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보다 깊은 사랑 (상) 지은이: 산드라 브라운 프롤로그 비행을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일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시계는 무한대로 뻗어 있었다. 한겨울에 어울 리지 않는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북쪽 끝에서 불었다. 활주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얼마간 혼잡스럽기는 했지만, 숙련된 지상근무 요원들은 예정된 스케줄대로 자기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이젠 착륙신호를 기다 리며 선회하는 비행기는 없었고, 활주로엔 이륙허가를 기다리는 두 대의 항공기 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산 안토니오 국제 공항의 평범한 금요일 아침이었다. 단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메리카항공 398기에 승객들이 제 시간안에 기내에 다 탑승하느냐 하는 것이었 다. 공항 진입로와 연결되어 있는 410번 서부고속도로가 공사로 인해 거의 1마 일에 이르도록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안에 탑승한 90명의 승객들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머리 위에 있는 휴대 품 칸에 간단한 소지품들을 올려놓고 조임쇠로 단단히 죄어놓았다. 그리고 책이 나 잡지, 신문 등을 갖고 각자의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종실승무원들은 언제 나 그래왔던 것처럼 의례적인 비행기 점검에 들어갔다. 운항승무원들은 컵걸이 에 음료수와 커피를 걸어놓고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최종 인원점검이 끝나고, 빈 좌석의 수만큼 예약하지 않은 대기승객이 탑승했다. 모든 좌석이 채 워지자 승강대는 철거되었다. 비행기는 활주로 끝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기장이 느릿느릿하면서도 품위있는 말투로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을 했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한 다음,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 활주로 위를 움직 이기 시작했다는 것과, 목적지인 달라스 시의 기후가 착륙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친절하게 이륙준비를 지시했다. 방송을 하고 있는 기장도, 또 398기 안에 타고 있던 그 어떤 사람도, 자신들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이륙한지 30초도 안돼 추락하게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이리쉬!." "음?...." "비행기사고랍니다. 그것도 활주로에서요!" 아이리쉬는 고개를 쳐들었다. "추락사곤가?" "불까지 났다더군요. 활주로 끝이랍니다." 뉴스 연출자인 아이리쉬 맥케이브는 어질러진 책상 위로 방금 들어온 기사원고 를 떨어뜨렸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책상 모서리를 돌아 상황실에 서 뉴스를 알려온 기자를 거의 쓰러뜨릴 정도로 밀치며 그의 개인용 유리간막이 바으로 들어갔다. "이륙 때였나, 아니면 착륙이었나?" 그는 물었다. "생존자는 ?"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 "여객긴가, 아니면 자가용 비행긴가?" " 그것 역시도...." "젠장 추락사고라는 건 확실한거야?" 리포터, 사진기자, 조연출 그리고 잔심부름꾼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경찰 무선수 신기에 모여들었다. 아이리쉬는 팔꿈치로 그들을 밀치고 들어가 볼륨레벨을 높 였다. 스피커에서는 쉬-익, 쉬-익 하 소리 사이로, 경찰들이 무전기로 상황을 연 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활주로! 현재까지는 생존자들에 대한 보고는 없음!.. 공항소방설비가 현장으 로 접근 중임! 연기와 화염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헬리콥터들도 현장으로 날 아가고 있다. 구급차들은...!" 아이리쉬는 상황을 보고하는 소리보다도 더 큰소리로 지시하기 시작했다. "이봐 자네!..." 그는 몇 초 전에 자신에게 사고 소식을 알려왔던 기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동 중계차량으로 당장 현장으로 출발해!" "예!" 그의 지시를 받은 기자가 카메라맨과 함께 비상구로 달려나갔다. "누군가 제보자가?" 아이리쉬가 사방을 둘러보며 이렇게 물었다. "마르티에즈입니다. 출근하는 길에 410번 도로에서 현장을 잡았다더군요." "아직도 대기하고 있나?" "아직 그곳에 있다고 합니다. 카폰으로 계속 상황을 알려오고 있죠." "될 수 있는 대로 사고 현장에 가까이 접근하라고 연락해. 중계차가 도착할 때 까지 자료화면을 많이 확보하라고 하고.헬기도 띄우게. 누가 헬기를 타고 가주겠 나? 헬기장에 갈 사람?" 그는 사방을 둘러 모여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중요한 임무 를 맡길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아이크 퇴근했나?" 그는 아침 뉴스 앵커맨에게 물었다. "화장실에 갔습니다...." " 가서 불러와. 스튜디오로 가라고 해. 다들, 뉴스 속보 내보낼 준비를 하도록. 관제탑, 공항 직원들, 항공회사, 경찰 측의 진술을 취재해야 해. 기관녀석들이 모 두에게 재갈을 물리기 전에. 헐! 자네가 헬기를 타고 가. 그리고 누가 집에 있는 에버리에게 전활 해주지 그래? 지금 당장 ..." "안돼요. 에버리는 오늘 달라스에 간다고 했지 않습니까?" "젠장 잊고 있었어. 아니 잠깐!... " 아이리쉬는 손가락으로 딱, 하고 소리를 냈다. 짧은 순간, 그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냈다. " 그렇다면 애버리가 공항에 있을 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애버리는 우리들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아메리카 항공 터미널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되겠지. 그리 고, 사람들이 가장 관심있어 할만한 애기들을 취재하고 있을테고 말야... 애버리 가 연락을 해오면, 그 즉시 내게 알려주도록..." 최신 정보를 기대하며, 그는 다시 무선수신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드레날린 이 그의 온몸을 한순간에 돌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건 이번 주말도 일 속에 파묻혀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초과근무와 두통, 차가운 음식과 다 식어빠진 커피... 이런 따위의 것들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정 작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이리쉬는 이미 초탈 비슷한 경지에까지 가 있는 사람 이었다. 주말뉴스의 시청률을 끌어 올리는 데에는 비행기추락사고만큼 좋은 기 사거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테이트 커트리지는 바로 집 앞에 그의 소형 트럭을 세웠다. 그는 자기를 위해 서 목장 울 문을 열어준 목장지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잡종개 한 마리가 뛰어와 차에서 내려선 그의 무릎 주위로 달라붙었다. "잘 있었니, 셰프?..." 테이트는 몸을 구부려 털이 수북한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개는 마치 늠 름한 영웅을 숭배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테이트 러트리지를 겸손하면서도 헌신의 미덕을 아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러트리지의 주위에는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에서부터 닳대로 닳아빠진 장화를 신은 발가락에까지, 그 어디를 본다해도, 그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여자들의 환상의 대 상이 되기도 했다. 만일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똑같은 만큼의 적대감을 가진 적들에게 둘러싸였을 정도로, 러트리지는 그렇게 잘난 사람이었다. 개를 문 밖에 있게 하고,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안으로 들어선 그는 넓은 홀 을 가로질러 들어가며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뚜벅뚜벅, 하고 장화굽이 대리석 타일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부엌 쪽으로 걸어가자, 가스렌지 위에서는 갓 끓기 시작한 커피가 진하고 향기로운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꼬르륵, 하고 배곯는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테이트는 아침에 산 안토니오 공항 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늦은 아침식사로, 파삭하게 구워진 스테이크와 스크램블드 에그 한 접시, 그리고 버터를 바른 서너 쪽의 뜨거운 토스트를 머리속에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뱃속에 선 더욱 심하게 배곯는 소리가 났다. 그의 부모는 부엌 안의-테이트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던- 참나무로 만든 둥근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 지이는 무척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차갑고 창백한 얼굴이 었다. 아버지 넬슨 러트리지도 그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탁자에서 일어나 두 팔 을 벌리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테이트!..." "왜 그러세요, 아버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그가 당황해 하며 물었다. "두 분 표정을 보니, 누가 죽기라도 한 것 같군요?" 아들의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주춤했다. "너... 오는 동안 라디오에서 뉴스를 못들었니?" "아뇨? 테이프를 들었어요. 왜 그러세요?" 왠지 불길한 생각이 테이트의 마음을 쓸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그의 시선이 머뭇거리며 텔레비전으로 날아가 꽂혔다. 그가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부모들은 거기에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테이트..." 넬슨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들의 감정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 채널 2번에서 '행운의 수레바퀴'를 중단하고 뉴스속보를 내보냈단다. 몇 분 전에 공항에서 비행기 한 대가 이륙 도중 추락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테이트는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어느 비행기인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다만, 아무래도..." 아버지는 계속 말을 잇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떨구 었다. 어머니 지이는 굳게 다문 입가로 이미 축축하게 젖은 크리넥스 화장지를 갖다댔다. "캐롤이 탄 비행기 말씀인가요?..." 테이트는 쉰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 다. 1 희뿌연 회색 연기의 사이를 뚫고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록 그 회색 연기 같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조만 간에는 제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잠시 지금 자신 이 애쓰고 있는 것이 결코 살기 위한 노력으로는 부질없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분간할 수 없는 앞을 향해서 뛰고 있었다. 마 치 뒤에서 어떤 가공할 무서운 것이 위협하고 있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않 으면 안되게 몰아대고 있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앞으로만 달려나갔다.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고통은 순간순간 의식을 잃어 버리게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오히려 아주 의식을 잃는 것만이 지금의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전혀 무관하게 고통은 아주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더 이상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마다, 마법의 특효약처럼 그의 혈관 구석구석을 엄습하는 고통을 씻어내 줄 따뜻한 무감각이 몰려들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램과는 달리, 의식이 깨어있는 순간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온몸에 기운이라곤 실낱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고통으로부터 빠 져나가려는 필사적인 노력도 이젠 끝이 나고 고통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잘 들리지 않던 소리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미하게조차도 느낄 수 없었던 주변의 상황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 점 또렷하게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인공호흡장치와 각종 전자기기들의 소리, 타일 바닥을 찍찍 미끄러지며 울리는 구두의 고무창 소리, 전화벨 소리들... 그러던 어느 순간,-그 여자가 무의식적으로부터 깨어났다고 느끼는 순간에-그 여자는 자신의 귓결에서 나누는 비밀스런 대화까지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운이 좋은... 그렇게 많은 연료를 뒤집어 썼는데도... 화상 을 입긴 했지만, 그것도 거의가 표면적인 화상일 뿐..." "얼마나 걸릴... 반응을..." "... 통증을 이겨내는 ... 이런 정도의 부상이라면..." "완전히 끝나려면... 대강 언제 쯤이나..." "... 내일 외과 전문의가... 당신과 함께 절차를..." "언제요?" "... 더 이상은 위험하지 않을... 감염될... " 아기에게 무슨 영향이 ...?" "아기? 당신 부인은 임신하지 않았어요." 그 말들은 하나같이 무의미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가 마치 어두 운 하늘의 유성들과도 같이 마구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자신의 평화로 운 혼수상태에 끼어든다는 생각에, 그들의 대화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아무것도 알거나 느낄 수 없는 무의식 상태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 고만 싶었다. 애써서 다시금 스스로를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러트리지 부인, 제 말이 들립니까?" 자기에게 묻고 있는 것 같은 그 물음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낮고 긴 신음 한 자락이 그의 쑤시는 통증을 느끼는 가슴에서 힘없이 새어나왔다. 애써 눈을 떠 보려 해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겨우 열린 한 쪽 눈꺼풀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머리 속까지 꿰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힘없이 눈을 되 감고 말았다. 밉살스럽게 파고들던 빛도 꺼졌다. "부인이 깨어나고 있어요. 빨리 남편을 오라고 해요." 남자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낮게 그러나 꽤나 들뜬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 여자 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리려고 해보았지만, 이내 목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테이트 씨의 호텔 전화번호를 알고 있나?" "예, 선생님. 러트리지 씨가 자기가 없는 동안 부인이 의식을 되찾게 되면 연락 해 달라고 연락처를 알려주고 갔거든요." 드디어 넝쿨손처럼 휘감고 있던 회색 안개가 눈앞에서 걷혔다. 그리고 여태껏 그 여자가 정확히 들을 수 없었던 말들도 이제는 확실하게 들려왔다. "당신이 얼마나 큰 충격과 곤란을 당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러트리지 부인... 우리는 지금 당신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마 뜻대로 입이 열리지 않을 겁니다. 가급 적이면 당분간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부인께서 지금 하셔야 할 것은 오로지 긴 장을 풀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는 겁니다. 걱정할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족 들이 금방 이리로 올 겁니다." 자신의 가쁜 맥박이 머리에까지 닿아 울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숨을 크게 쉬 어 보고도 싶었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흡을 돕기 위해 물려놓은 산소호흡기의 튜브를 통해 그의 폐로 산소가 쉬지 않고 들어가고 있었다. 다시금 눈을 떠보려고 시도해 보았다. 부분적이나마 한 쪽이 겨우 열렸다. 그 틈새를 통해 그 여자는 산란하게 부서지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불빛 때문에 초점을 맞추는 데 무척 애를 먹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여자는 그 노력을 하는 데 집중했다. 불분명하게 어른거리기만 하던 것들의 형체들이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오게 될 때까지 필사적으로 그 노력을 계속했다. 그렇다!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 정도는 그 여자 자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왜?!... 눈에 보인 사물들이 분명해지자마자 그 여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강한 의문을 가졌지만, 기억을 더듬다 말고 그 여자는 이내 마음 을 고쳐먹었다.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굳이 그것을 기억해 내고 싶지 않은 때 문이었다. 그 여자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비된 팔과 다리는 아무리 해도 움직여줄 것 같지 않았다.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마치 단단한 고치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을 뒤덮는 마비증상은 그 여자를 위협하기에 너무도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 마비상태가 과연 언제까지 계속돼야만 하는 것인 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이런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의 심장은 더욱 맹렬히 고동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유령같 은 희미한 물체 하나가 그 여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러트리지 부인,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곧 좋아지실 테니까요..." "맥박이 너무 가쁜 것 아닌가?..." 또 다른 유령이 침대 맞은 편에서 말했다.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일테지..." 방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까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던 그 사람이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가수면 상태라고 할 수 있어.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모르 고 있을테니 당연히 긴장할밖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의 형체가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모든 것이 잘 돼갈 겁니다. 러트리지 씨에게 연락을 드렸으니 금방 이리로 오 실 거구요. 남편을 만나면 한결 마음이 놓이겠지요, 안그래요? 러트리지 씨도 당 신이 의식을 되찾은 걸 보면 안심할 겁니다." "맙소사, 이렇게 깨어날 수 있다니!..." "난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어..." 문득, 사람들의 비명지르는 모습이 그 여자의 뇌리 속으로 무성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억해냈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 사람들의 비명. 짙고 검은 연기, 치솟는 화염과 가공할 공포... 무의식적으로 긴급상황이 벌어졌을 때 실행해야 하는 응급처치를 수행했다. 불타는 비행기의 동체를 빠져나와, 붉은 피와 검은 연기를 뚫고 곧장 앞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비록 뛰기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여자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했 다. 그때 무엇인가를 품 안에 꼭 품고 있었다. 아주 귀중한 그 무엇, 그리고 안 전한 곳으로 옮겨놓아야만 하는 그 어떤 것임에 틀림없었을 거라고 기억했다. 비행기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을 갖고 있었다. 그때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딱딱한 바닥 에 부딪치는 고통마저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 다음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 다. 지금까지 기억의 고통으로부터 그 여자를 보호해 온 망각의 늪으로 빠져든 것 이었다. "의사 선생님." "뭐죠?" "이젠 박동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좋아요. 묶었던 압박대를 좀 풀어줍시다.... 러트리지 부인?" 의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잘돼가고 있답니다. 부인께서 걱정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마틴 선생님, 러트리지 씨가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 "환자를 안정시킬 때까지 러트리지씨를밖에 있게 해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생소한 목소리 하나가 마치 몇마일 밖에서 들려오는 듯 아득하게만 들려왔지 만, 다가오는 그의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도 위엄이 있었다. "러트리지 씨. 몇 분만 기다려 주셔야..." "캐롤?..." 그 여자는 갑자기 그를 의식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주 가까이에까지 와 있 었고 그 여자에게 허리를 굽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여자를 안심시키며 말하 고 있었다. "당신은 곧 좋아질거야. 겁도 나고 걱정도 되긴 하겠지만, 곧 괜찮아 질거야. 우 리 맨디도 마찬가지고.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애는 뼈가 몇대 부러졌고, 팔 에 약간의 표피적인 화상을 입었을 뿐이야. 그 애의 병실엔 어머니가 계시지. 맨디 역시 금방 좋아질거야. 들려 캐롤? 당신과 맨디 둘 다 살았어, 지금은 그게 제일 중요한거라구..." 그 여자의 머리 뒤쪽에 밝은 형광등이 직접 비추었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모 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여자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하는 흐 릿한 인상이라도 갖게 될 정도의 독특한 편린들은 모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그의 안심시키는 말들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의 말 속에서 강한 신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었다. 그 여자는 그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 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손을 뻗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곧 자신이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그 여자의 어 깨에 가만히 손을 얹어두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접촉만으로도 그는 그 여자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그 여자의 두려움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진정 제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자는 자신이 또다시 망각 의 늪으로 빨려드는데 순순히 자신을 내맡겼다. 바로 곁에 마치 자신을 흡인할 듯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지키고 있다는 데에 웬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면서, "이젠 가셔도 됩니다. 러트리지 씨." "남아있겠소." 그 여자는 희미해지는 그의 모습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을 포기하고 이내 눈을 감았다. 확실히 진정제의 효과였다. 그 여자의 몸은 버려진 작은 보트가 안전한 항구를 향해 다가가듯 부드럽게 흔들렸다. 맨디가 누구일까? 그 여자는 궁금했 다. 자신을 캐롤이라 부르는 이 남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왜 모두들 자신을 계 속 러트리지 부인이라 부르고 있는가, 왜 모두들 자신이 이 남자와 결혼한 사이 라 생각하는가... 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 여자는 이 남자 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테이트 러트리지는 그 여자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도 그곳에 있었다. 그 여자로 서는 몇 분, 몇 시간, 아니 며칠이 지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중환자실의 집중 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혼수상태는 더욱 늘어만 갔다. 다시 눈을 뜨자, 테이트가 침대에 구부려 앉은 채 '안녕?...'하고 인사를 해왔다. 그러나 그 여자는 눈을 뜨기는 떴지만 테이트를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 다. 그 여자는 한 쪽 눈 만을 힘겹게 뜨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머리가 붕 대로 칭칭 감겨져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느낄 수 있었다. 여지껏 자신이 왜 머 리를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인지 비로소 알았다. 얼굴 아랫부분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 같았다. 의사의 말처럼 그 여자는 전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말 알아듣겠소, 캐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눈을 깜박거려 봐..." 그 여자는 눈을 깜박거렸다. "좋아..." 테이트는 한숨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 의사 말로는 지금은 절대 안정이 필요할 때라더군, 아무 말도 해 주어서도 안 되고 말야. 흥분을 하거나 하면 결국 회복만 더디게 할 거라면서. 지금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게 된 건지 속시원히 알고 싶겠지? 지금까지 당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말야. 내 말이 맞지?" 그 여자는 눈을 깜박였다. "비행기에 올라탔던 것 기억하지? 바로 그저께의 일이지. 당신은 맨디를 데리 고 달라스에 며칠 동안 쇼핑을 하러 떠나는 길이었지. 그 비행기에 사고가 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겠어?" 그 여자는 자신이 테이트가 말하고 있는 그 여자가 아니며, 맨디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줘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여자가 그걸 알릴 수 있는 방법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추락사고에 대한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 로 일단은 눈을 깜박거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당신까지 합해 고작 열 넷뿐이야." 그 여자는 테이트가 티슈로 눈물을 닦아줄 때까지도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테이트는 억세보이는 것과는 달리 무척 부드러운 손 길을 가진 남자였다. "하느님만이 당신이 어떻게 맨디를 데리고 불타는 비행기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는지 아실 것 같아... 당신 그 일이 정말 기억 안나?" 그 여자는 깜박이지 않았다. "어ㅉ든, 당신은 그 애의 생명을 건졌어. 당신의 용기에 정말 놀랍고 감사할 뿐 이야. 맨디는 지금 무척이나 겁에 질려 있어. 몸에 입은 상처보다도 오히려 애가 놀라고 질려 있는 게 더 걱정이 돼. 당분간은 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 같 아. 외상은 별로 걱정할 게 없다더군. 아이라서 부러진 팔도 금방 치료될수 있 고, 화상도 아무 문제가 없대요. 피부이식을 할 필요도 없다는 군. 그러니 맨디 에 관해서는 아무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소... 캐롤..." 테이트는 잠시 말을 끊고 그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당신은 온몸으로 그 애를 보호했어." 그 여자는 그의 그 강한 눈빛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 만, 그가 말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대단히 의혹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 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NTSB가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 있어. 블랙박스를 찾아냈다더군. 엔진 중 하나 가 폭팔한 거였어. 모든 게 정상적이었던 비행기의 엔진이 갑자기 폭팔했다는 거야. 연료가 말 그대로 연료가 돼서 비행기는 삽시간에 불덩이가 된 거지. 당신 은 비행기의 동체가 화염속에 완전히 휩사이기 전에 멘디를 데리고 날개 쪽에 있는 비상구를 통해 빠져 나온 것 같아. 다른 생존자들 중 한 남자, 당신이 맨디 의 안전벨트를 벗기려고 애쓰고 있는 걸 봤다더군. 당신과 맨디를 포함해서 셋 이서 함께 연기속을 뚫고 비상구 쪽으로 뛰는 걸 봤대. 당신의 얼굴은 그때 이 미 피로 덮여있었다고 했고, 그래서 얼굴의 상처가 이렇게 심한 거겠지." 그 여자는 자세한 사항들은 아무 것도 기억하질 못했다. 만약 비행기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고 조금만 더 그 안에 갇혀있었다면, 아마도 유독가스로 인해 질식사 했을 것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그는 그 여자가 사고에 대처해서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을 치하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취했던 행동은 어쩌면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의 생존본능있었는지도 몰랐다. 끔직한 사고의 기억은 아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세세하게 떠오를 것이 다. 그 여자로서는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잔인하게 떠오를 것이었다. 그 여자에게 있어서는 그 참혹한 몇 분 간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린다는 것만으로도 다시 한번 고스란히 그 사고를 경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탑승객 중 겨우 열 네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사실 또한 그 여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은 그 가운데서 그 여자는 살아남도록 선택되어졌고, 그 여자는 자신도 알 수 없었던 그 운명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시야가 다시 흐려졌다. 그 여자는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 었다. 테이트가 말없이 그 여자의 눈에 티슈를 갖다댔다. "출구를 찾는 동안 가스를 많이 마셨던 모양이야. 당신의 혈액을 검사해보더니 가스에 중독됐다면서 산소호흡기로 혈액정화를 시켜야 한다더군. 얼굴과 머리 부분을 많이 다치긴 했지만, 뇌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의 충격으로 오른쪽 정강이 뼈가 부러졌고... 팔은 붕대로 감겨져 있어. 화상 때 문에 붕대가 살에 늘어붙지 않도록 부목을 대고 있어.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 야?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가스중독만 빼고나면 당신의 상처는 전부 표면적인 것 뿐이라는 거야... 당신이 얼굴에 입은 상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아..." 그 말을 하는 테이트의 미간이 약간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을 안심시키려고 괜한 허풍 같은 건 떨지 않겠어. 캐롤 당신이 그런 걸 원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 여자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자 테이트는 말하기를 잠시 멈추고 그 여자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당신 생각대로 지금 당신은 얼굴을 좀 심하게 다쳤어. 그 래서 난 주에서 가장 훌륭한 성형 외과의사를 고용했어. 그는 사고로 인한 화상 클리닉의 대가라고 소문난 사람이야." 테이트의 말을 들은 그 여자의 눈이 심하게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테이트의 말을 듣고 안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상처입은 얼굴의 상 태가 얼마나 심한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화상클리닉이라는 말부터-마음이 답답 한 그 여자로서는-불길하게만 들렸기 때문이었다. "당신 코가 부러졌어. 광대뼈 하나도... 눈을 붕대로 감아 놓은게 바로 그 때문 이거든. 받쳐줄 만한 게 없으니까..." 그 여자의 목구멈에서 들릴락말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말못할 공포감 때 문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눈을 잃게 된다는 건 아냐, 눈은 이상이 없다니까 그만 해도 다행인 셈이지... 윗쪽 턱뼈도 부러졌다는군. 하지만 좀 전에 내가 말한 그 외과 의사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거야. 언제 그런 사고가 있었냐 싶을 만큼 감 쪽 같이 말이야. 좀 지나면 머리카락도 다시 자라게 될 거고. 치아 이식도 받게 될거야." 그 여자는 이도 머리카락도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당신의 사진을 보냈어. 아주 최근의 것들로만. 여러 각동에서 찍은 걸 여러 장 보냈으니까 당신의 원래 얼굴대로 완벽하게 고쳐놓을 수 있을 거야. 얼 굴에 입은 화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염려하지 말고, 어쨌든 이만하기를 다 행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지..." 테이트가 그 여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들을 듣는 동안 그 여자는 온 신경이 죄다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말중에 미묘한 몇 마디 단어들이 그 여자의 이해를 슬그머니 비켜가고 있음을 그 여자는 놓치지 않았다. 한가지 확 실한 것은, 붕대 속의 자신의 얼굴은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 여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과 공포감이 밀려왔다. 테이트는 그 여자의 어깨에 다시 손을 얹었다. 그 여자의 몸 에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가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캐롤, 내가 당신의 부상에 대해 솔직하게 애기를 해 준 건, 괜히 당신에게 겁 이나 주자고 그런 건 아냐. 나 역시 당신이 이 애기를 듣고 얼마나 두려워할 지 생각을 안해본 게 아니야. 그렇지만, 난 당신 스스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 들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기 위해선 이렇게 솔직하게 애기를 해주는게 오히려 당신을 위해서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쉽진 않을 거야. 하지만 가족 모두가 당신을 지키고 있으니 용기를 냅시다..." 테이트는 잠시 말하기를 멈추었다. 잠시 후, 다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난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당신을 다시 사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에만 전념하겠어. 그 외과 전문의는 믿을만한 사람이고,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 만, 나 역시 치료결과에 완전히 만족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당신 곁을 떠나지 않 겠어. 그것 하나만은 당신에게 약속할게. 난 당신에게 맨디의 생명을 건진데 대 한 빚을 졌어..." 그 여자는 그가 말한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저으려 해봤지 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무지 고개를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을 타고 깊이 박혀있는 튜브 때문에 아무리 말을 하려 해도 허삿가 될 뿐이었고, 더욱이 인공적인 산소의 투입으로 인해 말라버린 식도는 통증만 더해질 뿐이었 다. 간호사 한명이 들어와 테이트를 돌아가게 할 때까지 그 여자의 좌절은 그 깊이를 더해갔다. 테이트가 어깨에서 손을 뗐을 때,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였다. 다시금 고아처럼 버려지는 묘한 감정이었다. 간호사가 1회분의 수면제를 투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취 효과가 그 여자 의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가 또다시 심연의 나락으로 빠뜨리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취의 효과와 싸우려 했다.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의식을 잃어서는 안되는 그 무엇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정신적인 의지가 마취를 이 길 수는 없었다. 그 여자는 또다시 그것에 굴복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캐롤, 내말 들려?..."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되찾은 그 여자는 신음소리로 그 물음에 대답아닌 대답을 했다. 단 한방의 수면제로, 생기라고는 실날만큼도 없이 되어버렸다. 마치 그 여 자의 온몸을 통틀어 단 한줌의 살아있는 세포가 그 여자의 뇌와 나머지 죽어있 는 부분에 남아있는 것처럼... "캐롤?..." 목소리의 주인공은 붕대를 감고 있는 그 여자의 귀 가까이에서 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러트리지라는 이름의 남자가 아니었다. 러트리지였다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 여자는 러트리지리는 사람이 언제 자신의 곁을 떠났는지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여자는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걸 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이 목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러트리지처럼 달래는듯한 목소리가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꼴을 보아하니 아직 죽지는 않을 모양이군. 하지만 만약 당신이 죽게 되더라도 유언 같은 걸 남길 생각은 하지도 말아. 유언 따위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더라 도 말이야..." 그 여자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 때 문에, 눈을 떴다. 아까처럼 산란한 불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인공호흡장 치는 여전히 리드미컬하게 쉿쉿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곳 에 어떤 사람이 있음을 감지할 수는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볼 수는 없었다. "우린 여전히 함께 있어. 당신과 내가 함께 말야... 비록 지금 당신은 이런 꼴이 돼서 빠져나올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일이 다 망쳐진 건 아냐." 그 여자는 가물가물한 의식에서 좀 더 깨어나고자 눈을 깜박여 보려 노력해 보 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건지 그 여자로는 모를 말들 뿐이었다. 남자는 혼자인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마치 산 사람 같지않은 불길한 목소리 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테이트는 살아선 취임할 수 없을거야. 이 비행기 사고로 괜히 귀찮게 일이 꼬 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당신만 꿋꿋하게 이겨나가 준다면 우린 우리 목적을 위 해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갈 수 있어. 내 말이 들리나?... 힘들겠지만 당신이 지금 의 이 곤혹스런 상태만 잘 헤쳐나와 준다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될 수 있을 거 야. 그땐 상원의원 테이트 러트리지도 없어지고 난 뒤가 되겠지. 그가 먼저 죽게 될테니까 말야." 그 여자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공포감을 떨쳐버리려 감겨진 눈에 힘을 주었 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캐롤. 괜히 못듣는 체 하지말라구..." 몇 분 후, 그 여자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할 수 있는 한 아주 멀리로 시 선을 ㅇ겨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묘령의 방문객이 떠났다는 걸 알았다. 몇 분이 더 지나자, 불쾌하기만 한 인공호흡장치의 순환 주기가 또다시 시작되 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또다시 의식과 과수면 상태 사이를 오락가락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간호사가 들어와 그 여자의 수액을 점검하고 혈압을 쟀다. 간호사의 행동은 판에 박은 듯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방에 있는지 없는지, 혹은 방금 누가 들어왔는지 당연히 알고 있을텐데도, 또 그 방에 누군가 들어올 수 있게 허락했 을텐데, 간호사는 예사로워 보였다. 환자의 상태가 양호하다고 생각했는지 간호 사는 금방 나가버렸다. 그 여자는 조금 전 그 일을 단지 악몽을 꾼 거였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다 시 잠에 빠져들었다. 테이트 러트리지는 무료 고속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차량들을 내려다보며 방 한 켠 창가에 서 있었다. 젖어있는 포장도로 위엔 붉은 색과 흰 색의 자동차 불빛 들이 긴 꼬리를 남기며 반사되고 있었다.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테이트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오는 그의 형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발 밑에서 찌익, 하고 장화 굽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몇 분 전에 형 방에 전화했었어요." 테이트가 말했다. "어디 있었수?" "바에서 맥주 한 잔 했지. 아버지는 아직 안들어오셨니?" 테이트는 아무 말없이 머리를 가로지었다. 커튼을 내리고 창가에서 몇 발짝 떨 어졌다. "ㄱ어 죽기 일보 직전이야." 잭이 말했다. "배고파요? 그러고 보니 나도 여태 아무것도 먹질 않았군요. 왜 여태 배 고프 단 생각이 안 들ㅇ었지?" 테이트는 의자에 털썩 앉아 눈을 비볐다. 잭이 걱정스런 얼굴로 테이트에게 말 했다. "네 몹 내가 돌봐야지. 이런 상황에서 너까지 몸이 축난다면 어떻게 되겠니? 정말로 캐롤과 멘디를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네 몸부터 돌봐야지. 그러고 보니 너 정말 안색이 좋지 않구나..." "고마워 형..." "진심이야." "알고 있어..." 테이트가 눈을 부비던 손을 내리고 형에게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형은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왔지. 잔꾀 같은 것도 아예 모르고 살아왔어. 그건, 난 정치가이고 형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몰라." "정치가라는 말 자체부터 난 좋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억도 안나? 그런 말은 쓰지 말라고 에디가 충고했던 거..." "가족이나 친구들 한테까지도 그래야 하는 건가?" "너도 어느새 정치하는 사람들의 나쁜 버릇에 길들여졌나 보다. 자리 봐 가면서 말을 골라 해야 하니? 어떻든 간에, 그런 말은 아예 쓰지 않는 게 좋아." "그런 예기라면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하긴 쓸데없는 잔소리인지도 모르겠구나. 난 단지 네게 도움이 ㄷ으면 해서..." 테이트는 머리를 떨구었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는지, 본의 아니게 형에게 짜 증을 낸 게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형..." 테이트는 텔레비젼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채널 버튼을 쿡쿡 누르기 시작했다. "캐롤에게 얼굴 예기를 다 해줬어." "그랬구나..." 잭 러트리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양 무릎에 팔꿈치를 버틴 채로 몸을 앞 으로 굽혔다. 흰 드레스 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이었지만, 늦은 오후여 서 그런지 그는 지친 듯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풀기가 빠져 눅눅해진 셔츠에, 타 이는 제멋대로 느슨해져 있었다. 옷소매는 밀려 올라가고, 하루종일 앉아망 있었 는지 바지는 무릎 뒤쪽이 있는 대로 구겨져 있었다. "그래, 그 애기를 했더니 반응이 어떻더냐?" "쳇, 그걸 알 수 있다면 내가 왜 이러겠어..." 테이트가 투덜댔다. "캐롤은 지금 오른쪽 눈을 제외하곤 온통 붕대로 칭칭 감겨 있어 눈에서 눈물 이 나오는 걸 보고서야 그 여자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니... 내가 알 수 있는 거라곤 단지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 또 붕대로 칭칭 감겨진 지금 얼 마나 신경질적인 감정에 쌓여있을지 하는 정도 밖엔 없어. 조금이라도 움직이거 나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병원 복도를 오르락 내 리락 뛰어다닐 거라구. 형 같았으면 안 그러겠어?" 잭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넌 제수씨가 사고를 기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사실, 나 역시도 캐롤이 사고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기대도 못하고 있어. 그래서 캐롤과 멘디를 합해 열 네명 만 살아남았다는 그 말밖엔 해줄 수가 없었지..." "오늘 뉴스를 들어보니, 경찰에서는 아직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 시신 조각들을 모아서 신체부분들을 맞춰보고, 신워을 밝히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 아주 애를 먹고 있다더구나" 형 잭 러트리지가 방금 한 얘기는 테이트도 신문에서 읽은 바가 있는 것이었 다. 기사에 따르면, 사고 현장은 말로 할 수 없을만큼 참담한 광경이었다고 했 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헐리우드 감독이라도, 검시관과 유관기관의 직원 들이 목격했던 그 처참한 참사의 현장만큼 실감나고 섬뜩한 장면의 영화는 만들 어 낼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했었다. 테이트는 캐롤과 멘디가 그처럼 끔찍하게 죽어나간 희생자들 가운데에 있었다는 걸 기억할 때마다,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처럼 비위가 상했다. 그 생각만 하면 밤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비행기 사고가 한번 났다 하면, 대개 대형사고가 아닌 경우가 드물었다. 테이트 는 캐롤과 멘디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 중에 들었을 신문기사를 상상해 보았다. '상원의원 후보 테이트 러트리지의 아내와 세 살 난 딸, 398기의 희생자가 되 다!'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캐롤과 멘디를 그 수많은 비운의 사람들 틈에 끼어있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캐롤의 놀라운 용기 덕분에 아내와 아이 둘 다 참혹한 사고로부터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테이트의 입에서 한숨처 럼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오 하느님!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어깨 위에 큼지막한 피자박스를 얹은 넬슨 러트리지가 기우뚱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우산을 부산스럽게 털어대는 바람에, 그때껏 침울하게 눅어만 있던 방안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어버렸다. "마침 배고프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 때마침 들어오는 아버지를 반색하며 잭이 맞았다. "최대한 빨리 온거린다." "냄새가 좋은데요, 아버지. 마실 건 뭘 드릴까요?" 테이트는 그의 어머니가 마련해 둔 작은 붙박이 냉장고로 다가가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맥주로 하시겠어요? 음료수도 있어요." "피자가 곁들인다? 그야 물론 맥주지." "형은?" "나도 맥주" "오늘 병원에선 어땠냐?" "테이트가 캐롤에게 얼굴 상태를 다 애기해 줬다는군요." 테이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잭이 먼저 말했다. "그래?..." 넬슨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피자 한 조각을 손에 들고는 한입 가득 베어물었 다. 그리고는 우물우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현명한 방법이었을까?" "글쎄요... 그렇지만 만일 저였다면 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건지, 앞 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못견뎠을 거예요. 아버지라면 어 떠실 것 같으세요?" "나 역시 그랬을 것 같긴 하구나." 넬슨은 테이트가 가져다 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대답했다. "지이는 어떻든? 돌아오기 전에 만났니?" "기진맥진해 계셨어요. 오늘밤은 제가 맨디 곁에 있겠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셨 어요. 환자를 대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의 태도가 사무적인 게 아무래도 마음이 안놓이신다고 하시면서 맨디를 위해서도 당신께서 지키고 계신 게 나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오히려 절더러 들어가 쉬라고 막무가내로 들을 떠다미시니 어쩔수 가 있어야 말이죠." "그야 네 어머니가 너 쉬라고 한 말일 게다. 네 얼굴이 하도 안돼 보이니까 널 쉬게 하려고 그랬던 게 분명해. 네 눈에도 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제 말이 바로 그거라니까요." 잭이 한 몫 거들고 나섰다. "이 피자가 뽀빠이의 시금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테이트는 빈 말이나마 유모어를 섞어보려 해봤다. "우리의 충고를 건성으로 여기지 말아라, 테이트." 넬슨이 자못 건조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그는 캔맥주를 들고 그들을 향해 건배했다. 한 모금을 마신 테이트는 진지한 어조로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젠 캐롤도 의식을 되찾았다고 하고, 게다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에 대 한 설명도 충분히 해줬으니 저도 조금은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하루 이틀 걸릴 일이냐? 시간을 아주 많이 뺏길 거다. 우리 모두의 시간을," 잭이 한마디 툭 던졌다. "알려줘서 고맙구료." 테이트는 종이 넵킨으로 입을 닦아냈다. 그는 마음 한 켠으로는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재삼 다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형을 비롯한 가족들의 마음을 한번 떠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선거에 나가는 건 적어도 6년 정도는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아요..." "캐롤의 수술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기 전까지는 아무런 결정도 섣불리 내 려서는 안되는 것 아니겠니? 그럼, 그동안 우리가 했던 그 많은 일들은 다 어쩌 고? 네게 기대를 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그만둔다는 생 각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테이트, 기회란 이번 한번 뿐이란 거 모르겠니?" 조용히 듣고만 있던 테이트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얼마나 그 자리를 원해 왔는지는 형도 알 거야. 그래, 내가 진정 원했던 건 상원의원 자리였어요. 그렇지만, 그 자리 때문에 내 가족의 행복을 희생시키 고 싶지는 않아. 정치경력까지도." "그럴 정도로 캐롤이 네게 소중하더냐?" 테이트의 날카로운 회색빛 눈이 잭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여잔 내 아내야, 형!..." 잠깐 동안 그들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이어졌다. 드디어 넬슨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테이트가 옳은 것 같구나. 테이트, 지금부터 넌 개가 이겨내야 할 많은 어려움을 함께 지고 나가야 한단다. 자연히 많은 시간 동안을 캐롤의 곁에 있 어줘야 할 거고... 생명처럼 여기는 네 정치 경력까지 미뤄놓을 정도로 가족을 생각하는 네 모습이 보기 좋구나. 이기적이지 않은 네 모습을 기대해 보겠다." 다음 할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넬슨은 작고 둥근 탁자 위에 널려진 채 남아있 는 피자조각들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하지만, 캐롤이 네가 입후보하기까지 얼마나 널 도왔는지는 기억해둬야할 것 같다. 만약 네가 캐롤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또 얼마나 슬 퍼하겠니." 그는 짧고 굵은 집게 손가락으로 피자 사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애비된 사람으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막말로 하자면 말이 다..." 넬슨은 말하기를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불행한 사고가 오히려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돈 한 푼 안드는 광고가 될 수도 있다는 게지..." 그 말을 들은 테이트는 더 이상 그들에게 시선을 준다는 것조차 혐오스러워졌 다. 드디어 그는 말려 있는 넵킨을 내던져버리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한참을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방 안을 오락가락 했다. "나한테 이 애기를 하기 전에 에디하고는 미리 의논이 끝난건가요? 