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화원 지은이: 버넷 출판사 파랑새 1.외톨이가 된 메어리 해질녁, 미스르스웨트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한 어린 소녀가 고집스런 얼굴 로 앉아 있었다. 소 녀의 팔 안에는 온몸이 은빛털로 뒤덮인 고양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겨 있 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메아리. 메어리의 조그마한 얼굴은 야윌 대로 야위었고 몸은 삐쩍말라 있었다. 게다가 검은 색 옷에 검 은 색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더욱 침울해 보였다. 메어리는 팔 안에 안긴 고양이가 자꾸 몸을 비틀자 검은 색 장갑을 낀 여윈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패티, 조금만 있으면 돼." 메어리는 고개를 내밀어 창 밖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 름이 둥실둥실 흘러 가고 있었다. "저거 봐, 패티. 구름이 꼭 코끼리 모양 같애. 영국에도 코끼리가 있을까?" 메어리는 인도에서 살다가 영국에 있는 클레이븐 아저씨의 집에서 살기 위 해 미스르스웨트로 가는 중이었다. 메어리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아저씨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어머니와 아버 지를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이다. 메어리가 살고 있던 인도에는 콜레라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퍼졌는데 메어리 의 어머니와 아버지 도 이 병에 걸려 하루 아침에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패티를 안고 있는 메어리의 앞에는 메드로크 부인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 아 있었다. 메드로크 부인은 클레이븐 씨 저택의 하인들을 관리하는 하녀 감독이었다. 메드로크 부인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메어리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휴, 정말 볼품없이 생긴 애로군. 게다가 저 고양이는 또 뭐야?' 그때 열린 창틈으로 바람이 스며 들어오자 패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메드로크 부인이 낮게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저 고양이 좀 치울 수 없어요? 털이 마차 안에 날리잖아요." 메어리는 패티를 더욱 꼬옥 껴안으며 앙칼지게 쏘았다. "아줌마가 이 마차 밖으로 나가면 될 거 아냐?" 메드로크 부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메어리가 클레이븐 주인님의 조카였기 때 문에 꾹 참을 수밖 에 없었다. 메어리는 신경질을 잘 부리는 버릇없는 아이였다. 바쁜 부모님 밑에서 쓸쓸 하게 자란 메어리는 거의 하녀들의 손에 맡겨져 자랐다. 메어리의 아버지는 영국 정부에서 일을 하고 계셔서 늘 바쁘셨고, 어머니는 뛰어난 미인이었지 만 파티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을 좋아했다. 하녀들은 메어리가 요구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주었기 때문에 메어리는 점점 더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메어리의 고집스러운 성격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 다. 메어리는 부모님을 잃고 난 뒤로 세상에서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어리의 성격은 더욱 비뚤어졌다. "지금부터 가게 되는 곳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고 싶은데, 클레이븐 아저씨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메드로크 부인이 묻자 메어리는 무뚝뚝한 말투로 짧게 대답했다. "아니." "아저씨에 대해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나요?" "응." 메어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부모님께서 특별히 아저씨에 대해 말씀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그럼 아가씨가 놀라는 일이 없도록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곳에 대해 좀 얘기해 드리 는 편이 좋겠군요. 굉장히 색다른 곳이거든요." 메드로크 부인은 숨을 크게 내쉬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곳의 건물은 600년 이상된 집으로, 황량한 벌판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 요. 집에 있는 방만 도 거의 100개나 되지만 대부분의 방들은 열쇠로 채워져 있고 사용하지 않아요. 몇 대에 걸쳐 쓰 던 가구 같은 것도 항상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답니다. 집 주변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어요. 그 정원에는 가지가 땅까지 늘어져 있는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있지요." 메드로크 부인은 잠시 밖을 바라보고 다시 말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는 생각난 듯이 다시 말했다. "주인님은 꼽추이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마음까지 비뚤어지게 만들었지요. 젊 은 시절에는 무척 까다로운 분이셨어요.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 많은 재산이나 넓은 땅도 아무런 즐거움이 되지 못 하셨나봐요." 메어리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놀란 듯 엉겁결에 눈이 휘둥 그래졌다. 메드로크 부인은 그런 메아리를 힐끗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주인 마님은 정말 상냥하고 아름다운 분이었지요. 사람들은 돈 때문에 주인 마님이 주인님과 결혼했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예요. 주인 마님과 주인님은 서로 사랑하셨답니 다. 주인님은 주인 마님을 만난 뒤로 무척 행복해 하셨지요." 메드로크 부인은 단호히 말을 이어갔다. "주인 마님이 돌아가셨을 때...." "뭐? 돌아가셨다구?" 메어리는 흠칫 놀라 외쳤다. 언젠가 동화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불쌍한 꼽추 와 공주님의 이야 기가 기억났다. 메어리는 클레이븐 아저씨가 참 안됐다고 생각했다. "네, 돌아가셨어요. 그후로 주인님은 전보다 더 이상해지셨지요. 누구에게도 마음을 쓰지 않으 시고, 사람들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으세요. 늘상 집을 비우시는데 간혹 계시더 라도 서재에만 틀 어박혀 계시지요." 메드로크 부인의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메어 리는 창 밖으로 시 선을 돌렸다. 마차는 들판의 끝에 있는 늪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메어리는 늪지대를 서성거 리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어! 저 여자는 누구지?' 메어리는 뿌연 김이 서린 창문을 옷소매로 닦아내고 창문 가까이 얼굴을 들이 대었다. 늪지대에 서 있는 여자는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모 습이었다. 긴 머리 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붉은 망토는 바람에 부풀어 올라 펄럭이고 있었고, 높이 들어올린 양쪽 손목에는 커다란 링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여자는 메어리 가 타고 있는 마차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메어리는 오싹 소름이 돋아 패티를 꼬옥 껴안았다. "저 여자는 누구야?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야?" 메어리의 질문에 메드로크 부인은 창 밖을 힐끗 내다보더니 커튼으로 얼른 창문을 가려 버렸 다. "신경 쓸 거 없어요. 저 여자는 마녀예요. 저 늪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메어리가 너무 세게 끌어안았던 탓인지 패티가 목을 캑캑거렸다. "어머, 패티. 미안해." 메어리는 패티를 토닥이고 난 후 메드로크 부인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틈 을 타 커튼을 조금 걷어 보았다. 그러자 마차는 이미 늪지대를 지나쳐 있었다. 마차는 울퉁불퉁한 길을 계속 달렸 다. 바깥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듯했다. 메어리는 거세게 부는 바람이 이 상한 소리를 내자 메드로크 부인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파도소리야?" "아니에요. 여긴 몇 킬로미터나 이어진 황량한 땅이에요. 히드꽃이나 금작화 만이 자라고 있어 요. 그리고 야생말이나 양들이 살고 있지요." 메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물만 있으면 바다라는 느낌이 들 거야. 지금도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해." 마차는 이제 캄캄한 어둠 속을 달렸다. 마차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달리 고 작은 다리도 몇 번인가 건넜다. 메어리는 언제까지나 마차 여행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 었다. "이런 곳은 정말이지 싫어!" 메어리는 투덜거렸다. 또 다시 말이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 로 앞쪽에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메드로크 부인도 빛을 보고 안심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겨우 도착했네. 문지기 집에서 나오는 불빛이에요." 그러자 마차가 문지기 집을 빠져나간 후에도 3킬로미터의 가로수 길이 더 있 었다. 길게 가지를 뻗은 가로수 밑을 달리는 느낌은 마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착각을 일 으켰다. 가로수 길 을 빠져나와 마차가 멎은 곳은 돌을 깐 광장에 우뚝 서 있는 굉장히 넓고 큰 건 물 앞이었다. 처음에 메어리는 그 큰 건물을 보고 불이 켜져 있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려 자세히 보니 2층 구석의 방 하나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 다. 묵직한 떡갈나 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에는 철로 만든 장식 거울이 아로새겨져 있고, 굵은 쇠빗 장으로 채워져 있 었다. 메어리와 메드로크 부인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놀랄 만큼 커다란 방이었 다. '이런 곳엔 더 이상 있고 싶지도 않아.' 메어리는 엄숙한 표정의 철갑 군인들 초상화가 걸려 있는 이 집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메드로크 부인은 메어리를 이끌고 넓은 계단들을 지나 여러 개의 복도를 지 난 후에야 겨우 어 떤 방 앞에 멈춰 섰다. "주인님은 내일 아침 일찍 런던으로 가시기 때문에 오늘 아가씨를 만나실 수 가 없어요." 메드로크 부인은 딱딱하게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난로에는 불이 피워져 있 었고 테이블 위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메드로크 부인은 메어리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아가씨! 이 방과 바로 옆방이 아가씨가 쓰실 방입니다. 아가씨가 들어가도 좋은 방은 이 두 개의 방뿐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메드로크 부인은 말을 마치자 벨을 눌렀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하녀가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통통한 몸에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하녀였 다. "부르셨어요?" "그래, 마르사. 이 아가씨가 인도에서 오신 분이야. 네가 시중을 해드려라." 메드로크 부인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 고 메어리가 안고 있는 패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가씨. 이 집에선 고양이 따위는 키울 수 없어요. 마르사, 저 고양이 좀 치워 버려." 메드로크 부인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방을 나갔다. 메어리는 메드로크 부인 이 나간 방문을 향 해 눈을 흘겼다. "흥! 내게서 패티를 빼앗아 갈 수 있을 줄 알아! 어림도 없어!" 메어리는 마르사를 향해서도 눈을 흘겼다. "난 패티를 절대로 뺏기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패티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마르사는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음식 두껑들을 열다가 메어리를 보며 웃었 다. "전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아요. 동물을 아주 좋아하는걸요. 자, 식사하셔야죠?" 메어리는 고개를 휙 돌렸다. "안 먹어." "피곤하신가 보죠?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 해요. 몸도 무척 마르셨는데." "혼자 있고 싶단 말야!" 메어리는 소리를 빽 질렀다. 마르사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나갔다. 메어리는 마르사가 나가고 나자 패티를 꼬옥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였다. "패티, 이곳이 싫어.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어. 메드로크 부인도 하녀도 다 싫 어." 2. 이상한 하녀 이튿날 아침, 메어리가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것은 어젯밤에 보았 던 하녀였다. 하녀 는 깔개에 무릎을 꿇고 난로의 재를 긁어내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무척 좋은 아침이에요." 마르사는 메어리를 뒤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부산하게 재를 긁어내는 모습 이 활기차 보였다. 마르사는 재 긁는 일에 열중하면서 메어리를 향해 말했다. "오늘부터 제가 아가씨를 돌봐 드리게 되었어요." 메어리는 시선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음침한 느낌이 드는 방으로, 벽에 는 숲 속의 풍경을 그려 넣은 벽걸이가 걸려 있었다. 메어리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으로는 넓게 경사진 오르막길이 보였 다. 그러나 그 길엔 나무 한 그루 없이 마치 연보라빛 바다처럼 느껴졌다. 메어리는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키며 물 었다. "저게 뭐야?" "아, 저곳은 황야 들판이라고 하는 곳이에요.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아니, 난 저런 것은 싫어." "아직 익숙치가 않아서 그래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서 더 그 렇겠지만 금방 좋 아하게 되실 거예요." 메어리는 다시 창 밖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넌, 여기가 좋아?" "그럼요. 전 이곳이 아주 좋아요. 들판은 사실 벌거숭이가 아니에요. 봄과 여 름에는 히드꽃이 나 금작화가 흐드러지게 피는데 얼마나 아름답다고요. 향기는 또 어떻고요. 달 콤한 내음이 주위 를 가득 감싸죠." 마르사는 손을 털고 창 밖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늘도 얼마나 높은데요. 꿀벌이 붕붕대는 소리, 종달새가 지지배배 지저귀 는 소리... 전 어 떤 일이 있어도 이 들판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메어리는 인도의 하인과는 전혀 다른 마르사의 태도를 보고 놀랐다. 인도에 서 메어리가 본 하 인들은 언제나 굽신거리고, 아첨하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메어리는 인도에 있을 때는 화가 나면 늘 유모의 뺨을 때렸다. 메어리는 당 당해 보이는 이 하 녀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만약 마르사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될까?' 마르사는 마음씨가 고운 처녀였지만 어린아이에게 맞고만 있지는 않을, 어딘 가 다부져 보이는 하녀였다. 메어리는 머리를 베개에 기댄 채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 "넌 정말 이상한 하녀야." 마르사는 청소 솔을 든 채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만약 이곳이 다른 저택 같았다면 저처럼 보잘 것없고 사투리가 심한 애는 고용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 댁은 조금 이상해요. 메드로크 부인이 마치 주인 같 거든요. 클레이븐 씨는 거의 집을 비우세요. 이곳에 계실 때도 뭐 하나 상관하지 않으시고요. 저 는 메드로크 부인 이 고용해 주셨어요." 메어리는 인도에서 하던 대로 거만하게 물었다. "네가 내 하녀야?" "전 메드로크 부인에게 고용되어 있어요. 전 메드로크 부인에게 아가씨를 돌 봐 드리라는 명령 을 받았어요." "그럼 네가 내 옷을 갈아입혀 주겠네?" 마르사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요? 아니, 혼자서 옷을 못 입는단 말이에요?" "그래! 난 혼자서 옷 못 입어! 언제나 유모가 옷을 입혀 줬단 말이야!" 마리사의 놀리는 듯한 태도에 메어리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마르사 는 차분하게 타이르 듯 말했다. "아가씨,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배우세요.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거예요. 저희 어 머닌 항상 말씀하시길, 훌륭한 저택의 아이들은 마치 강아지처럼 유모가 얼굴 을 닦아 주고 옷도 입혀 주고, 산책도 데려가기 때문에 바보가 된다고 하셨어요. 전 처음에 아가씨 가 인도에서 온다 고 하길래 검둥이가 아닌가 했어요." "뭐라고? 이 건방진 것이!" 메어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 다. "아가씨, 전 검둥이를 나쁘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흑인들이 얼마나 신앙심 이 깊은데요. 흑 인도 우리들의 형제라고요. 전 흑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이번엔 꼭 볼 수 있으리라 생각 한 거예요." 마르사는 계속 울기만 하는 메어리를 보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우세요. 아가씨, 제발요." 마르사는 침대로 다가가 메어리를 달랬다. 마르사의 사투리와 어눌한 말씨는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다정함을 느 끼게 했다. 마르사 의 말씨에 메어리는 차츰 울음을 멈추었다. "자, 아가씨.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옆방에 준비되어 있는 아침밥을 드셔야 죠. 지금 일어나 시면 제가 옷 입는 것을 도와 드릴게요." 마르사는 옷장에서 메어리가 입을 옷을 꺼내 왔다. 그 옷은 메어리가 어제 입었던 검은 옷이 아니라 면으로 만들어진 흰색 옷이었다. "이 옷은 내 옷이 아냐! 내 옷은 검은 옷이야!" "이 옷이 아가씨가 입을 옷이에요. 클레이븐 씨 지시로 메드로크 부인이 사 오신 거예요. 클레 이븐 씨는 검은 옷을 입으면 집 안이 더욱 어두워진다고 싫어하세요." 메어리는 마르사가 옷을 입혀 줄 때도 꼼짝하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러나 마르사는 어린 동생들의 옷을 입혀 주는 일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메어리의 옷을 입힐 수 있 었다. 메어리는 옷을 입고 난 뒤 잠자코 발을 내밀었다. "왜 혼자서 구두를 신지 않죠?" "유모가 신겨 줬어." 마르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메어리를 보자 동생들이 생각났다. 마르사 의 동생들은 모두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었다. "아가씨를 제 동생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마르사가 말했다. "저희 집은 아이들이 열두 명이나 돼요. 아버지의 적은 벌이로 많은 식구들을 먹여야 하는 어 머니의 고생이 말이 아니지요. 제 동생들은 하루 종일 들판에서 뛰놀며 다녀 요. 저희 어머니는 들판의 공기가 아이들을 살찌운다고 말씀하시죠." 마르사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디콘이라는 열두 살 된 제 남동생은 동물들을 아주 좋아해요. 야생 망아지 를 길들여서 자기 말이라고 하며 굉장히 예뻐한답니다." 메어리는 마르사의 말이 신기했다. "와, 어디서 붙잡은 건데?" "들판에서요. 젖먹이 망아지일 때 엄마 말이랑 같이 있는걸 발견한 거예요. 디콘이 빵 부스러 기를 먹이고 부드러운 풀도 주곤 했는데 둘은 사이가 굉장히 좋아졌어요. 어 떤 때는 디콘을 등 위에 태워 주기도 할 정도랍니다. 디콘이 원래 마음이 착하니까 동물들도 알고 좋아하나봐요." 메어리는 패티 외에는 동물을 한 번도 길러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르사 의 말을 듣자 언젠 가는 꼭 망아지의 등에 타 보고 싶어졌다. 메어리는 망아지를 길들였다는 디콘 에게 흥미를 느꼈 다. '망아지를 길들였다는 디콘은 어떤 애일까?' 자기 외의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메어리로서는 다른 사람에 게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마르사는 웃고 있는 메어리를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디콘에게는 여우 친구도 있답니다. 디콘은 그 여우를 캡 틴이라고 불러요. 디콘이 붙여준 이름이죠. 캡틴은 디콘이 어디를 가든 따라다녀요. 디콘도 많은 동물 친구들 중에 서 캡틴을 제일 좋아하죠. 캡틴은 저희 집에서 디콘이랑 함께 살아요." 메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우하고도 친구란 말이야? 여우는 어떻게 만났는데?"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날, 구덩이에 빠져 있는 새끼 여우를 건져온 거예요. 엄마 여우는 곁 에서 죽어 있었대요. 