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지은이 : 로빈 쿡 옮긴이 : 박 민 출판사 : 열림원 작가의 말 “제2차세계대전 이래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실험 대상으로서의 환자를 확보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환자 자신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를 알게 되면 결코 응할 사람이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저명한 하바드 의대의 마취과 교수가 의학과 윤리를 침범했다고 여겨 지는 22건의 실험 사례를 기술한 논문의 시작 부분이다. 그는 50개의 집단에서 이 사례들을 추출했으며, 5백 명의 명단을 확보한 영국의 M.H. 팹워드 박사의 말을 인용했다. 인권 침해의 문제는 가끔 있는 우연한 의료 사고와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최 근의 연구 중심적인 의학계의 동향은 의사와 연구진의 가치 체계를 뿌리째 뒤흔 들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여러 미국 정부기관에서 종사자들에게 환각제의 효과를 실험한 사건은 수년 전 뉴스에도 방송되고 ‘60분’이라는 TV프로그램에도 주제로 채택된 일이 있 었다. 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소설 브레인(BRAIN)의 내용과 유사한 실험으로 살아 있는 암세포를 고령의 호나자에게 동의도 없이 주사한 사례가 실제로 있었다. 실험 당시 연구진은 암세포가 암을 일으킬지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분 명히 환자는 이미 나이가 들었으니 상관이 없다고 제멋대로 결정을 내린 것이 었다. 빙사능 물질을 주로 수용 시설에 있는 정신 장애자들같이 전혀 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입한 예는 무수히 많지만, 심지어는 신생아들도 실험 대상에서 제 외되지는 않았다. 이런 연구가 개개인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실험 대상이 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불편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심각한 수준의 신체 손상과 질병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연구 결과는 대개 중대한 의미를 가지지 않으므로,참 가한 연구진의 개인적 지식을 넓혀주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의학의 발전에 는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연구의 대다수가 비밀리에 미국 정부기관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특정 목적을 위한 주사 실험의 예를 한 가지 더 든다면, 7백 명에서 8백 명의 정신박약 어린이들에게 간염을 일으키기 위해 오염된 혈청을 주사한 경우가 있 었다. 이 연구는 다른 곳도 아닌 육군 전염병 연구부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 었다. 실험 대상 어린이의 부모들에게서 동의를 얻어냈다는 언급이 있기는 하지 만, 앞뒤 정황을 볼 때 동의를 얻어낸 과정과 그것이 실험 내용을 주지시킨 다 음의 동의였느냐 하는 것이 의심스러우며, 설사 그렇다해도 부모에 의한 동의가 실험 대상 아동의 권리를 대변할 수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연구진의 가족 중에 정신박약 아동이 있 다면 실험에 참가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언급된 다른 실험에라도 본인 이나 가족을 실험 대상자로 삼을 수 있을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다. 의학계 종사자들이 품고 있는 지적 우월주의가 의학 만능주의와 만나서 이중 적인 가치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인간 실험이 비윤리적인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고 단언한다면 무책임한 발언이 될 것이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극소수 는 무서은 결과를 야기하고 있으며, 대중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들이다. 병원 내에서 연구에의 압박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부담이 되고 있으며, 그 에 따른 학구적인 열정과 직업적인 경쟁의식이 연구진으로 하여금 호나자에게 끼칠 부정적인 결과를 무시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게다가 환자 또는 실험 대상자에게 있을지도 모를 위험과 사회에 대한 기여도 사이에 명확한 가치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환자의 동의만 있 으면 환자에게 가해지는 어떤 피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51명의 여성들에게 실험 단계의 분만 유도 약물을 투입한 연구의 예를 들어보 자. 그들이 모두 동의서에 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상적인 조건하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연구를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다수가 입원 과정의 압박감 속에서 실 험에 동의했으며, 심지어는 분만실에서 동의서에 서명한 경우도 있었다. 실험 후 환자들을 면담한 결과, 40퍼센트가 -실험 내용을 주지시킨 다음에 얻어낸 동의 라는 단서가 붙은 경우에도 - 자신들이 연구의 실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모르 고 있었다. 동의를 얻어내는 기만적인 방법의 하나로 연구에 사용되는 약물을 언급하면서 ‘실험용’이라는 말 대신에 ‘새로운’약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연구진은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이전의’약품에 비해 실험용 약품이 더 낫다는 내용 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의를 얻어내는 데 속임수를 꼭 사용할 필요도 없다. 환자가 ‘협조’하지 않으면 최상의 치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것을 암시하는 교묘한 협박이 가장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다음으로 애용되는 방법은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성공만 하면 환자에게 유익 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끝으로 실험 대상자에게 대한이 없다고 하거나 확립된 치료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의학잡지에만 해도 20년이 넘게 인간 실험에 대한 의학 윤리의 침해 사실이 거론되었지만 탁상공론에 지나 지 않았다. 상당한 비율의 환자들에게 비극을 초래할 지경에 이르지까지 이 실 험들이 계속 행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그리고 80년대 들어 의학이 물리학과 밀월 관계로 접어들면서 인권 침해의 기회는 새롭고 무서은 차원으로 탈바꿈했다. 의학과 물리학의 결합 무대 한가운 데는 신경과학이 놓여 있으며,주연 배우의 자리는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우주에 서 가장 신비하고 놀라운 창조물로 여겨지는 인간의 뇌가 차지할 것이다. 그 전 에 인간 실험에 관련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현안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허구와 환상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 의학박사 로빈 쿡. 작가에 관하여 의학바가인 로빈 쿡은 현재 아내 바바라와 함께 보스톤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의사로서 활동하는 틈틈이 저술 활동에도 전력하고 있으며, 그의 대표 작품으로 는 『인턴시절,THE YEAR OF THE INTERN』,『혼수상태,COMA』,『열병, FEVER』,그리고 『스핑크스, SPHINX』등이 있다. BRAIN 1 3월 7일 캐더린 콜린스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보도로부터 세 개의 계단을 올라 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우리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뒤롤 젖혀 현판을 올려다 보았다. 음각된 글씨로 ‘홉슨대학병원:뉴욕 시의 병들고 허약한 이들을 위하여’라고 쓰이여 있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시오’라고 적혀 있어야 옳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삼월의 아침 햇살로 인해 동공이 수축되었다. 그녀는 어 서 여길 벗어나 자신의 따뜻한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병원으 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죽기 만큼이나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미처 발걸음도 떼기 전에 몇 명의 환자들이 계단을 올라와 그녀의 곁 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망설임없이 문을 열었으며 음침하고 거대한 이 건물 은 그들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캐더린은 그 순간 자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놀라 잠시 눈을 감았다. 병원 문 은 밖에서 당기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자신의 배낭을 단단히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문을 잡아당겨 지옥으로 발을 내디뎠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21년 동안 경험해 보 지 못한 냄새로 주로 알코올과 역겨울 정도로 향기로운 방취제가 혼합된 일종의 화학약품 냄새였다. 알코올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병균을 막기 위한 것이고, 방취제는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동물적인 냄새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그때까지 캐더린이 병원에 오도록 스스로 설득하 는데 이용했던 부정(주:어떤 싫은 일을 애써 부인하려는 정신적인 기전)의 모든 여력은 증발해버렸다. 병원을 처음 찾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캐더린은 죽음이 라는 것을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으며 자신의 건강와 안녕을 아주 당연한 사실 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따. 이런 냄새를 맡으며 병원에 들어서자 최근 자신이 느 꼈던 몸의 이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의식 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더이상 생각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병원 안은 캐더린을 무척 짜증스럽게 했다. 부딪쳐 지나가 며 자긴을 향해 입김을 뿜어대고 기침을 해대는 사람들을 피해 쥐구멍 속으로라 도 들억아고 싶었다.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들, 허물이 벗어진 피부 발진, 진물 이 흐르는 부스럼들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더욱 심했다. 그 안에는 브뤼겔의 글미을 연상시키는 사람 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몸을 가누어야 했다. 그녀는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산부인과 접수계에게 할 말을 연습하며 주위 사람들을 의식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실례합니다. 제 이름은 캐더린 콜린스로 대학생이고, 여기서 네 번 진료를 받았어요. 이제 고향에 가서 저희 집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으려고 하는데 제 산 부인과 진료기록을 복사해 갈 수 있을까요?” 할 말은 간단했다. 캐더린은 시선을 돌려 엘리베이터 안내원을 바라보았다. 앞 에서 본 그의 얼굴은 굉장히 넓었지만 옆으로 돌아서자 납작한 머리 모양이 나 타났다. 캐더린은 그 흉칙한 모습에서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3층 임을 알리려 몸을 돌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 한쪽은 바닥과 옆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쪽은 그녀를 아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캐더린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때 몸집이 크고 털이 많은 남자 하나가 그녀를 밀치고 내렸다. 그녀는 벽에 손을 대고 몸을 나누면서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녀를 내려다 보았 다. 소녀는 그녀의 미소에 초록색 눈동자 하나만으로 응답했다. 다른쪽 눈동자는 커다란 자주색 종양덩어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위로 움직이자 캐더린은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지 난 달랐지만, 답답한 엘리베이터의 폐쇄된 공간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이 같은 폐쇄공포증(주:claustrophobia:좁고 폐쇄된 공간에서 공포를 느끼는 일종의 강박증상)의 증상을 이겨내려 애썼다. 뒤에서 누 군가의 기침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덜미로 입김이 밀려왔다. 4층에 엘리베이터가 덜컹하고 멈추면서 문이 열리자 캐더린은 내려섰다. 그리 고는 벽에 몸을 바짝 붙여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내릴 수 있게 비켜섰다. 현기증 은 이제 말끔히 사라졌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왼쪽으로 돌아 녹색 페인트 칠을 한 지 20년도 더 되어 보이는 복도를 따라걷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대기실까지 이어진 복도는 뽀얀 담배 연기 속에 환자와 어린아이들 로 가득차 있었다. 캐더린은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 오른쪽 끝방으로 들어갔다. 대학 산부인과 외래에는 각 단과대학의 학생들과 병원의 직원들을 위한 대기실 이 따로 있었지만 장식이나 가구는 일반외래의 대기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캐더린이 대기실에 들어서자 일곱 명의 여자가 동그란 철제 의자와 비닐 소파 에 앉아 묵은 잡지들을 초조한 표정으로 넘기고 있었다. 접수 담당 간호사는 책 상 뒤에 앉아 있었는데, 스물다섯 살 정도의 나이에 염색한 머리, 창백한 피부, 호리호리한 몸매의 새 같은 인상을 가진 여자였다. 밋밋한 가슴 위에 매달린 명 찰에는 엘렌 코헨이라고 적혀 있었다. 캐더린이 책상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 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제 이름은 캐더린 콜린스인데요...” 캐더린은 자신의 목소리가 의도했던 만큼 당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당당하기는커녕 끝에 가서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접수 간호사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료기록을 원하신다구요?” 경멸과 의심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였다.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이려고 했다. “글쎄요. 그 문제는 미즈 블랙먼과 상의 하셔야겠는데요. 좀 앉으세요.” 엘렌 코헨의 목소리는 이제 퉁명스럽고 권의적이 되어 있었다. 캐더린은 돌아 서서 책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접수 간호사는 서류철 캐비닛에서 캐더린의 진 료기록을 찾아들고 진찰실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갔다. 캐더린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윤기나는 밤색 머리를 왼쪽 어깨 위로 쓸어내 리고 있었다. 긴장했을 때 흔히 나타나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그녀는 맑고 푸른 눈을 가진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키는 5피트 2인치 반이었지만 그녀는 활달한 용모가 실제보다 더 커보이게 했 다. 그녀는 개방적인 성격으로 학교에서는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고 부모님 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부모님은 정글과도 같은 뉴욕 시에 혼자 살고 있는 순진한 외동딸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캐더린이 뉴욕에 있는 학교를 택하게 된 것은 바로 부모님의 걱정과 과잉보호 때문이었다. 그녀는 뉴욕이라는 도리가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독창성 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최근 병이 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 는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다. 부모님의 걱정과는 반대로 뉴욕은 그녀를 위한 도시였고, 그녀는 그 고동치는 생명력을 사랑했다. 간호사가 다시 나타나더니 자신의 타자기 앞에 앉았다. 캐더린은 조용히 대기실 안을 둘러보며 도살장의 암소들처럼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여자들의 숙여진 머릿수를 세어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은 저 여자들처 럼 진료 받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아니란느 사실이 무척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네 번이나 참아내야 했던 지난 진찰들은 정말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경험이 었다. 마지막으로 온 것이 바로 4주 전이었다. 혼자 지내는 캐더린에게 있어 그 동안 병원에 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어려운 행동이었다. 사실 그녀는 고향인 메사추세츠 웨스턴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계석 보아주던 산부인과 의사 윌슨 박사에게 가기를 원했다. 그는 그녀를 처음으로 친찰한 의 사로 이 병원에서 말고는 유일하게 그녀를 진찰한 사람이었다. 윌슨 박사는 이 병원의 레지던트들보다 더 나이가 많았고 유머 감각이 었었다. 그의 유며 감각 은 굴욕적인 산부인과 진찰을 적어도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 병원은 비인간적이고 차가운데다가 시립 병원의 분의기까지 어우러져 병원에 오는 것을 하나의 악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캐더린은 잘 견뎌냈다. 그녀의 독립심은 적어도 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런 강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임 간호사인 미즈 블랙먼이 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검은 머리를 뒤로 넘겨 한가운데에서 동그렇게 단단히 묶은 땅딸막한 키의 올해 마흔다섯 살이 된 여자 였다. 그녀는 티 한 점 없는 하얀 유니폼을 빳빳하게 풀을 먹여 입고 있었다. 옷 차림만 봐도 냉전하며 능률지향적인 그녀의 업무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녀는 이 병원에서 11년 동안 근무해 오고 있었다. 접수 간호사가 미즈 블랙먼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캐더린은 자기 이름이 거론 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미즈 블랙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더린 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빈틈없는 외보와는 달리 미즈 블랙먼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 순간 캐더린은 미즈 블랙먼을 병원 밖에서 만난다면 첫인상보다 는 훨씬 나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즈 블랙먼은 캐더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접수 간호사인 엘렌 코 헨에게 몇 마디를 속삭이고는 다시 진찰실로 들어가버렸다. 캐더린은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붉어졌다. 환자가 임의로 담 당의사 면담을 요청한 것에 대한 그들의 불쾌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고 여겨졌다. 그녀는 초조한 심정으로 표시가 떨어져 나간 해묵은 『레이디스 홈 저널』지를 펼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캐더린은 오늘밤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실까를 상상하면서 시간 을 보내려구 애썼다. 옛날에 쓰던 방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방안은 자신이 떠날 때의 모 습 그대로일 것이 분명했다. 노란색 침대 커버, 침대와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커튼, 그리고 어머니가 꼼꼼 하게 챙겨둔 사춘기의 추억이 담긴 모든 것 등. 편안한 성품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자 집에 간다고 전화를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망설여졌다. 전화를 하면 부모님을 로건 공항에서 만날 수 있겠지만 집에 가는 이유를 설 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캐더린은 자신의 병에 대해 전화로 얘기하고 싶지 않 았다. 20분쯤 후에 미즈 불랙먼이 다시 나타나서 접수 간호사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캐더린은 열심히 잡지를 보는 척했다. 마침내 미즈 블랙면이 이야기를 마치고 캐더린에게 다가왔다. "콜린스 양?" 미즈 블랙먼이 조금 신경질이 난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캐더린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의 진료기록을 요구하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캐더린은 잡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저희 치료방식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미즈 블랙먼이 다시 물었다.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서 저희 가족의 주치의를 만나 보려는데 제 의료기록을 가져갔으면 해서요."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미즈 블랙먼이 말했다. "의사의 요청이 있을 때만 기록을 보내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전 오늘밤 집에 갈때 가져갔으면 해요. 의사가 당장 필요하다고 그렇지도 모르는데, 기록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우리 병원에선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요.” “하지만 환자가 원할 때는 진료기록 사본을 떼어 갈 권리가 있다고 아는데 요.” 캐더린은 말을 마친 후에 흐르는 침묵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아니 불안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이런 식의 대화에 그녀는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즈 불랙먼은 마치 고집불통인 아이를 앞에 두고 단단히 화가 난 엄마와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캐더린도 지지 않고 미즈 블랙먼의 짙고 물기어린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담당의사에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미즈 블랙먼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 가까이 있 는 문으로 다시 들어가버렸따. 문의 걸이가 철컥하고 걸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캐더린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환자들은 정상 적인 관례를 깨려고 하는 그녀에 대한 병원 직원들의 경멸에 공감하고 있다는 둣한 표정으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었다. 캐더린은 스스로에게 피해 망상일 뿐이라고 타이르 듯 중얼거리면서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잡지 를 읽는 척했지만 여자들의 시선이 몹시 따가웠다. 거북이처럼 얼굴을 숨겨버리 거나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한 채 일어나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 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몇 명의 환자들이 진찰실로 불려 들어 갔다. 자신이 무시 당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려 45분이 지나서야 구겨진 하얀 상의와 바지를 걸친 의사가 캐더린의 진료 기록을 들고 나타났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여 캐더린 쪽을 가리키자 산부인과 레지던트인 하퍼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그녀 앞에 섰다. 몇 가닥 안 되는 머리 카락이 양쪽 귀에서 시작해 뒤로 넘겨져 목덜미의 빳빳한 머리털과 합해져 있었 다. 전에 캐더린을 두 번 진찰했던 의사였다. 반투명의 고무장갑에 눌려 외계인 같아 보이던 그의 털복숭이 손이 그녀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캐더린은 호의를 기대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표정 어디에서도 그런 빛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왼손으로 받쳐든 그녀의 진료기록을 펼쳐서 오른쪽 검지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나갔다. 마치 교회에서 설교라도 하려는 자세 같았따. 캐더린은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그의 왼쪽 바짓가랑이에 작은 핏방을이 점점 이 떨어져 있었고, 벨트 오른쪽에는 고무관이, 왼쪽에는 호출기가 매달려 있었 다. “왜 산부인과 기록을 필요로 하시는 거죠?”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캐더린은 아까의 얘기를 다시 한 번 되풀이 했다. “시간 낭비인 것 같군요.” 하퍼가 여전히 차트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차트에는 별 내용이 없어요. 경도의 비전형적인 세포가 검출된 팝 도말(주:자궁경부암의 조기 검출을 위한 검사법으로, 경부의 상피조직을 긁어 슬 라이드에 도말한 후 현미경으로 세포의 이상유무를 관찰하는 검사)소견과 경미 한 자궁경부의 미란(주:erosion:자궁경부가 허는 것)에 기인한 그램 양성 (주:Gram Positive:박테리아를 그램 염색법으로 염색하고 관찰하였을 때 보라색 으로 보이는 것)의 분비물이 약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부예요. 내말은 이 정도 가지고는 아무한테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거요. 방광염이 한 번 있었다고 하였는 데, 이건 그 전날의 성관계 때문이었던것임이 분명하고 이건 당신이 인정한...” 캐더린은 모욕감으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이것 봐요, 캐더린 양. 당신의 발작은 산부인과 질환과는 전혀 상관이 없 습니다. 이 문제는 차라리 신경과로 가보시는 게...” “신경과도 갔었어요.” 캐더린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신경과 기록도 이미 가지고 있구요.” 캐더린은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참았다. 그녀는 자주 감정에 휩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아주 가끔 울고 싶어질 때면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네이비드 하퍼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숨을 들이 쉬더니 반쯤 다문 입술 사이로 요란하게 뿜어냈다. 그는 지루해 하고 있는 듯했 다. “이것 봐요, 캐더린 양. 당신은 여기서 최상의 진료를 받았습니다...” “진료에 대해 불평하는 게 아니예요.” 캐더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눈물이 가득 고여 금방이라도 빰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릴 것만 같았다. “그냥 기록이 필요할 뿐이예요.” “내 말은, 당신이 산부인과적으로 더이상 얻어낼 수있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 “제발.” 캐더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 기록을 주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원장을 직접 찾아가겠어요.”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하퍼를 바라보면서 쏟아지려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쳤다. 마침내 위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차트를 접수계 책상 위에 던지며 간호사에 게 한 부 복사하라고 말했다. 캐더린은 그가 나직하게 욕설을 해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잘 가라는 말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찰실 안으로 사라 졌다. 캐더린은 외투를 걸치면서 자기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녀는 접수계 택상 모서리를 잡고 몸을 지탱하려 했다. 새처럼 생긴 금발머리 간호사는 타자기로 편지를 치면서 한번도 그녀를 거들 떠 보지 않았다. 그녀가 봉투를 타자기에 집어 넣을 때 캐더린은 자기가 기다리 고 있다는 걸 말해 주었다. “알았어요. 잠시만 그다려요.” 엘렌 코헨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내뱉었다. 그녀는 봉투에 글자를 친 다음 내용물을 집어 넣고 봉환 뒤, 우표를 붙이고 나서야 캐더린의 차트를 들고 모퉁이로 사라졌다. 그녀는 내내 캐더린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두 명의 환자가 더 불려 들어간 뒤에야 캐더린은 마닐라지로 된 봉투를 건네 받았다. 가까스로 간호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넷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 다. 캐더린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봉투를 옆구리에 끼로 배냥을 어깨 에 둘러 맨 뒤 거의 뛰다시피 하는 걸음으로 북적거리는 일반 대기실을 들어섰 다. 캐더린은 탁한 공기 속에서 갑자기 현기증이 나 발걸음을 멈췄다.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급하게 걸으려 한 것이 몸에 무리를 가져온 듯했다. 눈앞이 부옇 게 흐려지고 대기실 전체가 빙글빙글 돌았다. 간신히 팔을 뻗어 대기실 의자의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봉투가 겨드랑이에서 빠져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는 그녀의 무릎이 꺾여졌다.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 좋아질테 니 안심하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의자에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희미하게 나마 자신이 선 채로 들려서 복도를 지나가며, 자신의 발이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에 끌 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을 하나 지나더니 작은 방이 나타났다. 정신없이 빙빙 도는 느낌이 멈추질 않았다. 캐더린은 자신이 병이 난 것 같아 겁이 더럭 났으며 이마에는 식은 땀 이 솟았다. 캐더린은 자신이 바닥에 눕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 러자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고 어지러움이 사라졌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두 명 이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가까스로 그녀의 팔 하나를 외투로부터 빼내고 토니 켓(주:Tourniquet:혈관 주사를 놓을 때 팔에 묶는 고무줄)을 맸다. 그녀는 사람들 이 많은 대기실에서 더리상 구경거리가 되지 않고 이 방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 스러웠다. “훨씬 좋아졌어요.” 캐더린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좋아요.” 의사 중의 하나가 대답했다. “주사를 한 대 놓아 드리겠습니다.” “진성시켜 드리기 위한 주삽니다.” 팔꿈치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바늘로 찌르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토니켓을 풀 어내자 손가락 끝에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많이 좋아졌어요.” 고개를 도려 주사기의 피스톤을 누르는 손을 쳐다보며 말했다. 의사들이 그녀 위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저는 괜찮단 말이예요.” 캐더린이 다시 말했다. 두 명의 의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놓 고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명은 지금껏 그녀가 본 중에 서 가장 짙은 에메랄드 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캐더린은 움직이려 하였지만 그 럴수록 의사들의 손은 점점 더 꽉 조여왔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의사들이 멀어져 갔다. 동시에 귓속에서 윙윙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난 괜찮다니까...” 목소리가 탁해지고 입술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졌다. 잠시 후 그녀의 머리가 옆 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창고 바닥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암흑뿐이었다. 3월 14일 콜린스 부부는 서로를 부툭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소장은 열쇠가 잘 들어가지 않자 열쇠를 뽑아 들고 92호 열쇠가 맞는지 확인했다. 거꾸로 꽂았다는 것으 깨닫고 돌려서 다시 넣으니 그때서야 문이 열렸다. 그 는 옆으로 비켜서서 대학의 학장이 먼저들어가게 길을 터주었다. “아담한 아파트로군요.” 학장이 말했다. 50세 가량으로 작은 몸집에 매우 예민한 성겨과 빠른 몸놀림을 지닌 여자였 다. 그녀의 표정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학장의 뒤를 따라 콜린스 부부와 뉴욕 시경에서 나온 정복 경찰 두명이 방 안 으로 들어갔다. 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라고 광고가 난 방 한 칸 짜리의 작은 아파트였다. 하지만 강은 벽장같이 생긴 욕실에서만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경관은 뒷짐을 진 채 옆으로 비켜 서 있었다. 52세의 콜린스 부인은 방안을 들여다 보기가 두 려워 입구 근터에 서서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콜린스 씨는 곧장 방 한가은데로 절뚝거리며 들어갔다. 그는 1952년에 소아마 지를 앓은 뒤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기민한 사업 수완만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따. 55세에 그는 보스톤 그룹의 제일내셔널 시티은행의 2인자가 되었 다. 그는 적극적인 행동을 높이 사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겨우 일주일 밖에 안 됐잖아요. 걱정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학장이 말했다. “캐더린을 뉴욕에 못 오게 막았어야 하는데...” 콜린스 부인이 두 손을 맞잡고 불안에 떨면서 말했다. 콜린스 씨는 두 사람의 말을 못들은 체하며 침실로 가서 내부를 살펴보았다. “여행 가방이 침대위에 있군.” “그건 괜찮은 징조예요. 많은 학생들이 부담감 때문에 며칠씩 하교를 빠지곤 하죠.” 학장이 설명했다. “캐더린이 떠났다면 여행 가방을 가지고 갔겠죠. 그리고 일요일엔 전화를 했 을 테구요. 그 애는 매주 일요일이면 우리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콜린스 부인이 대답했다. “학장으로서 저는 많은 학생들이 잠시라도 이곳을 훌쩍 떠나 있고 싶어한다 는 것을 잘 압니다. 심지어 캐더린 같은 모범생도 말입니다.” “캐더린은 달라요.” 콜린스 씨가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학장은 무표정하게 서 있는 경관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잠시 후 콜린스 씨가 절뚝거리며 거실러 다시 나왔다. “캐더린은 아무 데도 가지않았소.” 그는 단정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여보?" 콜린스 부인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금방 말한대로야.” 콜린스 씨가 대답했다. “이걸 놔두고 갔을 리가 없어.” 그는 피임약이 반쯤 들어 있는 상자갑을 소파 위에 던졌다. “그 애는 뉴욕에 있어요. 그 애를 찾아야 해요.” 그는 경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말을 믿으시오. 경찰의 적극적인 행동을 바랍니다.” 4월 15일 마틴 필립스 박사는 통제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차가운 회벽의 느낌 이 좋았다. 그의 앞에서는 네 명의 의과대학 3학년 학생들이 유리 칸막이를 사 이에 두고 컴퓨토 단층촬영(주: Computerized Axial Tomography;CAT 또는 CT 라고도 함)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환자를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방사선과선택과목을 듣는 첫날이었다. 그들은 신경방사선과부터 시작했다. 마틴은 학생들에게 깊은인상을 심어주고, 그들의 콧대를 꺽어놓기 위해 컴퓨터 단층촬영기(CAT Sanner)를 먼저 보여주 었다. 의대생들은 대개 지나친 지적 우월감에 빠져 있기 마련이었다. 단층촬영실 안에서는 촬영기사가 허리를 구부리고 거대한 도넛 모양으로 생긴 촬영기에 환자의 머리를 맞추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펴고 접착 테이프로 환자 의 머리를 스티로폼(주:Styrofoam: 발포합성수지의 상표명) 받침대에 고정시켰 다. 마틴은 팔을 뻗어 책상 위에 있던 의로서와 환자의 차트를 집어 들고 학생들 에게 임상적인 사전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 대충 훑어보았다. “환자의 이름은 쉴러입니다.” 그가 말했다. 학생들은 준비과정을 지켜보는 데 몰두해 있어서 그가 말하는 동안 고개도 돌 이지 않았다. “나이는 47세이고 주소(주:Chief Complaint:환자가 병원에 오게된 주된 이유) 는 우측 팔과 우측 다리의 근력 약화입니다.” 마틴은 환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잔뜩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숭 있었다. 촬영실 안에서 기사가 환자가 누워 있는 테이블을 작동시키는 것을 보고 마틴 은 차트와 의뢰서를 제자리에 놓았다. 환자의 머리가 촬영기 입구로 천천히 들 어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그를 통째로 삼키는 것 같았다. 기사는 머리의 위치 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촬영실을 나와 통제실로 들어왔다. “자, 유리창에서 한 발자국씩 물러서요.” 필립 박사가 말하자 4명의 학생들은 즉시 컴퓨터 옆으로 물러섰다. 컴퓨터에 는 준비상태를 알리는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그가 예상했던대로 그들은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다. 기사는 촬영실로 통하는 출입문이 확실히 잠겼는지 확인하고 마이크를 들었 다. “움직이지 마세요. 쉴러 씨 절대로.”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계기판의 단추를 눌렀다. 쉴러 씨의 머리를 둘러싸고 있 던 도넛 모양의 물체가 거대한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다 멈추기를 반복했 다. 쉴러 씨에게는 아주 크게 들렸을 철컹거리는 소리가 밖에서는 유리에 가로 막혀 약하게 들려왔다. 마틴이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지금 저 안에서는 촬영기가 1도씩 회전할 때마다 X-레이를 240장씩 찍어대 고 있는 겁니다.” 학생 중 하나가 동료들을 둘럽며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 다. 마틴은 그를 못 본 척하고 손으로 눈을 조심스럽게 비비며 관자놀이를 지그 시 눌렀다. 마틴은 지금 커피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녹초가 되어 있었다. 대개 는 병원의 카페테리아(간이식당)에들러 커피를 마시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학 생들 때문에 시간이 나질 않았다. 신경방사선과 부과장었던 마틴은 학생들에게 신경방사선과를 소개하는 일을 도맡았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연구시간이 줄어들게 되어 그는 자주 짜증이 났다. 그래도 처음 2,30번은 뇌의 구조에 대한 자신의 광대한 지식을 학 생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즐거웠지만 이젠 그런 신기함도 사라졌다. 가끔 특별히 영리한 학생이 있을 때는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신경방사선과에는 그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이 아니었다. 몇 분 뒤 도넛 모양의 촬영기가 회전을 멈추자 이번에는 컴퓨터 모니터가 작 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계기판같이 생긴 장치였 다. 학생들의 눈이 모두 환자에게서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졌지만, 마틴은 자기 손을 보며 검지손가락 손톱 주위의 죽은 피부 조직을 벗겨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이제 30초 동안에 컴퓨터에는 조직밀도(Tissue density)에 대한 4만3200개의 방정식을 동시에 풀게 될 것입니다.” 마틴을 대신해 촬영실 기사가 설명했다. 마틴은 그걸 좋아했다. 사실 그는 학 생들에게 정규 강의만 하고 실습 따위는 신경방서선과의 전임의 (주:fellow:레지 던트 과정을 마친 후 보다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계속 남아 수련하는 의사)나 고도로 훈련된 전문 기사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마틴은 고개를 들어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 았다. 촬영실로 통하는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삐죽이 나온 쉴러 씨의 맨발 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동안 환자는 학생들로부터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학생들은 이제 기계장치에 더 흥미가 있는 것이었다. 마틴은 구급약 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 았다. 면도를 못한 턱 주위로 짧은 수염이 부러쉬의 억센 털처럼 자라 있었다. 그는 언제나 부서의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훨씬 전에 나와 수술장 탈의실에서 면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깅을 하고 샤워를 한 뒤 병원에서 면도하고 카페테리아아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게 그의 아침 일과였다. 그렇게 하 면 연구실에서 방해받지 않고 두 시간 가량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마틴은 거울을 보면서 숱이 많고 뻣뻣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끝은 금발 이고 뿌리로 갈수록 진한 다갈색을 띠는 그의 머리 색에 대해 간호사들이 놀라 기도 했지만, 꾸민다고 해서 실제보다 나아아질 것도 없었다. 마틴은 병원 이발 소에 갈 시간이 없을 때면 자기 손으로 머리를 자를 정도로 용모에는 그다지 신 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잘 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올해 마흔한 살로 눈과 입가에 최근에 생겨난 주름이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던 그의 얼굴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환자들은 최근들어 더욱 탄탄해 보이는 마틴을 보고 의사라기 보다는 TV에 나오는 카우보이 같다 고 했다. 마틴은 그 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고 또한 전혀 근거없는 말도 아니었 다. 마틴은 6피트가 조금 안 되는 키에 몸은 호리호리한 편이었지만, 운동으로 단 련되었으며 얼굴 생김새로 봐서는 결코 학구파 같지 않았다. 다만 각진 얼굴에 날카로은 코와 인상적인 입술을 가졌으며, 무엇보다도 생기 있는 하늘색 눈이 그의 지적인 면을 말해주었다. 그는 1961년도에 하버드를 우등으로 졸업한 수재 였다.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났던 글자가 사라지고 첫 영상이 나타났다. 기사가 화면 의 크기와 명암을 조정했다. 학생들은 운동경기라도 구경하듯이 화면 주위에 몰 려들었지만 화면에 보이는 것은 타원형의 흰테 안에 작은 점들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컴퓨터가 구성한 환자의 뇌사진으로 쉴러 씨의 두개골 윗부분 을 잘라낸 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었다. 마틴은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8시 15분 전이었다. 테니스 생거가 빨리 와서 학생들을 데려가 주었으면 싶었다. 오늘 아침에 정작 하고 싶었던 일은 이런데 서 학생들과 노닥거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연구자인 윌리엄 마이클스를 만나는 것이었다. 마이클스는 어제 그에게 전화를 해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아침에 그 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었다. 지금 마틴의 호기심은 대단히 예민한 상태로 놀라 운 소식이 무었일까 조바심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은 지난 4년 동안 컴퓨터가 방사선과 의사 대신 두개골 X-레이를 판독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연구를 해왔다. 하지만 X-레이 사진에서 보이는 특정 부분의 음영에 대해 주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공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엄 청난 것이다. 두개골 X-레이를 판독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X-레이를 판독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개발되기만 하면 방사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실현만 된다면. 마틴은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 부 서를 가질 수 있고 잘하면 노벨상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면이 바뀌고 다음 영상이 나타나자 다시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13밀리미터 윗부분의 영상입니다.” 기사가 말하며 타원의 밑부분을 가리켰다. “여기가 소뇌이고...” “거기에 이상이 있군.” 마틴이 말했다. “어디 말입니까?” 컴퓨터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기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 말이야.” 마틴이 다가와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은 방금 기사가 소뇌 라고 말했던 부분을 짚고 있었다. “이 우측 소뇌 반구에 보이는 음영이 떨어진 부분이 비정상이야. 원래는 다 른 곳과 음영이 같아야 하거든.” “그게 뭡니까?” 학생 중의 하나가 질문을 했다. “지금은 말하기 어려워.” 마틴은 이상이 있는 부분을 더 자세히 보라고 몸을 앞으로 굽혔다. “환자가 걷는 데 이상이 있지 않나?” “맞습니다. 운동실조를 보인지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기사가 대답했다. “뇌종양 같은데.” 마틴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학생들의 얼굴은 순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이 상 부위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현대 진단술의 위력을 보게 된 것 에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양이라는 병이 자신들을 포함한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다음 영상이 나타나며 먼저 사진이 지워졌다. “측두엽에도 음영이 감소된 부분이 또 있군.” 마틴이 벌써 다른 영상으로 바뀌고 있는 한 부분을 가리켰다. “다음 화면에선 더 잘 보일거야. 조영검사를 해 보아야 겠는데.” 기사가 일어나 쉴러 씨의 정맥에 조영제를 주사하려고 촬영실 안으로 들어갔 다. "조영제가 무슨 작용을 하죠?" 낸시 맥파든이 물었다. "뇌혈루 장벽이 손상되었을 때, 종양 같은 병명의 윤곽을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주지." 마틴은 말하다가 누군가 복도쪽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 았다. "요오드가 포함되어 있나요?" 그는 학생들 뒤에 서서 그에게 따뜻하게 웃음 짓고 있는 데니스 생거를 쳐다 보느라 그 질문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흰 가운을 벗어서 구급상자 옆에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일을 시작하 기 전에 하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마틴에게는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생거는 앞에 주림이 달린 분홍색 블라우스를 입고 목에는 얇은 나비 리본을 매고 있었다. 그녀가 옷을 걸기 위해 팔을 뻗치자 블라우스 밑으로 가슴이 언뜻 비쳤다. 마틴은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 보았다. 마틴은 그녀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키기 5피트 5인치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5피트 4인치가 맞았다. 몸무게는 108파운드로 날씬한 몸매였고, 가슴은 크진 않았지만 예쁘고 탄력이 있었다. 그녀는 숱이 많고 윤기있는 머리결을 뒤로 넘겨 핀으로 묶고 있었다. 눈 동자는 회색을 띤 밝은 갈색으로 발랄하고 개구장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 가 3년 전에 의대를 1등으로 졸업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또 그녀가 스믈여덟 살이라는 것을 믿으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데니스는 가운이 잘 걸렸는지를 확인하고 마틴의 곁을 지나면서 그의 팔꿈치 를 슬쩍 꼬집었다. 너무 빨라서 마틴은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자신에게 맞게 화면을 조정한 뒤 학생들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마침 기사가 돌아와 마틴에게 조영제를 주사했음을 보고하고 촬영기를 한 번 더 작동 시키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마틴은 허리를 굽혀 데니스의 어깨에 몸을 의지한 채 화면상의 한 부분을 손 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측두엽에 병변이 있어. 그리고 전부엽에도 같은 병변이 최소한 하나가 더 있어.” 그는 학생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챠트에는 환자가 담배를 많이 피운다고 씌어 있습니다. 이게 무얼 의미한다 고 생각하죠?” 학생들은 미동도 않고 화면만 응시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지적을 당할까봐 돈 한 푼 없이 경매에 나선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힌트를 하나 주지요. 원발성 뇌종양은 대개 병소가 한 개지만 다 른 신체 부위에서 넘어 온것, 즉 전이된 것은 여러 곳을 침범할 수도 있다는 것 입니다.” “폐암.” 학생 한 명이 TV 퀴즈 쇼의 출연자처럼 불쑥 대답했다. “아주 좋아요. 지금 단계에서는 100퍼센트 확신은 못하겠지만, 나는 맞다는 편에 돈을 걸겠어요.” “환자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그의 진단법에 질려버렸다는 표정으로 한 학생이 물었다. “담당의사가 누구지?” 마틴이 물었다. “신경외과의 커트 매너하임 박사입니다.” 데니스가 대답했다. “그럼 오래 못 살겠군. 매너하임은 수술을 할 테니까.” 마틴이 이렇게 말하자 데니스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경우에는 수술이 불가능해요.” “당신은 매너하임이란 작자를 몰라. 그 사람은 뭐든지 수술하려고 들지. 특히 종양일 경우에는.” 마틴은 데니스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그녀의 머리결에서 풍기는 향내를 맡았 다. 향기는 마틴의 감각에 지문처럼 뚜렷하게 남아 지금이 강의시간이라는 사실 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열정이 슬슬 솟아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는 마법에 서 깨어나려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생거 선생, 잠깐 얘길 좀 할 수 있을까?” 그는 불쑥 한마디 하고 구석쪽을 가리켰다. 데니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왔다. “내 의학적인 소견으로는...” 마틴은 아까와 같은 딱딱한 말투로 서두를 떼고는 잠시 쉬었다가 목소리를 낮 추어 속삭였다. “...당신, 오늘 정말 섹시하군.” 데니스의 표정이 느리게 변했다. 그녀가 그의 말뜻을 이해하는데는 약간의 시 간이 필요했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마틴, 당신은 정말 엉뚱해요. 목소리가 하도 심각하길래 큰 잘못이라도 저지 른 줄 알았더니.” “잘못했지. 당신은 내 주의를 산만하게 하려고 이런 섹시한 옷을 입고 나타 났잖아.” “섹시하다구요? 단추를 목까지 채웠는데도요?” “당신은 아무거나 입너도 입어도 섹시해.” “음흉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그렇죠. 이 못된 영감 같으니라고.” 마틴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데니스의 말이 맞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무의식 적으로 그녀의 벌거벗은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는 데니스 생거를 6개월이 넘 게 만났지만 아직도 10대처럼 흥분되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둘 사이를 병 원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신중하게 행동했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 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서로를 잘 알게 되면서 나이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틴이 신경방사선과의 부과장이고, 데니스는 방사선과의 2년차 레지던트라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학문적인 자극을 제공했다. 그녀가 3주 전부터 마틴의 신경방사선과에서 로테이션을 시작하게 되자 특히 더했다. 데니스는 이미 방사 선과 수련과정을 마친 두 명의 전임의와도 훌륭한 팀을 이루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영감이라구?” 마틴이 속삭였다. “그 말 때문에 벌을 받을 줄 알아. 이제부터 학생들은 당신이 맡는 거야. 그 들이 따분해 하는 것 같으면 혈관조영실로 보내라구. 이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임상적인 것부터 잔뜩 보여줘야겠어.” 생거는 체념하고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전의 스케쥴이 끝나면 내 연구실로 와요. 커피 숍으로 도망치는 거야.” 그는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흰 가운을 걸쳐 입고 방을 나갔다. 마틴은 방사선과와 같은 층에 있는 수술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x-레이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이 줄지어 늘어선 침대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방사선 판독실로 들어섰다. 판독실은 x-레이 판독상자들이 여러 개 들어선 넓은 방으로, 안에서는 십여 명의 레지던트들이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방사선 촬영기들은 30분 전부터 바쁘게 가동을 시작하였지만 매일매일 산더미 처럼 쏟아져 나오는 X-레이 사진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는 한두 개씩 들어오다가 갑자기 걷밥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 뻔했다. 마틴은 레지던트 시절의 경험으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레지 던트 시절 동안 전국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방사선과 중의 하나인 이곳의 힘든 생활을 바로 이 방에서 하루 12시간씩을 보내며 버텨냈던 것이다. 그때 한 노력의 대가로 신경방사선과에 전임의로 계속 남아 달라는 요청을 받 았다. 그리고 그가 전임의 과정을 인정받아 병원에 정식으로 채용됨은 물론 의 대 교수직도 겸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풋내기 스태프(Staff)로부터 현재의 신경방사선과 부과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빠른 발전을 거듭했다. 마틴은 방사선 판독실 한가운데서 발걸음을 멈췄다. 판독상자의 젖빛 유리를 통해 새어나오는 독특한 낮은 광도의 형광등 불빛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 습을 으시시하게 비추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불빛 아래에 서 있는 레지던트들이 창백한 피부와 퀭한 눈을 가진 시체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던 느낌이었다. 그는 자기 손을 내려 다 보았다. 마찬가지로 파르스름하게 창백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낯설고 싱숭생숭해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 었다. 작년부터 익숙하던 병원의 정경들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곤 하던 때가 종종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점점 불만스러워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하는 일은 점점 더 행정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처 해 있는 현재의 정체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58세인 신경방사선과의 과 장 톰 브록튼은 은퇴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데다가 방사선과 과장 해롤드 골드블라트 역시 신경방사선 학자였다. 마틴은 이 분야에서 더이상 화려한 출세 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도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 위에 굳게 버티고 있는 두 사람 때문에 말이다. 그 는 1년 전부터 이 병원을 떠나 자신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다른 병원으로 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틴은 복도를 돌아 수술장으로 향했다. 그는 제한구역이라고 씌어진 이중 문 을 통과해서 환자 대기실로 통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곳은 몸을 칼로 째기 위해 기다리는 초조한 모습의 환자들이 누워 있는 이동 침대로 가득차 있었다. 30개의 수술실과 회복실로 통하는 곳에 흰색의 긴 붙박이 호마이카 책상이 버티 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세 명의 간호사가 앉아 환자가 지정된 수술실로 들어가는지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수술은 24시간 동안 200여 건 정도로 이들의 일은 상당히 고된 것이었다. “매너하임의 수술에 대해 말해줄 사람 있소?” 마틴은 책상 위로 몸을 굽히며 물었다. 간호사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마틴은 몇 안 되는 훤칠한 용 모의 의사 가운데 하나였기에 수술실에 있는 간호사들은 그에게 대단히 호의적 이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지껄이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서로에게 양보했다. “이거 다른 데 가서 물어봐야겠군.” 마틴이 장남으로 가려는 몸짓을 하자 금발의 간호사가 막았다. “어머, 안돼요” 그러자 갈색머리의 간호사가 말했다.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창고 안에 들어가서 말씀 드릴까요?” 수술실은 병원 내에서 까다로운 제약이 없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곳의 분위기 는 다른 부서와는 사뭇 달랐다. 마틴은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잠옷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고, 또 수술의 위험에 따르는 긴장을 성적인 농담으로 풀려는 의도도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그는 방사선 과를 전공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외과 레지던트로 1년 동안 근무했던 그곳의 분 위기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떤 환자의 수술에 대해 알고 싶으신대요? 마리노 양인가요?” 금발머리 간호사가 물었다. “맞아요.” “선생님 바로 뒤에 있는 환자예요.” 마틴은 뒤를 돌아다 보았다. 스무 걸음쯤 떨어진 이동침대에 스물을 갓 넘은 여자가 시트를 덮고 누워 있었다. 고개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 술 전의 투약으로 몽롱한 상태에서도 자기 이름이 불리워 지는 것을 들은 것 같 았다. 수술에 대비해 머리를 깨끗이 밀어버린 그녀의 모습은 털이 뽑힌 새를 연 상케 했다. 수술을 위한 X-레이 사진을 찍을 때 그녀를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작고 허약할 줄 몰랐었다. 그녀의 눈에는 버려진 어린아이 같 은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마틴은 간호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모른 척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외과에서 방사선과로 전공을 바꾼 이유 중의 하나는 특정한 환자에게 쏠리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아직 수술이 시작되지 않았죠?” 그는 그녀가 공포에 질린 채 방치되어 있는 것에 화가 나 간호사에게 따졌다. “매너하임 박사님은 깁슨 메모리얼 병원에서 틋구한 전극이 도착하기를 기다 리고 계세요.” 금발머리 간호사가 대답했다. “절제한 뇌조직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기록하려고 하신다던데요.” “알겠소...” 마틴은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매너하임은 남의 스케쥴을 망쳐놓는 버릇이 있었다. “일본에서 매너하임 박사님을 찾아온 손님이 두 분 있어요. 일주일 내내 큰 수술들이 연이어 있었죠. 하지만 몇 분 있으면 수술이 시작될 거예요. 수술실에 서 환자를 불렀거든요. 