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Bonjovr Tristesse 프랑소와즈 사강 著 자동차 소리만 들리는 파리의 새벽녘 나의 기억이 이따금 나를 배신한다. 다시 여름이 다가온다. 그 추억과 더불어. 안느, 안느! 나는 이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어둠속에서 되풀이한다. 그러자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솟아나고, 나는 그것을 눈감은 채 그 이름으로 맞이한다. 슬픔이여 안녕! 지은이 / 프랑소와즈 사강 (1935 - )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로 본명은 프랑소와즈 크와 레이다. 아버지가 실업가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소르 본느 대학을 중퇴하였고, 1945년 19세 때 겨우 2주만에 써낸 처녀 작 [슬픔이여 안녕]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문단에 데뷔하며 이 작 품으로 그해의 '문학비평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는 [어떤 미 소],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브라암스를 좋아 하시나요] 등이 있다. 제 1 부 제 1 장 나른함과 달콤함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 낯선 감정들을 슬 픔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지 나는 망설인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게만 구애되는 이기적 인 감정이며, 나는 그것을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 더구나 내게 있어 슬픔이란 언제나 고상한 것으로 비춰지고 있었으니만큼. 나는 이제까지 나른함, 뉘우침, 그리고 드물게는 양심의 가책까 지도 알고 있었지만, 슬픔은 경험한 일이 없었다. 지금은 비단처 럼 부드러운 그 무엇인가가 나를 덮어씌우고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라놓으려 한다. 그해 여름, 나는 열 일곱 살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행복했었 다. 나 말고 아버지와 그 애인인 엘자가 있었다. 나는 이 부자연 스런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미리 해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버 지는 마흔살이었으며 15년째 홀아비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젊고 생활력이 강했으며, 앞날이 창창했다. 그래서 나는 2년 전에 기숙사를 나왔을 때, 아버지가 여인과 동거생활하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6개월이 멀다 하고 여인을 갈아치우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약간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은 아버지의 매력과 이 새롭고 안락한 생활에 나는 익숙해져 갔다. 아버지는 유능한 사람이었으며 바람둥이였다. 언제나 호기심이 왕성하고 싫증을 잘 냈으며 그러면서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 다.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 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친절하고 용돈도 잘 주었고 명랑했으며 나 에게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 이상으로 정답고 재미있는 친구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아버지는 여름방학 동안 현재의 애인 인 엘자와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올 만 큼 세심한 점이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찬성했다. 왜냐하면 아버 지에겐 여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 엘자가 우리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키가 크고 붉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수단이 좋은 직업적인 장사꾼으로서, 촬영소 에서 단역배우 노릇도 하고 샹제리제의 술집에 출입하기도 했다. 그녀는 상냥하고 마음씨가 좋았지만 주부가 되려는 엉뚱한 야심은 갖고 있지 않았다. 사실 우리들은......출발한다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무슨 일이든간에 이의를 내세울 겨를도 없었던 것이 다. 아버지의 집은 해변의 작은 만에 있었다. 그곳은 파도가 넘실 대고 검붉은 바위에 둘러싸인 황금빛 만이었다. 최초의 며칠은 황홀할 뿐이었다. 우리들은 더위에 진저리를 내 면서도 몇 시간이고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츰 건강한 구릿빛 으로 그을어갔다. 엘자는 살갗이 빨갛게 벗겨져 몹시 괴로워 했 다. 아버지는 불룩한 배가 돈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상한 다리 체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물속에 들어갔다. 차갑고 맑은 물 속에서 파리의 온갖 먼지, 온갖 그늘을 씻어 버리 려고 온몸을 함부로 놀려 매우 피로했다. 나는 모래 위에 딩굴며, 모래 한 줌을 손에 움켜쥐고 손가락 사이로 한 가닥 부드러운 황 색 실처럼 떨어뜨렸다. 나는 그것이 시간의 흐름처럼 흘러 지나가 버린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것은 안이한 느낌이다. 그리고 안이 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유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들려 주었다. 여름인 걸 뭐-. 내가 시릴르를 처음 만난것은 그곳에서의 생활이 엿새째로 접어 들고 있을때였다. 그는 해변을 끼고 요트를 달리고 있었는데 우리 들의 작은 만 앞에서 전복했다. 나는 그의 소지품을 주워 모으는 걸 도와 주었다. 그리고 함께 킬킬대면서, 그의 이름이 시릴르라 는 것과 법과 대학생으로 이웃 별장에서 어머니와 여름방학을 보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라틴 계통의 얼굴 모습을 갖고 있었다. 살갗이 검고 몹시 개방적인, 그러면서도 어딘가 균형이 잡힌, 사람을 감싸주는 듯한 이기적인 점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난폭하고 이기적 인 특히 자기들의 청춘에 열중한 나머지 그 속에 숨겨진 자기들의 공허함에 대한 변명이나 비극의 테마를 찾아내려는 그런 대학생들 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청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보다는 예의바르고 은근한 태도로 말을 걸어오며 아버지나 애인과 같은 부드러움을 보여 주는, 40대 신사들을 한결 좋아했다. 하지만 시 릴르는 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키가 크고 신뢰감을 갖게하는 아 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낯가림과는 반드시 동감 은 아니었지만-왜냐하면 그 때문에 우리들은 곧잘 시시한 사람들 과도 교제하게 되었으니까-육체적 매력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선 일종의 어색함과 무관심을 느꼈다. 남의 마음에 들기를 체 념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로선 커다란 결점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 다. 왜냐하면 다른사람들의 환심을 사는것 말고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정복욕 뒤에 숨겨진 것이 생활력의 과잉이냐 쟁탈욕이냐, 혹은 자기자신에 대 해서 안심하고 싶다는 은근하고 호젓한, 그러면서도 뿌리 깊은 욕 구인지 어쩐지 모르겠다. 시릴르는 돌아갈 때 요트 조종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그의 생각에 몰두하면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거의 아니 한두 마디밖에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신경질적이 되어 있는 것도 거의 눈치채지 못했 다. 저녁식사 후, 우리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테라스의 긴의자에 누웠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아름다운 빛을 형형히 빛내고 있었 다. 나는 별을 쳐다봤다. 금년엔 절기가 어느 때보다 빨리 다가와 살별이 하늘을 어지럽게 날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겨우 7월 초순이라 별은 움직이지 않았다. 테라스의 조약들 위에 서 매미가 울고 있었다. 아마도 몇천 마리가 있으리라. 더위와 달 빛에 취해서 몇 밤이고 몇 밤이고 밤새껏 이처럼 시끄러운 목소리 로 우는 것은......매미는 다만 한쪽 날갯죽지를 다른 쪽 날갯죽 지에 비벼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꼭 발정기의 고양이 목소리처럼 본능적인, 목구멍에서 나오는 노래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흐뭇한 심정이었다. 작은 모래알만이 내 블라우스와 살갗 사이에서 기분좋은 졸음의 습격을 막고 있었다. 이 때 아버 지가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님이 올 거란다]하고 말했다. 나는 실망해서 눈을 감았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이 런 상태가 길게 계속될 수가 없게된 것이다. [누군지 빨리 말해요.......]하고, 여전히 사교계를 갈망하고 있는 엘자가 외쳤다. [안느 라르상이야.]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 봤 다. 나는 놀란 나머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며 아버지를 쳐 다봤다. [안느더러 패션 콜렉션에 지치게 되면 오지 않겠느냐고 해보았 던 거란다. 그랬더니......온다나.......] 이것은 내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안느 라르상은 죽은 어머니의 옛친구로, 아버지와는 거의 교제가 없는 편이었다. 하지 만 2년전 내가 기숙사를 나왔을 때 아버지는 처치곤란한 나를 그 녀에게 보냈었다. 안느는 일주일 동안 나에게 고상한 취미의 의상 을 장만해 주었으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안느에 대하여 정열적인 동경을 하게 되었는데, 안느는 그것을 교 묘하게도 그녀 숭배자의 한 사람인 젊은이에게 들리도록 했다. 따 라서 나의 맨 처음의 멋과 사랑의 유희는 안느 덕택이었다. 그래 서 나는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안느는 마흔 두 살이었지만 대단히 매력적이고 매우 세련된 여자로서 교만하며 인생에 피로해 진 냉담한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었다. 구태여 말한다면 그녀에 게는 차갑고 쌀쌀한 점이 단 하나의 결점이라 해도 좋았다. 그녀 는 애교스러웠고 동시에 차가웠다. 일관된 의지와 타인을 두렵게 만드는 마음의 잔잔함이 그녀의 온몸에 배어 있었다. 이혼해서 자 유롭게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인이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 했으며 우리들이 사귀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교제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고상하며 머리가 좋은, 사려깊은 사람들과 사귀었 다. 우리 주위에는 아버지가 바라는 미인과 재미있고 떠들썩한 술 꾼들뿐이었다. 아마도 안느는 우리들-아버지와 나-이 주로 쓸데없 는 장난과 하잘것 없는 일로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약간 경멸하 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왜냐하면 안느는 무절제한 생활을 경멸 하고 있었으니까....... 사업상의 만찬회-안느는 의상, 아버지는 광고 관계 일을 하고 있었다-어머니의 추억, 나의 노력-왜냐하면 안느가 두렵긴 했지만 나는 안느를 몹시 존경하고 있었으므로-등등이 우리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여하튼 엘자의 존재와 안느의 교육에 관한 의견 을 동시에 생각해 보면 갑작스런 그녀의 방문은 아무래도 꺼림칙 한 사건처럼 생각되었다. 엘자는 안느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마 침내 잠자러 올라가 버렸다.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남았다. 나는 아버지의 발밑 돌계단에 가서 앉았다. 아버지는 몸을 굽혀 두 손 을 내 어깨에 얹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는 거지? 내 귀여운 아가씨야. 너는 마치 어린 들고양이 같구나. 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블론드의 딸을 갖 고 싶은 거야. 약간 뚱뚱한 도자기 같은 눈을 가진......그리 고.......] [그런 건 문제가 아녜요.]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안느를 불렀죠? 그리고 왜 그분은 그 제의를 승낙했을 까요?] [너의 늙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지.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안느의 흥미를 끌 만한 타입의 남성은 아녜 요.]하고 나는 말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두뇌가 너무 지나치게 좋고 그리고 도도해 요. 더구나 엘자는? 아버지는 엘자 문제를 생각해 보셨어요? 안느 와 엘자의 대화를 상상해 보셨어요? 나는 상상도 못하겠어요.] [그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하고 아버지는 솔직히 시 인했다. [그래, 그건 정말 큰일이구나. 쎄실, 파리에 돌아가 버릴까?] 아버지는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면서 조용히 웃었다. 나는 몸을 돌이켜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의 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우스 꽝스런 잔주름이 눈 가장자리에 새겨지고 입술이 약간 위로 도톰 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아버지는 목신(牧神)과도 같았다. 우리들 은 함께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말썽을 일으킬 때마 다 그러듯이, [나의 귀여운 공범자.]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네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심각하고 부드러웠으므로 나는 내 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정말 불행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늦 도록 우리들은 연애에 관해서 그리고 그 복잡스러움에 대하여 얘 기를 주고받았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상상속의 것에 그 치고 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정조라든가, 사건의 중대함, 그리 고 책임과 같은 관념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참 다운 이유가 없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 이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아마 틀림없이 분개했 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경우 그러한 태도가 부드러움 이나 헌신을 제거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는 그러한 감정이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고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 하고 있으니만큼, 그러한 심정에 자연스럽게 동화돼 버리는 것이 었다. 이런 아버지의 연애관이 나를 사로잡았다. 불꽃처럼 격렬하 면서도 일시적인 사랑......나는 정조라는 것에 사로잡히는 나이 가 아니었다. 나는 사랑의 갖가지 것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몰 랐다. 몇 번인가의 데이트, 키스, 그리고 권태를 제외하고서는- 제 2 장 안느는 일주일 안에 도착할 예정이 없었다. 나는 진정한 여름방 학의 마지막 며칠을 만끽했다. 우리들은 별장을 두 달 동안 빌리 고 있었지만 안느의 도착과 더불어 완전한 휴식이란 것이 불가능 해질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안느는 매사를 분명히 했고, 언어 속에 아버지나 나라면 그냥 지나쳤을 어떤 의미롤 부여하곤 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고상한 취미나 섬세함 따위에 대해 구분을 정 확히 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녀의 갑작스런 동작, 상처받 은 듯한 침묵, 표정 같은 것들 속에서 그 구분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자극적인 것임과 동시에 번거롭고 결국은 굴욕적인 것이 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옳았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으므로- 안느가 도착한다는 날, 아버지와 엘자가 푸레쥬스 역까지 마중 을 가기로 결정되었다. 나는 이 외출에 참가하는 것올 단호히 거 절했다. 아버지는 격분한 나머지, 그녀가 기차에서 내리면 바치려 고 한 뜰에 있는 창포꽃을 하나도 남김없이 꺾어 버렸다. 나는 꽃 다발을 엘자가 들고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데 온 마음을 기울였 다. 3시쯤, 그들이 가버린 후 나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견딜 수 없 는 더위였다. 나는 모래 위에 누워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시릴르 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눈을 떴다. 하늘은 더위 때문에 하 얗고 어렴풋하게 보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누 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여름의 세찬 힘에 눌려 모래밭에 못박혀 있었다. 무거운 두 팔과 메마른 입술과....... [죽었어?]하고 그는 말했다. [멀리서 보니 내팽겨쳐진 시체처럼 보였어.] 나는 미소지었다. 시릴르는 내 곁에 앉았다. 내 심장은 놀라울 정도로 거칠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가 움직인 찰나, 그의 손이 내 어깨에 가볍게 스쳤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는 원기 왕성한 해군 훈련처럼 우리들은 여러 번 서로 얽힌 채 물 속 깊이 가라앉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런 가슴의 설레임도 느끼지 않았었 다. 그런데 오늘은, 다만 이 무더움이, 이 꿈결이, 이 능숙치 못 한 몸짓이 내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부드럽게 흔들어 놓은 것 이다. 나는 시릴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는 뚫어져라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나는 시릴르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에 비해서 남달리 균형이 잡혀 있었고 착실했다. 따라서 우리 들의 상태-이 기묘한 세 식구-가 그를 놀라게 했다. 시릴르가 너 무 친절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겸손해서인지 그것을 입 밖에 내지 는 않았지만, 나는 시릴르가 아버지를 쳐다보는 불만스런 눈초리 로 그것을 느꼈다. 시릴르는 내가 고민하고 있을 것을 바랐으리 라. 하지만, 나는 고민하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단 한 가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그의 시선과 내 심장의 강한 고동이었다. 시 릴르는 내 위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의 시릴르에 게 느꼈던 신뢰감과 침착성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이 길쭉하며 약간 두툼한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시릴르, 우리들은 그처럼 행복했었는데......] 나는 말했다. 그는 나에게 부드럽게 키스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 고 나서 내게는 꼭 내려감은 눈꺼풀 밑의 번뜩이는 빨간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위와 방심, 첫 키스의 맛과 한숨 속에 몇 분인 가 지났다. 자동차의 클랙슨이 우리를 황급히 떼어 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릴르의 곁을 떠나 집 있는 쪽으로 올라갔 다. 안느의 빠른 도착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탄 기차가 도 착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자 동차에서 내려서 테라스 위에 있는 안느를 발견했다. [이 집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 집인가?]하고 그녀는 말했다. [몹시 그을었네, 쎄실! 너를 다시 만나보게 되어 기뻐.] [저두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오셨어요?] [자동차로 오고 싶었어. 덕분에 난 아주 피곤해졌어] 나는 안느를 그녀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시릴르의 배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창문을 열었지만 벌써 보이지 않았다. 안느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녀의 눈 가장자리의 작은 그늘을 발견했다. [이 별장은 정말 훌륭해!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안느는 중얼거렸다. [아버진 엘자와 함께 아주머니를 마중하러 역에 가셨어요.] 나는 슈트케이스를 의자 뒤에 놓았다. 그리고 안느 쪽을 돌아다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 러지고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엘자 마켄블? 아버지는 엘자 마켄블을 이곳에 데리고 와계신 모양이지?] 나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놀라서 안느를 쳐다봤 다. 언제나 보아온 매우 침착하고도 냉정하던 그 얼굴이 내 눈앞 에서 이처럼 변할 줄이야......안느는 나 있는 쪽을 뚫어져라 바 라보고 있었지만, 나의 언어가 가져다 준 몇 갠가의 영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겨우 내가 보였던지 얼굴을 돌리었다. [내가 미리 말했어야 했던 건데.......]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너무 출발을 서둘렀기 때문에...... 너무나 피곤해져 버렸었어.......] [그런데 지금.......]하고 나는 기계적으로 이어서 말했다. [지금이 어쨌다는 거지?]하고 그녀가 말했다. 경멸하듯 질문하는 시선이었다. 이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지금 아주머니가 도착하셨기 때문에.......]하고 나는 두 손을 비비면서 멍청하게 말했다. [전 아주머니가 오신 게 몹시 기뻐요.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 겠어요. 만일 무엇인가 마시고 싶으시면.......홈바는 멋진 걸요, 뭐] 나는 우물우물 말하면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혼란된 머리로 계 단을 내려갔다. 무엇 때문일까. 그 얼굴, 그 허둥대던 음성, 그 실망은? 나는 긴 의자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나는 안느의 온갖 엄격하며 신 뢰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 모습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비웃음, 자신, 권위....... 그 상처받은 얼굴을 발견한 것은 나를 감동시 키고 동시에 짜증나게 했다. 안느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까? 그녀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버지가 갖고 있는 그 어떤것도 안느의 취미에 맞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 약한 바람둥이이고 때로는 줏대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여행의 피로였는지, 도덕적인 분노였는지......나는 갖가 지 가설을 세우는 데 1시간을 소비했다. 5시가 조금 넘어 아버지는 엘자와 함께 돌아왔다. 나는 아버지 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안느가 아버지 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빠른 걸음으로 머리를 뒤로 약간 젖힌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아 버지는 미소지었다. 나는 안느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든 아버 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 다. [안느는 오지 않았어. 기차 창문 틈으로 떨어져 버린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아버지는 나에게 외쳤다. [방에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안느는 자동차로 왔어요.] [정말이냐? 그것 멋진데! 어서 꽃다발을 위층으로 가져가거라.] [어머, 꽃다발까지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하는 안느의 목소리 가 들렸다.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그녀는 여행에 지친 사람답지 않게 단정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천천히 미소를 지으면서 아버지와 만나기 위해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그녀가 내려온 것은 자동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 것이었고, 나와 얘기하고 싶었다면 좀더 빨리 내려와 주었을 수도 있었을텐 데 하고 섭섭하게 생각했다. 내가 떨어지고 만 시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더라면....... 그러나 이 마지막 생각이 나를 위로해 주 었다. 아버지는 급히 다가가 안느의 손에 키스했다. [난 정거장 플랫폼에서 이 꽃다발을 안고 바보처럼 웃음을 띠고 15분이나 서성거렸다오. 아, 정말 잘 되었소. 당신이 와줘 서......엘자 마켄블을 아시지요?] 나는 눈길을 외면했다. [우리들은 서로 만나 적이 있을 거예요.] 안느는 매우 시원스럽 게 말했다. [마련해 주신 제 방이 참 멋져요.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 요. 레이몬, 한데 전 고단해 죽을 지경이에요.] 아버지는 신이 나 있었다. 아버지 보기엔 만사가 순조롭기만 했 다.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를 떠벌이기도 하고 술병 마개를 따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정열적인 시릴르의 얼굴과 안느의 얼 굴...... 이 두 얼굴, 심각하기만한 얼굴이 번갈아 눈앞에 어른거 렸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과연 여름방학을 그렇게 간단히 지낼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물어 보았다. 이 최초의 저녁식사는 매우 즐거웠다. 아버지와 안느는 얼마되 지 않는 화려한 그들 공통의 지인(知人)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 었다. 안느가 아버지의 공동 출자자는 어딘가 덜떨어진 사람이라 고 말할 때까지 나는 몹시 즐거웠다. 이 사람은 술고래였지만 매 우 친절했고 우리들-아버지와 나로선 잊을수 없는 수많은 만찬을 함께 했던 것이다. 나는 항의를 했다. [롱바르는 재미있는 분이에요. 안느 아주머니, 그분은 아주 명 랑해요.]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분에게 무엇인가 모자라는 데가 있다 는 걸 인정하지? 그리고 그 유머만 하더라도.......] [그분이 일반적으로 소위 말하는 지성인의 부류에 속해 있지 않 을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뭐.......] 안느는 너그러운 투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아가씨가 말하는 지성인의 부류란 뜻은 요컨대 지성인의 연령 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녀의 간결하고 결정적인 표현이 나를 매혹시켰다. 어떤 표현 은 완전히 이해 못했었지만, 나를 감탄케 하고 어떤 이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느끼게 했었다. 이 우회적인 표현은 나에게 작은 노트와 연필을 갖고 싶은 심정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그런 생각 을 안느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너는 원망하고 있지는 않구나.] 나는 원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안느에겐 악의가 없기 때문 이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도 지나치게 무관심하다고 느꼈다. 그녀 의 판단은 악의에서 우러나는 날카로움, 정밀함이 아니었다. 하지 만 그럼으로써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첫날밤, 안느는 엘자가 멍청한 모습으로 직접 아버지의 침실 로 들어간 일에 대해서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느는 콜렉션의 스웨터를 내게 선물로 주었는데, 나에게 고마 움을 표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감사의 표시는 오히려 안느를 어색하게 만들고, 그리고 또한 나 역시 감사의 말 따위로 결코 자 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함을 알기에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난 저 엘자가 몹시 귀여운 사람이라고 여겨요.]하고 내가 방을 나가기 전에 안느가 말했다. 안느는 미소짓지 않고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내 마음속에 그것을 반박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의 그 녀의 반응을 잊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 예, 매력이 있는......뭐라 할까......몹시 인상이 좋 은.......] 나는 더듬었다. 그녀는 웃기 시작하고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마 음으로 내 방에 자러 갔다. 나는 어쩌면 지금쯤 어떤 계집애와 칸 느에서 춤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릴르의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 었다. 나는 바다의 존재, 끊엄없는 이 리듬과 태양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 던 것을 깨달았다. 나는 또한 네 그루의 보리수 나무가 있는 시골 여학교의 기숙사 안뜰과 그 향기를 기억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2년 전에 기숙사를 나왔을 때, 역 플랫폼에 서 있던 아 버지의 미소, 그 난처해진 미소를......왜냐하면 나는 머리를 땋 아내리고 거의 검정에 가까운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었으므 로...... 