디콘은 그 새끼 여우를 가슴 속에 품고 집으로 데려왔어 요." 메어리는 마르사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메어리는 여우 친구와 함께 산다는 디콘을 꼭 만나보 고 싶었다. "마르사, 나 디콘을 만나보고 싶어." 마르사는 밝은 웃음을 지었다. "곧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디콘은 클레이븐 씨의 양들을 돌보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곳에서 살지는 않아요. 들판에서 캡틴과 함께 양들을 돌보다가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 아가죠." 메어리는 디콘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 마르사를 닮아 자그마한 키에 거무스 름하고 건강해 보이 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자, 아가씨. 이제 식사하러 가셔야죠." 메어리는 자신을 위해 새롭게 고쳤다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에 잤던 방 보다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았다.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에는 맛있어 보이는 아침 식사가 잔뜩 준비되어 있었지 만 메어리는 마르 사가 내민 접시를 불쾌한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먹고 싶지 않아." 마르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높여 말했다. "오트밀이 싫다고요?" "그래, 싫어." "얼마나 맛있는데요. 그러지 말고 꿀이랑 설탕을 넣어서 드셔 보세요. 훨씬 맛 있을 거예요." "먹고 싶지 않다니까!" "그럼 이 맛있는 음식들을 버리란 말이에요? 너무 아깝잖아요. 제 동생들이라 면 오분도 안 돼 서 다 먹어 치웠을걸요." "왜?" "왜냐구요? 제 동생들은 한 번도 음식을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거든요. 그 래서 매일 굶주려 있어요." "난 배 고프다는 게 뭔지 몰라." 메어리는 정말 배고프다는 것이 뭔지 잘 몰랐다. 배가 고파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사는 몹시 화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한 번 정도 배고파 보는 것도 좋겠네요. 전 맛있는 빵과 고기를 앞에 두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요. 디콘과 필, 제인 그리고 다른 애들에게 이 런 음식을 먹일 수 있다면..." "그럼 가지고 가서 네 동생들에게 주면 되잖아." "이건 제 것이 아니에요." 마르사는 딱 잘라 말했다. "게다가 오늘은 제가 쉬는 날도 아니구요. 쉬는 날이라면 집에 있는 동생들에 게 갖다 줄 수도 있겠지만 말예요. 전 한달에 한 번씩만 쉬거든요." "쉬는 날은 뭘 하는데?" "집에 돌아가서 청소나 집안일을 해요. 엄마를 하루 정도 쉬게 해 드리려고 요." 메어리는 마르사의 말을 듣고 마말레이드를 바른 토스트를 한 조각 먹어 보 았다. 그러나 맛이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은 못 먹겠어. 하나도 맛이 없는걸." "옷을 두툼하게 입고 밖에 나가 놀면 어때요? 몸에도 좋고 배가 고파져서 밥 도 맛있게 먹게 될 텐데요." 메어리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여러 개의 정원과 오솔길, 커다 란 나무가 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썰렁해 보였다. "이런 날 밖에 나가서 놀라구? 무척 추워 보이는걸." "밖에 나가지 않으면 집에만 계셔야 하는데 집에서 뭘 하려고 그러세요?" 메어리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가지고 놀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안에 는 가구만 잔뜩 들 어 차 있었다. "인형도 없어? 난 나가기 싫단 말이야." "메드로크 부인이 준비해 놓지 않으셨나봐요. 이 집에서 놀수 있는 건 들판 에 나가 뛰어노는 일밖에 없어요." "누가 나랑 같이 나가 줄 건데?" 마르사는 어이가 없었다. "혼자 가세요. 아가씨도 혼자 노는 법을 배워야 해요. 제 동생 디콘은 혼자 서 들판의 양들을 몰고 다니는걸요. 디콘의 친구들은 모두 들판에서 사귄 친구들이에요." "어떤 친구들인데?" "들판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디콘의 친구예요. 새들에게는 손바닥에 모이를 놓아 먹게 하고 다 람쥐에게는 빵을 나눠 주곤 하죠." 마르사는 메어리에게 코트와 모자를 내밀고는 튼튼해 보이는 작은 부츠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는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저기로 들어가면 여러 개의 정원이 있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 지만 여름엔 꽃이 활짝 핀답니다." 마르사는 조금 주저하는 듯한 태도로 덧붙였다. "정원들 중의 하나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 정원엔 10년 동안 아무 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어째서?" 메어리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마르사는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주인 마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주인님께서는 아무도 그 정원에 들어 가지 말라고 하시 고는 커다란 자물쇠로 입구를 잠가 버리셨어요. 그 정원은 주인 마님이 무척 아끼던 정원이었거 든요. 주인님께서는 정원의 열쇠를 땅에 묻어 버리셨답니다." 메어리는 마르사의 말을 들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미스르스웨트 저택 은 온통 비밀과 신 비에 싸인 집 같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이런, 메드로크 부인이 벨을 울리고 계시네요. 전 이제 가봐야 해요." 마르사는 빠른 걸음으로 메어리의 방을 나갔다. 3. 빨간 가슴을 가진 새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울타리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는 정원은 어떻게 생겼을까? 꽃들은 모두 죽어 있을까?' 울타리를 빠져나가자 커다란 정원이 나왔다. 정원에는 여러개의 잔디밭이 있 고 꼬부라진 오솔 길이 길게 나 있었다. 정원에는 화단도 있고 색다른 모양으로 베어낸 상록수 도 있었다. 커다란 연못도 있었는데 연못의 한가운데에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분수가 설치되어 있었 다. 하지만 화단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분수도 물을 뿜어 내지 않고 있었다. "여긴 잠겨져 있다는 정원이 아닌가 보지?" 메어리는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다. "왜 정원을 잠가 버렸을까? 정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앞쪽에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길다란 벽이 나타났다. 담 가까이 가보니 담쟁 이 덩굴 아래 녹색 의 문이 보였다. "이 문일지도 몰라." 메어리는 녹색 문에 손을 댔다. 그러나 문은 열려 있었다. "에이, 이 문도 아니야. 하지만 문이 열려 있다는 건 들어가도 좋다는 걸 거 야." 메어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사방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이었는데 이 정원외에도 몇 개인가 담 으로 둘러싸인 정 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원들은 모두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와, 이렇게 많은 정원들은 처음 봤어!" 메어리는 다른 쪽에 있는 녹색 문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야채밭이었다. 그러나 겨울이어 서인지 야채밭은 모두 황폐해져 있었다. "피, 뭐 하나 제대로 자라지 않는 지저분한 곳이잖아!" 그때 패티가 갑자기 울음소리를 냈다. 메어리가 뒤돌아 보니 쟁기를 어깨에 짊어진 노인이 정 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다가 메어리를 보고 깜 짝 놀라는 듯했다. 그러나 곧 모자를 약간 위로 올려 인사를 했다. "이곳은 뭐하는 곳이에요?" "채소밭이야." "그럼 저곳은요?" 메어리는 다른 초록색 문을 가리켰다. "거기도 채소밭이야." 역시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담 맞은편에 또 다른 채소밭이 있고 그 맞은편은 과수원이야." "들어가 봐도 돼요?" "상관 없어. 하지만 들어가 봤자 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메어리는 오솔길을 걸어 두번째의 초록색 문을 빠져나갔다. 그곳에도 담벼락 과 야채밭이 있을 뿐이었다. 담장의 구석에는 또 다른 초록색 문이 있었다. 메어리는 문으로 다가 가 조심스럽게 손 잡이를 돌려 보았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찾았다! 바로 이 문이었어." 그러나 다시 한 번 힘을 주는 순간 문이 쉽게 열렸다. 메어리는 실망한 얼굴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과수원이었다. 그러나 벌거숭이가 된 나 무들이 말라 버린 채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곳이야. 모두 다 죽어 있나봐." 메어리는 바람이 휭하니 부는 과수원에 서서 담 맞은편에 있는 나뭇가지를 쳐다보았다. 그 순 간 메어리는 나뭇가지의 끝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를 보았다. 가슴이 빨간털 로 뒤덮인 작은 새 였다. "와! 새다. 예쁜 새야." 메어리는 패티를 쓰다듬으며 새가 있는 나뭇가지로 다가갔다. "패티, 조용히 해야 해. 안 그러면 예쁜 새가 날아가 버릴거야." 메어리는 패티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혹시라도 새가 날아가 버 릴까 겁이 났던 것 이다. 그런데 작은 새는 메어리를 보더니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찌르르 쫑 찌르르 쫑 찌르르르." 메어리는 가만히 서서 작은 새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메어리의 마음은 점 점 즐거워졌다. 메 어리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번졌다. "죽은 나무만 있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예쁜 새가 있다니." 인도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새였다. "패티, 저 새는 비밀의 화원에 살고 있는 새인지도 몰라. 또 만났으면 좋겠어. 그렇지?" 메어리는 새가 날아간 하늘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패티, 클레이븐 아저씨는 부인을 매우 사랑했다고 하던데, 왜 부인이 아끼던 정원은 싫어하는 걸까?" 메어리가 중얼거리자 패티는 야옹 울음소리를 내며 메어리의 손에 얼굴을 비 볐다. "난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 만나게 되더라도 아저씨는 날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날 좋아해 주는 건 패티 너밖에 없어." 메어리는 처음 들어갔던 채소밭으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아까 그 할아버지가 흙을 일구고 있었 다. 메어리는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는 모르는 척 일만 했다. "다른 정원에 갔다 왔어요. 과수원에도 들어갔다 왔구요. 그런데 거기엔 다 른 문으로 통하는 문이 없었어요. 다른 곳엔 다 있었는데." "어느 정원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하늘을 쳐다보던 할아버지의 무뚝뚝 한 얼굴에 부드러 운 미소가 번졌다. "휙휙휙휙." 할아버지가 과수원 쪽을 향해 낮고 부드러운 소리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메어리는 무뚝뚝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휘파람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공중을 스치는 작은 날개 소리가 들 려온 것이다. 메어 리는 얼굴을 들어 공중을 바라보았다. "와, 새다. 빨간 가슴 새야." 그것은 아까 보았던 그 작은 새였다. 작은 새는 정원지기 할아버지의 발치로 내려오더니 높게 쌓아올린 흙더미 위에 앉았다. "오! 왔구나. 어디에 있었니? 이 건방진 녀석. 오늘은 널 보는 것이 처음이구 나." 할아버지는 소리를 죽여 웃으며 아이에게 이야기하듯이 작은 새에게 말했다. 작은 새는 자그마 한 머리를 갸웃거리며 까만 구슬처럼 선명하고 귀여운 눈으로 할아버지를 올려 다보았다.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아, 신기해." 메어리는 할아버지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이 마치 귀여운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할아버지가 부르면 꼭 오나요?" "그럼, 오고 말고. 난 저 녀석이 새끼일 때부터 알고 지냈어. 다른 정원의 둥 지에서 태어났는 데 처음 담을 넘어 날아왔을 땐 몸이 약한 상태였지. 그래서 둥지로 2, 3일 정 도 돌아가지 못했 어. 그때 나랑 친하게 되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저 새는 다시 둥지로 날아갔나요?" "저 녀석이 다시 담 너머로 돌아갔을 때 다른 새끼들은 모두 떠나고 없었어. 혼자 남게 된 거 지. 결국 저 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어." "이 새 이름이 뭐예요?" "울새라고 해. 강아지처럼 사람을 아주 잘 따르는 새지. 저것 좀 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도 우리들 쪽을 보고 있지? 저 녀석은 우리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 는 거야." 할아버지는 빨간 조끼를 입은 것 같은 둥글둥글한 울새를 미소를 머금고 바라 보았다. "저 녀석은 무척 잘난 체한단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좋아 하지. 그리고 무엇 이나 알고 싶어해. 내가 뭘 심고 있으면 꼭 이렇게 보러 온단다. 주인님께서도 알지 못하는 일을 저 녀석은 알고 있지. 정원지기의 대장격이야." 울새는 까만 구슬처럼 선명한 눈을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내며 메어리를 쳐 다보고 있었다. 메어리는 이 작은 새가 아주 친한 사람처럼 점점 친근하게 여겨졌다. "다른 새끼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어요?" "나도 잘 모른단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겠지. 이 녀석은 영리하니까 자 기가 외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야." 메어리는 울새에게 다가가 울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외톨이야." 할아버지는 머리에 쓴 모자를 조금 뒤로 젖히고는 잠시 메어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인도에서 왔다는 그 애니?" 메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이름이 뭐예요?" "벤." 할아버지는 쓴웃음을 짓고 손가락으로 울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이 없었을 땐 나도 무척 쓸쓸했단다. 나도 외톨이였지. 내겐 저 녀 석 말고는 친구가 없단다." "나도 친구 같은 건 없어요. 나랑 놀아 주는 건 이 고양이 패티뿐이에요." "너랑 나는 닮은 점이 많구나. 못생긴 것도 닮고, 친구가 없는 것도 닮고, 삐 뚤어진 성격도 닮 고 말이다." 메어리는 자신의 용모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걱정 이 되었다. '내 얼굴도 아까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무뚝뚝할까? 난 정말 나쁜 성격을 가졌 나?' 메어리는 우울해졌다. 그때 갑자기 메어리 곁에서 구슬을 굴리는 것 같은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찌르르 쫑 찌르르 쫑 찌르르르." 울새가 메어리 가까이에 있는 사과나무 가지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울새가 왜 이러는 거예요?" 벤은 소리 높여 웃었다. "이 녀석은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네가 마음에 든 게 틀림없 어." "제가요?" 메어리는 사과나무 곁으로 다가가 작은 새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친구가 되어 주겠니?" 메어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목소리는 보통 때의 으스대거나 무 뚝뚝한 말투가 아 닌, 듣는 사람의 마음을 녹여 주는 말투였다. 벤 할아버지는 메어리의 말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 네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할 줄은 몰랐구나. 디콘이 동물에게 이야기 할 때랑 꼭 닮았 어." "디콘을 알고 있어요?" "그럼, 누구든지 디콘을 알고 있지. 디콘은 어디든지 잘 돌아다니거든. 산딸기 나 히드꽃도 그 애를 알고 있을 정도야. 여우들도 디콘에게만은 새끼들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 지. 종달새들도 디 콘에게는 둥지를 감추려고 하지 않아." 디콘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메 어리는 디콘에게 비 밀의 화원과 같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때 노래를 끝낸 울새가 조그만 소리로 날개짓을 하더니 날개를 펴고 날아가 버렸다. "담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메어리는 울새를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아! 과수원으로 날아갔어요. 저기는 입구가 없는 정원인데." "저 녀석은 저곳에서 살고 있단다. 태어난 곳도 바로 저곳이야." 벤 할아버지는 쟁기를 들고 다시 흙을 일구기 시작했다. "저곳엔 장미나무도 있나요?" "10년 전에는 있었단다." "그 장미를 보고 싶어요. 초록색 문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딘가에 있겠지요?" "10년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입구가 없다구요? 아니에요. 꼭 있을 거예요." 메어리가 외치자 할아버지의 얼굴은 다시 무뚝뚝해졌다. "찾아봐도 소용없어.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아라. 난 이제부터 다시 일을 해야 하니까 너 도 돌아가서 놀거라. 난 더 이상 시간이 없어." 할아버지는 흙을 일구던 손을 멈추고 쟁기를 어깨에 지고는 잽싸게 사라졌다. 4. 늪지에 사는 카멜라 메어리는 다음날도 패티를 안고 정원으로 나갔다. 울새와 벤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패티, 이제 심심하지 않을 거야. 벤 할아버지랑 울새가 우리와 놀아 줄 테니 까." 벤 할아버지는 정원에서 채소밭을 일구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메어리는 할아버지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러나 벤 할아버지는 그저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왔니? 난 지금 몹시 바쁘단다. 다른 데 가서 놀아라." 할아버지는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메어리는 쟁기질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등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치, 할아버지도 날 싫어하는 거야.' 메어리는 토라진 얼굴로 휙 돌아섰다. "난 울새랑 놀 거예요. 울새는 날 좋아한다구요." 메어리는 채소밭을 나와 과수원으로 갔다. "울새야! 어디 있니? 내가 왔어." 메어리는 과수원 주위를 둘러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나 울새의 아름다 운 노랫소리가 들려 올까 해서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울새의 귀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패티, 울새가 날 잊어버렸나봐." 메어리는 갑자기 슬퍼졌다. "울새도 날 좋아한 게 아니었어. 날 잊어버린 거야." 메어리는 울먹였다. 패티도 메어리를 따라 갸르릉거렸다. 메어리는 시든 나무와 쓸쓸한 바람 소리만이 무성한 과수원을 나와 들판 쪽 으로 발길을 옮겼 다. 멀리 들판에 시선을 주던 메어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래, 디콘. 디콘을 찾아가는 거야."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들판으로 달렸다. "디콘은 들판에서 양들을 돌본다고 했어. 디콘을 찾으면 여우 친구 캡틴을 소 개시켜 달라고 하 자, 패티." 메어리는 디콘과 캡틴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디콘도 마르사에게서 내 얘기를 들었을까? 들었을 거야." 메어리의 입에서는 방울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패티도 메어리 의 품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패티, 우리 누가 먼저 디콘을 찾나 내기할까?" 메어리는 패티를 내려 놓아 주었다. 패티는 꼬리를 흔들며 들판을 향해 뛰어 갔다. "같이 가자. 기다려, 패티." 메어리는 패티를 따라 들판을 달렸다. 이렇게 넓은 들판을 뛰는 건 처음이었 다. 들판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패티, 이렇게 넓은 곳에서 어떻게 디콘을 찾지?" 메어리는 멀리 들판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메어리의 옆에서 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메어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패티! 패티! 어디 갔니?" 메어리의 외침 소리는 들판으로 퍼져갔다. 그러나 패티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 았다. "패티! 어디로 간 거야! 패티!" 메어리는 들판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들판에는 갈색으로 변해 버린 키 작은 꽃나무들만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메어리가 혹시나 하고 뒤돌아보면 그것 은 바람에 풀잎들 이 몸을 눕히는 소리였다. "패티, 빨리 나와. 패티." 