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희의 화가 지은이: 드가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이도수 파리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해서 '신아테네'라 부르는 지역이 있다.이런 비공 식 화단과 문단은 일명 '로레트'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로레트라 별명이 붙은 것은 그들이 주로 로레트라고 부르는 노트르담 드 로레트 대성당의 그늘 아래서 작업했기 때문이다.로레 트는 돈을 벌기 위해 작품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그러나 그 지역은 오 귀스트 드 가와 같은 은행가들을 포함해 명망있는 사람들에게 역시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 의 아들 일제르 제르멩 에드가는 1834년 7월 19일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제1장 예술가의 교육 낭만적인 선조 드가의 이름은 은행가로 나폴리에 정착한 조부 일레르 드가와 뉴올리언즈에서 상업을 하 는 외조부 제르멩 뮈송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이 훌륭한 두 선조, 특히 그의 친할아버 지는 소년 드가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훗날 복잡하게 얽히게 된 혈통을 이용해 드가의 집안은 프랑스 혁명에 울며 겨자 먹기로 참가한 귀족계급과의 연결고리를 입증해 내려고 애쓴다. 아마도 이 가계는 랑그도크(남프 랑스)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일 레르 드가는 1770년 오를레앙에서 '제빵사, 피에르 드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프랑스 혁명중에 스스로 나폴리로 떠나버렸다. 일부 에서는 이 것을 일레를 드가의 정치적 견해에 따른 행동으로 보기도 하지만, 1904년 에드 가 자신이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폴 발레리에게 '추억을 회상하며'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안 개에 싸인 이 사건의 가장 그럴듯한 설명일 것이다. 발레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일레르는 프랑스 혁명중에 곡물거래업에 손을 댔다. 1793년 어느 날 그가 곡물거래소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뒤에서 가만히 다가와 그에게 속삭였다. '슬쩍 이곳을 떠나게!... 어서 도망치라구! 그들이 자네집을 노리고 있어.' 한시도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일레르는 당장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서 파리를 떠났다. 두 필의 말을 몰아 보르도로 간 그는 막 출항하려는 배에 올라탔다. 그 배는 마르세이유에 잠 시 정박했고, 드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저는 그의 말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듣고만 있었지 요.) 거기서 경석을 한 짐 실었다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마침내 드가는 나폴리에 닿았고, 그곳에서 사업에 발을 내딪었다." 일레르 드가는 자신의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하며 나폴리에서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해갔 다. 그가 나폴리에서 맨먼저 한 일은 제노바 출신의 돈 많은 무역상인인 자기 회사 사장 딸 과의 결혼이었다. 1809년 그는 중개인이 되었다. 1836년에는 세 아들과 함께 금융회사인 '드 가 파드레 에필리'('파드레 에필리'는 '아버지와 아들' 뜻하는 이탈리아어:역주)를 설립했고 파리 지점을 차렸다. 일레르는 나폴리에 부동산을 구입했고 캄파니아 주위의 부지-팔라쵸 피냐텔리 디 몬텔레 오네, 피아차 델 게수 누오보 인근, 산 로코디 카포디몬테의 주택-를 사들였다. 아이가 모두 일곱이나 태어나 부양가족도 점점 늘어갔다. 자녀들은 나이가 차자 하나씩 하나씩 평범하지만 유서 깊은 가문의 그 지역 귀족들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 이를 낳았다. 오직 장남 오귀스트만이 예외였다. 드 가(De Gas) 혹은 드가(Degas) 나폴리 사람이기 이전에 프랑스인이던 일레르는 오귀스트를 파리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1825년 프랑스땅을 밟을 당시 오귀스트는 불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지만 잠깐 프랑스에 머물기로 한 것이 그대로 주저 앉고 말았다. 1832년 7월 14일 오귀스트 드 가-그는 공식 인가를 받기 위해 성을 둘로 쪼갰고(1860년대에야 그는 원래 이름으로 되찾았다)-는 로레트 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셀레스틴 뮈송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뮈송 집안은 머리 미국땅에서 파리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신부의 아버지 제르멩 뮈송 은 처음에 자신의 고향인 아이티섬에서 뉴올리언즈로 가서 목화를 재배해 큰돈을 벌었다. 1815년생인 셀레스틴은 제르멩 뮈송과 명문 루이지애나 가문의 상속녀 마리 데지레 리리유 사이에 태어난 다섯 아이중 막내였다. 드가의 첫 전기를 기술한 폴 앙드레 르무안에 따르 면 이젊은 남녀의 사랑은 파리에 있는 양가 사이의 정원에서 꽃피었다고 한다. 서로를 향 한 무심한 눈빛이 점차 뜨거워지면서 이내 교구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레르 드가는 아들에게 사업경영을 맡겼다. 오귀스트는 '드가 파드레 에 필리'의 파리 지점을 운영하였다. 셀레스틴과 오귀스트의 11년 남짓한 결혼생활에서 다섯 명의 아이를 두 었다. 첫째가 에드가였고, 둘째가 아실(1838), 셋째가 테레즈(1840), 넷째가 마르그리트(1842), 그리고 장남 에드가가 가장 사랑했던 막내 르네(1845) 이렇게 다섯이었다. "공상에 빠진" 에드가 에드가는 룩셈부르크 가든 근처의 파리 생조르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부모가 들 뢰르가(현재의 다사스가)로 이사하면서 한동안 거기서 머물렀고, 다시 마담가로 옯겨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847년에 세상을 떠났다. 열세살 소년에게 분 명 비극적인 사건이었을 어머니의 죽음이 에드가에게 얼마만한 충격을 주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드가는 그 후 좀처럼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의 표현대로 '사 랑하는 아빠'에 대해서는 종종 추억에 잠기곤 했다. 오귀스트 드 가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조용한 삶 속에서 침잠하며 지냈다. 관리를 소홀 히하고 방치하자 회사는 점차 기울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완전히 도산하고 말았다. 그가 진정한 열정을 느낀 대상은 그림과 음악이었다. 1845년 10월 5일, 에드가는 생자크가 소르본 대학 건너편에 있는 루이 르 그랑 중학교 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받은 8년간의 교육이 그가 받은 제도권 교육의 전부였다. 이 학교의 학적부에 기제되어 있는 몇가지 사실 외에는 에드가의 학창시절에 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여름방학이나 휴일 외출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전무하다. 학업성적은 그런대로 좋은 편이었지만, 드가는 열의가 없는 학생이었다. 말수가 적고 친구 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던 그는, 세상사에 초연한 듯 멍하니 공상의 세계에 빠지는 일이 허다했고 주위가 산만하다고 꾸지람을 듣곤 했다. 그는 미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 았지만 다른 학생들, 특히 그의 평생 친구인 폴 발팽송도 그 정도 성적은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천재 화가의 탄생을 예견할 만한 조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에드가는 아버지와 함께 외독스 마르실이나 루이 라 카즈 같은 당대의 유 명한 미술 수집가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이 경험이 드가에게는 북적거리는 교실에 서 받은 주입식 교육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것이었다. 몇 년 후 드가가 '미술수집상'을 그릴 때 지난날의 체험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이들 애호가들은 오로지 상업적인 가치를 위해 무차별하게 예술작품에 돈을 뿌리던 신흥 부호들과 다르게 전시보다는 수집에 더 열광적이 고 열렬했던 사람들이다. 명백한 천직 드가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 자신의 갈 길을 그토록 빨리 선택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랄 만한 것이다.1853년 3월 27일 르 그랑을 졸업한 그는 4월 7일에 루브르에서 모사화를 그려 도 좋다는 승낙을 얻는다.그의 아버지는 언젠가는 가업을 이어가리라 기대했던 장남이 화가 의 길로 들어서려 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일시적으로나마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해 에드가는 1853년 11월에 법과대학에 등록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인 1899년 5월,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좀처럼 하기 싫어하는 드가가 이례적으로 친구 알레비 에게 고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실제로 법과대학을 다녔지만 그 동안에도 내내 루브 르에서 문예부흥기 이전 화가들의 작품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고, 결국에는 법률공부를 계속 할 수 없다고 아버지에게 털어놓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쨌든 드가는 그 이후 법과대학에 는 재등록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길로 첫 발을 내딛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얼마 후 드가는 에두아르 발팽송-화가 앵그르와 친구 사이였고 드가 의 학교 친구 폴 발팽송의 아버지인 미술수집상-의 조언에 따라 화가 루이 라모트에게 수 집을 받았다고 일러준다. 라모트는 화가 이폴리트 플랑드랭의 문하생이었다. 드가는 라모트 덕분에 그림의 실제적인 기초를 닦고, 그림에 대한 애정과 15-16세기 이탈 리아 거장들에 대한 존경심(그림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 오귀스트 드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다)을 갖게 되었다. 드가의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화가로서의 성실성과 정교하게 다 듬어진 작품에 대한 기호, 끈질긴 인내심은, 비록 상상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존경할 만한 화가였던 라모트에게서 많은 부분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55년 4월 5일, 입학시험에서 33등을 하면서 명성 높은 에콜 데 보자르(미술학교)에 들어 가게 되었을 때도 드가는 추천인으로 라모트의 이름을 댔다. 이 풋내기 화가가 스승 라모트 에게 독립한 것은 1859년에 이르러서였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드가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 해서는 정보가 충분하지 못하다. 심지어 그가 누구의 수업을 들었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 다. 2학기 수업에 복귀하지 않음으로써 드가는 교과과정을 이수한 뒤에 누릴수 있는 모든 이점들, 특히 로마상을 탈 기회를 영영 포기하게 된다. 로마상 수상자들은 로마의 빌라 메디 치에서 몇 년간 수학했고, 프랑스로 돌아오면 상을 받은 예술가들한테는 덮어놓고 우호적인 고객이나 프랑스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보장되었다. 드가에게는 이탈리아를 독립적으로 여행할 수 이는 경제적 능력과 교육을 받지 않고도 활 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로서는 교육 따위에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 가 없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앵그르를 만나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한다. "드가는 전에 나이가 지긋한 미술수집상, 발팽송 씨-음악당에 서 울려나오는 소리 같은 매력적인 이름이다-를 알게 되었다. 앵그르의 친구인 그는 그림 에 헌신적인 애정을 갖고 있었다. 드가의 말에 따르면 1855년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어느 날 드가가 발팽송 씨를 찾아갔더니 그가 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방금 앵 그르가 몹시 불쾌한 얼굴로 나갔네.' 발팽송 씨가 말했다. '다가온는 전람회에 내겠다고 자 기 그림 중에 한 점을 빌려 달라는 것을 내가 거절했거든. 나는 불이 날까 겁이 났네. 건물 이(파리 박람회를 위해 건립된 미술관) 불타서 무너질 수도 있잖은가.' 드가는 강력히 이의 를 제기했고 발팽송에게 생각을 바꾸도록 간청해 결국 승낙을 얻어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앵그르에게 그 그림을 써도 좋다는 말을 하러 그의 아틀리에를 찾아갔다. 발팽송 씨와 앵그 르가 이야기하는 동안 드가는 벽을 둘러보았다.(내게 이야기를 했을 당시 드가는 앵그르의 아틀리에에서 본 작품들을 기억했다가 스케치한 모사화를 몇 장 갖고 있었다.) 그들이 작업실을 나서려 하자 앵그르는 허리를 굽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바로 그순 간, 앵그르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며 바닥에 푹 쓰러졌다. 일으켜보니 얼굴이 피투성 이 였다. 드가는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앵그르 부인을 부르러 들라일가로 뛰어갔다. 그리고 앵 그를 부인을 부축해서 다시 퀘 볼테르 10번지까지 걸어갔다. 앵그르는 아직도 떨리는 몸 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드가는 앵그르의 안부가 걱정되어 다시 그의 집에 들렀 다. 앵그르 부인은 아주 친절하게 그를 맞이했고 그에게 그림을 한 점 보여주었다. 얼마 후 발팽송 씨는 드가를 앵그르의 아틀리에로 보내 빌려주었던 그림을 찾아오게 했 다. 앵그르는 그림을 이미 돌려보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드가는 이번에야말로 자기 얘기 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앵그르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머뭇 거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제가 그림을 좀 그리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이죠. 저희 아 버님은 미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인데 제가 아주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하셨어요.' '선을 그려보게.... 기억에 의존해서든, 자연을 보고 그리든 선을 많이 그려보게.' 앵그르 는 그렇게 말했다. 발레리가 드가에 대해서 쓴 책인 '드가 댄스 드로잉'에는 이런 내용이 있 다. "나중에 드가는 그때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처음과는 좀 다르게 말했다. 앞에서 내가 말 했던 대로 그가 앵그르를 다시 만나러 간 것은 사실이지만, 혼자가 아니라 발팽송씨와 함께 였으며 자기 화집을 겨드랑이에 끼고 찾아갔다고 했다. 