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번째 주검 지은이 : 앨리스 피터스 출판사 : 북하우스 봉사자 : 김동휘 새로 온 조수 그 소년이 처음 왔을 때 캐드펠 수사는 양어장 가에 있는 조그만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무더운 팔월 정오 무렵이어서, 설령 적당한 수의 조수들이 배정되었다 하더라도 이 시각쯤 이면 뙤약볕에서 진땀을 흘리기보다는 그늘 속에 들어가 낮잠이나 자고 싶어할 터였다. 그 러나 아직 수련사 딱지를 떼지 못한 그의 정식 조수들 중의 하나는 휴가기간을 이용해, 잉 글랜드 왕권을 둘러싼 내전에서 스티븐 왕의 편에 선 형에게 합류하려고 떠나고 없었다. 또 다른 조수는 집안이 모드 황후편이였으므로, 왕의 군대가 육박해오자 겁을 집어먹고서 체셔 에 있는 자기 집안의 영지로 피신해버렸다. 포위당한 시루즈베리보다는 그곳이 한층 안전하 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저런 이유로 캐드펠 수사는 모든 일을 혼자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일한 적이 적지 않은 캐드펠 수사 는 바깥 세상이야 혼란에 빠지든 말든 자기가 맡은 땅만큼은 황폐해지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는 결심을 다지고있었다. 그해, 그러니까 1138년 초여름 무렵에 이르러서는 지난 이 년에 걸쳐 산발적으로 진행되어온 골육상쟁의 여파가 시루즈베리바로 코앞에까지 육박해 있었다. 이제 전쟁의 위협은 죽음의 그림자처럼 성과 시를 뒤덮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캐드펠 수사는 파멸과 전쟁보다는 삶과 생장 쪽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얼마 지 나지 않아 또다른 방식의 살인, 이렇게 무질서한 시대에조차 허용되지 않는 은밀한 살인이, 그가 선택한 삶의 평온을 깨뜨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팔월은 농사일에 온 정신을 빼앗기지 않아도 될 시기였으나, 지금처 럼 혼자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벅찰 정도로 일거리들이 많았다. 수도원에서 캐드펠을 돕겠답시고 기껏 생각해낸 방법은 아타나시우스 수사를 붙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 수사는 귀머거리에 노망기가 든데다가 잡초와 농작물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 하는 사람이어서 캐드펠 수사는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혼자서 하는 편이 차라리 나 았다. 그는 밭 한 뙈기에 가을양배추를 옮겨심고, 다른 밭에는 겨울을 날 봄양배추의 씨앗 을 뿌리고, 완두콩을 거둬들이고, 이미 수확을 끝낸 완두밭에서는 사료와 가축들의 잠자리로 넣어주기 위해 시든 줄기를 거둬들였다. 게다가 그의 특별한 자랑거리인 식물표본실의 나 무 시렁에는 유리그릇에 든 약 대여섯 가지와 조그만 절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적어도 하 루 한 차례는 그 약들을 손봐야 했고, 잘 익어 거품을 내면서 발효되고있는 허브주들도 들 여다보아야했다. 때는 바야흐로 허브 수확의 절정기였으며, 겨울에 쓸 온갖 약들이 그의 손 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원 담 밖에서는 사촌간인 스티븐과 모드가 잉글랜드의 왕권을 둘러싸고 수많은 인명과 재물을 희생시키며 일대각축을 벌이고 있었으나, 그런 와중에서도 캐드펠 수사는 자신이 지배하는 왕국의 그 어떤 부분도 소홀히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양배추밭에 퇴비를 주다가 잠깐만 고개를 들어도 건물들의 지붕너머로 수도원 밖 성과 시에 서 꾸물꾸물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을 테고, 어제의 화재로 인한 매캐한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터였다. 그 어두운 그림자와 역한 냄새는 근 한 달 간이나 시루즈베리의 하 늘 위에, 관을 덮는 장막처럼 음산하게 깔려 있었다. 그 한 달 사이에, 성으로 통하는 다리 를 빼앗지 못한 스티븐 왕은 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육로인 성의 정문 밖 자신의 진영에서 격노해서 발을 구르고 있었으며, 성안에 있는 피챌런은 점점 줄어가는 양식과 보급품을 걱 정스레 바라보면서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피챌런은, 다루기 까다로우며 용맹함을 분별 있게 다스리지 못해 항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자신의 외숙 헤스딘 아눌피에게 간혹 감행하 는 기습공격을 전담시키고 있었다. 시루즈베리 주민들은 대문과 가게문들을 굳게 닫아걸고 숨을 죽이고 있었으며, 일부는 서쪽으로 달아나 예전에는 적이었으나 지금은 스티븐 왕보다 덜 두렵고 그들에게 호의적인 웨일스로 들어가고 있었다. 웨일스인들의 입장에서는, 잉글랜 드인들이 같은 잉글랜드인들을-모드나 스티븐을 잉글랜드인들로 간주할 수 있다면 말이지 만!-두려워한다는 것은 두손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웨일스인들은 , 잉글랜드인들이 웨 일스는 건드리지 못하고 자기네들끼리 치고받는 즐거운 사태가 계속되는 한은 자신들의 땅 으로 도망쳐오는 부상자들이나 피난민들 돕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캐드펜은 허리를 죽 펴고서, 햇빛에 그을어 잘 익은 개암나무열매 빛을 하고 있는 삭발한 정수리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냈다. 그때, 수도원으로 기부 들어온 물건들을 분배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은 오스왈드 수사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부지런히 다가왔다. 오스왈드 수 사는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의 어깨를 떼밀다시피 하면서 오고 있었다. 소년은 올이 거친 갈색 긴옷에 그 지방 사람들이 잘 입는 짧은 여름바지 차림이었다. 양말은 신지 않았 으나 아주 맵시 있는 가죽신을 신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특별한 행시를 위해 말끔히 차려입 은 듯한 모습이었다. 소년은 불안한 듯 눈길을 떨구고 잠자코 떼밀려왔다. 또다시 어느 집 안에서 두 당파로부터 압력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에 자기 네 자식을 맡기려 하는 모양이 었다. 캐드펠 수사는 새삼 양쪽 사람들을 모두 나무라는 심정이 되었다. "캐드펠 형제에게 일손이 필요할 듯해 이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이 아이는 힘든 일도 마 다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시내에 사는 한 선량한 여자가 문지기에게 데려와서 일꾼 삼아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헨코트에서 온 자기 조카인데. 부모가 모두 죽었다더군요. 아이에게 일 년치 경비를 딸려 보냈습니다. 로버트 부원장께서 받아들이겠다고 허락하시고 소년숙사에 방을 배정해주셨습니다. 이 아이는 수련사들과 공부는 같이 할 테지만, 스스로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일기 전에는 수도서원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아이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캐드펠은 관심 있게 소년을 훑어보고, 건강하고 의욕에 넘치는 젊은이 를 받게 된 것이 기뻐서, 주저하지 않고 응낙했다. 몸집은 호리호리했으나 다리는 튼튼해 보 였고 전신에 탄력이 넘쳐흘렀다. 소년은 가지런히 다듬어진 갈색 고수머리에 가려진 눈을 조심스럽게 들어 캐드펠 수사를 올려다보았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했지만 겁을 먹어서 그러 는 것은 아닌 듯했다. "네가 나와 밭일을 할 생각이 있다면 기꺼이 널 맡겠다. 이름이 뭐 지?" "고드릭입니다." 소년은 캐드펠에 못지않게 상대를 열심히 살펴보면서 거친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 "좋아, 고드릭. 잘 지내보자. 우선 나하고 같이 이 밭들을 돌아보면서 할 일 이 뭔지 알아보는 게 좋겠지. 이 안의 분위기도 좀 느껴보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만 이 담 너머에 있는 시내보다는 이곳이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게다. 네 선량한 아 주머니께서 널 이리로 데려오신 것도 다 그 때문이겠지" 소년은 빛나는 푸른 눈으로 캐드 펠 수사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이내 눈을 떨구었다. 오스왈드 수사가 말했다. "캐드펠 수사님과 함께 저녁기도에 참석할 때 보자구나. 수련장이신 폴 수사님이 네 방 을 보여 주시고 저녁식사 후에 할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실게다. 수사님 말씀을 정신차려 잘 듣도록 해라. 말씀하시는 대로 잘 따르도록 하고." "네, 잘 알겠습니다." 소년은 절도 있게 대답했다. 그 고분고분한 말투에서는 실없이 터져나오려는 웃음기가 살 짝 묻어나 있었다. 수년의 푸른 눈은 서둘러 걸어가는 오스왈드 수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줄곧 그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소년은 그 초롱초롱한 눈을 캐드펠 수사에게 돌렸다. 달걀처럼 갸름한 단아한 얼굴이었다. 꼭 다문 입술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이 양귀 퉁이가 허물어지고 있었으나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천성이 명랑한 사람들조차도 함부로 웃음을 터뜨릴 수 없는 어려운 시절이였다. "자, 가서 네 할 일이 뭔지 살펴보자꾸 나." 캐드펠 수사는 짐짓 쾌활하게 말하고 소년에게 삽을 들렸다. 캐드펠은 담을 두른 밭 들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채소들과 머리가 아찔할 만큼 진한 향내로 한낮의 대기를 가득 메 운 허브들을 보여주었고, 밖으로 나가서 양어장과 거의 시냇가까지 뻗어 있는 완두콩밭을 보여주었다. 이미 수확을 끝낸 올된 밭의 완두줄기와 이파리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 연한 황갈색으로 바싹 말라 있었고, 늦게 파종한 것에도 다 익은 완두 꼬투리들이 주렁주렁 매달 려 있었다. "이것들은 오늘내일 중에 거둬들여야 한다. 이런 무더위 속에서는 하루만 지나 도 곤란하거든. 수확을 끝낸 줄기들도 잘라내야 돼. 내 대신 이 일부터 하려무나. 줄기를 뽑지 말고 낫으로 밑동을 잘라내라. 남은 뿌리는 그대로 갈아엎으면 좋은 거름이 되니까." 캐드펠은 소년이 갑작으런 변화를 겪으면서 느낄지도 모를 이질감과 개운치 못한 기분의 찌끼를 순탄하게 털어버릴 수 있도록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올해 몇 살이냐 고드 릭?" "열일곱 살입니다." 소년은 거친 소리로 대답했다. 열일곱 살치고는 체구가 작았다. 캐드펠이 일하는 땅은 토질이 단단한 편이어서 갈아엎기가 쉽지 않으니, 땅을 일구는 일 은 나중에 시키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러나 소년은 마치 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기라 도 한 것처럼 항의하듯 말했다. "전 열심히 일할 수 있어요.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시키시 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렴, 그렇겠지. 우선 완두밭 일부터 시작하자. 마 른 줄기들을 베어내서 이 곁에 쌓아라. 그건 나중에 마구간이나 외양간 바닥에 깔아주지. 뿌리는 흙으로 되돌아가고." "인간들처럼요." 고드릭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인간들처럼." 이 골육상쟁의 와중에 너무도 많은 이들이 때이르게 흙으로 돌아가 고 있었다. 캐드펠 수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고는, 수도원 건물의 지붕들 너머 꾸역꾸역 솟아오르는 연기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무너진 성탑들을 쳐다보았 다. 캐드펠 부드럽게 물었다. "저기에 네 친척들이 있느냐?" 소년은 황급히 대꾸했다. "아뇨! 하지만 성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사람들은 오래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쩌면 내일 함락될지도 모른다고도 하구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누구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헨리 왕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영주들을 불러모아 모드 황후님을 당신의 후계자로 인정하게 하셨어요. 영주들은 하나같이 황후님께 충성을 맹세했구요. 황후님은 헨리 왕의 유일한 자손이시니 사촌인 스티븐 백작 이 왕권을 탈취하고 제 머리에 왕관을 얹자, 너무도 많은 영주들이 애초의 맹세를 잊고서 그걸 순순히 받아 들였어요. 그건 옳지 못해요. 충직하게 황후님 편에 서는 건 절대 잘못 이 아니에요. 변절한 사람들이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죠? 스티븐 백작의 주장을 어떻게 정 당화할 수 있어요?" "정당화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닌 듯하구나. 영주들 중에는 너와 정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이들도 있으니까. 말하자면 군주로는 여자보다 남자가 낫다고 생 각하는 이들이지. 그리고 남자로서는 스티븐이 왕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아니겠느냐. 스티븐도 모드 황후와 마찬가지로 윌리엄 왕의 손주니까." "하지만 헨리 왕의 아들은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그 사람도 모드 황후님처럼 여자인 자 기 어머니를 통해서 왕권과 연경 되어 있으니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제껏 말소리를 죽이며 이야기하던 소년은 갑자기 또렷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을 이었 다. "스티븐과 모드 황후님의 진짜 차이는, 스티븐 백작은 노르망디에서 이 땅으로 쳐들어 와 자기가 원하던 것을 차지했지만, 황후님은 노르망디에 그대로 머무르시면서 그 어떤 악 행도 하려 하시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영주들의 반 정도가 애초의 맹세를 떠올리고 황후님 편에 서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죠. 그래봤자 유혈사태와 떼죽음밖에 더 있겠어 요? 여기 시루즈베리에서는 그 참혹한 사태가 벌써 시작되고 있어요. 물론 그것이 여기만 의 일로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케드펠은 온화하게 물었다. "얘야, 너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게냐?" 낫을 들고 시험 삼아 완두줄기를 베어보던 소년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 경계심도 품지 않은 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고 캐드펠을 바라보았다. "그럼요." "그래 그럴수도 있겠지. 허나 남들과 있을 때는 입을 다물도록 해 라. 시내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전쟁터 한복판이나 다름없단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문을 닫아걸지 않으니까. 이 안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말을 옮기기도 하지. 그런 말을 수집해서 일러바치는 것으로 먹고사는 이들도 있고. 생각을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으면 안전할 테니 가급적 그렇게 하도록 해라." 소년은 찔끔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꾸지람을 듣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캐드펠의 의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너의 신뢰에는 신뢰로 보답하마. 내게는 두 군주 중에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다는 생각은 없다. 허나 충성의 맹세를 지키는 것 은 훌륭한 일이라 해야겠지. 자, 이제 일이나 열심히 하자. 양배추밭 일이 끝나면 이리 와 서 널 돕겠다." 그는 활기차게 일하는 소년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무척 유연한 몸매를 가 지고 있었으나 겉에 걸친 긴 옷이 헐렁해서 마치 한중간을 끝으로 묶은 천뭉치를 보는 듯했 다. 저애보다 나이도 많고 체구도 훨씬 더 큰 친척이 입다가 물러준 것이리라. 저런, 이 친구야, 이런 무더위에 줄곧 그런 식으로 일할 수는 없을 게야. 하긴 그때쯤이면 뭔가가 드 러나게 되겠지! 케드펠은 소년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황갈색으로 물든 줄기들이 서걱이는 완두밭으로 돌아왔을 때 소년은 빨갛게 달아오 른 얼굴로 진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소년은 낫을 휘두를 때마다 캐드펠의 귀에 들릴 정도로 헉헉댔으나 일하는 속도는 전과 다름없었다. 캐드펠은 베어놓은 콩줄기들을 한아름 안아 밭 가장자리로 옮기면서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고생할 필요는 없다. 옷 을 허리께가지 벗어내려도 괜찮아. 그러면 좀 편할게다." 그러면서 캐드펠 수사는 벌써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있던 승복의 상의 부분을 허리까지 벗 어내렸다. 강건해 보이는 그의 갈색어깨가 드러났다. 소년이 보인 반응은 여러 가지였으나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증거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소년은 잠시 낫질하 는 속도를 늦추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요!" 하고 말했다. 그 태도는 놀랄 만큼 침착했 으나 음성은 좀전보다 훨씬 맑고 높았다. 좀전에는 변성기를 갓 지난 소년 특유의 낮고 쉰 듯한 목소리였는데. 소년은 이내 부지런히 두 손을 놀리며 일을 계속했지만, 발그레하게 상 기된 기운이 옷깃 바로 위에서부터 가느다란 목을 타고 올라가 두 뺨에까지 번져나갔다. 설마 그럴 리가. 아니, 소년이 나이를 속였을 수도 있다. 이제 막 변성기에 접어든 탓에 목소리가 들쭉날쭉할 수도 있고. 어쩌면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제 가난이 드러나는 것이 창피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아, 물론 시험해볼 방법은 또 있다. 지금 곧 시도해보는 편이 나으리라. 만일 의심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테니까. "저놈의 왜가리가 또 우리 치어들을 훔치고 있구먼!" 캐드펠 수사는 메올 시내 건너편을 가리키면서 불쑥 소리쳤다. 그곳에서는 영문도 모르 는 왜가리가 큼직한 날개를 접고 시냇가를 걷고 있었다. "네가 나보다 가까우니까, 저놈들에 게 돌 좀 집어던져라!" 왜가리는 물론 죄없는 방문객이었다. 그러나 캐드펠의 판단이 옳다 면 그 새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터였다. 고드릭은 왜가리를 쳐다보더니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팔을 한껏 뒤로 젖혔다가, 얼마 나가지도 않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밑에서 위로 힘껏 내던졌다. 돌은 허공을 날아가 왜가리가 서 있는 곳에서 일이 미터쯤 떨어진 시 냇가 얕은 여울에 첨벙하고 제대로 떨어졌다. 왜가리는 놀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캐드펠은 혼자 중얼거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 문제를 심사숙고 하 기 시작했다. 성의 정문은, 시루즈베리 성과 시를 둥글게 휘감아도는 세번강의 들목과 날목 사이의 좁은 땅에 있었다. 스티븐 왕의 공격군은 그 정문으로 이어지는 땅 전역에 넓게 포 진해 있었다. 왕은 자기 진영에서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씨근대며, 자기를 돕겠다고 자청하 고 나선 소수의 충직한 시로프셔 주민들을 치하하고 환대하는 연회를 베풀면서, 그 자리에 없는 상당수의 불충한 무리들을 응징할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스티븐 왕은 체격이 크고 잘생긴 얼굴에, 말이 많고 단순한 사람이었다. 금발에 피부가 무척이나 희어 전체적인 인상은 퍽 우아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스티븐 왕은, 타고난 호 인기질과 모멸감에서 비롯된 쓰라린 심정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우둔하고 굼뜨다는 평판을 듣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삼촌인 헨리가 딸 하나만 남겨놓고 사망하자, 헨리의 가신들이 그의 유언에 따라 순순히 그 딸을 여왕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녀가 앙주 백작과 재혼해 프랑스 땅 깊숙한 곳에 눌러앉아 있는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게 되었을 때, 스티븐 왕은 그의 일생에서 단 한 번 놀라우리만치 신속 정확하게 움직였다. 그의 전격 적인 공세에 얼이 빠진 영주들은 마지못해 했던 과거의 맹세를 떠올리는 것은 둘째치고 자 기네의 이해관계를 차분히 따져볼 겨를조차 없이, 자신이 정당한 후계자라는 스티븐 왕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대성공으로 끝난 정변이 무슨 이유로 갑자기 뒤 틀리게 되었을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영향력 있는 신하들 중의 반수 가 한동안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와서 반란의 기치를 들고 나서게 되었을 까? 양심 때문에? 억지로 그의 왕권을 인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헨리 왕에 대 한 두려움 내지는 헨리 왕이 신도 움직일 수 있다는 미신적인 공포 때문에? 스티븐 왕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들을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어 부득불 무력에 호소하 여 필요할 때마다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천성에 걸맞게, 회개하는 자들은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제하면서 인정을 베풀었으나, 상대방은 그 것으로 이득을 보면서도 그의 관대한 처사를 비웃을 뿐이었다. 그는 반란자들의 성채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따끔한 맛 을 보기 전에 순순히 복종하라고 권유했으나, 각 지방의 영주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간에 내일 새벽의 공격은 시루즈베리 수비군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 고, 그것은 모든 영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리라. 이 중부 지방 영주들이 고분고분 그의 권유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결국 쥐새끼들처럼 허겁지겁 달려와 목숨을 애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리라. 특히 헤스딘 아눌프...... 그자에게는 시루즈베리 성탑에서 온갖 상스럽고 추잡한 욕설을 퍼부어댄 것을 짧은시간 동안에나마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리라. 오후 이슥한 시간, 캐드펠 수사와 고드릭이 저녁기도 시간에 참석하려고 손을 씻고 옷차 림을 단정히 하고 있을 즈음, 스티븐 왕은 풀밭에 설치된 자신의 막사 안에서 수석참모이자 시로프셔의 행정장관 내정자인 길버트 프레스코트와 플라망 출신 용병들의 대장인 윌렘 텐 헤이트와 함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지방의 소영주들이 왕을 지원하겠다고 휘하의 병력 을 이끌고 오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스티븐 왕은 할 수 없이 플라망 용병들에게 많은 부 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인데다가 무감각한 직업군인들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사고 있었다. 그들은 술에 취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게 한 마을을 불질러 버리기도 했다. 거대한 체구의 텐 헤이트는 붉은기가 도는 금발에 긴 콧수염을 기른 잘생 긴 사내로, 나이는 서른도 채 안 되었으나 전쟁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쉰이 넘은 나이 에 조용하고 과묵한 프레스코트는 노련하면서도 용맹스러운 기사였고, 절대 극단으로 치우 치지 않는 편이어서 조언을 할 때도 무척 신중했다. 그런데 그런 프레스코트 조차도 이번 에는 가혹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아량을 베푸셨습니다만 수치심도 모르는 뻔뻔스러운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전하를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야 할 때 입니다." 스티븐 왕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선은 성과 시부터 점령해야 하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곧 시루즈베리에 입성하시게 될 것입니다. 피챌런과 애드니, 그리고 헤스딘이 우리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는다면 전하의 뜻대로 처리하십시오. 수비군 내의 평민들은 별 문젯거리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자들의 경우에도 본보기가 될 만한 조치를 취하시도록 적절한 조언을 해 드리겠습니다." 왕은 이미 이곳에서의 저항을 주도한 그 셋에게 보복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윌리엄 피챌런은 바로 그가 시로프셔 행정장관으로 임 명한 자였으나, 지금은 그의 경쟁자 편에 서서 성을 차지하고 버티고 있었다. 피챌런의 가 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펄크 애드니는 피챌런의 배신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제 상전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헤스딘은 오만무례한 욕설들로 거듭 그를 모욕 하고 모독했다. 그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소모품이나 인질감들 정도에 불과했다. 프레스코트가 말했다. "시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피챌런은 우리가 시에서 북쪽으 로 빠지는 길을 폐쇄하기 전에 이미 제 아내와 자식들을 밖으로 빼돌렸다고 합니다. 애드 니도 딸이 하나 있긴 한데 그 딸은 아직 시내에 있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진작에 시 밖으 로 내보냈다고는 합니다만." 프레스코트는 시로프셔 출신이어서 최소한 이 지방 영주들의 이름과 평판 정도는 훤히 꿰고 있었다. "애드니의 딸은 어렸을 때 이미 메스베리 출신인 로버트 버링가의 아들과 약혼한 사이입니다. 메스베리는 오스웨스트리 곁에 있어 양쪽 집 안의 영지가 바로 맞닿아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전하를 뵙겠다 고 찾아온 사람이 바로 그 사람, 메스베리의 휴 버링가이기 때문입니다. 괜찮다는 판단이 서시면 그 사람을 이용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오늘까지만해도 그 사람은 피챌런 족 사람 이었고 전하의 적이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안으로 들여서 전하께서 직접 판단하십시오. 만일 그 사람이 정말로 마음을 바꾸었다면 휘하에 꽤 많은 병력이 있 으니 유용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 사람은 쉽게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 습니다." 한 근위대 장교가 대형 천막 안으로 들어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서른 살 난 유능 한 장교 애덤 쿠셀은 프레스코트의 가신들중의 하나요, 그의 오른팔격인 인물이었다. 왕이 대면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장교가 입을 열었다. "또 다른 방 문객이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숙녀분입니다. 그분을 먼저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분은 아 직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고 또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분은 자기 이름이 앨린시워 드라면서, 부친이 요 근래에 사망하기 전까지는 늘 전하 편이었다고 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없으니 두 사람 모두 데려오되 여자부터 말하게 하라." 쿠셀이 처녀의 손 을 잡고 천막 안으로 들어와 왕 앞에 서게하자 그녀는 더없는 존경과 복종의 예를 갖춰 절 을 했다. 뭇남자들의 시선을 끌 만큼 매혹적인 여자였다. 가냘픈 몸매에, 나이는 열여덟이 나 되었을까. 상중임을 알리는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에 쓴 하얀 모자와 베일에서 흘러내린 몇 가닥의 금발이 두뺨 가장자리에 드리워진 모습이, 그녀를 더욱 어리고 더욱 아름답게 보 이게 했다. 그녀에게서는 젊은 처녀들 특유의 수줍어하면서도 자부심 넘치는 의연함이 풍 겨나왔다. 그녀는 존경의 예를 표하면서, 왕의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용모에 놀라 짙푸른빛 이 도는 성큼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은 그녀에게 한 손을 뻗었다. "그대의 불행을 진심으로 애도하오. 방금 전에 들었소, 내가 어떤식으로든 그대를 보호해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지체없이 요구하도록 하시오." 처녀는 외경에 찬 부드러운 목소리 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너무도 친절하십니다. 저는 지금 고아가 된 처지여서, 저희 집안 이 마땅히 바쳐야 할 존경과 충성의 서약을 전하께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 하나뿐입 니다. 저는 지금 제 부친이 바라시던 바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부친이 병환으로 돌아가시 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직접 오셨거나 제가 좀더 일찍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희는 전하 께서 친히 시루즈베리로 오신 지금에서야 겨우 저희 성 두 곳의 열쇠를 전하께 바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상전보다 열 살쯤 더 들어 뵈는 침착 한 젊은 하녀가 진작부터 천막에 들어와 뒤켠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에게 열쇠꾸러미를 건 네주었다. 앨린은 그것을 공손히 왕에게 바쳤다. "저희는 전하를 위해 기사 다섯과 마흔 명 이상의 무장한 병력을 소집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저희 성들을 수비하라고 남겨 두고 왔습니다. 전하께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그들을 부리십시오." 그녀는 집안 소유의 영지들과 가신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열심히 암기 해둔 학과 내용을 외고 있는 듯했으나 엄숙하고 위엄 있는 자세만큼은 전투장에 선 장군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저게 큰 슬픔을 안겨준 속사정입니다. 제게는 오라비가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바로 이 일을 해 야 했던 사람입니다." 목소리는 조금 떨렸으나 그녀는 이내 용기를 내어 침착한 자세를 되 찾았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셨을 때 제 오라비 자일즈는 모드 황후편을 들었고, 그 바람 에 부친과 한바탕 다툰 뒤 황후 편에 가담하겠다고 집을 떠났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풍문에 듣자니 프랑스에 있는 황후에게 갔다고 합니다. 저는 제 집안에서 일어난 불상사를 전하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을 슬프게 한 사 건이었고, 전하께서도 같은 심정이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가져온 것을 거절하 지 마시고 전하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제 부친의 뜻이 그러했고 저 역시 그러합니다." 그녀는 마치 엄청난 짐을 부려놓기라도 한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은 무척 감동 했다. 왕은 한 손으로 그녀를 잡아끌어 그녀의 뺨에 열렬히 키스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쿠 셀의 얼굴에는 왕에게만 그런 기회가 온 것을 부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그 대의 슬픔에 설령 모래알만큼 작다하더라도 슬픔을 덧보탠다거나 그대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치 않으실 거요. 그대의 충성의 맹세를 영주들의 그것에 못지않은 소중한 것으로 내 온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소. 나를 돕기 위해 이런 수 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오. 이제 내가 그대를 돕기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말해보 오. 그대가 아직 숙소를 정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이곳은 군인들이 묵는 야영지라 그대가 묵을 만한 곳이 없소. 곧 밤이 올 텐데." 처녀는 수줍게 말했다. "수도원의 접객소에 가면 방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를 강 건너편까지 데 려다줄 배만 마련할 수 있다면요." "그대를 강 건너까지 안전하게 호위해주고, 그대에게 훌 륭한 집 한 채를 내주라고 수도원에 요청하도록 하겠소. 우리가 그대를 집까지 무사히 호 위할 병력을 배정할 수 있을 때까지, 그대는 그곳에서 안심하고 편히 쉴 수 있을 거요." 기 꺼이 그 일을 맡을 사람을 고르려고 주위를 돌아보는 왕의 눈에, 자기가 하고 싶어서 몸이 단 애덤 쿠셀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연한 밤색 머리와 그와 똑같은 색의 빛나는 눈을 가진 젊은이는 왕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애덤, 그대가 시워드 아가씨를 안 내해서 묵을 만한 집까지 모셔다드리겠나?"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쿠셀은 열 정적으로 말하고는 뜨겁게 달아오른 손을 처녀에게 내밀었다. 휴 버링가는 장교의 넓은 갈색 손에 얌전히 한 손을 얹고서 눈길을 떨구고 지나가는 처녀 를 지켜보았다. 불균형하다 싶을정도로 크고 우아한 눈썹 밑으로 보이는 처녀의 작고 품위 있는 얼굴은 할 일을 제대로 해낸 뒤에 오는 피로감과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휴 버링가는 왕의 천막 밖에서 그 간에 오간 말들을 모두 엿들었다. 그녀는 지금 공식적인 시련을 겪고 난 어린 신부, 그러니까 집안의 부와 가문을 과시하느라 한껏 성장을 했다가 양가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서 간단히 방으로 쫓겨가는 어린 신부처럼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의 장교는 그녀 곁에서 마치 자신이 정복당한 정복자처럼 더없이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충분히 수긍이 갈 만한 광경이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문득 윌렘 텐 헤이트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 버링가는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고 천막의 차일 아래로 들어갔다. 갑자기 침침한 곳으로 들 어섰기 때문에 당당한 체구에 피부가 하얀 왕의 모습도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다. 휴 버 링가는 복종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메스베리의 휴 버링가입니다, 전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전하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기사 여섯명과 쉰 명의 무 장병력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들의 반수는 숙련된 궁사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전하의 것 입니다." 왕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리도 그대의 이름은 잘 알고 있네. 그대 집안의 병 력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고. 그런데 그 병력을 우리의 대의에 바치겠다는 말은 왠지 생소 하게 들리는군. 내가 듣기로는 최근까지도 우리의 배신자인 패챌런과 애드니와 한패였다던 데. 그리고 이런 식의 심경변화는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아. 이 일대에서 한 달이나 체류했 어도 그대로부터 어떤 전언도 듣지 못했으니." 버링가는 냉담한 대접에 불쾌한 기색을 보 인다거나 허둥지둥 자기 입장을 변명하려 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은 이었다. "전하께서 그 사람들을 배신자라 부르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만, 저는 어렸을 적부터 그 사람들을 제 동료나 친지로 여기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우정을 나누기에 하등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극히 공정한 분이시니, 이제 까지 그 누구에게도 충성의 맹세를 한 적이 없는 저 같은 사람이 이런 순간에 어떤 길을 선 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했다는 것을 용납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맹세는 한번으로 그 쳐야 할 성질의 것이니까요. 헨리 왕의 딸이 나름대로 합당한 명분을 갖고 있다는 데는 의 문의 여지가 없는지라, 저로서는 그 명분을 선택한 사람을 배신자라 부를 수 없습니다. 전 하께 한 맹세를 어긴 사람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말씀입니다. 저는 불과 몇 달 전에 영지 를 상속받은 터라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충성의 맹세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어느 분 을 섬길까 한참을 고심했습니다만, 이제 이리로 왔습니다. 그다지 고심하지도 않고 전하께 몰려드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간단히 등을 돌릴 수도 있는 법입니다" 왕은 미덥지 않다는 듯이 물었다. "그대는 그러지 않겠다는 뜻인가?" 왕은 도도하게 달 변을 늘어놓는 이 뱃심 좋은 젊은이를 비판적인 눈으로 살펴보았다. 보통 키보다 약간 작 고 좀 여윈 듯 하기는 하나, 균형잡힌 체격에 태도는 무척이나 자신만만했다. 체구와 키에 서 부족한 점은 민첩한 동작과 잘 돌아가는 머리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으리라. 나이는 스물두셋쯤 되었을까. 거무스레한 피부와 이마를 굵게 가로지르는 숱많은 검은 눈썹에, 날 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젊은이였다. 얼굴만 보아서는 깊은 두 눈 뒤로 어떤 생각이 흐르는 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도도하게 늘 어놓은 말들은 솔직한 심경에서 나온 것일 수 도 있고. 사전에 잘 계산해둔 것일 수도 있었 다. 그는 능히 자신의 군주를 저울질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대담한 태도가 반드시 불쾌하 게 비치지만은 않으리라 추산한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젊은이였다. 버링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제 말씀을 믿어주십사 하지는 않겠습니다. 장차 두고보시면 아실 테니까요. 저는 전하의 시험에 맡겨 진 몸입니다." "그대의 군사들과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 "세 사람만 대동하고 왔습니다. 성을 텅 비워두거나 충분치못한 병력만 남겨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게다 가 쉰 사람 분의 양식을 준비하지 않아, 전하께 그들을 먹여주십사고 부탁드리기는 결례가 되는 것 같기에 그랬습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지체 없이 실행하겠습 니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네. 우리측 사람들도 그대를 받아들이기전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챌런과 막역한 사이였잖은가." "그랬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사람을 비난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선택한 길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듣기로 그대는 펄크 애드니의 딸과 약혼한 사이라던데."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약혼한 사이인지, 아니면 약혼했던 사이인지! 