그렇지 않 아도 아버지에게서 이 애기를 듣기 전에 에디에게서 전화를 그 비슷한 얘기를 듣기는 들었지만..." 일순간 잭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선거운동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포기해버릴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에디는 네 선거운동 매니저야. 더구나 여지껏 네게 얼마나 득될 충고를 해왔는 데... 왜 그 생각은 못하는 거지?" "언젠가 그 소리!" "에디는 여기 있는 우리들만큼이나 테이트 러트리지가 미 상원의원이 되는 걸 보고 싶어 할 게다. 그리고 자신이 버는 월급만으로도 아무 것도 살 수 있게 되 는 기대도 하고 있을 게 분명할 게다." 넬슨은 노골적으로 웃으며 일어나 테이트의 등을 소리가 나게 쳤다. "11월에 있을 선거에 출마하는 게야. 그때쭘이면 캐롤도 일선에 나서서 널 도울 수 있을게다, 아마." "좋아요, 그렇다면..." 테이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과연 두 분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 같군요. 앞으로 몇 개월 동안이야 필요한 경비는 제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고 나서 부터는 좀..." "도와줄 수 있을 게다, 테이트." 넬슨이 든든하게 말했다. "제가 동시에 주 가지의 입장일 수 없을 때, 두 분의 인내와 이해를 받을 수 있 을까요?" 테이트가 미심쩍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느 한 쪽을 위해 다른 한 쪽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지않도록 최선을 다하 기는 하겠지만, 전 결국 한 사람이니까요." 넬슨이 그의 기운을 북돋우려는 듯 말했다. "부족한 부분을 우리가 뒷받침 해주마." "그밖에 뭐, 에디가 다른 얘기는 안했었니?" 잭이 물었다. 마처 위기를 벗어나 사람처럼 무척 편안하게 묻는 것이었다. "이번 주말 쯤에 배달될 수 있도록 설문지 발송 작업을 할 자원봉사자들을 확 보해 놨다더군요." "유세에 관해선? 일정 잡아 놓은 건 있는 건가?" "계곡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시험적으로 연설이 하나 있다더군요. 그런데 내가 그만두라고 했어요." "왜?" 잭이 물었다. "고등학생들은 투표를 안하거든요." 테이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부모들은 하지. 그리고 그 쪽의 멕시칸계 사람들의 표를 확실하게 다져놓을 필요도 있잖니?" "거긴 이미 확실해." "반드시 그럴 거라고 장담할 건 못된다." 잭이 말했다. "난." 테이트가 말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캐롤과 멘디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게ㄷ어요. 다시 말해서, 난 앞으로 내 가 어디에 가야 할지, 언제 갈건지에 대해 좀 더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게 ㄷ다 는 말이야. 그러기 위해선 내가 하는 모든 연설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무게가 있어야만 할 거예요. 그러니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 것이 별 득이 될 것 같지가 않다는 거지." "그건 네 말이 옳은 것 같구나..." 넬슨이 그들의 대화 사이를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테이트는 아버지가 자기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말이란 걸 단박에 알았지만, 그렇다고 신경을 쓴 건 아니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온갖 걱정에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잠자리에 들어 잠이 라도 청해보는 게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트는 은근히 그 뜻을 아버지와 형에게 전했다. 그러자 잭이 어색하게 그를 포옹해 오는 것이었다. "괜히 네 심사만 뒤튼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나라고 왜 네 마음이 복잡 하다는 걸 모르겠니." "형이 그렇게라도 해주지 않으면 난 피등피등 살만 찌고, 그만큼 게을러지고 말 거야. 그런 면에선 형이 날 크게 돕고 있는 거지." 테이트는 선거운동 포스터 사진 속에 넣기로 했던 미소를 형에게 지어보였다. "너만 괜찮다면 난 내일은 집에 들어갈까 하는데? 누군가 한 사람쯤은 집안 일 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할 필요가 있으니까. 나머지 식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좀 들여다 봐야하고..." "정말 다들 잘 해나가고 있는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렇지가 않은 것 같던데. 네 딸 팬시는 벌써 며칠째 소식도 없이 나다니고, 네 처도... 글세, 네 처 있는 데야 네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넬슨이 잭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하고 있었다. "남자가 집안 일에 무관심한 걸 미덕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아무도 느끼지 못하 는 새에 모든 게 난감하게만 되버리는 게야." 그 말을 하며 아버지는 테이트를 흘긋 보았다. "테이트, 아니 너희 둘 다, 그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며늘 애 들이 불만을 가지 게도 생겼구나." 넬슨은 잭에게 다시 말을 걸며 말했다. "너도 너무 늦어지기 전에 네 처 도로시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 되겠더라..." "이번 선거만 끝내고 나면..."잭이 웅얼거리며 테이트를 쳐다보았다. "네가 날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한 시간 안으로 득달같이 달려오마." "고마워, 형. 형을 부를 때는 소환장 띄우듯 신중히 할게." "수술에 대해서 의사가 뭐 다른 말은 하지 않던?" "일단은 감염의 위험에서 벗어나야 뭘 해도 한 대... 연기를 마셔서 그만 폐를 손상시켰다는군. 못해도 두 주 동안은 기다려야 한다나봐.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 기도 어려운게, 그대로 너무 오래 두면 바스러진 얼굴 뼈가 그 상태로 굳어버리 기 시작한다더군. 좀 어렵게 ㄷ지." "오, 주님..." 테이트의 말을 들은 잭이 안타까운 듯 낮은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어울리지 도 않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제수씨에게 도로시와 팬시가 안부전한다는 말도 해주렴. 그럼..." "알았어..." 잭은 아래층 홀로 내려갔다. 넬슨은 좀처럼 떠나길 않았다. "오늘 아침 네 어머니와 이야길 했다. 맨디가 잠든 사이에 잠깐 빠져나가 중환 자실엘 가봤다고 하더구나. 캐롤은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다는구나." 테이트의 넓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여전히 그러고 있죠... 전 그 닥터 소여라는 사람이 정말 소문대로 그렇게 실력 있는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죠." 넬슨은 테이트의 팔에 한 손을 얹었다. 잠시 동안, 테이트는 아버지에게 팔을 내준 채로 서 있었다. "오늘 캐롤의 성형수술을 집도할 소여 박사가 우리가 건네줬던 사진을 가지고 모니터 화면 위에 캐롤의 얼굴을 그려냈어요. 비디오 이미징이라고 하더군요. 조 금씩 조금씩 캐롤의 얼굴이 화면 위에 떠오르는 걸 보니 신기하기만 했어요." "과연 수술로 캐롤의 얼굴을 원래 대로 복구해 낼 수 있을까?" "그 사람도 그 애기를 먼저 하더군요. 물론, 얼마간의 차이점이 아주 없을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 본인의 마음에 들거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하는 게 과연 캐롤 에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기는 하지만..." 테이트가 건조하게 말했다. "어쨌든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캐롤은 미국 여자들이 얼마나 복받은 사람들인 지 확실하게 알게 될 거야..." 넬슨은 그 특유의 낙관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테이트는 그때까지도 자신 을 올려다보던 캐롤의 근심스러운 눈빛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여 자는 충혈되고 퉁퉁 부어오른 한쪽 눈으로 자기를 근심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 다. 테이트는 아내가 죽음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ㄷ다. 아니면 그동안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얼굴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 는 것 같았다. 넬슨이 잘자라고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테이트는 머리속이 복잡한 생각들 로 가득차 있는 채로 텔레비전과 전등을 끄고, 옷을 벗고,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 갔다. 번쩍, 하고 번개가 쳤다. 그 빛이 커튼을 꿰뚫고 들어와 순간적으로 방 안이 훤 히 밝아졌다. 천둥소리로 가까이에 있는 빌딩이 흔들거리는 느낌과 함께 잔디밭 이 들썩이는 것만 같았다. 테이트는 빛이 번뜩이고 있는 걸 무표정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큰 사고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작별 키스 한번 하지 않았다. 근간 들어 두사람 사이는 비틀릴대로 비틀려 있었다. 사고가 있던 그 아침에도 여전히 말못할 긴장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캐롤은 쇼핑을 하기 위해서 며칠 간 달라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테이트는 캐 롤과 맨디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고는 탑승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항의 커피숍 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멘디가 오렌지 쥬스를 캐롤의 옷에 흘렸다. 아이의 자그마한 실수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캐롤이었다. 커피숍에서 나왔을 때, 그 여자는 그제서야 치마에 묻은 얼룩을 보고 멘디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뭘 그런 것 갖고 아이를 야단쳐? 얼룩이 심한 것도 아닌데, 잘 보이지도 않 소?" 테이트의 핀잔에 그 여자가 대뜸 발끈하고 나섰다. "이게 왜 안보여요?" "보기 흉하면 아예 안보면 되잖소!" 그 여자는 남편을 쏘아보고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 은 늘상 이런 식으로 끝이 나는 것이었다. 테이트는 달라스에서 맨디가 겪을 갖가지 신나는 일에 대해 재미있게 애기를 주고받으며 터미널 쪽으로 걸어갔다. 입구에 다다른 테이트는 무릎을 굽혀 아이 를 껴안았다. "맨디, 엄마하고 재미있게 놀고 오너라. 돌아올 때 아빠한테 줄 선물도 잊지 않 겠지?" "엄마, 그래도 돼요?" "그럼..." 대답하는 캐롤의 목소리는 아직도 뽀루퉁해 있었다. "그럼요, 아빠!" 맨디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어이구, 우리 공주님이 아빠한테 뭘 갖다줄지 기대해야겠네." 테이트는 작별인사로 그 여자를 끌어당겨 포옹했다. 애정없는 짧은 포옹 뒤에 그는 허리를 곧바로 세우고는 캐롤에게 비행기가 떠날때까지 자기가 기다려줘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여자의 대답은 역시 기대했던 대로였다. "당신이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어디?..." 공연히 말싸움만 될 것 같아 테이트는 잊은 물건은 없는지 건성건성 확이하는 것으로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화요일에 봅시다." "데릴러 올 ㄸ 늦지나 말아요." 캐롤이 제트웨이 쪽으로 맨디를 밀면서 소리쳤다. "난 공항에서 공연히 어슬렁거리기나 하는 건 싫어." 그들이 통로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맨디가 뒤돌아서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캐롤은 돌아보지 않았다. 캐롤은 돌아보지 않았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신에 차, 앞으로 걸어갔다. 어쩌면 그런 되지도 않는 자신감이 지금 그 퉁퉁 부은 한 쪽 눈으로 그렇게 불안한 눈빛을 내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찌ㄷ건, 캐롤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신감의 뿌리까지 온통 강탈당한 처지가 돼버렸다. 그것이 설혹 미모만이었다 하더라도. 캐롤은 추한 것을 경멸했다. 그걸 생각 해볼 때, 그 여자가 흘렸던 눈물은 결코 이번 사고로 이유없이 죽어나간 사람들을 애도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 는 쉽게 단정할 수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건 그 여자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 리라. 그 여자는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자신이 추하 게 되는 걸 용납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캐롤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테이트였기에,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쉽사리 놀라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레이슨은 백서 컨트리 검시관 수하에 있는 조수들 중에서도 가장 말단에 위치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골머리를 썩히는 아무리 애매한 물건이 나타난다고 그걸 자기의 직속 상관에게 가져다 보이기 전에 몇번이고 재검토를 해야한다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랬다. "잠깐만?" 고무로 된 앞치마와 장갑을 낀 사내가 지친 표정으로 그레이슨의 어깨 너머로 짓누르는 듯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동료들 중, 성깔 있기로 유명한 사람이었 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머리 속에 골프장이 왔다갔다 해?" "아뇨, 이걸..." "뭐?" 사내는 한때 인간의 신체였던 커다란 시커멓게 탄 물건더미 위의 그의 일거리 쪽으로 다가서며 되물었다. "애버리 다니앨즈의 치과 기록입니다. 사상자 번호 87번 말입니다." 그레이슨이 대답했다. "그 여자 신원이야 이미 확인 검시까지 다 ㄷ잖아." 사내가 벽에 붙은 차트에 눈길을 보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 여 자 이름 위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건 저도 압니다.그렇지만..." "그 여자에겐 친척이 없었어. 오늘 오후엔 그 여자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확 인절차까지 마치고 갔다구." "그래도 이 기록들은..." "이봐, 친구." 퉁명스런 어조였다. "내가 해야할 일들이 어떤 건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머리없는 몸통에 팔없는 손, 다리없는 발을 제 주인 몸에 짝지어주는 게 내가 하는 일이라고. 그 일을 오 늘 밤 안으로 끝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봐, 얼마나 정신이 없겠나? 그러니까, 신 원확인이 끝나서 봉해둔 걸 들고와서 공연히 사람 귀찮게 하지는 말라 이말이 야, 알겠니?" 그레이슨은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게 될 치과 X-레이들을 마닐라지로 된 봉투 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물론, 자네가 뭘 의문스러워 하는지는 모르는 게 아니야. 일단 이 시체들의 신 원확인부터 끝내고, 그 다음엔 언제라도 마음놓고 다시 생각해 보다는 얘기지." 체념한 듯 그레이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유능한 연구원이 될 수 있도록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내린 미혹스러운 판단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 아예 단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면, 그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하릴없이 그레이슨은 아직껏 그의 손에 의해 확인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체들 과 치과 기록들을 맞추기 위해서 일거리가 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발걸음을 ㅇ겼다. 날씨마저도 슬픔에 젖은 듯 보였다. 애버리 다니엘즈의 장례식일엔 비가 왔다. 전날 밤에는 밤새도록 비와 함께 천 둥소리가 텍사스 힐 교외에까지 진동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뇌우가 남기고 간 것이라곤 가련하고 차가운 회색빛 비였다. 이 싸늘하기만한 날씨에, 무표정한 아이리쉬 멕케이브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애버리가 생전에 노란장미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도 하관하기 직전에 그걸 뿌려주기를 고집했다. 생기있 고 화려한 꽃들은 마치 그 여자의 죽음을 조롱하기만 하는 듯해 보였다. 눈물이 그의 발그레해진 뺨을 타고 흘렀다. 요즘 들어서는 그닥 술을 하지 않 았느데도, 그의 주먹코는 여느 때보다 더 붉어 보였다. 애버리는 그걸 두고 지나 치게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이라며 간이나 혈압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 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잔소리를 했었다. 애버리는 반 러브조이에게도 마약중독이라며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러나 아이 리쉬는 애버리의 장례식에 싸구려 스카치에 잔뜩 취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교회 까지 운전해 가는 동안 줄곧 담배만 피워댔다. 반은 유행감각이라는 것과는 담 을 쌓은 듯한 옷차림에 넥타이마저도 그런 걸 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이 엄숙한 의식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애버리를 존중하 는 마음에서 특별히 신경을 쓴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반 러브조이를 경멸했다. 애버리야말로 그를 너그럽 게 보아주던 정말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 여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커버스토리로 하기로 결정한 KTEX'S 뉴스에서는 특별히 그 여자의 장례식에 기자까지 내보내는 성의를 보였다. 그런데도 반은 취재에 응해줄 것을 부탁해는 기자에게 대답 대신 경멸에 찬 눈초리로 한참을 노려보고는 손가락으로 엿먹으 라는 욕을 해주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 뿐이었다. 그는 뉴스취재가 계속되는 중 간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렇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무 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반 러브조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사람들이 그를 소외시키는 이유 중 하나의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 다. 간단한 장례식이 끝나자, 조문객들은 아이리쉬와 반만을 묘지에 남겨둔 채, 자 동차를 세워둔 좁은 도로로 나 있는 자갈길로 하나 둘 내려가기 시작했다. 묘지 고용인들도 그 두사람이 어서 자리를 떠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서 그들은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가 실내를 가득 매 우고 있었다. 어림잡아 마흔 정도는 ㄷ을 반 러브조이는 깡마른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옴 푹 들어간 배에 앙상한 어깨, 등은 새우처럼 굽은 사람이었다. 머리 한 가운데 가리마를 탄 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두피가 훤히 들 여다보일 만큼 성긴 머리카락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만 같았 다. 그는 말 그대로 나이먹은 히피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이리쉬는 몸집은 작았지만 강인한 사람이었다. 바람이 불 면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반 러브조이와는 반대로 그는 그렇지 않았 다. 탄탄한 두 다리로 대지를 굳건하게 밟고 있는 그는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 어도 꿈쩍않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외견상으로 달리 보이는 만큼, 오늘 장례식을 치루는 두 사람의 태도나 표현 역시도 자연히 다른 것이었다. 마 치 서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 그러나, 애버리를 잃은 것에 대 해서는 반이 아이리쉬보다 깊은 슬픔에 빠졌다. 반이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며 아이리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평소 때의 반의 성격으로라면 기대도 못할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창백하고 바싹 여읜 손가 락이 더욱 가볍게만 느껴졌다. "가지 내 똥차가 기다릴 거야." 아이리쉬는 넋나간 사람마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서너 발자국 앞으 로 걸어가더니 꽃다발에서 노란장미 하나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앞서 가는 반 을 따라 자갈길을 내려왔다. 빗방울이 아이리쉬의 얼굴과 오버코트 어깨깃에 떨 어졌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여기 있어! 내 리무진 안에!..." 반이 차 안에서 소리쳤다. 어느새 그는 차에 올라 있었다. "그냥 갈텐가?" 아이리쉬는 반의 고물 자동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자 기를 기다리고 있는 장의차를 보내버렸다. "자네와 함께 가겠어..." 아이리쉬는 반의 소형 트럭에 올랐다. 차 안은 바깥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초 라했다. 곰팡내 나는 차 안엔 잔뜩 찌든 비치 타월이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고, 마리화나 냄새가 배어 있는 밤색 카페트를 댄 차 안은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반이 시동을 걸었다. 털털거리며 엔진이 예열되는 동안, 그는 니코틴에 찌든 손 가락으로 담배 한 개비를 붙이더니 별 말 없이 아이리쉬에게 건네주었다. 생각없다고 말하려니,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괜히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래 서 아이리쉬는 반이 내민 담배를 군소리 없이 받아들고는 한모금을 깊이 빨아들 였다. 담배를 끊으라는 애버리의 잔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담배 피 운 이후로 몇 달 동안 그래왔다. 담배연기가 그의 입과 목을 톡 쏘았다. "맛이 괜찮은 걸." 손가락으로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아이리쉬는 다시 한번 깊이 빨아들였다. "어느 쪽으로 가겠나?" 담배를 입술 가장자리에 문 반이 앞 쪽을 바라보며 그 에게 물어왔다. "아무도 우리를 못 알아보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 아무 짓이나 해도 볼 사람이 없을 그런 곳." "이 근방에선 날 모르는 사람이 없을텐데 어떡하지..." 반 자신이 단골로 다니고 있는 곳이면, 한 두 번 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곳 이 없는 처지란 걸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오늘 같은 날 그런 것 따위가 문제가 될 건 아니었다. 잘 들어가지도 않는 기어를 어거지로 넣은 반은 마을 변두리에 있는 싸구려 술 집으로 아이리쉬을 안내했다. 반이 붉은 색의 비닐 문 앞에 차를 세우고 물었다. "여기 어때?" "자네가 이 안으로 들어서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 는지 검사할지도 모르겠는 걸? 그리고 총이 없는 걸 알면 아예 하나를 내주겠 군, 그래. 분위기가 묘해. 이집?..." 아이리쉬는 닳아빠진 농담을 하며 반을 따라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분위기였다. 한산한 실내는 더더욱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 다. 한낮인데도 몇 안되는 손님들은 하나 같이 머리 위에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몇 해씩 묵은 전등 장식들과 마찬가리고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주인이 얼마나 게으른 사람이었는지 머리 위 장식들 사이사이는 먼지 앉은 거미주들로 메꾸어져 있었다. 벨벳 천을 댄 벽에 걸린 그림 속에서는 벌거벗은 여자가 마지 못해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 음울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주크박스(jukebox,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곡을 들려주는 자동전축: 옮긴이)에서는 발랄한 마리아치 음악(mariachi music, 멕시코 거리악사들이 연주하는 흥겨운 음악: 옮긴이)이 시 끄러울 정도로 크게 연주되고 있었다. 반이 스카치 한 병을 시켰다. "뭘 좀 먹어야겠어..." 까닭모를 허기를 느낀 아이리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텐더가 예의라고는 아랑곳 없이 병과 잔 한 개를 내려놓았을 때 반이 아이리 쉬에게 뭘 좀 먹으라고 권했다. "아냐, 관둬..." 아이리쉬가 퇴박을 놨다. 깡마른 카메라맨은 잔에 스카치를 다 따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집 주인 여자에게 부탁하면 직접 요리를 해줄 걸세." "여기서 자주 먹나?" "가끔." 반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또 어깨를 으쓱했다. 음식이 나오고 겨우 몇 점 떠보기도 전에, 아이리쉬는 이게 배가 고파서 느끼 는 허기가 아니라느 걸 그제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접시를 옆으로 밀 어놓고 위스키 잔으로 손을 뻗쳤다. 한 모금 가득 목으로 넘겼다. 빈 속에 마신 술이라 그런지 독한 스카치 위스키 가 목을 타고 들어가며 위장에 불을 놓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독 한 기운이 그를 흔들었다. 그는 씨근거리며 숨을 골라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이리쉬는 역시 술꾼이었다. 숨을 고른 아이리쉬는 다시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넣고 꿀꺽 들이켰다. 숨쉬기는 편했지만, 눈물은 가시질 않았다. "애버리... 잊을 수 없을 거야..." 하릴없이 아이리쉬는 기름때로 절어있는 테이블 위에서 잔을 빙빙 돌렸다. 두 꺼운 송판으로 테이블에서 묵직하게 나무긁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귀에 거슬리던 주크박스 소리가 드디어 머췄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다음 곡 을 고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노래소리 때문 에 아이리쉬는 에버리와의 안타까운 사별을 방해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갠 내 친 자식과 다름없었어. 자네 아나?" 반에게 묻는 그의 어조가 사뭇 진지했다. 반은 바로 전에 피우던 담배꽁초로 새 담배에 옮겨 붙여 계속 피웠다. "난 걔가 태어나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걔 아버지와 함께 병원 복도에 서 몇 시간이고 기다린 끝에... 그 때의 가슴 졸이는 기다림이란... 그런데 이제 난 그 아이의 죽은 날까지 기억해야만 하다니!..." 아이리쉬는 손에 들고 있던 빈 잔을 다시 채웠다. "애버리가 탄 비행기가 사고에 생기리라고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 난 그저 기사, 그 빌어먹을 뉴스기사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사진기자 하나 딸려 보낼 필요도 없었던 그 하찮은 기사를 두고 내가 왜 에버리를 보낼 생각을 했던 건지!..." "헤이 이봐, 공연히 공적인 일을 가지고 자네 자신을 학대하지는 말아. 처음부 터 사고가 생기리라고 예측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이리쉬는 대답을 않고 잔 속의 황갈색 액체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반, 자네 시체를 확인하러 가본 경험이 있나?" 아이리쉬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대답 같은 건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저 혼자 대 답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한 데 모아 주욱 늘어놓았더군. 마치..." 그는 마음의 동요를 느끼는 듯 정면으로 시선을 주며 허허롭게 한숨을 내쉬었 다. "제기랄, 모르겠어. 전쟁터 같은 데엔 가본 적도 없는 나지만, 바로 그곳이 전쟁 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애버리의 시선은 검정색 비닐 백에 들어있었어. 머리 카락도 하나 남아있지 않더군..." 어느덧 그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모두 타버린 게지. 게다가 그 아이의 피부는 잔뜩... 오, 맙소사!..." 아이리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짧고 억센 손가락으로 두 눈을 덮 어버렸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 욕심만 아니었어도, 걔가 그 지경으로 죽게 되지 않았을거야!..." "헤이 이봐..." 접두어처럼 늘상 입에 달고 다니는 그 두 단어 외에는 반으로서도 더는 위로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반은 아이리쉬가 마시다 만 술을 벌컥 마셔버렸다. 반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비통해 하는 아이리쉬에게 물려주고는 자기는 마리 화나로 붙여 물었다. 아이리쉬는 무표정하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걔 어머니가 보지 않게 해준 하느님에게 감사하단 생각이 드는군. 만약 그 아이가 제 손에 자신의 로킷(locket, 사진, 머리털, 기념 품 등을 넣어 목걸이 등에 다는 작은 금합-옮긴이)을 꼭 쥐고 있지 않았다면 난 그 시체가 애버리인 줄조차 알지 못했을 거야."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마신 탓인지 아이리쉬는 속이 거북해서 곧 뒤집힐 것만 겉았다. "그 아이의 엄마 로즈마리가 이 세상에 없는 게 외래 잘된 일이야. 자기 아이가 그렇게 죽어있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볼 엄마가 세상 어디에 있겠나? 웃음이 나 는군. 난, 내 입으로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이봐, 난 말이야... 그 여자, 로즈마리를 사랑했어. 애버리의 엄마를, 젠장, 난 어쩔 도리가 없었어. 애버리의 아버지 클리프는 생의 대부분을 세계 곳곳의 지옥 같은 곳에 가 있었지. 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으니까. 그는 집을 떠날 때마다 내게 찾아와서는 로 즈마리와 애버리를 부탁하는 거였어. 클리프는 내 가장 절친한 친구였지만, 어떤 때는 차라리 그가 잘못돼주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들기도 했었지..." 목이 타는지 아이리쉬는 술 한 모금을 홀짝였다. "로즈마리는 알고 있었어. 확신해.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 그런 서로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애기된 적은 없었어. 그리고 그 여자는 클리프를 사랑했 어.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 반이 보기에도 그는 애버리가 열 일곱 되던 해부터는 차라리 그 여자의 아버지 였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지극정성이었다. 유능한 사진기자였던 클리프 다니엘스 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발발했던 아주 무의미한 전투-에 종군기자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로즈마리는 남편이 죽었다는 통지를 받은지 겨우 몇주만에 자신의 생애를 마감했다. 친구 아이리쉬 이외엔 의지할만한 사람이 아 무도 없는 애버리만을 남겨둔 채. "난 애버리의 아버지로서 클리프 이상이었어. 아냐, 비교도 안될만큼 훨씬 나았 지. 가족들이 모두 죽고 나자, 그 아인 날 의지하며 살아왔어. 작년에 그 아이가 지방법원 취재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을 때도, 그 아인 곧바로 내게 달려와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하듯 하소연 하더군." "그래,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리고, 비록 중대한 실수가 오점으로 남긴 했 지만, 그래도 그만큼 소명의식을 가진 기자도 드물거야." 독한 담배연기를 뿜으며 반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상처입은 채로 죽었다는 게 가슴이 아파." 아이리쉬도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이 들이켰다. "애버리는 자기가 실패했다는 것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 기자생 활을 해오면서 그 애가 가장 신경썼던 게 뭔 줄 아나? 다름아닌 바로 그 부분이 었다구. 클리프는 일에 미쳐서 걔 어릴 적엔 신경써줄 시간적인 여유도 없던 친 구였어. 아버지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라도 그 아인 유 능한 기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우울한 표정으로 아이리쉬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일이 다 지나고 난 뒤로는 그 문제에 관해선 단 한번도 그 애와 얘기를 해 보지는 않았어. 하지만, 말을 안한다고 마음까지 모르는 건 아니지 않나, 지방법 원 사건으로 야기된 책임추궁이 그 아이에게 말못할 스트레스를 줬던 거야. 그 리고 갠 어떻게든 자기의 오명을 씻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어. 그런데 그렇게 애 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애버리가 자기의 신용과 자존심을 회복하기도 전에 운명 은 고개를 돌려버렸어. 제기랄, 애버리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좌절감만 안은 채 죽어만 거라구!..." 친구이긴 했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의 괴로와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짙은 비애감이 빈의 가슴을 에이게 했다. 그는 아이리 쉬에게 지금 당장의 위로가 될만한 건 술 밖엔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 앞으로 술잔을 밀어주었다. "로즈마리에 대한 자네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도 없다는 겐가? 그 마음, 애버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아이리쉬의 물기 어린 시선이 반에게 맞춰졌다. "자네가 어떻게 알아?" "애버리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었으니까... 오해는 말게. 난 그저 걔한테 자네를 알고 지낸 게 얼마나 ㄷ는지 물었을 뿐이었으니까 말야. 적어도 자기가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릴 시절부터 자네가 있었다고 하더군. 그때부터 자네가 혹시 자기 엄마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왔다는 거야." "꺼려하는 것 같던가?" 가볍게 떨리는 아이리쉬의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대답을 기 다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내 얘기는, 그 사실로 애버리가 고민스러워 하는 것 같았냐는 거야?" 대답 대신 끈끈해 뵈는 반의 긴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들어가는 장미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짧막한 손가락으로 향기를 잃어가는 꽃잎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다행이군... 그래, 나는 그 둘을 다 사랑했던 거야..." 그의 무거운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맨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꽃잎 사이에 손가락을 쿡 찔렀다. "이런, 제기랄!..." 아이리쉬가 신음소리를 냈다. "난 그 아이를 잊지 못할 거야, 언제까지고..." 아이리쉬는 테이블 위로 머리를 떨궈버렸다. 그리고는 맞은 편에 앉은 반이 말 없이 슬픔을 달래는 동안 간간이 흐느껴 울었다. 애버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의식하면서 잠을 깼다.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애버리에게 충격을 주고, 또 혼란을 주고 했 던 것은 바로 그 여자에게 투약되었던 약물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제-적어도 애버리가 추측하기엔 어제였다.-애버리가 얼떨떨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여자의 시야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모두들 그 여 자에게 인사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며칠 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서 그 여자 는 자신이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누구도 식별해 낼 수 없을 만큼 제한된 범위 이상은 볼 수도 없다는 사실도 알 게 되었다.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제껏 좀처럼 아파본 적이 없는 애버 리에게는, 이렇게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 하나마저도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었다. 중환자실 안의 산란한 빛과 그 안 사람들의 부산스런 행동을은 그곳에 뉘어져 있는 사람의 정신적인 사고를 방해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정작 애버리를 당황 하게 했던 것은 그런 일차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그 여자 주변에 있 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잘못 부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ㄷ길 래 사람들이 하나 같이 그 여자를 캐롤 러트리지라고 부르는 것이가. 심지어는 테이트라는 남자마저도 자기 아내에게 말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자는 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려야만 했다. 그러나 애버리는 어찌해야 좋을지를 알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애버리 다니엘즈였다. 운전 면허증에도, 보도국 통행증에도, 그리고 그 여자의 지갑 안에 있는 다른 모든 신분증들에도 분명히 그렇게 인쇄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을 두고 캐롤 러트리지라고 부르다니, 아마도 사고 중에 그것들이 없어져버린 것이라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사고 기억 역시 그 여자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그래서 마침내 애버리는 그 런 사실들을 밝히는 것을 자기 몸이 어느정도 정상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의 이 일시적인 혼란을 청산하고 난 후로. 아이리쉬는 어디 있을까. 어째서 여태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일까. 자신 안에서의 분명한 대답이 그 여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감전된 사람마냥 온 몸을 뒤틀었다. 터무니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지금 같이 사람들 모두가 그 여자를 러트리지 부인이라고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거라면, 반대로 애버리 다니 엘즈는 죽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자신의 가정이 맞 을 것 같다는 것에 그 여자는 더욱 경악했다. 자신의 죽음은 아이리쉬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아이리쉬가 말 못할 고통 속에 빠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장에 자신으로 인해 아이리쉬에게 주었을 그 고통을 덜어줄 아무런 방법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기로서니 살아 숨쉬는 한, 그여자는 결코, 억울한 운 명을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라도 애 버리는 끊임없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사고를 집중시켜야한 할 것이다. "굿모닝...?" 애버리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금새 알아들었다. 상대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퉁퉁 부은 눈이 조금은 가라앉았겠다 싶은 생각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흐릿하기만 했던 테이트의 모습이 사뭇 또렸해졌다. 그의 숱 많고 잘 생긴 눈썹이 길고 곧은 콧잔등 위에서 거의 닿을 듯 말 듯 하 고 있었다. 그는 튼튼하고 완고해 뵈는 턱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입술의 윤곽선도 분명했 다. 아랫입술은 윗입술보다 약간 두터웠다. 테이트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애버리는 그 웃음 속에 쉽사리 드러나지 않은 가식 같은 게 숨어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웃음은 그 남자의 마음에 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왜 그런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신, 간밤에 편안하게 잘 잤다더군. 유독가스가 아직은 폐를 손상시켰다는 징 후도 없대요. 어때, 기쁜 소식이지?" 애버리는 이 얼굴과 이 목소리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어제부터가 아니 었다. 그보다는 훨씬 이전이라고 생각ㄷ지만, 그 여자는 자신이 언제 이 남자를 만났던 건지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당신이 어떤지 어머니가 무척 궁금해 하시더군. 그래서 이렇게 모시고 왔어." 테이트가 머리를 돌려 누군가에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했다. "어머니, 여기 서 계서야 해요. 그래야 캐롤이 어머니를 바로 뵐 수 가 있거든 요..." 중년의 부인 치고는 드물게 예쁜 얼굴이 애버리의 좁은 시야안에 들어왔다. 가 볍게 웨이브진 부드럽고 검은 머리카락이 부인의 매끄럽고 주름없는 이마를 타 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좀 어떠니, 캐롤? 네가 이렇게 잘 견뎌주고 있다니 무척 안심이 되는구나. 의 사들도 네 회복이 빠르다며 기뻐하고 있다고들 하고 말이다..." '테이트 러트리지! 맞아, 바로 그 이름이었어...' "맨디 얘기도 해주셔야죠, 어머니." 낯설기만 한 부인은 또 다른 낯선 사람에 대해 충실하게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맨디 개가 오늘은 아침식사를 거의 다 먹었지 뭐냐. 어젯밤 그 애한테 진정제 를 줘서 그랬는지 쌔근쌔근 잠도 잘 자고 말이야. 아직은 팔에 한 기브스 때문 에 움직이기 불편해하기는 한다만, 얼마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겠니. 그 아인 소 아과의 스타야. 그 작은 손가락으로 병동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단다. " 어느새 부인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부인은 티슈를 꺼내 눈물을 닦아냈 다. "그때 만약이라도..." 테이트 러트리지가 어머니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고정하세요, 어머니, 더 나쁜 경우를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딥니까? 이만 한 것도 다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그제서야 비로소 애버리는, 자신이 비행기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 맨디 러트리 지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 여자는 아이의 비명소리를 기억했다. 그 애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좌석 벨트를 풀기 위해 미친듯이 노력했던 것도 기억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벨트가 풀렸을 때, 그 여자는 있는 대로 버둥거리는 공포에 질린 아이를 끌어안은 채, 어떤 이의 도움을 받아 짙고 혹독한 연기속을 뚫고 비상구 쪽으로 돌진했다. 맨디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요원들은 당연히 그 여자, 애버리 다니엘즈를 캐롤 러트리지 부인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 다. 애버리는 마음 속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만으로 수수께끼를 서툴게 종합해보았다. 애버리의 탑승권에는 그 여자가 창가 쪽 좌석으로 지정돼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기내에 도착했을땐 이미 다른 여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애버리는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통로 쪽의 좌석에 앉았 다. 아이는 두 사람 사이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이 어머니 돼 보임직한 여자 는 애버리와 아주 비슷한 어깨 길이의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여자였 다. 그들은 서로 닮아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재잘재잘 떠들어 대던 아이 에게 애버리와 캐롤 러트리지를 자매 사이로 알고서 누가 엄마고, 이모인지를 물었을 만큼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애버리의 얼굴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찌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러 트리지 부인 역시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불에 타버렸을 것이다. 결정 적인 실수는 검시반 요원들이 그들이 자리를 바꿔 앉은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애버리와 죽은 캐롤의 신원을 잘못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그 여 자는 러트리지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만 하는 것이다. "어머니, 맨디가 조바심 내기 전에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테이트가 말했다. "제가 그리로 곧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어머니." "그럼 안녕, 캐롤..." 아들의 말을 들은 부인이 애버리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소여 박사한테 수술만 받고 나면 여전히 예쁜 네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을테 니 너무 걱정은 말고..." '저 부인도 진심으로 웃는 건 아니야...' 애버리는 부인이 떠났다고 생각했다. "깜박 잊을 뻔 했는데 말야..." 테이트가 침대로 가까이 걸어오면서 입을 열었다. 애버리의 좁은 시야 안에 그 의 모습이 다시들어왔다. "아버지 하고 형이, 참 에디도. 당신한테 안부를 전해 달라더군. 오늘 오후에 소 여 박사가 여기 오기로 되어 있는데 그때 아버지도 함께 나오실 모양이야. 당신 이 무척 보고싶으시다며 굳이 이리로 나오시겠다는 거야. 형은 오늘 아침 집으 로 갔어." 테이트는 쉬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자기가 말하고 있는 상대가 결코 제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 형이 형수에 대해 걱정해 온 걸 알아. 그리고 오직 하느님 만이 팬시 그 아 이가 내버려진 채 뭘 하고 다니는지 알고 계실거야. 아무리 에디가 개를 선거운 동본부에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하기는 했다지만 말야... 당신이 개인 병실로 옮 겨질 때까지 난 아무도 당신을 만나게는 하지 않을 셈이야. 그래도 섭섭해 하진 않겠지, 당신?" 테이트는 지금 자기가 누구를 두고 말하고 있는 건지, 또 어떤 것에 마음이 틀 어져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자기 아내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버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자기가 몽롱한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릴 수 있단 말인가. 이 사람들은 누워 있 는 이 여자가 애버리 다니엘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실상, 테이트가 들먹인 그 사람들이 다녀가고 말고는 그 여자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 여자가 당장 해야할 일은 이런 사실들은 까맣게 모른 채 자식 같이 키워온 자기의 주검 앞에서 비통해 하고 있을 아이리쉬에게 연락 을 취해야만 하는 거였다. 이 남자에게 자신이 캐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야 했다. "들어봐, 캐롤. 이번 선거운동 얘긴데..."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뒤로 가져갔다. 아마도 두손을 뒷주머니에 넣는 품 같았다. 그는 잠시 동안 턱 끝이 거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 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겨우 입을 열었다. "난 계획된 대로 일을 진행시킬 작정이야. 아버지, 형 그리고 에디까지도 날 밀 어주겠다고 했어. 적극적으로 밀어줄테니 걱정말고 한번 해보라는 거야. 물론, 정작 본작업에 들어가고 나면 상대 후보와 치열한 경쟁이 될 게 뻔한 거긴 하지 만, 그렇다고 그걸 두려워할 내가 아니잖아? 당신 사고 때문에라도 일이 더 힘 들어질 건 뻔하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이미 아버지나 형에 게 다시 한번 약속을 한 마당이고..." 좀 전의 말처럼 테이트 러트리지라는 사람은 최근 들어 그의 이름만으로도 뉴 스거리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정치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이름이었다. 애 버리가 여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그의 이름과 얼굴이 낯설지 않은 이 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5월에 있을 예비선거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는 11월에 있을 본 선거에서 현 재직 상원의원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 입장 에 있는 사람이었다. "일이 바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나 맨디가 병원에 있는 동안 내 가 해야할 일들까지 회피하겠다는 마음은 없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당 신과 맨디에게 쏟아부울 작정이지. 난 사원의원 자리를 놓칠 수가 없어. 다음번 에 출마하자니 또다시 6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만 하고. 이제껏 쌓아놓은 지지 도를 그때까지 유지해 나갈 일도 까마득하기만 해. 감히 일생을 두고 준비해왔 다고 할 수도 있을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난 국회로 갈 사람이야, 내가 그걸 얼마나 원했소?..." 애걸하듯 말하고 있는 테이트의 표정에서 애버리는 그에게 강한 신념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말을 마친 테이트는 묵묵히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맨디에게 갈 때가 된 것 같군. 그 애한테 아이스크림을 먹여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거든. 당신도 당신이지만 맨디가 그렇게 된 걸 두 눈 뜨고 보자니..." 테이트는 다음 말을 하려다 말고 그 여자의 붕대 감긴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지? 참, 오늘은 맨디가 처음으로 심리학 치료를 받는 날 이야. 지금 상태로는 그리 걱정할 건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하더군." 좀 전과는 달리 그가 눈에 띄게 흐트러진 말투로 몰아쳐 말하기 시작했다. "예방의학이란 말도 있는 거니까... 그 애가 영구적인 쇼크상태에 있는 것 보다 야 미리미리 손을 쓰는 게 낫지 않소?" 그가 의미있는 눈빛으로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매몰찬 얘기 같지만, 맨디가 지금의 이런 엄마를 본다는 게 별로 좋을 것 같지 는 않아.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엄마를 보면 몹시 놀랄거야. 성형수술이 끝나 고, 당신이 본 모습을 다시 찾기 시작하면 그때 잠깐 맨디를 데려오도록 할게. 그리고 당신 역시 그 애를 만나고 나면 아무래도 충격이 될 것 같으니까 내 말 대로 해요..." 애버리는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인 공호흡기를 위해 폐에까지 닿아 있는 고무호스가 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귓결로 언뜻 들었던, 유독가스로 인한 중독 때문에 일시적으로 성대를 쓸 수 없 게 ㄷ다고 말하는 간호사의 말이 생각났다. 도무지 그 여자는 턱부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애버리가 내보일 수 있는 괴로움의 표현이라고는 기껏해야 눈을 깜박거리는 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테이트는 그저 위로해 줄 마음으로 그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엉뚱한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 상심 말아요, 캐롤. 지금 이런 상태로 일시적인 것일 뿐, 곧 좋아질 거요. 소여 박사도 현재로선 실제 부상보다 용기를 잃는 게 훨씬 더 나쁘다고 말하더 군... 당신이 받게 될 수술절차에 대해 설명 해주러 오후 늦게 쯤 이리로 온다고 했어. 나한테 장담하던 걸? 수술만 받고 나면 당신의 원래 얼굴로 돌아갈 수 있 다고 안심하고 있으라고 말야. 그러니 마음부터 편하게 가집시다, 여보..." 애버리는 머리를 흔들어 보이려 했지만, 붕대로 단단히 고정된 머리가 그 여자 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두려웠다. 속도 상했다. 그 여자의 눈에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간호사가 침대 옆으로 가까이 왔다. 그 여자는 테이트를 비켜 서게 했다.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만 합니다, 테이트씨. 그리고 전 지금 부인의 붕대를 갈 아드려야만 하구요." "알겠습니다. 딸 아이 방으로 가 있지요." "필요하면 전화로 연락을 드리겠어요." 딱딱한 중환자실 분위기와는 달리 꽤나 친절한 간호사였다. 간호사는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다음을 이었다. "아 참, 아래층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부인의 보석들은 병원 금고에 보관돼 있 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 팀이 그걸 빼놓았다고 하면서요." '지금! 지금 찾아와야 해요!...' 애버리는 마음 속으로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병원 금고 안에 있는 보석은 캐 롤 러트리지의 것이 아닌, 바로 애버리 다니엘즈의 것이 분명한 때문이었다. 애버리의 생각대로 보석은 자기의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테이트와 그 가족들이 그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들은 끔직한 실수가 저질 러졌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그 즉시로 자기 아내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사실이 테이트에겐 크나큰 충격으로 받아 들여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보다야 백번 나은 게 아닌가. 