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번째 주검 지은이: 엘리스 피터스 출판사: 북하우스 봉사자: 박수민 7. 휴 버링가라는 사내 말을 타고 서튼을 가로질러 롱 숲의 울창한 원시림으로 들어서면서, 캐드펠은 문득 위험 한 야간 매복과 급습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나날들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에 사로 잡혔다. 그때는 하도 익숙한 일이어서 지긋지긋할 지경이었으나, 늙고 추레해진 지금 그 추억들은 그에게 짜릿한 흥분을 안겨주었다. 롱 숲은 넓이가 십오 제곱마일쯤 되는, 히스가 무성한 봉 우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탄 말은 힘 좋고 당당하고 혈통도 훌륭한 말이었다. 이렇게 좋은 말을 타본 지도 근 이십 년이 넘은 터라, 캐드펠은 왠지 허영심과 우쭐해지는 마음까 지 들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이는 감정을 의식하며,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보편적인 인 간의 한계를 새삼 느꼈다. 그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며 나란히 말을 달리는 젊은이조차도 옛 시절을 상기시켜주었다.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고 어떤 모험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원기 왕성했던 옛 동료들을, 그 동료들 덕분에 그때 캐드펠은 온갖 힘겨운 노역과 궁핍한 상황들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었다. 잘 닦인 길을 벗어나 짙은 어둠에 잠겨 있는 숲 속으로 들어서자 휴 버링가는 세속의 온 갖 시름을 잊는 듯했다. 자신의 파트너가 어떤 속임수를 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 없는 듯했다. 휴 버링가는 심지어 캐드펠이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겪은 일들과. 수사가 이 숲만큼이나 훤히 알고 있는 바다 건너 여러 나라들에 대해 심심풀이 삼아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했다. "그런 세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시고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다니시면서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셨습니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얘기로, 세상 여자들의 반을 겪어보셨는데 요?" 무심코 지나치는 듯한 조롱 섞인 말투이기는 했으나, 그 속에는 진심으로 대답을 듣고 싶 은 진지함이 깃들여 있었다. 캐드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딱 한 번 결혼할 생각을 했었소. 십자군에 참여하기 전이었소.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지요. 허나 솔직히 말해 나는 동방에서 그 사람을 잊었고, 그 사람은 서방에서 날 잊었소. 내가 너 무 먼데 가 있었기에 그 사람은 나를 기다리기를 단념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고. 그러 니 그 여자 쪽에도 약간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분을 다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한번도, 지금쯤 손자들을 봤을 거요. 아마 손자들에게 푹 빠져 있겠지. 좋은 여자였 는데." 버링가는 꿈꾸듯이 말했다. "하지만 동방 역시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세상이고, 수사님은 젊은 십자군이셨잖습니까. 정말 희한한 일이로군요." 캐드펠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요, 희한한 일이지! 허나 내 보기에는 당신도 희한한 사람이요. 당신이 알고 있는 이 들 중에서 서로가 타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소?" 숲 사이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평수사들은 그 시간까지 자지 않고 촛불을 밝 혀두고 있었다. 캐드펠은 그들이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도 있을 터였다. 지독하게 따분한 곳이었다. 두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좋은 수사들은 잠시나 마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척 반가워하리라. 그들이 방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인기척에 이내 문가로 나온 것으로 증명 이 되었다. 마흔 다섯이라는 자신의 나이만큼의 세월을 보낸 참나무처럼 장대한 근육질의 안젤름 수사는 한 손에 든 기다란 몽둥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집안은 프랑스계이나 태어나 기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작으면서도 다부지고 민첩한 체구를 지닌 루이 수사는 호신용 단검을 들고 있었다. 루이 수사는 단검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만 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나타나,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차분하게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러나 캐드펠 수사를 보자 그들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우리 늙은 형제셨군요.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갑네요. 이렇게 한밤중에 오시다니 뜻밖입니 다. 하룻밤 묵고 내일 가실 건가요?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들은 경계하는 눈길로 버링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버링가는 그들과 거래하는 일을 캐 드펠에게 일임했다. 이곳은 수도원의 문서가 왕의 문서보다 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 는 곳이었다. "이놈들을 맡기러 왔소. 여기 계신 이분이 이 말들을 남들의 눈에 뛰지 않게 며칠 동안만 돌봐달라고 해서 형제에게 부탁하려구요." 캐드펠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이렇게 훌륭한 말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말 주인의 심경을 충분히 헤아릴 사람들이니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었다. "이 말들은 곧 징발당해 군인들의 짐말로 쓰일 처지에 놓여 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 워서 숨겨두려고 하는 거요." 알제름 수사는 찬탄하는 눈길로 버링가의 말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숙인 말의 목을 한 손 으로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우리 마구간에 이렇게 아름다움 말을 들여놓는군요! 아니. 한동안 말은커녕 그 비슷한 짐승 꼴도 못 봤지요. 로버트 무언장님이 노새를 타고 오셨을 때만 빼고는 요. 그 분도 요즘은 거의 들르지 않으세요. 솔직히 말해 저희는 윗분들이 이곳이 외지고 쓸모 없는 곳이라 더 이상 유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이 녀석에게 기꺼 이 우리 마구간을 내주지요. 수사님이 타고 오신 말에게도요. 가끔 운동 삼아 이 녀석을 타 도 좋다고 허락하신다면 더욱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버링가는 싹싹하게 말했다. "이 녀석은 수사님이 타셔도 별 저항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나 캐드펠 수사님 이외 의 사람에게는 절대로 넘기지 마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곳에서 이 녀석들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마침 따분하던 차에 그들이 온데 다가 버링가가 후한 사례금까지 주었으므로. 평수사들은 무척 흡족해하면서 그 말들을 텅 빈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루이 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원래 글로스터의 로버트 백작님 저택에서 마부 노릇을 한 터라 제 면목을 세워줄 만 큼 당당하고 보기 좋은 말을 사랑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기꺼이 맡을 테지만요." 캐드펠 수사와 휴 버링가는 수도원을 향해 함께 걸었다. 캐드펠이 말했다. "내가 안내하는 길로 가면 한 시간도 채 안 걸릴 거요. 군데군데 잡초가 무성해서 말을 타 고 가기에는 적당치 않지만. 내가 잘 아는 길이오. 그리로 가면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물방앗간에서 상류 쪽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간 데서 메올 시내를 건너야 하오. 물을 건너도 괜찮다면 허브밭 쪽으로 해서 수도원경내로 들어갈 수 있소." 버링가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그러나 지극히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보기에 수사님은 저와 일종의 게임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를 숲속에서 길 을 잃게 하거나 물방앗간 수로에 빠뜨리실 생각이신가요?" "글세,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는 의문인데. 우리는 무척이나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산책 을 하게 될 거요. 그럴 만한 가치도 있고."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밤의 산책은 개인적인 야심이 전혀 없는 나이 든 수사와 끝없는 야심을 지닌 대담한 젊은이가 함 께 하는 흥미로운 산책이 되었다. 버링가는 캐드펠이 왜 그렇게 선선히 자신의 편의를 보아 주었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놓고 한참 고심하고 있을 터였다. 캐드펠 역시도 버링가가 자신 을 그 일에 끌어 들여 공모자로 만든 이유를 밝히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니까. 그가 버링가의 공모자가 된 것은 둘의 싸움을 좀더 흥미롭게 만들어주었을 뿐 별 문젯거리 는 되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 누가 목적하는 바를 이룰지는 여전히 불확실 했다. 좁은 숲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키는 서로 엇비슷했다. 하지만 캐드펠이 육중하고 다부진 체구를 가진데 반해 버링가는 호리호리하고 민첩했다. 버링가는 조심스럽게 캐드펠 수사의 뒤를 따랐다. 나뭇가지들 틈새로 새어드는 희미한 별빛만으로 간신히 사물을 식별할 수 있 을 뿐인 짙은 어둠도 그에게는 그다지 장애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가벼운 어조로 솔직 히 털어놓았다. "왕은 좀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글로스터 백작의 여지로 이동하려고 합니다. 병사들과 말 을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것도 다 그 때문이죠. 왕은 분명히 며칠 내에 이동할 거예요." "당신도 같이 갈 거요?"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눈치이니 옆에서 부채질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물론 버링가의 말은 모두 면밀한 계산을 거친 끝에 나오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그런 그도 머지 않아 오산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거야 왕의 마음에 달려 있죠. 이런 말을 하면 과연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왕은 저를 불 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야 제 땅이 있는 이곳에서 제 마음대로 지내는 편이 더 낫죠. 전 저 나름대로 애써왔습니다. 하지만 왕과 얼굴을 너무 자주 맞대는 건 효과로만 치자면 최악 이라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그 근처에서 얼씬도 하지 않았다가는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될 소지가 있구요.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문제죠." "당신의 판단은 신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이제 시내에 다 왔소. 저 소리 들리 오?" 수량이 적고 폭도 좁은 시내에는 징검다리가 될 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버링 가는 잠시 거리와 지형지물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날렵하게 돌을 딛고 물을 건너, 방금 전에 캐드펠이 한 말을 여실히 입증해 보였다. "진심이세요? 제 판단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씀이? 이점을 따지는 점에서만 그렇다는 말씀 이신가요? 아니면 예컨대, 남자들에 관한 판단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그것도 아니 면 여자들에 관한 판단에 대해서요?" 두 사람이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게 되었을 때 버링가가 물었다. 캐드펠은 투명스럽 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를 믿고 있으니 남자들에 관하 판단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수가 없겠지. 그걸 의심한다면 나는 당신의 신임을 받을 자격이 없지 않겠소." "여자들에 관한 판단은요?" 이제 그들은 확 트인 들을 걷고 있어 몸놀림이 좀더 자유로웠다. "만나는 여자들마다 붙잡고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충고 해주고 싶지. 다음 작전에 관한 것말고 왕의 진영에서 떠도는 소문은 없소? 일테면 피챌런 씨와 애드니 씨를 찾아냈다 는 소문같은 것." 버링가는 선선히 대답했다. "아뇨. 하지만 이제는 못 잡을 겁니다. 그분들은 운이 좋은 편이고, 그건 저로서도 하등 유감스러울 게 없는 일이죠. 지금 그분들이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프랑스로 향 하고 있는 중인 것만은 분명해요." 그의 말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의도하는 바가 뭐든 간에, 어쨌든 그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털어놓는 방법을 매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소식은 고디스에게 큰 위안 이 되어줄 것이었다. 고디스의 아버지와 그에게 앙갚음하여 드는 스티븐 왕과의 거리가 멀 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게다가 이제 고디스와 토롤드와 탈출로에는 충직한 수사들이 돌보고 있는 훌륭한 말 두 마리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캐드펠 의 말이 떨어지기만 하면 수사들은 언제라도 기꺼이 말을 내줄 테니까. 그러니 탈출의 첫 단계는 이루어진 샘이었다. 이제는 강물에서 안장주머니들을 회수해서 두 사람을 무사히 떠 나보내는 일이 남았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 다. "이제는 여기가 어딘지 알겠군요." 이십 분쯤 지난 뒤에 버링가가 말했다. 그들은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시냇물로 둘러싸인 땅을 일 마일쯤 똑바로 가로질러 다시 둑 앞에 이르렀다. 건너편으로 완두를 거둬들인 빈들 이, 별빛을 받아 희부옇게 펼쳐졌다. 그 완만한 구릉지대 너머로는 밭들과 수도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수사님은 밤중에도 이 일대를 훤히 꿰고 계시네요. 앞장서십시오. 이 시냇물에 깊은 구덩 이가 없다는 수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를 테니까요." 캐드펠은 샌들 외에는 젖을 것이 없었으므로 승복 자락만 걷어올리면 되었다. 캐드펠 수 사는 건너편으로 고디스가 자고 있는 오두막 지붕이 보이는 곳에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오 두막 지붕은, 밭들을 둘러싸고 있는 담과 나무들과 관목숲 너머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 었다. 버링가는 부츠와 바지를 벗지 않고 그대로 물 속으로 들어섰다.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 지만 버링가는 전혀 개의치 안는 눈치였다. 캐드펠은, 버링가가 찰랑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물 속을 걷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버링가는 야생동물의 직관을 타고났 는지, 밤에도 낮에 못지 않게 민첩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수도원 쪽 둑에 이르러서도 완두의 마른 뿌리를 밟아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지 낳으려고, 본능적으로 완두밭 가장자리 를 돌아서 갔다. "역시 타고난 음모꾼이군." 캐드펠은 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입밖에 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 사 이에 강한 유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적의 섞인 유대감일 수도 있겠지만.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이죠." 버링가는 불쑥 얼굴을 돌리고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상대방만 알아들을 수 있 게끔 나직하게 속삭이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보니 떠도는 소문 하나가 기억나네요. 말씀드린다고 하다가 깜박 잊었습니다. 며 칠 전에 어떤 친구가 밤에 강물 속으로 쫓겨 달아났는데, 듣자니 피챌런 어른의 향사들 중 의 하나였다고 하더군요. 병사들이 그러는데 한 궁수가 그 친구의 왼쪽 어깨 뒤편을 맞췄답 니다. 어쩌면 심장을 꿰뚫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친구는 그냥 떠내려갔답니다. 아마 애 첨 근방 어딘가에서 뭍으로 떠밀려나오겠죠. 그런데 이튿날 병사들이 주인 없는 발 한 마리 를 붙잡았답니다. 훌륭한 승용마였다고 하더군요." 캐드펠은 은근히 놀랐다.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겠소? 여기서는 마음 펴니 이야기해도 괜찮소. 한밤중에 내 허 브밭에서 어슬렁거릴 사람은 없을 테고, 수사들은 내가 이곳에서 허브주를 돌보느라고 남들 이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 다니는 것에 꽤 익숙해져 있으니까." 휴 버링강는 별다른 생각 없다는 투로 불었다. "허브주는 수사님을 거드는 아이가 돌보지 않습니까?"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온 아니는 이내 자기가 한 짓을 후회할 일을 당하게 마련이지. 우 리는 당신 생각보다는 우리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있다오." "그 말씀을 들으니 기쁘군요. 노련한 늙은 군인이 수사가 되어 밤의 냉기에 시달리는 거 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어린것들은 보호해줘야 마땅하죠." 버링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체불명의 말 이야기를 드리다가 말았죠......믿으실지 모르겠는데, 그 이틀 뒤에 병사들은 시 북쪽의 히스벌판에서 유유히 풀을 뜯어먹고 있는 안장이 얹힌 다른 승용 마 한 필을 또 붙잡았답니다. 그쪽 사람들은 왕의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 성에서 애드 니 어른의 따님을 데려갈 호위병을 파견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가씨가 숨어 있는 곳으로 가서 말을 태워 공격군의 포위망을 뚫고 안전하게 도피시키려구요. 그들은 그 호위 병이 아가씨가 있는 곳을 밝히지 않으려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래서 그 시도는 실패 로 돌아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애드니 어른의 따님은 아직도 행방불명인 상태인 거 죠. 아마 이곳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겠죠. 그들은 그 아가씨를 찾으려 들 겁니다. 이제는 전보다 더 열심히 찾아다니겠죠." 그 즈음 그들은 수도원 경내에 있는 채소밭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휴 버링가는 소리 죽여 말했다. "편히 주무십시오!" 그러고서 그는 접객소를 향해 유령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캐드펠 수사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오랬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누군가가 물방앗간으로 살그머니 다가와 안에서 오가 는 마지막 몇 마디를 엿들었으리라는 확신은 더욱더 굳어졌다. 그리고 그 사람이 휴 버링가 라는 점에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버링가는 자신이 얼마나 은밀히 움직일 수 있 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주위 상황에 맞춰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 역시도, 버링가는 서로를 상대의 재량에 맡기는 기묘한 모험을 하 자고 캐드펠 수사를 부추겼고, 적절한 의혹과 충격을 불러일으키게끔 세밀히 계산된 많은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아마 상대의 어리석은 행동을 촉발시키려는 의도도 숨어 있으리라. 그 러나 캐드펠은 그런 짓을 해서 그를 만족시켜줄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캐드펠은 버링가가 가청 거리 내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말, 자신 이 말 두 마리를 확보하고 숨겨진 보화를 회수해서 토롤드를 '그녀'와 함께 떠나보내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만일 버링가가 그보다 좀더 전에 문 뒤로 접근했 다면 고디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들었을 것이다. 설령 듣지 못했다 해도 분명 그런 의 혹을 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휴 버링가는 자신의 가장 좋은 말들과, 아직 고발하지 않았지 만 언제라도 고발할 수 있는 두 명의 도망자, 그리고 캐드펠을 가지고 어떤 게임을 하고 있 는 것일까? 한 청년을 생포하는 것이나 자기로서는 하등 아까울 것 없는 한 아가씨를 넘겨 주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버링가 같은 사내라면 자잘한 것보다는, 토롤드와 고디스, 보화를 한꺼번에 건 엄청난 도박을 하는 편을 선호할 터였다. 큰 출세를 기대하지는 못해도 예전처럼 작은 땅의 영주로 행세하며 지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왕의 상금과 총애를 얻으려고? 버링가와 관련한 가능성을 실로 무한했다. 캐드펠은 잠들기 전에 오랫동안 버링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만일 그가 캐드펠이 보화를 회수하러 나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부터는 한시도 캐 드펠을 놓치지 않으려 들것이다. 캐드펠은 자신을 그 보화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사람이 므로, 캐드펠은 여명이 희미하게 움터오기 시작할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제대로 눈으 붙이지도 않은 듯한데 아침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캐드팰은 아침식사 후에 허브밭에서 고디스에게 말했다. "오늘은 모든 것을 평소와 다름없이 하도록 하게. 수도회 평의회 전에 열리는 미사에 참 석하고 난 뒤에는 수업을 받게나. 점심식사 뒤에는 허브밭에서 일을 좀 하고 약들을 돌보고. 그 뒤부터 저녁기도 시간에는 살짝 빠져나가 물방앗간으로 가도 괜찮아. 허나 남의 눈에 띄 지 않게 조심해야 해. 나 없이도 토롤드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줄 수 있겠나? 오늘 나는 거 기 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잘 할 수 있어요. 수사님이 하시는 걸 봤으니까요. 이제는 허브에 대해서도 잘 알구요.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만약 어제 그 사람이 오늘 또 와서 우리를 염탐하면 어떻게 하 죠?" 고디스는 이미 캐드펠에게서 어젯밤의 여행에 대해 귀띔을 받은 터라 몹시 놀라기는 했지 만, 한편으로는 말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용기 백배하고 있었다. 캐드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오지 않아. 내 예상대로라면 그 사람은 내가 어딜 가든 간에 내 주위에서만 얼씬거릴 게야, 자네를 내게서 떼 놓으려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내게서 떨어져 있어야 자 네가 좀더 편히 있을 수 있으니까. 일이 그렇게만 되면 오늘밤 늦게 자네와 토롤드가 나를 위해 일을 하나 해줘야겠어. 저녁기도 시간에 됐다, 아니다로만 이야기 해주겠네. 일이 순조 로울 때는 그저 됐다라고만 하겠어. 자네들이 할 일이 뭔고 하니....." 고디스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으면서, 알았다는 표시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방앗간 벽 쪽에 기대놓은 배 봤어요. 네, 그쪽 밭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빽빽한 덤 불 알아요. 다리 끝 바로 아래에 있는 곳 말씀하시는 거죠..... 네, 물론 할 수 있어요, 저하고 토롤드하고요!" 캐드펠은 주의를 주었다. "충분히 오래 기다려야 하네. 이제는 어서 가서 미사에 참석하도록 하게나. 수업도 받고,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보이도록 애쓰게. 두려워하지는 말고,. 두 려워할 일이 생기면 곧 내게 알려줘. 내 바로 달려갈 테니까." 캐드펠의 생각 중에서 일부는 곧바로 입증되었다. 캐드펠은 일요일인 그날 수도원 경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로 마음먹고 미사마다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갖가지 용건을 가지고 문 지기실이며 접객소며 원장의 숙소, 진료소, 밭들 할 것 없이 온갖 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 다. 그가 어디를 가든 간에 그의 시선이 미치는 곳 어딘가에는 반드시 휴 버링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이제까지 그 젊은이는 교회에 그렇게 열심히 들락거린 적이 없었다. 앨린이 없 는 경우라면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캐드펠은 약간의 악의를 갖고서, 앨린이 미사에 참석 하고 있어도 버링가가 저 아닌 다른 구혼자에게 그녀를 맡겨두고 여전히 자기를 따라오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마음먹었다. 앨린은 수도회 평의회 뒤의 대미사에는 반드시 참석할 테고, 캐드펠 수사는 좀전에 문지기실에 들렀을 때 사복을 점잖게 차려입은 애덤 쿠셀이 앨린과 그녀의 하녀가 묵고 있는 조그만 집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눈여겨보아두었다. 캐드펠 수사는 이제껏 대미사만큼은 한 번도 불참한 적이 없었으나 이번만은 그럴싸한 핑 계를 만들어서 빠져나왔다.. 그가 약을 잘 다룬다는 사실은 시내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시민 들은 종종 그에게 도움과 조언을 청했으며, 헤리버트 원장은 그런 요청에 관대한 편이었기 때문에 매번 그를 선뜻 내보내주곤 했다. 수도원에서 세인트 자일즈 쪽으로 가는 길에, 피부 병 때문에 이따금 그의 치료를 받는 아이가 있었다. 점차 낫고 있는 참이어서 그날은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었지만, 캐드펠이 가야 한다고 하자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문 앞에서 캐드펠 수사는 마침 경내로 들어오는 앨린 시워드와 애덤 쿠셀을 만났다. 그녀 는 캐드펠을 보자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자신을 호위하는 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 는 약간 당황해서 그러는 듯 싶었다. 정성을 다해 처녀를 호위하는 왕의 신하의 얼굴은 발 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기쁨때문이었다. 요즘은 버링가가 그녀를 찾는 일이 상례화되다시피 했으므로 만일 앨린이 오늘도 버링가가 찾아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면 쿠셀 이 방문했을 때 꽤나 당황했을 터였다. 그런데 안도할 일인지 실망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버링가와 부딪치지 않았다. 버링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캐드펠은 이제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고 흡족해하며,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왕진길에 올 랐다. 버링가는 조심스럽게 그를 감시했으며, 그가 아이 집에서 나올 때까지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캐드펠이 수도원으로 향할 때에야, 버링가는 남은 말 중 한 마리에 올라타고서, 마 치 운동 삼아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유유히 다가왔다. 버링가는 캐드펠과 맞부딪치자 휘파 람을 불었다. "일요일 오전에 어딜 그렇게 헤매고 다니시나요, 캐드펠 수사님?" 버링가는 뜻밖에 만나 여간 반갑지 않다는 듯이 요란하게 인사했다. 캐드펠은 담담한 표 정으로, 어떤아이의 병을 치료하러 나왔으며, 그 결과가 무척 만족스럽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수사님은 정말 다방면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어제 그렇게 오래 일하셨으니 푹 주무셨겠 죠?"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긴 했지만 푹 잘 잤소. 그런데 아직도 탈 만한 말이 남 아 있구려." "아, 그 말씀이세요! 제가 한 가지를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 명령이 떨어져도 안식일이 끝 난 뒤에야 움직이게 될 거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내일은 직접 보시게 될 겁니 다." 그는 분명히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알게 된 정보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사냥은 아주 철저히 진행될 겁니다." 캐드펠은 그 말이 단순히 말이나 양식, 건초 따위만을 겨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 사냥은 아주 철저히 진행될 겁니다." 캐드펠은 그 말이 단순히 말이나 양식, 건초 따위만을 겨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스티븐 왕은 교회나 주교들과의 관계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으니 일요일에는 명령 의 시행을 보류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 점을 깜박 잊었어요. 그 덕분에 우 리도 하루를 유예받게 되었죠. 오늘밤은 그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발뻗고 편히 잘 수 있게 됐구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들처럼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사님?" 버링가는 껄껄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한 손으로 캐드펠의 어깨를 툭치고는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해 세인트 자일즈 쪽으로 달려갔다. 캐드펠이 점심식사 후에 식당에서 나왔을 때 버링가는 맞은편 접객소 현관 안쪽에서 서성 이고 있었다. 매사에 무관심한 듯이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버링가는 시계에 들어오는 모든 것의 움직임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캐드펠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회 랑으로 둘러싸인 뜰로 그를 유인해서, 고디스가 경내를 무사히 빠져나가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났으리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햇살이 비치는 곳에 앉아 기분 좋게 졸았다. 캐드펠 수사 는 낮잠에서 깬 뒤에도 한동안 그대로 않아, 이제까지 진행된 상황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이 함축한 뜻을 머릿속에서 정리해보았다. 버링가가 직접 캐드펠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세히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일을 부하들을 시키거나 사람을 사서 맡기지 않고 직접 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 는 그일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만일 그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한 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 안 앨린으 쿠셀에게 양보했다면 그것은 그가 캐드펠을 감시하는 일에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캐드펠은 생각했다. 저 친구가 바라는 목적, 그러니까 피첼런의 보화 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내가 선택된 게로군. 저 친구는 조금도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 지. 그것 좋군! 피할 방도는 없다. 남은 길은 그것을 이용하는 것뿐. 그러니 감시자를 질리게 하거나 진이 빠지게 하지는 말자.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지 지나치게 빨리 눈치 채게 하지도 말고. 이제까지 저 친구는 내 머리를 아주 복잡하게 했으 니 이제는 내 편에서 저 친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줘야지. 캐드펠은 작업실로 가서 오후 내내 여러 가지 허브주를 정성껏 조합하고 새로운 것들을 빚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가 저녁기도 시간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교회로 돌아갔다. 그는 버 링가가 군중 속에 숨어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캐드펠은 자기를 감시하는 일이, 그렇게 원기왕성하고 적극적인 사내에게 무척이나 지겹고 지루한 일이 되기를 바랐다. 쿠셀은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미사 에 참례하려고 되돌아왔을 때였다. 어쨌거나 그는 조신하고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팔을 잡 고 있는 앨린과 함께 교회로 왔다. 쿠셀은 부지런히 걸어오는 캐드펠 수사를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반갑게 인사했다.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나은 상황에서 만나뵙게 되어 기쁩니다, 수사님. 수사님이 다시 는 그런 일을 맡으시지 않게 되기를 빕니다. 앨린 아가씨와 수사님은 그때 그곳에 빛을 던 져주셨죠. 두 분이 아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추악할 일이 되었을 겁니다. 저는 수도원에 대한 전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방도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전하께서 그때 원장 님께서 서둘러 전하를 찾아뵙지 않은 점을 아직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계시거든요." 캐드펠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 이 난국을 무사히 헤쳐나갈 거 요." "저도 그러기를 빕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수도원에 어떤 특혜도 베풀지 않고 일반시민 들과 똑같이 대할 생각이십니다. 이 경내에서는 전하의 명령을 시행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 도 없습니다만,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수사님께서는 제게 달리 선택의 여 지가 없다는 점을 양해해주십시오." 캐드펠은 쿠셀이 내일 수도원으로 쳐들어오려는 것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그는 맡기 싫은 임무를 부여받았고, 자기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으며, 할 수만 있다며 피하고 싶다는 뜻을 사전에 밝히고 있는 것이다. 어 쩌면 곁에 있는 아가씨의 호의를 얻기 위해 정도 이상으로 싫은 척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캐드펠은 온화하게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명령에 따르는 여느 병사들처럼 당신 역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우리 교단의 모든 이들이 알아주리라 확신하고 있소. 그러니 당신 이 악명을 되리라는 걱정은 접어두시오." "저오 애덤에게 여러 차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앨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그를 세례명으로 불렀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를 그렇게 부른 것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분은 좀처럼 제 얘기를 받아들이시질 않는답니다. 사실이에요, 애덤. 당신은 자 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 있어요. 마치 직접 우리 오라버니를 죽이기라 도 한 것 처럼요.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플라망 사람들조차도 어떻게 비난할 수 있 겠어요? 그 사람들도 양심에 따라서 자기 길을 선택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어요. 그 선택 이 어떤 결과를 빚든 간에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요." "좋은 시대건 나쁜 시대건 간에 어떤 시대에도 인간은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법이오. 모 처럼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으니 아가씨가 내게 맡긴 희사품에 대해 결산보고 를 해야겠군요. 그 물건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세 영혼에게 크나큰 도움을 주었소. 물어보지 않아 이름은 모르오만 불행한 처지에 빠져 있는 그 소중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시오. 그 사람들 역시 틀림없이 아가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꺼요." 캐드펠은 쿠셀의 팔을 잡고 교회로 들어가는 앨린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다. 캐드펠은, 가족을 모두 잃고 상속된 재산마저 왕에게 모조리 바쳐버린 이 어려운 시기에 앨린이 수도원과 바깥 세상 사이에서 위태롭게 오가고 있으리라고 짐작했 다. 그 자신 원숙한 나이에 수도원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캐드펠은 그녀가 바깥 세상을 선택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가급적이면 지금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보다 훨씬 매혹적 이며. 