완전히 영지주의자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교로서 고대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수많은 스승들은 로마를 방문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을 그노시스에 입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문자주의자 주교들은 외래인들이 자신들을 단지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 으로 보고 영적 입문식을 치러야 한다고 주창하는 것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지주의 현자들이 문자주의 가르침을 얕잡아 보며 은밀한 미스테리아 입문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신도를 훔쳐 가는 것'에 분개했다. 예수 이야기를 먼저 창조한 영지주의자들은 이제 구원자의 신성한 가르침을 왜곡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문자주의 대변자인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다수의 신앙을 전복하고, 우월한 지식을 빙자해서 신도들을 빼돌린다'고 항의했다. 갈등은 불가피했고, 그리스도교의 정수가 무엇인가에 대한 혹독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결론 마침내 우리 두 사람은 진짜 예수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명을 사용한 미스테리아의 신인이다! 그는 역사적인 '다윗의 아들'로 변장한 신비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다른 모든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달리, 예수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갖게 된 이유가 분명해졌고, 일단 역사적 배경을 갖게 된 후에는 문자주의가 성장하는 것이 불가피했음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예수 신화와 발전 과정에 대해 우리가 발견한 증거의 일부를 되돌아보자. 예수는 이교도 미스테리아가 유대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도록 유대인 메시아로 변장한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이다. 그의 혼성적 성격은 특히 탄생에 대한 모순된 설명을 살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그는 다윗 혈통의 메시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것으로 그려져 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기대했던 유대인 메시아가 아니라, 죽었다가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예수는 가능한 한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만, 죽음과 부활을 말함으로써 사실상 예수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인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 이야기는 이교도의 신화적 주제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신화적 주제, 특히 출애굽기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예수 이야기는 유대인과 이교도의 사고를 종합한 유대인의 간약적 문헌에서 사용된 개념과 이미지를 차용한다. 비그리스도교인의 글에 예수라는 이름만 덧붙임으로써 그리스도교인의 글로 탈바꿈시킨 문헌이 상당수 존재한다. 유대인 메시아는 역사적인 인물이어야 하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것은 예수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미스테리아의 창조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위한 배경으로 선택된 시간과 공간을, 상징적 메시지를 암호화하는 장치로 이용했다. 예수 탄생의 시간은 새로운 물고기자리 시대의 탄생과 연계되어 태어나자마자 혐오스러운 헤롯 왕, 혹은 로마인들과 갈등 관계에 놓인다. 예수가 죽은 시기는 특히 혐오스러운 로마 관리 본디오 빌라도와 연계됨으로써 '부당하게 고발된 의로운 자' 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AD 70년에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구원자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질렀다. 이런 위기감 때문에 예수이야기의 역사화 과정이 촉진되었고, 바울이 가르친 신비한 초시간적 그리스도가 마가복음을 통해 역사성을 갖게 되었다 예수 미스테리아는 유대인들에게 신비한 메시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당시 근본주의자 광신도의 정치적 메시아들은 유대 지방에 재앙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이교도 신인을 도입시키기 위해 유대인 메시아를 오시리스-디오니소스로 만든 것은 현명한 아이디어였지만, 결코 효과가 없었다. 예수 미스테리아는 유대인들에게 거부되었지만, 이교도들에게 새로운 미스테리아 종교로 수용되었다 AD 70년 이후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을 알고 있는 유대교인들이 노예나 난민이 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서부로 간 사람들은 동부의 그노시스 스승들과 단절됨으로써 역사적 예수를 설교하는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을 기초로 한 새로운 종교를 발전시켰다. 소위 영지주의라고 일컫는 원래의 예수 미스테리아는 계속해서 동부에서 번성했다. 2세기 중반에 예수 이야기를 먼저 창조한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영지주의자들이 진짜 그리스도교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의 항구적 신화를 유대인이 기다려 온 역사적 메시아와 합성시키는 데 있어서, 유대인 미스테리아의 창작자들은 유례가 없는 이야기를 창조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이야기는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깊이 분석해 보면 그 방향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신화적인 구원자가 아니라 역사적 구원자여야 했다. 그래서 예수 이야기는 준(準)역사적 배경을 갖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게 불가피했고, 실제로 그렇게 전개되었다. 항구적인 가르침을 암호화한 초시간적인 신화로 시작되었던 것이, 결국에는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한 번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역사적 목격담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때부터 역시 불가피하게, 그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일단 그렇게 되자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종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신화가 아닌 역사를 기초로 한 종교, 신화적 비유로 이해하기보다 역사적 사실로 맹신하는 종교, 은밀한 미스테리아 없이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으로 이루어진 종교, 내용 없이 형식만 남은 종교, 앎이 없는 믿음뿐인 종교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우리 두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작은 하나의 미스테리아로 시작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의 장엄한 고대 신비주의적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편협한 문자주의자들의 권위주의적 그리스도교가 결국 세계를 지배하기에 이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11장 거짓교회 우리 외에도,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은 것처럼 스스로 주교나 사제라 칭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물이 마른 운하와 같다. 그들은 내 말로 장사를 한다. 그들은 거짓을 선전하는 자들을 칭찬한다. 그들은 죽은자의 이름에 매달리며, 그리하면 순결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베드로의 계시록>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분열과 갈등의 역사였다. 신약문헌 가운데 거짓 선지자에 대해 경고하지 않고,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공격하지 않는 문헌은 단 하나도 없다! 2세기 말에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말할 나위도 없이 그리스도교인들은 서로를 지극히 혐오한다. 그들은 가장 험악한 말로 서로를 끊임없이 중상하며, 자신의 교리만이 옳다고 생각해서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켈수스는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종교 활동 초기에 그들은 아주 소수였고, 목표가 같았다. 그 후 그들의 종교는 널리 퍼져서 수가 수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내분이 생겼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들은 온갖 종파로 나뉘었고, 자기만의 영토를 갖고자 했다. 이러한 분열이 거듭됨에 따라 각 종파가 서로를 비난하게 된 것 역시 놀랄 일이 못 된다. 오늘날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교인' 이라는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호칭에 매달린 채 자랑스러워하며, 온갖 교리에 대해 서로 자기만 옳다고 싸운다. 1세기에 그리스도교인 공동체 내부의 다툼은 전통 유대교와 예수미스테리아 사이의 다툼보다 훨씬 더 심했다. 2세기 중반에는 영지주의자와 문자주의자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은, 아무리 기괴하고 아무리 신화적으로 보일지라도 예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기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이다. 예수 이야기는 사실상 신비한 비유일 뿐이라는 영지주의자의 주장에 맞닥뜨린 문자주의자들은,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수난을 당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한 것이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단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단언이 너무나 광적으로 되풀이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문자주의자들이 그만큼 취약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예컨대 베드로후서에서 문자주의자들은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베드로후서 1:16)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고 방어적으로 단언한다. AD 110년경에 이그나티우스가 썼다는 편지에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거짓 교리에 미혹되지 말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일어난 탄생과 수난과 부활을 그지없이 확고하게 믿으라'고 촉구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처녀에게서 태어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실제로 빌라도에게 박해를 받으시어 그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2세기 말에 문자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위조된 베드로서, 요한서, 야고보서 등 여러 사도의 편지에서는 영지주의자를 이단자로 그린다. 요한1서는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요한1서4:2)만이 참된 선지자라는 것이다. 요한2서(영지주의자들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한 페이지로 된 편지)에서 저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그런 자에게는 인사도 하지 말라. 인사하는 자는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이다(요한이서 7-11). 문자주의를 든든히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 이야기는 각색이 되었다. 요한복음은 바울의 습관적 어법인 '육신의 탈을 쓰고(육신과 닮은꼴로)' 라는 말을 바꾸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그렇게 각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내용이 추가되었다. 학자들은 예수가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무덤에서, 문자 그대로 부활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 낸 수많은 구절을 추려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드러난 원래의 복음서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유령 같은 영적 존재로 그려져 있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사도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두 사도는 낯선 사람을 길에서 만나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리고 식사 때에 그가 떼어 준 빵을 먹고 비로소 그가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예수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누가복음 24:31). 그러나 그 구절 다음에,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추가된 구절에서, 부활한 예수는 자신의 '살과 뼈'를 과시하고 '나를 만져 보라'(누가복음 24:39)고 하며, 자신의 육체적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생선을 먹어 보이기까지 한다. 요한복음에서 슬피 울던 막달라 마리아는 산지기로 여겨지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비로소 그녀는 그가 예수라는 것을 알아본다. 예수는 그녀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요한복음 20:17)고 말한다. 그러나 그 문장 뒤에 '의심하는 도마'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 도마는 예수를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는 한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예수가 나타나 도마 에게 말한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요한복음20:27).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비유로 이해한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육체를 지닌 채 부활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교인들도 죽은 후 문자 그대로 육체를 지닌 채 무덤에서 부활할 거라고 가르쳤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는 그 누구든 참된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이단자라고 선언했다. 문자주의자들은 심지어 영성체 의식의 빵과 포도주도 문자 그대로 예수의 살과 피라고 주장 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단언한다! 예수 신화를 역사로 받아들임으로써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의 환생 교리를 포기했다. 문자주의자들은 신인이 역사상 단 한번만 죽었다가 부활한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인생도 일회적인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후의 보상과 처벌 또한 영원한 것으로 믿었다. 문자주의자들은 이교도인 켈수스가 '공격적인 교리' 라고 부른 것---선한 하나님이 한 번의 인생에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을 포기해 버리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또 재림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는 자기 말을 듣고 있는 자 가운데 일부는 죽기 전에 재림을 보게 될 거라고 약속한다(마가복음 9:1, 마태복음 16: 28, 누가복음 9:27). 물론 영지주의자들은 이 말을 비유로 보았다. 입문자가 그리스도 곧 보편적 다이몬으로 부활하는 것에 대한 비유로 본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이러한 '예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예수가 약속한 대로 나타나지 못한 것을 해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위조된 베드로후서에는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 공동체 내에서 이 쟁점에 대해 불편해하고 혼란스러워한 것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필사적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말세에 기롱(속이어 농락함)하는 자들이 와서 자신의 탐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가 우리에게 약속한 강림(재림)은 어디 있느뇨? 그동안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는 죽었건만, 세상은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던 때와 똑같지 아니한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라. 어떤 자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주의 약속은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윈하시어 오래 참고 계시는 것이다(베드로후서 3:3-9). 이와 마찬가지로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종말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풀이했다.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교가 온 세상 끝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다른 문자주의자들은 바울이, 일종의 불멸의 존재가 되어 에베소에 살고 있으니 결국 예수는 예언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우스꽝스러운 주장을 하기도 했다. 범궤(계약의 궤 : 모세의 십계명을 새긴 2개의 납작한 돌을 넣은 궤)의 길이가 5.5큐빗이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기괴하고 비비 꼬인 추리를 통해 히폴리토스는 종말의 날을 202년으로 확정 지었다. 그런데 그 해가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가자 종말의 날은 500년으로 늦춰졌다. 3세기 중반이 되자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종말의 날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5세기 초에, 2세기 교인들의 문헌을 번역한 사람들은 임박한 계시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해 버렸다. 이제는 그런 말들이 곤혹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여전히 '종말이 가깝다'고 경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주교들의 교회 영지주의자들은 입문자에게 그노시스를 제공했다. 