그 여자는 테이트가 가질 비통한 상실감을 애석해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다시 애버리 다니엘즈로 살아갈 수 있고, 또 아버지처럼 자신을 뒷바라지 해온 아이리쉬가 미칠 듯이 기뻐하는 것을 생각하니 앞 뒤를 가릴게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이리쉬와의 정신적인 사별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여자는 마음 속으로 테이트가 어서 그 보석을 찾으러 가주기를 외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나, 만약에라도 테이트가 자기 얼굴을 캐롤 러트리지로 바꾸는 기가 막힌 성형수술을 시작하는 그 직전까지도 아내의 보석을 찾아올 생각을 안한다면?... 방금 투약된 진정제로 가물가물해지는 마지막 의식은 바로 그것이었다. 테이트는 결코 살아서는 당선될 수가 없어... 애버리는 또다시 악몽애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가위 눌린 꿈 에서 도망치려 애를 썼다. 이번에도 역시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번 보다는 좀 더 확실하게, 그 목소리의 장본인이 자기 시야의 뒤 쪽 머리맡에서 불길하게 배회하고 있다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호흡인 듯한 옅 은 바람끼가 애버리의 노출된 눈 위에 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버리는 마치- 보이진 않지만-얇은 배일에 쌓인 어둠 속의 유령 같은 존재에게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었다. '상원의원 테이트 러트리지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살 수가 없거든... 상원의 원 테이트 러트리지는 죽임을 당하고 말걸?... 상원의원 테이트 러트리지... 그는 살 수가 없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애버리는 소리지르며 깨어났다. 물론, 소리없는 외침이었 지만, 그 소리는 애버리의 두 개골 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눈을 떴다. 머리 윗쪽 의 등불과, 코를 자극하는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그리고 인공호흡장치가 쉿 쉿 소리를 내고 있는 것으로 그 여자는 자기가 여전히 병원 중환자실 안에 뉘어 져 있음을 깨달았다. 악몽에 시달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지금의 악몽이 좀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어 젯밤의 일은 현실인 것만 같았다. 적어도 어젯밤까지 애버리는 테이트의 이름도 몰랐었다. 게다가 그 여자의 생각대로라면 어젯밤의 그 일이 단지 꿈이었다면, 그 여자가 무슨 수로 정확하게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 고 어젯밤의 그 꿈 같은 상황 속에서 애버리는 테이트 러트리지의 이름을 들었 던 걸 또렷이 기억하는 것이다. 자신의 귀 바로 가까이에서 위협적이고 경멸에 찬 어조로 읊조리던 정체불명의 목소리. 어느새 자신의 관심적인 놀음에 스스로를 빠뜨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테이트 러트리지가 진짜 위험에 빠진 걸까? 때 아닌 당혹스러움이 그 여자를 덮쳤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기자로서의 직업적인 습관대로 사건에 대해 정리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애버리 로서는 스스로 이 일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해 보거나 정리할 아무러한 전후관계 도 설정할 수 없었다. 너무도 순서 없는 사건이었다. 과연 그가 죽는 걸 원하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하느님,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의문들이군요...' 애버리는 이 일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자신의 능력-신체적으로 몸을 움직인다든가 말을 한다든가 하는- 이 제한상황에 놓인 것과 함께 추리력 역시 압류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테이트 러트리지의 생명에 대한 협박은 광범위하고 거대한 결과를 가질테지만, 지금의 애버리로서는 거기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놓여있 었다. 그 여자는 설명이나 문제의 해결을 생각해 보기엔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그만큼 그 여자의 정신 자체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심지 어 한 남자의 생명이 걸려 있다는 이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기 능을 다 해주지도 해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애버리는 이런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이 바로 그 여자 자신의 문제가 된 데에 분개했다. 상원의원에 출마한 한 후보자의 안전을 염려해 주는 것 말고라도 자 신이 극복해야 할 엄청난 문제를 이미 갖고 있지 않은가. 좌절감 때문에 잔뜩 위축되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애버리는 여전히 옴쭉달싹도 못하고 있었 다. 참으로 지치게 만드는 노릇이었다. 그 여자를 못살게 굴던 무기력감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무기력감은 그 여자가 보루로 남겨두었던 마지 막 의식에까지도 무자비하게 손을 뻗치고 들어왔다. 그 여자는 용감히 맞서 싸 우리라고 마음을 다잡아 먹어보았다. 그러나 결국, 질 도리밖에는 없을 자신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는 다시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버렸다. 5 "부인의 반응이란 그리 놀랄 것도 없는 겁니다. 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그런것이거든요." 명성 높은 성형외과의 소여 박사가 잔잔하게 미소를 띄며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잘 생긴 얼굴이 온통 부숴져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칭찬은 고맙군요..." 대답하고 있는 테이트의 표정은 납빛이었다. 바로 그 순간, 테이트는 그 잘난 외과의의 도도해 보이는 얼굴을 부숴놓고 싶었다. 소여를 두고 권위있는 의사입네, 실력 있는 사람입네 하는 주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테이트는 눈 에 비친 닥터 소여란 남자는 마치 자신의 혈관 속에 더운 피 대신 얼음물을 담고 있는 사람 처럼 보였다. 테이트가 듣기로, 그는 쓸데없이 돈만 많고 사교계에 처음 발을 들이는 속 빈 아가씨들이 나 그 주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 몇몇에 훌륭한 성형수술을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 다. 그리고 나이 먹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단체의 간부나 중역들, 모델, 텔레비젼 스타 등등-에게 그에 적절한 몇가지 시술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쨌든 테이트로서는 닥터 소여의 학위나 자격 따위가 그닥 모자란다고는 생각지 않으면서 도 캐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 같은 것엔 전혀 신경조차 쓰려 하지 않는 건방진 태도가 그 리 달갑게 보이지는 않는 것이었다. "난 여태 캐롤의 입장에서 모든 걸 이해하고자 노력해 왔소. 캐롤은 지금 기대 이상으로 아주 잘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적어도 내 보기엔 말이오." 테이트가 입을 열자 곧바로 넬슨이 말에 끼어들었다. "나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니, 테이트." 그는 중환자실 바로 옆 대기실 소파 위에 지이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넌 그저 소여 박사로부터 캐롤이 수술에 대해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당황해 하는 것 같다 고 말했지 않느냐?" 되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것도 인정하겠어요. 그렇지만 제 얘기는, 캐롤이 맨디나 사고 자체 에 대한 얘기에 대해서는 꽤나 덤덤한 태도로 받아들였지만, 정작 앞으로 받게 될 성형수술 에 대해 설명해 주자 대번 낯빛이 바뀌더라 하는 겁니다. 울기까지 했다구요!" 그 말과 함께 테이트는 머리카락 속으로 두 손을 넣어 아래로 긁어 내렸다. "당신은 말도 못하고, 한 쪽 눈밖에 보이지 않는 그 여자가 울음을 터뜨릴 때 얼마나 불쌍 하게 보이는지 상상도 못할 거요." "당신의 아내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러트리지 씨." 닥터 소여가 입을 열었다. "얼굴부상은 부인에게 있어선 고통 그 자체일 겁니다. 당연히 그럴테죠. 부인은 지금 평생 을 괴물 같은 얼굴로 살아갈까봐 그게 두려운 걸 겁니다. 내가 할 일이란 게 바로 거기서부 터죠. 부인에게 자신의 망가진 얼굴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아니 어쩌면 전 보다 훨씬 나아질 수도 있다는 확신부터 심어주는 게 바로 내가 할 일이란 겁니다." 소여는 테이트의 마음을 읽는 듯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은 지금 주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칼을 대야 한다는 것 부터가 싫 을 수도 있겠구요. 그런 마음이라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당신의 협력과 내 능력에 대한 무조 건적인 신뢰가 없다면 나도 이 일을 계솟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믿음조차 없었다면, 일단은 수술을 보류해야겠다는 당신의 결정에 따르지도 않았을 게요. 당신이 가진 기술적인 능력이나 특히, 환자를 대하는 포용력 같은 게 모자란다는 생각 해보지는 않았으니까..." 테이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난 환자들을 위한 매너 이외의 것은 아끼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자 가족들과 쓸데 없다는 말이오. 러트리지 씨. 오히려 정치 쪽에 쓸 관심으로 남겨 놓는 게 낫지요. 당신처 럼." 테이트와 소여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 후, 테이트의 입언저리가 묘하 게 비틀려 올라가며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비꼬는 듯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나도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소. 소여 박사. 난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아직까지 여기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그 이유요. 당신은 내가 여태껏 만나온 사람들 중에 가장 건방진 사 람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방면에 있어서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당신이 최고라니까 이쯤 해두는 거요. 좋소, 캐롤이 정상으로 돌아오는게 되는 걸 볼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당신을 돕도록 하겠소." "좋소. 그럼 환자를 만나러 가 봅시다." 닥터 소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인간적으로 모욕에 아랑곳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 라는 사람은. 그들 네 사람은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여자의 시야 앞으로 먼저 나선 사람은 테이트였 다. "여보, 캐롤. 깨어있소?" 애버리는 즉시 눈을 뜸으로써 자신이 의식이 있음을 알렸다. "좀 어떻소? 어머니와 아버지가 여기 와 계셔." 그 말과 함께 테이트는 한 쪽으로 비켜섰다. 넬슨과 지이가 침대 가장자리로 나섰다. "괜찮으냐, 캐롤?..." 지이가 안부를 물었다. "맨디가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더구나." 순간, 테이트는 어머니에게 맨디가 받았던 심리치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는 걸 깜빡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도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감을 잡을 어머니이기도 했다. 지이가 옆으로 비켜나자 곧이어 넬슨 러트 리지가 그 자리에 섰다. "좀 어떠냐, 아가. 네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겠다. 네가 나아지고 있다니 다 행인지... 얼른 완쾌되야지." 아버지가 테이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소여 박사가 왔어, 여보." 테이트는 환자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소여 박사와 자리를 바꾸었다. "우린 이미 한번 쯤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인. 물론, 기억하지는 못하시겠지만 요. 당신이 여기 들어온지 이틀째가 되던 날 부인을 진찰했습니다. 응급실 성형 팀이 응급처 치를 해놨더군요. 어쨌든, 이제부터 제가 부인을 인계받을 겁니다." 그 여자는 놀란 기색을 보였다. 소여 박사도 그 표정을 읽은 듯 했다. 그런 소여 박사의 눈 빛을 본 테이트로서도 조금은 안심이 ㄷ다. 그는 제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지금 부인은 두 개골에 심각하게 손상을 입고 계십니다. 이젠 부인 자신도 얼추 느낄 수 는 있겠지요? 남편께서 부인께 망가진 얼굴은 감쪽 같이 회복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고 는 했지만, 주치의로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 닥터 소여의 말은 붕대 안에 갇혀있던 그 여자의 몸을 더더욱 오그라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머리를 흔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막혀있는 목구멍을 통해 나오지 도 않는 소리를 만들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젠장, 뭘 말하려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테이트가 닥터에게 던지듯 물었다. "나를 못믿겠다는 말이겠지요." 외려 침착하기만 한 그의 대답이었다. "부인은 두려운 겁니다. 대개 이런 반응들이죠." 소여 박사가 그 여자 쪽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부인께서 겪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은 화상 때문에 오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심각한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 이 병원에 있는 화상 전문가들이 항생제로 치료해 줄테니 전연 걱정 을 안하셔도 될거란 말씀이지요. 전 부인의 피부와 폐와 정상적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될 때까지는 수술을 연기할 셈입니다. 부인께서 손을 움직일 수 있을 그 전 주, 혹은 두 주 전 쯤이 될 것 같군요. 물리치료가 시작되면 부인 자신도 이 상처가 영구적인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죠." 그는 좀 더 가까이 허리를 굽혔다. "자, 이제 부인의 얼굴에 대해 얘기를 해볼까요? 부인이 혼수상태일 때 X-레이를 찍어봤습 니다. 그 자료를 토대로 연구를 했지요, 그리고 이제 전 부인께 어떤 수술을 해드려야 하는 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나를 도와서 일해줄 수술팀까지 확보해 놓은 상태고 말입니다." 소여 박사는 붕대로 감겨 있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볼펜 끝으로 콕콕 누르며 다음 말을 이었 다. "우리는 식골편(뼈의 부스러기를 이용해 갈라진 틈이나 부서진 곳을 뼈를 이식하는 방법: 옮긴이)을 이용해서 당신의 코와 광대뼈를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핀과 나사, 철사 등으 로 부인의 부서진 턱을 보정하는 작업이지요. 거기에 필요한 온갖 기술을 전 이미 마스터한 사람입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이 쪽 관자놀이에서 머리 위 쪽을 거쳐 반대 편 관자놀이로 이어지는 선으로 두피를 절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양 쪽 눈의 속눈썹 선 아랫부분을 절개하 기도 할 겁니다.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모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테니까 말입니다. 코 를 세우는 작업은 피부 안 쪽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물론, 흉터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수 술 직후엔 여기 저기 붓고 멍들고 해서 보기에 좀 뭣한 기분도 들테니 거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미리 해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차피 몇 주 뿐이죠. 다시금 아니. 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지는 준비시기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수 있는 건가요, 박사님?" 지이가 물었다. "일단은 며느님의 코에 심어넣기 위해서라도 살점의 일부를 떼어내야 하기 때문에 남아있 는 머리카락도 수술 직전에는 완전히 깍아내야 하는 겁니다. 부인께서 머리카락이 다시 자 라는 거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화상클리닉하는 의사들마저도 쉽사리 염려 말라고 대답할 겁 니다. 걱정할 필요도 없는 문제거든요..." 그가 붕대 감은 그 여자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 었다. "좀 안된 일이지만, 당분간은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 겁니다. 치과보정팀 사람들이 수술과 이식조직편을 이식하는 동안 치아의 뿌리를 모두 제거할 거니까요. 두주 혹은 삼주 뒤엔 잃 었던 것들과 완전히 똑같게 만든 새 치아를 가지게 될 겁니다. 그동안은 입에서 위까지 연 결되는 튜브를 통해 유동식을 공급받게 될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조금씩 단계별로 음식물 을 먹을 수 있게 되죠." 닥터 소여가 캐롤의 반응을 거의 무시한 채 설명을 해낙가는 동안 테이트는 아내의 눈이 마치 그들 사이에서 자기의 마음을 이해해 줄 친구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처럼, 아니 어쩌 면 도망칠 수단을 찾고 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희번덕거라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여는 여전히 자기가 할 일들에 대해 쉬지 않고 환자에게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 다. 소여로서야 어쩌면 환자들의 이런 불안한 태도에 익숙해져 그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큰 사고를 처음 당하는 테이트 입장에서는 안하무인 격으로 제 할 말만 하고 있는 소 여가 곱게 보일 리가 만무한 것이었다. 소여는 가운 호주머니 안에 넣어둔 홀더에서 그럴 듯해 뵈는 8 10 사이즈의 컬러사진 한 장을 빼들었다. "이걸 좀 보시겠습니까, 러트리지 부인?..." 캐롤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캐롤은 테이트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예의 그 매혹적인 미 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에선 밉지 않은 장난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모양 새 좋은 머리카락이 그 여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닥터 소여가 다음 말을 이었다. "실로 하루 종일 걸릴 대수술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수술팀은 결국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 고야 말겁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말씀드린 전과정이 끝나는 데엔 수술 날짜부터 쳐서 8주 내지 10주 간이 걸리게 될겁니다. 부인의 피부와 골격을 정상적으로 되찾고 짧은 커트머리 를 갖게 되는 데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빠른 시간안에 복원할 수는 없을 거라고 전 자신할 수 있습니다.!" 캐롤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테이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되는 반변 테이 트는 닥터 소여의 오늘 방문이 결코 아내의 두려움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해준 결과밖 에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회번덕거리는 아내의 눈빛이 그걸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버리는 다급했다. 그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움직여보려고 무진 애를 써봤지만, 들어올리기에는 너무도 힘에 벅찬 사지 때문에 결국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말이 안 나오는 건 여전했고, 머리를 움직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쉬지않고 가고 있는 시간은 앞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될 어마어마한 재난 앞으로 점점 가까이 끌고 가는 것만 같았다. 며칠 간-며칠 간인지는 정확히 할 수 없었지만, 대충 열흘 정도-애버리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적절한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애써왔다. 이제 까지는 어떤 해답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컨디션은 날로 좋아지기만 하고. 자 연 애버리의 걱정은 날로 늘어만 가ㅆ.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근심어린 그여자의 표정을 성형수술을 기다리는 조바심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해주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는 날이 되고야 말았다. 어느 날 밤, 테이트가 찾아와서는 그 다음 날로 수술일정이 잡혔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에 이르른 것이다. "오늘 오후에 당신 수술에 관계된 전 의료진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대. 수술을 해도 될 만큼 당신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만장일치로 동의를 했다는군. 결국 주치의인 소여 박사가 내일로 수술날짜를 잡고 수술에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했대요. 난 통지를 받 자마자 이리로 달려온 게고..." 이제 그 여ㅈ는 적어도 내일까지는 자신에게 끔찍한 실수가 빚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할 급박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테이트 러트리지 역시 이 끔찍한 사건 속에 부분적으로나마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애버리는 그를 비난할 마음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오 히려 요사이 들어서는 테이트를 기다리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테이트가 그 여자 옆 에 있는 그 시간 동안 만큼은, 애버리는 적어도 든든한 경호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안도 감이 생길 만큼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그를 신뢰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테이트가 그 여자의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으로는 말이야... 젠장, 어차피 처음부터 그를 미더워한 건 아니었으니 당신에게 말 해도 상관없겠지!... 그 친구말야, 난 아직도 그 소여인지 뭔지 하는 자를 좋게 생각할 수가 없어. 그런데도 점점 신뢰감이 생기는 게 이상하단 말이야. 당신도 알겠지? 내가 그 친구를 신뢰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제라도 당신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할 사람이라는 걸 말야?..." 그 여자는 서슴지 않고 눈을 깜박여주었다. 그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두렵소?..." 그 여자가 다시 눈을 깜박였다. "공연히 당신 기운이나 빼는 말은 해서는 안되겠지..."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아주 힘들어질 게요, 캐롤. 하지만 난 당신이 잘 견뎌줄 걸로 믿고 있어..." 미소짓던 그의 표정이 약간은 경직되었다. "늘상 무사히 궁지를 벗어나던 사람이었으니까..." "어트리지 씨?" 문 쪽에서 웬 여자가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를 따라 테이트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애버리는 처음으로 그의 옆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캐롤 러트리지는 행운의 여자였 다. 저토록 미남인 사람을 남편으로 가질 수 있었다니. "부인의 보석에 관해 알려달라고 하셨지요?" 싹싹한 그 간호사였다. "아직 금고 안에 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애버리의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그가 중환자실 에 상기된 얼굴로 들어오는 것과 침대 위에 그 여자의 보석을 털썩 내던지는 걸 상상했다. "이건 캐롤 게 아니야! 당신, 당신은 대체 누구야?!" 라고 그가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나리오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상상 속의 희망일 뿐이었다. "제가 아래층 사무실에 들러 가져온다는 게 그만 깜빡 했군요..." "부탁을 해서러다 그걸 대신 좀 보내줄 수는 없겠소?" "연락해 보겠어요." "그래 주신다면 고맙겠소." 애버리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침묵으로 감사기도를 울렸다. 지금은 밤 11시, 이 시간 부로 그 여자는 불행으로부터 구원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성형수술은 어차피 그 여자에 게 이루어지로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애버리 다니엘즈와 같은 얼굴로 되길 바랬 지, 얼토당토 않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길 바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당신 수술실 안에까지 보석을 가지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설마 안하겠지?" 테이트가 웃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말 안해도 안다구. 당신의 분신 같은 그 보석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훨씬 낫겠 지... 내 말이 맞지 여보?" 테이트의 말을 듣는 순간, 애버리는 속으로쾌재를 불렀다. 일이 잘 돼가는 듯 했다. 잠시 후 테이트의 상기된 얼굴과 함께 그 실수는 가만히 놔둬도 자연 밝혀질 것이고, 여지껏 자 신을 캐롤 러트리지라고만 생각해 왔을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머리 속에 떠올 랐다. 그리고 이 여자는 여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뒤꼬인 이 웃지 못할 놀음에서 해 방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다. "러트리지씨, 죄송하지만 환자 본인이나 그 가족들이 아니고서는 금고 안에 보관된 개인 소유물을 내줄 수 없다는 군요. 병원 규정상 안되겠답니다.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내일이나 언제 시간이 나면 직접 내려가보도록 하지요..." 그 말은 차라리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애버리는 정신이 열길 낭떠러지 밑으로 꺼 지는 느낌을 순간적으로 받았다. 내일이면 너무 늦다. 하느님이 어쩌자고 이런 시험대에 자 기를 올려놓는 건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됐던 지방법원의 사 건의 취재실수에 대한 벌은 이미 충분히 받지 않았던가?결국 이런 식으로 자신의 한번 실수 때문에 남은 여생 전체가 그것에 대한 배상으로 점철된 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인가. 애버 리는 이미 기자로서의 사회적인 신뢰성과, 동료들로부터 받아오던 존경과 그 여자의 경력을 모두 잃은 상태가 아니던가. 그런 마당에 이젠 자신의 본 모습마저도 반납 당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갑갑증이 그 여자를 괴롭게 했다. "그 밖에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러트리지 씨." "아, 예. 뭐 별달리..." 간호사가 미안해졌는지 주저하며 말했다. "아래층 홀에 기자 두 사람이 와서 러트리지 씨와 인터뷰를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던데 요?..." "기자요?"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왔답니다." "여기?지금?에디 파스칼이 그들을 보냈답니까?" "아니오, 저도 처음에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그게 그런 게 아니었어요. 특종을 잡으려고 왔 대요. 내일 있을 부인의 수술에 대한 얘기가 밖으로 새나간 게 틀림 없어요. 그들은 사고가 당신의 가족과 상원의원 선거 경쟁에 미칠 영향에 대해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어 요.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지옥에나 가라고 전해줘요." "러트리지 씨, 그래선 안되는 것 아닌가요...." "나라고 그런 걸 몰라서 이런 소리나 하는 건 아니오. 그래요, 그럴 순 없겠죠. 그랬다간 에디가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게요..." 그가 혼잣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내 아내와 딸이 회복될 때까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전해줘요. 그 래도 돌아갈 기미를 안보이면 병원 경비원에게 전화해요. 내가 그러랜다고 해요. 만약에 소 아과 근처에 가서 내 어머니와 맨디를 만나려고 하기만 하면 그 즉시로 고소조치할 거라고 말이오." 테이트가 그 여자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어릿어릿하게만 보이 는 그의 얼굴 위엔 근심과 피로 때문인지 주름살이 부척 늘어 있었다. 그런 그의 곤혹스러 워 하는 표정을 읽은 애버리는 마음 속에 이는 연민을 어쩔 수가 없었다. "기사벌레들 같으니, 어제 신문에 뭐라고 해놨는지나 알아? 해변에서의 새우잡이 사업에 관해 내가 했던 말들을 옮기면서 아예 하지도 않았던 말을 버젓이 적어놨지 뭐야. 오늘 아 침 에디가 이의를 표명하기 전까지, 그것 때문에 사무실로 얼마나 많은 항의전화가 걸려왔 었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구." 보도기사의 부당함에 염증을 느꼈는지 테이트는 아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그건 애버리로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얘기였다. 워싱턴에서 근무할 사절에, 애버리 역 시도 이런 따위의 루머에 외눈하나 깜박하지 않을 정치거물들이 실상은 얼마나 무도한 사람 들인가 하는 취재거리로 많은 시간을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녔던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하물며 성실하게 정치경력을 쌓아온 테이트 러트리지 같은 사람이야 오죽 했으랴. 애버리의 눈에는 그가 피곤해 보이는 게 전혀 이상하지가 않았다. 지금 테이트라는 사람은 자신의 정치적인 승리를 쟁취해내야만 한다는 버거운 짐을 지고 있을뿐더러 개인적으로는 영구적인 것이 될지도 모를 정신적 쇼크를 받은 아이와 혹독한 시련 앞에 거의 알몸이다시 피 내비쳐진 아내가 있지 않은가. 테이트에게 있어 애버리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테이트의 아내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테이트에게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놓고 상심하고 있 다고 입을 열어 말해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 여자는 테이트에게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놓고 상심하고 있다고 입을 열어 말해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 여자는 그 를 기자들의 펜의 폭행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거나 맨디의 어려움에 대해 해명해줄 수 있는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애버리는 누군가가 그를 죽이려 계획하고 있다는 그 한마디조차 던져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밤새도록 테이트는 애버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애버리가 신음에 못이겨 눈을 뜰 적마다 그는 그림자처럼 그 여자의 시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이 가까워 올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해져만 갔다. 수면부족 탓에, 그의 눈 흰자위는 벌겋게 핏발이 섰 다. 보다못한 간호사가 테이트에게 와서는 돌아가 눈이라도 붙이라고 권유하는 말을 했다. 그러난 금방 쓰러질 것 같이 보이는데도 테이트는 단연코 거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을 뉘여놓고 어떻게 나 혼자만 편히 잘 수 있겠소. 난 캐롤을 그냥 내버려둘 수 가 없어요. 내 아내는 지금 겁에 질려 있단 말이오..." 이렇게 대답하는 그였다. 꼭 부부 사이가 아니라도 좋았다. 정말 가슴이 녹녹하게 젖어드는 말이었다. 그 여자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안돼요!... 제발 가지 말아요. 이대로 난 떠나지 말아요. 난 누군가가 필요해!...' 얼마 쯤이나 흘렀을까. 또 다른 간호사가 방금 끓인 커피 한 잔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을 때는 새벽녘인 것 같았다. 냄새가 아주 좋았다. 애버리까지도 그 새벽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잠시 후 호흡장치 조절을 위해 병원 조무사들이 들어왔다. 애버리의 허파기능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기는 해도 아직 며칠 정도는 더 입에 달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조무사들은 잠시 후에 있을 성형수술을 위해 이것저것 체크를 했다. 간호사는 혈압을 재 갔다. 그동안도 그 여자는 그들 중 아무에게라도 지금의 이 중대한 실수를 알려보려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미이라처럼 옴쭉도 못하는 환자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 일이 있는 동안 테이트는 잠시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소여 박사도 함께였다. 닥터 소여의 목소리는 기운차고 명랑했다. "기분은 어떻습니까, 부인? 어젯밤엔 잠을 설치셨다구요? 남편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자, 부 인이 새로 태어날 오늘이 밝았습니다. 대단한 하루가 되실 겁니다." 소여는 그 여자의 차트를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밝은 표정이기는 했지만, 소여의 인사말 속에 인간적인 따스함이라고는 전연 없었다. 지극 히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말이었다. 테이트도 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여자 역시 그 못지 않게 소여를 싫어했다. 차트를 읽어본 소여는 그 여자가 수술하기엔 적당한 컨디션이라는 것에 꽤나 만족한 듯, 가벼운 손동작으로 차트 뚜껑을 닫고는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그걸 넘겨주었다. "신체적인 컨디션은 수술 받게엔 적당하군요.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갖 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제 몇시간 후면 부인은 새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그리 고는 회복단계로 들어가는 거지요..." 애버리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목젖을 울려보려고 했다. 그들이 엄청난 잘못을 하려 한다는 걸 알리지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애버리의 발버둥을 오해하고 말았다. 그 여자 의 용트림을 아직도 수술이 겁이 나서 그러는 것쯤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소여가 허리 를 굽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모든 게 잘 될겁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반 시간만 있으면 본수술에 들어가게 될테니까요..." 그 여자는 다시 한번 발버둥쳤다. 그 여자에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단 한가지 뿐 이었다. 애버리는 밖으로 노출된 한쪽 눈을 쉬지 않고 깜박였다. 정말 속이 새카맣게 타버리 는 심정이었다. "간호사 마취제를 주사하도록." 소여가 방을 나가면서 간호사에게 지시를 했다. 애버리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댔다. 보 다못한 테이트가 앞으로 걸어와서는 그 여자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걱정 마오, 캐롤. 잘 될거야..." 간호사가 그 여자의 혈관에 꽂힌 수액 튜브 속으로 마취제를 주사했다. 애버리는 팔꿈치가 접히는 부분에 박혀있던 바늘 주변의 살갖이 미미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몇 초 후, 이제 애버리에게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따스하고 눅진한 무의식이 혀를 낼름거리며 그 여자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두 발을 받치고 있던 받침이 따끔따끔하게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들 때까지. 그건 마치 마약중독자들이 무감각의 달콤한 충격을 위해 사람을 죽 일 수도 있을 열반과도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찰라 같은 순간으로 시간이 쪼개지는 느낌과 함께, 그 여자는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눈 앞에 서 있는 테이트의 얼굴 이 둘로, 넷으로 점점 갈라지며 흐릿해져만 가더니, 급기야는 점점이 흩뿌려지고 말았다. "당신은 좋아질 거야. 내가 약속할게, 캐롤!..." '난 캐롤이 아니예요...' 애버리는 어떡하든 눈을 뜨고 있으려 했다. 그러나 점점 무거워지기만 하는 눈꺼풀의 무게 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물먹은 스폰지처럼, 그 여자는 무겁게 눈을 내리감았다. "기다리고 있을께, 캐롤..." 잠결 같은 소리로 테이트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애버리야. 애버리... 다니엘즈... 캐 - 롤-이... 아 - 니 - 야...' 그러나, 애버리가 수술실에서 다시 나올 그때 쯤이면, 그 여자는 애버리가 아닌 캐롤이 되 어 있을 것이다... 6 "난 자네가 뭣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테이트가 그의 선거매니저인 에디 파스칼의 주위를 돌며 화가 난 듯 이렇게 말하고 있었 다. 에디는 테이트의 날카로운 시선을 침착하게 받아주고 있었다. 테이트는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다가도 한번 화를 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뒤끝은 없는 사람 이었다. 에디는 대꾸하지 않고 테이트가 화를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에디가 예상했던 대로, 테이트의 눈에 어리던 불기는 여운만 남기고 곧 잦아들었다. 테이트 가 반대편 발에 중심을 옮기면서 뒷호주머니에 찔러넣었던 두 손을 뺐다. "에디, 내 심정도 이해해 줘. 캐롤의 수술이 끝난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러나. 워낙 대 수술이었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자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나." "자넨. 기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게 질문을 퍼부어댔을 때 내가 고분고분하게 대하지 않 고 화를 냈다고 해서 나를 나무라지 않았나? 자네가 내 심정을 안다면 그랬겠나? 내 솔직 한 심정을 말하자면 난 지금 카메라 앞에서 억지 웃음이나 지어주면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기자회견 따위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닐세. 왜 그걸 이해 못하는 거지?" 에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발, 테이트. 그건 기자회견이 아니었어." "그러니 내가 더 화를 내는 것 아닌가? 차라리 제대로 된 기자회견이었다면 나도 어느정도 자제하고 응해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따위 주제넘은 질문들이나 하고 있는데 내가 거기다가 꼬박꼬박 대답을 해줘야 되겠나? 만일 그랬다면 그건 또 얼마나 우스꽝스런 꼴이 ㄷ겠나?"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자네 얼굴이 6시와 10시 정각 뉴스에 40초 동안이나 나왔 어. 그것도 3대 방송사 모두 말이야. 대체 얼마나 많은 유권자들이 그걸 봤겠느냐 하는 얘기 야. 그걸 전부 녹화해 뒀지. 재생시켜 보기도 했고. 자네, 퉁명스럽기 짝이 없더구만. 잔뜩 부은 얼굴로, 꼭 금방이라도 질문을 하는 기자를 한 대 칠 것 같은 태도였어. 물론, 자네 상 황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하긴, 그렇게 한게 오히려 역으로 우리에게 이 로운 효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긴 하지. 안하무인인 방송매체 횡포의 피해자로 여겨져서 유 권자들의 동정심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인기에 연연해서 부당한 피해를 당하면서 까지도 속 도 없이 웃는 낯으로 일관하는 다른 정치 속물들하고는 다르다는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고 말야. 만일 그랬다면 그건 확실한 표다지기를 한 셈이지." 테이트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서글프게 웃었다. "고약한 사람, 자네도 내 형과 다를 바가 없어. 선거운동과 관계되는 일이든 사소한 일까지 도 무조건 어떻게 해야 이가 되고 해가 되는지 잠시도 저울질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말야." 테이트는 손을 그러모아 얼굴을 감쌌다. "피곤해..." "맥주 한잔 하지." 에디가 소형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캔멕주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제것도 하나 집어들고 호텔방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말도 한마디 않고 그들은 맥주만 마셨다. 먼저 입을 연 건 에디였다. "캐롤은 어때? 수술은 잘 된 것 같아?" 테이트의 한숨소리가 둘 뿐인 방 안을 더욱 건조하게 하고 있었다. "소여인지 뭔지 하는 작자가 수술실에서 나오면서 수탕나귀가 꺽꺽대듯이 지껄이더구만. 대성공이라나. 자기 팀이 해온 수술중에선 제일 잘된 거라며 허풍을 떨어대는 꼴이라니." "그거 제 선전이나 하자고 그렇게 수술할 때마다 허풍 떠는건 아닐까?" "차라리 소여가 한 말이 사실이기만 빌고 있네." "언제 쯤이나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있는 겐가?" "지금이야 눈 뜨고 볼 수도 없지. 몇 주 지나고 나면 수술이 잘된 건지 어떤지 알 수 있겠 지." 대답을 하며 테이트는 의자 속으로 더더욱 깊이 몸을 묻었다. 그가 긴 다리를 쭈욱 폈다. 낡은 장화 코가 과을 한껏 낸 에디의 구두에 닿을락말락 했다. 테이트가 입고 있는 청바지로 에디의 시선이 가 닿았다. 눈에 거슬렸다. 에디가 입은 줄 잘 선 플란넬 바지가 그의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이라면 테이트의 청바지는 정반대의 것이었 다. 그런데도 이제껏 그는 테이트가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것에 면박 한번 준 적이 없 었다. 테이트는 열심히 일하는 중간 계층의 텍사스인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이트 러트리지는 억눌리고 짓밟힌 이들을 대변해 줄 투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치적 전 략 때문에 그런 차림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그의 지금 옷차림이란 에디가 텍사스 대 학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열 일곱 살 때부터 늘상 보아온 것이었다. "오늘 생존자 중 한명이 죽었다는군." 낮게 깔린 목소리로 테이트가 말했다. "아이가 넷이나 딸린 내 또래의 남자라지, 아마. 내장에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었다는데, 상태가 좋아지고 있어서 다들 희망을 가졌었대. 그런데 결국 가스중독으로 죽고 말았다는 거야, 젠장!..." 테이트가 못내 어짢다는 듯 머리를 털었다. "여태 버텨왔는데 이제와서 가스중독으로 죽어버린다는 게 말이 돼? 그 가족들이 어떤 심 정일지 자넨 상상할 수 있겠나?" 에디는 친구 테이트가 우울해 한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테이트 자신이나 선거운동 을 위해서고 하나 좋을 게 없는 것이었다. 형 잭이나 아버지 넬슨까지도 가장 걱정스러워 하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테이트가 마음을 못잡고 있을 때, 잡념을 떨쳐버리게 하고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에디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맨디는 좀 어때? 본부 사람들이 다들 염려하고 있어." 에디가 짐짓 목소리를 밝게 하며 물었다. "오늘 병실로 큼지막한 기 하나를 보내왔더군. 벽에 걸어두었지. 내 대신 자네가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주게나." "맨디가 퇴원하는 걸 축하해주기 위해 뭘 해줘야할까 하고 모두들 난리야. 내일이면 그 애 몸집보다 훨씬 큰 곰인형을 받게 될 거라고 그 애에게 말해주게. 맨디는 이번 선거의 공주 님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테이트는 맥빠진 미소만 보냈다. "들어보니 부러진 뼈는 별 탈 없이 나을 거라고 하던데. 화상도 흉터 하나 없이 완쾌될 거 라고 하고. 그러니 조금만 더 지나면 완전히 정상을 찾게 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테이트는 캔맥주 두 개 더 가져왔다. 다시 의자로 돌아온 그는 에 디의 끊고 이렇게 말했다. "신체적으로야 완전히 정상을 찾게 되겠지. 그렇지만 그 애의 심리적인 상태는 그렇지가 않아." "그 애에게 기회를 주게. 어른들도 그런 크나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나면 그걸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나? 항공사에서 생존자들과 사망자 가족들에게 전문상담원들을 할 당한 것도 다 그래서 아닌가?"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맨디를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가 없네. 어 른들하고는 다르지. 그 어린 것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을까. 지 금 그 앤 있는 대로 위축되고 억압된 상태일세. 물론, 어떻게든 그 애가 웃는 걸 보려고 하 면 웃게 할 수도 있지. 그러나 그건 제 아빠를 기쁘게 해 주려고 억지로 웃는 웃음일 뿐이 지 그 애 스스로가 웃고 싶어서 웃는 게 아닐거라구. 생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아이에게 그건 또 얼마나 못할 짓이겠나. 그 앤 그저 병상에 누워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따 름이야. 어머니 말씀으로는 지금도 자면서도 울고, 가위눌려 소리를 지르기가 예사라고 하시는데..." "심리치료사는 뭐라던가?" "그 레즈비언?" 테이트가 참을성없이 욕을 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더군. 그런 말은 누군들 못하겠나? 기껏 한다는 말이, 날더러 맨디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안된다나..." "공감할만한 얘기군." 테이트가 화를 발칵 냈다. "이런 친구, 난 맨디가 치료에 필요한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데에 화가 난다는 게 아닐 세.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가 필요하다 그걸 누가 모르나? 환자 가족에게 그런 말이나 하는 게 심리치료사가 하는 일의 전부라니까. 차라리 아무 소리를 말든지. 그런 상투적인 말을 들 을 때마다 난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야. 당장, 우리 맨디가 그 조그만 어깨에 세상 멍에를 다 지고 있는 것 같은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 세 살박이 아이라고는 생각조 차 못할 행동을 보이고 있는 아이를 두고 어떻게 냉정을 찾을 수 있겠나?" 에디가 이치에 닿게 지적해 주었다. "아직 사고에서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그런 것일테지. 정신적으로 입은 상처러는 게 어디 그렇게 하루 이틀 새에 금방 씻은 듯 나아질 수 있겠나. 그건 육체적인 상처와는 근본 적으로 다른 문제가 아닌가. 자네가 너무 조바심을 내는 것 같기도 하군 그래." "내가 어떻게 조바심을 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제기랄! 캐롤과 맨디, 거기다가 유권자들까 지 모두 만족시켜줄 방법은 과연 뭐란 말인가?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것 도 동시에 말이야..." 에디가 가장 걱정스러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일어난 탓에 행여라도 테이트가 스스로 선거를 뒷전으로 미뤄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신문기자들이 몰려와서 테이트 러트리지 후보가 경선에서 스스로 사퇴할 심경을 가지고 있 다는 루머에 대해 물었을 때, 에디는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기자들을 잡아내서 죽 여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기도 했었지만, 다행히도 당사자인 테이트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 로 일축해버리고 말았다. 에디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테이트의 투지를 높여줘 야만 하는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이었다. 에디가 앞으로 다가앉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자네, 대학 2학년 때 말야. 남학생 클럽배 테니스 경기 기억나나?" 테이트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는." 에디로서는 절로 코웃음이 나는 말이었다. "희미하다고? 옛생각이 희미하다는 건 아직도 자네한테 옛모습이 남아있다는 얘기가 되는 군. 자네는 경기는 나 몰라라 하고 전날 밤 여학생들과 맥주파티나 즐겼지. 난 자네와 그 여 자가 자고 있는 침대까지 쫓아가서 찬물로 샤워를 시키고 아침 아홉시까지 코트로 데려가야 만 했었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테이트가 자조하는 투로 쿡쿡 웃기 시작했다. "자네 그 얘기는 새삼스럽게 왜 꺼내는 건가? 뭘 얘기하고 싶은 거지?" "내 말은..." 에디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겨우 걸칠까 말까한 자세로 앉아서 계속 말을 했다. "그때 자넨. 자네가 해내야만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고주망태가 된 그 상황에서까지도 결 국 자네 소임을 다할 수 있었지. 난 그걸 말하고 싶은 걸세. 적어도 그때는 자네의 선전만이 우리가 그 경기에서 우승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 이었고, 또 자네 자신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 결국 자넨 우릴 위해서 이겨줬지. 비록 자네가 첫시합을 뛰기 전 몇 분 동 안 간밤에 마신 맥주를 몽땅 다 토해내는 곤욕을 치루기는 했지만 말야..." "이 사람, 선거가 대학 테니스 경기와 비교가 되나?" "하지만, 자넨!" 에디가 손가락으로 테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를 게 뭐가 있나? 적어도 내가 자네를 안 이후로 자넨 기회를 잡는 일에 실패해 본 적 이 없었어. 우린 대학에서 두 해난 같이 지냈어. 비행훈련도 받았고, 게다가 지옥 같은 정글 에서 필사적으로 난 끌고 나오기도 했었어. 여태까지의 모든 경험들을 놓고 볼 때, 내가 생 각하기로는 자네는 언제 한번이라도 영웅이 되는데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거던." "난 영웅 따위가 되려고 선거에 출마하는 게 아냐. 그저 텍사스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하 고 싶을 뿐이고, 상원의원이 되겠다는 건 그걸 위한 한 방법일 뿐이네." "바로 그거야. 자넨 그렇게 되고야 말걸세." 마치 중요한 결심을 하고 난 사람 마냥 에디는 자신의 두 무릎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빈 맥주 캔을 놓았다. 테이트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는 거울 에 비친 자기 모습에 힐끗 눈길을 주었다. "야단났군." 그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는 채 부숭부숭한 턱수염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 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표를 던지겠나? 이렇게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는데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나?" "요즘 자네가 어떤 지경인지 뻔히 알면서 차마 그런 잔소리까지 할 수가 있어야지..." 에디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건 휴식을 취하는 거야. 내일 아침에 내가 좋은 면도가 하날 갖다 주도록 하지." "난 일찍 병원으로 갈걸세. 여섯시 쯤이면 캐롤이 회복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길 예정 이거든. 가봐야지." 자신보다 약간은 키가 큰 친구에게 시선을 주기 직전, 에디는 잠시 동안 자기가 신고 있 는 광 나는 구두 앞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번 일에는 내가 느낀 점이라고 할까. 자네가 캐롤 곁을 잠시도 비우지 않으려 애쓰는 것 말야... 내 보기엔, 자네가 대단히 잘하고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 에디의 칭찬에 테이트는 간단히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고맙군." 에디는 기운을 북돋아줄 요량으로 테이트의 팔을 붙임성 있게 툭 쳐주면서 말했다. "나 가세. 푹 자두도록 하게. 내일 아침 날이 밝기까진 아무 생각 말고 편히 쉬도록 하고... 병원에서 좋은 소식이 들리기만 기다리고 있겠네." "집 사정은 어떻다던가?" "그저 그렇지 뭐." "형이 그러더군. 팬시를 본부에 근무하게 한 게 자네라며?" 에디가 빙긋이 웃었다. 테이트가 자기 조카딸을 두고 점잖지 못한 평을 하지는 않으리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낮 동안 나와서 자료를 봉투에 넣는 일을 하라고 했지. 그야 내가 감독할 수 있는 일이니 까. 밤에 뭘 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테지만 말야..." 프렌사인 안젤라 러트리지는 시속 75마일로 달리며 가축탈출 방지용 도랑을 건넜다. 원래 부터 안전벨트를 못견뎌하는 성격이라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팬시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도랑을 뛰어넘은 팬시가 빙긋이 미소지었다.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팬시는 자신의 긴 금 발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교통법규를 있는 대로 무시하면서 고속으로 달리는 게 팬시의 열망이기도 했다. 팬시를 흥분시키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에디 파스칼이었다. 최근까지도, 흥분시키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에디 파스칼이었다. 최근까지도, 에디에 대한 열망을 전하지도 못했고, 그에게서 아무런 응답도 얻어내지 못하 고 있었지만, 팬시는 언젠가는 에디 파스칼이란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와주리라는 확신을 갖 고 있었다. 