그녀가 젊음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세상을. 캐드펠 수사는 수사들 사이에 앉으려다가 자기 자리로 들어가는 고디스를 보았다. 그녀의 빛나는 두 눈이 무언의 질문을 던졌고, 그는 나직하게 대꾸했다. "됐네! 모든 것을 내가 말한 대로 해." 이제 중요한 것은 남은 저녁시간 동안 버링가를 고디스가 움직이는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하는 일이었다. 버링가가 고디스의 움직임에 의심을 품고 쫓아다니지 못하게 하 려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해야 했다. 저녁일과를 충실히 지키는 것만으로 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저녁식사는 늘 간단하게 마련이었고, 버링가는 그와 고디스가 식당으로 들어왔을 때 분명 그곳 어딘가에 있었을 터였다. 평소에 캐드펠은 대회 의실에서 열리는 성인들의 전기를 낭독하는 공식적인 일과에 잘 참석하지 않는 수사로 이름 이 높았다. 이날도 캐드펠 수사는 그 시간에 은밀한 감시자를 뒤에 단 채로, 관절염을 앓고 있는 늙은 레지널드 수사를 만나러 진료소에 들렀다. 레지널드 수사는 그의 예기치 않은 방 문을 몹시 반겼다. 잠시 후 그는 허브밭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정문의 문지기실에서는 더욱 멀리 떨어진, 원장의 숙사에 딸린 정원으로 갔다. 그 즈음 고디스는 수련사들과의 저녁학습 을 마치고서 오두막이나 허브밭이나 정문 근처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러니 계속해서 버 링가를 자기에게 묶어두어야 했다. 원장 숙사에 정원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야 시든 장미꽃 과 카네이션을 따내는 따분한 일에 불과했지만. 그때쯤 캐드펠은 버링가가 줄곧 감시하는 지 이따금 한 번씩만 점검해보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모든 이의 귀감이 될 정도로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버링가는, 캐드펠이 워 낙 교활한 적수이므로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때 전격적으로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방심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날이 밝을 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지, 지금은 대충 지켜보는 정도로 그치려는 모양이었다. 중요한 일들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 시 작될 테니까. 마지막기도가 끝나자 수사들을 날 좋은 저녁 무렵에 흔히 그러듯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회랑으로 둘러싸인 안뜰이나 수도원 경내에서 잠시 한가로운 시간을 즐겼다. 그 즈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고, 캐드펠은 고디스가 이미 오래 전에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토롤드와 함께 있으리라 확신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자신만큼은 아직은 행동을 미루는 것이 좋 겠다고 생각하고, 캐드펠은 다른 수사들과 함께 숙사로 갔다. 교회로 이어지는 안쪽 계단을 통해 나가든 아니면 바깥 계단을 통해 나가든 간에, 넓은 뜰 건너편의 접객소에서 그를 감 시하는 자는 별 어려움 없이 그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을 터였다. 캐드펠은 안쪽 계단으로 해서 나가는 편을 선택해 그리고 교회로 들어갔다. 그는 열려 있 은 북쪽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성모 예배당과 대회의실의 동쪽 끝을 돌아 채소밭으로 들 어섰다. 캐드펠은 뒤를 돌아보거나 귀를 곤두세우지 않고서도 감시자가 멀찌감치 거리를 두 고, 그러나 항상 자신을 놓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미행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날이 꽤 어두워져 있었으나 캐드펠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는 버링가가 어둠 속 에서 얼마나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버링가는 그가 전날 밤에 말을 두 고 돌아올 때처럼 메올 시내를 건너가리라 예상하고 있을터였다. 은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라면 지위가 제아무리 높다 해도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 곁을 통과하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 캐드펠은 메올 시내를 건넌 뒤 버링가가 뒤따라오는지 확인해보려고 걸음을 멈추었다. 시 냇물의 잔잔한 흐름을 끓는 소리가, 희미하기는 했으나 또렷이 들려왔다. 캐드펠은 마음을 놓고 하류로 내려가 시내와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사람 하나만 겨우 건 너다닐 수 있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 거기서부터 시루즈베리 시내로 들어가는 돌다리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돌다리를 지나 이르게 되는 큰길 건너편에는 수도원 소유의 넓은 들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나 있었다. 캐드펠은 돌다리의 첫 번째 아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소용돌이치는 강물에 반사되는 희미한 빛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그곳에는 물방아로 쓰이던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교각 한켠의 외진 곳은 워낙 울퉁불퉁하고 비탈진 땅이 라 누구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으므로 덤불만 우거져 있었다. 그곳에는 어중간하게 자 란 버드나무들이 강물 쪽으로 허리를 숙인 채 휘늘어진 가지들을 물 속에 담그고 있었다. 그 나무들 밑으로 펼쳐진 덤불은 사람 대여섯 명은 너끈히 숨고도 남을 정도로 무성했다. 버들과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쉽게 뭍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가벼운 배는 강 쪽으로 허 리를 숙인 버드나무들 중의 한 그루에 붙잡아매인 채 유유히 강물에 떠 있었다. 평소라면 풀밭에 엎어져 있어야 할 배가 그렇게 강물 위에 떠 있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 배에는 지금 물방앗간에서 쓰는 자루에 담아서 아귀를 단단히 묶어놓은 묵직한 짐이 실 려 있을 터였다. 캐드펠은 뭔가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입장이었다. 그는 자신 이 수도원을 떠날 때부터 빈손이라는 것을 상대가 분명히 목격했으리라 믿었다. 캐드펠 수사는 배에 올라 배를 잡아묶은 줄을 풀었다. 자루에 담은 짐은 배에 실려 있었 다. 조심스럽게 들어보니 꽤 묵직했다. 그는 긴 노를 저어 다리 밑으로 배를 몰고가다가 첫 번째 아치 밑에서 고개를 들었다. 바로 위의 경사지대에 무성하게 자란 덤불 속에서, 그 덤 불보다 짙은 그림자 하나가 슬며시 움직이고 있었다. 일은 쉽게 끝났다. 버링가가 제아무리 예리한 눈을 가졌다 해도 다리 밑에서 벌어지는 모 든 일들을 상세히 볼 수는 없을 터였다. 그의 귀가 아무리 밝다해도 끝에 꽤 묵직한 것을 매단 쇠사슬이 끌어올려지면서 돌에 부딪는 소리와, 뭔가가 물 밖으로 끌려나오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다시 그 쇠사슬이 아래로 내려가며 난 덜그럭거리는 소리밖에 는 듣지 못했을 것이었고,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원래 쇠사슬에 매달려 있던 물건이 그대로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소리를 죽여 천천히 쇠사슬을 내려뜨렸다는 것과, 돌난간 위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느라 배에 숨겨놓은 짐을 살짝 세 번 강물에 담갔다 / 뺀 것만 제외하고는. 그 다음 단계의 일은 그가 버링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렸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다소의 위험이 따랐다. 캐드펠은 인간의 성향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자신의 목숨과 다른 두 사람의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일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 그 가벼운 배 를 뭍으로 저어갔다. 그의 머리 위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재빨리 높은 지대로 물러났다. 캐드 펠은 상대가 먼저 도로 근처로 가서,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든 금방 따라붙을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상대는 캐드펠이 어느 길로 갈지도 이미 정확히 예측 하고 있을 것이었다. 캐드펠 수사는 몹시 서두르는 듯한 손놀림으로 배를 버드나무에 단단 히 묶어놓았다. 남의 시선을 꺼리기라도 하듯 밤 시간을 택해 급히 서두르는 것 역시도 그 의 위장전술 중의 하나였다. 캐드펠은 다시 조심스럽게 도로로 기어올라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위에 사람이 있나 보는 척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그의 감시자는, 밤하늘을 배 경으로 한쪽 어깨에 커다란 짐을 둘러멘 채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는 캐드펠의 모습 을 뚜렷이 보았으리라. 캐드펠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황급히 도로를 가로질러, 좀전에 온 길을 되짚어갔다. 그는 시냇물 건넌 뒤에 시냇가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올라갔고, 얼마 뒤에는 전날 밤에 버링가와 함께 지나온 들판과 숲을 가로질렀다. 다행히도 그가 멘 짐은, 토롤드와 고디스가 꽤 묵직하 고 부피가 나가 보이도록 꾸려두기는 했지만 보이는 것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그러나 늙은 수사가 사 마일 남짓한 거리를 짊어지고 가기에는 영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이틀이나 연이어 잠잘 시간을 빼앗기고 이었다. 그는 두 젊은이가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고 나 면 그 다음날에는 아침기도 시간이며 뭐며 죄다 빠지고 늘어지게 잘 생각이었다. 그러고 난 뒤에는 자기가 저지를 일에 대해 응분의 참회를 해야겠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직감에 맡기는 수박에 없었다. 버링가가 자기가 어디로 이끌려가는지 정 확하게 예측하고서, 의혹을 품고 예상보다 빨리 되돌아가 계획을 깡그리 망쳐버리지는 않을 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버링가는 그 짐이 어디에 보관되는지를, 그리고 상대가 그것 없 이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광경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볼 때까지는 절대로 목적지를 함부로 넘 겨짚을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중간에 짐을 가로채려 들지는 않을까? 아니, 그럴 리도 없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가만있어도 이 늙은 얼간이가 자기가 쓸 생각으로 선뜻 말들을 숨겨준 곳으로 자진해서 짐을 옮겨주는 판국에, 무엇하러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캐드펠은 이제 상황을 전체적으로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최악의 경우까지도 꼼꼼히 생각해두고 있었다. 만일 버링가가 보화를 탈취하려고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살해했다면 지 금 그는 그때 실패한 일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일, 그러니까 첫 번째 시도 이후에 새 롭게 드러난 가능성까지도 현실로 이루려 들터였다. 캐드펠로 하여금 자신에게 유리한 장소 에 말들과 보화를 갖다놓게 했으니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이미 달성된 셈이었다. 거기에 더 해 캐드펠 수사가 말을 숨겨둔 장소로 두 사람의 도망자를 은밀히 데려올 경우에는- 캐드 펠은 사실 그럴 생각이었다- 버링가는 먼젓번의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을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혼녀를 그 아비를 잡기 위한 인질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렇게 된다면 스티븐 왕에게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그 덕분에 버링가는 바라는 지위를 확보하게 될 테고, 그가 저지른 범죄는 영원히 묻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경우였다. 그밖에도 경우의 수는 무한했다.. 버링가가 페인트리의 죽 음과는 무관하며 그저 피챌런의 보화를 추적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경우라면, 이제 그는 보화의 소재를 알아낸 셈이고 늙은 수사 하나쯤이야 자신의 부를 늘리려는 데 혹은 또 다른 목적, 그러니까 왕의 환심을 사는 데 아무장애도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느 경우 든 간에, 캐드펠은 이미 쑤시기 시작하는 어깨에 짊어진 그 애물단지 같은 물건을 말들을 숨겨둔 목장에 갖다놓으려 한 죄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터였다. 캐드펠은 마음 편히 생 각하자고 결심했다. 까짓것 암담해하지 말고 흥겨운 마음으로 결과나 지켜보지, 뭐! 둥글게 휘돌아가는 시냇물 너머 숲으로 들어서자 캐드펠은 걸음을 멈추고, 끙 하는 신음 을 내뱉으며 어깨에서 짐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쉬는 척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 가 자리에 앉은 까닭은 추적자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희미하기는 했어도 그 소리는 분명히 귀에 들려왔고, 캐드펠은 무척 흡족해했다. 좀처럼 지칠 줄 모르고 침착하기 그지없는 저 젊은이는 타고난 모험가였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한 음산하 고 냉소적인 젊은이의 얼굴이 캐드펠의 망막에 떠올랐다. 그제야 캐드펠은 그날 밤이 어떻 게 끝나게 될지 확신 할 수 있었다. 운이 따라주면-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캐드펠은 아니 니, 하느님이 축복해주신다면이라고 해야지 하며 자신을 나무랐다!- 아침기도 시간 전에 돌 아갈 수 있으리라. 캐드펠이 목장 오두막집 앞에 이르렀을 때 집 안은 불빛 하나없이 캄캄했다. 그러나 바스 락거리는 발소리만 듣고는 한 속에는 관솔불을, 다른 손에는 단검을 든 루이 수사가 밖으로 나왔다. 루이 수사는 잠에서 말짱하게 깨어서 무척이나 험악한 표정으로 어둠 속을 노려보 았다. "형제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캐드펠은 살았다 싶은 마음으로 어깨에서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드디어 다음에 토롤드 와 만날 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긴 것이다! 드디어 다음에 토롤드와 만날 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긴 것이다! 요 다음 번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 그짐을 나르 게 될 서라고. "날 안으로 들이고 문을 잠가요." "그러죠!" 루이 수사는 선선히 캐드펠이 시키는 대로 했다. 십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귀로에 오른 캐드펠은 길을 걸어가며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 다. 그러나 뒤를 밟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불길하고 위협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휴 버링가는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캐드펠 수사가 목장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테고, 거기서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빈손으로 나오는 것을 보 고서야 어둠 속으로 사라졌으리라. 휴 버링가는 아마도 홀가분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수 도원 접객소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캐드펠은 한시름 놓고 버링가와 같은 목적지를 향 해 여유 있게 걸어갔다. 이제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침기 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캐드펠 수사는 다른 수사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교 회에서 거행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숙사의 안쪽 계단을 경건하게 내려갔다. 8. 여자를 수색하라 월요일 오전, 동이 채 트기도 전에 왕의 장교들은 제각기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시루즈베 리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그 사이에 다른 장교들은 시내 전역의 모든 거리와 집들을 조직적으로 훑어나갈 태세를 갖추었다. 그 작전에는 말과 양식과 건초의 징 발 이상의 비밀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고, 그것은 군인들이 작전을 펼치면서 확실히, 그리 고 철저히 시행될 것이었다. 프레스코트는 세밀한 조사를 마치고 왕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모든 증거는 종합해볼 때, 그 여자는 틀림없이 이 근방 어딘가에 은신해 있습니다. 우리 가 발견한 주인 없이 떠돌던 말은 피첼런의 마구간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우리 군사에게 쫓겨 세 번 강으로 뛰어든 청년에게는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반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혼자 남겨졌으니 멀리 도망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전하의 자문관들은 그 여자를 생포할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애드니는 그 여자를 구 하기 위해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다른 자식이 없으니까요, 어쩌면 피챌런도 그 여자를 죽게 내버려두는 수치를 감수하느니, 차라리 돌아오는 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죽는다니? 아무렴 내가 그 여자의 목숨을 빼앗을 성싶소? 그 여자가 죽는다는 소리는 누 가 한 거요?" 프레스코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좋은 소식을 고대하면서 애태우는 아비로서는 능히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뿐입니다. 물론 전하께서야 그 여자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을 실 것입니다. 애드니를 수중에 넣으신다 해도 그에게조차 그러실 필요는 없으시겠지요. 심지어 피챌런까지도 마찬 가지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황후에게로 가서 그 편에 서서 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시루즈베리에 앙갚음을 하는가가 아니라, 전하의 군대를 보존하고 적의 군세를 줄이 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되었습니다." "맞는 말이오." 스티븐 왕은 특별히 강조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그의 분노와 증오심은 사 그라졌고, 그 대신에 타고난 너그러운 성품이 되살아나가고 있었다. 나태한 면은 물론 논외 로 해야겠지만. "내가 그 여자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싶어하는지조차도 잘 모르겠소." 그는 자신이 버링가에게, 만일 눈에 들고 싶거든 약혼녀의 행방을 알아오라고 지시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그 이래로 다소 불규칙하기는 하나 그런 대로 착실하게 모습을 보기고 있었지만 처녀의 행방을 열심히 추적하는 기미는 없었다. 왕은 버링가가 이 미 그때부터 자신의 마음을 자기 자신보다도 더욱 잘 헤아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다. "그 여자는 아무 해도 입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피챌런의 군대까지는 아니 더라도 최소한 그 여자 아비의 군대화는 싸우지 않으셔도 될 테구요. 만일 전하께서 적에 합류하려는 군세를 모두 차단하실 수만 있다면 많은 노고를 아끼실 수 있을 테고, 많은 부 하들의 목숨도 구하실 수 있습니다. 부디 이런 절호의 기회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적절한 조언이었다. 왕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무기는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가 되게 마련 이다. 일단 애드니를 생포해서 정중한 예를 갖춰 구금해 놓으면 저도 어쩔 수 없으리라. "좋소! 그 여자의 행방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시오." 징발과 수색을 진행하기 위한 사전준비는 철저히 이루어졌다. 애덤 쿠셀은 휘하의 부대와 플라망 용병 한 무리를 이끌고 수도원 정문으로 진군했다. 윌렘 텐 헤이트는 그보다 먼저 나가 세인트 자일즈 근처에 검문소를 설치한 뒤에, 시를 떠나려는 모든 행인들을 검문하게 하고 마차들을 모두 수색하게 하는 한편, 부관을 시켜 길목과 세 번 강의 나루터마다에 경 비병들을 배치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쿠셀은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수도원 문지기실을 접수해서 경비병들에게 일체의 출입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아침기도 시간 이십 분 전쯤이 었다. 날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소음은 거의 없었으나, 숙사에서 자고 있던 로버트부원 장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문지기실 쪽에서 이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감지하고, 무슨 일인 가 알아보러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쿠셀은 누가 보아도 깍듯하다고 할 정도의 경의를 표하면서, 명령을 이행할 수 있게 해달 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상대가 그렇게 예의를 갖춰서 나오는 데야, 로버트 부원장도 화가 치 밀기는 했지만 달리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스티븐 전하로부터 이 수도원 어디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해주십사고 요청하 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에서 비축하고 있는 양식과 건초의 십분의 일과, 전 하의 휘하에 있는 이들을 위해 쓰이지 않는, 쓸 만한 말들을 징발할 수 있게 해주십사고 요 청하라는 지시도 받았습니다. 또한 저는 전하를 배신한 펄크 애드니의 딸이 고디스라는 처 녀를 수색하라는 지시도 아울러 받았습니다. 그 처녀는 아직 이곳 시루즈베리 어딘가에 은 신해 있다고 합니다." 로버트 부원장은 은빛의 가는 눈썹을 치켜들고, 귀족적으로 생긴 자신의 기름한 코를 내 려다보는 자세로 입을 열었다. "설마 우리 수도원 경내에서 그 처녀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내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서 그 처녀가 있을 만한 데라고는 접객소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그런 처녀가 없소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곳에서는 그저 찾아보는 형식만 갖출 것입니다. 일단 지시를 받 았으니 이곳만 특혜를 드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 즈음 그곳에서는 수도원 소속이 아닌 하인 몇몇이 침묵을 지키고 조심스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졸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빛에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학생도 한둘 나와 있었다. 수련사들을 지도하는 수사가 나와 학생들을 숙사로 쫓아보내고는, 자신은 그 자리에 남아서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귀담아 들었다. "지금 당장 원장님께 보고드려야겠군요." 부원장은 놀랄 만큼 침착한 태도로 말하고 이내 헤리버트 원장의 숙사로 갔다. 그러는 사 이에 플라망 용병들은 정문을 닫고 그곳에 경비병을 배치하고서, 맡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 해 곧바로 창고와 마구간으로 향했다. 캐드펠은 이틀밤을 연이어서 잠을 설친 터라, 군인들이 진주한 것도 모르고 곤하게 자고 있다가, 아침기도 시간 직전에야 종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그러나 무슨 조처를 취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그는 허겁지겁 옷을 걸쳐입고 다른 수사들과 함께 교회로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수사들이 끼리끼리 두런거리고 있었다. 옆문은 잠겨있고, 플라망 용병들이 경내 를 배회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고, 마구간 쪽에서 는 비로소 자신이 허를 찔러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겁먹은 얼굴로 성당에 모여든 학생들 속에서는 고디스를 찾을 수 없었다. 아침기도가 끝나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캐드 펠을 허겁지겁 허브밭에 있는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다. 안에는 말라 가는 허브 타발들과 절구들, 병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으며, 벤치 겸 침대를 덮고 있던 담요는 치워지고, 그 자리에 갓 베어낸 라벤더 한 광주리과 병 한두 개가 놓여 있었다. 오두 막에도, 채소밭에고, 시냇가의 완두밭에도, 고디스는 보이지 않았다. 완두밭 한쪽에는 햇빛에 말라 리넨처럼 허옇게 바랜 완두줄기 더미가 헛간으로 옮겨져 건초더미와 나란히 쌓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어야 할 자루 속에 든 커다란 짐보따리는 사라지고 없었 다. 강물에서 건져내 축축하게 젖은 채로, 그 커다란 완두줄기 더미 속에서 하룻밤을 모냈을 터인데도, 완두줄기로 조심스럽게 위장하고 그 아래에 엎드려 있어야 할 작은 배 역시 보이 지 않았다. 배도, 피챌렌의 보화도, 고디스도,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고디스는 자기에게 맡겨진 무거운 책임 때문에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져서 아침기도 시간 전에 깨어났다. 그녀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밖으로 나갔다가 정문 문지기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조용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음에도 다소 부산스 러운 소리는 나게 마련이었고, 그 속에는 평소에 듣지 못한 낯선 목소리들도 섞여 있었다. 그 소리들은 엄숙한 침묵 속에서 움직이는 수사들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고, 바로 그 점이 고디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담으로 둘러싸인 허브밭에서 나올 즈음, 그녀는 말에서 내려 수도원 정문을 닫는 플라망 용병들과 부원장에게 다가서는 애덤 쿠셀을 보았다. 그녀 는 그가 자기 이름을 들먹이는 소리를 듣고 기겁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만일 그 들이 이 수도원까지도 철저히 수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면 틀림없이 자신을 찾아내지 않겠 는가. 수많은 적들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소년들과 함께 심문을 받는다면 제대로 연 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녀를 찾아낸다면 그녀가 머물던 오두막과 그 일 대를 수색해 그녀가 맡고 있는 물건까지도 찾아낼 것이다. 그녀는 캐드펠 수사와 토롤드도 지켜야 했다. 간밤에 토롤드는 그녀가 보화를 메고 무사히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 고서야 물방앗간으로 돌아갔었다. 그때 얼핏 그녀는 그와 함께 오두막에서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새벽에 쳐들어온 군대와 토롤드와의 사이에 게이에라는 넓 은 들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물방앗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에 숲이 있는데다가, 토롤드는 예리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니, 새벽에 병사들이 움직이는 소 리를 재빨리 포착할 수 있었으리라.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간밤의 일은 한바탕의 짜릿한 꿈만 같았다. 그들은 캐드펠 수사가 감시자를 다리에서 유인해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숨어 있다가 그 둘 이 사라진 뒤에 버드나무에 묶어둔 작은 배의 밧줄을 풀고 다리 아래로 갔다. 그들은 교각 의 돌벽에 닿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 조심 힘을 합쳐 쇠사슬을 잡아당겨 물이 줄줄 흐 르는 안장주머니들을 건져낸 뒤에, 캐드펠이 들고 간 짐과 똑같이 보이게끔 마른 자루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서 둘은 조용히 노를 저어 시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완두밭에 배를 대었 다. 캐드펠은 운이 좋으면 내일 밤 배가 필요할 수도 있을 테니, 배도 감춰두라고 지시했었 다. 간밤의 모험이 짜릿하고 달콤한 꿈이었다면 지금은 그 꿈에서 깨어난 셈이었다. 그녀에 게는 지금 당장 배가 필요했다. 캐드펠 수사와 연락해 지시를 받을 가망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에게 맡겨 진 물건을 당장 이곳에서 빼내야 했다. 그러나 문을 통해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 면 좋은지 일러준 사람이 곁에 없기 때문에, 모든 결정을 그녀 혼자서 내려야 했다. 다행히 플라망 용병들은 마구간과 헛간과 식품저장실을 약탈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채소밭들을 뒤질 성싶지 않았으므로, 그녀에게는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고디스는 황급히 오두막으로 돌아가 침대에서 담요를 걷어내 단지들과 절구들이 늘어서 있는 자리 뒤 긴 의자 밑에 숨겨놓고, 빈 침대 위에는 단지와 절구들을 대충 늘어놓아 선반 처럼 보이게 해두었다. 그녀는 은밀한 곳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부러 오두막 문을 열어놓았 다. 그러고 나서 고디스는 베어놓은 완두줄기더미로 살그머니 가서, 위장하느라 덮어둔 완두 줄기들을 걷어치우고 배와 자루 속에 넣어둔 짐을 꺼냈다. 다행히도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완두밭에는 줄기를 베어내고 남은 그루터기들이 고르게 깔려 있었으므로, 시냇가까지 배는 끌고 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배를 기슭에 놓아두고 완두줄기 더미로 되돌아가 보화를 들고 와서 배에 실었다. 그런 배를 타본 것은 지난밤이 처음이었지만. 마침 그녀는 간밤에 토롤드에게서 노젓는 법을 배워둔 참이었다. 시냇물의 완만한 흐름 덕분에, 배는 부드럽게 하류로 흘러갔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시냇물을 따라 세 번 강으로 내려간다면 병 사들의 감시망을 피할 재주가 없었다. 수색작전이 한창이니 큰길과 다리께에는 감시병들이 늘어서 있을 테고, 어쩌면 둑을 따라서도 죽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오두 막 앞에서 배를 타고 시냇물을 내려가면 이내 오른쪽으로 넓은 수로가 나왔고. 그 수로는 수도원의 물방앗간 앞에 있는 저수지와 이어졌다. 원래 물방아를 돌리는 데 쓰이는 물은 그 녀가 타고 내려가는 시내와는 다른 줄기에서 흘러오는 물이었다. 그 물줄기는 수도원의 양 어장에 물을 대주고 거기서 다시 흘러내려가 물방아를 돌린 뒤, 그 앞의 저수지로 들어갔다. 그 저수지의 물은 고디스의 오른편에 있는 수로를 통해 메올 시내와 합쳐졌다가 다시 세 번 강과 합류했다. 그 물방앗간 너머에는 수도원에서 지은 아담하고 깔끔한 집 세 채가 서 있 었다. 그 집들의 뜰은 물가와 바로 이어져 있고, 저수지 건너편에도 그것들과 비슷한 집 세 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다리께나 큰길에서는 그 집들에 가려 저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 고 물방앗간 바로 곁 집에는 지금 앨린 시워드가 묵고 있었다. 쿠셀은 도망자를 찾기 위해 집과 건물들을 죄다 수색할 작정이라 공언했다. 그러나 수도원 근처에서 쿠셀이 형식적으로 들를 곳을 한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그곳은 바로 앨린 시워드가 묵는 집일 것이었다. 고디스는 서투른 솜씨로나마 열심히 노를 저어, 시냇물보다 폭도 넓고 흐름도 더 완만한 수로 쪽으로 배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이 정반대이기는 해도 설마 하니 나를 이리떼에게 내던지지 않겠지. 그런 얼굴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짓 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여자와 내가 과연 정반대의 입장이기는 한 걸까? 지금은 오히 려 같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 여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왕의 처분에 맡겼지만 왕은 그 여자의 오빠를 처형하지 않았는가! 우리 아버지는 황후를 위해 당신의 영지와 목숨을 걸 었지만, 황후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만 하면 우리 아버지나 아버지의 동지들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앨린에게 오빠는 스티븐왕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이었고, 내게는 모드 황후보다 우리 아버지와 토롤드가 훨씬 소중하다. 선왕의 아들이 탄 배가 침몰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도 없었을 테고, 스티븐과 모드 양쪽 다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고, 자기들 영지에 얌전히 눌러앉아 있었을 텐데! 오른쪽으로 물방앗간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수차가 돌지 않았다. 그저 수로 의 물만 저수지로 쏟아져 들어와, 반대편 둑에 부딪혀 느릿느릿 역류해서 시냇물과 이어지 는 넓은 수로로 흘러내려갈 뿐이었다. 높이 육십 센티미터쯤 되는 이켠의 둑은, 세 집의 좁 은 뜰을 최대로 넓히려는 배려에서인 듯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그녀는 짐을 뜰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배 역시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물 쪽으로 기운 버드나무에서 뻗어나온 뿌리를 붙잡아 거기에 밧줄을 붙들어매고서 보화를 뜰의 풀밭으로 끌어올리기 시 작했다.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무게였지만, 그녀는 짐을 배 끝부분의 가로대 위로 구 려올린 다음에 두 팔로 끌어안고 있는 힘을 다해 들어올렸다. 그녀는 배가 기우뚱하지 않게 하느라고 갖은 애를 쓰며, 간신히 짐을 풀밭 끄트머리에 올렸다. 다행히도 짐은 굴러떨어지 지 않고 제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고디스는 그제야 한시름 놓여 두 팔로 짐을 감싸안 고 둑에 기대어 섰다. 처음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회의가 일었다. 내가 왜 이따위 허섭쓰레기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지금 내 관심사는 토롤드와 우리 아버지의 안위뿐인데, 참, 캐드펠 수사님이 계시 지! 내가 이 짐을 물 속에 빠뜨려버린다면 수사님은 크게 낙담하실 거다. 그분은 이 짐을 안전하게 빼돌리느라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나는 그분의 뒤를 이어 이것을 무 사히 보존해야 한다. 게다가 토롤드는 자기에게 부과된 과업을 완수하려고 몹시 신경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의 마음은 금보다 소중하다. 그래, 중요한 건 이 허섭쓰레기가 아니지. 그녀는 마음이 급해져서 지저분한 손으로 뺨과 눈가를 대충 문지르고 뭍으로 오르려 하였 다. 그러나 배가 밧줄 길이가 되는 만큼 자꾸만 뒤로 미끄러지고 있었으므로,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뭍으로 기어올랐을 때는 눈물이 아니라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 었다. 배도 끌어올리려 해보았지만, 그녀의 재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칫 잘 못했다가는 울퉁불퉁한 나무뿌리들 사이에 처박혀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 배는 다시 써야 했다. 그녀는 잔디밭에 엎드려 밧줄 길이를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해 나 무뿌리에 단단히 붙잡아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그 원수 같은 짐을 들어올려 가까스로 집 의 그늘 속에서 옮긴 뒤 문을 두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콘스턴스였다. 고디스는 그제야 시간이 채 여덟시도 안 되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앨린은 열시 미사에 참석하니까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 랐다. 그러나 수도원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았다시피 한 소란의 여파가 이 후미진 곳에도 미 친 모양인지, 가운을 걸친 앨린이 이내 하녀의 어깨 너머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자, 콘스턴스?" 앨란은, 헝클어진 머리에 지저분한 얼굴을 한 고디스가 바닥에 놓인 커다란 짐에 기대 서 서 숨을 할딱이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어 앞으로 나섰다. "고드리! 왠일이에요? 캐드펠 수사님이 보냈나요?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어요?" 콘스턴스는 깜짝 놀라 물었다. " 이 사람을 아세요, 아가씨?" "알아, 캐드펠 수사님을 돕는 이야. 얘길르 나눈 적이 있었지." 앨린은 총명한 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디스를 한 차례 죽 훑어보았다. 눈물로 얼룩 진 얼굴와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보고 앨린은 얼른 하녀를 옆으로 비켜세웠다. 그녀는 상대의 호소를 듣지 않고서도 고디스가 절망적인 처지에 빠져 있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 챘다. "안으로 들어와서, 어서! 