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스핑크스(상) 지은이 : 로빈 쿡 옮긴이 : 김기태 ----- 차 례 ----- 작가 소개 스핑크스 프롤로그 제 1 일 제 2 일 작가 소개 * 로빈 쿡 외과 의사로 현재 플로리다에 살고 있다. <스핑크스>는 이집트학에 대한 그의 평생에 걸친 열정이 낳은 대표작이다. 국내에 발표된 그의 다른 저서로는 돌연변이, 브레인, 바이탈사인, 바이러스 등이 있다. * 옮긴이 - 김기태 경희대 국어국문과 졸, 신문방송대학원 출판학 전공. 역서로 B.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외 다수 논문으로 '외국 번역물에 대한 연구'가 있다. 스핑크스 이집트만큼 경이로움이 많은 나라가 없고, 또 이집트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나라도 없기 때문에, 나는 이집트에 대해서는 상당히 말을 길게 할 수밖에 없다. - 헤로도투스의 <역사> 중에서 프롤로그 북부와 남부 이집트의 왕이고, 태양의 아들인 세티 1세 파라오(고대 이집트왕 의 칭호)가 통치한 지 10년 째 되는 해인 B.C. 1301년. 홍수가 빈번하게 나는 계절의 네번째 달, 10일.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테베(고대 이집트의 수도)의 계곡. 투탄카멘 파라오의 무덤. 이메니는 빽빽하게 쌓인 석회암들의 작은 틈에 구리끌을 힘껏 밀어 넣었다. 그는 끌이 단단한 돌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번 끌을 밀어 넣어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틀림없이 무덤 내부의 문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 문 뒤에는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보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 문의 뒤는 51년 전 젊은 나이에 죽은 투탄카멘 파라오가 영원히 쉬고 있는 집이었다. 이메니는 새로운 흥분을 느끼며 단단하게 쌓인 돌을 파기 시작했다. 먼지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의 각진 얼굴에서는 땀이 계속해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메니는 그의 건장한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넓이의 칠흑 같은 굴속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그는 끌로 파낸 석회암을 손으로 긁어내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굴을 파는 곤충처럼 돌 조각들을 뒤고 밀어냈고, 그러면 뒤에 있는 케메스가 그 돌 조각들을 갈대로 만든 바구니에 담았다. 이메니는 앞의 어둠 속에 있는 회벽을 껍질이 벗겨진 손으로 더듬으면서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 끝은 젊은 파라오가 매장된 이후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폐쇄된 문에 붙은 투탄카멘의 봉인을 더듬고 있었다. 이메니는 머리를 왼팔에 기대고 온몸을 쭉 폈다. 그제야 통증이 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뒤에서 케메스가 바구니에 자갈을 담으며 내는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내부의 문에 도착했어요." 이메니가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메니는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전문적인 도굴범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운하게 일찍 죽은 투탄카멘의 영원한 안식처에 굴을 뚫고 있었다. "이라멘에게 가서 내 나무망치 좀 갖다 주세요." 이메니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좁은 굴속에서 이상하게 울린다고 생각했다. 케메스는 내부의 문에 도달했다는 말에 기뻐하며, 갈대바구니를 끌며 뒤로 기어서 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이메니는 굴의 벽이 사방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아메넴헤브가 이 작은 무덤을 파는 것을 어떻게 감독했을 지를 생각하며, 밀실공포증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이메니는 할아버지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의 벽을 만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몸을 돌려서 단단한 바위에 손바닥을 붙이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아메넴헤브가 그의 아들이자 이메니의 아버지인 페르네퍼에게 물려주고, 그가 다시 이메니에게 물려준 투탄카멘의 무덤설계도는 정확했다. 이메니는 외부의 문으로부터 정확히 12큐빗(1큐빗은 46.56m)을 파서 내부의 문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내부의 문 뒤에는 방이 있다. 내부의 문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이틀 동안 힘들게 일했지만, 이제 아침이 되면 다 끝날 것이다. 이메니는 역시 설계도에 그 위치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네 개의 황금상만 훔쳐낼 계획이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갖고, 나머지는 그의 공범들이 갖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덤을 다시 봉할 생각이었다. 이메니는 자신의 행동을 신이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만을 위해서 훔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완벽한 미라로 만들어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 황금상 하나가 필요했다. 케메스가 나무망치와 등불이 담겨 있는 갈대바구니를 앞으로 밀며 다시 굴속으로 들어왔다. 바구니에는 황소뼈로 만든 손잡이가 달려 있는 청동단검도 들어 있었다. 케메스는 황금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나쁜 짓도 서슴치 않는 진짜 도둑이었다. 이메니는 나무망치와 구리 끌을 이용해서 돌 틈의 석회를 익숙한 솜씨로 파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건설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세티 1세 파라오의 동굴처럼 넓은 무덤에 비해서 투탄카멘의 무덤이 볼품없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투탄카멘의 무덤이 볼품없이 만들어진 것이 이메니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만약 무덤이 훌륭하게 만들어졌다면, 이메니의 신분으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렘헤브 파라오는 투탄카멘의 무덤에 아멘신(투탄카멘 왕이 가장 위대한 신으로 숭배한 신) 사제는 물론 보초도 두지 못하게 했고, 투탄카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도록 명령했었다. 그래서 이메니는 노동자의 숙소에 있는 야경꾼에게 밀 두 자루와 맥주만 뇌물로 주고 무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메니는 투탄카멘의 '영원의 집'에 오프(축제의 일종) 기간 중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사실 그 뇌물도 줄 필요는 없었다. <진실된 곳>이라고 불리는, 이메니가 사는 마을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네크로폴리스 (왕들의 묘지가 모여 있는 계곡)의 모든 관리들은 이 날, 나일강의 동쪽에 있는 테베로 가서 축제를 즐겼다. 그러나 무척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메니는 여전히 일생의 그 어느 때보다 더 불안했고, 그 불안함 때문에 그는 끌과 나무망치를 들고 미친 듯이 일을 했다. 마침내 이메니의 앞에 있던 장벽이 무너지고, 돌더미가 그 너머에 있는 묘실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메니는 혹시 지하세계의 악마가 덤벼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악마는 없었다. 그 대신, 그의 콧구멍에는 향긋한 삼나무의 향냄새가 밀려들었고,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메니는 두려움에 떨면서 계속해서 벽을 헐어내고, 머리부터 묘실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귀가 멀 듯한 정적이 가득 차 있었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고여 있었다. 이메니는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굴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 속에서 케메스가 앞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케메스는 이메니에게 등불을 건네주기 위해서 장님처럼 앞을 더듬으며 오고 있었다. "나도 들어가도 괜찮겠어?" 케메스가 어둠 속에서 등불과 부싯깃을 건네주며 물었다. "아직은 안 돼요. 돌아가서 이라멘과 아매시스에게 30분 정도 뒤에는 굴을 다시 메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해요." 이메니가 불을 붙이려고 서두르며 대답했다. 케메스는 투덜거리며 뒤로 기어 굴 밖으로 나갔다. 부싯돌에서 불꽃이 하나 튀어올라 부싯깃에 불이 붙었다. 이메니는 부싯깃에 붙은 불을 등불심지에 능숙하게 붙였다. 차가운 방에 갑자기 뜨거운 바람이 들어오듯, 어둠 속에 불꽃이 환하게 피어 올랐다. 이메니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깜빡거리는 불빛 속에서 시체를 먹는 신인 앰너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떨려서 등불도 흔들렸고, 이메니는 벽쪽으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러나 그 신은 앞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메니가 그 신상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 위에 등불을 비추자 상아로 만들어진 이빨과 날씬한 몸이 드러났다. 이메니는 잠시 후에 자신이 장례용 침대를 보고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묘실 속에는 신상이 두 개 더 있었다. 하나는 황소의 머리를 한 신상이고, 다른 하나는 사자의 머리를 한 신상이었다. 그리고 벽의 맞은 편 오른쪽에는 소년왕 투탄카멘의 실제 크기와 같은 상 두 개가 묘실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메니는 조각가의 집에서 조각되고 있는 그와 비슷한 세티 1세의 황금상을 본 적이 있었다. 이메니는 문지방에 늘어져 있는 마른꽃의 화환을 조심스럽게 피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황금상을 넣어놓은 황금 유물함 두 개를 재빨리 옆으로 치워놓았다. 그는 감탄하면서 유물함의 빗장을 풀고, 황금신상들을 받침대에서 들어올렸다. 하나는 북부 이집트에서 숭배하는 여신인 네크베트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이었고, 또 하나는 풍요의 여신인 이시스의 상이었다. 그 중 투탄카멘의 이름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이상했다. 이메니는 나무망치와 끌을 들고 앰너트 신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침대 밑으로 들어가서 측실로 들어가는 문을 재빨리 열었다. 아메넴헤브의 설계도에 따르면, 이메니가 훔치려고 하는 두 개의 상은 이 작은 측실의 상자 속에 있었다. 이메니는 꺼림칙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등불을 앞에 세워들고 측실로 들어 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무서운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곳에는 투탄카멘 파라오에게 연꽃과 파피루스 그리고 양귀비로 만든 꽃다발을 바치는 젊은 여왕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상자의 뚜껑이 교묘하게 잠겨져 있어서 열 수가 없었다. 이메니는 적갈색을 띤 삼나무 상자위에 등불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상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자신의 뒤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케메스는 이미 묘실 문지방까지 와 있었고, 이라멘은 그의 오른쪽 뒤에 있었다. 누비아(아프리카수단 북부 지방)의 흑인인 아매시스는 그 큰 몸집 때문에 멀리 뒤에 처져서 힘겹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벌써 작은 측실의 바닥과 벽에서 기묘하게 춤추고 있는 이메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케메스는 청동단검을 그의 썩은 이빨로 물고, 굴에서 묘실의 바닥으로 기어나왔다. 그는 조용히 이라멘이 자신의 옆에 서도록 도와주었다. 그 두 사람은 아메시스가 자갈 소리를 내며 마침내 묘실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거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기다렸다. 두려움에 가득 차 있던 그 세 명의 도둑들은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엄청난 보물 들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일생 동안 그처럼 놀라운 물건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그것들은 모두 가져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세 사람은 마치 굶주린 러시아의 늑대들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보물을 향해서 다가갔다. 그들은 단단하게 봉해져 있던 상자들의 뚜껑을 열고, 그 속의 보물들을 모두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가구와 수레에 붙어 있던 황금들도 모두 떼어냈다. 이메니는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잡힌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동료들이 지르는 환호성을 듣고,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악몽같았다. "안 돼. 안 돼!" 이메니가 등불을 움켜쥐고 묘실 입구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만 둬. 제발 그만 둬!" 그의 목소리가 작은 방에 울려 퍼졌고,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세 도둑들은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러나 곧 케메스가 황소뼈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단검을 움켜쥐었다. 아매시스는 케메스를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큰 이빨이 등불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이메니는 자신의 나무망치를 잡으려고 달려갔지만, 케메스가 먼저 발로 나무 망치를 멀리 차버렸다. 아매시스는 이메니에게 다가가 그의 왼쪽 손목을 잡고 등불이 흔들리지 않게 했다. 그는 계속해서 등불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석공인 이메니가 아마포 더미 위에 쓰러질 때까지 그의 관자 놀이를 계속 후려쳤다. 이메니는 자신이 얼마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알수 없었지만, 멍한 느낌이 사라지고 나자 끔찍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는 처음에는 희미한 목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벽의 틈으로 황금빛이 몇 줄기 새어 들어오고 있어서 눈이 부신 이메니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고 묘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천연 아스팔트가 섞인 투탄카멘 왕의 상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은 이메니는 케메스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도둑들은 가장 신성한 곳을 더럽힌 것이다. 이메니는 조용히 팔다리를 하나씩 움직여보았다. 비틀렸던 그의 왼쪽 팔과 손은 감각이 없었지만, 다른 곳은 다친 것 같지 않았다. 이메니는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굴의 입구까지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가깝기는 했지만 그곳까지 조용히 기어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메니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서 몸을 웅크리고, 두통이 조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케메스가 호루스(매의 얼굴을 한 태양신)의 작은 상을 집기 위해 갑자기 돌아섰다. 그는 이메니를 보고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묘실 가운데에 당황해서 서 있는 이메니에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메니는 통증을 참으며 있는 힘을 다해 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너무 급히 뛰어드는 바람에 그의 가슴과 배가 굴의 회벽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그러나 케메스는 재빨리 달려들어 이메니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이메니의 발목을 힘껏 잡아당기며 아매시스를 소리쳐 불렀다. 이메니는 굴 속에서 등으로 돌아누워 발버둥을 치며, 잡히지 않은 발로 있는 힘껏 케메스의 광대뼈를 걷어찼다. 그는 케메스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뾰쪽하게 튀어나온 화강암 조각이 엄청나게 많은데도 있는 힘을 다해서 굴 속을 기어갔다. 그는 곧 건조한 밤 공기 속으로 빠져나와 테베로 가는 길 위에 있는 네크로폴리스의 보초 숙소로 달려갔다. 뒤의 투탄카멘의 무덤에 있던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세 명의 도둑들은 자신 들이 단 한 군데의 묘실밖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떠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매시스는 무거운 황금상들을 한 아름 들고 마지못해서 묘실에서 비틀거리며 나왔다. 케메스는 넝마조각에 금반지들을 싸서 들었지만, 겁에 질려서 화강암조각이 흩어진 묘실 바닥에 짐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들은 훔친 물건들을 갈대바구니에 정신없이 담았다. 이라멘은 등불을 내려놓고 바구니를 앞으로 민 다음 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케메스와 아매시스가 연꽃 모양의 석고컵 하나를 문지방에 떨어뜨리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들은 일단 무덤 밖으로 나오자, 네크로폴리스 보초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계곡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매시스는 훔친 물건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파란 채색 도자기컵을 바위 밑에 감추고 다른 두 사람 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네크로폴리스의 노동자들이 사는 마을로 향하지 않고, 하트세수트 사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은 일단 계곡을 벗어나자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광대한 리비아 사막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들은 부자였다. 그것도 엄청난 부자 였다. 이메니는 자신이 고문을 견딜 수 있을지 가끔 상상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고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했다. 통증은 참을 수 있는 단계에서 참을 수 없는 단계로 놀랄 정도로 빠르게 넘어갔다. 그는 자신이 막대기로 조사를 받게 된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건장한 네크로폴리스의 보초 네 명이 그의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낮은 탁자 위에 꿇어앉히기 전까지,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다섯 번째 보초가 이메니의 발바닥을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다 말할 테니 그만 해요." 이메니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쉰 번이나 모든 것을 말했다. 그는 차라리 의식을 잃어버리기를 바랐지만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불 속에 발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이글거리는 오후의 햇볕 때문에 통증은 더욱 심했다. 이메니는 마치 도살당하는 개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그의 고개를 뒤로 잡아당겼다. 이메니가 마침내 거의 미칠 지경이 되자, 네크로폴리스의 경비대장인 마야가 매니큐어를 칠한 손을 태연하게 흔들어 그만 때리라고 지시했다. 곤봉을 들고 있던 보초는 이메니를 한대 더 때리고 매질을 그만두었다. 마야는 손에 들고 있는 연꽃향기를 즐기며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그 자리에는 서부 테베의 통치자인 네브마 낙트와 세티 1세 파라오의 건축감독관인 네네프타가 있었다. 마야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풀려나서 등을 땅에 대고 누워 여전히 발의 통증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이메니를 쳐다보았다. "다시 말해 보거라, 석공. 투탄카멘 파라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을 어떻게 알아냈지?" 보초들이 억지로 일으켜 세운 이메니의 눈에 세 명의 귀족이 마치 헤엄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에 그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신분이 높은 건축가인 네네프타를 알아보았다. "저희 할아버지가 저희 아버지에게 무덤의 설계도를 물려 주었고, 저희 아버지는 또 그것을 저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메니가 힘겹게 말했다. "네 할아버지는 투탄카멘 파라오의 무덤을 만든 석공이었느냐?" "그렇습니다." 이메니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부모를 미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다시 설명했다. 그는 공범들이 무덤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포기할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했다. 네네프타는 사파이어 빛의 하늘을 선회하고 있는 독수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메니의 대답 때문에 마음이 산란했다. 그는 이 무덤 도굴꾼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노력을 다해서 안전하게 만든 세티 1세 파라오의 영원의 집이 아주 쉽게 도굴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갑자기 아메니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너는 세티 1세 파라오의 무덤을 만드는 석공이냐?" 이메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속해서 애원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네네프타가 두려웠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네네프타를 두려워했다. "너는 우리가 만들고 있는 무덤이 도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보초만 없으면 어떤 무덤이든 도굴될 수 있습니다." 네네프타는 화가 치밀었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점을 가지고 있는, 이 하이에나 같은 인간을 직접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메니는 네네프타의 증오를 알아차리고, 보초들이 있는 곳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럼, 너는 우리가 파라오와 보물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네프타가 화를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메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침묵을 견뎠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진실밖에 없었다. "파라오를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메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무덤은 앞으로도 언제나 도굴될 것입니다." 네네프타는 뚱뚱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의자에서 쏜살같이 일어나 이메니를 손등으로 후려쳤다. "이 쓰레기 같은 놈. 네가 감히 파라오에 대해서 그처럼 건방진 말을 하다니." 네네프타는 다시 이메니를 때리려고 손을 들어올렸지만, 조금 전에 때렸을 때 손이 아팠던 것을 생각하고 손을 내렸다. 그는 아마포로 만들어진 옷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너는 무덤도굴전문가인데, 왜 네 계획이 이렇게 비참하게 실패했느냐?" "저는 무덤도굴전문가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전문가였다면, 제 공범들이 투탄카멘 파라오의 보물에 눈이 어두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을 겁니다. 그들은 탐욕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네네프타의 눈동자가 따가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커졌다. 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 변화는 아주 뚜렷해서 졸고 있던 네브마 낙트도 알아 차렸는지, 그는 접시에 있던 대추야자를 크게 벌린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췄다. "괜찮으십니까?" 네브마 낙트가 네네프타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앞으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그러나 네네프타는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도 몰랐다. 이메니의 말은 그에게 계시와 같았다. 그의 뺨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탁자쪽으로 몸을 돌리며 흥분된 목소리로 마야를 불렀다. "투탄카멘 파라오의 무덤을 다시 봉했소?" "물론입니다. 즉시 봉했습니다." 마야가 말했다. "다시 여시오." 네네프타가 이메니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다시 열어요?" 깜짝 놀란 마야가 물었다. 네브마 낙트는 들고 있던 대추 야자를 떨어뜨렸다. "그렇소. 나는 그 초라한 무덤에 직접 들어갈 생각이오. 이 석공의 말을 듣고 있다보니 영감이 하나 떠올랐소. 나는 이제 우리 세티 1세 파라오의 보물 들을 어떻게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지 알았소. 내가 전에는 왜 이 방법을 몰랐 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이메니는 처음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느꼈다. 그러나 이메니를 향해 갑자기 돌아선 네네프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는 작아졌고, 그의 얼굴은 암흑처럼 어두웠다. "네 말이 도움이 됐다." 네네프타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추악한 행위가 용서받을 수는 없다. 너는 재판을 받기는 하겠지만, 내가 직접 너를 고발할 것이다. 너는 정해진 법률에 따라 처형될 것이다. 너는 네 동료들이 보는 가운데 처형되고, 네 시체는 하이에나 에게 던져 질 것이다." 네네프타는 가마꾼들에게 가마를 가져오라고 손짓을 하고, 마야를 향해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너는 오늘 파라오를 위해서 훌륭한 일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제 뜨거운 소망입니다." 마야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하겠군요." "이것은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내게 오늘 떠오른 영감은 우주에서 가장 철저하게 숨겨지는 비밀이 될 것이다. 아마 영원히 숨겨질 것이다." 1922년 11월 26일 테베의 네크로폴리스.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계곡의 투탄카멘의 무덤. 흥분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구름 한 점 없는 사하라사막의 따가운 햇살조차도 그 긴장을 없애지는 못했다. 줄을 서서 투탄카멘의 무덤에서 파낸 석회암조각 들을 담은 바구니를 나르는 이집트 농부들의 손길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첫번째 문에서 30피트 떨어진 두 번째 문에 도착했다. 두 번째 문 역시 3천년 동안 봉해져 있었다. 그 뒤에 뭐가 있을까? 그 무덤 역시 다른 무덤들 처럼 골동품들이 다 도굴되고 텅 비어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발굴인부들의 현장감독인 사와트 라만은 먼지를 밀가루처럼 뒤집어쓰고, 열여섯 계단을 걸어서 평지로 올라섰다. 그는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계곡에서 유일하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곳인 텐트를 향해서 곧장 걸어갔다. "통로의 돌조각을 다 치웠다는 것을 알리려고 왔습니다." 라만이 가볍게 절을 하며 말했다. "두 번째 문이 이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던 하워드 카터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쓰고 있는 검은 중절모자 밑으로 라만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주 좋아요, 라만. 먼지가 가라앉는 대로 문을 조사합시다." "지시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만이 말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당신은 정말 냉정한 사람이군요. 하워드." 세례명이 조지 에드워드 스탄호프 몰리눅스 허버트인 카나본 경이 말했다. "문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면서 당신은 어떻게 여기 앉아서 레모네이드를 끝까지 마실 수 있는 거죠?" 카나본은 그의 딸인 에블린 허버트에게 윙크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벨조니가 세티 1세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 왜 파성퇴(벽 등을 부수는 기구)를 썼는지 이제 알겠군요." "제가 쓰는 방법은 벨조니의 방법과는 전혀 다릅니다." 카터가 항변하듯 말했다. "그리고 벨조니가 쓴 방법들은 석관이 들어 있는 경우는 제외하고, 무덤이 비어 있을 때 쓰기 적당하죠." 카터는 무의식중에 근처에 있는 세티 1세의 무덤 입구를 쳐다보았다. "카나본 경, 저는 우리가 여기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 아무 것도 확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무덤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무덤은 18C 왕조시대의 전형적인 파라오 무덤의 형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케테탄에서 가져온 투탄카멘의 소장품들을 모아놓은 창고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무덤도굴꾼들이 벌써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들어간 흔적이 있어요. 저는 그 도굴이 고대에 이루어졌고, 누군가 문을 다시 봉할 정도로 이 무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카터는 영국인 특유의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황량한 왕묘계곡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산란했다. 그는 마흔아홉 해 동안 살면서 이렇게 흥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발굴을 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20만 톤의 자갈과 모래를 퍼 날랐지만,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발굴을 시작한 지 닷새만에 느닷없이 무덤의 문을 발견해서 카터는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는 레모네이드를 휘저으며 생각하거나 희망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 아니, 전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사진 통로 바닥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발굴단은 공기를 휘저어 놓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카터가 먼저 들어갔고, 카나본과 그의 딸이 뒤따라 들어갔으며, 카터의 조수인 A.R. 칼렌더가 그 뒤를 따랐다. 라만은 카터에게 쇠로 만들어진 지레를 건네주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칼렌더가 큰 손전등과 양초들을 들고 들어갔다. "내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 무덤을 처음으로 뚫은 것이 아닙니다." 카터가 신경질적으로 왼쪽 구석의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문으로 누군가 들어갔고, 저기를 다시 봉한 겁니다." 카터는 중앙의 더 큰 원형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누군가 들어갔던 더 큰 흔적이 여기 또 있습니다. 정말 이상해요." 카나본 경은 고개를 숙이고 묶여 있는 아홉 명의 죄수와 한마리의 재칼이 그려져 있는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카터가 말을 계속했다. "문 밑에 있는 봉인은 투탄카멘의 원래 봉인입니다." 손정등의 불빛에 공중에 떠도는 미세한 먼지들이 반사되었고, 회벽에 있는 고대의 봉인도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제는 문 뒤에 뭐가 있는지 보기로 합시다." 카터가 마치 차나 한 잔 하자고 하는 듯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극도의 긴장으로 위궤양이 악화되는 것을 느꼈고, 그의 손은 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긴장 때문에 땀에 흠뻑 젖었다. 그가 지렛대를 이용해서 고대의 회벽 몇 군데를 시험삼아 팔 때 그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석회조각들이 그의 발 밑에 쏟아져 내렸다. 그가 벽을 파는 동안 억제하고 있던 그의 감정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해서, 벽을 파는 그의 손 끝에는 갈수록 힘이 들어 가고 있었다. 카터는 갑자기 지렛대가 회벽을 뚫고 들어가는 바람에 비틀 거렸다. 구멍에서 따뜻한 바람이 새어나오자, 카터는 성냥을 뒤져서 양초를 켜고 불꽃을 구멍에 댔다. 그것은 안에 산소가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간단한 방법이었다. 촛불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카터는 칼렌더에게 초를 건네주고 계속해서 지렛대로 벽을 파는 동안,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카터는 회벽 부스러기가 묘실 안쪽으로 떨어지지 않고 바깥쪽으로 떨어지게 하며 조심스럽게 구멍을 넓혔다. 카터는 다시 초를 들고 이번에는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초는 아무런 변화 없이 타올랐다. 카터는 이번에는 구멍에 고개를 집어넣고 어둠 속을 쳐다 보았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했다. 카터의 눈이 어둠에 익자, 3천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앰너트 신상의 황금머리와 상아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황금상들도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고, 촛불 때문에 황금상들의 그림자가 벽에 기묘하게 드리워졌다. "뭐가 보입니까?" 카나본 경이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주 놀라운 물건들이 있습니다." 카터가 처음으로 감정이 그대로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초를 손전등 으로 바꿔들고 안을 비췄기 때문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묘실에 가득찬 놀라운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앰너트 신상의 황금머리는 세 개의 장례용 침대의 일부분이었다. 카터가 손전등을 왼쪽으로 옮기자, 구석에 헝클어져 있는 금박을 입히고 상감무늬를 넣은 수레더미들이 보였다. 그는 손전등을 오른쪽 으로 옮기면서, 묘실이 왜 이상하게 어지럽혀져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 했다. 물건들이 정해진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무런 생각없이 던져 놓은 것처럼 흩어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실물크기의 투탄카멘 상 두 개가 있었는데, 모두 황금스커트를 입고 황금신발을 신고 홀과 도리깨를 들고 있었다. 두 개의 상 사이에는 봉해진 문이 또 하나 있었다. 카터는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구멍에서 비켜섰다. 그는 벨조니처럼 벽을 부숴버리고 묘실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해가 질 때까지 봉해진 문의 사진만 찍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묘실임에 틀림없는 곳에 아침까지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1922년 11월 27일 카터가 묘실로 통하는 문의 고대의 장벽을 허무는 데는 세시간이 넘게 걸렸다. 라만과 몇 명의 이집트인들이 그 작업을 도왔다. 칼렌더는 전선을 가설해서 통로를 환하게 밝혔다. 카나본 경과 에블린은 작업이 거의 끝났을 때 통로로 들어갔다. 회벽과 돌을 담은 마지막 바구니가 밖으로 들려나갔다. 이제 들어갈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밖의 무덤 입구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신문기자들이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카터는 잠깐동안 망설였다. 그는 과학자로서 무덤 내부의 세밀한 모든 부분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죽은 자의 신성한 영역에 침입한 것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 한편 그는 발굴가로서 발굴의 기쁨에 들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인의 기질에 따라 나비넥타이를 고쳐 매고, 계속해서 발 밑에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며 문지방을 넘어섰다. 카터는 문지방에 놓여 있는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연꽃무늬의 아름다운 컵을 아무 말 없이 가리켰고, 그래서 카나본은 그 컵을 밟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 카터는 실물크기로 만들어진 두 개의 투탄카멘 상 사이의 봉해진 문으로 걸어 갔다. 그는 봉인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 문 역시 고대의 무덤 도굴꾼들에 의해 열렸다가 다시 봉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했다. 묘실로 들어선 카나본은 주위에 함부로 흩어져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그는 딸이 들어오자 돌아서서 손을 잡아주다가, 설화석고 컵의 오른쪽 벽에 놓여져 있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그 왼쪽에는 마치 투탄카멘의 장례식이 어제 있었던 것처럼 마른 꽃의 화환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새까만 등잔이 놓여 있었다. 에블린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묘실로 들어섰고, 그 뒤를 따라 칼렌더가 들어섰다. 라만은 들어설 공간이 없자 묘실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불행하게도 누군가 묘실에 들어왔었고, 다시 봉해졌습니다." 카터가 앞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나본과 에블린 그리고 칼렌더는 카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카터 옆으로 다가갔다. 라만이 묘실 안으로 들어섰다. 카터가 말을 계속했다. "이상하게도 이 문은 묘실의 문처럼 누군가 두번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 번만 들어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도굴꾼들이 미라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카터는 돌아서서 묘실로 들어선 라만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라만. 나는 당신에게 묘실로 들어와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소."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저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들어왔을 뿐입니다." "물론, 도울 일이 분명이 있소. 당신이 도울 일은 내 허락없이는 아무도 이 묘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이오." "알겠습니다, 선생님." 라만은 조용히 묘실 밖으로 나갔다. "하워드, 라만도 우리가 발견한 것에 우리처럼 넋을 잃은 모양이오. 좀 더 너그럽게 대할 수도 있을 텐데요." 카나본이 말했다. "이번 발굴에 참여한 일꾼들 모두에게 이 묘실을 보여 줄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나중에 시간을 정할 생각입니다." 카터가 말했다. "자,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미라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덤도굴꾼들이 이 무덤을 더럽히다가 뭔가에 놀랐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처럼 귀중한 물건들이 함부로 어지럽혀져 있는 데에는 뭔가 신비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마치 도굴꾼들이 다녀간 뒤에 누군가 물건들을 잠깐동안 제자리에 놓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놓지는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죠?" 카터가 카나본에게 물었다. 카나본은 어깨를 으쓱했다. "문지방에 있는 저 아름다운 컵을 보세요." 카터가 말을 계속했다. "저것은 왜 원래의 자리에 놓여 있지 않죠? 그리고 저 황금상자의 문도 열려 있습니다. 분명히 황금상 하나를 누군가 훔쳐갔지만, 왜 문도 닫지 않았을까요?" 카터는 묘실의 문쪽으로 걸어가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평범한 기름등잔입니다. 이것이 왜 무덤 속에 있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묘실에 있는 모든 물건들의 위치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실마리를 이용해서 뭔가 알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정말 이상하군요." 카나본은 카터가 긴장하는 것을 보고, 카터와 같은 전문가의 눈으로 무덤을 보려고 노력했다. 사실, 기름등잔이 무덤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물건들이 흩어져 있는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나본은 묘실 속의 물건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문지방 위에 버려진 반투명한 설화석고 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것을 집어서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마음을 온통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는 순간, 카터의 흥분된 목소리가 묘실 안에 울려 퍼졌다. "다른 방이 또 있어요. 여길 보세요." 카터는 쪼그리고 앉아 장례용침대 중 하나의 밑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카나본과 에블린 그리고 칼렌더는 서둘러서 카터 옆으로 갔다. 손전등의 불빛 속에서 황금과 보석으로 가득 차있는 또 다른 방이 드러났다. 그 방은 묘실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물건들이 혼란스럽게 어지럽혀져 있었지만, 모두들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것에 놀라서 3천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의문을 품지 못했다. 나중에 그들이 그 신비를 조사할 준비가 되었을 때, 카나본은 이미 패혈증으로 위독했다. 그는 투탄카멘의 무덤이 열린지 20주도 되지 않았고, 카이로 전역에 5분 동안 원인모를 정전이 있었던, 1923년 4월 5일 새벽 두 시에 죽었다. 그의 병은 곤충에 물려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무덤발굴에 관여했던 또 한 명이 발굴 넉 달만에 불가사의한 상황 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잔잔한 나일 강에 정박해 있던 자신의 요트 갑판에서 실종되었다. 무덤의 도굴꾼들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시들해졌고, 이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신봉하던 신비학의 주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파라오의 저주'의 망령이 고대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뉴욕 타임즈>는 사망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스러운 일이고,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해서 회의적으로 무시하기는 어렵다." 과학계에 두려움이 퍼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은 우연의 일치가 있었던 것이다. 제 1 일 1978년 카이로, 오후 3시 에리카 바론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등과 다리의 근육이 수축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치한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가 몸을 숙이고 문양이 장식된 놋쇠 접시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을 때, 누군가 면바지를 입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 넣고 그녀의 몸을 만진 것이다. 