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특종 제2권 산드라 브라운 "쭌쭌, 꼭 8월의 옥수수 줄기처럼 몸이 깡 말랐군." 데이텟은 마치 실험 동물을 검사하듯이 그녀의 몸을 쿡쿡 찌르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기분이 상했지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 나마 기분이 살아날 때는, 기분 상하게 하려는 그의 시도가 물거품으 로 돌아갈 때뿐이었다. 기-몸의 생기는 모두 다 사라졌어요 데이텟, 당신이 다 고갈시켜 버렸기 때문이죠"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그 몸의 생기가 메마른 까닭은 당신이 그 레이에게 다 뽑아줬기 때문이야." 그는 두 손으로 침대 바닥을 짚고 그녀의 은밀한 속살을 헤집고 안 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녀는 신음을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만 족감을 주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면서 몸부림쳤다. 지금의 이 졸렬 한 몸부림은 사랑 만들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통치였다. 그는 그녀에 대한 통치권을 확고히 하려고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모욕도 이제 예전처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너무 자주 반복되다 보니 효과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음탕한 말들을 쉰 목소 리로 장황하게 속삭이면서 절정에 다다랐다. 이윽고 흡족한 듯이 기 분 좋은 낮빛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데이빗, 자축하기 이전에 당신 몸엔 생명이 없다는 걸 명심해요" 그녀는 탁자 위의 티슈 박스에서 휴지를 뽑아 다리 사이로 흘러내 리는 정액을 닦아냈다. "여기엔 정자가 들어 있지 않다는 걸 기억하고 있나요? "입 닥쳐? '썰령 당신이 정관절제 수술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해도 난 애인을 구했을 거예요 생명을 주는 남자와 관계를 맺고 싶기 때문이죠" "또다시 그 얘길 꺼내면-n "뭘 어쩔 건데.B,데이빗? "그 다음 말은 듣고 싶지 않을 텐데? -날 협박하는 건가요? 당신도 협박이 필요할 때가 있나요? 좋아요 로버트 루시톤이 죽었던 밤에는 어떻게 된 거죠? "바네사, 왜 자꾸 그 문제를 들먹이는 거지? 그 문제는 그애처럼 묻 어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텐데?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벌거숭이 몸에 는 최근 그녀가 겪은 섬뜩한 시련의 증거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 다, 살이 워낙 빠져 엉덩이 뼈가 오목한 복부 아래로 흥물스럽게 튀어 나왔다. 피부가 탄력을 잃은 탓에, 한때는 탱탱한 근육이 있던 자리엔 축 늘어진 물렁살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는 자신의 몸이 조금만 달라져도 펄쩍펄쩍 뛰면 서 흥분했으리라. 하지만 이제 자신의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있는 남 자에게 혐오감을 표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하이포인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송될 동안에도 의식이 완전 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그녀의 신경은 곡예 용 고공 줄타기 줄처림 팽팽했다. 모두가 다 약물이 요술을 부린 탓이 었다. 또한 조지가 데이빗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약물을 가지고 그녀를 조종했다. 그녀의 남편의 목적에 따라 그녀의 신경을 늦췄다 조였다 하면서 말이다. 그런 인위적인 조작을 그녀의 신경계가 얼마 나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 그녀는 보다 안정된 상태에서 자신의 상황을 명확하게 분석해봤지 만, 정신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을 기뻐해야 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할 즈음에 충격적인 현실을 알게 되어 두렵기만 했다. 즉, 가스톤 부인의 죽음으로, 자신에 대한 데이빗 의 계획이 일시 정지됐다는 사실 말이다. 그녀는 교육을 잘 받은 정치가답게 기자회견을 무사히 치러냈다. 남편과 아버지 사이에 서서, 기억할 수조차 없는 옛날부터 삶의 일부 분이 되어버린 눈부신 조명과 카메라, 마이크의 초점이 그녀에게 쏠 렸다. 기자회견을 지켜보는 이들 중에서 자신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 다는 걸 눈치챈 사람이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면 그중에 누군가가 자 신이 휘황찬란한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진 않 았을까? 더 나아가, 그 어떤 장신구도 하지 않다는 걸 눈치챈 사람이 과연 있을까? 데이빗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그 성공에 용기를 얻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에요 내 아들 로버트가 유아 돌연사 증 후군으로 죽었다고 이 세상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였으니 말예요" '저떤 게 좋겠어?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 아니야. 모든 사람들이 거짓을 믿는 게 당신에게도 좋을 거야. 당신은 영부인이 되는 것을 좋아하잖아? 이 세상에 그 진실이 밝혀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그녀는 한껏 냉소를 담아 되받아쳤다. "당신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관심도 없어요 오로지 당신에게 일어날 일들만 생각하죠 그 진실이 절대 밝혀지지 않게 하려고 당신 은 알랜 박사를 시켜 약물로 날 죽이려고 했어요, 안 그런가요? "바네사, 그건 피해망상이야." "아녜요 오늘 밤 난 소름끼치는 그 진실을 똑똑히 깨달았어요" 그녀는 짐짓 쾌활하게 깔깔 웃었다. '정말 안됐네요, 데이텟. 당신은 실패했어요 당신은 실패한 거라구 요 내가 아직도 여기에 버젓이 살아 있잖아요? 아직 힘은 없지만 당 신이 내게 해왔던 것처럼 당신에게 지옥을 맛보게 해주려고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 있단 말예요." "그래, 누구든지 여기 와 보면 당신이 얼마나 지옥 같은 인생을 살 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겠지." 데이빗은 침대에 일어나 앉아 주위의 호화로운 가구와 실내 장식을 휘둘러보았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에서 살고 있어. 그리고 당신 의 남편은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남자지. 게다가 당 신은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변덕을 부려 -.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편안하게 만들어준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알지도 못해. 그뿐인 줄 알아? 당신에게 자신들의 옷을 입혀달라고 간청하는 의 상 디자이너들도 수두룩하지. 또한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여행을 하 며 최신 요트로 바다를 가를 수도 있어,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들은 언 제나 당신이 타주길 대기하고 있지. 지금 엄청난 힘을 지닌 여기 이 강대국과 세상의 절반이 당신을 찬양하고 경애하고 있다구." 그러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은밀한 부분을 쓰다듬었다. "그래, 바네사, 당신이 비참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당연해." 그녀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데이텟, 차라리 그 옛날에 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지 그랬어요? 아직 어리고 속절없이 당신을 사랑했던 그 시절, 내 사랑을 모독하고 나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은 이유가 대체 뭐죠? "이유? 당신의 동화 같은 삶 속에 없어선 안 될 괴물이 되는 게 훨 씬 재미있었기 때문이지 바네사, 당신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진짜 불행이 뭔지 모르고 있어 불행이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무력한 상태이지. 자식들을 낳았다는 이유 하 나만으로 자식들을 공공연하게 멸시하고 장난삼아 학대하는 역겨운 두 술주정뱅이와 함께 사는 거란 말야! 당신은 부유한 집안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랐어. 원하는 건 뭐든지 당신은 가질 수 있었지, 당신은 그 빌어먹을 인생을 살아오면서 원하 는 걸 얻으려고 간청하거나 악착같이 긁어 모으고 심지어 소원을 빌 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거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꽥 소리를 질렀다. U그게 바로 날 징벌하는 이윤가요? 내가 어린 시절 당신보다 잘 살 았다는 것 때문이냐구요? 아니. 내가 당신을 징벌하는 이유는, 내가 믿었고 친구라 불렀던 사내에게 가랑이를 벌렸기 때문이야." 그는 그녀의 음부를 가리키며 경멸하듯이 내뱉었다, '끼게 바로 그가 날 배신하게 만들었어?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구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 다. 그녀 역시 고함을 지르면서 그에게 맞섰다. "따지고 보면 당신이 먼저 날 배신한 거예요 수십 명의 여자들과 함께 말예요 아니, 수백 명의 여자였나요? 대체 당신이 여자를 몇 명 이나 섭렵했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녀는 분노와 좌절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당신을 숭배했어-a,데이텟, 당신이 처음 아버지 선거 운동 본부에 참여했을 때 난 열여섯 살이었죠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서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당신을 언제나 사랑 했죠 그런 내가 왜 결혼 서약을 깨뜨렸을까요? 그 이유는 당신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서였어요 당신이 숱한 여자들과 오입질을 해도 난 우리의 결혼생활이 나름대 로 지속되길 바랐어요 당신이 정관절제 수술을 받았고, 아기가 당신 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도, 우리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 작하고 싶었죠 당신과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구요" 그러자 데이빗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낄낄거렸다. "바네사, 난 절대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 당신이 그 위대한 '암브 루스터'란 성을 지니지 않았다 해도 말야. 이 데이빗 말콤 메리트가 당신처럼 어리석고 천박하며 병든 닭 같은 여자 때문에 내 인생에 족 쇄를 채웠을 거라고 생각했나? 별안간 그녀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면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의 냉혈하고 무자비한 마음을 알게 되자, 어떻게 그 동안 그런 인간에 게 속아 살았는지 새삼 의아하게 여겨졌다. 그는 참으로 놀라운 연기 력으로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이 나라 유권자들을 속여왔다. "당신은 사악한 남자예요" "그리고 당신은 미친 여자지, 당신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는 사실이라교" 그러면서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가운을 걸치려고 그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네사는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잡았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천박하고 어리석은 여자가 아 니에요 난 결코 가만히 앉아 당신에게 살해당하진 않을 거라구요" "말 조심해, 바네사. 미합중국 대통령을 위협하는 짓은 중대한 범죄 행위야." "난 당신 졸개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하든 아무 관심도 없어요 어찌 되었든 당신을 파멸시키고 말 거예요" "오호, 그런가? 그가 다가오자, 그에게 위축되지 않는다는 게 결코 쉽지는 않았지 만 그녀는 의연하게 맞섰다. 느닷없이 그가 손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벽에 몸이 부딪쳤다. 광대뼈가 살갗 밑에서 부 서지는 격렬한 고통을 느끼면서 얼른 뺨을 감쌌다, "다시는 날 협박하지 마, 바네사. 당신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 로도 무력하고 고분고분하며 보잘것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어. 처 음엔 당신 아버지에게 그랬구 이젠 내게 그런 존재가 되는 거라교 그리고 날 쓰러뜨리려면 그 전에 먼저 당신 아버지가 당한다는 사 실을 명심해. 그는 존슨 행정부 이래로 워싱턴 정가에 퍼진 온갖 부정 한 거래와 관련되어 있지. 그러니 괜히 허튼 짓을 하려고 했다가는 날 파멸시키기 이전에 당신 아버지부터 도매금으로 넘어갈 줄 알라고 앞으로도 당신 맘대로 그 염병할 기자들을 불러서 백악관에 대한 악성 소문들을 흘려보내시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상원의원 클리트 암브루스터의 종말을 보게 될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는 방 안을 성큼 질러가서 문가에 다다라 그녀를 쏘아보았다. "한때는 당신도 왜 예쁜 엉덩이 축에 끼었지. 하지만 이제 당신은 아니올시다야." 데이빗은 복도를 민첩하게 질러가다가 밤인사를 하는 비밀 경호요 원들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바네 사와의 전투에서 숭리를 거두긴 했지만, 아직 최후의 승리갸 아니었 기에 만족스런 숭리보다는 차디찬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녀에 관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다니! 그 염병할 간호사! 침대 시트가 말끔하게 개켜 있었구 탁자 위의 전등에서 은은한 불 빛이 흘러나왔다. 왜나 아늑하고 쾌적한 분위기였다. 애인을 불러들일 까? 그 여자는 공식적으론 각종 기고란에 여권 신장론을 강력하게 주 장하는 신문협회와 특별 계약을 맺은 '컬럼니스트'이지만, 비공식적 으론 남자의 그것을 아주 멋지게 다루는 전설적인 명기를 갖고 있었 다. 그녀는 백악관에 몰래 들어오는 것을 대단한 흥밋거리로 생각했 교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항상 그에게 짜릿한 보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오늘 바네사가 넋두리를 한바탕 쏟아내자, 여느 때와는 달리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울화통만 더욱 치밀어올랐다. 그는 위스키가 약간 섞인 물잔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양치질을 하고 입안을 헹군 물을 세면대에 뱉었다. 그러고서 위스키를 섞은 물 잔에 손을 뻗다가 언뜻 거울에 비치는 등뒤의 움직임을 보았다. 뒤로 빙그르르 돌아서는 순간, 물잔이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 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데이빗은 가슴에 손을 얹고 뒤로 넘어질 뻔하 다가 간신히 세면대를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각하,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해졌군." "맙소사? 데이빗은 변기 의자 위에 털썩 걸터앉으면서 부르르 떨었다. "난 자네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네." 스펜서 마틴은 태연한 자세로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겉 으론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그간의 힘들었던 상 황을 암시하는 듯했다. 말쑥한 새옷을 차려 입었지만 몇 주 동안 면도 나 목욕을 하지 않은 듯, 수염이 텁수룩했고 몸이나 머리에선 악취가 물씬 풍겼다. 데이텟은 처음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입을 열었다. "대체 그 동안 어디 있었나? 이제 막 똥창에서 빠져나온 몰골이구 먼. 냄새도 꼭 그렇교" "어떤 의미에서 맞는 얘길세. 탈출에 성공하기 전, 여러 날 동안 내 가 싼 똥더미 위에 누워 있었거든." "대체 어디서 탈출했는데? "옛날 개척자들의 표현으론 채소 저장고라지? 그러나 그곳은 땅구 덩이였네. 그러니까 자네와 내 친구인 그레이 본듀란트의 헛간 밑에 있던 구덩이였지." 스펜서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나갔다. "자넨 믿을 수 있겠나? 그 망할 자식이 내게 총을 쏘았단 말일세." 이후 데이텟은, 스펜서가 그레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된 얘기 를 전해들었다, '겨석은 배리 트래비스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더군. 하지만 처음부터 놈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었던 게 분명했지 덕분에 내가 총을 쏘기 전에 녀석의 총이 불을 뿜었다네." 스펜서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끼제 녀석은 날 죽이지 않은 걸 언제낙 후회하게 될 거야. 주제에 보이 스카우트라도 되는 듯이 급소를 피해 나에게 총을 쏘았지."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 "그는 내 어깨 상처를 싸매주더니 날 발가벗기더군. 그러고는 마치 추누감사절에 털뽑힌 칠면조인 양 어깨에 들쳐메고 헛간으로 가서 그 속에 처박았다네. 손이 단단하게 묶였지만, 입으로 음식과 물을 먹을 수는 있었지, 식량만 잘 나눠서 먹는다면 수주일은 충분히 견딜 수 있 을 것 같았다네. 그런데 그 녀석이 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 내가 생존 훈련에서 항상 최고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그러니 살아남으라구 이 개자식이' 난 총상이 고통스러웠지만, 세균에 감염만 되지 않는다면 생명에 지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지, 그후 손을 푸는 데만 내 추측으로 24시간이 걸렸다네. 그는 내가 결국엔 그곳을 빠져나오리라 예상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도 미리 염두에 두었던 거야. 그곳은 한면이 2미터가 조금 넘는 정사각형의 구덩이였네. 천장은 머리 위로 대략 10센티미터 높이였고, 천장에서 다시 헛간 바닥까지 는 단단한 소나무로 그 구덩이를 받쳐놓았더군. 물론 그곳을 빠져나 온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구덩이의 문은 어전나? "나무였지. 하지만 그 위에 강철 I자형 들보를 두 개나 얹어놓았더 군. 아마도 그 집을 세우면서 쓰다 남은 철재인 듯했다네. 그러고는 통풍을 위해 문에다 구멍 세 개를 뚫어놓았지. 그리고 그 공기 구멍만 한 두께인 그 두 철재 들보를 문 위에 4센티미터 폭으로 세로로 설치 해 놓고 그 위를 건초더미로 덮었더됐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않으면 절대로 못 찾아내도록 말이지." "난 그곳에 사람을 보냈다네." "내 부하를? 데이텟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펜서가 신경질적으로 되받았다. "그렇다면 그 친군 눈뜬 장님이었군. 그곳에 왔으면 당연히 헛간까 지 이 잡듯이 뒤졌어야지? "그곳을 어떻게 빠져나온 건가? "손으로 땅을 팠다네. 딱딱하게 굳은 마카로니와 빵, 그리고 약간의 곡물로 준 음식만으로 어떻게 그곳을 탈출했겠는가? "그럼 물잔을 쓰지 그랬어? "흥, 스티를 잔이었네. 주변에서 뚜껑이나 밀짚도 전혀 찾을 수 없 었지. 오직 이것만이 내 유일한 탈출 수단이었다네." 스펜서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럭저럭 땅굴을 파서, 문과 철제 들보 밖까지 지렁이처럼 몸을 꿈 지락거리며 가까스로 탈출했다네, 만약 땅구덩이의 천장이 조금만 높 았어도 탈출에 섣공할 수 없었을걸세, 그곳엔 딛고 일어설 만한 것도 전혀 없었거든." '첫간 바닥이 콘크리트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네." "그레이는 원래 개척자의 집터에다 그 집을 세웠지. 그러다 보니 선 대 개척자가 남겨놓은 헛간을 그대로 놔두고 싶었던 모양이야." 스펜서는 슬쩍 미소를 흘렸지만 여전히 표정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 녀석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언제나 감상적이야."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그는 지금 이곳에 와 있네." "그럴 줄 알고 있었지." 데이텟은 스펜서에게 그레이 본듀란트의 뜻하지 않은 방문에 대해 얘기해주교 연이어 그의 부재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차례로 설명했다. '겅말 재수가 더럽게 없었네." 어느덧 제인 가스톤 부인의 죽음으로 설명이 이어졌다. "조지는 바네사에게 리튬 복용량을 점차 늘려가고 있는 중이었지. 그러다가 더욱 강력한 진정제를 투여하라고 명령하자 그 발칙한 간호 사가 반란을 일으켰다네. 조지는 그녀를 억지로 내쫓으려 했는데 그 와중에 그 여자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어버렸지. 그 이후 자네도 잘 아는 그 여기자와 내,- "알고 있네. -포스트-지에서 그 기사를 읽었지. 솔직히, 그 여자가 아직도 살아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다네. 그런 대폭발 에 아무도 살아서 걸어나을 수 없었을 텐데." "그 여자의 개가 먼저 집에 들어갔다고 하더군." "거기서도 역시 재수가 더럽게 없던 셈이로군." "하지만 싱린에서의 사건 이후로 클리트가 그녀를 손봐주기로 단 단히 작정한 모양일세. 이미 그녀는 공식적으로 커다란 치욕을 당하 고 직업적으로는 완전히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네. 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녀가 뭔가 교훈을 얻기를 바랄 뿐이라네." "그야말로 희망 사항일 뿐이지. 그 여잔 아둔한 학생이잖나? 데이텟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그런데 그레이는 어떻게 하지? "지금으로선 내 귀환을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둬야 할 것 같네. 자 네 생각은 어떤가? "하지만자네가오늘 밤 여기에 온 걸 본사람도 있을 것 아닌가? "밖의 경호요원들에겐 내 귀환이 국가 보안 사항이라고 말해두었 네. 그리고 부하들을 시켜 영부인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문 을 퍼뜨리도록 하겠네." "음, 참 멋진 생각이군. 그 방법이 내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구먼." 스펜서는 대통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아직도 그 목적이 확고한가? 데이텟은 아까 바네사와 나뒀던 대화를 떠올리면서 대꾸했다. "그전보다 더욱 투철해졌네. 오늘 밤 그녀와 함께 있었지.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아기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더군. 우리의 문제가 아직 해결된 게 아니란 말일세." 스펜서는 세면대 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며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셈이군." 데이빗이 변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나가기로 하지. 그나저나 난 그 동안 자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네. 또한 자네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줘서 정말 기쁘고 반갑군. 그러니 이제 제발, 목욕부터 좀 하게나." '巨래비수 자네 행동을 변명할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게." '거도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젠킨스 국장 님. 제 자신으로서도 엄청나게 치욕스런 경험이었죠" 하지만 WVUE방송국 국장은 계속 오만상을 지었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내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와 그가 어 떤 일을 겪었는지 들려주었네. 신문에 보도된 내용보다 훨씬 더 상세 하더구먼. 난 그 얘기를 들을수록 자네의 전문가답지 않은 자세와 방 식에 대해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네. 동시에 우리 방송국 직원이 그 렇게 행동했다는 점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지." "국장님과 방송국에 그런 심려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 일 을 없던 일로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지금 상황에선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참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그나마 가장 유리했거니와, 사실 그런 심정이었다. 하지만 암브루 스터 상원의원이 뒤통수를 치고 나오면서, 마치 고집센 말깽꾸러기처 럼 몰아붙이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할말이 있다면 당 당하게 직접 해야 할 것 아닌가? "자네가 저지른 실수의 중대성에 비춰볼 때, 그 여파가 상당히 축소 된 감이 있네, 우리로선 무척 다행한 일이야. 대통령의 기자회견도 그 사건의 파장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데 한몫 한 셈이지,- 예?그렇습니다. 국장님."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거죠" 그녀와 함께 불려와 실컷 야단을 맞고 있는 하위 프리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전전긍긍하는 기삭으로 손톱을 잘 근잘근 씹었다. 지저분한 흰 와이셔츠의 겨드랑이엔 식은땀이 점점 번져나가고 있었다. 배리는 그의 염려스러움이 그녀를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안전과 국장의 꾸중 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젠킨스는 눈을 치켜뜨고 서슬 시퍼렇게 그를 몰아세웠다. "카메라맨을 급파한 건 바로 자네가 아닌가, 프리프? "아,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던 건 배피가 전화를 걸어 요 청했기 때문이죠 그녀는 금세기 최대의 사건 현장에 와 있다고 허풍 을 떨었습니다." '제상에, 그럴 리가? 젠킨스가 이마를 치며 탄식했다. 그녀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하위를 변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화를 꾹 눌렀다. "젠킨스 국장님, 프리프 씨는 이번 일에 대해선 책임이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제가 먼저 전화를 걸어 카메라맨을 요청했던 겁니다.- 그녀에게 쏟아진 국장의 적개심에 불타는 시선에 그녀는 뺨이 발갛 게 달아올랐다. '치금 제가 몹시 후회하고 있는 수많은 결정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정녕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곳에 언론을 끌어들인 건 가뜩이나 좋지 않은 상황을 엄청난 재앙으로 바꿔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게다가 전화를 걸었던 건 순전히 보복 심리에서 비롯줬 다는 점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사실 연민의 표현을 그레이가 거 부해서 발끈한 상태였다. 그녀는 결코 클리트 암브루스터의 지지자가 아니었다. 바네사에 관련해서는 할말이 더 많았다. 아니할 말로 바네 사 때문에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음모에 쉽싸여 일생일대의 큰 타격을 입은 게 아닌가? 영부인을 대할 때마다, 차마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 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 해, 그레이가 아직도 베네사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에게 걷잡을 수 없 는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배리는 그날 밤 하위에게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전갈을 전했을 때도 그레이나 클리투 심지어 바네사에게 미안한 감 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야말로 객관성을 잃은 순간이었다. 물론 그 순간에 전화를 걸은 건 정당했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 되었을진 몰라도 어쨌든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원을 요 청하지 않을 기자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으리라. 그 계통에 확고한 위치로 끌어올려줄 특종이 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지금에서야 찬찬히 돌이켜보건대, 마치 소화불량에 걸린 독 수리처럼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이제 한바탕 요란한 잔치를 끝내고 식탁을 치을 때라는 생각이 스쳤다. 젠킨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상원의원이 이번 일로 아홉 가지 사항을 내세워 우리의 멍청이를 고소할 수도 있어. 솔직히 그가 그렇게 한다 해도 비난할 순 없네." 배리가 맥 빠진 표정으로 다소곳하게 되받았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그렇듯 화내는 것도 무린 아니죠 그리고 전 그분을 몇 초 동안이나마 몸서리치는 소동으로 몰아넣은 점에 대 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드렸습니다. 또한 대통령과 영부인께도 사 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백악관에도 수없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 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통령 부부께 제 말을 전해주길 거부했죠"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군." 하위가 중얼거리자, 젠킨스가 불쾌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전 다만 대통령 부부께서, 제가 제 실수를 가슴 깊이 뉘우치고 있 으며 그분들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트래비수 마음 씀씀이가 아주 고상하군. 하지만 그분들이 자네 전 화를 받는다 해도 더 이상 자넬 WV틴리 기자로 소개하진 말게." 젠킨스는 책상 위에 두 손을 얹고 그녀를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네와 우리 방송국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매듭 지은 걸로 알고 있게나." 그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봐 아까부터 두려움에 떨었다. 아니, 두려움에 떠는 만큼이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사건 현장에서 자신이 저지른 대실책의 파급을 그 즉시 무 마하는 동안, 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의식적으로 몰아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가혹한 현실에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날 해고하는 건가요? "한 시간 여유를 줄 테니 책상을 정리해서 이곳을 떠나게나." '게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세요, 젠킨스 국장님. 전 이번 일로 확실하게 교훈을 배웠습니다. 이제부터는 철저히 조심하겠어요 모든 사실을 꼼꼼히 확인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거무 늦었네, 트래비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마음이 바뀌지 않을걸세." 그녀는 그의 자비에 매달렸다. "제 집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렇네. 시기가 참 안 좋군." "전 직업이 필요합니다." "미안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네." 그녀는 혼란스런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직위만 해제시키고 보도국에 있도록 해주십시요" "트래비 "복사도 하고 원고도 편집하겠습니다. 전화도 받고 텔레프롬프터 (출연자에게 대사 따위를 보이게 하는 장치)를 조작하거나 우편물을 날 라다주고 샌드위치를 사오-습니다. 일종의 수습 사원이 되는 거죠 그랬다가 몇 달 후에 다시 평가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젠킨스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음을 선포했다. '거 이상 자신을 우스깡스럽게 만들지 말게나. 자넨 우리 프로그램 에 맞지 않는단 말일세," "그게 무슨 뜻이죠? "자네의 기준이 우리와 다르다는 얘길세. 또한 자네가 우리의 기대 를 저버렸다는 뜻이기도 하지. 다시 말해 난, 이번 사건 뿐만이 아니라 그간 자네가 저질러온 실수들 때문에 자넬 내쫓는 걸세." '허튼 소리랑 그만두세요? 그 말에 하위가 주춤거렸구 젠킨스 역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말했나? "왜 남자답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주 젠킨스? 당신이 날 해고하 는 진짜 이유를 대신 말해볼까요? 바로 암브루스터가 내 머리를 쟁반 에 담아 가지고 오빠고 했기 때문이잖아요? 그녀의 말이 급소를 젤렀다는 걸 의미하듯, 젠킨스의 안색이 시뻘 겋게 변했다. 배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겐킨스 씨, 점점 뒷걸음질만 치고 있군요 좋아요 아무래도 이 시 시한 방송국의 낮은 인지도와 닭똥 같은 경영 방식은 더 이상 내 프로 그램에 맞지 않는 것 같군.9-" "감자 튀김도 함께 드릴까요? 배리는 먹고 싶은 갈망과 감자 튀김의 기름기와 높은 열량을 잠시 생각해보다가 명쾌하게 대꾸했다. "좋아요 먹고 싶은데 어쩌겠어요? 큰 걸로 주세요" 그녀는 돈을 치르고 치즈버거와 감자 튀김을 들고 자동차로 돌아왔 다. 그날 밤 그녀는 혼자 저녁을 먹어야 했다. 몇 개월 동안 데일리에 게 자주 외출을 하라고 권했는데, 드디어 오늘 밤 데일리는 그 충고를 따를 겸 옛 친구의 초대를 받아 '브리지 바르도' 영화제에 갔다. '그가 운전해준대요? 배리는 데일리가 혼자 외출할 때, 특히 날이 어두을 때면 걱정이 앞 섰다. '그럼요, 엄마. 그가 날 태워 그곳에 갔다가 다시 집에 데려다줄 거 야. 그리고 다른 것들도 물어보기 전에 미리 대답할게. 산소 탱크도 확 채워졌는지 점검했어. 물론 젊은 시절의 바르도를 보고 숨을 헐떡 거리다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산소가 바닥날 수도 있겠지. 그러면 난 자위를 하면서 씩씩거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행복할 거야.' 그는 일부러 그녀의 성질을 돋으려고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녀 는 아직 그에게 해고당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분명 그 녀를 위로하겠다면서 집에 있을 거라고 고집을 피을 테니까. 두 사람 모두 불행에 잠겨 있을 필은 없잖은가? 아까 젠킨스 사무실을 나온 직후 청원 경찰이 그녀의 자리까지 졸 졸 따라와 그녀가 짐을 꾸리는 것을 내내 감시했다. 그녀는 범죄 용의 자 취급을 받는 것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따졌다. '이 쓰레기장 같은 곳에 내가 훔칠 물건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사사로운 의도로 이러는 건 결코 아닙니다. 트래비스 양. 회사 방 침입니다.' 게, 어련하시겠어요' 이미 하드 드라이브에 있던 정보를 모조리 디스켓에 저장해 놓았던 터라 디스켓과 노트들, 그녀가 취직한 날부터 모아온 자료들을 방송 국에서 건네준 상자 안에 거침없이 쏟아부었다. 청원 경찬은 그녀가 그 상자들을 자동차 트렁크에 실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셀렁한 데일리 집에 저녁 시간을 혼자 보내기는 싫었다. 햄버거와 감자 튀김을 들고 어디로 갈지 잠시 궁리했다. 링컨 기념관으로 갈까? 아니면 제퍼슨 거리? 두 군데 모두 시간을 보내기에는 알맞은 정취 있 는 장소였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차를 몰고 도로로 들어섰다. "배 리." 그녀는 '깍' 비명을 지르며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지 돌아보지 말고 차를 멈추지도 마시요" 순간 뒤에 있던 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속도를 늦추더니 그 녀의 뒷범퍼와 머리카락 한 올만큼 사이를 두고 멈췄다. 일본차인 '흔 다 시빅'을 몰던 그 남자가 후진했다가 그녀를 비켜 지나가면서 그녀 에게 손가락 총을 쏘았다. 그레이는 뒷좌석 구석멕 앉아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음번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시요" 얼마나 몸을 웅크리고 있는지 백미러로도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당신 때문에 애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발끈 화를 내며 그녀가 公아붙였지만, 그는 점잖게 훈계했다. "혼자 차에 타면서 뒷좌석을 점검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요" "자동차 문을 잠갔다구요" '저쨌거나 내가 타고 있잖소? 그가 조리있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난 지금쯤 당신이 와이오밍 주로 돌아가 카우보이 놀이를 다시 시 작한 줄 알고 있다구요 저번 밤에는 왜 날 혼자 버려두고 도망친 거 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나 혼자 짊어지라고 그랬나요? 당신은 정말 끔찍하게 비겁한 사람이에요 그나저나 내 차에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저기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지자 마자 곧바로 우측 길로 들어서시 요 그러면 1번가에 들어갈 수 있을 거요 뒤에서 따라오는 세 번째 차가 혹시 녹색 세단이 아니오? '개가 지금 미행당하고 있다는 건가요? "고개 돌리지 말고 백미러로 보시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으 로만 슬쩍 보란 말이요" "어머, 정말 그렇네.9. 반 블록쯤 뒤에서 녹색 승용차가 따라와.9_" "그들을 테버리시오, 배리." "저 차를 떼버리라구요? 메버리기는 당신이 먼저 날 떼버렸잖아요? 어떻게 저 차가 날 미행하고 있는지 알고 있죠? "당신은 오늘 하루종일 꼬리를 달고 다녔소" "그건 또 어떻게 알아요? "흠, 난 그 꼬리의 꼬리였기 때문이지." "연기처럼 사라지는 사나이 씨, 내가 왜 당신 말을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래요? '저 꼬리를 떼어버리교 그 허세도 그만두시오 알아 듣겠소? 당신 이 미행을 따돌리려고 한다는 걸 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시오" 그녀는 그에게 던질 질문들이 수백 가지나 됐지만 우선은 운전에 집중하기로 했다. 순간 녹색 세단이 정지 신호등에 걸리자, 쏜살같이 속력을 높이며 소리쳤다. "우와, 재미있군요" 그레이가 뒷좌석에서 툴툴거렸다. "흠, 재미가 상당하겠지." 그로부터 10여분 동안 길거리를 헤맨 뒤에, 그녀는 그에게 녹색 세 단이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곧장 직진하시요 시내를 벗어나란 말이요 그리고 그 사이에 또 다른 추적 차량이 따라붙지 않았는지 확인하시오" 그녀는 잠시 백미러를 살펴보다가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게 확실하 다고 말했다. "좋소 그럼 앞에 린턴 길이 있으면 차를 돌려 왔던 길로 다시 돌아 가시.p_" "왜요? "방을 잡아놓았소" 그가 가명으로 잡은 모텔 방에서 배리는 치즈버거와 감자 튀김을 그와 함께 나눠먹었다. 창가에 곁탁자와 작은 의자가 있었지만 두 사 람은 더블 침대 한가운데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음식을 먹었다. 그녀는 냅킨과 포장지를 봉지에 다시 쑤셔넣었다. "난 해고됐어요 내 진심 어린 사과도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에겐 충 분치 않았던 거죠 그는 오늘 아침 우리 방송국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날 쫓아내라고 했어_9-" "예상하고 있던 일 아니오? "네, 물론 예상은 했죠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산전수전 다 려으면 서 북새통 같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싸움꾼이고 젠킨스는 아첨꾼이 니까요 네, 그래요 이런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죠 그 런데 오늘 새삼스레 알게 된 사실로 이 비참한 하루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지는군요 바로 크롱카이트가 내 부주의로 죽었다는 거죠" "그게 무슨 얘기요? "폭발에 대한 ATF의 결론이 나왔어요 그들 얘기로는, 크롱카이트 가 멍멍이 문으로 부엌에 들어서다가 전깃줄에 걸려 넘어졌대요 그 래서 콘센트에 스파크가 일어나 가스 레인지에서 새어나온 도시 가스 에 불이 붙은 거죠 내가 와이오밍 주로 떠나면서 레인지를 잠그지 않 아 통풍구가 없는 집 안에 가스가 쌓여 있었죠 그 상황에서는 조금만 스파크가 일어나도 불이 붙기 십상이라는군요 불행 중 다행히 자택 소유주 보험에서 손실액 전부를 보상해 준다던데요" 그녀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번져나갔다. '官론 크롱카이트는 다시 살아날 수 없지만 말예요" 그레이가 신랄하게 되받아쳤다. ''당신 집은 몽땅 타버리고 애완견은 죽었지만, 걱정할 건 없다. 모 든 게 보험으로 처리되니까! 뭐, 대충 이런 얘기요? "그레이, 내 얘길 제대로 듣긴 들었나요? 그것은 사고였어요" '제기렐 레인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언제요? '기억이 잘 안 나_9-" '쩜화용 불씨를 끈 적이 있소? "아니요" "그럼 뒷문 길목에 전기 코드를 늘어뜨린 적은?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이미 그녀 역시 곱씹어보던 질문이었다. 그 말들을 새삼스레 그의 입에서 듣게 되자, 왠지 결연하게 그 명백한 해 답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하지 만 조사 결과가-." "물론 맞는 얘기요 폭발은 정확히 그렇게 일어난 거요 사전에 누 군가 그렇게 일어나도록 조작 해놓았기 때문이지. 스펜서는 부하들이 복잡한 폭탄 같은 걸 사용하도록 승낙할 위인이 절대 아니요 조금만 공들이면 자연 발화를 위장해서 폭발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데, 왜 굳 이 의심 살 짓을 하겠소? 그가 와이오밍으로 오기 전에 이미 그런 조치를 해놓은 거요 단순 한 방법을 선택한 셈이지. 사실 머리를 짤 필요도 없었소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지. 당신은 혼자 사는 여자요 애인도 나이든 부모님 도, 하다못해 동거인도 없이 말이요 다시 말해 방해가 될 인물은 전혀 없던 셈이지. 게다가 당신은 멀리 출장을 가서 가스가 축적될 만한 시 간적인 여유가 충분했소 그 폭발은 사전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이뤄 졌기 때문에, 당신처럼 부주의한 사람들 눈에는 당연히 사고처럼 보 이게 마련이지. 다만 크롱카이트가 당신보다 먼저 집 안에 들어간 게 과나마 다행이었소 그들은 그 점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던 거요- "그들이라구요? '게이빗 메리트가 뒤에서 시킨 일이었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또 그 잠꼬대 같은 얘긴가요? 당신은 대통령에게 어마어마한 구린 비밀이 있구 내가 그걸 파헤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모든 억측을 해 왔어요 하지만 이제 우린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해요 난 그 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바네사똑 아기의 죽음을 비롯헌-모든 것에 대해서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틀렸다구요 알-어요? "그렇다면 오늘 하루종일 누가 왜 당신을 미행했다고 생각하시오? 더구나 이제껏 당신이 추적했던 사건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밝혀졌는 데도 말이오! 물론 난 여전히 당신이 추적했던 그 사건에 뭔가 있다고 보고 있소 그리고 데이빗은 사소한 잘못도 결코 용서하지 않는 사람 이오 당신 이론이 맞든 틀리든, 그는 당신의 추적 조사 때문에 당신을 죽이려고 할 만큼 지독히도 화난 상태요" 허세를 부리던 그녀는 순간식간에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그가 다시 날 죽일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생각해야 안전할 거.9_"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이미 식사를 끝낸 게 다행이군요 그령잖았으면 입맛을 잃 어 식사도 못했을 텐데." "감자 튀김이 아직 한 조각 남아 있소" '가눠 먹어요" 그녀는 감자 튀김을 반으로 뚝 잘라 한쪽은 입 안에 집어넣고, 다른 한쪽은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가 배리의 손에 들린 감자 튀김 을 입으로 덥석 깨무는 통에 그녀는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의 입술이 손끝에 와닿는 순간, 짜릿한 전율이 온 몸에 소용돌이 쳤다. 몸이 돌연 착 가라앉으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머리부터 발끝 까지 화확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래선 안 돼!1려는 방바닥에 두 발을 힘차게 내딛었다. "본듀란트 씨, 난 당신과 안 잘 거예요 그게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거라면, 난 우리 두 사람이 쓸데없이 흥분해서 당혹감과 육체적인 불 편을 려지 않도록 하고 싶어요" '싼 지금 전혀 당혹하지도 않았구 육체적으로도 아주 편안하오 그 런데 '잔다'는 말이 간절한 표현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신은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잘 알잖아요"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 말뜻은 잘 알지. 하지만 난 그리 하자고 요구하지 않았소" '勺래우 당신은 요구하지 않았죠 당신은 항상 그랬어요 먼젓번에 도 요구하지 않았죠"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문제로 입을 놀려봤자 쓸데없을 것 같았다. 그날 아침, 와이오밍 에서 그는 그녀에게 구애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엔 어째서 그가 유혹할 거라고 지레 짐작한 걸까? 혼잣말처럼 그녀가 중얼거렸다. "가서 샤워해야겠어요" 그녀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상처받은 자존심을 움켜쥐고서 자그마한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떤 남자가 날 그린 적이 있어요" "당신을 그렸다고삘 그녀는 팬티 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몸에선 싱그러운 비누와 물에 젖은 살 냄새가 풍겼다. 침대에 올라와 재빨리 스웨터를 머리에 서부터 뒤집어 입는 그녀의 모습을 그레이는 힐끔거리며 훔쳐보았다. 창가 근처의 의자에 앉아 보초를 서면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반나체로 누워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배리 트래비스를 생각하지 않으 려고 가끔씩 블라인드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U그 남자가 내 몸에 색을 칠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캔버스에다 날 그렸단 뜻이에요 나체로 포즈를 취했죠" "왜 그건 일을 한 거요? 돈 때문이오? 次刃곳 그렇지는 않았어.9_ 대학에 다니며 반항심에 가득 차 한창 까불거릴 때였죠 내 부모님이 좋아하시지 않을,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를 저지르고 싶었어요 그때 그 남자가 내게 누드 모델이 돼달라고 부 탁하자, 아, 그거다 싶었죠 작업실이 따뜻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 제의를 승낙했어_9-" "그래서 어떻게 됐소? "그의 작업실이라 봤자, 테레빈 유(송진을 수증기로 증류하여 얻은 기 름)와 잘 썬지 않는 화가의 몸냄새가 물씬 풍기는 지붕 밑의 허름한 셋방이었죠 그는 마리화나를 줄창 퍼워대고 싸구려 와인을 물처럼 들이켜는, 아주 까다롭고 변덕스런 남자였어요" "그림은 어펐소? '개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죠 내 몸의 일부가 빠져 있었거든요 그 는 사랑에 한눈을 팔다가 예술을 망쳤다고 생각했죠 그가 예술혼에 불타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이에 난 옷을 입고 그 집을 빠져나왔답 니다. 그곳을 따뜻하게 해놓겠다는 약속을 지컸지만 말예요" 그레이는 코웃음을 치다가 급기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에게 몸을 완전히 내맡기는 법은 그에게 배운 거요? 한동안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그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모로 누워 무릎을 오므려 허리까지 올리고 그를 바라보았 다'. 머리카락이 얼굴 주변으로 물결치듯 흘려내려와 맨어깨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어린애 같았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모습이 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여성적인 매력과 어린아이처럼 여린 모 습이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물론몇 주전 만끽한그녀의 아늑한열기 가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해, 그녀가 어린아이보다는 여성에 더 가까 운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순간, 표현력이 풍부한 그녀의 눈동자에 순진한 당혹감과 상처 가 아른거렸다. "그레이, 왜 그렇게 한 거죠? "뭘 말하는 거요? '재 일부러 상스럽고 토욕적이며 공격적으로 말을 하냐구요? '낄부러 그런 건 아니오 그저 당신을 놀려주려고 했던 것 뿐이지. 그런데 아무래도 난 농담에 서툰 것 같소" "그렇다면 당신은 농담을 지독하게 못하는 사람이군요" "그게 바로 내 결점이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내게, 화가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 르쳐주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말한 그 기술은,,,,,, 뭐랄까, 흐 음, 그 순간이 닥쳤을 때 자연스럽게 터득했을 뿐이죠" 그러다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한층 부드럽고 태연하게 말했다. "바로 그날 아침, 당신 목장 집에서 말예요" 순간 그는 몸이 몇 주 전의 선정적인 기억에 반응을 일으키면서, 그 렇잖아도 불편한 의자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편하게 그 녀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또다시 성적인 모험을 찾아 그녀와 순 수한 항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항해는 새로운 의미였다. 즉, 감당 해내리라 섣불리 확신할 수 없는 책임을 뜻했다. '개 그 화가 얘기를 꺼낸 거요?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요 그냥 딱히 말할 게 없어서 그랬겠죠" "그건 당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거_- "뭐가 중요하다는 거죠? "언제나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그렇지 않아요" "거 보시오." 그녀는 짐짓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흥, 참 되게 웃기네_9_" '겅말이오? 난 인정받은 코미디언이요 사람들은 언제나 나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지. 코미디언이자 농담꾼이라고 말이요" 그는 미소조차 띠지 않았지만, 그녀는 깔깔거리며 몸을 굴려 침대 에 반듯이 누워 머리 위로 팔을 내저었다. 그레이는 어른이 된 이후로 웃음소리를 별로 듣지 못했다. 진실하고 자연스런 그녀의 웃음소리는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유혹적이었다. 그 소리가 무척 좋았다. "고마워요, 그레이. 그 일을 겪고 난 후로 난 이렇게 신나게 웃었으 면 했어요. 이젠 그 일에 익숙해지긴 했지만요." "대체 그 일이란 게 뭐요? '해고당한 일이죠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래-일리가 당신을 처음 해고했나? 그녀가 캐묻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가 내게 말해주었소" "어머, 그래요? 참 친절한 양반이군-9_" 말은 그렇게 했지만 뜻은 정반대였다. "쓸데없는 대화였지." "흠, 그렇겠군요 데일리가 당신에게 내 파란많은 경력에 대해 귀띔 해줄 때 혹시 날 해고시킨 배경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나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거짓이었다. 데일리는 그때 왜 상 세하게 그 배경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녀의 그런 표현이 성에 차질 않았다. 계속 이렇게 나가다간, 그녀에게 손대지 않기로 한 결심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낭만적인 막간의 희극 도 필요한 법이 아닌가? 그녀는 옛일이 생각나는 듯 추억에 가득 찬 미소를 머금었다. '게일리와 난 처음부터 친구는 아니었어요 그는 내게 TV방송국 보도국에 첫 직업을 갖게 해주었죠 당시 난 방송 기자에 대해 모든 걸 다 안다고 우쭐한 탓에 건설적인 비평조차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어요 반면에 데일리는 내가 직장에 눈곱만치도 기여할 줄 모르 는 돌대가리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날 고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쫓을 구실만 찾기 시작 했죠 하지만 그는 FCC(미연방 통신 위원회)나 EEO딕공정 고용기회 위 원회)의 고용과 해고에 관한 온갖 제도 장치 때문에 마음대로 인사권 을 행사할 수가 없었죠 그러다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 데일리는 그 제 도적인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난 자멸하고 말았어요" 그녀는 어떤 총잡이가 주(外D법정에서 총을 난사했을 때 그 장면을 목격한 최초의 기자였다. 배리는 그 총알 세례를 간신히 피한 어떤 여 인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십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유혈이 낭자한 법정.' 난 그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죠" 그리하여 그녀는 텔레비전 생중계에서, 그 총격이 '그린' 판사의 법 정에서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현장이 그린 판사의 법정이었다는 점은 그 사건을 더욱 흥미롭게 몰아갔죠 세간에 그린 판사가 장차 대법관으로 임명될 거라는 소문 이 파다했거든요 그래서 난 생방송 중에 그 총기 난사 사건이 정치적 인 동기에서 비롯된 게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답니다. 그린 판사를 반 대하는 자가 그에게 총을 겨뒀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의 판정에 불 만을 품은 사람이 앙갚음을 한 것일까? 그는 과연 이번 사건에서 살아 남았는가, 혹시 부상을 입지는 않았는가? 하지만 당시 그린 판사는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다가 어떤 캐 디에게서 그 사건에 대해 처음 들었다는군요 사실 총기 사건은 다른 법정에서 일어났고, 부상자도 없었으며 부서진 거라고는 천장의 조명 시설뿐이었죠 그리고 총이 발사된 원인도, 어떤 남자가 밀렵에 관련 된 민사 소송 건의 증거로 법정에 제출하려고 사슴 사냥 소총을 갖고 나왔다가 법정 간수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빛어진 오발사고였어요 나중에 내 증인은 지하 까페에서 일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로 판명됐죠 게다가 그녀가 법정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죠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보도물은 인기 드라마 '방황의 청 춘' 중간에 긴급 뉴스로 방송을 탔어요 덕분에 그린 판사의 부인이 그 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췄답니다. 