환자를 데리고 들어갈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알았어요.” 마틴은 벌써 환자 대기실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매너하임에게 수술 위치를 결정할 X-레이 촬영을 하고 싶으면 내게 직접 전화하라고 전해줘요. 그래야 몇 분이라도 절약될 테니까.” 그는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아직도 면도를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술장 휴게실로 향했다. 8시 10분으로 휴게실은 한산했다. 7시 30분 시작의 첫 수술들은 한창 진행중이었고, 잇달아 예정된 수술들이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었다. 한 의사가 전화기를 붙잡고 증권 브로커와 입씨름을 하면서 무의식 적으로 온몸을 긁적이고 있었다. 마틴은 탈의실로 들어가 늙은 관리인인 토미가 써도 좋다고 허락해준 옷장문 의 자물쇠를 땄다. 얼굴에 면도 거품을 잔뜩 발랐을 때 호출기에서 발신음이 울 려 그는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어느새 그는 신경이 대단히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거품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벽에 걸려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의 비 서인 헬렌 워커였다. 그녀는 윌리엄 마이클스가 도착해 그의 연구실에서 기다리 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마틴은 새로운 열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면도를 시작했다. 마이클스가 가 져온다는 놀라운 소식에 대한 흥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화장수를 바르 고 가운을 다시 걸친 뒤 휴게실로 나왔다. 아까 그 의사가 아직도 전화통에 매 달려 있었다. 마틴은 거의 뛰다시피해서, 연구실에 도착했다. 헬렌 워커가 타자를 치다가 고 개를 들었을 때는 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온 우편 물과 전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일어서려 했지만, 이미 연구실 문은 큰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마틴은 문에 기댄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마이클스는 마틴의 방사선학 잡지를 아무렇게나 넘기고 있었다. "어이" 마틴은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 마이클스는 언제나처럼 잘 맞지 않는 낡은 쟈켓을 입고 있었다. MIT 3학년 시절에 산 옷이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이었지만 실제로는 스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의 금발머리는 너무나 노래서 마틴의 머리를 갈색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만족스러움을 나타내는 개구장이 같은 미소 를 띠면서 파란색 눈을 깜벅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그는 말을 건네고는 다시 잡지를 보는 척 했다. "이거 봐, 날 꼭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건가? 난 벌써 그 정도가 극에 달해 있 다구" "무슨 애기인지 모르겠는데요...." 마이클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틴은 재빠른 동작으로 방을 가로질러 그의 손에서 잡지를 나꿔챘다. "바보 놀음은 관두자구. 자넨 '깜짝 놀랄 일'이라는 걸 헬렌에게 말할때부터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있었어. 난 새벽 4시에 자네한테 전화를 걸려고 했었단 말이야. 자, 이젠 무슨 애긴지 들어야겠어. 충분히 놀렸쟎아" "아, 그거 말이에요?" 마이클스가 다시 놀렸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는 허리를 굽혀 서류가방을 뒤적였다. 잠시 후 초록색 포장지에 싸서 노란 리본으로 묶은 작은 꾸러미를 끄집어냈다. 마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게 뭔데?" 그는 자신들이 진행중인 연구에 획기적인 도움이 될 컴퓨터 프린트 용지 따위 를 기대했었지 선물을 바란 게 아니었다 "이게 바로 깜작 놀랄 물건이에요." 마이클스는 꾸러미를 그에게 내밀었다. 마틴의 눈길이 다시 꾸러미로 향했다. 실망감으로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누가 이 따위 선물을 사다 달라고 했어?" "나의 훌륭한 연구 파트너에게 주는 선물이죠?" 마이클스가 꾸러미를 내민 채 말했다. "자, 어서 받으세요." 마틴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실망을 가라낮히고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어찌 됐든 아이클스의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선물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니 까. 마틴은 꾸러미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길이는 4 인치 정도에 높이가 1인치로 무게는 가벼웠다. "열어보지 않겠어요?" "아, 그래야지" 마틴은 대답하면서 마이클스의 표정을 읽어내려 했다. 전산과학 부서에서 일 하는 이 장난꾸러기 같은 녀석에게 선물이라는 게 도대체 어울리지 않았다. 그 가 친절하거나 다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평소의 그는 워낙 연구에만 집착해 있 어서 남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은 미처 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틴은 그와 4년을 함께 일해왔지만 망클스가 사교적인 모임에 나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마이클스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180도 바꿔 선물을 줄 생각을 다 하다니. 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대학에 새로 개설된 인공 지능 분야의 연구원으로 발탁된 사람이었다. MIT에서 박사학위를 땄을 때는 겨 우 열아홉 살이었다. "빨리요" 마이클스가 재촉했다. 마틴은 리본을 풀어 책상 위의 잡동사니 틈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초록색 종이를 풀어해치자 안에는 검은 상자가 있었다.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마이클스가 말했다. "상징적 의미?" "네. 정신과에서는 뇌를 블랙박스처럼 다루잖아요. 어쨌든 마저 풀어 보시죠." 마틴은 픽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뚜껑을 열 고 안을 싸고 있던 종이 조각들을 헤치자 놀랍게도 프리트우드맥(Fleet,Wood Mac)의 '루머즈'라는 제목이 붙은 카세트 케이스가 나왔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마틴은 웃으며 말했지만 마이클스가 왜 자신에게 프리트우드 맥의 태이프를 사주는지 모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기엔 더욱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죠" 마이클스가 설명했다. "안에 들어있는 건 음악보다 더 좋은 게예요" 갑자기 스무 고개의 해답이 나오는 것 같았다. 마틴은 케이스를 열고 테이프 를 꺼냈다. 노래 테이프가 아니라 프로그램이었다. "무슨 내용이지?" 마틴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몽땅 다 들어 있어요" "설마!" 마틴은 믿을수 없다는 듯 외쳤다. "저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자료 기억하시죠? 그게 기막힌 효과를 나타냈어요. 드디어 방사선 음영과 경계의 구분의 문제를 해결한 거죠. 이 프로그램은 당신 이 뽑아놓은 자료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다 모아놓은 거에요. 이것을 저기에 집어넣기만 하면 입력된 어떤 두게골 X-레이든 모조리 판독해 낼 수 있어요." 마이클스는 연구실 뒤편을 가리켰다. 마틴의 작업대 위에는 TV 모양의 전자 장치가 놓여 있었다. 대량 생산된 제품이 아니라 견본품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 다. 전면은 나사가 삐죽이 튀어나온 평평한 스테인레스 스틸로 된 판이었고, 왼 쪽 윗부분에는 프로그램 테이프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코드가 양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코드 하나는 프린터에, 또 다른 하나는 가로 세로 4피트, 높이 1 피트의 네모꼴 스테인레스 스틸 상자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의 앞 면에는 X-레이 필름을 집어 넣을 수 있도록 된 긴 틈이 있었으며, 틈 사이로는 필름을 안으로 밀어 넣는 롤러가 보였다. "믿을 수가 없는데." 마틴은 마이클스가 또 놀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우리도 못 믿겠어요.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벌어졌거든요." 그는 걸어가서 컴퓨터를 툭툭 쳤다. "당신이 고안한 방사선학에서의 문제 해결과 유형 분류 방식이 새로운 기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했을 뿐아니라, 그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까지 가르쳐 주 었어요. 이게 바로 그거예요." "겉모양은 간단한데." "보통 사람들은 겉모양에 잘 속죠. 하지만 내부장치는 컴퓨터 업계에 혁명을 일 으킬 겁니다." "정말로 이 컴퓨터가 X-레이를 판독할 수 있다면 방사선학계에 어떤 일이 벌 어질까 상상해 보라구." "X-레이를 판독해 낼 수는 있는데, 아직도 프로그램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요. 당신이 할 일은 과거에 판독했던 두개골 X-레이를 될 수 있는한 많이 모아서 이 프로그램으로 운용해 보는 거예요. 문제가 있다면 위음성(False negative;실제 로 양성인 것을 음성으로 판독하는 오차) 부분에 있을 겁니다." "방사선과 의사들도 똑 같은 문제를 갖고 있어." "그 문제를 이 프로그램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전적으로 당신한테 달렸구요.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컴퓨터를 켜세요. 의사들도 그쯤은 할 수 있겠 죠?" "문제 없어. 하지만 플러그를 꽂는 데는 따로 박사학위가 필요하겠는걸." "좋았어요." 마이클스는 웃었다. "당신의 유머 감각도 날로 발전하는군요. 플러그를 꽂고 컴퓨터를 켠뒤 프로그 램 카세트를 집어 넣으세요. 그 다음부턴 프린터에 나타나는 지시대로 X-레이 필름을 레이저 검색기에 밀어 넣으면 돼죠." "필름의 방향은 어떻게 하지?" "상관없어요. 감광액이 묻은 면이 밑으로 향하도록 하면 돼요." "알았어" 마틴은 두 손을 비비면서 대견스러운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표정으로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군." "믿을 수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예요. 4년 전만 해도 우리가 이런 프로그램을 만 들 거라구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나는 당신이 전산과학부에 불쑥 나타나서 누구 유형 분석에 관심 있는 사람 없느냐고 묻던 날을 지금도 기억하죠." "자네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지. 그때 난 자네가 아직도 학부 학생인 줄로 착 각 했었지. 하긴 인공지능 분야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모든 과학상의 업적에는 행운이라는 게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행운 뒤에는 고된 작업이 기다리고 있죠. 앞으로 당신이 해야하는 일처럼 이 프 로그램으로 더 많은 두개골 사진을 판독하면 할수록 프로그램의 이상을 고칠 수 있을 뿐아니라, 프로그램이 발견적 습득(heuristic)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기억 해 두세요." "못 알아 들을 말만 하는군. 발견적 습득은 또 뭐야?" 마이클스가 웃었다. "의사도 마찬가지군요. 의사가 어려운 용어에 대해 불평하는 건 처음 봤어요. 발견적 습득이란 프로그램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해요." "컴퓨터가 스스로 영리해진단 말인가?" "바로 그거예요." 마이클스는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당신한테 달렸어요. 그리고 똑같은 체계를 방사선학의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세요. 그러니까 시간이 있을 때 가능 하면 뇌혈관 조영사진들을 분석해서 자료를 뽑아놓으세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 에 할게요." 마이클스가 나가자 마틴은 작업대로 다가가 X-레이 판독기를 바라보았다. 당장 이라도 일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매일 정규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가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헬렌이 들어와 우편물 뭉치와 전화 메세 지, 그리고 뇌혈관 조영실의 X-레이 촬영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짜증나 는 소식을 전했다. 마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새 기계에서 고개를 돌렸다. 4 "리사 마리노 양?" 리사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케롤 비그로우라고 씌어진 명찰을 단 간호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중 짙은 갈색 눈만이 보였다. 머리는 꽃무늬가 그려진 모자에 가 려지고 코와 입도 수술용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다. 손목에 둘러진 환자의 인식 표(수술장에서는 환자가 바뀌지 않도록 인적 사항을 적은 팔찌 모양의 인식표를 감아둔다)를 읽기 위해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들어 뒤집는 게 느껴졌다. 팔이 다 시 제자리에 놓여지고 가볍게 두둘기는 느낌이 왔다. "수술 받을 준비가 됐죠?" 캐롤이 그녀가 누워 있는 이동침대의 제동장치를 발로 풀어 벽으로부터 끌어당 겼다. "모르겠어요." 리사는 간호사의 얼굴을 올려다 보려고 했지만 캐롤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준비가 됐을 거예요." 캐롤이 말하며 그녀의 침대를 흰 호마이카 책상 앞으로 밀었다. 21번 수술실로 향하는, 운명적인 여정을 시작한 그녀 뒤로 자동문이 닫혔다. 신경외과 수술은 대개 20번, 21번, 22번, 23번 수술실 중에서 행해졌다. 이 4개 의 수술실에는 뇌수술에 필요한 특수한 조건들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방이었다. 천장에는 자이스 수술 현미경이 달려 있고, 녹화기능까지 있는 폐쇄회로 비디 오 시스템과 특수한 수술대가 장치되어 있었다. 21번 수술실에는 수술 진행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된 관찰실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신경외과 과장이자 의대 의 학과장인 매너하임 박사가 이곳을 특히 선호했다. 리사는 지금 잠들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럴 수가 없엇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 져 정신이 더 또렷해져 있었다. 소독 약품 냄새도 유난히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아직 시간은 있어'라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침대에서 뛰어내려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술 같은 건 정말 받고 싶지 않았다. 특히 머리에는, 뇌수술이 아니라면 이렇 게 무섭진 않을 것 같았다. 이동침대가 멈춰섰다. 고개를 돌리자 모퉁이를 돌아가는 간호사의 뒷모습이 보 였다. 자신이 마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에 주차된 자동차 같은 존재 로 느껴졌다. 그녀 곁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구역질을 해대는 한 남자를 이동 침대에 실어 옮기고 있었다. 오더리(Orderlie:병원에서 일하는 잡역부) 하나가 그 의 턱을 밑으로 제끼고 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꿈에 볼까 두려운 한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리사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자신도 그 환자같이 될 것만 같았다. 신체의 가 장 중요한 부분이 열어 젖혀져서 무자비하게 파헤쳐지려 하고 있었다. 팔다리 같은 데도 아니고 바로 그녀의 인성과 영혼이 내재하는 머리가 말이다. 혹시 수 술 뒤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리사는 열한 살 때 맹장염을 앓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토록 무섭게 느껴 졌던 맹장 수술도 지금의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비록 생 명을 잃지 않을지 몰라도 수술 후에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산산조각이 되어 사람들이 그 조각을 주워 들여다 볼 것만 같았다. 캐롤 비글로우가 다시 나타났다. "리사, 이제 준비가 다 되었어요." "무서워요..." 리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리사. 매너하임 박사님에게 당신의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리사는 누구에게든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니라는 뜻으 로 고개를 저었지만 속에서는 화가 치밀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 지? 이건 불공평해. 1년 전만해도 그녀는 평범한 여대생 이었다. 그녀는 대학원 에서 법률을 전공하기로 하고 대학에서는 영어를 전공했다. 문학 강좌를 좋아했 다. 그녀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적어도 짐콘웨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결 국 자신이 학문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것도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남들이 섹스에 대해 안달을 하고 요란을 떠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짐을 만 나기 전에도 섹스를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번도 만족을 얻은 적은 없 었다. 그러나 짐과는 달랐다. 그녀는 짐과 관계를 가지면서 섹스가 무엇인지 깨 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무책임하지는 않았다.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았 지만 대신 횡경막(diaphragm:여성이 사용하는 고무막의 피임기구로 성행위 전 자궁 입구에 삽입한다)을 사용하여 조절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처음 산부인과 를 찾아갈 때 얼마나 대단한 용기를 내야 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번 째도 마찬가지였다. 이동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방은 한 면이 25피트인 정사각형 꼴이었다. 벽 에는 윗쪽의 유리로 된 관찰실 바로 아래까지 회색 타일이 붙여져 있었으며, 천 장에는 양철북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이 생긴 거대한 스테인레스 스틸 수술등 두 개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수술대는 폭이 좁고 흉칙하게 생긴 장치로 리사에게는 사교의 의식을 위한 제단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수술대의 한쪽 끝 부분에는 가운데게 뻥 뚫린 둥그 런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리사는 그것이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수술실의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구석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비지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 이제 수술대 위로 옮겨가세요." 캐롤 비글로우가 말했다. "네... 고마워요." 리사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스스로 놀랐다. 고맙다는 표현은 지금 그녀의 심 정으로는 얼토당토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수술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적으 로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들이 자신을 좋아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동침대에서 수술대로 몸을 옮기면서 최소한의 위엄을 지키려고 하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수술대 위에 몸을 눕히자 수술등이 눈에 들어왔다. 수술 등 바로 옆으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리창 저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자 눈을 감아버렸 다. 그 운명의 밤이 오기 전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던 그녀의 인생은 그 사건 이후 하나의 악몽이 되어버렸다. 그날 밤 그녀는 짐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상 하게 책을 읽는데 힘이 들었다. 특히 '언제나'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을 때는 더 어려웠다. 그녀는 확 실히 그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속에서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녀 는 결국 짐에게 물었다. 짐은 그녀가 그를 놀리는 줄 알고 웃기만 하다가 몇 번 씩 질문을 한끝에야 뜻을 가르쳐 주었다. 짐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뒤에도 '언제 나'라고 인쇄된 글자만 보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좌절감과 함께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 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전에 맡아본 듯한 지독한 냄새였다. 짐이 아무 냄새 도 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 직후에 그녀는 발작 을 일으켰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 짐은 떨고 있었다. 무서운 발작어었던 모양이 었다. 짐의 얼굴은 그녀에게 맞아 멍이 들고 할퀸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안녕하세요. 리사." 영국식 억양이 섞인 남자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벨라네이드 박 사의 짙은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대학에서 수련을 받은 의사로 인도인 이었다. "내가 어제 말해준 거 기억하고 있죠?"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침도 하지 말고 뒤척이지도 말라고 했어요." 리사는 마음도 편하게 가지려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저녁 라네이드 박사가 찾아왔던 것이 또렷하게 생각났다. 그녀가 저녁식사를 마쳤을 때 찾아와 자기가 마취를 담당할 의사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다른 의사들이 수도 없이 되 풀이한 건강상태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가 다른 의사와 다른 점은 대답에 관심 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그의 검은 마호가니 빛 얼굴은 그녀가 열한 살 때 맹장염에 걸렸었다는 얘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당시 마취를 했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말을 했을 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이외에 그가 흥미를 보였던 점은 그녀에게 알레르기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도였다. 그 때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었다. 리사는 외향적인 사람을 좋아하는데 라네이드 박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 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의 그런 냉정한 태도가 오히려 믿음직스럽기조차 했다. 그녀는 자신의 호된 시련을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라네 이드 박사의 그 다음 말에 그녀는 몹시 놀랐다. 그는 예의 그 옥스포드 억양으 로 이렇게 물었다. "매너하임 박사가 당신에게 어떤 종류의 마취를 사용할 것인지 말씀 하셨지 요?" "아뇨." "그거 이상하군요." 라네이드 박사가 한참 있다 말했다. "왜요?" 리사는 반문하면서 당혹감을 느꼈다. 그의 어투에서 심상찮은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대개의 두개골 절개술(Craniotomy;뇌 수술시 두개골을 여는 과정을 일컫는 말 로, 여기서는 뇌수술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임)에서는 전신마취를 하는데 매너하 임 박사가 이번에는 국소마취를 하겠다고 알려 왔거든요." 리사는 자기가 받을 수술이 두개골 절개술이라고 불리우는 줄도 몰랐다. 매너 하임 박사의 말로는 머리의 피부를 젖히고 머리에 작은 구멍을 낸후 오른쪽 측 두엽(temporal viobe:대뇌의 측면 부위에 해당하는 해부학적 명칭)의 손상된 부 분만을 들어낸다고 했었다. 리사의 발작은 어떤 이유로 인해 뇌의 일부가 손상 되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만 들어내면 발작은 없어질 거라고 설명했 었다. 자신은 그런 수술을 이미 100건 정도 치렀으며 모두 성공적인 결과를 가 져왔다는 말에 그녀는 안심했다. 매너하임 박사를 만나기 이전의 의사들은 그녀 에게 불쌍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발작은 끔찍했다. 대개는 이상하면서도 익숙한 냄새 때문에 발작이 언제 올지 알 수 있었지만, 때로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런 눈사태처럼 닥쳐올 때 도 있었다. 오랜 기간 다량의 약을 복용한 후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고 극장에 갔던 어느 날, 그녀는 그 불쾌한 냄새가 또 나는 걸 깨닫고는 벌떡 일어나 휴게 실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부터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의식하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휴게실 자판기 옆에 기댄 채 손을 다리 사이에 넣고 있었다. 옷은 일부 벗은 채로 발정난 암고양이처럼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 람들은 그녀가 정신병자인 줄 알고 둘러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고, 짐은 그녀에 게 주먹과 발로 맞아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녀에게 맞은 두 명의 소녀 중 하나는 심하게 상처를 입어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정도였다.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을 감고 우는 것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무서워서 그녀에게 감히 접근을 못했다. 그때 멀리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미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리사의 생활은 완전히 정체되었다. 미치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약물 로도 발작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매너하임 박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을때 그 를 마치 구세주처럼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라네이드 박사의 방문을 받은 후 에야 비로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라네이드 박사가 돌아간 후 오더리 한 명이 들어와서 그녀의 머리를 박박 밀어버렸다. 그 순간부 터 그녀는 공포에 사료잡혔다. "국소마취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리사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라네이드 박사는 신중히 생각하고 나서 대답 했다. "있죠? 당신의 뇌에서 병에 걸린 부분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려는 겁니다. 그 럴려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럼 맨 정신으로..." 리사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느낌 이 들었다. "맞아요." "하지만 매너하임 박사는 내 머리에서 어느 부위가 병들었는지 알고 있지 않나 요?"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내가 곁에 있을테니 걱정마세요. 통증은 없을 겁니다. 다만 기침을 하거나 뒤척이면 안 된다는 것만 명심하세요." 왼팔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생각이 중간에 끊겼다. 눈을 들어보니 그녀의 머리 위에 매달린 병 속의 액체에서 작은 방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라네이드 박사가 정맥주사를 놓은 것이었다. 그는 오른팔에도 정맥주사를 꽂은 뒤 주사 바늘 안으로 가늘고 긴 플라스틱 관을 밀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몸이 약간 아래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수술대를 조정했다. "리사, 카테터(Catheter,도관;체내의 액체를 빼낼 때 쓰는 가느다란 고무 튜브) 를 삽입하겠어요." 미사는 머리를 들어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캐롤이 분주하게 플라스틱 상자 를 풀고 있었다. 다른 스크럽 간호사(수술시에 손을 소독하고 직접 수술에 참여 하여 기구 등을 집어주는 간호사)인 낸시 도노반이 시트를 끌어올려 허리 아래 를 노출시켰다. "카테터라뇨?" 리사가 되물었다. "당신의 방광에 튜브를 집어넣는 거예요." 캐롤이 고무장갑을 집으면서 말했다. 리사는 다시 머리를 내렸다. 낸시 도노반이 리사의 다리를 붙잡고 양발바닥이 맞닿도록 무릎을 넓게 벌렸다. 그녀는 몸을 그렇게 노출시킨채 누워 있어야만 했다. "지금부터 만니톨이라는 주사약을 투여하겠습니다." 라네이드 박사가 설명했다. "배뇨량이 급증할 겁니다." 리사는 캐롤이 자신의 생식기를 소독하는 동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 다. "안녕, 리사. 난 조지 뉴먼입니다. 나를 기억하겠습니까?" 눈을 뜨자 마스크를 쓴 얼굴이 보였다. 푸른색 눈이었다. 반대편에는 갈색 눈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난 신경외과의 수석 레지던트입니다." 뉴먼이 말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3년차 레지던트인 랄프 로리 선생입니다. 어제 말씀드린대로 우린 매너하임 박사를 보조하게 됩니다."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다리 사이로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하더니, 방광에 이상 한 팽만감이 전해져왔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허벅지 안쪽에 테이프를 붙이 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을 푸세요." 뉴먼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금방 당신을 말끔하게 낫도록 해줄테니." 두 의사는 뒤쪽 벽에 걸린 X-레이 사진들로 시선을 옮겼다. 수술실 안이 분주해졌다. 낸시 도노반이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기구를 담은 쟁 반을 들고 들어와서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올려놓았다. 또 한 명의 스크럽 간호사인 다렌 쿠퍼가 가운과 장갑을 착용하고 기구들을 쟁반 위에 가지런히 정렬했다. 다렌 쿠퍼가 큰 드릴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리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라네이드 박사가 리사의 오른쪽 팔꿈치 윗부분에 혈압계를 묶는 동안 캐롤은 리사의 가슴을 젖히고 심전도 전극을 부착했다. 곧 심장 모니터에서 수중탐지기 같은 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존 덴버의 노래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뉴먼이 X-레이 사진을 검토하고 돌아와서 박박 깎은 리사의 머리 위치를 조정 했다. 그는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그녀의 코에,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정수리에 갖다대고 유성펜으로 줄을 그었다. 첫번째 줄은 한쪽 귀에서 정수리를 지나 다 른쪽 귀까지, 두번째 줄은 이마 한가운데서 시작해 첫번째 줄을 2등분하고 후두 부까지 이어졌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세요." 리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오른쪽 눈으로부터 귀까지 광대뼈를 따라 손가락으 로 누르는 것이 느껴져 왔다. 그런 다음에 유성펜으로 우측 관자놀이부터 귀 뒤 까지 줄을 긋는 것이 느껴졌다. 선은 그녀의 귀를 밑으로 한 말밥굽 모양을 형 성했다. 이 부분이 바로 매너하임 박사가 피부를 젖힌다고 말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졸음이 닥쳐왔다. 방 안의 공기가 끈끈하게 느껴지고 사지 가 나른해졌다. 눈꺼풀을 올리는 데도 힘이 들었다. 라네이드 박사가 미소를 지 으며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녀의 정맥주사줄을, 다른 한손에 는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당신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라네이드 박사의 목소리였다. 시간의 흐름이 멈추었다. 그녀의 의식 속으로 소리가 파도처럼 들어왔다 나갔 다 했다. 잠들어버리고 싶었지만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반 쯤 모로 눕게 몸이 돌려져 오른쪽 어깨 밑에 베개가 받쳐지는 것을 느꼈다. 양 손목이 수술대 옆에 직각으로 튀어나온 팔걸이에 묶였고, 몸을 고정시키기 위해 허리 둘레에도 가죽띠가 묶여졌다. 설사 묶여 있지 않다고 해도 기운이 없어 팔 하나도 들어올릴 수가 없는 상태 였다. 머리를 박박 문질러 닦고 소독약으로 칠하는 느낌이 왔다. 날카로운 바늘 로 찌르는 통증이 몇 번 있은 후에 머리를 바이스 같은 기구로 죄고 있는 느낌 이 들었다. 리사는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도 모르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갑작스런 통증에 그녀는 소스라쳐 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할 수 없 었다. 통증은 오른쪽 귀 윗부분으로부터 오는 것 같았다. 통증이 다시 왔다. 자 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리사는 몸을 움직여보려고 시도했다. 얼굴 바로 앞에만 터널 모양으로 구멍이 있었다. 터널 바깥으로 라네이드 박사의 얼 굴이 보였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리사. 지금 국소마취제를 주사하는 주사하 는 중이니까 움직이지 말아요. 금방 끝날 거예요." 통증이 자꾸 반복되었다. 머리가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팔을 들어 보려고 했 지만, 천 속에 갇혀 있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제발!" 그녀는 힘껏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약하기 그지 없었다. "괜찮아요, 리사. 긴장을 풀어요." 오른쪽 귀 바로 위에서 드렸다. "메스!" 뉴먼이 말했다. 리사는 몸을 움츠렸다. 유성펜으로 그어 놓은 선을 따라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 르는 듯한 느낌이 왔다. 그녀는 따뜻한 액체가 소독포를 적시면서 목에 와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혈겸자(hemostat;혈관을 잡을 때 쓰는 기구)." "레이니 집게(Raney clip). 그리고 매너하임 박사께 연락하세요. 30분쯤 있다가 오시면 된다고 말해줘요." 리사는 그들이 자기 머리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 다. 대신 방광 내의 팽만감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라네이드 박사를 불러서 오줌 이 마렵다고 했다. "방광에 카테터가 삽입돼서 그래요." "하지만 화장실에 가야겠어요." "안심해요, 리사. 수면제를 더 놓아줄게요." 다시 리사가 깨어났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터가 돌아가 지 사용해 들여다 보았지만 반점들이 쉽게 눈에 듸지 않았다. 이 환자의 필림에서는 병변이 심 층부인 백질(white matter)의 신경섬유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표층부인 대뇌피질에 있는 것 같았 다. 그는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대개의 다발성 경화증은 뇌의 백질에 병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프 린터가 멈춘 것을 보고 그는 출력된 보고서를 뜯어내 읽었다. 맨 위에 감사합니다. 라고 씌어 있 었다. 이것은 그가 필림을 삽입할 때 나온 말이었다. 밑에는 환자의 이름이 찍혀 있고 가짜 전화 번호까지 있었다. 마이클스의 짓이었다. 보고서는 마틴이 바라던 그대로였다. 린 앤 루카스의 경우에도 그랬던 것처럼 컴퓨터는 프로 그램화 되지 않은 이 비정상적인 병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돌아온 데니스가 15개의 또 다른 봉투를 들고 온 랜디와 거의 동시에 마틴의 방에 도착했다. 마틴은 데니스에게 큰소리가나게 키스를 보내고 나서, 그녀의 조언 덕택에 젊은 여성 두 사람을 더 발견할 수 이었다고 말했다. 마틴이 랜디가 가져온 새 필름들을 가지고 다시 작 업을 시작하려하자 데니스가 마틴의 어깨 위로 두 손을 살며시 얹고 속삭이듯 말했다. "응급실은 조용해요.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마틴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치 새 장난감을 그만 가지고 놀고 잠자리에 들라고 강요당하 는 어린애 같은 심정이 되었다. 마지못해 그는 봉투를 도로 내려놓고 랜디에게 명단에 올라 있 는 나머지 사람들의 필름을 찾아서 자기 책상 위에 놓아 달라고 부탁한 뒤, 만일 시간이 남는 다면 처음 줬던 명단의 필름들도 찾아서 작업대 뒤 벽에 쌓아 놓으 라고 말했다. 마틴은 잠시 생각하시다가 다시 랜디에게 병원기록실에 전화해서 캐더린 콜린스와 엘렌 멕카시의 차트를 자 기 연구실로 보내라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마틴은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뭘 잊은 것 같아." "당신 자신을 잊고 있잖아요!" 데니스가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여기서 18시간을 보냈어요. 그러고도 부족해요? 빨리 가요." 아파트는 병원에 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명시설이 잘 갖추어지고, 밝은 색으로 칠해진 지 하터널로 병원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기와 난방은 음향조절 타일이 부착된 터널 천장을 통해 공급되었다. 마틴과 데니스는 손을 잡고 의대 구관과 신관 건물 아래로 지나갔다. 그들은 계속 걸어가다가 브레너 소아과 병원과 골드먼 정신병 연구소로 통하는 터널의 갈래길 을 지나쳤다. 아파트는 터널 끝에 위치했다. 이 지역에서 암세포처럼 시설확장을 거듭라던 병원의 현재 경계선은 바로 타워 아파트였다. 아파트 지하 홀에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울려퍼지고, 방 탄 유리 건너편에 앉아 있던 경비원 하나가 마틴의 얼굴울 알아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 병원의 의사와 직원들이 주로 입주해 있는 아파트는 주거지로서 매우 훌륭한 곳이었다. 대학 의 다른과 교수들도 몇 명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보통 비싼 지역에 임대를 구해 살았다. 적극적 으로 직장 일을 하는 부인과 함께 사는 젊은 의사들의 수가 늘고 있기는 해도 이혼해서 혼자 지내는 이사가 대부분이었다. 아빠가 돌볼 차례인 주말만 제외하면 아이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 았다. 마틴의 많은 정신과 의사와 함께 상당수의 동성 연애자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틴도 이혼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6년간의 답답한 결혼 생활 끝에 4년 전 아내와 헤어졌다. 그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마틴도 레지던트 기간동안 학문에만 매달려야 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다 못해 결혼을 했었다. 아내의 이름은 셜리로 그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는 그녀가 느닷없이 떠난 것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이혼에 대한 그의 반응은 우울증으로 나타났고, 그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가능한한 오랜 시 간을 일에 매달렸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상황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초연함을 가지고 그때 일을 바라볼수 있게 되었다. 그가 결혼한 상대는 의학이었고, 그의 아내는 정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가치관이 무 엇인지를 깨달은 셜리는 그가 신경방사선과의 부과장으로 발탁되던 해 그의 곁을 결심했다. 그 는 승진되기 전까지 일주에 70시간씩 일하는 이유가 부과장이 되기 위해서라고 변명하다가 일단 그 직위에 오른 뒤에는 부과장으로의 그만한 시간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었다. 마틴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 셜리는 결국 함께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떠나버린 것이 다. "리사 마리노의 없어진 뇌에 대해 무슨 단서라도 잡았어요." 데니스가 그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아니, 하지만 분명히 매너하임이 연관돼 있을거야." 그들은 거대하고 현란한 샹들리에 밑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이었다. 불빛으로 생긴 금 빛의 동그라미들에 의해 카펫이 오렌지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뇌가 없어진 이유가 몹시 궁금하긴 하지만." 그의 아파트의 가장 좋은 점은 강과 우아한 곡선을 이룬 다리를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이었 다. 그것이 그의 아파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가 여기에 이사온 것은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는 전화로 임대계약을 했고 꾸미는 일을 임대회사에 일임했다. 그 결과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소파와 그 옆에 세워두는 작은 탁자 두 개, 커피 테이블, 거실 의자 두 개, 작은 식탁, 그리고 침대와 한 세트인 탁자가 들어왔다. 많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임 시로 사용될 것들이었다. 그는 여기서 4년씩이나 살게 되리라고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마틴은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았지만 오늘밤은 긴장을 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얼음을 담은 유리잔에 스카치 위스키를 따랐다. 짐짓 데니스에게도 병을 들어보이며 권했지만 예상대로 그 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와인이나 아니면 아주 가끔 진토닉을 마실 뿐이었다. 게다가 오 늘은 병원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호출에 응해야 했다. 대신에 그녀는 냉장고에서 오렌 지를 꺼내 자기 손으로 큰 잔에 따랐다. 데니스는 거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빨리 지쳐버리기만 기다렸다. 그녀는 그의 연 구나 없어진 뇌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시인하던 때를 떠 올렸다. 그가 그토록 심각해질 수 있다는 데 그녀는 놀랐고, 스스로의 감정도 무리없이 받아들 일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은 놀라운 거야. 단 하루 사이에 180도 달라질 수도 있지." 데니스는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기를 바라며 물었다. "무슨 얘기예요?" "어제만 해도 이렇게 빨리 X-레이 판독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만 일 일이 이대로만" 데니스는 벌떡 일어나 그를 밀어뜨린 후 그의 셔츠 자락을 잡아당기며 병원 일은 잊어버리고 그만 쉬라고 다그쳤다. 그녀는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억지로 웃음을 띄우며 그의 어리둥 절해 하는 얼굴을 쳐다 보았다. 마틴이 자기가 너무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고 시인하고 잠깐 샤워를 하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데니스가 염두에 두었던 행동은 아니지만 함께 있어 달라는 그의 부탁에 그녀 는 욕실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한면은 젖빛이고 다른 면은 사선 무늬가 있는 샤워실 유리 를 통해 그를 바라보았다. 벌거벗은 마틴의 몸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움직이는 것을 보자 데니스는 관능적인 자극을 받았다. 데니스는 그가 요란한 물소리 틈으로 대화를 계속하려 하는데도 오렌지 주스만 홀짝 거렸 다. 물소리 때문에 한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기도 하지만 들을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만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애정이 샘솟고 열정으 로 가득차는 것을 느꼈다. 마틴이 샤워를 마치고 수도꼭지를 잠근 뒤 수건을 쥐고 샤워실에서 나왔다. 그가 아직도 컴 퓨터와 의사들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인사을 찌푸렸다. 그녀는 화를 내며 그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그의 등을 닦기 시작했다. 등의 물기를 다 닦아낸 그를 돌려세우고 화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제발 입 좀 닥쳐요." 그리고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욕실에서 끌어냈다. 그녀의 돌발적인 태도에 당황한 마틴은 그녀가 이끄는대로 컴컴한 침실로 따라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강물과 멋있는 다리가 훤히 보이는 그 방에서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정열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마틴은 즉시 반응했다. 그러나 그가 막 데니스의 옷을 풀어 헤치려는 순간 그녀의 호출기에 서 나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헤어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잠시 서 로를 부둥켜 안고 친밀감을 만끽했다. 서로 아무 말은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병원 응급실 주차장에 구급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온 것은 새벽 2시 40분이었다. 비슷한 구급차 두 대가 이미 주차해 있었고, 지금 들어온 차는 그 사이로 범퍼가 고무 보호대에 쿵 부 딪치도록 바싹 정차했다. 엔진이 덜덜 거리다가 멈추고 앞좌석에서 운전사와 또 한 사람이 내렸 다. 부슬부슬 내리는 4월의 비에 머리를 숙인 채 그들은 차 뒤로 달려가 발판으로 뛰어 올라갔 다. 둘 중에서 몸이 마른 사람이 뒷문을 열어 젖히더니, 체격이 건장한 사람이 차 안으로 들어 가 빈 들것을 끌어냈다. 다른 구급차와는 달리 이 차는 응급환자를 싣고 오지 않았다. 대신 환자 를 데려가기 위해 왔으며 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두 남자가 들것을 다림질 판처럼 양쪽 끝을 뿌ㅌ잡고 들어올리자 받침대가 밑으로 내려와, 폭은 좁니만 충분히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환자 운반용 침대가 되었다. 그들은 응급실의 자동 문을 지나 좌우를 살펴보지도 않고 곧장 중앙통로로 접어들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경과 서쪽 병동이 위치한 14층에서 내렸다. 간호사 2명과 간호보조사 5명이 야간 근무조로 있었지만, 각각 1명과 3명씩 휴식중이어서 간 호사인 클로딘 아네트가 책임을 맡고 있었다. 마른 사람이 이송증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환자 는 뉴욕 의료원의 개인 병실로 옮겨져 개인 주치의가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미즈 아네트는 방금 입원에 관한 서류 작업을 마치고 양식에 서명한 다음이라 속으로 한숨을 쉬며 증서를 검토했다. 그녀는 마리아 곤잘레스에게 그를 데리고 1402호실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 런 다음 그녀는 휴식 시간 전에 일을 마치려고 진정제를 점검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구급 차 운전수의 눈이 짙은 초록색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마리아 곤잘레스는 1402호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린 앤을 흔들어 깨웠지만 그녀를 잠에서 깨어 나게 할 수가 없었다. 마리아는 아까 전화로 지시를 받아 발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페노바비 탈을 포함한 수면제를 두배로 투여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구급차 요원에게 설명했다. 남자는 상 관없다면서 들것 위에 담요를 펼쳤다. 유연하고 숙련된 솜씨로 그들은 린 앤을 들어 담요로 감쌌 다. 린 앤 루카스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안 보았다. 남자는 벌써 린 앤이 누워 있던 침대 시트를 벗기고 있는 마리아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린 앤 을 복도로 밀고 나갔다. 그들이 간호사실을 지나 다시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미즈 아네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한 시간 뒤 구급차가 병원을 빠져나갔다. 사이렌을 울릴 필요도 빨간 회전등 을 켤 필요도 없었다. 구급차의 뒷칸은 비어 있었다. 자명종 시계가 울리기 직전에 눈을 뜬 마틴은 시계의 스위치를 누르고 천장을 바라보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의 몸은 그 전날 잠자리에 든 시간이 언제이든 간에 5시 25분에 일어나도록 길들여져 남의 도움이 거의 필요 없었다. 마틴은 전신에 힘을 모아 벌떡 일어난 뒤 조깅복을 걸쳐 입었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공기는 촉촉했고 강 표면에 안개가 자욱해서 교각이 구름에 의해 떠받쳐 진 것처럼 보였다. 습기가 많은 까닭에 이른 아침의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는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 고, 그 생각은 대부분 데니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 년 되었다. 처음 2주 동안은 불면과 이상스런 기분 변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어느 날 데니스 가 그날 무슨 옷을 입었던가를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냉소와 환희의 감정이 뒤범벅 된 채 마침내 현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냉소는 나이 40에 새롭고 젊은 애인을 만나다 빈축을 사 는 동료들을 봐온데서 나온 감정이었고, 환희는 관계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었다. 데니스 생거는 시간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데 익숙한 단순한 젊은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개구쟁이 같은 집요함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케익 위에 얹힌 크림 같은 것이었다. 마틴은 그녀를 열렬히 사랑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 될 거라는 자기 최면으로 부터 자신을 구해줄 수단으로서 그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5마일 지점에 다다르자 마틴은 방향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눈 에 뛰었지만 대개 마틴은 그들처럼 모른 체하고 지나쳤다. 숨이 점점 가빠졌으나 그는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힘차고 유연한 보폭을 유지했다. 마틴은 자신이 의학을 사랑하는 것을 인생의 다른 면을 희생하는데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였다 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의 갑작스런 떠남 뒤의 충격이 이러한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마틴에게 연구란 일종의 구원과도 같았다. 매일 녹초가 되도록 일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파고드는 연구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자 유를 안겨줄 것이라고 믿었다. 다만 그는 죄어드는 숨통을 트이게 하고 싶었을 뿐 임상 의학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데니스가 함께 있어 줌으로해서 한층 더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는 같은 실수 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만일 둘 사이의 문제가 잘 풀린다면 데니스는 명실공히 그 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연구가 성공을 거둬야 했다. 7시 15분까지 그는 샤워와 면도를 마치고 연구실에 도착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놀 라서 멈칫했다. 밤새 그의 연구실은 낡은 X-레이 사진을 쌓아두는 지저분한 창고로 변해버린 것 같이 보였다. 랜디 제이콥스가 간밤에 예의 그 능력을 발휘하여 마틴으로부터 요청받은 필름 들의 대부분을 찾아서 갖다 놓은 것이다. 처음 명단에 적혀 있던 환자들의 필름이 들어 있는 봉투가 작업대 뒤에 불안하게 쌓여 있었 다. 그보다 적은 두번째 명단의 필름들은 판독상자 앞에 놓여 있었고, 측면 두개골 필름들이 따로 봉투에서 꺼내져 판독 상자에 끼워져 있었다. 마틴은 새로운 의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화면 앞에 앉았다. 그는 즉시 마리노, 루카스, 콜린스, 그리고 멕카시의 사진에서 나타났던 것과 유사한 이상 병변을 찾기 위해 필름들을 훑 어보기 시작했다. 데니스가 도착했을 때는 그가 이미 절반이나 검토를 마친 뒤였다. 그녀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윤기 있던 머리결이 부스스해졌고 눈밑의 그림자가 창백한 얼굴 을 더욱 까칠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틴을 한 번 껴안은 뒤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보며 마틴은 낮잠이라 도 잠깐 자라고 권하고, 피로가 풀리면 혈관조영실로 오라고 말하면서도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잠깐만요. 높은 사람의 애인이라고 예외는 없어요. 내 차례니까 잠을 자든 안 자든 뇌혈관조영 실에 갈 거예요." 마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데니스는 일에 관해서는 철저히 직업적이지 않으면 견디지 를 못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고, 그렇게 생각한다니 기쁘다고 말했다. 약간 누그러진 그녀가 말했다. 좀 뛰고 샤워라도 할래요. 30분 안에 돌아올게요." 마틴은 데니스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화면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책상 위의 잡동사니 가 운데 새로운 물건이 눈에 뛰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차트 두 개와 랜디가 보낸 쪽지였다. 쪽지는 나머지 필름을 다음 날 밤에 가져오겠다는 내용이었고, 차트는 캐더린 콜린스와 엘렌 멕카시의 것이었다. 마틴은 차트를 들고 화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콜린스 것부터 펼쳐보았다. 중요한 정보를 얻는데는 단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캐더린 콜린스는 21세의 백인 여자로 광범위한 신경학적 증상을 보였으며, 신경과에서 세밀한 검사를 하였으나 확실한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감별 진단으로 다발성 경화증이 고려되고 있었다. 차트를 처음부터 끝가지 신중하게 다 읽어 나가던 마틴은 캐더린 콜린스의 병원 방문과 검사가 한 달 전 갑자기 중단된 것을 알았다. 중단되기 직전까지 기입사항이 더 많아지고, 다음 검사가 언제 있을 거라는 내용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다시 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마틴은 콜린스 것보다 비교적 분량이 적은 엘렌 멕카시의 차트를 읽었다. 그녀는 22세의 여 성으로 두 번의 발작을 일으킨 예가 있었다. 그녀 역시 검사과정에서 기입사항이 기록되다 말았 다. 두 달 전의 일이었다. 마틴은 다음주에 환자에 대한 수명과정 뇌파검사가 있을 예정이라는 메모도 발견했다. 검사는 시행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검사과정은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감별진단도 차트에 적혀 있지 않았다. 헬렌이 여느 때처럼 골치 아픈 문제를 가득 안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꺼내기 전 에 마틴에게 신선한 커피와 직접 사온 도넛을 내밀고 나서 본론에 들어갔다. 퍼거슨이 다시 전 화해서 문제의 방에 있는 물품들을 정오까지 옮기지 않으면 거리에 내다버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고 했다. 헬렌은 말을 하고나서 마틴의 반응을 기다렸다. 마틴은 그 많은 장비들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암담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방들도 필요한 공간의 절반 밖에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임시 방편으로 물품들을 모두 자기 연구실로 옮겨 벽에 쌓아두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주말까지 뭔가 방도를 생가해 볼 작정이었다. 만족한 그녀는 결혼하려는 기사들의 문제로 넘어갔다. 마틴은 로빈슨에게 맡기라고 했지만, 헬 렌은 그 문제를 마틴이 조정하도록 그녀에게 맡긴 사람이 바로 로빈슨이라고 설명했다. 해결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다른 기사를 훈련시킨다는 것은 이미늦은 일이었다. 만일 그들을 해고한다면 마틴이 새로운 기사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사이 그들은 쉽게 다른 병원에 일자리를 구할 것이다. “그들이 얼마 동안이나 갈 것인지 알아봐요.” 그는 울화가 터지는 것을 누르며 말했다. 그 자신은 2년 동안 한 번도 휴가를 가보지 못했다. 헬렌은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겨 타자실의 코넬리어 로저스가 아프다고 전화가 왔다면서 이달 들 어 아홉번째 결근을 했다고 전했따. 그녀는 신경방사선과에서 일한 5개월 동안 적어도 한 달에 7일은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빠졌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물러보는 헬렌의 말에, 그는 그 여 자를 실컷 두들겨 패서 사지를 찢어 이스트 강에 던져버리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 고 헬렌의 의향을 물었다. “헬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제 생각엔 주의를 주어야 할 것 같아요.” “좋아, 알아서 해요.” 헬렌은 문으로 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오후 1시에 학생들에게 컴퓨터 단 층촬영기에 대한 실습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따. 마틴은 막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내 부탁 좀 들어줘요. 입원 환자 중에 린 앤 루카스라는 여자가 있는데, 그 환자에 대한 컴퓨터 단층촬영의 일정이 오전중에 잡혀 있는지 확인해줘요. 무슨 문제가 있으면내 특별 요청이라고 말하고, 기사들한테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내게 전화하라고 전해줘요.” 헬렌은 그대로 받아 적고 방을 나갔다. 마틴은 차트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두 여자 모두 신경 학적 중상이 있고, 캐더린 콜린스의 경우에는 다발성 경화증의 가능성까지 특별히 첨부되어 있 다는 것이 그에겐 큰 수확이었다. 마틴은 엔렌 멕카시의 경우에 대해 발작이 다발성 경화증의 임상중상으로 나타날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를 찾아보았다. 10퍼센트 미만이었지만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두 여ㅈ자는 무슨 잉유로 치료를 갑자기 중단했을까? 그들이 다른 병원, 심지어는 다른 도시 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다면, 그들의 X-레이 사진을 찍기란 매우 어려워질텐데. 그때 헬렌이 인터폰을 통해 뇌혈관조영실에서 레지던트들이 준비를 다 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일러왔다. 마틴은 슈퍼맨 마크가 희미하게 보이는 납가운을 걸치고 콜린스와 맥카시의 차트을 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는 헬렌의 책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두 환자의 소재를 파악해서 진단을 위한 X-레이 사진을 무료로 찍으로 오라고 권해줄 것을 요청했다. 겁을 먹게 하 지는 말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라고 했다.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데니스를 만났다. 그녀는 머리를 감고 샤워 를 한 뒤 옷을 갈아 입었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놀라운 변모였다. 그녀는 더이상 피곤해 보이지 않았고 엷은 갈색 눈동자가 수술용 마스크위에서 반짝거렸다. 마틴은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대신 그녀의 빛나는 두 눈을 잠시 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데니스는 이미 혈관조영술을 충분히 익힌 상태여서 마틴은 그녀가 하는 것을 보고 있지만 하면 되었다. 그녀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테터를 환자의 동맥에 삽입하는 동안 두사람 사이에는 아 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마틴은 필요시 조언을 해주려고 신중히 지켜 보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 가 전혀 없었다. 환자는 어제 방사선 단층촬영을 한 해롤드 쉴러었다. 