앵그르는 드가의 그림을 훌터보더니 화집을 덮고 이렇게 말했다. '좋아! 절대 자연을 보고 모방해서 그리지 말게, 젊은이. 언제나 기억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고 거장들의 판화를 모사하게." 발레리는 그때 드가가 아무 이의 없이 앵그르의 충고를 마음에 새겨 두었다고 쓰고 있다. 계속해서 선을 그리되 실물을 보고 그리지 말고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라는 앵그르의 교훈 은 자신의 작품으로도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드가는 '오달리스크' 창조자 의 함축성있는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해에 자기 자신을 모델로 그 림을 그리면서 이 야심에 찬 화가는 상티의 콩데 미술관에 있는 앵그르의 유명한 자화상의 포즈를 그대로 흉내냈다. 모사작업 이제 드가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국립도서관의 인쇄실, 파리 박람회의 앵그르 회고전을 들 락거리면서 모사화와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시간을 쪼개어 쓴다. 교복을 입은 동 생 르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드가는 학생임을 나타내기 위해 책과 공책, 펜, 잉크병을 함께 그려넣었다. 좀더 사적인 메모장이나 스케치북에는 끝까지 완성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꽤 거친 터치의 역사화들이 이때부터 더러 눈에 뜨인다. 엄밀히 말해서 젊은 화가의 작품 중에 고도의 복원주의라고 할 만한 수준의 것은 없다.드 가는 라모트의 아틀리에에서 누드나 조각상을 앞에 놓고 쉬지 않고 연습했지만 주로 노련한 거장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아버지의 격려로 더욱 고무되었다. 1854년 10 월, 그는 당시 라페엘로의 작품으로 추정되던 '젊은이의 초상'을 모사하기 시작했다. 이듬 해 에도 그는 거장들의 작품을 계속 모사했는데 가끔 유화로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연필 데생이었다. 후에 그는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거장들의 작품은 몇 번이고 거듭 모사해도 지나침이 없다.누가 보아도 훌륭한 모사화가라는 인정을 받은 연후라야 비로소 자연을 보고 무 한 개라도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모사화에서 연출까지 드가가 선배들의 작품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그림세계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던 표현의 정확성, 정연한 법칙, 기교상의 비법 등이었다. 그는 자신이 연구대상으로 삼 았던 거장들에게서 회화 양식의 정수이며 화가의 독특한 화풍이라고 할 수 있는 불가피한 편견을 능숙하게 추출해 냈다. "미술에 편견을 없는가? 부드러운 입술을 표현하기 위해 선 명한 선을 사용하고 눈매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마치 가위로 잘라낸 듯 속눈썹을 자르는 이탈리아 문예부흥기 이전 화가들은 어떠했던가?" 1858년(혹은 1859년)에 피렌체에서 드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붉은 분필화 '젊은 여인 의 초상'을 연필로 모사한다. 그런 다음 자기가 마치 레오나르도가 된 양 캔퍼스에 채색했다. 얼마 후 드가가 루브르에서 니콜라 푸생의 '플로라의 승리'(1627년경)를 만났을 때는 동일 한 그림재료인 오일을 쓰는 말그대로의 모사화에 그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17세기 기법으로 돌아가 푸생이 했을 법한 방식인 펜과 단색 담채로 단숨에 크로키를 했다. 그는 1890년대까 지 이런 작업을 줄기차게 계속해 나간다. 그는 친구 에르네스트 루아르와 루브르에서 만테 냐를 모사했는데 그것은 단조롭고 진부하고 독창성이 결여된 모사화가 아니라, 원래의 테마 에 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19세기에 유행했던 화풍을 연습해 보는 일이었다. 드가의 이탈리아 여행, 로마상을 받느냐 마느냐 1856년에는 드가는 이탈리아 장기 체류를 결심한다. 이는 결코 뜻밖의 결정이 아니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미술뿐 아니라 이탈리아 거장들을 열심히 연구하는, 17세기 이래 확고하 게 자리잡은 프랑스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 것 뿐이었다. 그러나 드가의 이탈리아 체류는 3 년이라는 기간으로 보나 프랑스 학생들이 로마를 찾는 목적으로 보나 비평가들 사이에 끊임 없이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여행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저 드가가 학문적 전통을 고취하 려 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치부했다. 설사 드가가 빌라 메디치에 머무르지 않았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보아 그가 쌓은 훈련은 여느 로마상 수상자들이 받는 교육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었다. 비평가들은 이 기간 동안 그가 그린 그림에 대해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려는 그릇된 열망을 담은 헛된 노력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1860년대 들어서서 그가 벗어버리게 될 전통적인 가르침과 주제들을 그의 천재성이 굳이 짊어질 필요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간단히 평가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드가가 운 좋게도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 로, 앙리 팡탱 라투르, 폴 세잔, 그리고 그 밖의 동시대 대표 화가들과 교분을 갖게된 덕분 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는 일 이상이었다. 그것은 가족이기도 했다. 1856년 7월 나폴리로 떠날 무렵, 드가는 스물두 살에 불과했지만 더 이상 풋내기가 아니 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감은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가끔 농담을 던지면 몹시 거북해하 거나 갑자기 퉁명스럽게 굴곤 했다. 그러나 그는 숙고 끝에 세운 확실한 계획을 품고 이탈 리아에 발을 내딛었다. 그는 시간을 조정해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보며 고전주의, 르네상 스. 바로크 미술을 공부하고,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기와 이탈리아 여행을 병행해 나간다. 나폴리의 팔라초와 산 로코 디 카포디몬테 근처의 빌라에서 할아버지 일레르 드가와 얼마 간을 함께 지낸 그는 가을에 로마로 떠나 이듬해 여름까지 그곳에 머문다. 그후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지루한 산골', 카포디몬테로 돌아온다. 나폴리에 있는 동안 드가는, 에두아르 삼촌과 앙리 삼촌, 할아버지의 금융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업자들, 로시나 고모(모르빌리 디 산탄젤로 공작 부인), 패니 고모(몬테자시 공작 부인), 가장 좋아했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던 로라 고모와 고향 나폴리 에서 피렌체로 추방당한 벨렐리 고모부 등 아버지 쪽 친척들과 만날 기회가 잦을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드가는 가족들 대부분의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산 로코 디 카포디몬테에 있는 빌라의 소파에 앉은 할아버지 일레르 드가의 초상화는 비록 크기는 작지 만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로마에 있을 때... 로마로 다시 돌아가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된 드가는 초상화는 잠시 제쳐두고 역사화(한 번도 완성시킨 적이 없는)와 강한 개성을 지닌 원주민에 대한 연구(당시에는 일반적인 관례 였다), 고대 미술과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등 보다 전통적인 공부에 몰두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는 공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종이 위에나 이따금씩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괴팍스런 성격이었지만-'퉁퉁거리는 드가, 툴툴거리는 에드가' 라고 판화가 가브리엘 트루니가 쓴 재미있는 글이 있다-드가는 당시 로마에 와 있던 프랑스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이 소규모 모임에는 로마상 수상자들과 다른 장려금을 받은 화가들뿐 아니라 드가처럼 이탈 리아를 자비로 여행하면서 사설단체나 개인을 위해 작업하는 화가도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는 드가와 1858년 초에 처음 만나 몇 년간 드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 치게된다. 그림을 천직으로 생각했던 모로는 당시 색채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고, 그의 연구 는 비슷한 노선으로 발전해 가던 드가에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플랑드랭과 라모 트에게 부담스런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기법에 대해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으며, 파스텔 사용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 것도 십중팔구 모로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나중에 드가는 모로를 통해 외젠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는 앵그르에 대한 드가의 찬미를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무엇보다 선을 중시하던 드가의 태도는 색채와 움직 임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조화를 이루게 된다. 피렌체에서 자기 반성의 휴가를 보내다 1858년 여름, 드가는 로마에서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아시시, 아레초를 거쳐 페렌체까지 여행했다. 그가 좋아하는 로라 고모가 페렌체의 아파트로 그를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나폴 리에 사는 로라 고모와 그녀의 두 딸이 할아버지 일레르 드가의 병환에 이은 사망(8월 31 일) 때문에 피렌체에 오지 못하게 되자 드가는 고모를 기다리는 동안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고모부 제나로 벨렐리와 함께 지내야 했다. 외롭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젊은 화가는 마침 '쳐다볼 사람은 자기뿐이고 자기 자신 외에는 생각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 는 누구나 우리 자신을 혐오한다는 블레즈 파스칼의 '플로방스에서 온 편지'(1656)를 읽었 다. 파리에 있던 오귀스트 드가는 아들의 귀환이 번번이 연기되자 조바심이 났지만 이탈리 아에서 눈에 띄게 그림이 좋아진 데 대해 만족감을 표시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받 아본 오귀스트는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그림이 굉장히 좋아졌구나. 그림에 힘이 있 고 색채가 사실적이야. 회색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플랑드랭과 라모트의 무기력함에서 벗어 난 느낌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공연히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라. 넌 아주 잘 하고 있으니 까." 아들이 보낸 그림을 보고 만족한 오귀스트는 드가의 작품에 이미 뚜렷이 나타나기 시 작한 독창성을 지적해 주기도 했다. "마음을 편안히 가져라. 조용하면서도 꾸준히 연습을 통 해 네가 선택한 길로 정진하거라.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스스로가 택한 길이다. 거듭 말하지 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평온한 마음으로 계속해 나가려무나. 네 앞에 는 밝은 미래가 있다. 그러니 낙담하거나 걱정하지 말아라." 오귀스트 드가는 이제 막 피어난 젊은 예술가가 지닌 기질상의 단점, 즉 자기 자신을 포 함해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경향, 충동적으로 어떤 일에 착수했다가 결실을 맺지 못 하면 쉽사리 의기소침해지는 성격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드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따분하다'고 생각해 그만두려고 하자 오귀스트는 그것이 화가의 물질적 행복을 보장해 주는 일이라고 반박한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바로 그 무렵 인 11월에 마침내 로라 벨렐리가 돌아왔고 열성적인 드가는 그가 남긴 유화 중 가장 중요한 대작이며 후일 '벨렐리 가족'이라고 부르게 된 초상화를 시작한다. 그는 피렌체에서 이 가족의 초상화를 위한 초기 작업에 착수해 한참 후 파리에서 완성을 보았고 1867년에 살롱전(프랑스 학술원 주관으로 해마다 열리는 공식 박람회)에 출품했던 것 같다. 폴 자모 '벨렐리 가족'을 두고 "자족이 이루어내는 극적인 장면에 대한 화가의 관 심과, 각 인물들이 그저 초상화의 모델로 평범한 포즈를 취한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그들의 가슴에 담긴 괴로움을 포착해 내려는 드가의 경향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라고 아 주 그럴듯한 평을 한 바 있다. 아버지의 바람을 모른 체할 수 없었던 그는 1859년 3월, 마침 내 피렌체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로라 고모와의 슬픈 작별, 귀스타브 모로와 의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파리에 도착한 드가는 우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후 몇 달 동안 드가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면서 당시 그의 친 구였던 은행가 앙투안 쾨니히스바르터의 말마따나 완전히 '맥을 놓고' 지내게 된다. 적당한 아틀레에르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쌀 거라고 아버지가 일러주었다-이 탈리아에 있는 모로의 격려가 몹시 아쉬웠으며, 오랜 외유 끝에 다시 편입한 파리 생활에서 느끼는 마음 고생이 만만치 않아 그는 쉽사리 붓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사정이 눈에 띄게 나아지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마 을에 널찍한 스튜디오를 구했고, 9월에는 이탈리아에서 막 파리로 돌아온 귀스타브 모로와 다시 만났다. 이탈리아 체류는 화가로서 드가의 출발을 알리는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드가는 파리의 널찍한 스튜디오에서 살롱전에 출품할 대규모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1859-1865년은 그가 주로 역사화에 치중한 기간이지만, 그 끝 무렵에는 당시 생활을 담은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2장 "그는 재능있는 화가가 아니라, 천재 화가였다" 대규모의 역사화들 자신의 역사화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제프테의 딸' (1859-1861)을 그릴 당시 드가의 목적 은 큰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들라르쿠아의 화법을 흉내내는 것이었다. 드가는 "나는 베로 네제의 기백과 색체를 가지고 만테냐의 정신과 사랑을 추구한다." 