그리고 자동차에 타고 나서의 아버지의 기쁨의 폭발, 왜 냐하면 나는 아버지와 닮은 눈과 입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아버지 에게는 가장 귀엽고 훌륭한 장난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 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버지는 나에게 파리를, 사치스럽고 안 락한 생활을 가르치려 하였다. 그 당시의 내 대부분의 즐거움은 금전의 덕택을 입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자동차로 스피드를 내는 일, 새옷을 마련하는 일, 레코드나 책이나 꽃을 사는 일......아 직도 나는 이같은 안이한 즐거움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구나 나는 그것이 안이한 것이라 듣고 있었으므로 안이하다고 부 르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비애나 신비적인 발작이라면 오 히려 쉽게 뉘우치고 부인할 수가 있었으리라. 쾌락과 행복에 대한 기호가 내 성격의 오직 하나의 일관된 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아 니면 내가 충분히 독서를 하지 못했던 탓이었을까? 기숙사에선 교화적인 책 이외는 읽을 수가 없었고 파리에선 책 을 읽을 틈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애들은 나를 영화관으로 유혹했다. 영화배우의 이름을 모른다고 그들은 나를 놀려대곤 했다. 또 어떤 때는 햇볕 이 내리쬐는 카페의 테라스로 끌려갔다. 나는 군중 속에 뒤섞인다 는 것, 마신다는 것, 나의 눈을 말끄러미 쳐다보며 손을 꼭 잡거 나, 혹은 군중 속에서 멀리 끌어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대한 쾌락을 맛보았다. 우리들은 집까지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집 대문 아래서 나를 끌어당겨서 키스했다. 나는 키스의 달콤함을 알았다. 나는 이같은 추억에 이름은 붙이지 않는다. 쟝......유벨......잭 크......라 하는 소녀들에겐 공통의 이름을......밤이 되면, 나는 별안간 어른이 되어서 아버지와 함께 나로선 아무런 할 일도 없는 밤의 모임에 나들이를 했다. 그곳에서 나는 즐거웠으며 또 나이 덕분에 사람을 즐겁게도 했다. 우리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나를 집 앞에 내려놓고, 대개는 여자 친구들을 배웅하기 위해 가 버렸 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돌아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인가 모험을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러한 것을 숨기지 않을 뿐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끔 점심식사롤 하러 오는 애인들이나 개중에 는 완전히 들어앉고 마는(다행히도 일시적인......) 경우에도 일 체 거짓말로 얼버무리거나 변명하는 일이 없었다. 어쨌든간에 나 는 오래도록 아버지의<귀한 여자손님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모 르고 있을 까닭은 없었다.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에게 신뢰감을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므로써 구차한 변명을 꾸 며대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좋았던 것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현명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결점 은 당시의 연령과 경험밖에 갖지 못한 나로선 깊은 감동을 받는다 기 보다는 즐거워야 할 사랑의 여러가지에 대해서 어느정도 나에 게 환멸적인 시니즘을 불어넣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특히 오스카 와일드의 간결한 표현을 즐기고 때때로 마음속으로 되풀이 하고 있었다. [죄악은 근대 사회에 있어서 유일한 선명한 색채다.] 나는 이 구절을 실행에 옮겼을 때보다 한층 확고한 확신을 갖고 내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자신의 일생이 이 구절을 모범으로 삼 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으며 에피나르의 악덕한 이미지처럼 솟아 나올 수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의미가 없는 시간이 나 단절이나 일상적인 선량한 감정을 망각하고 있었다. 관념적으 로 나는 저열하고 파렴치한 지옥 인생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제 3 장 이튿날 아침, 나는 침대 가득히 들이비치고 있는 비스듬한 태양 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잠을 깨고, 내가 그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 던 약간 뒤숭숭한 기묘한 꿈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꿈결에서 이 집요한 무더위를 손으로 가리려 하다가 단념했다. 열 시였다. 나는 잠옷 바람으로 테라스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 안느를 발견했다. 나는 그녀가 엷게 빈틈없 이 화장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결코 참다운 의미의 휴가 는 즐기지 못하리라. 그녀가 내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나는 커피잔과 오렌지를 들고 한가하게 계단에 걸터앉아서 아침의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했다. 나는 오렌지를 한 입 깨물었다. 달콤 한 과즙이 입안에 고였다. 뜨거운 커피를 곧 한 모금, 그러고 나 서 또 과일의 신선함을......아침의 태양은 내 머리카락을 데우고 내 살결에 난 시트 자국을 폈다. 5분쯤 지나면 수영하러 가야지. 그때 안느의 목소리가 나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쎄실, 먹지 않겠어?] [전 아침엔 마시는 게 좋아요. 왜냐하면.......] [조금은 볼품있게 되려면 아직도 3킬로그램 더 늘지 않으면 안 돼. 쎄실의 볼이 움푹 패였고 갈비뼈도 앙상하다구. 버터 바른 빵 을 갖고 오도록 해.] 나는 그녀에게 버터 바른 빵을 강요하지 않기를 간청했다. 그런 데도 그녀가 나에게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하려 했을때, 아 버지가 화려한 물색의 실내복을 입고 나타났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태양에 그을은 두 아가씨가 태양 아래서 버터 바른 빵을 의논하고 있으니.] [아가씨는 하나로서 충분하지 않을까요. 유감스럽게도......저 는 당신과 같은 또래의 나이예요. 레이몬......] 안느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 심술쟁이로군.......]하고 아버지는 부드럽게 속삭였 다. 나는 안느의 눈꺼풀이 뜻밖의 애무를 받았을 때처럼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기회로 살그머니 자리를 일어섰다. 계단에서 나는 엘자와 마주쳤다. 눈 두덩이가 붓고 햇볕을 받아 붉어진 얼굴의 빛바랜 입술이 잠자리에서 막 빠져나온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안느가 손질이 잘 되고 매만져진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아 래층에 있다는 것, 그리고 살결이 거칠어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일광욕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을 엘자에게 얘기해 주고, 그녀를 만 류하려고 했다. 나는 또한 그녀에게 조심하도록 주의하려 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녀는 오해했으리라. 그녀는 스물아홉 살이었 다. 안느보다 열세살이나 젊었으며, 그것이 강력한 무기처럼 그녀 는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해수욕복을 입고 만 쪽으로 뛰어갔다. 뜻밖에도 시릴르가 벌써 와 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가까 이 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어제의 일인데, 너에게 사과하려고 생각했어. 내가 나빴던 거 야.] 나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의 예의바른 태도 에 깜짝 놀랐다. [난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나는 거야.]하고 그는 배를 바다로 밀 어내면서 말했다. [그런 일은 없어.]하고 나는 쾌활하게 대꾸했다. 나도 벌써 배 위에 타고 있었다. 시릴르는 무릎 반까지 오는 물 속에 서서 재판소의 난간을 잡듯이 양손으로 뱃전을 움켜잡고 있 었다. 나는 그가 얘기를 끝낼 때까지 올라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 기 때문에 가능한 한 주의를 해서 그를 응시했다. 나는 그의 얼굴 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자신의 반쪽을 찾아냈다. 나는 시릴르가 자기 자신을 스물 다섯 살의 나쁜 유혹자로 속단하고 있 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웃지 마. 어젯밤 나는 얼마나 자책했는지 몰라. 알고 있어? 나 로부터 너를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너의 아버지의 그 여 자만 해도......나는 타기받을 비열한 놈이 되고 만거야. 그렇다 면 결국 같은 꼴이 되는거지.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 없을 거야.......] 시릴르는 말했다. 그는 진지했다. 나는 시릴르가 선량하며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 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싶다고......나는 양손을 시릴르의 목에 걸고 볼을 그의 볼에 꼭 대었다. 그의 어깨 는 넓고 나의 몸뚱이를 받쳐 주는 그의 몸의 근육은 단단하게 다 져져 있었다. [당신은 귀여운 사람이로군요, 시릴르. 마치 오빠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시릴르는 작은 함성을 울리며 두 팔로 나를 부둥켜안고 조용하 게 배로부터 끌어내렸다. 그는 나를 단단히 껴안고 들어올려서 내 머리는 그의 어깨 위에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시릴르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침 햇살 속에서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황금빛으로 그을 려 있었고, 한마디로 사랑스럽고 부드러웠으며, 그러면서 나를 지 켜 주었다. 시릴르의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았을 때, 나는 시릴르와 마찬가지로 쾌락에 떨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키스는 어떤 거리낌 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다만 깊은 쾌락의 추구만이 이따금 속삭임 에 끊기곤 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빠져나와 기슭에서 멀어져가는 배를 향해서 헤엄 쳐 갔다. 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고 얼굴을 물속에 틀어박았 다. 물은 녹색이었다. 나는 행복과 안도감에 완전히 도취되었다. 11시 반에 시릴르는 돌아가고 아버지와 안느, 그리고 엘자가 자 갈길인 오솔길에 나타났다. 아버지는 두 여인 사이를 걸으면서 그 녀들을 붙들어 주고,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우아하게 차례차례 손 을 내밀었다. 안느는 해수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들 앞에서 태 연히 그것을 벗고 누웠다. 가냘픈 허리와 날씬한 다리, 그녀에겐 조금도 시든 데가 없었다. 그것은 필경 다년간의 주의와 손질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나도 모르게 아버지에게 감탄하는 눈초리를 돌렸다. 몹시 놀라운 것은 아버지는 동의의 눈 짓을 보내는 대신 눈을 감았다. 엘자는 가엾게도 비참한 상태로, 온몸뚱이를 기름으로 범벅을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엘자에게 싫증을 내는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으리라. 그때 안느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쎄실, 이곳에선 어째서 그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이지? 파리에 선 정오까지도 늦잠을 자더니.......] [그때는 공부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죠, 뭐.]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미소짓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웃고 싶지 않을 때는 웃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에도 없는 것을 마지못해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면 시험은?] [깨끗하게 떨어졌어요.]하고 나는 쾌활하게 말했다. [10월엔 꼭 합격해야 해.......] [왜? 난 졸업장 같은 건 한번도 받은 일이 없지만 호화스런 인 생을 누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얼마간의 재산이 있었으니까요.......]하고 안느가 말했다. [내 딸은 언제라도 생활력이 강한 사내를 찾아낼 수 있어.] 아버지는 태연히 그렇게 말했다. 엘자는 웃기 시작했지만, 우리들 세 사람의 시선에 부딪히자 웃 음을 멈추었다. [쎄실은 이번 여름방학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돼요.] 안느는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절망의 시선을 보냈다. 아버지는 어색한 듯한 미소를 짓고 나에게 눈짓했다. 나는 까만 선이 가득 그어진 베르 그송의 책을 펼쳐 놓고 있는 자신을 연상했다. 그리고 저 아래 있 는 시릴르의 웃음소리를. 이런 생각이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난 안느 곁에까지 기어가서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눈을 떴다. 나는 걱정스러운 듯한, 애원하는 듯한, 그뿐아니라 과 로한 인텔리 같은 얼굴 표정이 되도록 뺨을 오무려뜨리고 그녀 몸 위에 웅크렸다. [안느 아주머니.]하고 나는 말했다. [저에게 그런 일은 안 시키시겠지요? 이 더위에 시험공부를 시 키다니......이번 휴가는 내게 좋은 시간들인데.......] 그녀는 한순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얼굴을 외면했다. [너에게 그런 일을 시키쟎으면 안 돼요. 네가 말하듯이 이 더위 속에도 말이지. 하지만 넌 틀림없이 이틀밖에 나를 원망치 않을거 야. 왜냐고? 난 너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꼭 시험에 합격하게 될거야.] [하지만 그것에 익숙해질 수 없는 것도 많다구요.]하고 나는 웃 지도 않고 말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교만한 시선을 흘낏 보냈다. 나는 근심 에 짓눌린 가슴으로 모래 위에 다시 누었다. 엘자가 남프랑스의 축제에 대해서 큰 목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했 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몸이 삼각형을 이룬 꼭지점에 위치하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대담 하고도 꼼짝않는 시선으로 안느의 옆모습과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 다. 아버지는 조용히 지칠 줄 모르는 규칙적인 동작으로 모래 위에 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향해서 달렸다. 나는 더이상 한가롭게 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휴가를 아쉬워 하면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들은 드라마의 온갖 요소를 갖고 있었다. 바람둥이와 고급 창녀, 이지적인 여인. 나는 바다 깊숙한 곳에서 보라색과 장미색 의 예쁜 조가비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줍기 위해서 잠수했다. 나는 점심식사 때까지 아름답게 닳아빠진 조가비를 손에 쥐고 있 었다. 나는 그것을 행복의 마스코트로 여름내 놓치지 않으리라 생 각했다. 사실 내가 어째서 이 조가비를 잃지 않았는지 모른다. 왜 냐하면 나는 무엇이든 잃어버리고 마니까. 오늘, 이 조가비는 도 화색으로 따뜻하게 내 손에 남아 있어서 나를 울고 싶게 한다. 제 4 장 그후 며칠 동안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엘자에 대한 안느의 극 진한 친절이었다. 주책없는 엘자의 이야기에 대해서 가엾은 엘자 를 놀림거리로 만들 수 있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그녀의 재 치있는 핀잔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안느의 끈기 와 너그러움을 속으로 칭찬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 교활한 계산이 은근히 섞여 있음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러한 심술궂은 조롱에는 곧 싫증을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안느가 이와 같은 태도를 짓는 것과는 반대로 아버지는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감정 도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아버지는 안느를 딸의 두 번째 어머니가 될 만한 대단히 존경하는 부인으로 대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방법 으로 언제나 나를 안느 감독 밑에 두고 나에 관한한 그녀에게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도록 꾸몄다. 그것은 그녀를 우리들에게 좀더 접근시키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 의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행동은 미지의 여성에 향한, 그것도 그 여인을 알고 싶다-쾌락을 통해서-하고 탐내는 듯한 그것이었 다. 나는 이따금 이런 눈빛을 시릴르에게서 발견하면 도망치고 싶 기도 하는 동시에 그를 유혹하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안느보다 흔들리기 쉬웠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서 무관심과 침착한 부드러움을 나타내어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첫 날 잘못 생각했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애매한 부드러움 이 아버지를 극도로 자극시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특 히 그녀의 침묵이......참으로 자연스럽고 우아한 그녀의 침묵 이......엘자의 쉴새없는 수다에 비해서 태양과 그늘과 같은 일종 의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가엾은 엘자....... 그녀는 정말로 아 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수다스럽고 불안정했으며, 여전히 태양의 열기 때문에 싱싱한 아름다움이 가리워져 있었다. 마침내 어느 날, 엘자는 아버지의 시선을 눈치채고 사태를 짐작 했던 모양이다. 점심 전에 나는 그녀가 아버지 귀에 무엇인가 속 삭이는 것을 보았다. 순간 아버지는 기분이 상한 듯한 놀란 표정 을 짓더니, 잠시 후 웃으면서 동의했다. 커피 타임에 엘자는 일어 나서 도어까지 가더니 우리들 쪽을 돌아보며, 나로선 아메리카 영 화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걸로 생각되는 안타까운 듯이 아주 세련된 애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시겠어요, 레이몬?] 아버지는 일어나더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낮잠이 건강에 유익하 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나갔다. 안느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담배가 손가락 끝에서 연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모두들 낮잠을 자는 것이 휴식을 취하는데 도움이 된다지만, 난 틀린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곧 자신이 말한 언어의 이중적인 의미에 정신이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만둬.]하고 안느가 쌀쌀하게 말했다. 안느는 내 말에 이중의 의미가 있는지, 어떤지 염두에 두지 않 았는듯 했다. 그녀는 곧 악취미의 농담이라고 알아차렸다. 나는 안느를 쳐다 봤다. 그녀의 애써 냉정하며 잔잔한 얼굴이 나를 감동시켰다. 어 쩌면 그때 안느는 미칠 듯이 엘자를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안느를 위로하기 위해서 시니크한 생각이 문득 내 머리에 떠올랐 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온갖 냉소적인 생각과 마찬가지로 이것 도 나를 아주 즐겁게 만들었다. 냉소적인 생각은 나에게 일종의 자신과 도취적인 자기 자신과의 공모감을 준다. 나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엘자의 검게 그을린 피부를 보더라도 두 사 람의 낮잠이 그리 즐겁지는 않겠죠, 뭐.] 나는 차라리 잠자코 있었던 편이 좋을 뻔했다. [난 그런 생각은 싫어. 더구나 너같은 나이에......천치 이상이 야. 그런 소린 듣기만 해도 슬퍼져.] 안느가 말했다. 나는 돌연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전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에요. 용서해 주세요. 사실 난 두사람이 정말은 아주 만족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안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었다. 나는 즉시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넌 연애에 대해서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것은 각기 독립된 감각의 연속은 아니야.] 그러나 나의 사랑은 모두 그랬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얼굴이며 행동, 키스했을 때의 갑작스런 감동......관련이 없는 활짝 핀 순 간......내가 갖고 있는 추억은 다만 이런 것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야.]하고 안느가 말했다. [그곳에는 끊임없는 애정과 정다움이 있고, 어떤 사람의 부재 (不在)를 강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너로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 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녀는 손짓으로 내버려 두라는 손짓을 하고서 신문을 펼쳤다. 내 감정의 무능함에 체념해 버린 듯싶은 이 무관심 대신 그녀가 노여워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이치가 옳 고,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서 동물과 같은 생활을 하는 내가 가엾고 약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나는 자신을 비하시켰고, 그것이 나로선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 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좋든 나쁘든 간에 나 자신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일이 아직 없었 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방에 올라가서 잠자코 생각에 잠기었다. 내 발밑에 있 는 시트는 아늑했다. 귀에는 아직도 안느의 말이 생생했다. [그것은 다른 것이야. 그것은 어떤 사람의 부재를 강하게 느끼 는 것.] 지금까지 누군가의 부재를 느꼈던 일이 있었던가? 나는 이 보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이젠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엇이든지 명확한 것, 협박적인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물론 이 뒤에 계속된 일들은 똑똑히 기억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에 가능한한 내 최대의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3주일, 요컨대 행복했던 3주일......어떤 날 아버지가 사람 눈에 될 만큼 안느의 입술을 쳐다봤다든지, 또 어 떤 날 아버지가 짐짓 농담처럼 안느의 무관심함을 핀잔했다든지 또 어떤 날 아버지가 웃지도 않고 안느의 세련됨을 엘자의 반 천 치 같은 태도에 견주어 보았다든지....... 두 사람이 15년 전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만일 서로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라면 좀더 일찍이 시작되었을 거라는 이 어 리석은 생각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만일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아 버지는 3개월 동안 열중한 끝에 마침내 안느에게 몇 가지인가의 정열적인 추억과 다소의 굴욕감을 가슴에 남기는 정도로 끝나리 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는 안느가 이런 식으로 사나이로부터 버림 을 받을 그런 여인이 아니란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 까? 그러나 시릴르가 있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내 생각은 꽉 차 있었다. 우리는 밤이면 곧잘 싼트로페의 나이트클럽에 가 클라리넷의 우 울한 멜로디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으며, 이 튿날이면 그런 말들을 잊어버렸다. 그런 밤은 얼마나 달콤했는 지....... 낮에는 우리는 기슭에서 요트놀이를 했다. 아버지도 이따금 우 리들과 함께 즐겼다. 특히 시릴르가 크롤 경주를 져준 후부터 아 버지는 시릴르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시릴르를 <나의 귀여운 시릴르>라고 부르고, 시릴르는 아버지를 <무슈>라고 부르 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도대체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어른일까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오후, 우리는 시릴르 어머니 별장으로 차를 마시러 갔 다. 그녀는 조용하고 친절한 노부인이었는데 우리에게 미망인으로 서 또는 어머니로서의 근심을 털어놓았다. 동정한 아버지는 동의 의 눈초리를 안느에게 던지고 숱한 찬사를 부인에게 바쳤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밝혀야겠다. 안느는 차분한 미소를 띠고 이 광경을 바 라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시릴르의 어머니가 인상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부류의 노부인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두 사람은 내쪽을 돌아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기 때문에 나는 화가 왈칵 치밀었다. [아버지께선 그 부인이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있다는 것도 몰라 요?]하고 나는 고함쳤다. [멋대로 자신의 인생을 추켜세우라고 하죠. 자기 책임을 다했다 고 자신한다면야......그리고.......] [하지만 사실이 그런데.]하고 안느가 말했다. [그분은 어머니로서의, 또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거 야. 소위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그리고 창녀로서의 책임도 말이죠.]하고 나는 쏘아붙였다. [난 추잡한 표현은 싫어. 가령 역설이라 해도 말이야.......] 안느가 말했다. [허나 이것은 역설이 아니예요. 그분도 다른 모든 사람처럼 결 혼했겠죠? 욕망때문에 혹은 결혼이란 해야 하는 것이니까......그 래서 아이가 생겼죠. 어떻게 하면 아이가 생기는지 아셔요?] [아마도 너보다는 잘 모르겠지.]하고 안느가 비꼬았다. [그렇지만 나도 약간의 상식은 있어.] [그렇게 해서 그 자식을 키웠고, 또 그럼으로써 간통의 불안이 나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분은 몇천 명의 여자 가 갖고 있는 인생을 겪었고, 그것이 자랑스런 거예요. 알겠어요? 부르조아지의 젊은 아내와 어머니의 입장에서 조금도 벗어나려고 노력한 일이 없었던 거예요. 이것저것 하지 않았다는 걸 자랑할 뿐, 무엇인가 완수한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너무 심한데.......]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것은 가짜예요.]하고 나는 외쳤다. [그리고 나중엔 이렇게 말하겠죠. <난 내 책임을 다했다.>왜냐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일 그 사람이 자기가 태 어난 환경을 무시하고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 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겠어요. [너는 지금 유행병에 물들어 있는 거야. 아무런 가치도 없는 유 행에.......]하고 안느가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말한 대로 생각하고 있었지 만, 사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것도 확실한 사실이었 다. 그것은 그렇다 해도 내 인생, 그리고 아버지의 인생은 이 이 론의 도움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경멸함으로써, 안 느는 나에게 상처를 입혔다. 사람은 때때로 하찮은 것에도 대단한 집착을 갖고 있는 일이 있 다. 그런데 안느는 나를 사색적인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나는 안느의 잘못된 생각을 빨리 깨우쳐 주는 것이 긴급한 일이 며, 가장 먼저 해야만 할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 기회가 이처럼 빨리 오고, 내가 그 기회를 잡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원래가 나 는 한 달이 못가서 한 가지 일에 대하여 의견을 바꾸기 쉽고, 내 신념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해서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겠는가? 제 5 장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파국이 닥쳐오고 말았다. 그날 아침, 아 버지는 그날 밤에 칸느로 도박과 댄스를 하러 가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엘자의 기뻐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익숙한 카지 노의 분위기 속에서 햇볕에 그을었던 본래의 아름다움과 반은 고 독했던 생활 덕분에 얼마간 퇴색해 버린 운명의 여인으로서의 개 성을 다시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안느는 이 사교취미에 반대하지 않 았다. 비교적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저녁식사 후 아무런 걱정도 없이 한 벌밖에 없는 야회복을 입기 위하여 이층 내 방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아버지가 골라 준 옷이었다. 액조틱한, 나에겐 너무 액 조틱한 천으로 만들어진 옷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신 의 취미에서 였는지 혹은 습관에서 였는지 나를 <운명의 여인>처 럼 꾸며 놓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래층에서 새로운 턱시도를 입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 목에 양팔을 감았다.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남성보다 멋져요.] [시릴르 말고는 말이지.]