시대 의 흐름이 과거에 새웠던 수많은 계획들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은 판국이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저는 그 아가씨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쪽 집안과 맺은 서약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왕은 젊은이를 면밀히 관찰하며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성안에는 여자들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군. 피챌런의 가족은 모조리 성을 빠져나가 지금쯤은 이미 이 지방을 벗어났을 걸세. 허나 애드니의 딸은 시내 어딘가에 은거해있는 듯하더군. 그렇게 쓸모 있는 아가씨 를 수중에 놓은 것도 썩 괜찮은 일이겠지." 왕은 은근히 강조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 계 획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말일세. 그대는 그 여자 아비 편이었으니 지금 그 여자가 어디 숨어 있을지 짐작하고 있겠지. 수소문을 해서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면, 다른 사람 은 몰라도 그대는 그 여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게야." 젊은이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으로 왕을 응시했다. 그 영리해 보이는 눈에는 왕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한 빛이 어려 있기는 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동의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고, 잘만 하면 왕 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 다. 버링가는 온화한 표정에 꾸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하. 저는 메스베리에서 올 때 그런 점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스티븐 왕은 아직 상대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만족했다. "여기 남아서 시를 함락시킬 때 우리를 도울 수 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대에게 맡길 일이 없네. 그대를 찾아야 할 일이 있으면 어디로 연 락하면 되겠나?" "수도원 접객소에 방이 있다면 거기 머물러 있겠습니다." 고드릭은 저녁기도 시간 동안 학생들과 수련사들로 이루어진 나이 어린 사람들 무리의 맨 뒤편, 평신도들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 평신도들은 수도원 담과 세 번 강의 수도원 쪽 둑 사이에 살고 있어서 여전히 이 피난처로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캐드펠 수사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찾았다. 그의 눈에 띈 것은 예상했던 대로 조그마하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아이였다. 밭에서는 활달하고 거침이 없었으나 지금 교회 안에서는 표정이 어두웠다. 어둠 이 내리고 있으니 곧 이곳에서의 첫날밤이 시작되리라. 다행히도 상황은 소년이 애초에 짐 작했던 것보다는 한층 순탄하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위기 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었다. 잘하면 굳이 위기를 겪지 않고도 넘어 갈 수 있을 터였다. 특히 오늘밤에는 더욱더. 그 소년말고도 보살펴주어야 할 아이들이 몇 몇 더 딸려 있는 수련장 폴 수사는 기꺼이 소년을 다른 사람 손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캐드펠은 저녁식사 후에 소년을 다시 찾았다. 그는 식사 때 고드릭이 맛있게 먹는 모습 을 보고 은근히 기뻐했다. 소년은 자신을 사로잡는 두려움이나 불안과 능히 맞서 싸울 수 있는 기개가 있어 보였고, 영혼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단련시켜 스스로를 강 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정도의 사려분별을 갖춘 듯했다. 게다가 그가 소년과 나란히 식당을 나오면서 어깨에 한 손을 얹었을 때 소년이 그에게 보낸 고마움과 안도어린 눈빛은 캐드펠의 마음을 한층 든든하게 해주었다. "이제 마지막기도 시간 때까지는 자유다. 바깥 은 서늘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 안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고드릭은 그곳을 벗어나 여름밤의 어둠 속으로 도피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놓였다. 그 들은 양어장과 허브밭 쪽으로 한가롭게 걸어갔다. 소년은 캐드펠 곁에서 깡충거리며 뛰어 가다가 느닷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수련장님이 저녁식사 후에 절 부르실 거라고 했는데요. 제가 이렇게 수사님하고 같이 가도 정말 괜찮을까요?" "모두가 찬성하고 축복한 일이니 조 금도 걱정할 필요없다. 폴 형제에게 말해서 허락을 얻었어. 너는 내 밑에 있게 되었고, 이 제는 내가 널 책임지게 되었다." 담으로 둘러싸인 허브밭으로 들어서자 낮 동안 햇빛을 담 뿍받은 로즈메리며 타임이며 회향이며 elf, 세이지, 라벤더 따위의 알싸한 향내가 한꺼번에 덮쳐왔다. 제 나름의 은밀한 향을 지닌 수많은 허브들의 세계. 서늘한 저녁나절임에도 그 곳에는 어지러울 만큼 진한 향기와 함께 태양의 열기가 여전히 떠돌았다. 머리 위에서는 칼새들이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면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기름 먹인 목재들이 부드러운 빛을 내고 있는 오두막 앞에 이르렀다. 캐드펠 수 사는 오두막 문을 열었다. "여기가 네 잠자리다, 고드릭." 오두막 한쪽 끝에는 말끔하고 야 트막한 벤치 겸 침대가 놓여있었다. 소년은 잠자코 그것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짚고 있던 캐드펠은 소년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나는 여러 가지 허 브들을 발효시키고 있는데, 몇 가지는 정기적으로 돌봐주어야 한다. 어떤 것들은 너무 빨 리 발효하기 때문에 자칫 소홀히 하면 상해버리고 말지. 네가 할 일들을 자세히 알려주겠 다. 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이건 네 침대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으면 저 쇠살 창 문을 열면 된다." 떨림이 그쳤다. 소년은 짙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고 탐색하는 듯한 시선 으로 캐드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미소를 지을 것 같기는 했으나, 그 눈에는 자존심이 상한 빛이 역력했다. 캐드펠은 문 쪽으로 돌아서서, 안에서 잠그게 되어 있으며 일단 걸어놓으면 밖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육중한 빗장을 보여주었다. "네가 나올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못 들어오지. 나도 물론이고." 고드릭은 이제 노골적으로 대드는 눈빛으로 캐드펠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 것 같 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드센 기색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아셨죠?" 소녀는 대들 듯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캐드펠 수사는 부드럽게 반문했다. "기숙사의 공동 침실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은 어떻게 넘길 심산이었나?" "전 잘 해냈을 거예요. 남자애들 은 그렇게 영리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속여넘길 수 있죠." 소녀는 풍덩한 겉옷을 두 손으로 잡아당기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 있으면 아래위가 다 밋밋해 보이거든요. 게다 가 남자들은 원래 무심하고 멍청하잖아요." 소녀는 캐드펠이 무심해 보이지만 실은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그녀는 완전한 소 녀로 돌아갔다. 마음놓고 즐거워하는 소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아, 수사님이야 그렇지 않으시지만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전 열심히 노력했고 누 구나 속여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잘못됐나요?" 캐드펠은 달래듯 말했다. "아주 잘 해냈지. 그러나 나는 승복을 입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사십 년 동안 세상일을 속속들이 경험한 사람이야. 뭐가 잘못됐느냐구?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불쾌하게 받아 들이지 말고 같은 편이 들려주는 좋은 충고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네. 아까 열을 올리면서 주장을 내세울 때 자네는 자신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는데, 그 목소리에는 탁한 기운이 전혀 없었어. 남자 목소리로 위장하려면 탁한 목소리로 말했어야지. 그런 기술은 배우면 익힐 수 있네. 시간이 있을 때 가르쳐주기로 하지. 그리고 내가 옷을 벗어내리고 편하게 일하라 고 권했을 때 낯을 붉히면 어떻게 하나. 그때 나는 거의 확신하게 되었지! 물론 자네는 내 권유를 뿌리쳐버렸지. 마지막으로 내가 시내 건너편으로 돌을 던지라고 했더니 자네는 꼭 여자처럼 던지더군. 팔을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뻗을 때 아래에서 위로 던졌잖나. 사내 애들이 어디 돌을 그렇게 던지던가? 앞으로 사내애들처럼 던지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남 이 하란다고 해서 무심코 돌을 던져서는 안 되네. 그랬다가는 당장 정체가 탄로나고 말 테 니까." 이런 처녀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처음에는 웃더 니 곧이어 울음을 터뜨렸고, 나중에는 웃다 울다 했다. 그 동안 캐드펠은 그녀를 그대로 내 버려두고 묵묵히 서서 참을성 있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제어력을 조금 잃었을 뿐이었다. 손해와 이득 사이에서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이리 퉁겨지고 저리 퉁겨지 고 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머릿속의 대차대조표에 따라 움직이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 캐드 펠은 그녀가 막 여성스러운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하는 앳되고 아름다운 열일곱 살 난 아가 씨라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소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고, 무지개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환히 웃으면서 영리해 보이는 눈매로 캐드펠 수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진심이세요? 수사님이 절 책임지신다는 거요. 아까 말씀드렸죠, 제가 수 사님을 완전히 믿고 있다고!" 캐드펠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최선을 다해 자네를 돕고 나중에 자네가 가고 싶어하는 곳으 로 안전하게 보내주는 것말고 달리 뭐가 있겠나?" 소녀는 새삼 놀라워했다. "수사님은 제 가 누군지도 모르시잖아요? 믿을 만한 사람인지 어떤지도 모르시구요." "이름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한 어린 처녀가 험한 폭풍우를 피하느라 잠시 여기에 혼자 외로이 떨어 져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나?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든 나는 더 이상은 알 필요가 없네." "수사님께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싶어요." 처녀는 하늘 만큼이나 투명하고 맑은 눈으로 캐드펠을 올려다보면서 담 담하게 말했다. "제 아버님은 지금 이 순간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루즈베리 성안에 계시거나, 아니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윌리엄 피챌런 어른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서, 언제 추적자들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올지 모를 위급한 상황 속에서 노르망디에 있는 황후의 영지를 향해 달아나고 계실 거예요. 지금 저는 절 도와주시는 그 어떤 분에게도 부담스런 존재고, 안전한 곳에서 벗어나자마자 당장 인질로 잡힐 거예요. 저는 캐드펠 수사님께도 역 시 위험스런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저는 피챌런 어른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친구인 분의 딸이거든요. 저는 고디스 애드니예요." 원래부터 오그라붙은 두 다리를 갖고 태어난 앉은뱅이 오즈번은 왕의 군대를 따라다니는 무리들 가운데 가장 비천한 사내였다. 오즈번은 바퀴 달린 조그만 수레에 몸을 싣고 두 손 에 쥔 나막신을 등뒤로 뻗어 땅을 잡아끌면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이곳저곳을 돌 아다녔다. 평소 같으면 시루즈베리 성문 곁에 자리를 잡았겠지만 이제 그 자리가 무척이나 위험해졌으므로, 오즈번은 적절한 시기에 그곳을 떠났다. 그는 나름대로의 기대를 품고 포 위공격군 중에서도 근위대의 주력부대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엄청나게 많 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왕은 무장한 적들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마음이 너그럽 다고 소문난 인물이었기에, 그 자리에는 떨어지는 것이 많았다. 고위장교들은 워낙 분주한 사람들이라 거지에게 눈길을 주거나 푼돈을 던져줄 겨를이 없지만. 시운이 어느 쪽으로 흐 르는지 관망하다가 뒤늦게 왕의 호의를 구하러 온 사람들은 일이 잘 되기를 빌면서 하느님 께 바치는 일종의 뇌물로 오즈번 같은 이에게 잔돈푼을 던져주는 일이 적잖았다. 자유민 출신의 궁사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플라망 용병들까지도 비번일 때나 기분이 좋을때는 동전 몇 푼이나 음식 조각들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는 경비초소에 가까운, 어중간한 크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 그늘에 자리잡았다. 그 곳이라면 빵껍질이나 물을 얻어먹을 수 있고, 야간에 피우는 화톳불의 온기를 즐길 수 도 있을 것이다. 팔월에도 밤이 되면 날이 쌀쌀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걸치고 있는 누더 기가 변변치 못할 때는 화톳불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군일들은 불길을 죽이려고 군데군데 토탄을 얹어두기는 했지만 늦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조사하느라 그 밝기만큼은 늘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오즈번은 자정 가까운 시각에 불편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뒤쪽 왼켠, 그러니까 성의 정문 쪽이기는 하나 한길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서 덤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에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시 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성문을 지나서가 아니라 강변을 따라 몸을 숨기면서 은밀히. 오즈번은 자신이 못박힌 손바닥만큼이나 시안을 훤히 꿰고 있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척후병이거나 시에서 이쪽으로 올 수 있는 유일한 다른 통로인 강으로 이어지는 수문으로 시를 빠져나온 누군가일 것이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실체는 보이지 않고 움직임만 포착되는 그 검은 형체는 덤불 을 빠져나와 허리를 잔뜩 낮추고서 살그머니 경비초소로 달려왔다. 보초가 누구냐고 소리 치자 형체는 긴장한 상태에서도 뭔가를 호소하려는 듯 얼른 멈춰섰다. 오즈번은 전신에 검 은 망토를 휘감아 하얀 얼굴만 희미하게 보이는 가늘고 호리호리한 몸집의 윤곽을 볼 수 있 었다. 형체는 보초의 물음에, 젊고 새되고 두려움이 담긴 절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 신들의 상관을 만나고 싶소. 무기는 없소! 상관에게 데려다주시오. 이야기할 게 있소. 전하께 도움이 될 만할 것이오......" 보초들은 그를 끌고 가서 대충 몸을 수색해 무기가 잇 는지 확인해보았다. 그 뒤에도 그들 사이에 뭔가 말이 오가기는 했지만 오즈번의 귀에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대화의 핵심은 뭔가 전할 말이 있다는 것 정도일 터였다. 보 초들은 그를 자기들 진영으로 데려갔다. 그것으로 그의 모습은 오즈번의 시야에서 사라졌 다. 오즈번은 한밤의 냉기가 누더기 틈새로 파고드는 탓에 다시 잠들지 못하고 덜덜 덜면 서 생각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내게도 좀전에 본 사내가 입은 그런 망토를 보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게 좋은 옷을 입은 사람도 바들바들 떨고 있지 않았는가. 그 떨리는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함께 열렬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흥미롭기는 하나 거지에게 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소한 사건일 뿐이었다. 적어도 좀전에 본 사람이 막사들 사이 의 어둑어둑한 길목에 나타나 또다시 초소 곁 통로에 멈춰 설 때까지는. 이제 남자의 발걸 음은 좀더 가볍고 여유가 있었으며, 행동거지에도 두려워하거나 남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훨씬 덜했다. 남자는 군에서 발급한 표찰을 받아들고 있었고, 그래서 들어올 때처럼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오즈번은 몇 마디를 엿들었다. "이제 돌아가야겠소, 의심을 사면 곤란하니까...... 나는 지시를 받았소!" 아, 이제 저 남자는 자신의 근심을 덜어주신 하 느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푼돈을 주고 싶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즈번은 급히 바퀴를 굴려 남자가 지나갈 길목으로 내달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한푼 줍쇼, 나리! 하 느님이 나리께 베푸신 자비를 가난한 사람한테도 좀 나눠줍쇼!" 오즈번은 느긋해 보이는 하얀 얼굴을 얼핏 보았다. 기대감과 안도감이 섞인 여유 있는 숨소리도 들었다. 남자의 목 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정교한 금속 걸쇠가 화톳불의 일렁임에 반짝 빛났다. 망토 주름 사 이로 손 하나가 나오더니 오즈번의 손바닥에 동전을 떨어뜨렸다. "내일 날 위해 기도 좀 해주게나." 남자는 소리 죽여 속삭이고는 오즈번이 미처 축복의 말을 하기도 전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재빨리 내달려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새벽이 오기 전에 오즈번은 설핏 깨었다 졸기를 반복하는 어지러운 잠에서 깨어나, 모든 이들의 통로가 되는 길을 황급히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여명이 채 밝기도 전에 왕의 군 대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무척이나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오 즈번은 병사들이 열을 맞춰 집합하고 무기를 점검하는 것을 소리로 들었다기보다는 직감으 로 느꼈다. 새벽 공기는 연대의 묵직한 발소리로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지만 실제로 들리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스티븐 왕의 군대가 시루즈베리 성에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대오를 이루어 출정하고 있었다. 급하게 휘어도는 세 번 강의 들목과 날목 사이, 병목처럼 좁다란 땅을 가로지르는, 시로 이어지는 유일한 육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죽인 움직임과 함께 섬뜩한 긴장과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살육 상황은 정오가 되기 훨씬 전에 끝이 났다. 성문들을 덤불로 태우고 두들겨 부수고 들어 간 공격군은 성곽 안뜰을 하나하나 점령해 들어가, 성벽과 탑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궁 사들을 모조리 죽여 떨어뜨렸다. 성안과 시내 전역의 하늘에는 시커먼 연기가 가득했다. 거리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개들조차도 얼씬하지 않았다. 최초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시루즈베리 주민들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아내와 자식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대피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요란한 함성과 굉음과 무기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에 귀를 곤 두세우며 숨을 죽였다. 전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군량 부족에 허덕인데다가 이미 탈 진할 대로 탈진해 있던 수비군은 틈만 보이면 병사들이 탈영한 탓에 수효도 많이 준 상태였 다. 주민들은 머지 않아 공격군 병사들이 시가지를 휩쓸고 다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경우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인 약탈의 시간을 숨죽여 기다리던 상인들은, 왕이 병사들의 이탈을 금하는 단호한 명령을 내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 까 닭은 플라망 용병들에게 전리품을 안겨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그들의 경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 자신이 아직은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곳은 적의 도시였고,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왕에게 무엇보다도 시 급한 것은 성에 남은 수비군을 처리하는 문제, 특히 피챌런과 애드니와 헤스딘 아눌프를 사 로잡는 일이었다. 스티븐 왕은 유혈이 낭자하고 연기가 자욱하며 여기저기 병기들이 널려 있는 안뜰을 지나 성의 홀로 들어가서, 쿠셀과 텐 헤이트와 그들의 부하들에게 반란의 주모 자들을 사로잡아오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왕은 프레스코트는 그대로 곁에 두었다. 새 행 정장관인 프레스코트는 그 성의 주요한 방들의 열쇠를 갖고 있었고, 그곳을 지킬 왕의 수비 대가 쓸 군량도 이미 확보해두고 있었다. "결국 전하께서는 무척 약소한 대가만을 치르신 셈입니다. 인명 피해도 거의 없었고, 시 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금전적인 피해는 좀 입었습니다만, 성을 원형 그대로 접수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성벽 몇 군데만 손보고 성문들만 새로 달면...... 이곳은 전하의 난공불락의 요 새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성이 우리가 들인 시간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 다." "차차 알게 되겠지." 스티븐 왕은 탑 위에서 오만무례한 욕설들을 내뱉던 헤스딘 아 눌프를 생각하며 음산한 표정으로 말했다. 놈은 제 죽음을 자초한 거야! 쿠셀이 투구를 벗고 이글거리는 불길 같은 진한 갈색 머리를 너풀거리며 홀 안으로 들어 왔다. 스티븐 왕은 쿠셀을 전투에서는 더없이 날렵하고 용맹하며 부하들을 지휘할 때는 강 력한 통솔력을 발휘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장교로 여기고 있었다. "어서 오게 애덤. 그자 들이 숨을 데를 찾아 도망쳤나? 적어도 피챌런만은 겁쟁이 하인놈처럼 헛간 같은 데 숨어 있지는 않겠지?" 쿠셀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전하! 저희는 이 성안을 지붕에서 지하감옥까지 이잡듯이 샅샅이 뒤졌습니다. 어느 한 곳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피챌런의 종적이 묘연합니다! 저희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그들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어느 쪽으로 달아났는지 기필코 밝혀내 겠......" 스티븐 왕은 발끈했다. "그들이라?" "애드니도 피챌런과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성을 빠져나간 것이 분명합니다. 전하께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스럽습니다만 사실 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스티븐 왕은 쿠셀이 사실을 숨김없이 전할 수 있는 뱃심을 가졌다는 점만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쿠셀은 말을 이었다. "헤스딘은 잡았습니다. 밖에 있습니다. 부상을 당했는데 심각한 것은 아니고 그저 살짝 긁힌 정도입니다. 안전을 위해 쇠사슬을 채워두었습니다. 이제 그자는 전하께서 성 밖에 계실 때처럼 오만방자하게 날뛰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은 자신의 주요한 적 두 사람을 다 잡았다 놓쳤다는 것을 깨 닫고 새삼 격노했다. "그자를 데려오라." 헤스딘 아눌프는 손목과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질질 끌면서, 심하게 절룩이며 들어왔다. 먼지와 연기와 피로 얼룩진, 덩치 크고 혈색 좋은 예순 가까운 사내였다. 플라망 용병 둘이 왕 앞에선 그를 찍어눌러 강제로 무릎 꿇게 했다. 그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굳어 있기는 했으나 여전히 도전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왕은 의기 양양하게 말했다. "뭐야, 이제는 한풀 꺾였나? 예전의 방자한 태도는 어디로 갔지? 하루이틀 전만 해도 되는 대로 지껄여대더니 왜 입을 다물고 있나? 이제는 좀 생 각이 생겨서 말투를 바꿀 참인가?" "전하." 헤스딘의 얼굴에는 정말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내뱉는다는 표정이 뚜렷했다. "전하는 승자이고 저는 이제 전하의 처분에 맡겨진 몸입니다. 저는 전하와 정정당당하게 싸운 사람이니 명예롭게 대우해주시기 바랍니다. 저 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귀족입니다. 전하는 돈이 필요하시고, 저는 백작의 몸값에 해당하 는 가치는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만한 돈을 치를 능력이 있습니다." "내게 정중하게 이야 기하는 것이 너무 늦었네그려. 우리 사이에 성벽이 가로놓여 있을 때는 온갖 잡소리를 마 구 지껄여대더니. 그때 난 기필코 자네를 붙잡아 처단하겠다고 맹세했고, 이제 드디어 내 맹세가 이루어질 판일세. 백작의 몸값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자네에게 내 가격을 제시할 까? 피챌런은 어디 있나? 애드니는? 어디서 그 둘을 붙잡을 수 있는지 시원하게 털어놓 고 내가 그자들을 붙잡게 해주십사 하고 기도나 올리게. 그러면 자네의 그 비천한 목숨을 살려두는 것을 고려해볼 수도 있을 테니. 그저 고려해보겠다는 말이야!" 헤스딘은 고개를 치켜들고 왕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가격은 지나치게 높은 것 같소. 내 동지들에 대해 내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우리가 이 싸움에서 졌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성을 빠 져나갔다는 것 정도요. 당신이 내게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날 살리거나 죽이는 것 뿐이오. 그러니 어서 가서 그 알량한 사냥감들이나 쫓으시구려!" 왕은 격노해서 소리쳤다. "어디 두고보자! 네놈에게서 더 얻어낼 게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보도록 하지! 애덤, 저 자를 텐 헤이트에게 넘겨 심문하게 하라. 헤스틴, 네게 두 시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사이 에 그자들의 행방에 관해 알고있는 모든 것을 발설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흉 벽에다 걸어놓을 테다. 당장 이자를 끌고 나가라!" 병사들은 헤스딘을 무릎 꿇은 자세 그 대로 끌고나갔다. 스티븐 왕은 씨근거리면서 자리에 앉아 손가락 관절을 잘근잘근 깨물었 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 생각하오, 프레스코트? 그자들이 패배가 분명해졌을 때야 비로 소 도망쳤다는 것이? 그렇다면 놈들은 아직 시내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지도 모르겠소. 어 떻게 놈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정문으로 빠져나가지는 못했어. 우리 군대의 감시망을 감쪽같이 따돌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맨처음 이 성에 진입한 중 대들을 두 개의 다리 쪽으로 곧장 진격하게 했소. 그러니 놈들은 섬처럼 고립된 시내어딘 가에 은신해 있는 거요. 놈들을 찾아내도록 하시오!" 프레스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로 접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강으 로 이어지는 수문이지요. 놈들은 거기서 우리의 눈을 피해 은밀히 세 번 강으로 헤엄쳐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놈들에게는 배가 없었을 테니까요. 물론 시내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 능성이 가장 높겠지만 말입니다." "수색하시오! 놈들을 찾아내시오! 놈들을 사로잡을 때 까지 일체의 약탈을 금하오. 사방을 이잡듯이 뒤져 놈들을 꼭 찾아내도록 하시오." 텐 헤 이트와 플라망 용병들은 적병들을 체포하고, 프레스코트의 지휘를 받아 새로운 수비대를 조 직해서 곳곳에 배치했다. 쿠셀과 다른 장교들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급히 시를 가로질러가 다리 두 곳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시내의 집들과 가게들을 샅샅이 수색하는 일에 착수했다. 일단 정복이 완료되자 왕은 자신을 호위하는 병력과 함께 막사로 돌아가서 탈주자 두 명에 관한 소식이 들러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두시가 조금 지났을 때 쿠셀이 돌아왔다. "수색이 실패로 끝났다는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저희는 거리 곳곳을 수 색하고, 시내의 모든 상인들과 적의장교들을 심문하고, 여염집들까지도 남김없이 뒤져보았습 니다.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닌데 그자들이 어떻게 감쪽같이 성을 빠져나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피챌런도 애드니도 찾아내지 못했고 그자들의 도피경로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는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강을 헤엄쳐 수도원 정문 너머로 달아났을 경우에 대비해서 그쪽으로 민첩한 정찰대를 파견하기는 했습니다만 소식을 듣게 될지는 의문입니다. 헤스딘은 아직 완강히 버티며 입을 굳게 봉하고 있습니다. 텐 헤이트 는 죽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성싶습니다. 그자는 자기가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이미 알고 있으니 아무리 협박해도 소 용없을 것입니다." 스티븐 왕은 싸늘하게 말했다. "놈은 내가 애초에 약속한 처벌을 받게 될 거야. 나머지는? 수비군 포로가 몇이나 되나?" "헤스딘을 빼고 아흔일곱입니다." 쿠셀을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왕의 잘생긴 얼굴을 주시했다. 몹시 화가 나 있기 는 하지만 곧 풀어지리라. 그들은 몇 주 내내, 지나치게 쉬이 용서하는 것이 그의 단점이라 고 왕에게 누누이 이야기해오지 않았는가. 쿠셀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전 하, 이제는 약자들에게 관용을 베푸실 때입니다." "놈들을 처형해!" 스티븐 왕은 마음의 동요를 피하려고 단숨에 뱉어냈다. "모두를 말씀이십니까?" "모조리! 단번에 해치워. 오 늘내로 놈들을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버려." 그들은 그 끔찍한 일을 플라망 용병들에게 떠맡겼다. 용병들은 그럴 때 아주 쓸모 있는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용병들은 그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종일 정신없이 바빠서 시내의 집 들에는 얼씬도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괜찮은 물건들은 하나 남김 없이 모조리 약탈당했 을 터였다. 그 소름끼치는 막간 덕분에 시루즈베리 길드 조합원들과 하급관리들과 토지관 리인들은 허겁지겁 회의를 소집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대표단을 파견할 수 있었고, 왕에 게서 미온적이나마 은전을 배풀겠다는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마뜩찮고 회의적인 표정 으로 보아 그들의 갑작스러운 충성의 맹세를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았으나, 왕은 일단은 그들 의 절박한 처지를 이해해주는 듯했다. 프레스코트는 새 수비대를 성내의 요소요소에 배치 했고, 그 사이에 텐 헤이트와 그의 용병들은 옛 수비대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흉벽에 매달아 처형했다. 헤스딘 아눌프가 가장 먼저 처형당했으며, 두 번째는 소규모 부대를 거느 렸던 젊은 향사 차례였다. 그는 공포에 질려,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처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그를 처형한 플라망 용병들은 잉글랜드어를 거의 할 줄 모르 는 사람들이어서 올가미가 목을 죄어 항의의 외침이 멎을 때까지 향사가 발악하는 광경을 보며 그저 흥겨워할 뿐이었다. 에덤 쿠셀은 그 살육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저 기쁘기만 했다. 그는 시내를 구석구석까지 수색했고, 다리를 건너 시 외각까지도 나가보 았다. 그러나 윌리엄 피챌런이나 펄크애드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 그날 이른 새벽부터 여전히 학살이 진행되는 한밤중까지, 시루 즈베리의 성 베드로 바울 수도원에는 섬뜩한 공포의 분위기가 내내 가시지 않았다. 붕붕대 는 벌떼처럼 갖가지 소문이 무성히 날아다녔지만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삶이라는 것은 전쟁이나 재앙이나 죽음에 의해 침범당하기를 거부할 때만이 지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수사들은 연속되는 기도시간이며 수도회 평의회며 미사며 노동이며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선택한 조직체의 일상을 열심히 수행했다. 평의회 뒤에 열린 미사는 엘린 시워드 가 하녀 콘스틴스와 함께 참석했다. 앨린 시워드는 수심이 가득한 창백한 안색에도 불구하 고 결탄할 만큼 침착했다. 휴 버링가도 참석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앨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도원이 그녀에게 내어준 수도원 물방앗간 근처의 집에서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았 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사제의 말보다는 상중임을 나타내는 하얀 베일에 가려진 그 근심 가득한 앳된 처녀의 옆모습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섬세하고 여려 보이면서도 단호한 의지가 깃들인 입술을 소리 없이 달싹이면서, 자신 이 이곳에서 무릎 꿇고 있는 사이에 다치거나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경건하게 기도를 울렸다. 콘스틴스는 그 곁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앨린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앨린을 보호하는 입장이었지만 주인의 곁에서 전쟁을 몰아낼 힘은 없었다. 앨린 이 집으로 다시 들어갈 때까지 버링가는 멀찍이 떨어져서 줄곧 그녀를 따라갔다. 그는 그 녀를 따라잡으려 하거나 그녀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앨린이 안으로 사라지자 그는 부하들을 뒤에 남겨두고서 수도원 정문을 지나 다리에 이르렀다. 도개교 상판이 들려 있었 으므로 시로 들어갈 길은 없었다. 그러나 다리 건너 시 오른쪽에 자리잡은 성에서 요란하 게 일었던 전투의 소음과 비명들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강 건너, 성의 웅장한 모습이, 후광처럼 드리워진 연기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약혼자를 찾아내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려 면 더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몇 가지 징후들을 근거로, 한시간 내에 다 리 상판이 내려지고 시로 들어가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틈을 이용해서 그는 유유히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다른 곳에 서와 마찬가지로 수도원 접객소에서도 온갖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어디서나 흠잡힐 데 없 는 정직한 일거리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들 짐을 꾸려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소 문들을 종합해볼 때 성은 확실히 함락되었으며, 이제 그곳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될 터였다. 이제부터는 스티븐 왕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 는 승리했고, 또 이곳에 있었다. 모드 황후가 내건 명분이 제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머 나먼 노르망디에 있으니 그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피챌런과 애드니가 마 지막 순간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은밀히 속삭였다.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이들이 마음속으로나마 하늘에 감사 드렸다. 버링가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다리가 내 려져 길이 트여있었고, 스티븐 왕의 보초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보초들은 그가 갖고 있는 증명서들을 꼼꼼히 조사해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자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며 통과시 켰다. 틀림없이 스티븐 왕이 그에 대해 모종의 지시를 내린 것이리라. 버링가는 다리 를 건너서, 보초들이 지키고 있기는 하나 활짝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섰다. 그 문과 연결된 가파른 언덕길은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시루즈베리 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 다. 버링가는 그 길을 잘 알았고, 자신이 어디로 가려 하는지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 언덕 꼭대기에는 푸줏간들과 그에 딸린 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거리는 인적 없이 텅 비 었고, 쥐죽은 듯 고요했다. 푸줏간 거리에 늘어선 가게들 중에서 가장 크고 말끔한 에드릭 플레셔의 가게는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굳게 닫혀 있었다. 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고개를 내미는 사람도 겁먹은 듯 힐끗 내다보고는 얼른 모습을 감추고 문 을 잠가버렸다. 거리는 아직 약탈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버링가는 굳게 잠긴 가게문 을 두드렸다. 이윽고 안에서 슬며시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문열어요, 나 휴 버링가요! 에드릭, 페트로닐라, 문 영어요, 나 혼자요!" 