고 다소 막연하게 표현 한적이 있다. 그 작품은 15-16세기 이탈리아의 회화기법을 자유롭게 차용하고 있기는 하지 만, 성서시대에 잠재해 있는 이교사상을 격렬하고 조화되지 않은 야만적인 리듬으로 표현하 여 위대한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들라크루아가 잘못된 궤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던 아 버지와 달리 드가는 귀스타브 모로의 조언에 따라 마침내 색채의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었 다. 그것은 화폭 전체의 명함을 과감하게 병렬배치하고, 여기저기서 폭발하듯 힘찬 색조를 사용함에 따라서 얻어지는 즐거움이었다. '제프테의 딸'에 나타난 살아 움직이는 듯 활기찬 화면과 대조적으로 '바빌론을 건설하는 세미라미스'(1860-1862)는 왕비와 그녀의 시종들을 주의 깊게 배치하고 그에 걸맞게 가라앉은 색조를 사용해 매우 통제된 화면을 보여주고 있 다. 고대 그리스의 상상도는 같은 시기에 그린 '스파르타의 청년들'(1860-1862)에도 나타나 는데,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서 발췌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화풍과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거기에는 고고학적 재구성을 위해 공을 들이 거나 사라진 문명을 발굴해 내려고 고심한 흔적 따위는 없다. 대신에 헬레니즘의 자취가 전 혀 느껴지지 않는 광활한 불모지에서 파리의 부랑아같은 젊은이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 가사이하게 서로 대치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드가는 캔버스에 그물무늬가 있는 종이를 붙이 고 그 위에 유화를 그린다음 테레빈유를 써서 희미하고 엷게 처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비 관습적인 기법으로 저 수수께끼같은 '중세의 전쟁 장면'(1865)을 그렸다. '중세의 전쟁 장면'은 미국 남북전쟁의 참상과 특히 뉴올리언즈 여인들에게 가해진 북군 의 잔인한 학대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강간을 당하거나 죽어 널부러진 채 황무지를 뒤덮은 여인들의 장엄한 누드는 드가의 그림에 몇 년 후 나타난다. 즉 아무도 보 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목욕을 하고, 물기를 닦고, 머리를 빗고, 졸고 있는 모 여인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건만..." 1859-1865년은 불안과 회의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드가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내놓았지 만 그 자신은 이 모든 것이 헛일로 끝나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형의 작업을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르네 드가는 이렇게 말했다. "형은 대단한 기세로 작업을 하고 있고 그의 마음 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그림뿐이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할 작품의 완성을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던 오귀스트 드 가는 자신 의 희망이 다시한번 좌절되는 기분을 맞봐야 했다. 2년 전에 그는 아들에게 농담처럼 자신 의 염려를 표현한적이 있었다. "우리 라파엘로 선생께서 열심히 작업을 하기는 하는데 아직 도 완성품이 나오질 않는군. 그 동안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건만...." 작업에 온 정신을 빼앗긴 드가는 남들에게 냉정한 인상을 주었고 그의 퉁명스러움은 그때 부터 이미 유명했다. "형의 머릿속에서 들끊고 있는 감정들을 살펴보면 정말 놀라울 지경이 다." 1864년에 르네가 한 말이다. 그는 이어서 드가에게 느끼는 가족들의 불안을 이렇게 피 력했다. "형은 재능있는 화가가 아니라 천재 화가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단 한가지, 형 은 과연 그의 감정을 그림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일까?" 그 무렵 드가의 우정 역시 변화를 겪는다. 귀스타브 모로와의 관계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않되어 급속히 냉각되었고 1863년 이후로는 보나와도 왕래가 뜸해졌다. 대 신 문화적 환경이 드가와 필적할 만하고 15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지 닌 화가 제임스 티소와 새롭고 강력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에두 아드 마네와의 만남이 이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드가와 마네: 그 파란 만장한 우정 드가와 마네가 처음 만난 때는 드가가 루브르에서 벨라스케스 '마르그리트 공주'를 직접 구리판에 애칭으로 새기고 있던 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네는 자기보다 두 살 연하 인 이 화가의 대담성에 깜작 놀랐다. 드가가 처음 구상한 대로 모사가 잘 진행되지 않는 것 이 분명해지자 마네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우화처럼 전해지는 이 두 거장의 관계에서 얼마만큼이 사실인지 가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 니지만, 그들 사이의 유대는 1870년대 말에 가장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두 화가의 서로에 대한 찬탄은 종종 서로를 향한 신랄한 비평 때문에 손상을 입곤 했다. 마네는 여자에 별 관 심이 없는 드가에 대하여, 드가는 마네의 부르주아적 경향과 출세 제일주의, 그리고 살롱전 에서 낙선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한 '낙선자전' 덕분에 그가 누리게 된 명성을 보고 독설을 퍼부었다. 갈등으로 점철된 그들의 우정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드가가 그려 선사한 마네 부부의 초상화(1868-1869)에서 비롯되었다. 음악가였던 마네 부인은 파리에 있 는 자기 집 거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남편 마네는 소파에 길게 누워 그녀의 연주를 듣 고 있다. 드가는 이 그림을 마네에게 주었고 마네는 답례로 자신이 그린 정물화 한 점을 선 사했다. 얼마 후 마네가 드가에게 받은 초상화를 훼손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그림 속의 자기 아내 얼굴이 실제와 너무 똑같아서 차마 봐줄 수가 없었던지 아내의 얼굴부터 세로로 잘라 버린 것이었다. 몇 년이 흐른 뒤 수집상인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드가의 아틀리에에서 그 초 상화를 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볼라르: "누가 그렇게 망쳐놨습니까?" 드가: "거짓말 처럼 들리겠지만 마네일세! 자기 마누라 그림이 실물만 못하다고 느꼈던 모양이지.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내가 저 그림 꼴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당장 그걸 집어 들고, 가겠 다고 말 한마디 없이 나와 버렸네. 집으로 돌아와서 마네가 준 정물화를 당장 벽에서 내려 이렇게 꼬리표를 달아서 그에게 돌려보냈지. '선생, 당신이 그린 '자두'는 돌려드리겠소." 볼라르:" 마네와 그후 화해하셨겠죠. 안 그렇습니까?" 드가: "마네와 불편한 관계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데 그 '자두'는 벌써 다른 데다 팔아버렸더군." 그뒤에 현대 생활을 주제로 해서 그린 드가의 그림이 원인이 되어 둘 사이에 또다시 논쟁 이 벌어졌다. 마네는 드가가 '바빌론을 건설하는 세미라미스'를 그리느라고 정신이 없을 당 시에 자신은 이미 그런 주제를 붙들고 캔버스와 씨름하고 있었노라고 주장했다. 드가는 당 연히 경마장에 대한 자신의 관심은 18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때 이미 여러 장의 연 습화를 그렸다고 맞섰다(1862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신사들의 경마: 경마가 시작되기 전'이 그 중에서 가장 큰 작품인데 이 그림들은 20년 후에 거의 다시 손을 본 것이다). 경마장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189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드가의 작품들에 등장하는데, 1861년부터 간간히 노르망디의 발팽송 가족들과 지내면서 그의 경마 그림도 변화를 거듭해 왔다. 발팽송가가 있는 메닐위베르 근처에 아르장탕 경마장이 있었다. 그곳의 시골 풍경은 드가가 너무나 좋아했던 영국의 컬러 판화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는 어느 날 발팽송 가족과 함께 나갔던 소풍의 기억을 되살려 1869년에 '시골 경마장' 이라는 제목의 작은 유화를 그 렸다. 친구인 티소, 모로, 마네와 달리 드가는 1860년대 중반까지도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직 마네, 프레데리크 바지유, 앙리 팡탱 라투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 르 등 카페 게르부아의 단골 손님들과 파리에 와 있는 알프레드 시슬리, 클로드 모네, 폴 세 잔, 카미유 피사로 같은 화가들 사이에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정도였다. 선택받은 소수 화가 그룹 내에서 드가는 세련된 태도나 기품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는 태 도, 이미 악명이 나기 시작한 재담으로 확실한 명성을 얻었다. 1865년부터 1870년대까지 드가가 해마다 출품했던 살롱전은 그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중세의 전쟁 장면 '(1865년 살롱전)을 호평한 사람은 피에르 퓌비 드 샤반 한 사람뿐이었다. 작가인 에드몽 아 부는 '장애물 경마'(1866년 살롱전)에 대해 '기운차고 약동적인 작품' 이라고 짧게나마 호평 했다. 1867년에는 두 점의 가족초상화에 대해 지나가는 말처럼 내린 평가 외에는 드가에 대 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에밀 졸라는 드가가 1868년 살롱전에 출품한 피오크르의 초상에 대 해 칭찬과 비평이 섞인 모호한 평을 했다. 1869년 출품작에 이르러 비로서 흡족한 칭찬이 주어졌지만 여전히 빈약한 수확에 불과했다. 게다가 드가는 실상 단 한 점의 그림도-아직은 그가 돈걱정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 만-팔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티소는 몇 년 사이에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귀스타브 모 로의 작품은 황제의 사촌인 나폴레옹 공작의 소장품이 되기도 했다. '발레 '샘'에서의 피오 크르양'이라는 드가의 작품은 그가 처해있는 모호한 위치를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미술 평론가 에드몽 뒤랑티의 말을 빌리면 마네는 앙리 팡탱 라트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가가 "상류 사회를 그리는 화가가 되어가는 중이다." 고 썼는데, 이때 마네는 분명히 이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그토록 노련한 솜씨를 발휘한 작품임에 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졸라나 카스타냐리, 그리고 뒤랑 티는 자신들의 세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오만한 방종이 분명하게 드러난 이 화가의 초상화를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음에 틀림없다. 반면에 아카데미의 비평가 들과 오페라좌의 단골 손님들, 그리고 명성을 쫓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대에서 보았던 피 오크르와 닮은 피로에 지친 동양의 공주를 보고 아무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다시는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다 살롱전은 적어도 드가에게만은 대중의 주목을 끌 만한 장소가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후 본류에서 떨어져 나온 1870년대와 1880년대의 인상파 전람회는 원맨쇼를 싫어하는 이 화가 에게 훨씬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1870년에 그는 4월 12일 '르 파리 주르날'지에 '살롱 전 심사 위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 후 마지막으로 살롱전에 작품을 내놓는다. 그 공개장에서 드가는 작품의 전시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종합적인 기준을 마련할 것을 제의 한다. 다시 말해 전시할 작품은 두 줄 이상 걸지 말고, 각 작품 사이에는 최소한 20-30센티 의 거리를 두되, 소묘와 채색화를 적적히 배합하고, 전시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는 작 가에게 자신의 그림을 찾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 골자였다. 이 공개장의 내용을 보면 드가가 그간 살롱전에 출품하면서 어떤 장애에 부딪혔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작품들을 아래위 두 줄로 빽빽하게 거는 전시방식이 아니었다면 마음을 동요시 키는 독특한 분위기의 '중세의 전쟁 장면'이 그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피오크르 양이나 고즐랭 부인의 초상화 역시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전 시 시작 며칠 후에 작품을 찾아갈 권리를 요구한 것은, 1867년 살롱전에 출품했던 '벨렐 리 가족'을 다시 손보려고 했을 때 인수가 쉽지 않았던 기억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여간 1870년을 기점으로 드가의 인생은 다시 한 장을 넘기게 된다. 인상파 전람회를 조직하면서 동료화가들과 여러면에서 이견을 보였지만, 그는 살롱전을 거부하는 쪽으로 자신의 입장을 굳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좋은 작업환경, 마침내 인정받기 시작한 드가 집안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로-두 여동생이 결혼했고 르네는 에드가의 성화에 못 이겨 뉴올리언즈로 이사를 가서 사촌누이를 신부로 맞이했다-1860년대는 드가에게 매우 행 복한 시기로 기록되었다. 소소하게 거듭되는 시련에 방해받지 않고 그는 점점 향상되는 자 신의 작품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다. 대중들의 취향에 부합하지 못하는 그의 고집스런 무능 력만이 아니었다면-하지만 이것이 작업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꺽지는 못했다-아마 이 시기를 평온기라고 특징지어도 무방하리라. 드가는 아직 돈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가 축적해 놓은 부는 그에게 작품을 팔아 야 한다는 부담 없이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1868-1869년 이후에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그는 주변의 몇몇 차원을 넘어서 외부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고, 자기 작품을 알리는 일에 어느 정도 활발히 나서기 시작했다. 1869년 그의 동생 아실이 뉴올리언 즈 뮈송 집안에 보낸 편지에는 에드가 브뤼셀에 갔다가 반 프라트라 왕실의 각료가 운영하 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갤러리에 자기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는 "에드가에게 기쁨을 안 겨주었고 마침내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을 갖게 했다"고 적혀 있다. 