마틴은 생각으로는 분명히 수술이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매너하임이 수술을 위해 뇌혈관조영술을 의로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 시간 뒤에 촬영과정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틴은 그녀의 뒤에 대고 속삭였다. “할 말이 있어. 시작한 지 몇 주 되지도 않았는데 나보다 훨씬 더 잘 하는군.” 데니스가 얼굴을 붉혔지만 마틴은 그녀가 만족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틴은 그녀에게 마무 리를 맡기고 다음 환자의 준비가 완료되면 연구실로 연락하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그는 판독상자에 걸려 있는 두개골 X-레이 사진들을 놓고 분석하는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 해 볼 생각이었다. 계산상으로는 하루에 100장만 분석하면 한 달 반만에 처음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것을 모두 마 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모순점이 드러나는 대로 마이클스에게 알려 분석 작업을 마칠 때쯤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7월까지 는 의학계에 중대한 발표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연구실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자 헬렌이 기다리고 있따가 실망스런 소식을 전했 다. 그가 부탁한 것 중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린 앤 루카스는 밤 사이에 뉴 욕 의료원으로 옮겨져 단충 멕카시의경우에는 학부생으로 이름이 올려져 있기는 하지만, 콜린 스와는 한 달 전에 집을 나가 실종자로 처리되어 있고, 멕카시는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두 달 전 서부고속도로에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맙소사!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미안해요. 저오선 최선을 다했어요.” 마티은믿을 수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세 사람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검사할 수 있 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는 연구실로 걸어들어가 멍하니 벽만 쳐다보았다. 때로는충동적인 성 격을 지닌 그는 그런 식의 돌발적인 사태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가 주먹 쥔 손을 다른 손바닥에 부딪치자 방안에 그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발걸음을 옮 기 며 생각에 잠겼다. 콜린스는 집을 나갔다. 경찰이 그녀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멕카시는? 사망했다면 병원으로 옮겨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어느 병원이란 말인 가? 그리고 린 앤은... 벨레브 병원이 아니고 그의 친한 친구가 갔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틴은 헬렌에게 린 앤이 왜 이송되었는지 알아보라는 지사와 함께 뉴욕 의료원의 도날드 트래 비스 박사에게 전화를 연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엘렌 멕카시가 사고 후 어디로 옮겨졌 는 가를 경찰에서 알고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마틴은 산만해진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앞에 있는 두개골 X-레이 필름에 주의를 집중했다. 곁 으로 보아서는 모두 정상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헬렌의 책상으로 갔다. 이번에도 희소식은 거 의 없었다. 트레비스 박사는 너무 바빠서 나중에 전화해 주겠다고 했고, 린 앤에 관해서는 담당간 호사가 7시에 퇴근을 해서 연락을 취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유일한 희소식은 엘렌 멕카시 가 사고 후 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었다. 마틴이 그녀에게 자세한 것을 물어보려는데 잡역부 한 사람이 큰 손수레에 상자, 종이 뭉치, 기 타 잡동사니를 잔뜩 싣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마티의 연구실로 수레를 밀고 들 어가 물건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짓이오?” 마틴이 물었다. "박사님이 여기 놓겠다고 하신 창고물이에요.“ 헬렌이 설명했다. “제기랄.” 마틴은 사내가 벽 쪽에 물품을 쌓는 것을 지켜보며 내뱉었다. 상황이 그의 통제력 밖으로 벗 어나고 있다는 데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난장판 한가운데 저편에서 한없이 울리는 벨 소리에 그의 신경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잠깐 시간 있어요?” 돌아보니 윌리엄 마이클스가 열린 문에 기대어 선 채 마틴의 찌푸린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만면 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다 휘둥그래진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말게.” 마틴은 마이클스가 또 농담을 할까 봐 선수를 쳤다. “세상에 할 일을 이렇게 산더미같이 미뤘었단 말이에요?” 바로 그때 입원과에서 누군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임시 직원이라며 다른 사 람 을 바꿔주었다. 두번째 사람은 입원만 담당할 뿐 퇴원이나 이동은 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수 화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그제서야 그는 담당자가 쉬는 시간 중이라는 것을 알 고 전화를 끊었다. 관료주의적인 그들의 태도에 분통이 터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기랄! 차라리 배관공이 될 걸.” 마이클스는 웃고 나서 그에게 연구계획은 어떻게 진행되는냐고 물었다. 마틴은 손으로 산더 미 처럼 쌓인 X-레이 봉투를 가르키며, 필요한 X-레이 봉투를 다 찾았고, 한 달 반이면 모두 분석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완벽하군요. 지금 개발중인 새로운 기억장치와 주변기기가 우리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 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당신이 분석작업을 마칠 때쯤이면 문제점 을 보완한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 있는 새 중앙처리장치가 완성될 거예요. 그게 얼마나 뛰어날 건 지 상상도 못하실 걸요.” “정반대야.”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게 좋은 생각이 있어. 우선 프로그램이 무엇을 찾아냈는지 보여줄게.” 마틴은 화면에 걸린 필름들을 치우고 마리노, 루카스, 멕카시의 X-레이 필름을 끼웠다. 그는 손가락과 구멍 뚫린 종이를 사용해가며 각각의 필름들에 나타난 음영 변화 부분을 보여주려고 애 썼다. “제겐 모두 똑같아 보이는데요.” “바로 그거야. 그게 이 컴퓨터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보여주는 거라구.” 마이클스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의욕은 다시 살아났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뉴욕 의료원의 도날드 트래비스 박사였다. 마틴은 필름에 나타난 이상 은 일부려 빼고 린 앤 루카스의 문제를 그에게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환자에 대해 방 사선 단층촬영과 특수 X-레이 촬영을 부탁했다. 트래비스는 쾌히 승낙하고 전화를 끊었다. 곧 이어 전화기에서 뚜 하는 소리가 나더니, 헬렌이 데니스가 다음 혈관조영의 준비를 마쳤다는 연 락을 전했다. “전 가봐야겠어요. 필름 분석이 잘 되길 바래요. 마틴, 이 일은 당신한테 달렸다는 거 잊 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이 넘겨주는 자료를 가지고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 마이클스가 말했다. 마틴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납가운을 걸쳐 입고 마이클스를 따라 연구실을 나섰다. 9 크리스틴 린키스트의 바로 위에 있는 큰 형광등 가운데 하나가 고장이 나 윙하는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가벼운 두통이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데다가 깜빡이는 불빛까지 그 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통증은 둔한 느낌으로 일정하게 계속됐으나 늘 그랬던 것처럼 육체적 활동으로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벌거벗은 남자 모델을 바라보다 작업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그림은 평면적이고 2차원적이며 감정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평소 신체 데생시간을 좋아했지만 오늘 아침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림이 그것을 반 영하고 있었다. 저놈의 불빛만 깜빡이지 않아도... 그녀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왼손을 들어 눈을 가려보았다. 기분이 휠씬 좋아졌다. 그 녀 는 새 목탄 조각으로 모델이 서 있는 받침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선 도화지에 목탄을 대고 밑 으 로 수직선을 그어 내렸다. 그녀는 목탄을 종이에서 떼어내고는 깜짝 놀랐다. 아무 선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목탄 끝을 보니 분명히 종이에 닳아서 끝이 평평해져 있었다. 크리스틴은 불량품이거니 생 각 하고 도화지 구속에 시험해 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돌리는데 시야 가장자리로 아까 그렸던 수직 선이 나타났다. 다시 똑바로 쳐다보자 선이 사라져버렀다. 그러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환각에 빠진 건 아닌가 해서 몇 번씩 고래를 반복해서 돌려보았다. 머리가 수직선을 똑바로 향하면 그녀의 눈이 인식하지 못하고, 머리를 어느 쪽이든 약간만 회 전하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정말 섬뜩한 일이었다. 편두통이라는 말은 들을 적이 있었으나 아직 겪어보지는 않았었다. 문득 이것이 편두통이 아 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크리스틴은 목탄을 내려놓고 도구들을 보관함에 넣어 잠근 뒤 담당 교 수에게 몸이 불편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교정을 가로질러 가는데 수업을 들으러 갈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현기증이 다시 일어났다. 지구가 갑자기 몇 도씩 뒤틀려 회전하는 것 같이 느껴지며 약간씩 균형감각을 잃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불쾌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나고 귀에서는 희미하게 뭔가 울리는 소리가 들 려왔다. 크리스틴의 아파트는 학교에서 한 구역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로, 이 건물의 3층을 걸어서 올 라 다녔으며, 캐롤 댄포스라는 친구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다리가 무겁게 느껴 졌다. 독감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파트는 비어 있었다. 캐롤은 수업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방해 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기에 는 잘됐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캐롤의 보살핌이 아쉬었다. 그녀는 아스피린 두 알을 삼키고 옷 을 벗은 뒤 침대에 올라가 차가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곧 기분이 나아졌다. 다시 일어날까 하다가 혹시 그 이상한 증상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 그냥 누워 있기로 했다. 누군가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던 그녀는 침대 밑의 전화가 울리는 것이 반가웠다. 그러나 전 화 를 건 사람은 그녀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녀의 팝 도말 검사결과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려 주 기 위해 병원 산부인과에서 한 전화였다. 크리스틴은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귀를 기울였다. 병원에서는 팝도말 검사의 결과가 비 정 상으로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닌데다가, 특히 자궁경부미란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걱정 할 것은 없지만 신중을 기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오후에 병원으로 와서 재검사를 받는 것이 좋겠다 고 했다. 크리스틴은 편두통을 언급하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산부인과에서는 막무가내였다. 그저 빠르 면 빠를수록 좋다고 오기를 고집했다. 오후에 빈시간이 있으니 기다리지 않고 금방 하고 갈 수 있 다는 거였다. 마지못해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무언가 자신에게 이상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 면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이 져야했다. 하지만 혼자 가기는 두려웠다. 그는 남자 친구인 토마스 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병원에 대해 악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틴은 병리과 문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병리학 실습은 그가 학생이었던 시절 끔찍 이 도 싫어하던 과정이었다. 그의 첫번째 부검 실습은 마음의 준비조차 못한 상태에서 겪은 고 된 체험이었다. 그는 1학년 때의 시체 해부나 다를 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당시의 해부용 시체는 인 간 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나무조각 같았고, 냄새가 불쾌하기는 해도 화학약품이니까 참을 수 있 었다. 게다가 해부실습은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장난과 농담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병리학은 달랐다. 부검은 백혈병으로 사망한 11세 소년의 시체로부터 시작했는데, 소년 은 창백하기는 해도 부드러워서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송장의 배를 갈라서 물고기처 럼 내장을 들어냈을 때 마틴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점심으로 먹은 것이 막 올라왔다. 그는 고래 를 옆으로 돌려 구토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소화액의 산으로 인해 식도가 타는 듯 쓰렸다. 교수 가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뛰쳐나가지 않고 벼텼으나 고통은 더욱 심 해졌으며 죽은 소년에 대해 비애감마저 들었다. 마틴은 병리과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병리과는 그가 학생 때 보았던 것과는 전혀 딴판으 로 바뀌어 있었다. 부서 자체가 새로 지은 의대 건물로 이전 된 이후 시설도 초현대식으로 바뀌 었 다. 높은 천장과 발자국 소리가 기괴하게 울리던 대리석 바닥의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 대신 새 로 옮긴 병리과는 널찍하고 깨끗했으며, 시설은 주로 흰 호마이카와 스테인레스 스틸로 되어 있 었다. 개인용 방들은 어깨 높이의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으며, 벽은 모네를 위시한 인상파 화가들 의 복사품 그림들로 현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접수계원이 제프리 레이놀즈 박사와 레지던트들이 부검을 진행중인 현장을 가르쳐 주었다. 마 틴은 레이놀즈 박사를 연구실에서 만나기를 원했지만, 접수계원은 레이놀즈 박사는 부검 때 누 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 하지 않는다며 자꾸 현장으로 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마틴은 레이놀즈 박사를 방해할까봐 미안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걱정돼서 그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접수계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따라갔다. 마틴은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그의 앞에 놓인 스테인레스 스틸 테이블 위에는 고기 덩어 리 같은 한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흉부를 가로질러 골에 이르는 Y자 형태의 절개선을 중심으로 부검이 막 시작되어 있었다. 피부와 피하조직이 옆으로 젖혀져 갈빗대와 내장이 드러나 보였다. 마틴이 들어오는 순간 레지던트 한 명이 큰소리를 내며 갈비뼈를 절단하는 중이었다. 레이놀즈 박사가 마틴을 알아보고 그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에 푸줏간에서 쓰는 것과 비 슷 한 부검용 칼이 들려 있었다. 마틴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다 른 곳으로 돌렸다. 방은 수술실과 비슷했다. 모두 새 것이었고 현대식이었으며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타일이 전부 붙여져 있었다. 스테인레스 스틸 테이블은 다섯 개였으며 뒤쪽 벽에는 장방 형 의 냉동실 문이 여러 개 있었다. “잘 왔어, 마틴.” 레이놀즈가 앞치마 자락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마리노의 일에 대해선 정말 안됐어.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네.” “괜찮아. 애써줘서 고마워. 부검이 없다길래 사체에 단층촬영을 실시해 봤는데 놀랍더군. 내 가 뭘 찾아냈는지 알아?” 레이놀즈가 고래를 저었다. “뇌가 없어졌어. 누군가 뇌를 제거하고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도로 봉합을 해놓은 거야.” “설마!” “정말이야” “세상에. 가족은 그렇다치고 언론에서 낌새라도 알아차리면 그 여파가 엄청날 텐데. 가족들 은 부검에 절대 반대했었다구.” “그러니까 그것에 관한 얘기를 하자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깐만. 병리과가 거기에 관련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글쎄, 모르지.” 레이놀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이마의 혈관이 불거져 나왔다. “믿어도 좋아. 시체는 결코 여기에 온 일이 없어. 곧장 시체실로 갔다구.” “신경외과에서 한 짓은 아닐까?” “글쎄. 매너하임의 부하들이 미친 놈들이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마틴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여기 들른 진짜 이유는 두 달 전에 죽어서 응급실로 실려온 엘 렌 멕카시라는 환자에 대한 부검이 실시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레이놀즈는 장갑을 벗고 병리과의 중앙부서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앙컴퓨터에 연 결 된 단말기로 그는 엘렌 멕카시의 이름과 환자 번호를 입력했다. 즉시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나 오고 부검일자와 번호, 그리고 끝으로 사망원인이 나타나 있었다. 두부 손상으로 인한 과다한 뇌 출혈과 뇌간 헤르니아(brain-stem herniation;뇌출혈 등오로 뇌압이 상승할 경우 생명과 직결되 는 뇌간 구조가 두개골 내에서 밀려나와 기능 상실이 되는 상태)가 그것이었다. 레이놀즈가 금방 부 검보고서의 사본을 찾아 마틴에게 내밀었다. “뇌 부검도 했냐?” 레이놀즈가 마틴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다시 빼앗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두부 손상인데 부검을 안하면 되나.” 그의 눈이 재빨리 종이를 훑었다. 마틴은 그를 바로 보았다. 레이놀즈는 의대 실험실 동료일 때보다 거의 50파운드나 몸무게 가 늘어 옷깃이 목 뒤의 살에 파묻힐 정도였다. 피부 밑으로 모세혈관이 미세한 그물조직처럼 보 이 는 그의 양볼은 살이 쪄서 불룩했다. “차 사고 직전에 발작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는 걸.” 레이놀즈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 내린 결론인가?” “혀를 여러 번 깨물었어. 확실한 것은 아니고 다만 추측일 뿐이야.” 마틴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런 세세한 사항은 보통 법의학자들 만이 집어낼 수 있다고 생 각했었다. 레이놀즈가 계속 설명했다. “여기 뇌에 관한 부분이 있군. 출혈과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점이 없는 건 아니야. 측 두 엽 피질부의 조직 소견에 신경세포의 일부가 죽어 있는 것이 관찰 되었어. 신경교 반응(glial reation)은 거의 없고, 하지만 진단가지는 못내렸군.” “후두엽은 어때? X-레이 사진으로 희미한 이상은 발견했거든.” 마틴은 물었다. “슬라이드 한 장을 만들어서 관찰해 보았는데, 정상이었어.” “한 장 뿐이야? 젠장, 몇 장 더 조사해 봤으면 좋겠는데.” “자네 운이 좋군 뇌를 고정(fixation;조직이 변하지 않도록 약품처리하는 과정. 여기서는 처 리 해서 보관하고 있다는 뜻임) 시켰다고 씌어 있어. 잠깐만 기다려 보게” 레이놀즈가 카드 목록표가 있는 데로 가서 성이 M으로 시작하는 서랍을 잡아당겼다. 마틴 은 희망을 가지고 바라 보았다. “고정시켜서 보관한 건 사실인데 우리한테는 없군. 신경외과에서 필요하다고 가져갔으니 까 신경외과 실험실에 있을거야.” 마틴은 데니스가 혈관조영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잠깐 들렀다가 곧장 수술장으로 향 했다. 대기실의 북적대는 환자들을 피해서 그는 수술장 접수대로 갔다. “매너하임 박사를 찾는대요.” 마틴은 금발의 간호사에게 물었다. “수술실에서 언제 나올지 알아요?” “물론 알죠.” “언제인데요?” “20분 전이요.” 다른 간호사가 웃었다. 그들은 기분이 좋은 것으로 보아 수술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양이 었 다. “레지던트들이 봉합을 하고 있어요. 매너하임 박사님은 휴게실에 계시고요.” 마틴은 신하들의 알현을 받고 있는 듯한 매너하임을 발견했다. 두 명의 일본인 의사가 그 의 양옆으로 서서 시종일관 웃으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외과의사들이 더 있었고, 모두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매너하임은 담배 와 컵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일 년 전 금연을 선언했지만 그것은 담배를 사지 않겠다 는 듯이었고 지금은 남의 담배를 얻어 피웠다. “그래서 내가 그 약아빠진 변호사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나?” 매너하임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연극 배우처럼 움직이며 말했다. “물론 나는 신과 겨룰 수도 있소. 내 환자들이 자기 뇌를 누구에게 맡길려고 하겠소. 청소부 겠소? 그랬지.” 모인 사람들이 수긍의 뜻으로 왁자지껄 웃다가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가가는 마틴 은 매너하임이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여, 우리의 일꾼 방사선 학자께서 오셨군.” “우리 모두가 기쁘게 해드릴려고 노력하고 있죠.” 마틴은 유쾌하게 말했다. “근데, 어제 전화로 한 농담을 그리 즐겁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야겠는걸.”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적당하지 않을 때 그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마리노가 사 망한 줄 몰랐으며 필름에서 미세한 이상을 발견했었거든요.” “앞으로는 환자가 사망하기 전에 X-레이 사진을 봐둬야겠군, 그래.” 매너하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마리노의 시체로부터 뇌를 제거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매너하임이 눈을 부릅뜨더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는 마틴의 팔을 잡고 일 본 인 의사들에게 들리지 않는 곳으로 끌고 았다. “내 말 똑바로 들어.” 매너하임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어젯밤 자네가 허가도 없이 마리노의 시체를 옮겨다기 X-레이 사진을 찍었다면서? 나는 어 떤 자식도 내 환자 주위를 맴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특히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잠깐만요!” 마틴은 매너하임의 손아귀에 있는 팔을 뿌리쳤다. “내가 관심있는 건 좋은 역구대상이 될 수 있는 특이한 X-레이 사진 몇 장 뿐이에요. 그쪽 문제에는 관심도 없어요.”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허락없이 리사 마리노의 시체에 무슨 짓이라도 했다간 자네 머리 에 똑같은 짓을 해주겠어. 시체실에서 시체를 빼낸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잘 기억해 뒤.” 매너하임은 마틴의 얼굴 앞에 손가락으로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마틴은 갑작스런 두려움으로 인해 머뭇거렸다. 인정하기는 죽어도 싫었지만 매너하임이 급 소 를 쥐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만일 마리노의 뇌가 없어진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마틴 자신 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며, 증인이라고는 그와 내연 관계에 있 는 데니스 밖에 없었다. “좋아요. 마리노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두죠. 그런데 같은 X-레이 소견을 가진 환자를 발 견 했습니다. 엘렌 멕카시라는 환자인데, 불행히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병 원 에서 부검을 하고 뇌를 고정시켜 신경외과에 넘겨주었더군요. 그 뇌를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 “난 자네가 이제 그만 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난 바빠. 진종일 죽치고 앉아서 사진 나부랑이 나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진짜 환자를 상대해야 한다구.” 매너하임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마틴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이 거만한 시골뜨기 잡놈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 에 없었다. 매너하임이 예상하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바라는 일일지도 몰랐다. 대신 마틴은 매 너하임의 아킬레스 건으로 알려진 곳을 건드리기로 했다. 그는 침착하고 이해심 깊은 목소리 로 말했다. “메너하임 박사님. 당신에겐 정신과 의사가 필요해요.” 매너하임이 싸울 태세를 갖추고 획 돌아섰다. 그러나 마틴은 이미 방을 빠져나간 후였다. 매 너하임에게 정신의학이란 그가 표방하는 모든 것의 정반대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정신의학이란, 개념을 초원한 비본질적인 것의 혼란 상태에 불과했으므로, 안정을 위해 정신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은 최대의 모욕이었던 것이다. 매너하임은 불같이 화를 내며 문 을 박차고 탈의실로 들어가 피묻은 수술장 신발을 벗어 팽개쳤다. 신발은 날아가 옷장문에 가서 부 딪치고는 세면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벽에 붙은 전화기를 낚아채서 큰 목소리로 두 군데 전화를 했다. 먼저 그는 병원 원장 인 스탠리 드래이크에게, 다음은 방사선과 과장인 해롤드 골드블라트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마틴 필 립스에 대해 무슨 조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매너하임 은 병원 내의 가장 강력한 실권자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마틴은 화를 자주 내는 편은 아니었지만 연구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헬렌이 고개를 들었다. “15분 뒤에 학생들에게 할 강의가 있다는 것 잊지 마세요.” 마틴은 그녀의 곁을 스쳐가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놀랍게도 데니스가 X-레이 판독상자 앞에 앉아서 멕카시와 콜린스의 차트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데니스는 돌아앉으며 농담 을 던졌다. “점심이나 같이 하는 게 어때요. 영감님?” “그럴 시간이 없어.” 마틴은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 의자에 몸을 던졌다. “기분이 엉망이군요.” 마틴은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데니스가 차트 를 내려 놓고 일어섰다. “미안해.” 마틴의 목소리가 가려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오전 내내 짜증의 연속이었어. 이 병원은 진보적인 요구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담 을 쌓고 있어. 내가 어쩌면 중대한 학문적 발견을 이룰지도 모르는데, 병원에선 그걸 들여다 보지도 못하게 막기로 작정한 것 같아.” “헤겔이 이렇게 썼어요. ‘세계의 위대한 업적 중 열정없이 이루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 다.! ’” 데니스는 한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녀는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었고, 자신이 위대한 사상 가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마틴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틴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그 열정을 사용하라는 건데.” “마음대로 해석하세요. 다만 헤겔이 의미한 건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어쨌든 전 점심이나 먹 으러 가야겠어요. 정말 같이 안 갈 거예요?” “도저히 안돼. 학생들 강의가 있거든.” 데니스는 문으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콜린스와 멕카시의 차트를 보니까 둘 다 수차례의 팝도말 검사결과가 비전형 적 으로 나와 있더군요.” 데니스는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산부인과 검사는 정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두 환자 모두 팝도말 검사만 제외하면 모든 게 정상이죠. 비전형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병 적 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정상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드물게 나타나는 건가?”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검사결과가 정상으로 나올 때까지 계속 다녀야 할 거예요. 지금까지 저상이라는 보고서는 못봤거든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언급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안녕!” 마틴은 손을 흔들어주고 책상 앞에 앉아 리사 마리노의 차트를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그 의 기억으로는 거기에도 팝도말 검사에 관한 언급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밖으로 얼굴을 내밀 고 헬렌을 불렀다. “오늘 오후에 너더러 산부인과에 가라고 일어줘요.” 오후 1시 5분, 마틴은 ‘컴퓨터 단층촬영 개론’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슬라이드 상자를 들 고 왈로우스키 기념 강의실로 들어섰다. 실리 위주로 비좁은 공간에 잔뜩 밀어넣기만 한 방사선 과 의 다른 부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방이었다. 강의실은 지나치게 호사스러웠다. 병원 강의실 이라기 보다는 할리우드의 시연회장 같았다. 최고급 시트가 입혀진 의사들은 층층이 배열돼 있 어서 시야가 가려지지 않고 앞의 화면을 볼 수 있었다. 마틴이 들어갔을 때 강의실은 이미 빽 빽 이 차 있었다. 그는 슬라이드를 환등기 위에 놓고 강단으로 올라섰다. 학생들은 신속히 의자 위에서 자세 를 바로 잡고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마틴은 조명을 어둡게 하고 첫번째 슬리이드를 넘겼다. 마틴은 강의를 수도 없이 해보았기 때문에 세련된 강의 솜씨를 터득해놓고 있었다. 그는 영 국 의 고드프리 혼즈필드라는 사람에 의해 최초로 컴퓨터 단층촬영의 개념이 정립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발전 단계를 연대순으로 열거해 나갔다. 마틴은 X-레이가 사용되기는 하지만 사진은 컴퓨터가 정보를 분석하여 수학적으로 재결합 한 결과라는 것을 아주 신중하게 설명했다. 그는 일단 학생들이 그런 기초적인 개념을 이해하면 강 의의 요점을 끝마쳤다고 생각했다. 강의를 계속하면서 그의 마음 속이 산만해지기 시작햇다. 그는 단층 활영기에 워낙 친숙해 져 있어서 별다른 호기심은 없었지만, 그것을 개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존경심에는 가벼운 질투 심 도 섰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가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학계에서 대단한 주목을 받으리라는 것 을 알았다. 그의 업적은 방사선 진단법에 훨씬더 혁신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마틴이 종양을 감지해 낼 수 있는 단층활영기의 성능을 설명하고 있는데 호출기가 울렸다. 불 을 켜고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기로 달려갔다. 헬렌은 위급한 사항이 아니면 그를 호 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환은 외부전화라고 하며, 그가 항변하기도 전에 도날드 트래비스 박사를 연결시켜 주었다. 마틴은 손을 벽에 짚고 말했다. "도날드, 지금 수업중이야. 내가 다시 전화하면 안될까?" "이것 봐!" 도날드가 고함을 질렀다. "자네가 말한 한밤중의 이송환자를 찾느라 오전 내내 허비했단 말이야!" "린 앤 루카스를 못 찾았단 말인가?" "그렇다니까. 그쪽 병원에서 이송된 환자는 최근 일주일 동안 한 명도 없었대." "정말 이상한 일이군. 분명히 뉴욕 의료원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이봐, 나도 이쪽 입원과에 알 아 볼테니까 한 번만 더 알아봐 주겠나?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 마틴은 전화기를 내려 놓고 잠시 그대로 붙잡고 있었다. 관료주의자들을 상대하는 일은 매너 하 임 같은 부류의 인간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강단으로 돌아온 그는 강의를 계속하려 고 했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는 강의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위급한 상황이라는 거 짓 말로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연구실로 돌아온 그에게 헬렌은 수업을 방해해서 죄송하다며 트래비스 박사가 하도 집요하게 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마틴은 괜찮다고 말해주고 연구실로 들어가는데 헬렌이 따라 들 어와 그에게 걸려온 전화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병원 원장인 스탠리 드래이크가 두 번이나 전화를 해서 마틴이 들어오는 대로 전화하라 는 전갈을 남겼다고 했다. 그리고 휴스턴의 로버트 멕넬리 박사가 뉴올리언즈에서 열릴 연례 방 사선학 총회에서 신경방사선과 의장직을 맡을 것인지 여부를 물어왔다고 했다. 그녀는 일주일 내 로 회답을 바란다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헬렌이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려는데 마틴이 갑자 기 손을 들고 말을 막았다. "지금은 그만하면 됐어!" "하지만 더 있는 걸요." "알아. 언제나 있잖아." 헬렌은 한 발 물러섰다. "드래이크 씨에게 전화하실 건가요?" "아니. 헬렌이 전화해서 내가 오늘은 너무 바빠서 내일 전화하겠다고 전해줘." 헬렌은 언제 그를 혼자 내버려두어야 하는지를 잘 아는 눈치 빠른 비서였다. 문간에 서서 마틴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지럽게 쌓여 있던 두개골 필름들이 치워지고 그 자 리에 아침에 찍은 혈관조영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그래도 그의 수석기사인 케네스 로빈스만 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일은 안정을 되찾는 방편 중의 하나였다. 그는 앉아서 마이크를 집어들 고 구술을 시작했다. 마지막 혈관조영 사진에 관해서 구술을 하는데 누군가가 들어와 그의 뒤에 서 있는 것이 느껴 졌다. 데니스라고 생각하며 돌아보다가 병원 원장인 스탠리 드래이크의 웃는 얼굴을 대하고 그 는 깜짝 놀랐다. 마틴이 보기에 드래이크는 유연하고 세련된 정치가 타입의 인물이었다. 그는 늘 감청색 양복 을 말쑥하게 입고 소매에다가 금시계줄까지 차고 다녔으며, 장식용 단추가 달린 풀먹인 흰 와이셔 츠 위로 실크 넥타이가 곧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마틴이 알기로는 아직도 커다란 프랑스식 커프스 핑크를 하는 사람은 드래이크 밖에 없었 다. 어떻게 해서인지 그의 얼굴은 뉴욕의 우기인 4월에도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마틴은 그를 무시하고 혈관조영 사진에 대한 구술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환자는 뇌저 신경절 부위에 좌중대뇌와 죄후대뇌 융모상 동맥의 혈관으로 이루 어 진 거대한 동맥 기형을 가지고 있음. 구술끝. 감사합니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마틴은 원장을 향해 돌아섰다. 드래이크가 아무 생각없이 곧바로 자기 연 구 실로 걸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남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지 않는 병원측의 태도에 그는 진저리 가 났다. "필립스 박사, 만나서 반갑소." 드래이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부인은 안녕하시오?" 마틴은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른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 다. "저는 4년 전에 이혼했습니다." 드래이크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웃음을 띄었다. 그는 화제를 바꿔 마틴을 임명한 이래 신 경방사선과가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에 이사회가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드래이 크 가 여기 온 이유와 자신을 계속 편안하게 대해주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으흠." 드래이크는 어조를 가다듬고 조그만 입을 다시 열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불행한 마리노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가엾은 처녀의 시체가 비인도적으로 학대받고 사후검사의 승인도 없이 X-레이 촬영을 당 한 일 말이오." "그리고 뇌도 빼앗겼죠. X-레이 사진을 찍은 것과 뇌를 제거하는 것을 같은 부류로 취급할 수 는 없어요?" "아, 물론 그렇지. 박사가 뇌를 제거하는데 실제로 가담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 "잠깐만요." 마틴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어요. X-레이 촬영은 제가 했습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뇌 를 제거한 것은 제가 아니예요." "필립스 박사, 나는 누가 뇌를 제거했느냐에는 관심이 없어요. 내가 관심있는 건 뇌가 없어졌다 는 사실 그 자체란 말이요. 이 시점에서 여론과 재정적 부담으로부터 우리 병원과 직원을 보호 하 는 것은 내 책임이오." "제가 관심있는 것은 뇌를 가져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가져간 사람이 나 라 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필립스 박사, 흥분할 필요 없어요. 병원에서 벌써 시체 안치소에 말해 놓았어요. 환자의 가 족 들은 이 불행한 사태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 박사의 입장이 유리하지 않다 는 것을 알려드려야겠소. 부탁하건대 이 일에서 손 떼시요. 그러면 문제는 간단해요." "매너하임이 그러라고 시키던가요?" 마틴은 점점 냉정을 잃고 있었다. "필립스 박사, 내 입장을 이해해 주시오. 난 당신 편이오. 내가 바라는 건 불씨를 없애서 큰 피 해를 미리 방지하자는 거요. 그게 모든 사람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소? 난 박사가 좀더 합리적 으 로 생각하기를 바래요." "감사합니다." 마틴은 일어서며 말했다. "어려운 발걸음에 충고까지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그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틴은 드레이크를 밖으로 내몰고 문을 닫았다. 그는 드레이크가 한 말을 되씹어 보면서 눈 앞에 벌어진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문 밖에 서 드레이크가 헬렌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선 분명 꿈은 아니었다. 병원 안에 갇힌 채 생쥐들과의 지루한 경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과 연구를 성공시켜야겠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다. 마틴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지난 10년간 두개골 X-레이 사진을 찍은 환자들의 명단을 접어 들 었다. 쌓여 있는 필름의 번호와 대조한 후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지부터 결정했다. 그는 첫번째 봉투를 집어 들고 명단의 이름에 표시를 한 뒤 사진을 꺼냈다. 두 장의 측면 사 진 만 놔두고 나머지는 다시 집어 넣었다. 컴퓨터에 필요한 정보를 입력한 뒤, 그는 필름 한 장을 레 이저 검색기에 삽입하고 다른 한 장은 판독상자에 끼웠다. 옛날의 X-레이 보고서는 프린터 옆에 두었다. 대부분의 강박적인 성격 소유자들이 그렇듯 마틴도 명단을 만들어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가 마리노, 루카스, 콜린스, 멕카시에 대한 메모를 적어 나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데니스였 다. 오후의 첫 혈관조영술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마틴은 잠깐 생각하다가 자신이 있어봤자 별 필 요 가 없을 테니까 별 문제가 없으면 그녀의 생각대로 그냥 진행해보라고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데 니스는 그의 신뢰에 적이 만족해 했다. 마틴은 명단으로 되돌아가서 콜린스의 이름 위에 줄을 그었다. 마리노의 이름 뒤에는 이렇 게 썼다. '시체실에서 위너를 만날 것' 마틴은 그 잡역부가 리사 마리노의 시체에 일어난 일에 대해 꼭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멕카시의 이름 뒤에는 '신경외과 실험실'이라고 썼다. 이제 루카스만 남았다. 트래비스 말에 따르면 가명으로 입원하지 않은 이상 그녀는 뉴욕 의 료 원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녀의 이름 뒤에는 '신경외과 서 쪽 14병동 야간 근무 간호사'라고 썼다. 다음으로 그는 전화기를 들고 입원과로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벨이 36번이나 울린 후에야 누 군가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도 통화해야 할 상대는 자리에 없었다. 마틴은 이름과 함께 전화해 달 라는 전갈을 남겼다. 그러는 동안 컴퓨터가 작동을 마쳤다. 마틴은 보고서를 읽다 말고 들떠서 옛날 보고서와 비 교 하기도 하고 필름을 검토해 보기도 했다. 옛날 보고서의 내용과 똑같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는 빠 진 경도의 골비대와 전두동의 혼탁까지 언급되어 있었다. 다음 필름을 가지고 같은 과정을 되풀이 하는데 헬렌이 문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미안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상부'에서 그를 가능한 한 빨리 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해롤드 골드블라트 박사의 사무실은 병원의 안마당 쪽으로 직사각형의 혹처럼 튀어나온 증축건 물의 맨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누구나 여기에 들어갈 때에는 바닥에 깔린 카펫과 마호가니로 장 식된 벽을 보고 이곳이 그의 영역인 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마틴에게 전화번호부의 이름만 큼 이나 많은 간판들이 달린 시내 법률사무소를 연상하게 했다. 그는 육중한 나무문을 노크했다. 골드블라트는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뒤에 앉아 있었다. 방은 3 면이 유리창이었고, 책상은 문을 향해 놓여 있었다. 어찌보면 백악관의 집무실 같기도 했다. 골 드 블라트는 권력을 과시하는 장식물을 숭배했고, 일생을 마키아벨리적인 책략으로 일관한 끝에 방 사선학에 있어서만큼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때는 그도 신경방사선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바가 있으나, 지금은 관리자의 위치에 있 기 때문에 그의 전문적 지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고, 따라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틴 은 컴퓨너 단층촬영기 같은 혁신에 대한 골드블라트의 몰이해에 냉소적인 입장이었짐나 여전히 선배로서 그를 존경했다. 그는 방사선학을 현재의 위치에 올려 놓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골드블라트는 일어서서 마틴에게 악수를 총하고 책상 맞은편의 의자를 권했다. 그는 64세였 지 만 아직도 원기왕성한 사람이었다. 그의 옷차림은 1939년 하바드를 졸업할 당시 입던 식 그대 로 였다. 그는 발목에서 1인치 위로 단을 접어 올린 자루같은 바지에다 조끼까지 갖춘 헐렁한 양 복 을 입고 다녔다. 그는 가는 리본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자기 손으로 직접 매서 그런지 꼬이고 좌우 균형이 맞 지 않았다. 또한 거의 백발에 가까운 그의 머리는 귀를 약간 덮는 상고머리로 깍여 있었다. 그는 쇠테로 가장자리를 두른 벤자민 프랜클린 풍의 안경 너머로 그를 응시했다. "필립스 박사." 골드블라트는 앉으며 서두를 꺼냈다. 그는 책상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두손을 맞잡았다. "체온도 채 식지 않은 송장을 한밤중에 시체실에서 가져오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정상적인 행 동이 아닌 것 같네." 마틴은 그것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변명이 아닌 해명으로, 그와 월리 엄 마이클스가 개발한 X-레이 판독 컴퓨터 프로그램과 그 프로그램으로 리사 마리노의 X-레이 필 름에서 찾아낸 음영의 이상에 관해 이야기 했다. 그는 그 이상을 규명할 수 있는 X-레이 필름이 더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발견한 것을 계속 연구해 컴퓨터 X-레이 판독기의 개념을 정리할 의무감이 있다고 덧붙었다. 마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골드블라트는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자네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드 는 군." "저는 안다고 믿습니다만." 골드블라트의 말은 의외였다. 마틴은 냉정을 잃지 안흥려고 애썼다. "난 자네가 하는 일의 기술적인 측면을 말하는 걸세. 솔직히 말해서 이미 의사로부터 멀어 진 환자를 한층 더 고립시키려는 연구를 병원측에서 지원할 거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체제를 내세우고 있어." 마틴은 할 말을 잊었다. 골드블라트 박사에게도 이단 위급을 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 던 것이다. 이런 취급은 여기저기에 깔려있는, 간신히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그렇고 그런 방사선과 의사들로부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네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야. 난 자네가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기를 바란다네. 하지만 내게 는 우리 부서를 이 병원에서 온전하게 보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상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 서 연구를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어떤 경우에도 허가없이 사체에 방사선을 쬔다는 건 말도 아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마틴은 눈 앞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매너하임이 저 사람을 구워 삶았구나!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매너하임은 스포트 라이트를 다른 사람과 할께 받을 만큼 겸 손한 프리마돈나가 아니다. 그가 이제 와서 골드블라트나 드래이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잖 은 가? 이건 앞뒤가 안 맞았다.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은... " 골드블라트가 손가락을 모아 뾰족한 탑처럼 만들면서 말했다. "자네가 레지던트 한 명과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더군. 우리과 내에서 그 런 종류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묵과할 수 없네." 갑자기 마틴이 눈쌀을 지푸리며 험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의사로서 할 일을 다하고 있는 한 병원에서 저의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그는 휙 돌아서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골드블라트가 그를 불러 세우며 병 원 의 이미지가 어쩌구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않았다. 그는 손에 메시지를 적은 쪽지를 쥐고 일어서는 헬렌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 가 문을 쾅 닫고 화면전환기 앞에 털썩 주저앉아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일에 몰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지만 거들떠 보 지 도 않고 헬렌이 받도록 내버려두었다. 부저 소리에 그는 문을 빼꼼히 열고 몸짓으로 누구냐고 물 었다. "트래비스 박사예요." 트래비스 박사는 이송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감안해 병원 안을 샅샅이 뒤 졌지만, 뉴욕 의료원에 린 앤 루카스라는 환자가 없는 게 확실하다고 전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입원과에서 뭐 알아낸 게 있느냐고 물었다. "별로 없다네." 마틴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트래비스로 하여금 그토록 애쓰게 해놓고 막상 자기 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은 것이 미안해서 대답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그는 트래비스와 통화를 끝 내자마자 입원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몇십 번 울리도록 끈질기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결국은 이송과 퇴원수속을 담당하는 여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 어떻게 해서 한 밤중에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실려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환자는 죄수처럼 한 곳에만 감금돼 있진 않아요. 그 환자가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나요?" "그렇소." "흔한 일이에요. 응급실을 통해 입원을 해 있다가도 일단 안정이 되면, 개인 주치의가 이 병원 과 관계하지 않는 한 이송되기 일쑤예요." 마틴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린 앤 루카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물어보았다. 그녀의 말로 는 자료를 뽑아내려면 입력과의 기록을 관리하는 컴퓨터에 번호와 생년월일을 입력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응급실 기록철에서 번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료를 찾는대로 즉시 전화 를 주겠다고 말했다. 마틴은 다시 구술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드는데 바로 코 앞에 콜린스와 멕카시의 차트가 눈에 띄었다. 그러자 데니스가 팝 도말검사에 관해 이야기했 던 것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산부인과의 기초적인 지식도 모르는 그가 팝 도말검사를 제대로 알 도 리가 없었다. 그는 흰 가운을 걸친 후 캐더린 콜린스의 차트를 들고 방을 나섰다. 헬렌의 앞을 스 쳐가면서 곧 돌아올테니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호출을 피해달라고 지시했다. 먼저 가볼 곳은 도서관이었다. 옆으로 지나가는 환자들이 차가운 날씨 탓에 옷을 두툼하게 껴 입은 것을 보고 그는 지하터널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가 아파트로 갈 때 이용하는 우측 갈래길 을 따라가면 옛날 의대건물로 통하는 계단을 지나 의과대학 신관 건물이 나왔다. 옛날 건물은 두 해 전 신관이 완성된 이래 사용되지 않고 지금까지 버려져 있었다. 원래 병원 측에서는 옛날 건물을 새로 단장해서 방사선과처럼 시설확장으로 인해 공간이 절대 적으로 부족한 임상부서에 공급할 계획이었으나, 계획보다 막대한 공사비가 들어 신관 건물이 거 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예산이 바닥나버렸다. 2년이 지났는데도 신관의 일부는 마무리를 못해 어디선가 기금이 들어오기만 가다리고 있는 중 이었다. 그래서 옛날 건물을 병원으로 개조하는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고, 각 임상부서들은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었다. 새 의과대학은 마틴이 학교를 다니던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특히 도서관이 엄청나게 변 모했다. 옛날 의과대학이 거의 버려진 채로 있는 가장 큰 이유인 돈이 여기서는 전혀 문제가 되 지 않는 것 같았다. 널찍한 로비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양쪽으로 똑같이 생긴 계단이 우아한 곡 선을 그리며 윗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서관 카드목록은 일, 이층 사이에 있는 발코니의 한쪽 구석에 있었다. 마틴은 그곳에서 기본 적인 산부인과 교과서의 열람번호를 찾아냈다. 팝 도말검사에 관해 알아보는데만 관심이 있었 을 뿐 지겨운 세포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틴은 그 검사법의 효울성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 었 다. 팝 도말검사는 조기 암 진단법으로 가장 믿을만한 방법에 속했다. 학창시절 자기 손으로 해 본 일도 있어서 아주 쉽다는 것도 알았다. 설압자로 자궁경부의 표면을 조금 긁어내 유리 슬라이 드 위에 발라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결과의 분류법과 검사결과가 '비전형적'으로 나왔을 때 무슨 후속조치가 필요한지 전 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교과서를 보아도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포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의심 이 되면 자궁경부에 대한 요오드 염색법으로 이상이 있는 부위가 어디인지를 판단하는 쉴러 검사 법이나 생검, 또는 질 확대경 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설명뿐이었다. 마틴은 질 확대경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색인을 들춰봐야 했다. 현미경 같은 기구 로 자궁경부를 관찰하는 검사라고만 나와 있었다. 마틴을 놀라게 한 것은 자궁암의 10퍼센트 내지 15퍼센트가 20세에서 29세 사이의 젊은 여성들 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나이먹은 여자들만 문제가 되는 줄 알고 있었다. 더 말할나위도 없이 여성들은 매년 산부인과 검진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은 교과서를 도로 제자리에 꽂고 대학 산부인과 외래로 향했다. 그는 산부인과 외래에 서 이곳만은 찾아오는 여자들의 대부분이 예쁜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의대생들이 배고픈 동물 앞에 걸려있는 고기처럼 감히 넘보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생들이 상대할 수 있는 환자는 벌 써 아기를 여럿 낳은 나이 많은 단골 환자들 뿐이었기 때문에, 여학생 환자는 플레이보이지의 누 드 사진에 나오는 모델처럼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마틴은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듯한 느낌을 가지며 접수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그가 그녀 앞 에 서자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밋밋한 가슴이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숨을 깊이 들 이쉬었다. 마틴은 전혀 균형이 안 잡힌 듯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눈 사이가 지나 치 게 좁은 까닭임을 알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난, 마틴 필립스 박사요." "안녕하세요, 엘렌 코헨입니다." 마틴은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향했던 시선을 돌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담당의사와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소?" 엘렌 코헨이 다시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지금 환자를 진찰하고 계신데 곧 나오실 거예요." 다른 부서 같았으면 지체없이 진찰실로 걸어 들어가겠지만, 여기선 차마 그럴 수 없어 마틴 은 12살 때 미용실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가졌던 수줍음을 다시 느끼며 대기실을 향해 돌아섰다. 대 여선 명쯤 되는 젊은 여자들이 앉아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손 에 들고 있던 잡지를 다시 뒤적이기 시작했다. 마틴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접수대 가까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엘렌 코헨은 읽고 있던 싸구 려 소설을 소리나지 않게 끌어내리더니 서랍 속에 떨어뜨렸다. 우연히 그가 그쪽을 바라보자 그녀 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틴은 골드블라트로 생각을 돌렸다. 자신의 사생활 심지어는 연구까지 사사건건 간섭할 권 리 가 있다고 착각하는 그의 사고방식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서에서 그의 연구에 자금 을 대주었다면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일은 없었다. 방사선과에 기여한 것이라 고 는 오직 마틴의 시간뿐이었다. 기계설비와 프로그램 사용료 등에 들어가는 상당한 액수의 자금 은 마이클스가 속한 전산과학부의 유용한 자금을 지원받았던 것이었다. 그때 환자 중의 한 명이 접수 간호사에게 다가가 팝 도말 검사결과가 비전형적이라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이 들렸다. 접수계 책상을 겨우 붙잡고 서 있는 그 환자는 말하는 것도 힘 들어 보였다. "그건 미즈 블렉먼에게 물어보셔야 돼요." 접수 간호사가 말하다 말고 마틴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웃음을 지으며 말투를 바꾸었 다. "전 의사가 아니니까요.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시면 미즈 블렉먼이 나올 거예요." 크리스턴 린키스트는 더이상 좌절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바로 진찰받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침에 두통과 현기증이 있었으며, 게다가 눈까지 이상하다고 호 소 하고 그 때문에 어제처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제발 미즈 블렉먼한테 제가 여기 있다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그 분이 전화했을 땐 기다리 지 않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크리스틴은 말을 마치고 마틴이 앉아 있는 맞은 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몸의 균형 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주 느릿느릿 조심해서 움직였다. 엘렌 코헨은 눈동자를 굴려 마틴을 보며 저 여자가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 어 보였지만 곧 미즈 블렉먼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마틴은 고개를 돌려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비전형적인 팝 도말 검사결과와 신경학적 증상간의 연관성을 부지런히 찾고 있 었다. 크리스틴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마틴은 그녀가 부끄러워 할 것에 대한 염려 없이 마음 놓 고 그녀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20대 초반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재빨리 캐 더 린 콜린스의 차트를 펼쳤다. 부지런히 페이지를 넘겨 그녀의 초기 신경증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찾 아냈다. 두통, 현기증, 시각 이상이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크리스틴 린키스트를 쳐다보았다. 앞에 있는 이 여자도 똑같은 X-레이 소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그는 다른 환자의 X-레이 사진을 몇장 더 찍으려고 갖은 노력 을 다했는데도 모두 실패했으므로, 새로운 환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일이었다. 처음부터 필요한 사진을 모두 다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지체할 것 없이 그는 크리스틴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며시 두들겼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얼 굴을 덮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겁에 질린 표정은 한층 더 연약한 인상을 주었으며, 마틴은 그제서야 그녀가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틴은 어휘를 신중히 골라 방사선과에서 왔다고 자기 소개를 하고, 접수 간호사에게 말하 는 증상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슷한 문제를 지닌 4명의 여자 환자 X-레이 사진 을 본 일이 있어서 그녀에게도 X-레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순전히 예방적인 조치니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크리스틴에게는 병원이란 놀라운 일만 가득한 곳이었다. 