그녀는 힐튼호텔에서 떠난 뒤로 음란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심지어는 음흉한 말까지 하는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충격적인 일이었겠지만, 그녀가 카이로에 온 첫날이어서 더욱 충격이 컸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몸을 만진 사람은 가지런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조롱하듯 웃고 있는,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그녀의 몸을 만졌던 손을 여전히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에리카는 큰 삼베핸드백을 메고 있었지만, 왼손으로 소년의 팔을 뿌리친 다음 오른손을 꽉 쥐고 체중을 실어서 있는 힘을 다해 조롱하고 있는 얼굴을 후려 쳤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소년보다 더 놀랐다. 그러나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그 주먹은 마치 가라데를 배운 사람의 공격 처럼 매서워서, 놀란 소년은 놋쇠상점의 가판대 위에 넘어졌고, 놋쇠제품들이 자갈을 깐 도로 위에 와르르 쏟아졌다. 금속쟁반에 커피와 물을 담아들고 오던 다른 소년도 놋쇠그릇을 밟고 넘어져서 그곳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에리카는 겁에 질렸다. 사람이 들끓는 카이로의 시장에서 혼자 핸드백을 움켜잡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를 때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떨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모두들 큰 소리로 웃기만 했다. 놋쇠상인조차 자신의 놋쇠제품들이 여전히 길바닥에 뒹굴고 있는데도 옆구리를 잡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놋쇠제품들 사이에서 일어선 소년도 턱을 손으로 감싸고 배시시 웃었다. "마레이쉬." 놋쇠상인이 말했다. 에리카는 나중에 그 말이 '어쩔 수 없다' 또는 '상관 없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화가 난 척 작은 망치를 휘둘러 그 소년을 쫓아버렸다. 그는 에리카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낸 다음 그의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에리카는 심장이 여전히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카이로에 대해서 그리고 현대이집트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집트학자로서 공부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 학문은 현대이집트의 문명이 아니라 고대이집트의 문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가 전공한 이집트 신왕조(B.C. 1590년-1085년)의 상형문자에는, 1980년대의 카이로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스물 네시간 전에 카이로에 도착한 이후 계속해서 쓰라린 낭패감만 느꼈다.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냄새였다. 카이로의 구석구석에는 양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한 역겨운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소음이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라디오에서 나는 귀에 거슬리는 아랍음악이 뒤섞여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는, 마치 중세의 구리지붕처럼 녹청색으로 가난에 찌든 도시를 뒤덮고 있는 불쾌한 먼지와 모래였다. 에리카는 소년의 일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테두리가 없는 작은 모자를 쓰고 자신에게 미소를 보내는 남자들이 모두 추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로마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 겨우 십대 초반인 소년들이 낄낄거리고, 영어와 불어 그리고 아랍어가 뒤섞인 질문을 하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카이로는 낯선 곳이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낯설었다. 길거리의 표지판조차 장식적이기는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아랍어 필기체로 덮여 있었다. 에리카는 나일강으로 이어져 있는 샤리 엘 무스키 거리를 바라보면서 도시의 서쪽지역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이집트로 올 생각을 했던 것 자체가 우스운 짓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 동안 사귄 애인인 리처드 허비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녀의 어머니 재니스조차도 그녀의 계획이 우스운 짓이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중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카이로의 중심가를 바라보았다. 길을 좁았고 사람들은 엄청 나게 많았다. "돈 좀 주세요."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말했다. "학교에 가려면 연필을 사야 해요." 그 소녀의 영어는 놀라울 정도로 또렷했다. 에리카는 길거리에 덮여 있는 것과 같은 먼지가 머리에 하얗게 뒤덮인 그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누더기같은 오렌지빛 날염 옷을 입고 있었고 신발은 없었다. 에리카는 고개를 숙이며 소녀에게 미소를 짓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녀의 눈 주위에는 녹색 집파리들이 잔뜩 들어붙어 있었다. 소녀는 파리를 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소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에리카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경찰이다!" 가슴에 고딕체로 '관광 경찰'이라고 씌어진 배지가 붙어 있는 흰 제복을 입은 경찰이 사람들을 헤치고 에리카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순식간에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에리카를 조롱하던 소년들도 모두 사라졌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길을 잃으신 것 같군요." 경찰이 또렷한 영국식 발음으로 말했다. "저는 칸 엘 칼리리 시장을 찾고 있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뛰 아 드로이트." 경찰이 앞쪽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툭 쳤다. "죄송합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당신에게 영어를 써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곧장 앞으로 가세요. 여기는 엘무스키 거리입니다. 곧장 앞으로 가시면 샤리 포트 셰드의 큰길이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시면 칸 엘 칼리리 시장입니다. 즐거운 쇼핑이 되시길 바랍니다만, 값을 깎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기 이집트에서는 값을 깎는 것은 스포츠와 같습니다." 에리카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사람들 틈을 헤집고 걸어갔다. 경찰이 사라진 지 1분도 채 안 되어 그녀를 조롱하던 소년들이 마술처럼 또 나타났고, 엄청나게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들고 에리카를 에워쌌다. 그녀는 노천도살장을 지나쳤는데, 그곳에는 최근에 도살된 양들이 머리만 빼고 껍질이 벗겨져서 정부의 허가를 나타내는 분홍색 도장이 찍힌채 매달려 있었다. 에리카는 갈고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시체의 퀭한 눈 때문에 등골이 오싹 했고, 피비린내 때문에 점심에 먹은 것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악취는 도살장 옆의 과일 가판대에서 나는 너무 익은 망고 냄새와 길거리의 당나귀 똥냄새가 뒤섞인 묘한 냄새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걸음 더 가자, 이번에는 약초와 향신료 냄새 그리고 막 끓인 아랍커피의 향기가 뒤섞여 풍기고 있었다. 좁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는 거리에서는 뿌연 먼지가 햇빛을 가릴 정도로 피어올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뿌옇게 보였다. 오후의 무더위 때문에 길 양쪽에 있는 모래빛의 건물들에는 모두 덧문이 내려져 있었다. 시장 깊숙이 들어간 에리카는 화강암이 깔린 도로에 나무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듣다가, 자신이 중세의 카이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혼돈과 가난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서양문화에 의해 조심스럽게 위장되고 감춰진, 원시적 형태의 신비스럽고 활기찬 삶에 놀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은 인간의 감정에 의해 어느정도 억제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척 적나라했다. 그들은 체념과 웃음으로 운명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담배 있어?" 이제 겨우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물었다. 그는 회색셔츠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소년의 친구들 중 한명이 그의 등을 떠밀어서, 그는 비틀거리며 에리카 옆으로 다가섰다. "담배?" 소년이 아랍춤을 추고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며 다시 물었다. 숯불이 가득 찬 다리미로 바쁘게 다림질을 하고 있던 재단사가 씨익 웃었고,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물파이프를 피우고 있던 남자들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으며 에리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에리카는 그들과 눈에 띄게 다른 옷을 입은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면바지와 니트블라우스를 입고 있어서 한눈에 여행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이로 에서는 서양옷을 입은 여자들은 바지가 아니라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시장에 온 여자들도 대부분 전통적인 검은색의 멜리야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에리카의 몸매도 이곳 여자들의 몸매와 달랐다. 그녀는 체중을 조금 줄이면 자신의 몸매가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집트의 여자들보다는 훨씬 날씬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도 시장에 온 이집트 여자들의 둥글고 살찐 얼굴보다는 훨씬 갸름했다. 에리카는 크고 푸른 눈에 숱이 많은 갈색머리였고 약간 뾰루퉁해 보일 정도로 아랫입술이 두툼했다. 그녀는 자신이 미인계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남자들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지금 혼잡한 시장을 헤쳐나가면서,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차려입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는 옷차림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음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에리카는 큰 핸드백을 옆구리에 밀착시키고 온갖 수공품과 상품들을 파는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좁은 길을 서둘러 걸어갔다. 건물 사이의 머리 위에는 카페트와 옷들이 천막처럼 덮여있어서 햇빛은 막았지만, 먼지와 소음은 더 지독했다. 에리카는 무척 다양한 얼굴들을 보면서 또 다시 멈칫거렸다. 이집트인들은 한결같이 뼈대가 굵고, 입이 크고 입술이 두터웠으며, 전통의상인 갈라비아를 입고 테가 없는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순수한 아랍인인 베두인들은 날카로운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또 웃통을 벗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누비아족들은 숯처럼 새까맣고 건장한 근육질의 체격이었다. 에리카는 사람들의 파도에 떠밀려 앞으로 나갔고, 칸 엘 칼리리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참으로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그녀의 등을 꼬집어서 돌아섰지만, 그녀는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대여섯 명의 소년들이 그녀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몰리고 있었다. 에리카는 선물을 사기 위해서 금세공상품을 파는 곳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누군가 더러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을 때 완전히 깨져버렸다. 그녀는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고대문명과 그 당시의 예술과 신비때문에 이집트에 대해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동안 경험한 현대이집트의 도시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에리카는 사카라처럼 유물이 있을 곳으로 특히 북부이집트의 교외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그곳은 자신이 꿈꾸었던 것과 같으리라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당나귀를 피하며, 다음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당나귀는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도 그 불쌍한 짐승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힐튼호텔에서 떠나기 전에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던 에리카는 만약 계속해서 남동쪽으로 간다면 틀림없이 엘 아자르 사원의 광장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갈대로 만든 새장 속에 들어있는 앙상한 비둘기들을 팔고있는 상인들 틈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그녀는 마침내 사원의 광탑과 햇살이 내리쬐는 광장을 볼 수 있었다. 에리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 바람에 에리카에게 담배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따라오던 소년이 그녀와 부딪힐 뻔 했지만 재빨리 피했다. 에리카의 눈은 상점의 유리진열대에 고정되었다. 그녀 앞에는 작은 항아리처럼 생긴 도기 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현대의 지저분함 속에서 빛나고 있는 고대이집트의 광채였다. 그 도기는 주둥이 부분이 약간 깨지기는 했지만, 다른 곳에는 아무런 흠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 물병을 벽에 걸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에 틀림없는 구멍도 그대로 였다. 에리카는 시장에 모조품이 가득 차 있고, 관광객을 끌기 위해서 일부러 비싼 가격을 붙여 놓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진품도기에 너무나 놀랐다. 시장에서 파는 모조품 중에는 조각한 미라상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집트 제1왕조 도자기의 전형적인 형식이었고, 에리카가 근무하고 있는 보스턴 미술박물관에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훌륭했다.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그것은 적어도 6천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에리카는 골목으로 조금 물러서서, 최근에 칠을 다시 한듯 창문에 선명하게 새겨진 가게이름을 바라보았다. 위에는 기묘한 모양의 아랍어 필기체가 씌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영어로 '압둘 골동품'이라고 씌어 있었다. 창문의 왼쪽에 있는 문에는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를 조롱하던 누군가가 핸드백을 잡아당겼기 때문에, 에리카는 용기를 내어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에리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백 개의 색구슬로 만들어진 주렴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상점은 3미터 정도의 높이에 길이는 그 두 배 정도로 작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시원했다. 벽은 모두 흰색이 칠해진 벽토였고, 바닥에는 여러 곳이 닳은 동양의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유리판이 깔려 있는 L자형의 판매대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에리카는 핸드백 끈을 어깨에 걸고 자신이 창문을 통해 보았던 그 놀라운 도기를 더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옅은 황갈색이었고, 갈색과 자홍색의 중간쯤 되는 색으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도기 안에는 구겨진 아랍신문이 채워져 있었다. 가게 뒤쪽에 드리워진 육중한 적갈색 커튼 뒤에서 주인인 듯한 노인이 나타나 발을 질질 끌며 판매대 쪽으로 걸어왔다. 에리카는 그를 힐끗 보고는 즉시 마음이 놓였다. 그는 예순다섯 살쯤 되어 보였고, 움직임이나 표정이 친절해 보였다. "저는 이 도기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좀 더 자세히 봐도 괜찮을까요?" 에리카가 말했다. "물론이오." 노인이 판매대 뒤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그는 도기를 집어서 에리카의 떨리는 손에 태연하게 건네주었다. "판매대 위에 올려놓고 봐도 괜찮소." 노인이 백열전구의 불을 켰다. 에리카는 도기를 조심스럽게 판매대 위에 올려놓고, 핸드백도 내려놓았다. 그런다음 다시 도기를 집어들어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며 장식을 자세히 보았다. 단순한 장식무늬 외에도, 무희와 영양 그리고 원시적인 배들이 그려져 있었다. "얼마죠?" 에리카가 그림을 신중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200파운드요." 노인이 마치 그것이 비밀이라고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200파운드요?" 에리카가 머릿속으로는 그것을 달러로 환산하며 소리쳤다. 약 3만 달러 정도 였다. 그녀는 도기가 혹시 모조품인지 확인하는 동안에 값을 깎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저는 100파운드 이상은 여유가 없어요." "180파운드까지는 줄 수 있소." 노인은 마치 큰 희생을 감수하는 것처럼 말했다. "120파운드면 적당할 것 같군요." 에리카가 계속에서 무늬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을 위해서......" 노인이 말을 멈추고 에리카의 팔을 잡았다. 에리카는 그의 행동에 신경쓰지 않았다. "미국인이죠?" "네." "좋아요. 나는 미국인들을 좋아해요. 러시아인들보다는 훨씬 좋아하지. 아가씨를 위해서 내가 특별히 싸게 드리겠소. 이 물건은 내가 손해를 보고 주는 거요. 가게를 연 지 얼마되지 않아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오. 아가씨에게 160파운드에 드리겠소." 그는 손을 내밀어 에리카가 들고 있던 도기를 잡고는 판매대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건 정말 놀라운 물건이오. 더 이상은 깎아줄 수 없어요." 에리카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랍인 특유의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는 서양식의 재킷 속에 갈색의 갈라비아를 입고 있었다. 에리카는 도기를 뒤집어서 밑부분의 나선형 무늬를 쳐다보다가 땀에 약간 젖은 엄지 손가락으로 색이 칠해진 곳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구운 시에나 흙의 안료가 손가락에 약간 묻어났다. 에리카는 그 순간 도기가 위조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진품은 분명히 아니었다. 에리카는 불쾌함을 느끼면서 도기를 판매대 위에 내려놓고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에리카가 노인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다른 물건들을 보여주겠소." 노인이 벽에 있는 큰 나무장식장을 열며 말했다. 그는 레반트인(동부 지중해 연안 사람)특유의 본능으로 처음에 에리카가 보였던 열정을 알아차렸고, 똑같은 본능으로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도 눈치챘다. 그는 당황하긴 했지만 쓸데없이 싸워서 손님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이것은 마음에 들 거요." 노인이 장식장에서 비슷한 도기 한 점을 꺼내 판매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에리카 역시 노인이 겉으로는 친절해 보이지만 자신을 속였다고 말해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못해서 노인이 내미는 도기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처음 것보다 더 길쭉하고 밑부분은 더 좁았다. 그리고 왼쪽으로 그려진 나선형 무늬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이런 종류의 도기가 많이 있소." 노인이 도기 다섯 개를 더 꺼내 놓으며 말을 계속했다. 에리카는 노인이 등을 보이고 있을 때 집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도기의 무늬가 새겨진 곳을 문질렀다. 이번에는 안료가 묻어나지 않았다. "이건 얼마죠?" 에리카가 흥분을 감추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 있는 도기는 6천년 이상은 된 것이었다. "이것들은 만든 사람의 솜씨와 보존상태에 따라서 가격이 다르지." 노인이 애매하게 말했다. "모두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시오. 가격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얘기합시다." 에리카는 도기를 모두 자세히 살펴보고는, 일곱 개 중에서 진품이라는 확신이 드는 두 개를 골라냈다. "이 두 개가 마음에 들어요." 에리카가 확신을 가지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집트학자로서의 경험이 실용적인 가치가 있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리처드가 옆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도기 두 개를 본 다음 에리카를 쳐다보았다. "이것들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닌데 다른 것을 고르지 그러시오?" 에리카는 노인을 쳐다보며 망설이다가 도전적으로 말을 꺼냈다. "다른 것들은 위조품이기 때문이에요." 노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천천히 그의 눈에 빛이 났고,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노인은 마침내 눈물까지 흘리며 껄껄 웃었다. 에리카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말해봐요......" 노인이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말을 계속했다. "이것들이 위조품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 봐요." 노인은 에리카가 한쪽으로 치워놓은 자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 쉽게 알아낼 수 있어요. 무늬 부분의 안료가 완전히 흡수되지 않아서 젖은 손가락에 묻어나더군요. 골동품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죠." 노인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도기를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에 구운 시에나 흙의 안료가 묻어났다. "당신 말이 정말 맞군." 노인은 에리카가 골라놓은 도기도 똑같이 시험해보았다. "바보가 잘난 체를 했군.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이 진짜 도기 두 개는 얼마죠?" 에리카가 물었다. "그건 파는 게 아니오. 물론 언젠가는 팔지 모르지만 지금은 팔지 않소." 판매대 위에 깔려 있는 유리판 밑에는 문화재관리국의 정부소인이 찍힌 공문서 한 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면허장 옆의 종이에는 원할 경우에는 골동품에 대한 보증서를 준다는 내용이 인쇄되어 있었다. "손님이 보증서를 원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세요?" 에리카가 물었다. "보증서를 주죠. 여행객들에게는 그 보증서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소. 그들은 그들이 산 기념품에 즐거워할 뿐이오. 그들이 진품인지 확인하는 일은 결코 없소." "양심의 가책을 안 느끼세요." "그럼, 안 느끼지. 정직함이란 부자들의 사치일 뿐이요. 장사꾼이란 언제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물건을 가장 비싸게 팔려고 노력하는 법이오. 여기에 오는 관광객들은 기념품을 원하지. 만약 그들이 진짜 골동품을 찾는다면 그들은 골동품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야. 관광객들이 어떤것에 대해 아느냐 모르느냐는 그들의 책임일 뿐이요. 그런데 당신은 고대 도기의 안료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지?" "저는 이집트학자예요." "당신이 이집트학자라고! 알라신이 놀라실 일이군!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왜 이집트학자가 됐지? 아무 것도 이 압둘 함디의 눈은 못 속이는데 나도 정말 늙은 모양이군. 그럼 전에도 이집트에 온 적이 있소?" "아니에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전에도 오고 싶었지만, 여행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못 왔어요. 이집트에 오는 것이 한동안은 제 꿈이었어요." "그렇다면 이집트에서 즐겁게 지내길 빌겠소. 북부이집트에도 갈 생각이오? 룩소르 말이오?" "물론이에요." "그럼, 내 아들이 하는 골동품가게의 주소를 알려드리지." "아드님도 위조도기를 파시나요?" 에리카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야. 하지만 그 아이는 당신에게 정말 멋진 물건들을 보여 줄거요. 나도 놀라운 물건을 몇 개 가지고 있지.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압둘이 장식장에서 미라상을 꺼내서 판매대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은 석고가 덮인 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앞부분에는 상형문자가 한 줄 씌어 있었다. "이건 위조품이에요." 에리카가 재빨리 말했다. "아니오." 압둘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 상형문자는 진짜가 아니에요. 이 상형문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이건 단지 무의미한 기호를 늘어놓은 것일 뿐이에요." "아가씨는 이 신비스러운 글씨를 읽을 수 있소?" "그건 내 전공이에요. 특히 신왕조 이후의 상형문자는 잘 알아요." 압둘은 미라상을 돌리며 상형문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많은 돈을 주고 이걸 샀소. 나는 이게 진품이라고 확신하고 있소." "이 상은 진짜일지도 모르지만, 문자는 진짜가 아니에요. 이 상형문자는 아마 이 상을 더 값어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집어넣었을 거예요." 에리카가 미라상의 검은색을 닦으면서 말했다. "좋소. 그럼 다른 것을 보여드리지." 압둘은 위에 유리판이 덮여 있는 장식장으로 가더니 작은 판지 상자를 꺼냈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벗겨내고, 갑충석(고대 이집트의 왕쇠똥구리 모양으로 조각한 보석으로, 그 바닥 표면에 기호를 새겨 부적 또는 장식품으로 썼음) 몇 개를 꺼내 장식장 위에 늘어놓았다.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그 중 하나를 에리카 쪽으로 밀었다. 에리카는 그것을 집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작은 구멍이 많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윗부분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쇠똥구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을 뒤집어본 에리카는 세티 1세 파라오가 사용했던 '타원형의 윤곽'(고대 이집트의 국왕과 신의 이름을 둘러싼 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조각된 그 상형문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요." 에리카가 갑충석을 판매대 위에 놓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그걸 갖고 싶은 생각이 없소?" "왜 없겠어요. 이건 얼마나 하죠?" "이건 당신 것이요. 내가 선물하겠소." "저는 이런 선물은 받을 수 없어요. 왜 저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시는 거죠?" "그건 아랍인의 관습이오. 하지만 내가 경고하는데 이건 진짜가 아니오." 에리카는 깜짝 놀라서 갑충석을 불빛에 비춰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에 가졌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는 진짜 같은데요." "아니오. 내가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내 아들녀석이 이걸 만들었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아드님은 정말 대단한 재주를 가지고 있군요." 에리카가 상형문자를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아들녀석은 솜씨가 아주 뛰어나지. 그 아이는 진품을 보고 상형문자를 똑같이 만들어요." "뭘로 만들었죠?" "고대인의 뼈로 말들었소. 룩소르와 아스완에 있는 고대 공동묘지에는 부서진 미라를 감춰놓은 은닉처가 엄청나게 많이 있지. 내 아들은 갑충석을 조각하기 위해서 뼈를 사용하오. 표면이 오래되고 닳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칠면조에게 그 뼈를 먹이지. 칠면조가 일단 먹었다가 다시 배설하면 정말 고색창연해 보이거든." 에리카는 갑충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생각하지 속이 메스꺼워져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때문에 속이 메스꺼운 것은 금방 사라져서, 에리카는 갑충석을 손가락으로 집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았다. "제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해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흥분하지 마시오. 이렇게 만든 몇 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파리의 박물관장들이 가져갔지. 그리고 시험도 했다고 하더군." "아마 방사성탄소시험을 했을 거예요." 에리카가 불쑥 말했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가 만든 갑충석이 진짜라고 판정을 내렸소. 그래, 뼈는 분명히 고대인의 뼈긴 하지. 지금 내 아들이 만든 갑충석이 전 세계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소." 에리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자신이 전문가와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이름은 압둘 함디요. 그냥 압둘이라고 불러요. 아가씨는 이름이 뭐요?" "아, 미안합니다. 에리카 바론이에요." 에리카는 갑충석을 판매대 위에 내려놓았다. "에리카, 나하고 박하차 한 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 압둘은 갑충석들을 장식장에 다시 집어넣은 다음 두꺼운 적갈색의 커튼을 쳤다. 에리카는 압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지만 가방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갈까 잠시동안 망설였다. 뒷방은 판매대가 있는 방의 앞쪽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지만 문이나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벽과 바닥에는 동양의 카페트가 덮여 있어서 마치 텐트 속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뒷방의 한가운데에는 방석들과 작은 탁자 그리고 물파이프가 놓여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압둘이 커튼을 열고 가게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에리카는 천으로 완전히 뒤덮인 몇 개의 큰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가게 입구에 달려 있는 주렴의 구슬이 부딪히는 소리와 압둘이 차를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앉으세요." 압둘이 돌아와서 바닥에 놓여 있는 큰 방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당신처럼 아름답고 지적인 아가씨에게 대접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요. 미국의 어디서 왔소?" "태어난 곳은 오하이오주의 토레도예요." 에리카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스턴에 살고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보스턴 옆에 있는 캠브리지에 살고 있어요." 에리카는 작은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백열전구 때문인지 빨간색의 동양 카페트가 마치 붉은색 벨벳처럼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보스턴이라. 보스턴은 아마 틀림없이 아름다울 거요. 보스턴에 내 친구가 한 명 있지. 우리는 종종 편지를 교환하오. 편지는 내 아들녀석이 쓰긴 하지만 말이오. 나는 영어로 글을 쓸 줄 몰라 내 아들녀석을 이리 불러서 쓰게 하지." 압둘은 방석 옆에 있는 작은 책상서랍을 뒤져, '이집트 룩소르의 압둘 함디 앞'이라고 주소가 씌어 있는 편지를 꺼냈다. "혹시 이 사람 아시오?" "보스턴은 아주 넓은 곳인데......" 에리카는 편지에 적혀 있는 그녀의 상관인 허버트 로리 박사의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로리 박사님을 아세요?" 에리카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나는 그를 두 번 만났고, 우리는 자주 편지를 교환해요. 그는 내가 약 1년 전쯤에 갖고 있던 라메스 2세(제 19C 왕조의 왕)의 머리에 무척 관심이 많았소.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오. 아주 명석하기도 하고." "맞아요." 에리카는 압둘이 보스턴미술박물관의 근동학부장을 맡고 있는 유명한 하버트 로리 박사와 편지를 교환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녀는 그 때문에 마음이 훨씬 더 편해졌다. 압둘은 마치 에리카의 생각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책상서랍 속에서 다른 편지들을 몇 장 더 꺼냈다. "이 편지들은 루브르박물관의 두보아 씨와 대영박물관의 코필드 씨에게서 온 것이오." 가게 문의 주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압둘을 일어서서 커튼을 젖히고 아랍어로 몇 마디 했다. 흰 갈라비아를 입고 맨발인 소년이 소리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삼각대로 받친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는 물파이프 옆에 금속받침대와 함께 컵 두 개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소년은 자신이 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압둘은 소년의 손에 동전 몇 닢을 놓아 주고 소년이 나갈 수 있도록 커튼을 젖혀주었다. 그는 에리카 옆에 다시 앉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차를 휘저었다. "마셔도 괜찮은가요?" 에리카가 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안전하냐고?" 압둘이 놀라며 물었다. "여기 이집트에서는 음료수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아주 많이 들었거든요." "아, 배탈이 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그래요, 이건 아주 안전해요. 차 가게에서는 물을 언제나 끓이거든. 걱정하지 말고 들어요. 여기는 무덥고 건조한 나라요. 그래서 아랍에서는 친구와 함께 차나 커피를 마시는 것이 관습이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차를 마셨다. 에리카는 맛이 좋은 것에 놀랐고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상쾌한 것에 또 놀랐다. "말해 봐요. 에리카......" 압둘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는 그녀이름의 두 번째 음정을 강하게 발음 하며 이상하게 불렀다. "물론, 내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 이집트 학자가 되었는지 말해 봐요." 에리카는 자신의 찻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작은 박하조각들이 뜨거운 물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런 질문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 질문을 천 번쯤을 들었고, 특히 '모든 것을 다 가진' 아름다운 유태인 처녀가 왜 교육학이 아니라 이집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수없이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하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고, 나중에는 "너는 결코 네 앞가림도 못할 거야!"라고 화를 내고, 마지막에는 "금전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않겠다"고 협박 하며 에리카의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모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공부를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반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이집트학의 모든 분야가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공부를 끝냈을 때 어떤 종류의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고, 같이 공부한 학생들의 대부분이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실직상태에 처해 있는 반면, 그녀는 보스턴 미술박물관에 '운 좋게' 취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대 이집트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집트학에는 뭔가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면이 있었고, 이미 발견된 유물들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면에 매료되었다. 에리카는 고대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랑에 관한 시가 특히 좋았다. 그녀는 그 시들을 통해서 수천 년을 이어온 고대인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그로 인해서 그녀는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인류사회가 전혀 발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에리카는 압둘을 쳐다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이집트학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공부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여행을 갔었는데, 그때 본 것 중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본 미라 하나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대학에서 고대사를 공부했어요. 저는 문화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어 너무나 재미 있었어요." 에리카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이집트학을 공부한 이유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 "아주 이상하군." 압둘이 말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정말 힘겨운 직업인데, 당신에게는......" 압둘을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좋은 거지. 지금 몇 살이요.?" "스물 여덟 살이에요." "남편은 어디 있소?" 에리카는 웃으면서, 자신이 왜 웃는지 압둘이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리처드와의 복잡한 문제들이 그녀의 무의식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져나왔다. 그것은 마치 수문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이 낯선 노인에게 자신의 문제들을 모두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그 문제들을 잊고 이집트학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이집트에 온 것이다. "아직 미혼이에요." 에리카가 말했다. "관심이 있으세요?" 에리카가 웃으며 물었다. "내가 관심이 있느냐고? 나는 언제나 관심이 있소." 압둘이 웃으며 말했다. "이슬람교 사회에서는 한 남자가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소. 하지만 나는 한 명의 아내도 제대로 즐겁게 해주지 못하지. 그건 그렇고, 스물 여덟 살인데 미혼이라니 세상은 참 요지경 속이군." 에리카는 압둘이 차를 마시는 것을 보면서 이 순간이 정말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압둘, 당신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까요?" "나는 좋아요." 압둘이 몸을 똑바로 세우고 재킷을 가다듬는 동안 에리카는 핸드백에서 소형 폴라로이드사진기를 꺼내 플래쉬를 끼웠다. 잠시 후에 플래쉬에서 강한 빛이 터지고 카메라에서는 현상이 채 끝나지 않은 사진이 나왔다. "우와, 당신 카메라는 러시아 로켓보다 성능이 좋군요." 압둘이 다시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당신은 내 가게에 온 이집트학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젊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것을 하나 보여주고 싶소." 압둘이 천천히 일어섰다. 에리카는 사진을 힐끗 보았다. 사진은 선명하게 나와 있었다. "이 골동품을 보는 것은 행운이요, 아가씨." 압둘이 약 1미터 80센티미터 정도 높이의 물건을 덮고 있는 천을 천천히 벗기며 말했다. 에리카는 그것을 보고는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에리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앞에는 실물크기의 상이 있었다. 그녀는 자세히 보기 위해서 그 앞으로 급히 다가갔다. 압둘은 일생의 역작의 베일을 벗기는 화가처럼 의기 양양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상의 얼굴은 투탄카멘의 상처럼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그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건 세티 1세요." 압둘이 말했다. 그는 에리카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천을 바닥에 놓고 방석 위에 앉았다. "이건 제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에리카가 위엄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평온한 세티 1세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눈은 설화석고로 만들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녹색 장석이었다. 그리고 눈썹은 반투명한 광석인 홍옥수로 만들어져 있었다. 고대 인도인의 전통적인 머리장식물은 청금석으로 상감세공이 된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목에는 이집트의 여신인 네크베트를 나타내는 대머리독수리 형태의 화려한 장식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목걸이는 황금과 수백 개의 청옥과 벽옥 그리고 청금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대머리독수리의 부리와 눈은 오석이었다. 허리띠에는 황금칼이 꽂혀 있었는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손잡이에는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홀을 들고 앞으로 내민 왼손에도 보석들이 상감세공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에리카는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이 상은 위조품이 아니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상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난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 붉은색 동양 카페트 가운데 서 있는 세티 1세의 상은 다이아몬드처럼 맑고 깨끗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에리카는 상주위를 천천히 돌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저는 이런 것은 처음 봐요." "이것은 우리의 보물들이 감춰져 있던 리비아 사막의 모래속에서 나왔소." 압둘이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처럼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은 여기 몇 시간 서 있다가 여행을 시작해야 하오. 내가 보기에는 당신도 이걸 좋아하는 것 같군." "아, 압둘. 너무나 아름다워서 뭐라고 할 말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다시 앞쪽으로 간 에리카는 상의 밑부분에 씌어 있는 상형문자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녀는 긴 타원형 속에 들어 있는 세티 1세 파라오의 이름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녀는 또 다른 타원형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이름도 보았다. 