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안녕, 내 사랑아 (상) 지은이: R.챈들러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 작가 소개 - 1888년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퀘이커 교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일랜드계 미국인 - 영국 덜위치 칼리지 예비학교를 거쳐 파리와 독일에 불어와 독어 연구 - '아카데미', '스펙테이터', '웨스트민스터 가제트' 신문 등에 평론이나 수필 등을 게재 - 추리소설 <챈들러는 아내를 시시라고 불렀다> 발표 - 사립탐정인 필립 말로우가 처음 등장하는 처녀장편 <거대한 잠>로 유명해짐 - <협박자는 쏘지 않는다(Blackmailers Don't Shot)> 발표 - <거대한 잠> <안녕, 내 사랑아> <기나긴 이별> 발표 ┌────────────────────────────┐ │ 제 1 장 │ └────────────────────────────┘ 센트럴 가(街)에는 흑인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백인도 살고 있었다. 나는 의자가 세 개뿐인 이발소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보내진 디미트리오스 알레이디스라고 하는 이발사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작은 일이긴 하지만, 그의 아내가 남편을 찾아 데리고 오면 사례를 하겠노라고 했었다. 그 남자는 이발소에 없었다. 결국 나는 알레이디스 부인에게서 돈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그날은 3월말의 따뜻한 날이었다. 나는 이발소 앞에 서서 2층의 플로리안이라고 하는 도박장의 네온사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 한 사람 그 간판을 올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처음 보는 이민온 사람처럼, 더럽게 먼지낀 창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195cm 쯤 되어 보이는 몸집이 큰 남자인데, 맥주회사의 트럭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와 3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커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여송연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비척 마른 흑인들이 그 남자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분명 눈길을 끌 만했다. 처음의 제모습을 잃고 찌그러진 부드러운 모자, 하얀 골프공 모양의 단추가 달린 회색 운동복, 갈색 와이셔츠, 노란 넥타이, 너덜너덜해진 회색 면바지, 코끝에 하얀 장식이 붙은 악어가죽 구두. 가슴의 바깥 주머니에는 넥타이와 똑같은 색의 화려한 장식 손수건이 꽂혀 있었다. 모자 띠에 예쁜 깃털이 두 개 꽂혀 있었는데, 이 깃털은 별 의미 없는 것이었다. 센트럴 가에는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이 꽤 있긴 했으나, 그래도 이 남자는 천사 케이크 위의 독거미처럼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의 피부는 핏기가 없이 핼쓱했고 수염도 깎지 않았다. 수염을 기른 모습만으로도 언제나 눈길을 끌 만한 남자였다. 머리는 검고 곱슬이며, 짙은 눈썹이 뭉툭한 코에 닿을 만큼 길었다. 귀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작았고, 눈은 회색인데 흔히 볼 수 있듯이 눈물 같은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 남자는 조각처럼 그곳에 내내 서 있더니, 마침내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거리를 천천히 가로질러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의 이중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으로 문을 밀어서 열고선, 차갑고 표정 없는 시선으로 거리를 한번 둘러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만일 그가 몸집이 작고, 좀더 눈에 띄지 않는 복장을 했더라면 나는 그가 강도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복장에, 그런 모자를 쓰고, 그렇게 몸집이 커서는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거리 쪽으로 흔들리던 문이 멈춰지더니 다시 거리를 향해 홱 열리며 한 남자가 안에서 내동댕이쳐지듯이 퉁겨나왔다. 그는 거리를 가로질러 그곳에 세워져 있는 두 대의 자동차 사이 틈으로 들어가 찰싹 엎어졌다. 그 남자는 손과 무릎을 바닥에 댄 채 궁지에 몰린 쥐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잠시 뒤 천천히 일어나 모자를 주워들고는 길 위에 섰다. 야위고 볼품없는 어깨에 다갈색 얼굴을 한 청년이었는데, 라일락 색깔의 옷에 카네이션을 한 송이 꽂았으며, 머리는 새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입을 벌린 채 잠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다보았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모자를 다시 쓰고 길 가장자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정적. 사람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이중문 앞에 가서 섰다. 문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문을 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나타나 내 어깨를 부숴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세게 붙잡는 것이었다. 그 손은 나를 문 안으로 끌어들인 뒤, 나의 몸을 들어올려 첫번째 계단 위에 올려놓았다. 커다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가게엔 검둥이도 오나? 어서 말해 봐! 그곳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2층에서는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으나, 계단에 있는 것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몸집이 큰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계속 어깨를 꽉 잡고 있었다. 검둥이라서 쫓겨난 거야. 밖으로 내팽개쳐진 놈을 봤겠지? 그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뼈는 부러진 것 같지 않았으나 팔이 저렸다. 흑인의 가게인걸요. 하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내가 말했다. 어떤 곳이라고 생각했었나요? 그런 곳이라고. 그 몸집이 큰 남자는 식사 뒤의 포만감에 넘치는 호랑이처럼 조용하게 목청을 울리면서 말했다. 벨마가 여기서 일했었어. 내 사랑스러운 벨마가. 그는 다시 내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나는 그 손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는 고양이처럼 재빨랐다. 그는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다시 한 번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랬단 말이야. 사랑스러운 벨마! 나는 벌써 8년째 만나지 못했어. 자네, 여기가 검둥이 가게라고 했지? 나는 그렇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를 들어올려 두 번째 계단에 올려놓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서 벗어나 몸을 자유롭게 해보려 했다. 나는 권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디미트리오스 알레이디스를 찾는 데 권총은 필요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갖고 있었다 해도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몸집이 큰 이 남자가 나에게서 권총을 빼앗아버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위에 올라가서 보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목소리를 침착하게 하여 말했다. 그는 다시 나를 놓았다. 그리고 회색 눈에 쓸쓸한 모습을 담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 하고 그가 말했다. 누구든 나에게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어. 어때, 우리 둘이 올라가 한잔 마시지 않겠나? 마시게 놔두지 않을 거요. 흑인 가게라서...... 나는 벨마를 8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어. 그는 쓸쓸하게 말했다. 헤어진 지 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갔어. 편지도 6년 동안이나 받지 못했고.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그녀는 여기서 일했었거든.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였지. 자, 함께 올라갈까? 좋아요, 갑시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데 날 들어올려 계단에 올려놓지는 마시오. 내 발로 걸을 수 있을 만큼 내 몸은 건강하고 화장실에도 혼자 가는 어른이니까. 제발 나를 들어서 옮기는 건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사랑스러운 벨마가 여기서 일했었어. 하고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도 어깨가 아팠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 │ 제 2 장 │ └────────────────────────────┘ 계단을 다 올라가니 또 이중문이 있었다. 몸집이 큰 그 남자가 그 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연 뒤, 우리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 그 홀은 길쭉했으며 불결하고 어둠침침했다. 홀 구석에서는 흑인 한패거리가 주사위 게임용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오른쪽 벽을 따라 바가 있었고, 그 밖에 작고 둥근 테이블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남녀 몇 사람의 손님이 있었는데 모두 흑인이었다. 주사위 게임용 테이블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테이블 위의 전등이 꺼졌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홀 안을 감쌌다. 회색에서 새까만색의 여러 얼굴이 호두색 눈을 반짝이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다른 인종의 침입에 적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살집이 좋고 덩치가 큰 흑인이 와이셔츠 소매에 핑크색 가터(소매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팔에 두르는 띠)를 하고서, 넓은 등에 핑크색과 흰색의 멜빵을 교차시킨 채 바의 카운터에 기대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 보디가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쳐들고 있던 한쪽 다리를 조용히 내리며 천천히 우리 쪽을 향하더니, 조용하게 다리를 벌리고서 두터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온갖 흉기로 두들겨맞은 듯 엉망진창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흉터가 있고, 맞아서 부었으며, 피부색과 얼굴 형태도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짧고 흐트러진 머리에는 흰 머리칼이 섞여 있었고, 한쪽 귀에는 귓불이 없었다. 그 흑인은 딱 벌어지고 당당한 체격을 갖추었다. 묵직한 다리가 조금 안으로 휘었지만, 흑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다리였다. 그는 다시 혀로 입술을 핥고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권투선수처럼 몸을 굽히고서 우리들 쪽으로 다가왔다.몸집이 큰 남자는 아무 말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매에 핑크색 가터를 댄 흑인이 커다란 갈색 주먹을 몸집이 큰 남자의 가슴에 명중시켰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손이었다. 그런데 몸집이 큰 남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보디가드는 침착하고 조용한 표정으로 웃었다. 백인은 들어올 수 없어. 미안하지만 흑인만 들어올 수 있어. 몸집이 큰 남자는 작고 쓸쓸한 회색 눈으로 홀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목덜미에 붉은빛이 돌았다. 검둥이의 둥지인가! 하고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 조금 목소리를 높여, 벨마는 어디에 있지? 하고 보디가드에게 물었다. 보디가드는 굳은 표정으로 몸집이 큰 남자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갈색 와이셔츠, 노란 넥타이, 회색 윗도리, 골프 공 모양의 단추. 그는 두툼한 얼굴을 움직이며, 여러 각도에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 밑 악어가죽 구두로 눈을 돌린 뒤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불쌍해 보였다. 그는 다시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마라고 했나? 여기엔 벨마라는 여자는 없어. 술도 여자도 아무것도 없어. 어서 돌아가시지, 백인 양반. 얌전하게 돌아가라고! 벨마는 여기서 일했었어. 몸집이 큰 남자가 말했다. 숲속에서 혼자 꽃을 따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보디가드가 갑자기 웃어댔다. 일했었을지도 모르지. 하고 그는 등뒤에 있는 흑인들을 어깨 너머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틀림없이 벨마는 여기서 일했을 거야. 그러나 이젠 일하지 않아. 그만둔 거지. 하하하! 내 몸에서 손을 떼는 게 어때? 하고 몸집이 큰 남자가 말했다. 보디가드는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당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집이 큰 남자의 와이셔츠에서 손을 뗀 뒤, 커다란 갈색 주먹을 부르쥐었다. 보디가드로서의 명성을 손상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팔꿈치를 뒤로 구부리더니 재빠르게 몸집이 큰 남자의 턱에 일격을 가했다. 홀 안에 희미한 환성이 흘렀다. 멋진 일격이었다. 어깨가 쳐지고 몸이 멋지게 흔들렸다. 그 일격에는 몸의 중량이 실려 있었다. 그 멋진 일격을 가한 남자는 끊임없이 이런 행동을 연습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몸집이 큰 남자는 겨우 1인치 정도 머리를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는 그 일격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그 일격을 받아 몸이 흔들리는 것 같더니, 목구멍에서 희미한 소리를 내며 보디가드의 목을 잡았다. 보디가드는 무릎을 올려 몸집이 큰 남자의 배를 차려고 했다. 몸집이 큰 남자는 보디가드를 그렇게 하도록 놔두었다가 커다란 구두를 리놀륨 바닥에 미끄러지게 하여 벗기고서는, 보디가드의 몸을 뒤로 젖히면서 오른손으로 허리띠의 쇠장식을 꽉 잡았다. 쇠장식은 소리를 내고 부서졌다. 몸집이 큰 남자는 그 거대한 손바닥을 보디가드의 등에 정확하게 맞추어 내리눌렀다. 보디가드는 빙글빙글 돌더니, 비틀거리며 양팔을 휘두른 채 그만 홀을 가로질러 나뒨굴고 말았다. 세 남자가 당황하여 길을 비켜주었다. 보디가드는 테이블을 타고 넘어 덴버(콜로라도 주의 수도)까지 들릴 정도의 큰소리와 함께 홀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다리가 꼬이고 구부러진 채,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 있으면 곤란하지. 하고 그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잔 하지 않겠나? 우리들은 바로 걸어갔다. 손님들은 두세 사람씩 모여 그림자처럼 홀을 가로질러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소리도 내지 않았다. 스윙 도어의 흔들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우리들은 바의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위스키. 몸집이 큰 남자가 말했다. 당신은 뭘로 하겠어? 위스키.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들은 위스키를 마셨다. 몸집이 큰 남자는 두터운 위스키 잔의 가장자리에서 무표정하게 위스키를 핥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다친 듯 절룩거리며 걷는, 흰색 윗도리를 입은 마른 흑인이었다. 이봐, 벨마가 있는 곳을 알고 있나? 벨마라고 하셨습니까? 바텐더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엔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엔요.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지? 글쎄요. 그게 -- 바텐더는 타월을 카운터에 놓고 이마를 찡그리며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10개월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제 거의 1년이...... 확실히 해. 하고 몸집이 큰 남자가 말했다. 말문이 막힌 바텐더는 머리 잘린 닭처럼 침만 삼켰다. 여기는 언제부터 검둥이의 가게가 되었지? 그는 짜증스러운 모습으로 고함을 쳤다. 누가 그랬나? 몸집이 큰 남자가 움켜쥔 주먹 안에서 위스키 잔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5년은 지났소. 하고 내가 말했다. 이 바텐더가 벨마라는 여자를 알고 있을 리 없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요. 몸집이 큰 남자는 내가 지금 막 알에서 깨어난 것처럼 바라보았다. 위스키도 그의 기분을 복돋아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려고 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들어온 사람이야. 기억하고 있겠지?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웃음을 보였다. 위스키. 하고 그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멍청히 서 있지만 말고 술을 따라. 바텐더는 당황하여 눈을 희번덕거렸다. 나는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홀을 둘러보았다. 손님의 모습은 전혀 없고, 홀 안에 있는 사람은 바텐더와 몸집이 큰 남자, 나, 그리고 벽에 내팽개쳐진 보디가드뿐이었다. 보디가드는 슬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고통을 참으며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한쪽 날개를 잃은 파리처럼 벽에 기대어 조용하게 기어가는 것이었다. 테이블 뒤로 갑자기 나이를 먹어 환멸을 느낀 사람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기어갔다. 나는 기어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텐더가 위스키를 따랐다. 나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섰다. 몸집이 큰 남자는 보디가드가 기어가는 모습을 흘끗 뒤돌아보았지만, 다시는 그에게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옛날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군. 하고 그는 불평을 했다. 작은 스테이지에서 밴드가 음악을 연주했고, 천천히 즐길 수 있는 방이 몇 개 있었어. 벨마는 여기서 노래를 불렀지. 빨간 머리의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였어. 우리는 결혼하려 했는데 놈들이 나를 처넣어 버렸지. 나는 두 잔째의 위스키에 입을 댔다. 나는 아무래도 너무 필요 이상으로 깊이 관여된 것 같았다. 처넣다니? 8년간 내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나? 나비를 잡으러 다녔을까? 그는 바나나 같은 둘째손가락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감옥이야. 난 머로이. 몸집이 엄청나게 커서 큰 사슴 머로이라고 불렸지. 그레이트 벤드의 은행에서 4천 달러를 털었어. 혼자서 말이야. 그 돈을 이제부터 쓰려는 거요? 그는 나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때 우리 등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보디가드가 일어나 주사위 게임용 테이블을 향해 있는 문에 손을 걸쳤다. 그는 그 문으로 거의 구르는 듯한 모습으로 사라졌다.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는 거지? 하고 큰 사슴 머로이가 고함쳤다. 바텐더의 눈은 머릿속으로 궁리를 하며 보디가드가 비틀거리며 사라진 문에 겨우 초점을 맞췄다. 몽고메리 씨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이 가게의 주인이죠. 그자가 알지도 모르겠군. 하고 몸집이 큰 남자가 말했다. 그는 위스키를 죽 들이켰다. 그 작자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두 잔 더 따라줘.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세상에 아무런 근심걱정 없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홀을 가로질러 갔다. 커다란 그의 등에 가리어 문이 보이지 않았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몸집이 큰 남자가 손잡이를 잡고 흔들자 쇠장식이 떨어져 빠져나갔다. 그가 문 저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문이 닫혔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나는 바텐더를 바라보고 있었고, 바텐더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그는 카운터를 닦다가 한숨을 쉬며 오른손을 카운터 아래로 내리려고 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마르고 약한 팔이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은 채 미소를 지었다. 거기 뭐가 있지? 그는 입술을 핥았다. 나에게 팔을 잡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게 빛나는 얼굴에 회색 그림자가 비쳤다. 저 사람은 자네가 상대하기에는 벅차. 하고 내가 말했다. 어떤 난폭한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어. 지금은 그냥 술만 마시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남자는 옛날 여인을 찾고 있어. 여기는 백인의 가계였었는데, 알고 있었나? 바텐더는 또 입술을 핥았다. 저 사람은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었어. 8년간이나. 8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긴 건지 그 사람은 모르고 있어. 우리는 평생처럼 길게 생각되는데 말이야. 여기에 있는 사람이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알겠어? 바텐더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한패라고 생각했었는데...... 억지로 끌려 들어온 거지. 길거리에서 붙들려서 억지로 끌려온 거라고.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인걸. 그렇지만 별다른 어떠한 감정도 없어. 거기에 뭐가 있지? 총입니다. 하고 바텐더가 말했다. 좋지 않아. 그건 금지되어 있잖아. 하고 나는 소리를 낮게 하여 말했다. 그 밖에 또 뭐가 있지? 권총이...... 하고 바텐더는 말했다. 여송연 상자에 들어 있습니다. 이제 팔을 놔주십시오. 좋아. 총은 거기 놔둬. 지금 총을 꺼낼 상황이 아니잖아. 적당히 넘어갈까요? 바텐더는 엷은 웃음을 흘리며 나의 어깨에 기대면서 말했다. 나로서는...... 그는 그렇게 말을 꺼내더니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주사위 게임용 테이블 뒤의 닫혀진 문 저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을 세게 닫은 소리였는지도 모르나, 나는 문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바텐더도 문소리로 생각지 않았다. 바텐더는 몸이 굳어지더니 입을 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급히 카운터 가장자리까지 갔다. 언제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뒷문이 세게 열리더니 큰 사슴 머로이가 돌진하듯 들어와 창백하고 엷은 웃음을 지으며 발을 벌리고는 앞을 가로막고 섰다. 45구경 자동연발 권총이 그의 손에 들려져 있었는데, 장난감 권총처럼 보였다.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하고 그는 매우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손을 카운터 위에 올려놔. 바텐더와 나는 양손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큰 사슴 머로이는 홀 안을 휙 둘러보았다. 엷은 웃음이 그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을 옮겨서 조용하게 홀을 가로질러 왔다. 이젠 그런 복장을 하고 있어도 혼자서 은행을 습격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바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손들어, 검둥아. 하고 그는 침착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바텐더는 두 손을 들었다. 몸집이 큰 남자는 나의 등뒤로 오더니 왼손으로 나의 몸을 뒤졌다. 목덜미에 그의 따뜻한 입김이 닿았다. 몽고메리 씨도 벨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더군. 그가 말했다. 그런데 이것으로 대답하려고 했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권총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조용하게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이야 --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는 나를 잊고 편히 쉬게. 그리고 경찰놈들에게 분별 없는 짓거리는 하지 말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권총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럼, 잘 있게. 난 전차를 타야 하거든. 그는 계단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계산이 끝나지 않았어.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발을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가져가야 할 거야. 그러나 전부 몽땅 빼앗으려고는 하지 마. 그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문 저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바텐더가 몸을 구부렸다. 나는 카운터를 뛰어넘어 바텐더를 들이받았다. 카운터 위 선반에 타월로 가려진 산탄총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여송연 상자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38구경 자동권총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두 자루를 다 집어들었다. 바텐더는 술잔이 진열되어 있는 선반에 몸이 꽉 눌린 채 꼼짝 못하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 모서리를 돌아 홀을 가로질러 주사위 게임용 테이블 뒤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곳은 L자 형태의 계단으로써 거의 광선이 미치지 않았다. 보디가드가 손에 나이프를 쥔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나는 몸을 구부려 나이프를 집어들고 뒷문 계단 쪽으로 던져버렸다. 보디가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손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쓰러져 있는 그를 넘어 검은색 페인트가 거의 다 벗겨진 채 사무실 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문을 열었다. 반쯤 열려진 창 옆에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한 남자가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의자 높이는 정확히 남자의 목덜미에 이르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가 의자 등받이 뒤로 젖혀진 채, 코가 열린 창을 향하고 있었다. 목뼈가 부러진 모습이었다. 책상의 오른쪽 서랍이 열려져 있었다. 그 안에 신문지 한 장이 있었는데, 가운데가 기름으로 더러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권총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좋은 생각이었을 것 같지만 몽고메리 씨의 머리 위치로 보니, 이 경우에는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상 위에 전화기가 있었다. 나는 산탄총을 놓고 문을 잠근 뒤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그쪽이 안전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고, 그렇게 하더라도 몽고메리 씨가 불평을 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경관이 계단을 뛰어올라왔을 때는 보디가드도 바텐더도 모습을 감추고 나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 │ 제 3 장 │ └────────────────────────────┘ 널티라고 하는 무뚝뚝한 남자가 사건을 담당했다. 그는 나와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줄곧 노랗고 긴 손을 무릎 사이에 깍지끼고 있었다. 이 사람은 77번가의 경찰서 경감이었는데, 우리들이 얘기를 나눈 곳은 작은 테이블 두 개가 양쪽 벽에 붙어 있는 좁은 방이었다. 바닥에는 갈색의 더러운 리놀륨이 깔려 있었고, 여송연 꽁초냄새가 방에 배어 있었다. 널티의 와이셔츠는 닳아 떨어져 있었고, 윗도리 소맷부리가 커프스 부분까지 접혀져 있었다. 이 볼품없는 모습만 봐도 그가 정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큰 사슴 머로이의 상대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방금 피우던 여송연에 불을 붙인 뒤 성냥개비를 바닥에 버렸다. 바닥에는 온통 버려진 성냥개비로 흐트러져 있었다. 또 검둥이 살인이군. 18년간 이 경찰에 몸 담고 있는데 늘 이런 사건뿐이라오. 신문에 나지도 않고. 이런 사건은 4행 광고에도 나오지 않으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명함을 집어든 뒤 다시 한 번 대강 훑어보았다. 필립 말로우, 사립탐정. 보기에도 상당히 담력이 좋을 것 같은데, 그 동안 무얼 하고 있었소? 어느 동안? 머로이가 그 남자의 목을 눌러꺾고 있을 동안 말이오. 다른 방에서 일어난 일이오. 하고 내가 말했다. 머로이는 그 남자의 목을 부러뜨리겠다는 것을 예고하지 않았거든. 나를 조롱할 생각인가? 하고 널티는 내뱉듯이 말했다. 얼마든지 조롱해도 좋아. 모두 나를 조롱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난 아무렇지도 않아. 항상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니까...... 나는 당신을 조롱하는 게 아니오. 하고 내가 말했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게요 -- 다른 방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았소. 하고 널티는 싸구려 여송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나도 거기 가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잖소? 그런데 당신은 권총을 갖고 있지 않았었소? 권총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지요. 어떤 일이었는데? 부인을 남겨놓고 도망간 어떤 이발사를 찾는 일이었소. 검둥이였나? 아니오. 그리스 인이오. 그런데 -- 널티는 휴지통에 침을 뱉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었소? 방금 얘기한 대로 공교롭게도 거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뿐이지요. 그 남자가 플로리안에서 흑인 한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내쫓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그만 2층으로 끌려간 겁니다. 