그녀는 그 뉴스를 접하 고 너무나 놀라 집에서 뛰쳐나오다가 마당에 있던 스프링쿨러 꼭지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오른 손목이 부러졌죠 다른 시청자들도 가뜩 이나 연속극이 중단되어 기분이 상한 터에 그 기사가 인기 멜로 드라 마에 비교할 가치도 없는, 법정을 배경으로 한 사실 무근의 엉터리 속 보였다는 걸 알고 모두 다 눈이 뒤집혔어요 결국 우리 방송국 전화 교환대는 성난시청자들의 항의 전화로 한동안 불통이 될 지경이었죠 물론 내 신뢰성은 땅에 떨어졌어요 방송국도 마찬가지구요 우리 방송국은 경쟁사들의 조소와 비아냥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 어요 그리고 방송계에서 나처럼 실수를 하면, 신문사의 방송 비평가 들이 그 일을 갖고 며칠 동안 줄창 써먹게 마련이죠 데일리는 날 고 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윗사람들에게서 날벼락을 맞았어요 그나 마 목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이었죠 물론 그 직후 난 보따 리를 싸야 했어요 그 일로 해서 이익을 본 사람은 그린 판사뿐이었어 요 지금 대법원 판사가 되었으니까요" "전혀 인기가 없는 대법관이지," "그래서 또 다른 쟁점을 불러일으켰죠 내 실책으로 그린 판사에 대 해 동정론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의회에서 대법관 승인을 받지 못했 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미국 국민은, 인기에 연연해 하지 않는 대법관을 선사해준 나에게 감사해야 해요 여담이 지만, 데일리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죠" "그런 일을 려고도 당신 두 사람은 어떻게 친구가 된 거요? "몇 년 전 난언론계 소식통을통해 그가폐기종을 앓아어쩔 수 없이 보따리를 쌌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때 난 그에게 위로의 전화 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죠" 그녀가 말을 멈추고 모나리자 같은 미소를 짓자, 그레이는 대체 무 슨 비밀을 숨기고 있냐고 물었다. '게일리는 내게 유독 까다롭게 대했던 사실을 인정하더군요 그 이 유는 내게 재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성숙도와 상식이 부족하기 때 문이라고 설명했죠 그러면서 그는 내가 입을 다물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각오가 돼 있다면 기꺼이 날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그후로 우 린 아주 절친한 친구가 줬죠" "그런데 왜 그 동안 당신들의 우정을 비밀로 해둔 거요? "우선은 내 개인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죠 난 언제나 사생활과 직장 생활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과거의 적과 화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고 신뢰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랬겠군." "아주 예리하시군요, 본듀란트 씨, 방송계에선 한번 원수가 되면 무 덤까지 가져갈 대재앙으로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데일리와 친 구가 됐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출세에 눈이 멀어 원수와도 손 을 잡은 몰염치한 여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거든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너무나 천진난만해, 그레이는 이제 그 미소를 파괴해야 한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저쨌든 당신의 그 비밀은 외부에 노출뤘소 난 당신의 꼬리를 하루 종일 따라다녔지. 그들은 당신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도 알고 있소" 그는 그녀의 고민에 찬 신음소리를 듣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데일리까지 괴롭히진 않을 거요 하지만 우린 내일 아침 눈뜨는 대로 그에게 충고를 해줘야 할 거요" "그들이 왜 날 미행한 거죠? "데이빗과 바네사에게 배치됐거나 그외 백악관 곳곳에 배치된 비 밀 경호요원들은 모두 스펜서의 부하들이요 그들은 정상적인 모집 과정을 거쳐 자격 요건에 이상이 없지만, 원래부터 스펜서의 하수인 들이었지." "그들은 어떻게 국법을 맘대로 어기는 거죠? "그 점에 있어서 그들은 아주 절묘하요 결코 국법을 어기는 일이 없지 그들은 매 상황마다 민첩하게 적응하면서 교묘하게 행동한단 말이오 이를테면 누군가 그들에게 당신 문제를 따져물으면, 그들은 당신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라서 감시가 필요하다고 둘러대겠지." '걱어도 그건 맞는 얘기네요" '지제 좀 잠을 자두시요"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창가로 돌아와 밖을 내다보았다. 5분 동안 주차장을 살펴보면서 수상쩍은 자동차나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윽고 감시망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다시 침대 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배리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했다 '지금쯤이면 잠을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턱을 받치고 아까처럼 모로 누워 있었다. '勺레이 본듀란투 당신은 대체 누구죠? "나말이오? 난 평범한 사람일 뿐이오" 그녀는 졸음이 쏟아지는지 나른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아니,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어서 눈 좀 붙이시.- "당신도 쉬어야 해요 그리고 이 침대는 우리 둘이 자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다구요" 하지만 지금 그 옆에 올라가면 도저히 그 살결과 목소리를 그냥 놔 둘 것 같지 않았다. "난 여기 좀더 앉아 있겠소" "왜죠? "생각할 게 있어서." "뭘 생각한다는 거죠? '저서 잠이나 자두시오, 배리."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녀를 이기지 못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시.- "그날 아침, 당신 집에서 말예요 그건 아무 조건없는 순수한 섹스 였어요, 그렇죠? "그렇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근사한 섹스였죠" 어둠 속에서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주 근사했지." "하지만 당신은 내게 키스를 하지 않았어요 내 입술에 해주지 않았 다구요 왜 키스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거죠? "한 가지 더 묻자고 했지? 그건 두 번째 질문이군. 잘 자요- "조지? 아내의 목소리가 '스카치 위스키'가 출렁이는 대양 저 너머 해안에 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조지 알랜은 고개를 들구 집안에 마련 한 집무실 문가에 서서 짙은 어둠을 드리우고 있는 아만다를 쳐다보 았다. 사랑스럽구 매력적이며, 강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 의 모습을 똑바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강인한 모습을 보일수 록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책상으로 다가와 술병을 들더 니 남아 있는 양을 확인했다. 그는 만취한 상태였지만 그녀의 소리없 는 질책을 뚜켠이 느꼈다. 그는 간신히 혀를 움직여 불뚱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만다? "반갑군요 그래도 날 기억해다주니. 그런데 혹시 당신에게 두 아들 이 있는 건 기억나지 않던가요? '지금 그걸 수수께끼라고 내는 건가? "당신 즌아들이 요즘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난 그애에 게 대체 뭐가 문젠지 말하라고 애원했지만, 그앤 뽀로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런데 학교 선생님과 통화해 보니, 요즘 들어 학교에서도 똑같이 행동한다는 거예요 그앤 문제를 마음 깊숙 한 곳에 감춰두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막고 있어요 그애가 하 는 짓이 당신과 너무 똑같아 난 겁이 날 지경이라구요 그리고 언젠가 작은아들 침대로 가보니 애가 기도를 하고 있더군 요 하나텀께 아빠를 도와달라고 기도하더니 곧이어 흐느껴 울기 시 작했죠 난 그애를 한참 달래 간신히 재웠어요" 조지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비볐다. "나중에 애들 방에 가서 애들에게 밤인살 하겠소" -말을 이해 못하는군요 난 당신이 얘들에게 밤인사를 하지 않았 으면 해요 적어도 지금 그 상태론 안 된다구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애 들은 멍청이가 아니에요 당신에게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걸 눈치채고 있어요 분명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구요" "음주'라고? 고유 명사 같은데? "고유 명사죠 대체 요새 무슨 문제가 있죠? "아무 일도 없어." "P,그래요? 그럼 지난 48시간 동안, 당신 행동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나요? 어제 아침 당신은 마치 공포 영화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생전 잠 한숨 자지 못한 사람처럼 녹초가 되었더군요 그런데도 당신은 집을 오랫동안 비우교 기진맥진한 모습 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단 한 마디 설명도 들려주지 않았죠 심지어 나나 아이들이 그간 잘 지냈는지도 묻지도 않았어요 당신은 곧장 여 기 집무실에 올라와 지금까지 단 한 발자국도 밖에 나오질 않았죠" 그녀는 그 말을 강조하듯이 위스키 병을 책상에 '탕' 내려놓았다.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는가 싶더니 울기까지 하더군요 난 당신 이 우는 소리를 듣고 처음엔 화가 났지만, 나중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오 조지."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뭐가 잘못줬는지 얘기해주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도을 수 있겠어요? "잘못된 건 아무 것도 없소" '기가 막혀서, 조지! 대체 당신의 결혼관이 언제부터 바뀐 거죠? -그게 무,무슨 뜻이야켄 "당신이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면 우리는 부부라고 할 수 없 어요 적어도 지금 우리의 모습은 결혼식장에서 서로에 대해 진실을 맹세한 부부의 모습이 아니죠 하지만 아직 법률상으론 난 당신 부인 이에요 그러니 무슨 영문인지 알 권리가 있다구요" 그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맙소사! 당신 귀머거리이-잘못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가 아무리 서슬 시퍼렇게 호통을 치고 분노를 터뜨려도 그녀는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게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이 이렇게 내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 는데, 아직도 날 속일 생각을 해요? '제발 날 혼자 내버려둬." "아니요, 그렇게 할 순 없어요" 그녀는 산뜻한 단발머리를 격하게 흔들었다. '짱신은 내 남편이고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죽는 그 순간까 지 당신을 지킬 거예요 하지만 먼저, 뭣 때문에 훌륭한 의사이자 남편 이자 아버지인 당신이 울보 술주정뱅이로 바뀌었는지 알아야겠어요" 조지는 그녀를 쏘아보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만 다는 냉정하면서도 고집 센, 그야말로 근성 있는 여자였다. "당신 문제는 데이빗과 관련된 거예요, 그렇죠? 날 속이려고 머릴 싸맬 필은 없어요 난 그가 당신에게 닥친 위기의 근원이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어요. 대체 그 위기가 구체적으로 뭐예요? "그만 해, 아만다." "그가 당신에게 월 시킨 거죠? "그만 하라고 했잖아." "그가 대체 무슨 꼬투리로 당신을 조종하는 거죠? "그는 날 조종하지 않아? 그가 꽥 소리치자 그녀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맞고함을 쳤다. "아니요 조종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 조종에서 벗어나려 한다 면 그는 당신을 파멸시킬 거예요"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여자가 죽었어. 됐나? '리라구요? "방금 당신에게 말했잖아. 문제를 털어놓았단 말야. 그러니 이젠 행 복한가? 만족하냐고? "그 간호사를 말하는군요? "그래, 그 간호사! 사흘 전 우리의 호숫가 별장에서 죽은 그 여자.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어버렸지,"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난 그녀를 살려내려고 무진 애를 썼지.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어. 난 실패했교 그녀는 죽었어." 그러고는 느닷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당신, 술 취했나요? "발륨 한 알 먹은 것뿐이야." '져선을 다했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30분 동안 그녀를 살려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어. 하지만 비밀 경호요원들이 날 그녀에게서 떼어내며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그러더군." 아만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요, 조지." 그는 그녀의 위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방금 분노에 찬 말을 퍼부은 그녀라 해도, 자신을 따스하게 반겨주리란 걸 알고 있었 다. 그녀의 가슴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교 목소리는 오아시스처럼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켜주리라. 또한 품 속은, 한동안 악마들에게 피 할 수 있는 피난처가 돼주겠지. 하지만 그녀의 위로나 용서받을 자격이 없었다. 자기 자신의 비하 와 자격지심은 그녀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결 국 그는 그 사랑을 물리치고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굄 덤벼들 듯이 물었다. "대체 당신이 월 할수 있다는 거"刃 그문제를해결하려고 당신이 기적이라도 일으킨다는 건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술 진열장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손으로 스카치 위스키 병을 따는 게 무척 버겁게 느껴졌지만, 그럭저럭 술마 개를 따고 잔을 채웠다. -아니지, 잠깐만." 그는 술잔을 들고 아만다에게 돌아섰다, -당신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암, 그렇고말교 당신은 일단 맘만 먹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성취야말로 당신의 주특기니까. 아니야, 탁월한 게 당신의 주특기일 거야." 서슴없이 내뱉는 통렬한 비난이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으리란 걸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처럼 타락해 주길 바랬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아만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그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채 계속 평정을 지켰다. "조지, 난 당신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 위로할 순 있어요" "그래서 좋은 일들을 많이 했겠군." "당신은 예전에도 환자를 잃은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의사로서 환 자를 살릴 수 없는 현실을 괴로워하는 건 자연스런 반응이겠죠 하지 만 아무리 그래루 이렇듯 슬퍼했던 적은 없었다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비록 술에 취하긴 했어도, 그녀에게 속내를 들키는 것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혼 미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이미 뭔 가를 간파했다. "아까 내게 들려준 얘기는 진상을 축소한 내용이죠? 대체 호숫가 별장에서 그밖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외 일이 벌어졌다고 누가 그랬나?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은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난 당신을 잘 알아.a,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을 속일 순 없죠 아까 들려준 얘기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빼놓았어요" "간호사가 희생되었어. 그뿐이야." "바네사와 관련된 문제군_a,그렇죠? "아니 야." "그렇다면 그 여자가 죽은 건,,,- 그가 대뜸 으르렁거리며 호통을 쳤다. "대체 내게 무슨 얘길 듣고 싶은 거이-당신은 정말 골치아픈 문제 만 묻는군. 내가 이미 말해뒀잖아? 여기서 당장 꺼지란 말야, 우라질! 이 빌어먹을 여편네야, 날 혼자있게 내버려둬? 예전엔 이처럼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온 집 안에 메아리치면서 그 상스러움이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말았다. 과거 에 사랑하는 아내를 그런 저속한 말로 모욕할 만큼 타락한 적이 있던 가?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무거운 닻을 끌어내리듯, 비 참함과 우울의 심연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그는 술잔을 단숨 에 비웠다. 아만다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멀어져갔다. 그러다가 걸음 을 멈추고 문가에서 돌아섰다. '게, 좋아요 어디 실컷 고함을 지르고 욕하세우 조지, 그렇게 해서 기분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난 강하니까 얼 마든지 받아주겠어요" 그리고 왼쪽 주먹을 번쩍 들어올려 결혼 반지를 보여주었다. '게이빗 메리트는 대통령으로서의 서약을 했죠 하지만 나 역시 우 리의 결혼식 날, 제단 앞에서 신성한서약을 했어요 난 죽음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다고 서약했고 그 말은 진심이었어 요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싸움 한 번 해보 지 않고 당신을 내줄 순 없어요 그 남자가 당신을 파괴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거예요 설령 그가 미합중국 대통령이 라 하더라도 난 절대 물러서지 않아요"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데일리가 볼멘 소리로 툴툴거렸다. 배리는 텔레비전 채널을 VH-1으로 고정시켜놓고 귀가 멍멍해질 정 도로 소리를 높였다. U그레이는 이 집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도청도 돼 있겠군? 그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우리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일부러 도청할 필요도 없습니 다. 감청 장비 성능이 워낙 뛰어나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도 우리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죠" "그들이라니? "스펜서의 부하들 말입니다." "썩을 놈들? 데일리는 으르렁거리며 그레이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배리에게 물었다. "난 당신들 두 사람이 찢어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죠 하지만 그가 어젯밤에 날 깜짝 놀라게 했죠" "어제 바르도 영화제에서 밤늦게 돌아와 보니 당신이 집에 없더군. 그래서 밤새도록 당신 걱정을 했지."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기안해요, 전화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데일리는 늘상 사용하는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시늡을 했다. "그렇다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당신들은 여전히 그 아 기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고 믿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레이가 대답했다. "난 기정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이기도 하죠 여 하튼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건은 눈사태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데이텟은 그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고 기를 쓰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한 셈입니다. 우선 스펜서는 날 제거하는 데 실패했습니 다. 그리고 간호사가 죽던 날, 조지 알랜의 호숫가 별장에서의 일들도 틀어진 셈이죠 그 간호사의 죽음으로 알랜 박사가 외부에 노출되었습니다. 바로 그 주치의나 데이빗이 노출을 전혀 원치 않는 시기에 말입니다. 그 때 문에 주치의가 바네사에게 저지르고 있던 그 뭔가가 중지됐던 것 같 습니다. 무슨 저주 의식이든, 주술이든 뭐든 말입니다." 배리는 그 부분에서 그레이의 말을 넘겨받았다. "간호사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바네사의 건강 문제에 세인들의 이 목을 집중시켰죠 해서 데이빗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되살려서 워싱턴으로 급송했던 거예요," 다시 그레이가 말을 받았다. "그들은 바네사를 기자회견장에 참석시켜 전세계에 그녀의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정상인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직도 위험한 상태였습 니 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대체 뭐요? 내가 보기엔 모든 절차가 아 무 문제 없던데. 닐리가 간호사에 대한 영부인의 추모사를 대독한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 메리트 부부가 간호사의 가족을 걱정하고 기도해준 내용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이었지만." "그날 바네사는 조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녀 는 회견장에서 어머니의 결혼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죠 그 반지는 바 네사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 날, 클리트 상원의원이 그녀의 오른손 약 지손가락에 끼워준 이후로 한 번도 그녀의 손에서 떠난 적이 없는 물 건입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그녀의 손가락에 그 반지가 없더군요 바 네사는 카메라가 자신을 비췄을 때 일부러 그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보였습니다. 그 동작은 분명 누군가 자신이 그 반지를 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주길 바라는 행동이었죠" 뜻하지 않은 그레이의 얘기에 데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그녀가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혹시 그녀가 반지를 엉뚱한 곳에 놔두고 깜빡 잊어버린 건 아닐까 요? 아니면 몸이 야윈 통에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졌을 수도 있겠죠 또는 그저 그 반지에 싫증나서 끼지 않았을 수도 있구요 아니면 반지 모양을 고치거나 세척하기 위해 보석상에 맡긴 것일 수도 있잖아요? 아무튼 그 반지가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수십가지 논리적인 추 론이 가능해.9-" "맞는 얘기요, 배리. 만일 내가 와이오밍 주에서 텔레비전으로 그녀 를 보다가 그 반지를 끼지 않은 걸 발견했다면, 방금 당신이 말한 추 론들을 생각해 보면서 별로 대수롭잖게 생각했을 거요 하지만- 잠시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스펜서가 내 입을 영원히 침묵시키려고 날 찾아오고 당신 집이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감시팀이 하루종일 당신을 따라 다니고 있는 이상, 결코 그 일을 대수롭잖게 넘겨버릴 수가 없소" 마지못해 배리는 그의 주장을 인정했다. "나도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바네사의 '요잉 이후로 기자회 견만이 그녀가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행사였죠 그녀가 백악관에서 주장하는 대로 건강하다면 공식 일정대로 활동을 다시 시 작해야 정상이잖아요? 그러더니 충동적으로 전화를 집어들고 기억에 의존하여 전화 번호 를 꾹꾹 눌렀다. 어안이 벙벙해 그레이가 대뜸 물었다. "누구에게 거는 거요? "바네사 집무실예요" "당신이 뭘 말하려는지 몰라도 감시받고 있다는 걸 명심하시오" "그들은 내가 옛날 수법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할 거예.9. TV좀 꺼 주세.9_" 갑작스런 침묵은 -의 떠들썩한 소리만큼이나 신경에 거슬렸다. "안녕하세요" 배리는 상대가 인사말을 받자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게 이름은 샐리 메이 헨더슨입니다. 전 -미국 혁명의 딸-지의 대 표죠 저 흰 영부인께서 무주택자들에게 음식과 거처를 마련하는 운동 을 펼치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수훈상을 수여하고자 합니다." 그러고는 그 조직의 방침상 수상자 개인에게 직접 상을 수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수상식에 따르는 선전 효과는, 영부인께서 지금까지 조직적으 로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써오신 무료 급식소와 숙소의 지속적인 필요 성에 대해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바네사의 보좌관은 예의 바르면서도 확고한 태도로, 가까운 시기에는 그런 만남이 이뤄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영부인은 최근의 그 슬픔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영부인께 우리의 안부를 전해주시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배리는 전화를 끊고 데일리와 그레이에게 돌"떴다. "그녀의 보좌관은 알랜 박사에게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그 어떤 일 정도 잡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군요" 그레이가 텔레비전 소리를 다시 높였다. "데이빗이 안간힘을 쓰고 있군," "그런 것 같아.9-" "당신들 모두 똑같은 생각인가? 데일리는 턱을 비비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바네사는 데이빗에게 보탬이 되지 않고 점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데이텟은 부담스런 부분은 반드시 없애버리죠" 그레이의 단언에 데일리가 발끈했다. "그건 당신 추측에 지나지않소" "흐-음, 난 그를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레이가 소파로 돌아가 앉자,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리가 먼저 침묵을 깼다. "난 방송계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어요 일생일대의 실수를 두 번씩이나 저지르다니, 할말 없죠 내 육감은 전혀 믿을 게 못된다고 낙인찍혔다구요 하지만 지금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해요 우리 대통 령은 범죄자예요" 그러고는 그레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설령 내 육감이 믿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당신 육감만큼은 믿을 수 있죠" "고맙소" 그레이는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데일리를 쳐다보다가 다시 그녀에 게 시선을 돌렸다. "당분간 데일리 씨와 함께 외국 어디론가 휴가를 떠나시요 데이빗 은 당신들이 이 사건을 포기하구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 할 때에야 비로소 경계를 늦출 거요 난 그 기회를 이용해 바네사를 구해보겠소 데이빗이 제거 계획을 행동에 옮기기 전에 말이오- 배리가 격한 목소리로 반발했다. '저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말아꾜 우린 지금 영부인이 살해당할 지도 모를 위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난 뒷 짐지고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바네사가 가장 먼저 도움 을 요청한 사람은 바로 나라구요 내가 그녀의 구조 신호를 오해하지 만 않았어도, 그녀는 지금쯤 아버지 곁에서 편하게 쉬고 있었겠죠 하 지만 내가 번짓수를 잘못 찾는 통에 아직도 남편의 폭정에 고통당하 고 있는 거라구요 그리고 바로 그의 범죄행각으로 인해 소중한 걸 모두 잃었어요 크 롱카이투 내 집, 내 직업까지도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을 차지하고 있는 그 비열한 작자에게 반드시 복수하고 말 거예요 불쌍한 작자, 복수심에 불타는 가장 독한 나한테 걸려들다니! 잃어버릴 게 아무 것 도 없는 나에게 말예.Q_" "당신 은신처는 아직 빼앗기지 않았잖아? 데일리가 씨근거리며 묻자 그녀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勺래요 그리고 데일리, 당신도 빼앗기지 않았죠" "아가씨, 제발 눈물이 글썽거리는 그 눈으로 날 보지 마. 당신 머릿 속엔 똥만 가득 들어 있군. 당신 두 사람 모두." "데이빗이란 작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잠자 코 있겠어요? 배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이 하는 얘길 들어보면 꼭 미친 사람같아. 하다못해 당신들 자신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인 적이라도 있나? 그는 상식을 벗어난 미합중국 대통령이야. 이 나라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전세계 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사내지. 그를 괜히 집적거렸다간 쥐 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고 말 거라고" 배리는 고개를 슬쩍 돌려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 녀와 마찬가지로 굳센 의지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얄궂게도 두 사람 을 갈라놓았던 서로의 고집이 이젠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다시 데일리에게 돌습떤다. "대통령이 날 죽이려고 한다면, 최소한 맞붙어 보기라도 하고 싶어 요 하지만 당신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진 않아요 이번 기회에 장기 휴가를 떠나세요" 그레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준비되는 대로 당신은 오늘 오후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데일리, 어디로 가고 싶어요? 멕시코는 어때요? "가서 매춘부나 몇 명 낚으란 건가? 천만에! 사양하겠어." "그럼, 바하마는요? "뉴스도 안 보고 사나? 그곳엔 카리브 해안에서 이는 태풍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친다네." "호주는 어떨까요? "아무 곳도 가지 않겠어. 내가 왜 이곳을 떠나 당신 두 사람만 재미 보게 하겠나? 데일리가 고집을 피우자 그레이는 장의사 같은 표정으로 되받았다. "데일리, 그런 재미는 없을 겁니다. 당신은 그 사내들관 장난도 칠 수 없죠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려고 덤벼들 땐 절대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단단히 각오하고 이 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약간은 감상적인 소리겠지만, 우린 생사의 갈림길에 들어서게 될 겁니다." 데일리가 곧바로 쏘아붙였다. "난 이미 생사의 갈림길에 들어선 몸이야." 그러고는 두 팔을 벌리고 초라한 집 안을 가리켰다. "배리보다는 내가 더 잃을 게 없는 몸이지 게다가 불치의 병을 앓 고 있소 또한 아내나 자식도 없는 홀아비요 반면에 내가 당신들을 돕는다면 적어도 내가 죽은 후에 날 기억해줄 거 아니오? 배리는 방을 가로질러 몸을 굽혀 데일리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추레한 늙은이지만, 난 당신을 무척 사랑해요" "집어치워! 난 그런 감상적인 말을 제일 싫어해? 데일리는 그나를 홱 뿌리쳤다 "좋아, 그레이. 이제 무슨 일부터 할 겐가? 배리는 문가에 서 있는 제인 가스톤 부인의 아들에게 화사하게 미 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가스톤 씨, 전 배리 트래비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 군요? "물론 배저리게 기억하고 있소 그런데 대체 내 집엔 웬일이오? "이걸 갖다 드리려구요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는 푸른 수국 화분을 치켜들면서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 다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로 작정한 듯 옆으로 비켜섰다. "잠시 동안만이_- 랄프 가스톤 2세는 30대 중반으로 온순한 태도에 성격이 나약해 보 이는 인상을 풍겼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중류층이 몰려사는 워싱턴 시 교외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산뜻한 벽돌집이었다. 배리는 전화번호 부에서 그의 집 주소를 알아낸 터였다. 그녀는 그를 따라, 깨끗하지만 장난감이 어질러진 방들 사이를 지 나쳤다. 그는 아이들용 잔디깎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재 아낸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갔소" "부인과 아이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네요" 배리는 그를 따라 방충망이 쳐진 뒷 베란다로 나섰다. 그녀가 도착 하기 전에 집주인은 그곳에서 휴대용 텔레비전으로 NCAA풋볼 경기 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고, 곁탁자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마실 것을 내놓 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가리키는 대로 알루미늄 옥외 의자에 앉았다. 배리는 대화 내용을 결코 기록에 남기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 히고서 얘기를 시작했다. "전 기자로서 찾아온 게 아닙니다. 제가 WVUE에서 해고당한 사실 을 알려드린다면 기분이 좋아지실지 모르겠군_9-" "그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좋아지는군, 트래비스 양. 당신은 응분의 처벌을 받은 거요 어머님은 귀부인으로서 정말 조용하고 기 품 있는 분이셨소 그래서 생전에 남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으셨지. 그런데 당신은 우리 어머니의 주검을 놓고 잔인한 짓을 펼쳤소 당신 이 병원에서 언론의 위력으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펼친 뒤로 난 당 신을 정중하게 대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소" "당신이 뭐라 해도 할말이 없군요 더 나아가 가스톤 씨와 어머니 사이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든 점에 대해 무 척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게 사과하는 거요? '게, 물론이죠" '지차를 받아들이겠소 그러니 이제 그만,,,,,." 그가 주볏거리며 일어서려 하자 배리가 재빨리 그를 막았다. "당신 어머니께선 알랜 박사가 채용했을 때, 무척 기뻐하셨겠죠"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채찍소리처럼 날카롭게 그가 되받자 그녀는 어리등절했다. 아, 물론 의사가 당신 어머니를 무척 신뢰했다는 뜻이죠" 그의 표정엔 안도하는 기색이 뚜켠했다. -으음, 그건 그렇소 어머니는 그렇듯 좋은 일거리를 갖게 되어 대 단한 행운으로 생각하셨구 특히 중요한 환자를 돌보게 되어 만족스 럽다고 하셨소" 순간 배리는 기자로서의 직감이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 안의 베이 컨처럼 지글지글 튀기 시작했다. 여기서 뭘 발견하리라곤 생각도 하 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 오게 된 동기는 순수하고 진실했다. 자신의 실수와 그 때문에 가스톤 집안이 겪은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랄프 가스톤 2세와의 만남은, 바네사를 보호하려고 그녀와 그레이가 잔 전략의 하나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범죄 행위를 경찰서 에 신고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노룻이었다. 법무부에 제시할 확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백악관에 총질을 하며 대통령을 공격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공격은 훨씬 더 교묘하게 이뤄져야 했다. 현 정부를 그 내부에서부터 파괴시켜야 한다는 그레이의 의견에 배 리와 데일리도 적극 찬성이었다. 사멸하는 별처럼 스스로 붕괴해야 했다. 언뜻 보기엔 모순일지는 몰라도, 메리트 정부의 힘으로 그 자체 의 종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정보야말로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그러 한 맥락에서 그들은 조지 알랜의 호숫가 별장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 이 벌어졌는지 파악해야 했다. 배리는 제인 가스톤 부인의 아들부터 조사해 나가는 데에 기꺼이 나섰다. 그 만남에서 뭔가 엄청나게 중요 한 정보를 얻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 방문의 그 가능성을 너무 소흘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었다. 랄프는, 어머니가 영부인의 개인 간호사로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표현할 때 '행운'과 '만족스럽다'는 단어를 썼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제인 가스톤 부인이 뭔지 모르지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직 감했다. 하지만 왜? 배리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과거에도 어머니께서 심장에 문제가 있으셨나요? 랄프는 약간 방어적인 태도로 대꾸했다. "최근 2년은 그랬지만, 어머니는 건강하셨소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꼬박꼬박 약을 챙겨드셨단 말이요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꼬투 리를 잡으려 해도 어머님의 명예를 깎아내릴 순 없을 거요 어머니는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셨을 뿐 아니라, 아주 훌륭한 간호사셨소"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알랜 박사가 고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대통령도 마찬가지구요" "대통령께선 장례식 때 화환까지 보내주셨소" '勺래요? 내게도 화환을 보낸 적이 있죠" 그때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대통령이 살인범이란 사실을 알기 전이었으니까. '저머니께서 과거에도 심장마비를 일으킨 적이 있으셨나요? 또다시 그가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가볍게 그런 증상을 보이셨지만 금세 회복되셨소 그 때문에 일에 지장을 주진 않았소" "아무도 당신 어머님의 간호 솜씨나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진 않 았는데_a,가스톤 씨." 손에 땀이 나는지 그는 허벅지에다 손바닥을 연신 문질러댔다. 그 의 모습을 보며 배리는 초조한 몸짓이란 걸 깨달았다. 중류충이 주로 몰려 사는 그 벽돌집 주인은 더 이상 온화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영부인을 간호할 정도였다면, 내 어머님은 그 누구든지 간호하실 만큼 훌륭한 분이시오." "그럼 요," "내 어머니는 그 일을 맡을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단 말이요" "물론 그러셨겠죠 그런데 어머니께선 알랜 박사를 위해 일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무슨 뜻이오? 배리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여유 있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말이에요 당신도 알다시피, 대부분 의사들은 무척 이기적이죠 그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물위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전 어머니와 알랜 박사와의 관계가 어 전는지 궁금하군요" '꺼머니는 그런 얘긴 전혀 하지 않으셨소" 배리는 직감적으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영부인이 병에 대해 적절하게 치료받고 있어 만족하셨다는 얘기군요? '페리트 부인은 병에 걸린 게 아니요 단지 장기간 요양을 취하고 있을 뿐이오." "물론 그렇죠. 저도 그런 의미로 말한 거랍니다." "아니요 당신은 내 어머니가, 영부인이 환자로서 적절치 못한 치료 를 받고 있는데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는 의미로 얘기했소" "가스톤 씨, 난 절대로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대통령은 당 신 어머니와 알랜 박사가 메리트 부인을 정성을 다해 돌봐왔다고 공 식적으로 칭찬했잖습니까? "대체 당신이 말하려는 요점이 뭐요? 내 얘기의 요점이라? "알랜 박사가 그렇듯 훌륭한 실력을 갖고 있었는데도 당신 어머니 의 생명을 구하지 못한 건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죠" "박사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소" "그 말을 믿나요? '재가 왜 그 말을 믿지 않겠소? 박사는 뛰어난 의사이며 훌륭한 사 람이요 다른 어느 누구도 주지 않던 기회를 어머니께 준 분이죠" '기회라노? "일거리 말이.- 느닷없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 이상 이 문제로 얘길 나누고 싶지 않소 내 어머니는 불과 며칠 전에 돌아가셨소 난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단 말이요" '官론 그러시겠죠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배리는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이미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둬 그쯤 에서 물러섰다. 해답보다는 더 많은 의문을 갖고 그 집을 떠나야 했지 만, 문제들을 더욱 깊이 조사해야겠다는 열의가 가득 차올랐다. '지렇게 얘기 나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의 집 현관 앞에 서서 그와 굳게 악수를 나뒀다. 이 나라 의 대부분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루 그 역시 권력자에게 속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비록 그가 무례하게 굴었다 해도 마음 한구석엔 동 정심이 일었다. "가족들에게도 제 심심한 조의를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번 일로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랄프 가스톤 2세는 배리 트래비스가 인도로 걸어나가 차에 올라타 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차를 몰고 떠나가기가 무섭게 전화기를 붙잡고 번개처럼 전화번호를 눌러댔다. 상대방은 두 번째 신호음에서 전화를 받았다 랄프는 그 연방수사국 요원과 이제 두번째 대화를 하는 셈이었다. 첫 번째는 그저께, 그러니까 어머니 장례식 전날 그 사내가 밤샘 장소 에 난데없이 나타나 밀담을 요구했을 때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랄프 는 처음 그와 얘기를 나눌 때와 마찬가지로 입안이 마르고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 여기자가 나타나면 전화를 해달라고 하셨죠? 과연 말씀하신 대 로 그녀가 방금 제 집을 다녀갔습니다." "그녀와 대화를 나뒀소? 래1,선생님. 전 그녀 코앞에서 문을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말씀하신 대로 허물없이 행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녀의 목적이 뭐였소? "사과하려고 왔다는군요" 랄프는 마치 신병이 상관에게 보고하듯 배리와의 대화내용을 낱낱 -들려주고 그 사내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녀는 주로 내 어머니의 병력과 메리트 부인이 알랜 박사에게 어 떤 치료를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흐른 후 그 정부 요원이 입을 열었다. "가스톤 씨, 일을 아주 잘 처리하셨소 메리트 대통령께선 귀하의 협조에 감사할 것이오" 랄프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 사내는 이 나라 최고 지휘관에게서 직접 명령을 받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사내의 얘기에 따르면, 배리 트래비스는 영부인에 대한 괴이하기 짝이 없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현 정부를 헐뜯고 다닌다고 했다. 배리 트래비스는 백악관에 지극히 적대적인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조국의 적이었다. 그녀의 파괴적인 성향이 이 나라에 어느 정도 영향 을 미칠진 아직 미지수지만, 싱린에서의 사건 이후로 정부도 바짝 긴 장하여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스톤 가족 에게 찾아와 정보를 캐묻는다면 분명 파괴적인 목적이 숨어 있을 게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대통령께서도 그 즉시 연락 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씨 사실을 즉시 대통령께 보고하겠소 의무를 잘 수행한 당신의 노 고를 치하하오_"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로선 오히려 조국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 다는 게 기쁘군요 그밖에 또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앞으로도 그녀가 다시 찾아오면 내게 즉시 연락주시오" "그녀가 다시 찾아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TV방송국에서 해고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그녀는 내게, 기자가 아닌 개인으 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그 얘긴 상당히 의심스럽구먼." 스펜서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대통령에게 돌아섰다. "방금 가스톤과 통화했네. 그는 여전히 FBI요원과 대화를 하고 있 다고 생각하더군. 그런데 오늘 누가 그에게 인사차 들렀는지 아나? "염병할? 대체 그 문제는 언제 깨끗하게 해결된단 말인가? 그보다 머릴 싸맬 중요한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3군 참모 총장과 국방장관 등과 함께 합동참모 본부 회의에 참석해야 했 다. 리비아에서 뒤숭숭한 내용의 첩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 주 안으로 국회에서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조정안을 검토 해야 한다. 이번엔 상하 양원에서 모두 예산을 삭감했다. 그 내용은 특정 이익 집단들의 분노를 살 게 뻔했고 그들을 달래는 일은 또다시 대통령의 몫으로 떨어질 판국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결정의 핵심은, 내년 선거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런 행정적인 문제들에 집중해야 상황이지만, 바로 코앞에 닥친 골칫거리 때문에 그 문제들을 뒷전으로 미를 수밖에 없었다. 데이빗은 부아가 치밀어 낮게 으르렁거렸다. "정말 임질보다 더 끈질기고 지독한 여자군. 하지만 우리에게서 도 망칠 순 없을걸세." U아니, 그 여잔 할 수 있네. 그레이도 마찬가지지, 우린 그들을 쏴죽 여야 하네." U스펜서, 그건 너무 위험해. 자칫하다간 뉴스거리가 될 수도 있단 말일세." U하지만 언론의 주목은 클리트에게 집중될걸? 요즘 들어 그 양반은 노골적으로 그들을 못살게 굴고 있잖나? 만약 그들이 잔흑한 최후를 맞는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클리트 상원의원이 될걸세." 데이빗은 잠시 스펜서의 얘기를 곱씹어보았다. 귀가 솔깃한 제안이 었다. 한방에 새 두 마리를 잡는다? 아니지, 클리트까지 합치면 세 마 리인 셈이군. 스펜서의 감시팀은 그레이와 배리 트래비수 그리고 그 들이 함께 살고 있는 늙은이의 모든 움직임을 보고해오고 있었다. 그 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건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더없이 간 편하고 산뜻한 조치였다. 매우 유혹적인 제의였지만-너무나 위험 한 일이었다. "스펜서, 그래도 안 되겠네." "내 부하들은 그 일을 말끔히 처리할 수 있네. 백악관과는 전혀 무 관하게 해결,F " 데이빗이 손을 올리면서 법무부 장관에 대해 언급했다. "윌리엄 얀시는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야. 게다가 난 운명을 하늘에 맡기면서까지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고 싶진 않네. 자넨 지금 너무 이 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레이를 쏴죽이고 싶어 조바심을 치고 있 단 말일세." "사실이네. 하지만 자네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있지." "나도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만 우린 빈틈없이 처리해야 하네, 그리 고 그들이 바네사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 진 않겠지," "데이빗,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게. 우린 바네사를 죄수처럼 백악관 안에 무작정 가둬둘 순 없네." 대통령은 수석 보좌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야 그녀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지 않는 한 곤란하겠지." 두 사람 사이에 다시금 눈빛이 오갔다. 데이빗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스펜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알랜 박사에게 즉각 오빠고 전화하겠네." 데이빗이 재빨리 수화기를 낚아챘다. "또 한 사람을 심장마비로 죽게 하려고 그러나? 조지는 자네가 죽 은 줄로 알고 있네. 그러니 내가 직접 하는 게 좋겠네," 배리가 현관문에 들어서자 마자 그레이가 대뜸 물었다. '개체 어디 가 있었던 거요? 두 시간 전에 돌아오기로 했잖소? "아주 흥미있는 정보를 캐느라 늦어진 거예요 안심해우 보다시피 난 살아 있니까. 오늘 오후 내내 꼬리를 달고 다녔지만 말예요 그 친 군 마지막 모퉁이에서 떨어져 나가더군요 아, 배고파 죽겠어요- 그러고는 자동차 열쇠를 그레이에게 홱 던졌다. "난 샤워할 테니까 나가서 저녁 거리 좀 사오세요 얘기는 식사를 한 다음에 하죠" 그로부터 1시간 후, 세 사람은 데일리의 부엌 탁자 앞에 모여 앉았 다. 하얀 골판지 상자 안에 든 남은 음식이 굳어가고 있었다. 방구석에 놓여 있는 라디오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를 질러대는 중이었다. 배리는 우선 그들을 걱정시킨 점에 대해 사과했다. '재기할 내용이 전화로 할 상황이 아니라서 그랬어요 하지만 이제 내가 알아낸 사실을 들으면 날 용서할 수 있을 거예요" "랄프 가스톤 2세에게 뭣 좀 알아낸 건가? "간접적으로요" 그녀는 라디오 소리보다 작게 목소리를 낮추면서 죽은 간호사의 아 들과 만난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상하게도 그는, 어머니가 훌륭한 간호사였다는 걸 계속 강조했 어요" ,,1래서? "그래서, 아무도 그 부분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치 더군요 그런데 왜 그는 지레 흥분해서 물어보지도 않은 내용을 입에 올리면서 펄쩍 뛰었을까요? 그 점이 왠지 수상쩍어서 그의 집을 나서 자 마자 몇 가지 조사를 해보았죠 형사 법원에 있는 정보원에게 전화 를 걸어 고인의 이름을 대주었답니다. 그러자 그 정보원이 컴퓨터 전 산망에 고인의 이름을 입력시켰죠 우와! 그런데 한 건의 전과와 경찰 관계 기록이 나오는 거예요" 두 남자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다시 배리를 쳐다보았다. "그 간호사는 랄프 가스톤 1세와 결혼한 후에도 간호사로 일하면서 처녀 적 이름인 '제인 하이셀민을 사용했더군요" 데일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거참 구미 당기는 얘기군! 왜 그랬지? "몇 년 전 시한부로 사는 환자가 그녀의 간호를 받다가 갑자기 숨 을 거뒀거든요 안락사가 아닌가 의심스런 죽음이었죠 그녀는 그 혐 의를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인 환자의 가족이 지방검사를 찾아가 조사를 요구했답니다. 하지만 대배심원은 그 사건 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해서 불기소를 결정했죠 결국 그 환자 의 죽음은 췌장암으로 판명되교 하이셀만은 모든 혐의를 벗게 됐답 니다." '끼제 기억나는군." 데일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리가 함박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그래야 했죠 사실 그 사건은 WVUE방송국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얼마 되지 않아 취재한 사건이었거든요 하지만 영안실에서 그녀를 봤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죠 게다가 그때와는 달리 그녀가 늙었고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이 그 즉 시 떠올리기가 힘들었죠 아무튼 그녀는 범죄 혐의를 벗었지만, 그 기소 사건으로 너무 놀라 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답니다. 그 사실 역시 신문에 실렸죠 그녀는 건 강을 회복하고, 6개월 후에는 다시 일해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답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그녀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죠 그 사건은 홈 하나 없이 완벽한 그녀의 경력에 지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답니다. 그녀는 그 사건이 일어난 의료 기관에서 쫓겨났어요. 그 리고 결혼 후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제출한 구직 신청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답니다." 그레이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래가 한번 맞춰보겠소 그러니까 알랜 박사가 일자리를 주기 전까 지 그랬다, 이건가? 배리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에게 겨누더니 '탕'하고 외 쳤다. "정확히 맞췄어요? "그들이 일부러 안락사 혐의플 받은 적이 있는 간호사를 고용했다 면1~ "바네사가 안락사로 죽길 바라서겠죠 그리고 설령 바네사가 다른 이유로 죽을 경우, 간호사가 그 이유를 발설하려 할 때 과거의 병력처 럼 심장 발작으로 쉽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깔린 거죠" "그리고 사람들은 간호사의 심부전증 병력을 생각하고 아무 의심 도 하지 않겠지." 그들은 말이 필요없을 만큼 서로 생각이 통했지만, 그녀는 내친 김 에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그리고 설령 간호사가 심장마비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책 임을 물어 희생양으로 처리해버릴 수 있죠" "이번엔 아주 잘했어? 그녀는 홉족한 미소를 띠면서 데일리의 칭찬에 답례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혹시 알랜 박사가 제인 가스톤 부인을 죽이고, 심장마비사 로 처리한 건 아닐까? 그레이는 볼을 긁적거리면서 데일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仁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이 약한 친구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냉혈한이 아닙니다. 스펜서나 데이빗과는 다른 인물이죠 난 그 간호사의 심장마비사는 그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서 그 의사는 당황하긴 했어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이 아니었거든.9_" 그러면서 배리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랄프 가스톤 2세는 어떤 사람이오? 그 역시 그들의 하수인인가? "아니요. 그는 단지 어머니의 명예만 걱정하더군요," 데일리가 큼큼거리며 볼멘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대체 이 일이 언제 끝날 것 같나? 배리가 맥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나도 전혀 모르죠" 데일리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떼었다. "난 지쳤어. 게다가 이 염병할 상황 때문에 미치겠다구." 그러면서 신경질적으로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公賣다고 좌절감에 빠져 또다시 허튼 행동일랑 하지 마세요" 배리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생각이 없이 말을 하다니. 곧이어 데일리가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쏘아보자, 그레이는 레이다처 럼 예리한 반응을 보였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데일리가 곧바로 둘러댔다. '지봐우 본듀란트 이곳은 내 집이요 그러니 내 맘대로 내가 원할 때 뭐든 할 수 있지." 그레이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띤가 내가 알아야 할 일이 벌어졌다면,,- 배리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오, 맙소사! 