그녀는 그것이 세티 1세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상형문자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이름은 투탄카멘이었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세티 1세는 역사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소년왕인 투탄카멘 이후에 50여 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던 무척 중요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었다. 그 두 명의 파라오는 혈통이 전혀 다르고 서로 다른 왕조에 속해 있었다. 에리카는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상형 문자를 다시 해석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해석은 이번에도 똑같았다. 상형문자에는 두 파라오의 이름이 모두 들어 있었다. 가게의 바깥 문에 드리워진 주렴이 시끄럽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압둘은 재빨리 일어섰다. "에리카, 잠깐 실례하겠소. 하지만 먼저, 조심하기 위해서 이 물건을 감추는 게 좋겠소." 압둘은 그 믿을 수 없는 파라오의 상 위에 검은 천을 덮었다. 에리카에게는 상을 천으로 덮는 것이 마치 환상적인 꿈에서 너무 빨리 깨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앞에 있던 상은 이제 검은 천으로 덮인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손님에게 가 봐야겠소. 금방 돌아오겠소.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기다려 주시오. 더 마시겠소?" "아니, 괜찮아요." 에리카가 대답했다. 그녀는 차를 더 마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을 더 보고 싶었다. 그녀는 압둘이 커튼을 들추고 밖을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을 때, 현상이 다 된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들었다. 압둘의 머리부분이 약간 잘려나간 것 외에는 훌륭했다. 그녀는 압둘이 괜찮다고 하면 상을 한 장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압둘은 밖에 있는 사람이 급하지 않은 사람인 듯 커튼을 열어 놓은 채 다시 들어와 그의 작은 책상 쪽으로 갔다. 에리카는 방석에 앉았다. "이집트 관광안내책자는 있소?" 압둘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나겔의 안내책자를 갖고 있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나에게 더 좋은 것이 있소." 압둘이 편지 틈에서 약간 낡은 소책자를 꺼내며 말했다. "이건 베데커가 만든 1929년판이오. 이 책자는 이집트의 유적지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아요. 나는 당신이 여기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이 책자를 이용했으면 좋겠소. 이건 나겔이 만든 안내책자보다 훨씬 더 좋소." "정말 친절하시군요. 조심해서 보겠어요. 고마워요." 에리카가 책을 받으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이집트 여행을 좀더 즐겁게 해줄 수 있다면, 나로서도 즐거운 일이오." 압둘이 커튼 쪽으로 걸어가며 말하고는 다시 머뭇거렸다. "만약 당신이 이집트를 떠날 때 내게 그 책자를 돌려주기 어려우면 표지 안쪽에 적혀 있는 이름과 주소의 남자에게 돌려주시오. 나는 여행을 자주 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이 떠날 때쯤에 카이로에 없을지도 모르겠소." 압둘은 미소를 지으며 가게로 나갔다. 무거운 주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에리카는 그림과 접힌 지도로 가득 찬 안내책자를 훑어 보았다. 베데커가 별을 네 개나 표시해서 중요한 곳이라고 강조한 카르나크사원에 대한 설명은 거의 40페이지에 이르렀다. 그 책자는 아주 훌륭했다. 그 다음 장에는 하트세수트 여왕의 사원에 있는 구리장식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에리카는 흥미있게 읽었다. 에리카는 압둘을 찍은 사진을 읽던 페이지에 끼우고 큰 핸드백에 책을 집어넣었다. 에리카는 방에 혼자 있으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세티상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상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천을 벗기고 그 이상한 상형문자를 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그녀는 천을 벗기고 상을 보는 것은 친절하게 대해 준 압둘에게 무례하게 구는 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안내책자를 다시 꺼내려고 핸드백을 열었다. 그녀는 그때 가게 밖에서 들려오던 조용한 목소리들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을 들었다. 그 목소리들은 크지는 않았지만 화가 난 것 같았다. 에리카는 처음에 그들이 값을 깎는 줄 알았다. 그러나 유리 깨지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 급히 입을 틀어막은 듯한 외마디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에리카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관자놀이가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조용하지만 더욱 위협적인 목소리로 뭔가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카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커튼으로 다가가 몇 분 전에 압둘이 했던 것처럼 커튼 틈으로 가게 안을 엿보았다. 그녀가 처음에 본 것은 낡고 더러운 갈라비아를 입은 아랍인 한 명이 마치 누군가 들어오지 않나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출입구의 주렴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에리카는 그 아랍인의 왼쪽을 보고는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더러운 갈라비아를 입은 아랍인 한 명이 압둘을 판유리가 깨진 판매대 뒤로 끌고 가고 있었다. 압둘의 앞에는 갈색 줄무늬가 있는 깨끗한 흰 옷과 흰 터번을 쓴 세 번째의 아랍인이 있었고, 그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언월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압둘의 겁에 질린 얼굴 앞에 있는 그 칼의 날카로운 날이 백열전구 불빛에 번쩍였다. 에리카가 그 소름끼치는 장면을 보지 않으려고 커튼 뒤로 숨기도 전에 세 번째의 아랍인이 압둘의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고 인월도로 압둘의 목을 있는 힘껏 베어버렸다. 잘라진 숨통에서 '헉'하는 소리가 들리고,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에리카는 다리가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지만 두꺼운 커튼 때문에 그녀가 주저앉는 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겁에 질린 에리카는 방안에 숨을 만한 곳이 없는지 찾아 보았다. 장식이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에리카는 가까스로 일어서서 구석에 있는 장식장 뒤에 숨었다. 숨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어둠 속에서 눈을 손으로 가리는 아이처럼 자신의 얼굴밖에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압둘을 붙들고 있던 매부리코 남자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그 남자의 잔인하게 빛나던 검은 눈과 금이빨 하나가 드러난 콧수염 밑의 일그러진 입술을 잊지 않으려고 계속 생각했다. 가게에서는 마치 가구를 옮기는 듯한 소란스러운 소리가 잠시 들렸고, 곧 이어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시간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에리카는 누군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남자들이 뒷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에리카는 숨을 멈췄고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 때문에 경련을 일으켰다. 아랍어로 말하는 소리가 그녀의 오른쪽에서 들렸다. 그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이 움직이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발소리가 들리고, 뭔가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아랍어로 욕을 했다. 발소리는 다시 그녀에게서 멀어졌고, 곧 이어 가게 입구의 주렴이 부딪히는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에리카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지만, 마치 천길 낭떠러지 끝에서 중심을 잡고 있기라고 한 것처럼 계속해서 구석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5분이 지났는지, 아니면 15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50까지 세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구석에서 약간 빠져나왔다. 방은 비어 있었고, 그녀의 큰 핸드백과 찻잔은 카페트 위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웅장한 세티 1세의 상은 보이지 않았다. 에리카는 출입문에 달려 있는 주렴이 다시 부딪히는 소리에 또다시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다시 장식장 뒤로 달려가다가 아직 차가 남아 있는 찻잔을 발로 차고 말았다. 찻잔은 금속 받침에서 벗어나 카페트 위에 굴렀다. 찻물이 카페트에 스며들었고 찻잔은 탁자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에리카는 다시 장식장 뒤에 바싹 몸을 붙였다. 그녀는 누군가 무거운 커튼을 젖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햇빛이 방 안에 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햇빛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단 둘이 방 안에 있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에리카는 다시 숨을 죽였다. 갑자기 손 하나가 그녀의 왼팔을 억세게 쥐고는 그녀를 장식장 뒤에서 끌어내 방 한가운데로 밀었다. 보스턴, 아침 8시 리처드 허비는 알람시계가 울리는 바람에 꿈에서 깨어났고, 또 하루가 시작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시계를 보았을 때가 새벽 5시였다. 그는 어제 스물다섯 명의 예약 환자를 진료했기 때문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제기랄." 리처드가 주먹으로 알람시계를 내리치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주먹질 때문에 버튼이 눌러졌을 뿐만 아니라 시간 표시창의 플라스틱 뚜껑이 튕겨 나갔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뚜껑은 쉽게 다시 끼울 수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삶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 졌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고 그는 그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다. 리처드는 침대 가장자리로 다리를 돌려 일어서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는 알람시계의 뚜껑은 끼우지 않고 플러그를 뽑아버렸다. 전자시계의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소음이 멈췄다. 시계 옆에는 에리카가 스키장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리처드를 화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욕망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는 특유의 뾰류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 보고 있었다. 리처드는 화가 나서 액자를 뒤로 돌려 놓았다. 어떻게 에리카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3천년 이상이나 된 죽은 문명에 푹 빠질 수가 있을까? 리처드는 화가 났지만, 떠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에리카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리처드는 일어서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화장실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그는 서른 네 살이었고 무척 미남이었다. 그는 언제나, 심지어는 의과대학에 다닐 때에도 운동을 좋아했고 3년 전부터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테니스와 라켓볼을 규칙적으로 했다. 1미터 80센티 미터의 키를 가진 그의 몸은 호리호리하고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에리카가 그에게 말한 것처럼, 그의 엉덩이조차도 잘 발달되어 있었다. 리처드는 샤워와 면도를 하고 옷을 입은 다음, 오랫동안 계속해 온 것처럼 손쉬운 음식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의 일상적인 행동 중에서 어긋난 것은 양말뿐이었다. 깨끗한 양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빨래광주리에 있는 것을 다시 신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은 에리카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과 사이가 무척 좋은 토레도에 사는 에리카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리카에게서 아직 전화 없었나요?" "세상에. 리처드, 그 아이가 간 지 이틀밖에 안 됐어." "알아요. 저는 그저 전화가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에리카가 걱정이 돼요. 저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결혼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았는데." "자네는 결혼얘기를 1년 전에 꺼냈어야 했어." "그때는 얘기할 수가 없었어요. 병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이 없었거든요."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자네는 그 뒤에도 결혼얘기를 꺼내 지 않았어. 그래서 에리카가 골이 난 거야. 그리고 만약 자네가 에리카가 걱정이 된다면, 그 아이가 이집트로 가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어." "저는 못 가게 했어요." "리처드. 자네가 못하게 했다면 그 아이는 지금 보스턴에 있을 거야." "저는 정말 노력했어요. 저는 에리카에게 만약 이집트에 간다면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했어요. 우리의 관계가 앞으로 달라질 거라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그 아이가 뭐라고 하던가?"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집트에 가는 일이 자신에게는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에리카는 지금 한창 그럴 때야, 리처드. 그 아이는 곧 괜찮아 질거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네." "그 말씀이 옳을 거예요. 적어도 그러기를 바라고요. 혹시 에리카에게서 전화오면 제게 알려 주세요." 리처드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기분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그는 마치 에리카가 자신에게서 달아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충동적으로 TWA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카이로행 항공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는 그렇게 하면 에리카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고 출근시간은 이미 늦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우울해 하고 있는데 에리카만 혼자 즐기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카이로, 오후 3시 30분 에리카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랍인 살인자의 얼굴을 보게 되리라 생각했었지만, 그녀의 눈 앞에는 비싼 양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당황해서 서로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리카는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이본 줄리앙 드 마르그는 거의 25분이나 걸려서 자신이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확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심하게 떨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에리카는 한참 뒤에야 압둘이 가게 안에 있고, 그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거라고 이본에게 가까스로 말했다. 이본은 자신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설명하고, 에리카에게 가게 안을 살펴볼 테니 앉아 있으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는 금방 돌아왔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본이 말했다. "깨진 유리가 있고 바닥에 피가 묻어 있긴 하지만 아무도 없어요."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끝까지 한 말이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얘기해 주시오." "저는 경찰서에 가야 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떨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을 감았을 때 압둘의 목을 베던 칼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사람이 살해되는 것을 봤어요. 조금 전이었어요. 정말 끔찍 했어요. 나는 누가 다치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나는 경찰서로 가고 싶어요!" 에리카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하자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30대 후반인 그 남자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고, 그의 각진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의 강렬한 눈 때문인지 그에게는 위엄이 있어 보였다. 에리카는 남루한 옷을 입은 아랍인들을 보고 난 뒤여서인지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그 남자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저는 사람이 살해되는 것을 봤어요." 한참 뒤에 에리카가 말했다. "저는 커튼 뒤에 숨어서 엿보았어요. 한 사람은 문 옆에 있었고, 다른 사람은 노인을 붙들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에리카는 말을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그 사람은 노인의 목을 베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 세 남자가 뭘 입고 있었죠?" 이본이 에리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물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에리카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들이 뭘 입고 있었느냐구요? 나는 지금 소매치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람이 살해된 것을 봤다고 말하고 있어요. 살인!" "당신을 믿어요. 하지만 그들이 아랍인이었소, 아니면 유럽인이었소?" "갈라비아를 입은 아랍인이었어요. 두 사람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훨씬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어요. 맙소사. 나는 여기 휴가를 즐기러 왔는데......" 에리카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이 생각나요?" 이본이 조용히 물었다. 그는 안심시키는 것과 동시에 다시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에리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확실히 모르겠어요.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났어요. 칼을 들고 있던 남자는 아마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나는 문 옆에 서 있던 남자는 얼굴도 못 봤어요." 손을 들어올렸던 에리카는 자신의 손이 너무나 격렬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이 가게주인인 압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사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오랫동안 얘기를 했어요. 그는 재치가 있고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세상에......" 에리카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밖에 아무도 없다고 하셨던가요?" 에리카가 커튼 사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밖에서 진짜 살인이 일어났다구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이본이 말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에리카의 어깨에 얹혀 있었는데, 에리카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시체도 가져갔죠?" 에리카가 물었다. "시체도라니 무슨 뜻이죠?" "그들은 여기 있던 상을 가져갔어요." 에리카가 상이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정말 굉장한 상인데, 고대 이집트 파라오......" "세티 1세의 상이군." 이본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 정신나간 노인이 세티 1세의 상을 여기에 놔뒀군!" 이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 상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에리카가 물었다. "알아요. 사실, 나는 함디와 그 상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어서 여기 온 겁니다. 살인사건이 언제 일어났죠?" "잘 모르겠어요. 10분이나 20분 정도 된 것 같아요. 당신이 들어왔을 때, 나는 그 살인자가 다시 돌아온 줄 알았어요." "제기랄." 이본은 에리카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방 안을 서성이며 말했다. 그는 베이지색 재킷을 벗어 방석 위에 내려놓았다. "얼마 되지 않았군요." 이본이 걸음을 멈추고 에리카에게 돌아섰다. "당신은 그 상을 정말 봤나요?" "네, 봤어요.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저는 지금까지 그처럼 엄청난 골동품은 한 번도 못 봤어요. 투탄카멘의 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것은 19C 왕조의 장인들이 만들어 낸 신왕조 최고의 걸작품이었어요." "19C 왕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나는 이집트학자예요." 약간 평온을 되찾은 에리카가 대답했다. "이집트학자? 당신은 이집트학자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그럼, 이집트학자는 어떻게 생겨야 하나요?" 에리카가 따지듯 물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내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시다. 당신이 이집트학자이기 때문에 압둘이 당신에게 그 상을 보여준 건가요?" 이본이 물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건 바보짓이야. 아주 멍청한 짓이야. 나는 그가 왜 그런 위험을 무릅썼는지 이해를 못하겠군. 당신은 그 상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아시오?" 이본이 화가 난 것처럼 물었다.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가야 해요. 그 상은 이집트의 국가적인 보물이에요. 나는 이집트학자로서 골동품 암거래 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처럼 엄청난 유물도 거래되는지는 몰랐어요.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해요!" 에리카가 말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해?" 이본이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미국인의 독선이군. 가장 큰 골동품 암시장은 미국이오. 만약 골동품들을 사는 사람이 없다면 암시장도 없을 거요. 궁극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바로 암시장에서 골동품을 사는 사람이요." "미국인의 독선?" 에리카가 화를 내며 말했다. "프랑스인은 어떻구요? 결국에는 프랑스가 빼앗아간 셈인, 덴데라 사원에 있던 12궁상과 같은 값진 물건들로 루브르박물관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사람들은 수천마일을 여행해서 이집트에 오지만 결국에는 12궁상의 석고모형밖에 못 보죠." "12궁상은 루브르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오." 이본이 말했다. "이봐요, 이본. 그것도 변명이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과거에는 그 말이 타당성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에리카는 자신이 터무니없는 논쟁을 벌일 정도로 회복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또한 이본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그가 감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도록 자신이 그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좋아요." 이본이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원칙에는 동의한 셈이군요. 암시장은 당연히 없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소. 한 예를 든다면, 나는 우리가 경찰서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에리카는 깜짝 놀랐다. "당신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죠?" 이본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에리카는 자신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에 의기소침해져서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이 걱정하는 것을 이해해요.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설명해 주죠. 당신에게 선심쓰는 척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현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려고 그러는 겁니다. 여기는 뉴욕이나 파리 그리고 로마도 아닌 카이로예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탈리아만 해도 이집트보다는 훨씬 효과적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죠. 카이로는 비대한 관료정치 때문에 고통받고 있어요. 동양의 전통적인 음모와 뇌물이 이곳 에서는 예외가 아니라 법이죠." 이본이 말을 잠깐 멈췄다가 계속했다. "만약 당신이 경찰서에 가서 내게 한 얘기를 그대로 한다면 당신이 가장 의심 받을 겁니다. 그리고 결국 당신은 감옥에 가게 되거나 최소한 연금상태에라도 처하게 될 겁니다. 진술서만 쓰는 데도 여섯 달은 걸릴 겁니다. 당신의 삶은 결국 비참해지고 마는 거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나는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당신은 누구죠?" 에리카가 담배를 꺼내기 위해 핸드백을 집으며 물었다. 사실 그녀는 진짜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리처드는 그녀가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녀는 그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면세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거라도 손에 들고 있고 싶었다. 이본은 에리카가 핸드백을 뒤지는 것을 보고 금으로 된 담배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에리카는 머뭇거리다가 담배 하나를 꺼냈다. 이본 역시 금으로 된 라이터로 에리카에게 불을 붙여준 다음, 자신도 담배를 피웠다. 그들은 잠시동안 침묵 속에서 담배를 피웠다. 에리카는 연기를 마시지 않고 뱉기만 했다. "나 역시 골동품 암시장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본이 단정한 암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나는 고대유물과 유적지들이 파괴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서 뭔가 하려고 마음먹었죠. 세티 1세의 상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가장 큰......,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본이 적당한 말을 찾느라 말을 멈췄다. "발견." 에리카가 적절한 말을 대신 찾으려고 하며 말했다. 이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말을 계속 찾아보라는 듯 손을 빙빙 돌렸다. "파괴." 에리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 어떤 사건을 해결할 때 필요한 것인데......" "증거." "아, 그래요. 증거. 세티 1세의 상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가장 큰 증거예요. 하지만 나는 지금은 잘 모르겠소. 그 상은 영원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죠. 혹시 당신이 그 살인자를 알아낼 수 있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곳 카이로에서 그건 무척 어려워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경찰서에 간다면 살인자를 찾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해질 겁니다." "당신은 그 상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에리카가 물었다. "함디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나 외에도 수많은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을 겁니다." 이본이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이곳으로 최대한 빨리 왔어요. 사실 나는 카이로에 몇 시간 전에 도착 했습니다." 이본은 큰 나무장식장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장식장 안에는 작은 골동품 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여기 있으면 도움이 될텐데......" 이본이 작은 나무 미라상을 꺼내며 말했다. "이 물건들은 대부분 위조품이에요." 이본이 덧붙여 말했다. "책상 속에 편지가 있어요." 에리카가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본은 에리카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그쪽으로 걸어가 책상서랍을 열었다. "아주 좋아요." 이본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혹시 이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가게 안에 다른 편지들이 더 감춰져 있지 않는지 살펴봐야 겠군요." 이본은 커튼 쪽으로 가서 커튼을 활짝 열었다. 가게 안에 햇빛이 약간 비치고 있었다. "라울!" 이본이 크게 소리쳤다. 가게 문의 주렴이 부딪혔다. 이본은 커튼을 잡고 라울이 들어오는 것을 도왔다. 머리색이 검은 라울은 이본보다 젊었고 이제 20대 초반쯤되어 보였는데, 태평 스럽고 남자다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가 장 폴 벨몽도와 비슷 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본은 라울이 남프랑스 출신이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만, 액센트가 너무 강해서 그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에리카에게 소개했다. 라울은 에리카와 악수를 하면서 활짝 웃었다. 두 남자는 에리카에게 신경쓰지 않고 프랑스어로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증거를 더 찾기 위해서 가게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몇 분이면 끝날 겁니다." 이본이 길쭉한 장식장을 조심스럽게 뒤지며 말했다. 에리카는 방 한가운데 있는 큰 방석 위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이본과 라울이 가게를 뒤지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남자를 멍청히 쳐다 보기만 했다. 그들은 장식장을 모두 뒤지고 이제 벽에 걸려 있는 카페트를 모두 내리기 시작했다. 두 남자의 일하는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겉모습 이상의 차이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고 물건을 다뤘다. 라울은 무뚝뚝하고 직선적이었으며 종종 힘에 의존해서 일을 했다. 그에 비해서 이본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일을 했다. 라울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머리를 그의 강인해 보이는 어깨 사이로 떨구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본은 꼿꼿이 서서 일하고, 물건들을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았다. 이본은 소매를 걷고 있어서 그의 부드러운 팔뚝과 작은손이 드러났다. 에리카는 그 순간 이본이 왜 그토록 독특해 보이는지를 알았다. 그는 19세기의 귀족과 같은 조용하고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우아한 권위가 느껴졌다. 여전히 맥박이 심하게 뛰고 있는 에리카는 갑자기 앉아 있기가 싫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두꺼운 커튼 쪽으로 갔다. 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녀는 이본이 시체가 없어졌다고 말을 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가게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손을 내밀어 커튼을 열었다. 에리카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커튼을 열 때,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떤 사람이 휙 돌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가게 안에 있던 그는 에리카 만큼이나 놀랐는지 팔에 한 아름 안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뜨렸다. 라울이 즉시 뛰어나와 에리카 옆을 지나 가게로 나갔다. 이본이 그 뒤를 따라서 달려나왔다. 가게 안에 있던 도둑은 도기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면서 문쪽으로 달려갔지만 라울이 고양이처럼 날쌔게 도둑의 어깨 사이를 내리쳤다. 마루에 나뒹군 도둑은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이본은 도둑을 힐끗 쳐다보고 에리카에게 다가섰다. "괜찮아요?" 에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런 일들은 오늘 처음 당해봐요." 에리카가 여전히 커튼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소년을 좀 봐요." 이본이 말했다. "혹시 그 세 명의 아랍인 중의 한 명이 아닙니까?" 이본이 에리카의 어깨에 손을 둘렀지만 에리카는 정중하게 그를 밀어냈다. "괜찮아요." 에리카가 자신이 살인사건 때문에 너무나 긴장이 되어 있어서 소년을 보고 지나칠 정도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말했다. 에리카는 깊은 숨을 내쉬고 겁에 질려 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 세 명 중의 한 명은 아니에요." 에리카가 간단하게 말했다. 이본이 아랍어로 뭐라고 소리를 치자 소년은 허겁지겁 일어서서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렴이 춤을 추었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가난 때문에 독수리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들은 어디에 문제가 있으면 금방 알아차려요." 이본이 말했다. "저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도 경찰서에 가서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이본이 손을 뻗어 에리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경찰에게 알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당신을 결국 이 사건에 연루되어 야만 합니다. 그리고 판단은 당신이 내려야 하지만 내 말을 믿어요. 나는 이곳에 대해서 조금 알아요. 이집트의 감옥은 견디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에리카는 이본의 조용한 눈을 바라보다가 여전히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에리카는 이미 카이로의 가난과 극도의 혼란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신을 모셔다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에리카. 우리가 찾은 편지들을 가져오겠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두 남자는 뒷방으로 통하는 두꺼운 커튼 사이로 사라졌다. 에리카는 부서진 판매대 쪽으로 걸어가서 깨진 유리와 말라붙은 핏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토할 것 같은 느낌을 참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 그녀가 찾고 있던, 압둘이 아들이 만들었다면서 선물했던, 정교하게 위조한 갑충석을 발견 했다. 그녀가 갑충석을 핸드백 속에 넣는 순간 그녀의 발끝에 깨진 도기조각이 채였다. 진품도기 두 개도 모두 깨져 있었다. 6천년 동안 존재했던 도기들이 열두 살짜리 도둑 때문에 보잘 것 없는 가게바닥에서 허무하게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에리카는 그것을 보고 기운이 쭉 빠졌다. 그녀는 다시 피를 바라보다가 눈물을 참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다정했던 사람의 삶이 탐욕에 의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에리카는 언월도를 휘두르던 남자의 얼굴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지만 뚜렷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베두인(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아라비아인)처럼 날카로운 인상이었고, 얼굴은 윤이 나는 청동색이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그 남자의 얼굴이 분명하게 생각나지는 않았다. 에리카는 다시 눈을 뜨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압둘함디를 위해서라도 경찰서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살인범이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본이 말한 카이로의 경찰에 대한 충고가 맞는 것 같았다. 또한 만약 그녀가 살인자를 다시 보았을 때 그를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면 경찰서에 가는 위험을 무릅쓸 가치도 없는 셈이었다. 에리카는 몸을 숙여서 도기의 큰 파편 하나를 주웠다. 전문가의 눈으로 그 파편을 보던 에리카는 설화석고와 장석으로 만들어진 세티 1세 상의 눈이 생각 났다. 그녀는 그 상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처럼 중요한 물건이 암시장에서 거래된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에리카는 커튼 쪽으로 걸어가서 커튼을 젖혔다. 이본과 라울은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말고 있는 중이었다. 이본은 에리카를 쳐다보며 금방 끝날 거라고 손짓했다. 에리카는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본은 암시장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프랑스는 적어도 그들이 루브르박물관에 옮겨놓지 않은 이집트의 보물들이 약탈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했었다. 에리카는 혹시라도 자신이 경찰서에 가지 않는 것이 상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이본과 같이 호텔로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상당히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본은 라울이 양탄자를 다시 깔게 남겨두고 에리카와 함께 '압둘 골동품상'을 나섰다. 에리카는 혼자서 칸 엘 칼리리를 걷는 것보다 이본과 같이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본은 에리카가 지금 까지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듯 카이로와 시장에 대해서 끊임 없이 말했다. 그는 카이로의 역사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칼라 단추도 풀었다. "네페르티티의 구리머리는 어떻습니까?" 이본이 노점상의 가판대에서 관광기념품 하나를 집으며 물었다. "싫어요!" 에리카가 치한이 자신에게 추근거리던 생각에 겁이 나서 말했다. "기념품 하나는 있어야 해요." 이본이 말했다. 그는 아랍어로 값을 깎기 시작했다. 에리카가 그만두라고 했지만 이본은 네페르티티의 상을 사서 그녀에게 정중하게 내밀었다. "이집트를 마음 속에 간직하기 위한 기념품입니다. 단 하나의 문제는 이것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에리카는 웃으며 그 작은 상을 받았다. 그녀는 무덥고 먼지가 많고 가난에 찌든 카이로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약간 긴장이 풀어졌다. 그들은 좁은 골목을 지나 햇살이 강하게 내리쪼이는 알 아자르 광장에 도착 했다. 시끄럽게 들리던 자동차의 소음과 경적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본이 사각형의 광탑이 있고 양파모양의 작은 탑 다섯 개가 있는 이국적인 건물을 가리켰다. 그는 그 다음에 왼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자동차와 노천시장에 가려 있는 유명한 알 아자르 사원의 입구가 있었다. 그들은 사원 쪽으로 걸어 갔고, 사원이 가까워지자 두 개의 아치와 정교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장식된 사원입구가 보였다. 그것은 에리카가 이집트에 도착한 뒤에 처음으로 보는 중세 이슬람교 건축물이었다. 사실 에리카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고, 그녀는 사원의 모습에서 이국적인 느낌을 받았다. 이본은 그녀가 사원에 관심을 갖는 것을 알고는 다양한 탑들을 특히 둥근 지붕과 돌로 만든 장식물이 있는 탑들을 가리켰다. 그는 계속해서 이슬람교의 역사와 술탄(이슬람교의 군주)에 대해서 에리카에게 설명했다. 에리카는 이본이 혼자서 계속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지만 갈수록 그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워졌다. 사원 바로 앞에 있는 시장에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압둘과 그의 갑작스러운 끔찍한 죽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본이 화제를 바꿔서 질문했지만 에리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본은 질문을 다시 해야만 했다. "이게 내 차예요. 호텔까지 태워다 드릴까요." 그것은 이집트에서 만든 피아트자동차였고, 비교적 새 차이긴 했지만 얼룩과 긁힌 곳이 여기저기 있었다. "벤츠는 아니지만 성능은 괜찮아요." 에리카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이본이 자가용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택시를 타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본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낯선 나라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그녀의 마음과는 다른 표정이 나타났다. "내 입장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본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척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20분만 가게에 빨리 갔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나는 그저 당신을 돕고 싶을 뿐입니다. 카이로에는 당신이 이미 경험한 것처럼 위험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이 시간에는 택시를 잡지 못할 겁니다. 지금 시간에는 택시가 거의 돌아다니지 않아요. 내가 호텔까지 태워다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울은 어떻게 하죠?" 에리카가 차를 타지 않을 구실을 만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이본이 자동차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그는 에리카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의 차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은 터번을 쓴 아랍인에게 다가가 아랍어로 몇 마디 한 다음 아랍인이 벌린 손바닥에 동전 몇 닢을 놓았다. 그는 다시 자동차로 다가와 운전석의 문을 열고 에리카에게 미소를 지으며 차에 탔다. 그의 푸른 눈이 오후의 햇살에 부드럽게 빛났다. "라울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만약 당신이 혼자서 카이로를 돌아다닐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묵고 있는 호텔까지 내 차로 갈 수 있는 용기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용기가 없다면 당신이 묵고 있는 호텔이 어딘지 말해주세요. 