메어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패티는 메어리의 단 하 나밖에 없는 친구였 다. 패티를 잃으면 메어리는 정말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메어리는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해는 어느새 기울 어지고 있었다. 햇 볕이 사라지자 바람은 더욱 싸늘하게 불어왔다. 그러나 메어리는 패티를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 아갈 수는 없었다. "패티, 엉엉, 패티. 어디 있는 거야?" 메어리의 목소리는 울음소리로 변해 있었다. 메어리는 어느새 들판의 끝에 있는 늪지대에 다다 랐다. 늪에서는 기분 나쁜 찬 바람이 흘러나와 늪 주위에 있는 풀잎들을 감싸고 있었다. 메어리는 늪 가까이로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들 었던 메드로크 부인 의 말이 떠올랐다. '저 늪에는 마녀가 살고 있어요. 늪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마세요.' 늪 주위에서 언뜻 보았던 붉은 색 망토를 입은 여자의 모습도 떠올랐다. 늪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는 넓은 이파리들이 매달려 있었다. 이파리들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마치 마녀의 머리카 락이 날리는 모습 같았다. '그 여자는 정말 마녀였을까? 하지만 유모는 마녀는 숲 속에서 산다고 말했었 는데.' 메어리는 커다란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 뒤에서 갑자기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메어리는 발이 땅바닥에 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나무 뒤에서 나온 것은 메어리가 마차를 타고 갈 때 보았던 이상한 여자였 다. 치렁치렁 늘어뜨 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위로 솟구쳐 있고 등에는 붉은 색 망토가 걸쳐져 있 었다. "난 카멜라란다. 늪에 있는 오두막 집에서 살고 있지. 넌 아주 먼 곳에서 온 아이로구나." 카멜라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조금씩 떨렸다. 메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 고 겁에 질린 얼굴 로 카멜라를 바라보았다. "무서워할 것 없다. 난 널 도와 주고 싶단다. 넌 뭔가를 잃어버렸구나, 그렇 지?" 메어리는 카멜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네, 전 고양이를 잃어버렸어요. 패티는 하나밖에 없는 제 소중한 친구예요." "패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이에요." 메어리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 패티를 믿니? 패티가 너의 진정한 친구라면 분명히 네 곁으로 돌아올 거야." "하지만 들판은 너무 넓어요. 게다가 여우랑 매도 있는걸요." 카멜라는 들판을 둘러보았다. 카멜라의 눈에는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들판은 열심히 살아가려는 자들의 편이란다. 그 대신 살아 갈 용기를 잃은 자들에게는 냉엄하 지. 너도 패티도 이 들판에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노력을 해 봐." "전 길도 잃어버렸는걸요." 카멜라는 손가락으로 빛나는 별을 가리켰다. "저 별을 따라가면 네가 원하는 것을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이 냇가를 따라가다 보면 저 택으로 향하는 길이 나올거야." 메어리는 카멜라가 가리키는 별을 보았다. 그 별을 따라가면 패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전 메어리예요. 저기 들판 끝에 있는 저택에 살고 있어요."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거야." 빛나는 별은 동쪽으로 향해 있었다. 메어리는 동쪽으로 난 들판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패티를 찾으러 가야겠어요. 패티는 혼자 무서워서 울고 있을지도 몰라 요." 메어리는 카멜라가 가르쳐준 대로 빛나는 별을 보며 동쪽으로 걸어갔다. 옆의 풀 숲에서 패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야옹 야옹" 메어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패티는 풀숲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패티! 찾았어. 패티!"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한편 하녀 마르사는 날이 저물도록 메어리가 돌아오지 않자 정원과 과수원을 돌아다니며 메어 리를 찾았다. 그러나 메어리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아가씨가 들판에서 길을 잃은 건 아닐까?" 마르사는 등불을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아가씨! 메어리 아가씨!" 저 멀리서 메어리의 부름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기야! 마르사, 나 여기 있어!" 마르사는 메어리에게로 달려갔다. 메어리는 패티를 품에 안고 오돌오돌 떨며 저택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러나 메어리의 얼 굴에는 웃음이 번져 있었다. "아가씨, 어딜 갔다 오시는 거예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아가씨가 길 을 잃은 줄 알았단 말예요." "패티를 잃어버렸었어. 그래서 늦은 거야." 메어리는 패티의 보드라운 털에 볼을 비볐다. "패티를 잃었다구요? 그런데 어떻게 찾으셨어요?" 마르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멜라가 찾아 줬어." "카멜라라구요?" "응, 늪에 있는 오두막 집에서 살고 있대." 메어리는 마르사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마르사도 카멜라에 대해서 알고 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단지 소문으로 조금 들었을 뿐이에요." "사람들이 뭐라고 그래?" "예언과 점성술을 하는 여자래요. 마녀라고도 하죠. 하지만 마녀는 아닐 거예 요. 그저 점을 치 는 떠돌이 집시일 거예요. 아가씨는 카멜라가 무섭지 않아요?" 마르사는 웃옷을 벗어 오돌오돌 떨고 있는 메어리에게 걸쳐 주었다. "무섭지 않아. 패티를 찾아 주었는걸." 메어리는 정말로 카멜라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웬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이었다. 카멜라는 메어리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5. 클레이븐 씨의 슬픔 며칠 동안 메어리는 거의 매일 같은 생활을 되풀이했다. 메어리가 아침에 눈 을 뜨면 마르사는 난로 앞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메어리는 매일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지 않으면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집에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메어리는 밖에 나가는 것이 자신의 몸에 얼마나 좋은지 깨닫 지 못하고 있었다. "패티, 바람이 너무 신선해. 흠, 숨을 들이마셔봐. 그렇지?" 메어리는 히드꽃 위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을 가슴 가득 들이쉬면서 들판을 뛰어다녔다. 메어 리의 마른 몸은 점점 건강해졌다. 뺨에도 발갛게 생기가 돌았다. 하루 종일 밖에서 보낸 날이 2, 3일 계속되던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메어리 는 배가 고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마르사, 아침 식사. 나 배 고픈 것 같애." 아침밥을 앞에 둔 메어리는 접시가 빌 때까지 스푼을 놓지 않았다. 먹기 싫던 오트밀도 맛있게만 느껴졌다. "오늘은 잘 드시네요." 마르사는 다른 날과 달리 맛있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메어리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응, 오늘은 맛있어." 메어리도 자신이 놀라웠다. "들판의 공기 때문에 식욕이 생긴거예요.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거 예요. 저희 집 동생들은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는 적이 많아요. 아가씨, 매일 밖에서 놀면 몸 도 건강해지고 혈색도 훨씬 좋아질 거예요." "응, 그런데 뭘 하면서 놀아?" "제 동생들은 나무토막이나 돌멩이를 가지고 놀아요. 뛰면서 돌아다니기도 하 고, 큰 소리를 지 르기도 하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보기도 하고 말예요." 메어리는 정원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벤 할아버지는 메어리 를 보아도 여전히 모른 척하거나 바쁜 척할뿐이었다. 메어리가 특별히 잘 가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그곳은 담에 둘러싸인 채소밭 밖의 긴 산책길이 었다. 담은 담쟁이 덩굴로 온통 덮여 있었다. 그 담에는 다른 곳보다 더 초록색 의 덩굴이 빽빽히 우거져 있었다. "다른 곳은 다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는데, 이곳만 이상해." 메어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길다란 덩굴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었 다. 그때 메어리는 언뜻 빨간 것이 눈 앞에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아름다운 새 소리가 들 려왔다. "울새야! 울새! 패티, 울새가 저기 있어!" 울새는 담장의 꼭대기에 앉아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메어리를 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너도 내가 보고 싶었니?" 메어리는 울새와 말이 통해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믿는 듯 이야기했다. 울새 는 여러 가지를 얘 기해 주는 것처럼 지저귀며 담 위를 훨훨 날았다. 울새는 메어리에게 이렇게 말 하는 것 같았다. '안녕, 정말 바람이 시원하지? 해님은 또 얼마나 멋지니? 모든 것이 아름다워. 우리 함께 노래 하고 뛰어다니면서 놀자. 자, 어서.' 메어리는 웃으면서 벽을 따라 날으는 울새의 뒤를 좇았다. "난 네가 좋아! 네가 너무 너무 좋다구!" 메어리는 뛰면서 소리쳤다. 패티도 '야옹'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메어리의 뒤를 따랐다. 메어 리는 울새의 노랫소리를 흉내내며 달렸다. "찌르르 쫑 찌르르 쫑 찌르르르." 울새는 날개를 펴고 재빠르게 나무 꼭대기로 날아올라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불렀다. "찌르르 쫑 찌르르 쫑 찌르르르." 메어리는 울새가 올라앉아 있는 나무를 보자 울새를 처음 보았던 때가 생각났 다. 그때 이 울새는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었고 메어리는 과수원에 있었다. 지금 메어리는 과수원 반대편의 담 옆에 서 있다. 그리고 같은 나무가 담 안 쪽에 있다. "저 나무는 비밀의 정원에 있는 나무야." 메어리는 뛰어다니던 발걸음을 멈추고 혼자 중얼거렸다. "울새는 비밀의 정원에 살고 있는 거야. 아, 어떤 곳인지 보고 싶어." 메어리는 뛰어서 과수원으로 갔다. 담 맞은편에는 울새가 앉아 있던 나무가 이었다. "저게 그 정원이야. 틀림없어." 메어리는 정원과 과수원 사이의 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입구가 보 이지 않았다. 메어 리는 반대 편부터 벽을 다시 살펴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 정말로 입구가 없네. 십년 전에는 분명히 있었을텐데." 메어리는 매일 비밀의 정원 입구를 찾기 위해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메어리 는 이제 전혀 심심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의 생활이 즐거웠다. 미스르스웨트 들판의 시원한 바람은 메어리의 머릿속에 있는 어두운 생각들 을 몽땅 날려 주었 다. 메어리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팠다. 메어리는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다음 노곤한 기 분 속에서 마르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디콘의 친구 캡틴은 아주 영리해요. 디콘이 돌보는 양이 다른 길로 가면 캡 틴은 울음소리로 그걸 가르쳐 주지요. 캡틴은 여우인데도 양들과 아주 사이가 좋아요. 디콘이 다 른 동물들과 놀고 있을 때면 캡틴이 양들을 지켜요." 메어리는 마르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림 속 에는 동물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디콘의 모습과 양들을 지키는 캡틴이 있었다. 메어리는 마르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비밀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클레이븐 아저씨는 왜 그 정원을 싫어하셔?" "또 그 정원을 생각하고 있어요? 하긴 저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그랬으 니까요." "어째서 아저씨는 그 정원을 싫어하시는 걸까?" 메어리는 되풀이해서 물었다. "아가씨, 밖에서 불고 있는 바람소리를 들어 보세요." 바람이 집 밖에서 주변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무섭게 휘몰아 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집 안에 들어오려고 벽과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 정원을 싫어하셔?" 메어리는 또 다시 물었다. 마르사는 메어리가 끈질기게 묻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알고 있 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말은 메드로크 부인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건데 괜찮을지 모 르겠네요. 이 집에 는 말해서는 안 될 일이 굉장히 많아요. 클레이븐 씨의 명령 때문이지요." "뭔데? 어서 말해 봐." "저 정원만 없었다면 주인님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저 정원 은 주인 마님의 정 원으로 두 분이 결혼하셨을 즈음에 만들었답니다. 주인 마님은 저 정원을 굉장 히 좋아하셔서 그 분은 늘 자신이 직접 꽃을 돌보셨대요. 정원지기에게는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하 게 하시고요. 주인 님과 주인 마님은 안으로 들어가셔서 문을 잠그고는 몇 시간이나 그곳에서 책 을 읽기도 하고 이 야기를 하시기도 했대요. 주인 마님은 가지가 의자처럼 되어 있는 오래된 나무에 장미를 뻗게 한 후 늘 거기에 앉아 계 셨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지가 부러져서 주인 마님이 큰 부상을 입으셨답 니다. 그것이 원인 이 되어 주인 마님은 다음날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주인님도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 이후로는 아무도 정원에 들어가는 일 이 없었고, 주인님 께서는 정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답니다." 메어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빨갛게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메어리의 마음속에는 네 가지 좋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메어리는 울새 와 친해졌고, 몸 안 의 피가 뜨거워질 때까지 바람속을 달렸다. 또 메어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 고픔을 느꼈고, 다 른 사람의 일을 안됐다고 생각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6. 복도의 울음소리 다음날의 폭우가 몰아쳤다. 창 밖의 들판의 뿌연 안개와 구름에 뒤덮여 잘 보 이지 않았다. 메어리는 방 안에 앉아 폭우가 그치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폭우는 그칠 생각 을 않고 더욱 세게 몰아칠 뿐이었다. 메어리는 하루 종일 방 안에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심심해 서 견딜 수가 없었 다. "이렇게 비오는 날은 너희 집에선 모두 뭘 하고 지내?" 메어리는 마르사에게 물었다. "큰 아이들은 외양간에서 놀아요. 디콘은 비 따윈 상관하지 않고요. 디콘은 비가 와도 햇볕이 비치고 있을 때처럼 밖으로 나가죠. 햇볕이 비치는 맑은 날 볼 수 없는 것을 빗속에서는 볼 수 있다나요?" "빗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게 뭔데?" "음, 예를 들어서 물에 빠진 까마귀 같은 거죠. 디콘은 물에 빠진 까마귀 새 끼를 데리고 와서 길들인 일도 있어요. 몸이 새까매서 '검댕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디콘이 가는 곳은 어디 든지 따라다닌대요." "어! 까마귀 친구도 있어? 디콘은 친구가 무척 많구나. 망아지, 캡틴, 그리고 검댕이까지." 메어리는 마르사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혹시 마르사가 이야기를 그만 둘까봐 염려가 될 정도였다. 마르사가 해 주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마르사의 어머 니와 디콘의 이야 기였다. "마르사의 어머니도 동물을 좋아하셔?" "그럼요. 디콘 다음으로 동물을 좋아하세요. 디콘의 친구들은 모두 어머니의 친구예요. 특히 캡틴과 검댕이는 어머니를 잘 따르죠." "내게도 까마귀나 여우 새끼가 있다면 함께 놀 수 있을 텐데." 메어리는 동물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마르사네 가족들이 부러웠다. 메어리의 엄마는 동물을 무 척 싫어했다. 메어리가 패티를 안고 다니면 집안에 털이 날린다고 얼굴을 찡그 리셨다. "마르사, 디콘과 마르사네 엄마 얘기를 더 해줘. 난 마르사네 엄마도 디콘만큼 좋아." 그때 아래층에서 메드로크 부인이 부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마르사 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죠? 전 내려가봐야 해요. 아가씨, 뜨개질 할 줄 아세요?" "아니, 못해." "바느질은요?" "그것도 못해." "그럼 책은 읽을 줄 아세요?" "응, 읽을 수 있어." "그럼, 도서실에 들어가도 좋은지 메드로크 부인에게 물어 보세요. 도서실에 는 수천 권의 책이 있거든요." 마르사는 도서실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급한 걸음으로 아 래층으로 내려가 버 렸다. 마르사가 나가고나자 메어리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도서실을 직접 찾아보는 거야. 이 이상한 집을 둘러 보는 것도 재미있 을 거야.' 메어리는 이 저택에서 사람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메어리의 식사는 언제나 마르사가 가져다 주었고 그 외에는 메어리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메드로크 부인은 이 틀에 한번 정도씩 메어리가 잘 있는지 보러 왔다. 메어리는 문득 메드로크 부인의 말이 떠올랐다. '집에 있는 방만도 거의 백 개나 되지만 대부분의 방들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사용하지 않아 요.' 메어리의 마음 속에 서서히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백 개나 되는 방이 정말 모두 열쇠로 잠겨 있을까? 방안은 어떻게 꾸며져 있을까? 방이 정말 백 개나 될까? 내가 가서 그 방을 세어 보면 어떨까?' 메어리는 자꾸만 커져가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 갔다. 메어리의 방 이 있는 긴 복도는 중간 중간에 몇 개인가의 작은 복도로 나누어져 있었다. 메 어리는 긴 복도를 벗어나 작은 복도를 걸었다. 막다른 곳에 이르자 좁은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오 르자 또 복도가 있 었다. 복도 옆에는 방들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어휴, 가도 가도 방이야. 잠깐, 내가 몇까지 세었더라. 스물 다섯? 스물 여 덟?" 메어리는 세던 방의 개수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메어리는 방의 개수 세는 것을 포기하고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천천히 복도 를 지나갔다. 그림 은 풍경화도 있었지만 대개는 멋진 옷을 입은 여자와 남자의 초상화였다. 그 중에는 어린아이의 초상화도 있었다. 메어리는 한 여자 아이의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초상화의 여자 아 이는 메어리 자신 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게 호기심이 강한 것 같은 아이였다. "얘, 넌 이름이 뭐니? 어디로 간 거야?" 메어리는 발꿈치를 올리고 손가락으로 초상화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메어 리의 목소리는 조 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넌 지금 어디에 살고 있니? 여기에 있으면 좋을 텐데." 메어리는 넓은 집안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거나 복도를 지나며 혼자 서성 거리고 다녔다. 계 단에도 복도에도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은 없었다. 3층 다다르자 메어리는 방문을 열어 보기로 했다. 메드로크 부인의 말대로 문이 잠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은 쉽게 열렸다. 그 방은 침실이었다. 큰 창문에 쳐진 커튼은 자수가 수놓인 빌로드로 되어 있 었다. "와, 멋있다." 메어리는 이끌리듯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구석에 놓인 장식장에는 상아로 만들어진 코끼리가 백 개 정도 늘어서 있었다. 그 코끼리 들은 모두 크기가 달랐다. 아주 큰 코끼리도 있었고 아기 코끼리도 있었다. 메어리는 유리로 된 장식장 문을 열고 코끼리를 꺼내 가지고 놀았다. 그러 나 곧 싫증이 나자 상아 코끼리를 다시 장식장 안에 넣고 복도로 나왔다. "이상한 집이야.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바로 그때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메어리는 흠칫 놀라 난로 쪽 의 소파를 보았다. 