권총을 들이댔소? 아니오. 그때는 권총을 갖고 있지 않았소. 적어도 내게는 권총을 보이지 않았지요. 그 권총은 아마 몽고메리에게서 빼앗은 것일 게요.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가 버렸죠. 나는 가끔 귀엽게 보이거든. 이상하군. 당신은 그런 남자일 리가 없는데. 아무렇게나 편리한 대로 생각하시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말싸움을 해도 하는 수 없지. 나는 그 남자를 만났지만, 당신은 만나지 못했소. 나나 당신을 시계추같이 흔들 수 있을 만큼, 무엇이든 못할 게 없는 남자였지요.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안 것은 그가 돌아가고 난 뒤였소. 권총소리는 들었지만, 누가 무서운 머로이를 습격했다고 생각했고, 또 그를 습격했다 해도 머로이는 그 권총을 빼앗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아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소? 하고 널티는 되물었다. 은행을 습격할 정도의 남자잖소. 그때 그의 복장을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런 복장으로 사람을 죽이고 갈 바보는 없거든요. 그는 벨마라고 하는 옛날 여인을 찾으러 간 겁니다. 플로리안이 백인의 가게였을 때에 그곳에서 일한 여자죠. 그러나 은행강도로 올려졌었던 남자니까 반드시 붙잡아야죠. 물론 -- 하고 널티는 말했다. 그렇게 몸집이 큰 남자가 그런 복장을 했다면...... 아니, 그 밖에도 옷을 또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게다가 자동차, 은신처, 돈, 친구들도......그러나 결국엔 잡힐 테지요. 널티는 다시 휴지통에 침을 뱉었다. 붙잡힐 게요. 내 머리가 백발이 될 때쯤에는.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이 사건에 몇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시오? 한 사람.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흔히 그렇지. 언젠가 이스트 84번가 흑인거리에서 권총소동이 발생한 적이 있었소. 내가 갔을 때는 이미 한 사람이 죽은 뒤였는데 가구와 벽, 천정에까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더군. 그때 나는 그 집 앞에서 크로니클 지(紙)의 신문기자를 만났는데 마침 차에 타려고 하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검둥이예요. 하찮은...... 하고 말하는 겁니다. 그는 그 집안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더군. 보석으로 나왔는지도 모르지만 -- 하고 내가 말했다. 기록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체포할 때는 조심해야지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죽으면 다시는 이런 사건을 떠맡지 않아도 되잖소? 하고 널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책상 위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전화 수화기를 들더니 슬픈 듯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놓고 나서 메모지에 뭔가를 표시했다.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마치 그것은 아득히 먼 먼지투성이 복도의 등불 같았다. 놈의 기록이 발견되었다는군요. 지금 전화온 게 그겁니다. 지문과 사진도 찍었고. 하여튼 단서를 잡았다고 합디다. 그리고 나서 메모한 쪽지를 집어들고 이렇게 말했다. 이런 뜻이오. 197cm에 120kg. 확실히 몸집이 큰 남자가 틀림없군. 라디오를 이용하여 수배했소. 아마 도난차량의 목록 뒤가 될 게요. 지금은 단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여송연을 가래침 뱉는 통에 버렸다. 여자를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고 나는 말했다. 벨마를 찾는 겁니다. 지금 머로이는 그녀를 찾고 있어요. 사건은 거기에서부터 발생한 겁니다. 벨마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찾으면 좋겠는데. 하고 널티가 말했다. 나는 20년 동안이나 매춘가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거든. 나는 일어섰다. 오케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봐, 기다려. 하고 널티가 말했다. 지금 말한 것은 농담이오. 그리 급할 거 없잖소? 나는 담배를 꺼내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긴 당신이 그 여자를 찾아주면 좋겠군. 확실히 그럴 듯한 생각이오. 그렇게 해서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거죠? 그는 노란 손을 슬픈 듯이 펴보였다. 그의 미소는 부서진 쥐덫의 올가미처럼 교활해 보였다. 당신은 경찰과 잘 어울릴 수 없을 게요. 하지만 경찰서에 친구가 있다 해도 손해가 되지는 않잖겠소? 그런 일로 내가 득볼 일이 있나요?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게요. 하고 널티는 끝까지 버텼다. 나는 대단한 사람은 못 되지만, 어떤 사람이든간에 경찰서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유익한 거니까. 단지 호의요?-- 그렇지 않으면 돈이 나오는 거요? 돈은 나오지 않소. 널티는 노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성적을 좀 올려놓지 않으면 재미없게 되어 있소. 요전 이동 때부터 입장이 나빠져서 말이오. 나는 잊지 않는다오, 언제까지나, 은혜를 입은 것은.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좋소. 알겠소. 이렇게 합시다. 내가 단서를 찾아내면 그것은 당신 것이오. 그렇지만 당신이 그를 체포하게 되면 범인확인은 내가 맡겠소. 점심식사 뒤에.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눈 뒤 지저분한 복도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 경찰서를 나왔다. 큰 사슴 머로이가 군용권총을 손에 들고 플로리안을 나온 뒤 두 시간이 경과되었다. 나는 점심을 들고 위스키를 한 병 산 뒤, 차를 동쪽으로 달려 센트럴 가를 북쪽으로 돌았다. 나의 육감은 포도(鋪道) 위에서 춤추고 있는 열파(熱波)처럼 의지할 곳 없었다. 이 일에서 호기심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1개월 동안 일을 하지 않은 상태이다. 비록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일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 │ 제 4 장 │ └────────────────────────────┘ 플로리안은 물론 닫혀 있었다. 가게 앞에 자동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한눈에 사복형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남자가 한쪽 눈으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보디가드와 바텐더의 행방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동네사람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가게 앞을 천천히 지나 길모퉁이를 돌아 차를 세우고, 플로리안에서부터 길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을 그은 지점에 있는 흑인들 호텔을 바라보았다. 호텔 샌즈 수시 라고 하는 이름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거리를 가로질러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갈색 파이버 융단을 씌운 조잡한 의자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 맨끝이 카운터인데, 대머리 남자가 눈을 감은 채 연약해 보이는 갈색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앉아서 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하여간 둘 중 하나였다. 1880년대에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넥타이에 커다란 녹색 핀이 꽂혀 있었다. 그리 야무져 보이지 않는 커다란 턱이 넥타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의 손톱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회색 반달이 나타나 있었다. 그의 팔꿈치 옆에 이 호텔은 인터내셔널 컨솔리데이티드 에이전시 (국제통합탐정사무소)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표시된 금속제 표식이 놓여 있었다. 카운터의 흑인이 한쪽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표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HPD에서 조사하러 왔습니다. 바뀐 것은 없습니까? HPD란 그 에이전시 안의 호텔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로, 부도수표로 지불하거나 혹은 계산하지 않고 벽돌로 가득찬 가방을 남겨놓고 뒷문으로 도망간 손님들 뒷처리를 하는 곳이었다. 별로 바뀐 게 없는데요. 하고 그 지배인은 크고 울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말로우, 필립 말로우. 좋은 이름이군. 여운이 좋아요. 오늘은 날씨가 좋은 것 같습니다. 그는 또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나 당신은 HPD 사람이 아니오. HPD 사람이 올 리가 없거든. 그는 마주잡고 있던 손을 풀고 표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옛날 물건을 파는 집에서 샀다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지. 저런. 나는 말했다. 그리고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서 50센트짜리 은화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플로리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었소? 벌써 잊었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이때에는 두 눈을 뜨고 카운터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보스가 살해당했소. 하고 내가 말했다. 몽고메리라고 하던가...... 불쌍하게 됐군. 명복이나 빌어줘야지.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또 낮아졌다. 그런데 경찰에서 오셨수? 사립탐정이오. 피해를 주지는 않겠소. 그는 나를 관찰하고 나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잠시 뒤 천천히 눈을 뜨더니, 그 눈은 돌고 있는 은화에 쏠려 있었다. 아무래도 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누가 죽였소? 하고 그는 조용하게 물었다. 누가 샘을 죽였답디까? 감옥에서 나온 남자가. 그곳이 백인의 가게였는데, 그게 없어졌기 때문에 화가 났던 거요. 옛날에는 백인 가게였다고 하던데, 당신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화는 광선을 받아 반짝이다가 회전을 멈추고 카운터 위로 떨어졌다. 어느 쪽을 좋아하시나? 하고 나는 말했다. 성경을 들려 드릴까? 그렇지 않으면 술을 사드릴까? 성경은 집사람이 있는 곳에서나 읽는 거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 눈은 거북의 눈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이...... 하고 나는 말했다. 점심은 -- 그가 말했다. 나 같은 몸과 기질을 가진 사람은 먹지 않는 법이오. 하더니 그는 소리를 더욱 낮추어 -- 이쪽으로 돌아오시지요. 나는 카운터를 돌아 주머니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어 카운터의 아래 선반에 놓고 다시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는 몸을 구부려 병의 상표를 확인하고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보였다. 이걸 마셔도 아무것도 말할 것은 없겠지만, 어쨌든 함께 마시지 않겠소? 그는 위스키 병을 열고는 카운터 위에 있는 작은 잔을 두 개 놓고 잔이 찰랑찰랑할 때까지 가득 따랐다. 그리고 잔 하나를 들더니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고 나서 새끼손가락을 들고 단숨에 죽 들이켰다. 그는 위스키를 맛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위스키는 진짜군.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힘이 되어주겠소. 이 근처의 일이라면 길바닥에 금간 부분 하나까지 모르는 게 없다오. 거짓말이 아녜요. 이 술은 진짜인걸. 그는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나는 플로리안의 사건을 들려주었다.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벗겨진 머리를 흔들었다. 샘의 가게는 조용하고 좋은 곳이었는데...... 하고 그는 말했다. 이 한 달 동안 싸움다운 싸움도 없었고...... 6~7년 전 플로리안이 백인의 가게였을 때는 어떤 이름이었죠? 네온사인을 바꾸는 것은 비싸게 먹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이름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소. 이름이 바뀌었다면 머로이가 무슨 말인가를 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경영자는 누구였소? 이상한 걸 물으시는군. 플로리안이라고 하는 남자였죠. 마이크 플로리안. 그 마이크 플로리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흑인은 갈색 손을 크게 펴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엄숙하고 무게 있었으며 슬프게 들렸다. 죽었어요. 하나님 곁으로 간 거지. 1934년이었던가 35년이었던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생활이 넉넉치 않았고, 하여튼 간장이 나빠졌다고 하더구먼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뿔을 잘린 사슴처럼 푹 쓰러져 버리는 법이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직업과 관련된 말을 하는 것처럼 낮아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잔 더 마시지 않겠소? 그는 병마개를 닫고 나에게 돌려주었다. 두 잔으로 결정했소 -- 점심때는. 아, 고맙소. 당신처럼 얘기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오......부인이 있었어요. 제시라고 하는 이름이었죠.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기까진 모르죠. 전화번호부로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전화실은 로비 구석의 어두운 곳에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가 쇠사슬로 묶어진 너덜너덜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플로리안이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없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흑인은 아무 말 않은 채 시민명단을 꺼내어 내 앞으로 밀어 넘겨주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젠 조금도 흥미가 없는 것이다. 시민명단에는 미망인 제시 플로리안이라고 하는 이름이 나와 있었다. 웨스트 54번가 1644번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머리를 어디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주소를 종이쪽지에 적어두고 시민명단을 돌려주었다. 흑인은 명단을 덮고 나와 악수를 나눈 뒤 내가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양손을 마주잡았다. 두 눈이 조용하게 감겼다. 그에게 있어서 용건은 이미 끝난 것이다. 나는 문 옆까지 가서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편안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대머리가 빛나고 있는 것이 인상에 남았다. 나는 호텔 샌즈 수시를 나와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돌아갔다. 너무나도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너무 척척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 ┌────────────────────────────┐ │ 제 5 장 │ └────────────────────────────┘ 웨스트 54번가 1644번지는 집 앞에 다 말라버린 잔디밭이 있는 낡고 오래 된 갈색 집이었다. 볼품없는 종려나무 주위에 잔디밭이 한 군데 커다랗게 패여 있었다. 현관에 목재 안락의자가 하나 놓여져 있고, 오후의 바람이 작년에 포인세티아(홍성초, 멕시코산 관상식물)의 손질하지 않은 어린 가지를 금이 간 곳이 눈에 띄는 회반죽 벽에 세게 때려 소리를 내게 하고 있었다. 집 옆의 빈터에서는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노란 옷이 녹슨 철사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집 앞을 지나 차를 세우고 되돌아왔다. 벨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자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한 여자가 코를 풀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기력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갈색도 아니고 금발도 아닌 확실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그다지 야무져 보이지 않는 몸매에 색과 형태가 시대에 뒤진 면 목욕용 화장복을 걸치고 있었다. 단지 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커다란 발가락이 갈색 남자용 가죽 슬리퍼 사이로 들여다보였다. 플로리안 부인입니까? 제시 플로리안 부인이십니까? 하고 나는 거듭 물었다. 예. 침대에서 일어나 나온 병자와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센트럴 가에서 술집을 했었던 마이크 플로리안의 부인이시죠? 하고 나는 또 물었다. 그녀는 커다란 귀의 뒷머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놀란 표정을 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하고 그녀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게 하지 마세요. 마이크는 5년 전에 이미 죽었습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죠? 문은 아직 닫혀진 채로 빗장이 걸려 있었다. 탐정입니다. 잠깐 여쭤볼 말이 있어서요.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얼마 뒤 빗장을 열고 문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아직 청소도 못했지만...... 하고 그녀는 콧소리로 말했다. 경찰이군요. 나는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갔다. 멋진 대형 라디오가 방 왼쪽 구석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가구다운 가구라고는 그 라디오뿐이었다. 아직 그런대로 새 것 같았다. 그 밖에는 전부 잡동사니들 같았다. 현관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나무 안락의자가 있었다. 식당 테이블은 얼룩투성이였다. 부엌으로 통하는 열린 문에는 손가락 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전기 스탠드가 2개. 전에는 훌륭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되는 전등갓이 초라한 거리의 여자처럼 닳아 해어져 있었다. 여자는 안락의자에 앉아 슬리퍼를 흔들흔들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라디오에 시선을 모은 채 긴의자 끝에 앉았다. 그녀는 라디오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중국 차(茶)와 같이 맥없는 열의가 그녀의 표정에 나타났다. 그 라디오만이 나의 즐거움이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마이크가 어떤 일을 한 것도 아니고, 탐정이 여기에 올 리는 없을 텐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알코올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는 등에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져 손으로 더듬어 보았더니 빈 양주병이었다. 여자는 킬킬거리며 웃고 나서 말했다. 하긴 어지간히 여자가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빨간 머리의 여자입니다. 빨간 머리의 여자도 있었는데...... 그녀는 가까스로 눈을 똑바로 떴다. 단지 빨간 머리의 여자라고 해도, 이름은......? 벨마라고 합니다. 물론 본명은 아닐 겁니다. 성은 알 수 없고. 가족의 부탁으로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죠. 센트럴 가의 가게 이름은 옛날 그대로지만, 지금은 흑인 가게가 되어 있더군요. 거기서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기 때문에 부인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이제 와서 그 아가씨의 행방을 찾다니 가족들도 이상하군요. 하고 여자는 의미있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금전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커다란 액수의 돈은 아니지만,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하면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돈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그렇죠. 하고 여자는 말했다. 게다가 오늘은 덥군요. 그런데 당신은 탐정이라고 했죠? 교활한 눈길, 침착한 표정. 남자용 슬리퍼를 신은 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빈 술병을 집어들고 흔들어 보았다. 나는 빈 병을 버리고, 뒷주머니에서 흑인 호텔 지배인과 내가 조금밖에 손대지 않은 특제 버번 위스키 1파인트짜리 병을 꺼내어 무릎 위에 놓았다. 여자의 눈이 반짝이며 위스키 병을 바라보다가 곧 새끼 고양이와 같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새끼 고양이와 같은 천진함은 없었다. 당신은 경찰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죠? 하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이라면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거든요. 무슨 일이죠? 그녀는 다시 코를 풀었다. 나는 그 손수건처럼 더러운 손수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위스키 병에 집중되어 있었다. 의혹이 목마름과 싸웠는데 목마름이 이겼다. 이 승부는 항상 결정되어 있었다. 그 벨마라고 하는 여자는 가수였습니다. 당신은 모를 테죠. 거기에 늘 갔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해초와 같은 색의 눈이 위스키 병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 가루가 덮인 혀로 입술을 핥았다. 위스키는 오래간만이군요. 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조금이라도 흘리면 아까우니까. 그녀는 일어서서 방을 나가더니 더럽고 두꺼운 잔을 두 개 들고 되돌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위스키를 따랐다. 그녀는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잔을 잡고서 마치 아스피린을 먹듯이 삼키더니 다시 병으로 눈길을 쏟았다. 나는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르고 내 잔에도 반 정도 따랐다. 그녀는 잔을 들고 안락의자로 되돌아갔다. 이미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그녀는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죠? 나는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명함을 읽은 뒤, 옆 테이블에 놓고 그 위에 빈 잔을 올려놓았다. 사립탐정이었군요. 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죠? 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무랐다. 그렇지만 이 위스키는 당신이 얘기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란 증거예요. 범죄에 건배. 그녀는 세 번째 잔을 자기가 따라서 다 마셔버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도 좀 알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지, 만약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해 줄는지 문제는 그것뿐이었다. 사랑스러운 빨간 머리의 아가씨였죠. 하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잘 기억하고 있어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아름다운 각선미도 아낌없이 보여준 아가씨였죠. 어디로 갔는지 떠돌이라 행방은 알 수 없지만...... 나도 부인이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혹 다른 데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곳은 없겠습니까?-- 그 위스키는 다 드십시오. 없으면 또 사오겠습니다. 당신은 마시지 않는군요. 하고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잔을 들고 위스키가 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시간을 끌며 마셨다. 그 아가씨의 가족은 어디에 있나요? 하고 그녀는 느닷없이 물었다.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군요. 하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경찰은 모두 똑같아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술을 사주는 남자는 모두 친구인 법. 그녀는 위스키 병으로 손을 뻗어 네 잔째 따랐다. 이런 말 하지 않는 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마음에 들면 끝까지 마음에 들어버리는 성격이죠. 그녀는 싱글싱글 웃었다. 오히려 빨래통 쪽이 귀여웠을 것이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요. 좋은 걸 보여드릴 테니까...... 그녀는 일어서서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황급히 화장복 앞자락을 여미고 나서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엿보면 안돼요. 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어깨를 문에 부딪치며 방을 나갔다. 나는 집 뒤쪽으로 가는 그녀의 비틀거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포인세티아의 어린 나뭇가지가 집 앞 벽에 울적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빨래 철사가 희미한 소리를 냈다. 아이스크림 장수가 방울을 울리며 지나갔다. 방구석에 있는 커다란 새 라디오가 댄스 음악을 낮게 연주하고 있었다. 얼마 뒤 뒷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의자가 쓰러진 것 같았다. 힘 좋게 열린 서랍이 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 소리였다. 그녀는 투덜투덜거리면서 물건을 뒤섞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나고 트렁크 뚜껑을 들어올리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나는 긴의자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이며 식당으로 가서 열려진 문틈으로 뒷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트렁크 앞에 서서 안에 있는 물건을 죄다 끄집어내면서 이마에 덮인 머리칼을 귀찮은 듯이 쓸어올렸다. 의외로 취해 있었다. 그녀는 트렁크 속으로 몸을 굽히면서 기침을 한 뒤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살집이 좋은 무릎을 굽혀 주저앉더니 양손을 트렁크 속으로 처넣어 더듬었다. 그녀가 트렁크 안에서 끄집어낸 것은 색바랜 분홍색 테이프로 묶인 사진 뭉치였다. 그녀는 불안한 손놀림으로 테이프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진 뭉치 속에서 봉투를 하나 골라내어 트렁크 오른쪽에 처넣었다. 그리고 나서 떨리는 손끝으로 테이프를 다시 묶었다. 나는 가만히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와서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되돌아와 방 입구에 서서는 몸을 흐느적흐느적거렸다. 그리고 우쭐한 모습으로 나에게 웃어보인 뒤, 갖고 있던 사진 뭉치를 내 발 밑에 던지고 나서 안락의자가 있는 곳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위스키 병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사진 뭉치를 주워 색바랜 분홍색 테이프를 풀었다. 보세요. 그녀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사진이에요. 신문광고 사진요. 그놈들은 경찰소식으로라도 나오지 않으면 신문에 실리지 못하죠. 그 남자가 남기고 간 것은 그 사진과 입고 있었던 낡은 옷뿐이었어요. 나는 포즈를 취한 남자와 여자 사진을 한 장씩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여우 같은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경마장에서나 볼 수 있는 옷을 입고는 익살맞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지방순회를 하는 댄서와 희극배우였다. 메인 가(街)의 서쪽 맞은편에 있는 극장에 출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변두리의 소극장이나 스트립 쇼 극장에 나오는 사람들뿐으로, 그 스트립 쇼 극장은 아마 단속으로 인하여 운영이 빠듯한 쇼였을 것이며, 때로는 단속받고 있었던 곳임이 틀림없었고, 그들도 법정에 이끌려 당분간 뜸했다가는, 또 퀘퀘한 땀내를 부리면서 엷은 웃음을 짓고 무대에 섰던 곳이리라. 여자들은 아름다운 각선미를 드러내놓고 있었으며, 영화였다면 허가받지 못할 정도로 육체를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샐러리맨의 윗도리처럼 지쳐 있었다. 금발 머리, 밤색 머리, 황소같이 커다란 눈, 꿩의 눈처럼 희미한 눈, 장난꾸러기와 같은 작고 예리한 눈, 빨간 머리의 여자도 있었을 테지만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리 대단한 흥미도 갖지 않고 대강 훑어보고 나서 원래대로 테이프로 묶었다. 본 기억이 없는 얼굴뿐이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왜 이 사진들을 내게 보여주는 거죠? 그녀는 오른손으로 술병을 쥐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벨마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었나요? 이 사람들 속에 있습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빛났다. 사진을 받아오지 않았나요?-- 가족들로부터? 받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대답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령 짧은 옷을 입고 리본을 매고 있는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있지 않은 여자는 없다. 나는 당연히 사진을 받아왔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졌어요. 하고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잔을 들고 일어서서 그녀 옆으로 걸어가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술이 다 떨어지기 전에 가득 따라주시지요. 그녀는 잔을 집어들고 위스키를 따르려고 했다. 그때 나는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식당을 빠져나가 뒤에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뒤에서 그녀가 무슨 말인지 외쳐댔다. 나는 트렁크 오른쪽에서 봉투를 끄집어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난 채 까마귀와 같은 기분나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앉으시죠. 하고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거칠게 해서 말했다. 