이세 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들어 옮기죠 자! 콘스턴스 물을 닫 아!" 그들은 나무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실내로 들어섰다. 열려있는 동쪽 창으로 따뜻한 아침 햇살이 환하게 밀려들어왔다. 앨랜과 고디스는 서로를 바라보고 섰다. 푸른 가운 차림에 구름같이 피어오른 황금빛 머리 를 어깨 위로 부두럽게 늘어뜨린 앨린은 지극히 여성스러웠다. 풍덩하기 짝이없는데다가 구 겨질대로 구겨질 갈색 겉옷과, 잘 맞지도 않는 헐렁한 바지 차림의 고디스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었고, 땟국과 진땀으로 얼룩진 얼굴에는 풀물까지 푸르스름하게 들어 있었다. "난 숨을 곳을 부탁하러 왔어요. 왕의 병사들이 나를 찾고 있거든요. 붙잡으면 단단히 써먹 을 수가 있으니까요, 난 고드릭이 아니라 고디스예요. 고디스 애드니, 펄크 애드니의 딸." 고디스는 간단하게 말했다. 앨린은 고디스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큰감동을 받았다. 앨린은 이목구비가 반듯한 상대의 갸름한 얼굴에서 칙칙한 갈색 옷과 여윈 팔다리 로 시선을 옮겼다. 앨린은 다시 그 도전적이고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앨린의 두눈은 빛을 말했다. 앨린은 열린 창문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내 침실로 들어가요, 거기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거기 있으면 아무도 당신을 보 지 못할 거예요, 우리끼리 자유롭게 얘기할 수도 있구요. 어서 짐을 옮기도록 하죠. 내가 거 들어줄게요." 두 여자는 피챌런의 보화를 함께 드렁올려 침실로 옮겼다. 이 곳이라면 쿠셀도 감히 들어 올 엄두를 내지 못하리라.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앨린은 살며시 문을 닫았다. 고디스는 침대 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노곤해지면서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졌다. 그녀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앨린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왕의 적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라는 걸 아세요? 당신을 속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당신은 나를 넘겨주는 게 자신의 의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당신은 아주 정직한 분이고 조금도 날 속이고 있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스티븐 왕께 넘 긴다고 해서 그분이 나를 달리 봐줄지는 의문이예요.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렇지 않으실 않 을 거구요. 나는 남들에게서 더 나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여기서라면 안전하게 쉴 수 있어요, 콘스턴스와 나 둘이서 아무도 당신 긐처에 얼씬하지 못하게 할께요." 캐드펠 수사는 아침기도 시간과 정례화된 첫 번째 미사 시간 내내, 그리고 절차가 대폭 간소화된 수도회 평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기는 했으나, 손가락 마디들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안일함을 끊임 없이 나무라고 있었다. 그 안일함 때문에 그는 왕의 군대가 선수를 치는 동안 태평하게 잠을 자고 말았다. 수도원의 문은 굳게 닫혀 밖으로 나갈 길이 없었다. 그가 나갈 수 없다면 고디스는 더더욱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시냇물 건너편에는 병사들이 없지만 강둑에는 감시하는 병사들이 죽 깔려 있을 터였다. 고디스가 배를 타고 갔다면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상류로 가지는 않 았을 것이다. 얼마큼까지는 앞이 트여 있지만 그 너머로는 바위가 가득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아 배를 저어 가기가 불가능 한 길이니까. 그는 그녀를 생포했다는 외침이 들려올까 매순 간 마음을 졸였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에 매순간 안도했다. 똑똑한 아가씨니 무사히 빠져나갔으리라. 그들이 지키려 그렇게도 애쓴 보화를 가지고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지만. 평의회에서 헤리버트 원장은 쓰디쓴 환멸감과 피로로 그늘진 우울한 표정으로, 왕의 군대 가 수도원을 급습해서 접수했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보고하고는, 왕의 장교들이 무슨 명령을 내리든 의연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세로 따르고, 그들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본연의 직무 를 충실히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이 세상 너머의 세계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재물 을 빼앗기는 일이란 달게 감수할 시련에 지나지 않았다. 캐드펠 수사는 자신의 수확물에 관 해서는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와이 허브나 약의 십분의 일을 요구할 성싶지는 않았고, 과 일주 한두 통쯤이야 기꺼이 양보할 용의가 있었다. 원장을 열시에 열리는 대미사 때까지 조 용히 자기 할 일을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수사들을 해산시켰다. 캐드펠은 밭으로 가서 당장 눈에 띄는 자잘한 일들을 하기는 했지만 마음은 온통 다른 곳 에 가 있었다. 날이 훤히 밝은 뒤에 도 메올 시내를 건너서 근처 어딘가에 있는 숲으로 피 신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 거추장스러운 보화를 들고 갈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러기에는 너 무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디스는 보화를 갖고 가기 위해 오두막과 그곳 근처 에서 병사들이 이상하게 여길 흔적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배를 타고 가는 편을 선택한 것 이었다. 캐드펠은 고디스가 시냇물과 강이 합류하는 곳까지 가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그 랬다가는 진작에 붙잡혔을 테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도 고디스가 붙잡혔다는 소식 이 들리지 않자, 그의 마음은 조금씩이나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어디 있든 간 에, 고디스는 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할 터였다. 게다가 추수가 끝난 들판 너머, 지금은 쓰이지 않는 물방앗간에는 토롤드가 있었다. 적절 한 순간에 생소한 움직임을 파악했다면 숲으로 피신하지 않았을까. 캐드펠은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저물기 전에 군대의 작전이 끝난 다면 날이 어두워진 뒤에는 없어진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테고, 그렇게만 된다면 오늘밤 안으로 그들을 서쪽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어쩌면 오늘밤이야말로 가장 좋은 기회가 될는지 도 몰랐다. 수색을 맡은 병사들은 시 전역의 검문과 수색을 끝낸 뒤라 탈진해서 경계를 소 홀히 할 테고, 시민들은 불만이 가득해서 그날 일어난 일들에 대해 떠들어대느라 정신없을 테고, 수사들은 시련의 시간이 끝난 것에 대해 열렬한 감사 기도를 올리는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지 않겠는가. 캐드펠은 미사에 참석하려고 널찍한 뜰로 나갔다. 뜰에는 창고에서 징발한 곡식자루를 실 은 군용마차들이 늘어서 있었고, 마구간 쪽에서는 플라망 용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 다. 괜찮은 말을 타고 여행하다 이곳에 발이 묶인 여행객들이 놀라서 뜰로 뛰어나와 말을 돌려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병사들과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으나, 자신들이 왕을 위해 일하 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으면 헛일이었다. 늙은 말이나 쓸모없는 말들만이 간신히 징발 을 면했다. 병사들은 수도원 마차 한 대와 그 마차를 끌 짐말들을 징발해 그곳 창고에서 실 어낸 밀을 실었다. 그때 정문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그 커다란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은 경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대담하게도 그 한켠에 달 린 쪽문을 두르리면서 들여 보내달라고 한 것이었다. 혹시 왕의 병사이거나 세인트 자일즈 의 검문소나 왕의 진영에서 온 연락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경비병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황금빛 머리를 하얀 모자와 베일로 말끔하게 가리고 한 손에는 기도서를 든 앨린 시 워드가 나타났다. "난 교회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앨린은 상냥하게 말했다. 그녀는 앞을 가로막고 선 병사들이 잉글랜드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프랑스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병사들이 그녀를 들이지 않으려고 문을 닫으려 하는 찰나, 한 장교가 그쪽으로 급히 다가갔다. "전 메시르 쿠셀에게서 미사에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제 이름은 앨린 시워드 예요.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그분께 물어보세요." 병사들은 급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정말로 그런 특전을 부여받았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곧 쪽문이 열렸고, 병사들은 뒤로 물러서서 그녀를 통과시켰다. 그녀는 북새통을 이룬 넓은 뜰을 태연하게 가로질러서 교회의 남쪽 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분주하게 설쳐대 는 병사들과 그 병사들과 그 병사들에게 사정하면 매달리는 여행객들 틈새를 비집고 교회에 서 나오는 캐드펠 수사를 보더니 걸음을 늦추었다. 그녀는 그에게 의례적인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고드릭은 제 집에 잘 있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캐드펠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해진 뒤 우리 아가씨를 보러 가겠소." 캐드펠은 앨린이 고드릭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있을 텐데도 '우리 아가씨"라는 말에 살 그머니 미소짓는 것을 보고 그녀가 이미 사태의 전망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는 소리를 낮춰 물었다. "배는?" "제 집 뜰 앞에 있어요." 그러고서 그녀는 교회로 들어갔다. 캐드펠 수사는 갑자기 큰짐을 내려놓은 듯 가뿐한 마 음으로, 다른 수사들이 열지어 서 있는 곳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토롤드는 시루즈베리 성 동쪽에 있는 숲 가장자리의 한 나무에 올라앉아, 물방앗간에서 가져온 빵과 수도원 과수원 밖으로 뻗어나온 사과나무에서 딴 설익은 사과 두 알을 먹고 있 었다. 거기서는 강 건너 서쪽으로 거대하게 치솟은 성벽과 탑뿐만 아니라, 그 오른쪽으로 멀 찌감치 떨어진 숲속에 자리잡은 왕의 진영 막사들까지도 볼 수 있었다. 지금쯤 대개의 병사 들이 시내와 수도원에서 바삐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왕의 진영은 텅 비어 있을 터였다. 토롤드의 몸은 이 갑작스런 위기상황에서 만족스럽다 할 만큼 마음먹은 대로 잘 따라주었 다. 솔직히 말한다면 놀라울 정도였다. 괴롭기로는 몸보다 마음 쪽이 더했다. 그의 잎이 무 성한 이 아늑한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 고작일 뿐 아직 멀리까지 걸을 수도, 큰 힘을 쓸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움직여도 손상된 근육들과 허벅지의 상처에서 별다 른 통증이 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토롤드는 몹시 기뻐했다. 어깨에는 약간의 통증이 있 었으나 그 역시 팔을 움직이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을 가 장 괴롭히고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의형제 같은 존재에서 갑자기 배다른 누이나 그보다 더 가까운 어떤 존재로 바뀌어버린 고디스의 안위였다. 물론 그는 캐드펠 수사를 신뢰했다. 캐 드펠 수사의 넓고 다부진 어깨는 믿음직했다. 그러나 캐드펠 한 사람의 어깨에 그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토롤드는 근심걱정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계속해서 훔친 사과를 깨물어 먹었다. 앞을 있는 힘을 모두 써야 할 때가 오지 않겠는가. 순찰하는 병사들이 그와 세 번 강 사이에 놓인 강둑 위를 교대로 오락가락하고 있었기 때 문에, 토롤드는 그들이 수도원이나 다리 쪽으로 완전히 철수하기 전까지는 감히 움직일 엄 두조차 낼 수 없었다. 토롤드는 시 외곽을 도대체 얼마큼이나 멀찍이 돌아가야 왕의 군대가 친 비상선을 피할 수 있을지 도무지 종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는 물의 흐름을 따라 전달되어온, 다리께에서 이는 뚜렷한 소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 었다. 그 소리는 지속적으로 들려와 그의 잠을 방해했다. 수많은 기병과 보병들이 물 위로 높이 솟아오른 아치 다리를 딛고 통과하는 소리, 말발굽 소리와 사람의 발소리들이 뒤섞인 그 소음은 강물을 탁 멀리까지 퍼져나갔으며, 물방앗간에 물을 대주는 수로의 물과 물방앗 간의 나무 벽과 바닥판자들이 그 소리를 그의 귀에까지 전해준 것이었다. 그는 기겁해서 벌 떡 일어나 본능적으로 옷부터 꿰어입고서, 자기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 물건들을 주 섬주섬 거둬들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병사들이 다리 끝에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가 고 있었다. 토롤드는 더이상 꾸물거리지 않았다. 틀림없이 철저하게 입체적인 수색작전이 펼 쳐지고 있었다. 그는 물방앗간 안에서 자기가 머물렀던 흔적을 죄다 없애고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은 모조리 강물에 버리고는, 살그머니 물방앗간을 빠져나와 수도원 땅의 경계를 넘어섰 다. 토롤드는 강둑으로 다가오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성 반대편에 있는 숲 가장자리로 들어 갔다. 그는 그 대규모 수색작전이 누구를, 혹은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누가 붙잡힐지는 자명했다. 이제 그의 단 하나의 목표는, 지금 어디 있든 간에, 고 디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의 방패막이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이곳을 빠 져나가 안전한 노르망디로 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강둑을 따라오던 순찰병들은 고디스가 처음 그에게 다가왔던 덤불을 뚫고 나가느라 두 패 로 나누어졌댜. 그들은 이미 빈 물방앗간을 수색했으나 고맙게도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마음을 놓고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내려와 숲속 깊이 들어갔다. 다리 근처에서 세인트 자일즈를 지나 런던까지 이어지는 간선도로 주 변에는 가게들과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으므로,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이렇 게 동쪽으로 나아가다 세인트 자일즈 너머 어딘가에서 그 도로를 가로지르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소동이 완전히 끝난 뒤에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소동이 완전히 끝난 뒤에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편이 나을까? 문제는 이 소동이 언제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데다가, 고디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자코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나가는 쪽을 택한다면 온갖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도로를 가로지르고 시냇물을 건너기 전에 먼저 세인트 자일즈까지 가야했다. 설령 시냇물 자체는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 도, 수도원의 채소밭 건너편까지 접근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채소밭에서 가까운 곳에 은신처를 찾아 엎드려 망을 보고 있다가 기회를 틈 타 재빨리 완두줄기 더미 속으로 숨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서도 계속해서 주위가 잠잠하면 허브밭이나, 고디스가 지난 일주일 밤을 안전하게 보낸 곳이지만 그는 아직 가보 지 못한 오두막으로 숨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앞으로 나아가 비상선을 빙 둘러가자. 뒤로 물러선다면 어차피 다리 끝 부근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는 병사들이 어두워 질 때까지, 아니 어쩌면 밤새도록 진을 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앞으로 나아가려니 급하게 내닫는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토롤드는 무척 짜증스러웠다. 군대가 불쑥 쳐들어오는 바람에 놀라고 분개한 주민들이 몹시 동요한 상태였으므로 더더욱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이렇게 좁은 바 닥에서는 동네사람들이 서로를 일가붙이처럼 훤히 잘 알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들에게 토롤 드는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일 테니, 자칫 눈에 띄었다가는 대번에 엄청난 소란이 일 것이었 다. 중심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군대의 급습으로 한바탕 소동을 겪으면서 몹시 충격을 받 아 대개가 집에 틀어 박혀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이들은 가축을 돌보거나 밭을 길 러 나왔다가 뒤늦게 낯선 소리를 듣고서,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길 쪽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토롤드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마 음만 졸이며 괴로운 낮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결국 윌 렘 텐 헤이트의 부하들이 철저한 검문과 수색을 벌이는 검문소를 멀찍이 빠져 지나갈 수 있 었다. 그즈음 검문소에는 행인들에게서 압류한 물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말도 열 필 넘게 매여 있었다. 그곳은 시루즈베리 시내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주택가였다. 검문소 너 머로는 넓은 들판에 드문드문 작은 부락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검무소로부터 반 마일 쯤 지난 곳은 인적이 드물었다. 토롤드는 그곳에서 재빨리 도로를 가로질러가 그 일대의 지 형과 방위를 가늠하면서, 다시 한번 시냇물 위켠의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곳에는 두 가닥의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먼 쪽은 원래의 시내이고, 가까운 쪽은 그 시내의 상류 쪽에서 둑을 막아 끌어낸 물방아에 물을 대는 수로였다. 토롤드는 이제 서쪽으 로 서서히 기울고 있는 저녁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번쩍이는 두 가닥의 물줄기를 볼 수 있 었다. 저녁기도 시간 가까운 무렵이었다. 지금쯤 스티븐 왕의 군대는 시와 수도원의 약탈을 끝내지 않았을까. 토롤드가 들어선 골짜기는 무척이나 협소하고 가팔라 인가가 전혀 없었으며, 양들만이 한 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토롤드는 골짜기가 트이는 곳으로 내려가 수월하게 물방아 수로 를 건너, 그곳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시냇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토롤드는 밭 하나를 내달려 두둑에 몸을 숨겼다가 다른 밭을 가로지르는 과정을 반복 하며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저녁기도 시간쯤에 토롤드는 수확이 끝난 완두밭 맞은편의 매끄러운 풀밭에 이르렀다. 그곳은 앞이 활짝 트여 있어 있었으므로, 그는 시냇가에서 얼마쯤 후퇴해서, 전망이 잘 보이면서도 몰을 숨길 수 있는 잡목림으로 들어갔 다. 거기서는 허브밭을 둘러싼 담 너머로 수도원 건물들의 지붕과, 그보다 더 높다란 교회 지부이며 탑들이 똑똑히 보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완만한 경사를 이룬 수확이 끝난 완두밭이며, 고디스가 그가 열아홉시간 전에 배와 보화를 숨겨두었던 완두줄기 더미며, 허브밭을 둘러싸고 있는 황갈색 담이며, 오두막의 가파른 지붕 들.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하지만 하루해가 완전히 저물 대까지는 얼마간 더 기다 려야 했다. 기다리지 않으려면 기회를 봐서 시냇물을 가로질러 완두줄기 더미까지 달려가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다. 이따금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일을 하느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양떼를 몰고 집으로 가는 양치기, 숲에서 버섯을 따 가지고 나오는 아낙과, 거위를 몰고 가는 그 아낙의 두 아니, 그가 점잖게 인사를 하며 그 곁을 천천히 진치면 그 들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숲에서 뛰쳐 나와 시냇물을 건너 수도원의 밭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누군가가 목격한다면 이상하게 생각 하고 대번에 고함을 칠 터였다. 수도원 경내에서는 아직도 병사들의 외침이며 명령을 내리 는 소리, 마차와 마구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날아왔다. 게다가 시 냇물 이켠 하류 쪽에서는 어떤 사내가 말을 타고 토롤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수도원에서 담으로 막히지 않은 유일한 통로인 그쪽 방면을 지키기 위해 파견나왔는지, 천 천히 말을 몰며 풀밭을 질러오고 있었다. 산책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유유히 움직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감시를 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눈에 띄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지만 그것만으 로도 충분했다. 사내가 고함을 치거나 두 손가락으로 입술을 모아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기 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플라망 용병 열댓 명이 몰려오지 않겠는가. 토롤드는 덤불 속 깊이 들어가서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탄 크림빛과 짙은 잿빛 얼룩이 진 덩치 큰 말은 늘씬하고 튼튼해 보였으나 그다지 잘생긴 축은 아니었다. 말 주인 인 남자는 여윈 몸매에 검은 머리와 올리브빛 피부를 가졌고, 거만하면서도 음침해 보이는 인상에 ,방만하다 할 정도로 여유있게 말을 몰고 있었다. 토롤드의 관심을 끈 것은 무엇보다 도 밝고 화사한 빛깔의 안장과 그 말의 특이한 얼룩무늬였다. 그 말은 바로 새벽녘에 강변 을 따라 다가오던 순찰병들의 선두에 선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내가 말에서 내려 , 잠 시 후에 병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고, 얼마 후에 그들이 다시 밖으로 나오자 그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었다. 딴에는 조심한다고 했지만 혹시 의심을 살 증거는 나오지는 않을 까 두려워 하고 있었으므로, 토롤드는 상대를 세심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은 분명 아침에 본 그 말이고, 사람도 그 사람이었다. 사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무관심한 표 정으로 토롤드의 앞을 지났지만 토롤드는 속지 않았다. 얼핏 무심히 주위를 둘러보는 듯한 사내의 눈빛은 섬뜩하다 싶게 예리하고 강렬하였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 하나 놓 치지 않을 성싶었다. 그러나 이제 사내는 토롤드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며, 저물 녘의 들판에는 그 사내말고 는 아무도 보이지 낳았다. 만일 사내가 계속 길을 간다면 시내를 건널 수 있으리라. 서두르 다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해도 시냇물에서 익사할 염려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여름밤이 라 그리 춥지도 않을 테고. 토롤드는 가야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디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터였다. 왕의 장교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평탄한 들판 끝을 향해 태평하게 나아갔다. 주 위에는 다른 사람도 없었다. 순간 토롤드는 벌떡 일어나 활짝 트인 풀밭을 가로질러 시냇물 로 뛰어 들었으며, 타고난 민첩함과 행운 덕분으로, 별탈 없이 얕은 데를 골라 딛고 추수가 끝난 완두밭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두더지처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완두줄기 더미 로 낮게 포복해갔다. 아침부터 충격적인 일들을 계속 겪은 터라, 토롤드는 배와 보화가 사라 진 것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는 햇빛에 바싹 말라 빳빳한 크림빛 레이스처럼 된 따뜻한 완두줄기들을 주위로 끌어모으고, 몸을 몇 번 뒤채 자리를 고른 뒤에,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몸을 덮은 줄기들 사이로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그 순간 얼룩빼기 말을 탄 사내도 무언가를 느낀 듯싶었다. 사내는 문즉 말머리를 돌리더 니 꼼짝하지 않고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내는 좀전처럼 느긋하게, 그러나 예리하게 주위의 동정을 살피면서 몇 분쯤 옴쭉도 않더니, 이윽고 천천히 하류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 했다. 토롤드는 숨을 죽이고 상대를 주시했다. 사내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그 시간에 그 풀밭을 오락가락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내는 한가롭게 말을 몰았다. 그러나 완두밭 건너편에 이르자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더니, 메올 시내 건너편을 지그 시 응시했다. 사내는 완두줄기 더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토롤드는 사내의 거무스레한 얼굴에 은밀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사내가 고삐를 쥔 손을 쳐들어 살짝 움직인 것을 자신에게 보내는 가벼운 인사일 수도 있겠다고 여 겼다.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가. 전적으로 상상이 빚어낸 환영에 불과하리라! 사내는 물방앗 간 쪽에서 흘러나오는 수로와 그 너머로 시내와 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바라보며. 다시 하류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토롤드는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완두줄기들로 몰을 덮고 푹신한 풀밭에 누워서 두 팔로 머리를 괴었다. 그는 한꺼번에 덮쳐오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해 이내 곯아떨어졌다. 깨 어났을 째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고, 주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토롤드는 얼마 동안 그대 로 누워서 주위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다가 완두줄기 더미에서 기어나왔다. 이윽고 그는 완 만한 경사를 이룬 완두밭을 슬며시 기어올라가 캐드펠의 허브밭으로 숨어들어갔다. 밭에는 낮의 햇빛으로 달아오른 수많은 허브의 알싸한 향내가 넘치고 있었다. 그곳에 오두막이 있 었다. 그를 반기기라고 하듯 오두막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토롤드는 따듯한 침묵과 어둠 이 감도는 실내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맙소사!" 캐드펠 수사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얼른 토롤드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네가 이리로 오리라 생각해서 삼십 분마다 여기 들렀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구먼. 여 기 앉아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게. 우린 위기를 무사히 벗어났어!" 토롤드는 낮으면서도 절박한 목소리로 지금 그에게 중요한 단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고디스 아가씨는 어디 있습니까?" 9. 목숨을 건 내기 토롤드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고디스는 앨린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 다보고 있었다. 콘스턴스는 그녀가 좀더 잘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들고 좀 떨어진 곳에 섰다. 말끔히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고, 갈색과 황금색 실로 수놓은 앨린의 비단 가운을 걸치고, 고수머리에 앨린의 가는 금빛 머리띠를 맨 고디스는 다시 여성으로 돌아간 것이 기뻐 자신 의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보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이제 선머슴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미모를 자각하고 있는 단아한 젊은 숙녀의 그것이었다. 고디스는 거울을 들 여다보며 새삼 찬탄했다. 부드러운 촛불빛 덕분에 그 얼굴은 그녀가 보기에도 신비롭고 낯 설었다. "그이가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그녀는 이제까지 캐드펠 수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토롤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는 것을 잠시 앚고 아쉬운 듯 말했다. 지금 고디스는 심지어 앨린에게조차도 토롤드의 신상 에 관해서나 그가 맡은 임무에 대해서 일체 발설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그것은 앨린에게 빚을 진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앨린은 관심과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그런 분이 있나요?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당신을 호위해줄 그런 분인가요? 아니,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지. 이런 걸 묻다니 온당치 못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분을 위해서 그 드레 스를 입고 갈 수는 없나요? 일단 이곳을 벗어나면 원래의 모습으로 여행할 수 있지 않겠어 요?" 고디스는 서글프게 말했다. '좀 힘들 거예요. 적어도 우리가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요." "그럼 이 옷을 가져가세요. 그 큰 짐 속에 넣으면 되잖아요. 난 그것말고도 옷이 많으니까 요. 그걸 가져가지 않으면 안전한 곳에 닿았을 때 입을 옷이 없어서 아쉬울 거예요." "아, 그 말이 내게 얼마나 유혹적으로 들리는지 아세요! 당신은 너무나 친절한 분이에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출발해서 처음 얼마 동안은 갖고 갈 짐이 아주 많을 거구요. 친절 한 마음은 정말 고마워요.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고디스는 재미 삼아 앨린의 드레스를 모두 입어보았고, 콘스턴스는 기꺼이 그녀를 도와주 었다. 고디스는 옷 한 벌 한 벌을 갈아입을 때마다 아무 예고도 없이 토롤드 앞에 불쑥 나 타났을 대 그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그리고 경탄어린 눈길로 자신을 훑어보는 모습을 상상 해보았다. 그녀는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가 잘 있으리라는 것 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며 더없이 행복한 오후를 보냈다. 언제든 토롤드는, 이 옷이 아니라 다른 근사한 옷을 입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다시 길어진 머리를 땋아내리거나 아니면 앨린 의 머리띠와 같은 황금빛 머리띠로 가지런히 빗어넘긴 화사한 그녀를 보게 되리라. 그러다 가 고디스는 토롤드와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자두를 나눠먹으며 그 씨들을 물방앗간 마루판 자 사이로 세 번 강물에 떨어뜨리던 일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토롤드 앞에서 한껏 재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가 머리띠를 풀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들은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어 기겁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여기도 수색하러 왔을까요? 내가 당신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 아닐까요?" 고디스가 겁먹은 얼굴로 속삭였다. "아네요.! 오늘 아침에 애덤이 분명히 얘기했어요. 절대로 날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구요." 그러더니 앨린은 결연히 일어섰다. "당신은 콘스턴스와 함께 여기 있어요. 문은 잠그구요. 내가 가볼게요. 지금 시간에 캐드 펠 수사님이 당신을 만나러 오실 수 있을까요?" "아뇨, 아직은요. 지금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걸요." 더없이 정중한 노크였으나 그럼에도 고디스는 잠긴 문 뒤에 쪼그리고 앉아 숨을 죽이고서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온 정신을 쏟았다. 앨린이 방문객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방문객은 남 자였다.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무척이나 예의바르게 말하고 있었다. "애뎀 쿠셀 씨네요.!" 콘스턴스는 그렇게 속삭이더니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사람처럼 비죽이 웃었다. "우리 아가씨한테 푹 빠져 기회만 있으면 찾아오는 분이세요!" "저분......앨린은요?" "그거야 모를 일이죠! 아니 아가씨 쪽은 그렇지 않아요, 아직은요!" 고디스는 오늘 아침에도 문지기실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짐꾼들과 일꾼들에게 지금과 는 전혀 다른 말투로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그러나 오늘 그가 맡은 임무는 결코 즐겁지 않 은 일이었을 테고, 품위 있는 사람까지도 퉁명스럽고 고압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성질 의 것이었으리라. 앨린의 기분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저 헌신적이고 사려 싶은 태도야말 로 참된 그의 본모습일 터였다. "오늘 일어난 소동으로 언짢아하시지나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이제 시끄러운 일도 다 끝 났으니 편히 쉬실 수 있을 겁니다." 앨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전 전혀 성가지지 않았어요. 별 불만도 없구요. 신경써주셔셔 고맙습니다. 하지만 물자를 징발당한 사람들은 좀 안됐어요. 시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쿠셀은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네, 내일도 계속됩니다. 하지만 수도원은 이제 조용할 겁니다. 여기 일을 끝냈으니까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찾고 있다는 그 아가씨는 찾으셨나요?" "아뇨, 못 찾았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전 기쁘군요."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전 아가씨를 존경합니다. 아가씨가 그 누구도 위험스러운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 생포당하는 일 따위를 겪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저 도 잘 압니다. 그러니 아무 죄없는 처녀의 경우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저는 앨린, 당신 에게서 무척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쿠셀이 "앨린......" 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 가 너무 낮아서 고디스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사실, 그 어조가 너무도 은근하고 간절 했으므로 그녀는 애써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잠시 후 앨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밤 제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시기는 어려울 거예요. 여러 가지 일들로 마 음이 아팠거든요. 저 역시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피곤하구요, 당신도 그러시겠죠! 오늘밤에 는 푹 자게 해주세요.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적당한 때가 곧 오겠죠." "맞습니다!" 쿠셀은 다시 근무중이 군인의 절도 있는 자세로 돌아갔다. "용서해주십시오.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는데. 이제 제 부하 대개가 수도원을 빠져나 가고 있고 저 역시 뒤따를 테니 편히 쉬십시오. 한 십오분쯤 병사들이 행군하는 소리와 마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겠지만 그 뒤에는 조용해질 겁니다." 말소리가 희미해졌다. 고디스는 현관문이 열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 말이 오고 간 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빗장을 지르는 소리가 나더니 앨린이 침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갔으니 문 열어도 돼요." 