마치 대단한 사건을 다루는 양 하지 마세요 데일리는 오늘 아침 신경이 약간 예민해졌죠 당신이 나간 사이에 세단 한 대가 집 옆을 계속 맴돌더라구요. 그래서 그는 그만 욱 하는 성미에 베란다 로 나가서 그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죠 그게 전부예요" 그레이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되받았다. "그 일로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발각됐다는 사실을 알 게 뤘는데도 말이오? "데일리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 데일리가 배리의 얘기를 가로막았다. "날 위한답시고 쓸데없이 변호해주지 않았으면 고맙겠어." 그러고서 도전적인 자세로 그레이에게 돌슬떤다. "당신이 대체 뭔데 내 집에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거요? 예상과는 달리, 그레이는 무척 부드럽고 점잖게 대꾸했다. '게일리, 이건 우리끼리 성질을 내면서 다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충고하든지, 그건 모두 당신의 안전을 위한 겁니다. 그리고 배리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죠 그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위험하다고 강조를 해도 모자랄 작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사람의 피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들이죠 만에 하나 당신이 죽게 되면 그 때문에 평생 마음에 부담을 갖고서 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자 데일리는 마치 부당하게 꾸지람을 들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 을 지었다. 단 한 차례 꾸지람을 듣고 그 부분에 전문가인 그레이의 의견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툴툴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겐씬 자러 가겠소" 배리는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면서 그에게 밤인사를 건넸다. 그레 이는 그를 따라 부엌에서 나갔다. 한밤의 험악한 대화가 마침내 막을 내리자 그녀는 라디오를 끄고는 새삼스레 적막함이 고마웠다. 부엌을 깨끗이 치우고 나서 그녀는 불을 끄고 거실로 나갔다. 그레이는 소파 한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소파에 머리를 받치고, 발과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거실의 조명이라 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황달에 걸린 듯한 길거리의 희미한 가로등 빛뿐이라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나서 무려 18년 동안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자랐다. 보 기 드물게 부부 생활을 가져, 몇 초의 순간에 잉태한 자식의 행복보다 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열을 올렸던 부모님. 어쩌면 바로 그런 배경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항상 얼굴을 보이고 말을 하는 직업 을 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방송 기자란 낮가죽이 얇은 사람에겐 어을 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한때는 무시만 받던 아이가 지금은 수많은 사 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조롱당하고 질책받긴 했지만 무시당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 본듀란트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툭하 면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게 영 눈에 거슬렸다. 특히 그녀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나눈 그 팎은 순간의 기억마저 무시했다. 그날 아침 처음 만난 이후로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는 거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와이오밍 주에서의 일은 사랑이나 애정의 행위라고는 할 수 없는 화학적인 반응 내지는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방 안 에 들어설 때마다 그가 나팔을 불며 반겨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아는 체해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둘 사이에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모텔에서 그녀와 한 침대에 누을 때조차 그는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 일은 그녀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었다. 오늘 밤, 그는 더욱 더 내면으로 깊숙이 빠져든 듯했다. 그녀는 사 자 굴 속으로 들어가는 듯이 행동할까 생각해봤지만, 신중한 접근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을 가로질러 그 앞에 우뚝 서서 두서없이 쏘아붙였다, "어떻게 그 일을 전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거죠? "그럼 안 된단 거요? 그래도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난 우리가 그 일을 아무 조건없는 순수한 섹스였다는데 합의한 걸 로 알고 있소" '資론 그랬죠" 그러자 그는 그럼 그걸로 얘기는 다 끝난 게 아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요 우연히 무심코 이뤄진 관계였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실제 벌어졌던 일이란 걸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긴가요? "그렇다면 꼭 인정해야 될 이유는 대체 뭐요? "글쎄_a,음,,,,,, 그건- 그녀는 속이 치밀어오르는 듯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단지 난 우리가 그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당신 아버지 때문이오? 차라리 그가 쉽게쉽게 말을 늘어놓았다면 그녀도 그리 당황하진 않 았으리라. "내 아버지에 대해 당신이 윌 알고 있죠? "그가 당신 어머니나 당신을 위해 살지 않았다는 사실, 그는 공단 침대 이불 위에서 여자와 놀아나다가 숨을 거둔 상습적인 오입쟁였다 는 사실, 당신 어머니는 그 일로 자살했다는 사실 등등이요" 그녀가 앙칼지게 되받았다, "데일리가 모두 다 얘기해줬군요 그는 내 개인사를 당신에게 말해 줄 권리가 없는데도 말예요"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난 그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거든." "왜 그렇게 관심이 많죠, 본듀란트 씨? '개 그렇게 핏대를 올리는 거요? "당신 과거를 말할 때마다 핏대를 올린 사람은 누군데 그래요?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을 뚜렷이 볼 순 없었지만 뭔가를 망설 이는 듯한, 생각에 잠긴 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배리, 당신은 모순덩어리요 난 군대에 있을 때, 모순을 연구하고 분석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이오 모순이란 항상 상당히 의미 있는 부 분을 지니기 때문이지." "좋아우 일단 속아주기로 하죠 그렇다면 대체 내가 어떤 면에서 모순덩어리라는 거죠? '계를 들어 당신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 농담을 잘하는 성격이오 그리고 남자들과 있을 때는 혼란스런 몸짓을 보이지. 한순간엔 성적 인 것을 전혀 멀리하는 듯하다가 또 한순간엔..- 그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사도 정신에 따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소" "당신은 진짜 왕자님이군요" "난 당신이 왜 그렇게 뜨겁고도 차가운 여자인지 알고 싶소 물론 데일리의 설명 덕분에 당신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됐지만. 아무래도 당 신 아버지의 거부가 당신을 이렇듯 야심찬 여자로 만든 것 같소" 그녀는 두 손을 엉덩이에 붙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제 그만 얘기하죠" "당신은 아버지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 열심히 노력했소 당신 은 애정을 얻으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지. 또한 여성 해 방론자처럼 굴면서, 남자에게 걷어채이기 전에 먼저 그 남자를 걷어 차버리지. 하지만 그런 모질고 냉혹한 태도는 여성적인 당신의 자연 스런 성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소 당신 아버지 덕분에 당신은 남자 들을 경계하는 여성이 된 거요" "본듀란트 씨, 난 남자들을 경계하지 않아요 단지 영리한 것뿐이 죠 또한 모든 남자들을 다 불신하진 않아요 몇몇 남자들만 그렇죠" "대부분의 남자들이겠지." "그래우 대부분의 남자들은 믿지 못할 존재들이죠 내 어머니완 달 리, 난 남자들이 날 거들떠보지 않는 걸 결코 용납 못해요 바로 그렇 기 때문에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시작한 거예요 당신에게 초콜릿과 장미 꽃다발 따윈 바라지도 않아요 그러니 나 같은 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척 행동하지 말란 말예요" "알았소" "좋아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시오" 비좁은 방 안에서 역시 비좁은 간이침대 위에 드러누워, 배리는 방 금 전에 그를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공허한 승리라는 생각 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바네사 메리트는 침대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데이텟에게 얻어맞은 후로 지금까지 사홀 동안 침실 밖으로 나가보질 못했다. 데이빗 역시 그녀를 보러오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캐티 쿠리'가 최근에 북아프리카 에서 돌아온 국방장관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리비아가 군 사력을 증강하여 이스라엘에 공습을 감행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 지만, 정작 리비아 정부는 그 폭격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고 있었다.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미국의 해외 정보망을 통해 그 첩보의 사실 성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한 조치를 유 보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실제로 공격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경우, 데이빗에겐 대단 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결정은 으레 여야 모두와 국민들에 게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적대국과 사소한 충돌을 빛기만 해도 내년 대선에서 적잖은 표를 잃을 위험도 뒤따랐다. 바네사는 그가 궁지에 몰려 있다고 생각하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보좌관이 문을 두드리며 알랜 박사가 찾아왔다는 얘기를 전 하는 순간, 그 미소는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박사가 침대로 다가오자, 그녀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조지, 이번엔 뭘 원하죠? "그것도 일종의 인사인가요? 단지 당신을 진찰하러 왔을 뿐이오" 그의 태도는 빈틈이 없었다. '게이빗의 명령인가요? 그는 그녀의 눈밑에 난 상처와 부은 자국을 애써 회피했다. "그는 오늘 아침 태풍의 피해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카리브 해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앤드류 공군기지에서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하면서 사람들에 게 손을 흔들어주는 장면이 뉴스에 나오더군요 아주 결연한 표정을 짓던걸요? 그는 분명, 용감한 기사가 용을 죽이듯 태풍을 단숨에 잠재 울 거예요 오 불굴의 데이빗 경? 그는 그녀의 팔에 혈압계를 붙이면서 되받았다. "바네사, 그를 빈정거린다고 해서 당신이 돋보이는 건 아닙니다." "당신이 기를 쓰고 못본 체하려는, 여기 내 뺨의 상처 자국도 날 돋 보이게 해주지는 않죠 혹시 데이빗이 내 광대뼈를 성형 수술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지 않던가요? 그가 내 몸의 손상 정도를 살펴보 고 수술비를 뽑아 달라고 당신을 보낸 건 아닌가요? "난 혈압을 체크하려고 왔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혈압계를 벗기고 지혈대를 다시 고무 밴드로 단단 히 졸라맸다. LI데이빗은 당신이 완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좀더 요양을 해야 한 다고 생각하더군_9-" "요양이라구요? 다시 날 격리시키겠단 말인가요? 맙소사, 안 돼!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큰 소리로 비명을 질 러봤자 무슨 소용 있겠는가? 큰 소리를 내면 비밀 경호요원들이 달려울 텐데. 그들을 앞에 세워 놓구 또다시 조지가 죽이려 한다고 떠들기밖에 더하겠는가? 하지만 이미 그녀의 경호요원들과 보좌관은 그녀의 뜻도 묻지 않고 조지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특히 그 여성 보좌관은 겉보기엔 헐렁한 스웨터 와 정장용 구두 차림의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할머니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곳곳에 심어놓은 데이빗의 밀정이었다. 그러니 과장되게 동정 심 어린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볼 게 뻔하다. 결국 그녀는 약에 취해 또다시 그 휴양지의 감옥에 보내지리라.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덫에 걸렸다. 기자회 견장에서 누군가 자신을 구조해줄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애를 썼다. 시청자 중에서 혹시라도 내가 어머니의 결혼 반지를 끼지 않았 다는 걸 눈여겨본 사람은 없을까? 불행히도 그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적어도 그레 이는 그런 것 같았다. 스펜서는 요사이 보이진 않았지만, 데이빗에 대 한 그의 충성심은 결코 변치 않으리라.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가 당신 이 모든 걸 통제하고 있다고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로늘 아 침 아버지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조지가 그녀의 괄꿈치 안쪽으로 얼음 같은 알콜을 바르는 동안 그 녀가 뚜벅 말했다. "아버지께 전화하고 싶어요" -래가 나중에 대신 전화하죠 피를 뽑을 수 있도록 주먹을 쥐세요" 그녀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날카롭게 내뱉었다. "난 지금 당장 전화하고 싶다구욧?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재빨리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벌거벗었다는 것은 생각지 않고 탁자 위의 전 화기로 손을 뻗었다. 순간 서툰 동작으로 수화기를 잡다가 전화가 바 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들려고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바네사, 오. 맙소사? 조지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날 놔줘, 이 개자식아? 그녀는 몸부림치면서 그에게 저항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에서 수화 기를 내리쳐 떨어뜨리고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팔을 격렬하게 휘두르며 손가락을 구부려 그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려고 했다. "다시는 내게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하겠어? "난 단지 당신을 도와주려는 것뿐이요" -거짓말 좀 작작해, 이 위선자이 시치미를 테는 짓은 이제 그만 하 란 말야! 당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는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야! 날 다시 구제 불능의 상태에 빠뜨리라고 명령을 받은 거지, 그렇지? 적어도 날 학대한 증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날 격리시키라고 했 겠지. 영부인이 부부싸움으로 눈이 시퍼렇게 멍들었다는 사실은 가히 폭탄적인 뉴스가 될 테니까, 안 그래? 그녀는 다시 발버등쳤지만 그가 민첩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바네사, 흥분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당신에게 진정제를 투여할 수밖에 없소" "그가 날 죽이라고 하면 그 명령을 따를 건가s,조지? '제상에, 물론 그럴 순 없죠? '거짓말쟁이! 당신은 이미 하이포인트에서 날 죽이려고 했어요 대 체 당신은 그에게 무슨 약점이 잡혀서 그러는 거죠? '치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요" "당신은 그를 위해 살인 사건까지 은폐했어요 그러니 그 야비한 인 간이 밝혀서는 안 될 당신 비밀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게 대 체 뭐주 조지? "난 살인사건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아하,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당신은 데이빗에게 목이 졸려 있는 상태라 아무 말도 못하는 거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그가 어떤 인간 인지 잘 알고 있어요 그게 그 사람의 방식이에요 말해봐외 대체 그 가 당신 모가지 위에 어떤 도끼를 겨냥하고 있냐구요? 아만다와 관련 된 건가요? 그게 바로 당신 급소가 아니던가요? 당신은 그 멋대가리 없는 부인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어요 아니면, 데이빗이 당신 자 식들의 목숨을 위협하던가요? 아하, 그는 그런 일에 아주 능숙해요 내 경우가 바로 그 산 증거니까. 그는,-, 아악? 조지는 그녀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주사기 바늘을 그녀의 정강이에 꽃고,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피스톤을 꾹 눌렀다. '기안해우 바네사. 당신은 내게 달리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소" '쌀지, 당신에게도 선택할 길이 있어요 우린 모두 선택권을 갖고 있죠 제기렐 나쁜 자식? 그녀는 목이 멘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데이빗과 함께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라? 그날 저녁 조지 알랜은 집 앞의 도로에 차를 멈친지만 차에서 나와 집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을 무릎 위에 축 늘어뜨리고 자동차 앞 유리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온 몸의 맥이 다 풀려서 문을 열 힘조차 없었다. 그나마 집 안의 불이 켜져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혹시 창문의 불이 다 꺼져 있고, 식구들이 다 보이지 않구 옷 장과 책상이 텅 비어 있을까 봐 마음을 졸이곤 했다. 아만다가 아이들 을 데러고 집을 나가버렸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그를 되찾기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했지만, 대체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언제쯤이나 남편이 구원받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 란사실을깨달을까? 그는 매일 아침 술과 죄책감에 몸을 떨며 게슴츠 레한 눈으로 식탁에 나타날 때마다 아내의 얼굴에서 역겨운 표정을 보곤 했다. 그는 아만다가, 자신이 간밤에 어디에 있었고 무슨 일을 했는지 물 어보며 여전히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예리한 감각이 눈에 거슬렸다. 그녀는 그 어떤 법 집행기관에서 사용 하는 것보다도 더 정확한 거짓말 탐지기를 몸 속에 지니고 있는 듯했 다. 아무리 그럴싸한 구실을 둘러대도 그녀를 속이는 것이 점점 힘에 부쳤다, 게다가 죄책감 때문에 더욱 변명이 늘어가고 입이 거칠어졌다. 그 녀는 여러 차례 험악한 꼴을 본 후로는, 남편이 데이빗 메리트의 명령 에 따라 수행하는 일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꼬치꼬치 캐묻는 일을 중단한 까닭은 그의 거짓말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든지, 혹은 살기등등한 부부싸움으로 두 아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엔 질책과 경멸이 넘쳐홀렀다. 그는 그녀 의 인내심이 엷어져가구 사랑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곁 을 떠날 것만 같았다. 수치와 절망 속에서 죽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차를 몰고 오면서 허벅지 사이에 끼워둔 술병 주등이를 입에 물고 술을 쭉 들이켰다. 차라리 교통 경찰에게 음주 운전으로 걸려들 었으면 싶었다. 그랬다면 기꺼이 그 죄를 인정하리라. 음주 운전으로 잠시 철창에 갇혀 있는 것이 데이빗을 위해 일하다가 종신형을 언도 받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자신이 감옥에 갇힌다면, 데이빗은 코앞 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또 다른 의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국가적인 임무를 기쁜 마음으로 포기할 것만 같았다. 집으로 오기 전에, 그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데이빗이 오기만을 기 다렸다. 데이빗은 카리브 해를 서둘러게 순방하면서 선한 의지를 언 론을 통해 세계 만방에 과시했다. 젊교 잘생기구 활기찬 대통령은 태 풍에 쉽쓸린 재해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끔찍한 자연의 위력 에 집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섬 사람들을 위로했다. 앞다투어 각 신문사와 방송국이 그 모습을 찍어 최대의 선전이 된 셈이었다. 조지는 치를 떨었다. 그가 자연 재해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존재란 사실을 사람들이 알 기나 할까! 이윽고 대통령이 약간 구릿빛으로 익은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집 무실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피곤하고 힘든 여행으로 오히려 더욱 활 력을 얻은 모습이었다. '조지! 웬일인가? 조지는 마치 대통령이 전혀 모르는 사실을 얘기하는 듯이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자네 부인이 오늘 아침 다시 아프기 시작했네. 해서 내가 책임지고 치료와 간호가 보다 쉬운 개인 휴양 시설로 부인을 이 송시켰네.' 그러자 그 개자식은 짐짓 낙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슬픈 척했다. 잠시 후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장인에게 그 사실을 알렸냐고 물었다. '자네가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에게 직접 얘기하는 게 좋을 듯하이,' 데이빗이 조지에게 언론에 발표한 적절한 문구를 달톤 닐리와 짜달 라고 요구하자, 조지는 내일 아침 서둘러 먼저 그 일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지의 고민에 찬 표정과 맡은 일에 대한 무성의한 그 태도를 눈치 챘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데이빗은 그런 내색조차 짓지 않았다. 조 지의 감정이 어떻든, 자신의 명령이 충실히 이행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대체 그가 당신의 모가지 위에 어떤 도끼를 겨냥하고 있는 거죠? 아만다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조지는 데이빗 메리트와 만난 그 날을 저주했다. 그 당시엔 상서로운 징조로 느껴졌던 일들이 돌이 켜 생각해보면 일생일대 가장 불길한 사건들이었다. 우연이었는지 아 니면 데이빗이 우연처럼 꾸민 짓인지는 몰라도, 당시 젊은 레지던트 였던 조지는 테니스 코트장에서 앞날이 창창한 젊은 국회의원 데이빗 을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눌 때, 조지는 그의 팔에 강한 힘이 스며 있음을 느꼈다. 마치 데이빗의 권위와 정력이 자신의 몸 속 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강한 우정의 밑거름 이 되어 주었다. 그후로 그들은 자주 만나 테니스를 치거나 술을 마시구 혹은 점심 을 같이했다. 당시 갓결혼한 알랜 부부는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 해 사치스런 생활을 누릴 수 없었는데도, 데이빗은 넉넉한 표정으로 그들 부부의 수수한 아파트에서 햄버거로 배를 채우곤 했다. 하지만 데이빗이 결혼한 뒤 그의 아내는 알랜 부부와의 저녁 식사 모임에 시 큰등한 반응을 보였다. 바네사와 아만다는 남편들처럼 깊은 우정을 나누지 못했다. 조지는 그 원인이 아만다가 바네사보다 지적으로 월 등히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 여인은 성격과 관심사가 사 뭇 달라 서먹서먹한 관계였지만, 조지와 데이빗의 우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다. 사귄 지 오래되지 않아 조지는 데이빗을 가장 절친하고 믿을 만한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삶이 파멸 위기에 처했을 때, 자연스레 데이텟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위기는 어떤 혹인 소년이 응급실로 실려오면서부터 시작됐다. 같이 따라온 환자 친구들의 얘기로는, 그 소년이 동네에서 농구 경기 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조지는 환자의 나이와 겉모 습, 그리고 친구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즉각 마약 과용이라고 의심 했다. 그는 그 패거리들에게 환자가 그날 무슨 마약을 복용했냐고 물 었다, 그중 한 친구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그는 단지 그놈의 빌어먹을 NEA농구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마 약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구.9-" 하지만 조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환자의 모든 증상은 알콜과 신 경 안정제의 복합적인 과용 증세와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둔이었다. 곧바로 간호사들에게 위 세척과 음식을 토하도록 약을 쓰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다가 환자의 어머니가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환자가 어린아 이 시절 류마티스성 열병으로 대동맥 심장 판막에 손상을 입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손상된 심장 판막이 격렬한 농구 경기 중에 심장마비 를 일으켰던 것이다. 조지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약효의 효과가 급 속히 나타났다. 소년은 정신없이 토악질을 하다가 이물질이 기관지로 들어갔고, 결국 구토물에 질식해 익사하고 말았다 조지는 죄책감과 당혹감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믿을 만한 친구 인 데이빗에게로 달려갔다. 데이빗은 조지가 울면서 하는 얘기를 끝 까지 들어주었다. '그 환자는 정신이 없어서 내게 자신의 병력을 얘기해주지 않은걸 세. 물론, 내가 미리부터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그를 대하지만 않았어 도 그에게 그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겠지. 아니, 가슴 부위를 조금만 더 철저히 조사했더라면,,,,,- '그애 친구들이 그애가 심장이 약하단 얘길 해주었나? '환자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들에게 계집애 같은 녀석이라고 따돌림 을 받을까 봐 그 병을 절대로 알리지 않았다고 하더군. 오, 하나넘? 조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이제 환자 어머니가 의료 과오를 죄목으로 삼아 병원과 날 고소할 거 라네.' 조지는 이제껏 힘들게 쌓아올린 모든 경력과 기반이 한꺼번에 와르 르 무너져내리는 게 두려웠다. 한 달만 더 채우면 레지던트 과정이 끝 나는데, 그와 아만다의 꿈들이 무참히 꺾이는 순간이었다. 그때 데이빗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너무 자신을 학대하지 말게. 자넨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 었네. 어쨌거나 그는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깜등이 불량아가 아닌가? '이상하게도 그땐 그의 가슴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네,'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의사로서 당연히 그런 의심을 가져야 했네. 아무리 증세가 명확하다 하더라도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되는 거였어.' 데이빗이 다시 그를 달랬다. '여보게. 지금 데이텟 메리트란 인간이, 친구가 남은 생애 동안 자 신의 실수로 괴로워하도록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했다면, 당장 그 생 각을 버리게. 자네, 날 믿을 수 있겠나? 데이빗의 침착성에 최면이 걸린 듯 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 어머니가 자네에게 아들의 심장질환에 대해 얘기하는 걸 옆 에서 들은 사람이 있었나? '없는 것으로 아네. 우린 단 둘이 있었거든.' '잘됐군.' '하지만 그의 진료 기록에는 그 사항이 남아 있을걸세. 그녀는 병원 에 올 때 아들의 진료 기록들을 가져왔거든. 데이빗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 기록들은 지금 어디 있나? 조지는 가방에서 과오를 증명할 자료를 꺼내 데이빗에게 건네주었 다. 데이빗은 그 자료를 받아 금고 안에 넣어두었다. '자넨 아무 것도 보지 않았네. 내 말, 이해하겠나? 그러고는 금고 문을 잠그고 뒤로 돌아서서 조지의 표정을 보며 껄 껄 웃었다. '이제 긴장 풀게나. 이만한 일로 그렇게 벌벌 떨면 어떻게 하나? 응 급실에서 환자들이 죽는 건 늘상 벌어지는 일이야. 내 약속하지! 앞으 로 아무도 이 사건을 조사하지 않을 거라고 말일세.' '환자 어머니는 어떻게 하지? '어쩌면 그녀는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걸세. 그 리고 아들이 조만간 그리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자네가 그를 구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믿게 될 거야.' 조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앤 명확한 이유로 응급실에서 죽었기 때문에 아마도 부검은 없 을 것 같네, 데이빗.' 그러자 데이빗이 조지의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쳤다. '그럼 이제 식은땀일랑은 그만 좀 흘리게나.' 데이빗이 예언한 대로 조지가 진단을 내린 환자의 사인에 대해 아 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장의사에서 소년의 시신을 가져간 뒤 로 소년의 어머니는 그에게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은밀한 비밀로 두 사람의 결속력은 더욱 굳건해졌다. 데이 빗은 조지를 동료 의원들과 그외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 다. 그리고 조지를 워싱턴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라고 추켜세울 때도, 하원에 의안을 제출할 때와 똑같이 진지하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구 사해 모든 이들이 그의 말을 믿었다. 그리하여 조지는 개인 병원을 차리면서 워싱턴 정가의 거물들을 고 객으로 삼을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백악관의 주치의로 임명되면 서, 돈벌이가 잘되는 그 병원을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팔아넘기고 부통령 집 근처에 아름다운 저택을 샀다. 정말 꿈 같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한밤중에 백악관으로 불려가 생후 석 달된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그 즐거운 인생은 급속히 하강 곡선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데이텟은 이제껏 자신이 베푼 은혜의 보답을 철저히 요구해왔다. 조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지만, 데이빗이 아직도 그 소년의 병력 자 료를 보관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소년의 질병을 오진한 것은 명 백하면서도 치명적인 과실이었지만, 그 당시 곧바로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그 대가를 치렀다면 그 난관을 극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말을 해놓고는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밝 힌다면 의료계에서 결코 용서해줄 리 없었다. 당시 데이빗의 결정은 조지를 구원한 듯이 보였지만, 사실은 조지의 무덤을 파는 데 결정적 인 기여를 한 셈이다. 현재 조지가 누리고 있는 명성을 감안해 볼 때, 오래 전에 은폐했던 응급실에서의 그 사건은 뉴스 시간의 첫머리를 장식할 특종 기사가 분명했다. 일단 그 사건이 언론에 공개되면, 의사들의 과오로 인해 얼 마나 많은 환자가 죽느냐 하는 점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모든 이들의 관심이 죽은 소년과 그의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그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파렴치한 의사에게 쏠리게 될 뿐이었다. 조지는 그런 불명예를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으로 아만다와 두 아들이 평생토록 편안히 먹고 살 만큼은 되었다. 그녀에게 쥐꼬리만한 연금이라든가 생명 보험 증 서, 게다가 엄청난 부채는 남겨놓지는 않았다. 남겨놓지 않았다고? 순간 조지는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문득 깨 달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맞는 생각이었다. 데이빗의 최근 명령을 이 행한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를 게 없었다. Ur料-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레이? 그 목소리는 배리 자신이 듣기에도 긴장감이 팽팽히 감돌았다. "달톤은 백악관 보도 담당관이니, 거짓말로 먹고사는 인물이요" '재가 볼 때 이번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부엌에서 파이와 커피를 먹고 있었다. 달톤 닐리가 영부인 이 다시 얼마 동안 공직생활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한 후로 벌써 1주일 이 다 지나갔다. 이번에도 닐리는 그녀의 상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달지 않았교 그녀의 요양지 역시 비밀에 부쳤다. 이제는 라디오를 시끄럽게 켜놓고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레이가 집안에 음파 소음 발생기와 여러 대의 변환기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 이다. 그 첨단 기술 장비는 귀에 들리지 않으면서도 감청 장치의 수신 력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음파를 쏘아댔다. 배리가 다시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바네사의 건강이 안 좋다는 달톤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를 변호하지? "그를 변호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내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죠 바네사가 정말로 아프다는 뜻이에요 아들의 죽음으로 그녀의 조울병 이 더욱 악화되었을 게 뻔해요 결과적으로 그녀에 대한 투약량도 늘 어날 수밖에 없었겠죠 그리고 그녀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격리 상태에서 간호와 감시도 받아야 했을 거예요 바로 이 점이 그 사건의 전부인데, 난 괜스레 그 사건에 내 직업을 건 셈이죠" 데일리가 이죽거리며 나섰다. "당신은 이젠 직업이 없잖아." "흥, 그 점을 새삼스럽게 알려주다니 고맙네요 아니, 5분에 한 번씩 그 사실을 알려줘서 정말 눈물나게 고맙군요" "대체 뭣 때문에 눈에 쌍심지를 켜는 건가? "그런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아니, 모든 것 때문이죠 아,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언짢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 왜 내가 배알이 꼴리는지 알고 있어요. 이렇게 인생 실패자 로 전락하기 이전의 삶이 너무나 그립단 말예요" 데일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公아붙였다. "중요한 점은, 당신이 이렇게 인생을 망치기 이전에 아무도 당신더 러 유아 돌연사 증후군이나 대통령의 아기 문제, 혹은 영부인의 정신 및 감정상의 문제를 파헤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셈이라고" "세상에, 대체 내게 그런 사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바로 당신이잖아요? "난 당신에게 억측이 아닌 사실에 바탕을 둔 기사를 쓰라고 가르쳤 어, 그게 바로 내가 가르친 거라고!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배워먹질 않은 거야." 데일리는 잠시 숨을 고르려고 파리한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인생을 되찾고 싶다고? 좋아, 그럼 언제든지 내 집에서 나 가면 되잖아? "나가라고 하면 누가 못 나갈 줄 알아요? 나도 이런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집구석에선 하루라도 더 못견디겠어요! 그리고 젖은 수건을 제대로 걸어놓지도 않고 변기 의자를 내려놓을 줄도 모르는 지저분한 남자들과는 더 이상 욕실을 같이 쓰고 싶지도 않다구요? 그녀가 의자를 뒤로 밀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부엌의 리놀륨 바닥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당신들 두 남자와 이제껏 벌인 게임이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건 정 말 어이없을 정도로 어리석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짓거리 라구요! 난 지금 막 결정했어_9. 내 인생을 되찾고 말겠어요! 당신들 두 사람, 하고 싶은 대로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그러고서 그녀는 바닥을 쿵쾅쿵쾅 울리면서 부엌을 질러가 문을 닫 고 나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 그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요" 데일리는 가슴을 들썩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래,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어. 그녀가 최근에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좀더 친절하게 대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가서 그녀의 마음을 달래질야 할 것 같군." '씬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뽀로통하게 있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아 마 정신 상태가 불안한 걸로 보니 씰경 전 증후꼰이겠죠 조금 있으 면 그녀도 마음이 풀릴 겁니다. 그때 내가 얘기해 보죠" "자네, 그녀와 몸을 섞었지, 안 그런가? "딱 한 번이었습니다." '설마? 정말 그뿐인가? "왜요? 그 횟수를 기록해 두시게요? "대체 그녀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 건가텔 "난 여자들에 대해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데일리는 그레이의 위협적인 푸른 눈빛에 주눅이 들어 마음 에 담긴 말을 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때때로 난 그녀를 못살게 굴지만, 사실 내 피붙이처럼 사랑한다네. 난 -녀가 자네나 이번 사건으로 가슴 아파하는 건 바라지 않는단 말 일세. 그러니 이제 이 터무니없는 짓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네." ,,1주일 전만 하더라도 이 일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으 셨잖습니까? "나도 이제 막 생각을 바됐네. 애당초 이 일은 특종에 대한 배리의 욕심에서 시작됐지. 하지만 요즘 들어 난 그녀의 야망이 전염병과 비 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네. 말하자면 내게도 전염된 셈이지. 그 사실을 좀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그녀는 와이오밍 주까지 가서 자네까지 흥분시켰네. 본듀 란투 사실 자넬 자극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어떤가? 생각만 해도 근사하잖은가? 위험에 처한 바네사가 신호를 보내자 그 녀의 영웅이 달려오다! 젠장! 그래서 자넨 이 일에 진지하게 달려들었 던 거야. 우리 세 사람 모두 너무나 감상에 젖었던 셈이네." "데일리,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데일리가 숨을 헐떡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괜찮겠나? 알다시피 이런 개똥 같은 일을 치르기엔 내 몸이 너무 늙고 병이 단단히 들었어.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내 생 애를 좀더 평화롭게 보내고 싶다네, 내 묘비에 '반역자'란 단어가 새 겨지는 건 정말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자신이 잘못한 걸 알았을 때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사람이 돼야 해, 아, 난 그나마 그런 힘이 아직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싶네." 그러고서 의자에서 일어나 산소 공급기를 끌고 흐느적거리면서 문 가로 걸어갔다. "일이 다 끝나면 잊지 말고 꼭 불을 끄도록 하게. 자네 두 사람은 방세와 전기세도 내지 않잖아? 그레이는 빈 커피잔들을 싱크대 안에 넣고 깨끗이 헹군 다음 문가 로 가서 부엌 불을 껐다. 그와 배리, 데일리는 잠시 동안 어둠 속에 몸을 웅크렸다. 배리가 그레이의 귓불을 꼬집더니 머리를 끌어당기며 속살거렸다. "월경 전 증후군이 뭐 어떻다구요? 그레이 역시 잔뜩 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미안하오" 데일리가 최대한으로 숨소리를 죽이면서 물었다, "이 방식이 먹힐 거라고 확신하나? 그레이는 솔직하고 진지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걸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겠죠? 이미 그레이에게서 적외선 검파기의 사용 방법을 배운 데일리는 자 신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소리를 죽이며 대답했다. '지제 이곳을 싹 쉽쓸어버리세. 누군가 어둠 속에 숨어 내 집을 염 탐하고 있다면 이 장치가 알려주겠지." "좋습니다. 뭔가 발견하면 날 부르십시요 그레이는 말을 끝내자 마자 무선 이어폰을 한쪽 귀에 끼웠다. 그의 윗옷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송수신 무선기와 함께 사용하는 장비였다. "참 근사한 장난감들이군." 데일리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배리는 어둠 속에서 광채를 띠는 그 의 눈빛을 보았다. "문제는 저쪽 전문가가 이보다 더 근사한 장난감들을 갖고 있다는 점이죠 좋습니다. 이제 시작하죠" 데일리가 그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자 그들은 소리없이 뒷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달이 구름에 완전히 가려져 감시팀 들도 적외선 쌍안경과 적외선 검파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 그들을 발 견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레이가 말한 대로 저쪽 전문가들 역시 근 사한 장난감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데일리의 집 앞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주차돼 있는 감시팀 의 차량을 발견했다. 그저께는 트레일러, 어제는 AS차량, 그리고 오 늘은 유개 트럭이었다. 지난 1주일 동안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진 않 았지만, 어쨌든 스펜서의 비밀 경찰들은 스펜서가 없는 중에도 그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레이는 집 뒤쪽에 감시 인원이 배치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데일리의 자동차와 배리의 자동차를 남의 눈에 잘 띄는 집 앞 장소에 주차시켜 놓았다. 그리고 감시팀이 방금 전 부여에서 벌어진 각본에 따른 연극에 속아주길, 즉 이쪽이 내부에서 분열될 조짐이 있다고 믿 어주길 바랐다. 그레이는 소음 발생기가 자신들의 대화 내용을 완전 히 감춰주리라곤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 대화에서 일부러 도청꾼 들이 듣고 싶어할 얘기만 늘어놓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몸을 낮게 웅크리고 소리 죽여 데일리의 뒷 베란 다 구실을 하는 자그마한 사각형의 콘크리트 지대를 벗어나 한 래기 정도 되는 뒷마당을 질러 달렸다. 그녀의 집이 화염에 쉽싸이던 밤과 마찬가지로 그레이는 그녀를 이끌고 여러 골목과 샛길로 주택가를 몇 블록 지나쳤다. 개 두 마리가 두 사람을 보고 짖어댔지만 어둠 속에서 FBI요원들이 불쑥 튀어나와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재수 없는 일 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레이는 이미 일을 벌이기 전에 단층 사무용 건물 뒤에 자동차 한 대를 주차시켜 놓았다. 자동차에 다다르자 자신이 착용한 무선기의 마이크로폰에다 대고 속삭였다. '게일리, 어떻습니까? '기밀 요원의 방귀소리조차 들리지 않더군. 다행이야." "교신 끝." 배리는 긴장한 탓에 몸에 무거워져 어느새 헥헥거리며 숨을 몰아쉬 었다. 그러다가 자동차를 타고 어느 정도 데일리의 집 주변을 벗어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들이 우릴 뒤쫓고 있나요? "그건몇 분안에 알수있소" 그레이는 차의 속력을 높였다가 낮췄다가 하면서 길거리를 요리조 리 누비고 다녔다. "그들이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지 않았다면 일단 꼬리는 붙지 않은 것 같소" 그는 이어폰과 무선기를 빈 좌석에 놔두었다. 그 사이에 배리는 얼 굴을 찌푸리면서 툴툴거렸다. '정씬과 데일리는 아까 아주 회한한 말을 하더군요 누구라도 그 대 화 내용을 들었다면, 날 월경 직전 상습적으로 신경질을 부리는, 야심 차고 선동적이며 몸가짐이 헤픈 멍청이로 알겠더라구요" "홈, 제법 빨리 파악하는군." II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公아보았다. "그런데 이 자동차는 어디서 구한 거죠? "쇼핑 센터 주차장에서." "그럼 훔친 거란 말예요? "아니지. 난 차 주인에게, 현 대통령을 타도하려는 사람으로 날 소 개하고 자동차를 빌려달라고 말했을 뿐이요" '래참 기가 막혀! 보나마나 지금쯤 도난 신고가 돼 있겠군요 당장 차에서 내려야겠어_9_" "난 '시보레 블궤이저'와 이 차의 번호판을 바꿔달았소 이 도시만 하더라도 이런 '타우루스'가 수천대는 굴러다니고 있지. 게다가 내일 이면 이 차를 내버리고 다른 차를 구할 거요" "당신은 범죄도 기사도 정신으로 저지르는 것 같군요" '지번 사건이 끝날 때까지 앞으로 우리가 저지르게 될 범죄에 비하 면 이런 자동차 절도는 새발의 피일 거요 참, 그의 주소가 어디라고 했소? 하위 프리프는 계단식 아파트의 3층에 있는 방 네 개짜리 집에서 혼자 살았다. 세월이 갈수록 계단은 그의 무릎처럼 더욱 요란하게 삐 그덕거렸다. 오늘도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두 무릎 이 욱신욱신 쑤셨다. 거실 조명을 켜구 부져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중국 음식 봉지를 내려놓았다. "안녕, 하위? "어이쿠,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돌아서니 배리가 어두운 침실에서 부엌으 로 걸어나왔다. "하위, 내가 놀라게 했나 보죠? 미안해요 집에 누군가 몰래 숨어들 면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지 당신 맘 이해해요" "사람, 간 떨어질 뻔했잖아! 대체 여기서..."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어둠 속에서 배리의 뒤에 나타난 키 크고 호리 호리한 인물을 보는 순간 다시 한 번 놀랐다. '저 사람은 누구지? '勺레이 본듀란트 씨예요 이분이 바로 하위 프리프 씨랍니다." 배리는 하위가 특공대 대장의 꿰뚫어보는 듯한 푸른 눈, 은발의 머 리, 그리고 험악한 입술을 더욱 잘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당신이 그레이 본듀란트 씨군요" "하위, 이분에 대한 얘길 어디서 들었나 보죠? 배리의 질문에 대꾸는 하지 않구 하위는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르며 그레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본듀란트 씨.' "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소" 하위는 자신만만한 그레이의 목소리를 듣자 언젠가 함께 당구를 쳤 던 남자가 떠올랐다. 친구로 사귀고 싶었지만 그 술집에 다시는 나타 나지 않았던 그 남자. 하위는 불청객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레이의 표 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무지 빈틈이 없었다. 마치 먹이감을 발견하고 단방에 해치을 상대라는 걸 아는 육식 동물처럼 자신만만하 고 도도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대체 내 집엔 왜 나타난 거요? "우린 정보를 얻기 위해 왔소" 그레이는 부츠 끝으로 탁자 밑의 의자를 끌어냈다. "하위, 의자에 앉으시오 우린 당신의 저녁 식사를 훼방할 생각은 없소 그러니 우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음 놓고 식사하시오1 하위는 그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지만 그레이가 중국 음식 봉지를 앞으로 내밀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맛이 싹 달아난 것은 물론이요 이젠 돼지고기와 새우를 넣고 볶은 국수의 달짝지근하면서도 신맛을 생각해도 속이 메스꺼웠다. 순간 불안감을 감추려는 그의 시도는 실 패로 끝나고 말았다. 배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위, 왜 그러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잖아요? 우릴 만난 게 반갑 지 않은 모양이죠? '개리, 사실 난 요즘 자네와 대화를 나누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 를 받았어. 어떤 상황에서도 그건 용납될 수 없지. 젠킨스는 하다못해 내가 자네에게 시간만 알려줘도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구.- 그레이 본듀란트가 얼른 되받았다. "그렇다면 하위, 당신은 운이 좋은 거요 우린 이미 지금이 몇 시인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배리, 그렇다고 내가 자네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건 아니야. 자네도 알잖아? 젠장, 나도 내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말야. 자네에 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정말이라고! 우린 친구로서 헤어진 거잖아? 우리 사이에 감정은 전혀 없었어. 적어도 내 쪽에선 그렇단 말야." 겨드랑이에서 10년 묵은 정원 호스처럼 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난,,,,,, 난,,,,,, 아참, 그렇지. 자네에게 전화가 왔었어. 잠깐만 기 다려봐. 내가 메모지에 적어놨지."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그 종이쪽지를 찾아내더니 그녀에게 건네주 었다. "여기 있어. 그 전화는 내가 오늘 밤 퇴근하기 직전에 받은 거야. 당신 친구라고 하더군. 그 여자가 자네와 통화하게 해달라고 하니까 전화 교환원이 내게 연결시켜준 거야." 배리는 쪽지를 보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샤를린 워터스군요" "맞아. 그 여자는 아주 급한 일이라면서 내게 전화 번호를 알려주더 군. 그래서 거기에 그 번호를 써놨어." "그녀는 내 친구가 아니에요 틈날 때마다 내게 전화를 해온 미치광 이란 말예_9-" "아. " 하위는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샤를린이란 여자가 배리가 몹시 얘기하고 싶어할지도 모를 중요한 인물이길 기대했는데. 아무튼 배리 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이란 걸 보여주려고 발버등치고 있었지만 그레 이 본듀란트는 별로 감명을 받지 못한 듯했다. 그의 화강암 같은 표정 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하위는 훤칠하고 위압적인 영웅이 다른 의자를 탁자 밑에서 끌어내 어 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는 모습을 두려움이 섞인 눈길로 지켜보 았다. 그의 동작은 유연하면서도 조용했다, 하위는 그와 눈길만 마주 쳐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 시선이 자신의 두개골을 꿰뚫고 들어오 는 듯한 기분이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이 사내에게 집 적거리지 않겠지. 배리는 부엌 조리대에 등을 기대고 괄짱을 꼈다. 마치 자기 집에 와 있는 것처럼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하위는 거짓 미소라는 걸 재빨리 알아차렸다. "하위, 당신은 꼭 돼지처럼 땀을 흘리고 있군-- "난 단지 당신들이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할 뿐이야." "그레이와 난 당신과 친구처럼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려고 잠시 들 렀을 뿐이에요" "뭐에 대해서? "오 여러 가지죠 내일 날씨, 레드스킨 팀의 야구 경기. 그들은 정 말 올해도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해리슨 포드의 새 영 화. 아참, 백악관의 요즘 소식들. 뭐, 그 정도죠" "난 백악관의 요즘 소식에 대해선 전혀 듣지 못했어." "오효 하위, 이거 왜 이러세요? 보도국에서 일하시는 분이." -개리, 제발, 그건 좀 포기해줘. 계속 그렇게 하다간 자네만 점점 더 곤경에 빠질 뿐이야." 와, 그렇게까지 염려해 주다니 정말 감격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당 신이 영부인에 관해 최근에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궁금하군요" "아무 소식도 못 들었어." "분명 들었을 텐데요? "맹세코 정말 못 들었다니까." '재가 그만둔 이후로 누가 그 일을 맡게 췄죠? 그란트야. 그의 얘기로는 그곳 사람들의 입이 부자의 항문보다 더 단단하게 닫혀 있다더군. 아무 것도 새어나오는 게 없대." 그럴 리 없어요 항상 뭔가가 새어나오게 돼 있죠 뜬소문이나 뒷 공론 같은 것 말예요 메리트 부인이 다시 백악관을 떠났다. 왜? 어디 로 갔을까? 그녀를 본 사람은 없는가? 그녀의 건강이 진짜 안 좋은가? 그녀는 지금 생명이 위독한 상태인가? 배리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하위는 애처롭게 보이려는 듯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맹세코 난 아무 것도 몰라. 아뿔싸, 자넨 이 일에 완전히 환장했군. 정말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야! 어째서 자네 그 머릿속엔 메리트 부인만 들어 있는 거지? 세상에, 배리! 정상이 아니야. 머리가 돈 여자 같다됐" 배리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그레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가 이 사람관 얘기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그냥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문가로 향하자 그레이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저 사람을 그냥 이대로 두고 가면 연방 수사국 요원들에게 우리가 찾아와 질문을 던졌다는 걸 다 불을 거요" "흐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요"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미심쩍인 표정으로 하위를 째려보았다. 하위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금세 얼굴이 핼쓱해졌다. "당신들이 여기 왔었다는 얘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소" 그레이는 윗옷 안으로 손을 넣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의 목숨을 운명에 맡길 순 없소" 하위가 다급하게 두서없이 내뱉었다. "오, 젠씸 맙소시 이럴 수기 오, 하나럼! 