벨기에에 머무는 동 안 유명한 미술수집상인 아서 스티븐스가 드가에게 1년에 1만 2천프랑이라는 조건으로 작품 계약을 제의해 오기도 했다. 드가 역시 마네처럼 작품의 판로로 영국의 미술품 시장을 타진 하고 있던 중이었다. 1869년에 오고간 편지를 살펴보면 드가가 처해있던 특별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교양 넘치는 미술애호가 집안인 모리소 가문 사람들은, 이 편지에서 드가가 모 리소의 딸 이브(테오도로 고비야르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에게 몇 시간이나 앉 아 있을 것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드가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조사 해 본후 그에 대한 분명한 지론을 갖게 된다. 이브의 언니인 베르테는 처음에는 별로 드 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드가가 맨 처음 그린 이브의 크로키를 보고 "그저 그렇다"고 평했 지만 나중에는 파스텔로 그린 '이브의 초상화'(1870년 살롱전)를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사회적인 지위는 높지만 방랑자 기질을 지닌 가족에게 드가는 본인이 시간적인 여유가 있 고 모리소 집안의 사정만 괜찮다면 아무때나 들르곤 하는 '괴짜'로 인식되었다. 그는 수도원 처럼 조용한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그림을 그 렸다. 모리소 부인은 6월 말쯤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내게 낮에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했지. 점심시간에 와서는 하루종일 있다가 돌아갔어. 일하는 게 즐거워 보였고 붓을 놓고 돌아가기가 싫은 눈치였어. 그에게는 일이 정말로 쉬워보여. 왜냐하면 요 이틀간 사람들이 계속 드나드는 와중에 작업을 하면서도 손길을 늦추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 야." 그보다 한 달 전에 베르테는 드가가 첫 스케치를 하는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더 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처럼 혼란스런 와주에도 어려운 초상화 한 작품을 위한 습작에 몰두 할 수 있는 그이기도 했지만 어떤 그림들은 몇 년씩 질질 끌기도 했다. 드가의 작품을 제작 하는 과정은 처음부터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었다. 태평스런 성격과 불만의 끊임없는 조합, 부단한 회의, 아틀리에 한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 늘 앞으로 나아가면서 가끔은 동일한 주 제에 대해 신선하고 색다른 변주를 생각해 내는 집요함 등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주 제의 폭은 좁아만 갔다. 가만히 앉아서 일하기를 좋아하고 사생활에 시중한 드가의 생활태 도 덕분에 별다른 소문 거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의 노트에 잠깐 언급된 사연(1859년에 드가가 유혹한 듯한 어떤 여자한테 퇴짜를 맞고 나서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열 렬한지 적어놓았다) 이나 편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1859년에 그는 자신의 열정과 결혼계 획등을 고모인 로라 벨렐리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짖궂은 소문 몇 토막 (마네 는 베르테 모리소에게 "그는 여자를 사랑할 능력이 없고, 사랑하고 있다는 말조차 하지 못 한다."고 말했다)이 전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애정생활은 대부분 밝혀지지 않은 채 남 아있다. 일명 '강간'으로 불리기도 하는 '실내' 같은 작품은 이 화가의 성생활과 감정이 지닌 어두운 측면을 말해주고 있어서 비평 이상의 역할을 해준다. 젊은 처녀의 수수한 방에는 그 곳에 들어올 권리가 없는 한 남자가 서 있다. 그 남자는 이미 자기 영토를 차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소지품이 방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서랍장 위에 놓인 모자와 침대에 걸쳐진 외투). 여자는 옷매무새가 흩어진 채로 의자에 구부정하게 엎드려 있다. 그림 중앙에 있는 램프의 불빛 아래에는 끝이 뾰족한 가위가 보이고 상자가 열어젖혀져 붉은 안감이 보이는 가운데 흰 천이 그 속에서 비어져 나와 있다. '깨어진 주전자' 이후로-장 밥티스트 그뢰즈의 과장만 아니라면-처녀성의 상실이 그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그리고 파리 코뮌 프랑스-프러시아의 전쟁(1870-1871)과 파리 코뮌 그리고 뒤이은 폭력적인 혁명정부의 활 동은 화가가 본업에 충실할 수 없도록 가로막았다. 1870년 9월에 드가는 마네처럼 국가 방 위군에 입대했다. 10월초에 그는 파리 북부의 바스티용 12요새에 배속되었는데 그곳 지휘관 은 루이 르 그랑 중학교 시절 친구였던 앙리 루아르였다. 두 사람은 그후 다시 우정을 이어 간다. 드가와 마네는 최상의 전략을 두고 종종 열띤 논쟁을 벌리곤 했다. 베르테의 어머니 모리소 부인은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국가방위군의 소집과 그 방어대책에 대 해 논쟁하다가 거의 주먹다짐까지 할 뻔했지.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 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 드가씨는 포병부대로 전출되었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아직 총 한번 쏘아보지 못했다더구나. 그는 자기가 과연 대포소리를 견딜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 으로 총성을 듣고 있다고 해." 하지만 전쟁은 이런 시시한 논쟁을 넘어 피할 수 없는 실제 적인 비극을 불러왔다. 화가인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스물아홉살의 나이로 오를레앙 근처에 서 살해당했고 드가의 친구이며 조가가인 조제프 퀴벨리에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드가는 이 일을 계기로 제임스 티소와 소원해졌는데, 티소가 죽어가는 이 미술가의 그림을 가지고 전장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전쟁은 드가에게 늘 보는 얼굴들 외에 새 친구를 사귀는 기쁨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장토, 리네, 그리고 레네'(1871)라는 이름이 붙은 감동적 인 삼인 초상화를 보라, 이 그림은 한 퇴역군인이 초대한 저녁식사가 끝나갈 즈음 세 전우 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태평스런 우아함이 깃들인 이 그림의 분위기는 드가가 그들을 만 났을 무렵인, 파리의 포위공격을 받던 시절의 어려움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드가는 파리 코 뮌이 선포될 당시 파리가 아닌 노르망디의 발팽송가에 있었다. 발팽송의 귀염둥이 딸 오르 탕스 초상화는 거기서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사실 역시 모리소 부인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지만, 6월 1일 파리로 돌아온 후 드가는 파리 코뮌 지지자들에 대한 진압을 맹렬히 반 대했다. "티뷔르스(모리소)가 두 명의 파리 코뮌 지지자를 만났다. 그들은 모두 처형될 운명 에 놓여있었다. 드가와 마네였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려는 지독한 조치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하고 있다." 이 뜻밖의 기록을 보면 드가에게 새겨진 보수주의자의 이미지는 수정되어야 마땅할 것이 다. 그러나 그의 평생에 걸친 작품활동을 놓고 본다면 전쟁이 반드시 나쁜 결과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1870년을 전후해서 드가는 자신의 친구이자 바순 연주자인 데지레 디오 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디오는 파리 오페라좌의 관현악단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오케스트라 석에 앉아있다. 작업을 막 마치고 다시 손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드가는 릴 전람회에 출품하 겠다는 디오에게 그림을 넘겼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면서 작품이 파리로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그림을 손보려던 드가의 희망은 무산되었다. 디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 지만 드가의 가족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드가가 마침내 완성작을 내놓게 되었으니. 그림다운 그림을 말예요!" 이 그림은 그이 화폭에 무희들이 등장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캔버스 위로 몰려 있긴 하지만 그들은, 엄숙한 표정의 음악가들 머리 너머 에 펼쳐진 동화속 나라같은 무대에서 훨훨 날고 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면 손발이 뒤틀리는 심한 고통이 계속된 다. 마치 일본 판화에서 보여지듯 종종 인물의 모습이 잘려 나가기도 하는 이 그림들 속에 서 연습은 속도를 더해가고, 무희들은 리듬에 맞춰 다리를 번쩍번쩍 쳐들고, 벽을 따라 무용 봉을 꽉 붙잡은 채, 발레화를 신은 발을 바닥에 콩콩 구른다. 입가에 자동 인형 같은 미소를 머금고서...." 제3장 여인들의 화가 "가볍게 나는 듯한 무희들의 모습이 눈에 익으면서 마치 그들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처 럼 보이고, 할딱이는 숨결이 느껴지고, 귀를 찢는 듯한 바이올린 선율 위로 그들의 실수를 지적하는 무용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발꿈치를 당겨. 엉덩이는 뒤로. 손목은 높이 들고, 자 관절을 찢으라구.-가 들리는 듯한 완벽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지막 명령에 그랑 데블로페가 시작되고 스커트 자락을 밀어올리며 쳐든 다리는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로 가장 높은 무용봉 위로 솟아오른다."(1880년 제5회 인상파 저람회에 출품된 드가의 그림에 대한 조리스 칼 위스망의 비평에서) 무대옆의 빈자리에 서서 '오페라좌의 관현악단'은 그의 작품세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다. '피오크르 양의 초 상'이후 무대와 무용수라는 주제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작품이 등장한다. 드가가 언제부 터 극장을 출입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1885-1862년 사이에 그가 관람했던 공연들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그 이전의 것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당시 드가는 르 플루에티가에 있던 오페라좌(1875년부터는 가르니에궁)에 드나들었지만 정식 회원은 아 니었고, 무대 뒤에서 무희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그는 실제 연습 장면이나 공연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그려왔기 때문에 정확한 묘사라는 측면에서 별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페라좌에서 무용 시험 을 치는 날 들어가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용시험 장면을 꽤 많이 그렸으면서 도 실제 연습 장면을 본적이 없으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그는 고백했다. 1870년대 초부터 그는 발레 그림을 부쩍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무대위의 화가들을 그린 그 림도 있지만 발레 수업 장면이 대부분이다. 이 그림들은 즉각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자 연히 그의 화폭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왜 드가가 이런 주제를 택했을까? 오페라 를 좋아하는 친구들(조각가이자 의상 디자너인 뤼도르크 르피크, 작가인 뤼도비크 알레비)뿐 만 아니라, 오페라좌의 관현악단 연주자들 (바순 연주자 디오, 플루트 연주자 알테, 첼리스 트 필레 등)과 교분을 가지면서 드가는 외젠 피오크르를 통해 얼핏 보았던 특별한 세계를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1870년에 뤼도비크 알레비는 '카르디날 부인'을 발간한다. 이 작품은 오페라좌의 두 젊은 무희 폴린 카르디날과 비르지니 카르디날이 흥미진진한 모험 을 겪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연작 단편소설 가운데 첫 작품이다. 1871년 11월에 드가가 '무 용교실'에 몰두하고 있을 때 알레비는 '카르디날 씨'를 발표했는데, 그 소설의 첫 장면은 금 방 막이 오른 무대에서 펼쳐지는 코르드 발레(무용단 전원의 군무)로 시작된다. 이때까지는 드가가 아직 알레비의 소설에 삽화를 그려넣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용수들의 이면세계에 대 한 경험이 별로 없었던 드가가 이 작가의 조언으로 많은 득을 보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특 히 이 '무용교실'이라는 작품은 조제핀 고즐랭 (전에 그가 초상화를 그린적이 있던)이 연습 을 시작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페라좌의 무용실'(1872년)에서 그는 루이 메랑트라 는 유명한 발레선생을 화폭에 담았다. 이 두 점은 모두 1872년에 미술상인 폴 뒤랑 뤼엘이 구입했는데 그의 화랑은 당시에 바르비종파의 작품들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뒤랑 루엘은 1870년대에 인상파 화가들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작품을 미술 시장에 내놓는 일에 전력한 다. 이는 드가의 미술시장 진출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드가와 미술상들 모네나 루느아르,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드가는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하고 꾸준히 작품을 판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필요할 때마다 그림을 팔았다. 그는 자신과 사업 관계를 맺고 있는 미술상들에게 이제 막 완성시킨 자신의 '상품' 혹은 '물건'(드가의 표현 그대로)을 넘기곤 했다. 때로는 오랫동안 갖고 있던 그림들을 팔기도 했다. 그는 자신 의 초기작품중 하나인 '로마의 거지 여인'(1857년)을 1897년에야 뒤랑 뤼엘에게 넘겼는데, 이 는 완숙기로 접어든 그가 아직도 초기작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드가는 미술시장을 겨냥해 특별히 '상품'을 제작하기도 했 고, 은행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뒤랑 루엘에게 상품의 판매를 아예 위임해 버리기도 했다. 뒤랑 뤼엘의 이러한 역할은 후에 드가가 많은 돈을 투자해 자신의 수장품을 늘려갈 때까지 도 계속 이어졌다. 드가의 작품 제작 활동이 미술시장이나 전람회-특히 뒤랑 뤼엘의 런던 정기 전람회들-에 소개되면서 그의 작품에 실질적인 변화가 따르기 시작한다. 드가의 예술 세계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애호가와 수집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역시 출세에 차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870년대에 뒤랑 뤼엘의 재정사정이 나빠지자 그는 화가들에 대한 지원을 잠시 중단하게 된다. 수입원을 잃어버린 드가는 다행히 영국의 미술수집상인 찰스W.데샴프스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유명한 바리톤 장 밥티스트 포로 같은 개인수집가들도 몇 명 있었다. 