버링가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그 문이 무 덤처럼 굳게 봉해져 있을 테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아무도 없는 체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무랄 수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문이 활짝 열리더니 페 트로닐라가 마치 구세주를 맞기라도 하듯 환하게 웃으면서 두 팔을 벌리고 나타났다. 그녀 는 나이가 꽤 들었지만 여전히 통통했으며, 몹시 활달하고 상냥했다. 이제까지 포위되어 잇 던 이 시에서 그가본 사람들중에 가장 건강해 뵈는 여자였다. 그녀는 하얀 모자로 잿빛 머 리를 단정하게 여미고 있었고, 현명해 보이는 잿빛 눈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밝게 반짝였다. 그녀는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휴 도련님! 이런 때 믿을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되다 니!" 그러나 버링가는 그녀가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즉각 눈치챘다.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에드릭, 휴 도련님이 오셨어요, 휴 버링가 도련님이!" 페트로 닐라가 외 치자 금방 그녀의 남편이 나타났다. 덩치크고 불그스름한 얼굴에, 이 도시에서 그 솜씨를 인정받고 있는 유능한 도축업자이자 시의원인 남자. 부부는 버링가를 안으로 들이고는 그 가 좀전에 예상했던 대로 문을 단단히 잠갔다. 버링가는 약혼자를 찾으러 온 사람답게 서 론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고디스는 어디있소? 고디스를 찾으러 왔소. 내가 돌 볼거요. 그분이 고디스를 어디 숨기셨소?" 부부는 문이 단단히 잠겼나 확인하고 혹시 밖 에서 뒤쫓는 발소리가 들리지는 않나 신경 쓰느라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듯 했다. 부부 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자기들이 알고 싶은 것부터 재빨리 묻기 시작했다. 애드 릭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 쫓기고 계신가요? 숨을 곳이 필요하세요?" "도련님은 수비대에 계셨나요?" 페트 로닐라는 그렇게 물으며 근심스런 얼굴로 혹여 부상당한 곳은 없는지 그의 몸을 찬찬히 흝 어보았다. 마치 자기가 과거에 고디스의 유모가 아니라 그의 유모 노릇을 했거나, 어린 시 절의 약혼식 이래로 기껏 두세 번쯤 본 것이 아니라 날마다 봐오기라도 한 것처럼 곰살궂기 짝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염려하는 태도였다! 잠시 숨돌릴 틈을 가지면서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해야 좋을지 궁리하는, 무척이나 세련된 기술이었다! 에드릭이 말했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었습니다. 다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장관님과 펄크 나으리를 찾 으려고 시내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다 시피 했지요. 숨을 곳이 필요하시다면 여기 계십시오. 그 사람들이 도련님을 바짝 뒤쫓고 있나요?" 그 쯤에서 버링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가 성안에 있지 않았으며, 어떤 식으로든 피챌런의 편에 가담한 적이 없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영리하고 충직한 옛 하녀와 그녀의 남편은 애드니의 신임을 단 단히 받고 있었으며, 누가 자기 주인과 행동을 함께 하고 누가 거리를 두면서 지내는가를 훤히 꿰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난 위험에 빠진 것도 아니고 필요한것도 없소. 다만 고디스를 찾으러 왔을 뿐이지. 사람들이 그럽디다, 그분이 진작에 고디스를 피챌런 어 른의 가족과 함께 딴 데로 보냈어야 했는데 그냥 두어 때를 놓쳤다구요. 어디가면 고디스 를 찾을 수 있소?" 에드릭이 물었다. "누가 아가씨를 찾아보라고 도련님을 이리로 보냈습 니까?" "아니, 아니, 그런 사람 없소...... 그분이 여기말고 달리 어디다 고디스를 맡기겠소? 유모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어서요? 물론 난 가장 먼저 이리로 온 거요! 그 사 람이 여기 없다고는 하지 말아요!" 페트로닐라가 말했다. "아가씨는 여기 계셨어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저희가 모시고 있었죠. 하지만 딴 곳으 로 가셨어요. 너무 늦게 오셨어요. 나으리가 기사 둘을 보내서 아가씨를 모시고 가셨죠. 아가씨가 어디로 가시는지는 저희에게도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알지 못하면 누가 강요해도 발설할 수 없는 법이라 하시면서요. 하지만 적당한 때 아가씨를 시 밖으로 모시고 가지 않 았나 싶어요. 지금쯤 아주 멀리, 안전한 데 가 계실 거예요. 하느님, 부디 우리아가씨를 지 켜주소서!" 그 기도의 진지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키운 주인집 딸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바칠 터였다.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마다하지 않을테고! "내가 그 사람을 찾는 걸 도와줄 수 없겠소? 난 장차 그 사람의 남편될 사람이오. 그 사람 부친께 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가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오. 내가 알고있는 바로는 그분은 지금쯤 어쩌면......" 그때 부부사이에 오간 것은 단순한 눈짓의 교환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차 싶은 마음에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부부는 재빨리 서로를 쳐다보더 니 입을 모아 말했다. "하느님,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그들은 병사들이 미친 듯이 시내를 수색하는 것을 보고 피챌런과 애드니가 죽지도, 잡히 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고 피챌런과 애드니가 죽지도, 잡히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멀리,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부부는 그들의 안전 을 위해서라면 자기들 목숨이라도 바칠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변절자였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직접저그로 부 딪쳐서는 도저히. 에드릭 플레셔는 엄숙하게 말했다. "죄송스럽습니다만 더는 도움이 되어 드릴 수가 없군요. 사정이 워낙 그러니까요. 최소한 그 어떤 적도 아가씨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아가씨에게 그런 짓을 하는 이가 없 게 해달라고 저희와 함게 기도해 주십시오." 버링가는 꼭 자기를 짚어 하는 말인 듯해 심 사가 뒤틀렸다. 버링가는 맥없이 말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군. 딴 데서라도 알아봐야 지. 앞으로도 내가 댁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거요. 문을 열고 밖에 누가 있나 살 펴봐줘요, 페트로닐라." 그녀는 기꺼이 그렇게 하더니, 길이 거지의 손바닥 만금이나 횅하 니 비어있다고 말했다. 버링가는 에드릭과 악수를 하고 그 아내의 뺨에 키스했다. 그녀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낯을 붉히자 그의 뒤틀렸던 심사가 약간 풀렸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시오." 그는 그들이 기꺼이 따라줄 단 한 가지 요청만 하고는 반쯤 열린 문으로 나갔다. 등뒤로 문이 굳게 잠겼다. 그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겨야 할 입장 이었으므로 휴 버링가는 너무 크지는 않게, 그러나 그들의 귀에는 들릴 정도로 발소리를 울 리며 집 모퉁이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버링가는 재빨리 돌아서서 가치발로 살금살금 문으 로 다가가 귀를 갖다댔다. 페트로닐라가 경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신부를 잡으려 고 하다니! 저 작자 나중에 큰 대가를 치러야 할걸요! 아가씨는 주인 어른이나 피챌런 어 른을 사로잡기 위한 좋은 미끼예요! 저 작자는 지금 스티븐 밑에서 출세하려는 거예요. 우리 아가씨는 그러는 데는 가장 좋은 발판이 되어줄 거구요." 에드릭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저 사람이 진심으로 아가씨가 안전한 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하지만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당 신 말은 옳아. 저 혼자 발이 닳도록 찾아다니라지 뭐." 페트로 닐라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우리 어린양을 그 어떤 녀석도 찾아내지 못할 곳에 숨겨뒀다는 것을 알아낼 수는 없을걸요!" 그녀는 '녀석도'라고 하면서 킬킬댔다. "앞으로 아가씨를 거기서 모시고 나와도 괜찮을 때가 오겠죠. 이 모든 소동이 가라앉은 뒤에 말예요. 아가씨 아버님 이 열심히 말을 달려 될 수 있는 대로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 계신다면 좋으련만. 프 랭크웰의 두 청년이 오늘밤 행정장관님의 보화를 갖고 별 탈 없이 서쪽으로 달아나야 할 텐 데. 모두들 무사히 노르망디로 가셔서 황후님을 열심히 도우시게 될 거예요. 황후님께 축 복이 내리기를!" 에드릭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쉬잇, 여보! 잠긴 문 뒤에도 엿듣는 사 람이 있을 수 있잖소......" 그들이 안채로 들어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휴 버링가는 그곳을 떠나 길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버링가는 흡족한 마음으로, 성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며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기대한 것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그들은 오늘밤 피챌런과 그의 보화를 그러니까 웨일스로 빼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절망적인 사태가 올 것에 대비해 시를 둘러 싼 장벽 너머, 시의 근교인 프랭크웰 어딘가에 보화들을 미리 숨겨 두었다. 통과해야 할 문 도, 건너야 할 다리도 없는 곳 어딘가에. 이제 고디스가 숨어 있음직한 곳 한 군데가 떠올 랐다. 고디스와 피챌런의 돈만 갖다 바치면 스티븐 왕보다 훨씬 까다로운 사람의 환심도 살 수 있으리라! 저녁기도에 참석하기 한 시간 전쯤에 고디스는 허브밭의 작업장에서 캐드 펠 수사가 가르쳐준 대로 허브주를 희석하고 섞는 일을 쉼 없이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고민이 가득했고, 그녀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계속해서 오락가락했다. 밭에서 일하 느라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훔친 탓에 그녀의 얼굴은 온통 얼룩져 있었다. 눈가의 옴폭한 부분은 눈물로 씻겨져 깨끗했지만, 볼록한 부분에는 슬픔과 긴장의 음울한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부지런히 두 손을 놀리면서 참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두눈이 두세 방울 새어나와 더 붉어지면 안 되는 허브주에 똑똑 떨어졌다. 무심코 고디스는 오래 전 마 구간에서 배운 욕설을 내뱉었다. 매사냥꾼들이, 그녀의 친한 친구였던 부주의하고 버릇없는 조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내뱉은 욕설이었다. "그보다는 그 눈물을 축복하는 편이 나 을 텐데."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캐드펠 수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가 빚은 허브주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것이 될 게야. 하느님께서 항상 지켜보신다는 것을 의 심하지 말아야지." 그녀는 캐드펠의 목소리에서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워주려는 마음을 읽 고서, 꼬질꼬질하게 얼룩이 져 있음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고집 세어 보이는 얼굴을 수사에 게로 돌렸다. "수도원 문지기실과 물방앗간과 다리께에 들렀는데 좋지 않은 소식들이 들리 더구먼. 조금 쉬었다가 이 세상을 하직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러 가세.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 죽음이 가장 끔찍한 악은 아니야. 꼭 나쁜 소식만 들었다고는 할 수 없겠구먼. 세 번 강 이쪽과 다리께에서 들은 말들을 한 데 모아보면 말일세. 다리를 지키던 보초들 중에 나와 함께 성지에 있었던 궁사가 있어서 자세한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자네 부친과 피챌런 씨는 죽지도 부상당하지도, 포로가 되지 도 않았다네. 왕의 군대가 시내 전역을 수색했지만 결국 그분들을 찾아내지 못했어. 그분 들은 무사히 피신하셨네. 스티븐 쪽에서 아무리 애쓴다 해도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야. 그러니 이제 그 술을 빚는 일에만 정신을 쏟게. 우리가 자네를 여기서 무사히 빼내 부친께 돌려보낼 때까지 신분을 들키지 않게 젊은 청년 같은 몸가짐을 갖추도록 애쓰고." 그 순간 그녀는 봄철에 한꺼번에 녹아내린 눈처럼 펑펑 눈물을 쏟았으나, 곧이어 봄날 햇살처럼 환 히 웃었다. 가슴 아픈 일들도 많고 기뻐할 일들도 많았으므로, 그녀는 처음에는 갈피를 잡 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사월 날씨처럼 울었다 웃었다 했다. 그러나 결국은 인생의 사월이라 할 수 있는 시기에 접어든 처녀답게, 햇살처럼 밝은 희망 쪽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녀는 어 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진작에 수사님하고 알고 지내시지 못한 게 정말 안타까워요. 하지만 수사님은 아버님과 같은 신념을 갖고 계시진 않죠?" 캐드펠은 달래듯이 말했다. "내가 받드는 분은 스티븐도 모드도 아니야. 평생토록 나는 오직 한 분의 왕만을 위해서 싸워왔네. 허나 헌신 과 충성의 자세는 높이 평가하지. 그 헌신과 충성의 대상이 기대에 부응하는가 하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지. 자네 의 충성심은 내 충성심만큼이나 성스럽네. 자, 이제 세수를 하고 저녁기도 전에 삼십분쯤 눈을 붙이게. 아니, 자네는 너무 젊어서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먼!" 그녀는 노령과 함께 오는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으나, 격심한 긴장 뒤 에 오는 피로로 벤치 겸 침대에 누워 이내 곯아떨어졌다. 그녀는 안도감이라는 달콤한 시 럽에 취해 정신없이 잤다. 캐드펠은 저녁기도에 늦지 않게 적당한 시각에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아직도 붉게 충혈되어 있는 눈을 가리느라 단정하게 자른 곱슬머리를 눈썹가지 빗어 내리고, 캐드펠 곁에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접객소에 묵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충격과 공포로 하느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심정 이 되어 모두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는 휴 버링가도 끼여 있었다. 그는 아마 두려 움 때문이 아니라, 물방앗간 곁의 숙소를 나와 시종 시선을 내리 깔고서 무거운 마음으로 그곳까지 온 앨린 시워드라는 매혹적인 미끼에 끌려서 왔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 링가는 또 다른 흥미로운 존재가 있나 싶어 주위를 잽싸게 훑어보았다. 그 순간, 묘한 대비 를 이루며 막 채소밭 쪽에서 들어오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작달막하면서도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 체구에 햇빛에 그을고 바깥의 험한 기후에 단련된 외모의 중년 수사가, 한 소년의 좁은 어깨를 보호하듯 감싸면서 뱃사람 같은 걸음걸이로 오고 있었다. 소년은 자기 보다 좀더 나이 많고 체구도 더 큰 친척에게서 물려받았음직한 풍덩한 겉옷을 걸치고 종아 리와 맨발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이마에 드리워진 숱많은 갈색 머리 사이로 조심스럽게 주 위를 훑어보며 재게 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버링가는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 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다시피 했으므로, 쉽게 잘 움 직이는 그의 길게 째진 입술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고디스는 표정과 걸음걸이를 침착하게 통제했으며, 버링가를 알아보았다는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교회로 들어선 뒤에 동료 학생들에게 다가가 미소를 교환하고, 몇 몇 학생들과는 팔꿈치로 몸을 쿡쿡 찌르는 장난을 하기도 했다. 버링가가 계속해서 이쪽을 주시한다면 아무래도 잘못 보았다고 자기 눈을 의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서로의 얼 굴을 본 지가 오 년도 넘었으니 설혹 알아보았다 해도 쉽게 확신할 수는 없으리라. 게다가 그는 상복 차림의 어떤 아가씨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제야 고디스는 한시름 놓고, 그 가 앨린 시워드를 주시하는 것에 못지 않게 그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아직 몸맵시가 재대로 나지 않아 툭 튀어나온 팔꿈치와 무릎밖에 보이지 않 는,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열여덟 살짜리 소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양이처럼 자신만만하면서도 냉정하고 초연한 위엄을 갖춘, 제법 세련된 맛을 풍기는 청년이 되어 있 었다. 고디스는 상대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청년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제는 그에게 아무 흥미도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못했다. 상황이 변하면 서 운명도 바뀌었다. 그가 다시는 자기쪽을 쳐다보지 않아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식사 뒤에 소년들과의 저녁학습을 마치고 나서 캐드펠 수사와 함 께 허브밭으로 들어서자마자 고디스는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캐드펠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자네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이지! 그 친구는 왕의 진영에서 곧장 이리로 왔네. 접객소에서 떠도는 모든 소문들을 알고 있는 데니스 수사 말로는, 그 친구가 분명히 왕의 편에 서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저 관 찰대상일 뿐이어서 뭔가 공을 세워야 정식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라더군." 캐드펠은 뭉뚝한 갈색 코를 문지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친구가 자네를 알아보 던가? 내가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던가 하는 표정으로 한참 쳐다보던가?" "처음에는 긴가민 가 하는 표정으로 유심히 살펴보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 나서는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별로 관심 있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구요. 아마 자기가 착각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 사람은 저를 잘 몰라요. 지난 오 년 동안 많이 달라졌고, 더구나 이렇게 변장하고 있으 니까...... 내년이면......" 고디스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소스라치게 놀라 거의 공포에 질 린 얼굴이 되었다. "우리는 결혼하게 되어있었어요." 캐드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난 어쩐지 개운치 않아! 그 사람이 있는 곳에는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게. 그 사람은 곧 왕의 인정을 받아 이곳을 떠나게 될게야. 일주일만 지나면 가고 없을 걸세. 그때까지는 접객소든 마구간이든 문지기실이든 그 친구가 나타날 만한 곳에는 얼씬도 말게. 어떻게 해 서든 그 친구와 부딪치지 말아야지." 고디스는 두려움에 질려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절 알아본다면 출세하기 위해서 절 밀고할 거예요. 제 목숨이 위 태로워지면 아버님은 무사히 배를 타셨다 해도 당장 되돌아오실 거예요. 그러면 저기서 죽 은 불쌍한 사람들처럼 돌아가시게 될 테고......" 그녀는 소름끼치는 장식품들이 매달려 있는 석탑들 쪽으로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거기서는 그때까지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 었으나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처형은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고디스는 열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염병을 피하듯 그 사람을 피하겠어요. 하루빨리 그 사람이 떠나게 해주십사고 기도하겠어요." 수도원장인 헤리버트는 이제 나이도 꽤 들었고 지칠대 로 지친데다가 원래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이 시대의 추악한 풍조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어서, 활기 있고 야심만만한 로버트 부원장의 보좌를 받는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세 속으로부터 벗어나 영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혼자만의 호젓한 세계로 더욱 깊이 침잠해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수도원장은 자신이 왕의 눈밖에 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왕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유난스럽게 내보이며 그 주위로 모여들기를 꺼리는 이들은 누구나 왕에게서 미움을 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헤리버트 원장은 끔찍하기는 하지만 도 저히 피할 수 없는 의무와 부딪치자 용기를 내어 문제를 해결하러 나섰다. 짐승처럼 참혹 하게 목숨을 잃은 아흔여덞 구의 주검이 있었다. 어떤 범죄나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그들 은 저마다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요, 적절하게 매장될 권리를 가진 존재들이었다. 베네딕트 회 수사들은 의당 그런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했다. 헤리버트 원장은 스티븐 왕의 중죄인들 을 묘비도 표식도 없는 흙구덩이에 되는 대로 쓸어 넣게 하지는 않을 심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끔찍한 일이었으므로 원장은 전쟁이나 유혈참사 같은 잔혹한 사 건들을 여러 번 겪어 자신을 적절히 도울 수 있는 이가 업는지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다. 캐 드펠 수사가 적임자였다. 캐드펠 수사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성지를 종횡무진했고, 그 뒤에는 전투가 그칠 날이 없다시피 한 성지의 해안을 순회하는 배의 선장으로 십 년 간 이나 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마지막기도가 끝난 뒤 원장은 캐드펠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들 였다. "나는 오늘밤 스티븐 왕에게 찾아가서 학살당한 죄인들 모두를 기독교식으로 매장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청원할 작정이오. 왕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내일 그 가엾은 시신들 을 수습해서 보기 흉하지 않게 처리한 뒤에 매장해야 하오. 가족들이 찾아와서 직접 매장 하겠다고 하는 경우말고는 우리가 적절한 의식을 베풀어 잘 묻어주십시다. 캐드펠 형제는 과거에 군인이었으니, 내가 왕에게서 허락을 얻어내면 형제가 그 일을 맞아서 처리해주겠 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장님.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만 제 성의를 다해서 처리하도 록 하겠습니다." 아흔아홉 구의 시신 "네, 그렇게 할게요." 고디스는 말했다. 제가 수사님께 불편을 끼쳐드리지 않는 길이 그 거라면요. 네, 아침학습과 저녁학습 시간에 꼭 참석하구요, 저녁을 먹을 때는 그 누구도 쳐 다보지 않고 묵묵히 먹을게요. 그러고 나서 슬그머니 식당을 빠져나와 악들을 저장하는 이 곳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을게요. 네, 문의 빗장을 단단히 걸고 있다가 수사님 목소리가 들 리면 열게요. 물론 수사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겠어요. 하지만 전 수사님하고 같이 가고 싶 어요. 그 사람들은 제 아버님 편 사람들이자 제 편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조금 이나마 제 힘을 보태고 싶어요." 캐드펠은 단호하게 말했다. "설혹 위험하지 않다 해도 자네를 거기로 보내고 싶지 않아. 실은 안전하지도 않지만 말 일세.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추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알게 되면, 신이 인간에게 정 의와 자비를 행하리라는 확신에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라는 자연의 잔혹한 불의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항시 영원이 임재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반생애가 지나야 하는 밤 일세. 자네도 때가 되면 그런 경지에 이르겠지. 그러니 여기 머물러 있게. 휴 버링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캐드펠은 휴 버링가를 고디스에게서 가급적 멀리 떼 놓으려는 생각에서, 건장하고 헌신적인 도움을 줄 사람들로 구성한 작업반에 버링가를 포함 시킬 궁리까지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영혼에 공덕을 더하려는 마음에서인지, 죽은 사람들 이 추구한 대의에 암암리에 동조하고 있어서 인지, 아니면 친구나 친지를 찾아 보려는 마음 에서인지는 몰라도 접객소에 묵고 있는 여행자들 중에서 세 사람이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 므로 그런 모범을 따르라고 휴 버링가나 다른 이름을 은근히 부추기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 었겠지만 그 젊은이는 이미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마도 왕을 만날 수 있으리라 는 설레는 기대를 품고 떠났을 터였다. 새로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왕에게서 잊혀진 존재가 되도록 방침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마구간의 평수사들은 버링가가 전날 저녁에도 저녁기도가 끝나자마자 말을 타고 떠났다고 했다. 무장을 한 그의 부하 셋도 그 것에 묵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네 말들을 손질하고 사료를 먹이고 운동을 시킨 뒤에는 아 무 하는 일 없이 종일 빈둥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혹시나 왕의 노여움을 살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신을 매장하는 불쾌한 일에 참여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 을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수사들과 평수사들과 자비로운 여행자 셋으로 구성 된 스무 명의 작업반을 꾸려서, 다리를 건너 성으로 갔다. 스티븐 왕은 수도원 측에서 자진해서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선 것을 은근히 반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명령을 내려 강제로라도 떠맡겨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성벽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요새에서는 얼마든지 고약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을 테니 그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새로 구성된 수비대원들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헤 리버트 원장이 기독교인의 의무를 앞세우면서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을 자신에 대한 무 언의 질책으로 받아 들였고,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어쨌든 하우베이트인 가 뭔가 하는 그 늙은이는 요구한 대로 필요한 권한을 이양 받았다. 그 덕분에 캐드펠의 작업반은 검문도 받지 않고 시로 들어가는 문과 성문을 통과했으며, 캐드펠 수사는 프레스 코트와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캐드펠은 활기 있게 말했다. "우리에 관한 지시를 받으셨 겠지요. 우리는 시신들을 손보러 이리로 왔으니 매장지로 옮기기 전에 시신들을 가지런히 눕힐 적당한 넓이의 깨끗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샘에서 물을 좀 길어다 써야겠습니 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리넨은 갖고 왔습니다." 프레스코트는 냉담하게 말했다. "성의 안뜰이 비어 있으니 그곳을 쓰도록 하시오. 필요 하다면 거기 있는 널빤지들을 써도 좋소." "전하께서는 또, 그 불운을 겪은 이들 중에서 이 도시 출신이 거나 이 도시에 가족이나 친지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들이 시신을 찾아가서 개 별적으로 매장해도 좋다고 허락해주셨습니다. 제가 모든 준비를 끝냈을 때 장관께서 그 사 실을 시내 전역에 통고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유로이 성을 출입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프레스코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 올 정도로 대담하다면 얼마든 지 그러라고 하시오. 나도 환영하는 바요. 그 송장들이 빨리 치워지면 빨리 치워질수록 좋 으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시신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 가여운 열매들을 철이르게 거두는 일은 새벽이 오기 전에 끝나버렸고. 성벽과 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증거들을 없애느라 플라망 용병들은 태반은 밤을 새웠으리라. 그 발 상은 아마 플라망 용병들의 머리에서가 아니라 프레스코트의 머리에서 나왔을 터였다. 프 레스코트는 이들을 처형하는 일에 찬성했으므로 주검들을 보는 것이 과히 즐거울 수가 없었 다. 게다가 그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한 습관에 젖은 나이든 군인이었으므로, 뭐든 깨끗이 처 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숨을 거두자 밧줄을 끊어 흉벽 너머 성벽 아래 도랑에 떨어뜨렸소. 정문으로 나가보시오. 탑들과 길 사이에서 찾을 수 있을 거요." 캐드펠은 자기에게 제공된 작은 안뜰을 살펴보았다. 그런 대로 깨끗하고 외부와 격리되 어 있어서 시신들을 늘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그는 작업반을 이끌고 성문을 나가 성벽 쪽으로 가서, 탑들 사이에 파인 깊은 도랑으로 내려갔다. 도랑물은 바짝 말라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키 큰 풀과 자그마한 관목들 사이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졌 다. 시신들은 성벽에 가까운 한 자리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그 양쪽으로도 망가진 인형 들처럼 아무렇게나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다. 캐드펠과 작업반원들은 가운 자락을 걷어올 리고, 짝을 이루어 묵묵히 일했다. 그들은 시신들의 목을 감고 있는 밧줄을 풀어내고 쉽게 옮길 수 잇는 시신부터 안으로 날랐다. 위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뼈가 부서져 하나로 뒤엉 킨 시신들은 따로 분리시켜야 했다. 해가 솟아오르자 햇살을 받은 성벽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신앙심 깊은 여행자 셋은 겉옷을 벗어 던졌다. 그 깊고 우묵한 공간의 끈끈한 대기는 숨막힐 듯 답답했다. 그들은 비오듯 땀을 흘리며 연신 숨을 헐떡였지만 결코 일손 을 늦추지는 않았다. 캐드펠 수사가 말했다.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가엾은 영혼들이 있 을지 모르니 항상 주의 깊게 살펴보시오. 군인들이 서두르느라 숨이 넘어가기 전에 밧줄을 끊어버렸을지 모르잖소, 게다가 이 아래에 덤불이 우거져 있으니 위에서 떨어지는 충격에도 살아남은 이가 있을 수 있소." 그러나 플라망 용병들은 서두르면서도 일을 철저하게 해치 워, 그 대학살의 현장에서 구출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 지만 정오 무렵에야 겨우 시신들을 모두 성 안뜰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작업반은 그때부 터 시신들의 얼굴이 생전에 그들을 사랑했던 불행한 부모나 부인의 눈에 끔찍하게 보이지 않게끔 깨끗이 씻기고, 가능한 한 보기 좋게 가다듬고, 부러진 뼈들을 맞추고, 눈꺼풀을 덮 고, 엉킨 머리를 가지런히 빗기고, 떨어진 턱을 다시 맞추는 일들을 시작했다. 캐드펠은 프 레스코트에게 가서 조금 전에 약속한 사항을 공표해달라고 부탁하기 전에 시신들 사이를 돌 아다니면서, 그런대로 보기 흉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수를 세어가며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마지막 시신에 이르렀을 때 캐드펠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멈춰 섰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 겼다가 반대로 거슬러올라가면서 다시 한 번 세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가장 처참하게 상한 부위를 감싼 리넨까지 벗겨가며 직접 손대지 않은 시신들을 한 구 한 구 면밀히 살펴 보았다. 그는 마지막 시신을 살펴본 뒤에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캐드펠은 아무 말 없 이 프레스코트를 찾으러 갔다. "전하의 명령에 따라 몇 명을 처형했다고 하셨습니까?" 프 레스코트는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대답했다. "아흔여덟이요." "장관님은 수를 세어보 지 않으셨거나 잘못 세셨습니다. 저곳에는 아흔아홉구의 시체가 있습니다. 프레스코트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흔여덟이나 아흔아홉이나, 하나가 더 많고 적은 게 무슨 상관이오? 모두 반역죄를 저질러서 처형된 자들인데 그 셈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머리칼을 쥐어 뜯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오?" 캐드펠은 담담하게 말했다. "장관님의 입장에서는 전혀 상관 없으시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정확한 셈을 요구하실 것입 니다. 장관님은 헤스딘 아눌프를 포함해서 아흔여덟명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받으셨습니다.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명령은 떨어졌고, 장관님은 그 명령에 찬동 하셨으며, 그 일은 문서에 기록되었고, 납득된 사항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행위에 대한 셈은 훗날 다른법정에서 치러지겠지요. 그런데 그 아흔아홉번째 시신은 애초의 셈 속에 들 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왕도 그를 이승에서 추방하라고 지시하지 않았고, 그 어떤 중 신도 그를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없으며, 그는 모반이나 반역죄를 포함한 그 어떤죄로 도 고발당하거나 기소된 적이 없는 사람이므로, 그를 죽인자는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프레스코트는 거칠게 내뱉었다. 나 이거야 원!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난 장교 하나가 사람수효 하나를 잘못 센 것을 가지고 무슨 심각한 의혹이 있기라도 한 듯 법석을 하다니! 보고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누락된 거요, 그자는 다른 자들처럼 무장한 상태에서 붙잡혀 처 형당했으니 응분의 처벌을 받은거요. 그자는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켰고, 다 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교수형 당했소, 반역의 마지막 응보는 그런 법이오. 수사는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거요?" 캐드펠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와 함께 가셔서 그 시신을 봐주신다면 장관님의 오해가 풀리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 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교수형 당하지도 않았고, 두 손을 결박당하지도 않았습니 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 사람의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셈에서 누락된 것뿐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프레 스코트 장관님, 처형당한 사람들 중에는 숲 속에 숨겨진 한 장의 나뭇잎처럼 은밀하게 살해 된 한 사람이 끼여 있습니다. 장관님은 제가 그를 찾아낸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실지 모르 겠습니다만, 설혹 제가 못 봤다 할지라도 하느님까지 보지 못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설령 장관님께서 저를 침묵시킬 수 있다손 쳐도 제가 입을 다문다 해서 하느님까지 침묵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프레스코트는 왔다갔다하다가 우뚝 멈춰 서서 캐드펠을 뚫어지게 응시했 다. "수사는 무척이나 진지하군. 어떻게 다른 식으로 죽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거요?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갖고 있소?" "네 그렇습니다. 가서 보시죠! 그 시신은 어떤 잔혹한 자가 다른 시신들 사이에 놓으면 아무 의심도 없이 의혹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슬쩍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가져다놓았기에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자가 그곳에 많은 시체들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말이 되는데." "어제 저녁 무렵에는 이 도시 사람들 대부분과 모든 수비대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밤새 저질러진 일입니다. 가서 보시죠!" 프레스코트는 캐드펠과 함께 안뜰로 갔다. 프레 스코트는 시신을 보고 몹시 놀라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 어떻게든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점을, 죄책감을 느끼는 바로 그 당사자보다 더욱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프 레스코트는 죽음의 음산한 장막이 드리워지고 그 악취가 진동하는,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에서 캐드팰과 함께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젊은이의 시신이었다. 갑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으나, 쇠사슬갑옷이나 금속판 갑옷 따위의 값나가는 것들은 군인들이 미리 벗겨냈으므로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젊은이 의 차림새는 원래부터 그가 쇠사슬 따위를 걸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가죽장화를 신고 있기는 했으나 검정색 겉옷은 가볍고 얇았다. 이를테면 여름철에 말을 타고 홀가분하게 여행하려는 사람이 밤에는 입고 낮에는 벗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골라 입었 음직한 차림새였다. 