즉 이 세계라는 환상너머의 진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영적으로 체험케 했다. 문자주의자들은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성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곤혹스러운 딜레마에 빠졌다. 예수 이야기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사실을 기록한 역사라고 누구나 믿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2세기 말의 저술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보통의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한 인간이 무덤에서 육체적으로 되살아났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다고. 이러한 합리적인 의심에 대해 테르툴리아누스가 내세울 수 있었던 주장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진실이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는다'. 역사책에서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라고 추앙되는 사람이 고작 그런 말밖에 하지 못했다! 예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하기 위해 문자주의자들은 영적 계보를 고안해 냈다. 그래서 문자주의자들이야말로 사도들의 직계 제자라고 주장했다. 더러는 150년 전에 죽은 사도에게 직접 배운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당시에 살아 있던 자들의 개인적 증언으로써 예수 이야기의 역사성이 증명된다며, 그 증언은 직계 제자인 주교들에게 충실하게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이처럼 조작한 계보를 강력한 무기로 사용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자들이 전혀 모르는 은밀하고 신성한 비밀을(미스테리아를)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서 문자주의자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12사도에게까지 소급되는 사도 계보의 대표자들 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문자주의자들은 주교들이 12사도와 동일한 권위를 부여 받은 자라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의 권위가 부활을 처음 목격한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자주의자 주교들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합법적인 근거로, 그들이 12사도의 계승자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래서 권위에 반대하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아예 그리스도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스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위조된 편지에서 저자는 반감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는 '성급하고 자의적인 사람들'을 비난했다. 문자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주교들에게 권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불복종하는 죄를 짓는 자라고 단언했다. 또, 신성하게 부여 받은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나 '사망의 형벌을 받는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이그나티우스가 썼다는 편지에서도 주교는 '하나님 대신' 지배하는 자라고 주장했다. 진실로 독실한 자는 '주교를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두려워하고, 복종' 해야 한다! 주교와 사제와 부제가 없으면 '교회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편지의 주인은 또 이렇게 썼다. 그 누구라도 주교 없이는 교회와 관계된 어떤 말도 하지 말라. 주교나, 주교가 임명한 자만이 정당한 영성체 의식을 거행할 수 있음을 알라. 주교가 행하지 않는 영성체 의식이나 세례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다. 주교와 함께하는 것은 교회와 함께하는 것이다. 주교에게서 떠난 자는 교회에서 떠난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이다. 이 편지의 주인은, 하나님이 하나이며 유일하기 때문에 교회에도 우두머리는 오직 하나뿐이며, 모두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주교'는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슬로건이 되었다. 그와 달리 영지주의자들의 조직에는 주교나 사제라는 위계 질서가 없었다. 그들은 주교나, 사제나, <성서> 낭송자나, 선지자 등의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제비뽑기를 해서 정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새로 제비 뽑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각 역할을 맡은 자가 계속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일을 할, 올바른 사람을 하나님이 선택한다고 믿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문자주의자 테르툴리아누스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렇다면 주교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이 된다. 오늘은 부제인 사람이 내일은 <성서> 낭송자가 된다. 오늘 감독자인 사람이 내일은 평신도가 된다. 심지어 그들은 평신도들에게도 사제직을 부여한다. 정통파 교인들이 항구적인 권력 계층을 구축하려고 한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누구나 영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깜짝 놀라서 이렇게 썼다. 나는 이단자들의 소행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그들이 자신들의 신조에 따라 얼마나 천박하게 행동하는지, 진지함도 없고 권위도 없고 규율도 없이 얼마나 어리석게 구는지. 무엇보다도 누가 믿는 자이고 누가 이교도인지 알 수가 없다. 누구한테나 똑같이 개방되어 있고, 똑같이 듣고, 똑같이 기도한다. 혹시 이교도가 참석하면 이교도와 똑같이 기도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어울리며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다른 교리를 지녔으면서도 그들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뭉치기로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잘난척하며, 모두가 그노시스를 주겠다고 나선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모든 형태의 종교는 원래 남녀가 평등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계속 여자와 남자를 영적으로 평등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2세기 중반에 문자주의자들은 성별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2세기 말에 여자는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여자를 지도자로 삼는 그리스도교인 집단은 무조건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여자는 교회에서 연설하면 안 되고, 가르쳐도 안 되고, 세례를 주어서도 안 되고, 영성체 의식을 거행해서도 안 되고, 남성의 역할을 분담하겠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영지주의자들이 여신을 숭배하고 여성들이 사제가 되는 것을 적극 장려했던 바로 그 시대에, 지독한 여성 혐오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대변해서 여성을 다음과 같이 몰아붙였다는 것은 참 별난 일이다. 너희는 악마의 출입구이다. 너희는 악마가 감히 공격하지 못한 남성을 유혹한 여성이다. 너희는 모두 이브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여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는 이 시대에도 계속 살아 있느니, 너희의 죄 또한 당연히 계속 살아 있느니라. 2세기 말께 문자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인 자와 아닌 자를 위한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규칙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은 문자주의 신조를 고백해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에게 참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구성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 이상이라고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했다. <빌립의 복음서>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 밖으로 나왔으면서도 이제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웃는다. 신조를 읊조리거나, 심지어 순교를 해도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태복음 7:16)고 한 말을 인용하며 참된 교회에 속한자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영적 성숙의 증거를 요구했다. 문자주의자 주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그런 개인주의가 그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본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훨씬 더 광적이고 극단적이 되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사탄의 대리인들' 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촉구하며 이렇게 경고했다. '하나님은 모든 이단자들에게 내릴 영원한 불의 형벌을 준비해 두셨다'. 문자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이단자가 되느니 이교도가 되는 게 낫다'는 말을 후렴처럼 읊조렸다. 유난히 광적이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영지주의자들이 '식인 풍습'에 빠졌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신약 유다서의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다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짧고 편집증적인 논법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모두의 구원에 대해 너희에게 간절히 편지하고자 하였으나, 그 대신 이번에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진 믿음을 보존키 위해 힘써 싸우라는 호소의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경건치 아니한 자, 이미 오래 전에 유죄 판결을 받기로 정해진 자들이 너희 가운데 몰래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환락의 허락으로 왜곡하고, 홀로 하나이신 우리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그들은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신성모독을 하기까지 한다(유다서 1:3-8) 영지주의자들은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은밀하게 스며든 앎---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기탄없이(염치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愛餐 : 맛있게 먹는 요리) 속의 암초 (유다서 1:12)이고,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1:13)이다. 유다서의 저자는 '그들의 몸에 닿아 더럽혀진 옷까지도 혐오하라'(1:23)고 말한다. 디모데서의 저자는 영지주의 가르침을 '독한 창질'에 비유한다(디모데후서 2:17) 이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 교회의 당국자들을 '저속한 교회 만능주의자' 라고 일컬었다. 영지주의 현자 헤라클레온은 문자주의 교회의 도그마를 '영양가 없이 정체된 물'에 비유했다---그리스도가 그노시스를 통해 선택된 자에게 준 '살아 있는 물'과 대비되는 죽은 물에 비유한 것이다. <진리의 증언>에서는, 문자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가 누군지 모른다'고 공격한다. <위대한 세트 신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영지주의자들이 '무지한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인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미움을 받고 박해 당한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박해하는 자들은 '말 못하는 짐승들처럼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영지주의 문헌에서 구원자는 '온전한 교회의 자유와 순결을 흉내내기 위해 죽은 자의 교리와 거짓말을 주창하는' '거짓 교회(모방 교회)'가 만들어져 왔다고 말한다. <트리파티테 트락타테Tripartite Tractate>에서는 참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영지주의자들과, 거짓 신인 유대인의 여호와를 섬기는 문자주의자들을 대비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는 평등하게 사랑으로 함께 모여 자발적으로 서로를 돕는다. 반면에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서로에게 명령하고 싶어하며, 헛된 야심으로 서로 앞서기 위해 경쟁한다'. 그들은 '서로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비판했다. 소위 교회라고 일컫는 수많은 곳에서, 특히 대도시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린다는 지배자들이 우글거린다. 더러 가장 고귀한 예수의 사도라 할지라도 그들과 평등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발렌티누스파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자로 명백히 규정했지만,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공개적 미스테리아와 은밀한 미스테리아 사이의 현격한 거리를 좁히기 위해 예수 미스테리아의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자 했다. 발렌티누스와 같은 현자들은 바울이 제시한 원래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교회는, 심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이 모두 모여 있는 집단으로 보았다. 바울은 이 두 수준의 교회가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충고했다. 그래서 발렌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런 공존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기고 심적 수준, 곧 문자주의와 영적 수준, 곧 영지주의의 그리스도교인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바울은 그의 로고스, 곧 영적 가르침과 케리그마kerygma, 곧 심적 가르침을 구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공동체 내부의 파괴적인 분열을 피하기 위해 '같은 신조를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영적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자신과 하나님'만 알도록 자신의 깨달음을 비밀에 부치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심적 그리스도교인들을 자극하지 않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라고. 마찬가지로 발렌티누스파는 그들이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지만,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교회 의식에 참여했다.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파와 신학적 논쟁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이 무조건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투덜거렸다. 그들은 우리에게 줄기차게 묻는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신조를 고백하고, 같은 교리를 지니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이단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그러나 이단자 사냥꾼인 이레나이우스는 그것을 영지주의자들의 우회적인 음모로 여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실제로,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며 그런 말을 할 뿐이다'. '그들이 공적으로 하는 말'로만 보면 발렌티누스파가 '겉보기에는' 문자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스테리아를 추구한다'. 이레나이우스는 그들이 '권위를 배척하는 모임'을 갖기까지 한다고 비난한다. 다시 말하면 주교들의 권위를 배척하는데, 이레나이우스가 바로 주교였다! 3세기 초에는 발렌티누스파 그리스도교인들도 둘로 쪼개졌다. 동부의 발렌티누스파는 문자주의 자들과의 화해 운동을 실패로 돌아간 운동으로 간주하고 포기해 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와 헤라클레온등 서부의 발렌티누스파는 계속 그리스도교를 통합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예수의 말(플라톤의 말을 인용한 말)을 인용하면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된 자는 적다'(마태복음 22:14)고 주장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다수는 그노시스를 갖지 못한 자들이어서, 선택된 소수인 영지주의자들은 다수를 가르쳐서 그노시스로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리스도가 교회 내에 '영적' 교인과 '비영적' 교인을 함께 두어 결국에는 모두가 영적인 교인이 될 수 있도록 했다고 가르쳤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편 두 부류가 모두 하나의 교회에 속했고, 둘 다 세례를 받았고, 둘 다 미사에 참가했고, 둘 다 같은 고백을 했다.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의 수준뿐이었다. 입문하지 않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조물주를 하나님인 것처럼 잘못 숭배했다. 그들은 죽었다가 육체적으로 부활한 그리스도가 그들을 죄에서 구해 줄 거라고 믿었다. 