앨린은 불쾌감보다는 개인적인 일을 들킨 것 때문에 당화스럽고 곤혹스러워 발갛게 상기 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당신을 숨겨주었다고 해도 그분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았나봐요. 그분은 당신을 찾아내지 못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거든요." 그러면서 앨린은 생긋이 웃었다. 애덤 쿠셀이 그 표정을 보았더라면 몹시 기뻐했을 터였 다. "병사들은 모두 떠날 거예요. 이제 끝났어요. 우리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만을, 그리고 캐드펠 수사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돼요." 허브밭의 오두막에서 캐드펠 수사는 자신의 환자를 안심시킨 뒤에 먹을 것을 주고 치료해 주었다. 토롤드는 처음 던진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나자 순순히 고디스의 침대에 누워 캐드펠에게 어깨와 허벅지의 상처를 내맡겼다. 허벅지의 상처는 이미 아물었지만 그럼 에도 캐드펠은 조심스럽게 붕대를 대고 꼼꼼히 싸맸다. "오늘밤 말을 타고 웨일스로 떠나게 될지 모르니까 상처가 도지지 않게 해야 하네. 그렇 게 되면 다음으로 미뤄야 할 테니까. 이 상처는 조금만 자극을 줘도 다시 터질 염려가 있 어." 토롤드는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오늘밤이요? 오늘밤에 떠난다구요? 고디스 아가씨와 함께 말씀이십니까?" "그래야지. 오늘밤이 적당한 때일세. 나도 이런 상황을 오래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자네들이 딱히 부담스러운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오웨인 귀네드의 나라로 무사히 떠나보내 야 내 마음이 편하지. 신표을 줄 테니 그걸 갖고 가다가 가장 먼저 만나는 웨일스인에게 보 이도록 하게나. 자네가 이미 오웨인께 드릴 피챌런 씨의 추천장을 갖고 있고, 오웨인께서도 약속을 지키기는 하시겠지만 그래도 내 신표를 보이는 편이 나을 게야." 캐드펠은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에 대해 내심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짐짓 이렇게 말했다. 토롤드는 진심에서 우러나 힘있게 맹세했다. "말을 타고 출발하고 난 뒤로는 제가 고디스 아가씨를 잘 돌보겠습니다." "고디스도 자네를 잘 돌봐줄 걸세. 이제까지 자네를 치료한 이 약병을 맡길 생각이니까. 그밖에도 고디스가 필요로 할 만한 것들도 갖춰주겠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배와 짐까지 감쪽같이 처리한 아가씨죠!" 토롤드는 그 일을 생각하면서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일을 그렇게 침착하게 처리할 수 있는 아가씨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고디스 아가씨를 숨겨준 아가씨도 참 대단한 분입니다! 수사님께 그 소식을 전 해주기 까지 했으니까요! 바로 이 시로프셔가 그렇게 뛰어난 두 아가씨를 배출해낸 곳이죠." 토롤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토롤드는 무엇엔가에 골몰한 표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아가씨를 어떻게 빼낼까요? 그자들이 경비병을 남겨두었을 텐데. 저는 문으로는 나 갈 수가 없어요. 문지기가 제가 그리로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게다 가 배는 수도원 밖에 있구요." 캐드펠은 붕대 끝을 맵시 있게 여미면서 말했다. "잠깐만. 내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게나. 자네는 오늘 하루 어떻게 했나?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행동한 듯한데. 그곳에서 용케 빠져나왔고 물방앗간에 대해서 별다른 소문이 없는 걸 보니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말끔히 없앴나보이. 병사들이 오는 것을 금방 눈치챘던 모 양이지?" 토롤드는 캐드펠에게 출발했다 멈추고, 달리다 숨고, 한 자리에서 한없이 오래 꾸물거리다 허겁지겁 서두르고 하는 일들로 점철된, 그 길고 위험하고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지루했던 하루를 이야기했다. "강둑과 물방앗간을 수색하던 병사들을 봤습니다. 말탄 장교 하나가 무장한 보병 여섯을 지휘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저는 제가 있던 흔적을 말끔히 없앴습니다. 그장교가 먼저 물방 앗간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부하들을 들여보내더군요. 그런데 조금있다가 그 사람을 다시 봤 어요." 토롤드는 갑자기 그 우연한 일이 떠올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제가 시냇물을 건너 그 완두줄기 더미로 뛰어들었을 때 그 사람을 다시 봤어 요. 그 사람은 말을 타고 혼자서 건너편 둑을 오락 락하고 있었죠. 강과 물방아 수로 사이를 요. 그 사람이 탄 말과 안장을 보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죠. 저는 그 사람이 제게 등 을 돌리고 가고 있을 때 시냇물을 건넜는데, 그 사람이 말을 되돌려와 바로 제 맞은편에 서 더니 한동안 제가 숨어 있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더군요. 저는 그 사람이 제가 거기 숨어 있 다는 것을 아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저를 바라보는 것 같았거든요. 빙긋이 웃기까지 했구요! 이제 들켰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냥 가더군요, 결국은 저를 못 본 겁니다." 캐드펠은 깊은 생각에 잠겨 약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조용히 물었다. "말을 보고 아침에 본 장교인 줄 알게 되었다고 했나? 그 말의 뭘 보고 알았지?" "크기와 빛깔로요. 덩치가 무척 크고 깡마른 긴 다리로 성큼 성큼 걷는 말이었는데, 잘생 기지는 않았지만 튼튼해 보이기는 하더군요. 배부분은 크림빛에, 등과 옆구리에 거무수레한 얼룩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캐드펠은 갈색으로 그을은 뭉뚝한 코를 문지르더니 더욱 짙은 갈색을 띤 정수리 부분을 긁적이며 물었다. "말 주인은 어떻던가?" "저보다 몇 살 더 먹었음직한 청년이었습니다.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체구는 호리호리했구 요. 오늘 아침에 본 것 중에서 기억나는 건 그 사람이 입은 옷과 말을 타는 태도였습니다. 다루기 힘든 사나운 말 같아 보이는데도 아주 느긋하게 몰고 다니더군요. 하지만 오늘 저녁 에는 얼굴도 똑똑히 봤습니다. 살집이 별로 없는 깡마른 얼굴에 눈썹과 눈동자가 시커멨어 요. 그리고 휘파람을 불더군요." 토롤드는 갑자기 그 소리가 기억 나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아주 간드러지게요." 그 친구로군! 캐드펠도 그 휘파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 역시도, 좀더 나은 두 마리 말을 딴 곳으로 빼돌린 뒤 수도원 마구간에 남겨진 두 마리 말 중 한 마리였다. 말 주인은 두 마리는 바칠 의향이 있으나 네 마리 다는 못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징발이 끝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두 마리 중의 한 마리를 타고 있었고, 아마 다른 한 마리 역시 그의 소유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는 이미 왕의 신임을 얻었고, 오늘의 기습에도 참모로 참여했다. 특별히 부여된 어떤 임무를 띠고서?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그 임무를 선택했을까? "자네가 시내를 건너는 걸 그 사람이 본 것 같나?" "완두줄기 더미에 몸을 숨기고 나서 살펴봤더니 그 사람이 제 쪽으로 돌아서더군요. 그때 저는 제가 움직이는 걸 그 사람이 곁눈으로 언뜻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는 머리전체에 눈이 달렸다. 주의할 필요가 없는 것말고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캐드펠은 태연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말을 세우고 자네 쪽을 쳐다보더니 말을 타고 가버렸다고 했나?" "저는 그 사람이 고삐 쥔 손을 살짝 쳐들어 제게 아는 척을 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 다." 토롤드는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냐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고디스 아가씨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골몰해 좀 제정신 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엉뚱한 환각을 봤구요. 하지만 그 순간 그 사람은 고개를 돌 리더니 전처럼 느긋하게 말을 몰고 가더군요. 그러니 결국 절 보지는 못한 거죠." 캐드펠은 내심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 못했다. 캐드펠은 그 이야기가 함축하는 뜻을 헤아 려보았다. 어둠이 내려 밤이 오면 머지않아 새벽빛이 밝아오는 법이다. 주위는 아직 완전한 어둠에 잠기지 않았다. 해가 지고 난 뒤 서쪽 하늘가에 초록색의 잔광이 남은 어스름녁. 새 벽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첫 서광의 조짐은 이미 보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절 보지는 못했겠죠?" 토롤드는 자신이 고디스에게 위험을 몰고 오지는 않았나 두려워하면서 물었다. 캐드펠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게나. 다 잘 됐으니 신경 쓰지 말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 난 마지막기도를 드리러 갈 걸세. 그 동안 자넨 문을 꼭 걸어 잠그고 고디스의 침대에 누워 한 시간쯤 눈을 붙이게. 새벽녘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테니까. 끝나는 대로 곧 돌아오겠네.." 그러나 캐드펠은 바로 교회로 가지 않고 마구간 주위를 돌아다니느라 몇 분을 보냈다. 그 는 마구간에 얼룩빼기 말과 등이 넓적한 갈색의 코브 종 말이 없는 것을 보고도 그다지 놀 라지 않았다. 캐드펠은 마지막기도가 끝난 뒤 별 용무도 없이 접객소에 들러보았다. 귀족들 이 묵는 구역에서는 휴 버링가가 보이지 않았고, 평민들이 묵는 구역에서는 그의 부하 셋이 보이지 않았고 평민들이 묶는 구역에서는 그의 부하 셋이 보이지 않았다. 수도원의 문지기는 저녁기도가 끝날 즈음 버링가가 수색작업을 마치고 들어왔고 곧바로 그 의 부하 셋이 밖으로 나갔으며, 버링가도 한 시간쯤 지난 뒤에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수도원을 나갔다고 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군. 캐드펠은 생각에 잠겼다. 휴 버링가는 오늘밤 벌어질 일이 과감히 뛰어들었으며 그 내기에 기꺼이 생사를 걸었다. 그가 그렇게 대담한데가 내 마음을 빈틈없이 읽어내고 있으니 나 역시 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하자. 나 역시 대담하게 승부를 걸고, 글쎄, 그렇다면 왕의 휘하로 들어가겠다는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자기 말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버링가가 말들을 옮기고 싶어한 까닭은 다른 목적이 있어 서였을 거다. 게다가 나를 공모자로 만들었다! 왜일까? 정말로 말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면 제 힘으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그에게는 그런 곳이 필요치 않았으며, 그가 노린 것은 단지 내게 말이 어디 있는지 알리려는 것뿐인 셈이다. 쉽게 손쓸 수 있는, 무척이나 유혹적인 곳에 말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던 거다. 그는 내가 두 젊은이를 이 시루즈베리와 왕의 점령지 밖으로 빼돌려야 할 사정에 처해 있어서 자기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링가는 두 마리 말이라는 미끼를 내걸어, 보화도 함께 빼돌리고 싶으면 말이 있는 곳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느냐고 나를 살살 꾀고 있다. 결국 그 는 두 명의 도망자를 애써 추적할 필요 없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저 느긋하게 앉아 기 다리기만 하면 된다. 내가 두 사람과 보화를 허둥지둥 목장 오두막집으로 옮길 때까지 가만 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곳에서 모조리 수중에 넣어버리면 될 테니까. 그렇다면 오늘밤 그는 미리 그곳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이번에는 배후에 무 장한 부하들을 숨겨두고서.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사소한 점들이 캐드펠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토롤드가 완두줄기 더미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면, 무슨 목적에서 그랬을까? 지금 고디스가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고 치면, 그 짝마저 잡아들이려는 의도에서 새를 날려보내는 편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간과하고 넘어갔던 것들을 다시 한번 고려해보자. 남 자로 변장한 고디스를 알아보고도 지금처럼 모르는 척하고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잃어 버린 약혼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만 두고 적절한 때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그 가 고드릭이 고디스라는 것을 알았고 피첼런의 부하중의 한 사람이 물방앗간에 은신 해 있 다는 것을 알았다면, 보화를 강물에서 건져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병사들을 끌고 와, 그 귀중한 전리품들을 모조리 낚아채 왕에게 넘겨주어 왕을 기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구태여 이렇게 수상쩍은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예컨 대 고디스와 토롤드는 붙잡자마자 왕에게 넘겨주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되, 피첼런의 보화는 시루즈베리로 갖고 가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자기 영지로 살짝 보내버리려는 속셈은 아닐까? 그렇다면 말들을 목장으로 옮겨놓은 까닭은 순진한 늙은 수사를 속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보화를 비밀리에 메스베리로 빼돌리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 물론 이 모든 가정은 버링가가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살해한 자가 아닐 경우다. 그가 살인 자라면 상황은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고디스는 그녀의 아버지를 사 로잡으려는 미끼로 시루즈베기로 돌려보내겠지만, 토롤드 블런드는 생포한 즉시 죽여버릴 거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첫 번째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저질러지는 두 번째 살 인. 캐드펠은 그렇게 된다면 실로 참혹한 일이라 생각했으나 정작 그의 마음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일이 전혀 딴판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럴 수 있을 테고, 응당 그 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내 성을 갈 거고, 영리한 젊은이와 겨루는 짓 따 위는 다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 캐드펠 수사는 또다시 힘겨운 하룻밤을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허브밭으로 돌아갔다. 토롤드는 벌써 깨어 있다가 누가 왔는지 확인하자마자 이내 빗장을 풀었다. "이제 갈 시간이 됐습니까? 걸어서 그 집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있나요? 토롤드는 고디스를 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보기 전까지는, 그녀가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안 전하고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길이야 항상 있는 법이지. 허나 아직 충분히 어두워지지도, 조용해지지도 않았으니 앉아 서 좀 쉬게나. 말들이 있는 곳에 갈 때까지는 자네도 얼마간 짐을 져야 할 테니까. 나도 숙 사로 가서 좀 쉬겠네. 아 걱정하지 말게. 곧 돌아올 테니까. 방에 들어간다 해도 떠나는 것 은 문제도 아닐세. 내방은 안쪽 계단 바로 곁에 있고 부원장 방은 그 끝에 있는데, 그분은 한번 잠이 드셨다 하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니까. 수도원 정문 쪽에 교구민 전용 문이 따로 있다는 걸 자네도 알지? 수도원 담에 나 있지 않은 유일한 문이지. 그 문을 지나면 시 워드 아가씨의 집까지는 얼마 되지 않아. 시민들이 다소 늦은 시간에 경내를 나간다 해도 문지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게야." 토롤드는 새삼 깜짝 놀랐다. "앨린이는 아가씨도 그러면 그때 그 문으로 해서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가는 나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겠지. 그리고 그 훌륳 한 아가씨는 플라망 용병들에게 자신이 잘 대우해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자기가 쿠셀과 잘 알고 있다는 특전을 행사하는 편을 선택한 거라네 .아, 물론 자네에게야 훌륭한 아가씨가 따로 있겠지. 그 아가씨에게 잘 대해주게나. 앨린은 단지 자기가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느라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본 것 뿐일세. 내 단언하지만 앨린은 장차 고디스 못지 않게 큰 일을 해낼 게야." 토롤드는 근심이 가득한 속에서도 그드릭-고디스 만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확신 하면서 오두막 안의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싱긋 웃었다. "문지기가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 시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고 말 씀하셨는데, 그래도 베네딕트회 승복을 입은 사람에게는 꽤나 신경 쓸 텐데요." "베네딕트회 승복을 입은 사람이 그렇게 늦은 시간에 경내를 빠져나간다는 말은 누가 하 던가? 그리로 가서 고디스를 데려올 사람은 바로 자네야. 교구민 전용 문은 잠겨 있는 적이 없어. 문지기실이 근처에 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 때가 되면 내가 자네를 그리로 내보내 주겠네. 그러면 곧장 물방앗간 곁 집으로 가서 고디스를 데리고 나와서 배를 타고 수로로 빠져나오게나. 나는 수로와 메올 시내가 만나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토롤드의 눈은 어둠 속에서조차도 빛을 발했다. "그 세 채 중에서 우리 쪽에서 세 번째 집이겠군요. 압니다. 제가 가죠!" 오두막 안은 더없는 만족감과 기쁨으로 들뜬 토롤드가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실내를 감도는 허브 향기마저 한층 진해지는 듯했다. 고디스를 빼내올 사람, 단순한 사랑의 도피행각보다 한층 자극적이고 경이로운 모험을 감행할 사람은 바로 그였다. "우리가 시냇가에 닿을 때쯤 수사님은 수도원 쪽 둑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란 말씀이죠?" "그러겠네. 나 없이는 어디도 가지 말게! 지금은 한 시간쯤 잠을 자둬. 깊이 잠들면 곤란 하니 빗장은 지르지 말게. 사방이 조용해지면 자네를 데리러 오겠네." 캐드펠 수사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너무도 힘겨운 하루를 보낸 터라 수사들은 모두들 기꺼이 덧문을 닫고 불을 끄고, 밤의 장막으로 스스로를 차단하고서 잠이 들었다. 캐 드펠이 토롤드를 데리러 갔을 때 토롤드는 이미 깨어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밭들 을 지나고 접객소와 원장 숙사 사이의 좁은 뜰을 가로질러 회랑으로 들어서서, 그곳에서 다 시 교회의 남쪽 문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들은 미사가 없을 때면 시간을 초월한 침묵과 고 요함만이 가득한 은둔의 공간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높다란 벽을 따라가 서쪽으로 난 문을 밀었다. 그 거대한 문이 빠끔히 열리자 캐드펠은 귀를 기울였다. 열린 틈 새로, 굳게 닫혀 있는 거무스레한 수도원 정문이 보였다. 그러나 교구민 전용 문은 활짝 열 려서, 희미하게 밝혀진 작은 창처럼 밤의 어둠 속에 떠 있었다. "사방이 아주 고요하군. 지금 가게! 나는 시냇가에 가 있을테니까.' 청년은 좁은 쪽문을 살짝 빠져나가 큰길로 들어섰다. 캐드펠은 살그머니 문을 닫고는 온 길을 천천히 되짚어갔다. 캐드펠은 별빛에만 의지해 채소밭을 지나고 들판을 가로질러 시냇 가 둑에 닿았다. 그는 둑을 따라 죽 걸어가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르자 바닥 에 주저앉았다. 땅에는 잡초와 살갈퀴덩굴이 무성했고 나방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팔월밤은 따뜻하고 고요했다. 이따금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덤불을 살랑이게 하고 숲을 가볍게 한숨짓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만으로도 경험 많고 주의 깊은 사람이 내는 소리쯤은 얼마든지 가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밤에 그들을 미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을 터였다. 미행할 만한 사람은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있 을 테니까. 콘스턴스는 캐드펠 수사가 온 줄 알고 문을 열었다가 젊은 청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 라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나 고디스는 초조감과 조바심을 이기지 못해 콘스턴스의 어깨 너머로 힐끗 내다보았다가 숨죽인 짧은 탄성을 내지르더니, 콘스턴스를 밀치고 토롤드의 두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다시 고드릭으로 변장하고 있었고 토롤드는 여태껏 처텨답게 차려입은 고디스의 모습을 본 적 없었으나, 이제 그에게 그녀는 어디까지나 고디스 아가씨 일 뿐이었다. 그녀는 토롤드에게 달라붙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꼭 끌어안기도 하고, 큰일나고 싶어서 돌아다니느냐고 야단을 치기도 하고, 붕대를 맨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 며 오늘 지낸 애기 좀 해보라고 했다가는 이내 취소하고, 온통 정신이 없었다. 고디스는 마 침 입을 다물더니 어느 정도 진정된 고개를 바짝 치켜들어 그가 키스해주기를 기다렸다. 토 롤드는 당황해하다가 이윽고 그 뜻을 깨닫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토롤드란 분이군요." 앨린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담담한 태도로 보아 앨린은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토롤드 자신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문을 닫아, 콘스턴스, 괜찮으니까." 최근에 경험한 일들로 인해 나름대로 젊은 남자를 보는 안목이 생긴 그녀는 토롤드를 대 충 훑어보고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캐드펠 수사님이 보내셨나보군요. 고디스 아가씨는 오늘 아침에 왔을 때 바로 되돌아가 고 싶어했지만 제가 안 된다고 했어요. 수사님께서 직집 오시겠다고 하셔서 당신을 보내시 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하지만 수사님이 보내신 분이라면 대환영이에요." "고디스 아가씨가 아가씨께 제 얘기를 했나보군요?" 토롤드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약간 낯을 붉혔다. "제가 알 필요가 있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고디스 아가씨는 대단히 신중한 본이에요. 저도 그렇구요." 앨린 역시 자신이 한 일로 흥분하고 신이 나서 그 화사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 다. 이제 그녀는 자기 역할이 여기서 끝난다는 것에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캐드펠 수사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되죠. 날이 밝기 전에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가는 게 좋을 거에요. 고디스 아가씨가 가져온 짐은 여기 있어요. 안에서 잠 시 기다리세요. 저수지 근방이 조용한지 제가 살펴보고 올 테니까요." 그녀는 어둠 속으로 나가 저수지 가장자리에 서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왕의 군대가 경비병을 남겨놓고 가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이미 모든 곳을 샅샅이 수색했고 가 져갈 것을 다 가져간 마당에 새삼 무엇하러 그러겠는가. 저수지 건너편 집들에는 아직 자지 않고 있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집들은 모두 어둠에 잠겨 있었고, 따뜻한 밤인데도 하 나같이 덧문이 내려져 있었다. 낮 동안에는 약탈을 금지하는 공식적인 명령 때문에 행동을 조심하던 플라망 용병들이 야심한 시간을 틈타 뭐 훔칠 게 없나 싶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터였다. 둑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풀들은 부드러운 바람에 간혹 흔들리 곤 했지만, 강둑으로 막혀 있는 그곳에서는 버드나무 이파리들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오세요!" 앨린은 문을 빠끔히 열고 속삭였다. "사방이 조용해요. 길이 가파르니까 제 뒤만 따라오세요." 앨린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원래 입었던 흰 가운을 벗고 오후 무렵부터 짙은 색 가 운으로 갈아입고 있을 정도로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롤드는 자루에 담아 줄 로 아귀를 묶은 피챌런의 보화를 들어올렸다. 고디스가 거들려고 하자 그는 단호하게 거절 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순순히 물러나더니, 조용하고도 재빠른 몸놀림으로 토롤드보다 먼저 배가 묶여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배는 저수지 쪽으로 허리를 숙인 버드나무 가지들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과 저수지 사이에는 둑의 밑부분이 무너져내려 폭이 육십 센티미터쯤 되는 물구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앨린은 둑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가 로 끌어당긴 배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제까지 집 안에만 갇혀 지내온 그 성실한 아가씨는 자기의 능력을 적절히 이용하고 결단력 있는 여주인답게 행동하는 법을 아주 빠르게, 그리 고 즐거운 마음으로 익혀가는 참이었다. 고디스는 배에 올라타서 두 팔로 짐을 끌어안아 배에 실었다. 원래 기껏해야 두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 배는 토롤드가 올라타자 물 속으로 꽤 깊이 가라앉았으나, 그런대로 두 사람의 무게를 든든하게 받쳐주었고, 예전에 제대로 배 구실을 하고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라도 데 려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디스는 허리를 굽혀 그때까지 풀밭 가장자리에 무릎 꿇고 않아 있는 앨린을 끌어안았 다. 고맙다는 말을 할 때를 놓친 토롤드는 앨린이 내민 작고 보드라운 손에 말없이 키스했 다. 앨린은 버드나무에 묶인 밧줄을 풀어 뱃전에 던져주었다. 배는 둑에서 살그머니 밀려나, 저수지 바깥쪽으로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는 수면을 서서히 가로질러갔다. 잠시 후 배는 물방아 수로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살과 만났고, 그 흐름은 배를 부드럽게 떠밀어 속도를 높여주었다. 토롤드는 노를 젓지 않고 잠자코 앉아 그 고요한 흐름에 배를 내맡겼다. 배는 저 스스로 알아서 수로 쪽으로 접어들었다. 고디스가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버드나무와 그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떠오른, 불 꺼진 어두운 집뿐이었다. 토롤드는 노를 저어 배를 수도원 쪽 둑으로 몰고 갔다. 키 큰 풀밭에서 캐드펠 수사가 일 어섰다. "잘 했네! 별 말썽 없었나? 별다른 인기척도 없었고?" "전혀요. 이제는 수사님이 안내해주십시오." 캐드펠은 한 손으로 배를 가볍게 흔들어보았다. "우선 고디스와 짐을 건너편에 내려놓고 나를 건네주게. 신발을 적시지 않고 가고 싶으니 까."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건너편 기슭에 닿은 뒤에 캐드펠은 배를 풀밭으로 끌어올렸다. 고 디스가 얼른 달려들어 그를 거들었다. 그들은 배를 가까이에 있는 잡목림 속에 감춰놓았다. 배를 감추고 나서 그들은 한숨을 돌리느라 잠시 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캐드펠 말마따나, 여기서 오 분 잘 쉬고 나면 이 뒤에 따를 힘겨운 노동도 그런 대로 견뎌 낼 수 있으리라. "말은 해도 좋지만 목소리는 낮추게나. 자네들이 서쪽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는 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 짐을 꺼내서 둘로 나누세. 자루째 들고 가기보다는 안장주머니를 한 쌍씩 맡아서 어깨에 메고 가는 편이 훨씬 수월할 테니까." 고디스는 캐드펠의 팔을 잡았다. "저도 한 쌍은 들고 갈 수 있어요." "짧은 거리 정도야 그럴 수 있겠지." 캐드펠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자루에서 안장주머니 두 쌍을 꺼냈다. 넓적한 끈으로 서로 연결된 작은 주머니 두 개로 이루어진 안장주머니들은 애초에 말등에 걸치기 좋게 그 안에 든 무게를 똑같이 나누어놓았으므로 어깨에 메고 가기 수월했다. "걸어가는 거리를 줄이려고 반 마일쯤은 배를 타고 강으로 해서 가는 게 어떻겠나 싶었는 데,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다가 이 짐까지 있으니 배가 가라앉고 말 게야. 허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그리 멀지 않아. 한 삼 마일 정도 되려나." 캐드펠은 안장주머니 한 쌍을 어깨에 걸치고 두어 번 흔들어, 지고 가기 편한 위치에 놓 이게 했다. 토롤드도 다른 한 쌍을 성한 어깨에 걸쳐멨다. 캐드펠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내 평생 이렇게 값비싼 물건을 지고 가기는 처음인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 구경할 수가 없다니." 뒤에서 토롤드가 말했다. "제게는 가슴 아픈 물건입니다. 이것 때문에 니콜러스가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친구의 복수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목수을 보전하고 무사히 이 짐을 들고 갈 궁리나 하게나. 니콜러스는 원한을 풀게 될 테 니 자네는 장래의 일에나 신경 써. 그 친구 일은 내게 맡기고." 캐드펠은 버링가와 함께 오갔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일행을 인도했다. 그는 시냇물을 건녀서 펄리 너머에 있는 목장 오두막으로 곧장 가는 대신에 서쪽으로 한참을 돌아서 갔고, 따라서 그들이 정남쪽으로 오두막과 수평되는 위치에 이르렀을 때는 그 집의 서쪽, 그러니 까 웨일스 방면으로 일 마일 가량 떨어진 꽤 울창한 숲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디스가 물었다. "미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쪄죠?" "그런 사람은 없어." 캐드펠의 단호한 어조에 그녀는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캐드 펠 수사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그녀는 자기도 토롤드의 짐을 반 마일쯤 지고 가 겠다고 고집을 부려 짐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토롤드는 그녀의 발걸음이 흐트러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기미가 보이자마자 얼른 다시 되찾아갔다. 전방의 나뭇가지들 사이로 레이스처럼 펼쳐진 좁디좁은 하늘이 조금 밝아졌다. 그들은 이 제껏 밟고 온 풀밭길과 삼림 사이로 난 널찍한 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쪽은 이제까 지보다 폭이 약간 넓어 보였다. 캐드펠은 나뭇가지들로 가려진 자리에 그들을 멈춰 세웠다. "이제부터는 신경 쓰면서 가도록 하게나. 이따가는 나 없이 여기까지 와야 할 테니까. 우 리 앞에 있는 이 넓고 바른 도로는 예전에 로마인들이 건설한 길이네. 우리왼쪽, 그러니까 동쪽으로 계속해서 가다보면 애첨에서 세 번 강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지. 우리 오른쪽, 그러 니까 서쪽으로 화살처럼 똑바로 가다보면 웨일스의 풀 지방에 이르게 돼. 만일 그리고 가는 도중에 장애물과 만나면 남쪽으로 돌아가서, 몽고메리로 해서 가게나. 일단 이 길에 이르면 좀더 빨리 말을 달릴 수 있을 게야. 길 중간중간에 가파른 고개들이 있긴 하지만. 이제 이 도로를 가로질렀으니 시냇가까지 반 마일 가량 가게 되네. 그 길을 잘 익혀두도록 하게." 도로 건너편 길은 사람들이 더 많이 다니는 길이라서 그런지 좀더 넓어, 말을 타고 가기 에도 별 지장이 없을 듯했다. 얼마 후, 그들은 폭도 넓고 물 흐름도 잔잔한 시냇가에 이르렀 다. 캐드펠이 말했다. "우리 짐들은 여기다 두고 가도록 하지. 숲속 아무 나무에나 걸어두면 잃어버릴 염려가 있으니까 여기에다 걸어두세. 이 길에서 헤엄치지 않고 시내를 건널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 니까." 토롤드가 물었다. "짐을 놓고 간다구요? 왜요? 말들이 있는 곳까지 가져가면 안될까요? 오늘밤에는 우리를 미행하는 자들이 없을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물론 그런 자들은 없네." 사냥감들이 어디로 올지 분명히 알고 있다면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으면 될 테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날 믿고 내 말대로 따르게." 캐드펠은 메고 온 안장주머니를 내리고, 가장 안전하고 적당한 은닉 장소를 찾아 이제 어 느 정도 눈에 익은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오른쪽 가까이에 있는 덤불 속에, 한쪽 줄기들은 이미 죽어버리고 맨 밑 가지는 무성한 덤불 속에 묻힌, 뒤틀린 노목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캐드펠은 그 맨 밑 가지에 안장주머니를 걸었다. 토롤드도 들고 온 주머니를 군말 없이 그 곁에 걸더니, 혹시 남의 눈에 띄지 않을까 싶은지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았 다. 무성한 이파리들이 두 쌍의 안장주머니를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캐드펠은 만족했다. "좋았네! 여기서부터 우리는 동쪽으로 향하게 될 걸세. 그렇게 가다보면 내가 전에 갔던 곧은 길과 만나게 되지. 우리는 오른쪽에서 목장으로 접근해야 하네. 그렇게 하면 그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도 우리가 그곳에서 웨일스 쪽으로 일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겠지." 짐을 내려놓아 홀가분해진 젊은이들은 가까운 친구 사이인 꼬마들처럼 서로 손을 꼭 잡고 캐드펠의 뒤를 따랐다. 탈출의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터라 더는 할 말이 없었 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다정하게 붙어서 걷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 믿으면서. 곧은 길에 닿은 지 불과 몇 분 되지 않아 숲은 사라지고 컴컴한 하늘이 드러나면서 목장의 울이 서 있는 조그만 빈터가 나타났다. 촘촘한 울타리 사이사이로 오두막 안 어딘가에서 내 비치는 어렴풋한 빛이 언뜻언뜻 보였다. 사위는 고즈녁한 침묵에 감싸여 있었다. 안젤름 수사는 마치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곧바로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아 마도 시루즈베리에서 물건을 빼앗긴 어떤 여행자로부터 그날의 격변에 관한 소식을 전해듣 고는, 누군가가 좀더 중한 벌을 피하기 위해 조만간 그리로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서둘러 그들을 안으로 맞아들이더니, 문을 닫으면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캐드펠 뒤에 서 있는 두 젊은이를 살펴보았다. "오늘밤에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요. 여기서 들은 바로는 일 이 아주 고약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더군요." 캐드펠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소. 다들 별일이 없어야 할텐데. 특히나 두 젊은이에게는 말이요. 이 훌륭한 수사님 들이 자네물건을 안전하게 잘 보관해 주셨다네. 안젤흠 형제. 이 아가씨는 애드니씨의 따님 이라오. 이 친구는 피챌런씨의 향사이고. 그런데 루이 형제는 어디 있소?" "형제가 오시는 것을 보자마자 안장을 얹으러 나갔습니다. 형제가 급히 움직이셔야 할 거 라 짐작하고 온종일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오실 것에 대비하여 음식도 준비해두었구요. 여기 음식보따리가 있습니다. 빈속으로 먼길을 가는 것은 좋지 않지요 포도주도 한 병 들어 있습 니다," "잘됐구먼! 나도 몇 가지 가져왔지." 캐드펠은 작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들을 꺼내 젊은이들에게 건넸다. "약들이네. 고디스가 사용하는 법을 알아." 고디스와 토롤드는 경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토롤드는 고마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전 가서 안장 얹는 것을 거들겠습니다." 그는 고디스의 손을 놓고 잔풀이 무성한 작은 뜰을 가로질러 마구간으로 갔다. 숲속의 빈 터는, 시절이 워낙 혼란스러워 제대로 손보기 어려우니만큼, 머지않아 다시 숲으로 되돌아갈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볼품 없는 그 목조건물들도 여름철마다 무섭게 번식해가는 초록 의 파도에 이내 휩쓸리게 될 것 같았다. 삼사 년 내에 롱 숲은 빈터며 건물들을 흔적도 없 이 삼켜버리고 말 듯했다. "저희 두 사람을 위해서 여러 모로 애써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여요. 안젤름 수사님. 물론 여기 계신 캐드펠 수사님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셨겠지만요. 캐드펠 수사님은 여드레 동안 제 주인 역할을 톡톡히 하셨고, 그 점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앞으로 가능하다면 그 이상으로 보답하겠어요. 토롤드와 저는 결코 수사님을 잊지 않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수 사님이 저희를 위해 해주신 일을 결코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도요." 고디스는 경탄한 눈길로 그 거인 같은 수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안젤름 수사는 무척이 나 흐뭇하고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꼭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하느님은 아가씨를 사랑하실 거요. 