미국 여행 이 모든 것이 드가를 변화시켰다. 그의 동생 르네가1872년 여름 파리에 와 있는 동안 쓴 글에 따르면 드가는 그때부터 "더 노련해지고....더 심각해지고 말수가 더 적어졌다." 르네는 뉴올리언즈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의 독신 생활이 굳어지면서 "낮에는 작업을 하고 밤에는 샹젤리제 거리를 산책하고 거기서 카페 샹탕까지 걸어가 사람들이 주고 받는 시시한 소가곡을 듣거나, 교외로 나가 저녁을 먹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격전지를 돌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전하고 있다. 1872년 여름 동안 르네는 자신과 함께 뉴올리 언즈로 가서 외가쪽 친척들과 함께 지내다 돌아오는게 어떻겠냐고 드가를 설득한다. 르네는 반쯤은 자랑스러운 마음에서, 반쯤은 빈정거리는 투로 "위-대한 화가를 모시고 갈테니 그분 에 걸맞은 환대를 준비하라."고 편지를 보내면서 "그렇다고 브루노 밴드, 국민군, 소반수에 목사들까지 동원하는 역전 환영행사는 에드가가 원치 않는다."고 익살스럽게 덧붙였다.한참 을 망설이던 '위대한 예술가'는 마침내 그해 10월, 동생을 따라 미국행 배를 타기로 결심한 다. 뉴올리언즈에서 드가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고장 사람'이 다 된 르네의 안내를 받으며 그는 매사를 눈여겨본다. 열차의 침대칸, 아이들을 돌보는 흑인 여인 들의 '조금씩 다른 피부색' '홈을 판 나무로 만든 하얀 집들' '두개의 굴뚝이 달린 기선' 그리고 '번잡스러우면서도 능률적인 사무실 분위기와 광막하고 어두운 동물적 힘 사이의 대 조'. 그러나 드가는 이러한 감명과 새로운 인상들을 모두 다채롭고 멋진 그림으로 옮겨놓기 는 커녕 -사람들은 그렇게 예상했겠지만- 자기가 두고 온 느긋한 파리의 생활을 그리워했 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세계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나만의 비밀장소에 숨어 일에 몰두하는 것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철학자 장 자크 루소에 견주어 모든 것을 자세히 관 찰하고, '완수하는 데 10년이 걸릴 계획'을 세웠다가 '10분도 안 되어 미련없이 팽개치기도' 한다. 그 곳에서의 삶은 황량해 보인다. 간간히 찾아오는 설사병에 땀투성이로 만드는 더위 그리고 '사람 죽이는' 더운 바람, 오페라를 향한 고통스러울 정도의 갈망, 성가시게 졸라대 는 대가족의 끊임없는 방해. 처음부터 에드가는 파리에서 온 젊은 화가가 뭘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몰려온 친척들에 에워싸였다. 그들의 성화를 물리칠 수가 없어 그는 '가족의 초상화' 를 그렸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그의 앞에서 포즈를 취했는데, 그의 제수가 된 에스텔 뮈송 (르네의 부인), 조카 데지레, 루이지애나의 잘난체하는 친척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 나 피렌체에 머물렀던 15년 전과 달리 그는 이 작업에서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초상화 작업은 그로 하여금 너무나 '따분하다'고 불평하게 만들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곧 그곳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밝혔다. 그리고 여행 계획이 이미 잡혀 있던 1873년 2월, 그는 런던에 있는 친구 티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지금 영국 시장을 겨냥해 "힘이 있는 그림을 한 점 그리고 있다."고 전한 다. 이 그림이 '뉴올리언즈의 면화거래소'로 더 유명한 '사무실 안의 초상들 (뉴올리언즈)'이 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드가의 아저씨 미셸 뮈송의 사무실에 있는 열 네 명의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화가의 두 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각자에 게 주어진 업무에 열중해 있다. 편지에서 드가는 루이지애나는 어디를 가나 면화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온통 면화에 관련된 일뿐일세. 풍토 덕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면 화를 위해 살고 면화로 먹고 살지." 마치 축소 모형으로 제작된 바다인 양 테이블 위에 펼 쳐진 눈부시게 새하얀 면화 샘플을 보고 그가 내린 결론이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면서도 나 름대로 질서가 잡혀 있는 이 '확실하고도 분명한' 필치를 보여주는 사무실 그림은 아메리 카에 대한 그의 생각 -멀리 떨어져 있는 고요하고 풍요로운 땅- 을 엿보게 해준다. 같은 주제를 약간 변형시켜 그린, 하버드 포그 미술관 소장 작품을 제외하면 이 작품은 드가가 미국에서 가져온 유일한 작품이다. 다른 그림들 ('꽃병이 있는 여인상' '노래연습')은 시작은 미국에서 했지만 파리에 돌아와서 완성한 것들이다. 오랜 고독 속으로 침잠하다 먼 미국땅에서의 장기체류는 끝났다. 이제부터 드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곳에서 여 생을 보낸다. 늘 그랬듯이 노르망디에서 여름을 지내거나 프랑스 남부의 온천에 다녀오거나 아버지 쪽 친척들 때문에 계속 불거져 나오곤 하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따금 나폴 리에 갔다 오는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파리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1870년대는 전반적 으로 동요가 일고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인상파 전람회의 조직, 극도로 다양한 경향을 보 이는 예술작품들, 기법상의 수많은 혁신등). 그러나 무엇보다 드가는 그 이전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던 가족의 불운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1874년 2월 23일, 오귀스트 드 가가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늘 '사랑하는 아빠'라고 불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의 침대 머리맡에 걸린 작은 그림 속의 드 가는 비록 노령으로 허리가 굽었지만 총기는 잃지 않은 모습으로 로렌조 파강이 부르는 스 페인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실 아저씨는 1875년 2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산 은 1909년에야 처리될 수 있었다. 오귀스트 드 가의 회사는 이미 엉망인 상태였고 나폴리의 재산을 분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데다 르네의 빚은 화가에게 최초로 재정부담을 안겨주었 다. 이제 그는 작품을 파는 일에 좀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875년, '잘생긴데다 성미 급하고 자만심이 강한 드가의 동생 아실이, 파리의 증권 거래소에서 옛 정부의 남편에게 습격당하자 두 번이나 그에게 총을 쏘아 부상을 입히는 사 건이 발생한다. 드가로서는 피할 수 없는 불명예스런 시련이었다. 40대에 들어선 드가는 늘 뭔가 불안해하며 친구를 원하고 끊임없이 '질서를 갈망'했지만 한번도 안정이 되거나 자리 잡힌 적이 없었다. "가족 하나 없이 혼자 산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힘든 일입니다." 1877년 친구인 레옹틴 드 니티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런 고백이 보 인다. "독신생활이 내게 이렇게 고통을 줄줄은 미쳐 몰랐어요. 건강도 좋지 못하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이렇게 늙어가는군요. 내 인생은 아주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인상파들의 눈으로 본 드가 이 시기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몇 차례 열렸던 인상파 전람회이다. 이 전시회는 종종 신랄한 비난이 대상이 되곤 했지만, 드가 쪽에서 보자면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873년 12월부터 모네, 피사로, 시슬리, 모리소, 세잔, 그리고 ' 무명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동조합'을 결성했던 몇 몇 미술가들과 함께 매번 인상파 전람회 의 조직을 열심히 도왔다. 그 전람회의 목적은 작품 선정위원회 없이 자유롭게 전시하고 전시한 작품은 팔 수 있으며 (절대 물질적으로 흐르지 않을) 미술 저널을 발간하는 것이었 다. 1874년 봄에 문을 연 첫 번째 전람회에서 드가는 열 점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더러는 호 의적이지 않은 비평도 있었지만 폭넓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전람회는 실 패였다. 언론의 무자비한 질타가 쏟아졌고 참가자도 얼마 되지 않았으며 작품도 거의 팔리 지 않아 예술가 협동조합은 금방이라도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2년 뒤에 그들은 르 플르티에가 11번지에 있는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다시 한번 전람회를 열었다. 이번 전람회에 드가는 스물두 점의 작품을 내놓았고, 언론의 평가는 다시 한번 둘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한테도 드가는 점점 더 그 그룹의 리더로 인식되 었다. 1877년과 1879년, 1880년에 잇따라 열린 인상파 전람회는 같은 작품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평가라는게 따분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새로 발견한 드가라는 화가의 재능을 인정하는 비평이나 그 화가에게 갈채를 보내는 일을 빈번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드가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그룹 내에 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었다. 드가의 주위에는 완고한 비난자들도 있었지만 지지자들도 있었다. 이미 출판물을 통해 드 가를 극구 칭찬한 바 있던 조리스 칼 위스망은 1880년 '현대 예술'에 실은 기고문에서 길고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그보다 몇 년 앞서 에드몽 공쿠르는 -비록 드가의 가장 열렬한 옹 호자는 아니었지만- '일기'에, 특별히 언급할 만한 독특함이 이 화가에게 있다고 밝혔다. 그 글에서 공쿠르는 "그는 관습에 얽매이기 싫어하고...게다가 병약하고 신경쇠약에 걸린데다가, 시각장애로 앞을 못 볼지도 모르는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는 탁월한 감수성을 지녔다." 고 썼다. 1876년에는 시인이며 나중에 드가와 친구가 되는 스테판 말라르메가 런던에서 발간한 한 기고문에 드가에 대해 열렬한 찬사를 늘어놓기도 했 다. 1870년대는 다채롭고 복잡한 기법을 이용해 처음 시도하는 다양한 주제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많이 내놓은 시기였다. 그 이전 10년 동안 큰 비중을 차지하던 초상화는 다소 감소 한 반면 무희들의 그림은 더 많아졌다. 경마장을 다룬 작품들도 계속 제작되었고 세탁소 여 직공들도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카페 콩세르와 사창가도 그의 관심대상으 로 떠오른다. 그림재료들도 주제 못지않게 다양해진다. 유화는 물론, 갖가지 용액이 모두 사 용되며 그의 작품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파스텔과, 자기가 고안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노타이프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로워졌다. 그가 18세기 회화-그가 유년시절부 터 익숙했던-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는 점 이외에도 파스텔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에게 유리했다. 파스텔은 건식인데다가 (오일을 사용할 때보다 작업이 덜 번거로웠다) 불 투명이어서 (고쳐 그리기가 훨씬 쉬웠다) 단시간에 작업을 끝마친 후 몇 번이고 수정작업을 하는 화가에게는 아주 이상적이 재료였다. 게다가 재료의 특성상 '나비 날개에 묻은 가루' 처럼 시간이 흐르면 날아가는 파스텔은, 우거진 수풀 아래서 힘차게 노래하는 카페 콩세르 가수들이나, 무대 위에서는 색색의 무용 스커트를 입은 공기처럼 가벼운 존재이지만 가끔씩 본래의 풋풋하고 거친면을 드러내는 파리의 소녀들처럼 잘 포착되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기 에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무희들의 화가, '꿈꾸는 듯한, 꾸민' 존재들 기법의 혁신을 위한 끝없는 연구와 다양한 용액들을 활용해 보려는 그의 욕구는 무희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더불어 상호 보완해가며 발전을 거듭한다. 드가가 '무희의 화가' 가 된 특정한 시점이 있다면, 그가 여러 기법들을 폭넓게 구사하면서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무희 의 그림을 무수히 그린 바로 이 시기가 될 것이다. 무대위의 무희들을 그렸던 초기 작품들 에는, 공기처럼 가벼운 발레리나와 무대 앞의 어둠침침한 음악가들, 딱딱한 표정으로 맨앞 줄에 앉아 있는 연주회의 정기 회원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꿈꾸 는 듯한, 꾸민 존재들이 깐닥깐닥 춤추는' 에덴 동산 같은 무대와 음울한 지옥을 강하게 대비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이제 그는 무대장치 뒤로, 기쁨이 없는 연습실이나 무희들의 몸 을 녹이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후원자들과 잡담을 주고받는 후미진 곳으로 따라 들어간다. 그들을 바라보는 화가의 눈은 날카롭고 타협을 모르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그렇게 잔인하 지는 않다. 드가는 보통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얼굴'의 무희들과, 후원자 노릇을 하며 딸들을 지키기 위해 감시의 눈길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들의 어머니들, 검은 양복 차 림의 티켓 소지자, 짧은 발레 스커트와 리본을 화폭에 되풀이해 옮겨놓는다. 무용가이자 안 무가인 쥘페로가 발레 지도를 하고 있는 두 점의 '무용교실'은 대작이다. 그보다 작은 작품 들 (분홍색이나 초록색 종이에 자주 그림) 은 셀 수 없이 많고, 모노타이프, 부채에 그린 그 림들에도 무용 장면은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섬세한 비단천 위에 그린 이 부채그림에는 무 희의 빠른 몸동작을 그린 화가의 뛰어난 솜씨가 잘 드러나 있다. 여러 계층의 여자들 1870년대에도 세탁소 여직공들, 카페 콩세르의 가수들, 매춘부들이 계속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1874년 2월에 드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에드몽 공쿠르는 빨래하고 다림질을 하는 여인들의 그림을 몇 점 보고 자기 동생이 쓴 소설, '마네 살레몬'(1867)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졸라는 자신이 드가에게 빚을 졌음 을 고백한다. "저는 제 소설, '달갑지 않은 사건'의 두어 군데에 당신의 그림들을 아주 짧게 이지만 묘사해 두었답니다." 카페 콩세르를 주제로 한 그림은 1876-1877년을 전후로 갑자 기 등장했다. 그의 카페 앙바사되르의 종이초롱 불빛 아래서 외설스런 노래를 부르며 경련 과 같은 몸짓을 선보여 유명해진 에밀리 베카, 입을 크게 벌리고 팔을 늘어뜨린 채 개를 흉 내내며 '개의 노래'를 부르는 테레자 같은 유명 가수들의 모습을 모노타이프로 몇 장 제작 했다. 그 무렵 화려한 사창가 접대실의 창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죽치고 앉아 손 님을 기다리다가 외설스런 몸짓으로 유혹하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마담의 축일을 축하해 주 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직업상 유니폼이나 다름없는 것들, 예를 들면 목을 꼭 조인 목걸이, 야한 속옷, 스타킹, 가터 벨트, 뒤축이 없는 슬리퍼 같은 것들을 걸치는 것 말고는 거의 언 제나 홀딱 벗은 모습이다. 