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가 들려주는 이야기 지은이: 찰스 램, 메리 램 옮긴이: 김찬식 출판사: 도서출판 유진 (저자 및 역자 약력) * 지은이 찰스 램(1775--1834), 메리 램(1764--1847) 찰스 램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빈민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섰다. 그리고 낮에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밤에는 시인들과 친분을 맺고 시를 발표했다. 그는 누나인 메리가 정신병을 앓게 되자, 자신에게도 정신병의 유전이 있음을 알고는 평생 동안 누나를 돌보며 독신으로 살았다. 이들 남매는 어린이들을 위해 1807년 '셰익스피어가 들려주는 이야기', 1808년에는 '율리시즈의 모험'을 발표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어린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 * 옮긴이 김찬식 KBS기자, 뉴스 앵커, 전문위원 지냄. 현재 교통방송국에서 '교통시대'를 진행하고 있음.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색동회 이사. 칼럼집 '오늘을 생각한다', 수필집 '빛과 사랑과 용서를', 시집 '이 타는 가슴을' 등의 저서가 있음. (셰익스피어 약력) * 셰익스피어(1564--1616) 영국의 시인이며 극작가. 37 편의 시집을 남겼다. (셰익스피어가 들려주는 이야기) 1807년에 영국의 수필가인 찰스 햄과 그의 누나인 메리 램이, 어린이들이 고전에 친근해지도록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 20편을 골라 동화 형식으로 쓴 작품. 이 중에서 희극은 메리가, 비극은 햄이 썼는데 (여기에서는 1) 편만 수록하였다 템페스트(폭풍) 한 외딴 섬에 프로스페로라고 불리는 노인이 그의 예쁘고 귀여운 딸 미란다와 함께 단둘이 살고 있었다. 딸은 어렸을 적에 이 섬에 왔기 때문에 아버지 말고는 그 누구도 몰랐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작은 바위 동굴에는 조그만 방이 몇 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재에는 마술책이 많이 꽂혀 있었다. 아버지는 대단한 학자에다 뛰어난 마술사이기도 했다. 이 섬은 원래 시코락스라고 하는 요술쟁이 노파가 지배했었는데, 그녀는 자기가 명령하는 것을 듣지 않는 요정들을 모조리 나뭇가지에 묶어 놓았다. 그러나 프로스페로가 처음 이 섬에 와서 그 요정들을 모두 구출했을 때부터 그들은 프로스페로의 요정으로 되어버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생기발랄하고 귀여우며 자그마한 꼬마 아리엘은 진심으로 프로스페로를 잘 따르고 있었다. 꼬마 아리엘은 심술궂은 장난은 하지 않았지만, 다만 요술쟁이 노파의 아들인 칼리반을 놀려 주는 걸 큰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칼리반은 정말 심술궂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그런 아이였지만, 프로스페로는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며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래도 칼리반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나쁜 성격 때문에, 좋은 일이라든가 자기에게 유익한 충고들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장작 나르는 일 같은 힘든 일만 하게 되었다. 칼리반이 일을 게을리하고 있으면 감독인 아리엘은 살짝 다가가서 꼬집어 준다. 그러면 칼리반은 시궁창 속에서 뒹굴거나 원숭이처럼 얼굴을 찡그린다. 또한, 재빨리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서 떼굴떼굴 구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리엘의 모습은 프로스페로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요정들을 이용해서 프로스페로는 자기 마음대로 바람을 일으키거나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오늘 부는 태풍도 프로스페로가 요정들에게 요술을 부려서 일으킨 것으로서, 바다에서는 거친 파도가 휘몰아쳐 그림과 같은 배 한 척이 침몰할 것만 같았다. 프로스페로는 미란다를 불러서, 그 배에는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미란다는 슬프게 말했다. "아버지, 그렇다면 저 사람들이 불쌍하잖아요. 보세요, 배가 마구 흔들려요.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리겠어요." "걱정할 것 없다, 미란다. 괜찮아. 누구 하나 다치지 않도록 요술을 부리고 있단다. 내가 이런 요술을 부리는 것도 모두 너를 위해서야. 너는 네 신분에 대해서나, 또 어디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때는 세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테지." "아뇨, 기억하고 있어요." "어떻게 기억하니?" "뿌옇게 안개 같은 모습만 떠오르지만, 여자 네다섯 명이 항상 제 주변에서 보호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맞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단다.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곳에 왔을 때의 일도 기억하고 있니?"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러자 프로스페로가 계속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밀라노의 성주였단다. 너는 공주로서 나를 계승할 몸이었지. 나에게는 안토니오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성의 살림을 모두 그에게 맡겨놨었지.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일과는 등지고 항상 책 속에서만 살고 싶었거든. 그런데 나의 동생이자 너의 삼촌인 그 안토니오가 내 성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세웠단다. 그리고 나의 적수였던 나폴리 왕까지 그를 도와주어, 그는 마침내 자기 야심을 성취할 수 있었지." "그렇다면 그 삼촌이라는 분은 왜 우리들을 죽이지 않았나요?" "그것은 일반 백성들이 나를 섬기고 따랐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던 것이지. 안토니오는 우리들을 배에 태워서 파도가 심하게 몰아치는 깊은 바다로 내보냈단다. 깃발이나 배의 장비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아주 작은 나룻배에 태워 내보내서 배가 파도에 뒤집혀 죽게 할 작정이었지. 그런데 나의 심복이었던 부하 한 명이 물과 음식과 옷가지, 그리고 나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책들을 살짝 배에 던져 넣어 주었지." "아버지, 그렇다면 제가 아주 거추장스러웠을 텐데요?" "아니다. 오히려 너는 나에게 있어서는 천사와 같았단다. 너의 티없이 밝은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 고통을 참고 이 섬까지 올 수 있었거든. 이 외딴 섬에 배가 닿았을 때부터 너를 기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단다." "하지만, 아버지, 왜 오늘은 갑자기 저렇게 엄청난 폭풍을 일으키시는 건가요?" "그것은 말이다, 그 적수였던 나폴리 왕과, 또한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찬 내 동생놈이 이 성에 오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말하면서 프로스페로가 마술 지팡이를 살짝 딸의 이마에 대자마자 미란다는 금세 잠들어 버렸다. 왜냐면 꼬마 요정인 아리엘이 나타나서, "모든 것이 주인님 명령대로 되었어요."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리엘의 모습이 미란다에게는 보이지 않아서, 프로스페로가 아리엘과 얘기할 때에는 아무도 없는 하늘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프로스페로는 그런 모습을 딸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리엘, 일이 어느 정도나 되었느냐?" 하고 프로스페로는 아리엘에게 물었다. 아리엘은 폭풍이 휘몰아쳐서 흔들리는 파도와, 선원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들을 얘기했다. 또한, 나폴리 왕의 아들인 페르디난드가 제일 먼저 거친 파도에 휩쓸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이제 왕자를 잃어버렸다며 슬픔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자는 이 섬의 저쪽 한 귀퉁이에 무사하게 살아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왕자는 자기 아버지가 거친 파도에 휩쓸려 빠져 죽으면 어쩌나 하고 슬픔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너는 정말로 귀신같이 잘 알고 있구나. 그럼, 빨리 이곳으로 그 왕자를 데리고 오너라. 내 딸과 만나게 해야 되겠다. 한데, 나폴리 왕과 내 동생은 어떻게 되었느냐?" "두 사람은 왕자를 찾아 헤매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계속 찾아다니고 있답니다. 배는 텅텅 비어 물결에 찰랑찰랑 흔들거리고 있지요." "아리엘, 너는 정말 훌륭하게 일을 잘 해냈다. 하지만, 아직 또 일이 남아 있다." 고개를 갸웃하며 아리엘이 물었다. "또 할 일이 남아 있다고요? 부디 저하고 약속한 것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앞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물론 그 동안 나를 보살펴 주신 은혜는 잘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느냐? 내가 너를 처음에 얼마나 힘들게 구해 냈는지 알아? 네가 그 못된 요술쟁이 노파 시코락스에게 붙들려서 나뭇가지에 묶여 있을 때 금방 숨이 넘어 갈 듯이 헐떡거리고 있는 것을 구해 준 거야. 이 배은망덕한 녀석 같으니라고." "제발 절 좀 자유롭게 해주세요." 하고 아리엘은 손바닥으로 빌며 애걸했다. "좋아, 그렇다면 허락해 주지. 약속대로 자유롭게 해주겠다." 그러자 아리엘은 너무나 기뻤다. 퐁퐁 샘솟듯이 뛰어올라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페르디난드 왕자가 커다란 슬픔 속에 빠져 있는 바닷가 풀숲에까지 가게 되었다. 아리엘은 왕자를 보고서 다음과 같은 노래했다. 사랑하는 왕자님, 왕자님은 산호와 같으며 그 눈은 진주와 같아요. 사랑하는 왕자님, 이 바닷가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딩동댕' 이 종소리가! 슬픔과 지친 몸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왕자는 하늘에서 들리는 이상야릇한 노랫소리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프로스페로와 미란다가 앉아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쪽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바로 그때 프로스페로가 말했다. "미란다, 저쪽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지금까지 아버지밖에 사람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 미란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아버지, 저것은 틀림없는 천사예요. 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쳐다보고 있네. 아.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5,5,5^ 틀림없이 저것은 천사일 거야! 그렇죠, 아버지?" "아니란다. 저것은 음식도 먹고 잠도 자는,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이란다. 저 젊은 남자는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서 이 섬에까지 밀려온 것이지. 슬픔과 지친 몸으로 인해 조금은 초라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멋진 청년이란다. 뿔뿔이 흩어진 자기 동료들을 찾으려고 저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미란다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아버지처럼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한 표정의 얼굴에 새하얀 머리칼, 흰 수염, 목부터 발끝까지 기다란 흰색 옷을 입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어 왔던 것이다. 미란다는 젊고 훌륭한 이 왕자를 보고서 가슴이 두근 두근거리며 뛸 듯이 기뻤다. 페르디난드도 어떻게 이런 곳에 저토록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하고 가슴 설레이며 쳐다보았다. 이곳은 아마도 마법의 섬이며, 저 여인은 이 섬의 여신이 아닐까 생각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미란다는 자기는 단순히 이 어른의 딸이지 여신이 아니라고 대답을 하고 나서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프로스페로가 가로막았다. 그는 젊은 두 사람이 소곤소곤 얘기 나누는 것을 보고서 한편으로 좋게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페르디난드의 진심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은 태도로 왕자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이 섬의 주인인 나를 공격하고 땅을 빼앗으러 온 것이 틀림없구나! 나를 따라오너라. 네 몸을 단단히 묶어놓겠다. 너는 이제 짠 바닷물, 썩은 조개, 말라 비틀어진 나무 뿌리와 썩은 나무 열매 같은 것만 먹어야 한다." 그러자 페르디난드는, "당신보다도 더 강한 적수를 만날 때까지 그런 대접은 사양하겠소이다."하고 말하며 칼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프로스페로는 마술 지팡이로 마술을 부려서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보자 미란다는 안타까웠다. "아버지, 너무 심하세요. 저는 지금까지 사람이라고는 아버지와 이분밖에 본 적이 없지만, 이분은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웬지 모르게 좋은 감정이 느껴져요." "잔소리 말아라." 하며 아버지는 미란다를 꾸짖었다. "너는 이 남자 말고는 그 바보 멍텅구리 칼리반밖에 모르니 이 남자가 최고인 줄 알고 있지만, 세상에는 얼마든지 훌륭하고 멋진 남자가 많이 있다." "아버지, 저는 이분보다 더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을 찾고 싶진 않아요. 이런 분이라면 족해요." 그러자 프로스페로는 못 들은 척하고 왕자에게 말을 했다. "너는 이제부터 나와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어디 한번 덤벼 봐라!" 페르디난드는 자신이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은 프로스페로의 마술 지팡이 때문에 그렇게 된 줄은 모르고, 그의 뒤를 힘없이 따라가는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될 뿐이었다. 그는 미란다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프로스페로의 바위 소굴로 따라 들어갔다. "마치 꿈과 같이 순식간에 쇠사슬로 온몸이 묶여 버렸구나. 그렇지만 이런 속에서도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저 진주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볼 수 있게만 된다면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 프로스페로는 페르디난드를 방구석에 가만히 묶어 놓지만은 않았다. 곧 밖으로 끌고 나와 여러 가지 힘든 일을 시켜 놓고, 자신은 서재에 들어가 책을 보고 있었다. 페르디난드가 해야 할 일은 무거운 장작들을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왕자로 태어난 그는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옷을 입으며 편안하게 살아 왔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서툴러서 금방 숨을 헉헉대며 지쳐 버리고 말았다. 미란다는 그것을 보고서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버지는 지금 서재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계시니까, 앞으로 세 시간 정도는 밖에 안 나오셔요. 그러니 마음 편히 좀 쉬도록 하세요." "아가씨, 나는 쉴 수가 없습니다. 쉬기 전에 우선 이 일을 해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이 좀 쉬고 있으면 그 동안에 내가 장작을 모두 쌓아 놓겠어요." 페르디난드는 미란다에게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미란다가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방해될 뿐이었다. 프로스페로가 페르디난드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도 실은 젊은 왕자의 자기 딸에 대한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서재에서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술을 부려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고 다가가서 어떤 얘기를 주고받는지 엿듣고 있는 것이었다. 미란다는 페르디난드가 이름을 물어 보자 공손하고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왕자는 미란다의 대답에 고마워하며, 온 세계를 다 찾아봐도 당신같이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여인은 처음 봤다고 했다. 미란다는 왕자에게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자 얼굴은 본 적이 없으며, 남자도 아버지와, 방금 친구가 된 당신밖에는 아무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또한, 관심도 없고요 나는 오직 당신과 사귀고 싶을 뿐이에요." 그것을 가만히 엿듣던 프로스페로는, "옳지, 됐다. 내가 바라는 대로다." 하고 생각하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페르디난드는 자기가 나폴리 왕의 계승자라는 것을 미란다에게 알려주고, 그녀에게 왕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아아! 나는 정말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솔직히 대답하겠어요.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여서 나는 기꺼이 신부가 되어 드리겠어요." 그 말에 대해서 페르디난드가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하려 했을 때 프로스페로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들의 말을 모두 엿들었단다. 페르디난드, 내가 자네에게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을 시킨 것은, 미란다를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자네는 용케도 잘 참았네. 정말로 자네의 진실한 사랑을 이제 알았으니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겠어." 이렇게 말하고 프로스페로는 그곳을 떠나 아리엘을 불렀다. 그리고는 난파선을 타고 이 섬의 어느 한 모퉁이에 정착해 있을, 마음이 능구렁이 같은 동생과 나폴리 왕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아리엘의 말에 따르면, 그 두 사람은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 모두 이상하고 괴상해서 겁에 질려 제정신을 잃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기진맥진하여 움직이지도 못하고 당장 먹을 것조차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 그곳으로 아리엘은 일부러 맛있는 음식을 잔뜩 가지고 가서, 주지는 않고 보여 주기만 하여 약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쓰라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프로스페로와 죄가 없는 어린 미란다를 죽이려고 한 그 대가라고 말했다. 나폴리 왕과 그 능구렁이 같은 동생 안토니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리엘의 말을 듣고서, 그 동안 자신들이 한 행동이 얼마나 나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아리엘은 두 사람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고, 정말 불쌍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여기로 데리고 오너라, 아리엘." 프로스페로가 말했다. "너까지 불쌍하다고 생각할 정도라면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가엾지 않겠느냐." 아리엘은 금방 나폴리 왕과 안토니오를 데리고 왔다. 난파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하늘에서 연주하는 아름다운 요정의 음악에 이끌려 왔다고 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태풍으로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프로스페로가 버려졌을 때 몰래 책과 음식을 넣어 주었던 곤잘로라는 사람도 함께 있었다. 지친 몸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그들은 처음엔 자신들 앞에서 있는, 온통 새하얀 노인이 누군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 노인이 곤잘로를 생명의 은인이라며 정중히 대접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악독한 짓을 저지른 동생 안토니오는 눈물로 형에게 용서를 빌었고, 나폴리 왕도 잘 모르고 안토니오라는 사람을 도와주었던 잘못을 사죄했다. 프로스페로는 나폴리 왕에게, "나 역시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소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활짝 열어서 나폴리의 왕의 아들인 페르디난드와 자신의 딸 미란다가 사이좋게 체스(서양식 장기 게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폴리 왕과 그 아들은 서로 아무런 이상 없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부둥켜 안았다. 나폴리 왕은 아들 곁에 서 있는 미란다의 우아하고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이 자그맣고 귀여운 아가씨는 누구입니까? 우리들을 떼어 놓기도 하고, 또 만나게도 한 이 섬의 여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왕자인 페르디난드는 자기가 미란다를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아버지도 착각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아가씨는 사람입니다^5,5,5^. 인간은 알 수 없는 신의 오묘한 계획으로 우리들은 만났고, 결혼도 약속했지요. 아버님, 저는 아버님이 무사히 살아 계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허락도 받지 않고 제 뜻대로 선택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5,5,5^ 이 분은 밀라노의 이름 높은 성주인 프로스페로님이십니다. 제가 이분의 따님을 얻었으니 이분은 제 아버님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이 말을 듣자 나폴리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5,5,5^ 나도 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셈이구나!" "모든 일들이 참 잘되었습니다. 이제 지난 일들은 깨끗하게 잊읍시다." 프로스페로는 이렇게 말하고 동생을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자기가 밀라노 땅에서 쫓겨난 것과 이런 외딴섬에서 자식인 미란다를 나폴리 왕자에게 아내로 보내게 된 것도 모두 페르디난드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신의 뜻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프로스페로는 배가 있고 배를 저어 갈 선원들도 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모두가 함께 돌아가자면서, 동굴로 식사초대를 하고는 칼리반을 불러서 급히 잔치 준비를 시켰다. 사람들은 그 바보스럽고 도깨비같이 생긴 하인 요정들이 재빨리 여러 가지 음식물을 만들고 방들을 깨끗하게 치우는 데에 놀랐다. 한편, 또랑또랑하고 상냥한 요정 아리엘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서 너무나 기뻤다. 이 꼬마 요정은 날아다니는 새처럼 창공이나 숲속, 그리고 향기로운 꽃 사이를 마음대로 폴폴 날아다니고 싶다고 늘 말해 왔었다. "꼬마 귀염둥이 아리엘, 나는 지금부터 너를 완전히 속박에서 풀어 자유롭게 해주겠노라." "고마워요, 프로스페로 주인님. 제가 끝까지 성실하게 주인님이 타고 가시는 배를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어요!"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벌들이 달콤한 꿀을 빨아들이듯 나도 달콤한 꿀을 맛보고 싶어라. 머물 곳이 그 어딘지는 몰라도 올빼미가 울어댈 즈음, 잠이 스르르 오네. 한여름을 향해 박쥐의 배를 타고 가네. 가지마다 피어오르는 꽃과 같이 기쁘고 상큼하게 살아가려네. 마침내 출발하는 아침에 프로스페로는 더 이상 요술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요술책과 요술 지팡이를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프로스페로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 땅도 되찾고 딸 미란다와 페르디난드가 경사스럽게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을 기쁜 마음으로 그려 보았다. 그런 흥겨움 속에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요정인 아리엘의 보호를 받으며 즐거운 항해를 계속해서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여름밤의 꿈 옛날 아테네에 엄격한 법률이 있었는데, 딸이 자기 아버지가 선택해 준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 딸을 사형시켜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법률에 따라 자기 딸을 처형하는 그런 아버지는 없었다. 그런데 에게우스라는 한 노인이 자기 딸 헤르미아에게 그 마을의 명문 집 아들인 데메트리우스와 결혼하라고 했다. 하지만, 헤르미아는 라이산더라는 다른 청년을 깊이 사랑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해서, 결국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아테네 왕에게까지 보고되었다. 헤르미아는 자기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는 이유는 데메트리우스가 헬레나와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테네 왕은 동정심이 꽤 많았지만 법률을 바꿀 힘은 없었기에, 헤르미아에게 나흘간의 여유를 주었다. 그 뒤에도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면 사형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헤르미아는 풀려 나자마자 곧장 사랑하는 라이산더에게 달려가 자신에게 닥친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한참 동안 궁리한 끝에 자기의 친척 한 사람이 아테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산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그곳이라면 법률의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 오늘밤 아버지 집에서 도망쳐 함께 그곳에 가서 결혼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을에서 2--3km 떨어진 그 조용한 숲속에서 만나기로 하지." 헤르미아는 그렇게 약속한 뒤에 그 비밀을 친구인 헬레나에게만 털어놨다. 그러자 헬레나는 자기를 사랑하기보다 은근히 헤르미아를 좋아하는 데메트리우스에게 달려가 그 비밀을 속삭였다. 왜냐면, 데메트리우스는 반드시 헤르미아를 쫓아갈 것이 틀림없으니 자기도 살며시 한번 따라가 보려 했기 때문이다. 헤르미아와 라이산더가 만나기로 한 숲이 마침 요정들이 살기에 아주 쾌적한 곳이었다. 거기서는 오베론이라는 요정의 왕과, 티타니아라는 요정의 여왕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이 요정의 왕과 여왕이 한창 싸우고 있었다. 왜냐면, 여왕이 유괴해 와서 소중히 키우던 남자 아이를 왕이 키우겠다고 했는데 여왕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이 숲속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 밤에 요정 여왕이 자기 하인을 데리고 산책하다가, 공교롭게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듯 우연히 요정 왕과 마주쳤다. "달밤에 우연히 만났군. 이 욕심쟁이 여왕 같으니라고." 하고 요정 왕이 말하자, "뭐라고, 당신이야말로 심술 덩어리지. 정말 상대하지 못할 만큼 지독한 왕이야." 하고 여왕도 대꾸했다. "성질이 괴팍한 할망구야. 그래도 내가 한수 위야. 뭐라고 자꾸 떠들어대는 거야? 잔소리 말고 그 아이나 어서 내놔!" "뭐야? 당신 왕국을 다 준다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줄 수 없어." "좋아, 어디 한번 멋대로 해보시지. 날이 밝기 전에 복수를 해줄 테다." 하고 요정 왕은 잔뜩 화를 내며, 자기의 부하 요정 푸크를 불렀다. 푸크는 마을에 내려가서 요술로 온갖 심술을 부리는 요정이다. 그 족제비같이 날쌤 몸으로 식탁의 음식 속에 들어가 음식을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거나, 혹은 아기에게 젖주는 엄마의 젖을 모두 없애서 젖이 안 나오게 하며,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으면 술잔의 술을 잉크로 바꿔 골탕먹이는 것이었다. 할머니 혼자서 술을 마시면 입술에 술잔을 부딪히게 해서 주름진 할머니의 턱과 목으로 술이 줄줄 흘러내리게 했고, 젊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때는 그 반대로 만들어 버려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게 했다. 이 모든 소동이 푸크의 심술궂은 장난 때문에 일어났다. "이것 봐, 푸크!" 하고 요정 왕은 말했다. "사랑풀이라는 꽃을 꺾어 오너라. 그 자주색 꽃잎을 짜서 잠자는 사람 눈꺼풀에 바르면, 눈뜬 뒤 가장 먼저 보는 것을 뭐든지, 예를 들면 사자, 호랑이, 곰, 원숭이, 그 무엇이든지간에 사랑하게 되지. 그러니까 요정 여왕이 자는 사이에 그 즙을 발라 보는 거야. 그리고는 내가 다른 주문을 외면 그 꼬마 아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이야." 못된 장난만 골라 하는 푸크는 그 생각에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는 그 꽃을 꺾으러 폴싹폴싹 날아갔다. 요정 왕이 푸크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데메트리우스와 헬레나가 숲속에 왔다. 데메트리우스는 왜 따라오냐면서 헬레나를 꾸짖었으나, 그녀는 예전에 자기를 죽도록 쫓아다니던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못 들은 척하며 서둘러 달려갔고, 그녀는 계속 그를 따라갔다. 요정 왕은 이것을 엿듣고 헬레나가 불쌍하게 생각됐다. 그래서 푸크가 그 꽃을 꺾어 오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리 오너라, 푸크. 저기에 변심한 애인을 사랑하는 불쌍한 여인이 있다. 만일에 남자가 그 여인 가까이에서 자는 것을 보거든 이 꽃즙을 눈꺼풀에 발라 놓아라. 그렇게 하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그 여인이 아니겠느냐. 그 젊은 여인은 아테네풍 옷을 입고 있으니 빨리 가 보거라!" 푸크는, "염려 마세요. 제가 감쪽같이 해놓고 오겠습니다." 하며 또 폴싹폴싹 날아갔다. 요정 왕은 여왕이 사는 해변가에 가서 여왕이 잠잘 준비를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 예쁘장한 집은 참 잘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은 인동덩굴로 단장했고, 집안에는 사향 냄새가 가득 했으며, 방안의 이불은 오색을 아로새긴 뱀 가죽이었다. 가만히 보니 요정 여왕은 여러 가지 할 일을 하인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바퀴벌레를 보면 쏜살같이 달려가 죽여야 한다^5,5,5^. 그리고 어린 요정들의 옷을 만들어 주고 싶으니 너는 박쥐 날개를 가져오너라. 또 시끄러운 부엉이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쫓아야 하고, 그밖에도 내가 자는 걸 방해하면 안된다. 자^5,5,5^. 지금부터 내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장가를 불러 보렴." 요정들은 노래하기 시작했다. 혀가 두 개 달린 알록달록한 뱀과, 가시돋힌 고슴도치도 이쪽으로 오고. 이무기와 도마뱀은 나쁜 장난을 하지 말도록. 여왕 곁에 다가가면 안된다. 노래하는 꾀꼬리는 자장가를 잘도 부른다. 꾀꼴 꾀꼴 꾀꼬꼴. 꾀꼴 꾀꼴 꾀꼬꼴. 어린아이에게 심술부리지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고 요술도 부리지 않는, 사랑스런 우리 여왕님! 편안히 주무세요, 꾀꼴 꾀꼴 꾀꼬꼴! 이런 아름다운 자장가를 불러 여왕이 잠들자, 요정들은 각자 맡겨진 일들을 하기 위해 모두 나갔다. 요정 왕은 살짝 요정 여왕 곁으로 다가가서, 아무나 사랑하게 되는 자주색 꽃즙을 바르며 말했다.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이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히히!" 한편, 헤르미아는 그날 밤 사랑하는 라이산더와 함께 길을 떠났다. 숲속을 채 빠져 나가지 못했는데 헤르미아가 기진맥진해 버려서, 라이산더는 잔디가 푸릇푸릇하게 돋아난 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라이산더는 헤르미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 누울 자리를 정하여 두 사람 모두 금방 잠들어 버렸다. 그때 심술궂은 요정 푸크가 촐싹대며 와서 아테네풍의 옷을 입은 남녀가 자는 것을 보고는, 즉시 남자의 눈꺼풀에 사랑의 약인 자주색 꽃즙을 발랐다. 마침 헬레나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라이산더가 눈을 떠서,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이 헬레나였다. 그러나^5,5,5^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무조건 사랑하게 되는 그 약 때문에 라이산더는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당신은 헤르미아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군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불 속에서라도 뛰어들 수 있어요." 헬레나는 자신이 조롱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아! 정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는거야. 데메트리우스에게 버림받은 것만도 분한데, 또 이런 식으로 놀림당하다니. 라이산더, 당신만은 정말 진실한사람이라고 믿었어요." 헬레나는 이렇게 말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라이산더는 잠자고 있는 헤르미아도 까맣게 잊고서 무작정 쫓아갔다. 헤르미아는 깨어나 불안한 마음으로 라이산더를 찾아 숲속을 헤매었다. 한편, 요정 왕은 데메트리우스가 라이산더와 헤르미아를 못찾고 깊이 잠든 모습을 발견했다. 요정 왕은 요정 푸크가 착각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데메트리우스를 보고서 그의 눈꺼풀에 자주색 꽃즙을 발라 주었다. 데메트리우스는 눈을 떴을 때, 헬레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기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다정스레 말을 걸었다. 결국 헬레나는 데메트리우스와 라이산더 양쪽에게 구애를 받고 모두가 자기를 조롱한다고 생각했다. 헤르미아도 헬레나 못지않게 놀랐다. 지금까지 자기만을 사랑하던 라이산더와 데메트리우스가 어째서 헬레나만을 쫓아다니는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사이가 좋았던 네 사람은 언성을 높이며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해, 헤르미아. 라이산더를 어떻게 할 거니? 그리고 데메트리우스까지 나를 희롱하게 하고 말이야. 남자들과 짜고 불쌍한 나를 이렇게 바보 취급해도 되는 거니? 너무해! 우리는 한 의자에 앉아 짝꿍이 되어 같이 공부하고, 노래부르며, 밥 먹고, 뭐든지 같이 하지 않았니?" "뭐라고? 너야말로 너무하는구나. 너무 잘난 척하지 마." "언제까지 사람을 놀릴 거니?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나를 조롱하고 있어. 이래도 되는 거야, 정말?" 헬레나와 헤르미아가 이렇게 말다툼을 벌인 뒤, 데메트리우스와 라이산더는 헬레나를 서로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숲속에서 결투를 벌였다. 두 여인들도 그 뒤를 따라갔다. 모두 가 버리자,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요정 왕은 푸크에게 말했다. "푸크, 네가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장난친 게야. 어느 쪽이냐?"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주인님께서 아테네풍의 옷을 입은 남자를 찾아내어 꽃즙을 발라 주라고 하셨죠? 이 싸움은 거기에서 시작이 된 거예요. 싸움이 재미있게 되어가는군요." "너도 보고 들은 대로 저 남자들은 결투할 태세다. 어서 내가 시키는 대로 짙은 안개를 불러와서 서로 싸우고 있는 여인들이 제각기 흩어지도록 해라. 그렇게 한참 동안 빙빙 돌려 놓으면 모두 지쳐서 잠들어 버릴 게다. 그때 특수 꽃집을 라이산더의 눈꺼풀에 바르는 거야. 그렇게 하면 이전과 같이 다시 헤르미아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 아름다운 저 여인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모두 괴로운 꿈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자, 빨리 그렇게 해라. 푸크, 나는 요정 여왕이 어떤 사람을 상대하는가 보러 가야겠구나!" 요정 여왕은 아직도 쿨쿨 자고 있었다. 요정 왕은 길가에서 자고 있는 광대를 보자, '이놈을 여왕의 애인으로 만들어 주자.' 하며 광대에게 당나귀 탈을 씌웠다. 광대는 눈을 뜬 뒤 아무것도 모르고 요정 여왕이 자는 곳으로 갔다. 그때 요정 여왕이 눈을 뜨자 그 약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여왕은 당나귀 머리를 한 광대를 보고 마음이 설레어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어머나! 