큰 사슴 머로이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요. 나는 어둠 속으로 권총을 쏴볼 작정이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녀는 두 번 눈을 깜박이고는 입술을 벌렸다. 더러운 이가 나에게 냉소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큰 사슴이라고? 큰 사슴이 어떻게 되었나요? 나왔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감옥에서 나와 45구경 권총을 갖고 다니고 있지요. 오늘 아침에 벨마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센트럴 가에서 흑인이 한 명 살해당했소. 지금쯤 8년 전에 그를 경찰서로 보낸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을 게요. 그녀의 표정이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술병을 잡더니 입술에 대고 병째 위스키를 마셨다. 흘러넘친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서 경찰이 그를 찾고 있군요. 하고 말한 뒤 그녀는 웃었다. 경찰이! 명석한 여자다. 나는 이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워졌다. 이 여자를 취하게 한 것은 내 목적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나는 꽤 솜씨가 좋은 남자였다. 내 일이란 어떤 것에 부딪칠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조금 염려되었다. 나는 봉투를 열고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다른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었지만 사진의 주인공은 매우 느낌이 좋은 여자였다. 허리에서 위로 피에로 의상을 입고 있었다. 검은 방울이 달린 뾰족한 모자 밑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검게 비쳤는데, 빨간 머리인지도 모른다. 얼굴은 옆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스럽고 천진한 여자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것은 확실하고, 틀림없이 남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을 것이다. 다만 그 아름다움은 평범한 아름다움으로, 오피스 가(街)의 점심시간에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허리 아래로는 각선미가 드러나 있었는데, 멋진 각선미였다. 사진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 사인이 적혀 있었다. 언제나 당신의 사람 -- 벨마 바렌트. 나는 그 사진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사진을 집으려고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왜 감췄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봉투에 넣고는 그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왜 감췄어요? 하고 나는 재차 물었다. 왜 이 사진만 보여주지 않았죠? 이 여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죽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좋은 아가씨였지만 죽었어요. 이젠 돌아가 주세요. 그녀의 손에서 위스키 병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나는 몸을 구부려서 병을 주우려고 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찼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끌어당겨 그녀의 발을 피했다. 나를 찼다고 해서 숨긴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어디서 죽었습니까? 왜 죽었죠? 나는 불쌍한 병자예요. 하고 그녀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나를 돌보지 않아 늦었지요. 나는 아무 말 않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옆으로 다가가 거의 비어 있는 병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는 융단을 내려다보았다. 라디오가 방구석에서 즐거운 듯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집 앞을 지나갔다. 파리가 창에 부딪쳤다. 얼마 뒤,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거리더니 머리를 흔들고 웃어대며 오른손으로 병을 들어 입에 들이댔다. 병이 비자 그녀는 술병을 흔들어보고 나서 내게 냅다 던졌다. 술병은 방구석의 융단 위를 굴러다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나를 노려보더니 두 눈을 감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연극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튼 상관없었다. 나는 이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모자를 들고 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방구석에선 여전히 라디오가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조용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뒤돌아보고 나서 문을 닫고는 다시 조용하게 열어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아직 감겨져 있었지만 눈꺼풀 밑에 빛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이웃집 창의 커튼이 열려져 있었고 코가 뾰족한 백발 노파의 얼굴이 유리창에 눌려져 있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노파가 이웃집 상황을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곳을 가든 그런 사람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나는 그 노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곧 커튼이 닫혔다. 나는 차를 세워둔 곳으로 되돌아가서 차를 달려 77번가 경찰서 2층 널티의 방으로 올라갔다. ┌────────────────────────────┐ │ 제 6 장 │ └────────────────────────────┘ 널티는 변함없이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재떨이에 여송연 꽁초가 두 개 늘었고, 바닥에는 버려진 성냥개비의 수가 더 많아졌다. 내가 빈 책상에 걸터앉자 널티는 자기 책상에 뒤집혀 있던 사진을 집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정면과 옆을 향한 얼굴이 나란히 있었고, 지문의 분류가 기록되어 있었다. 틀림없는 머로이의 사진으로, 강한 광선의 조명을 받고 찍혔기 때문에 프랑스 빵처럼 눈썹이 없어 보였다. 틀림없군. 하고 말한 뒤 나는 사진을 돌려주었다. 오레곤 주(州)의 형무소에서 전보로 보고가 왔소. 하고 널티가 말했다. 형기를 마쳤다는군. 간신히 단서를 잡았소. 7번가 노면전차 차장이 머로이 같은 남자를 봤다는 게요. 3번가와 알렌산드리아 가(街)의 길 모퉁이에서 내렸다고 하니까 아마 빈집에 들어가 숨어 있을 것이오. 시내에서도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집을 빌리는 사람도 없는 오래 된 저택이 몇 개 있기 때문이지. 그가 그 중 한 집에 숨어들어갔다고 하면 그는 독안에 든 쥐라오. 당신은 뭘 알아냈소? 화려한 모자를 쓰고 하얀 골프공 모양의 단추를 윗도리에 달고 있었다고 합디까? 널티는 인상을 찡그리며 무릎에서 손을 깍지꼈다. 아니오. 파란색 옷이었다는군. 갈색인지도 모르겠고. 살롱은 아니었을 겁니다. 어째서? 농담이겠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 남자는 큰 사슴 머로이가 아니오. 전차는 타지 않았소. 돈을 갖고 있소. 게다가 그는 기성복은 입지 않아요. 맞춤복이 아니면 입지를 않죠. 아, 저런! 하고 널티는 재미있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당신은 무얼 하고 왔소? 당신의 대리역할을 하고 있잖소. 플로리안은 백인의 가게였을 때도 같은 이름이었소. 근처 흑인 호텔 지배인에게 들었는데, 네온사인은 돈이 들기 때문에 그 가게를 인수한 흑인은 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디다. 그전의 주인은 마이크 플로리안이라고 몇 년 전에 사망했지만 그의 아내는 살아 있소. 웨스트 54번가 1644번지에 살고 있소. 이름은 제시 플로리안 -- 전화번호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시민명단에는 나와 있소.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게요? 그 여자와 밀회라도 하라는 건가? 그것도 내가 대신 끝마치고 왔소이다. 위스키 병을 갖고 갔었소. 진흙이 잔뜩 쌓인 물통 같은 얼굴을 한 중년여자였소. 쿨리지(1872~1933년, 30대 미국 대통령)가 대통령이었을 때부터 한 번도 머리를 감은 적이 없는 것 같았소. 농담은 빼고 본론만 얘기해 주시지. 하고 널티가 말했다. 나는 그 플로리안 부인에게서 벨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소. 기억하고 있소, 널티 경감? 큰 사슴 머로이는 벨마라고 하는 빨간 머리의 여자를 찾고 있었소 -- 내 얘기가 따분하다면 그만둬도 좋고. 아니, 어째서? 무엇 때문에 감정이 상했소? 아니오. 아무것도 아니오. 말해 봤자 당신은 모를 게요. 플로리안 부인은 벨마라고 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소. 초라한 집에 값진 가구라고는 70~80달러 될 만한 새 라디오뿐이었소. 당신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하나도 얘기하지 않고 있소. 플로리안 부인은 -- 나에게는 제시로 통했지만 -- 남편이 남기고 간 것은 낡고 오래 된 옷과 그 가게에서 일한 연예인들 사진뿐이라고 나에게 말했소. 나는 술로 그녀를 유혹해 보았소. 그녀는 나를 후려쳐서라도 위스키 병을 빼앗을 만한 여자라오. 세 잔인가 네 잔 정도 마셨을 때 침실로 들어가더니 오래 된 트렁크 속에서 사진 뭉치를 찾아가지고 옵디다. 그런데 내가 그 모습을 몰래 엿보았더니 사진 뭉치 속에서 봉투를 하나 빼내 감추어버리는 거였소. 그래서 나는 그 봉투를 빼앗아 가져왔다오. 나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피에로 아가씨의 사진을 그의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사진을 집어들고 가만히 바라보더니 입술을 오므렸다. 귀여운 아가씨인걸. 하고 그는 말했다. 고생해도 좋겠는데. 이 아가씨가 벨마 바렌트요? 이 아가씨는 어떻게 됐소? 플로리안 부인은 죽었다고 했소 -- 그러나 그것으로는 사진을 감춘 이유가 설명되지 않지요. 왜 감췄을까? 그것은 말하지 않았소. 참, 이런 일이 있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큰 사슴이 출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경계하기 시작했다오. 그래서...... 그것뿐이오. 나는 사실을 모두 숨김없이 털어놓고 증거를 당신에게 제공한 거요. 이제부터는 당신이 단서를 찾아야 하오. 그러나 이게 무슨 도움이 되지? 결국 사건은 검둥이 살인인데. 큰 사슴이 체포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소. 하여튼 여자와는 8년간 만나지 못했으니까...... 알았소. 좋도록 하시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되오. 그는 그 여자를 찾고 있소. 게다가 집념이 강한 남자 같았소. 은행을 덮쳐 체포했다고는 하지만 밀고한 사람이 있었을 게요. 그게 누군지 아시오? 몰라. 그러나 조사하면 알 수 있겠지. 그런데 왜? 밀고한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소. 큰 사슴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놈들에게 복수하려 하고 있소. 나는 일어섰다. 그럼, 돌아가야겠소. 행운을 빌겠습니다. 나를 버릴 거요? 나는 문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집에 돌아가서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야만 하오. 어디, 상태가 좋지 않은 게요? 더러워져 있을 뿐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몹시 더러워져 있소. 그리 급한 것은 아니잖소. 앉으십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조끼에 대고 몸을 뒤로 젖혔다. 급한 것은 아니오. 하고 나는 말했다. 조금도 급하지는 않지. 이제 내가 할 일은 없소. 플로리안 부인이 말한 게 확실하다면 벨마는 죽었소. 게다가 지금의 단계에서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될 만한 이유도 없고. 당신 말도 옳소. 하고 그는 직업의식에서 오는 의혹을 얼굴에 나타내며 말했다. 게다가 당신은 큰 사슴 머로이의 단서를 잡았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착수해야 한단 말이오. 큰 사슴을 놓칠지도 모르지. 하고 널티가 말했다. 아무리 몸집이 큰 남자라도 붙잡지 못하는 일도 있거든. 그의 눈은 의심이 담긴 채 빛났다. 얼마 받았소? 뭘? 당신을 잠자코 있게 하는 데에 그녀가 얼마 주었냐고? 무얼 잠자코 있게 하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지금 입 밖에 내지 않은 것 말이오. 그는 조끼 앞에서 두 손을 마주모아 밀며 웃었다. 지금 무슨 애길 하고 있는 거요? 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남겨놓고 방에서 뛰어나왔다. 문에서 1미터 정도 떨어졌을 때 나는 또다시 뒤로 되돌아가 조용하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똑같은 자세로 조끼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얼굴에 미소는 지워져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입은 아직 벌려진 채였다. 그는 몸을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고,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문을 연 것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문을 닫고 복도로 걸어나갔다. ┌────────────────────────────┐ │ 제 7 장 │ └────────────────────────────┘ 그해의 달력에는 인쇄가 좋지 않은 렘브란트(1606~1669, 네덜란드의 화가)의 자화상이 실려 있었다. 더러운 엄지손가락으로 지저분한 파레트를 들고, 똑같이 지저분한 큰 흑두건을 쓰고 있는 자화상인데, 선금을 다만 얼마라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일을 해주겠다는 모습으로 화필을 허공에 들고 있었다. 얼굴에는 늙은이의 주름살이 보이고 인생에 대한 혐오와 과음으로 초라해져 있었지만, 나는 그 쾌활한 표정과 아침이슬처럼 빛나고 있는 눈이 마음에 들었다. 4시 반, 내가 사무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리고, 자신에 찬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요? 그렇습니다...... 당신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나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있었소. 오늘밤 7시에 내가 있는 곳으로 왔으면 좋겠소만. 용건은 그때 얘기합시다. 내 이름은 린제이 마리오. 주소는 몬테마 비스타의 캐브릴로 가(街) 212번지요. 장소는 알겠소? 몬테마 비스타라면 알고 있습니다, 마리오 씨. 그러나 캐브릴로 가는 알아보기 힘든 곳이오. 도로가 뒤얽혀 있고 경사져 있소. 길가를 따라 카페에서 돌층계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소. 세 번째 길이 캐브릴로 가인데, 1블럭 정도 부근엔 내 집밖에 없소. 그럼, 7시요. 어떤 목적으로 나를 고용하는 겁니까, 마리오 씨? 전화로는 말하고 싶지 않소. 어떤 성질의 것인지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몬테마 비스타까지는 상당한 거리라서요. 얘기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비용은 지불하겠소. 일에 따라선 일을 맡지 않기도 하시오? 법률에 저촉되는 일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맡습니다. 전화 목소리는 더욱더 차가워졌다. 법률에 저촉되는 일이라면 당신에게 부탁하지도 않소. 틀림없이 하버드 대학을 나온 남자다. 가정법의 사용법이 문법에 맞았다. 납득할 수 없는 점도 있었지만 은행구좌에 돈도 떨어졌고 하여 나는 애써 점잖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마리오 씨.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렘브란트가 나에게 엷은 웃음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책상서랍 깊숙이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어 병째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렘브란트는 당황하여 엷은 웃음을 거두었다. 태양광선이 책상 가장자리를 스치고 융단 위에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사무실 밖의 거리에서는 교통신호의 벨이 울리고 전차가 달리는 소리가 났다. 이웃 변호사 사무실에서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단조롭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고 불을 붙였다. 그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널티였다. 찐 감자 같은 목소리였다. 자, 내가 졌소. 하고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를 알고서 말했다. 유감이오. 머로이는 그 플로이안 부인을 찾아갔었소. 나는 수화기를 꽉 움켜쥐었다. 갑자기 윗입술이 차가워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 이미 머로이는 붙잡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잘못 봤었소. 웨스트 54번가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쪽으로 전화를 걸어왔소. 플로리안 집에 손님이 두 명 왔었다고 하는 게요. 한 사람은 길 맞은편에 차를 세워놓고 주위를 살핀 뒤 집안으로 들어갔소. 한 시간 정도 있었던 것 같소. 키는 약 6피트(약 183--), 검은 머리에 중간 정도의 체격. 별다른 점은 없이 그곳에 잠시 머물다가 집을 나왔고...... 고약한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을 테지?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 말대로요. 이 남자는 당신일 테지. 두 번째가 큰 사슴이었소. 화려한 복장의 몸집이 커다란 남자였는데, 그 친구도 자동차를 타고 왔지만 그 할머니는 차 번호판을 읽을 수 없었소. 당신이 돌아가고 난 뒤 한 시간 정도 뒤의 일이었소. 조급하게 들어가선 5분 정도밖에 집안에 있지 않았소. 차를 세워둔 곳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그는 커다란 권총을 꺼내어 약실(총알을 넣는 회전통)을 돌렸답디다. 그것을 할머니가 본 거요. 그랬기 때문에 전화를 건 거지. 그러나 집안에서는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안됐군. 하고 나는 말했다. 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순찰경관이 곧 나갔지만 반응이 없었소. 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으로도 들어가 봤지만 죽은 사람은커녕 산 사람도 없었소. 아무도 없었단 말이오. 플로리안 부인은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었소. 이웃집 할머니에게 가봤더니 화를 내더라는 거요. 그 할머니가 모르는 사이에 플로리안 부인이 나가버렸기 때문이오. 그래서 그들은 되돌아와 일을 하고 있었소. 그리고 나서 한 시간, 아니 한 시간 반이 지났을까, 그 할머니가 또 전화를 걸어온 거요. 플로리안 부인이 돌아왔다고 하는 거였소. 내가 전화에다,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라고 말했더니 할머니가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리더구먼. 널티는 한숨을 쉬고 나서 내 말을 기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또 말을 꺼냈다. 당신 의견은 어떻소? 별 의견은 없소. 큰 사슴은 물론 그곳에 갔었을 게요. 플로리안 부인과는 아는 사이가 틀림없소. 그렇긴 하나 그곳에 언제까지나 있을 수는 없었을 게요. 플로리안 부인에게 경찰의 손이 미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내가 여자를 만나봅시다. 하고 널티가 말했다. 어디로 갔는지 조사해 보겠소. 명안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을 의자에서 일어나게 해준 사람이 있다니...... 응? 또 조롱하는 게요?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니까...... 좋소. 그래서 머로이는 어떻게 됐소? 그는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젠 놓치지 않을 거요. 지라드에서 북쪽으로 향한 것이 확실하오. 자동차는 빌린 거였고. 주유소 종업원이 경찰방송을 듣고 알려왔소.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는 것 외에 모든 것이 부합된다고 그가 말합디다. 그대로 북쪽으로 가면 벤츄라에서 붙잡힐 것이고, 리지 가도(街道)로 방향을 바꾸면 비상선에 걸리게 되지. 만일 비상선을 돌파하게 되면 도로를 폐쇄하도록 되어 있소. 경찰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이제 그는 독안에 든 쥐요. 글쎄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 사람이 정말 머로이고, 이쪽 생각대로 움직여 준다면 말이죠. 널티는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소?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것은 아니잖소. 그런데 당신은 플로리안 부인과 사이가 좋을 테지? 그 외에 또 알고 있는 것이 있을 텐데? 술만 가져가면 누가 가더라도 똑같았을 게요. 한 번 더 그녀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건 경찰이 할 일 아니오? 그렇소. 하지만 벨마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없어요.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 다르지만. 여자라는 것은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소. 하고 널티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바쁘지는 않을 테지? 일이 있소.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일을 의뢰받았소. 그것도 보수를 받는 일이라오. 모처럼 들어온 거지만...... 나를 버릴 생각이오? 그런 뜻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잖소. 알았소. 당신이 그런 마음이라면...... 나는 어떤 마음도 아니오. 하고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나는 경찰 앞잡이로 일할 마음은 없소! 좋소. 화내려면 맘대로 화내시오. 널티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미 끊긴 수화기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도시에는 경찰관이 1,750명이나 있는데, 나를 앞잡이로 이용하려고 하다니......! 나는 수화기를 걸쳐놓고 위스키를 또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나서 석간신문을 사러 잠깐 로비에 갔다. 널티가 말한 대로 몽고메리 살인사건은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나는 이른 저녁식사 시간에 대려고 사무실을 나왔다. ┌────────────────────────────┐ │ 제 8 장 │ └────────────────────────────┘ 점점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몬테마 비스타에 도착했다. 해면에는 아직 아름다운 광선이 춤추고 있었고, 곡선을 그린 해안선에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펠리컨 무리가 폭격기처럼 편대를 이루어 날아갔다. 요트 한 척이 베이 시티 쪽을 향하여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쪽의 태평양은 보랏빛을 띤 잿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몬테마 비스타는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로 된 수십 채의 집이 경사면에 흩어져 있어서, 크게 재채기라도 하면 해안의 비어 있는 작은 증기선으로 집이 흘러내려 앉을 것 같았다. 해안을 따라 콘크리트 육교 위를 드라이브 웨이가 달리고 있었다. 육교 밑은 인도로 되어 있었다. 육교 옆에서 콘크리트 계단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 나를 고용하려는 남자가 말한 카페가 있었다. 카페의 내부는 밝고 손님으로 흥청거리고 있었지만, 줄무늬의 차양이 있는 테라스에는 철제다리가 붙어 있는 타일 붙인 테이블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바지를 입은 거무스름한 여자가 맥주병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폭스 테리어 종 개 한 마리가 철제의자 하나를 전신주 대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그 카페의 주차장에 차를 넣으려 하자 여자는 공허한 목소리로 개를 꾸짖었다. 나는 계단을 언덕 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캐브릴로 가까지 계단이 280개였다. 끊임없이 모래섞인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고, 양쪽 난간이 두꺼비 배처럼 젖어 있었다. 내가 계단을 캐브릴로 가까지 올라갔을 때 바다에서는 이미 황혼의 희망을 잃고 다리를 다친 한 마리 갈매기가 바람을 거슬러 날고 있었다. 나는 계단에 앉아 구두 속의 모래를 털어버리고 맥박이 정상이 되기를 기다렸다. 숨찬 게 겨우 가라앉자 목 둘레의 와이셔츠를 느슨하게 하고서 목소리가 미치는 거리에 있는 겨우 한 집, 불빛이 새고 있는 그곳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 집 앞에는 바닷바람이 스며든 나선형 계단이 출입구로 통해 있고, 마차의 등불을 모방하여 처마에 단 등이 현관을 비추고 있었다. 자동차 차고는 집 아래에 있었다. 차고의 문은 열려 있었는데, 크롬 장식이 붙어 있고, 라디에이터 캡 위에 승리의 여신상으로 코요테의 꼬리가 붙들어 매어져 있었다. 상표가 있어야 할 곳에 머리문자가 새겨져 있는 커다란 고급 승용차를 현관 위에 달린 등이 비추었다. 차는 오른쪽이 운전석이며, 집보다도 비싸게 보였다. 나는 나사형 계단을 올라가 호랑이 머리 형태로 되어 있는 고리쇠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황혼의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집안에서는 발소리가 들려올 기미도 없었다. 셔츠가 축축했고 등에 얼음 주머니를 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하얀 모직 옷에 보랏빛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두른, 키가 큰 금발머리의 남자가 나타났다. 흰색 윗도리의 깃에 한 송이 수레국화가 꽂혀 있고, 그것과 대조되게 파란 눈이 희미하게 감겨 있었다. 목에 느슨하게 감은 보랏빛 스카프에서는 여자가 생각날 정도의 부드러움이 느껴졌고, 그 속으로 늠름한 갈색 목덜미가 들여다보였다. 넥타이는 매고 있지 않았다. 좀 벌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호남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로, 나보다 3센티 정도 키가 큰 185cm는 될 것 같았다. 금발머리는 손질한 건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그대로인지 계단처럼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보아 과연 하얀 모직 옷에 보라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깃에 수레국화를 꽂을 만한 남자였다. 그는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 내 어깨 너머로 어둠이 깔린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7시요. 하고 나는 말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까? 그럼, 당신은...... 하고 이름을 생각해 내려는 것처럼 말을 끊었다. 중고 자동차의 광고처럼 효과없는, 부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나는 그에게 잠시 그 몸짓을 즐기게 한 뒤 말했다. 필립 말로우. 오후와 똑같습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는 식으로 나에게 예리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나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음, 그랬군요. 들어오시오, 말로우 씨. 오늘밤에는 하인이 없습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문을 밀었다. 문에 닿기라도 하면 마치 몸이 더러워지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그의 곁을 빠져나가자 향수냄새가 났다. 들어간 곳은 발코니가 낮고, 금속으로 된 난간이 커다란 아틀리에 풍의 거실 세 군데에 둘러쳐져 있었다. 난간이 없는 한 군데에는 난로와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난로에는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발코니 주위는 서재로 되어 있었고, 금속제 조각이 몇 개 있었다. 우리들은 계단을 세 개 내려가 거실로 들어갔다. 융단은 복사뼈를 간지럽힐 만큼 길었다. 연주회용인 그랜드 피아노는 뚜껑이 닫혀 있었으며, 그 가장자리의 분홍색 비로드 천 위에 키가 큰 은색 꽃병이 놓여져 있었고, 노란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치스러운 가구들이 있었고, 바닥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쿠션이 흩어져 있었다. 폭력을 휘두르기에는 어울리지 않았고, 정말이지 편한 방이었다. 광선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한구석에 무늬 있는 단자로 싸여진 폭 넓은 침대 의자가 있었다. 각설탕을 머금으며 압상트(쓴 쑥으로 만든 술)를 훌쩍 마시고 정열적인 목소리로 의논하기에 알맞은 방이었다. 일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지만 그밖에는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방이었다. 린제이 마리오 씨는 그랜드 피아노의 곡선에 어울리게 몸의 위치를 조절하고 노란 장미향기를 맡은 뒤, 프랑스제 에나멜 담배 케이스를 열고서 금색 물부리가 붙은 긴 갈색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분홍색 의자에 앉아 재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캐멀 담배에 불을 붙여 코로 연기를 내뿜고는 선반 위에서 검게 빛나고 있는 금속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얕게 패인 홈이 하나, 돌기가 두 개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리오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았다. 재미있을 게요. 하고 그는 별 관심없이 말했다. 바로 요전에 발견했소. 아스터 다이얼의 새벽의 혼이오. 나는 크로프슈타인의 엉덩이가 두게 달린 사마귀 인가 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린제이 마리오는 꿀벌을 삼키는 듯한 얼굴을 했다.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아오는 데 힘이 들어보였다. 당신은 기묘한 유머 감각을 갖고 있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기묘한 게 아니라 -- 하고 나는 말했다. 단지 거리낌없는 것뿐입니다. 그래요? 그는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요 -- 물론, 그것은 의심하지 않소. 그런데 내가 당신을 부른 것은, 실은 아주 사소한 용건이라서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 미안할 정도의 일이오. 나는 오늘밤 두 남자를 만나 돈을 주기로 되어 있는데, 누구랑 함께 갔으면 하고 생각한 거요. 당신은 권총을 갖고 다닙니까? 갖고 다닐 때도 있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살집이 좋은 그의 보조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유리 구슬이 숨어버릴 정도로 깊은 보조개였다. 권총은 갖고 가지 말았으면 하오. 그런 종류의 용건이 아니라 사업상의 지불이기 때문이오. 나는 권총을 쏜 적이 없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협박입니까?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나는 남에게 협박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소. 