하고 아버지는 전연 생각지도 않은 말 을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 중에서 가장 예쁘다.] [엘자와 안느 다음이죠.]하고 나도 생각지도 않은 말을 그렇게 지껄였다. [두 사람은 꾸물거리고 이렇게 우리들을 기다리게 하니까, 늙은 류머티즘 환자인 아버지와 함께 춤이나 추자!] 나는 아버지와의 외출에 앞서는 행복감을 다시금 찾아냈다. 정 말 아버지는 조금도 늙은 기색이 없었다. 나는 춤추면서 언제나의 오데코롱 향기와 따뜻한 체온과 담배냄새를 호흡했다. 아버지는 리듬에 맞추어 춤추면서 반쯤 눈을 감고 나와 비슷한 즐거운 듯 한, 참을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나에게 부기우기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하고 아버지는 류머티 즘임을 잊고 말했다. 엘자가 모습을 나타냈으므로 아버지는 댄스를 멈추고 그녀를 마 중하기 위해서 반색하며 몇 마디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녹색 드레스를 몸에 걸치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 입가엔 직업 적인 애교어린 미소를, 즉 그녀의 카지노용 미소를, 띄우고 있었 다. 그녀는 메마른 머리카락과 햇볕으로 탄 살결을 정성껏 매만져 아름답게 보이려 했지만 그것은 황홀하기 보다는 차라리 노력에 비할 만한 것이라는 게 옳을 것 같다. 그녀는 다행히 그것을 깨닫 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실까요?] [안느가 아직 안 내려왔어요.]하고 나는 일러 주었다. [이층에 가서 준비가 되었나 보고 와요.]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칸느에 도착하면 열두시가 넘겠다] 나는 야회복자락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면서 계단을 올라가 안느 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문 앞에서 우뚝 섰다. 그녀는 회색 옷 을 입고 있었다. 거의 흰색에 가까운 이상한 회색으로 전등불빛에 반사되어 마치 새벽 바다의 색조와 같은......그날 밤 성숙한 여 인의 온갖 매력이 그녀에게 집중된 것과 같았다. [멋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아아, 안느 아주머니, 얼마나 멋진 의상인지 몰라요!] 그녀는 막 이제부터 이별을 고하는 사람을 대하듯이 거울 속의 자신에게 눈웃음을 쳤다. [이 회색은 성공인데.]하고 안느는 말했다. [멋진 것은 아주머니.......]하고 나는 덧붙였다. 그녀는 내 귀를 잡아끌며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짙은 파랑색이었다. 나는 그것이 밝아지며 웃음짓는 걸 보았다. [넌 귀여운 아가씨야. 이따금 귀찮게 굴기는 하지만.......] 안느는 내가 입은 야회복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내 앞을 지 나쳐 갔다.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해줌과 동시에 분하게도 만들었 다. 안느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나는 아버지가 그녀를 맞이하러 다가서는 모양을 보았다. 아버지는 계단 아래에 멈춰 서서 한 발 을 첫번째 층계에 올려놓은 채 안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엘자도 안느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똑똑히 이 광 경을 기억하고 있다. 내 바로 앞에 안느의 황금빛으로 알맞게 그 을린 목덜미와 흠잡을 것 없이 아름다운 어깨가 있었다. 그 조금 아래쪽에 손을 내민 아버지의 상기된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서 벌 써 이미 멀리 아슴해진 엘자의 실루엣이 있었다. [안느, 당신은 멋져!]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안느는 지나치면서 아버지에게 미소지어 보이고 외투를 손에 들 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만나도록 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쎄실, 나와 함께 가겠어?] 그녀는 나에게 운전을 하도록 해주었다. 내가 천천히 몰아가는 밤길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안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는 라디오의 요란스러운 트럼펫 소리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 다. 아버지의 2인승 오픈카가 커브 길에서 우리를 앞지르기 시작 했을 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끼어들 여 지가 없는 연극에서 자신이 벌써 따돌려져 있음을 느꼈다. 카지노에서는 아버지의 책략 덕분으로 우리들은 곧 뿔뿔이 흩어 지고 말았다. 나는 그러는 동안 바에서 엘자와 그녀의 친구이며 벌써 몹시 취해하고 있는 남미 사람과 어울렸다. 그는 연극관계 일을 보고 있었는데, 이런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연극에 대한 정열 덕분에 꽤 유쾌했었다. 나는 그와 함께 한 시간 가까이 즐겁 게 보냈다. 하지만 엘자는 심심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두 사람 유명한 배우를 알고 있었지만 기술분야엔 무관심했다. 그녀는 갑 자기 마치 내가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가 어디 있 는지 묻더니 가 버렸다. 남미 사람은 한순간 섭섭한 낯빛을 지었 으나 다시 위스키를 들이키고 명랑해졌다. 나는 사심없이 예의상 그와 상대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주 명랑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남미 사람이 댄스를 하려고 했을 때 일은 더 한층 우스꽝스럽게 되었다. 나는 그의 몸을 팔로 받쳐 주고 그에게 밟히지 않도록 발 을 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정신없이 웃고 있었기 때문에, 엘자가 내 어깨를 두들겼을 때, 그리고 그 불길한 얼굴 표정을 보았을 때 나는 하마터면 그녀 를 지옥으로 쫓아보낼 뻔했다. [그 사람들이 안 보여.] 엘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화장이 지워지고 불빛에 어린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엘자의 이런 모습을 쳐다보자 가엾은 생 각이 들었다. 나는 별안간 아버지에 대해 격심한 노여움을 느꼈 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무례한 것이었다. [아, 어디 있는지 알아요.]하고 나는 사뭇 자연스럽게, 그리고 엘자가 근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곧 돌아올께요.] 내가 받쳐 주지 않자, 남미 사람은 엘자의 품안으로 기울어졌고 그것을 만족해 하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엘자가 나보다 포동 포동 하다는 걸 슬프게 생각하면서 그녀에 대해선 성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카지노는 넓었다. 나는 두 바퀴나 휘둘러봤지만, 두 사 람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는 테라스를 둘러보고 마침내 자동차 가 생각났다. 내가 자동차를 주차장에서 찾아내기까지엔 얼마간의 시간이 걸 렸다. 아버지와 안느는 자동차 안에 있었다. 나는 뒤쪽부터 가서 유리창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는 아버지와 안느의 거 의 닿을 정도로 접근된 심각한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가로등에 어려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들은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아마 도 소곤소곤 얘기를 주고받았으리라. 나는 그들의 입술이 움직이 는 걸 보았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엘자를 생각해서 나는 도어를 열었다. 아버지의 손은 안느의 팔 위에 있었다. 두 사람은 흘낏 나를 쳐 다봤을 뿐이었다. [즐거워요?]하고 나는 얌전하게 물었다. [어쩐 일이냐?]하고 아버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 뭣하러 이곳에 왔니?] [그럼 아버지는? 엘자가 한 시간 전부터 찾고 있어요.] 안느가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었다. 아쉬운 듯 천천히....... [우리는 돌아가겠어. 엘자에게 내가 피로해서 아버지가 자동차 로 바래다 주었다고 전해. 당신들도 실컷 즐겼으면 내 자동차를 타고 돌아와요.] 노여움이 나를 뒤흔들었다.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이 실컷 즐겼으면이라고요! 몰라서 그러세요! 정말 너무 해요!] [뭐가 너무하다는 거냐]하고 아버지는 놀라서 되물었다. [아버지는 햇볕에 견디지 못하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바다로 데 리고 와서 허물이 전부 벗겨지면 버리는 거죠. 너무해요. 정말 너 무하다구요. 난 도대체 뭐라고 엘자에게 말하면 좋아요? 도대체 뭐라고.......] 안느는 이젠 상대하기도 싫다는 태도로 고개를 다시 아버지 쪽 으로 돌렸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미소지으며 내 말을 귀담아 들으 려 하지 않았다. 나는 노여움이 복받쳤다. [나는......나는 엘자에게 이렇게 말하겠어요. <아버지는 함께 잠 잘 다른 여자를 만났으니, 돌아가 주세요> 라고 말예요. 알겠 어요?] 아버지의 놀란 고함소리와 안느가 내 뺨을 때리는 소리가 동시 에 났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도어에서 돌려버렸다. 몹시 아팠다. [사과해!]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온갖 생각이 머리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나는 잠자코 도어 곁에 수그리고 서 있었다. 버티고 싶은 생각이 언제나 뒤늦게 내 머리 에 떠오르는 것이다. [이쪽으로 와요.]하고 안느가 말했다. 협박적인 말투가 아닌 듯싶어서 나는 다가갔다. 안느는 나의 뺨 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바보였었나를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부드럽게 천천히 이야기했다. [심술은 그만 부리도록 해. 나도 엘자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하 고 있어. 하지만 네가 그것을 가장 말썽 없이 수습할 수는 있지? 내일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구. 내가 때려서 몹시 아프 지?] [아뇨, 그렇지 않아요.]하고 나는 공손히 말했다. 그녀의 갑작스런 친절과 나의 잠시 전까지의 도를 지나치게 거 친 노여움 때문에 나는 울고 싶어졌다. 나는 그들이 떠나 버린 뒷 모양을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온통 빈털터 리가 된 느낌이었다. 나의 유일한 위안은 나 자신이 상냥한 마음 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카지노 에 돌아갔다. 그곳에서 엘자를 찾아냈다. 남미 사람이 그녀의 팔 뚝에 늘어붙어 있었다. [안느가 기분이 언짢대요.]하고 나는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바래다 주어야만 했어요. 뭘좀 마시겠어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납득이 갈 만한 구실 을 찾아냈다. [안느가 구토를 했어요. 아주 굉장했지 뭐예요. 옷이 아주 더러 워져서.......] 나는 이 상세한 설명이 그럴듯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엘자 는 조용히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쩌면 좋을지를 몰라서 엘자를 쳐다봤다. [쎄실!]하고 그녀는 흐느꼈다. [아! 쎄실, 우린 그 동안 정말 행복했었는데.......] 그녀의 흐느낌은 점점 심해졌다. 남미 사람도 같이 울기 시작했 다. 나는 안느와 아버지를 증오했다. 나는 가엾은 엘자가 우는 것 을, 그리고 그녀의 눈썹마스카라가 마구 번지는 것을, 또 이 남미 사람이 흐느끼고 있는 것을 그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였으 리라. [아직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도 아니잖아요, 엘자. 나와 함께 돌아가요.] [난 나중에 내 슈트케이스를 찾으러 가겠어.]하고 그녀는 울음 을 터뜨렸다. [잘 있어, 쎄실. 우리는 싸움도 안 했지?] 나는 그녀와 날씨나 유행 말고는 별로 얘기한 적이 없었지만, 오랜 친구를 잃어버린 심정이 들었다. 나는 별안간 홱 돌아서서 자동차 쪽으로 뛰어갔다. 제 6 장 이튿날 아침은 몹시 괴로웠다. 아마도 전날밤에 위스키를 마신 탓이리라. 나는 어스름한 미명 속에 침대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듯 한 자세로 눈을 떴다. 입은 텁텁하고 노곤한 손발은 불쾌하게 진 땀에 절어 있었다. 차차 햇빛이 덧문 사이로 스며들어와 먼지가 빽빽하게 줄지어서 날아올라갔다. 나는 일어나기도 싫고, 그렇다고 자리 속에 누워있 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엘자가 과연 돌아올까, 안느와 아버지는 오늘 아침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일어나려는 노력을 흐리기 위해서 그들 일을 생각했다. 나 는 겨우 몽롱하게 졸음에 취한 것처럼 비적비적거리면서 실내의 서늘한 타일 깐 곳까지 갔다. 거울이 나에게 서글픈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거울에 기대섰다. 퉁퉁 부은 눈, 부푼 입술, 이 낯 선 얼굴, 이것이 내 얼굴......나는 이 입술과 이런 자세와 멋 대로 추악하게 변한 이 얼굴 모양 때문에 나약하고 비겁하게 되어 버렸던 것일까. 만일 정말 자신이 약한 인간이라면, 어째서 나는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이렇게도 똑똑히,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 는 상반되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일까? 나는 자신을 혐오하는 것을 재미있게 생각했다. 방탕 때문에 초췌하고 퀭해진 이 늑대의 얼굴 을 증오하는 것이......나는 자신의 눈동자를 흘겨보면서 방탕이 라는 언어를 자신에게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내가 웃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실 얼마만한 방탕이었을까. 대단치 도 않은 몇 잔의 술, 뺨을 맞았던 것, 흐느낌......나는 이를 닦 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와 안느는 벌써 테라스에 나와서 아침 식탁 앞에 바짝 기 대어 앉아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아침 인사를 지껄이고는 그들 앞에 앉았다. 부끄러워서 나는 감히 두 사람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이 나로 하여금 눈을 들게 하였다. 안느의 얼 굴은 밤사이 핼쓱해져 있었다. 지난밤 사랑의 유일한 증세였다. 두 사람 모두 행복한 듯이 미소짓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행복은 언제나 나로선 시인(是認)해야만 할 것이 며 성공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푹 잤니?]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그럭저럭.]하고 나는 대답했다. [어젯밤 난 위스키를 너무 마셨어요.] 나는 커피를 잔에 따라서 맛을 보았다. 그러나 곧 그것을 제자 리에 내려놓았다. 그들의 침묵 속에는 독특한 무엇인가 풍기는 것 이 있어서 그것이 나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나는 오래 그것을 견 디기엔 너무나도 피로해져 있었다. [어쩐 일이죠? 두 분 다 뭔가 이상하군요.] 아버지는 짐짓 태연한 듯한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당겼다. 안느 는 나를 쳐다보고 비로소 분명하게 부끄러운 낮빛을 지었다. [너에게 부탁이 한가지 있어서]하고 가까스로 그녀는 입을 열었 다. 나는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있었다. [또 엘자에게 심부름인가요?] 그녀는 얼굴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나는 결혼하려고 생각해.]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안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난 다음,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아버지의 눈짓을 기대했다. 그것은 나를 화나게 하는 동시에 안심을 시키는 신호인데......그런데 아버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는 없어> 그러나 나는 이미 그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에요.]하고 나는 건성으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이나 속박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 던 아버지가 하룻밤 사이에 그런 결심을 하다니......이것은 우리 들의 생활을 뿌리째 바꿔 버리고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다음 우리들 세 사람의 생활도 예상해 보았다. 내가 존경하고 있었던 안느의 섬세함과 총명함에 의해서 갑자기 균형이 잡힌 생활을 총명하고 세련된 벗들, 행복하고 평온한 저녁 한때......나는 갑자기 떠들썩한 만찬이나 남미 사람과 같은 이들 과 엘자를 경멸하게 되었다. 우월감과 자존심이 나를 지배했다. [아주아주 멋들어진 생각이에요.]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와 안느에게 미소지었다. [나의 귀여운 작은 고양이, 나도 네가 기뻐할 줄 알았다.]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몹시 좋아했다. 사랑의 피로가 나타나 있 는 안느의 얼굴은 내가 이제까지 본 그녀의 어떤 얼굴보다도 친해 지기 쉬운 부드러운 것이었다. [이쪽으로 오렴, 작은 고양이.]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두 손을 내밀고 자기와 안느 쪽으로 나를 끌어 당기었다. 나는 두 사람 앞에 반쯤 꿇어 앉아 있었다. 아버지와 안느는 달콤한 듯 나를 바라보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편 나 는 이 순간 어쩌면 내 인생은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 실은 그들에겐 내가 한 마리의 고양이, 작고 귀여운 한 마리의 애 완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 는 그들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모 르는 과거나 미래의 속박에 의해서 맺어져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눈을 감고 그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면서 그들과 함께 웃어 줌으로써 나의 역할을 다시 이어갔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안느가 나를 이끌고 나의 인생에 서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취할 길을 가르 쳐 줄 텐데. 나는 완성되어 갈것이고, 아버지도 또한 나와 똑같이 되리라. 아버지는 일어나서 샴페인을 한 병 가지러 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아버지는 행복한듯 했다. 그것은 틀림없 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가 한 사람의 여인 때문에 행복하게 되어 있는 것을 얼마나 자주 보아왔던 것일까. [난 네가 약간 무서웠어.]하고 안느가 실토했다. [왜요?]하고 나는 물었다. 묻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반대하면 두 사람의 결혼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같은 인상을 주었다. [난 네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어.]하고 그녀 는 말하고 웃기 시작했다. 나도 역시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는 안느를 약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동시에 그럴 필요가 없음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너에겐 우습게 보이지 않니? 이 늙은이들의 결혼이?] [늙은이들이 아녜요.]하고 나는 온갖 확신을 기울여서 말했다. 까닭인즉 아버지가 왈츠를 추면서 샴페인 술병을 옆에 끼고 돌 아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안느 곁에 앉아 팔을 안느 어깨에 돌렸다. 그녀는 아 버지 쪽으로, 나로 하여금 눈길을 돌리게 하는 행동을 취했다. 어 쩌면 그녀는 그 때문에 아버지와 결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 지의 웃음과 신뢰감을 느끼게 하는 그 우람한 팔뚝과 그 생활력과 그 열정 때문에......마흔 살, 고독에의 두려움, 어쩌면 관능의 마지막 실습......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안느를 결코 여자로서 생 각해본 일이 없이 하나의 실재물로서만 생각해왔다. 나는 그녀 속 에 있는 확고함이나 우아함이나 지성 등을 인정했지만, 결코 성적 매력이나 나약함을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여 기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교만하며 지성적인 안느 라르상이 자기와 결혼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도록 그녀를 사랑 할 수가 있을까? 이 애정을 아버지의 엘자에 대한 애정과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았다. 태양이 나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침묵과 은 근한 두려움과 행복에 넘쳐서 우리들 세 사람은 테라스에 앉아있 었다. 엘자는 그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났 다. 행복하며 즐겁고도 고독한 7일간. 우리들은 복잡한 실내장치 나 매일의 시간 할당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와 나는 이러한 계획 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빽빽히 어렵게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본래 우리들은 이같은 계획을 믿고 실천했던 적이 있었던 것일 까? 매일 12시 반에 같은 곳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돌아오고, 집 에서 저녁을 먹고, 그 뒤에는 집에 있는다......아버지는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버지는 유쾌한 듯이 방랑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 부 르조아지적인 우아하고 짜임새 있는 생활을 반기었다. 아마도 이 것은 모두 나에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도 또한 관념의 조작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나는 지금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 주일의 추억을 깊이 생각 해보리라. 안느는 성미가 누그러지고 신뢰심이 두텁고 몹시 친절했으며,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그들이 눈자위를 검게 물들이고 서로 부축하면서 함빡 웃으며 내려오는 모습을 보 고, 제발 이것이 일생토록 계속되기를 바랬다. 저녁때 우리들은 곧잘 해안에 내려가서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아페 리티프(전주) 를 마셨다. 우리는 언제나 사이가 좋은 보통 가족처럼 보여졌다. 나 혼자서 아버지와 외출해서 야유적이거나 혹은 동정적인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던 나도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기뻐했다. 결혼식은 여름휴가가 끝나고 파리에 돌아간 다음 올릴 예정이었다. 가엾은 시릴르는 우리 가정의 변화를 얼마간 놀라움을 갖고 바 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합리적인 결합은 그를 기쁘 게 했다. 우리는 함께 요트를 탔고, 때론 욕망에 따라 키스를 하 기도 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밀어붙이고 있을 동안 이따금 안느의 얼굴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아침에 부드럽게 상처입은 그 녀의 얼굴을......사랑이 만들어낸 완만함과 행복한 듯싶은 방종 한 동작을......그리고 나는 그녀를 부러워했다. 키스는 끝나고 만다. 만일 시릴르가 나를 그토록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틀림없 이 나는 그 주일로 그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6시에 섬에서 돌아오자, 시릴르는 요트를 모래밭에 끌어올렸다. 우리들은 오솔길을 지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몸을 녹이기 위해서 우리들은 인디언놀이나 핸디캡의 뜀박질을 생각해 냈다. 그는 언제나 집 앞에서 나를 따라붙었다. 그는 승리를 외치면서 내 위에 덤벼들고 나를 솔잎 위에 뒹굴리며 부둥켜 안은 다음 키 스했다. 나는 아직껏 허덕이듯 숨결을 몰아쉬는, 그러면서도 농도 가 엷은 키스를 모래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일치된 내 심 장에 겹친 시릴르의 고동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심장의 고동과 다정한 모래의 파도소리. 하 나, 둘, 셋......하나 그는 숨결을 다시 고르고 그 입맞춤은 정확 해지며 농밀해졌다. 나는 벌써 바다의 술렁거림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귓속에 소용돌이치는, 자신의 피가 거칠게 고동치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저녁때, 안느의 목소리가 우리를 떼어 놓았다. 시릴르 는 내 위에 누워 있었다. 우리는 붉게 물든 저녁놀과 일몰의 그림 자 속에서 거의 반나체였다. 그리고 그것이 안느를 오해하도록 했 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짧게 내 이름을 불렀다. 시릴르는 단번에 뛰어 일어났다. 물론 부끄러워하면서......나 는 좀더 천천히 안느를 보면서 일어났다. 그녀는 시릴르 쪽을 보 며 마치 그의 존재를 느끼지 않은 듯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과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는 대답도 않고 나에게 몸을 수그려 떠나기 전에 내 어깨에 키스했다. 이 행동이 나를 놀라게 하고 무슨 약속을 하기나 한 것 처럼 나를 감동시켰다. 안느는 무엇인가 다른 일을 오해하고 있는 듯 여전히 새초롬하며,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로 나를 똑바로 응시 했다. 그것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만일 안느가 다른 엉뚱한 생각 을 하고 있다면 이처럼 쌀쌀하게 지껄이는 건 잘못이다. 나는 체 면상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안느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기계적 으로 내 목에 붙은 솔잎을 떨어냈다. 그때 처음 나를 발견한 것처 럼- 나는 안느의 그 아름다운 얼굴이 모멸의 표정을 짓는 걸 보았 다. 그녀를 뛰어나게 아름답게 만들고, 나를 약간 겁나게 하는 그 권태와 비난의 얼굴을....... [너는 이런 따위의 장난이 대개는 병원에서 끝난다는 걸 알지 않으면 안 돼.]하고 그녀는 말했다. 안느는 우뚝 서서 찬찬히 나를 쳐다보며 말했으므로 나는 몹시 어색했다. 그녀는 꼿꼿이 꼼짝하지 않고 지껄일 수 있는 여인 중 의 한 사람이었다. 나에겐 소파라든가 무심코 잡는 물건이든가 담 배든가 다리를 흔들흔들하던가 흔들거리고 있는 다리를 바라본다 든가 하는 것이 필요했다. [과장해서 말할 것까지는 없어요.]하고 나는 웃음지으면서 말했 다. [다만 시릴르와 키스했을 뿐, 그것이 병원 신세까지는 지지 않 겠죠?] [부탁이니까 그 사람과는 두번 다시 만나지 말아 줘.]하고 그녀 는 내 말을 믿고 있지 않았다. [말대답은 삼가해요. 너는 아직 열 일곱 살이고 현재 나는 너에 게 약간 책임이 있어요. 나는 너의 일생을 망치도록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리고 너에겐 공부할 일이 있지? 그걸로 오후 한 나절은 보낼수 있을거야.] 안느는 등을 돌리고 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얼떨떨하고 멍청 해져 땅 위에 못박히고 말았다. 그녀는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변명, 나의 부 정, 그녀는 이런 것들을 그 모멸보다 더 지독한 무관심한 태도로 대해 주리라. 흡사 내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흡사 내가 생명이 없는 하찮은 무엇인가처럼......그리고 안느가 훨씬 전부 터 알고 있는 쎄실이 아닌 것처럼......여하튼 나라면 그녀가 나 를 벌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괴로워할 것이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였다. 아버진 보통 때와 다름없는 태도를 보일까? 그 녀석은 누구냐? 나의 귀여운 아가씨, 그는 미남이며 건강한 사람이겠지? 불량청년 을 조심해야 해요. 나의 귀여운 쎄실. 아버지가 이런 방향으로 이 끌어 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여름휴가는 끝장이었다. 저녁식사는 마치 악몽처럼 지나갔다. 안느는 한 마디도 <아버지 에게 아무 말도 않겠어. 난 밀고자가 아니야. 하지만 공부를 열심 히 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해 줘, 응?>이라고 조차 말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따위의 계산은 안느로선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 는 그 점을 기뻐하는 동시에 이같은 그녀를 원망했다. 왜냐하면 안느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난 그녀를 경멸할 수 있을테니까. 안느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도 범하지 않고 포타즈가 끝났을 때야 비로소 생각난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난, 당신의 아가씨에게 조금 충고를 하고 싶어요, 레이몬. 오 늘저녁 나는 쎄실과 시릴르가 숲속에 있는 걸 보았어요. 두 사람 은 친구이상으로 보이더군요.] 아버지는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넘기려고 하였다. 가엾은 아버 지....... [그건 무슨 뜻이오? 무엇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시릴르와 키스하고 있었어요.]하고 나는 열심히 외쳤다. [그런 걸 안느가 오해하고서.......] [나는 아무것도 오해하지 않고 있어.]하고 안느는 내 말을 가로 막았다. [하지만 나는 쎄실이 시릴르와 만나는 것을 당분간 그만두는 편 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공부하는 편이(바카로레아 국가시험 공부를 하라는 뜻).......] [가엾은 쎄실.]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 시릴르란 녀석이 똑똑한 놈일 테지?] [쎄실도 똑똑한 여학생이에요.]하고 안느가 말했다. [그러니까 만일 쎄실이 상처라도 입게 되면 정말로 가슴이 아플 거예요. 그리고 쎄실은 이곳에선 너무 자유롭기 때문에 종일 그 남자애와 함께 있다는 것, 또 두 사람이 한가롭다는 점 등에 비추 어 아무래도 돌이킬수 없는 결과가 될까봐 나는 걱정이에요. 당신 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란 말 때문에 나는 눈을 치켜 떴다. 그런데 아버지는 매우 난처한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아마 당신의 말대로일 거야.]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응, 아무튼 너는 공부를 좀 해야만 돼, 쎄실. 또 철학시험을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을 테지?] [그것이 나에게 어떻다는 거죠?]