난 죽고 싶지 않소 정말 죽고 싶지 않단 말야. 그럴 수 없어. 제발, 날 죽이지 마시-p_, 하지만 그레이는 '찰칵' 하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매그넘' 권총의 방아치를 뒤로 당겼다. 하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배,,,,,깨리,,,,,, 제-쎄발 -써 사람이 날 죽이지 않게 해줘, 우린 친구였잖아." '씬구? 친구라고요 하위? 하,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요"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덧붙였다. "친구라는 사람이 날 팔아먹어요? 당신은 언제나 젠킨스에게 잘 보 이려고 날 제물로 삼았잖아요? 당신은 매일 함께 일하는 날 개똥으로 취급했어요 게다가 난 지금 그레이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처 지예요 그가 당신이 우릴 밀고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작정했다 면, 그 뜻을 막을 수 없단 뜻이죠 하지만 난 당신이 죽는 장면은 보고 싶지 않군요 그리고 중국 음식도 다신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레 이, 내가 다른 방에 들어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줄래요? "제제제발." 하위는 흐느껴 울면서 애걸했다. "날 살려줘, 배리." "미안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에요" 그녀는 조리대에서 벗어나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잠시 멈춰서서 마 지막 작별 인사로 하위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레이 본듀란트는 식탁 너머로 팔을 뻗어 하위의 이마 한가운데에 총부리를 갖다댔다. "뭔가 듣긴 들었지만, 그게 사실일지는 모르겠어," 그 말이 하위의 입에서 워낙 빠르게 흘러나와 마치 곡예단이 공중 제비를 도는 것 같았다. 배리는 발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서 의심스런 표정으로 눈살을 찌 푸렸다. '지제사 입을 여는 건가요? 혹시 그레이에게 죽고 싶지 않으니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녜요? 하위는 얼른 가슴에 십자가를 그어댔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맹세하겠소, 본듀란트 씨." "무슨 얘길 들은 거요? "소문에 따르면, 메리트 부인이 폭행을 당해 어떤 병원에 입원해 치 료받고 있다는 거.- "그건 벌써 옛날 얘기예요 그 소문은 예전부터 나돌았다구요" 배리가 반박하자 하위가 초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씨번엔 진짜라던데? 그레이는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느 병원이오? "나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르죠 그리고 뜬소문일 수도 있겠죠" 그레이가 배리를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 레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하위의 이마에 총부리를 갖다댔다. 하위는 벌벌 떨면서 설명했다. "알랜 박-,박사가 날마다 백악관 풀밭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어 디론가 갔다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은 1시간 내지는 1시간 30분 쯤 있다가 돌아오는데, 행선지가 어디인지, 또 영부인과 관련된 것인 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사이 그가 가정 불화를 겪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죠" "알랜 박사의 결혼생활엔 아무 이상이 없소 나도 그들에 대해선 좀 알고 있지, 그들은 서로 홀딱 반한 잉꼬 부부란 말이오" "하지만 요즘은 의사와 그 부인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하더군 _9. 소문이 그렇게 돌고 있습니다. 또 누가 압니까? 어쩌면 그가 바람 을 피우는지도요." 하위는 한 줄기 희망의 눈빛으로 배리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그레이 에게 고개를 돌렸다. "맹세코 그게 전부야. 배리, 내가 들은 소문의 전부란 말야. 젠킨스 는 내가 자네와 얘기하면 내 엉덩이 위에다 워싱턴 기념탑을 넘어뜨 리겠다고 경고했어. 그러니 그 정보로 뭘 하든지, 그 얘길 내게서 들었 다는 말은 결코 새나가지 않도록 해줘. 약속해줄 수 있겠어, 배리? 그레이가 그녀에게 뚜벅 물었다. "당신은 어찌 생각하오? 이 사람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소? 대뜸 하위가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나도 잘 모르겠군요" 배리는 볼 안을 오물거리면서 덧붙였다. "죽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꾸며댈 수도 있죠. 아니면 우리에게 거짓 말을 했다가 나중에 당신에게 보복당하리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 도 모르구요" 하위가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끼여들었다. '재 말은 거짓이 아니오 그러니 보복을 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레이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푸른 눈빛으로 하위를 노려보았다. 그 리하여 그 짧은 순간 동안, 하위는 세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셈 이었다. 그레이가 방아치를 풀고 총부리를 이마에서 거두기 전까지. "하위, 그럼 이렇게 합시다. 오늘은 일단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하 지만 내가내일 다시 찾아왔을 때 당신은 자신이 죽으면 안 될 이유를 제시해야만 하요" "그게 무슨 얘긴지? "병원 이름을 알아내란 말이요 별로 부담스런 요구가 아닐 것 같은 데, 그렇지 않소? 당신이 좋아하는 이 맛깔스런 중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와 병원 이름을 교환하는 거_9_" "그건 못합니다. ,,,,-내가 어떻게 병완 이름을 알아내겠습니까? "그건 당신 문제요 하지만 난 당신이 알아낼 수 있으리라 믿소" 배리가 샐쭉거리며 나섰다. "그를 너무 믿지 마세요 지금 가련한 몸뚱아리를 구하려고 무슨 말 이든 다 하겠죠 그리고 나중에 우리의 뒤통수를 칠 거예요" 하위는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본듀란트 씨, 하느님께 맹세하 건대, 난 당신들을 배반할 사람이 아닙니다." 배리가 코웃음을 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레이,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단, 난 그를 믿지 못하겠어 요 그는 구더기 같은 인간이거든요" '래게 그런 사실을 일깨워줘서 고맙소 배리." 하위는 그레이의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하위, 배리 얘기로는 당신이 평소 자주 못살게 굴었다더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곧바로 배리가 되쏘았다. "그는 단순한 성차별주의자가 아니에요 거짓말 잘하는데다가 아주 비열한 성차별주의자죠" 순간 그레이의 위험스런 푸른 눈이 조금 더 가늘어지면서 하위를 노려보았다. 하위는 의자에서 몸부림을 쳤다. 좋습니다. 인정하죠 어쩌면-어쩌면 그녀에게 약간 농담을 했 겠죠 하지만 진심으로 그런 말들을 했던 건 결코 아닙니다." "LH가 볼 때,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는 여자의 관심을 얻지 못하니까 그런 추잡한 농담을 던져서 만족을 느끼는 남자인 것 같소" 그레이의 말에 배리가 맞장구쳤다. '끼주 정확한 표현이군요" 그러자 하위는 광신도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래1,맞습니다. 난 그런 놈이죠 배리가 무슨 말은 하든 다 맞습니다. 난 죄가 많은 놈입니다." U그렇다면 당신은 배리의 성적 충동, 애정 생활, 그녀의 몸매, 그리 고 은밀한 부분에 대해 비열한 농담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는 거요? "때때로_9_"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가슴을 쳐다보며 응 큼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여성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저질렀겠군." -게, 그런 적이 있죠 정말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행동들 에 대해 뼛골에 아로새길 만큼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레이가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고말고요 아무렴요 선생. 내가 진정으로 후회하지 않으면 서 그런 거짓말을 한다면 날벼락을 맞을 것입니다." 그레이는 권총으로 의자를 '톡톡' 치면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문 을 열었다. U하위, 이후로 당신이 또다시 그녀를 모욕하거나 학대했다는 얘길 들으면 난 참지 못할 거요 그러니 차라리 날 만나기 전에 날벼락을 맞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좋을 거요" "아-알겠습니다." "내일은 뭘 할 거요? "원하시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릴 위해 그 일이 성공하길 빌겠소" 하위는 아직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긴장이 풀린 듯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그래도 날 죽이는 건 싫으시죠? "아니, 그런 건 아니요 당신을 지금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당신의 두 뇌에 바람 구멍을 내기 위해 값비싼 탄환을 낭비하는 게 아깝기 때문 0] 9_'~ 그러고서 그레이는 권총을 허리춤에 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 니 눈 깜짝할 사이에 침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배리 역시 한 마디 말 도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하위가 침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쳐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봐요! 내일 몇 시에 어디로 날 찾아온 다는 겁니까? 하지만 침실에선 으스스한 침묵만이 흘러나왔다. 하위는 용기를 내 어 침실로 들어갔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불청객들이 감쪽같 이 증발해 버렸다. 바지가 오줌으로 젖어 있지만 않았다면. 그들의 방 문을 끔찍한 백일몽 탓으로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위가 불쌍해요" "그러지 마요 그를 구더기에 비교했을 때, 당신은 이미 온 세상의 모든 구더기를 모독한 셈이요" 두 사람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실 창문과 비상구로 하위의 아파트를 빠져나와 데일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배리 는 그레이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훔친 자동차의 앞 유리 창 밖을 서글픈 눈길로 내다보았다. "그레이, 당신은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이에요 당신 때문에 그가 완 전히 공포에 질려버렸잖아요" "공포는 훌륭한 자극제요" "그래도 난 그게 과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지 의심스럽군요" '래일 밤이면 공포의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요" "그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썼어요" 그러고는 하위가 준 쪽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키득거렸다. U아, 옛 친구 샤를린! 그녀는 내가 WWE에 근무하지 않는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나 봐요 지금까지 얘기한 적은 없지만, 참 끈질기게 내게 전화를 건 여자였어오." 느닷없이 배리가 그레이에게 보도에 차를 바싹 붙여 약국 앞에 세 워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녀의 요구대로 차를 세우고 함께 차에서 내렸다. "약국 문은 닫혀 있소" 약국에 가려는 게 아니에-9- 공중 전화를 걸려는 거라구-Q-" 그레이는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우리가 여유잡고 빈들거릴 동네가 아니-p_ 가게 안에 보안등이 켜져 있구 당신이 바지 속에 휴대용 대포를 넣고 다니니까 걱정 없어요" 그가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L그레이, 헛다리 짚는 얘긴 이제 그만 하고 잔돈이나 빌려줘요" 하위가 적어준 전화번호에는 낮선 지역 번호가 들어 있었다. 그녀 는 전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카드 대신 동전을 사용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신호가 떨어지고 여러 차례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다 그 녀가 막 포기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응답했다. '거1!" "여보세요? 그녀는 재빨리 그레이에게 전화가 걸렸다는 뜻의 손짓을 보냈다. "누가 이 번호를 알려줬소? -저, 샤를린 워터스 씬데요 그녀와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상대는 대답하기보다는 담이 걸린 듯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지터스 씨가 그곳에 살지 않습니까? "물론 이곳에 살고 있소 하지만 감금된 이후에는 이 전화를 사용할 수 없소" "감금이라노? 그 말 한 마디에, 배리는 자신과 똑같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그 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겅화히 거기가 어디죠? "미시시피 펄에 있는 센트럴 교도소요" "그럼 워터스 씬 복역수인가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소 댁은 어떻게 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건 거요? "실례지만, 지금 전화를 받고 분은 누구시죠? 그 남자는 그곳의 교도관으로 우연히 공중전화 박스 옆을 지나가 다가 전화벨이 울리기에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배리는 내친김에 교도소 소장파 통화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금 이 한밤중에 말이오? 당신은 변호사나 뭐 그런 사람이오? 그녀는 신분을 교묘하게 에둘러서 밝혔다. 그리고 교도소 소장과 의 통화가 매우 중대한 일임을 설명하면서, 결코 내일 아침까지 기다 릴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교도관이 투덜거리면서 대꾸했다. "좋소 지금 그곳 전화번호를 알려주시요 어쨌든 소장님께 말씀은 드려보겠소" 배리는 교도소 소장의 직통 번호를 알고 싶었지만, 이 정도 성과에 일단 만족하기로 하고 교도관에게 공중전화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 녀가 전화를 끊자, 그레이가 미시시피의 교도소 죄수와는 어떻게 알 게 된 거냐고 물었다. -가 제작한 유아 돌연사 증후군 연속 보도물이 인공위성을 탔죠 덕분에 이 나라의 모든 TV방송국에 방영되었죠 그중 한 방송국이 교도소 안에까지 시청자들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죄수들 은 종종 유명인사에게 병적인 집착을 보이곤 하죠 내가 유명인사라 고 말하기는 좀 뭣 하지만 말예_9" "오늘 밤 그녀와 통화하는 게 '매우 중대한' 이유가 대체 뭐요?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여태까지 샤를린이란 여잔 끈질 기게 날 멍청이라고 몰아붙였거든요 난 그녀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줬는지 궁금할 따름이에요" 그러자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래요? '勺냥 생각하는 것뿐이오 데이빗과 바네사는 모두 미시시피 출신 이잖소?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순간 전화벨이 울리자 배리는 첫 번째 신호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중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져보세요 전 배리 트래비습니다." "교도소 소장인 푸트 그래이엄이요" "전화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장님." "아니, 괜찮습니다. 아가치, 뭘 도와드릴까요? 그녀는 워싱턴의 방송 기자로 소개하고서. 샤를린 워터스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녀가 몹시 귀찮게 굴었군요? L1아니, 그렇진 않았습니다. 전 그저 워터스 씨가 왜 내게 전화를 했 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기친 샤를린이 뭔들 못하겠습니까? 배리가 그레이를 올려다보니, 그는 그녀의 표정을 열심히 살퍼느라 바싹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면서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그레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말을 되받았다. '기친 샤를린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벌써 77세가 넘은 할머닌데도 여전히 기가 펄펄하게 살아 있죠." -긴세라구요? 세상에! 어떻게 그렇듯 나이가 들었는데도 교도소에 남아 있는 거죠? L(그녀는 무기수입니다. 내가 18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미 이 곳에 갇혀 지내더군요 이 교도소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낸 복역수로 알고 있습니다. 샤를린이 언제부터 이곳에 갇혀 있게 됐는지는 아무 도 모릅니다. 그녀는 말하자면-뭐라더라? 아, 행운을 가져다주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곳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지도잡니다. 모든 죄수들이 그녀를 좋아하죠 굉장히 괴짜이긴 해도 말입니다. 그녀는 아가씨가 뭘 물어보든 스스럼얼이 자신의 의견을 들려줄 겁니다." 그렇다면 소장님은 그녀가 텔레비전에서 내 보도 기획 프로를 보 고 전화를 건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시겠군요? -그럼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P. 그런데 대체 무슨 프로였소? "유아 돌연사 증후군이죠." "흐음. 내 생각에, 아가비는 그녀가 가장 관심 있는 주제를 다뤘던 것 같소 정부의 부패, 경찰의 잔인성, 합법화된 마약, 뭐 그런 문제들 에 대해 떠들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녀의 죄목은 뭐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주점을 털었소 남편이 50달러도 안 되는 돈 때문에 주점의 열여섯 살 난 종업원과 세 명의 고객 머리에 총알 구멍 을 냈지. 주정부에선 판결 후 얼마 있지 않아 그를 사형시켰지만, 샤를 린의 경우는 좀 사정이 애매했소 그녀는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거 니와 또 남편 말을 따르지 않았다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필요 조차 없었을 거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오" "어쨌든 그 부분까지는 유아 돌연사 증후군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 군_a,그렇죠? "그건 그렇소" "아,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드 린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하겠습니다. 푸트 씨." '전만에. 그리고 내 이름은 그래이엄, 푸트 그래이엄이오 도움을 주게 되어 오히려 기쁘군요" 배리는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그레이가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아참, 그래이엄 소장님,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요 혹시 샤를 린 할머니가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나 메리트 대통령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 아니겠죠? "대통령? 아, 왜 진작에 그걸 물어보지 않았소? 순간 그녀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전화 수화기 속 으로 뭉쳐지는 듯 아찔했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가락이 어느새 하 얗게 바뀌었다. 그레이는 분위기가 심상찮게 바뀌는 것을 눈치채고 얼굴을 들이대 면서 물었다. "그가 방금 뭐라 했소? 배리는 그레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곧이어 소장의 말이 이어졌다, "샤를린이 그 상원의원이나 메리트 대통령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 다는 건 사실이라고 봐야 할 거요" 배리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저떻게 그런 일이? '쌍황이야 여러 가지가 있-죠 알다시피 샤를린은 발이 넓습니다." "아까는 그녀가 종신형을 살고 있다고 하셨잖나요? "그건 사실이요 하지만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투옥되기 전에 참으 로 다채롭고 화려한 인생을 살았더군요 처음에 로버트 레드포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애인으로 시작해서 리차드 닉슨 전 대통령과도 즐 거운 한때를 보냈다고 합디다. 또한 그 시절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 생아를 갖기도 하고 마릴린 몬로와 조 디마지오가 결혼했을 때는 몬 로와 함께 2대 1로 디마지오와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그 뿐이 아니요 프로 야구 선수인 디마지오는 그녀에게 영감을 얻어 '미 스터 커피'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배리는 그 말을 듣고 전화 박스의 벽에 등을 털썩 기댔다. "맙소사,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그녀는 진짜 미치광이에요" 그러자 푸트는 아까 그 교도관보다 훨씬 더 듣기 좋은 소리로 껄껄 거렸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요 아, 어쨌든 웃어서 죄송하군요, 트래비 스 양. 정말 이 부분이 당신에게 중요한 일입니까? 래1,그렇습니다." "끔찍하군요 내가 볼 때 아가씬 시간 낭비를 한 것 같은데.- 그녀는 분통이 터지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상냥하게 되받았다, '건혀 그렇진 않죠 푸트란 이름을 가진 분은 생전 처음 만나뵙게 된걸요? 전화를 끝내고 그레이와 함께 다시 자동차 안에 들어가자 마자 샤 를린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갈가리 찢어 바닥에 버렸다. '지친 여자의 전화에 응답하다니! 이건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 에 빠져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예요. 내가 이렇게 궁색한 상 황이란 걸 하위나 젠킨스가 안다면, 난 당장 죽어버릴 거예요1~ "상황은 얼마든지 바펄 수 있소" "날 옹호해줄 필은 없어요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던 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충동이었어요 지금 그 충동을 실천에 옮긴 게 창 피해서 미치겠다구요! 문제는, 지금의 나로선 더 이상 뽀족한 수가 없 다는 사실이에요 하위가 그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다음엔 어떻 게 하죠? "당신의 정보원들은 어떻소? "요사이 내 삐삐가 울리는 걸 들은 적 있어요? "건전지가 다 된 거 아니오? 그녀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레이, 내 삐~111는 나와 마찬가지로 전혀 고장나지 않았어요 언론 계에 관한 한 난 워싱턴에서 패배하고 만 거라구요" "그래도 당신은 아직 말을 잘하잖소? 그가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할수록 그녀는 더욱 반발했다. "아무도, 심지어 내 가장 은밀한 정보원조차 나와 얘기하는 걸 꺼려 해요 이 도시, 아니 이 나라 전체의 보도국에선 날 화장실 청소부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구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우리가 데일리의 집을 떠나기 전에 내가 한 말의 90퍼센트 는 진심이었어요 아, 내 인생을 되돌리고 싶어요 크롱카이트도 그립 고, 내 집도 그리워요 그곳은 궁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집이었죠 내 일이 그리워요 보도국에서의 촉박한 마감시간, 사건 현장을 취재 할 때의 그 박진긴 그리고 괜찮은 보도물을 만들었을 때의 만족감들 이 모두 그립단 말예요 운명은 그것들을 내게서 앗아갔죠 이쩨는 하 위조차 그립더군요 오늘 밤 그를 보니 왠지 기쁘고 반갑더라구요" 그레이는 그녀를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심한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거요" "당신은 조금이라도 그런 면이 없나요? 당신은 목장, 말, 그 소중한 고독이 그립지 않나요? 때때로 당신은 내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더 좋 았을 거란 생각을 해보지 않나요? "하지만 당신은 날 찾아왔소 그리고 지금 그게 없었던 일이 되길 바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과거에 난 은퇴해서 살고 있으면 서도 언젠가는 활동을 재개하리란 걸 알고 있었소 잠재의식적으로 그 활동이 어떤 형식으로 시작될지 궁금하기까지 했지. 그런데 그 활 동의 기폭제가 바로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죽음일 줄이야! 일이 그 렇게 벌어지리란 걸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 었던 일이요 또한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일들을 그 누가 알겠소? "맙소사, 당신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마음의 평정을 잃은 적이 없었 나요? 당신의 그 염병할 갑옷 속에는 인간의 감정이라곤 단 한 방울도 스며들 수 없는 건가요? 당신은 왜 항상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느끼지 못하죠? 그녀는 목이 메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눈에 눈물이 핑 돌고 있다는 걸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미치광이의 전화에 응답한 자신이 더없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바네사를 에워싼 비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깊은 좌절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이제껏 파 악한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면, 바네사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배 리는 대통령이 영부인을 없애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확신했다. 날이 갈수록 배리는 그의 마각을 밝히는 일에서 실 패했고, 그는 점점 더 승리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편으론 데일리에 대해서도 걱정이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안색이나 목소리가 점점 더 나빠져 심상치가 않았다. 데일리는 겉으 론 태연하게 굴었지만, 그녀는 그의 상태가 악화돼가고 있음을 예리 하게 느꼈다. 이미 의사는 더 이상 해줄 일이 없다고 선언한 터였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혈신적이고 앞선 의술도 그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는, 오히려 그나마 남아 있는 생명을 갉아먹을 정도로 그의 병은 악화 돼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걱정거리 중에서도 오늘 밤 눈에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주범은 바로 옆에 있는 남자였다. 그레이 본듀란트는 영원한 수수께 끼였다. 두 사람은 이제 친밀한 사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낯선 타인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녀는 울고 싶었다. 그녀는 그를 애무했지만 그의 내면과 접촉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까지의 조심스런 태도를 떨쳐내며 과감하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모든 사람, 모든 사물에 대해 무관심하죠? 대체 왜 아무 감정도 없는 녀석이 되었냐구요? 잠시 적대적인 침묵이 자동차 안에 감돌았다. '래 부모는 같은 날 죽었소 한날 한시에 비명 횡사하신 거요 그때 난 철부지 아이였지 자연히 그 일로 엄청난 상처를 받았소 하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고 내 조부모님들을 의지하면서 살게 됐소 그러다 그분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차례차례 저 세상으로 가버리셨지. 그 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내 유일한 혈육인 사촌 누이와 친하게 지냈지 만 매형은 내게 말조차 걸려고 하지 않았소 누이는 그와 자식들과 함 께 살아야 했기에 결국 날 자신들의 인생에서 몰아내고 말았소 그러고 나서 난 진심으로 믿는 두 남자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소 그 들의 생각을 그들 자신들보다도 먼저 알아차릴 정도였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소 우린 동성애자들만큼이나 서로 가깝게 지냈지. 그런데 그들은 날 배신했고 날 두 번씩이나 죽이려 했소" 그는 잠시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이내 덧붙였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다시 맺을 아무런 필요도 못 느끼게 된 거요" 지금까지 들은 얘기 중에서 그가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밝힌 얘기 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그의 독백 속에는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는 생각이 스쳤다. "바네사와 그 아기에 관한 부분은 빼놓는군요 당신은 자신이 목숨 을 걸고 사랑했던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는 얘기를 빼놓았단 말예_Q-" 그는 찬바람이 쌩쌩 도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소 그 부분은 빼놓았소" "의원님? 클리트가 책상 위의 스피커폰에 대고 응답했다. "무슨 일인가, 캐롤? "그레이 본듀란트 씨가 의원님과 얘기하고 싶어하십니다" 클리트는 잠시 생각에 잠겨 턱을 쓰다듬었다. "없다고 해주게." '꺼제부터 벌써 세 번째 전화를 거셨습니다." "그가 내게 전화를 몇 번 했는지 상관없네. 어쨌든 난 그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알랜 박산 어찌 됐나? '계속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분과 연락이 안 된다고 합 니다." "대체 무슨 뜻이지? '깩악관 측이 그 이상의 언급은 회피하고 있습니다." 조지 알랜은 얼마 전 그에게 전화를 걸어, 바네사가 치료를 잘 받으 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술만 심하게 마신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날 그의 전화의 요지는, 앞으로 그녀의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개 인 병원에 입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 전까지는 방문객을 받지 않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사실, 방문객들 이 환자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병원 방침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못박았다. 문제의 병원이 있는 곳은 빌어먹을 하이포인트가 틀림없었다. 불쌍 한 바네사는 아비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곳으로 이송되어 아직도 연락이 안 되었다. 알랜 박사는 그리 오랫동안 그녀를 격리시 키지는 않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그후 클리트는 상원 재정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예산안 조정 작업에 매달리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의무적으로 조정 회의에 참석했지 만 내심 딸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나라의 재정 문제에 전념할 수가 없었 다. 주치의는 그의 전화를 계속 피했고. 데이빗 역시 개인적으로 얘기 할 기회를 주기는커녕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 구린내가 나고 있었고, 그 구린내는 클리트에게 엄청난 공포를 몰고 왔다. "그들은 전화를 건 사람이 나란 걸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의원님." "그렇다면 내가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고 싶다고 말해주게나." 비서가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클리트는 책상 앞에서 일어나 커다란 창문가로 다가갔다. 30년이 넘게 똑같은 풍경을 보아 왔지만 한 번도 그 풍경에 질린 적이 없었다. 워싱턴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시시각각 바뀌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변화무창했으며 계절은 돌고 돌았다. 하지만 미합중국 정부의 탄탄한 건물은 예나 지 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속에서 치미는 격한 감정은 결코 애국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 이상의 감정이 었다. 그 감정은 이 건물 안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권력, 즉 성적인 흥분과 똑같은 감동을 선사하는 권력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권력 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미약이란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데 권력에 비길 만한 것은 없었다. 이 세상 어떤 것 도 권력만큼 강한 쾌감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그 누구든 엄청난 부에 맛을 들인 남자라면 더 나아가 권력을 얻으 려고 발버등을 친다. 그리고 일단 권력을 손에 넣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클리트보다 젊고 유능한 사내가 그 권력을 가졌으니, 워싱턴에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사령봉을 바꿀 시기가 됐다고 판단했다. 물론 새로 사령봉을 건네받을 인물은 데이텟 메리트가 아니었다. 순간 비서가 다시 벨을 울렸다. '기원님, 죄송합니다. 오늘 대통령의 일정은 꽉 찼교 오늘 밤 비행 기로 애틀란타에 가서 내일 오후까진 돌아오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클리트는 잠시 머리를 짜낸 후 입을 열었다. "고맙네, 캐롤. 그 돌팔이 의사 알랜과 계속 연락을 시도해 주게나. 그리고 그레이 본듀란트 친구는 잊어버리게." "알겠습니다." 플리트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닳아빠진 가죽 의자에 몸을 파묻고 앞뒤로 혼들면서 다음 행동을 생각하기 시 작했다. 데이빗은 예상과는 달리 민첩하게 움직였다. 클리트는 데이빗 이 사람들의 관심이 식으면 다시금 영아 살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를 제거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랬다. 클리트는 처음부터 그레이 본듀란트와 배리 트래비스가 커 피숍에서 했던 얘기를 다 믿었다. 트래비스의 진실을 믿었지만, 그녀 가 어디 그에게 달리 행동할 기회를 주었던가? 일부러 병원에서 그녀 의 실수에 대해 야단법석을 퍼웠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부터가 바보 같은 꼴이 되고 말았으리라, 그녀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 분 노는 간사하고 배반을 일삼는 사위를 향한 것이었다. 배리 트래비스는 가까이 지내선 안 될 별종이었지만, 그레이 본듀 란트는 그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사실 배리 트래비스 혼자 나섰 다면 그 얘기의 신빙성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이 본듀 란트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그 해병대 출신의 전 직 대통령 보좌관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내는 지나치게 과 묵하고 정직한 성격이라, 클리트는 체질적으로 솔직하고 단도직입적 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가 거짓말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날도 그 레이는 바네사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교묘히 대답을 회피했 다. 어떻게 보면 대답의 생략을 거짓말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클리트는, 그 모습을 그레이 자신보다는 바네사를 추잡한 소문에서 지키려는 용감한 행동으로 보았다. 그리고 데이빗의 성격은 물론이요, 베키 스터기스란 여자와 관련된 사건을 알고 있었기에, 데이빗이 자신의 애가 아닌 아기를 교살했으 리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클리트는 그 사실을 좀더 일찍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원망 스러웠다. 데이뎃 녀석은 오랫동안 장인과 아내를 속여왔다. 마치 아 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해서 바네사는 아기론 갖지 못하는 게 자 신의 탓으로 알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반면에 데이빗은 그와 관련한 그 어떤 의학적인 충고를 거부해왔다. 클리트는 그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 망할 녀석은 정관절제 수술을 하고 나서 딸애와 잠자 리를 같이하면서도 그 진실을 밝히질 않았다. 더욱이 녀석은 불임에 대한 책임을 바네사에게 뒤집어씌워 무능력감을 심어주었고. 결과적 으로 조울병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물론 클리트의 양심 역시 완전히 개끗한 것은 아니었다. 딸애가 결 혼생활로 받은 상처와 학대에 대해서는 자신도 부분적인 책임을 통감 했다. 그애가 그렇듯 그 오랜 세월 고통받는 동안, 대체 난 어디서 윌 하고 있었던가? 어째서 그토록 명백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거지? 해답은 간단했다. 데이빗을 백악관에 입성시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그 녀석이 바네사의 사랑을 잔인하게 짓밟았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 지 못한 것이다. 바네사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며 마찰을 빛지 않고, 기대 이상으 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내는 동안엔 데이빗도 그녀에게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 와중에 바네사는 남편의 오입질을 견뎌내는 아름다운 아내의 역할도 충실하게 해냈다. 하지만 바네사가 다른 남 자의 애를갖게 되자데이빗은눈한번 깜박이지 않고잔인하게 그녀 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렇다, 배리 트래비스와 그레이 본듀란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 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클리트가 알지 못한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데이텟 메리트가 사랑하는 딸에게 지옥 같은 인생을 안겨주었고 또한 외손자를 살해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데이빗 메리트는 반드시 파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저녁 뉴스 시간에 데이텟의 죄를 밝 히는 짓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에게 맞선다는 사실을 감추고,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격퇴해야 했다. 그레이 본듀란트 정도라면 함께 손을 잡고 데이빗을 멋지게 무너뜨 릴 수 있는 확실한 동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자, 특히 다른 기자도 아닌 배리 트래비스와 한패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리트는 그들과는 독자적으로 움직여야 하며, 데이빗이 이미 행동을 개시했기에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먼저 바네사를 찾아야 했고, 둘째로 그녀를 데이텟에게서 구 해야 했다. 그리고 셋째로 그 망할 녀석을 없애야 했다. 거기엔 숱한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클리트 자신 의 모순된 감정이었다. 사위의 배신으로 가슴에 못이 박히는 듯했지 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무턱대고 따를 수는 없었다. 대단히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데이빗의 가면을 벗기는 동안에도 조사 작없을 철저히 벌여 자신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현 정부를 완전히 깨끗하게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교묘한 작전을 펼쳐야 했다. 지금 그 작전의 수행을 가로막는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시간이었 다. 클리트는 너무 시간이 촉박한 게 아닌지 두려웠다. '저이쿠, 하위 씨 아니오? 하위는 하마터면 짬짤한 맥주가 목에 걸린 뻔했다. 허등지등 손등 으로 입술을 닦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야구 모자를 쓴 콧수염을 기른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시오! 그렇잖아도 당신을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체념하던 참 이었소" 그 남자는 슬쩍 부자연스런 미소를 흘리면서 대꾸했다. "말도 마시오 그 동안 일 때문에 꼼짝도 못했소- "아, 그렇습니까?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갑소 어떻소 내가 맥주를 한잔 사드릴까? 하위는 친구가 되고 싶은 그 사내의 반응을 보고 반갑기는 했지만, 맥주를 사주겠다는 말은 그냥 형식적으로 해본 소리였다. 오늘 밤에 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한가롭게 친구를 사귀려고 술집에 들른 건 아 니었다. 그저 술만 몇 잔 들이켜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레이 본듀란트 가 언제 또 나타나 영부인의 거처를 알아냈느냐고 다그칠지 몰라, 마 치 교회에 온 음탕한 여자처럼 하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레 이 본듀란트나 배리가 WVUE방송국 스튜디오에라도 나타나면 정말 큰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끝낼 시간인 7시가 되기까지 배리나 그녀의 무시무시 한 공모자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혹시라도 그 두 사람이 자신 에 대해 잊었거나, 그들이 찾으려는 정보를 다른 곳에서 얻었을 거라 고 그럴싸한 생각으로 좀 느긋하게 마음 먹으려 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는 최대한 손을 써봤지만 백악관에서 아무 정보도 건지지 못했다 는 사실을 과연 그들이 믿어줄지 염려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이 도시 의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메리트 부인이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배리와 그레이 본듀란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위는 병원 이름을 지어 둘러대더라도 그레이 본듀란트에 게 정보를 줘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 전직 해병대 군인은 약속을 철두 철미하게 지키는 인물이었다. 그 정보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레이 본듀란트는 분명 파리 목숨처럼 단숨에 자신을 살해하리라. '勺맙소 그럼 한 잔 마시죠" 하위는 소름 끼치는 상상속에서 급히 빠져나오면서 물었다. "뭐라 했소? 그의 새 친구는 당혹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맥주 말이.- 하위는 '아차' 하면서 얼른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그런지, 그렇지, 아이쿠,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소 내, 곧 돌 아오겠소" 그가 맥주를 갖고 돌아와 보니 그 능청스런 사내는 당구대에 초크 를 먹이고 있었다. "오늘은 조심해야 할 거요. 이래뵈도 그 동안 왜 연습했거든." 그 사내의 미소를 보자 교활한 눈과 작고 뽀족한 이빨을 가진 육식 동물이 떠올랐다. "아, 사실 난 오늘은 시간이 없소" 하지만 그 사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미소 떤 얼굴보다 훨씬 더 부담 스러웠다. 하위는 그 얼굴을 본 순간 재빨리 마음을 바됐다. "좋소 한 게임 정도이" "당연히 그러셔야지! 내 자존심을 구할 기회도 줘야 할 게 아니오? 이윽고 두 사람은 당구를 치면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위는 점수가 영 시원찮았다. 집에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스 러워 도무지 당구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혹시 그레이 본듀란 트가 어딘가에서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길 건너편 편의방 세 탁소 뒤에 숨어 내가 나오길 기다리는 건 아닌가? -그 친구는 어떻게 췄소? '지라고요? '건에 얘기한 그 직장 동료 말이오 가당찮은 여자였던 걸로 기억하 는데. 아무래도 당신은 오늘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 같소 오늘 밤에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면..." 하위는 다급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아니. 미안합니다." 이 바보야! 정신 차리지 못하겠어? 하위는 자신을 꾸짖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지금 멋진 사내가 친구가 돼달라고 애원하고 있잖은 가? 그런데 난 어떻게 하고 있지? 바로 멍청이처럼 굴고 있잖은가? 이 모두 배리의 잘못이다. 항상 그녀는 문제만 일으켰다. 그리고 이 번엔 그녀의 잘못과 그레이 본듀란트의 잘못이 겹친 셈이다. 대관절 무슨 권리로 남의 아파트에 몰래 숨어들어와 날 이 지경으로 몰아넣 는가? 아무 힘도 없는 것들이! 적어도 배리는 그랬다. 그리고 그레이 란 작자는 영부인을 건들인 죄로 워싱턴 밖으로 쫓겨난 몸이 아닌가! 그들이 어떻게 되든 내가 알게 뭔가? 만일 오늘도 날 찾아와 협박한다 면 경찰을 부르고 말리라, 새로운 자신감이 불끈 치솟아, 아래로 축 늘어진 허리띠를 추켜을 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난 그녀를 해고했소" "설마? "그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그녀는 계속 일을 망쳐 왔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소" 하위는 말을 끝내고 유감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확 다물었다. "내가 오죽 했으면 그리 했겠소? 그 뒤로 하위는 최고의 당구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의 친구는 맥주 잔을 들어올려 그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그래도 난 아직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있소" "그래요? 사내는 당구대를 조준하여 공을 쳤다. 공이 '딱' 소리를 내면서 굴 러갔지만 구멍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추천장이라도 써주었단 거요? "아니, 난 그녀의 비밀 조사 확동을 돕고 있소" 하위가 바라던 대로 사내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 얘기에서 풍기 는 은밀한 암시에 귀가 솔깃한 모양이었다. '꺼떤 비밀 조사 활동을 말하는 거요? 하위는 그레이 본듀란트에게 받은 치욕을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리던 차에, 여기서 긴장을 조금만 풀어도 가슴이 다 후련할 것 같았다, 진실 을 약간 과대 포장한다고 어디가 덧나겠는가? 어차피 이 친구는 어디 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지 못하겠지, 게다가 가장 친한 친구들 도 서로 속이는 세상 아닌가? 남자들 세계가 다 그렇고 그런 건데 뭐. "그녀는 이제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예전에 내가 당신에게 말한 그 큰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요 그런데 그녀는 그 과정 중에 벽 에 부딪쳐 내게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요구하더군요" "대체 어떤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그러시오? 하위가 눈을 찡긋거리면서 대꾸했다. '깩악관 내부 사점에 정통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정보들이요" "그래서 그녀에게 그 정보를 알려줬소? "그건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오. 결코 그렇지 않지 난 혼자서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내 은밀한 정보원들을 졸라댄 후에 야 배리에게 던져줄 맛있는 사탕을 간신히 준비해 왔소" "그 여자가 무척 좋아했겠군." '지제 좋아할 거요" "아직 그녀에게 얘길 하지 않았다는 거요? 그 남자가 눈을 반짝거리며 싱글거리자 콧수염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하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때렸다. "아하, 이제 알겠소 당신은 그녀에게 보답을 얻어낼 때까지 정보를 주지 않으려는군. 어떻수 내 말이 맞죠? 하위가 낄낄거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 자신이 원했던 바로 그런 친 구였다. 자신을 결코 무시하지 않구 어엿한 사내이자 똑똑한 사람으 로 믿어주는 친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오늘 밤 늦게 그녀를 만날 예정이요 그리고 그녀는 내게 그 정 보를 얻어내려고 기꺼이 몸을 허락할 거요," 그날 밤 배리는 그레이가 오후에 병원 주차장에서 훔친 '볼보'를 몰 았다. 그리고 하위의 아파트 근처에서 속력을 줄였다. "차를 어디에서 세우:주 그레이? "한 블럭을 더 내려가서 멈추고 날 내려주시요 내가 먼저 을라가 보겠소" "현관문으로 들어갈 건가요? "어젯밤 위협으로 그 친군 겁에 잔뜩 질려 있을 테니, 오늘은 당당 하게 행동해도 안전할 거요" "만일 그가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으면 어쩌죠? "그의 말이 거짓이라면 난 금세 눈치챌 거요 먼저 갈 테니 나중에 오시오." 그러고는 인도 위로 내려 자동차 문을 닫았다. "점잖게 행동하세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위의 용기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새 친구와 헤어져 술집을 나 오자 마자 다시금 불안해졌다. 집으로 차를 모는 동안, 운전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레이 본듀란트는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하면 내 엉덩이를 걷어 찰 거야. 그리고 얘기를 꾸며서 한다 해도, 그는 수시간 내로 그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 다시 돌아와 날 죽이겠지. 어찌됐든 이제 죽은 목숨 이었다. 배리에게 자비를 구걸하지 않는 한. 1녀가 어젯밤 비록 날 모질게 대했지만, 정작 그레이 본듀란트의 총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한숨을 푹 내쉬며 하위는 건물 뒤에 지정된 장소에 차를 세우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지, 그녀는 그레이가 내게 총부리를 겨눌 때 입맛을 잃기 싫다 면서 옆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어."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 떨리는 손길로 현관문의 자물쇠를 열고 문을 활짝 열었다.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바싹 긴장이 되어 잠시 머뭇거렸다. 커다랗게 숨을 내쉬고 집 안에 한 발자국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이 집 안엔 혼자뿐이라고 확신했다. 아침에 나간 그대로, 아무도 이 이파트에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이 방저 방을 왔다갔 다하며 불이란 불은 모두 다 켜서 집 안을 빛으로 가득 차게 했다. 문 득 침실 창가에 있는 화재 대퍼용 사닥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 밤의 불청객들이 그 사다리를 이용하여 빠져나갔다는 생각이 스쳤다. 슬쩍 창밖을 보았다. 그러나 건물 밑의 골목까지 지그재그꼴로 내려 가는 철제 계단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발길을 돌려 부겨으로 들어갔다.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아까 마신 맥주가 요동을 쳐 속이 쓰라렸다. '꺼억' 트림을 신트림을 하면서 속 쓰림을 달래줄 음식을 찾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고 살폈다.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약간의 스파게티를 찾아내며 중얼거렸다. "이게 괜찮겠군."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당당한 사내였다. 그런데도 자신의 집에서 벌벌 떨며 자신의 그림자만 봐도 깜짝 놀라는 처지라니! 하지만 배리 가 영부인에 관한 방정맞은 생각을 품기 시작한 뒤루 인생이 완전히 벼락을 맞은 꼴이 되어버렸다. 직장에선 젠킨스에게 시달림을 받았구 이젠 여가 시간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전직 특공대원의 위협 때문에 머릿속이 엉망인데, 어떻게 한가롭게 친구를 사귀겔는가? 집 안에서 조차 그런 문제에 시달려야 하다니! 생각할수록 배알이 뒤틀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배리가 도착하는 대로 따끔하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창자가 바싹 조이는 듯했다. 심호흡을 커다랗게 하고 용기를 내어 도전적인 태도로 문가로 다가가 서슴없이 현관문을 열었 다. 배리와 그레이 본듀란트에게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 었다. 하지만 손님은 둘이 아닌 한 사람이었다. 그 손님은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안녕하시오, 하위. 들어가도 되겠소? 배리는 볼보에서 빠져나와 자동차를 신중하게 살피면서 문을 잠팠 다. 인도를 활기차게 걸어가면서, 훔친 차를 도난당하지 않으려고 신 경을 곤두세우는 묘한 행동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건물 가까이 다가서서 3字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골목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하 위의 집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아직 일이 벌어지지 않았군, 그레이가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면 반드 시 불을 끌 테니까. 건물 1층 복도로 들어서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에선 골 동품 창고처럼 곰팡내가 물씬 풍겼다. 하위의 아파트 문을 두드리고 응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커녕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무 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았지만 집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이 스르르 열렸다. "하위?1레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꺼져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환하게 -넌져 있던 집 안이 갑자기 칠혹 같은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공포에 찬 비명소리를 내지를 상황이었지만, 너무나 겁에 질려 목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 거실을 가로질러 빠르 게 다가오는지, 어둠 속에서도 발밑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재빨 리 뒤로 돌아서서 문 손잡이를 잡았지만 미처 돌리기 전에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마시요" 그레이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맥이 탁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 을 뻔하다가 그에게 돌아섰다. '개체 무슨 일이죠? "지금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오." "잠간만요" 그녀는 문을 열려는 그의 동작을 막아섰다- "하위는 어디 있죠? 