약점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협박을 받는 수가 있습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협박을 받는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는 담배 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의 청녹색 눈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보였지만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부드럽고 인상적인 목의 선이 내 눈에 비쳤다. 그의 시선이 조용하게 내려와서 나를 관찰했다. 나는 상대편 남자들과 호젓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아직 어디인지는 알 수 없소.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화로 알려주기로 되어 있거든. 곧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하오. 장소는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일 게요. 오래 전부터 있었던 얘기입니까? 실은 3~4일 전의 일이오. 지금에 와서 보디가드란 너무 늦은 감이 있군요. 그는 검은 담뱃재를 흔들어 털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 말대로요. 그 동안 결심이 안 섰던 거죠. 누군가를 데려가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지시는 없었지만, 혼자서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그 정도로 담력이 좋은 남자가 아니라서. 상대편은 당신을 알고 있습니까? 그건 모르오. 나는 많은 돈을 갖고 가지만 내 돈은 아니지. 어떤 친구를 위해 일하는 겁니다. 물론 나는 그 돈을 건네주고 싶은 생각은 없소. 나는 담배를 끄고 분홍색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엄지손가락을 마주댔다. 돈은 얼마나 -- 그리고 목적은? 그건 -- 하고 말하면서 그는 아름다운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역시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말할 수가 없소. 난 단지 당신과 함께 가서 당신 모자나 들고 있어라 이겁니까? 그는 손을 강하게 흔들었다. 담뱃재가 하얀 커프스 위에 떨어졌다. 그는 그 재를 흔들어 털고 재가 묻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말 들은 게 처음은 아니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일을 시키려는 겁니까? 당신은 보디가드가 되라고 하면서도 권총을 갖고 가면 안된다니. 힘을 빌려 달라고 말하면서도 무엇을 하면 좋은지 말해 주지 않고 있소. 목적도 이유도 모르고 내 생명을 위험에 드러내놓으라고 하는 거요. 그럼, 어느 정도 보수를 줄 생각이오? 그것도 아직 생각지 않았소. 그의 광대뼈가 탁한 붉은색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볼 마음은 있는 거요? 그의 목줄기에 붉은빛이 돌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한 방 먹여주고 싶소? 나는 쓴웃음을 짓고 일어나 모자를 썼다. 그리고 입구의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급하게는 걷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당신의 시간을 몇 시간 제공받는 것만으로 보수를 100달러 지불하겠소. 부족하다면 부족하다고 말해 주시오. 위험은 없소. 내 친구가, 홀드 업 (hold up, 손들어 라는 뜻으로 강도를 의미함) 으로 보석을 빼앗겼소. 그것을 되사는 겁니다. 아, 앉으시오.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을 할 것 없소. 나는 다시 분홍색 의자에 앉았다. 알았소. 하고 나는 말했다. 얘기를 들려주시겠소? 우리들은 정확하게 10초간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은 비취 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소? 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또 갈색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없습니다. 보석에서는 이것만이 진실로 가치가 있는 거요. 다른 보석은, 보석 그 자체에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세공 때문에 가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게요. 하지만 비취는 비취 그 자체에 가치가 있소. 수백 년 전에 다 파버리고 현재 매장량이 있는지는 알 수 없소. 내 친구가 갖고 있는 것은 60개의 구슬로 이루어져 있는 목걸이인데, 1개의 구슬이 6캐럿씩 각각 정교한 세공으로 되어 있소. 8만 달러에서 9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거요. 중국 정부가 그것보다 약간 큰 12만 5천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을 갖고 있소. 며칠 전 밤에 내 친구가 홀드 업 으로 그 목걸이를 빼앗겼소. 나도 그곳에 있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소. 나는 그 친구를 태우고 어느 파티에 갔다가 트로카델로 카바레를 돌아서 그녀의 저택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소. 그때 차 한 대가 왼쪽 펜더를 스치고 멈췄소.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홀드 업 이었소. 내가 본 것은 두 녀석이었는데, 한 명은 핸들을 잡고 있었던 것 같고, 또 한 명은 뒷좌석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오. 내 친구는 비취 목걸이를 하고 있었소. 그들은 그 비취 목걸이와 반지 두 개, 팔찌를 빼앗았소. 두목 같은 녀석이 작은 손전등으로 별로 급한 기색도 없이 빼앗은 물건을 조사하더니 반지 하나를 돌려주고는 자기네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 테니까 경찰이나 보험회사에 신고하기 전에 전화를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지시에 따르기로 한 거죠. 그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보석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오. 보험액수가 충분하다면 상관없겠지만 희귀한 물건일 경우에는 달라는 액수를 주는 수밖에는 없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비취 목걸이는 어디에서도 손에 넣을 수는 없겠군요? 그는 잘 닦여져 광택이 나는 피아노 표면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매끈매끈한 것에 닿는 것만으로 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손에 넣을 방법이 없소. 세상에 둘도 없는 물건이지. 애당초 그녀가 몸에 지녔던 것부터가 잘못이었소. 그러나 그러한 점에서는 부주의한 친구였소. 다른 물건도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특히 아까운 것은 없었소. 그래서 얼마를 주기로 했나요? 8천 달러. 너무 싸다고 할 정도지만 그녀가 똑같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듯이 그들도 처분할 수 없었던 겁니다. 아마 보석을 취급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게요. 그 친구분의 이름은 -- 말할 수 없습니까?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소. 그럼, 지불방법은......? 그는 침울해진 파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술에 취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갈색 담배를 잡은 손이 시종 떨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며칠간 내가 중간에서 전화로 교섭을 한 결과 완전히 조건이 결정되었소. 나머지는 시간과 장소만이 문제요. 오늘밤 그 전화가 걸려오게 되어 있소. 너무 먼 장소여서는 안된다고 약속해 놓았고, 또 전화가 오면 곧 나가야 한다고 했소. 연락할 수 없도록 하려는 수법일 것이오. 경찰에게 말이오. 그 지폐에는 표시가 되어 있습니까? 지불은 지폐라고 생각합니다만...... 물론 지폐요. 20달러짜리 지폐. 그렇지만 표시는 되어 있지 않소. 검은 광선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도록 표시를 해둘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오 -- 단지 경찰은 그런 무리들을 잡고 싶어하기 때문이오 -- 협력만 얻게 되면. 지폐의 일부를 전과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수도 있소. 그는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듯하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검은 광선이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 거요? 자외선이오. 어두운 종류의 잉크만을 빛나게 하는 거죠. 표시를 해놓을 수 있다면 해놓읍시다. 이젠 시간이 없소. 하고 그는 흥미가 없는 듯이 말했다. 그것이 내 마음에 걸리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어째서? 당신은 오늘 오후가 되어서야 나를 불렀소. 왜 나를 부른 겁니까? 내 말을 누구에게서 들었습니까? 그는 웃었다. 소년의 웃음을 생각나게 했지만, 나이가 차지 않은 소년의 웃음은 아니었다. 고백하는데, 전화번호부를 펼쳐놓고 당신 이름을 집어낸 겁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계획이었소. 오늘 오후가 되어서야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나는 또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그의 목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그는 양손을 펼쳐보였다. 단지 가르쳐 준 장소로 가서 지폐 꾸러미를 건네주고, 비취 목걸이를 받아오는 것뿐이오. 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어떻게 하는 것이? 음. 나는 어디에 타죠?-- 뒷좌석이오? 그게 좋을 거요. 대형차인데, 숨을 필요는 없소. 그러나 --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나를 뒷좌석에 숨게 하고 전화로 지시받은 장소로 가자고 했소. 8천 달러의 지폐를 갖고서 그 10배나 12배의 가치가 있는 목걸이를 되사려 하고 있소. 상대는 종이 꾸러미를 건네놓고. 여기서 펼쳐보면 안돼. 할지도 모르오.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냥 지폐만 받고 목걸이는 소포로 보낸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들이 당신을 배신해도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소.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지. 홀드 업 을 할 정도의 놈들이오. 당신 머리를 때려놓고 행방을 감출 시간을 벌려고 할지도 모르오. 나도 그것이 염려스러웠소. 하고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데려가려고 생각한 것은 실은 그것 때문이었소. 홀드 업 때 그들은 당신 얼굴에 손전등을 비췄습니까?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디서나 똑같겠지만. 요 며칠간 당신의 얼굴을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소. 어쩌면 훨씬 전부터 당신에 관계된 일은 뭐든지 조사해 놓았을 거요. 완전히 본을 떠놓는 거죠. 치과의사가 금니의 본을 뜨듯이, 한치의 틈도 없이 본을 떠놓는 겁니다-- 당신은 그 여자와 종종 만나고 있습니까? 아니오 -- 종종이라고 말할 수는 없소. 하고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결혼한 여자입니까? 당신 -- 그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녀를 문제삼는 말은 그만두시지. 좋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좀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 실패할 확률이 적습니다. 사실은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작정입니다. 상대편이 약속을 지킨다면 나는 필요가 없을 것이고, 상대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잖소. 당신이 함께 있어 주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양손을 벌렸다. 좋습니다. 그러나 운전은 내가 하겠소. 돈도 내가 갖고 가겠소. 당신은 뒷좌석에 숨어 있는 거요. 우리들은 키도 비슷하니까. 일이 잘못 될지도 모르니 사실을 말해 주었으면 좋겠소. 시험해 보는 것뿐이오. 그래요.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100달러를 받는 거요. 따라서 머리를 맞아야 한다면 내가 맞겠소.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잠시 뒤 밝은 표정을 되찾고 미소를 떠올렸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하고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어느 쪽으로 하든 커다란 변화는 없소. 우리들은 어차피 함께 갈 거니까. 브랜디 마시겠소? 마시겠소. 그리고 내 100달러를 갖다주지 않겠소? 오래간만에 지폐 좀 만져봅시다. 그는 댄서처럼 피아노에서 떨어졌다. 상체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그가 나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는 거실 밖 발코니에 설치된 작은 전화실에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전화는 아니었다. 대화는 달콤한 것이었다. 잠시 뒤 그는 별이 다섯 개 있는 마르텔 브랜디 병과 다섯 장의 20달러짜리 새 지폐를 갖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오늘밤은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 적어도 이때까지는. ┌────────────────────────────┐ │ 제 9 장 │ └────────────────────────────┘ 저택 안은 아주 조용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밀어닥치는 파도인지, 가도를 질주하는 자가용인지, 소나무 가지 끝을 스치는 바람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아득한 저 아래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였다. 나는 그곳에 꼼짝 않고 앉아 귀를 기울이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니 한 시간 반 동안에 전화벨이 네 번 울렸다. 문제의 전화는 10시 8분이 지나 걸려왔다. 마리오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간략하게 대화를 마친 뒤 소리나지 않도록 수화기를 놓고 조용하게 일어섰다.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미 거무스름하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는 거실로 돌아와서 컵에 찰랑찰랑하게 브랜디를 따랐다. 그리고 비뚤어진 미소를 떠올리며 잔을 광선에 대고 바라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나갑시다, 말로우 씨. 준비는 되었소? 언제라도 좋소. 그 때문에 불려와 있는 거니까. 대체 어디로 가는 거요? 프리시마 캐년이라고 하는 곳이오.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도가 있소.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장소를 가리켰다. 베이 시티의 북부에서 구릉지대로 통해 있는 블루브 애드가 있다. 그 블루브 애드에는 언덕 쪽으로 빗나가 있는 샛길이 몇 개 있는데, 그 끝이 프리시마 캐년이었다. 대강 짐작은 갔다. 카미노 데 라 코스타 라고 하는 도로의 변두리에 접해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부터 12분 이상은 걸리지 않소. 하고 마리오가 빠른 말로 이야기했다. 나갑시다. 시간을 20분으로 제한당했소. 그는 나에게 밝은 색 외투를 건네주었다. 좋은 목표가 될 외투였다. 외투는 나에게 딱 맞았다. 모자는 내 것을 썼다. 나는 겨드랑이 밑에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내가 외투를 입고 있을 동안 그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계속 떠들어대면서 8천 달러의 지폐가 들어 있는 하틀로 봉투를 손으로 장난하고 있었다. 프리시마 캐년의 가장자리에 납작한 선반처럼 된 곳이 있소. 거기는 길에서 들어갈 수 없도록 하얀 난간이 세워져 있으나 가장자리로는 들어갈 수 있는데, 거기서부터 진흙탕길로 비탈이 져 있소. 우리들은 거기에서 불을 끄고 기다리고 있는 거요. 그 주위에 집은 없소. 우리들......? 아니오. 내가 말이오. 이론적으로는. 나는 그에게서 하틀로 봉투를 받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틀림없이 지폐 다발이 가득차 있었다. 나는 지폐를 세지 않고 다시 고무밴드를 끼우고서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갈비뼈에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우리들은 입구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리오는 전등을 완전히 끈 뒤, 가만히 문을 열고 안개 속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은 나사형 계단을 통해 차고 쪽으로 내려갔다. 이 근방은 밤이 되면 공기가 축축하고 안개가 꼈다. 나는 잠시 앞유리창 와이퍼를 움직여 전방을 확인해야 했다. 외제 대형차는 미끈하게 미끄러져서 나는 그냥 핸들에 손을 얹고만 있으면 되었다. 약 2분 정도, 우리들은 언덕 위를 피겨 스케이팅이 8자를 그리듯이 왔다갔다 하며 겨우 조금 전의 카페 옆으로 나왔다. 나는 마리오가 왜 계단을 올라오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을 몇 시간 달려도 미끼통 속의 갯지렁이처럼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길에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한 자루의 빛줄기가 되어 달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3분간 달리고 나서 커다란 주유소가 있는 해안에서 산 쪽으로 돌아, 언덕 기슭을 따라 차를 달렸다. 주변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언덕 위에선 산쑥 향기가 진동했다. 여기저기에 노란 등불이 매달린 창이, 따고 나서 남겨진 오렌지처럼 보였다. 스치듯 지나가는 자동차가 차가운 빛으로 포도를 어루만지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안개가 자욱히 껴서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오가 어두운 뒷좌석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오른쪽의 불빛이 벨베디아 비치 클럽. 이 다음 도로가 라스 팔가스이고, 그 다음이 프리시마요. 그곳을 오른쪽으로 도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그리고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핸들을 잡은 채 어깨 너머로 말했다. 머리를 내밀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죽 감시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이 자동차는 어디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소. 당신이 쌍둥이라는 게 그들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우리들은 산골짜기 같은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또 위로 올라가고, 그리고 나서 잠시 뒤 또 한 번 내려갔다가 또 올라갔다. 마리오가 또 말했다. 이 다음 도로요. 사각 탑이 보이는 저택이 있소. 그곳을 돌아가는 거요. 당신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아닐 텐데. 농담이 아니오. 하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단지 이 근처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것뿐이오. 나는 사각으로 된 하얀 탑이 있는 저택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헤드라이트가 흐르고, 순간 카미노 데 라 코스타 라는 도로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우리들은 미완성의 가로등이 늘어서 있는 넓은 도로를 미끌어져 갔다. 보도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토지업자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던 것일 게다. 보도의 잡초 저쪽,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와 식용 개구리가 울고 있었다. 마리오의 자동차는 그만큼 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이다. 한 블럭에 한 채꼴로 집이 있었다. 얼마 뒤 두 블럭에 집 한 채가 되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집은 전혀 없어졌다. 하나둘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도 있었지만, 이 근처의 사람들은 닭과 함께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포장된 도로가 끝나고, 가뭄이 계속되어 콘크리트처럼 딱딱해진 진흙길로 들어갔다. 진흙길은 점차 좁아졌고 풀숲과 풀숲 사이를 완만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오른쪽 멀리로 벨베디아 비치 클럽의 불빛이 보였다. 산쑥의 강렬한 향기가 밤의 어둠 속에 자욱히 끼어 있었다. 얼마 뒤 하얀 페인트로 칠한 선반이 진흙길을 가로질러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리오가 다시 내 어깨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소곤거렸다. 저기서부터 건너편으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소. 하고 그는 말했다. 길이 너무 좁아 지나갈 수 없을 게요. 나는 차를 세우고 불을 줄이고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불을 전부 끄고 차에서 내렸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주위의 고요함이 너무나도 완벽하여 1.5 킬로나 떨어진 절벽 아래 가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잠시 뒤 또다시 귀뚜라미가 한 마리씩 울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에 부근 일대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로 온통 둘러싸였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저기 내려가서 상황을 봅시다. 하고 나는 뒷좌석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윗도리에서 권총의 손잡이를 만져보고 나갔다. 풀숲과 하얀 선반 사이는 자동차 안에서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넓게 뚫려 있었다. 풀숲이 넘어져 있었고, 진흙 속에 자동차의 바퀴자국이 나 있었다. 아마 따뜻한 날 밤에 젊은 남녀가 밀회를 하러 왔었던 것일 게다. 나는 선반 옆을 지나 나아갔다. 길은 내리막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멀리서 파도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길거리의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길은 풀숲으로 빙 둘러쳐져 있는 좁은 분지로 끝이 나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도 내가 온 길 외에는 없었다. 나는 분지의 중앙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조용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무슨 소리가 나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비치 클럽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성능 좋은 야간 망원경으로 보면 클럽의 창에서 잘 보일 것이 틀림없다. 자동차가 오가는 모습이나 차에서 내린 사람의 모습, 사람의 수도 잘 보일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성능좋은 야간 망원경으로 바라보면 상상 이상으로 자세하게 보이는 법이다. 나는 되돌아가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풀숲의 귀뚜라미가 큰소리로 울어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구부러진 길을 올라가 하얀 선반 옆을 지나갔다. 아직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아주 캄캄하다고도 할 수 없고 밝다고도 할 수 없는 회색의 희미한 불빛 속에 검은색 자동차가 어렴풋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자동차 옆으로 가서 운전대의 러닝보드에 한쪽 발을 얹었다. 시험해 본 것이오. 하고 나는 소리를 죽이고서, 그러나 뒷좌석의 마리오에게는 들리도록 말했다. 당신이 침묵하라는 말을 지킬지 시험해 본 거요. 내 등뒤에서 어떤 형체가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마리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풀숲 옆의 것을 보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누가 때렸는지 모르지만 내 머리를 뒤에서 내리친 사람이 있었다. 겨냥이 빗나갈 리는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는 등뒤에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항상 나중이 되어서야 생각나는 법이다. ┌────────────────────────────┐ │ 제 10 장 │ └────────────────────────────┘ 4분. 하고 목소리가 말했다. 5분, 6분인지도 모르지. 그들은 재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행동한 게 틀림없어. 그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잖아. 나는 눈을 뜨고서 차가운 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뒤로 젖혀져 누워 있었다. 몸에 힘이 없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좀더 길었는지도 모르지. 8분 정도 지났는지도 몰라. 그들은 자동차 옆의 풀숲 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마리오를 위협하는 거야 간단하지. 작은 손전등을 얼굴에 들이대면 공포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릴 거야. 아주 손쉬운 일이지. 주위는 더없이 조용했다. 나는 한쪽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픔이 후두부에서 발목까지 전해졌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차에 올라타고 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다른 사람은 또 풀숲에 숨어 있었지. 마리오가 혼자서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혹은 전화로 얘기했을 때, 수상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나는 양손을 땅에 대고 몸의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래, 그랬던 거야. 하고 목소리가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목소리였다. 나는 정신이 들 때부터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조용히 해, 이 멍청아. 하고 말한 뒤, 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멀리서 차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것은 귀뚜라미 울음소리, 청개구리의 꼬리를 길게 끄는 기묘한 울음소리였다. 그 어느 소리도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땅바닥에서 손을 떼고, 산쑥의 강한 향기를 털어버리려고 옷에다 손을 비볐다. 좋은 솜씨다. 더구나 너는 100달러를 이미 받았어. 내 손이 외투 속주머니를 더듬었다. 물론 하틀론 봉투는 없었다. 이번에는 윗도리의 속주머니를 더듬었다. 지갑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100달러의 지폐도 그대로 있을까? 어쩌면 없을 것이다. 왼쪽 갈비뼈에 무거운 것이 닿았다. 어깨에 매달린 권총이었다.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그들은 내 권총을 그대로 놔두었다. 칼로 찌르고 나서 눈을 감겨줄 만한 사람들이다. 나는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아직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모자를 들고 머리에 손을 댔다. 오랫동안 사용한 머리다. 조금 빙빙 돌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모자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다. 아직 머리는 사용할 수 있었다. 하여튼 앞으로 1년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머리다. 나는 오른손을 다시 한 번 땅바닥에 대고 왼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려고 했다. 겨우 눈앞으로 시계를 가져오자 야광 바늘이 10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온 것이 10시 8분. 마리오는 2분 정도 이야기를 했다. 우리들이 저택에서 나오는 데에 4분은 걸렸다. 시간은 실제로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 대단히 천천히 흘러간다. 결국 대단히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그랬었나? 내가 어떻게 하든 그런 것을 왜 내가 걱정을 하지? 좋아, 나보다 재빠른 사람이라면 더 시간이 안 걸렸을 것이다. 즉, 차가 출발한 것은 10시 15분이 된다. 여기까지 12분 걸렸으니까 10시 27분. 나는 차에서 내려 움푹 팬 땅으로 가서 8분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뒤통수를 얻어맞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10시 35분이다. 내가 쓰러지고, 얼굴을 땅바닥에 부딪치는 데에 1분은 걸렸을 것이다. 내 턱은 까져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볼 필요도 없었다. 내 턱인걸. 까진 것 정도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뭘 이끌어내고 싶은가? 좋아, 잠자코 있어. 생각 좀 하게 해줘. 시계는 10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 20분간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20분간 편안하게 자고 있는 동안에 일을 실패하여 8천 달러의 지폐를 잃었다.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분이면 군함을 침몰시킬 수도 있고, 비행기 3대나 4대 정도는 격추시킬 수도 있고, 사형을 두 번 집행할 수도 있다. 죽을 수도, 결혼할 수도, 취직할 수도, 이빨을 뺄 수도, 편도선을 수술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또 20분이면 아침 일찍 일어날 수도 있다. 나이트 클럽에서 물을 달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그것은 모르겠다. 아무튼 20분의 잠은 짧은 것이 아니다. 특히 야외의 차가운 밤이다. 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무릎을 대고 있었다. 산쑥의 향기가 견딜 수 없었다. 꿀을 찾는 들벌의 끈적끈적한 분비물이 있었다. 꿀은 달았다. 너무 달았다. 내 위장은 뒤집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목으로 넘어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식은 땀이 이마에 흘러내렸다. 나는 먼저 한쪽 다리에 힘을 주어 선 뒤, 양쪽 발을 힘껏 디뎠다. 몸이 휘청휘청했다. 다리를 절단당한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차는 이미 없었다. 진흙길이 완만한 언덕을 올라가, 카미노 데 라 코스타 가장자리의 포장된 도로에 연결되어 있었다. 왼쪽에 하얀 페인트로 칠한 난간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아득히 먼 저쪽에 밝게 보이고 있는 것은 베이 시티의 불빛일 것이다. 오른쪽 조금 가까운 곳에 보이는 것은 벨베디아 클럽의 불빛이고. 