하고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더니 곧 눈길을 돌려버렸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는 무신경이 우리들의 생활에 인스피레이션을 주는 유 일한 감정임을 깨달았다. 변명을 하기 위해 논쟁을 벌려서는 안되 는 것이다. [그럼.......]하고 안느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잡았다. [아가씨는 <숲속의 처녀>역을 <착한 여학생>역으로 바꾸는 거 야. 겨우 한 달 동안만......그렇게 어렵지 않겠지? 아닐까?] 그녀는 나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미소지으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런 상태 아래선 결과는 뻔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빼었 다. [그래요.......]하고 나는 말했다. [어려운 거예요.] 나는 너무나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으므로 그들에겐 그것이 들리 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면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 른다. 이튿날 아침, 나는 베르그송의 한 구절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 다. 그것을 이해하기엔 수 분이 걸렸다. <사실과 원인 사이에, 엄밀히 말해서 얼마만큼의 이질성을 사람 이 찾아낼 수가 있다 할지라도, 또한 행동의 규칙부터 사물의 본 질에 관한 인정에 이르기까지엔 매우 먼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 고, 사람들이 인류를 사랑하는 힘을 펴낼 수가 있다고 느끼는 것 은 항상 인류의 발생적 원리에 직접 접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 이었다.> 나는 짜증을 부리지 않고 처음엔 조용히, 그리고 나중에는 큰 목소리로 그 구절을 되풀이하여 외었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이 구절을 열심히 노려보았다. 가까스로 그 뜻을 알 수 있 었지만, 나는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냉정하고 무능 력하게 느꼈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음 줄을 정신차 리고 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무엇인가 바람처럼 내 마 음속에 일어나,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나는 황금색 만의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시릴르의 모습과 부드럽게 출 렁이는 배의 요동을, 그리고 우리의 입맞춤을 생각했다. 그런 다 음 안느를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으 므로 심장을 두근두근거리면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그것이 잘 못된 생각이며 또한 치가 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으론 내가 응석만 부리는 게으름뱅이 계집애로서 이렇게 생각할 권리조차 없다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의지와 는 달리 상상을 펴고 있었다. 안느는 해롭고 위험한 존재로서 우 리들의 갈길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이를 악물고 지금 막 마치고 온 식사 장면을 돌이켰다. 그때는 내가 원망에 마음이 앵돌아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 한 감정을 갖는 자신을 경멸하고 비웃었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안느를 비난하는 점이었다. 그녀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행복을 위해서, 친절을 위해서, 평온을 위해서 태어났는데, 나는 그녀의 덕분으로 비난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어버렸다. 내성적인 것 따위에는 도무지 낯선 나는 어리둥절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나에 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던 것일까? 나는 그녀의 힘을 재어보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탐냈고 아버지를 차지했다. 그녀는 서서히 우리 들을 안느 라르상의 남편과 의붓딸로 다시 말해서 잘 훈련된, 환 경이 좋은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불안정한 우리들이 얼마나 쉽게 이 매력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어 무책임하게도 양보하리라는 것을 나로선 잘 알고 있었다. 안느는 수완이 너무 좋았다. 이미 아버지는 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식탁에서 그 난처해진 듯 얼굴을 돌린 아버지의 얼굴이 나를 괴롭 혔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옛날 아버지와 공모했던 온갖 것, 파리의 흰 길을 새벽녘 자동차로 돌아왔을 때의 웃음 등을 기 억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모두 끝나고 말았다. 이제는 아버지 다음으로 내가 안느의 영향을 받아 수정되고 지도되리라. 나는 차 츰 괴로워하지도 않으리라. 그녀는 이지와 냉소와 부드러움으로 행동하여 나는 반항할 수도 없으리라. 6개월도 못되어 반항하고 싶은 심정조차 없어지고 말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단히 별러서 다시 아버지와 옛날의 우리 들 생활을 되찾아야만 한다. 문득 나로선 명랑하며 떠들썩했던 지 난 2년간이 얼마나 행복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이 사이 내가 그 처럼 빨리 내던져 버린 그 2년간이......생각하는 자유, 상식을 벗어난 일을 생각하는 자유, 생각하지 않는 자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는 자유,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자유. 나는 이제 스스로 존 재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빚어만들 수가 있는 찰흙에 지나지 않았지만, 틀을 거부하는 찰흙이었다. 나는 사람이 이 변화에 복잡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또 한 나에게 굉장한 컴플렉스를 부과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아 버지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애정이라든가 혹은 안느에 대한 불건전 한 정열이라든가. 그러나 나는 진정한 원인을 알고 있다. 그것은 더위와 베르그송과 시릴르와, 아니면 최소한 시릴르의 부재였다. 나는 언짢은 기분으로 오후 내내 그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러 나 모든 것이 우리가 안느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데서 생겨진 것이었다. 나는 차분히 사색하는데 익숙해 있지 못했다. 그것이 나를 화나게 했다. 식탁에서 아침과 마찬가지로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버지가 그래서 농담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모양이다. [나는 청춘이 누리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명랑과 대화라 고 아는데.......] 나는 아버지를 거칠게 노려보았다. 아버지가 청춘을 찬미하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말고 나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 었던가? 우리는 많은 것을 얘기했었다. 사랑과, 죽음과, 음악을.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버렸다. 나는 전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 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노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옛날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를 배신한 거야> 그리고 나는 입 밖에 그 말을 내지 않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다. 나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아버지는 문득 걱정이 되어 나를 마주 쳐다봤다. 어쩌면 이미 장난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이 가 정말 위험 상태에 놓여져 있음을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가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기는 것을 보았다. 안느가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안색이 나쁘구나. 내가 너에게 공부를 너무 심하게 시킨 모 양이구나]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제는 멈출 수가 없는 이 연극 속의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저녁식사를 마치었다. 테라스의 식당 창문으로부터 비쳐진 삼각형 의 광선 속에 나는 안느의 싱싱하게 숨쉬는 긴 손이 움직이며 아 버지의 손을 잡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시릴르를 연상했다. 나는 그 가 매미의 울음소리와 달빛이 가득찬 이 테라스에서 나를 꼭 끌어 안아주면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애무를 받고 위안을 받고 나 자신과 화해를 하고 싶었다. 아버지와 안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사랑의 밤 이 있고 나에게는 베르그송이 있다. 나는 울려고, 자기 자신을 불 쌍히 여기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나는 이미 안느야말로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마치 그녀를 이겨낼 것 이 확실한 것처럼....... 제 2 부 제 1 장 이 무렵부터의 추억은 너무도 또렷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보다 훨씬 주의깊게 생각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로선 솔직함과 안이한 에고이즘이란 자연스런 사치였었다. 나는 언제나 그 속에 살아왔다. 그런데 이 며칠 동안 나는 매우 혼란을 겪었으므로 사물을 신중히 생각하고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 게 되었다. 나는 온갖 내성의 괴로움을 지나왔지만,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감정은......>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느를 아버지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욕망이 잔인한 것처럼, 이 안느에 대한 감정은 어 리석고 비참한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을 이와 같이 다루는 것일까? 나 자신에게 일어 나는 각가지 일들을 차례차례 느끼는 것도 자유가 아닌가? 태어나 서 처음으로 이 <자신>이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고, 이같은 이중성 의 발견이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나는 변명하기 쉬운 구실을 찾 아 혼자서 뇌까리고는, 자신이 성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문득 또 하나의 <자신>이 나타나서 내가 아무리 진실한 겉모습을 갖고 있어도 그것은 거짓이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 고 외쳤다. 하지만 또 하나의 <자신>이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총명함이야말로 미맹의 최악의 것은 아닐까? 나는 내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지금 안느가 불어넣어 준 공포와 적대의식을 정 당화시킬 수는 있는지, 또 내가 이기주의적인 허위의 독립심에 조 종받은 계집애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몇 시간을 두고 고민하였다. 그 동안 나는 매일 조금씩 여위어 갔다. 나는 해안에선 고작 잠 자는 일 이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식사 때에는 내 의사 와는 반대로 걱정스런 침묵을 지키고, 아버지와 안느에게 어색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나는 안느를 쳐다봤다. 나는 안느의 얼굴을 쉴새없이 살폈다. 식사중에 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아버지에 대한 저 안느의 감정이야말로 사랑이 아니냐. 아버지에겐 다시 찾아오지 않는 사 랑이 아니냐. 그런 저 눈동자 속에 담긴 나에 대한 근심어린 미소 를 어떻게 원망할 수가 있겠는가?> 문득 그녀가 말했다. [레이몬, 우리들이 파리에 돌아가면.......] 그 순간 안느가 우리들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고 간섭한다는 느낌이 나를 반항케 만들었다. 나는 그녀가 교묘함과 냉혹함의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되 었다. 나는 자신에게 또 한번 중얼거렸다. <안느는 차갑고 우리들은 따뜻하다. 안느는 권력적이고 우리들 은 독립적이다. 안느는 무관심하다. 어떤 사람도 안느의 흥미를 끌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우리들을 열중케 만든다. 안느는 쉽사리 사귀려 들지 않는다. 우리들은 명랑하다. 우리 두 사람만의 열기 속으로 안느는 그 냉정함과 더불어 살그머니 끼어 들어오리라. 안 느는 따뜻해지고 서서히 우리들의 자유분방한 평안한 열을 뺏어가 버리리라. 안느는 우리들로부터 모두 훔쳐 버리고 말리라. 아름다 운 뱀처럼.......> 나는 아름다운 뱀이라고 속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뱀! 안느는 나에게 빵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 사람은 안느가 아니냐? 머리 가 좋은 안느, 너를 돌봐 준 사람. 그녀의 냉정함은 그녀의 생활 형식인 거다. 너는 그것을 타산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안느의 무관심함은 하찮은 것들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며, 그것이 고상하다 는 증거다.> 아름다운 뱀......나는 부끄러움으로 창백해졌다. 나는 안느를 쳐다봤다. 나를 용서해 달라고 속으로 그녀에게 빌었다. 이따금 안느는 이같은 시선을 갑자기 발견하고 놀라움과 불안으로 얼굴을 흐리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안느는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시선을 찾았다. 아버지는 동경이나 욕망을 갖고 그녀를 쳐다보았으며 이 불안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요컨대 나는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차츰 더해가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제 에 관해서 자신을 미워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괴로워할 만큼 괴로워하고 있었다. 즉, 조 금쯤은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안느에게 정신이 없었고 득의와 쾌락으로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때문에 살고 있는 듯싶었다. 그래도 어떤 날 내가 아침 해수욕 후 해변에서 잠자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내 곁에 앉아서 나를 들여 다봤다. 나는 자신에게 아버지의 시선이 멈춰진 것을 느꼈다. 나는 이 무렵의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만, 짐짓 명랑한 체하는 행동으로 [수 영하지 않겠어요?]하고 일어나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슬픈 목소리로 외쳤다. [안느, 이 오줌싸개를 보러 와 봐요! 아주 빼빼 말랐어. 만일 공부 탓이라면 그만두라고 해야겠는걸.] 아버지는 모든 것을 전대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 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열흘 전이었다면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 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훨씬 깊은 착잡 속에 빠져들고 있 었다. 그리고 이미 오후의 공부 시간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왜 냐하면 베르그송 이래 나는 한 권의 책도 펼쳐본 일이 없었기 때 문이다. 안느가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살며시 걸어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배를 모래 위에 깔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반대쪽인 내 옆에 와서 중얼거렸다. [정말 공부가 탈이군요. 그렇지만, 방안에서 서성이는 것보다는 정말 공부를 하는 편이 좋을 텐데.......] 나는 흘낏 쳐다봤다. 나는 두 사람을 노려봤다. 어떻게 안느는 내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까? 어쩌면 내 엉뚱한 생각마 저 간파했던 것은 아닐까? 안느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능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느낌이 나를 겁나게 했다. [난 방안에서 빙빙 돌지 않아요.]하고 나는 항의했다. [그 녀석이 없어서이냐?]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아녜요.] 이것은 약간 거짓말이었다. 사실 시릴르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 다. [그런데 넌 기운이 없다.]하고 아버지가 엄한 투로 말했다. [안느, 봐요. 마치 강한 태양아래 지쳐버린 고양이 같군.] [나의 귀여운 쎄실.]하고 안느가 말했다. [노력해봐. 조금 공부하고 식사를 많이 들도록 해봐. 이번 시험 은 중요해.] [난 시험 같은 거 모른단 말이에요. 내 알 바 아니라니까!] 나는 외쳤다. 나는 절망적인 얼굴로 안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것이 시험보 다도 중요하다는 걸 알려 주려 했다. 안느는 이렇게 나에게 물어 야만 했었다. <그럼 무슨 까닭이지?>하고. 그리고 꼬치 꼬치 캐물 어 전부 털어놓게 해야만 했다. 그러면 안느는 나를 납득시키고, 그녀의 의지대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토록 바짝 여위도록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없게 되리라. 그녀는 나를 주의깊게 관찰했다. 나는 안느의 눈동자의 투명한 푸른 빛이 주의와 비난으로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안느가 결코 질문하지 않으리라는 것과 나를 해방시켜 주지 않으리란 것 을 알았다. 왜냐하면 안느에게는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을 것 이며, 또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안느는 나에게 상처를 입힌 이같은 느낌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 며, 또한 인정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경멸과 무관심함을 갖고 있 었으리라. 하긴 나의 이같은 느낌은 경멸과 무관심의 가치밖에 없 는 것이지만. 안느는 언제나 매사에 정확히 가치를. 부여하곤 했 다. 따라서 나는 절대로 그녀와 토론하지 못한다. 나는 거칠게 모래 위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따뜻한 모래알 위 에 뺨을 대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조금 떨고 있었다. 침착하고 자신 있는 안느의 손이 내 목에 놓여지고, 신경질적인 떨림이 멈 출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인생을 까다롭게 살면 못써요.]하고 안느가 말했다. [너는 몹시 행복해 했는데, 그리고 이성적이 아닌 네가 그토록 우울해하다니......너답지 못하잖아] [알고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걱정도 없고 건강하고 명랑하며 원기 왕성한 젊은이예요. 그리고 바보천치인.......] [자, 식사하러 가지.]하고 안느가 말했다. 아버지는 먼저 일어나 버렸다. 아버지는 이러한 따위의 말대꾸 가 몹시 싫은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것은 듬직 하고, 힘이 솟게 해 주는 손이었다. 이 손이 나의 최초의 실연을 위로해 주었고, 또한 더 없이 행복 하고 조용한 순간에 내 손을 잡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음 모한 장난과 떠들썩거리는 웃음속에서 이 손은 내 손을 꼭 잡아주 었다. 밤에 자동차의 핸들 위에서 열쇠구멍을 장난치며 찾던 내 손 위에 겹쳐졌던 이 손, 여인의 어깨 위와 담배 상자위에서의 이 손, 그러나 이 손을 이미 나는 어찌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나는 힘껏 그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제 2 장 이틀이 지났다. 나는 방안을 서성거리며 거닐어 보았다. 안느가 이제까지의 우리들 생활 양식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강박관념 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나는 시릴르와 만나려고 하지 않았 다. 그는 나를 안심시키고 얼마만큼의 행복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 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지난날을 추억하든 가 혹은 다가올 나날을 두려워하든가 하는 갖가지 난해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일종의 만족감조차 느끼고 있었다. 몹시 더웠다. 내 방은 어두컴컴하고 덧문은 닫혀 있어 답답하고 후덥지근하여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눈을 천장으로 향한 채, 서늘한 시 트의 한 조각을 찾기 위해서 몸을 겨우 조금 움직이는 정도였다. 나는 잠자지 않았지만 침대의 발치에 축음기를 놓아두고 멜로디가 없는 다만 리듬만이 흐르는 레코드를 돌렸다. 나는 담배를 많이 피웠다. 나는 자신을 퇴폐주의자로 여겼으며 그것이 마음에 들었 다. 그러나 이 유치한 연극은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불충분했 다. 나는 슬프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어느 날 오후, 하녀가 도어를 노크하고 의미심장한 태도로, [누 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하고 알렸다. 나는 곧 시릴르라 고 생각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시릴르가 아니고 엘자 였다. 엘자는 정다운 몸짓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엘자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싱싱한 아름다움에 놀랐다. 그녀는 아직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프랑스에선 햇볕에 그을리는 것이 유행으로 서 고생하여 햇빛에 타려 한다.). 빈틈없이 손질이 된 아주 황홀 한 황금색 그을음으로서 젊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난 슈트케이스를 가지러 왔어.]하고 엘자가 말했다. [쥬안이 요새 몇 벌 새옷을 사주었지만 그것만으론 불편해 서.......] 나는 순간 쥬안이라니 누굴까 하고 의아스러웠지만, 그대로 내 버려 두었다. 나는 엘자와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뻤다. 그녀는 첩살이며 술집 이며 가벼운 밤의 모임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나에게 행복했던 나 날을 추억하게 해주었다. 나는 엘자에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 다고 말했고, 그녀 또한 우리들에겐 공통점이 있어서 언제나 잘어 울릴 수 있었다고 열의를 담은 말을 했다. 나는 가벼운 거부감을 느꼈지만 얼버무리고 그녀가 아버지와 안느와 맞닥뜨리지 않도록 내 방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내가 아버지 얘기를 했을 때, 엘자는 작은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쥬안과 그가 사준 몇 벌의 양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엘자가 아직도 아버지를 사랑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3주일 전이었다면 나는 그런 미묘한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방에 들어가자 엘자는 그녀가 겪어온 남프랑스 사교계의 향 락적이고 화려한 생활에 관해서 열심히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 고 있는 동안 그녀의 싱싱한 모습을 보아서인지, 기묘한 느낌이 막연하게 내 마음속에 이는 것을 느꼈다. 나의 침묵때문인지 엘자 는 비로소 자기 얘기를 일단 끊고, 방안을 몇 발자국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쪽을 돌아보지 않고 무심코 <레이몬은 행복 한가?>하고 물었다. 나는 옳다구나 여기고, 곧 그것이 어째서인지 깨달았다. 그때 몇 가지 계획이 내 머리 속에서 잇달아 생각났고, 갖가지 음모가 솟아오르고, 나는 자신의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무엇을 그녀에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행복이란 지나친 말이에요! 안느는 아버지에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어요. 그녀는 아주 능숙하니까.] [매우 능숙하지]하고 엘자는 한숨지었다.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결심시켰는지 당신은 절대로 상 상 못할 거예요. 그 사람은 아버지와 결혼해요!] 엘자는 몸서리가 나는 듯싶은 얼굴을 나에게 돌렸다. [그 사람이 결혼해요? 레이몬이 결혼하고 싶어해요? 레이몬이!] [그래요.]하고 나는 말했다. [아버지가 결혼해요!] 문득 웃고 싶은 충동이 내 목구멍에 걸렸다. 내 손은 떨고 있었 다. 엘자의 표정은 흠씬 두들겨맞은 것처럼 보였다. 요컨대 아버 지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여생을 창녀들과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엘자가 생각할 여유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녀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건 말도 안돼요. 엘자. 아버지는 벌써부터 괴로워하고 있어 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걸 당신도 잘 알죠?] [그렇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엘자는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듯싶어 나는 웃고 싶어지고 나의 전율은 가열되었다.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안느에 대항해서 싸울 만한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어요. 당신 만이 비등한 매력을 갖고 있는걸요, 뭐.] 찬사가 바쳐지자, 엘자는 확실히 내 말을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레이몬이 결혼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이겠지?]하고 그녀 는 의문을 표시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어요? 당신이 에요,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 은......엘자! 당신이 그것을 모르는 체해도 난 다 알고 있어요!] 하고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엘자가 눈꺼풀을 깜빡깜빡하면서 내가 준 희망과 기쁨을 감추려고 얼굴을 외면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일종의 도취감 속에 서 행동했다. 나는 무엇을 그녀에게 말해야 될 것인가를 똑똑히 느꼈다. [알겠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가정의 아늑함과 도덕감을 불어넣은 거 예요. 그리고 안느는 성공했던 거예요.] 언어가 나를 압도시켰다. 왜냐하면 확실히 그것은 나 자신의 감 정 표현이었다. 물론 간단하고 통속적인 표현이긴 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내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만일 결혼이 성립된다면 우리 세 사람의 생활은 무참하게 깨어 지고 마는 거예요. 엘자, 아버지를 지켜 주어야만 해요. 아버지는 커다란 애라구요. 커다란 어린애.......] 나는 <커다란 어린애>를 열심히 되풀이했다. 그것이 너무 연극 같다고 여겨졌지만, 엘자의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는 벌써 촉촉히 젖어 있었다. 나는 찬미가를 부르듯 끝을 맺었다. [살려 줘요, 엘자, 나는 당신을 위해서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 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들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나는 마음속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불쌍한 중국인을 위해서....... (옛날 중국에 기근이 들었을 때, 파리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기부금을 모으며 곧잘 이 말을 지껄였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엘자가 물었다. [나로선 불가능할 것 같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만둬요.]하고 나는 흔히 말 하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한 소리로 외쳤다. [정말 뻔뻔스런 암여우 같으니!]하고 엘자는 중얼거렸다. [정말 그래요.]하고 나는 말하고 이번엔 내 편에서 얼굴을 돌렸 다. 엘자는 눈에 띄도록 활기를 되찾아 갔다. 엘자는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녀는 저 음모가인 여인에게, 이 엘자 마켄블의 솜씨를 보여 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엘자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도 그 일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그녀 자 신도 쥬안 곁에 있었을지라도 아버지의 매력을 잊을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아버지에게 가정 얘기를 하지 않았었겠지만, 최 소한 아버지를 심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더더구나 결혼은 꿈도 꾸 지 않았다. [엘자!]하고 나는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벌써 그녀와 함께 있 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시릴르에게로 가요. 그리고 내가 부탁했다고 하고, 재워 달라 고 해요. 시릴르는 어머니와 의논해서 어떻게 해줄 거예요. 그리 고 내일 아침 내가 만나러 가겠다고 말해 줘요. 그때 우리 세 사 람이 의논해 보기로 해요.] 문가에서 나는 우스갯말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지키는 거예요. 엘자.] 엘자는 흡사 수십 개의 인생이, 그녀를 감싸 주고 있는 사나이 수효만큼의 인생이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엄숙한 태도로 끄덕였 다. 