나이는 스물다섯을 넘지 않은 듯했고, 머리는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었 으며, 목이 졸려 죽은 탓에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보기 흉하기는 했지만, 둥그스름한 얼굴은 잘생긴 축에 들었다. 캐드펠이 익숙한 손길로 시신의 눈꺼풀을 어루만 져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르 덮기는 했지만, 눈이 너무 많이 튀어나와 완전히 덮이지는 않 았다. 프레스코트는 그 눈을 보고 안도하는 듯했다. "이 사람은 죽었소." "그랬습니다. 그러나 밧줄로 졸려 죽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다른 이들처럼 억센 손아귀에 졸려 죽은 것도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젊은이의 목숨을 빼앗 아간 줄이 얼마나 가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가는 줄로 처 형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낚싯줄처럼 탄탄한 줄이 목을 휘감고 조른 것입니다. 정 말 낚싯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군요. 줄이 파고든 자국 가장자리의 변색된 부분이 반짝이 지 않습니까? 이 사람을 살해한 자는 줄이 살 속 깊숙이, 매끄럽게 파고들라고 줄에 왁스 를 칠했습니다. 그리고 이 뒤의 움푹 팬 자국, 보이십니까?" 캐드펠은 한 팔로 조심스레 시신의 머리를 받쳐올리고, 목 뒤 척추가 불룩 튀어나온 부위 근처에 난 깊이 패고 거무죽죽하게 멍이 든 자국을 보였다. 그 한가운데는 반점처럼 검은 핏자국이나 있었다. "가해자가 줄로 희생자의 목을 감아 비틀 때 손잡이 구실을 하는 나무 막대 한쪽 끝이 닿은 자국입니다. 몰래 사람을 기습하는 자들이나 잔인한 노상강도들이 이 렇게 양끝에 손잡이가 달리고 왁스를 칠한 줄을 사용하지요. 손아귀 힘과 팔목 힘이 웬만 큼만 있다면 쉽게 상대를 처치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보십시오, 장관님. 줄이 파고 든 부위가 마구 찢겨지고 거기에 핏방울이 말라붙어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의 손도 보십시 오. 피로손톱 끝이 검게 물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는 줄이 목을 조르자 자신의 목을 마구 쥐어뜯었던 것입니다. 두 손이 자유로웠으니까요. 장관님의 부하들이 교수형을 집행할 때 두 손을 묶지 않고 한 경우도 있었습니까?" "없소!" 스레스코트는 캐드펠의 빈틈 없는 설명에 완전히 사로잡힌 나머지 엉겁결에 불쑥 대답했 다. 뒤늦게 주워담으려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프레스코트는 미지의 젊은이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캐드펠 수사를 바라보았다. 상대에 대한 적의로 프레스코트의 눈빛은 날카로워졌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괴상한 이야기를 공표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득될 게 없소. 이 사람을 매장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시오. 나머 지는 그냥 묻어두고 넘어갑시다!" 캐드펠은 부드럽게 말했다. "장관님은 이 젊은이의 이름 이나 신분을 밝혀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젊은이는 적진 에서 전하께 보낸 사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을 공정하게 대우해주셔서 하느님과 인간들, 이 양쪽 모두와의 조화로운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캐드펠은 수 사답게 좀더 직선적으로 말을 이었다. "만일 장관님께서 진실을 왜곡하신다면 장관님 자신 의 결백함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장관님이라면 이 사실을 있는 그래도 보고하고, 지금 곧 사람들을 풀어 시중에 공표 하겠습니다. 저희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젊은이의 가족이나 친지가 나타나 시신을 인수 하겠다고 한다면 장관님은 자신의 영혼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설혹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다 해도 불의를 바로 잡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신 셈이니, 그것으로 장 관님의 의무는 끝나게 됩니다." 프레스코트는 한동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캐드펠을 노려 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사람들을 내보내 이 사실을 공표하겠소." 그는 그렇게 불쑥 한마 디 내뱉더니 홀 쪽으로 가버렸다. 그 소식은 시낸 전역에 공표되었으며 수도원에도 정식으 로 통보되어 접객소에서 묵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알게 되었다. 동쪽에 있는 왕의 막사를 떠나 하류 쪽에서 말을 타고 강을 건너 수도원으로 오던 휴 버링가는 수도원 정문에 딸린 문지기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휴 버링가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포고 내용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 앨린 시워드의 가냘픈 모습을 보았다.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그가 상상 했던 대로 밝은 황금빛이었다. 달걀처럼 갸르스름한 얼굴 양쪽으로, 몇 가닥의 곱슬머리가 맵시 있게 늘어져 있었다. 긴 속눈썹 덕분에 그녀의 눈에는 한층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짙은 황동빛 눈이었다. 그녀는 조그마한 두 손을 꼭 쥐고서, 마음이 흔들려서인지 입술 을 잘근잘근 깨물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듯하기도 하고, 근심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앳되어 보였다. 버링가 는 로버트 원장이 낭독하는 내용을 사람들 맨 뒤에서 조용히 들으려고 우연히 선택한 곳이 그곳이기라도 한 것처럼, 앨린 시워드로부터 불과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을 내렸 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처형당한 사람들 중에 자기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이들은 시 신을 찾아가 자비로 집안의 땅에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특히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이 하나 있으니, 원하는 이는 누구든 와서 보아도 좋으며, 그 사람의 신원을 알 경우에 는 밝혀주기를 바라신다. 어떤 처벌이나 불이익도 없을 테니 누구나 안심하고 와도 무방하 다." 모두가 그 포고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앨린 시워드는 그 대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는 점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성안에 들어가봐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끼면서도 그곳 에서 끔찍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차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버링가는 그녀에게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집을 나가 황후의 지지자들에게 가 담한 오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프랑스로 간 듯하다는 소문을 듣 기는 했으나 사실인지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오빠와 같은 편에 선 사람들이 내전의 희생자가 된 자리에 가서 그들 사이에 오빠가 끼여 있지 않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신념을 회피하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생각들은 그 더없이 순진하고 솔직한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혹시 제가 아가씨께 뭔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부디 주저하지 마시고 말씀해주십시오." 버링가는 부드럽고도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다너 생긋 웃었다. 그녀는 교회에서 그를 보았고,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접객소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루즈베리 일대가 최근 들어 일대격변에 휩싸여 있는 탓에, 그 곳 사람들은 서로 믿을 만 한 이웃 아니면 잠재적인 밀고자로 여기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자기 주변 사람들 을 두 번째 부류로 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기회에 그녀의 신뢰를 얻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가씨가 전하께 충성 서약을 했을 때 저도 같은 이유 로 전하께 갔었죠.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저는 메스베리의 휴 버링가라고 합니다.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면 여간 기쁘지 않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가씨는 방금 전에 들 은 소식으로 고민하고 당황해하시는 듯하더군요. 혹시 제가 아가씨를 위해 해드릴 일이 있 다면 뭐든지 기꺼이 하겠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친절하신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굳이 해야 한다면요. 여기에 제 오라버니의 얼 굴을 아는 분은 아무도 안 계시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주저하고 있었어요...... 하지 만 시내에서 여기로 온 부인들 중에는 아들을 찾으러 가실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분들이 하실 수 있다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불운한 사람들 중에 아가씨의 오라버니께서 끼 여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오라버니가 지금 어디 계신지 모 르고, 오라버니가 황후 편이라는 것말고는 없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분명히 확인해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언제고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버링가는 부드럽게 물었다. "오라버니와 아주 가까우셨던가 보군요?" 그녀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아뇨. 보통의 오누이 사이보다도 멀었어요. 오라버니는 늘 친구들하고 어울리거나 자기 할 일만 쫓아다 니느라 바쁘셨어요.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구요. 제가 열한 살인가 열두 살쯤 됐을 때 오 라버니는 집을 떠나셨어요.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버님과 다투고 금방 다시 나가버리 셨죠. 하지만 그분은 제 단 한 분뿐인 오라버니이고, 저는 그분의 상속권을 그대로 존속시 켜 놓았어요. 듣자니까 원래 셈했던 수효에 들지 않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이 한 구 끼여 있다고 하더군요." 버링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아가씨의 오라버니는 아닐 겁 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요? 오라버니에게 이름이 필요하고 그 이름을 찾아줄 누이 동생이 있어야 한다면 어쩌죠?" 그 순간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가봐야겠어요." "제 생각으로는 가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래도 굳이 가셔야 하겠다면 절대로 혼자 가셔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이내 후회했다. 자기 하녀를 데리고 가겠 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이내 예상밖의 대답을 했다. "콘스턴스를 그런 곳에 데리고 가지는 않을 거예요! 콘스턴스에게는 그 일에 관련된 가족이 없으니 그 런 끔찍한 광경을 봐야 할 이유가 없죠." "저와 함께 가실 의향이 있다면 기꺼어 함께 가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다른 대안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으나 아직까지는 없는 듯했다. 그녀의 수심 가득한 얼굴은 기쁨으로 환해졌다. 그녀는 놀라움과 희망과 감사하는 마음이 섞인, 더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다른 분께 누를 끼쳐서는 안 되죠." 이제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버링가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당장 가도록 하십시다! 아가씨가 제 청을 거절하고 혼자 가신다면 제 마음은 몹 시 불편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같이 가자고 해서 아가씨의 괴로움이 더해질 뿐이라고 하 신다면 군말 없이 물러서겠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 는 일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떨면서 애처롭게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 이겠죠. 저는 그렇게 용감하지 않아요! 같이 가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어요," 그는 애초에 원했던 것을 얻었다. 거의 기대한 만큼의 성과였다. 거리를 한가롭게 걷게 되면 그녀 곁에 좀더 오래 머무를 수 있고, 더욱 가까워질 기회를 얻게 될 텐데 굳이 말을 탈 필요가 있겠 는가. 휴 버링가는 말을 마구간으로 보내고 앨린과 함께 큰길로 나섰다. 둘은 다리를 건너 시루즈베리로 들어섰다. 캐드펠 수사는 성의 안뜰 한구석 아치 문 바 로 곁에서, 살해된 시신을 지키듯 우뚝 서 있었다. 자식이나 친척을 찾으러 온 시민들은 반 드시 그곳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캐드펠은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붙잡고 물어볼 수 있 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가 물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안됐기는 하지만 내 가족이 아니어 서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 젊은이를 아는 사람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그 가엾은 이들에게서 어떻게 큰 관심을 기대하겠는가. 프레스코트 는 약속한 대로 오는 주민들을 방해하지 안았고 그들을 검문하거나 이름을 기록하지도 않았 다. 프레스코트는 그저 불유쾌한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시신들을 가능한 한 빨리 성밖으로 내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애덤 쿠셀이 지휘하는 수비대는, 그곳에 온 사람들에게 일체 참견하지 말고 필요할 경우에는 거들어주어도 무방하다는 지시를 받았다. 밤이 오기 전에 서둘러 그 달갑지 않은 손님들을 성밖으로 내보내야 했으니까. 캐드펠은 수비대원들까지도 모두 불러서 그 신원미상의 시신을 살펴보게 했지만 아무도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쿠 셀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한동안 시신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젊은 향사에게 남의 증오를 살 큰 문제 가 있었겠습니까? 보아하니 대단한 일을 할 위인이 못 되는 듯한데." 캐드펠 수사는 엄숙 하게 말했다. "증오가 없어도 살인할 수 있는 법이오. 노상강도나 산적들은 우연히 걸려든 사람들을 좋고 싫은 감정도 없이 그냥 죽이지 않소." "이런 청년에게서 뭘 얻겠다고 살인 을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낮 동안 구걸한 동전 몇 푼 때문에 거지를 죽이는 자들도 있 소. 상대편에 서서 무기를 들었다는 잘못 하나만으로 왕이 일거에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 을 처형시키는 광경을 보고 흉악한 자들이 자기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을 정당화한다고 해 서 그들을 탓할 수 있겠소!" 캐드펠은 쿠셀의 얼굴이 벌게지고 눈에 분노의 불꽃이 번뜩이 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 물론 그대들이 지시 를 받았고, 글 지시에 복종하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 소. 나도 젊었을 적에는 군인이어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훈련받았고, 지금 와서는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되는 짓들도 서슴없이 저질렀으니까. 내가 결국 또다른 유형의 훈련을 받게 된 까닭도 바로 과거에 대한 깊은 자책감 때문이었소." 쿠셀은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앞으로 그렇게 될지는 의심스럽군요." "나도 그 당시에 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요. 그러나 결국 나는 이 자리까지 왔고, 앞으로도 변함 없이 내 소 명을 다할 거요. 우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니까!" 우리 인간에 게 주어진 보잘것없는 권능을 오용한 것 중에서 이것야말로 최악의 짓이리라. 안뜰에 널린 시신을 바라보며 캐드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즈음에는 시신들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빈 자리가 나고 있었다. 부모나 아내가 와서 찾아간 시신이 십여 구쯤 되었다. 조금 있으면 수도원에서 보낸 작은 손수레들이 언덕길을 올라올테고, 수사들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맥 없이 늘어진 시신들을 수레에 실어서 내가게 될 터였다. 겁먹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아치 문을 통해 아직도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에 쓴 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아낙들과 수척한 얼굴의 중년 사내들이 체념한 표정으로, 자기네 아들을 찾아 여전히 시신들 사이를 힘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쿠셀은 상을 당한 사람들만큼이나 표정이 어두웠다. 이렇게 괴 이한 무리를 호위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쿠셀이 침울한 기분에 젖어 찌푸린 얼굴로 땅바닥 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 앨린이 휴 버링가의 팔에 기대어 아치 문으로 들어왔다. 앨린은 창 백하고 굳은 얼굴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움 켜쥐듯 자신을 호위하는 휴 버링가의 소매를 꽉 쥐고 있기는 했으나 고개를 꼿꼿이 들고 흔 들림 없이 곧장 걸어왔다. 버링가는 세심하게 신경 써서 그녀와 보폭을 맞추며 걷고 있기 는 했지만, 안뜰의 처참한 광경으로부터 그녀의 시선을 돌리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 저 뜨거운 눈길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흘끔흘끔 곁눈질할 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 서 캐드펠은 생각했다. 여자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일념에서 공연히 자기가 보호해주겠답시 고 설치고 나서는 것은 역시 전략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그녀는 젊고 순진하고 마음 여린 아가씨이긴 해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자부심 넘치는 처녀이므로, 일단 마음을 먹었다 하 면 누구도 함부로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만일 그녀가 이곳을 배회하는 가엾은 다른 시민들 처럼 가족을 찾으러 왔다면 지나치게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어떤 이에게도 그다지 고마워하 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말을 삼가면서 사려 깊게 처신하는 이에게는 무척 고마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말을 삼가면서 사려 깊게 처신하는 이에게는 무척 고마워하겠지만. 쿠셀은 앞에서 다가오는 어떤 불안한 움직임을 감지하기라도한 듯 눈을 들었다가 두 남녀가 안뜰의 햇살 속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오후의 잔인한 햇살 속으 로 들어서는 광경을 보았다. 붉은기 도는 쿠셀의 밤색 머리칼이 번쩍 들리면서, 햇살을 받 아 가시금작화 덤불에 붙은 불길처럼 벌겋게 타올랐다. "맙소사!" 그는 낮게 부르짖더니 아치 문으로 달려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앨린......! 아가씨가 왜 여기에? 여기는 너무 끔 찍해서 아가씨가 올 곳이 못 됩니다." 그러고 나서 쿠셀은 버링가에게 거칠게 따져물었다. "어떻게 아가씨를 이런 데로 모시고 와서 참혹한 광경을 보게 할 수가 있소?" 앨린이 재 빨리 나섰다. "이분이 절 데리고 온 게 아니에요. 오자고 한 건 저였어요. 이분은 저를 막을 수가 없어서 친절하게도 저와 함께 와주신 거예요." "자진해서 이런 고행을 하다니 정말 어리석은 짓입니다. 도대체 아가씨가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가씨의 가 족이나 친척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저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앨린의 하 얀 얼굴에서 유난히 커 보이는 두 눈은 두려움 속에서도 발치에 늘어선, 수의에 덮인 시신 들을 흘린 듯 더듬고 있었다. 처음 그 눈빛에는 공포와 혐오만이 서려 있었으나, 그것은 점차 강렬한 인간적인 연민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전 알아야 해요! 여기 와 계신 이분 들처럼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견딜 수 있다면 저도 견 딜 수 있어요. 제게 오라버니가 한 분 있다는 걸 아실 거예요. 제가 전하께 말씀드리고 있 을 때 당신도 거기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그분은 여기 계실 수 없어요. 노르망디로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소문을 들었다고만 했죠. 하지만 소문만으로 어떻게 확 신할 수 잇겠어요? 정말 프랑스로 갔는지, 아니면 고향 근처에 있는 황후 편 사람들에게 가담했는지 제가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어요? 저는 오라버니가 시루즈베리를 선택했는지 아닌지 제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해요." "하지만 여기서 농성하고 있던 이들의 면면은 이미 다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가씨의 오라버니가 이 속에 끼여 있을 리는 만무합니다." 버링가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점잖게 말했다. "장관님의 포고문에 따르면 여기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요. 애초의 셈보다 한 구가 늘었다고 들었습다 만." 앨린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직접 확인하게 해주세요. 그러지 않 으면 어떻게 제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요?" 가슴 아프고 화가 치미는 일이기는 했으나 쿠 셀에게는 그녀을 막을 권리가 없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것을 보여보았자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것만 증명될 뿐이겠지만. "그 시신은 여기 있 습니다." 쿠셀은 그녀를 캐드펠 수사가 서 있는 귀퉁이 쪽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캐드펠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무심코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 사심 없이 나온 순수한 미소였다. 그러 나 그 미소는 이내 사라졌다. "수사님과는 안면이 있는 것 같군요. 수도원에서 뵈었거든 요. 허브를 재배하시는 캐드펠 수사님이시죠?" "맞소. 아가씨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잘 모 르겠소만." 그녀는 낯을 붉히면서 솔직히 털어놓았다. "문지기 일을 하시는 평수사께 여쭤 보았습니다. 저녁기도와 마지막기도 때 수사님을 뵈었거든요.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다면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수사님은 마치 수도원에 들어오시기 전에 많은 모험을 하신 분 같은 분위기를 갖고 계셨어요. 십자군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어요. 고드프리 드 부이용과 함께 예 루살렘 포위공격에도 참여하셨구요! 저는 그런 성스러운 모험을 상상으로만 그려왔었죠...... 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한 것에 낯을 붉히며 눈길을 떨구다가 캐드펠의 발치에 있 는 죽은 청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차분한 침묵 속에서 한동안 그를 응시했다. 울혈이 가라앉아 모습은 그리 흉측하지 않았다. 아주 젊고, 잘생겼다고 할 만한 얼굴이었다. 앨린은 낮게 말했다. "수사님이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고 계신 일은 기 독교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에요. 이 사람이 바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그 사람인가요? 원래의 수보다 하나 더 늘었다는 그 사람요?" "맞소." 캐드펠은 허리를 숙 이고 리넨을 끌어내려 수수하면서도 질 좋은 옷을 보여주었다. 그 젊은이에게서는 전쟁의 분위기가 조금도 풍기지 않았다. "이 사람은 여행할 때 누구나 지니는 단검 한 자루말고는 일체 무장을 하지 않았소." 앨린은 케드펠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머링가 가 시선을 집중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서, 살아 있을 때는 활달하고 명랑해 보였을 둥그런 얼굴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앨린이 물었다. "이 사람은 이곳에서의 싸움에 참여하 지 않았다는 말씀이신가요? 수비대원들과 함께 생포되지도 않았구요?" "내가 보기에는 그 런 것 같소. 모르는 사람이오?" "네." 앨린은 타인에 대한 순수한 연민의 감정으로 젊은 이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젊군요! 정말 안됐어요! 이 사람의 이름을 댈 수 있으 면 좋으련만 조혀 본 저기 없는 사람이네요." "버링가 씨도?" "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버링가는 침울한 낯으로 여전히 그 시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거의 비슷해 보였다. 일 년이나 차이가 날까. 자신의 쌍둥이 형제 같은 이를 매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매장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법이었다. "자 이젠 볼일을 다 보셨으니 이 끔찍한 곳을 떠나도록 하세요. 여기는 아가씨가 계실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아가씨의 걱정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걸 아셨죠? 아가씨 오라버니는 이곳에 안 계십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곁에서 맴돌던 쿠셀이 처녀의 팔에 한 손을 얹으며 달래듯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만류하 는 손을 뿌리쳤다. 아주 부드럽게. "아녜요. 이 사람은 아니지만 제 오라버니는 다른 데 계실지도 몰라요. 여기 있는 시신들을 모두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요? 이왕 여기까지 온 마당에 뭐가 두렵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다 참고 견디는데 저라고 못할 건 없겠죠." 그녀는 케드펠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호소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 았다. "지금 여기 일은 케드펠 수사님 소관이에요. 수사님은 제가 이 불안한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한다는 걸 잘 아실 거예요. 저와 함께 여기를 돌아봐주시면 안 될까요?" "기꺼이 그러겠소." 캐드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말로는 도저히 단념시킬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이곳을 돌아볼 권리가 있었다. 두 젊은이는 상대가 자기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는지 나란히 뒤 따라왔다. 앨린은 슬픔과 연민으로 가슴을 죄면서도 드러난 시신들의 얼굴을 결연한 표정 으로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오라버니는 스물네 살이고...... 저랑 별로 닮지 않았어요. 머 리칼 색도 저보다 짙구요...... 아, 여기에는 오라버니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네 요!" 그들이 시신들의 대열를 반쯤 돌았을 때 갑자기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캐드펠 의 팔을 움켜쥐면서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그녀는 비명은 지르지 않고 낮은 신음소리만 한 번 토해냈다. 그것이 신음이 아니라 말이라는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캐드펠만이 알 수 있었다. "자일즈!" 그녀는 조금 더 크게 소리치고는, 일시에 모든 빛깔이 빠져나가 거 의 투명해 보이는 얼굴로, 한때 오만함과 고집이 넘치던 오빠의 잘생긴 얼굴을 뚫어지게 내 려다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더니 고개 숙여 시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 았다. 그녀는 엎드려서 두 팔로 오빠의 가슴을 끌어안고 짧고도 낮은 흐느낌을 토해냈다. 그녀의 흩어진 머리가 주위에 찬연한 황금빛을 흩뿌렸다. 캐드펠 수사는 온갖 풍상을 겪 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녀가 자신의 슬픔을 위로해줄 이를 필요로 할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기 만했다. 그러나 캐드펠이 그녀를 달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애덤 쿠셀이 그를 밀치고 달려 들어 처녀 곁에 무릎 꿇고 앉더니,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쿠셀도 앨린 못지않게 극심한 충 격을 받은듯했다. 그는 고통과 당혹감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아가씨! 맙소사, 이분이 정말로 아가씨의 오라버니십니까? 아, 내가 알았더라 면..... 사전에 알았더라면 구해냈을 텐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분을 빼냈을 텐데...... 하느님, 저를 용서하소서!" 그녀는 금빛 머리로 뒤덮인,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얼굴을 쳐들 고 쿠셀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움과 연민을 함께 느꼈다. "아, 그러지 마세요! 그게 어떻게 당신의 잘못이었겠어요? 당신은 알려고 해도 아실 수 없었어요. 당신은 그저 지시받은 대로 하셨을 뿐이에요. 그리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죽게 놓아두고 한 사람만 구해내실 수 있었겠어요?" "이분이 정말 아가씨 의 오라버니십니까?" "네." 그녀는 충격과 슬픔으로 넋이 나간 얼굴로 젊은이의 시신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자일즈 오라버니예요." 그녀는 더없이 참혹한 일을 겪었으나, 아 버지와 오빠들이 없는 탓에 앞으로의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할 처지였다. 그녀는 여전히 쿠셀의 두 팔에 안긴 채 고개를 숙여 오빠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캐드펠은, 숨을 거둘 때 공포의 충격으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 굴들을 손봐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두기를 정말 잘했다 싶었다. 그녀는 저거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 자리 에서 일어섰다. 이제까지 줄곧 행동을 자제하면서 놀랄 만큼 현명하게 처신했던 휴버링가 가 얼른 한 손을 내밀었다. 귀족 가문의 딸로 곱게 자라온 터라 이런 참혹한 시련은 처음 이겠지만, 그녀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테고, 기꺼이 그렇게 하려 들 것이었다. "캐드펠 수사님, 수사님이 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려요. 자일즈 오라버니와 저뿐만 아니라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해서요. 이제 수사님이 허락해주신다면 오라버니를 매 장하는 일은 제가 직접 맡고 싶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여전히 침울한 얼굴로 그녀 곁에 서 있던 쿠셀이 말했다. "이분을 어디로 옮기실 건가요? 제 부하들을 시켜 시신을 그곳까지 모셔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아가 씨 일을 거들라고 지시할 테니 필요하시면 뭐든 시키십시오. 저도 같이 따라가고 싶은 마 음이 간절합니다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처지여서." "정말 친절하시군요. 이곳의 세인트 앨크먼드 교회에 제 어머님 집안의 가족묘지가 있고, 엘리어스 신부님이 저를 잘 아십니다. 제 오라버니의 시신을 거기까지 옮겨다주시겠다는 제안은 감사히 받아들이겠지만 할 일이 있는 분들을 그 이상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제 앨린은 침착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적인 일들을 능동적으로 감당해 야 하는 이의 표정이 되었다. 고려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운 여름철이니만큼 서둘러야했으며, 품위 있는 장례식을 치르는 데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빠짐 없이 준비해야 했다. 그녀는 당당한 자세로 모든 일들을 차분히 처리해나갔다. 그녀는 버링가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게 친절을 베풀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오라버니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일에 매달려아 하고, 당신은 저 때문에 공연히 우울한 시간을 보낼실 이 유가 없으세요. 제게는 더 이상 두려울 일이 없으니까요." "올 때도 아가씨와 함께 왔으니 갈 때도 함께 가겠습니다." 휴 버링가는 고집을 부리는 듯한 기미도 보이지 않고, 연민 어 린 표정 따위도 짓지 않고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내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 고는 자기가 해야 할 일로 돌아갔다. 쿠셀의 부하 둘이 좁은 들것을 날라와 자일즈 시워드 이 시신을 올리자 앨린은 시신의 늘어진 머리를 손수 바로잡았다. 그녀의 일행이 막 그곳 을 떠나려는 순간, 미간을 찌푸린 채 괴로운 마음으로 시신을 내려다보던 쿠셀이 불쑥 소리 쳤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제야 기억이 나는데 여기 오라버니의 물건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쿠셀은 급히 아치 문을 나가 성탑 쪽으로 가더니, 잠시 후에 검은 망토를 팔 에 걸치고 되돌아왔다. "이건 저 끝에 있는 경비초소에 남겨진 물건들 속에 끼여 있던 것 인데,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오라버니 것인 듯합니다. 이목 부분의 걸쇠에 새겨진 문양 이 오라버니께서 차고 계신 허리띠 버클의 문양과 똑같습니다. 보십시오." 사실이었다. 영원을 상징하는, 제 꼬리를 입에 문 용을 부조한 화려한 청동제품. "방금 전에 이 버클 을 보고 비로소 생각났습니다. 이 두 문양이 우연히 똑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최소한 이것 을 오라버니께 되돌려드리는 일이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망토를 펼쳐 들것에 놓인 시신의 얼굴과 몸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처음으로 앨린의 눈에 어 린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앨린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캐드펠은 다시 신원미사의 시신을 지키는 일로 돌아왔다. 캐드펠은 계속해서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아무 소득도 없었다. 조금 뒤, 저녁 어스름녘이 되면 남은 시신들을 모두 수레에 싣고 와일 가의 언덕길 을 따라 내려가 시내 밖으로 가게 될 터였다. 이렇게 더운 여름철에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내일 새벽 헤리버트 원장은 수도원 한 끝에 마련된 조그만 땅덩이를 집단매장지로 봉헌하는 의식을 치를 터였다. 그러나 캐드펠로서는 이 시신, 그 어떤 범죄로 고발당한 일 도 없고, 유죄판결을 받은 일도 없으며, 정의를 바로 세워줄 것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이 신원 미상의 시신을 처형당한 사람들과 함께 매장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름을 되찾아주고 거기 에 걸맞은 장례식을 치러 무덤으로 보낼 때까지 이 젊은이는 결코 고이 잠들지 못하리라. 세인트 앨크먼드 교회의 사제인 엘리어스 신부의 사제관에서는 수녀들이 신부의 도움을 받아 경건하게 자일즈 시워드의 옷을 벗기고 물로 씻은 뒤 얼굴과 매무새를 가다듬고 수의 를 입히고 있었다. 휴 버링가는 잔일을 거들어주려고 곁에 대기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일하는 방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앨린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혼자서 처리할 수 있었으 므로 다른 사람이 거드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설령 누군가가 끼여들어 그 일을 조금이라도 가로채려 했다면 고마워하기보다는 분개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나자 갑자기 격심한 피로가 덮쳐왔고, 그녀는 말없이 곁에서 부축해주는 버링가의 팔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꼭 붙들고서 물방앗간 곁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자일즈 시워 드는 세인트 앨크먼드 교회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친 뒤 그곳에 있는 외조부의 묘에 합장되 었다. 같은 시간에 성 베드로-성 바울 수도원의 수사들은 그때까지 누구도 찾아가지 않은 예순여섯 구의 시신들을 적절한 의식을 거쳐 땅에 묻었다. 시신의 정체 앨린은 오빠가 걸쳤던 겉옷과 바지와 시신을 덮었던 망토를 들고 돌아와 손수 솔질하고 잘 개켜놓았다. 셔츠는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라 태우고 잊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좋 은 천으로 된 그 질긴 옷들은 헐벗고 지내는 이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냥 내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맵시 있게 묶은 옷보퉁이를 들고 정문의 문지기실로 갔지만, 넓은 뜰 전체가 사람 하나 없이 텅비어 있었다. 그녀는 캐드펠 수사를 찾아보려고 다시 연못가를 지나고 채소밭 들을 가로질러가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예순여섯 구의 시신이 누울 커다란 무덤을 파고 그 안에 시신들을 차곡차곡 쌓는 단순 반복적인 노동은 돌무덤 하나를 열고 또 하나의 혈족을 넣는 일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게 마련이었다. 수사들은 곁에서 많은 이들이 돕는데도 불구하고, 오후 두시 넘어서까지 고되게 일하고 있었다. 캐드펠 수사는 없 었지만 허브밭 일을 돕는 소년은 있었다. 소년은 더위에 말라죽은 꽃대궁들을 잘라내고, 꽃 이 활짝 핀 박하줄기들을 이파리가 달린 채 베어내느라 분주했다. 