나는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서 만년필 형태의 손전등으로 땅을 비추었다. 지질은 붉은 옥토로, 건조할 때는 대단히 딱딱하지만 지금은 공기가 안개로 축축하기 때문에 타이어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무거운 보그 타이어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손전등 불빛으로 타이어의 흔적을 더듬어갔다. 약 3.5 미터 정도 나아가서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자동차는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타이어의 흔적이 계속되었다. 나는 조금 전의 움푹 팬 땅으로 내려갔다. 차는 그곳에 있었다. 광택 있는 차체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고, 테일 라이트(展燈)의 붉은 유리가 손전등 빛의 테두리에 떠올랐다. 불은 전부 꺼져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이를 덜덜 떨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나는 차 뒷문을 열고 손전등으로 비췄다. 아무도 없었다. 앞좌석도 비어 있었다. 스위치는 꺼져 있었다. 열쇠는 가느다란 쇠사슬로 록에 매달려 있었다. 거칠게 설친 흔적도 없고, 유리에도 상처가 없었다. 핏자국도 없었고 시체도 없었다. 나는 문을 닫고 차 주위를 조사해 봤지만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몸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긴장했다. 풀숲의 가장자리에서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나는 손전등을 껐다. 권총이 어느 사이엔가 내 손에 잡혀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간 뒤 아래로 내려갔다. 엔진소리로 미루어보아 소형차인 것 같았다. 헤드라이트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밝아졌다. 자동차 한 대가 진흙길을 3분의 2 정도 나아가서 멈추었다. 손전등 빛이 진흙길을 비추고 잠시 뒤 꺼졌나 싶더니 차는 비탈길을 내려갔다. 나는 권총을 쥔 채 마리오의 자동차 뒤에 몸을 웅크렸다. 자동차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쿠페였다. 작은 쿠페는 움푹 팬 땅으로 가서 방향을 바꾸었다. 헤드라이트가 마리오의 세단을 비추었다. 나는 당황하여 머리를 숙였다. 헤드라이트가 내 머리 위를 양쪽에 날이 달린 칼처럼 가로질렀다. 쿠페는 멈추었다. 엔진 소리가 그쳤다.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정적.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가벼운 발소리가 땅을 밟았다. 다시 정적.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도 그쳐버렸다. 그리고 한 줄기의 광선이 땅과 평행하게 흘렀다. 나는 발을 감추려고 했지만 감출 틈이 없었다. 광선은 내 발을 비추고 멈추었다. 정적. 광선이 내 발에서 올라가 세단 차체를 비추었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만돌린 선과 같은 긴장된 웃음소리였다. 이런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광선은 다시 차체 밑으로 돌아와 내 발을 비추고 멈추었다. 의외로 부드러운 스타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세요. 손을 들고 이쪽으로 나오는 거예요. 총으로 겨누고 있다는 걸 명심해요.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광선이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차체 위를 천천히 흘렀다. 목소리가 또 나를 찔렀다. 안 들려요? 난 10연발 권총을 갖고 있어요. 총쏘는 것도 자신이 있죠. 당신의 발은 두 발 모두 위험에 처해 있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권총을 그대로 들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손에서 떼어놓든지. 하고 나는 외쳤다. 나의 목소리는 닭장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울렸다. 대단한 말을 하는군요. 하고 그녀는 부드럽게 떨리는 목소리, 기분좋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목소리가 또다시 엄숙해졌다. 얌전하게 나오는 게 좋아요. 내가 셋을 셀 동안에. 내가 당신을 겨누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요? 복사뼈는 다치면 좀처럼 낫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평생 낫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전등 불빛을 바라보았다. 나는 두려울 때에는 떠들게 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안돼. 움직이지 말아요 -- 당신은 누구죠? 나는 차 앞쪽으로 돌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늘씬한 검은 머리에서 2미터 정도의 지점에 멈추어섰다. 나는 정면으로 손전등 빛을 받았다. 거기서부터는 다가오면 안돼요! 하고 그녀는 외쳤다. 당신은 누구죠? 어, 그 권총을 보여주시겠소? 그녀는 권총을 광선 속으로 내밀었다. 총구는 내 배를 향하고 있었다. 소형 권총이었다. 작은 콜트 자동권총이었다. 뭐요, 그것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장난감이잖소. 그 권총에 총알은 10발이 들어가지 않소. 6발이오. 그 권총으로 쏠 수 있는 것은 나비 정도입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요. 당신, 미쳤어요? 내가요? 실은 홀드 업 을 당했으니 아직 제정신이 아닌지도 모르겠소. 그거 -- 당신 차예요? 아니오. 당신은 누구죠? 당신은 그 손전등으로 대체 뭘 보고 있었소? 나는 당신 말에 대답하는 게 아니라 질문하는 거예요. 내가 보고 있었던 것은 풀숲에서 자고 있는 남자예요. 금발의 웨이브가 져 있는? 아니에요. 틀렸어요. 하고 그녀는 매우 침착하게 말했다. 원래는 웨이브가 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허를 찔린 모습이었다. 예상치 않은 대답이었다. 생각이 나지 않소. 단지 타이어의 흔적만을 더듬어 이곳으로 내려왔기 때문에......상처는 심했소? 나는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작은 권총이 꿈틀하고 움직이고 플래시 라이트의 빛이 정지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당신 친구는 죽었어요. 나는 잠시 아무 말 않고 나서 말했다. 함께 가봅시다. 그전에 여기서 당신이 누군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얘기해 주세요. 하고 그녀는 시원시원한 어조로 말했다. 말로우. 필립 말로우. 탐정이오. 사립탐정. 그럴지도 모르죠. 증명해 보세요. 지갑을 꺼내겠소. 그만둬요. 손을 움직이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그는 죽지 않았는지도 모르오. 죽었어요. 머리가 엉망이었어요. 그보다 당신 얘기를 빨리 들려주세요. 아니오. 죽지 않았는지도 모르오. 먼저 가보는 것이 좋겠소. 나는 한쪽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움직이면 쏘겠어요. 하고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다시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손전등 빛이 춤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같았다. 상당히 생명을 소홀히 하는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좋아요. 함께 보러 가시죠. 당신이 앞으로 걸어가요. 당신은 병자 같군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 나를 쏘았을 테지. 죽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 눈 아래가 조금 검어졌소. 익살스런 말도 할 줄 아는군요 -- 사체저장소의 파수꾼 같아요. 하고 그녀는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손전등 빛이 내 몸에서 흘러나가 내 눈앞의 땅을 비추었다. 나는 작은 쿠페 옆을 지나갔다. 보통 소형차로 안개 속의 별빛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구부러져 있는 진흙길을 올라갔다. 여자의 발소리가 내 바로 뒤에서 계속되었다. 우리들의 발소리와 그녀의 숨결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숨소리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 │ 제 11 장 │ └────────────────────────────┘ 언덕길을 반쯤 올라간 오른쪽에 마리오의 발이 있었다. 그녀가 손전등으로 비추었더니 그의 몸 전체가 보였다. 내려갈 때에는 몸을 구부리고 있었고, 1/4 정도 크기의 빛으로 타이어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손전등을 빌려주시오. 하고 말하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무 말 않고 손전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몸을 구부렸다. 땅은 차갑고 축축했다. 마리오는 풀숲 가장자리에 뒤로 젖혀져 위를 본 채 길게 누워 있었다. 옷만 그곳에 놓여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얼굴과는 달라져 있었다. 아름다운 금발이 흠뻑 피에 젖어 있었고, 웨이브는 사라지고 없었다. 원시시대의 점토와 같은 회색의 질척질척한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여자는 내 등뒤에서 큰 호흡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리오의 얼굴을 전등으로 비추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이었다. 한쪽 손이 내팽개쳐지고 손가락이 구부러져 있었다. 쓰러질 때에 몸이 회전된 듯 외투가 몸에 깔리고 꼬여 있었다. 무릎은 엇갈려 있었으며, 입 주위에 검은 기름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불빛을 비춰주시겠소? 하고 손전등을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나는 말했다. 기분이 나쁘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녀는 손전등을 받아들더니 아무 말도 않은 채 살인사건반의 경관처럼 태연하게 시체에 불빛을 비추었다. 나는 만년필 형태의 손전등을 꺼내어 시체를 움직이지 않도록 하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안돼요. 하고 그녀는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경찰이 올 때까지는 손을 대서는 안돼요. 알고 있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경찰이 온다 하더라도 본서 직원들이 올 때까지는 손을 댈 수 없소. 본서의 경찰도 검시가 끝나고, 현장사진을 찍고 지문을 찍을 때까지는 손을 댈 수 없고. 본서에서 경찰이 이곳까지 와서 일을 끝마치는 데는 두 시간은 걸리게 됩니다. 그렇군요.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어차피 당신 생각대로 하겠죠. 그렇지만 이렇게 머리를 엉망으로 해놓다니 몹시 원한을 산 모양이죠? 원한에 의한 게 아닐 겁니다. 이런 짓 하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나로서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리오의 옷을 뒤졌다. 바지 한쪽 주머니에 은화와 지폐가 들어 있었고, 또 한쪽 주머니에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열쇠 케이스와 작은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뒷주머니에는 지폐, 보험증서, 운전면허증 등이 들어 있는 지갑이 있었다. 윗도리의 속주머니에는 금도금된 샤프 펜슬이 꽂혀 있었고, 사용하던 성냥과 마른 가루 눈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모시 손수건이 나왔다. 본 기억이 있는 갈색 황금빛 필터가 달린 담배가 들어 있었다. 에나멜 제품인 담배 케이스도 들어 있었다. 남미 몬테비데오의 제품이었다. 또 한쪽의 속주머니에는 본 적이 없는 담배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모조 대모갑 테두리에 명주를 깔았고 양쪽에 용의 자수가 놓여져 있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어도 모를 만큼 얇은 것이었다. 그 속에는 길고 가느다란 러시아 담배가 세 개비 들어 있었다. 그 중 한 개비를 뽑아보았다. 오래 된 것인 듯 바삭바삭하게 마르고 감긴 것이 나빴다. 물부리가 붙어 있는 담배였다. 이 담배는 피우지 않았소. 하고 나는 어깨 너머로 말했다. 아마 여자에게 권하기 위해 갖고 있었던 것일 게요. 여자친구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녀는 내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들여다보았다. 모르는 남자예요? 오늘밤에 처음 만났을 뿐이오. 나는 그의 보디가드로 고용되었던 거요. 훌륭한 보디가드였군요. 나는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하고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정도 모르고 이런 말을 해서. 그거 대마초가 아닐까요? 보여주실 수 있어요? 나는 자수가 놓여 있는 담배 케이스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내 친구들 중에도 대마초를 피우는 남자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이볼을 세 잔 마시고 마리화나를 세 개비 피우면, 잠을 깨우는 데에 스패너로 세게 때려야만 해요. 전등을 움직이지 마시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얼마 뒤 그녀는 나에게 담배 케이스를 돌려주었다. 나는 담배 케이스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결국 마리오의 몸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일어서서 속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5장의 20달러짜리 지폐는 그대로 있었다. 통이 큰 놈들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잔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나는 지갑을 넣고, 만년필 형태의 손전등을 주머니에 넣은 뒤 느닷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권총을 빼앗았다. 그녀는 손전등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 손전등을 주워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는 바로 껐다. 난폭한 짓은 하지 말아요. 하고 긴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죽였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의 차갑고 조용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또한 침착한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나는 다시 전등을 그녀의 얼굴에 비추었다. 그녀의 눈이 깜박였다. 커다란 눈이었다. 작고 생기 있고 긴장된 얼굴이었다. 피부 속의 뼈가 느껴지는 강한 얼굴이었다. 당신의 머리카락은 빨갛군. 하고 나는 말했다. 아일랜드 계로군요. 성은 리어든이에요.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거죠? 전등을 꺼주세요. 머리는 빨갛지는 않고 다갈색이에요. 나는 전등을 껐다. 이름은? 앤. 애니가 아니에요. 여긴 뭐 하러 왔소? 아무 생각 없이 드라이브하고 있었어요. 난 혼자 살고 있는 고아예요. 이 근방은 잘 알고 있는데, 드라이브하고 있는 중에 불빛이 깜박이고 있지 않겠어요. 밀회라고 생각하기에는 오늘밤은 너무 춥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 남녀였다면 불을 켜지는 않았을 거 아니겠어요? 나였다면 불을 켜지 않겠지. 그러나 대단히 위험한 일을 한 것 아니오? 당신이었어도 똑같았을 거예요. 난 권총을 갖고 있었고, 조금도 무섭지 않았어요. 이쪽으로 와서는 안된다는 법률도 없을 테니까요. 음. 그러나 자기방어라고 하는 법률은 있소 -- 당신의 권총을 돌려주겠소. 오늘밤은 내가 졌소. 권총 허가증을 갖고 있을 테죠? 나는 총 손잡이를 앞으로 하여 권총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권총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인간이란 이상한 일을 하는 건가 봐요. 난 원고를 쓰고 있어요. 돈벌이가 됩니까? 대단한 것은 아니에요 -- 당신이 찾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죠? 주머니를 뒤지기도 하고...... 별로 이렇다 할 목표는 없었소. 나는 항상 어딘가를 해맨다오. 우리들은 어떤 여성을 위해 도둑맞은 보석을 되사려고 8천 달러의 지폐 꾸러미를 갖고 이곳에 와 있었던 거요. 그리고 멋지게 감쪽같이 속은 겁니다. 그러나 왜 이 남자를 죽였는지 그걸 난 모르겠소.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저항할 만한 남자가 아니었는데. 게다가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움푹 팬 땅으로 내려가 있었고, 그는 차 안에 있었죠. 우리들은 움푹 팬 땅으로 차를 타고 들어가도록 지시받았지만, 길이 좁아 지나갈 수 없어서 나만 움푹 팬 땅으로 내려갔던 거요. 그 사이에 그를 해치운 거지. 그리고 나서 그들 중 하나가 차에 올라탔다가 나를 공격한 겁니다. 나는 물론 그가 차에 타고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서...... 그럼 당신이 실패했다고 할 수도 없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납득이 안 가는 점이 있었소.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돈이 탐났던 거요. 나는 이제부터 경찰서에 가서 기름을 짜야만 하는데, 몬테마 비스타까지 태워주지 않겠소? 그곳에 내 차를 놓고왔거든. 이 남자가 그곳에 살고 있소. 그거야 쉬운 일이지만, 누군가 남아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내 차를 타고 가든가 --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경찰을 부르러 가도 좋아요.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12시에 가까웠다. 아니오. 안되겠소. 어째서요? 어째선지는 잘 모르겠소. 다만 그런 느낌이 들었소. 이 사건은 나 혼자 해결하고 싶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움푹 팬 땅으로 내려가서 그녀의 작은 쿠페에 탔다. 그녀는 헤드라이트를 끈 채 차의 방향을 바꿔 진흙길을 올라가 하얀 선반 옆을 빠져나가서 한 블럭 정도 나아간 뒤 헤드라이트를 켰다. 나는 머리가 아팠다. 우리들은 첫번째 집이 있는 지점으로 갈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먼저 말을 한 것은 그녀였다. 술이라도 마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우리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어요? 경찰서에는 우리집에서 전화를 걸면 될 테고, 경찰은 어차피 웨스트 로스엔젤스에서 오니까요. 이 근방에는 소방서밖에 없거든요. 좋으시다면 해안으로 가주시겠소? 나만의 사건으로 하고 싶소. 아니, 왜죠? 난 경찰 같은 건 무섭지 않아요. 내가 말하는 게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소. 잠시 혼자 있으면서 생각 좀 하고 싶소. 그래요 --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우리들은 해안을 따라 길거리에 있는 주유소에서 북쪽으로 향해 달려서 몬테마 비스타의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카페는 유람선처럼 밝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내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해 주시오. 두뇌가 필요한 일이라면 불러도 소용없겠지만...... 그녀는 명함을 손가락으로 장난하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베이 시티의 전화번호부에 이름이 나와 있어요. 25번가 819번지죠. 난 당신 일에 쓸데없는 말참견을 하지 않았으니까 칭찬받아도 좋을 거예요. 게다가 당신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어요. 그녀는 차를 돌려 길을 달렸다. 나는 테일 라이트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곳에 선 채 바라보았다. 나는 도로 옆에 있는 카페 옆을 지나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탔다. 바로 눈앞이 술집이었다. 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개구리처럼 완전히 차가워진 몸과 1달러짜리 새 지폐 뒷면처럼 새파란 얼굴로 웨스트 로스엔젤레스 경찰서에 차를 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 │ 제 12 장 │ └────────────────────────────┘ 그리고 나서 한 시간 반의 시간이 지나갔다. 시체는 수용되고, 현장 부근의 땅이 조사되어 나는 같은 말을 서너 번 되풀이해야 했다. 우리들 네 사람은 웨스트 로스엔젤레스 경찰서의 당직 경감 방에 있었다. 유치장의 취객이 이따금씩 무슨 말인가를 외치고 있을 뿐 경찰서 건물은 아주 조용했다. 리플렉터 안쪽의 강한 전등빛이 넓적한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고, 지금은 그 주인과 똑같이 죽은 것으로 보이는 린제이 마리오의 주머니에 있었던 물건이 펼쳐져 있었다. 나와 마주보고 있는 남자는 로스엔젤레스 경찰서의 살인과에서 온 랜들이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과 차가운 눈을 가진 50세 가량의 마른 남자였다. 검은 반점 모양이 있는 담홍색 넥타이를 하고 있었고. 그 반점이 내 눈앞에서 끊임없이 춤추고 있었다. 그의 뒤에 보디가드 같은 살찐 남자가 두 명 서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내 한쪽 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맛이 없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가 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80살을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랜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얘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소. 마리오라고 하는 남자는 돈의 지불에 대해서 계속 교섭했을 게 틀림없소. 그런데도 바야흐로 일이 벌어지려는 날에 갑자기 전혀 면식도 없는 남자를 보디가드로 부탁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소? 보디가드라고 하는 뜻은 아니오.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권총을 갖고 있는 것도 마리오는 알지 못했소. 단지 함께 가 달라고만 했을 뿐이오.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나요?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들었다고 했는데, 나중엔 전화번호부에서 적당히 골랐다고 했소. 랜들은 테이블 위의 물건을 휘저어 명함 한 장을 찾아내어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하듯 내 앞에 내던졌다. 그러나 그 남자는 당신의 명함을 갖고 있었소. 분명히 내 명함이었다. 다른 명함과 함께 지갑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지갑을 조사해 봤을 때는 명함을 한 장씩 조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오가 갖고 있는 명함치고는 조금 더러웠다. 구석에 둥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별로 이상할 것 없소. 나는 기회만 있으면 아무에게나 명함을 내밀어 대니까...... 마리오는 당신에게 돈을 갖고 가라고 했다죠? 하고 랜들이 말했다. 그것도 8천 달러나. 상당히 당신을 믿은 사람이로군. 나는 담배연기를 천정에 내뿜었다. 전등빛에 눈이 아팠다. 뒷골이 욱신욱신 쑤셨다. 그 8천 달러는 이제 갖고 있지 않소. 당연하지. 만일 그 돈을 갖고 있었다면 당신이 여기에 올 리가 없으니까. 돈을 갖고 있는데도 여기에 오게 될까?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억지로 만든 웃음이었다. 8천 달러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지만 --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을 때려죽이는 일이었다면 나는 두 대 이상은 때리지 않았을 거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있는 형사 한 사람이 휴지통에 침을 뱉었다.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오. 아마추어의 솜씨같이 보이거든. 그러나 그렇게 꾸민 것인지도 모르지. 그 돈은 마리오의 돈이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모르겠소. 그의 돈은 아니라고 했지만, 확실하다는 뜻은 아니오. 그가 강도를 만난 여자가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마리오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지만...... 하고 랜들은 천천히 말했다. 그가 8천 달러를 훔치려 했는지도 모르오. 뭐요? 나는 놀랐다. 어쩌면 놀란 듯한 표정을 보였을 것이다. 랜들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당신은 지폐를 섶습니까? 물론 세지 않았소. 그는 단지 봉투를 넘겨주었을 뿐이오. 돈이 들어 있었고, 상당한 부피였지요. 그는 8천 달러라고 했소. 내가 등장하기 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을 그가 훔칠 필요는 없잖소? 랜들은 천정 구석을 바라보고는 입술을 비뚤어지게 했다. 그리고는 어깨를 흔들었다. 한 번 더 복습을 합시다. 하고 그가 말했다. 마리오와 여자를 습격해서 목걸이를 빼앗고 돈으로 흥정하려는 놈들이 있었는데, 그놈들은 목걸이의 값어치로 미루어 보아 너무 싼 가격을 매겼소. 그 돈을 마리오가 지불하기로 했고, 그는 자기 혼자서 할 계획이었소. 상대방의 지시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보통 상황이라면 이럴 경우 귀찮은 조건을 붙이는 법이지. 그러나 마리오는 당신을 데려가도 지장없다고 생각했소. 당신들은 조직적인 보석 갱을 상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상대가 말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소. 마리오는 두려워져서 누군가를 데려가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동행에 선택되었소. 그렇지만 당신과는 전혀 면식도 없었소. 누군가에게서 받은 명함으로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었지. 그리고 막상 나가려고 할 때에 마리오는 당신에게 돈을 갖고 가게 하고 자신은 뒷좌석에 숨어서 당신에게 말을 시키기로 했소. 당신의 의견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당신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만일 당신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그가 말을 꺼냈을 것이오. 그러나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소. 랜들은 다시 어깨를 흔들었다. 그것이 그의 연극이었던 거요. 전화가 걸려오고 장소가 결정되었소. 마리오만이 알고 있는 장소였소. 당신은 전화를 듣지 않았소. 가보았더니 아무도 없었고, 움푹 팬 땅으로 내려가라고 했지만 대형차로는 지나갈 수가 없었소. 그래서 당신이 움푹 팬 땅으로 가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소. 잠시 기다려 보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와 보니 차 안에는 당신 머리를 때린 놈이 있었소. 그리고 어떻게 되었소? 만일 마리오가 그 돈을 노리고 있고, 당신을 미끼로 하려 했다면 그는 꾸며놓은 계획대로 행동한 게 되는 거요. 꽤 이치에 맞는군. 하고 나는 말했다. 마리오는 나를 후려갈긴 뒤 돈을 되찾고 나서 나쁜 짓을 했다고 후회하면서 스스로 자기 머리를 엉망으로 부숴버렸다는 거군요. 우선 돈을 풀숲 밑에 묻고 나서. 랜들은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공범자가 있었소. 당신들 두 사람을 때려눕혀 놓고 공범자가 돈을 갖고 도망가는 계획이었소. 그렇지만 그는 마리오를 배신하고 죽여버렸소. 당신은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죽일 필요가 없었고. 나는 훌륭한 생각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담배를 속 유리가 없어진 목재 틀로 된 재떨이에 비벼껐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치에 맞지 않소? 하고 랜들이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소. 그러나 단 한 가지 모순되는 점이 있소. 나는 차 안에서 맞았소. 아무래도 마리오를 의심하게만 되어 있는 거지. 그의 입장만 나빠지는 것 아니오? 그런 건 없소. 하고 랜들이 말했다. 당신은 권총을 갖고 있는 것을 마리오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당신이 권총을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때문에 당신이 아직 그를 의심하지 않는 동안에 당신을 처치해 버리려고 생각했던 거요. 차 안에서 맞았다고 하여 마리오가 때렸다고 하는 증거는 없으니까. 그렇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이 이겼다고 해둡시다. 돈은 마리오의것이 아니며, 그가 그 돈을 훔치려 했다. 그리고 공범자가 있었다고 가정하면 당신 얘기는 훌륭하게 성립됩니다. 즉, 마리오의 계획에서는 우리 두 사람의 머리에 혹을 만든 뒤 숨을 돌리고 돈을 도둑맞아 유감스럽다고 하고 나선 그대로 이 사건을 잊게 해버리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걸 테죠? 그는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겠죠? 그에게도 방법은 좋았는데. 그런 거요. 하고 랜들이 교활하게 웃었다. 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소.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 사실을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소.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고, 보석 갱 중 한 녀석이 그에게 얼굴을 기억하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당신은 이상한 소리나 말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소? 그 남자라면 목을 졸라 잠자코 있게 해버리는 것은 문제없소. 무서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는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풀숲에 숨어서 내가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상당한 거리였소. 아마 100피트(약 30-)는 되었을걸. 내가 없어지자 그들은 차를 들여다보고서는 마리오가 있는 것을 발견했소. 권총을 들이대고 차에서 내리게 했소. 그리고 그는 머리를 얻어맞았소. 그렇지만 그가 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의 표정을 통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누군가를 알아차린 듯이 그들은 여기게 됐소. 어둠 속에서 말이오? 그렇소. 틀림없소. 마음에 걸리는 소리라는 게 있는 법이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소. 랜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조직적인 보석 갱이라면 마구 살인하지는 않소.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을 반짝였다. 그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하이잭(납치극)이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차를 어디에 세워두었습니까? 몬테마 비스타의 주차장입니다. 랜들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뒤에 있는 두 형사도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유치장의 술 주정꾼이 요들을 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부를 마음을 잃게 했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차도까지 걸어갔소. 하고 나는 말했다. 마침 지나가던 차를 세웠더니 젊은 여자가 혼자 타고 있었소. 그래서 몬테마 비스타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 거요. 이상한 여자로군. 하고 랜들이 말했다. 밤도 늦고 길도 호젓한데 잘도 세워주었군. 그런 여자도 있더군요. 이름은 물어보지 않았지만 얌전한 여자 같았소. 