즉 그들은 예수, 곧 자기 자신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믿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계속 성숙해서 그노시스를 받아들인 자들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속성, 곧 하나님의 속성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속성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발렌티누스파는 문자주의자 주교들이 조물주 여호와나 되는 것처럼 심적 수준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합법적으로 권위를 휘둘러도 좋다고 양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교들이 여호와를 대신해서 요구하고, 경고하고, 위협하는 말들이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한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입문자들은 신비한 그노시스의 체험을 통해 구원을 받았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정통은 없다 전통적으로 주도 면밀하게 조장되어 온 영지주의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이 속한 정통파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변방에서 활동한 광신적 극단주의자들의 작은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물론 반영지주의자들이 만든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흥망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아시아와 이집트에 두루 존재했으며, 로마에 중심지를 두고, 때로 서구 여러 지방에도 자리를 잡았다'. AD 첫 몇 세기에는 사실상 '교회'라는 게 없었고 서로 경쟁하는 종파만 있었는데, 그종파 가운데 하나가 문자주의자들이었다. 문자주의자인 순교자 유스티누스, 비타협적인 영지주의자 마르키온, 그리고 영지주의/문자주의의 분열을 해소하고자 한 발렌티누스, 이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시대에 로마에 살았던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스승들이었다. 교인들 공동체가 가지각색으로 나뉘어진 것은 2세기 중반이었다. 그런데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 영웅으로 기억되기에 이르렀고, 다른 두 사람은 하찮은 이단자로 배척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전에는 발렌티누스와 마르키온이 유스티누스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자기 이름을 딴 그리스도교 운동을 일으켜 수세기 동안 크게 번성했다. 영지주의가 4세기와 5세기에 혹독한 박해를 받기 전까지는, 초기그리스도교에서 영지주의자들이야말로 대다수 교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은 지성인들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컨대 발렌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철학자이자 시인이었으며, 이집트의 주교로 선출된 사람이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막강한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레나이우스는 문자주의자 공동체의 수많은 주교와 사제, 과부, 순교자가 발렌티누스파의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성격이 편협한 테르툴리아누스조차도 발렌티누스가 '지성과 설득력을 갖춘 유능한 인간' 이라는 것을 시인했다. 마찬가지로, 문자주의자 제롬은 마르키온이 '진정한 현자' 라는 것을 시인했다. 한편 문자주의자들의 영웅인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로 여겨지기를 필사적으로 원했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 학파에 가입하지 못하고 퇴짜를 당했다. 그런 직후에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영지주의 현자들은 수많은 복음서와 영적 문서를 집필한 것으로 추앙되었다. 물론 신약의 마가복음으로 개작된 예수 이야기의 원래 버전을 쓴 것도 그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서들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단것도 그들이었다. 117년경에 활약한 바실리데스는 주석서 24권을 쓴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후대에 정경(正經)이 된 복음서들을 언급한 적이 없다. 바실리데스는 또 직접 복음서 하나를 썼고, 인도 구루들의 가르침에 관한 책도 썼다! 약 170년경에 프톨레마이오스와 헤라클레온은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신약<성서>에 대한 최초의 주석 역시 영지주의자들이 쓴 셈이다. 이와 달리 문자주의자들은 실질적인 문서를 집필한 게 거의 없다. 다만 이단자들을 공격하는 글만 집중적으로 썼다. 이러한 반영지주의 저술이 씌어지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중반 무렵이었다---문자주의는 그때 비로소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4세기의 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의 말에 따르면, 최초의 반 이단저술가는 아그리파 카스토르(활약 시기 135년경)라는 인물이었다. 물론 순교자 유스티누스(150년경)도 반 이단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저술은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후대의 정통과 그리스도교인들이 보기에 그 저술이 너무나 '반정통적' 이었기 때문이다. 이단자를 논박하는 글 가운데, 2세기 말에 씌어진 이레나이우스의 저술보다 앞선 것은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이후의 모든 논박은 다소간에 이레나이우스를 기초로 삼았고, 그의 촌평과 편견을 그대로 베껴 쓰기만 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러나 이단자를 공격한 이런 문서들은 정통 그리스도교에 대해 명확한 진술을 하지 않는다. AD 첫 몇 세기에는 우리가 오늘날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다만 문자주의를 정통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단지 문자주의자들이 후대에 교회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첫 몇 세기에는 여러 종파가 서로 다른 시기에 크고 작은 세력을 떨쳤고, 가장 광신적인 정통과 그리스도교인들조차도 결국에는 이단자로 낙인 찍힌 경우가 허다했다. 3세기 전반기에 문자주의자인 히폴리토스는 한때 노예였던 영지주의 스승 칼리스투스가 로마에 제안한 정책을 거절한 적이 있다. 칼리스투스는 신도들이 노예와 결혼하는 것을 인정해 주길 원했고, 죄의 사면을 확대해서 성범죄자도 용서해 주기를 원했다. 히폴리토스는 칼리스투스를 일반 범죄자로 몰아붙였지만,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 대다수는 그를 스승으로 존경했고, 주교로 선출했다. 그러자 이단자 사냥꾼 원조인 히폴리토스는 이제 그가 그토록 열심히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헌신했던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힐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문자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들 일부는 실제로 생애 말년에 영지주의로 돌아섰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제자였던 타티아노스가 그랬고, 심지어 광신적인 이단자 사냥꾼 테르툴리아누스조차 그랬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가 이끈 영지주의자 집단에 들어갔다. 몬타누스는 전에 이교도의 신인 아티스 미스테리아의 사제였다. 이제 테르툴리아누스는 전에 그가 이단자를 공격했던 것과 똑같은 독설로, 심적 수준의 교인들만 모인 '정통' 교회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영적인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교회'가 아니라 '수많은 주교' 들의 교회일 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과거 여성혐오증을 돌이켜보면, 몬타누스의 무리에 여성 사제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는 것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권위자는 이렇게 썼다. 몬타누스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리스도교 교리는 발랄하고 자극적인 여성들의 감독 아래 전혀 다르게 발전했을 것이다.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 무리를 떠나 자기만의 종파---테르툴리아누스파---를 세웠다. 놀랄 것도 없지만, 전통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영지주의로 개종한 것은 교묘히 은폐되었다. 그리고 그가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한 글만 무수히 복제되었다. 문자주의 교회에서는 그의 저술을 모범적인 문헌으로 간주해서 다른 모든 종파를 말살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정통' 운운했다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인들 다수가 공통으로 지닌 어떤 견해가 항상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견해가 정통이었는지를 시사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정통이 되었을 뿐이다. 비로소 그때에 문자주의 종파는 자신들의 특수한 견해를 강화할 수 있는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영지주의는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번창했다. 정통으로 간주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 다수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항상 유력한 주교들의 견해를 반영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전통 유대교와의 관계에 대한 성가신 쟁점들 때문에 처음부터 분열되어 있었다. 2세기 중반에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고, 그들은 할례를 거부했으며, 모세의 다른 모든 명령과 금기를 준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란은 여전히 드셌다.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유대인의 신 여호와를 완전히 버리고 플라톤과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신 개념과 동일한 '최고의 하나' 라는, 좀더 신비한 개념의 신을 받아들이고 싶어했다. 막강한 영지주의 스승이었던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별개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조법>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구약의 문장들을 병치해서 그 문장들이 서로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마르키온은 여호와가 '죄를 지은 야만인' 이며, 구악은 그가 인간에게 저지른 죄의 목록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선한 하나님과 범민족적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계시였다---작은 민족의 볼 완전한 여호와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문자주의자들도 유대교 전통을 거부했다. 실제로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다수의 문자주의자들이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동료 교인들에게 말도 걸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문자주의자들은 유대교 전통을 거부하면서도 구약은 계속 간직하고 싶어했다. 구약은 신성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신약도 신화가 아니라 실제 사실의 기록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구약이 뒷받침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구약은 예수의 도래에 대한 '예언들'의 원전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그런 예언들은 문자주의자들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의 유산이 있다는 것은 권위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구약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유대인의 고대 문헌에 기초'했고, 따라서 이교도 세계의 어떤 책, 어떤 도시, 어떤 종교, 어떤 인종보다도 더 유구한 전통을 지녔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문자주의자들은 유대인의 경전을 원했지만, 유대교를 원치는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를 거부했기 때문에 영적 유산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으며, 이제 그 유산은 합법적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경전은 이때 처음으로 '구약(옛날의 약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약(새로운 약속)'을 예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약 <성서>는 하나의 예언으로 마무리되도록 적절히 재편집되었다. 그럼으로써 아주 매끄럽게 신약 복음서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점점 더 로마화됨에 따라, 예수를 죽인 책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로마인 빌라도가 아닌 유대 민족 전체로 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하는 유대인 무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되었다. '그(예수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 27:24). 현대의 권위자는 이렇게 썼다. 이 한마디 말이 인류에게 물려준 유산은 너무나 처참한 것이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인을 수세기 동안 박해해 온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되어 왔다. 겨우 최근에 이르러서야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유대인 후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죽인 책임이 없음을 선포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2세기부터 줄곧 문자주의자들은 유대인을 매도하는 장문의 글을 수없이 써 왔다. 사르디스의 맬리토 주교(170년대)는 유대인들을 '하나님을 죽인 자'---'전적으로 새로운 범죄'를 고안해 낸 범죄자---라고 질타했다. 유대 민족이 로마 제국에게 당한 재앙은 하나님의 정당한 복수로 여겨졌다. 유대인들이 재앙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참된 그리스도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간주했던 할례는, 주를 살해한 죄에 동참한 징표로 여겨지게 되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유대인들에게 가공할 만한 적대적 독설을 퍼부으며 이렇게 썼다. 육체적인 할례는 너희가 다른 민족과, 그리고 우리와 구별될 수 있는 징표로서 아브라함 때부터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 징표에 따라 마땅히 너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너희만이 받게 될 것이다. 너희의 땅은 황폐화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모든 도시는 불타고, 이방인들이 너희의 땅에서 난 과실을 먹게 될 것이다. 너희는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정당하며 마땅하게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의로운 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그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이제는 그의 안에서 소망하는 자들을 기만하며 그를 보내신 그분, 전능하신 하나님, 만물의 창조주를 기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점점 더 매도 당하는 동안 본디오 빌라도를 의롭고 신성한 인간, 심지어 그리스도교인으로 보는 전통이 날조되었다! 4세기 무렵에 빌라도와 그의 아내는 성자로 추앙되었다| 이러한 예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사실상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신약 <성서> 만들기 그리스도교를 영지주의자들 수중에서 빼앗기 위해. 그리고 공통의 도그마에 기초한, 중앙집권화된 종교를 세우기 위해, 문자주의자 주교들은 당시에 배포된 수많은 영지주의 복음서의 영향력을 분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히 그리스도교의 진술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제한된 수의 정경(正經)을 만드는 한편, 다른 모든 문헌은 위작이자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일에 착수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한 밑거름이 된 것은 유대인들에게서 훔친 구약이었다. 그러나 어떤 문헌을 정경에 포함시켜야 할 지가 문제였다. 당시에 서로 다른 교인들 공동체는 서로 다른 문헌을 <성서>로 채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들이 선호하는 복음서와 편지와 전설이 정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세기 말에 격화된 논란은 4세기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현대의 거의 모든 종파가 신약에 포함된 문헌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지만, 처음 4세기에는 모든 단일 문헌이 한때 이단적이거나 위조된 것으로 낙인 찍힌 적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정경을 선택하려는 첫 시도는 약 110년경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모호한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마태복음이 '신탁'을 수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그가 지니고 있던 마태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문헌과 상당히 다름을 시사한다. 분명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시대(150년경)에는 신약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가 언급한 '사도들의 회고록' 이라는 것은 정경이 된 네 복음서와 사뭇 거리가 있다. 그는 자신의 어떤 저술에서도 네 복음서를 언급한 적이 없다. 타티아노스(170년대)는 다른 복음서들의 얘기를 추려서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지워 버린 후 하나의 복음서로 종합했지만, 교인들 공동체는 이 복음서를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2세기 말에 이레나이우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네 복음서를 정경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네 복음서가 각각 예수의 사도 가운데 1명이 직접 썼다는 주장을 신빙성의 기준으로 제시했지만, 그런 기준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마가와 누가는 그들이 묘사한 사건의 목격자인 척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신약은 가장 초기에 가장 널리 인용된 일부 문헌---<도마의 복음서>, <헤르마스의 양치기>, <헤브라이 사람들의 복음서>등---을 배제했다. 그런 문헌들에는 예수의 준(準)역사적 이야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마의 복음서>는 예수의 '쌍둥이'인 도마가 기록했다는 것으로 예수의 '은밀한 이야기'를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헤르마스의 양치기>는 초기 교인들 사이에 매우 인기 있는 문헌이었는데, 헤르마스가 '교회' 의 화신으로 변장한 이교도 신탁의 여사제를 만나는 이야기가 담긴 원래의 이교도 문헌을 살짝 개작한 것이다. 