젊은 아가씨가 위험에 처했을 때 선한 사람이 할 일이 뭐겠소? 그 아가씨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겠소? 아가씨와 함께 온 젊은이도 그렇고!" 루이 수사가 이곳에 맡겨진 말 두 마리 중에서 버링가가 타고 왔던 밤색에 흰색이 섞인 말을 끌고 왔다. 토롤드는 검은 말을 끌고 그 뒤를 따라왔다. 잘 손질해주고 잘 먹인데다 충 분한 휴식을 취하게 덕에 말들은 무척 원기왕성했다. 마구도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안젤름 수사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짐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말에 싣기 좋게 둘로 나눴으면 싶었지 만, 열어불 권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수사님이 갖고 오신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무게가 좀 더 가벼운 사람이 탈 말의 엉치께에다 실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평수사는 며칠 전 밤에 캐드펠이 가져왔던 자루에 든 짐을 갖고 오려고 집 안으로 들 어갔다. 토롤드와 고디스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캐드펠의 지시를 따른 경우가 있었듯 이, 아무래도 캐드펠은 그 평수사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이 있는 듯했다. 안젤름 수 사는 그 넓은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나와 말들 곁에 부려놓았다. "이 짐을 안장에 고정시킬 가죽끈도 가져왔지요." 그들은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듯 지체없이 안장에 짐을 묶을 줄을 걸 고 가죽끈으로 단단히 동여매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들 뒤에 있는 울타리문의 빗장을 지탱하는 굵은 밧줄을 검으로 베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서 있어! 아무도 움직이지 마! 자, 이제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서. 두 손을 앞으로 하고 잘못하면 아가씨가 다친다!"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시키는 대로 맥없이 돌아섰다. 문은 활짝 열려 있고, 그 자리에 휴 버링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버링가의 양옆으로는 두 사내가 당장이라도 쏠 것처럼 활시 위를 팽팽하게 당기며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화살은 고디스를 똑 바로 겨냥하고 있었다. 활을 다루는 데 능숙한 궁수들이었으므로 언제든지 표적을 정통으로 꿰뚫을 수 있을 터였다. 버링가가 말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으니까요. 이제 그대로 계십시오. 제 부하가 문을 닫을 테니 모두들 꼼짝말고 제자리에 서 계십시오," 10. 최후의 승리자 그들은 각자의 셩격에 따라 반응했다. 안젤름 수사는 자신의 몽둥이를 찾으려고 힐끗힐끗 두리번거렸지만 몽둥이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루이 수사는 명령받은 대로 두 손을 앞으로 늘어뜨리기는 했으나, 오른손은 단검을 숨겨둔 옷자락 가까이 가 있었다. 고디스는 처음에는 그 믿어지지 않는 사태에 몹시 당황했으나 이내 격렬한 분노에 휩싸여 얼굴이 하 얗게 질리더니, 번쩍이는 두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캐드펠 수사는 그 충격적인 사태에 이내 체념한 표정이 되어, 사내가 짐을 발견하고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게 하려는지 그 위에 걸터앉아 승복 자락으로 슬쩍 덮었다. 토롤드는 허리띠에 찬 캐드펠의 단 검을 움켜쥐고 싶은 본능과 싸우며, 고디스와 두 궁수 사이를 가로막으려고 두 걸음 옮겨 디뎠다. 캐드펠 수사는 토롤드를 보고 감탄하면서 내심 미소를 지었다. 처녀에게 온 마음을 빼앗긴 청년은, 제 몸으로 그녀를 가로막기도 전에 두 대의 화살이 표적을 꿰뚫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거 무척이나 감동적인 몸짓이긴 한데 별로 소용없을 거요. 화살이 엉뚱한 사람에게 가 서 박힌다 해도 저 아가씨가 자신이 맞은 것보다 더 기뻐할지는 의문이니까. 여기 있는 사 람들은 죄다 지각 있는 사람들이니 공연히 영웅처럼 행동하지 마시오. 여기 매튜는 이 정도 거리에서라면 화살 한 대로 두 사람도 꿰뚫을 수 있소. 물론 그러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심지어 내게도 말이오 그러니 내가 지시하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편이 나을 거요." 버링가가 말했다. 그는 별다른 위협의 몸짓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부하들은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이면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활을 쏠 태세였으므로, 그곳에 있는 누군가가 버링가를 공격해서 상황을 역전시킬 가능성은 전무해 보였다. 버링가는 그들 에게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으니 토롤드가 단검으로 공격하려는 기미를 보이기가 무섭게 화살이 먼저 날아와 박힐 터였다. 토롤드는 뒤로 한 팔을 뻗어 고디스를 끌어당기려 했지만, 고디스는 얼른 그의 손을 피하더니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감연히 휴 버링가와 맞 섰다. "내게 지시할 게 뭐죠? 당신이 원하는 게 나라면, 좋아요. 나 여기 있어요. 나를 갖고 어 떻게 할 건가요? 내게는 아직도 꽤 넓은 땅이 있는데, 그걸 얻기 위해 당신의 권리를 내세 워 나랑 결혼할 심산인가요? 우리 아버지를 처리하고 나면 왕은 내 땅과 나를 새로 얻은 심 복에게 기꺼이 넘겨주겠죠! 내가 당신에게 그 정도의 가치는 있나요? 아니면 나를 훌륭한 분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미끼감으로 왕에게 넘겨서 왕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인가요?" "둘 다 아니오." 버링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그녀의 어깨를 응시했다. 그의 얼 굴에는 상대를 인정함과 동시에 비웃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예전에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소. 그 뚱뚱하던 꼬마 아가씨가 그 사이에 장족의 발전을 했군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건대 조만간 저 친구와 결혼하게 될 것 같고, 내게는 다른 계획이 있어서 말이오. 당신에게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 을 테구요. 여기 있는 모두가 지각 있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전혀 싸울 필요가 없소. 당신을 위해서 말하자면, 고디스, 나는 당신의 투사가 가는 길에 사냥개들을 풀어놓을 생각조차 없 소, 내가 정직한 반재가에게 악의를 품을 이유가 어디 있겠소? 특히나 당신이 저 친구를 마 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에 와서 말이오." 그는 그녀를 비웃고 있었고 그녀도 그것을 알고 경계심을 눚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웃 음을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하기는 했으나, 그 웃음에는 악의가 없었다. 그것은 득의에 찬 웃 음이자 가볍게 조롱하는 웃음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애정까지도 어려 있었다. 고디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캐드펠 수사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캐 드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휴 버링가를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버링가는 내심 감탄한 눈빛으로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말이 진심일 거라고 믿어요." 그녀는 정말 그럴까 의심하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믿어보시오! 당신은 여행하는 데 필요한 말들을 구하러 이리로 왔소. 그리고 여기엔 말들 이 있소. 당신은 지금 당장에라도 말을 타고 떠날 수 있어요. 당신과 저 젊은 향사 둘이서 말이오, 아무도 당신들을 뒤쫓지 않을 거요. 나와 내 부하들말고는 당신들이 여기 있다는 것 을 아무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꼭 필요한 물건들을 제외한 나머지 짐을 줄이고 간다면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하게 말을 달릴 수 있을 거요." 버링가는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캐드펠 수사님께서 마치 않기에 편한 돌을 찾아내기라도 하신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점 잖게 걸터앉으신 저 짐, 저건 두고 당신을 생각하기 위한 기념품으로 내가 보관하겠소." 그 말을 듣고 적절히 자신을 제어할 줄 아는 고디스는 캐드펠 수사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 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사태의 전말을 깨달은 표정. 내면에서 회오리치 는 벅찬 승리감과 환희를 드러내는 표정을 짓지 않을 만큼은 자기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 리고 그녀는 뒤에 서 있는 토롤드 역시 사태를 깨닫고 아찔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캐드펠이 여기서 췌일스 방면으로 일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시냇가 나뭇가지에 안장 주머니들을 걸어놓게 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물건은 거꺼이 양도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기뻐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제 그 기가 막힌 작전을 완 료하는 일은 그녀에게 맡겨젔다. 캐드펠은 그녀에게 그것을 일임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한번도 맞닥뜨린 적 없는 최대의 시험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는 바로 이 시험에 달려 있었다. 그녀와 마주 선 사내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한층 뛰어난 사내였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버링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약소한 금붙이를 압류하는 대신 그녀를 풀어주어 다른 남자와 다른 대의를 좇아 행복 하게 잘 살게끔 해주겠다는 버링가의 제스처에는 두 마리의 좋은 말을 제공해주고, 그들이 웨일스로 달아나는 것을 눈감아주겠다는 의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축복이 었다. 세속적이기는 하나 무척 소중한. "당신의 의향이 정 그렇다면, 우리는 떠날 수도 있어요!" 고디스는 그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단정하듯 말했다. 버링가는 말했다. "내 감히 충 고하건대 빨리 떠나도록 하시오. 밤이 아직 깊어지지는 않았지만 빨리 지나갈 거요. 당신들 이 갈 길은 멀고." 그녀는 너그럽게 말했다. "난 당신을 오해해왔어요. 당신을 전혀 몰랐어요. 당신은 물건을 차지하려 할 권리가 있었 어요. 우리에게도 역시 이걸 지키려고 싸울 권리가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세요. 공정한 승 리와 공정한 패배에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동의하세요.? 버링가는 반색했다. "동의하고말구요! 당신은 내 온 마음을 사로잡는 적수요, 그러니 저 젊은 향사께서는 내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당신을 데리고 떠나는 게 좋을 거요. 물론 그 짐은 남겨두 고......" 캐드펠 수사는 이제까지 지키고 있던 짐보따리에서 마지못해 일어섰다. "그러는 수밖에 도리가 있나. 이건 당신 거요. 당신이 공정하게 이겼으니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버링가는 냉정을 잃지 않고 짐이 든 자루를 세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캐드펠이 세 번 강 에서 이곳까지 날라온 짐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럼 어서 가시오. 부지런히! 날이 밝기까지는 몇 시간쯤 여유가 있을 거요." 그러고 나서 버링가는 처음으로 토롤드에게 눈을 돌려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토롤드는 시종 태연자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상황에서도 탄복할 만 한 자제심으로 고디스가 자기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있었다. "실례지만 난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데." "내 이름은 토롤드 블런드라고 하오. 피첼런 어른의 향사요." "그 동안 서로 알고 지내지 못한 게 유감이오. 하지만 우리가 무기를 들고 겨루지 않게 된 건 정말 다행이오. 보나마나 대단한 강적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버링가는 나릅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 환하게 웃었다. 사실 그는 토롤 드의 큰 키와 긴 팔을 그다지 두려워 하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의 보물을 잘 돌보도록 하시오. 토롤드. 나는 내 것을 잘 돌볼 테니까."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눈길로 조용히 버링가를 주시하던 고디스가 말했다. "키스해줘요. 내가 잘 되기를 빌어주구요! 나도 그럴 거니까요!" "내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하겠소! 버링가는 두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진한 키스를 했다. 그 키스는 토롤드를 자극 할 만큼 오래 지속되었지만, 토롤드는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 은 다정하면서도 차분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오누이간의 키스같은 것 일 테니까. "이제 말을 타고 어서 가요!. 그녀는 먼저 캐드펠 수사에게 다가가더니, 그만이 알아보고 들을 수 있는 몹시 동요된 표정과 목소리로 키스해달라고 했다. 그 조용한 격정은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나 웃음, 혹은 그 양자가 결합된 것으로 자칫하면 당장 터져 나올지 몰랐다. 마음속에서 이는 그 복잡한 격정의 소용돌이 때문에 캐드펠과 평수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인사는 자연 짧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심이 드러나기 전에 황급히 그들 곁을 떠나야 했다. 토롤드가 그 녀가 탈 말의 등자를 잡아주려고 다가갔으나, 안젤름 수사가 먼저 두 손으로 그녀를 반짝 안아들어 안장에 앉혀주었다. 그 등자가 약간 긴 듯해 토롤드는 길이를 줄이려고 허리를 굽 혔다. 바로 그 순간 고디스는 토롤드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씩 웃는 모습을 언뜻 보았고, 그 역시도 이제까지 진행되어온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며 그녀의 내밀한 웃음에 동참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롤드와 그의 파트너가 처음부터 그 모든 계획에 참여했더라면 그렇게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이지는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저변에 깔린 흐름들을 재빨 리 포착하고 있었다. 토롤드는 버링가의 밤색 말에 올라타고, 목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두 궁수 는 활을 늘어뜨리고 한쪽에 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고, 버링가의 세 번째 부하 는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캐드펠 수사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캐드펠은 느긋하게 말했다. "내게 빚진 게 있거든 고디스에게 갚아주게나. 고디스를 부친께 무사히 데려다줄 때까지 부디 길 조심하고." 그러고서 캐드펠은 엄숙하게 덧붙였다. "고디스는 자네에게 맡겨진 성스러운 짐이니 사심 없이 잘 돌보도록 하게." 한순간 토롤드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는 곧 그 자리를 떠났고, 고 디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가볍게 말을 몰아, 활짝 열린 문을 지나 빈터를 가로질러 숲 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좀더 넓은 길로 들어설 테고, 시냇가에는 안장주머니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캐드펠은 말발굽이 풀밭을 딛는 부드러운 소리 와 그들의 몸이 나뭇가지에 닿을 때마다 이파리들이 살랑대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 다. 얼마 후 그 모든 소리는 밤의 침묵 속으로 녹아들었다. 캐드펠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 역시 그 소리에 정신을 온통 빼앗기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저 아가씨가 처녀의 몸으로 부친께 돌아간다면 다시는 남녀의 일을 두고 내기를 걸지 않 겠습니다." 이윽고 버링가가 입을 열었다. 캐드펠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고디스는 아내된 몸으로 부친께 돌아갈 거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오. 여기와 노르망디 사이에는 주례를 서줄 사제들이 한둘이 아닐 게요. 고디스는 토롤 드에게 자기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설득하는 데 꽤 애를 먹겠지. 토롤드가 좀처럼 받아들이 려 하지 않을 테니까. 허나 워낙 수완이 좋은 아가씨니 결국 성공하고 말 거요." "수사님은 저 아가씨에 대대 저보다도 잘 아십니다그려. 저는 저 아가씨를 거의 몰랐습니 다! 애석햐게도!" "내 생각에 당신은 처음에 나와 고디스가 성당으로 들어갔을 때 고디스를 알아보았던 것 같은데." "아. 네. 얼굴 생김새로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기연가미연가하다가 이틀쯤 지난 뒤에 확 신을 갖게 됐습니다. 얼굴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거든요. 생기발랄해졌다는 점만 빼놓고는." 그는 캐드펠의 눈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사실 저는 고디스를 찾으러 갔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가씨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 이용 당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저 자신이 차지할 생각도 없었구요. 하지만 수사님 말 씀마따나, 그 아가씨는 제게 맡겨진 성스러운 짐이었죠. 제 부모님과 그 아가씨 부모님이 정 해준 인연으로, 제게는 그 아가씨의 안전을 돌볼 책임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해왔다는 것을 믿고 있소." "저도 수사님의 그 말씀이 진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사이에 불쾌한 감정의 앙금 따위는 없는 거죠?" "그럼, 서로 앙갚음할 일도 없고, 게임은 끝났소." 문득 캐드펠은 온몸에서 맥이 쑥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안도감에서 나온 유쾌한 피로였다. "저와 함께 말을 타고 수도원으로 돌아가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 두 필을 끌고 왔거든 요. 제가 데려온 젊은 친구들은 잠을 자야 하니까 이곳에 계신 수사님들이 하룻밤만 재우고 먹여주신다면 내일 여유 있게 돌아갈 수 있겠는데요. 제 안장주머니에 포도주 두 병과 고기 파이를 넣어 왔는데, 수사님이 오시리라고 확신하긴 했지만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서 미리 준비해왔죠." 루이 수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오늘밤 갑작스런 돌풍이 들이닥쳐 좀 놀라긴 했습니다만 그 바람에 피해를 본 사람은 아 무도 없는 것 같군요. 포도주 두 병들이 원한다면 카드 게임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꽤 적적하던 참이었어요." 궁수들 중의 하나가 버링가의 말 두 마리를 끌고 왔다. 다리가 길고 덩치가 큰 잿빛 얼룩 빼기 말과 튼튼해 보이는 갈색 코브 종 말이었다. 평수사들과 버링가의 부하들은 사이좋게 음식과 포도주가 든 안장주머니를 내리고, 버링가의 지시에 따라 얼룩빼기 말의 엉덩이께에 자루에 든 큼직한 짐보따리를 얹고서, 안젤름 수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쓰려고 가져왔던 가 죽띠들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버링가는 캐드펠 수사에게 말했다. "코브 종 말은 수사님과 이 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 덩치 큰 녀석 은 이런 짐 정도에는 까딱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저 녀석은 성질이 사납고 고집이 세어서 아 무나 못 다루죠. 저는 익숙하지만요.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녀석을 사랑합니다. 더 좋은 말 두 필을 내주긴 했지만 저 망나니는 제 호적수고, 저는 저 녀석을 그 말들과 바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캐드펠이 버링가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이보다 더 적절히 표현할 말은 없었다. 이 망나니는 내 호적수고 녀석을 다른 상대와 바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 망나니 같 은 사내는 열심히 정탐하고 다니더니, 조금도 원치 않는 신붓감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느라 고 소중한 말 두 마리를 선뜻 내주었다. 이 사내는 신붓감을 안전한 곳으로 치워버리고 보 물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음험한 계략을 총동원했다. 사내의 보물은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공정한 게임이었다. 그래. 그렇고말고,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책을 통해 배우며 살 아가게 마련이니까! 그들은 전에 한번 가보았던 길을, 전보다 한층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느긋하게 함께 갔 다. 처음 목장으로 갈 때 밟았던 길은 점 멀기는 하지만 말이 걷기에 좀더 편할 성싶었으므 로,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밤은 사납게 동요하는 시대의 거친 흐름과는 달 리, 더없이 포근하고 고즈녁하고 고요했다. "아침기도에 여러 번 빠지셨죠?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모든 일을 좀더 빨리 해치웠다면 자정쯤에는 수도원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을 텐데. 그 일로 속죄를 하셔야 한다면 우리 둘이 함께 해야 마땅할 겁니다." 버링가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캐드펠은 수수께끼처럼 대꾸했다. "당신과 나는 이미 속죄의 고행을 함께 나누고 있다오. 당신보다 더 짜릿하고 버거운 상 대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지. 우리가 함께 편안히 말을 타는 것으로 내 죄과가 좀 가벼워 질 수도 있을 거요. 야간에 이렇게 안온하고 평화로운 기분으로 말을 탄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오."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어 얼마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어디쯤에서 생각이 엉 켜 더 이상 진전이 안 되는지, 버링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디스가 보고 싶으시겠죠" 버링가의 말에는 순수한 연민이 담겨있었다. 그는 며칠동안 그들의 관계를 면멸히 관찰하 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캐드펠은 솔직히 인정하였다. "내 심장 한 귀퉁이가 달아난 것 같소. 허나 다른 이들이 나타나 그 자리를 메워주겠지. 고디스는 좋은 처녀였소. 아니, 당신이 내 환상을 허용해준다면, 좋은 소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뭐든 빨리 배우고 싶으면 바지런한 일꾼이었거든. 앞으로 좋은 아내가 되었으면 싶 소. 그 청년은 고디스에게 딱 맞는 짝이오. 그 청년이 한쪽 어깨를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왕의 궁수들 중 하나가 그쪽 어깨에 화살을 맟춰 꽤 큰 부상을 입었지만 고디스가 정성스럽게 간호해주고 있으니 곧 좋아질꺼요. 둘 다 무사히 프랑스에 닿을 테고." 그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궁금하던 것을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만일 우리 중의 누군가가 명령에 따르지 않고 덤벼들었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소?" 휴 버링가는 껄걸 웃었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죠. 물론 제 부하들은 함부로 활을 쏠 정도로 분별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활은 아주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리고 저같이 위험한 인간 은 순식간에 마음이 변할 수도 있구요. 제가 그 처녀한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 각하셨던가보죠?" 캐드펠은 솔직하게 말할까 하다가 슬쩍 돌려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내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지. 토롤드가 고디스를 가 로막으려 들면 그 전에 그 사람들이 활을 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곧 그런 생각을 버렸소." "수사님이 목장으로 뭘 갖고 오셨는지 제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으시겠죠? 그리고 오늘 밤 그걸 가지러 오시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해도요?" "당신이 기막힌 술수를 가졌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있으니 이제는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 지 않을 거요. 아마 잘 알고 있으니 이제는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거요. 아마 내 가 그걸 가져온 날 밤에 강에서부터 내 뒤를 밟았던 게로군. 그리고 나를 부추겨 강에서 보화를 건져내 이리로 옮기게 하고 , 애초부터 보화는 차지하고 젊은이들은 탈출시키려는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당신의 말들을 이리로 옮기는 일에 끌어들였고 , 당신에게는 그야말 로 꿩 먹고 알 먹고인 셈이오. 그런데 어째서 오늘이 그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소?" "믿음이죠. 만일 제가 수사님 처지에 놓여있었다면 저는 가급적으로 빨리 그 젊은이들을 빼돌리려 했을 겁니다. 수색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오늘밤 같은 호기는 흔치 않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죠. 그리고 저는 수사님이 멍청한 분이 아니시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캐드펠은 엄숙하게 말햇다. "우리는 무척이나 공통점이 많소. 그런데 그 짐이 목장 오두막에 안전하게 보관하게 있다 는 것을 알았으면서 왜 진작 빼앗아 딴 데로 옮기지 않았소?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방금 전 에 했던 것처럼 그 친구들을 딴 곳으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서 그 사람들이 말을 타고 떠나는 동안 저는 편안히 잠이나 자라구요? 고디스와 화해도 하지 않고 저를 자기 적으로 믿게 한 채로 프랑스로 떠나보내라구요? 제가 그것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깨끗하게 헤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아무 불만도, 원한 도 없는 상태로요. 호기심도 좀 작용했죠. 고디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젊은 친구를 보고 싶 었거든요. 보화야 수사님이 그 친구들을 빼돌리기로 작정하실 때까지 잘 보관되어 있을 테 니 그 일로 불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죠. 그러니 오늘처럼 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 까?" "딴에는 그렇겠군." 그들은 그 숲이 끝나는 곳에서 서튼의 넓은 도로로 나왔고 ,그 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꺾 어져 세인트 자일즈로 향했다. 그들은 무척이나 편한 기분이었으나 , 두 사람 모두 그 사실 에 그다지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버링가가 말했다. "시간이 다소 늦긴 했지만 이번에는 수도원의 정식 입주자들 답게 문지기실 앞으로 지나 가시기로 하죠. 수사님이 반대하시지만 않으신다면 허브 밭에 있는 오두막으로 곧장 가서 거기서 남은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고 싶거든요. 또 고디스가 수사님 밑에서 어떻게 지냈으며 어떤 기술을 배웠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구요. 그 친구들 은 이제 얼만큼 갔을 까요?" "풀까지 반은 갔을게요. 그보다 좀더 갔을지도 모르고 , 도로가 잘 닦여 있는 편이거든. 좋소. 내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같이 보도록 합시다. 그런데 전에 시내로 들어가 고디스의 행방을 수소문 한 적이 있었지요? 에드릭 플레셔의 가게로 찾아가서 말이오. 페트로닐라는 당신이 아주 불순한 동기로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던 데." 버링가는 웃으면서 말했다. "족히 그럴 여자죠. 자기가 돌보는 병아리의 배필감으로 마음에 꼭 차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 여자는 처음부터 저를 싫어했어요. 이제는 수사님이 그 여자의 마음 을 좀 편안하게 해 주실 수 있겠군요." 이윽고 그들은 어둠에 싸인 건물들 사이를 지나 조용한 수도원 앞길을 달려갔다. 밤의 정적 속에서 그들의 말발굽소리는 유난히 음산하게 울렸다. 그곳에 사는 몇몇 이들이 불안한 마 음에 덧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았으나, 너무도 한가롭고 느긋하게 가고있는 그들을 보고는 해를 끼칠 이들이 아니라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의 왼쪽, 수도원 담 안으로 는 거대한 교회가 높이 솟아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수도원의 정문이 보였다. 정문의 쪽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문을 지키는 평수사는 그 야심한 시각에 말을 탄 사람 둘이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약간 놀랐지만, 두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고 이내 안심했다. 이들은 위에서 시키는 정당한 심부름을 하러 나갔다 온 것일 테고, 요즘같이 격변하는 시절에야 그렇게 늦 은 시간에 볼일을 보러 다닌다고 해서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평부사는 졸린데다가 별 관심도 없어서, 그들이 마구간으로 가는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말들을 마 구간에 들이고서 짐보따리를 메고 허브밭으로 향했다. 버링가는 그 짐을 들어보더니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걸 거기까지 둘러메고 가셨단 말씀입니까?" "그랬지. 직접 보지 않았소." "정말 숭고한 노역이라 할 만한데요. 이번에도 다시 메고 갈 생각 없으신가요? 거리도 짧 은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데. 이제 그 짐은 당신 거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나오실까봐 염려했었죠!" 그러나 버링가는 스스로의 자부심을 충분히 만족시켰고, 고디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 당화했으며, 원하던 전리품을 손에 넣은 터라,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보기보다 힘이 좋은 편이어서, 그 무거운 짐도 허브밭까지의 짧은 거리 정도는 거뜬히 지고 갈 수 있었다. "여기 어딘가에 부싯돌과 부싯깃이 있으니 불을 밝힐 때까지 기다려주시오. 사방이 깨질 것투성이라서." 캐드펠 수사가 먼저 오두막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는 부싯돌과 부싯깃을 넣어둔 상자를 찾아내 돌돌 말려 있는 까맣게 탄 천에 불을 일으켜서, 조그만 기름 접시에 떠 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의 불꽃이 제대로 피어오르면서, 기묘하게 생긴 절구들과 플라스크들, 온 갖 병들, 향기를 뿜어내는 마른 허브 다발들에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버링가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수사님은 연금술사시로군요. 마법사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도 없겠는데요." 버링가는 오두막 한가운데에 짐을 내려놓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고디스가 밤 시간을 보낸 데가 여긴가요?" 그는 토롤드가 뒤척이며 불안한 잠을 자느라 담요가 구겨진 채 널려 있는 침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수사님이 만들어주신 잠자리로군요. 첫날부터 고디스의 정체를 눈치 채셨던 모양이죠?" "맞소. 나는 오랫동안 세상 경험을 한 사람이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 내가 빚은 과일주를 맛보겠소? 배가 잘된 해에 만든 건데." "거 좋죠! 앞으로 휴 버링가를 제외한 모든 적수들과의 싸움에서 내내 승리하시기를 기원 하면서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서 버링가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전리품을 묶은 줄을 풀었다. 자루 속에서 또 자루 가 나왔고, 그 자루에서 또다시 자루가 나왔다. 그가 열에 들떠 있다거나 탐욕스러워 보였다 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잔뜩 호기심에 부푼 정도일 뿐이었다. 세 번째 자루에서 짙은 색깔 의 옷뭉치가 굴러나왔다. 이제까지 눌려 있던 반동으로 옷뭉치가 주르르 펼쳐지면서, 바닥 위로 상의 소매 둘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짙은 색깔 겉옷에 하얀 셔츠 한 벌이 엉켜 있었 고, 그 안에서 매끈한 큰 돌 세 개와 돌돌 말린 허리띠 하나, 가죽 칼집에 들어 있는 단검 하나가 나왔다. 맨 마지막으로 옷뭉치 한가운데에서 단단하고 밝은 빛을 내는 자그마한 노 란 물체가 흐릿한 금빛과 은빛을 발산하며 또르르 굴러나오더니 버링가의 발치에서 멈추었 다. 그것이 전부였다. 버링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지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썹은 거의 이마 끝까지 치켜올라갔고, 검은 눈은 놀라움과 경악으로 휘둥그래졌다. 이제까 지 위축된 빛이나 놀라움이나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늘 입심 좋게 떠벌리던 그 얼굴에서 그 이상의 다른 표정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한 손을 휘저 어 옷가지들을 죽 펼쳐놓더니 입을 쩍 벌렸다. 버링가는 큼직한 돌들을 한동안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썹이 이마에서 소리 없이 춤을 추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 그의 두 눈에는 사태의 전말을 깨달았다는 기색이 어렸다. 그는 번뜩이는 눈으로 캐드펠 수사를 힐끗 쳐다보더니 온몸을 뒤흔들며 요란하게 웃어젖혔다. 그 서슬에 그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허브 다발들까지 흔들릴 지경이었다. 호방하고 기탄 없는 진실한 웃음이었으므 로, 캐드펠조차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제까지 줄곧 수사님을 가엽게 여겨왔었습니다. 이런 대비를 해두신 줄도 모르구 요! 수사님의 속셈을 어느 정도 간파했으니 잘하면 감쪽같이 속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제가 어리석었죠." 버링가는 어린아이처럼 손등으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더니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캐드펠은 과일주를 채운 비커를 그에게 내밀었다. "죽 들이켜시오. 앞으로 캐도펠을 제외한 모든 적수들과의 싸움에서 내내 승리하기를 빌 면서 혼자 건배해요!' 버링가는 비커를 받아들고 쭉 들이켰다. "수사님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분이시죠. 최후의 웃음을 터트린 분이시니까요. 하지 만 적어도 얼마 동안은 제게 승리감에 도취할 기회를 주셨고, 저는 앞으로 그보다 더 근사 한 기분을 맛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무슨 수를 쓰셨죠? 어떻게 하신 겁니까? 수사님 에게서 내내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 수사님은 그 친구가 물 속에 집어넣어둔 곳을 끌어올리 리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고, 거기에서 떨어지는 물이 돌난간에 떨어 지는 소리도 들었는데요." "그랬지. 그런 다음에 다시 집어넣었소. 소리나지 않게 조심조심 말이오. 이 짐은 내가 미 리 배에다 실어두었던 거요. 다른 짐은 당신과 내가 떠나자마자 고디스와 그 친구가 건져 올렸지." 버링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은 그 친구들이 갖고 있나요?" "그렇지. 지금쯤 두 사람은 오웨인 귀네드의 영역인 웨일스로 들어갔을 거요." "그럼 수사님은 제가 뒤따라다니면서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줄곧 알고 계셨습니까?" "당 신이 그 보화를 갖고 싶어한다면 의당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요. 당 신을 그 보화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줄 사람은 나말고 없을 테니까. 감시의 눈길을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을 이용하는 것말고 또 있겠소." "수사님은 분명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게 내 보물이라니!" 버링가는 소리치더니, 바닥에 널린 것들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웃어젖혔다. "이제는 고디스의 말뜻을 알겠습니다. 공정한 승리와 공정한 패배에는 사람의 마음을 상 하게 할 일이 절대 없으리라고 했죠." 그는 흙바닥에 펼쳐진 물건들을 좀더 차분하게 들여다보았다. 버링가는 이맛살을 찌푸리 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번뜩이는 눈으로 캐드펠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여러 장의 자루 속에 이 큰 돌들을 집어넣으신 것은 수긍이 가는 위장입니다. 