그렇게 베어낸 박하는 단으로 묶어 벽에 걸어놓고 말렸다. 오두막 처마 밑의 사면 벽에는 마른 허브 다발들이 줄 줄이 널려 있었다. 그 부지런한 소년은 맨발로 일하고 있었다. 소년의 다리에는 분가루 같 은 뿌연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한쪽 뺨에는 초록색 같은 얼룩이 져 있었다. 소년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엄청난 향기의 파도를 몰고 서둘러 허브밭에 서 나왔다. 허브의 향기는, 얼핏 보아서는 지극히 평범한 성자의 몸에서 풍기는 불가사의한 향기처럼, 소년의 거친 옷자락으로부터 짙게 풍겨 나왔다. 흐트러진 머리를 한 손으로 허둥 지둥 쓸어넘기는 바람에 소년의 한쪽 뺨에 묻어 있던 초록색 얼룩이 다른쪽 뺨과 이마에도 묻고 말았다. 앨린은 사과하듯이 말했다. "난 캐드펠 수사님을 찾고 있었어요. 댁은 수사 님 일을 거들어주는 고드릭이죠?" 고디스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가씨. 캐드펠 수사님은 바쁘십니다. 일이 다 끝나지 않으셨거든요." 고디스도 그 일을 거들고 싶어했지 만 캐드펠 수사는 대낮에는 가급적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 다. 앨린은 낯을 붉혔다. "아, 참! 그걸 알았어야 하는데. 그럼 수사님께 말 좀 전해주겠 어요? 내가 우리 오라버니 옷을 가져왔거든요. 이제 오라버니에게는 필요없는 것들이지만 아직은 쓸 만하니 입을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해주세요. 그런 일에는 수사님이 적격이실 것 같아서요." 고디스는 지저분한 두 손을 옷자락에다 문 지르고 옷보퉁이를 받아들다가, 갑자기 숨을 죽이고 앨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제는 필요치 않다니...... 오라버니께서 저기에 계셨나요? 저 성안에요? 아, 이런, 죄 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디스는 기겁하고 당혹한 나머지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앨린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작은 의무가 끝나고 난 뒤 허전한 두 손 을 내려다보았다. "네,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죠. 그건 오라버니가 선택하신 길이었 어요. 나는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오라버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하지 만 적어도 최후까지 그 길을 고수하셨죠. 아버지가 아셨다면 화를 내시기는 하셨겠지만 적 어도 수치스럽게 여기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고디스는 옷보퉁이를 가 슴에 끌어안고서 적당한 다른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맸다. "캐드펠 수사님이 돌아오시는 대 로 아가씨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수사님은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아가씨의 더없이 큰 자비심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기를 바라실 겁니다." "그리고 수사님께 이 돈도 전해드 리세요. 그분들 모두를 위한 위령 미사에 쓰시라구요. 특히나 성안에 없었던,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분을 위해서요." 고디스는 당황하고 의아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그분들과 한편이 아니었던 사람이 있었다구요? 전 몰랐습니 다!" 어제는 캐드펠 수사가 밤늦게야 탈진해서 돌아왔으므로, 고디스는 그와 변변히 이야기 를 나눌 틈도 없었다. 고작 고디스가 들은 이야기는 남은 시신들을 매장하기 위해 수도원 으로 날라왔다는 것뿐이었다. 그 비극의 현장에 없었던 사람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수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흔여덟 구의 시신이 있어야 할 곳에 아흔아홉 구가 있었고, 그 중의 한사람은 원래부터 무장을 하지 않은 듯했다구요. 캐드펠 수사님은 성으로 들어오는 이마다 붙잡고 그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아직 아는 사 람이 없었나봐요." 고디스는 정말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럼 지금 그 사람 은 어디 있습니까?" "나도 몰라요. 이 수도원으로 옮겨왔지 싶긴 한데. 내 생각에 캐드펠 수사님은 이름도 신원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을 다른 시신들과 함께 매장하게 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수사님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댁이 더 잘 알겠죠. 그분하고 일한 지 는 얼마나 되었나요?" "얼마 안 됩니다. 아주 조금밖에 안 되었어요. 하지만 차츰 그분에 대해 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디스는 왠지 불안해져서 그 맑은 아이리스빛 눈으로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비밀을 지키는 데는 남자보다도 여자가 더 위험한 존재였다. 고디스는 일하던 허브밭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앨린은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대뜸 눈치챘다. "내가 일을 방해했군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고디스는 돌아가는 앨린을 지켜보면 서, 남자들만의 성역인 이곳에서 모처럼 다른 여자와 만난 소중한 시간을 연장시키지 않은 것에 후회가 일었다. 그러나 고디스는 그 옷보퉁이를 오두막안의 침대에 내려놓고 다시 일 하러 갔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내내 캐드펠이 오기만을 고대했다. 마침내 캐드펠 수 사가 기진맥진해서, 그러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을 떠안은 채 돌아왔다. 캐드펠은 피로로 뻣 뻣해진 두 뺨을 단단한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 "왕의 막사에 가봐야겠네. 새 행정장관은 이번 일을 처리하다가 부딪친 예기치 못한 사건을 내가 왕에게 알리는 게 좋겠다고 여기는 모양이야. 게다가 왕도 내게서 이번 일에 관한 보고를 받고 싶어하구. 이야기하려다가 잊 은 게 있는데, 자세히 말할 시간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아,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어요. 앨린 시워드가 수사님을 찾아 이리로 왔었거든요. 이걸 들고 와서 수사님 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사람들에게 희사해달라고 하더군요. 자기 오빠가 입던 옷들이래 요. 그리고 이 돈은 위령 미사에 써달라고 했어요. 특히, 엉뚱하게 나타난 사람을 위해서 써달라구요. 자, 이제 말씀해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캐드펠은 만사를 젖혀 놓고 잠시 조용히 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고디스 곁에 편히 앉아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고디스는 열심히 듣고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었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 은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요?" "교회 제단 앞에 있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서 미사 드리러 오는 신자들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에 놓아두었지. 그래봤자 내일까지밖 에 못 두지만." 캐드펠은 안타까운 듯이 말을 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말일세.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매장해야 한다면 쉽게 다시 파낼 수 있는 곳에 묻을 생각이네. 그 가 엾은 청년의 신원이 밝혀질 때까지 초상화와 입은 옷들은 잘 보관해둘 거고." 고디스는 끔 찍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수사님은 정말로 그 사람이 살해되었다고 믿으세요? 살인 자가 자신의 범죄를 감쪽같이 은폐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시신을 왕의 희생자들 사이에 던 져둔 거라구요?" "이보게, 내가 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은 살인자가 사전에 준비해 간 목 조르는 줄로 뒤에서 당한 거야. 그 사건은 다른 사람들이 죽어서 성 밑 도랑으로 내 던져진 바로 그날 밤 일어났네. 그보다 살인을 저지르기에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나?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은 마당에 누가 일일이 수를 세고 가려내고 할 것이며, 설령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쳐도 누가 그 이유를 밝혀내려 들겠나? 그저 그 청년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갈 테고, 그러면 사건은 그대로 은폐되는 것이지." 고디스 는 분노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죠! 수사님이 나타나셨으 니까요. 수사님이 아니셨다면 그 누가 아흔아홉 구의 시신들 중에서 두드러지게 다른 한 시신을 굳이 찾아내려 들었겠어요? 그 누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정당한 법적 수 순도 거치지 않고 죽은 사람의 권리을 지켜주겠다고 혼자서 끝까지 버티겠어요? 아, 수사 님 때문에 저도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어요. 저는 여기 틀어박혀 있어서 아직 그 사람을 못 봤어요. 왕은 잠깐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우선 제가 가서 보게 해주세요! 캐드펠은 잠시 생각하다가 끙 하는 낮은 신음을 내며 힘겹게 일어섰다. 그는 예전처럼 젊 지도 않았고 요즘 들어 밤낮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하게. 남들은 다 들여다보게 하는데 자네만 못 보게 할 수야 없지. 지금 그곳에는 아무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내 곁에 바싹 붙어야 하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자네를 이곳에 서 안전하게 내보내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할 입장이야." 고디스는 서운한 듯이 말했다. "저를 그렇게도 내보내고 싶으세요? 이제 간신히 세이지와 마소람을 구별하게 되었는데! 저도 없이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해내시려구요?" "몇 주 이상 붙잡아둘 수 있는 수련사 하나를 훈련시키면 되지. 그리고 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캐드펠은 승복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가죽주머니를 꺼내들더니, 이리저리 뒤져서 길이가 십오 센티미터쯤 되고 햇빛에 바싹 마른, 가느다란 사각기둥 모양의 풀줄기를 빼냈다. 그 줄기에는 이파리들 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쌍으로 붙어 있었고, 줄기와 이파리들이 만나는 곳마다 조그만 갈색 열매가 달려 있었다. "이게 뭔지 아나?" 그녀는 며칠 사이에 풀에 관해 많은 것들을 배운 터라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뇨. 여기서는 키우지 않는 건데 요. 들에서 자라는 것을 본다면 혹시 알지 모르겠지만." "거위풀이네. 갈퀴덩굴이라고도 하지. 작은 가시들이 낚시바늘처럼 돋아 있어서 아무 데나 잘 들러붙는 묘한 덩굴식물이야. 이 조그만 씨에도 가시들이 나 있네. 이 곧은 줄기 가운데가 부러져 있지 않나?" 그녀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언뜻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었 다. 바싹 말라 갈색으로 탈색한 줄기 가운데 가는 금으로 중간쯤에서 날카롭게 접힌 자국 이 나 있었다. "여긴 무슨 자국이죠? 이건 어디서 나셨어요?" 캐드펠은 그녀가 큰 충격 을 받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끔 부드럽게 말했다. "그 불쌍한 청년의 목에 팬 긴 상처에 걸려 있었네. 그 청년의 목을 조른 가느다란 줄 때문에 중간이 꺾인 거지. 이 풀은 올해 새로 자란 것이 아니라 작년에 베어진 걸세. 이 풀은 지금 같은 계절에는 어디서나 무성하 게 자라면서 사방에 씨를 뿌린다네. 이 풀은 가축들을 먹이는 꼴에도, 마구간이나 외양간 바닥에 깔아주는 깔짚 속에도, 지난 가을에 베어서 말려둔 건초더미 속에도 끼여 있어. 그 렇다고 무시하지는 말게. 잘 아물지 않는 갓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뛰어난 효험이 있 으니까. 야생하는 모든 것들은 제각기 고유한 쓰임새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악용하지만 않 으면 해로울 게 없지." 캐드펠은 그 작은 풀을 다시 가죽주머니에 넣고 가슴속에 조심스럽 게 품고는, 고디스의 어깨에 한 팔을 얹었다. "자, 그럼 같이 가서 그 젊은이를 보세나." 오후가 반쯤 지나고 있었다. 수사들은 분주하게 일하고, 학생들이나 수련사들은 학습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적당히 할당된 일을 마치고 한가롭게 놀 시간이었다. 그들은 활기차게 뛰노는 사춘기 소년들 외에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교회에 도착해, 서늘하고 어둠침 침한 실내로 들어섰다.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간직한 젊은이는 머리와 얼굴을 제외하고는 수의로 친친 감싸인 채로 성가대석 한 끝에 놓인 관 속에 엄숙히 누워 있었다. 실내를 감 도는 여름 오후의 부드러운 빛이 젊은이의 시신 위로 희미하게 내리비쳤다. 불과 몇 분 지 나지 않아 그들은 그 빛에 익숙해져 젊은이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디스는 젊은이 곁에 서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그들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을 아나?" 그러나 캐드펠은 이미 어떤 대답이 나 올지 짐작하고 있었다. 고디스는 속삭이듯 말했다. "네." "가세!" 캐드펠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고디스를 교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환한 햇살 속에 들어섰을 때 캐 드펠은 고디스의 깊고 긴 한숨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진한 향기가 떠도는 허브밭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두막 그늘에 앉았다. "우리가 본 글 젊은이가 누 구지?" 고디스는 아직도 놀라움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름은 니콜러스 페인트리예요. 제가 열두 살나던 해부터 어쩌다가 한번씩 봤어요. 피 챌런 향사죠. 시루즈베리 북쪽에 있는 어른의 영지들 중 한 곳에 살면서 심부름을 하느라 몇 번인가 말을 타고 왔었어요. 시루즈베리 사람들 중에는 그 사람을 아는 이가 별로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이 길을 가다 살해 당했다면 틀림없이 피챌런 어른의 심부름을 하던 중이 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른은 이 근방에서는 더 이상 볼일이 없으셨을 텐데." 그녀는 두 손 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골똘히 생각했다. "시루즈베리에도 그 사람을 알 만한 이들이 얼마 쯤은 있을 거예요. 자기네 가족을 찾으러 올 일이 없어서 나타나지 않았겠지만요. 제가 아 는 사람 중에 그날 낮과 밤 동안 그 사람이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알 만한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이름을 대도 그 사람들에게 아무 해도 없을 거라고 보장해주시겠어요?" "나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게야. 내 약속하지." "절 자기 조 카라면서 여기에 데려다준 제 유모가 있어요. 페트로닐라는 우리 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바 치다시피 했고, 뒤늦게 결혼하긴 했지만 나이가 많아서 자식도 낳지 못했죠. 페트로닐라의 남편인 에드릭 플레셔는 시루즈베리 도축업 길드 조합장인데, 피챌런 어른 집안 사람들과도 우리 집안 사람들하고도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에요. 그 두 사람은 피챌런 어른이 모드 황 후님을 위해 궐기했을 때 처음부터 그분들의 모든 계획에 참여했죠. 수사님이 찾아가시면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는 건 뭐든지 말씀드릴 거예요. 그 가게는 아마 수사님도 아실 거 예요. 푸줏간 거리에 있는, 돼지머리 간판이 붙은 집이에요." 캐드펠은 코를 문지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원장님의 노새를 빌리면 좀더 빨릴 움직일 수 있겠지. 다리도 덜 혹사하 게 될 테고. 왕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해서는 곤란 할 테니 돌아오는 길에 그 가게에 들러야 겠군. 자네가 나를 믿는다는 표식 같은 것을 주면 좋겠네. 그럼 그 사람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겠나." 그녀는 캐드펠 만큼이나 열중해 있었다. "페트로닐라는 글을 읽을 줄 알고 제 필체를 알고 있으니까 양피지 한 장만 주세요. 작 은 조각이면 돼요, 그 사람 아주 쾌활한 사람이었는데. 니콜러스 말예요. 제가 알기론 그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 적 없는 사람이에요. 노상 잘 웃었구요...... 하지만 수사님이 왕에게 니콜러스가 적의 편이었다는 말씀을 하신다면 왕은 살인자를 추적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그냥 그 사람 운명이라고 하면서 그 사건에서 손떼라고 할걸요." "나는 왕에게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사람이 있고, 살해한 방법과 시간을 알고 있으나 장소나 이유는 모른다는 말을 할 걸세. 그 사람의 신원을 밝혀냈다는 이야기도 할 거구. 그리 두드러진 인물이 아니니 별 생각 없이 넘어갈 게야. 지금까지는 나도 그 정도밖에 모르니까 더 이상은 이야기하려 해도 할 게 없어. 설혹 왕이 내 말을 하찮게 여기고 그냥 묻어두라고 명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네. 내 모든 힘을 다해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살해한 자를 반드시 밝혀내고 말겠 어. 내 힘만으로 안 되면 신의 가호를 빌려서라도 말일세." 캐드펠 수사는 원장의 노새를 빌려서, 앨린이 맡긴 옷들을 들고 길을 떠났다. 원래부터 할 일이 있으면 다음날로 미루지 않고 즉각즉각 해치우는 습관이 있는데다가, 시내를 지나 다보면 거지들을 많이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죽은 이의 바지는 양쪽 눈에 허옇게 백내장이 낀 장님 노인에게 주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내밀고 있는 노인은 이리저리 깁고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이내 못 쓰게 될 바지를 입고 있었으므로 그 바지를 주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이었다. 갈색 겉옷은 시내 중심가 네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불쌍한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 젊은이는 입을 헤벌리고 사지를 벌벌 떠는 정신박약아였다. 체구가 작은 노파 가 한 손으로 젊은이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었다. 캐드펠이 옷을 주고 성문 쪽으로 가 자 노파는 그의 뒤에 대고 새된 소리로 축복의 말을 외쳐댔다. 캐드펠은 마지막으로 남은 망토를 안장 앞부분에 끼고서 왕의 진영 경비초소를 향해 다가가다가, 그 근처 나무그늘에 들어가 있는 앉은뱅이 오즈번의 조그마한 나무 수레를 보았다. 캐드펠은 그의 오그라붙어 쓸모없는 두 다리와 온몸을 끌고 다니느라 딱딱하게 못이 박힌 두 손을 눈여겨봤다. 오즈 번의 나막신은 옆의 풀밭에 놓여 있었다. 오즈번은 승복을 입은 사람이 노새를 타고 다가 오자 얼른 나막신을 움켜쥐더니 재빨리 그 앞으로 나섰다. 나무그늘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고 여태 자주 쉬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구자는 불구자였으므로 보통사람들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밤에 기온이 조금만 떨어져도 추위에 벌벌 떨 것이며, 겨울밤에는 실로 엄청난 고초를 겪으리라. "훌륭 하신 수사님, 불쌍한 불구자에게 적선을 베푸시면 하느님께서 그 보상을 해주실 겁니다요!" "그러지, 친구. 내, 동전보다 더 좋은 걸 주겠네. 내 손을 거쳐 자네에게 이걸 보내준 훌 륭한 숙녀를 위해 기도나 해주게나." 그러면서 캐드펠은 안장에 끼워둔 자일즈 시워드의 망토를 빼내어,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오즈번의 흉측한 두 손에 떨어뜨렸다. 왕은 사려 깊게 말했다. "수사가 발견한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한 건 참으로 잘한 일이 오. 우리 행정장관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좀 놀랍긴 하지만 워낙 바쁜 터라. 살인 자가 그 사람 뒤로 달려들어 목 조르는 줄로 교살했다 했소? 노상강도들이 그런 흉악한 짓 을 곧잘 저지르지. 그런데 그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가 처형한 적의 시체들 사이에 그 희생자를 던져놓았다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소! 나와 내 장교들을 감히 공범자로 만들다 니! 그건 왕권에 대한 모독이오.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기필코 그 중죄인을 붙잡 아 재판에 회부하겠소. 그리고 그 젊은이의 이름이...... 페인트리라고 했던가?" "니콜러스 페인트리입니다. 그 젊은이의 시신을 교회에 두었더니 어떤 이가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북부 시로프셔 출신이랍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왕은 생각에 잠겼 다. "그 젊은이가 우리편에 서서 싸우려고 시루즈베리로 말을 타고 오던 중이었을 수도 있 겠구먼. 그렇지 않아도 북부 시로프셔출신의 젊은이들 몇몇이 이리로 와서 우리편에 가담 했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캐드펠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있을 수 없 는 일이란 없다.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숲 속에 있던 강도가 그가 가진 돈을 강탈하려고 목을 졸랐다...... 일이 그렇게 된 게로군! 우리 땅의 길이 모두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만은 이 새로운 무정부상태 하에서 나는 감히 그렇다고 주장할 수가 없구려. 수사가 원한다면 이 사건을 좀 더 깊이 파고들어도 좋소,. 그 살인자를 찾아내면 행정장관에게 놈을 처단해 달라고 요청하 도록 하시오. 행정장관은 내 뜻을 잘 알 테니까. 사악한 범죄를 은폐하는데 감히 나를 이 용하다니." 그 말은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으며, 왕에게는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캐드 펠은, 설사 페인트리가 피챌런의 심복이자 심부름꾼이었다는 것을 왕이 알았다 하더라도, 아 직까지 확실한 사실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죽임을 당할 즈음 그가 피챌런의 반란음모를 돕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하더라도 왕이 태도를 바꾸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여 러 가지 정황들로 미루어, 앞으로 스티븐 왕의 왕국 내에서는 수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날 듯 한 조짐이 보이지만, 왕은 그런 사건들 때문에 잠을 설치고 싶지는 않을 것이었다. 왕은 은 밀히 살인을 자행한 자가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그늘 속으로 기어드는 것을 원치 않 을 것이며, 그것을 자신에 대한 크나큰 모독으로 간주해 강력하게 응징하고 싶어할 터였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강렬한 에너지와 무기력함, 자비로움과 뒤틀린 악의, 재빠른 행동과 이 해할 수 없을 만큼 나태한 태도가 놀라운 대조를 보이면서 번갈아 가며 나타나곤 했다. 그 러나 그 훤칠하고, 잘생기고, 단순한 사람의 내면 어딘가 에는 고결함이 숨겨져 있었다. 캐드펠 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후원해주시겠다는 전하의 뜻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 는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부과하신 의무를 저버리거나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저는 그 젊은이의 이름과 인상착의밖에는 모 릅니다. 그는 인상으로 미루어보아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인 듯하고, 그 어떤 범죄로도 기소 당한 적 없으며 그 누구에 의해서도 고발당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죽었습니 다. 저는 전하께서도 저 못지 않게 이 사건에 대해 불유쾌한 심정을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기필코 그것을 바로 잡겠습니다." 푸줏간 거리의 돼지머리 간판이 달린 가 게의 여주인은 일반시민들이 수도원 수사를 대할 때 흔히 보이는 공손하고 소심스런 태도로 캐드펠 수사를 맞았다. 잿빛 머리에 잿빛 눈, 통통한 살집의 느긋해 보이는 페트로닐라는 망설임 없이 수사를 집 안으로 맞아들였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고디스에게서 받은 양피 지를 건네지 않았다면, 그녀는 서로를 잘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장벽 역할을 하는 정중한 태도로 일관했으리라. 그러나 케트로닐라는, 쓰고 또 써서 나달나달해진 양피 지에 고디스가 그 사자를 신뢰한다는 내용을 한 자 한 자 공들여 쓰고 서명까지한 것을 보 더니 대번에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기쁨에 겨워 눈물까지 글썽이며, 갈색으로 그을은 피부에 믿음직하고 소박하게 생긴 아니 지긋한 수사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아가씨가 잘 해내고 있는가보죠? 수사님께서도 잘 돌봐주고 계시구요! 아가씨가 여기다 그렇게 썼어 요. 전 아가씨 필적을 잘 알아요. 같이 글쓰는 법을 배웠거든요. 전 아가씨가 태어날 때 부터 모시고 있었어요. 딱하게도 아가씨는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딸이었죠. 아가씨가 뭘 하 든 간에 늘 제가 함께 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구요. 항상 아가씨 곁에 있어드리려고 애썼 답니다. 앉으세요, 수사님, 앉으셔요. 그리고 아가씨가 잘 계시는지, 수사님을 통해 뭐 보 내드릴 건 없는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아, 수사님, 어떻게 하면 우리 아가씨를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까요? 여러 주 걸릴 것 같다면 그때까지 수사님 곁에 있어도 괜찮을 까요?" 페드로닐라가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바람에 캐드펠은 중간중간에 간신히 끼여들어, 그녀가 아주 잘 지내고 있으며 계속 잘 지낼 수 있게끔 자기가 어떻게 보살피고 있는지 한 두 마디로 간략하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캐드펠은 고디스가 특별히 의도하지 않고서도 쉽사리 남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처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에드릭 플레셔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고 시내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돌아왔 을 때, 페트로닐라는 이미 캐드펠 수사를 단단히 신임하게 되어서 남편에게 그를 믿을 만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육중한 체구의 에드릭은 널찍하고 안락한 의자에 주저앉더니 다소 안 도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은 가게문을 열어야겠습니다. 저희는 정말 운 이 좋은 셈이지요! 왕은 사로잡지 못한 사람들의 앙갚음을 하느라 많은 이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왕은 일체의 약탈행위를 금지시키고도 모자라서 다시 한번 부하들에게 그 점을 강조했답니다. 명분이 정당하고 좀더 일관성 있는 사람이었다면 전 아마 그 사람 편을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영웅처럼 보였다가 또 어떤 때는 전혀 그렇지 않으 니, 참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는 탄탄한 두 다리를 모으고 아내를 잠깐 쳐다보더 니 캐드펠에게 시선을 돌렸다. "집사람에게서 수사님이 아가씨의 편지를 갖고 오셨다는 말 을 들었고, 저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능력 이 닿는 한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캐드펠은 힘있게 말했다. "고디스 아가씨가 수도원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안전하게 지켜주겠소. 적당한 기회가 오 면 가야 할 곳으로 보내줄 테고, 필요한 게 있느냐니까 하는 말인데, 나를 좀 도와주었으면 하오. 우리 수도원의 교회에 댁들이 알 만한 젊은이의 시신이 있소. 내일 매장할 거요. 그 청년은 성이 함락된 뒤 포로들이 교수형 당해 도랑으로 내던져진 날 밤에 살해됐소. 청 년을 살해한 자는 다른 곳에서 일을 저지르고 나서 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곳을 찾다 가 포로들의 시신이 있는 곳에 그 청년의 시신을 갖다 버린 거요. 그 청년이 어떻게, 언제 죽었는지는 말할 수 있지만 어디서, 누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소. 아가씨는 그 청년의 이름이 니콜러스 페인트리고, 피챌런 씨의 향사였다고 했소." 캐드펠 수사는 그 부 부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분명 그 사건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이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듯, 둘 다 깊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 은 게 있소. 나는 기필코 이 사건에 관한 진실을 밝혀 그 청년의 원한을 풀어주려 하오. 게다가 나는 왕에게서 그 살인자를 추적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그런 짓을 싫어한다는 점에 서는 왕도 난 못지않았지요." 한참 뜸을 들이다 에드릭이 물었다. "그렇게 살해된 사람이 하나뿐이었습니까? 또다른 사람은 없었구요?" "두번째 피해자가 꼭 있어야하오? 하나로 도 충분하지 않소?" 에드릭은 침통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명을 띠 고 출발한 두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습니까? 그 사실을 아는 분은 수사님 한 분뿐인 것 같은데요." 캐드펠 수사는 의자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주저하지 않고 자세한 내막을 들려주었다. 저녁기도 시간을 놓치게 되어도 할 수 없 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 람이었다. 그러나 그 의무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 었다. 고디스는 그가 없더라도 그 안전한 곳을 벗어나지 않을 터였다. 적어도 저녁학습 시 간까지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나는 아가씨를 보호해야 하고 페인트리의 원한도 풀어주어야 하오. 나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 두가지 일을 해낼 작정이오." 부부는 시선을 교환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야기하는 일은 남편 쪽에서 맡았다. "성과 시가 함락되기 일주일 전, 피챌런 어른은 당신의 가족들을 이미 피신시켜 놓으시고 고디스 아가씨를 수사님의 수도원에 은신시키기로 결정하시고는, 당신이 잘못될 경우에 대 비한 대책도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적이 성문을 부수고 쳐들어올때까지 달아나지 않으 셨습니다. 그 점은 수사님도 알고 계시지요? 그분은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가셔서 애드니 어른과 함께 세 번 강을 헤엄쳐 건너가셨습니다.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려야지 요! 성이 함락되기 전날, 피챌런 어른은 미리 대비책을 세우셨습니다. 당신이 갖고 계신 모든 보화를 저희에게 맡기시고, 당신이 피살될 경우에는 그 보화들을 황후님께 전하게끔 조처해놓으신 거지요. 바로 그날 저희쪽 사람들은 그 보화들을 프랭크웰에 있는 제 농장으 로 옮겼습니다. 그곳에다 두면 갑자기 옮겨야 할 사정이 생겨도 다리를 건널 필요가 없으 니까요. 그리고 저희들은 약속을 했습니다. 만일 그 어른이 보낸 사람이 증표를 가져오면 그 사람을 그곳으로 안내하고, 말이며 그밖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주어, 밤사이에 보 화들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기로요." "그 약속은 지켜졌소?" "네, 성이 함락되던 날 아침에요. 그런데 적이 너무 급작스럽게, 무척이나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저희 쪽에서 그만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이 왔더랬습니다. 저 희는 그 사람들에게 우선 다리를 건넌 뒤 밤까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 낮에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자세히 말씀해주시오. 그 두 사람은 그날 아침 몇 시쯤에 이리로 왔소?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어떻게 그 사람들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하던 가요? 보물을 옮긴다는 것과 그 사람들이 어느 쪽 길을 택할지에 대해 알고 있던 이들이 몇이나 되오? 살아 있는 그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요?" "두 사람은 새벽빛이 밝자마자 왔습니다. 그때쯤 왕의 군대가 공격을 개시하면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 했지요. 두 사람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양피지에 잉크로 성자의 두상을 그린 그림을 갖고 왔어요. 그 전날 밤에 회의가 있었는데, 그 회의에서 피챌런 어른이 다음날 그들을 보내서, 차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당신께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보화를 무사히 황후님께 보내드 려 그분의 권리를 지키는 일에 유용하게 쓰시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 두 사람이 다음날이 저물자마자 먼길을 떠나리 라는 것을 알았겠군요. 어떤 길로 갈지도 알고 있었을 테고. 그 보화가 어디에 숨겨져 있 는지도 다들 알고 있었소?" "아닙니다. 프랭크웰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구체적으로 어 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피챌런 어른과 저만 빼고는요. 그래서 두 명의 향도가 제게 와야 했던 거지요." "그렇다면 보화를 탈취하겠다는 음험한 마음을 품은 자는 그 것을 옮기는 시간을 알았다 해도 미리 가서 가져가지 못하고 길에서 습격할 수밖에 없겠 군요. 피챌런 씨 측근의 장교들이 모두들 그 보화가 프랭크웰에서 서쪽, 그러니까 웨일스로 옮겨질 예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두 사람이 어느 길을 택할지는 하등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을 거요. 길이라고는 첫 일 마일 남짓한 거리까지는 강의 들목과 날목으로 양쪽이 막 힌 곳 한 곳뿐이니까." "수사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그 두 사람 을 살해하고 보화를 탈취하려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패챌런 어른의 측근들 중 하나가 요?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람들 모두는, 아니, 적어도 대개는 마지막까지 성에 남 아 있다가 죽었습니다. 두 사람이 밤에 말을 타고 가다가 숲속에서 강도짓을 하며 살아가 는 자들에게 우연히 습격당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시를 둘러싼 성벽에서 일 마일밖에 안 떨어진 데서? 그 청년을 살해한 자는 시루즈베리 성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을 벌였다는 점을 잊지 마시오. 그래야 그 날 밤 안에 도랑에 있는 다른 시신들 무더기 속에 청년의 시신을 날라다 버릴 수 있지 않겠소. 그렇게 하기에 필요한 물건들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을 테고, 그건 그렇고, 아무튼 그 두 사람은 이리로 와 서 증표를 보이면서 그 전날 밤에 앞으로 닥칠 사태에 대비한 계획을 세웠다고 했군요. 그 런데 적이 예상을 뒤엎고 급박하게, 엄청난 기세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모든 일이 시급하게 진행되었구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소? 그들과 같이 프랭크웰로 갔소?" "네. 그곳에는 제 농장과 헛간이 있는데, 두 사람은 자기들이 타고 온 말들과 같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 헛간에 숨어 있었습니다. 안장주머니 두 쌍에 꾸려놓은 보화는 제 농 장에 있는 마른 우물 속에 감춰두었구요. 안장주머니가 꽤 묵직해서, 말이 제 주인과 그것 을 같이 지려면 무리겠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사람들이 안전하게 숨어 있는 것을 보고 오전 아홉시경에 그곳을 떠났지요." "그 사람들은 몇 시쯤에 출발했을까 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 떠났을 겁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출발하고 나서 바 로 니콜러스가 살해당했다는 말씀이신가요?" "틀림없소. 성에서 몇 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일을 벌였다면 시신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을 거요. 이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요. 그러나 완벽하다 할 만큼 치밀하지는 못했지요. 댁들이 페인트리를 잘 알고 있다고 고디스 아가씨가 그러더군요. 또 한 사람은 누구요? 그 사람 역시 잘 아는 사람이었소?" 에드릭은 무거운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니콜러스와 잘 아는 사이 인 듯 했습니다. 서로 허물없이 대했으니까요. 하지만 니콜러스는 원래부터 새로 사귄 이들하고도 쉽게 트고 지내는 성격이었지요. 그 젊은이는 처음 본 사람이었어요. 피챌런 어른의 북쪽에 있는 다른 영지 출신인데, 토롤드 블런드라 했습니다." 부부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물론이고 말로 표현된 것 이상의 이야기를 캐드펠 에게 들려주었다. 골똘히 생각하느라 찌푸려진 에드릭의 얼굴은 그의 착잡한 심경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이 잘 알고 믿었던 청년은 죽었으며, 그들이 처음 본 청년은 패챌런의 보 화들, 그러니까 황후의 재원이 될 금제식기들이며 금화며 보석류와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살인자는 그 보화를 수중에 넣기 위해 필요한 모든 사항을 상세히 꿰고 있었다. 그 모든 사항들을 두 번째 전령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반만큼 아는 이도 없 을 것이다. 물론 제3의 인물이 길에서 보화를 탈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롤드 블런드 는 길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두 사람은 에드릭의 헛간에 하루종일 함께 숨어 있었 으니, 니콜러스 페인트리는 그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살해당한 채 말 등에 태워져 성 밑 도 랑으로 실려갔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고 나서 남은 한 사람이 두 마리 말을 끌고 웨일스를 향해 서쪽으로 떠났을 수도. 캐드펠이 떠나려고 일어서자 페트로닐라가 말했다. "그날 또 한가지 일이 있었어요. 오후 두시쯤 왕의 군대가 시내로 들어오는 다리 두 곳 을 모두 점령하고 다리 상판을 내렸을 때 그 사람이 왔었죠. 휴 버링가 씨요, 버링가 씨는 여러 해 전에 우리 아가씨와 약혼한 사이인데 아가씨를 무척이나 걱정하는 척하면서 어디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 사람에게 얘기해주었느냐구요? 