그쪽에서 소리가 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야? 거기 누가 있는 거야?" 메어리는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소파의 한 구석에 빌로드로 된 쿠션이 있었 는데 그 쿠션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속에서 무엇인가가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메어리 는 가만히 옆으로 다가갔다. "너였구나. 여기가 너희 집이니?" 그 주인공은 작은 생쥐였다. 메어리는 생쥐 옆에 달라붙어 있는 새끼 생쥐들을 바라보다가 살며시 그 자리 를 떠났다.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마르사가 걱정할 거야.' 그러나 메어리는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메어리는 이리저리 헤 매다가 자기 방이 있는 2층에 도착했다. 그러나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길을 잃어버렸어. 내 방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고요함을 깨고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메어리는 귀를 기울였다. 그 소 리는 바람소리 같 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메어리는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 록 그 소리는 울음 소리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울고 있어. 누구일까?" 그 소리는 칭얼거리는 아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메어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메어리는 어두운 복도의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벽을 더듬는 메어리의 손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것은 벽걸이였다. 메어리 의 손이 벽걸이에 닿는 순간 덜컥하는 소리가 났다. "꺄악!" 메어리는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 그 벽걸이 뒤에 문이 감추어져 있었고 열린문 맞은편으로는 또 다른 복도가 보였다. 메어리는 갑자기 나타난 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문이지? 복도가 얼마나 많은 거야?' 그런데 복도 쪽을 보고 있던 메어리는 깜짝 놀랐다. 복도 저만치서 메드로크 부인이 화난 얼굴 로 열쇠 꾸러미를 들고 메어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메드로크 부인은 앙칼진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메어리는 갑자기 나타난 메드 로크 부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길을 잃어버렸어." 메드로크 부인은 메어리의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지난번에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방을 함부로 얼씬거려서는 안 된다고 말 했잖아요." "길을 잃었다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여기 서 있는데 울음소리가 들렸 단 말이야." 메어리는 메드로크 부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메드로 크 부인은 더욱 더 세게 메어리의 팔을 죄었다. "그런 소리가 들릴 리 없어요! 어서 방으로 돌아가세요! 그러지 않으면 뺨을 때려 줄 거예요!" 메드로크 부인은 메어리가 몸부림을 치자 멱살을 잡고 끌어 당겼다. 그리고 는 메어리의 방까지 오자 메어리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가 있어도 된다고 말한 곳에만 가만히 계세요! 알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방문을 열쇠로 잠 가 버려서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 아무래도 아가씨에겐 엄하게 다스릴 사람이 필요 한 것 같군요." 메드로크 부인은 방을 나간 후 문을 찰칵 잠가 버렸다. 메어리는 화가 나 얼 굴이 새파랗게 질 렸다. "나를 가두어 놓겠다고? 흥! 할 수 있으면 해 보라지!" 메어리는 이를 갈았다. "난 확실히 들었어. 분명히 누군가 울고 있었어. 그 정체를 꼭 밝혀내고 말겠 어." 메어리는 마치 힘든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몸이 피곤했다. 메드로크 부인에 게 화가 났지만 어 쨌든 재미있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메어리는 상아로 만든 코끼리와 놀았고, 쿠션에 보금자리를 만든 재색 빛의 새앙쥐도 만난 것 이다. 7. 화원의 열쇠 폭풍우는 이틀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틀이 지난 날 아침 메어리는 일어나자마자 창 밖을 내다보고 마르사를 불렀 다. "마르사, 저 들판 좀 봐. 저기 말야." 들판에는 세차게 휘몰아치던 바람도 그치고 뿌연 안개와 구름도 어디론지 사 라지고 없었다. 지 금은 눈부신 파란 하늘이 들판 위에 높게 떠올라 있었다. "난 저렇게 푸르고 예쁜 하늘은 처음 봐. 인도에서는 하늘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게 빛을 내고 있었거든." 메어리는 창가에 서서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아름다운 호수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여기저기엔 새 털 구름이 떠 있었 다. 마르사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폭풍이 금방 없어졌지요? 해마다 이때쯤이면 이런 일이 자주 있어요. 폭풍 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리고 황폐했던 땅이 모두 살아나지요. 봄이 가까이 온 탓이에요." "난 영국은 비가 오거나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들만 계속되는 줄 알았어." "그렇지 않아요. 특히 이곳 요크셔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이 에요. 아가씨도 들 판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이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마르사는 창가에 서 있는 메어리 곁으로 다가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금작화도 피고 히드꽃에도 보라색 방울이 피어요. 나비들이 훨훨 하늘을 날 아다니고 꿀벌도 붕붕거리며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다니죠. 그리고 종달새는 하늘 높이 올 라 노래를 불러요. 아가씨도 곧 디콘처럼 하루 종일 들판을 놀러 다니고 싶을 때가 올 거예요." "마르사, 너희 집에 가 보고 싶어." 마르사는 메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메어리의 얼굴은 처음 이 저택에 왔 을 때처럼 마르지도 않았고 고집스럽게 보이지도 않았다. 메어리의 얼굴은 동생 제인이 뭔가를 매 우 하고 싶어할 때 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저희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엄만 저희들 일이라면 뭐든지 아시거든요. 오늘 은 제가 집에 가는 날이니까 물어볼 수 있을 거예요." "난 마르사의 엄마가 좋아졌어. 만난 적은 없지만 말야." 마르사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퍼졌다. "저희 엄마는요, 이해심도 많으시고 마음씨도 고우세요. 일도 얼마나 잘하신 다고요. 엄마를 만 나는 사람은 누구나 엄마를 좋아하게 되죠. 전 쉬는 날 집에 가서 엄마를 볼 생각을 하면 걸음이 날 듯이 가벼워지죠." "난 디콘도 좋아. 디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런데 디콘은 날 좋아해 줄까?" 메어리의 얼굴은 자신 없는 표정이 되었다. "아가씨는 아가씨 자신을 좋아하세요?" "아니, 전혀 좋아하지 않아. 정말이야. 아무도 날 좋아해 준 사람이 없는걸." 메어리는 마르사가 집으로 돌아가 버리자 더욱 쓸쓸했다. "패티. 정원에 나가서 놀자. 울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정원으로 나갔다. 메어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신 선한 봄냄새가 났 다. 메어리는 담쟁이 덩굴이 뒤엉켜 있는 긴 담 바깥쪽의 산책길을 걸었다. 메어 리는 담 너머 안쪽 에 있는 나무의 긴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울새가 없나봐. 늘 저기에 앉아 있곤 했었는데." 패티도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실망한 듯 까실까실한 수염을 메어리의 손에 비볐다. "너도 울새가 좋은 모양이구나. 그렇지?" 메어리는 패티를 꼬옥 안아 주었다. 그런데 패티가 갑자기 메어리의 품 안에 서 고개를 내밀며 반가운 울음소리를 냈다. "왜 그래?" 메어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메어리의 등 뒤에는 울새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땅을 쪼아대고 있 었다. 마치 메어리의 뒤를 쫓아오다가 메어리가 뒤돌아보자 아닌 것처럼 하려는 몸짓 같았다. "날 기억해 주었구나. 날 기억하고 있어. 네가 세상에서 최고야."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봤지, 패티. 울새는 날 좋아해. 울새는 날 좋아해." 메어리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메어리는 패티와 함께 울새를 따라 달렸 다. 메어리는 달리 다가 그 자리에 서서 뱅글뱅글 춤을 추기도 했다. "찌르르 쫑 찌르르 쫑 찌르르르." 메어리의 입에서는 울새를 흉내내는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울새도 메어리 를 따라 뛰어오르 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메어리는 노래를 부르는 울새의 곁으로 다가갔다. 울새는 메어리가 가까이 가도 놀라거나 날아 가려 하지 않았다. "울새는 내가 손을 대거나 놀라게 하는 짓을 절대 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 는 거야. 날 이해 하는 거야." 메어리는 팔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메어리는 숨이 막힐 정도의 행복감을 느꼈다. 울새는 흙더미 위에 올라 흙을 파헤치며 벌레를 찾고 있었다. 메어리는 울새 에게 다가가 흙더 미를 바라보았다. "배 고프니? 내가 맛있는 빵 갖다줄까?" 그런데 흙더미에 무엇인가가 묻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녹슨 철이나 고리 같았다. "이게 뭐야?" 메어리는 손을 내밀어 그 고리를 주워 올렸다. 그것은 고리가 아닌 열쇠였다. 그 열쇠는 오랜 세월 파묻혀 있었던 것처럼 완전히 녹이 슬어 있었다. "이건 십년 동안 묻혀 있던 그 열쇠일지도 몰라!" 메어리는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열쇠를 눈을 크게 뜨고 무서운 것이라도 보듯 바라보았다. "맞아, 비밀의 정원 열쇠일 거야." 메어리는 꽤 오랫동안 그 열쇠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어리는 비밀의 정원을 보고 싶어 견딜 수 가 없었다. 8. 마르사의 선물 다음날 아침 메어리가 눈을 떠보니 마르사는 아침 일찍 집에서 돌아와 일을 하고 있었다. 메어 리는 잠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열쇠는 그대로 있었다. 마르사는 집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가 절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한 달 사이에 얼굴이 더 좋아 졌대요. 전 엄마와 둘이서 빵을 굽고 산더미처럼 쌓인 동생들의 빨래들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어요." 마르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들판에서 동생들이 돌아왔을 땐 따끈따끈하게 구워진 과자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 있었어요. 장작도 활활 타고 있었구요. 모두들 굉장히 좋아했지요. 무척 왁자지껄 했어요. 디콘은 이런 곳이 라면 임금님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답니다." 메어리는 마르사 곁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메어리의 머릿속에는 또 다시 한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작은 오두막집 안에 마르사와 마르사의 어머니가 웃고 있다. 그 주 위에 둘러 서 있는 아이들의 입가에도 밝은 미소가 번져 있다. "그래서? 또 얘기해 줘. 응?" "밤에 식구들이 모두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을 때 전 모두에게 아가씨 얘기 를 했어요." "내 얘기를? 와, 정말이야? 뭐라고 했는데?" "음, 인도에서 온 여자 아이라고 했지요.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유모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양 말 하나 신을 줄 모른다고 했어요." 마르사는 메어리를 쳐다보며 짓궂게 웃었다. 메어리는 마르사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은 신을 줄 안단 말이야. 마르사가 가르쳐 줬잖아." "하지만 모두들 아가씨의 이야기를 재미있어 했어요." 메어리는 마르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디콘과 마르사네 엄마도 내 얘기를 듣고 싶어해?" "그럼요. 디콘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었어요. 그렇 지만 어머니는 클레 이븐 씨가 아가씨를 외롭게 내버려 두었다고 화를 내셨어요. 왜 가정교사나 유 모를 두지 않으시냐 는 거죠." "흥, 가정교사 따위는 필요없어!" 메어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닌 아가씨도 이제 공부해야 할 나이라면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하 셨어요. 그러면서 제게 아가씨 기운을 북돋아 주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전 그렇 게 하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메어리는 마르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르사, 난 네 얘기를 듣고 있으면 참 즐거워. 넌 이미 내 기운을 복돋아 주 고 있어." "잠깐만요, 아가씨." 마르사는 밖으로 나가더니 앞치마 안에 무엇인가를 숨겨가지고 들어왔다. "이게 뭐 같아요? 아가씨에게 드릴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마르사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내게 줄 선물이라고?" 메어리는 큰 소리로 물었다. "장사꾼이 저희 집에 왔었어요. 항아리, 냄비 등 여러 물건이 쌓여 있었지만 어머니는 돈이 없 어서 아무것도 사지 못했어요. 장사꾼이 가려고 할 때 엘리자벳이 빨갛고 파란 손잡이가 달린 줄 넘기가 있다고 외쳤어요.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그 장사꾼을 불러 세웠어요." 메어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르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제가 드렸던 월급에서 줄넘기 값인 2펜스를 꺼내셨죠. 어머닌 제게 이렇 게 말씀하셨어요. '마르사, 넌 참 기특하구나. 돈 쓸 일도 많을 텐데 내게 네 월 급을 전부 주다니 말이야. 그 돈에서 2펜스를 아가씨에게 줄넘기를 사 드리는 데 쓰는 게 어떻 겠니?' 하고 말예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마르사는 앞치마에서 줄넘기를 꺼냈다. "이게 바로 그 줄넘기예요." 줄넘기는 튼튼하게 생긴 가느다란 줄로, 양끝에 빨갛고 파란 줄무늬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와,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메어리는 줄넘기를 받아들고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메어리는 줄넘기를 본 적이 없어서 줄넘기 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뭐하는 거야?" 메어리의 말에 마르사는 큰 소리로 되물었다. "뭐하는 거냐구요? 인도에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나요? 이건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마르사는 방 한복판으로 가서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 다. "어때요?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요?" 메어리는 마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메어리의 얼굴에 호기심이 깃든 표정이 점점 퍼져갔 다. 마르사는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메어리를 보면서 기뻐서 어쩔 줄을 몰 라했다. "자, 보세요. 이제부터 개수를 세면서 할 테니까요. 하나, 둘, 셋..." 마르사는 깡총깡총 뛰면서 개수를 세었다. "와, 잘한다. 벌써 육십 개째야." 메어리는 박수를 치며 마르사를 따라 개수를 세었다. 마르사는 가쁜 숨을 몰 아쉬면서도 얼굴에 는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구십구, 백! 와! 백 개나 했어." 메어리도 마르사를 따라 깡총깡총 뛰었다. "예전에는 훨씬 잘했었어요. 제가 열두 살 땐 지금처럼 뚱뚱하지도 않았고 연 습도 열심히 해서 오백 번까지도 했어요." 메어리는 마르사에게 다가갔다. "참 재미있을 것 같아. 너희 엄마는 정말 친절하고 좋은 분이셔. 나도 너처 럼 줄넘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럼요. 자, 해 보세요." 마르사는 줄넘기를 메어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처음부터 백 번을 하는 건 힘들지만 연습하면 차츰 많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저희 어머니는 줄 넘기가 아이들의 좋은 장난감이라고 하셨어요. 아가씨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래요. 집 밖의 공 기 좋은 곳에서 이걸로 줄넘기를 하게 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손발이 쑥쑥 자라고 튼튼해 진대요." 메어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르사가 했던 대로 줄넘기를 넘겨 보았다. 그 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잘 안돼. 하지만 재미있어." 메어리는 줄넘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는 처음이었다. "춥지 않게 옷을 단단히 입고 밖에 나가서 한 번 해 보세요." 마르사는 옷장에서 외투와 모자를 꺼내 메어리에게 주었다. "엄마는 될 수 있는 대로 아가씨를 밖에서 놀도록 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옷 을 두껍게 입으면 될 거라고 하시면서요." 메어리는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줄넘기를 팔에 걸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 가려다가 뭔가가 생 각난 듯 다시 되돌아와 머뭇머뭇 말했다. "마르사, 이거 네가 월급 받은 돈으로 산 거라고 했지? 정말 고마워." 메어리의 말투는 매우 어색했다. 메어리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뭔가를 해 주었다는 것도 깨 달은 적이 없었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마르사는 메어리가 내민 손을 어설프게 잡고 웃었다. "제 동생 엘리자벳이었다면 손등에 키스해 줬을 텐데." 그러자 메어리의 표정은 더욱 어색해졌다. "내가 키스해 줄까?" "아니에요. 됐어요. 언젠가는 아가씨가 먼저 키스하고 싶으실 때가 있을 거예 요. 자, 나가서 줄 넘기를 하세요." 메어리는 약간 쑥스러워하면서 방을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 요크셔 에는 색다른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메어리는 발 밑에서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패티에게 소근거렸다. "패티, 난 말이지. 마르사가 참 좋아. 처음엔 굉장히 싫었지만 말이야." 9. 미스르스웨트의 봄 줄넘기는 굉장히 멋진 놀이였다. 메어리는 줄넘기를 하며 정원으로 달려갔다. "패티, 이것 봐. 열 개나 했어. 처음엔 세 개밖에 못 했었는데 말이야." 메어리는 줄이 자꾸만 다리에 걸려도 재미있기만 했다. 패티는 줄이 휙휙 돌 때마다 발톱을 세 우고 줄을 잡으려고 했다. "그게 아니야, 패티. 이렇게 넘어야 되는 거라구." 메어리는 빨갛게 상기된 뺨에 함빡 웃음을 머금고 줄을 넘었다. "봐, 나도 잘하지? 다시 해 볼게." 메어리는 몇번이고 다시 줄넘기를 했다. 해님은 햇볕을 쏟아 주었고, 바람은 상쾌한 흙냄새를 싣고 불어왔다. "정말 재미있어. 이런 놀이는 처음이야." 메어리는 줄넘기를 하며 정원을 이리저리 돌았다. 메어리는 벤 할아버지가 있는 채소밭으로 갔 다. 채소밭에는 벤 할아버지가 땅을 일구면서 울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벤 할아버지! 울새야! 안녕!" 메어리는 줄넘기를 멈추지 않고 상기된 얼굴로 할아버지와 울새에게 인사를 했다. 벤 할아버지는 줄넘기를 하고 있는 메어리를 신기한 표정으로 보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정말 놀랐는걸. 네가 줄넘기를 하다니. 역시 넌 어린아이 로구나. 네 속에도 어린아이의 피가 흐르고 있어." 벤 할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조금 전에 막 시작했는걸요. 아직 스무 번밖에 못 했 어요." "처음 시작하는 것치곤 아주 잘하는 거야. 봐라, 울새 녀석도 널 가만히 쳐다 보고 있지 않니?" 벤 할아버지는 울새를 보며 미소지었다. "저 녀석,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네 뒤를 쫓아다닐 거다. 줄넘기라는 물건을 처음 보니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이야." 메어리는 잠깐씩 쉬면서 정원 전부와 과수원을 줄넘기를 하며 돌았다. 나중 에는 몸이 더워지고 숨이 가빠서 계속할 수가 없었다. 메어리는 30분 동안이나 줄넘기를 하며 정원 을 돌았던 것이다. "하아, 하아, 스무 번도 더 뛰어 넘었어." 메어리는 몸을 숙이고 숨을 몰아 쉬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 다. 그것은 흙더미 에서 주웠던 열쇠였다. "잊고 있었어. 