최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팬시는 커빌에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의 벨보이에게 마음을 빼앗 기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바로 몇 주 전, 24시간 영업하는 트럭 정류장에서였다. 팬 시는 심야영화를 보고 나서 그곳으로 갔다. 마을 안에서 밤 열 시 이후로도 문을 열어두고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팬시는 심야영화를 보고 나서 그곳에 들렀던 것이 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만 싫었다. 트럭 정류장에서 팬시는 굵은 빨대로 바니라 코크를 먹고 있었다. 매점의 비닐 포장너머로 아까부터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을 가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베이컨 치즈버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기름기 많은 햄버거를 야만스럽 게 물어뜯는 모습이 팬시의 마음을 자극시켰다. 팬시는 천천히 그의 바로 옆을 지나쳤다. 마 치 말을 걸어보려는 듯이. 팬시는, 자기가 늘상 쓰는 방법대로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재잘 되며 말을 건네는 걸 그만두고서 계산을 치루고는 곧장밖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로 갔다. 핸들 아래로 미끄러지듯 차에 올라타면서 팬시는 육감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는 모 든 것이 시간 문제였다. 매점의 넓은 창문 안 쪽을 들여다 보면서 팬시는 마지막 몇 입 분 량의 치즈버거를 허둥지둥 입 안에 구겨넣은 채 계산을 하고도 남을 돈을 카운터에 던져놓 고 뛰어나오는 그 젊은 사내를 끈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통명성을 마치자 버크가 먼저 다음날 같으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하는 게 어떻느냐고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팬시는 오히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입장이었 다. 그런 팬시의 마음을 안 버크가 마다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부정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 는 사랑계획은 팬시에겐 정말 마음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팬시의 판에 박은 듯한 미 소가 입술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 여자는 육감적인 표정으로 다음날의 달콤한 약속을 받아 들이겠다는 대답을 했다. "일곱시 정각에 그곳에 있겠어." 팬시가 쉰듯한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거기도 각자가 준비해야 할 것들은 알아서 챙겨오기로 해. 콘돔 잊지 마." 어떻게 보면 도덕적인 면에서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보다도 더 무신경한 팬시였지만, 성병에 대해서 만큼은 지독할 만큼 철저했다. 과연 버크는 기대했던 그 이상의 사내였다. 그는 기교로 안되는 부분에 가서는 넘치는 정 력으로 팬시를 압도했다. 사내로서 그의 성적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전라의 그는 눈 이 부실 만큼 매끈한 몸을 갖고 있었다. 팬시는 그날로 해서 버크와 모두 여섯 차례로 밤을 같이 지내게 되었다. 오늘 밤 두 사람은 버크의 지저분한 아파트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저녁식사랄 것도 없는 간단한 음식과 값싼 포도주를 마셨다. 팬시가 갖고 온 마리화나도 피웠다. 그리고는 그대로 카페트 위에서 게임에 들어갔다. 침대 위의 시트보다는 카페트 쪽이 그나마 깨끗하게 보였 기 때문이다. 버크는 부드러웠고 열심이었다. 그리고 탄탄했다. 그는 팬시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괜찮은 사내였다. 그러나 팬시에겐 누구도 완전하지 못했다. 에디 파스칼, 그 외에는. 팬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면 스웨터 안에는 노브라인 가슴 뿐이었다. 지이 할머니가 노발대 발해도, 그 여자는 브래지어를 했을 때 느끼는 갑갑함이 싫었다. 안전벨트를 맬 때 느끼는 갑갑함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결박당한 느낌이었다. 에디는 그야말로 멋진 남자였다. 여태 팬시가 상대해 온 풋내기들과는 달랐다. 팬시가 보아온 에디 파스칼은 언제나 말쑥한 정장을 하고 있었다. 대개 형편없는 부랑자들이나 남부의 시골뜨기들은 카우보이 복장을 즐 겼다. 서부에서야 그런 옷을 입는 게 보기 좋을 수도 있고, 펜시 자신도 로데오 여왕으로 뽑 히던 그 해엔 그런 복장에 갖가지 야한 액세서리까지 늘여붙이며 다니기도 했지만. 그야 어 디까지나 로데오 경기장에서나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었고, 정작 팬시의 머리 속에 그려진 남성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디는 검정색 양복에 실크 셔츠를 받쳐 입고, 이탈리안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의 몸 에선 언제나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 같은 신선한 냄새가 풍겼다. 샤워중인 그를 상상 하면 팬시는 마치 제 몸이 녹아드는 것 같은 야릇한 환상에 휩싸이곤 했다. 에디의 벗은 몸 에 손을 대고, 입마춤으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애무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만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멋진 일이 될 것인가... 이런 것이 바로 팬시가 꿈 꾸는 가미로운 환상이었다. 그런 공상은 물론 팬시에게는 즐겁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섬뜩한 불쾌감이 그 행복의 순간을 여지없이 치고들어오는 덴 어찔 도리가 없었다. 우선 에 디가 자신과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고쳐놔야 한다. 그 다음엔 가장 친한 친구의 조카딸로만 여기는 걸 극복해야 한다. 팬시 생각엔 에디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버티 고 있지만, 겨우 그런 따위가 자신을 가로막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에디가 아무리 버틴 다 해도, 그와 눈이 마주칠때마다 그 여자가 보내는 눈부신 유혹을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팬시가 선거운동본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ㄷ다고 말하자, 가족들 모두가 기뻐해주었 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할아버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아 주었다. 할머니까지도-물론, 팬시로서는 무척이나 싫어하는 것이긴 했지만,-예의 그 고상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멋진 생 각이구나, 애야.'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아버지 잭 러트리지는 말까지 더듬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도 팬시가 이제는 스 스로 제 앞가림을 하려는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해주려고 술에서 깨어있었다. 정작 팬시가 기대했던 것은 에디의 반응이었다. 자기가 기대하는 만큼 에디가 달가와주기 를 바랬지만, 그의 환대는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그에게 그 뜻을 전했을 때, 에디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고작 '무슨 일이든 우리가 가릴 입장은 아니 지. 어떤 도움이든 좋아. 그런데 팬시, 타이프를 칠 줄은 아나?'가 전부였다. 성질 같아서는 그 당장에 욕이라고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버리고 나면 당장 할아 버지부터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도 같고, 또 마치 자기 속을 빤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 은 에디에게 욕은커녕 그런 내색이라도 했다간 공연히 일을 그르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또 처음부터 속을 들여다보이게 하기도 싫었다. 팬시는 어렵사리 공손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진지한 눈으로 에디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맡겨진 일이면 뭐든 열심히 하겠어요, 에디 아저씨." 접는 포장이 달린 팬시의 무스탕 자동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자욱히 먼지가 일었다. 아빠 엄마를 만나기까지 아무도 만나게 되지 않기를 바랬지만, 그런 운은 없었다. 팬시가 문 가까 이로 가자마자, 거실 쪽에서 할아버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저예요, 할아버지." 복도를 지나는데 할아버지가 팬시를 가로막았다. "이제 오니, 얘야?" 넬슨이 다가와 볼에 키스를 하려고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 팬시가 술을 마 셨는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럴 줄 알고 그 여자는 값싼 포도주와 강한 마리화나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집에 오는 길에 박하사탕을 세 개씩이나 먹었다. 아무 낌새도 못 챈 할아버지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뒤 로 물러섰다. "어디에 갔다 오는 게냐?" "영화보러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둘러대는 건 팬시에겐 조금도 어색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캐롤 숙모는 좀 어떠세요? 수술은 잘 됐어요?" "수술은 잘 끝났다더구나. 의사가 그랬대. 그래도 얼마간은 말을 하는 건 어려울 게야." "세상에, 어떻게 얼굴이 그 지경으로 될 수가 있다죠? 정말 무시무시 해요, 안그래요 할아 버지?" 필요에 따라서는 어느 때라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얼굴표정을 지을 수도 있고, 적당히 슬 프게도, 적당히 의기소침하게도 보일 수 있는 팬시였다. 지금 역시도 팬시의 걱정어린 커다 란 눈망울과 깜박이는 긴 속눈썹은 적어도 그 할아버지의 눈에는 착한 천사처럼만 보였다. "결과가 좋아야 할텐데..." "염려 마세요. 잘 될거예요." 팬시는 할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퍼지는 걸 보고, 그 여자가 숙모를 걱정해주는 것에 할 아버지가 마음 흐뭇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말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만 들어갈께요, 할아버지. 피곤하거든요. 영화가 얼마나 지겨웠는지 보다 말고 잠이 들 었지 뭐예요.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 팬시는 모듬발을 하고는 할아버지의 뺨에 상냥하게 입을 마췄다. 아무 것도 몰랐기에망정 이지, 만약에라도 넬슨이 제 손녀딸이 불과 한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 입술을 어떻게 놀렸는 질를 알았다면, 아마도 말채찍을 움켜쥐고야 말았을 것이다. 팬시는 중앙으로 난 복도를 따라 들어가다가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접어든 또 다른 복도 끝은 엄마 아빠의 침실이었다. 문고리에 손을 막 얹자, 아버지 잭이 침실 문을 열고 머리를 쑥내밀었다. "팬시냐?" "안녕, 아빠?" 팬시가 달콤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잘 있었니?" 잭은 딸이 그 늦은 밤까지 뭘 하고 다녔는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 갔다오냐는 상 투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건만, 팬시가 먼저 그 말을 하고 나섰다. "친구네 집에 다녀오느라 좀 늦었어요..." 말을 해놓고, 팬시는 잠시 머뭇거렸다. 신중히 아버지의 심경을 살피는 거였다. 어색한 분 위기였다. 아버지의 입언저리와 두눈에 괴로움의 찌끼가 어려 있었다. "엄마는요?" 무뚝뚝한 목소리로 어깨너머 방 안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대답했다. "잔다." 방 문간이면 침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어머니의 코고는 소리는 거기까지도 크게 들려왔다. 코고는 소리 때문에 라도 어머니는, 잠을 잔다고 하기 보다는 아예 남의 잠 을 쫓아버리려 작정한 사람같이 느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팬시가 제 방으로 들어가며 인사를 했다. 아버지가 뒤에서 그 여자를 불러세웠다. "본부에서 지내긴 좀 어떠냐?" "좋아요." "일은 재미있어?" "괜찮던데요."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 "제기랄, 그건 정말 싫단 말예요." 딸의 입에서 상스런 소리를 듣자 마음이 언짢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불러세워 꾸 짖지는 않았다. 잭의 마음 한 켠에는 팬시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냐, 잘자거라, 팬시." "안녕히 주무세요..." 건성 뿐으로 심드렁하게 대답을 한 팬시는 침실문을 소리나게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버렸 다. 7 "내일 맨디를 데려올까 해." 테이트가 자못 부드럽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젠 부기도 많이 빠졌으니 맨디도 당신 얼굴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을 거야." 애버리가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그 여자의 얼굴을 바라 볼 때면 늘상 따뜻하고 부드 러운 미소를 띠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석연찮은 그 무언가가 숨겨져 있 었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석연찮은 그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석연찮은 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아내라 해도 얼 굴을 온통 들쑤셔놓아 흉터 투성이로 만들어버린 그 복잡한 성형수술을 받은 그 주간에도, 테이트는 제 아내를 보러오는 데 게으름 한번 부린 적이 없을 만큼 지극정성이었다. 애버리 는 그의 자비로운 품성에 마음 깊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손으로 펜을 쥘 수 있게만 된다면 그런 마음부터 노트에 적어 보여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붕대를 푼건 벌써 며칠이나 됐다. 병 원에선 우선 양손에 감겨 있는 붕대부터 풀어주었다. 애버리는 살갗이 아물지 않은 온통 벌 그죽죽한 피부와 털도 없는 맨살갗에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손톱은 아예 다른 사람의 것처럼 징그럽게 바투 깎여 있었다.그 여자는 매일 매일을 고무공을 가지고 약한 손아귀에 힘을 기르는 물리치료를 계속해서 받았지만, 원하던 대로 펜을 쥘만큼 손 안에서 힘조절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렵기만 했다. 애버리가 그 일만 해내게 되면, 테이트 러트리지에게 할 말 은 너무도 많았다. 지금까지 애버리를 경멸하듯 붙어있던 인공호흡장치도 떼어졌다. 탈저현상으로, 그때까지도 아무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참으로 그 비행기 사고야말로, 이미 자신감을 상실해버린 방송기자, 애버리 다니엘즈에게는 씻을 수 없는 심각한 정신적 쇼크를 남긴 사건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의사들은 하나 같이 그 여자가 앞으로 점점 제 본래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지시키고 있었다. 그 이유들을 설명하면서, 그들은 사고 당시에 흡입한 유독가스로 인해 성대가 손상받은 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 소리를 못내는 것이 오히려 정상 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털이나 치아도 없는 맨 몸뚱이로 빨대를 통해 엑체 음식물만을 섭취 하고 있는 애버리의 심신 상태는 전체적으로 여전히 심한 혼란상태였다. "어떻게 생각해? 당신, 맨디를 만나는 거, 감당해 낼 수 있겠어?" 테이트가 조심스럽게 그 여자에게 물었다. 그는 분명히 미소 띤 표정이었지만, 애버리는 그 미소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어색함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 다. 적어도 애버리가 의식이 있고부터는 줄곧, 테이트는 활발하고 낙관적으로 보이려 애써왔 다. 그 여자가 수술을 받고 나서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맨 먼저 기억이 나는 것도, 자신 의 침대 옆에 바싹 붙어앉아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하고 있던 테이트였다. 그는 수술이 멋지 게 됐다는 말을 단 하루도 거른 날이 없었다. 소여 박사와 2층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까지 도 그 여자의 빠른 회복과 좋은 소인에 대해 칭찬을 계속해 주었다. 그러나 애버리의 입장에서, 다른 어떤 소인도 애버리의 소용에 닿는 것이 없는 게 사실이 었다. 만약 두 손으로 목발만 짚을수만 있었더라도 애버리는 부러진 다리로나마 그럭저럭 견뎌내며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병원에서야 좋은 소인 좋은 소인 운운하지만, 애버리의 입장에서야 좋은 소인일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들에게 자신이 마음속으로 전혀 흥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릴 수가 있을까. 그 여자는 조금도 마음이 들뜨지 않았다. 자신에겐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상처는 다 나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애버리 다니엘즈의 얼굴은 어떤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뀌어버렸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그 여자의 두 눈엔 뜨거운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런 애버리의 심경을 테이트는 전연 다르게 받아들였다. "약속 할게. 맨디를 이곳에 오래 있게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아무리 짧은 만남이라 해도 정작 맨디한테는 도움이 많이 될거라구. 그 앤 지금 집에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모두들 그 애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놔두고 있어. 심지어 팬시까지도 군말이 없을 정도니 말 다한 거 아니겠어? 낮엔 별 탈 없이 지내다가도 밤만 되면 괴로워하는 게 좀 문제이긴 하지만. 당신 을 만나고 나면 안심하게 될 게 틀림없어. 우리가 암만 당신이 곧 돌아 올 거라고 말해봤자, 갠 믿으려 들지 않을 게 뻔해.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그런 말을 입밖에 낸 건 아니지만, 사고를 당한 뒤로는 워낙 말수가 적어진 탓에 그 조그만 속에 무슨 생각을 어 디까지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저 그렇게 추측할 뿐이지." 테이트가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는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애버리가 그의 정수리 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정중앙에서 약간 비켜난 자리에서부터 나선으로 가리마가 타져 있었다. 어느덧 애버리는 그를 쳐다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테이트 러트리지라는 인물은 이젠 낯설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외과의사로서 재능을 자신하고 있는 닥터 소여나 친절한 병원 간호팀 이상으로, 테이트 러트리지라는 인물은 애버리의 작 은 우주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소여 박사의 말대로 눈알을 지탱해줄 만한 정도로 광대뼈가 굳어지는 것과 함께, 애버리는 왼쪽 눈의 시력을 서서히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수술 3주 후, 눈꺼풀을 버티게 해준 봉합용 실을 뽑았다. 코 안쪽에 심었던 팩과 겉부분을 감싼 부목도 내일쯤이면 떼어낼 수 있을 거 라는 약속을 받을 정도로 쾌유되어 가고 있었다. 마치 완쾌로 가는 한 발 한 발의 족적을 기록하는 듯, 테이트는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로 싱싱한 꽃다발이 배달되도록 해주었다. 병실 문을 들어설 때마다 그는 늘 웃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일부러라도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애버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애버리는 마음 속으로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테이트가 내색하는 건 아니었지만, 선거를 앞두고 있는 후보의 입장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내의 병실을 찾아 온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그는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렇지만, 만약 테이트가 그렇게라도 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신은 그 자신은 그 엄청난 일들을 감당해 내지도 못한 채로 속이 까맣게 타서 진작에 죽어버렸을 거라고 그 여자 스 스로 생각했다. 애버리의 병실 안엔 거울이라고는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아무거도, 상을 비출 수 있을만한 것이라고는 아예 없었다. 애버리 생각에도 그런 것들이 모두 계획된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겠거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애버리는 자신의 모습이 어 떻게 보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테이트가 그렇게 열심히 숨기려고 애쓰는 이유도 결 국은 그 여자의 모양의 소름끼칠 만큼 혐오스럽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체적인 병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의례 그렇듯이, 더구나 자신에게 일어난 중대한 변 화를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는 상태에서, 애버리의 오감은 날카로와질 대로 날카로와져 있 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에게 해주는 말과 그 사람들이 정말로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이런 추측들이 머릿속에 가득차서 애버리 는 있는 대로 신경이 곤두섰다. 테이트는 그 여자에게 친절했고 사려깊게 대해주었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 하나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그런 것들 사이사이로 드러나지 않게 자 리하고 있는 어색한 거리감을 애버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맨디를 데려와도 되겠지? 당신만 괜찮다면..." 그는 들어매어져 있는 애버리의 부러진 다리를 조심하면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테이 트가 캐쥬얼 셔츠 위에 수에드 가죽 자켓을 입은 차림인 것으로 보아 바깥 날씨가 어지간히 추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창 밖으로 걸려 있는 태양은 겨울날씨와는 다르게 무척 빛나고 있었다. 들어올 때,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테이트는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그의 두 눈은 회색이 도는 푸른 색이었다. 정면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그는 사람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테이트 러 트리지는 대단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런 그가 사실은 아무 상관도 없는 애버리에게 지극 정성으로 대해주는 것이다. 애버리는 그토록 간절하게 말하는 테이트를 실망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비록 맨디가 딸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테이트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면 애버리는 그렇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심지어는 아예 아이의 엄마 노릇을 해주고 싶 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애버리는 수술 이후에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감정의 표현수단으로, 좋다는 고개짓을 했다. '좋아요...' 테이트가 얼굴빛까지 환해지며 반색을 했다. 적어도 그 웃음만은 진실해보였다. "내가 수간호사하고 얘기를 해봤는데, 당신만 원한다면 옷을 입도록 해주겠대. 품 큰 겉옷 이나 나이트가운 정도는 입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구. 생각해봐요, 당신이 맨디 앞에서 병 원가운이 아닌 일반 복장을 입고 있으면 맨디가 볼 때 얼마나 더 친근감을 느끼고 안심할 수 있겠냐는 거야. 우리가 바라는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하잖소? 안그래?" 애버리가 또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문에서 인기척이 났다. 애버리는 눈을 그쪽으로 돌렸다. 테이트의 부모라는 사람들이었다. 넬슨과 지니아? 아니면 지이? 뭐 그런 이름인 것 같았다. 적어도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부 르는걸 보면. "글쎄, 앨 좀 보라구..." 넬슨이 병실을 가로질러 와서는 아내 지이 앞으로 나오며 애버리의 침대 발치에 섰다. "좋아보이는구나. 그래, 정말 좋아진 것 같아. 안그러오, 여보?" 지이의 두 눈이 애버리와 마주쳤다. 지이가 푸근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훨씬 좋아보이는구나." "그 의사, 말만 그런 줄 알았더니 엄청난 보수 값은 하는구나." 넬슨의 주름진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여지껏 난 성형외과수술 같은 데에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의였지. 그런 건 허영심 많은 부자집 여인네들이 남편 호주머니에서 돈을 그러다모아 내던지는 짓이라고만 생각해왔 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번 일 같은 경우엔..." 그 말을 하며 넬슨은 한 손을 들어 누워있는 애버리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다음 말 을 이었다. "정말 돈 들인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애버리는 자기가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단지 비행기 사고의 희생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신세가 돼버렸다는 생각이 새삼 들며 넬슨이나 지이라는 사람들로부터 격려받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수 없었다. 테이트는 아내가 부모님들 사이에 오간 대화의 내용 때문에 적잖이 불편한 심정이 되었음 을 알아챘다. "캐롤이 내일 맨디가 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말이 떨어지자 지이가 득달같이 아들의 말꼬리를 붙잡고 닦아 세우기 시작했다.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서서 아들을 나무랐다. "테이트, 그게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짓인 게냐? 맨디를 위한 게냐? 아니면 캐 롤을 위해서냐?" "저 혼자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하는 게 맨디를 위해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캐롤도 좋다고 하고..." "맨디의 담당 의사는 뭐라고 하더냐?" "그 여자가 뭐랬건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러는 거요? 아이한테 어떤 것이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 아이 아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넬슨이 지이의 말을 가로채며 꾸짓듯 말을 하고 나섰다. 그리고는 테이트의 등을 툭, 하고 한 대 쳐주면서 말했다. "누가 뭐라든, 난 네 생각을 믿는다. 그래, 지금 같으면 맨디에게 제 엄마를 보게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 될 게야." "당신 말이 맞기만 한다면야 무슨 걱정이겠어요?..." 애버리의 병실 안에는 화초와 꽃들이 아주 많았다. 테이트가 매일 매일 배달시켜온 것들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갖가지 꽃으로 병실 안은 마치 작은 화원을 ㅇ겨다놓은 것처럼 싱싱한 향기로 가득차 있었다. 지이는 별 말 없이 화분이나 꽃에 물을 주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어디를 보더라도 캐롤의 친정 식구가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이나 기재는 아무 것 도 없었다. 그것으로 애버리는 죽은 캐롤에겐 가족이 아무도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 각할 수 있었다. 그 여자에게 가족의 울타리로 엮을 수 있는 사람들이란 결국 눈 앞에 있는 이들 뿐이라는 게 되는 것이다. 넬슨과 테이트는 오늘도 선거운동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다. 이 병원에 들어와서, 아니 애 버리의 의식이 돌아온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저들은 만나기만 하면 줄창 선거얘기이다. 애 버리의 눈에 비친 그들이란 마치 선거를 위해 태어나고 존재하는 사람들만 같아 보이는 것 이었다. 방금, 두 사람의 대화에 에디라는 이름의 사람이 떠오르고 있었다.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던 애버리의 머릿속에 매끈하게 면도한 얼굴과 흠 잡을 데 없는 옷차림의 남자 모습 과 에디라는 이름이 교차되었다. 그 남자는 두 번인가 병실에 왔던 사람이었다. 올 때마다 그는 테이트와 함께였다. 에디는 는 밝은 표정과 경쾌한 몸놀림을 보였다. 마치 그 조직의 응원단장인 것처럼. 테이트의 형은 잭이라고 했다. 테이트와는 터울이 많은 것 같았고, 성미도 그보다 훨씬 더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보인 것도 어쩌면 애버리의 병실 안에서만이었는지도 모를 일 이지만, 어쨌든 병실 안에 있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그랬다. 그는 올 때마다 자기 아내 와 딸과 함께 문병오지 못한 걸 두고 더듬거리기까지 하며 애버리에게 사과를 했다. 잭의 아내 도로시 레이에 대해서 얘기를 꺼낸 사람은 여태 한 사람도 없었지만, 눈치빠른 애버리는 도로시라는 여자가 어떤 몹쓸 병 때문에 늘상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내심 혼자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었어도, 팬시라고 하는 아이는 분면 가족들간에 모든 이의 분쟁의 씨였다. 운전을 할 정도의 나이는 됐지만, 여느 아이들처 럼 독립해서 살아가기엔 어린 나이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 가족들 사이 에서 오갔던 대화를 종합해보면 그랬다. 그들은 모두 산 안토니오에서 한시간 남짓 차로 가 야하는 거리에 모여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애버리는 희미하게나마 테이트 러트리지에 대한 뉴스기사의 기억 속에서 목장 운운하는 기사를 읽었던 걸 기억해냈다. 그렇다. 러트리지 일 가는 분명 재력과 명성,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힘을 가진 집안이었다. 애버리에게 말을 할 때, 그들은 늘 다정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애버리를 놀라게 하 거나 괴롭히면 안된다는 이유로 늘 조심스러워하는 투였고, 말 한마디 한마디까지도 가려하 는 듯했다. 그렇지만 애버리로서는 그 사람들이 말로 하는 대화 보다도 오히려 조심스러워 하며 입 뒤로 감추어두는 얘기들이 훨씬 궁금하고 흥미를 끌게 하는 것이었다. 애버리는 과민이다 싶을 정도로 억제되어 있는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의 표현들에 유난 히 관심을 기울여보았다. 그들 얼굴에 잡혔다가는 곧 사라져버리는 미소는 하나 같이 즉흥 적이었고 긴장돼 있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테이트의 가족들이 애버리를 정중하게 대하는 태도였지만, 거기엔 보이지 않게 싫게 여기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이 가운은 정말 예쁘구나." 지이의 한마디가 상념에 젖어있던 애버리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지이는 테이트 가 집에서 가져온 짐을 풀어 병실 캐비넷에 정리해 넣고 있었다. "내일 맨디를 만나려면 이걸 입어야겠구나." 애버리가 가냘프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 끝나 갑니까. 어머니? 캐롤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요." 테이트가 침대 가까이로 다가와 애버리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일 반나절은 꼬박 당신 혼자 있어야만 할 거야. 적적하더라도 좀 참아요.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게 당신 몸에 좋을테니까, 알겠지?..." "아무 걱정 말고 푹 쉬거라, 아가. 지금까지 넌 잘 해내왔어, 우리가 기대한 대로 말이다. 여보, 당신도 인사를 해요. 잠깐이라도 둘만 있을 시간을 줘야 하잖소?" "잘 있거라, 캐롤." 지이가 남편을 따라 그 여자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병실 밖으로 사라지자 테이트가 다시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낮추었다. 정작 피 로해보이는 사람은 그였다. 손을 뻗어 그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행 동으로 옮길만큼 간절한 건 못되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테이트가 자기 몸에 손을 댄 것도 위로나 격려에 의례적으로 있을 수 있느 정도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닌 게 사실이었지 않은 가. 그것도 진심이라고 생각되어지지도 않는 지극히 의례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 거였다. "오후 늦게나 올 것 같아. 맨디가 낮잠에서 깨면 데리고 올게." 테이트가 묻는 말처럼 잠시 말하기를 멈추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 여자도 대답하는 고개짓 을 했다. "세시 쯤이나 되야 할 거요. 맘 같아선 맨디만 달랑 데리고 왔으면 싶은데, 어떻게 될지..." 또다시 말하기를 멈추고 테이트는 주춤거리며 문쪽을 힐끗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가 큰 숨 을 들이쉬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맨디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군. 그렇지만 그 애도 나름 대로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있으니 당신이 보듬어줘야지... 나도 당신이 여태 많은 어려움을 어렵사리 이겨내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당신은 어른이고 그 앤 아이잖소? 그러니 드 애 보다는 당신이 상황을 극복할 힘을 더 갖고 있다는 게 아니겠어?"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허공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맨디는 어린애야. 그걸 생각해서라도." 그 말을 마치고 테이트가 몸을 똑바로 폈다. 짧은 미소가 얼굴위로 어른거렸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좋은 만남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트가 떠나려 할 때면 늘 그렇듯이, 애버리는 또다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어느덧 테이트만이 그 여자와 세상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날 때면, 그는 단순히 몸만 빠져나가는 게 아 니었다. 외로움, 두려움, 소외... 뭐 이런 따위의 것들에 가릴 데 없이 벌거숭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애버리의 용기마저 가져가버리는 것이었다. "편안한 밤 보내고 좋은 꿈 꿔요. 내일 당신을 보러 올게." 작별인사를 하며 테이트가 손가락 끝으로 애버리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부벼주었다. 하지 만 이번에도 입맞춤 같은 건 없었다. 여지껏 단 한번도 그는 애버리에게 입맞춤 같은 건 해 온 적이 없었다. 실상, 지금의 그 여자 얼굴이 여유롭게 입맞춤이나 하고 있을만한 처지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남편이 원하기만 한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애버리 생 각에는 테이트는 보통이 넘는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애버리는 아무 말없이 병실 문을 나서는 테이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다음 순간, 진 한 외로움이 그 여자의 목을 조르려 사방에서 스멀스멀 기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 금 그것을 물리칠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틈을 주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애버리는 어떻게 하면 테이트 러트리지에게 자신이 여태 테이트가 생각해온 제 아내가 아닌 애버리 다니엘즈라는 이름의 여자라는 것을, 그 가슴 찢어지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 캐롤 러트리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애버리 다니엘즈라고 기록되어 있는 무덤 안에 묻혀있을 것이다. 그 엄청난 얘기를 과 연 어떻게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테이트와 가까운 친분관계를 가진 누군가가 그를 헤치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시을 어떻게 얘기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지난 한 주 간 애버리는 자기에게 찾아왔던 유령 같은 존재의 방문이 그냥 악몽이었을 뿐 이라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되뇌이고 자신에게 주지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던 상황이라는 걸 뒷받침해줄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황당무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헛꿈을 꾼 거였다고 생각해버리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접어둘 수 없는 보다 확실한 사실 하나. 그 일은 분명히 현실이었다는 것이었다. 애버리가 들었던 그 모든 이야기들은 열대지방의 석호처럼 너무도 뚜렷하게 마음 속에 각인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 들었던 불길한 어조와 억양이 그 여자의 뇌리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그 장본인은 애버리가 들었던 테이트에 대한 살인음모를 몸소 실행할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바로 그런 점들이 내내 찜찜하게 애버리의 뇌리에 자리 해 왔고, 애버리의를 불안감에 짓눌리게 하고 있었다. 그는 러트리지 집안 사람중 어느 누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환 자실에 있는 환자를 면회하기 위해서 단독으로 출입이 허가되는 사람은 단지 직계 가족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인가? 아무도 테이트에게 악의를 보이는 것 같은 사람 은 없었다. 모두들 그를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애버리는 테이트의 가족들을 하나 하나 떠올려보았다. 아버지 넬슨 러트리지?... 그건 생각 할 수고 없는 일이었다. 테이트의 부모가 그를 몹시 사랑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형 잭?... 그 역시 동생에게 어떤 식으로든 악의 같은 건 품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에디란 사 람 역시 혈연관계는 아니었지만, 가족관계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테이트와 가장 친하다 는 두 사람 간의 우정도 순수하기만 해보이는 것이었다. 아직은 형수인 도로시 레이나 조카 딸 팬시를 본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가 남성이었다는 것 을 똑똑히 기억하는 한 그 두 사람도 물망에 오를 입장은 우선은 아니었다. 여태까지 애버리가 들었던 목소리 중에는 그 날의 기분 나쁜 방문자로 여겨지는 사람은 없 었다. 그런데,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출입조차 허용되지 않는 중환자실에 어떻게 혼자서 들어올 수 있었느냐 한는 것을 생각하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도 병원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고 버젓이 들어와서 여유있게 말을 건넬 수 있었으니... 적어도 그 남자는 캐롤에겐 낯선 사람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공모자에 게 말하는 것처럼 얘기할 수가 없었을테니까. 테이트는 제 아내가 자기를 죽일 살인음모에 공모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캐롤이 그 에게 해를 끼치려고 작당하고 있음을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어쩌면 바로 그걸 알고 있기 때 문에 환대와 따사로움 뒤에 말못할 거리감 같은 걸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아, 애버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심한 기사욕구를 느끼기 시작했다. 기사거리 앞에서는 늘상 그래왔듯이 애버리는 아이리쉬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든 의 혹의 실타래를 풀어보며 낱낱히 해부하고 싶었다. 얼기설기 구멍이 빈 부분, 빠뜨린 요소들 을 조각조각 모으려고 애쓰곤 했었다. 애버리의 뇌리에 별안간 아이리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리쉬는 인간의 형태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애버리는 이 세상 누구 보다도 그의 통찰력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의견이라면 제일 우선으로 여겨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테이트 러트리지에 대한 생각으로 애버리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날 밤, 애버리는 수액을 통해 주사되는 수면제에 자신을 내맡겼다. 중환자실을 감싸고 있던 긴장감과는 달리, 독방 병실엔 그와는 정반대로 풀어진 안락감이 있었다. 방안엔 희미한 꼬마전구의 불빛만 있을 뿐, 감당키 어려운 고독감이 매일밤 그렇지 않아도 머리속이 산란하기만 한 애버리를 엄습 해오곤했다. 잠과 의식 사이를 오가며, 애버리는 만약 자기가 언제까지고 캐롤 러트리지의 역할을 떠맡 는다면 나중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보기 시작했다. 일단 테이트가 아내를 잃는 슬픔 을 겪는건 연기할 수가 있을 것이고, 맨디도 그 애의 정신적인 병인을 치료하는 동안, 어머 니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애버리 다니엘즈 는 테이트를 살해한 음모의 주인공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한 용감한 기자로 불리게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소리 내지 않고 애버리는 웃기 시작했다. 아이리쉬가 애버리의 얘기를 들으면 그 여자에게 미쳤다고 욕을 할 게 뻔했다. 고함을 지를지도 모를 일이고, 어쩌면 무릎을 꿇려 윽박지를지 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일고 있었지만, 어느 모로 생각해 보아도 화가 나기는 마 찬가지였다. 그런 모든 광대놀음이 끝나고 애버리가 얻을 수 있는 게 과연 무어란 말인가. 정치? 인간관계? 그리고 음모?... 부질없는 환상이 애버리를 깊은 수면으로 끌고 들어가버렸다. 8 애버리는 8년 존 알칸사스에 있는 낡고 컴컴한 작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의 첫 번째 텔레 비젼 오디션 때보다 더욱 신경 과민 상태였다. 그때 땀으로 젖은 축축한 두 손바닥을 연신 바지에 문질러가면서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마른 침을 삼키면서 카메라 앞에 섰다. 진흙과 돼지 사료에 발목을 깊숙이 넣고, 핏기 없는 손가락으로 마이크를 있는 대로 꽉 움켜쥐고는 돼지 농장주들의 생활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정신없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겨우겨우 촬영을 마쳤을 때, 뉴스 디렉터인 아이리쉬는 질병은 돼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지, 농장주들을 엄습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 여자가 실 수한 말들을 익사스럽게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애버리에게 보도기자 분야의 일 을 주었다. 이것도 역시 하나의 오디션이었다. 맨디가 다른 어떤 사람도 간파해내지 못했던 사실-일그 러지고 부어오른 피부 속의 여자가 자기 엄마, 캐롤 러트리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해 낼 수 있을까? 낮 동안, 수다스런 간호사들이 그 여자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느라 부산스러웠지만, 또 물 리 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운동을 끝내는 해내기는 했지만, 종일토록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 문이 그 여자의 마음을 스산스럽게 했다. 이제까지의 사건의 진상이 지금 당장 밝혀지는 걸 애버리 자신이 과연 원하고 있느냐 하는게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런 뚜렷한 대답도 얻어내지를 못했다. 당분간, 적어도 당분간은 다른 사람들이 캐롤이 란 여자와 자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나가다가 아예 운명까지 바꿔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작 죽은 사람은 캐롤 러트리지이지, 애버리 다니엘즈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운명이 송 두리째 뒤바뀌어진다 하더라도 그건 운명이 그렇게 된 것이지, 그 여자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애버리는 제한된 상황에서나마 모두에게 그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 필사 적으로 애를 써 보았지만,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다. 지금 애버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애버리가 연필을 쥐고 의사소통을 할 만큼 손에 힘이 들지 않는 이상, 캐롤로 남아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그 역할을 해내는 동안, 그것으로써 테이트 러트리 지가 보여준 친절에 보답한 셈은 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맨디가 제 엄마를 만남으로써 정신적 쇼크를 치료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다만 그게 일시적일 뿐일지라도 애버 리는 그 일을 도와줄 마음이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아이에게 엄마의 죽음을 확인 시킨다는 것도 말이 안되거니와, 지금 애버리의 입장으로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다만, 애버리를 만남으로써 아이의 상태를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뿐인 것이었다. 간호사가 채 1인치 길이도 안되는 애버리의 머리칼 위에 스카프를 씌워 매만져주며 자신의 머리 만지는 솜씨를 뽐내듯 말을 건넸다. "좋아 보이는 군요. 두 주 정도 지나고 나면 잘 생긴 부인 남편께서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될 거예요. 당신도 알겠지만, 몇몇 결혼한 간호사들 뿐만 아니라 모든 독신의 간호 사들까지도 푹 빠져있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며 간호사는 무미건조하게 시트를 바로 펴더니, 꽃다발이 어떻다느니 하며 이미 삐죽이 시들어가는 봉오리를 잘라내면서 침대 주위를 돌아다녔다. "신경 거슬리거나 그렇지는 않으시죠? 이런 식의 얘기야 워낙 많이 들었을테니 그다지 신 경쓰시진 않으시겠지만요... 결혼한지는 얼마나 됐죠? 4년? 동료 간호사가 말한 걸 들은 기 억이 있어요." 말을 하다 말고 간호사가 애버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닥터 소여가 기적을 이뤄내고 있는 거예요. 기다려봐요. 당신들 둘은 워싱톤에서 가장 멋 진 한 쌍이 될 테니 말예요. 얼마나 멋져요? 미남 상원의원이 그 부인까지도 미인이라니..." 문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애버리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문 쪽을 돌아 다보았다. 테이트가 거기 서 있었다.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가 간호사를 보고 말을 했다. "당신 말대로 나 역시 소여 박사가 기적을 낳게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소. 그런데 정말로 내가 선거에서 이기리라고 생각합니까?" "제 표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의 물음에 간호사가 밝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테이트도 따라 웃었다. 그의 웃음은 중후 했다. 어찌 생각하면 노인이나 닳아빠진 담요처럼 편안한 것이기도 했다. "따님은요?" "간호사실에 데려다 놓고 오는 길이오. 잠시 후에 데리러 갈겁니다." 테이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눈치를 챈 간호사가 애버리를 내려다보며 미소 섞 인 윙크를 보내왔다. "행운을 빌겠어요." 둘만 남자, 테이트가 애버리 쪽으로 움직여 왔다. "당신 좋아보이는군." 테이트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아, 맨디가 이곳에 왔어. 결과가 어떨는지 당신이나 나나 확신할 수야 없겠지만, 애를 보고 당신이 실망하지 않았으면 해. 만약 그 애가..." 마치 섬광이 번쩍이듯, 애기를 하던 테이트의 강한 시선이 애버리의 가슴 위에 멈췄다. 애 버리는 나이트 가운의 앞섶을 적당히 풀어놓고 있었다. 애버리는 테이트의 얼굴에 스치는 당혹감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 질치고 있었다. "캐롤?..." 쉰 목소리였다. '그가 알았다!' "맙소사!..." 이제 그는 그 당혹감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당신, 그동안 너무 많이 수척해졌어..." 속삭이듯 그가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손끝으로 한손을 그 여자의 가운 안쪽으로 집어넣고 는 한쪽 가슴을 조심스럽게 눌러보았다. 그리고는 멀찍이서 그 여자의 몸을 대충 훠어 보는 것이었다. 애버리의 더운 피가 테이트의 손끝이 닿는 살갗 쪽으로 쏜살 같이 모여들고 있었 다. 얕은 신음소리가 애버리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부질없는 목소리였기는 했지만. "결코 당신이 안좋아보인다는 걸 말하자고 이러는 건 아냐. 단지... 뭐랄까, 달라... 하기는, 그동안 몇 파운드 정도 빠지는 거야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딛쳤다. 아주 잠깐 동안, 그들은 꼼짝 않고 그러고만 있었다. 그리고는 테이트가 손을 거두었다. "맨디를 데려오겠어." 애버리는 잔뜩 예민해진 신경을 안정시키려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애 타게만 해오던 착오가 두 사람에게 이떤 식으로 드러나게 될지, 실감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 이었다. 그런 반면, 앞으로 테이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의 선이 얼마나 멀리 뻗어나갈지도 예 상하지 못했다. 그의 손길은 애버리가 처한 곤혹감 만큼이나 안타깝게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애버리는 지금 자신을 망가뜨리려 드는 감정적인 사치를 용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고는 자신을 긴장시키는 데 충실하려 했다. 애버리는 맨디라는 아이가 흉칙한 자기의 얼굴을 보고 행여 무서워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애버리는 테이트와 아이가 병실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여보?" 테이트가 부르는 소리에 에버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빠의 가슴에 묻혀있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흰 드레스에 짙은 감색 무늬가 있는 하얀 앞치마, 흰색 스타킹, 아이는 온통 하얀 색 일색이었다. 왼팔엔 기브스를 하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검고 광택이 있었다. 올이 굵고, 숱이 많긴 했지만, 애버리가 어렴풋이 나마 기억하는 만큼 긴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찬찬히 살피고 있는 애버리에게, 마치 자기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 테이트가 설명을 해주었다. "머리카락을 자를 수밖에 없었어. 불에 그을렸거든." 턱에 찰랑찰랑할 정도의 길이였다. 25센트짜리 은화처럼 크고 동그란 갈색 눈을 가진 맨디 는 망원경 초점 표시 십자선 안에 잡힌 암사슴처럼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맨디는 예쁜 아이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무감각했다. 명색이 엄마를 만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변해버린 모습에 대한 혐오나 두려움, 호기심 같은 걸 나타내기는커녕 아무 반응 도 없이 그저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가져온 선물을 드려야지?..." 아빠의 재촉에도 아이는 오른쪽 손에 들고 있는 데이지 부케줄기들을 질식시키고만 있었 다. 잠시 후, 맨디가 겁먹은 얼굴로 애버리에게 부케를 내밀었다. 애버리가 손 힘이 부쳐 받 아들지 못하자, 테이트가 대신 받아 애버리의 가슴에 부드럽게 얹어주었다. "아빤 꽃에 줄 물을 좀 찾아봐야겠구나. 그동안 엄마 곁에 있으렴?..." 테이트가 가슴에 안고 있던 맨디를 침대 가장자리에 앉히려고 아이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가 아이를 놓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이가 훌쩍거리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 고는 아빠의 자켓 옷깃을 부여잡았다. 두 손을 벌벌떨기까지 했다. "알았다." 테이트가 애버리에세 쓴웃음을 던졌다. 그런 다음 맨디의 뒷편 매트리스의 가장자리에 엉 덩이만 간신히 붙인 채 조심스럽게 앉았다. "우리 맨디가 엄마한테 보여준다고 이 그림을 그렸다오." 테이트가 자켓의 안주머니에서 접힌 마닐라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애버리가 보이도록 맨디 의 머리 위로 그걸 펼쳐보였다. "이게 뭘 그린 건지 엄마에게 말씀드려야지, 맨디?..." 애버리의 눈에는 알록달록한 그 낙서가 아무것으로도 보이지 않았지만, 맨디가 속삭였다. "말이야." "그래, 할아버지의 말들이지." 테이트가 끼어들며 맨디를 부추겼다. "어제 아버지께서 말을 태워주셨어. 그래서 오늘 아침 내가 제안을 했지. 당신에게 선물로 말그림을 그려주는 게 어떻냐고 말야." 애버리는 손을 들어 그에게 그림을 가까이 끌어당기라고 손짓했다. "엄마가 우리 맨디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드는가 본데?" 테이트는 아이에게 지어보였던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애버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 나 정작 맨디는 자기 그림이 엄마에게 감상되어지는지 아닌지 하는 것엔 그다지 관심이 없 다는 표정이었다. 그 앤 애버리의 코 위의 부목을 가리켰다. "저게 뭐야?" "음... 저게 바로 어제 할머니랑 아빠랑 네게 얘기했던 그 붕대란다. 기억나지 않니?" 애버리를 대신해 아빠가 대답을 해주었다. "어? 오늘은 없을 거라고 했는데?" 아이가 두 손을 위로 마주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일이면 없어질 수 있을까?" 테이트의 물음에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건 뭘 하는거예요?" 맨디는 여전히 붕대며 부목 같은 것에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 양 그렇게 물었다. "그건 맨디가 했던 기브스나 비슷한 거란다. 