그들이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생각했다. 작은 차였소. 하고 나는 말했다. 시보레 쿠페였소. 번호는 기억하지 못하고. 놀랍군요. 차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고 형사가 말했다. 또 쓰레기통에 침을 뱉었다. 랜들은 몸을 내밀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사실을 숨기고 있소. 이 사건을 당신이 해결하여 선전하려고 할 테지. 나는 당신의 진술이 마음에 들지 않소. 다시 한 번 고쳐 생각하기 바라오. 내일이 되면 진술서를 받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이것만은 기억해 두시오. 이것은 살인사건이오. 경찰의 일이란 말이오. 조금 도움이 되더라도 당신의 협조는 구하지 않겠소. 당신은 사실만을 얘기해 주면 되는 거요, 알았소? 잘 알았습니다. 이젠 돌아가도 좋겠습니까? 머리가 빙빙 돌아서요. 돌아가시오. 나는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네 걸음 정도 걸어갔을 때 랜들이 헛기침을 하며 별 관심 없는 듯 말했다. 또 하나 참고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 마리오는 어떤 담배를 피웠소? 나는 뒤돌아보고 말했다. 갈색 담배요. 남미 것일 겝니다. 프랑스제 에나멜 담배 케이스에 들어 있었소. 그는 테이블에서 명주의 자수가 있는 담배 케이스를 집어들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본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중이오. 전에 본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었던 것을. 왜 그러죠? 시체에 손을 대지 않았을 테지? 나는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주머니를 뒤져보았소. 그때에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것이었소. 그러나 직업상 호기심에서 조사했을 뿐 아무것도 숨긴 것은 없소. 어쨌든 마리오는 내게 일을 의뢰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랜들은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세 개비의 담배가 모두 없어졌다. 나는 이를 꽉 물고서 표정을 변하지 않게 하려고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리오는 이 케이스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까? 피우지 않았소. 랜들은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빈 케이스요. 그러나 당신도 알고 있듯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소. 가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 현미경으로 조사하고 있소.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마초인 것 같소. 만일 그렇다면 오늘밤 두 개비 정도는 피웠을 거요. 흥분제가 필요했을 테니까. 랜들은 담배 케이스를 닫고 테이블에 놓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오. 한 번 더 말해 두겠소.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지 마시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안개는 개이고 검은 비로드 같은 하늘에 별이 크롬으로 만든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심야의 거리를 달렸다.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술집은 닫혀 있었다. ┌────────────────────────────┐ │ 제 13 장 │ └────────────────────────────┘ 다음날 아침 잠이 깼을 때는 9시였다. 커피를 블랙으로 세 잔 마시고 냉수로 뒤통수를 씻고 나서 아파트 문에 내던져져 있던 조간을 대강 훑어보았다. 큰 사슴 머로이에 관한 일은 작게 실려 있었지만, 널티의 이름은 없었다. 린제이 마리오에 대해서는 1행의 기사도 없었다. 사교계 뉴스로 혹시 뭔가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옷을 입고 부드러운 삶은 계란을 두 개 먹고 네 잔째의 커피를 마시며 거울을 보았다. 아직 눈 밑에 기미가 남아 있었다. 나가려고 문을 열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널티였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말로우 씨요? 그렇소. 붙잡았나요? 붙잡았소. 내가 말한 대로 벤추라 가도에서. 대대적인 범인 체포였다고 합디다. 198cm의 남자가 차에 위스키를 다섯 병 쌓아놓고서, 또 한 병의 위스키를 마시면서 110 킬로미터가 넘는 스피드로 달렸소. 우리는 시골 경찰 겨우 둘이 권총과 곤봉으로 그와 맞서야만 했었소. 그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나는 뭔가 장단을 맞추려고 생각했지만 좋은 말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널티는 얘기를 계속했다. 그 몸집이 큰 남자는 경찰을 두 명이나 때려눕히고 경찰차의 무전기를 시궁창에 던져버리고 나서 위스키를 마시고 잠들어 버렸다는 거요. 그 동안에 경찰이 겨우 일어나서 몸집이 큰 그 남자의 머리를 곤봉으로 때린 뒤 수갑을 채운 겁니다. 지금 유치장에 처박혀 있소. 만취운전죄, 차중음주죄, 공무집행방해죄, 공유물훼손죄, 탈옥미수죄, 질서문란죄, 도로상 주차위반죄로 말이오. 어떻소, 재미있지 않소? 하나도 재미없군요. 그런데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은 것 아니오? 사람이 틀렸소. 하고 널티는 괴로운 듯이 말했다 헤메트에 살고 있는 스토야노프스키라고 하는 남자인데, 생 잭 터널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였소. 부인과 네 아이들이 있소. 부인은 화가 났지. 그런데 당신은 단서가 있었소? 없소. 머리가 아픈 것뿐이오. 만일 시간이 있으면 -- 아니오, 고맙소. 그 살인사건의 재판은 언제 있는 거죠? 당신에게는 볼일이 없을 텐데. 널티는 차갑게 웃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파트를 나와 할리우드 대로에 있는 사무실로 차를 달렸다. 차를 주차장에 넣어놓고 사무실로 올라가 항상 열쇠를 잠그지 않는 대합실 문을 열었다. 앤 리어든이 읽고 있던 잡지에서 눈을 떼며 미소를 지었다. 갈색 수츠에 목이 높은 하얀 스웨터. 점심때 보니까 머리는 순수한 갈색으로, 위스키 잔처럼 작은 산에 일주일분의 세탁물을 얹을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45도 각도로 쓰고 있었으므로 차양이 거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자는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아니, 그 때문에 어울렸는지도 모른다. 나이는 대략 28세 정도. 이마는 약간 좁은 데다 코는 작고, 윗입술이 아주 얇고 길었으며 입은 너무 컸다. 회색을 띤 파란 눈. 애교 있는 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용모였다. 사무실이 몇 시에 문을 여는지 몰라서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오늘은 비서가 쉬는 날인가 보죠? 비서는 없소. 나는 안쪽 방문을 열고 바깥쪽 문의 벨 스위치를 넣었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녀는 마른 백단향 냄새를 풍기며 내 앞을 지나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 녹색의 서류 케이스와 초라하게 색이 벗겨진 융단과, 먼지를 뒤집어쓴 가구와, 그다지 청결하지 않은 망사 커튼을 둘러보았다. 전화를 받으러 나올 사람이 필요하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게다가 커튼도 가끔 세탁해야겠어요. 성 스위진 제(7월 15일. 이 날부터 40일간 청명한 날이 계속된다고 한다)에 나갈 계획이오. 앉으시오. 조금은 일을 손해볼지도 모르오. 그러나 세탁은 할 수 없소. 그래요? 하고 그녀는 흥미가 없는 듯이 말하고 나서 커다란 가죽 핸드백을 책상 유리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책상 위의 담배를 한 개비 집었다. 나는 종이성냥으로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손가락을 데었다. 그녀는 담배연기를 내뿜고, 그 연기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치아였다. 오늘 아침, 내가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겠죠. 머리는 좀 어때요? 아직 멍합니다. 당신이 오리라고는 전연 예기치 못했소. 경찰서에서 혼나셨죠? 여느 때와 같았소. 내가 방해가 되지 않았나요? 아니오. 그렇지만 환영하고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나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그녀는 별로 싫은 얼굴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파이프를 피우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법인데 -- 나는 당신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소. 왜 그런지는 모르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나와는 관계없는 사건이 되어버렸소. 나는 어제 괴로운 일을 당해 술을 마시고 잠들어 버렸고, 지금은 경찰의 일이오. 경찰에서는 내게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했소. 당신이 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만일 내가 아무 생각없이 그곳으로 나갔다고 말하더라도 경찰에선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나는 경찰에 불려가서 지독한 일을 당하겠죠. 내 기분을 어떻게 당신이 알지? 탐정도 사람이에요. 원래는 사람이었지. 오늘 아침은 얄궂게 되었군요. 하며 그녀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을? 돈벌이가 되나요? 그다지 훌륭한 사무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쓸데없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좋을는지 모르겠군요. 말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우리들 두 사람 다 관련되어 있어요. 당신은 왜 나를 감싸고 있는 거죠? 내 머리카락이 빨갛고 몸매가 마음에 들기 때문인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명랑하게 웃었다. 그 목걸이의 주인을 알고 싶지 않으세요? 내 몸이 긴장되었다. 순간적으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았다. 나는 목걸이에 대한 일을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성냥을 집어 파이프에 불을 다시 붙였다. 별로 알고 싶지 않소. 왜 그럽니까? 난 알고 있어요. 그래요? 어떻게 하면 당신은 얘기가 듣고 싶어지죠? 발가락이라도 간지럽혀야 하나요? 그랬군.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그것을 말하러 온 거군. 그녀의 파란 눈이 커지고 젖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어깨를 흔들어 입술을 벌리며 대담하게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런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렇지만 내 몸에는 사냥개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경찰이었죠. 클리프 리어든이라고 하는데, 7년간 베이 시티의 경찰서장으로 일했어요. 기억하고 있소.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해고되었어요.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실망하셨답니다. 도박장의 배후인물인 레어드 브루넷이 자기 부하를 시장으로 당선시켰을 때 기록과로 좌천되자 곧 사표를 내고 2년 뒤 돌아가셨죠. 그리고 나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그 이후 2년간 저 혼자 살고 있어요. 그거 안됐군. 그녀는 담배를 비벼껐다. 담배꽁초에는 입술 연지가 묻어 있지 않았다. 내가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버지 대신에 도와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사실은 어제 저녁 당신에게 말했어야 했죠. 오늘 아침 누가 그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나서 랜들 경감님을 만나고 왔어요. 내가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당신에 대해서 화를 내더군요. 그럴 거요. 그러나 사실을 말한들 믿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일어서서 창문을 열었다. 도로의 잡음이 들려왔다. 머리가 무거웠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위스키를 꺼내어 잔에 따랐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내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전혀 융통성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나는 위스키를 다 마셔버린 뒤 병을 서랍에 넣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에게는 권하지 않는군요. 하고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아직 11시밖에 안되었고, 게다가 당신은 마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거 겉치레 인사죠? 우리는 동료잖소. 그녀는 내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나도 의미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위스키를 마시고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책상 유리를 장갑으로 닦았다. 조수를 고용할 생각은 없으세요? 이따금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고용할 생각 없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리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용건만 말하고 나서 돌아가겠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목걸이라면 박물관 물건이기 때문에 보석상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타고 있는 성냥을 손으로 가리고 불꽃이 손가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성냥을 천천히 불어 끄고 재떨이에 버렸다. 나는 목걸이에 관한 건 당신에게 말한 기억이 없소. 랜들 경감님에게서 들었어요. 입이 가벼운 친구로군. 아버지의 친구인걸요. 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나에게 말하고 있잖소. 당신은 이미 알고 있잖아요. 어리석군요.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도중에서 손 올리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무릎으로 내리더니 눈을 크게 반짝였다. 훌륭한 연극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알고 계셨죠? 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다이아몬드였소. 그 외에 팔찌가 하나, 귀걸이, 반지가 세 개, 그 중 하나는 에메랄드였소. 소용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시치미를 떼도...... 비취 보석이오. 대단히 귀한 것으로 6캐럿짜리 세공을 한 구슬이 60개 연결되어 있소. 8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거요. 그런 아름다운 갈색 눈을 하고 있으면서 마음속을 떠보기도 하는 걸 보니 당신은 지독한 사람이군요. 그런데 목걸이는 누구의 것이오? 어떻게 찾았소? 간단했어요. 가장 큰 보석상으로 가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블럭으로 가서 지배인에게 물었어요. 잡지사 기자라고 하고 물어봤죠. 귀한 보석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그는 당신의 빨간 머리와 균형잡힌 몸매를 믿었겠군. 그녀는 이마까지 새빨갛게 되었다. 하여튼 가르쳐 주었어요. 베이 시티의 교외 저택에 사는 돈많은 부인의 것이래요. 루인 로크리지 그레일 부인이라고 해요. 남편은 은행인가 뭔가에 투자하고 있고, 2천만 달러 정도의 재산이 있다고 했어요. 비벌리 힐스에서 KFDK라고 하는 방송국을 경영하고 있을 때, 거기서 일하던 부인을 알게 되어 5년 전에 결혼했대요. 부인은 눈이 번쩍 뜨일 만치 아름다운 금발이라고 해요. 그레일 씨는 노인이며, 간장병으로 항상 약을 복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인은 늘 밖으로 놀러다니고 있다나 봐요. 블럭의 지배인이라고 하는 남자도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하나 보군. 그에게서 전부 들은 것이 아니에요. 멍청하군요. 그 부인에 대한 것은 기디 가티 애버가스트에게 들었어요. 나는 또다시 위스키 병을 꺼냈다. 탐정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처럼 술주정뱅이 탐정이 되는 건 아니겠죠? 된다 해도 좋지 않소? 그들은 항상 사건을 해결하잖소. 얘기나 계속하시오. 기디 가티는 크로니클 신문 사교란의 기자예요. 몸무게는 90 킬로 정도이고, 히틀러 수염을 기르고 있어요. 여기 그레일 부인의 사진을 받아왔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사진을 꺼내어 내 앞에 내놓았다. 틀림없이 금발머리였다. 목사가 교회 창문에 구멍을 뚫고 뛰쳐나가고 싶을 만한 금발이었다. 검은색과 흰색 옷을 입었으며, 옷에 어울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약간 거만하게 보이지만 남자가 원하는 것은 모두 갖추고 있는 여자였다. 나이는 30세 정도였다. 나는 위스키를 따르고서 단숨에 죽 들이켰다. 치워주시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변하게 돼. 당신에게 드리려고 받아온 거예요. 만나고 싶겠죠? 나는 다시 사진을 바라보고 나서 압지 밑으로 집어넣었다. 오늘밤 11시. 어떻겠소?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당신을 만난다고 했어요. 일 관계로. 괜찮죠? 처음엔 일이라도 좋소. 그녀는 짜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나는 농담을 그만두고 진지한 얼굴을 보였다. 그 부인은 무슨 용건으로 나를 만나겠다는 겁니까? 물론 목걸이에 대한 거죠. 좀처럼 그녀에게 전해 주지 않아서 겨우 전화통화가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술에 취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말씀은 비서에게 해주세요. 하고 말한 뒤, 비취 목걸이를 갖고 계시다고 하던데요? 하고 말을 꺼냈죠. 잠시 잠자코 있더니, 갖고 있습니다. 하기에, 그럼, 보여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하자, 무엇 때문에 보자는 거죠? 하고 되묻는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필립 말로우의 대리인인데요. 했더니, 그게 어떻다는 거죠? 하는 거예요. 알았소. 요즈음 사교계에선 저질 언어가 유행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몰라요. 하고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사교계의 여자 중에 무뢰한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비밀전화는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쓸데없는 참견 아닌가요? 하더군요. 그렇지만 전화를 끊으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비취를 생각하고 있었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던 거요. 아니면 랜들에게서 사건에 대해 들었는지도 모르고. 리어든 양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랜들은 목걸이의 주인을 알지 못했어요. 내가 알고 있는 걸 보고 놀랐었는걸요. 조만간 놀라지 않게 될 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다음은? 목걸이를 되찾고 싶지는 않으세요? 하고 말했더니 부인도 놀라서 비밀전화를 가르쳐 주더군요. 곧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급히 만나고 싶다고 하고 나서 사건을 얘기했는데, 마리오에게 소식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참인 것 같았어요. 돈을 갖고 남쪽으로 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결국 오늘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나서 당신에 대해 얘기했죠. 친절하고 정직하므로 목걸이를 되찾고 싶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한다고......그녀는 흥미를 느낀 것 같았어요. 나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미없는 표정이었다. 모르겠소? 나한테 경찰이 손을 떼라고 했단 말이오. 그렇지만 그레일 부인에게는 당신을 고용할 권리가 있을 거예요. 고용해서 뭘 시키지?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핸드백의 물림쇠를 딱딱 소리나게 했다. 아니 -- 그만한 재력이 있고 -- 더군다나 그처럼 아름다운 여자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오는 어떤 남자예요? 여자처럼 해사한 미남이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소. 여자에게는 매력이 있을지 몰라요. 매력을 느낀 여자도 있을 테지. 그레일 부인도 그 중 한 사람인 것 같아요. 함께 놀러다니곤 했었거든요. 그 부인에게는 남자친구들이 곰팡이 슬 정도로 많이 있을 거요. 목걸이를 되찾을 기회는 어쩌면 없을지도 몰라요. 왜죠? 나는 일어서서 사무실 벽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두드렸다. 옆 사무실의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멈추더니 곧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창 옆으로 가서 맨션 하우스 호텔 사이의 좁은 빈터를 내다보았다. 식당의 음식냄새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나는 책상으로 돌아가서 위스키를 집어넣고 의자에 앉아 파이프에 8번째인지 9번째의 불을 붙이고는 리어든 양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좋아할 얼굴이었다. 글래머로 마무리된 금발은 한 다스에 1다임(10센트)이었지만 이 얼굴만은 달랐다. 나는 그 얼굴에 미소를 보냈다. 좋아요, 앤. 하고 나는 말했다. 마리오를 죽인 것은 커다란 과실이었소. 목걸이를 빼앗은 일당이 그런 일을 할 리는 없지. 그들이 만일을 위해 데리고 간 보디가드가 한 짓이 틀림없소. 마리오가 좋지 않게 몸부림치자 급한 성질이 고개를 들어 해치워버린 겁니다. 목걸이를 빼앗은 것은 보석 주인의 행동을 상세히 알고 있는 조직적인 갱이오. 적당한 대가는 요구하지만 속이지는 않소. 이번 살인사건은 그들의 성격에는 맞지 않아. 어쩌면 마리오를 죽인 범인은 이미 죽었을 것이오. 발에 추를 매단 채 태평양 밑에 가라앉아 있을 거요. 목걸이는 그 범인과 함께 해저로 가라앉아 버렸든지, 아니면 진짜 가치를 알고 있으므로 몇 년 간 꺼내지 않을 생각으로 어딘가에 감추어 버렸을 것이오. 하긴 그 보석 갱이 대규모를 이루고 있다면 외국으로 반출해 내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진짜 가치를 알고 있다면 8천 달러는 너무 싼 것이오. 하여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은 결코 살인을 저지를 계획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오. 앤 리어든은 입술을 반쯤 벌리고 달라이라마(라마교의 교주)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머리가 좋군요. 그렇지만 영리하지는 않아요. 그녀는 일어서서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만나러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랜들이 뭐라고 하든 손님이 나를 부르면 어쩔 수 없지. 그럼 가는 거죠? 나는 그레일 부부에 대해 조금 조사해 오겠어요. 부인의 연애생활에 대해서. 그레일 부인에게도 연애생활이 있겠죠? 갈색 머리로 둘러싸인 얼굴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누구나 있지. 나는 경험이 없어요. 정말로...... 나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녀는 나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주고는 문 쪽으로걸어갔다. 잊은 게 있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뭐예요? 그녀는 책상 위를 둘러보았다. 알고 있을 거요. 그녀는 책상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내 눈앞에 얼굴을 쑥 내밀었다. 보석 갱이 살인을 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마리오를 죽인 사람을 죽여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범인이 붙잡혀서 마약이 떨어지게 되면 아무 말이나 떠벌이게 되기 때문이오. 나는 거래 상대는 죽이지 않는다고 한 거요. 어떻게 마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알고 있지는 않소. 다만 머리에 떠오를 뿐이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마약중독자라오. 그래요. 하고 말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뭐죠? 그녀는 핸드백에서 얇은 종이에 싸여 있는 것을 꺼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나는 그 물건을 집어들고 고무밴드를 풀렀다. 종이 물부리가 붙은 긴 러시아 담배가 세 개비 들어 있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갖고 와서는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곧 대마초라는 것을 알았죠. 지금 베이 시티에서 유행하고 있는 형태인걸요. 시체 주머니에 대마초가 들어 있으면 불쌍하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렇다면 담배 케이스도 함께 가져갔어야 했소. 하고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담뱃가루가 남아 있는데 케이스가 비었다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오. 할 수 없었어요 --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 정말이지 되돌아가서 가져오려고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당신에게 피해를 주었나요? 아니오. 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피해를 줄 리가 없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어째서 버리지 않았소? 그녀는 차양 넓은 모자를 한쪽 눈이 가려질 정도로 기울이며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내가 경찰의 딸이었기 때문이죠. 하고 그녀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떤 작은 증거라도 버려서는 안되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지만 부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어깨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 그 말은 밀폐된 방안의 연기처럼 사무실 안에 걸렸다. 좋지 않았어요. 갖고 오는 게 아니었어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 │ 제 14 장 │ └────────────────────────────┘ 나는 세 개비의 러시아 담배를 책상 위에 늘어놓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녀는 증거는 버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것은 증거일까? 무슨 증거일까? 대마초를 피우고 있는 사람은 적지 않다. 갱도 피우고 있다. 약사도, 고등학교 학생도 피우고 있다. 인도 대마의 잎사귀로 만든 것이다. 인도 대마는 어디에서나 자라고 있다. 지금 재배하는 것은 위법이지만, 미국과 같은 넓은 나라에서 대마초를 단속하기는 어렵다. 나는 파이프를 피우며 옆 사무실의 타이프라이터와 할리우드 대로의 잡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봄바람이 방안 공기를 흔들었다. 커다란 담배였지만, 러시아 담배에는 큰 것이 많다. 그리고 마리화나는 눈이 성긴 잎이다. 인도 대마. 증거. 여자는 특이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머리 정수리가 아팠다. 어쩐지 뻐근했다. 나는 칼을 집어들고 작고 예리한 칼날을 꺼냈다. 그 칼날은 파이프 청소에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에 손을 뻗었다. 경찰에서 하는 방식이다. 한가운데를 가르고 알맹이를 현미경으로 조사한다. 혹시 다른 것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좀처럼 없겠지만 그런 건 어떻든 상관없다. 일인 것이다. 나는 담배를 한가운데에서부터 세로로 가르기 시작했다. 물부리 부분이 가르기 어려웠지만 간신히 해냈다. 그러자 물부리 속에서 얇게 말린 종이가 몇 개 나왔다. 문자가 인쇄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손가락 끝으로 말린 종이를 펴려고 했으나 종이가 책상 위를 미끌어져 맘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또 하나의 담배를 집어올려 물부리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주머니칼의 날로 다른 작업에 착수했다. 물부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담배를 세게 눌렀다. 종이가 얇아 종이 뒤에 있는 담배가 손가락에 느껴졌다. 나는 물부리를 조심스레 잘라놓고, 더욱 신중하게 세로로 잘랐다. 또 종이가 말려 있었다. 이번에는 완전했다. 나는 가만히 그 종이를 펴보았다. 명함이었다. 연한 색깔의 종이였다. 왼쪽 밑에 스틸우드 하이츠의 전화번호가 기록되어 있었다. 오른쪽 밑 구석에는 전화로 예약되었음 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약간 큰 글씨로 쥴스 암사 , 그 아래에 신경전문의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세 개비째의 담배를 집어들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물부리를 자르지 않고 얇은 종이를 꺼내었다. 역시 똑같은 것이었다. 그 종이를 원래의 물부리 안에 밀어넣었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고 나서 파이프를 재떨이에 놓았다. 그리고 시간을 알기 위해 한 번 더 시계를 쳐다봐야만 했다. 나는 처음의 두 개비의 담배와 잘게 찢어진 얇은 종이를 원래의 종이로 싸고, 완전한 한 개비의 담배를 다른 종이에 싸서 책상 안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나는 책상 속의 명함 같은 얇은 종이를 쳐다보았다. 쥴스 암사. 신경전문의. 전화번호는 기록되어 있었으나 주소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 종이가 중국 것이나 일본 것이 틀림없는 비단 담배 케이스의 대마초 속에 들어 있었다. 그 담배 케이스는 동양 물품을 팔고 있는 가게에서 35센트에서 75센트 정도로 살 수 있는 흔한 물건이었다. 후이 푸이 신이나 론 신 탄이라고 하는 가게로, 그러한 가게에서는 아라비아의 달 이라는 향수가 프리스코 세이디의 방 뒤쪽에 있는 여자 아이와 같은 향기라고 하면 예의범절이 좋은 일본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런데 이런 담배 케이스가 별도로 고가품 케이스를 갖고 있는 죽은 남자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가 피우던 담배는 그 고가품 케이스의 담배였다. 그는 잊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니면 비단 케이스는 그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호텔 로비에서 발견했으나 신고하는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경전문의 쥴스 암사.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랜들이었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는 조용하게 말하는 타입이었다. 당신은 어젯밤 당신을 태워준 여자를 모른다고 했소. 차도까지 걸어가서 지나가던 차를 얻어탔다고 했고. 새빨간 거짓말이잖소. 당신에게 아가씨가 있었다고 말했으면 아가씨 얼굴에 뉴스 카메라맨의 플래시를 퍼붓게 하지 잠자코 있겠소? 그러나 당신은 내게 거짓말을 했소. 즐거웠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다. 자, 그건 좋도록 합시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만났소. 