어서 정원의 문을 찾아야 해." 메어리는 다시 과수원의 담장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문이 보이지 않 자 메어리는 손으로 벽을 더듬었다. 그러나 만져지는 건 담쟁이 덩굴의 까칠한 느낌뿐이었다. 메어리는 다시 벤 할아버지가 있는 채소밭으로 갔다. 벤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울새와 함께 있어 서인지 아까보다도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할아버지, 그 땅은 왜 일구시는 거예요?" "봄을 맞기 위해서란다." 할아버지는 허리를 쭈욱 펴고 하늘을 보았다. "이제 봄이야. 어때? 봄 냄새가 좀 나니?" 메어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웬지 기분이 좋고 신선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흙내음이야." 할아버지는 다시 땅을 일구면서 대답했다. "땅은 생물을 키울 준비를 하고 있어. 씨뿌릴 시기가 오면 땅은 무척 기뻐하 지. 아무것도 할 일 이 없는 겨울이 무척 지루했기 때문이야. 햇빛이 따뜻하게 비추면 초록색 싹 들이 깜깜한 땅에서 머리를 내밀게 될 거야." "그 싹은 나중에 무엇이 되는데요?" 메어리가 물었다. "크로커스, 수선화, 갈란투스 같은 꽃들이 되지. 이런 꽃들을 본 적이 없니?" "없어요. 인도에서는 장마가 지나면 너무 덥고 눅눅해서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변해 버려요. 전 그래서 하룻밤만 자면 모든 게 자란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에서는 하룻밤 가지고는 자라지 않아. 좀더 기다려야만 한단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로 울새가 날아들었다. 메어리는 부드럽게 스치는 날개짓 소리 만으로도 그것이 울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울새가 살고 있는 정원에도 땅 속에서 여러가지 싹이 틀까요?" "어떤 정원 말이냐?" 벤 할아버지는 다시 무뚝뚝한 얼굴이 되었다. 벤 할아버지는 비밀의 정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메어리는 끈질기게 물었다. "오래된 장미 나무가 있는 정원 말이에요. 꽃은 모두 죽어 버린 걸까요? 아니 면 여름이 되면 다 시 피어나는 꽃들도 있나요? 장미 나무는 정말 있나요?" "저 녀석에게 물어봐라." 할아버지는 귀찮다는 듯이 어깨로 울새 쪽을 가리켰다. "알고 있는 것은 저 녀석뿐이야. 십년 동안 울새 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 정원 에 들어간 적이 없 어." 메어리는 흙을 일구고 있는 할아버지를 두고 채소밭에서 나왔다. 메어리는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들어갈 거야. 그런데 어떻게 찾지? 아무리 살펴봐도 문 같은 건 보이지 않잖아.' 메어리는 과수원 담을 바라보며 줄넘기를 했다. 갑자기 바람이 씽 불어와 나뭇잎들을 날렸다. 메어리는 그 모습이 마치 나무 의 머리카락이 날리 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메어리의 머릿속에는 카멜라의 모습 이 떠 올랐다. "그래! 카멜라가 있었지! 카멜라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메어리의 가슴은 방망이질치듯 두근거렸다. "카멜라라면 비밀의 정원에 대해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메어리는 갑자기 얼굴에 발갛게 홍조를 띠며 즐거워했다. 메어리는 줄넘기를 넘으며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메어리의 머릿속에는 비밀의 정원에 싹이 트고 장미 나무가 자라는 상상이 아 름답게 펼쳐졌다. 10. 카멜라를 찾아가다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들판으로 나갔다. 들판에는 봄을 알리는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의 부드러운 손이 메어 리의 얼굴과 머리칼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아이, 간지러워." 메어리는 바람을 손으로 막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패티는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메어리를 올 려다보았다. "패티, 우린 카멜라한테 가는 거야. 카멜라는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 정원의 문이 어디에 있는지 도 알 거야." 메어리는 사각거리는 풀잎을 밟으며 들판을 지났다. 들판에는 히드꽃과 금작 화가 삐죽삐죽 얼굴 을 내밀고 있었다. 메어리는 들판의 한복판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은 보이지 않았다. "패티, 이곳은 정말 이상한 것투성이야. 그런데 카멜라가 사는 늪은 아직 멀었 을까?" 메어리는 발돋움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건 끝없이 펼쳐진 들판뿐이었다. "이상해. 늪은 어디에 있지?"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방향도 모르는 채 들판을 걸었다. 해가 조금씩 기울어 갔다. 메어리는 한 참을 걸은 후에야 늪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메어리는 늪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한기에 몸 이 오싹해졌다. "패티, 카멜라의 오두막집은 어디에 있을까?" 메어리는 겁 먹은 눈으로 늪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집 같은 건 어디에도 보 이지 않았다. 단지 늪 앞에 서 있는 키 큰 나무만이 눈에 들어왔다. 메어리는 그 나무를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금방 이라도 그 뒤에서 카멜라가 긴 머리와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날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풀잎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메어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 다. 카멜라가 어느새 메어리의 뒤에 서 있었다. "안녕, 메어리. 오늘은 뭘 잃어버렸지?" 카멜라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두 눈은 빛을 발하고 있고 팔찌에서는 짤 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메어리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패티를 안은 팔에 너무 힘을 주었는지 패티 가 야옹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였다. "아, 이 고양이가 메어리의 잃어버렸던 친구군." 카멜라는 고개를 숙이고 패티를 들여다보았다. 카멜라는 가늘고 긴 손을 올려 패티의 털을 쓰다 듬었다. 그러자 패티는 기분 좋은 듯 갸르릉 울음소리를 냈다. "어, 이상하네?" 패티는 낯선 사람이 만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카멜라 가 만지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는 것이다. "자, 메어리.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지?" 카멜라는 메어리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메어리는 카멜라의 초록빛 눈동자 속 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알고 싶은 게 있어 왔어요." 카멜라는 조용히 웃었다.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알고 싶어하는군. 그렇지?" "모두들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가르쳐 주지 않아요." "호! 메어리, 클레이븐 가의 비밀은 아가씨만 모르는 게 아니야. 그 집의 비밀 은 아무도 말을 하 거나 물어서는 안 되게 되어 있지." "왜요? 어째서 이야기하거나 물으면 안 되는 거죠? 카멜라는 알고 있죠? 좀 가르쳐 주세요. 십 년 동안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는 정원에 대해서 말예요." 카멜라는 고개를 돌려 늪을 바라보았다. 카멜라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 려 이리저리 흩어졌 다. "메어리, 비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매우 슬픈 일이야." "슬픈 일?" 메어리는 카멜라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메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패티도 따라서 작은 머리 를 흔들었다. "매우 슬픈 일이지." 카멜라는 메어리에게로 다가왔다. "메어리, 사람들은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지. 소중한 비밀이 들춰지는 건 슬 픈 일이란다. 비밀 은 엿보는 것보다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는 편이 좋아." "하지만 전 그 정원의 입구를 꼭 찾고 싶어요. 아저씨의 비밀을 엿보려는 게 아니라구요." 메어리의 간곡한 부탁에 카멜라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널 내 오두막으로 데리고 가 주마." 카멜라의 오두막은 황야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나무가 낡아서 그런지 문이 바람에 삐그덕거렸 다. "이곳이 내 집이란다." 카멜라는 문을 열고 캄캄한 집안으로 들어가 등불을 켰다. 메어리는 주춤거 리며 작은 오두막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메어리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크고 작은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짐승의 뼈를 닮은 장식물이 벽에 걸려 있고 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메어리, 주위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돼. 사람들은 매우 약하지. 모두들 언제 나 뭔가를 두려워 하면서 살고 있단다. 그래서 때때로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할 때가 있지." 카멜라가 촛불을 켜며 말했다. 집 안이 갑자기 환해지자 메어리는 눈을 깜박 였다. "소중한 것이라니요?" "멀지 않아 알게 될 거야." 카멜라는 방 한가운데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다섯 개의 수정 구슬 과 카드가 놓여 있 었다. "자, 메어리. 이리 와서 앉으렴." 카멜라와 메어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탁자 위의 촛불이 흔들리며 벽에 이상한 그림자 를 만들고 있었다. "자, 메어리. 마음 속으로 빌어봐." "무엇을요?" "알고 싶은 것과 깨닫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깨닫지 못한 거라구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깨닫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네 운명에 대해서 점 을 쳐주마. 메어리, 손을 모으고 마음을 가다듬으렴." 메어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에 손을 모은 후 눈을 감았다. 카멜라는 탁자 위에 있는 카드를 집어 빠르게 펼쳤다가 다시모았다. 카드를 다루는 카멜라의 손 은 너무도 능숙해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카멜라는 카드를 뒤집은 다음 탁 자 위에 펼쳐 놓았 다. "라바라 사박다라 디비리리 사박다라, 운명의 별이여 내 손으로, 라바라 사 박다라 디비리리 사 박다라." 카멜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카드를 한 장 집어 올렸다. "사막의 카드가 나왔어." 메어리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사막? 그건 뭐예요?" "많은 고난, 그리고 오래된 커다란 집." 메어리는 깜짝 놀랐다. 오래된 커다란 집은 클레이븐 씨의 저택을 말하는 것 이었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은 그 집밖에 없다고 나와 있어." 카멜라는 다시 한 장의 카드를 집어 올렸다. 이번에는 전차가 그려진 카드였 다. "이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고난을 극복하라는 뜻이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메어리는 카멜라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카멜라는 탁자에서 또 한 장의 카드를 집었다. "불의 카드, 그 괴로움을 견디면 넌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 "소중한 것? 내게 소중한 것은 비밀의 정원이에요. 난 비밀의 정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비밀의 정원에 대해서 알고 싶니?" "네, 입구를 알고 싶어요." 메어리는 눈을 반짝이며 카멜라를 보았다. 카멜라는 카드를 한 곳으로 모으고 수정을 집어 탁자 의 가운데로 모았다. "눈을 감아라. 그리고 마음속으로 비밀의 정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야." 메어리가 두 눈을 꼭 감자 카멜라는 두 손을 서서히 위로 올리며 주문을 외웠 다. "라바라 사박다라 디비리리 사박다라, 비밀의 문이여 모습을, 라바라 사박다 라 디비리리 사박다 라." 카멜라의 손목에 채워진 짤랑거리던 팔찌에서 이상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카멜라는 두 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리고 손을 서서히 아래로 내려 수정 구슬 을 집어 탁자 위로 휙 던졌다. 수정의 빛이 공중에서 반짝 빛나며 아래로 쏟아졌다. 세 개의 구슬 은 탁자 밑으로 떨 어지고 두 개의 구슬이 탁자 위에서 또그르르 굴렀다. "바람과 새가 나왔어." 카멜라는 수정 구슬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바람과 새라구요? 그걸로 어떻게 정원의 입구를 알 수 있어요?" 메어리는 수정 구슬과 카멜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멜라는 여전히 수정 구슬을 뚫어져라 바 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입을 떼었다. "빨간 가슴을 가진 새야. 빨간 가슴을 가진 새와 바람을 좇으면 입구를 알 수 있어." "빨간 가슴을 가진 새라구요? 그건 울새예요. 울새는 제게 정원의 열쇠도 찾게 해주었어요." 메어리는 신이 나서 말했다. 메어리는 카멜라의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었 다. 11. 비밀의 문 다음날 아침 메어리는 눈을 뜨자마자 줄넘기를 가지고 정원으로 나갔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나무와 채소들 위로 반짝이고 있었다. 메어리는 숨을 크 게 들이쉬었다. "흠, 상쾌한 냄새! 이게 바로 벤 할아버지가 말한 봄냄새인가봐." 메어리는 줄넘기의 손잡이를 양손에 꼭 쥐었다. "자, 시작!" 메어리는 줄을 돌리며 깡총깡총 뛰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메 어리는 줄넘기를 하 며 정원을 돌았다.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가 흔들렸다. "빨간 가슴을 가진 새와 바람, 빨간 가슴을 가진 새와 바람." 메어리는 카멜라의 말을 중얼거렸다. 메어리의 눈에 울새는 보이지 않았다. 메어리는 숨이 차서 줄넘기를 멈추고 몸을 힘껏 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울 새가 짹 하고 인사 를 보내왔다. "울새구나!" 메어리는 얼굴에 함빡 웃음을 담고 뒤돌아보았다. 울새는 과수원의 흔들거리 는 담쟁이 덩굴 위 에 앉아 있었다. 울새는 메어리를 보며 반갑다는 듯 자그마한 얼굴을 갸웃거렸 다. 메어리는 울새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 울새야. 난 어제 카멜라에게 갔다 왔단다. 정원의 입구를 알려고 말이 야. 카멜라는 네 가 입구를 알고 있대. 정말이니?" 울새는 여전히 작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마치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았다. "넌 내게 열쇠가 있는 곳도 가르쳐 주었으니 오늘은 입구를 가르쳐 주지 않 을래? 넌 그곳에서 살고 있잖아." 울새는 흔들거리는 담쟁이 덩굴에서 담 위로 날아올라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는 메어리에게만 들려 주기 위한 소리 같았다. 울새의 노랫소리만 큼 귀엽고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때 마법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메어리가 유모에게서 들은 어떤 마 법의 얘기보다도 더 굉장한 마법이었다. 메어리가 서 있는 산책길에 기분좋은 바람이 갑자기 휙 불어왔다. 그것은 과 수원의 담에 드리워 진 담쟁이 덩굴을 흔들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메어리는 덩굴에 앉아 있던 울새 가 떨어지지는 않을 까 걱정이 되었다. "울새야, 이쪽으로 와." 메어리는 울새 곁으로 다가갔다. 담쟁이 덩굴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 때문에 한쪽으로 쏠려 있었 다. 그런데 그 밑으로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덩굴 밑에 숨겨져 있던 둥근 손잡이였 다. 바로 정원의 문이었던 것이다. "찾았어! 찾았다구!" 메어리는 잎새 밑에 손을 넣어 담쟁이 덩굴을 떼어냈다. 담쟁이 덩굴은 두껍 게 뒤덮여 있었지만 쉽게 떨어져 나왔다. 메어리는 흥분과 기쁨으로 가슴이 뛰고 손까지 떨렸다. "울새야, 이것 봐. 틀림없는 정원의 입구야." 울새도 흥분했는지 메어리의 곁으로 와 머리를 내밀고 노래를 계속했다. 메어리는 덩굴을 떼어내고 드러난 네모진 철판에 양손을 댔다.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십년 동안이나 잠겨져 있던 문의 열쇠였다. 메어리는 주머 니에서 열쇠를 꺼 냈다. 그리고 자물쇠 구멍에 맞춰 보았다. 열쇠는 구멍에 꼭 맞았다. "와, 맞았어. 꼭 맞아." 오랜 세월 동안 잠겨져 있었던 탓인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메어리가 양손 을 사용해 돌리자 열쇠는 겨우 돌아갔다. "휴, 겨우 열었어. 녹이 슬었나봐." 메어리는 팔을 올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누가 있지 나 않은지 산책길을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메어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메어리는 흔들거리는 담쟁이 덩굴을 옆 으로 젖힌 후 힘껏 문을 열었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메어리는 살며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그 문에 기 대어 주위를 살펴보 았다. 흥분과 놀라움과 기쁨으로 숨이 가빠왔다. 지금 메어리는 비밀의 정원 안 에 서 있는 것이다. "정말 멋있어. 저 장미 덩굴 좀 봐. 울새야, 여기가 네가 살고 있는 곳이구나." 정원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비밀스러웠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에는 잎사귀 없는 덩굴 장미가 서로 뒤엉켜 담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덩굴은 마치 길게 늘어진 커튼처 럼 흔들리며 서로 뒤얽히거나 먼 가지에까지 뻗어 있었다. 나무에서 나무로 멋 진 줄사다리를 만들 고 있는 덩굴도 있었다. "저 장미 나무들은 살아 있는 걸까, 죽어 있는 걸까?" 잎새도 꽃도 없는 장미 나무들은 시들어 버린 것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 알 수 가 없었다. 갈색의 가는 줄기와 가지는 담이나 나무, 풀 위에까지도 넓게 퍼져 있었다. 이 정원이 신비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나무에서 나무로 엉겨붙어 망토를 걸친 것 같은 장미 덩굴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할까?" 메어리는 숨을 죽이고 말했다. "정말 조용하다." 메어리는 우두커니 서서 고요함에 귀를 기울였다.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던 울새도 날개짓을 하 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십년 동안 여기에서 말을 한 것이 내가 처음이라니." 메어리는 조심스럽게 정원 안을 걸었다. 메어리는 옛날 이야기나 동화 속에나 나올 듯한 재색의 아치 밑을 통과하면서 아치를 이루고 있는 장미 가지와 덩굴을 올려다보았다. "모두 시들어서 죽어 버린 걸까? 여긴 죽어 버린 정원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 면 좋겠는데." 메어리의 눈에는 재색과 갈색의 가지만이 보였다. 작은 잎새의 싹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벤 할아버지라면 보기만 해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메어리는 이제 원한다면 언제나 덩굴 아래의 입구를 지나 이곳으로 올 수 있다. "여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곳이야." 메어리는 태양이 내리쬐는 정원 안을 뱅글뱅글 돌았다. 울새도 나뭇가지에 서 내려와 메어리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이 수풀에서 저 수풀로 옮겨 다녔다. 울새는 지저귀며 부산 하게 움직였다. '자, 이곳을 봐. 아름답지 않니? 난 네게 이 정원을 보여 주고 싶었어.' 울새는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메어리는 이 정원의 모든 것이 신 기했다. 메어리의 머 릿속은 정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잎새가 나오고 꽃들이 봉오리를 맺게 될까? 울새야, 생각 해 봐. 몇 천 그루 의 장미가 온통 꽃을 달고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말야. 아, 너무너무 아름다울 거야." 정원 안에는 상록수로 덮여 있는 작은 정자도 있었다. 그 안에는 돌로 된 의 자와 이끼 낀 커다 란 화분이 놓여 있었다. "난 이 정원을 줄넘기를 하면서 모두 돌아볼 거야." 메어리는 팔에 걸치고 있던 줄넘기를 손에 쥐고 줄을 넘으며 정원을 돌았다. 정자 쪽으로 갔을 때 메어리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거기에는 뭔가가 검은 흙에서 머리를 내밀 고 있었다. 끝이 뾰 족한 연두빛의 작은 싹이었다. "싹이야. 봄이 되면 작은 싹들이 고개를 내민다고 벤 할아버지가 말해 주셨 어." 메어리는 무릎을 꿇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래, 작은 싹이 나오고 있는 거야. 이건 크로커스나 갈란투스, 수선화가 될 싹이야." 