내가 로비로 찾아가겠습니다. 나는 아직 세티 1세의 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아마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이본이 안전벨트를 맸다. 에리카는 광장을 힐끗 둘러보고 한숨을 쉬며 차에 탔다. "힐튼호텔이에요." 에리카가 말했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지 않았다. 이본은 운전을 하기전에 먼저 염소가죽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운전장갑을 꼈다. 그가 재빨리 기어를 넣었고, 그의 작은 자동차는 날카로운 바퀴소리를 내며 자동차의 물결 속으로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동차를 위험하게 몰았기 때문에 이본은 브레이크를 자주 밟았고, 그 때문에 에리카는 충돌에 대비해서 바짝 긴장했다. 자동차는 계속해서 출발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에리카의 몸도 계속해서 앞뒤로 흔들렸다. 그들의 자동차는 에리카가 옆의 자동차와 거의 부딪힐 뻔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험하게 달렸고, 때로는 다른 자동차나 트럭, 당나귀가 끄는 마차 그리고 심지어는 건물과 거의 몇 밀리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달렸다. 짐승들과 사람들이 그들의 자동차 앞으로 불쑥불쑥 나타났기 때문에, 이본은 두 손으로 핸들을 단단히 붙들고 마치 자동차 경주라도 하는 것처럼 운전했다. 이본은 다른 사람들이 난폭하게 운전하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단호하고 공격적으로 운전했다. 그는 다른 차나 수레들이 앞에 끼어들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틈이 생길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혼잡한 중심가를 벗어나 고대 도시의 성벽과 살라딘의 웅장한 성을 지나 남동쪽으로 향했다. 성 안에 있는 모하메드 알리 사원의 둥근 지붕과 광탑들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 있었다. 그들은 로다 섬의 북쪽 끝이 보이는 나일강에 도착했다. 이본은 다시 오른쪽으로 차를 돌려서, 도도히 흐르는 나일강의 동쪽 둑 위로 차를 몰았다. 오후의 햇빛에 수만 개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시원하고 푸른 강물은 무더위와 카이로의 중심가의 더러움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에리카는 오전에 나일강을 보았을 때 나일강의 역사와 그 강물이 먼 적도의 아프리카에서 흘러온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느꼈었다. 그녀는 오늘에서야 카이로와 이집트의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이 나일강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숨이 막힐 듯한 먼지와 무더위는 마치 전염병처럼 카이로를 억누르고 있는 사막의 힘과 가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본은 힐튼호텔의 정문으로 곧장 차를 몰았다. 그는 열쇠를 꽂아놓은 채 재빨리 차에서 내려 인도 쪽으로 가서, 터번을 두른 도어맨보다 먼저 에리카가 차에서 내는 것을 도왔다. 조금 전에 그녀의 일생을 통해서 가장 끔찍한 장면을 보았던 에리카는 이본의 뜻밖의 친절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그처럼 작은 부분에까지 신경을 쓰는 남자다운 남자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본의 행동은 유럽인들의 독특한 행동이었고 에리카는 비록 지치기는 했지만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당신이 당신 방으로 가서 샤워를 한 다음에 나와 얘기하고 싶다면 기다리겠소." 이본이 사람들로 붐비는 로비에 들어설 때 말했다. 오후의 국제선 비행기가 도착해서인지 사람이 많았다. "저는 먼저 뭘 좀 마시고 싶어요." 에리카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에어컨이 켜진 칵테일라운지는 마치 유리처럼 맑은 수영장에 뛰어든 것처럼 시원했다. 그들은 구석에 앉아 마실 것을 주문했다. 에리카는 주문한 것이 오자, 자신이 시킨 보드카와 토닉 칵테일의 차가운 잔을 잠시동안 뺨에 대고 시원함을 즐겼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에리카는 페르노를 마시는 이본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그가 환경에 무척 빨리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칸엘 칼리리에서도 마치 힐튼호텔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가 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자신감과 자제력을 갖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의 옷을 좀더 자세히 보고는, 그의 옷이 무척 공을 들여서 맞춘 것임을 깨달았다. 에리카는 이본의 우아한 옷과 리처드가 즐겨 입는 브룩스 브라더스를 비교하고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리처드가 옷에 관심이 없고 그러한 비교가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한 모금 더 들이키고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술을 삼켰다. "정말, 너무나 끔찍한 경험이었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괴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이본은 침묵을 지켰다. 에리카가 몇 분 뒤에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세티 1세 상은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찾아볼 생각입니다." 이본이 말했다. "나는 그 상이 이집트 밖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찾을 겁니다. 압둘 함디가 혹시 그 상이 어디로 가는지 당신에게 말했나요? 아무 말이라도?" "가게에 몇 시간 있다가 여행을 시작한다는 말만 했어요.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한 1년 전쯤에 그와 비슷한 상 하나가 나타났었는데......" "비슷한 상이라니 무슨 말이죠?" 에리카가 흥분하며 물었다. "그것은 세티 1세의 황금상이었습니다." 이본이 말했다. "그걸 실제로 봤나요, 이본?" "아니오. 만약 내가 봤다면 그게 지금 휴스턴에 가 있지는 않을 거요. 그것은 휴스턴의 한 석유재벌이 스위스은행을 통해서 샀어요. 나는 그것을 추적해 보려고 했지만, 스위스은행에서는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나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휴스턴에 있는 그 상의 밑 부분에 혹시 상형문자가 있었나요?" 에리카가 물었다. 이본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전혀 몰라요. 왜 그걸 묻죠?" "내가 본 세티 1세의 상 밑에 상형문자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에리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상에는 두 파라오의 이름이 씌어 있었어요. 세티 1세와 투탄카멘의 이름이었어요!" 이본은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에리카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코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상형문자는 제 전공이에요." 에리카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세티 1세와 투탄카멘의 이름이 똑같은 상에 씌어 있을 수는 없어요." 이본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상하긴 하지만 그건 틀림없었어요. 불행하게도 나머지를 모두 번역할 시간이 없었어요. 저는 처음에는 그 상이 위조품인 줄 알았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것은 위조품이 아니오. 함디는 위조품 때문에 살해되지는 않았을 거요. 다른 이름을 투탄카멘의 이름으로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요?" "아니에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볼펜을 꺼내 냅킨에 투탄카멘의 왕명을 그려서 이본에게 주었다. "그것이 내가 본 세티 1세 상의 밑 부분에 씌어 있었어요." 이본은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에리카가 그린 것을 보았다. 에리카는 그를 쳐다보았다. "압둘이 왜 살해된 거죠?" 에리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건 너무나 터무니 없는 짓이에요. 만약 그 도둑들이 상을 원했다면 그냥 가져갈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함디는 가게에 혼자 있었어요." "나도 그들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본이 투탄카멘의 이름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이것은 '파라오의 저주'와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죠." 이본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1년 전에 메카로 가는 이집트인 순례자에게서 골동품을 하나 구한 베이루트의 중간상인을 수소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의 거처를 알아내자마자 그는 살해됐어요. 나는 혹시 그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은 그가 함디와 같은 이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에리카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중간상인은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의 총격전 때문에 죽었죠. 그렇긴 하지만, 그가 총에 맞았을때 나는 그를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비극이에요." 에리카가 다시 압둘을 생각하며 슬픈 얼굴로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함디는 순진한 방관자가 아니었고 그가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 상은 엄청난 가격이 나가는 것이고 가난에 시달리는 이 나라에서는 돈이면 산도 움직일 수 있죠. 그래서 당신이 경찰서에 가는 것이 잘못하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일 거고, 그 상처럼 엄청난 돈이 관계된 문제라면 경찰도 정직하게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본?" 이본은 담배연기를 빨아들이고, 볼품없이 장식된 라운지를 둘러보았다. "운이 좋으면 함디의 편지 속에서 정보를 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추적을 시작할 수는 있을 겁니다. 나는 누가 함디를 죽였는지 꼭 알아낼 겁니다." 이본은 에리카를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범인을 잡게 되면 그들 확인하는 데 당신의 도움이 상당히 필요할 겁니다. 그렇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할 수 있어요. 살인범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당신을 돕고 싶어요." 에리카는 자신이 한 말을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너무나 케케묵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본은 손을 내밀어 에리카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정말 기쁘군요." 이본이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소. 나는 메리디언호텔 800호에 묵고 있습니다. 그 호텔은 로다 섬에 있어요." 이본이 말을 멈췄지만, 그는 여전히 에리카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나와 같이 식사를 하신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당신은 오늘 카이로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셨으니 내가 카이로의 다른 면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에리카는 뜻밖의 제안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본은 정말 매력적인 남자였고 어떤 여자라도 그와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이 싫지 않을 것이다. 그의 관심은 세티 1세의 상에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이본. 하지만 저는 지금 너무 지쳤어요. 저는 아직도 비행기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가시지 않았고 어젯밤엔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다음에 하죠." "그럼, 저녁을 일찍 먹읍시다. 당신을 여기에 10시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오늘처럼 끔찍한 경험을 하고, 당신 혼자 호텔 방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군요." 에리카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였다. 10시면 너무 늦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녀는 어쨌든 저녁을 먹어야 했다. "10시까지 저를 데려다 주시는 것이 귀찮지 않으시다면 당신과 같이 식사를 하고 싶어요." 이본은 에리카의 손목을 잡은 손에 잠깐동안 힘을 준 다음, 놓았다. "좋습니다." 이본이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보스턴, 오전 11시 리처드 허비는 헨리에타 올슨의 살찐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배는 쓸개가 있는 부분만 드러나 있었다. 헨리에타의 나머지 부분은 그녀의 체면을 위해서 모두 가려져 있었다. "자, 올슨 부인. 이제 어디가 아픈지 가리켜 보세요." 리처드가 말했다. 손 하나가 시트 속에서 빠져나왔다. 헨리에타는 검지손가락으로 흉곽 바로 밑의 배를 눌렀다. "그리고 여기 뒤도 아파요, 선생님." 헨리에타가 오른쪽을 몸을 돌리고 손가락으로 등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여기예요." 헨리에타가 신장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리처드는 눈만 돌려서 간호사인 낸시 자콥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리처드가 이런 종류의 환자는 경험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리처드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는 점심시간 전에 세 명의 환자를 더 진찰해야 했다. 비록 그가 내과병원을 개업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병원은 놀랄 정도로 잘 되었고 가끔씩 힘든 날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일이 좋았다. 흡연과 비만으로 인한 병을 가진 환자가 90퍼센트 이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통 자신이 전문의 실습기간에 배운 지식을 대부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에리카였다. 그는 에리카 때문에 헨리에타의 쓸개와 같은 문제에는 거의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빠른 노크소리가 들리고 접수원인 샐리 마린스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생님, 전화 왔습니다." 리처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전화를 한 사람이 에리카의 어머니인 재니스 바론임을 알아차리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해 줄 것을 부탁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올슨 부인. 꼭 받아야 하는 전화라서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리처드가 말했다. 그는 낸시에게도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리처드는 사무실 문을 닫고 수화기를 든 다음 연결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재니스." "에리카에게서 아직 편지는 없었어, 리처드." "전화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그녀가 아직 편지를 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어요. 제가 전화했던 것은 정말 미칠 것 같아서였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나는 자네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네. 리처드, 자네는 에리카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녀가 왜 이집트에 갔다고 생각하세요?" 리처드가 물었다. "나도 정말 모르겠네. 나는 에리카가 이집트학을 전공하겠다고 말한 뒤로 그 놈의 이집트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해를 못하겠어. 그 아이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그 아이에게 알아듣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리처드가 잠시 생각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저는 그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상관하지 않지만, 취미 때문에 일생 동안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리처드." 다시 침묵이 흘렀고 리처드는 멍한 상태에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제가 이집트에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참 뒤에 리처드가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재니스?" 리처드는 전화가 끊어진 것 같아서 말했다. "이집트! 리처드, 자네는 그런 일 때문에 병원을 떠날 수는 없어." "어렵기는 하지만,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죠. 며칠은 시간을 낼 수 있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긴 해. 하지만 난 모르겠네. 에리카는 언제나 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그 아이가 왜 이집트에 가는지 물어 봤었나?" "우리는 그 문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어요. 그녀는 내가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자네가 같이 갔다면 그 아이는 자네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았을 거야." 재니스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제가 그녀를 걱정한다는 것은 아시잖아요! 맙소사, 에리카는 우리가 살게 될 집에 전세를 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에리카는 아마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거야, 리처드. 나는 자네가 너무 일을 질질 끌어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네. 어쩌면 자네가 이집트에 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리처드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오후에 진찰해야 할 환자들의 명단을 바라보았다.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카이로, 밤 9시 10분 에리카는 두 명의 정중한 웨이터가 접시를 치울 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에리카는 이본이 웨이터들에게 너무 딱딱하게 굴어서 당황했지만, 이본은 웨이터란 말이 적을수록 좋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본이 근엄하게 주문한 값비싼 이집트 음식으로 촛불 속에서 식사를 했다. 무사탐 언덕 꼭대기에 있는 그 레스토랑은 '몽테 벨로 카지노'라는 적절하지 않은 이름이긴 했지만 낭만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에리카는 그 레스토랑의 베란다에 앉아서 아라비아반도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중국까지 이어지는 거친 아라비아산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강이 만들어 놓은 삼각주들이 보였고,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의 한가운데에서 뱀처럼 기어오는 나일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경치는 도시를 뒤덮고 있는 안개 속에서 머리를 쳐들고 있는 카이로의 둥근 지붕들과 광탑들이 있는 서쪽이었다. 별들은 땅 위의 도시에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어슴프레한 하늘에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에리카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도시에서 풍기는 이국적이고 신비한 분위기 때문에 에리카는 낮에 있었던 추잡한 사건을 잊을 수 있었다. "카이로는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이본이 말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기 때문에 잠시동안 그의 윤곽만 보이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빨자 담뱃불이 빨갛게 보였다. "카이로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역사를 갖고 있어요. 부패와 야만성 그리고 계속된 전쟁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너무나 기괴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변화가 심했었나요?" 에리카가 압둘 함디를 생각하다가 물었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는 변화가 많지 않았죠. 부패는 삶의 한 방식이죠. 가난 역시 그와 마찬가집니다." "뇌물도 그런가요?" 에리카가 물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본이 담뱃재를 재털이에 조심스럽게 털며 말했다. 에리카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당신은 저에게 경찰서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저는 함디씨의 살인범을 확인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고, 아시아인들의 음모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입니다. 내 말을 믿어요." "하지만 계속해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살인을 목격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말이에요. 당신은 내가 경찰서에 가지 않은 것이 당신이 십자군처럼 암시장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물론입니다. 만약 경찰이 세티 1세의 상을 나보다 먼저 찾아낸다면 내가 암시장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겁니다." 이본이 안심시키려는 듯 에리카의 손을 꼭 쥐었다. "세티 1세의 상을 찾는 동안 압둘 함디의 살인범도 함께 찾아 주시겠어요?" 에리카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나를 오해하지는 마세요. 내 목적은 상을 찾고 암시장을 없애는 겁니다. 나는 내가 이곳 이집트인들의 도덕성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바보같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살인범을 찾아낸다면, 곧 바로 경찰에 알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죠?" "그렇겠죠." 에리카가 말했다. 언덕 위에 있는 성에 불이 들어와 환하게 보였다. 에리카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 성을 보다가 십자군이 생각났다. "당신이 오후에 한 말 때문에 저는 깜짝 놀랐어요." 에리카가 이본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파라오의 저주'에 대해서 말했어요. 아마 당신은 틀림없이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이본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웨이터가 향긋한 냄새가 나는 커피를 따르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파라오의 저주! 나는 그런 생각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아요. 고대 이집트인들은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죠. 그들의 신비학은 무척 발달해 있었고, 그들은 모든 종류의 독약을 알고 있었어요. 그 이후로......" 이본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파라오의 무덤에서 나온 보물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의문사했어요. 파라오의 저주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많은 의심을 하죠.." 에리카가 말했다. "언론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재빨리 과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카나본 경은 물론이고 투탄카멘의 무덤을 발굴했던 사람 중에서 아주 이상하게 죽은 사람이 몇 명 있어요. 그것은 파라오의 저주와 어떤 관계가 있어요. 하지만 나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 내가 저주라는 말을 쓴 이유는 당신이 표현한 것처럼 '증거'를 갖고 있는 두 명의 상인을 내가 만나기 직전에 그들이 모두 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들은 커피를 다 마신 다음에 무너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언덕 위의 사원까지 산책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원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본은 한때는 위용을 자랑했을 지붕이 없는 그 사원의 벽 근처에 있는 바위에 올라설 때 에리카의 손을 잡아주었다. 한밤중의 하늘에는 은하수가 흩어져 있었다. 에리카는 과거의 역사 때문에 이집트에 매력을 느꼈었는데, 지금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중세의 사원에서도 이집트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본은 차로 돌아갈 때 에리카의 어깨에 팔을 둘렀지만, 그는 계속해서 사원에 대해서 담담하게 설명했고 약속한 대로 에리카를 힐튼호텔 앞에 열 시가 거의 다 되어서 데려다 주었다. 에리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여전히 약간 얼이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본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에리카는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해서 자물쇠에 열쇠를 넣어 돌리고 문을 열었다. 그녀는 불을 켠 다음 좁은 현관에 있는 선박에 핸드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의 안전고리를 걸었다. 에어컨이 최대로 켜져 있었다. 그녀는 인공적으로 시원해진 방에서 자고 싶지 않아서 에어컨을 끄기 위해 스위치가 있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에리카는 중간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방의 구석에 있는 안락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도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순수한 베두인의 모습이었지만 회색 양복과 흰 셔츠를 입고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마치 청동으로 만든 끔찍한 조각품 같았다. 에리카는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에 만약 또 다시 누군가 자신을 추행하려고 할 경우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공격하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녀는 지금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온 몸의 힘이 쭉 빠졌다. "제 이름은 아흐메드 카잔입니다." 마침내 조용히 앉아 있던 그 남자가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집트 아랍공화국 문화재관리국의 국장입니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검은 가죽지갑을 꺼냈다. 그가 지갑에서 뭔가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제 신분증입니다." 에리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이본과는 달리 경찰서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자신이 경찰서로 가야만 했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깊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본의 말대로 행동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최면술을 거는 듯한 아흐메드의 시선에 여전히 얼어붙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에리카 바론양." 아흐메드가 일어서서 에리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에리카는 그의 눈길처럼 강렬한 눈빛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객관적인 면에서는 오마 샤리프처럼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에리카는 자신을 빨아들이는 듯한 그의 눈길이 너무나 무서웠다. 에리카는 두서없이 중얼거리다가, 결국에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겨드랑이가 축축히 젖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곳에서도 법을 어겨본 적이 없었던 에리카는 극도로 긴장했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스웨터를 입고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아흐메드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의 강렬한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에리카는 아흐메드 옆에 서서 로비를 걷다가, 문득 습기 차고 끔찍한 감방이 떠올랐다. 갑자기 보스턴이 달처럼 멀리 느껴졌다. 아흐메드가 힐튼호텔 앞에서 손짓을 하자 검은 세단이 그들 앞으로 다가와 멈췄다. 아흐메드는 뒷문을 열고 에리카에게 타라는 손짓을 했다. 에리카는 협조적으로 행동하면 압둘이 살해된 것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재빨리 차에 탔다. 아흐메드는 차가 달리는 동안에도 위압적인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가끔씩 에리카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에리카의 마음 속에는 온갖 걱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미국대사관과 영사관을 생각했다. 혹시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전화를 할 기회가 있을까? 만약 전화를 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하지? 그녀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거대한 강이 마치 정지되어 있는 검은색 잉크처럼 보이는 반면, 도시는 다른 자동차들과 행인들의 움직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죠?" 에리카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도 이상하게 들렸다. 아흐메드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에리카가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사무실로 가는 겁니다. 멀지 않소." 그의 말처럼 검은색 새단은 잠시 후에 기둥이 늘어서 있는 정부건물 앞의 도로가에 섰다. 그들이 계단을 올라가자 경비원이 육중한 출입문을 열었다. 에리카는 아흐메드를 따라서 힐튼호텔에서 온 시간만큼이나 오랫동안 걸었다. 그들의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많은 텅빈 복도를 지나, 수많은 부서들이 있는 건물의 미궁 속으로 더욱 더 깊이 들어갔다. 그들은 마침내 아흐메드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흐메드는 문을 열고 금속책상과 낡은 타자기가 있는 작은 방으로 에리카를 안내했다. 그는 그 옆의 넓은 방으로 들어가서 에리카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 방에는 뾰쪽하게 깎은 연필들과 새 것처럼 보이는 장부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낡은 마호가니책상이 있었다. 아흐메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재킷을 벗었다. 에리카는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곧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으로 끌려가서 지문을 찍는 것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또한 호텔 예약부직원들이 도장을 찍어야 하고 스물네 시간 동안은 돌려줄 수 없다면서 가져가서 지금 여권도 없기 때문에 더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텅 빈 방이 더욱 무서웠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에리카는 리처드와 어머니가 떠올랐고, 그들에게 국제전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초조하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사무실은 엄숙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벽에는 다양한 유적지의 사진액자들이 걸려 있었고, 투탄카멘의 장례가면을 이용한 현대식 포스터도 한 장 붙어 있었다. 그리고 큰 지도 두 장이 오른쪽 벽을 뒤덮고 있었다. 하나는 이집트 지도였는데, 여러 지역에 빨간색 핀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테베의 네크로폴리스 지도였는데, 무덤이 있는 곳에 십자표시가 되어 있었다. 에리카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아흐메드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바쁘게 움직이며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흐메드가 돌아서며 물었다. "아니, 괜찮아요." 에리카가 그의 기묘한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미리 넘겨 짚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아흐메드가 묻기 전에 미리 다 털어놓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흐메드는 컵에 차를 따라서 책상 위에 놓았다. 그는 설탕을 넣고 천천히 휘저으며 다시 한 번 강렬한 시선으로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에리카는 그의 강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눈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이 사무실에 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요." 아흐메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리카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아흐메드는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이집트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가 고함을 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에리카는 그가 화를 내는 것에 깜짝 놀라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저는 이집트학자예요." "그리고 당신은 유태인이죠, 그렇죠?" 아흐메드가 따지듯 물었다. 에리카는 아흐메드가 자신이 판단력을 잃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 정도로 영리하긴 했지만 그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다. "그래요." 에리카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왜 이집트에 왔는지 알고 싶소." 아흐메드가 반복해서 물었다. "나는 여기에....." 에리카가 대들듯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집트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왔고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 알소 싶소." "나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일하지 않고,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여기 아무런 목적도 없이 왔다는 말을 내가 믿을거라고 생각하시오?" 아흐메드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자, 이봐요, 에리카 바론." 아흐메드가 미소를 지었고, 그의 가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그의 이빨이 더욱 희게 보였다. "물론 목적은 있어요." 에리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에리카는 리처드와의 복잡한 문제가 생각나서 말끝을 흐렸다. "당신 말은 신빙성이 없소, 전혀." 아흐메드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이집트학자예요. 저는 고대이집트에 관해서 8년 동안 공부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박물관의 이집트학 부서에 근무하고 있어요. 저는 언제나 이집트에 오고 싶었어요. 1년 전에 이곳에 올 생각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년 동안 기다렸다가 오게 된 거예요. 저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주목적은 휴가예요." 에리카가 말했다. "어떤 일이오?" "저는 유적지에 가서 북부이집트 신왕조의 상형문자를 해석할 생각이에요." "골동품을 사러 이곳에 온 게 아니오?" "천만에요." 에리카가 말했다. "이본 줄리앙 드 마르그와는 언제부터 알았소?" 아흐메드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에리카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는 그를 오늘 처음 만났어요." 에리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를 어떻게 만났소?" 에리카는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고, 그녀의 이마에는 다시 식은 땀이 돋았다. 아흐메드는 살인사건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걸까? 에리카는 조금 전에는 혹시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만났어요." 에리카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당신은 마르그 씨가 이집트의 가치 있는 국가적인 보물들을 사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에리카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안심한 것을 아흐메드가 알아 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아흐메드는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몰라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당신은 골동품 암시장을 와해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겠소?" 아흐메드가 일어서서 이집트지도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은 이해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대화가 흘러갈 여러 방향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흐메드가 왜 자신을 그의 사무실에 데려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이 아주 나빠요. 예를 든다면, 무척 파괴적인 도둑들이 1974년에 덴데라사원에서 상형문자 석판 열 장을 훔쳐갔어요. 그것은 국가적 비극이고 국가적인 치욕이었습니다." 아흐메드가 지도의 빨간 핀이 꽂혀 있는 덴데라사원 지역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이집트인의 소행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근절할 수가 없어요. 이집트의 가난 때문이죠." 아흐메드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얼굴에 긴장과 책임감이 뒤섞여 나타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른 핀이 꽂혀 있는 곳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핀이 꽂혀 있는 곳은 모두 중요한 골동품이 도난당한 곳입니다. 만약 내게 직원이 어느 정도 있고, 경비원들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줄 수 있는 돈이 있다면 도난을 어떻게든 막아볼 수 있을 겁니다." 아흐메드는 에리카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리카를 향해서 돌아선 그는 그녀가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것에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르그 씨는 이집트에서 뭘 하고 있죠?" 아흐메드가 다시 화를 내며 물었다. "저는 몰라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세티 1세의 상과 압둘 함디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만약 자신이 세티 1세의 상에 대해서 말한다면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에 얼마나 머물 거죠?" "저는 전혀 몰라요. 저는 그를 오늘 처음 만났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소." "그래요." 에리카가 힘없이 대답했다. 아흐메드가 다시 에리카에게 다가섰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에리카의 녹색 눈을 위협적으로 노려보았다. 에리카는 그의 강렬한 눈빛을 느끼고, 자신도 같이 노려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는 아흐메드가 자신이 아니라 이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겁이 났다. 그 밖에도, 그녀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녀는 이본이 세티 1세의 상 때문에 이집트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마르그 씨에 대해서 뭘 알았죠?" "그가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에리카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아흐메드가 손으로 책상을 치자 날카롭게 깎은 연필이 튀어 올랐고 에리카는 움찔했다. "나는 그의 성격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오. 나는 이본 드 마르그가 왜 이집트에 왔는지를 알고 싶소." 아흐메드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죠? 저는 단지 그 남자와 저녁식사를 같이 했을 뿐이에요." 에리카가 대들 듯 말했다. "당신은 처음 만난 남자와 저녁식사를 자주 하나요?" 아흐메드가 물었다. 에리카는 아흐메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그 질문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집트에 온 이후 거의 모든 일이 놀라웠다. 그의 목소리에 질책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에리카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는 낯선 사람과는 저녁식사를 하지 않아요." 에리카가 또 다시 대들 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본을 만났을 때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는 매력적이었어요." 이흐메드는 벗어놓은 재킷을 집어들고 천천히 입었다. 그는 잔에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에리카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대화를 비밀로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제 당신의 호텔로 데려다 주겠소." 에리카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에리카는 바닥에 떨어진 연필을 줍는 아흐메드를 보면서 갑자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보기에 아흐메드는 골동품 암시장을 와해시키려는 진지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보를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아흐메드는 그녀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본이 그녀에게 경고했던 것처럼 아흐메드는 그녀가 알고 있는 미국의 관리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행동했다. 그녀는 아흐메드가 호텔로 데려다 주겠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든지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로, 밤 11시 15분 이본 줄리앙 드 마르그는 붉은색 실크로 된 크리스찬 디오르 잠옷의 허리띠를 그의 은빛 가슴털이 거의 다 드러날 정도로 느슨하게 맸다. 800호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어서 방안으로 사막지대의 시원한 밤바람이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이본은 넓은 발코니에 놓인 탁자에 팔을 괴고 앉아서 나일강 북쪽의 삼각주를 바라보았다. 길쭉한 기둥 모양의 전망대가 있는 게지라섬이 멀리 희미하게 보였다. 나일강의 오른쪽에는 힐튼호텔이 있었다. 이본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에리카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본이 지금까지 알았던 다른 여자들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에리카의 이집트학에 대한 열정에 충격과 매력을 느꼈고 그녀의 직업을 알고는 당황했다. 