현대 권위자의 말에 따르면, 이 문헌의 저자는 사실상 '우리가 바울 이후 가장 잘 아는 초기 그리스도교인' 이라고 한다. <헤브라이 사람들의 복음서>는 초기 교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된 복음서이다. 그러나 초기에 그토록 인기가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문헌 역시 신약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문헌들은 예수가 일곱 달 동안만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교도 신인 디오니소스가 바로 그랬다! <도마 행전>과 같은 수많은 영지주의 저술은 너무나 인기가 있어서 그냥 배제시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문헌은 이단적 내용을 지운 후 문자주의자들의 주장에 맞도록 각색되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썼다. 가톨릭 주교와 스승들은 영지주의 저술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저지하고 신자들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대신 이단적 서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를 송두리째 채택해서, 독이 될 만한 교리는 조심스럽게 제거한 후 다소 정제된 이야기를 사람들 손에 쥐어주었다. 물론 사도행전도 원래의 영지주의 문헌을 그런 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2세기 말에 이레나이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그것을 <성서>로 간주했지만,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그런 <성서>가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때 영지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삼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형태로 날조된 것이다. 즉,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역사성을 확립하고, 사도들의 계보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주교들을 합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행전은 또 바울을 문자주의의 사도로 그려 놓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바울이 알고 있는 것처럼 꾸며 놓았다. 물론 영지주의자들은 사도행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진짜 편지 내용과 사도행전 속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영광스러운 상처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 사이의 갈등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 박해에 대해 양 진영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다. 문자주의자들에게는 예수가 순교자였다. 그래서 순교를 당한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예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증거였다. AD 258년에 사망한 키프리아누스는 '영광스러운 상처에서 흘러나와 지옥의 불을 끄는 피'의 '숭고하고 위대하며 흐뭇한 장관'을 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생생히 묘사했다. 오늘날 무슬림 극단주의자들과 흡사한 방식으로, 문자주의 순교자들은 신성하고 영 적인 전사로 받들어졌다. 순교한다는 것은 천국의 한자리를 보장 받는 것이었다. 그러한 보상이 제시됨에 따라 수많은 문자주의자 교인들은 능동적으로 죽음을 찾아갔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함으로써 영생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의 피를 바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고통 당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사회의 언저리에 작은 무리로 결집된 이런 광신도들은 여러 면에서 현대의 사교 집단을 닮았다. 오늘날의 사교 집단도 기꺼이 집단자살을 함으로써 천국의 보상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순교에 대해 가장 열광적인 웅변을 한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나이우스가 그토록 바람직한 운명을 피해 갔다는 것은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순교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적인 오해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고 그 운명에 순교도 포함되지만, 재빨리 천국에 가는 방법으로 순교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기만적인 일이라고 보았다. 그들에게 영적 계몽은 그노시스에 대한 신비한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거창한 제스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의 증언>이라는 영지주의 문헌은, 순교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우리는 그리스도교인' 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 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증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만 증언하기 때문에 공허한 순교자' 들이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일 뿐이어서 그들이 원하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희생'을 바란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식인종으로 만드는 자들이다. 그런 문자주의자들은 순진한 동료 교인들을 부추겨서 '죽은 자의 이름으로 신앙을 굳건히 지키면 순결케 되리라'는 환상 아래 '사형 집행자에게' 자진해서 찾아가도록 '형제들을 몰아붙이는 자들' 이다. <베드로의 계시록>의 저자는 특히 '어린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행을 보며 환호하는 문자주의자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순교를 옹호하는 자들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그런 자들을 '영지주의자와 달리,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만큼 어른이 되지 못한' 유치한 애들로 규정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불합리하게 용감한 자는 결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무서운 게 무엇인지 몰라서 끔직한 일을 당하는 애들도 용감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들은 불을 만지기까지 한다. 날카로운 창을 향해 돌진하는 야수도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푼돈을 벌기 위해 여러 개의 칼을 던지고 받는 요술쟁이도 용감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용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실로 용감한 자는, 악의적인 수많은 무리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위험 속에서도 의연하게 다가올 일을 기다린다. 그런 식으로 그는 순교자라 불리는 자들과 구별된다. 순교자는 스스로 위험한 사건을 만들어서 위험 속으로 돌진한다. 더러는 영광을 추구해서 수난을 당하고, 더러는 더 큰 형벌이 두려워서 수난을 당하고, 더러는 사후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수난을 당하지만, 그런 자들은 영지주의자와 달리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만큼 어른이 되지 못한 애들과 같다. 운동 경기에서처럼 교회에서도 어른을 위한 면류관이 있고, 애들을 위한 면류관이 따로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순교자로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다만,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심오하고 신비한 진실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수준 낮은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로 부활한다는 것을 뜻한다. 문자주의자들은 순교의 수난을 헛된 일로 치부하는 영지주의자의 태도에 분개했다. 이그나티우스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편지의 저자 역시 분개해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누군가 말하듯이, 만일 예수의 수난이 다만 형식일 뿐이라면 내가 왜 감옥에 갇히고, 내가 왜 야수들과 싸우고자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죽어도 그게 헛된 일이란 말인가?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을 배신자로 보았다. 겁쟁이들을 위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함으로써, 박해에 직면한 교회를 단합시키려는 시도를 좌절시키고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영지주의자들은 문자주의자들을 광신적 극단주의자로 보았다. 거짓 약속을 내세워 무의미한 수난을 당하도록 호도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로마인과 박해 그리스도교 박해의 전통 역사에 따르면, 로마 제국이 이 새로운 종교만을 특별히 증오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로마는 신비주의자, 철학자, 종교적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숙청했다. 그들의 존재가 로마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미스테리아에 대해서는 애증이 교차했는데, 그리스도교는 또 다른 미스테리아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여러 외래 종교의 이국적 영성과 심오한 철학에 이끌리면서도,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급진적인 도전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했다. 예컨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추종자들은 후대의 예수 미스테리아 추종자들처럼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BC 186년부터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는 로마에서 금지되었고, 이탈리아 전역의 성소가 파괴되었다. 수많은 입문자들이 처형당했고 때로는 한번에 수천 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첫 몇 세기 동안 사실상 로마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다른 철학자는 물론이고,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도 추방이 되었다. 이후의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전제적인 로마 당국과 타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형에 처해졌다. <이교도 순교자 행전>이라고 불리는 한 문헌은 그렇게 박해 받은 입문자들의 용기와 고결함을 찬양한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를 비웃으며' 화형장으로 끌려가 '불길 속에서 의연하게' 죽어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에 따르면, 맨 처음부터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인의 박해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3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교인들은 공식적인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특정 도시의 몇몇 개인에 한해서만 박해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특별한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억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2세기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총독 가운데 1명이 문의한 것에 대해 이렇게 지시했다---그리스도교인들은 마땅히 정식 재판을 받아야 하며, 익명의 공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재판이 이루어져서 안된다고. 그리스도교인을 '쫓아내는 것'도 안 되며, 고발인은 고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AD 250년에 역병이 고대세계를 휩쓸며 수많은 사람이 죽자 상황이 달라졌다. 로마 제국은 붕괴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불운의 희생양이 되었다. 데키우스 황제는 제국의 번영과 건강을 위해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신들에게 제사지낼 희생 동물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해 최초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는 1년 만에 끝났지만, 257-259년 발레리아누스 치하에서, 그리고 303-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박해가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박해를 받은 기간을 모두 합하면 5년 정도이다. 이러한 박해의 규모는,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의 소위 '대박해'의 규모라는 것도, 그리스도교 선전자들이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3세기 중반의 글에서 오리게네스는 신앙을 위해 죽은 '몇몇' 그리스도교인을 '손꼽을' 수 있다고 썼다.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교인은 남자 10명 여자 7명뿐이었다! 로마 총독들은 흔히 그리스도교인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강제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그리스도교인들은 타협책을 제시 받았다. 그들이 희생제의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면 분향만 하는 것을 제안 받았다. 한 총독은 순교자가 되려는 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너는 며칠 만이라도 생각해 볼 시간조차 갖고 싶지 않단 말이냐? 세상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지 너는 알지 못하느냐? 네가 자진해서 죽는다면 대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 총독이 이렇게 하소연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순교를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 자신이었다. 한 교인 집단은 아시아의 총독을 찾아가서 자신들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총독은 거절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벼랑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는 것은 자유라고 총독은 말했다! 영지주의자들처럼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처럼 순교를 자청하는 것이 깨달음을 통한 운명의 수용이 아니라 공허한 작태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기꺼이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에서 비롯한 일이어야지, 그리스도교인들처럼 단순한 고집에서 비롯한 일이어서는 안 된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며, 비극적인 것도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사려 깊은 판단에서 비롯한 일이어야 한다. 일부 로마 황제들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흥미롭고 이국적인 미스테리아 종교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세베루스 알렉산더(230년대)는 자신의 개인 성소에 이교도 미스테리아의 여러 신인들 석상 곁에 그리스도의 석상을 모셔 놓기까지 했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이교도 철학자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 철학자인 오리게네스의 후견인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장 전통 주장과 달리, 로마의 박해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가 국교로 채택한 이후에 비로소 부각되었다. 이때부터 순교는 더 이상 선택 사항이 될 수 없었다. 교인들은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는 고대세계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기 전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될 운명을 기다리며, 특히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그런 허구를 처음 날조한 테르툴리아누스(200년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거의 모든 도시의, 거의 모든 시민이 그리스도교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좀더 신빙성 있는 오리게네스(240년경)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은 사실상 고대세계의 주민 가운데 소수였다. 첫 몇 세기 동안 교인이 얼마나 많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묘비의 글과 이교도 문헌은 250년 이전의 그리스도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3세기 초에 씌어진 가장 중요한 역사서 두 권에도 언급이 전혀 없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통계 자료는 오직 하나뿐인데, 그것은 4세기의 그리스도교인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남긴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자료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아무튼 그의 말에 따르면, 251년에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이 '1천500명 이상의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았다고 한다. 성직자는 154명이나 되었다---그들 가운데 52명은 귀신을 쫓아내는 자였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250년경에 로마 제국의 인구 가운데 약 2 퍼센트가 그리스도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는 인구의4-5퍼센트까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에도 유세비우스는 전체 성지(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도교인이 사는 마을을 고작 세 곳 정도만 알고 있었다. AD 첫 3세기에는 교인 수가 증가했지만, 그리스도교인만 증가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세계의 미스테리아 인구가 총체적으로 증가했던 것이다.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종교적 회의주의가 만연했다. 