어제 처음 왔을 때는 몇 시간 동안 기 다리게 하더니, 오늘은 의사가 오히려 환자에게 간청하는 것이었다. 는 소음과 함께 머리에 전해져 오는 진동과 압박감이었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무엇을 의미 하 는지 짐작할 수 있는 리사에게 그 소리는 겁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두개골이 톱으로 절단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기구의 이름이 크라니오톰(Craniotome;개 두기)이라는 것을 몰랐다. 조마조마했지만 고맙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덮고있는 얇 은 천을 통해 뼈가 타는 냄새가 코끝으로 전해졌다. 라네이드 박사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는 게 반가웠다. 그녀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으로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모터 소리가 사라졌다. 갑자기 찾아든 정적 속에 심전도 모니터만 삑삑거리며 주기적인 신호 음 을 내보내고 있었다. 통증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편두통이었다. 라네이드 박사의 얼굴이 터널 끝 에 나타났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동안 팔에 감긴 혈압계가 더 죄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골겸자"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오른쪽 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엘리베이터"주: 골막을 벗겨내는데 사용되는 기구" 몇 번의 쑤시는 듯한 아픔에 뒤이어 '뚝'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즈" 뉴먼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커트 매너하임 박사는 손을 소독하면서 21번 수술실로 들어가는 문을 통해 멀리 있는 별시계를 바라보았다.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 순간 수석 레지던트 뉴먼이 수술대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 나는 것이 보였다. 뉴먼은 장갑 낀 두 손을 가슴에 십자로 모으고 벽에 걸린 X-레이 사진을 다시 한번 검토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두개골을 여는 것을 마치고 이제 과장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 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국립보건연구소에서 나온 조사위원회가 정오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 다.그는 향후 5년간 그의 연구비용으로 쓰일 기금 1200만 달러는 받아내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 적 인 시기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 기금을 유치해야만 했다. 만일 놓친다면 그의 동물실험실과 지난 4년 동안의 연구결과를 몽땅 잃게 될 판이었다. 그는 공격성과 분노를 유발하는 뇌의 한 지점 을 정확히 찾아내야 하는 중대한 수술이 기다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비누 거품을 씻어내다가 매너하임은 수술장 주임 간호사인 로리 매킨너를 발견했다. 매너하 임 이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로리! 오늘 도쿄에서 일본인 의사 둘이 여기 오기로 했는데, 그 사람들이 수술복 입는걸 도와 줄 수 있는 누구 한 사람을 휴게실로 보내줄 수 있겠소?" 로리 매킨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큰소리로 복도에서 떠드는 매너하임의 행동이 마 음 에 안들었다. 매너하임은 이런 무언의 질책을 알아채고 나지막이 그 간호사를 욕했다. "여자들이란" 그에게 간호사들은 날이 갈수록 귀찮은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투우장으로 뛰어드는 황소처럼 거칠게 수술실 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갔다. 잔잔하던 수 술 실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다렌 쿠퍼가 그에게 소독된 수건을 건넸다. 손을 닦으면서 그는 허 리를 구부려 리사 마리노의 절개딘 두개골을 들여다 보았다. "뉴먼, 이 바보같은 자식." 매너하임이 으르렁거렸다. "언제쯤이면 두개골 절개를 제대로 할거야. 가장자리를 더 비스듬히 절개하라고 골백번도 더 말했잖아. 젠장 이거 완전히 엉망이군." 천 밑에서 리사는 새로운 공포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저는..." 뉴먼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매너하임이 말허리를 잘랐다. "변명 따위는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똑바로 일을 하든지, 이 병원을 그만 두든지 둘 중 에 하나를 택해. 일본인들이 여기 올텐데 이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나?" 그의 수건을 받기 위해 낸시 도노반이 옆에 서 있었지만 그는 수건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 는 아이처럼 어디에 있든지 자신이 중심이 되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행패를 부리는 것을 서 슴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항상 바라는 바를 이루었다. 그는 수술을 신속하게 할 뿐 아니라 수술 테크닉에 있어서는 미국에서 가장 뒤어난 의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는 자 기 나름대로 표현하기를, '인간의 뇌 속으로 일단 걸음을 들여놓으면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라는 말을 애용했다. 그는 복잡한 신경해부학에 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수 술을 매우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다렌 쿠퍼는 매너하임이 애용하는 특수한 갈생 고무장갑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는 손가락 을 밀어넣으면서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으음..." 그는 손가락을 밀어넣는 데서 성적 쾌감이라도 얻는 것처럼 신음소리를 냈다. "아주 예쁜데.." 다렌 쿠퍼는 그의 장갑에 묻은 파우더(장갑을 낄때 쉽게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묻혀둔다)를 닦 는데 쓰이는 젖은 수건을 건네주면서 그의 회갈색 눈동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눈길을 피했다. 그 녀는 그의 이런 말투에 익술해져 있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못들은 척하는 것이 최상의 방어 책 이라는것도 알고 있었다. 뉴먼을 오른쪽에, 로리른 왼쪽에 세우고 수술대 머리맡에 자리잡은 매너하임은 리사의 뇌를 덮 고 있는 반투명의 경막(뇌와 두개골 사이에 있는 막)을 들여다 보았다. 이미 뉴먼이 신중하게 경 막의일부를 실로 꿰어 절개부 가장자리에 고정시켜 놓은 것이 보였다. 그것으로 인해 경막이 두 개골 내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좋았다. 쇼를 시작합시다." 매너하임이 말했다. "경막구 (경막을 잡아당기는 갈고리 모양의 기구)하고 매스" 기구들이 그의 손에 세게 부딪쳤다. "살살해. 방송국에서 녹화하는줄 아나? 기구를 받을 때마다 손이 아파서야 무슨 수술을 하겠어?" 그는 고개를 숙이고 경막구를 사용해 솜씨 좋게 경막을 들어 올리고 나서 메스로 작은 구멍을 냈다. 구멍을 통해 분홍빛을 띤 회색의 뇌 표면이 보였다. 일단 손을 대기 시작하면 매너하임은 철저한 프로였다. 비교적 작은 편인 그의 손은 섬세하 게 움직였고 눈길은 환자에게서 한 번도 떼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손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 의 5피트 7인치 밖에 안되는 키는 일생 그를 괴롭혔다. 늘상 그는 키가 5인치만 더 컸어도 자 신 의 뛰어난 지적능력과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몸 관리를 잘한 덕택으로 그 는 61세의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그는 뇌 조직의 보호를 위해 경막과 뇌 사이에 작은 솜조각을 끼워 가면서 작은 가위를 사용해 경막을 절개된 두개골 가장자리까지 연 다음 검지 손가락으로 리사의 측두엽을 조심스럽게 건드 려 보았다. 경험 많은 매너하임은 아주 작은 이상도 이런 방법으로 감지해 낼수 있었다. 매너하임 에게는 이렇게 살아 숨쉬는 인간의 뇌와 자신이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야말로 자신의 존재가 신처 럼 우러러 보이는 순간이라고 여겨졌다. 수많은 수술과정에서 이 짜릿한 자극은 그를 성적으 로 흥분하게까지 하였다. "자, 이제 전기자극 장치와 뇌전도 전극을 가져와." 뉴먼과 로리는 가는 전선 뭉치를 들고 어디가 끝인지를 몰라 쩔쩔 맸다. 순환 간호사(소독 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 의사들의 지시를 이행하는 간호사)인 낸시 도노반이 그들에게서 전선 뭉치를 건네받아, 맞는 전극을 찾아내어 근처에 있는 계기판에다 꽂았다. 뉴먼이 가는 전극들을 한 줄은 측두엽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한 줄은 실비우스 정맥(Sylvian vein)위로 지나가도록 해서 두 줄로 조심조심 평행하게 꽂았다. 끝에 작은 은구슬이 달린 전극들은 뇌 아래쪽에 놓여졌다. 낸 시 도노반이 심장 모니터 옆에 있는 뇌파 모니터의 스위치를 켜자 화면이 삐소리를 내며 형광을 발하는 불규칙한 곡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하라타 박사와 나가모토 박사가 들어왔다. 매너하임이 그들을 초청한 이유는 그들에게 서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관중이 필요해서였다. 매너하임이 말했다. "측두엽 절제수술시 측두엽의 상부를 절제할 것인가에 대해 책마다 잔뜩 헛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지. 사람들은 그게 언어장애를 유발할까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어. 해답은 직접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어" 그는 오케스트라 지휘봉같이 생긴 전기 자극장치로 라네이드 박사에게 손짓했다. 라네이드 박 사가 허리를 구부려 소독포를 젖히면서 리사의 이름을 불렀다. 리사가 눈을 떴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뒤의 당혹감이 두 눈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리사, 동요를 기억나는 대로 읊어 볼래요?" 리사는 그렇게 해서라도 수술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시키는대로 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매 너하임이 자극장치를 뇌에 갖다대자 그녀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이 말 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상을 보았다. 매너하임은 말이 중간에서 끊긴 것을 설명했다. "이게 바로 해답이야. 이 환자의 경우에는 측두엽 상부를 절제해서는 안돼." 일본인 의사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실험에서 더 흥미로운 부분이 아직 남아있지." 매너하임이 이렇게 말하면서 깁슨 메모리얼 병원에서 가져온 삽입 전극 두 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가 X레이 촬영기사 좀 부르지 그래. 전극의 위치를 알 수 있게 사진을 찍어둬야겠어." 딱딱한 바늘형의 전극은 기록과 자극을 겸하는 장치였다. 전극을 소독하기 전에 그는 바늘 끝 에서 4센티미터 떨어진 곳에다가 미리 표를 해두었다. 또 작은 금속자로 측두엽의 앞쪽 표면에 서 직각이 되게 세워 깊이를 표시한 곳까지 조심스럽게 밀어넣었다. 다시 두번째의 전극을 첫번 째 것의 2센티미터 뒤에 같은 방식으로 삽입했다. 각각의 전극은 뇌 표면으로부터 5센티미터 정 도 삐죽히 튀어나와 있었다. 다행히도 그 순간 신경방사선과의 수석 X-레이 촬영기사인 캐네스로 빈스가 도착했다. 만일 그 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매너하임은 유명한 그의 주먹을 한 방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 술실에는 X레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설비가 되어있어 사진 두 장을 찍는데는 불과 몇 분밖 에 걸리지 않았다. 매너하임은 시계를 올려다보고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서둘러야했다. "이제 삽입한 전극에 자극을 주어서 간질의 뇌파가 발생하는지 보자구.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절 제술로 발작성 장애를 100퍼센트 완치시킬 수 있게되지." 의사들이 리사 주위에 다시 모였다. 매너하임이 말했다. "라네이드, 자극이 가해질 때 무슨 느낌이 드는지 환자더러 설명하락 말하게." 라네이드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독포 밑으로 사라졌다. 그는 다시 나타나서 매너하임에 게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사는 자극이 가해지는 순간 폭탄이 폭발하는 것 같았지만 소리도 고통도 없었다. 1초인지 한 시간인지 조차 짐작 못할 시간이 흐른 뒤 긴 터널 끝으로 만화경 같이 변화 무쌍한 얼굴이 나타 났다. 라네이드 박사였다. 그러나 그녀는 라네이드 박사를 알아보지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 식하지 못했다. 그녀가 느끼는 거라고는 발작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끔찍한 냄새뿐이었다. 그녀 는 공포에 질렸다. "어떤 느낌이 들지요?" "살려줘요!" 리사는 소리쳤다. 움직이려 했지만 몸이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발작이 일어나려 하고 있 었다. "리사!" 라네이드 박사가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리사,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살려줘요." 리사는 정신을 잃는 순간 소리쳤다. 그녀는 몸부림쳤지만 머리와 가슴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 의 모든힘은 오른팔로 집중되어 손목을 묶고 있던 끈이 엄청난 힘에 의해 툭 끊어지고 말았 다. 자유롭게 된 그녀의 팔은 소독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뇌파 모니터에 갑자기 비정상적인 뇌파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란 매너하임의 눈에 포 속에서 빠져나온 리사의 손이 보였다. 그가 조금만 더 빨리 대처했어도 사고는 막을수 없었다. 리사의 손 이 수술대에 묶여있는 몸을 풀어내기위해 사방을 휘젓다가 삐죽이 뛰어나온 전극을 쳤고, 전극 은 뇌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다. 마틴이 조지 리스라는 소아과 의사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 렸다. X-레이 기사 로빈스였다. 마틴은 그에게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통화를 계 속했다. 리스는 계단에서 떨어진 섯으로 추정되는 두살짜리 남자 아기의 두개골 X-레이 사진에 관해 물어보고 있었다. 마틴은 흉부 X-레이 사진에 오래된 갈비뼈 골절 소견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아 학대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 귀찮은 전화를 어서 끊고 싶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전화를 끊고 나서 의자 위에서 몸을 돌리며 그가 물었다. 로빈스는 그가 추천한 신경방사선 과 수석기사였고 둘 사이에는 친밀한 유대관계가 있었다. "매너하임을 위해 부탁하신 필름얘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빈스는 필름을 판독상자에 끼웠다. 대개 수석 기사는 부서 밖에서 X-레이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매너하임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위해 그가 직접 찍도록 마틴이 특별히 부탁했었다. 스크린에 리사 마리노의 수술 X-레이 사진이 밝게 드러났다. 두개골의 절제된 부분이 음영이 감소된 다각형으로 나타난 측면사진이었다. 예리한 절제선 안쪽으로 무수한 전극 가닥의 흰 그 림 자가 보였다. 매너하임이 측두엽에 밀어넣은 가느다란 바늘같이 생긴 전극이 가장 눈에 띄었다. 주의를 끈 것은 그 전극이 삽입된 위치였다. 그는 발로 벽면 크기의 다른 판독 상자의 모터를 작동시켰다. 그가 페달을 밟고 있는 동안 은 판독 상자의 화면이 계속바뀌었다. 이 장치에는 그가 검토하고자 하는 필름을 얼마든지 한꺼번 에 걸어놓을 수가 있었다. 그는 화면에 리사 마리노의 이전 필름들이 나오자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새로 찾은 필름을 아까의 것과 비교하여 깊이 박힌 전극의 정확한 위치를 판별해 내었다. "세상에, 자네 실력은 여전하군. 내가 자네하고만 일할 수 있다면 문제의 절반은 해결될텐데." 로빈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했지만 칭찬이 듣기 좋았다. 그에게 있어 서 마틴은 요구하는 것이 많은 상관이었지만 반면 칭찬할 줄도 아는 상관이었다. 마틴은 정밀하게 눈금이 표시된 자를 가지고 먼젓번의 사진에 나타난 미세한 혈관 사이의 거리 를 재었다. 뇌의 구조와 혈관의 정상적인 위치에 관한 그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지금 자신의 관 심을 끌고 있는 부분의 입체적인 영상을 마음 속에 그려볼 수가 있었다. 이것을 새 필름에 적 용 해보자 전극의 끝이 어디에 가 있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 "놀라워." 마틴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말했다. "전극의 위치가 놀라우리만큼 정확해. 매너하임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그의 판단이 손재주만 큼이나 정확했으면 얼마나 좋겠어." 이 필름을 수술실로 도로 가져갈까요?" 로빈스가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가져갈게. 매너하임한테 할 말이 있어. 예전 필름들도 같이 가져가야겠어. 후 뇌동맥(Posterior cerebral artery)의 위치가 조금 꺼림직해." 그는 X-레이 사진을 챙겨들고 문으로 향했다. 수술실의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지만 매너하임은 벌어진 사태에 대해 울화가 치밀었다. 외국인 의사들이 옆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도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장 심하게 당한 사람은 뉴먼과 로리였다. 매너하임은 마치 그들이 일부러 그런 일을 꾸미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세웠다. 그는 라네이드가 리사에게, 전신마취를 걸자마자 측두엽 절제수술을 시작했다. 리사가 갑자기 발작을 이르키자 수술실은 순간 공포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모두 훌륭하게 대처했다. 리사가 더 이 상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 전에 허공을 휘젓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재빨리 나꿔챈 사람은 바로 매너하임이었다. 하지만 진짜 영웅은 라네이드였다. 그는 즉시 그녀에게 150밀리그램의 티오펜탈을 정맥주사 하 고 뒤이어 d-투보쿠라린이라는 근육마비제를 주사했다. 약물을 주사하자마자 발작이 멈추어지 고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발작을 멈추고 잠든지 몇 분이 지난 후 라네이드는 기관지 튜 브 를 삽입하고 일산화질소를 주입한뒤 모니터를 켰다. 뉴먼은 로리가 표면 전극들을 제거하는 동안 뜻하지 않게 너무 깊숙이 들어가버린 전극을 뽑았 다. 뇌 표면의 전극을 제거하던 로리는 뇌의 노출된 부분을 습기 있는 솜으로 감싸고 다시 그 위 에 마른 소독 수건을 덮었다. 리사에게 소독포가 새로 씌어지고 의사들도 새 가운과 새 장갑 을 착용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지만 매너하임의 기분만은 풀리지 않았다. "이런 젠장" 매너하임이 뻣뻣한 허리의 긴장을 풀기위해 몸을 곧추 세우면서 말했다. "로리, 자네가 더 나이를 먹어서 무언가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 싶으면 나에게 말해. 그러지 않 으려거든 내가 볼 수 있게 그 놈의 견인자(수술 부위를 벌리기위해 당길 때 쓰는 기구) 좀 제 대 로 붙잡고 있든지." 그러나 로리의 위치에서 매너하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마틴이 필름을 들고 들어왔다. "조심해요." 낸시 도노반이 숨죽여 말했다. "가르쳐줘서 고맙소." 마틴은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매너하임이 아무리 훌륭한 외과의사라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까다로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쩔쩔 맨다는 것이 마음에 안들었다. 그는 매너하임이 자기 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X-레이 사진을 판독상자에 걸어놓았다. 5분이 지나서야 그는 매너 하임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너하임 박사님." 마틴은 심장 모니터 소리 너머로 그를 불렀다. 시선들이 그에게로 쏠리고 매너하임이 일어섰다. 그가 고개를 들자 머리에 쓰고 있던, 광부가 쓰는 것과 비슷한 헤드라이트가 마틴의 얼굴에 정면으로 비쳤다. "나는 뇌수술을 하고 있어. 그걸 안다면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텐데." 매너하임은 화를 억누르며 내뱉었다. "위치 설정을 위해 X-레이를 의뢰하셨죠?"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제 의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자네 일은 다 끝났군." 매너하임은 몸을 돌려 확장된 절개 부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마틴이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전극의 위치가 아니었다. 위치는 더할나위없이 정확했다. 문제는 무시무시한 후뇌동맥으로 향해있는 전극의 방향이었다. "그것 말고 또 있어요. 그런..." 매너하임이 고개를 홱 돌려 소리를 꽥 질렀다. "필립스 박사, 수술을 마칠 수 있도록 필름을 들고 여기서 나가주겠나? 자네가 필요하면 우 리 가 부를 테니까 말이야!" 그의 고함이 터져나오는 동안 헤드라이트가 채찍처럼 별을 난타했다. 그러고나서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총검상겸자(baynet for cep)를 요구하고 다시 수 술을 시작했다. 마틴은 차분히 X-레이 사진을 챙겨들고 수술실을 빠져나갔다. 탈의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 입 으면서 더이상 생각을 안하기로 했다. 그것이 감정을 다스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방사선과로 돌아오는 도중 사고에대한 자신의 책임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매너하임을 상대하는 일은 그가 방 사선과 의사로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필요로 했다. 그는 결국 부서로 돌아올 때까 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혈관조영실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연구실에서 그가 맞은 헬렌 워커가 말하면서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헬렌 워커는 퀸즈 출 신의 대단히 우아한 흑인여성으로 나이는 38세였으며, 벌써 5년째 마틴의 비서로 일해오고 있 었 다. 직장 동료로서 그들의 관계는 다분히 우호적이었다. 마틴은 그녀가 없는 연구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훌륭한 비서들처럼 그녀도 그의 매일매일의 생활에 큰 조언자가 되어주었 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틴의 세련된 옷차림도 그녀의 노력 결과였다. 그녀가 그를 부추겨 토요일 오후에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만날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는 아직도 대학 시절의 헐렁한 옷차림 그대로 였을 것이다. 그뒤로 그는 새롭게 변신했으며 운동 으 로 단련된 그의 체력과 잘 어울리는 현대적인 옷을 입을 줄 알게 되었다. 마틴은 매너하임의 X-레이 사진을 다른 사진과 서류, 잡지, 전문서적들로 가득찬 책상 위로 휙 던졌다. 책상은 헬렌이 건드리지 못하는 유일한 구역이었다. 책상위가 아무리 어지럽혀져 있어도 그는 찾고자 하는 것을 금장 찾아낼 수 있었다. 헬렌은 그의 뒤에 서서 그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읽어주었다. 리스 박 사 가 전화를 해 자기 환자의 컴퓨터 단층촬영에 관해 문의했으며, 2번 혈관 조영실의 X-레이장비를 수리해서 정상적으로 가동중이라는 소식과 심한 뇌 손상을 입은 환자가 있으니 빨리 단층활영을 실시해야겠다는 응급실로부터 온 전화 내용 등이었다. 매일매일 끝없이 반복되는 내용들이었다. 마틴이 계획한대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일러주자, 그녀는 돌아서 방을 나가 자기 책상으로 돌아 갔 다. 마틴은 흰 가운을 벗고 X-레이 촬영시 방사능 차단을 위해 표면을 납으로 처리한 가운을 걸 쳤 다. 가운의 가슴 부분에 슈퍼맨의 머리글자가희미하게 남아 눈에 확 띄었다. 2년 전 신경 방사선 과의 전임의가 장난으로 그린 것인데, 친밀감에서 한 행동임을 알기에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 무리 지우려고 해도 없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자리를 뜨려다 말고 프로그램 테이프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려고 책상 위를 둘러보았 다. 마이클스가 가져온 것이 환상이 아니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테이프가 보 이 지 않자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서 무더기로 쌓여 있는 잡동사니 중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물건들 이 쌓인 곳을 뒤져 보았다. 테이프는 매너하임의 X-레이 사진 밑에 깔려 있었다. 그는 방을 나가려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 췄다. 테이프와 리사 마리노의 두개골 X-레이 필름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열려있는 문을 통 해 헬렌에게 혈관조영실에 연락해서 금방 갈 거라고 전하라고 소리치고는 자신의 작업대를 향해 걸 어갔다. 그는 납가운을 다시 벗어서 의자 위에 걸쳐놓고 컴퓨터 앞에 서서, 이 물건이 정말로 작동 을 할가 의심스런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리사 마리노의 수술 X-레이 사진을 판독상자에서 나 오는 불빛에 비춰보았다. 전극의 위치에는 더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가 지금 알고 싶은것은 절개 부위에 대해 컴퓨터가 뭐라고 판독을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이런 수술적 처치에 대 한 정보를 프로그램에 입력시켜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판독결과가 나올지 궁금 했다. 그는 컴퓨터의 스위치를 켰다.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천천히 테이프를 밀어넣 었 다. 3/4쯤 밀어넣자 컴퓨터가 마치 배고픈 강아지처럼 날름 테이프를 삼켰다. 그리고 즉시 프린터 가 작동을 시작했다. 마틴은 출력된 글자를 읽기위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컬 래드리드 1입니다. 환자의 이름을 입력하세요. 마틴은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사용해 '리사 마리노'라고 치고 리턴키를 눌렀다. 감사합니다. 환자의 증상을 입력하세요. 그는 '발작성 장애'라고 입력했다. 감사합니다. 임상자료를 입력하세요. 그는 '여성 21세, 1년 전부터 측두엽성 간질 호소'라고 쳤다. 감사합니다. 레이저 검색기에 필름을 삽입하세요. 마틴은 검색기 가까이 갔다. 필름 삽입구 안쪽의 롤러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필름을 감광액이 칠해진 면이 밑으로 가게 해서 조심스럽게 밀어넣었다. 필름이 폴러에 밀려 안으로 들 어갔다.프린터가 다시 문자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커피라도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마틴은 미소를 지었다. 마이클스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유머 감각을 발휘하고 있었다. 판독기에서 희미한 전자음이 들려나오고 프린터는 계속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틴은 납 가 운을 주워들고 연구실을 나왔다. 21번 수술실에서는 매너하임이 리사의 오른쪽 측두엽을 기저부에서 떼어내 조심스럽게 들어올 리는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의 옆에서 뉴먼이 측두엽과 정맥동(Venous sinus)을 연결시켜 주 는 몇 가닥의 가는 혈관을 기술적으로 응고시키자 마침내 측두엽이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매너하임은 리사의 떼어낸 측두엽을 두개골 밖으로 꺼내어 다렌 쿠퍼가 들고 있던 스테인레스 스틸 쟁반위에 떨어뜨린 뒤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수술은 순조로웠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매 너하임의 기분도 바뀌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한 성취감과 만족감에 도취해 있었다. 시간 도 다른 때보다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오까지는 연구실에 가 있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기는 싫었다. "아직 멀었어." 매너하임은 왼손에 금속 흡입기를, 오른손에 겸자를 들고 말했다.그는 측두엽이 있던 자리에서 흡입기를 사용해 뇌조각을 빨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심부핵(deeper nuclei)이라고 이름 붙인 조각 을 제거하는 중이었다. 수술과정에서 자장 위험한 부분이었지만, 동시에 매너하임이 가장 좋아하 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치명적인 부위를 피해서 흡입기를 움직였다. 한순간 비교적 큰 뇌조직 덩어리가 흡입구 입구에 걸려서 시끄러운 휘파람 소리를 내다가 튜브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꽤 음악 레슨 시간 같군." 신경외과에서 이런 농담은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매너하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어색한 분위 기 에서 작접 한 농담이라 평소보다 더 우습게 들렸다. 두명의 일본인 의사들까지도 기분 좋게 웃 고 있었다. 매너하임이 뇌조직을 제거하자마자 라네이드가 리사의 호흡량을 줄이기 위해 마취기를 조절했 다. 매너하임이 더이상의 출혈이 있는지 조사하는 동안 리사의 혈압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수 술 부위를 자세히 살펴본 매너하임은 부위가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 다. 그는 봉합기구를 들고 뇌를 싸고 있는 질긴 경막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라네이드는 리사가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는 모든 수술과 정 이 끝나면 기침이나 기관지 수축없이 기관지에서 튜브를 제거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 러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약물을 조화있게 조절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중 요 한 것은 혈압이 상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매너하임은 능숙하게 손을 놀려 신속히 경막을 봉합해나가 마지막 한 바늘까지 다 끝냈다. 측 두엽이 있던 자리가 움푹 들어가 그림자가 지기는 했지만 리사의 뇌는 이제 완전히 닫혀졌다. 매 너하임은 자기가 해놓은 일에 스스로 경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뒤로 물 러 서서 요란하게 장갑을 벗었다. 철썩하는 소리가 수술실 안에 울려 퍼졌다. "나머지를 봉합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매너하임은 일본인 의사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고 수술실을 나갔다. 매너하임이 섰던 자 리를 뉴먼이 이어 받았다. "자, 로리. 자네가 나를 도울 수 있는지 아니면 방해만 하는지 한번 보자구" 그는 매너하임의 흉내를 냈다. 절제해 냈던 두개골 조각을 할로윈데이(주:기독교의 성인들을 추모하는 명절로 갖가지 기괴 한 분장을 하고 거리를 행진함)의 호박 귀신처럼 다시 제자리에 맞추어 넣자 봉합 준비가 끝났다. 그 는 치상겸자(tooth forcep)로 봉합할 피부 끝을 잡고 뒤집었다. 그러고 나서 바늘을 피부 깊숙이 찔러 넣어 두개골 막을 떳는지 확인하고 다시 바깥으로 나오게 했다. 바늘의 몸체를 잡고 있던 기구를 풀어 피부를 뚫고 나온 바늘 끝을 다시 잡은 후 실크 봉합사 를 밖으로 뽑아내었다. 같은 방법으로 반대쪽 피부에도 실크 봉합사를 통과시키고 나면 로리 가 기다리고 있다가 이것을 단단히 묶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상처를 다 봉합하고나니 검은 봉 합사로 꿰매진 리사의 머리는 마치 지퍼를 달아놓은 것 같았다. 피부 봉합이 진행되는 동안 라네이드 박사는 계속 호흡백을 압박해 리사를 호흡시키고 있었 다. 마지막 바늘을 뽑아 내자마자 그는 리사에게 100퍼센트의 산소를 공급하고, 아직 몸에 대사되 지 않고 남아 있는 근육 마비제를 중화시키기 위한 약제를 투여했다. 예정대로 호흡백을 다시 압 박 하는데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 전해져 왔다. 마지막 몇 분 동안 그녀에게는 스스로 호흡하려는 기 미가 있었다. 그래서 호흡을 시키는데 약간 저항이 느껴졌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저항도 없었 던 것이다. 라네이드는 호흡백을 보면서 식도에 삽입되어 있는 청진기의 소리를 들어보았지만 리사의 호흡 이 어느 순간 멈춘 것이 분명했다. 그는 말초신경 자극계를 검사했다. 근육마비제는 예상대로 거 의 약효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왜 호흡을 하지 않지? 라네이드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취란 벼랑끝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안전하다고 방심하다가는 순식간에 위험 천 만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재빨리 리사의 혈압을 측정했다. 혈압은 150 에 90으로 올라 있었다. 수술중에는 105 에 60으로 안정된 상태였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잠깐만요?" 뉴먼을 부르는 그의 눈은 심장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박동은 규칙적이었으나 극파간의 간 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뉴먼이 마네이드 박사에게 물으면서 그의 목소리에 실린 초조함을 읽었다. "모르겠어요." 라네이드 박사는 리사의 정맥혈압을 검사하고 혈압강하계 나이트로프루사이드를 주사할 준비를 했다. 지금까지 라네이드 박사는 그녀의 생체 신호의 변화가 뇌수술로 인해 나타나는 일시적 인 뇌 반응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출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사의 뇌 속에 출혈 이 있어서 뇌압이 증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 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혈압을 재었다. 이번에는 170 에 100으로 올라 있었다. 그는 즉시 나이트로프루사이 드를 주사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뇌출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리사의 눈꺼풀을 열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현상이 일 어 나고 있었다. 동공이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레지던트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매너하임이 미쳐 날뛸 거야." 뉴먼이 먼저 말했다. "그래도 부르는게 좋겠어. 위급한 사황이라고 전해요." 그는 낸시 도노반에게 지시했다. 그녀가 달려와 내부 전화로 수술장 입구를 불렀다. "두개골을 다시 열어야 할까요?" 로리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뉴먼이 안절부절 하면서 대답했다. "뇌 깊숙한 곳에서 출혈이 있다면 빨리 컴퓨터 단층촬영부터 하는게 좋겠지만, 수술 부위의 출 혈이라면 바로 열어야겠지." "혈압이 계속 오르고 있어요." 라네이드 박사가 혈압계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그는 혈압을 낮추기 위 해 약물을 더 주사할 채비를 했다. 두 명의 레지던트는 꼼짝 않고 그냥 서 있었다. "혈압이 계속 오르고 있어.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봐요!" "가위" 뉴먼이 소리를 질렀다. 가위가 그의 손에 쥐어쥐고, 그는 방금 꿰매 놓은 봉합사를 다시 자르기 시작했다. 실을 다 자르자 상처가 저절로 벌어졌다. 두피를 벗기자 절개한 두개골 부위가 밀려올 라와 있고 맥박이 뛰는 것 같이 보였다. "당장 쓸 수 있는 혈액이 네 병 있어야겠어." 라네이드 박사가 외쳤다. 뉴먼이 절제한 두개골 조각을 붙잡고 있던 실 두 가닥을 잘랐다. 두개골 조각이 저절로 옆으 로 떨어져 나갔다. 경막이 음산한 암갈색을 띠고 부풀어 있었다. 갑자기 수술실 문이 벌컥 열리고 매너하임 박사가 뛰어들어왔다. 수술복 단추가 맨 밑의 두 개 만 빼고 하나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소리치다 잔뜩 부풀어 올라 맥박치는 경막에 눈길을 멈추었다. "하느님 맙소사! 장갑, 가져와!" 낸시 도노반이 새 장갑을 꺼내 입구를 벌리려고 하자 그는 장갑을 나꿰채서 소독도 하지 않고 손에 끼웠다. 경막을 봉합했던 실을 몇 가닥 자르자 경막이 확 벌어지면서 선홍색피가 그의 가슴에 튀었 다. 그는 피를 뒤집어 쓰며 나머지 실을 잘랐다.출혈의 근원지를 찾아내아 했다. "흡입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흡입기가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피를 제거하고 보니 뇌가 한쪽으 로 밀리고 부어 있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어요." 라네이드 박사가 말했다. 매너하임은 큰소리로 두외견인자를 달라고 해서 수술 부위의 밑부분을 보려고 했지만,흡입기 를 떼어내기만 하면 피가 다시 가득 차올랐다. "혈압...?" 라네이드 박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혈압이 완전히 떨어졌어요." 수술 도중 내내 신호음을 내던 심장 모니터가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은 멈춰버렸다. "심장이 멎었어요!" 라네이드 박사가 소리쳤다. 레지던트들이 무거운 소독포를 리사의 머리 위로 끌어올려 몸을 드러나게 했다. 뉴먼이 수술 대 옆의 작은 의자에 올라타고 리사의 흉골을 압박하면서 심장소생술을 시도했다. 라네이드 박사 는 급히 구한 혈액병을 걸고 모든 정맥내 공급선을 열어 취대한 빨리 수액을 공급했다. "그만해!" 매너하임이 소리쳤다. 그는 라네이드가 심장 박동정지를 알렸을 때부터 수술대에서 몇 걸음 물 러나 있었다. 철저한 실패감으로 그는 들고 있던 견인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피와 뇌 조직 조각이 흐르는 손을 허리에 대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소용없어. 시간 낭비야." 그가 마침내 말했다. "중요한 동맥이 터진 게 분명해. 저 머저리 같은 환자가 제 머리 속으로 전극을 밀어넣을 때 그랬을 거야. 그때 전극이 동맥을 가로질호 지나가면서 혈관 경련이 생겼는데,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몰랐던 거야. 경련이 풀리자 피가 쏟아져 나온거고. 이 환자를 살릴 방법은 없어." 수술복 바지가 내려가지 않게 움켜쥐면서 매너하임은 뒤돌아서 나가다 문앞에 서서 레지던트들 을 보며 말했다.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다시 봉합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5 "제 이름은 크리스틴 린키스트인데요." 대학병원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젊은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웃고 있었지만 입가에 는 가는 경련이 일었다. "11시 15분에 존 숀펠드 박사님을 만나기로 했는데요." 벽시계는 정확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접수 간호사 엘렌 코헨은 읽고 있던 3류 소설에서 눈을 떼어 자기에게 미소 짓고 있는 예쁜 얼 굴을 올려다 보았다. 엘렌은 순간 자기에게 없는 것을 그녀가 모두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틴 린키스트의 염색하지 않은 금발은 비단결처럼 섬세했고, 약간 위로 들린 듯한 코 도 매력적이었으며, 크고도 깊은 푸른 눈에 미끈하게 빠진 다리 또한 그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해 주 었다. 엘렌은 첫눈에 그녀가 싫었다. 엘렌은 그녀를 방탕하기로 소문난 캘리포니아 출신 계집애쯤 으 로 치부하기로 했다. 크리스틴이 실제로는 위스콘신 주 매디슨 출신임을 알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는 담배를 깊숙이 한 모금 빨아들이고 코로 연기를 내보내면서 예약부를 들춰보았다. 그녀는 크리스틴의 이름에 밑줄을 긋고 그녀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니고 그녀가 만날 의사 는 숀펠드가 아니고 하퍼 선생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째서 숀펠드 박사에게 진찰을 받을 수 없는 거죠?" 같은 기숙사에 있는 친구가 크리스틴에게 숀펠드 박사를 추천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진찰을 받는다는 것이 끼림칙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여기 없기 때문이에요. 대답이 됐나요?"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렌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소설로 눈을 돌렸다 가 뒤돌아 걸어가는 크리스틴의 뒷모습을 질투어린 눈길로 쏘아봤다. 크리스틴은 그냥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왔던 갈을 되돌아 나간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 람 도 없었다. 그녀는 질병과 죽음을 연상케 하는 병원의 황량한 분위기부터가 싫었다. 위스콘신에서는 윌 터 피터슨 박사에게 반 년마다 받는 정기검사가 즐길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의 병원은 청 결하고 산뜻하여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 오늘 병원 약속을 하느데 많은 애를 쓴 데다가 일단 시 작 한 것은 끝을 봐야 하는 그녀의 성미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기저기 얼룩으로 더럽혀진 비닐의 자 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벽시계의 바늘이 천천히 움직여 15분을 가리켰을 때 크리스틴의 손바닥에는 땀이 촉촉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까짓 일로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에게 정신적 인 이상이라도 있는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협소한 대기실에는 그녀 말고도 여섯 명의 여 자 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침착해 보여 더욱더 괴로왔다. 자신의 몸 안에 무슨 병이 있 다는 선고를 받기 위해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다 헤진 잡지를 주워들었다. 그러나 일단 떠오른 생각 을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광고마다 자신에게 닥쳐올 시련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페이지를 넘 기자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걱정이 들었다. 성 관계를 가진 후 정자가 질 속에 얼마 동안이나 남아 있을까? 그젯 밤 에 그녀는 선배이자 남자 친구인 토마스 휴런과 잠자리를 같이 했었다. 의사가 그럴 안다면 얼 마 나 창피할까? 그녀가 병원을 찾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토마스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난 가을 이 후 로 꾸준히 만나왔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녀는 안전주기를 지키는 것이 더이상 합리적인 피임 방 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마스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성 관계를 더 자 주 가지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학교의 구내약국에서 경구피임약을 구하려다가 먼저 산부인과 에서 검진을 받아야 한다 는 말을 들었다. 크리스틴은 고향에 가서 잘아는 의사에게 가고 싶었지만 사생활의 비밀이 드 러 날 것이 두려워 갈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다가 그녀는 복부에 팽만감과 함께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순간 속이 뒤 틀려 설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생각만 해도 굴욕적이었다. 그녀는 시계를 올려다 보면서 더 오래 기다리지 않기만을 바랬다. 1시간 20분이 지난 뒤 엘렌 코헨이 크리스틴을 진찰실호 불렀다. 모노륨이 깔린 바닥으로부 터 올라오는 냉기를 느끼며 그녀는 커튼 뒤로 들어가 옷을 벗어 하나뿐이 없는 옷걸이에 걸었다. 그 녀는 가호사가 시킨대로 허벅지 중간쯤 오는 길이에 앞을 여미게 되어 있는 진찰가운을 입었 다. 밑을 내려보니 한기로 인해 곤두선 젖꼭지가 마치 두 개의 단추처럼 면 가운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그녀는 의사가 보기 전에 제발 가라앉아 주었으면 하고 바랄뿐이었다.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나오다가 수건 위에 기구를 배열하고 있는 간호사 미즈 블랙먼을 보았 다. 크리스틴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궁검경과 겸자 따위의 스테인레스 스닐제 기 구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보였다. 기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 벌써 갈아 입었어요?" 미즈 블랙먼이 말했다. "좋아요. 이리 오세요." 그녀는 진찰대 위를 탁탁 쳤다. "이 위로 올라가요. 의사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 미즈 블랙먼은 발로 작은 의자를 적당한 위치로 옮겨주었다. 크리스틴은 얇은 가운을 두 손으로 꼭 여미고 진칠대로 다가갔다. 끝에 철제 등자(주:stirrup; 산 부인과 진찰대에 달린 두 발을 벌려 걸치는 장치)가 삐죽이 나온 진찰대는 마치 중세의 고문기구 같아 보였다. 그녀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미즈 블랙먼을 마주하고 진찰대에 앉았다. 미즈 블랙먼이 그녀의 병력을 상세히 물어봤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철저함에 탄복했다. 누구도 일을 그렇게 철저히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심지어 그녀의 가족에 관해서까지 완벽하게 물어봤다. 미즈 블랙먼을 처음 봤을 때는 외모에서 풍기는 냉정하고, 날카로운 분위기 때문에 행동 역 시 그렇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병력을 물어보는 과정에서 그녀를 환자가 아닌 한 개인으로 관심 을 가지고 대해주어 한결 안심이 되었다. 미즈 블랙먼은 계속 물어오면서 몇달 전부터 약간씩 분 비 물과 가끔 비월경 기간에 비치는 하혈에 대해서는 차트에 받아 적었다. "좋아요. 의사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 이제 누워서 등자에 양발을 걸어요." 미즈 블래먼이 차트를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크리스틴은 가운을 여미면서 그녀의 말에 따랐다. 아무리 해도 옷자락이 자꾸 벌어지는 것 을 보며, 그녀는 애써 찾은 냉정이 다시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얼음장 같은 등자로부터 느껴지는 냉기가 온 몸으로 밀려왔다. 미즈 블랙먼은 깨끗이 세탁된 시트 한 장을 흔들어 펼쳐 그녀 위로 덮은 다음 한쪽 끝을 들추 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크리스틴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치부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좋아요. 밑으로 더 내려와야겠어요." 크리스틴은 엉덩이를 밀어 아래로 내려갔다. 미즈 블랙먼은 시트 자락을 들춘 채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크리스틴은 한참을 더 내려가 엉덩이가 진찰대 끝에 걸쳐지는 게 느껴졌다. "됐어요. 이제 마음 편히 가지고 기다리면 하퍼 박사님이 들어오실 거예요."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도대체 어떻게? 자신이 푸줏간 선반 위에 놓여 고객의 거친 손길을 기 다리는 고기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뒤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누가 안을 들여다 볼까봐 자 꾸 그쪽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 노크 소리도 없이 진찰실 문이 열리고 병원 사환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실험실로 갈 혈액 샘플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미즈 블랙먼이 그에게 가르쳐 주려고 함께 방을 나갔다. 크리스틴은 알코올 냄새가 밴 무균실에 덩그렇게 혼자 남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 었 다. 또 기다려야 된단 말인가? 반대편 문이 열렸다. 그녀는 의사이기를 기대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정작 나타난 것은 접수 간 호사였다. 미즈 블랙먼이 어디 갔느냐고 묻는 말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간호사가 나 가고 문이 쾅 닫혔다.크리스틴은 고개를 다시 내리고 눈을 감았다. 더이상 기다릴 수 있을 것 같 지가 않았다. 크리스틴이 막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 다. "안녕하세요? 저는 데이비드 하퍼입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틴은 힘없이 대답했다. 데이비드 하퍼.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의 사라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다. 짧은 수염투성이의 어린애 같은 얼굴은 훌렁 벗겨진 대머리와 전 혀 안 어울렸고, 눈썹은 너무 짙어서 진짜 눈썹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퍼는 작은 세면대로 가서 재빨리 손을 씻고 나서 탁자 위에 놓여진 그녀의 차트를 읽으며 물 었다. "이 학교 학생인가요?" "에." "무슨 과목을 전공하는데요?" "미술이에요." 크리스틴은 대답하면서 그가 시시한 질문만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지 루 하기 짝이 없는 기다림 끝에 나누는 대화라 일종의 위안이 되긴 했다. "미술, 그거 좋지요." 하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는 손을 말리고 나서 상자갑을 찢어 고무장갑을 꺼냈다. 그는 크리스틴이 보는 데서 장갑에 손을 쑤셔넣어 손목에서 탁 튕겼다 놓고는 차례로 잡아당겨 손가락 을 끝까지 밀어넣었다. 그 과정은 하나의 의식같이 신중하게 행해졌다. 크리스틴은 하퍼가 머리만 빼고 다른 곳은 털 이 무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얇은 고무장갑에 비쳐보이는 북실북실하게 털이 난 손은 천박 하 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진찰대 발쪽으로 걸어가면서 분비물과 가끔 있는 하혈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그 증 상들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작은 의자에 앉아 그녀 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시트 밑자락이 들추어지자 일종의 공포감마저 들었다. "자, 내 쪽으로 더 내려왔으면 좋겠군요." 그녀가 몸을 움직이는데 문이 열리고 미즈 블랙먼이 들어왔다. 크리스틴은 그녀가 반가웠다. 그 때 그녀의 다리가 최대한 벌려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노출될 여지도 없었다. "그레이브스 검사경을 줘요." 하퍼가 미즈 블랙먼에게 말했다. 크리스틴은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볼 수가 없었다. 단지 쇠가 쇠에 부딪치면서 나는 찰칵거 리 는 소리와 함께 아랫배에 칼이 스쳐지나가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자, 이제 힘을 쭉 빼세요. 크리스틴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장갑 낀 손이 그녀의 음순을 옆으로 벌리자, 그 반응으로 허 벅지 근육이 움찔 움츠러들었다. 뒤이어 차가운 금속 검사경이 비집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자, 자, 힘을 빼세요. 마지막으로 팝 도말검사를 받은 것이 언제죠?" 잠시 후에야 그녀는 그 물음이 자기를 향한 것임을 깨달았다. "일 년쯤 됐어요." 속에서 무언가 확장되는 느낌이 왔다. 하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삽입된 검사경이 불편해서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검사경이 약간 움직이더 니 의사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의사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반대편으로 등을 돌리 고 작은 탁자 위에 몸을 구부린 채 두 손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미즈 블랙먼이 그를 향해 고 개를 끄덕이고 낮은 말로 속삭였다. 크리스틴은 도로 누우며 그가 빨리 검사경을 빼내기만 기 다 렸다. 그때 검사경이 움직이고 복부가 푹 꺼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됐어요." 마침내 하퍼 박사가 말했다. 검사경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빠져나가고 짜릿한 통 증만 남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나머지 진찰을 더 받아야 했다. "난소는 정상인 것 같군요." 하퍼가 더럽혀진 장갑을 벗어 뚜껑 달린 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진찰결과보다는 진찰이 끝났다는 데 대한 안도감에서 나온 말이었다. 유방에 대한 진찰을 간단하게 마친 뒤 하퍼는 그녀에게 옷을 입어도 좋다고 말했다. 지극히 사 무적이고 아무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크리스틴은 탈의실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하고 싶은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의사가 그냥 나가버릴까봐 돨 수 있는 한 빨리 옷을 챙겨 입었다.그 녀 는 미처 채우지 못한 블라우스 단추를 마저 끼우며 탈의실을 나왔다. 다행히도 하퍼는 마침 그 녀 의 차트를 마무리짓는 중이었다. "선생님?"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피임법에 대해 여쭤볼 게 있는데요...." "무엇이 알고 싶은데요?" "제게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해서요." 하퍼 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방법은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어요. 당신의 경우에는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어요. 개인 적인 선택에 달린 거니까요. 자세한 건 미즈 블랙먼하고 애기하세요."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하퍼의 무뚝뚝한 태도에 그럴 자신이 사 라 져버렸다. "진찰 결과는... " 하퍼는 펜을 가운 주머니에 집어 넣고 일어나면서 말을 이었다. "아주 정상입니다. 자궁경부에 약간의 미란이 있고 이것 때문에 분비물이 있긴 하지만 아직 문 제될 건 없어요. 2개월 뒤에 다시 검사해 보도록 하지요." "미란이 뭐죠?" 그녀는 질문을 하면서도 진짜로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건 정상적으로 덮여 있는 상피세포가 결핍된 부위를 말하는 거예요. 또 물어 볼게 있어요?" 하퍼는 진찰을 서둘러 끝내려 했지만 그녀는 뭔가 아쉬운 게 남은 것 같아서 잠시 망설였다. "아직 봐야 할 환자가 남아 있어요. 피임법에 관해 알고 싶으면 미즈 블랙먼에게 물어보도 록 해요. 훌륭한 상담자가 되어 줄 거예요. 그리고 진찰 후에 약간 하혈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걱정하 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2개월 뒤에 다시 봅시다." 그는 미소를 짓고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주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미즈 블랙먼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퍼 박사가 나간 것을 보고 놀란 눈 치였다. "빨리 끝났군요." 미즈 블랙먼이 차트를 집어들었다. "검사실만 들르신 다음 돌아가시면 됩니다." 크리스틴은 그녀를 따라 현미경을 비롯한 의료기구들이 즐비한 선반과 두 개의 검사대가 놓여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맞은편 벽에는 기분 나쁘게 생긴 기구들이 종류별로 가득 진열된 유리 벽 장이 있고, 그 옆에는 시력검사표가 걸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시력검사표는 알파벳 E로만 구성 되 어 있었다. "평소에 안경을 쓰나요?" 미즈 블랙먼이 물었다. "아뇨." "좋아요. 피를 뽑아야 하니까 여기 누워요." 크리스틴은 시키는 대로 했다. "전 피를 뽑을 때 약간 현기증이 있어요." "그건 흔한 일이에요. 눕게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크리스틴은 주사기 바늘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딴 데로 돌렸다. 미즈 물랙먼은 빠른 손놀림으로 혈액을 채취하고 그녀의 혈압과 맥박을 측정했다. 그러고나 서 그녀는 시력검사를 하기 위해 검사실의 불을 껐다. 크리스틴은 미즈 불랙먼에게 피임법에 대해 물어보려고 햇지만, 그녀는 자기가 할 일을 마 칠 때까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검사가 끝난 뒤에야 산부인과 진찰결과에는 아 무 문제가 없으니 대학내 가족계획협회로 가보라고만 말해 주었다. 미란에 관해서 미즈 블랙먼은 모든 게 깨끗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 했다. 그러고나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적은 뒤 만일 혈액 검사결과 이상이 잇으면 통보해 주겠 다 고 말했다. 크리스틴은 안심하며 검사실을 서둘러 나왔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긴장에 대한 보상으로 오후 수업을 빼먹기로 했다. 그러나 산부인과 외래 한가운데 도착했을 때 그녀는 길을 잃은것 같았다. 아까 어떤 길로 왔던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엘리 베이터를 찾다가 가까운 복도 벽에 붙어 있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라는 글자가 그녀의 망막에 비쳤을 때, 머리 속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 다. 동시에 묘한 기분과 함께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나더니 불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뭐라고 단 언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친숙한 것처럼 느껴지는 냄새였다. 크리스틴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런 증상들을 무시하고 사람들로 혼잡한 복도를 향해 걸 어갔다. 병원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현기증이 심해지고 사방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크리 스 틴은 출입구 문설주를 붙잡고 서서 눈을 감았다. 빙빙 도는 느낌이 사라졌다. 현기증이 다시 나타 날까봐 겁이 나기는 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히 현기증은 다시 일지 않았고 그녀 는 문설주를 놓고 혼자 설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틴은 막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거머쥐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으 나 하퍼인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크리스틴은 자신의 증상을 말하기 싫어 재빨리 말했다. "정말이세요?"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이고 확신을 주듯 팔을 그의 손에서 빼냈다. "그럼 방해해서 미안하오." 하퍼는 실례한다고 말하고 복도로 멀어져 갔다. 크리스틴은 사람들 틈으로 섞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후들거 리 는 다리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6 마틴 필립스는 레지던트가 환자의 동맥에서 카테터를 째내고 모든 처치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 을 확인하자 혈관조영실을 빠져나왔다. 서둘러 복도를 걸어가며 헬렌이 점심식사를 하러 가고 없기를 바랬다. 그러나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마자 헬렌이 마틴을 먼저 알아보고는 언제나처럼 손에 긴급한 메 시지를 쥐고 고양이처럼 뛰어왔다. 마틴은 그녀가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전해주는 나 쁜 소식을 싫어했던것이다. "2번 혈관조영실이 또 가동되지 않는데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껄이기 시작했다. "X레이 쵤영실 자체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고, 필름 전동장치에 말썽이 있다는 군요." 마틴은 납가운을 옷걸이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라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고, 헬렌 이 수리를 맡고 있는 회사에 벌서 전화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작업대 위의 프린터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컴퓨터가 뽑아낸 자료가 나와 있었다. "클레어 오브라이언과 조세프 아보댄저 두 사람한테도 문제가 생겼어요." 헬렌이 또 말을 시작했다. 클레어와 조세프는 신경방사선과에서 몇년간의 수련기간을 거친 촬 영기사들이었다. "무슨 문제인데 그래?" "결혼하기로 결정했대요." 마틴이 웃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서 이상한 짓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런 게 아니구요." 헬렌은 펄쩍 뛰었다. "둘은 6개월에 결혼해서 휴가를 받아 열므 내내 유럽에 가 있겠다고 그랬어요." "여름 내내? 그럴 수는 없어! 동시에 두 사람에게 2주 휴가를 주는 것도 어려운데, 그들한테 진 작 말하지 그랬어?" "물론했지요. 하지만 신경 안 쓴대요. 해고당한다 해도 그대로 밀고 나간다던데요." "젠장." 마틴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그들이 여기서 수련한 기술이라면 어떤 큰 병원에도 쉽사리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의대 학장실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지난 주에 있었던 회의에서 신경방사선과에 서 실습하는 의대생 수를 두 배로 늘리기로 결정했대요. 