아뇨, 절 뭘로 보십니까? 저는 그 사람에게 말했어요. 시가 함락되기 일주일 전에 어른이 아가씨를 딴 데로 보내셨는데 우리 도 어디인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쯤 스티븐의 나라를 떠나 안전한 곳에 가 계실 거 다 하구요. 저희는 그 사람이 스티븐의 위세 덕에 이리로 올 수 있었다는 걸 눈치 챘거든 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금세 다리를 건너와 시내를 활보할 수 있었겠어요. 그 사람은 우리 아가씨를 찾으러 오기 전에 왕의 진영에 갔던 거예요. 사랑 때문에 그러는 건 절대 아녜요. 그 사람에게 아가씨는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존재죠. 아가씨 아버님을 잡기 위한 미끼가 되니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피챌런 어른까지도 잡아들일 수 있을 거구요. 듣 자니 그 사람이 지금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다던데, 부디 우리 어린양을 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해주세요." 캐드펠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날 오후에 그 사람이 여기 들렀다고 했 오? 아, 그 점은 걱정 마시오. 나도 그 위험을 익히 알고 있으니 고디스 아가씨가 그 친구 눈에 띄지 않게 신경 쓸 거요. 그런데 그 친구가 여기왔을 때 페인트리의 임무에 대해서 무슨 말이 오가지는 않았겠지요? 그 친구가 솔깃해할 만한 어떤 말도 없었구요? 머리가 무척이나 잘 돌아가고,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친구인데! 이런, 이런...... 미안하오, 댁 들은 절대로 그런 말을 입밖에 낼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아요. 아, 여러 가지 로 도움을 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오. 앞으로 진전이 있는 대로 알려드리리다." 캐드펠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페트로닐라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 토롤드 블런 드란 청년 아주 좋은 사람 같아 보였는데! 그 소박하고 예의바른 얼굴 뒤에 뭐가 숨어 있 는지 겉으로 봐서야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토롤드 블런드!" 고디스는 그 이름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발음해보았다. "색슨인 이름이네요. 북쪽 영지에는 유서 깊은 가문 출 신의 색슨 사람들이 꽤 많이 살아요. 하지만 모르겠는데요. 그 사람은 본 적 없어요. 니 콜러스가 그 사람하고 서로 아주 허물없이 대했다구요? 니콜러스는 원래 사람이 좋죠. 하 지만 어리석지는 않아요. 두사람이 비슷한 연배니까 니콜러스는 그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 나도 아네! 허나, 고디스, 난 지금 무척 피곤해서 더 이상은 생각을 못하겠어. 마지막기도에 참석했다가 잠자리에 들어야겠네. 자네도 그렇게 해야지. 내일은......" 고디스는 몸을 일으켜 캐드펠의 손을 잡았다. "내일 우리는 니콜러스 를 매장할 거예요. 우리가요! 그 사람은 어떻게 보면 제 친구라고 할 사람이니까 저도 거 기 참석할거예요." "그래, 그래야겠지." 캐드펠은 하품을 하고는, 감사와 슬픔과 희망이 뒤 섞인 심경으로 하루가 끝난 것을 기뻐하며 한 팔로 고디스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낯선 젊은이 니콜러스 페인트리는 적절한 의식을 거쳐 수도원 교회 익랑의 돌 밑에 안장되는 예외적인 특권을 누렸다. 다른 많은 시신들을 처리한 뒤에 따로 혼자 남은 시신이었고, 바로 그 때문 에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매장할 공간으로 교회 밖보다는 안이 좀더 여유가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를 그곳에 안장하는 일은 다른 시신들을 매장할 때보다 한층 수 월했다. 요즘 들어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더욱더 환멸과 절망을 느끼게 된 헤리버트 원장 은 내전이 아니라 개인적인 악의와 잔혹함에 희생된 그 외로운 손님을 반겨 맞았다. 니콜 러스는, 지금은 거의 가능성이 없지만 앞으로 적당한 때가 되면 성인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 를 일이었다. 신비롭고 잔혹한 죽임을 당했으며, 젊디젊은데다가, 그 모든 외관이 마음과 삶이 깨끗하며 악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든 점에서 그는 순교자 가 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앨린 시워드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녀는 일부러 청했 는지 혹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휴 버링가와 함께였다. 그 청년은 점차 캐드펠의 마음을 불 편하게 하고 있었다. 사실 청년은 어떤 적대적인 태도도, 자신의 약혼자를 찾으려 애쓰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녀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의 느긋하고 오만한 태도에는 상대를 위압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입가에 어 린 빈정거리는 듯한 희미한 미소, 어쩌다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를 빤히 쳐다보는 그 강렬 한 검은 눈동자. 캐드펠은 고디스를 여기서 무사히 내보내야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라도 최소한 버링가가 나타남직한 곳은 피하게 해야 하리라. 수도 원에 딸린 큰 과수원들과 밭들은 수도원 경내에 있지 않고 큰길 건어 강을 따라 죽 펼쳐진, 게이에라고 불리는 비옥하고 평탄한 지역에 있었다. 그 기름진 땅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약 간 지대가 높은 들판은 온통 밀밭이었다. 밀밭은 강을 사이에 두고 성과 마주보고 있는데 다가 왕의 공격군 진영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성이 공격받을 때 적잖이 피해를 입었다. 무 사히 살아남은 밀도 수확의 적기가 근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누구도 감히 추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태가 좀 진정되자 수도원 사람들은 생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양 식을 거둬들이기 위해, 최대한의 인력을 동원해서 하루 안에 일을 마치려고 무척이나 서둘 렀다. 그 들판 끝에는 수도원의 두 번째 물방앗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 역시도 전쟁으 로 인한 위험 탓에 한창 쓸모가 있을 시기인 여름 한 철을 쓰지 않고 방치해두어 손볼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캐드펠은 고디스에게 말했다. "자네는 곡식 베는 사람들과 함께 가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잘하는 건지 잘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단 하루만이라 도 자네를 이 경내 밖으로 내보내고 싶구먼." 고디스는 놀라서 물었다. "수사님은 안 가시 구요?" "나는 여기 머물면서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위험이 닥친다 싶으면 서둘러 달려가 겠네. 밀을 헛간에 거둬들일 때까지는 아무도 자네를 유심히 지켜볼 여유가 없을 테니 별 일 없을 거네. 허나 아타나시우스 수사 곁에 붙어 있도록 하게. 아타나시우스 수사는 두더 지만큼이나 눈이 어두운 사람이니 뒤에서 수사슴이 덤벼든다 해도 모를 게야. 낫을 휘두를 때의 손동작에도 신경을 쓰게나. 팔을 삼십 센티미터도 못 되게 젖혔다가 휘두르면 안돼!" 그녀는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하고 새로운 환경을 맛보는 것이 즐거워 행복한 마음으로 밀수확자들의 대열에 끼여 들판으로 나갔다.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캐드펠 수 사는 세심히 따져보면 그렇게 마음을 놓을 상황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고 디스에게는 그녀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늙은 얼간이 하나가 곁에 꼭 붙어 있었 다. 예전에 병아리를 돌보는 암탉처럼 그녀를 보호해주던 나이 든 유모가 곁에 있었듯이. 캐드펠은 일행이 문지기실 밖으로 나가 길을 건너 게이에로 들어서는 모습을 죽 지켜보다 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서 경내의 밭으로 일하러 갔다. 캐드펠이 무릎을 끓고 잡초를 뽑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볍게 내던지는 듯한 싸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왔다. "수사님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시는 곳이 바로 여기로군요. 언제는 시체들을 거둬들이시더니 이제는 전혀 다른 것을 거둬들이시더니 이제는 전혀 다른 것을 거둬들이시 네요.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캐드펠은 풀숲을 헤치고 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목 소리는 거의 그 발소리만큼이나 조용했다. 캐드펠 수사는 박하밭 마지막 귀퉁이에 이르러 서야 비로소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휴 버링가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주 좋소. 우리가 이 시루즈베리에서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되기만을 바랍시 다." "마침내 그 낯선 사람의 이름을 알아내셨더군요. 그 사람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시 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요." 캐드펠은 경구 같은 말을 내뱉었다. "모든 의문에는 반드시 답이 나오게 마련이오. 충분히 기다리기만 하면 말이오." 버링가 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수색에는 반드시 바라는 결과가 따르게 마련이구요? 아, 물론 수사님께서는 충분히가 얼마만큼의 시간을 뜻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 지만 스무 살 때 찾던 것을 여든 살 먹어서야 발견한다면 헛수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겠죠." 캐드펠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전에 그것을 구하기를 포기했을 거 요. 포기야말로 구하려는 노력에 대한 답이 되는 법이니까. 이곳에서 찾고 있는 것이 있 소? 그렇다면 내가 거들어줄 수도 있지. 그게 아니면 이 단순한 식물들에 대해 뭐 알고 싶은 점이라도 있어서 온 거요?" 버링가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닙니다. 제가 단순한 것을 알아보러 왔다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는 박하줄기를 따 내어 손가락으로 짓이겨 코에 대보고는, 가지런한 하얀 이로 깨물어 맛을 보았다. "여기에 제가 찾아볼 만한 게 있을까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도대체 몇 가지 병을 얻었는지도 모르 겠는데, 도무지 치료할 재주가 없어서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캐드펠 수사님은 수도원에 들 어오시기 전에 대단히 많은 일들을 겪으셨다더군요. 그렇게 엄청난 전쟁들을 겪으신 분이, 맞서 싸울 적조차 없는 이런 곳에서 생활하시려면 못 견디게 따분하실 텐데요?" 캐드펠 수 사는 타임들 틈에 섞인 분홍바늘꽃 줄기를 뽑아내며 말했다. "요즘은 전혀 따분하지 않다 오. 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악마는 도처에 나타나지요. 심지어는 수도원에 도, 교회에도, 허브밭에까지도." 버링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요란하게 웃었다. 짧은 검은 머리가 이마 위에서 춤을 추었다. "고약한 장난을 하겠답시고 수사님이 계신 곳으로 온다 면 그 악마는 헛일을 하는 거죠! 하지만 악마는 여기까지 와서 감히 예전의 십자군 전사에 게 뿔을 들이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무슨 말씀이신지 알 만합니다!" 휴 버링가는 거의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주위의 어떤 것도 눈여겨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검은 눈동자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으며, 웃고 농담을 하면서도 그 의 귀는 바짝 곤두세워져 있었다. 그쯤에서 버링가는 앨린이 무심코 이야기한 잘생기고 언 변 좋은 소년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눈치 챘다. 게다가 버링가는 자신이 허브밭을 샅샅이 염탐하고, 잘 마르고 있는 허브 다발 냄새를 일일이 맡아보거나 오두막 안에 즐비한 약들을 죄다 기웃거린다 해도, 캐드펠 수사가 조금도 개의치 않으리라는 것도 눈치 채고 있 었다. 그것들이 버링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캐드펠 수사는 미리 벤치 겸 침대 위에 덮여 있던 담요를 치우고, 그 위에 대신 허브를 으깨는 절구와 잘 익어서 서 서히 발효되고 있는 허브주 한 항아리를 올려둔 참이었다. 고디스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 다. 그만 하면 고디스가 수도원에 있는 여느 아이들처럼 기숙사에서 함께기거하는 한 아이 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지지 않겠는가. 버링가가 말했다. "수사님이 잡초 뽑는 일에 전 념하시도록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로 수사님의 명상을 방해했군요. 혹 시 제가 해드릴 일이 있을까요?" 캐드펠은 반문했다. "왕은 없답디까?" 버링가는 또다시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에게 의표를 찔렸다는 것을 시인하는 웃 음이었다. "네, 아직은요. 하지만 곧 생길 겁니다. 그분은 상대가 미심쩍다고 해서 영원히 내칠 수 있는 위인이 못 되니까요. 하지만 저를 시험한다는 뜻으로 과제를 주셨는데, 아직 까지는 별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또다시 박하줄기 하나를 꺾어서 손 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입 속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며 히죽 웃었다. "제가 보기에 캐드펠 수 사님은 이곳에서 가장 유능한 분이시고 머리도 가장 잘 돌아가는 분이십니다. 혹시 제가 수사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정이 생길 때 생각도 변변히 안 해보시고 무조건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죠?" 캐드펠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등의 근육이 우두둑 뒤틀렸다. 캐드펠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글쎄, 나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오. 나는 변변히 생각도 안 해보고 뭘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이따금 내 생각이 행동과 보조를 맞추느라 느닷없이 방향을 바꿀 때가 있기는 하지만." 버링가는 빙긋 웃으면서 나긋나긋하 게 말했다. "그럼 그 말씀을 약속으로 마음 깊이 담아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서 그는 허리를 살짝 숙여 우아하게 절을 하고는 수도원 뜰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밀을 수확하러 나간 사람들은 몹시 지치고 햇빛에 빨갛게 익고 땀으로 범벅이 되기는 했 으나, 밀을 모조리 베어 나르게 좋게 쌓아 올려놓고 저녁기도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고디스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와 캐드펠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수사님 빨리 가세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 캐드펠은 고디스의 손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으 며,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팽팽한 긴장감이 어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기도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까 저랑 같이 허브밭으로 가세요." "무슨일인데?" 소리를 높이면 주위에 서성대는 여남은 사람들이 들을 염려가 있는데다가 고디스는 별 일도 아닌데 호들갑을 떨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캐드펠 수사는 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뭔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오기라도 했나?" "남자예요! 부상당한 남자! 강을 헤엄쳐왔어요. 상류에서 쫓기다가 강물로 뛰어들어 물살을 타고 떠내려왔대요. 시간이 얼마 없어서 곁에 붙어서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이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건 알아요. 굶 주려 있구요! 하루 밤 하루 낮을 거기에 있었데요......" "어떻게 그 사람을 발견했나? 자 네 혼자서?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일인가?" "네." 고디스는 캐드펠의 소매를 좀더 바싹 잡 아당기더니 수줍음 때문에 한층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긴 하루였어요. 너무 힘이 들어서 전 일하다 말고 살짝 빠져서 아주 멀리, 물방앗 간 근처 숲속까지 갔었어요. 아무도 못보게요......" "그랬겠지! 무슨 뜻인지 알겠네!" 아, 하느님, 고디스 동년배의 소년들을 죄다 저 소녀와 철저히 격리시켜 절대로 그런 광경을 보 지 못하게 해주소서. 아타나시우스 수사야 뒤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사람이니까 별 상 관없겠지만. "그 사람이 숲속에 있었나? 아직도 거기 있구?" "네. 전 그 사람에게 갖고 간 빵과 고기를 주고 시간이 나면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옷은 입고 있는 채로 말 랐는데...... 소매에 피가 배어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곧 괜찮아질 것 같아요. 수 사님이 돌봐주시기만 하면요. 물방앗간에 숨겨주면 될 거예요. 아직은 아무도 거기 안 가 니까요." 무엇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생각해두었던 터라, 그녀는 문지기실 쪽으로 가기 전에 우선 허브밭의 오두막으로 캐드펠을 잡아끌었다. 여러 가지 약들이며, 리넨이며, 음식이 필 요할 터였다. "몇 살이나 됐던가?" 이제 엿들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캐드펠은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고디스는 연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젊어요. 저하고 별 차이 없을걸 요. 쫓기는 처지에 있구요! 물론 그 사람은 저를 남자로 알아요. 제 물병에 있는 물을 줬 더니만 저를 가니메데스라 부르던데요......" 꽤 배운 청년인 모양이었다. 캐드펠은 먼저 오 두막 안으로 들어가, 둘둘 만 리넨 뭉치 하나, 담요 한 장, 물약병 하나를 고디스의 두 팔에 안겨주면서 말했다. "자, 가네메데스, 이것들을 보따리에 싸게. 그 사이에 나는 이 작은 약 병을 채우고 먹을 것을 좀 준비할 테니까. 몇 분만 있으면 다 되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기 다려주게. 자네가 그 청년에 대해 알아낸 것들은 걸어가면서 들려줘. 큰길을 건너가기만 하면 우리 말을 들을 사람이 없으니 거기서부터는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괜찮네." 큰길을 건너자 한시름 놓인 고디스는, 햇빛이 있는 동안에는 마음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 던 모든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단번에 쏟아냈다. 아직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으므 로 그들은 어스름녘의 희미한 빛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숲이 제법 울창했는데 거기서 그 사람이 몸을 뒤채면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죠. 누군가의 향사 노릇을 하는 사람 같았어요. 제게 이야기를 해주었죠. 그런데 사실은 알맹이 있는 건 하나도 해주지 않았어요. 꼭 철부지 애를 상대하는 것처럼 그랬다니까요. 기운은 하나도 없어 보이죠, 어깨와 팔에서는 피가 흐르죠, 저한테는 꼭 하 찮은 꼬마 대하듯 하죠...... 하지만 제가 자기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 만큼은 저를 믿어줬어요." 고디스는 캐드펠의 걸음을 따라가느라 꽤 키가 큰 밀의 그루터기들 사이를 허겁지겁 걸어가며 말했다. 곧 수도원의 양떼가 와서 그 그루터기들을 먹어치울 테고, 그 배설물은 들판을 비옥하게 해줄 것이다. "저는 제가 가진 것을 그 사람에게 주면서 조용히 누워 있으라고 했어요. 날이 어두워지는 대로 와서 도와주겠다구요." "자, 거의 다 왔으니 앞장서게. 그 사람이 자네는 알아보겠지." 어스름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별들이 나타났다. 그 아름다운 팔월 저녁의 어스름은 앞으로도 한 시간 남짓 머물면서 뭇사람들의 시선으로 부터 그들을 가려줄 것이고, 그 사이에 그들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질 것이다. 고디스는 그 루터기 사이를 지나오면서 어린아이처럼 꼭 붙잡고 있던 캐드펠의 손을 놓고 키 작은 관목 들로 이루어진 성긴 덤불을 헤치고 들어갔다. 왼켠으로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검푸른 강물이 흘렀다. 그 낮은 맥박이 주위의 고즈넉한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 이따금 소용돌 이가 일면 물살이 은빛으로 번쩍였다. "쉿! 저예요...... 가니메데스! 우리 두 사람의 친구 도 왔어요!" 숲의 어둠 속에서 더욱 시커먼 형체가 움직이더니, 갸름한 하얀 얼굴과 금발이 리라 짐작되는 엉클어진 허연 머리가 솟아올랐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낯선 사람은 한 손 으로 풀밭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듯해 캐드펠은 얼마큼 마음이 놓 였다. 거친 숨소리로 미루어 온몸이 결리고 쑤시는 듯했으나, 치명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 았다. "고맙소! 나에게는 진심으로 친구들이 필요해요......" 젊은이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 했다. 캐드펠은 곁에 앉아 그의 몸을 자신의 한쪽 어깨에 기대게 했다. "딴 곳으로 옮기기 전에 우선 좀 알아보세. 다친 데가 어딘가? 움직이는 모양으로 보아하니 관절이 어긋나거 나 부러진 데는 없나본데." 캐드펠은 두 손으로 젊은이의 몸과 사지를 부지런히 만져보았 다. "근육에 상처를 좀 입었을 뿐입니다." 청년은 힘겹게 말하다가 캐드펠의 손이 어딘가 에 닿자 헉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많이 흘려 흔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강물 속으 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떠내려가서...... 그자들 은 제가 완전히......" 젊은이는 상대가 자신의 몸을 자신 있게 다루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음식과 포도주가 그대 몸에 피를 보충해 줄 걸세.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겠나?" 환자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네." 그러고서 환자는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다가 하마터면 곁에서 조심스럽게 거드는 두 사람 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안 되겠어, 가만 있게.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내 몸을 단단히 붙잡고 내 등뒤로 가서 두 팔로 목을 끌어안게나." 키는 컸지만 몸은 가벼웠 다. 캐드펠은 몸을 숙이고 굵은 두 팔로 가늘면서도 근육질인 허벅지를 감싸안고 일어서서, 젊은이가 편하게 업힐 수 있게 몇 번 몸을 뒤챘다. 젊은이의 옷에는 여전히 강물의 눅눅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젊은이는 맥없이 말했다. "무거우실 텐데요. 걸을 수 있는데......" "하자는 대로 잠자코 따르기나 하게. 고드릭, 먼저 가서 주위에 누가 없나 살펴봐라." 거기서 물방앗간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먼 하늘을 배경으로 물방앗간의 형체가 거무스레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아래로 흐르는 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거대한 둥근 바퀴에, 이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빈 자리가 보였다. 고디스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문 을 당겨 열고, 앞장서서 어둠 속을 더듬어갔다. 그녀는 마룻바닥 왼쪽의 좁게 갈라진 틈으 로 하얗게 소용돌이치면서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덥고 건조한 계절인데다가 올해 는 다른 해보다 수위가 낮은 편이었으나, 세번 강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벽 아래쪽 어딘가에 마른 자루들이 가득 쌓여 있을 테니, 그 근처를 더듬어서 찾아보려 무나." 캐드펠 수사는 고디스의 뒤에서 헐떡이며 말했다. 그들의 발밑에는 지난해 수확한 밀을 빻고 남은 왕겨들이 쌓여 있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며 뽀얀 가루 들이 피어올라 코끝을 간질였다. 고디스는 자루를 들고 더듬더듬 한구석으로 가서, 그것들 을 펼쳐 두툼하고 푹신한 잠자리를 만든 뒤에 자루 두장을 잘 개켜 베개를 만들었다. "이 제 이 다리 긴 왜가리를 자리에 앉힐 테니까 이 친구의 겨드랑이를 잡고서 날 좀 거들어주 렴. 야, 숙사에 있는 내 침대만큼이나 훌륭하구먼! 이제 가서 문을 닫아라. 불을켜서 이 친구 몸을 살펴보게." 캐드펠은 맷돌 위에 부싯깃 삼아 마른 왕겨를 한 움큼 깔고 불을 일 으켜, 미리 준비해온 실한 양초 토막에 붙였다. 초에 불이 붙자 그는 왕겨에 붙은 불이 번 져나가지 않도록 양초 밑부부느로 자근자근 눌러 끄고 나서 그 위에 초를 세웠다. 말랑말 랑한 밑부분이 굳어지면서 양초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자, 이제 좀 보세!" 젊은이는 벽에 편히 기대앉아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신을 보살필 책임을 캐드펠에게 순순히 양도했 다. 지친 얼굴이 땟국에 절어 있기는 했지만 젊은이는 타는 듯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실내가 어두워서 눈동자가 어떤 빛인지는 알 수 없었다. 큼직하고 잘생긴 입술 은 피로로 축 처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강물에 젖어 지저분하 게 헝클어진 머리칼은 평소에는 밀대처럼 밝은 황금빛이었을 것이다. "한쪽 어깨가 찢겼구 먼." 캐드펠은 부지런히 두 손을 놀려, 한쪽 소매가 마른 피로 한겹 덧입혀진 검은 겉옷을 벗겨냈다. "이 셔츠는 못쓰겠는데. 우선 새 옷들이 있어야 이 여인숙을 떠날 수 있겠어." "지금 당장은 돈을 치르기가 어렵겠는데요." 청년은 그 와중에도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상처자리에 들러붙었던 천이 떨어져나가자 아픔을 못 이겨 웃다가 말고 헉 숨을 몰아쉬었 다. "우리 치료비는 아주 저렴하다네. 그저 솔직하게 이야기만 하면 환대를 받을 수 있지. 물이 필요해, 고드릭. 강물이라도 없는것보다야 나을 테니, 물을 담아올 그릇이 있나 찾아 봐라." 그녀는 수차 밑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 가운데 반쪽밖에 안남았다고 해야 할 커다 란 물병 하나를 찾아냈다. 주둥이와 손잡이가 떨러져 나가자 그곳에 들른 손님이 그냥 버 리고 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물병을 겉옷 밑자락으로 싹싹 문질러 닦고는 물을 뜨러 갔 다. 아무래도 물방아에 물을 대는 수로의 물보다는 강물이 깨끗할 것 같아, 그녀는 강물이 흐르는 곳까지 가느라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 그 사이에 캐드펠은 청년의 허리띠를 풀고 구두와 바지를 벗기고는, 담요를 펴서 청년의 알몸을 덮어주었다. 오른쪽 허벅지 아랫부분 에 검으로 베인 것으로 짐작되는, 깊지는 않으나 꽤 길게 째진 상처가 나 있었고, 그것말고 도 하얀 알몸 곳곳에 퍼렇게 멍든 자국이 있었다. 목 왼쪽과 오른쪽 손목 바깥쪽에는 살갗 이 벗겨져나간 가는 자국들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아물 어 거무죽죽한 선처럼 뵈는 그 상처자국들은 다른 상처들보다 하루나 이틀전에 난 듯했다. "큰 문제는 없겠네. 자네는 최근에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삶을 산 것 같군그래." 청년은 아늑한 기분에 반쯤 졸면서 웅얼거렸다. "운이 좋아 목숨은 건졌지요." "누가 추격했나?" "왕의 군대지요...... 그밖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그럴까?" "그럼요. 하지만 며칠만 자나면 다 나아서 여러분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것에는 지금 신경 쓰지 말게. 내 쪽으로 좀 돌아누워봐. 그만, 됐네! 허벅지를 동여매야겠어. 상처자 리가 깨끗하고 이미 아물고 있네. 조금 아플 게야." 캐드펠의 말대로였다. 청년은 입을 약간 벌리고 온몸에 힘을 잔뜩 주기는 했으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캐드펠이 상처를 동여매고 청년의 몸을 담요로 덮어주었을 때, 고디스가 물병을 들고 왔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으므로 그녀는 두 손으로 물병을 안고 있었다. "이젠 어깨를 살펴보세나. 피가 그렇게 흐른 데가 바로 여기로군. 화살을 맞았군그래!" 그의 왼쪽 어깨 바로 아래의 팔뚝 부위를 화살촉이 비스듬히, 뼈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파고나가, 팔뚝의 살이 흉측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캐드펠은 상처에서 흘러나와 두텁게 들러붙은 피딱지를 살살 문질러 벗겨내고, 물 약을 적신 리넨 조각으로 상처자리를 단단히 눌렀다. "이렇게 하면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 지." 그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리넨 붕대로 청년의 팔을 단단히 동여맸다. "이제는 좀 먹 어야 해. 허나 너무 많이 먹지는 말게나. 지금은 지쳐서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할 테니까. 자, 여기 고기와 치즈와 빵이 있네. 일부는 남겨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먹도록 해. 아침에 일어나면 몹시 허기가 질 테니." 청년은 사정하듯 말했다. "물이 좀 남았으면 손과 얼굴을 씻고 싶군요. 하도 지저분해서!" 고디스는 청년 곁에 무릎을 끓고 앉아, 리넨 한 조각을 물병의 물에 적시더니, 청년의 손에 쥐여주는 대신에 자기가 직접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닦 아주었다. 고디스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넓고 반듯한 이마 위로 쓸어 넘겨주고, 엉긴 머리카 라글 세심하게 풀어주었다. 청년은 처음에는 놀란 기색이더니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 길에 잠자코 얼굴을 맡겼다. 이제 그녀 덕분에 가장자리의 땟국이 씻겨져나가 말끔해 보이 는 그의 두 눈은 점점 휘둥그래졌다. 그는 자기 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고디스의 얼 굴을 경탄이 담긴 눈길로 유심히 지켜보았다. 고디스는 그의 얼굴을 씻기면서 거의 말이 없었다. 탈진한 청년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내 늘어져버렸다. 그는 얼마 동안 힘없이 처진 눈꺼풀 사이로 자신을 구해준 두 사람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는 졸음에 겨워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를 애써 움직여보았다. "절 위해 두 분이 이렇게 까지 애쓰셨으니 제 이름을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캐드펠은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해도 늦지 않네. 우선은 푹 자는 것이 제일이야. 내 보기에는 곧 그렇게 될 듯하 구먼. 자, 이걸 마시도록 하게. 상처를 곪지 않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도 도움이 될 걸세." 그것은 그가 손수 빚은 약효가 강한 강장제였다. 그는 청년이 마시고 건네준 빈 약 병을 옷 안자락에 넣었다. "그리고 여기 잠에서 깼을 때 무료함을 달래줄 포도주병이 있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겠네." 고디스는 낮으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는!" 돌아서려는 순간에 캐드펠은 때마침 생각이 났다. "잠깐, 한 가지 더! 수중에 무기가 없더군. 검을 차고 있었을텐데." 청년은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버렸습니다., 강물 속에. 몸이 무거워 물에 자꾸 가라앉았거든요. 게다가 화살은 마구 날아들었죠. 화살을 맞은 것도 강물 속에 있을 때였어요...... 그 순간 물 속으로 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물에 빠졌다고 믿게 하려구요......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어요!" "알았네, 내일 이 야기하도록 하지. 자네에게 줄 만한 무기를 찾아봐야겠군. 자, 그럼 잘 자게!" 청년은 그들이 촛불을 끄고 문을 닫기도 전에 벌써 곯아떨어졌다. 그들은 바스락거리는 그루터기 사이를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머리 위로 궁륭처럼 걸려 있는, 검푸른 하늘 가장 자리의 생생한 푸른빛은 엷은 청록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수사님, 가니메데스가 누구예 요?" 고디스가 불쑥 물었다. "제우스의 술시중을 든 아름다운 소년이었지. 제우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아!" 고디스는 청년이 자신을 정말 남자로 보아주는 것이 즐거워 해야 할 일인지 유감스러워해야 할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헤베의 또다 른 이름이라고도 해." "아, 네! 그런데 헤베가 누구죠?" "헤베도 제우스의 술시중을 들었 고 제우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 허나 그쪽은 아름다운 처녀였더." "아!" 고디스의 감탄사에는 깊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 큰길을 건너 수도원으로 향할 때쯤 고디 스는 진지하게 말했다. "누군지 아세요?" "제우스? 이교도들의 신들 중에서 가장 신다운 존재......" "그 사람 말예요!" 고디스는 날카롭게 말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캐드펠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제게 색슨식 이름을 댔고, 머리색도 그쪽 계통이고, 왕의 군대에게 쫓기 고 있고...... 그 사람은 토롤드 블런드예요. 피챌런 어른의 보화를 황후님께 전하기 위해 니콜러스와 함께 떠났던 그 사람요. 물론 그 사람은 니콜러스의 억울한 죽음과는 아무 상 관도 없어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비열한 짓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을 거예요!" "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하기가 주저된다네. 특히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더 욱더. 그러나 그 청년이 비열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보증해줄 수가 있지. 자, 이제는 편히 잘 수 있겠지!" 부지런한 농부요 약제사인 캐드펠 수사가 아침기도 시간 한참전에 일어나 한 시간 가량 일하다가 다른 수사들과 함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상 례에 벗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날 새벽 일찍 옷을 걸쳐입고 밖으로 나 갔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전날 약속한 대로 자신이 데리 고 있는 소년을 깨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약제들이며, 먹을 것이며, 캐드펠이 기부 들어온 물품 중에서 살짝 빼돌린 겉옷과 바지를 챙겨들고 오두 막을 나섰다. 고디스는 전날 밤에 청년의 피묻은 셔츠를 들고 왔었다. 질 좋은 리넨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버리기가 아까워, 고디스는 잠들기 전에 그 셔츠를 깨끗이 세탁해두었다 가 새벽에 눈을 뜨자 화살촉이 스치면서 찢긴 자리를 말끔히 기워놓았다. 덥고 건조한 팔 월이라 정원의 덤불에 조심스럽게 펼쳐놓았더니 밤사이에 잘 말라 있었다. 그들의 환자는 이미 자루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걸신들린 사람처럼 열심히 빵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듯, 문이 열려도 숨으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찢기고 피로 얼룩진 겉옷을 어깨에 두르고 있긴 했으나 담요로 가려진 다른 부분은 알몸 이었다.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매끈한 가슴과 옆구리는 보기 좋게 미끈했다. 몸 여기저기 와 눈가에는 푸른 멍자국이 여전했지만, 간밤에 잘 잔 탓인지 꽤 회복된 듯했다. 캐드펠 수 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내가 이 상처를 손보는 동안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이 야기하게나. 다리의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잘 아물 텐데 어깨는 쉽지 않겠어. 고드릭, 내 가 붕대를 푸는 사이에 이 친구 뒤에서 지켜보고 있어라. 붕대가 착 달라붙어 잘 안 떨어 질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자네는 팔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고, 자......" 캐드펠 수사는 공정하게 자기 이야기부터 꺼냈다. "사람들은 나를 캐드펠 수사라 부르네. 데이위 상트처 럼 웨일스 출신이고, 대충 짐작했을지 모르겠네만 나는 세계 각처를 떠돌아다녔네. 그리고 이 친구는 자네도 들었다시피 고드릭이라고 하네. 나를 자네에게 데려왔지. 우리들을 믿게 나. 싫으면 할 수 없구." "저는 두 분 다 믿습니다." 새벽 여명의 불그레한 빛을 받아서인 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청년은 좀더 화색이 돌았다. 그의 눈은 갈색보다는 초록에 더 가까운, 덜 익은 개암열매 빛깔이었다. "저는 그저 믿어드리는 정도로는 보답이 되지 않을 만큼 두분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가능한 한 제가 처한 입장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 니다. 앞으로도 그러겠구요. 제 이름은 토롤드 블런드고, 오스웨스트리 근처의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그리고 전 속속들이 피챌런 어른 편 사람입니다." 그 순간 상처에 들러붙은 붕대가 떨어지지 않았다. 고디스는 청년의 몸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통증을 주지 않으려고, 접힌 부분을 살며시 들고서 상처에 달라붙은 붕대를 살살 당겨 떼어냈다. 토롤드는 애써 통증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만일 그 점 때문에 두 분이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면 저는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제가 가려던 곳으로요. 제가 감 당해야할 어려움을 두 분께 전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가도 좋다고 할 때 가야 돼요." 고디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앙갚음으로 상처에 아직 붙어있는 붕대를 휙 잡아뜯었다. 그러나 그 손짓조차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고디스는 약을 축인 천으로 상처자리를 눌렀다. "그리고 오늘은 그날이 아녜요." "그만. 이 사람이 말하게 가 만 내버려두어야지. 시간이 없으니까. 계속하게, 젊은이. 우리는 모드 편 사람들을 스티븐 에게 팔아넘길 사람들이 아니네. 스티븐 사람들을 모드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지도 않을 거 고.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 토롤드는 한 차례 깊은 숨을 몰아쉬더니,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니콜러스 페인트리라는 친구와 함께 이 성 으로 왔습니다. 