에드워드 기번이 말했듯이 '모든 신들이 철학자들에게는 똑같이 참된 것으로 보였고, 정치가들에게는 똑같이 거짓된 것으로 보였고, 행정관들에게는 똑같이 유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젊었을 때 쇠퇴하기 시작했던 신탁이 2세기 초에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테네에서는 전에 완전히 쇠퇴한 디오니소스 의식이 다시 되살아나서 엘레우시스에서의 입문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도 제국 전체에 걸쳐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교도의 반응 그리스도교는 다른 많은 미스테리아 종교와 더불어 유행한 또 하나의 미스테리아 종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교도 지성인들의 주목을 받긴 했다. 이 새 종교에 대한 지성인들의 반응은 오늘날 주류사회의 종교적 지도자가 주변의 잡다한 종파를 바라보는 것과 유사했다. 그리스도교가 꽤 인기를 끌게 되어 단순히 무시해 버릴 수 없게 되자 그리스도교가 독창적이라는 주장은---정당하게---비판을 당했고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제 주머니를 채우며, 제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주목한 최초의 이교도 작가인 타키투스와 플리니우스(110년대)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다만 과잉 열정을 지닌 미신적 광신도라고 보았다. 켈수스(170년대)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문명화된 다른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사람들' 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기 신앙이 유일무이하며, 고대 이교 신앙과는 반대가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켈수스가 보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은 불합리했다. 그들은 '자기 믿음의 이유를 논의하고자 하지 않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믿으라'고 말함으로써 남들을 개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낮은 계층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그 종교는 계속해서 서민들에게 퍼져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서민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퍼져 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믿음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도 소수 있지만, 대부분 무지한 자들 사이에서 번성해가고 있다. 켈수스의 친구인 풍자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는 그리스도교가 어수룩한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돈을 갈취하기 위한 사기일 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어떤 상황에서든 돈을 버는 방법을 아는 전문 사기꾼이 어수룩한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되면 그 사기꾼은 하룻밤 사이에 큰돈을 갈취하고 속은 자들을 비웃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3세기 중반의 글에서 교인들 공동체를 비난했다. 그는 그 공동체가 돈을 버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는 남자들과,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는 소문을 큰 소리로 떠벌리는 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썼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교가 기성 종교가 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다고 시인하며 서글퍼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심지어 부자들과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교육을 받은 여성들까지 그 신앙의 지지자들을 우호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사소한 권위를 얻기 위해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는 자들까지 꽤 있다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세기 중반에 루킬라라는 이름의 한 부자 여성은 실제로 거액을 기부해서 자기의 하인 마요리누스를 카르타고의 주교로 만들었다! 260년에 안디옥의 주교가 된 사모사타의 바울이 교회 예배를 아주 수지맞는 사업으로 만들었다는 보고도 있다. 그는 걸핏하면 부자 신도들에게 기부를 강요했고, 대부분을 착복해서 호사스럽게 살았다. 270년에 이교도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더없이 신랄한 비평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복음서들이 너무나 일관성이 없고,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불가능하고 거짓된 말로 가득해서 참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책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열다섯권에 달하는 책 속에서 조목조목 비평했다. 그는 육체적 부활의 믿음을 터무니없는 물질 만능의 사고라고 조롱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 세계가 어떤 계시에 따라 멸망할 거라고 말하면서도, 하잘것없는 개인의 육체만은 하나님 덕분에 영원히 보존될 거라고 주장한다는 이유에서 그 종교를 무식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죽기 전에 세례를 받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어도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은, 선량한 인간 사회의 기초를 뒤흔드는 거라고 그는 보았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외길을 발견했다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이교도 철학의 '보편적인 길'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 아폴론의 신탁을 포함시켰는데, 그 신탁은 그리스도를 찬양하지만, 부활한 하나님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을 때 포르피리오스의 저술이 즉각 금서가 되어 불길 속에 던져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막강한 로마 제국이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더구나 또 다른 미스테리아 종교로서가 아니라, 하나이며 유일한 참종교로 수용했다는 것은 역사상 가장 역설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유대 국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로마가 결국에는 유대인 역사를 신성시하는 종교---더구나 로마 총독이 살해했다는 유대인 선지자를 섬기는 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 역사에서는, 이교 신앙의 어둠에서 인간을 빛으로 이끈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이 가장 선호한 종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성공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 채택한 유일한 외래 미스테리아 종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17년 전인 304년에 한신인이 '제국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이 신인은 12월 25일에 기적적으로 태어났으며, 신도들이 상징적인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다. 이 신인은 다름 아닌 페르시아의 구원자 미트라스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로마인들의 적이자 경쟁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미트라스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상 유대인의 구원자 예수를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는 AD 첫 세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절정에 이른 3세기에는 제국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현대 권위자의 말에 따르면 '흑해의 제방에서 스코틀랜드의 산맥까지, 사하라 사막의 접경 지대까지'---미트라스를 섬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미트라스 신앙의 기념물을 살펴보면 자유인뿐만 아니라 노예까지도 미스테리아의 입문자가 되었으며, 흔히 그런 노예가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트라스 신앙에서는 실제로 '나중에 된 자가 먼저'(마태복음 20:16) 되었다. 2세기 말에 코모두스황제(재위 18-192)도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에 입문했다. 황제의 입문은 로마 세계에서 엄청난 자극제가 되어 교인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코모두스 이후의 여러 황제들은 미트라스 신앙을 제국의 종교로 삼으려고 했다. 로마의 지도자들은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 미스테리아가 달랐고, 선호하는 정도도 달랐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티스를 선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라피스를 숭배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오시리스를 받들었다. 엘가발루스는 헬리오스를 섬기는 일신교 신앙을 강화하려고 했다. 점점 분열이 격화되고 있는 와중에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라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 황제들은 '하나의 신앙'을 필요로 했다. 보편적인 종교, 곧 '가톨릭catholic' 종교를 필요로 한 것이다('catholic은 '보편적' 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주). 황제들은 이러한 온갖 종교를 여러 시대에 걸쳐 제시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4세기 전반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이상적인 후보였다. 민중들에게는 미스테리아 종교가 항상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미스테리아 종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미스테리아 종교의 지도자들은 신비주의자 이거나 철학자들이었고, 그들은 국가의 권위에 과감히 의문을 제기하며 권위를 훼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골치 아픈 지성인들을 배제시킨 미스테리아 종교였다. 게다가 이미 권위주의적인 종교가 되어 있었다. 이 종교는 권위를 지닌 자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당국자들이 바라던 종교가 아닐 수 없었다. 신비주의자가 없는 종교, 은밀한 미스테리아가 없는 공개적 미스테리아만의 종교,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 321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황제가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교인이 된 동기는 분명 영적인 게 아니라 정지적인 것이었지만,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자신의 개종이 신성한 계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전투 전야에는 그와 '모든 군대'가 자정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의 징표'를 보았는데,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스도교인의 십자가가 아니라, 이교도의 상징인 키로chi-rho였다. 하늘에 나타난 그 상징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며 잠자리에 든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 그리스도가 찾아왔다. 자정에 본 상징을 들고 있던 그리스도는 '적과의 교전 때 이것을 사용하라'고 그에게 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의 방패에 그 상징을 그려 넣었고, 그리스도가 약속한 대로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그의 말을 믿기로 한다면 '평화의 왕자' 예수는 황제에게 마법 군대의 부적 하나를 건네 줌으로써 고대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제국을 손에 넣은 셈이다. 키로chi-rho 상징은 이교도의 파피루스 고문서에서 비롯한 것으로, 학자들은 예언적인 구절에 이것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 키로가 그리스어로는 크레스톤Creston이며, '길조'를 뜻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키로는 그리스도를 가리기는 말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이 상징은 이중의 의미를 지녔다. 이교도에게는 길조를, 그리스도교인에게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이런 이중 의미는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무엇보다도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때에만 그리스도교를 강조했다. 그가 꿈에서 약속 받은 승리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을 때, 비문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로마 병사들이 이교도의 거룩한 수호자들로부터 신성한 도움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광장에 있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육중한 석상 위에 자신의 두상을 얹어놓게 했고, 그의 모습을 헬리오스와 함께 동전에 새겨 넣게 했다. 그리고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이교도 세계의 최고 사제---라는 호칭을 여전히 사용했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인 황제들도 382년까지 그런 호칭을 사용 했다. 대부분의 로마 황제와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누스는 사악하고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골족과의 전쟁(306-312)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짓을 했다. 그가 바르바리(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왕들을 수천 명의 부하들과 함께 야수의 먹이로 던져 주었을 때 이교도들까지도 충격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한 후에도 여전히 사악하고 무자비했다. 325년에 그리스도교인들의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한 직후, 그는 자신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친아들 크리스푸스를 살해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받는 것을 고의로 연기했다. 계속 죄를 짓다가 마지막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룩한 내세를 보장 받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악명은 로마 교회조차도 차마 그를 성자로 만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그래서 '대제(大帝)' 라는 수식어로 만족해야 했다 : 저자주).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조금 더 먼저 교인이 된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녀는 콘스탄티누스의 계모 살해에 연루된 후 추방이 되었는데, 내친김에 성지 순례에 나섰다. 거기서 그녀는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무덤이자 탄생지인 동굴을 발견했다. 골고다에서 예수와 두 도둑을 못 박은 십자가 3개도 함께 발견했다. 이것은 정말 별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가 못 박혔다는 날로부터 300년이 지나는 동안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유대인이 수천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처럼 뜻밖에 발견한 성지에 교회를 세웠다. 그곳은 오늘날까지도 성스러운 곳으로 기려지고 있다. 성스러운 십자가 조각들은 제국의 도처에 보내졌고, 가톨릭 교회는 헬레나를 '진짜 십자가의 발견자, 성 헬레나'로 기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묘지로 여겨진 성소 부지에 거대한 공회당을 세웠는데, 이 공회당은 장차 로마 가톨릭 신앙의 발전소인 로마 교황청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처럼 그저 문자주의자와 영지주의자로만 분열되어있는 게 아니라, 문자주의 공동체 자체도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작되자마자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료 교인들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황제의 무릎에 첩첩이 쌓아 올렸다고 한다!(황제는 그것을 모두 불태웠다 : 저자 주) 콘스탄티누스는 신학을 전혀 몰랐다. 사실 그는 이교에 가까운 연설을 해서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그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강제로 통합시켰다. 니케아에서는 하나의 신조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도 전세계의 교회에서 그것을 되뇌고 있다. 신조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주교들은 황제가 직접 재판하여 범죄자로 몰아 제국에서 추방시켰다. 동의한 주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손님 자격으로 니케아에 초대 받아 황제즉위 20주년 잔치에 참석했다. 많은 주교들은 동의 서명을 한 후 후회를 했다. 훗날 어느 주교는 황제에게 이런 글을 써 보냈다. '우리는 그대가 두려워서 신성을 모독한 글에 서명함으로써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은 훨씬 더 무자비한 그리스도교인 황제들의 치하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다만 율리아누스 황제(재위 361-363)가 이교 신앙을 부흥시키려고 한 잠깐의 기간만이 예외였다. 율리아누스는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로 자처했는데, 미트라스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의 입문자였다. 그는 하나인 신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찬가를 썼으며 겸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반유대 그리스도교인 교회의 소망대로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덕분에 이교 신앙이 잠깐 부흥했지만, 곧바로 그리스도교가 다시 살아나서 훨씬 더 맹렬히 세력을 확대해 갔다. 니케아 신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영구히 분열된 채 신약 논쟁으로 위장된 정지적 내부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권위적 분위기 속에서 패배자들은 파문 당했고,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다. 