작년에 실습한 학생들이 최고의 선택과목 으 로 뽑았다나 봐요." 마틴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더온다니! 나에게 필요한 게 고작 이런 학생들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망할! "끝으로 하나만 더."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관리부의 마이클 퍼거슨 씨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우리가 물품창고로 쓰고 있는 방을 비워달라 는 군요. 사회봉사실로 만든대요." "아니. 그럼 우리는 물품을 어디다 보관하란 말야?" "저도 그렇게 물어봤는데요, 그 사람 말이 그 방이 신경방사선과에 할당된 게 아니라는 걸 박 사님도 알 테니까 박사님한테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고 그랬어요. 그럼 전 점심 먹으러 가야겠 어 요. 곧 돌아올게요." "그개, 맛있게 들고 와요." 잠시 동안 마틴은 혈압이 정상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관리 문제에 있어서 점점 골치 아 픈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프린터를 향해 걸어가 출력된 보고서를 잡아당겼다. 스컬 래드리드1 리사 마리노 임상자료. 1년 전부터 측두엽성 간질을 앓아온 21세 여성. 휴대용 X-레이 촬영기로 좌측면 촬영. 촬영 각 도는 8도 정도 벗어난 것으로 보임. 우측두엽 부위에 두개골의 결손을 나타내는 큰 음영 감소 부 분이 있음. 이 부위의 예리한 경계로 보아 인위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임. 골 결손부 밑에 있 는 큰 두피판을 시사하는 두꺼운 연부조직이 이 사실을 입증함. 수술 X-레이 사진임이 분명 함. 표면 전극으로 보이는 다수의 급속체가 발견됨. 측두엽에 삽입된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가는 원 주형의 전극은 편도와 해마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됨. 뇌의 음영으로 보아 후두엽, 두정엽 중간 그 리고 측두엽 외측에 선형 병변이 나타남. 결론 우측두엽 부위에 큰 골결손이 있는 수술 X-레이 사진. 다수의 표면 전극과 두 개의 삽입 전 극. 입력되지 않은 양상의 광범위한 음영변화 소견. 건의사항 선형 병변의 원인 파악과 삽입 전극의 위치 측정을 위해 전후면과 사면 촬영, 컴퓨터 단층촬 영 을 실시할 것을 권함.주요 동맥과 삽입 전극의 방향에 대해서는 혈관조영 자료가 요구됨. ***선형 음영 변화의 의미를 중앙기억장치에 입력 바람. 감사합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면 마이클스 박사와 마틴 필립스 박사에게 보내구시기 바랍니다. 마틴은 출력된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훌륭한 자료였다. 훌륭하다기 보다도 환상적인 정도로 대단한 자료였다. 말미의 우스갯소리 또한 압권이었다. 마틴은 보고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신경 방 사선과 의사가 아닌 자신들의 기계로부터 나온 보고서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개골 절개술이라는 용어를 입력시키지 않았는데도, 컴퓨터는 주어진 정보들을 가지고 추론 해 서 정확한 답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음영의 변화 소견이 마음에 걸렸다.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마틴은 리사 마리노의 X-레이 사진을 판독기로부터 꺼내서 판독상자에 걸었다. 자료에서 시사 한 변화가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자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걸림돌이 되었던 그 들의 음영 판정방법이 결국 유용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전환기를 작동시킨 마틴은 화면에 지나가는 X-레이 사진들 중에서 리사 마리노의 혈관 조 영 사진을 찾아냈다. 그는 화면전환기를 멈추고 그 수술 전 사진 중 측면 필름을 하나 꺼내 수 술 X-레이 사진 바로 옆에 걸고 자료에서 지적한 대로 음영 변화 소견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실마읏럽게도 그 사진 역시 정상으로 보였다. 문이 열리고 데니스 생거가 들어왔다. 마틴은 미소를 띄우면서 다시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접고 조금 찢어냈다. 다시 펴자 한 가운데서 작은 구멍이 뚫렸다. "여기서 종이접기를 하느라 바쁜 줄은 몰랐어요." 데니스가 팔을 벌려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과학이란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 진보하는 거야. 오늘 아침 당신과 헤어진 후 많 은 일이 일어났어. 마이클스가 최초의 두개골 X-레이 판독기를 가져왔지. 이게 처음 뽑아낸 자료야." 데니스가 자료를 읽는 동안 마틴은 구멍 뚫린 종이를 판독상자에 걸린 리사 마리노의 X-레 이 사진 위에 갖다댔다. 구멍을 통해서 보이는 작은 부분만 남기고 필름의 다른 부분은 모두 종이 에 가려졌다. 마틴은 구멍 안으로 보이는 협소한 부위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는 종이를 떼어내고 데 니 스에게 필름에 비정상적인 것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그가 종이를 도로 갖다 댔을 때도 그녀가 안 보인다고 하자 그는 직선으로 늘어선 미 세 한 흰 점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종이를 떼어 냈을 때는 두 사람다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저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진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하던 데니스가 물었다. "나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마틴은 컴퓨터가 리사 마리노의 수술 전 사진에서도 수술 사진에서와 같은 음영 변화를 읽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레이저 판독기에 밀어넣었다. "그런데 이게 좀 거림직 해." 그는 분주한 소리를 내면서 작동하는 컴퓨터로 다시 다가섰다. "왜요? 이 자료는 굉장한데요." 이렇게 묻는 데니스의 얼굴에 판독상자의 파르스름한 불빛이 비추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야. 컴퓨터가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보다도 X-레 이 판독을 더 잘 해낸단 말이야. 난 그 음영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었거든. 프랑켄쉬타인 이야기가 생 각 나." 마틴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데니스가 웃었다. "마이클스는 내가 X-레이 사진을 하나씩 집어 넣을 때마다 편하게 일하라는 말이 나오도록 프 로그램을 입력해 놓았어. 처음엔 커피를 한 잔 마시라고 하더니, 이번엔 뭘 좀 먹으라는군." "제가 보기에 훌륭한 충고인데요, 뭘. 커피 숍에서의 낭만적인 밀회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 도 시간이 별로 없어요. 단층촬영실로 돌아가야 돼요." "지금 당장은 자리를 뜰 수가 없겠는데." 마틴은 계면쩍은 음성으로 말했다. 접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먼저 말해 놓고 실망시켜서 미안 했 다. "이 일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어서." "괜찮아요. 샌드위치라도 먹어야겠는데, 당신도 먹을래요?" "아니, 됐어." 마틴은 프린터가 자료를 찍어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연구가 잘 진행된다니 정말 기뻐요. 단신한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해요." 그녀는 문을 열고 서서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는 프린터가 멈추자마자 용지를 뽑아냈다. 먼젓번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했다. 컴퓨터가 음영 변화에 대해 다시 언급하면서 단층촬영과 함께 다른 각도에서의 X-레이 촬영을 권하는 것을 보 고 그는 환호했다. 마틴은 기쁜 나머지 머리를 뒤를 젖히고 컴퓨터가 양철북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들겼다. 그 때 판독상자에 걸려 있던 리사 말리노의 X-레이 사진 몇 장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혀 사진을 주워들다가 문 앞에 서 있는 헬렌 워커를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미친 사 람 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필립스 박사님?" "물론." 마틴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X-레이 사진들을 챙겼다. "난 괜찮아. 조금 흥분해서 그래. 점심 먹으러 간다고 했잖아?" "갔다가 여기서 먹으려고 샌드위치를 사왔어요." "윌리엄 마이클스한테 전화 좀 해주겠어?" 헬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마틴은 사진들을 도로 제자리에 걸었다. 사진의 희미한 반점들 을 바라보면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칼슘같이 보이지도 않고 혈 관 을 따라 분포된 것 같지도 않았다. 피질에 생긴 것인지 회백질에 생긴것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 려웠다. 전화기에서 뚜 소리가 나자 그는 내부 연결 전화기를 들었다. 마이클스였다. 마틴은 컴퓨터가 발휘한 놀라운 능력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자신도 발견하지 못했던 일종의 음영 변화 를 컴퓨터가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가 하도 빠르게 지껄이자 마이클스는 좀 천천히 얘기하 라 고 했다. 마침내 그가 말을 멈추었을 때 마이클스는 말했다. "우리가 예상한 대로 작동이 된다니 기쁘군요." "예상한 대로라니? 이건 기대 이상이야." "그래요. 그런데 x-레이 사진은 몇 장이나 넣어봤어요?" "정확히 말하면 한 장이야. 한 환자의 사진을 두 장 넣어 봤거든." "겨우 x-레이 사진 두 장을 봤단 말이에요? 벌써 지쳤나 보죠?" "알았어, 알았어.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이 일에 쏟을 시간이 별로 없었단 말이야." 마이클스는 알았다고 대답하면서도 한 번의 좋은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주의를 흐뜨리지 말 고, 지난 몇년간의 두개골 필름을 모두 컴퓨터에 넣어 시험해 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지 금 단계에선 위음성으로 판독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마틴은 계속 듣고 있었지만 리사 마리노의 사진에 나타난 거미줄 같은 병변에 대한 조사를 멈 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간질환자이고, 그렇다면 간질과 x-레이에 나타난 미세한 변화 간 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과학적 의문이 떠올랐다. 어쩌면 광범위하게 침범한 신경 계 질환을 나타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틴은 새로운 흥분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마이클스와의 통화를 끝마쳤다. 그는 리사 마 리 노에 내린 추정 진단중에 다발성 경화증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그 질환에 대한 방 사선학적 진단법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건 대단한 발견이었다. 의사 들 은 다발성 경화증의 객관적인 진단법을 찾아내려고 수 년간 노력해왔다. 마틴은 리사 마리노의 x-레이 사진과 단층촬영 사진을 더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술 이 막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너하 임 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매너하임의 연구 지향적인 기질을 아는 그는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다. 그는 문 밖의 헬렌에게 매너하임을 연결시켜 달라고 소리치고 다시 리사 마리노의 x-레이 사 진을 들여다 보았다. 이 음영 변화 소견은 미세한 선들이 그물 모양이기 보다는 평행하게 배 열 된 것으로 보이지만 방사선학적 용어로 망상구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면서 혹시 지금 보이는 양상이 신경섬유에서 기인한 변화는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다. 그러나 두개골을 관통하기 위해 비교적 강한 x-레이를 조사했다는 사실을 고 려할 때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 순간 부저 소리가 그의 사고 진행을 막았다. 매너하임에 연 결된 것이었다. 마틴은 수술실에서 있었던 x-레이 사건은 이미 잊어버렸다는 듯이 기분 좋은 농담으로 말 을 떼었다. 매너하임을 상대할 때는 그런 충돌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흘려보내는 것이 상책이 었 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에게 마틴은 리사 마리노의 x-레이 사진에서 흥미있는 변화를 발견하였 기에 전화했다고 설명했다. "환자가 견디어 낼 수 있는 한 빨리 두개골 x-레이와 컴퓨터 단층촬영을 더 실시하여 이 변화 를 캐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박사님의 허락을 얻어서 말입니다." 매너하임은 불편한 침묵으로 응했다. 마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벽력 같은 호 통 이 터져나왔다. "자네 농담하는 거야? 이상한 취미를 가졌군, 그래." "농담이 아닙니다." 그는 당황했다. 매너하임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잘 들어. 방사선과에서 x-레이나 찍고 있기엔 이미 늦었어. 알았나?"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지고 삐 소리만 났다. 매너하임의 안하무인같은 태도는 이미 경지에 이 르러 있었다. 마틴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접 근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너하임이 수술 후의 환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 매 일 매일의 관리는 수석 레지던트인 뉴먼의 일이었다. 그는 리사가 아직도 회복실에 있는지 알아보 려 고 뉴먼에게 연락했다. 수술장 입구의 접수대가 나왔다. "뉴먼 선생님이요? 잠깐 어디 가셨는데." "그래요?" 그는 전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들고 다시 물었다. "그럼, 리사 마리노가 아직 회복실에 있나요?" "불행히도 거기까지 가지 못했어요." "가지 못했다니?" 마틴은 매너하임의 태도를 퍼뜩 떠올렸다. "수술대 위에서 사망했어요. 슬픈 일이에요. 게다가 매너하임 박사님의 첫 수술 사망 환자거든 요." 마틴은 X-레이가 걸린 판독상자로 고개를 돌렸다. 리사 마리노의 X-레이 사진 대신 오늘 아침 수술장 환자 대기실에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는 깃털을 다 뽑힌 새와 같던 그녀 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그는 산란해지는 정신을 수습하여 그녀의 영상을 지워버리고 X-레이 사진에 주의를 기울였다.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리사마리노의 차트를 검토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 랐 다. X-레이에 나타난 변화와 연관지을 수 있는 다발성 경화증의 임상증후와 증상들이 신경학적 검사과정에서 발견되었을지도 몰랐다.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헬렌을 지나치며 혈관조영실의 레지던트에게 곧 갈테 니 먼저 시작하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헬렌은 입 안의 음식을 급히 삼키고, 마이클 퍼거슨이 물품 창고에 관해 다시 전화하면 뭐라고 대답할지를 물었다. 마틴은 못들은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식!" 그는 수술장으로 통하는 중앙 통로로 접어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병원 관리부 사람 들 을 어떻게 하면 무시해버릴 수 있는지 터득하고 있었다. 그가 수술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몇 명의 환자가 대기실에 있었지만 오전과 같은 혼잡함은 찾을 수 없었다. 마틴은 막 수술복을 갈아입고 나오는 낸시 도노반을 알아 보았다. 그가 다가서자 그녀는 미소로 응답했다. "마리노 양의 수술에 문제가 있었다면서요." 그는 동정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낸시 도노반의 미소가 사라졌다. "끔찍한 일이었어요. 너무 끔찍해요. 그렇게 젊은 여자가... 매너하임 박사님도 안됐고요." 마틴은 낸시가 매너하임 같은 작자를 동정한다는 게 놀라웠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수술이 거의 끝나가는데 중요 동맥 하나가 터졌어요." 마틴은 당혹감을 느끼면서 머리를 젓다가 전극이 후뇌동맥에 지나치게 근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전후 사정을 대강 그려볼 수 있었다. "차트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접수에게 물어볼게요." 마틴은 낸시가 수술장 접수대의 간호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내 그녀는 돌아 와서 말했다. "전 병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 말에 의사도 추가하고 싶었지만 너무 무례한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미소를 짓다가 이 매력적인 젊은 여성에게 즉각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X-레이 촬영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요." "몸이 너무 안 좋아 될 수 있는 대로 집에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금방 끝날 겁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딱 한 장만... 내가 직접 모시고 가겠어 요." 크리스틴은 망설였다. 한편으로는 병원이 끔찍히도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몸이 계속 안 좋아 마틴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을 것 같기도 했다. "어때요?" 마틴이 끈질기게 물었다. "좋아요." 그녀는 결국 승낙했다. "됐어요. 여기 산부인과에서 얼마나 더 있을 거죠?" "모르겠어요. 오래 안 걸린다고 했는데." "좋아요. 혼자 어디 가면 안돼요." 몇 분 뒤 크리스틴의 이름이 불려졌다. 동시에 다른 문이 열리고 하퍼가 모습 을 나타냈다. 마틴은 하퍼가 병원을 지나다니면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레지던트라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빛나는 대머리 때문에 인상에 남았던 것이다. 마틴은 자 리에서 일어나 자기 소개를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레지던트 과정에 있는 하퍼는 방이 따로 없는 데가가 진찰실마저 둘 다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 이 야기를 나눌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들은 좁은 복도로 나갔다. "뭘 도와드릴까요?" 하퍼가 의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신경방사선과의 부과장이 관심 분야와 전문 지식이 극과 극에 있는 산부인과를 찾아왔다는 것이 그로서는 의외였다. 마틴은 다소 모호한 용어를 써가며 외래는 어떤 식으로 배정되는지, 하퍼가 여기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만족하는지 따위를 물어봄으로 써 말문을 열었다. 하퍼는 작은 눈으로 마틴의 얼굴을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의 설명으로는 대학 외래는 선임 레지던트 중에서 선택하여 두 달씩 맞는다고 하면 서, 이 과정이 레지던트가 끝나고 병원에 계속 남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적인 발판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봐야 할 환자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하퍼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마틴은 그를 편안하게 하려던 자신의 질문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팝 도말 검사결과가 비전형적이라는 보고가 나오면 대개 어떻게 하지요? "경우에 따라 달라요." 하퍼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채 대답했다. "빈전형적인 세포에는 두 부류가 있어요. 하나는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암의 가능성은 없는 부류, 또 하나는 비전형적익 암의 가능성까지 있는 부류이지요." "어떤 부류에 속하건 가만 있어선 안 되는 거 아니예요? 내 말은 세포가 정상 이 아니면 그에 따르는 후속조치가 필요하지 않느냐 그 말이에요. 내 말이 맞 죠?" "그렇긴 합니다만..." 하퍼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는 구석으로 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죠?" "그냥, 좀 알고 싶어서요." 마틴은 콜린스의 차트를 들었다. "이 외래에서 팝 도말 검사결과가 비전형적이라고 나온 환자를 몇 명봤는데, 산부인과 기록을 살펴보니 쉴러검사나 생검, 질 확대경검사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더란 말이오. 팝 도말 검사만 되풀이 될 뿐이지... 이상하지 않아요?" 마틴은 하퍼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난 누굴 추궁하려고 온 게 아니라 관심이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 "차트를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말씀 드릴 수가 없군요." 하퍼는 그 말로 대화를 끝맺을 생각이었지만 마틴이 콜린스의 차트를 내밀자 하는 수 없이 펼쳐보아야 했다. 하퍼는 '캐더린 콜린스'라는 이름을 보자 얼굴이 굳어졌다. 마틴은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차트를 끝까지 다 넘긴 그는 고개를 들어 마틴을 한 번 보고 차트를 도로 건네주며 말했다. "이해가 잘 안가는 군요." "분명히 이상하죠?" "글쎄요. 이건 제가 처리한 일이 아니고...,전 지금 일을 하러 가야 합니다. 그 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마틴을 비켜 지나갔다. 마틴은 그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벽에 몸을 바싹 붙여주어야 했다. 갑작스럽게 끝나버린 대화에 충격을 받은 마틴은 진찰실로 황급히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틴은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질문을 할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하퍼가 듣기에는 그가 느꼈던 것 이상으로 힐난조로 들렸 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캐더린 콜린스의 차트를 펼쳤을 때의 반응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러나 마틴은 더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마틴은 하퍼에게 더 말을 시켜보았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접수 간호사에 게 돌아가 크리스틴 린키스트의 진찰이 언제 끝나는지 물었다. 엘렌 코헨은 처 음엔 그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다가 마틴이 다시 한 번 반복하자 간호사와 함께 있으니 곧 나올 거라고 쏘아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처음부터 린키스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마틴이 그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자 더 싫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엘렌 코헨의 질투를 알 리 가 없는 마틴은 대학 산부인과 외래가 대단히 혼란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몇 분 뒤에 크리스틴이 간호사를 따라 진찰실에서 나왔다. 마틴은 그 간호사 를 본 적이 있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팽팽히 당겨 올려 둥그랗게 묶은 모 습을 카페테리아에서 본 듯한 기억이 났다. 그는 일어나서 그녀가 접수대로 걸어가 접수 간호사에게 4일 후에 크리스틴의 예약을 해놓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틴은 안색이 아주 창 백해 보였다. 마틴이 크리스틴을 불렀다. "런키스트 양, 다 끝났어요?" "그런 것 같아요." "X-레이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크리스틴은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갑자기 검은 머리의 간호사가 다시 접수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실례가 되는 질문이지 모르겠지만 무슨 X-레이 사진을 말씀하시는 거죠?" "측면 두개골 사진이요." "알겠습니다. 물어본 까닭은 크리스틴 양의 팝 도말 검사결과에 이상이 있어 그게 정상으로 나올 때까지는 복부와 골반 X-레이 사진을 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런 겁니다." "문제 없습니다. 우리 과에서 보려는 부위는 머리뿐이니까요." 그는 팝도말 검사와 방사선 촬영간에 그런 연관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 했지만 어쨌든 그럴 듯하게 들렸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갈 길을 갔다. 엘렌 코헨은 예약 카드를 크리스 틴의 손에 거칠게 넘겨주고 바쁘게 타자를 치는 체했다. "캘리포니아 갈보년."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틴은 크리스틴을 데리고 북적거리는 외래를 빠져나와 본관으로 연결되는 문 으로 안내했다. 일단 본관으로 들어서자 아까 외래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쾌적한 분위기였다. 크리스틴으로서는 의외였다. "이곳은 몇몇 외과 의사들의 개인 연구실이에요." 마틴은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걸어가며 설명해 주었다. 새로 페인트가 칠해 진 벽에는 유화가 한 점 걸려 있었다. "전 병원 전체가 낡고 퇴락한 줄 알았어요." 크리스틴이 말했다. "그렇진 않아요." 순간적으로 마틴의 마음 속에 방금 본 산부인과 외래와 지하 시체실의 영상이 스쳐갔다. "크리스틴, 환자 입장에서 대학 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산부인과에 가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는데, 긍정적인 대답 이 나올 리가 없죠." "다른 데와 비교하면 어때요?" "음, 너무 비인격적이에요. 적어도 어제 의사를 만났을 때는 말이에요. 오늘은 간호사 밖에 못 봤지만 이 편이 훨씬 나았어요. 게다가 오늘은 어제처럼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고, 피를 뽑고 시력을 측정한 것 말고는 다른 진찰은 안 받았거 든요. 정말 다행이었어요." 마틴은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러 단추를 눌렀다. "미즈 블랙먼이라는 사람이 제 팝 도말 검사에 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어요. 나쁘지 않은 게 분명하대요. 흔한 2번 타입이라서 대부분 저절로 정상으로 되돌 아 온다고 했어요. 그리고 자궁경부의 미란이 원인일지 모른다고 관주욕을 약하 게 하고 성 관계를 피하라고 했어요." 마틴은 크리스틴의 솔직 대담성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대부분의 다른 의사 들처럼 그도 의사라는 존재가 환자들로 하여금 사행활에 관한 비밀 이야기도 마 음 놓고 털어 놓게 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사선실에 도착한 마 틴은 필요한 측면 두개골 필름 한 장을 얻기 위해 캐네사 로빈스를 찾아내어 크 리스틴을 그의 손에 맡겼다. 4시가 지난 시각이었기 때문에 방사선과는 다소 한 산했고, 주 방사선 촬영실 중의 하나는 비어 있었다. 로빈스가 사진을 찍고 필름 을 자동현상기에 넣어 현상하기 위해 암실로 들어갔다. 크리스틴이 기다리는 동 안 마틴은 복도 가운데 필름이 현상되어 나올 구멍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쥐 구명을 지키는 고양이 같군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데니스가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도 내가 고양이가 된 것 같아. 산부인과에서 마리노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를 발견했어. 그래서 사진에 똑같은 게 나타날까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 는 거야. 그건 그렇고, 오늘 오후 혈관조영한 것은 어떻게 됐어?" "아주 좋았어요. 혼자 일하게 맡겨줘서 고마워요."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 순간 크리스틴의 X-레이 사진이 끝을 드러내더니 롤러에서 밀려나와 밑에 있는 받침대에 떨어졌다. 마틴은 사진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가로채 판독상자 에 끼웠다. 그는 손가락을 크리스틴의 귀 근처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자세히 살 폈다. "제기랄, 아무것도 없잖아." "무슨 소리예요? 환자에게 정말로 이상이 있기를 바라는 거예요?" "당신 말이 맞군. 아무한테나 이상이 있기를 원한다는 게 아니라 X-레이 사진 을 정확히 찍을 수 있는 환자가 필요할 뿐인데." 로빈스가 암실에서 걸어나왔다. "사진 더 찍으실 거예요, 필립스 박사님?" 마틴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필름을 집어들고 크리스틴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 로 들어갔다. 데니스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좋은 소식이오." 마틴이 필름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당신의 X-레이 사진은 정상이에요." 그러고 나서 마틴은 크리스틴에게 만일 증상이 계속된다면 일주일쯤 후 다시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그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의문나는 사항이 있 으면 연락하라고 자신의 직통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크리스틴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현기증이 일 어나 그녀는 X-레이 테이블을 의지해야 했다. 방이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도 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마틴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크리스틴은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먼젓번하고 똑같은 현기증이에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그녀는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냄새를 다시 맡았다는 사실만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기괴한 증상이었던 것이다. "괜찮아질 거예요. 이젠 집에 가봐야겠어요." 마틴이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계속 괜찮다고 했다. 엘리베 이터 문이 닫힐 때 그녀는 손을 흔들면서 애써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젊고 매력적인 아가씨의 전화번호를 아주 교활하게 얻어내는군요." 마틴의 연구실로 돌아오면서 데니스가 말했다. 마틴은 모퉁이를 돌면서 헬렌 이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데니스가 연구실로 들어서면서 대번 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게 다 뭐예요?" "아무 말도 말아 줘." 마틴은 잡동사니가 쌓인 책상으로 걸어갔다. "내 생활은 이제 엉망이 되어버렸어. 아무리 훌륭한 조언도 아무 소용이 없다 구." 그는 헬렌이 남기고 같 쪽지부터 집어들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골드블라트 와 드래이크로부터 중요하다고 표시된 전화가 와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종이조 각들을 응시하다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쪽지들은 나풀나풀 원을 그리며 천 천히 떨어졌다. 그는 텀퓨터를 켜고 크리스틴의 두개골 필름을 집어 넣었다. "여,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마이클스가 문간에 나타났다. 그는 방안의 잡동사니들을 보고 아침에 왔던 이 후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음을 직감했다. "자네가 묻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라면 대답은 ‘ 좋아’야. 아직 몇 장 밖에 안 넣어 봤지만 100퍼센트의 정확성을 보이고 있어." "굉장하군요." 마이클스가 손뼉을 쳤다. "굉장한 정도가 아니야. 거의 환상적이라구. 여기에서 제대로 돼가고 있는 것 은 이 컴퓨터 밖에 없어. 여기에 더 시간을 못내서 안타까울 뿐이지. 불행히도 병원 일로 제대로 못하고 있어. 하지만 오늘밤 집에 안가고 여기서 가능한한 많 은 필름을 분석해 볼 생각이네." 마틴은 데니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얼 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읽으려고 했지만, 그때 프린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자료를 뽑아내는 것이 들려 그쪽으로 주의가 쏠렸다. 마이클스가 그것을 보고 다가와 마틴의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넘겨다 보았다. 데니스가 보기에 그러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대견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같았다. "내가 방금 크리스틴 린키스트라는 젊은 여자 환자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걸 판독하고 있는 거야. 내가 다른 환자에게서 발견되었다고 얘기한 것과 같은 이 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더군." "그 이상 하나에만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예요? 내 생각으로는 프로그램 자체에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연구의 재미는 나중에 즐겨도 늦 지 않다구요." "자네는 의사가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 우리가 이 작은 컴퓨터를 의학계에 내 놓기만 하면, 중세 카톨릭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직면했던 것과 비슷 한 상황이 벌어질 거야. 그쪽에서 고집 불통으로 나와도 컴퓨터가 발견한 새로 운 방사선 소견을 제시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게 아닌가." 프린터가 멈추자 마틴이 보고서를 뜨ㅌ어냈다. 그의 눈동자가 종이 위로 신속 히 움직이다가 어느 한 문장에서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믿을 수가 없군." 마틴은 필름의 다른 부분을 모두 가리고 두개골 뒤쪽의 작은 부위만 보이게 했다. "여기 있다! 하느님 맙소사! 환자가 같은 증상을 갖고 있다고 했지. 컴퓨터가 다른 환자의 판독결과를 기억하고 있다가 여기에 있는 아주 작은 이상을 집어낸 거야." "다른 필름들에서도 아주 희미하게 보였어요." 데니스가 마틴의 어깨 위로 넘겨 보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두정이나 측두엽 부위가 아니라 후두엽의 끝부분에 있군요." 질환의 초기 단계일지도 몰라." "질환이라니요?" 마이클스가 물었다. "확실히 모르지만 이것과 같은 음영 이상을 보이는 몇 명의 환자가 다발성 경 화증이 아닌가 싶어. 아직은 어림짐작일 뿐이야."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마이클스가 말했다. 얼굴을 필름에 아주 가까이 들이대고 보아도 마찬가지였 다. "이건 구조에 관한 문제야. 차이를 구별할 수 있으려면 먼저 구조가 어떤 것인 지부터 알아야 하네. 내 말을 믿어. 분명히 있다니까. 컴퓨터는 없는 말을 지어 내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내일 그 환자를 데려다가 저 부위에 초점을 맞춰 자 세히 찍어 봐야겠어. 더 정확한 필름에서는 자네도 볼 수 있을 걸세." 마이클스는 자신으로서는 이상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카페테리아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사양하고 그는 그만 가봐야겠다고 했다. 그는 문간에 서서 다시 한 번 마틴에게 컴퓨터로 엣날 필름 을 분석하는 데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달라고 요청하고, 지금은 이 컴퓨터가 온갖 종류의 새로운 방사선 소견을 접해야 할 때이며, 각각의 이상에 매달려 시 간을 허비한다면 프로그램상의 오류를 고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 로 손을 흔들고 방을 나갔다. "저분도 참 열심히네요." 데니스가 말했다. "그러는 것도 당연해. 이 프로그램을 처리하기 위해서 보다 더 효과적인 새로 운 기억처리장치를 설계했다고 하더군. 머지 않아 준비가 될거야. 나 때문에 계 획에 차질이 생기면 안되잖아." "그래서 오늘밤에 일을 하겠다는 말이에요?" "물론이지." 마틴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제서야 그녀가 오늘 얼마나 지쳐있는지를 깨달았다. 그 전날 거의 한숨도 못잔 데다가 오늘도 종일 일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저녁에 우리집에 와서 저녁식사라도 하고, 어젯밤 시작한 걸 끝마칠 수 있기 를 바랬는데..." 마틴은 그녀의 노골적인 유혹에 금방 마음이 움직였다. 낮 동안의 분노와 좌 절을 성적으로 해소하는 것도 훌륭한 치유방법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가 인턴 시절 긴장을 풀기 위해 간호사에게 했던 것처럼 다루기에는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난 일을 마저 해야 해. 피곤할텐데 집에 일찍 들어가지 그래. 늦게라도 가게 되면 전화하고 갈게." 그러나 데니스는 막무가내로 그가 방사선과 전임의들이 구술해 놓은 현관조영 사진과 단층활영 사진을 모두 검토할 때까지 가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유겼다. 비록 보고서에 자기 이름이 실리지 않더라도 마틴은 자기 부서에서 실시한 것은 모두 점검하는 버릇이 있었다. 7시15분 전이 되었을 때 기지개를 켰다. 그가 고개를 돌려 데니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외면을 했다. "왜 그러지?" "당신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요." 마틴은 그녀의 태도가 의외라 여기며 손을 내밀어 그녀의 턱을 들어올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화면의 스위치를 내린지 불과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에 그녀가 연구에 몰두한 학자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한 사람 의 여성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마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그녀가 너무 피곤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렀다.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그녀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싶다며 나중에 만나자고 인사를 한 뒤 간단한 입맞춤을 남기고 한 마리 새처럼 방을 나가버렸 다. 데니스에게는 마틴의 두뇌 회로에 합선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 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시 동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나서 크 리스틴의 전화번호를 꺼내 다이얼을 돌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는 편지 뭉치를 카페테리아로 가지고 가서 저녁식사를 하며 교정을 보기로 햇다. 마니ㅌ이 구술과 편지 교정을 마친 것은 9시 15분이었다. 그 동안 그는 흠없 이 잘 작동하는 컴퓨터에 25장의 옛날 사진들을 더 분석해 볼 수 있었다. 그가 일하는 동안 랜디 제이콥스가 분석을 끝마친 필름 봉투를 자료실에 반납하느라 계속 들락거렸지만, 그때마다 다른 필름을 수백 장씩 더 가져왔기 때문에 마틴 의 연구실은 전보다 더 어수선해지고 발디딜 틈도 없게 되었다. 마틴은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들어 크리스틴의 집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벨이 두번째 울릴 때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걱정할 일은 아니예요. X-레이 사진을 자세히 검토해보니 아주 작은 부위에 대해서 좀더 면밀한 관찰을 해볼 필요가 있더군요. 괜찮다면 내일 오전쯤에 다 시 와줄 수 있겠어요?" "아침에는 안돼요. 이틀 동안 내리 수업을 빼먹었거든요. 더 빠지면 안될 것 같아요." 그들은 3시 30분으로 약속을 정했다. 마틴은 그녀가 병원에 도착하면 그의 연 구실로 곧장 오면 되니까 기다리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 았다. 전화를 끊고 마틴은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그날 있었던 기분 나쁜 일들을 하 나씩 떠올렸다. 매너하임과 드래이크에 대해서 화가 나기는 하지만, 원래 그들의 성격이 그러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골드블라트에게 당한 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스승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런 가혹한 인신 공격을 받을 줄 은 미처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마틴은 자신이 4년 전 신경방사선과의 부과장으 로 임명될 때 골드블라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이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따. 골드블라트의 행동 뒤에 숨은 것이 전 산화 작업에 대한 적대감이라면 마틴이나 마이클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곤란 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틴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만들었던 새로운 방사선 소견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의 명단을 찾아보았다. 새로 운 진단 기술을 확실히 해놓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그 는 명단을 찾아내서 크리스틴 린키스트의 이름을 추가했다. 새로운 컴퓨터 장치에 대한 골드블라트의 반대 의사를 감안하더라도, 그의 태 도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그가 매너하임과 드래이크와 결탁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가 만일 매너하임의 편에 섰다면 무언가 상식을 벗어난 일이 진행중이라는 것을 말했다. 무언가 아주 기괴한 일 이. 마틴은 의자에 앉아 명단을 들췄다. 마리노, 루카스, 콜린스, 멕카시, 그리고 린 키스트 맥카시의 이름 뒤에 그는 ‘신경외과 실험실’이라고 섰었다. 매너하임 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는다면 그도 그렇게 못할 까닭이 없었다. 마틴은 어 두침침한 연구실을 벗어나 불이 환하게 밝혀진 복도를 나섰다. 투시검사실을 향 해 걸어가다가 그는 찾던 것을 발견했다. 잡역부들이 쓰는 청소도구였다. 자주 늦게까지 알하곤 하던 마틴은 청소부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았다. 가끔 그들은 그가 방안에 있는데도 들어와서 청소를 하며, 그에게 책상 밑에 몰래 숨 어 사는 것 같다고 농담을 던지지도 했었다. 20대 중반의 남자 두 명과 그보다 더 나이를 많이 먹은 여자 두명으로 구성된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남자 가운데 하나는 백인이었고, 또 하나는 흑인이엇으며, 여자들은 각각 푸에 르토리코, 아일랜드 여자였다. 병원에서 일한 지 14년째 되는 그녀는 그들의 감 독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마틴은 투시검사실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을 찾았다. 마틴은 그녀를 불렀다. "디어리, 감깐만요." 디어리(귀여운 사람이라는 뜻의 애칭)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부르는 별명이었 다. "신경외과 실험실에 들어갈 수 있나요?" "마취제 캐비넷이 있는 방만 빼고는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지요." "대단하군요.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하려는데... 들어줄래요?" 그는 신경외가 실험실에 있는 표본에 대해 X-레이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그 녀가 가지고 있는 열쉬를 15분 동안만 빌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단층활영을 무료로 받게 해주겠다고 했더니 디어리는 반색을 했다. "아무에게도 못주게 되어 있지만, 박사님 부탁이니까... 우리가 방사선과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들려주세요. 20분이면 되겠죠?" 마틴은 지하 터널을 통해 왓슨연구소 건물로 갔다. 그는 아무도 없는 로비에 서 문이 열려 있는 엘레베이터에 올라타고 가려는 층의 단추를 눌렀다. 엘리베 이터 안에 갇히자 인구가 많고 거대한 도시 한복판에 자리잡은 바쁜 병원 건물 안에 있는데도 혼자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구원들은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시간엔 텅비어 있었 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면서 통로에서 나는 바람소리 뿐 이었다. 문이 열리자 그는 조명이 희미한 넓은 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상구를 통 해 들어가자 건물 저쪽 끝까지 길게 뻗은 복도가 앞에 펼쳐졌다. 전력을 아끼기 위해서 전등은 거의 꺼져 있었다. 디어리가 그에에 통째로 넘겨준 열쇠꾸러미의 짤랑거리는 소리가 빈 건물 안에 울려펴녔다. 신경외과 실험실은 복도 왼쪽으로 끝에서 세번째에 있는 방이었다. 마틴은 그 방에 가까이 갈수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실험실로 들어가는 문은 가운데 젖 빛 유리가 끼워진 철제문이었다. 마틴은 어깨 너머로 흘낏 뒤를 돌아보고 열쇠 를 자물쇠에 기워넣었다. 문이 슬며시 열리자 그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마틴은 지레 겁을 먹고 잔뜩 긴장한 자신을 비웃었지만, 그의 행동에 비 해서 초조함이 더 가중되기만 할 뿐 아무 소용 없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을 좀 도둑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가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탁하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렀다. 창백한 형 광등 불빛이 넓은 실험실 안을 가득 배웠다.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작업대에는 세면대와 가스 분사기 , 그리고 그위로 실험용 유리기구들을 올려놓은 선반이 갗추어져 있었다. 한쪽 끝에는 일반 수술실의 3/4밖에 안되지만 수술등과 작은 수술대 , 심지어 마취기구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인 수술실의 면모를 갖춘 동물 수술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술실에는 타일이 깔려 있다는 것을 빼고 수술실과 실험실은 따로 구 분되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설비들이었고, 매너 하임에게 학문적인 명성을 안겨주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마틴은 뇌 표본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 한곳에 모아서 보 관할 거라는 생각에 큰 캐비넷들을 뒤져보았다. 그는 빈 캐비넷 하나를 열어보 다가 수술실 뒤편으로 또 하나의 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철망이 부착된 투 명한 유리창 너머로 컴컴한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문 바로 뒤에 유리창이 올 려진 선반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유리병 속에 있는 것은 보존 용액에 담겨진 인간의 뇌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틴은 더초조해졌다. 뇌들을 보는 순간 그는 맥카시의 뇌 를 찾아내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문을 밀고 들어가 이 름표를 재빨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때 지므ㅇ의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왼쪽으로 짐승우리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얼핏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각각 환 자 이름과 번호 , 그리고 날씨가 씌어진 유리병에만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쪽에 는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그는 병에 씌어진 날짜가 환자의 사망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진열대를 따라 계속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유리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 한 걸음 한 걸음 옮길때마다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했다. 맥카시 의 것은 진열대의 맨끝 출구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방을 잡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마틴은 작은 방안에 가득 울려퍼지는 비명소 리에 동물이 오싹해지고 심장이 얼어붙은 듯했다. 곧이어 쇠끼리 부닺히는 소 리가 들려왔다. 마틴은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뒤로 섰지만 다리가 휘청거려 벽에 어깨가 부딪쳤다. 비명소리가 한번 더 공기를 찢었지만 아무것 도 덮쳐오는 것은 없었다. 대신 우리에 갇힌 원숭이 한 마리가 마틴의 시야에 들어 왔다. 원숭이는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새까만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으며 입술은 말려 올라가 이를 드려내고 있었다. 드 러낸 이빨중 두개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의 쇠창살을 물어뜯다. 그랬는지 부러져 나간 상태였다. 원숭이의 머리 위에서는 색색 가지의 스파게티 같은 전 신 다발이 삐죽이 솟아 있었다. 마틴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매너하임과 그의 부하들이 만들어 놓은 분노에 찬 괴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매너하임의 최근 관심분야가 뇌에서 문노의 반응과 연관된 부위를 정확히 알아내는 데 있다는 것은 병원내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른 연구원들은 그누구도 매너하임을 제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차츰 적용되면서 마틴은 우리가 하나뿐이 아니라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에 가지 각색으로 손상을 입은 원숭이들이 우리마다 한 마다씩 갇혀 있었다. 몇 마리는 아예 두개골 뒷면을 전부 다 투명한 유리구로 대체하고 그사이로 수백 개의 전극을 꽂아 놓았다. 어떤것은 뇌의 일부를 절개 했는지 행동이 몹시 유순했다. 마틴은 뭄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쥐고 시 끄럽게 뒤흔드는 원숭이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일부가 절개된 맥카시의 뇌가 담긴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병이 있던 뒤편에 고무줄로 묶어 놓은 현미 경 슬라이드들이 눈에 띄었다. 마틴은 그것도 집어 들고 방을 나가려고 실험실 의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이 다시 닫히더니 두런거리는 소리가 뒤 따랐다. 마틴은 공포에 휩싸인 채 유리병과 슬라이드와 열쇠 뭉치를 놓치지 않게 꽉 쥐고 동물실으 ㅣ뒷면을 열었다. 그의 앞에 구불구불한 각도로 끝도 없이 밑으 로 이어진 비상계단이 나타났다. 마틴은 계단 꼭대기에 멈취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상문이 찰칵하고 닫히기 직전 그는 문을 붙잡고 다시 실험실로 들여왔다. "마틴 필립스 박사님 아니세요?" 깜짝 놀란 경비원이 그를 알아 보았다. 그의 이름은 피터 셔베이언으로 병원 내 농구팀 선수 였으며 , 마틴과도 늦은 밤에 대화를 몇번 나눈일이 있었다. "여기서 뭘하고 계신 겁니까 ?" 마틴은 굳어진 표정으로 말하고 표본병을 들여보였다. "아아..." 셰베이언은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저는 여기서 일하기 전에는 정신과 의사들만 괴짜인 줄 알았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마틴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내디디며 말했다. "이 표분에 X-레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예요. 오늘 인수하기로 돼 있었는데 받지 못해서 ..." 그는 얼굴을 알지 못하는 다른 한 사람의 경비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 "여기 오실 때는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셔야 합니다. 현미경 몇대를 도난 당한 이후로 경비가 부쩍 강화되었거든요." 마틴는 야간 근무를 하는 방사능 촬영기사를 한 사람 보러내 응급실의 외상환 자에 대해 할 애기사 있으니 신경방사선과로 오라고 했다. 마틴은 혼자서 맥카 시의 뇌를 종이판 위에 놀려놓고 직접 X-레이 사진을 찍어 보았으나 계속 실 패했던 것이다. 아무리 해봐도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아 뇌의 내부를 전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방사선 투과량을 낯추어 보기도 했지만 별 도운이 되지 못했다. 불러온 기사는 뇌를 한 번 보더니 얼굴이 헬쓱하게 질려서 손을 댈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가버린 뒤 마틴은 문제가 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뇌를 포름알데 하이드에 들어 있었다 해도 내부조직이 방사선 사진으로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 로 부패한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마틴은 뇌를 유리병에 도로 집어 넣고 슬라 이드를 챙겨 워ㅅ층의 병리학과로 향했다. 병리과 연구실은 잠겨 있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현미경을 훔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로 오라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검실의 문 을 열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각각에 구술장비가 옆에 딸린 현미경들 이 쭉 늘어서 있는 긴 중앙 탁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처음으로 자기자신 의 피를 현미경으로 보던 때를 되살렸다. 그때는 백혈병이 아닐까 하고 몹시 떨었던 기억이 났다. 의대생들이 시달리는 갖가지 상상 질환 가운데 그가 겪지 않은 병은 하나도 없었다. 병의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그는 분젠버너 위에서 비이커에 담긴 물이 팔팔 끊 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틴은 유리병과 슬라이들르 내려 놓고 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몸집이 몹시 비대한 병리과 레지던트 하나가 어기적거 리며 들어왔다. 방에 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지 바지 지퍼를 올리면 서 문에 들어서던 그는 마틴을 보고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반즈 였다. 마틴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부탁을 하나 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 다. "무슨 부탁인데요 ? 빨리 부검을 마치고 여기서 나가려던 참인데." "슬라이드가 몇 장 있는데요. 잠깐만 봐줄 수 있겠어요 ?" "여기 현미경도 많는데 , 직접 하면 되잖아요 ?" 다른 부서에서 일한다 해도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시건방지다는 생각 이 들었지만 마틴은 화를 꾹 늘러 참았다. "해본지가 오래 되놔서 , 게다가 이건 뇌조직인데 난 뇌에는 전혀 익숙치 않거 든요." "그럼 내일 아침에 신경병리과 사람항테 부탁하세요." 뚱뚱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친절하다고 생각하는 마틴의 선입견이 이 친구에 의해서 확고히 입증되어 지는 순간이었다. 반즈는 마지못해 슬라이드를 받아서 현미경 밑에 올려 놓고 한동안 들여다 보 더니 다른 슬라이드를 보두 집어서 보았다. 그가 슬라이드를 모두 검사하는데 10분이나 걸렸다. "흥미로운데 , 여기 이것 좀 보세요." 그는 마틴이 볼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주었다. "뻥 뚫린 부위가 보이죠 ?" "네." "전에 신경세포가 있던 자리예요." 마틴은 반즈를 바라보았다. "이 빨간 색연필로 표시한 슬라이드는 모두 뉴런(신경세포의 단위)이 없거나 기형인 부위가 있는 것들이에요. 흠미로운건 염증 소견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에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원인불명의 '다발성 , 분리성 누런 괴사' 라고 기술한 수밖에 없겠군요." "추측할수 있는 원인이라도 없나요?" "알고 싶지는 않아요." "다발성 경화증은 어떨까요 ?" 반즈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죠. 다발성 경화증은 백질에 주로 병변이 나타나지만 회백질에 나타나는 경우도 가끔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이렇게 보이지는 않아요. 확실한 건 마이엘린 염색을 해봐야 알겠지만요." "칼슘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요 ?" 방사선 음영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은 그리 많지 않으며 칼숨은 그 중의 하나 였다. "칼슘으로 의심되는 것은 눈에 안 띄는데요. 그것도 특수 염색을 해봐야 하겠 지만요." "하나만 더 물어 볼게요. 후두엽에 대한 슬라이드를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유리병 위를 툭툭쳤다. "슬라이드만 봐달라고 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그랬죠. 뇌를 전부 봐달라는 게 아니예요. 잘라주기만 하면 돼요." 지독히 괴로운 하루를 겪은 마틴은 게으른 병리과 레지던트와 말다툼할 기분 이 아니었다. 반즈가 그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리병을 들었 다. 마틴은 부검실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반즈는 국자 같이 생긴 기구로 뇌를 포름알데하이드 용액으로부터 꺼내 싱크대 옆의 스 테인레스 스틸 작업대 위에 올려 놓았다. 큰 해부용 칼을 꼬나든 반즈는 마틴 에게 어느 부위를 원하는지 물었다. 그는 마틴이 가리키는 부분들을 1/2인치 크 기로 잘라내어 파라핀 용액에 담갔다. "박편은 내일 다 될거요. 어떤 종류의 엽색을 할까요 ?" "생각나는 것 모두 해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 게 있는데. 야간 시체실에서 일하는 인부 알아요?" "워너 말인가요." 마틴이 고개를 끄떡였다. "잘은 몰라요. 좀 괴짜이는 해도 믿을 만하고 일도 잘해요. 여기 온지 몇 년 됐어요." "그 사람 , 뇌물 같은 거 받아요 ?" "모르겠는데요. 그 사람한테 뭘 바라고 뇌물을 주겠어요?" "뭐든 될 수 있죠. 가령 , 성장호르몬을 채취하기 위해 뇌하수체라든가 , 금이 빨 , 아니면 기타 특별한 부탁으로." "모르겠어. 그런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요." 신경외과에서의 가슴 졸이는 경험을 겪은 뒤라 , 마틴은 지하 시체실로 향하 는 빨간 선을 따라가면서 줄곧 불안에 떨었다. 시체실 바깥의 거대하고 어두운 동굴같이 생긴 방은 무시무시한 괴기 영화에서 사용되는 무대장치처럼 보였다. 소각로의 문에 끼워진 수정유리가 외눈박이 괴물의 눈처럼 어둠속에서 빛났다. "제발 , 마틴. 너 도대체 왜 그래 ?" 마틴은 자꾸만 위축되는 스스로에게 자신을 갖도록 타일렀다. 시체실은 어제 보았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전구가 빠져나간 채 전선에 매달려 축 늘어 진 전등갓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섬뜩한 광경을 연출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열린 냉동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에 차가운 김이 서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워너!" 마틴이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타일이 발라진 낡은 방안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 응답이 없길래 방안으로 들여서는데 등 뒤에서 문이 저저로 다ㄷ 혔다. 그는 다시 한번 크게 물렀다. "워너!" 고요한 가운데 들리는 거라고는 수도 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을 소리 뿐이었 다. 마틴은 조심조심 냉동실로 다가가 살며시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워너가 시체를 하나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동침대에서 떨어진 벌거벗은 뺏 뺏한 송장을 도로 제 위치에 올려 놓으려는데 자꾸 침대가 움직여서 애를 머근 모양이었다.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마틴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가만히 지 켜보기만 했다. 마침내 워너가 시체를 침대 위에 도로 눕히는데 성공했을때 그 는 냉동실 안으로 들어갔다. "워너 !" 그의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들렸다. 워너는 무릎을 구부리더니 밀림에 사는 동물이 먹이를 습격할 때처럼 양손을 치켜들렀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잠깐 애기 좁 합시다." 그의 권위적인 목수리를 내려고 했지만 자기가 듣기에도 너무 약했다. 시체 들에 둘러싸인상항에서 자신감이 눈녹 듯 사라진 것이었다. "당신의 입장을 이해하니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약간의 정보가 필요 할 뿐이에요." 워너는 마틴을 알아보고 안도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숨을 가쁘게 내쉼 때마다 허연 입김이 서렀다. "난 리샤 마리노의 뇌가 필요해요. 누가 무슨 이유로 그걸 가져갔는지는 상관 없어요. 연구 대상으로서 한번만 보려는 거예요." 워너는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만 아니 었으면 , 그도 주위의 다른 시체와 마찬가지로 보였을 것이다. "돈을 주겠소." 그는 평생 아무에게도 뇌물을 줘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 "100달러." "리사 마리노의 뇌에 관해서 난 아는 바가 없소." 마틴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항에서는 더이상 말할 용 기가 나지 않았다. "알았어요. 난 방사선과에 있으니까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나거든 내개 전화해 주시오." 그는 돌아서서 냉동실을 걸어나왔다. 