나는 그녀가 춤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 다. 나는 일주일 안에 반드시 아버지가 새로이 엘자를 갈망하리라 생각했다. 3시 반이었다. 지금쯤 아버지는 안느의 품안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안느 자신도 활짝 열리고 꽃피고 흩어져서 쾌락과 행복의 열기 속에서 반듯이 쓰러져 졸음에 몸을 맡기고 있으리라, 나는 1 초도 지체할 수 없이 급히 면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나는 쉴새 없이 방안을 서성였다. 나는 창문께로 가서 모래 위 에 찍어눌려진 정적의 바다에 흘낏 시선을 던졌다가, 도어까지 되 돌아갔다가, 다시 창문으로 갔다. 나는 치밀하게 계산하고 확정시 키고 다음에서 다음으로 이의를 제거시켜 갔다. 나는 지금까지 정 신의 민첩함과 그 급격한 움직임이란 것을 생각 해본 일이 없었 다. 나는 자기가 냉혹하리만큼 교묘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 에, 내가 엘자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 이래 자신을 점령하고 있는 그 자기 혐오의 심정이 다시금 일종의 자부심과 내부적인 죄 악감과 고독한 감정에 가해진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모든 감정은 수영을 하는동안 무너졌다. 말할 필 요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안느 앞에서는 양심의 가책으로 떨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러한 나를 가장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안느의 핸드백을 들어 주기도 하고, 그녀가 물에서 나오면 급히 해수욕 가운을 건네 주고, 친절하고 다정스런 말을 퍼부었다. 요즘 있었던 내 침묵 후의 이 급격한 변화가 안느를 놀 라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녀를 기쁘게 여기기조차 했다. 아버지는 몹시 기뻐했다. 안느는 미소로 나에게 감사하고, 명랑하게 내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뻔뻔스런 암여우야!> <정말 그래요>를 돌이키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또한 엘자의 천치 비슷한 태도를 받 아들였던 것이었을까? 내일, 나는 잘못을 고백하고 엘자를 이곳에 서 떠나도록 충고하자. 모든 것이 전대로 되리라. 그리고 나는 결 국 시험에 합격하리라. 확실히 도움이 되리라, 바카로레아 (대학 입학자격 시험)는. [그렇죠?]하고 나는 안느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죠. 도움이 되겠죠? 바카로레아는.......]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나도 안느가 이처럼 명랑한 것을 보고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넌 정말 괴짜로구나.]하고 안느가 말했다. 정말로 나는 변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하려고 계획했 던 것을 그녀가 안다면 더욱 깜짝 놀랐으리라. 내가 어느 만큼 변 해 버렸는가를 안느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나는 모두 털어놓고 고 백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엘자에게 연극을 시켰어요. 엘자가 시릴 르에게 홀딱 반한 것처럼 꾸며, 시릴르의 집에 묵게 하고, 우리는 그들이 요트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해변의 숲속에서 두 사람과 마주치도록 했지요. 엘자는 더욱 아름다워졌어요. 물론 당신과 같 은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뭐랄까......저 눈부신, 사나이들을 뒤 돌아보게 하는 창녀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아버지는 오래 참지 못 할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의 것이었던 아름다운 여자가 이렇게 빨리......이렇게도 공공연히......눈앞에서......더구나 자기보 다 젊은 놈팡이와....... 아시겠죠? 안느!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 랑하고 계셔도 곧 엘자를 원하게 될게 틀림없어요. 자신의 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아버지는 몹시 허영적이라 할까 자신이 없 는 거예요. 어느 편이든 똑같긴 하지만....... 엘자는 내 명령을 받아 할 짓을 하고 말 테죠? 어느 날 아버지는 마침내 당신을 배 신하고, 당신은 견딜 수 없게 되겠죠? 그렇죠? 당신은 나눠가질 수는 없는 여자이죠? 그래서 당신은 가 버리겠죠? 그것을 내가 원 했던 거라구요. 예, 못난이죠! 난 베르그송이나 더위 때문에 당신 을 원망하고 있었어요. 난 이렇게 상상하고 있었죠......그러나 난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럽기 때문에 얘기하는 것을 그만 둘 테야. 즉 바카로레아의 시험공부 때문에 나는 당신을, 어머니 의 친구였던 당신을, 그리고 우리들의 친구였던 당신을 하마터면 상처받게 할 뻔했던 것이에요. 그렇긴 해도 도움이 되셨죠, 바카 로레아는? 그렇죠!> [그렇죠!] [뭐가 그렇죠지?]하고 안느가 말했다. [바카로레아가 도움이 된다는 뜻인가?] [네.]하고 나는 말했다. 결국 안느에겐 아무 말도 않는 편이 좋다. 안느는 틀림없이 이 해하지 못할것이다. 안느에겐 모르는 것이 여럿 있었다. 나는 아 버지의 뒤를 쫓아서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아버지와 노닥거리며 물놀이의 즐거움과 양심의 가책에 들볶이지 않는 즐거움을 다시 맛보았다. 내일 나는 방을 바꾸자. 나는 학교 책을 들고 다락방에 틀어박히자. 그렇지만 베르그송만은 갖고 가지 말도록 하자. 고독 속에서 차분히 두 시간 동안 공부, 침묵 속의 노력, 잉크와 종이 냄새, 10월에 있을 시험의 성공, 아버지의 놀란 듯한 칭찬, 안느 의 감탄, 졸업장......나는 안느처럼 약간은 차가운 느낌을 풍기 는 이지적이고 교양이 몸에 넘치게 될 것이다. 나는 어쩌면 지적 요소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5분 동안에 이치가 있 는, 물론 경멸받을 만한, 그러나 이유 있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 그러고서 엘자! 나는 엘자의 허영심과 감정을 이용해서 엘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다만 잠깐 슈트케이스를 가지러 온 그녀를 몇초 안에 결심시켰다.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엘자 를 겨냥하고 약점을 발견하고, 얘기하기 전에 나는 자신의 무기를 갖추었다. 비로소 나는 이상한 쾌락을 깨달았다. 한 인간의 내부 까지 들어가 규명하고, 그 인간을 밝은 햇빚으로 끌어내어 그곳에 서 상대방의 급소를 찌른다는 쾌락을...... 마치 손가락을 조심스 럽게 방아쇠에 거는 것처럼, 나는 누군가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찰나에 총탄이 튀어나갔다. 명중! 나는 그때까지 이 런 것을 몰랐다. 나는 언제나 너무나도 충동적이었다. 내가 한 사 람의 인간을 쏘아맞추었다면, 그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인간의 반사작용인 온갖 황홀한 메카니즘을, 언어가 지니고 있는 온갖 힘을, 문득 막연하게나마 알게된 것이다. 그것이 환상에 의 해 이루어졌던 것이 얼마나 분했었는지....... 언젠가 나는 누군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리라. 그리고 그에게 이르는 하나의 길을 찾으리라. 주의와 다정함과 떨리는 손으 로....... 제 3 장 이튿날 시릴르의 별장으로 가는 도중, 나는 지적인 점에서는 대 부분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까닭인즉 전날밤 나는 자신의 회복 을 축하하기 위해서 저녁식사에 많은 술을 마시고 명랑 이상의 좋 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이제부터 문학사 호(文學士號)를 따는 공부를 할 것이며, 지식인들과 교제하여 유 명해지고, 지긋지긋하고 틀에 매인 생활을 하는 여자가 될것이라 고 설명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광고의 비결과 스캔들을 이용해서 나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우리들은 우스꽝스런 생각을 교환하며 웃음을 폭발시켰다. 안느 역시 웃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를 너그럽게 봐주는 웃음과 같았다. 그러나 이따 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명성에 집착하는 나의 야심이 문학을 모 독하고 양가집의 자녀가 할 짓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아버지와 내가 또다시 예전처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 으며 아주 행복한 듯싶은지라, 안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안느는 나를 자게 하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버지는 사실 아무것도 몰랐고, 안느는 그 일에 대해서 매우 교 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싶어, 나는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 고 안느가 얘기하려고 내 몸에 허리를 굽혔을 때, 나는 잠에 빠지 고 말았다. 밤중에는 기분이 나빴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아침보다 기분이 나빴다. 나는 머리가 깨질듯해서 확실한 결심도 내리지 못한 채 솔밭쪽 으로 발길을 향했다. 아침 바다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갈매기 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릴르는 정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별안간 나에게 덤벼들어 양팔로 나를 안더니 거칠게 나를 죄면서 두서없는 말을 속삭였다. [나의 사랑하는 쎄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얼마나 오 랫동안......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몰랐어. 그 사람이 너를 불행하게 했는지 어쩐지......나는 나 자신이 이렇게도 쓸쓸할 줄 은 정말 몰랐어. 나는 매일 오후 만 입구를 지나갔어. 한번, 두 번......내가 이처럼 널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미처 몰랐어.] [나도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 그것이 나를 놀라게 함과 동시에 감격시켰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의 감동을 그에게 증명시키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 웠다. [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지!]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너의 보호자야. 너를 학대받도록 내버려 둘수는 없어.] 나는, 아! 이것이 바로 엘자가 꾸며낸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 다. 나는 시릴르에게 엘자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물었다. [나는 엘자를 친구라고, 그리고 고아라고 소개했어.]하고 시릴 르는 대답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엘자는......그리고 그 여자에 대 해서도 모두 얘기를 들었지. 정말 놀랄 일이야. 그토록 세련되고 고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따위 저질스런 짓을 하다 니.......] [엘자가 몹시 허풍을 떨었나 보죠 그런데 엘자에게 할말 이.......] 하고 나는 모기소리만하게 말했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어.]하고 시릴르가 막았다. [쎄실, 난 너와 결혼하고 싶어.] 나는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된다. 아, 만일 이렇게 나쁜 기분만 아니었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하고 시릴르는 내 머리카락 속에서 속삭였다. [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해. 좋은 취직자리가 있거든. 아저씨 가... 나도 스물 여섯 살이야. 소년이 아니라구 진담으로 말하는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절망적이 되어서, 무엇인가 아름답고도 애매한 언어를 찾 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는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피로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아버지가....] 나는 떠듬거렸다. [아버지는 내가 맡을 테니.]하고 시릴르가 말했다. [안느가 찬성하지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 사람은 나를 아직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안 느가 안된다고 하면 아버지도 그렇게 따라 말할 거야... 난 피로 해, 시릴르. 감격으로 그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말았어. 앉아 요. 어머, 엘자가 나타났네.] 엘자는 실내복 차림으로 내려왔다. 눈부실 정도로 싱싱해 보였 다. 갑자기 나는 내가 빛을 잃고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두사람 다 건강한 빛으로 활기에 넘쳐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그것 이 한층 더 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그녀는 내가 마치 교도소에 서 출감하기라도 한 듯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나를 앉히었다. [레이몬은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어?] 그녀는 물었다. 엘자는 희망에 부풀어 매우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엘자에게 아버지가 벌써 그녀를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과, 시릴 르에게는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을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시릴르가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녀는 지껄일 대로 지껄여대고, 나를 틀림없이 무엇인가 술책이 뛰어난 사람처 럼 대우하며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커피는 몹시 쓰고 향긋하였으 며, 햇볕을 쬐자 나는 약간 원기를 회복한 듯 싶었다. [난 열심히 연구해 봤지만 좋은 방법이 아직 없어.]하고 엘자가 말했다. [없어.]하고 시릴르가 거들었다.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어쩔수도 없어.] [있어.]하고 나는 말했다. [하나의 방법이 있어. 당신들은 정말 상상력이 없네요.] 그들이 내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주 의기양양해 졌다. 그들은 나보다도 10년이나 나이가 위인데도 머리가 없는거 다! 나는 약간 거만한 투로, [그것은 심리문제야.]하고 말했다. 나는 긴 시간 내 계획을 설명했다. 그들은 내가 전날 밤 나 혼 자서 중얼거렸던 똑같은 이의를 들고 나왔으므로, 나는 그것을 각 개격파(各個擊破)하는 데 날카로운 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그들을 납득시키려 했으므로 이번엔 나도 열중하고 말았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머지는 다만 그들에게 그것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뿐이었는데, 나는 앞에서의 것처럼 이치가 맞는 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러한 책략은 별로 찬성하지 못하겠는데.]하고 시릴르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너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별수 없지] [그야 안느 때문만은 아니야.]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안느가 이대로 남아 있다면, 당신이 안느의 마음에 맞 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겠지?]하고 엘자가 말했 다.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내가 스무 살쯤 되었을때, 안느는 역시 학사로서 빛나는 장래가 약속된, 총명하며 균형이 잡힌, 그 리고 틀림없이 품행이 단정한 청년을 나에게 소개하리라. 그런 모 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시릴르는 대충 그런 자격 을 갖춘 청년이다. 나는 웃기 시작했다. [부탁이야, 웃지 말아 줘.]하고 시릴르가 말했다. [내가 엘자를 사랑하고 있는 척하면 너는 질투해 줄래?...... 어떻게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니? 대체 나를 사랑하고 있니?] 시릴르는 낮은 목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엘자는 이 미 그곳에 없었다. 나는 시릴르의 긴장한 햇볕에 탄 얼굴과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묘한 인상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바로 옆에서 붉게 상기된 시릴르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나 는 벌써 자신이 이지적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시릴르 가 얼굴을 약간 앞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우리들의 입술이 스쳤 다. 그때, 우리는 서로가 벌써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걸 느꼈다. 나는 눈을 뜬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뜨겁고 단단한 입술이 내 입 술로 다가왔다. 가벼운 떨림이 입술로 전달된다. 그는 그것을 막 으려고 좀더 입술을 밀어붙였다. 그런 다음 그의 입술이 열려서, 그 키스는 적극적이 되어 버리고, 곧 집요하게 되더니 교묘하게, 너무나 교묘하게 되어 갔다. 나는 태양 아래서 남자와 키스하는 편이 시험준비를 하는 것보다는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쎄실, 우린 함께 살아야만 해. 엘자와 연극을 하겠어.] 나는 자신의 계산이 옳은가 그른가를 자문했다. 내가 이 연극의 핵심이고 연출자였다. 나는 언제라도 정지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너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지.]하고 시릴르는 입술을 말아올리는 비스듬한 작은 미소-매력있는 도적 같은 표정을 만드 는-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키스해, 빨리 키스해 줘.]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연극을 시작하고 말았다. 나의 의지와는 반대 로 타성과 호기심으로써......나는 이따금 난폭함과 증오심을 갖 고 이짓을 하는 편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게으름이 나 태양이나 시릴르의 키스를 거치지 않고서라도 최소한 자기 자 신을 규탄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1시간 후에 어수선한 심정으로 공모자들과 헤어졌다. 나를 안심시킬 수 있는 근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즉, 내 계 획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안느에의 정열을 충성에까 지 가져갈는지도 모른다. 뿐만아니라, 시릴르나 엘자도 나 없이는 아 무 일도 못한다. 나는 이 연극을 언제라도 그만둘 구실을 찾아 낼 수가 있으리라. 만약에 아버지가 이 계획에 말려든 것처럼 보이 면 ...시도해 본다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일이며, 나의 심리적인 계산 이 맞았는지 어떤지를 지켜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 뿐 아니라, 시릴르는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나와 결혼하고 싶 어한다. 이 생각이 나를 행복감으로 채워 줬다. 만일 그가 1년이나 2년,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나는 승낙하리라. 나는 벌써 시릴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시릴르에게 기대서 잠자고,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 리라. 주말이면 우리들은 안느와 아버지의 의좋은 부부한테 점심 을 함께 하러 가리라. 그리고 시릴르의 어머니도...그것이 식사에 가족적인 분위기를 더해 주리라. 나는 안느와 테라스 위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해안에 내려가는 참이었다. 안느는 간밤에 술취한 사람을 대하듯 시니컬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안느가 하려했던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것이 내 자존 심을 상하게 할는지 모른다고 하며 웃으면서 거절했다. 아버지가 물속에서 나왔다. 딱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근육이 황홀하게 보인 다. 나는 안느와 함께 헤엄쳤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적시지 않도 록 머리를 물 위에 내놓고 조용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우리 세사람은 다같이 나란히 모래밭에 엎드렸다. 나는 잠자코 두 사람 사이에 누워 있었다. 그때였다. 한껏 돛을 올린 요트 한척이 만의 한쪽 끝에 모습을 나타냈다. 아버지가 맨 처음 그것을 발견했다. [저 시릴르란 놈, 이젠 참지 못하겠는 모양이지?]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안느, 용서해 줄까? 정말로 좋은 녀석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위험을 느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하고 아버지는 말을 이 었다. [만을 지나쳐 버리는데. 아니, 혼자가 아닌데...]안느가 이번엔 고개를 들었다. 요트가 우리들 앞을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시릴르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가 빨리 가 버리기를 빌었다.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2분 전부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저건 엘자가 아니야! 어째서 저런 곳에 타고 있는 것일 까?] 아버지는 안느를 돌아봤다. [저 애는 대단한 솜씨야. 저 가엾은 사내애를 아주 녹여 버린모 양이군. 아마도 그 늙은 어머니의 식객 노릇을 하고 있음이 분명 해.] 그러나 안느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부딪치자 부끄러움으로 확달아오르 는 얼굴을 모래 위에 숙였다. 안느는 손을 뻗어 내 목 위에 얹었 다. [나를 봐요... 화났어?] 나는 눈을 떴다. 그녀는 애원에 가까운 걱정스런 눈초리로 내 위에 얼굴을 숙여 왔다. 그녀는 이때 비로소 민감하고 내성적인, 사람을 살피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내가 연극 을 시작한 그날에... 나는 이 손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신음소리를 울리며 거칠게 얼굴을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 아버지는 요트를 바 라보고 있었다. [가엾은 애...]하고 안느의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가엾은, 나의 가엾은 쎄실, 이렇게 된 것은 내게도 책임이 있 어. 내가 그처럼 강경하지 않았다면...그러나 너를 괴롭히려고 그 랬던 건 아니야. 믿어 주겠니?]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목덜미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는 꼼 짝하지 않았다. 나는 밀려나가는 파도에 내 발밑의 모래가 쓸려나 가는 때와 같은 느낌을 맛보았다. 다정함과 이 연극을 그만두고 싶다는 욕망이 나에게 밀려왔다. 어떠한 감정도, 노여움도, 욕망 도 이처럼 세게 나를 잡아끈 적은 없었다. 연극을 집어치우고 내 일생을 맡기고 죽을 때까지 안느의 손아귀에 자신을 맡기자. 나는 지금까지 뿌리째 뒤흔들린 것만 같은, 이처럼 여린 나약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심장이 멈춰 버릴 것만 같 았다. 제 4 장 아버지는 놀라움 이외의 별다른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하녀 는 엘자가 슈트케이스를 가지러 왔다가 곧 되돌아갔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하녀가 왜 엘자와 내가 만난 것을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녀는 이 고장 사람으로 대단한 공상가였다. 그녀는 우 리 가정상태에 관해서 매우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그녀가 해야 했던 실내 할당에 대해서는....... 한편 아버지와 안느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인지 내 눈치만 살 폈고, 처음 한동안은 견디기 어려웠던 그 친절함도 곧 유쾌한 것 으로 생각되어 왔다. 왜냐하면, 가령 내가 꾸민 짓이긴 했어도, 팔짱을 끼고 아주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시릴르와 엘자를 만난 다는 것이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요트는 탈수 없 었지만, 그 대신에 내가 그랬듯이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는 엘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들과 스쳐지나갈 때엔 나는 일부러 냉담하게 보이는 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우리들은 곳곳에서 시릴르와 엘자를 만났던 것이다. 솔밭 속 에서, 거리에서, 드라이브웨이에서...그러한 때 안느는 나를 흘낏 보고, 다른 화제를 끄집어내거나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손을 어깨 위에 얹기도 하였다. 나는 안느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썼던가? 나는 안느의 친절함이, 그 지성인의 세련된 모양이었는지 혹은 단순한 무관심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언제나 적당한 언어와 몸 짓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정말 괴로워 하고 있다면, 이만큼 좋은 받침대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었다. 왜냐하면 앞에도 말한 것처럼 아버지는 조금도 질투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 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안느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증명함과 동시 에 내 연극의 효과가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나는 적이 실망 했고 자존심이 상했다. 어떤 날 아버지와 내가 우체국에 들어가려고 할 때, 마침내 엘 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우리들을 못 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꼭 모르는 여자를 대하듯 휘파람을 불며 돌아보았다. [이봐, 엘자가 몹시 예뻐졌는걸.] [사랑 덕분이겠죠.]하고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란 듯이 시선을 나에게 던졌다. [넌 그전보다 태연해졌구나.] [그렇지 않아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 사람들은 같은 또래고,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모양이죠, 뭐.] [안느가 없었으면 조금도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던 거야.]아 버지는 몹시 노여워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적극적이었다면 젊은 애숭이한테 여자를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쯤 넌 알잖니?] [하지만 나이가 역시 문제예요.]하고 나는 심각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까짓것......이라고 하는 시늉을 어깨를 조금 으쓱 해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버지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걸 눈치챘다. 아버지는 어쩌면 엘자도 젊고 시릴르도 젊었을 것이라 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년배의 부인과 결혼함으로써 자기가 속해 있었던 <젊은 사람들>의 패거리로부터 따돌려진 것 을. 나는 불현듯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 나는 안느의 눈자위며 입 가장자리의 잔주름을 볼 때 자신을 나무랐다. 하지만 자신의 충동 에 따라 행동하고, 그런 다음 나중에 뉘우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사건의 진행을 모르는 시릴르와 엘자는 매일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만나러 가기가 머뭇거려졌다. 그들은 억지 춘향으로 나로부터 책략을 뺏어갈 것이며 나는 그것 이 마음에 꺼리어졌다. 그래서 오후에는 공부를 핑계대고 나는 언제나 내 방에 틀어박 혀 있었다. 실제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요가의 고행을 적은 책을 한 권 발견하고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그것에 몰두했다. 나는 이따금 혼자서 소리를 내지 않는 아주 어리석은- 왜냐하면 안느가 듣는 것이 두려워서-짓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안느에게 늘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으므로. 나는 안느에게 실연당한 계집애가 언젠가는 훌륭한 학사가 된다는 희망 을 안고 사랑의 상처를 어루만진다는 연극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녀는 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따금 식탁 에서 칸트를 인용하곤 했는데 그것은 눈에 띄게 아버지를 실망시 켰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마치 인도 사람처럼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싸 고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다음, 마치 요가의 깨 침을 이룬 것처럼 거울 속의 나 자신을 열심히 노려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도어를 노크했다. 나는 하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녀는 무엇이든지 무관심했기에 나는 들어오라고 고함쳤다. 안느였다. 그녀는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도어에 우뚝 서더니, 이윽고 미소를 띠었다. [무슨 장난을 하고 있지?] [요가예요.]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장난은 아니예요. 인도의 철학.......] 안느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내 책을 들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 다. 100페이지 되는 곳이 펼쳐져 있었고 다른 페이지엔 <실행불능 >이나 <힘의 소모가 많음>과 같은 나의 낙서 투성이었다. [넌 아주 양심적이구나.>하고 안느가 말했다. [그것은 그렇고, 네가 그처럼 말하고 있었던 저 파스칼에 대한 명논문은 어떻게 되었지?] 