이곳에 있나요? "그렇소 여기 있소" '저디 있죠? 그가 뭐라 하던가요? 하지만 그레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얼굴 위로 그의 더운 숨결이 쏟아졌다. "하위는 어디 있죠? "쉬 잇." 순간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공포에 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조용히 하시요" 하지만 그녀는 그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거실로 걸어갔다. "배리, 안 돼? 그가 어둠 속에서 그녀를 붙잡으려고 손을 휘둘렀지만 공기만 손에 잡혔다. 부엌에서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식탁 모서리에 정강이를 세 차게 부딪쳤다. 형광등 스위치를 발견하고 여러 차례 눌러댔지만 불 은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 퓨즈 함 차단기에 장난을 친 것이 틀림없 -다. 그레이가 드디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개리, 갑시다. 어서? "날 놔요? 그녀는 앙칼지게 소리치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몸 싸움에서 그를 이긴다는 것은, 특히나 지금 같은 어둠 속에서는 가당 치도 않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나마 이 부엌 구조에 대해 아는 게 다행이었다. 그레이와 몸싸움을 벌이면서도 창 가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이윽고 머릿속에 그리던 지점에 다가서자 마자 블라인드의 아랫부분을 붙잡고 힘차게 잡아당겼다. 순간 구식 블라인드가 번개같이 위로 말려올라가면서 수백만 마리의 박쥐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가로등 불빛이 부엌으 로 쏟아져 들어왔다, "젠장? 그레이가 날카롭게 으르렁거렸다. 배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초인 적인 힘으로 그를 밀치면서 소리쳤다. "하위? 그리고 부여과 침실 사이의 복도에 너부러진 하위를 보았다. 하위 는 뭐에 그리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 고 있었다. 이쪽 귀밑에서 저쪽 귀밑까지 잘린 목에서 검붉은 피가 콸 콸 쏟아져나왔다.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그레이가 잽싸게 손바닥으로 그 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대고 한 단어를 속삭였다. "스펜서," "스펜서 마틴? 데일리는 혼란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자네가 그를 죽였다고 말했잖나?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를 죽였다고 말한 사람은 배 리였죠" 그러면서 그레이는 배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두 손에 뜨거운 찻잔을 움켜쥐고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무 심코 몸을 앞뒤로 흔들거렸다. 데일리의 집 역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스펜서의 개들의 눈을 피해 집 안으로 무사히 들어왔다. 아 니, 그랬으면 하는 게 그레이의 심정이었다. 스펜서란 인물이 등장하 면서 위험이 점점 더 커져갔다. 어둠 속에서 그레이가 뚜벅 내뱉었다. "그저 그를 무력화시켰을 뿐입니다. 그때 죽였어야 하는 건데? 그러고 나서 스펜서에게 총상을 입힌 뒤 헛간 지하에 있는 채소 저 장고에 가둬둔 과정을 설명했다. "물론 그를 죽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곳에 가둬두려고 했죠 이곳 워싱턴에 와서 클리트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일 내로 아니면 길어봤 자 1주일 내로 바네사를 데이빗에게서 구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 던 겁니다." 그러다가 슬쩍 배리를 보니 그녀는 아직도 허공을 멍하니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일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떻 게 빠져나왔는지는 몰라도 탈출했으리라는 걸 진작에 예상하고 있어 야 하는 건데! 아마 손으로 땅을 파서 그곳을 빠져나왔을 겁니다." "그래서 자넨 프리프를 죽인 사람이 스펜서라고 확신하는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난 그 녀석의 스타일을 알죠" 그러자 배리가 5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만일 하위가 스펜서 마틴을 만난 적이 있다면 분명 떠벌리고 다녔 을 거예.Q_" "하위는 오늘 밤 스펜서를 처음 만나자 마자 몇 초 만에 목이 잘린 것일 수도 있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찰은 문이 강제로 열린 흔적이 없다고 했어요 하위는 살인자를 알아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게 한 거죠" 데일리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배리,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레이가 그녀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하위가 날 집 안에 들어오게 했다가 내게 살해당한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배리는 그레이와 잠시 눈싸움을 벌이다가 먼저 고개를 돌렸 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녀를 쉽사리 놔주질 않았다. "그게 바로 당신 생각이 아니었소? "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어요" 그러더니 찻잔을 옆에 내려놓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격렬하 게 비비며 울부짖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다구요! 그저 하위가 끔찍하게 죽은 모습밖에는 생각나지 않아요 물론 그를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난 그에게 그런 내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아요 그래요, 그는 개인 적으로 보면 혐오스러웠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었죠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죄없는 사람이었다구요! 그런 그를 이런 위험한 일 에 끌어들인 건 바로 나예요 결국 내가 그를 죽인 거죠 그의 죽음은 평생 내 양심의 굴레로 남을 거라구요." 그녀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잠시 아무도 입 을 열지 않다가 데일리가 큼큼거리며 물었다. '경찰이 뭐라던가? 사실 그레이는 스펜서가 사건 현장에 되돌아와 자신들마저 옭아맬 까 두려워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배리는 인간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911로 전화를 걸었다. 결국 그레이 는 그녀를 졸도시켜 아파트 밖으로 들쳐업고 나오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 그곳에서 수사 요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수사관들에게, 그날 밤 하위와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진 술했다. 그리고 그의 아파트에 도착해 보니 집 안의 불이 꺼져 있었고 문도 열려 있었으며 하위가 죽어 있더라, 그들이 손댄 건 문 손잡이와 두 개의 형광등 스위치, 그리고 창문의 블라인드 아래 손잡이뿐이었 다는 식으로 털어놓았다. 물론 그레이는 첫 번째 경찰차가 도착하기 전에 퓨즈 함에서 자신의 지문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배리는 그가 왜 집 안의 불을 꺼놓고 아파트에서 도망치려고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사관들은 하위가 아파트 문 밖으로 나서다가 살인자에 의해 다 시 집 안으로 떠밀린 거라고 생각하더군요 그의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어, 범행 동기를 강도질로 보고 있죠 경찰에선 강도 한 명의 짓이거 나, 아니면 조직 범죄단의 짓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네에게 혐의를 두진 않던가? '지로 찍힌 발자국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죠 매일같 이 전국적으로 수천 켤레씩 팔리는 남자 운동화 자국이더군요 살인 자도 그 실수를 의식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발자국이 그거 하 나밖에 없었거든요 수사관들은 살해범이 아파트를 빠져나가면서 핏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신발을 벗었다고 생각하더군요 내 생각에 스펜서는 일부런 그런 자국을 남겼을 겁니다. 각본대로 경찰을 끌어들이려고 말입니다. 즉, 누군가 하위를 우연히 범행 대상 으로 찍구 그의 뒤를 따라와 단돈 몇 달러 때문에 그를 죽인 거라고 말입니다. 경찰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한 뒤에 수사를 종결할 겁니다. 그러면 이번 사건도 수많은 미해결 살인 사건 으로 남겠죠" 그때 배리가 그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죠? 배리가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자 그레이도 적잖이 울화 가 치미는 듯했다. 그러고는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개체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요? 죄라도 고백하라? "당신이 왜 나보다 먼저 하위 아파트로 들어가려고 했는지 설명을 듣고 싶을 똴이에요" "난 그에게 충격 효과를 주고 싶었을 뿐이요" "그 정도론 설명이 안 돼요," "그건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요" "그럼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왜 불을 끈 거죠? "당신이 그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소" "하지만 난 결국 그의 최후를 보고 말았죠 그런데 왜 날 밖으로 끌 고 나가려 했죠? "스펜서가 근처에 숨어 있었다면 우리 역시 안전할 수 없었기 때문 - "스펜서, 스펜서, 죽음에서 기적적으로 부활하다니." 그녀는 두 팔을 높이 쳐들며 소리쳤다. "주를 찬양하리로다? 그레이가 이를 악물면서 되받았다. '재가 '그렇소, 다 털어놓겠소 내가 그의 목을 잘査丈 라고 해야 당신 속이 시원하겠소? "당신은 정말 구역질나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불만스러운 거요? 기뻐서 펄쩍 뛸 줄 알았는데. 난 당신이 911과 전화를 끝내고 나서 곧바로 방송국에 촬영 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게 참으로 놀라웠소 소름끼치는 살인 사 건 현장을 첫 번째로 취재한 기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오 그게 바로 당신의 장기이자 취미잖소? 흥분을 느끼는 일이 아니었냔 말이 오? 게다가 당신은 쓸 만한 기삿거리를 얻으려고 아무 남자와 잠자리 를 같이 하잖소? 데일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하면 충분하네, 그레이." 하지만 그레이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배 리에게만 쏟아졌다. "당신에게나 그 누구에게든 내 자신을 변호하고 싶지 않소 윌 믿든 당신 맘대로 하시요 당신이 뭘 믿든지 아무 관심도 없으니까." 그러고서 그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몇 발자국 걸어가자, 그녀는 날렵하게 그를 쫓아갔다. 마치 처음 만나 날 아침 그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스펜서가 살아 있다 치더라도, 왜 하위를 죽인 거죠? "그걸 낸들 어떻게 알겠소? 그는 그녀의 손을 단호하게 뿌리치며 덧붙였다. '거쩌면 하위가 우리에게 정보를 누설할 거란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걸 그가 어떻게 알았죠? 그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지제부터 당신은,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작자들이 그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란 사실을 똑똑히 알아두시요 결코 그 런 작자들이 아니요 그들은 행동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소 도덕도 정치도. 심지어 감정도 그들을 방해할 순 없지. 그들은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게 있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해내는 사람들이요 그들에겐 양심이란 건 눈곱만치도 없소 이 사실을 충분히 알 때까지 당신은 그들에게 계속 충격을 받을 거요 왠지 아오? 당신은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그 말을 끝내고 그는 고개를 돌려 데일리를 쳐다보았다. "웬만하면 날 혼자 있게 해주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나가든지요" 데일리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들 두 사람은 항상 나쁜 소식이 있을 때마다 한밤중에 날 잠 자리에서 끌어내더군." 그러고는 발을 질질 끌면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레이가 배리에게 매섭고 도전적인 눈길을 던지자 그녀는 아무 말 도 없이 돌아서서 데일리를 따라 거실을 빠져나갔다. 그레이는 욕지기를 터뜨리며 부츠와 셔츠를 벗고 소파에 누웠다. 소파가 그의 키보다 짧아 발을 팔걸이 위에 걸쳤다. 그는 어느 곳에서 나 어떤 상황에서든 잠을 잘 수 있었다. 언제든지 마음만 내키면 잠을 잘 수 있도록 훈련을 해왔다. 자리에 누우면 곧바로 깊은 잠을 자면서 도 잠재의식의 일부는 항상 깨어 있어 위험에 대처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그런 숙련된 습성도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나 화 가 치밀어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분노, 그리고-. 고통? 과연 그런 상태인가? "제기 랄? 그는 팔을 올려 이마에 갖다댔다. 고통? 왜? 그녀의 어리석은 비난 에 때문에? 살인자라고 몰아붙이는 그녀의 의심 때문에? 내가 왜 그 런 우둔하고 덜 떨어진 감정을 달래걸야 하는가? -윌 믿든 당신 맘대로 하시오 당신이 윌 믿든 아무 관심도 없으 니까! 하지만 그 말은 공허한 엄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주길 바라는지 알 순 없었지만, 그래도 냉혈한 살인마 로 취급받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녀의 평가에 신경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녀는 똑똑한 여자였다. 자신의 문제에 관한 한 너무 충동적이었 다. 그리고 톡 쏘는 듯하고 빈정거리는 식의 유머감각으로 두려움파 실망을 교묘하게 감추는 데 이력이 나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겁쟁이 는 아니었다. 그녀의 용기는 오히려 감탄할 정도였고 돋보이는 장점 이었다. 또한 정신력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객관적인 언론인이 되 기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창의력이 풍부했지만, 지성을 높이는 데 톡 톡히 한몫을 해냈다. 또한 그녀는 여태껏 그의 거부 때문에 고통을 받 아왔다. 그는 내심 그녀의 고통을 동정했으며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었다. 사실 대단히 고결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정보를 캐내려고 몸 을 팔았다고 비난하다니, 얼마나 비열한 수작인가? 두 사람이 처음 만 난 그날 아침 그녀에게 퍼부었던 말은 진심이 아니었교 지금도 그 생 각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심지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 새벽 그의 집에서 벌어진 쾌락의 향연은 그녀 역시 그레이만 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는 아직도 그날의 사건을 명 확하게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저 충동적이며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 은, 설명할 수 없는 욕정 탓으로 돌려버리고 그 일을 잊으려고 했다. 그런 격렬한 성적인 만남을 지나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짓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인간의 동물적인 모습으로 치부 하고 잊는 게 최고였다. 아니, 정말 그러려고 안간힘을 썼다. 겉으로는 그녀를 헐뜯는 데 열을 올렸지만. 그날 아침 몸을 섞은 그 녀는 결코 요부가아니라는걸 그짧은시간에 알수 있었다. 당시 그 녀의 반응은 너무나 솔직했고 순수했다. 그녀의 순수한 반응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 에게 화가 나 있는 오늘 밤에는 그랬다. 하지만 마음 은밀한 구석에 숨은 기억들은 틈만 나면 밖으로 슬금슬금 기어나와 지분거렸다. 평 소 같았으멸 정리가 잘 되어 있을 머릿속이 온갖 잡다한 생각들로 난 장판이었다. 작지만 통통한 가슴, 언제나 탱탱하게 솟아오르는 젖봉오 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기만 해 도 몸이 후끈거리며 달아오르지 않았던가? K1~ 0]?)~ 그는 팔을 내리고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다가오 는 소리를 듣지 못해, 소파에서 불과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자고 있었어요? 그는 눈 하나 깔짝이지 않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소" "우리가 이제 윌 해야 할지 생각났어요" "그게 뭐요? 그는 뚝뚝하게 물으면서도, 속으로는 '우리의 두 눈이 멀 정도로 격 정적인 섹스'란 말이 떨어지길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 은 전혀 거리가 멀었다. 배리는 그곳에 대해 훤했다. '엠버시 로우' 근교의 나무들이 무성한 그 거리는 워낙 저명 인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까닭에 워싱턴에선 좀 외지고 으슥했다, 그 지역은 인파가 붐비는 매사츄세츠 도로와 무척 가까웠지만, 일부러 그곳을 찾지 않는 한 쉽게 지나치는 곳에 자리잡 고 있었다. 게다가 그 거리를 표시한 지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곳의 집들은 한결같이 도로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섰구 높다 란 울타리나 벽돌 담으로 가려져 있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전기문을 설치한 집들도 많았다. 그레이가 매물로 나온 집 앞의 차도에 자동차 를 세우는 동안 배리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우린 총에 맞을지도 몰라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그녀가 자기 집 뒤뜰에서 얼정거리는 우리 모습을 보면 어떻게 나 올까요? '씰제로 그렇게 해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이요" 이곳에 오자는 건 배리의 착상이었다. 그리고 지난밤에는 왜 괜찮 은 착상 같아 우쭐했는데, 지금은 점점 자신이 없었다. "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죠? "두 번 정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뿐이요 하지만 우린 사적인 대화를 전혀 나누지 않아, 그녀는 아마 날 기억하지 못할 거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팽팽한 긴장이 흐르자,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본듀란트 씨, 당신은 참 인상이 강하잖아요" "그건 맞는 말 같군.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줬는지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배리는 깍지를 긴 손을 내려다보면서 대꾸했다.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해요 어젯밤에 그런 말을 해서요 난 당신이 실제로 그런 짓을 했으리라곤 믿지 임小)1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난 화가 났어요 그리고 두려웠죠" 그레이는 자동차 문을 열고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 일은 이젠 잊어버립시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팔을 고집스럽게 잡아당겼다. '게발-----난 그 일로 내 가슴에 응어리가 남는 건 원치 않아요'' "좋소 그럼, 마음속에 있는 말을 속 시원히 말해보시요" "밤새도록 생각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그 일을 추리해 보았죠 스펜 서가 당신 헛간을 탈출하여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위에게 접근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 우리보다 몇 분 먼저 하위 아파트로 들어가 그를 죽였다. 자,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의 혐의를 벗겨줄 단서를 현장에 남겨놓은 걸까요? 스펜서는 내가 해고당해 그 앙갚음으로 그를 살해한 것처럼 조작할 수도 있었어_9. 틀림없이 우린 감옥에 갇혀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발 버등치느라, 그나 대통령을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예_9. 그런데 오히 려 그는 증거를 남겨 우리가 경찰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해주었어요. 대체 그 저의가 뭐죠? 그레이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즉각 대꾸했다 '지유는 간단하요 우리에 대해 보다 원대한 계획을 세워두고 있기 때문이지." '계를 들면 어떤 계획이죠? "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린 아주 조심해서 움직여야 하.- 그러더니 텅 비어 있는 조지 왕조풍의 대저택 뒤에 펼쳐진 나무들 을 바라보았다. "자, 갑시다." 그녀는 많은 뜻이 담긴 그의 대답으로 이제까지의 그 어떤 대화보 다도 더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우선은 마음을 가다듬고 차에서 내 렸다. 매물 저택에 대한 광고가 실린 신문을 가져올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을 세우고 주변을 얼깽거리는 이유 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 신문 광고가 그럴 듯한 변명이 될 터였다. 그레이가 매물 저택의 땅의 경계선인 높다란 철책을 따라걸어가자 그녀가 그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한 5분 정도 걸은 뒤에야 저택의 뒤쪽 경계선에 다다랐다. 그레이가 앞을 가리켰다. '저곳이 그들의 집이오." 그녀는 두 집의 땅을 가르는 녹지대 건너편에 솟아오른 저택의 지 붕을 보았다. "앞장 서시죠." 활엽수들의 이파리들이 이제 막 옷을 바꿔입기 시작해 상록수와 대 조를 이루며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또한 나무들 사이 를 걸어가는 동안, 낙엽들이 발에 밟혀 바스락거렸다. 다른 때에 이런 상황이었다면 훨씬 더 즐거운 산책이 되었겠지. 그들은 조지 왕조풍의 붉은 벽돌 저택 뒤에 펼쳐진 정성스레 가꾼 드넓은 잔디밭에 이르러 다시금 머뭇거렸다. 정원에는 화사한 국화가 만발해 눈이 부셨다. 그리고 울타리는 사교계 데뷔 무도회에 처음 참 석하는 아가씨처럼 완벽하게 다듬어놓은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뒤뜰을 봐왔지만, 그레이.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도 정말 아름답군요" 그 얘기에 그가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순간 저택 뒷문으로 어떤 여인이 걸어나오자 그 미소가 활짝 피어날 겨를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여인은 둘둘 말아 고무줄로 감은 포스터인 듯한 종이 두루마리를 한 아름 들고 있었다. "바로 그녀_9_" 그레이가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에서 벗어나 풀밭을 질러가자, 배 리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날씬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여인은 '체로키 지프' 뒷좌석에 종 이 두루마리를 옮겨놓고 허리를 펴다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다 행히 여인은 등을 돌리고 도망가려는 기미는 없었다. 그저 제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배리는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표현력이 풍부한 여인의 어두운 눈동자가 고뇌로 가득 차 있음을 보았다. 여인의 시선이 배리에게서 그레이로 옮겨졌다가 다시 배리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배리나 그레이 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아만다 알랜이 말문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와주시다니." 아만다는 편안한 부엌과 우아한 정찬실을 지나 아늑한 거실로 배리 와 그레이를 안내했다. 벽난로에선 불꽃이 나지막이 일렁거렸다. 거실 에선 희미하게 사과향과 계피 향내가 났다. 거실 곳곳에 조지 알랜과 아만다, 그리고 두 아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 들이 가족사와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담은 기록 영화처럼 펼쳐졌다. 가구들은 멋지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했다. 거실 분위기는 상당히 매혹 적인 편이었다. 배리는 아름다운 거실, 두 아들, 그리고 여인이 가꾼 집에 은근히 질투와 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만다 알랜의 얼굴과 몸가짐에 배 어 있는 곧 불어닥칠 파멸의 절박함은 부러운 대상이 아니었다. 어젯밤 배리는 하위의 말대루 주치의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부인에게서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한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다. 별로 가망성이 없는 계획이지만 한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여 겼다. 그렇지만 아만다가 이렇듯 자신과 그레이를 만나 안도하는 모 습을 보니 뜻밖이었다. 게다가 보통 여자가 원하는 것들을 다 가진 여 인이 그처럼 불행하고 비참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도 못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아만다가 그레이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우리가 마지막 만난 뒤로 수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배리를 소개해 주었다 "난 이미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어요, 트래비스 양." "나 역시 부인이 누군지 이제 알겠군_9. 얼마 전에 부인은 WVUE로 전화를 걸어 내게 하이포인트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귀띔해 주셨죠? 아만다가 아까 밖에서 그들에게 말을 건넨 순간, 배리는 그 목소리 가 이상하게 귀에 익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바로 그 익명 의 정보 제공자란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난 누군가에게 뭔가 알려 주고 싶었지만,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9- 그러다가 당신 이 바네사와 인터뷰를 했던 게 기억났답니다." "그때 부인께서 뭔가 옳지 않은 일이 호숫가 별장에서 벌어지고 있 다고 얘기한 걸로 아는데요? "그래.a,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잘 몰랐어요 조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아만다는 낯선 사 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후에야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조지는 무슨 일을 하는지 더 이상 내게 털어놓지 않더군요, 하지만 난 만일 간호사가 그때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다면. 바네사 역시 죽고 말았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레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It유감스럽게도, 부인의 말은 사실입니다." 아만다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배리를 쳐다보았다. -아가씨가 방송국을 그만둔 후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더군.8," -왜 내게 연락하려고 했죠? -지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데이빗 메리트는 모든 사람이 믿는 대로의 그런 인격자가 절대 아니에요 양심도 없는 악독 한 인간이조= 그를 어떡하든 막아야 합니다." 그러고는 더욱 음울한 눈빛으로 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U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배리가 고개를 PL덕였다. U당신은 그 시트 밑에 바네사의 시신이 있다고 믿고 싱린 병원의 영안실로 쳐들어갔죠? 래1,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은 내 남편이 그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나요? 배리는 서글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또한 그레이 -피송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제 생각으론 그렇습니다. 의 생각이기도 하죠" 아만다는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었다. "그렇군_S-" 바네사의 조울병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약물 치료에 있어 의사가 교묘한 조치를 취할 여지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내 말에 동의하시죠? 아만다가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L(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레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끼여들었다. 우린 바네사가 아직도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확증할 몇 가지 결정적인 근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조지가 가해자란 말인가요? "가해자는 데이빗이죠" L(그렇다면 데이빗이 조지를 통해 그런 짓을 하고 있군요" 그는 아만다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이미 그녀 의 말을 확증해 주고 있었다. 배리는 자신들이 하는 얘기가 아만다 역시 이미 짐작하고 있던 내 용이란 걸 알았다. 그렇지만 아만다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을 확증한 다는 게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아만다 의 위엄 있는 태도를 보며 배리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L(알랜 부인, 이번 일로 부인께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나 역 시 충분히 헤아리고 있습니다 비록 알랜 박사를 만난 적은 없지만 내 가 아는 부분을 종합해볼 때, 그분이 악의가 있어 그런 짓을 하는 건 절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레이가 그 말을 이었다. 난 그를 압니다. 그는 바네사와 마찬가지로 데이빗의 제물이죠" 다시 배리가 나섰다. 우린 알랜 박사를 비난하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니에요 단지 정보를 얻으려고 온 겁니다." 아만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러분은 굳이 그런 변명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데이빗이 대통 령에 취임하고 조지를 백악관의 주치의로 임명한 뒤로 내 남편을 지 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어요"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는 확실히 그런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그러자 아만다는 그레이와 잠시 공감 어린 눈빛을 교환하다가 곁탁 자 위에 놓인 최근에 찍은 가족 사진으로 시선을 들렸다. '쌀지는 지금 뭔가 끔찍한 사건에 연루돼 있어요 그게 뭐든 그이는 혼자 힘으론 거기서 도저히 발을 랠 수가 없죠 그 때문에 우리의 가 정 생활은 파탄 직전에 놓여 있답니다. 그 일 때문에 우리 애들 역시 정서가 불안한 상태예요 조지는 지금 스스로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 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학대하고 있어요 그이가 내 눈앞에서 무너 져가고 있는데, 난 그의 내면에 한 발자국도 접근할 수가 없답니다. 애원을 해보다가 떠나겠다고 위협을 해봐도 소용이 없어요 그 일이 뭔지 몰라도 나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러다가 배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그 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요? "데이빗 메리트는 바네사의 아기를 살해했죠 아기의 사인은 유아 돌연사 증후군이 아닙니다." 순간 아만다는 마르고 핏기없는 손가락으로 떨리는 입술을 가렸다. 배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부인의 남편은 데이빗에게 속아서 의사로서의 신념이나 개인의 도덕관에 위배되는 요구에 응하고 있어_9.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분 은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는 겁니다." 배리는 차마 알랜 박사가 대통령을 위해 살인 사건을 은폐했고 이 제는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를 제거하는 일에 협조하고 있다는 말 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만다는 똑똑한 여성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는데 굳 이 상세한 설명까진 필요없었다. 마침내 아만다는 손을 입에서 내렸 다. 입술이 새하앙게 질려 있었지만 더 이상 떨리지는 않았다. "난 그 남자가 내 남편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납니다. 설령 조지가 범죄에 연루돼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데이빗 메리트 의 정체를 밝힐 수 있도록 내 힘과 능력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조지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살아서 옥살이를 하는 게 더 좋으니까 요 하지만 이 악몽이 그이를 위해 빨리 끝나지 않는다면, 그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고 말 겁니다" '개리와 나 역시 부인이 우리를 도와주실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아만다는 그레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당신들은. 데이빗이 조지를 시켜 바네사를 제거하려 한다고 믿고 있죠긴 태1,그렇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뭘 하고 있나요? 클리트 암브루스터는 바네사가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상대가 사위라 해도 능히 죽일 수 있는 인물 이에요 그에게 도움을 청해봤나요? '끼미 해봤죠 하지만 싱린에서의 실패 이후로 그는 우리와 말조차 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배리가 침울하게 대꾸하자 아만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여러분을 피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 상원 의원도 결코 깨끗한 인물은 아니죠 도박판인 정치에 잔뼈가 굵은 인 물이에요 조지도 그 의원의 사기성을 넌지시 얘기한 적이 있죠" 그레이가 말을 받았다. '내 생각도 똑같습니다. 만일 클리트가 백악관을 향해 포문을 연다 면 그 파편이 그에게 튀어 자신을 쏜 꼴이 되기 십상이죠 명연설가인 데이빗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이익을 챙겨주기 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그 추잡한 비밀을 지키려면 맹목적으로 충성 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비리의 그물에서 벗어날 순 없죠 심지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장인이라 해도 말입니다." "난 데이텟 메리트에게 충성 바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들은 내게 뭐가 필요한 거죠? "조지가 바네사를 가두고 있는 곳의 이름입니다." "그건 나도 몰라요 조진 내게 그런 얘길 해주지 않아요 하지만 - 이버 하우스'일 거라는 생각이 듐니다." 배리가 멀뚱거리며 그레이를 쳐다보자,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어리 등절한 표정이었다. 아만다가 이내 덧붙였다. "그곳은 중독 환자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개인 병원이랍니다." "그런 병원 이름은 처음 듣는군.- "아마 그러실 거예요 테이버 하우스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는 극비 장소기 때문이죠 그곳은 최고위급 정부 관료들과 그들의 직계 가족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 워싱턴 정가의 알콜, 약물, 마 약의 남용 사례는 일반인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요 그 시설 은 권력자들이 중독 증상에 걸려 치료받을 때 그나마 체면을 지키려 고 20여 년 전에 처음 설립췄죠" '저디에 있죠? '거지니아 주에 있어요 여기서 자동차로 1시간 게분쯤 걸리는 거 리예_- "그렇다면 조지가 날마다 백악관 잔디밭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어 디론가 왔다갔다하는 게 식랭뵉 수 있겠군요 그곳 주소를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레이의 요청에 아만다는 당황해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그곳엔 가본 적이 없어요 그곳은 방문객들을 절대 받지 않거 든요 하지만 그곳과 가장 가까운 소도시를 알고 있어요" 그들은 아만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붙박이 책상 앞 에 앉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종이에 써주었다. 이제 테이버 하 우스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그레이와 배리의 물으로 남겨졌 다. 그레이는 그녀가 적어준 정보를 한번 훑어보고서 쪽지를 호주머 니에 넣었다. "우리가 기대한 이상의 수확을 얻었군요 고맙습니다. 아만다." 아만다는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레이, 당신이 신중하게 행동할 거라고 믿어요 내 말은 조지를 그렇게 대해 달라는 뜻이죠 난 그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정보들 을 알려드리는 거예요 아니, 바로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죠 하 지만 이렇게 당신들을 도와드리고 나니 왠지 그이를 배반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그런 갈등은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도 그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죠 내 전력을 기억하십시오 한때는 데이텟을 위해 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보좌관이자 친구로서 말입니다." 그녀는 그레이의 팔을 한번 지그시 누른 뒤 손을 뗐다. '지번 일은 당신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에요. 사실, 당신들이 여기 까지 올 생각을 해서 깜짝 놀랐죠" 배리는 아만다에게, 싱린에서의 사고 이후로 자신들이 어떻게 감시 를 받고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내 친구의 집을 떠나자 마자 그들은 우리를 뒤쫓아오더군 요 그레이는 교통이 혼잡한 지역에서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우리와 얘기를 나뒀던 사람이 지난밤에 살해당했다는 걸 부인 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꺼머나, 세상이" "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안전한 곳에 가 있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레이의 제의에 아만다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간단히 대꾸했다. "내가 아이들까지 휴학시켜 함께 도망을 가면 데이빗에게 더욱 의 심을 사게 될 거예요 게다가 조지를 혼자 내버려두고 갈 수 없어요- 배리는 또다시 찬탄의 시선으로 아만다를 우러러보았다. 그 사이에 그레이가 아만다에게 경고의 말을 전했다. "우린 부인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 것입니다. 하지 만 부인 역시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됩니다. 평소 잘 알던 사람조차도 믿어선 안 되죠 스펜서 마틴 같은 작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자 아만다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하지만--그 독사 같은 작자를 당신이 처치하지 않았나요? 난 그렇게 생각- "그게 무슨 말이죠? 아만다는 부엌 안 붙박이로 설치된 작은 텔레비전을 가리키켰다. "아까 전에 방송됐어_9_ 뉴스 속보.로_9_" '저떤 속보였죠? 배리가 묻자 아만다는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레이. 그레이 본듀란트 씨가 바로 그 뉴스의 핵심이었어요" 그레이 본듀란투 인질 구출 작전의 영웅이 이제는 FBI요원들에게 추적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대통령 수석 보좌관인 스펜서 마틴의 실 종에 대한 유력한 혐의자로 말이다. 데이뎃 메리트는 이 나라의 국민 들과 함께 같은 시간에 그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와 스펜서는 대통령의 숙소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스 펜서가 워싱턴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는 비 밀이었다. 그는 그 숙소 3층의 빈 침실에 머물면서 자유롭게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방은 방음 시설뿐만 아니라 도청 방지 시설까지 설치돼 있었다. "그 녀석은 얼간이더군." 스펜서는 하위 프리프에 대해 떠벌리기 시작했다. "날 보더니 좋아 어쩔 줄 모르더군. 녀석은 군소리없이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네. 내가 그 집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전혀 의심하지도 않고 말일세." "그러니까자넨, 그가술집을 떠난뒤 그 집 현관에서 자넬 맞이하 기까지 트래비스와 그레이에게 연락할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확신하 는 건가? "난 줄곧 녀석을 감시하고 있었네." 스펜서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그들에게 연락했다 해도 별 문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단지 뭔가 안다고 내게 으 스대면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애를 썼거든. 실제로 녀석은------." "아니, 저게 대체 뭐야겟 스펜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데이텟의 관심을 사로잡은 장면 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얼굴이 대통령처럼 텔레비전 화면에 가득 잡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옛날 사진, 그러니까 옛날 신문 기 사에 실렸던 사진이었다. 그렇지만 화면 속에 나타난 얼굴은 윤곽이 뚜렷했다, 스펜서는 재빨리 리모컨을 집어들고 버튼을 눌러 소리가 다시 들리도록 했다. L1실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데이빗과 스펜서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국회 의사 당이 있는 '카피톨 힐'에 나와 있는 방송국 취재 기자의 설명이 계속 되는 동안 두 사람의 당혹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개담무쌍한 인질 구출 작전의 성공으로 국가적인 명성을 누린 그 레이 본듀란트 씨가 스펜서 마틴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라고 합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보좌관인 마틴 씨는 와이오밍 주에 있는 그레이 본듀란트 씨의 목장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현재 마틴 씨를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기랄! 대체 누구 짓이야丁 스펜서가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쳤다.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당장 알아보겠네." 대통령은 전화기를 들고 법무부 장관에게 당장 전화를 넣도록 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게이빗, 스피커폰을 사용하게." 법무부 장관 윌리엄 얀 시가 외출 중이라 그의 비서가 장관을 대신 해서 대통령 그 특유의 분노의 화살을 맞아야 했다. '개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얀시 장관은 어디 있나? 지금 당 장 그와 통화를 해야겠네." "장관님과 사모님은 외식을 하시러 나가셨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당장 그를 찾아보게. 지금 당장 찾으란 말일세, 그리고 스펜서 마틴의 실종에 대한 조사를 명령한 사람이 대체 누군가? '皇론 얀시 장관입니다. 제가 알기루 장관님은 모종의 비밀 정보를 제공받으셨습니다." '기밀 정보라고? 그러면 그가 그 단서 하나만 가지고 사건을 전면 적으로 조사케 했단 말인가? "그 정보는 상당히 믿을 만한 분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각하. "그게 대체 누군가?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십니다." 데이빗이 스펜서를 쳐다보자, 그는 사악하고 교활하며 꺼림칙한 침 묵을 지키고 있었다. 데이빗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관자놀이를 문지 르면서 딱딱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그 문제를 사전에 나와 상의하는 걸 잊은 모양이군." "상원의원께선 스펜서 마틴 씨가 실종된 지 벌써 2주일이 지났다고 하시더군요 각하, 얀시 장관께선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대통령 각하 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그건 사실이네. 나 역시 마틴 씨의 실종으로 걱정하던 참이 었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어째서 얀시 장관이 그레이 본듀란트 를 찾고 있느냐, 하는 점일세." "각하, 최근에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본듀란트 씨로부터 마틴 씨 가 와이오밍 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마틴 씨의 가장 최근 의 행적이지_- "본듀란트 씨는 찾았는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계속 내게 연락해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얀시 장관을 찾아내 당장 내게 연락을 하라고 전해주게나." "알겠습니다. 각하. 그 말씀을 당장 전하겠습니다." 데이빗이 스피커폰을 껐다. '지거 원. 자네, 갑자기 나타나는 것으로 해서 이 어처구니 없는 사 태에 종지부를 찍고 싶진 않나? 스펜서는 잠시 방 안을 서성이다가 대꾸했다. "아니, 그럴 순 없네. 내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야만 훨씬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네. 그러니 지금은 우선 내 부하들을 시켜 그레이를 얀시 보다 먼저 찾아내도록 해야겠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레이가FBI나 얀 시에게 취조를 받게 할 순 없어." 데이빗은 혐오감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놈의 양 시? 윌리엄 얀 시는 메리트 행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직을 완벽하게 수행 하는 인물이었다. 데이텟보다 10년 아래인 그는, 처음 그 직책에 임명 될 당시 로버트 케네디처럼 젊고 적극전이었다. 얀시는 케네디처럼, 주 정부나 연방 정부 관할의 검사가 피고인을 기소하여 그 책임을 묻 는 '형사 소추' 부분에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지도 자적인 정신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고. 매력적이며 매우 똑똑한 인물 이었다. 그래서 데이텟은 그의 임명 동의안에 서명을 했지만, 그후로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해 왔다. 얀시는 너무 예리하구 너무 근면하고, 너무나 정직한 인물이었다. 얀시와 본듀란트는 데이빗과 처음부터 갈 등이 예정된 위험스런 한 쌍이었다. -그레이가 이 뉴스를 보자 마자 얀시의 집무실로 어슬렁어슬렁 걸 어들어가 자네를 채소 저장고 속에 가둬둔 얘기를 털어놓을 텐데, 무 슨 대책이 없겠나? "섣불리 그렇게는 못할 거야." "왜지? -껏째로 그렇게 되면 최소한 얼마 동안은 활동을 못하게 될 테지 우선 총으로 날 쏴서 지하실에 가둬둔 이유를 설명해야 하거든. 하지 만 그런저런 사정을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적잖이 걸릴 수밖에 없는 데, 그건 그레이가 원하지 않아. 둘째로, 그가 하위 프리프의 시신을 본 건 마치 내 명함을 받은 것과 똑같다네. 이제 그도 내가 더 이상 지하실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지." 데이빗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간이 갑자기 촉박해졌군, 안 그런가? "그런 셈이네." "제기랄, 그렇다면 굳이 그런 조사가 필요없잖은가? 대체 클리트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스펜서가 전화기를 가리켰다. "자네가 직접 물어보게나." 클리트는 대통령의 문장이 새겨진 도자기 재떨이에 시거 재를 툭툭 털었다. "난 자네가 왜 그리 흥분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데이빗," 상원의원은 대통령의 호출에 즉시 응했다. 데이빗 메리트가 격노한 상태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란 점을 충분히 혜아리면서 유쾌한 마음으로 백악관을 찾았다. 클리트의 예상대루 데이빗은 스펜서와 그레이의 문제에 몹시 조바 심을 쳤다. 데이빗은, 스펜서가 그레이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그레 이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았다. 그리 고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그런 주장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그레이를 반역자이자 살인자로 몰아세울 각본까지 짜놓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이미 데이빗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국민 들의 마음속에 벌써 의심의 씨앗이 뿌려진 거나 다름없었다. 선거를 한 해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은 정권을 거머쥐고 있는 기득권 층, 특히 데이텟에겐 골치아픈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야당에선 분명 날을 잡아 감수성이 예민한 군중들을 상대로, 대통령이 뒤가 구린 인 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성토 대회를 벌일 건 뻔했다. 클리트 쪽에서 보면, 그레이 본듀란트를 배신함으로써 적을 만든 셈이었다. 하지만 그레이를 제물로 희생시킨다 해도 별로 아깜지 않 은 인물이었고, 배리 트래비스는 그야말로 확실한 소모품이었다. 클리 트는 병원 영안실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녀의 신뢰도를 철저하게 난도 질해버렸다. 두 남녀는 데이빗 메리트를 현행범으로 보고 있었지만, 클리트는 그들의 눈물 어린 분투를 방해한 점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 두 사람이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다면 그 때문에 데이빗을 파멸시키려는 자신의 계획마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또한 그 두 사람이 계속 날뛰게 내버려둔다면, 자칫 실수로 베키 스 터기스의 사건이 외부에 노출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클리트 암브 루스터에게도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상원의원의 우선 순위 중에서 자기 보존은 권력 다음으로 소중했다. 그래서 본듀란트와 그 여기자를 한쪽에 묶어두려고 법무부 장관 얀 시에게 전직 해병대원이 스펜서 마틴의 살아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들이 이 게임에서 떨어져나가면 클리트의 목적은 보다 간딘멍료해진다. 바네사를 건강하게 만들어 데이빗에게 서 영원히 떼어놓고, 그를 파멸시키는 작업을 착착 진행하면 된다, 상원의원이 깊은 상념속에 빠져 있는 사이에 데이빗이 비난의 포문 을 열었다. "제게 먼저 상의도 하지 않으시고-, 클리트가 대뜸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자네와 의논하기 위해 요 며칠 동안 무던히도 애를 썼네. 하지 만 자넨 내 전화도 받지 않았지, 그리고 어젠 조지아 주에 갔고, 오늘 에서야 날 만나자고 한 게 아닌가? '거도 제 일정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클리트 그래도 제가 얀시에게 전화를 걸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었잖습니까? "오히려 기다릴 수 없었지, 데이빗. 난 이 문제를 오랫동안 붙들고 늘어질 게 아니라고 느꼈네. 사람들은 이미 스펜서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단 말일세." '저떤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측 사람들. 스펜서의 부재에 주목하고 있는 이들이지. 자네측 사람들은 지금 혼란을 느끼고 날 찾아오고 있다네." "그들이 어째서 장인을 찾아간단 말입니까? '개냐하면 자네와 난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지." 클리트는 자신의 도전에 응할 테면 응해보라는 듯 스스럼없이 거짓 말을 내뱉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네가 내게 평소의 생각과 관심사를 털어놓는다 고 생각하고 있지. 만일 자네가 스펜서의 의문스런 부재를 의논할 상 대가 필요하다면 그건 바로 나란 말일세." 그러고서 잠시 시거 연기를 흡족한 표정으로 내뿜었다. "그레이에게서 스펜서가 그를 보러 왔다는 얘길 들으신 겁니까? "그렇다네. 그와 트래비스를 싱린에서 만난 바로 그날 들었지." "그날 밤에는 짧은 순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대화 중 에 스펜서란 이름을 입에 올릴 시간이 있었습니까? 클리트는 잠시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 어쨌든 우린 스펜서의 문제를 우연히 언급했다네. 스펜서가 다시 나타났다면 나도 그 얘길 스치듯 잊었을걸세. 하지만 그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교 앞으로도 그럴 희 망이 보이지 않더군. 나도 그동안 약간 뒷조사를 해보았네. 우편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 또한그의 아파트에서 요 몇 주동안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그의 집에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더 군 그는 와이오밍 주로 갔다가 티턴 산맥에서 사라진 것 같은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으로선 본듀란트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란 말일세," "하하, 뭔가 불길한 말투로 얘길 하시는데, 지금 혹시 그레이가 스 펜서를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닙니까? "그럼 자넨 다르게 생각하고 있단 얘긴가? '거 참, 엉뚱한 생각이시군요" "과연 그럴까? "그렇고말고요" "얀시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더군." "얀시! 그를 지명할 때 보류할까도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게 무척 후회가 되는군요" 클리트가 느물스럽게 낄낄거리며 되받았다. "얀시 장관은 본듀란트와 비슷한 인물이라 그랬겠지. 