이본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그녀와 같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어쩌면 아주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그가 최근에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는 강한 매력을 풍기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탁자 한가운데에는 이본과 라울이 압둘 함디의 가게에서 찾은 편지뭉치로 가득 찬 서류가방이 놓여 있었다. 라울은 이본이 이미 자세히 읽어본 편지들이 놓여 있는 안락의자에 누워 있었다. "이거야!" 이본이 갑자기 읽고 있던 편지를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스테파노스 마큘리스. 함디는 마큘리스와 편지를 주고 받았어! 그는 아테네의 여행업자야." "뭔가 알아낼 수 있겠군요." 라울이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협박한 내용은 없습니까?" 이본은 편지를 계속해서 읽고 몇 분 뒤에 고개를 들었다. "협박한 내용은 없어. 그는 압둘이 말한 문제에 관심이 있고, 이곳으로 와서 타협을 하고 싶다는 말만 했어.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군." "틀림없이 세티 1세의 상에 대해서 한 말일 겁니다." 라울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그렇지 않아. 나는 마큘리스를 알아. 그는 세티 1세의 상에 대해서라면 좀더 직접적으로 말했을 거야. 그 이상의 것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함디가 틀림없이 그를 협박했을 거야." "만약 그랬다면 함디는 바보가 아니군요." "그는 진짜 바보야. 그는 죽었으니까." 이본이 말했다. "마큘리스는 우리가 연락을 취했던 베이루트의 중간상인과도 편지를 했었습니다." 라울이 말했다. 이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큘리스가 베이루트의 중간상인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마큘리스부터 조사하는 게 좋겠군. 그는 이집트의 골동품을 취급하고 있어. 아테네로 전화를 해보게." 라울이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호텔 교환수에게 전화를 걸어 국제전화를 부탁했다. 그는 잠시 후에 전화를 끊고 이본에게 말했다. "오늘 밤에는 통화량이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전화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기적같은 일이죠." "좋아." 이본이 서류가방을 닫으며 말했다. "함디는 전 세계의 중요한 박물관에는 모두 연락을 취했어. 어쨌든, 마큘리스는 가능성이 희박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에리카 바론뿐이야." "제 생각에는 그녀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라울이 말했다. "내게 생각이 있어." 이본이 담배를 피워물며 말을 계속했다. "에리카는 함디를 죽인 세 명 중 두 명의 얼굴을 봤어." "그렇긴 하지만 그녀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살인범들이 그녀를 기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녀가 기억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울이 말했다. "에리카 바론이 살인범을 보았고, 살인범들의 얼굴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이집트의 암흑가에 알려 줄 수 있겠지?" "아!" 라울이 갑자기 이해한 듯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에리카 바론을 미끼로 이용해서 살인범들이 나타나게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거야. 경찰이 함디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어. 그리고 문화재관리국도 세티 1세의 상에 대해서 듣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거야. 따라서 아흐메드 카잔도 이 일에 관여하지 못할 거야. 우리에게 골치 아픈 친구는 아흐메드뿐이야."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라울이 진지하게 말했다. "뭔데?" 이본이 담배를 꺼내며 물었다. "아주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계획대로 한다면 에리카 바론이 살해될 수 있습니다. 함디의 살인범들은 그녀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 "누가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까?" 이본이 에리카의 가는 허리와 그녀의 체온과 그녀의 매력적인 몸매를 생각하며 물었다. "우리가 적당한 사람을 고용한다면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칼리파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골칫거리야." "그렇긴 하지만, 최고죠. 여자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살인범들을 잡고 싶으시다면 칼리파를 쓰셔야 합니다. 진짜 문제는 그가 비싸다는 겁니다. 아주 비싸죠." "그건 상관 없어. 나는 세티 1세의 상이 필요하고 갖고 싶어. 내 생각대로 하면 틀림없이 내게 필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사실, 나는 지금은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갖고 있는 함디의 편지들을 모두 읽어 봤지만 불행하게도 암시장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어." "정말로 암시장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말 하면 잔소리야. 나는 함디가 보낸 편지를 보고, 암시장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 칼리파에게 연락하게. 그가 내일 아침부터 에리카를 미행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그녀와 가끔 같이 보낼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녀가 모든 얘기를 다한 것 같지 않아." 라울이 의심하는 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이본을 바라보았다. "좋아, 솔직히 말하지. 자네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녀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면이 있어." 이본이 말했다. 아테네, 밤 11시 45분 스테파노스 마큘리스는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전등을 껐다. 발코니의 미닫이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달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테네는 정말 낭만적인 도시예요." 데보라 그라함이 스테파노스의 품에서 빠져나가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침대 근처의 탁자에 병이 빈 채 놓여 있는 데메스티카 포도주때문만이 아니라 분위기에도 취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요염하게 돌려서 어깨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는 풀어져 있었다. 지중해의 햇살에 그을린 피부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그는 큰 손을 뻗어 데보라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테네에 살고 있는 거요. 아테네는 연인들의 도시지." 스테파노스는 언젠가 다른 여자에게서 밤에 들은 그 표현을 자화자찬할 때마다 써먹었다. 그의 셔츠 역시 단추가 풀어져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셔츠 단추를 몇 개 풀고 다녔다. 그는 검은 털로 뒤덮인 넓은 가슴을 갖고 있어서 그가 모은 금목걸이나 메달을 걸고 다니면 더 돋보였다. 스테파노스는 데보라를 침대에 끌어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여자들이 언제나 편하고 쉽게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고 그에게 말했지만 스테파노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루어진 것에 만족했지만, 자신의 솜씨에 더 만족하고 있었다. "저를 여기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스테파노스." 데보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천만에." 스테파노스가 웃으며 말했다. "잠시 발코니에 나가 있어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오."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그는 데보라가 질질 끄는 것에 속으로 화가 났다. 데보라는 브라우스의 단추를 채우고 미닫이 문쪽으로 걸어갔다. 스테파노스는 색바랜 청바지 밑에서 움직이는 그녀의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열아홉 살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요."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여기는 넓이가 1미터밖에 안 돼요, 스테파노스." "농담한 거요."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그는 문득 그녀를 뜻대로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초조하게 담배를 피워물고, 천장에 연기를 힘껏 내뿜었다. "스테파노스, 이리 나오서 내가 보고 있는 게 뭔지 가르쳐 주세요." "제기랄." 스테파노스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마지못해서 일어나 데보라 옆으로 갔다. 데보라는 최대한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어몬 거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가 법의 광장인가요?" "맛소." "그리고 저쪽은 파르테논 신전인가요?" 데보라가 반대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요." "오, 스테파노스. 너무 아름다워요." 데보라는 스테파노스를 바라보다 손으로 그의 목을 껴안고, 그의 넓은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광장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의 모습에 흥분을 느꼈었다. 그는 눈가에 깊은 주름살이 있어서 더욱 개성있게 보였다. 데보라는 그의 짙은 턱수염 때문에 그가 더욱 남성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데보라는 여전히 이 낯선 사람의 아파트에 따라온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이곳이 시드니가 아니라 아테네라는 점 때문에 해방감을 느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세요, 스테파노스?" 데보라가 물었다. 시간을 끌수록 그녀의 기대감은 더 커졌다. "그게 중요해?"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에게해의 휴일'이라는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고. 그리고 또 밀수도 해요. 하지만 대부분은 여자를 쫓아다니지." "오, 스테파노스.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이 아냐. 나는 수입이 괜찮은 여행사를 갖고 있지만, 이집트에 기계부품을 밀수하고 골동품을 빼내오는 일도 하지. 하지만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대부분은 여자들을 쫓아다녀. 여자를 쫓아다니는 일은 결코 싫증이 나지 않지." 데보라는 스테파노스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여자를 쫓아다닌다고 솔직하게 한 말에 더욱 흥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다. 스테파노스는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자제력이 느슨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실을 지나 곧장 침실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겼다. 방안에 비치는 푸른 달빛 속에서 옷을 모두 벗고 있는 그녀는 너무나 관능적이었다. 스테파노스는 바지를 벗고 고개를 숙여 데보라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데보라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그때 느닷없이 침대 옆에 있는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스테파노스는 불을 켜고 시계를 힐끗 보았다. 1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는 뭔가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받아."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데보라는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그녀는 영어로 누구냐고 묻고는, 잠시 후에 국제전화라라고 말하면서 스테파노스에게 수화기를 주려고 했다. 스테파노스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를 받으라고 손짓을 하고 누가 전화를 했는지 물어보라고 조용히 말했다. 데보라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수화기를 대고 누구냐고 물은 다음 손으로 수화기를 막았다. "카이로예요. 이본 줄리앙 드 마르그 씨래요." 스테파노스는 데보라의 손에서 수화기를 나꿔챘고, 그의 장난스러웠던 얼굴에 갑자기 탐욕스러운 표정이 가득 찼다. 데보라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나체를 손으로 가렸다. 그녀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옷을 입으려고 했지만, 스테파노스가 그녀의 청바지를 깔고 앉아 있었다. "한밤중에 실없는 소리를 하려고 전화하지는 않았겠죠?" 스테파노스가 화를 내며 말했다. "맞아요, 스테파노스." 이본이 조용히 말했다. "압둘 함디에 대해서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어서 전화했소. 그를 압니까?" "물론, 그 개자식을 알지. 그가 어쨌다는 거요?" "혹시 그와 거래를 한 적 있소?"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군, 이본. 왜 그걸 묻는 거요?" "함디가 어제 살해됐소." "그것 참 안됐군. 하지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스테파노스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데보라는 여전히 청바지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스테파노스의 등을 밀면서 다른 손으로 청바지를 잡아당겼다. 스테파노스는 이본의 말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자 화가 치밀었다. 그는 손등으로 데보라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데보라는 침대 끝에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함디의 죽음에 대해서 혹시 짚이는 것 없소?" 이본이 물었다. "그 개자식이 죽기를 바랐던 사람은 아주 많지. 나도 마찬가지였어." 스테파노스가 화를 내며 말했다. "그가 당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소?" "잘 들어요, 마르그. 나는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소. 그가 죽은 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나는 당신과 정보를 교환하고 싶소. 나는 당신이 알면 좋아할 정보를 가지고 있소." "어디, 말해 보시오." "함디는 휴스턴에 있는 것과 같은 세티 1세의 상을 갖고 있었소." 스테파노스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맙소사!" 스테파노스가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데보라는 기회가 생긴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청바지를 집었다. 마침내 옷을 다 입을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몸을 움츠렸다. "그가 세티 1세의 상을 어떻게 손에 넣었지?" 스테파노스가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소." 이본이 대답했다. "경찰에서 그 사실을 알았소?" 스테파노스가 물었다. "아니오. 나는 그가 살해된 직후에 그 현장에 갔었소. 나는 함디의 서류들과 당신이 최근에 보낸 편지를 포함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편지들을 가져 왔소." "그걸로 뭘 어쩌려고?"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혹시 편지에 암시장에 대한 얘기는 없었소? 혹시 그가 뭘 폭로하려고 하지는 않았소?" "음, 그러니까 함디가 당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었군." 이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니오. 그는 뭘 폭로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소. 당신이 그를 죽였소, 스테파노스?" "만약 내가 죽였으면 내가 죽였다고 솔직하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마르그? 꿈 깨시오." "내가 부탁한 거나 잘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훌륭한 실마리를 갖고 있소. 한 전문가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인현장을 목격했소." 스테파노스는 문쪽으로 걸어가서 거실과 발코니를 둘러보고 잠시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 증인이 살인범들을 기억하고 있소?" "물론이오. 그녀는 이집트학자인데, 살인범이 그녀에게 강한 인상을 준 모양이더군. 그녀의 이름은 에리카 바론이고, 지금 힐튼호텔에 묵고 있소." 스테파노스는 전화를 끊은 다음, 지방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그는 신호가 가는 동안에 초조하게 전화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에반젤로스, 짐을 꾸려. 우리는 내일 카이로로 갈 거야." 스테파노스는 에반젤로스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빌어먹을." 스테파노스가 밤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는 그때 데보라를 보았다.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여기서 나가." 스테파노스가 고함쳤다. 데보라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녀는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그리스의 자유는 너무나 위험하고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카이로, 밤 12시 담배연기로 가득 찬 칵테일라운지에서 나온 에리카는 힐튼호텔 로비의 밝은 불빛에 눈을 찡그렸다. 아흐메드와의 일과 거대한 정부 건물의 위협적인 느낌 때문에 그녀는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녀는 쉬고 싶어서 술집에 들어갔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몇 명의 미국인 건축가들이 그녀와 함께 따분한 저녁 시간을 때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굴 그녀는 술만 마시고 나와야 했다. 로비를 걸어가던 에리카는 몸 속에 들어간 스카치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불행하게도 알콜은 그녀의 불안감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알콜은 오히려 불안감을 더해 주었고, 라운지에 있던 남자들의 유심히 쳐다보는 눈길에 그녀는 과대망상증 초기증상까지 느꼈다. 그녀는 혹시 누가 따라오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었다. 에리카는 웅장한 로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한 유럽남자가 그녀를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보석을 전시해 놓은 곳 옆에 서 있던 턱수염을 기르고 긴 흰옷을 입은 아랍인도 그녀를 까만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예약부 앞에 서 있던 이디아민처럼 생긴 흑인 한 명이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에리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피곤해서 쓸데없는 상상을 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보스턴에서 자정에 혼자 돌아다닌다 해도 모두가 쳐다볼 것이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에리카는 자신의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아흐메드가 자신의 방에 있는 것을 보았던 충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불을 켰다. 아흐메드가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욕실로 갔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문의 안전고리를 걸다가 현관 바닥에 놓인 봉투를 발견했다. 그것은 힐튼호텔의 편지봉투였다. 에리카는 발코니로 걸어가면서 편지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이본 줄리앙 드 마르그 씨의 전화가 왔었고, 돌아오는 대로 시간에 관계없이 전화해 달라고 했다는 메모가 들어 있었다. 그 글 밑의 사각형 속에는 '긴급'이라고 인쇄된 글씨가 있었다. 에리카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웅장한 경치가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막지역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지평선 위의 하늘에 엄청나게 많은 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일강의 크고 검은 띠가 마치 비에 젖은 도로처럼 어둠 속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신비스러운 스핑크스가 멀리서 조용히 과거의 수수께끼를 지키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신화 속의 짐승 옆에 있는 전설적인 피라미드들의 엄청난 몸집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그것들은 고대에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기하학적인 모양 때문에 전위적인 느낌이 들었고, 과거와 미래가 뒤바꾼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에리카는 그 고대의 건축물 왼쪽에 있는 로다섬을 볼 수 있었다. 로다섬은 마치 나일강을 항해하는 정기선처럼 보였다. 에리카는 섬 끝에 있는 메리디언호텔의 불빛을 보고, 이본이 다시 생각났다. 에리카는 메모를 다시 읽고, 이본이 어쩌면 아흐메드가 찾아온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혹시 그가 아직 모르고 있으면 그에게 말을 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곰금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부가 연관되어 있는 한 어떤 문제에도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이본에게 아흐메드가 찾아온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문제에 더 깊이 연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흐메드와 이본 사이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본은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리카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교환수에게 메리디언호텔 800호로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수화기를 어깨와 머리 사이에 끼우고 블라우스를 벗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좋게 불고 있었다. 전화는 거의 15분이나 걸려서 연결되었다. 에리카는 이집트에 오기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집트에서는 전화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여보세요." 라울이었다. "여보세요. 에리카 바론이에요. 이본 좀 바꿔주시겠어요?" "잠깐 기다리세요." 에리카는 기다리는 동안에 신발을 벗었다. 구두에는 카이로의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본이 쾌활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본. 당신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메모를 받았어요. 급한 전화라고 씌어 있더군요."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지 급한 일은 없습니다. 당신 덕분에 오늘밤을 아주 멋지게 보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구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에리카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사실, 당신은 오늘밤에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당신을 다시 보고 싶어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에리카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아침에 당신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메리디언호텔의 계란요리가 일품이죠." "고마워요, 이본."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이본과 같이 있는 것이 즐겁기는 했지만 이집트에서의 시간을 시시덕거리며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엇보다고 자신이 수년 동안 공부해 온 유물들을 먼저 보아야만 했고, 다른 데 신경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또 있었다. 그녀는 전설적인 세티 1세의 상이 사라진 것을 본 목격자로서의 책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라울을 보내서 당신을 이리로 모셔올 수 있습니다." 이본이 에리카의 생각을 방해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본. 하지만 저는 지쳐 있어요.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 "이해합니다. 그럼 일어나는 대로 내게 전화를 해 주세요." "이본, 오늘밤에는 저도 즐거웠어요. 당신을 만난 오후 이후에는 내내 그랬어요. 하지만 저도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리고 관광도 하고 싶어요." "내가 카이로를 좀더 자세히 보여드리고 싶군요." 이본이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에리카는 이본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이집트에 대한 관심은 무척 개인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이본,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 어떨까요? 그게 저에게는 좋을 것 같아요."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알겠습니다. 저녁식사도 좋아요, 에리카. 나는 그 시간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릴 겁니다. 하지만, 시간을 정해야겠군요. 아홉 시에 만나기로 합시다." 에리카는 다정하게 인사를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본의 끈질김에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본과 저녁식사를 할 때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에리카는 일어서서 침실의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스물 여덟 살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나이보다 어리게 보았다. 그녀는 작년 생일에 느닷없이 나타났던 눈 옆의 잔주름살을 보았다. 그녀의 피부에는 작은 여드름도 몇개 돋아 있었다. "젠장." 에리카는 여드름을 짜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짜지지 않았다. 에리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남자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는 남자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가 없었다. 에리카는 브래지어와 스커트를 벗었다. 그리고 샤워기의 물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욕실의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콧날을 만지며 자신의 얼굴이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살펴보았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전신을 거울에 비춰보고는 운동을 해서 살을 좀 빼긴 해야겠지만 그런 대로 몸매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갑자기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보스턴에 억지로 버려두고 온 삶을 생각했다.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이집트로 도망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리처드 생각이 났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전화기를 집어들고 리처드 허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적어도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교환수의 말에 실망하고 말았다. 에리카가 투덜거리자 교환수는 자신도 전화가 많이 걸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꾸했다. 교환수는 카이로에서 국제전화를 하려면 보통 며칠씩 걸리지만, 시내전화는 훨씬 쉽다고 친절하게 덧붙였다. 에리카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눌렀다. 그녀는 너무나 피곤해서 잠을 자기 전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카이로, 새벽 12시 30분 아흐메드는 게지라 섬으로 이어지는 '7월 26일' 다리로 달려가는 차 속에서 달빛에 반사되는 나일강을 쳐다보았다. 그의 운전사는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지만, 아흐메드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카이로의 운전사들은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대는 것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만큼이나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에 준비하고 있겠네." 아흐메드는 자마렉 가의 샤리 이스마일 무하메드에 있는 그의 집 앞에서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운전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차를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흐메드는 텅빈 '카이로' 아파트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는 고향인 북부이집트 룩소르의 나일강 옆에 있는 작은 집이 훨씬 더 좋았고, 가능한 한 그곳에 자주 갔다. 그러나 그는 문화재관리국 국장으로서의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카이로에 있어야만 했다. 아흐메드는 이집트의 거대한 관료조직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결과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서 대학졸업생들 모두에게 정부 내의 직업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할 일에 비해 직원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한 체계 때문에 불안감이 만연해 있었고, 대부분의 정부직원들은 그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약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조가 없었다면 이집트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아흐메드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문화재관리국의 조직을 정비해야만 했었고, 그는 그렇게 하다가 각 부서들의 전체적인 비효율성에 직면했다. 그리고 관리국을 재정비하려는 그의 노력은 지금까지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었다. 아흐메드는 이집트 로코코 양식의 소파에 앉아 서류가방에서 서류 몇 장을 꺼냈다. '룩소르의 왕묘계곡을 포함한 네크로폴리스의 보안체계 정비'와 '투탄카멘의 유물을 위한 지하방공보관소'라는 제목의 서류였다. 아흐메드는 그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던 첫번째 서류를 펼쳤다. 아흐메드는 첫 구절을 두 번이나 읽고 나서야 자신이 그 서류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에리카 바론의 섬세한 얼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방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깜짝 놀랐었다. 그는 그녀를 심문하기 위해서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처음에 더 당황한 것은 바로 그였다. 아흐메드가 하버드에 3년 동안 머물 때 사랑에 빠졌던 여자와 에리카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무척 비슷했다. 그 여자는 아흐메드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였고 그녀에 대한 기억은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은 아흐메드가 옥스포드로 떠날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흐메드는 그 이후로 애정관계를 피하고 그의 가족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아흐메드는 머리를 벽에 기대고 래드클리프 출신의 파멜라 넬슨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14년이라는 시간의 안개속에서도 그녀를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의 사랑에 의해 추운 줄도 몰랐던 보스턴에서의 어느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났던 순간이 생각났다. 아흐메드는 천천히 일어서서 부엌으로 갔다. 그는 에리카가 불러일으킨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면서 차를 끊였다. 미국을 향해 떠났던 것이 마치 어제 같았다. 그의 부모는 공항에서 아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잔소리와 격려를 잔뜩 늘어놓았었다. 북부이집트의 소년에게는 미국이 너무나 흥분되는 곳이었지만, 보스턴에서의 생활은 끔찍할 정도로 외로울 뿐이었다. 적어도 파멜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녀를 만난 뒤로는 황홀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는 파멜라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미친 듯이 공부를 했고, 하버드를 3년만에 졸업했다. 아흐메드는 차를 들고 거실고 돌아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뜨거운 차가 들어가자 긴장되어 있던 그의 위가 부드러워 졌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 뒤에 왜 에리카 바론을 보고 파멜라 넬슨을 떠올렸는지를 이해했다. 그는 에리카에게서 파멜라가 그녀의 감각적인 자아를 감추곤 했던 것과 같은 지성과 너그러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아흐메드가 사랑했던 여자는 파멜라의 내면에 숨어 있는 여자였다. 그는 눈을 감고 파멜라의 나체를 생각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아흐메드가 갑자기 눈을 떴다. 사다트 대통령의 웃고 있는 초상화가 떠올라 따뜻한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현실의 중압감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문화재관리국에서의 책임과 가족에 대한 책임때문에 그러한 감상적인 생각을 할 여유가 거의 없기도 했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온갖 어려움을 헤쳐냈고, 이제 그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에 아주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아흐메드는 왕묘계곡에 관한 서류를 집어들고 다시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서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에리카 바론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심문하는 동안 그녀가 보였던 명료한 태도를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반응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민감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와 동신에 에리카가 중요한 것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도 확신했었다. 아흐메드는 이본 줄리앙 드 마르그가 에리카와 저녁식사를 했다는 것을 알려준 문화재관리국 직원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는 마르르가 그녀를 '몽테 벨로 카지노'에 데려갔고, 아주 낭만적인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아흐메드는 일어서서 방은 걸어다녔다. 그는 이유도 모르는 채 화가 났다. 드 마르그가 이집트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골동품을 더 사들일 생각인가? 마르그가 전에 이집트에 왔을 때, 아흐메드는 그를 충분히 감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만약 에리카와 드 마르그의 관계가 발전한다면, 에리카를 통해서 드 마르그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아흐메드는 직속부하인 자키 리아드에게 전화를 걸어 에리카 바론을 아침부터 24시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모두 알고 싶네. 모든 것을 말야." 카이로, 새벽 2시 45분 에리카는 낯선 소음 때문에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고, 그녀는 팬티만 걸치고 있었다. 거친 금속성의 소음이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고 에리카는 그제서야 자신이 호텔에 있으며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소리는 계속해서 틀어놓은 샤워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녀는 불을 다 켜놓은 채 침대 모서리에서 잠이 들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면서도 여전히 멍했다. 교환수는 에리카가 미국으로 신청한 전화가 연결되었다고 말했다. 에리카는 몇 번이나 '여보세요'하고 소리를 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욕실로 가서 샤워기를 잠궜다. 무심코 거울을 바라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두덩은 부어 있었으며 뺨에 난 여드름은 곪아 있었다. 에리카는 전화벨이 다시 울려서 침실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당신이 전화를 해줘서 정말 기뻐. 여행은 어때?" 수화기를 통해서 반가워하는 리처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끔직해요." "끔찍해? 뭐가 잘못됐어?" 리처드는 금방 깜짝 놀랐다. "괜찮아?" "괜찮아요. 그냥 기대 이하일 뿐이에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리처드가 지나칠 정도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전화를 한 것이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세티 1세의 상과 살인 그리고 이본과 아흐메드에 대해서 모두 얘기했다. "맙소사." 리처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에리카, 다음 비행기로 즉시 돌아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리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에리카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녀는 리처드의 명령에 반발심을 느꼈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건 그는 그녀에게 함부로 명령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집트를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에리카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봐, 에리카, 당신의 목적은 이루어졌어. 그런데 그곳에 더 이 상 머물 필요가 뭐 있겠어? 더욱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말야." "나는 위험하지 않아요. 그리고 목적을 이루었다는 게 무슨 말이죠?" 에리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나에게 알리려는 것 말이야. 나도 이해해. 그러니 더 이상 시위할 필요는 없어." "리처드, 나는 당신이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당신에게 시위를 하는 게 아니에요. 고대이집트는 내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피라미드를 직접 보고 싶었어요.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여기에 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야." "솔직히 말해서, 이건 국제전화로 할 만한 얘기가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여자이지만 동시에 이집트학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언제나 잊고 있어요. 나는 학위를 받기 위해서 8년 동안이나 공부를 했고, 내가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내게 무척 중요해요." 에리카는 또 다시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 리처드가 상처받은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의사로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해요." "의료와 이집트학은 아무 관계도 없어." "물론이에요. 하지만 이집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의료행위에 바치는 것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있어요.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지금은 보스턴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럼 내가 이집트로 가지." 리처드가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했다. "안 돼요." 에리카는 간단하게 거절했다. "안 돼?" "그래요, 안 돼요. 제발 이집트에 오지 마세요. 저를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다면, 제 상사인 로리박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가능한한 빨리 이곳으로 전화 좀 해달라고 해 주세요. 이집트에서 전화하는 것보다는 이집트로 전화하는 게 훨씬 빠르거든요." "로리박사에게 전화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당신은 정말 내가 이집트로 가는 게 싫단 말이야?" 리처드가 거절당한 것에 놀라며 물었다. "그래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작별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새벽 네 시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을 때 에리카는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리처드가 또 전화를 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고, 전화벨이 몇 번 울리게 내버려 둔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러나 리처드가 아니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허버트 로리 박사였다. "에리카, 괜찮아?" "괜찮아요, 로리박사님. 아무 일 없어요." "리처드가 한 시간 전쯤에 전화를 했었는데 상당히 흥분하고 있더군. 전화해 달라고 했다면서?" "그래요, 로리박사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에리카는 잠이 깨도록 일어섰다. "아주 놀라운 일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카이로에서 미국으로 전화를 하는 것보다는 미국에서 이곳으로 전화를 하는 게 훨씬 쉬워서 전화해 달라고 했어요. 리처드가 어제 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안 했어. 그는 당신이 곤경에 처해 있다고만 하더군. 그 말만 했어." "곤경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로리박사에게 전날 있었던 일들을 재빨리 설명했다. 그리고는 세티 1세의 상에 대해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했다. "믿을 수가 없군." 에리카가 말을 끝내자 로리박사가 말했다. "나는 휴스턴에 있는 세티 1세의 상을 봤었네. 그걸 사들인 사람은 굉장한 부자인데, 그는 매트박물관의 레오나드와 나에게 707기까지 보내며 우리를 초대해서 그 상이 진짜인지 감정해 달라고 했어. 우리는 둘 다 그 상이 이집트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는 데 동의했어.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비로스나 룩소르에서 나온 것 같아. 그리고 보존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어. 그것이 3천년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야. 어쨌든, 당신이 설명한 것을 들으니 진품같군." "휴스턴에 있는 상의 밑 부분에도 상형문자가 있었나요?" 에리카가 물었다. "있었어. 아주 전형적이고 종교적인 경고문이 있었고 또 아주 이상한 상형문자도 있었어." 로리박사가 말했다. "제가 본 것도 아주 이상했어요." 에리카가 흥분하며 말했다. "번역하기 아주 어려운 상형문자였어. '투탄카멘의 뒤를 이어 통치한 세티 1세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이라는 내용이었어." 로리박사가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제가 본 상에도 세티 1세와 투탄카멘의 이름이 같이 씌어 있었어요. 