다 나을 때까지 엄마 얼굴을 보호해주는 거야. 기브스를 하고 있으면 뼈가 안에서 서로 아무는 동안 네 팔을 보호해주듯이 말이야." 아빠의 설명이 끝나자 맨디는 진지한 시선을 애버리에게로 다시 돌렸다. "엄마가 울고 있어요." "엄마가 너를 보니 너무 기뻐서 그런가 보구나." 테이트의 해명에 애버리는 눈을 감고 끄덕거렸다. 몇 초가 지나 다시 눈을 떴다. 그 여자가 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긍정의 표시를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애버리는 어쩌면 불타 죽 었을지도 몰랐을 맨디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너무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사고로 감 정적인 상처들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맨디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앞으로 자신에게 닥 쳐온 나머지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를 극복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애버리 또한 그들이 생각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죄의식과 슬픔의 공포에 휩쓸렸다. 전혀 예기치 않게, 맨디가 손을 내 밀어 애버리의 멍든 뺨을 만지려고 했다. 테이트가 맨디의 손이 닿기 바로 직전에 아이의 손을 나꿔챘다. 맨디의 손을 다시 아래쪽 으로 천천히 끌어내리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타일렀다. "엄마를 아프게 해선 안된단다, 아가..." 아이의 두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아이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엄마에게 마음이 기운 거였다. 애버리는 맨디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자발적인 모성애의 충동에 응하 면서, 손을 뻗었다. 아직 채 아물지도 않은 손으로 그 여자는 맨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 다. 아이가 버티는 힘만큼 상처의 아픔이 골 속으로 전해져왔지만, 그래도 애버리는 아이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끌어당겼다. 맨디는 애버리의 옆에 작은 몸을 구부리며 소담스레 앉았 다. 애버리는 계속해서 맨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겨우 기어나오는 작은 소리로 이런저런 아이 어르는 말흉내를 냈다. 애버리의 그 모호한 달램이 아이에게도 그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맨디가 울기를 멈추고 앉아 온순하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난 우유를 엎지르지 않았어요, 엄마..." 마음이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애버리는 팔 안에 그 애를 꼭안아주고 싶었다. 그 엄청난 재 난에서 살아난 것만 해도 어딘데, 그깥 우유를 엎지르고 아니고는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일 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애버리는 서 있는 테이트를 건너다보며 맨디를 말했다. 테이트더러 안아들라는 표시로. "너무 오래 있는 것 같구나, 맨디. 엄마한테 작별 뽀뽀를 해드리렴?" 테이트가 안아든 맨디를 엄마에게 기울이며 말했다. 맨디는 아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의 목을 감고 있던 두 팔에 힘만 더 줄 뿐이 었다. 아예 얼굴을 저편으로 돌려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곧 돌아오겠소." 맨디가 그러는 게 결코 엄마에게 섭섭해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테이트는 나중에 적당한 때에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몇 분 후, 테이트 혼자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사실에 갔더니 간호사들이 맨디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더군. 그래서 그 애를 맡기고 오 는 게요."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몸을 낮추고 두 무릎사이에 양손을 깍지를 꼈다. 그는 아내 를 보지않고 깍지 낀 손마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 외로 오늘 반응은 좋은 것 같아. 주말에 다시 데려와도 될 것 같은데. 적어도 난 그 렇게 생각해. 여기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당신도 그렇소?" 테이트가 아내의 의중을 알아보려 어깨 너머로 힐끗 눈길을 보내왔다.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는 다시 자신의 두 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야... 사실 난 맨디가 오늘 당신을 만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 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사실이야. 아무런 확신도 생기질 않아... 그 애가 무엇인가에 얼 만큼, 또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이 없어. 오늘 일만으로는 모든 게 좋아졌다 고 단언할 수도 없어. 캐롤!..." 그의 목소리에 섞인 절망감이 애버리의 마음을 쥐어 뜯고 있었다. "맥도날드 가게에 가면 그 애가 항상 얼래줄넘기 놀이를 하곤 했었지. 거기도 가봤어. 그렇 지만 이젠 아무것도!..." 테이트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엉거주춤 앉은 채, 두 손바닥 안으로 고개를 쑤셔박았 다. "행여 맨디의 마음이 움직여줄까 하는 바램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봤어. 하지만!... 이젠 뭘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구!..." 안타까운 마음에 애버리는 팔을 들어 그의 뒷머리카락을 쓸며 매만졌다. 순간, 테이트가 주 춤하며 마치 손을 탈쳐내듯 고개를 들어 애버리를 쳐다보았다. 애버리도 반사적으로 아주 빨리 팔을 빼냈다. 그 바람에 그 여자의 팔에 심한 통증이 왔다. 애버리가 신음을 했다. "미안해, 여보." 테이트가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 그 여자 쪽으로 다가왔다. "당신 괜찮아? 누구라도 부를까?" 애버리가 머리로 싫다는 내색을 했다. 그리고는 수줍어하며 얼굴 위로 미끄러져내린 스카 프를 제대로 하려고 애썼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가슴이 드러나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애버리는 그가 자기의 추한 알몸을 보지 않아 줬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다. "맨디 걱정은 하지 말아요. 시간이 흐르면 지금보다야 좋아지지 않겠어? 좀 전의 그런 푸 념도 단지 내가 지쳐있어서 그런 것 뿐이니까. 선거운동도 조금씩 확대되고 있어. 그리고... 아냐, 신경쓰지 말아요. 그야 내 사업일뿐이지 당신 것은 아니니까... 그만 가봐야 할 것 같 군. 우리 두 사람의 방문이 당신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테니까. 수고했소, 좀 쉬도록 해요. 안녕, 캐롤..." 이번엔, 그는 작별인사로 애버리의 손가락 끝을 부벼주는 일조차도 해주지 않고 그냥 사라 져버렸다. 9 "우리가 자넬 귀찮게 하고 있는 겐가?, 테이트?" 테이트가 켕기는 표정으로 그 의 선거 매니저 에디 파스칼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미안하네. 에디가 자기 때문 에 마음 불안해 할 것이라고 십분 인정을 하며 테이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가죽소파에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연신 되돌임질 하던 연 필 돌리기를 멈추었다. 좌중의 사람들 모두가 한나절 동안 계속 집안에만 있었 다. 예비선거를 앞둔 이 마지막 몇 주 동안의 선거운동 전략의 윤곽을 잡기 위 한 회의를 계속했던 것이다. 도대체 자네는 어딜 헤매고 다닌 겐가? 답답해 하 는 표정으로 에디가 물었다. 엘 파소와 스위트워터 사이의 어느 것이었어. 그런 데 이봐, 에디. 자네 웨스트텍사스를 뚫는다는 게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 는 거야? 그렇고 말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지. 잭이 맞장구를 치며 에디를 거들고 나섰다. 그 사람들은 너를 기다리고 있어. 있는 그대로의 텍사스의 가치 에 대해 그들에게 격려연설을 해 줘야 해. 형 말대로 난 모든 가능성이 있는 것 처럼 마냥 떠들 수야 있겠지. 그렇지만 그릇된 희망이나 공허한 약속을 한다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형도 모르는 것 아니잖아요? 이번엔 아버지 넬슨이 한마디 했다. 우리가 네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한다고는 생각지 말거라. 그렇지만, 이런 것도 염두에 둬야지. 데커 상원의원은 석유사업이 곤경에 빠지게 된 데에 부분적으로나마 책임을 지 고 있어. 그는 아랍국가들과의 무역협정을 지지했었지. 지금은 어떠냐? 실업상태 의 유정 파는 인부들 입장에서야 그 부분에 대해 뭔가 확실한 대답을 해줄 것을 기다리지 않겠냐는게지. 테이트는 회의탁자 위에 연필을 던지고 일어났다. 청바 지 주머니 속으로 두 손을 집어 넣으며 그는 창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 밖의 날씨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봄이라기엔 아직은 이른 감이 좀 있었지만, 그래도 박태기나무와 수선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목초지의 잔디도 눈에 띄게 초 록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버님 의견에 동의하지 않나? 에디가 물었다. 나 도 동의하기는 해.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지만. 테 이트가 여전히 들을 보인 채로 대답을 했다. 나도 밖으로 나돌아다니면서 데커 상원의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들먹이고, 또 어느정도는 낙관적인 점도 베 풀면서 다니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는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난 여기 있어야 해.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야. 캐롤과 함께? 그래 그리고 맨디와 함께. 맨디의 심리치료사가 한 말 생각 안나니? 그 애에게 필요한건 이제 시간 뿐이라고 하지 않아? 그리고, 캐롤이 집에 돌아오면 맨디는 자연적으로 나아질 거라고 하지 않 았어? 잭이 말했다. 그랬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여기에 있거나 없거나 맨디 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야. 캐롤만 해도 그렇다. 지금 같은 상태에 서 그 여자를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난 같이 있 어야 해. 성급한 테이트의 목소리였다. 적잖이 수세를 느꼈는지, 테이트는 나머 지 세 사람과 마주 대하기 위해 몸을 획 틀었다. 같이 있으면 네가 뭘 해줄 수 가 있다는 거야. 그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해야 시퍼렇게 멍든 왕방울만 한 두 눈을 뜨고 찾아온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일 밖에 더 있어? 이런 제기 랄. 그 눈빛이 얼마나 섬뜩하던지. 퉁명스럽게 잭이 말했다. 테이트의 얼굴은 형 의 무감각한 그 한마디로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닥쳐라, 잭. 노기등등한 테이트 의 눈빛이 심상찮다고 느꼈는지 넬슨이 고함을 질러서 재빨리 잭의 입을 틀어막 았다. 그런 아버지를 시야 밖으로 밀어내며 테이트가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 래, 형 말대로 하릴없이 병실에 앉아서 얼굴이나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그 이상 어떻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 러니까 그렇게 하는 게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말야. 형이 말한그런 한심한 짓이란 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않아? 몇 주 전에도 내가 분명히 이런 말을 형에게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디가 난처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우리 모두가 캐롤이 이 집보다야 병실에 있는 게 훨씬 좋을 거라고 동의하지 않았나? 물론 그랬지. 잭이 에디의 말을 잘라버리고는 대 화에 다시 끼어들었다. 이것 봐, 테이트. 여지껏 캐롤은 병원 안에 있는 일반환 자들 이상으로 왕족 같은 대우를 받아왔어. 더구나 요즘 들어서는 하루가 다르 게 회복되고 있지 않니? 내가 그렇게 말했던 건 그냥 말을 재미나게 하지고 그 런 거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구, 봐라. 살갗에 뻘건 기운만 다 가시고, 머리카락만 좀 더 자라고 나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게 될거 야. 그런데 문제될 게 뭐가 있다고 그 난리냐, 난리는? 육체적인 회복도 회복이 지만, 문제는 아직도 정신적인 쇼크상태에 시달리고 있다는게 심각한 문제 아 뇨? 좀 전의 수세와는 달리 약간 분위기를 다잡은 테이트가 어쩌나 보자는 식으 로 내던진 말이었다. 아무도 그 점에 대해서 걷불리 말하는 사람은 없어, 테이 트. 아니나 다를까 넬슨이 정확하게 꼬집어 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네 마음이 그 렇다 해도, 지금 넌 네게 주어진 기회를 허투로 넘겨버려서는 안돼. 네가 네 안 사람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만큼, 선거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게 다. 아버진 제가 그걸 잊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테이트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되물었다. 물론 알고 있겠지. 에디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자네로서는 캐롤에게 쏟는 노력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것까지 부인하진 않겠어. 하지만, 캐롤은 내가 없으면 안되네. 내가 꼭 필요해. 닥터 소여 말로는 오랜 시간 혼자만 있게 되면 무척 우울해진다고 했어. "젠장 할, 캐롤이 우울해 하는지 아니면 마음 속으로 웃고 있는지 그 작자가 어떻게 안다는 거야? 빌어먹을, 캐롤은 아직 아무말도 못하는데 말야! "잭!" 넬슨이 냅 다 고함을 내질렀다. 군대시절, 건방진 공군장교를 혼내줄 때 늘상 써먹던 어조 였다. 그는 예비역 공군대령의 매서운 눈매로 그의 큰아들 잭을 노려보았다. 잭, 테이트 형제가 다 자랄 때까지도 손찌검 한번 하지 않고 키워낸 넬슨이었다. 가 끔가다 한번씩 정히 필요할 때에 한해서만 엄하게 나무랐다. 그것도 대개는 노 기어린 시선과 거친 어조의 고함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그들 형제에게는 가히 매질에 가까울 만큼의 효력을 냈던 것이었다. "잭, 그렇게 남의 일 말하듯 하지 말고, 네 동생이 처한 곤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해 봐라, 제발." 잭은 아버지 의 뜻을 받을어야 한다는 일차적인 존경의 발로라는 게 참담할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얼굴에 노기를 삭이지 않은 채로 의자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캐롤 이야말로 이번 여향을 포기하지 말라고 네게 얘기해줄 첫번째 사람일 게야, 테 이트. 넬슨이 더욱 침착한 억양으로 테이트에게 권고해 주었다. 내 마음 속에 그 런 확신이 없다면, 이런 말을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있겠냐? 나도 아버님과 같은 생각일세. 저도 두 분 말씀에 동감입니다. 사고만 아니었더라도 캐롤은 지금쯤 저와 함께 짐을 싸고 있었을텐데. 다음 말을 이으려 하며 그는 긴장과 피로로 뻣뻣해진 뒷목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내가 떠날거라고 그 여자에게 얘길 하면, 캐롤의 눈망울은 당혹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겠죠. 눈에 선해요. 여행 내내, 그 모습이 절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예요.. 애처롭습니다. 어떻게 보든, 그건 캐롤에 게는 안된 일이 아닙니까. 여행이니 어쩌니 하기 전에 제가 고려해야 할 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저의 부재에 대해 캐롤이 어떻게 반을을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만 한다는 거죠. 적어도 그게 제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좌중으로부터 조용 한 감정적 동요를 느꼈다. 테이트의 말처럼, 그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자기들이 원하고 있는 공통적인 바램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하나 테이트가 방금 들먹 은 그 문제에 관해 사려깊은 배려를 했덤 사람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테이트 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 방에서 나온 테이트는 곧장 집 밖으로 나왔다. 5분도 안돼서 그는 목장의 목초지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제멋대로 방목되고 있는 잡종 육우떼 사이를 지나치면서도 마음 속엔 별달리 목 적지도 없이 앞으로만 달렸다. 지금 이 순간, 테이트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한 개인으로서의 자유였다. 이 평화로운 들판과도 같은 여유가 그에겐 필요했다. 요즘 들어 그는 혼자 있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외견상으로 외로움 같은 건 끄 트머리조차도 기어들지 못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과 빡빡한 일정 속에 옴쭉달싹 도 못하고 끼어있던 그였다. 그러나. 그의 전생애를 두고 지금처럼 외롭고 고독 한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아버지, 잭 그리고 에디는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서는 이를 데 없이 좋은 조언자였지만,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해선-그렇다, 이런 문제야말로 철저히 개인적인 고민이 아니가.- 빈 수수깡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 로지 테이트 혼자만이 해결해야 했다. 구는 두 주 전 맨디를 캐롤에게 처음 데 려갔던 날, 의아스럽기 그지없던 캐롤의 손길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손길 뒤에 감추인 캐롤의 마음이 무얼 의미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두 주 동안, 그 일을 두고 줄곧 다시 생각해보고 분석해 보았지만 결 코 허투로 지날 일도, 또 쉽사리 잊혀지는 일도 아니었다. 테이트 자신이 얼결에 놀라 뒤로 목을 젖혔을 만큼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여자의 손 끝에서 오는 느낌은 말할 수 없이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비록 짧디 짧은 순간이었지만. 데 이트는 그것을 그와 캐롤이 함께 했던 가장 예정어린 애무로 생각했다. 두 사 람의 첫키스 때보다도, 둘이 처음으로 깊은 사랑을 나눴던 때보다도, 그리고 마 지막으로 사랑을 나눴던 때보다도 훨씬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느낌이 들었 다. 그는 석회석 언덕 사이를 졸졸 흐르며 목마른 봄의 대지에 목을 축여주는 작은 시냇가에 고삐를 틀어 말을 멈추게 했다. 땅으로 내려섰다. 가시나무, 삼목, 그리고 콩과의 관목나무들이 바위 투성이의 대지에 파릇파릇 점을 찍고 있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강했다. 어찌나 매서운지 금새 볼이 얼얼해지고 눈가에 물기까지 어리게 했다. 자켓도 없이 날셔츠 바람으로 나오길 괜히 그랬 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볕이 따뜻해서 그런 대로 견딜만은 했다. 그날, 캐롤 의 손길은 그를 놀라게 하기엔 너무도 충분한 것이었다. 전연 캐롤답지 않은 행 동이었지 않은가. 본래 남다를 다루는데는 천부적이라고 해야할 만큼 타고난 여 자였다. 아직까지도 두 사람이 멋모르고 사랑하던 연애초기시절을 떠올리면 테 이트의 숨이 힘들어질 만큼 그 여자는 대단한 여자였다. 그 여자가 어떤 것을 원하든, 캐롤은 손끝만으로도 남자를 자기 멋대로 달궈놓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 손끝으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없을 만큼 그 여자는 자신의 속깊은 갈망을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테이트는 그 차이 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염려와 걱정과 동 정의 손길이었다. 순수하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계산이라곤 전혀 없 는 연민과 사랑 그 자체였다. 전연 캐롤 같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말발굽소 리가 들려왔다. 넬슨이 말을 멈추고는 테이트가 몇 분 전에 했던 동작처럼 날쌘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애비도 말을 타고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승마 하기엔 정말 좋은 날씨야. 안그러니 테이트?" 아버지는 머리를 한껏 뒤로 제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알아요, 저를 재촉하시려고 따라오실 거라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넬슨이 쿡쿡 웃으며 오랜 세월 바람에 씻겨 하얗게 센 바위를 고개짓으로 가리켰다. "네 어머니가 이쪽으로 가는걸 봤다더구나. 네가 나가자마자 샌드위치를 들고 방으로 올라오더니 오늘은 그만 얘기를 하라고 하 지 뭐냐. 나보고는 널 뒤따라가보라면서 말이다. 네가 슬퍼하는 것 같다면서." " 어머니가 잘 보셨군요" 글쎄다 극복해야 할 문제 아니겠니? 어렵겠지만." 완곡한 말투였지만, 테이트가 듣기엔 오히려 더 강한 명령인 것만 같았다.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군요. "시작 때부터 이번 선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너도 알 고 있었지 않니? 우리가 당초에 얘기했던 것 말고 달리 기대했던 거라도 있는 게냐?" "선거에 대해서라면 이젠 문제될 게 없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돼 있으니 까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테이트의 갈라진 턱 끝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굳 은 의지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럼 캐롤과의 일이 문제란 말이지? 너 역시 두 사람 간의 관계가 이 이상 더 소원해진다거나 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되 는 게냐?" 아버지의 어림짐작에 테이트는 머리를 돌리고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아버지는 요즘 캐롤에게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걸 알고 계세요?" "소여 박사가 말하지 않던? 완쾌된 후에도 그 아이의 겉모습이 사고 전과 아주 같을 수는 없 을 거라고 말이다. 약간은 달라진 구석도 있겠지만,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이니 너 무 염려는 하지 말라고 했잖느냐? "신체적 변화가 아니구요. 저는 캐롤의 심정 적인 변화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그 여자가 반응하는 게 뭔가 달라졌다는 거지요. "글쎄다 잘 모르겠는 걸? 예를 들면 어떤 거냐?" 테이 트는 캐롤의 두 눈이 반신반의하거나 근심, 걱정 따위의 표정으로 변하는 몇가 지의 예를 들려주었다. 아들의 말을 빼놓지 않고 다 듣고 난 넬슨은 무언가 말 을 하려다 말고 꽤 길다 싶은 시간 동안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난 말 이다. 그 아이가 그런 우려의 빛을 보이는 게 오히려 당연한 게 아니냐고 반문 하고 싶구나. 너라면 그렇지 않겠니? 아무리 제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 다손 치더라도, 어찌됐든 캐롤은 제 얼굴을 송두리째 뜯어고친 입장이 아니냐. 어느 여자라도 그런 불안감을 나타낼 밖에. 더우기 캐롤같이 미모를 자랑하던 입장에서야 본래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다면 왜 불안해 하지 않겠니?" "저도 그건 아버지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테이트가 중얼거렸다. "걱정도 걱정이지만, 그보다도 전 캐롤이 격분할 게 염려가 돼요. 그 리고 저로서는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오직 저만이 느끼고 있는 느낌 이 있단 말이죠." 테이트의 초점이 일순간 흐려졌다. 캐롤에게 맨디를 처음 데려 갔던 그때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캐롤의 병실에 맨디를 세 번 데려갔습 니다. 번번히 맨디를 놓지 않고 울기만 했죠." "그거야 아이를 잃을 뻔 했던 기 억 때문이었겠지. 생각해 봐라. 그렇게 아이를 잃는다면 얼마나 허망해지겠니? 아이를 볼때마다 그 생각이 나서 아찔해지는 걸 게야." "아버지께서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겁니다. 한번은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 자 홀 가운데 캐롤이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휠체어에 앉은 채로 거기서 내내 우리가 도착하길 기다렸던 거에요. 새 틀니를 끼우기 전이었으니 머리가 온전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머리엔 스카프를 두르고, 다리엔 기브스를 한 그대로 거기 서 우릴 기다렸다구요." 고개를 갸우뚱 하며 테이트가 머리를 흔들었다. "끔찍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담해보였어요. 평소 캐롤 같았으면 상 상이나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습니까?" "그야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랬던 거 겠지. 침대에서 나와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확인시키고도 싶었을 테고 말이다." 잠깐 동안 아버지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을 지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지껏 캐롤이 제 자신 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본 적이 있었던가. 안면근육 이 당겨 제대로 미소를 지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맨디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 을 나섰을 때 두 사람을 보고 반갑게 미소짓고 있던 것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 다. 얼굴은 일그러진 채 미소를 짓고 있다기 보다는 찡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 기만 했지만, 테이트는 그 여자가 웃어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요, 아버진 캐롤의 행동이 진심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뭐." 넬슨이 주저하면서 말했다. "난 그저." "일시적인 거라고요?" "그래."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대답을 했다. "난 다 알고 있다, 테이트. 네가 알고 있으리 라는 걸 너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네 개인적인 문제까지 간섭하고 들자는 건 아니다. 네 어머니와 난 너와 네 형과 모든 가족들이 여기 이 목장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린 네 개인적인 일에 대해 서는 가급적 쓸데없는 간섭은 안하려 했던 거지. 그건 네 형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단다. 정말 간섭할 마음이었다면, 난 네 형수 도로시 레이의 알콜중독 을 치료하도록 과감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또 팬시에게 담배를 당장 끊으라 고, 너같은 건 업어져야 한다고 마구 욕설을 퍼붓고야 말았을 게다." 다음 말을 하기 전, 넬슨이 숨을 고르느라 잠시 말하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건 이 얘기 가 나오기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얘기이다만, 난 네가 캐롤과의 이런 식의 결혼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 좀 더 주도적으로 노력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너희 둘 사이가 벌써 몇 년 전부터 벌어져왔다는 걸 애비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겸연 쩍은 듯 양 손을 펼쳐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속 깊은 얘기까지 말하 라고 하는 건 아니다. 그런 것까지 알 필요야 있겠니, 어디. 단지 내 혼자 생각 에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 뿐이니까 정도야 어찌됐든.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부부든지 어려운 ㄸ를 맞을 때가 있는 게다. 네 어머니와 난, 너의 두 사람이 서 로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도 하나 쯤은 더 가지고, 워싱턴으로 가서, 거기서 늙을 때까지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이번 사고가 오히려 두 사람 이 가졌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좋은 기회인지도 모르잖니? 하지만, 성급하게 마음을 먹는다거나 그러지는 말거라.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만 할 건 아니다. 한가지 일을 두고 그것이 전체인 것 처럼 생각하면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을테니까. 어쩌면 너로서는 지금까지 캐롤과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거다." 테이트가 아버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그 말의 타당한 점과 숨은 뜻을 읽어내며 아버지의 말을 재확인해보았다. "제가 괜한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군요." "난 가능성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뿐이다, 테 이트." 아버지가 재차 강조하는 어조로 말을 받았다. "대개, 사람이 죽음의 숲에 가까와지면 평소 때보다 훨씬 너그러워지는 게 보통지지. 눈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사고를 당하면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해준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죄의식을 느끼면서 선한 면들을 보이곤 하지 않니?" 넬슨은 아들의 무릎 위에 가볍게 한 손을 얹었다. "아무래도 애비 생각으로는, 네가 캐롤에게서 발견하고 있다는 그 변화라는 것이 바로 그 런 게 아니냐는 게다. 난 네가 이번 사건으로 그 아이가 지난 모든 잘못을 시인 하고 완전히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무적정 믿어버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소여 박사도 캐롤의 외모에 대해서야 이렇다 저렇다 자신있게 말을 했지만, 그 아이의 심리적인 변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안했지 않니?" 테이트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아버지 말씀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숨을 크게 들이쉰 테이트가 다 시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아버지 말씀이 옳으세요 저 역시 캐롤 이 보여준 요즘의 행동들만 가지고 섣부른 희망을 가지려 한 게 사실이니까요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넬슨이 넉넉해 뵈는 표정을 지으면 테이트의 어깨에 가 만히 손을 올렸다. "너 자신에게, 또 그 아이한테는 더더욱, 필요 이상으로 다그 칠 생각은 말거라. 무엇보다도 지금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게 아니겠니? 투자 를 한다고 생각하렴. 기다림보다 더 값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시간이 얼마가 걸 리건, 묵묵히 기다려보거라, 일생 동안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해도, 그건 값진 기 다림인 게야." 두 사람은 말에 올라 집 쪽으로 고삐를 틀었다. 집까지 돌아오는 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굿간 앞에 다다르자, 테이트 가 안장에 기대며 비스듬히 돌아앉아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 연설여행 은." "결정했니?" 넬슨이 오른쪽 다리를 허공에 날리며 땅에 발을 디뎠다. "제가 양보하지요. 일주일 간만입니다. 그 이상은 가 있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고삐 를 쥔 손으로 아들의 허벅지를 정감있게 한차례 쳐주었다. 그리고는 고삐를 아 들에게 넘겨주었다. 흐뭇해 하는 미소가 그의 얼굴 위에 잡히고 있었다. "애비 말을 알아들어줄 주로 알고 있었다. 잭과 에디에게 전해주마." 아버지가 들을 보 이면 집 쪽으로 앞장섰다. "아버지." 넬슨이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고맙습니 다." 넬슨이 손을 흔들며 아들의 감사를 마다했다. "말들이나 적당히 넣어두고 들어오렴." 테이트는 아버지의 말을 잡아끌어 마굿간 쪽으로 갔다. 말에서 내려 선 테이트는 말타기를 처음 배울 무렵, 안잔에 앉는 법도 배우기 전에 먼저 배 웠던 말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분 후, 말 궁둥이를 마사지해주던 그는 힘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 테이트는 캐롤의 동정어린 따뜻한 손 길이 그리웠다. 아주 간절하게. 그는 그 여자의 손길 뒤에 숨겨진 감정이 자기가 생각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나 어린 맨디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지금의 변화가 지속되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 의문에 해답은 시간만이 내려줄 수 있을테지만, 아버지의 말도 일견 옳다는 생 각은 들었다. 이전에 그 여자가 밉보인 일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약간의 변화에도 온 신경을 다 쏟는 것인지도 몰랐다. 테이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억지로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그 여자를 갑자기 그렇게까지 믿고 있음을 마땋찮게 여기ㅁ서도, 또 한 편으론 자신도 모르게 비어져나오는 의혹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할!" 10 "그런 다음엔, 텍사스 테크니컬 스쿨에서 있을 강연을 대비해서 미리 이름을 알리러 그를 보내야 하는 겁니다." 잭이 테이티의 여행일정을 그의 제수 캐롤에 게 상세히 설명하다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너도 알다시피, 테이트. 그 지역 엔 어마어마한 목화농장이 많이 있어. 그쪽에 사는 농부들만 해도 어디냐? 에디 가 거기 소비조합이나 다른 단체에서 연설을 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구나." "에 디가 빠뜨렸다면 형이 내 대신 좀 일러줘요. 일절을 잡도록 말이예요. 전략적으 로도 아주 필요한 지역이니까." "그래. 일정을 잡아야지. 꼭 기억해야겠어." 침대 에 누운 애버리는 테이트와 잭 형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들 두 사 람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가족이라고 생각할 만큼 서로 닮은 데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서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너무나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잭 러트리지는 테이트보다도 족히 3년은 더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테이 트보다 약간 더 검은 듯한 모발을 위로 갈수록 성글었다. 배가 나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의 체격은 테이트보다 나아보이지 않았다. 잭은 언제나 꼭 털실을 헝클어 놓은 것처럼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다. 테이트는 아무리 그렇게 되려고 일부러 해도 안될 것 같았다. "테이트를 제수씨 곁에서 너무 오래 떼어놓 는 것 아니예요? 용서해요, 캐롤." 애버리는 잭이 말을 하는 동안 한번도 자기에 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는 걸 느꼈다. 늘 그랬다. 여지껏 병원에 들를 때마다 잭은 그 여자의 얼굴을 바로 보지 않고, 늘상 그 여자의 가슴, 그 여자의 손, 그 여자의 다리의 기브스 언저리에 시선을 떨어뜨리곤 했다. "선거운동에 중요한 부 분을 차지하지만 않는다면 제수씨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이러지는 않을텐 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애버리가 손으로 쥐기에는 너무 굵은 연필을 쥐고 한 위에다가 '괜찮아요.'라고 흘려썼다. 잭이 고개를 숙여 그 여자가 쓴 것을 읽고는 애버리에게 엷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잭과 그의 제수 사이에 는 어떤 유쾌하지 못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애버리는 그것의 정체를 짐작하 고 있었다. "오늘 쯤이면 약간씩이라도 말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테이트가 그 러던데요?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제수씨가 그전처럼 다시 말을 하는 걸 들으면 굉장히 기쁜 일이지요." 잭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애버리는 자기가 아직 속 에 담고 있는 그 말이 정작 테이트에겐 얼마나 불ㅋ하기 짝이 없는 얘기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애버리가 손으로 연필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뒤에 도 사실 여부를 바로 알리지 않고 오히려 자기로 하여금 계속해서 제 아내라고 믿게끔 한 이유를 따지고 들 것이다. 그 여자 역시 그런 자신을 이해 못하고 있 기는 마찬가지였다. 애버리의 두 눈에 북받치는 감정으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 다. 그걸 본 잭이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문쪽으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런, 늦겠군. 집까지 갈 일도 한참인데. 잘 있어요, 캐롤. 테이트, 안가니?" "난 좀 더 있다가 가겠어요. 로비까지 함께 갑시다." 몇 분후에 돌아오겠다고 캐롤에게 이 야기한 후 테이트는 그의 형과 함께 방을 나왔다. "탐탁지 않아 하는 것 아니 냐?" 조심스럽게 잭이 물었다. "요 며칠 예민해져 있었어. 마음쓰지 마, 형." "캐 롤이 다시 목소리를 찾게 된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던데? 왜 그런 거 냐?" "또박또박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니까 짜증이 나는가 보지 뭐. 형 은 이해못할 거야." 테이트가 외래 진료실의 색유리문을 잡아당기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참, 좀 전에 캐롤이 글씨를 쓸 때 좀 이상하다고 못느꼈니?" "이상하 다니?" 테이트가 두 명의 간화사와 국화 꽃다발을 들고 그 뒤를 따라온 남자가 지나 갈 수 있도록 한켠으로 비켜서며 되물었다. 잭이 바깥으로 나가다 말고 닫 히고 있는 문을 손으로 잡으며 대답했다. "캐롤, 오른손잡이 아니니? 그렇잖아?" "그래요, 오른손잡이." "그런데 왜 왼손으로 글씨를 쓴 거지?" 잭이 어리둥절한 질문을 하자, 곧 테이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두 손을 펴보이며 특유의 몸짓을 해 보였다. "글쎄." 잭이 문에서 손을 떼자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집에서 보자, 테 이트." "운전 조심해요, 형!." 테이트는 어떤 사람이 그 문으로 들어설 때까지 형 이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에 의심스러워 하는 표 정이 비쳤다. 몸을 돌려 다시 병실 쪽으로 향하는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테이트가 나간 동안 애버리는, 요 며칠 새 부쩍 다르게 행동하는 테 이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과 한 주 사이로 그는 너무도 달라지고 있었다. 그 렇다고 발걸음마저 뜸해진 건 아니었지만, 요즈음의 방문은 이미 그 이전의 방 문과는 다른 것이었다. 선거 운동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걸 감안해서 그 여자 도 처음엔 그의 태도변화를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접어두고 있던 것도 사 실이었다. 매번 올 때마다 테이트는 거르지 않고 꽃과 읽을거리를 들고왔다. 애 버리가 음식물을 씹을 수 있게 되자 그는 병원의 지시에 따라 덩어리 음식을 이 것 저것 가져왔다. 가져올 때마다 싫증내지 않도록 매번 다른 음식을 가져오는 세심함을 잊지 않았다. 애버리를 위해 VTR까지 설치해주고 테이프도 이것저것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런 세심함과 따사로움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테이트의 의기소침함이나 우울함같은 것을 그 여자는 놓치지 않고 간파해 냈다. 아니, 자 연스럽게 느껴졌다고 하는 게 더 어울렸다. 병실 안에서 테이트는 말을 조심했 다. 또 결코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애버리가 캐롤의 모습으로 돼가면 돼갈수 록 테이트는 더욱 멀어져갔다. 그는 딸 맨디를 애버리에게 데리고 오지도 않았 다 애버리가 서판 위에 '맨디'라는 이름을 쓰고 그 뒤에 물음표를 찍어서 테이트 에게 내보였다. 그는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 생각엔 자꾸만 맨디를 이리로 데려오는 게 별로 그 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 당신이 다시 집 으로 돌아오면 그애와 함께 있을 시간도 충분할텐데 뭐." 이 무뚝뚝한 말 한마디 가 애버리에겐 상처가 되었다. 하기야 맨디를 만나는 일이 당장 애버리의 무미 건조한 병실생활에 얼마간이나마 자극도 되고,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되기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아이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 아빠가 막아서는 일이 오히려 더 바람직한 일일는지도 모를 터였다. 아이와 같이 있어볼 기회가 없던 애버리로서 는, 뜻하지 않은 혼란 속에 놓인 그여자의 위기의 시간들을 아이에게서 보상받 으려는 무의식적인 갈망에 젖어있기도 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야 오히려 어 떤 식으로든 공연한 감정적 유대는 미리부터 잘라내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리 라. 테이트에 대한 애착은 더욱 복잡했다. 그건 애버리가 언젠가 테이트와의 세 계에서 벗어나 다시금 애버리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 애착을 끊어버리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애버리는 어느정도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 기기도 했다. 누군가가 죽이려 음모를 꾸미고 있는 미국 상원위원에 입후보하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막의 요소들에 대해 눈을 뜨면서 애버리의 기자기질에서 비롯되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테이트의 결혼생활엔 대체 어 떤 문제가 있었을까? 왜 캐롤이 자기 남편을 살해하려 했을까? 애버리의 머리가 진실을 밝혀내려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지가 몸에 배어있던 기자의식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을 생각하면 서 애버리는 육감적으로, 이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진실이 결코 좋은 이야기들 은 아닐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육감이고 예감이었다. 이제 테 이트에게 얽혀있는 문제는 애버리와도 무관하지만은 않은 게 되어 있었다. 애버 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이 문제들에 얽혀버린 것이다. 애버리는 그 문제들의 해결에 있어서 자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는 것을 직감 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이유들로 해서, 캐롤이 결정해 놓은 대로, 저질러 놓은 대로 고스란히 뒷감당이나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테이트에게 자기도 모르게 애정어린 손길을뻗었을 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 한가지 일로만 보더라도 테이트와 캐롤 사이의 갈등의 골이란 일반적인 부부간의 그것을 넘어선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마치 우리 안 에 있는 야생동물에게 하듯이 자기 아내를 대했다. 먹이도 던져주고, 놀아주기도 하지만, 손을 뻗어 만지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뭐든지 아내가 원하는 대로 선선히 응해주기는 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선택적일 뿐이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미루어보건대, 제 아내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감 같은 건 아예 없는 것 같기만 했다. 그런 테이트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라는 느낌이 들기 도 했다. 바로 그것,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그 여자의 뇌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잭을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테이트는 골치 아픈 생각일 랑은 잠깐이나마 접어두는 게 나을 성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병실로 들어 왔을 때, 애버리는 테이트를 반갑게 맞으며 미소짓던 걸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 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던 것이다. "당신, 왜 왼손으로 글씨를 쓴 거지?" 순간, 애버리는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거였다. 이 진실의 순간이, 이 기회 가 자신 앞에 주어지기를 계속 기다려왔지만 정작 진위의 갈림길 앞에서, 그 여 자는 그 기회를 선택할수도 없었다. 어리석었어.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니! 캐롤이 어느 손을 쓰는 여자였는지, 왜 신경을 쓰지 않았단 말인가. 다급한 마음에, 그 여자는 간청하듯 그를 바라보며 소리를 내어 테이트의 이름을 불러 보려 했다. 왼손에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마음 속으로 애버리는 '하느님, 도와주 세요!'라고 기도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만 하면 곧바로 얘기를 해야잖은가,.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고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테이트는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설령 선거에서 이긴다고 해도 취임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 끔찍한 날이 내일, 아니 오늘밤에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어쩌면 11월까지 일어나지 ㅇ낳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애버리는 조심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과연 그 여자가 죄를 씌울 사람은 가족 중 누구란 말인가? 애버 리가 글을 쓸 수 있게 됐음에도 그 엄청난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건, 당시로 서는 사건에 대한 내막을 충분히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릴없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그 해답을 제공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었다. 애버리가 알 고 있는 불확실한 사실을 대충이라도 테이트에게 말한다면, 그는 믿어줄까? 그 가 무엇때문에? 거의 두달 동안이나 자신의 아내인 체 한 여자에게 그가 과연 귀를 기울일까? 아마도 테이트는 애버리가 맨디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이, 괘씸 하게도 이 비극적인 사실을 단지 흥미있는 기사거리로만 여기고 파헤치려 든 비 양심적인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애버리는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 연필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감았다. 그리고는 'H'라고 흘려썼다. 글씨 를 쓰는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애버리는 그만 연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래 로 굴러 떨어진 연필이 그 여자의 허벅지를 타고 엉덩이와 시트 사이에 끼어들 었다. 테이트의 마디굵은 손이 연필을 집어들었다. 그가 애버리의 손에다 연필을 다시 쥐어주며 서판 위를 가리켰다. "H라니? H가 뭐야?" 애버리의 눈동자가 애 원하듯이 조용히 그에게 모아졌다. 그리고나서는 쓰던 글자를 마저 다 썼다. 글 자를 다 쓰고나서 서판을 그를 향해 돌려 보였다. "고통?"테이트가 고개를 갸우 뚱 하며 작은소리로 읽었다. "오른손을 사용하는 게 고통스럽다고?" 죄 지은 사 람마냥, 애버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고통..스러원요." 애버리가 작은 목소리 로 겨우 이 한마디를 흘려보내며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올렸 다. 마음 속으로 애버리는 자기가 하고 있는 거짓말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낱 낱의 모든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섣불리 입을 열어서는 안되는 일이 었다. 그 엄청난 사실에 비해 별 수고없이 제멋대로 꾸며댄 단어 몇 개가 각기 당황해 있던 두 사람 모두를 해방시켜준 것이었다. 요즘 같은 심리상태에서라면, 누군가가 자기를 죽이려든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들지 않을게 뻔한 일이기도 했거니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그 여자는 가지 고 있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테이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짤막하게 이야 기했다. "형이 놀랐는가 봐. 실은 나로서는 당신이 오른손으로 썼는지 왼손으로 썼는지 자세히 보지 못했으니 이렇다 저렇다 말은 못했지만. 그런 걸 다 살필 만큼 여유가 있는 게 아니거든. 요즘은 특히." 테이트가 양손을 허리춤에 대고 뒤쪽으로 등을 시원스럽게 제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운전을 하는 게 너무 버거 웠나 봐. 이런, 시간도 많이 늦었군. 당신, 내일 쯤이면 기브스 풀 것 같던데. 참 잘 됐어. 앞으로는 움직이기가 더 편해질테니까." 애버리의 두 눈이 눈물로 흐렸 다. 자상하고 친절한 테이트, 이 남자가 진상을 알게 되면 얼마나 증오하게 될 것인가. 사고 이후의 짧지 않은 회복기간 동안, 알게 모르게 그 여자의 유일한 의지가 되어준 테이트가 아닌가. 이런 사실을 그가 알든 모르든 간에, 애버리 쪽 에서야 육체적, 정신적 회복을 그에게 의지해 온 입장이었지 않은가. 이제 애버 리는 그에게 세 가지의 불쾌한 진실 - 그의 아내, 캐롤 러트리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과, 자신은 테이트의 사생활에 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는 방송기자 라는 사실, 또 누군가가 그를 고의적으로 암살하려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써 그의 친절에 보답해야만 하다니. 애버리의 눈믈을 그의 동정을 샀다기 보다 는 오히려 그를 화나게 했다.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던 테이트가 창턱에 쌓 아 놓은 신문더미에 주의를 돌렸다. 그가 가져가 준 비행기 사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문있었다. 테이트는 신문을 향해 몸짓을 했다. "캐롤, 나는 당신이 왜 우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이젠 얼굴도 많이 좋아졌는데 말이야. 하마터면 죽 을 뻔 했던 당신이야. 맨디도 마찬가지였고. 살아있는다는 것만으로도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 안들어?" 퉁명스럽게 핀잔을 준 테이트가 이러면 안된다는 생 각이 들었는지, 다시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화를 누그러뜨리려 깊은 숨을 대여섯 차례 들이마셨다. "미안하오, 여보. 이렇게까지 심하게 화를 낼 것도 아닌데. 나 라고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 모르겠어? 알아. 지옥에 가도 당신이 겪 는 고통보다는 덜할 거야." 그는 가끔씩 청바지와 어울려 입는 스포츠 자켓에 손 을 뻗어서 몸에 걸쳤다. "또 올께." 그 말 뿐이었다. 그렇게 혼자 남겨두고 휑하 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테이트의 그림자라도 잡아보려는 것처럼, 래버리는 한참 동안 문쪽을 바라보았다. 간호사가 들어와 잠자리를 준비해 주었다. 애버리는 휠 체어에서 내려와 목발을 짚었다.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성치도 않은 손으로 목발 손잡이를 잡는 것부터가 우선 견디기 어려웠다. 뒤뚱대던 몸을 겨우 바로 세우고 났을 때, 그 여자는 이미 지쳐있었다. 애버리의 마음도 몸만큼이나 피곤 했다. 자리에 누운 후에도, 애버리는 쉽사리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테이트가 진상을 알게되었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날 표정을 상상해보았다. 그의 삶이 또 다른 격동에 휘말리게 될 게 뻔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커다란 피해 를 입을 것이다. 마음 속에 '피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애버리는 그 새롭고 두 려운 생각에 괴로와졌다. 애버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날로, 테이트를 죽이려든 사 람이 누구건 간에 애버리 역시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왜 이런 생각 을 미처 하지 않았을까? 애버리 다니엘즈가 방송기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 간, 음모의 주동자는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했던 걸 기억해 낼테고, 당연히 애버 리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올 것이 뻔할텐데. 애버리가 범인의 목소리를 들었 다는 걸 안 이상, 두 사람 모두 입을 막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 무서운 생각에 애버리는 더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정체 불명의 복 수의 여신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분있었다. 어두컴컴한 병실 벽에 검게 비치 는 그림자를 보았다. 애버리의 빠른 심장박동 소리가 고막에 윙윙 울렸다. 무엇 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과 테이트를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죽은 캐롤이 대신 살아서 이 상황에 직면했다면, 남편의 안전을 위해 무얼 했을까. 테 이트에게 있어서 숨은 적이 누군지를 알아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신체적 여건만 허락된었다 해도 애버리는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애버리는 아 직도 자기가 다른 여자의 삶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캐롤이 이미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면, 그런 애버리 자신은 또 어떤가. 