임금님같이 훌륭하시고 영리하신 분이시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님. 다만 제게 이 숲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을 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니, 숲에서 나가 버리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을^5,5,5^ 나는 이 숲의 요정 여왕이에요.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내가 하인 요정도 부리게 해드리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땅콩 깍지와 뭉게구름, 나방, 멧돼지라고 불리는 네 요정들을 불러냈다. "이 점잖은 신사를 모셔라. 맛있는 포도와 살구를 대접하고 어서 벌집에서 꿀을 따와서 이분께 드려라!" 여왕은 이렇게 명령하면서 광대에게 말했다. "당신의 그 얼굴에 매끈매끈하고 곱게 돋아난 털을 어루만지게 해주세요, 귀여운 당나귀님?" 당나귀 탈을 쓴 광대는 여왕에게 귀여움받는 것은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지만, 네 명의 하인이 생겼기 때문에 우쭐대며 명령했다. "이봐, 땅콩 깍지야, 내 머리를 좀 긁어라! 뭉게구름아, 벌집에 가서 꿀을 따오너라! 멧돼지야, 너도 내 머리를 긁어다오. 정말로 얼굴에 털이 더부룩하게 난 것 같구나. 또 잠이 오니까 가만히 살살 긁어주어야 한다." 여왕은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 광대를 안아 살며시 재웠다. 그때 막 요정 왕이 여왕 앞으로 나가서, 당나귀 탈을 쓴 광대에게 너무 열중한 것을 꾸짖으면서 훔쳐 온 그 남자 아이를 달라고 했다. 여왕은 새로운 그 광대에게 너무나 열중한 자기 모습을 들키자, 부끄러워 안 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왕은 벼르던 그 남자 아이를 얻자 여왕이 가련하게 여겨져서 다른 특수한 꽃가루를 그녀의 누에 조금 발라 주었다. 그러자 요정 여왕은 순식간에 제정신으로 돌아와 광대에게 몰두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과 여왕은 사이좋게 화해했다. 왕은 여왕에게 아테네풍 옷을 입은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싸움이야기를 모두 들려주고 난 뒤 함께 살펴보러 갔다. 푸크가 모두를 한 장소에 모아서 풀밭 여기저기에 재워 놓았다. 그리고 푸크는 새로운 약을 라이산더의 눈에 발라서 이전에 작용했던 약을 제거해 버렸다. 헤르미아가 먼저 눈을 떴고 라이산더도 눈을 떠서 헤르미아를 보고, 두 사람은 그날 밤 일어난 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엉터리 꿈을 꾼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헬레나와 데메트리우스도 깨어났다. 푹 자고 일어나 침착해진 헬레나는 데메트리우스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단히 기뻐했다. 어젯밤 그렇게 언성을 높여 가며 말다툼을 벌였던 연인들은 화해를 해서 다시 사이가 좋아졌고, 당장 부딪친 헤르미아의 결혼 문제에 대해 지혜와 마음을 모아 의논했다. 결국 데메트리우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런 사실을 모두 얘기하여 사형을 취소하도록 간청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그때 그곳으로 헤르미아의 아버지 에게우스가 도망친 딸을 쫓아왔다. 에게우스는 데메트리우스가 이제 헤르미아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딸과 라이산더의 결혼을 허락했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나흘 뒤, 헤르미아를 사형시키기로 한 날에 식을 올리기로 했고, 또 같은 날에 헬레나와 데메트리우스도 함께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요정 왕과 여왕은 함께 노력한 보람을 느끼며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고 이 요정 왕국을 네 여인들에게 주어 결혼을 축하하자고 의논했다. 이렇게 기묘한 요정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모든 얘기가 단지 한여름밤의 꿈일 뿐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겨울 이야기 시실리의 왕 레온테스는 마음씨 착하고 아름다운 왕비 헤르미오네와 무척이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왕은 자기 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만이라고는 없었지만, 단지 옛친구인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를 한번 자기 왕궁으로 초청해서 헤르미오네와 만나게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온테스와 폴릭세네스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으나, 지금은 모두 한 나라의 왕이 되어 편지나 선물, 또는 외교관을 통해서만 소식을 주고받고 있을 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초대를 받은 끝에 마침내 폴릭세네스는 아득히 먼 보헤미아에서 시실리의 궁정으로 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레온테스는 너무나 기뻐서 왕비 헤르미오네에게 친구를 융숭하게 대접해 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어렸을 때 남들을 골탕먹였던 추억들을 되새기면서 헤르미오네에게도 들려주었다. 오랫동안 머무른 뒤 폴릭세네스가 출발 준비를 서두르자, 헤르미오네 왕비는 레온테스 왕이 간곡하게 부탁하니 좀더 머물러다 가라고 그에게 상냥하고도 끈질기게 부탁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지도 않았던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레온테스 왕이 직접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았던 폴릭세네스가 왕비의 간청에 못 이겨 2--3주 정도 출발을 늦추자, 레온테스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공공연히 죄도 없는 친구와 아내 사이를 의심하게 된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비뚤어져서, 그만 어리석게도 질투 때문에 눈이 멀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다지도 그 두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던 레온테스 왕은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 신하인 카밀로에게 폴릭세네스를 독살하라고 명령했다. 카밀로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의 질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헤미아 왕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빨리 도망가라고 일러 주었다. 폴릭세네스는 친절한 카밀로와 함께 몰래 도망쳐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갔다. 그리고 카밀로를 자기의 심복으로 삼았다. 폴릭세네스가 도망친 것을 알고 레온테스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가 왕비 방에 가 보니 어린 아들 마밀리우스가 엄마 앞에서 재롱을 떨고 있었다. 질투로 인해 눈이 먼 왕은 어머니에게서 아들을 빼앗고 사랑하는 아내 헤르미오네를 감옥에 집어넣고 말았다. 마밀리우스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감옥에 들어간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몇 날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못하는 바람에 몸은 쇠약해지고 바싹 말랐다. 왕은 왕비를 감옥에 처넣으면서 두 신하에게 시켜, 왕비가 자신에게 불성실했으니 아폴로 신이 모셔져 있는 신전으로 가서 신의 계시를 듣고 오라고 명령했다. 헤르미오네는 감옥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예쁜 딸을 낳았다. 왕비는 귀여운 딸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나의 귀엽고 사랑스런 죄수야! 네게 죄가 없는 것처럼 나도 죄가 없단다." 한편, 헤르미오네에게는 폴리나라고 하는 마음씨 곱고 친절한 친구가 있었다. 폴리나 부인이 아기의 탄생 소식을 듣고는 감옥에 와서 아기를 시중들고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왕비님께 이렇게 전해 주세요. 만일, 왕비님이 나에게 공주님을 맡겨 주시면 왕께 보여 드리겠다고 말이에요. 왕도 죄가 없는 어린 공주를 보시게 되면 마음이 풀어지실 거예요." 시녀의 말을 들은 헤르미오네 왕비는 기꺼이 공주를 폴리나에게 맡겼다. 폴리나의 남편 안티고누스는 그런 짓을 하면 왕의 노여움을 더하게 할 뿐이라고 아내를 극구 말렸다. 그것을 뿌리치고 폴리나는 왕 앞에 나아가 갓 태어난 공주를 그 발 밑에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왕을 향해 헤르미오네를 변호해 주고 왕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죄없는 왕비와 공주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레온테스는 더욱더 화를 내면서 폴리나를 내쫓아 버렸다. 그녀는 물러날 때에 공주를 슬그머니 놓고 나와 버렸다. 아무리 혹독한 왕일지라도 죄가 없는 어린 공주를 보면 측은히 여겨 생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자비한 왕은 폴리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는 안티고누스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를 바다로 데리고 가서 물속에 던져 넣으라고 말했다. 안티고누스는 마음씨 고왔던 카밀로와는 달리 왕의 명령을 그대로 따라 즉시 아이를 파도가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로 데리고 나갔다. 왕은 왕비의 부정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계시를 들으러 간 신하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공주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왕비를 아폴로 공정의 모든 귀족들 앞에서 재판 하기로 했다. 불쌍한 왕비가 죄인의 몸으로 나와 막 재판을 받으려 하는데 아폴로 신전에 갔던 신하 두 사람이 돌아왔다. 레온테스는 가지고 온 상자의 뚜껑을 뜯고 큰소리로 또렷또렷하게 읽으라고 신하에게 명령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헤르미오네에게는 죄가 없다. 폴릭세네스 또한 죄가 없다. 카밀로는 성실한 사람이며, 레온테스는 질투로 가득 찬 폭군이다. 만일, 잃은 아이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왕은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것이니라." 그러나 왕은 신의 계시도 믿지 않고, 그것은 다 왕비가 꾸며 낸 수작이라고 하며 재판을 계속하려고 했다. 이때 그곳에 갑자기 어떤 남자가 뛰어들어와 마밀리우스 왕자가 어머니가 재판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헤르미오네는 불쌍한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레온테스는 그 모습을 보고 왕비를 불쌍히 여겨, 폴리나와 그 하인들에게 왕비를 풀어 주고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폴리나는 금새 돌아와서 헤르미오네가 죽었다고 말했다. 레온테스는 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금까지 자기가 너무나 가혹한 행동을 했다고 후회하면서 비로소 아내에게는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신의 계시에서, '만일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내지 못한다면'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딸을 가리켜 하는 말이며, 왕자가 죽은 것은 곧 왕위 계승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딸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비탄에 빠졌다. 한편, 어린 공주를 바다에 버리러 갔던 안티고누스의 배는 거친 풍랑 때문에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보헤미아 왕국의 해안에 다다랐다. 안티고누스는 배를 바닷가로 끌어올린 뒤 아기를 버렸다. 그러고 난 뒤 다시 배에 오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곰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그는 곰에게 습격을 받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버렸다. 그가 천벌을 받은 바람에 시실리로 돌아가 공주를 어디에 버렸는지, 언제 버렸는지에 대해서 왕에게 보고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왕은 자기가 명령한 대로 안티고누스가 딸을 죽여 버렸겠구나 하며 낙심하여 오랜 세월을 흘려 보냈다. 불쌍한 공주는 외로운 양치기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었으므로, 버려진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내와 함께 소중하게 키웠다. 공주는 버려졌을 때 좋은 옷과 보석으로 싸여 있었기 때문에, 양치기는 아무도 모르는 땅에 가서 그 보석을 팔아 양떼를 사들여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공주는 페르디타라고 불렸다. 그것은 그녀가 버려졌을 때 겉옷에 꽂힌 종이쪽지에 고귀한 가문이라는 말과 함께 쓰여 있었던 이름이었다. 어린 페르디타는 자신이 정말로 양치기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라감에 따라 점점 더 헤르미오네를 꼭 빼닮아, 아름답고 성품이 고운 처녀가 되었다.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에게는 플로리젤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이 젊은 왕자는 양치기 집 근처에서 사냥을 하다가 마치 여왕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페르디타를 보고서 금방 반해 버렸다. 그는 귀족의 옷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고는 도리클레스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양치기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왕자 플로리젤이 이따금씩 궁정에서 없어지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아버지 폴릭세네스가 아들의 행방을 추적해 본 결과, 아들이 양치기의 딸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폴릭세네스는 착실한 카밀로와 상의하고는 함께 몰래 양치기 집에 가 보기로 했다. 왕과 카밀로는 변장을 하고 양치기 집으로 갔다. 그날은 마침 양털을 깎는 날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도 쾌히 들여보내 주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쉽게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상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이 나오고, 잔디밭에서는 춤을 추고, 장사꾼들이 와서 리본을 파는 등, 아주 즐겁고 명랑한 분위기였다. 이런 시끌벅적한 가운데 플로리젤과 페르디타는 구석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누고 있었다. 왕은 완전히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로리젤도 자기 아버지를 몰라보았다. 그들 곁에 좀더 가까이 가서 살펴본 폴릭세네스는 페르디타의 청순하고 해맑은 모습을 보고서 카밀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예쁜 양치기의 딸은 예전엔 본 적이 없네. 아무리 봐도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구먼." "정말 양치기의 여왕 같습니다." 카밀로도 맞장구쳤다. 왕은 양치기에게 슬그머니 다가가서 물었다. "잠깐 물어 보겠습니다만, 따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젊은이는 누구입니까?" "도리클레스라는 사람인데, 제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답니다. 딸도 저 청년을 매우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두 사람이 결혼한다면 딸은 도리클레스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물건을 혼수로 갖고 가게 될 겁니다." 라고 양치기는 대답했다. 양치기는 대답했다. 양치기는 페르디타의 보석을 조금만 팔고 나머지는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폴릭세네스는 이번에는 살며시 아들 곁으로 가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이봐, 젊은이 자네는 이 잔치에 너무 들떠 있어서 그런지 그 외의 일들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구먼. 옆에 있는 아가씨에게 선물 한 가지는 사줘야 하지 않겠는가?" 젊은 왕자는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 보시오, 노인! 나는 그런 시시한 선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페르디타가 진심으로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이 가슴속에 있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뿐입니다. 마침 노인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5,5,5^ 잘됐습니다. 이 기회에 당신이 저와 페르디타 사이에 굳게 맺은 결혼 약속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결혼 약속의 증인? 웃기는군. 너희들의 파혼의 증인이 되어주마." 이렇게 말하고 왕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는 이렇게 천한 여자와 결혼하려 했다면서 아들을 꾸짖었다. 더군다나 페르디타에게는, "이 몹쓸 것 같으니라고!" 하는 둥 심한 욕설을 퍼붓고 다시 한번 내 아들을 불러내기만 하면 너와 네 아버지를 사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카밀로에게는 왕자를 끌고 오라는 명령하고는, 잔뜩 화를 내면서 궁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가고 나자 페르디타는 모욕받은 데 대해 화가 났지만 차분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서로 남남이 되고 말았군요. 하지만, 내게 두려움이나 걱정은 없어요. 당신 아버지의 궁전을 내리쬐고 있는 햇님은 우리가 사는 작은 오두막집에도 비치고 있답니다." 그리고는 슬픈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행스럽게도 꿈에서 깨어났으니 앞으로는 여왕 흉내는 내지 않겠어요. 나는 저쪽에 가서 양젖이나 짜야겠어요." 마음씨 착한 카밀로는 페르디타의 꿋꿋하면서도 정숙한 태도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다시 한번 고국으로 돌아가서 국왕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밀로는 플로리젤과 페르디타에게 자신과 함께 시실리 궁정으로 가자고 권했다. 그렇게 되면 레온테스는 반드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고, 폴릭세네스 왕도 마음을 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두 연인은 기꺼이 그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양치기는 페르디타의 보석과 어렸을 때 입었던 옷, 겉옷에 꽂혀 있던 종이쪽지 등을 갖고 집을 떠났다. 플로리젤과 페르디타와 양치기, 그리고 카밀로는 항해를 무사히 끝내고서 레온테스의 궁정에 도착했다. 레온테스는 이들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정중하게 대접해 주었다. 플로리젤이 데리고 온 페르디타의 모습 속에서 사랑하던 왕비의 모습을 발견한 왕은 한층 더 슬픔에 잠겨, 자신이 옛날 그렇게 어리석고도 혹독한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더라면 공주는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나는 자네의 훌륭한 아버지, 다정했던 내 친구 폴릭세네스의 우정까지도 저버렸네. 지금에 와서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네." 한편, 옆에 서 있던 양치기는 왕이 페르디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자기 딸을 아주 어렸을 적에 내다버렸다는 말을 듣자, 자기가 페르디타를 발견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냈다. 그는 혹시 페르디타가 바로 그 버려졌다는 공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치기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자기가 페르디타를 바닷가에서 주웠을 때의 일로부터 시작해서 곰에게 습격받아 죽은 안티고누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안티고누스의 상냥하고 착실한 부인 폴리나는 아직도 궁정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양치기가 가져온 겉옷이 왕비가 아기에게 입혀 준 것이며, 보석은 그 목에 걸어준 것이고, 종이쪽지에 쓰인 글은 남편의 글씨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페르디타는 레온테스의 딸임이 분명해졌다. 레온테스는 자기 딸을 찾고 나서는 헤르미오네의 죽음을 더욱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만, "페르디타, 네 어머니는^5,5,5^ 네 어머니는^5,5,5^" 하면서 한탄할 뿐이었다. 그러자 폴리나가 앞으로 나와 자기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가 만든 최근의 조각 작품을 하나 갖고 있는데, 그것이 돌아가신 왕비님과 무척이나 닮았기 때문에 꼭 한번 보아 주십사고 말했다. 게다가 꼭 자기 집에 가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즉시 폴리나의 집으로 갔다. 폴리나가 조각을 가리고 있던 휘장을 걷자 왕은 그 조각을 보고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 조각은 헤르미오네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생생하게 거기 서 있었던 것이다. 조금 뒤에 왕은 말을 시작했다. "오! 진정 훌륭한 작품이로다. 내가 처음에 결혼을 신청했을 때도 이렇게 아름다웠었지. 하지만, 폴리나, 헤르미오네는 이 조각품처럼 늙지는 않았었소." "그게 바로 조각가의 천재성입니다. 조각가는 왕비님이 지금 살아 계시면 이럴 것이라고 상상해서 이렇게 만든 것이니까요. 그러면, 폐하, 다시 커튼을 치겠습니다. 만든 지 얼마 안되어서요." "마치 이 조각품은 살아 움직이는 듯하구먼."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커튼을 치지 마시오. 나는 저 조각품이 살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먼. 누가 보면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저 조각의 입술에 키스를 해야겠소." "아니, 안됩니다. 저 조각상의 입술은 그림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아 폐하의 입술만 더러워지십니다. 그럼, 이제 커튼을 치겠습니다." "안되오. 그만두오." 레온테스는 한사코 폴리나를 말렸다. 페르디타는 어머니의 조각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보고 싶었던 어머니, 저는 이 자리에 죽 앉아서 계속 어머니만을 바라보고 있겠어요." 폴리나는 왕에게 말했다. "부디 커튼을 치게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더욱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실 저는 저 조각상을 움직여서 발판에서 내려오게 하여 폐하와 손을 잡게 할 수도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법의 힘으로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신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해보시오." 그래서 폴리나는 미리 준비해 둔 고상한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러자 조각상은 발판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와 레온테스의 목에 매달려 남편과 아이의 행복을 비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착한 폴리나는 왕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왕비가 죽었다고 왕에게 거짓말을 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왕비는 폴리나의 집에 살면서 페르디타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몸을 숨기고 살아왔다. 레온테스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왕비가 이렇게 살아 있고, 게다가 잃어버렸던 딸까지 다시 찾게 되어 레온테스는 더없이 행복했다. 행복에 넘친 왕과 왕비는 버려진 딸을 소중히 길러 준 양치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후하게 보답했다. 폴리나는 자신의 고생이 저런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리하여 행복이 흘러넘치는 시실리의 궁정으로 아들과 카밀로의 뒤를 쫓아 폴릭세네스 왕이 찾아왔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그도 한마음으로 이 경사를 축하해 주었다. 레온테스는 그 동안 폴릭세네스에 대해 나쁘게 굴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예전처럼 다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폴릭세네스는 아들과 페르디타의 결혼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페르디타는 이제 한낱 양치기의 딸이 아니라 왕위 계승자가 된 것이다. 헛소동 메시나의 총독 레오나토에게는 헤로라는 딸과 베아트리체라는 조카딸이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성격이 매우 쾌활하여 항상 재미있는 농담을 하면서 고지식한 헤로를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이 두 딸이 성장하여 마침내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무렵, 대여섯 명의 젊은이가 이 궁정을 방문했다. 그 중에는 장군으로서 이름이 드높은 아라곤의 공작 돈 페드로와 그 친구인 플로렌스의 귀족 클로디오가 끼어 있었다. 또 재주 있는 재담가로서 널리 알려진 베네딕도 그들과 함께 왔다. 그들은 전에도 메시나 궁정에 온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총독은 딸과 조카딸에게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분부했다. 베네딕은 그들이 다같이 모인 방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총독이나 공작들과 사이좋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말괄량이 베아트리체는 원래 어떤 대화에도 재치 있게 잘 끼여드는 편이었기에 베네딕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장황하게 늘어놓고 계신 건가요, 베네딕? 누구 한 사람 듣고 있지 않잖아요?" 베네딕도 베아트리체에게 지지 않을 만큼 말을 잘했지만, 이렇게 번번이 그녀의 재치 있는 공격을 당하게 되자 은근히 화가 났다. 이처럼 사려없는 말을 하는 것은 훌륭하고 예의바른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베네딕이 지난번에 메시나에 왔을 때도 이 두 사람은 얼굴만 마주하면 서로를 조롱하고 입씨름을 벌였었다. 베네딕은 베아트리체의 트집에 지지 않으려고 재빨리 말을 되받았다. "아니, 아가씨, 아직도 무사히 살아 있었군요?" 이렇게 비꼬는 말로써 둘은 오랫동안 언쟁을 벌이곤 했다. 이번 만남에서도 베아트리체는 베네딕에게 시비를 걸었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베네딕에 대해 전쟁에서 대단히 용감하게 싸운 사람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 용기란 것은 사실 알고 보면 별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베네딕은 자신이 남들보다 용기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그런 비방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가리켜 '공작의 아첨꾼' 운운했을 때는 더 이상 참고 들을 수만은 없었다. '평소에 공작의 마음에 들도록 조금 신경을 썼을 뿐인데 겨우 그런 이유로 그런 심한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그런 말을 듣고는 제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베아트리체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공작은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의 이렇게 장난기 심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고는 재미있어하면서 귓속말로 총독에게 속삭였다. "오, 정말 재치 있는 아가씨로군요. 베네딕에게 꼭 어울리는 배필인 것 같소." 총독은 만일 그들이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매일같이 싸움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작은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결혼시켜 놓으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이 결혼 외에도 또 한 쌍의 보기 좋은 부부가 생길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클로디오가 정숙하고 아름다운 총독의 딸 헤로를 은근히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는 클로디오에게 말했다. "자네는 헤로를 좋아하고 있지?" "오, 그렇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부터 그녀를 무척 훌륭한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평화를 되찾은 뒤 그녀를 다시 만나니 어여쁜 헤로에 대한 사랑만이 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전쟁의 처참한 기억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공작은 클로디오의 진실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즉시 총독에게 클로디오를 사위로 맞이해 달라고 부탁했다. 총독은 그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여 두 사람의 결혼을 서둘렀다. 이제 몇 밤만 지나면 결혼식인데도 젊은 클로디오는 그 나날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 공작은 기다리는 동안 항상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맺어 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클로디오뿐만 아니라 총독과 헤로까지 그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 계획이란 다름이 아니라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에게 서로를 각각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작과 총독, 그리고 클로디오는 즉시 그 계획을 시행했다. 그들 세 사람은 베네딕이 넓은 정원의 조그마한 정자 안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바로 뒤의 나무 숲에 숨어서 일부러 베네딕에게 들리도록 큰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총독님, 언젠가 총독님이 말씀하셨던 것이 어떤 내용이었죠? 조카따님이 베네딕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참말로 남자를 남자같이 여기지 않던 베아트리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묘한 것은, 남들 앞에서는 싫어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 사람을 보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 그 심정입니다." 그러나 클로디오도 한마디 거들었다. "헤로가 그러는데, 베아트리체는 베네딕을 죽도록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베네딕이 똑같은 정도로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너무 속이 상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공작은 이 말에 맞장구를 쳐 가며 얘기했다. "그 이야기를 베네딕에게 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클로디오는 반대했다. "그렇게 하면 베네딕은 그 말을 트집잡아 가련한 베아트리체를 더욱더 괴롭힐 겁니다." "그런 짓을 한다면 목졸려 죽어도 싸지. 베아트리체는 참으로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고 총명한 아가씨니까 말이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베네딕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고."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들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었고, 헤로가 말했다는 것만 들어 보더라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만큼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군. 아직 결혼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 여자는 품행도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기까지 하다고 모두들 그러잖아. 확실히 내 마음도 끌려. 아! 저기 베아트리체가 오고 있군. 오늘은 더욱 예뻐 보이는걸. 그렇게 생각하니 웬지 모르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베네딕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베아트리체가 다가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절대로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지만, 식사하러 오시라고 하기에 왔어요." 이에 대해 베네딕은 지금까지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베아트리체, 수고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변함없는 태도로 듣기 싫은 말을 두어 마디 하고는 가버렸다. 완전히 공작의 계략에 넘어간 베네딕은 베아트리체가 겉으로 보이는 오만한 태도와는 달리 속으로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아가씨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나쁜 놈이야. 베아트리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지." 다음은 베아트리체의 차례였다. 이 일을 맡은 헤로는 우선 어슐라와 마가렛이라는 두 시녀를 불러 먼저 마가렛에게 명령했다. "급히 내 사촌 베아트리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헤로와 어슐라가 정자 뒤에 있는 과수원에서 베아트리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고 살짝 얘기해 줘. 그리고 그애를 은근히 이쪽으로 유인해 오도록 해." 베네딕이 공작과 클로디오가 하는 얘기를 엿들었던 정자로 베아트리체를 데리고 오려고 마가렛이 떠난 뒤 헤로는 어슐라를 데리고 과수원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자, 어슐라, 베아트리체가 오면 우리는 이쪽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베네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야. 너는 그 사람을 잔뜩 추켜세우고, 나는 베네딕이 얼마나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자, 시작하자꾸나. 베아트리체가 벌써 와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곧 헤로는 어슐라에게 무슨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 어슐라. 베아트리체는 너무나 교만해. 어떤 이야기를 해줘도 베아트리체의 마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거야." "그럼, 베네딕님이 베아트리체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정말인가요?" "공작님이나 클로디오도 그렇게 말했고, 다들 베아트리체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라고 내게 부탁하셨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베네딕을 위한다면 결코 베아트리체에게 그 이야기를 알려서는 안된다고 나는 주장했지." "그렇고말고요. 베아트리체 아가씨가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단번에 그분을 놀림감으로 만들고 말 거예요." "아무리 총명하고, 신분이 높고,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라 할 지라도 베아트리체에게 조롱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어." "옳으신 말씀이에요. 그렇게 남을 놀려대는 것은 좋지 않아요." "맞아, 내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그앤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거든." "그래도 베네딕님 같은 훌륭한 신사분을 거절할 만큼 무분별하지는 않겠지요." "베네딕 그분은 정말 평판이 좋아. 완전히 이탈리아의 일등 신사지. 내가 사랑하는 클로디오는 빼놓고 하는 말이지만." 이쯤에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헤로는 결혼식이 내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옷을 한번 입어 봐야겠다면서 시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지금까지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베아트리체는 그들이 가버리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말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네. 