그러나 복도로 나왔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엘리베이터로 정신없이 달음질치고 있었다. 마틴은 데니스의 아파트 바깥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문패들을 훑어보았다. 데 니스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워낙 많은 가구가 살고 있어 서 올 때마다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그는 검은 단추를 누른뒤 철컹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 현돤문 손잡이를 붙들고 있었다. 아파트 안은 모든 집에서 저녁식 사로 양파튀김을 요리하는지 양파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마틴은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 다른 층에 가 있다면 언제 1층 로비에 도착 할지 알 수 없었다. 데니스는 언젠나 3층에서만 살 것을 고집했고 마틴은 층계 오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층을 남겨놓고 그는 자기가 얼마나 지쳐 이쓴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정말 길고도 끔찍하 하루였다. 데니스는 다시 한번 변신해 있었다. 목욕을 한 뒤 잠깐 눈을 붙였을뿐이라고 했는데도 전혀 괴로한 기색이 안 보였다. 머리핀을 꽂지 않은 그녀의 윤기나는 머릿결이 풀어헤져서 유연한 물결 모양을 그리며 늘어 뜨려져 있었다. 그녀는 공단으로 지은 분홍색 속옷을 짧은 바지에 받쳐 입고 있었다. 마틴은 옷으로 가려진 부분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여성적인 매력을 지적인 능력으로 소화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 어떻게 차가운 병원의 이미지를 그렇게 순식간에 벗어버 릴 수 있는지 늘 신기해 했다. 그녀는 두가지를 놀랍도록 균형을 이루어 나가 고 있었다. 그들은 문간에서 포옹을 하고 팔짱을 낀 채 곧장 침실로 향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필요없었다. 마틴은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처음에도 그가 하 는 대로 가만히 있던 그녀가 곧 그에게 합세했다. 두사람은 가지고 있는 열정 을 보조리 불살라 서로에게 기쁨을 주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은 친밀감을 만끽하며 한동안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서로 상대방에게 허락한 만족을 언제까 지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마틴이 몸을 팔꿈치로 받치고 반쯤 일으켜 세워 그녀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콧날과 입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갔다. "내생각에 이제 우리 사이는 오나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 같아." 마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몇 주 전부터 증상은 있었는데 바로 이틀 전에야 이 병의 확실한 진단을 내 릴 수 있었어. 당신을 사랑해. 나의 데니스." 데니스에게 그 낱말이 그토록 절실한 의미를 품고 다가온 적은 없었다. 마틴 은 그녀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는 애기했어도 , 사랑한다는 말은 입 밖에 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들에게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 마틴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겁이 나. 병원 일 때문에 관계가 깨어졌던 과거가 다시 되풀이 될까봐 두려운 거야." "그렇지 않아요." "그래 , 의학이라는 것은 인질을 붙잡고 끊임없이 요구만 하는 그런 존재야." "하지만 전 그런 요구를 이해할 수 있어요." "난 당신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확신 못해. 아직 까지는 ..." 그는 그말이 매몰차게 들릴 것을 알았지만 그녀가 지금은 의사라는 직업에 대 해 희망을 품고 있어도 , 한 부서를 운영하면서 매일 거듭되는 고된 일이 생쥐 들의 경주 같은 다른 직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어야 했다. 게 다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골드블라트의 도전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그의 걱정은 더이상 단순한 가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저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해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혼 이후 당신은 변했어요. 그 당시에는 일에서 자기 성취를 이루려는 출세지향주의에 빠져 있 었는지 몰라도 이젠 바뀌었어요. 당신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더욱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라고 믿어요."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마틴은 데니스의 통찰력도 놀라웠지만 스스 로의 솔직성에 더 놀랐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데니스였다. "단 하나 제가 이해할 수 없건 당신이 병원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고 싶다 면서 왜 연구에만 그토록 집착하느냐 하는 거예요." 마틴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당신은 내게 성취해야 할 목표가 되었고 , 연구는 당신과 함께 있을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 내가 의학으로부터 얻을려고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그들은 입을 맞추며 새롭게 표현된 애정을 서로 확인했다. 그러나 서로의 팔 을 베고 누워 있으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이젠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데니스가 이를 닦으러 간 동안에 마틴은 린 앤의 수수께끼 같은 실종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는 닫혀진 욕실 문을 흘낏 쳐다보고 병원에 전 화를 걸어 담당 간호사에게 린 앤이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는데 곧바로 다른것으 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말했다. 그 간호사는 린 앤의 이송이 모든 입원서류 작업을 마친 직후에 일어났던 일 이라 쉽게 기억을 해냈다. 마틴은 환자가 어디로 보내졌는지 아느냐고 물었지 만 그녀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마틴은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마틴은 침대에 누워 데니스의 등을 껴안고 옆으로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 다. 그는 아까 머리에 전극이 꽂힌 원숭이들의 끔찍한 몰골을 본 사실을 이야 기하며 , 매너하임이 얻고자 하는 정보가 그런 희생을 치를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아느냐고 물었다. 잠이 들락말락 하던 데니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이미 들뜨기 시작한 마틴의 마음은 낮에 방문했던 산부인과 외래 를 떠올려고 있었다. "이봐. 병원에 있는 산부인과 외래에 가본 일 있어 ?" 마틴이 팔꿈치를 데니스의 등에 대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에 그녀는 잠에 서 깨어났다. "아뇨 , 없어요." "오늘 거기 갔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곳이더군." "그게 무슨 소리예요 ?" "나는 몰라.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산부인과에 대해 많은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봐." "참 재미 있군요." 데니스가 조롱조로 쏴붙이더니 그에게서 떨어져 등을 돌리고 누웠다. "내 부탁 좀 들어주지 않겠어 ? 그곳을 한 번 알아보는 거야." "환자 행세를 하란 말인가요 ?" "아무렇게 하든 상관없어. 그곳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을 뿐이 야." "하긴 정기검사를 받을 때가 지났어요. 거기서 받으면 되겠네요. 알았어요. 내일 전화해 볼게요." "고마워." 마틴은 이렇게 말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데니스가 눈을 뜨고 시계를 집어들 었을 때는 아침 7시가 넘어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것을 보고 파랗게 질렸다. 마틴이 늘 6시 이전에 일어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명종을 맞추어 놓지 않았는데, 그가 그만 늦잠을 자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이 불을 젖히고 욕실로 뛰어들어 샤워기를 틀었다. 마침 눈을 뜬 마틴의 시야에 마 루로 뛰어나가는 그녀의 벗은 등이 들어왔다. 하루의 시작으로서는 기가 막힌 영상이었다. 늦잠은 마틴에게 이전의 삶에 대한 반항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그 는 침대의 온기를 마음껏 즐기며 늘어지게 기지게를 켰다. 그는 잠을 좀더 잘까 하다가 데니스와 함께 샤워를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욕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미 샤워를 마쳐 장난을 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샤워실로 들어서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오전 8시에 CPC(임상-병리 토론회)에서 X-레이 사진에 관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말을 퉁명 스럽게 내뱉았다. "늦은 것에 대해 대신 변명을 해줄테니까 다시 한 번 사랑을 나누는게 어때?" 그가 노래를 읊조리듯 속삭였다. 데니스는 젓은 목욕 가운을 마틴의 머리에 뒤집어 씌우고 욕조에서 빠져나왔 다. 그녀는 물기를 닦아내면서 물 쏟아지는 욕탕을 향해 마틴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일찍 끝나면 저녁을 지어 놓을게요." "난 뇌물 같은 거 안 받아. 멕카시의 뇌 표본이 어떻게 됐는지 병리과에다 알 아봐야 하고, 크리스틴 린키스트에 대한 다윈 단층촬영과 컴퓨터 단층촬영도 실 시해야 돼. 거기다 옛날 두개골 필름들을 컴퓨터로 분석해애 하고, 오늘이 내 연 구에서 제일 중요한 날이야." "당신은 너무 고집이 센 것 같아요." "집착이 강하지." "산부인과 외래에는 언제 가는 게 좋을까요?" "가능한 한 빨리." "알았어요. 내일로 약속을 정할게요." 데니스가 헤어 드라이어로 머리를 만지는 동안에는 대화가 불가능했다. 마틴 은 욕조에서 나와 데니스의 1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했다. 두 사람은 비좁은 욕 실에서 서로에게 방해가 안되려고 이리저리 춤을 추어야 했다. 데니스가 거울을 바싹 들여다 보고 눈화장을 하면서 물었다. "X-레이 사진의 음영 변화가 무엇에 의해서 생긴 거라고 생각하세요?" "도무지 모르겠어. 그래서 병리학과에 조직표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거 야." 마틴이 자신의 숱 많은 금발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찾아내는 게 다발성 경화증 같은 특정 한 질병에 막연히 결부시키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 말이 맞아.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착상은 차트에 근거한 거야. 눈 감고 칼 휘두르는 격이지. 하지만 그거 알아? 당신 덕에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 다구." 마틴은 터널을 통해 예날 의대 건물로 들어섰다. 도로 쪽에서 들어가는 입구 는 이미 오래 전에 폐쇄되어 있었다. 그는 로비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자기 도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희망만으로 가득찬 미래를 꿈꿔었다는 감상에 빠졌 다. 그는 낡아빠진 붉은 빛 가죽을 댄 짙은 색의 낯익은 나무문 앞에서 잠시 발걸 음을 멈추었다. 정교한 글씨로 의과대학이라고 씌어진 부분은 아무렇게나 못질 해 놓은 판자조각으로 훼손되었으며, 그 밑에 압정으로 고정된 두꺼운 판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의과대학은 버거관으로 이전했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낡은 문을 들어서자 다 떨어져 나간 실내 장식물 이 보였다. 철거도 마치기 전에 예산이 바닥나 오크나무로 만든 벽판이 경매에 서 처분된 이래 황폐하게 버려진 현관이 있었다. 마틴은 쓰레기 틈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 예전에 안내실이었던 자리를 지나 휘어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위에서 현관을 바라보자 도로 쪽에서 들 어가는 입구에 빗장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문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마틴의 목적지는 계단식의 배로우 강의실이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해서 전산 과학과:인공지능 개발실이라고 쓰인 새로운 표지판을 발견했다. 마틴은 문을 열 고 쇠파이프로 이루어진 난간까지 걸어가 반원형의 강의실을 내려다 보았다. 의 자들은 모두 취워지고 없었으며 대신 그 자리에 온갖 종류의 장비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계단 밑으로는 마이클스가 마틴의 연구실로 가져 온 작은 컴퓨터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두 개의 커다란 장치가 있었다. 흰 가운의 소매를 걷어붙인 청년이 그 가운데 하나를 붙잡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전기 인두를, 다른 한 손에는 전선을 들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죠?" 그가 소리쳤다. "월리엄 마이클스를 찾는데요." "아직 안 왔어요." 청년이 연장을 내려놓고 마틴을 향해 계단을 올라왔다. "전활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마이클스가 오면 마틴 필립스에게 전화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아, 필립스 박사님이시군요,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전 칼 루드먼이 라고 합니 다. 마이클스의 대학원생입니다." 루드먼이 난간 위로 악수를 청해왔다. 마틴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처음 보는 신기한 장비들을 둘러보았다. "엄청난 설비로군요." 컴퓨터 연구실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마틴은 이렇게 대규모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이 안에 있으니까 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나는 전에 여기 있던 의대에 다녔는 데..., 61년도에 바로 이 강의실에서 미생물학을 들었었거든요." "지금은 우리가 최대한 활용하고 있지요. 의대 신축 공사비가 모자라지만 않았 어도 우리는 여기서 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람이 전혀 지나다 니지 않기 때문에 컴퓨터 작업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하죠." "미생물학 실험실이 아직도 강의실 뒤에 그대로 있나요?" "아, 그럼요. 사실은 우리가 기억장치 연구실로 사용하는 중인데 완전히 격리 돼 있어요. 컴퓨터 업계에 얼마나 스파이가 많은지 모르실 겁니다." "맞는 말이지요." 마틴의 호출기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호출기를 끄로 말을 이었다. "두개골 판독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어요?" "알고 말고요. 그게 우리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원형인 걸요. 여기선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럼 내 질문에 답변을 해줄 수 있겠군요. 필름의 음영을 분 석하는 서브루틴(註:subroutine:주 프로그램을 세분화한 각 부분별 프로그램)을 따로 뽑아낼 수 있는지 마이클스에게 물어보려고 했었거든요" "물론 할 수 있죠. 컴퓨터에게 요구만 하세요. 구두 닦는 것만 빼고 뭐든 해줄 테니까요." 8시 15분이 되자 병리과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현미경들이 줄지어 놓인 긴 작업대는 레지던트들로 꽉 찼다. 수술장으로부터의 냉동표본(註:frozen section;조 직검사를 빨리하기 위해 조직을 얼려서 처리한 후 바로 검사하는 방법) 의뢰가 15분 전부터 도착하고 있었다. 마틴은 좁은 연구실에서 35밀리 카메라가 위에 정착된 커다란 현미경 앞에 앉아 있는 레이놀즈를 찾아냈다. "시간 좀 내주겠나?" "그저지, 자네가 어젯밤 가져온 표본은 벌써 보았네. 차침에 벤자민반즈가 내 게 가져왔더군." 마틴이 빈정거렸다. "심술궂은 데가 있긴 해도 뛰어난 병리학자야. 게다가 난 그 친구가 곁에 있는 것이 좋다네. 같이 있으면 내가 훨씬 날씬해 보이거든." "슬라이드에서 뭐 찾아낸 거 있나?" "아, 여기 있다." 헬렌이 말했다. "2번 혈관조영실이 새 필름 전송장치를 들여놓느라 종일 가동을 못한대요." 마틴은 헬렌이 하는 말을 전혀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아날로그로인쇄된 자룔를 비교하면서 그는 필름의 이상 부이가 주위의 정상 부위보다 전반적으로 음영이 오히려 낮게 표시된 것을 알아냈다. 너무 변화가 미묘하여 포착하기 힘 든 것이었지만 음영이 더 높은 것으로 생각했던터라 놀라운 일이었다. 디지털로 인쇄된 자룔를 들여다보고 마틴은 그 까닭을 알았다. 디지털 형식에서는 주위보다 음영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가 굉장한 격차로 벌 어져 있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고, 그 때문에 그가 X-레이 사진에서 칼슘같은 고밀도 물질로 인해 미세한 반점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컴퓨터는 이상 부위가 정상조직보다 음영이 낮고 그래서 더 발게 나타 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X-레이가 더 쉽게 투과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틴은 병리과에서 본 신경세포 괴사를 떠올렸으나 X-레이 흡수 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이거 좀 봐요." 그는 디지털 인쇄 자료를 헬렌에게 보여주었다. 헬렌은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 를 끄덕이다 물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거죠?" "모르겠어, 만일..." 마틴이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만일 뭐가요?" "칼을 갖다줘요. 아무 칼이라도 좋으니까." 마틴은 갑지기 흥분한 사람처럼 말했다. 헬렌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피 주전자옆에 있던 땅콩 버터병에서 칼을 찾았다. 그이 연구실로 다시 들어서던 그녀는 기겁을 했 다. 마틴이 포름알데하이드 병에서 인간의 뇌를 꺼내 신문지 위에 올려놓고 있 는 것이었다. 판독상자에서 비치는 불빛에 낯익은 나선형의 덩어리가 밝게 빛났 다. 헬렌은 구역질을 참으며 마틴이 칼로 뇌 표본의 뒷부분을 얇은 조각으로 잘 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뇌를 포름알데히이드에 다시 집어넣고 베어낸 조 각을 신문지에 싸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토마스 박사의 부인이 척수조영실에서 준비가 다 되어 박사님을 기다 리고 계세요." 헬렌이 방을 나서는 마틴의 뒤에 대고 말했다. 마틴은 대답도 안하고 암실로 향하는 복도로 접어들었다. 눈이 암실의 희미한 붉은 조명에 적응하는 데는 몇 분이 걸렸다.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자 그는 아직 X-레이에 노출도지 않은 X-레이 필름들을 꺼내 뇌 조각을 그 위에 올려놓 고 위쪽 캐비닛 속에 놓었다. 그는 캐비넷을 테이프로 봉하고 쪽지를 붙였다. 미노출 필름. 열지 말 것! 필립스 바사. 데니스는 CPC가 끝난 뒤 대학 산부인과 외래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의사 라는 사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 그곳 사람들을 평가하기에 더 나을 것 같아 그냥 대학에 근무한다고만 했다. 그녀는 접수 간호사가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것에 약간 당황했다.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을 때는 약속을 정하기 전에 물어보는 것이 엄청나게 많아서 또 한번 놀랐다. 그들은 그녀의 산부인과 병력 이외도 전반적 인 건강상태와 심지어 신경 병력까지 물었다. "당신이 우리 병원에 오게 돼서 기뻐요. 오늘 오후에 빈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 내일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11시 45분에 올 수 있어요?" "그러죠." 데니스는 전화를 끊으면서 마틴이 왜 산부인과에 의심을 품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마틴은 판독상자에 걸린 척수조영사진을 가까이 들여다 보면서 정형외과 의사 가 토마스 부인의 허리에 해놓은 수술이 무엇닌지를 정확히 알아내려 했다. 요 추 제4번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척추궁 절재술을 받았음이 명백했다. 그때 마 틴의 연구실 문이 벌컥 여리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면 골드블라트가 들이닥쳤 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안경은 코 끝에 걸쳐져 있었다. 마틴은 뒤를 흘낏 돌아보더니 다시 필름만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의 그런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고드블라트의 화를 부채질했다. "무레하기 짝이 없구만." 그가 으르렁거렸다. "과장님은 노크도 없이 여기 들어닥치지 않았습니까. 저는 과장님의 사무실에 들어갈 때 예의를 지킨 걸로 기억하는데요. 과장님꼐 제가 한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예절을 따지는 사람이 남의 개인 재산에 손을 대나? 매너하임이 새벽에 전화해서 자네가 그이 실험실에 침입해 표본을 훔쳐갔다고 난리를 부렸단 말이 야. 그게 사실인가?" "빌렸을 뿐입니다." "빌렸다고, 세상에! 그럼 어제 시체실에서 송장을 빼낸 것도 빌린 것가? 자네 무엇이 씌인 거 아냐? 의학계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나한 테 말해. 두 사람이 하면 훨씬 쉬울 테니까." "말씀 끝나셨습니까?" 마틴은 짐짓 침착하게 물었다. "아니야! 안 끝났어! 클린튼 클라크가 산부인과에서 가장 우수한 레지던트 하 나를 자제가 모욕했다고 말했어. 마틴, 자제 미친 거 아닌가? 자넨 신경방사선 학자야! 자네가 훌륭한 의사만 아니었어도 당장 해고 되었을 가야." 마틴은 잠자코 있었다. "문제는..." 골드블라트의 목소리가 약간 누그러졌다. "자네가 뛰어난 방사선 학자라는 거야. 마틴, 잠시 동안만 조용히 지낼 수 없 나? 매너하임이 골치덩어리라는 것은 나도 알아. 그의 일에 끼어들지마. 그리고 제발 그의 실험실에 들어가지도 말고. 그 친구는 아무때고 누구든 그곳에 얼쩡 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밤에 기어든 건 말할 것도 없고." 골드블라트는 방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난장판이 된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연구실을 대하고는 그의 입이 점점 벌 어졌다. 그는 눈길을 다시 마틴에게 돌리고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훌륭히 일을 수행하고 있었어. 자네는 처음부터 이 자리를 맡도록 추천됐어. 자네가 이전의 마틴 필립스로 돌 아가기를 바라네. 난 자네의 최근 행동도 이해할 수 없고, 연구실이 돼 이 모양 이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어. 한 가지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모ㄷㄴ 걸 정리하 지 않으면 다를 일자를 찾아야 할거야." 골드블라트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마틴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자존심에 도 불구하고 해고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겁이 났다. 그 생각은 그로 하여금 더 지체하지 않고 곧장 행동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그는 부서를 뛰어다니면서 진행중인 모든 과정을 점검하고 필요할 때면 조언도 아끼 않았다. 그는 쌓여 있던 오전에 찍은 필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판독하고, 고도의 기술 을 요하는 좌측 뇌혈관 조영술을 직접 실시해 그 환자가 수술을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학생들을 한 곳에 모은 그는 그들의 관심 집중도에 따라 빠져들게도 하고 혼 란스럽게도 하면서 컴퓨터 단층촬영기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러는 동안 헬렌은 그가 시킨대로 지난 며칠 동안 쌓여 있던 편지와 전화메시지에 회답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렇게 해서 쌓여있던 일을 처리한 마틴은 사환을 시켜 어수 선한 방안의 필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하고, 오후 3시까지 60장의 필름을 컴퓨터로 분석해 옛날의 보고서와 비교해 보았다. 프로그램은 우수한 기능을 발 휘하고 있었다. 3시 30분에 그는 머리를 문 밖으로 내밀고 헬렌에게 크리스틴 린키스트에게서 전화가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였다. 마틴은 X-레이실에 가서 케 네스 로빈스에게 젊은 여자가 온 일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대답은 없다는 것 이었다. 4시가 될 때까지 마틴은 컴퓨터로 6장의 필름을 더 분석했다. 다시 한번 컴퓨 터는 방사선 학자인 마틴보다도 더 정확하게 뇌막종양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미 세하게 석회화된 부위를 집어냈다. 그는 헬렌에게 그 환자를 찾아보도록 부탁하 기 위해 필름을 옆에 따로 놓아 두었다. 4시 15분에 그는 크리스틴 린키스트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벨이 두 번 울리고 그녕의 룸메이트가 전화를 받았다. "죄송해요, 필립스 박사님. 크리스틴이 오늘 아침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간 이후로 한 번도 못봤어요. 11시와 1시 15분 수업을 빠졌어요. 그 애답지 않은 일 이에요." "미안하지만 어디있는지 좀 찾아서 내게 전화하라고 해주겠어요?" "그러죠. 솔직히 저도 걱정이 되거든요." 5시 15분 전에 헬렌이 낮에 쓴 답신에 사인을 받기 위해 그의 연구실로 들어 왔다. 근녀는 편지들을 퇴근한 길에 부칠 생각이었다. 5시 30분이 약간 지나서는 데니스가 연구실에 들렀다. "조금 정리가 된 것 같군요." 그녀가 주위를 감상하듯 둘러보며 말했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거야." 마틴은 X-레이 사진을 레이저 검색기에 집어넣으며 대꾸했다. 그는 문을 닫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 놓기 싫은 걸 참고 팔을 풀었을때 그녀 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내가 뭘 잘했나 보죠?" "종일 당신 생각만 했어. 지난 밤을 떠올리면서." 그는 아침에 골드블라트가 야기시킨 불안에 관해 그녀와 상의하고 나머지 삶 을 그녀와 함께 하길 원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문제는 그가 이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잠시라도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녀가 저녁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한 약속을 상기시키자 그는 머뭇거렸다. 그리 고 그녀의 실망해하는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옛날 필름들을 모두 분석할 능력만 있다면 이번 주 토요일 밤에 차를 몰 고 섬에나 갈 생각이었는데." 데니스는 기쁨에 들떴다. "정말 멋질 거예요. 참 그건 그렇고, 산부인과에 전화해서 내일 정오경에 가겠 다고 약속을 정했어요." "잘했어. 누구와 얘기했는데?" "모르겠어요. 하지만 굉장히 친절했고 내가 간다는 데 대해서 아주 반가워하는 것 같았어요. 오늘 일찍 끝나면 우리집에 오지 그래요?" 데니스가 나간 뒤 한 시간이 지나서 마이클스가 도착했다. 마틴이 프로그램을 진지한 자세로 검토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기뻤다. 마틴이 말했다. "내 예상을 뛰어 넘고 있어. 잘못된 판독은 단 하나도 없었다구." "대단하죠.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는데요." "분명히 그럴 것 같아. 이대로만 나가면 초가을까지는 상업적으로도 사용 가능 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연례 방사선학 총회에서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는 걸." 마틴의 상상력은 그 영향을 점쳐보며 한없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아침 에 느꼈던 직장에 대한 불안감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마이클스가 떠난 뒤 마틴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는 필름을 컴퓨터에 집어 넣는 과정을 개선해 시간을 줄이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러나 그는 일을 하면 서 시간이 흐를수록 크리스틴 린키스트가 없어진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기 시작 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무심함에 화가 났지만 차츰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자신이 X-레이 사진을 찍으 려고 할 때마다 실패하는 것을 결코 우연으로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9시경 마틴은 크리스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룸메이트가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피립스 박사님. 제가 전화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크리스틴을 어 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요. 종일 본 사람이 없대요. 경찰에 연락을 해 놓았어요." 마틴은 전화를 끊고 그럴 리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여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되... 마리노, 루카스, 멕카시, 콜린스, 이번엔 린키스트 까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터무니없는 일이야. 갑자기 마틴의 머리에 입원과 에서 회신을 못받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린 그는 신호가 간지 4번 만에 전화를 받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담당 직원은 5시 에 퇴근을 해서 내일 아침 8시에나 나올 것이기 때문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마틴은 수화기를 꽝 하고 내려놓았다. "젠장!" 이렇게 소리친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서성대기 시작했다. 문득 암실 캐비넷에 넣어둔 멕카시의 뇌 표본이 생각났다. 암실에서, 마틴은 응급실에서 찍은 필름을 현상하고 있는 기사가 일을 마치기 를 기다려야 했다. 그 기사가 나가자마자 마틴은 재빨리 캐비넷을 열어 필름과 완전히 건조한 뇌 표본을 꺼냈다. 그는 표본을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 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노출되지 않은 필름은 현상기에 집어 넣었다. 마틴은 복도의 필름이 나오는 구멍 앞에 서서 크리스틴의 실종이 또 하나의 우연일 가능성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만일 우연이 아니라면 그건 무엇 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해야 하는가였다. 그 순간 사진이 받침대로 떨어졌다. 필름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것으로 예 상했던 마틴은 사진을 판독상자에 끼워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느님 맙소사!" 그는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뇌 표본의 모양이 그대로 필름에 음영이 감소된 부분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한가지 밖에 있을 수 없었다. 방사능 X-레이 사진에 나온 으명 변화는 심각한 양의 방사능에 노출 된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마틴은 곧장 핵의학과로 달려갔다. 실험실로 들어간 그는 베타트론(전자가속 기)옆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냈다. 방사능 탐지기와 납으로 표면처리를 한 몸집이 큰 저장상자(방사능 물질을 넣 어두는 상자)가 그것이었다. 그는 그 상자를 들어올릴 수는 있었으나, 직접 운반 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 이동침대 위에 얹었다. 그가 첫번째 들른 곳은 그의 연구실이었다. 뇌가 들어 있는 병은 분명히 방사 능이 있을 것으므로, 그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납상자에 넣었다. 그는 뇌 조각을 놓았던 신문지도 찾아내 상자에 함께 집어 넣었다. 그는 뇌 조각을 놓았던 신문지도 찾아내 상자에 함께 집어 넣었다. 심지어는 뇌를 자를 때 사용 했던 칼까지도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방사능 탐지기로 방안을 검색했 다. 다행히도 방사능은 검출되지 않았다. 암실로 돌아온 마틴은 쓰레기통을 들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상자 안에 쏟아 부었다. 그런 다음 쓰레기통을 검색해 보고 만족해했다. 그는 연구실로 돌아와 고무장갑을 벗어서 상자에 던지고 상자를 봉합했다. 그는 방안을 다시 한 번 방사능 탐지기로 검색해 보고 극소량의 방사능 만 발 견되자 마음을 놓았다. 다음에 할 일은 그가 벨트에 차고 있는 방사량제(방사능 에 얼마나 노출이 됐는지 측정하기 위해 몸에 차고 다니는 기구)에서 방사능 노 출 체크용 필름을 꺼내 그가 뇌 표본으로부터 쐬인 방사능의 양이 얼마나 되는 지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도 그의 뇌리에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사실들 간에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머리와 어쩌면 신체의 다 른 부위에도 상당한 양의 방사능을 쬐었을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젊은 여성..., 다발성 경화증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신경학적 증상..., 모두 산부인과를 찾아 갔었고 비정상적인 팝 도말 검사결과. 마틴은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으로 방사능이 최대 관건이 될 것 같았다. 그는 과도한 양의 방사능이 자궁경부세포를 변질시 킬 수 있고, 따라서 팝 도말 검사결과가 비전형적으로 나올 수 있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팝 도말 검사결과가 비전형적이라는 것은 좀 특이했다. 이 것도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 로 이걸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방사능 검색이 끝나자 그는 콜린스와 멕사시의 번호와 산부인과를 방문한 날 짜를 명단에 적어 넣었다. 그런 다음 그는 방서선과의 중앙 복도를 서둘러 걷다 가 주방사선 판독실을 가로질러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는 사태의 급 박함을 느끼며 단추를 눌렀다. 크리스틴은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었다. 일반 X-레이 사진에 그 이상이 나타 날 정도라면, 그녀의 뇌에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녀를 찾는 길만이 지난 한 주 동안의 수수께끼 같은 사진들을 푸는 연쇠라고 여 겨졌다. 놀랍게도 벤자민 반즈가 외투를 몸에 걸친 채 의자에 앉아 일을 하로 있었다. 친절한 병리과 레지던트는 아닐지 몰라도 그의 헌신적인 노력을 존경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틀밤을 내리 여기에 올라오십니까?" "팝 도말 검사 때문에." 마틴은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말했다. "난 또 급히 봐줘야 할 슬라이드라도 가져오신 줄 알았죠." 반즈가 농조로 말했다. "아니오. 약간의 정보만 알려주면 되요. 방사능이 팝 도말 검사를 비전형적인 것으로 나오게 할 수 있어요?" 반즈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진단을 위한 촬영 정도로는 그런 얘길 들어본 적이 없지만, 치료를 위한 방사 능은 분명히 자궁경부세포에 영향을 미치니까 당연히 팝 도말 검사에도 영향이 있겠죠." "비정상으로 나온 표본을 보면 방사능에 의한 것인지 구분할 수 있겠어요?" "아마 그럴 걸요." "어젯밤 내 부탁으로 봤던 슬라이드 기억하죠? 그 뒤뇌표본 말이에요, 신경세 포의 이상이 방사능에 의해서 일어난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손상된 신경세포 바로 옆의 것들이 멀쩡한 걸로 봐서 원격 조준으로 그 부분만 방사능이 조사된 것을 수 있어요." 마틴은 앞뒤가 맞지 않은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환자들은 X-레이 사진에 나타날 정도로 많은 양의 방사능을 쬐었는데, 신경세 포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는 동안 주위의 세포는 아무렇지도 않다니. 마틴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팝 도말 검사표본이 남아 있어요?" "그럴겁니다. 당분간은 보고나하니까. 하지만 여기엔 없어요. 세포학 실험실로 보냈는데, 거긴 일하는 시간이 은행과 똑 같아요. 내일 아침 9시나 되야 문을 열 겁니다." "고맙소." 마틴은 한숨을 쉬면서 지금 곧바로 세포학 실험실로 찾아가야 할지 말설였다. 레이놀즈에게 전화하면 될지도 모른다. 막 방을 나가려다가 한 가지가 더 떠올 랐다. "팝 도말 검사결과를 관찰하고 나면 차트에 그 결과를 단순히 분류만 해놓나 요, 아니면 따로 병리 소견을 상세히 적어 놓나요?" "분류만 해 놓아요. 상세한 소견은 테이프에 따로 보관되어 있으니까. 환자의 번호만 알면 자료를 뽑아낼 수 있어요." "그렇군요. 바쁜 시간을 내줘서 정말 고맙소." 반즈는 답례로 고개를 약간 끄덕하고 다시 현미경을 들여가 보기 시작했다. 병리과의 컴퓨터 단말기는 연달아 세워진 칸막이로 연구실과 분리되어 있었 다. 마틴은 의자를 글어당겨 모니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는 방사선과에 있는 것 과 다를 바 없이 키보드 바로 뒤에 대형 TV 같이 생긴 화면이 있었다. 다섯 명의 환자 명단을 꺼낸 마틴은 먼저 캐더린 콜린스의 이름을 치고, 뒤에 환자번호와 팝 도말 검사법의 코드번호를 입력했다. 화면이 잠시 사라졌다가 마 치 누가 타자라도 치는 것처럼 글자들이 와면에 나타났다. 캐더린 콜린스라는 이름이 재빨리 새겨지더니 잠시 후에 첫번째 팝 도말 검사 일자가 나오고 다음 과 같은 문장이 이어졌다. 도말 및 고정상태 양호, 염색적합. 세포는 정상적인 성장과 분화를 보여줌. 에 스트로겐 효과 정상: 0/20/80. 극소수의 칸디다 유기체 발견, 결과: 정상. 마틴은 화면에 다음 자료가 나타나는 동안 처음 검사 일자를 다시 확인해 보 았다. 날짜는 마틴이 명단에 적어놓은 것과 분명히 일치했다. 화면으로 시선을 다시 돌린 마틴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두번째 팝 도말 검사의 결과도 정상이었 던 것이다. 마틴은 화면을 지우고 재빨리 멕카시의 이름과 번호, 적합한 코드번호를 입력 했다. 그는 컴퓨터가 자료를 찍어내는 것을 지켜보며 복부가 뒤틀리는 듯한 느 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정상이었다. 마틴은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의사로서 그는 차트에 씌어 있는 것을 그대로 믿도록 배웠다. 특히 검사보고서에 관해서 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환자가 느끼는 증상과 의사가 받는 인상은 주관적이라 해 도 데이터는 객관적이어야 했다. 마틴은 X-레이 사진에서 무언가를 빠뜨리거나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가끔 있 듯이 검사실에서도 실수의 가능성이 드물지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능성이 적인 실수와 의도적인 조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종의 공모가 성립되어야 했다. 마틴은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마틴은 머리를 괴고 책상에 앉아 손으로 눈을 비볐다. 병원 책임자에게 전화 하려는 충동이 일었지만, 그게 바로 스탠리 드래이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 었다. 드래이크의 반응은 그 사실을 서류상에서 없애버리고 대충 무마하려 들 것이 뻔했다. 경찰이 있었지! 마음 속으로 그는 가상의 대화를 그려보았다. "여보세요. 저는 마틴 필립스 박사입니다. 홉슨 대학병원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환자들의 팝 도마 검사결과가 정산인데도 차트에는 비정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마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안되, 경찰이 개입하기 전에 더 많은 정보를 입수해야 해. 직관적으로 그는 비록 앞뒤가 맞지 않지만 방사능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사능이 비정상적인 팝 도말 검 사결과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누군가 방사능이 발견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비정상으로 나온 결과를 정상이라고 보고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건 정반대 의 경우였다. 마틴은 다시 한 번 시체실의 잡역부를 떠올렸다. 지난 밤 만나려는 계획이 무 산된 이래 마틴은 워너가 리사 마리노에 관해서 그가 밝혀내고자하는 것 이상으 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아마 100달러 가지고는 충분치 않 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높은 금액을 제안해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사태는 이미 학문적인 연구의 차원을 넘어섰다. 마틴은 시체실에서 워너와 부딪쳐 성공적으로 일일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았다. 시체들에 둘러싸인 그의 아성에서 마틴은 안절부절할 것이 틀림 없었다. 위너의 입을 열기 위해서는 마틴이 좀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모 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마틴은 시계를 흘낏 보았다. 11시 24분이 지나고 있었다. 워너는 분명히 4시부 터 자정까지 일하는 저녁 근무조에 속했다. 순간적으로 마틴은 위너의 집까지 따라가 5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그는 데니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간지 여섯 번 만에 그녀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실 거예요?" "아니." 마틴은 말을 얼버무렸다. "일을 하다 말아서 그걸 마쳐야 돼." "여기 당신을 위한 따뜻한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요." "주말에 다 만회할게. 좋은 꿈꿔요." 마틴은 옷장에서 짙은 청색의 파카를 꺼내 입고 주머니에서 그리스 선장 모자 를 찾아 썼다. 벌써 4월이었지만 부슬비가 자주 오고 북서풍이 불어와 날씨가 꽤 쌀쌀했다. 응급실을 통해 병원 건물을 빠져나간 그는 계단에서 물이 고인 주차장의 아스 팔트 위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는 도로로 나가지 않고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 어 병원 본관 건물을 돌아서 브레너 소아과 병원 건물과 본관 사이에 형성된 협 곡을 따라 걸어갔다. 50야드를 걸어 나가면 병원의 안마당이었다. 어렴풋한 밤하늘로 깍아지른 절벽처럼 제멋대로 치솟은 병원 건물들이 불규칙 한 시멘트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병원은 합리적인 장기 계획도 없이 마구잡이 로 지어졌다. 안마당에 서서 건물들이 제각기 다른 각도로 서서 좁은 공간에서 맞대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틴의 눈에 골드블라트의 사무실 이 들어 있는 작은 돌출부가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표지판으로 삼아 가야할 방 향을 정했다. 겨우 25야드 떨어진 곳에서 지하의 시체실로 내려가는 눈에 띄지 않는 입구가 나타났다. 병원 측에서는 시체를 처리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시체는 사람들 눈을 피해 비밀릴에 검은 장의 차에 실려서 보내졌다. 마틴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벽에 몸을 숨겼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케네 스 로빈스가 리사 마리노의 X-레이 사진을 넘겨준 이후 겪은 복잡한 사건들을 돌이켜 보았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2주가 흐른 것 같았다. 처 음 방사선 이상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은 이제 엄청난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는 병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안다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그건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아픈 것과 같았다. 의학은 곧 그의 삶이었다. 크리스틴 린키스트에게 느끼는 책임만 아니었어도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의학계에것의 매장이라는 골드블 라트의 위협이 귀에서 메아리쳤다. 예정된 시간에 워너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문단속을 하려고 등을 돌렸다. 마틴 은 워너가 틀림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두운 불빛 아래서 눈을 가늘게 떴다. 놀 랍게도 그는 짙은 양복에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맨차림이었다. 부유한 상 인이 밤에 자신의 고급 의상실 문을 닫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시체실 안에서는 흉칙하게만 보였던 그의 깡마른 얼굴도 지금은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워너는 몸을 돌려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바닥을 내밀어 비가 오는지를 보았다. 날씨가 맑은 것을 확인한 그는 거리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른손에는 검은 색 서류가방이 들려 있고 구부린 팔꿈치에는 탄탄하게 접힌 우산이 매달려 있었다. 마틴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덜어져 그를 뒤따라 가다가 그가 이상하게 걷는 다는 것을 알아챘다. 다리를 저는 것은 아니고 한쪽 다리가 다른쪽보다 훨씬 힘 이 세서 껑충껑충 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걸어 갔다. 워너가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살기를 바라던 마틴의 희망은 그가 브로드웨이 에서 모퉁이를 돌아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 깨졌다. 마틴은 발걸음을 빨리 해서 계단을 두 개씩 뒤어내려 간격을 좁혔다. 그러나 워너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승차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황급히 승차권을 구입한 마틴은 역무기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틴은 IRT(도시간 급행선으로 뉴욕 시의 지하철 노선의 하나) 엘리베이터가 텅 빈 것을 보고 IND(시내선) 승강장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뛰어 내려갔다. 모퉁 이를 돌자 시내선 승강장의 계단을 내려가는 워너의 뒷머리가 얼핏 보였다. 마틴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신문지를 꺼내서 펴들고 읽는 시늉을 했다. 그로부 터 30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워너가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 앉아서 놀랍게도 '체스 입문'이라는 책에 몰두해 있었다. 마틴은 밝은 지하철의 불빛 아래서 그의 옷차림을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그의 약복은 짙은 청색으로 양쪽을 터 놓은 에드워드 풍이었다. 바짝치켜 깎 은 그의 머리는 단정히 빗질되어 있었고, 볕에 그을린 그의 높은 광대뼈는 그를 프러시아의 장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옷차림에서 단 한 가지 눈에 거슬 리는 것은 여기저기 흠집이 나고 닦은지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구두였다. 저녁 근무를 마친 병원 직원들이 퇴근할 시간이 되자 지하철 승강장은 간호 사, 오더리, 기사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시내 급행선이 천둥같은 소리를 내며 역 구내로 들어오자 마틴은 워너의 뒤를 따라 열차에 올랐다. 워너는 책을 앞에 놓고 석상처럼 묵묵히 안자 있었다. 그의 움푹 들어간 눈은 책 위에서만 왔다 갔다 할 뿐이었고, 그의 양 무릎 사이에 놓인 서류가방은 바 닥에 똑바로 세워져 있었다. 마틴은 조금 떨어진 곳에, 폴리에스터 약복을 입은 잘 생긴 스페인 청년 맞은 편에 앉았다. 열차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마틴은 튀어나갈 준비를 했지만 워너는 꿈쩍도 하 지 않았다. 59번가를 지나면서 마틴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워너가 집으로 곧장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 그 생각을 미리 못했을까. 그는 워너가 결국 42번가에 서 내리는 것을 보고 따라 내리며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는 워너가 곧바로 집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디로 향하든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틴은 거리로 나서는 그를 뒤따르며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적잖게 낙담했 다. 밤은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힘이 있었다. 눅눅하고 차가운 날씨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42번가는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말쑥하게 빼입은 워너는 포르노 영화관과 책방 앞에서 서로 옥신각신하는 기괴한 복장의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곳의 성도착적인 행태에 익숙한 것 같았다. 그러나 마틴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람들이 자기 앞 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뒤엉킨 기괴한 군상을 피해 몸을 틀고 방향 을 돌리고 심지어 차도에 내려가기까지 하면서 워너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따 라갔다. 앞에서 워너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성인용 서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 였다. 마틴은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멈추어 섰다. 그는 워너에게 앞으로 한시간만 할애하기로 했다. 그가 그 시간 안에 아파트로 돌아가지 아ㅎ으면 이 터무니 없 는 짓을 그만 둘 생각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마틴은 자신이 한때의 외판원과 행 상과 걸인들의 표적이 된 것을 알았다. 그 집요한 무리의 요구에 시달리던 마틴 은 마음을 바꾸어 서점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 가까이에 설교단 같이 생긴 발코니에서는 라벤더 빛깔의 머리와 괴팍한 용모를 한 노파가 앉아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짙은 그림자 속에 깊숙이 박힌 그녀의 눈동자는 그를 들어오게 해도 되는지 심사라도 하듯이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마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이런데서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이면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 가장 가까운 통로로 들어섰다. 그런데 워너가 보이지 않았다. 손님 하나가 팔을 흐느적거리며 그의 곁을 지나가다가 은근 슬쩍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 사내가 한참 갔을 때까지도 마틴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다가 갑자기 구역질을 느끼고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가 장 급선무는 자신의 주의부터 환기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워너가 서가 뒤나 잡지 판매대 뒤편에 숨어 있지나 않나 해서 서점 안을 빙 둘러보았다. 둥지를 틀고 앉은 까마귀처럼 라벤더 빛 머리의 노파가 그의 일 거수 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마틴은 잡지책 하나를 집어들었으나, 비닐 포장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 도로 제자리에 꽂았다. 표지에는 두 사람의 남자가 곡예를 부리듯이 뒤엉켜 있었다. 갑자기 서점 뒤편의 문으로부터 워너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틴은 기겁을 해서 재빨리 몸을 돌려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를 고르 는 척했다. 그러나 워너는 곁눈 가리개를 한 말처럼 전혀 좌우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서점을 빠져나갔다. 마틴은 워너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그를 뒤쪽고 있다 는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버티는 동안 발 코니에서 내려다 보고 있던 노파는 그가 문을 나서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는 딴 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이었다. 243 거리로 나서던 마틴은 워너가 택시를 잡는 장면을 목격했다. 지금까지 애써온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마틴은 보도에서 뛰어내려 달 려오는 택시를 향해 미친듯이 손을 흔들었다. 한 대가 길 가운데 멈춰서자 그는 다른 차들을 피해 택시에 뛰어올랐다. "저 버스 뒤의 바둑판 무늬 택시를 따라줘요." 마틴이 황급히 말했다. 운전수는 그를 빤히 쳐다 볼 뿐이었다. "빨리요."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차에 기어를 넣었다. "경찰이슈?" 마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일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워너는 52번가와 2번가의 교차지점에서 차를 내렸다. 마틴은 모퉁이로부터 100 피트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거리 끄트러리로 뛰어가 워너의 모습을 찾았다. 워너 는 세 집 건너 위치한 상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틴을 길을 떠나서 상점을 쳐다보았다. '섹스용품점'이라고 불리는 상점이었 다. 42번가에 있던 성인용 서점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고풍스러운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마틴은 그 상점이 고가구점, 화려한 식당, 고급 의상실 사이에 자리잡은 것을 알았다. 높이 솟은 아파트 건물도 모두 중사층 수준인 것 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꽤 잘 사는 동네였던 것이다. 워너가 어떤 남자와 함께 문간에 나타났다. 남자가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워너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한 뒤 그와 헤어져 2번가로 걸어갓다. 마 틴은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뒤에 떨어져 있었다. 워너가 이렇게 들르는 장소가 많을 줄 머리 눈치라도 챘었다면 마틴은 그를 따라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간 일은 접어두고라도 그는 이 긴 여정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워너에게는 방문할 곳이 더 남아 있었다. 길을 건너 3번가로 접어든 그는 55번가를 따라 가다가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고층 건 물들 사이에 허름하게 지어진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1920년대 사진에나 나올 법한 술집이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마틴은 워너를 시야에 붙잡아 두지 않으면 놓칠 것만 같아 그의 뒤를 따랐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북적대는 것을 보고 마 틴은 망연자실한 체 몸을 뒤흔드는 사람들 틈을 해집고 들어가야 했다. 그곳은 독신자가 찾는 바(bar)였고, 마틴에게는 또 하나의 요지경 같은 세상이었다. 워너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살펴보던 마티은 그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금발의 아가씨와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틴은 모자를 좀더 내려눌렀다. "뭐하는 분이세요." 왁자지껄하는 소음 사이로 여자가 소리쳤다. "의사요, 병리학자." 워너의 대답이었다. "정말요?" 그 말은 그녀에게 놀라운 효과를 나타냈다. "좋은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지. 난 대개 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지 만 가끔 여기서 술을 마실 수도 있어요." "어머, 잘됐군요." 카운터에 기대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틴은 워너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 고 있는지를 지껄이고 있는지를 그녀가 알고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뒤편 벽쪽에 워너의 동태를 지켜볼 수 있는 장소를 발견 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그는 뒤죽박죽이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십수 년이라는 긴 시간을 배우는데 투자했는데 겉으로는 무서울 만큼 멀쩡하 게 보이는 괴상한 녀석을 뒤쫓아 그것도 한밤중에 독신자 술집에서 죽치고 있다 니, 마틴은 주위를 힐끔거리다가 워너가 너무도 숩게 사업가나 법률가등 틈에 끼는 것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워너가 여자가 적어주는 전화번호를 받은 뒤 맥주잔을 비우고 소지품을 챙겨 들었다. 3번가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그를 따라가기 위해 택시 운전수와의 가버 운 실랑이가 있었지만 5달러짜리 지페 한 장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마틴과 운전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는 갑작스런 비로 흐려지는 도시의 불빛을 지켜보았다. 와이퍼가 앞 유리창으 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쉼없이 닦아냈다. 택시는 57번가 도로를 타고 시내를 가 로지른 뒤 콜럼버스 순환로에서 브로드웨이를 향햐 북쪽으로 달리다가 암스테로 담 가로 접어들었다. 왼쪽으로 콜럼비아 대학이 보였다. 비는 쏟아지기 새작할 때화 마찬가지로 갑 작스럽게 멈췄다. 141번가에서 우회전을 했을때, 마틴은 몸을 앞으로 내밀어 우 전수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운전수는 '헤밀톤 언덕' 이라고 짤막하게 대 답하고 해밀톤 광장에서 왼쪽으로 돌아 경사로를 내려갔다. 전방에서 워너가 탄 택시가 멈추어 섰다. 마틴은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 렸다. 북쪽으로 갈수록 암스테르담 가의 경치는 볼품이 없었지만 마틴이 서 있 는 곳은 의외로 아름다운 동네였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연립주택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모든 건축 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깨끗하게 새로 단장 을 끝냈으며 다른 건물들도 한창 진행중이었다. 도로가 끝나고 해밀톤 광장으로 접어드는 지접에서 워너는 흰 화강암으로 지어진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건물에 난 창문 둘레의 장식은 베니스풍의 고딕 양식이었다. 마틴은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3층에 있는 창문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연립주택은 멀리서 볼 때처럼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전번 적인 분휘기를 손상시킬 정도는 아니엇다. 마틴은 건물에서 퇴락한 우아함을 느 꼈고 워너의 안목과 능력에 감탄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마틴은 워너의 방문을 두들김으로써 그를 놀라게 할 베 짱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깨달았다. 데니스의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가구 당 초인 종이 하나식 잠긴 현관문 앞에 달려 있었다. 헬무트 워너의 이름은 밑에서 세번 째였다. 손가락을 초인종에 대고 마틴은 자신이 이 일에 휘말려들기를 진정으로 원하 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잠시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았 지만 크리스틴 린키스트를 생각하자 용기가 생겼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 렸다. "누구요?" 작은 스피커로부터 워너의 목소리가 잡음에 실려 흘러나왔다. "필립스 박사요. 당신에게 돈을 가져왔소, 워너. 많은 돈이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마틴은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같이 온 사람 있소?" "혼자요." 한때는 화려했을 현관에 귀를 거술하는 버저소리가 울려퍼진 뒤 마틴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문뒤에서 여러 개의 잠금 장치를 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빠끔이 열리자 마틴의 얼굴로 은색의 불 빛이 쏟아졌다. 워너의 깊숙이 박힌 눈동자 중 하나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 고, 그의 예상치 못한 방문에 놀라 눈썹은 치가 올라가 있었다. 체인이 풀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마틴은 거칠게 문 안으로 들어갔으며 워너는 부딪치지 않기 위해 벽에 등을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방 한가운데서 마틴은 발걸음을 맞추었다. "기꺼이 돈을 주겠소, 친구." 그는 최대한 용기를 내어 아주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리사 마리노의 뇌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아야겠소." "돈은 얼마나 지불할 생각이오?" 워너는 주기적으로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 하고 있었다. "500달러" 그는 워너가 그만한 액수에 넘어가기를 바랫다. 