공식적으 로 애버리 다니엘즈란 여기자는 사고의 희생자로 죽은 사람이 아니던가. 어느 누구도 애버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더이상은 없을 터였다. 애버리에겐 남편도, 자 식도, 심지어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신세가 아닌가. 실상, 본 격적으로 일에 뛰어든다 해도, 성공은 불확실하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사고 이 전의 기자생활에서 있었던 실수-순전히 그 여자의 판단착오로 말미암았던-때문 에, 그 여자는 아버지의 권위있는 명성에 누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후광까지 도 한꺼번에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산 안토니오에 있는 KTEX에서 일한다는 건 그 여자 입장에서는 대가 없는 중노동을 선택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 도 몇년씩이라니. 거래선의 규모로 보자면 그곳도 꽤나 지명도 있는 근무처이긴 했고, 또 어디에서고 면접조차도 허락해주지 않던 어려운 시절에 일자리를 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할 일이라고는 생가하면서도, 애버리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하나같이 시베리아 유형 같은 고약한 일들 뿐이었다. 애버리는 근본적으로 언론 계에서 소외당하고 말았다. KTEX는, 원천적으로 방송업무와 특히 워싱턴 등의 행정구역과는 소원하기만 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금, 그 모든 상황을 한꺼번에 뒤엎을 수 있는 놀랄만한 기사거리가 애버리에게 제공된 것이다. 그 여자가 정말로 테이트 러트리지의 부인이 된다면, 상원의원의 선거운동과 그에 관계된 살인음모를 꾸민 자를 내부사람의 관점에서 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 직은 기사내용을 작성하지는 못했어도, 생각해보면 테이트의 부인으로서의 생활 은 지금도 하고 있는 게 사실 아닌가. 애버리를 다시금 방송계의 정상으로 올려 놓는 데에 이보다 나은 기회가 있겠는가? 이런 흔치않은 기회가 수많은 기자 가 운데 과연 몇에게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여자는 자신의 복직을 위해 아낌 없이 도와줬던 사람들을 기억해냈다. 말하자면 제 오른팔을 기꺼이 내어준 고마 운 사람들이었다. 애버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잦아들었다. 오른팔은 아직도 말 을 듣지 않았지만, 얼굴과 이름 그리고 자신의 존재는 이미 회복되었다. 한 사람 의 생명을 구하고, 거기다 남다른 경력을 쌓자고 하면 이 정도의 고통 쯤은 오 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극적으로 모든 진상이 밝혀진다 해도, 애 버리의 위장에 대해 비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여자가 이런 기회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임의적으로 그 여자에게 주어졌을 뿐이 다. 그렇다고 나쁜 마음에서 테이트를 속이려 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직 업상의 성취감 위에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갸륵함이 담겨있는 일이지 않은 가. 눈앞에 닥친 위험소지야 엄청난 것이었지만, 애버리는 자신이 처한 위험스런 상황 앞에서 비굴하게 몸을 도사리는 영악한 기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애버 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위해 매일매일 위험과 싸운 사람이 아니던가. 그 래서 그 용기를 인정받아 결국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결과를 낳은 게 아닌가. 애 버리는 이 일이 이성적으로 마무리지어야 할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투른 감정이 아닌 실제적인 접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 여자는 테이트의 아내역할과 그와 관련된 모든 역할들을 자연스럽게 해내야 했다. 그의 가족들과도 자연스런 생활을 해내야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캐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캐롤의 일상을 배워야했다. 이 도 전은 실로 생명을 위협할 만큼 아슬아슬한 일이다. 저항이나 도피를 하기에도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까딱만 잘못되어도 그 결과는 가혹한 것임에 틀림없 을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그것에 대한 보상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애버리는 왼손으로 글을 쓴 것 같은 수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 이다. 그러나, 타고난 재기로 그 어려운 상황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고, 얼 마 가지않아 실수 없이 제 위치를 찾고 멋지게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해나갈 수 있을 엇이다. 애버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발에 몸을 의지해 절룩절룩 침대로 몸을 움직여 갔다. 밝게 빛나는 형공등 아래 선 애버리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 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벽에 붙여 놓은 캐롤의 사진과 제 자신을 비교 했다. 닥터 소여가 자신한 대로, 그 여자의 피부는 아기의 엉덩이처럼 부드럽고 혈색도 좋아보였다. 바짝 들여다보지 않는 한 흉터는 신경쓰지 않아도 될 만큼 미미했다. 멀지 않아서 모든 흉터들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캐롤의 앞니는 덧니 였다. 그것 때문에 애버리는 입술을 뒤로 뒤집어서 하는 치음 보철술을 할까 하 고 생각해보았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본래의 얼굴에 대한 슬픈 그 리움이 일었지만, 애버리는 더이상의 감정적 사치를 허락해선 안되겠다고 다잡 아 마음먹었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본래의 얼굴에 대한 슬픈 그리 움이 일었지만, 애버리는 더이상의 감정적 사치를 허락해선 안되겠다고 다잡아 마음먹었다. 이것이 지금의 자신의 운명인 것이다. 애버리 다니엘즈는 이제 새로 운 얼굴을 갖게 된 것이다. 그건 새로운 삶으로 형한 승차권임이 분명하다. '내 일이 오면, 애버리는 캐롤인 체 해야 할 것이다.' 애버리 다니엘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11 "헤어스타일이 멋진데요. 아주 그만이예요, 러트리지 부인." 간호사가 다시 한 번 애버리에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고마워요." 애버리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뭐 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요.?" 테이트와 떨어져 있던 일주일 동안, 애버리는 완 전히 제 목소리를 찾았다. 늘 테이트가 병원에 들렀던 그 시간 쯤 괴면 그 여자 는 의례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아니에요." 간호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전에 그말, 빈 말이 아니예요. 사실, 그런 짧은 헤어스타일은 아무에게나 어울리 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부인께는 정말 잘 어울려 보여요." 애버리는 손거울 을 들여다보았다. 아마 위로 뾰족이 비어져나온 앞머리를 내려뜨리면서 미심쩍 은 듯 내뱉었다. "실은 나도 그러기를 바라는 걸요, 뭘." 애버리는 오른발을 발판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 옆으로 기대어 세워놓은 지팡이 하나가 눈에 띄였다. 그 여자는 양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있었다. 오늘은 간호사들까지 일주 일 이상이나 찾아오지 않았던 테이트의 도착에 애버리만큼이나 가슴을 설레였 다. 그래서 그들은 애버리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꾸며놓았다. "러트리지 씨가 도착했어요." 간호사들 중 하나가 문께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큰소리로 전 했다. 애버리와 함께 있는 간호사가 애버리의 어깨를 감쌌다. "부인, 정말 멋져 보이네요. 부군께서 보시면 놀라 기절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테이트가 정말로 기절해 넘어진 건 아니었지만, 애버리를 본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며칠 전에 지이가 가져다 준 외출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애버리를 보고 눈 이 휘둥그래진 것이다. "어서 오세요, 테이트." 애버리의 말소리를 들은 그는 더 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버리의 심장도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뭔가 들킨 건 가!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건가! 캐롤이 남편과 있을때 특별히 사용하는 애칭 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애버리는 그가 자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당신은 거짓 말장이요, 사기꾼이야!"라고 소리칠 것만 같아 마음 졸이며 그이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테이트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예상 외로, 그는 어색한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잘 있었소, 캐 롤?" 그 여자의 정교하게 만들어진 코에서 약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당황한 탓 에 그때껏 가슴이 아플 정도로 참고 있던 숨을 어렵사리 내뱉은 거였다. 테이트 가 병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침대 탁자 위에다가 선물꾸러미와 꽃다발을 내려놓 았다. 표정없는 얼굴있었다. "당신, 멋져보이는군." "이젠 말도 잘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테이트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마침내." "목소리가 그 전과 많 이 달라진것 같아." "소여 박사가 그럴 거라고 말했잖아요, 기억 안나요.?" 애버 리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야 그랬지 하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누가 알았 나." 테이트가 손가락을 목구멍 쪽으로 교차시켜 보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잔 뜩 쉰 목소리야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테이트는 제 아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느 부부 같았다면 테이트는 그 여자 앞에 무 릎을 꿇고, 마치 눈 먼 사람이 자기 손가락 끝으로 제 아내의 얼굴을 더듬듯, 죽 을 뻔 했던 아내를 되찾은 기쁨에 그 부드러운 얼굴을 부비고 감탄하며 자기의 사랑을 전해야 옳을 것이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지금 그는 아내 앞에서 껄 끄러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테이트의 옷차림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청바지 차림이었다. 여기저기 구김이 가고 흐늘하늘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입 어왔기 때문에 그의 하반신에 너무도 잘 맞아보였다. 애버리는 자신이 그런 감 각적인 호기심에 사로잡히는 게 싫었다. 테이트의 상체 역시 보기 좋았다. 애버 리는 시선을 줄 데를 몰라하며 머쓱해진 통에 손을 가슴에다 올려놓았다. "당신, 절 노려보고 있군요." 그 말에, 테이트가 아주 잠깐 동안 고개를 앞으로 떨구었 다가 이내 쳐들었다. "미안하오, 여보. 당신이 이렇게 완전히 옛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어. 그리고 뭐랄까, 완전해. 이전의 당신과 너무나 똑 같아, 미리카락만 빼곤 말이야." 처음부터 계획에 두었던 테이트의 반응이라, 그 여자는 일부러 기쁨의 진저리를 쳐보였다. 그것도 아주 약하게. "추워?" "네? 춥 냐구요? 아, 아니에요." 지금쯤이면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기운을 환기시킬 필 요가 있었다. 애버리가 뭔가 색다른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건 뭐죠?" 그가 가져온 선물꾸러미를 고개짓으로 가리켰다. "아, 이거? 당신 보석이야." "보 석이요?" 애버리가 터질 것 같은 행복감을 간신히 참았다. "비행기 사고가 나던 날, 당신이 하고 있던 보석이지. 오늘 병원에서 보석을 보관하고 있다는 걸 알려 왔더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는 길에 찾아온 거야." 테이트가 포장을 뜯어 애버리에게 건네주었다. 애버리는 마치 독사가 든 살자라도 되는 양 노려보기도 했고 미꾸라지를 만져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만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한 느낌을 테이트에게까지 눈치채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기에, 마침내 용감하게 그걸 받아들었다. "내용물을 확인해 볼 시간은 없었어. 당신이 확인해 봐.": 테이 트가 고개를 뒤로 하고 반쯤만 열린 눈으로 넌즈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애버리 가 보석꾸러미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중에 할께요.""의외로군. 당신이 이걸 받자마자 치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반지를 끼기에는 좀 그렇거든요." 애버리가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펴며 테이 트에게 몸시늉을 해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다 나은 것 같지만, 아직 통증이 가 시지는 않았거든요. 반지를 끼고 빼고 하는 게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서요." "하지만 결혼반지도 그 안에 있잖아? 당신이 그걸 얼머나 애지중지 했는데. 다 른 것도 아니고 말야." 그의 한마디로 애버리가 일순간 당황했다. 그 역시 결혼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채였다. 더구나 그것으로 테이트가 캐롤인지의 여부를 확인해볼 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해 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캐롤이 부정한 의도로 그 반지를 없애버린 게 되어버리 면 여태까지의 모든 노력들이 모두 허사가 돼버리는게 아닌가. 어떻게든 이 상 황을 잘 넘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테이트가 침대 끝에 앉았다 냉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애버리였다. "갔던 일은 잘 하고 온 거예 요?" "음, 지옥에 갔다 온 것처럼 피곤하긴 하지만 결과는 괜찮았어." "거의 매 일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봤어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열광적이더군요." "모든 사람들이 내 공약에 기뻐하는 것 같더군." "정치평론가들 얘길 들어봐도 하나같 이 당신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거라고 보고 있었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는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맨디는 어때요?" 그가 예의 그 어깨를 들먹이며 양 손을 벌리는 몸짓을 했다. "잘 있어." 애버리가 의심스로운 눈초리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잘 지내지 못하고 있군요." 그가 자리에서 일 어나 침대 안쪽으로 걸어왔다 카펫트 위에 초생달 모양의 부츠 뒷굽 자국이 새 겨지고 있었다. "여전히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나 봐. 어머니가 그러셔. 거의 매일 같이 소리를 지르며 깨는데 어느 땐 낮잠을 잘때도 그렇대. 어떤 때는 몽유병 환자처럼 의식없이 집안을 돌아다니기도 한대. 유령처럼." 테이트가 뭔가를 잡아 보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손을 모았다. "집은 엉멍 진창이야. 평화스러운 게 아무것도 없어. 이젠 아무도 해결할 수가 없을 것 같 아. 나도, 심리치료사마저도. 내말 알겠소? "어머님께 맨디를 데려오시라고 몇 번 이난 부탁을 드렸어요. 당신이 허락하지 않아서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맞아. 그 랬어." "왜 그랬죠?" "나하고 함께가 아니라면, 애한테 좋을 게 없을 거란 생각 이 들어서였어." 애버리는 굳이 왜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했다가 아직 자기 가 감당하지도 못할 또 다른 문제만 생기게 하는게 아닌가 하는 염려에서였다. 지금껏 신경을 곤두세운 것만 해도 어딘데, 공연히 난처한 입장이 될 필요는 없 는 거였기도 했다. "맨디가 보고싶어요. 내가 집에 가면 괜찮아질텐데." 그의 생 각은 확고한 것이었다. "글쎄." "맨디가 제 얘기 안물어요?" 애버리가 시선을 무 릎으로 떨어뜨리며 조그맣게 물었다. "알겠어요." "아니, 뭘 바라고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대체? 당신이 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거 아냐?" 잠시 두 사람의 시선 이 허공에서 휘감겼다. 애버리가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그 여자의 두 눈엔 눈 물이 가득했다. 엄마의 사랑을 담뿍 받아보지 못한 가여운 아이를 생각하며 울 었다. 애버리는 부모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는 게 어떤 느낌이라는 걸 알고 있었 다. 그 여자가 맨디의 엄마로 행세하기로 결심한 것도 캐롤의 죽음에 대한 소식 을 들은 즉시로 맨디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이, 빌어먹 을!" 테이트가 소리죽여 말했다. 그리고는 병실을 가로질러 와서는 애버리의 머 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낀 짧고 억센 머리카락이 두피를 자 극하는 느낌을 받았다. "미안하오, 여보. 당신을 울릴 생각은 아니었어. 맨디는 나을거야. 아니, 많이 좋아질거야." 그러고 잠시 후, 테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 봐야 할것 같아." "안돼요!" 애버리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 있었다. "가지 마세요." "가야할 시간이야." "제발, 조금만 더 있어줘요." "여행 때문에 많이 피 곤해. 신경도 예민해져서 당신한테 나쁜 영향만 줄지도 몰라." "상관 없어요, 제 발, 같이 있어 주세요." 테이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애버리가 실망한 빛을 감추고 침착하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을 배웅해 드릴께요." 애버리 가 지팡이로 손을 뻗쳐 그것에 몸을 기대어 일어나려 했다. 그렇지만, 긴장한 탓 에 손엔 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애버리는 지팡이에서 미끄러지며 몸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 "맙소사, 조심해." 테이트가 반사적으로 그 여자를 감싸안았다. 마 닐라지로 싼 봉투가 애버리의 무릎에서 마루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애버리는 신 경 쓰지 않았다. 등은 그의 팔에 기댄 채로 애버리는 그에게 온몸을 맡겼다. 그 의 굵은 손가락이 애버리의 가슴 바로 아래를 꽉 붙든 채였다. 테이트가 애버리 를 침대 쪽으로 조심스럽게 데리고 갔다. 그 여자는 손가락으로 그의 자켓의 옷 자락을 말아올리며 그에게 꼭 매달렸다. 코 끝에서 처음 맡아보는 그의 체취가 풍겼다. 애버리는 그의 체취를 깊숙히 들이마셨다. 박하같이 시원하면서도 바깥 공기가 묻어 있는 듯했다. 향기로우면서도 남성적인 냄새 같기도 했다. 오렌지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강인한 기운이 애버리의 온몸 구석구석으로 옮 겨오는 것만 같았다. 그 여자는 신비의 약을 마시는 것처럼 몸 깊숙이 빨아들였 다. 그제서야 애버리는 그가 없었던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자기가 애써 거 부했던 정체모를 상념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느 순가부터 알게 모르게, 테 이트의 부인이 되는 염원을 한 것이었다. 아내노릇이 아닌 진짜 아내가 되고 싶 다는 갈망이었다. 그의 부재 중에 느꼈던 허망함, 고독감 같은 정신적 고통이나, 일 주일 여만에 다시 찾아온 테이트를 보는 순간, 온 마음을 감싸고 도는 기쁜 마음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말도 못할 만큼 강렬한 감정인 것이다. 테이트가 조심조심 애버리를 침대 옆으로 옮겨갔다. 그는 에버리의 넙적 다리를 살살 매만져주었다. "당신, 아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뼈가 여물지 않았다는 걸 잊지 마." "그건 그래요." 예비선거가 끝날 때까지 퇴원 않기로 했 던 게 백번 잘한 일이야. 아직은 조금만 움직여도 당신한테는 무리가 되요." "그 럴거예요." 애버리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방금 테이트가 한 말도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족들 선에서 결정된 일이었고, 그것도 테이트가 아닌 그의 어머니 지이의 입을 통해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하루빨리 집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테이트."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와져 있었다. 애버리는 그의 동자 속에 어려있는 자신의 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애버리는 붙잡히고 싶었 다. 또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테이트, 날 안아주세요, 키스해 주세요.'라고 말 하고 싶었다. 뛰고 있는 박동소리로 보아 그가 그 여자의 마음을 알아차린것 같 았다. 그가 가까이에서 몸을 뗐다. "갈께." 표정없는 얼굴로 그 한마디 뿐이었다. "푹 쉬어." 애버리가 팔을 한껏 뻗었다. 할 수 있는 한 힘껏 그를 잡았다. "고마 워요." "뭐가?" "뭐냐하면 꽃하고, 그리고 침대까지 오도록 도와준 거요." "별소 릴 다 하는군." 그가 손을 빼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애버리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 당신은 항상 내 감사를 거절하는 거죠?" "어린애 같은 소리 말아요 캐롤."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하는 감사, 지금의 나에겐 아무 런 의미도 주지 않아. 그 이유야 당신이 더 잘 알거 아니오." 그는 잘 있으란 퉁 명스러운 한 마디를 남긴 채 병실을 나갔다. 애버리는 비참함을 느꼈다. 실상 그 여자가 원했던 건 일반적인 부부간의 재회 이상의 것이었다. 그 여자가 꿈꿨던 건 냉혹한 현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아내에 대해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 는 그런 남편에게서 애버리가 기대할 수 있었던 건 뭐란 말인가. 최소한 그는 애버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직업적인 목적의식에 서 보더라도 애버리는 여전히 사건에 대한 사명감을 저버리고 있는 건 아니었 다. 애버리는 의자로 되돌아갔다. 발 밑에 떨어져 있는 봉투를 집어 봉한 부분을 비집어 열어 그 안에 든 내용물을 손바닥 안으로 쏟아놓았다. 손목시계는 겉유 리가 박살이 난 채 멈춰져 있었다. 금으로 된 귀걸이 한 짝도 어디 갔는지 없어 져 버렸다. 그렇지만, 그런 게 큰 손해날 것도 없었다. 그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이 업어진 것이다. 로킷이 어디로 갔을까? 애버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고가 났을 때 애버리는 로킷을 몸에 지니지 않고 있었다. 애버리는 귀한 보석 을 잃어비린 걸 속상해 하면서 의자 깊숙히 몸을 구겨들었다. 그렇지만, 당장 화 가 나지는 않았다. 나중에야 어 떨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몇 분 후, 애버리는 컴 퓨터 단말기 앞에 앉아 뭔가 열심히 입력을 하고 있는 간호사 앞에 섰다. "러트 리지 부인, 부군과의 해후는 좋으셨나요?" "좋았어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느라 애버리는 짐짓 명랑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준비해두었던 우편물을 꺼내 간호 사 앞에 내놓았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내일 이걸 좀 부쳐주시면 좋 겠는데.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간호사가 애버리가 내놓은 봉투에 적힌 주소를 읽었다. 간호사가 뭐라 질문을 할까봐 애버리가 먼저 더듬수를 놓았다. "부탁해요." "그렇게 해드리죠." 간호사는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가졌지만 일 단 그렇게 대답했다. "아침이면 부칠 수 있을 거에요."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는 비밀로 해줬으면 해요. 남편이 알면 속도 없는 여자라고 나무랄지도 모르거 든요. 들어주실 수 있죠?" "알겠어요." 애버리는 테이트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여자에게 주고간 푸짐한 용돈에서 아껴두었던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건네 주었다. "이 돈이면 우표 사는 데는 모자라지는 않을 거에요. 고마워요." 그것은 애버릴 다니엘즈의 또 다른 단절을 의마하는 일이었다. 몸을 돌린 애버리는 캐 롤 러트리지라는 여자의 개인 병실로 조용히 되돌아갔다. 12 아이리쉬 맥케이브는 다른 날과 달리 일찍 퇴근해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맨 양말 바람으로 오늘도 맥주를 마시려 냉장고로 다가갔다. 꼭지를 당겨 뚜껑을 딴 그는 캔 꼭지로 흘러나오는 맥주 거품을 홀짝거리며 저녁거리로 마땅한게 없 을까 하고 냉장고 안을 기웃거렸다. 한참을 보아도 허기를 달랠만한 게 눈에 띄 지 않자 그는 안주도 없이 깡맥주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거실쪽으로 다가가던 아이리쉬는 집 안으로 들어오며 탁자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우편물을 집어 들었다. 텔레비전에선 게임쇼가 한창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그대로, 텔레비전 은 텔레비전대로 따로따로 놀았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보며 오늘 들어온 우편물을 분류하고 또 광고전단과 청구서도 분류해 놓는다. "흥!....." 무표 정하게 우편물을 분류하던 아이리쉬는 마닐라지로 된 봉투를 발견하고는 어리둥 절해 하며 눈쌀을 찌푸렸다. 발신인의 주소도 없는 것이었다. 시내우편 표시만 되어 있었다. 그는 봉투에 달린 봉함부분을 무시한 채 집게손가락을 안으로 밀 어넣어 부욱, 뜯었다. 그걸 거꾸로 세워 안에 든 내용물을 그의 허벅지로 쏟아부 었다. 다음 순간, 마치 더러운 부스러기가 몸에 닿은 것처럼, 아이리쉬는 짧은 숨을 몰아쉬며 흠칫 놀랐다. 금부치며 보석들이 눈앞에 떨어진 것이었다. 제대로 돼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 부서진 보석들을 노려보고 있는 아이리쉬의 허파 는 거칠게 들고나는 숨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박동도 그 어느 때보다도 격 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부서진 손목시계에 손을 뻗어 만져볼 만큼 흥분을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한눈에, 다름 아닌 애버리의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파를르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줏어모았다. 그리 고는 마지막으로 애버리를 만났을 때 달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금귀걸이를 유심 히 살펴보았다. 그는 재빨리 방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잡동사니를 던져놓는 것 이외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책상으로 갔다. 서랍을 열어제친 그는, 애버리의 시신을 확인한 날 시체안치소에서 받아온 봉투를 꺼내들었다. "애버리 양의 물건 입니다." 법정의 사무장이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건네준 것이었다. 그때 아이리쉬 는 안에 내용물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그걸 받아든 채로 되돌아 나와버렸다. 지 금까지도 차마 그걸 열어볼 용기를 못내고 있던 터였다. 어쩌면 그는 미신에 사 로잡혀있었는지도 몰랐다. 애버리의 소지품을 만지작거린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 게 있어서는 무덤을 파헤치는 것만큼이나 탐탁지 않게 생각된 것이었다. 아이리 쉬는 애버리의 아파트를 비워줘야 할 입장이었다. 애버리가 죽고 나자,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득달같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아이리쉬가 가진 애 버리의 유품이란 고작해야 생전 사진 몇 장에 불과했다. 옷가지나 이것저것 쓸 만한 물건들은 죄다 자선단체에 기부를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유품이라고 해봐 야 아이리쉬의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부질없는 것들이었는지도 몰랐다. 사진 몇 장 이외에 그가 같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애버리의 시신임을 확인시켜준 로킷 이 전부였다. 애버리가 아주 어렸을 때 그 여자의 아버지가 준 것으로, 이제껏 아이리쉬가 애버리를 만날 때마다 몸에 지니고 있지 않은 걸 본 적이 없을 정도 로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는 여지껏 책상 속에 처박아두었던 봉투를 뜯어 잔뜩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에다 그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애버리의 로킷과 함께 다 이아몬드 귀걸이 한 쌍, 금시계 하나, 팔지 두 개, 반지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결 혼선물 세트도 두 세트 들어있었다. 반지엔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가 여러개 박 혀 있었다. 한 눈에도 애버리의 보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사치를 부릴 애버리가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보석이 값나 가고 물건이랬자, 아이리쉬에게는 니켈로 만든 전기플러그만도 못한 것이었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이건 애버리의 장식품이 아닌 게 확실했다. 틀림없이 사고 의 다른 희생자, 그것도 생존자들 중에 한 사람의 것이리라. 이 물건이 바뀐 바 람에 슬퍼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과연 누구일까. 실수로 빚어진 일이란 말인 가...... 아이리쉬의 머리 속이 별안간 닥친 일로 소리가 나도록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일이 잘못된 걸 안 이상, 그는 이번 일의 잘잘못을 가름해야 한다. 이 물건의 주인을 찾아내어 그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 장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오직 오늘 배달돼 온 애버리의 시계와 귀걸이에 대 한 것 뿐이었다. 누가 보낸 것일까. 왜 이제 와서. 그리고, 이제야 자신에게 이걸 보낸 거라면, 지금까지는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다급해진 아이리쉬는 혹시나 이 우편물을 부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한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봉투를 살펴보았다. 아무런 실마리도 없었다. 그리고, 집주소를 적은 글씨체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간 적어도 사무실 같은 데서 보낸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있는 대로 날린 글씨에 크기까지도 한결같지 않았다. 글 을 갓 배우는 어린아이가 쓴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야?!....." 허공으로 고개를 제친 아이리쉬가 텅 빈 아파트에다 대고 허망하게 고함을 질렀다. 애버리의 죽 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슬픔의 고통을, 지금까지는 무디게 둔 채 꾹꾹 눌러올 수 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이리쉬는 천을 씌운 소파에 깊 숙히, 그리고 무겁게, 몸을 구기고 들었다. 눈물어린 눈으로 애버리의 로킷을 바 라보았다. 마치 애버리를 형상화시키는 마력의 기적을 부르는 것처럼, 엄지손가 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그걸 어루만졌다. 이 시간 이후로는, 어떤 이유에서 애버 리의 보석과 또 다른 희생자의 그것이 바뀌어지게 된 건지, 그 의혹을 풀어보려 고 무진애를 쓸 그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가 가장 원하는 건, 애버리와의 황당했던 사별의 혼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왜 안된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가 없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팬시도 알아들을 만큼 설명해줬을텐데?" "이번 주 성체건립 축일에 날 데리고 가는 게 뭐가 안될 게 있다고 그러냐구요!" "이 건 업무상 출장여행이야. 놀러가는게 아니라고. 작은 아버지의 유세준비만 하기 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 짬이 안날 거라니까?" 그 말에 팬시가 화가 나서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아저씨가 날 진짜 생각해준다면 어디든 항상 데리고 다녀줄 거예요." 에디 파스칼이 팬시를 노려보았다. "내가 뭐라고 답할지 생각해 봐." 그 는 선거운동본부의 스위치를 내렸다. 본부는 상가에 위치해 있었다. 전에는 애완 동물가게였던 탓인지 임대료가 싼 축에 들었다. 또 중심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 에, 시내 어떤 곳이든 어렵지 않게 갈 수가 있었다. 단 한가지 결점이라면 우리 에 있던 동물들의 배설물 악취가 난다는 것이었다. "에디 아저씬 왜 제게만 유독 매몰차게 구는 거죠?" 에디가 열쇠로 문에 달린 헐거운 잠금장치를 잠그고 있을 때 팬시가 푸념조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는 넌, 왜 그렇게 골칫덩이고?" 두 사 람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에디가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왔다. 에디가 몰고 다 니는 차는 실용적인 포-드 세단이었다. 평소부터 팬시가 지긋지긋한 고물차라고 생각하는 차종이었다. 그가 자물쇠를 따고는 팬시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팬시가 안으로 들어가며 의식적으로 제 앞가슴을 에디에게 부딪쳤다. 운전석에 앉은 에 디가 안전벨트를 매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팬시는 그제서야 그가 최근에 머리를 잘랐다는 걸 알았다. 이발사가 그의 머리를 너무 짧게 잘라 놓았다. 불만 스러웠다. 팬시가 느끼기에, 에디가 바꿔나가야 할 첫 번째가 승용차였다. 그리 고 그 다음이 바로 이발사였다. 에디가 핸들 뒤쪽으로 손을 넣어 시동을 걸었다. 냉난방장치가 자동적으로 켜지면서, 엔진의 열을 받은 뜨거운 바람이 차안을 채 우기 시작했다. 에디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목단추까지 두엇 풀었다. 말끔하 던 외모가 금새 흐트러져 보였다. 팬시는 지나칠 정도로 매무새를 풀었다. 블라 우스의 단추를 배꼽 있는 데까지 풀어제친 팬시가 블라우스를 확 풀어보였다가 다시 덮었다. 그런데도 에디 쪽에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도리어 팬시가 안 달이 났다. 팬시가 어떤 행동으로 나오든 상관하지 않은 채 그는 무료고속도로 로 가는 진입로로 가기 위해 경사진 길로 차를 움직였다. "아저씨, 호모예요?" 팬시가 심술궂게 물어보았다. 에디가 기도 안찬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왜?" "다룬 사내들한테는 아저씨한테 보여준 절반만 보여줬어도 당장 절 끌어안 고 뒤로 나자빠졌을 거예요." "듣자듣자 하니, 정말 제멋대로 지껄이는구나. 행동 거지도 그렇고." 에디가 팬시 쪽으로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어떻게 그따위로 내게 말할 수가 있는 게냐?" 팬시의 푸른 눈동자에 그가 피워 문 담배연기가 어 리고 있었다. 맘 속으로야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가 보는 앞에서 당장에 그 기분 을 드러낼 정도로 아둔한 여자는 아니었다. 감정을 숨긴 채로 팬시는, 고양이가 게으름을 피우며 몸을 웅크리듯이 자동차 시트 깊숙히 몸을 꼬아서 누우면서 끈 끈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씬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예요." 참 어쩔 수 없는 아이란 생각이 들어 에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팬시, 넌 참 어쩔 수 없는 아이구나,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기나 하니?" "물론이죠. 내가 뭐 백치인줄 알아요?" 팬시가 짙은 금발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파묻으 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절 두고 다들 그렇게 쑤근댄다는 것도 다 알고 있는 걸요, 뭘." 팬시는 찬 바람이 나오고 있는 에어컨 바람에 상체를 내맡겼다. 그런 다음, 목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들어올려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목덜미에 바람이 닿게 했다. "왜 질문엔 대답을 안 해주는 거예요? 맞죠?" "뭐가?" "호모라는 거요." "아냐." 대답을 하는 에디는 여 전히 건성건성이었다. 저으기 약이 오른 팬시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에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양손은 자기 목 뒤로 돌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두두룩한 가슴이 한껏 돋보이는 자세였다. 차 안의 찬 기운 때문인지 유두가 딱딱해져 있었다. 블 라우스 위로 그 윤곽이 또렷이 드러났다. "그것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목석처럼 날 거부할 수가 있는 거죠?" 혼잡한 무료고속도로 교통량을 뒤로한 채 그들은 이제 목장으로 향하는 북서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에디의 시선이, 유혹하는 팬시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에디의 시선을 의식 못할 리 없는 팬시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넌 참 예쁜 애야, 팬시." 에 디의 초점이 아주 잠간 동안, 블라우스 위로 어릿어릿하게 비치고 있는 유두의 꽃받침에 머물고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아가씨지." 팬시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이 그 여자의 얼굴과 어깨 위로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그리구요? 그 다음엔요?" "가장 친한 친구의 조카이기도 하지." "그래서요?" "그래서 널 손댈 수 없다는 뜻이야." "이런 골샌님 같으니!....." 팬시가 신경질적 으로 소리를 질렀다. "위선자! 비굴한 내숭장이! 아주 우습지도 않아!" "그래, 네 삼촌 테이트가 생각해도 우습지도 않을 거야.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또 어떻겠 니?.... 내가 네 몸에 손이라도 대는 날엔, 세 사람 전부 엽총을 들고 날 찾아올 게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팬시가 의자 건너로 팔을 뻗어 그의 허벅지 안쪽 으로 손을 디밀었다. "흥분되지 않아요?...." 에디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팬시의 손을 거머쥐더니 홱, 하고 뿌리쳤다. "설령, 네가 내 이상형이라 했어도 흥분 같 은 건 안해."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팬시가 제 자리에 털썩 몸을 던졌다. 창 밖 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늘 아침 팬시는 일부러 자기차를 남겨놓고 아빠를 따라 산 안토니오로 왔다. 종일토록 에디와 함께 집으로 올 궁리를 한 끝에 겨 우 이렇게 같이 오게 됐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남자는 목석같기만 한 것이 다. 지금껏 몇 달 동안 애써왔던 교묘한 유혹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 것만 같았 다. 인내력이 부족한 팬시는 드디어 몸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로 작 정해버렸다. 얼결에 사랑을 나누었던 버크와의 관계는 채 한 달을 넘기지도 못 하고 침대 위에서 끝을 내고야 말았다. 나중에, 그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알아낸 것도 이유 아닌 이유가 되긴 했지만, 소유욕과 질투가 많은 버크를 감당해낼 도 리가 없어서였다. 가장 중요한 그의 결점이란 바로 침대 위에서의 사랑 이후에 그가 느낀 죄의식이었다. 팬시와 토닥거리며 까탈스럽게 언쟁을 벌였을 만큼이 나 신경이 쓰였던 건, 바로 그 문제야말로 그가 유부남이고 아니고는 문제도 되 지 않을 만큼 팬시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이유였다. 이즈음 팬시는 정말로 모 든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예비선거 까지의 막바지 석달은 그 여자가 가지고 있 는 인성의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최대한의 인내심, 곧 팬시의 근본적인 선한 성 품으로 버티게끔 하는 위기의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순간마다 팬시는, 자 신을 숙모 캐롤과 비교하며 지냈었다. 적어도 그때로선, 숙모가 병원 안에서 온 집안 식구의 관심을 끌며 지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경쓰이고 샘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팬시가 고작해야 10달러라는 보수 같지도 않은 보수를 받으며 정신 사납고 일한 티도 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동안, 그것도 동물들의 악취 가 가시지 않는 볼품없는 선거운동본부에서 봉투나 붙이고, 전화로 여론조사나 하고 있을 동안에, 숙모 캐롤은 호화롭기 짝이 없는 독방 병실에서 왕비나 된 양 시중을 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팬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린 맨디 조차도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아니, 고통의 근원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차라리 정확했다. 마냥 어린 짓이나 할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겉늙은 행동을 해왔 던 것 이상으로, 근간에 들어서는 더더욱 아이답지 않은 행동을 보여주는 맨디 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비행기 사고가 났던 그 이후로는 더더욱 골치 아픈 상태로 줄달음치는 게 아닌가. 지난 주엔 금속으로 만든 거라면 뭐든지 가 리지 않고 입에 쳐넣는 맨디를 보고 참다 못해 팬시가 아이에게 소리를 쳤다. 당연히 말려야 할 일을 가지고 야단을 치고 있으면 칭찬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영문도 모르고 나선 할머니는 외려 팬시를 나무랐다. 분통 터지는 일이었지만, 상대는 할머니였고, 집안 분위기로 봐서도 자신에게 역성을 들어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겠다는 생각에 그냥 벙어리 냉가슴 앓듯 꾹 참고 넘어갔다. 팬시의 생 각으로, 그 아이는 정신이상이었다. 나날이 바보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데도 사람들은 그 아이 편만 드는 것이었다. 집안 사람들의 신경이 캐롤 숙모와 맨디에게 쏠리고 있는 와중에 정작 팬시에게 돌아온 건 무언가. 얼마 전에 팬시 가 속도위반으로 딱지를 뗀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 잭은 발광을 하다시피 팬 시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것만이었으면 말도 안했다. 어떤 경우에서든 또다시 경 고장이 날아오는 날엔, 팬시가 벌어들이는 수입 이사응로 벌금이 매겨질 때는 단 한 푼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경고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위협이 실제상황에서 그대로 적용된 적은 없었지만, 딸을 두고 그런 심한 말을 여과없이 퍼부은 아버지가 옳게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팬시로서는 삼촌의 정계진출, 그것도 예비선거만을 담보로 해놓은 채 여타의 대소사를 생각없이 짓 뭉개버리는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온 집안 식구들이 선거, 선거 하며 야단법석을 떠는 꼴이 눈꼴이 시었다. 팬시 눈에는 삼촌이 대통령후보-대 개의 사람들이 기죽기에 바쁜-에라도 입후보한 것처럼 생각이 되어졌다. 어찌됐 건 삼촌이 상대 후보자를 압도적으로 이겨가고 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정작 팬 시에겐 조금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팬시는 한달 전에 있었던-극비에 부친 채 은밀히 정치평론가들에게 거액의 돈을 썼던-일이 어째서 선거에 필요한 일이었 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삼촌의 미소는 여자들의 얼을 빼놓았다. 그런 여자들 에겐 연설의 핵심이 뭐였느냐는 결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자들은 단지 외모 만을 보고 표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팬시가 당초에 에디를 유혹해 보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만 해도 제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지 배적이었지만, 이즈음에 들어서는 그렇게 자신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번번 이 에디가 교묘하게 그 여자의 유혹을 피하는 거였다. 적어도 에디는, 팬시가 걸 고 넘어지는 요점을 피해가는 용한 재주가 있었다. 무력하기 짝이 없게 만들곤 하는 것이다. 상념에서 깨어난 팬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운전에만 열중인 에 디를 건너다보았다. 적어도 겉보기만으로는, 그는 납덩이처럼 차가워 보였다. 팬 시의 생각으로도, 여지껏 자신에게 남다른 배려를 해 온 에디에게는, 자신의 모 습이 철없는 매춤부처럼 추한 모습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에디가 입 을 열었다. 팬시가 계속 추한 모습만 보인 탓이었을까, 에디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도 결코 곱지만은 않았다. "거리의 여자같다는 생각, 안해 봤어?" 계획적인 말 이었는지, 에디가 오른팔을 뒷좌석에 걸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다. "생각 해 봐, 지금 이 상황에 딱 맞는 표현아니야?" 일순간, 팬시의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다. 그 여자는 이를 갈았다. "어쩜, 감히 나한테 그런 욕을 할 수가 있죠?!" "그럼 더 이상은 거리의 여자처럼 헤픈 짓은 그만둬. 질 떨어지는 얘기도 그만 하고.... 난 이런 장난은 정말 흥미가 없어. 조금만 더 살아 봐. 네가 하는 이런 유아기적인 장난도 싫증이 날테니까...." "아저씬 호모예요, 날호모!" 그 말에, 에 디의 호흡이 가빠졌다. 분을 삭히는 듯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게 말해서 네 분이 풀린다면 그렇게 믿으렴...." "호모가 아니라면 아저씬 다른 누군가로부 터 그걸 얻게 돼 있어요! 남자란 다 똑같거든요. 정상적인 남자가 그짓을 하지 않고 지낼 수야 없으니까요!....." 말을 마친 팬시가 에디 쪽으로 바싹 다가앉았 다. 그리고는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대체 누구예요, 아저씨랑 자는 여자가? 본 부에서 같이 일하는 여잔가요? 누구예요?" "팬시....제발...." "바짝마른 그 빨간머 리죠? 그 여자가 분명해! 그 여잔 이혼녀 아녜요? 사람들 말로도, 그 여잔 욕정 에 사로 잡혀 있다고 들었어요." 팬시가 그의 소매자락을 꽉 잡았다. "나 같은 아일 두고, 왜 굳이 그런 여자예요? 왜 하필이면 다 늙은 그런 여자냐구요?"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었던지, 에디는 집앞의 순환차도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팬시의 양 어깨를 다잡아 세차게 흔들어댔다. "이유를 말해주지! 난 너 같은 철 부지 어린아니, 더구나 길 가는 아무 녀석에게나 헤프게 몸을 내주는 그런 아이 와는 사랑을 나누지 않아, 알겠어?!" 에디의 화는 팬시를 꾸짖기 보다는 도리어 그 여자의 욕망을 부추겼을 뿐이었다. 그가 어떤 심한 행동을 보이건, 그건 팬시 를 자극하고 흥분하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팬시가 손을 아래로 던졌다. 그의 가랑이 사이였다. 팬시의 입술이 육감적인 미소를 띠며 묘 하게 이지러졌다. "그럴 것까진 없잖아요, 봐요. 이렇게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 는데?...." 샅아래 손을 넣은 채 팬시가 음탕하게 말했다. 그는 팬시를 밀쳐내고는 욕을 퍼부으며 차에서 튀어나왔다. "도대체 너라는 아이는 어쩔 수가 없어! 생각 하는 족족 그짓뿐이라니!...." 에디가 차 밖으로 나간 뒤, 팬시는 블라우스 단추를 다시 잠그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반면, 에디의 넥타이는 풀 어진 채, 두 사람이 다퉜다는 흔적을 담고 있었다. 팬시를 침대로 데리고 가지만 않았지, 그에게도 그런 욕망은 있었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같은 일마저도 차라리 진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팬시가 문 앞에 다다르자, 엄마 도로시 레 이가 나타났다. 겉보기엔 똑바로 걷고 있었지만, 엄마의 눈은 벌써 취기가 서려 있었다. "이제 오니?" "며칠 동안, 성체건립 축일을 지키러 가야겠어요." 집 안으 로 들어서며 팬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에디가 데리고 가지 않는다 해도 이왕 가기로 한 이상, 도중에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가 거절했으니까 더더욱, 갑자 기 그 앞에 나타나 당황하게 해주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침에 떠 나야 하니까 돈을 주셔야겠어요." "지금은 안돼." 엄마의 말에, 팬시가 두 주먹을 골반 위에 척 걸쳤다. 기세가 여간이 아니었다. 곧잘 그래왔듯, 엄마의 만류에 눈을 잔뜩 흘겼다. "도대체 엄만 왜 안된다는 거야?!" "아무도 집을 비워선 안된 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 취기 있는 엄마의 대답이었다. "내일 캐롤 숙모가 집으로 온다는 거야." "이런, 젠장!...." 팬시가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그게 이유 라니!...." 13 에버리는 거울에 비친 테이트를 보았다. 보를 씌워놓은 작은 탁자 앞에 앉은 에버리는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테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에버리는 들고 있던 분처ㅂㄹ 거울 같은 탁자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의자로 몸을 돌려 그와 아주 가까이 마주앉았다. 그런 애버리에게 시 선을 박은 채로, 테이트는 코트와 여러 상점에서 사들고 온 쇼핑백을 침대위로 던졌다. 애버리가 초조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걱정돼 죽을 지경이예요..." "아름다워 보이는데 뭘 그래." 애버리가 조심스럽게 바른 반짝반 짝 윤이 나는 입술을 침으로 촉촉하게 적셨다. "오후에 이곳 담당 미용사가 다녀 갔어요. 메이컵 강습을 해주고 갔어요. 화장이 자신이 없어서는 아니었지만, 그 래도 이제부터는 더 새롭게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상담하는 사람까지 같 이 다녀갔어요." 애버리가 다시 한 번 그를 보고 초조해 하는 미소를 지어보였 다. 애버리는 마음 속으로 이제부터 캐롤의 화장분위기를 바꾸는데 적당한 구실 도 찾을 겸, 제 스스로도 새로워진 분위기에 적응할 겸해서 받은 메이컵 강습이 었다. 그런데 아직 한쪽 손이 성치 않은 탓으로, 한 손만 가지고 그들이 가르쳐 준 기법을 다하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새로운 방법으로 해봤어요. 당신 보기 엔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애버리는 정말로 그렇게 보일 양으로 그가 제 얼굴을 잘 볼수 있도록 얼굴을 쳐들었다. 테이트도 아무 거리낌없이 바싹 다가 왔다. 양 손을 무릎 위에 얹어놓은 채, 허리를 굽혀서 그 여자의 쳐든 얼굴을 이 구석 저구석 뜯어보기 시작했다. "흉터 하나 찾아낼 수가 없군. 아무것도.....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야." "고마워요, 여보." 애버리가 약간 과장을 섞어서, 한 여인 이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듯한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테 이트가 남편이 아니라는 것 말고도 테이트 역시 그 여자에게 애정 같은 건 없었 다. 조금이 지나자 그가 다시 똑바로 몸을 펴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애버리가 실 망감을 억누르며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테이트가 기대했던 만큼 관대한 사람 은 못된다는 걸 그 여자도 알고는 있었다. 캐롤이란 여자가, 그가 아내에게 가질 수 있는 신뢰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 것이었다. 그걸 아는 이상, 자신에게 다 시금 믿음이 생기게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인지도 알아야 했다. "이젠 새로운 제 모습이 익숙하세요?" "뭐, 점점 그래지는 것 같아." "그래도 낯 설은 데가 있긴 하죠?" 애버리가 자신없어 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 젊어 보여." 대답을 하고 난 테이트가 어깨너머로 그 여자를 흘깃 보고는 한마디 덧붙 였다. "더 예쁘고......" 애버리는 탁자에서 빠져나와 테이트 쪽으로 몸을 움직였 다. 그리고는 그의 팔을 붙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정말..... 더 예뻐요?" "그렇다 니까." "어떻게 더 예쁜데요? 어떤 데가 그래요?" 애버리는 그의 관용하는 한계 를 알고 있었다. 또 그가 기분을 조절하는 능력의 정도 역시도 들어서 익히 알 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위험신호가 떨어져도 벌써 떨어졌을 상황이었 다. 불빛에 눈이 부셔서 마음까지 조마조마하게 하는 것 같았지만, 에버리는 애 써서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테이트가 머리를 긁으며 궁하게 대답을 해왔다. "글세?.....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긴 좀 그렇군. 잘 모르겠어. 다르긴 다른데, 화 장?.. 머리모양?.. 난 모르겠어. 어쨌든 좋아 보인다는 건 사실이야. 그럼 된 거 아냐? 우리, 이 정도로 대충 끝내지? 당신....." 테이트의 날카로운 시선이 얼굴에 서 목, 가슴, 허리로 천천히 움직여가고 있었다. 마치 뭔가 더 많은 걸 알아내보 겠다는 눈치 같았다. 애버리의 온몸을 천천히 훑고 난 그가 다시 얼굴 쪽으로 시선이 주었다. "그래, 꽤 좋아 보여." 그런 다음 테이트가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쪽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당신이 부탁한 물건을 구해왔어. 어머니와 함 께 다녔지." 쇼핑백 쪽으로 머리를 가리킨 그가 하나 하나 그 항목을 읽어 내려 갔다. "이건 와이 새티스 스 프레이 향수이고... 당신이 불러준 목욕 재료는 못찾 겠더군. 미안해. 다음에 갖다줄게. 그리고 이건 팬티 스타킹. 색깔 마음에 들어? 당신이 연한 베이지 색이라고 말했던 건데, 제대로 고르긴 했나?" "좋아요." 애 버리는 그가 부르는 항목들을 따라 가방을 샅샅이 살펴 보았다. 그 여자는 상자 안에 든 병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몸을 약간 움츠렸다. 마개를 뽑은 다음 손분 무기로 손목에다가 살짝 뿌려 보았다. "음, 이 냄새!...." 