틀림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너무이상해요." 에리카가 말했다. "나도 투탄카멘의 이름이 같이 씌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데 동의해. 사실, 레오나드와 나는 그 상을 보았을 때, 진품으로 인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것이 진품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어. 혹시 세티 1세의 어떤 이름이 씌어 있었는지 알겠어?" "제 생각으로는 오시리스신과 연관된 그의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에리카가 말했다. "잠깐만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에리카는 압둘이 그녀에게 갑충석을 주었던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녀는 바지를 걸쳐놓은 의자 쪽으로 달려갔다. 갑충석은 주머니 속에 있었다. "맞아요, 그의 오시리스 이름이에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교하게 위조한 갑충석에 씌어 있는 이름과 똑같아요. 로리박사님, 휴스턴의 상에 있는 상형문자의 사진을 구해서 저에게 보내주실 수 있겠어요?" 에리카가 물었다. "아마 할 수 있을 거야.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는데, 제프리 라이스라는 사람이야. 그는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 같은 또 다른 상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무척 흥미를 가질 거야. 그리고 내가 또 다른 상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하면 틀림없이 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발견된 곳에서 그 상을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에요." 에리카가 말했다. "맞는 말이야. 그것이 암시장의 진짜 문제야. 문화재도굴범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파괴해 버리거든." 로리박사가 말했다. "저는 암시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전혀 몰랐어요. 저는 정말이지 암시장에 대항해서 뭔가 하고 싶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것은 훌륭한 목표야.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커. 압둘 함디라는 사람이 너무 늦게 깨달은 것처럼 말이야. 그것은 목숨을 건 게임이야." 에리카는 로리박사에게 전화를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곧 룩소르로 가서 상형문자 번역작업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로리박사는 에리카에게 조심하고 재미있게 보내라고 말했다. 에리카는 전화를 끊고 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녀가 이집트에 대해서 공부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흥분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 위해서 침대로 돌아가며 여행을 떠날 때 느꼈던 열정을 또 다시 느꼈다. 제 2 일 카이로, 아침 7시 55분 카이로의 하루는 일찍 시작되었다. 농작물을 가득 싣고 근처 마을에서 온 당나귀 달구지가 동쪽하늘이 밤의 어둠으로부터 부옇게 채 밝아 오기도 전에 느릿느릿 도시로 들어왔다. 나무바퀴 구르는 소리, 마구부품의 팔랑거리는 소리, 시장으로 향하는 양과 염소 떼들의 방울소리 등 온갖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자 석유동력의 탈것들이 동물마차 대열에 합류하였다. 제과점에서 나오는 맛있는 빵냄새가 공중에 퍼져 있었다. 7시경에는 택시들이 마치 벌레들처럼 나타나서 경적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길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온도는 점점 올라갔다. 발코니 문을 조금 열어두었기 때문에 에리카는 엘 타흐러다리와 힐튼호텔 앞의 나일강을 따라 뻗은 넓은 가로수길인 코니쉬 엘닐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가 연한 푸른색 바탕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시계를 힘끔 보다가 자신이 그다지 오래 자지 않은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이제 겨우 8시도 안 되었던 것이다. 에리카는 자세를 바꿔 앉았다. 모조갑충석은 전화기 옆 탁자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걸 집어 마치 진품인지 시험하기라도 하듯 눌러보았다. 지난밤의 휴식으로 인해 어제 사건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방으로 아침식사를 주문한 후, 에리카는 그날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이집트박물관을 방문하고 고대 왕들의 전시장을 둘러본 다음 고왕조의 공동묘지인 사카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녀는 여행자들의 정규코스인 기자의 피라미드로 가는 걸 피하고 싶었다. 아침은 간단했다. 주스, 메론, 갓 구워낸 빵과 꿀 그리고 부드러운 아라비안커피. 아름다운 발코니에서 우아하게 아침식사를 하였다. 멀리서 햇빛에 반사되고 있는 피라미드와 조용히 흐르고 있는 나일강을 바라보며 에리카는 희열을 느꼈다. 커피를 조금 더 부은 후, 에리카는 나겔의 이집트 안내서를 꺼내 사카라편을 펼쳤다. 거기에는 하룻동안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어서 그녀는 신중하게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문득 그녀는 압둘 함디의 안내책자를 기억해냈다. 그건 여전히 그녀의 큰 핸드백 속에 깊이 들어 있었다. 조심해서 다 낡아빠진 앞장을 편 후, 면지에 있는 이름과 주소를 읽어보았다. 나시프 말머드, 샤리 엘 타흐러 180번지. 이것은 그녀에게 압둘 함디의 마지막 말에 담긴 끔찍한 아이러니를 생각케 했다. "나는 여행을 자주 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이 떠날 때쯤엔 카이로에 없을지도 모르겠소." 그녀는 그 노인이 말 그대로 되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흔들었다. 사카라편을 펼치고 좀 더 신판인 나겔의 여행안내서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검은 송골매가 하늘 높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다니다가 골목을 황급히 달려가던 쥐를 꽉 낚아챘다. 9층 아래에서 칼리파 카릴은 빌린 이집트 피아트에 다가가 라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는 펑 소리가 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등을 기대고 앉아 즐겁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숙히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한없는 냉소를 자아내는 듯한 커다란 매부리코에, 무뚝뚝해 보이는 구레나룻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살쾡이처럼 아주 절도있게 움직였다. 933호의 발코니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그의 목표물을 발견했다. 그는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에리카를 잘 포착해 그녀의 다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즐거운 임무를 맡게 된 걸 매우 행운으로 생각했다. 에리카가 그가 있는 쪽으로 다리를 움직이자 씩 웃었다. 이 웃음은 매우 놀라운 모습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의 윗 앞니 중의 하나가 깨져서 날카롭게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통적인 검은 정장과 넥타이는 그를 흡혈귀처럼 보이게 하였다. 칼리파는 혼란스런 중동지역에서 실업문제를 경험해 보지 않은 보기 드문 몇몇 군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다. 이라크에서 게릴라훈련을 받았지만 팀웍의 부족으로 축출되었다. 그는 또한 양심이 결핍된 인물이다. 그는 단지 돈에 의해 움직이는 반사회적 킬러였다. 칼리파는 아름다운 미국인 여자여행객을 보호하는 일이 터키의 쿠르드족에게 AK 공격용 권총을 실어나르는 일을 할 때와 똑같은 보수가 지급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유쾌하였다. 에리카의 옆 발코니를 살펴보던 칼리파는 아무런 의심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 프랑스인으로부터의 주문은 간단했다. 그는 에리카 바론을 살인의 가능성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고, 그 가해자를 붙잡고 싶어했다. 쌍안경을 힐튼호텔에서 좌우로 돌려보며 나일강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화력이 좋은 총으로 장거리에서 발사되는 총격은 막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심쩍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은 왼쪽 팔 아래 케이스에 들어 있는 스테치킨 반자동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걸 모사드를 위해 시리아에서 암살한 KGB중개인으로부터 얻었다. 다시 에리카에게 눈을 돌려 칼리파는 이처럼 젊고 싱싱해 보이는 아가씨를 누군가 죽이려 한다는 걸 믿으려 애를 썼다. 그녀는 막 딸 때가 된 복숭아처럼 보였고, 칼리파는 이본의 동기가 정녕 사업적인 것 때문인지 의심스러웠다. 갑자기 그 아가씨는 일어서더니 책들을 챙겨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칼리파는 쌍안경을 힐튼호텔 정문쪽으로 낮추었다. 그곳은 여전히 택시행렬과 함께 아침의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가멀 아브라힘은 엘 아람 신문의 첫장을 접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힐튼호텔 정문 맞은편의 차도에 주차된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택시는 오늘 하루동안 빌린 것이었다. 호텔 앞의 도어맨들이 투덜거렸지만 그의 문화재관리국 신분증을 보더니 이내 수그러졌다. 가멀의 의자 옆에는 에리카 바론의 확대된 여권사진이 있었다. 매번 여자가 호텔에서 나올 때면 그 사진과 얼굴을 대조해 보곤 하였다. 가멀은 28살이었다. 키는 5피트 4인치보다 약간 컸고, 좀 살이 찐 편이었다. 결혼해서 한 살, 세 살 된 아이를 두고 있었고 그는 그봄에 카이로대학에서 공공행정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기 직전에 문화재관리국에 취업되었다. 그는 7월 중순경부터 일을 시작했지만 일이 그가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문화재관리국에는 직원이 아주 많아서 그에게 주어지는 일이란 겨우 에리카 바론을 뒤쫓으며 그녀의 행선지를 보고하는 따위의 일밖에는 없었다. 가멀은 그 여자가 나와서 택시를 타자 다시 사진을 집어들었다. 가멀은 한번도 누군가를 미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이 매우 품위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거부할 만한 자리에 있지 못했다. 특히 그가 국장인 아흐메드 카잔에게 직접 보고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멀도 문화재관리국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걸 말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사카라의 더위를 감안해서 센스있게 차려입은 에리카는 짧은 소매의 밝은 베이지색 면블라우스와 허리를 졸라매는 끈이 달리 약간 어두운 계통의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큰 핸드백 속에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후레쉬라이트 그리고 1929년 판 베데커 여행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두 안내서를 신중히 비교해 본 후 그녀는 압둘 함디가 준 걸 택하였다. 이것이 나겔의 것보다 훨씬 잘 되어 있었던 것이다. 프런트에서 그녀는 여권을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일 안내인을 소개받았다. 그는 앤워 셀림이었다. 에리카는 안내인을 원치 않았지만 호텔측에서 권하였다. 전날 치한들 때문에 매우 고생을 한 후라서 에리카는 이내 수긍하였다. 가이드에게는 이집트 파운드로 7파운드를 지불하고 택시와 운전사에게는 10파운드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앤워 셀림은 40대 중반의 비쩍 마른 사람으로, 정부공인안내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113이라는 숫자가 박힌 금속핀을 회색양복의 깃에 붙이고 있었다. "나는 환상적인 여행일정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는 도중 애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셀림이 말했다. "먼저 우리는 서늘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거대한 피라미드를 방문할 겁니다. 그런 다음 ......" "고맙습니다만." 그의 말을 가로채며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뒷걸음질쳤다. 셀림의 이는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돌격하는 코뿔소처럼 헉헉거리고 있었다. "난 이미 하루일정을 다 짜 놓았어요. 먼저 잠깐 이집트박물관을 방문하고 사카라에 가고 싶어요." "하지만 사카라는 한낮에 가기에는 너무 덥습니다." 셀림이 항의하며 말했다. 그의 입은 냉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강렬한 태양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온 그의 피부는 단단해 보였다. "나도 그건 알아요." 에리카는 이 대화를 중단시키고자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이게 내가 원하는 여행일정이에요." 표정의 변화도 없이 셀림은 그녀를 위해 하루 빌린 택시의 문을 열었다. 운전수는 3일 정도 자란 듯한 수염이 있는 젊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박물관을 향해 출발하자 칼리파는 쌍안경을 내려놓았다. 그는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면서 과연 어떻게 하면 가이드와 택시운전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궁리하였다. 차에 기어를 넣다가 힐튼호텔 쪽에서 에리카의 택시를 바로 뒤쫓는 다른 하나의 택시를 발견하였다. 두 차는 첫번째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였다. 가멀은 그녀가 나타났을 때 사진을 보지 않고도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에리카의 택시를 쫓으라고 운전사에게 말하기 전에 급히 신문여백에 가이드번호 '113'을 써넣었다. 그들이 이집트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셀림은 그녀가 문밖으로 나오는 걸 도왔고 택시는 기다리는 동안 무화과 그늘 쪽으로 갔다. 가멀은 운전사에게 에리카의 택시가 잘 보이는 곳에 멈추도록 하였다. 그는 신문을 펼치고 웨스트은행에 대한 사다트의 제안이 담긴 긴 기사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칼리파는 박물관 밖에 차를 세우고 누구인지 볼까 해서 의도적으로 가멀의 택시 곁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보지 못했다. 칼리파는 가멀의 움직임이 의심스러웠지만 명령에 충실히 따르기 위해 에리카와 그녀의 안내인의 뒤를 쫓아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에리카는 흥분된 마음으로 그 유명한 박물관에 들어갔지만, 그녀의 이러한 지적 열망과 관심조차도 박물관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매우 귀중한 물건들이 헌딩턴 가의 보스턴박물관에서처럼 매우 먼지가 많은 방 안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기이한 조각들과 돌로 된 얼굴상들은 불멸이 아닌 죽음의 형상이었다. 안내인들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 흰색 유니폼에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억새비를 들고 있는 청소부들은 쓰레기를 버리지도 않은 채 계속 이방 저방을 쓸고 다녔다. 정말 바쁘게 일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리공이었다. 그는 고대 이집트벽화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한 연장을 가지고 간단한 목공일을 하거나 새끼로 둘러친 좁은 공간에서 회반죽을 하고 있었다. 에리카는 주변환경을 무시하고 좀더 유명한 유품들에 집중하려 하였다. 32번 방에서 그녀는 라호테프와 그의 형인 쿠푸 그리고 그의 아내인 노프리티스의 살아있는 듯한 석회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에리카는 그저 그 얼굴들을 보는 데 만족하려 했으나 그녀의 안내인은 자꾸만 자기 지식을 뽐낼 기회를 갖고 싶어 하였다. 그는 에리카에게 그가 처음 그 조각상을 봤을 때 라호테프가 쿠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에리카는 그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에게 묻는 말에만 대답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였다. 게다가 그녀는 대부분의 유물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에리카는 라호테프상을 돌아보다가 뒤쪽으로 가기 바로 직전에 전시장 출입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견치처럼 보이는 이를 가진 남자의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으나, 그녀가 다시 돌아서자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 매우 불편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전날의 사건으로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라호테프상 주변을 걸으며 슬쩍 여러번 문쪽을 보았다. 그 검은 형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매우 순수해 보이는 프랑스 여행객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셀림이 나가자는 손짓을 해와 에리카는 32번 방을 나와 그 건물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긴 전시장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북서쪽 모퉁이의 이중아치를 열심히 바라보다가 재빨리 사라지는 검은 형체를 보았다. 걸어가면서도 셀림은 흥미있는 것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해댔는데, 에리카는 박물관 북쪽에 위치한 전시장과 교차되는 지점을 향해 바삐 걸어 내려갔다. 약간 골이 난 셀림은 박물관을 거의 빛의 속도만큼 빨리 보기를 원하는 급한 얼굴을 한 미국인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녀는 교차지점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셀림은 그녀 뒤에 멈칫거리고 서서 그녀의 관심을 앗아간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 했다. 그녀는 하트세수트 여왕의 집사였던 센무트의 상 옆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상을 살펴보고 있다기보다는 북쪽 전시장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특별히 보고 싶은 게 있다면 제발 ......" 셀림이 말했다. 에리카는 화가나서 셀림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했다. 갑자기 전시장 중앙으로 뛰어간 에리카는 그 검은 형체를 찾아보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독일인 한 쌍이 팔짱을 끼고 박물관의 평면도에 대해 논쟁하며 걸어갔다. "바론 양." 참으려고 애쓰는 걸 명백히 드러내며 셀림이 말했다. "난 이 박물관을 구석구석 잘 압니다. 만일 보고자 하는 게 있으면 묻기만 하십시오." 에리카는 그에게 연민을 느껴 자신이 유용하다는 걸 느끼도록 하는 어떤 걸 물어보려 애를 썼다. "박물관에 세티 1세의 유물이 있나요?" 셀림은 집게손가락을 코에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서 아무말 없이 허공에 손가락을 세운 다음 에리카에게 따라 오라고 하였다. 그는 현관 홀을 지나 2층의 47번 방으로 에리카를 안내하였다. 그는 '388. 1'이라고 번호가 붙은 정교히 조각된 거대한 규암 옆에 섰다. "세티 1세 석관의 눈꺼풀." 그는 자랑스레 말하였다. 에리카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전날 보았던 그 위대한 상과 비교해 가면서 그 석상을 바라보았다. 그건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또한 세티 1세의 석관이 런던으로 빼돌려져 그곳의 작은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음을 기억하였다. 암거래가 이집트박물관을 얼마나 속이고 있는지가 너무도 명백하였다. 셀림은 에리카가 볼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다른 방의 출구쪽으로 끌고 갔다. 그는 그녀에게 그곳을 들어갈때 문에 있는 안내인에게 15피에스타를 주도록 하였다. 일단 방에 들어서자 셀림은 길고 낮은 유리상자들을 통과해 벽에 붙은 상자 옆에 멈추었다. "세티 1세의 미라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보다가 에리카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수많은 공포영화를 위해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그런 종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미라의 귀는 부서지고 머리는 더 이상 그 흉상에 붙어 있지 않았다. 영생에 대한 확신 대신에 그 흉상은 죽음의 공포가 영원함을 확신하게 하였다. 방에 있는 다른 왕들의 미라들을 둘러보던 에리카는 그것들이 고대이집트를 생생히 살아있도록 한다기보다는 이미 시간이 엄청나게 흘러버렸고 고대이집트는 너무도 요원함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세티 1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녀가 전날 보았던 아름다운 상과 일치되는 건 없었다. 최소한의 닮은 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상은 곧은 코에 좁은 턱을 하고 있었으나 미라는 매우 넓은 턱에 매부리코였다. 그녀는 온몸이 으스스해짐을 느끼며 되돌아나오기 전에 와들 와들 떨었다. 셀림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면서, 에리카는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 이 먼지구덩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에리카의 택시는 카이로의 혼돈을 뒤로 한 채 이집트 교외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나일강의 서부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셀림은 람세스 2세가 모세에게 말한 걸 에리카에게 말해주면서 대화를 계속하려 했으나 마침내 침묵에 잠겼다. 에리카는 셀림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의 가족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침묵에 잠기게 되었고 에리카는 평화로이 경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나일강의 사파이어 블루와 농경지의 밝은 연두색 사이의 색의 대조를 즐겼다. 지금은 추수기였다. 그들은 잘 익은 붉은 과일이 달리 야자수가지를 가득 실은 당나귀를 지나갔다. 아스팔트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왼쪽은 나일강 서쪽에 있는 산업도시 힐완으로 가는 길이었다. 앞에 아무 장애물이 없는데도 여러 번 경적을 울려대며 에리카의 택시는 오른쪽으로 질주해 갔다. 가멀은 대여섯 대의 차 뒤에서 뒤따랐다. 그는 완전히 차 가장자리에 붙어 앉아서 운전사와 몇마디 나누고 있었다. 그는 더위를 피해 회색빛 양복 웃저고리를 벗었으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1/4 마일 정도 뒤에 처져서 칼리파는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았다. 차는 온통 시끄러운 음악으로 가득찼다. 그는 이제 에리카가 미행당하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 방법이 너무 눈에 띄었다. 그 택시는 에리카를 바싹 뒤쫓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그는 대학생처럼 보이는 그 남자의 잘난 얼굴을 보았지만 학생 테러리스트로 간주했었다. 그는 그들의 깔끔한 외모가 그들의 무모함과 대담성의 방패막이 될 수 있음을 종종 보아왔다. 에리카의 택시는 너무 빽빽하게 들어차서 침엽수림처럼 보이는 야자숲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그늘이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를 대신해 주었다. 그들은 작은 벽돌모양의 마을에 있는 휴식처를 찾아갔다. 한쪽에는 작은 사원이 있었다. 다른 쪽에는 80톤급의 설화석고 스핑크스와 나뒹구는 깨진 조각의 파편들 그리고 람세스 2세의 석회석상이 있는 탁 트인 지역이었다. 개간지 가장자리에 스핑크스 카페라 불리는 작은 간이매점이 있었다. "멤피스의 전설적인 도시입니다." 셀림이 조용히 말했다. "메노퍼를 의미하는 거군요." 에리카는 그 빈약한 유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멤피스는 그리스 이름이었다. 메노퍼는 고대이집트의 이름이었다. "난 우리 모두를 위해 커피나 차를 사고 싶군요." 에리카는 자신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알고 이렇게 제안하였다. 간이매점으로 걸어가서 에리카는 한때 그 권능을 자랑했던 고대이집트의 초라한 유물들에 대해 미리 공부해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주 실망했을 것이다. 여러 명의 어린 거지소년들이 모조골동품을 가지고 접근하였다. 그들은 이내 셀림과 운전사에 의해 호되게 몰리었다. 그들은 둥근 철제테이블이 있는 작은 베란다로 올라가서 음료를 주문하였다. 남자들은 커피를 시켰다. 에리카는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땀이 얼굴로 비오듯 쏟아지자 가멀은 <엘 아람>지를 손에 들고 차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분명치 않았으나 마침내 그는 마실 게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에리카 일행과 마주치는 걸 피하며 매점 근처의 테이블로 갔다. 커피를 주문한 후 신문을 펼쳐 그 뒤에 몸을 숨겼다. 칼리파는 가멀의 뚱뚱한 상체에 쌍안경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손가락들은 자유롭게 해 두었다. 그는 멤피스 개척지에서 75야드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재빨리 그의 이스라엘제 FN 스나이퍼 총을 꺼냈다. 그는 열린 운전석의 창문에 총구를 올려놓고 차 뒷좌석 깊숙히 낮게 앉아 있었다. 가멀이 차에서 나온 후 칼리파는 그를 자기 시야에 정면으로 들여놓았다. 만일 가멀이 에리카를 향해 갑자기 돌발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칼리파는 즉시 그를 쏠 것이다. 그를 죽이진 않겠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말했듯이 상당히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이다. 에리카는 베란다에서 주위를 휘젓고 다니는 날파리들 때문에 음료를 유쾌하게 마실 수가 없었다. 손짓으론 내쫓기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몇번이나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일행들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이르고는 일어서서 개간지 주변을 배회하였다. 택시로 되돌아가기 전에 에리카는 설화석고 스핑크스를 감상하기 위해 멈춰섰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신비가 얘기될 수 있을지 궁금하였다. 그것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 그건 고왕조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차로 돌아와서 그들은 빽빽한 야자숲이 듬성듬성해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죽 나아갔다. 농경지가 다시 나타났고 관개로를 따라 조류와 수초가 빽빽하였다. 갑자기 파라오 조제의 무덤인 계단식 피라미드가 야자수 행렬 너머로 그 친숙한 윤곽을 드러내었다. 에리카는 짜릿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막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석조건축을 방문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집트학자에게는 이집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측면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축가 임호테프가 피라미드의 시대를 열면서 높이 2백피트에 달하는 여섯 개의 계단을 절묘하게 만들었다. 에리카는 서커스를 보러 가는 어린애마냥 기대감에 벅차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관개로를 통과하기 전에 작은 진흙벽돌로 된 마을을 지나가야 함으로 인해 지체되는 것이 싫었다. 다리를 건너자 농경지가 끊기고 건조한 리비아사막이 시작되었다. 거기엔 변화가 없었다. 일몰이 없었더라면 정오부터 한밤까지 아마 똑같았을 것이다. 길의 다른 쪽에서는 모래와 바위 그리고 가물거리는 열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가 대형 관광버스의 그림자가 비치는 휴식처로 들어서자 에리카는 제일 먼저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셀림은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달려야만 했다. 운전사는 기다리는 동안 환기를 시키기 위해 네 개의 차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칼리파는 가멀의 행동으로 인해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에리카를 무시한 채 그는 피라미드의 담벼락 그늘 속으로 신문을 가지고 걸어갔다. 그는 안에 있는 에리카를 뒤따르는 데 방해조차 되지 않았다. 칼리파는 잠깐동안 그가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의 길인지 생각해 보았다. 가멀의 존재가 어떤 교활한 책략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에리카 곁에 바싹 붙어 있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켓을 벗고 그의 스테치킨 반자동권총을 오른손에 들고 자켓으로 감쌌다. 그때 에리카는 그곳의 유물들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녀가 이집트에 대해 꿈꾸어 오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의 지식으로 5천여년 전부터 있어온 기이한 업적인 공동묘지의 파편들을 충분히 숙지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하루만에 모든 걸 다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점만 건7ㅡㅜ드리고 그녀가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코브라부조와 같은 기대치 못한 것들을 즐기는 데 만족하였다. 셀림은 마침내 그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늘에서 보냈다. 하지만 그녀가 정오쯤 떠나자는 손짓을 해오자 매우 기뻐했다. "여기에 작은 카페가 있답니다." 셀림이 기대에 차서 말했다. "난 귀족들의 무덤을 굉장히 보고 싶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너무 흥분이 되어서 쉬고 싶지가 않았다. "그 식당은 티(Ti)와 세라피움의 석실 문묘 바로 옆에 있습니다." 셀림이 말했다. 에리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세라피움은 고대이집트 유물 중 가장 기이한 것 중 하나였다. 마피스 황소의 미라는 지하묘지 안에 왕의 품위에나 걸맞게 위풍당당히 매장되어 있었다. 세라피움의 단단한 바위까지 손으로 조각한 것은 대단한 노력이었다. 에리카는 인간의 묘지 건축에 투자한 노력은 십분 이해했지만 황소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피스 황소의 묘에 관련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의문점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난 꼭 세라피움에 가겠어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뚱뚱한 가멀은 더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카이로에서조차도 그는 대낮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 정오의 사카라는 거의 한계를 초월하는 곳이었다. 그의 운전사가 에리카의 택시를 뒤쫓아갈 때 살아남을 방법을 연구하였다. 아마도 도중에 그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녀가 카이로에 돌아오려 할 때까지 운전사에게 그녀의 뒤를 쫓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가던 에리카의 택시가 멈추더니 사카라의 식당에 주차하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가멀은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방문했던 곳임을 기억해 냈다. 황소를 위한 어두운 지하동굴을 지날 때 너무도 겁에 질렸었다. 비록 그렇긴 했지만 그 동굴이 아주 시원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긴 세라피움이 아닌가요?" 운전사의 어깨를 툭 치며 가멀이 물었다. "저기 오른쪽이 맞습니다." 통로의 역할을 하는 도랑의 초입을 가리키며 운전사가 말했다. 가멀은 차 밖으로 나와서 입구쪽으로 이어진 일련의 스핑크스를 관찰하고 있는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가멀은 그가 어떻게 해야 시원할지를 깨달았다. 게다가 수년이 지난후 세라피움을 다시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칼리파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는 그의 번들거리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그는 가멀이 그가 가장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추어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너무도 침착하였다. 만일 그가 그 남자의 궁극적인 의도에 대해 확신한다면, 그를 쏘아서 이본 드 마르그에게 산 채로 데려다 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멀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상황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태로웠다. 그는 자동총의 원통에 소음장치를 부착하고 가멀이 지하입구로 연결되는 트렌치에 들어서는 걸 본 다음 차에서 내렸다.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건 세라피움이었다. 설화석고 스핑크스를 행복한 표정으로 카메라에 담고 있는 에리카를 뒤돌아보며 칼리파는 가멀이 왜 세라피움에 먼저 들어갔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깨달았다. 어둡고 둥근 천장의 전시실 중 한 곳 혹은 좁은 통로 중 한 곳에서 가멀은 독사처럼 기다리다가 예기치 못한 데서 공격을 해 올 예정인 것이다. 세라피움은 암살 장소로서는 완벽한 곳이었다. 수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칼리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역시 에리카 바론을 앞서 걸어들어가 가멀이 숨은 장소를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도 위험하였다. 그는 마침내 에리카와 함께 들어가서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다. 에리카는 입구로 다가가 경사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녀는 동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실 밀폐된 공간을 싫어하였다. 세라피움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녀는 눅눅한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싹하는 전율로 인해 대퇴부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야위고 뾰족한 더러운 얼굴의 아랍인이 돈을 받고 있었다. 세라피움은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음침한 전시장에 들어서자 에리카는 고대이집트 문화가 시대를 흘러오면서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그 신비스러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통로는 신비로운 사상의 무시무시한 힘을 과시하며 지옥으로 가는 터널처럼 보였다. 셀림의 뒤를 쫓아 그녀는 기묘한 환경으로 더욱더 깊숙히 들어갔다. 그들은 불규칙적이고 조악한 벽돌, 낮은 출력의 전구로 희미하게 밝혀지고 있는 끝없이 긴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전구들 사이에서 어두운 그림자들이 시야를 흐리게 하였다. 다른 여행자들이 그 음침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곤 하였다. 소리들은 텅빈 공간을 채우며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중앙 복도로 가는 오른쪽 모퉁이에서 전시장이 분리되었고, 그들은 각각 상형문자로 뒤덮인 거대한 검은 석관들을 지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부속전시관에는 조명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에리카는 이미 충분히 보았다고 느꼈으나 셀림은 가장 훌륭한 석관은 나무사다리가 있는 저 끝에 있는 것이라고 고집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안에 있는 조각도 볼 수 있었다. 마지 못해 에리카는 셀림의 뒤를 계속 따라갔다. 마침내 그들은 문제의 전시관에 도착하였고 셀림은 에리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껴섰다. 그녀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의 난간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칼리파는 에리카의 뒤를 바싹 쫓으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는 반자동권총의 안전핀을 끄르고 그것을 다시 자켓 속에 있는 오른손에 쥐었다. 칼리파는 여행객들이 갑자기 어둠속에서 나타날 때 순간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 그가 마지막 전시관의 모퉁이를 돌 때, 바로 15피트 앞에 있는 에리카를 보았다. 칼리파는 가멀을 본 순간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다. 에리카는 매우 윤이 나는 거대한 석관의 측면을 따라 만들어진 짧은 나무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가멀은 그녀가 올라갈 때 꼭대기에서 에리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가장자리에서부터 뒤로 한발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칼리파로서는 유감스럽게도 에리카는 그와 가멀 사이에서 그의 시야를 방해하고 재빠른 사격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몹시 당황해서 앞으로 뛰쳐나간 칼리파는 셀림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는 에리카를 주저앉히고 깜짝 놀란 가멀을 향해 손을 뻗치면서 짧은 계단을 힘껏 올라갔다. 강한 불꽃이 칼리파의 숨겨진 권총에서 뿜어나와 심장을 관통해 가멀의 가슴에 치명적으로 박혔다. 가멀의 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작은 몸은 고통과 혼란으로 일그러졌고 비틀거리다가 에리카에게 넘어졌다. 칼리파는 혁대에서 칼을 뽑아들고는 나무계단을 뛰어넘었다. 셀림은 도망가기 전에 비명을 질렀다. 층계참에 있던 여행객들은 아직도 무슨 일이 생긴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칼리파는 본선인 전기줄을 향해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충격에 대비한 채 이를 악물고 전선을 잘라 세라피움 전체를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카이로, 오후 12시 30분 스테파노스 마큘리스는 자신과 에반젤로스 파파리스를 위해 각각 스카치를 주문하였다. 두 남자는 목이 파인 니트 셔츠를 입고 메리디언호텔의 라 파리지엔느 라운지의 칸막이가 쳐진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스테파노스는 불쾌하고 신경질적인 상태였고, 에반젤로스는 보스이 기질을 알기에 침묵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프랑스 녀석" 스테파노스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바로 내려 오겠다고 해 놓구선 20분이나 지났어." 에반젤로스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스테파노스의 화를 부채질하는 것밖에 되지 않음을 잘 알기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오른쪽 부츠 상단의 다리에 매놓은 작은 권총을 바로잡았다. 에반젤로스는 상당히 큰 체격에 억세 보이는 남자로, 특히 이마는 그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빼면 네안데르탈인처럼 보이게 했다. 마침내 이본 드 마르그가 소형 서류가방을 들고 문에 나타났다. 그는 에스컷(스카프 모양의 넥타이)에다 푸른 블레이저를 입고 있었고 라울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이 부자놈들은 항상 폴로게임을 하러 오는 것처럼 보인단 말야." 스테파노스가 빈정대며 말했다. 그는 이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에반젤로스는 오른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테이블을 약간 밀었다. 이본이 그들을 발견하고 걸어왔다. 그는 스테파노스와 악수를 하고 앉기 전에 라울을 소개받았다. "비행기 여행은 어땠습니까?" 이본이 주문을 하자마자 매우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의 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말 낭비할 필요 없습니다, 스테파노스." 이본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어쨌든 난 당신이 압둘 함디를 죽였는지 알고 싶소." "만일 내가 함디를 죽였다면 이 지옥같은 곳에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스테파노스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는 일생동안 일할 필요가 없는 이본 같은 부유한 부류를 경멸하였다. 스테파노스 같은 사람에게는 침묵이 훨씬 유용하리라 믿으며 이본은 새 골로아 한 갑을 꺼내 그 중 한 개비를 꺼냈다. 그는 사람들에게 권유했지만 에반젤로스만이 흡연자였다. 그는 담배에 손을 뻗었지만 이본이 에반젤로스의 털 많고 근육질인 팔뚝에 있는 문신을 보느라 손에 그대로 담배를 쥐고 있어서 애를 먹었다. '하와이'라고 쓰인 훌라 댄서였다. 마침내 에반젤로스가 담배를 집어들자 이본이 물었다. "하와이에 자주 가십니까?" "난 어릴 적에 화물기에서 일했습니다." 에반젤로스가 말했다. 그는 테이블의 작은 초에서 담배불을 붙인 후 뒤로 물러나 앉았다. 이본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스테파노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말을 시작하기 전에 이본은 조심스레 금으로 된 라이터로 담배불을 붙였다. "아니오." 이본이 말했다. "아니오, 난 당신이 함디를 죽였다면 카이로에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당신이 우려하는 게 있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스테파노스, 난 뭘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여기에 매우 빨리 왔습니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게다가 난 함디의 살인자가 카이로 출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스테파노스가 화가 나 고함을 질렀다. "자, 이게 맞나 보시오. 당신은 그 살인자들이 카이로 출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정보로 당신은 그들이 분명 아테네 출신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당신의 추론인가요?" 스테파노스가 라울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당신은 이런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죠?"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라울의 검은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의 손은 무릎에 단정히 내려져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본, 당신을 실망시켜서 미안합니다만, 압둘 함디의 살인자는 다른 데서 찾아보셔야 할 것 같군요. 난 아닙니다."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매우 유감이군요." 이본이 말했다. "질문할 게 아주 많습니다. 당신은 누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예측이 안 되는군요."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그러나 함디는 스스로 많은 적을 만들며 산 것 같습니다. 함디의 편지를 내가 좀 볼 수 있을까요?" 이본이 테이블 위에 서류가방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걸쇠에 얹었다. 그러고는 잠깐 멈추었다. "한 가지만 더, 혹시 세티 1세 상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유감스럽게도 모릅니다." 서류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난 그 상을 원합니다." 이본이 말했다. "만약 내가 그 상에 대해 듣는 게 있으면 즉시 당신에게 알려드리죠."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당신은 내게 전혀 휴스턴 상을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소." 이본이 스테파노스를 조심스레 쳐다보며 말했다. 서류가방에서 눈을 뗀 스테파노스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변했다. "내 휴스턴 상과 관련된 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죠?" "내가 아는 걸 그저 말한 것뿐이오." 이본이 말했다. "당신은 그걸 함디의 편지를 통해 알았나요?" 스테파노스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대답 대신 이본은 가방의 걸쇠를 풀어 테이블 위에 함디의 편지를 내 놓았다. 스테파노스가 편지를 뒤적이는 동안 뒤로 기대서 그의 페르노(프랑스 원산의 술)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그는 압둘 함디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를 옆으로 분류시켰다. "이게 전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게 우리가 발견한 전부입니다." 