메어리는 흙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촉촉한 흙의 신선한 냄새를 맡아 보았다. 흙에서 좋은 냄새 가 났다. "다른 곳에도 있을지 몰라. 다른 곳도 돌아봐야지." 메어리는 줄넘기를 그만두고 정원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길 가장자리의 화단 도 풀들 사이도 살 펴보았다.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돌아보니 연두빛의 뾰족한 싹이 몇 개 더 발견 되었다. 메어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 정원은 죽어 버린 것이 아니었어." 메어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소리쳤다. "살아 있어. 장미는 몰라도 다른 건 모두 살아 있어." 메어리는 뾰족한 싹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싹 주위에는 많은 풀이 우거져 있었다. "풀들 때문에 답답할 거야. 잠깐만 기다려. 내가 마음껏 숨쉬게 해줄게." 메어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싹 주위에 나 있는 잡초를 뽑아 주었다. 그러자 싹 주위에 깨끗한 빈터가 생겼다. "자, 이젠 숨을 쉴 수 있을 거야." 메어리는 탁탁 손을 털고 일어났다. 메어리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다른 싹들도 숨 쉬게 해줘야지. 해줄 곳이 너무 많아. 오늘 다 못 하면 내일 도 해줄 거야." 메어리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흙을 파 일구거나 잡초를 뽑아냈다. 풀을 뽑 는 것이 너무나 재 미있었다. 메어리는 화단의 풀들을 뽑아주고 나무 밑의 수풀 속에도 들어갔다. 울새도 몹시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메어리의 뒤를 쫓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휴, 덥다. 참 이상하지. 날씨는 추운데 몸에서 열이나." 메어리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고 나중에는 모자까지도 벗어 버렸다. 메어리는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정원에서 일을 하며 보냈다. 메어리가 눈을 들었을 때는 벌써 정원에 들어온 지 두세 시간 지난 후였다. 그 시간은 메어리가 지금껏 보냈던 시간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메어리는 자신이 다듬어 준 연두빛 새싹들을 엎드린 자세로 둘러보았다. 새싹들은 다듬어 주지 않았을 때보다 두 배는 더 건강해 보였다. 그것을 보자 메어리는 몹시 기뻤다. 자신이 직접 가꾸어 주고 사랑을 쏟아 기른 생명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었다. 메어리의 얼굴에도 건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밥 먹고 또 올게." 메어리는 자신의 새로운 영토를 둘러보며 나무와 장미에게 인사했다. 낡은 정원의 문을 열고 나오는 메어리의 발걸음은 날 듯이 가벼웠다. 12. 메어리의 비밀 메어리는 마르사가 있는 방으로 우당탕 뛰어갔다. "마르사, 나 배 고파. 밥 많이 줘." 마르사는 메어리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밥을 많이 먹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 다. "고기 두 조각에 푸딩도 두 개씩이나! 굉장해요. 줄넘기가 이렇게 효력이 좋 을 줄 몰랐어요. 저 희 엄마가 보시면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메어리는 식사를 마치고 난로 앞에 앉았다. "저, 마르사. 나 삽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삽이요? 어디에 쓰시려구요? 땅을 파려고요?" 메어리는 마르사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밀의 정원을 자기만의 장 소로 해 두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만약 클레이븐 아저씨가 아시게 된다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어쩌면 다신 열 수 없도록 새 열쇠로 꼭꼭 잠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 이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메어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긴 너무 심심해." 메어리는 천천히 말했다. "여기도 저기도 다 잠겨 있잖아. 인도에선 할 일 없어도 사람들이 많아서 좋 았는데. 어떤 때는 악단이 와서 연주도 하곤 했었어. 여기선 너하고 벤 할아버지말고는 얘기할 사 람도 없는데 넌 매 일 일을 하니까 바쁘고 벤 할아버지는 나랑 말도 잘 안 하려고 하고 말야. 작은 삽이 있다면 나도 벤 할아버지처럼 씨도 뿌리고 작은 정원도 만들 수 있을 텐데." 메어리의 말을 듣고 있던 마르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머, 엄마가 말씀하신 대로예요. 저희 엄마는 아가씨에게 꽃이나 야채를 심을 수 있는 작은 공터가 있으면 참 좋을 거라고 하셨어요." "정말? 마르사네 엄마는 뭐든지 알고 계신가봐." "그럼요. 열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기르셨는걸요." "삽은 어떻게 구해야 되지? 얼마나 할까?" "스웨트 마을에 있는 가게에서 튼튼해 보이는 작은 삽을 본 적이 있어요. 2실 링이었어요." "2실링 정도는 가지고 있어. 메드로크 부인이 클레이븐 아저씨가 주셨다고 하 면서 돈을 조금 주 었거든." 마르사는 깜짝 놀랐다. "주인님은 아가씨를 기억하고 계셨나봐요. 돈까지 주셨다면 분명히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아저씨가? 하지만 난 아저씨를 본 적이 없는걸." "아가씨의 어머니에게서 아가씨 얘기를 들으셨을 수도 있죠." 메어리는 클레이븐 아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이 저택에 들어온 뒤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마르사, 아저씨는 언제 돌아오실까? 아저씨는 여행 다니는걸 좋아하셔?" "아마도 마님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일 거예요. 주인님은 마님이 돌아가시기 전 에는 집을 떠나신 적이 별로 없으셨답니다." 메어리는 클레이븐 아저씨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부인을 굉장히 사랑하셨나봐. 부인은 어떤 분이셨어? 무척 아름 다웠을 거야. 그렇 지?" "저도 본 적이 없지만 매우 아름다운 분이셨대요. 저희 엄마가 그러셨어요. 마음씨도 아주 고와 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대요." "난 클레이븐 부인을 보고 싶어. 비밀의 정원을 가장 아꼈던 분이잖아. 그런 데 화단에 심을 꽃 씨는 어디서 구하지?" "디콘한테 구할 수 있을거예요. 디콘은 저희 집 작은 뜰에 많은 꽃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정말이야? 그런데 디콘이 내게 꽃씨를 나누어 줄까?" "물론이에요. 아가씨, 글씨 쓸 줄 아세요? 편지를 써서 디콘에게 꽃씨와 삽 을 가져오라고 하면 돼요." "응, 쓸 줄 알아. 내가 가서 메드로크 부인에게 펜과 잉크, 종이를 달라고 할 게." 메어리가 방을 나가려 하자 마르사가 불렀다. "제 것이 있어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려고 사 두었던 거예요. 제가 가서 가 져올게요." 마르사가 방에서 나가자 메어리는 좋아서 작은 손을 맞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삽이 있으면 싹을 다듬어 주기가 훨씬 편할 거야. 흙을 깨끗하게 해 주고 잡 초도 뽑아 줘야지. 그리고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면 정원은 활짝 살아날 거야." 메어리는 마르사가 가져온 종이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글씨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인도에 있을 때 가정교사들이 모두 메어리를 싫어해서 금방 그만두었기 때문 이다. 메어리는 겨우 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르사, 디콘이 가져온 걸 내가 어떻게 받지?" "디콘이 갖고 올 거예요. 양들에게 풀을 먹인 뒤 이곳으로 들르면 되니까요." "와, 신난다. 그런데 왜 난 들판에서 한 번도 디콘을 보지 못했지?" "디콘은 싱싱한 풀을 먹이려고 멀리까지 양들을 데리고 가요. 그리고 가까운 들판으로 양을 몰 고 갔다가는 양들이 히드꽃이나 금작화를 먹어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디콘은 사랑스러운 꽃들이 밟히거나 먹히는걸 보지 못해요." 메어리는 손을 모으고 마르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난 디콘을 만날 수 있어. 여우와 까마귀 친구를 가진 디콘을 볼 수 있다구." 마르사는 메어리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날 밤, 메어리는 새근새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흙을 일구는 일로 인한 피곤함과 줄넘기, 그리고 신선한 공기 덕분이었다. 해님은 며칠 동안 계속 비밀의 화원 안을 비추고 있었다. 메어리는 매일매일 정원에 가 나무들 을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정원에서 줄넘기를 했다. "패티, 난 이곳이 너무너무 좋아. 바람도 좋고 정원도 좋고. 다좋아." 패티도 덩달아 깡총깡총 뛰며 메어리의 뒤를 따랐다. 메어리의 달리기 속도는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줄넘기도 백 개나 할 수 있 게 되었다. "자, 봐. 나도 마르사만큼 할수 있어. 그렇지?" 메어리는 줄넘기를 하며 울새와 이야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즐거운 일은 정원의 싹들 과 둥근 뿌리를 마음껏 숨 쉬게 해 주는 것이었다. 메어리는 어느날 흙을 파다가 양파처럼 하얀 뿌리를 발견했다. 메어리는 그게 뭔지 몰라 흙으로 가만히 덮어 주었다. 메어리는 벤 할아버지에게 가서 물었다. "할아버지, 양파처럼 하얀 뿌리는 뭐예요?" "그건 모양이 둥근 구근이란다.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뿌리가 둥글지. 뿌 리가 아주 작은 것 도 있는데 그건 갈란투스랑 크로커스이고, 큰 것은 수선이란다. 그리고 제일 큰 뿌리는 백합과 다 알리아지. 이런 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단다." 벤 할아버지는 정원 일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메어리는 벤 할아 버지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런 뿌리들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어도 살 수 있나요?" 메어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둥근 뿌리는 조금도 돌볼 필요가 없단다. 그냥 내던져 두어도 땅 속에서 혼 자 잘 자라지. 이 저택에도 갈란투스가 몇 천 그루나 된단다." 벤 할아버지는 이제 메어리를 보아도 예전처럼 귀찮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지?" "한 달 정도요." "너도 이제 겨우 미스르스웨트의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구나. 살도 붙고 피부도 건강해졌 어. 네가 처음 이 채소밭에 왔을 땐 마치 깃털이 뜯긴 까마귀 같았단다. 보기도 흉하고 성격도 무 척 비뚤어져 있었지." 메어리는 예전 같았으면 왈칵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살이 쪘나봐요. 예전엔 헐렁헐렁했던 양말이 꼭 조여요."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쟁기를 들고 흙을 일구었다. 메어리는 이제 언제든 지 안심을 하고 벤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정원을 갖고 계세요?" "아니, 난 문 옆에 있는 정원에서 살고 있지만 그게 내 정원은 아니란다." "만약에 정원이 있다면 뭘 심고 싶으신데요?" "뿌리가 둥근 구근이나 좋은 향기가 나는 꽃을 심으면 좋겠지. 하지만 대개는 장미가 될 거야." 메어리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벤 할아버지는 잡초를 한 움큼 뽑아 저만치 던져 버리고서 대답했다. "나는 내가 정원지기로서 섬기고 있던 젊은 마님에게서 장미 가꾸는 법을 배 웠어. 그분은 자기 가 아끼시는 정원에 장미를 굉장히 많이 심으시고는 어린아이 대하듯이 귀여 워하셨어. 언젠가는 장미 곁에 웅크리고 앉아 사랑스럽게 키스하고 계시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단다." 할아버지는 다시 잡초를 한 움큼 뽑아 던졌다. "이미 십년이나 지난 얘기야." "그 아주머닌 지금 어디에 계세요?" 메어리는 흥미를 느끼며 말했다. "하늘나라에." 벤 할아버지는 쟁기를 흙 속에 깊이 박아 넣었다. "하늘나라에?" "목사님께서 마님은 착한 분이고 꽃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예쁜 분이니까 하늘 나라에 가셨을 거 라고 말씀하셨어." "그러면 그 장미꽃은 어떻게 됐어요?" 메어리는 더욱더 흥미를 느꼈다. "아무렇게나 내던져 두었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어서 장미가 시들어 버렸나요? 네? 죽어 버렸을까요?" 메어리는 이제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난 그 정원 안에 있는 장미를 좋아했어. 장미를 사랑하는 마님도 좋아했단 말이야. 그래서 일년에 한두 번 정도는 그 정원에 가서 손질을 해주곤 하지. 쓸 데 없이 너무 자란 나뭇가지를 친다든지 뿌리 주변의 흙을 파 일궈주거나 하는 일을 하지." 메어리는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잎이 거의 떨어져 버린 잿빛 나무가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를 알려 면 어떻게 해야 하 죠?" "봄까지 기다리면 알 수가 있단다. 햇빛이 비치고 땅을 촉촉하게 적셔 주는 비가 오면 차차 알 게 될 거야." "어떻게 알 수 있는데요?" "나뭇가지를 봐라. 갈색으로 작게 부풀어 있는 가지가 있지? 그 부분이 어떻 게 변하는지 잘 살 펴봐라." "요즘도 그 장미를 보러 가세요?" "올해는 아직 못 갔어. 류마치스 때문에 온몸이 마디마다가 쑤셔서 말이야." 벤 할아버지는 툴툴거리며 말하더니 갑자기 또 성난 표정이 되었다. "너처럼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보는 애는 처음 봤다. 저쪽에 가서 놀아라." 벤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메어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밀 의 정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메어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한 비밀이 었다. 13. 디콘의 피리소리 메어리는 줄넘기를 하면서 산책길을 뛰었다. 이 길은 월계수 울타리가 있는 산책길이었다. 메어 리는 산책길을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패티는 벌써 숲까지 달려가 메어리를 기 다리고 있었다. "패티, 벌써 거기까지 가 있었니? 너도 달리기가 빨라졌구나?" 메어리는 줄넘기를 멈추고 패티에게 다가갔다. 그때 어디선가 낮은 음의 휘 파람 소리가 들려왔 다. 그 소리는 유난히 색다른 소리였다. "들어봐, 패티. 저게 무슨 소리일까?" 메어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 메어리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 아이가 나무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 아이의 나이는 열두 살쯤 되어 보였는데 하늘을 향하고 있는 들창코에 뺨도 양귀비처럼 빨갰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파란색의 동그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봐. 정말 신기하지 않니?" 그 남자 아이가 앉아 있는 나무에는 다람쥐가 있었고, 옆에 덤불에서는 꿩이 머리를 내밀고 있 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 마리의 토끼가 앉아 있었다. 더 신기한 것은 나무 옆에 엎드려 있는 잿빛 털을 가진 여우였다. 동물들은 모두 남자 아이의 낮은 피리소리에 이끌려 모인 것 같았다. "쉿, 움직이지 마. 여기 있는 동물들이 놀라면 안 되니까." 메어리가 가만히 있자 남자 아이는 피리부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 아이가 몸을 똑바로 일으키자 동물들은 모두 제자리로 달아났다. 그러나 여우만은 달아나지 않고 남자 아이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난 디콘이야. 넌 메어리지?" 디콘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편지는 잘 받았니?" 메어리의 말에 디콘은 갈색의 곱슬머리를 끄덕였다. "정원을 가꾸는 도구를 사 가지고 왔어. 작은 삽이랑 갈퀴, 그리고 괭이야. 가 게집 아줌마가 덤 으로 꽃씨를 주셨어. 하얀 양귀비꽃 씨앗이랑 푸른색 참제비 씨앗이야. 내가 가 져온 꽃씨도 있어." 디콘의 말투로 보아 메어리가 마음에 든 듯했다. "우리 이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씨앗을 보도록 하자." 메어리와 디콘은 통나무 위에 걸터얹았다. 디콘은 웃도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봉투를 꺼냈다. 그 봉투 안에는 꽃 그림이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예쁘고 작은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목서초랑 양귀비야. 내 화단에서 가져온 거야. 이 꽃들은 어디에 심어도 잘 자라서 피리를 불 어 주는 것만으로도 싹이 나오고 꽃이 펴." 디콘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저건 울새 소리야. 우리를 부르고 있어." 호랑가시 덤불에서 울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가 정말 우리를 부르는 소리야?" "그럼, 친구를 부르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야. '이쪽을 봐. 나랑 얘기 하면서 놀자.' 저 새 가 누구 것인지 아니?" "응, 벤 할아버지 거야. 나도 알고 있는걸." "너도 알고 있다구? 아, 울새가 말하던 그 아이가 바로 너구나. 난 저 녀석에 게 너에 대해서 많 이 들었어. 저 녀석이 널 친구라고 하던데?" "정말? 정말 내가 좋다고 했어?" 메어리는 울새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응, 싫어했다면 네 옆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 저것 좀 봐. 네게 관심을 끌려고 하고 있잖아." 디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울새는 덤불위에서 날아다니며 지저귀거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저 여우는 누구니? 아, 알았다. 캡틴이구나." 메어리는 아까부터 계속 디콘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여우를 보며 말했다. "맞아, 캡틴이야. 내 제일 친한 친구지. 캡틴, 이리 와. 새로운 친구를 소개시켜 줄게." 디콘이 부르자 캡틴은 디콘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쫑긋 들었다. 캡틴은 메어리 의 무릎에 길고 뾰 족한 주둥이를 대고 조그맣게 울음소리를 냈다. 메어리는 움찔 뒤로 물러났다가 조심스럽게 캡틴의 털을 만져 보았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나봐. 나도 캡틴이 무섭지 않아. 여우는 다 무서울 거라 고 생각했었는데." "캡틴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서 반갑다고 하는데?" "정말이야? 나도 정말 반가워!" "참, 네가 안고 있는 고양이가 패티니? 마르사 누나가 말해줬어. 아주 장난꾸 러기라며?" 디콘은 패티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패티는 앞발로 디콘의 손가락 을 살짝 긁었다. "하하, 이 녀석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본데? 하지만 너도 곧 나랑 친해질 거야. 난 모든 동 물들과 친하거든. 그런데 네 꽃밭은 어디니? 클레이븐 씨가 정원을 좀 나누어 주셨겠지?" 메어리의 얼굴색이 변했다. 메어리가 입을 열지 않자 디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누어 주지 않으셨어? 그래서 그러니?" "만약 내가 비밀을 말하면 넌 그걸 사람들에게 말하고 말거야. 그렇지?" "난 언제나 비밀을 지켜. 내가 만약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여우 새끼의 굴이 나 작은 새의 보금 자리를 아이들에게 말해버렸다면 동물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었을 거야. 난 절 대로 비밀을 지켜." 메어리는 손을 내밀어 디콘의 팔을 잡았다. "난 정원을 훔치고 말았어. 그 정원은 내 것이 아니야. 아무도 갖고 싶어하지 않고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정원이야. 어쩌면 꽃이 모두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 메어리는 몸이 달아올라 재빨리 말했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정원을 내가 돌보고 있어. 누구도 내게서 그 정원을 빼앗아가지 못해. 저 정원을 자물쇠로 잠가버리고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 메어리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디콘의 파란 눈이 동그래졌다. "어어, 울지 마." 메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가자. 내가 보여 줄게." 메어리는 디콘에게 정원을 보여 주고 싶었다. 디콘은 메어리만큼 정원을 사랑 해 줄 것 같았다. 메어리가 담 곁으로 다가가 담쟁이 덩굴을 들어올리고 그 밑에 있던 문을 열 자 디콘은 깜짝 놀 랐다. 메어리는 안으로 들어가 자랑이라도 하듯 손을 들어 정원을 가리켰다. "여기가 비밀의 화원이야." 디콘은 몇 번이나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우와! 굉장히 이상하고 아름다운 곳이구나.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애." 디콘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담에 늘어져 있는 덩굴과 풀 속에 가지를 뻗 고 있는 장미, 큼지 막한 화분 등을 살펴보았다. 캡틴도 디콘을 따라 살금살금 정원을 돌아다녔다. "이 정원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디콘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 정원에 대해 알고 있었어?" 