그런데 다 른 것들은 왜 넣으셨습니까? 이것들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당신은 이것들이 뭔지 모를 거요. 나도 그 점은 알지. 이것들은 당신과는 무관한 것들이 고, 그것은 당신과 나 둘 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오." 캐드펠은 셔츠와 바지와 겉옷을 들여올려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것들은 니콜러스 페인트리가 밤중에 프랭크웰의 숲속 오두막에서 교살당한 뒤에, 살인 자가 제가 저지른 짓을 은폐하려고 성벽 밑에다 그의 시신을 버렸을 때가 그가 입고 있던 옷들이오." 버링가는 소리를 낮춰 말했다. "원래 수효보다 하나 많은 시신 말씀이로군요." "맞소, 토롤드 블런드가 그 친구와 함께 말을 타고 갔었는데 중간에 서로 헤어졌고, 그때 그런 사건이 벌어졌지. 그 살인자는 토롤드 역시 기다렸지만 죽이지는 못했소. 토롤드가 상 대를 쓰러뜨리고 짐을 갖고 달아났으니까." "그 부분은 저도 압니다. 그날 저녁 물방앗간에서 토롤드가 수사님께 한 얘기와 수사님 그 친구에게 들려주신 얘기의 마지막 대목이었죠. 하지만 그 이상은 몰라요." 버링가는 참혹하게 죽은 젊은 향사의 나들이옷이자 유품인 진갈색 바지와 황갈색 겉옷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버링가는 고개를 들어 캐드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제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수사님은 제가 딴 것을 찾느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을 때 이것들 이 불쑥 튀어나오게 하려고 하셨군요. 제가 이걸 보고 죄책감 때문에 기겁해서 펄쩍 뛰게 하려구요. 시가 함락된 날 밤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셨는데, 지금 기억하기로 저는 그때 말을 타고 혼자 외출했었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시내에 갔었구요. 좋습니다. 죄다 말씀드리 죠. 그때 저는 페트로닐라가 무심코 흘린 얘기를 엿들었습니다. 그 덕에 프랭크웰의 두 젊은 이가 말을 타고 떠나려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제가 귀담아들 었던 건 고디스의 행방에 관한 단서였고, 그것 역시도 얻어내기는 했지만요. 네, 저는 제가 의심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렴 제가 살인을 할 사람으로 보이 십니까? 그렇게 비열하고 흉악한 방법으로요? 그리고 그저 그 쓰레기를 얻으려고 그 친구 들을 웨일스로 떠나보냈다구요.? 캐드펠은 부드럽게 반문했다. "쓰레기?" "아. 물론 있으면 기분 좋고 쓸모 있는 거라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자기가 필요로 하 는 만큼 돈을 넉넉하게 갖고 있을 때라면 그 이상은 쓰레기에 불과하죠. 생각해보세요. 그걸 먹을 수가 있나요. 입을 수가 있나요. 비와 추위를 가릴 수 있나요. 읽을 수 있나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나요. 사랑을 할 수 있나요?" 캐드펠은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왕의 호의는 살 수는 있겠지." "저는 이미 왕의 눈에 들었습니다. 왕은 자문관들이 설득할 때는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혼자 가만 내버려두면 인재를 만났을 때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분노하거나 복수심에 불타고 있을 적에는 온당치 못한 일들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지나친 지시 에 대해 재고해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 지시를 따르는 이들은 경멸하는 사람 이구요. 저는 그날 저녁에 얼마 동안 왕의 진영에서 왕과 함께 있었습니다. 제가 제 힘이 미 치는 대로 물자와 병력을 동원해주겠다니까 왕은 대신 제 성들과 영지를 그대로 보유해도 좋다고 했어요. 저로서는 아주 만족스런 제안이었죠. 그러니 피첼런 어른의 금을 얻을 기회 가 왔다면, 물론 환영이야 했을 테지만, 그 기회를 잃었다 해도 크게 애석해할 일은 아니잖 겠습니까. 게다가 근사한 싸움이었구요. 그러니 대답해주십시오. 수사님. 수사님이 보시기에 제가 돈 때문에 등뒤에서 사람을 교살할 자로 보이십니까?" "아니지! 그렇게 생각할 여러 정황이 있기는 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그 가능성은 배제해 버렸소.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당신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이니, 금같이 하찮 은 것을 자신의 자부심보다 더 높이 평가할 리가 없지. 나는 오늘밤에 시험에 부쳐보기도 전에도, 당신이 고디스를 위험한 처지에서 구해내고 싶어하고 고디스를 도망치게 할 방법들 을 내게 암시해왔다고 이미 굳게 확신하고 있었소. 그러면서 금을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으 니 무척이나 공정한 거래였지. 당신이 내가 찾는 자가 아니오. 내가 보기에 당신이 할 수 없 는 일은 그리 많지 않소. 당신을 잘 알게 된 지금, 나는 비열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은 당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당신은 제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오. 이 물건들 중에는 당 신의 마음을 뒤흔들 만한 것도, 당신이 알아볼 것도 없으니까." "알아볼 게 없다......아니, 그렇지도 않아요." 버링가는 은 발톱이 움켜쥐고 있는 노란 황옥을 집어들더니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돌려보 았다. 이윽고 버링가는 몸을 일으켜 등잔불에 대고 찬찬히 뜯어보았다. "본 적은 없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어떤 직감이 듭니다. 만들어진 모양새로 보아 제가 아 는 물건일지도 모르겠어요. 앨린이 자기 오빠의 시신을 매장할 준비를 하는 사이에 저는 그 곁에 있었습니다. 그때 앨린은 오빠의 물건들을 한데 모았죠. 제가 알기로, 죽음의 순간 진 땀으로 얼룩져버린 셔츠를 제외한 모든 옷가지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해달라고 수사님께 가져왔을 겁니다. 그때 앨린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도 없는 어떤 물건에 대해 얘기했죠. 자 기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단검인데. 그 집안의 장남들은 성년이 되면 그걸 물려받았다고 하더군요. 앨린은 그 모양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는데. 이 커다란 보석은 그 단검자루의 끝 을 장식하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캐드펠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디서 찾아내셨죠? 죽은 사람에게서 나온 건 아닐 테 구요!" "그렇지는 않지. 허나 토롤드가 살인자와 뒹굴며 격투를 벌였던 현장의 흙바닥에 박혀 있 었소. 토롤드의 단검에서 나온 것은 아니오. 그러니 그 단검을 갖고 있었을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지." 버링가는 경악해서 물었다. "그럼 페인트리를 교살한 사람이 앨린의 오빠라는 말씀인가요? 앨린에게도 그 책임이 있 구요? 캐드펠은 달래듯이 말했다. "당신은 시차를 잊고 있소. 자일즈 시워드는 니콜러스 페인트리가 살해되기 몇 시간 전에 죽었지. 그러니 혹시 앨린에게도 죄가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소. 니콜러스 페인 트리를 죽인 자는 우선 자일즈의 몸을 뒤져 그 단검을 훔쳐 차고서 매복 장소로 갔을 거 요." 버링가는 고디스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네요. 한 잔 더 주십시오." 캐드펠이 비커를 다시 채워주자 버링가는 갈증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들어켜더니, 다시 황 옥을 집어들고 손으로 무게를 가늠 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인을 잡을 단서 하나를 갖고 있는 셈이네요. 놈은 성에서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적어도 얼마동안은 분명히 그곳에 있었어요. 우리의 판단이 옳다면 이 물건이 박혀 있던 그 아름다운 무기를 놈이 거기서 훔쳤을 테니까요. 하지만 처형은 밤 까지 계속되었으니, 놈은 처형이 끝나기 전에 그곳을 떠났을 겁니다. 그리고 프랭크웰 한쪽 에 있는 매복 장소로 숨어 들어갔겠죠. 그들의 계획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처형당한 그 불 쌍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목숨을 구하려고 동료들을 배신했을까요? 처형이 시작되었을 때 수사님이 찾는 그자는 그곳에 있다가 일이 끝나기 전에 떠났습니다. 프레스고트는 틀림없이 성안에 있었고, 텐 헤이트와 플라망 용병들도 처형을 하느라 그곳에 머물러 있었죠. 제가 듣 기로 쿠셀은 기회가 생기자마자 얼른 그곳을 빠져나가, 피첼런 어른을 잡으러 시내를 수색 하는 좀더 깨끗한 일에 매달렸다고 하니까, 쿠셀에게는 혐의를 두기가 어렵습니다." 캐드펠이 불쑥 지적했다. "플라망 용병들 모두가 잉글랜드어를 구사하지는 못하지." "일부는 할 줄 압니다. 그리고 처형당한 아흔여덟 명 중에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이 반 이상이었을 거구요. 플라망 용병들 중 한 사람이 그 단검을 탈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가치 있는 물건인데다가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번 사건에서 수사님과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억울한 죽음은 반드시 그 진상을 밝혀내야 합니 다. 이 사건이 앨린에게 더욱 큰 슬픔이나 수치를 안겨주지는 않을 테니, 앨런에게 더욱 큰 슬픔이나 수치를 안겨주지는 않을 테니. 앨런에게 이것을 보여서 그녀가 알고 있는 단검에 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보는 것도 좋겠군. 내일 평의회가 끝난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당신 이 그럴 의향이 있고, 내가 평의회에서 속죄의 고행을 부과받아 일주일 간 근신하는 일이 없으면 말이지만." 일은 캐드펠 수사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무척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그가 아침기도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수사들도 수도회 평의회 전에는 그 일을 깨끗이 잊고 있었다. 심지어 로봇 부원장까지도 그 점을 지적하면서 참회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전날의 흥분과 비탄이 가신 뒤 좀더 희망적인 일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병력과 말들을 새로 충원하고 많은 식량과 건초를 징발한 스치븐 왕은 모드 황후와는 이복남매 간이자 황후에게 가장 충성하는 글로스터의 모버트 백작의 서쪽 거점을 공격하려고 우스터로 진군하려 하고 있었다. 왕의 선봉대는 이튿날 떠날 예정이었으며, 왕 자신은 시루즈베리 성의 수비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이틀을 묵을 예정으로 지금 성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징발 경과에 퍽 만족한 왕은 묵은 감정의 앙금을 말끔히 씻고 싶은 마음에, 화요일인 오늘 성에서 열리는 저녁만찬 에 헤리버트 원장과 로버트 부원장을 초대했다. 수도원 측에서는 그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사소한 죄 따위는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 캐드펠은 감사한는 마음으로 작업장으로 돌아와, 고디스의 침대에 누워 버링가가 와서 깨 울 때까지 곤히 잤다. 버링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 손에 황옥을 들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 이 엿보이기는 했지만 침착함만은 여전했다. "이건 앨린 집안 것이었습니다. 앨린은 이걸 알아보고 반가운지 두 손으로 꼭 쥐어보더군 요. 세상에 이렇게 생긴 것이 또 있을 수는 없죠. 이제 저는 성으로 가봐야 합니다. 왕이 베 푸는 만찬이 벌써 진행중이거든요. 그 자리에는 텐 헤이트와 플라망 용병들도 참석할 겁니 다. 자일즈가 죽은 뒤 그 단검을 훔친 자를 꼭 찾아내고 말겠습니다. 그자를 찾아내기만 하 면 살인자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겠죠. 헤리버트 원장님께 청해서 오늘 저녁 성으로 오실 수 없을까요? 원장님은 수행원이 필요하시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수사님이 청하기만 하시면 원장님은 기꺼이 응하실 겁니다. 수사님이 가까이 계시면 제가 뭔가 드릴 말씀이 있어도 쉽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캐드펠은 끄응 소리를 내며 쩍 하품을 하더니, 간신히 눈을 떠 자기 족으로 허리를 숙인 청년의 영리하고 빈틈 없어 보이는 얼굴을 올려보았다. 매섭고 냉정하고 뭔가 열심히 쫓는 얼굴이었다. 그는 인제 강력한 원군을 얻고 있었다. 캐드펠은 웅얼거렸다. "나를 깨운 죄로 당신에게 가벼운 저주가 내렸으면 좋게구먼. 허나 저녁에는 꼭 가겠소/" 버링가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건 원래 수사님의 일이었습니다." "여전히 내 일이긴 하지. 부탁이니 날 자게 내버려두고 어서 가서 만찬을 즐기시오. 오후 에도 내 시간을 빼앗을 테니, 당신을 이래저래 내 명을 재촉하는 악마 같은 사람이구먼." 휴 버링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앞으로 할 일이 부담스러워 소리를 죽이기는 했 지만. 버링가는 캐드펠의 널찍한 갈색 이마에 가볍게 십자가를 긋고 그의 곁을 떠났다. 11. 밝혀진 진실 왕의 만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시중드는 사람을 한 명씩 대동해야 했다. 게다가 캐드펠 수사는 집단매장 문제를 처리했고 무고하게 살해당한 이에 관해 왕과 이야기까지 나 눈 터라, 왕이 그 문제에 관해 물어볼 때를 대비해서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쉽게 원장 을 설득할 수 있었다. 로버트 부원장은 변함 없는 아첨꾼이요, 그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제 롬 수사를 데리고 갔다. 제롬 수사는 핑거볼이며 냅킨이며 물주전자 시중에는 워낙 탁월했 고, 다른 일에 정신을 팔 가능성이 있는 캐드펠 수사보다는 한층 바지런한 사람이었다. 캐드 펠 수사가 여태껏 적의라는 것을 갖고 있다면, 로버트 부원장과 제롬 수사는 그의 오랜 적 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병적으로 창백한 삭발한 정수리를 무척이나 혐오했으니까. 시내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왕을 존경해서라기보다는 왕이 곧 떠날 예정이어서 조성된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밖으로 보이기에는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에드릭 플레셔는 만찬에 초 대받은 손님들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려고 가게를 나와 하이 가(街)까지 내려왔다. 캐프렐 수 사는 에드릭을 보고,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 있으며 무척이나 흡족한 내용이어서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암시로 가볍게 눈짓을 했다. 에드릭은 환하게 웃으며 살집이 두둑한 손을 흔들었고, 캐드펠 수사는 그가 그 암시를 제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페 트로닐라는 자신의 어린양이 떠난 것을 슬퍼할 테지만, 든든한 호위자를 대동하고 무사히 탈출한 것에는 크게 기뻐하리라. 원장의 시중을 드는 일이 끝나는 대로 곧 그 가게에 들러 야지. 캐프렐 수사는 시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자일즈 시워드의 좋은 바지를 입고 뽐내듯 앉아 점잖게 손을 벌리고 있는 장님 노인을 보았다. 하이 가 네거리에서는 입술을 헤벌리고 있는 정신 박약아 손자를 한 손으로 부축하고 있는 왜소한 노파도 보았다. 질 좋은 갈색 겉옷은 그 젊은이에게 잘 맞았고, 젊은이는 그 기분 좋은 감촉 덕분에 황홀한 만족감에 싸여 있는 듯했다. 아. 앨린. 그대는 음식과 옷가지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무척이나 소중한 자비 를 베풀었구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대가 직접 보아야 하는데. 그 포장된 도로가 성문을 향해 뻗어 올라간 곳에는 왕의 진영을 따라 다니는 거지들이 잔 뜩 기대에 부풀어 새 자리들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왕의 대판관인 솔즈베리의 로버트 주 교(부록참조)가 자신의 상전을 만나기 위해 부유하고 직위가 높은 성직자들의 행렬을 이끌 고 그곳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경비초소벽의 그늘 속에는 작은 손수레를 탄 앉은뱅이 오 즈번이 자리잡고 있었다. 거기서라면 움직일 필요없이 편하게 구걸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오 즈번이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보호하느라 쓰는 나막신들은 그의 곁, 밤이 오기 전에는 필요 치 않아 잘 개켜놓은 검은 망토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워낙 반듯하게 개켜놓았기에 까 만 천 위에 도드라진 망토 목 부분의 금속 걸쇠가 더욱 눈에 띄었다. 제 꼬리를 입에 문, 영 원을 상징하는 용이 부조된 걸쇠. "지난번에 왕 진영의 경비초소 곁에서 자네와 만난 적이 있지. 그 후로 잘 지냈나? 이번 에는 더 좋은 자리를 잡았군그래." 캐드펠은 다른 사람들을 먼저 성문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잠시 멈춰 서서 그 불구자에 게 말을 걸었다. 오즈번은 놀라우리만치 맑고 순수해 뵈는 눈으로 캐드펠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이 아니었다면 그의 얼굴 역시 몸만큼이나 흉측하게 보였으리라. "수사님을 기억합니다요, 제게 망토를 주신 분이죠." "그래 쓸 만하던가하던가?" "그럼요. 그리고 수사님이 당부하신 대로 그 숙녀분을 위해 기도해왔습죠. 그런데 수사님, 그건 제게는 괴로움을 안겨주기도 하는 일입니다요, 전에 이 망토를 입었던 분은 돌아가셨 죠, 그렇죠?" "그렇다네. 허나 그렇다고 괴로워하지는 말게나. 그걸 자네에게 보내준 숙녀는 그 사람의 누이동생이고, 그 옷을 축복하면서 내게 맡겼으니까. 그러니 그 옷을 입고 편히 지내게." 캐드펠은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오즈번은 그의 승복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통 사정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수사님, 저는 죄를 지은 탓에 겁이 납니다요. 저는 그 사람을 봤거든요. 이 망토 를 입고 저처럼 말짱하게 살아 있는 그 사람을요......" "그 사람을 봤다구?" 캐드펠은 숨죽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즈번의 근심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날 밤에 저는 너무 추워서,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런 망토를 보내 저를 따뜻하게 해주 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요! 수사님, 생각하는 건 기도하는 거나 다름없잖습 니까요! 그러고 나서 사흘도 지나지 않아 하는님께서는 정말로 제게 이 망토를 보내주셨어 요, 수사님이 제 품에 안겨주셨죠! 그러니 제 마음이 어떻게 편할 수 있겠습니까요? 그 청 년은 그날 밤 제게 은화를 주면서 내일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했습죠. 하지만 제 첫 번째 기도가 두 번째 기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면 어 떻게 하죠? 제가 망토를 얻으려고 한 사람을 무덤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한거나 마찬 가지라면요?" 캐드펠은 싸늘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오즈번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마음과 눈이 맑은 온전한 사람이었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내는 진실로 깊은 근심에 싸여 있었으며, 그 근심이 온 마음을 사 로잡고 있었다. 캐드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들은 깡그리 잊게나. 악마만이 그런 생각들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니까. 하느님 께서 자네가 바라던 것을 보내주셨다면 그것은 크나큰 악으로부터 작은 선을 구해내기 위한 뜻이었을 게야. 그러니 자네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네. 자네가 그 옷 임자를 위해 올린 기도는 지금까지도 그의 영혼에 많은 도움이 될 걸세. 그 청년은 피챌런 씨의 수비대원 중 의 하나였는데, 성이 함락된 뒤에 왕의 명령으로 처형당했지. 그러니 자네가 두려워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네. 그 청년의 죽음은 자네탓이 아니니까. 그리고 자네가 아무리 속죄를 한다 해도 그 친구를 살려낼 수는 없지 않은가?" 사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 덜었다. "피챌런 어른의 부하라구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청년이 왕의 진영으로 들어갔 다가 나오는 걸 봤는데요?" "자네가 그 청년을 봤다구? 확실한가? 이 망토가 그 청년이 걸쳤던 것과 같은 옷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 "목에 붙어 있는 이 걸쇠를 봤으니까요. 그 청년이 저한테 은화를 줬을 때 불빛 속에서 이걸 똑똑히 봤습죠." 그렇다면 사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과 똑같은 문양을 가진 또다른 걸쇠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캐드펠은 자일즈 시워드의 검띠 버클에서도 이와 똑같은 문양을 보았 다. 캐드펠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 청년을 본 게 언제였지? 그 청년을 만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공격이 시작되기 전날 밤 자정쯤이었습니다요. 그때 저는 불을 쬐려고 경비초소 가까운 데에 자리잡고 있었습죠. 그 청년은 숲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났습니다요. 경비병들이 누구 냐고 외치니까. 그 청년은 왕에게 도움이 될 얘기가 있으니 자기를 사람들의 상관한테 데려 다달라고 했습니다요.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젊어 보였어요. 몹시 겁을 냈구요! 하지 만 그 당시 겁먹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요! 경비병들은 청년을 데리고 안으로 들 어갔고, 조금 있다가 다시 나오는 것도 봤는데, 이번에는 순순히 내보내주데요. 청년은 의심 을 받아서는 안 되니 다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요. 제가 들은 건 그게 전 부입니다요. 얼굴이 환한 게 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지 않기에, 저는 한푼만 달라고 했 습죠. 그러자 청년은 은화를 주면서 내일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요. 그런데 그 다음날 죽었다뇨!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 제 곁을 떠날 때 그 사람은 내일 죽을 거라 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얼굴이었습니다요." 캐드펠은 두려움과 많고 상처받기 쉬운 모든 나약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으로 가슴 이 저렸다. "맞네, 죽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게야. 우리 중의 그 누구도 그날이 언제 닥칠지 모 르니까 말일세. 허나 그 청년을 위해 많이 기도해주게나. 자네의 기도가 그의 영혼을 위로해 줄 테니까. 자네가 그 청년에게 해를 끼쳤다는 생각은 깨끗이 떨쳐버리고, 사실이 그렇지 않 아. 자네는 그 청년이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실 거네. 잘못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어떤 해도 미치지 않은 게야." 오즈번은 그제야 안심을 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캐드펠은 그 곁을 떠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앉은뱅이 사내가 떨쳐 버린 불안과 우울의 짐을 대신 짊어진 채로. 캐드펠은 생각에 잠겼다. 타인을 구원한다는 것은 항시 자신이 그 짐을 대신 짊어진다는 뜻이다. 그와 똑같은 무게만큼의 짐을! 문득 캐드펠은 한 가지 질문을 더 했어야 하는데 깜박 잊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시급한 질문이었다. 그는 오던 길을 되짚어갔다. "그날 밤 경비책임을 맡은 장교가 누구였는지 아나?" 오즈번은 고개를 가로저었따. "본 적도 없고,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온 적도 없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요." "이제는 쓸데없이 괴로워하지 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그 망토가 죽음이 아 니라 축복이 깃들인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마음 편히 입도록 하게." 캐드펠은 성 안뜰에서 헤리버트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만찬장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잠깐 볼일을 보고 왔으면 합니다. 니콜러스 페인트리와 관련된 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안채에서는 스티븐 왕이 초대받아 온 인사들을 접견하느라 그 넓은 뜰이 온통 성직자들이 며 주교들이며 그 주의 소귀족들, 백작, 그리고 그 밖의 일행들로 북적이고 있었으므로, 그 렇지 않아도 연회가 시작되어야 필요해질 하찮은 수행원들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게 다가 원장은 솔즈베리 주교와 마음에 맞는 대화를 나누게 되었으므로 캐드펠의 청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캐드펠은 휴 버링가를 찾아나섰다. 그의 마음은 오즈번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몹 시 울적했다. 많은 의문이 풀려나가며 서글픔을 안겨주었지만, 아직도 한 가지 의문만은 풀 리지 않고 있었다. 피챌런의 보화에 관한 이야기를 누설한 사람은 목에 밧줄이 걸리는 마지 막 순간 공포에 질려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배신은 성이 함락되기 하루 전, 아직 전투의 결말이 나지 않았을 때 일어났다.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 끝에 나온 행위였다.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는 남몰래 왕의 진영으로 와서, 왕에게 도움이 될 만한 소식이 있으니 경비책임을 맡은 장교에게 데려다달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 갈 때는 경비병에게 자기편의 의심을 사지 않게끔 성으로 되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 다. 그때 그는 한시름 놓고 있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무슨 핑계나 구실을 대고 성을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되-적의 위치를 정찰하러 나가겠다는 핑계를 대지 않았을까?-동료들의 의심을 사지 않게끔 성으로 돌아가라는 적의 장교의 지시 에 따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성으로 돌아간 그를 기껏 맞이한 것은 애써 피했다고 여 겼던 죽음이었다. 휴 버링가는 넓은 홀에서 나와 그 앞의 계단에 서서, 이리저리 오가는 인파 속에서 한 사 람을 찾느라고 목을 늘여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으로 한껏 차려입은 소귀족들의 화려한 의상의 물결 속에서 베네딕트회의 검은 승복이 언뜻언뜻 눈에 띄기는 했지만, 키가 작은 편인 캐드펠 수사는 많은 사람들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버링가보다는 캐드펠이 먼저 상대를 찾았다. 캐드펠이 인파를 헤집고 버링가에게 다가가자, 꿈틀거리는 눈썹 아래에서 안뜰을 훑던 버링가의 날카로운 검은 눈이 그를 발견하고 반짝했 다. 버링가는 계단을 내려오더니 좀더 으슥한 곳으로 가려고 캐드펠의 팔을 잡아끌었다. "경비병들이 다니는 길목으로 가시죠. 거기에는 경비병들말고는 아무도 없을테니까요. 이 런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성벽 앞에 이르렀다. 버링가는 자기네 쪽으로 오는 모든 이들을 훤히 볼 수 있 는 호젓한 자리로 캐드펠을 이끌었다. 그는 캐드펠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수사님 얼굴에 새 소식이 있다고 씌어 있군요.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제 얘 기를 해드릴 테니까요." 캐드펠은 조금 전에 들은 말을 간략하게 전했고, 버링가는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했다. 버링가는 등을 방어하기라도 하려는 듯 감시구와 감시구 사이에 불룩하게 솟은 흉벽에 기대어 섰다. 그의 얼굴은 당혹감을 이기지 못해 일그러졌다. "앨린의 오빠였군요! 다른 사람일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은 밤중에 몰래 성을 빠wu나와 얼 굴을 가리고 왕의 진영으로 가서 왕의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고 올 때처럼 살그머니 돌아간 겁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아, 미치겠군!" 버링가는 거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짓이 허사로 돌아간 거예요! 자기편을 배신하고 좀더 고약한 자에게 희 생당하는 결과를 빚은 거예요. 수사님은 아직 모르세요. 그게 사건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 만 그 사람은 앨린의 오빠가 틀림없습니다! 하필이면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소. 앨린의 오빠였지. 판단을 잘못해서 황후 편에 붙은 것을 후회 하고, 목숨을 잃을 거라는 두려움에 쫓긴 나머지 공격군 진영으로 황급히 달려갔소. 자기 목 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뭘 제공하겠다고 했다더라? 왕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이라 했다 는군! 바로 그날 저녁 수비군 측에서는 회의를 열어 피챌런 씨의 금을 옮기기로 결정했소. 그 살해자는 아주 적절한 시점에 그런 경로로 해서 페인트리와 토롤드가 무엇을 운반하고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알게 된 거요. 내 생각에 그자는 그 금을 독차지하려고, 그 소식을 왕 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직접 탈취하러 나섰을 거요. 그렇지 않다면 일이 그런 식 으로 끝날 수 없었겠지. 오즈번이 말한 대로 청년은 그자의 말에 속아 어느 정도안심을 하 고, 지시받은 대로 성으로 돌아간 거요." 버링가는 씁쓸하게 말했다. "앨린의 오빠는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겁니다. 아마 왕에게서 좋은 대우를 받 고, 관직을 얻게 되리라는 언질도 받았겠죠. 그자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밝은 표정으로 돌아 간 겁니다. 하지만 그자의 진짜 의도는, 앨린의 오빠가 그 이야기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성으 로 돌려보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포되어 처형당하게 하는 거였죠. 그날 수비군을 처형하 는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던 플라망 용병중의 하나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어요. 헤 스딘 아눌프가 처형당한 뒤, 텐 헤이트가 한 청년을 지목하면서 상부로부터의 명령이니 그 청년을 두 번째로 처형하라고, 형을 집행하는 용병들에게 지시했답니다. 용병들은 시키는 대 로 했구요. 처음에 앨린의 오빠는 자기를 딴 데로 빼돌리려는 연극이라 생각하고 순순히 끌 려나온 모양이더군요. 그러다 그것이 실제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자 비명을 지르고 악을 쓰 면서 저항했고, 용병들은 아주 재미있어했답니다. 너희가 잘못 알고 있다, 자기는 죽을 사람 이 아니다,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사람을 보내서 물어봐라....." "사람을 보내서 물어봐라...... 애덤 쿠셀에게 말이지." "글쎄요. 누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그 용병도 이름은 듣지 못했다 고 하구요. 특별히 그 사람을 지목하시는 무슨 이유라도 있으세요? 그 사람은 딱 한 번 들 르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는데요. 처형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은 사람이 몇 안 되 었을 때 그리로 와서 시신들을 들여다보더니 자기가 맡은 일을 하러 시내로 나갔고, 다시는 그리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답니다. 용병들은 그것을 보고 애덤 쿠셀이 소심한 사람이라 생 각했구요." "단검은? 용병들이 자일즈를 처형할 때 그걸 차고 있었다던가요?" "그랬답니다. 저와 얘기한 용병도 그 단검에 눈독을 들였는데, 임무교대 시간이 와서 잠시 쉬는 사이에 가지러 가봤더니 이미 없어졌더랍니다." 캐드펠은 씁쓸하게 말했다. "엄청난 횡재수가 생겼어도 그 과정에서 눈에 띤 사소한 여분의 이익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게로군."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런데 수사님은 왜 그자가 쿠셀이라고 단정하십니까?" "앨린이 성으로 와서 오빠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쿠셀이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었던 것이 기억 나서 그러오. 그때 그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던 거요. 그자는 이렇게 말 했소. ‘아, 내가 알았더라면...... 사전에 알았더라면 구해냈을 텐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분을 빼냈을텐데...... 하느님 저를 용서해주소서!’허나 그자가 말한 참뜻은‘앨린 나를 용 서해주오’요. 그때 그자는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었겠지. 나로서는 그런 것을 참회라고 부르 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자는 그 망토를 돌려주었소. 당신도 그건 기억할 거요. 아마 단 검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요. 허나 그럴 수가 없었지. 그건 이미 자루가 망가져서 불완전한 것이 되어 있었으니까." 캐드펠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자가 지금 그 단검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구먼. 애초에 시신의 몸에서 그걸 훔칠 정 도의 인간이라면 남에게 내주기가 쉽지 않았을 거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도 말이오. 그 렇다고 그냥 갖고 있다가 자칫 앨린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그자는 요즘 앨린의 사랑을 얻으려고 안달하는 중이니까. 어떨 것 같소? 그자가 그걸 어딘가에 숨겨두고 싶어할 까, 아니면 없애버리고 싶어할까?" 버링가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면서 말했다. "수사님의 판단이 옳다면 우리에게는 그 단검이 꼭 필요합니다. 좋은 증거니까요. 그런데 수사님,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죠? 동료들은 사지에서 허덕이고 있는 판국에 그런 식으로 제 한 목숨을 건지려 한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도 좋게 봐줄 구석이 없는데 요. 하지만 수사님이나 저나 이 문제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는 없어요. 그랬다가는 더없이 순 수하고 고결한 아가씨에게 치명타를 입히게 될 테니까요. 앨린은 오빠 때문에 슬퍼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앨린은 앞으로도 오빠가 배신을 한 대가로 사면을 약속받았다고 울부 짖으면서 비굴하게 죽은게 아니라, 최후까지 자신의 선택을 충실하게 고수하다가 죽었다고 여겨야 해요. 지금이건 앞으로건 앨린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돼요." 캐드펠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우리가 그자를 고발한다면 이 사건은 재판에 회부될 테고, 그렇게 되면 모든 사실 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거요. 그렇게 되게 할 수가 없으니 그게 바로 우리의 약점이지." 버링가는 소리를 높였다. "그건 우리의 강점이기도 합니다. 그자 역시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을 테 니까요. 놈은 왕 밑에서 출세하기를 원하고 공직을 원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앨린도 원하구 요. 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일 이런 사실이 털끝만큼이라도 앨린의 귀에 들어갈 경우 놈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녜요, 놈은 우리 못지않게 이 사실을 영원히 묻어두고 싶어할 거예요. 즉석에서 분쟁을 종결지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준다면 놈은 좋다고 달려들걸요." 캐드펠은 점잖게 말했다. "그렇겠지.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하고 있소. 그러나 내 입장도 이해해줘야 하지 않겠소? 나 는 또다른 책임을 안고 있는 처지요. 우리가 정의를 제대로 세우지 못해서 니콜러스 페인트 리의 영혼이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면 곤란하지." "저를 믿어주십시오. 오늘밤 왕이 베푸는 만찬장에서 제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저를 도울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계십시오. 나콜러스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복수도 하게 될 거구요. 하지만 그 일은 제게 맡겨주셔야 합니다." 캐드펠은 버링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 의혹과 당혹감에 휩싸인 채로 원장의 의자 뒤에 섰다. 망가진 단검도 없는데 과연 쿠셀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을까. 버링가와 이야기를 나눈 플라망 용병은 쿠셀이 단검을 가져가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오빠의 몸 위에 엎어진 앨린에게 고통과 충격이 역력한 표정으로 쿠셀이 소리친 말들은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그러 나 휴 버링가의 얼굴에는, 니콜러스 페인트리뿐만 아니라 앨린 시워드를 위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겠다는 결열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버링가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빠가 가문의 명성과 제 이름을 더럽힌 사람이라는 사실 이 앨린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버링가는 애덤 쿠셀의 목숨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터였다. 