이본이 주의를 일행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당신은 그곳을 구석구석 뒤졌습니까?" 스테파노스가 물었다. 이본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라울을 돌아보았다. "아주 샅샅이요." 라울이 말했다. "다른 게 더 있어야만 합니다."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난 그 노인이 허세를 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현금 5천달러를 원하거나 영국에 보고서를 제출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테파노스가 다시 천천히 편지를 뒤지며 말했다. "당신이 추측하기에 세티 1세 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까?" 이본이 다시 페르노를 마시며 말했다. "잘 모르겠소." 로스엔젤레스의 중개인으로부터 함디에게 온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그러나 만일 도움이 된다면, 그건 아직 여기 이집트에 있다고 당신에게 자신할 수 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스테파노스는 급하게 편지를 읽고 있었다. 라울과 에반젤로스는 음료를 마시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본 역시 세티 상이 아직 이집트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앉아 있는 곳에서 저수지가 보였다. 그 너머는 광활한 나일강이었다. 강 한가운데에서는 나일강의 분수가 공중을 향해 물을 수직으로 쏘아올리고 있었다. 여러 갈래의 작은 무지개가 거대한 수면의 분출과 함께 나타났다. 이본은 에리카 바론을 생각하였고, 칼리파 카일이 라울이 그에게 말한대로 훌륭하길 바랐다. 만일 스테파노스가 함디를 죽였고 에리카에게 어떤 행동을 취한다면, 칼리파는 제 몫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 미국인 여자는 어때요?" 마치 이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그녀를 만나고 싶군요." "그녀는 힐튼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일들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녀를 제발 부드럽게 다루어 주세요. 그녀는 세티 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입니다." "그 상은 이제 내 관심 밖입니다." 스테파노스가 편지를 밀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난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그리고 그녀를 기술적으로 다룰 것을 약속드립니다. 말해 보시오. 당신은 압둘 함디에 대해 뭘 알고 있습니까?" "그리 많지 않아요. 그는 원래 룩소르 사람인데 새 골동품점을 내기 위해 카이로에 왔습니다. 그의 아들은 룩소르에서 여전히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만나봤나요?" 스테파노스가 말했다. "아니오." 이본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는 스테파노스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 "만일 당신이 그 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면, 내게 즉시 연락하는 걸 잊지 마시오. 난 그걸 살 수가 있습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본이 돌아섰다. 라울도 일어서서 뒤를 따랐다. "당신은 그를 믿습니까." 밖으로 나오자 라울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모르겠군." 이본이 계속 걸으며 말했다. "내가 그를 믿는 것과 신뢰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야. 그는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 중 최고의 기회주의자야. 나는 스테파노스가 에리카를 만날 때, 칼리파가 지극히 신중했으면 좋겠어. 만일 스테파노스가 그녀를 다치게 한다면 그를 쏴도 좋아." 사카라 마을, 오후 1시 48분 방안에는 파리 한 마리가 두 창문 사이를 계속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특히 창문에 부딪힐 때마다 그렇지 않으면 조용할 방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에리카는 방을 둘러보았다. 벽과 천장은 온통 하얗게 칠이 되어 있었다. 유일한 장식이라곤 앤워 사다트의 웃고 있는 초상화뿐이었다. 하나 있는 나무문은 닫혀 있었다. 에리카는 등받이가 곧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는 낡은 전구가 다 닳은 검은 철사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문 옆에는 작은 금속테이블과 그녀가 앉아 있는 것과 비슷한 또 다른 의자가 있었다. 에리카는 지저분해 보였다. 바지는 오른쪽 무릎이 찢겨져 있었고 무릎은 타박상을 입고 있었다. 바싹 마른 혈흔이 베이지색 블라우스의 등부분에 붙어 있었다. 손을 잡고서, 그녀는 몸의 떨림이 좀 줄어들었는지 알아보려 했다.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눈을 크게 뜨려 했지만 구역질이 났다. 졸음이 밀려오는 걸 느꼈으나 눈을 꼭 감고 이겨낼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는 여전히 충격상태에 있었지만 좀더 분명하게 생각해 보려 하였다. 이윽고 그녀가 사카라마을의 경찰서에 끌려왔다는 걸 알아 냈다. 세라피움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려 했을 때 손이 축축한 걸 깨닫고 비벼댔다. 가멀이 처음 그녀에게 쓰러졌을 때, 그녀는 자신이 움푹한 곳에 빠졌다고 생각하였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나무계단이 너무 좁아서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방이 어둠 속에 파묻혀서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등 뒤로 따뜻하고 끈끈한 액체가 흐르는 걸 느꼈다. 곧바로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등에서 죽어 있던 남자로부터 나온 피라는 걸 알았다. 에리카는 또 한차례 구토증을 느꼈고, 그때 문이 열렸다. 종전에 부러진 연필을 가지고 조서를 꾸미기 위해 30분가량 머물렀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지만 우아한 몸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혁대의 가죽케이스에 든 낡은 권총이 그녀를 다시금 불안하게 하였다. 그녀는 이미 이본이 염려하던 관료들의 혼란을 경험하였다. 분명히 그녀는 결백한 피해자라기보다는 용의자로 몰려 있었다. 그 권위주의자들이 나타난 순간부터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두 경찰이 증거물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을 해서 그 사실이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에리카는 여권을 압수당하고 오븐 속 같이 뜨거운 트럭에 갇혀 사카라로 이동되어 왔다. 그녀는 미국인 변호사를 부를 수 있는지 여러 번 물었지만 차례로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가 관련되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하였다. 에리카는 그 허름한 경찰서를 통과해 구식권총을 차고 있는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세라푸윰에서 마을까지 데리고 온 트럭이 엔진을 툴툴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녀의 여권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그는 대답 대신에 그녀를 그 안으로 얼른 밀어넣었다. 문이 닫히더니 잠겼다. 앤워 셀림은 이미 나무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에리카는 세라피윰에서의 대혼란 이후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만난 게 너무나 반가워 모든 게 정상이었다는 걸 말해 달라고 애원하며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가 안에 밀려들어오자 셀림은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난 당신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소."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가 말했다. "내가, 이상하다구요?" 그녀는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진 걸 보고 뒤로 움찔하며 물러섰다. 트럭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자 그들 두 승객은 꼭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에리카는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상하게 행동했어." 셀림이 말했다. "특히 박물관에서. 당신은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같아 보였고 난 그들에게 그걸 말할 거요." "난 ......" 에리카는 말을 하려 했지만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머리를 감쌌다. 그녀는 함디의 살인에 대해 신고를 했어야만 했다. 셀림은 그녀를 보다가 트럭바닥에 침을 탁 뱉았다. 카이로, 오후 3시 10분 에리카는 차 밖으로 나와 그녀가 엘 타흐러 광장 구석에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힐튼호텔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는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할 수 있기를 바랐다. 쇠고랑을 찬 셀림을 보자 두려움이 더욱 커졌고 그녀가 구속이 될 건지가 궁금해졌다. 그녀와 셀림은 사람들로 가득 찬 중앙비밀경찰국 안으로 급히 밀려갔다. 그 다음에 둘은 갈라졌다. 에리카는 지문을 채취당하고 사진을 찍힌 뒤 마침내 창문 없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녀의 호위자는 평평한 나무탁자에서 조서를 읽고 있는 아랍인에게 깍듯이 인사하였다.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오른 손을 들어 호위자를 내보냈고 이내 조용히 문이 닫혔다. 에리카는 서 있었고 그가 조서를 넘길 때를 제외하고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형광등 불빛이 그의 대머리를 잘 닦인 사과마냥 빛나게 하였다. 그의 입술은 얇았고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달싹였다. 그는 깃을 빳빳이 세운 군복을 한치의 틈도 없이 차려 입었다. 검은 가죽끈이 왼쪽 어깨에 있는 견장으로부터 총집 속의 자동권총을 지탱해 주는 가죽혁대에 이르기까지 죽 뻗어 있었다. 그 남자가 조서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에리카는 서류에 부착되어 있는 미국 여권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합리적인 사람과 얘기를 나누게 되기를 희망했다. "앉으시죠, 바론 양." 여전히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 경찰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칼날처럼 깨끗이 면도한 구레나룻 자국이 있었다. 그의 긴 코는 맨 끝에서 휘었다. 에리카는 재빨리 맞은편 나무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밑으로 그의 번쩍번쩍 윤이 나는 부츠 외에 그녀의 큰 핸드백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게 그걸 보는 마지막이 될까봐 걱정되었다. 경찰관은 서류를 내려놓고 여권을 집어들었다. 그는 여권의 사진이 있는 쪽을 펼쳐 사진과 에리카를 여러번 눈을 앞뒤로 굴리며 비교하였다. 그런 다음 손을 뻗어 전화기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난 리유테넌 이스칸더라고 합니다." 테이블 위에 양손을 맞잡으며 그 경찰관이 말했다. 그는 에리카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세라피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죠?" "잘 모르겠습니다." 에리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난 석관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날 넘어뜨렸어요. 그리고는 내 위로 한 사람이 쓰러졌고 전기가 모두 나갔습니다." "당신을 쓰러뜨린 사람을 봤나요?" 그가 약간 영국식 억양으로 말했다. "아니오." 에리카가 대답했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졌어요." "그 피해자는 사살되었습니다. 그 때 총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못 들었습니다. 그저 누가 융단을 치는 것 같은 소리는 몇번 들렸지만 총소리는 아니었어요." 리유테넌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뭔가를 적었다. "그리곤 무슨 일이 일어났죠?" "난, 내 위로 쓰러진 사람으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에리카는 그 끔찍한 기분을 다시 기억해내며 말했다. "내 생각으론 어떤 소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아요. 누군가 촛불을 가져온 게 기억납니다. 그들이 나를 도와 주었고, 그 사람이 죽었다고 누군가 말했어요." "그게 전부인가요?" "경비원이 왔고 이내 경찰이 도착했죠." "당신은 총에 맞은 사람을 보았습니까?" "조금요. 하지만 쳐다보기가 힘들었어요." "전에 그를 본 적이 있나요?" "아니오." 에리카가 말했다. 이스칸더는 손을 아래로 뻗어 큰 핸드백을 들어 에리카에게 그걸 밀었다. "없어진 게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에리카는 가방을 확인해 보았다. 카메라, 여행안내서, 지갑 - 모든 게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녀는 돈을 세어보고 여행자수표를 확인하였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것 같군요." "그러면 당신은 강도당한 건 아니군요."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당신은 이집트학자로서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은 그 남자가 문화재관리국 소속이라는 걸 아시면 놀라겠군요?" 이스칸더의 차가운 눈을 피해, 에리카는 자기 손이 몹시 떨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으며 손을 내려다 보았다. 비록 이스칸더의 질문에 신속히 대답을 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조금 전에 한 질문이 이 조사에서 중요한, 아마 가장 중요한 질문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아흐메드 카잔을 기억해 냈다. 그는 문화재관리국 국장이었다. 어쩌면 그가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문화재관리국에서 일한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어느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난 분명히 그를 모릅니다." "당신은 왜 세라피윰에 간 거죠?" 리유테넌 이스칸더가 물었다. 차 안에서 셀림이 힐난조로 한 말을 기억하고는 대답 대신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용한 안내인이 추천했습니다." 에리카가 대답했다. 서류를 펼쳐 리유테넌은 다시 뭔가를 기입하였다. "하나 물어도 될까요?" 에리카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물론이죠." "혹시 아흐메드 카잔을 아시나요?" "그럼요." 그가 말했다. "당신은 그를 아시나요?" "예, 난 그와 많은 얘길 나누고 싶습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그는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며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카이로, 오후 4시 05분 걷는 건 끝이 없어 보였다. 복도는 원근법적으로 죽 뻗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실크정장에서 부터 너덜한 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옷을 입은 이집트인들이 문 앞 혹은 사무실에서 흩어져 줄을 지어 있었다. 몇몇은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에리카와 그녀의 호위자는 그들을 딛고 지나가야만 했다. 공기는 담배연기, 마늘냄새 그리고 양들의 느끼한 냄새로 탁하였다. 에리카가 문화재관리국의 외부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전날 밤에 수십여 개의 책상과 구형타자기가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차이점이라면 이제 그것들이 겉으로 바쁜 척하는 시공무원들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잠시 기다린 후, 에리카는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이 가동되어서 그 시원함이 기분을 좋게 하였다. 아흐메드는 창 쪽으로 향해 있는 책상 뒤에 서 있었다. 힐튼호텔과 새 인터콘티넨털호텔의 윤곽 사이로 나일강이 일부분 보였다. 그는 에리카가 들어오자 돌아섰다. 그녀는 그녀에게 닥친 문제를 강물처럼 그에게 쏟아붓고 도움을 간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그녀를 붙잡아 맸다. 그의 얼굴엔 슬픔이 어려있었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고, 그의 올이 굵은 검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그의 손가락이 반복적으로 그의 머리를 쓸어내린 것 같았다. "괜찮은가요?" 에리카가 정말 걱정이 돼서 물었다. "예." 아흐메드가 느리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듬거리고 있었으나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난 우리 부서에서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소." 그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리카는 그저 그의 감정을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책상을 돌아 걸어가서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아흐메드가 눈을 떴다. "미안합니다." 그가 말했다. "앉으시죠." 에리카는 그에 따랐다. "난 세라피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간단히 보고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직접 듣고 싶군요." 에리카는 처음부터 얘기를 시작하였다. 모든 걸 말하게 되길 원했던 그녀는 심지어 박물관에서 그녀를 긴장하게 했던 그 남자에 대해서도 말했다. 아흐메드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는 절대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그때서야 말을 하였다. "총에 맞은 그 남자는 가멀 이브라힘이었고 여기 문화재관리국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훌륭했죠." 아흐메드의 눈은 눈물로 반짝거렸다. 이처럼 강해 보이는 남자가 그녀가 알았던 미국인들과는 달리 그렇게 마음 쓰는 걸 보며, 에리카는 자신의 문제조차 망각하였다. 감정을 노출시키는 이런 능력은 상당히 매력적인 성격의 하나였다. 아흐메드는 말을 잇기 전에 고개를 숙여 자신을 진정시켰다. "아침나절 중 가멀을 본 적이 있나요?" "못 본 것 같아요." 에리카가 말했지만 확신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멤피스의 간이매점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분명하진 않아요." 아흐메드는 손가락으로 그의 굵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얘기해 보세요." 그가 말했다. "가멀은 당신이 계단을 오르려고 했을 때 이미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요." 에리카가 말했다. "난 그게 이상합니다." 아흐메드가 말했다. "왜죠?" 에리카가 물었다. 아흐메드는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저 생각이에요. 별 의미는 없습니다." 그가 둘러대듯이 말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돼요, 카잔 씨. 그리고 난 당신이 내가 그 일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믿어주었으면 해요. 정말 아무것도. 그리고 난 미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군요." "당신은 미대사관에 전화를 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아무 도움이 않될 겁니다." "내 생각에, 난 도움이 필요해요." "바론 양, 유감스럽지만 오늘 하루 불편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이건 우리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호텔로 돌아가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잡혀 있는 게 아닌가요?" 에리카는 방금 들은 말을 거의 믿기가 힘들어서 이렇게 물어 보았다. "물론이죠." 아흐메드가 말했다. "그건 참 좋은 소식이군요. 그렇지만 난 당신에게 얘기할 것이 하나 더 있어요. 지난 밤에 당신에게 얘기했어야 했지만 두려웠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난 매우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이틀을 보냈습니다. 어느게 더 나쁜 상황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군요. 믿기 힘들겠지만, 어제 오후에 우연히 다른 살인을 목격했습니다." 에리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난 압둘 함디라는 노인이 3명의 남자에 의해 살해되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아흐메드의 의자가 바닥에 쿵 쓰러졌다. 그는 뒤로 기대고 있었다. "당신은 그 얼굴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의 얼굴엔 놀라움과 걱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둘은 기억해요. 하지만 한 명은 모릅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당신이 본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요. 하지만 자신할 순 없어요. 지난 밤 당신에게 얘기 안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난 정말 두려웠어요." "이해합니다." 아흐메드가 말했다. "걱정마세요. 제가 그걸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심문이 더 있을 겁니다." "또 심문......" 에리카가 절망하여 말했다. "사실 난 가능하면 빨리 이집트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번 여행은 내가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미안해요. 바론 양." 에리카가 지난 밤의 기억으로부터 평정을 되찾자 아흐메드가 말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당신은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혹은 당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까지는 허락이 안 될 겁니다. 당신이 이런 문제들과 연관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단지 카이로를 떠나려고 한다면 제게 알려 주십시오. 또 당신은 미대사관과 이 문제를 상의 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국내문제에는 그다지 발언권이 없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이 나라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군요." 에리카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떠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말하기 곤란하군요. 아마도 일주일쯤. 힘드시겠지만 여기에서의 경험을 우연의 일치로 간주해버리세요. 내 생각에 당신은 이집트를 즐기려고 노력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아흐메드가 말을 잇기 전에 연필을 만지작거렸다. "정부대표의 자격으로 당신에게 오늘 저녁을 대접하며 이집트가 얼마나 유쾌한 곳인지를 보여드리고 싶은데요." "고맙습니다." 에리카는 진심으로 그의 제안에 감사하였다. "하지만 난 이미 이본 드 마르그와 약속이 있습니다." "오, 알았어요." 아흐메드가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자, 정부를 대신해 제 용서를 받아주십시오. 당신을 호텔로 모셔다 드리고 보호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는 일어서서 책상을 가로질러 에리카와 악수를 하였다. 그의 악력은 기분좋을 정도로 강하고 단단했다. 에리카는 방에서 걸어나오면서 대화가 갑자기 그렇게 끝나고 자유로운 몸이 된 게 얼떨떨했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아흐메드는 비서실장인 자키 리아드를 방으로 불렀다. 리아드는 이 부서의 15년 선배지만, 아흐메드의 초고속 승진에 밀렸었다. 비록 지적이고 약삭빠르긴 하지만, 그의 외형은 아흐메드와 정반대였다. 오만해 보이는 외모에 뚱뚱한 편이었고, 그의 머리는 양처럼 검고 강하게 곱슬거렸다. 아흐메드는 그가 앉자 돌아서서 거대한 이집트지도로 걸어갔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소. 자키?" "전혀요." 자키는 에어컨이 가동됨에도 불구하고 연신 이마에 흐르고 있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는 아흐메드가 압박받는 걸 즐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멀이 왜 살해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맞은편 손바닥에 주먹을 쾅 부딪히며 아흐메드가 말했다. "오, 이런 애 딸린 젊은 사람을...... 그이 죽음이 에리카 바론 양의 미행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글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키가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의도된 것이었다. 자키는 불이 붙지 않은 파이프를 입에 물었는데 재가 가슴에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흐메드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머리를 비벼댔다. 그러고나서 천천히 그의 손은 얼굴로 내려와 그의 훌륭한 구레나룻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그가 고개를 돌려 큰 지도를 다시 보았다. "난 사카라에서 모종의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소. 아마도 몇몇 새 묘가 도굴되었을 겁니다." 그는 뒤로 걸어가 책상 뒤에 앉았다. "더욱더 이상한 건 입국처 관리에 따르면 스테파노스 마큘리스가 오늘 카이로에 도착했다는 것이오." 아흐메드가 몸을 앞으로 내밀어 자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해 주시오, 경찰이 압둘 함디에 대해 뭐라고 보고를 하였소." "거의 없습니다. 언뜻 보기에 그는 강도당했습니다. 경찰은 최근 그 노인이 룩소르에서 카이로로 그의 골동품 업을 옮기면서 상당히 많은 부를 축적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매우 가치 있는 골동품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좀 지녔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당한 것 같습니다." "그 돈이 어디서 생긴건지 알아보았나요?" 아흐메드가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인에겐 룩소르에서 골동품상을 하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경찰이 아들에게 그 사건을 알렸소?" "제가 알기론 아닙니다. 그 사건은 경찰에게는 너무 자연스런 사건의 하나입니다. 사실 그들은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난 관심이 있소." 아흐메드가 말했다. "오늘밤 룩소르로 가는 항공편을 예약해 주시오. 아침에 그의 아들을 방문해야 겠어요. 또한 사카라에 추가경비원을 보내도록 하시오." "지금이 카이로를 떠날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자키가 파이프 대로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이 얘기했듯, 스테파노스가 카이로에 있다는 건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자키. 하지만 내 생각에 난 여길 떠나 나일강변의 내 집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쉴 필요가 있어요. 불쌍한 가멀에 대한 크나큰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렇게 기분이 우울할 때, 룩소르야 말로 정서적 위안처입니다." "그리고 미국여자, 에리카 바론은 어때요?" 자키는 스테인레스 스틸 라이터로 그의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괜찮소. 겁을 먹고 있긴 하지만 떠날 때쯤엔 진정되어 보였소. 만일 내가 24시간 동안 2명의 살인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 피해자 중 하나가 내 위로 쓰러졌다면 더더욱." 자키는 말을 하기 전에 그의 파이프를 여러 번 깊이 빨았다. "이상하군요, 아흐메드. 난 에리카 바론 양의 상태에 대해 물은게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그녀를 미행하길 원하는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아니오." 아흐메드는 화가 나서 말했다. "오늘 밤은 아니오. 그녀는 이본과 함께 있을 거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흐메드는 당황하였다. 그의 기분은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당신답지 않군요, 아흐메드." 자키가 자기 상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아흐메드를 수년 동안 알아왔지만, 여자에게 관심을 두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제, 갑자기 아흐메드가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흐메드에게 잠재된 유약함을 발견한 자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아흐메드의 완벽한 기록을 증오하고 있었다. "아마도 당신은 며칠 동안 룩소르에 가 있는 게 좋겠군요. 제가 카이로에서 우리 관할하에 있는 모든 걸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직접 사카라를 조사해 보겠습니다." 카이로, 오후 5시 35분 정부 차가 힐튼호텔로 들어설 때에도 에리카는 여전히 그녀가 풀려난 걸 완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가 미처 정차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는 마치 운전사가 그의 석방에 도움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힐튼호텔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다시 로비는 북적거렸다. 오후 국제항공편 때문에 승객들은 끊임없는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여행가방 위에 않아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거나 무언가 허둥지둥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에리카는 문득 그녀의 옷차림이 얼마나 기이한지 깨달았다. 더위에 시달린 탓에 흠뻑 땀에 젖어 지저분하였다. 커다란 혈흔이 여전히 등뒤에 남아 있었고, 그녀의 면바지는 오른쪽 무릎이 터져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아주 괴상한 차림새였다. 만일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다른 길이 있었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중앙의 크리스탈 샹들리에 밑으로 깔린 빨갛고 파란 융단 위를 걸어 똑바로 지나가야만 했다. 그건 주목받기에 충분하였고, 이내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예약부에 있던 남자는 펜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쳐다보았다. 에리카는 엘레베이터를 타기 위해 걸음을 빨리 옮겼다. 그녀는 만일 누군가 그녀를 막기 위해 오다가 등뒤에 핏자국을 보게되는 게 두려워 얼른 단추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단추를 여러번 눌렀지만 층 표시기는 야속하게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맨에게 8층을 요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용히 끄덕였다.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닫히기도 전에 손 하나가 엘리베이터 맨에게 다시 열기를 간청하며 납으로 된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에리카는 뒤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저......" 카우보이 모자에 부츠를 신은 키 큰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에리카 바론 양인가요?" 에리카의 입은 벌어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난 휴스턴에서 온 제프리 죤 라이스입니다. 당신은 에리카 바론 양이시죠?" 그는 문이 닫히는 걸 계속 막으며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맨은 돌조각처럼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죄 지은 아이처럼 주눅이 든 채 에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바론 양." 제프리 라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에리카는 자동적으로 손을 올렸다. 제프리 라이스는 손을 과장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바론 양, 정말 반갑군요. 제 아내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뺄 틈도 주지 않고 제프리 라이스는 에리카를 엘리베이터 밖으로 잡아당겼다. 그녀는 가방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리자 핸드백을 잡기 위해 몸을 앞으로 굽혔다. "우린 당신을 몇 시간이나 기다렸습니다." 라이스는 에리카를 로비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네다섯 보쯤 걷다가 그녀는 겨우 손을 뺄 수가 있었다. "라이스 씨." 그녀가 멈추며 말했다. "당신 부인을 만나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하죠. 난 오늘 너무도 힘든 하루를 보냈어요." "당신은 좀 후줄근해 보이긴 합니다만, 한잔만 같이 하도록 하죠." 그는 다시 손을 뻗어 에리카의 팔목을 잡았다. "라이스 씨." 에리카가 날카롭게 말했다. "제발요, 우린 당신을 만나려고 지구의 반을 달려왔습니다." 에리카는 제프리 라이스의 햇볕에 그을려 검었지만 깨끗하게 면도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라이스 씨, 무슨 말이죠?" "말한 대로입니다. 내 아내와 난 당신을 보기 위해 휴스턴에서 밤새 날아왔습니다. 다행히 난 내 전용기가 있죠. 당신은 단지 우리와 한잔 하면 되는 겁니다." 갑자기 그 이름이 생각났다. 제프리 라이스는 휴스턴에 있는 세티 1세 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밤 늦게 로리박사와 통화하면서 들었던 그 이름을 기억해 낸 것이다. "당신은 휴스턴에서 왔습니까?" "그래요. 날아서 몇 시간 전에 도착했죠. 자 이제 이리와서 내 아내 프리실라를 만나보세요." 에리카는 프리실라 라이스를 소개받기 위해 로비로 되돌아 가기로 했다. 그녀는 목과 어깨가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수많은 샹들리에 빛과 어울려 절묘한 효과를 내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한 전형적인 남부미인이었다. 그녀의 남부억양은 남편보다 심했다. 제프리 라이스는 그의 아내와 에리카를 호텔라운지로 안내했다. 그의 예의바른 태도와 큰 목소리로 인해 서비스는 신속하였다. 특히 그가 이집트화로 1파운드 지폐를 건네주자 더더욱 그랬다. 칵테일라운지의 침침한 조명 아래서 에리카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구석자리로 가 앉았는데, 거기서는 에리카의 찢기고 더렵혀진 옷이 보이지 않았다. 제프리 라이스는 자신과 아내를 위해 스트레이트 버번을 주문하였고 에리카에게도 보드카와 토닉을 시켜주었다. 그녀는 마음이 좀 누그러지는 걸 느꼈고, 심지어 관습에 따른 그들의 경험에 대한 텍사스의 이야기에 웃기조차 하였다. 에리카는 보드카와 토닉을 한 잔 더 했다. "자, 이제 사업문제로 넘어가서." 제프리 라이스가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 파티를 분명 망치고 싶진 않지만, 우린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당신이 파라오 세티 1세의 상을 봤다던데요." 에리카는 라이스의 태도가 아주 극적으로 변하는 걸 느꼈다. 그는 놀기 잘하는 텍사스식의 멋진 외양 이면에 약삭빠른 사업가 기질을 감추고 있었다. "로리 박사 얘기로는 당신이 내가 가진 상에 대한 사진, 특히 바닥의 상형문자에 대한 사진을 보고싶어 한다던데요. 바로 여기 몇 장 있습니다." 제프리 라이스는 자켓의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공중에 똑바로 들어올렸다. "자, 만일 당신이 로리 박사에게 말했던 상을 어디서 봤는지 말해준다면 이 사진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난 내 상을 휴스턴의 시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상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건 그리 특별한 게 못될 겁니다. 다시 말해 난 당신이 본 그 상을 사고 싶습니다. 편법으로요. 사실, 내가 그걸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에게 만 달러를 줄 생각입니다. 당신을 포함해서!" 술잔을 내려놓고 에리카는 제프리 라이스를 쳐다보았다. 카이로의 처절한 가난을 본 후, 에리카는 여기서 만 달러라면 뉴욕에서 10억의 효과를 낼 거라는 걸 알았다. 카이로의 지하세계에서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만들어낼 것이다. 압둘 함디의 죽음이 그 상과 관련돼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그저 정보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만 달러는 엄청난 희생을 야기할 것이다. 너무도 끔찍한 발상이었다. 에리카는 재빨리 압둘 함디와 세티 1세 상과 관련된 경험을 풀어헤쳤다. 라이스는 조용히 듣다가 압둘 함디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 밖에 그 상을 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내가 아는 한 없습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그럼 그가 그 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누가 아나요?" "이본 드 마르그 씨, 그는 메리디언 호텔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는 함디가 전세계의 막강한 구매자들에게 편지를 보냈으므로 아마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거라고 지적했어요." "이번 일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지겠는 걸." 라이스가 아내의 손목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다시 에리카를 보며 사진을 건네주었다. "당신은 혹 그 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에리카는 머리를 흔들었다. "전혀요." 봉투를 가져가며 말했다. 실내가 어두웠지만 사진 보는 걸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걸 꺼내 첫 장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건 상당한 상입니다. 그렇죠?" 마치 에리카에게 그의 첫 아이 사진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라이스가 말했다. 제프리 라이스가 옳았다. 사진을 보고서 에리카는 그 상이 근사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걸 알아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 상은 그녀가 본 것과 동일했다. 그녀는 멈칫하였다. 라이스의 상을 보다가 그녀는 파라오의 오른손에 보석이 박힌 홀이 쥐어져 있는 걸 보았다. 압둘 함디의 상에서는 왼손에 홀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 상은 같지는 않았지만 거울에 비춘 것처럼 같아보였다. 에리카는 나머지 사진은 대충 보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아주 훌륭한 사진들이었다. 마침내 그 상의 바닥을 확대한 사진이 보였다. 에리카는 그 상형문자를 볼 때 맥박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너무 어두워 그 상징들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기울여서 두 파라오의 타원형장식을 볼 수 있었다. 세티 1세와 투탄카멘의 이름이 있었다. 놀라웠다. "바론 양, 우리와 저녁을 함께 하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프리실라 라이스는 그녀의 남편이 초대의 말을 꺼내자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맙습니다만," 사진을 봉투에 넣으며 에리카가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난 이미 선약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집트에 머무르고 계신다면, 다음에 하기로 하죠." "좋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오늘밤 당신 손님과 자리를 함께 하면 어떨까요?" 에리카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거절하였다. 제프리 라이스와 이본 드 마르그는 물과 기름 같을 것이다. 에리카는 다른 생각을 한 걸 사과했다. "라이스 씨. 당신은 세티상을 어떻게 구했죠?" 질문이 너무 무례함을 잘 알기에 그녀는 머뭇거렸다. "내 돈으로요." 제프리 라이스가 테이블을 쾅쾅치며 웃었다. 그는 분명 그의 대답이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그 이상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난 뉴욕의 중개인으로부터 그에 대해 들었죠. 그는 내게 전화해서 이집트의 놀라운 유물 하나가 은밀히 경매된다고 얘기해 줬소." "은밀히?" "예, 공개적이 아니라 극비죠. 항상 그런 식입니다." "여기 이집트에서인가요?" "아니오. 취리히에서요." "스위스요?" 에리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왜 스위스죠?" "묻지 마십시오. 일종의 에티켓입니다." "당신은 그게 어떻게 취리히로 갔는지 아십니까?" "아뇨. 말씀드렸듯이 묻지 마십시오! 그건 취리히의 대형은행 중 하나가 주선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입을 꼭 다물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돈뿐입니다." 그가 웃으면서 일어서서 에리카를 다시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그는 분명히 더이상 말할 의도가 없어 보였다. 에리카는 머리가 멍해져서 방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기다리는 동안 제프리 라이스는 그 상이 그가 취리히에서 구한 첫 이집트 유물이 아님을 언급하였다. 그는 아마 모두 세티 1세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으로 된 상과 지느러미 모양의 아름다운 목걸이를 몇 개 더 구입했다고 말했다. 옷장에 사진봉투를 집어넣다가, 에리카는 암거래의 발단이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누군가 모래속에서 고대의 유물들을 발견해 그걸 원하는 누군가에게 팔았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최종적인 거래는 국제은행의 연석회의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억지로 인정해야만 했다. 그건 믿기 힘든 일이었다. 에리카는 블라우스를 벗어 핏자국을 살펴본 다음 아무렇게나 휙 던져 버렸다. 그녀의 바지 역시 같은 식으로 쓰레기통에 처넣어졌다. 브래지어를 벗어서 뒷끈에 피가 묻어 있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그건 버릴 수가 없었다. 브래지어는 에리카가 사기엔 너무 까다로워서 단지 몇몇 제품만이 편안했다. 던져버리기 전에 그녀가 얼마나 가져왔는지 확인하려고 옷장을 열었다. 그러나 곧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란제리는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던 학창시절에조차 사치스러운 걸 좋아했다. 따라서 그녀는 그것들을 조심해서 다루었고, 흩어져 있으면 깨끗하게 정리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옷장 속이 낯설었다. 누군가 그녀 물건에 손댔음이 틀림없었다. 에리카는 일어서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정돈되어 있었다. 호텔 미화원이 청소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 옷에도 손을 댔단 말인가? 가능하다. 재빨리 그녀는 리바이스바지를 꺼내려고 중간서랍을 열었다. 한쪽 주머니에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마지막 선물인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있었고 뒷주머니엔 돌아갈 항공표와 여행자수표가 있었다. 모든 게 다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도로 집어넣었다. 맨 윗서랍을 다시 살펴보고, 그녀는 자기가 아침에 물건들을 뒤집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목욕탕으로 걸어가, 그녀의 플라스틱 화장가방을 집어 내용물을 조사해 보았다. 분명 그녀는 화장품들을 정리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이스춰라이저는 맨 밑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맨 위에 있었다. 또한 맨 위에는 그녀의 피임약이 있었다. 그녀는 그걸 저녁마다 먹었다. 에리카는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았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 전날 길거리에서 어떤 소년이 그녀의 몸에 손을 댔을 때처럼 강간당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그녀 물건에 손을 댄 게 분명했다. 에리카는 호텔지배인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할지 고민하였다. 하지만, 분실된 게 없는데 이떻게 얘길해야 하나? 로비로 되돌아가면서 에리카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아주 분명히 잠갔다. 그리곤 걸어나와 미닫이 유리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작열하는 이집트의 태양이 서쪽 수평선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카이로, 밤 10시 이본과의 저녁식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낭만적인 휴식이 되기에 충분했다. 