이 놀라운 연작들은 1876년에 출판된 위스망의 소설 '마르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드가는 다시 한번 동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리얼리즘 속 으로 빠져들지만, 이런 주제에 대한 그의 대담하고 솔직한 접근은 후대 화가들의 그것을 훨 씬 앞지르는 선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저속한 장면을 강조하지는 않 았다.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게 되면 춘화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허나 드가가 그린 '마담의 축일'에는 축제 무드와 이집트 부조의 장엄함이 깃들여 있다." 이러한 주제가 진기하다고 해서 여전히 그 비중을 무시할 수 없는 초상화의 중요성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아직도 드가는 그에게 아주 가까운 주위 사람들에 게만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주기를 부탁한다. 고모처럼 가까운 친척들, 완고한 몬테 자시 공 작부인, 앙리 드 가 아저씨는 조카딸 뤼시에와 조용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모습으로. 앙리 루아르 같은 친구는 자신의 공장 앞에 선 옆모습으로 그린다. 그리고 잘 차려 입은 장토 부 인은 외출 직전에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는 모습으로, 작가인 에드몽 뒤랑티는 책들이 꽂힌 서가를 배경으로 자기 책상 앞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으로, 피렌체의 비평가 디에고 마르텔리는 간이 의자에 불편하게 걸터앉은 모습으로 그려놓는다. 드가의 초상화는 그가 1860년대에 추구했던 방향으로 나갔다. '오페라좌의 관현악단'처럼 '증권거래소의 초상들'은 직장에서 사람들과 섞여 있는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거울을 보는 장토 부인'은 갈색톤으로 조화를 이룬 휘슬러의 작품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가 하면 '몬테자 시 공작부인과 그녀의 딸, 엘레나와 카밀레' 에서는 부인의 위엄 있는 모습이 화폭 가장자리 에 옆모습으로 서 있는 두 딸의 발랄함과 대비를 이룬다. 초상화 '디에고 마르텔리' 의 가파 르게 각이 진 관점은 단시 그가 노트에 써놓은 관심사와 들어맞는다." 초상화 한 점 그리기 위해서 화가는 모델로 하여금 아래층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기도 하고 2층에서 작업도 시키 면서 뇌리에 남는 대상의 형태와 표정에 익숙해져야 한다. 즉석에서 데생을 하거나 채색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렇게 괴롭고 마음 아픈 것은 시골풍경 때문인가, 아니면 50년 내 인생의 무게 때문인 가? 내가 체념한 듯 바보같이 웃으면 사람들은 나를 즐거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돈키 호테'를 읽고 있다. 오, 그는 정말 운 좋은 사람이다. 그 얼마나 거룩한 죽음이냐!...아, 나 자 신을 강한 남자라고 생각하던 날들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가슴속의 논리와 계획으로 꽉차 있던 그 시절! 나는 언덕을 내달리고 있다. 마치 너무 많은 포장지에 쌓인 양, 엉뚱한 색깔 에 파묻혀 어딘지도 모르는 채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제4장 "나는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드가는 조각가인 알베르 바리톨로메에게 자기의 침울한 심정을 털어놓은 것은 그가 쉰 살 이 되던 때였다. 얼마 후인 1886년에는 울적한 마음에 이런 편지를 썼다. "이런 내 마음에서 마저 뭔가 억지로 꾸민 듯한 가공의 냄새가 나는군. 무희들은 이런 감정을 발레화처럼 색바 랜 분홍색 공단 가방에 넣고 꿰매버리지." 가까운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드가는 노 쇠에 대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고독과 질병, 돈문제, 가까운 친구들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에 대해 주기적으로 환멸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1880-1890년: 마침내 명성과 부를 얻다. 이 10년 동안 드가의 인생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1880년에는 가족의 부채 때문에 여 전히 편치 못했다. 1890년에 그는 3층짜리 아파트로 살림의 규모를 줄여가는 한편, 자신이 수장하고 있던 앵그르, 들라크루아, 코로, 쿠르베, 고갱, 세잔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팔아야 했다. 1880년에 드가는 그림을 많이 팔려고 애썼고, 몇몇 미술수집상들 (부소와 발라동, 베 르넹 죈, 엑토르 브람, 앙브루아즈 볼라르, 그리고 뒤랑 뤼엘) 에게 자신의 작품을 넘겼다. 이 무렵 드가는 펠릭스 페네옹, 조르주 알베르 오리에와 같은 비평가들에게 갈채를 받기 시작했다. 가리탱토르의 글 (보그스 외5인 공저, '드가', 1988년)을 인용하면 "드가는 무명 화 가의 편안함 속으로 슬그머니 미끄러지기 위해 파리 미술계에서 눈에 띄는 자신의 위치를 버렸고 심각한 채무상태에서 벗어났으며 자연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돌아섰다." 가끔 몹시 비참한 기분에 빠지곤 하던 드가는 이제 부와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에게는 돈이 있었다 .그의 여동생 테레즈는 이처럼 지적한 적이 있었다. "오빠는 자기한테 얼마나 많은 돈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예요." 그의 작품은 꾸준히 잘 팔렸다. 꽤 많은 화가들이 그를 거장으로 존경했다. "그의 작품보다도 드가라는 이름이 그의 성격에 따른 별칭처럼 통 용되고 있다." 오딜롱 르동이 1889년 3월에 한 말이다. "독립성의 원칙이 논의의 대상으로 떠오르면 언제나 그의 얘기가 나올 것이다. 드가라는 이름을 신전에 높이 새겨둘 만하다. 이 사람을 존경하라. 절대적인 존경을 바치라." 외출을 싫어하는 여행자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의 일상은 여러 가지 사건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 았다. 두 차례에 걸쳐 이사 -1882년 피갈가로, 1890년 빅토르 마세가로- 를 했고 가정부 사 빈 네가 사망했으며, 그녀 대신 충성스런 조에클로지에가 들어왔다. 조에는 드가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를 돌보았다. 늘 그랬듯이 드가는 여름이면 메닐위베르의 발팽송가나 노르 망디 해안의 알레비가에서 지내다 돌아왔다. 1880년대 말에는 프랑스 남서부 코트레의 온천 에서 머물기도 했다. 1889년에는 멀리 스페인과 모로코까지 여행을 했다. 파리를 떠나 있는 동안에는 작업을 하거나 친교모임을 가졌다. 코트레에서 드가는 나이 지긋한 귀족들과 중산 계급의 벼락부자들, 나중에 유명한 테너 장 드 레즈케와 결혼한 사교계의 여성 마이 네슬 백작부인등과 즐겁게 어울렸다. 드가는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달리 휴가여행에서 기념품 이나 화집따위를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연이 협조해 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곤 했 다. "산 그림을 그려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내가 너무 경솔했던 것 같네. 이곳에는 별로 마음 에 드는 장면이 없군. 우리는 거의 한곳에 틀어박혀 있고 여태까지는 모두가 나를 냉대하는 듯하네." 그가 1890년에 코트레에서 보낸 편지에 담긴 말이다. 그러니 자연히 파리의 조용하 고 평화로운 자신의 스튜디오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1889년 갑자기 떠난 스페인 여행이 그 적절한 예이다. 여행은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한 가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아직도 마드리드를 여행하면서 진짜 투우를 한번 보고 싶 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네." (1889년 8월, 코트레에서 바르톨로메에게 보낸 편지) 이 생각은 '내 머릿속을 스페인에 관한 것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 그와 관련된 책자들 (여 행안내서, 기행문, 투우입문서) 을 읽으면서 점점 무르익었다. 9월 초에 코트레를 떠난 그는 비아리츠에 잠깐 들렀을 때 전차 2층 칸에서 레옹 보나를 우연히 만났다. 로마 출신의 옛 친구는 정부 고위 관리들의 공식 초상화가로 승진해 있었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드가는 프라도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네는 벨라스케스를 알수 없을걸세.") 투우경기도 관람하고 안달루시 아에도 잠깐 다녀오며, '단 몇 시간만이라도' 모로코 땅을 밟아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다. 탕헤르로 떠난 드가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에 재미를 느꼈고 - "마차 행렬에 끼여 노새를 타고 가는 나를 상상할 수 있겠나? 보랏빛 비단옷을 입은 가이드의 안내로 해 안가의 먼지 낀 길을 따라 노새를 타고 탕헤르로 왔다네." (1889년 9월 18일에 탕헤르에서 바르톨로메에게 쓴 편지)- 들라크루아를 추억하며 감회에 젖는다. ("우리는 자연의 손길이 닿을 만한 가치가 있었던 사람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되지. 들라크루아가 세상을 떠났으니 말일세.") 스페인과 모로코를 둘러본 그의 짧은 여행은 근본적으로 순례여행이었으며 작품 은 단 한점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벨라스케스와 들라크루아를 순례했고 이름은 한번도 입 에 올리지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유명을 달리한 마네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을 터였다. 베라 스케스와 투우를 보면서 틀림없이 그는 옛 친구를 생각했을 것이다. 1880년대는 이 화가에게 상실의 시대였다. 마네가 1883년에 죽었고, 이탈리아 화가인 주제 페 드 니티스 ('그 명민하고 비범한 친구') 가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났으며, 루이 르 그랑 중 학 시절부터 줄곧 친구였던 알프레드 니오데와 그가 사랑하는 루이 알레비의 사촌이 잇따라 곁을 떠났다. (메리 캐섯의 동생 리디아는 1882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 때문에 생긴 공백은 때맞춰 새로 사귀게 된 충실한 친구들로 다시 채 워졌다. 한 사람은 1883년에 처음으로 드가의 작품을 구입한 앙리 루아르였고 또 한 사람은 메리 캐섯이라는 미국 출신의 여류 화가였다. 캐섯은 1879년-1880년에 드가와 함께 '밤과 낮' 이라는 정기간행물의 발간을 추진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캐섯은 드가에 대한 끝없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는데, 미국의 엄청난 갑부 루이진 헤브마이어에게 드가의 작품들을 수집 하도록 권한것도 바로 그녀였다. 1882년에 캐섯은 모자상점을 그린 그림에 여러 차례 모델 을 서주며 자신의 친구인 헤브마이어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모델을 서 주 는 경우는 드가가 움직이는 것을 힘들어 하거나 (직업적인) 모델들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을 때뿐이야." 드가는 캐섯의 작업에 용기를 북돋워주 고 조언을 해주며 그녀의 작품 몇 점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유명한 '머리를 매 만지는 처녀' 였다. 그는 이 그림을 자기 아파트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었다. 그러나 드가의 인간관계가 늘 그랬듯이 그들 사이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드가 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1884년경)는 젊은 미국 여자가 카드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을 옮기고 있다. 훗날 캐섯은 이 그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12년-1913년에 뒤랑 뤼엘에 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그림이 내 초상화로 가족들에게 남겨지 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술작품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나를 그렇게 혐오스런 여자로 그려놓은 것은 견딜 수 없어요. 내가 그 그림을 위해 모델을 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는게 싫 어요." 캐섯이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은 숙녀답지 못한 품위 없는 포즈뿐만이 아니라 드가가 그림에서 그녀에게 요구한 역할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장의 카드를 내보이고 있는 그녀는 마치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빈정대는 듯한 점쟁이처럼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서는 리처드 톰슨의 글을 읽어보라.) 그 당시 드가의 여자친구는 메리캐섯뿐이 아니었다.글 루크와 바그너 해석으로 갈채를 받았고 에르네스트 라이에르의 가장 유명한 두 편의 오페 라, '살람보'와 '시구르드' 에서 주역을 맡아 더욱 유명해졌던 소프라노 로즈 카롱이 있었다. 드가는 로즈 카롱에게 소네트-그중 한 편은 1888-1889년 겨울에 썼다-를 지어 바쳤는데 그 소네트에서 드가는 그녀의 힘차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무대에서 보이는 침착성에 경의를 표 했다. 소네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만일 내 눈이 멀어버린다면, 부디 귀라도 성해서 눈으 로 보지 못해도 그 목소리로 알 수 있기를." 드가는 몇 년 후(1892경) 로즈 카롱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 초상화에서 그녀의 얼굴은 거의 어둠에 묻혀 있지만 그 속에서 풍기는 아스텍인의 특징과 장갑을 벗고 있는 손의 움직 임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다. "성스러운 카롱, 그녀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그 녀가 알지도 못하는 퓌비드 샤반이 떠오른다." 드가가 쓴 글이다. 오페라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 오페라는 드가가 열정을 바친 주된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파리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들을 보면 드가가 밤에 무대 뒤에서 오페라를 구경한 횟수뿐만 아니라 1885년부터 1892년 사이에 관람한 오페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드가는 라이에르의 '시 구르드'- 브뤼네힐데 역을 맡은 로즈 카롱의 노래를 들으러 갔던 것으로 짐작된다-를 적어 도 서른일곱 번 이상 보았고, 베르디의 '리골레토'를 열다섯 번, 들리브의 발레 '코블리아'를 열세 번, 로시니의 '빌헬름 텔' 과 도니제티의 '라 파보리타' 를 각각 열두 번, 구노의 '파 우스트'를 열한 번, 마이어베어의 '아프리카인'과 베르디의 '아이다'를 열 번씩 보았다. 그는 프랑스 대가극 걸작들, 알레비의 '유대인', 마이어베어의 '위그노' '귀신 로베르' '예언자'도 관 람했다. 