하지만 콧방위도 안뀐다면? 워너의 얇은 입술이 옆으로 벌어지며 깡마른 뺨에 굵은 주름을 만들더니 입가 에 지괴한 웃음을 지어냈다. 그의 이빨은 작고 가지런했다. "정말 혼자 왔소?" 마틴은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좋소. 뭘 알고 싶소?" "모든 걸." 워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얘기가 길어질텐데." "시간은 많소."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오. 같이 들겠소?" 마틴은 고개를 저었다. 긴장으로 배가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편히 않으시오." 워너는 몸을 돌려 독특한 걸음걸이로 부엌으로 갓다. 마틴은 뒤를 따르며 아 파트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지는 붉은 벨벳 종유였고 가구는 빅토리아 풍이었 다. 화려하고도 장중한 우아함을 갖춘 방은 하나뿐이 티파니 램프의 희미한 불 빛에 의해 더욱 돋보였다. 탁자 위에 그의 서류가방과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으 로 보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벼ㅊ 장의 사진과 함께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부엌은 싱크대와 작은 스토브, 그리고 위에 원주형의 코인이 감기고 겉이 법 랑질로 처리된 냉장고가 딸린 작은 방이었다. 냉장고는 마틴이 어린 시절 이후 한번도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워너가 냉장고 문을 열고 샌드위치와 맥주를 한 병 꺼낸 뒤, 싱크대 비ㅌ의 서랍에 들어 있던 병따개로 병을 따고 서랍 속에 다 시 던져 넣었다. 워너가 병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한 잔 하겠소?" 마틴은 고개를 저었다. 워너가 부엌에서 걸어나옴에 따라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탁자에 놓여 있던 서류가방과 카메라를 한쪽으로 치운 워너는 그에게 앉으라는 몸짓을 했다. 워너는 목이 탔는지 맥주를 길게 한 모슴 들이키고 병을 내려놓으며 요란하게 트림을 했다. 그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마틴의 자신감은 사라졌다. 처음 기습의 효과는 이 제 사라지고 없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그의 눈은 워너의 행동을 하나하나 주시하며 그에게 붙박혀 있었다. 워너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잡역부의 월급을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요." 마틴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 다음 말을 기다렷다. 워너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 어 물었다. "나는 아주 오래된 나라에서 왔죠." 그는 입에 샌드위치를 가득 물로 얘기를 했다. "루마니아 출신이에요.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나치즈가 부모님을 죽이고 다섯 살이었던 나를 독일로 데려갔죠. 그게 내가 다하우에서 시체를 다루기 시 작한 때입니다......" 워너는 부모가 상해당한 일, 집단 수용소에서 학대받은 일, 그리고 시체와 함 께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일 등을 자세히 이야기에 나갔다. 그는 카틴에게는 말 할 틈도 주지 않고 끔찍한 이야기만 끝없이 늘어놓았다. 마틴이 그 무시무시한 애기 중간에 끼어들어 그만두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마틴은 자신 의 확고하던 목적 의식이 뜨거운 숯불앞에 놓인 밀랍처럼 흐믈흐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왔고...." 워너가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맥주병을 끝까지 비우고 의자를 뒤로 밀어낸 뒤 한 병을 더 가지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의 이야기에 기가 질린 마틴은 탁자에 앉아서 그의 뒷보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의과대학의 시체실에서 일자리를 얻은 거요." 워너가 싱크대 밑의 서랍을 열며 소리질렀다. 병따개 밑에는 시체실의 오래된 대리식판 위에서 부검이 행해질 때 그가 몰래 빼낸 해부용 칼이 몇개 숨겨져 있 었다. 그는 그 가운데 하나를 움켜쥐고 한번 겨누어분 뒤 상의 왼쪽 소매에 집 어넣엇다. "하지만 내 봉급은 너무 적었소." 그는 병을 타고 병따개를 도로 집어 넣은 뒤 서랍을 닫고 몸을 돌려 탁자로 돌아왔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리사 마리노에 관한 것뿐이오." 마틴이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워너의 인생 이야기가 그에게 육체적인 피 로를 가중시켰던 것이다.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오." 워너는 새로 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병을 식탁 위에 놓았다. "난 지금보다 부검이 더 많이 행해지던 시절, 시체실에서 일하면서 부수업을 올리기 시작했소. 쓸만한 것들이 많았지. 그때 사진을 생각하게 된 거요. 난 그 걸 42번가에 내다 팔았소. 벌써 몇 년 된 일이오." 워너가 한 손을 들어 자기 아파트를 소개하는 시늉을 했다. 마틴은 누동자를 돌려 어두침침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붉은 벨벳 벽지가 사진 으로 뒤덮인 것을 아까는 누여겨 보지 않았었다. 이제 보니 사진들은 벌거벗은 여자의 시체를 찍어 놓은 외설적이고도 끔찍한 것이었다. 마틴은 그를 곁눈질하 고 있는 워너에게로 슬며시 주의를 돌렸다. "리사 마리노는 내 최고의 모델 중 하나였소." 그는 탁자위에 있던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마틴의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그걸 한 번 보시오. 아주 높은 액수를 불렀소. 특히 2번가에서는, 천천히 보시 오. 난 화장실에 가야겠소. 맥주 때문에 금방 오줌이 마렵군." 워너가 어리둥절한 마틴의 뒤를 돌아서 침실문으로 사라졌다. 마틴은 리사 마 리노의 시체를 찍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변태적인 사진을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진에서 나타난 정신 이상이 손가락을 통해 자신에게로 옮을까봐 손을 대기조차 두려웠다. 워너는 그의 관심사를 엉뚱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저 자는 정말로 없어진 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수상한 행동 또한 단순히시체의 사니을 은밀히 거래하다 보니 생겨난 것일수도 있다. 마틴은 뱃속 의 것을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워너는 침실을 거쳐 화장실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틀어 오줌을 누는것같이 들리게 한 뒤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어 길쭉하고 예리한 해부용 칼을 꺼냈다. 그것을 단검처럼 오른손에 움켜쥐고 그는 살금살금 침실로 다시 들어갔다. 15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마틴이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머리를 숙여 무릎 위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침실문 바로 뒤에서 잠시 발걸 음을 멈추었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반질반질하게 닳은 칼의 나무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고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사진을 접어 들어 탁자 위에 뒤집어서 올려 놓 으려고 하다가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 비명소리가 터졌다. 칼날이 목 바로 아래 우축 쇄골의 뒤를 뚫고 폐 윗부분을 지나다가 우측 페동 맥 손상시키기 직전에 멈추었다. 확장된 기관지로 피가 쏟아져 들어가자 반사적 으로 고통스러운 기침이 터지면서 입세서는 선혈이 울컥하고 포물선을 그며 뿜 어져 나와 마틴의 머리롸 그 앞에 놓인 탁자를 시뻘겋게 물들엇다. 마틴은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날리면서 맥주병을 움켜쥐었 다. 고개를 홱 돌리자 워너가 비틀거리며 목에 깊숙이 박힌 칼 자루를 뽑아내려 고 허공에 헛손질을 하는 장면과 마주쳤다. 목에서 그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의 몸이 탁자에 심하게 부딪힌 뒤 바닥에 나뒹굴었다. 워넌가 쥐고 있던 해부용 칼이 탁자에 부딪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말고 아무것도 손대지 마시오!" 워너를 살해한 암살자가 마루쪽으로 난 문으로부터 나타나며 소리쳤다. "당신을 계속 감시한 게 잘한 일이었군." 그는 마틴이 지하철에서 보았던 짙은 콧수염을 기르고 폴리에스터 양복을 입 은 스페인계 미국인이었다. "대동맥이나 심장을 찌를 생각이었는데, 이 친구가 내게 시간을 안주었소." 사내는 워너의 목에서 칼을 뽑아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워너가 머 리를 오른쪽 어깨에 틀어박고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칼이 잘 빠지지 않았다. 암살자는 웅크린 워너의 몸뚱아리를 누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무기를 회수할 수 있었다. 마틴은 처므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어 탁자 밑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 는 사내를 관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들고 있던 맥주병을 힘겟 휘둘러 침입 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내는 휙 하는 소리를 듣고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옆으로 제껴 타격을 어깨로 분산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결국은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희생물 위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극도의 공포에 휩사여서 마틴은 여전히 맥주병을 손에 쥔 채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간에 이르자 아래층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살인자 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문고리를 다시 잡고 그는 방향을 바꾸어 워너의 집 뒷쪽으로 달려갔다. 살인자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마틴은 침실 뒤로 난 창문까지 뛰어가 창틀을 열어젖히고 방충망을 열려고 했 으나 열려지지가 않았다. 방충망을 발로 부순 그는 비상계단으로 나가 밑으로 뛰어내려갔다. 그의 탈출은 달려 내려갔다가 보다는 곧바로 뛰어내리는 것에 가 까워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땅바닥에 말을 디딘 그에게는 방향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작정 동뽁을 향해 달려야 했다. 그는 옆 건물을 지나 공터에 있는 채소밭으로 뛰어들어갓다. 오른편으로는 허리케인 방벽이 세 워져 있어 헤밀톤 광장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계속 달려가자 지대가 갑자기 낮아져 그는 가파른 동산 위에서 미끄 러져 밑으로 굴러냈다. 빛이 점점 뒤로 사라지면서 그는 어둠속으로 발을 들이 밀고 있었다. 갑자기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았다. 철조망 너머로 10피트쯤 떨어진 곳에 자동차 폐차장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세인트 니콜라스 가의 불빛이 어렴 풋하게 보였다. 마틴은 철조망 위로 넘어가려다가 밑에 틈이 있는 것을 발견하 고 기어들어가 몇 피트를 마구 띠어서 시멘트 담벼락 밑으로 몸을 굴렸다. 가까이서 보니 폐차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버려진 차들이 방치되어 녹슬어 가고 있는 넓은 공간일 뿐이엇다. 마틴은 앞에 보이는 거리의 불빛을 향 해 찌그러진 쇳조각들 틈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뒤쫓아 오 는 차가 없나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일단 거리로 나서자 뛰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 그는 워너의 아파트로부터 가 능한 한 멀어지고 싶엇다. 경찰 순찰차가 혹시나 있나 하고 둘러보았지만 한 대 도 보이지 않았다. 길 양편의 건물들이 불에 탄 채 방치된 것을 알았다. 그는 사 방을 두리번러리다가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탄 채 방치된 것을 알았다. 어슴푸레 한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그것들은 해골처럼 보였다. 보도 위에는 쓰레기와 잡 동사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마틴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할래ㅋ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어둠과 황폐한 정경 이 그의 두려움을 더하게 했다. 두 구역을 더 뛰어가던 마틴은 그의 뛰는 모습 에 더 놀란 뒷골목의 흑인 부랑아 한 패거리를 보았다. 그들은 마약을 사고팔던 것을 멈추고 할램의 중심지를 향해 뛰어가는 정신나 간 백인 친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뛰어난 체력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속도로 달린 탓에 그는 곧 기진맥진애져 금 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은 칼로 찌르는 듯이 아팠다. 결국 그는 뛰는 것을 포기하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허름한 건물의 어둠속으로 숨어 들엇 다. 그는 개진 벽돌 틈으로 발이 걸려 넘저지자 축축한 벽을 의지해 몸을 일으 키고는 숨을 볼아 쉬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달리 기를 멈추었다는 것만 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누가 추적해 오지 않았는지 밖을 살폈다.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의 세계에 온 것처럼 너무도 조용했다. 그때 건물 안의 짙은 어무 속에서 손 하나가 뻥어나와 거의 발을 움켜쥐엇다. 다가오기도 전에 냄새로써 그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어린 양의 울음소리 같 은 비명이 터져나오고, 그느 독충에라도 물린 듯 팔을 힘껏 뿌리치면서 출입구 밖으로 돌진해 나갔다. 손의 주인이 그의 힘을 못 이겨 같이 끌려나오자 마틴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 람이 똑바로 서지도 못할 정도로 마약에 찌든 중독자라는 것을 알았다. "하느님 맙소사." 마틴은 소리치며 몸을 돌려 어둠에 잠긴 거리로 다시 뛰쳐나갓다. 다시는 멈우지 않기로 마음먹은 마틴은 평소 조깅을 하던 속도로 계속 뛰어갔 다. 전혀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곧장 앞으로만 가면 결국은 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들어설 수 있을 거사는 생각이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 주위로 미세한 안개가 싸이더니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두 구역을 더 달려가다가 마틴은 드디어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넓은 차도가 앞에 펼쳐져 있었고 한쪽 모투이에 밤새 영업하는 술집이 보였다. 술집에서는 현란한 버드와이저 맥주 광고판의 네온 불빛이 교차로에 핏빛 같은 불빛을 비추 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네온 불빛이 시들어가는 도시에 안식처라도 제공해주는 듯 떼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축축해진 머릴르 쓸어올리면서 마틴은 구역질을 느꼈다. 버드와이저 광고판의 불빛을 보자 워너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던 시뻘건 피가 연상되었다. 그는 사건 에 휘말렸다는 인상을 남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팡등에 묻어 있던 핏자 국을 손으로 닦아 없댄 뒤 구역질을 더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을 즈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 안의 분위기는 끈끈했고 담배연기고 자욱했다. 귀가 멍멍할 정도의 시끄러 운 디스코 음악이 가슴에 진동을 느끼게 했다. 바 안에는 대략 열두어 명이 있 었는데, 모두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샹태였고 게다가 모두 흑인이었다. 디스코 음악말고도 작은 킬러 텔레비젼에서 1930년대의 갱 영화를 틀어대고 있었다.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때묻은 앞치마를 두른 바텐더 한 사람뿐이었다. 손님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마틴에게로 항하면서 폭풍 전의 희미한 섬광 같은 갑작스런 긴장이 바 안을 가득 채웠다. 마틴은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틴은 20년 가까이 뉴욕에 살아오면서도 겉만 바드르한 부유함만킁이나 뉴욕이라는 도 시를 특징 지워주는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보호해 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는 그에게 어느 순간에 공격이 가해 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험상궂은 얼굴들도 따라 움직였다. 턱수엽을 기른 사내 하나가 카우터 앞의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서도 힘이 넘치는 근육질의 몸이 반들거렸다. "덤벼, 흰둥아!" 그는 이를 드러냈다. "플래쉬!" 바텐더가 끼어 들어 그에게 저리 비키라고 말한 다음 마틴을 바라보았다. "선생, 여기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싶은거요. 죽고 싶소?" "전화를 사용할 수 있을까요?" "뒤로 가보시오." 바텐더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마틴은 플래쉬라고 불리운 사내의 옆을 돌아가며 숨을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10센트짜리 동전을 찾아내 전화기 있는 곳으로 갔다. 화장실옆에 전화가 한 대 있었지만 벌써 누가 차지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와 말다툼을 하는 듯했다. "이봐, 뭘 어쩌겠다고 질질 짜는 거야?" 필사적으로 도망올 때처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전화 거는 녀석의 손목 을 비틀어 전화기를 뺐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많이 진정이 되어 제일 끄트머리에 비어 있는 자리로 돌아와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가 있었 다. 바 안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누그러져 대화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바텐더가 선불을 요구하고 그에게 브랜디를 가져다 주었다. 독한 술이 들어가 자 뒤죽박죽인 머리가 진정이 되고 생각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워너의 죽음 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이래 처음으로 순간 싸움은 워너와 그를 암 살하러 온 사이에 벌어진 것이고, 그는 우연히 끼어든 제 삼자에 지나지 않는다 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암살자가 한말은 그가 마틴을 계속 뒤따라 왔다는 것 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돼!' 마틴은 워너를 계속해서 뒤쫓아왔고 워너가 들었던 칼을 보았다. '정말로 그가 나를 공격할 속셈이었을까?' 일련의 사건들을 연결지으면서 마틴의 머리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그날 밤 지하철에서 암살자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자 혼 란은 더 심해졌다. 마틴은 술잔을 비우고 한잔을 더 청한 뒤 바텐더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그가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사실 도로의 명칭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전화통을 붙잡고 말다툼을 하던 흑인 친구가 마틴의 곁을 지나 술집을 나갔 다. 마틴은 의자에서 일어서 새로 따른 잔을 들고 전화기로 향해 걸어갔다. 이제 는 마음이 차분해져 경찰에게 사거느이 경위를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는 전화기 밑에 있는 작은 선반에 술잔을 올려놓고 동전을 집어 넣은 뒤 911번을 눌렀다. 디스코 음악과 텔레비전 소리 사이로 전화선 반대편에서 울리는 벨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 자기가 알아낸 사실을 말할까 망설이다가 그건 혼 란스러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는 한밤중에 워너의 아파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기 전에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졸리운 듯한 쉰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제6분과, 맥밀리 경사입니다." "살인사건을 신고하려는데요." 마틴은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려고 애썼다. "어디쯤인가요?" "주소는 확실히 모르지만, 건물은 다시 보면 알아 볼 수는 있어요."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할렘의 술집 안에 있는데... " "술집! 무슨 뜻인지 알겠군." 경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술은 얼마나 마셨나?" 맙소사, 경사는 그를 주정뱅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봐요, 한 남자가 칼에 찔리는 걸 내 눈으로 봤단 말이오." "이 친구야, 할렘에서 칼에 찔리는 사람이 한두 명이야? 당신 이름이 뭐야?" "마틴 필립스 박사요. 홉슨 대학병원의 방사선과 부과장으로 있소." "필립스라고 했소?" 경사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렇소." 마틴은 경사의 반응이 의외였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것 보세요. 우린 당신 전화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난 당신한테서 전화가 오는 즉시 기관으로 연결하라는 지시를 받았단 말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전화가 끊어지면 즉시 다시 전화해야 합니다, 아 셨죠?" 경찰관은 그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붙들고 있는 전화기를 통해 찰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틴은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내고 경찰관이 지껄인 이상한 말들에 대한 설명이라도 구하듯 수화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경사는 분명히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기관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슨 기관이란 말이지? 찰칵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저쪽에서 누군가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났다. 굉 장히 긴장한 목소리였다. "필립스 씨, 지금 어디세요?" "난 할렘에 있어요. 누구시죠?" "전 정보원 샌슨입니다. 기관의 뉴욕지국 부국장을 맡고 있어요." "무슨 기관을 말하는 겁니까?" 누그러지는 단계에 있던 마틴의 신경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다시 흥분되기 시작했다. "FBI말입니다. 잘 들어요. 우린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당신은 한시라도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야 합니다." "왜요?" 마틴은 얼떨떨한 와중에서도 샌슨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설명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머리를 내리친 남자는 당신을 보호하 던 우리 정보원이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그가 방금 보고를 했어요. 아시겠습니 까? 워너가 끼어든 건 우연한 사건일 뿐이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알아 듣겠어요!" "상관없어요." 샌슨이 내뱉었다. "중요한 건 당신을 거기에서 나오게 하는 일입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이 전화 선이 안전한지 알아 봐야겠어요." 마틴이 수화기를 들고 있는 동안 찰칵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마틴은 아 무 소리도 나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분노가 치솟았다. 모든게 짖궂은 농담 같이만 느껴졌다. "전화선이 안전하지 않아요." 샌슨이 다시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내가 다시 전화할테니까." 마틴은 그에게 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차차 분노가 사라지면서 서서히 새로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국은 FBI였구나. 마틴은 손 아래 있던 전화기가 따르릉 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샌슨이었 다. "좋아요. 필립스 씨, 잘 들으세요! 홉슨 대학병원에 관련된 음모가 있어요. 그 동안 우리가 은밀히 수사해 오고 있었죠." "방사능도 관련돼 있어요." 마틴이 불쑥 말했다. 앞뒤가 맞아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오?" "확실합니다." "좋아요. 잘 들어요, 필립스 씨. 이 수사에 당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누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야겠어요. 병원 내부의 사람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샌슨은 마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미행을 당하고 있다면 여기로 와서는 안됩니다. FBI가 수사중이라는것을 지 금 그들이 알면 절대 안되니까요. 잘깐만 기다리세요." 샌슨의 목소리가 끊기고 멀리서 자기들끼리 논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원, 필립스 씨, 수도원이 어딘지 아세요?" 샌슨이 전화기로 돌아와서 물었다. "물론이죠." 마틴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거기서 만납시다. 택시를 타고 와서 정문에 내린 뒤 택시를 보내세요. 그러면 당신에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상이 없다뇨?" "미행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젠장!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필립스 씨." 마틴은 더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전화기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샌슨은 대답이나 응낙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마 틴은 그의 심각한 말투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바텐더에게로 돌아가 서 택시를 부를 수 있는지 물었다. "할렘에서 한밤중에 택시를 부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바텐더는 이렇게 말했으나 마틴이 내미는 5달러짜리 지페에 마음을 바꾸고 현 금등록기 뒤에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기 바로 옆에 있던 45구경 권총의 손 잡이가 눈에 띄었다. 마틴은 20달러의 팁을 준다는 약속과 함께 목적지를 워싱턴 언덕이라고 속여 서 말한 다음에야 택시 운전수를 오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초조한 심정으로 15 분을 기다리자 택시가 문 앞에 와서 멈추어 섰다. 마틴은 차에 올라타고 한때는 화려했던 거리를 빠져나왔다. 운전수는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마틴에게 차 의 모든 문을 잠그라고 일러줬다. 열 구역 정도를 달리자 거리는 덜 으스스한 모습을 띠었다. 곧 마틴의 눈에도 익은 구역이 나타나고 불을 환히 밝힌 상점들이 황폐한 거리의 모습을 대신했 다. 우산을 받치고 걸어가는 사람들도 몇몇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자, 어디까지 가십니까?" 운전수가 말했다. 그에게는 적지로부터 누군가를 구했다는 안도감이 역력히 보였다. "수도원이요." "수도원요? 아저씨, 지금 새벽 3시 반이예요. 거긴 아무도 없다구요." "돈만 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마틴은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 봐요." 운전수가 빨간 신호등에서 차를 세우며 말했다. 그는 플렉시클래스 칼막이 너 머로 고개를 돌렸다. "난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무슨 같잖은 일에 매달려 있는지는 모르지만, 날 끌어들이지는 마슈." "싸움 같은 건 없어요. 정문 앞에서 세워주기만 하면 돼요. 그 다음엔 갈길을 가면 되잖소." 신호등이 바뀌고 운전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더 군소리가 없는것으로 보아 마틴의 말에 만족한 듯했다. 마틴은 다시 생각에 잠길 수 있게 된 것이 반 가웠다. 샌슨의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틴은 혼 자 아무런 결정도 내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게 수수께끼 투성이였다. 병 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는 현실에 구속받지 않는 엉뚱한 세계로 발을 헛디 딘 것이다. 파카에 얼룩진 워너의 핏자국을 보기 전에는 자신이 겪은 것이 환상 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최소 한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건 입증되었으니까. 창밖으로 춤추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마틴은 FBI의 개입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조직이라는 것은 한 개인보다는 철두철미하 게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병원에서의 체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 다. 이번 일 같은 경우도, 그것이 무엇이었든간에, FBI에게 그토록 중요한 일이 라면 그들이 과연 마틴이 처한 상황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겠으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마틴은 수도원에서 만나는 것이 불안해졌다. 우선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택시 뒤를 누가 따라오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았다. 교통량이 많지 않았고 미행의 위험도 없어 보였지만 그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운전수에게 방향을 바꾸자고 말하려다가 어는 곳으로 가든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력감을 느꼈다. 차가 수도원에 가까워질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던 마틴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운전수에게 말했다. "세우지 말고 계속 가요." "정문에서 내려주면 된다고 했잖소." 운전수가 따졌다. 택시는 정문 역활을 하는 둥그런 자갈이 깔린 지역으로 들어섰다. 중세풍의 문 위로 밝혀진 큰 전등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보도가 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이 근처를 한 바퀴 돌아주시오." 마틴은 말하면서 주위를 세심하게 살폈다. 두 개의 차도가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멀리 보였다. 밤에본 수도원은 십자 군의 음침한 성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택시 운전수는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허드슨 강이 보이는 순환도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밤이라 강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지 워싱턴 교가 불빛으로 우아한 곡 선을 그리며 하늘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서 있었다. 마틴은 움직이는 물체가 없나 끊임없이 주위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강가에 차를 세워두고 밀회를 즐기는 그 흔한 연인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었거나 날씨가 너무 추운 탓일 거야. 아니면 둘 다이거나. 택시는 큰 원을 그 린 뒤 다시 정문으로 돌아와서 멈췄다. "자, 이제 뭘 원하슈?" 운전수가 백미러로 마틴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길 빠져나갑시다." 운전수는 대답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건물로부터 멀어져 갔다. "잠깐, 차 세워요!" 마틴이 이렇게 소리치자 차가 끽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했다. 마틴은 진입로 를 따라 세워진 돌담에 서서 담 너머를 보고 있는 부랑아 세 명을 발견했다. 그 들은 타이어가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택시가 멈춘 곳으로 부터 30야드 뒤쪽이었다. "얼마요?" 마틴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필요없소. 내리시오." 마틴은 플렉시글래스 창틀에다 10달러짜리 지페를 끼워놓고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택시는 휭하니 달아났고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차소리가 순식 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틈을 무거운 정적이 대신하고 저 멀리 보이지 않는 헨리 허드슨 가로를 따라 달리는 차들만이 그 정적을 가끔 뒤흔들었다. 그의 오른쪽 으로 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이 움트기 시작하는 나무들 틈 속으로 나 있었 다. 어렴풋하게나마 그 샛길이 다시 갈라녀 아치형의 차도 밑으로 뻗은 것이 보 였다. 그는 길을 따라가면서 구름다리 밑을 쳐다보았다. 부랑아는 셋이 아니라 넷이 엇다. 한 명은 대자로 뻗어서 코를 골고 있었고, 나머지 세 명은 앉아서 타드놀 이를 하는 중이었다. 작은 모닥불이 반 갤론짜리 술병 두 개를 비춰주고 있었다. 마틴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면서 그들이 겉모습 그대로 한낱 떠돌이에 지나지 않 기를 바랬다. 그는 이들을 샌슨과의 사이에 방패막이로 이용할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가 체포될 가능성은 없다 하더라도 병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앞으로 일 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간매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다 해도 한밤중에 수도원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절차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틴은 그들을 몇 분 더 지켜 본 뒤에 약간 술에 취한 체하며 구름다리 밑으 로 걸어갔다. 세 명의 부랑자들은 그에게 잠깐 눈길을 주다가 아무런 해도 입히 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하고 다시 카드놀이에 열중했다. "이 중에 10달러 벌고 싶은 사람 혹시 없소?" 마틴이 말을 걸었다. 그들이 두번째로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을 하면 10달러를 버는데요?" 가장 어린 녀석이 물었다. "10분 동안만 내가 되는 거야." 세 명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녀석이 일어섰다. "좋아요. 내가 당신이 되어서 무얼 하면 되나요?" "수도원으로 올라가서 주위를 맴돌다가 어떤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필립스 라고 대답하면 돼." "10달러부터 보여줘요." 마틴은 돈을 그에게 내보였다. "나는 어때요?" 나이 먹은 녀석이 어렵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닥쳐, 잭." 젊은 녀석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아저씨?" "마틴 필립스." "알았어요, 마틴. 계약은 성립된 거예요." 마틴은 외투와 모자를 벗어서 그에게 입히고 모자를 푹 눌러 씌웠다. 그런 다 음 그는 부랑아의 외투를 받아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소매에 팔을 꿰었다. 외 투는 좁은 벨벳 옷깃이 달린 다해진 체스터필드였다. 주머니 속엔 포장도 하지 않은 먹다남은 샌드위치 조각이 들어 있었다. 마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두 명의 사내가 부득부득 따라가겠다고 우 겼다. 그들은 마틴의 조용하지 않으면 모든 거래는 취소라는 엄포를 놓을 때까 지 큰소리로 웃고 농담을 했다. "똑바로 걸어가면 되요?" 젊은 녀석이 물었다. "그래." 마틴은 대답하면서 이 가장행렬을 계속해야 하나 망설였다. 길은 넓은 차도 밑에 있는 안마당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자갈이 깔린 지역에 이르기 직전에 지친 행인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가 마련된 가파른 경사길이 있었다. 입구 에서부터 이어진 돌담으로 만든 경계선이 교차점에서 뚝 끊겼다. 그곳만 넘으면 수도원 본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좋아." 마틴이 속삭였다. "저 문을 향해 걸어가서 문을 열어보고 돌아서 걸어나오면 10달러는 네것이 되지." "내가 외투와 모자를 가지고 그냥 내 빼버리면 어쩌구요." "널 믿겠어. 도망친다 해도 널 잡는 건 문제없어." "이름이 뭐라고 했죠?" "필립스. 마틴 필립스." 녀석은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앞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모자를 일부러 더 눌러 썼다. 그는 경사길을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곧 중심을 잃고 몸으 ㄹ가누지 못했다. 마틴이 그의 등을 살짝 떠밀자 그는 엎어져 손을 짚고 기어서 올라가 차도에 이르러서야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틴도 돌담 건너편이 넘겨다 보일 수 있을 때까지 경사길을 올라갔다. 부랑 아는 벌써 차도를 건너 자갈이 깔린 표면 때문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넘 어지기 전에 중심을 잡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사용되는 공터를 지난 그는 나무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 있어요?" 그의 외치는 소리가 수도원 안마당에 울려퍼졌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로 비틀 거리며 걸어가서 다시 소리쳤다. "나, 마틴 필립스요!"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하는 부슬비 소리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담장에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수도원은 비현실적이고 시간 을 초월한 듯한 정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틴은 다시 자기가 거대한 환상에 사 로잡힌 미생물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갑자기 총소리가 정적을 찢고, 안마당에 있던 부랑아의 몸의 허공으로 붕 떴 다가 화강암 보도 위로 쑤셔박히는 것이 보였다. 고속으로 날아간 총알이 잘 익 은 멜론을 맞춘 것과 비슷한 장면이었다. 총탄이 들어갈때는 아주 작은 구멍을 만들고 말았지만, 나올 때에는 무서운 힘으로 그의 얼굴을 다 날려버리고 30피 트 사방으로 산산히 흩어지게 만들었다. 마틴과 두 명의 부랑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누군가 그를 총으로 쏘았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돌려 서로 부딪치고 구르면서 가파른 언덕길을 뛰어 내려 수도원을 벗어났다. 마틴은 그때처럼 절망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워너의 집에서 도망나올 때도 이토록 심한 공포에 사로잡히지는 않앗었다. 금방이라도 총소리가 다시 나고, 치 명적인 총탄이 날아와 그를 그 자리에서 쓰러뜨릴 것만 같았다. 그를 저격한 사 람이 누구이건 간에 안마당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살펴보고 실패라는 것을 즉가 가 알아차릴 것이 틀림없었다.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돌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언덕길부터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마틴은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곤두박질치면서도 길이 어서 나타나기만을 바랬다. 그가 몸 을 일으켜 세웠을 때 오른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관목숲 을 헤치며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두번째 총성이 고통스런 비명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마틴은 심장이 입으로튀 어나올 것만 같았다. 숲을 벗어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어둠속으로 이어진 오솔 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아차하는 순간 그의 몸이 계단 꼭대기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땅에 부딪칠 때까지 시간이 무한정 계속되는 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체조선수처럼 머리를 몸쪽으로 바짝당기 고 몸을 한 바퀴 굴려 재주를 넘었다. 그는 등을 깔고 누웠다가 일어나 앉았지 만 어지럼증으로 정신을 못차렸다. 그때 뒤에서 길을 따라 달려오는 발자국 소 리가 들려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현기증을 참으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 다. 이번에는 제때 계단을 발견하고 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그는 계단을 서너 개 씩 뛰어내려 후들거리는 다리로 계속 달렸다. 직각으로 교차되는 길이 아타났지 만, 너무 빨리 뛰느라 어느 쪼긍로 방향을 정해야 할지 결정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 번 교차로에서 길이 막힌 것을 보고 머뭇거렸다. 오른쪽 밑으로 숲이 끊 겨 있고 나무들 가장자리로 콘크리트 난간이 달린 발코니 같은 것이 보였다. 발 자국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행각하고 자 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발코니를 향해 뛰어갓다. 그의 눈 앞에 그네와 벤치, 그리고 가운데에 여름에 수영장으로 사용되는 거승로 보이는 얕게 파인 곳이 있는 시멘트 마당이 100댜드 정도 펼쳐져 있었다. 넓은 마당 너머로 도시의 거리가 보이고 노란 택시가 지나가는 것도 눈에 띄었다.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그는 발코니에서 마당까지 이어진 넓은 시멘트 계단을 향해 몸을 움직여 가다가, 추격자들보다 넘저 발코니를 향 해 넓게 트인 장소를 가로지르다가는 발각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잽싸게 발코니 아래 우묵한 곳으로 숨어 들었다. 코를 찌르는 지린내도 개의치 않았다. 그때 머리 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작정 몸을 뒤 로 굴려 벽에 가서 기대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앉은 그는 소리가 새 어나가지 않게 가쁜 숨을 고르게 하려 애썼다. 발코니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희미한 앞마당을 배경으로 버티고 서 있었고 저 멀리 깜빡이는 시내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머리 위에 서 떠돌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기진맥진하여 숨을 헐떡이는 물체가 마틴의 등뒤에서 나타나는 듯하더니, 한 남자의 그림자가 운동장으로 굴러내려 그 너머의 도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가벼운 발소리가 연달아 위의 발코니에서 들리더니 두런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얕은 수영장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마틴의 머리 위에서 총이 불을 뿜고 동시에 달아나던 그림자가 얼굴을 땅에 쳐박고 고꾸라졌다. 시멘트 바닥에 부딪친 그의 몸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 다. 즉사한 것이 분명했다. 마틴은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여우처럼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제 최후의 일격 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지치지 않았다면 저항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발코니를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 이며 숨죽이고 앉아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틴은 앞에 있는 기둥 사이로 금방이라도 어두운 그림자들이 나타날 것을 예 상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11. 데니스 생거는 즉시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한밤중에 나는 소리에 귀를 기 울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체내로 쏟아져 나온 아드레날린으로 인해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마치 망치로 쾅쾅 치듯 뛰는 것 을 느꼈다. 그녀를 잠에서 깨운 이상한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 이라고는 오래된 냉장고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그녀의 호흡이 서서히 정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냉장고마저 마지막으로 덜컥하는 소리가 나더니 모터가 꺼져 아파트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젖히며 악몽을 꾸었나 하다가 화장실에 가야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방광의 압박감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일어나기 싫었지 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데니스는 따뜻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녀는 불을 켜지 도, 화장실 문을 닫지도 않고 잠옷을 허벅지까지 끌어올린 뒤 차가운 변기에 걸 터 앉았다. 체내의 아드레날린이 방광을 억제하고 있는지 몇 분 동안 앉아 있은 뒤에야 소변을 볼 수 있었다. 볼 일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옆집에서 누가 벽에 쿵하고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데니스는 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해서 귀를 귀울였지만 아파트 안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살그머니 마루로 나가 현관문을 살폈다. 자물쇠가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침실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녀가 마루에 찬바람이 이 는 것을 느끼고 메모판에 꽂아 놓은 종이쪽지가 펄럭이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바 로 그때였다. 그녀는 방향을 돌려 허겁지겁 현관쪽으로 다가가서 어두운 거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통풍구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데니스는 겁을 먹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했지만 뉴욕에 온 이래 가장 두 려운 것이 낯선 사람의 침입 가능성이었다. 여기에 온 후 근 한 달동안 그녀는 제대로 잠도 못잤다. 그런데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지금 그 악몽이 현실로 되 살아나고 있었다. 누군가 이 아파트 안에 있는 것이다. 순간 그녀는 전화기가 두 대라는 것을 기억했다. 하나는 침대 옆에 있었고, 하 나는 바로 앞에 있는 부엌 벽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낡은 리놀륨 카펫을 발바 닥에 느끼며 한 걸음에 마루를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선 뒤 싱크대를 뒤져서 과도를 집어들었다. 작은 칼날이 희미한 빛에도 섬뜩하게 빛났다. 데니스는 그 보잘것없는 무기를 가지고도 든든함을 느꼈다. 냉장고 앞으로 뻗은 그녀의 손은 전화기에 닿았다. 그 순간 낡은 냉장고의 모 터가 지하철 소리 같은 소음을 내며 가동을 시작했다.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던 데니스는 그 소리에 놀라 전화기를 놓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입으로부터 비명이 터져나오기 직전 한 손이 그녀의 목을 거머 쥐고 무서운 힘으로 들어올렸다. 그녀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팔이 축 늘어지 며 칼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발을 마루바닥에 질질 끌며 헝겊 인형처럼 가볍게 끌려갔다. 침실에 내동댕이쳐진 그녀의 눈 앞에 섬광이 번쩍이고 머리에 무딘 통증이 왔다. 그리 고 소음기가 부착된 권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났다. 총탄은 침대 위의 담요에 가서 박혔다. 누군가가 담요를 확 제쳐보더니 그녀 를 거칠게 꿇어앉혔다. "그 자식 어디 있어?" 침입자 중의 한 명이 다그쳤다. 다른 한 명은 벽장을 열어보았다. 그녀는 침대 옆에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옷을 입고 두꺼운 벨 트를 한 두 명의 사내가 앞에 있었다. "누구 말인가요?" 데니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네 애인, 마틴 필립스 말이야." "몰라요, 병원에 있을 거예요." 사내 중의 하나가 다가와서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침대 위로 던졌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지." 마틴에게 시간은 꿈결같이 흘렀다. 마지막 총성이 들린 후 더이상 아무 소리 도 들을 수 없었다. 운동장 너머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간혹 들려오는 것을 빼고는 너무도 고요한 밤이었다. 그는 심장의 고동이 서서히 느려져 정상 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침 햇살이 운동장 위로 서서히 번져갈 때에야 그의 정신은 제 기능을 발휘 하기 시작했다. 여명이 밝아옴에 따라 콘크리트 쓰레기장이 자연석같이 둘레를 막고 있는 그곳의 지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새들이 갑자기 모여들더니 비둘 기 몇 마리가 물을 뺀 수영장 안에 엎어져 있는 시체 위를 맴돌았다.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보려던 그의 뇌리에 운동장에 누워 있는 시체가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곧 누군가 경찰을 부를테고 그는 지난밤 이래 충분히 의심 을 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마틴은발을 딛고 일어서서 혈액순환이 정상을 되찾을 때까지 등을 벽에 기대 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시멘트 계단을 오르는데 온몸이 욱씬거려 왔다. 그가 바로 몇 시간 전 목숨을 걸고 달려왔던 오솔길이 밑으로 보였다. 길 저편에서 어떤 사람이 개를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머지않아 운동장의 시체를 발견하겠지. 그는 계단을 내려가 버려진 시체 근처를 지나서 공원 구석으로 황급히 걸어갔 다. 비둘기들이 총탄에 산산조각이 난 시체의 살 조각을 물고 싸우는 것을 보고 마틴은 고개를 돌렸다. 공원을 벗어난 그는 부랑자가 입었던 외투의 깃을 세우고 길을 건너 브로드웨 이로 접어들었다. 모퉁이에 지하철 입구가 보였지만 땅 밑에는 어떤 함정이 숨 겨져 있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는 그를 뒤쫓던 자들이 아직도 이 근처에 있을 까봐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어떤 건물 입구에 들어가 거리를 살펴보았다. 시시각각 날이 밝아지고 차량의 수도 증가하고 있었다. 마틴은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사람들이 많아질수 록 나는 안전하다. 수상쩍게 거리를 배회한다든가 세워진 차 안에 앉아 있는 사 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택시 한 대가 신호등에 걸려 그의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마틴은 건물 입구 에서 뛰쳐나와 차 뒷문을 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 운전수가 되돌아 보더니 빨간 불인데도 속도를 내어 달아나버렸다. 마틴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택시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차도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야 택시 운전수가 달아난 이유를 알았다. 그는 영락없는 부랑아의 몰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는 굳어져버린 피와 나뭇잎을 붙인 채 마구 헝클어지 고 얼굴은 지저분했으며, 스물네 시간동안 자라난 수염이 덥수룩 했다. 거기에 낡은 체스터필드 외투가 떠돌이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익숙한 지갑의 촉감을 느끼고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는 지갑을 꺼내 현금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았다. 31달러가 있었 다. 이런 상황에서 크레디트 카드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그는 5달러짜 리 지폐 한 장을 끄집어 내고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5분쯤 뒤에 또 한 대가 와서 멈췄다. 마틴은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서 가지런 히 하고 다 떨어진 옷이라는 것이 금방 눈에 띄지 않도록 외투 앞 자락을 풀어 헤친 뒤 운전수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택시 앞에 가서섰다. 거기다 그는 5달러짜리 지폐를 들고 있었다. 운전수가 그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앞으로 곧장 가주세요." 운전수는 백미러에 비친 그의 모습에 놀란듯 했지만 신호가 바뀌자 차에 기어 를 넣고 브로드웨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틴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돌려 뒷 유리창 밖을 살펴보았다. 포트타이론 공 원과 작은 운동장이 급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마틴은 아직도 어디로 갈지 마음 을 정하지 못했지만 군중 속에 끼어들면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42번가로 가주시오."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강변로에서 돌 수 있었는데." 운전수가 투덜거렸다. "아뇨. 그 길로 가선 안 돼요. 서부도로를 타고 가주세요." "그럼, 요금이 10달러 정도 나오는데요. 손님." "알았소." 그는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 백미러를 보고 있는 운전수에게 보여주었다.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틴은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애썼다. 그는 지 난 열두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의 세계 전 체가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다. 그는 경찰에 달려가 구조를 요청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경찰이 왜 자신을 FBI에 넘겨주려 했을까?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기관에 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일까? 차가 2번가를 질주하는 동안 그 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42번가에는 마틴이 필요로 했던 혼잡함이 있었다. 여섯 시간 전만 해도 다른 세계같이 으스스하던 거리가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곳의 사람들은 병적 인 정신상태를 굳이 정상인 채 숨기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한 사람이 누군지 쉽게 구별하고 피할 수가 있었다. 마틴은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큰 걸로 한 병 사서 꿀꺽꿀꺽 다 마시고도 모자 라 한 병을 더 마셨다. 그는 42번가를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에 대 한 논리정연한 설명이 필요했다. 의사로서 그는 어떤 질병이 아주 복합적인 증 후와 증세를 보인다 해도 틀림없이 하나의 확실한 병명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틴은 5번가에 가까워지면서 도서관 옆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걸어 들어갔 다. 그는 빈 벤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지저분한 외투로 몸을 감싸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한 뒤 밤사이 일어난 사건들을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우선 병원에서 일어난 일부터 생각해 보면... 마틴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잠에서 깨어났다. 누가 그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제 공원에는 많은 사람이 거닐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땀이 많이 났다. 일어서는 데 자신의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확 끼쳐왔다. 그는 공원을 걸어나오며 시 계를 흘끔 보다 벌써 10시30분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몇 구역 떨어진 곳에서 그리스 풍으로 지어진 커피 숍을 발견하고 안으 로 들어갔다. 낡은 외투를 둘둘 말아 탁자 밑에 내려놓은 뒤 그는 배가 고픈 것 을 느끼고 달걀 프라이와 베이컨, 토스트, 커피를 주문했다. 그는 비좁은 화장실 에 들어갔지만 얼굴은 씻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누가 그를 본다고 해도 의사라 고 여길 리는 만무했다. 누군가 그를 추격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나은 분장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다섯 명의 환자에 대해 만들었던 쭈글쭈글해진 명단을 호주머니에서 찾았다. 마리노, 루카스, 콜린스, 멕카시, 린키스트, 이 환자 들과 그들의 병력이 기관에서 조사한다는 기괴한 사건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 이 여자들은 모두 어떻게 된걸까? 살해되었을까? 이 사건이 여성과 암흑가에 연계 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방사능은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FBI가 개입 한 이유는? 어쩌면 그 음모는 국가적인 것이고 전국의 병원이 다 관련된 것일지 도 모른다. 마틴은 커피를 한잔 더 마시며 수수께끼의 해답은 홉슨 대학병원 안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기관에서는 그가 병원에 올 것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병원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해도 마 틴에게는 가장 위험한 장소인 것이다. 마틴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공중전화로 다 가갔다. 먼저 전화해야 할 사람은 헬렌이었다. "필립스 박사님! 이제라도 전화가 돼서 다행이군요. 어디 계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다. "병원 바깥이야." "그럴 줄 알았어요. 어딘데요? "왜 묻지?" "그냥 알고 싶어서요." "말해봐, 누가 나를 찾지 않던가... FBI같은 데서 말야?" "FBI에서 박사님을 왜 찾겠어요." 마틴은 헬렌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질문에 질문으로 반응하는 것은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특히 FBI의 조사라는 얼토당토 않은 질문을 받 았을 때 평소 같았으면 그녀는 그에게 미쳤느냐는 한마디만 하고 말았을 것이 다. 샌슨이나 그의 정보원 중의 하나가 그녀 옆에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전화를 툭 끊어버리고 차트를 비롯한 연구실에 있는 자료르 빼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마틴은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데니스 생거 박사 를 호출해 달라고 했다. 제발 그녀가 산부인과에 가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그러 나 그녀는 호출에 응하지 않았고 그는 메세지도 남기기가 두려워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크리스틴 린키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번째 벨이 울릴 때 전화를 받은 그녀의 룸메이트에게 마틴은 이름을 밝히고 크리스틴에 대해 물었 지만, 그녀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다시는 전화하지말라고 한 뒤 전화를 끊 어버렸다. 마틴은 제자리로 돌아와 환자들의 명단을 탁자 위에 펼쳤다. 그는 펜을 꺼내 이렇게 썼다. '젊은 여성의 뇌에 강한 방사능 반응(다른 부위도 의심), 정상적인 팝도말 검 사결과를 비정상이라고 보고, 다발성 경화증과 비슷한 일련의 신경학적 증상.' 마틴은 자신이 쓴 내용을 바라보다가 마음 속으로 거대한 원을 그려보았다. 그는 다시 썼다. '신경증상-산부인과-경찰-FBI,그리고 시체광 워너!' 이것들이 모두 연괄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없어 보였지만 산부인과가 그 한 가운데 위치하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팝 도말 검사결과가 비정상이라고 보고 된 이유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의 힘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무엇인가 거 대한 것이 맞닥뜨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매일 그에게 두통거리를 안겨주던 예 전의 생활이 오히려 그리워졌다. 