베네딕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니 정말일까? 나도 지금까지와는 생각을 달리해야겠어. 이제 더 이상 그를 비웃거나 경멸하지 말아야지. 황량하고 쓸쓸했던 내 마음을 그 사람의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묻어 버려야겠어."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을 사랑하게 하려는 공작의 계획은 뜻대로 술술 풀려 나갔다. 그런데 헤로와 클로디오의 결혼식 앞에는 뜻하지 않았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라곤의 공작 돈 페드로에게는 돈 존이라는 배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남을 괴롭히고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심술궂은 사람이었다. 그는 형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형의 친구인 클로디오도 몹시 싫어했다. 돈 존은 클로디오와 헤로의 결혼을 방해할 목적으로 헤로의 시녀인 마가렛과 친한 보라키오라는 마음씨 나쁜 악당에게 돈을 주어 무서운 음모를 꾸몄다. 그날 밤 헤로가 잠들면 보라키오가 그 방의 창가에 서서 헤로로 변장한 마가렛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멀리서 클로디오가 보게만 된다면 그들의 약혼은 헤로가 품행이 정숙지 못한 여자라고 오인을 받게 됨에 따라 깨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계획을 짜고 나서 돈 존은 공작에게 가서 헤로를 비난했다. 헤로는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지만, 사실은 밤마다 몰래 자기 약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슬쩍 믿지 못하겠으면 오늘밤 숨어서 지켜보고 확인해보자고 말했다. 클로디오는 그 말에 찬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헤로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오늘밤 보게 된다면 내일 결혼식장에서 그녀에게 창피를 주고 말겠소." 공작도 그 계획에는 찬성이었다. 그날 밤 돈 존이 클로디오와 공작을 헤로의 방 근처로 데리고 갔을 때, 정말로 헤로의 창가에서 한 여인이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는 실제로는 마가렛이었지만 헤로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이 광경을 본 공작은 클로디오는 그 여자가 헤로라고 굳게 믿고 말았다. 아무튼 클로디오는 헤로가 자기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여태까지 갖고 있던 불 같은 사랑도 증오로 변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클로디오도 이 부끄러운 사실을 내일 결혼식장에서 모든 사람이 모인 가운데 폭로하여 망신을 주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공작도 저런 여자는 그런 벌을 받아도 싸다고 하며 그 말을 찬성했다. 다음날,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손님들이 모이고, 클로디오와 헤로는 주례를 서는 신부 앞에 섰다. 그리고 신부가 막 결혼식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클로디오는 몹시 흥분해서는 헤로에게 품행이 올바르지 못한 더러운 여자라며 욕을 퍼부었다. 눈처럼 깨끗한 헤로는 너무나 놀라서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입을 떼었다. "당신, 제정신이세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총독 역시 너무나 당황해서 공작에게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오?" 그러자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총독님,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만, 댁의 따님이 어젯밤에 몰래 딴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을 나와 클로디오, 그리고 내 동생 존이 보았다는 것을 알려 드리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분명히 그 여자는 헤로였습니다. 그럼, 이만." 헤로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로 충격을 받아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공작과 클로디오는 기절한 헤로와 망연해 하고 있는 총독을 남겨두고 냉정하게 결혼식장을 떠나 버렸다. 베네딕과 베아트리체는 어떻게 해서든 헤로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애를 썼다. 베아트리체는 사촌이 얼마나 깨끗하고 착한 처녀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든 아버지마저 헤로를 의심했다. 헤로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어젯밤 몰래 어떤 남자를 만난 것이 사실이라면, 부디 저를 죽이거나 내쫓아 버리세요." 그때 이 상황을 죽 지켜보고 있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공작님과 클로디오가 무슨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신부의 생각은 다름이 아니라, 헤로를 죽은 것처럼 가장해서 장례식을 치르자는 것이었다. "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클로디오는 금세 헤로를 불쌍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끼리만 알고 지내기로 합시다. 나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믿고 있어요. 클로디오도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지금까지 지내 왔던 일들이 그리워지겠지요." 베네딕도 신부의 말을 거들었다. "총독님, 그렇게 하세요. 저는 그 사람들과 친한 친구 사이이지만, 헤로를 위해 꼭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총독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서 그렇게 하자고 승낙했다. 총독이 신부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나자 베네딕은 혼자 남아 있던 베아트리체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더 이상 농담이나 비방을 하지 않고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아트리체 양, 계속해서 울고만 있었습니까?" "예, 지금까지도 슬픔 때문에 눈물이 그치지를 않아요." "틀림없이 헤로 양은 오해를 받은 것입니다." "아! 정말로 그애의 오해를 풀어 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나는 그 사람을 평생 은인으로 알겠어요." "두 분이 그렇게도 사이좋은 자매였던가요^5,5,5^ 그건 그렇고, 베아트리체, 내가 당신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정말로 사랑합니다." "나도 당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어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낸다는 것이 부끄럽군요. 지금은 다만 헤로가 불쌍하고 딱한 생각이 들 뿐이에요." "하늘에 맹세하겠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나 또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클로디오를 죽여 주세요." "예? 그것만은^5,5,5^ 나는 그 친구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클로디오는 나쁜 사람이에요. 헤로를 비방하고 망신을 주었잖아요. 헤로가 창 너머로 다른 남자와 얘기를 했다는 것도 다 그 사람이 꾸며낸 얘기라고요. 마음씨 착한 헤로는 죽고 말 거예요. 아, 만일, 내가 남자라면!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나를 위해 남자가 되어줄 친구가 있다면!" "기다려 주시오, 베아트리체.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클로디오가 분명히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럼요. 틀림없을 거예요." "좋습니다. 그러면 약속하지요. 나는 클로디오와 결투를 벌이기로 하겠습니다. 틀림없이 끝장내 버리겠습니다. 당신은 저쪽에 가서 사촌을 위로해 주세요." 베네딕은 클로디오에게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총독까지 한몫 거들어, 헤로에게 창피를 준 나쁜 놈에게 자기까지도 결투를 신청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클로디오는 백발이 성성한 총독의 결투 신청은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나, 베네딕의 신청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곳으로 동네 야경꾼이 보라키오를 끌고 왔다. 보라키오가 뱃속 검은 돈 존에게 돈을 받고 아무 잘못도 없는 헤로에게 누명을 씌우기로 한 약속을 그 야경꾼이 우연히 엿들었던 것이다. 보라키오는 공작과 클로디오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그들이 헤로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시녀 마가렛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헤로의 결백에 대해서는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돈 존은 자기 죄가 탄로난 것을 알아 재빨리 메시나에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 클로디오는 헤로를 비난했던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면서 그녀를 찾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기의 가혹한 태도 때문에 사랑하는 헤로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총독에게 잘못을 빌면서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총독이 내린 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성격이나 외모가 헤로를 꼭 빼닮은 조카딸 한 명이 있으니, 그애와 결혼하여 조카사위나 되어 달라고 한 것이다. 클로디오는 한번 약속한 이상 상대가 누구이든지, 예를 들어 살빛이 암흑처럼 검은 흑인 여자든 생판 낯선 사람이든간에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렇지만 너무도 마음이 아팠으므로, 헤로의 무덤에서 밤을 지새며 후회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침이 되어 공작이 클로디오와 함께 성당에 갔더니 벌써 모든 사람이 결혼의 증인이 되려고 와 있었다. 소개를 받은 그 조카딸이라는 사람은 얼굴에 하얀 면사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곧 클로디오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 "이 신성한 성당과 신부님 앞에서 내게 손을 주십시오. 당신이 결혼을 승낙하신다면 오늘 이후로 나는 당신의 진실한 남편이 되겠습니다." "나도 죽기 전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였지요. 그리고 지금도 당신만을 살아하고 있답니다." 하면서 베일을 벗는 그 여인은 다름아닌 헤로였다! 그녀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클로디오는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자기 얼굴을 꼬집어 보기까지 했다. 공작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죽었다던 헤로가 살아 있었다니!"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베네딕은 자기도 베아트리체와 이 자리에서 당장 결혼하자고 말했다. 베아트리체가 조금 머뭇거리면서 반대를 하자, 베네딕은 헤로에게서 들었다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사람들이 자기를 맺어 주기 위해 일을 꾸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속았다고 만은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 이미 두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도 서로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사랑을 깨뜨릴 수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베네딕은 예전처럼 약간 비꼬는 투로 자기가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그녀가 자기를 죽도록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거절하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며 큰소리를 쳤다. 베아트리체도 이에 지지 않고 베네딕이 자기에게 너무 끈질기게 사랑을 고백한데다가, 그가 폐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으므로 하도 딱해서 결혼해 주려는 것이라고 재빨리 되받아쳤다.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축복 아래 행복하게 결혼을 하게 되자 말다툼을 멈췄다. 두 쌍의 행복한 연인들은 공연한 헛소동을 겪고 나서 더 굳은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신 좋으실 대로 옛날 프랑스가 공작의 영지들로 나뉘어 있을 무렵, 정식으로 작위를 이어받은 공작인 친형을 추방하고 자신이 그 영토를 차지하게 된 한 공작이 있었다. 자신의 영토를 빼앗긴 형은 몇 명의 충직한 신하들과 함께 아르덴 숲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들은 공작을 위해 자신들의 땅과 재산을 버리고 지위를 잃은 공작을 모셨다. 궁정에서 보내는 형식적이고도 딱딱한 생활에 비한다면 그들의 생활은 어떻게 보면 오히려 태평스럽고 한가로운 것이어서, 유쾌하고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영국의 로빈후드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숲으로 많은 신분 높은 사람들이 궁정을 떠나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황금시대(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장 살기 좋은 시대를 말함)에 살고 있는 양, 걱정 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여름철에 그들은 울창한 숲의 시원한 그늘에 누워 야생 사슴들이 노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숲의 원주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얼룩배기 짐승들이, 나중에 들어온 이주민들인 자신들의 식량이 되기 위해 잡혀 죽게 되는 것을 그들은 마음 아프게 생각했다. 겨울이 되어 싸늘한 바람이 불어닥치게 되면 공작은 자신의 불운함을 가슴 깊이 느꼈지만, 그는 꾹 참아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몸에 불어닥치는 이 차디찬 바람은, 궁정에서 알랑거리는 간신들과는 달리 어떻게 내가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된 것을 가르쳐 준다. 바늘로 몸을 콕콕 쑤시는 듯이 차갑게 몸을 물어뜯지만, 그 이빨은 비열하고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불행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조차 유익한 것을 찾아낸다. 마치 메스꺼운 두꺼비의 독오른 머리에서도 약을 만들 수 있는 보배를 찾아낼 수 있듯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공작은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발견했다. 이러한 관점 덕분에, 그는 겉은 사람의 탈을 썼지만 속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이 우글대는 곳을 떠나 나무들에게서도 이야기를 듣고, 흐르는 시냇물을 책으로 삼으며, 돌멩이에게서 설교를 듣고, 모든 것에서 선함을 찾아냈다. 추방당한 공작에게는 로잘린드라고 하는 외동딸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쫓아낸 숙부 프레드릭 공작은 로잘린드를 궁정에 붙들어 두고 자기 딸인 실리아의 말동무가 되도록 했다. 아버지들의 사이는 좋지 못했지만, 두 처녀 사이에는 아주 굳은 우정이 오가고 있었다. 실리아는 자기 아버지가 로잘린드의 아버지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하여 로잘린드를 극진히 위해 주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달리 마음씨가 상냥하고 고와서, 로잘린드가 추방당한 아버지와 홀로 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우울해 하고 있을 때면 늘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기운을 북돋아 주곤 했다. 어느 날 실리아는 언제나 그랬듯이 로잘린드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제발 부탁이야, 사랑스런 로잘린드 언니, 기운을 내." 이때 공작이 보낸 사람이 들어왔다. 씨름 경기가 벌어질 예정이니, 만일 보고 싶거든 궁전 앞뜰로 나오라는 전갈이었다. 실리아는 씨름 구경을 하면 로잘린드의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 당시 씨름은 궁정의 신분 높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경기였다. 실리아와 로잘린드가 마침 경기장에 나타났을 때는 처참한 싸움판이 벌어질 참이었다. 선수 중 한 명은 아주 노련한 씨름꾼으로서 많은 선수를 때려눕힌 사람이었는데, 여기에 맞서 싸울 젊은이는 새파랗게 젊은데다 기술도 없으므로,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 청년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딸과 로잘린드가 오자 이렇게 말했다. "아, 너희들도 보러 왔구나. 하지만, 너희들은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게다. 저 선수들의 실력 차이가 너무 심해서 말이야. 젊은이를 설득해서 씨름을 포기하게 했으면 하는데^5,5,5^ 얘들아, 저 젊은이에게 가서 그만두라고 좀 말려 보아라." 처녀들은 그 말을 받아들여 젊은 선수에게 다가갔다. 먼저 실리아가 그를 만류했고, 그 다음에는 로잘린드가 부드러운 말로 그가 당하게 될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경기를 단념하게 하려고 애를 섰다. 그러나 청년은 오히려 이 상냥한 말을 듣고는 싸움을 포기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이 사랑스런 처녀의 눈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고서 결의를 다지는 것이었다. 그는 실리아와 로잘린드의 간곡한 만류를 거절했다. 그래도 두 처녀가 계속 말리자,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말하면서 확실하게 굳혔다.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아가씨들의 청을 거절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예쁜 눈과 상냥한 마음으로 이 승부에 나가는 저를 지켜보십시오. 이 승부에서 진다 해도 하잘것없는 녀석 하나가 죽을 뿐이고, 죽는다 해도 그것을 원한 인간이 죽는 것뿐입니다. 친구에게 피해도 주지 못하는 저입니다. 제가 죽는 걸 슬퍼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다 못해 세상에 해가 되지도 못 합니다.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걸요. 이 세상에서 자리 하나 채우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 자리를 비우게 되면 더 좋은 사람으로 메워질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어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실리아는 낯선 청년이 다치지 않기를 빌었다. 그러나 로잘린드는 그 청년에게 깊이 마음이 끌렸다. 그가 말했던, 그가 살아가고 있는 냉혹한 세상과, 죽기를 바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로잘린드는 그의 처지가 그녀처럼 불운하다고 생각하고 동정해서 시름하고 있는 그의 위험에 마음을 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사랑에 빠져들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아름답고 고귀한 아가씨로부터 격려를 받은 청년은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어, 결국 기운센 상대를 당당히 때려눕혔다. 프레드릭 공작은 그 젊은이의 용기와 실력을 보고 퍽 흐뭇해 했다. 공작은 젊은이를 부하로 삼고 싶어서 이름과 가문에 대해서 물었다. 낯선 젊은이는 자신의 이름은 오를란도이며, 롤란드 드 보이스 경의 막내아들이라고 말했다. 오를란도의 아버지 롤란드 드 보이스 경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떴으나, 살아 있을 당시에는 전 공작의 충실한 신하였다. 프레드릭 공작은 오를란도가 자기가 추방한 형의 친구의 아들임을 알게 되자, 이 용감한 청년에게 가졌던 호감이 싹 가시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형의 친구들의 이름만 들어도 싫었으나, 이 젊은이의 용맹에 아직 감탄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그는, "오를란도가 다른 사람의 아들이라면 좋았을 텐데." 하며 경기장을 떠나 버렸다. 로잘린드는 은근히 좋아하게 된 이 청년이 자기 아버지의 옛 친구의 아들임을 알고 기뻐하며 실리아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롤란드 드 보이스 경을 무척 좋아하셨어. 저 청년이 그분의 아들이라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아까 저분이 모험을 하려 했을 때 결사적으로 말리는 건데." 그들은 프레드릭 공작이 갑자기 기분나빠 하며 자리를 떠난 것을 보고 당황해 하고 있는 오를란도에게 갔다. 로잘린드는 자기가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오를란도에게 주며 말했다. "저를 위해 부디 이 목걸이를 받아 주세요. 좀더 멋지고 예쁜 것을 선물할 수도 있으련만, 지금 제 처지가 불운하니 어쩔 수가 없네요." 두 사촌이 단둘이만 있게 되면 로잘린드는 언제나 오를란도 얘기를 끄집어내곤 했다. 실리아는 사촌언니가 잘생긴 젊은 씨름 선수에게 반해 버렸음을 알고 로잘린드에게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도 갑작스레 사랑에 빠져 버릴 수가 있지?" 로잘린드는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분의 아버지를 무척 아끼셨어." "그렇지만," 하고 실리아는 대꾸했다. "언니는 그런 이유로 해서 그 아들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해야 되겠네. 우리 아버지는 그분의 아버지를 미워하니까. 하지만, 나는 오를란도를 미워하지 않을 테야." 프레드릭은 롤란드 드 보이스 경의 아들을 만난 일로 해서 아직도 수많은 귀족들이 추방당한 형을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조카딸에 대한 그의 불쾌함을 부채질하게 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조카딸의 미덕을 칭찬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당한 일로 해서 그녀를 동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심술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했다. 실리아와 로잘린드가 방에서 오를란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데 프레드릭이 들어왔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로잘린드에게 궁전을 떠나라, 아버지를 따라 나가라고 호령했다. 로잘린드를 궁정에 남겨둔 것도 오로지 실리아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실리아는 이렇게 애원했다. "전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언니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고, 그래서 언니를 여기 머무르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언니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 우리는 생각하는 것도 같고, 오랫동안 같이 배우고, 같이 먹고, 같이 잤어요. 전 언니와 함께가 아니면 살 수가 없어요." 프레드릭은 대꾸했다. "그애는 너에 비해 너무 약아빠졌어. 부드럽고 온순하며 과묵한 것 때문에, 또 그 참을성 많은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딱하게 여기도록 만들고 있어. 넌 바보스럽게도 그애를 두둔하고 있지만, 그애가 떠나고 나면 네 용모며 행실이 더욱 돋보이게 될 테니 잠자코 있거라. 나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돌이키지 않는다." 실리아는 아버지가 로잘린드를 더 이상 그녀의 곁에 머무르게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실리아는 로잘린드와 함께 궁정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사촌언니와 함께 밤을 틈타 몰래 빠져 나와 로잘린드의 아버지가 추방되어 살고 있는 아르덴 숲으로 가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 실리아는 젊은 여자들이 값진 옷을 입고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시골 처녀처럼 변장하자고 말했다. 로잘린드는 두 사람 중 하나가 남자로 변장하면 더 안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빨리 의논을 한 끝에 키가 큰 로잘린드가 시골 젊은이의 옷을, 실리아가 시골 소녀의 옷을 입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오빠 동생이라 부르기로 하고, 로잘린드는 자기를 가니미드라고 부르라고 했다. 실리아는 알리에나라는 이름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여행 비용에 필요한 금과 보석을 보따리에 챙겨 넣고 두 명의 어여쁜 공주들은 긴 여행을 시작했다. 추방당한 공작이 사는 아르덴 숲은 궁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로잘린드는 차려 입은 옷에 걸맞게 용기를 내었다. 실리아의 굳은 우정에 감격한 로잘린드는 지루한 여행길을 꿋꿋이 버텨가면서 자기를 따라 고생하는 실리아를 진짜 오빠가 하듯이 보살펴 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씩씩하게 얌전한 시골 처녀 알리에나의 오빠 가니미드 역할을 해냈다. 그들은 마침내 아르덴 숲에 이르렀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묵었던 편안한 여인숙도, 먹을 것도 없었다. 너무나 허기지고 피곤하여, 동생을 데리고 종일 명랑하게 이야기하면서 길을 걸어온 가니미드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알리에나까지도 가니미드가 겉으로는 남장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여자처럼 울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지경이었다. 그들은 공작이 있는 곳을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숲이 워낙 넓어 찾지를 못하고 피곤에 지쳐 풀 위에 누웠다. 그때 운좋게도 어떤 마을 사람 한 명이 그들 앞으로 지나갔다. 가니미드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목동, 사랑이나 돈이 이 황무지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제발 우리를 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오. 내 어린 여동생이 너무 오랫동안 여행을 해서 지쳐 있는데다가 먹지를 못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요." 그 남자는 자신은 그저 양치기의 머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주인 집을 팔려고 내놓았으므로 대접을 잘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자기와 같이 가면 조촐하나마 대접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몹시 기뻐하면서 힘을 내어 그 남자를 따라갔다. 두 남매는 갖고 온 보석을 팔아 양치기의 집을 샀다. 그리고 그 머슴도 자기들의 하인으로 고용하고 양떼를 치게 했다. 먹을 것과 잠잘 곳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된 두 사람은 공작이 사는 곳을 알아낼 때까지 이 집에 머물러 살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곧 이 새로운 생활을 좋아하게 되었고, 양치는 일을 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가니미드는 때때로 궁전에 살 때 만나 사랑하게 된 용감한 오를란도를 그리워하면서, 그를 만나고 싶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오를란도도 이 숲에 와 있었다. 이 기묘한 일은 다음과 같은 까닭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다. 오를란도가 매우 어렸을 때, 롤란드 드 보이스 경은 숨을 거두기 직전 맏아들인 올리버에게 동생을 잘 키워 줄 것을 부탁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잘 교육시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고 아버지는 유언했다. 그러나 심술궂은 올리버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교육을 시키기는커녕 동생에게 제대로 옷 한 벌 해 입히지 않고 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오를란도는 태어날 때부터 고귀하고 인자한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 훌륭한 청년으로 자랐다. 올리버는 이런 동생을 미워하여 똑똑하고 늠름한 동생을 죽여 버리겠다고 별렀다. 그래서 그는 씨름판에서 많은 선수들을 죽인 이름난 씨름꾼과 동생을 맞붙게 한 것이다. 이 잔인한 형의 냉대로 말미암아 오를란도는 자기가 외토리라고 느끼고, 쓸쓸해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첫번째 계략에 실패한 사악한 올리버는 동생이 자고 있는 방에 불을 질러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드 보이스 경의 충실한 하인 한 명이 이 사실을 알고는, 공작의 궁정에서 돌아오는 오를란도에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제가 주인님의 심복으로 지낼 때 틈틈이 모은 500크라운을 갖고 있습니다. 이걸 모두 드릴 테니 받아 주시고, 저를 도련님의 하인으로 써 주십시오.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무슨 일에든지 충성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오, 친절하고 정이 많은 아담! 정말 할아범은 충성스러워요. 우리 함께 떠나기로 합시다. 할아범이 젊었을 때 모아 놓은 돈을 다 써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봅시다." 오를란도와 아담은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여기저기 헤매던 끝에 아르덴 숲에 다다른 두 사람은 배도 고프고 몸도 지쳐서 꼼짝못하고 누워 버렸다. 나이먹은 하인이, "도련님, 이젠 한 발자국도 못 걷겠습니다. 너무 굶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며 쓰러졌다. 오를란도는 아담을 안고 나무 그늘에 옮겨 뉘어 놓고는 격려했다. "정신차려요, 아담! 잠시 여기 누워 쉬어요. 죽겠다는 말은 하지 말고." 오를란도는 곧장 먹을 것을 찾아나섰다. 그의 우연히 공작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공작은 풀 위에 앉아 있었다. 오를란도는 너무나 배가 고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칼을 빼어들고 달려들었다. "이제 그만 먹고 나한테 그 음식을 내놓으시지!" 공작이 물었다. "자네는 굶주려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원래 예의범절이란 걸 모르는 강도인가?" 오를란도는, "배고파 죽을 것만 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작은 오를란도에게 앉아서 먹으라고 했다. 이렇게 친절한 말을 듣고 오를란도는 칼을 제자리에 꽂고는 자신이 한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 다들 야만스러울 것이라고 여기고, 거칠게 요구하지 않으면 안될 거라고 생각해서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제가 보니 유복한 생활을 하셨던 분들 같은데, 어째서 이런 외딴 곳에서 지내십니까? 아무튼 당신들이 누구건간에, 예전에 교회에 나가 자선을 베푸셨든,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든간에 동정심이 무엇인지 안다면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공작이 대답했다. "방금 말한 그대로일세. 우리는 아주 화려한 나날을 보냈었지. 교회에 나가서 자선을 베풀기도 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네. 그러니 어서 앉아서 실컷 먹게나." 오를란도가 말했다. "저쪽에 한 노인이 있습니다. 저를 지극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인데, 너무 배가 고파 쓰러졌습니다. 그 사람에게 뭘 먹이기 전까지는 저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데리고 오게. 자네들이 올 때까지 우리도 식사를 하지 않을 테니." 오를란도는 충실한 아담을 부축해서 자리로 돌아왔다. 공작은, "노인을 잘 앉히게. 두 사람 다 내게 잘 찾아왔네."하면서 먹을 것을 듬뿍 주었다. 공작은 오를란도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가 자기의 옛친구 롤란드 드 보이스 경의 아들임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하여 오를란도와 그 하인은 공작 옆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것은 로잘린드와 실리아가 아르덴 숲으로 와 자리잡은 지 얼마 안되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양치기 남매로 변장하고 평화롭게 지내던 두 아가씨가 어느 날 숲속을 거닐 때였다. 두 사람은 숲에 자라고 있는 여러 나무의 껍질에 '로잘린드'라는 이름을 새겨져 있고, 숲속 이곳저곳에 사랑의 시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오를란도가 걸어왔다. 오를란도는 씨름판이 벌어졌을 때 로잘린드에게서 받은 목걸이를 아직도 목에 걸고 있었다. 오를란도 앞에 있는 양치기 총각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는 로잘린드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로잘린드는 자신이 가니미드라고 소개했다. 오를란도는 잘생긴 양치기 총각이 마음에 들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가니미드는 일부러 장난꾸러기처럼 버릇없이 굴면서 사랑에 빠진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떤 남자가 말이지요, 이 숲속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무를 망쳐 놓고 있어요. 아직 여린 나무에 로잘린드라는 이름을 새겨서 망가뜨리지를 않나, 나뭇가지에 그 여자를 사모하는 시를 매달아 놓지를 않나. 내가 그 사랑에 눈먼 남자를 만나면 상사병을 치료할 좋은 처방을 알려 줄 텐데!" 오를란도는 그가 바로 자기라고 고백하고, 그 훌륭한 처방이라는 것을 알려 주지 않겠느냐고 가니미드에게 부탁했다. 가니미드는 오를란도에게 상사병을 치료하려거든 날마다 자기 집을 찾아와서, 자기를 로잘린드로 여기고 말을 걸어 보라고 말했다. "오를란도, 내가 로잘린드 흉내를 내면 당신은 나를 로잘린드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맺혀 있는 사랑의 말을 여러 가지로 속삭여 보세요. 그러면 아픈 마음이 좀 나을 거예요." 오를란도는 가니미드의 말을 곧이듣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일 양치기 남매의 집으로 찾아가 양치기 총각을 로잘린드라고 부르며 애인을 대하듯 상냥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오를란도는 가니미드가 로잘린드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장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속에 맺혀 있던 생각들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 내심 기뻐했다. 또한 가니미드도 오를란도가 속삭이는 사랑의 말이 실제로 자기 자신인 로잘린드에게 향한 것이었으므로 무척 즐거웠다. 이렇게 해서 젊은 두 사람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한번은 오를란도에게서 공작이 살고 있는 곳을 들어 알게 되었지만, 가니미드는 자신이 로잘린드라는 것을 아직은 밝힐 수 없었다. 이럭저럭 시간이 흘러 로잘린드는 아버지인 공작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공작은 허름한 차림새를 한 양치기가 자기 딸 로잘린드와 꼭 닮았다고 생각하고 반가운 마음에 신분을 물었다. 가니미드는 공작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신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공작은 그가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웃었다. 가니미드는 아버지가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는 것을 보고 며칠 내로 사실을 말씀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아침, 오를란도가 가니미드를 찾아가던 도중에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의 목에는 독사가 휘감겨 있었으나, 오를란도가 다가가자 잽싸게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 이번에는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나 누워 있는 사람을 노리는 것이었다. 오를란도가 멀리서 잠이 든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는 다름 아니라 자기를 곤경에 빠뜨리고 불태워 죽이려고까지 한 형 올리버였다. 오를란도는 문득 형을 이대로 내버려두어 사자밥이 되게 할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본디 착한 성품을 가진지라, 생각을 바꿔 칼을 빼어들고 사자에게 덤벼들었다. 오를란도는 사자를 죽이고 형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었지만,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에 찍혀 어깨에 큰 상처를 입었다. 