메어리가 큰 소리로 묻자 디콘은 손짓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작은 소리로 얘기하지 않으면 안 돼. 누가 듣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마르사 누나한테 들었어. 그 얘길 듣고 늘 궁금해 했었는데." "장미꽃이 필까? 난 장미가 모두 죽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넌 알 지? 역시 죽은 거 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여길 봐." 디콘은 재색으로 변해 버린 오래된 장미나무 곁으로 갔다. "잘라 버려야 하는 오래된 가지가 많아. 하지만 새로 돋는 것도 있어. 이게 바 로 그거야." 디콘은 재색 가지 밑에 가려져 있던 녹색의 어린 가지를 만졌다. 메어리도 소중한 것을 만지듯 어린 가지를 쓰다듬었다. "이것? 살아 있는 거야? 정말?" "그럼. 이번 여름엔 눈부신 장미 정원을 볼 수 있을 거야. 잘 다듬어 주면 말 이야." 그때 주위를 둘러보던 디콘이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어, 누가 손질을 해 줬네?" 그것은 메어리가 잡초를 뽑아 주고 숨을 쉬게 해준 새싹들이었다. "내가 해준 거야. 숨을 쉬게 해주려고 새싹 근처를 파줬어. 하지만 난 저게 어떤 싹인지도 몰 라." "참 잘했어. 정원사도 이렇게 해주지는 못했을 거야. 자, 봐. 이건 크로커스, 저건 갈란투스, 그 리고 이건 수선화야. 어, 캡틴. 그걸 만지면 안 돼." 디콘의 말에 새싹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캡틴이 얼른 고개를 들고 딴짓을 했다. "네 앞에서 야단을 맞으니까 창피해서 저러는 거야. 네게 아주 잘 보이고 싶은 거봐." 디콘은 캡틴의 부드러운 잿빛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메어리와 디콘은 죽은 가지를 잘라주고 흙을 파며 부지런히 일을 했다. "여기에는 할 일이 굉장히 많아." "다시 와서 도와주지 않을래? 부탁이야, 디콘. 또 와줘." 메어리가 부탁했다. "매일이라도 올게. 날씨가 맑든 비가 오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야. 이렇게 재 미있는 일은 처음이 야." 디콘은 웃으며 말했다. 메어리는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예전에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질문 을 했다. "디콘, 넌 내가 좋으니?" "응, 좋아." 디콘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굉장히 좋아. 울새도 분명히 나처럼 널 좋아할 거야." "와, 그럼 두 명이나 날 좋아하는 거네? 울새하고 디콘하고." 그때 정원 안에 있는 커다란 시계가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냈다. "어머, 가 봐야 해. 너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되지?" 디콘은 방긋 웃었다. "이제 양들에게로 돌아가 봐야 해. 널 만나러 오느라고 잠깐 우리 안에 넣어 두었거든. 답답해 할 거야. 빨리 가서 들판의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게 해줘야 해." "또 올 거지?" "그럼. 이 정원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어. 내게 둥지를 가르쳐 준 티티새처럼 넌 안심하고 있어도 돼." 메어리는 정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는 디콘과 함께 정원을 나왔다. 14. 땅을 조금만 나누어 주세요 메어리는 숨을 헐떡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메어리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 었고 뺨은 환한 장 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르사는 테이블 곁에 서 있 다가 메어리를 맞았다. "늦으셨네요. 어딜 갔다 오셨어요?" "디콘을 만났어, 디콘을." "그 애가 꼭 오리라고 생각했어요. 어떠셨어요?" "난 말이야. 디콘이 아주 멋있는 애라고 생각해. 둥근 코도 마음에 들고 초 원 같은 파란 눈도 좋아. 난 캡틴도 봤어. 디콘이 그러는데 캡틴은 날 마음에 들어한대." 메어리는 수저를 들고 접시에 담긴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꽃을 어디에 가꾸면 좋을지 누구에게 물어보셨어요? 디콘이 가져온 꽃씨를 심어야 하잖아요." "아직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어." 메어리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벤에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벤이라면 심을 만한 곳을 아가씨에게 찾아줄 거예요." "만약 아무 방해가 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땅인데, 내가 가지면 안 된다고 하는 사 람은 없겠지?" "그럼요.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죠." 메어리는 빨리 식사를 했다. 다시 정원에 가서 상한 가지들을 잘라 줘야 했 기 때문이다. 메어리 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마르사가 불러 세웠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늘 아침에 주인님께서 돌아 오셨어요. 아가씨 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계셔서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뵙고 싶어하세요." "아저씨가 날 만나고 싶어하신다고? 내가 여기 처음 온 날은 만나고 싶지 않 다고 하셨잖아?" "저희 어머니가 스웨트 마을에 돌아오시다가 우연히 주인님을 만나신 모양이 에요. 저희 어머니 는 주인 마님을 두세 번 정도 저희 집에 초대하신 적이 있으시거든요. 저희 어 머니가 주인님에게 아가씨 얘기를 하셨나봐요.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님께서 아 가씨를 뵙고 싶어하 세요." 그때 문이 열리고 메드로크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메드로크 부인은 검정색 옷에 검정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목언저리에는 남자 얼굴의 사진이 붙은 커다란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그 사 진은 몇 년 전에 죽은 메드로크 부인의 남편 사진이었다. 메드로크 부인은 치장 을 할 때마다 항상 그 브로치를 달았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군요." 메드로크 부인은 메어리를 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머리를 다시 매만지세요. 마르사, 네가 아가씨를 도와서 제일 좋은 옷을 입 혀 드려라. 아가씨, 클레이븐 씨가 서재로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메어리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메어리는 옷을 갈아입고 메드로크 부인을 따라 서재로 갔다. 메어리가 안내된 곳은 이 집에서 지금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서재 안의 난로 앞 안락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메어리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그 아이를 두고 물러가도 좋아요. 이야기가 다 끝나면 종을 울릴 테니 그때 데려가도록 해요." 클레이븐 씨가 말했다. 메드로크 부인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클레이븐 아저씨는 곱추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단지 어깨가 약간 구부러져 있 을 뿐이었다. 클레 이븐 아저씨는 어깨 너머로 메어리를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오너라." 메어리는 아저씨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니? 몸이 너무 말랐구나." "옛날보다는 많이 찐 거예요." "내가 널 잊고 있었구나. 네게 가정교사나 유모가 필요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것마저 잊고 있었 어." "전 이제 다 컸으니까 유모는 필요 없어요. 그리고 가정교사도 제발 두지 말아 주세요." 아저씨는 이마를 문지르며 메어리를 쳐다보았다. "마르사의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구나. 그럼, 넌 뭘 하고 싶지?" "밖에서 놀고 싶어요. 여기저기서요. 마르사네 어머니가 줄넘기도 사 주셨어 요." "뭐 갖고 싶은 건 없니? 책이나 장난감, 인형 같은 거라도." "전 씨앗을 심고 꽃이 자라는 걸 볼 수 있는 땅을 좀 갖고 싶어요." 클레이븐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땅을 달라?" 아저씨는 멈춰서서 메어리를 쳐다보았다. 아저씨의 눈빛은 부드럽고 다정하게 변해 있었다. "원하는 만큼 땅을 주마. 네 말은 꽃을 아주 사랑하던 어떤 사람을 생각나게 했어. 네가 마음에 드는 땅이 있다면 말해보거라. 그것을 네게 주마." 아저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어디라도 상관 없나요?" "그래, 상관 없단다." 메어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비밀의 정원을 주세요." 클레이븐 씨의 안색이 변했다.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도 사라졌다. "비밀의 정원이라고?" 메어리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십년 전부터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는 그 정원 말예요." 클레이븐 씨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책이 툭 떨어졌다. 클레이븐 씨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 다. "누구에게 들었느냐? 누구에게 들었어? 누구에게 들었냐고 묻고 있잖아!" 클레이븐 씨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손으로 쾅쾅 두드렸다. 의자가 뒤로 콰 당 넘어졌다. "메드로크 부인! 메드로크 부인!" 클레이븐 씨는 종을 울렸다. 소란스러운 종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 퍼졌다. 그 러자 메드로크 부 인이 급한 걸음으로 서재로 뛰어들어 왔다. "부르셨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클레이븐 씨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메어리를 가리켰다. "저 애를 당장 데리고 나가!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해 줘!" 클레이븐 씨는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메드로크 부인은 매서운 눈으로 메어리를 쳐 다보았다. "주인님께 어떻게 했지요?" "별로. 모두 내게 시중을 잘 들어 주느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말했을 뿐이 야. 그리고 뭐 갖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어 보셔서 정원을 달라고..." "정원이요?" 메어리는 머뭇거리며 메드로크 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디든 좋을 대로 가져도 좋다고 하셔서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는 그 정원 을 갖고 싶다고 말 씀드렸어." "뭐라고요? 세상에!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죠?" 메어리는 우물쭈물 했다. 마르사에게 들었다고 했다가는 마르사가 혼이 날 게 틀림없기 때문이 다. "아무도 말해 준 적 없어. 그냥 우연히 들었을 뿐이야." 메어리는 무엇인가 더 물으려는 메드로크 부인의 곁을 지나 서재를 빠져나와 버렸다. 메어리는 저택을 나와 비밀의 정원으로 갔다. 울새가 지저귀며 메어리를 뒤따 랐다. "안녕, 오늘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야. 이 정원을 달라고 했더니 아저 씨가 무섭게 화를 내셨거든." 메어리는 돌로 만든 의자에 앉아 정원을 둘러보았다. "난 이 정원을 클레이븐 부인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데 말이야. 난 이곳이 제일 좋아. 초록빛 새싹들도 내가 모두 숨쉬게 해 주었어." 그때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울새가 갑자기 날아 오르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 다. 그리고 소리 높 여 지저귀었다. "울새야, 왜 그래?" 메어리는 정원의 입구로 다가가 안에서 문을 잠갔다. 울새가 자꾸만 정원의 벽을 왔다갔다하며 부산을 떠는 모습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메어리는 열쇠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 다. "아무래도 누가 오고 있는 것 같애." 저만치서 클레이븐 씨가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메어리는 깜짝 놀라 구멍에서 눈을 떼었다가 다시 들여다 보았다. 클레이븐 씨는 정원의 문으로 다가와 덩굴을 걷어내려 했다. '설마 열리지는 않겠지? 들키게 된다면 난 이곳에서 쫓겨나고 말 거야.' 메어리는 몸을 정원의 구석으로 숨겼다. 클레이븐 씨는 덩굴을 걷어내고 정원 입구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손 잡이를 돌려보기 시 작했다. 문이 단단히 잠겨져 있음을 안 클레이븐 씨는 안도의 빛을 띠며 그 자 리를 떠났다. 메어리는 잠시 후 숨을 죽이며 열쇠 구멍으로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멀어져 가는 클레이븐 씨 의 뒷모습이 보였다. 메어리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웬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 다. "아저씬 참 외로우신가봐. 이 정원을 다시 사랑하게 되면 행복해지시지 않을 까?" 울새는 나뭇가지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고마워, 울새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 정원에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 을 거야." 울새는 가만히 날아와서 메어리의 어깨 위에 앉았다. 15. 마르사의 가족 메어리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메드로크 부인이 메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며칠 동안 다른 곳에 가 계셔야겠어요. 주인님께서 아 가씨를 만나고 싶 어하지 않으세요." 메어리는 깜짝 놀랐다. "내가 가 있을 곳이 어디에 있어? 난 나쁜 짓을 한 게 아무것도 없어." 메드로크 부인은 딱딱하게 말했다. "마르사네 집에 가 계세요. 마르사에게는 이미 말을 해 놓았어요. 양치기 소 년 디콘이 마중을 나올 거예요." 메어리는 마르사네 집이라는 말에 조금 안도가 되었다. "빨리 떠날 준비를 하세요. 정원에서 디콘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주인님 은 얼마 후면 다시 여행을 떠나실 거예요. 그때가 되면 아가씨를 부를게요." 메어리는 짐을 챙기러 방으로 올라갔다. 메드로크 부인이 다시 메어리를 불렀 다. "그 고양이도 같이 데리고 가 주세요. 아가씨가 없으면 하루 종일 시끄럽게 울 어댈 거예요." "물론 패티도 데리고 갈 거야." 메어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방으로 올라왔다. 방에는 마르사가 메어리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마르사, 마르사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슬프지만 마르사네 엄마와 동생들을 만나게 돼서 기 뻐." "저희 어머니도 아가씨를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아가씨 얘기만 듣고도 아주 좋아하셨는걸요." 메어리는 가방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디콘이 캡틴과 함께 메어 리를 기다리고 있었 다. "잘됐어, 메어리. 네가 우리집에 머무르게 됐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좋았는 지 몰라. 그런데 왜 이곳을 떠나 있게 되었니?" 메어리는 디콘의 집으로 향하는 들판을 걸으면서 디콘에게 아저씨의 얘기를 해 주었다. "아저씬 부인이 돌아가신 뒤로 그 정원을 잠가 버리신 거야. 아무도 들어가 지 못하게 말이야. 그런데 내가 오늘 그 정원을 달라고 했어." 디콘은 나뭇가지로 땅을 톡톡 두드리며 걷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레이븐 씨에게 비밀의 정원을 달라고 했단 말이야?" "응, 그랬더니 불같이 화를 내시며 다시는 나를 안 보겠다고 했어." 메어리는 디콘에게 클레이븐 부인의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디콘은 그 이야 기를 들으며 동그란 눈을 계속 깜박거렸다. "그래서 클레이븐 씨가 그 정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싫어하시는 거구나." 둘은 어느새 들판을 지나 디콘의 집에 다다랐다. 디콘의 집은 아담하게 생 긴 오두막집이었다. 집 주위에는 많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저거 봐, 메어리. 저기가 우리 집이야!" "와! 보인다. 저기 연기 나는 집 말이지?" "응, 우리 집까지 달리기 할까?" "좋아. 자, 시작!" 메어리와 디콘은 디콘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메어리가 조금 앞서고 있었고 디콘이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캡틴도 바람을 가르며 메어리의 앞을 달렸다. 메어리와 디콘이 집 앞에 도착하자 디콘의 엄마 스잔이 나왔다. "엄마, 메어리예요." 디콘은 메어리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스잔은 마르사처럼 통통한 몸에 건 강한 피부색을 가진 아줌마였다. 스잔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잘 오셨어요. 피곤하시죠, 메어리 아가씨."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어요. 지난 번 주신 줄넘기 잘 받았어요. 얼마나 재미있 는지 몰라요." "마음에 드셨다니 참 기뻐네요.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메어리는 스잔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메어리는 깜 짝 놀랐다. 많은 아 이들이 제각기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아이는 냄비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소쿠리 를 가지고 있었다. 또 한 명은 다리미질을, 그리고 나이가 어려 보이는 아이들은 놀고 있었다. "얘들아, 잠깐만 이쪽을 보거라." 스잔이 짝짝 손뼉을 치자 아이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메어리를 돌아보았 다. "이분은 마르사 언니가 있는 저택의 메어리 아가씨란다." 스잔은 메어리에게도 아이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자, 제일 큰 애부터. 이쪽은 제일 언니인 엘리자벳, 저기 요리를 하고 있는 아이는 제인, 아가 씨와 동갑인 아홉 살이에요. 그리고 다리미질을 잘하는 세릴, 앤은 네 살, 개구 장이 봅, 그리고 또 어디 갔지? 얘들아!" 스잔의 말에 방문이 열리고 얼굴이 똑같이 생긴 세 명의 아이들이 나왔다. "우린 세 쌍둥이예요. 제 이름은 필이에요." "전 제임스." "그리고 난 잭키." 세 명의 쌍둥이들이 인사를 하자 메어리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 었다. "이쪽이 제임스?" 메어리가 한 명을 가리키며 묻자 모두 깔깔 웃었다. "전 잭키예요." "정말? 너무 똑같이 생겨서 구분을 할 수가 없어." 스잔은 방에서 담요에 싼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이 아이는 막내 크리스예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죠." "아, 귀여워." 메어리는 아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기는 메어리의 손을 꼭 쥐었 다.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워." 스잔은 크리스를 꼭 껴안으며 정겨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이 애들말고도 장남 마이클이 있는데, 그 애는 요오크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남자 아이가 여섯 명, 여자 아이가 여섯 명, 합해서 모두 열두 명이죠." "열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처음 봤어." 메어리와 아이들은 스잔이 정성스럽게 차려 준 식사를 했다. 메어리는 스잔이 만들어 준 음식이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음식보다도 맛이 있었다. "너무 맛있어요. 정말." 메어리가 그릇을 다 비우자 다른 아이들이 자신의 음식을 덜어 메어리에게 주 었다. 메어리는 그 따뜻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식사를 하고 난 메어리와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이층 침대 아래에는 세릴이 자고 위에는 엘리자벳, 선반 위에는 봅과 앤, 그 리고 커다란 소쿠리 안에는 잭키와 제임스, 필, 세 쌍둥이가 잠이 들었다. 또 다른 이층 침대에서 는 제인과 메어리가 잠들었다. "참 포근한 집이야. 그렇지, 패티?" 밖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개구리 소리에 섞여 디콘의 피리소리 도 들려왔다. "패티, 너도 잠이 오지 않지? 우리 디콘한테 가 볼래?"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피리소리는 언덕 위에 있는 헛 간에서 들려오고 있 었다. "디콘은 헛간에 있나봐." 메어리는 헛간으로 들어갔다. "왜 혼자 이런 곳에 와 있어?" 디콘은 피리 부는 것을 멈추고 메어리를 향해 웃었다. "맑게 개인 날 밤은 헛간에서 자곤 해. 기분이 참 좋거든." "여기서?" "응, 너도 잠이 오지 않아?" "응, 이렇게 빨리 잠자리에 든 적이 없거든." 메어리는 디콘이 앉아 있는 푹신푹신한 짚더미 위에 앉았다. "우리 집은 모두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잠자는 시간도 빨라. 해가 졌 는데도 자고 있지 않으면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초랑 석유값도 걱정해야 되거든." "그래? 내가 있는 저택과는 굉장히 다르구나." "그래서 해가 진 후에 저녁을 먹는 일은 좀처럼 없어. 오늘처럼 늦게 먹은 건 특별한 손님이 왔 기 때문이야." "내가 와서? 어머! 몰랐어."