오늘의 '정통'이 내일의 '이단' 일 수 있었던 것이다. 4세기 말경에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는 낙담한 나머지 이렇게 썼다. 매년, 아니 매달 우리는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사소하고 애매한 것을 묘사하는 새로운 신조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한 짓을 후회하고, 후회한자들을 옹호하며, 우리가 옹호했던 자들을 파문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남들의 교리를 저주하거나, 남들이 지닌 우리 자신의 교리를 저주하고, 서로 상대방의 교리를 갈가리 찢으며, 서로의 멸망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 무렵 문자주의자 교인들조차도 로마 교회를 더 이상 그리스도의 계획 완수로 보지 않고, 오히려 '반그리스도'의 작품으로 보기 시작했다. 역사의 날조 로마 교회는 자체 신앙에 어울리는 역사를 필요로 했다. 적을 비방하고, 하나님이 허락한 승리를 자축하는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진실은 엄격히 억압되었고 좀더 수용 가능한 역사가 날조되었다. 이렇게 날조된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정식으로 당당하게 가공의 복음서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신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예수 이야기 자체인데, 저자는 그런 저술들이 비유적 허구 이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문자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허구를 만들어 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역사적 기록으로 통용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교 전통 역사의 토대가 된 그런 저술들은 날조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2세기 말에 바울의 원래 편지들은 새롭게 개찬되어 바울을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계보에 끼워 넣음으로써 바울을 영지주의에서 격리시켰다.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로마화하기 위해 바울을 유명한 로마 정치가 세네카와 가까운 인물로 조작하기까지 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원고 300편에는 바울의 편지 8통과 세네카의 답장 11통이 담겨 있는데, 물론 모든 편지가 완전히 위조이지만 최근까지도 진짜 편지인 것으로 믿었다! 그 편지들 속에서 세네카는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바울은 황제의 궁전에서 복음을 공식 설교하는 사람으로 세네카를 지명한다. 4세기에는 이런 날조를 기초로 해서 제롬은 자신의 그리스도교 성자 목록에 세네카를 포함시켰다. 여러 사도들의 이름을 빌려 편지가 위조되기도 했다. 그 편지들이 지금은 신약에 포함되어 <성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신빙성이 의문시되었다. 가톨릭의 대변자였던 유세비우스조차도 야고보서와 유다서, 베드로서, 요한서의 출처를 의심했고 계시록은 전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보았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로마의 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이 썼다는 편지들은 5세기까지 계속해서 위조되고 희석되고 첨삭되었다. 라틴어로 번역할 때도 수많은 왜곡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의 가르침 등 여러 가르침도 이때 왜곡되어, 당시 정통으로 간주된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수정되었다. 그리스도교 성자들에 대해서는 상습적으로 허구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흔히 그런 허구는 죽은 이교도 현자들의 생애와 전설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권력의 핵심인 로마 교회를 신임하기 위해 베드로가 로마로 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못 박혔다는 이야기를 꾸며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너무 늦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이것을 신약에 포함시키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기 있는 영지주의 저술은 영지주의 색채를 지운 채 편집해서 문자주의 문서로 만들었다. 심지어 이교도의 저술까지 각색해서 자신들의 도그마를 뒷받침하는 저술로 만들었다. 예수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는 이교도 시빌의 신탁은 4세기 초에 위조되어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예수의 신격을 입증하는 자료로 제시했다. 그들은 <오르페우스의 증언>도 위조해서 고대 미스테리아의 예언자가 자신의 원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유대인 피타고라스 학파인 필론의 저술을 서툴게 첨삭하기도 했고, 필론이 사도 요한과 율법 논쟁을 했다거나 로마에서 베드로를 만났다는 우스꽝스러운 전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를 그리스도교인으로 탈바꿈시켜서 신약에 나오는 아리마대의 요셉과 요세푸스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세푸스가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증언한 것처럼 내용을 덧붙여 놓기도 했다. 요세푸스가 썼다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후기 문서도 위조된 것인데, 그것은 요세푸스가 직접 문자주의 교리를 가르친 것처럼 꾸민 앞서의 위조를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면밀한 언어학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학자들은 이 문서를 위조한 사람을 '의심의 여지없이' 밝혀 냈다. 다름 아닌 이레나이우스의 제자이자, 이단자 사냥꾼 원조인 히폴리토스(220년대)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학자들은 또 바울이 썼다는 데살로니가후서의 언어와 문체가 히폴리토스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 냈다---이 후서는 데살로니가전서(진짜)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그러니 데살로니가후서를 위조한 것이 히폴리토스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성자 본디오 빌라도!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통용된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본디오 빌라도의 복권을 돌아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 신화를 역사적 문맥에 끼워 넣은 원래의 저자가 본디오 빌라도를 구원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로 설정한 것은, 잔혹했던 이 로마 총독을 유대인들이 너무나 증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케 한 후 손을 씻은 것은 그가 '은밀한 심중으로는' 그리스도교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에 따르면 빌라도는 이제 막 처형한 그리스도가 정말 신이었다는 보고를 로마에 보냈는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진 것은 그것이 최초였다. 티베리우스 황제(모든 종교를 경멸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는 즉각 그리스도를 로마 신들의 반열에 올려 놓고 싶어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의 계획을 기각했다. 이 강력한 황제는 평소에 자신의 하인이나 다름없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몇 가지 이유로, 다만 혹독한 법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런 사건 자체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런 법이 발효되기 수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후 테르툴리아누스의 허구를 기초로 해서 <빌라도 행전>이라는 문서가 위조되었다. 그 후 이 문서를 기초로 한 <니고데모의 복음서>라는 후대의 문서가 만들어졌다---그래서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 문서를 '3중의 허구' 라고 일컬었다. <니고데모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를 처형했다는 빌라도의 보고가 로마에 도착하자 황제는 빌라도를 사슬에 묶어서 잡아 오라고 명했다. 모든 의원들과 신들과 군대가 바라보는 가운데 황제는 이렇게 선포했다. 그지없이 불경한 자여, 너는 어찌하여 감히 그런 짓을 했느냐.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너는 이미 그 위대한 징표를 보지 않았느냐. 사악한 짓으로 인해 너는 온 세상을 파괴했도다. 그들이 그를 너에게 넘겨주었을 때, 너는 즉시 그를 보호해서 나에게 보냈어야 했다. 너의 보고에 언급했듯이 그처럼 의롭고, 그처럼 놀라운 징표를 보인 자를 십자가에 못 박지 말았어야 했다. 그 징표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그리스도라는 말을 입 밖에 내자, 그 순간 모든 신들의 석상이 무너져 먼지가 되었다. 빌라도는 '신들을 섬기지 않고 법도 지키지 않는 불경한유대인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자기 변호를 했다. 그러자 황제는 유대인들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에게 진격하여 복종케 하라. 그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 모든 민족의 노예가 되게 하라. 그들을 유대 지방에서 모두 쫓아내고, 그들을 하찮은 민족으로 만들어 세상 어디에서도 더 이상 그들이 보이지 않도록 하라. 그들은 악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빌라도는 형장으로 끌려가 주에게 기도를 드린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예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방인들의 모든 세대, 모든 가족들이 너를 축복 받은 자라 일컬으리라. 네가 총독으로 있을 때, 선지자들이 나에 대해 예언한 것들이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재림의 목격자가 되리라. 곧이어 빌라도의 목이 베어지고, 주의 한 천사가 그를 데려간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아내 프로클라는 너무나 황홀한 나머지 돌연 숨이 끊어져 남편과 함께 묻혔다. 빌라도는 결국 콥트 교회의 성자로 추앙되었고, 6월 25일은 그의 축제일이 되었다!(콥트 교회는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設을 주창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한 이집트 교회이다. 성육신한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성을 이룬다는 주장이 단성설이다. '정통' 교회는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 신인양성설을 교의로 채택했다 : 옮긴이 주) 한편 그의 아내 프로클라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자로 추앙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당시에는 역사로 믿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는 명백히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다소 수용 가능한 전통 역사---1천500년 동안 '절대적 진리gospel truth'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교 역사---를 만든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앞서의 실없는 얘기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전통 역사 또한 똑같이 부정확하며, 똑같이 공상적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친근한 얘기만 아니라면 역시 똑같이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얘기인 것이다. 교회 선전자, 유세비우스 그리스도교의 모든 허구 역사를 최종적으로 조직화하고 종합한 것은 4세기의 유세비우스 주교였다. 그는 '교회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니케아공의회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완전히 바꾼 주교들 가운데 1명이었다. 그는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전기 작가가 되어, 아첨하는 말로 황제의 살인 행각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린 전기를 썼다. 유세비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천국을 다스리듯이, 로마 황제는 문명화된 세상의 정부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시킨다고 신도들에게 설명했다. 황제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 대변자였다! 유세비우스의 임무는 로마의 그리스도교에 적합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진실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를 만들었다. 현대의 고전학자의 말에 따르면 유세비우스의 글을 읽는 것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황당한 문학적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또 다른 현대의 고전학자는 더 퉁명스럽게 그를 '고대에 대해 최초로 철저하게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역사가' 라고 일컬었다. 또 다른 학자는 '고의로 시대를 날조' 했다는 점에서 그가 '부정직' 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학자는 유세비우스의 역사가 '피상적' 이고 '고의로 날조한' 역사이며, '자의적이며 마구잡이로' 만들어 낸 역사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역사가가 옳게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 고전학자들이 유세비우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의 '영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을 그리스도교 역사에 포함시켰고, 교회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고백했다. 현대의 고전학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저술을 더없이 큰 의혹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말을 상당히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한다는 것은 지극히 무비판적인 행위라고 선언해야 한다.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적에만 맞으면 언제든 습관적으로 그의 말을 인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말은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되어 왔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만 첫 3세기 동안 교회 '역사'로 살아남은 글이 그의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모든 교회 역사가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결국 거짓말이 항구화된 나머지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역사' 에서 유세비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게 가해진 대표적인 비난을 전부 열거했다. 그는 문자주의자 주교들이 원래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대표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의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들의 후계자 계보를 제시했다. 그 계보는 유세비우스 이전에, 아마도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날조된 것이지만 유세비우스는 그 계보에 첨삭을 가했다. 그는 계보를 만들며 흔히 이름만 나열했는데, 어림짐작으로 선택했거나 날조한 이름을 역사에 끼워 넣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명백한 잘못이나 모순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는 처음 1세기부터 로마 교회를 주교들이 이끌어 왔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증거는 전혀 없다.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단 1명이라도 나타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유세비우스는 또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교인의 수를 터무니없이 과장했을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의 전기까지 집필했는데, 그 전기는 사실상 이교도 순교자의 전설을 베낀 것이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저술 목록을 열심히 만들었는데, 현명하게도 그 저술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걸 언급하면, 그들이나 자신의 생각이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젊었을 때 그에게 큰 영감을 준 오리게네스에 대해 기술할 때에도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정통파 공동체에서 오리게네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 대해 말하자면, 유세비우스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게 유린당한 것을 대단히 기뻐했다. 구원자를 살해했으니 재앙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당한 고통을 분명 재미삼아 아주 흉흉하게 묘사한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러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사악하게 대우한 대가였다'. 유세비우스는 하나님이 분노해서 AD 70년에---로마군의 도움을 약간 받아서!---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전에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웃 펠라 지방으로 안전하게 피신하라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는 또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갔을 때, 에비온파의 영지주의자 집단 하나만 발견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술했다.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이단자가 될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을 구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 유세비우스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자신의 허구 이야기가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전혀 양심에 거리낌없이, 예수 자신이 에데사(지금의 터키 동남부)의 왕자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만들어 냈다---그 편지에서 예수는 왕자가 자기를 본 적도 없으면서 구세주를 믿게 된 것을 축하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로 통용되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전제적인 로마 황제에게 고용되어 아첨을 일삼으며, 200년 전통을 기만적으로 날조했다. 