이곳으로 왔더군. 내가 존경하고 있는 친구의 딸이었소. 그래서 무슨 얘기를 했소? 하고 나는 말했다. 조금 다짐해 놓았소. 하고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소. 당신에게 전화를 건 것도 똑같은 이유요. 이번 사건은 비밀로 하시오. 보석 갱을 일소하려 생각하고 있소. 이런, 이번에는 보석 갱이 되었나요? 그런데 그 이상한 담배 케이스 속의 가루는 역시 대마초였소 -- 용이 찍혀 있는 케이스 말이오. 마리오는 틀림없이 그 담배는 피우지 않았을 것이오. 틀림없소. 내가 본 바로도 다른 담배를 피웠으니까. 내가 보고 있지 않은 시간도 있지만. 음. 얘기는 그뿐이오? 좋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잊으시오. 이 사건에 관여해서는 안돼요.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거요. 만일 이상한 행동을 하면...... 그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나는 전화기 속으로 하품을 했다. 잘 들었겠지? 내게 그런 권한이 없다고 말할 생각이겠지만 그건 큰 잘못이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증인으로서 유치할 것이오. 신문에도 발표하지 않을 거요? 살인사건은 발표할 거요. 그렇지만 내막은 발표하지 않을 거요. 당신도 모르기 때문이지. 이것으로 두 번 경고했소. 하고 그는 큰소리를 냈다. 세 번째는 용서하지 않겠소. 말은 잘하는군. 그는 느닷없이 전화를 끊었다. 오케이. 그가 어떻게 말하든 나는 내 생각대로 할 뿐이다. 나는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무실 안을 걸어다니며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또 시계를 보았지만 역시 몇 시인지는 잊어버렸다. 나는 또 책상에 앉았다. 쥴스 암사. 신경전문의. 시간을 들이고 돈만 지불하면 다 지쳐버린 남편에서부터 메뚜기의 피해까지 무엇이든 다 고쳐주는 것이다. 식어버리 사랑, 혼자 잠드는 것에 싫증이 난 여자, 집을 나간 채 소식이 없는 아들이나 딸들, 부동산을 지금 팔아야 할 것인지 1년 더 기다려야 할 것인지 등등. 어떤 일이든 상담 상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남자도 상담하러 갈 게 틀림없다. 사무실에서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려도 조끼 속에서는 항상 벌벌 떨고 있는 남자. 그러나 환자는 대부분 여자일 것이다. 한숨만 내뿜고 있는 살찐 여자,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마른 여자, 꿈을 꾸고 있는 나이먹은 여자, 엘렉트라처럼 운명을 두려워하고 있는 젊은 여자, 온갖 모습의 여자, 모든 연령의 여자. 단 하나 모든 환자에게 공통되는 것이 있다 -- 그것은 모두 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쥴스 암사 선생에게는 외상은 통하지 않는다. 현금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우유계산서에는 떫은 얼굴을 하는 여자도 암사에게는 기쁘게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과거가 있는 의사. 자기 명함을 대마초에 연루되게 한 남자. 그 담배가 죽은 남자에게서 발견되었다. 나는 전화 수화기를 들고, 시외전화 교환에게 스틸우드 하이츠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 │ 제 15 장 │ └────────────────────────────┘ 여자의 목소리가 대답을 했다. 외국 발음이 강한 목소리였다. 알로. 암사 씨에게 연결해 주시오. 미안합니다만 암사 씨는 전화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의 비서입니다.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장소를 가르쳐 주시오. 만나고 싶소. 암사 씨는 기쁘게 당신을 만나실 겁니다만 지금은 매우 바쁘셔서...... 언제 만나고 싶으신가요? 곧 만나고 싶소. 오늘중에. 안됩니다. 다음주라면 모르겠습니다. 예약명단을 조사해 보시겠습니까? 아니오. 예약명단은 어떻든 상관없소. 연필 있소? 있습니다. 거기에 써주시오. 이름은 필립 말로우. 할리우드 카헨가 빌딩 615호실. 할리우드 대로요. 전화는 글렌뷰 7537번. 적었습니다, 말로우 씨. 마리오라는 남자에 관한 일로 꼭 암사 씨를 만나고 싶소. 급한 용건이오. 생사에 관계된 문제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니오. 하고 나는 전화기를 꽉 쥐고 흔들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소. 암사 씨는 꼭 나를 만나야 할 거요. 나는 사립탐정이오. 암사 씨를 만나고 나서 경찰에 가려 생각하고 있소. 어머. 하고 그녀는 카페테리아의 정식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에 계신 분이군요. 틀렸습니까? 경찰은 아니오. 틀렸소. 하고 나는 말했다. 사립탐정이오. 그렇지만 급한 용건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소. 전화로 대답을 해주시오. 전화번호, 알고 있죠? 예, 적었습니다. 마리오라는 분, 병을 앓고 있나요? 뭐 꼭 건강하지는 않소. 하고 나는 말했다. 알고 있소? 아니에요. 당신이 생사의 문제라고 생각하시기에......암사 씨라면 반드시 병을 고칠 거예요. 그렇지만 이 병만은 고치지 못할 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겠소. 나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용 위스키 병에 손을 뻗었다. 살을 가는 기계 속을 지나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암사 씨가 6시에 뵙겠답니다. 고맙소. 장소는 어디요? 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차는 있소. 장소를 가르쳐 주시면 -- 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하고 그녀는 차갑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 번 더 시계를 쳐다보았다.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나의 위장은 아직 술로 타고 있었다. 조금도 공복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상수도 인부의 손수건 같은 맛이었다. 나는 램브란트에게 인사를 하고 모자를 쓴 뒤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떨어져 내린 기왓장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발을 멈추고 복도 벽에 기대어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젊은 아가씨가 내 옆을 지나가다가 이상한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서 사무실로 되돌아와 전화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등기소의 가옥대장 일을 맡고 있는 친구들을 불러냈다. 주소를 알면 그 가옥의 소유자를 알 수 있나? 알 수 있어. 어딘데? 웨스트 54번가 1644번지. 누구 소유로 되어 있는지 조사해 주게. 오케이. 전화를 걸어주겠네. 몇 번인가? 3분이 지나 전화가 걸려왔다. 연필 갖고 있지? 하고 그는 말했다. 메이플우드 제4지구의 11호지라네. 가옥대장상의 주인은 제시 피어스 플로리안이라고 하는 미망인인데, 사정이 좀 있네. 어떤 사정인가? 후기의 세금, 도시계획부과세, 게다가 2천6백 달러의 신탁증서도 지불하지 않았다네. 사려고 하면 충분히 흥정이 성립된다는 뜻이군. 그렇게 좋진 않지만, 저당보다는 빠르다네. 이상한 것은 금액뿐이야. 신축하지 않은 한 그 주변에서는 금액이 너무 세다네. 오래 된 집이지. 손질도 하지 않았고. 1천5백 달러 내면 매입할 수 있는 집이야. 이상하군. 4년 전에 증서가 다시 작성되어 있는걸. 어디서 맡고 있나? 신탁회사인가? 아니야. 개인이네. 린제이 마리오라고 하는 독신 남자야. 나는 그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지 잊어버렸다. 나는 다만 벽을 바라보고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공복이 느껴졌다. 나는 맨션 하우스 커피숍에서 점심을 먹고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꺼냈다. 나는 똑바로 웨스트 54번가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위스키를 갖고 가지 않았다. ┌────────────────────────────┐ │ 제 16 장 │ └────────────────────────────┘ 그 주변 일대의 거리의 모습은 전날과 변한 것이 없었다. 얼음집의 트럭 한 대와 포드가 두 대 주차해 있을 뿐 길목은 모래먼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1644번지를 통과하고 나서 차를 세우고, 양쪽 집들을 잠시 관찰한 뒤 목적지의 집까지 걸어서 되돌아왔다. 볼품없는 종려나무 가지도 마르고, 물기 없어진 잔디도 전날 그대로였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 항상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잔디 가장자리에는 광고물이 내던져져 있었다. 나는 그 광고물을 주워 바지를 털었다. 이웃집 커튼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허풍쟁이가 또 엿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품을 하고 모자를 다시 썼다. 허풍쟁이 할머니는 코가 평평해질 정도로 창 유리에 얼굴을 누른 채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집 앞으로 걸어가서 나무 계단을 올라가 벨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토끼 같은 턱을 한 키가 큰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그녀의 눈은 조용한 물에 비친 빛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모자를 벗었다. 플로리안 부인에 관한 일로 경찰서에 전화를 건 분이 부인이십니까? 그녀는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오른쪽 어깨의 검정 사마귀까지 꿰뚫어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댁이 알 바 아니잖수. 대체 당신은 누구요? 오랫동안 그렇게 된 코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탐정입니다. 뭐?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고. 저 여자 집에 뭐가 있었나? 나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었는데. 쇼핑도 전부 헨리에게 시키고 있는데 쥐죽은 듯했다오. 그녀는 스크린 도어를 열고 나를 들여보냈다. 홀엔 가구의 오일 냄새가 배어 있었다. 전에는 좋은 형태였었던 수수한 가구가 많이 있었다. 구석엔 파도무늬 같은 도안이 새겨진 물건이 있었다. 우리들은 바깥 방으로 들어갔다. 핀을 꽂을 여지가 있는 모든 가구란 가구에는 전부 목면 레이스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댁을 본 적이 있는데. 하고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틀림없이 그래. 댁은 전에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탐정은 탐정이죠 -- 헨리라고 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심부름을 해주는 검둥이 남자애라오. 댁은 용건이 뭐죠? 그녀는 빨강과 흰색의 줄무늬 앞치마를 두드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를 두 번 소리냈다. 어제 공무원들이 플로리안 부인 집에서 나와 이쪽으로 왔었나요? 어떤 공무원들? 제복을 입은 공무원들 말입니다. 하고 나는 꾹 참고서 말했다. 그래요, 좀 왔었다오. 아무것도 몰랐었어요. 몸집이 큰 남자는 어떤 사람이죠 -- 권총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남자? 그녀는 그 남자의 인상과 풍채를 내게 말했다. 틀림없이 머로이였다. 어떤 차를 타고 있었죠? 작은 차였다우. 겨우 몸이 들어갈 정돈데...... 그 남자는 살인범입니다. 그녀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흥미로 인해 눈이 빛났다.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차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몰라요. 그가 살인범이었다니, 이 동네도 어수선해졌군. 22년 전에 이사왔을 때는 문에 자물쇠를 채우지도 않았는데, 요즘은 갱이나 나쁜 경찰, 거기다 정치가가 기관총으로 싸움까지 하니, 정말 세상이 험악해졌어. 그런데 플로리안 부인이라는 사람은 어떤 여잡니까? 이웃 교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매일 밤 라디오를 틀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다오. 게다가 증거가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술을 마시는 것 같아. 손님은 있나요?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우. 틀림없겠죠. 저...... 내 이름은 모리슨이라고 해요. 틀림없어요. 늘 창에서 엿보고 있으니까. 재미있겠군요. 죽 옆에 살고 있었습니까? 이제 10년 되었지. 남편이 있었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죽어버렸어요.그다지 이상한 죽음은 아니었는데...... 돈을 남기고 죽었습니까? 그녀는 턱을 쑥 내밀고 코를 실룩거렸다. 술을 마셨구먼. 이를 뽑았거든요. 치과의사가 마시게 해줬습니다. 좋지 않아요. 약이 된다고 하던데. 약이라고 해도 술은 좋지 않아. 분명히 좋지 않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돈을 남겨놓았습니까, 그 남편은? 몰라요. 그녀의 입은 자두 정도의 크기로 볼통스러웠다. 경찰이 돌아가고 나서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고맙습니다, 모리슨 부인. 덕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노파에게 이별을 고하고 입구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내 뒤에서 따라와, 또 이를 소리나게 하며 말했다. 전화는 몇 번에 걸면 좋을까? 유니버시티 4에 5000번. 널티 경감을 찾아주십시오. 그런데 그 여자는 무엇으로 생활하고 있습니까 -- 생활구제기금인가요? 여기는 빈민굴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훌륭한 식기 찬장이군요. 이건 꽤 값어치가 나가겠는데요. 하고 식당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현관에 놓여 있는 식기 찬장을 곁눈질로 보면서 나는 말했다. 양 가장자리가 둥글게 되어 있으며, 가느다란 다리에 조각이 새겨져 있고, 채색된 과일 바구니가 새겨져 있는 커다란 식기 찬장이었다. 여기서도 옛날에는 꽤 상당한 생활을 했었지. 자만은 아니지만...... 나는 밖으로 나와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노파는 기분을 고치고 웃는 얼굴을 보였다. 매월 초하루에 등기우편물이 온다오. 하고 노파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녀 쪽으로 돌아서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파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우편배달부가 등기우편물을 갖고 오면 한껏 모양내고 외출해서는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돌아오면 한밤중인데도 언제까지나 노래를 부른다니까. 몇 번이나 경찰을 부르려고 생각했는지 몰라요. 나는 그녀의 야윈 팔을 두드리며 인사를 하고 나서 모자를 다시 쓰고 거리로 나왔다가,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되돌아갔다. 노파는 아직 현관에 서 있었다. 내일이 초하룬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4월 1일입니다. 등기우편물이 오는지 틀림없이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노파는 눈을 반짝이며 새된 목소리로 웃어댔다. 내일은 만우절이라고. 아마 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노파의 웃음소리를 뒤에 남겨놓고 플로리안 부인의 집으로 걸어갔다. 닭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듯한 웃음소리가 언제까지나 들려오고 있었다. ┌────────────────────────────┐ │ 제 17 장 │ └────────────────────────────┘ 플로리안 부인의 집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노크를 해봐도 똑같았다. 문고리를 돌려보자 자물쇠는 잠겨 있지 않았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전날 그대로였다. 진의 냄새까지도 똑같았다. 작은 테이블에 더러운 잔이 하나 올려져 있었고, 라디오는 틀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침대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쿠션 뒤를 더듬어 보았다. 빈 술병이 하나 끼워져 있어 두 병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침실에서 숨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식당으로 가서 안쪽 침실을 들여다보았다. 침실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플로리안 부인은 목면 이불에 턱을 파묻고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이불에 달려 있는 방울이 입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초라한 누런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더러운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방에는 고약한 냄새가 가득차 있었고, 69센트짜리의 자명종이 페인트가 벗겨진 선반 위에서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거울에 부인의 얼굴을 비뚤어지게 비치고 있었다. 사진이 들어 있었던 트렁크는 아직 열려진 채. 안녕하십니까, 플로리안 부인. 병이 나셨나요?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혀를 내밀고 입 주위를 핥았다. 잠시 뒤 상처투성이의 레코드와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잡혔나요? 큰 사슴 말입니까? 예. 아직 못 잡았습니다. 곧 잡히겠지요. 그녀는 눈을 깜박여 눈앞에 덮여 있는 얇은 막을 없애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문을 잠그셔야만 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남자가 되돌아올지도 모르거든요. 내가 큰 사슴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제 내가 그의 이름을 말했을 때 안색이 변하는 것 같더군요. 그녀는 내가 말한 것을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술 가져왔나요? 아니, 오늘은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지갑이 비었거든요. 진이라면 쌀 텐데. 사러 갔다올 수도 있지요......그럼, 머로이는 무섭지 않다는 거군요. 당연하잖아요! 그렇습니까? 그럼, 뭐가 두려운 겁니까? 일순간 그녀의 눈이 빛난 것 같더니 곧 빛은 사라졌다. 이젠 그만두세요. 경찰은 정말 싫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문 옆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는 끝이 코끝에 닿도록 해보려 했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웠다. 그가 뭐 경찰에게 붙잡힐 사람인가요. 하고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남자는 돈도 있고 친구도 있어서 뒤쫓아가도 소용없어요. 그러나 임무는 임무죠. 하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정당방위였습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그녀는 킬킬거리며 웃고서 이불로 입을 닦았다. 붙잡힐 거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큰 사슴을 좋아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녀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그를 알고 있어요? 요전날 검둥이를 죽였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낄낄 웃어댔다. 눈에서 눈물이 넘쳐 볼을 타고 흘렀다. 강한 남자인 것 같았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점이 있었죠. 무슨 일이 있어도 벨마를 찾겠다고 했습니다. 찾고 있는 사람이 가족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가족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면 찾아도 소용이 없죠. 어디서 죽었습니까? 텍사스 주 달하트. 감기가 심해져서 죽었죠. 함께 있었습니까? 아뇨. 얘기를 들었을 뿐이에요. 누구에게? 어느 댄서예요. 이름은 잊어버렸어요. 한 잔 마시면 생각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의 계곡처럼 목이 말라 있거든요. 한 가지 더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진을 사러 갔다올께요. 나는 이 집의 등기서류를 조사해 봤습니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불 위에서 몸을 경직시켰다. 그리고 반쯤 눈을 감고 숨소리를 죽였다. 너무 많은 액수로 저당잡힌 거 아닙니까? 린제이 마리오라고 하는 남자의 이름이던데...... +그녀는 여전히 몸을 긴장시켰다. 나는 그 사람의 집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식모로 일했죠. 그래서 그가 돌봐주고 있는 거지요. 나는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서 뗀 뒤, 아무 목적도 없이 잠시 바라보고 나서 다시 한 번 입에 물었다. 어제 오후 여기에서 돌아갔는데, 마리오 씨가 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서 일을 부탁했습니다. 어떤 일을?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를 흔들었다. 그건 말할 수 없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젯밤 나는 그를 만나러 갔었소.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군요. 하고 그녀는 화가 치민 듯이 말하곤 이불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나는 그녀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경찰같이 영리해요. 하고 그녀는 토하듯이 말했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어루만졌다. 그냥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얘기는 그것뿐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그런 운명이 되었는지, 우연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싫다고 하는 거예요, 탐정은. 그녀는 즉석대사처럼 말했다. 이젠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또 한 가지, 내일은 등기우편물이 오지 않을 게요. 그녀는 이불을 밀어젖히고 일어났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오른손에 빛나는 물건이 잡혀 있었다. 작은 권총이었다. 예스럽고 더러운 권총이었다. 말해 봐! 그녀는 외쳤다. 무슨 용건으로 왔지? 나는 권총을 쳐다보았다. 권총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권총을 잡고 있는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눈은 아직도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거품이 보였다. 당신과 나는 함께 힘을 모아야만...... 하고 나는 말했다. 권총과 그녀의 턱이 동시에 뚝 떨어졌다. 나는 조금씩 문에서 떨어졌다. 잘 생각해 보시오. 나는 급하게 식당과 거실을 빠져나가 집 밖으로 나왔다. 등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등 근육이 딱딱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차에 탔다. 3월의 마지막 날인데도 한여름 같은 더위였다. 나는 차를 운전하면서 윗도리를 벗고 싶어졌다. 77번가 경찰서 앞에서는 순찰차의 경찰 두 사람이 떫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스윙 도어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 난간 맞은편에서 고소장을 대충 훑어보고 있는 제복 경관에게 널티가 2층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있을 거라고 하며 내가 그의 친구인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가 올라가도 좋다고 하여 나는 더러운 계단을 올라가 널티의 방을 노크했다. 안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널티는 의자에 허리를 파묻고 양쪽 다리를 또 하나의 의자에 올려놓은 채 이빨을 후비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왼쪽 손을 눈앞으로 뻗어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엄지손가락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았지만 널티의 눈은 우울하게 흐려 있었다. 잠시 뒤, 그는 손을 무릎까지 내려 양다리를 바닥으로 내리고 엄지손가락 대신에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피우던 여송연이 책상 위에서 이빨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의자 시트 커버를 뒤집어 앉아 담배를 물었다. 당신이오? 하고 널티는 버드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쳐다보며 말했다. 단서는? 머로이 말이오? 조사는 이미 중단되었소. 어째서? 이젠 잡을 수 없어요. 지금쯤은 멕시코로 줄행랑쳤을 거요. 그가 저지른 일은 검둥이를 한 명 죽인 것뿐일 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중대한 범죄도 아니고. 당신은 아직도 관심을 갖고 있소?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일이 생겼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제 그 일은 없어졌소 -- 그 여자 사진, 아직 갖고 있소? 그는 압지 밑을 더듬어 사진을 꺼냈다.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실 이건 내것이오. 필요없다면 빌려가고 싶소. 경찰서에서 보관해야 하겠지만, 뭐 괜찮을 게요. 가져가시오. 나는 사진을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그럼, 돌아가겠소.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군. 하고 널티는 말했다. 나는 그의 책상 가장자리의 로프 조각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내 시선을 좇았다. 그는 버드나무 가지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십던 여송연을 입에 처넣었다. 이곳에도 없소. 하고 그는 말했다. 감시한 용의자가 있소. 윤곽이 잡혀 가면 당신을 잊지 않겠소. 여러 가지로 대단하군. 뭐 좀 맡겨보고 싶은걸. 당신처럼 일 잘하는 남자는 보답이 있어서 좋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엄지 손톱 끝으로 성냥을 그었다. 그리고 단번에 불이 붙은 것이 기쁜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송연의 연기를 맛있게 빨아들였다. 나는 웃고 있소. 하고 내가 방을 나갈 때 널티가 말했다. 복도는 조용했다. 건물 자체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경찰서 앞에서는 순찰차의 경관들이 아직도 구부러진 펜더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차를 달려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내가 사무실로 들어옴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곧바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필립 말로우 씨입니까? 말로우입니다만...... 이쪽은 그레일입니다. 루인 로크리지 그레일 부인이 곧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어디서? 베이 시티, 애스터 드라이브 862번지. 한 시간 이내에 와주시겠습니까? 당신은 그레일 씨입니까? 아닙니다. 고용인입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 │ 제 18 장 │ └────────────────────────────┘ 그곳은 바다에 가까워 바다냄새가 느껴지긴 했지만 해면은 보이지 않았다. 애스터 드라이브는 그 주변에서 완만한 커브를 만들고 있었고, 바다와 반대쪽은 조금 작고 아담한 집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으며, 바다에 가까운 곳은 전부 커다란 저택으로 3.5 미터나 되는 벽을 두르고, 철문이 위엄 있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저택 안에는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상류계급만을 위한 방음장치 용기에 들어가는 특제 햇빛이 있었다. 그 저택의 반쯤 열린 문 안쪽에는 진한 감색 루파시카(러시아 인들이 입는 앞이 터지지 않은 윗도리)를 입고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 가죽 각반을 댄 남자가 서 있었다. 어깨통이 넓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풍채좋은 청년이었다. 입 가장자리에 담배를 물고 연기가 코로 들어가지 않도록 머리를 약간 기울이고 있었다. 한 손엔 검고 긴 장갑을 끼고 있었고, 한 손은 맨손이었는데 가운데 손가락에 커다란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문패는 붙어 있지 않았지만 이 저택이 틀림없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면서, 장갑 끼지 않은 손을 무심코 엉덩이 뒤로 돌리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별 관심 없는 모습을 보여도 실은 내 주의를 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차에서 0.5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발을 멈췄다. 그레일 씨 저택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여깁니다만 아무도 안 계십니다. 약속이 되어 있는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함이? 필립 말로우. 거기서 기다려 주시오. 그는 느린 발걸음으로 문 있는 곳가지 되돌아가서 두터운 기둥에 설치되어 있는 철문을 열쇠로 열었다. 안에는 전화가 있었다. 그는 두세 마디 전화로 말하고 나서 문을 닫고 내 옆으로 되돌아왔다. 본인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나는 자동차 면허증을 보여주었다. 그런 것은 아무런 증거도 되질 않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 차가 아닐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는 차에서 나와 그와 30cm 정도 떨어져 섰다. 술 냄새가 났다. 좋은 술이었다. 헤이그 앤드 헤이그 라고 하는 것일 게다. 술 마셨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집사와 전화로 얘기하게 해주시오. 하고 나는 말했다. 반드시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힘껏 걷어차기 전엔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잖소. 나는 여기서 일하고 있을 뿐이오. 하고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뒷말은 공중으로 날려보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탐정이오. 탐정?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우리들은 서로 쓴웃음을 나눴다. 나는 반쯤 열린 문에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길은 커브로 되어 있고 진녹색의 높은 담이 이어져 있었다. 작은 문이 있었다. 그 문에서 들여다보니 담 안의 잔디에서 일본인 정원사가 일하고 있었다. 넓은 잔디의 잡초를 뽑아내면서 다른 일본인 정원사들이 그러하듯이 히죽히줏 웃고 있었다. 또 담이 30 미터 정도 계속되었다. 담이 닿은 곳은 광장으로 되어 있고, 차가 6대 세워져 있었다. 그 하나는 작은 쿠페였다. 우편물을 넣는 데에 충분할 정도로 큰 최신형 투턴의 뷔크가 두 대, 승용차의 바퀴만큼 큰 니켈 루버(공기흡입구)와 하브 캡의 검은색 리무진이 한 대, 그리고 뚜껑을 젖힌 가늘고 긴 스포츠 패턴이 한 대 있었다. 주차장에서부터 폭 넓은 콘크리트 길이 저택 옆의 입구로 이어져 있었다. 주차장의 왼쪽은 네 귀퉁이에 분수가 있는 정원이었다. 정원 입구는 철문으로 되어 있었고, 문 위에 큐피드 조각이 있었다. 기둥 위에 흉상이 놓여 있었고, 괴수 그리핀이 양끝에 웅크리고 있는 돌 벤치가 있었는데, 정원 중앙의 풀장에는 돌로 만든 연꽃잎이 떠 있었고, 돌로 만든 커다란 개구리가 앉아 있었다. 