애버리가 손목을 그의 볼 가까이에 갖다대자, 테이트가 냄새를 맡아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의 입 술이 애버리의 팔안쪽에 닿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좋은데?....." 무표정한 그 한마디 뿐이었다. 그리고는 애버리가 팔을 내리기도 전에 그는 고 개를 돌려버리는 거였다. "소매 있는 나이트 가운이라?" 테이트가 이상하다는 듯 그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 언제부터 잠옷을 입고 자기 시작했지? 게다가 소매 까지 달려 있는 걸로?" 입으로 하는 신경전에 지친 애버리가 발끈하고 나섰다. "비행기 사고 때문에, 난 팔에 2도 화상을 입었잖아요!" 그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가 싶더니 이내 쩝쩝 입을 다시며 도로 다물었다. 그리고는 목록의 마 지막 항목을 읽는 것이었다. "브라 34-B컵...이건 좀......" 가방에서 브래지어를 꺼 내 든 애버리가 꼬리표를 떼고는 다시 안으로 구겨넣었다. 집에 있는 캐롤의 옷 장에서 가져온 브래지어는 그 여자가 하기엔 너무 컸었다. "왜 그렇지?" "살이 빠져서 가슴도 줄었나 봐요..... 그동안 뭐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 안들었어요?" 애버리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경멸하는 듯한 어조였다. "아니, 아무것도 몰랐는걸." 에버리는 내일 집에 갈 때 입을 옷을 쇼핑백에서 꺼냈다. 테이트와 그의 어머니 지이가 캐롤의 옷장에서 가져다준 옷은 몸에 약간 크기는 했어도 그닥 흠 잡을 데 없이 잘 맞는 편이었다. 입어보니 그 여자보다 캐롤의 가슴과 힙이 더 풍만하고 굴곡이 있었다. 애버리는 오랜기간 유동식을 했기 때 문에 옷이 풍덩해진 거라고 변명을 했다. 신발은 꼭 맞았다. 여지껏 그 여자는 가능한 한 스커트보다는 바지를 입어서 팔과 다리를 가려왔다. 자신의 종아리와 발목모양이 캐롤과 다른 것을 집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는 못했다. 러트리지 일가에게, 어쩌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해 온 건지도 모르지만. 그런 걱정은 애버리의 뇌리 속에서 윙윙 거 리는 모기소리만큼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에 대한 집착이 애버리를 공포감으로 떨게 했고, 그래서 애버리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게 되어버릴지도 모를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캐롤의 성격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애버리에게는 확신 비 슷한 것이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의식을 가지고 일을 풀어나가는 한, 행운의 여 신이 자기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아직껏 어떠한 큰 실수도 하지 않고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 돼 나갈 것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했다. 이제 병실을 떠나야 하는 날이 눈 앞으로 닥쳐왔기 때문에, 애버리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러트리지 일가 사람들과, 더욱이 테이트와 한 지붕 아래서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한 집안 안에 있어 야 한다는 건, 자신의 위장이 드러날 위험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말이 되는 것 이었다. 가족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될 위험은 아주 사소한 구석에까지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국회의원 후보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능수능란하게 위장을 해야 하며, 또 그 일에 연관된 문제점들도 잘 처리해 가야 하지 않은가. "여보, 내일 아침에 기자들이 몰려들지 않을까요?" "여기 앉아봐, 그러지 않아도 애디가 그 얘기를 꺼내더군. 그에 대한 대비를 해 야 한다고 말야." "그게.... 무슨 말이죠?" 얼굴을 마주 대고 의자에 나란히 앉아 그 여자가 물었다. "당신은 내가 기자들 앞에서 실수라도 할까봐 그게 걱정이겠 죠?" "아, 아니야. 내가 걱정하는 건 기자들이 당신에게 무례한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엉겁결에 궁한 대답을 하는 그였다. 그러나 애버 리의 직업은 기자였다. 그말을 들은 애버리는 속으로 발끈 화가 났다. 좀 더 캐 물어 보기로 했다. "어떤 걸 두고 하는 말이죠?" "당신에게 사적인 질문을 아주 많이 할 거야. 당신의 얼굴을 무슨 동물원에서 나온 짐승처럼 자세히 뜯어볼 게 고. 어디 흉터 자국이 없나 하고 살펴도 볼거야. 그렇게 돼봐. 다음 날 신문을 들춰보면 일생을 통틀어 당신 사진을 가장 많이 보게 될 거라구." "내가 카메라 를 겁내는 줄 알아요?"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나도 당신 마음 을 알아. 하지만 내일 당신이 이곳에서 나가면 당신은 군중들에 둘러 싸일 거요. 물론 에디가 질서를 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긴 하겠지만, 기자들이 와락 달려들 어 이것 저것 묻기 시작하면 그걸 어떻게 말릴 수 있겠어? 그런 일이야 당신도 많이 당해 봤잖아?" 테이트가 품 안으로 손을 넣더니 또 다른 쪽지 하나를 꺼내 애버리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밤 안으로 외우도록 해봐. 당신을 위해 에디가 쓴 짧은 답변들이야. 내일 마이크도 준비해 온다고 했어... 왜,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나?" 애버리가 잔뜩 화난 얼굴로 쪽지를 그에게 다시 던졌다. "내가 이걸 읽는 다면,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저능아라고 비웃을 거예요!" 테이트가 한숨지으며 관자놀이를 부볐다. "에디가 섭섭해 할 거요." "에디만 만족시켜주면 그걸로 다 끝난다는 거예요? 이걸 내입으로 천역덕스럽게 읽어 봐요. 사람들은 모두들 사고가 내 얼굴보다 뇌를 망가뜨려놨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마치 제인 에어처럼 감금시켰다고 여기고야 말 거라구요.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아내를 가두다!' 뭐 이렇게 소문이 나도 좋단 말이죠?" "제인 에어? 몰랐는 걸? 당신, 언제 문학에까지 관심이 있었지?" 애버리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그러나 재빨리 다른 말로 둘러댔다. "영화를 봤어요.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나를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게 놔둘 수가 없어요. 또 사전에 준비해 놓지 않 아도 내가 하고 싶은 말 정도는 실수않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구요." "제발 경거망동하지 말야. 알겠어?" "테이트, 나도 입이 있고 생 각도 있는 사람이란 말예요!" 테이트에게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애버리는 속 사포처럼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어요? 난 저능아가 아 니란 말예요. 어떤 자리에 서고 내가 무슨 말을 어떠헥 해야 하는 건지, 또 해야 할 말인지 아닌지 정도의 눈치는 있어요. 공식석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도 알고 있어요." 애버리는 건네받은 쪽지를 반으로 부욱, 찢어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화가 난 테이트도 언성을 높였다. "오스틴에서의 사건 생각도 안나, 당 신? 난 그런 실수는 두 번 다시 용납할 수가 없어!" 애버리로서야 캐롤이 오스 틴에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턱이 없는 처지라, 변명을 해야할지, 사과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가지 확실한 건, 애버리 다니엘즈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직업이었고, 결코 겁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 는 대중매체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헌데, 캐롤 러트리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애버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11월가지, 공적인 이미 지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는 게 아니니까, 적당히 알아서 행동하겠어요. 좋 아요. 내가 얘기해야 될 걸 봐두도록 하죠." 애버리가 제 신세가 가엾다는 듯 허 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찢어진 종이를 주우려고 몸을 굽혔다. "이 지루하지 짝이 없는 답변문을 외우기까지 하겠어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을 하겠어요." "나 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그럴 것까진 없어. 정말 날 위해서라면, 아예 아무 말도 안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어차피 대중들의 호기심을 무마하기 위해 에디가 미리부터 작성한 거고, 또 형이나 아버지까지도 그의 의견을 같이 하는 입장이니까 결국 당신이 기자들 앞에서 대답을 하는 건 그들을 흡족하게 해주는 일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거든." 그가 주춤주춤 일어섰다. 돌아가려는 폼 이었다. 애버리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디는 어때요?" "그저그래. 달라 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 "걔한테도 내일 내가 집으로 간다고 했어요?" "해주 기야 했지.. 그렇지만, 녀석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맨디의 상태가 호전되는 기미는 없는 것처럼 들렸다. 불상한 생각에 마음이 찡해진 애 버리가 손을 목 밑에 갖다대고는 생각없이 문질렀다. 테이트가 애버리의 손 등 을 만졌다. "참, 잊을 뻔 했곤." 그는 침대 쪽으로 두어 발자국 걸어가서는 기둥 에 걸쳐둔 자켓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애버리에게 불쑥 내밀었다. "보석 이란 보석은 다 잃어버렸으니 내일 사람들 앞에서 좀 그럴 것 같다고 해서. 애 디가 결혼반지를 새로 맞춰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더군. 유권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게 아니겠냐면서 말이야. 그래서 새로 맞춰왔어. " 반지 건에 관해서 만 큼, 적어도 애버리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테이트가 보석에 대해 물어왔을 때, 그 여자는 봉투 안에는 자기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보석들이 들어있었다고 말했다. "홧ㄱ미에, 여기서 일하는 간호사에게 줘버렸어요." "그럼, 당신 건 어디 있다는 거야?" 그렇게 물은 테이트에게 발칵 짜증을 부렸다. "낸들 어떻게 알아 요! 그렇게 궁금하면 보험회사에 알아보지 그래요? 사람이 죽어가는 혼란스런 지경에, 내 것 네 것 척척 챙길 수가 있었겠어요, 어디?....." 테이트는 회색빛 우 단으로 겉을 싼 반지 케이스에서 단순하고 굵은 금반지를 꺼내들었다. "다른 보 석들만큼 값나가는 건 아니겠지만, 초라해 보이지는 않을 거야." "마음에 드는 걸요." 반지를 그 여자의 세 번째 손가락에 끼워줄 때 그 여자가 말했다. 반지를 끼워준 테이트가 손을 거두며 주먹을 쥐었다. 그역시 반지를 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쌍가락지였다. 다음 순간, 애버리는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애버리가 고개를 숙여 그의 손 등 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캐롤......" 그가 점잖을 빼며 타이르는 목소리로 그 여자를 제어하려 했다. "이러지마....." "여보, 제발요......이제껏 당신이 베풀어준 모든 것에 감사를 표시하고 싶어요. 제발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애버리는 자신 의 감사를 받아달라고 그에게 애원했다. "처음으로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난 그때 죽고만 싶었어요. 그때부터 난 끝간 데 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왔어요. 매 순 간 순간을. 당신의 지칠 줄 모르는 격려가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내 삶을 스스 로 포기하고야 말았을 거예요. 당신은....." 애버리는 다음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재생된 그 여자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 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이번 사고를 통해 내게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원천이었어요, 고마워요, 여보....." 애버리는 입으로만이 아닌 우러나는 가슴으 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난 뒤, 애버리는 벅차오르 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어 자기 입술을 테이트의 입술에 갖다댔 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제꼈다. 애버리는 그의 빠르고 놀란 듯한 숨소리를 들었 다. 한 눈에도,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놀란 눈으로 그 여자의 얼 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그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허공에서 부딪치는가 싶더니, 테이트가 마지못해 고개를 아래 쪽으로 가져왔다. 그 여자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가볍고 짧게 입을 맞춰주었다. 애버리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몸을 한껏 뻗쳐서 한 번 닿은 그의 입술을 떨 어지지 못하도록 낮게 중얼거렸다. "테이트. 키스해 줘요, 제발!" 낮은 신음소리 와 함께, 테이트의 입술이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애버리의 허리를 감은 그의 억 센 두 팔이 점점 안으로 당겨졌다. 그리고는 한 손을 그 여자의 목에 감고, 깊은 입맞춤을 쉬지 않으며 엄지손가락으로는 목을 애무해 주었다. 그가 애버리에게 로 깊숙히 혀를 넣었다. 별안간 테이트가 입술을 뗐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 무래도....." 거친 호흡을 들이내쉬며 테이트는 그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의식 적으로야 거부하고 있다 해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애버리의 입술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그는, 입을 맞춰줄 만큼 감정을 허락한 자신이 도무지 이해 가 되지 않았다. 좀 전의 자기 행동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세 차게 흔들었다. 애버리는 몇 달 동안 비밀스럽게 키워왔던 테이트에 대한 열망 을 분출하면서 그에게 다시 키스했다. 두 사람의 입술은 갈망과 열기로 함께 녹 아버렸다. 그 여자의 입술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더욱 그 다음의 것을 원했다. 애버리 역시 테이트의 모든걸 받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애버리를 애무하던 그 가 그 여자의 허리를 바짝 안으로 당기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 여자는 힘 받 는 대로 몸을 활처럼 굽히며 그의 목 뒤로 손을 올려 깍지를 낀 채 테이트의 머 리를 제 쪽으로 힘껏 당겼다. 그 여자는 그의 머리카락과 옷 그리고 맨살의 어 깨로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애무했다. 그러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테이트가 애버리를 밀쳐내고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나버린 것이다. 그가 입술에 남은 애버 리의 키스를 닦아내려고 손 등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걸 본 애버리는 화가 났다. 그 여자는 작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러지마, 캐롤." 그가 단호하게 이야 기했다. "난 당신이 하고 있는 이 새로운 게임에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 다시 익 술해질 때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어. 나역시 당신에게 일어난 불행 한 사건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있어. 생각해 봐. 당신이나 나나 법적인 부부라는 것 이외에 관계지을 수 있을 만한 게 하나라도 있나? 그래, 그래서 여지껏 내 도의상의 의무만 다해왔던 거였지. 안된 일이지만, 내 감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 어. 당신이 아무리 그런 척해도, 내겐 아무 영향도 줄수가 없는 거라구..... 달라 진 건 아무것도 없어.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테이트는 침대에 걸어둔 스포츠자켓을 움켜쥐었다. 그걸 어깨에 걸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 실을 어슬렁어슬렁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에디 파스칼이 앞뜰로 나가고 있었다. 해마다 따사로운 5월이면 녹음이 피어나는 초목에 봄햇살이 내리쬐고, 협죽도가 수영장 주위로 경계를 치고 있는 도자기항아리 안에서 기지개를 편다. 화단엔 이끼장미가 한가득인 정말 아름다운 정원이다. 밤시간인 지금은 꽃들도 봉오리 를 닫고 있지만, 앞뜰 전체를 스포트라이트로 비추는 덕분에, 낮 동안의 화려한 꽃잔치를 방불하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일가가 살고 있는 저택의 흰색 외벽엔, 크고 갸름한 꽃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겐가?" 에디가 물었다. 파티오 의자에 정물처럼 고독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테이트였다. 에디의 물음에, 그브정한 자세로 앉아있던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생각 좀 했어." 그는 캐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주일 간의 여행을 다녀온 다음 간만에 아내를 찾아갔을 때, 거울을 통해 다시금 보게된 아내 캐롤 러트리지의 모습은 차라리 눈이 부셨다고 해야할 만큼 아름다웠다. 자신의 도착이 뭔가 특별한 걸 의미하 는 것처럼, 캐롤의 검은 눈동자는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캐롤의 눈빛을 완 전한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내 그 연극에 빠져들어버렸다. 얼 마나 바보스러운 자신이었나. 오늘 일에 대해 테이트는 내심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좀더 이성적으로 그 여자를 몰라라 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끝까 지 캐롤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다시금 품에 안지 않을 수 있었다면, 집으로 돌 아온 뒤 가장 믿음 가는 친구 에디에게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을테고, 또 지금처 럼 손에 스카치병도 들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화가 난 테이트는 잔 바닥에서 다 녹아가고 있는 얼음 위에 시바스리갈 병을 거꾸로 세웠다. 에디가 테이트 가까이에 의자를 당겨 앉고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 다. 그런 에데의 시선 속에 어떤 감정이 녹아 있는 건지 모를 리 없는 테이트였 다. 그는 감추지 않고 비난의 눈길을 주고 있는 친구에게 소리를 냅다 질렀다. "자네가 보고 있는 게 영 마음에 안들면, 다른 걸 쳐다보든지, 아니면 아예 이 자리를 피하면 될 거 아닌가!... 난!... 내 이 변덕스런 마음이!...." 테이트는 정숙 하지 못한 캐롤에게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의 부정함을 용서할 수도 있으 련만, 결국, 다른 사람도 아닌 테이트 러트리지의 아내가 그런 여자라는 것에 못 내 분해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속좁은 남자가 바로 자기의 모습임에야 어쩌 랴. "캐롤 때문에?" 에디라고 테이트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 아 니었다. 선거매니저란 명색답게, 그는 이제 테이트의 마음속까지 환히 들여다보 는 사람이었다. "그래....." "자네, 내가 준 답변문 얘기는 했나?" "음.... 그 여자가 그걸 어떻게 했는지 아나?" "필요없다고 뻗댔겠지...." "반으로 북북 찢어버렸어." "신상에 해롭게 쓰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더 낫게 평이 나도록 쓴 건데." "자네 가 직접 그렇게 말하게나....." "내가 마지막으로 자네 집사람에게 충고를 했을 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기나 하나? 날 보고 상머저리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대는 거야. 그날 이후로 난 아예 입을 닫아두는 게 수라고 생각해 온 사람일세. 그래 서 답변문도 자네에게 대신 갖다주라고 부탁을 했던 거고 말야. 캐롤이 어떻게 생각을 하건 간에, 비행기 사고 이후로는 처음 인터뷰를 갖는 것 아닌가. 기자란 사람들도 캐롤만큼 직선적이고, 또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호락호락 놔주지 않을 게 뻔한데, 그렇게 되면 성질 급한 캐롤의 속만 긁어 놓는게 되는 것 아니겠나. 만약, 그렇게 되기라도 하면 그 다음 일은....." "나도 그게 염려가 돼서 캐롤에게 이야기를 했어. 헌데 누가 그런 걸 부탁이나 했느냐고 발끈 화부터 내는 거야. 자기는 생각도 없고, 입도 없는 사람이냐고 하면서 그 정도는 문제없이 해낼테 니 걱정 말라는 거지 뭔가." "글세....." 에디가 피곤한지 목을 긁으며 영 안심이 안된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자네가 나서야만 할 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 냥 보고만 있어 주게.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제 입으로도 잘 할 수 있 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을 했으니 적어도 중간에서 우리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 야 하겠나, 어디." 말을 마친 테이트가 술 한모금을 들이켰다. 알뜰을 환하게 비 추고 있는 불빛 속으로 자살하듯 몸을 날리는 나방 한 마리를 지켜 보면서, 그 는 이쪽 손바닥에서 저쪽 손바닥으로 잔을 굴렸다. "그런데 캐롤 말이야....." 에 디가 의아해 하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캐롤이 어쨌다는 거지?" "도대체!....나도 모르겠어, 뭔가 달라....." 테이트가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겐가?" 사고가 있고서 캐롤이 의식을 찾은 그때부터, 그 여자에 게서는 뭔가 다른 이미지가 풍기고 있었다. 남편인 테이트가 그걸 느끼지 못했 을 리 없고, 또 저으기 이상스럽게 생각해오기는 했지만, 차마 제 아내 같지 않 다는 그 한마디만은 가족은 물론, 가장 막연한 에디에게도 입밖에 낼 수가 없었 던 그였다. "사고 이후로 캐롤의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 차분해진 것 같기도 하고... 붙임성도 생긴 것 같고....." "붙임성이라? 방금 전엔 답변문 때문에 발끈 성을 냈다고 했지 않나?" "그래... 그렇지만 그 정도로 성을 낸 것도 실상 오늘이 처음이었어. 거의 처음. 내 보기엔 캐롤이 사고를 당한 후로 제 앞에 닥친 곤혹 스러운 상황들을 겪어내면서 많이 진지해진 것 같아. 외모로 봐서도 사고 전보 다는 어려진 것 같지만, 말하는 품이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훨씬 성숙해진 것 같은 거야." "....하기는. 나도 그 비슷한 느낌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니까. 뭐 그 속까지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거겠지만, 캐롤 자신도 죽음 앞에선 어ㅉ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깨달은 거라면, 자네가 지금 얘기하는 대로 생각이 바뀐 건 지도 모르지." 고개를 적당히 떨군 에디는 넓게 벌어진 티 테이블의 다리 사이의 테라스 타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 렇고, 앞으로는 어떻게 할 셈인가? 캐롤과의 사적인 일들 말야." 에디의 말이 끝 나기가 무섭게 테이트가 에디를 따가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야 자네가 상관 할 일이든가?" "지난 주에 포트워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모르는 줄아 나?" "도대체 무슨 얘길하는지 모르겠군." "그때 그 여자 말이야, 테이트." "그곳 에 모였던 여자가 어디 한 둘이었나?" "정당대회가 끝난 다음, 어떤 여자가 자넬 자기 집까지 초대했지 않았나?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부인하지는 못 할텐데?" 난처해진 테이트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맙소사, 도대체 나란 사람은 자네를 벗어날 재간이 없는거군!" "적어도 자네가 상원의원에 당선될 때까지는, 어쩔수 없네. 싫든 좋든 말야....." "글쎄, 공연한 상상 말아. 난 거기 안갔어." "다 알고 있다니까." "그럴만한 이유를 대봐. 내가 그 여자 집에 갔을 거란 증거를 대보란 말야." "정확한 이유가 있지. 여자라는 것." 에디의 정확한 진단에 테이트 는 새삼 놀랐다. 머쓱해진 그가 짧게 웃어보였다. "필요했지?" "......" 테이트의 머리 속에 번뜻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선거 유세를 하러 그와 함께 여행 을 떠났을 때, 테이트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자처하며 제 집까지 초대한 미모의 여인이 있었는데,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보니 어쩌면 그 모두가 에디의 계획이 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이 서는 거였다. "자네가 만든 일이었군, 그렇지?" 테 이트의 질문에 에디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대답을 했다. "자넨 남자가 아니던가? 아내 몸엔 몇 달 동안 손가락도 댈수가 없는 처지이고, 그 전에도 별반....." "에 디, 자네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가족들 모두가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난 단지 그걸 사실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고. 오히 려 자네 자신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나?" "피곤해. 그만 자 야겠어." 주춤주춤 일어서는 테이트를 에디가 붙잡아 앉혔다. "가긴 어딜 가나? 난 진심으로 자넬 염려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거야. 앉아. 차라리 자네 답답한 속 을 털어놓으란 말일세." 테이트를 다잡아 앉히는 데 성공한 에디는 그가 진정할 동안 말없이 몇 분을 기다려주었다. "내 얘기는 자네가 그동안 너무 오래 여자를 잊고 살아왔다는 거였어." 에디가 조용하게 말했다. "금욕이 지나치면 오히려 사 람은 더 긴장을 하게 돼요. 신경만 날카로와지고... 어떤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만 낳을 뿐야. 뭐랄까, 내가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지. 자네에게 다시금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바로 따뜻한 잠자리라는 생 각이 들어서였어." "자네 뭐가 되고 싶어서 이러는 겐가? 포주인가?" 테이트가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말하자 에디가 저으기 실망스러운 듯이 그를 건너다 보았 다.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돼 그렇게 감정적 으로만 받아들이나?" "게리 하트한테나 말해봐." "그 사람이야 말쑥하지가 않잖 아?" "그러는 자넨?" "나야 그 정도는 아니지.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께서 지금 자네가 한 말을 들으시면 뭐라고 하실지 알기나 하고 이런 소린가?" "아버진 이 상주의자야." 에디가 설득조로 나오기 시작했다. "자네 아버지는 모성애만큼이나 잠자리의 효과를 믿고 계신 분이더군. 도덕성이란 건 어차피 어중간한거라는 입 장이시지. 나? 나야말로 지극히 현실주의자지. 그야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가 아 무리 외적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을 하고 다닌다손 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있는 걸세. 바로, 남자 역시 동물성을 저버릴 수 없는 자연의 섭리 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지... 다른 말로 하자면, 자네가 스스로 그럴 수만 있다면, 굳 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거야, 부담 이 없는 거라면."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이제껏 감추어왔던 자신 의 깊은 속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있게 말을 마친 에디 는 어깨까지 으쓱해 보이며 까닭모를 미소를 보내오는 거였다. 그의 말이 다 끝 난 건가 싶더니 이내 다음 말로 결론을 짓는 것이었다. "테이트, 자네 같은 상황 에서라면, 가정을 지키는 선에서 약간의 외도는 오히려 정신건강에 보탬이 될 걸세." "도대체 내 어떤 모습이 아무 여자나 안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는 걸로 보인 겐가. 얘기나 들어보자구." 테이트가 곱지 않게 묻는데도, 에디는 여전히 미 소 띤 그대로였다. "자네 얼굴에 나타나는 자그마한 표정의 변화에도, 난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수가 있어. 그만큼 우리 사이가 남같지 않다는 말도 되는 거지. 자네가 음울한 표정으로 잔뜩 찌푸리고 다닐 때부터 그속을 들 여다봤다고나 할까. 공적인 일로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내겐 아직도 풋나기 어린 시절의 그 테이트 러트리지라고." "에디, 자네도 모를리 없겠지만, 난 이번 선거 에 내 모든 미래를 걸었어. 상원의원으로서 입지를 세울 내 야망을 이제 막실현 하려고 하고 있어. 그런 내가, 그것도 남보기에 별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남편이, 기껏해야 20분도 채 못되는 부정에 운명을 걸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난 단지 자넬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뿐이야." 에디가 한숨을 내 쉬며 말끝을 흐렸다. 반대로 테이트는 비양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정 작 자네가 신경써야 할 것은 친구를 위해 무얼 해줘야 할까. 하는 문제가 아닐 까?" 에디가 맥없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런거야 고전에 나오는 케케묵은 교 제술 아닌가?" 그들 둘은 집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트가 에디의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자넨 좋은 친구야, 에디." "고맙굼." "그렇지만, 캐롤의 시각 도 날카로운 면 하나 쯤은 있었어." "뭔가, 그게?" "자네가 상머저리라는 얘기." 어린아이처럼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한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14 애버리는 선글라스를 벗어들었다. "차라리 이런 건 쓰지 않는 게 더 낫겠어 요." 에디가 애버리 역성을 들고 나섰다. "꼴사나운 모습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 이느니 그 편이 더 낫겠군요." "제 말이 그 말이예요." 애버리는 벗어든 선글라 스를 천연실크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그 자켓은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주름바지 와 썩 어울렸다. "괜찮아 보여요?" 그 여자가 조심스럽게 테이트와 에디에게 물 었다. 그 말에 에디가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기 가 막힌 걸요!" "저 친구 익살이란!" 테이트가 빙긋이 웃으며 짖궂은 농담을 했 다. 에버리가 몽당한 머리를 가볍게 뒤로 쓸어넘기며 다시 물었다. 안심이 안된 다는 눈치였다. "머리는요?" "멋져요, 매력적이기만 한 걸요?" 애버리의 물음에 에디가 대답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가볍게 손뼉을 치고는 손바닥을 마주하고 비벼댔다. 테이트가 중간에 끼어들어 두 사람에게 환기를 시켰다. "자, 가지. 이 거 너무 오랫동안 사냥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 같아? 나가자구." 설레는 발걸음 으로 세 사람은 애버리의 병실을 나섰다. 병원직원들이나 간호사들과는 이미 작 별인사를 해 둔 터였지만, 그들이 로비로 가는 복도를 걸어나오며, 간호사실 앞 을 지나칠 때, 안에서 사람들이 반가운 얼굴로 다들 나와서 행운을 비는 덕담 한마디씩을 해주었다. "차가 어디 있죠?" 그들이 로비를 거의 다 나왔을 때, 애 버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유리문 바깥을 언뜻 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기 자들의 무리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건물 바깥으로 나오자 검정색 캐딜락 리무 진이 커브를 돌아 그들 앞쪽에 정차했다. 정장을 한 운전수가 재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캐롤 당신을 편안하게 데려다 주고 싶어서 준비를 했지요." 에디가 밝 은 얼굴로 설명을 했다. "편안하게요? 무엇으로부터죠?" "번잡스러움으로부터요. 짐은 이미 운전기사가 트렁크에 다 실어놨죠. 이제 몸만 가면 돼요." 어느 사이 에 기자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이쪽 저쪽에서 순서없이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쏟아지는 보도진들의 질문을 점잖게 거절하는 동안, 어느새 세 사람은 리무진에 서 한참 밀려나버렸다. 테이트가 애버리를 흘깃 돌아다보았다. 예상하고 있던 상 황에서 마지막으로 애버리가 보여줘할 태도며 해야할 말들을 무언 중에 다짐하 는 듯한 눈빛이었다. 테이트가 차 쪽으로 가기 위해 앞쪽으로 나섰다. 그런 그를 애버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면에서는 친구인 테이트 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글쎄요, 워낙 속이 깊은 사람이라 놔서....." 애버리 는 기자들에게 들려줄 그럴싸한 인터뷰 대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에디가 작성해 준 것 말고도, 결코 그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을 범위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 는 그런 문안을 생각해 놓고 있었다. 적어도 테이트의 평가에 있어서는, 그의 선 거본부장은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사람이란 것까지 배려를 한것이었다. 애버리 를 이끌고 차에까지 다다른 두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각기 다른 일을 했다. 에디는 언제라도 두 사람을 차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게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 고, 테이트는 애버리와 팔짱을 낀 채 기자들의 주의를 돌리려고 하고 있었다. 기 자들과 사진기자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몇 달만에 모습을 나타낸 캐 롤 러트리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잡아보려는 일념으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이었다. 에디의 지시로 애버리는 인터뷰를 시작했다. 입을 연 애버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캐롤 러트리지였다. 실로 캐롤의 남편까지도, 그밖 에 가장 가까이에서 애버리를 바라볼 수 있는 일가 사람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정 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정작 마이크 앞으로 다가간 애버리는 두려운 생각이 앞섰다. 누군가가 앞으로 뛰어나와 '여기 제 욕심 하나 만을 위해 성형수술까지도 불사했던 비열한 기자가 있다!' 애버리 다니엘즈는 사 기꾼이다!'라고 소리라도 지를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떠 낼듯한 우뢰 같은 박수가 다음 순간을 장식했다. 애버리가 깜짝 놀라며 공상에 서 깨어났다. 애버리와 테이트, 그리고 에디 이렇게 세 사람은 주변에서 일어난 급작스런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 졌다. 애버리의 두 다리가 눈에 띄게 후들거리 기 시작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그 여자는 테이트를 건너다보았다. 바로 옆자리에 서 테이트 러트리지가 환한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애버리가 손을 들어 박수를 잦아들게 했다. 그 여자의 손짓 하나로 박수소리가 스물스물 잦아들기 시작했다. 간단히 인사말을 하는 애버리의 목소리가 여실히 떨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머리 속에 잔뜩 준비해두었던 말까지 다 잊어버릴 판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애버리는 목청을 가다듬고 머리를 가볍게 뒤로 젖혀 긴장을 풀어보려 했 다. 바짝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그 여자는 에디가 준비해 준 짧은 답변문의 내 용부터 말하기로 했다. "우선, 기나긴 병원생활을 마치고 이제 무사히 집으로 돌 아가게 된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항공 398기의 끔찍했던 추락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졸지에 잃은 분들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번 사건은 아직도 저와 제 어린 딸에게는 믿기지 않는 무서운 사건으로 여겨지기만 합니다. 그러나 저 캐롤 러 트리지는 그 비극적이고 무시무시한 사고에서 이렇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 번 투병생활을 통해서 전 저의 남편 테이트 러트리지의 극진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몸소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남편의 끊임없는 후원과 격려가 아 니었던들, 전 존재가 자체까지도 위협을 받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한 마디는 에디가 쓴 것이 아닌, 즉흥적으로 그 여자가 보탠 말이었다. 말을 마친 그 여자는 용기를 내어 테이트의 손 위에 자신의 한 손을 살포시 얹어놓았다. 예상하지 못했던지, 테이트는 잠깐동안 망설이는 듯 하다가 그 여자의 손을 부 드럽게 감싸쥐어 주었다. "러트리지 부인, 당신 생각엔 아메리카항공사가 이번 추락사고의 책임져 줄 것으로 예상하고 계십니까?" "조사가 완결될 때까지는 뭐 라고 얘기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결과는 NTSB에 의해 발표될 것입 니다." 그 여자를 대신해서 테이트가 대답했다. "러트리지 부인, 손해배상청구소 송은 제기하실 계획이신가요?" "지금 당장 소송을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번 질문에도 역시 테이트가 대신 대답을 했다. "부인께선 불타는 사고현장에서 따님을 구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이나 심경 같은 걸 말씀해 주시 죠." "말씀드리겠어요." 이번엔 테이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여자가 선수를 뺏 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살아야겠다는 생존본 능이 절 지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성본능이 발동했나 봅니다. 그래서 아이를 구했던 거죠.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아이 어미로서의 그런 본능 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질문입니다.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얼굴이 새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같 은 건 없었습니까? 혹시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 말입니다. 꼭 두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기자의 물음이 끝나기 도 전에 말허리를 자르며 대답을 했다. 그 어느때 보다도 단호한 말투였다. "전 남편이 선택한 의료진이라는 사실 하나로 더 이상 의심이나 무서움 같은건 느끼 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제 남편이 선택을 한 것이었으니까요. 그 덕에, 지금 이 렇게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테이 트가 마이크를 제 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하려, 한 손으로 귀에 갖다 대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이제 됐겠죠? 여러분 들 생각대로 캐롤은 건강합니다. 자, 이젠 캐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 습니다. 인터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테이트가 그 여자를 앞 쪽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기자와 군중들도 만만히 물러설 기세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더욱 바싹 세사람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었다. 질문도 계속되었다. "러트리지 씨, 앞으로는 부인도 함께 선거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까?" 배포 좋게 생긴 기자 하나가 그들 앞 을 가로막고는 마이크를 억지로 들이대며 기세좋게 물어왔다. "따님의 상태는 어 떤가요, 러트리지 씨!" "그 아이도 건강합니다. 감사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갈 수 있도록....." "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러 트리지 부인. 따님은 엄마의 얼굴이 변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 까?" "더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소." 두 사람을 군중들에게서 떼어놓으려 무진 애 를 쓰고 있던 에디와 함께, 테이트는 그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 다. 모인 사람들의 극성도 여간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호의적인 것 같았지만, 그 래도 갑자기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쌓인 애버리로서는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애버리는 어느 누군가가 개인적인 위기에 있을 때 마이크를 갖다 대는 기자의 입장이었다. 기자란 직업 은 늘상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고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정보, 새로운 소식 을 전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임무 를 수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기에 화살처럼 갖다 대는 마이크 저편의 사람 의 마음 같은 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면도 적잖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늘 애버리의 마음 속엔 제 직업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런 직업에 몸담았던 애버리인 까닭에 이번 인터뷰만큼은 듣는 사람들 쪽에서는 전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확실한 연극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번뜩 애버 리의 시야에 KTEX 방송국의 마크가 붙은 비디오 카메라가 들어왔다. 뒤를 돌 아다보니 모니터화면에 제 얼굴이 비쳐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애버리는 카메 라맨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름아닌 반 러브조이였다. 미치도록 반가운 마음에 애 버리는 자신은 이제 반에게는 낯선 사람이란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여 자가 반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창백하고 야윈 얼굴의 애버리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반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젊은 처녀라고 여길만 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툭 튀어나온 반의 광대뼈를 마치 막내동생을 어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 여자는 공식석상이란 것도 잊은 채 그 를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애버리의 느닷없는 포옹에 정작 놀란 쪽은 반 러브조 이였다. 반의 생각으로야 상원의원 후보의 아내인 이 여자가 어딜 보고 자기에 게 그런 남다른 반가움을 표시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잡히는 일이었기 때문 이었다. 의아해 하는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였는지 애버리는 곧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는 이렇다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다시 몸을 돌려 테이트 러트리 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버리가 그가 있는 데로 다시 돌아서자, 테이트는 그 여자를 리무진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차 안으로 들어가며 애버리는 뒤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반은 어깨에 비디오 카메라를 메고 떠나는 애버리 일행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차르를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 위 에 올려진 비디오 카메라가 그들 일행이 병원 앞마당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열 심히 따라가고 있었다. 시끄러운 경찰 무선 교신기 소리와 기자, 카메라맨, 잔심 부름꾼들의 움직임이 그 이전의 애버리의 못브을 연상하게끔하고 있었다. 테이 트는 애버리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다리가 애버리의 허벅지와 맞닿 아 있었고, 팔꿈치는 그 여자의 가슴에 닿을락말락 하고 있었다. 바깥 시선을 의 식해서였는지 테이트가 엉덩이를 바짝 붙인 채 그 여자 옆에 꼭 붙어앉아 있었 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애버리가 원했던 바로 옆자리에 앉아준 것이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에디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훌륭했어. 당신. 즉석에서 했던 대 사도 아주 괜찮았고." 테이트의 손이 애버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런데, 그닥 좋은 얼굴은 아닌 것 같군. 왜 그러나?" 에디의 물음에 테이트는 목단추를 풀르 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늘어뜨리며 대답을 했다. "케롤이 한 말들은 문제가 되질 않아. 그렇지만." 그는 에디에게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다음 말을 이었다. "문제를 맨디를 두고 이것저것 물은 기자들이란 거야. 고약한 사람들 같으니. 기 껏 묻는다는 게 아이 얘기라니 말야. 그것도 대답하기 곤란한 것만 골라서... 더 구나, 캐롤이 선거에 대해 뭘 안다고 선거얘기를 꺼내나, 꺼내길." "그 사람들이 진짜 우리 일을 궁금하게 여기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질문을 했던 거라고 생각하나? 어차피 자극적인 호기심 때문이었을텐데, 뭘." "그게 얼마나 생각없는 짓들이냔 말일세. 걘 내 딸이야. 사람들이 허투로 여기고 아무렇게나 말을 삼는 건 참을 수가 없어." "적어도 내 문제에 관해선 걱정 안해도 될 거예요." 허스키 한 애버리의 이 한마디로, 테이트가 단박에 곱지 않은 눈으로 흘기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 "지금까지야 날 두고 얘깃거리를 삼았지만, 또랑또랑하게 제 할 말을 다하는 걸 보고 나니 재미가 없어진 거겠죠. 그러니 다음 차례가 누구겠어 요? 당연히 맨디나 당신 선거얘기가 아니겠어요?" 그 여자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그들은 당신에게 걸린 중요한 사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달려들게 뻔해요." 애버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병원생활 말 년에, 텔레비전 뉴스와 일간신문을 통해 테이트의 선거운동 진행상황을 면밀히 주시해 왔던 덕분이었다. 애버리의 말대로 테이트 진영에서는 처음부터 상대 후 보에게 맹공을 퍼붓는 것으로 방어를 겸한 공격을 해왔다. 지금까지야 승승장구 로 버티어 왔다지만, 진짜 싸움이 코 앞으로 닥쳐있는 상황이었다. 11월에 맞붙 어 각축을 벌여야 할 상대는 로비 데커, 바로 현직 상원의원인 것이다. 데커는 텍사스 정계에 있어선 선구자적인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다. 애버리의 기억대로, 그는 막강한 상원의원인 것이다. 언젠가, 두 사람이 함께 강연을 하는 곳에 애버 리가 취재를 갔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서로 에게 호의를 가지는 선의의 경쟁자의 모습들이었다. 다만, 데커의 호의와 테이트 의 그것 사이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팽팽한 적대감을 감출 수 없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날 애버리는 인상 깊은 두 사람의 경쟁자에게 청중으 로서의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즈음 뉴스를 장식 하는 기사 가운데 가장 세인의 관심을 끄는 건 단연 선거얘기였다. 이야기가 되 어져 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번 선거야말로 흥미진진하고 불꽃 튀기는 경쟁의 연속이었다. 날마다 뉴스 방송에서는 상원의원에 출마한 각 후보 들에게 공평하게 시간을 배당하려는 노력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시간은 각 후보 당 15초. 애버리가 알고 있기에도 15초라는 시간 배당은 바람직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요 며칠 간을 되돌아보면, 데커의원은 그 15초라는 시간을 각 유세장에 서의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는 것으로 효과적으로 사용한 반면, 테이트의 경우엔 캐롤이나 맨디의 근황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는 것으로 거의 다 써버리는 식이었 다. 한마디로 상대적 약세에 놓인 처지였다. "어떻게 하면 맨디에게 귀찮게 굴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테이트의 혼잣소리에 애버리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곧 괜찮아질테죠, 뭐. 어차피 호기심이란 소리소문없이 잦아들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염려를 할 시간이면 여지껏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소외된 농민문제 같은 것에 투자를 해보세요. 신념있게 보이는 게 중요할테니까요." "캐롤이 아주 잘 지적했는 걸?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테이트?" 에디가 어쩌나 본다는 식으로 그 를 건너다 보고 있었다. 대답을 하는 테이트의 표정이 묘하게 얼그러지기 시작 했다. "나라고 그걸 생각 안했을 리가 있겠어? 나도 다 생각이 있어요." 그가 창 문 밖으로 얼굴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색하게 대화가 끊긴 세 사람 은 선거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에디가 입을 열었다. "캐롤, 모 두들 당신을 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대대적으로 환영을 해야 한다고 난리법 석이었죠. 그래서 제가 공연히 일을 크게 벌일 것 없다고 타일렀어요. 글쎄, 그 렇게 일러두긴 했어도 당장 우리가 도착하면 어떻게 될지.... 워낙 흥분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이라서....." 조소석에 앉은 그가 막연한 불안감으로 얼굴이 발그레해 진 애버리를 백미러로 보고는 달래듯 그렇게 말해주었다. "흥분이 돼서 그런가 봐요, 애디. 잠시만이라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둬 주시겠어 요?" "그렇게 해주게나, 에디. 말 걸지말고 가만히 두자고." 테이트가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에디도 더 이상은 아무 말이 엇었다. 곳이어 그들 이 탄 리무진이 선거사무실로 보이는 건물 앞에 멈추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 아도, 처신하기 곤란한 이 상황을 무난히 잘 넘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버 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테이트가 이끄는 대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낯 모르는 사람들과 정답게 안부를 묻는 위태로운 연극을 하는 수 밖에. 어느덧 테이트와 에디가 차밖에 서서 그 여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트가 손을 내밀어 어서 나오라는 시늉을 했다. 뒷머리가 쭈뼛쭈뼛 일어설 정도로 불안한 마음이었음에도, 그 여자는 일부러 태연하게 처신해야 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가 이끄는 대로 사무실 쪽으 로 걸음을 옮겼다. 문에 다다랐을 때, 애버리는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에 가슴까 지 느끼하게 역겨워짐을 느꼈다. '이건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야, 애버리. 정신 똑 바로 차려야 해....."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으며 조심스럽게 문앞에 섰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출입구에서 바라봐도, 그 안은 부산스러 워 보였다. 한 눈에도 얼마나 정신없이 바쁜 곳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원 봉사자들이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걸고 하는가 하면, 이쪽 편에서는 몇 사람 이 계속 봉투를 확인, 선별하고 있었다. 편지를 개봉하고 있는 사람, 앉아서 이 것 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는 사람, 모든 이들이 하나 같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 었다. 마치 혼자 원숭이 우리 속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으로 들어 선 테이트는 상의를 벗고 팔소매를 걷어부쳤다. 그리고는 이쪽 저쪽 일이 되어 가는 상황을 살피고 묻고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세 사람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일에 매달려 있던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을 반겨맞기 시작 했다.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표정을 지켜보는 애버리까지도 모두들 진정으로 테 이트의 선거에 헌신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진지하고 열의에 찬 표 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에디의 말대로, 애버리에게 떨어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테이트와 인사를 나눈 그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 그 여 자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애버리는 게걸스런 호기심의 눈 초리를 받고 싶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녕하세요, 러트리지 부인." 한 젊은 남자가 애버리 쪽으로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전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군요." "고마워요." "러트리지 씨, 아침에 주지사께서 부인의 완쾌를 축하하는 축 전을 보내왔습니다. 