이교 신앙의 파괴 2세기에 자진해서 순교를 당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목격함으로써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주장하는 테르툴리아누스는, 자기 역시 한때는 로마의 공개적 박해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잔혹' 한 것을 즐기며 지켜보았다고 시인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된 후에도 그와 같은 피투성이의 수난을 여전히 즐긴 것 같다. 그는 분명 재미삼아서 '최후의 심판' 때에 이교도들에게 닥칠 운명을 소름 끼치도록 폭력적으로 그려 놓았다. 구경거리를 원한다면, 모든 장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장관인 최후의 영원한 심판을 고대하라. 그 많은 지상의 군왕들, 거짓 신들이 암흑의 가장 낮은 심연에서 신음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얼마나 찬탄하고, 얼마나 웃고,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의기양양하겠는가. 주의 이름을 박해한 그 많은 관원들이 교인들을 불태웠던 것보다 더욱 격렬한 불길 속에서 녹아 내리는 것을 보리라. 현자라고 불린 그 많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기만적인 제자들과 더불어 시뻘건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리라. 그 많은 유명 시인들이 미노스의 법정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리라. 그 많은 극작가들은 자기 자신의 수난의 노래를 흐드러지게 부르리라. 그 많은 무용수들은….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그의 적대자들이 영원히 받게 될 소름 끼치는 형벌을 기뻐한다. 그는 불과 몇 세대 후에 그런 형벌이 실제로 수많은 이교도들에게 가해지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최후의 심판때가 아니라, 4제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교 신앙을 말살할 때!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되자, 문자주의자들은 이교도들에게 잔혹한 테러를 가했다. 이교도 예언자들은 체포되어, 그들의 신이 가짜라는 것을 시인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사제들은 그들의 성소에 사슬로 묶인 채 굶어 죽었다. 고발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도 이교도들은 어린애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고발을 당해서 신들의 제단에 그들의 피를 뿌렸고, 그들의 창자로는 현악기 줄을 만들었다---그들은 처참한 고문을 당한 후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고, 그렇게 처형당했다. 산채로 화형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일부 고대 성소는 능욕을 당한 후 철저히 파괴되었고, 더러는 징발되어 강제로 그리스도교 교회로 개조되었다. 이교도의 위대한 종교 저술들은 대규모로 소각되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 목격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판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질렀다. 금서를 소유한 자의 장서는 모조리 재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교 신앙이 공격을 당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을 잘못 숭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들이 정말 병자를 고치고 미래를 예견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다만 이교도의 신들은 어수룩한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기 위해 마법을 부리는 악마로 간주되었다. 이교도의 '다이몬'은 사악한 '데몬(악마)' 이 되었다. 따라서 이교신앙은 말살되어야 했다. 4세기 중반에 한 주교는 그리스도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재위 337-350)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우상숭배의 범죄를 모든 면에서 혹독하게 박해해야 하는 것은 지고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황제에게 명해진 것입니다. 통촉하소서, 그런 범죄에 관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듣고 믿으소서. 그 아들도 형제도 용서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명하십니다. 칼을 들어 그 아내의 수족을 베라고 명하십니다. 그 친구 또한 아주 심하게 박해하고, 신성을 더럽히는 민족의 몸을 갈가리 찢기 위해 모두 무기를 들라고 명하십니다.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도시까지도 죄다 파괴하라고 명하십니다. 383년에 로마의 이교도 원로원 의원인 시마쿠스는 너무나 참담한 나머지 그리스도교인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종교적 관용을 호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지만, 헛일이었다. 모든 숭배는 같은 것으로 여겨져야 합당합니다. 우리는 같은 별, 같은 하늘을 봅니다. 그것은 모두 같은 우주에 속합니다. 각자 진리를 찾는 방법이 다르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위대한 비밀에 이르기 위해 유일한 하나의 길로만 갈 수는 없습니다. 386년 무렵에는, 근본주의에 사로잡힌 광신도 수도사 무리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피에 굶주려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법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교도인 리바니우스는 황제가 개입해 달라고 이렇게 호소했다. 폐하는 신전을 폐쇄하라거나 아무도 신전에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폐하는 신전과 제단의 불과 분향을 배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검은 복장을 한 이 폭도들은 엄연히 법이 있는데도 법을 무시하고, 곤봉과 돌과 쇠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신전을 유린하며, 더러는 맨손 맨발로 유린합니다. 그래서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어 지붕이 내려앉고, 벽이 무너지고, 석상이 끌어내려지고, 제단이 뒤집어지고, 사제들은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음을 당합니다. 첫 신전이 파괴되면, 두 번째, 세 번째 신전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법을 어기면서, 전승 기념비를 철거해서 첩첩이 쌓아 올립니다. 대부분 교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더러는 도시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수가 너무나 많은데, 작은 무리로 흩어져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후 함께 모여서, 무슨 짓을 했는지 서로 다투어 자랑하다가, 최고의 만행을 저지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한 익명의 이교도(390년대)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죽을 무렵에는 남아 있는 성소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세라피스 신전도 형체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있던 자리에서는 거짓말처럼 텅 빈 어둠만이 괴괴할 것이다. 391년 6월 16일,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모는 이교도 신전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스도교인 폭도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각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으로 달려가 초석만 남겨 놓은 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황제는 또 이렇게 명했다.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모든 책을 불살라라. 그 책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그리고 경건한 자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그러자 문맹자 수도사들은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 온 지혜와 과학적 지식을 이교도의 미신으로 취급해서 닥치는 대로 말살해 버렸다. '그 수도사들은 인간을 닮았지만 돼지처럼 산다'고 말한 이교도 작가 에우나피우스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렇게 썼다. '검은 복장을 한 자들은 모두가 횡포한 자들이다'. 415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로스는 수도사들을 시켜 한교인 폭도를 선동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막 이교도 과학자를 살해하게 했다. 그 과학자는 히파티아라고 불린 여성이었다. 그녀는 사지가 갈가리 찢겼고, 키릴로스는 성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이교도 종교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세기 후, 테오도시우스 치하에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믿어야 할 유일한 종교로 선포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395년에 사망했다. 정확히 15년 후 로마는 서고트족의 발길에 무참히 짓밟혔다. 고대세계의 가장 위대한 제국의 심장부인, 자랑스러운 이 도시는 여러 신들을 섬기며 천년 동안 번영해 왔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지 몇 십 년 만에 수많은 경이적 유물과 성취가 파괴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로마는 멸망하고 말았다(476년에 서로마 제국 멸망 : 옮긴이 주). 그리스도교는 미트라스 신앙이나 다른 이교 신앙이 실패한 로마 제국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동반한 종교였다. 영지주의의 말살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에도, 영지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다. 4세기에도 여전히 이단적 교인들이 많아서, 예루살렘의 키릴로스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경고 해야 했다---실수로 영지주의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테오도시우스 치하에, 이집트의 성직자와 수도사 사이에는 이단자가 너무나 많아서 티모테우스 주교는 일요일마다 강제로 고기를 먹게 함으로써 채식주의자인 영지주의자들을 솎아 냈다! 철학자 시네시우스는 명백히 영지주의자였는데도 키레네의 주교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이교도 과학자인 히파티아와 함께 플라톤 철학을 연구했고, 부활을 신성한 미스테리아의 비유로 여겼다. 그는, 유일하게 참된 종교는 철학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종교적 이야기와 의식은 철학자가 아닌 자들을 위해 철학적 진리를 대중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정통을 부르짖는 당대 상황에서 그는 주교로서 '은밀히 철학화' 하지 않고 공개적 노선을 따르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을 위해 부활절 의식 대신 입문식을 치르게 했다. 그것은 정통 그리스도교보다 이교도의 미스테리아와 관계된 것이었다. 영지주의가 계속 인기를 유지해 가자 로마 교회는 강제로---무자비하게 효율적으로---그리스도교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영지주의를 금하는 100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 모임, 입문, 재산 소유, 그리고 궁극적으로 존재 자체를 불법화했다! 포고령 하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이 법령에 따라 다음과 같이 알린다. 노바티아누스파·발렌티누스파·마르키온파·파울리키우파, 너희의 교리는 거짓과 허영으로, 파괴적이며 악의적인 범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너희에게 경고한다. 너희는 어느 누구도 이 시간 이후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한다. 이 법령을 어길 경우, 너희가 모임을 가진 모든 가옥을 몰수해서 그것을 즉각 가톨릭 교회에 넘겨주게 될 것이다. 마침내 381년에 테오도시우스는 이단을 국가 반역죄로 규정했다. 영지주의 저술은 '금지되기만 해서는 안 되며, 전부 파괴하고 불태워야 할' '온갖 사악함의 온상' 으로 매도되었다. 모든 철학적 토론은 전적으로 억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포고되기도 했다. 너희는 공개 석상에 나가서는 안되며, 종교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해서도 안되며, 토론을 하거나 조언을 해 주어도 안된다. 5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막강한 대주교인 키릴로스를 위해 '악역'을 수행한 어떤 수도원장은 이단적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공격하며 다음과 같이 위협했다. 너희가 키릴로스 대주교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희들 대부분의 목이 베일 것이며, 간신히 목숨을 구한 자들은 추방될 것이다.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대변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겁을 주어야만 사람들이 말을 듣기 때문에 강압 조치가 필요했다는 말로써 당시의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 준다. 군사력은 이단자를 억압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스스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나는 너희도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하겠다'. 바울의 사랑과 그노시스의 영적 종교는 로마 교회의 복종과 테러의 종교가 되었다. 본래부터 편협한 종교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무수한 종파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들 가운데 거의 전부---가톨릭, 정교, 개신교, 비국교도 등---는 근본적으로 4세기에 문자주의의 승리로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은 예수의 역사적 존재성을 토대로 삼고 있다. 그들은 전제적인 콘스탄티누스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사도신경에 동의한다. 그들은 초기 교회의 끊임없는 교리 투쟁과 극악한 위조와 부패한 권력 투쟁 등의 우여곡절을 통해 신약에 포함시키기로 선택된 소수의 문서만 읽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한 사조였을 뿐인 문자주의가 곧 그리스도교라는 잘못된 생각을 물려받아 왔다. 문자주의는 어떻게 영지주의를 이길 수 있었을까? 자체 특성상 영지주의는 신비한 특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반면에 문자주의는 제도적 종교를 신봉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개인적 계몽에 관심이 있었고, 교회를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문자주의자들에게 승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승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자주의는 원래 그리스도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였고, 입문자를 영적인 길로 이끌기 위한 준비 단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환상적인 마법과 기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례를 받고 믿기만 하면 불멸성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는 공개적 미스테리아는 은밀한 미스테리아보다 더 대중적으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예수의 말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된 자는 적다'(마태복음 22:14). 원래의 예수 미스테리아가 온전하게 살아남았다면, 공개적 미스테리아가 인기가 있을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노시스의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영지주의와 문자주의가 분열해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자, 문자주의가 더 인기를 끌게 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영지주의에 대한 문자주의의 승리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다만 놀라운 것은 승리할 때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추구된 하나의 커다란 특성, 곧 편협성 덕분이었다. 그런 편협성은 역사의 변덕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예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연히 야기된 부산물이다 이교 신앙과 영지주의는 본래부터 관용적이었다. 그것은 신화를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 다른 종파는 다른 신화를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대립적이지는 않았다. 다양성이 수용 가능했던 것은, 내적 의미를 중시할 뿐 외적 표현은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주의는 본래부터 편협했다. 예수가, 하나이며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자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는 그런 역사성을 따지지 않는 다른 모든 종교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영원한 저주를 받도록 정해져 있다면,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의 믿음을 전파할 도덕적 의무를 갖게 된다.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필요하면 강제로라도 전파해야 한다---그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교 신앙과 영지주의에 대한 로마 교회의 공격은 종교적 성전(聖戰)이었고, 하나님이 부여한 의무였다. 자기만이 옳다는 편협성은 그처럼 성스러운 것이 되었다. 결론 앞서의 증거를 되돌아볼 때, 우리 두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교의 전통 '역사'가 역사상 가장 큰 은폐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교의 원천인 영지주의 가르침,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참된 뿌리인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는 가혹하게 억압을 받아 증거가 대규모로 말살되었고, 로마 교회의 정치적 목적에 어울리는 거짓 역사가 날조되었다. 