그는 사사건 건 자네에게 대들었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부를 할 줄 모르는 성격 이거든. 아무튼 그는 F의 수사 요원들을 풀어서 본듀란트와 직접 얘 기를 나누려고 할걸세." 클리트는 입의 한쪽 귀퉁이로 시거를 물고서 술병이 들어 있는 진 열장으로 다가가 스카치 원액을 한 잔 따랐다. 그러고는 전등 앞에 수 정 술잔을 들고 그 수정체의 각면들에 빛을 비춰보았다. "본듀란트가 그들의 질문을 받으면 스펜서의 방문 이유에 대해 얼 마나 입을 열지 궁금하구먼." 클리트는 입끝을 올리며 돌아서서 사위를 날카로운 눈길로 겨눠보 았다, 두 남자는 잠시 숨가쁜 눈싸움을 벌였다. 데이빗은 빈틈없는 스 승에게 마지못해 존경의 표시로 먼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레이에게 얘기를 들어서 알고 계셨군요." "자네가 스펜서를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얘기 말인가? 아, 물론 그 얘기를 들었지. 자연히 난 자네가 입을 막고 싶어하는 그 사내가 무엇을 알구 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더구먼." 데이텟은 긴 소파에 앉아 무릎을 꼬았지만, 클리트는 데이빗의 태 평스런 태도에 결코 속지 않았다. 겉으론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속이 바착 타겠지. '개체 윌 원합니까, 클리트? 전 장인을 잘 압니다. 당신이 갑자기 심심해져서 이렇듯 터무니없는FBI수사를 획책한 건 결코 아닐 겁니 다. 그리고 진짜 스펜서가 염려돼서 이번 일을 시작하신 것도 결코 아 니죠 그렇다면 이유가 쉽니까? 대체 윌 원하죠? "내 딸일세." "내 아내이기도 합니다." "자넨 바네사의 인생을 파괴하고 있어. 난 절대로 그렇게는 내버려 둘 수 없네." '깔리트 바네사에 관한 한, 장인 어른보다는 남편인 제가 더 염려 하고 있을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린 바네사를 잘 돌보고 있 습니다." '거디서 돌보는 거지? 이번에도 알랜의 호숫가 별장인가? "그곳에서 치료하기엔 상태가 심각합니다. 그녀는 어느 날 아침 완 전히 이성을 잃었죠 조지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녀를 전문 치료 시설로 데려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저느 시설을 말하는 건가? '게이버 하우습니다." "그 중독자를 치료하는 병원 말인가? "알랜 박사는 그곳에서만큼은 그녀의 사생활이 보장될 거란 사실 을 알고 있었죠" 데이빗은 방을 질러 책상 앞으로 다가가 중간 서랍에서 종이 한장 을 꺼냈다. -끼게 그곳 전화번호입니다. 정 절 못 믿으시겠다면 그곳에 전화해 보시죠" 클리트는 그에게서 종이를 낚아채고 백악관 전화 교환원에게 그 번 호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스카치 잔을 책상 위에 거칠게 놓았다. 이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 -나왔다. '게이버 하우습니다." 난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요 그곳 책임자와 통화하게 해주시요" "잠간만 기다리십시요" 다시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는 동안 부드러운 음악이 귓전에 울려 퍼졌다. 지금 이 번호가 과연 중독자 치료 전문 병원의 전화인지 확신 이 들지 않았다. 혹시 데이빗이 조작해낸 곳의 전화가 아닐까? 클리트? 언젠가는 전화를 주실 줄 알았습니다. 대통령께서, 의원님 이 전화를 줄 거라고 말씀하셨거든-- 클리트는 그 목소리를 금세 알아보았다. '덱스터 레오폴드' 박사는 예전에는 종합병원의 외과 의사로 일하다가 현재는 테이버 하우스의 병원장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이었다. 잘 있었나, 덱스터? 내 딸은 어떤가? 클리트, 솔직히 말씀드리죠 알랜 박사가 처음 따님을 이곳에 데려 왔을 때는 정말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따님께서 워낙 술을 많이 먹어 약이 잘 듣지 않았죠 하지만 이제 우린 따님을 다시 안정시켜 놓았고 현재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덱스터, 그애에게 최상의 치료를 베풀어주게나." LI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난 그애의 치료를 알랜이 아닌 다른 의사가 맡길 원하네." 그러자 잠시 덱스터가 머뭇거렸다. "클리트, 좀 곤란한데요" 난 그게 얼마나 곤란한지는 상관하지 않네." 알랜 박사는 공식적인 그녀의 주치의입니다. 다른 의사로 교체할 수 있는 결정은 메리트 부인이나, 혹은 영부인이 결정을 내리실 수 없 는 경우엔 대통령만이 내리실 수 있습니다. 저로선 알랜 박사를 영부 인의 치료를 담당할 의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덱스터 레오폴드는 존경할 만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지 만, 웬일인지 그 역시 데이빗의 꼭두각시로 변해버렸다, 조지 알랜이 덱스터의 눈앞에서 바네사를 서서히 죽인다면, 덱스터는 다른 쪽을 쳐다보는 척하는 건 아닐까? -테이버 하우스는 정확히 어디에 있나? 그곳에 직접 가서 딸애를 보고 싶네." ,랄리트 유감스럽지만 그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의원님도 이곳 방 침을 잘 아시잖습니까? 이곳은 환자와 직원 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 점은 환자의 사생확과 병원의 명예를 지키는 유일 한 길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만나는 건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 습니다. 특히나 환자가 심-적인 면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는 상태 에선 말입니다." "하지 만 덱스터 ------." ,지송합니다. 클리트 예외는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대통 령께서도 이미 전화를 통해 여러 차례 우리에게 요청하셨지만 영부인 을 만나실 수는 없었습니다. 대통령의 요구까지 거부했는데 의원님의 요구를 들어드릴 순 없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하는 것만이 메리트 부인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클리트가 눈길을 돌려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데이빗은 침착한 표정 으로 클리트를 쳐다볼 뿐이었다. "알았네. 다시 말하지만 난 바네사가 잘 있기를 바라네. 그애는 아 기가 죽은 후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단 말일세." '개통령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분은 아기가 죽은 직후 영부 인을 곧바로 치료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그녀가 전 문적인 상담과 치료를 받았다면 지금처럼 위태로운 상태를 미연에 방 지할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건강 을 완전히 회복한 영부인으로 되돌려 보내겠습니다." "자네 신상에 뭐가 좋은지 분명히 알고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걸세." 클리트가 그렇게 말을 덧붙이고 전화를 끊자 데이빗이 물었다. '지젠 만족하십니까? '지, 크게 만족한 건 아니네," 클리트는 집무실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심하게, 데이빗. 자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자넬 위해 거짓말을 주절거리고, 더러운 일을 하도록 시켰는지 난 상관하지 않 겠네.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내 딸을 꼭 되찾을 거야. 그렇지 않으 면,,,,,, 몇 주 전에 내가 자네에게 말한 대로 자넬 이곳에 앉혔듯이 자넬 이곳에서 내쫓고 말겠네," 그러고는 대통령의 코앞에 대고 손가락을 '탁' 퉁겼다. "이렇게 말일세." 동 틀 무렵, 클리트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잔에 커피를 따랐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직전, 커피 메이커에 시간을 맞춰놓아 다음날 일어 나자 마자 신선한 커피를 마셨다. 새벽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바라보며 소년 시절의 소 중한 추억들을 되살리곤 했다. 그가 아직 정치란 단어가 무슨 뜻을 가 졌고 그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기 전의 시절, 또한 그가 어떤 인간 들에겐 명예보다 야망과 탐욕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구 그런 인간이 되기 전의 시절에 대한 추억들 말이다. 부친은 한 범죄를 은폐하려고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감 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훤칠하고 강인했으며 조용한 분이었다. 아버 지는 초등학교를 3학년밖에 마치질 못했지만 별자리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으셨고 도미노 패의 점수를 눈 깜짝할 사이에 계산해낼 수도 있 었다. 좀처럼 화를 낼 줄 모르는 분이었지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라면 그 어떤 싸움에서건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기갑차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패 턴 장군을 따라 독일로 건너가 복무를 했고 결국 그 전쟁터에 묻혔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남부 텍사스 주의 소 목장에 서 카우보이로 일했다. 목장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뒤통수를 치는 인간들이 아니라 방을 뱀, 겁을 먹은 말들, 그리고 성격이 좨 까다로운 뿔이 긴 소였다. 말안 장에 앉아 보내는 하루는 정말 길고 힘들었으며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무수한 별들이 찬란히 빛나는 아름답고 신비한 밤하늘을 위안 삼아, 지치고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동 틀 무렵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카우보이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아 뜨겁고 독한 커피로 몸을 녹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친정 식구들과 함께 살기 위 해 자식들을 데리고 미시시피로 거처를 옮겼다. 그후로 클리트는 청 소년기의 남은 시기 동안 목장 근처에도 가보질 못했고,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워싱턴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구운 돼지고기와 거름, 가죽, 그리고, 시거가 뒤섞인 냄새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판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먹거리를 준 비하실 때의 그 냄새를. 이 세상에서 당시 야영을 하면서 마신 커피만 큼이나 더러운 커피도 없었지만, 또한 그처럼 맛있는 커피도 없었다. 클리트는 그 시절의 아침을, 아니,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와 함 께 말을 타는 것이 그렇게 즐거을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거친 사내들 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존경어린 태도로 아버지를 대했잖은가? 클리트 로선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아침과 마찬가지로 오늘 아침도 클리트는, 아버지가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실지에 대해선 애써 생각을 회피했다. 부엌 불을 켰다. 식탁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레이 본듀란트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클리트? -그레이가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그의 축 늘어진 자세는 결코 싸움 을 거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클리트는 그레이에겐 배신이 최대 의 모욕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는 위험한 사내였다. 클리트는 아버지와 모닥불, 그리고 목동들에 대한 추억이 자신에게 곧 불어닥칠 최후의 전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자신에게 모 욕받은 이 사내가 선사하는 죽음의 전조 말이다. 순식간에 공포가 온 몸을 케뚫고 지나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물론 클리트는 그런 내면의 움직임을 겉으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 고, 태연하게 커피를 따라 불청객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레이에게 이 집에 어떻게 들어왔냐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이 저택 에는 고도의 방범 장치가 설치돼 있었지만, 중동의 감옥을 뚫고 들어 간 경험이 있는 전직 해병대원에겐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클리트는 그레이의 냉혹하고 무자비한 시선을 받으면서 독한 카페 인 액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이제 내가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는 아 닌 것 같군." '勺렇지도 않주 클리트 우선 날 물라고 풀어놓은 개들을 쫓아주십 .] g_ "그렇겐 할 수 없네. 그건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일세." '거짓말 마십시요 애초에 일을 시작한 사람은 의원님이잖습니까? 그러니 그 짓을 멈출 수 있는 사람도 의원님이시죠 그렇다면 의원님 이 이제엇 자랑해 왔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그 어마어마한 권력 은 모두 허풍에 지나지않았단 얘깁니까? 그레이 본듀란트는 확실히 상대할 가치가 있는 적수였다. 그를 말 몇 마디로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리트는 사냥놀음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혔다, '띨 원하는가? "난 바네사를 찾아 의원님께 되돌려 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FBI 에게 목이 졸리면 그 일을 할 수 없죠" "바네사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네," "그걸 진심으로 믿으십니까? "그녀는 테이버 하우스에 있네." "나도 압니다." 클리트는 그레이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저젯밤 덱스터 레오폴드와 통화를 했네, 그는 그곳 병원장이라네. 난 그에게, 그녀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내게 되돌려 보내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고 못박아 두었지." 그레이는 코웃음을 치면서 클리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일전에 바네사의 임신과 유아 돌연사 증후군에 대해 나와 배리가 했던 얘길 조금이라도 믿으십니까? 클리트는 정치가답게 침묵을 지켰다. "우리가 했던 얘기가 조금이라도 맞는다면, 데이빗이 과연 그녀를 내버려둘까요? 클리.투 도대체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진짜 바네사의 아기를 교살했다면, 그녀가 살아서 그의 범죄를 폭로하도록 그저 바라만 볼 것 같습니까? 클리트 역시 마음속으로는 그 문제를 내내 생각해 왔다. 그 해답은 무섭도록 간단하고 명확했지만 말이다. "자넨 윌 원하나? "체포될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윰니 다. 난 의원님이 내게 그 자유를 어떻게 가져다줄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의원님이 알아서 할 일이죠 어찌됐든 내게서 FBI의 포위망을 걷어주십시오." '개가 어떻게,,,,,,." '래게 허튼 소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의원님은 뭔가 묘안을 짜내어 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의원님이 오해를 하 고 잘못 판단했다고 둘러대십시요 뭔가 그럴 듯한 구실을 짜내어 믿 게 만드십시_e. 그래서 그들이 날 따라붙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_P. 그 대가로 난 의원님께 바네사를 되찾아 주겠습니다." "자네가 없이도 난 그앨 찾을 수 있네." "문제는 살아 있는 그녀를 되찾는 것이겠죠" "데이빗은 감히 그런 짓은 못할 걸세. 난 그에게 알아듣도록 충분히 주의를 주었지." "그래봤자 그에게 더욱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할 이유를 제공하신 것 밖에는 안 됩니다." "자네 충고는 고맙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네." "좋습니다. 어디 맘대로 해보십시오 하지만 의원님이 분명히 아셔 야 할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스펜서는 실종된 게 아닙니다. 그 는 건강하고 생생하게 살아서 이곳 워싱턴에 와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난 자네가 그를 죽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지금 나 역시 그 사실을 후회 할 만큼 오래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말입니다. 그는 돌아왔습니 다. 최근에 그의 솜씨를 목격했죠 의원님은, 그와 데이텟이 나와 FBI 가 만나 얘기를 하도록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분명 먼저 날 잡아서 죽일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넨 바네사의 생명이 아니라, 자네의 생명을 갖고 홍정을 하고 있군." 순간 그레이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일렁거렸지만, 놀라우리 만큼 냉정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스펜서는 결코 영원히 모습을 감추고 살진 않을 겁니다. 언젠가는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돼 있조= 그때 공식적으로 등장하면서 의 원님을 웃음거리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의원님은 늑대가 온다고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처럼 망령난 노인네로 전락할 수밖에 없죠 그때는 얀시나 FBI도 의원님이 자신들을 우스갯감으로 만들었다고 공공연히 비난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데이빗이 바네사에게 그 어떤 재앙을 내린다 해도 의원님의 주장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의원님은 그저 머리가 약간 돌아버린 노쇠한 퇴물로 낙인찍힐 뿐입니 다. 데이빗이 승리하리라는 건 불 보듯 빤한 사실입니다." "그런 거짓말을 나더러 믿으란 말인가? 하지만 그레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냉혹한 푸른 눈동자로 클 리트를 公아보기만 했다. "난 어젯밤 데이텟에게, 내가 얀시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를 진행시 킨 이유를 설명했다네. 만약 스펜서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 자리에 서 데이빗은 내게 그 사실을 얘기했을걸세." 그러자 그레이는 또다시 얼굴을 클리트에게 바싹 들이댔다. "데이빗이 그런 얘기를 과연 해줄 것 같습니까? 아, 클리투 당신 역시 조심스럽게 외손자를 살해한 죄로 데이빗을 파멸시킬 멋진 계획 을 요리하고 계시겠죠 하지만 의원님의 방식은 많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사내의 말엔 일리가 있었지만, 클리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재가 자네 말대로 하지 않으면 어잴 셈인가? "그렇다면 행운을 빌겠습니다. 어디 맘대로 해보십시오" "난 오랜 세월 동안 내 생각대로 일을 처리해 왔네, 그러면서 그 동 안 왜 좋은 결과를 거둬왔지." "그렇다면 지금 바네사가 어째서 의원님의 곁에 있지 않고. 외부와 전혀 연락이 안 되는 병원 안에 감금되어 데이빗의 충견인 조지 알랜 의 감시와 간호를 받고 있는 겁니까? 상당히 예리한 질문이었지만, 클리트는 그에 대한 답변을 내릴 수 없었다. 아직도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굴복하거나 위축당 하는 건 생리에 맞지 않았다. '치금 허세를 부리고 있군. 자네도 나만큼이나 바네사가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자넨 내 도움이 없이도 FBI이든 그 누구든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싸워서 물리치고 성 안으로 쳐들어 가 공주를 구해을 수 있잖은가? "한 번 정도는 가능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그새 다른 여자를 구했나? 배리 트래비스로? '져러 모로 바네사는 매력있는 여잡니다. 하지만 너무 이기적이죠" 클리트는 그레이에게 집게손가락을 흔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재 말 똑똑히 듣게. 난 자네든 그 누구도 내 딸을 비판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레이는 그 말을 무시한 채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법을 너무 이른 나이에 배웠습니다. 의원님은 그 방면에 대해, 그녀가 모실 수 있는 최고의 선생이었죠 바네사는 어려서부터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여자였습니 다. 그 점은 내가 백악관에서 일을 그만두었을 때 이미 정확하게 증명 된 사실이죠 당시 그녀는 우리에 관해 떠도는 뜬소문들의 화살을 고 스란히 나에게만 향하게 해놓구 데이빗과 나 사이를 중재해 주기는 커녕 날 위해 한 마디도 변호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왜 그앨 도우려고 하는가? "애국심 때문입니다." "흥, 자기 과장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 아닌가? 자넨 계속 영웅 이 되고 싶은.거겠지, 자네에겐 영부인을 구하는 일이 도저히 그 유혹 을 뿌리칠 수 없는 도전이잖나." "내 동기가 그렇듯 낭만적이질 않습니다. 클리투 한 갓난아기가 죽 었습니다. 그 살해범은 의당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난 또 한 데이빗의 권세와 나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싶습니다. 그것을 단숨에 완전히 끝장내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그의 추악하고 구린 정 체가 백일하에 드러나서 그의 정부가 와해되지 않는 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바네사가 내 호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한 다 해도, 그렇게 개죽음을 당해선 안 되잖습니까? 클리트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지제 보니 성자 그레이가 탄생하셨군? 그레이는 이제 할말을 다 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식 탁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늠름하고 강인해 보였 다. 클리트는 자연히 그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속이 상했다. 그 젊은이 의 건강한 힘에 왠지 주눅이 들었다. 자신이 한층 더 늙고 초라하고 비굴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U클리투 이제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내가 구출 작전을 수행해도 되는 되는 겁니까? "한번 생각해 보겠네." -그 정도론 충분치 않습니다. 지금 당장 윌리엄 얀 시에게 전화를 거 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난 이대로 종적을 감출 테니까, 이후로 바네사 의 생명은 전적으로 의원님의 손에 달려 있게 됩니다. 의원님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비열하고 교활하신 분이니 어쩌면 데이뎃에게 이기고 살아남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못하겠죠" 클리트는 결코 항복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하지만 공을 높이 멀 리 차려면 현명하게 뒤로 물러서야 한다는 건, 이미 그가 '올레 미스' 에서 풋볼을 배우며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그녀가 새롭게 자리를 잡은 무덤에서 자동차로 걸어가는 동안, 두 남자가 양 옆으로 다가왔다. "트래비스 양삣 때1?" 그들은 그녀에게 FBI배지를 보여주었다. U아가씨께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말인가요?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이곳은 장례식 장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프리프 씨에 대해선 우리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그 동안 우린 아가비를 찾으려고 많은 어려움을 려고 있 다가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습니다." "장례식까지 이러다니, 두분의 무정함은 정말 용서할 수 없군요" 하위 프리프의 간단하고 비종교적인 장례식에는 애처로우리 만치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석했다. 이는 그의 생애에 대한 비극적인 기 록이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점심 시간을 특별히 1시간 더 늘리려고 그럴싸한 구실을 찾으려는 WWE의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식순이 끝 나자 마자 삼삼오오 어울려 잡담을 나누면서 자신들의 차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 팎은 도덕적인 의무를 다하고, 이젠 자유롭게 어울려 즐 거움을 나누려고 말이다. 하지만 배리는 진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슬퍼한 까닭은, 하 위가 끔찍하게 죽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범죄자를 잡지 못하고 어느 한 사람도 하위를 진심으로 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FBI한 요원이 그녀를 팔꿈치로 슬쩍 찔러 비탄에서 끌어냈다. "트래비스 양, 적당한 시간이 아닌 건 알고 있지만, 우린 그래도 아 가씨와 얘기하고 싶습니다." "당길들이 날 이렇게 양쪽에서 잡고 있는데, 내가 윌 어쩌겠어요? 하지만 무덤에서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면 안 될까요? "좋도록 하시죠" 이윽고 그들이 그녀의 자동차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손수건으로 마지막 눈물을 닦으며 그들에게 돌아섰다. "난 프리프 씨의 살인 사건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걸 경찰에 다 얘기했어_9. 그들은 현장에서 내 진술서를 받아갔다구_Q-" "우리는 그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왜 날 찾아왔죠? 그녀는 짐짓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레이 본듀란트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넋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 사람." 그러고는 팔짱을 끼면서 지루하고 뽀로통하게 말을 이었다. "두 신사분은 우리의 국가 영웅에 대해 뭘 알고 싶나요? "우선, 지금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건 나도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구요 그이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구요" 두 요원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트래비스 양, 우린 아가씨와 그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낀아요 우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죠 그러다가 어제 갑자기 그 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지명 수배자가 뤘죠 마치 지금까지 내게 닥 친 불행으로도 아직 충분치 않다는 듯이 말예요 처음엔 내 집이 산산 조각 나면서 내 개가 죽었죠 그 다음에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에게서 욕을 한바탕 얻어먹었어요 그 사건 덕분에 난 직장에서 해고당했답 니다. 그러다가 난 음, -, 당신들도 아시겠지만 욕망에 빠졌지요 아, 난 그 사내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었어요 사실 그 어떤 여성 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겠어요? 어쨌든 그는 국가 영웅이잖아요? 그는 강인하교 과묵한데다가 아주 섹시한 남자죠 게다가 그의 눈동 자는 마치 , ,,, ,,." 짐짓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 우린 잘 지냈답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그가 지명수배 됐다고 뉴스 속보로 텔레비전에 나타나지 뭐예요? 난 겁에 질려 그에게 내 곁에서 당장 꺼지라고 소리쳤더니 그는 내 말대로 하 더군요 하지만 그는 너무도 착한 사람이라 내게 진실을 밝히지 못했 단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어요"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젭니까? "방금 말했잖아우 어제라구요" '겅확히 몇 시죠? "흐음, 글쎄요 오후 중간쯤 됐을 거예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실 수 없습니까? "그건 좀 힘들겠군_9_ 뉴스 속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시계를 보았 거 든요," "그때 아가치는 뭘 하고 있었죠?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그때 두분은 일종의,,,,,, 일을 하고 있었군요" '꺼머머, 호호 참 묘한 표현이군요" "그 일이 벌어진 장소는 어딥니까? "모텔인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요" "위치는 기억나십니까? '겅말 내가 두 손 들게 만드시는군요 고속도로 근처에 있는 곳이었 죠 하지만 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그 모텔이 어느 도시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는 뜻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면서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난 저-. 아휴, 정말 난처하군요 그때 그레이, 아니 본듀란트 씨 는 운전을 하고 있었죠 그리公,,,-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 만, 난 차안에 똑바로 앉아 있지 않고 머리를 계기판 아래로 숙이고 있었답니다." FBI요원들이 다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중 한 요원은 눈을 아예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난 그 모텔에 이름이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어요 그 장소를 고른 건 그이니까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그곳은 아주 구질구질한 싸 구려 모텔이었죠 여러분도 그런 곳을 아실 거예요 왜 시간당 숙박비 를 계산하는 곳 말예요 깨끗한 시트도 돈을 따로 주고 구해야 하잖아 요 게다가 피비(연방 수사국 요원의 속어)들에게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죠 어머나, 미안해요 아저씨들. 경멸하려는 뜻은 정말 아니 었어요 어쨌든 본듀란트는 구두쇠처럼 굴었답니다.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 때, 그가 날 남자들만 가는 음란한 장소로 데려가더군요 그게 믿어지세요? 그가 만약 침대에서 그렇게 끝내주 지 않았구 또한 멋진 푸른 눈을 갖고 있지만 않았어도 난 그날 당장 결별했을 거예요" 한 요원이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으흠, 본듀란트 씨가 스펜서 마틴에 대해 얘기한 적은 없었나요? '쌔기했죠 언제나 그 사람 얘기만 했는걸요? 두 사람은 절친한 친 구랍니다. 그 두 사람과 대통령은 모두 다 이런 사이죠~1 그녀는 집게손가락 위에 가운데 손가락을 겹쳤다. "그가 혹시, 마틴 씨가 자신을 보러 와이오밍으로 내려왔다는 말을 했습니까? '게. 사실, 난 마틴 씨보다 하룬가 이틀 먼저 그곳에 갔죠 지금 그 는 뭘 하는가' 식의 기사를 쓰려고 본듀란트 씨에게 내려간 거랍니다. 그런데 우린 서로보자마자사고를치고만거죠 내 말뜻아시겠죠? 그 뒤로 그는 나를 따라 워싱턴으로 왔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사 를 쓰기도 전에 난 해고를 당했죠 그리고 이제, 그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줬답니다.- '지젠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그녀는 그 요원에게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재 성적 충동에 대해선 그렇다는 얘기죠" "아! 그가 마틴 씨나 대통령에게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까? "아노 사실 그는 최근에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답니다." 그녀는 한쪽 눈을 살짝 찡긋거렸다. "하지만 여러분도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그렇잖나요? '저제 오후 이후로 본듀란트 씨에게서 연락이 없었나요? '거1,유감스럽게도 없었답니다. 이제 가도 되나요? 장례식은 내가 좋아하는 행사가 아니라서요" 그녀는 당당하게 자동차 문을 열었다. 거-다가 더 이상 여러분께 말씀드릴 내용도 없답니다. 본듀란트 씨 와 관계를 맺은 건, 내가 최근에 여러 가지 잘못 내린 결정 중의 하나 랍니다. 여러분은 공식적으로 저지른 나의 대실수들을 잘 알고 있을 테죠? 난 그런 모든 실수들을 되도록 빨리 잊고 싶답니다." "앞으로 그에게서 연락이 오면------." '껀락은 오지 않을 거예요 내가 꺼져버리라고 말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죠 '당신이 어떻게 감히 날 차버리지? 난 하나님이 주신 최대 의 선물인데? 하는 식으로 말예요" "그래도 그가 연락을 해오면 우리에게 전화를 주십시요" '딱론 그렇게 하죠" 그녀는 그 요원이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또다시 말썽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그가 내게 연락을 해오면 반드시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시간을 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자신들의 승용 차로 걸어갔다. 배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그들에게 아 무런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두 사내는 좋은 사람들 축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즉, 그들은 임무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데일리의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는 감시팀은 결코 그런 순진 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도 그레이를 찾으려고 집 안으로 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배리나 그레이의 의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 '요원'들은 FBI내에 있는 대통령의 사병들로서 스펜서 마 틴의 지휘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그레이가 착한 FBI들 에게 발견되거나 취조받는 걸 결코 원치 않으리라. 대통령이나 그의 보좌관은 언제든지 그 사냥개들을 데일리의 집 안 으로 들여보내 그 안에 사는 성가신 파괴 분자들을 제거할 수도 있펐 다.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 그 의혹은 배리를 비롯한 두 남자의 뇌리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 세 사람을 일망타진하 려고 보다 원대한 음모를 세워 착착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다. 배리는 그레이의 생각이 옳은 게 아닌가 두려웠다. 데일리는 교차로에서 장미를 파는 히피에게 신호를 보냈다. 5초도 되지 않아 그 히피가 날렵하게 데일리의 차 뒷좌석에 드러눕자, 데일 리는 푸른 신호등 밑으로 차를 움직였다. "아주 잘하시는군요, 데일리." 그레이는 머리띠와 가발을 벗었다. '치금 버스 뒤로 차 세 대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데일리는 운전대를 능숙하게 돌렸다. "나도 이젠 이 일에 왜 익숙해졌네, 꽃은 많이 팔리던가? "너무 잘 팔려 그만두기가 싫을 정도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굽 니까? 그레이는 데일리의 옆좌석에 앉은 사람을 가리켰다. "난 그녀에게 '돌리'란 이름을 지어주었다네." 돌리는 커다란 눈을 가진 공기로 부풀린 인형이었다. 인형은 배리 의 재킷을 걸치고. 그레이의 히피 가발보다 훨씬 더 헝클어진 적갈색 가발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의 안전띠로 그 인형을 좌석에 고 정시켜 놓았다. 배리는 뒷좌석의 한쪽 구석에 몸을 쪼그리고 앉아 톡 끼여들었다. "저 인형은 내 대역이에.9-" 그레이는 머리를 살짝 들고 그 인형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주 닮았군." 배리가 '흥흥'거리며 태연하게 되받았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부담이 없어지는군요 FBI앞에서 당신을 씹은 것에 대해 말예요" 그녀는 그레이에게 하위의 장례식 이후 잠시 FB떼게 붙들렸던 일 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행히 암브루스터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 당신 이름이 지명 수배자 명단에서 지워졌죠 당신이 그 상원의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물라루 효과를 발휘한 셈이죠 오늘 저녁 그는 텔레비전 뉴 스에 등장해 의사 전달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지껄이더군요 그 는 자신의 직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그에 따라 인사 조치를 취할 뜻을 내비쳤죠 그리고 클리트의 입을 빌어, 메리트 대통령은 전 국민에게 스펜서 마틴이 현재 '미묘한 개인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중 이라고 설명했답니다." "그 말은 사소한 치질 수술에서 극악한 반역 행위에 이르기까지 온 갖 의미를 내포할 수 있-군." "그래요 그리고 스펜서는 그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금 백악관에 공 식적으로 등장하겠죠 클리트는 동료 의원들에게 약간의 질책을 들었 지만, 잘못을 반성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런 비난을 묵묵히 감수했죠" "그레이에게 법무부에서 온 전화를 얘기해주지 그래." 데일리는 미리 계획한 대로 감시팀을 따돌리려고 이리저리 정처없 이 차를 몰면서도, 신통하게 배리와 그레이의 대화 내용까지 따라잡 고 있었다. "당신 정보원에게서 온 전화인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삐 호출을 받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죠 그랬더니 그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즉 당신이 지명 수배에서 풀렸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정보를 요구하더라구요" "예를 들어 어떤 정보를 요구했지? "이를테면 지금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하는 식이었죠 오늘 오후에는 암브루스터와 얀시, 그리고 FBI의 형사팀 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북새판 속에서 조금씩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봐요 솔직히 난 그런 상황이 오히려 재미있지만 말예요." 그녀는 그레이에게 정답게 미소를 던지면서 말을 이었다 '껏진 당신, 이상이 바로 내가 오늘 려은 일들이었어요 당신 하룬 어펐죠? "난 테이버 하우스를 발견했소" 그레이가 병원을 찾아냈다면, 배리와 데일리 역시 일을 시작할 준 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데일리, 꼬리를 떼어버린 것 같습니까? "한 5분 전쯤에 그렇게 한 것 같네." "하지만 이 차에 전자 추적 장치가 설치돼 있을지 모릅니다. 아직 송신기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 차가 깨끗하다고 안심할 순 없죠 우린 되도록 빨리 차를 바낀 타야 합니다." 그레이의 지시에 따라 데일리는 여러 층으로 이뤄진 주차 건물 안 으로 차를 몰았다. 그레이는 이미 그곳에다 2층에 다른 차량을 준비해 놓았다. 배리와 그레이가 민첩하게 차에서 뛰어내렸다. 데일리도 자동 차의 시동을 켜두고서 밖으로 나왔다, "둘다 몸 조심하게나." "산소 탱크에 산소는 충분히 들어 있죠? "아무렴, 배리." "차를 좀 몰다가 저녁을 사드시고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십 시요 그들을 오랫동안 바쁘게 해주셔야 합니다. 단, 요행수는 절대 바 라지 마십시오 절대 운에 맡기고 모험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레이의 염려에 데일리가 심술궂게 대꾸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네. 이런 일을 수십번도 더 해봤잖나? 나도 이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단 말일세," 그레이가 다시 말을 되받았다. "물론 잘하실 겁니다. 자, 배리, 갑시다." 그녀는 데일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길 바라며 잠시 머뭇거렸 다. 첩보 작전과 호흡 기구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다. '딸슨 일이 있어도 동 트기 전에는 돌아올 거예요 최선을 다해 빨 리 와서 당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겠어요, 그러니 내게 조심해서 행동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_- "물론 조심하겠어." "그리고 절대로 돌리와 싸우시면 안 돼요" "돌리는 착한 여자야. 누구처럼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구." "그리고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으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래요 그렇게 약속은 하실 수 있죠 하지만 난 당신이 절대 그러 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구_9-"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말끝이 떨렸다. "당신은 결코 내 말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순간 그레이가 다른 차의 운전대를 잡으면서 소리쳤다. "배리, 어서 떠나야 해? 데일리도 다급하게 몰아세웠다. '써서 가. 그렇잖으면 그레이의 계획을 망치게 되잖이" 그러고는 자신의 차로 돌아가려 했지만 배리가 그를 붙잡고 꼭 껴 안으면서 속삭였다. "데일리, 당신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예요 내 평생토록." "그래, 그래." 데일리는 심드렁하니 말하고는 그녀에게 벗어나 저쪽으로 가버렸 지만, 그녀는 그의 퉁명스런 태도에 속지 않았다. 작별 인사를 끝내 건네지 않는 그를 보며, 자신도 역시 그와 똑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밀려와 차디찬 전율을 느꼈다. "데일리-" 그는 운전대 뒤로 몸을 쑤셔넣으면서 대꾸했다, "난 괜찮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러고는 그 와 눈을 마주치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일부러 그녀의 눈길을 피하면 서 차의 기어를 바됐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그가 차를 몰고 사라지 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동차가 주차장의 급격한 경사로 밑으로 사 라질 때까지 자동차의 미등에서 눈길을 메지 않았다. "배리? '지금 가요" 그녀가 자동차 안에 들어가보니 그의 옆좌석에는 쇼핑백이 놓여 있 었다. "이게 뭐죠? "보급품이_9. 그런데 그건 뭐요? 그가 그녀의 가죽 가방을 가리켰다.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예요" 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당신은 데일리가 정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그와 내 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자 그는 자동차에 핸드 브레이크를 올리더니 그녀에게 몸을 돌 렸다. "당신은 굳이 나와 함께 갈 필요가 없소 당신은 여기 데일리와 함 께 남아서 그를 보호해주고, 나 혼자 가는 게 더 낫겠소" 배리는 그를 도우려는 마음을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거부하는 태도 를 보이자 화가 치밀었다. '썰듀란투 지옥에나 떨어져또" "그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려는 곳이 아닌가? 그들은 중류층들이 사는 거리를 한참 동안 누비고 다니다가 어느 한적한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그는 앞좌석에서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망 좀 보고 있으시요 변장을 해야 하니까." "뭘 변장하는데요? "내 옷." 그는 히피 스타일의 빛바랜 진바지와 홀치기 염색을 한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검정색에 가까운 회색 양복과 하얀 셔츠, 그리고 검정 넥 타이로 바낀입었다. 그녀가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기리 얘길 해줬어야죠 난 옷을 간단하게 입고 나왔단 말예요" "당신 어머닌 옷을 적게 입는 것보단 많이 입는 게 더 좋다는 말을 해주지 않으셨소? '딸쎄우 잘 모르겠군요 난 어머니가 하는 말이라면 죽어라 하고 듣지 않았거든요" "좋소 그럼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그는 자동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지무 소리 하지 말구 이제부터 내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시요" 그들은 도로변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모퉁이의 건물로 걸어갔다. 집집마다 창문에서는 환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 러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벽면 위에 너울거리며 블라인드 틈으로 언 뜻언뜻 보였다. 차도 위에는 승용차 한 대와 캠핑용 트레일러가 설치된 소형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레이는 배리에게 두 집을 나누는 경계선인 상록수 울타리 옆에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쇼핑백을 그 녀에게 맡기고서 트럭 뒤에 있는 캠핑용 트레일러 쪽으로 다가갔다. 트레일러의 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레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능숙한 솜씨로 자물쇠를 따고 그녀에게 오빠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은신 처에서 캠핑용 트레일러로 재빨리 달려갔다. 그는 그녀와 함께 트레 일러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안에서 자물쇠를 잠갔다. "자리에 앉으시요" 그는 한쪽 벽면에 붙은 심이 들어간 간이의자를 가리켰다. 그러고 는 재킷을 접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영문을 몰라 두 팔을 벌렸다. '지제 뭘 하조? '기다리는 거요" -개단히 뛰어난 내장님, 난 당신에게 굳이 알려주고 싶진 않지만, 이곳은 테이버 하우스가 아니랍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여기 살고 있소 오늘 아침 일찍 병원을 발견했을 때, 마침 그 남자는 아침 근무조와 교대를 하고 퇴근하는 길 이었지. 난 그를 따라 이 집까지 찾아온 거요" -오늘 밤 그가 병원에서 일한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오." "그럼 이 방법이 먹혀들어갈 거라는 건요? "그것도 모르요" 만일 이 방법이 먹혀들지 않으면 어쩌는데요? L(그뻔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이제 질문은 그만둘 수 없겠소? 그 러다가 누군가 우리 얘길 들으면 어쩌겠소 어서 앉기나 하시요" 결국 그녀는 잠자코 자리에 앉아 뚱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특공대원이 되는 건 소문만큼 신나는 일은 아니군.9. 오히려 지루 해_Q-" 그러자 그는 곧바로 손을 들어올려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쉬 잇." 망사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가 트레일러 벽을 뚫고 들려왔다. 곧이 어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서 운전해요" "알았어" '지번엔 내일 낮까지 일하나요? "아니, 내일 아침 8시쯤에는 퇴근할 거야.- "그러면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을게요" 남자가 트럭으로 가까이 다가오는지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푹 자둬, 안녕." 그의 발자국 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금속성 소리가 들리면서 자동차 문이 열렸다. 그가 트럭 운전석에 올라타자 트레일러가 흔들거렸다. 그레이는 배리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떼자 얼른 입술 위로 손가락을 세워 말을 가로막았다. 차의 시동이 몇 차례 '크르륵' 소리를 내면서 성을 내더니 이내 활 기를 되찾았다. 트럭의 핸드 브레이크가 풀리자 그들의 몸이 요동쳤 다. 트럭이 차도로 굴러가기 시작하면서 고성능 스피커에선 미국 서 부와 남부에서 발달한 대중음악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그레이가 먼저 입을 테었다. "음악이라----. 뜻하지 않은 선물이군. 자,이제 하고 싶은 얘길 자 유롭게 해보시.p_l "저 사람은 테이버 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인가요? "그의 옷차림으로 봐서, 그곳 전기 기사나 관리부에서 일하는 사람 일 거라고 추측했소" "그곳은 어떻게 생겼죠? "병원 말이오? 대저택을 개조한 건물이.P_ 건축 양식은 조지 왕조 풍이지. 녹음이 우거진 곳을 높은 벽들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소 외 부와는 철저하게 격리된 곳이요 고속도로에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 져 있어 일부러 찾으려고 애를 쓰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눈에 띄지 않소 정문 입구에는 무장한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데, 그 넓은 지역에 입구라곤 그곳 하나뿐이요" 배리는 그레이의 계획이 점차 이해가 되었다. "그럼 지금 저 남자가 우릴 그 안으로 들여보내준다는 거군요" "바로 그게 내 생각이오." '경비원이 트레일러 안을 조사하면 어떻게 하죠? "모든 직원 차량들의 유리창에는 통행 허가증이 붙어 있소" "참으로 기발한 계획을 세우셨군요" "그 말은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이곳을 탈출할 때까지 남겨두는 게 좋을 거요" 그녀는 그 말에 장난스런 기분이 싹 달아나면서 화제를 돌렸다. "암브루스터는 어떻게 된 거죠? 정말 그를 믿나요? "그에게 성질을 부릴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가 조건을 내세우고 있 으니, 내쪽에선 그 조건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소" "과연 -가 이번 소동이 의원 사무실 직원의 잘못에서 비롯됐다는 얘길 믿을지 의심스럽군요" "클리트는 필요하다면 그 누구의 팔이라도 비틀 사람이오" "설사 그렇다 해도- "팔을 비틀어도 소용이 없으면 아예 팔을 부러뜨릴 거요 그가 적임 자를 찾아가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시키기만 하면 일은 끝나오 그는 어찌췄든 자신의 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소 그러니 바네사의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즉 나와도 두말없이 거 래를 하게 될 거요" 그레이의 동기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배리는 지금 상황에선 그 부 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 이 일이 끝난 뒤, 바네사가 어느 정도로 자신이나 그에게 감사를 하고, 또한 어떤 형식 으로 그 마음을 표현할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각본은 이와 같으리라. 우선 바네사가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녀와 데이빗 메리트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이한다. 그러면 그녀는 자신을 사악한 남편의 손에서 구출한 영웅과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 그리고 배리 역시 자신이 원하던 것을 갖게 되겠지. 특종에 대한 단 독 회견의 기회와 그로 인해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됨은 물론이요, 자신 의 주가는 이제껏 상상도 못했던 높이까지 치솟게 된다. 그게 바로 그 녀가 그 무엇보다도 원했던 것이 아닌가? 그녀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왠지 기분이 울적해졌다. "난 당신이 시간을 때을 수 있도록 트럼프라도 갖고 올 줄 알았죠" '지루하다면 저걸로 기분 전환하시요" 그는 쇼핑백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 오늘 저녁 당신이 입을 옷이 들어 있소" 그 종이 가방 안에는 산호빛 화학섬유로 만든 바지와 허리 밑까지 내려와 벨트로 졸라매는 간호사 제복과 새하얀 구두, 그리고 해군용 낙하복이 들어 있었다 "간호사는 패션 모델이 아니니, 옷 맵시가 나쁘다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_- 배리는 그 내용물들을 카펫이 깔린 트레일러의 바닥에 쏟아부었다. '지 낙하복은 누가 입죠? '래가 입을 거요" 그녀는 트레일러에서 일어나 혁대 버클에 손을 갖다댔다. "참으로 자상하시군요 뒤로 돌아 앉아 주시겠어요? '씰소 당신이 등을 돌리면 되잖소? 그가 이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녀도 기꺼이 그럴 용의 가 있었다. 그녀는 그레이처럼 무관심해지자고 다짐하면서 구두를 벗 고 셔츠 자락을 허리춤에서 끄집어 올렸다. 트레일러의 조명은 커튼 이 쳐진 양쪽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빛뿐이라 어둠침침했다, 그녀는 혁대 버클을 끄르고 지퍼를 내려 바지를 벗었다. 그러고는 잘 개켜 쇼핑백 밑바닥에 잘 깔아놓았다. 곧이어 망설임없이 블라우 스의 단추를 풀었다. 마침내 팬티와 브래지어만이 남았다. 그나마 서 로 잘 어울리는 한 벌이었고 모두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새로 구입 한 속옷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속내의 모델이 아니었고 더욱이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도 아니었다. 다행히 어둠침침한 실내가 그런 차이점을 은근하 게 가려주었다. 순간 그녀와 그레이는 트럭의 속력이 급속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 다. 배리가 그를 쳐다보니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그곳에 도착할 시간이 아닌데 왜 멈추는 거지? "가솔린이 떨어진 걸까요? "나도 모르겠소" 그는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군" 트럭은 계속 속력을 줄이더니 이내 멈췄다. 운전사는 라디오를 끄 고 자동차의 시동마저 꺼버렸다. 곧이어 자동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자 트레일러가 다시 요동쳤다. 동시에 배리와 그레이는 운전사의 목소리를 들었다. "안녕, 내 사랑. 오래 기다렸지? 데일리는 자신이 맡은 미끼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배리, 그레이와 주차장에서 헤어진 직후, 그는 회색빛 승용차가 몇 블록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뒤를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데일 리는 시내를 일부러 천천히 돌면서 자신에게 다시 꼬리가 붙었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그레이의 말대로 이 차에 전자 추적기가 설치돼 있는 건지 도 몰랐다. 아니면 그 망할 자식들이 다시 운좋게 그를 찾아냈거나, 대통령의 비밀 요원들은 그레이가 아는 것 이상으로 도처에 퍼져 있 는 것이리라. 생각만 해도 섬뜩한 가능성이었지만, 그 살인청부업자들 이 이 바쁜 길거리에서 앞뒤 안 가리고 폐기종을 앓는 늙은이를 덮칠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처음 I시간 동안은 그 숨박꼭질이 재미있었지만 똑같은 짓을 몇 번 되풀이하자 질리고 말았다. 그는 5분동안 세 차례나 하품을 한 끝에 라디오를 켜고 채널을 랩 음악이 나오는 방송 주파수에 맞췄다. 그 이 유는 간단했다. 이 세상에서 극도로 증오하는 음악 중 하나였기 때문 이었다. 만일 그 역겹고 가증스런 소음마저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지 못한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그렇게 해줄 수 없다는 생각마저 스쳤다. 이윽고 뱃속에서 꼬르륵거리기 시작할 즈음, 그는 차를 몰고 맥도 널드 햄버거 가게의 드라이브스루(차를 탄 채 주문용 스피커로 물건을 주문하고 나가는 창구에서 물건을 받는 시설) 안으로 들어가서 대형 햄 버거를 주문했다. 