부인의 용기를 칭찬하시더군요. 좀 전엔 전화까지 주셨습니 다. 오시는 대로 전화를 주셨으면 하시던데요. 러트리지 부인의 일로 공연히 맘 만 부산스럽게 가지지 말라며 11월에 있을 선거에 총력을 다하라는 격려를 보내 주셨습니다. 공정성을 잃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말입니다. 답신을 보낼까요?" " 글세,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말이 없군. 일단 보류해주게나." 주지사의 전언을 전 했던 젊은 남자가 씨익웃었다. 그리고는 안쪽의 프로그램실로 다시 들어갔다. " 현재까지 상황은 어떻지?" 꼭 누구에게라고 할 수도 없이, 여러사람을 두고 테이 트가 물었다. "지금 이 마당에서 투표결과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벌써부터 그 러나?" 에디가 이 책상 저 책상으로 작업진도를 점검하며 건성건성 테이트에게 대답을 했다. 테이트가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책상으로 가던 에디는 팬시 에게 눈길을 돌렸다. 팬시가 제 숙모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래왔 던 것처럼. "팬시, 뭐가 또 틀어졌길래 뚱한 얼굴이지?" 에디가 곱지 않은 표정 을 하자 테이트가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지지도 분석은 끝났니, 팬시?" "부동표 는 14퍼센트 정도 될 걸로 나타났어요. 작은 아버지, 지난 주나 다름이 없어요." 그렇게 대답을 하며 팬시가 테이트와 애버리가 선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 캐롤 숙모?" "그래, 잘 있었니, 팬시?" 팬시의 얼굴에 천사 같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 나, 그 미소 속엔 애버리를 불안하게 하는, 마치 자신이 캐롤이 아닌 딴 여자임 을 알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한 날카로움이 묻어 있었다. 얼마 전에 팬시가 병원 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팬시는 캐롤 숙모가 중한 상처를 입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숨죽여 웃었다. 철없이 팬시의 태도를 본 넬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 었다. 그길로 팬시를 밖으로 내쫓아버린 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병문안을 온 아이를 내쫓아버리는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였지만, 쫓김을 당하면서도 꾸지람 의 속 뜻을 새겨보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입 주위가 더 배시시 꼬이며 고소해하 는 팬시도 정말 고약스럽기 짝이 없다고 애버리는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팬시를 두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천박한 여자라고 얘기들을 했다. 팬시가 열살만 더 어렸다 해도 애버리는 그 아이에게 확실하게 예절교육을 시킬수가 있었을 것이 다. 때로는 명령도 하면서 그렇지만 캐롤에 대한 팬시의 반감은 흔히 십대 소녀 가 어른에게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뭔지 는 몰라도, 그 아니는 캐롤에 대해 끊임없는 악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만 보이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애버리로서도 함부로 다가설 수는 없는 것이었다. " 작은 아버지가 주신 새 결혼반지인가요, 이게?" 반지를 낀 애버리의 왼손을 내려 다보며 팬시가 물어왔다. "그래, 지난 밤에 내게 주셨지." 팬시가 손가락 끝으로 애버리의 손을 끌어올리며 조소하듯 반지를 살펴보았다. "이게 뭐야,다이아몬드 도 하나 안박힌 거로군요?" "네가 할 일이 있다,팬시." 두 사람 사이를 갈라서며 애디가 냉정하게 말했다. "자,이리 와." 에디가 팬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고 는 반대 방향으로 팬시를 밀어냈다. "귀여운 아이..." 팬시가 에디에 의해 밀려나 는 걸 보면서 애버리가 혼잣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러트리지 부인." 중년부인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엉겁결에 애버리도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베이커 부인," 부인의 윗주머니에 꽂혀있는 이름표를 훔쳐본 애버리가 다정스럽게 인사말을 했다. 인 사말을 했다. 인사말을 했다. 인사를 받은 베이커 부인이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테이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어색한 시선이 오고갔고, 부인이 서둘러 일 얘기를 꺼냈다. "테이트 시가 점검해 주실 게 잇어요. 에다가 오시면 보여드리라고 한 기사가 있었거든요. 내일이면 다시 출장을 가셔야 할테니 얼른 가서 가지고 오지요." "알겠습니다. 베이커 부인. 오 늘 밤에 집에 가서 읽어볼테니 챙겨놔 주세요. 내일 에디 편으로 보내드리는 걸 로 하지요." "그렇게 하세요. 시간을 다투는 일은 아니니까 에디도 별 말은 없을 겁니다. 그럼...."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요? 그래요, 여보?" 부인이 저만큼 가자 애버리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작 질문엔 대답도 않고 그는 딴소 리만 했다. "우리도 가는게 좋겠군." 에디의 책상 모퉁이에 앉아 있던 테이트가 사무실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에디가 전화를 받고 잇는 직원과 연 방 무슨 얘기인가를 하며 손을 흔들어 잘가라는 인사를 해보였다. 테이트가 애 버리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올 때 타고 왔던 리무진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누가 차를 타고 나갔나 보죠?" "어차피 사무실 차니까, 다른 차를 타고 가지 뭐." 한산하기 그지없는 오후의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며 애버리는 오랜만에 다 시 거닐어 보는 도시의 풍경과 소리를 만끽했다. 기자라는 직업적인 속성 탓에, 그동안 메마른 도시에서만 이루어졌던 그 여자의 세계와 거기에 너무도 익숙해 져 있던 자신을 되돌이켜보며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일상 속에 파묻혀 살아가 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건물마다 제각기 다른 화려한 색채, 걷는 이의 여유를 부르는 오후의 햇살,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있는 곳에는 얕으마하나마 흥분이 배여 있었다. 조금 후, 차에 오른 그들은 공항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활주로를 오르는 비행기 쪽으로 옮겨졌다. 애버리는 까닭모를 오싹한 냉 기를 느끼며 양팔을 꼬아 가슴으로 가져갔다. 고통의 응어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당신 괜찮아?" 테이트의 걱정스럼 물음에 정신을 차림 애버리는 이 내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그리고 곁에 앉은 테이트의 팔을 가볍게 붙들었다. " 괜찮아요...." "전같이 비행기를 탈 수 있겠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 만 차차 나아지겠죠, 뭐...." "당신도 당신이지만, 걱정이 되는군. 전처럼 맨디와 함께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될는지." "걘 나보다는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들이 어른보다 회복이 빠르다고 하는 말도 있으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무 슨 걱정이겠어..." "보고 싶어요, 우리 맨디. 그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애도 그럴거야, 아니 당신보다 더 할지도 모르지." "정말 그럴까요?" 엷은 미 소가 테이트의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아주 잠깐 이었지만 두 사람은 편안하게 웃음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테이트의 눈빛이 다시 흐 려지며 웃음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그에 게서 어제 병실에서의 일처럼 감정을 숨기려 한다는 걸 읽을 수 잇었다. 애버리 가 조용히 물었다. "베이커 부인한테 내가 실수를 한 거라도 있어요? 그런 거예 요?" "......" "그러고만 있지 말고 얘길 해줘요." "베이커 부인은 불과 2주 전부 터 우리 일을 도와주기 시작한 사람이야. 당신은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지. 그런데 다시 만나서 반갑다니? 그건 무슨 말이지?" 애버리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대답이 궁해진 애버리는 그 래도 무슨 말이든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중지로 관자놀이 를 문지르며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려 애를 썼다. "미안해요, 테이트. 공연히 이상 한 소리만 늘어놔서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어버렸군요." "이젠 알겠어?" "그렇지 만, 나는 환자였어요. 그건 사실이잖아요. 내가 기억을 잘못한 거예요. 가끔 그래 요. 사고 후유증 때문인지 혼동이 될 때가 있다구요. 분명히 전엔 알던 사람들인 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 다든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의....." " 더 말 안해도 알아. 실은 나도 몇 주 전부터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니까 긴 말 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애버 리는 마치 낯모르는 사내에게 알몸을 보인 것 같은 수치심과 당혹감에 사로잡혔 다. 이미 알고 있었다니, 그것도 몇 주 전부터! 그런데도 어떻게 말 한마디 않고 지금까지 대해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왜 진작 말하지 않았죠?" "당신이 공연히 걱정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어. 정신과의사를 찾아가 물어보았지. 그 사람 말 로는 사고에서 받은 충격으로 기억의 어느 한부분이 지워진 걸거라고 말을 했 어." "영원히 그렇대요?" "그건 자기로서도 단정하기는 어렵다는군. 시간을 두고 노력하면 지워진 부분은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래. 아예 없어지는 수도 있지만." 정신과의사의 진단이란 말에 애버리는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이젠 실수를 하더 라도 핑계댈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거였기 때문이었다. 애버리는 테이트의 손을 가볍게 감싸쥐었다. "미안해요, 여보. 애꿎은 당신만 곤란하게 했군요." "베이커 부인에겐 내가 설명을 해줄게. 차근차근 얘기를 하면 못 알아들을 사람은 아니 니까." 그 말과 함꼐 테이트는 애버리에게서 손을 뺐다. 그리고 중앙 분리 고속 도로를 빠져나오기 위해 다시 핸들 위에 손을 얹었다. 애버리는 그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를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 가. 애버리 다니엘즈는 북부중앙텍사스에 있는 대학도시 덴톤에서 태어났다. 그 리고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아버지 클리프 다니엘즈가 사진기자로 일했던 달라스 에서 보냈다. 애부분의 텍사스사람들처럼, 애버리 역시 고향에 대한 긍지와 자부 심을 가지고 자라났다. 비록 표준어를 구사하기 위해 언어 교정 강사에게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야 하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모든 면에서 텍사스사람이었다. 고 향의 언덕은 애버리가 즐겨 찾은 곳 중의 하나였다.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과 대 지는 봄이 성장하는 강렬한 원기를 그 어느 계절보다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었 다. 지금쯤이면 사파이어 같은 수레국화가 한창 땅을 덮고 있을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화려한 야생화가 자연의 캔버스 위를 눈부시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옥석들이 목가적인 풍경을 보호하려는 듯 굽은 어금니처럼 땅 위로 나와 있다. 애버리의 머리 속에 담겨 있는 고향의 언덕은 마치 모네의 작품을 감상하 는 것 같이, 그 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한마디로 토속적인 풍성함이 서려 있는 땅이었다. 애버리는 그곳을 사랑했다. 외관상으로는 테이트 역시 그랬다. 운전하는 동안 그는 그림같은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 도 마음을 끄는 곳이었다. 테이트는 핸들을 꺾어 길을 접어들었다. 눈 바로 위에 러트리지 일가의 목장이란 표지판이 보였다. 애버리가 활동을 해도 좋을 만큼 회복기로 접어들 무렵부터, 그 여자는 러트리지 일가에 관한 기사를 하나 둘 모 아들이며 사전지식을 쌓는 일을 해두었다. 그 자료에서 애버리는, 그들 일가가 무려 5천 평방 애이커에 달하는 광활한 목장을 가진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목장은 가덜러프로부터 흘러드는 두 줄기의 지류와 블랭코에서는 지 류가 만나는 비옥한 땅이라는 사실과 함께. 테이트의 아버지 넬슨은 그의 아버 지로부터 그 땅을 상속받았다. 공군에서 은퇴한 그는, 남은 인생을 오직 목장가 꾸기와 효과적인 가축사육의 연구를 위해 살아왔다. 월간 <텍사스> 지에는 그 들에 대한 기사와 함꼐 살고 있는 집 사진이 함께 실렸다. 그 기사를 읽으며 애 버리는 가능한 한 자신이 들어가서 살아야 될 집에 대해 요모조모 많은 정보가 실려 있기를 기대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여자가 원하는 만큼 흡족한 정도는 아 니었다. 오르막길의 정상에 올라서자, 먼거리에서나마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 색 벽돌로 지은 스페인 풍의 건물로, 중심부를 기점으로 안뜰 주위에 말발굽 형 태로 테두리를 두른 모양의 집이었다. 지붕엔 붉은 기와가 올려져 있었다. 아스 팔트를 깔아놓은 집안의 도로는 주출입구 앞에서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몇 십 년인지도, 몇 백년인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떡갈나무는 집 앞쪽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가지엔 잎이 꼬불꼬불 말려진 회색빛 이끼가 가득했다. 짙은 자주색 제라늄이 현관 양쪽에 놓인 테라코타 항아리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테이트가 그 여자를 이끌고 건물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드 디어 애버리 다니엘즈, 아니 캐롤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15 집안 전체가 지이 여사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집안을 꾸미고 있 는 장식이나 가구들은 전부가 하나같이 여사의 취향인 복고풍의 것들이었다. 온 집안을 둘러 포근하고 안락한 기운이 감돌도록 세심하게 꾸며진 집이었다. 높다 란 천정만큼이나 넓은 창으로 환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사는 가족을 위 해서 집을 그렇게 훌륭하게 꾸며놓고 있었다. 점심식사는 안뜰에 준비되어 있었 다. 식사는 엷은 노란색 파라솔을 씌운 검붉은 목재의 탁자 위에 차려져 있었다. 넬슨과 지이와 가볍게 포옹으로 인사를 나눈 애버리는 맨디에게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잘 있었니, 아가? 너를 다시 보게 되어서 엄만 얼마나 기쁜지 몰 라." 맨디는 고개를 돌리고 물끄러미 뜨락을 쳐다보았다. "이젠 많이 좋아졌어 요...."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 구나. 아빠도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셨 어. 우리 아가, 참 예뻐졌구나." 애버리가 예쁘게 다듬어 놓은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머리카락도 많이 자라고. 이런 기브스도 다 풀었구나." "배고파. 할머니가 엄마 오시면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엄마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아무래 도 아이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런 맨디의 무관심이 애버리를 가슴 아프게 했다. 엄마와 아이가 그렇게 오랜 기간을 떨어져 있다가 만난 거라면, 지 금쯤 아이의 표정에서 그동안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는 흥분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전연 그렇지가 않았다. 다들 탁 자주위로 자리를 잡자, 모나가 부엌에서 음식쟁반을 날라왔다. 모나는 애버리를 보자마자 잘 왔다는 인사부터 했다. "모나, 캐롤에게 냉차 좀 갖다 주지 그래요. 그리고 설탕을 넣는 것도 잊지 말고." 넬슨이 하는 말에서 애버리는 그 일하는 여자의 이름이 모나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그들이 무심코 주고받는 일상의 자잘한 대화들이 부지불식간에 애버리에게는 이런 저런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중 요한 것들이었다. 애버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캐롤의 습관이나 좋아하는 것과 싫 어하는 것 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여자는 테이트의 부모님이나 맨디 가 있을 때는 물론, 그들이 곁에 없을 때라도 혹시나 무의식 중에 애버리 자신 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애버리 가 마음 속으로 자신이 그럴 듯하게 연극을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몸집이 크고 털이 북슬북슬하게 덮힌 개 한 마리가 알뜰로 뛰어 들 었다. 애버리가 낯선 이방인이란 걸 느끼지 못한 개가 그 여자 쪽으로 곧바로 달려들었다가 그 여자의 몇 피트 앞에 멈칫 섰다. 네 다리를 경직시킨 개가 몸 을 잔뜩 웅크리고는 목 깊숙이에서 나는 소리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개! 러 트리지 집안의 애완동물!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한 걸까? "얘가 왜 이래? 내가 달 라졌니? 날 못알아보겠어?" 테이트가 탁자 위에 다리를 척 걸쳐 놓고는 허벅지 를 탁탁 치며 개를 불러들였다. "이리와 셰프, 으르렁거리지 말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그대로 한 채, 개는 앞으로 기어가서 테이트의 허벅지에다 턱을 올려놓 았다. 테이트가 개의 귀 뒤를 긁어 주었다. 애버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펴서 그 개의 주둥이를 만져 주었다. "안녕 셰프, 나야." 셰프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이 그 여자의 손에다 코를 킁킁거리다가 마침내 그 여자가 위험한 인물은 아니 라는 생각을 했는지 뜨겁고 축축한 혀로 애버리의 손바닥을 핥았다. '이제 됐구 나...."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애버리는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테이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내 개와 친해질 마음이 든 거지?" 그의 말에 애버리는 힘 없이 주위를 살펴보았다. 넬슨과 지이 역시 그 여자의 행동에 당황한 것 같았다. "언제부터냐 하면... 뭐랄까... 죽음에 직면하게 된 다음부터 전 모든 살아있는 생 물들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됐어요. 말로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뭐든 살아 있다는 건....." 겨우겨우 어색한 순간이 지나가고 더 이상의 사건없이 점심식사가 계속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애버리는 방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욕조 에 몸을 담그고 잔뜩 긴장한 몸을 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정작 집안 으로 들어선 그 여자는 다시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들어서 있는 많 은 문 중에, 어떤 것이 테이트와 캐롤이 쓰는 방문인지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 었다. "여보." 애버리가 물었다. "내 가방, 가지고 들어왔어요?" "아니 왜? 필요한 거라도 있어?" "네, 좀 가져다 주세요." 맨디를 넬슨 내외에게 맡겨 놓은 애버리 는 테이트를 따라 안뜰에 세워놓은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버리는 작은 것, 테이트는 큰 것을 들고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래 내. 둘 다 내가 들게." 그 가 집안으로 들어서며 뒤에 따라 오는 애버리에게 건성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애버리가 뒤에 쳐져 테이트를 따라가며 대답했다. 긴 복도 안쪽으로 넓은 이중 문들이 열려 있었다. 복도의 한 벽면은 안마당이 내다보이는 창문으로 둘러져 있었다. 몇 개의 방들은 다른 쪽으로 문이 나 있었다. 테이트가 그 중 한 방으로 들어가서 통풍구가 나있는 옷장문 앞에다 그 여자의 가방을 내려 놓았다. "모나 가 짐 푸는 걸 도와줄 거요." 애버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여 자는 침실을 둘러보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방은 전체적으로 환하고 넓었 다. 사프란(가을에 피는 크로커스. 영국에서는 크로커스가 봄에 제일 일찍 피는 꽃임. 샛노랑색: 옮긴이) 색의 카페트가 바닥에 깔려 있고, 가구는 온통 엷은 갈 색의 목재 가구들이었다. 침대 커버와 주름들은 꽃무늬의 사라사 무명으로 만든 것이었다. 애버리의 취향으로 보기에는 꽃무늬가 너무 많은 게 마음에 들지 않 았지만, 화려하고 잘 꾸며진 것이어서 그나마 괜찮아보이긴 했다. 침대 탁자 위 에 잇는 디지탈 알람시계에서부터 화장대 위에 있는 은으로 틀을 댄 맨디의 사 진액자에 이르기까지, 그 여자는 한 눈으로 방안의 물건들을 눈에 익혔다. 테이 트가 말했다. "나 잠시 사무실에 나가야겠어. 오후엔 당신도 쉬어야 할테니까 꼭 내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맘 편히 가지고 푹 쉬어요. 그리고 만약에...." 애 버리의 격한 호흡이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는 반대편 벽에 걸려 있는 캐롤 의 실물 크기의 사진을 바라보는 애버리의 시선을 따라갔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애버리는 한 손을 목에, 다른 한 손은 가슴에 대고 대답했다. "아니예요. 다만, 아무래도 저 모습과는 너무나 다름 것 같아서...." 당혹스러웠다. 마치 자신 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 것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을 마주 본다는 건 너무나 떨리는 일이었다. 진하고,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듯한 두 눈은 그 여 자의 속을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진에서 황급히 눈을 떼고, 애버리는 속으 로 떨며 테이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짧은 머리 카락을 훑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당신만 괜찮다면 저 사진을 떼버리고 싶어요. 당분간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한테 물어? 여긴 당신 방이니까 뭐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는거지." 그가 머리를 돌려 문 쪽으로 몸 을 틀었다. "저녁 먹을 때 봅시다." 테이트가 방을 나가며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그의 무관심이나 냉담함은 문제도 아니었다. 애버리는 남극대륙에 떨어져서 수 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그는 그 여자가 속해 있고, 관계를 짓고 있는 남편이라는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인 것 같았다. 남편으로서의 형식적인 자리에 의무적으로 있을 뿐, 그 이상은 자기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겁이 더럭 났다. '여긴 당신 방이니까.....' 캐롤의 침실은 깨끗하게 정돈된 박물관이다 싶을 정도로, 사람 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곳이었다. 기껏해야 3개월 정도 비워놓은 것 뿐인데, 이렇게까지 황폐한 느낌이 들다니... 적어도 사고가 난 그날 아침까지는 캐롤 러트리지가 이 방에 있었을 것 아닌가. 고작 3개월만에 이렇게까지 썰렁한 방이 되고 말게 하는 여자였다면.... 애버리의 머리 속에 캐롤의 얼골이 싸늘하게 떠올랐다. 애버리는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 안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나누 어 입혀도 충분할 만큼 옷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비싸 보이는 모피 코트에서 부터 요란한 장식이 달린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사치스런 여자 옷들 뿐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옷장에만 테이트의 물건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책상 위나 서랍 속에도 테이트의 것이라고 여겨질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참담한 표정으로 애버리는 넓찍한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구기고 앉았다. '당신 방이니까 '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의 방'이 아니었다. 비참한 생각이 애버리의 가슴을 흔들 고 지나갔다. 테이트가 부부로서의 권리를 요구할 때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 도 되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안심이 아니라 비참한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일까. 그는 아내와의 내밀한 사랑을 접어둔 사람이란 말인가. 지난 몇 주일 간 테이트가 보여준 태도는 커다란 실망 그 자체였다. 그 실상을 오늘, 그 여자의 방에 들어와서부터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이다. 적어도 애버리는 테이트 러트 리지에게만은-비록 그것이 상호간이 아닌 그 여자의 일방적인 감정이긴 하더라 도-솔직해 지고 싶었다. 가면을 쓴 채로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는 않았 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이미 각방을 쓰면서 남남끼리 같은 부부생활을 하 는 증거들이 눈 앞에 드러나 있지 않은가. 당초에 그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 에 소신있게 행동하리라던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초라하고 성급한 결정이었는지 그 여자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쉽게만 생각했던 자신이 못나보이기만 했다. 앞 으로 닥칠 집안 사람들과의 신경전이 갑자기 먼지를 켜켜히 뒤집어 쓴 고서마냥 무겁게 다가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아직은 숨도 돌리지 말고 신경을 곤두세 워야 해. 애버리, 테이트는 결코 네 동반자가 아니었어.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도 더 멀리 널 내쫓고 있는 사람인지도 몰라.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애버리는 캐롤의 초상을 노려보았다. 네모난 격자 틀 안에 갇혀 있는 캐롤 러트리지가 악 의에 찬 즐거움으로 애버리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란한 여자. 당신 은 음란한 탕녀야......" 비장한 목소리로 애버리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테이트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게끔 사주를 한다해도, 난 해내고야 말겠어... 원상태대로 돌려 놓고야 말 거야. 끝까지 지켜봐요, 캐롤..." "병원 음식 이 입에 맞더냐? 음식 때문에 고생은 안했고?" 넬슨이 애버리에게 말을 걸고 있 었다. 번뜻 정신을 차린 애버리가 그에게 싱겁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았어 요. 아버님. 병원음식도 괜찮았지만, 어디 집음식만 할려구요, 맛이 좋아요." "몸 이 많이 야위었구나." 넬슨이 그 여자를 이리저리 살피며 안타까운 듯 다음 말을 이었다. "사고 전엔 통통해서 보기도 좋았는데. 난 우리집 식구가 바짝 마른게 보기 싫어." 애버리가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와인잔 으로 손을 뻗었다. 애버리가 와인을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캐롤이 좋아하는 술 임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분명 그 자리가 캐롤이 집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만찬이었고, 애버리에게 와인을 들겠냐는 질문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잔을 채 운 것만 보아도 그럴 것 같았다. 식사를 하면서 천천히 홀짝거렸는데도, 스테이 크와 함께 곁들여져 나온 브루고뉴산 와인은 거의 비워져가고 있었다. "숙모 가 슴이 왜 그 모양이죠? 갑자기 빈약해진 게 꼭 폭삭 내려않은 것 같애." 애버리 의 건너편에 앉은 팬시가 애버리의 가슴 쪽으로 포크를 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 며 반대 편 손가락으로는 양 쪽의 균형을 맞추며 비교를 했다. "팬시야, 버룻없 는 짓 좀 하지 말아라. 숙모에게 그게 무슨 말 버릇이냐?" 할머니 지이가 점잖 게 타일렀다. "난 느낀 바대로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 뿐이예요." "솔직한 것만큼 재치도 있어야 잖겠니, 꼬마 아가씨?" 식탁 상석에 앉아 있던 팬시의 할아버지가 점잖음을 잃지 않은 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전,....." "여러 말 말거라. 함 부로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냐. 식탁에서 그게 무슨 점잖치 못한 행동이냐? 버릇 없게." 넬슨이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다시는 그런 소리 입밖에 내지도 말아 라." 할아버지의 꾸중에 팬시는 소리내어 포크를 접시위로 떨어뜨렸다.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싫어요! 왜 모두들 입만 열면 내 꾸중이죠? 숙모 가 몸이 야윈건 그렇게 다정할 수 없게 가엾어 해주고, 내가 한마디만 하면 다 들 이때다 싶게 우루루 야단부터 치려들고, 난 뭐 감정도 없는 미친앤줄 알아 요?!" 넬슨이 잭을 아주 무섭게 쏘아 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잭이 딸의 무 례한 행동을 어떻게 마감하려드는지 어디 한 번 보자는 뜻이었다. 팬시의 아버 지는 그 눈빛을 정확히 받아들이고 다음 순간, 성깔있는 눈초리로 팬시를 노려 보는 것이었다. "팬시 좀 점잖을 수 없니. 지금은 숙모의 귀가를 축하하는 자리 잖니?" 애버리는 잭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제기 랄, 늘 이렇다니까!...." 식탁으로 몸을 잔뜻 수그린 채, 팬시는 우울한 침묵으로 빠져 들었다. 남은 음식을 포크와 나이프로 장난질을 치는 걸로 보아 식탁에서 떠날 수 있을 마땅한 기회를 찾는 것 같았다. "요즘 캐롤을 보면 평소와는 조금 달라요.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고마워요, 에디." 애버리는 맞은 편 모퉁이 가 까이에 앉은 에디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는 와인 잔을 들어 그 여자에게 가볍게 답례했다." "오늘 아침, 캐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기자가 도대체 누굴까? 병 원 계단을 내려서는 장면 말야. 뉴스시간에 세 개 방송국에서 동시에 나왔다고 하던데." 넬슨이 말했다. "여보, 나 커피 좀 줘요." "알았어요." 지이가 컵에 커피 를 따라놓고는 유리로 된 포트를 식탁 아래로 내려 놓았다. 도로시 레이가 받아 든 커피를 따라버리고는 대신 와인 병으로 손을 뻗었다. 도로시 레이의 두 눈이 탁자 너머에 있는 애버리의 두 눈과 마주쳤다. 애버리의 호의적인 미소에 그 여 자는 지독한 적개심을 담은 시선을 보내왔다. 과도한 음주로 인해 일그러지고 풀어진 표정이 온 얼굴을 덮고 있다고는 해도, 도로시 레이의 미모는 가히 절색 이라고 할만큼 매력적이었다. 얼굴 전체가-특히 눈주위가 -부어올라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맑게 푸른기를 띠고 있었다. 만찬을 위해서 화장을 하긴 했지만, 얼 굴에 남아있는 술기운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머리는 두 개의 머리 핀으로 되는 대로 뒤로 푹 찔러 놓았고, 저렇게 화장이 떠서 피부에 먹어들지 않는 얼굴일 바에는, 화장 안한 맨 얼굴이 훨씬 나아보일 것 같았다. 특별한 이 야기거리가 아닌 한, 도로시 레이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말도 별로 하지 않 고, 그 여자는 오직 무생물체인 와인병과 의미없는 대작을 하고 있었다. 애버리 는 도로시 레이 러트리지가 극도로 불행한 여자라는 걸 금방 알수 있었다. 첫인 상과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그 여자가 불행하게만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야 알 수가 없었지만, 애버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그 여자가 남편을 말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잭이 와인병을 그 여자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다 조심스럽게 놓으려 했을 때, 그의 손을 찰싹 때리고는 병의 목을 잡고 자신의 빈 잔에 가득채우는 것으로 상대적인 감정표현을 하는 것만 봐서도 그랬 다. 무심한 순간에도 또렷이 남편의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는 그 여자의 시선에 서, 좀 삐뚤어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다 살아있는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확실 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만의 직감이었다. "새 포스터에 들어갈 실물대 사진을 봤니?" 잭이 그의 동생에게 묻고 있었다. 애버리의 한 쪽엔 테이트가, 또 다른 한 쪽엔 맨디가 앉아 있었다. 식사 중에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 애버리였지만, 실상 그 여자는 온 신경을 두 사람에게만 쏟았다 해 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애버리가 맨디의 고기를 한 입에 들어갈 정도로 잘게 잘라 주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조용히 그걸 받아 먹었 다. 어린아이를 다뤄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애버리였지만, 적어도 그 여자가 알 고 있는 상식으로는, 아이들은 재잘재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고 안절부벌 못하고 때때로 성가실 정도로 활동적인 작은 악동들이란 것이었다. 그 런데, 맨디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 아이는 불평도, 부탁도 하지 않았다. 잘게 잘라주는 고기 조각을 기계적으로 받아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 았다. 서로 제각기 노는 가족들이, 애버리의 퇴원을 축하해준다는 명목 아래 어 색하기 작이 없게 앉아 있는 게 못내 불만스러웠던지, 테이트는 식사가 끝나자 애버리도 자신처럼 어서 식사를 끝내주기를 바라는 눈치를 은근히 보내며 홀짝 홀짝 와인을 마시며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오후에, 사무실에서." 그가 형의 질 문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구호가 괜찮더군. 바라던 대로였어." "테이트 러트리 지, 새롭고 견고한 기초." 잭이 구호를 좌중에 토해 놓았다. "바로 그거예요." "쟤가 어떻게나 극성이던지, 그 문구를 안넣을 수가 있었어야죠." 잭이 대상없이 혼잣말처럼 떠들어댔다. 그 말을 들은 테이트가 형에게 손으로 권총을 쏘는 시 늉을 하며 윙크를 했다. "역시 형은 내 심중을 잘 보는군. 그 구호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별로 마음에 내켜하지는 않았을 텐데. 에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뭐, 괜찮아. 현재의 경제적 침체를 벗어나게 해줄 신 텍사스를 건설할 테이트 러트리지 뭐 그 정도면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 슬로건으로 새로 만든 포스터를 거리 곳곳에 쫙 붙여대는 거야. 그야 말로 국가가 기대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길 수 있도록 말이지. 이젠 데커의 기초가 무너지 고 있다고 사람들 모두가 생각할 수 있게 아주 대대적으로 밀어붙여야해." "아버 지는 어떠세요?" 넬슨은 생각에 잠겨 그의 아랫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글쎄 다..... 난 페어플레이를 하겠다는 문구가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물 론, 그것도 나쁘진 않겠죠." 테이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좀 식상하지 않을 까요? 선거 때면 늘상 나오는 그런 얘기....." "그래도 잊어선 안될 덕목이지." 넬 슨이 심기가 불편한 듯, 상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테이트 마음 에 들어야 일도 잘될 것 아니겠어요, 여보?" 지이가 넬슨을 가만히 말리고 들었 다. 그리고는 여러 겹을 쌓은 코코넛케익의 유리뚜껑을 들어내고 그걸 자르기 시작했다. 처음 잘라낸 조각을 넬슨에게 주자 생각없이 그가 케익에 손을 대려 했다. 지이가 조용히 남편을 타일렀다. "오늘 밤, 첫 번째 조각은 캐롤의 몫이예 요.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지이의 말에 머쓱해진 넬슨이 빙긋 웃으며 접 시를 애버리에게 넘겨 주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애버리는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코코넛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캐롤의 식성을 생각해서 그렇게 준비했을 지이와 가족들의 눈을 의식해서, 어거지로 한 입을 베어물었다. 남자들은 계속해서 선거얘기만 늘어놓았다. "그럼, 결정난 걸로 알고 인쇄로 들어가면 되겠구나? 슬로건하고 포스터하고....." "형, 확실한 결정은 2,3일 후에 하면 안되겠어?" 테이트가 그의 아버지를 흘깃 쳐다보았다. 넬슨은 그의 케익 조각을 음미하며 먹어치우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자기의 의견이 묵살됐다고 생각했는지 과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좀 전의 내 말은 단지 의견일 뿐이야. 다른 의견도....." "얘 좀 봐? 너 평소에는 그 구호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였잖아?" 눈치도 없이, 잭이 계속 물고 늘어졌다. "그야.... 어쨌든 2,3일만 여유를 가집시다. 어때요?" 말도 없이 잭이 케익조각이 담긴 접 시를 받았다. 도로시 레이는 접시를 마다했다. "적어도 주말까지는 포스터제작에 들어가야 될텐데?" "그 전까지만 결정하면 되는 거잖소, 형." "맙소사, 누가 좀...." 팬시가 맨디를 보고 기겁을 하고 있었다. 케익을 가져가는 일은 세 살짜리 꼬마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부스러기가 맨디의 드레스에 떨어지고 아 이의 입가엔 하얀 크림이 곤죽이 되어 있었다. 맨디는 닦아내려고 했지만 그 아 이의 손은 끈적거리는 설탕으로 덮여 있어서 그 역시 역부족이었다. "이 꼬마유 령이 먹고 있는 걸 본다는 건 너무 혐오스러워. 이만 실례해도 되는 거겠죠?" 어른들의 허락도 없이 팬시는 소리나게 의자를 뒤로 밀고는 접시에다 냅킨을 냅 다 던지며 발딱 일어났다. "난 케릴리에 가서 영화나 보겠어요. 누구 같이 갈 사 람 없어요?" 팬시가 좌중을 훑어보며 의향을 묻는 듯 했지만, 사실은 에디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열심히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아무도 없나 보군." 주변을 돌아본 후 뾰로퉁해진 팬시가 주방을 훌쩍 나갔다. 애버리는 말괄량이가 나가는 걸 보고는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저 애는 어떻게 철모르는 사촌동생에게 그따위 말을 할 수 있을까? 애버리는 맨디를 무릎위에 앉혔다. "흘리지 않고 케익을 먹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니, 아가야?" 애버리는 냅킨 모서리에 물을 묻혀 맨디의 손을 닦아주고, 얼굴에 묻은 설탕도 닦아주었다. "도로시 레이, 잰 정말 대책이 없는 것 같구나." 넬슨이 한심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저 애, 치마 꼴이 그게 뭐야? 너무 짧아. 엉덩이에 아슬아슬 하지 않니." 도로시 레이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체념한 듯 대답 했다. "저도 노력해요. 정작 그 아이를 나쁘게 만드는 건 잭이예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잭이 큰 소리를 질렀다. "난 매일 같이 쟤를 사무실로 데 리고 나가고 있어. 당신은 뭘해줬나? 그나마 내가 그렇게 하는 게 당신이 그 아 이에게 해주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인 일이 아니냐구!" "학교는 어쩌고?" 넬슨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학교를 마저 다니게 하는 것만이, 걔가 정상적인 아이가 되고, 또 저런 망둥이 같은 짓을 그만두게 하는 방법이 될 게야. 장차 뭐가 되겠 니? 교육을 받지 않고야 어떻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겠어?" 말을 마친 넬슨 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애버리도 동의했다. 지금의 팬시는 통제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이고, 애가 저 지경이 되어버렸다는 건 어쨌든 부모의 잘못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자기가 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 애버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넬슨과 다른 사람들이, 부모된 사람들의 부족함과 팬 시의 얘기를 계속할 수 있게끔 놔두고 자리를 비키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맨디를 씻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먼저 일어나도 실례가 안되겠죠?" "도와주련?" 지이가 물었다. "아뇨, 됐어요." 애버리는 지이가 늘상 즐거운 마음 으로 맨디를 재우는 일을 온르은 자기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조용히 말을 덧 붙였다. "오늘은 제가 집에 온 첫날이니까. 엄마 품에서 맨디를 재우고 싶어요. 그래도 개ㅗ찮으시다면요. 훌륭한 저녁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잘 때쯤 맨디에게 인사하러 올라갈게." 애버리가 식당에서 맨디를 데리고 나올 때, 테이트가 뒤에 서 그렇게 말했다. "글세, 변한게 없는 것 같은데?" 도로시 레이는 누비듯이 거 실을 지나가다가 화면이 큰 텔레지전 세트 앞에 있던 두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잭이 다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 듣기나 하는 거예요?" 몇 초 지난 후에 그 여자가 물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들었어, 도로시.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당신이 오늘 밤도 역시 그 잘 난 표현대로 '빌어먹을 얼굴'이었다는 거였다면, 당신 말이 맞아. 아무것도 변하 지 않았어." "내 말은 당신이 동서한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는 거예요." 잭은 총알처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손바닥으로 신경질 적으로 쳐서 꺼버렸다. 쟈니 카슨쇼가 끝나고 있었다. "또 취했군! 지긋지긋해. 혐오스럽다구... 난 자야겠어." 그는 신발소리를 내며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침실 로 걸어갔다. 도로시 레이는 일어나 그를 따라가려고 버둥거렸다. 그 여자의 긴 옷 단이 뒤에서 질질 끌렸다. "부인하지 말란 말예요!" 그 여자가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난 당신을 보고 있었어요. 저녁식사 내내, 당신은 캐롤의 몸뚱이와, 예 쁜 새 얼굴에 반해 침을 흘리고 있었어요." 셔츠를 벗어든 잭이 대충 뒤범벅해서 옷바구니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는 몸을 굽혀 신발끈을 풀었다. "우리 가족 중 에 정신 못차리고 침을 흘린 유일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얼마나 취했는지, 제 몸뚱이 하나 건사를 못하더군." 침이란 말에 반사적으로, 도로시 레이가 손등으 로 입을 문질러 닦았다. 도로시 레이 핸콕이 청춘이었을 때 그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이 중년 여인의 모습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는 램파스 고등학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그리고 그 명성은 졸업할 때까 지 계속되었다. 도로시 레이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의 유일 한 혈육인 도로시 레이를 아버지는 농익은 사과를 대하듯 애지중지 다루었ㄷ. 도로시 레이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들 부녀를 아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는 딸의 계절 옷을 사주기 위해 일년에 두 번씩 그 여자를 달라 스로 데려갔다. 그리고 딸이 열여섯번째 생일을 맞는 기념으로 또래 친구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접는 포장이 달린 새 자동차 코레티를 선물해 주었다. 도로시 레이의 어머니는 간질병이 있었다. 아버지가 터무니 없는 선물을 하는 걸 보고 어린아이에게 자동차가 웬 거냐고 말리고 나설때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독한 술을 따라주며 일축해버리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어떤 것에 관해서 그 여자의 가치없는 의견이 듣고 싶으면 요청을 하겠다는 핀잔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로시 레이는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에 입학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 다. 2학년에 올라갔을 때 잭을 만났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고 도로시 레이는 마침내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 여자의 삶에 서 결코 거절당하는 일은 없었고, 또 그 여자가 진실로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법대에서 2년 동안 노력을 한 잭도 도로시 레이와의 사랑 에 빠지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결혼을 한다는 건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졸업하는 것은 물론 이고 학급에서 항상 상위권으로 달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여자와 관계된 일 에서라면 정중함과 진중한 멋을 잃어선 안된다는 당부도 늘 잊지 않는 사람이었 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장남인 그가, 마침내 도로시 레이의 유혹에 빠져 그 여자의 처져를 빼앗았을 때, 그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느냐-숙녀에게 정중하 게 나갈 것인가. 아니면 부모님의 기대에 대해 책임을 지고 뜻대로 나갈 것인가 -하는 어려운 갈림길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도로시 레이는 한 달이 지 나도록 소식이 없다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그 여자의 눈물은 그로 하여금 결정 을 내리게 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당황한 잭은 혼전임신보다는 결혼을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고, 아버지 넬슨도 자기처럼 생각해 주기를 기원했다. 잭과 도로시는 주말을 끼고 오클라호마로 가서 비밀리에 결혼을 하고는 그들의 부모 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넬슨과 지이의 실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를 중퇴할 의향이 없다는 잭의 약속을 들은 후에는 도로시 레이를 식구로 맞아들였다. 도로시 레이의 아버지 핸콕은 이 소식을 도무지 긍정적으로 받아들 여주지를 않았다. 도로시 레이의 가출은 핸콕을 거의 죽음 지경까지 몰아갔다. 실제로 그의 결혼식이 있은 한 달 후에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도로시 레 이의 불안정한 어머니는 알콜중독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몇 주후, 병원에서 퇴원한 도로시 레이의 어머니는 잔뜩 여윈 몸이긴 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멀쩡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3일도 채 못 지나서, 결국 다시 술을 입에 댄 어머 니는 만취한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마주오는 차와 정면으로 맞부딛쳐 그 길로 명을 달리하고야 말았다. 프랜사인 안젤라 러트리지(팬시)는 도로시 레이와 잭이 결혼한 후 18개월이 지나서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상 최장기 임신이거 나 그 여자가 결혼을 목적으로 속임수를 쓴 것이었다. 팬시가 태어난 뒤 도로시 레이는 아이가 생기기만 하면 임신중절을 했다. 그것도 잭과 아무런 상의도 없 이 독단적으로 그렇게 했다. 가장 마지막에 했던 임신중절은 생명을 위협할 정 도로 후유증이 심했다. 보다못한 의사가 앞으로 영구적으로 임신을 막기 위해서 그 여자에게 튜브를 장치했다. 이것이 그 여자의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감정적 인 고통을 무디게 했다. 그때부터 도로시 레이는 매일 오후 칵테일을 마시기 시 작했다. 날이 갈수록 양은 늘어만 갔고, 술기운이 작용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두 배로 마셨다. "당신이 어떤 표정으로 있었는지, 당신 자신이 어떻게 알 수 있 어?! 난 알아. 당신이 동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안단 말야!" 그런 말을 할 정 도로 도로시 레이는 남편의 사랑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미친소리, 난 캐롤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고 있어요! 어때, 내 말이 맞지?" 잭 쪽으로 바싹 다가선 도로시의 몸에서 술에 찌든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얼굴을 쥐어짜면 당 장이라도 볼에서 술이 비어져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섰는 도로시가 그토록 미울 수가 없었다. "당신은 근본적으로 캐롤에게 적대감과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 어. 당신에 비하면 캐롤은 한 단수 위한 말이지. 그걸 무의식적으로나마 당신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증오를 한다는 걸 내 모를 줄 알아? 당신 눈엔 캐롤이 달 라졌다는 게 보이지도 않나?" "뭐가 달라져?!" 손에 들고 있던 그의 옷을 거는 대신, 그는 의자 위에다 그걸 내던졌다. "캐롤이 왼손을 쓰는 걸 보지도 못했겠 지? 당신 알기나 했어?" 그의 말을 들으며 도로시는 윗몸을 뒤로 제끼고 어설프 게 허리에 양 손을 갖다댔다. 술취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거만한 태도를 취 했다. "다른 게 또 있지." 그 여자는 거만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뭐야? 얘 기할테면 얘기해 봐!" "맨디를 대하는 것과 테이트에게 하는 부드러운 태도 말 이야. 얼마나 자상하게 변했어? 아주 감미로울 정도야. 믿기지 않을 만큼." " 하!...." 도로시가 기도 안찬다는 듯한 탄성과 함께 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내뱉기 시작했다. " 그 년이?!... 감미롭다고? 맙소사, 그 년 앞에선 당신은 아예 장님이 돼버리는군!" 술에 잔뜩 취한 도로시의 초점잃은 눈동자가 잭에게 시선을 보내 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사고가 난 후로, 그 년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해왔어. 당 신이 얘기하는 족족이 다 그런 것들이지. 똑똑히 알아두라구. 이 천치야. 그건 모두 쇼란 말이야, 쇼!" 뭔가 알고 있는 듯한 그 여자의 말이었다. "쇼라? 그 이 유가 뭐지?" "원하는게 있으니까!" 비틀거리던 도로시가 자기 말을 강조하기 위 해 그의 가슴을 턱턱 치기까지 했다. "뻔해. 훌륭하고 젊은 상원의원의 마누라 자리가 탐이 난 거야. 당신도 두 사람 사이가 예사 부부같지 않다는 것 쯤은 알 고 있었겠지? 겁이 난 거겠지. 혹시 자기를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상원 의원의 아내가 되어 원싱턴에 가서 살 걸 생각해 보니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선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왜 안했겠어? 잭, 그럼 당신은? 당신의 그 더러운 욕망은 어떻게 되는 거냐구?!" "그래 그렇게 되면 나도 당신 같이 술에 곯아 살게 될테 고, 당신과 함께 지내게 되겠지." 도로시 레이는 흔들리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주제를 피하지마. 당신은 캐롤을 원해. 난 당신이 그렇다는 걸 알아. 안다구!.... 알아....." 흐느끼며 말을 마친 그 여자의 주정에 지친 잭은 옷들 을 주섬주섬 걸고 나서 침대 주위를 돌아 램프 스위치를 끄고 침대에 앉았다. " 그만 침대로 들지, 도로시." 지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도로시 레이가 그의 팔 을 붙잡았다. "당신은 결코 날 사랑하지 않았어...." "제발 그런 말은 이제 금나 좀 할 수 없나? 말도 안되는 소리 좀 말아." "당신은 내가 결혼을 위해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난 안다구..." "난 한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그 때 난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어. 난 그랬어." "나도 알아.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 는 걸."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머리 속으로 원해도 양 심에 가책 한 번 느끼지 않았어." 도로시 레이는 비난하듯 그를 노려보았다. "당 신에게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는 걸 알아. 당신이 날 속인게 한 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이런 판에, 내가 술을 안마시면 한 게 뭐가 있다고. 당연한 거야, 이건.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라구....." 도로시 레이의 뺨으로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 었다. 뭄ㅎ하게, 그 여자는 그의 벗은 어깨를 착싹 때렸다. "남편이 사랑해 주지 도 않는 나 같은 게 할 일이 뭐야? 술이야, 그래서 술을 마시는 거야. 당신, 결 코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리고 이젠 동생의 아내를 넘보고 있는 거라구..." 잭이 침대 시트 속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옆으로 돌린 후, 이불을 끌어 당겨 뒤집어썼 다. 아는 체도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무관심이 마침내 그 여자를 화나게 했다. 무릎으로 기어서 침대 한복판까지 온 도로시 레이가 주먹으로 잭의 등을 치기 시작했다. "진실을 말해줘. 그 여자를 어느정도 사랑하는지 어서 말못해?! 얼마나 많이 나를 멸시하는지 말해보란 말야!" 도로시 레이가 이러면 다 된 거 였다. 꼭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 여자는 항상 이랬다. 대꾸도 않고 돌아눕고 나면 제멋대로 지껄여대다가는 풀썩 침대 위에 고꾸라져서는 의식을 잃고 널부 러져 잠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잭은 몸을 돌려 그 여자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땅이 꺼지게 무거운 한숨을 쉬고는 돌아누운 채 버거운 하루 를 마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