공식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처형을 당해서, 이윽고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좀더 최근의 역사를 돌아보면 고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극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 과거 정권에 몸담았던 공무원을 포함한 엄청난 인구가 공산당에 가입했다. 왜? 살아남고 싶으면 공산당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과거 정권에 연루된 사람은 인민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와 유사하게, 일단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자, 교인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왜? 그리스도교인은 특혜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평화롭고 성공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교인이 되지 않으면 '의견을 달리하는' 이교도, 곧 하나님의 '적' 으로 낙인이 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스탈린 선전자들이 그들의 전제정치를 미화시키고, 그들의 도그마가 참되고 선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사악하게 역사를 날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선전자들은 교인들에게 거짓말을 주입시켰다. 공산주의처럼 그리스도교도 처음에는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결국에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정권을 만들어 냈다. 근년에 공산주의의 독단적 편협성은 중국과 캄보디아의 광신적 청년 공산주의자들을 부추겨 문화혁명이라는 재앙을 불러왔다. 이때 그들은 풍요한 고대의 유물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고, 수많은 지성인들을 학살했으며, 그들의 사회는 위기에 처했다. 마찬가지로 약 1천500년 전에, 광신적 그리스도교 수도사들도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그때 고대의 경이로운 유적과 이교 신앙의 문화적 업적이 잿더미가 됨으로써, 서구문명은 1천 년이나 퇴보하고 말았다. 이교도 유산을 그처럼 막무가내로 파괴한 것은 서구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잃어버린 유산의 규모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교도의 신비주의와 과학적 탐구 정신은 독단적 권위주의로 바뀌었다. 로마 교회는 영적 구원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인하며 위협과 폭력으로 그들의 신조를 강요했다. 고대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잿더미가 되는 동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문자주의자의 근본주의 신앙이 승리 했음을 이렇게 선포했다. <성서>의 권위에 입각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모든 정신력보다 <성서>의 권위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피라미드와 파르테논 신전을 세웠지만, 유럽 지역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몇 백 년이 지나는 동안 벽돌집을 짓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BC 1세기에 포시도니우스는 행성들의 궤도를 충실하게 반영한 태양계의 아름다운 공전 모형을 만들었다. AD 4세기 말경에는, 하나님이 매일 밤마다 하늘에 별을 설치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BC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불과 몇 퍼센트의 오차 이내에서 지구의둘레를 정확히 추산해 냈다. 그러나 AD 4세기 말경에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이단자로 몰렸다. 우리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교 신앙이 그토록 원시적인 반면, 문자주의 그리스도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면, 왜 이교 신앙은 그토록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왜 참종교는 그토록 몽매한 1천년의 암흑시대를 불러왔는가? 12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사방의 지류를 받아들이는 진리의 강이 하나 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분명 고대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그리스도교를 재평가해야 할 적절한 시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교도 점성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가 만들어진 것은 물고기자리의 큰 달이 시작된 때였다. 이제는 물고기자리의 시대가 끝나 가고, 새로운 물병자리 시대가 밝아 오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처럼 역사 흐름의 전환점에 서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러 면에서 과거의 시대 변화를 상기시켜다. 묵시적인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더 팽배해 있는 것이다. 낮설고 새로운, 절충적 종교가 도처에서 일어서고 있다. 기존의 종교는 불신되며 쇠퇴해 가고 있다. 다가올 물병자리의 시대에는 영적 종교가 어떤 형태를 띠게 될까? 당당하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화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 온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적인 관점에서 이 기나긴 세월은 분명 권위주의적 종교, 종교적 편협성, 종교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암흑시대' 였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참신앙으로 자처함으로써, 다른 모든 영적 전통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그 무엇보다도 우월하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 논리에 따라 폭력으로 온 세상의 다른 사회를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또한 그리스도교 자체의 신비주의자와 자유사상가들을 끔찍하게 박해했다. 유대인의 아버지 신 여호와를 유일하게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얼굴로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여성 신격을 억눌렀고, 그러한 신학적 관점은 여성을 남성에게 합법적으로 종속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지적 질문을 억압하고 도그마를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고집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이 종교에 등을 돌리고 모든 형태의 영성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갈수록 많은 사람이 종교를 기껏해야 여흥으로, 나쁘게는 편견과 편협과 갈등의 원천으로 여기고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지혜와 문명의 원천으로서 그들의 조상을 섬기는 반면, 서구 문화귄에서는 조상들을 악마의 숭배자라고 매도해왔다. 그것은 서구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서구인들은 문화의 뿌리를 단절시켜 왔다. 15세기에 르네상스, 곧 '재생' 이라고 적절히 명명한 기간에 이교도 철학을 재발견한 후 비로소 서구 문명은 침잠해 들어갔던 미신과 투쟁의 늪에서 기어올라올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근대에 서구는 과학적 지식의 과실을 수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대인들과 달리, 서구인들은 앎과 영성을 같은 미스테리아의 두 국면으로 보지 못했다. 서로 화해할 길이 없는 적대적 관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하나의 종교라는 깃발 아래 세계를 통합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문자주의 그리스도교 자체가 심한 분열의 원인이 되어 왔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과 이교도, 남자와 여자, 과학과 종교, 믿음과 이성이 대립해 왔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새 역사가 아니라 그러한 참담한 분열이 서구 영혼 속에 남겨 놓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고대 미스테리아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영적 진화라는 보편적 흐름을 다시 탈수 있고, 악마의 것으로 낙인 찍었던 다른 모든 종교적 전통을 적이 아닌 파트너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무거운 짐인 구약과 오직 한 부족의 질투하는 신을 포기한다면, 여성 신격의 지혜를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독단주의를 포기한다면, 발견의 모험을 통해 과학적 앎과 신비주의를 통합한 고대의 경이를 다시 일깨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약이 실제 사건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저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 자체의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회복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대하기에 너무 벅찬 것일까? 고작 100여 년 전만 해도, 가장 사색적인 사람들까지도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었다. 자연의 진화라는 다윈의 생각은 우스꽝스럽고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다윈의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은 압도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예수 미스테리아'를 제대로 이해하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이교 신앙에서 진화했으며, 예수 이야기도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비유적 신화라고 주장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일이면 이 주장은 너무나 명백해서 논쟁 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유일무이한 역사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로부터 진화한 것이다. 역사에 느닷없는 단절은 없다. 변화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는 죽지 않았다. 그 미스테리아는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모습이 바뀌었다. 서구의 영성은 이들 두 위대한 전통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이제 우리의 모든 풍요한 유산의 공통 기반과 그 유산에 대한 권리를 회복할 때가 되었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근본주의자들의 반발 압력에 굴복해서 권위주의적인 과거로 회귀해 버린다면, 그리스도교 역사의 쓰레기통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격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인들은 '<성서>에 씌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라는 상투적인 말에 굴종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이미 그리스도교는 과거와 같은 지배력을 잃었다. 그러한 지배력의 상실과 더불어 우리 문화는 필사적으로 새로운 영적 방향을 찾아왔다. 그리스도교는 신비한 뿌리로 돌아감으로써만 새로운 물병자리 시대의 새로운 명성을 창조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주의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거짓말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조만간에 그 토대는 반드시 전복될 것이다. 그러나 은밀한 미스테리아의 그리스도교는 신비한 초시간적 진실의 반석 위에서 안식하고 있으며, 과거에 늘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초시간적인 진실과 잇닿아 있다. 하나의 진실 모든 영적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은 항상 현재적이며, 결코 변치 않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2천 년 전에 처음으로 느닷없이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다만 인간의 항구적인 의미 추구의 한 장(章)이며, 진화하는 인간 의식의 대양에서 일렁인 하나의 물결이며, 아득한 고대로부터 신비주의자들이 도달했던 초시간적 그노시스를 언어화하고자 한 하나의 시도이다. 하나님은 단 한 번 유일하게 소풍삼아 지상에 도래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약속된 재림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신God이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인이 예수 이야기 속에 암호화한, 은밀한 미스테리아에 입문할 수 있는 전통이 남아 있지 않지만, '볼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심오하고 신비한 가르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가르침은 수세기에 걸쳐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발견되어 왔다. 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철저히 탐구하는 것은 너무 큰 과제여서 이번 책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다음 책을 기다려 주시기 바란다. 이번 책에서 우리 두 사람이 입증하고자 한 것은, 이교도 미스테리아와 그리스도교 양자의 핵심에 본질적으로 하나의 항구적인 철학이 내재해 있다는 것, 그리고 전통적으로 적대해 온 이 두 종교는 사실상 근친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리스도교가 잃어버린 어떤 것---그노시스의 비밀을 밝혀 주는 은밀한 미스테리아---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함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가 그리스도교를 해친다고는 보지 않는다. 역으로 고대 예수 이야기의 장엄함을 밝혀 주는 명제라고 본다. 고대의 예수 이야기는 진실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이다. 만드는 데 수천 년의 세월이 걸린 이야기인 것이다. <역사의 연구>에서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썼다. 죽어 가는 반신반인의 모습 뒤에는, 여러 이름으로 여러 세계를 위해 죽는 참된 신God의 위대한 모습이 어려 있다. 미노스 문명 세계를 위한 디오니소스, 수메르 문명 세계를 위한 타무스(담무스), 히타이트 문명 세계를 위한 아티스, 시리아 문명 세계를 위한 아도니스, 그리스도교 문명 세계를 위한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단 한 번 수난을 당한게 아니라 여러 차례 출현해서 수난을 당한 이 신God은 누구인가? 그 답은 바로 우리 각자이다. 고대 미스테리아는 우리 모두가 신의 아들과 딸이라고 가르쳤다. 희생된 신인 신화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도 부활해서 참된 불멸성, 거룩한 정체성을 얻을 수 있다. 이교도 철학자 살루스티우스는 미스테리아 신인 아티스의 신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아티스 이야기는 과거 속에 고립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보편적 과정을 상징한다. 그 이야기가 질서화된 우주와 밀접하게 연계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의식(儀式)에 따라 재생산해 우리 내면의 질서를 얻게 된다. 아티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신비하게 아티스와 더불어 죽어서 아이로 재탄생한다. 예수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신화도 '과거 속에 고립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항구적으로 영적 재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다. 예수 신화는 바울이 주장한 신성한 비밀, 곧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지금도 드러낼 수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도마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내 입에서 나온 것을 마시는 자와 같아지리라. 내가 몸소 그가 되리니, 감추어진 것들이 그에게 환히 드러나리라. 웹사이트 인터넷에는 '예수 미스테리아'에 포함된 모든 주제에 관한 방대한 정보가 널려 있다. 가장 유용한 사이트 일부만 소개하겠다. 고전 문헌 http://www.perseus.tufts.edu/Texts/chunk_TOC.html 아이스키네스, 아이스킬로스, 크세노폰 등이 남긴 수백 종의 고대 그리스 문헌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다. http://www.usask.ca/c1assics/Resources/biblios.html#tocsin 인터넷상의 고전의 바다. 고전 문헌에 대한 도서 목록, 연구, 보조 교재 등에 관한 무수한 목록이 열거되어 있다. 영지주의 http://www.webcom.com/~gnosis/search_form.html 찾아보기 검색이 가능한 영지주의 고문서, 흥미로운 주제나 키워드로 방대한 영지주의 고문서의 전체 내용을 검색해 볼 수 있다. 모든 나그 함마디 문서와 기타, 영지주의 문헌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교부들 http://www.newadvent.org/fathers http://www.ccel.org/fathers2 전자성서협회(The Electronic Bible Society)의 노력으로, 38권의 샤프(Schaff) 판본을 기초로 한 니케아 이후 교부들 문헌의 영문 번역본을 인터넷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가 쓴 <아리우스파 이단과 아리우스의 파면에 관한 서간>으로부터 제피리누스(교황)의 <제1서간과 제2서간>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문헌이 망라되어 있다. http://www.webcom.com/~gnosis/library/polem.htm 영지주의 협회도서관(The Gnostic Socirty Library)에는 영지주의에 반대한 초기교부 논객들의 저술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영지주의 연구에 흥미로운 중요 교부들의 문헌은 물론이고, 마니교에 반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도 열람할 수 있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고대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본래의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탐구하며 강의를 하거나 세미나를 열고 있다. 앞으로의 이벤트에 대해 알고 싶거나 두 저자를 이벤트에 초대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주소 :우편 : PO Box 2638, Glastonbury, Somerset, BA6 9WF, England 이메일 : info@jesusmysteries.demon.co.uk 웹사이트 : http://www.jesusmysteries.demon.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