다시 데니스를 품에 안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지겹고 따분한 생활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과 약속을 맺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그를 이 악몽에서 구출해 주신다면 다시는 자기 생활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그는 종이를 내려다 보다가 눈에 눈물이 가득 괴는 것을 느꼈다. 경찰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를 쫓는 것일까? 이건 말도 안돼. 그는 전화기로 걸어가 다시 데니스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여전 히 호출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에 빠진 채 산부인과로 전화한 뒤 접수 간호사를 바꿔 달라고 했다. "데니스 생거라는 환자가 왔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직 오지 않았는데요. 오기만 하면 언제라도 진찰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마틴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을 이었다. "난 마틴 필립스 박사인데요, 그녀가 오면 내가 약속을 취소시켰으니까 나한테 연락하라고 말해주시오." "그렇게 전하죠." 마틴은 이렇게 말하는 접수 간호사의 목소리가 당황하여 떨리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마틴은 작은 공원으로 다시 걸어가 벤치에 앉았다. 그는 어떠한 분별력 있는 판단도 내릴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는 그였기에 총격을 받고도 경찰에 연락할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후는 졸다가 퍼뜩 깨어나는 과정을 몇 번씩 되풀이하는 가운데 흘러갔다. 그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판단이 되어버렸다. 교통이 혼잡한 시간이 되자 자동차의 숫자는 점점 불어나고 행인들의 수는 줄어들기 시 작했다. 마틴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커피 숍으로 다시 들어갔다. 시간은 여섯 시를 조금 넘어 있었다. 그는 미트로프 한 접시를 주문하고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데니스를 다시 한 번 호출했다. 그러나 그녀가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아파트로 전 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경찰에서 그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녀 도 감시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녀는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수화기를 들었다. "마틴?" 그녀의 목소리는 필사적이었다. "그래, 나야."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거기 어디예요?" "도대체 어디 갔었어? 전화로 종일 호출을 했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집에 있었어요." "병원 교환수에게 알리지도 않았잖아." "알아요..., 전..." 갑자기 데니스의 목소리가 변했다. "여기 오면 안 돼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기고 싸우는 듯한 호리가 들려왔다. 그는 심장이 방망이질치는 것을 느꼈다. "데니스!" 그가 소리치자 커피 숍 안에 있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필립스 씨, 나 샌슨이오." 전화기를 다시 든 사람은 정보원이었다. 뒤에서 데니스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 가 들렸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필립스 씨." 샌슨이 전화기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그 여자를 끌고가서 조용히 하게 해!" 그가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잘 들어요, 필립스 씨." "샌슨, 이게 무슨 짓이야!" 마틴이 고함을 질렀다. "데니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진정하시오, 필립스 씨. 여자는 안전하니까, 우리는 그녀를 보호하러 이곳에 왔소. 지난 밤에 수도원에서는 어떻게 된 거요?" "어떻게 된 거냐고? 당신 제정신이야? 당신들이 나를 날려버리려고 했잖아!" "터무니 없는 소리 마시오. 우린 앞마당에 있는 게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우리는 그들이 이미 당신을 잡아간 줄로 착각한 거요." "'그들'이 누군데?" 마틴은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필립스! 이런 사항을 전화로 이야기 할 수는 없소." "어떻게 된 건지 말이나 해!" 커피 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꼼짝도 않고 쥐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다. 그들 은 뉴욕 시민들로 온갖 종류의 이상한 일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런 작은 커피 솝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샌슨이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필립스 씨, 당신은 여기로 와야만 해요. 그것도 지금 당장! 당신 혼자 나가 돌아다니면 문제가 더 복잡해져요. 당신도 알다시피 무고한 생명들이 경각에 달려 있소." "두 시간!" 마틴이 소리쳤다. "시내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있단 말이야!" "좋아요, 두 시간. 하지만 1분이라도 늦으면 안돼요." 찰칵 하는 소리가 나고 전화가 끊어졌다. 마틴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순식간에 그의 우유부단함은 사라져버렸다. 그는 5달러짜리 지폐를 내던지고 8번가 지하철 역을 향해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는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 만 일단 병원부터 들러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주어진 두 시간동안 해답을 찾 아야 했다. 샌슨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었다. 정말로 그들은 마틴이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틴은 확신할 수가 없었고 그 불확실성이 그에게 공포를 안겨다주었 다. 그는 직감적으로 데니스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느꼈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시내선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 고 있는 시간은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었고, 그의 잠재적인 지능을 사용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릴 때까지 그는 병원으로 들어갈 방법과 들어가서 할 일을 생각해 두었다. 마틴은 거리로 쏟아져 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을 내려 첫번째 목적지 로 향했다. 그곳은 주류 판매점이었다. 마틴의 후줄근한 용모를 한번 훑어 본 점 원이 금전등록기 뒤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밖으로 내몰려고 했지만 그가 돈을 들어보이자 아무 말도 안했다. 위스키 한 병을 골라 돈을 치르는 데는 30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브로드웨이 를 벗어나 샛길로 접어든 그는 드럼통으로 가득찬 좁은 뒷골목을 발견했다. 그 는 술병을 따고 술을 한 모금 입에 부어놓고 목을 헹구었다. 그는 조금만 삼키고 대부분은 바닥에 도로 뱉었다. 그는 위스키를 향수처럼 얼굴과 목에 뿌리고 반쯤 남은 병을 외투 주머니에 꽂았다. 드럼통 사이를 비틀 거리며 걸어간 그는 뒤쪽에 있던 드럼통 하나를 골랐다. 겨울에 보도에 까는데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 모래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나머지 현금을 지갑에서 꺼내 술병이 들어있는 주머니에 함께 넣은 뒤 모래에 얕은 구덩이를 파고 지갑 을 묻었다. 그가 다음에 들른 곳은 작지만 분주한 식료품점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넓게 길을 터주었다. 손님이 상당히 북적거리고 있어서 그는 돈을 계 산하는 곳에서 금방 눈에 띄는 장소를 찾느라 몇 사람과 부딪쳐 지나가야 했다. "아..." 마틴은 숨이 막히는 척하며 콩이 든 깡통 진열장을 싸안고 나뒹굴었다. 깡통 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굴러가는 가운데 그는 몹시 아프다는 듯 신음 을 했다. 가게 주인이 달려와서 허리를 구부리고 괜찮냐고 묻자 그는 이를 악물 었다. "가슴이... 아파요..." 얼마 있지 않아서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차가 마틴을 싣고 홉슨 대학병원으 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얼굴에 산소마스크가 씌워지고 가슴에 심전도 기 록계가 연결되었다. 정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그의 심전도는 미리 무선을 통 해 분석되어져서 심장에 관계되는 약물의 투여는 일단 필요없다는 결론이 내려 졌다. 보조원들의 의해 응급실로 실려가면서 그는 현관의 경찰들이 서 있는 것을 보 았지만 그들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주 응급실 방 가운데 하나로 실려가 침대에 옮겨졌다. 레지던트가 심전도를 한 번 더 검사하는 동안 간호사 가 그의 신분증을 찾으려고 그의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검사는 정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으므로 응급 심장팀은 인턴 한 명에게 그를 맡기고 자리를 떴다. "지금도 아파요?" 인턴이 마틴 위로 허리를 굽히고 물었다. “말록스(제산제중의 하나)를 주세요.” 그는 끙끙거리며 말했다. “싸구려 술을 마시면 말록스를 먹어야 할 때가 있어요.” “괜찮은 방법인 것 같은데.” 의사의 말이었다. 서른다섯 살 먹은 깐깐하게 생긴 간호사가 그에게 말록스를 갖다주었다. 그녀 는 비참한 꼴을 하고 있는 그를 두들겨 패지 않았을 뿐 몹시 거칠게 다루었다. 그녀가 병력을 받아 적을 때 그는 이름을 홉킨스라고 둘러댔다. 그것은 대학 시절 룸메이트의 이름이었다. 간호사는 몇 분 동안 안정을 취하고 가슴에 통증 이 다시 오면 말하라고 한 뒤 그가 누워있는 침대 주위에 커튼을 쳤다. 마틴은 몇 분 동안 누워 있다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 는 응급실 도구함에서 면도날 하나와 상처를 깨끗이 닦아내는데 쓰이는 작은 비 누조각을 찾아내고 수건 몇 장과 수술 모자와 마스크도 집어들었다. 그렇게 무 장한 그는 커튼을 살짝 빠져나왔다. 평상시처럼 밤이 깊어가는 그 시각의 응급실은 혼란의 아수라장이었다. 접수 창구 앞에서 접수를 하려고 기다리는 줄은 입구까지 늘어서 있었고 구급차가 일 정한 간격으로 계속 도착했다. 그가 복도를 당당히 걸어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접수 창구 맞은편의 회색문을 열 때까지 아무도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 다. 휴게실에는 단 한 명의 의사밖에 없었고 그나마 심전도를 읽느라 정신이 팔려 있어서 마틴은 들키지 않고 샤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옷가지를 방구석에 벗어두고 재빨리 샤워와 면도를 했다. 세면대 옆에 있는 수술용 소독복 뭉치가 눈에 띄었다. 응급실 당직의사로 보이기에는 안성맞 춤인 차림이었다. 그는 상의와 바지를 입고 젖은 머리를 수술 모자로 감싼 뒤 마스크까지 썼다. 병원 사람들이 수술장 밖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특히 코감기로 고생할 때는 대부분이 그랬다. 마틴은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보고 그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확신을 했다. 병원에 무사히 들어왔을 뿐 아니라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응급실 환자는 제멋대로 병원을 나가는 환자가 많으니 하비 홉킨스도 그렇게 해서 없어진 걸로 생각하겠지. 마틴은 시 간을 보았다. 한 시간을 소비한 셈이었다. 마틴은 휴게실을 나와 두 사람의 경찰 곁을 지나 응급실을 가로지른 뒤 카페 테리아 뒤의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갔다. 방사능 탐지기를 찾으려 했지만 연구실에 있는 것을 가지러 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치료방사선과를 뒤져 다른 것을 구해야 했다. 그는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다시 뛰어내려와 외래가 있는 건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구식이라 탑승원이 있어야 하는 엘리베이터는 이미 가동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산부인과가 있는 4층까지 뛰어올라가야 했다. 그는 화가 잔 뜩 난 두명의 사업가 틈에 끼어 앉아 병원으로 오던 지하철 안에서 방사능이 산 부인과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병원안에 들어와 방사능 탐지기를 손에 쥐고 있는 데도 그는 갈피를 못 잡았다. 어디를 조사해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틴은 산부인과 대기시를 지나서 그보다 작은 대학 외래로 들어섰다. 청소부들이 아직 일을 시 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떨이가 넘쳐있고 종잇장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모든 게 극히 정상이고 아무 일도 없은 것처럼 보였다. 마틴은 접수 간호사의 책상을 살펴보았지만 책상서랍은 잠겨있었다. 책상뒤 에 있는 두 개의 문을 열어 보려고 했었으나 모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잠금 장치는 매우 단순한 것이어서 열쇠를 손잡이에 밀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접수 간호사의 책상 위에 있던 플라스틱 카드를 틈새로 밀어 넣어 간단히 문을 땄다. 마틴은 방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전에 하퍼 박사와 이야기를 나눈 복도였다. 왼쪽에 두 개 의 진찰실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검사실 아니면 다용도실로 보이는 방이 있었 다. 마틴은 진찰실로부터 들어가 보기로 했다. 방사능 탐지기를 들고 두 방을 돌아다니며 모든 캐비넷 안과 구석, 심지어는 진찰대 위까지 탐지기를 들이댔지 만 결과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진찰실은 깨끗했던 것이다. 검사실에도 작업대 위의 캐비넷부터 시작해 서랍을 열어보고 상자 안을 들여다 보며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는 기구가 들어있는 큰 캐비넷까지 마저 검사했다. 탐지기의 반 응은 모두 음성이었다. 그런데 쓰레기통에서 최초의 반응이 나타났다. 매우 약하고 전혀 해가 없을 정도의 야이었지만 분명히 방사능임에 틀림없었다. 시계를 들여다 보다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30분 내로 데니스의 아파트에 전화 를 해야만 하였다. 그는 샌슨이 그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반드시 확인한 후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쓰레기통에서 나온 양성 반응 때문에 그는 검사실을 다시 한 번 살펴 보기로 했다. 벽장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벽장의 밑선반은 시트와 가운이 차곡차곡 개어져 놓인 반면, 윗선반은 검사기구와 사무실 용품이 뒤섞여 있었다. 그가 탐지기를 바닥 가까이에 대자 선반밑에 더러워진 시트를 담은 바 구니에서 약한 양성 반응이 나타났다. 마틴은 더러운 시트를 모두 꺼내고 탐지기를 들이댔다. 아무 이상도 없었다. 탐지기를 빈 상자에 댔더니 밑바탁에서 다시 약한 양성 반응이 나왔다. 그는 팔을 뻗어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벽과 바닥은 나무색깔로 칠해져 있어서 단단 해 보였지만 주먹으로 두들기니 진동이 있었다. 그는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천 천히 두들겨 보았다. 한쪽 모퉁이에 이르렀을때 널판이 약간 기울더니 틈이 벌 어지며 그 밑으로 또 하나의 공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곳을 밀 어서 바구니가 놓여있는 바닥을 들어 올리고 아래를 살펴보았다. 밑에는 눈에 익은 방사선 경고 문안이 담긴 납을 씌운 보관함이 두 개 있었다. 두 개의 상자에는 여러 가지 의학용 동위원소(Isotope:원자번호는 같으나 원자 량은 다른 원소)를 생산하는 브루크헤븐 연구소에서 제작되었다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상자 가운데 하나만 딱지를 제대로 다 읽을 수 있었다. 상자에는 2(18F) 플루오르-2-데옥시-디 글루코스가 들어 있다고 되어 있었다. 다른 상자 에 붙은 딱지는 일부가 지워져 있었지만, 역시 데옥시-디-글로코스 동위원소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틴은 재빨리 상자를 열었다. 딱지를 읽을 수 있었던 첫번째 상자는 중등도 의 방사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훨씬 두꺼운 납으로 보호되어 있는 다른 상 자에 탐지기를 들이대자 탐지기가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무엇인지를 몰라도 아주 많은 양의 방사능이 들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상자 뚜껑을 다시 닫고 널판을 덮은 뒤 시트를 바구니에 담고 벽장 문을 닫았다. 그는 그 물질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지만 그것이 산부인과에 있다는 사실만으 로도 의심을 하기에 충분했다. 병원에는 방사능 치료와 몇가지 진단법, 그리고 한정된 연구 분야 외에는 방사능 물질의 사용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통제를 가 하고 있었으므로 산부인과 외래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알아 내야 할 것은 방사성 데옥시 글루코스가 어디에 사용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틴은 방사능 탐지기를 들고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일단 터널로 들 어선 후에는 의대생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뛰어가던 속도를 줄여야 했 다. 그러나 의대 신축건물에 이르자 그는 다시 뛰기 시작해 도서관에 도착할 때 쯤에는 숨이 턱에 차 있었다. ‘데옥시 글루코스’ 그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걸 어디서 찾아볼 수 있죠?’ ‘모르겠는데요.' 깜짝 놀란 사서의 대답이었다. ‘이런’ 마틴은 카드 목록이 있는 데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자료실에 물어보세요.’ 사서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 15세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는 정기 간행물 열람실 옆의 자료실 책장으로 다가갔다. 소녀는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빨리..., 데옥시 글루코스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게 뭔데요?’ 소녀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훑어 보았다. ‘글루코스로부터 만들어진 설탕 종류일 것 같은데, 뭔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찾 아보려는 거야.’ ‘그럼 화학 이론을 먼저 찾아보시고 아니면 의학 색인을 찾으신 다음에...’ ‘화학이론! 그게 어느쪽이지?’ 소녀가 긴 탁자 뒤에 세워진 서가를 가리켰다. 마틴은 그곳으로 달려가 색인 집을 뽑아 들었다. 시간이 급박하였지만 시계를 쳐다보기가 두려웠다. 글루코 스 밑에 나온 부제대로 책과 페이지 수를 찾았다. 그는 항목을 펼치고 읽기 시 작했지만 너무 흥분되어서 말의 뜻이 하나도 머리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뒤죽박 죽이 되어버렸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집중을 하며 읽어 나갔다. 데옥시 글루코스는 글루코스와 유사한 것으로 뇌의 생물학적인 연료이며, 뇌- 혈관-장벽을 투관한 다음 활동성 신경세포에 흡수된다고 했다. 그러나 일단 활 동성 신경세포에 흡수된 다음에는 글루코스처럼 대사되어 버리지 못하고 그래도 침착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의 맨 밑줄에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 ... 방사능을 함유한 데옥시 글루코스는 뇌 연구에 대단한 기여를 해왔다.’ 책을 덮는 마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병원 안의 누군가가 인간을 대상으로 뇌 연구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매너하임이다.’ 이렇게 생각한 마틴은 독약을 마신 것 처럼 무서운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화 학자는 아니었지만 데옥시 글루코스와 같은 화합물에 방사능을 띠게 한 다음, 이 물질을 사람의 체내에 주사하여 뇌에 흡수하는 양상을 연구하는 데 사용된다 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만일 산부인과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방사능이 매우 강하면 그것을 흡 수한 뇌 세포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신경세포의 경로를 연구하고자 한다면, 이 방법을 이용해서 뇌 세포를 선별적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동 물 뇌의 신경 경로를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신경해부학 분야의 기초적인 연 구방법이 되어왔다. 뻔뻔스러운 과학자하면 같은 방법은 능히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틴은 소름이 끼쳤다. 매너하임 같은 자기 중심적 인간은 연구의 도덕적인 측 면을 충분히 무시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틴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매너하임이 어떻 게 해서 산부인과를 가담시켰는지를 모르겠지만, 우선 그들을 다 조사대상에 올 려야 했다. 그리고 병원 책임자도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 다면 프리마돈나를 자처하는 신경외과 의사로 병원에서 신처럼 행세하려드는 매 너하임을 무슨 이유로 드래이크가 두둔하겠는가. 마틴은 그 섬뜩한 추측에 맥이 풀렸다. 그는 매너하임이 정부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보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백 만 달러의 공공기금이 그의 연구 활동에 투자되었다. FBI가 개입 한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마틴은 정부에 의해 지원을 받는 중요한 연구를 훼 방 놓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걸까? FBI에서는 연구에 인간 실험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었다. 마틴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는 식의 조직상의 혼돈상태에 대해 모 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의학 연구를 위해 인간을 희생하는 것이 정부에 의해서 비밀리에 보호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마탄은 천천히 손목을 돌려 시계를 보았다. 데니스에게 전화를 할 시간이 앞 으로 5부 남았다. 정보원들이 그녀에게 해를 안 끼칠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들이 부랑들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다시는 그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사건의 전말은 아닐지 몰라도 일부는 밝혀 낸 셈이었다. 마틴은 조금만 권력있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 정도만 가지고도 모든 음모를 만천하에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를 끌어 들인단 말인가? 병원 조직과 관계없는 외부 사람이라야 하지만, 또한 병원과 그 조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이미 수많은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그의 경고가 먹혀 들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마틴의 뇌리에 천재 소년 마이클스가 떠올랐다. 그라면 대학의 교무 담당 사무관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이라면 즉각 조사단의 편성이라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래, 한번 해보자. 그는 전화기로 달려가 외부 전화를 들도 마이클스의 집 번호를 들리며 그가 집에 있기를 기원했다. 그의 낯익은 목소리가 전화기로 흘러나오는 순간 마틴은 환호성을 질렀다. ‘마이클스, 난 지금 엄청난 곤경에 처해 있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지금 어디 예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 병원에는 무서운 대규모 연구가 진행되는 것을 알아냈는 데, FBI가 그걸 감싸고 있는 것 같아. 왜냐고는 묻지 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죠.?’ ‘대학 교무담당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인간 실험에 관련된 음모가 있다고 알려 주게. 그 사람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지 않는 한 그 정도만을도 끌어들이기 에 충분할 거야. 그렇게만 되면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격이야. 하지만 당장 데니 스가 문제야. 지금 아파트에서 FBI에 붙잡혀 있어. 교무관에게 워싱턴에 전화해 서 그녀를 놓아주라고 해주게.’ ‘당신은 어쩌구요?’ ‘내 걱정은 안해도 돼, 난 괜찮으니까. 지금 병원에 있어.’ ‘우리 집으로 오지 그래요?’ ‘그럴 수가 없어. 신경외과 실험실로 올라가봐야 해. 15분 후에 자네 컴퓨터 연 구실에서 만나지. 서둘러 주게!’ 마틴은 전화를 끊고 데니스의 아파트로 다이얼을 돌렸다. 누군가 전화기를 들 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샌슨!’ 마틴이 소리쳤다. ‘나요. 필립스!’ ‘필립스, 어디 있소? 당신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 있었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염려 마시오. 지금 시내 북쪽에 있는데 그쪽으로 가는 중이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한 20분 정도.’ ‘15분 내에 오시오.’ 샘슨은 한마디만 간단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틴은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맛보며 도서관을 뛰쳐나갔다. 샌슨은 한마디만 간단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 틴은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맛보며 도서관을 뛰쳐나갔다. 샌슨은 그가 포기 하도록 하기 위해 데니스를 인질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를 죽 이려고 한 것이고, 그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그녀도 기꺼이 살해할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이클스에게 달려 있었다. 그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기관에 연락을 취해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뒷바침할 수 있는 정보가 더 필요했다. 표제 기사는 틀 림없이 매너하임이 장식하겠지. 마틴은 신경외과에 있는 뇌 표본중 방사능에 오염된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연구동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경외과 실험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수술 모자가 어느 결에 벗겨져서 뒤엉킨 머리칼을 황급히 손으로 쓸어넘겨야 했 다. 데니스의 아파트로 전화할 시간이 몇 분 밖에 남지 않았다. 매너하임의 연 구실 문이 잠겨져 있어 그는 유리창을 부술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다. 작은 소 화기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는 소화기를 벽에서 떼어내 출입문 유리창에 던져 산산조각을 내었다. 남아 있는 유리조각을 발로 차서 깨부순 뒤 팔을 집어넣어 손잡이를 돌렸다. 동시에 복도 끝에 난 문이 왈칵 열리더니 두 명의 남자가 손에 권총을 들고 달려 들어갔다. 병원 경비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폴리에스터 정장을 입고 있었 다. 그 중의 한 명이 몸을 낮추면서 양손으로 권총을 거머쥐고 그를 겨누고 다른 한 명이 소리쳤다. ‘꼼짝 말아, 필립스’ 마틴은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험실 안의 깨진 유리 위로 몸을 날렸다. 소음기가 달린 권총에서 둔한 소리를 내며 발사된 총알이 철제문을 스치고 지나 갔다. 그가 발을 모아 문을 걷어차자 부서진 창틀에 남아 있던 깨진 유리조각 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틴은 복도를 뛰어오는 무거운 발소리를 들으며 실험실 안으로 몸을 돌렸다. 방은 어두웠지만 실험실 내부구조를 아는 그는 칸막이 틈으로 달려갔다. 그가 동물실의 문 손잡이를 잡는데 추격자들이 바깥문으로 들어섰다. 그 중 한 명이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실험실은 형광등 불빛에 의해 대낮같이 밝아졌다. 마틴은 미친 듯이 동물실 안으로 뛰어들어 전극을 머리에 꽂고 분노에 차 날 뛰는 원숭이가 갇혀 있는 우리를 잡았다. 원숭이는 철망 사이로 그의 손을 움 켜쥐고 물을 뜯으려 했다. 마틴은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실험실 문쪽으로 밀 고 갔다. 추격자들이 가장 가까운 작업대를 돌아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는 숨을 잠시 가다듬고 우리의 문을 열어 젖혔다. 실험실 유리기구들이 흔들려 깨지는 소리와 함께 원숭이가 자신을 가두었던 감옥으로부터 뛰쳐나갔다. 원숭이는 단 한 번의 점프로 작업대의 선반으로 뛰 어올라 기구들을 사방으로 집어던져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전선을 늘어뜨리고 분노에 미쳐 날뛰는 괴물의 모습에 놀란 두 남자는 감히 마틴에게로 접근하지 못했다. 마틴이 원숭이에게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숭이는 갇혀 있던 화풀이를 하기 위해 마틴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어깨를 덮쳐서 억센 손톱으로 그의 살을 파헤치고 목에 이빨을 깊숙이 박았다. 다른 남자가 도우려 했지만 원숭이의 동작은 너무나도 빨랐다. 마틴을 결과를 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동물실을 가로질러 뇌표본이 진열된 선반을 지나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계단을 뛰 어내려가 바닥으로 뛰어내리고 구르는, 아찔한 탈출을 다시 한 번 연출했다. 위에서 비상계단 문을 벌컥 열어 젖히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그는 벽에 바싹 붙어 달렸을 뿐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 남자가 자기를 발견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지만 그걸 알기 위해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매너하임의 신경 외과 실험실을 지키고 있을 거란 걸 예상했어야 했다. 계단을 쿵쾅거리며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러 층 위에 뛰 떨어져 있었다. 그는 더이상 총성 을 듣지 않고 무사히 지하에 도착해서 터널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마틴이 옛날 의대 건물의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데 낡은 문의 양쪽 경첩이 삐 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구부러진 대리석 계단을 뛰어오른 뒤 그는 군데군데 헐 린 복도를 경주하듯이 달려 옛날 원형 강의실 앞에 다다랐다. 그는 강의실이 컴컴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마이클스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정적만이 감돌았다. 추격자를 따돌리는데 일단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기관에서 그가 병원 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 니 이제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마틴은 가쁜 숨을 진정하려고 애썼다. 빠른 시간 안에 마이클스가 오지 않는 다면 절망감에 빠진 데니스의 아파트로 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초조하게 강의실 문에 손을 기댔다. 놀랍게도 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냉랭한 암흑속으로 발걸음을 디밀었다. 그 순간 학생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었던 낮은 음조의 찰칵거리는 소리가 정적 을 깨뜨렸다. 그 소리는 조명장치가 작동을 시작할 때 나는 전기 소리였다. 그 리고 옛날 그 시절과 마찬가지로 불빛이 강당을 환하게 채웠다. 시야 한 구석 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내려다 보았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마이클스의 모습이었다. ‘마틴,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마틴은 원형 강당이 강의실로 사용되던 시절, 계단식 의자들 사이의 가로 통 로로 뛰어내리기 위해 올라서곤 했던 난간을 붙잡았다. 마이클스는 계단 맨 아 래 서서 그에게 내려오하고 손짓을 했다. ‘교무담당관에게 연락했나?’ 마틴이 소리쳤다. 마이클스를 보자 몇 시간 동안 품고 있었던 희망이 현실로 나타나는 듯했다. ‘다 잘 됐어요! 이쪽으로 내려와요.’ 마이클스가 밑에서 소리쳤다. 마틴은 전에 의자들이 놓여있던 자리로 지금은 전자장치에 연결된 전선 가닥 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세 명의 남자가 마이클스 곁에 서 있었다. 마이클스는 벌써 도와줄 사람을 구했나보다! ‘데니스를 구할 만한 방법을 어서 찾아서...’ ‘우리가 보호하고 있어요.’ 마이클스가 외쳤다. ‘그녀에게 아무 일 없나?’ 마틴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전하게 잘 있어요. 어서 내려오기나 하세요.’ 마틴이 강당 아래로 다가갈수록 더 많이 설치된 장비와 뒤엉킨 전선들 때문에 접근하기기 용이하지 않았다. ‘신경외과 실험실에서 날 총으로 쏘려던 두 남자를 피해 간신히 도망쳐 오는 길이야.’ 그는 아직도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겨 나왔다. ‘여기 있으면 안전해요.’ 마이클스는 그가 내려오는 모습을 주시했다. 마틴은 계단 아래 공간으로 내려오면서 어수선한 계단에서 눈을 들어 마이클 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경외과에서 무얼 찾아낼 시간이 없었어.’ 이렇게 말하는 마틴의 눈에 다른 세 명의 사내 얼굴이 보였다. 한 사람은 그 가 이 실험실을 처음 방문할 때 만난 일이 있는 온화하게 생긴 대학원생 칼 루 드먼이었지만, 나머지 두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낙하복 같이 생긴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틴의 마지막 말을 못들은 척하고 마이클스는 낯선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 며 말했다. ‘이제 만족하시죠? 마틴을 여기로 데려올 수 있다고 했잖아요.’ 마틴에게서 잘곧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여기에 데려오기는 했소만, 그를 꼼짝 못하게 할 자신이 없소!’ ‘그럼요.’ 마이클스의 대답이었다. 마틴은 이 이상하고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 마이클스를 바라보던 눈을 돌려 그 사내를 향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는 바로 워너를 죽이 그자였 다. ‘마틴...’ 마이클스가 마치 아버지 같은 목소리로 온화하게 그를 불렀다.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요.’ 그때 낯선 자가 끼어들었다. ‘마이클스 박사, FBI에서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가 보장합니 다. 하지만 CIA에서 하는 일은 내가 통제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소.’ 마이클스가 몸을 홱 돌렸다. ‘샌슨 씨, CIA가 당신의 권할권 밖이라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난 필립스 박 사와 얘기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요.’ 그가 다시 마틴을 향해 돌아섰다. ‘마틴,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이리 와요.’ 그는 옆에 붙어 있는 또 하나의 원형 강당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마틴은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그의 손은 강당 가장자리에 있는 철제 난간 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안도감은 당혹감으로 바뀌고 그 당혹감과 함께 또 다 른 형태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는 두려움을 숨기려고 일부러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걸 당신에게 보여주려는 거예요. 자, 이리 오세요.!’ 데니스는 어디 있어!’ 마틴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절대 안전하니까 내 말을 믿어요. 자 어서 가요.’ 마이클스가 마틴을 향해 돌아와서 그의 손목을 잡고 강당 아래로 잡아 끌었 다. ‘보여줄 게 있다니까요. 안심해요. 몇 분만 있으면 데니스를 만나게 돼요.’ 마틴은 마이클스의 손에 이끌려 샌슨의 앞을 지나서 옆 강당으로 들어갔다. 그들보다 앞서 갔던 젊은 학생이 전등을 켜두었다. 마틴의 눈에 먼젓번의 강의 실과 마찬가지로 의자를 치워버린 원형 강당이 눌에 들어왔다. 계단 아래 공간에는 수백만의 광전감지 광수용 셀로 이루어진 거대한 스크린 이 서 있었고, 거기서 나온 전선들이 처리장치에 연결되어 있었으며, 처리장치에 서 나온 그보다 적은 수의 전선들이 두 가닥으로 모여 두 대의 컴퓨터에 각각 연결되어 있었다. 이 컴퓨터로부터 나온 전선들은 다시 다른 컴퓨터로 얼기설 기 이어져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당신이 보고 있는게 뭔지 알겠어요?’ 마이클스가 물었지만 마틴은 고개를 젖는 도리밖에 없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최초로 컴퓨터화 된 인간의 시각체계 모델이예요. 부피가 크고,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는 원시적이지만 엄청난 기능을 발휘하죠. 스크린에 영상이 비치면 당신 앞에 있는 컴퓨터가 들어온 정보를 결합하죠.’ 마이클스가 손을 휘젓는 시늉을 했다. ‘마틴, 당신 앞에 있는 이건 말이죠, 프린스턴에서 최초로 건설된 원자로에 견줄 수 있다구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 중 하나가 될 거예요.’ 마틴은 마이클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제4세대 컴퓨터를 창조해낸 거예요!’ 마이클스가 이렇게 말하고 마틴의 등을 소리 나게 쳤다. ‘들어봐요. 제1세대는 겨우 계산기 구실밖에 못했어요. 제2세대에 들어서야 트렌지스터를 사용하게 되었고, 제3세대는 마이크로 칩이었죠. 우리가 드디어 제4세대 컴퓨터를 탄생시켰고, 당신 연구실에 있는 작은 컴퓨터도 그것을 응용 한 최초의 작품 중 하나예요. 그 결과 무슨 성과가 있었는지 알아요?" 마틴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고 마이클스는 더 신이 나서 열을 올렸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인공지능을 창조했다구요!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어 냈단 말이에요. 컴퓨터가 배우기도 하고 추리하기도 해요. 언젠가 이루어지고야 말 일이었지만, 결국 우리가 해낸 거예요." 마이클스는 마틴의 팔을 잡고 두 개의 강당을 잇는 복도로 끌고 갔다. 강당 사이에는 옛날에 미생물학과 생리학 실험실로 쓰이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 다. 마이클스가 그 문을 열었을 때 마틴은 문 안쪽으로 두꺼운 철제가 보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보안장치였다. 마이클스가 특수한 열쇠로 문을 따고 잡아당겨 열었다. 마 치 금고실에 들어가는 것처럼 절차가 복잡했다. 마틴은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순간적으로 휘청했다. 작은 방으로 나뉘 어 석판을 댄 실험대가 있던 옛날 실험실 대신에 길이가 100피트나 되어 보이는 창문도 없는 방이 펼쳐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맑은 액체로 가득한 유리 기둥들 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이게 우리한테 가장 가차 있고 생산적인 준비과정이었어요." 마이클스가 맨 앞에 있는 ㅇㅍ리 기둥의 표면을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이 처음 받는 인상은 다분히 감정적으로 흐르기 쉽다는 걸 알아요. 우리 들도 모두 그랬었으니까요. 하지만 얻어진 성과는 그만한 희생의 가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마틴은 천천히 유리 기둥 주위를 돌아보았다. 기둥은 최소한 6피트 높이에 지 름이 3피트는 돼 보였다. 캐더린 콜린스의 살아 있는 신체 부분이, 마틴이 나중 에 들어서 안 것이지만, 뇌척수액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팔을 머리위로 올리고 앉은 자세로 액체 속에 둥둥 떠 있었다. 인공 호흡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뇌가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두개골은 아예 없었다. 얼굴은 눈을 빼고 는 거의 형체가 없이진 상태로 눈에는 콘택트렌즈가 덮여 있었다. 기관지에 삽 입한 튜브는 목으로부터 바로 뻗어나와 있었다. 양 팔은 감각신경의 말단부가 드러나도록 기술적으로 해부되어 있었으며, 신경의 말단부는 서로 거미줄처럼 엮어 뇌에 박힌 전극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틴은 천천히 기둥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이 그를 덮 쳐와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컴퓨터 과학에서 피드백과 같은 중대한 진전은 생체조직을 연구함으로써 이 루어졌다는걸 알 거예요. 인공 두뇌학에서 연구하는 게 바로 인간의 생체조직이 에요. 우리는 정신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뇌를 알 수 없는 블랙박스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적인 단계를 밟아가면서 인간의 뇌 자체로 접근해 왔던거죠." 마틴은 마이클스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넘겨줄 때 내뱉었던 수수께끼같은 말을 갑자기 기억해냈다. 이제야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린 뇌를 여느 복잡한 기계처럼 연구했어요. 그리고 상상 외로 큰 성공을 거 두었죠. 우리는 뇌가 어떻게 정보를 축적하는지, 과거 컴퓨터의 비효율적인 직렬 처리 방식 대신 어떻게 해서 뇌는 정보를 병렬적으로 처리하는지, 그리고 어떻 게 해서 기능적으로는 계층적인 체계로 조직되어 있는지 등을 발견해 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우리가 인간의 뇌와 같은 기계적 장치를 설계하고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컴퓨터가 놀라운 기능 을 발휘한 겨예요. 마틴,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마이클스는 마틴을 이끌고 일렬로 세워진 유리 기둥들을 지나며, 모두 다른 형태의 생체 해부를 가한 젊은 여성들의 노출된 뇌를 보여주었다. 맨 끝의 유리 기둥 앞에서 마틴은 걸음을 멈추었다. 준비과정의 가장 초기단계에 있는 실험 재료였다. 마틴은 남아 있는 얼굴의 일부분으로 누군지 알아보았다. 바로 크리스 틴 린키스트였다. "자, 들어봐요." 마이클스가 말했다. "처음 볼 때는 매우 충격적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 획기적인 과학적 성과 는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나요. 의학계만 해도 모든 분야를 혁신시킬 거예요. 우리의 초기단계 프로그램이 두개골 X-레이 사진을 판 독해 내는 것을 당신도 이미 보았죠. 마틴, 난 갑작스런 결정을 강요하는 게 아 니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두 사람은 의학과 컴퓨터 과학이 교묘히 결합된 방의 견학을 마쳤다. 한쪽 구 석에 마치 중환자실처럼 복잡한 생명 유지장치로 보이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모니터 앞에는 흰 가운을 걸친 남자가 앉아 있었지만 작업에 열중해서 그들이 다가가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캐더린 콜린스의 유리관 앞에 서서 마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물체의 뇌에 삽입된 게 뭐지?"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그건 감각신경이에요." 마이클스가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뇌는 저 혼자 놔두면 얄궂게도 전혀 무감각하기 때문에, 우린 캐더린의 말초 감각신경을 뇌의 전극에 연결해서 순간순간 뇌의 어느 부분이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게 해놨어요. 즉 뇌에 대한 피드백 체제를 구성해 놓은 겨죠." "그럼 이 합성체가 자네와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틴은 진심으로 놀라서 물었다. "물론이죠, 그게 바로 이 모든 장치의 매력이라구요. 우린 뇌 자체를 연구하기 위해 진짜 인간의 뇌를 사용했는 걸요. 보여줄게요." 캐더린 콜린스의 유리기둥 바깥에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컴퓨터 단말기와 비슷하게 생긴 장치가 있었다. 똑바로 세워진 넓은 모니터와 키보드와 유리기둥 안의 장치뿐 아니라, 방 한쪽에 있는 중앙컴퓨터에도 전기적으로 연결되어 잇엇 다. 마이클스가 키보드로 무엇인가를 두들기자 모니터에 질문이 나타났다. "기분이 어때, 캐더린?" 질문이 사라지고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타났다. "좋아요. 어서 일을 시작하고 싶어요. 자극을 전해줘요." 마이클스가 웃으며 마틴을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만족할 줄을 몰라요. 그런 까닭에 일을 더 잘하죠." "자극을 전해달라는 게 무슨 뜻이지?" "이 여자의 쾌락중추에 전극을 심었거든요. 그래서 우리에게 협조하면 보상을 해주는 거죠. 우리가 자극을 전해주면 이 여자는 100번의 오르가즘을 한꺼번에 느낄 수가 있게 돼요. 끊임없이 원하는 것으로 봐서 대단히 좋아하고 있어요." 마이클스가 타자를 쳤다. "딱 한 번만이야. 캐더린. 참을 줄도 알아야 해." 그러고 나서 그는 키보드의 옆에 달린 빨간색 단추를 눌렀다. 마틴은 캐더린 의 몸이 활처럼 휘면서 부르르 떠는 것을 보았다. "뇌의 보상체제가 가장 강력한 동기유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어쩌 면 자기 보존본능을 능가할지도 몰라요. 우린 가장 최신의 컴퓨터에 이 원리를 적용시키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이런 방법을 쓰면 기계의 능률이 훨씬 향상되는 거죠." "누가 이런 걸 고안해 냈지?" 마틴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어느 한 사람만이 명성을 얻거나 비난 받을 수는 없어요. 단계적으로 이루어 진 거니까요. 하나가 이뤄지면 그게 바탕이 돼서 다음 것을 이끌어냈어요. 그러 나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과 나예요." "나라구?" 마틴이 반문했다. 그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요. 내가 인공지능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당신도 알거예요. 그래서 처 음부터 당신과 함께 일하는데 적극적이었죠. X-레이 사진을 판독하면서 당신이 제시했던 문제들이 '유형인식'이라는 핵심사항으로 구체화 되었어요. 인간은 유 형을 인식할 수 있지만 가장 정밀한 컴퓨터라 해도 그런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죠. 당신이 X-레이 사진을 관찰하는 데 사용해온 방법론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당신의 판독기능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는 전자장치 에 의존하는 논리적 단계를 분리시켰어요. 복잡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 아요. 우리는 인간의 뇌가 낯익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만 을 알면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신경과학에 관심이 있는 몇 명의 생리학자 와 팀을 조직해서 방사능을 띤 데옥시 글루코스를 그 당시 어느 특정한 유형을 나타내는 환자에게 주사하는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연구를 시작했어요. 우리가 사용한 것은 안과에서 자주 사용되는 E차트였어요. 방사성 글루코스 물질은 E유 형을 인식하고 조절하는데 관련된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실험 대상자의 뇌에 현 미경으로 관찰되는 미세한 병변을 만들어 냈어요. 그 다음엔 그 병변의 위치만 알아내서 뇌가 어더ㅎ게 기능하는지를 판정하면 되는 거죠. 선별적으로 뇌를 파 괴하는 기술은 수 년간 동물의 뇌를 연구하면서 사용해 왔던 거예요. 다만 차이 점은 그것을 인간에게 직접 실험함으로써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많은 것을 짧은 시간 안에 얻어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젊은 여자들만 골랐지?" 마틴은 악몽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느끼며 물었다. "단지 용이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우리는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불러모을 수 있는 건강한 실험대상 집단이 필요했어요. 산부인과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목 적에 부합되는 집단이었죠. 그들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행해지는지 거의 묻지도 않을 뿐더러, 단순히 팝 도말 검사보고서만 바꿔치기함으로써 수시로 다시 오게 할 수 있었어요. 내 아내는 수년 전부터 대학 산부인과 외래에서 일했어요. 그 사람이 환자를 선택해서 일반적인 검사를 위해 피를 뽑을 때 혈류 속에 방사능 물질을 주사한 거예요. 아주 쉬운 방법이었죠." 마틴은 갑자기 산부인과에서 보았던 검은 머리의 빈틈없이 생긴 여자의 얼굴 을 떠올렸다. 그 여자와 마이클스를 연관시키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금까 지 보았던 모든 것 보다는 훨씬 쉽게 믿을 수 있는 얘기였다. 캐더린 콜린스 앞에 있는 모니터에 글씨가 나타났다. "자극을 전해주세요." 마이클스가 키보드를 쳤다. "규칙을 알잖아. 나중에 실험이 시작되면 해줄게." 그는 마틴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이 프로그램이 너무 쉽고 성공적이어서 연구의 목적을 더 넓히고 싶어졌어요. 아무리 그래도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룩한 일이지만요. 어쨌든 우리는 여 기에 힘을 얻어 많은 양의 방사능을 주사하여 뇌의 최종 관련 부위의 윤곽을 파 악하고자 하였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그 대문에 몇 명의 환자에게서 증상이 발 생하더군요. 특히 측두엽 관련 부위에 작용할 경우 훨씬 더 심했어요. 그래서 이 부위에 대한 작업은 실험대상이 견딜만한 정도의 증상 한도내에서 뇌에 손상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일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지요. 하지만 실험대상자가 지나치 게 많은 증상을 보이게 되면 병원에 데려와서 다음 단계의 실험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마이클스가 유리기둥들을 손짓했다. "그리고 이 모든 중요한 발견들은 바로 이 방에서 이루어졌죠. 하지만 우리도 시작할 때는 이런 성과를 예측하지 못했어요." "마리노와 루카스, 린키스트 같은 최근의 환자는 어떻게 된거야?" "아, 그거요. 그들 때문에 약간 혼란이 있었죠. 가장 높은 수치의 방사능을 투 여한 게 바로 그들이었고, 따라서 증상도 빨리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가 데려오 기 전에 의사한테 먼저 찾아갔어요. 그러나 의사들은 결코 진단을 내릴 수가 없 었어요. 특히나 매너하임 같은 사람은." "그럼, 매너하임은 이 일에 관련이 없다는 말인가?" 마틴으로서는 의외였다. "매너하임이요? 지금 농담하는 거예요? 이런 중대한 연구계획에 저밖에 모르 는 그 따위 자식을 참가시킨다는 게 말이나 돼요? 그는 아무리 사소한 발견이라 도 자기가 혼자한 거라고 주장할걸요." 마틴은 방을 둘러보았다. 두렵고 기가 막혔다. 도저히 이런 일이 그것도 대학 병원 내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게 가장 놀라운 일은, 자네가 어떻게 이런 일을 꾸밀 수 있었느냐는 거야. 내 말은, 약리학과의 별볼일없는 녀석들이 쥐를 학대할 때에도 동물협회를 뒤에 업고 있어야 하는데 말야." "우린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어요.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이 FBI 정보원이 라는 건 아시죠?" 마틴은 마이클스를 바라보았다. "새삼 알려줄 필요도 없어. 그들은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 점에 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당신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나도 어 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몰랐어요. 당신은 1년 넘게 감시를 받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 말로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그랬어요." "내가 감시를 받아왔다고?" 마틴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우리 모두 감시를 받았어요. 마틴,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이 연구의 결 과는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를 완전히 변혁시킬 거예요. 내 말은 과장이 아니예 요. 처음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할 때는 작은 연구계획에 불과했지만 초기 연구결 과로 특허를 신청하자, 큰 컴퓨터 회사에서 연구비를 대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더군요. 그들은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연구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 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결과뿐이었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 었죠. 그런데 그때 불가피한 일이 발생했어요. 우리의 제4세대 컴퓨터를 최초로 대량 출원한 곳이 국방부였어요. 이 컴퓨터는 무기의 개념 자체를 바꿔버렸죠. 입체영상 분자기억 저장체제 를 갖춘 소규모 인공지능 컴퓨터를 이용해 우린 최 초로 진정한 의미의 지능미사일 유도체제를 설계 제작했어요. 그래서 지금 육군 에서는 '지능미사일'의 원형을 보유하고 있어요. 원자력의 발견 이후 방위산업 분야의 일대 혁신이었죠. 그리고 정부는 컴퓨터 회사들 보다도 더 우리의 연구 방법 자체에 대히서는 관심이 없었어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않든, 정부는 원자 탄을 만들어낸 맨하탄 계획 때보다도 더 철저하게 최고 수준의 음 "결정이라니?" 마틴은 무기력하게 반문했다. "이 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는지 결단을 내려야 해요. 놀라운 일인 줄 은 알지만 말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지 당신에 게는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었다는 걸 고백해야 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이미 위 험한 정도로 많은 것을 알아냈으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들어봐요, 마틴. 환자의 동의없이 생체실험을 하는 게, 특히 그 환자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 다면 어떤 의학윤리에도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 나 저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어요. 열일곱 명의 젊은 여성이 아무도 모르게 희생되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건 더 나은 사회와 미 래에 미합중국 방위력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각각 의 실험대상자 입장에서 본다면 큰 희생이지만, 2억 미국인 전체의 입장에서 보 면 아주 작은 수에 지나지 않아요. 해마다 얼마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속도로에서 다른 차를 들이 받 아 생명을 버리는지, 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봐요. 여기 있 는 열일곱 명의 여성들은 사회에 공헌을 했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 "난 이런 걸 용납할 수 없어. 차라리 그들이 날 죽이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마틴은 여전히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자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잖아." "난 당신을 좋아해요, 마틴. 우린 4년 동안이나 함께 일했어요. 당신은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이고, 인공지능 개발에 굉장한 공헌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 예요. 의학적인 분야, 특히 방사선학 분야에는 이 모든 과정을 다 적용시킬 수가 있어요. 우린 당신이 필요해요, 마틴. 당신 없이는 절대 연구를 할 수 없다는 뜻 은 아니예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필요불가결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당신을 필요로 해요." "자넨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당신과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만 알아둬 요. 그리고 한 가지 더 강조할 게 있어요. 더이상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없 어요. 이 연구계획에서 생물학적인 측면은 마무리지을 단계에 이르렀어요. 필요 한 정보는 이미 얻었고, 이젠 그러한 개념들을 전자공학적으로 다듬을 때가 된 거예요. 생체실험은 이제 끝났어요."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참가했지?" "바로 그게..." 마이클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프로그램의 매력 가운데 하나예요. 원안의 중대성에 비해 관련된 인원은 아주 적었죠. 생리학자 몇 명과 컴퓨터 과학자 몇 명, 그리고 간호사 몇 사람 뿐 이죠." "의사가 없단 말이야?" "네." 마이클스가 웃음을 지었다. "아, 잠깐만요. 정확히 말하면 신경과학 생리학자 중 한 명이 의학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어요." 두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참,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군요. 분명히 그리고 당연히 당신은 이 새로운 컴 퓨터 기술을 적용하자마자 이루어질 의학계의 획기적인 진보에 대해 그 찬사를 한 몸에 받게 될 거예요." "아첨하는 건가?" "아첨이라뇨, 사실인 걸요. 이제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학자가 될 거 예요. 당신은 방사선학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을 것 이고, 그렇게 되면 100퍼센트의 능률을 가진 컴퓨터가 모든 진단 작업을 대신할 날도 멀지 않았어요.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는 셈이죠. 언젠가 당신 입으로 방사선과 의사들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75퍼센트의 정확성 밖에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했진ㅎ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은..." 마틴은 당황한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발을 움직였다. "아까 말한 대로 내가 정보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그들이 일단 누가 보안을 누설할 것으로 의심하면 내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단 말이에요. 불 행하게도 데니스 생거가 관련돼 있어요. 아직 연구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 지만 그 정도로도 계획에 차질을 초래하기에는 충분해요. 다시 말하면 만일 당 신이 이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뿐 아니라 데니스도 같이 제거될 거예 요. 내게는 그걸 막을 힘이 없어요." 데니스를 죽이겠다는 위협에 도덕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분노가 또다른 분노로 바뀌어 갔다. 마틴의 가슴 속에서는 증오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폭발할 것 같 은 격분을 자제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모든 신경이 파열 될 것 만 같았다. 그의 머리가 다시 논리적인 사고를 하게 되기까지 그는 엄청 난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렇게 감정을 자제한 마틴의 얼굴에는 연구계획 뒤에 숨은 무서운 권력과 힘 에 직면해 허탈감에 사로잡힌 표정이 떠올랐다. 그 자신이 희생되는 것은 상관 없지만 데니스까지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슬픈 체념의 감정이 그의 마음에 휘 장을 드리웠다. 마이클스가 마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마틴 이제 모든 걸 털어놓은 것 같군요. 어디 말 좀 해봐요." 마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나." "선택의 여지야 있죠. 그 폭이 좁긴 하지만 분명히 당신과 데니스 두 사람은 엄중한 감시하에 놓여서 이 얘기를 의회나 언론에 발설할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 어떤 우발적 사건에도 대비할 수 있는 계획이 세워져 있어요. 당신의 선택권은 당신과 데니스의 생명을 구하든가 아니면 즉각 의미없는 죽음 을 택하든가의 사이에 놓여 있어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요. 내가 바라는 대 로 결정을 내리면 데니스에게는 우리의 연구가 국방부의 지원을 받은 걸 당신이 모르고 있다가 기밀을 누설한 것으로 오인받은 거라고 말해두겠어요. 그 여자가 이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은 오로지 당신 책임이에요." 마틴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유리기둥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데니스는 어디 있나?" 마이클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를 따라와요." 두 사람은 은행의 금고실 같은 이중문을 도로 빠져나와서 강당을 지나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