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헛간의 문이 열리고 스잔이 들어왔다. "어머, 메어리 아가씨. 여기에 계셨어요? 사라져 버려서 걱정했어요. 이 들판 의 봄은 쌀쌀해요. 그러니 어서 집으로 들어가세요. 디콘, 아가씨를 집 안에 데려다 드리거라." 디콘과 메어리는 일어서서 스잔을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디콘, 넌 헛간에서 잘 거니? 아가씨, 안녕히 주무세요." 스잔이 방으로 들어가자 디콘은 메어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양의 숫자를 세다보면 빨리 잠들 수 있을 거야." "응, 고마워. 디콘." 메어리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아 디콘이 가르쳐준 대로 양의 숫자 를 세었다. "213마리의 양, 214마리의 양, 215마리의 양, 내일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스잔을 도와드려야 지. 216마리의 양..." 메어리는 숫자를 세다가 잠이 들었다. 환한 아침해가 떠울랐다. 디콘과 세 쌍둥이는 이른 아침부터 장작을 쪼갰고 엘리자벳과 앤은 음 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어리는 아직까지도 새근새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제인이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걷 었다. 강한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제인은 자고 있는 메어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아직도 자고 있는 거야? 해가 이렇게 높이 떴는데." 제인은 메어리를 깨우려고 했다. 그러자 엘리자벳이 제인을 말렸다. "푹 주무시게 해 드려. 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피곤했을 거야." 그러자 문을 열고 세 쌍둥이가 들어왔다. 쌍둥이들의 손에는 장작이 한아름 안겨 있었다. "으ㅆ! 누나, 장작 여기 놔 두었어." 소란스러운 소리에 메어리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다들 일어났는데 나만 혼자 늦잠을 자고 있었네?" 제인은 선반에서 접시를 꺼내다 말고 메어리를 돌아보았다. "어머, 이제야 일어났네." 메어리는 제인에게로 다가갔다. "접시 놓는 일은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아니, 괜찮아." 메어리는 제인의 사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인에게서 접시를 받아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 간 접시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마루위로 떨어져 모두 깨지고 말았다. 메어리는 새파랗게 질려 당황 해서 얼른 접시조각들을 주워 들었다. "미안해요. 어쩌면 좋지? 어? 아야!" 메어리는 흩어진 접시조각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메어리의 손가락 끝에서 빨간 피가 흘러 나 왔다. "어머! 피나 나." "어머! 이런. 손가락을 이리 줘 봐. 내가 피를 멈추게 해줄게." 앤은 메어리의 손가락을 잡더니 입으로 빨았다. 그리고는 당황해 있는 메어리 를 보며 방긋 웃었 다. "우리 엄마는 우리가 손가락을 다치면 이렇게 해주셔." "고마워, 앤. 그런데 어떡하지? 접시를 모두 깨버렸으니." "괜찮아. 걱정하지 마." 엘리자벳이 메어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제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메어 리를 보며 쌀쌀하게 말했다. "왜 접시를 놓겠다고 나서서 깨뜨리니? 내가 하겠다니까." 그때 집 앞에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마차 소리가 멈추더니 문을 열고 메드 로크 부인이 들어왔 다. "아가씨를 모시러 왔어요." "날 데리러 왔다구?" 메어리는 스잔의 뒤로 몸을 숨겼다. "주인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주인님의 명령이세요. 지금 바로 돌아가셔 야 합니다." "싫어! 돌아가지 않을 거야!" 메어리는 소리를 질렀다. 메어리는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디콘의 집에서 살 고 싶었다. 클레이븐 아저씨의 무서운 얼굴을 다시 보는 일은 싫었다. "절대로 가지 않을 거야!" 메어리가 악을 쓰자 메드로크 부인은 메어리를 끌어당기며 강제로 마차에 태 우려고 했다. 메어 리의 몸이 땅에 질질 끌렸다. 메어리가 소리를 지르자 패티가 메드로크 부인의 손을 꽉 깨물어 버 렸다. "아야! 이 버릇없는 새끼 고양이가!" 메드로크 부인은 패티를 잡아채더니 휙 던져 버렸다. "패티! 패티!" 메어리는 메드로크 부인의 손에서 빠져나오며 던져진 패티를 안았다. "흥! 내가 돌아갈 줄 알고! 절대로 가지 않을 거야! 두고 보라구." 메어리는 들판 쪽으로 달려가 도망가 버렸다. "기다려요! 아가씨! 아가씨!" 메드로크 부인은 메어리를 쫓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있던 스잔이 메 드로크 부인의 팔을 잡았다. "제가 디콘에게 찾게 해서 돌려보낼 테니까 저택으로 돌아가 계세요."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겠군요." 메드로크 부인은 분한 듯 씩씩거리며 마차에 올라타고 저택으로 향했다. 메어리는 한참을 달리다가 디콘의 집이 보이지 않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 다. "배가 고파. 너도 그렇지, 패티?" 패티는 그렇다는 듯 야옹 울음소리를 냈다.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잔디 위에 누웠다.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흘러가고 있었 다. 디콘의 집에서의 짧은 시간은 메어리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결코 풍족 하지는 않지만 서로 도우며 살고 있는 디콘의 식구들이 메어리의 눈에 아름답게 비쳤다. "패티, 난 스잔이 꼭 우리 엄마 같아. 스잔이랑 같이 있으면 꼭 우리 엄마랑 함께 있는 것 같 아." 메어리의 눈에는 뿌연 눈물이 차 올랐다. 메어리는 인도에서 같이 살던 돌아 가신 엄마가 생각났 다. 자꾸만 구름이 흐리게 보였다. 한편 디콘은 메어리를 찾아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메어리 메어리.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때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디콘이 비 오던 날 건져 주었던 검댕이 였다. "검댕아, 메어리를 찾았니?" 검댕이는 까악까악 울음소리를 냈다. "못 찾았다구? 자, 이번엔 저쪽을 한 번 찾아보자." 디콘은 검댕이와 함께 다른 쪽의 들판으로 갔다. 메어리의 배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났다. "패티, 배가 너무 고파. 메드로크 부인은 돌아갔겠지? 디콘 집에 가 보자." 메어리는 들판을 지나 디콘의 집으로 가서 창문을 기웃거렸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제인이 메어 리의 등을 톡톡 쳤다. "뭘 하고 있어?" 메어리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어머, 제인이었어? 놀랐잖아. 메드로크 부인은 돌아갔지?" "돌아갔어." 제인은 빨래를 들고 있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 그거 빨래지?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제인, 난 네가 부러워. 넌 좋은 엄마랑 아빠가 있고 형제도 많잖아. 난 계속 이곳에 있고 싶어." 제인은 메어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줄곧 이곳에 있고 싶다구? 말도 안 돼. 네가 이곳에 있으면 우리 집은 점점 더 가난해진단 말 이야!" 메어리는 제인의 차가운 말에 놀랐다. "어, 어째서?" "어제 저녁밥은 평소보다 훨씬 분에 넘쳤어. 그렇게 무리를 하고 나면 우리들 이 앞으로 먹을 것 이 줄어든단 말이야." "몰랐어." 메어리는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저택에는 항상 맛있는 음식들이 쌓여 있어서 아무 리 많은 사람들이 먹어도 모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접시도 공짜가 아니야." 제인은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 돈이라면 조금 가지고 있어." 메어리의 말에 제인은 코방귀를 뀌었다. "놀리지 마. 베풀어 달라고 말한 적 없어. 너 같은 애는 정말 싫어. 다시는 이 곳에 오지 마." 메어리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제인을 바라보았다. 메어리의 눈에는 조금씩 눈물이 차 올랐다. "누가 올까봐? 다시는 안 올 거야!" 메어리는 뒤돌아서서 들판으로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디콘은 들판에서 메어리를 찾고 있었다. 디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채 검은 먹구름을 머금고 있었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한바탕 비가 내릴 것 같아." 디콘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었다. 디콘은 까마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좀 더 찾아보면 될 거야. 자, 다시 찾아보자." 메어리는 패티를 안고 들판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메어리의 머리에서 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배고파. 몸도 춥구. 패티, 너도 춥지? 날 좋아해 주는 건 너밖에 없나봐. 난 역시 외톨이야." 메어리는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저 멀리 카멜라의 집이 보였다. "카멜라의 집이야. 카멜라는 분명히 따뜻한 수프를 대접해 줄 거야. 패티, 조금 만 참아." 메어리는 카멜라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은 늪지대여서 여기저 기 작은 웅덩이들이 패여 있었다. 메어리는 달리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꺄-악! 도와줘요!" 메어리의 몸은 웅덩이 속으로 자꾸만 빠져 들었다. 그때 디콘이 웅덩이 쪽으 로 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늪근처에서 메어리를 찾고 있다가 메어리의 비명소리를 듣 고 달려온 것이다. "어! 기다려. 내가 건져줄게." 디콘은 메어리의 손을 잡고 끌어올렸다. 메어리는 한 손으로는 디콘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패티를 안고 간신히 웅덩이에서 빠져나왔다. "휴, 큰일날 뻔했어. 춥지? 자, 내 옷 입어." 디콘은 조끼를 벗어 떨고 있는 메어리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빨리 집으로 가자. 감기 걸리겠다." "싫어! 너희 집에는 안 갈 거야! 제인이 있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 제인은 싫어." "싸웠니?" "그래, 내가 있으면 너희 식구들에게 폐가 된다고 했어." "뭐? 난 잘 몰랐어. 하지만 그건 제인이 몰라서 한 말이야. 우리 식구는 모두 널 좋아해. 자, 어 서 우리 집으로 가자." 디콘은 메어리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메어리는 고집을 부리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 메어리. 이러다 정말 감기 들겠다. 빨리 집에 가서 몸을 녹여야 해." 디콘이 다시 일으키려 하자 메어리는 벌떡 일어서서 카멜라의 집으로 달려갔 다. "싫어! 너희 집에는 가지 않을 거야! 난 카멜라한테 갈 거라구!" 디콘도 메어리의 뒤를 따라서 달렸다. 메어리는 카멜라의 오두막집에 도착하 자 노크도 하지 않 고 문을 벌컥 열었다. 카멜라는 탁자에 앉아 있다가 놀란 눈으로 메어리를 바라 보았다. "카멜라, 나-어?" 메어리는 카멜라를 부르다가 말을 멈추었다. 카멜라 앞에 디콘의 엄마 스잔 이 앉아 있었다. 스 잔은 메어리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이런, 흠뻑 젖었구나, 감기에 걸리겠어. 어서 안으로 들어오거라." 뒤쫓아오던 디콘도 스잔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왜 이곳에 계세요?" 스잔은 카멜라와 마주보며 웃었다. "카멜라와 난 친구란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야." 16. 정원의 비밀 통로 디콘과 메어리는 카멜라의 오두막 집에서 따뜻한 수프와 모닥불로 몸을 녹였 다. "메어리, 카멜라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니?" 디콘은 오두막집을 나오면서 궁금한 듯 메어리를 보았다. "응, 얼마 전부터. 카멜라는 패티도 찾아주고 비밀의 문도 찾게 해주었어. 카 멜라는 모르는 게 없나봐." 디콘은 카멜라의 오두막 집을 뒤돌아보았다. "사실 난 너랑 엄마가 카멜라를 알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왜?" "마을에 있는 목수 아저씨가 늪 주위에는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었거든. 마녀 가 살고 있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카멜라는 아주 좋은 사람 같아. 목수 아저씨는 카멜라를 잘못 알 고 있는 거야." 디콘과 메어리는 들판을 걸었다. "모르겠어. 클레이븐 아저씨는 날 보면 막 화를 내실 거야. 하지만 정원을 돌 봐줘야 하는데. 뽑 아줄 잡초도 있고 죽은 가지들도 잘라줘야 되거든." 메어리는 비밀의 정원으로 가고 싶었다. 울새도 보고 싶고 마르사도 보고 싶 었다. 메어리의 얼 굴은 침울해졌다. 그러자 디콘이 메어리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나도 정원이 걱정 돼. 수선화랑 갈란투스도 줄기를 뻗으려하고 있을 거야." 그때 저만치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어? 메어리, 저건 클레이븐 씨의 마차야. 우릴 봤나봐. 이쪽으로 오고 있어." 마차는 메어리와 디콘의 앞에서 멈추어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클레이븐 씨가 내렸다. "메어리, 널 찾고 있었다. 메드로크 부인을 보내도 오지 않았더구나." 메어리는 휙 고개를 돌렸다. "메드로크 부인은 따라서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메드로크 부인은 저 랑 패티를 싫어해 요." "메드로크 부인은 내가 화난 걸 보고 널 마르사네 집으로 보낸 거란다. 하지만 난 널 남의 집에 맡길 생각은 없었다. 화를 내서 미안하구나." 메어리는 그제야 화가 조금씩 풀렸다. "마르사네 집에서는 재미있었니?" 아저씨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메어리도 방긋 웃었다. "네.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그 집의 가족은 열네 명이나 돼요. 저 스잔 아줌마 네 집에 또 놀러가 도 되죠?" "그럼, 네가 가고 싶다면 가도 좋단다. 하지만 네 집은 이곳이란 걸 잊지 말아 라." "네! 고맙습니다. 아저씨." 메어리는 디콘과 작별 인사를 하고 클레이븐 아저씨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메어리는 마차에 오르기 전에 디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디콘, 조금 있다 정원으로 와. 나도 가 있을 테니까." 디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어리는 마차에 올라 디콘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돌멩이가 깔린 자갈길을 지 났다. 클레이븐 아저씨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메어리, 네게 꽃을 심을 수 있는 땅을 주라고 벤에게 일러뒀다. 하지만 비밀 의 정원은 절대로 안 된다. 그곳은 아무도 들어가선 안 돼. 네가 뭘 해도 좋지만 이 집의 규칙만은 지켜다오. 들어가 서는 안 된다고 하는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메어리는 클레이븐 아저씨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저씨의 얼굴은 쓸쓸해 보였다. 마치 정원 의 열쇠 구멍으로 보았던 아저씨의 뒷모습 같았다. '아저씨는 정말로 아줌마를 사랑하셨나봐.' 메어리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메어리에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그래, 정원을 다 살려 놓으면 아줌마는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돌아가신 아줌 마를 기쁘게 해 드 리는 게 아저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야.' 메어리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비밀의 정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정원의 입 구 앞에서 인부들이 모여 땅을 파고 있었다. 인부들은 나무를 심고 있는 중이었다. '어떡하지? 인부들이 있으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잖아.' 메어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열쇠만 만지작거렸다. 메 어리는 정원에 들어 가지 못하고 숲의 오솔길을 걸었다. "패티, 난 꼭 정원으로 들어가고 싶어. 장미랑 새싹들을 보고 싶단 말이야. 울 새도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메어리는 속이 상해서 패티에게 중얼거렸다. 정원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점점 간절해졌다. 그런데 메어리는 숲길을 걷다가 나뭇가지와 풀들에 가려진 구멍 안으로 몸이 빠지고 말았다. "아악!" 메어리는 구멍의 입구를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구멍은 꽤 깊어 보였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메어리의 외침소리는 숲으로 퍼졌다. 그러나 숲은 저택에서 꽤 떨어져 있어 서 아무도 메어리의 외침소리를 듣지 못했다. 메어리가 붙잡고 있던 입구의 흙이 조금씩 무너져 내 렸다. "악! 살려줘요!" 메어리는 그만 깊은 구멍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메어리는 어두운 구멍 속에 쓰러져 기절을 했다. 메어리는 한참 후에야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메어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찍찍 생쥐의 울음소 리가 들려왔다. "어머, 생쥐네? 넌 여기에 살고 있니?" 생쥐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메어리를 바라보다가 구멍을 따라 어디론가 가 려 했다. "좋아, 생쥐를 따라가 봐야겠다." 메어리는 몸을 숙이고 생쥐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걷자 머리위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왔다. 메어리는 손을 뻗쳐 빛이 들어오는 입구를 잡았다. "여기가 어디지?" 메어리는 밖으로 나왔다. 공중에서 울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울새? 아, 보고 싶었어. 어? 그렇다면 여긴 비밀의 정원?" 메어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비밀의 정원이었다. 메어리는 정원의 나무 들을 둘러보며 함 빡 웃었다. "다행이야. 너희들을 볼 수 있어서. 정원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었다니, 정말 몰랐어. 어서 디콘 에게도 얘기해 줘야지." 메어리는 다시 구멍으로 내려가 숲으로 갔다. 그곳에는 디콘이 메어리를 찾고 있었다. "메어리구나. 인부 아저씨들이 일을 하고 있어서 정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겠어. 어쩌지?" "걱정하지 마. 아저씨들에게 들키지 않고도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어." "뭐라고? 어떻게?" 메어리는 디콘을 데리고 구멍으로 갔다. "이 구멍을 통과하면 비밀의 정원이야. 이 구멍은 정원과 연결되어 있어." "와, 대단해." 디콘은 탄성을 질렀다. 둘은 캄캄한 구멍을 지나 정원으로 갔다. "봐, 맞지? 장미 나무와 덩굴들. 여기가 비밀의 정원이야. 그런데 그 구멍은 뭘 까?" "그건 수도관이야." "수도?" "응, 들판 너머에 있는 냇가의 물을 저택 안으로 끌어들여서 밥 짓고 빨래에 이용하는 거야." 디콘은 여러가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벤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도 있었고 들판의 동물들에게서 배운 것도 있었다. "그런데 디콘, 어째서 물이 흐르지 않지?" "냇물의 흐름이 바뀐 걸 거야. 분명해." 메어리는 디콘과 함께 정원에 있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메어리는 정원으로 통하는 다른 입구를 알게 된 것이 너무 기뻐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을 이 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문 앞에 사람들이 서 있어도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어.' 메어리는 뒤척이며 혼자 조용히 웃었다. 밖에서는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 다. 메어리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건 바람소리가 아니야." 메어리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분명히 바람소리가 아니야. 다른 소리야. 그래, 맞아. 언젠가 들었던 그 울음 소리야." 복도 저쪽에서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방문에 대고 귀를 기 울이니 울음소리는 더욱 확실하게 들려왔다. 메어리는 침대 곁에 있는 양초를 들고 살짝 방을 나왔다. 복도는 매우 길고 어두웠지만 흥분해 있는 메어리에게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다. "오늘은 꼭 저 울음소리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 테야." 메어리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촛불이 조금씩 흔들려 빛 이 점점 흐려졌다. 메어리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울음소리는 그쳤다가 다시 이어지곤 했다. 메어리는 복도를 쭉 걸어 왼쪽 모퉁이를 돌아 넓은 계단을 올라 또 오른쪽으 로 돌았다. 그러자 전에 메어리가 방들을 돌아다니다 메드로크 부인을 보았던 벽걸이가 나타났다. "그래, 전에 들었던 울음소리도 바로 이 근처에서 나고 있었어." 메어리는 벽걸이를 밀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에 서 울음소리가 더욱 확실하게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