올리버는 동생이 사자와 맞붙어 싸우는 동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동안 자기가 그다지도 못살게 굴었던 동생이 목숨을 걸고 맹수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못된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쳤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동생에게 용서를 빌었다. 오를란도도 후회하고 있는 형을 보고 가까이 가서 끌어안았다. 올리버는 사실 이 숲에 동생을 없애버릴 생각을 하고 왔지만, 이제는 정말로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를란도는 상처가 너무 심해 가니미드를 찾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형에게 가니미드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올리버는 양치기의 집을 찾아가서 가니미드와 알리에나를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오를란도가 자기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자기야말로 그를 심한 곤경에 빠뜨린 오를란도의 형인데, 이제 두 사람은 화해했다고 말했다. 올리버가 자신의 나쁜 짓을 후회하는 것을 보고 알리에나는 깊이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올리버도 자기 얘기를 듣고 상냥하게 대해 주는 알리에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가슴에 사랑이 싹트고 있는 중에 가니미드는 오를란도가 사자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만 기절해 버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는 아마 로잘린드라면 이렇게 정신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흉내를 내보았다고 둘러대면서 말했다. "오를란도에게 가서 내가 기절하는 시늉을 아주 잘하더라고 말해 줘요." 그러나 올리버는 가니미드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고는 굉장히 마음 약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당신이 흉내를 낸다면 마음을 꿋꿋이 먹고 남자답게 행동해 보시오." "그렇게 할 수 있고말고요. 하지만, 난 사실은 여자인가 봐요!" 하고 가니미드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올리버는 오랫동안 그 집에 머무르다가 많은 얘깃거리를 가지고 동생에게 돌아갔다. 가니미드가, 오를란도가 사자에게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했다는 것, 자신이 예쁘고 상냥한 양치기 처녀 알리에나를 사랑하게 된 것, 그리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지만 알리에나가 자기의 청혼을 승낙한 것 등을 올리버는 이야기했다. 올리버는 알리에나와 결혼해서 이곳에서 양을 치며 살고 싶으며, 고향에 있는 땅과 집을 모두 네게 주마고 오를란도에게 말했다. 오를란도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하세요. 그러면 제가 공작님과 그 친구분들을 초대하겠습니다. 형님은 형수님 되실 분에게로 가서 빨리 승낙을 받으세요." 그래서 올리버는 서둘러 알리에나에게 달려갔다. 가니미드는 오를란도를 문병하러 찾아왔다. 두 사람이 올리버와 알리에나 사이에 일어난 갑작스런 사랑에 대해 얘기하게 되자, 오를란도는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하라고 형에게 권했다는 말을 하고, 자기도 로잘린드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니미드는 이 얘기를 듣고, 오를란도가 만일 로잘린드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숲에 사는 어떤 마법사의 도움으로 내일 결혼식장에 로잘린드를 데려올 수 있다고 하면서. 오를란도는 도저히 그 말을 곧이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니미드는, "내 목숨을 걸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믿고 예복을 입고서 공작과 친구들을 결혼식장에 초대하십시오. 로잘린드는 당신과 결혼하려고 꼭 올 테니까요."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올리버는 알리에나와 함께 공작에게 갔다. 오를란도도 그들과 함께 갔지만, 로잘린드는 보이지 않았다. 오를란도는 가니미드가 자기를 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오를란도에게 과연 마법의 힘으로 로잘린드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오를란도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가니미드가 들어와 공작에게 물었다. "만일 제가 로잘린드를 데리고 온다면 오를란도와 결혼하게 해주시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지. 내 영토를 전부 준다 하더라도." 다음에 가니미드는 오를란도에게 말했다. "내가 만일 그 여자를 데리고 오면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지요?" 오를란도는 기꺼이 대답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요." 그래서 가니미드와 알리에나는 그곳을 물러나와 예전에 입었던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자 두 아가씨는 금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로잘린드와 실리아가 모두가 모인 곳에 나타나자, 거기 모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로잘린드는 놀라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추방된 것과 양치기 남매로 변장하고 이 숲에서 살아온 것을 이야기하며 결코 마법의 힘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공작은 다시 한번 결혼을 승낙했다. 그리하여 올리버와 실리아, 오를란도와 로잘린드는 동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은 쓸쓸한 숲속에서 행해졌지만, 그 이상 더 즐거운 결혼식은 지금까지 없었다.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하인이 달려와서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들려주었다. 프레드릭 공작은 실리아와 로잘린드가 몰래 도망친 것과, 덕망 있는 신하들이 모두 자기 형에게 가버리는 것이 화가 나고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제정신을 잃은 프레드릭은 군대를 이끌고 형을 잡아들이려고 아르덴 숲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한 노인을 만나 그 노인의 훈계를 듣고 지금까지의 나빴던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남은 생애를 수도원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프레드릭은 하인을 형에게 보내어 자기 잘못을 빌고,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돌려 드린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뜻밖의 소식은 결혼식을 한층 더 즐겁게 했다. 실리아는 큰아버지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축하 인사를 드렸고, 이 영토의 계승자 자리가 자기가 아니라 로잘린드에게 돌아갔다는 것까지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공작은 추방된 동안에도 변함없이 자기를 섬긴 신하와 하인들에게 마침내 보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외롭고 쓸쓸한 숲에서 다시 궁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 베니스의 상인 유태인 샤일록은 베니스에 사는 고리대금업자로서 기독교도인 상인들에게 비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어 재산을 늘리고 있었다. 샤일록은 빌려 준 돈을 다시 받을 때 인정사정없이 행동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는데, 그 중에서도 베니스의 젊은 상인 안토니오는 제일 그를 싫어했다. 샤일록도 안토니오가 곤란한 사람들에게 항상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했다. 활달하고 시원 시원한 성격의 안토니오는 금전거래소에서 욕심 많은 샤일록을 만나면 언제나 그 지독한 짓에 대해 욕하며 나무라곤 했다. 그러면 샤일록은 꾹 참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복수를 하리라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신분이 높은 안토니오는 친절하게 남을 위해서 무엇이든 있는 힘을 다했기에 누구든 그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바사니오라는 귀족 청년은 안토니오와 매우 친한 친구였다. 그는 신분만 높고 재산은 없었는데도, 생활만은 신분에 걸맞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돈에 쪼들려 집안 형편이 어렵고 초라했으며,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안토니오에게 빌려오곤 했다. 어느 날 바사니오는 안토니오에게 와서 자신은 어떤 부자 상속녀를 사랑하는데 곧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많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셨는데, 살아 있을 때 가끔 자기를 찾아와 만났고, 그녀 역시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부자에게 구혼하는 데 필요한 3천 두카트가 없으니 항상 신세져서 미안하지만 좀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안토니오는 마침 그때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배들이 화물을 싣고 곧 돌아오니, 그때까지만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에게 빌리도록 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3천 두카트를 빌리러 샤일록의 집으로 갔다. 안토니오는 이자는 얼마라도 좋으니 배가 입항할 때까지만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까지 돈이 마련되지 못하면 배에 실린 화물이라도 주겠다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샤일록은 마음속으로, "좋다! 이 기회에 저 녀석들의 약점을 잡고 전부터 노려 왔던 분풀이를 실컷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샤일록은 이렇게 말했다. "안토니오 씨, 당신은 금전거래소에서 항상 나를 더러운 고리대금업자라느니, 못 믿을 사람이라느니 하고 욕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 옷에 침을 뱉거나, 미친개로 취급해서 발길질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난 꾹 참아 왔습니다. 유태인은 모두 참을성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당신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군요. 나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시지만, 개에게 3천 두카트라는 큰 돈이 있을 리가 있겠소? 내가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씀드릴까요? '나으리께선 지난번 나에게 침을 뱉으셨으니, 그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라고요!" "지금도 나는 당신이 한 일들을 나쁜 짓이라고 말해 주고 싶소. 이번 돈도 원수에게 빌려 준다는 심정으로 빌려 주는 것이 좋겠소. 그래야만 마음놓고 큰소리치면서 받을 수 있으니 말이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만일 내가 약속을 어겼을 때는 배상금을 얼마든지 요구해도 좋소!" "아니, 그렇게 흥분해서 덤비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습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운 일들은 잊어버리고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이자는 한푼도 필요없습니다." 이렇게 겉으로는 자못 친절하게 제의해 오자 안토니오는 아주 놀랐다. 샤일록은 더욱 친절한 척하면서, 이것도 모두 안토니오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만일 안토니오가 돈을 갚기로 약속한 날에 갚을 수 없을 때를 대비해서 차용증서를 쓰고 서명했으면 좋겠다고 농담 섞인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차용증서에는, 만일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안토니오의 몸에서 1파운드(약 0.5kg)의 살을 떼어낼 것을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그 말을 승낙했다. "좋소, 그 증서에 서명하겠소. 유태인에게도 이런 친절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도록 하지." 바사니오는 그런 비열한 증서에 서명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했지만, 안토니오는 돈을 갚아야 할 날짜 이전에 자신의 배가 그 돈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싣고 돌아올 테니까 괜찮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대담성에 매우 놀랐다. 그러면서도 바사니오를 슬쩍 보면서 태연하게, "오!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의심이 많군요? 자신들이 지독한 짓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일까지 의심하는 거겠지요! 설령 안토니오가 약속한 기일을 지키지 못해서 안토니오의 살점을 내 손에 쥐었다고 해서 내게 무슨 이익이 되겠소? 나는 다만 당신들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오. 그래도 싫다면 이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바사니오는 만일 안토니오가 자기 때문에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된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만두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샤일록이 시키는 대로 그 증서에 서명했다. 바사니오가 결혼하려는 부자 상속녀는 베니스에서 가까운 벨몬트라는 곳에 있는 궁전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포르시아이며, 매우 아름답고 마음씨도 고운 여자였다. 바사니오는 친구인 안토니오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친절하게 돈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친구 그라시아노와 함께 훌륭하게 차려입고 벨몬트로 갔다. 바사니오는 포르시아의 결혼 승낙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기에, 곧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바사니오는 자기에게는 아무런 재산이 없으며, 자랑할 것은 오직 전통 깊은 가문뿐이라는 것을 포르시아에게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가 훌륭한 인격을 갖췄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또한, 자신은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더욱더 노력해야겠다고, 그에게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더욱 아름다워져야겠다고 상냥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리고 바사니오가 남편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이끌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저 자신이나 제 것이었던 모든 것은 지금부터는 모두 당신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제가 이 저택의 여주인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이 집, 이 집의 하인들, 그리고 저까지도 당신 것입니다. 이 반지와 함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사랑의 징표로 소중한 반지 하나를 바사니오에게 주었다. 바사니오는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부유한 포르시아가 자신과 같이 무일푼인 남자를 받아 줬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 사랑과 감사의 표현을 더듬더듬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포르시아가 준 반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맹세했다. 심복인 그라시아노는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하며 자신도 결혼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그라시아노. 애인만 있다면 말이야." 하고 바사니오가 말했다. 그라시아노는 포르시아 아가씨의 아름다운 하녀 네리사를 사랑하는데, 그녀도 포르시아 아가씨와 바사니오가 결혼하면 자신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포르시아가 사실이냐고 네리사에게 묻자 그녀는, "예, 아가씨만 허락해 주신다면." 하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포르시아는 결혼을 기꺼이 승낙했고, 바사니오도 유쾌하게 말했다. "그라시아노, 우리 결혼이 자네들의 결혼으로 더욱 빛나게 되겠는걸." 이때 갑자기 불쑥 들어온 한 하인 때문에 이 연인들의 행복으로 가득 찬 분위기는 사라져 버렸다. 하인이 가지고 온 안토니오의 편지를 읽고 나서 바사니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할말을 잃었다. 포르시아가 걱정이 되어 무슨 소식이냐고 묻자 그제서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다정한 포르시아! 이 편지에는 불길한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재산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재산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부담스런 빚까지 있습니다." 그는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린 일이라든가, 만일 안토니오가 그 빚을 유태인 샤일록에게 기일내에 갚지 못하면 살점 1파운드를 베어줘야 한다는 것을 포르시아에게 털어놓았다. '보고 싶은 바사니오, 내 배들은 모두 난파당했다네. 유태인에게 차용증서를 써 주었으니 보증한 대로 지불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군. 죽기 전에 자네를 꼭 한 번 보고 싶으나 자네 형편이 어떤지 모르겠군. 다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오지 않아도 좋다네.' "부디 용무를 빨리 마치고 가 보세요. 이렇게 진정한 친구가 내 사랑 당신의 과오로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기 전에 빌린 돈의 몇 배라도 지불할 수 있도록 어서 서둘러 가 보세요." 포르시아는 바사니오에게 자신의 돈을 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바사니오가 출발하기 전에 결혼해야 하고, 그러면 바사니오가 자기 돈을 남편의 자격으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두 사람은 결혼했고, 그라시아노와 네리사도 곧 결혼했다. 그 다음 바사니오와 그라시아노는 곧장 베니스로 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안토니오를 만났다. 잔혹한 유태인은 빌린 돈의 지불 기일이 지났다면서 빌린 돈은 받으려 하지도 않고, 다만 안토니오의 살점 1파운드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베니스의 공작 앞에서 재판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사니오는 걱정을 하면서도 그 재판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포르시아는 남편과 헤어질 때 남편을 격려해 주고 싶어, 돌아올 때는 그 친구를 같이 모시고 오라고 부탁했다. 포르시아는 변호사인 친척 벨라리오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변호사로 가장해서 재판에 나간다면 어떻겠냐고 의논했다. 벨라리오는 그 말에 찬성하고, 준비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빌려 줬기 때문에 그녀는 하인을 시켜 그것을 가지고 오도록 했다. 포르시아는 곧 변호사로 변장하고, 하녀인 네리사도 변호사 서기로 남장을 해서 같이 베니스로 떠났다. 그래서 둘은 베니스의 공작 앞에서 재판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에 도착했다. 포르시아는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편지를 공작에게 전했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변호사 벨라리오는 안토니오를 위해 변호하고 싶은데 몸이 좋지 않아 갈 수 없으니, 학식 있고 젊은 박사를 대신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을 자기 대신에 변호사로 허락해 달라고 그는 부탁했다. 공작은 긴 외투와 가발로 잘 변장한 포르시아를 변호사치고는 너무 젊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이 재판에서 변호를 담당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드디어 중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포르시아가 주위를 둘러보니 무자비한 유태인이 눈에 띄었다. 방청석에는 남편 바사니오가 있었지만, 포르시아가 변장했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사니오는 단지 친구가 걱정이 되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포르시아는 우선 샤일록에게, 베니스의 법률에 의해 차용증서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당연히 안토니오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포르시아는 무감각한 샤일록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비의 고귀함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비라는 것은 마치 마른 대지 위에 조용하게 내리는 비처럼 베푸는 자나 받는 자 모두를 축복합니다. 왕에게는 그의 왕관보다도 더 좋은 것이지요. 자비가 이 세상을 깨끗하게 변화시켜,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 가까운 성품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샤일록의 대답은 오로지 차용증서에 쓰여 있는 대로 배상을 해달라는 말뿐이었다. "그럼, 돈을 몇 배로 갚아 드리면 안되겠소?" 하고 포르시아는 물었다. 바사니오는 3천 두카트의 몇 배일지라도 샤일록이 원하는 대로 몽땅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샤일록은 이것조차 거절하고 막무가내로 안토니오의 살점 1파운드를 베어 달라고 말했다. 바사니오는 안토니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법률을 조금 신축성 있게 적용해 줄 것을 젊은 변호사에게 부탁했다. 이에 대해 포르시아는,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것이며, 일단 정해진 법률을 결코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할 수는 없소!" 하고 엄한 말투로 대답했다. 샤일록은 이 말을 듣고 자기 편을 들어 준다고 생각하며 기뻐서 이렇게 말했다. "호오! 다니엘 같은 명판사님이시군! 젊은 판사님! 나이답지 않게 훌륭한 판사님이시네."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포르시아는 샤일록에게 차용증서를 보여 달라고 해서 그것을 보고 난 뒤 말했다. "정말로,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으니 유태인의 요구대로 안토니오의 가슴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살 1파운드를 베어내도 법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군요. 그러나, 샤일록 씨! 다시 한번 더 생각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어떻습니까? 당신은 돈을 받고, 이 차용증서는 내가 찢어 버리면 어떨까요?" 그렇지만 잔혹한 유태인은 조금도 변함없이 말했다. "안되지요. 어디까지나 맹세한 대로 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안토니오 씨, 당신의 가슴을 열고 샤일록의 칼을 받아야만 하겠습니다." 하고 포르시아는 말했다. 결국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을 베어내려고 긴 칼을 천천히 스^6,3^윽싹 갈았다. 포르시아는 안토니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안토니오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침착하게, "할말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는 친구 바사니오에게 말했다. "악수나 하세, 바사니오. 잘 있게나. 자네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다고 슬퍼하지 말게. 나중에 자네의 어여쁜 아내에게 내 대신 인사해 주게. 내가 얼마나 자네를 아끼고 있었는지를 전해 줬으면 좋겠어." 바사니오는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토니오, 나는 내 생명같이 소중한 아내와 결혼했어. 그러나 내 생명도 아내도 온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자네 목숨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자네를 구할 수만 있다면, 여기 있는 악마 같은 샤일록에게라도 기꺼이 희생당하겠어.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다네." 포르시아는 이 말을 들으면서 남편이 친구에 대한 우정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부인이 여기에 계셔서 그 말을 들으신다면 그다지 기뻐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고 말하며 속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포르시아 곁에서 서기 복장을 입고 글을 쓰던 시녀 네리사도 이 말을 듣고 말했다. "그런 말은 부인이 안 계신 곳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가정 불화가 일어날 테니까요." 그러자 바사니오의 흉내를 잘 내는 그라시아노도 한마디했다. "나에게도 매우 사랑스런 아내가 있습니다. 그녀가 저 세상에 가서라도 이런 짐승 같은 유태인의 지독한 근성을 고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샤일록은 이런 대화를 들으며 한참 기다리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자,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드디어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법정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토니오 때문에 슬퍼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포르시아는 침착하게 살점의 무게를 달 저울이 준비되어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태인을 향해서 말했다. "샤일록 씨! 출혈로 안토니오 씨가 죽지 않도록 의사를 불러오게 하시오." 샤일록은 안토니오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은 차용증서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증서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그런 조치는 취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런 조항은 없소. 증서에는 쓰여 있지 않으니까." "그렇군요. 당연히 안토니오의 살점 1파운드는 당신 것이지요. 법률에 의해 그렇게 판결합니다. 당신은 안토니오의 가슴에서 살점 1파운드를 잘라내도 좋습니다." "오, 현명하고 훌륭하신 재판관님! 정말로 다니엘과 같은 명재판관이로다!" 샤일록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긴 칼을 날카롭게 세우고 안토니오를 계속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 준비됐소이다." "좀 기다리시오, 샤일록 씨." 포르시아는 샤일록을 가로막았다. "아직 분명히 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당신 말대로 증서를 따져 보면, 피 한 방울이라도 당신에게 준다고 쓰여 있지 않소. 이 증서에는 분명히 살점 1파운드라고만 쓰여 있군요. 만일, 살을 베어 낼 때 안토니오 씨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하면 법률에 의해 당신의 모든 재산은 베니스 국가에 몰수당하게 됩니다." "^5,5,5^" 그런데 살점을 베어 낼 때 사람의 능력으로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현명한 포르시아는 차용증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살점뿐이지 피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해 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생각해 낸 젊은 변호사의 현명함을 칭찬하고 박수 갈채를 보내며 기뻐했다. 그라시아노는 샤일록이 사용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내며 말했다. "오! 현명하고 훌륭한 재판관님! 잘 들어라! 유태인 놈아! 다니엘과 같이 훌륭한 재판관이 오셨다." 샤일록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자 실망한 표정으로 돈을 받겠다고 말했다. 바사니오는 뜻밖에 안토니오의 목숨을 구하게 되자 매우 기뻐하며 얼른 돈을 건네주려 했다. 그때 포르시아는 그를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조용히들 해주십시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유태인은 차용증서에 적혀 있는 것 이외에는 받을 수 없습니다. 자, 샤일록 씨! 살점을 자를 준비를 하세요. 다만, 피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됩니다. 또한, 살점 1파운드보다 많거나 적어서도 안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틀리면 베니스의 법률에 의해 사형당하게 되며, 당신의 전재산은 몰수됩니다." 샤일록은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내 돈을 받아 돌아가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바사니오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러자 다시 포르시아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잠깐만요. 아직 당신에게 할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니스의 법률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려 했을 때 살해하려던 자의 재산은 국가에 몰수당하며, 공작님의 뜻에 따라 그의 생사 여부를 결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공작은 샤일록을 향해 말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신이 당신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두말할 것 없이 목숨만은 살려 주겠으나, 재산의 반은 안토니오에게 주고, 반은 국가 재산으로 몰수하겠노라!" 관대한 안토니오는 자기에게 그 재산을 줄 필요는 없으며, 다만 샤일록이 죽은 뒤에 그의 딸과 사위에게 안토니오에게 주기로 한 재산을 물려준다는 서명을 해달라고 말했다. 샤일록의 외동딸이 최근에 아버지의 허락 없이 안토니오의 친구인 어느 젊은 기독교인과 결혼했다는 것을 안토니오는 알고 있었다. 샤일록은 너무 화가 나서 외동딸을 자기 딸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유태인은 안토니오의 요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어 샤일록의 잔인한 복수극은 실패하고 재산마저 몰수당했기 때문에, 그는 힘없이 터덜터덜 법정을 나가 버렸다. 공작은 안토니오를 자유롭게 해주고 재판을 모두 끝마쳤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젊은 변호사의 재능을 칭찬하면서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나 변호사는(사실은 포르시아였으므로) 남편보다 먼저 벨몬트로 돌아가기 위해서 곧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안된다고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에 공작과 다른 사람들이 법정에서 나가자 바사니오는 젊은 변호사로 변장한 포르시아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변호사님! 내 친구인 안토니오를 당신의 총명한 지혜로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부디 유태인에게 갚으려 한 3천 두카트를 대신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꼭 갚겠습니다." 하고 안토니오도 덧붙여 말했다. 젊은 변호사는 아무리 부탁해도 돈을 받지 않았다. 다만, 바사니오가 그렇게까지 사례를 하고 싶으면 끼고 있는 장갑을 달라고 했다. 바사니오가 장갑을 벗자, 그 손가락에는 포르시아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젊은 변호사는 그것을 보고는 장갑보다는 그 반지를 갖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바사니오를 놀려 주려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변호사가 바사니오의 반지를 갖고 싶어하자 바사니오는 매우 곤란해 했다. 바사니오는 이 반지는 약혼 반지이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줄 수 없다고 말하고, 그 대신 베니스에서 가장 비싼 반지를 새로 사 주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포르시아는 일부러 화를 내며 법정을 나가 버렸다. "잘 알았습니다. 나를 거지 취급하시는군요." 안토니오는 바사니오에게 부탁했다. "이보게, 반지를 변호사에게 드리게. 이 정도도 신세진 것을 생각하면 자네 집사람에게 책망을 듣는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바사니오는 친구 안토니오를 구해 준 은혜를 되새기며 승낙했고, 그라시아노에게 반지를 가지고 변호사를 따라가 드리라고 했다. 그러자 서기로 변장한 네리사도 그라시아노 반지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라시아노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네리사에게 주어야만 했다. 변호사와 서기 복장을 한 두 여인은 집에 돌아가면서 반지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책망하며 어떤 여자에게 선물했느냐고 따져 보려는 생각을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포르시아와 네리사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곧 본래의 옷으로 갈아입고 남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바사니오와 안토니오, 그리고 그라시아노는 포르시아의 집에 도착했다. 바사니오는 친구를 포르시아에게 소개했고, 포르시아가 축하와 환영의 말을 하는 사이에 한쪽에서 네리사와 그녀의 남편인 그라시아노는 벌써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벌써 싸움이야! 어떻게 된 거지?" 그라시아노는 대답했다. "네리사가 나에게 준 그 하찮은 반지 때문입니다." 네리사는 화를 내며 대들었다. "하찮은 반지라고요? 뭐가 하찮다는 건가요? 내가 당신에게 드릴 때 그것을 죽을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해놓고는 변호사 서기에게 줘 버렸다고요? 다 알아요, 다른 여자에게 준 거지요?" "아니오, 이 손이 그것을 증명하오. 나는 그 젊은 서기에게 주었다고. 키가 당신만한 조그만 사람인데, 아주 총명한 지혜로 안토니오의 생명을 구했단 말이오. 바로 그 서기가 그것을 선물로 달라고 하기에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있던 포르시아는 말했다. "그건, 그라시아노, 당신이 잘못했군요. 그라시아노 씨! 부인에게 약혼 기념으로 처음 받은 것을 주다니요. 나도 남편에게 반지를 드렸습니다만, 온 세상이 다 변한다 해도 그이는 그것을 남에게 주지 않을 거예요." 그라시아노는 자신의 실수를 변명할 생각으로 말했다. "주인님이 그 젊은 변호사에게 반지를 먼저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서기가 나에게도 반지를 달라고 요구하더군요." 포르시아는 이 말을 듣고 매우 화난 듯 자기 반지를 준 바사니오를 나무랐다. 바사니오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화나게 했기 때문에 열심히 해명했다. "아니오, 명예를 걸고 진실을 말하겠소. 어떤 다른 여자에게 준 것이 아니오. 그 사람이 우리가 사례로 주려는 3천 두카트를 받으려 하지 않고 대신 그 반지를 달라고 하는 거요. 그것을 거절하자 화를 내며 가 버리니 할 수 없지 않겠소. 포르시아, 나는 사실 친구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서 결국 주고 말았소. 용서하시오. 그 상황에서는 당신이었다 하더라도 반지를 주었을 것이오." 안토니오는 걱정이 되어 포르시아에게 말했다. "나 때문에 이런 싸움이 일어났군요. 하지만, 포르시아, 나는 당신 남편을 위해서 내 몸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남편이 반지를 준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내 목숨을 담보로 약속하기로 합시다. 당신 남편이 다시는 당신과 그런 약속을 어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포르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증인이 되어 주시지요. 자, 이 반지를 남편에게 돌려 드리겠어요. 그리고 예전보다 더욱 소중하게 보관하시라고 말씀드려주세요." 바사니오는 그 반지를 받고 나서 변호사에게 준 반지와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포르시아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며, 그때 그 젊은 변호사가 바로 자기이고, 서기는 네리사였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제서야 바사니오는 아내가 담대한 용기와 훌륭한 지혜로 안토니오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으며, 동시에 매우 기뻐했다. 