햄버거 가게의 젊은 직원은 데일리의 여자 친구가 공기로 부풀린 인형이란 걸 알아차렸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데 일리 역시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 직원이 그를 파괴 분자가 아 닌 성 도착자로 여기는 것이 차라리 나을청 싶었다. 그는 자동차를 식당 앞에 세워놓구 지나가는 손님들을 멍하니 지 켜보면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입맛이 별로 당기지 않아 햄버거 를 반쯤 먹다 말았다.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다가 문득 인형이 질책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시금 운전대를 잡으려고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손가 락으로 무릎을 불안하게 두드리며 맥도널드를 오가는 사람들을 우두 커니 지켜보았다. 그 사람들 중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려온 부부가 눈 길을 끌었다. 겉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그 가족의 모습은, 행복의 파랑 새가 결코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했 다. 하지만 그런 행복에 대한 산 증거, 즉 자녀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갖는 모습은 그에게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에게 흘딱 반했던 작고 귀여운 여자 선생과 결 혼했어야 했다. 그 역시 그녀를 미칠 듯이 사랑했잖은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는 그녀의 그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와 유순하고 다정한 태 도에 눈이 멀고 말았다. 그녀의 미소를 한 번만 봐도 그는 마치 백만 장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오만심에 그녀를 살뜰 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그녀와 만나는 대신 툭하면 밤늦게까지 사무 실에 앉아 일에 매달렸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우선 순위에서 훌륭한 기삿거리에 이은 2순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녀를 영화관에 데려가는 일은 특종을 좇는 일에 비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진실하고 다정한 그녀는 여느 여자와는 달리 오랫동안 그를 참아주 었지만, 그는 그녀의 인내력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을 범 했다. 그녀는 결국 그를 포기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보다 생활이 안정되고 세심하며, 자신의 일과 자유에 그다지 헌신적이지 않은 남 자와 말이다. 젊은 시절의 자유가 노년의 고독으로 둔갑하다니, 이 얼마나 웃기 는 일인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녀가 그리웠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이 너무도 아쉬었다. 그는 회한과 자기 연민에서 빠져버린 스스로를 비웃었다. -언제부턴가 늙고 가련한 멍청이로 변해버렸어. 이윽고 비애에 가득 찬 백일몽에 진저리를 치면서 차에 시동을 걸 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까 그 승용차는 길 건너편 멕시코 음식을 파는 '타코 벨'에 세워 있었다. 데일리가 움직이자 그 승용차가 즉각 따라붙었다. 그는 66번 도로를 타고 시내에서 빠져나가다가 495번 도 로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갑자기 차를 돌려 북서쪽으로 향했다. 승용 차가 차량의 물결을 헤치면서 기를 쓰고 뒤를 쫓아오는 모습을 백미 러로 지켜보는 게 참으로 재미있었다. 비록 그 회색빛 승용차가 유일 한 꼬리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체비 체이스 메릴랜드를 거쳐 다시 워싱턴 시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위스콘신 대로로 차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곳은 조지타운으 루 밤의 환락을 추구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은 군중들로 술집과 레스 토랑의 테이블이 항상 붐비는 유흥가였다.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운전대를 돌리다가 다시금 시외곽 지대로 빠져나왔다. 장시간 운전대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 점점 더 지겹고, 졸음이 쏟아졌으며 또한 피곤해졌다. 생각이 다시금 그 여선생에게로 흘러갔다. 그는 어리석게도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사랑스런 아내가 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자식들을 낳고 지금쯤은 손자까지 보았으리라. 그랬다면 매년 려는 가을도 더 이상 외롭고 스산하지 않구 또한 배리의 우정에만 매 달리지도 않았겠지. 배리는 정말 훌륭한 여성이었고, 그는 그녀를 마 치 피붙이처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없 었다. 그 사랑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과거에 그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더라면, 지금 죽는 게 이처럼 두 렵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를 위해 잘된 일인지 몰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헐 떡거리며 숨을 쉬는 늙은 방귀쟁이를 돌봐줘야 할 테니까.~1 무심결에 내뱉은 자신의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라 상념에서 벗어 났다. 대체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니 창고 건물들 로 사방이 에워싸인 어떤 공업 단지였다. 창고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하역장에는 거대한 트레일러 트럭들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거대한 짐승처럼 흥물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 데일리의 자동차와 그 뒤를 따르는 미행 차량만이 그 황량한 거리 를 달리는 유일한 차였다. 데일리는 매번 모퉁이를 돌 때마다 방향 감 각을 상실하면서 그 콘크리트 미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갔 고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젠장? 그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승용차가 그의 퇴 로를 막고서 점점 거리를 좁혔다. 본능적으로 U턴을 하여 그 승용차를 지나치려는 순간, 그쪽 운전사 역시 차를 급하게 왼쪽으로 돌려 그 앞을 가로막았다. 데일리는 승용 차 옆을 들이박지 않으려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그 승용차를 들이박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랐다. 자동 차 충돌 사고를 일으키고 그 틈을 타 기적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기회 를 지레 겁을 먹고 쉽게 포기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두려웠다. 승용차 에서 나와 점점 다가오는 세 명의 성난 남자들에게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10분 늦었잖아요" 여인의 앵돌아진 목소리가 트레일러 벽을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그레이는 이를 바드득 갈며 욕지기를 터뜨렸다. '기런,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재수없게도, 침대 차를 가진 호색한을 택한 거요 자, 서두릅시다? 그는 트레일러 방 안에서 운전석 위로 이어지는 간이침대 위로 그 녀의 구두, 옷가지, 쇼핑백, 손가방 들을 던져올렸다. "저 곳으로 올라가시오, 어서," "싫어요 저긴 꼭 관 같단 말웨요"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맨무릎을 잡구 다른 한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잡고서 그녀를 간이침대로 올려보냈다. 간이침대의 매트리스와 천장사이의 거리가 불과 30여 센티미터 밖에 안 돼 보였다. 침대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여분의 침구와 베개들 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이는 듯했다. 곧바로 그레이 역시 베개, 담.s, 그리고 침낭 사이로 기어올라왔다. "뒤로 좀더 들어가시요" 배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 온 신체의 부분을 최대한 줄였다. 두 남녀가 트레일러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여자의 불 평이 흘러나왔다. "난 이런 어리석은 짓거리에 넌더리가 나요 왜 모텔에 가지 않는 거예요? "그건 이 트레일러가 좀더 은밀한 장소기 때문이야." "그리고 돈도 안 들죠" "당신, 이건 돈 문제가 아니야. 솔직히 모텔에 가면 기록을 남기잖 아. 설마 우리 관계가 내 마누라에게 발각되는 걸 바라지는 않겠지?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그레이는 둘둘 말린 침낭과 베개들 을 간이침대 끝에 필사적으로 늘어놓았다. 그 결과 다행히 남녀가 트 레일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것들로 자신과 배리의 몸을 가렸다. 그러고 나서 배리를 더 구석으로 몰아놓교 순식간에 누비 이불로 두 사람의 몸을 덮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면 이곳은 정말 숨쉴 공간도 없이 꽉 들어 차겠군_9-" '지, 뽀족한 수라도 있소? 하지만 그녀는 좋은 수가 있다 해도 그걸 말할 틈이 없었다. 뒷문이 활짝 열리고 실내등이 켜졌다. 남자가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의 몸무게로 인해 차체가 다시 뒤뚱거렸다. '저디 한 번 시작해 볼까?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싱글거렸다. '래 사랑, 오늘 밤에는 화끈한 다이나마이트처럼 보이는걸? 블라우 스 새로 샀어? "맘에 들어요? "맘에 들고말고! 그런데 그걸 얼마나 빨리 벗을 수 있지? "당신은 짐승이야." 잠시 뒤 문이 닫히고 불이 꺼졌다. 이어서 갖가지 소리가 연달아 들 려왔다. 웃음소리, 한숨소리, 걸쭉하게 입을 맞추는 열정적인 키스 소 리, 옷가지들을 벗는 바스락 소리, 지퍼가 열리는 날카로운 소리, 그리 고 낮은 신음소리. "당신은 아주 귀찮은 남자예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자기, 좀더 이리와 봐." 다시 신음소리와 쪽쪽거리는 키스 소리가 이어졌다. 남자가 숨을 헐떡거렸다. "난 지금 터질 것만 같아. 어서, 해.두,,,,,." '저 위로 또 올라가야 해요? 여자가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난 저곳이 싫어요 저번에는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단 말예요" "좋아, 좋아, 어서-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요! 그걸 찢으면 안 돼요! 당신이 2분의 I초만 기다리면 내 가 벗을게요" 다음 순간 그 빌어먹을 녀석은 이미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듯했 다. 이어서 두 몸이 엉겨붙어 어딘가에 몸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는 그것이 바닥인지 벽인지 알 수 없었거니와 굳이 알고 싶지 도 않았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도저히 지을 수 없는 이미지 가 눈앞에 뱅뱅 돌았다. 두 남녀의 야릇찬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해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무의식적인 반응을 억누르려고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귀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배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몸이 굳은 채 꼼짝 않고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는 그녀의 정적을,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생생하게 느 꼈다. 머리의 샴푸 냄새에서부터 자신의 무릎에 와닿은 발가락의 감 촉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뚜켠이 의식했다. 빌어먹을! 트레일러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도색영화의 장면들 을 고스란히 현실로 옳겨놓은 듯했다. 한무리의 사내들이 모여 캔맥 주를 비워가며 침을 질질 흘리며 관람하는 남성 전용 영화를 보는 기 분이었다. 싸구려 포르노 잡지에서 원색적인 용어로 설명한 밀회의 내용과 딱 맞아떨어졌다. 예술적인 가치는 전혀 없는 환상 말이다. 아 니, 에로틱한 멋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작품이었다. 유치하구 천하기 짝이 없는-. 저런 죽일 것들! 그레이는 온 몸이 용광로처럼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의 몸이 성적으로 흥분하는 이유는,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일보다는 자신과 함께 엉겨붙어 누운 배리의 탓이 컸다. 그녀는 반나 체였고 그는 옷을 완전히 입고 있었는데, 그 상황 자체가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요소였다. 그 발견의 위험은 그가 여섯 살 때부터 다시 없는 유혹으로 와닿았다. 목사의 여덟 살 난 딸과 함께 그애 아버지의 복숭 아 과수원에서 아담과 이브의 놀이를 할 때부터 말이다. 게다가 대자 연은 얄궂게E,남자가 흥분 상태를 다스리지 못할 상황일수록 남성 이 더욱 꼿꼿해지도록 장난기 어린 수작을 부려놓았다. 아래의 남자는 수당나귀처럼 소리높여 울더니 끄르렁거렸다 "자기, 좋았어? "아누 좋았다고 하기 전에 저주를 퍼부을 거예요" "걱정 마. 내가 이제 재미있게 해줄 테니까. 콘돔도 많이 준비했고. 일을 하러 떠나기까지 시간이 45분이나 남아 있단 말야." 45분이라니! 그레이는 그렇게나 오랫동안 견뎌낼 -신이 없었다. 배리는 어떨 까? 그녀 역시 뭔가 영향을 받지 않을까? 그는 목에 와닿는 그녀의 숨 결을 느꼈다. 빠르고 뜨거운 숨결이었다. 그녀도 흥분할 걸까? 그녀는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아주 조금씩. 그녀의 가슴 위로 구부렸던 무릎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괜한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보니 그게 아니었 다, 이윽고 그녀의 무릎은 그의 혁대 버클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힘들게 조금뤽 몸을 움직여 잔뜩 성이 나 있는 그의 남성 위로 무릎을 붙였다. 그러고서 정강이를 그의 허벅지와 무릎 사이로 내려 보내 마침내 그의 배와 자신의 배를, 그의 다리와 자신의 다리를 하나 가 되게 했다. 남성과 여성으로서 말이다. 그녀는 서서히 머리를 그에게 기울였다. 한 번에 아주 조금씩 움직 이는 것 같았다. 결코 상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뜨거운 입김이 그의 목이 아닌 입으로 전해졌다. 비록 이불 속이라 사방이 어두웠지만 그 는 배리가 자신을, 특히 자신의 입술을 뚫어지게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해버리면 넌 바보가 돼! 하지만 그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 키스를 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벌렸지만, 그를 열정적이고 무모하게 몰아가기 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이러면 안 돼, 본듀란트! 하지만 내면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기도 전에 그의 혀는 그녀의 입 술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달콤하구 비단결 같구 생기 넘치는 그 입술 로 동시에 그의 손길은 소리없이 그녀의 등을 더듬어내려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자신의 몸에 꽉 밀착시켰다. 이젠 그녀와 잔뜩 부 풀어오른 그의 바지를 가로막는 것은 엷은 비단 천 한 장뿐이었다. 그 녀는 엉덩이를 슬그머니 들썩거리며 그의 튀어나온 바지 앞설에 팬티 를 비벼댔다. 순간 그의 목에선 목소리라기보다는 진동음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 나왔다. 순간 그녀와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는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붙이고 소리없이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썼다. 심장이 격렬 하게 뛰는 통에 그런 믐짓은 부질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래의 두 남녀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두 남녀는 어 리석고. 경박한 언어의 전희에 열중해 있어 그럴 틈이 없었다. 가끔씩 터져나오는 여자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멈칫했을 뿐이었다. 그레이는 오로지 배리에게 걸쭉하고 진하게 키스를 하는 데만 열중 했다. 그녀에게 몇 번이나 키스를 했고 또한 혀가 그녀의 입 안을 몇 번이나 파고들었는지 세어보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의 입술에서 결코 떼지 않았다. 혀를 멈추고 숨을 쉬어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순간에조차 그녀는 고개를 세우고 혀끝으로 그의 윗입술을 간지럽혔 다. 그는 그녀에게 푹 빠져,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을 때까지 그녀가 지분거리며 장난을 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입 안으로 혀를 깊이 밀어넣었다. 그녀를 꼭 붙 잡고 그녀의 가랑이와 자신의 남성의 자리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머물렀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녀와 사랑의 유희를 벌였다. 정 녕 감미로운 천국이요, 거룩한 지옥이었다. 이제껏 그가 경험해온 성적 결합 중 이처럼 지속적이고 격렬하며, 친밀하고 만족스러우며 절망적인 만남은 없었다. 이 상태에서 폭발적 인 절정으로 이끌어 영원토록 지속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은 그나 배리의 몫이 아니라. 아 래에서 몸부림치는 낯선 두 남녀의 몫이었다. 이윽고 트레일러의 문이 열리고 실내등이 켜진 순간에야 비로소 그 레이의 의식도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 다시 문이 닫히고 밖에서 잠 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남녀는 문 밖에서 머뭇거리며 다음 밀회의 계획을 의논하다가 결국은 여자가 승리를 거뒀다. 그 남자는 마지못 해 여자와 모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배리와 그레이는 가만히 누워, 그 부정한 연인들의 서글픈 이별의 대화를 어쨀 수 없이 들게 되얼다. 마침내 막간의 촌극이 끝나고, 남자 는 트럭 운전석으로 올라와 운전을 시작했다 차가 움직이면서 스피커가 '꽝꽝' 울리자 그레이는 이불을 젖혔다. 그러고는 배리의 눈길을 애써 회피했다. 상황이 끝난 지금, 그는 그 옛날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목사 딸과 함께 노는 장면을 그녀의 아버 지에게 들켰던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먼저 간이침대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재려와서 옷을 입으시요" 목소리가 무뚝뚝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 말을 부드럽 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이제껏 배운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군대에서 그는 적의 고문을 견뎌내는 법이나 육체의 고통에서 마음을 단절시키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 무적의 해병대도 배리 트래비스 란 여성의 매력에 굴복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아래로 기어 내려왔다. 라디오에선 '가스 브룩' 이 친구들과 함께 빈민가에서 위스키나 맥주를 마시는 방법을 담은 노래를 불러댔다. 그레이는 그런 소음이 차 안을 황황 울리는 것이 오 히려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 소음은, 배리가 간호사 제복을 입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하고 어색한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레이도 재빨리 낙하복을 걸쳐입고 지퍼를 올린 후 머리에 모자를 썼다. 배리는 옷을 다 입고 나서 의자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가방을 간이 침대에서 끌어내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어둠침침한 조명 속에서 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럽게 쳐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당신이 내게 키스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런가? "그런데도 당신은 그 점에 대해 할말이 없나요? "그렇소" "왜죠? '개냐하면 우리는 이제 곧 미합중국의 영부인을 납치해야 하기 때 문이요 우린 작전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하지." "작전? 그레이, 난 여자예요 당신의 특공대 부하가 아니라구요" '지곳에 오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었소 만일 내 지휘가 마음에 들 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시요 난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단 말이요 그러니-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제발요" "뭐요? "자기, 이번에 좋았어? 그는 미소를 짓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나지막하게 너털웃음을 토해냈다. "입 닥치시e,배리."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그녀는 부드럽고 새침스러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이 원할 때 남자를 사로잡았음을 아는 여성만이 짓는 그 런 미소였다. 이후로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즈음, 차가 다시금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운전사는 라디오를 끄고 초소 앞에 서 차를 세웠다. 그레이는 그녀를 건너다보며 속삭였라. "자, 마침내 도착했소" 세 남자 중 두 남자가 데일리의 운전석으로 다가왔고, 한 남자는 조 수석으로 다가왔다. 세 남자가 동시에 양쪽 차문을 열었다. "웰시 씨? "댁들은 대체 누구시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데일리의 팔을 잡고 그를 차 밖으로 끌어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풀썩하는 소리가 들리 자 데일리가 돌아보니 돌리의 가슴에 잭나이프가 꽃혀 있었다. 데일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끼봐쪼 꼭 그럴 필요가 있소? 대체 당신들이 뭔데 그러는 거요? 하지만 숨쉬기조차 힘이 드는 상황에서 목소리에 힘을 준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의도와는 달리, 목소리는 미약하기 그지없어 그는 허탈감에 젖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세 남자는 전혀 웃지 않았다. 사실 그들 삼인조는 데일리가 만난 이들 중에서 가장 험상궂게 생겼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무심 결에 '묵시록'에 나오는 말을 탄 네 명의 기사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그에게 배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우린 FBIS-" 데일리는 그들이 스펜서 마틴의 부하들일 거라고 생각하며 냉소적 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실 줄 알았소" '쩽시 씨, 우린 당신을 저녁 내내 뒤쫓아 다녔소" 셋중에 우두머리인 듯이 보이는 작자가 말문을 열었다. "설마 우리가 이런 우습지도 않는 인형 때문에 당신을 뒤쫓아다닌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린 멍청이가 아 니요 말도 하지 않교 움직이지도 않는 여자라!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 그 질문은 합법적인 질문이오? 아니면 당신의 성생활에 대한 설명이오? 하지만 그 재치있는 말에 그 남자는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 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데일리의 뒤로 돌아서서 그의 몸을 자동차 범 퍼 위에 납작 엎어놓고 두 손을 뒤로 꺾어 플라스틱 줄로 묶었다. '개체 무슨 죄목으로 날 체포하는 거요? 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소 공기로 부풀린 인형을 좌석에 앉혀 돌아다닌 것도 죄가 된단 말이오?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요? "우린 당신의 동거인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오." "무슨 동거인을 말하는 거요? 다른 요원이 우두머리에게 충고를 했다. "그의 코에서 튜브를 빼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협조를 할 겁니다." 데일리는 가슴이 얼어붙는 공포를 애써 물리쳤다. 그들이 그에게서 산소 탱크의 튜브를 례어버리면 죽은 목숨이었다. 우두머리란 작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데일리는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의 힘이 빠졌지만, 우두머리의 그 다음 말에 괜스레 섣불리 안도했음을 깨달았다. "우리 대장은 당신과 당신 친구들에게 잔뜩 화가 나 있소"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눈 하나 깜짝 할 것 같소? 도대체 스펜서 마틴은 뭐가 겁 나서 직접 날 잡으러오지 않는 거요? 그가 혹시 본듀 란트를 겁내는 건 아니오? "스펜서 마틴이라니? 그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텔레비전의 뉴스도 안 보시오? 마틴 씨는 개인적인 볼일로 백악관을 잠시 떠났단 말이요" "아, 공식적으로야 그렇지. 그가 멍청이 같은 당신들을 최고로 야비 한 인재들이라고 뽑은 거라면, 그도 이제 갈 데까지 다 간 셈이군." 그러자 세 남자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데일리는 너털웃음을 토해냈다. '재? 내가 당신들을 깜짝 놀라게 했나? 당신들은 그게 비밀인 줄 알 았소?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요" 우두머리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져보시오 노인 양반, 당신은 당신의 그 패거리와는 다르잖소? 당 신은 현명한 사람이라 우리에게 협조할 수도 있을 거요 오늘 밤 배리 트래비스와 그레이 본듀란트는 대체 어디로 갔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요? "차라리 날 죽여라, 개똥 같은 놈들아." 금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다 른 사내가 얼른 막았다. 우두머리가 씨근거리며 소리쳤다. "웰시, 그들은 지금 어딨어? 데일리는 이제 궁지에 몰려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들에게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 사내 들은 단순히 그의 심문자일 뿐만 아니라 처단자이기도 했다. 그의 임무는 이 나쁜 녀석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그레이와 배리가 바네사 메리트를 테이버 하우스에서 탈출시킬 시간을 벌어주 는 것이었다. 그가 숨을 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의 임무는 성공한 셈이다. 어쩌면 영광스런 최후는 되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명예로운 종막은 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반항적인 태도가 잘 먹혀들지 않는 것 같아 작전을 바민 졸도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 머리가 어지럽군." "그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면 당신을 편히 쉬도록 해주겠소" -그래, 영원한 안식을 주겠지. "모텔이라 했소" '지름은 뭐요? 어디 있는 거지? "그건 모르겠소" '저디냔 말이오? '지싱턴 무슨 모텔이라고 했는데- '지싱턴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모텔이 어디 한두 갠 줄 아시오? "물론, 한두 개는 아니지 그런데 대체 몇 개나 되는데 그러시오? 그러자 우두머리는 데일리의 멱살을 잡고 그의 발끝이 땅에 떨어질 정도로 들어올렸다. "트래비스와 본듀란트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당신의 기 억을 빨리 되살리는 게 좋을 거요" 데일리는 목이 콱 막혀 캑캑거리며 더듬거렸다. '勺곳은-, 앤드류 공군 기지로 가는 길에 있소 난 그들과 그곳에 딱 한 번만 가보았기 때문에 그곳의 위치를 정확히는 기억 못하겠소 하지만 그 근처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거.Q-" "좋소 그럼 어서 갑시다." 남자는 데일리의 튜브가 콧구멍에서 빠져나을 정도로 거칠게 내려 놓고 떠밀었다. '내 산꼬 난 저게 있어야 한단 말이외" 데일리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그 사내들에게 붙잡힌 채 발버 등을 쳤다. "진정하시오, 웰시 씨. 우린 당신이 질식사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소 적어도 당신의 친구들이 오늘 밤 뭘 계획하고 있는지 알 아낼 때까지는." 그의 콧구멍 속에 다시 튜브가 끼워졌다. 사내들은 데일리의 산소 탱크를 자동차에서 꺼내어 데일리와 함께 회색빛 승용차로 옮겨 실었 다. 그가 승용차의 뒷좌석으로 떠밀려 들어갈 때, 돌리의 잔해도 그곳 에 옮겨진 것을 발견하고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최소한 혼자 죽지는 않을 운명이었다. "누군가 당신을 가로막고 묻는다면 이번에 새로 충원된 개인 간호 조무사라고 말하시요" 그들의 부정한 운전사가 트럭을 떠나 일터로 가버린 뒤에도 그레이 는 장장 10분 동안 배리에게 주의사항을 들려주었다. 예상대로 정문 경비원들은 트레일러를 스치듯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었 다. 덕분에 그레이와 배리는 일단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지만 아직 병 원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는 가짜 이름이 인쇄된 핀으로 꽃는 ID카드를 꺼내어 그녀 에게 건네주었다. '지걸로 정밀 검사를 통과할 순 없겠지만 언뜻 봐서는 진짜처럼 보 일 거.9-" 그녀는 자신의 가명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돌리 매디슨?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인형과 데일리가 무사했 으면 좋겠어요" "그 인형은 잘 해낼 거요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보안 카메라 에 잡히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요 즉, 주변에 사람이 없 더라도 누군가 우릴 감시할 수 있소 그러니 걸음걸이도 자연스럽게 하고,,,, ,, " "나도 알아우 일키 아까부터 그 얘길 열두 번도 더 했을 거예요" "난 단지 우리가 바네사를 발견하기 전에 총알받이가 되는 걸 원치 않을 뿐이_p_" "건물 안에도 경비원이 있나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그들이 무장하고 있을까요? "아마 그럴 거요 그들은 분명 비밀 경호요원들일 거요 하지만 그 들은 내가 처리하겠소" "한 가지만 더요 일단 우리가 바네사를 찾으면 이곳을 어떻게 빠져 나갈 생각이죠? "계획 하나, 내가 이 트럭에 시동을 걸겠소 그러면 당신과 바네사 는 이걸 타고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요" "그럼 계획 둘은 뭐죠?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을 거요" 그녀가 샐쭉거리며 중얼거렸다. "참 대단하시군요" 트레일러 문을 먼저 열고 나간 사람은 그녀였다. 테이버 하우스는 그레이가 설명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곳이었 다. 한가운데 정원을 중심으로 U자형으로 세워진 그 병원은 3층 건물 이었다. 그들은 웅장한 입구를 피해 그레이가 낮에 정찰을 하면서 점 찍어둔 직원용 옆문으로 들어갔다. 마침 의사들, 간호사들, 다른 직원 들이 퇴근을 하고 야간 근무조의 직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는 동안, 그레이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소 당신은 여기서 조금 기다렸다가 내 뒤를 - 라오시.- "당신을 따라 어디로 오빠는 거예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걱정 마시요 내가 당신을 찾을 테니까."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가 돌아섰다. "배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만이라도 이곳에서 도망치시오. 내 말 알겠소? 누군가의 차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들어왔을 때와 똑같 은 방법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란 말이_P. 알겠소? 그녀가 삐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않겠단 뜻이오? 때1."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돌아서서 다른 직원들 틈에 끼어 건물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방을 열고 비디오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확인했다. 새로 갈아긴 테이프가 제대로 끼워졌는지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역사를 창조하는 이 순간에 카메라 에 테이프를 넣는 것을 깜박 잊으면 그야말로 낭패 중에 낭패였다. 입구로 걸어가는 동안, 수천가지 걱정과 불안이 엄습했지만, 한 가 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이 일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바네사 메 리트는 이곳 어디에선가 죽고 말리라. 해서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구 위에 설치된 여러 각도에서 강한 빛을 뿜어내는 '투광 조명등'을 뜰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 조명등이 등대가 되어 위험한 암초 지 대 사이로 배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듯이 자신을 인도해주길 간절히 빌었다. 예전에 테이버 하우스가 개인 저택이었을 당시, 더러워진 신발이나 옷을 벗어두는 곳이었을 법한 장소를 지나쳤다. 그 곁방은 직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드넓고 환하며 설비가 잘 돼 있는 매점 휴게실로 통했다. 그곳에는 음식과 음료수, 커피 등을 파는 각종 자판기, 각빙 기, 여러 대의 전자 오븐과 전자 레인지, 탁자와 의자, 그리고 두 군데 의 부속 휴게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금속제의 사물함 이 붙어 있었고 또 다른 쪽 벽면에는 어디에서나 읽어볼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글씨로 쓴 의사와 간호사의 명단과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근무 교대도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점차 뜸해 졌다. 잡역부처럼 차려입은 남자가 전자 레인지에 음식을 넣고 덥히 고 있었다. 공중 전화 박스 앞에서는 어떤 간호사가 전화통을 붙잡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또 다른 간호사는 자신의 사물함을 열고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그레이처럼 낙하복 차림 의 두 남자가 탁자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터빈 엔진'에 대해 떠들어댔다. 아무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밤 11시마다 마 치 그렇게 하듯이 심드렁찬 태도로 그곳을 지나쳤다. 그곳을 지나치자 병원의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물건이 잘 팔 리지 않는 삭막한 매점은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뭔가 경직되고 형식 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복도로 통했다. 복도의 벽은 파스텔 풍의 벽지 가 붙어 있었고. 그 위로 징두리 벽판이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었다. 놋쇠 반사등으로 불빛이 무척 은은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 다. 배리는 흘을 따라가다가 그 흘과 엇갈리는 복도와 마주쳤다.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쭈볏거리는 기색없이 당당하게 행동해야 해. '이니 미니 마이니 모우, 어느 쪽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봅시다? 옳지, 오른쪽이다. 그녀가 선택한 복도는 건물의 정면과 연결되었다. 그곳에는 불 꺼 진 사무실, 접수처 겸 응접실에는 소형 그랜드 피아노와 대형 등나무 탁자와 의자들 사이로 열대 식물들과 고사리류들이 가득 찬 일광욕실 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광경은 환상적으로 멋졌지만, 의료 시설과 관 련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커다란 곡선을 그리는 거대한 계단과 대리석 바닥에서 15미터 높이 에 설치된 채광창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둥근 천장의 흘 중앙에는 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글라디올러스 줄기가 1미터가 넘 는 높이로 힘차게 뻗어 있었다. 그 거대한 흘 안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곤 벽의 콘센트 앞에 무릎 을 꿇고 앉아 드라이버로 뭔가를 어설프게 고치는 건물 관리인뿐이었 다. 배리는 원형 탁자를 돌아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재가 코카인 중독자만 돼도 맘놓고 이곳에 머물 수 있을 텐데." "중독자가 되는 게 그리 쉬운 줄 아시오? 관리인 차림의 그레이가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 1층에는 사무실과 회의실밖에 없소" '기록 보관소일까요? "틀림없이 그럴 거요 그 자료함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 있을 거요 하지만 난 좌물쇠 따기 도구를 갖고 오지 않았거니와 그짓을 하려면 시간이 왜 걸리지." "그렇다면 이제 우린 어떻게 하죠? '검퓨터 단말기를 이용해야 하요 병원측은 환자의 명부를 항상 컴 퓨터로 점검하고 있을 거-9-"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그럼 이제 2층으로 올라가야 하겠군요" "당신은 엘리베이터를 타시요 난 계단을 이용하겠소" "2층에서 봐요" 철제 우리 비슷한 엘리베이터의 장치들은 기계 설비라기보다는 차 라리 장식품에 가까웠다. 배리는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개층만 을 라가는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정교한 철제문을 나서서 왼쪽으로 꺾어지다가 어떤 간호사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간호사는 배리를 보고 배리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거기서 뭘 하고 있죠? 그곳은 죽음의 함정인데? "아, 난 신참이에.- 배리는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어렵지 않은 연기였다. "다음번에는 급행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겠어요 돌리 매디슨이라 고 해요" 배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제발, 내 이름을 갖고 농담하지 말아주세요 정말이지, 그 런 농담에 시달려 귀에 진물이 날 정도거든요" '씬다 아놀드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때 배리는 막 층계를 올라오는 그레이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 그 녀가 간호사의 주의를 끈 덕분에 그는 담당 간호사의 책상 뒤로 무사 히 다가갔다. 주변에 그 간호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간호사가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일을 시작했죠? 배리는 매점에 붙어 있던 근무 당번 전화번호표에서 본 이름을 재 빨리 떠올렸다. "오늘이 첫 출근이에요 해들리 박시럼께 배치되었죠" '해들리 박사럼은 6개월 간의 휴가를 보내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네, 물론 그는 지금 휴가 중이시죠" "그가 아니고 그녀겠죠" '게, 난 그녀라고 말한 거예요" 배리는 린다 아놀드의 팔을 잡고 가까이 다가섰다. '끼건 우리끼리 얘기지만, 그 박사님의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진 않 을 거예요 그분은 책을 집필하시기로 돼 있지만 과연 그분이 그 책을 집필하실 수 있을지는 미지수랍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어머나, 놀라운 소식이군-9. 그분은 이미 책을 많이 내셨는데, 이번에 또 책을 쓰신다는 건가요? '게, 그렇다니까요" 배리는 말을 하면서 해들리 박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저 술 장애증'에 걸려 있길 빌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상상 외로 고전하고 있죠" "그러시다니 참 안됐군요 그녀는 남에게 나눠줄 수 있는 걸 많이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의사이시기도 하죠" '게, 그래요 그분은 참으로 소중한 분이에요" 배리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그레이의 등을 힐끔거렸다. 그는 책상 위로 등을 구부리고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컴퓨터 단말기 를 조작하고 있는 걸까? 간호사가 대뜸 배리가 어깨에 멘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가리켰다. "그건 뭐죠? '해들리 박사님을 위해 모으고 있는 연구 자료들이에요" "그게 다 그거란 말예요? "아, 사실, 어딜 가든지 다이어트 식품인 '슬림 패스트'를 갖고 다닌 답니다. 집에서 나을 땐 언제나 두 개 이상은 들고 나오죠 게다가 여 분의 구두를 갖고 다녀야 해요 엄지발가락 안쪽에 심하게 염증이 생 겼거든요 그리고 이 가방에 잡지들이 없는 날이 없죠 이상이 내 일상 적인 소지품들이랍니다. 어휴, 말도 마세요! 난 언제나 이 소지품들 때 문에 남편에게 놀림을 받는답니다." "아래층에 사물함을 배정받지 않았나_Q?" '게, 하나 배정받긴 했죠 하지만 거시기-. 배리는 다이얼 좌물쇠를 손짓으로 해보였다. "그걸 제대로 조작할 수 없더라구요 그걸 다루는 법을 터득하기 전 까지는 이 쓰레기들을 항상 들고 다닐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때 린다 아놀드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제 보니 왠지 얼굴이 눈에 익은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서 봤는 지 모르겠군요" -텔레비전에 나온 날 본 적이 있구나! '해들리 박사님의 조수가 되기 전엔 어디서 일했죠? '져기저기서 일했죠 똑같은 일에 금세 싫증이 나는 성격이거든요" 그때 간호사 뒤에서 그레이가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공작이 끝났음 을 알려왔다. "자, 이제 난 다시 건물 안을 돌아다니며 이곳 시설을 몸에 익혀둬 야 할 것 같아- '재가 도쑤n "아니, 췄어요 혼자 있을 때 일을 더 잘하는 타입이죠" 배리는 '호호'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저 낡고 삐걱거리는 엘레베이터를 다신 타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배웠답니다." "실례합니다." 그레이는 그들에게 다가와 린다 아놀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린다 가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전구를 바꿔달라고 한 분이 당신입니까? "아누 난 아닌데요" "그렇다면 3층 간호사인 게 분명하군. 분명 2者이라고 말했는데, 내 가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요 미안합니다." 그는 모자를 벗고 계단으로 다시 돌아갔다. 간호사 린다 아놀드가 뒤로 돌아서 보니 배리는 이미 감쪽같이 사 라진 뒤였다. 아까 돌리의 짧은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던 뚱한 표정의 사내가 우 두머리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그곳에 없습니다." 그들이 그 모텔을 '찾아내기'까지는 근 1시간 30분이 걸렸다. 데일리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워싱턴 여관 1길호라? 그 요원은 데일리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 방에 있던 트럭 운전사는 내가 잠에서 깨우자 미친 듯이 펄쩍 뛰더군." 데일리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요원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난 정말 이럴 줄 몰랐소 그녀는 분명히 오늘 밤 이곳에서 본듀란 트를 만난다고 했단 말이요" "당신은 주차장에서 그녀를 내려놓지 않았소?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어디로 갔소? "바로 여기요 적어도 내겐 그렇게 말했단 말이요 하나님께 맹세하 건대, 틀림없는 사실이오 난 인형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그 녀의 미끼가 돼주기로 했을 뿐이오." 그러자 한 요원이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거짓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쭉 우릴 농락한 겁니다." 데일리는 연기를 더욱 실감나게 하려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날 해치지 마시오, 제발. 난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해야 했단 말이요 난 그가 무서워서 죽겠소" "누굴 말하는 거요? "본듀란트요 그는, 내가 만일 이 일에 실패하면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소 분명히 그렇게 할 사람이지. 당신플은 그의 눈을 들여다본 적 있소? 정말 소름끼치는 눈이지. 그는 타고난 인간 도살꾼이란 말이요 내가 당신들을 여기로 데려온 사실을 알면 그는 분명 날 죽이고 말 거요" 우두머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이제 그만 집어 치우시오? 그래도 데일리는 계속 애원했다. '제발 날 집으로 데려가 주시요 그들이 여기 없다면 나도 더 이상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소 본듀란트는 아마 내게 거짓말을 한 모 양이오 심지어 배리에게도 거짓말을 한 것 같소 아무래도 그는 그녀 를 함정에 빠뜨린 것 같은데, 여러분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여튼 내가 윌 알겠소? 난 한낱 늙은이에 지나지않소 난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단 말이요" 요원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는 또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우두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젠장, 또 거짓말을 하고 있군. 어서 가세." 자동차에서 우두머리는 카폰을 사용하여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웰시는 모텔에 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여기 없습니다." 그는 잠시 상대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거1,그렇습니다. 그를 직접 상대하시면 저희들이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으실 겁니다." 데일리는 그 말투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이젠 산소 탱크의 바늘이 가리키는 수치조차 불안했다. 그러다가 우두머리가 수화기에서 귀를 떼자 마자 말을 걸었다. '개 장치에 공기가 얼마 남지 않았소" "그건 당신의 개인 문제인 것 같소" 다른 두 남자는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맞 은편에선 돌리가 그 큼지막하게 일그러진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시내로 돌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의 목적지는 평범 해 보이는 사무용 빌딩이었다. 그들이 데일리를 건물 비상구를 통해 안으로 데려가는 동안,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예쁜 달님은 변함없이 환 한 미소로 그를 반겨주었다. 그 정도로도 기분은 좋았다. 그들은 그를 업무용 엘리베이터에 태워 7층으로 데려갔다. 데일리 를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데려가는 동안 그들의 구두 뒤축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퍼졌구 산소 호흡기의 바퀴가 연신 비명을 질러댔 다. 여태껏 그 빌어먹을 물건에 기름칠을 할 시간도 없었다니. 요원 중 하나가 나서서 그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들어오라는 말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데일리는 문지 방 너머로 눈길을 던지면서 바야흐로 자신에게 닥칠 고문과 죽음의 형태를 생각해 보았다. 그 안의 남자는 방의 유일한 조명 기구인 전등을 등지고 있었지만 데일리는 그의 실루엣만 보고도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웰시 씨." 그는 친근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 밤은 무척 바쁘신 것 같군요 지금쯤 산소도 거의 다 떨어지 지 않았습니까? 이런, 우라질! 테이버 하우스의 3층 창고에 있는 파열된 수도관은 두 사람이 바라 는 대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물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방문 밖으 로 간호사들과 간호 조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모여든 사람마다 제각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떠들어댔다. 그중 한 간호사는 '순간 온 수장치'가 파열되기 직전, 창고에서 어떤 관리인이 일하는 것을 보았 다고 주장했지만, 웬일인지 주변에서 그 관리인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일을 벌이기 전에 그레이는 배리를 계단통에 데려다놓고 그곳에 서 잠시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바쁜 척' 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의 곁을 떠났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었다. 하지만 몇 분 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낙하복과 모자는 다시 정장과 넥 타이로 바뀌었고, 수도관이 파열돼 버렸다. 덕분에 그녀는 그가 어디 서 뭘 했는지 그리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자, 갑시 다." 그녀는 그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남쪽 끝 복도에서 벌어진 소동 덕분에 그들이 북쪽 끝으로 가는 동 안 아무도 그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다가 300호 방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두 비밀 경호 요원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총알밥이 되는 순간이야. 배리와는 달리 그레이는 침착했다. "안녕하시a,신사 양반? 그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본듀란트 씨? 그레이는 굳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간 잘 지냈나? "예전에 은퇴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다 말해주겠네. 지금은 우선 메리트 부인을 옮겨야겠어. 저쪽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했거든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영부인에 관해서는 철저한 예방 조치가 필요하지. 대 통령께서는 최대한 조심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길 원한다네." 그러고는 대뜸 한 손을 들어올려 두 요원의 말을 가로막고 손가락 으로 귀에 낀 이어폰을 감쌌다, "아래층에서 준비가 췄다고 하는군. 자, 간호사? 그는 배리를 돌아보며 방쪽으로 고갯짓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대꾸를 하고서 두 요원 사이를 지나가려고 했다. '죄송합니다만, 알랜 박사 외에는 아무도 순간 그레이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손끝으로 그 사내의 뒤통수를 강 타했다. 뒤이은 번개 같은 주먹에 그 사내는 아래로 고꾸라졌다. 다른 요원은 배리를 막으려고 그녀에게 돌아선 상태였다. 그레이는 그의 목덜미에도 당수를 날렸다. 그 역시 힘없이 무너졌다. 배리가 방문을 열자 그레이는 두 요원들의 몸을 방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모두 몇 초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레이는 재빨리 가짜 이어폰 을 내버리고 비밀 경호요원들의 이어폰을 끼었다. 그는 잠시 이어폰에 귀를 기울이다가 허리를 굽혀 정신을 잃은 요 원이 옷깃 밑에 착용한 작은 송화기에다 대고 말했다. "반대편 복도 끝에서 약간의 소동이 벌어진 것뿐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수도관이 파열됐답니다." 그리고 다시 상대편의 말을 들었다. "아니P,그럴 필은 없습니다. 우리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송화기를 끄고 배리에게 말했다. '지붕에 또 다른 요원이 있군." "그가 목소리가 달라진 걸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그레이는 지붕 위의 요원이나 근처 지역에 있을지 모르는 다른 요 원들의 행동을 파악하려고 재빨리 너부러진 한 요원의 양방향 무선 장치를 자신의 옷에 끼웠다. 그러고서 기절한 두 요원의 입을 테이프 로 틀어막고 그들의 손과 발을 등뒤로 돌려 배관 테이프로 바짝 묶었 다. 하지만 누군가 그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점검하러 내려울 때까지 대체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을까? 배리는 그런 염려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레이는 이미 어둠침침 한 방 안을 가로질러 바네사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 섰다, 야윈 몸매는 침대 시트 밑으로 그 어떤 계곡이나 언덕의 형태도 만들어놓지 못했다. 배리는 그레이의 맞은편 침대가로 움직였다. "메리트 부인? 그레이는 좀더 커다랗게 말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바네사,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소? 순간 그녀가 눈꺼풀을 실룩거리면서 눈을 떴다, 그레이를 발견하자, 그녀의 가냘픈 숨결이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오셨군요? "당신을 이곳에서 탈출시키려고 왔소" "그레 이."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이제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진정제를 너무나 많이 투여한 상태라, 그가 그녀의 팔에서 테이프를 뜯어내고 혈관에서 린 도노관을 빼내는 동안에도 꿈 쩍도 하지 않았다. 배리는 바네사의 몸을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무척 심각한 상태 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의 눈두덩이는 마치 두개골을 뚫 은 두 개의 포탄 구멍 같았다. 입술엔 핏기가 전혀 없었다. 그레이는 바네사의 무릎과 어깨를 잡고 침상에서 들어올렸다. 그녀는 마치 그 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개리, 권총을 드시요" 그가 바네사를 들어올리면서 권총을 침상 위에 내려놓았던 탓이다. 배리는 감히 그 총을 만지지 못하고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 무기를 쏘아보았다. 총구에 붙은 긴 소음기는 더욱 섬뜩한 느낍을 자 아냈다. 하지만 그레이의 표정이 그 총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공포스 러워 보였기에 그녀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두 손에 잡히는 그 총은 보기보다 무척 묵직했다. "조심해서 다루시요 안전 장치가 풀려 있소 업무용 엘리베이터는 흘 끝에 있소 우린 그걸 타고 1층으로 내려갈 거요" 그는 기절한 상태인 두 요원을 흘낏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자네들이 정상적인 요원들이라면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스펜서의 부하들이라면 당장 지옥으로 꺼지게." 