좀더 최근작들인 마스네의 '르 시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그 이후로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사라져버린 팔라딜레의 '파트리', 생상스의 '아스카니오'도 물론 잊지 않았다. 이 목록들은 드가의 음악적 취향과 그 당시 이미 유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던 프랑스 대가극이라는 장르를 그가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려주며, 그가 여러차례 공언했던 바그너에 대한 반감을 잘 대변해 준다. (1891년과 1892년에 그는 로즈 카롱이 엘자역을 맡 았음에도 불구하고 '로엔그린'을 딱 두 번 보았을 뿐이다.) 이같은 음악적 취향으로 오페라 와 발레는 그의 작품에서 변함없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드가는 리허 설 장면들을 차례차례 계속 그렸는데- 전부 합해 40장쯤 되는 제각각 다른 연작들이다- 이 때 그는 관습에서 벗어난 수평으로 긴 화폭을 사용했다. 규모가 줄어들고 옆으로 긴 화폭은 독창적인 구성요소들- 아무것도 없는 길다란 벽, 사람이 모여 있거나 아무도 없는 공간, 녹회색빛, 그림에 묘미를 주기 위해 가끔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더블베이스를 그려넣는-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무희들은 하품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위해 기지개를 켜거나, 가 끔은 고통스런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는 피곤한 몸을 쉬고 있다. 이 그림들은 대개 뒤랑 뤼엘이 구입했다. 드가는 이따금씩 다른 수집상들에게 제품을 팔 겠다고 위협하거나 끈질기게, 때로는 그다지 정중하지 않은 표현으로 돈을 요구했다. "당신 이 차일피일 미루고 파스텔화를 보러 오지 않으니 당신에게 이렇게 그림을 보냅니다." 1886 년 8월 13일에 드가가 뒤랑 뤼엘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이다. "말 그림 한 점과 산을 배 경으로 한 경마장 그림(유화)을 하나 더 보냅니다. 그러니 오늘 오후까지 돈을 좀 보내주시 면 좋겠소. 내가 당신한테 뭔가를 보낼 때마다 액수의 반이라도 맞춰줄 수 있도록 애써보시 오. 일단 내가 다시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빚을 깨끗이 청산할 수가 있을 게고, 그렇게 되면 당신을 위해 따로 남겨둘 작품이 없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돈이 지독하게 궁해 요. 이 파스텔화를 당신말고 다른 사람에게 팔려고 했던 것도 바로 그래서입니다. 그럼 돈을 다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드가는 뒤늦게 불붙기 시작한 미술품 수집 욕구 때문에 계속 현금이 필요했고 이 취미는 그가 가장 중요한 소장품들을 사들인 1890년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드가의 작품에 대한 뒤랑 뤼엘의 독점은 1887년에 드가가 자신의 초기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를 -'국화꽃이 있는 여인상'으로 잘못 알려진 '꽃병 옆에 기대어 앉은 여자'-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넘김으로써 끝나게 된다. 테오는 부소와 발라동 화랑의 수 집상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1891년 테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1890년대가 다가오면서 드 가는 작품 파는 횟수를 줄여갔고, 최신작이든 초기 작품이든 수집상에게 넘기거나 미술시장 에 내놓을 때면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이처럼 미술시장에 대한 그의 독립적인 태도는 날로 높아가는 그의 인기와 더불어 더욱 확고해만 갔다. 그는 전람회에 내놓을 작품 역시 공들여 고르고 또 골랐다. 동료 사이의 갈등: 드가, 고갱, 피사로 인상파 전람회는 여전히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전람회의 조직에서 드가가 맡 아온 역할이 집중포화를 맞게 되었다. 폴 고갱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혹시 그 때문에 일 을 그르치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를 반대한 주된 이유는- 그다지 격렬하지는 않았지 만 귀스타브 카유보트와 카미유피사로 역시 드가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그가 자신 의 친구를 몇을 전람회에 참여시키겠다고 고집한 데서 비롯되었다. 1882년 전람회 때 그는 기분이 상한 나머지 작품을 한 점도 출품하지 않았다. 1886년의 마지막 인상파 전람회에는 카달로그에 나온 열다섯 작품 가운데 겨우 열 점만 전시했다. 그 열 점의 작품들은 비평가 들의 갈채를 받았다. '목욕을 하고, 몸을 씻고, 물기를 말리고, 수건으로 닦고, 머리를 빗거 나 빗어주는 여자들 누드 연작'은 현재 1886년 전람회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쇠라의 '그랑 자드섬의 일요일 오후' 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상파 전람회의 폭풍 같은 시 대는 그렇게 종말을 고했고 전람회 하나하나는 미술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비 록 인상주의 화가의 자격은 결코 아니었지만 드가는 끝까지 성의를 다하여 이 아방가르드 운동을 지지했다. 자신의 친구들-페데리코 잔도메네, 메리 캐섯, 주제페 드 니피스, 장 프랑 수아 라파엘-을 밀어붙인 그의 고집은, 그가 그 집단에 속해 있음으로 해서 덕을 본 아방가 르드 동료들이 치러야 할 양보였다. 예전 친구들과의 관계는 점점 틀어졌다. '그 모든 것에 도 불구하고'-딱 자르는 거절과 그의 까다로운 성격, 만년의 적의에 찬 반유대주의-드가에 대한 피사로의 엄청난 찬미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했다. 그는 모네와 점점 할말이 없는 사이가 되었고 모네를 진정한 예술가라기보다 영리한 사업가 쪽이라고 혹평했다. "드가는 누구보다도 냉혹한 비평가였습니다." 모네가 1888년에 전시한 작품을 회상하며 피사로가 한 말이다. "그는 모네의 그림을 오직 팔아먹는 데 목적을 둔 미술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 어요. 그저 아름다운 장식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던 거 죠." 그의 진정한 친구들은 독창성이 없는 이류 화가들, 그런대로 능력은 있지만 인상파 화 가들의 천재성은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여자, 말, 그리고 또 여자들...... 만년에 접어들어 그는 전람회 참가를 삼가했고, 그림 판매도 이따금씩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때 못지않게 꾸준히 작업했고 1870년대에 탐구하기 시작한 몇 가지 주제들 과 끈질기게 씨름했다. 여자들-무희, 모자 판매원, 다림질하는 여자, 목욕하는 여자-이 그 어느때보다 강조되던 시기였고 초상화나 경마장 그림은 어쩌다 한 번 제작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말 그림은 에드워드 뮤브리지와 에티엔 쥘 마레의 연구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 었다. 그들은 말이 달릴 때의 모습을 연속사진으로 빨리 찍으면 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포 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잡지 '나튀르'(1878년 12월 제 14호)에서는 이미 속 도가 각각 다를 때 말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동판화로 찍어 게재한 바 있었 다.1887년에 드가는 뮤브리지의 '동물의 운동'을 열심히 탐독했고 그 중에 두 장을 모사했으 며, 그 사진들을 바탕으로해서 몇 점의 조각품을 만들었다. 1880년대 초에 들어서서 드가는 1860년대에 제작한 두 점의 경마 그림을 대폭 개작했다. '장애물 경마' (마지막 제 작,1896-1898)와 '신사들의 경마: 경마가 시작되기전'은 20년 전에 그려놓은 그림들이었다. '신사들의 경마'는 원래 시골이던 배경에 공장굴뚝의 연기를 그려넣고 기수들의 얼굴을 다시 손질하고 깡말랐던 기수와 말의 몸에 살집을 붙여서 거의 완벽하게 다른 작품으로 만들었 다. 가까이하기 쉬운 이 그림들은 1880년대에 들어 사겠다는 애호가들을 만났고, 이로써 화 가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대부분 여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모자상점에서 모자를 써보고 있는 여자들이 나오는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화폭 아래 쪽 진열대에 즐비하게 놓인 화려한 여성용 모자들은 수평으로 여지없이 절단되어 있다. 그 의 여자들은 다림질판을 앞에 놓고 힘겹게 노동을 하거나, 물병을 들고 하품을 하고 기지개 를 켜고, 발레용 짧은 스커트 차림으로 무대 위에서 절을 하거나 무대 뒤에서 마지막 연습 을 하거나 어깨끈을 매만지고, 혹은 자기방에서 혼자 몸을 닦아 물기를 말리고 부지런히 문지르고 머리를 빗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거나 누군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자신들의 행동을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고 행각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럼 없이 젖가슴과 엉덩이를 드러내고 널따란 등을 내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이 나체화들에 표 현된 가차없는 사실성 때문에 화가의 잔인한 시선이 비판을 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드가 가 여자를 동물로 여기고 그들의 무의식적이고 노골적인 행동을 관찰해 대중 앞에 그대로 드러내보인 엿보기꾼이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견해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다른 사람 들은 -반 고흐가 그런 견해의 선두에 있었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화가 의 성적 관심에서 나온 산물로 보았다. 화가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호는 이런 말을 한다. "드가의 그림은 남성적이며 개인감정이 섞여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방탕한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공증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인 간이라는 동물을 관찰합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한 인간이라는 동물을 관찰합니다. 그 동물은 (섹스하는) 동물인데다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이 섹스하는) 동물이며 그 자신은 (섹스하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아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입니다." "드가의 귀는 점점 어두워졌고 눈마저 제 기능을 잃었다."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1921년에 드가를 두고 한 말이다. 새로 일어나고 있는 아방가르드 운동과도 관계를 끊고 고독 속에 파묻혀 점점 장님이 되어가고 있는 드가는 서서히 세상에서 물러나 멈칫거리는 걸음으로 거 리를 배회했다. 제5장 "모든 것을 놓아버리다" 1890년대까지는 그래도 그의 시력이나 청력이 어느 정도 제 기능을 할 수 있었으나, 1907 년쯤에 이르러서는 마치 '펜싱을 하듯' 파스텔을 휘두르며 그림을 그릴 지경이었다. 1910년 에 모델 알리스가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에 드가는 작업에 몹시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 다.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1912년에 이사한 뒤로 그가 거의 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빅 토르 마세가에 있던 드가의 집이 철거대상에 들어 집을 비울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큰 그 림들을 뒤랑 뤼엘에게 맡기고 클리시 대로 6번지에 자리잡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다. 이 강제이주는 의심할 바 없이 그이 종막을 향한 시발점이 된다. 새 거주지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던 그는 도무지 작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21년 12월 10일에 다니엘 알레비는 드가가 슬픔 어린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보다시피, 다리는 성하니 돌아다닐 수가 있지. 그런데 이사를 한 다음부터는 일을 할 수가 없어..... 상관없어. 더 이상 생각 안 하기로 했어. 참 놀라운 일이지, 늙는다는 건 얼마나 무심해지는 것인지." 서서히 찾아오는 죽음을 향해 1890년대부터 화가는 점점 더 자기 속으로 침잠하며 세상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게 된다. 1890년대 초에 이미 외출 횟수가 줄었고 만나는 친구도 소수에 불과했으며 발레 리허설에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1892년에 뒤랑 뤼엘이 퍽 이례적으로 풍경화를 주제로 한 드가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다른 전시회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늙어간다는 데 대한 쓰라린 심 정을 가눌 길이 없었던 그는 세상 모든 것에서 자기 자신을 점차 떼어낸다. 그러나 이때까 지 그날그날의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저녁 무렵까지는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작업 에 몰두하고, 알레비(1897년까지)나 루아즈 집안에 갔다가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오는 날은 충실한 가정부 조에 클로지에가 차려주는 조촐한 저녁을 먹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여름은 메닐위베르의 발팽송가나 퀘앙브리의 루아르가에서 지냈고 나중에는 생발레리쉬르솜에 있는 브라카발의 집에서 보내기도 했는데 그곳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알던 곳이었다. 아주 가끔 이지만 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스위스를 비롯해서, 1890년 가을에는 부르고뉴 지방을 돌 아보았고, 1906년에는 나폴리에 다녀왔다. 경제적인 곤란은 이제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다. 마음이 내키면 아주 가끔씩, 그것도 개인수집을 늘리기 위해 돈이 필요할 때 작품을 내놓았 지만 전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제 그룹 전람회에도 관계하지 않았고 다른 화가들 에게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각가 폴 폴랭과 알베르 바르톨로메, 화가인 장 루이 포렝, 루이 브라카발, 그리고 드가가 끝까지 '끔찍한 마리'라고 불러댔던 쉬잔 발라동이 그 들이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고 사랑하는 동료들을 잃은 가슴 시린 상실감이 그를 더욱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도록 부추겼다. 베르테 모리소는 1895 년에 사망했고 말라르메가 1898년에, 툴루즈 로트레크가 1901년에, 고갱과 피사로가 1903년 에, 세잔이 1906년에 각각 세상을 등졌다. 친척들과 개인적인 친구들도 역시 하늘의 부름에 따랐다. 