포르시아는 다시 한번 새롭게 남편의 친구 안토니오에게 인사하면서, 재판이 열리기 바로 전에 받은 어떤 편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 편지에 난파당했다고 믿었던 안토니오의 배가 '무사히 입항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이렇게 잇달아 일어난 뜻밖의 행운에 모든 사람은 다 함께 기뻐했다. 리어왕 고대 브리튼의 리어 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그들은 앨버니 공작의 아내가 된 고네릴, 콘월 공작의 아내 리건, 그리고 아직 어린 막내딸 코딜리아였다. 그 즈음 브리튼 궁정에는 프랑스 왕과 버건디 공작 두 사람이 동시에 구혼하러 와서 코딜리아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궁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제 리어 왕의 나이는 80세가 넘어서 몸이 쇠약해졌기에, 왕은 통치권을 젊은 사람에게 물려주려고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은퇴해서 언제 죽어도 후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왕은 세 딸을 불러서 누가 가장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각자 표현해 보라고 했다. 그 사랑의 정도에 따라 왕국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였다. 맏딸 고네릴은 아버지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말로는 번드르하게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버님은 자신의 눈빛보다 소중하며, 목숨이나 그 어떤 자유보다도 중요하다는 둥 하며 아부하는 말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왕은 큰딸이 진심으로 그러리라 믿고 매우 기뻐하며 왕국의 넓은 땅 중에서 3분의 1을 고네릴과 그 남편에게 나누어 주었다. 둘째 딸인 리건도 언니처럼 불성실한 성품이었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리건은 언니가 말씀드린 것보다 아버님을 훨씬 더 사랑할 뿐 아니라, 아버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쁨에 비하면 다른 기쁨은 모두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리어 왕은 이 거짓말도 사실로 믿고 리건과 그 남편에게도 언니와 같이 왕국의 3분의 1을 주었다. 이렇게 기특한 딸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자신은 축복을 받을 것이며, 행복할 것이라고 늙은 왕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막내딸 코딜리아의 차례가 되자, 왕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코딜리아가 틀림없이 언니들 이상으로 열정적인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리라고 생각했다. 왕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가장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코딜리아는 언니들이 아첨하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를 속여 남편과 함께 땅을 차지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그런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코딜리아는 이렇게 짧은 한 마디의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저는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왕은 가장 귀여워하던 딸이 이렇게 말하자 깜짝 놀랐다. 왕은 그녀에게 지금 말한 것을 다시 생각해서 고쳐 말해 보라고 소리질렀다. 그렇지 않으면 크게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코딜리아는 사실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지만, 언니들이 교활한 아첨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그것을 쉽게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왕께서는 제 아버님으로서 저를 키워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아버님께 복종하고 존경하겠어요. 그렇지만 언니들처럼 이 세상에서 아버님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결혼한다면 그 남편은 반드시 제 사랑의 반 정도를 요구하겠지요? 제 사랑을 모두 아버님께 드려야 한다면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니들도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들리는 말을 한 이유는 그녀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대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왕은 막내딸이 거만하게 말한다고 여기고 매우 화가 났다. 리어 왕은 평소에도 화를 잘 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나이탓으로 더욱 심했다. 왕은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크게 노하여 코딜리아의 몫으로 남겨 둔 3분의 1의 땅을 언니들에게 나눠 주고 말았다. 리어 왕은 신하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두 자매와 사위들에게 모든 권력과 재산, 통치권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다만 왕이라는 이름만 간직하기로 했다. 또한, 백 명의 기사를 부하로 두고 한 달씩 교대로 두 딸의 궁전에 머무르기로 하는 것 이외에는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두 딸에게 넘겨준 것이다. 신하들은 국왕의 이런 결정을 듣고 놀라고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일어서서 왕에게 다시 생각하라고 용기있게 말하지 못했다. 다만, 켄트 백작만이 코딜리아를 위해서 정직하게 충고하려 했는데, 리어 왕은 그의 말을 가로막고 사형시켜 버리겠다고 소리쳤다. 진심으로 왕을 존경하던 충성스런 켄트 백작은 리어 왕이 올바르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켄트 백작은 충성스레 왕에게 다시 말씀드렸다. 그는 제발 왕이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도록 간청했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으로는 코딜리아는 왕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코딜리아를 오해한 왕은 켄트 백작의 용기 있는 태도에 더욱 화가 날 뿐이었다. 왕은 충실한 그를 추방하기로 하고 5일간의 여유를 주었다. "만일 6일째 되는 날에 이 밉살스런 놈이 발견되면 당장 죽여 버려라."하고 왕은 명령했다. 그래서 켄트 백작은 왕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한 코딜리아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고 나서, 그녀의 언니들에게 왕을 진심으로 잘 모시고 사랑해 드릴 것을 부탁하며 떠나갔다. 한편, 왕은 코딜리아에게 구혼하러 왔던 프랑스 왕과 버건디 공작을 불렀다. 그는 이 막내딸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말해 주고 나서, 어떤 재산도 주지 않기로 했는데도 계속 구혼할 것인지 물었다. 버건디 공작은 그녀에게 한푼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즉시 떠나 버렸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달랐다. 코딜리아가 왕에게 오해받은 것은 언니들처럼 아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그녀의 솔직하고 진실한 성품은 땅덩어리 이상의 지참금이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코딜리아가 괴로워할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아버님과 언니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하고서 프랑스로 데리고 가서 왕비로 삼기로 했다. 코딜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언니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언니들이 아버님께 말씀드린 대로 아버님을 사랑하고 잘 모셔 드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언니들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면서 자신들은 의무를 잘 알고 있다고 화를 냈다. 코딜리아는 언니들이 교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을 걱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코딜리아가 떠나자마자 언니들은 곧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리어 왕은 큰딸인 고네릴의 궁전에 머무른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큰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파렴치한 큰딸은 아버지 주변에 남아 있는 백 명의 신하가 돈만 낭비한다고 주장하고, 나이 많은 아버지가 함께 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면서 만날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바쁜 일이 있다며 왕에게 함께 얘기 나눌 시간도 주지 않았다. 또한, 고네릴은 왕의 하인들을 시켜서 왕을 소홀히 모시게 했고, 또 그들은 왕의 명령에 따르려 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왕이 말을 해도 귀머거리처럼 일부러 들리지 않는 척하는 것이었다. 리어 왕은 딸의 행동이 변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자신의 결정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씨 깨끗하고 충성을 다한 단 한 사람은 변함없이 부왕을 정성스레 섬겼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켄트 백작이었다. 그는 리어 왕에게서 추방당한 뒤 브리튼에서 발견되면 목숨을 잃게 되겠지만, 나중에 쓸모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원래 높은 신분이었지만 초라한 차림새로 변장하고 왕에게 가서, 케이어스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하인으로 섬기게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큰딸의 거짓 아첨에 슬퍼하고 있던 왕은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자 기뻐했다. 왕은 그가 켄트라는 사실을 모른 채 케이어스를 하인으로 삼았다. 그의 겸손한 말과 태도는 매우 왕의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고네릴의 집사가 자기 주인을 믿고 리어 왕에게 무례하게 대했다. 케이어스는 왕이 이처럼 모욕받자 울분을 참지 못해 자기도 모르게 그 집사를 걷어차서 물 웅덩이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진심에서 나오는 태도를 보고 리어 왕은 그를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 이처럼 리어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케이어스만이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은 왕의 기분전환을 위해 궁에서 채용한 어릿광대였다. 이 초라한 어릿광대는 왕이 왕위에 물러난 뒤에도 늘 따라다니며 기발한 익살로 왕을 즐겁게 해주었다. 가끔 광대는 깊은 생각 없이 왕관과 모든 것을 딸들에게 주어 버린 리어 왕의 실수를 탓하기도 했다. 어릿광대는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딸들은 뜻밖의 횡재에 기쁜 눈물을 흘리지만, 나는 슬퍼서 노래부르네! 임금님처럼 귀하신 분이 숨바꼭질하시려나? 어릿광대들 사이에 들어오시네! 갑자기 아무렇게나 내뱉는 노래로 이 유쾌한 광대는 큰딸인 고네릴 앞에서조차 리어 왕을 빈정대거나 조롱하고 비꼬았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야 하는 두 딸들이 아버지보다 높은 지위가 된 것을 다음과 같은 얘기로 비꼬았다. "두견새의 새끼가 완전히 자라면 길러 준 휘파람새의 머리를 쪼아서 죽여 버린답니다!" 어떤 때는, "마차가 말을 끌어당기기도 한답니다." 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리어 왕은 이제는 왕이 아니라 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둥 말하고 싶은 대로 실컷 말을 하면서 나름대로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리어 왕은 단순히 존경받지 못한다든지, 차디찬 대접을 받는 것만이 아니었다. 고네릴은 날마다 아버지에게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으려면 자기네 궁전에 머무르는 것이 곤란하다고 트집을 잡았다. 기사들은 빈둥빈둥 놀고 먹느라 식량만 축내고 있으니, 그 수를 줄여 몇 명의 하인만 놔두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리어 왕은, 믿고 왕관을 물려준 딸이 이렇게 말하자 충격을 받았다. 품행이 올바른 하인들을 비난하며 너무 괘씸한 요구를 하기에 노왕은 매우 화가 났다. 아버지는 하인들을 데리고 둘째 딸인 리건의 궁으로 가겠노라고 말했다. 왕은 고네릴이 들으면 참지 못할 정도로 욕을 퍼부으며 성을 출발했다. "저애에게 결코 자식이 생기지 않겠지만, 만일 자식을 갖게 된다면 부모를 모욕하고 복수하려는 녀석일 게야. 그때가 되면 불효자를 둔다는 것은 독사에게 물리는 것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될 테지." 라고 그는 말했다. 터벅터벅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왕은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막내딸인 코딜리아의 말이 맘에 안 들었다 해도 큰딸의 지독한 불효에 비하면 정말로 사소한 것이라고 비로소 뉘우쳤다. 왕은 쓸쓸히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리어 왕은 둘째 딸의 궁전에 하인 케이어스를 보내 편지를 전해서 자신과 부하들이 도착하기 전에 맞이할 준비를 해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고네릴은 벌써 동생인 리건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가 멋대로 기분나빠 한다고 비난하고, 아버지가 데리고 가는 많은 신하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해 놓았다. 그때 동시에 왕의 편지를 가진 케이어스가 그곳에 도착했다. 그가 보니, 이전에 리어 왕에 대해 무례한 짓을 하기에 넘어뜨렸던 집사가 와 있었다. 케이어스는 그 집사에게 어떤 용무로 왔는지 물어 보자, 집사가 욕을 하며 그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에 케이어스는 그를 한참 때려 주었다. 그 사건이 리건과 그의 남편에게 알려져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케이어스는 자신이 부왕의 사자이니 그에 알맞은 대우를 해달라고 했는데도, 리건은 그의 다리에 족쇄를 채워 버렸다. 잠시 뒤 부왕이 궁전에 들어서자 케이어스가 부끄럽게 앉아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다. 이것은 부왕이 앞으로 받을 나쁜 대접을 예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리어 왕이 둘째 딸을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리건 부부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다. 노왕이 잔뜩 화를 내자 그때서야 둘은 뒤늦게 인사하러 왔다. 그때 부왕은 큰딸 고네릴도 함께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네릴은 사자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믿을 수가 없어 직접 동생을 만나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설득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노왕은 참을 수가 없어서 고네릴에게 나이든 노인이 이렇게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도 부끄럽지 않느냐고 소리질렀다. 둘째 딸 리건은 아버지에게 신하를 반으로 줄여서 언니의 궁전으로 돌아가시라고 권했다. 아버지가 언니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좋겠다고 리건은 말했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서 분별 능력이 부족하니, 젊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듣고서 리어 왕은, "신세를 지겠다고 딸에게 머리 숙여 사정하는 짓은 못해! 고네릴과 함께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싫으니 난 이곳에 있을 테다!" 하고 말했다. "리건은 고네릴처럼 배은망덕하지 않고 온화하고 상냥할 게야!" 또 왕은 신하들을 반으로 줄여 고네릴의 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참금도 없는 막내딸과 결혼한 프랑스 왕으로부터 하찮은 도움이라도 받는 것이 낫겠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리건은 언니인 고네릴보다 더했다. 50 명의 신하는 너무 많으니 25 명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리어 왕은 가슴이 미어 터질 것 같아, 고네릴을 향해 차라리 그녀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고네릴은 말을 가로막으며, "25 명도 필요없어요. 세 명이나 다섯 명쯤이면 충분할 텐데요?" 하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두 딸들은 아버지에게 지독한 짓을 해서 부왕 주위에 남아 있던 사소한 것들까지도 모두 없애버리려 했다. 백만 군사를 호령하던 한 나라의 왕이 한 명의 하인조차 없게 되었다. 리어 왕이 괴로웠던 것은, 그런 것들을 잃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배은망덕한 딸들이 자신의 일거일동을 못마땅해 하고 막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형편없는 대접을 받자 왕은 정신이 약간 이상해졌다. 그는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지독한 마녀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욕을 퍼붓기도 했다. 이러는 사이에 밤이 되고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딸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리어 왕의 신하들을 궁 밖에 세워두었다. 리어 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배은망덕한 딸들과 한 지붕 밑에 있기 보다는 오히려 밖에서 폭풍우를 맞는 편이 속편하겠다고 말했다. 딸들은 아버지가 고집이 세기 때문에 스스로 고생하는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며 문을 닫아 버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폭풍우가 더 무섭게 몰아쳤지만, 노왕은 딸들의 태도를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달려나갔다. 리어 왕은 어두운 밤에 휘몰아치는 폭풍우는 맞으며 나무 한 그루 거친 들판을 걸었다. 바람과 천둥에게 도전이라도 하듯이 당당하게 걸었다. 그는 비바람을 향해, 인간이라는 배은망덕한 동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가서 이 대지를 바다로 덮어 버리라고 울부짖었다. 늙은 왕의 곁에는 초라하고 애처로운 어릿광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케이어스로 행세하고 있는 충신 켄트는 초라한 리어 왕과 익살꾼 광대가 있는 곳으로 간신히 찾아왔다. "아! 여기 계셨습니까? 이처럼 지독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는 짐승조차도 숨을 곳으로 몸을 피합니다. 어째서 이런 밤에 왕께서는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 말을 듣고 리어 왕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서 그를 매우 야단쳤다. 그의 마음속에는 몸 밖에 불어 닥치는 비바람보다도 더 심한 폭풍우가 몰아치기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불효자는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주려던 손을 물어뜯는다고 중얼거렸다. 선량한 케이어스는 쉴 새없이 어서 비바람을 피하시라면서 황야에 초라하게 세워진 한 오두막으로 들어가기를 눈물로 청했다. 그 속에 들어가 보니 미친 거지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허리만 빼고는 발가벗은 참혹한 몰골이었다. 왕은 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린 자신도 이런 비참한 꼴일 거라고 생각했다. 배은망덕한 딸들만 아니라면 이렇게 까지 참담한 모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리어 왕이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리어 왕이 딸들의 비인간적인 대우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미친 거라고 케이어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케이어스는 신하들 중에서 충직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새벽녘에야 비로소 미친 왕을 모시고 도버 성까지 갔다. 그곳 도버성에는 켄트 백작의 친구들도 있었고, 또 그가 백작으로서의 세력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 그는 리어 왕의 막내딸 코딜리아가 있는 프랑스로 갔다. 그가 왕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언니들의 몰인정한 처사를 눈으로 보듯 자세히 설명하자 코딜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코딜리아는 남편인 프랑스 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잔혹한 언니들과 형부들을 몰아내고 부왕을 다시 왕위에 복귀시킬 수 있도록 충분한 군대를 수행해서 브리튼으로 가게 허락해 달라고 코딜리아는 부탁했다. 왕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곧 출발했다. 리어 왕은 곁에서 시중을 들고 보호하던 하인의 눈을 피해 오두막에서 빠져 나왔다. 도버 근처의 들판을 초라한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코딜리아의 병사들이 발견했을 때, 왕은 이미 완전히 미쳐 버린 뒤였다. 머리 위에는 짚이나 쐐기 풀 같은 잡초로 만든 왕관을 쓰고 혼자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 대고 있었던 것이다. 코딜리아는 한시 바삐 아버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의사의 충고를 어길 수 없었다. 왕은 몸과 마음이 너무나 쇠약해졌으니 자고 나서 침착함을 되찾을 때까지는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코딜리아는 의사들에게 아버님의 병을 낫게 해주기만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치료해야 된다고 엄하게 명령했다. 의사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노력한 끝에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왕의 상태는 많이 회복되었다. 왕과 그의 사랑하는 딸이 만나는 광경은 보기에도 눈물겨웠다. 왕은 사랑스러운 막내딸을 다시 만나자 감격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 오해를 하여 딸을 쫓아냈던 자신의 잘못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왕은 완전히 낫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신하들에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또 자신에게 상냥하게 키스해 주기도 하고 얘기해 주기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리고 막내딸 코딜리아 같은 그 아가씨가 누구냐고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코딜리아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도 했다. 코딜리아는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니 제발 무릎을 꿇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도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그녀는 언니들의 불효를 대신 갚아 드리겠다면서 아버지에게 키스했다. 아버지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게 된 코딜리아는 아무리 성실치 못한 언니들이지만 아버님에 대한 대우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자신을 물어뜯은 적의 개일지라도 지독하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라면 내쫓지는 않을 텐데, 백발이 성성한 아버님을 썰렁한 밖으로 내쫓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코딜리아는 언니들이 아버님께 대한 태도를 듣고 나서 아버님을 구해 드리기 위해 프랑스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도 하나하나 차분히 설명했다. 리어 왕은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해 달라며, 코딜리아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코딜리아는 딸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딸들의 무정한 태도로 잠시 정신병을 앓게 되었던 리어 왕은 코딜리아의 정성스런 가호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한편, 그렇게 잔혹한 짓을 했던 고네릴과 리건은 어찌되었을까? 아버지에게 배은망덕했던 두 사람은 남편에게도 불성실했다.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좋아했는데, 공교롭게도 둘이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에드먼드라는 남자인데, 형인 글로스터 백작을 쫓아내고 자신이 백작이 된 음흉한 사람이었다. 그때 마침 리건의 남편인 콘월 공작이 죽자 리건은 즉시 글로스터 백작과 결혼하려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언니 고네릴은 질투에 눈이 멀어 여동생에게 독을 먹여 죽여 버렸다. 고네릴은 동생을 독살한 사실이 탄로나서 감옥에 갇힌 뒤 실망과 후회의 날들을 보내다가 홧병으로 발작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악독한 두 자매는 벌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사람만 먼저 죽는 것은 아니었다. 사악한 마음이 없는 코딜리아에게도 슬픈 운명이 닥쳐왔던 것이다. 사악한 글로스터 백작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코딜리아는 글로스터 백작의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글로스터 백작은 그녀를 이용하여 왕권을 차지할 마음을 먹고 감옥에 가두었는데, 코딜리아는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훌륭한 효행의 본보기를 후대에 남긴 코딜리아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리어 왕도 이렇게 상냥한 딸이 죽고 난 뒤 더 오래 살지는 못했다. 리어 왕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해 섬겼던 켄트 백작은 케이어스라는 하인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왕에게 알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리어 왕은 죽음에 이르러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켄트 백작은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이 충신도 리어 왕이 죽고 나서 머지않아 주인을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뒤따라 죽었다. 또한, 글로스터는 코딜리아를 죽인 것이 발각되고 나서 원래의 백작인 형과 결투를 벌이다가 살해되었다. 고네릴의 남편인 앨버니 공작은 코딜리아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관계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내가 아버지에 대해 지독한 일을 한 것도 그가 시킨 것이 결코 아니었으므로, 리어 왕과 세 딸이 죽은 뒤에 브리튼의 왕이 되었다. 맥베스 던컨 왕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던 무렵, 맥베스라는 귀족이 큰 세력을 쥐고 있었다. 맥베스는 전투에 나갈 때마다 탁월한 지혜로 용맹스럽게 싸워 이겼고, 게다가 왕의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왕과 신하들은 그를 매우 신임했다. 최근에도 그는 노르웨이 대군에게 도움을 받는 반란군을 무찌르는 공적을 세웠다. 맥베스가 동료 장군 뱅코와 함께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도중, 바람부는 황야에 다다랐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 괴상하게 생긴 세 마녀가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들은 여자인 듯하면서도 뾰족뾰족 수염이 나 있는데다, 쪼글쪼글한 주름투성이 살갗을 갖고 있었다. 맥베스가 먼저 말을 걸자 세 마녀는 화난 투로 잠자코 있으라면서 주름투성이이며 거칠게 갈라진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그러더니 맨 앞에서 있던 마녀가 외쳤다. "맥베스, 글래미스의 성주가 되실 분!" 맥베스는 이 마녀가 자신에 관한 일을 미리 알아내고 말하자 매우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어서 두 번째 마녀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아직은 아니지만, 장래의 코더 영주이신 맥베스님!" 이 말을 듣고 맥베스는 더더욱 놀랐다. 코더의 영주란 왕이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마녀도, "만세! 장차 임금님이 되실 분, 맥베스 장군 만세!" 라고 인사했다. 맥베스나 뱅코는 예언 같은 축하 인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왕자들이 존재하는 한 다른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에 마녀들은 뱅코 장군에게, "맥베스보다 크지는 않지만, 그보다 훌륭하십니다! 맥베스보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행운아이십니다." 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그들은 뱅코가 왕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뒤를 이을 손자는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고 예언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세 마녀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장군은 어리둥절하여 가던 길을 멈춰선 채 기이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왕이 보낸 사자가 달려왔다. 사자가 갖고 온 전갈은 다름 아니라 왕이 맥베스 장군에게 코더의 귀족 지위를 부여한다는 소식이었다. 놀랍게도 그 소식이 마녀의 예언과 딱 들어맞자 맥베스는 크게 놀라 뭐라고 대답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세 마녀의 예언이 적중할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세 번째 마녀의 말대로 언젠가는 자기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뱅코 장군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마녀들이 예언한 일이 실현되는 것을 보니 자네 손자가 왕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 그러나 뱅코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천만의 말씀! 나는 그렇게 불손한 생각은 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는 조심하게. 첫 마녀의 예언대로 왕위를 노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둠의 마녀들은 시시한 일을 사실처럼 이뤄지게 하고 나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약속을 뒤집어 배신해 버린다네. 부디 정신차리게. 그렇지만 코더의 귀족이 된 것은 사실이니 아무튼 축하하네." 그렇지만 맥베스의 가슴속에는 마녀가 한 예언이 이미 깊이 파고들어, 정직한 뱅코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때부터 어떻게 하면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것만 생각하게 되었다. 맥베스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에게 마녀들이 이상한 예언을 한 것과, 그 중의 일부가 꼭 들어맞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대담하면서도 야심이 무척 강한 여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피 흘리는 것이 두려워 망설이는 남편을 여러 가지 말로 설득했다. 그녀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헛되게 하지 말고, 마녀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왕을 암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던컨 왕은 나라를 위해서 애쓰는 충신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직접 그 공을 치하해 주곤 했다. 맥베스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기에 마침 왕은 맬컴 왕자와 도널베인 왕자, 그 밖에 많은 신하들과 시종들을 수행하고 맥베스의 성에 왔다. 맥베스가 사는 성은 경치가 매우 좋으며 공기가 맑고 쾌적한 곳이었다. 왕은 성에 들어서자 성의 분위기가 좋고, 맥베스를 비롯해서 그의 부인에게 빈틈없고 예의바르게 대접받자 매우 흡족해 했다. 그런데 이 맥베스 부인은 마음속에 사악한 계획을 숨기고 독사와 같은 독을 감추고 있으면서 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자기 전에 맥베스의 극진한 환대에 매우 만족해 하면서 많은 하사품과 하사금을 하인들에게까지도 나누어 주었다. 그 중에서도 맥베스 부인에게는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주면서 참으로 친절한 국내 최고의 여인이라고 칭찬했다. 왕은 먼 길을 오느라고 피곤해서 곧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당시의 관습대로 침실을 지키는 두 시종이 바로 옆방에서 잤다. 어느덧 한밤중이 되어 지구 반쪽의 모든 사물이 죽은 듯 잠들었다. 악몽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외에는 주인을 죽이려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만이 깨어 있었다. 맥베스 부인은 눈을 비비며 살며시 일어나 왕을 암살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편이 야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또한 왕을 죽이겠다고 맹세했으면서도 다시 마음이 약해져서 이런 큰일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일을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합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단검을 가지고 왕의 침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잠들기 전에 침실을 지키는 시종들에게는 술을 많이 먹여 깊은 잠에 빠지게 해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잠꼬대를 하면서 자고 있었다. 침실에 들어가니 던컨 왕이 곤히 자고 있었다. 잠자는 얼굴을 가만히 보니 어쩐지 자기 아버지와 닮은 데가 많아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맥베스 부인은 용기가 없어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맥베스 부인이 그런 짓을 할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맥베스는 단지 신하일 뿐만 아니라 왕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만일, 왕의 신변에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왕을 구해 내야 하는 신분으로서, 왕을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던컨 왕은 모든 일에 정당했고, 자비심이 많으며, 신하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며, 귀족들을 사랑했다. 모든 백성들이 흠모하는 왕을 암살한다면 두 배의 복수를 당할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맥베스는 왕의 신하로서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는데, 암살자라는 수치스런 이름이 붙는 것은 무엇보다도 싫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생각한 뒤 맥베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잠시 선량한 마음이 되어 사악한 마음을 버리려 했다. 그러나 맥베스 부인은 자신의 음흉한 계획을 쉽게 버릴 여자가 아니었다. 마음이 약해지는 남편을 격려하고 북돋아 주면서, 한번 맹세했으니 망설이지 말라고 설득했다. 그녀는 자손 대대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막상 시도해 보면 짧은 순간에 해치울 수 있는 간단한 일이라고 재촉했다. 젖먹이 어린애도 어머니 젖에서 떼어놓으면 어찌할까 궁리하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살인 누명은 자고 있는 시종들에게 덮어씌우면 되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겁이 많다는 남편을 책망하면서, 한번 맹세한 이상 빨리 해치우자고 했다. 이처럼 빈틈없이 격려를 받고 설득당하자 맥베스는 다시 한번 참혹한 일을 저지를 용기가 솟았다. 