그 친구 역시 피챌런 어른 편 사람이고, 그 친구 집안 영지는 저희 집안 영 지 바로 곁에 붙어 있습니다. 저희는 성이 함락되기 일주일 전에야 수비대에 가담했습니다. 공격받기 전날 밤에 회의가 열렸는데, 저희는 계급이 낮아 거기에 참여하지는 못했죠. 그 회의에서 다음날 피챌런 어른의 보화를 모드 황후께 전하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 마지막 날이 될 줄도 모르고서요. 니콜러스와 저는, 저희가 시루즈베리에 온 지 얼마 되 지 않아 시내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그것을 전달하는 사자로 뽑혔다는 소 식을 들었습니다. 저희 상급자들은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어서 도중에 피살당할지도 모른 다나요. 그 보화는 다행히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금제 식기와 그보다 좀더 많은 금화와 보석류가 좀 되었지요. 그 보화는 피챌런 어른과 그것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심복 한 사람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저희는 말을 타고 그 심복을 찾아간 뒤에 거기서 다시 그가 이끄는 곳으로 가서 보화를 싣고, 밤사이에 웨일 스로 빠져나가야 했습니다. 피챌런 어른과 오웨인 귀네드는 상호 협정을 맺고 친구가 된 사이였거든요. 오웨인 귀네드는 스티븐 편도 황후님 편도 아니고 웨일스를 위해서만 헌신 하는 분이고, 잉글랜드의 내전으로 아주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죠. 동이 채 트기도전에 왕의 군대는 공격을 개시했고, 우리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저 희는 당장 출발하라는 지시를 받고 떠났습니다. 저희가 가야 할 곳은 시내에 있는 한 가게 였습니다......" 청년은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는 것이 꺼림칙해 망설였다. "나도 아네." 캐드펠은 어깨 상처에서 밤새 배어나온 진물을 닦아내고 새 헝겊을 물약에 적시면서 말했 다. "에드릭 플레셔의 가게지. 그 사람은 내게 자기가 그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말을 들려 주었어. 그 사람이 자네들을 프랭크웰에 있는 자신의 헛간으로 안내하고서, 보화를 숨겨둔 데를 알려주고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 계속하게!" 젊은이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 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며 순순히 말을 이었다. "저희는 날이 어두어지자마자 말을 타고 떠났습니다. 프랭크웰의 들판에서 숲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숲에는 가축지기의 오두막이 한 채 있어요. 들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 가장자리를 따라 길이 죽 나 있는 곳에요. 저희가 바로 그 길을 따라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니콜러스의 말이 휘청 했습니다. 몹시 비틀거리기에 제가 말에서 내려 살펴봤습니다. 알고 보니 마름쇠에 찔렸더 군요. 뼈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캐드펠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마름쇠라구? 전쟁 터에서 멀리 떨어진 그런 숲길에?" 날카로운 못 네 개로 되어 있어 아무렇게나 내던져도 언제나 못 하나가 하늘을 향하므로, 효과적으로 기병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잔혹한 비밀 병기가 무슨 이유로 숲 속의 좁은 오솔길에 떨어져 있었다는 말인가? 토롤드는 자신 있게 말했다. "네, 마름쇠였습니다. 그저 말이 비틀거리는 것만 보고서 단정한 게 아닙니다. 분 명히 마름쇠가 발의 발굽에 박혀 있었고, 저는 그것을 비틀어 빼냈어요. 하지만 그 불쌍한 짐승은 다리를 심하게 절었죠. 걸을 수는 있었습니다만 멀리 갈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람과 무거운 짐을 싣고서는요. 마침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제가 아는 농가가 있어 서, 저는 니콜러스의 말을 그 집의 다른 말과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좀 억울한 교환이긴 하지만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희는 짐도 내리지 않고 그냥 가고 있었 는데, 니콜러스가 부담을 덜어주겠다면서 말에서 내리더니, 자기는 숲 속에 있는 오두막에서 절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그 농가로 갔죠. 그 집은 숲 오른쪽에 있 습니다. 저희가 있던 곳에서는 서쪽이죠. 그 집주인은 울프라는 사람인데, 제 외가 쪽으로 먼 친척뻘됩니다. 저는 거기서 저희 말보다 훨씬 못한 새 말을 한 마리 얻어서 니콜러스의 짐을 옮겨 싣고 되돌아왔습니다." 토롤드는 그때를 회상하고 새삼 긴장하며 말했다. "그 오두막 쪽으로 다가가면서 저는 니콜러스가 밖을 내다보고 있으리라 예상했습니다. 제가 오면 금방이라도 말을 탈 준비를 하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몹시 불안해졌습니다. 사방이 쥐죽은듯이 고요해서, 제가 조심스럽게 다가 가긴 했어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얼마든지 그 친구 소리를 들을 수 있었거 든요. 그런데 그 친구는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제게 뭐라고 소리치지도 않았습니다. 그 래서 저는 오두막에 더 다가가지 않고 발을 돌려 오솔길로 들어섰어요. 거기서 말을 내려 두 마리의 고삐를 한데 합쳐 금방 풀 수 있게끔 나무에 살짝 묶어놓았죠. 홱 잡아당기면 그냥 풀어지게요. 그렇게 해놓고 저는 오두막으로 갔어요." 캐드펠은 붕대를 감으면서 물 었다. "사방이 완전히 어두웠나?" "네, 아주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전 계속해서 어둠 속에 서 움직였기 때문에 그런 대로 주위를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두막 안은 칠흑 같이 캄캄했습니다. 벽 쪽에 난 문이 반쯤 열려 있기에, 저는 귀를 바짝 세우고 아무 말없 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오두막 중간쯤에서 그 위로 엎어진 겁니다. 니콜러스의 몸 위로요! 그때 엎어지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토롤드는 심각하게 말을 있다가, 자신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틀림없이 자신보다 몇 살 어린 가니메데스를 문득 꺼림칙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별로 듣기 좋은 얘기가 못 되는데 요." 그의 눈빛은 고디스의 어깨 너머 캐드펠 수사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캐드펠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마음놓고 이야기하게나. 이 친구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일 에 더 깊숙이 연루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쫓아내려 한다면 이 친구가 가만있지 않을 걸세. 시루즈베리에서 일어난 이 사건과 관련된 것 치고 듣기 좋은 얘기가 뭐 있겠나. 허나 말하 다보면 뭔가 건질 수 있겠지. 자네는 자네가 알고 있는 부분을 이야기하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을 이야기할 테니까." 고디스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두 사람에게 온 신경 을 쏟고 있기는 했지만, 현명하게도 그 대화에는 일체 끼여들지 않았다. "그 친구는 죽어 있었습니다. 엎어지면서 제 입과 그 친구 입이 맞닿다시피 했는데, 숨을 쉬지 않는 겁니다. 쓰러지면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그 친구를 끌어안게 되었죠. 그런 데 그 친구는 한 무더기의 넝마 같더군요. 바로 그 때 제 뒤에서 마른 풀이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실내에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도요. 저는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습니 다. 저는 공포에 질려서......" "잠깐 실례하겠네!" 캐드펠은 물약에 적신 새 헝겊으로 진물 이 나는 상처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게야. 자네 친구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게나. 그 친구는 분명 하느님과 함께 있을테니까. 어제 수도 원 안에 그 친구를 매장했다네. 왕자처럼 묻혔지. 자네 친구를 살해한 자가 문 뒤에서 달 려들었을 때 자네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벗어났겠구먼." "네, 그랬습니다." 청년 은 붕대가 조여들자 아픔을 못 이겨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놈은 분명히 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마른 풀더미에서 나는 소리가 그놈이 달려든다는 것을 예고해준 셈이죠. 사람 은 누가 자기 머리를 공격하면 막으려고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쳐드는 법인데, 저도 무의식 중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 순간, 놈의 가는 줄이 제 목과 손목을 휘감았어요." 청년은 변 명하듯 말을 이었다. "저는 현명하거나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저 겁에 질린 나머지 팔을 휘 둘렀는데, 그 바람에 줄이 놈의 손에서 퉁겨져나갔습니다. 그래서 놈은 어둠 속에서 제 몸 위로 쓰러졌죠. 수사님은 제 말을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놈이 우연히 쓰러지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자네의 말을 뒷받침해주는 정황증거들이 있네. 그러니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는 말게나. 그 뒤로는 서로 맨손으로 붙었 으니 그 전보다는 좀더 승산이 있었겠군. 그래, 어떻게 해서 그자의 손에서 벗어났나?" "제가 힘이 세고 용감해서라기보다는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건초 속에서 끌어안고 뒹굴면서 서로 상대의 목을 조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순전히 감각에 의해서 싸운거죠. 시공을 가늠할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싸웠는지는 알 수 가 없지만, 지금 생각하기에는 불과 몇 분 정 도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도 낡아서 조각조각 떨어져나갈 판인 여물통 비슷한 물 건이 벽 쪽에 붙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싸움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놈과 뒹굴며 싸우고 있는데 느슨하게 빠져 있는 그 판자쪽 하나가 제 머리에 닿기에, 그걸 두 손으로 움켜잡고 놈을 후려갈겼거든요. 놈은 쓰러졌죠.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의식을 잃었어요. 저는 그 틈을 이용해 그곳을 빠져나와 말의 고삐를 풀고는, 쫓기는 산토끼처럼 허겁지겁 서쪽으로 달아났죠. 제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을 할 사람은 저 말고도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니콜러스의 복수를 하기 위해 거기에 좀더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토롤드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때 제가 피챌런 어른이 제게 맡긴 임무를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요. 그 이후로는 줄곧 그 임무를 염두에 두고 있었죠. 어쨌든 저는 그 순간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쳤 습니다. 저는 놈이 자기를 도와줄 다른 자들을 숲 속에 매복시켜놓지나 않았을까 싶어 몹 시 두려웠습니다. 그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캐 드펠은 붕대를 감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자책할 필요없네. 올바른 판단은 부끄러워 할 게 아니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니까. 자네 계산에 따르자면, 자네는 꼬박 이틀 동안 애초에 출발한 지점에서 거의 제자리걸음을 한 셈일세 그려. 왕이 이곳과 웨일스 사이에 많은 병사들을 풀어놓았던 모양이지? 그리로 가는 길목길목 마다에 말일세." "벌떼만큼이나 많았습니다! 저는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빠져나갈 곳도 없는 데서 하마터면 순찰병들과 맞부딪칠 뻔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죄다 멈춰 세우는데 말 두 마리와 보화를 가진 제가 무슨 수로 빠져나가겠습니까? 저는 부득이 옆의 숲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무렵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는 잠자코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구요. 밤이 오자 이번에는 남쪽 길로 향했습니다만, 그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길을 벗어나서 숲을 뚫고 나가면 강물이 휘돌아나가는 곳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러느라 어영부영 그 밤을 다 보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낮에는 강가 언덕의 숲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밤이 오자 다시 출발했죠. 바로 그때 적병 너 덧이 저를 발견했습니다. 급히 달아나려 했지만 달아날 곳을 딱 한 군데, 강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저를 에워쌌고, 저는 그 덫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병사들이 포위망을 흐트러트려 추적을 따돌리려고 말 두 마리에 걸어 두었던 안장주머 니들을 들어내고 말들을 풀어 내달려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꽤 근접해온 병사가 제 수법을 눈치 챘는지, 말들을 쫓아가지 않고 곧바로 제게 달려들었죠. 그 병사는 검으로 제 허벅지 를 베더니 말들을 쫓아가는 다른 병사들을 소리쳐 불렀어요. 이제 빠져나갈 길은 딱 하나 뿐이었죠. 저는 안장주머니들을 든 채로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원래 수영을 잘하는 편이지만 짐들의 무게 때문에 물에 떠 있기도 벅찰 지경이었어요. 저는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아래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때 병사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어요. 날이 어둡고 거리 가 꽤 떨어져 제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물 속에 움직이는 게 있을 때는, 왜 강물 이 하얗게 반짝거리잖습니까? 그 때문에 어깨에 화살을 맞게 된 겁니다. 저는 급한 김에 물 속으로 뛰어들어 될 수 있는대로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었고, 그 사이에 꽤 멀리 떠내려 오게 되었습니다. 세번 강은 여름철에도 물살이 빠르니까요. 병사들은 얼마동안 강둑을 따 라 쫓아오면서 두세 대의 화살을 더 쐈습니다. 하지만 그 즈음 병사들은 제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판단했나봅니다. 저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강둑으로 헤엄쳐가 한 발로 강바닥을 짚고 서서,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가며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하지만 강물 속을 벗어나지는 않았죠. 저는 다리에도 병사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리를 지날 때까지는 감히 뭍으로 오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쯤 지난 뒤에 강둑을 넘어 덤불 속으로 기어들어간 것까지는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에는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수도원 사람들이 수확하러 왔을 때 잠깐 정신이 든 것밖에는요. 그때 함부로 몸 을 움직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얼핏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드릭이 저를 발견했죠. 이것이 제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진상입니다." 토롤드는 그렇게 이야기를 맺고 캐드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캐드펠은 부드럽게 말했다. "진상의 전부는 아닌 듯한데. 고드릭은 자네에게서 안장주머니를 보지 못했어." 캐드펠 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줄곧 자신을 응시하는 청년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니, 뭐 신경 쓸 것 없네. 더 캐묻지 않을 테니까. 자네는 피챌런 씨의 보화를 책임질 유일한 사람이고, 이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자네의 문제야. 참고로 이 야기하자면 자네 얼굴에는 임무수행에 실패하지 않았다고 씌어 있네. 마음을 좀 편하게 해 주려고 하는 말인데, 시내에서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피챌런 씨와 애드니 씨는 생포되지 않 고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하네. 이제 오후까지 여기 혼자 있어야겠네. 우리 도 할 일이 있으니까. 일이 끝난 뒤에 잘 있나 보러 오지. 우리 둘 다 오거나 둘 중의 하 나만 오거나 간에. 여기 먹을 것과 마실 것, 옷가지가 있네. 이 옷들이 잘 맞았으면 좋겠 구먼. 오늘은 얌전히 누워 있게나.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으니까." 고디스는 캐드펠이 내려놓은 잘 개켜진 옷들 위에 빨아서 꿰맨 셔츠를 올려놓고 캐드펠을 따라 나가려 했으나, 토롤드의 얼굴에 떠오른 놀란 표정을 보고 쑥스럽기도 하고 흐뭇하기 도 한 기분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토롤드는 감탄한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원래는 피로 얼 룩져 있던 길게 찢어진 부분을 말끔히 꿰매놓은, 깨끗이 세탁된 셔츠를 내려다보더니 나직 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맙소사! 누가 이렇게 했죠? 수도원 안에도 전문적인 여자 제봉사 가 있나요? 아니면 두 분이 기도를 하셔서 기적을 이루어내셨나요?" "그거? 고드릭의 작 품일세." 캐드펠은 장난기 어린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귀까지 새빨게진 고디스를 놓아두고 먼저 아침 햇살 속으로 나갔다. "수도원에서는 말을 베고 강장제 빚는 법만 가르쳐주는 게 아니에요." 고디스는 우쭐해서 말하고 도망치듯 캐드펠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수도원으 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토롤드의 말을 되새겨보면서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녀와 만나 기 전에 토롤드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었다. 처음에는 살인자의 줄에, 다음에는 스티 븐 왕의 순찰대에게, 그 다음에는 강물에, 그 뒤로는 숲 속에서 부상 때문에. 신의 은총이 그를 보살피고 있으며 그녀자신을 그를 위한 도구로 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 음속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 있었다. "수사님은 그 사람을 믿으세요?" "믿지. 그 사람은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거짓말은 안 할 사람이야. 아직 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제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이런 말씀을 드렸잖아요. 니콜 러스와 함께 출발한 동료가 그를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제일 쉬웠을거라구요. 마음만 먹으면 아주 간단하잖아요! 하지만 수사님은 어제 그러셨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한 게 아니라구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그거야 아주 간단하지! 그 사람의 목과 손목에 난 목조르는 줄 자국, 그 가는 상처자국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나? 그 사람은 자기 친구에 이어 살해당할 뻔 한게야.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네. 그 사람이 우리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실이야. 허나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겠지. 우리는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위해서 그것을 밝혀내야 하네. 이따가 오후에 물약과 허브주들을 살펴보고 난 뒤에 마음이 내키면 그리로 가서 그 친구와 함께 있어도 좋네. 나도 일이 끝나는 대로 그 리로 갈 테니까. 그 전에 프랭크웰에서 조사해봐야 할 게 몇 가지 있어." 게임이 시작되다 사루즈베리 시내를 지나 다리를 건너가면 프랭크웰에 닿는다. 시루즈베리의 서쪽 다리를 지나 교외로 이르는 길은, 정착촌을 둘러싼 밭들을 뒤로하고 서쪽으로 똑바로 나아가면서 완만한 언덕길이 된다. 처음에는 세 번 강을 굽어보는 높은 언덕을 오르는 외줄기 길이지 만 이내 두 갈래로 갈라지고, 그 중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은 곧 다시 갈라져, 그렇게 해서 세 가닥의 길이 웨일스로 향하게 된다. 캐드펠 수사는 성이 함락된 날 밤에 니콜러스와 토 롤드가 택한 길, 즉 세 길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길로 들어섰다. 그는 시내에서 에드릭 플레셔의 가게에 들러 두 명의 젊은 사자들 중에서 그래도 한 사람은 살아 남아 책임진 물 건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줄까도 생각했으나 이내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 다. 아직 토롤드가 안전한 처지에 놓여 있지 못하므로 그가 무사히 떠날 때까지는 그의 소 재지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터였다. 게다가 그곳은 시내여서 그의 적들이 엿들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중에 에드릭과 페트로닐라와 좋은 소식들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가 오리라. 그 길은 토롤드가 이야기한 울창한 숲 근처에서 잔풀이 깔린 좁은 오솔길로 바뀌어, 숲 가장자리를 따라 죽 이어졌다. 나무들 사이로 경작된 밭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숲 속으로 좀더 깊이 들어간 곳에 목재로 대충 지어진 야트막한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시체를 말 등에 싣고 성 밑의 도랑까지 나르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세 번 강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바로 맞은편에 성이 보이는 이곳에서도 들판을 둥그 렇게 휘돌아가고 있었다. 살인자는 성 밑에 이르려면 강을 건너야 했을 테지만, 강 한가운 데 있는 섬이 물살을 완만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요즘 같은 건기에는 얼마든지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거기서 성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으니까 날이 새기 전에 충분히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길을 좀더 가니 오른쪽으로 토롤드가 말을 바꾼 울프의 땅이 나타났다. 울프의 집은 그 길에서 사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울프는 밀밭의 이삭 줍기에 바빠 낯선 수사와 말할 기분이 아닌 듯했으나, 토롤드의 이름을 대면서 그가 믿는 사람이 여기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이내 태도가 달라졌다. "네, 토롤드가 다리를 절고 있는 말을 끌고 와서 다른 말과 바꿔달라고 하기에 제가 가진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놈 을 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래도 이익을 본 쪽은 접니다. 토롤드가 남겨놓고간 말은 피챌런 어른의 마구간에서 나온 놈이니까요. 아직도 다리를 절긴 합니다면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 다. 한번 보시렵니까? 말에 딸려 있던 근사한 마구들은 잘 감춰놓았죠. 남들이 보면 제가 말을 훔쳤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더 고약한 방법을 써서 빼앗아 왔다고 오해할지도 모르니 까요." 키가 크고 밤색에 흰 털이 섞인 말은, 귀족의 소유임을 알리는 근사한 마구들을 채 워놓지 않았어도 농부의 것이라고는 생각 하기 힘든 훌륭한 말이었다. 말은 여전히 한쪽 앞다리를 절고 있었다. 울프는 캐드펠에게 다친 곳을 보여주었다. 캐드팰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토롤드의 말로는 마름쇠에 다쳤다고 하던데. 이런 곳에 그런 것이 떨어져 있었다 니 참 이상한 일이오." "하지만 마름쇠가 맞습니다. 저도 직접 봤거든요. 그 다음날 제가 그 길로 가서 샅샅이 살펴보고 여러 개 주웠습니다. 우리집 가축들이 그 길을 자주 지나다 니는데, 잘못해서 밟으면 곤란하니까요. 누군가가 그 길의 제일 좁은 지점에다 마름쇠를 열 두어 개쯤 골고루 뿌려놓은 겁니다. 그게 다 그 친구들을 오두막있는 데서 멈추게 하려는 수작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임무를 띠고 있는지, 어느 길로 가려고 하는 지 미리 알고 있던 자가 사전에 덫을 설치해놓고 숨어서 그 사람들이 걸려들기를 기다렸던 게로군요." 울프는 분개했다. "왕이 그 계획을 눈치 채고 은밀히 부하들을 보내, 그 친구 들이 갖고 있던 것을 빼앗으려 했던 겁니다. 왕 역시 상대편만큼이나 돈이 궁하니까요." 그러나 캐드펠은 숲 속에 있는 오두막으로 되돌아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껏 파악 한 모든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이것은 왕이 파견한 병사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혼자서 그 보화들을 차지하기 위해 꾸민 음모다. 만일 그 누군가가 왕을 밀사였다면 혼자 움직이지 않고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했을 테니까. 모든 일이 그자의 뜻대로 성사 되었다면 그 보화가 들어갈 자리는 스티븐 왕의 금고 속이 아니었겠지. 모든 정황으로 보 아 그날 밤 오두막에는 분명 제3의 인물이 있었다. 토롤드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거듭 밝혀진 일이었다. 마름쇠들은 정말로 길에 골고루 깔려 있었고, 두 마리 말 중에서 최소한 한 마리는 발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계략은 제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어쩌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헤어지게 되었으므 로, 살인자는 먼저 한 사람을 처치하고 여유 잇게 다른 한 사람마저 처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까. 캐드펠은 오두막 주변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곧장 오두막 안으로 들 어가지는 않았다. 오두막에서 좀 떨어진 여기 어딘가에서 토롤드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길 로 되돌아가, 쉽게 달아날 수 있게끔 말들의 고삐를 느슨하게 묶어놓았다. 아마 제3의 인물 도 이 근처 어딘가에, 숲속으로 좀더 깊이 들어간 으슥한 곳에, 말 한 마리를 대기시켜놓았 을 터였다. 아직도 그들의 자취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이후 비가 오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이 이 숲속을 돌아다녔을 성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도 시루즈베리의 주민들은 억지로 끌려나오지 않는 한은 자기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왕의 순찰병들은 주로 빠르게 말을 달릴 수 있는 넓은 길로 다녔다. 시간이 꽤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캐드펠 수사는 그 자취들을 찾아냈다. 그 하나는 말 한 마리가 풀을 뜯어먹던 자리였다. 지대가 우묵해서 비가오면 물이 괴는 마른진흙 땅과 무른 땅에 발굽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질 좋은 편자가 박힌 큼직한 굽자국들로 보아, 틀림없이 혈통좋 은 말이었다. 말 두 마리가 대기하고 있던 흔적은 오두막 서쪽의 숲속에 있었다. 낮게 드 리워진 나뭇가지에, 급히 고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껍질이 벗겨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풀 이 벗겨져나가 맨땅이 드러난 곳에서는 서로 다른 말 두 마리의 발굽자국을 식별할 수 있었 다. 캐드펠 수사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대낮의 밝은 빛 덕분에 일하기는 수월했다. 실내였지만 문을 활짝 열어두면 꽤 밝은 편이었다. 살인자가 그곳에서 희생자를 기다렸 으니 틀림없이 자취가 남아 있을 터였다. 오두막 안에는 지난 겨울에 햇빛이 잘 드는 숲 가장자리의 공터에서 베어낸 마른풀이 가득했다. 원래는 뒷벽에 가지런히 기대어 쌓여 있 었을 테지만, 지금은 마치 강풍이 집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흙바닥에 마구 널려 있었다. 토롤드가 헐거운 판자 하나를 뽑아냈다던 낡은 여물통은 벽에 기우뚱하 게 기대어 서 있었다. 바닥에 널린 마른풀들 가운데는, 바싹 마르긴 했으나 여전히 향기를 내뿜는 허브들이 심심찮게 섞여 있었다. 그 중에는 가시가 있어 어디에나 잘 달라붙는 거 위풀도 있었다. 캐드펠 수사는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교살한 줄에 딸려서 목 살 깊숙이 끌 려들어가 박힌 거위풀 줄기와, 토롤드의 어깨에 난 흉측한 상처를 떠올렸다. 그 상처를 치 료하는 데는 거위풀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숲 가장자리 공터를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곳에는 거위풀이 꽤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공명정대한 정의는 작년에 수 확된 풀 한 줄기로 한 사람이 살해당한 일에 관심을 갖게 하더니, 올해 자란 그 풀로는 죽 은 이의 친구의 상처를 달래고 치료하게끔 하고 있었다. 안에서 벌어진 육박전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모습을 제외하고는, 오두막에는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문 뒤쪽 결이 거친 목재들에는, 군청색 모직 옷에서 떨어져나온 실오라기들이 군 데군데 붙어 있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문 뒤에 바싹 붙어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작은 핏덩이가 묻어 있는 마른 토끼풀 이파리도 찾을 수 있었다. 캐드펠은 살인자가 목을 조른 흉기를 찾으려고 풀더미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살인자가 다시 찾아내 가 져갔거나 어느 구석엔가 깊게 파묻혀 있는 것이리라. 캐드펠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여물 통이 있는 곳에서부터 문간까지 바닥을 훑으며 뒤로 기어갔다. 거의 포기하려 할 즈음 그 의 몸을 지탱하던 한 손에 단단하고 날카로운 어떤 것이 닿았다. 캐드펠은 기겁해서 얼른 손을 떼며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을 조사하러 온 호기심 많은 수사를 다치 게 하려고 또다시 마름쇠를 던져놓기라도 한 것처럼, 건초로 얇게 덮인 흙바닥에 뭔가가 반 쯤 박혀 있었다. 그는 다시 허리를 숙여 그 자리의 건초를 쓸어내고 그것을 잡아비틀었다. 단단하고 싸늘한 감촉을 주는 물체가 쉽게 빠져나와 그의 손에 들어왔다. 바로 뒤의 문 가에 들이치는 햇살에 그 물체를 갖다대자 작은 노란 태양이 반사되면서 눈부신 빛을 발했 다. 캐드펠 수사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오후의 환한 햇살이 넘실거리는 마당으로 나갔 다. 대충 다듬은 커다란 보석이었다. 은박을 입힌 독수리 발톱이 움켜쥔 돌능금만한 황옥. 보석을 쥔 발톱은 원형 그대로였으나 발목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잘 세공 된 은장식품의 끝부분인 듯했다. 장식핀의 끄트머리일까...... 아니, 장식핀의 일부로 보기에는 너무 크다. 단검자루의 끝부분?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작업할 때 쓰는 칼이 아니라 귀족의 단검 이었을 것이다. 이 보석은 길고 끝이 둥그스름한 단검자루에 박혀 있었을 테고, 아마도 자 루와 날 사이에 있는 가로대에도 이것과 조화를 이루는 좀더 작은 황옥들이 박혀 있었으리 라. 그렇게 자루에 박혀 있다가 떨어져나온, 세공된 면이 뚜렷이 보이는 누런 덩어리는 이 제 그의 손에 쥐어 있었다. 한 사람은 목이 졸린 채 죽음의 고통 속에서 나동그라졌고, 다 른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뒹굴면서 격투를 벌였다. 그 셋 중의 어느 하나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차고 있던 단검자루가 다져진 흙바닥에 닿았고, 그 서슬에 단검자루 장식에서 가 장 약한 부분인 그 황옥이 떨어져 나왔을 터였다. 주인은 그것이 떨어져나간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테고. 캐드펠은 허리띠에 달린 작은 주머니 속에 조심스럽게 황옥을 집어넣고 거 위풀을 찾으러 나섰다. 그는 햇살이 미치는 숲 가장 자리의 무성한 풀밭에서, 거위풀 줄기 들이 자라고 있는 각진 땅뙈기를 발견했다. 잠시 후에 캐드펠 수사는 옷자락에 수많은 거 위풀 씨를 매달고 수도원으로 향했다. 고디스는 수사들이 오후 일을 하러 사방으로 흩어지자마자 수도원을 살짝 빠져나와서, 조 심을 하느라 부러 길을 이리저리 돌아 게이에 끝에 있는 물방앗간으로 갔다. 그녀는 과수 원에서 딴 잘 익은 자두 몇 알과 새로 구운 빵 반 덩어리, 그리고 포도주가 담긴 플라스크 를 들고 있었다. 환자는 빠르게 입맛을 찾고 있었다. 그가 먹성 좋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녀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녀는 곤경에 빠진 그를 자신이 발견했다는 이 유로 그에게 보호자와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토롤드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서, 다리를 쭉 뻗고 발목을 서로 엇갈린 편안한 자세로 따뜻한 나무 벽에 기대어 자루 침대 위 에 앉아 있었다. 바지는 그런대로 잘 맞았다. 겉옷 소매는 좀 짧은 듯했지만. 안색은 아 직 파리했으나, 전체적으로 놀라우리만치 생기 있어 보였다. 다친 곳의 통증이 가시지 않아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가 겉옷을 걸치느라 꽤 고생을 했으 리라는 생각에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그쪽 어깨를 편하게 해줘야 하니까 팔을 소매에 끼우려고 애쓰지 마세요. 편하게 해주지 않으면 잘 낫지 않는다구요." "난 아주 좋아. 게다가 곧 떠나야 할 사정이 생기면 어떤 불편이라도 감수해야 하지 않 겠나. 어깨 상처는 곧 아물 거야." 토롤드는 건성으로 말했다. 그는 상처가 아니라 다른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고드릭, 오늘 아침에는 물어볼 틈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캐드펠 수사님이 니콜러스를 수도원에 매장했다는 이야기, 그게 사 실인가? 수도원 사람들이 어떻게 그 친구를 발견했지?" 그는 그들의 말을 의심해서라기보 다는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고디스는 토롤드 곁에 앉았다. "모두 캐드펠 수사님 덕분이었어요. 시신이 있어야 할 수효보다 한 구 더 많았어요. 캐드펠 수사 님이 그 점을 무심히 넘기시지 않고 자세히 알아보셔서, 다른 시신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시 신 한 구를 찾아내셨죠. 그 뒤로 수사님은 그 누구도 그 일을 그대로 넘기고 지나치게 하 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해서 왕도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죽은 사람의 원 한을 반드시 풀어주라고 지시하게 된 거죠. 토롤드 씨의 친구를 위해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캐드펠 수사님 한 분뿐이에요." "오두막에 있었던 자가 누구든 간에 나는 그자에게 별다른 상처를 입히지 못했어. 그저 잠시 정신만 잃게 했을 뿐이지. 내가 걱정하 는 것은 바로 그 점이야. 놈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감쪽같이 시신을 처리해버릴 정도로 유능 하고 교활한 놈이거든." "하지만 캐드펠 수사님을 속여넘길 정도로 영리하진 못해요. 모든 인간의 영혼은 죽음의 자리에 처하면 그 신원이 밝혀져야 하는 법이죠. 니콜러스 씨는 적 어도 자신의 이름을 찾았고 적절한 의식을 거쳐 품위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어요." "그 친구가 그대로 방치된 채 참혹하게 썩어가거나, 제 이름도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속에 뒤섞여 흙에 묻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어서 여간 기쁘지 않아. 물론 다른 사람들도 우리 동지들이었고, 그런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지만. 우리가 성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우리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을 거야. 왕의 병사들에게 붙잡히면 나 역시 마찬가 지일테구. 그런데 스티븐이 자기 일을 대신 해준 살인자를 체포하라고 지시하다니! 세상 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고디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 두 가지 경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왕은 자신이 직접 지시해서 처형된 아흔 여덟 구의 시신에 대한 책임은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재가도 받지 않고 누군가가 제멋대로 살해한 아흔아홉번째 주검에 대한 책임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왕은 그 사람을 죽인 방법을 혐오했어요. 그리고 자신이 그 사건의 공범자로 끌려들어 가게 된 것에 분개했구요. 앞으로 그 누구도 토롤드 씨를 잡지 못할 거예요." 고디스는 단 호하게 말하더니 겉옷 안주머니에서 자두를 꺼내 담요 위에 던졌다. "여기 빵보다 더 달콤 한 게 있어요. 드세요!" 그들은 다정하게 앉아서 자두를 먹으며, 그 씨들을 마루판자사이 에 난 틈으로 강물에 떨어뜨렸다. 한참만에 토롤드가 입을 열어 담담하게 말했다. "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고, 이제는 나 혼자서 그 일을 해야 해. 만일 내가 고드릭과 캐드펠 수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 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야. 그런데 이제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할 수 없이 떠나야 한다니 서글프기만 하군. 고드릭과 수사님이 내게 해준 일들은 결코 잊지 못할 거야. 어쨌든 난 웬만큼 몸이 회복되면 바로 떠나야 해. 내가 가는 편이 두 사람 신상에도 이로울 테니까. 좀더 안전해질테구." 고드릭은 잘 익은 자줏빛 자두를 깨물며 말했다. "누가 안전해요? 어디에서요?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어요." "아무튼 위험에도 정도가 있게 마련이잖아. 게다가 나는 할 일이 있는 사람이고, 지금 당장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만큼 건강해." 그녀는 고개를 돌려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가 떠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이제 곧 떠 나겠다고, 그녀의 보살핌과 그녀의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캐드펠 수사라는 든든한 동지가 있었다. 그녀는 동지의 권위를 빌어 엄하게 말 했다. "몸이 완전히 낫기도 전에 어딘가로 가려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봐요. 현명하게 생각 하라구요.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여기 있어야 해요. 오늘이나 내일은 어림 도 없어요. 그럴 생각이라면 진작에 마음을 고쳐먹는 편이 좋을걸요!" 