사촌과 매제 에드몬도 모르비가 1893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몰 발팽송이 1894년에, 누이 마르그리트가 189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젊은이들과 어울리 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베르테 모리소와 외젠 마네 사이의 딸 쥘리 마네는 1890년대에 드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드가 댄스 드로잉'을 쓴 폴 발레리는 집에서 드가를 처 음 만났다고 술회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드가는 스파르타식 업격함과 금욕주의, 얀센(17세기 교회 개혁을 주장한 신학자) 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화가로 보였다. 발레리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보았다. 뤼도비크 알레비의 아들인 다니엘 알레비는 드가 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것을 충실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 "올 것이 왔다" 1894년 프랑스군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데블스 아일랜드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유형지로 쓰였음: 역주) 로 유배된다. 이 사건은 프 랑스를 두 진형으로 나누며 10년이 넘도록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그 진형의 한쪽에 는 반유대주위자들과 왕당파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교권 개입에 반대하는 드퓌레스 옹호 자들이 있었다. 뒤프레스 사건이 처음 발발했을 때부터 드가는 열렬한 반뒤프레스파였고 반 유대주의적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러나 그는 진보적인(부분적으로 유대계이기도 한) 알레비 집안과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사실 양쪽 모두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굳이 그 화재를 꺼내는 일은 없어서 알레비 집안에 대한 그의 정기적인 방문은 변함없이 계속되 었다. 그랬는데, 1897년 12월 23일 저녁에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다니엘 알레비는 그때의 사건에 대해 대충 이렇게 설명했다. "드가 아저씨는 우리와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다른 손님들이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를 않는군요. 아마도 조심성 이 없이 아무말이나 하는 젊은이들이었겠죠. 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조 마조마한 심정으로 아저씨를 보았지요. 아저씨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자꾸만 천장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렇게라도 그 사람들한테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 같았어요. 아저씨가 입을 열 였다면 분명히 군대를 옹호하는 말씀을 하셨겠죠. 그 자리의 젊은이들이 헐뜯고 있는, 아저 씨가 평소에 신봉해 마지않던 군대의 전통과 가치에 대해 말입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녁식사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튿날 아침, 어 머니는 편지 한 장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없이 그 편지를 제 형 엘리에게 건네셨습니다." 드가의 태도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이 편지는 최근에 와서 야 다시 발견되었다. "오늘 저녁에는 실례를 무릅쓰고 이만 물러가야겠습니다. 앞으로 얼마 동안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오늘 저녁 내내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제가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는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는 그 청년들에게 부담스런 존재이고, 제게 그들은 휠씬 더 참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저를 그냥 이대로 살게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즐거운 기억들도 많아요. 그러나 지금 의 이 불편한 심사를 계속 억눌러야 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싹터서 지금까지 자라온 우리 사 이의 좋은 감정이 깨어지고 말것입니다. 당신의 옛 친구, 드가." 이렇게 해서 오랜 우정이 끝이났다. 드레퓌스 사건은 드가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이후로 반유대주의, 반동 보수주의 화가라는 평판이 그를 따라다녔다. 드가는 사려 깊고 탁월한 예술가이기는 하지만 반유대주의자라는 꼬리표는 가장 난처한 일면으로 남아있다. 수집가이자 사진가 1890년대에 드가는 개인수집품들을 늘려간다는 고상한 명분에 자신의 열정을 거의 모두 쏟아 붓는다. 그의 집요함은 친구인 바르톨로메가 보기에는 무척 놀라운 것이어서 1896년에 그는 이 수집벽이 까딱 잘못하면 드가를 파산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과도한 집착이라고 말 했다. "요즘 드가가 너무 열심히 미술품을 사들여서 뒤랑 뤼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아 닌지 걱정이 된다. 그의 미래도 물론 걱정이고...." 당시에 드가는 당대의 대표적인 수집가 대열에 올라설 만한 걸작들을 구입하고 있었다. 1893년 말부터 불과 얼마 동안에 그는 -엄 청난 값을 치르고- 고갱의 대표적 걸작이라고 할수 있는 '달과 지구' '신의 달'을, 밀레의 수집품 경매(1894년 4월 25일)에서 일 그레코의 '생 틸데퐁소'를, 그 이듬해에 들라크루아 의 '슈비테르 남작'을 구입했다. 1895년 12월에는 다니엘 알레비에게 자신의 수집품들을 보 여주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사들이고 또 사들이고! 나도 내 자신을 못 말리겠네!" 바르톨로 메가 그의 수집가 이력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표현했던 것은 1896년 1월의 구매 였다. 그때 드가는 앵그르의 '자크 루이 르블랑 부부의 초상'을 사들였다. 드가는 오래전 1855년에 그들의 아들 집에서 그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바르톨로메는 미술품을 수집하는 드가의 열정을 지팡이나 사진을 수집하는 그의 취미와 마찬가지로 한때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여겼다. 드가는 그로부터 얼마 후, 이번에는 최신 과 학기술이 만들어낸 신기한 물건들에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기종이 아마 이스트맨 코 닥 NO.1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진기를 한 대 구입했다. 그는 본래 스냅 사진을 찍는 데 는 관심이 없으므로 삼각대나 유리판처럼 사진사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장비들을 사용하겠 다고 우겼다. 드가는 밤에 사진 작업을 했는데, 낮에는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 기도 했지만, 주된 목적은 사진의 영상을 통해 '달이나 불빛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포착해 보려는 데 있었다. 그가 창조해낸 가장 아름다운 사진 작품들은 알레비의 집에서 찍은 것들 이었다. 모델은 마치 환영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괴한 공간에, 그가 세심하게 잡아준 위치에 선 채로 몇 시간씩 꼼짝못하고 벌을 서야만 했다. 가끔은 르누아르, 말라르메, 베레 랑, 알레비 집안 사람들, 화가의 동생 르네, 그리고 드가 자신도 렌즈 앞에서 태연을 가장하 고 멋진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강박감에 시달리는 거장이 시도하는 새로운 표현양식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탐험 거의 60년에 가까운 드가의 화가경력을 돌이켜볼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비교적 장수를 누렸던 모네와 르누아르와는 달리 드가는 쉽게 고객층의 인기를 끌어모을 수 있었던, 당시 의 믿을 만한 유행 재료들에 의종하거나 일정한 형식에 머무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는 점이 다. 그는 관습에서 벗어난 표현양식과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충동에 끊임없이 시 달렸다. 그는 말년이 되어서도 매사에 집요하고 엄격하기까지 했던 청장년 시절의 결의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 삶의 궤적이 여러 면에서 드가와 유사한 티치아노나 20세 기의 화가 피카소와 달리, 드가의 노년은 영광에 넘치는 것이었다. 1890년부터 1900년까지 그이 작품을 통해서 쉼없이 새로운 장을 개척해 나갔다. 그 작품들은 어딘가 불안하고 마음 을 흔들어놓는 데가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한 비평가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고르지 못하고 날카로우며 눈에 거슬리는 색조가 팡파르를 울리며 갑자기 나타났고.... 그의 진실성이나 객관적인 사실성, 혹은 정확도 따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드가 자신은 '러시아 무희들'에서 이를 '색채의 파티' 라고 일컬었다. 바로 얼마 전의 무 희 그림이나 누드와 마찬가지로 이 파스텔화에서도 정통에서 벗어난 색채들-카나리아 빛 노랑, 밝은 핑크, 부드러운 초록, 울려 퍼지는 듯한 파랑- 이 설득력 있는 장렬한 선을 강조 하고 있다. 그의 그림들에는, 1900년에 제작한 몇몇 스케치에 표현주의적인 힘을 불어넣은 강력함과 감정의 방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얼굴은 개개인의 특징적인 모습들이 하나의 얼 룩처럼 되어버리면서 그 명확성을 잃었다. 구도는 점점 더 터무니없어졌고 넓디넓은 화폭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려는 자의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제는 여전히 동일했지만, 사실적인 표현을 한층 더 그것도 공공연히 무시하면서 더 단순해지거나 생략되었다. 드가는 1880년대 에 자신이 호의를 가졌던 사실주의에 등을 돌렸다. 이제 그의 기수들은 경마장과 상관없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불명료한 공간을 어슬렁거린다. 너무나 튀는 색깔의 실크 셔츠를 입고서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간다. 1890년대에 와서 오래전인 1869년에 감깐 흥미를 가졌을 뿐인 풍경화로 다시 돌아간 것 역시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나치면서 얼핏 보았던 장소의 정수 를 뽑아내고 기억에 의지해 하나의 통합된 장면으로 걸러내는 방법을 풍경화를 통해 발견했 다. 모노타이프 풍경작업들은 이륜마차를 타고 부르고뉴 지방을 여행했던 1890년 10월에 제 작되기 시작해 189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뤼도비크 알레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들 은 '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내 눈의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아마도 아주 모호할' 거라고. 모노타이프에 채색을 한 이 그림들은 화가 조르주 잔니오의 시골집에서 실험적으로 제작되었다. 잔니오는 드가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고는 그가 기름을 입힌 판에 붓이나 손가락으로 풍경을 그리던 방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계곡과 하늘, 흰구름, 가지가 검은 과일 나무들, 벚나무와 떡깔나무, 비가와서 불어난 강물, 붉은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땅 위로 보이는 사나운 하늘을 질주하는 구름들이 동판 위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 다. 마치 그의 눈앞에 실제 장면이 펼쳐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힘들이지 않고 솟아올 랐다." 드가의 말년에 가장 특징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빗는 여자들,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는 무희-을 옛 거장 들의 전통과 맥을 같이하는, 위대한 역사화와 종교화들로 회귀하는 듯한 작품 속으로 끌어 들인 확고한 결단이라고 할 것이다. 좀더 뚜렷해지고 한결 절제된 그의 선은 간혹 미래의 마티스를 예언하는 듯하다. 어떤 때는 붉은색과 흰색 두가지 색조만으로 반짝이는 어른거림 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보나르를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색채들을 폭발 시키기도 한다. '머리빗기' 와 '목욕 후' 를 보라. 무대장치는 무희들이 넘나드는 실제 풍경 으로 바뀌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초상화 몇 점은 쉽사리 표현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 을 만큼 단순화되고 평정을 잃은 작품들이다. 꼭 필요한 정수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잘라내니 모든 것들에 새로운 긴장감이 생기고 기념비적인 무게가 실리게 된 것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진행된 그의 노쇠와 1912년부터 1917년 사이의 삶에 대해서는 몇몇 목격자들의 증언이 도움을 준다. "드가는 마치 난파선의 잔해와 같다." 1913년에 메리 캐섯이 쓴 글이다. 1915년에 그의 동생 르네는 드가의 친구 폴 라퐁과 함께 낙담스러운 기 분을 정리했다. "고령에 비하면 분명 건강상태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다. 식사도 잘하고, 청력장애말고는 특별한 질환도 없다. 귀는 점점 나빠져서 대화를 나누기가 매우 힘들다. 외 출을 해도 멀리 가지 못한다. 카페에 한 시간 가량 앉아 있기도 한다. 그래야 기운을 차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하므로 친구들이 그를 찾아오는 일 도 별로 없다. 슬프고 비참한 말년이다! 그는 고통도 없고 걱정도 없이 서서히 헌신적인 사 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드가는 1917년 12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눈을 감기 직전에 그를 본 바르톨로메는 마치 말년에 호메로스처럼, 영원을 응시하고 있는 그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아름다 웠다" 고 묘사했다. 그는 몽마르뜨 언덕에 자리잡은 가족묘지에 영원히 잠들었다. 그 뒤 1918년과 1919년에 공매가 있었고 불후의 명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스튜디오에서 발견 된 수백 점의 미술품들이 경매에 부쳐졌던 것이다. 친한 친구들은 그의 작품과 수집품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일생에 걸친 그의 작업이 얼마 나 폭넓고 다양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드가의 이미지를 단 한가 지만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면 이것도 괜찮으리라. 1911년 어느 봄날, 드가는 조르주 프티 갤러리에서 열린 앵고르 회고전에 들렀다.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던 그는 다니엘 알레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저 그림들에서 난 뭔가를 발견할 수가 있네. 내가 모르는 그림들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어." 그는 앵그르의 그림들 앞에서 '만져보고 쓰다듬어보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