마침내 그는 손에 단검을 쥐고 던컨 왕이 자는 캄캄한 방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피묻은 단검 한 자루가 그에게 두둥실 떠서 다가왔다. 맥베스가 놀라서 손잡이를 잡으려 하자 단검은 휙하니 피 묻은 칼날을 뒤로 하고 사라져 버렸다. 앞으로 하려는 일 때문에 순간적으로 보인 환상이었다. 겨우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천천히 왕이 자고 있는 곳으로 접근한 다음에 순간적으로 해치워 버렸다. 막 살인을 하고 난 순간, 옆에서 자던 시종 한 사람이 잠꼬대로 웃기 시작하자 곧 다른 사람이, "살인이다!" 하고 큰소리를 질러 두 사람은 모두 눈을 떴다. 그러나 그들은 나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며 짧게 기도했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 라고 하자 또 한 사람은, "아^6,3^멘!" 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더니 다시 둘은 잠이 들었다. 이것을 듣고 있던 맥베스는 시종이 하나님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할 때 자신도, "아멘." 이라고 할 뻔했다. 그렇지만 그 말이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다. "졸지 말라. 맥베스는 그 졸음을 죽여 버렸다. 생명을 기르는 죄없는 잠을 죽여 버렸다. 그러므로 맥베스는 앞으로 다시 잘 수 없느니라." 맥베스는 무서운 환상에 괴로워하며, 계획대로 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마치 미치광이처럼 되어서 돌아온 맥베스를 보고 맥베스 부인은 깨끗하게 마무리하지 않은 것을 책망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손에 묻은 피를 씻도록 하고, 아직 피가 묻어 있는 단검을 들고 시종이 자는 방으로 가서 그들의 뺨에 피를 칠하고 방을 나왔다.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무서운 사건이 드러났다. 맥베스 부부는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종들은 피묻은 얼굴을 하고 단검을 갖고 있었기에 분명히 범인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맥베스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그런 시종들에게는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를 만한 담력이 없었거니와, 왕이 죽었을 때 가장 형편이 좋아지는 것은 맥베스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한 두 왕자는 우선 그곳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던컨 왕의 두 아들은 위험을 느끼고 형 맬컴은 영국 궁정으로, 동생 도널베인은 아일랜드로 도망쳤다.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자들이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하자 왕위를 이을 사람은 맥베스뿐이었으므로 마녀들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드디어 왕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고귀한 신분이 된 다음 맥베스 왕과 그의 아내 왕비는 마녀들이, "맥베스는 왕이 되겠지만, 그의 후계는 그 자식이 아니고 뱅코의 손자가 되리라!" 하고 예언한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을 피로 더럽히며 큰 죄를 범한 것이 겨우 뱅코의 자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였나 하고 그들은 후회했다. 그는 뱅코와 그의 자식들까지 없애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마녀들이 한 예언을 뒤집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왕이 된 맥베스와 왕비는 이 목적을 위해 성대한 만찬회를 개최하여, 뱅코와 그의 아들은 물론 주요한 귀족들을 모두 초대했다. 뱅코는 그날 밤 만찬회에 참석하려고 궁으로 가는 도중에 맥베스의 명령을 받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은 용케 도망쳤다. 이때 몸을 피한 뱅코의 아들의 자손이 나중에 대대로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오른 것은 물론이다. 그날 밤 왕비는 만찬회에서 여주인으로서 아주 상냥한 태도로 훌륭하게 대접했다. 맥베스 왕도 귀족들과 허물없이 이야기하며, "내 친구 뱅코만 와 준다면, 이 나라의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이 집에 모이는 성황을 이룰 텐데. 왜 이리 늦지?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말했다. 마침 이렇게 말하고 있는 곳으로 죽은 뱅코의 유령이 들어와 맥베스가 앉으려던 의자에 먼저 앉아 버렸다. 맥베스는 악마와 만나도 벌벌 떨지 않는 대담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광경을 보고 공포로 얼굴이 창백해져서 가만히 유령을 바라보면서 다만 멍하니 서 있었다. 왕비와 귀족들의 눈에는 유령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맥베스가 텅 빈 의자를 응시하고 멍청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웬일인가 하고 궁금해 했다. 왕비는 맥베스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나무라며, 그것은 던컨 왕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단검이 공중에 떠 있었던 환상과 똑같은 것이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맥베스에게는 아직도 유령이 보였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로, 때로는 의미가 있는 듯한 말로 유령에게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는 그러다가는 무서운 비밀이 탄로날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다가 왕비는 요즘 맥베스 왕은 심신이 피로해서 가끔 저렇게 이상해진다고 말하면서 귀족들에겐 이젠 그만 돌아가라고 말했다. 맥베스 왕과 왕비는 이와 같이 자신들이 범한 나쁜 짓의 결과로 무서운 환상에 시달렸고, 밤에는 악몽으로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뱅코의 망령처럼 마음에 걸린 것은, 그의 아들을 암살하는데 실패해서 국외로 도망치게 한 것이었다. 그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자손들을 왕위에서 물리치고 스코틀랜드의 왕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맥베스는 다시 한번 마녀들을 만나서 앞으로의 운세를 점쳐 보고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 보기로 결심했다. 맥베스는 전에 마녀를 만났던 황야를 헤매다가 마녀들이 그 황야의 돌집에 있는 것을 찾아냈다. 마녀들은 맥베스가 오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녀들은 여러 가지 주문을 외우면서 저승에 있는 죽은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우선 펄펄 끓어오르는 큰 가마솥 속에 두꺼비, 박쥐, 뱀 도룡뇽의 눈, 개의 혀, 도마뱀 다리, 올빼미 날개, 용의 비늘, 위대한 신의 이빨, 식인 상어의 위, 마녀의 미이라, 독이 든 당근, 산양의 쓸개, 유태인의 간장, 무덤 속에서 자란 주독나무의 작은 가지, 죽은 아이의 손가락 등을 넣어 삶다가는 너무 뜨겁게 되면 깨끗한 피로 식혔다. 그리고 그 속에 새끼를 먹은 돼지 피를 쏟고 사람 죽이는 교수대에서 떨어진 기름을 뿌리기도 했다. 이렇게 소름끼치는 의식을 보면서도 맥베스는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말했다. "어디에 유령이 있느냐? 제발 한번 만나게 해다오." 그래서 마녀들은 유령을 불러냈다. 세 유령을 불러냈는데, 첫번째 유령은 투구를 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맥베스의 이름을 부르며 파이프의 귀족들을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 경고에 맥베스는 감사했다. 맥베스는 파이프의 귀족인 맥더프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유령은 피투성이가 된 어린아이 모습으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무엇이든 두려운 것은 없으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당신에게 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힘은 무시해 버려도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용감하고 대담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것을 듣고 맥베스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면 그렇지. 맥더프 정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완전무결한 게 좋기 때문에 그놈을 살려두지는 않겠다. 그렇게 하면 두려운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두 다리 뻗고 푹 잘 수 있게 되었지." 세 번째 유령은 왕관을 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나타나서 말했다. "모반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버넘에 있는 숲이 네 궁전 앞에 있는 던시네인 산까지 오지 않는 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맥베스는 또 외쳤다. "고마운 예언이다! 누구든지 숲을 끌어당겨서 땅에 묻혀 있는 뿌리를 움직이게 할 사람은 없다. 천지개벽이 다시없는 한 넘버의 숲이 어찌 움직이랴! 이로서 나는 내 생명이 있는 날까지 왕좌에 있을 것이고, 뜻밖의 죽음은 상상할 필요가 없겠지. 그런데 다시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은 뱅코의 자손이 이 왕국을 언젠가 통치하는 날이 올지 하는 것이다." 그러자 큰 가마솥이 땅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왕과 같은 모습을 한 여덟 명의 허깨비가 한꺼번에 맥베스가 서 있는 곁을 지나갔다. 맨 마지막이 뱅코였다. 그는 많은 모습들이 비치는 거울을 손에 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맥베스에게 웃으면서 거울 속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맥베스는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오를 뱅코의 자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서 마녀들은 조용한 음악 소리와 함께 춤추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때부터 맥베스의 생각은 완전히 피로 물들여졌다. 마녀의 돌집에서 돌아온 그가 처음 들은 것은 파이프의 귀족 맥더프가 영국으로 도망쳐서 죽은 던컨 왕의 장남 맬컴과 손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맬컴을 선봉장으로 해서 맥베스에게 항거하는 군대를 모아, 맥베스를 물리치고 정통성이 있는 후계자인 맬컴을 즉위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맥베스는 화가나서 맥더프의 성으로 군사를 보내어 거기에 있던 맥더프의 아내와 아이들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그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러한 만행을 보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모두 맥베스 세력하에서 도망쳤고, 많은 사람들이 영국에서 반기를 든 맬컴과 맥더프의 군대에 합세하게 되었다. 맥베스를 두려워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도 몰래 그 군대의 승리를 빌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맥베스의 군사들은 모두 그 폭군을 증오하며, 사랑이 없으면 존경도 없어진다면서 모든 것을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맥베스는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자신이 살해한 던컨 왕조차도 지금은 무덤 속에서 편히 자고 있다는 것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에 악몽으로 시달리던 그의 아내가 죽었다. 흉칙한 꿈에 시달릴 때도 서로 위로해 주곤 했던 왕비였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두려움과, 모두에게 미움받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살한 것 같았다. 이 때문에 맥베스는 홀로 남아 사랑해 줄 사람도, 돌보아 줄 사람도, 나쁜 일을 의논할 상대도 모두 없어진 채 외토리가 되었다. 맥베스는 이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맬컴 군대가 가까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옛날 싸울 때 입던 갑옷을 입고 용기를 내어 싸우다가 죽으려고 결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녀들이 불러낸 유령들의 말을 굳게 믿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죽일 수 없으며 버넘 숲이 이 던시네인 궁전까지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난공불락이라는 성안에 틀어박혀서 맬컴의 군대가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파수병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버넘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숲 전체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을 맥베스는 호되게 야단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을 하면 나무에 매달아서 말려 죽여 버리겠다. 만일, 사실이라면 있는 그대로 다시 한번 말해 봐라." 그러나 정말로 버넘 숲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숲이 던시네인 궁전까지 밀어닥칠 때까지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유령들의 예언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믿을 수가 없어. 그렇지만 저 녀석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기를 갖고 나가 보자. 여기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남아 있을 필요도 없다. 태양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피곤해지고 죽고 싶은 심정이야." 맥베스는 계속해서 절망적인 말을 되풀이하면서 성벽을 포위한 적진 속으로 돌진했다. 사실은 숲이 움직여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적군이 버넘 숲을 빠져 나갈 때 맬컴의 지혜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병사들에게 각자 나뭇가지를 잘라 그것으로 위장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이 나뭇가지로 위장한 군대의 진군이 멀리서 본 파수병을 놀라게 한 것이다. 이렇게 예언이 맥베스가 상상도 못했던 형태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그의 신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맥베스의 병사들은 겉으로는 맥베스의 편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폭군을 증오하며 맬컴과 맥더프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싸우고 있었다. 그래도 맥베스는 화를 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덤벼드는 적을 쓰러뜨리며 결국 맥더프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맥더프를 보자 맥베스는 유령들의 경고에서 누구보다도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한 것을 생각하고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맥더프는 처음부터 그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후퇴하려는 맥베스의 앞을 가로막고 격렬하게 싸웠다. 맥더프는, "이 원수놈아! 내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녀석아! 내 칼을 받아라!" 하고 소리쳤다. 맥베스는 이미 죄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한 약점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맥더프는 더욱더 그가 한 짓을 욕하며, "폭군, 살인자, 지옥갈 녀석!" 하고 욕을 해댔다. 그때 맥베스는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지지 않는다고 한 유령의 말을 떠올리고 자신을 갖고 말했다. "헛수고다, 맥더프! 나에게 덤비려느냐! 쓸데없는 무모한짓이다! 내 목숨은 유령들이 준 부적을 달고 있기 때문에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에겐 패하지 않는다." "부적을 달았다고? 이 미친 녀석아, 이 맥더프는 보통 사람처럼 여자가 낳지 않았어. 나는 산기가 없을 때 엄마의 배를 가르고 나온 몸이다." 이러한 맥더프의 대답을 듣고 맥베스는 조금 남아 있었던 신념마저 잃고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그렇게 거짓말하는 혀는 신에게 저주받을 것이다. 나는 마녀와 유령들의 말에 의하면 잔꾀에 속지 않는다고 했다, 이 녀석아. 아무튼 나는 너 같은 애숭이와는 싸우기 싫다." "그렇다면 살아 있어라. 사실은 심심하던 참에 잘되었다. 대신 너를 우리 병사들에게 구경거리로 만들어 주마. 그리고 간판에는 희대의 폭군이라고 써 주마!" 이렇게 경멸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맥베스는 잠시 절망했지만 곧 용기를 되찾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젊은 맬컴 밑에 무릎을 꿇거나 시시한 인간들처럼 욕된 삶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설령 버넘의 숲이 밀려 온다 해도, 또 나에게 대항할 네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자랑스럽게 최후의 일전을 벌이겠다." 이 미치광이 같은 말과 함께 그는 맥더프에게 덤벼들었다. 치열한 격투 끝에 결국 맥더프는 맥베스를 쓰러뜨렸다. 그는 맥베스의 머리를 베어 맬컴 왕에게 갖다 주었다. 이리하여 젊은 맬컴은 던컨 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는 왕좌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말괄량이 캐서린은 패두아의 갑부 뱁티스타의 맏딸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나운 성질을 가진데다가 시끄럽게 욕을 해대곤 했으므로, 패두아에서는 말괄량이 캐서린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이 캐서린과 결혼할 엄두를 내기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어떤 신사도 그녀에게 청혼하려 하지 않았다. 반면에 여동생인 비앙카에게는 훌륭한 사람들이 청혼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아버지 뱁티스타는 큰딸이 먼저 결혼한 다음에야 둘째 딸에게 청혼하라고 하면서 이를 승낙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페트루치오라는 신사가 신부감을 구하려고 패두아로 찾아왔다. 그는 동네방네 소문난 캐서린의 나쁜 성격에도 개의치 않고, 그녀가 부자이면서 예쁘다는 말을 듣고는 이 유명한 말괄량이와 결혼하여 잘 길들인 다음에 부드럽고 점잖은 마누라로 바꿔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페트루치오는 이런 어려운 일을 해내는 데는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캐서린에게 지지 않을 만큼 지독한 성질을 가진데다, 매우 영리하고 쾌활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예리하게 판단하고, 기분이 좋을 때도 일부러 화난 시늉을 할 수 있거니와, 그 자체를 즐기며 웃을 줄 아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뛰어난 분별력이 있었으므로, 그는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는 캐서린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부러 모든 행동을 그녀와 똑같이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페트루치오는 말괄량이 캐서린의 집으로 가서 우선 아버지 뱁티스타에게 큰딸 캐서린에게 구혼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녀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정숙하며 점잖다고 들었기 때문에 멀리 베로나에서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다며 일부러 여러 가지를 반대로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맏딸을 결혼시키고 싶지만, 딸의 성질로는 그게 어렵다고 막 고백하려 하는 참에, 마침 캐서린의 음악 가정교사가 방으로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기타 치는 법이 틀렸다고 지적했다가 캐서린에게 기타로 머리를 얻어맞았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해서 그 '얌전한 캐서린'이 어느 정도로 심한 말괄량이인지 곧 알려지고 말았다. 그러자 페트루치오는 말했다. "용감한 아가씨로군요. 더욱더 호감이 갑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이렇게 말하고는 노인의 허락을 재촉했다. "저는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뱁티스타 씨! 매일 구혼하러 올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제 아버님을 알고 계시지요?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토지와 재산을 저에게 모두 물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따님에게 어느 정도의 지참금을 딸려 보내실 작정이십니까?" 뱁티스타는 페트루치오가 구혼을 하는 사람치고는 태도가 좀 당돌하고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말괄량이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겠다는 것은 여간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맏딸에게 지참금 2만 크라운과, 자신이 죽은 다음에는 토지를 반 정도 줄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 괴상한 혼담은 곧 결정되었다. 아버지는 말괄량이 큰딸에게 그 말을 전하고, 페트루치오를 만나보도록 하라고 말했다. 페트루치오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 구혼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오면 자신을 가지고 기세등등하게 설득해야겠다. 만일, 욕을 하면 휘파람새처럼 아름답게 노래하는구려 하고 말해 줘야지. 찌푸린 얼굴을 하면 이슬에 막 씻긴 장미처럼 싱싱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겠다.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훌륭한 웅변이라고 해주고, 나가 달라고 하면 일주일간 같이 있어 달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다고 감사하는 말을 해줘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캐서린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들어왔기 때문에 페트루치오는 우선 이렇게 불렀다. "안녕, 케이트! 다른 이들이 그러는데 당신 이름이 바로 케이트라지요?" 캐서린은 이 무례한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경멸하듯이 말했다. "나에게 말을 거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캐서린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나 페트루치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당신은 틀림없는 케이트요. 똑똑한 케이트, 사랑스런 케이트, 때로는 말괄량이 케이트라고 불리기도 하지. 그러나, 케이트, 당신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예쁜 케이트요. 그러니까, 케이트, 당신이 상냥하다는 소문이 어느 마을에서나 자자한 것이고, 그래서 나도 당신을 아내로 맞으려고 온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구혼 작전이었다. 그녀가 말괄량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큰소리로 마구 욕을 해대자 그는 매우 상냥하고 공손한 말이라고 칭찬하며, 빨리 이야기를 매듭지으려고 이렇게 말했다. "상냥한 캐서린!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둡시다. 아버님은 당신이 내 아내가 되는 것을 승낙하셨소. 지참금까지 결정했으니까, 당신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난 당신과 결혼할 것이오." 그러고 있는데 아버지 뱁티스타가 들어왔다. 페트루치오는 그에게 따님이 친절하게도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며, 다음 일요일에 결혼할 약속을 했다고 말했다. 캐서린은 이 말을 부인하면서, 다음 일요일에는 결혼이 아니라 그가 교수대에 목이라도 매달리는 꼴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아버지가 자기를 이런 미치광이 같은 난폭한 사람과 결혼시키려 한다면서 원망했다. 그러나 페트루치오는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을 무시하고, 아버님 앞이라 반대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한 사이가 되었으므로, 둘이만 있게 되면 그녀는 기분이 좋아지고 사랑스러워진다고 능청을 떨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도 말했다. "악수합니다, 케이트. 나는 베니스에 가서 당신이 결혼식날 입을 옷을 사오겠소. 아버님께서 피로연 준비를 하시고, 손님들도 초청해 주십시오. 저는 반지와 예쁜 장신구, 그리고 멋진 옷들을 사올 테니까요. 그러면 당신은 아주 아름다워 보일거야. 자, 이제 키스해 줘요, 케이트. 우리는 일요일에 결혼할 거니까." 이윽고 일요일이 되어 초대받은 손님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페트루치오는 오지 않았다. 캐서린은 그가 자신을 조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화가 나서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침내 페트루치오는 나타났다. 그런데 오긴 했지만, 캐서린에게 사다 주마고 약속했던 옷이며 장신구는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새신랑다운 차림새가 아니라 누구든지 바보스럽게 여길 만큼 이상하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왔다. 게다가 그가 데리고 온 하인들이나 타고 온 말까지도 하나같이 모두 초라한 몰골이어서, 행색이 도무지 말이 아니었다. 페트루치오는 아무리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해도 그 괴상망칙한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캐서린은 나와 결혼하는 것이지, 내 옷과 결혼하는 것이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캐서린은 아무리 해도 소용없음을 알고 교회로 식을 올리러 갔다. 그는 교회에 가서도 전과 같이 미치광이 같은 행동을 계속했다. 목사님이 캐서린을 신부로 맞아들이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는 끝까지 사랑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너무 큰소리로 그렇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 소리에 놀란 목사님은 성경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목사님이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으려하는 순간, 이 미치광이 신랑이 주먹으로 내리쳤기 때문에 목사님은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하고 떠들어대기도 했기 때문에, 대단한 성질을 가진 캐서린이 오히려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 지경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다들 교회 안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페트루치오는 교회 안으로 포도주를 가져오게 해서는 큰소리로 모든 이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한 뒤, 마시다 남은 것을 목사님 얼굴에 뿌렸다. 이런 미치광이 같은 결혼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페트루치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말괄량이 신부를 훌륭하게 훈련시키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캐서린의 아버지 뱁티스타는 호화스런 결혼 피로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돌아온 페트루치오는 곧장 캐서린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장인이 된 뱁티스타의 항의와 신부인 캐서린의 성난 욕설에도 불구하고, 페트루치오는 아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남편의 권리라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면서 캐서린을 데리고 출발해 버렸다. 그 태도가 꽤나 힘차고 단호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그를 말리려들지 않았다. 페트루치오는 일부러 고른, 빼빼 마르고 초라한 말에 신부를 태우고, 자신도 하인과 함께 마찬가지로 비실비실한 말을 타고 지독하게 질척거리는 길을 걸어갔다. 캐서린이 탄 말이 비틀거리기라도 되는 양 큰소리로 말을 야단치기도 하고 하인들을 야단치기도 했다. 캐서린은 지루하고 진저리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그의 고함소리만 들으면서 겨우 그의 집에 도착했다. 페트루치오는 겉으로는 친절하게 그녀를 맞이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날 밤은 재우지도 않겠거니와 먹을 것도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곧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그렇지만 페트루치오는 어느 요리든지 다 일부러 트집을 잡아 이렇게 맛없는 고기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줄 수 없다면서 마루에 던져 버리고 나서 하인들을 꾸짖었다. 캐서린은 몹시 배가 고팠지만 피곤해서 방으로 들어가 자려고 했다. 그러자 페트루치오가 또 침대에 트집을 잡고 베개랑 이불을 던져 버렸으므로 그녀는 할 수 없어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깜박 잠이 들려 할 때마다 이번에는 그가 침대를 손보는 법이 서툴다고 하인들을 큰소리로 야단쳤기 때문에 잠을 깨고 말았다. 다음날도 페트루치오는 계속 같은 방법으로 캐서린에게는 상냥한 말을 하면서도 그녀가 음식을 먹으려 하면 저녁식사 때처럼 트집을 잡고서 식사를 모두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에게 머리를 숙인 적이 없었던 캐서린도 하인들에게 몰래 먹을 것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하지만, 하인들은 주인님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갖다 드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심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저 사람은 나를 말려 죽이려고 결혼했나 봐. 우리집 앞에 기웃거리던 거지도 먹을 것은 잘 얻어먹었는데. 지금껏 누가 먹으라고 애원을 해도 먹지 않았고, 먹는 것의 중요함을 몰랐던 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정신이 없고, 잘 수도 없고, 게다가 욕만 먹고 있으니 현기증이 나네. 그보다도 더 진절머리나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이 내가 사랑스럽기 때문이라면서, 먹고 자려고만 하면 금방 죽기라도 할 듯이 떠들어대는 거야." 이 혼잣말은 페트루치오가 들어오는 동시에 뚝 그쳐 버렸다. 페트루치오는 정말로 굶겨 죽일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기를 조금 가지고 와서 말했다. "내 사랑스런 예쁜이! 이리 와요, 여보. 내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보라고. 이렇게 당신에게 주려고 내가 직접 고기 요리를 만들어 왔다오. 이런 친절에는 감사의 인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라? 한마디 말도 없군? 당신은 고기 요리를 싫어하는 모양이지? 만드느라고 고생한 것이 헛일이로군." 그리고 그는 하인들에게 명령해서 접시를 가져가게 했다. 캐서린은 마음속으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제발 그것을 갖다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렇지만 페트루치오는 아직 조금 더 골려 주려는 마음을 먹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감사하는 말은 해야 되는 법이오. 그러니까 먹을 것에 손을 대기 전에 나에게 말해 봐요." 그래서 캐서린도 마지못해서,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기를 조금 주면서 말했다. "당신의 상냥한 마음에 대한 보답이오, 케이트! 어서 서둘러 먹어요. 이 사랑스런 귀염둥이 아가씨! 이제부터 친정으로 다시 가서 비단옷과 모자, 황금 반지, 목둘레 깃, 스카프, 부채, 그리고 보석이 잔뜩 달린 화려한 외출복을 입고 임금님 같은 성대한 피로연을 엽시다." 페트루치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런 사치스런 물건들을 정말로 살 생각이라고 믿게 하기 위해서 양장점 주인과 잡화상 주인에게 미리 주문해 둔 것들을 가지고 오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직 음식을 반도 먹지 않았는데 음식 그릇을 가져가라고 하인에게 명령하면서, "어때, 진수성찬이었지?" 하고 말했다. 금방 도착한 잡화상인은 모자를 내놓으면서 말했다. "주문하신 모자입니다." 그러자 페트루치오는 또 화를 내면서 이것은 접시 모양 같은데다 새조개나 호두껍질만큼 작다며, 다시 더 크게 만들라고 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그 모자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전 이게 좋아요. 점잖은 젊은이들은 요즘 모두 이런 모자를 쓰고 있어요." "당신이 점잖아지면 그때는 하나 사 주겠소. 그때까지는 안돼." 캐서린은 고기를 조금 먹었기 때문에 다소 힘이 생겨서 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말할 자유는 내게도 있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야겠어요. 나는 어린애가 아녜요. 갓난애도 아니고. 당신보다 더 훌륭한 분이라도 내가 하는 말은 들어 줘야 할 거예요. 들어 줄 수 없다면 차라리 귀를 막고 계시지요." 페트루치오는 그녀와 시끄럽게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든 모두 당신 말대로요. 그건 역시 시시한 모자요. 당신이 그런 것은 싫다고 하는 점이 내 마음에 드는구려." "당신이 날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는 이 모자가 마음에 들어요. 내 마음에 드니까 이 모자를 가지겠어요. 이것이 아니면 필요없어요." "드레스를 좀 봤으면 좋겠는데." 하고 말하면서 페트루치오는 일부러 캐서린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양장점 주인이 앞으로 나서며, 페트루치오가 그녀를 위해서 주문한 예쁜 드레스를 내밀었다. 페트루치오는 모자든 드레스든, 캐서린에게 보여 주기만 하고 사 주지는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또 트집을 잡았다. "야, 지독하군! 맙소사, 이게 뭐야, 이 소매 말이야. 사과 파이처럼 위아래를 둥글게 해서 이거 마치 대포 같잖아!" 양장점 주인은, "지금 유행하는 대로 만들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캐서린은 이렇게 멋진 드레스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페트루치오는 양잠점 주인과 잡화상 주인에게 미리 몰래 물품 대금을 지불해 두었기 때문에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귓속말을 하고 나서 일부러 큰소리로 그들을 방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나서 그, "자, 이리 와요, 캐서린! 지금 입고 있는 조잡한 옷이라도 좋으니까 친정집으로 갑시다." 라고 말하며 말안장을 하인들에게 준비시켰다. 그리고 또 지금이 이른 아침이니까 점심때까지는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인들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이미 아침이 아니고 낮이었다. 그러므로 남편의 맹렬한 태도에 기가 죽어 있던 캐서린도 공손할 수만은 없어서 잘라 말했다. "내가 감히 말한다면 말이죠, 이미 2시가 지났으니까 거기에 닿으려면 저녁식사를 끝낸 뒤에나 도착할 거예요." 그렇지만 그는 아내를 완전히 억눌러서 처가에 갈 때까지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고분고분 따르도록 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치 태양에게도 명령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한다든지 행동을 하면 당신이 사사건건 방해를 하기 때문이오. 오늘은 하는 수 없어. 갈 때는 내가 몇 시라고 하면 바로 그때가 반드시 그 시간이 되는 거야." 그는 며칠이 걸릴지라도 캐서린의 거만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서 어떤 일에나 복종하도록 하게 하고 나서 친정집으로 가게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가는 도중에 그가 대낮에 달이 비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캐서린이 달이 아니고 해라고 반대하는 것만 가지고도 다시 데리고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친정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달이든 별이든 그 밖에 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당신이 따르지 않으면 안돼." 