캐드펠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나도 모르게 저 젊은 친구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었군그래. 저 친구가 아무 해도 입지 않았 으면 좋겠는데. 차라리 이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토롤드 볼런 드와 고디스 애드니에 관한 부분은 슬쩍 빼고서 우리가 확보한 증거들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야 하겠지.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애덤 쿠셀이 자일즈 시워드의 단검을 훔쳤다는 구체적인 정황 증거라도 제시해야 하는데. 그 단검과 살인 현장에서 찾아낸 황옥을 맞춰볼 수 있다면 더욱 좋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쿠셀은 모든 것을 부인하면서, 자기는 황옥도 단검도 보지 못했으니 답변할 말이 없다고 할 테지. 그러면 왕 밑에서 쌓아올린 혁혁한 전 공과 높은 지위가 있으니, 아무 탈없이 무사히 빠져나가게 될 테고. 그날 밤의 만찬은 순전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에만 한정된 행사여서 숙녀들은 한 사 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커다란 홀은 빌려온 커튼과 휘장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었 고, 사많은 횃불들로 휘황하게 밝았다. 왕은, 군대가 쓸 군수품 징발을 담당한 이들이 임무 를 훌륭히 소화해내 수비대의 군량과 건초가 충분히 확보되었으므로 무척 흡족한 상태였다. 헤리버트 원장은 왕이 자리한 맨 윗단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캐드펠은 원장의 뒤에 서서 홀 전체를 굽어보았다. 참석한 손님이 대충 오백명은 되는 듯했다. 그는 버링가를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단 아래에 있는 테이블에서, 마음속에 그 어떤 은밀한 계획도 품지 않은 것처럼 명랑하고 활달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화려한 정장 차림의 버링가를 보았다. 버 링가는 자신의 표정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쿠셀을 힐끗 쳐 다볼 때도, 맞붙어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를 갖고 있다는 기미를 내비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주목을 끌 만한 그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쿠셀은 왕이 앉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초대받은 고관들이 촘촘히 둘러앉은 자리의 말 석이기는 했지만. 체구도 당당하고 활기가 넘치고 얼굴도 잘생긴데다가 왕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내가 온갖 비열하고 흉측한 수단을 동원해가며 남 몰래 그 보화를 차지하려 들었다니! 그러나 이같은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이 뭐 그리 이상한 일이겠는가? 왕에게서 받는 총애가 왕의 운명과 더불어 기울 수 있고, 영주들은 운 세가 바뀌는 데 따라 하루가 다르게 편을 바꾸고 있으며, 귀족들조차도 하루아침에 자신을 파멸시키거나 포로로 만들 수 있는 공허한 대의명분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쫓기에 급급한 세 태에서야! 쿠셀은 그저 이 시대의 한 상징에 불과했다. 몇 년 내에 이 나라 곳곳에서는 그 를 닮은 자들이 횡행하게 되리라. 캐드펠은 그런 불안한 미래를 예감했다. 잉글랜드가 이렇게 흘러가다니 도무지 마음에 들 지 않았다. 휴 버링가가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고서 수상쩍은 싸움터로 출격하려 하고 있으 니, 이제 곧이어서 일어날 일은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캐드펠은 긴 식사시간 동안 혼자서 속을 끓였다. 항시 술을 절제하고 소식을 하는 헤리버 트 원장의 시중을 드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캐드펠은 물을 따라주고 냅킨과 핑거볼을 챙겨주면서 일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두자는 심경으로 잠자코 기다렸다.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접시들이 치워지고 테이블에 포도주만 남게 되자, 시중들던 사람 들도 주방으로 가서 남은 음식들을 골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요리사들과 허드렛일꾼들은 이미 자기 몫을 챙겨들고 조용한 구석으로 가서 먹고 있었다. 캐드펠은 먹다 남은 빵과 고 기를 모아들고 넓은 안뜰을 가로질러 성문 앞에 있는 앉은뱅이 오즈번에게 갔다. 캐드펠은 포도주도 가지고 갔다. 그 가난한 사람도 한 번쯤은 왕이 치르는 돈으로 호사를 누려야 하 지 않겠는가. 그래봤자 그 비용은 사회의 위계질서를 따라 차례로 내려가 결국은 모조리 가 나난 사람들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말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생을 치르면서도 자기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의 몫은 결코 차지하지 모하게 마련이었다. 캐드펠은 연회장으로 돌아가다가 경비초소 횃불 아래 쪼그려 앉은, 열두어 살 먹은 사내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초소 벽에 편안히 기대어, 날이 가는 칼로 고기를 잘게 썰고 있었다. 캐드펠은 좀전에도 주방에서 그 아이가 같은 칼로 생선의 배를 갈라 내장을 빼는 것을 보기 는 했으나 그 자루는 보지 못했다. 지금도 아이가 고기를 먹으면서 그 칼을 옆의 땅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면 못 보고 지나쳤을 터였다. 캐드펠은 걸음을 멈추고 그 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평범한 부엌칼이 아니라 잘 만들어 진 단검이었다. 쥐기 좋게 둥글면서도 기름한 자루는 은사(銀絲)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세공 되어 있었고, 손을 보호해주는 가로대에서는 조그만 보석들이 빛을 발했다. 꿈틀거리는 어떤 형상을 은으로 부조한 자루의 맨 끝은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지만 그 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실로, 생각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캐드펠은 자기도 모르게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된 그 아이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되겠기 에, 더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얘야, 너 그렇게 좋은 칼이 어디서 났니?" 소년은 고개를 들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소년은 볼이 미어지게 입 속에 우겨넣 고 씹던 음식을 꿀꺽 삼키더니 활달하게 말했다. "어쩌다가 얻은 거예요. 훔친 건 아녜요." "그럼. 그럴 리가 있겠니.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얻었지? 칼집도 있니?" 칼집은 그 옆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소년은 자랑스레 칼집을 두드리며 말했다. "강에서 건져올려써요. 물 속으로 잠수해야 했지만 금방 찾아냈죠. 이건 정말로 제 거예 요, 수사님. 주인이 버렸거든요. 끝이 부러져서 그랬나봐요. 하지만 물고기 배를 가르는 데는 최고예요, 이렇게 좋은 칼을 가져보기는 처음이에요." 결국 버렸군! 그러나 자루의 보석이 떨어져나갔다고 버린 것은 아니지. "그 주인이 그걸 강물에다 던지는 것을 봤니? 언제, 어디쯤에서?" "제가 성 밑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혼자 수문께에서 내려와 강둑으로 가더 니 강물에다 이걸 던지고 성으로 되돌아갔어요. 그 사람이 가고 난 다음에 물 속으로 뛰어 들어 찾아냈죠. 초저녁 때쯤이었어요. 그날 밤에 시체들을 죄다 수도원으로 실어날랐어요. 내일이면 딱 일주일이 되네요. 그날은 다시 낚시를 하러가도 괜찮은 첫날이었거든요." 전후사정이 정확히 들어맞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 앨린은 자일즈의 시신을 세인트 앨크먼 드 교회로 옮겼고, 뒤에 남은 쿠셀은 앨린의 눈에 띄었다가는 자신을 영원히 저주하게 만들 소지가 있는 물건을 들고 후회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을 터였다. 그러다가 그 끔찍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것을 강물에 던져버린 것이다. 복수의 천사가 낚시하는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것을 다시 건져내어, 이제 안심해도 좋다고 믿고 있을 때 느닷없이 눈 앞에 들이대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서.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 어떻게 생겼든? 나이는 몇 살 쯤 되어 보이고?" 캐드펠은 여전히 확신하고 있지 못했다. 그의 생각을 뒷받치해주는 것은 공포에 질린 쿠 셀의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 자일즈 시워드의 시신을 망토로 덮어주는 일이라도 하게 해달 라고 사정하던 모습뿐이었다. "그냥 남자 어른이에요. 누군지는 저도 몰라요. 수사님처럼 늙지는 않았어요. 아주 늘지는 않았다는 뜻이에요." 소년은 자기가 분명히 보았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양쪽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소년에게 자기 아버지 연배의 사람들은 죄다 늙은이로 보일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서른한두 살밖에 되지 않았다고 할지 라도. "그 사람을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겠니? 그 사람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그 사람 이 누군지 가리킬 수 있겠어?" "그럼요!" 소년은 자기를 뭘로 보느냐는 듯이 말했다. 소년은 말주변은 별로 없었지만 영리하고 눈 이 예리해 그 사람을 쉽게 알아볼 것 같았다. 캐드펠은 결심을 굳혔다. "얘야, 그 칼을 칼집에 넣어라. 그걸 갖고 나하고 같이 좀 가자. 아, 걱정하지는 말거라. 네 보물을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혹시 나중에 그걸 넘겨줘야 할 일이 생기면 후 한 값을 치러주겠다. 내가 네게 바라는 건 방금 전에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한 번만 해주는 것뿐이야. 네가 손해볼 일은 없겠지?" 캐드펠은 염려가 되면서도 한층 흥분한 기분으로 소년과 함께 홀로 들어섰다. 캐드펠은 자신이 좀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음악 소리는 그쳐 있었고, 휴 버링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맨 윗단의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이윽고 왕 앞에 선 버링가는 누구의 귀에나 똑똑히 들릴 정도로 또렷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우스터로 떠나시기 전에 제 말씀을 들어주시고 모쪼록 이 문제를 바로잡아주셨으 면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어떤 자를 처벌해주십시오. 그자는 전하의 신임을 받는 자임에도 자신의 지위를 남용했습니다. 그자는 죽은 사람의 물건을 훔침으로써 고귀한 신분에 먹칠을 했고, 살인을 자행함으로써 인성을 더렵혔습니다. 이에 저는 그 죄상을 고발하며 제 몸으로 써 제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합니다. 이것이 제 도전의 표시입니다!" 버링가는 쿠셀이 범인이라는 확신이 없으면서도 캐드펠의 직관에 목숨을 걸려 하고 있었 다. 버링가는 허리를 숙여 밝은 빛을 띤 조그만 물체를 테이블 위로 굴렸다. 그것은 맑은 소 리를 내면서 굴러가 왕의 컵에 부딪쳤다. 좌중은 갑자기 침묵속으로 빠져들었다. 상석에 둘 러앉은 사람들은 부러진 부분의 들쭉날쭉한 면 때문에 뒤뚱거리며 구르는 노란 물체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그것을 굴린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왕은 그 황옥을 집어들어 큼직한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이더 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잠시 후 왕은 고개를 들어 한동안 휴 버 링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캐드펠은 아랫단에 있는 테이블들을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소 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면서, 말석에 꼿꼿이 앉아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애덤 쿠셀을 줄곧 쳐다보며 캐드펠을 따라갔다. 쿠셀은 표정을 적절히 통제하고 있어서, 주위의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놀라거나 궁금해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짐승의 뿔로 만 든 술잔을 꽉 움켜쥔 손만이 그의 충격을 드러내줄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캐드펠이 이미 내리고 있던 판단에 맞춰 머릿속에서 빚어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캐드펠은 이제 자 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몹시 흥분하고 긴장한 상태에서는 더욱더. "충격적인 선언을 하기에 좋은 때를 기다려왔군그래." 마침내 왕이 입을 열었다. 왕은 보석을 들여다보던 고개를 들어 못마땅한 표정으로 버링 가를 바라보았다. "전하의 저녁식사를 망치기는 싫었습니다만 미루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하의 정의는 정직한 모든 이가 향유할 수 있는 권리니까요." "단검자루의 끝부분입니다. 그것이 박혀 있던 단검은 이제 이제 시워드라는 아가씨의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전하를 지원하기 위해 바친 바 있는 충성스 러운 숙녀분 말씀입니다. 그 단검은 원래 그 아가씨의 오라비인 자일즈의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전하께 맞서 이 성을 수비하던 사람들 속에 끼여 있다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렀지 요. 그 단검은 자일즈의 시신에서 탈취된 것입니다. 병사들에게서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 니다만, 기사나 신사가 취할 행동은 아닙니다. 그것이 첫번째 죄입니다. 두 번째는 살인입니 다. 그 살인 건에 대해서는 이 시루즈베리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있는 캐드펠 수사에게서 들 으셨을 겁니다. 죽은 이들의 수효를 세고 난 뒤에 밝혀진 살인 말씀입니다. 전하와 전하의 명령을 이행한 이들은 무고한 사람을 등뒤에서 교살한 자의 방패막이로 이용되었지요. 전하 께서도 기억하실 겁니다." 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억하고 있지." 그의 기분은, 타고난 나태한 성격대로 아무 생각 없이 여유있게 연회를 즐기고 싶을 때 고발자의 말을 듣고 판단을 내리는 일에 신경 써야 하는 불유쾌함과, 그 사건의 배후에 무 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싶은 강렬한 호기심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이 보석이 그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전하, 이 자리에는 캐드펠 수사도 와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가 살인이 저질러진 현장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격투 끝에 단검에서 떨어져나와 흙바닥에 박힌 이 보석을 찾았다는 사 실을 직접 증언할 겁니다. 캐드펠 수사는 단검을 훔친 자와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살해한 자 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그자가 죄의 증거인 이 보석이 떨어져나간 줄도 모르고 그 자리를 떠났다는 사실을 또한 증언할 겁니다." 그 즈음 캐드펠은 상석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지만, 좌중의 관심은 온통 버링가와 왕 에게만 집중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가 그리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쿠셀 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흥미롭다는 듯이 듣고 있었다. 쿠셀의 저 태도는 무엇 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분명히 버링가의 말에 내재된 약점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단검을 훔친 자가 니콜러스를 살해한 자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나설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가 단검 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밝혀낼 수가 없을테니까. 단검은 세 번 강 밑바닥에 영원 이 수장되었다. 그를 범인이라 지목하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을테니, 그는 그저 남들처럼 그 이론이 그럴듯하다고 인정해주고, 그 범죄를 지탄하고 슬퍼하는 척 만 하면 될 터였다. 아니, 어쩌면 쿠셀의 저 느긋함은 죄없는 사람의 초연함에서 나온 것일 지도 모른다! 휴 버링가는 가차없이 말했다. "그러므로 저는 전하 앞에서 다시 한번 강력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앉아 있는 한 사람을 절도와 살인을 저지른 자로 고발합니다. 그리고 저는 주장의 정 당성을 제 몸으로 직접 입증하겠습니다. 애덤 쿠셀과의 결투를 제안합니다." 버링가는 자기가 고발한 사람을 바라보려고 테이블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셀은 당연히 경악하고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 표정은 이내, 느닷없이 말도 안 되는 비 난을 받은 무고한 사람의 그것처럼, 상대에 대한 분노와 경멸로 바뀌었다. "전하,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면 비열하고 극악한 짓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비 난에 제 이름을 결부시킬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죽은 사람의 품에서 단검을 훔쳤다는 말은 사실 일 수도 있습니다. 그 도둑이 사람을 죽이고 보석을 증거물로 흘리고 갔다는 말도 사 실일 수 있지요. 하지만 어떤 근거로 거기에 제 이름을 결부시키는지에 대해서는 휴 버링가 가 직접 해명해주었으면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날조해낸 거짓말 입니다. 그 단검을 제가 언제 봤다는 겁니까? 제가 그걸 언제 수중에 넣었다는 겁니까? 지 금 그건 어디 있습니까? 제가 그걸 차고 다니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전하, 사람들을 시켜서 제 소지품과 소유물을 뒤지게 해주십시오. 만일 제 숙소나 그 밖의 곳에서 그것이 나온다면 제게 꼭 알려주십시오!" "그만!" 왕은 엄히 소리치더니 찌푸린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철저히 조사해봐야 할 사안이로군. 만일 이 고발이 악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응분의 처벌 을 받아야 한다. 방금 전에 애덤이 한 이야기가 이 문제의 핵심이겠군. 그 수사가 정말 이곳 에 와있나? 그 수사가 살인이 벌어진 현장에서 이 장식품을 발견했고, 이것이 문제의 단검 에서 떨어져나왔다고 했다는 말인가?" "저는 오늘밤 캐드펠 수사를 대동하고 왔습니다." 원장은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캐드펠은 보이지 않았다. "저 여기 있습니다, 원장님." 아랫단에서 캐드펠이 말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온 정신을 빼앗긴 이들이 지 켜보는 속에서, 캐드펠은 한 팔을 소년의 어깨에 두르고 앞으로 나왔다. "버링가의 말이 사실이오? 그 사람이 살해된 현장에서 수사가 이 보석을 찾았소?" "네, 전하. 격투가 벌어져 두 사람이 엉켜 뒹군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현장의 흙바닥 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것이 한때 시워드 양 오빠의 소유였던 단검에서 떨어져나왔다는 것을 증언한 이가 있 소? 그 단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말이오." "앨린 시워드 양이 그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보석을 시워드 양에게 보였더니 금방 알아보 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보석은 단검을 훔친 자가 그 비열한 살인행위를 저지른 자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좋은 증거물이 되겠군. 그런데 수사나 버링가는 어떤 근거로 그자가 애덤일 거라고 추 정하는거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애덤을 단검이나 그 살인행위와 결부시킬 연결고리가 없소. 애덤을 지목하는 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대충 둘로보고 솔즈베리의 로 버트 주교나 저 아래에 앉아 있는 향도들 중의 한 사람을 지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눈 을 감고서 그 칼끝을 우리 중의 한 사람에게 들이대는 것이 다름없다는 뜻이지. 도대체 무 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요?" 쿠셀은 시뻘개진 얼굴에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이 문제의 핵심을 그렇게 명확하게 짚어주시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기 꺼이 이 훌륭한 수사님을 도와 그 비열한 절도행위와 은밀한 살인행위를 단죄하러 나설 용 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버링가, 나나 다른 어떤 정직한 이를 그 두 가지 범죄와 결부시키는 것은 삼가도록 하시오. 만일 그 보석과 단검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면 부디 그걸 찾아내도록 하시오. 하지만 그 단검이 내 수중에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하는 짓 따위는 삼가는 편이 좋을거요. 내가 정말로 그 도전장을 집어들면 어쩌려고 그러오?" 휴 버링가는 무서우리만치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내 도전장은 지금 테이블 위에 있소. 당신은 그저 집어들기만 하면 되오. 나는 도전을 철 회하지 않겠소." 캐드펠이 말했다. "전하, 그 단검과 용의자를 연결시킬 증거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보석과 단검을 연결시켜줄 구체적인 증거로서 문제의 단검을 제시하겠으니, 전하께서 손수 이 둘을 맞춰보 셨으면 합니다." 상석에 앉은 사람들이 두런대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과 바람이 부딪치는 충격처럼 일 시에 솟아올라, 캐드펠은 목청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캐드펠이 단검을 쳐들어 보이자 맨 윗단 끝에 서 있던 버링가는 꿈꾸듯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어, 경외심이 가득한 침묵으로 왕 에게 건넸다. 단검을 주운 소년은 그 보물을 잃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단검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쿠셀은 마치 자신을 홀리려고 물귀신이 불쑥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공 포와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뜷어지게 바라보았다. 왕은 그 정교한 세공에 감탄하며 잠시 그 단검을 들여다보더니, 마침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칼을 뽑아서 황옥을 움켜쥔 은 빛 발톱과 자루의 톱날 같은 끝부분을 맞춰보았다. "이 보석이 이 단검에 붙어 있던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군. 모두들 봤겠지?" 왕은 캐드펠을 내려다보았다. "수사는 이것을 어디서 발견했소?" 캐드펠은 소년에게 격려하듯 말했다. "전하께 말씀드려라. 내게 했던 그대로 말씀드려." 소년은 두려움을 능가하는 짜릿한 흥분으로 얼굴을 붉혔다. 소년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소년은 의연하게 버티고 서서 새된 목소리로, 캐드펠에게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천진난 만하게 전말을 설명했다. 소년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그때 저는 물가 덤불 옆에 있었어요. 그 사람은 저를 보지 못했지만 저는 그 사람을 똑똑히 봤죠. 그 사람이 가자마자 저는 단검이 가라앉은 곳으로 뛰어들어가 그걸 찾아냈어 요. 저는 그 강가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살고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저는 걷기도 전에 헤엄부터 쳤대요. 그 사람이 버렸기 때문에 저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고 갖고 있었어요. 그게 바로 그 칼이에요, 전하. 전하의 볼일이 끝나시면 제가 다시 가져도 되나 요?" 왕은 자신의 판단에 맡겨진 그 심각한 분쟁을 잠시 잊고, 낯을 붉힌 채 자신을 열심히 올 려다보는 소년에게, 타고난 다정다감하고 매력적인 성격에서 우러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 다. 만일 왕권을 얻으려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 와중에서 온갖 거친 방법들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의 천성은 좀더 빛을 발했으리라. "그러니까 오늘밤 우리가 먹은 생선을 보석으로 장식된 이 칼로 다듬었다는 말이지? 왕에 게 걸맞은 대접이로구나! 맛도 좋았지. 네가 그걸 잡았느냐? 손질도 네가 했고?" 소년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도 거들었다고 했다. "네 역할을 제대로 해냈구나. 자, 이제 말해봐라. 이 칼을 던진 사람은 네가 알고 있는 사 람이냐?" "아뇨, 전하. 그 사람 이름은 몰라요. 하지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보이느냐? 지금 여기 이 홀에 앉아 있느냐?" "네, 전하." 소년은 선선히 대답하면서 똑바로 애덤 쿠셀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에요."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쿠셀에게 쏠렸다. 특히나 침통하고 심각한 왕의 시선이. 그러고는 짧은 침묵이 그 뒤를 이었다. 한 번 심호흡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 침 묵은 홀을 온통 뒤흔들 듯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섬뜩한 침묵이었다. 그 침묵은 쿠셀이 분노를 억누르려 안간힘을 쓰면서 내뱉은 말로 깨어졌다. "전하,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저는 그 단검을 가진 적이 없으니 강물에 던지고 싶어도 던 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가졌던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단검입니다." 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서? 버링가는 아니다. 버링 가 역시 나나 그대 못지않게 이 증거물을 보고 놀란 듯했으니까. 그럼 저 베네딕트회 수사 가 소년을 부추겨 이야기를 날조하게 했다고 생각하라는 말인가? 무슨 목적으로?" "제 말씀은 이 모두가 어리석은 착오라는 뜻입니다. 저 소년은 그 사람을 봤을 것이고, 이 미 말한 그대로 단검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착오에서 나온 것 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저를 공격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전적으로 부인합니 다." 휴 버링가가 나섰다. "저 사람이 범인이라는 제 주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왕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서슬에 테이블이 흔들려 컵들이 요동하면서, 여기저 기서 포도주가 넘쳐흘렀다. "이 사건에는 엄밀히 규명해야 할 부분이 있고, 이제 나로서는 그것을 밝히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되었소." 그는 다시 소년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분노를 억제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자, 차분히 생각하고 잘 살펴본 다음 다시 말하거라. 그때 네가 본 사람이 저 사람이라고 확신하느냐? 자신이 없거든 그렇다고해도 괜찮다. 잘못 본 것은 죄가 아니야. 체구나 머리색 깔이 비슷한 다른 사람을 봤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확실하다면 겁내지 말고 그렇다고 하 려무나." 소년은 발발 떨면서도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고 말했다. "확실해요. 분명히 봤어요." 왕은 커다란 의자등받이에 기대앉더니, 생각에 잠겨 두 주먹으로 양쪽 팔걸이를 툭툭 쳤 다. 이윽고 왕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휴 버링가를 쳐다보았다. "내가 홀가분한 기분으로 신속하게 이동해야 할 상황에서 그대가 내 목에 묵직한 맷돌을 걸어놓았구먼. 이미 이야기된 것들을 흘려버릴 수는 없으니 부득이 좀더 깊이 파고들 수밖 에. 이번 사건은 재판이라는 기나긴 과정으로 들어가거나...... 아니, 그대나 그 누구를 위해서 도 내 출정을 연기하지는 않겠어. 단 하루라도! 나는 이미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변경할 수 는 없어." 버링가가 말했다. "전하께서 결투를 통한 재판을 용인해주신다면 그러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저는 이미 애 덤 쿠셀을 살인죄로 고발했고, 지금 다시 한번 고발합니다. 만일 그가 제 도전을 받아들인다 면 저는 어떤 의식이나 준비 없이도 바로 그를 상대할 용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내일 그 결과를 보시게 될 것이고, 그 이튿날에는 이 사건의 부담을 홀가분하게 털고 출정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시종 쿠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캐드펠은 그가 앞일을 전망 해보고 점차 자신감을 회복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입술과 눈썹께로 흘러내려 맺 혔던 약간의 땀은 말라붙었고, 눈에 서려있던 절망의 빛은 냉정한 계산으로 바뀌었다. 심지 어 그는 빙긋 웃기까지 했다. 궁지에 몰린 그에게는 두가지 탈출구가 있었다. 하나는 기나긴 조사와 심문 과정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단한 싸움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결투 쪽 이 낫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캐드펠은 눈을 가늘게 뜨고 휴 버링가를 머리끝에서 어떤 생각들이 오가고 있는지 눈치챘다. 그곳에 자기보다 어리고, 키가 한 뼘이나 작고, 몸무게도 더 적게 나가고, 팔길이도 짧고, 미숙하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먹잇감이 있다. 일단 하늘이 심판해준다고 하면 그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을테고, 그가 자신의 오라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앨린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을 것이며, 말도 되지 않는 고발 을 당한 그는 아무 비난도 사지 않으면서, 앨린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상대를 효 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결국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인데, 그렇다면 일을 제대 로 해치워야지. 쿠셀이 테이블로 팔을 뻗어 황옥을 집어들어 버링가를 향해 내던지듯 굴려보내자, 버링가 는 그것을 회수해 품속에 간직했다. 쿠셀은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전하. 저는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의례절차나 연습 따위 는 생략하고 내일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러면 전하는 그 이튿날 출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리고 저도 전하와 함께 가겠습니다. 쿠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대들이 서로 싸워 내개서 훌륭한 신하 한 사람을 빼앗기로 결심했다니, 나로서는 둘 중에서 더 나은 사람 하나만을 곁에 둘 수 밖에. 시간은 내일 아침 미사가 끝난 뒤인 아홉시다. 장소는 이 성안이 아니라 성문 밖, 도로와 강 사이의 풀밭이 좋 겠다. 프레스코트와 윌렘은 결투장에 병사들을 정렬시키는 일을 맡는다. 그들이 진행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말들에게 위험을 지우지는 않을테니 맨몸에 검으로 싸우도록 하라!" 휴 버링가는 허리를 숙여 말없이 복종의 뜻을 표했다. 쿠셀을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쿠셀은 검을 다루는 데 좀더 유리하게 마련인, 버링가보다 기다란 자신의 팔과 강인한 팔목을 생각하고 빙긋 웃었다. "그러면 결투장에서!" 왕은 뜻밖의 사건으로 엉망이 된 연회를 단호한 한마디로 끝맺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의 정의 이미 어둑어둑해진 시내의 거리는 마치 쥐들이 빈 집안을 내달리는 것처럼 소연하기 그지 없었다. 비쩍 마른 잿빛 얼룩빼기 말을 탄 휴 버링가는, 걸어가는 캐드펠 수사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말을 몰았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으려고 귀를 바짝 세운 채 가까이에서 걷고 있는 제롬 수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의 앞에서는 헤리버트 원 장과 로버트 부원장이, 한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에도 자신들이 개입 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걱정스런 어조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싸움을 받아들였으니 이제 물러설 길은 없었다. 그 싸움에서 진 사람은 하늘의 심판을 받은 것이었 다. 만일 진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경우에는 교수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링가는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저를 뭐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바보라해도, 천치라 해도, 멍청이라 해도 그렇게 해서 수사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신다면요." 그는 놀리듯 가벼운 투로 말했지만 캐드펠은 속지 않았다. "나무라거나 동정하는 것 따위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와는 하등 상관 없는 거요. 나는 당신이 저지른 짓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조차도 없으니까." "수사의 입장에서 말씀이죠?" 말투는 온건했으나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거기에 빈정거리는 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 챘을 터였다. "인간으로서 말하는 거요, 이 못된 인간 같으니!" 버링가는 진심으로 말했다. "저는 수사님을 사랑합니다. 수사님이 저와 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수사님 역시 저처럼 행 동하셨을 겁니다.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난 그러지 않았을 거요!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늙은 얼간이에 대해 섣부른 추측은 삼가 시오! 내가 실수한 거라면 어쩔 뻔했소?" "실수하지 않으셨잖아요! 그자는 이중으로 살인을 한 잡니다. 앨린의 불쌍한 겁쟁이 오빠 를 사지로 몰아넣었고, 페인트리를 비열하게 교살했으니까요.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앨린에 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어떤 식으로든지요." "그 아가씨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거요. 허나 지금쯤 그 소식이 온 시내 에 퍼져나갔을 테지.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기대하는 거요?" "다 퍼져나갔겠죠. 저로서는 그저 그 아가씨가 진작에 깊이 잠들어 내일 아침 열시에 열 리는 대미사 때까지 어떤 말도 듣지 못하게 되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그때쯤이면 어떤 식 으로든 결판이 나 있겠죠." 캐드펠은 마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일부러 비꼬듯이 말했다. "그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온밤을 지새우느라 내일 아침에는 기진맥진한 채로 결투장 에 나가게 되겠군 그래." 버링가는 나무라듯이 말했다. "전 그런짓을 할 얼간이가 아닙니다." 그러더니 그는 캐드펠에게 대뜸 삿대질을 했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수사의 신분으로 하느님께서 정의로운 처분을 내리시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시다뇨? 저는 침대로 가서 아주 잘 잘 겁니다. 그리고 청신한 기분으로 일어나 심 판장으로 갈 거구요. 수사님은 하늘에 대해 제 대리인이자 변론인 역할을 해주실 거죠?" 캐드펠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나는 푹 잘 거요. 종이 울릴때야 일어날 거고. 내가 당신같이 건방진 이교도보다도 못한 믿음을 갖고 있을 성싶소?" "그래야 우리 수사님이시죠! 하지만 수사님이 정말 친절한 분이시라면 내일 아침기도 때 쯤 저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한두 마디 속삭여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수사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쉬는 시간을 좀 이용해서 기도를 하죠, 뭐." 그러면서 그는 말 위에서 한 손을 뻗어 마치 축수라도 하듯 캐드펠의 삭발한 널찍한 정수 리에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떼고는, 말에 박차를 가해 앞서 달려갔다. 버링가는 원장의 곁 을 지나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와일 가의 구불구불한 비탈길로 사라졌다. 캐드펠 수사는 아침기도가 끝나자마자 원장에게 갔다. 헤리버트 원장은 그를 보고도, 그의 요청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원장님, 저는 이번 사건에서 휴 버링가라는 젊은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 청년 의 고발은 원래 제가 조사하던 과정에서 드러난 증거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그 청년이 자 진해서 그것을 고발하는 책임을 떠맡고 제게는 위험한 역할을 일체 맡지 못하게 했지만, 그 렇다고 거기에 연루된 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그 심판장에 가서 그의 곁에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간에, 저는 거기에 가야 합니다. 