에리카는 자신의 회복력에 놀랐다. 끔찍한 하루였고, 리처드에게 전화한 이래 느끼고 있는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그 저녁을 즐겼다. 이본은 태양이 꺼져가는 깜부기 불처럼 아물거리고 있는 때에 호텔로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들은 카이로의 먼지 섞인 열기를 피해 마디마을이 있는 나일강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별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에리카의 긴장감은 시원한 저녁공기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식당은 '바닷말'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정확히 나일강의 동쪽 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저녁기후를 만끽하기 위해 식사하는 방은 사방으로 트여 있었다. 강 건너 야자수나무 위로 기자의 피라미드가 휘황찬란하게 솟아 있었다. 그들은 홍해에서 잡아올린 싱싱한 생선과 큰 참새우를 시켜서 불에 구워 먹었으며, 기아나클리스라는 흰 포도주를 곁들였다. 이본이 그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증류수로 묽게 했으나 에리카는 약간 과일맛이 나면서 단 걸 좋아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검은 실크셔츠에 감탄의 눈빛을 보내며 그가 마시는 걸 쳐다보았다. 우쭐대거나 특별한 날에 입는 최고급 실크에 대해 그녀가 갖는 생각은 여성스러움이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사실 그 은빛의 광채는 그이 남성미를 강조해주는 것 같았다. 에리카 자신도 치장에 꽤 오랜 시간을 들였는데 그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풋풋하게 감은 머리는 옆으로 흘러내렸고, 거북이 껍질 모양의 빗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둥글게 목이 파이고 캡 소매에 볼륨 있는 손목을 한 초콜릿빛 갈색의 자켓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래 처음으로 아래쪽에 긴 스타킹을 신었다. 자신이 최대한으로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부드러운 나일강의 미풍이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오자 너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들의 대화는 가볍게 시작되었으나 이내 살인사건으로 돌아섰다. 이본은 압둘 함디를 죽인 자를 밝히려는 그의 노력에 좌절하였다. 그는 에리카에게 자기가 알아낸 거라곤 카이로 출신이 아니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에리카는 세라피윰에서의 그 끔찍한 소동과 연이어 경찰서에서의 경험을 얘기해주었다. "난 오늘 당신과 함께 하는 걸 허락해주었으면 합니다." 이본은 그녀가 얘기를 마치자 놀라움에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는 테이블을 가로질러 그녀의 손을 지긋이 눌렀다. "나 역시 그래요." 에리카가 거의 맞부딪힌 손가락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이본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오로지 세티 1세 상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의 이빨이 촛불에 빛났다. "당신 놀리고 있는 거죠?" 에리카는 사춘기적 흥분을 감추며 말했다. "놀리는 게 아닙니다, 에리카. 당신은 내가 이전에 만난 여자들과는 다릅니다." 에리카는 건너편의 어두워지는 나일강을 바라보았다. 근처 둑 위의 희미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낚시배에서 일하는 몇몇 어부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벌거벗고 있었는데 그들의 검은 피부는 어둠 속에서 잘 닦인 질그릇처럼 빛을 발했다. 순간적으로 그 경치에 사로잡힌 에리카는 이본의 말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건 매우 상투적 어투로 들렸고, 그런 의미에서는 다소 천박하였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에리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본은 그녀가 만난 여느 남자와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이집트학자로 교육받았다는 사실이 나를 매료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난 이걸 칭찬의 의미로 생각합니다만,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동유럽적 감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난 당신이 이집트의 신비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 매우 미국적인 걸요." "오, 하지만 미국인은 민족적 기원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뚜렷합니다. 그게 매력적이라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난 차갑고 금발인 노르디족의 외모에 신물이 났습니다." 그녀 자신도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기대했거나 듣기를 원한 말은 그녀를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해주는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본은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채고 식사가 치워지는 동안 화제를 바꾸었다. "에리카, 오늘 세라피윰에서의 살인자는 보았나요?" "아니오." 에리카가 말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난 아무도 보질 못했죠." "저런, 너무나 끔찍한 경험이로군요. 난 그이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당신 위로 쓰러지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하지만 중동지역에서 정부인사 암살은 매일 반복되는 일이죠. 적어도 당신은 다치지 않았군요. 어려우시겠지만,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그저 지독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세요. 함디의 죽음 이후라 상황이 더더욱 안 좋군요. 이틀 동안에 두명의 살인이라!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알아요. 그건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겁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게 한 가지 있어요. 오늘 총에 맞은 사람은 그저 정부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에요. 그는 문화재관리국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따라서 비록 전혀 반대입장이긴 하지만 두사람 다 고대유물을 다루었어요." 에리카가 희미하게 웃었다. 웨이터가 아라비아커피와 디저트를 가져왔다. 이본은 설탕을 넣은 세몰리나 케익을 주문하였다. "당신의 모험 중 놀라운 것 하나는 당신이 경찰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본이 말했다. "그건 전부 옳지는 않아요. 난 몇 시간 동안 억류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에리카는 디저트를 맛보고 열량이 낮다고 결론지었다.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에요. 감옥에 가지 않은 게 행운입니다. 확신하건데 당신 안내인은 여전히 억류되어 있을 겁니다." "내가 풀려난 건 아흐메드 카잔 덕입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아흐메드 카잔을 아세요?" 먹는 걸 멈추고 이본이 말했다. "그와는 관계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에리카가 말했다. "지난밤 당신이 날 내려준 후 아흐메드 카잔이 내 방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이본의 포크가 테이블에 부딪혀 딸그락거렸다. "만일 당신도 놀랐다면 내가 어땠는지 상상해 보세요. 난 함디의 살인을 신고하지 않아서 체포된 줄 알았어요. 그는 나를 그의 사무실로 데리고가 약 1시간 동안 얘기했습니다." "믿기지 않는군요." 이본이 넵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아흐메드 카잔은 함디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나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죠. 그 외엔 날 그의 사무실로 데리고 갈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는 전혀 그 얘긴 꺼내질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기가 두려웠죠." "그러면 그가 원한 건 뭐였죠?" "대부분 당신에 대해서였어요." "나요!" 이본이 우스꽝스럽게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가슴에 집게손가락을 댔다. "에리카, 당신은 정말 놀라운 이틀을 보냈군요. 난 결코 그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 여기 이집트에 수년간 왕래하고 있어요. 그가 나에 대해 뭘 묻던가요?" "당신이 이집트에서 뭘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무슨 말을 했죠?" "모르겠다고 했어요." "세티 1세 상에 대해 말하진 않았나요?" "전혀요." "에리카, 당신은 훌륭하군요." 갑자기 그는 테이블에 몸을 밀착해 그의 손으로 에리카의 얼굴을 감싸더니 양 볼에 키스하였다. 그의 풍부한 제스처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의식적으로 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흐메드 카잔이 내가 한 말을 전부 믿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죠?" 이본이 말했다. 그는 다시 디저트를 들고 있었다. "오늘 오후 호텔에 돌아왔을 때, 내 물건에 뭔가 미묘한 변화가 있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조사당한 것 같아요. 귀중품들은 그대로 있어요. 도난당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들이 무얼 찾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본은 에리카를 똑바로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채 음식을 씹고 있었다. "당신 방문에 보조자물쇠가 있습니까?" "예." "그걸 사용하세요." 그는 디저트를 한입 더 입에 물고는 다시 얘기를 하기 전에 생각에 잠겼다. "에리카, 함디를 방문할 때 그가 당신에게 준 게 없나요? 편지나 서류 같은 것 말이오." "아니오. 그는 진짜처럼 보이는 모조갑충석을 하나 주었죠. 그리고 꼭 1929년 판 베데커 여행안내서를 이용하라고 했어요." "그게 어디에 있죠?" 이본이 물었다. "바로 여기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가방에 손을 넣어 표지가 없는 그 베데커 여행안내서를 찾았다. 표지는 방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 갑충석은 그녀의 동전지갑 안에 있었다. 이본은 갑충석을 들고 촛불 가까이에 비추었다. "이게 모조라고 확신하나요?" "좋아 보이죠, 그렇지 않아요? 제 생각에도 진짜같지만 함디 말로는 자기 아들이 만들었답니다." 이본이 아주 조심해서 갑충석을 내려놓고 안내서를 집어 들었다. "이 베데커 판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가 말했다. 각각의 장을 살펴보며 조심스레 넘겼다. "이건 이집트 각 지역에 대해 쓰인 가장 훌륭한 안내서입니다. 특히 룩소르 지방에 대해." 이본은 그 표지 없는 책을 에리카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이걸 진짜라고 입증해도 될까요?" 그가 갑충석을 엄지와 집게 사이에 잡고서 말했다. "방사선 탄소실험을 의미하나요?" "예." 이본이 말했다. "이건 내가 보기에 아주 훌륭해 보입니다. 이건 세티 1세의 타원형장식입니다. 그 뼈 같군요." "그 소재에 대한 건 옳아요. 함디는 그의 아들이 고대 공동묘지 미라로부터 채취한 뼈들로 만들었다고 했어요. 또한 표면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도록 칠면조에게 먹였다고 했어요." 이본이 웃었다. "이집트 골동품은 아주 풍부합니다. 거의 똑같아요. 난 이걸 실험해 보고 싶습니다." "난 괜찮아요. 하지만 나중에 돌려주세요." 에리카는 마지막 커피를 마셨는데 입안에 쓰디쓴 커피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이본, 왜 아흐메드 카잔은 당신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요?" "내 생각엔 내가 괴롭히고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그가 왜 내가 아닌 당신에게 얘길했는지에 대해선 대답할 수가 없어요. 아마도 그는 날 위험한 골동품수집가로 여기고 있나 봅니다. 그는 내가 암거래 루트를 파헤치려고 하는 동안 몇몇 주요 유물을 획득한 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암거래에 대해 뭔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흐메드 카잔은 여기 각료입니다. 그들은 내 도움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아마도 그들의 일을 더 두려워합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고질적인 증오가 있죠. 그리고 난 프랑스인이자 영국인입니다." "당신은 영국계인가요?" 에리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난 종종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본이 강한 프랑스 억양으로 말했다. "유럽인의 가계는 일반인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답니다. 내 가족의 거주지는 파리와 샤르트르 사이에 있는 랑부이예 근교의 샤토발로아입니다. 내 아버지는 마르그 후작이지만 어머니는 영국의 하코트 가 출신입니다." "장황하군요." 에리카가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 말은 흥미롭게 들린다는 거예요." 에리카는 그가 계산할 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식당을 나와서 이본은 에리카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느낌이 좋았다. 밤 공기가 상당히 서늘했다. 만월에 가까운 둥근달이 길가에 늘어선 유칼립투스 나뭇가지 사이에서 휘영청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 벌레들의 합창이 울려퍼졌다. 에리카에게 오하이오주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생각나게 하였다. 참 편안한 기억이었다. "당신은 이집트의 귀중한 골동품 중에서 어떤 걸 갖고 계신가요?" 이본이 피아트 근처에 왔을 때 에리카가 물었다. "언젠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운 것들이죠. 그 중 특히 작은 금상들을 좋아합니다. 하나는 네크베트이고 다른건 이시스죠." "혹 세티 1세 유물을 구입한 적은 없나요?" 에리카가 물었다. 이본이 차로 가서 에리카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아마도 목걸이 한 개쯤, 대부분이 신왕조시대 것이죠. 목걸이 하나만 세티 1세 시대 것입니다." 에리카는 차에 올랐고 이본이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일렀다. "예전에 자동차경주를 좀 했었습니다. 그래서 운전할 땐 항상 그렇죠." "추측이 돼요." 에리카는 전날 그의 차에 탔던 걸 기억하며 말했다. 이본이 웃었다. "사람들은 내가 좀 빠르게 운전한다고 말하죠. 난 그걸 즐깁니다." 그는 운전장갑을 꼈다. "난 당신이 나만큼이나 세티 1세 상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해요. 그의 전설적인 바위로 깎은 무덤이 고대에 도난당했다는 건 아주 정확히 알려져 있습니다. 20번째 왕조의 충성스런 사제가 그의 미라를 구할 수 있었고, 그들의 노력을 기록에 남겼습니다." "난 오늘 아침에 세티 1세의 미라를 봤어요." "모순되지 않습니까?" 엔진을 보며 그가 말했다. "세티 1세의 부서지기 쉬운 몸체가 완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우리에게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건 그 전설적인 땅굴이 19세기말 영리한 라솔 일가에 의해 불법적으로 발견되었을 때 나온 파라오 미라 중 하나였죠." 이본은 몸을 움직여 차 뒤쪽으로 의자를 제꼈다. "라솔 일가는 그들이 붙잡힐 때까지 약 10여 년간 천천히 도굴해 냈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는 식당에서 벗어나 카이로 쪽으로 속력을 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세티 1세 유물이 있을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이 룩소르에 가서 그의 거대한 묘를 방문해 보면, 금세기 동안 비밀통로를 발견하기 위해 터널을 뚫도록 허락한 지역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종종 암시장에 세티 1세의 유물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라고 해서 그리 놀라운 건 아니죠. 그는 아마 그의 소유물들을 분산해서 묻었을 겁니다. 그리고 무덤이 도굴되더라도 종종 장례용품을 다시 재생시켜 놓기도 했죠. 그 내용물들은 아마도 수년 동안 묻히고 도굴되고 재생되었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농부들이 룩소르에 있는 골동품들을 계속 파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매일 밤 그들은 사막의 모래를 나릅니다. 그러고나면 그들은 뭔가 특별한 걸 발견합니다." "세티 1세 상 같은거요?" 에리카가 이본의 옆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웃었다. 그녀는 그의 검게 그을린 피부 아래로 들어난 하얀 치아를 볼 수 있었다. "맞아요. 하지만 세티 1세의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 어땠을 거라고 상상하십니까? 아마도 그건 실로 엄청났을 겁니다. 투탄카멘의 보물이 우리를 어지럽게 합니다만, 세티 1세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에리카는 이본이 옳다는 걸 알았다. 특히 세티 1세의 상을 본 후에는 더더욱. 세티 1세는 제국을 통치한 주요 파라오였다. 투탄카멘은 아마도 실제 권력은 쥐어보지도 못한 하찮은 소년왕이었다. "제기랄." 이본이 도처에 널린 깊은 구덩이 중의 하나에 빠지자 소리를 질렀다. 그 충격으로 차가 몹시 흔들렸다. 도시는 막대기로 버팀목을 댄 마분지 조각들로 시작되었다. 그것들은 새로 도착한 이주민들의 집이었다. 그 마분지는 쇠붙이,천, 가끔 기름통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판자촌에 이어 보기 흉한 진흙벽돌집이 나타났고, 결국 도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가난의 기운이 독소처럼 공기 중에 퍼져 있었다. "제 방에 가서 브랜디 한 잔 하지 않으시렵니까?" 이본이 물었다. 에리카는 기분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그를 훔쳐보았다. 이본의 제안이 말 그대로 순수하지만은 않은 좋은 기회였다. 그녀는 분명 그에게 끌렸고, 끔찍한 하루를 보낸 후 누군가와 가까이 있다는 건 매우 유쾌한 일이었다. 육체적 매력이 항상 행동의 길잡이가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본은 너무도 친절해서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를 쳐다보며 그가 그녀에게는 경험 이상의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였다. "고마워요, 이본.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군요. 힐튼에서 다른 걸 마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에리카가 차분하게 말했다. "좋아요." 에리카는 이본이 더 고집하지 않아서 약간 실망하였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만든 환상의 피해자였다. 호텔에 도착하자, 그들은 담배연기로 가득 찬 호텔라운지보다 걷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손을 잡고 그들은 분주한 코니쉬 엘닐 거리를 지나 나일강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엘 타흐러 다리를 배회하였다. 이본은 로다섬 꼭대기에 있는 메리디언호텔을 가리켰다. 펠리커선 한 대가 달빛에 얼룩지는 물길을 따라 유유히 미끄러져 갔다. 이본은 에리카를 팔로 감싸안으며 걸었다. 에리카는 그의 팔을 잡았다. 다시 한번 수줍음을 느꼈다. 리처드 외에 다른 남자와 있어본 게 참 오랜만이었다. "스테파노스 마큘리스라는 그리스인이 오늘 카이로에 도착했습니다." 이본이 난간에 멈추어 서서 말했다. 그들은 강물 표면에 흔들리고 있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가 전화해서 당신을 만나려고 할 겁니다." 에리카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는 아테네에서 골동품 거래를 합니다. 그는 거의 이집트에 오질 않아요. 그가 여길 왜 왔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알아내고 싶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압둘 함디의 죽음 때문에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티 1세 상 때문에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살인사건 때문에 날 보길 원하나요?" "예." 에리카의 시선을 피하며 이본이 말을 이었다. "난 그게 어떤 식으로 개입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본, 난 압둘 함디의 일에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놀라운 일 투성이에요. 난 당신께 내가 아는 모든걸 다 얘기했어요." "이해해요." 이본이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신은 내가 가진 모두입니다." "무슨 말이죠?" 이본이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당신은 세티 1세 상과의 마지막 연결고리입니다. 스테파노스 마큘리스는 휴스턴에 있는 한 남자에게 첫번째 세티 1세 상을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이번 것도 관련되었는지 염려됩니다. 당신도 아다시피 이번 기회에 골동품 약탈을 중지시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에리카는 힐튼호텔의 화려한 불빛을 보고 있었다. "첫번째 상을 구입한 휴스턴의 남자 역시 오늘 도착했습니다. 그는 오늘 오후 힐튼 로비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제프리 라이스입니다." 이본의 입은 눈에 띄게 굳게 다물어졌다. "그가 내게 말했어요. 단지 두 번째 상이 어디 있는지만이라도 얘기해주는 사람에게 만 달러를 주겠다고 말이에요." "오, 하나님." 이본이 말했다. "그건 카이로가 서커스장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아흐메드 카잔과 그 부서에서 이 상에 대해 알아내려 한다는 걸 우려하고 있습니다. 자, 에리카, 그건 내가 일을 좀더 빨리 진행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당신 기분은 이해합니다만, 제발 날 위해 그를 만나주십시오. 난 그가 무슨 일을 도모하는지 알고 싶고 당신은 날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제프리가 그러한 돈을 제안한다는 건 아직도 그 상이 쓸모있다는 걸 입증하는 겁니다. 만일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 역시 개인비품으로 사라져 버릴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그를 만나 그가 한 얘기를 모두 내게 해 달라는 겁니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에리카는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리카는 그이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전설적인 세티 1세 상이 공개적으로 보존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안전할 거라고 믿으세요?" "물론이죠." 이본이 말했다. "그가 전화하면 공공장소에서 만나기로 하세요. 그러면 문제 없어요."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저녁식사 한 끼를 빚진 겁니다." "그럼요." 이본이 에리카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입술이었다. 에리카는 이본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녀는 잠시 그가 자길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그런 자신을 꾸짖었다. 게다가 그녀가 그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방으로 돌아온 에리카는 여행기간 중 그 어느 때보다 유쾌하였다. 이본은 그녀가 오랫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그녀를 자극하였다. 리처드와 그녀의 육체적 관계가 수개월동안 만족스럽지 못한 반면에 이본은 성적 욕망을 의미 있는 관계에 있어 부가적인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기꺼이 기다리려 하였고, 그것이 그녀를 더 기분좋게 하였다. 문앞에서 그녀는 키를 재빨리 꽂아서 문을 활짝 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제대로인 것 같았다. 그녀가 본 수백 가지의 영화를 기억해내며 만일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약간의 준비를 했다. 불을 켜고 침실로 갔다. 비어 있었다. 자신의 연극 같은 행동에 웃으면서 욕실로 갔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힘껏 닫았다. 문은 미국제 철제로 되어 있었는데 철컥하고 확실히 닫히는 소리가 났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에어컨을 끈 다음 발코니 문을 활짝 열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투광 조명등은 꺼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 재킷을 머리 위로 벗어서 걸어 놓았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코니쉬 엘닐 거리를 오가는 차량 행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호텔은 조용했을 것이다. 한쪽 눈화장을 지우고 있는 동안 문쪽에서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다. 거울 안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브라와 팬티 차림이었다. 그리고 눈화장도 한쪽만 지운채였다. 멀리서 일상적인 자동나팔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쳤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한 번 그녀는 금속이 긁히는 소리를 들었다. 에리카는 피가 얼굴로 솟구치는 걸 느꼈다. 누군가 그녀 방의 자물쇠에 열쇠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사실은 그녀를 갑자기 긴장하게 만들었다. 빗장에 성큼 다가갈 수가 없었다. 미처 문을 잠그기도 전에 문이 열리게 될까봐 두려웠다. 자물쇠가 다시 덜컹거렸다. 다시 쳐다보자, 문의 손잡이가 천천히 돌려졌다. 에리카는 욕실 문의 자물쇠를 보았다. 그건 손잡이가 달린 단순한 버튼이었다. 문 자체는 두꺼운 판이었다. 자물쇠에 열쇠가 맞지 않아 손잡이만 천천히 돌리고 있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깜짝 놀란 동물처럼 그녀의 눈을 탈출구를 찾아 온 방을 헤맸다. 발코니 옆 테라스로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아니, 그녀는 9층 아래로 떨어질게 틀림없다. 이내 그녀는 전화를 기억해 냈다. 조용히 방을 가로질러 수화기를 집었다. 신호음이 들렸다. 대답해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소리질렀다. 제발 대답해요. 여느 소리와 다른 마지막 철커덕 소리가 들려왔다. 열쇠가 완전히 들어가 한 바퀴 회전하는 소리였다. 문이 열렸다. 소리없이 문이 열려 복도에서부터 방의 안쪽까지 한줄기 환한 빛이 밀려들어왔다. 에리카는 무릎을 꿇었다. 침대에 전화기를 던진 채 바닥에 납작하게 업드려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침대시트 밑으로 열린 문 밑을 볼 수 있었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려나왔다. 에리카는 전화가 그녀가 숨은 곳의 단서가 됨을 알았다. 한 남자가 방에 들어왔다. 끔찍한 공포감에 젖어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침대 쪽으로 걸어와 에리카 앞에 섰다. 에리카는 머리를 움직이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녀 위에서 수화기가 제자리에 놓이는 게 들렸다. 침입자는 조용히 그녀의 시야에서 뒤로 걸어나가 욕실을 살펴보았다. 그가 옷장으로 걸어가는 걸 보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그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침실 중앙으로 되돌아와 그는 에리카 머리에서 5-6피트되는 지점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오더니 침대 앞에 우뚝 섰다. 그녀는 그를 만질 수도 있었다. 그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갑자기 침대 시트가 제껴지고 에리카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리카, 도대체 침대 밑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리처드!" 에리카는 눈물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에리카는 여전히 흐느끼느라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리처드는 그녀를 침대 밑에서 꺼내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가 씨익웃으며 말했다. "침대 밑에서 뭘 하고 있었지?" "오, 리처드!" 에리카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소리쳤다. "당신이어서 너무 기뻐요. 내가 얼마나 기쁜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그를 꽉 붙잡고 몸을 밀착시켰다. "종종 당신을 놀라게 해줘야겠는 걸." 그녀의 다 드러난 등에 팔을 얹으며 리처드는 행복하게 말했다. 그리고 에리카가 진정이 되어 눈물이 마를 때까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정말 당신이에요?" 리처드의 얼굴을 뜯어보며 에리카가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꿈이 아냐, 바로 나야. 약간 지쳐 있기는 하지만 여기 이집트에 당신과 함께 있는 거라구." "좀 피로해 보이는군요. 괜찮아요?" 에리카가 그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아, 난 괜찮아. 좀 피곤할 뿐이야. 장비에 문제가 생겨서 로마에서 4시간 지체했어.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지. 근데 당신 근사한데. 언제부터 한쪽 눈만 화장했지?" 에리카는 웃으면서 그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당신이 내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좀더 좋아 보일 수 있었을 거예요. 근데 어떻게 시간을 냈죠?" 그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팔에 기댄 채로 말했다. "몇달 전에 어떤 사람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경비를 대준 적이 있었어. 그는 내 호의에 고마워했지. 그가 모든 응급환자와 입원환자를 돌봐줄 거야. 당신이 너무나 보고싶었어." "나 역시 그랬어요. 내가 왜 전화했겠어요!" "전화해 줘서 고마웠소." 리처드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 "1년 전 당신에게 이집트에 갈 수 있겠느냐고 했을 때, 당신은 시간을 낼 수가 없겠다고 했어요." "저, 난 그때 확신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건 1년 전이고 지금은 여기 이렇게 이집트에 당신과 있잖소. 내 자신도 믿기 힘들지만. 그런데 에리카, 대체 침대 밑에서 뭘 하고 있던거지?"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내가 당신을 놀라게 했나?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랬다면 미안해. 난 당신이 자고 있는 줄 알았지. 조용히 들어와 집에서 하던 것처럼 당신을 깨우고 싶었어." "놀랐느냐구요?" 에리카가 물었다. 그녀가 빈정거렸다. 그녀는 옷장으로 가서 구멍이 송송 뚫린 옷을 꺼냈다. "난 아직도 가슴이 뛰어요. 당신이 나를 공포스럽게 했어요." "미안해." 리처드가 말했다. "열쇠를 어떻게 구했죠?" 에리카는 무릎에 손을 얹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난 그저 932번 열쇠를 달라고 했지." "그들이 당신에게 주던가요? 아무 질문도 없이?" "그래, 호텔에선 흔한 일이지. 난 그들이 그러길 바랐고 그래서 당신을 정말 놀라게 하고 싶었어. 난 내가 카이로에 있는 걸 당신이 처음 알았을 때의 표정을 보고 싶었어." "리처드, 내가 지난 며칠 동안 경험한 일은 당신이 지금까지 당한 일들 중 가장 안 좋은 일보다도 더 심한 일일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정해 보였다. "사실 매우 어리석었어요." "괜찮아, 괜찮아." 리처드가 그의 손을 거짓 방어자세로 올리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놀래켰다면 미안해. 그럴 셈은 아니었어." "한밤중에 누가 내 방에 침입하면 놀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리처드, 그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보스턴에서조차도 그건 현명한 게 아닐 거예요. 당신은 전혀 내 기분을 고려하지 않아요." "자, 난 당신을 만나게 될 흥분에 젖어 있었소. 난 19만 마일을 달려왔소." 리처드 얼굴에 웃음이 가시기 시작했다. 그의 꺼칠한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그의 눈두덩은 검은 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화가 나요. 세상에, 난 심장마비되는 줄 알았다구요. 당신은 나를 죽도록 두렵게 했어요." "미안해,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다구요?" 에리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모르고 했다는 가정하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에요. 근데 그렇지가 않아요. 난 이틀동안 두 명의 살인을 목격해서 최악의 상태에 있어요. 근데, 그런 어린애같은 장난을 하다니. 너무해요. 너무해!" "난 당신이 날 봐서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어." 리처드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당신도 나를 봐서 기쁘다고 말했잖소." "난 당신이 강간범이나 살인범이 아니라는 게 그저 기뻤을 뿐이에요. 리처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난 당신을 보러 온 거야. 내가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지구의 반을 돌아 이 먼지투성이의 더운 나라에 온 거란 말야." 에리카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녀의 화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난 특별히 당신에게 오지 말라고 요청했어요." 그녀는 장난꾸러기 어린애에게 얘기하듯이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 어머니와 상의했어." 리처더는 침대에 앉아 에리카의 손을 잡으려 했다. "뭐라구요!" 그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물었다. "한번 더 말해보세요." "무얼 말하라는 거야?" 리처드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는 그녀가 다시 화가난 걸 느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과 우리 엄마가 공모했군요?" "난 그런 말은 사용하지 않았어. 우린 내가 여기 와야 하는 지에 대해 상의했어." "훌륭하시군요." 에리카가 비웃었다. "그리고 난 에리카가, 아직 소녀 같은 당신이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에리카, 당신 어머니는 진심으로 당신을 염려하고 있어." "난 그걸 확신하지 않아요." 에리카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 어머니는 그녀와 내 삶 사이를 분리하시질 못해요. 그녀는 나와 너무 가깝게 있어서 마치 내 삶속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구요. 그걸 이해할 수 있겠어요?" "아니." 리처드가 점점 화난 표정으로 변하며 말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난 유태인다운 것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내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에 내가 따르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내가 진정 누구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을 막지는 않지만요. 그녀는 내게 최선의 것이 어떤건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나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길 원하는 것 같아요. 문제는 나와 내 어머니는 아주 다르다는 겁니다. 우린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자랐어요." "당신이 어린애처럼 느껴지는 때가 바로 지금처럼 말할 때야." "리처드, 당신은 이해 못해요. 당신은 내가 왜 이집트에 왔는지조차 알 수 없어요. 내가 아무리 설명하려 했지만 당신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그에 동의하지 않아. 난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안다고 생각해. 난 당신의 맹세가 두려웠어. 당신은 당신의 독립을 입증해보고 싶었던 거야." "리처드, 당신이야말로 약속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에요. 1년 전에 당신은 결혼에 대해 상의조차 안 했어요. 이제 갑자기 당신은 아내와 집 그리고 개가 필요해졌어요. 난 그것들의 순서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난 소유물이 아니에요. 당신이나 어머니에게 독립성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여기 이집트에 온 건 아니에요. 만일 내가 원하는 게 그것이었다면 난 메드클럽처럼 이미 짜여진 휴양지 중 한 곳에 갔을 겁니다. 난 고대이집트를 공부하는 데 8년을 보냈고 그게 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집트에 온 겁니다. 의학이 당신의 일부인 것처럼 그건 내 일부예요." "그래서 당신은 사랑과 가족이라는 것이 당신의 일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려는 거요?" 에리카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부차적인 건 아니에요. 그저 결혼에 대한 현재의 내 개념이 지적인 것에 대한 포기라고 생각된다는 거예요. 당신은 내 일을 항상 화려한 취미의 일종으로 간주해 왔어요. 당신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어요." 리처드가 반박하려 했지만 에리카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난 당신이 내가 외국학박사학위를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기 때문은 아니에요. 그저 당신 자신을 위해 만든 어떤 거대한 설계에 맞추려 하고 있을 뿐이예요." "에리카, 이건 정당하지 않은 것 같군." "오해 말아요, 리처드. 난 내가 비난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는 걸 충분히 알아요. 난 결코 진지하게 내 일에 대한 열정을 얘기해 본 적이 없어요. 만일 그러면 당신이 놀랄까봐 위장해 온 거죠.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내 자신을 이제 확실히 인식하고 있어요. 그건 내가 당신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아내의 역할을 원치 않는다는 걸 의미해요. 난 여기 이집트에서 내 전문지식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고자 온 거예요." 리처드는 에리카의 논쟁의 무게에 휘청하였다. 그는 너무 피곤해 싸울 기력조차 없었다. "만일 당신이 유용한 존재가 되고 싶다면, 하필 왜 그처럼 모호한 분야를 택했지? 정말로 내가 의미하는 건 에리카, 왜 하필 이집트학을! 그것도 신왕조 상형문자를!" 리처드는 침대에 드러누웠지만 여전히 바닥에 발이 닿아 있었다. "이집트유물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서랍으로 걸어가서 제프리 존 라이스가 준 사진봉투를 끄집어 냈다. "난 지난 이틀동안 너무도 힘들게 그걸 배웠어요. 이걸 좀 보세요." 에리카는 리처드의 가슴에 봉투를 던졌다. 리처드는 힘들게 일어나 앉아서 사진을 꺼냈다. 재빨리 훑어본 다음 도로 집어 넣었다. "훌륭한 상이로군."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도로 드러누웠다. "훌륭한 상?" 에리카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건 내가 일찌기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고대이집트의 상이에요. 내가 목격한 두 살인사건 중 적어도 하나는 그 상과 관련되어 있어요. 근데 그저 훌륭한 상이라구요?" 리처드는 한쪽 눈을 뜨고 서랍에 등을 기댄 채 도전적으로 서 있는 에리카를 보았다. 서랍장 맨 위에 작은 자수 옷이 눈에 띄었다. 그가 지루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훌륭한 상이야. 그런데 두 살인사건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오늘 또 다른 사건을 목격한 거야?" 리처드는 몸을 일으켜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난 그걸 봤을 뿐만 아니라, 그 피해자가 내 위에 쓰러졌어요. 그보다 더 가까이에서 연루되기도 힘들 거예요." 리처드는 몇분 동안 에리카를 주시하였다. "내 생각에 당신은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는데."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권위를 내세우며 말했다. "난 여기 머무를 거예요." 에리카가 딱 잘라 말했다. "사실 난 골동품 뒷거래에 대해 뭔가 일을 도모하고 있어요. 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티 1세 상이 이집트에서 유출되는 걸 막고 싶어요." 깊이 생각에 잠긴 에리카는 시간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다가 지금이 새벽 2시 40분이라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안에서 끄집어낸 작은 원형테이블에 앉아 발코니에 있었다. 그녀는 또한 취침용 등을 가져왔다. 그건 휴스턴에 있는 세티 1세 상의 사진을 비추며 테이블 위를 밝히고 있었다. 리처드는 여전히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에리카는 그와 다른 방을 쓰려고 했지만 호텔은 초만원이었다. 쉐라톤, 세퍼드, 메리디언 모두 마찬가지였다. 에리카가 게지라섬에 있는 호텔에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그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으며 그가 잠에 취했음을 알았다. 에리카는 리처드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지는 위험을 피하고 싶어서 그와 함께 밤을 지내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가 잠이 들었기 때문에 아침에 그가 방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로 했다. 너무 긴장을 해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에리카는 사진의 상형문자를 분석하기로 했다. 그녀는 특히 두 파라오 타원형장식에 둘러싸인 짧은 비문에 관심이 있었다. 상형문자는 정해진 모음자 방향이 없기 때문에 해독에 항상 애를 먹었다. 그런데 세티 1세 상의 비문은 일반적인 것보다 더 힘들었다. 마치 처음의 설계자만이 그 메시지를 해독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에리카는 비문을 읽는 방향에 대해서도 결정을 못했다. 어느 쪽으로 읽어가든 의미가 나오질 않았다. 왜 소년왕 투탄카멘의 이름이 절대군주인 세티 1세 파라오의 비문에 새겨 있는 걸까?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해석은 이런 것이었다. "영원한 휴식(혹은 평화)이 전능한 남북이집트의 왕이시고, 오시리스가 사랑한 아몬레의 아들이시며, 투탄카멘 이후(혹은 뒤에, 아래에)에 지배해 온(통치, 혹은 권력을 쥔) 파라오 세티 1세에게 주어지도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건 로리 박사가 전화로 얘기한 것과 상당히 유사하였다. 분명 세티 1세는 투탄카멘 사후 50여 년을 지배했거나 살았다. 하지만 모든 파라오 중에서 왜 투트모세 4세나 다른 위대한 제국 건설자 중의 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은 걸까? 또한 마지막 전치사가 그녀를 신경 쓰이게 했다. 세티 1세와 투탄카멘 사이에는 왕조의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아래의'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어쨌든 가계관계가 없었다. 실지, 세티 1세 이전에 투탄카멘 가의 이름이 찬탈자 파라오 호렘헤브에 의해 지어졌다는 건 꽤 믿을 수 있었다. 그녀는 투탄카멘의 하찮음 때문에 '- 뒤에'라는 말도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후에'만 남았다. 에리카는 그 문구를 큰 소리로 읽어내렸다. 다시 읽더라도 그건 너무 단순하게 들렸다. 3천년 전에 작용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그녀는 흥분을 느꼈다. 리처드가 잠자고 있는 방안을 돌아보던 에리카는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거대한 심연 이상의 것이 존재함을 느꼈다. 리처드는 이집트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이러한 지적인 흥분이 그녀 자신의 중요한 일부라는 걸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일어서서 등과 사진을 들고 방으로 되돌아갔다. 불빛이 리처드의 얼굴을 비추자, 그의 입술이 살짝 달싹거렸다. 그가 갑자기 소년처럼 어리게 느껴졌다. 에리카는 그들 관계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를 기억하였다. 그녀는 그때처럼 보다 순수한 때가 그리웠다. 그녀는 그를 매우 좋아했지만, 현실을 직시하기가 힘들었다. 리처드는 항상 리처드식을 원했다. 그의 의사경력이 어떤 측면에서든 그를 조망하기 어렵게 했다. 에리카는 그가 변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과 맞부딪혀야 했다. 그는 에리카가 원한 건 도피를 해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결코 세티 1세 상이 이 나라에서 유출되는 걸 막겠다는 그녀의 신념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그 상을 찾는 걸 꼭 보게 될 거야." 그녀는 어둠 속에서 리처드에게 속삭였다. 리처드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돌아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