정원 맞은편에는 장미가 피어 있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이 끝나자 양쪽에 울타리를 낀 계단이 있었다. 울타리를 통하여 태양이 계단에 당초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가지각색의 수목이 울창한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 구석에 해시계가 놓여져 있었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정작 저택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버킹검 궁전보다도 작고, 캘리포니아로 친다면 잿빛을 띤 창의 수도 클라이슬러 빌딩보다도 작았다. 나는 저택의 옆쪽 입구로 가서 벨을 눌렀다. 어딘가에서 교회의 종 같은 부드러운 종소리가 들려왔다. 줄무늬 조끼에 금단추를 한 남자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이며 내 모자를 받았다. 그 뒤에 줄무늬 바지, 검은 윗도리, 회색 줄무늬 넥타이를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백발이 섞인 머리를 반 인치 정도 숙이며, 말로우 씨, 어서 오십시오. 어서 이쪽으로. 하고 말했다. 우리들은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파리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바닥에는 동양풍의 융단이 전면에 깔려 있었고, 벽에는 몇 장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모퉁이를 도니 또 복도가 있었다. 프랑스풍의 창에 멀리 푸른 물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태평양 옆에 있다는 것과, 이 저택이 해안 근처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집사는 문 하나를 가볍게 노크하고서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체스터필드식의 커다란 긴의자와 담황색의 의자가 난로 앞에 놓여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는 방이었다. 좋은 광택을 내고 있는 바닥에는 비단처럼 얇고 이솝의 할머니만치나 예스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방구석의 낮은 테이블 위에서 꽃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벽은 희미한 색의 양피지였다. 널찍하고 편안한 방으로, 첨단적인 새로운 맛과 그윽하고 고상한 맛이 교묘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내가 방을 가로질러 가자 세 사람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중 한 사람은 앤 리어든으로, 몇 시간 전에 만났던 그대로의 그녀였지만 호박색의 액체가 든 잔을 잡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마르고 키가 큰 남자로, 건강하지 못한 누런 얼굴색을 하고 있었다. 아마 60은 넘었을 것이다. 수수한 색의 옷을 입고,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꽂고 있었다. 세 번째 사람은 금발머리의 여성이었다. 나가려던 참이었던 듯, 엷은 녹색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옷에 그다지 주의를 쏟지 않았다. 그것은 남자는 여자를 생각하고, 그녀는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 옷은 그녀를 젊게 보이게 했고, 눈의 색깔은 짙푸른색으로 보였다. 머리카락은 오래 된 유화의 금색 같았다. 몸의 곡선은 이 이상 매력을 더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될 만큼 아름다웠다. 목에는 다이아몬드가 빛나고 있었다. 손은 작지는 않지만 아름다웠으며, 손톱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이는 미소였지만, 눈은 신중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웃는 입은 육감적이었다. 잘 오셨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쪽은 제 남편이에요 -- 말로우 씨에게 마실 것을 만들어 드리세요. 그레일 씨는 나와 악수를 나눴다. 그는 차가운 손으로 조금 축축했다. 눈은 외로운 듯했다. 그는 스카치와 소다수를 섞어 나에게 위스키 소다수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방구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위스키 소다수를 반쯤 마시고 리어든 양을 보고 웃었다. 그녀는 공허한 표정으로 나를 뒤돌아보았다. 힘이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금발의 여자가 자기 잔을 내려다보며 내게 말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만, 그 때문에 갱과 분쟁이 발생한다면 잃은 물건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힘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부탁합니다. 하고 그녀는 마치 그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처럼 미소를 내게 보냈다. 나는 남은 위스키 소다수를 다 마셔버리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레일 부인은 긴의자 팔걸이에 장치되어 있는 벨을 눌렀다. 하인이 들어왔다. 부인은 쟁반을 가리켰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서 마실 것을 두 잔 만들었다. 리어든 양은 아직도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그레일 씨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인이 나갔다. 그레일 부인과 나는 잔을 들었다. 부인은 좀 깔끔치 못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할 수 있어요. 하고 그녀는 또 미소를 지었다. 린 마리오는 어느 정도까지 당신에게 털어놓고 얘기했나요?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리어든 양을 보았다. 리어든 양은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레일 부인은 남편 쪽으로 돌아섰다. 여기에 계셔야만 해요? 그레일 씨는 일어서서 나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고 나서, 기분이 좋지 않아 자리를 떠 눕고 싶은데 허락해 주지 않으시겠소? 하고 말했다. 말이 너무나 정중하여 안아서 데려가지 않으면 실례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레일 씨는 마치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조용하게 문을 닫았다. 그레일 부인은 잠시 그 문을 쳐다보고 나서 미소를 되찾고 나를 바라보았다. 리어든 양에게 무엇을 묻든 지장없겠지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레일 부인은 잔을 다 마셔버리고 옆 테이블에 놓았다. 서먹서먹한 행동은 그만둡시다. 함께 상담해요. 당신은 이런 직업 쪽에서는 볼 수 없었어요. 젊고 탄력있고...... 틀림없이 하등한 직업이기 때문이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돈벌이가 되나요? 안됩니다. 즐거움은 있지만......어떤 큰 사건에 부딪칠지 모르기 때문이죠. 어째서 사립탐정이 되셨나요? 괜찮죠, 이런 거 물어봐도? 그리고 그 테이블을 이쪽으로 밀어주시지 않겠어요? 술병에 손이 닿도록...... 나는 일어서서 은쟁반이 놓여 있는 테이블을 그녀 옆으로 옮겼다. 그녀는 마실 것을 또 두 잔 만들었다. 나는 아직 두 번째 잔을 반쯤 남겨놓고 있었다. 우리들의 전신은 대개 경찰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잠시 지방검사 밑에서 일했었습니다만, 목이 잘렸죠. 그녀는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다. 설마 무능했다는 뜻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말대꾸를 했기 때문이죠. 그 외에도 전화가 있었습니까? 그게 -- 그녀는 앤 리어든을 쳐다보았다. 그 눈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앤 리어든은 일어섰다. 그녀는 아직 가득차 있는 잔을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가져와서 그곳에 놓았다.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일 부인. 원고에는 쓰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어머, 돌아가시려고요? 하고 그레일 부인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앤 리어든은 아랫입술을 이빨로 깨문 채 입술을 물어뜯을지, 아니면 잠시 그대로 깨물고 있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듯했다. 좋은 기회이긴 하지만 돌아가야만 합니다. 전 말로우 씨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다만 친구일 뿐이지요. 안녕히 계세요, 그레일 부인. 또 와주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그레일 부인이 벨을 두 번 누르자 집사가 나타났다. 리어든 양은 잰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부인은 잠시 문을 쳐다보고 나서, 이 방법이 좋겠죠? 하고 말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리어든 양이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알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시겠죠? 하고 나는 말했다. 특이한 아가씨입니다. 당신이 목걸이 주인이라는 것도 그녀가 찾아낸 겁니다. 어젯밤 드라이브를 하다가 불빛을 발견하고는 마리오가 살해된 장소로 온 거죠. 오! 그레일 부인은 잔을 들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해요. 가엾게도, 린은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죽다니......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눈이 커지고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하여튼 리어든 양에 관한 것은 염려마십시오. 아무것도 입밖에 내지 않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아버님이 이곳 경찰서장이었답니다. 제게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은 술을 드시지 않네요? 제가 마시는 식으로 마시고 있는 겁니다. 당신과 저는 힘을 합쳐야 해요. 린은 -- 마리오 씨는 홀드 업 의 상황을 얘기했나요? 이곳과 트로카델로 사이의 어딘가에서 서너 명의 일당에게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어요. 그렇지만 어딘지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반지를 하나 돌려주는 거예요. 상당한 가치가 있는 반지인데. 그것도 그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좀처럼 목걸이를 하지 않았어요. 박물관에 있는 물건처럼 귀한 것이어서 시중에는 둘도 없는 것인데도 그들은 그것을 겨냥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들이 가치를 알고 있었을까요? 목걸이를 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다리는 아직도 아무렇게나 꼬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날밤 목걸이 한 것은 몰랐겠죠. 알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녀는 가는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녀는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하녀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저는 하녀를 믿고 있어요. 어째서? 모르겠어요. 웬지 모르게 사람을 믿는 성격이에요. 당신도 믿고 있고...... 마리오는?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어떤 일에는 믿고 있지만, 어떤 일은 믿지 않아요. 믿는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그녀의 이야기는 시원시원하고 약간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으나 불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말을 잘 생각해서 사용했다. 그럼, 하녀는 좋다고 하고, 운전사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날밤은 린이 자기 차를 운전했어요. 조지는 없었던 것 같아요. 목요일이 아니었을까요? 마리오는 어젯밤부터 4~5일 전이라고 했습니다. 목요일이면 일주일 전이 되지요. 그렇지만 목요일이었어요. 하고 내 잔에 손을 뻗으며 그녀는 말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조지는 목요일이 휴가였어요. 생각났어요. 그녀는 내 잔에 좋은 색깔의 스카치를 가득 따르고 소다수를 부었다. 언제까지 마셔도 취하지 않을 술이었다. 그녀는 같은 술을 자신의 잔에도 만들었다. 린이 내 이름을 말했나요? 하고 아직도 눈에 경계의 빛을 띤 채 그녀가 물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날짜도 일부러 확실히 말하지 않았겠군요 -- 그럼, 하녀와 운전사에게 혐의를 두지 않는다고 하면...... 혐의를 두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거들어주고 있을 뿐이에요. 하고 그녀는 웃었다. 다음은 집사 뉴턴인데, 그는 제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 목걸이는 길고, 또 백여우 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 아니에요. 보지 못했어요. 아름다웠겠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취한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술을 마시니까 점점 정신이 나는데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다. 그런 태도를, 취해도 아름다움은 잃지 않는 여자를 나는 네 사람밖에 모른다. 그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뉴턴은 틀림없습니다.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죠. 남자 하인은 어떨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틀림없이 목걸이를 보지 못했어요. 누가 목걸이를 하라고 했습니까? 그녀의 눈이 금세 경계의 빛을 띠었다. 저를 속이지 마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내 잔을 잡고 위스키를 따르려고 했다. 아직 술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잠자코 따르게 놔두고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잔을 다 따르고 우리들이 또 잔을 들었을 때 내가 말했다. 기록을 정확히 해놓고 제가 얘기할 것이 있습니다. 그날밤의 일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녀는 소매를 걷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저, 이제...... 기다리게 놔두세요. 그녀의 눈이 빛났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대단히 거리낌이 없군요. 제 직업은 겸손해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날밤의 상황을 얘기하든지, 나를 쫓아내든지 어느 쪽이든 결정하십시오. 그럼, 제 옆에 앉는 쪽이 좋지 않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인이 다리를 꼬았을 때부터...... 그녀는 흐트러진 스커트를 고치면서 말했다. 이 옷은 금방 기어 올라가서...... 나는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당신, 민첩하시겠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항상 이런 식으로 하시나요? 하고 그녀는 넋을 빼앗긴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천만에요. 여유가 있을 때는 나는 티벳의 승려랍니다. 단지 여유가 없는 거군요. 얘기를 딴 데로 돌리지 마시고.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들의......하여튼 내 마음을 문제에서 딴 데로 돌리지 마십시오. 대체 얼마를 지불했습니까? 그럼, 목걸이를 되찾을 수 있는 건가요? 나는 내 방법으로 합니다. 이겁니다. 나는 잔을 단숨에 죽 들이켰다. 그리고 공기를 조금 빨아들였다. 살인범을 잡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일, 나와는 관계가 없어요. 경찰이 할 일이잖아요. 그러나 마리오는 내게 100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디가드의 의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수치스러워서 울고 싶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울어도 좋겠습니까? 술을 마시는 게 좋아요. 그녀는 또다시 우리들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녀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 얘기해 주시지요. 하고 위스키가 흐르지 않도록 잔을 들면서 나는 말했다. 식모도 없고, 운전사도 없고, 하인도 없습니다. 세탁도 혼자서 해야 합니다. 홀드 업 은 어떤 식이었습니까? 마리오가 얘기해 주지 않은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양손을 턱에 대고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우리들은 브렌트우드 하이츠의 파티에 갔었어요. 그 뒤에 린이 춤추러 가자고 했기 때문에 트로카델로로 갔어요. 트로카델로를 나와선 세트 대로(大路)까지 갔더니 도로공사를 하고 있어서 산타 모니카 대로(大路)로 돌아 호텔 인디 라는 지저분한 호텔까지 가니까 호텔 맞은편에 비어 홀이 있었는데, 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어요. 겨우 한 대? 비어 홀 앞에? 그래요. 겨우 한 대뿐이었어요. 작고 지저분한 가게였어요. 그리고 그 차가 우리들 뒤를 쫓아왔었던 거예요.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서 산타 모니카에서 알게로 대로(大路)로 방향을 바꾸려 하는데 린이 다른 길로 가자고 말을 꺼내길래, 길이 꼬불꼬불한 주택 구역으로 들어갔더니 그 차가 갑자기 우리 차를 앞질러 펜더를 부딪친 순간 급브레이크를 건 거예요. 그러더니 모자를 눈가까지 눌러쓰고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외투를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어요. 새하얀 스카프였어요.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죠. 그는 우리 차의 헤드라이트를 피해 걸어왔어요. 그랬을 겁니다.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향하고 올 바보는 없으니까. 마시지요.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독살스럽게 그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눈썹을 모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마실 것을 두 잔 만들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남자는 린의 옆까지 와서 스카프를 코 위까지 올리고 권총을 들이대며, 손들어, 얌전히 있으면 다치지 않아. 하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또 한 남자가 반대편에 있는 내 쪽으로 걸어왔어요. 비벌리 힐스에서 말이로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경비가 빈틈없는 곳인데...... 그녀는 어깨를 흔들었다. 하여튼 홀드 업 이었어요. 스카프를 한 남자가 내 보석과 핸드백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내 옆에 있는 남자는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린이 보석과 핸드백을 건네주자 핸드백과 반지 하나를 돌려주고는, 경찰과 보험회사에 알리면 안된다고 하며 적당한 금액으로 목걸이를 되돌려줄 테니까 연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요. 매우 침착했고, 조금은 교양이 있는 남자 같았어요. 멋쟁이 에디는 시카고에서 죽었는데. 그녀는 머리를 움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들은 위스키를 마셨다. 린에게 말을 한마디도 못하게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날 전화가 걸려오더군요. 전화는 두 대가 있어요. 내선으로 연결되는 것과, 내 침실에 있는 내선이 없는 것. 전화는 이쪽으로 걸려왔어요. 물론 전화번호부에 실려 있지 않은 전화예요. 그런 것은 5~6달러 내면 조사할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같은 사람들은 매달 전화번호를 바꾸고 있지요. 우리들은 또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린과 거래를 하라고 얘기하고서 적당한 금액이라면 지불해도 좋다고 말해 놨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당분간은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거였어요. 틀림없이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8천 달러라고 하는 것으로 얘기가 성립되고, 그런 일이 생긴 거예요. 이번에 만나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얼굴은 기억이 안 나요. 랜들은 이걸 전부 알고 있겠군요? 물론 알고 있어요 -- 이젠 괜찮겠죠? 이런 얘기 언제까지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였다. 랜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녀는 하품을 했다. 잊어버렸어요. 나는 빈 잔을 들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그 잔을 내게서 빼앗아 또 위스키를 따랐다. 나는 그 잔을 그녀의 손에서 받아 왼손으로 바꿔들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매끄럽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 손은 내 손을 꽉 쥐었다. 근육이 단단했다. 몸매도 훌륭하고 가냘픈 곳이 없는 여자였다. 무슨 생각이 있는 듯했지만 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똑같았을 게요.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내 쪽으로 돌리고는 끄덕였다. 난 당신을 믿고 있어요. 언제부터 마리오를 알았습니까? 벌써 5~6년. 주인이 경영하고 있는 방송국의 아나운서였지요. KFDK. 내가 마리오를 안 것도 그 방송국이고, 주인을 안 것도 그 방송국이에요.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오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돈이 생겨서 아나운서를 그만두었지요. 정말 돈이 생긴 걸까요? 그렇지 않으면 입으로만 그렇게 말한 걸까요? 그녀는 웃으며 단지 내 손을 꽉 쥐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 다 써버렸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당신에게 돈을 빌린 적도 있겠죠? 그녀는 내가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방법은 구식이군요. 아직은 업무중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위스키가 고급품이기 때문에 좀처럼 취하질 않는군요. 하긴 취하지 않아도 좋지만...... 알았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손을 내 손에서 빼내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린 마리오는 여자를 협박해서 생활했어요. 당신도 빼앗겼습니까? 꼭 얘기해야만 하나요?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좀처럼 없는 일이지만, 한번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술에 취해 곤드레가 된 적이 있어요. 그때 나체 사진을 찍힌 거죠. 지독한 놈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거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내 손을 두들겼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필. 당신은? 헬렌. 키스해 줘요. 그녀는 천천히 내 무릎에 누웠다. 나는 머리를 숙여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댔다. 그녀는 속눈썹을 떨며 내 뺨에 키스했다. 내가 입술을 가까이 대자 그녀의 입술은 반쯤 벌어져 불타오르고 있었다. 혀가 이빨 사이에서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그레일 씨가 조용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안고 있던 그녀를 떼어놓을 틈도 없었다. 나는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내 팔 속의 여자는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을 다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쯤 꿈을 꾸는 듯한, 반쯤 빈정거리는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레일 씨는 헛기침을 하면서, 실례했소. 하며 방을 나갔다. 그 눈에는 비애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밀어젖혀 세우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녀는 나에게 밀려서 긴의자에 누워 있었다. 스커트가 가터 위까지 걷어 올라가 하얀 넓적다리가 보였다. 누구였어요? 그레일 씨. 신경쓸 거 없어요. 나는 그녀 옆에서 떨어져 처음에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긴의자에 다시 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이해하고 있는걸요. 불평은 하지 않아요. 봤단 말이오. 신경쓸 거 없다고 말했잖아요. 병자이기 때문에 불평할 권리조차 없어요. 나에게 대들지 마시오. 난 히스테리 여성은 싫으니까. 그녀는 핸드백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어 입술을 닦고 거울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무 마셨어요. 오늘밤 벨베디아 클럽. 10시. 그녀는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호흡이 거칠었다. 어떤 곳이지요? 레어드 블루넷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에요. 내 친구죠. 갑시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의 돈을 훔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입술에 가볍게 루즈를 바르고 나서 나를 곁눈질로 보며 거울을 던져주었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얼굴에 묻은 루즈를 닦고 거울을 돌려주기 위해 일어섰다. 그녀는 황홀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땠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소. 벨베디아 클럽, 10시. 그다지 몸치장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나는 턱시도밖에 갖고 있질 않소. 어디서 만날까요? 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눈이 흐리멍덩해 있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집사가 복도에서 모자를 건네주었다. ┌────────────────────────────┐ │ 제 19 장 │ └────────────────────────────┘ 나는 또 높은 담을 따라 나 있는 길을 통하여 철문으로 나왔다. 문지기는 조금 전의 남자와는 달리 분명히 보디가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몸집이 큰 남자였다. 그는 건방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문에서 내보내주었다. 차의 경적이 울렸다. 리어든 양의 쿠페가 내 차 바로 뒤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차갑고 비꼬는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장갑낀 가는 손을 핸들 위에 놓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참견할 건 아니지만 그 여자, 어떤 여자라고 생각하시죠? 금방 스커트를 벗을 여자요. 어째서 항상 그런 말투를 써야만 하죠? 하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대단히 불쾌한 듯이 말했다. 나는 이따금 남자가 싫어질 때가 있어요. 늙은 남자, 젊은 남자, 풋볼 선수, 오페라 가수, 빈틈없는 부르주아, 미남자 지골로(男妾), 그리고 천한 사립탐정.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투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가 지골로라고 누가 말했소? 누구요? 시치미떼지 말아요. 마리오지. 추측이에요. 그렇지만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미안해요. 난 싫은 소리를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분명히 그 여자의 스커트를 벗기는 것은 문제없겠지만, 한 가지 당신이 기억해 두어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 늦었다는 거예요. 널찍한 도로가 태양광선 속에서 평화로운 잠을 탐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칠해진 트럭이 맞은편 저택 앞에 섰다. 트럭의 앞면에 베이 시티 유아 서비스 회사 라고 적혀 있었다. 앤 리어든은 내 쪽으로 몸을 펴며 파란색의 눈을 우울하게 떴다. 약간 너무 긴 윗입술은 뾰족하고 이빨에 꽉 눌려 있었다. 그녀는 짧고 날카로운 호흡을 했다.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앞으로도 도와드릴 계획인걸요.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고 싶지 않소. 경찰도 내 응원을 바라고 있지 않고. 내가 그레일 부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소. 비어 홀 앞에 세워져 있었던 차 얘기를 해주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지. 상대는 보석전문 고급 갱이란 말이오. 그 목걸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섞여 있을지 모르지. 사전에 정보가 제공되었는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오. 나는 담배를 찾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 나는 그다지 흥미가 없아. 신경전문의에게도? 나는 오히려 멍청한 얼굴을 했다. 신경전문의? 당신은 탐정이 아니었던가요? 깜박 잊고 손을 대지 못했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레일 집안에는 곰팡이가 슬 정도로 돈이 많이 있소. 그리고 이 마을에서는 법률을 돈으로 살 수 있소. 경찰의 이상한 행동을 보시오. 신문에도 기사를 실을 수가 없소. 중요한 단서를 갖고 있는 사람도 협력할 길이 없소. 손을 떼라고 하는 경고뿐이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루즈는 이미 지워졌어요. 하고 앤 리어든은 말했다. 난 신경전문의라고 했어요. 안녕.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내던지고 달려갔다. 나는 그 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베이 시티 유아 서비스 회사 라고 적힌 트럭의 남자가 새하얀 제복을 빛내면서 저택 옆문에서 나와 트럭에 올라탔다. 그는 무슨 상자를 안고 있었다. 트럭은 소리도 없이 도로를 미끌어져 갔다. 그것은 단지 기저귀를 간 것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차에 타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5시가 가까워졌다. 스카치 위스키는 할리우드에 도착할 때까지 내 몸에 남아 있었다. 마음씨 좋은 여자애가 있어. 하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마음씨 좋은 그 여자애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도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벨베디아 클럽에서 10시에 약속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어리석군. 내 목소리였다. 내가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15분 전 6시였다. 건물은 조용했다. 나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