나는 식탁에서 그것을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처럼 파스칼 의 말을 즐겨 지껄였던 것이다. 물론 나는 한 줄도 그것을 쓰지는 않았다.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안느는 뚫어져라 나 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공부도 안하고 거울 앞에서 이 따위 어리석은 장난을 하다니. 네 멋대로야! 더군다나 우리들...아버지나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좋아하고 있다니, 이건 더욱 나쁜 짓이야. 그렇지 않아도 너의 갑 작스런 지적인 활약엔 기가 질렸어.] 안느는 나가 버렸다. 나는 거울속에서 멍청해하고 있는 채였다. 나는 그녀가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 었다. 나는 다만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논문을 인용했던 것뿐인데, 그랬더니 별안간 안느가 나를 모욕한것이다. 나는 그녀 의 요즘 나에 대한 태도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차갑고 사람을 모욕하는 이 비웃는 태도는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가운을 벗어던지고 슬랙스와 낡은 블라우스를 입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태양이 지글지글 끓는 듯싶었지만, 나는 일종의 격조에 못이겨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어떤지 확신이 서지 못했으므로, 그것이 더욱 더 나의 노여움을 부채질했 다. 나는 시릴르의 집까지 뛰어갔다. 숨을 허덕이면서 별장 입구 에 서 버렸다. 오후의 더위 속에서 집은 이상할이만큼 호젓하며 조용할 뿐, 그들은 비밀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릴르의 방으로 올라갔다. 우리가 시릴르의 어머니를 만 나러 갔을 때 그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그 방으로. 나는 도어를 열었다. 시릴르는 뺨을 팔베개에 얹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잠 들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시릴 르가 무방비 상태라고 감격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시릴르를 낮은 음성으로 불렀다. 그는 눈을 뜨고 나를 보자, 곧 몸을 일으키었 다. [네가 어떻게 여길?] 나는 그에게 큰소리 내지 말라고 눈짓을 했다. 만일 그의 어머 니가 와서 나를 아들의 침실에서 발견한다면 다른 어떤 엉뚱한 사 실로 받아들여 버리리라. 하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리라...나 는 자신이 당황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방문쪽을 향했다. [어길 가?]하고 시릴르가 외쳤다. [돌아와......쎄실.] 그는 내 팔을 움켜잡고 웃으면서 제지했다. 나는 그를 돌아다보 았다. 나도 아마 그랬을 것이지만, 시릴르가 파랗게 질렸다. 그래 서 내 손목을 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곧 나를 품안에 안아서 잡아 끌기 위함이었다. 나는 어지러움 속에서 생각했다.<결국은 이렇게 될걸.>그 후엔 사랑의 유희였다. 욕망의 손을 내미는 공포, 다정 함과 열광, 그리고 난폭한 고통에 이어서 승리에 부푼 쾌락이... 나에겐 행운이 있었다-그리고 시릴르에게 필요한 다정함이 있었던 점-그날부터 쾌락을 알았다는 것은....... 나는 몽롱한 채 그 옆에서 4시간을 보냈다. 나는 언제나 사랑은 손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고 나 자신이 이것을, 내 나이의 무지로써 노골적으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결코 이처럼 무관심하게 아무렇게나 이 일에 대해선 얘기할 수가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시릴르는 나와 나란히 누운 채 나와 결혼하겠 다는 것과 나를 평생 그의 곁에 두겠다고 맹세했다. 나의 침묵이 그를 걱정시켰다.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서 시릴르를 쳐다보고 [나의 아망(情夫)]하고 불렀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시릴르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몽 쉐리(나의 애인),시릴르, 몽 쉐리!] 이때 내가 그에게 대해서 품은 감정이 과연 사랑이었는지는 확 신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들뜬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심정을 속이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만큼은 나 는 그를 나자신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쳤으리라. 내가 돌아갈 때 시릴르는 나에게 화가 났 느냐고 물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 행복을 준 그에게 화를 내다니! 나는 너무나 피로해서, 몸이 소금에 절인 것처럼 나른해져 천천 히 솔밭 속까지 돌아왔다. 나는 시릴르에게 위험한 일이니 만큼 바래다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자신의 얼굴에서...눈자위의 기미나 입술 윤곽, 떨림 속에 명백한 쾌락의 자취가 발견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집 앞에서 안느가 긴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 었다. 나는 외출을 변명할 교묘한 거짓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안느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안느는 절대로 캐묻는 것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안느와 다투었던 것을 떠올리면 서 침묵한 채 안느의 곁에 걸터앉았다. 나는 꼼짝하지 않은 채 눈 을 반쯤 감고, 자신의 숨소리의 리듬과 손가락의 떨림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따금 시릴르의 육체와의 추억이, 어떤 순간의 추억이 내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나는 테이블에서 담배를 한가치 집어들고 성냥불을 켜댔다. 성 냥불은 꺼졌다. 나는 두 번째엔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바람은 없었지만, 내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불은 담배에 가까이 가 자, 곧 꺼져 버렸다. 나는 투덜대면서 세 가치째를 손에 들었다. 그때 웬지는 모르지만, 이 성냥개비가 나로선 생사에 관한 중대함 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안느가 갑자기 그 무관 심에서 빠져나와 주의 깊게 미소도 짓지 않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 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주위의 환경도 시간도 모두 멈추고 사라 져 버렸다. 그곳엔 이 성냥개비와 그것을 들고 있는 내 손가락과 잿빛의 성냥 갑과 안느의 시선밖에 없었다. 내 심장은 미칠 것처 럼 크게 고동치기 시작하고 나는 성냥갑 위의 손가락을 경련시켰 다. 성냥은 탔지만, 성냥불 쪽에 얼굴을 허기진 듯이 가져가면 담 배가 성냥불을 덮어서 불을 꺼버리고 말았다. 나는 땅바닥에 성냥 갑을 떨어뜨린 채 눈을 감았다. 안느의 캐묻는 엄격한 눈초리가 내 위에 쏟아졌다. 나는 누구라도 좋다.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이 <기다린다>는 것이 정지되기를 애원했다. 안느의 두손이 내 얼굴 을 들어올렸다. 나는 두려워 안느가 내 눈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꼭 감았다. 나는 피로의, 걷잡지 못하는 꾸밀 줄 모르는 쾌락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안느는 모든 질문을 체념한 듯,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침착하게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 더니 나를 놓아 주었다. 그런 다음, 담배에 불을 붙여서 내 입에 물려 주고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이 때의 행동에 상징적인 의미를 주었다. 나는 이 행동에 하나의 의미를 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도 성냥을 잘못 켜대면 나는 이 이상한 순간을 다시 기억해 내곤 한다. 나의 행동과 나 사이의 이 간격을, 안느의 시선의 중압감을, 그리고 주 위의 공허함을, 그 공허함의 강박감을....... 제 5 장 내가 지금 얘기한 이 사건은 하나의 동떨어진 사건으로 머물러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반응에 대단한 절제를 갖고 대단한 자 부심을 가진 사람들처럼 안느 역시 타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 다. 왜냐하면 내 얼굴 위에 있었던 안느의 딱딱한 손길이 부드럽 게 나를 놓아 준 이 동작도 그 타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안느는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것을 고 백시킬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가엾어서인지 무관 심해서인지 그런 생각을 포기해버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안느는 나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만큼 나의 시중을 들거나 나를 길들이는 것도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감독자로서 교육자 로서의 임무에 몰아넣은 것은 의무감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결혼하는 동시에 나의 시중도 들게 된 셈이었다. 나는 안느의 여전한 비난이 초조함이나 혹은 그보다 좀더 강한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즐겨했으리라. 왜냐하면 이 경우 습관 이 즉시 문제를 해결할 테니까. 교정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할 때 에는 타인의 결점이란 것에 익숙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나로선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느는 그러한 감정을 품지는 않으리라. 왜냐하면 나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또한 어떤 의미로선 안느에게 책임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것은 나는 본질적으로 아직 선했으므로...유순하면서도 무척 고집 이 세었으므로....... 그래서 안느는 노여워하고 있었고 그것을 나에게 전가시켰다. 며칠 후 저녁식사 때에 언제나처럼 여름방학 공부에 관한 견디기 어려운 의논이 시작됐다. 나는 조금 지나쳤고, 아버지도 기분이 상해서, 안느는 마침내 나를 방안에 몰아넣고 방문을 잠가버리고 말았다. 누구도 소리를 거칠게 지르기 전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 이다. 사실인즉 나는 안느가 어떻게 해놓았는지 몰랐다. 나는 목 이 말라서 도어 쪽으로 걸어가 도어를 열려고 했을 때 자물쇠가 걸려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지금까지 방안에 감금당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창문으로 뛰어갔지만 그곳 에선 아무래도 나갈 방법이 없었다. 나는 도어에 부딪쳐서, 어깨 가 굉장히 아팠다. 큰소리를 내어 다른 사람더러 열어 달래기가 싫었으므로 이를 악물고 열쇠구멍을 망가뜨리려고 했다. 나는 손 톱깍기를 열쇠구멍에 꽂은 채 빈 손으로 방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꼼짝 않고 서있는 동안 생각이 또렷해져 왔다. 일말의 냉정과 평 화가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것은 잔인한 것에 대한 나의 첫번째 접촉이었다. 나는 잔인함이 가슴속에서 가득채 워지고 내 상상에 따라 점점 격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침대 에 누워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나의 사나움은 그 구실에 비해 적 당한 것이 되지 못했다. 오후에 나는 두세 번 방을 나가려고 시도 했지만 허사였다. 6시에 아버지가 문을 열러 왔다. 아버지가 방안에 들어왔을 때 나는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나를 쳐다 보고 나 역시 기계적으로 미소지었다. [같이 얘기할까?]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무엇을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하시죠? 나도 그래요. 이런 일을 설명할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하고 아버지는 한숨 돌리는 눈치였다. [너는 안느에 대해서 고분고분해야만 해. 참아야지.......] 이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안느에게 참는다......아버지 는 문제를 거꾸로 만들려 했다. 요컨대 아버지는 안느가 딸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어떠한 희망 도 가해질 것처럼. [내가 나빴어요. 안느에게 사과하고 오겠어요.] [네가......넌 행복하냐?] [물론이죠.]하고 나는 명랑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너무 안느를 괴롭게 한다면, 난 좀더 빨리 결 혼하겠어요. 다만 그것 뿐이에요.] 이 해결법이 아버지를 괴롭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설마 네가 <신데렐라 공주>는 아닐 테지?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빨리 떨어져갈 수 있니? 우리들 은 겨우 2년 동안 같이 살았을 뿐이 아니냐.] 이 생각은 나로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 다. 나는 아버지에게 안겨서 울면서 잃어버린 행복이나 격한 감정 을 호소하는 순간을 상상했다. 나는 아버지를 이 음모에 참가시킬 수가 없었다. [난 그저 과장해서 말했어요. 네, 안느와 난 잘 어울리고 있어 요. 정말은...서로 양보만 한다면요.] [응, 물론이지.]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와 마찬가지로 양보하는 것은 서로 가 아니라, 아마도 내 쪽에서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네, 알겠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안느가 언제나 옳다는 것을 잘알고 있어요. 안느의 생활 은 우리들의 생활보다 훨씬 훌륭해요. 훨씬...훨씬 깊은 고상한 멋을 갖고 있어요.] 아버지는 무심결에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제부터 한 달이나 두 달 안에 안느의 생각에 아주 동화해 버 릴 거예요. 우리들 사이엔 이젠 이따위 어리석은 다툼도 생기지 않을 거예요. 다만 약간의 인내가 필요해요.] 아버지는 어리둥절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또한 두려운 듯 한 태도로...아버지는 미래의 장난을 음모할 공모자를 잃고, 과거 도 조금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극단적이 되어선 안 돼.]하고 아버지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네 나이에 맞지 않는...내 나이에도 맞지 않는 생활을 해 왔다는걸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었다거나 불행한 생활도 아니었어. 아니...결국...우리들은 너무...말하자면...슬프게... 아니 미쳐 있지도 않았어. 이 2년간...안느의 매사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그런식으로 모두 부정해선 안돼.] [부정해선 안 돼요...하지만 버리지 않으면 안 돼요.]하고 나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물론...]하고 불쌍한 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느에게 사과했다. 안느는 사죄는 필요 없다고 하며 더위가 우리들 언쟁의 원인일 거야 하고 말했다. 나 는 별 거리낌 없었으며 명랑했다. 나는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솔밭 속에서 시릴르와 만났다. 시릴 르에게 이제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을 얘기했다. 그는 두려 움과 존경이 어린 태도로 듣고 있었다. 그런 다음, 나를 두팔로 끌어안았지만, 이미 시간이 늦어서 나는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 다. 시릴르와 헤어지는 괴로움이 나를 놀라게 했다. 만일 그가 나를 붙잡아 둘 구실을 찾으려 했다면 아마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내 육체는 시릴르를 반기고 싱싱하게 깨어나고 그의 육체를 향해서 꽃피고 열렸다. 나는 정열적으로 키스했다. 시릴르를 아프게 하려고 생각하고, 자국을 내어 밤새도록 한시도 나를 잊지 않도록 하면서 밤엔 내 꿈을 꾸도록 해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시릴르가 없는, 내 몸을 마 주본 그가 없는, 그 황홀함이 없는, 그리고 그 급격한 사나움과 오랜 애무가 없는 밤은 끝없이 지루하리라. 제 6 장 이튿날 아침, 나는 드라이브웨이를 산책하려고 아버지와 함께 나섰다. 우리는 의미도 없는 말을 명랑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별 장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솔밭을 지나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제 의했다. 마침 정확한 10시 반이었다. 바로 예정 시각이었다. 아버지는 내 앞을 걷고 있었다. 왜냐하면 길은 좁고 가시덤불이 깔려 있어서 나는 발을 긁히지 않도록 아버지 뒤에서 덩굴을 헤치 며 걸어갔다. 아버지가 우뚝 서 버리는 것을 보고 나는 아버지가 그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버지 곁으로 다가섰다. 시릴르와 엘자가 솔잎 위에 누워 서 완전한 전원의 행복을 만끽하는 듯 잠들어 있었다. 내가 두사 람에게 이렇게 하도록 시킨 것인데 막상 이렇게 그들을 바라보니 내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엘자의 아버지에 대한 애정, 시릴 르의 나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두 젊고 아름다우 며 그리고 그처럼 다정하게 몸을 붙여 누여 있는 것은 괴로운 사 실이었다. 나는 흘낏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꼼짝하지 않고 창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었다. [깨우지 말고 그냥 가요.] 아버지는 엘자에게 최후의 시선을 던졌다. 엘자는 벌렁 누워 있 었다. 젊음에 넘친 아름다운 붉은 머리를 가진 그녀는 온통 황금 빛으로 그을려서 젊은 요정-마침내 되찾은 아름다움을 갖고-과 같 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아버지는 홱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쁜 계집 같으니! 망할 계집!]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말씀하셔요? 엘자는 자유 아네요? 그렇죠?] [그런 것이 아니다. 너는 시릴르가 그 여자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보고 기분이 좋았니?] [난 이제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그렇다. 나도 엘자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하고 아버지는 분개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 야. 나와 그 여자와는...그 여자와는 합께 살았었으니까...더욱 참지 못한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참지 못하겠다는 것을...아버지 는 나와 똑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급히 두 사람을 떼 어내어 자기의 소유물을, 자기의 소유물이었던 것을 되찾는다... [만일 안느가 들었다면.......] [뭐? 안느가 들었다면? 물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 으면 화를 낼 것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너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냐? 그렇지? 이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거냐? 너도 분 개하고 있니?] 아버지의 생각을 이끄는 것이 나로선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 것 일까? 아버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약간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분개하지 않아요.]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매사를 똑바로 관찰해야만 해요. 엘자는 건망증이 심하 고 시릴르가 마음에 들었으며, 이미 아버지에겐 관심이 없어요. 더구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한 후에는 말이죠. 그러 한 짓은 용서 못하는 거예요.......] [만일 내가 하려고만 생각한다면...]하고 아버지는 말하기 시작 하다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잘 안될 거예요, 틀림없이]하고 나는 힘주어 말했다. 엘자를 다시 손아귀에 넣는 찬스를 의논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 러운 일이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런 것은 당치 않은 생각이다.]하고 아버지는 이성을 회복한 듯이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렇죠.]하고 나는 어깨를 약간 으쓱하면서 말했다. 이 어깨를 으쓱한 것은 <안돼요, 불쌍한 아버지, 경쟁에서 탈락 한 걸요, 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뿐, 집까 지 가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안느를 양 팔로 끌어안고 눈을 감은 채 몇초 동안 그대로 그녀를 포옹하고 있었다. 안느는 약간 놀란 듯 미소지으면서 아버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나는 거실을 나와서 부끄러움에 떨면서 복도 의 간막이에 기대어 있었다. 두 시에 나는 시릴르의 가벼운 휘파람 소리를 신호로 해변으로 내려갔다. 그는 나를 요트에 태우자, 바다 쪽으로 향했다. 바다는 고요했고 텅비어 있었다. 아마도 이처럼 햇빛이 뜨거운 한낮에 나 다니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단 바다로 나오자 시릴르는 닻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그때까지 거의 아무 말도 지껄이지 않고 있었다. [오늘 아침...]하고 시릴르가 말문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마...]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두터운 스크천 위에 다정하게 나를 밀어서 쓰러뜨렸다. 우 리들은 땀에 뒤범벅이 되어 미끄러지면서,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배는 우리들 밑에서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바로 눈 위에 있는 태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돌연 시릴르의 명령하는 듯한, 애정이 담긴 속삭임이...태양이 떨 어져 폭발해서 내 위에 덮쳤다...나는 어디에 있는걸까? 바다 밑 에, 시간 밑에, 혹은 쾌락 밑에? 나는 소리 높이 시릴르를 불렀 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다. 그러고 나서는 소금물의 산뜻함이었다. 우리들은 함께 웃었다. 멍청이, 나른하게 감사하면서...우리들에겐 태양과 바다와 웃음과 사랑이 있었다. 우리들은 저 여름과 같은 공포와 뉘우침이 준 그 황홀함과 격렬함을 가진 그것들을 결코 다시 찾아내지는 못하리 라. 나는 사랑이 나에게 가져다 준 육체적이며 현실적인 쾌락 이외 에도 일종의 지적인 쾌락을 경험했다. <사랑을 한다>(프랑스어로 선 성 관계를 맺는 걸 이렇게 표현한다.)라는 단어는 그 자체의 매력을 갖고 있어서 의미를 둘로 나누며 매우 동사적인 것이다. 이 <한다>라는 말은 물질적이고 실증적인 것이며 시적이고 추상적 인 <사랑>이란 말과 연결되어 있는 점이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전에는 이 언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또 그 맛도 깊이 생각지 못하고 쓰고 있었다. 나는 현재 자신이 훨씬 신중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가 안느를 바라볼때, 또 안느가 최근에 보여준 그 묘하고 도 음탕한 웃음- 그것은 우리들, 아버지와 나를 창백하게 질리게 하고 눈을 창밖으로 돌리게 했다.-지을 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들이 안느에게 그 웃음이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지 말한다 해 도, 그녀는 우리들을 믿지 않았으리라. 안느는 아버지에게 대해서 정부와 같은 게 아니라 친구로서, 다정한 친구로서 행동하고 있었 다. 하지만, 밤엔 틀림없이...나는 이같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 다. 나는 흐린 생각은 아주 싫었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안느와 아버지와 엘자의 일을 잊고 있었 다. 사랑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고 달콤하고, 평화로운 꿈나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시릴르는 나에게 어린애가 생기는 것을 겁내지 않느냐고 물었 다. 나는 그런 문제는 시릴르에게 전적으로 맡긴다고 말했고, 그 도 그것이 원칙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그에게 몸을 허락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나 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을 것이며, 만일 나에게 아이가 생겼다 면 그만이 나쁜 사람이 되리라. 내가 견디지 못하는 책임을 시릴 르가 가로맡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비쩍 마른 몸으로 임신하는 자신을 상상하기 어 려웠다. 처음으로 나는 자신의 볼품없는 몸집을 축복하였다. 한편 엘자는 기다리다 지쳐 안절부절 못하며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엘자나 시릴르와 함께 있는 장면을 갑자기 들키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엘자는 늘 아버지의 눈에 띄게 끔 계획적으로 곳곳에서 아버지와 스쳤다. 그녀는 그걸로 상상적 인 승리를, 또한 그녀 말에 의한다면 아버지의 숨길 수가 없는 억 제된 충동을 저주하고 있었다. 나는 직업상 결국은 금전관계에 지 나지 않는 사랑이나 하는 이 여자가 이처럼 로맨티스트가 되고 시 선이나 움직임등의 세세한 행동에 의해서 그렇게 흥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왜냐하면 엘자는 성급한 사나이들에게 익숙해 져 있을 것이므로.... 엘자가 미묘한 역할에 익숙하지 못한 것만 은 사실로서, 엘자에게 있어서는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심 리적 세련의 극치인양 여기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서서히 엘자때문에 마음의 갈등을 느끼기 시작하였는 데, 안느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안느에 대해서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깊은 애정으로 열중하고 있는 듯했 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두렵게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태도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나는 양심의 가책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머지 3주일 동안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파리에 돌아가고, 엘자는 엘자대로 돌아갈 것이다. 또 만일 아버지와 안느가 아직도 그 결정이 변함없다면 두 사람은 결혼하리라. 파리에는 시릴르가 있을 것이며, 안느는 그곳에서조차 내가 시 릴르를 사랑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므로 내가 시릴르와 만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시릴르는 파리에 어머니 집에서 멀리 떨 어진 방을 하나 갖고 있었다. 나는 벌써 보랏빛과 장미빛의 하늘, 파리의 이상한 하늘을 향해서 열린 창문을, 창문 손잡이 위의 비 둘기 소리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좁은 침대 위의 시릴르 와 자신과를....... 제 7 장 그런 며칠 후 아버지는 한 친구로부터 생 라파엘(산도르페근처 의 지명)에서 아페리티프를 함께 마시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는 곧 우리들에게 그 말을 전하고 우리들이 원하기는 했지만 약간 강 제적인 이 고독한 생활에서부터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음을 몹시 기뻐했다. 나는 엘자와 시릴르에게 우리들은 7시에 <소레이 유>라는 술집에 가 있을 테니, 만일 오고 싶으면 그곳에서 만날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불행하게도 엘자는 아버지의 친구를 알고 있 었으므로 더구나 가고 싶어했다. 나는 말썽을 예기했기 때문에 단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엘자 는 막무가내였다. [샤를르 웨프는 나한테 홀딱 반했어.]하고 엘자는 어린애처럼 순진하게 말했다. [만일 웨프가 나를 만난다면, 레이몬이 나에게 돌아오도록 주선 해 줄 거야.] 시릴르는 생 라파엘에 가든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로선 내가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나는 그것을 그의 눈동자 속에서 발견하고 의기양양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후 6시 반쯤 우리들은 자동차로 출발했다. 안느는 우 리들을 자기 자동차에 태웠다. 나는 안느의 자동차가 좋았다. 그 것은 커다란 미국제 오픈카로서 안느의 취미라기보다는 광고 때문 이었다. 수많은 번쩍거리는 장식, 소음도 적었고 세상에서 동떨어 진 것과 같은, 그러면서도 커브를 돌 때마다 약간 비스듬하게 기 울어지는 그 자동차는 내 취미에 맞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우 리들은 세 사람 다 함께 운전석에서 무릎을 마주 붙이고 바람과 같은 속력에 쾌감을 느꼈고, 어쩌면 똑같은 죽음의 신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안느가 운전을 하고 있어서 흡사 이제부터 형성되 려하는 우리들의 가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칸느 의 밤 이후 안느의 자동차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갖가지 생각에 잠겼다. 솔레이유 술집에서 우리들은 샤를르 웨프와 그 부인을 만났다. 그는 극장 관계의 광고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 부인은 씀씀이 가 무척 헤펐는데 그것은 주로 젊은 사나이들을 위해서였다. 샤를 르 웨프는 돈을 계속해서 충당해야 했으므로 항상 돈 꽁무니를 쫓 고 있었다. 그의 우울하고 성급한 면에 무엇인가 야비한 곳이 있 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엘자의 애인이었다. 왜냐 하면 엘자는 그 미모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욕심 많은 여인도 아니 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녀의 무관심이 그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 이다. 