저는 저를 대변해준 친구가 위험에 처한 사 오항에서 등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원장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 마음도 무척이나 괴롭소. 왕이 어떻게 말했든 간에 나로서는 그저 이번 결투가 한 사 람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는 일로 끝나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오." 캐드펠은 마음속으로, 이번 결투의 목적은 오로지 한 사람의 입을 영원히 틀어막기 위한 것이므로 저로서는 그런 기도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원장은 말을 이었다. "쿠셀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교회에 매장한 그 불쌍한 청년을 죽인 것이 확실하오?" "확실합니다. 그 사람만이 그 단검을 갖고 있었으니, 그 단검에서 떨어져나간 보석을 흘릴 수 있는 사람도 오직 그 사람뿐입니다. 선악을 분명히 가르는 논리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도록 하시오. 이 문제가 끝날 때까지 그대가 지고 있는 모든 의무는 면제해 주겠소." 그런 결투는 하루종일 계속되게 마련이었다. 어느 한 당사자가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고 상대를 공격할 수도 없어서 결국 땅바닥에 쓰러져 일어서지 못하게 되어 서야, 쓰러진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게 되어서야, 결투는 비로소 끝난다. 무기가 부러져 못 쓰게 될 경우에도, 결투자들은 상대방이 싸울 기력을 잃고 살려달라고 애걸할 때 까지는 손이나 이빨이나 두 발로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패배했으니 하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 뒤에는 교수형이라는 더욱 치욕스런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캐드펠은 승복 자락을 걷어올 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수도원을 빠져나가면서, 이런 결투는 신의 심판으로 존중할 가치가 전혀 없는, 끔찍하고 잔혹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으니. 어쩌면 신의 섭리가 개입할지도 모른다. 내가 과연 버링가만큼의 믿음을 갖고 있을 까? 버링가는 정말로 잠을 잘 잤을까? 묘하게도 캐드펠은 그랬으리라고 믿었다. 정작 자신 은 자다깨다 하면서 괴로운 잠을 잤으면서도. 캐드펠은 떨어져나간 황옥을 되찾아 원상을 회복한 자일즈 시워드의 단검을 갖고 와서 자 신의 방에 드었다.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고기잡이 소년은 곧 되돌려주거나 아니면 후 한 대가를 치러주겠다는 말로 달래서 돌려보냈다. 그러나 아직은 앨린에게 이야기할 계제가 못 되었다. 결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휴 버링가가 직접 앨 린에게 돌려주게끔 해야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니,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지 도 않았다. 캐드펠은 암담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는, 신이 우리를 위해 세운 계획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 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만큼 세상을 겪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나는, 신이 그 어떤 완전한 목 적을 이루기 위해서 휴 버링가를 저승으로 보내고 애덤 쿠셀을 이승에 남겨두는 편을 선택 할 경우, 그 부당한 처사에 반기를 들고 일어설 가능성이 이 늙은 가슴에 잠재해 있다는 것 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시루즈베리 시 북문에 해당하는 성의 정문 밖에는 집 몇 채와 가게들이 밀집해 있으나, 인가는 이내 끝나고 도로 양켠으로 넓은 풀밭이 펼쳐졌다. 잔풀이 우거진 그 양쪽 들판 너 머로는 세 번 강의 들목과 날목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로 왼쪽 옆 풀밭에는 왕에게서 결투 의 진행을 맡으라는 명을 받은 이들이 , 평평한 자리를 골라서 창을 십자로 엇갈리게 쥔 플 라망 용병들을 정사각형으로 둘러세워두었다. 그 병사들의 역할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구경 꾼이 흥분을 이기지 못해 결투장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것을 막고, 결투 당사자 중의 어느 하나가 달아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결투장 밖으로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는 왕이 앉을 커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주변에는 귀족들이 앉을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을 제 외한 정사각형의 다른 세 면에는 이미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소문은 이미 낙엽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시루즈베리 전역에 퍼져나가 있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그곳은 지 나치게 조용했다. 창을 든 병사들 뒤로 몰려선 구경꾼들은 분명히 끼리끼리 수군대고 있었 으나, 목소리들이 워낙 낮아서, 그 모든 소리를 다 합쳐도 햇빛 속을 분주히 날아 다니는 벌 떼의 날갯짓 소리보다 작을 지경이었다. 아침나절의 비스듬한 햇살은 풀밭 위로 긴 그림자를 부드럽게 늘어뜨렸고, 하늘에는 엷은 안개가 베일처럼 드리워졌다. 갑자기 성무느이 침침한 아치 통로에서 번쩍이는 강철과 화려 한 빛깔의 의상들로 수놓아진 행렬이 나타나자, 경비병들은 그 행렬이 지나갈 수 있도록 일 제히 길을 틔웠다. 캐드펠은 그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연한 황갈색 머리에 당당한 체구, 훤 하게 잘생긴 스티븐 왕은 이제 자신의 가신들 중 한 사람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묵묵 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그 사건이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나게 된 것을 누구보다도 다행스럽게 여겼으며, 결투의 시간이 미루어지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 을 생각이었다.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결투자들에게 휴식시간을 주지 않을 듯했고, 그 들이 어떤 잔인한 행위를 하더라도 일체 저지하지 않을 성싶었다. 왕은 그저 어서 끝이 나 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왕의 뒤에 열지어 선 기사들과 영주들이며 성직자들은, 언제라도 왕 의 지시를 따를 듯 더없이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왕의 행렬이 결투장에 도착하자 두 명의 결투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방패도, 쇠사슬갑옷도 없이 간단한 가죽옷으로만 무장하고 있었다. 왕은 하루종일 그곳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보 내는 것도, 둘 다 손을 들 수 없을 만큼 지쳐 그날의 결투가 무효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고, 그저 어느쪽이든 속히 쓰러져 주기만을 바랐다. 이 두사람 중에서 누가 죽든 상관없이 내일 이면 선봉을 따라 본진이 출발해야 할 테고, 본진과 함께 출정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잡무 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발자인 버링가가 먼저 왕 앞으로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경 의를 표하고는, 퉁기듯이 일어서서 활기 넘치는 자세로 창을 든 병사들을 향해 다가갔고, 병 사들은 그가 결투장으로 들어설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버링가는 병사들에게서 조금 떨어 진 곳에 서 있는 캐드펠 수사를 보았다. 진지하고 신중한 버링가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어려 있었으나, 그럼에도 검은 두 눈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캐드펠은 침울하게 말했다. "당신이나 날 실망시키지 않게 조심하도록 하시오." 버링가는 묵상하는 사람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갓 태어난 새끼양처럼 깨끗하게 참회한 상태니까요. 준비는 완 벽하게 되어있습니다. 게다가 수사님의 팔이 저를 받쳐줄 텐데요, 뭘." 모쪼록 그래야지. 당신이 팔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말이오. 캐드펠은 승복을 걸친 이래 오랫동안 평온한 생활을 지속해왔음에도, 한때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험난한 세월을 보 냈던 자신의 영혼에 과연 참다운 변화가 있었는지 미심쩍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결투장으 로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피가 치솟았다. 쿠셀 역시 왕에게 예를 갖춘 뒤 결투장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각자 결투장 구석에 자리잡 고서 서로를 대각선으로 마주보았다. 결투의 진행을 맡았음을 알리는 직장(職杖)을 들어올린 프레스코트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며 왕을 쳐다보았다. 전령이 먼저 고발자 의 이름과 고발 내용을, 뒤이어 피고발자가 반박한 내용을 큰 소리로 외쳤다. 군중은 일제히 긴 한숨과도 같은 탄성을 발했고, 그 소리는 들판 전체에 울려퍼졌다. 캐드펠 수사는 휴 버 링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다. 고요하고 냉정하 면서도 강렬한 빛을 뿜는 검은 두 눈은 상대의 두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왕은 결투장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한 손을 쳐들었다. 직장이 떨어져 땅바닥에 울리고, 프 레스코트는 결투장 한끝으로 물러났다. 두 결투자는 서서히 상대에게 다가갔다. 첫눈에 그들의 모습은 엄청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쿠셀의 체구는 버링가를 단연 압도 했고, 나이도 더 들어보였으며, 키며 팔길이며 몸무게에서도 쿠셀 쪽이 월등했다. 게다가 쿠 셀이 뛰어난 기술과 많은 경험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쿠셀의 불 타는 듯한 머리와 장대한 체구에 견주어, 버링가는 호리호리한 소년처럼 보였다. 버링가의 가벼운 몸은 재빠르고 민활하게 움질 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몇 초도 지나 지 않아 쿠셀 역시 상대에 못지않게 빠르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검 과 검이 처음으로 부딪쳤을 때 캐드펠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몸을 살짝 움직이며 상대의 타 격을 받아넘기는 버링가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무의식중에 팔과 손목에 힘을 주면서 몸을 가볍게 돌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이제 캐드펠 눈앞에는 성문의 아치형 통로가 훤히 바 라보였다. 그 컴컴한 통로로 검은 옷과 새하얀 피부가 선연한 대조를 이루는 한 처녀가 구름 같은 금발을 뒤로 날리면서 제비처럼 날렵하게 뛰어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거의 무릎까지 올리고서 번개같이 내달려왔고, 그 한참 뒤에서 다른 젊은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뒤쫓아왔다. 콘스턴스는 숨이 턱에까지 차서, 앨린에게 제발 서라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외치느라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죄다 쏟고 있었다. 그러나 앨린은 일체 대꾸를 하 지 않고, 두 연적(戀敵)이 상대방을 없애려고 또다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현장을 향해 내달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현장에 다다른 그녀는 좌우 어느 쪽도 돌아볼 여유 없이 그저 고개를 길게 빼고 구경꾼들 너머만 기우거렸다. 캐드펠은 황급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 녀는 그를 알아보고 입을 벌리더니 이내 그의 가슴으로 뛰어들어왔다. "캐드펠 수사님,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한 거죠? 수사님은 아셨으 면서, 다 아셨으면서, 어쩜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해주셨어요! 콘스턴스가 밀가루를 사러 시 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저는 전혀 몰랐을 거예요......" 캐드펠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숨을 할딱이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여기 오면 안 되오. 아가씨가 뭘 할 수 있겠소? 난 저 친구에게, 아가씨에게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저 친구는 아가씨가 아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아가씨는 절대 이걸 봐서 는 안되오."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전 본 거예요! 제가 저이를 남겨두고 순순히 갈 줄 아세요?" 그러더니 그녀는 캐드펠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사람들 말이 사실인가요? 저이가 애덤을 그 청년을 살해한 죄로 고발했다면서요? 제 오라버니의 단검이 그 증거라면서요?" "사실이오." 앨린은 놀란 얼굴로 캐드펠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결투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들이 부딪쳤다가 떨어지고, 칼날이 휘익 허공을 가르며 또다시 맞부딪쳤다. 그녀의 휘둥그렇게 뜬 자수정빛 눈에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기색이 역력했다. "그 고발 내용 역시 사실이구요?" "그렇소." "아, 세상에!" 앨린은 두려워하면서도 홀린 듯이 결투장을 바라보았다. "저이의 몸은 너무 가냘프군요...... 저이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요? 상대편 몸의 반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이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 수가 있죠! 캐드펠 수사님, 어떻게 저 이가 이런 무모한 짓을 하게 그냥 놔두셨어요?" 묘하게도 캐드펠은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굳이 이름을 대지 않아도 ‘저이’가 둘 중의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도는 알만 했다. 이제까지는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마 앨 린 역시 그랬겠지만. "앞으로 아가씨가 휴 버링가가 하려고 마음먹은 것을 못하게 하는 데 성공하거든 내게도 그 방법을 꼭 알려주시오. 내게도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저 친구는 이 방법을 선택 했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소. 타당한 이유들이지요. 저 친구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듯이, 아가씨와 나는 그저 이것을 감수해야 할 뿐이오." 그녀는 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셋이에요. 우리가 저이를 응원하면 큰 힘이 될 거예요. 저는 지켜볼 수 있 고 기도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겠어요. 절 좀더 가까이 가게 해주세요. 저랑 같이 가세요! 전 봐야해요!" 그녀는 인파를 마구 헤집고 창 든 병사들 쪽으로 가려했다. 캐드펠은 그녀의 팔을 끌어당 겼다. "저 친구가 아가씨를 보지 않는 편이 낫소. 지금은 안 돼요!" 앨린은 짧고 날카로운 웃음처럼 들리는 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검들 사이로 뛰어들지 않는 한 저이는 저를 보지 못하실 거예요. 병사들이 저를 저 안으로 들여보내준다면 전 당장 그렇게 하겠어요....... 아니, 안 돼!" 그녀는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흐느끼면서, 즉각 자기가 한 말을 거두었다. "안 돼요. 제가 그렇게 하면 안되죠. 저도 그 정도의 분별은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 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것뿐이에요." 캐드펠은 씁쓸한 심경이 되었다. 투쟁으로 점철된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자들이 겪어야 할 운명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역할은 생각만큼 그렇게 수동적이지는 않은 법이었 다. 그는 지대가 약간 높아 그녀가 햇살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금발을 어깨에 풀어 늘어 뜨린 채 휴 버링가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며 결투를 지켜볼 수 있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 즈음 휴 버링가의 칼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쿠셀의 빰을 살짝 스 치고 지나가면서 묻은 것에 불과했다. 버링가의 가슴을 보호하는 가죽옷 밖으로 드러난 왼 쪽 소매 역시 피에 젖어 있었다. "저이가 다쳤어요." 앨린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막으려고, 그 자그마한 주먹을 입 속에 반쯤 틀어놓고서 손가락 관절들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캐드펠에게 조용히 지켜보겠 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켜야 하리라. 캐드펠은 믿음직하게 말했다.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오. 저 친구가 좀더 빨라요. 저것 좀 보시오. 저렇게 날쌔게 피 하고 있잖소! 좀 말라 보이기는 해도 손목은 강철같이 탄탄하다오. 저 친구는 하려고만 들 면 뭐든지 다 할 사람이오. 그리고 저 친구는 자신의 손에 힘을 더해주는 진실의 편에 서 있소." 앨린은 잠시 주먹을 빼고 나지막하게 젖어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이를 사랑해요. 지금까지는 몰랐었죠. 하지만 전 저이를 사랑해요!" "나도 그렇고. 나도 그래요!" 그들은 한시도 숨돌릴 겨를 없이 꼬박 두 시간을 싸웠다. 이제 높이 솟아오른 태양은 사 정없이 열기를 뿜어냈고, 결투자들은 괴로움에 허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힘을 아껴가면서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싸움을 계속했다. 가까이에서 서로 검을 겨눈 채 상대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지금, 그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 따위는 없이 오직 확고부동한 목적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쪽은 진실을 입증하려는, 다른 한쪽은 그것을 짓뭉개려는 목적이었다. 둘 모두가 자신들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 곧 상대를 죽이는 것에 의해 그 목적을 이루려 하 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전까지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 순간에는, 한쪽이 여 러 강점들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호적수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기술은 동등했고 빠르기도 엇비슷했다. 그들 사이의 균현은 진실의 무게가 좌우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가 여기저기에 작은 부상들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풀밭에도 군 데군데 핏자국이 어려 있었다. 정오가 다 되어갈 무렵, 버링가가 갑작스럽게 상대를 찌르고 들어갔다. 쿠셀은 뒤로 밀리 다가 피로 물든 풀밭에서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뜨겁고 건조한 여름 날씨로 풀이 바싹 말라 있었으므로, 바닥은 그렇지 않아도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쿠셀은 자신의 몸이 쓰러지 는 것을 느끼면서 검을 든 팔을 허공으로 치켜올려 버링가의 칼을 받아넘기려 했으나, 내리 치는 칼날에 부딪쳐 그만 검의 날이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그는 하마터면 놓칠뻔한 칼자루 만을 움켜쥔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의 날은 멀찍이 날아가버렸고, 그 검은 더 이상 쓸 모없는 것이 되었다. 버링가는 적에게 일어설 기회를 주려고 이내 뒤로 물러났다. 그는 검 끝을 땅바닥으로 향 하게 하고 프레스코트를 쳐다보았다. 프레스코트는 지침을 받으려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싸우라!" 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왕의 불쾌감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버링가는 검 끝을 풀밭으로 향한 채 한 손으로 눈썹과 윗입술위에 맺힌 땀을 닦으며 상대 를 응시했다. 쿠셀은 느릿느릿 일어나 무용지물이 된 칼자루를 내려다보더니 절망적인 한숨 을 토하며 내던져버렸다. 버링가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왕을 쳐다보고는, 생각할 여유를 가지 려는 듯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왕은 싸움을 계속하라는 손짓만 할 뿐이었다. 버링가는 결투장 가장자리로 재빨리 걸어가서, 용병들이 들고 선 창들이 이루고 있는 울타리 아래에 검을 내던지고 허리께로 손을 가져가 천천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쿠셀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생각도 못한 선물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 닫고 새로운 자신감으로 불타올랐다. 왕은 중얼거렸다. "저런저런! 저 친구가 가장 뛰어난 용사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면." 이제 그들은 단검으로 싸워야 했다. 단검의 경우에도 팔이 긴 쪽이 유리하게 마련이었으 며, 게다가 쿠셀이 허리춤의 칼집에서 뽑아든 단검의 길이는 휴 버링가가 들고 있는, 무기라 기보다는 오히려 장식품에 가까운 단검보다 훨씬 길었다. 스티븐 왕은 다시 그 싸움에 흥미 를 갖게 되었고, 억지로 이런 일에 말려들었다는 짜증스러운 기분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앨린은 캐드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의 호전적인 조상들이 싸움터에서 그랬을 것 처럼 입술을 말아올리고 콧날을 발름거리면서 신음하듯 말했다. "저이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여유 있게 상대를 죽일 수 있었는데. 아, 저이는 완전히 미쳤 어요. 하지만 전 저이를 사랑해요!" 그 무서운 춤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점점 가까이 오른 태양은 그림자의 길이를 자꾸 줄여나갔고, 마침내 두 사람은 그들의 몸이 그려낸 검은 원반 위에서 전진하고, 후퇴하고, 옆걸음질치게 되었다. 한낮의 이글거리는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덮쳐, 가죽옷으로 감싸인 그 들의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길이도 짧고 무게도 가벼운 단검을 든 버링가는 수세에 몰렸고, 쿠셀은 자신이 유리한 입장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상대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버링가는 재빠 른 손과 날카로운 눈, 그리고 기민한 몸놀림 덕분에 거듭되는 필살의 공격을 번번이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링가도 마침내 지치기 시작했다. 그의 판단력은 흐려지고 정확성이 떨어졌 으며, 몸놀림 역시 둔해지고 불안정해졌다. 쿠셀은 기운을 회복한 탓인지, 아니면 그 싸움을 끝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든 힘을 끌어모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의 기세와 열기를 되찾은 듯했다. 버링가의 오른손으로 흘러내린 피가 단검자루를 적셔, 단검은 손바닥에서계 속해서 미끄러졌다. 쿠셀 왼쪽 소매의 찢겨진 천자락이 시야 한귀퉁이에서 너펄거리고 있었 으므로, 그의 집중력은 계속해서 분산되었다. 버링가는 단검을 몇 차례 휘두르며 공격해들어 가 상대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단검과 팔길이가 짧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불리하 게 작용하고 있었다. 버링가는 쿠셀의 광포한 공격이 힘을 잃을 때를 기다리면서 필요할 경 우에는 뒤로 후퇴해서라도 어떻게든 힘을 아끼려 애썼다. 조만간 그럴 때가 오리라. "아, 하느님! 저이는 지나치게 너그러운 탓에 목숨을 잃게 됐어요...... 저 사람은 저이를 가 지고 놀고 있어요!" 앨린이 신음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캐드펠은 단호하게 말했다. "휴 버링가를 희롱하는 사람은 그 누고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아직은 휴 쪽이 훨씬 활기 가 있소. 조속히 이 싸움을 끝내려고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기는 해도 줄곧 저렇게 나갈 수 는 없지." 버링가는 쿠셀이 공격할 때마다 단검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큼씩 물러서면서 자꾸 후퇴하고 있었다. 쿠셀은 거칠게 단검을 휘두르면서 상대를 계속해서 뒤로 밀어붙였다. 상대 를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결투장 한구석에 가둘 심산인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쿠 셀의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아니면 버링가가 기민하게 덫에 빠져나온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쫓고 쫓기는 과정은 창들의 열을 따라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버링가는 쿠셀의 공세로 결투 장 중앙으로 탈출할 수 없었고 쿠셀은 버링가의 완강한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으므로, 그 꼴사나운 행진은 계속되었지만, 그것도 또다른 구석에 몰리면 끝나게 될 터였다. 플라망 용병들은 바위처럼 떡 버티고 서서, 느린 파도처럼 진행되는 싸움이 자기들의 대 열을 따라 힘겹게 흘러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들이 그 대열의 중간 쯤에 이르 렀을 때 돌연 쿠셀이 상대를 밀어붙이는 대신에 잽싸게 한 걸음 풀쩍 물러나더니, 단검을 풀밭에 내던지고 의기양양한 외침을 내뱉으며 허리를 숙여 늘어선 창 밑으로 손을 뻗었다. 애덤 쿠셀의 손에는 한 시간쯤 전에 휴 버링가가 그에 대한 자비로 내던진 검이 들려 있었 다. 휴 버링가는 자신들이 바로 그곳까지 온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쿠셀이 그런 목적으로 자기를 그곳까지 밀어 붙였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군중들이 몰려선 결투장 밖 어딘가에서 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쿠셀은 막 검을 들고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굵은 눈썹 밑으로 보이는 두 눈은 미칠 듯한 환희로 이글거렸 다. 그러나 쿠셀이 아직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달려들 듯 휴 버링가가 그에게 몸을 날렸다. 일 초만 지체 했어도 늦었을 터였다. 검이 허공으로 치솟을 때 버링가는 오른팔에 힘을 주고 오른손으로 단검을 단단히 움켜쥐고서, 왼손으로 검을 쥔 적의 손목을 낚아채며 온몸의 무게를 실어 쿠셀의 가슴에 부딪쳤다. 그들은 잠시 밀고 당기 고 하닥 함께 뒤엉켜 잔디밭에 쓰러져, 무심한 용병들의 발치께에서 버둥거리며 뒹굴었다. 앨린은 또다시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막으려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눈을 다시 떴다. "아니, 모조리 볼거야, 난 봐야 해...... 난 견뎌낼 거야! 저이가 날 부끄러워하지 않게! 아, 수사님...... 수사님...... 어떻게 되고 있죠? 볼 수가 없어요......" "쿠셀이 검을 낚아챘지만 휘두를 시간이 없었소. 잠깐, 한 사람이 일어나는데......" 두 사람이 함께 쓰러졌다가 한 사람만 일어섰다. 그 사람은 멍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적이 발밑에서 두 팔을 풀밭 위로 맥없이 늘어뜨리고 축 늘어져 있기 때문 이었다. 쿠셀이 이글거리는 태양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었다. 그의 몸 아래에서 는 시뻘건 물줄기가 꾸물꾸물 흘러나와, 주변의 짓밟힌 땅에 거무죽죽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휴 버링가는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고 오른손에 쥔 단검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당혹스러 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움은 갑작스럽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말 이 나버렸다. 그는 지치고 맥이 쭉 빠졌다. 버링가의 단검에는 새로 묻은 핏자국이 없었고, 쿠셀의 오른손에는 그의 죽음과는 무관한 검이 아직도 느슨하게 쥐여 있었다. 그러나 어쨌 든 쿠셀은 쓰러졌고, 그의 생명은 무성한 풀밭으로 신속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두 자루의 무 기에 피도 묻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어넘어졌으니, 기적치고는 참으로 괴이한 기적이었다. 버링가는 쿠셀의 왼쪽 어깨를 잡고 축 늘어진 몸을 돌려, 피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살펴 보았다. 쿠셀의 가죽 조끼에는 검을 집으려고 그 자신이 내던진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단검은 굳건히 버티고 선 플라망 용병의 부츠에 부딪쳐 무성한 풀밭위에 거꾸로 서 있었 던 것이다. 버링가가 몸을 날려 달려들자 쿠셀은 단검의 날 위로 쓰러지고 말았고, 그들이 서로 붙잡고 뒹굴면서 그 날이 그의 몸 깊이 박혀 들어가버린 것이다. 버링가는 생각했다. 결국 나는 이자를 죽이지 않았다. 자신의 교활한 책략이 스스로를 죽 인 것이다.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있어 기쁜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캐드펠 수사 는 만족해 할 것 같았다.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살해한 자를 철저히 응징해 그의 원한을 풀 어주었으니까. 니콜러스의 살인자는 공개적으로 고발당했고, 하늘이 그 고발을 심판해주어 이미 숨이 끊겨버렸다. 휴 버링가는 유죄선고를 받은 자의 손에서 자신의 검을 수월하게 빼냈다. 그는 천천히 돌 아서서 검을 쳐들어 왕에게 예를 표하고는, 창을 들고 선 용병들을 향해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갔다. 그의 손과 팔의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용병들은 잠자코 물러나 순 순히 길을 터주었다. 그가 왕이 앉은 의자 앞으로 가려고 풀밭 위로 두세 발짝 내디뎠을 때 앨린이 뛰어들어 그를 격정적으로 끌어안았다. 버링가는 갑자기 기운을 되찾았다. 그녀의 금발을 그의 어깨와 가슴을 뒤덮었다. 그녀는 힘이 쭉 빠진 듯하면서도 황홀한 기쁨에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휴...... 휴......" 그녀는 세례명으로 그를 부르더니 그의 뺨과 손과 손목에 난 피묻은 상처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통증을 더할 뿐이기는 했지만. "왜 제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왜? 왜? 아, 당신 때문에 나는 몇번이나 죽는 줄 알았다구 요! 이제 우리 둘 다 살아났군요...... 키스해줘요!"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제 그녀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몸을 어루만지고, 안달학,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마음이 놓인 휴 버링가는 곧 제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쉿, 그만하시오. 아니면 나를 비난하거나. 당신이 지금처럼 내게 다정하게 대하면 난 정 신을 잃고 말 거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아직은 쓰러질 수 없어요. 자, 당신이 정말로 내 애인이라면 당신의 팔에 기대게 해줘요. 이리 와서 내 곁에 서요. 좋은 아내처럼 나를 부 축해주고. 안 그러면 나는 전하의 발 아래 쓰러질지도 몰라요." "내가 당신의 애인이라구요?" 앨린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한 보장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물었다. "그렇고말고! 이제 다시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소!" 버링가가 왕 앞으로 나아갈 때 앨린도 그의 팔을 꼭 끼고 나란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 는 지치고 여기저기 부상을 입었음에도, 방금 전까지 앨린과 나눈 즐거운 시간을 잠시 잊고 왕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 저는 제가 살인자에 대해 했던 제 진술을 입증했고, 전하의 지지와 인정을 받았다 고 믿습니다." "그대의 적이 스스로 확연하게 입증해주었네." 왕은 두 연인이 나란히 붙어서 등장한 예기치 못한 광경에 마음이 누그러지고 기분이 유 쾌해져서, 사려깊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대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겠구멈. 그대는 내게서 이 주의 유능한 부행정장관을 빼앗아 갔어. 그밖에도 그가 맡았던 여러 자리를 빼앗아갔고. 결투에서는 비열하게 굴었지만 어쨌든 유능한 친구였지. 그러니 나로서는 그 앙갚음으로 그대가 만들어낸 빈 자리를 그대 자신으 로 채울 수 밖에 없네. 그대가 갖고 있는 성들에 대한 권리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성의 수 비를 맡을 책임을 그대로 유지하게 한 채로 말일세. 어떤가?" 버링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우선 제 신부와 의논하고 싶습니다." 앨린 역시 버링가에 못지않게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전하께 기쁨이 되는 일이라면 제게도 역시 기쁨입니다." 캐드펠 수사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저런, 저런, 일찍이 남녀의 혼인 약속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또 있을까. 이 친구들은 자기들 결혼식에 시루 즈베리 시민들 전부를 초대해야겠군. 캐드펠은 마지막기도 전에 휴 버링가가 입은 수 많은 작은 상처들을 치료할 거위풀 약과 황옥을 조심스럽게 붙여 복원한 자일즈 시워드의 단검을 갖고 접객소로 갔다. "오스왈드 수사는 숙련된 은세공사요. 이건 그 사람과 내가 당신의 연인에게 주는 선물이 오. 당신이 직접 앨린에게 건네줘요. 허나 강에서 이걸 건져낸 소년에게 후한 보상을 해주라 고 하시오. 앨리은 기꺼이 그렇게 할 거요. 앨린에게 해줘야 할 말이 무척 많겠지. 허나 그 나머지 이야기, 그러니까 그 아가씨 오빠와 관련된 부분은 일체 비밀로 합시다. 지금도, 앞 으로도 앨린에게 자일즈는 불운한 편을 선택한 때문에 죽어간 많은 이들중의 한 사람이니 까." 버링가는 복원된 단검을 받아들고 우울한 얼굴로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정의가 아닙니다. 수사님과 저는 한 사람이 저지른 죄의 진실은 만천하에 드러내야 했고, 또다른 사람의 진실은 은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오늘밤 버링가는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어둡고 서글픈 표정이었다. 전신의 상처가 욱신거 리고, 몸을 움직일때마다 혹사당한 근육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탓만은 아니었다. 그는 승리를 했으나 그 승리의 이면, 곧 자신이 간신히 피한 실패한 운명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꼭 결백한 사람만이 정의의 시혜를 받는 걸까요? 만일 그 사람이 쿠셀을 찾아가 유혹하 지 않았더라면 쿠셀은 그런 비열한 범죄에 빠져들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상만을 논하지. 진실을 명확히 꿰뚫어볼 수 있는 이의 관점에서는 어떨 까 하는 생각은 치워버리시오. 당신은 합법적으로 명예롭게 얻은 것들을 갖고 있소. 그것들 을 소중히 여기고 즐겨요. 그럴 권리가 있으니까. 당신은 시로프셔 주의 부행정장관이고, 왕 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며, 남자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여자와 약혼을 했소. 그 아가씨는 처 음 본 순간부터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지. 내 안목을 믿어요! 그리고 내일 온몸의 뼈가 쑤 시거든 -틀리없이 그렇게 될 거요- 기분 좋게 견디시오. 건강한 청년에게 그까짓 사소한 통 증쯤 무슨 문제가 되겠소?" 버링가는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쯤 그 두 사람은 어디 있을까요?" "웨일스의 해안에 도착해 프랑스로 실어다줄 배를 기다리고 있겠지. 별일 없이 잘 있을거 요." 캐드펠은 스티븐 편도 모르 편도 아니었다. 그 네 젊은이 중에서 둘은 모드 편이었고, 둘 은 스티븐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현재의 무정부 상태와 내전의 상처를 벗은 미래의 잉글랜드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캐드펠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정의에 대해서 하는 말인데, 정의는 전체 이야기의 반도 채 안 되게 마련이오." 캐드펠은 마지막 기도 때 마음과 삶이 깨끗했던 젊은이 니콜러스 페인트리가 고이 잠들기 를 기원할 생각이었다. 이제 그는 틀림없이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편안히 잠들 것이다. 그는 죄의 구렁텅이에서 죽은 애덤 쿠셀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할 생각이었다. 때이르게 죽은 사람들, 회개할 여유도 없이 제 혈기와 제 힘을 못 이겨 죽은 사람들은 모두 다 원래 수효 보다 하나 많은 시신이었다. 캐드펠은 말했다. "자꾸 어깨 너머를 돌아보거나 후회할 필요는 없소. 당신은 당신에게 닥친 일을 한 거요. 그것도 무척이나 훌륭하게. 하느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오. 인간의 영역 가장 높은 곳에 서부터 가장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정의와 응보가 미칠 수 있는 그 어디에나 은총의 빛 역 시 깃들일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