라고 하면서 되돌아가려 했다. 그렇지만 캐서린은 이미 말괄량이가 아니라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아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계속해서 가도록 해요. 이미 이렇게 멀리까지 왔잖아요? 태양이든 달이든 당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하기로 해요.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촛불이라고 말씀하시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렇다고 할 테니까요." "좋아! 저것은 달이오." "달이고말고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저것은 해요. 달이 아니고 해란 말이오." "그렇다면 해예요. 하지만, 당신이 또 해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해가 아닌 셈이지요. 뭐든지 당신이 이름을 붙이시면 그렇게 되기도 하려니와, 나에게도 역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을 듣고 페트루치오는 그대로 친정집으로 향해서 가기로 했다. 그래도 그는 이러한 마음이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지 캐서린의 마음속을 한번 더 시험해 보기 위해서, 길가에서 만난 나이먹은 신사에게 마치 그 사람이 젊은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가씨?" 그리고 페트루치오는 캐서린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는, 분홍빛 뺨을 예쁘다고 칭찬하기도하고 두 눈은 샛별처럼 빛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노인에게, "사랑스럽고 예쁜 아가씨, 오늘 하루 즐거우시기를!" 하고 말한 다음 캐서린에게, "상냥한 케이트! 이 아름다운 처녀에게 당신의 마음을 전하는 키스를 해줘야지." 무엇이든 완전히 순종하게 된 캐서린은 곧 남편의 의견에 따라 노인에게 말했다. "젊고 꽃봉오리 같은 아가씨! 당신은 예쁘고 상냥하시군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기다리시는 부모님은 또 얼마나 행복하실까?" 페트루치오는 캐서린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당신 미쳤군. 이렇게 쪼글쪼글한 주름투성이 노인인데. 당신이 말하는 아가씨가 아니잖아." 그러자 캐서린은 재빨리 이렇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영감님.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모든 게 다 싱싱하게 보였나 봐요. 당신이 품위 있는 노인이라는 말씀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엉뚱한 실수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페트루치오는 노신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만일, 저희들과 같은 길이라면 같이 가시지요." "쾌활한 주인 양반, 명랑한 부인, 당신들 말씀은 아주 재미있으시군요. 내 이름은 빈센시오라고 하며 패두아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찾아가는 길입니다." 노신사가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분이 바로 캐서린의 여동생, 그러니까 처제인 비앙카와 결혼할 루센시오의 아버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페트루치오는, "당신의 아드님은 매우 훌륭한 결혼을 할 겁니다." 하고 말했기 때문에 그 노인은 매우 기뻐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같이 유쾌한 길동무가 되어 처가집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미 처제인 비앙카와 노인의 아들인 루센시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많은 축하객이 모여 있었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큰딸의 결혼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비앙카의 결혼을 마침내 승낙했던 것이다. 그들이 들어갔을 때는 비앙카 부부 이외에 또 한 쌍의 신혼 부부가 와 있었다. 그들은 호텐시오라는 신사와 그의 신부였다. 그들은 둘 다 자신들의 신부가 상냥하고 얌전한 마음씨를 가진 것에 만족해 하면서, 페트루치오가 운나쁘게 말괄량이 신부를 맞이하게 된 것을 비웃고 있었다. 페트루치오는 그들의 심술궂은 농담에는 신경쓰지 않고 있었지만,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 버리자 장인 뱁티스타까지도 함께 그를 보고 웃으며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부인들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려고 다른 방으로 가 버렸다. 이때 페트루치오가 자기 아내인 캐서린이 다른 신부들보다 훨씬 더 남편에게 순종하며 얌전하게 된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장담하자 장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미안한 얘기지만, 페트루치오, 자네가 가장 상대하기 곤란하고 힘든 상대를 고른 것 같네." 페트루치오는 그 말에 곧 반대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기를 한번 해보지요. 제 각기 자기 신부를 여기로 부르도록 합시다. 가장 먼저 온 신부가 가장 남편에게 순종 잘하는 신부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 남편이 내깃돈을 모두 갖기로 합시다. 모두들 어떻습니까?" 다른 두 사람은 자신들의 상냥한 아내가 말괄량이인 캐서린보다는 온순한 성격이기 때문에 남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종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기꺼이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20크라운을 걸고 내기를 하자고 했다. 그러자 페트루치오는 개를 걸고 내기를 할 때도 그 정도는 걸고 하니까, 20배 정도를 더 갈자고 큰소리쳤다. 결국 루센시오와 호텐시오는 100크라운으로 내깃돈을 올렸고, 루센시오가 우선 하인을 시켜서 비앙카에게 와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인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마님께서는 바쁘셔서 오실 수 없다고 하십니다." 페트루치오는, "뭐라고? 바빠서 올 수 없다고? 들으셨지요? 바빠서 올 수 없답니다."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은, "캐서린이 더 나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좋겠소." 하면서 웃었다. 다음은 호텐시오가 하인에게 지시했다. "오! 부디 와 주십사고? 그런 말을 들으면 오지 않을 수 없겠는데." 호텐시오는, "자네 아내라면 그런 말을 들어도 오지 않을 거야." 라면서 웃었다. 그런데 그때 하인이 호텐시오의 아내를 모셔 오지 않고 혼자 돌아왔기 때문에, 호텐시오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무엇을 하고 있나? 어디 있어?" "주인님, 마님은 주인님께서 장난을 치고 계시는 거니까 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마님께서는 주인님더러 어서 와달라는 부탁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하고 하인은 대답했다. 이번에는 페트루치오가 하인에게 말했다. "이봐, 마님께 가서 내가 오라고 했다고 전해라." 이 말을 들으면서 모두들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뱁티스타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니, 이런 놀라운 일이! 캐서린이 정말로 왔어!" 캐서린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상냥하게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웬일로 부르셨어요?" "처제와 호텐시오 부인은 어디 있소?" "응접실 난로 곁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가서 두 사람을 이리 데리고 나와요." 캐서린은 남편이 하는 말을 빨리 들어 주려고 대답도 하지 않고 재빨리 나갔다. 루센시오와 호텐시오는 깜짝 놀라서 저마다, "이상한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트루치오가 말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이게 다 평화의 전조지.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즐거운 생활의 시작이란 말일세." 캐서린의 아버지는 말괄량이 딸이 정숙하고 얌전한 여자로 변한 것을 보고 너무나 기뻐서 말했다. "이것으로 자네가 내기에 이겼네. 나도 지참금을 2만 크라운 더 올려 주겠네. 내 딸이 다른 사람처럼 변했으니 말일세." "아닙니다. 저는 지참금보다 더 좋은 것을 얻었습니다. 아내가 새로 익힌 변함없는 굳은 정조와 순종을 더 보여 드리겠습니다." 페트루치오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방으로 캐서린이 여동생들과 같이 들어왔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보게나, 데리고 왔잖은가. 자네들의 버릇없는 아내들을 설득시켜 데리고 왔어. 캐서린, 당신 모자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런 시시한 것은 내던져 버려요." 캐서린은 곧 쓰고 있던 모자를 내팽개쳐 버렸다. 이것을 보고 있던 비앙카와 호텐시오 부인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어머, 기가 막혀. 이런 엉터리 같은 짓을 보여 주려고 일부러 불러냈어요?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짓이에요." 비앙카의 남편은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도 언니처럼 미련했으면 좋았을걸. 당신이 너무 똑똑해서 100크라운이나 손해봤어." 비앙카는 지지 않고 다시 말했다. "나를 걸고 내기를 하다니, 당신이야말로 어리석군요." 그러자 페트루치오는 자신 있게 다시 말했다. "여보, 캐서린, 당신에게 부탁하겠소. 이 말괄량이들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어떠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오." 그러자 모두가 놀란 것은, 전에는 말괄량이였던 캐서린이 아내로서 해야 할 복종의 의무에 대해서 끝없이 설명하며 칭송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괄량이가 아니라 패두아에서 가장 점잖고 정숙하고 현명한 부인으로서 다시 한번 유명해졌다. 열두 번째 밤 오빠인 세바스찬과 여동생인 비올라는 메살린에 사는 젊은이들이었다. 두 남매는 쌍둥이였는데 너무나 생김새가 비슷해서 옷이 다르지 않으면 구별해 내기 힘들 정도였다.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났는데, 마찬가지로 남매가 한꺼번에 죽을 뻔한 일이 일어났다. 같이 배를 타고 여행하고 있을 때에 일리리아 해안에서 배가 난파당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타고 있던 배는 폭풍우 속에서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기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선장은 두세 명의 선원과 함께 조그만 예비선을 타고 고생 끝에 겨우 육지에 닿았다. 쌍둥이 남매의 여동생인 비올라도 그 배를 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사하게 살아남은 것에 대해 기뻐하기보다는 오빠 세바스찬을 걱정하느라 슬퍼할 뿐이었다. 선장은 그녀를 위로하면서 오빠는 배가 부서졌을 때 튼튼한 돛대에 몸을 묶고 있었으니 아마도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바스찬이 그 돛대에 실려 돌고래 등에 업힌 것처럼 파도에 떠내려가는 것을 멀리서 봤는데, 운이 좋으면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비올라는 이 말을 듣고 다소 마음을 놓았으나, 앞으로 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선장에게 일리리아라는 곳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이곳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 바로 여기서 세 시간도 안되는 곳에 있으니까요." "이곳은 어떤 분이 다스리는 땅인가요?" "오르시노라는 가문의 인품이 뛰어난 공작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르시노 공작? 아버지한테서 그분의 존귀한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독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지금도 역시 독신이지요. 소문에 의하면 오르시노 공작은 올리비아라는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청혼했다고 하더군요. 그 올리비아라는 아가씨는 재주와 고운 성품을 모두 갖춘 아주 어여쁜 아가씨랍니다. 1년 전에 돌아가신 백작의 딸로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오빠가 그분을 보살펴 왔었는데 오빠마저 죽어 버렸지요. 그래서 그 아가씨는 아버지와 오빠만을 생각하면서 다른 남자들과는 절대로 만나거나 사귀지 않기로 했다는 겁니다." 오빠를 잃고 나서 슬픔에 젖어 있던 비올라는 그만큼 애절하게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올리비아라는 아가씨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비올라는 선장에게 자기는 올리비아 아가씨의 시중을 들며 살고 싶으니 소개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그러나 올리비아 아가씨는 누구든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지체 높은 공작님의 간청조차도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올라는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자기가 남장을 해서 오르시노 공작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되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선장에게 의논하자 친절한 선장은 곧 그 계획을 도와 주기로 했다. 비올라는 그에게 돈을 주면서 남자 옷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오빠인 세바스찬이 항상 입고 있던 색상과 스타일로 만들어 오도록 했다. 그 옷을 차려 입고 나서자 비올라는 오빠와 똑같아 보였다. (나중에 알겠지만, 오빠인 세바스찬도 바다에서 구조되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착각하여 우스꽝스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청년으로 변장한 비올라는 선장과 함께 공작을 찾아뵙고 세자리오라는 가명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공작은 이 예쁘장한 청년의 말씨나 우아한 행동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세자리오를 곧 하인으로 고용하기로 했다. 비올라는 항상 정직하고 성실하게 모든 일들을 처리했기 때문에 공작은 그를 가장 아끼게 되었다. 오르시노 공작은 올리비아 아가씨를 사모하는 자기 감정까지도 세자리오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진심으로 있는 힘과 지혜를 다 모아서 구혼을 하는데도 그녀는 한마디로 거절하며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귀한 공작은 그렇게나 몰인정한 상대를 사모하는 정 때문에 남자답게 야외에서 활동하는 것을 모두 잊고 지냈다. 그 대신 차분한 음악이나 온화한 사랑의 노래 같은 것에 푹 빠져서 하릴없이 세월만 흘려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사귀어 왔던 귀족들과의 교제까지도 완전히 끊고 하루 종일 젊은 세자리오만을 상대로 하소연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오르시노가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는 동안에 비올라는 비록 지금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원래는 젊은 아가씨인지라, 이렇게 늠름하고 젊은 공작에게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입 밖에 낼 수도 없고, 보답받을 수도 없는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보아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멋있고 훌륭한 이 오르시노를 올리비아 아가씨가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자리오는 사람을 못 알아보는 그런 여인을 사모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넌지시 부드럽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만일, 공작님께서 올리비아 아가씨를 사랑하듯 어떤 아가씨가 공작님을 사랑한다 하더라고 공작님은 그 아가씨에게 올리비아 아가씨에 대한 사랑을 하소연하시겠지요? 그래도 그 아가씨는 공작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오르시노는 그 무엇도 올리비아에 대한 자기의 사랑과 비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비올라는 자기가 품고 있는 사랑은 그가 올리비아에게 바치는 애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세자리오?" "여자가 남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사랑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에게도 어떤 남자를 무척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지요. 만일^5,5,5^ 제가 여자였다면 주인님을 그만큼 깊이 사랑했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랑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는가?" "가엾게도 그애는 사랑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마음속으로만 사랑하고 있었지요. 마치 바윗돌처럼 강한 인내심을 갖고, 슬픔 속에서도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 여자는 사랑 때문에 결국 죽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공작은 물었지만, 비올라는 불분명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오르시노 공작에 대한 자기의 비밀스런 사랑을 어떤 방법으로든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올리비아 아가씨 집에 보냈던 하인이 돌아와서 말했다. "부끄럽게도 올리비아 아가씨를 뵙지도 못했습니다, 주인님. 공작님의 심부름이라고 했는데도 하인들이 막무가내로 거절하면서 문 안에 들여 놓지도 않았습니다. 올리비아 아가씨께선 앞으로 7년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수녀처럼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돌아가신 오빠 생각만을 하시며 근신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녀는 죽은 오빠에게조차 그러한 애정을 바칠 정도로 자상하고 고운 마음씨를 갖고 있구나! 만일, 사랑의 화살을 그녀 가슴에 맞추더라도 내가 그녀를 얼마만큼이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5,5,5^ 그렇지, 세자리오? 내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이미 몽땅 너에게 털어놨으니, 넌 지금 곧바로 올리비아 아가씨 댁으로 가서 내 마음을 전해 다오. 가서 거절당하든 어쨌든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만나기 전에는 발이 붙어서 한걸음도 꼼짝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꼭 만나고 오너라!" "그런데 만일 만나뵐 수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그때엔 내 열정적인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말해야 한다. 내 괴로움을 아가씨에게 숨김없이 털어놓기에는 네가 안성맞춤이다. 너는 내 마음속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어색하게 점잔을 빼는 하인들보다는 고상한 말씨를 갖춘 젊은이의 말을 더 잘 들어줄 거다." 그래서 비올라는 올리비아 아가씨 댁을 향해서 출발했다. 비올라는 자기가 사랑하는 공작의 부탁이긴 하지만, 공작이 다른 여자에게 청혼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는 공작의 하인인 이상 주인의 지시를 충실히 순종하기로 마음먹었다. 올리비아 아가씨는 어떤 청년이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올리비아 아가씨 댁 하인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편찮으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것을 다 알고 왔으니 꼭 만나뵈어야만 돌아가겠다고 우겨대고 있습니다. 지금 주무시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그것도 다 알고 왔다며 무조건 만나뵈어야 한다고 고집부립니다. 기가 막혀서^5,5,5^ 뭐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올리비아는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들어오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렇게 소란피우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공작이 보낸 하인이 분명하다면서 올리비아는 얼굴을 베일로 가렸다. 비올라는 들어서자마자 가능한 한 남자다운 태도를 갖추고 점잖고 공손하게 말했다. "이 이상 더 훌륭하고 아름다울 수 없는 아가씨! 당신이 이 저택의 주인이신지 아닌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아가씨를 한번도 뵌 적이 없기 때문에, 만일 다른 분에게 말씀드리게 된다면 아주 곤란합니다. 제가 외운 대사를 주인 아가씨가 아닌 다른 분에게 헛되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려야 할 내용은 아름답게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다 외우는 데 아주 고생했기 때문이지요." "어디에서 오셨나요?" "저는 외운 것 이외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질문은 제가 맡은 역할과는 상관없는 듯합니다." "당신은 희극 배우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서 비올라는 다시 한번 아가씨가 이 댁의 주인인지 아닌지 물었고, 올리비아는 주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비올라는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부디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이 청년 세자리오를 본 순간 한눈에 반해 버렸기에 그 당돌한 요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7년 동안을 베일을 가리고 있겠다던 결심도 잊어버리고 베일을 걷어올리면서 말했다." "자! 이제 당신이 준비해 왔다는 그 연극을 보여 주시지요. 잘할 수 있겠어요?" "'자연'이라는 화가가 아가씨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그렸군요. 어쨌든 대단한 미인이십니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을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고 자기 혼자만 숨기고 계시다니 아주 잔인한 분이십니다."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도대체 왜 당신은 저를 칭찬하시는 건가요?" "당신이 어떤 분인지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은 거만하시지만 동시에 매우 아름다우시군요. 저의 주인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아름다운 여왕님이더라도 그만큼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르시노 공작님의 당신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라고 보다 차라리 숭배이며, 비오는 듯한 눈물이며, 불붙는 듯한 탄식이라 할 수 있답니다." "당신 주인이신 공작님께서는 이미 내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어요. 물론 그분이 고귀하고 훌륭한 신분에 높은 덕을 쌓으신, 흠잡을 데 없는 분이시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학식이 높고 겸손하며 용기 있는 젊은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렇지만 나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고 훨씬 전에 이미 대답해 드렸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을 저의 주인님만큼만 사랑한다면 이 문 앞에 버드나무 가지로 오두막을 지어 놓고 매일 당신에게 호소할 것입니다. 당신을 소재로 비탄에 젖은 노랫말을 지어서 깊은 밤에도 큰소리로 노래할지도 모르죠. 당신의 이름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메아리가 되어 오면 당신은 잠도 못 잘 것이고, 또한 저를 측은하게 생각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야말로 저를 측은하게 생각해 주셔서 고맙군요. 그런데 당신 부모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가씨가 생각하시는 제 신분보다는 높은 분들이십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돌아가서 말씀드려 주십시요. 저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시는 사람을 보내지 마시라고도 해주세요. 다만, 저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를 알려 주러 당신이 다시 오신다면 예외로 하겠어요." 그래서 비올라는, "참 무정한 분이군요." 하고 말하고 돌아갔다. 비올라가 가버리자 올리비아는 세자리오가 공작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높은 신분이라고? 그 이야기하는투며 표정이며 그 체격이나 거동 등 모두가 완전한 신사가 틀림없어." 그 뒤로 올리비아 아가씨는 갑자기 세자리오에 대한 사랑이 싹트는 것을 알고서 상대가 천한 신분의 하인이라는 것도 잊고 그의 사랑을 얻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하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지고 세자리오의 뒤를 쫓아가서 오르시노 공작의 선물을 허락도 없이 건방지게 놓고 갔으나 받을 수 없다고 호통치면서 전해 주고 오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반지를 선물해서 자기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세자리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올라는 곧 쫓아온 하인의 엉뚱한 말을 듣고 올리비아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오르시노 공작이 반지를 주지 않았을 뿐더러, 가만 생각해 보니 올리비아의 표정이나 태도에게 자기에 대한 호감이 엿보였기 때문에 아가씨가 자기의 남장한 모습에 반한 것이라고 곧 눈치챘다. "딱한 아가씨, 차라리 허망한 꿈을 사랑하시는 게 나아요. 남장한 나를 사랑하다니. 그래도 남장을 해서 착각하게 한 내가 나쁘지. 오르시노 공작님에 대한 나의 부질없는 생각을 올리비아 아가씨에게도 폼게 한 것이 잘못이고 나쁜 짓이야." 비올라는 오르시노 궁으로 돌아와서 청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주인에게 전했다. 그래도 공작은 올리비아를 다시 한번 더 설득해서 자기를 이해하도록 해주면 좋겠다면서 세자리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은 세자리오에게 다음날에도 또 올리비아 아가씨 댁에 다녀오라면서,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달래도록 노래를 좀 불러달라고 했다. "어젯밤 그 노래를 들으니 괴로운 생각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어. 기억해 둬, 세자리오. 그것은 오래 된 노래지만 평범하고 순박한 노래야. 젊은 아가씨들이 햇볕에 앉아서 뜨개질을 할 때 부르는 노래지. 시시한 노래 같지만 순수하게 천진난만한 사랑을 표현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곡이거든." 그래서 세자리오는 노래를 불렀다. 오너라, 오려무나, 죽음의 신이여! 편백나무 관 속에 나를 눕혀 다오. 날아라, 날아가려무나, 내 한숨아. 매정한 이 아가씨에게 이 목숨 다하는구나. 하얀 수의에 주목나무 장식을 마련해 다오. 죽어 이슬이 되어도 어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꽃은 필요없소, 예쁜 꽃은 더욱 그렇소. 편백나무 관 하나면 만족한다오. 친구 한 사람도 찾지 마오, 조문은 더욱 그렇소. 죽은 몸을 관 속에 그대로 놔두오. 천 가지 만 가지 근심 걱정 할 것 없이 그대로 흙 속에 묻어 주오. 울먹이는 내 사랑이 내 무덤 모르도록 조용히 묻어 주오! 이 사랑의 고뇌를 노래한 옛 노랫말은 비올라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연히 슬픔 표정을 띠었다. 이것을 보고 오르시노는 말했다. "세자리오, 웬일이냐? 너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사랑으로 고뇌해 본 표정이구나. 무슨 고민이냐? 너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눈길을 준 경험이 있느냐?" "죄송합니다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몇 살쯤 되었지?" "공작님과 같은 나이였으며, 외모도 비슷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작은 이 아름답고 젊은 청년이 자기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남자처럼 생긴 여인을 사랑했구나 하며 미소지었다. 그렇지만 사실 비올라는 오르시노 공작과 은근히 비유해서 말한 것이지, 남자처럼 생긴 여인을 뜻한 것은 아니었다. 비올라가 다시 올리비아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는 전과 달리 금세 정중하게 올리비아 아가씨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비올라가 다시 한번 주인님을 위해 설득해 보려고 왔다고 말하자 올리비아 아가씨는 자기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분의 일이라면 두 번 다시 말씀하지 마시오. 하지만, 만일^5,5,5^ 다른 구혼을 하신다면^5,5,5^ 하늘에 별들이 노래하는 것보다 더 즐기어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올리비아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청년 하인에 대한 사랑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비올라의 곤란하고 불유쾌한 안색을 보고서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리 당신이 화를 내도, 또 경멸을 받아도 그것이 도리어 제겐 아름답게 여겨지는군요. 세자리오! 당신이 그렇게나 거만한데도 저는 당신을 사랑하다니, 열정을 감출 이성도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도 소용이 없었다. 비올라는, "저는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두 번 다시 오르시노 공작의 부탁을 전하러 오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 방을 나가 버렸다. 비올라가 올리비아의 저택을 나오자, 올리비아에게 거절당한 어떤 구혼자가 올리비아가 공작의 하인 따위를 사랑한다면서 격분하고는 달려들었다. 결투를 신청받은 비올라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원래 상냥한 여자였기 때문에 불쌍하게도 칼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할 정도였다. 그녀는 무서운 남자가 칼을 빼어들고 공격해 오는 것을 봤을 때 자기는 원래 여자라고 소리지를 뻔했다. 그렇지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이 그 가엾은 젊은이를 구해 주었다. 그 사람은 마치 그녀와는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그녀를 보호하며 상대에게 말했다. "만일, 이 신사가 당신에게 실례를 범했다면 그 실수를 내가 책임질 것이며, 당신이 이 사람에게 실례를 범했다면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대신 도전하겠소이다." 비올라는 위험에 빠진 자기를 구해 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알지도 못하는 자기를 왜 목숨을 걸고 도와 주는지를 물어 보려 했는데, 그때 경찰이 다가왔다. 그들은 오르시노 공작이 고소한 5년 전의 죄값이라면서 그 낯선 행인을 체포해 버렸다. 그러자 그 사람은 황급히 비올라를 향해서 말했다. "이것이 모두 자네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된 것이네. 이제 이렇게까지 곤란한 입장이 되었으니 내가 맡긴 지갑이나 어서 돌려 주게. 내가 이렇게 된 것보다도 자네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네. 대단히 놀란 모양인데,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은 없네!" 그 사람의 말은 비올라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모르는 사람에게 지갑을 받은 일이 없다며 항의했다. 그렇지만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 준 대가로 갖고 있던 돈을 조금 주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배은망덕하다면서 그녀에게 지독하게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여기에 있는 이 젊은이는 물에 빠져서 사경을 헤맬 때 내가 건져 준 작자입니다. 바로 이 사람 때문에 나는 일리리아에까지 와서 이런 꼴을 당하는 것입니다." 경찰관은 이 남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런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하면서 서둘러 끌고 가려했다. 그는 끌려가면서 비올라를 세바스찬이라고 부르며, 친구를 죽게 내버려둔다면서 욕을 퍼부었다. 비올라는 자기를 세바스찬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도 그 낯선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곧 그 사람이 자기를 오빠로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친구가 오빠였으면^5,5,5^ 비올라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모르는 사람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 사람은 안토니오라는 선장으로서, 세바스찬이 폭풍우 속에서 돛대에 몸을 붙들어 매고 목숨이 끊어질 듯 바다 위에 표류하고 있을 때 그를 배로 건져 올렸던 것이다. 안토니오는 세바스찬을 매우 좋아하게 되어서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가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 세바스찬이 오르시노의 저택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안토니오는 전에 어떤 해전에서 공작의 조카에게 중상을 입힌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이다. 지금 그가 죄인이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안토니오와 세바스찬이 육지에 상륙했을 때는 배가 난파당한 뒤 비올라가 육지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이었다. 안토니오는 세바스찬에게 지갑을 주면서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사도 좋다며, 세바스찬이 마을을 구경하는 동안에 자기는 여관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세바스찬이 약속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자 그는 생각 끝에 위험을 무릅쓰고 세바스찬을 찾아나섰다. 비올라가 세바스찬과 같은 옷을 입고 얼굴도 똑같았기 때문에 그녀를 오빠 세바스찬으로 착각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간신히 만난 세바스찬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구해준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딱 잡아떼다니^5,5,5^ 게다가 지갑을 받은 적도 없다고 했으니 배은망덕하다고 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비올라는 안토니오가 가 버리자, 결투 신청을 한 사람이 다시 덤벼들까 두려워서 얼른 빠져 나왔다. 마침 뒤이어 세바스찬이 올리비아의 저택을 구경하러 그곳에 왔다. 그때 올리비아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람도 곧 따라와서는, "자, 또 만났구나. 이 배은망덕한 겁쟁이 졸장부야, 각오해라!" 하면서 세바스찬에게 싸움을 걸어 왔다. 상대가 막무가내로 달려들자 세바스찬은 어쩔 수도 없이 칼을 빼어들고 반격했다. 그때 올리비아가 집에서 뛰어나와 그 결투를 말렸다. 그녀는 세바스찬을 공작님 댁 하인인 세자리오로 착각하고서 상처난데는 없느냐고 하면서 미안해 했다. 세바스찬은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공격당하기도 하고, 처음 만난 여자에게 아주 정중한 대접을 받기도 해서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우 기뻐하며 올리비아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 공작의 하인 청년이 화를 낸다든지 경멸한다든지 하지 않고 자기의 고백을 기쁘게 들어 주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세바스찬은 이 아가씨가 처음 대하는 자기에게 너무 지나친 애정을 쏟아 주기 때문에 혹시 정신이 이상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훌륭한 저택의 여주인으로서 신중하고 차분하게 집안일을 돌보며, 하인들을 부리고, 사무 일체를 처리해 가는 것을 보고는 이 뜻밖의 애정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올리비아는 세자리오가 전혀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근처에 성당에 가서 곧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다. 