샤를르 웨프의 처는 심술쟁이었다. 안느는 그녀와 만난 일이 없 었으므로, 나는 곧 안느의 아름다운 얼굴이 군중 속에 나갔을 때 처럼 경멸하는 듯한 비웃음을 띤 표정으로 변해가는 것을 발견했 다. 샤를르 웨프는 언제나처럼 끊임없이 지껄이면서 안느에게 탐색 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안느가 어째서 이 바람둥이 레이몬과 그 딸과 함께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 안되어 알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매우 득의만면해진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잠시 한숨을 돌려쉬고는 웨프를 향해 약간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봐, 뉴스가 있어. 안느와 나는 10월 6일에 결혼한다네.] 웨프는 멍청한 눈으로 번갈아가면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나는 아주 기뻐했다. 부인은 실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부터 아버지에 게 딴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축하하네!]하고 웨프가 가까스로 외쳤다. 떠들썩한 큰 소리 로....... [그건 굉장한 아이디어다. 마담, 당신이 이따위 불량자의 시중 을 들게 되다니, 당신은 참으로 숭고하시군요...갸르송(금사)!... 축하를 해야지.......] 안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때 나는 웨프의 얼굴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돌 아보지 않았다. [엘자! 야, 신난다. 엘자 마켄블이야. 나를 몰라 본다. 레이몬! 자네도 봤나? 저 계집애는 아주 예뻐졌는걸.......] [그럴테지!]하고 아버지는 행복의 소유자와 같은 투로 말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생각난 듯 얼굴빛을 바꿨다. 안느가 아버지의 음성을 눈치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재 빨리 아버지로부터 외면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열고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므로,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웃했다. [안느 아주머니가 너무나 예뻐서 야단들이에요. 저 사람이 아주 머니를 쳐다보고 있어요.]하고 나는 은근하게 말했다. 적어도 아 버지에겐 들릴 정도의 크기로....... 아버지는 급히 뒤를 돌아보자 문제의 사나이를 발견했다. [난 이런 곳이 싫다.]하고 아버지는 말하고 안느의 손을 잡았 다. [어머, 아주 다정하시군요!] 웨프 부인이 비웃는 듯한 말투로 감탄했다. [샤를르, 두 분을...애인들을 방해해서 안되었던 것 같아요. 쎄 실만을 부르셨더라면 좋았을걸] [만일 그랬었다면 쎄실은 오지 않았을 거예요.]하고 나는 말했 다. [왜? 어부들 중에 애인이라도 있어요?] 그녀는 한번 내가 버스차장과 벤치에 앉아 얘기하는 것을 본 이 후부터 나를 그녀가 호칭하는 데그랏세(자기 계급보다 낮은 사람 이란 뜻) 취급을 하고 있었다. [예, 그래요.]하고 나는 명랑한 체하면서 말했다. [그래, 많이 낚여요?] 견딜 수 없는 점은, 그녀가 자기의 표현을 유머가 넘치는 말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차츰 노여움이 치밀어올라 참을 수 가 없게 되었다. [난 마꾸로(청어)(프랑스 속어로 여인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는 끄나풀을 가리킴)의 전문가는 아니지만...하지만 낚시질은 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언제나 흐트러지지 않는 안느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몬, 갸르송에게 스트로를 부탁해 주시지 않겠어요? 오렌지 쥬스엔 없어선 안돼요.] 샤를르 웨프는 차가운 음료수를 차례차례로 비워갔다. 아버지는 억지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아버지대로의 방법으 로 술을 마시면서 생각에 잠기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안느는 나에 게 애원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우리들은 싸움하기 직전의 사람 들처럼 곧 함께 식사에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나는 식사 중 술을 많이 마셨다. 안느가 아버지를 바라볼 때의 걱정스러운 표정과 나에게 시선을 줄 때의 막연한 감사의 표정을 잊기 위해서.... 웨프 부인이 그녀 나름의 위트로 가시 돋친 말들 을 나에게 돌릴 적마다 관대한 미소를 갖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전법이 그녀를 당황케 만들었다. 그녀는 재빨리도 도전적이 되 었다. 안느는 다투지 않도록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안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의 싸움은 아주 싫어했고, 웨프 부인이 금방이라도 덤빌 것 같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난 오히려 이런 것엔 익숙해 져 있었다. 우리들이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잔소리를 들어도 나는 별로 긴장하지 않 았다. 식사 후에 우리들은 생 라파엘의 카바레로 갔다. 우리들이 도착 한 후에 곧 엘자와 시릴르가 도착하였다. 엘자는 입구의 문턱에 우뚝 서더니 크라크의 여자와 큰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 음, 가엾은 시릴르의 부축을 받으며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 는 엘자가 연인이라기보다 직업적인 태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지 만, 그러나 그것이 더욱 엘자를 예쁘게 보이도록 했다. [누구야? 저 여드름투성이의 애숭이는? 아주 젊은데.]하고 샤를 르 웨프가 물었다. [사랑이에요.]하고 부인이 중얼거렸다. [사랑이 엘자를 예뻐지게 한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하고 아버지가 거칠게 말했다.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야.] 나는 안느를 보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덤덤히 엘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흡사 그녀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힌 마네킹이나 매우 젊은 여자를 쳐다볼 때와 같은 태도로......아무런 가시 돋친 표 정도 짓지 않고....... 나는 순간 이 야비함이나 질투가 전혀 없 는 안느를 열렬하게 찬미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엘자를 질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느는 엘자보다도 백 배나 아름다웠고 세련되어 있었다. 나는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그말을 안느에게 이 야기했다. 그녀는 이상스럽다는 듯이 나를 봤다. [내가 엘자보다 예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에요.] [그야 그런 말을 듣는 건 기분 나쁘진 않아. 하지만 넌 또 과음 하고 있구나. 컵을 나에게 줘. 너는 시릴르가 저렇게 있는 걸 봐 도 슬프지 않니? 그 사람도 정말 시시한 사람이구나.] [그는 나의 아망이에요.]하고 나는 쾌활하게 말했다. [몹시 취했군. 돌아갈 시간이야, 마침.......] 우리들은 웨프 부처와 헤어졌다. 나는 웨프 부인을 점잖게 <친 애하는 마담> 하고 불렀다. 아버지가 핸들을 잡았다. 내 머리는 안느의 어깨 위에서 놓여져 있었다. 나는 웨프 부처보다도, 우리들이 늘 만나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안느에게 호감이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편이 훌륭하며 총 명했고 훨씬 뛰어났다. 아버지는 조용했다. 아마도 엘자가 카바레 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쎄실은 잠자고 있소?]하고 아버지가 안느에게 물었다. [예, 작은 계집애처럼......비교적 얌전했어요. 마구로의 공박 은 좀 심했었지만.......] 아버지는 웃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나는 새로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안느,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당신 말고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아. 믿어 주겠소?] [그렇게 다짐을 주지 말아요......난 두려워요.......] [손 좀 이리 줘요.] 나는 일어나서 반대하려고 했다. [안돼요. 벼랑 위를 운전하고 있을 때는.......]하고. 하지만 나는 조금 취해 있었다. 안느의 향수, 내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닷 바람, 우리들이 사랑했을 때의 시릴르가 내준 내 어깨 위의 작은 상처......나에겐 행복을 느끼며 잠자코 있을 이유가 얼마든지 있 었다. 나는 잠들어 버렸다. 그 동안 엘자와 불쌍한 시릴르는 시릴 르의 어머니가 금년 생일 선물로 사준 오토바이로 애를 먹으면서 귀로에 접어들었으리라. 웬지는 모르지만 나는 감동해서 울고 싶어졌다. 이 자동차는 이 처럼 푹신하고 이처럼 스프링이 좋아서 잠들기 알맞게 되어 있 다......수면......웨프 부인은 지금쯤 잠자고 있지는 않으리라. 나도 틀림없이 그녀만한 연령이 되면 나를 사랑하게끔 젊은 사나 이들에게 돈을 지불하리라. 왜냐하면 사랑은 가장 달콤한, 가장 생생한, 가장 이치에 맞는 것이니까......그리고 대가는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것은 웨프 부인이 엘자나 안느에 대한 것처럼 심 술궂고 질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혼자 살그머니 웃었다. 안느 가 어깨를 조금 움직였다. <잠을 자요>하고 그녀가 위엄을 보이며 말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제 8 장 이튿날 나는 별로 피로하지 않았고, 과음으로 약간 머리가 아팠 지만 아주 기분좋게 눈을 떴다. 매일 아침이나 다름없이 햇볕이 가득 들이비치어 있었다. 나는 침대 시트를 걷어내고 파자마의 웃 옷을 벗어던진 다음 발가숭이 등을 햇볕에 돌리었다. 구부린 양팔 에다 볼을 대었다. 곧 눈앞에 미면의 거친 시트의 올이 보이고, 좀더 멀리 창문 창살에 파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햇볕은 부드럽 고 뜨거웠다. 햇볕이 뼈를 피부 바로 밑에까지 치밀어올리어 나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 특별한 서비스를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이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리라 결심했다. 어젯밤의 일이 조금씩 내 기억 속에 살아났다. 안느에게 시릴르 가 나의 아망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우스웠다. 취하면 진실을 말하는 것인데, 누구나 믿지 잃는 것이다. 나는 또한 웨프 부인과 그녀와의 싸움을 생각해 냈다. 나는 그런 류의 여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환경속에서 그만한 나이가 되면......그녀 들은 무위와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하여 자주 불유쾌해지곤 하 는 것이었다. 안느의 침착성이 여느 때보다 더 한층 이런 여자를 어쩔 수 없는 그저 그런 여자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본시 그 것은 추측한 바와 같았다. 아버지의 여자 친구들 중에는 안느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사람들과 즐거운 밤을 보내려면 약간 취해서 말다 툼을 하며 즐기든가, 부부 중의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것밖에 없 다. 아버지로선 더욱 간단했다. 샤를르 웨프와 아버지는 바람둥이였 다. [맞춰 보아. 오늘밤 누구와 식사를 하고 누구와 자는지? 소레르 영화사의 귀여운 마르스와란다. 내가 듀피의 집에 들어갔더 니.......] 아버지는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행복한 녀석! 그녀는 에리즈급의 미인일세.] 중학생의 대화였다. 두 사람의 장점은 그 열중과 그것에 기울이 는 정열이었다. 카페의 테라스에서 끝날 줄 모르는 밤샘을 하고 있을 때의 론바르의 슬픈 고백조차도.......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잖아, 레이몬! 그녀가 가 버리기 전의 그 봄을 기억하고 있나? 바보야, 너는! 사나이의 일생을 겨우 한 여자를 위해서!] 그것은 음탕하고 굴욕적인 면이 있었지만, 두 사나이에게는 술 잔을 서로 부딪히는 따스함이 있었다. 안느의 친구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으리 라. 어쩌면 이러한 종류의 모험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 령 그러한 얘기를 한다 해도 부끄러움으로 해서 웃으면서 말하리 라. 안느가 우리들의 친구들에 대해서 표시할 이 은근함을 나도 함께 나누어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애교 가 넘친 전염성 있는 은근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 른살이 되면 나는 자신이 안느보다도 우리의 친구들과 닮아 있으 리라 추측되었다. 안느의 침묵이나 그 무관심이나, 그 겸손함이 나를 질식 시킬 것만 같았다. 반대로 15년만 지나면 나는 인생에 약간 권태를 느끼고 역시 똑같이 권태를 느낀 매력적인 사나이 쪽 으로 허리를 굽혀 속삭이리라. [내 최초의 아망은 시릴르라 했다우. 내가 열 여덟 살이 될 무 렵, 바다 위는 더웠어.......] 나는 이 사나이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나의 아 버지와 같은 잔주름이 있으리라. 누군가가 도어를 노크했다. 나는 급히 파자마의 웃옷을 걸치고 외쳤다. [들어와요!] 안느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고 있었다. [커피가 조금 필요할까 해서...... 골치는 아프지 않아?] [좋아요. 내가 약간 돌았던 모양이야, 어젯밤.......]하고 나는 말했다. [언제나 우리들이 너를 밖으로 끌어낼 때처럼. 하지만 네가 심 심풀이를 해줬어. 정말 긴 밤이었어요.] 안느는 웃었다. 나는 태양에도 커피맛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안느와 얘기 할 때 나는 너무나 열중하게 되어 자기의 존재를 잊어버리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느만이 언제나 나에게 자신을 문제삼게 하고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쎄실, 너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즐거워? 웨프니 듀피이 니 하는 사람들.......] [대개의 경우 그 사람들의 태도가 따분해요. 그러나 재미있는 사람들이에요.] 안느도 플로어에 있는 파리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파리가 병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안느는 길고도 무거운 눈꺼 풀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은근하게 구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 다. [그 사람들의 대화가 얼마나 단순했는지 넌 정말 모를 거야. 뭐 라 하면 좋을까? 그리고 시시하다는 것을......계약이라느니, 계 집애니, 밤의 모임이니 하는 너절한 얘기들. 넌 조금도 심심치 않 았어?] [잘 아시지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10년이나 수도원에 있었고, 그 사람들에겐 도덕관념이 없 으니까, 그것이 아직도 나를 재미있게 하는 거예요.]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고까지는 덧붙이지 못했다. [벌써 2년이나 전부터.......]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은 이치의 문제도 아니고 도덕의 문제도 아녜요. 감수성의 문제예요. 육감의.......] 나에겐 아마도 그것이 부족되어 있는 것이다. 분명히 이 점에 있어서 나에게 무엇인가가 부족되어 있다고 느꼈다. [안느 아주머니, 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요?] 나는 갑자기 말했다. 안느는 나의 엉뚱한 질문에 놀라서 웃기 시작했다. [물론이잖아? 어째서 그런 걸 묻지?] [만일 내가 바보라도 아주머니는 같은 말로 대답했을 거예요. 나는 아주머니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연령의 문제야.]하고 그녀는 말했다. [너보다는 얼마간 자신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그렇지 않으면 나 는 너에게 영향받게 될 테니까.] 안느는 실소했다. 나는 자존심을 상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나쁜 것만도 아니죠?] [그렇게 되면 큰일나게 돼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별안간 그 가벼운 태도를 시정하고 정면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어색해서 조금 몸을 움직였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 얘기를 할 때 뚫어져라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든가 이쪽이 열심히 듣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바로 옆까지 오는 버릇엔 익숙해 있지 못했다. 그것은 그릇된 계산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나는 도망치든가 뒷걸음질치는 것밖엔 생각않고 <예, 예> 대답하면서 대화의 방향을 돌리어 방 저쪽 구석으로 도망치는 수단을 늘리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사람들의 집요함이나 파렴치함과 독점하려는 심정은 나를 격노케 만든다. 다행히 안느는 나를 독점하려는 생각 은 없었다. 다만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나를 쳐다보는 것에 그 쳤지만, 나는 얘기할 때 좋아하는 무관심한 가벼운 상태를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웠다. [어떤 상태로 끝나는 줄 알고 있어요? 웨프 같은 인종의 사나이 들이?] 나는 마음속으로 <그리고 아버지도>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타락해 버리는 거죠?]하고 나는 명랑하게 말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이미 매력이 없어 지고 흔히 말하는 정력도 없어지는 거야. 그리고 이제는 마실 수 도 없어도 여전히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여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고독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많 은 사람의 몸을 망쳐놓는 일도 감수해야만 되는 거지. 그리고 놀 림을 받고 불행해져. 그때가 되어서 감상적이 되고 침울해지는 거 지. 나는 산송장같이 되어 버린 사람을 지금까지 많이 보아왔어.] [가엾은 웨프!]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를 위협하고 있는 말투였던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적어도 안느가 아버지 시중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이 아버지를 위협하고 있는 말투였던 것이다. [너는 그런 것을 생각도 못했을 테지?]하고 안느는 작은 동정의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장래의 일 같은 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지? 그렇지? 청춘의 특권으로.] [부탁이에요.]하고 나는 말했다. [젊다 젊다 하며 그렇게 업신 여기지 말아요. 나는 가능한 한 젊음을 조금 이용하고 있을 뿐인 걸요, 뭐. 청춘이 온갖 것의 특 권과 변명의 권리를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고 있 어요. 나는 청춘에 별로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아요.] [그럼 무엇을 중요시하지? 마음의 평정에? 자유에?] 나는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안느와 는.......] [아무것도.]하고 나는 말했다. [난 아무것도 생각 안 해요. 잘 아시면서.......] [당신들은 약간 애를 먹이는구나. 아버지와 너...... 우리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대단한 일에도 쓸모가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이런 식으로 만족하고 있는 거야?] [난 자신에게 만족한다는 건 아녜요.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하진 않아요. 나는 자신을 좋아하려고도 하지 않아요. 이따금 아주머니 가 내 인생을 복잡하게 하니까 아주머니를 원망하고 있을 정도예 요.] 그녀는 생각에 잠기면서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많이 들은 노래였는데 나는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안느 아주머니, 그 노래가 무슨 노래죠? 신경쓰여요!] [몰라!] 그녀는 약간 실망한 태도로 다시 미소지었다. [침대로 가서 푹 쉬도록 해요. 집안 식구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조사는 딴 데서 추궁할 테니.] [물론 아버지인 경우엔 간단해요.]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하는 말이 금세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소. 왜냐하면 안느, 나는 당신을 사 랑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아무리 이지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이유는 가치있는 걸로 들리리라. 나는 마음껏 기지개를 펴고 베개 위에 다시 머리를 파묻었다. 안느에게 그렇게는 말했지만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실제로 는 안느가 과장해서 말했음이 틀림없다. 20년 후엔 아버지는 위스 키와 화려한 추억을 되씹는, 백발의 사람 좋은 60노인이 되리라. 우리들은 함께 외출하리라. 이번엔 내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사랑 의 모험을 얘기할 것이며,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해주리라. 나는 이 장래의 일에 안느를 제외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로 선 안느를 그곳에 두어보는 것이 아니, 둘 수가 없었다. 때로는 황폐하고, 때로는 꽃으로 뒤덮이고, 싸움이나 외국말의 악센트가 범람하며, 대개는 짐들로 지저분한 이 무질서한 아파트 속에 가장 소중한 재산인 것처럼 안느가 어디에나 가져오는 정돈과 조용함과 조화를 상상하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죽도록 심심해질 것이 겁이 났다. 시릴르를 진실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그녀의 영향을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래 나는 많은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따분함과 평온함을 두려워했다. 내부적으로 평온하기 위해선 우리 들 아버지와 나에겐 외부적인 떠들썩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 고 그것은 안느에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제 9 장 나는 안느와 자기 자신만을 많이 언급하고 아버지에 대해선 별 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이 얘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며, 또한 내가 아버지에 대한 관심 이 적어서도 아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만큼 사랑한 적도 없었고, 그 무렵 나에게 활기를 북돋워 주었던 온갖 감정을 기울 여 아버지를 사랑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가장 안정되고 가장 깊은 것이었으며,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내가 새삼스러이 아버지를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도 아 버지를 잘 알고 있고 너무나도 친밀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보다도 맨 먼저 아버지의 행동을 납 득이 가도록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비천한 사나이도 아니고, 이기주의적인 사나이도 아니 다. 하지만 아버지는 바람둥이로서 고칠 수 없는 쾌락주의자였다. 나는 아버지를 깊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또한 무책임한 사나이 처럼 얘기하지는 못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대해 가진 애정은 가볍 거나, 혹은 아버지로서의 단순한 의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버 지는 누구보다도 가장 나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 고 나 자신에 있어서도 언젠가 맛본 저 절망감이란 단순히 아버지 가 나를 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한 것과 나 이외에 향해진 관심 의 탓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아버지는 결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나를 희생시키지는 않았다. 밤중에 나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아버지는 웨프가 말하는 [소위 재미볼 수 있는 좋은 찬스]조차 곧 잘 놓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때 이외엔 아버지가 쾌락과 난봉과 안이함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깊이 생각한다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모든 것에 <아버지가 이론적이라 주장하는> 생 리학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넌 자신에게 싫증을 내고 있느냐? 좀더 잘 자고 술을 좀 덜 마 셔라.] 아버지가 이따금 여자에 대해서 갖는 극렬한 욕망도 그랬다. 아 버지는 그것을 억제하든가 혹은 좀더 복잡한 감정에까지 이끌어가 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물질주의자 였었지만, 섬세하고 이 해력이 있고 요컨대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엘자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를 괴롭혔지만 욕망은 사람이 생각하 는 그런 것은 아니다. 즉 아버지는 이렇게 마음속에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안느를 배신하는데, 그것은 안느를 보다 적게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난처한걸. 엘자에 대한 이 욕망 은! 빨리 걷어치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느와 말썽이 생긴 다>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아버지는 안느를 사랑하고 그녀를 존경하고 있었다. 요 몇 년 동안 아버지가 놀아 온 경박한 그리고 약간 머리가 나쁜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안느는 색다른 여자였다. 안느는 아버지의 허영심과 색욕과 그리고 감수성을 동시에 만족 시켰다. 왜냐하면 안느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녀의 지성과 경험 으로 아버지를 대했기 때문이다. 현재 안느가 아버지에 대해서 안 고 있는 감정의 중대성에 대해서, 과연 아버지가 얼마큼 이해하고 있는지 나는 그다지 확신은 없다. 그녀는 아버지로선 다만 이상적 애인이고 나에 대해선 이상적 어머니로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버지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이상적 아내>라고? 그리고 이 낱 말에 따르는 갖가지 의무도 포함시켜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 는다. 시릴르와 안느의 눈엔 나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이상한-감 정면에서-사람으로 보여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 버지가 정열적인 인생을 보내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왜냐하 면 아버지는 인생을 평범한 것으로 보고서 그것에 그의 온갖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안느를 제외시킬 계획을 세웠을 때 나 는 아버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떠한 것에도 위안을 받 았기 때문에 그처럼 자신을 위로하리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 지로선 정돈된 생활을 보내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여자와 헤어지 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 자신이 그런 것처럼 습관이나 정해진 것에 의해서만이 정말로 상처를 입고 소모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나는 이 것을 때로는 아름다운 순수한 유목민이라 여기고, 때로는 비참한 빈털터리의 향락자들이라 생각했다. 지금 아버지는 괴로워하고 있으며 적어도 초조하게 안타까워했 다. 엘자는 아버지의 과거의 청춘, 특히 아버지의 청춘의 심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안느에게 말하고 싶어서 우물 쭈물하고 있는 걸 잘 알았다.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하루만 봐주게. 그 계집애한테로 가서 내가 늙은이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마음 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다시 한번 그 육체의 피로를 맛보아야만 하오.] 그러나 아버지로선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안느가 시샘이 많 아서라든가, 원래부터 도덕에 견고한 여성이라 이러한 문제에 대 해서 의논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안느가 다음과 같은 것을 조건 으로 내세우고 아버지와 함께 되기를 승낙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해서 안이한 방탕시절이 끝났다는 것, 아버지는 이미 미성년자가 아니라 안느가 일생을 맡긴 사나이라는 점, 따라서 아버지가 가엾 은 자기의 변덕의 노예처럼이 아니라 신사답게 행동할 것 등등이 었다. 이것에 대해선 안느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것은 지극히 당 연한 것으로서 조건으로서도 건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버지가 엘자를 원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서 서히 무엇보다도 엘자를 소망한다는 것, 금지되어 있는 것에 대한 배가된 욕망을 갖고서 엘자를 소망하는 것을....... 그 무렵이었다면 나에겐 아직도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엘자에게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 도록 말하고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 안느를 니스나 어딘가로 끌고 가 한낮을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면 마음이 가라앉 고 다시 부부애가 넘치는 다정한-적어도 파리에 돌아갔을 때엔 부 부애가 될-아버지를 발견했으리라. 하지만 안느가 참지 못하는 이런 점이......다른 여자들처럼 단 순한 애인으로 있어 주었다면......