토롤드는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는 듯 입을 딱 벌리더니, 거친 나무 벽에 머리를 기대로 유쾌하게 웃었다. "꼭 우리 어머니처럼 말하는군. 내가 마상시합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지. 고드릭, 난 너를 아주 좋아해. 물론 어머니도 좋아 했지. 하지만 난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했어. 난 건강하고, 힘도 있 고, 능력도 있어, 고드릭. 그리고 나는 너나 수사님의 지시를 받기에 앞서 이미 다른 데서 지시를 받은 사람이야. 난 가야 돼. 고드릭도 나 같은 입장이라면 그 괄괄한 성미에 진작 여기를 떠나고도 남았을걸." 고디스는 사납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난 분별이 있는 편이니까. 무기도 없고 말도 없는 주제에 여기서 달아나봤자 뭘 하겠다구요? 토롤드 씨는 이미 말들을 놓아주었어요. 추적을 따돌리려구요. 우리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가봤자 어디까지 가겠어요? 토롤드 씨가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해서 피챌런 어른이 고마 워하실 것 같아요? 아니, 이런 얘기는 할 필요도 없지." 고디스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몸이 성치 못하니까 여기를 빠져 나가봤자 강가까 지도 못 살 거예요. 처음에 이리로 왔을 때처럼 캐드펠 수사님한테 업혀서 되돌아 와야 할 걸요." "아, 과연 그럴까, 우리 꼬마?" 토롤드 눈은 장난기로 반짝였다. 그는 자신이 밖으 로 나가보았자 실패로 끝나 수치스런 일만 당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그 귀여운 철부지의 수 작이 재미있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해서 심각한 걱정거리들을 잠시 잊었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 "굶주린 고양이만큼이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두 씨를 판자 사이의 틈으로 패대기치듯 내던졌다. "열 살짜리라도 넘어뜨릴 수 있을걸요!" 그렇게 생각해? 정 말로?" 토롤드는 옆으로 몸을 굴려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내가 얼마나 튼튼한지 직접 보여드리지요. 고드릭 선생!" 그는 순수한 즐거움에 호탕하 게 웃어젖혔다. 그는 순간 온몸의 근육에 힘이 솟았다. 가까운 친구와 뒹굴면서 장난을 치 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요 친구는 약간 버릇을 고쳐줄 필요가 있었다. 토롤드 가 다친 팔로 소년의 양어깨를 휘감아 젖히자 그 거만한 꼬마도깨비는 짤막한 비명을 내지 르면서 벌렁 넘어졌다. "너 따위는 한 손만 갖고도 해치울 수 있어, 요 귀여운 꼬마야!" 토롤드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치고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 조금 뒤로 물러서며 왼쪽 손바닥으로 헐거운 겉옷에 감싸인 상대의 가슴을 찍어눌렀다. 그 순간 대번에 진상을 깨닫 고 소스라치게 놀라 잽싸게 손을 떼었다. 고디스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오른손으로 그의 귀 를 후려갈겼다. 그들은 얼른 서로 떨어져서 구겨진 자루들을 사이에 두고 일 미터쯤 떨어 져 앉아,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침묵과 정적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들은 일 분 남짓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서로를 곁눈질했다. 분노에서 죄 책감 섞인 연민의 표정으로 살며시 바뀌어 가는 그녀의 옆얼굴은, 우아하면서도 활달하고 지극히 여성적이었다. 토롤드는 자신이 정말로 기운이 없거나 아팠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있었거나. 그 나직하고 쉰 듯한 목소리는 그저 묘한 매 력을 더해줄 뿐인 자연스러운 속임수에 불과했다. 토롤드는 얼얼한 귀를 쓸면서 생각에 잠 겼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진작 이야기해주지 않았지요? 당신을 화나게 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고디스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톡 쏘아붙였다. "댁이 이쪽에서 시키는 대로 할 만큼 분별이 있거나, 친구들한테 점잖게 대할 줄 아는 예의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알릴 필요가 없잖아요." "하지만 당신이 내 부아를 돋구었잖아요! 그건 내가 내 또래의 남자들 하고 자주 하는 거친 장난일 뿐인데. 당신이 그런 장난을 불러들인 거요." 그러다가 토롤 드는 문득 생각났는지 이렇게 물었다. "캐드펠 수사님도 아세요?" "당연히 아시죠! 캐드 펠 수사님은 최소한 수사슴과 암사슴 정도는 구별할 줄 아는 분이세요." 또다시 먼젓번보 다 더 긴 침묵이 찾아왔다. 분개하는 마음과 호기심, 조심스러움이 가득한 침묵이. 그 동 안 그들은 눈을 내리깔고 은밀히 상대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혹시 붕대로 싸맨 자리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나 싶어 그의 다친 어깨를 가리고 있는 소매를 슬쩍슬쩍 곁눈질했고, 그 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경고해주는 그녀의 뾰로통한 입술과 찌푸린 눈썹과 우아한 얼굴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화났어요?" 전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억지로 내뱉은 것 같은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 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관계 가 멀어졌다는 착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그들은 정신없이 웃어젖히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안을 좀 과장되게 조심하려 한 것말고는, 그들의 관계를 복잡하게 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서로 떨어져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벽에 기대어 앉았을 때,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어 그를 나무랐다. "그 팔을 그런 식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해요. 상처가 깊어서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구요." "아, 아니, 아무 이상 없어요. 하지만...... 당 신을 화나게 할 뜻은 조금도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토롤드는 자신도 마땅히 들어야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 단도진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무슨 연유로 이렇게 하고 다니게 되었지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진지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앞으로도 이 사 람을 믿은 것을 후회하게 될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겠지. "사람들이 나를 시루즈베리 밖으로 내보내려 했는데 미처 그러기도 전에 시가 함락되고 말았어요. 나는 나를 수도원에 놓은 건 절망적인 상황에서 간신히 생각해낸 필사적인 시도 였어요. 하지만 난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죠. 실제로도 그렇게 됐구요. 모두가 다 나 를 남자라고 믿었으니까요. 캐드펠 수사님만 빼구요. 당신도 속았어요. 그렇죠? 나도 당 신과 같은 당파에 속한 도망자예요, 토롤드. 우리는 피차 같은 처지에요. 난 고디스 애드 니 예요." "정말입니까?" 그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펄크 애드니 님의 따님이라구요?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가씨 때문 에 몹시 걱정을 했었어요! 특히 니콜러스가 더욱 그랬죠. 그 친구는 아가씨를 알고 있었 으니까요...... 아가씨를 본 적이 없긴 했지만, 저 역시도...... 그는 금발머리를 숙여서, 마지 막 남은 자두를 막 집어든 그녀의 그리 깨끗하지 않은 작은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 "고디 스 아가씨, 저는 아가씨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종복 입니다! 이건 정말 멋진 일이군요! 진작에 알았더라면 마저 얘기했을 텐데. 실은 반도 안 했거든요." "지금 들려줘요." 그러 면서 고디스는 자두를 반으로 쪼개 씨를 세 번 강물에 떨어뜨리고서 반쪽을 그의 입에 넣어 잠시 말을 멈추게 했다. "그러고 나면 나도 나와 관련된 얘기를 할게요. 그럼 우리는 모든 맥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캐드펠 수사는 물방앗간으로 곧장 가지 않고 작업장에 들러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나 점검해본 뒤에, 거위풀을 절구에 넣고 곱게 빻아 초록빛 약을 만들어서, 자신이 돌보는 두 젊은이와 합류하러 물방앗간으로 떠났다. 혹시 어디선가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캐드펠은 일부러 길을 돌아 물방앗간으로 갔다. 두 젊은이는 마치 그들 모두 가 직면하고 있는 온갖 근심걱정들로부터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기라도 한 듯, 무척이 나 차분하고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캐드펠이 그 세계에 접근하는 것을 꺼리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그들을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 이제는 그들 사이에 어 떤 비밀도 없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들은 모든 것을 터놓으면서 무척이나 가까워져서 더 이상은 서로에게 그 무엇도 물어볼 필요가 없게 된 듯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어서 빨 리 캐드펠 수사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캐드펠 수사님......" 고디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입을 열었다. 캐드펠은 쾌활하게 말했다. "우선 이 사람이 겉옷과 셔츠를 벗는 것부터 도와줘. 그러고서 붕대를 풀어야지. 아직 고비를 넘기지는 못했으니 차분히 기다리게나. 내가 낫게 해줄 테니." 그 말속에는 그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나무라려는 뜻은 숨어 있지 않았다. 처녀는 얼른 일어나 먼저 상 처 부위에 들러붙은 부분을 조심조심 떼어내고 겉옷을 벗긴 다음에, 끈을 풀어 셔츠를 허리 께로 흘러내리게 하고는, 리넨 붕대를 한쪽부터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청년은 붕대 푸 는 일을 도우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시종 고디스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디스 역시 청년이 아파할까 신경 쓰느라, 흘린 듯 자신을 쳐다보는 청년의 얼굴에서 거 의 눈을 떼지 않았다. 캐드펠은 그 광경을 냉정하게 생각했다. 저런, 저런! 휴 버링가가 약혼자를 찾아다녀봤자 헛수고겠군. 그런데 그 친구는 정말로 이 아가씨를 찾아다니기는 하는 걸까? "흠, 상처가 이렇게 깨끗하게 아무는 건 처음 보겠는걸. 덕분에 내 체면이 서 는군 그래. 자네 자신의 체면도 서고, 여기 이 배인 자국은 일평생 자네 어깨에 남아 있을 걸세. 팔은 한 달 정도만 지나면 활을 쏠 수 있을 정도가 될 게야. 허나 흉터는 평생 남겠 지. 자, 이제 좀 화끈할 테니 꾹 참게나. 갓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이 약이 최고지. 찢긴 근육이 서로 붙을 때 좀 아프지만 말끔히 붙긴 할 게야." 토롤드는 꿈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프지 않은데요. 캐드펠 수사님......" "우리 가 붕대를 다 감을 때까지 잠자코 있게나. 그 일이 끝나면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돼. 두 사 람 다." 토롤드가 고디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셔츠를 입고 겉옷을 걸치기가 무겁게 둘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은 마치 틀이 정해져 있는 공식적인 의식에서 발언할 차례를 넘기듯 이, 혹은 무도회에서 다음 사람에게 춤출 기회를 넘기듯이, 상대에게 다음 줄거리를 넘기곤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두 사람은, 자기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목청까지도 비슷 하게 높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두 사람이 서로 동지애를 느껴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몰 랐다. 그러나 캐드펠 수사가 없는 동안 그 두 사람 사이에 싹튼 감정에서 동지애가 차지하 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디스가 말했다. "그래서 저는 토롤드에게 저에 관한 모든 얘기를 다 해주었어요. 토롤드는 전에 우리에 게 얘기해주지 않은 부분만 들려주었구요. 이제 수사님께도 말씀드리고 싶대요." 고디스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바탕을 닦아주자, 토롤드는 흔쾌히 순서를 넘겨받았다. "저는 피챌런 어른의 보화를 안전하게 숨겨놓았습니다.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몸을 가볍 게 하느라 검이며 검띠며 단검이며 모든 것을 버렸지만 안장주머니 두 쌍에 든 보화만은 내 내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 동안 흘러 내려가다 돌다리의 첫번째 아치 밑에 이르 렀죠. 그곳은 수사님도 저만큼이나 잘 아실 겁니다. 첫 번째 교각이 있는 곳 말입니다. 그 교각 곁에는 얼마 전까지 물방아 삼아 쓰던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지 않습니까? 그 배 는 없어졌어도 배를 붙잡아맸던 쇠사슬은 교각의 돌에 박아놓은 고리에 그대로 남아 있더군 요. 그 교각 위에는 한 사람이 앉을 공간이 있어서, 저는 그리로 올라가 잠시 숨을 돌렸습 니다. 그런 뒤에 쇠사슬을 끌어올려 안장주머니들을 매달아 다시 물 속으로 던져넣었죠. 그러고 나서 저는 계속해서 하류로 헤엄쳐가다가 요 앞에 이르러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런 뒤에 고디스 아가씨가 저를 발견한 덤불로 들어갔죠." 그는 그녀를 거침없이 고디스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내면을 더없이 감미롭고 살풋하게 휘저어놓는 이름. "제가 회수해서 주인에게 돌려드릴 때까지 그 보화는 세번 강물 속에 그대로 있을 겁니 다. 그러기를 바라구요. 그분이 무사히 살아 계시다니, 하늘이 도우신 겁니다. 덕분에 그 분은 그걸 유용하게 쓰실 수 있겠죠." 갑자기 토롤드는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가 그걸 발견했다는 소문은 없었죠?" 토롤드는 걱정스러운 듯 재우쳐 물었다. "누가 그걸 건져냈다면 당연히 소문이 났겠죠?" "그럼, 당연하지! 아직 아무도 그 대어를 낚아내 지 못했으니 안심하게나.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그곳을 뒤져보겠나? 허나 남의 눈을 피해 그걸 회수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걸세. 우리 셋이 지혜를 모아 가능한 방법들을 모색해봐 야겠지. 이제 자네들 두 사람이 동맹을 맺는 사이에 내가 뭘 했는지 이야기해주겠네." 캐 드펠은 간단히 요약해서 말했다. "난 자네가 이야기한 모든 것들을 발견했다네. 그곳에는 자네가 끌고 다니던 말 두 필의 발자국이 남아 있더군. 자네의 적이 타고 온 말의 발자국 도 한 필뿐이었네. 그자는 왕의 금고를 불리려는 열성당원이 아니라 제 뱃속을 채우려는 도둑이었네. 그자는 자네들의 앞길을 가로막으려고 길에다 마름쇠들을 가득 뿌려두었지. 자네의 친척이 자기집 가축들이 밟을까 싶어 다음날 거기서 여러 개를 회수했다네. 오두막 안에서 두 사람이 싸운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 있더군. 그리고 흙바닥을 더듬다가 이걸 찾 았어." 캐드펠은 주머니 속에서 온 발톱이 움켜쥐고 있는, 대충 다듬어진 노란 덩어리를 꺼 냈다. 토롤드는 그것을 받아들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기는 했으나, 눈에는 처 음 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검자루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 세요?" "그럼 자네 것이 아니란 말인가?" 토롤드는 웃었다. "제 거요? 가난한 향도가 무슨 수로 이렇게 좋은 무기를 손에 놓을 수 있겠습니까? 제 무기는 제 조부가 차시던 평범한 검이었습니다. 무거운 가죽집에 들어 있던 단검도 그것과 어울리는 평범한 것이었구요. 만일 이게 제 것이라면 강물 속에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간직 하려 했을 겁니다. 이건 제 것이 아녜요." "페인트리 것도 아니구?" 토롤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친구가 이런걸 갖고 있었다면 당연히 제가 알고 있었겠죠. 니콜 러스와 저는 처지도 비슷한데다 삼 년 넘게 친구로 지내왔으니까요." 문득 토롤드는 캐드 펠 수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뭔가 의미 있을 듯한 일이 기억납니다. 그자가 기절하고 나서 제가 급히 그곳을 떠나려 했을 때 저는 우리가 싸웠던 건초더미 밑에서 작고 단단한 뭔가를 밟고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어요. 제가 밟은 게 이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자의 것이겠죠? 네, 이건 분명 그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뒤엉켜 구 를 때 흙바닥에 부딪쳐 떨어져 나온 거예요." "거의 확실하네. 우리를 그자에게 인도해줄 유일한 단서고" 캐드펠은 토롤드에게서 보석을 회수해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보석 하나가 떨어졌다고 해서 그렇게 훌륭한 단검을 내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야. 그 주인은 그걸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가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 싶을 때 수리하려 들겠지. 우리가 그 검을 찾아낼 수 있다면 살인자가 누구인지는 저절로 드러날 텐데." 토롤드는 화 가 치미는지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면서 수사님과 함께 그자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해서 니콜러스의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좋 으련만. 니콜러스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시받은 대로 피챌런 어른의 보화를 프랑스로 갖고 가서 황후께 전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리고......" 토롤드는 캐드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펄크 애드니 어른의 따님도 어른께 안전하게 모셔다드려야 하구요. 수사님께서 고디스 아가씨를 제게 맡겨주신다면 말씀입니 다." "그리고 수사님께서 저희를 도와 주신다면요." 고디스는 그렇게 되리라는 굳은 확신 을 갖고서 대뜸 덧붙였다. 캐드펠은 부드럽게 말했다. "이 아가씨를 자네에게 맡긴다...... 그럴 수 있겠구먼.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내 힘닿는 대로 두 사람을 도와야겠지. 무척이나 간단한 문제일세! 나는 그저 늙어빠진 말조차도 금값인 이곳에서 훌륭한 말 두 마리를 마 법을 써서 불러내고, 자네가 숨겨놓은 보화를 대신 가서 찾아온 후에, 두 사람과 보화를 그 말에 태워 여기를 떠나 웨일스로 가게 하기만 하면 되겠지. 알겠나? 이 아가씨는 뻔뻔스 럽게도 내게 그걸 요구하고 있는 거라네!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뭐! 성자들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들도 수월하게 해내시니까......" 그 대목에서 갑자기 캐드펠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라는 표시로 한 손을 들었 다. 바짝 곤두세운 캐드펠의 귀에, 열려 있는 문 근처 밀밭 가장자리의 그루터기를 조심스 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나직한 발소리가 언뜻 들렸다. "왜 그러세요?" 고디스는 놀라서 눈 을 둥그렇게 뜨고 속삭이듯 물었다. 캐드펠은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내가 잘못 들었어." 그러고 나서 캐드펠은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는 가서 저녁기도에 참 석해야지. 가세! 늦으면 곤란해." 토롤드는 캐드펠 수사의 말에 함축된 무언의 지시에 따 라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그들을 보냈다. 만일 누군가가 엿듣고 있었다면...... 그러나 토롤 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는 캐드펠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듯 했다. 그 런데 구태여 고디스를 놀라게 할 까닭이 있겠는가? 패드펠 수사는 더없이 훌륭한 보호자니 까 일단 수도원 벽 안에만 들어서면 그녀는 다시 안전한 성역에서 머물게 되리라. 그 자신 은 스스로가 책임지면 될 테고. 검 한 자루만 있으면 참 좋겠는데! 캐드펠 수사는 풍덩한 승복 허리춤에 손을 넣더니, 거죽이 벗겨져 나간 낡은 칼집 속에 든 길쭉한 단검 하나를 꺼내어 말없이 토롤드의 손에 쥐어주었다. 토롤드는 자기 생각이 실현된 것에 놀라, 마치 기적에 접하기라도 한 듯 경건하게 검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밖으 로 나간 뒤에도 토롤드는 가로대가 바로 얼굴 앞으로 오게끔 두 손으로 칼집을 받쳐들고 경 외가 가득한 눈으로 한동안 검을 들여다보다가 문을 닫아걸었다. 사프란 꽃행기가 풍기는 저녁 나절의 상큼한 대기 속으로 들어선 후에도 청년의 인상적인 표정은 여전히 캐드펠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캐드펠 자신도 한때는 두 손으로 칼집을 받쳐들고, 그렇게 황홀한 표정 으로 그 단검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십자군에 참가했을 때 그는 그 단검 에 대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 단검은 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고, 십 년 동안 그와 더불 어 지중해 동쪽 바다를 떠돌아다녔다. 그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온갖 허 영과 집착을 버렸을 때조차 고이 간직해둔 단검이었다. 그러나 캐드펠은 이제 그것을 필요 로 하고 욕되게 사용하지 않을 누군가에게 넘겨줌으로써, 마침내 그것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캐드펠 수사는 주위를 유심히 살피면서 물방앗간 모퉁이를 돌아 수로를 건넜다. 그의 귀 에는 야생동물 못지 않게 예민했음에도, 마지막 몇 마디를 나눌 때까지는 밖에서 나는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캐드펠은 자신이 들은 소리가 과연 사람의 발소리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루터기 사이로 달려가던 조그만 동물의 발소리는 아니었을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고 가정해야 했고, 그럴 경우 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생각해두어야 했다. 정말로 밖에 누군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마지막 몇 마디를 엿들었으리라.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실이 드러난 셈이었 다. 보화 이야기를 했던가? 그랬다, 바로 그 자신이 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말 두 필을 구하고, 보화를 회수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웨일스로 떠나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보화 가 어디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했던가? 아니, 그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전에 나왔다. 그 러나 정말로 엿들은 자가 있었다면 그자는 왕의 군대에게 쫓기는 피챌런 편 사람 하나가 그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고, 최악의 경우에는 애드니의 딸이 수도원에 은신 해 있다는 것까지도 눈치챌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진상이 모두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 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었다. 젊은이가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 면 곧바로 그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만일 오늘 저녁과 밤 시간이 무사히 지 나가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면, 괜한 일로 속을 썩였다고 생각하게 될 테지만. 지금 캐드펠의 주위에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멀리 강둑에 낮아 낚시질 에 열중해 있는 소년 하나 뿐이었다. "왜 그러세요? 뭔가 마음이 불편하시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요." 곁에서 말없이 걸으 며 그를 유심히 살펴보던 고디스가 물었다. 캐드펠은 대답했다. "괜한 일로 신경 쓸 것 없 네. 내가 잘못 들었어. 아무 일 없네." 그 순간 고디스가 토롤드를 발견한 덤불 너머 강 가 쪽에서 이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그의 순에 포착되었다. 여위고 민첩한 사내가 빈약한 은신처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그는 그들이 걷고 있 는 길을 향해 예각을 그리며 다가왔고, 조만간 그들과 만나게 될 판이었다. 휴 머링가는 우 연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적당한 순간에 그들과 만나게끔 철저히 계산된 속도로 다가오며 부 드럽고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뜻밖에도 여기서 뵙다니 정말 반갑군요. 아, 너도 따 라왔구나 하는 듯한 표정. "아주 기분 좋은 저녁입니다, 수사님! 저녁기도 드리러 가시나 보죠? 저도 그런데요. 같이 걸어도 될까요?" 캐드펠은 쾌활하게 말했다. "기꺼이." 캐 드펠 수사는 고디스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서, 그녀에게 약초와 붕대가 들어 있는 조그만 보 따리를 건네주었다. "고드릭, 먼저 뛰어가서 이것들을 갖다 놓아라. 그러고 나서 다른 아 이들과 같이 저녁기도에 참석하도록 하고, 네 덕에 다리도 좀 편해지고, 빚고 있는 물약들을 휘저을 시간도 좀 얻어보자꾸나. 어서 가라, 얘야. 뛰어가!" 고디스는 청년의 시야에서 벗 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기뻐서 보따리를 덥석 움켜쥐더니, 건강한 여느 소년처럼 보이려 고 한 손으로 키 큰 그루터기를 주르르 훑으며 휘파람을 불면서 달려갔다. 그녀의 눈과 마 음은 온통 다른 청년의 모습으로 가득차 있었다. "착한 애를 데리고 계시는군요." 휴 버링 가는 앞서서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좋은 애요." 캐드펠은 휴 버링가와 나란히 크림빛으로 변해가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애는 우리에게 일 년치 경비를 내고 들어오긴 했지만 장차 수사가 될지는 의문이오. 그러나 글 읽는 법과 셈법, 허브와 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게 될 테고, 그런 것 들은 장차 저애에게 큰 도움이 될 거요. 그런데 오늘은 꽤 한가한가보오?" 휴 버링가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한가하기는요. 수사님의 뛰어난 솜씨와 지식이 필요해서 왔죠. 먼저 허브밭에 가봤는데 안 계시기에 오늘은 이쪽 과수원과 밭 쪽에 볼일이 있으실지도 모 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안 보이셔서 저기 강가에 앉아 저녁 햇살을 즐기 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수사님이 저녁기도에 참석하러 가실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쪽 에도 돌봐야 할 밭이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밀은 다 거둬들이지 않았나요?" "여기 있는 건 죄다 거두었소. 이제 양들이 와서 이 그루터기들을 말끔하게 뜯어먹을 거 요. 그런데 내게서 원하는 게 뭐요? 내 본분에 맞는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리겠소." "어 제 아침에 수사님께 제가 무슨 부탁을 드리면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주시겠느냐고 여 쭤보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수사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간에 깊이 생각해보고 하신다고 하 셨고,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때 저는 떠도는 소문에 불과한 어떤 좋지 않은 이야기에 신경을 쓰고 있었죠. 그런데 이제 그것이 사실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스티븐 왕은 이 미 딴 곳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고, 그에 따라 군량과 말을 확보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왕은 시루즈베리를 공략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른데다가, 이제는 먹여야 할 병사들과 말을 필요로 하는 기병들의 수효도 더 많아졌거든요.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퍼졌다가는 모두들 저처럼 무슨 수를 써서든 징발을 피하려 들 테니까요." 버링가는 히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왕은 시내에 있는 집들을 죄다 수색해서, 각 가구가 확보하고 있는 건초와 식량 의 십분의 일을 징발하라는 지시를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쓸 만한 말들도 죄다 징발할 거 구요. 죄다라는 말에 유념하세요. 말 주인이 누구든 간에, 이미 군용으로 쓰이고 있거나 수비대 소속이 아니라면 다 끌어갈 겁니다. 수도원 말들도 징발 대상에서 면제되지는 않을 거구요." 전혀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말들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를 골라서 치고 들어온 듯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휴 버링가가 일반시민들보다 앞서서 그런 정 보를 입수했다는 것은, 그가 왕의 진영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수시로 통보받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불길한 증거이기도 했다. 이 젊은이의 말과 행동은 뭐든지 진실로 여겨지지가 않 았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간에, 이 젊은이는 언제나 그것을 자신의 게임으로 만드는 사람이 었다. 이 단계에서는 대꾸를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수록 좋을 듯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생각대로 게임을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둘 다 이익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 다. 우선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마음대로 하게 하자. 물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 든 각도에서 세밀히 검토해보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맞춰보아야 하겠지만. 캐드펠은 담담하게 말했다. "부원장께는 나쁜 소식이 되겠군." 버링가는 이맛살을 찌푸 리면서 말했다. "제게도 나쁜 소식이죠. 수도원 마구간에 제 말이 네 필이나 있거든요. 왕이 제게 무슨 임무를 부여해주었다면 저 자신과 제 부하들이 쓸 말이니 계속 갖고 있겠다 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예요. 제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안 받아들여질 수도 있죠. 그리고 수사님께만 솔직히 털어놓겠는데, 저는 제가 갖고 있는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징발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두 마리를 은밀한 곳에 빼돌 려두고 싶어요. 이 소동이 끝날 때까지, 징발을 맡은 프레스코트의 부하들 눈을 피할 수 있 는 데다가요." "두 마리만? 어째서 모두 다 숨겨두지 않으시고?" "왜 이러십니까, 수사님 께서 그 정도는 능히 넘겨짚으실 만큼 빈틈없는 분이라는 걸 제가 잘 알고 잇는데. 아무려 면 제가 말도 없이 여기서 지내겠습니까? 만일 그 사람들이 와서 제 말이 한 마리도 없다 는 걸 알게 되면 찾아내려고 난리를 칠 겁니다. 그것 때문에 왕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변 변찮은 기회마저 날아가 버릴 테구요. 하지만 별 쓸모 없는 말 두 필을 넘겨주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넘어가겠죠. 그 두 필은 넘겨줄 수 있어요. 여기서 한 며칠 지내보니, 수사 님이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일이라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금방 알겠더군 요." 그의 말투는 활달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어느 정도 진심인 듯 들리 기도해, 속에 다른 뜻이 숨어 잇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 원장님은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과 부딪치실 때면 으레 수사님께 의지하 시더군요. 저도 수사님께 현실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수사님은 이 일대를 훤히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이 가축몰이가 끝날 때까지, 며칠 동안 제 말들을 맡겨둘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처럼 달콤한 제안이었다. 캐드펠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 제안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두 젊은이의 목숨이 그 말 두 마리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설령 그렇 지 않다 하더라도, 캐드펠 수사는 버링가가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그를 이용하려는 것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 제안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었다. 캐드펠 수사는 버링가가 자신의 생각을 훤히 꿰고 있으면서, 그렇게 넘겨짚지만 말고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라고 하는 것 은 아닌지 슬슬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동기까지는 아니라도 상대의 수법만큼은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고. 그러니 공정한 싸 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사근사근한 녀석은 니콜러스 페인트리를 살해했을 공산이 크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상대가 요청하지도 제안하지도 않은, 전혀 다른 방향의 결투가 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을, 그게 우연이건 필연이건, 최대한 이용하 도록 하자. "있지, 그런 데가 있소." 버링가는 거기가 어디냐고 묻지조차 않았다. 왕의 군 데에게 절대 들키지 않을 만큼 충분한 먼지, 은밀할 곳인지 따위의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오늘밤 그리로 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버링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더니 캐드펠의 눈 을 바라보면서 씩 웃었다. "내일 공식적인 명령이 떨어질 테니 오늘밤이 아니면 기회가 없 어요. 수사님과 제가 말을 타고 갔다가 내일 아침나절까지 걸어서 돌아올 수 있는 거리라 면 저와 함께 가주십시오. 다른 사람보다는 수사님과 가고 싶습니다!" 캐드펠은 그 일을 하는 데 고려해야 할 것들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 대답에 대해서는 새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저녁기도가 끝난 뒤 말들을 끌고 나가 세니트 자일즈로 가시오. 난 마지막 기도 가 끝난 뒤에 그곳에서 합류하도록 할 테니까. 남들이 보는 데서 우리가 나란히 말을 타고 나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소. 당신이야 갑갑하면 저녁나절에도 말들을 운동시키러 나갈 수 있겠지만 말이오" 버림가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곳이 어디죠? 세 번 강 을 건너야 합니까?" "아니, 시내조차도 건널 필요가 없소. 펄리 너머에 있는 롱 숲에 우리 수도원이 마련해둔 목장에 딸린 낡은 오두막으로 갈 거요. 세상이 험해져서 양떼와 소떼들 은 철수시켰지만, 오두막에는 아직도 평수사 둘이 남아 있소. 그 누구도 말을 찾겠다고 거 기까지 가지는 않을 게요. 그곳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곳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평수사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어줄 게요." "세인트 자일즈 가 그리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까?" 세인트 자일즈는 수도원 정문 동쪽 끝에서 좀 떨어져 있는 교회였다. "맞소. 남쪽 서튼 방면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좀 가다보면 롱 숲이 나온다오. 돌아올 때는 지름길로 오면 한 삼마일쯤 걷게 될 거요. 일 마일쯤 덜 걷게 되는 셈이지." 버링가는 짐짓 자신 없는 체했다. "그 정도 거리라면 제 다리가 그런 대로 버텨주겠죠. 그럼 마지막기도 시간 뒤에 세인트 자일즈에서 뵙겠습니다." 버링가는 더 이 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캐드펠 곁을 떠나 서둘러 걸어갔다. 앨린 시워드가 숙소를 나와 교회로 가느라고 수도원 정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버링가는 이내 그 녀 곁에 따라붙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신뢰가 담긴 미소로 그를 쳐다보았다. 교활한 구석이라고는 좀처럼 찾을 수 없고 자부심과 예리한 감각까지도 갖춘 그 아가씨는, 뱀처럼 사악한 젊은이를 보고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뱀이라 해도 좋고, 선악의 판단을 떠나 차 디차고 섬뜩한 그 무엇으로 표현해도 좋으리라. 키드펠은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며 앞에서 걸어가는 남녀를 주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여자의 저 태도는 남자의 환심을 서려는 의도 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상대를 무조건 믿기 때문에 나온 것일까. 예로부터 순진무구한 젊은 아가씨들이 뱃속이 시커먼 악당들에게 속아넘어간 경우는 무수히 많았다. 심지어 살인자들에게 속아넘어간 겨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악한 자들 은, 그들의 천성과 정반대되는 지극히 다정다감한 마음으로 아가씨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캐드펠은 교회에서 고디스를 보고 다소 위안을 받았다. 고디스는 영리하게도, 팔 꿈치로 다른 소년들을 툭툭 치기도 하고 소곤거리기도 하면서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 고 있었다. 고디스는 재빨리 그 푸른 눈을 돌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 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어주었다. 그렇게 안심할 만한 상황은 못 되었지만 캐드펠 수사는 어떻게 해서든 잘 타개해나갈 심산이었다. 그가 보기에 고디스는 앨린만큼이나 훌륭한 아가씨였다. 고디스를 보면 오래 전, 그리스 처녀 뱃사공 아리아나가 떠올랐다. 구름처럼 솟아오른 짧은 고수머리에 스커트를 무릎 위로 걷어올리고 긴 노를 저 으며 기슭에 있는 그에게 소리치던 아리아나...... 아, 이런! 그때 그는 이미 나이가 꽤 들 었었다. 지금의 토롤드보다 훨씬 더. 이런 살풋한 상상은 토롤드에게나 어울릴 법했다. 그나저나 오늘밤 마지막기도 시간 뒤에, 세인트 자일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