세바스찬은 자기를 세자리오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 청혼을 쾌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세바스찬은 친구인 안토니오에게 자기의 행운을 이야기해 주려고 집을 나섰다. 한편, 그 뒤 오르시노는 세자리오를 데리고 올리비아를 만나러 왔다. 마침 그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경찰이 죄수인 안토니오를 공작에게 데려왔다. 안토니오는 여전히 하인 세자리오를 세바스찬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공작에게 그 청년은 자신이 바다에서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지난 3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도 자신을 모른다고 하는 배은망덕한 녀석이라고 투덜거리며 하소연했다. 그렇지만 공작은 마침 그곳을 올리비아가 나왔기 때문에 안토니오가 하는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백작의 따님이 계시는 곳이다. 천사가 땅 위를 걷는 듯하고나. 너에게 말해 두겠지만, 네가 말하는 것은 미치광이 헛소리야. 이 젊은이는 3개월 전부터 내 시중을 들고 있었어." 그리고 나서 그는 경찰들에게 안토니오를 데려가도록 지시했다. 올리비아 아가씨는 세자리오를 자기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한결 상냥하게 대했다. 공작은 자기의 하인이 그렇게까지 사랑받는 것을 보자 질투를 느껴 화를 내면서 그를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 "여봐라, 세자리오! 돌아가자. 네가 이렇게까지 대접받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곧 죽여 버려야겠다!" 청년 하인 세자리오의 모습을 한 비올라는 마음속으로 공작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올리비아는 자기의 남편인 세자리오를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아서 외쳤다. "나의 사랑 세자리오! 어디로 가시렵니까?" 비올라는 대답했다.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 주인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도 올리비아는 그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큰소리로 세자리오는 자기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며, 신부님을 불러오게 해서 신부님의 말을 들어 보자고 했다. 신부님은 올리비아 아가씨와 이 청년이 결혼한지 아직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세자리오가 아무리 자기는 올리비아와 결혼한 적이 없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오르시노 공작은 자기 하인에게 목숨보다도 소중한 애인을 도둑맞았다며 한탄했다. 그가 세자리오에게 두 번 다시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바로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세자리오가 한 사람 더 나타나서 올리비아를 자기 아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 새로운 세자리오야말로 올리비아의 진정한 남편인 세바스찬이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은 생김새, 같은 목소리, 같은 옷차림인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잠시 뒤 모두가 침착해지자 남매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오빠가 무사할 줄은 몰랐고, 세바스찬도 물에 빠져죽었다고만 생각하던 여동생이 젊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랐다. 비올라는 공작의 하인이 되기 위해 남자로 변장했다는 것을 고백했다. 쌍둥이인 오빠와 여동생이 너무나 생김새가 닮았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오해들이 말끔히 해결되었다. 사람들은 올리비아 아가씨가 여자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깨닫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올리비아는 결국 여동생 대신에 그 오빠인 세바스찬과 결혼한 것을 알고서도 기뻐했다. 오르시노의 희망은 올리비아의 결혼으로 영원히 끝난 셈이어서, 그는 짝사랑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밝혀진 세자리오의 예쁘장하던 남장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렸다. 그는 세자리오를 매우 예쁘다고 생각하며 세자리오에게 여자 옷을 입힌다면 얼마나 예쁠까를 생각해 보았다. 충실한 하인이 가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한 것은 다만 충절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외의 수수께끼 같은 말들도 이제는 확실하게 알았다. 그래서 그는 비올라와 결혼하려고 결심하고, 그녀에게 세자리오라고 부르며 말했다. "세자리오, 너는 몇 번이나 내게 말했었지,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고! 게다가 나를 위해서 그 약한 몸으로 충실하게 온 힘을 다 쏟아 주었어. 오랫동안 나를 주인이라고 불러 왔으나, 앞으로는 내가 너를 주인의 아내, 오르시노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겠다!" 올리비아는 공작이 비올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아침에 자기 결혼에 주례를 서 주었던 신부님에게 다시 오르시노와 비올라의 결혼식을 올려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두 쌍둥이 남매는 같은 날에 한꺼번에 결혼식을 치렀다. 두 사람을 잠시 헤어지게 했던 폭풍우와 난파선은 결국 큰 행운을 가져다 준 고마운 자연의 심술이었던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옛날 베로나라는 마을에는 카풀렛과 몬타규라고 하는 이름난 두 가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쪽 집안은 옛날부터 원수처럼 사이가 나빠서, 쌍방의 먼 친척들은 물론 하인들조차 서로를 미워하여 마을에서 만날 때마다 으르렁댈 뿐만 아니라, 심하게 말다툼을 벌이다가 때로는 피를 흘리며 싸우기까지 했다. 이러한 싸움으로 인해 베로나 마을은 하루도 평화스럽지 못했다. 나이가 제법 든 카풀렛 경이 성대한 만찬회를 베풀 때에 몬타규 집안 사람만 아니라면 그 누가 가더라도 환영받았다. 그런데 이번 카풀렛 가문의 만찬회에는 많은 신사와 숙녀들이 참석했는데, 몬타규 경의 아들 로미오도 살그머니 참석했다. 몬타규 집안 사람으로서 이 만찬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거기에 참석하면 카풀렛 집안의 로잘린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로미오의 친구 벤볼리오가 가면을 쓰고 나가면 안전하게 로잘린을 만날 수 있다고 하며 로미오를 꾀었던 것이다. 로미오는 로잘린이라는 여인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는데, 로잘린은 로미오를 좋아하기는커녕 깔보며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인 벤볼리오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로미오를 데리고 나가서 일방적인 짝사랑에서 그를 구해 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젊은 로미오는 벤볼리오와 또 한 친구 머큐시오와 함께 가면으로 가장하고 카풀렛 경이 베푸는 만찬회장으로 갔다. 카풀렛 경은 그 세 젊은이가 몬타규 집안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매우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마침내 흥겨운 댄스 파티가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로미오는 사뿐히 춤추고 있는 어떤 한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했다. 화려한 샹들리에도 오직 그 여인만을 위해 더 한층 밝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보석과 같았다. 로미오는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그 아름다움을 보고, 마치 까마귀 무리에 섞여 있는 흰 백로와 같이 아름답다며 혼잣말로 칭찬했다. 그런 말을 카풀렛의 조카인 티볼트가 우연히 듣고서 가면을 쓴 사람이 로미오라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 성격이 괴팍한 티볼트는 몬타규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자기 가문의 만찬회를 방해하기 위해 왔다며 물어뜯을 듯이 화를 내며 로미오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티볼트의 아저씨인 카풀렛 경이 다른 손님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또한 로미오가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사로 존경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볼트의 난폭한 행동을 멈추게 했다. 티볼트는 하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댄스 파티가 끝나자, 로미오는 아까 그 아저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에게 점잖고 예의바르게 인사한 뒤 그녀와 소곤소곤 얘기했다. 상냥하고 아리따운 그녀의 손을 잡고서 그녀를 여신이라고 부르며, 자기를 그 여신에게 예배드리는 신자로 비유해서 말했다. 그는 신자가 죄를 지어서 그 죄를 용서받고자 하니 그 용서로써 키스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아가씨는 대답했다. "순례자님, 당신의 태도는 너무나도 공손하고, 그 생각하는 것도 고귀합니다만, 키스만은 안되겠군요." "여신이라 해도 입술은 있는 것이니, 그 입술로 키스해 주시면 되지 않겠소?" "입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입술은 기도할 때나 사용하는 것이랍니다!" "오오! 그렇다면^5,5,5^ 나의 소중한 여신이여! 나의 기도를 받아들여 부디 키스를 허락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절망해서 기절해 버릴 거라오." 두 사람이 이렇게 짧은 동안에 불꽃 같은 사랑의 대화를 나눌 때 그녀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 뒤 로미오가 그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몬타규 집안의 최대 적수인 카풀렛 경의 외동딸 줄리엣이라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원수 집안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줄리엣 또한 사랑하게 된 청년이 몬타규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상한 사랑의 씨앗이 싹트게 된 것을 깨닫고 두려워했다. 밤이 깊어지자 로미오는 두 친구와 함께 카풀렛 경의 저택을 나왔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저택 뒤편에 있는 담벽을 타고 정원에 들어갔다. 그때 마침 줄리엣이 창가에 나타나자 꼭 동쪽의 캄캄한 하늘에 태양이 솟아올라 환하게 비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창가에 턱을 괴고 밤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미오는, "차라리 저 손가락에 낀 장갑이 되었으면. 그렇게되면 그녀의 얼굴에 닿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는 혼자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아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미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너무나 기뻐,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오오, 나의 아름다운 천사여! 저 위로 당신이 나타난다면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숙여 당신을 우러러보게 될 것이며, 당신을 하늘의 천사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오." 로미오가 서서 엿듣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오! 사랑하는 로미오, 당신은 어째서 로미오인가요? 나를 위해서 아버지를 버려 주세요. 당신의 신분을 버려 주세요. 그것이 싫으시다면 하다못해 나의 약혼자라고 고백이라도 해주세요. 그렇게 한다면 나도 카풀렛이라는 이름을 버리겠어요." 하면서 몸과 모든 마음이 그의 것이 되어버린 자기를 받아달라고 중얼거렸다. 이 사랑의 고백을 엿들은 로미오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무 그늘 아래 숨은 채 속삭였다. 자기를 약혼자로 생각하든지 않든지간에 그녀가 원한다면 이름을 바꾸고 싶으니 로미오라는 이름을 과감히 버리겠다고 말했다. 줄리엣은 정원의 어둠 속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놀랐다. 자기의 비밀을 모두 엿들은 사람이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곧 그가 다시 한번 속삭이자 줄리엣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예민한 귀로써 그가 로미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기집안 사람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몬타규 집안의 사람은 죽게 될지도 모르니,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줄리엣은 안타깝게 얘기했다. 그러자 로미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아! 나에겐 당신의 눈이야말로 카풀렛 사람들의 칼보다 훨씬 예리하답니다. 당신에게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미움을 산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적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어떻게 알고 이쪽으로 오셨죠? 누구의 안내를 받고서?" "사랑이 길잡이가 되어 주었답니다. 나는 뱃길의 길잡이는 아니지만, 파도가 휘몰아치는 머나먼 바다에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라는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 아무리 험난한 바다라도 헤치며 건너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줄리엣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로 변해 버렸다. 그녀는 로미오에게 자기 맘을 엿보인 것을 부끄러워했다. 분별 있는 여자들이 하는 행동처럼, 사랑하더라도 일부러 냉담한 체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미오가 은밀히 듣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해버렸으므로,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내보이게 된 것이다. 줄리엣은 로미오를 '사랑스런 몬타규'라고 부르며 경박하게 사랑을 고백한 것은 밤의 어둠에 휩싸여 자기의 생각을 흘려버린 것이라고 변명했다. 또한, 자기의 행동은 뛰어나게 얌전하고 예의바르다고는 할 수 없으나, 겉으로만 얌전한 체하며 일부러 사랑하는 사람을 애태우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드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진실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로미오는 그 말을 듣고 하늘에 사랑을 맹세하자고 했지만, 줄리엣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고 신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고백을 벌써 들었으니 벌써 서약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 때 줄리엣을 유모가 불렀다. 유모는 원래 그녀와 같은 방에 잠자는데, 날이 새기 전에 빨리 자라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금방 돌아와서 또 로미오와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의 사랑이 정말 고결한 것이라면 두 사람의 결혼 날짜를 정해서 알려 달라면서, 또한 그때에는 자기 운명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그를 자기 남편으로 여기고 이 세상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줄리엣은 몇 차례나 유모한테 불려갔다. 그러나 가서는 돌아오고, 다시 가서는 또 돌아와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연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음악은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가 될 테니까. 그렇지만 조금은 자기도 하고 쉬기도 해야 했기에 두 사람은 결국 아쉬워하면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에는 이미 먼동이 트고 있었는데, 흥분한 로미오는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가지 않고 근처의 수도원에 있는 로렌스 신부를 만나러 갔다. 착하고 선량한 신부는, 젊은 로미오가 이른 새벽에 찾아온 것을 보고 분명히 상사병으로 인해 밤을 지새우고 온 것이라고 꿰뚫어 보았다. 잠시 신부는 로미오가 로잘린에 대한 사랑의 고민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고백을 듣고 줄리엣에 대한 새로운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신부는 젊은 사람들이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고 외모만 보고 사랑에 빠진다며 충고를 해주었다. 하지만, 로미오는 로잘린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어떤 반응도 없었으나, 줄리엣은 자기와 진정으로 사랑을 주고받았다면서 결혼을 승낙해 줄 것을 부탁했다. 신부는 원래 카풀렛과 몬타규 양가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줄리엣과 로미오, 젊고 순수한 이 사람들의 결합이 양쪽 집안이 화해하는 데 큰 디딤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도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로미오는 정말 행복했다. 줄리엣도 하인에게 그 소식을 듣고 로렌스 신부에게로 달려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신성한 결혼식을 치렀다. 착하고 선량한 신부는 두 사람 앞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기를 기원하면서 젊은 몬타규와 젊은 카풀렛의 결합으로써 양가의 오랜 미움과 긴 불화를 없애주시도록 하나님에게 기원했다. 식이 끝나자, 줄리엣은 집에 돌아온 뒤 밤이 되어 로미오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마치 축제 전날 밤 아이들이 안타깝게 축제를 고대하는 것처럼. 한편, 로미오의 친구들인 벤볼리오와 머큐시오가 베로나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카풀렛 일가의 한패거리들이 만찬 때에 로미오에게 대들었던 티볼트를 앞세우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머큐시오를 향해 몬타규의 로미오 같은 인물과 어울린다며 심하게 나무랐다. 머큐시오도 성질이 괴팍했기 때문에 지지않고 날카로운 말로 쏘아댔다. 결국에는 벤볼리오가 말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판 싸움이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곳에 마침 로미오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성격이 괴팍한 티볼트는 머큐시오와 싸우다가 이번엔 로미오한테 욕을 하면서 싸움을 걸어 왔다. 로미오는 티볼트가 줄리엣의 친척이기도 했고, 또한 그녀를 대단히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싸움은 피하려 했다. 로미오는 원래 현명하고, 신사답고, 점잖았기 때문에 한번도 싸움에 가담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젠 카풀렛이라는 가문은 예전과는 달리 사랑하는 아내의 가문이기 때문에, 증오하기는커녕 오히려 친근하게 생각하여 훌륭한 나의 카풀렛이라고 부드럽게 부르며 티볼트를 달래려고 했다. 그렇지만 티볼트는 지옥을 증오하듯 몬타규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었기에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머큐시오는 어째서 로미오가 티볼트와 사이좋게 지내려 하는지 모르고, 다만 비겁하게 굴복한다고 생각하여 티볼트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다. 결국, 티볼트와 머큐시오가 칼부림을 하며 싸우기까지 하여 로미오와 벤볼리오가 애쓴 보람도 없이 머큐시오는 쓰러져 죽고 말았다. 친구가 당한 것을 보고 로미오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티볼트를 향해 칼을 뽑아들었다. 이번에는 티볼트가 로미오의 단칼에 끝장이 났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은 대낮에 베로나의 시가지에서 즉각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곳으로 벌떼같이 몰려들 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곳으로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카풀렛과 몬타규 양쪽 가문의 가장들도 부인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심지어 공작까지 도착하여 몬타규와 카풀렛 일가의 오랜 싸움으로 인해 언제나 마을의 평화가 깨진다며 이번에야말로 죄인으로 판명된 자는 극형에 처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로미오의 친구인 벤볼리오는 이 끔찍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증인이었기에 공작으로부터 모든 사실들을 증언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는 사실대로 말하면서, 가능하면 로미오가 누명을 덮어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신중히 변호했다. 카풀렛 부인은 자기 조카 티볼트를 잃고 비탄에 빠져, 공작에게 이 재판을 엄중히 다루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벤볼리오의 증언이 편파적이라고 비난했다. 카풀렛 부인은 로미오가 자기 딸 줄리엣의 남편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자기 사위를 곤궁에 빠뜨리게 되었다. 로미오의 어머니 몬타규 부인은, 티볼트가 먼저 머큐시오를 죽였으니, 이미 죄를 저지른 티볼트를 죽인 것이므로 로미오는 무죄라고 항의했다. 공작은 부인들의 싸움에 동요하지 않고 주의 깊게 사실을 조사한 다음에, 결국 로미오를 베로나에게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줄리엣에게 그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새색시가 된 지 겨우 한두 시간 지났는데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로미오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다니^5,5,5^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엔 가까운 사촌오빠가 죽었다는 것을 슬퍼했지만, 곧 티볼트에게 죽음당할 뻔한 남편이 무사한 것을 한없이 기뻐했다. 동시에, 억울하게 추방되는 남편의 쓰라림을 생각하며 그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픔보다도 오히려 두려움이 앞섰다. 로미오는 그 사건을 벌이고 나서 로렌스 신부가 있는 수도원으로 숨어 들어가 그곳에서 추방 사실을 전해 듣고는, 죽음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에 휩싸였다. 그는 줄리엣이 없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곳이라면 이 세상 어느 곳이든 천국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모두가 지옥이었다. 착하고 선량한 신부는 그의 아픔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미쳐 버릴 만큼 괴로운 로미오는 아무런 말도 귀담아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슬퍼했다. 그곳으로 마침 사랑하는 줄리엣의 하인이 왔기에 그는 다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신부는 조용히 로미오를 타일렀다. "자네는 티볼트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자신까지도 죽어서 자네를 태양처럼 믿고 따르는 아내까지도 죽게 할 셈인가? 높고 고귀한 신분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괴로움을 만났을 때 훌륭하게 참고 견디어 나갈 만한 용기와 덕이 없다면 천한 사람과 뭐가 다르겠는가. 사형을 당하는 대신 추방 선고만으로 그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게. 그래도 자네가 사랑하는 줄리엣이 무사하고, 또한 티볼트와의 싸움에서도 자네가 죽지 않고 살았으며, 이미 줄리엣은 분명히 자네의 아내가 아닌가!" 이처럼 신부는 여러 말로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나, 로미오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신부는 그에게 힘을 내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몹시 애를 썼다. 마침내 로미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신부는 그날 밤 줄리엣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은밀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즉시 추방된 곳으로 떠나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덧붙여서, 작당한 기회를 보아 자기가 그들의 결혼을 다시 주선하여 양 가문이 화해하게 되면 공작도 로미오를 용서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로미오는 신부의 분별 있는 충고에 따라 그날 줄리엣과 함께 지내고 새벽에 혼자 만투아로 떠날 결심을 했다. 그날 밤, 로미오는 전날 밤 사랑의 고백을 들었던 그 정원에서 그녀의 방으로 숨어 들어가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아쉬운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것은 완전히 환희에 넘친 밤이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그 기쁨도 사라져 버렸다. 정말 반갑지 않게도 너무나 빨리 먼동이 터 오기 시작하더니, 동쪽 하늘에 찌르는 듯한 태양빛이 이 연인들에게 작별 시간을 알려 주었다. 로미오는 무겁고 착잡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 쓸 것을 약속하며 이별을 고하고 추방지인 만투아로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창문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혼자 남은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외로이 땅에 서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마치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로미오도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날이 훤하게 밝아서 베로나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불쌍한 이 연인들에게 몰아칠 비극을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로미오가 떠나가고 나서 얼마 안되어, 카풀렛 경은 줄리엣에게 파리스 백작이라는 아주 젊고 멋진 청년과 결혼하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줄리엣은, 자기는 너무 어린데다가 티볼트의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며 청혼을 거절했다. 물론 자기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카풀렛 경은 그녀의 변명에 귀기울이지 않고 다음 목요일에 파리스와 결혼하라고 명령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좋은 혼담을 딸이 무조건 거절하는 것은 아마도 수줍음 때문일 것이라고 오해했다. 어쩔 줄 몰라 안타까워하던 줄리엣은, 언제나 어려움을 의논하던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로렌스 신부는 한숨을 쉬며 깊이 생각한 뒤 줄리엣에게 그 결혼을 피하기 위해선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물론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이 살아 있으니 절대로 파리스와 결혼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신부는 그녀에게 결혼을 피할 하나의 어려운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집에 돌아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을 약속한 뒤, 결혼 전날 밤에 신부가 전해 주는 약병에 든 약을 마시라는 것이었다. 그 약을 마시면 42시간 동안 몸이 싸늘해져서 생명이 끊어진 듯이 되어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그 나라의 관습대로 영구차에 실려 카풀렛 일가의 묘지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42시간만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로미오가 밤중에 묘지로 와서 그녀를 만투아로 데리고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줄리엣은 로미오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파리스와 결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위험스런 모험까지도 해볼 결심을 하고 신부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결혼식을 다음날로 앞둔 수요일 밤, 줄리엣은 약을 몽땅 마셔 버렸다. 줄리엣은 혹시 신부가 그녀를 로미오와 결혼시킨 것에 대해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를 독살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도 해보았다. 또한, 얼마 전에 죽은 티볼트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는 무덤 속에서 덩그렇게 혼자 두 눈을 뜨고 있으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로미오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셔 버리고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젊은 파리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신부를 깨우러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방에 쓰러진 차디찬 시체로 변해있었다. 온 집안에 큰소동이 일어났다. 젊은 파리스는 두 사람이 서로 손도 잡아 보기 전에 죽음이 새색시를 불러간 것에 대해 대단히 슬퍼했다. 카풀렛 부부의 슬픔은 더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을 훌륭하게 짝지워 출가시키려 했는데, 잔인하게도 죽음이 앞장서 버린 것이다. 축하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 준비한 모든 것들이 비참하게도 장례식의 준비물로 변해 버렸다. 결혼식에 사용할 맛있는 음식들은 장례식의 손님 대접 음식으로 바뀌고, 혼례식의 축하 노래는 쓸쓸한 장송곡으로 바뀌었으며, 신부가 걸어가는 길에 뿌리려던 꽃들은 이제 묘지로 옮겨가는 시신 위에 뿌려지게 되었다. 나쁜 소식은 항상 좋은 소식보다도 빠르게 마련이다. 만투아에 있던 로미오가 있는 곳에 줄리엣이 죽었다는 소문이 가장 먼저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전에 그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자기가 죽자 줄리엣이 와서 자기 입술에 키스를 해주어 다시 되살아나는 꿈이었다. 그러나 베로나에서 온 소식을 듣고 현실은 꿈과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신부의 심부름꾼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신부의 비밀스런 계획을 모르는 채 너무도 놀라, 곧 그날 밤에 말을 타고서 베로나의 무덤속에 있는 그녀에게 떠났다. 그와 함께 그는 어떤 약사에게 많은 돈을 주고 독약을 손에 넣었다. 무덤속에 들어가 줄리엣을 한번 만나보고는 그 독약을 마시고 자기도 그녀 곁에서 죽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로미오는 한밤중에 베로나에 도착해서 카풀렛 일가의 오래된 공동묘지로 갔다. 그가 횃불을 들고 삽과 렌치로 무덤 문을 막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 못된 몬타규가 감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의 새색시 줄리엣의 무덤에 꽃을 들고 슬픔에 빠져 한밤중에 찾아온 파리스 백작이었다. 그는 물론 로미오가 줄리엣과 어떤 관계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원수 집안인 몬타규가 무덤을 파헤치러 온 것이라고 오해하여 화를 내며 덤벼들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진다는 베로나의 법률로 위협하며 로미오를 체포하려 했다. 로미오는 지난번처럼 끔찍한 싸움을 피하려 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싸움판을 벌이게 되었고, 파리스는 성난 파도처럼 제 정신이 아닌 로미오의 단칼에 쓰러졌다. 로미오는 파리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불행하게 죽은 젊은 파리스를 무덤에 넣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줄리엣이 곱게 누워 있었다. 죽었다고는 하지만, 어느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전과 똑같이 아리땁고 어여쁜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생기에 찬 모습으로 신부에게서 받은 마취제를 먹고 잠들었을 때와 똑같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피투성이가 된 티볼트가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로미오는 그 시체에게 용서를 빌고서 줄리엣을 위해서 그를 사촌이라 부르며, 자기가 자살하여 그 대가를 치르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 로미오는 사랑하는 줄리엣의 입술에 마지막 이별의 키스를 하고 나서 약사에게서 산 독약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것은 신부가 건네 준 마취제와는 다른 진짜 독약이었기 때문에, 효과는 순식간에 나타나서 그는 즉시 쓰러져버렸다. 그곳으로 마침 신부가 곡괭이와 등불을 가지고 허둥지둥 나타났다. 신부는 만투아로 보낸 편지가 로미오에게 도착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서둘러 무덤으로 찾아온 것이다. 신부가 주위를 둘러보니 카풀렛 일가의 무덤 속은 이미 횃불이 훤하게 빛나고 있었고, 칼과 핏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으며, 로미오와 파리스가 이미 숨이 끊어져 땅바닥에 쓰러져 잇는 것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러한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생각할 틈도 없는데, 마침 줄리엣이 마취약 효과가 다되어 깨어났다. 그녀는 곁에 신부가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 로미오는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람들이 그곳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신부는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줄리엣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얘기한 뒤, 서둘러 도망쳐 버렸다. 혼자남은 줄리엣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손에 약병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것을 깨닫고 몇 방울이라도 남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직 따스한 그의 입술에 마지막 키스를 했다.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기 때문에, 줄리엣은 얼른 거기 떨어져 있던 칼을 들어 자기 몸을 찔러 사랑하는 로미오를 따라 자살해 버렸다. 그 뒤 그곳으로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파리스 백작과 함께 왔던 하인이 묘지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베로나가 온통 떠들썩해져서, 몬타규 경과 카풀렛 경을 비롯하여 공작도 함께 그곳에 모였다. 신부는 잔뜩 긴장하여 부들부들 떨며 숨어 있던 묘지 뒤편에서 붙잡혀, 마침내 공작의 명령에 따라 젊은 두 남녀의 숨은 사랑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와 함께 로미오의 자살에 대한 모든 내용은 로미오의 하인이 갖고 온 유서를 통해 명백히 밝혀졌다. 공작은 몬타규와 카풀렛의 대표자를 향해 그들의 양쪽 집안의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질책하며, 하늘에서 그들의 자식의 사랑을 통해 이와 같은 무서운 천벌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문의 가장들은 앞으로는 원수 관계를 버리고 자식들의 무덤에 지금까지 갖고 있던 서로에 대한 질투심과 증오심을 파묻어 버리기로 했다. 젊은 카풀렛과 몬타규의 남녀가 결혼했듯 두 가문의 대표자들도 이제는 서로 형제라고 부르며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몬타규 경이 줄리엣의 모습을 새긴 순금 동상을 세우고 정조를 지킨 정숙한 그녀의 덕을 높이 기리고 싶다고 하자, 카풀렛 경도 로미오의 동상을 세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이미 비극이 저질러졌지만, 두 가문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대했다. 그 동안 그들의 적대 관계가 너무나도 심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자식들이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두 가문의 뿌리깊은 증오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