일시적인......안느의 고상한 자만심, 안느가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우리들의 생활을 까다롭게 만들고 말았던 것일까...... 그러나 나는 엘자에게 아버지의 요구를 들으라고도 말할 수 없 고, 또한 안느에게 니스에 함께 가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 마음속의 욕망이 아버지를 괴롭히고 아버지에게 과실을 범 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과거의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안느의 모멸, 아버지와 나로선 행복했었던 것에 대한 안느의 안이 한 경멸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안느를 모욕하려고 생각 진 않았지만, 우리의 인생관을 받아들여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속였다는 것을 그녀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안 느는 그것이 그녀 개인의 가치나 품위를 훼손시키는 것이 아닌, 전혀 생리적인 일시적인 마음으로서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어떠한 짓을 해도 자기에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면, 우리들을 과실이 있는 채로 내버려두어야만 한 다. 나는 아버지의 고민을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 에게 고백하고 강제적으로 아버지의 공범자 (즉 엘자에게 얘기를 하고 안느를 멀어지게 한다......)가 되지 않도록 극력 피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안느에 대한 사랑과 안느 자신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안느를 속이고 그녀와 대적한다는 생 각은 나를 공포와 막연한 존경으로 가득 채웠다. 얼마동안 우리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었다. 나는 아버지가 엘 자의 일로 해서 흥분할 기회를 가능한 한 많이 마련했다. 안느의 얼굴은 이미 나를 양심의 가책으로 물들게 하지는 않았 다. 나는 때때로 안느가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취미와 같을 만큼 우리들의 취미에도 적합한 생활을 세 사람이 보낼 수도 있다 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한편 나는 시릴르와 곧잘 만나서는 숨어 서 서로를 사랑했다. 소나무의 냄새, 바다의 소용돌이, 그의 몸과 의 접촉......시릴르는 양심의 가책으로 번민하기 시작하고 있었 다. 내가 연기하게끔 한 역할이 시릴르로 하여금 아주 싫증이 나 게 만들었다. 내가 시릴르와의 사랑엔 그것이 필요하다고 믿게 하 지 않았다면 그것을 승낙하지 않았으리라. 그것들은 모두가 많은 이중인격과 침묵이 요구되었지만 노력과 거짓말은 매우 조금만으 로써 충분했던 것이다(나는 앞서도 말했다. 자신의 행동만이 자기 자신을 판단하게 되리라고......). 나는 이 기간에 대해선 총총히 지나려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것 을 기억해 내는 결과 자신을 짖누르는 추억 속에 다시 빠지는 것 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미 안느의 행복한 듯한 웃음과 나에 대한 안느의 친절함을 생 각만 해도 무엇인가 가슴을 짖누르는 듯한 고통이 나를 때리고 괴 롭히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허덕이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의 가책과 흡사한 것을 느끼고서 갖 가지 일에서 구원을 찾는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든가, 레코드를 튼다든가, 남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든가......조금씩 나는 다 른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것이 싫다. 내 기억력의 불완전함이나 정신의 경박과 싸우는 대신 그것들에 도움 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란....... 나는 그러한 것 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가령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 이라도....... 제 10 장 운명이 자기를 표현할 때에 그것에 합당치 못하는, 혹은 평범한 얼굴을 선택하는 것을 즐겨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 해 여름, 운명은 엘자의 얼굴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매우 아 름다운 얼굴이라 할까 오히려 이끌리는 얼굴. 그녀는 또한 황홀할 만한 웃음을 갖고 있었다. 조금 두뇌가 나별 사람만이 갖고 있는, 상대방에게 통하게 하는, 완전한 웃음을...... 이 웃음의 효과를 남보다 앞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찾아냈다. 우리들이 시릴르와 함 께 있는 엘자를 갑자기 놀라게 할 때 나는 엘자에게 이것을 최대 한으로 발휘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일렀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오는 소리가 들리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웃어요, 네.] 그래서 이 기쁨에 넘치는 웃음소리를 들음으로써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 심한 노여움이 스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연출가 의 소임은 나를 열중시키고 말았다. 나는 절대로 실수하지는 않았 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그 가공적인 관계를 공공연하게 증명하고 있는 시릴르와 엘자를 함께 놓고 바라보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 는 일이므로 아버지와 더불어 나도 창백해졌다. 아버지 얼굴처럼 내 얼굴에서도 핏기가 걷히고 고통보다도 심한 소유욕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다. 시릴르! 엘자의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는 시릴 르....... 이 이미지가 내 마음을 흐려놓았다. 이 이미지가 갖는 힘을 모른 채 내가 시릴르와 엘자와 함께 이 이미지를 완전한 것 으로 조작한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용이한 것이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시릴르의 얼굴 윤곽, 그의 갈색의 매끄러운 목덜미 가 내밀어진 엘자의 얼굴에 기울어지는 것을 보자, 나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했을 것이다. 나는 자신 이 그것을 연출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같은 사건을 제외하고선 신뢰와 다정함-이 말을 사용하기엔 나도 괴롭다-과 안느의 행복이 일상생활을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사실 안느는 내가 지금까지 본 어느 안느보다도 한층 행복해 보 였고, 에고이스트인 우리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우리들의 격심한 욕망과 나의 야비한 책략 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엉큼 하게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안느의 무관심과 자존심이 본 능적으로 안느를 모든 책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실제 로 이지적이면서 아름답게 있다는 것, 그리고 애정을 정성껏 쏟는 다는 것 말고는 안느는 아무런 교태도 짓지 않았다. 나는 안느의 신상에 관해서 차츰 동정하기 시작했다. 연민이란 감정은 유쾌하 며, 군악대처럼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법이다. 사람들은 그 점에 대해서 나를 비난할 수는 없으리라. 드디어 어떤 날 아침, 하녀가 매우 흥분된 태도로 다음과 같은 엘자의 쪽지를 갖고 왔다. <만사 잘 되었음. 곧 와요> 그것이 나에겐 대파국이 일어난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해결이 싫은 것이다. 나는 해변에서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엘자를 발견했다. [아버지와 지금 만나고 왔어, 가까스로...... 1시간 전 에.......] [아버지는 당신에게 뭐라고 말했어요?] [이번 일에 대해선 몹시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마 치 시시한 사나이처럼 행동했었다 하며......그것이 정말이지, 그 렇지 않아?] 나는 동의해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찬사를 말했어요. 그 약간 무 뚝뚝한 듯한 어투로 말이에요. 그것도 아주 낮은 목소리로...마치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 괴로운 듯한......그 음성.......] 나는 엘자를 사랑의 시의 황홀함으로부터 매정하게 떼어놓았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다는 거죠?] [글쎄 아무것도!...... 아, 있어요. 레이몬이 마을에서 함께 차 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초대해 주었어요. 내가 원망하지 않는다면, 너그럽고...... 즉 내가 진보적이라면.......] 아버지의 붉은 머리 여자들에 대한 진보적 견해란 것이 나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했다. [어째서 웃어요? 내가 가야만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하마터면 그런 것들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 그런 다음 나는 엘자가 그녀의 책략의 성공을 나에게 돌리고 있다 는 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잘못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는 모르 지만 그것이 나를 노엽게 했다. 나는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몰라요, 엘자. 그것은 당신 마음에 달린 문제가 아닌가요? 당 신이 무엇을 해야 되나 하고 언제나 나에게만 묻지 말아요. 누가 보기엔 내가 당신을 충동질하는 줄 알겠어요.] [그렇지만...... 당신 덕택인데 뭐.]하고 엘자가 말했다. 그녀 의 존경하는 듯한 말투가 별안간 나를 두렵게 했다. [갔다와요. 당신이 가고 싶으면......하지만 이젠 그 일에 대해 선 나에게 말하지 말아요...... 부탁이니까!] [하지만 그 여자로부터 레이몬을 해방시켜 주어야 하지 않아, 쎄실?] 나는 도망쳤다. 아버지는 자기 좋을 대로하는 게 좋을 테고, 안 느를 적당히 다스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시릴르와의 만남 이 있다. 사랑만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로 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시릴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두 팔로 끌어안고 데리고 갔다. 그의 곁에선 무슨 일이든 쉽사리 해결되어 갔다. 격렬함과 쾌락에 넘치면서....... 얼마후 나는 시릴르의 땀으로 젖은 황금 빛 상반신에 몸을 붙이고 누워 있었다. 나 자신도 기진맥진해서 파선된 배의 선원처럼 축 늘어져서....... 나는 시릴르에게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시릴르에게 말할 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그리고 일종의 쾌적한 체념을 갖고서 그렇게 생각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릴르는 그런 점에 대해서는 나를 상대해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 일은 어찌되었든 좋아. 너를 나와 같은 생각에 일치시킬 만큼 나는 널 사랑하고 있는 거야. 나는 널 사랑한다. 얼마나 너 를 사랑하는지.......] 이 말의 리듬이 식사 중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그래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봐도 나는 이 점심식사에 대해선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안느는 그녀의 눈자위 그늘과 같은, 그 눈 동자 자체와 같은 자줏빛 옷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뜻 보기 는 여유있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로서는 매우 순조로운 상태가 되 어 있었던 것이다. 디저트를 들 때 아버지는 오후에 마을에 볼일 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히죽이 웃었다. 나는 매우 지 쳐 있었으며 운명론자였다. 그리고 단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은 수 영하러 가는 것....... 4시에 나는 해변에 내려갔다. 나는 마을로 가는 아버지를 테라 스에서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조 심하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물은 매끄럽고 미지근했다. 안느는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엘자 와 재미를 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방에서 콜렉션의 데상을 하고 있었으리라.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태양이 더이상 나를 따뜻 하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테라스로 돌아와 긴 의자에 걸터 앉아 신문을 폈다. 그때였다. 안느가 나타난 것은...... 그녀는 숲 쪽에서 왔다. 그녀는 뛰고 있었다. 위태롭고 익숙하지 못하게 팔꿈치를 몸에 붙 이고서....... 순간 나는 나이든 부인이 뜀박질을 하고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나동그라질 것만 같은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 연한 채였다. 안느는 집 뒤의 차고 쪽으로 사라졌다. 그때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나도 뛰기 시작했다. 안느를 쫓아가기 위 해서....... 안느는 벌써 자동차 속에서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나는 뛰어가서 자동차 도어에 몸을 던졌다. [안느 아주머니! 가지 말아요...... 잘못이었던 거예요. 내 탓 이에요. 아주머니에게 이제부터 모든 걸 설명할 테니까.......]하 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핸드 브레이크를 풀 기 위해서 앞으로 몸을 수그렸다. [안느 아주머니,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그녀는 그때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녀 는 울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때 자신이 하나의 관념적 존재가 아 니라, 살아 있기에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을 공격했음을 깨달았다. 그녀 역시 얼마간은 수줍은 작은 계집애였으리라. 그런 다음 소녀 가 되고 여인이 되었다. 그녀는 마흔 살이었다. 그리고 고독했었 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와 더불어 10년, 혹은 20년을 행복하게 지내려고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 는....... 이 얼굴, 이 얼굴, 이것이 나의 작품인 것이다. 나는 화석처럼 자동차 도어에 몸을 기댄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너에겐 아무도 필요 없어요. 너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그녀는 중얼거렸다. 엔진이 돌고 있었다. 나는 절망하고 있었다. 안느가 이처럼 가 버리도록 할 수는 없었다. [용서해 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너의 무엇을 용서하지?] 눈물이 쉴새 없이 안느의 얼굴에 흘렀다. 그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꼼짝 않는 얼굴. [가엾은 애!] 그녀는 순간 손을 내 볼 위에 놓았다. 그리고 가 버렸다. 나는 자동차가 집 모퉁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멍청하게 어떻 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모든 것이 그처럼 빨리 끝나 버릴 줄이 야! 그리고 그 안느의 얼굴, 그 얼굴....... 나는 등뒤에 발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였다. 엘자의 입술연지를 씻어내고 옷의 솔잎을 털어 내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나는 아버지에게 몸을 내던졌다. [바보! 바보!]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대체 어찌 되었느냐? 안느는?...... 쎄실, 말해다오, 쎄 실.....] 제 11 장 우리들은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대 했다. 갑자기 되돌아온 둘만의 시간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나나 아버지는 조금도 식욕이 없었다. 두 사람 다 같이 안느가 또다시 우리들에게로 돌아와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나로선 안느가 가 버렸을 때의 참담했던 그녀 얼굴의 추억 과 또 안느의 슬픔, 나의 책임에 대한 생각으로 오래 견딜 수가 없으리라. 나는 자신의 끈기 있는 음모에 대해서도, 그처럼 교묘 하게 들어맞은 계획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고삐도 재갈도 없는 말처럼 아주 미쳐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그와 같은 감정이 나타나 있는 것을 느 꼈다. [쎄실, 어떻게 생각하니? 안느는 이대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 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버지는 말했다. [안느는 틀림없이 파리에 갔을 거예요.]하고 나는 말했다. [파리.......]하고 아버지는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이제 두 번 다시 못 만날지도 몰라요.......] 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테이블 너머로 내 손을 꼭 쥐었다. [넌 나에게 매우 화를 내고 있을 테지? 내가 무엇에 홀리었는지 모르겠다. 엘자와 숲속을 지나서 돌아오는 도중, 엘자가......아 냐, 내가 엘자에게 키스했던 거야. 안느는 마침 그때 왔을 거야. 그래서.......]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엘자와 아버지란 두 등장 인물이 소나 무 그늘에서 끌어안고 있는 그림은 희극과 같고 현실성이 없는 것 처럼 느껴졌으며, 나에겐 이 두 사람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날 의, 오로지 하나의 생생한 것은, 참혹하리만큼 생생했던 것은 안 느의 얼굴이었다. 그 마지막 얼굴, 고뇌로 일그러진 배신당한 그 얼굴, 나는 아버지의 담배상자에서 담배를 한 가치 끄집어내어 불 을 붙였다. 이것은 안느가 허용하지 않았던 일이다. 식사 중에 담 배를 피운다는 일...... 나는 아버지에게 미소지으려 했다. [난 잘 알 수 있어요. 아버지 탓이 아녜요. 말하자면 일시적인 착각이었어요. 하지만 안느는 우리들을 즉 아버지를 용서해야만 해요.] [어쩌면 좋을까?]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안색이 매우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가련하 게 여겼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을 가련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안느는 이렇듯 우리들을 내버렸을까. 결국은 일시적인 혼란으로 안느가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다. 안느는 우리들에 대해서 의무가 없는 것인가? [안느에게 편지를 써요. 그리고 빌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천재적인 아이디어다!]하고 아버지는 외쳤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3시간 동안이나 쩔쩔매고 있었던, 뉘우침 때 문에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이 당황함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간신히 찾아냈던 것이다. 식사도 끝나기 전에 우리들은 식탁보나, 나이프, 포크 등을 치 웠으며, 아버지는 커다란 램프와 만년필과 잉크병과 편지지를 가 지러 갔다. 우리들은 마주 걸터앉아서 비로소 미소를 띠게 되었 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느가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박쥐 한 마리가 창문 앞에 날아와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버지는 머리를 숙이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날 밤 우리들이 안느에게 쓴 선의에 넘친 편지를 견딜 수 없는 비웃음과 참혹한 감정 없이는 돌이켜 생각하지 못한다. 두 사람 다 같이 램프 밑에서 재능이 없는 착실한 학생처럼 이 불가능한 <안느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숙제를 열심히 풀고 있었 다. 우리들은 그래도 겨우 좋은 구실과 애정과 후회에 가득 담긴 이런 종류의 걸작 두 편을 완성시켰다. 편지를 끝내면서 나는 안 느가 이것에 승복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며, 화해는 가깝다고 여 겼다. 벌써 부끄러움과 유머에 넘친 용서의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파리에 있는 우리 아파트에서 행해지리라. 안 느가 들어와서....... 전화가 울렸다. 열 시였다. 우리들은 서로 놀란, 그리고 희망에 넘친 시선을 교환했다. 안느일 것이다. 안느가 우리들을 용서하고 돌아오겠다고 전화하고 있는 거다. 아버지는 전화기를 잡아들었 다. 그리고 [여보세요!]하고 기쁜 듯한 목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곧 꺼질 듯한 목소리로 [네, 네, 어디에서? 네.]하고 밖에는 말하 지 않았다. 나도 이번엔 일어섰다. 공포가 내 마음속에서 회오리 바람처럼 일었다. 나는 아버지를, 그런 다음 기계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아버지는 조용히 수화 기를 놓고 나를 돌아봤다. [안느에게 사고가 났다.]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에스태레르로 가는 길에서......안느의 주소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던 모양이다. 파리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 전화번호를 알아냈 다고.......] 아버지는 기계적으로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아버지의 말에 끼 어들 수가 없었다. [사고는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구나. 그곳에선 수많 은 사고가 있었다는 거다. 자동차가 50미터나 굴렀다고. 기적일거 다. 안느가 살아 있다면.......] 그날 밤의 일을 나는 마치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떠오르는 도로, 아버지의 움직이지 않는 얼굴, 병원 의 도어....... 아버지는 내가 안느를 면회하는 것을 꺼리었다. 나는 대합실의 벤치 위에 걸터앉아서 베니스의 석판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간호사 한 사람이, 그 장소에서 사고가 일어난 것은 초여름부터 이번까지 벌써 여섯 번 째나 된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 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죽음에 의해서, 다시금 안느가 우리들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들이 자살한다면-우리들에게 그 용기가 있다치고-그것은 총으로 머리를 쏘아서만 할 것이다. 그리 고 죽게 한 책임자의 잠과 피를 영원히 혼란케 할 유서를 남겼으 리라. 하지만 안느는 우리들에게 호사스런 선물을 주었다. 즉 사 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케 하는 기회를 우리들에게 남긴 것이다. 위험한 장소, 안느의 자동차의 불안정함, 그것을 선물로서 받을 만큼 우리들은 곧 나약하게 되리라. 더구나 만일 지금 내가 <그녀 는 자살했다>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극적이다. 아버지나 나와 같은 인간들 때문에 자살할 수가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들 때문에....... 뿐만아니라 아버지에게는 사고였다는 것 말고는 얘기한 적이 없다. 이튿날 우리들은 오후 3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엘자와 시릴르 가 계단에 걸터앉아서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안느를 잘 모르고 또한 안느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 다.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의 하찮은 연애사건과 그들의 아 름다움의 매력과 그들의 어색함과 더불어....... 시릴르는 한 발짝 나한테로 다가와서 손을 내 팔에 걸었다. 나 는 그를 쳐다봤다. 나는 결코 그를 사랑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선량하고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것 뿐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 준 쾌락을 사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가 필요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집에서, 이 청년으로부터, 이 여름으로부터 떠나가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만이 나와 함께였다. 이번에는 아버 지가 내 팔을 잡았고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엔 안느의 겉옷, 안느의 꽃, 안느의 방, 안느의 향기 등이 있었다. 아버지는 덧문을 닫았다. 냉장고 속에서 술병을 하나 꺼 내고 컵을 두 개 내놓았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선 유리한 치 료제였다. 우리들의 사죄의 편지가 아직도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 었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걷어치웠다. 편지가 마루위에 펄럭펄럭 날아 떨어졌다. 넘치도록 따라진 술잔을 갖고 내 곁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순간 주저하다가 발에 밟히지 않도록 편지를 치웠다. 나 는 그러한 것은 상징적이며 또한 악취미라고 생각했다. 나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쳐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방안은 어스름했다. 나 는 창가에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았다. 바다가 해변에 밀어닥치고 있었다. 제 12 장 파리의 아름다운 태양 아래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구경꾼들, 상 복(喪服)....... 아버지와 나는 안느의 친척인 나이먹은 부인들과 악수를 했다. 나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들은 일년에 한 번쯤 그녀의 집에 차를 마시러 왔을 테지. 사람 들은 동정어린 시선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웨프가 결혼 뉴스를 퍼 뜨려 놓았던 게 틀림없으리라. 시릴르가 출입구에서 나를 찾고 있 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를 피했다. 내가 그에 대해서 갖고 있는 원망스런 감정은 전혀 부당했었지만,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 다. 주변 사람들은 이 어리석고도 무서운 사건을 한탄하고 있었 다. 나는 사고사라는 점에 아직 얼마간의 의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런 말들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돌아오는 도중 아버지는 자동차 속에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에게는 이제 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나에게도 아버지밖 에 없어요. 우린 두 사람뿐이라 불행한 거예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때 처음으로 울었다. 이 눈물은 매우 유쾌한 눈물이었다. 내가 병원의 베니스 석판화 앞에서 느꼈던 견 딜 수 없었던 공허감과는 거리가 먼 눈물이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나에게 손수건을 내주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서. 거의 한 달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저녁식사도 점심식사도 함께 들고, 밖에 나다니지도 않으며, 홀아비와 고아와 같은 생활을 보 냈다. 이따금 우리들은 안느의 얘기를 조금씩 화제에 올렸다. [기억하고 있어! 바로 그날 말이야.......] 우리들은 눈길을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왜냐하면 그것 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든가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의 감정을 폭발시켜서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서로의 조심성과 다정함은 이윽고 보 람이 있었다. 얼마쯤 지나자, 우리들은 안느에 대해서 차분하게 얘기할 수가 있었다. 우리들과 함께 행복해질 수가 있었던, 그러 나 하나님 품안에 안긴 한 사랑하는 사람을 얘기하듯. 나는 우연 대신에 하나님이란 말을 썼다. 그러나 우리들은 신을 믿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연을 믿을 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행복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어떤 날, 나는 친구집에서 그 사촌오빠의 한 사람 과 만났다. 그는 내 마음에 들고 나도 그의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자주 아무런 목적 없이 그와 쏘다니고, 또 고독을 싫어하는 아버지는 대단한 야심가인 한 젊은 여성과 나처럼 나다녔다. 예측하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 옛날과 같 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웃으며 서로의 사랑의 모험담을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나와 필립과의 교제를 플라토닉한 사랑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것 같았는데, 나 역시 아버지의 새 로운 아이(여자친구)에게 돈이 많이 드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행복했다. 겨울이 끝나 가려 한다. 우리는 전과 같은 별장을 빌리고 싶었는데, 아마 주앙 레 팡 근처의 것을 빌리 게 되리라. 다만 내가 침대 속에 있을 때, 자동차 소리만 들리는 파리의 새 벽녘 나의 기억이 이따금 나를 배신한다. 다시 여름이 다가온다. 그 추억과 더불어. 안느, 안느! 나는 이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오 랫동안 어둠속에서 되풀이한다. 그러자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솟 아나고, 나는 그것을 눈감은 채 그 이름으로 맞이한다. 슬픔이여 안녕!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