배리는 그와 함께 문으로 향하다가 물었다. "보안 카메라는 어떻게 통과하죠? "그걸 보지 못했소 당신은 보았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가 우릴 가로막으면 어떡하죠? "그 총으로 쏴버리시오" 그는 태연하게 대꾸를 하면서 그녀에게 고갯짓을 보냈다. "흘을 살펴보시요" 그녀는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퉁이 쪽에서 물이 찬 창고 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복도 는 텅 비어 있었다. 비밀 경호요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아 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깨끗해요"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시오," 그녀는 복도로 나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불이 들어온 판 넬 숫자가 1층에 머물러 있었다. 배리는 엘리베이터가 두 층을 올라오 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시 모퉁이 쪽을 돌 아보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다행히 그 안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그 안에 들어가서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레이는 바네사를 안 고 단 두 걸음에 흘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배리는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지리한 몇 초의 시간 동안 말이다. 마침내 문이 닫히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리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1층에 도착하 고 문이 열릴 때 혹시 누군가가 그곳에 서 있다가 그 두 사람에게 무 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물으면 과연 그 사람을 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용기가 시험받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 각했다. 1층 문이 열렸을 때, 다행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개점에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그쪽에서 말소리가 제법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쉬는 시간인가 봐요" "다른 쪽으로 가봅시다. 출구가 그쪽 하나만 있는 건 아닐 거요 다 른 문으로 나가서 돌아갑시다." '낄광욕실에 좌우로 열리는 유리로 된 프랑스식 문이 있더군요" 그들은 1층 흘을 날렵하게 걸어갔다. 일광욕실의 문에는 빗장이 걸 려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지 문은 보안 장치와 연결돼 있을지 몰라요" '기젠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소" 그녀는 빗장을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귀청을 찢어놓는 듯한 비명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배리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반사 적으로 돌아서서 총을 쏘았다. 그녀가 쏜 총알이 '보스톤 고사리'를 쓰러뜨렸지만 길쭉하고 하얀 새장 안에 갇힌 열대성 새는 계속해서 미친 듯이 소란을 피워댔다. 새 는 깃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형형색색의 색깔로 물든 날개로 활개짓하 면서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들은 사력을 다해 건물 밖으로 달려갔다. 병원의 직원들은 그 새 의 그 날카로온 성질에 익숙한 듯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다. 드넓은 마 당 가장자리를 뒤덮은 건물 그림자에 몸을 묻고 주차장까지 달려갔다. "잠간만? 그레이가 멈춰세우자 그녀는 발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지만, 그레이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이어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송화기를 켜고 마이크로폰에다 대 고 말했다. '찍원용 주차장에 뭔가 있다고? 다른 비밀 경호요원이구나! 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선 거의 잊고 있 었다. 재빨리 지붕을 훌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턱짓 으로 그녀에게 앞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돌아서서 다 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그녀를 뒤쫓아오면서 일부러 당혹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영부인은 괜찮은데." 그러더니 배리에게 소리쳤다. "젠장! 배리, 그가 우릴 발견했어." 그녀는 정신없이 트럭이 있는 곳까지 내달렸다. 이윽고 트럭의 트 레일러 뒷문을 열고 안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레이가 바로 뒤따라 을 라와 바네사를 긴 의자 위에 눕히는 것을 거들었다. "그러고 있으시.- 그는 번개처럼 밖으로 뛰어나가 문을 '쾅' 닫았다. 잠시 후 트럭에 시동이 걸리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초 후, 날카로 운 비상벨 소리가 테이버 하우스를 둘러싼 평화로운 교외 지역을 뒤 흔들었다. "아만다, 파이가 아주 맛있군요 잘 먹었소" 아만다가 빈 디저트 접시를 들고 쟁반에 올려놓는 동안, 데이빗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데이빗. 맛있게 드셨다니 기쁘군요 좀더 드시겠어요? 대통령은 혁대를 두드리면서 넉살좋게 대꾸했다. "아니, 됐습니다. 열량엔 항상 주의해야 하거든요" 그녀는 딱딱한 표정을 띠며 커피를 더 들겠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 게 해달라고 대꾸를 하고 자신의 잔에 커피를 따르는 그녀를 주의깊 게 살펴보았다. 그녀는 실례한다고 말을 한 뒤, 쟁반을 들고 조지와 데이빗을 남겨놓고 거실을 떠났다. "아만다는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잖나? 데이빗의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조지는 술 진열장을 열고서 커피 에 위스키를 섞으면서 물었다. "자네 잔에는 뭘 타줄까? "아니, 난 괜찮네." 대통령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자, 조지의 두 아들은 열떤 흥분 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애들은 대통령에게 숙제를 봐주고, 다음날 학 교 친구들에게 보여줄 글을 써달라고 졸라댔다. 하지만 아만다는 두 아들을 침실로 쫓아버리고, 거실에서 조지와 대통령에게 파이와 커피를 대접했다. 그녀의 행동은 언제나 찬바람이 돌았지만. 데이빗은 그 쌀쌀맞은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그래왔듯이 그녀의 태도를 무시했구 그렇듯 고드름 같은 여자와 결혼한 조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는 위스키를 섞은 커피를 들고 소파로 돌아왔다. 데이빗은 정 교한 도자기 커피잔이 덜덜거릴 정도로 조지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조지, 왜 그렇게 긴장하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자네가 무슨 죄 책감에 빠져 있는 걸로 착각하겠군." 조지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여기는 왜 찾아왔나? "LH가 가장 친한 친구의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존재란 말인가?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닐세." "좋아. 그렇다니 다행이군." 데이텟은 아직 입도 안 댄, 커피를 차숟갈로 슬슬 저었다. "이번에 의회가 제출한 보건 법안에 대한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어 서 왔네, 난 의사로서의 자네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니까,,,..." 조지는 갑작스레 경계심을 늦추니 맥이 쭉 빠져 말을 더듬었다. "난--그 법안을 대강만 알고 있네." "그 정도라도 자네라면 나름대로 의견이 있을걸세. 그걸 어떻게 생 각하는가? 순간 전화가 울렸다. 조지는 소파에서 펄잭 뛰다시피 일어나 수화 기를 들었다. "여보세.a,알랜입니다." 그는 잠시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 대꾸했다. "그렇소, 여기 계시오." 조지가 돌아서서 데이텟에게 수화기를 내밀면서 속삭였다. "긴급 사태라고 하는군." "스피커폰 버튼을 눌러주게," 조지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말대로 했다. '져보시오 대통령이요" 영부인이 테이버 하우스에서 들려 나갔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들려 나갔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납치당했다는 뜻입니다. 각하. 영부인께서 납치당했습니다- 데이텟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라고? 전화선 반대편의 재수가 지독히도 없는 전령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 다. 대통령이 성난 목소리고 라구 다그쳤다. "대체 그 빌어먹을 비밀 경호요원들은 윌 하고 있었지? "그 요원들은 묶여 있었습니다. 메리트 부인은 병실에서 들려나와 차량에 실려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각하, 그 작전은 숙달된 솜씨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졌습니다. 병원 경비원들과 비밀 경호요원들은 정문에서 그 납치범들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영부인이 다 칠까 봐 감히 차량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습니다. 그 트럭은 경고 사 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차를 몰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잘애물 을 부수고 병원을 탈출했습니다." 그 요란한 통화 내용을 듣고 아만다가 거실로 다시 들어섰다. 데이 빗은 그녀가 그 소식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이란 걸 예리하 게 알아차렸다. '재체 누가 그 짓을 벌인 거지? 어떤 테러범인가? "용의자는 그레이 본듀란트와 배리 트래비스로 밝혀졌습니다." , 데이텟은 그 소리를 듣고 허파 속에 남아 있는 숨을 단번에 토해내 는 듯했다. "세상에! 그레이 녀석이 머리가 돌았나?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소리쳤다. "그는 메리트 부인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비밀 경호요원들에게 대 담하게 다가와 대통령 각하를 위해 일하는 척했다고 합니다." '지 멍청이들! 그는 이제 날 위해 일하지 않는단 말일세? 데이빗은 울화통이 터지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를 범죄자로 취급해야 하네! 내 말 알아듣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FBI에도 이미 통보했습니다. 주(外D경찰이 그 차량을 발견했습니다. 그 트럭은 병원에서 수마일 떨어진 간선도로변 의 트럭 전용 주유소에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 도 영부인이나 납치범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차 량을 바꾼 것 같습니다." 데이텟은 좀더 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즉시 백악관으로 돌아가겠네. 그 사이에 내 차로 연락주게나." "알겠습니다. 각하." 데이텟은 전화를 끊고 조지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자넨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하는가? "그건 내 잘못이 아니네. 난 그곳에 없었잖은가? 분명 보안상에 허 점이 있었던 걸세." 계속 데이텟이 고함을 질렀다. '개체 어떻게 된 거이? 지금까지 바네사를 자네에게 맡길 때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다니? 그때 문가에서 아만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끼 일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바로 당신이에요, 데이빗." 조지가 소리쳤다. "아만다? 데이빗은 감히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그 거만한 암캐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녀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데이빗은 손사래를 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만두게, 조지. 즉시 백악관으로 돌아가봐야 하네. 나와 함께 가 겠나? "물론이지." 그들이 현관문 밖으로 나가보니 문 옆윽 지기고 있던 비밀 경호요 원들도 이미 비상 사태의 소식을 플었는지 보두들 바짝 긴장하고 있 는 모습들이었다. 경호 차량들이 앞뒤를 에워싼 대통령 전용 리무진 은 커브길에서 대기 중이었교 선두에는 네 대의 경찰 모터사이클들 이 포진하고 있었다. 자동차 행렬이 펜실바니아 대로를 향해 거리를 질주하는 동안, 데 이빗은 운전사 뒤로 방청 유리가 올라왔는지 확인하고 조지에게 돌아 앉아 껄껄 웃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 말대로 그가 일을 벌였군. 그레이는 극적인 구출 작전을 감행할 만큼 고귀한 작자, 아니 미친 작자라고 내가 말했잖나? 조지 알랜은 창밖의 허공을 노려보면서 대꾸했다. "그래, 데이빗, 자넨 내게 그렇게 말했지," "난 그가 그녀를 그곳에서 탈출시킬 줄 알고 있었네. 스펜서의 부하 들이 그 늙은이 웰시가 오늘 밤 미끼로 쓰이고 있다고 보고해 왔을 때, 그 탈출 작전이 시작됐다는 걸 눈치챘다네," "자넨 모든 면에서 항상 맞아떨어지는 것 같군." "조지, 자네가 할 일은 제대로 했겠지? "그럼, 오늘 밤 그녀를 떠나기 직전에 그렇게 했네." "효과가 제대로 발휘할까? "그렇다네. 그녀는 리튬에 중독되어 죽게 될걸세." 물론 그 점은 검시를 통해 밝혀질 사실이었다. 주치의나 대통령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아무런 혐의도 받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바네사 가 그레이 본듀란트와 배리 트레비스의 손에 넘어갈 당시, 파이와 커 피를 먹고 있어 알리바이가 명확했다. 그레이와 배리는 결국 납치와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되리라. 바네사의 연인인 그레이는 그녀에게 약을 조심해서 적당량만 복용 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리튬을 너무 적게 투여하면 그 녀의 조울증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발작을 일으키리라. 반면에 리 튬을 너무 많이 투여하면, 특히 진정제와 함께 사용할 때 그녀는 졸도, 혼수 상태, 혹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병원에서는 그녀를 안정시키려 고 어쩔 수 없이 진정제를 투여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레이가 그 약을 어디서 얻었는지 알고 싶어할걸세." 데이텟은 그건 문제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처림 재주와 기략이 무궁무진한 친구가 윌 못하겠나? 훌륭찬 검 찰관은 그레이가 그런 물건들을 구해서 적절하게 사용하고 다시 그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없앨 만큼 영리한 인물이란 사실을 배심원들에 게 쉽게 납득시킬 수 있을걸세," "그래도 난 그들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고 보네, 그들이 바네사를 구하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데 어째서 살해한단 말인가? 데이빗은 가끔가다 조지가 무지무지하게 어리석다는 생각이 스쳤 다. 그 머리로 어떻게 의사 고시에 합격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간단한 문제를 매우 어렵게 만드는 무척 짜증스런 성격의 소유 자였다. "그레이는 바네사를 짝사랑했다가 그녀에게 걷어차인 전력이 있다 네. 당시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 국민 앞에 스스럼없이 드러냈지. 그뒤로 그는 워싱턴을 떠나 쓸쓸한 고독 속에서 상처입은 자존심을 달래야 했지. 하지만 그 동안 그의 적개심은 속으로 곪기 시 작했다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자아는 바네사를 죽이지 않고는 결 코 진정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셈이네." "그러면 배리 트래비스는? "그녀는 그레이를 사랑한 나머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경쟁 상대 를 처치한 거라네. 싱린에서의 사건 이후, 그 두 사람은 사회의 적이 됐지. 따라서 국민들도 그들이 그런 흥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을 기꺼이 믿어줄걸세." 대통령은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지, 이건 정말 기막힌 계획일세. 내가 생각해 봐도 너무나 완벽 하단 말일세. 스펜서는 적을 파멸시키지 말구 적이 스스로 파멸하도 록 하라고 입버룻처럼 말해왔지. 그가 여기서 나와 함께 이 사건을 지 켜볼 수 없는 게 유감이군. 이 소식을 알았다면 정말 좋아했을걸세." 클리트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배리와 그레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헬리콥터의 날개는 이미 돌아가기 시작한 상 태였다. 마침내 그레이가 차에서 튀어나오자 클리트가 소리쳤다. "고맙게도 성공했군! 내 딸은 어떤가? "살아 있습니다." 상원의원은 헬리콥터가 워싱턴으로 날아가는 동안 바네사에게 필 요할지 모르는 각종 응급 치료를 위해 의료진들을 직접 골라 대기시 켜 놓고 있었다. 그녀가 트럭에서 바퀴달린 들것에 실려 밖으로 나오 는 동안, 담당 의사는 의료진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상원의원은 딸의 차디찬 손을 꼭 움켜잡고 들것을 따라 헬리콥터로 향해 달려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얘야, 그들이 대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냐灰 그레이는 헬리콥터 소리를 뚫고 의사에게 소리쳤다. "그곳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게 이상하리만치 너무 쉬웠습니 다. 어쩌면 이미 심각한 해를 당했을지 모르겠군_9_" 의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 를 끄덕이고 곧바로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그로부터 몇 초 후, 헬기는 배리와 그레이를 쇼핑 센터의 텅 빈 주차장에 남겨두고 밤하늘을 갈 랐다. 배리는 헬기가 떠나는 장면도 비디오로 찍어두었다. 화질은 방송용 으로 내보낼 수준이 못되겠지만, 그 가치만큼은 말할 수 없이 귀중했 다. 그들은 헬리콥터가 빙 돌아 워싱턴 D.C.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배리는 비디오 카메라를 가방 안에 집어넣으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그레이에게 물었다 "아까 그 말이 무슨 뜻이죠? 의사에게 무슨 말을 한 거냐구요?' "난 테이버 하우스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걸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소" 그녀는 그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막판에 추격 쇼를 연출한 걸 제외한다면 우린 그냥 그곳에 들어가서 미합중국 영부인을 데리고 나온 것에 지나지않 았소"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헬기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그녀의 생명을 구하기엔 너무 늦은 건지도 모르겠소" -다! 그 자리에서 꼼짝 마라? 그들 뒤의 어둠 속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배리와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네 남자가 권총을 그들에게 겨누면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헤드라이트가 켜지면서 자동차 두 대가 주 차장으로 쏜살같이 굴러들어와 그들과 불과 몇 미터 사이를 두고 급 정거를 했다. "본듀란투 손을 머리 위에 얹으시요" 그는 그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게 신상에 좋다는 것을 알았다. 한 요 원이 다가와 그레이의 혁대에서 권총을 발견하고 압수했다. 또 다른 요뭔이 배리의 가방을 잡고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난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아요" 요원들이 그레이에게 수갑을 채우고 권리서를 읽어주는 동안, 그레 이가 배리에게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시요" 그의 암시에 따라 배리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체포에 순순히 응 했다. 자신의 증언과 비디오 테이프의 내용은 영부인 구출 작전에 관 한 자신과 그레이의 무죄를 충분히 입증해주리라. 하지만 지금 그 얘 기를 떠든다는 것은 시간 낭비요, 숨결의 낭비일 뿐이었다. 암브루스 터 상원의원과 바네사가, 대통령이 부인의 아기를 죽이고 영부인마저 살해하려 했다는 주장을 확증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배리와 그레이는 FBI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각기 다른 차에 올라 탔다. 요원들은 그녀를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주고 그녀가 뒷좌석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동차 좌석에 누워 있는 무언가를 보는 순간, 공포 에 질려 비명을 질러대면서 자동차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등쳤다. "그레ol!" 하지만 요원들은 그녀의 등을 잡고 그녀를 차 안으로 밀었다. 그녀는 차창으로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비명을 듣구 그녀의 놀람을 감지하면서 자신을 다른 차 안으로 들여보내려는 요원 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손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그들을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도 자동차 뒷좌석에 떠밀리고 말았다. 자동차 문이 '됨 닫히고 타이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두 차량은 나는듯이 굴러갔다. 배리는 흐느껴 울면서 회색빛 승용차의 뒷좌석에 함께 앉아 있는 인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헝클어진 가발을 쓴 채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으로 배리를 되쏘아보는 건 바로 돌리였다. 조지 알랜은 이불 밖으로 살짝 비집고 나온 잠자는 두 아들의 얼굴 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층 침대에서 자는 둘째아들은 개구쟁이자 운동 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앞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울릴 호남아였다. 그애는 그 타고난 매력으로 인생을 쉽게 헤쳐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 이 스쳤다. 큰아들은 아만다의 진지함을 물려받았다. 잠을 자면서조차 문제를 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동생보다 더 영리했고, 성취 동기가 높았다. 그애의 지성과 자제력은 앞으로 그가 어느 방면을 선택하든 성공을 보장해주리라. 조지는 그 선택이 의학이길 바랐다. 두 아들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조심조심 침실을 나와 살그머니 문을 닫았다. 부부 침실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평소처럼 아만다는 그 를 위해 곁탁자의 전등을 켜놓았다. 두 사람이 아무리 심하게 싸움을 하고. 아무리 사이가 벌어졌다 해도 매일 밤 한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마치 그가 언제든지 자신에게 돌아올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그 불을 켜놓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단결 같은 그 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마치 줄무의를 만들듯이 흘러내려와 있었다-그녀는 새근새근 고른 숨결을 토해냈다. 그는 그녀를 만지고 키스하고 싶었지만 그녀를 깨울까 봐 감히 그러질 못했다. 그는 다시 방 밖으로 나와 집무실로 돌아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무 엇보다도 술이 필요했다. 술잔에 술을 따라 책상에 가져다놓고 의자 에 점잖게 앉았다. 무척 길고 긴 하루였다. 그는 데이빗과 함께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바네사가 클리트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조지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술을 흘짝거리면서 그 열기가 몸 전 체에 퍼져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취기는 그의 몸을 쉽사리 정복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취기를 막았다. 데이빗 이 지시를 내렸지만, 자신은 그의 뜻을 거슬렀다는 냉엄한 생각들이 맬돌았다. 술잔을 비우고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구경이 크지 않은 총 이라 입천장에 대고 쏜다면 고통없이 깨끗이 마무리 지을 듯싶었다. 우선 총알이 모두 장전되었는지를 확인했다. 그런 다음 탄창을 다시 제자리에 끼우고 총을 책상 깔개에 내려놓았다. 안쪽 호주머니를 뒤져 조그마한 플라스틱 병을 꺼냈다. 그 마개는 아직 뜯지 않은 상태였고. 리튬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데이빗의 지시 대로라면 지금쯤 치사량으로 바네사의 몸 속에 흘러다니고 있어야 할 그 리튬이었다. 조지는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 막판 뒤집기로 데이빗을 이겼 다. 아만다가 자신의 행동을 승리로 봐주었으면 싶었다. 어쩌면 자신 의 그 최후의 작품은 우유부단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을 보상해줄 수 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만다도 그나마 조금은 그를 사랑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리튬 약병을 책상 깔개 위에 내려놓구 권총을 들어 총구를 입 안에 넣었다. 그 기나긴 드라이브 동안, 배리는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에게서 데 일리의 소식을 들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비명도 질러보고 애원도 해보구 흐느껴 울기도 하며 위협도 해보았지만 그들의 강철 같은 침 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 역시 배리와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워싱턴 시내에 있는 평범한 사무실용 빌딩이었다. 그들은 업무용 엘리베이터 안에 짐덩이처럼 떠밀려 7층의 복도 끝에 있는 사무실로 인도되었다. 그레이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과 몸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그들 은 그를 먼저 사무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의 입정 사나운 외침은 배 리에게도 결코 좋은 조짐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상처투성이에 온 몸이 망가져 유혈이 낭자한 데일리의 모습 을 보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사무실 안에 들어서 보니 그는 기 진맥진한 모습으로 소파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이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조명이 희미한 사무실을 비 틀비틀 질러가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데일리, 괜찮은 거예요? 그는 숨을 헐떡이며 대꾸했다. "보다시피. 당신도 괜찮은 것 같관 아직 총에 맞지 않았네? "돌리를 그들의 차 안에서 봤어요 난 겁이 났어요" "그들이 내게 새 산소 탱크를 갖다뒀어. 그래서 앞으로 얼마 동안은 더 살 수가 있지. 내 걱정은 안해도 돼. 메리트 부인을 탈출시켰나? "해냈어요 그녀는 이제 좋은 사람들에게 맡겨졌죠 그녀의 몸은 아 주 편찮아 보였지만 말예요 그녀가 살아날지는 아직 미지수예요" 한 요원이 수갑을 풀어주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주인에게 돌슨떴다. 그녀는 성난 표정으로 두 손을 번쩍 쳐들고 그에게 손목에 난 발그스름한 수갑 자국을 보여주었다. "윌리엄, 이렇게 우릴 거칠게 대할 필요가 있었나요? 법무부 장관 윌리엄 얀 시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안녕, 배리. 안녕하시오, 본듀란트 씨." 그레이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이 전부터 아는 사이요? "대학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소 그녀는 캠퍼스 라디오 방송국의 기 자로 활동했고 난 학생 정치 연합의 회장이었소 한가할 때면 그녀는 기삿거리를 얻으려고 날 찾아오곤 했지." "난 지금도 가끔씩 그렇게 하죠 그레이, 윌리엄이 바로 법무부에 있는 내 정보원이랍니다." "그가 당신 정보원이라고?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기밀 정보들을 마구 넘긴 건 아니오 본듀 그란트 씨. 난 단지 그녀가 다른 곳에서 얻은 정보를 확인해 주거나 부인할 뿐이요 그녀가 길을 잃지 않도록 지도해주는데, 그 일조차 아 주 힘겨을 때가 있소" 그러고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배리는 아까 했던 질문을 되 풀이했다. "윌리엄, 이게 필요한 일이었나요? "우린 당신들을 정식으로 체포해야 했어. 닭신과 본듀란트는 영부 인을 납치한 용의자들이기 때문이지." 그는 데일리를 흘끔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껜시 씨는 이미 공범자라고 고백했다고" '官론 데일리는 우리에게 도움을 줬죠 하지만 우리가 벌인 일은 납 치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린 바네사 메리트를 구출한 거라구요" '개체 어디서, 누구로부터 구했다는 거야긴 "그녀의 남편에게서죠" 얀시 장관은 근엄한 표정으로 배리를 바라보다가 그레이에게 눈길 을 돌렸다. "결국 내가 걱정한 대로 그 말을 하는군." "당신은 하나도 놀라지 않는 것 같군요?,윌리엄? "난 최근에 아주 이상한 전화들을 받았지. 처음엔 암브루스터에게 서, 그 다음엔 대통령에게서 걸려왔어. 본듀란트 씨가 워싱턴에 다시 나타나게 되자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선 것 같더군. 처음엔 난 그 를 붙잡고 싶었지만 나중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어, 알고 보니 본듀란트 씨는 당신과 깊이 사귀는 사이였더란 말야. 그런데? 갑자기 윌리엄의 목소리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당신은 하위 프리프의 장례식장에서 내 부하들에게 터무니없이 흰소리를 늘어놓았더군. 한번 상상해 보라구. 내 부하들이 내게 당신 이 들려준 얘기를 설명하는 장면 말야." "그게 무슨 얘기였소? 그레이가 묻자 배리는 우물거리면서 대꾸했다. "말하자면 긴 얘기예요" 그녀는 윌리엄에게 돌아섰다. '래가 허풍을 떤 까닭은,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란 걸 확신할 수 없 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FBI요원들이었소"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들이 어쩌면,,~1 그녀는 당흑스런 표정으로 그레이를 힐끔 쳐다보면서 사실을 얼마 나 밝혀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데일리가 소파에 반쯤 누워 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부담을 덜 어주었다. "그녀는 그들이 스펜서 마틴을 위해 일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 한 거요" 윌리엄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스펜서 마틴이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을 감시한 건 사실 이오 그들은 내 부하들에게 몇 번 저지당했지, 우린 그들이 누군지 궁금해 하던 참이었소" 그레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들은 바로 스펜서의 부하들이오" 윌리엄이 그레이에게 돌아섰다. "그렇다면 내게 당신 말을 믿으라는 거요? "당신은 이 나라 사법 당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야 하요 내 말은 나쁜 사람들을 추적하고 잡아들여야 한다는 걸 뜻하지." "그 얘기는 또한, 무슨 이유에서든 나쁘다고 일컫는 사람들의 권리 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뜻하고 있소" 배리는 두 사내 사이에 적대감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재 빨리 대화를 가로막았다, "윌리엄, 일단 당신도 사실을 알고 나면 스펜서 마틴이 위험한 인간 이란 사실에 동의할 거예-9-" -나도 지금 당신들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어, 배리, 대체 진실이 뭐야? 당신의 유아 돌연사 증후군 기획물이 방송에 나간 뒤로 당신 이름이 영부인의 이름과 항상 연결되더군. 그러다가 영부인이 의문스럽게 어디론가 사라졌지. 달톤 닐리의 허튼 소리는 내 지성에 대한 모독이었고 조지 알랜은 내게 물을 먹였어. 어디 그뿐인 줄 알 아? 비밀 경호요원들은 한결같이 벙어리가 돼버렸지. 우린 당신이 오 늘 밤 그 주차장에서 요원들을 감쪽같이 따돌렸을 때, 뭔가 일을 벌이 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 그래서 우린 저 노인을 붙짐小- 그때 데일리가 모욕감을 느끼고 꽥 소리쳤다. rrg]봐? 아무튼 우리가 선수를 쳐서 당신들이 스펜서 마틴을 위해 일 한다고 얘기하는 그 사내들이 그를 해치거나 죽일 수 없게 된 거지." 윌리엄은 재킷 단추를 풀고 손을 허리에 얹으면서 이내 덧붙였다. -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 이 사건의 전모를 다 알아야 해. 바로 그런 이유로 당신들을 곧바로 유치장에 집 어넣어서 중죄인 취급하는 대신 이곳에 데려온 거라고" -껄리엄, 우릴 그렇게 믿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말 하기 전에 변호사를 참석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해도 되지. 꼭 그런 절차를 밟고 싶다면 말야. 하지만 당신 은 내게 모든 것을 솔직히 다 털어놓을 수도 있어." "비공식 인가.Q?" "비공식 이 야." 지난 세월의 경험을 통해, 그녀는 그가 신의를 지키는 인물이라 믿 었다. 그의 그 고결한 인격은 좋은 기삿거리를 좇는 그녀의 길에 여러 차례 방해가 되었다. 그녀는 국가 안보가 달린 문제에 있어 그가 정보 를 주지 않을 때마다 그에게 화가 나곤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가 있었기에 잘못된 길을 퍼할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그를 믿지 못할 이 유가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얘기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 르겠군_9_" "스펜서 마틴부터 시작합시다." "당신은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그는----- 그레이가 윌리엄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배리의 말을 막았다. "배리, 조심해. 그는 과거에 당신 동창이긴 하지만 당신의 속을 다 빼주기 전에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어. 누가 그를 그 자리에 앉혔구 또한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말야." 윌리엄이 발끈하면서 호통을 쳤다. "본듀란트 씨, 나도 누가 날 이 자리에 앉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하지만 난 미합중국 국민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오 이 나라 국민과 관련된 내 일과 의무를 매우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소 물론 데이텟 메리트 덕분에 이 자리에 앉게 됐지. 하지만 요즘 백악 관에서 풍기는 구린내에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소 스펜서 마틴에 관 해선 나도 그의 사병들에 대해 알고 있소 연방 정부의 모든 부서 곳 곳에 자신의 정보원들과 밀정들을 심어놓았지, 나도 인정하긴 싫지만 그중에는 법무부와 관련된 부서들도 끼어 있소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그가 대통령에게 미치는 영향력이오 난 메리트 대통령이 그에게 왜,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알고 싶소 솔직히 말해 본듀란트 씨, 배리가 당신과 어울려 다니자 무척 걱정해 왔소 그래서 난 그녀에게 당신이 백악관을 방문했던 사실을 귀해 준 거요 난 당신이 마틴의 협력자라고 생각했던 거지." "당신은 잘못 생각한 거_9_" "아마도 그럴 수도 있을 거요 내가 알기로도 당신은 메리트 부인 때문에 쫓겨난 거니까."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녀 때문쎄 난 다시 이곳에 돌아왔지 " 법무부 장관은 한동안 그레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배리에게 돌 아섰다. '씨 모든 일이 바로 그 유아 돌연사 증후군 기사 때문에 시작됐어 지, 안 그래? "사실 이번 사건은 바네사 메리트가 내게 커피를 마시자고 초대한 일에서부터 시작됐어요 말하자면 정말 긴 이야기죠 그리고 이 사건 을 얘기하자면, 우리 나라 대통령이 입에 담기도 역겨운 극악한 범죄 들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어요" "배리, 바로 그 때문에 당신 일행을 여기로 데려온 거야. 그 이야기 가 얼마나 길고 복잡하든, 또한 그 사건에 누가 연루돼 있든 상관없이 그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야 말겠어," '제기랄 모든 일이 다 엉망이 되고 있어. 배리와 그레이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구. 게다가 바네사는 그 염병할 병원에 들어가 있다니. 병원에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원래 지금쯤이면 그녀가 죽었다는 끔찍한 소식이 전해지게 돼 있었잖나? 그런데 아직도 그녀가GWU병 원에서 치료받고 있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진정하게, 데이빗." 대통령은 다이아몬드처럼 단호한 눈빛을 빛내며 스펜서를 마구 다 그쳤다. "스펜서, 내게 잘난 체하지 마! 내가 물 먹으면 자네도 물 먹게 돼 있어, 내게 점잔빼는 말을 할 때마다 그 사실을 기억해두란 말야? "난 자네에게 잘난 체하거나 점잔랜 적이 없네. 나도 자네와 똑같이 걱정이 되는군. 하지만 우리가 허등대면 허등댈수록 상황만 더 악화 시킬 뿐이야." "무슨 소린가? 상황은 이미 더 이상 악화될 건덕지가 없을 만큼 악 화돼 버렸어." "그래도 더욱 더 악화될 소지가 있네." 데이빗은 주먹으로 반대편 손바닥을 내리치면서 물었다. '개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나도 모르겠네. 테이버 하우스에서의 모든 일은 내 각본대로 진행 췄지, 내 부하들은 자존심을 구겨가면서까지 본듀란트에게 당해주었 네. 하지만 클리트가 그곳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곳에 헬리콥터를 대기시켜 놓았을 줄 우리가 어찌 알았겠나? "그래도 자넨 그런 일을 예상하고 있어야 했어. 바로 그런 예상을 하라고 자네에게 돈을 주는 거야. 그리고 대체 조지는 지금 어디 있 나? 그는 나도 몰래 내 곁에서 사라졌는데, 아마 분명 집으로 간 것 같네. 그에게 빨리 전화를 넣어보게. 그래서 그에게, 병원 의사가 그의 조치를 망쳐놓을 수도 있는지 물어봐주게." "이미 그의 집에 여러 차례 전화를 해봤지만 계속 통화중이었네. 그 리고 삐삐도 계속 쳐보았지만 아직 연락이 없어." 데이텟의 목소리에 희망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바네사의 공식적인 주치의일세. 어쩌면 그 병원으로 불려갔 는지도 모르지 " "데이빗, 그럴 리는 없을걸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클리트는 그가 그녀에게 1킬로미터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걸세." "맙소사! 만약 조지의 조치가 효과가 없다면,1) 스펜서가 부드럽게 말을 되받았다. '지금 우리는 다른 문제를 생각해야 하네. 문젠 바네사가 우리의 정 부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점이야. 그날 밤 육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와 자네, 그리고 나뿐이네. 조지는 의심 을 품고 있겠지만, 그 의심을 확인할 길은 전혀 없지. 그러니 우린 어 떻게 해서든 바네사의 침묵을 보증받아야 하네. 그러면 아무도 그 일 의 진상을 알 수가 없게 되지." 데이빗은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스펜서를 바라보았다. "자네와 나만 빼놓고 말이지." 동 틀 무렵, 대통령은 아내를 보려고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옷차림 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아내를 위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평소의 정장 대신 간편한 옷차림에 스포츠형 점퍼를 입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비밀 경호요원들이 먼저 병원에 나타났다. 그 즈음, 병원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언론에서는 영부인의 건강 에 관한 최근 소식을 얻으려고 병원에 일찌감치 진을 치고 있었다. 대 통령은 경호를 받아가면서 주방문을 통해 병원으로 들어가 직원용 엘 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병실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가 보니 장인이 아내의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데이빗은 짐짓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랄리트 아낸 어떻습니까? "왜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나? 바네사는 자는 듯이 보였지만, 데이텟이 그녀의 손을 들어올리자 눈을 번쩍 떴다. 그는 그녀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여보 당신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요"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대꾸했다. 안녕, 데이빗. 당신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감개무량하군요" "각하, 이쪽은 머피 박사요" 데이빗은, 클리트가 옆에 서 있는 의사를 소개하자 건성으로 받아 들였다. '치사 선생, 내 아내는 어떻소? "각하, 내가 볼 때 영부인에게 지금까지 리튬을 지나치게 고농도로 투여했더군요 게다가 영부인의 몸에는 신경 안정제인 '할돌'을 비롯 해 여러 가지 진정제가 검출되었습니다." "난 그녀의 혈중농도를 끊임없이 체크한 것으로 알고 있소"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오폴드 박사는 내게 테이버 하우스에서 작성한 그녀의 의료 기 록을 팩스로 보내왔습니다. 그 기록에 기재돼 있는 상태대로라면 영 부인은 당연히 받아야 할 치료를 받은 거죠 하지만 우리가 진찰하고 조사해본 결과는 그 기록의 내용과는 전혀 다릅니다." '저떻게 덱스터 레오폴드의 직원들이 그런 실수를 저지른 거지? 아무도 감히 데이텟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환자의 침대 옆 에 서 있는 머피 박사 주위로 당혹한 침묵이 감돌았다. 데이빗이 큼큼거리며 활기찬 어조로 물었다. "그녀의 증상은 어떻소? "한 마디로 약물 중독입니다. 현재는 정맥 주사로 그녀의 몸 속을 세척하고 있죠 그 과정은 적어도 며칠은 걸립니다. 그후에는 효과적 이지만 안전한 수준으로 그녀에 대한 투약을 시작해야죠 영부인은 다시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는 그랬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괜찮을 거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각하." -정말 잘랐군." 데이빗은 바네시치 손을 꼭 잡고 손에 입을 맞춘 뒤,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마네 킹처럼 차갑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세 사람만 남겨둔 채 병실을 나갔 다. 데이빗은 클리트가 미처 포문을 열기도 전에 방어 태세를 취했다. "덱스터 레오폴드에게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톡톡히 그 대가를 치르게 하기 전에 자네부터 흔쭐 이 날 각오를 해야 할걸세." 데이텟은 짐짓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스펜서 마틴이 들어왔다. 바네사는 숨을 급히 몰아실며 지금까지보다 활기찬 모습을 띠기 시 작했다. '지런, 이런, 귀찮은 사람은 언제나 안 왔으면 한 때 나타난단 말씀 이 야." 스펜서는 그 모욕을 못들은 척하면서 바네사를 내려다보았다. '썽이 호전되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그러고서 데이텟에게 고개를 돌렸다. "달톤 닐리가 언론에 메리트 부인의 증세가 나아졌다고 확신시키 는 데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대통령께서 직접 언론에 말씀하셔서 영부인이 곧 쾌차하여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고 납득시키 셔야 할 것 같습니다." '以거 좋은 생각이네. 클리투 나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장 인 어른의 존재는 그 기쁜 소식을 확증시켜줄 겁니다." 끌리트는 바네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쌔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혼자 있어도 괜찮겠니?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버지, 전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에요" "그래, 물론 넌 혼자가 아니지." 그는 허리를 굽혀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허리를 펴고 문가로 손을 뻗었다. "먼저 가시오 각하." 데이뎃은 상원의원의 이상한 말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혀 같잖 았다. 심지어 자신을 향한 아내의 혐오감 어린 눈길조차 탐탁찮았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에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녀의 손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처음부터 데이빗 메리트는 그야말로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과 악수 를 하는데 적극적이었으며 언론에 민감한 대통령이었다. 그의 친근감 을 맛본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를 보호하려는 충동이 일 텐데, 오 늘도 예외는 아니리라. 비밀 경호요원들에게는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그 즉흥 기자회견은 병원의 1층에서 급작스럽게 열리게 되었다. 기자들과 병원 관계자들 에게서 기자회견의 주최측을 보호하는 방책이라곤 가느다란 나일론 밧줄 뿐이었다. 녹초가 된 달톤 닐리는 대통령이 나타나자 반가워하며 옆으로 비켜 서서 그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대통령의 도착으로 언론은 일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내 여기저기서 그에게 고함소리로 질문이 쏟아 졌다. 그는 두 손을 들어올려 정숙을 구했다. 아우성소리가 어느 정도 잦아들자 그는 자신과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방금 메리트 부인의 병 실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밝혔다. "우린 함께 그녀와 얘기를 나뒀습니다. 그녀는 의식이 뚜렷했교 몸 상태도 좋았으며 아주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과 나는 지금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전문가로 구성된 탁월한 의료진이 그녀에게 제공하는 치료 방법을 모든 면에서 신뢰하고 있습니다." 클리트는 데이빗이 그런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는 모습 을 보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뒤로 물러서서 혼자 힘으로 만들 어낸 그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한 마디로 괴물을 창 조해냈다. 메리 쉐리 여사의 고전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처럼 클리 트 역시 그 창조물을 파괴해야 할 순간이 점점 다가왔다. 대통령은 조지 알랜 의사에 관한 질문을 받고 알랜 박사는 현재 접 촉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로 명확한 답변을 회퍼했다. 그리고 메리트 부인이 테이버 하우스에서 납치당한 사건에 관련해서는 완벽한 보고 를 받기 전까지는 아무 할말이 없다고 하면서 덧붙였다. "지금까지의 보고들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고서 기자회견을 간단히 끝내야 하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하 고 그들의 염려와 관심에 깊이 감사하면서 출구로 향했다. 클리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들에 묵묵부답으로 응하면서 데이빗에게 집 까지 태워다 달라고 요구했다, 데이빗은 그 요구에 난처해 했지만 이내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운 전사에게 백악관으로 돌아가기 전 예정에 없는 곳을 들러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클리트는 대통령의 리무진을 타기 전에 스펜서에게 무뚝뚝하게 말 을 건넸다. "다른 차를 타게." 스펜서는 뭐라 지시를 요구하는 듯이 데이텟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해주게나, 스펜서." 클리트는 스펜서가 탐탁찮은 기분이란 걸 알아차렸지만 스펜서는 구겨진 체면이라도 구하려는 듯이 지체없이 그 자리를 피했다. 클리트는 자동차 행렬이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동안 데이빗에 게 물었다. "그는 언제 다시 나타난 건가? "그게 뭐였더라? 그의 '미묘한 개인적인 문제'를 갖고 장인이 어쭙 잖은 소동을 일으켰을 때였죠" '꺼허, 결과적으론 그렇게 된 셈이군. 솔직히 난 본듀란트가 기회 있을 때 그 개자식을 죽이지 않은 게 무척 유감스럽네." "바로 그 말씀을 하시려고 차를 태워달라 하신 겁니까? 제가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제 보좌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다 시 한 번 들려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 자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젤세," "클리트, 그 얘기라면 이젠 진력이 납니다. 제가 파멸의 기로에 서 있교 장인만이 절 구해주실 수 있다고 귀가 따갑도록 말한 것으로도 아직 모자랍니까? "흠, 별로 틀린 표현이 아니구먼. 데이빗,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네 가 끝도 없는 똥구덩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 에 없네." 데이빗이 휘파람을 불며 이죽거렸다. '이건 정말 대화가 심각해지는군요" 데이텟, 내 말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그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을 듣고도 그렇게 나을 수 있는지 한번 봐야겠군." 클리트는 눈을 부라리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바네사가 낳은 아기는 자네 자식이 아니었지. 그래서 자넨 그앨 죽 인걸세. 그리고 자넨 적어도 두 번 이상 내 딸을 죽이려 했네." 클리트가 예상했던 대로 데이텟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바네사가 장인께 그렇게 얘기했다면 그녀의 병세가 생각보다 훨 씬 더 악화된 것 같군_9_ 그녀가 미쳤다는 건 장인이나 저나 모두 다 아는 사실이잖습니까? 클리트는 데이빗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고 성질을 죽였다. 데이빗,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네. 내가 앞서 주장한 내용에 대 해 자넨 수십가지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부인, 설명, 혹은 합리화를 할 수 있겠지, 자네가 어떻게 대응할지는 빤히 알고 있네. 자넬 가르친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우리, 일을 좀더 쉽고 간편하게 처리하세. 난 자네가 원하교 필요로 하는 걸 보장해줄 수 있네." "그게 뭐죠? "나와 바네사의 침묵이지." "교환 조건은? "신속하고 조용한 이혼일세." 데이텟은 눈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연세가 많아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것 같군.a,클리트." "자네에게 장담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U그러니까 지금 제게, 바네사와 빠른 시일 내에 평화롭게 이혼을 하 라고 제안하시는 겁니까? -이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일세. 내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데이빗 메리트의 얼굴엔 조롱기 어린 미소가 다시금 돌아왔다. "따르지 않으면요? 클리트는 서류 가방을 집더니 밀봉된 봉투를 꺼내들었다. "따르지 않으면 윌리엄 얀시를 찾아가 이것을 전하겠네." 데이빗이 장인에게서 봉투를 넘겨받았다. 열어보니 안에서는 여러 장의 천연색 사진들이 나왔다. 데이빗은 마치 코브라라도 만진 양 소 스라치게 놀라면서 그 사진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왜?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그녀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지. 베키 스터기스는 우연히 사고로 죽은 게 아니었네. 자네와 서로 멱살을 잡 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뒤로 넘어져 탁자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쳐 죽은 게 아니란 말일세. 그날 밤 자넨 내게 그렇게 얘기했지만. 데이 빗, 사실 그녀를 개패듯이 두들겨패 죽여버렸지. 거기 있는 그 사진들 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네." 데이빗은 놀랄 정도로 순식간에 충격에서 벗어났다. '깔리트 지금 누구에게 허세를 부리는 겁니까? 전혀 장인에게 어 울리지 않는 짓이군요 전 이 사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아무 시체나 찍은 것에 지나지않죠 그리고 이 여자를 개패듯 이 때려죽인 살인범은 제가 아닌 장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네. 봉투 안에는 사 진 말고도 다른 게 있지." 데이텟이 봉투를 거꾸로 들고 흔들자 무릎 위로 오디오 테이프가 떨어졌다. '게이빗, 자네가 그녀를 죽였네, 자넨 눈물을 홀리면서 그 사실을 인정했지. 기억하는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도 자네의 고백은 그 테 이프 속에 다 담겨 있네." 클리트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난 모든 걸 기록으로 남겨두네, 중요치 않은 부분은 나중에 다 폐 기처분해 버리지만 뭔가 쓸모 있는 것들은 잘 보관해두지. 자네가 그 무방비 상태의 그 여자와 아기에게 한 짓을 보고난 뒤에 그 특별한 테이프를 보관해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네." 클리트는 데이텟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구슬방울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듯했다. "클리트, 감히 이걸 폭로할 순 없을 겁니다. 장인 역시 저와 마찬가 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죠" 클리트는 그의 비난을 인정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네. 내 공직 생활은 불명예스럽게 끝나게 되 겠지. 그보다 난 자네가 멸망의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두고 남은 생 애동안 유력한 정치인으로서 존경받으며 살고 싶네, 딸애와 함께 말 일세. 또한 자네의 이 역겨운 과거는---n 잠시 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가리켰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지. 대신 자네가 할 일은, 소란을 피우 거나 언론에 적절치 못한 설명을 늘어놓는 일 없이 바네사를 깨끗하 게 포기하는 것뿐이네." "그럼 대체 언론에다가는 어떻게 얘기하라는 겁니까? "자네들 두 사람은 서로 결코 조화를 이를 수 엄는 차이점이 있다 고 말하기만 하면 돼. 아기의 죽음은 결혼생활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 을 주었다는 식으로 말일세. 미국의 수백만 부부들은 자네의 말에 공 감할걸세. 이혼에 대한 자네의 정직한 태도는, 오히려 선거에 약간의 동정표까지 몰아줄 수 있지." 데이텟은 이를 악물면서 따졌다. '게가 무슨 바보천친 줄 아십니까? 선거를 앞두고 이혼을 하는 건 정치적으로 자살 행위입니다. 어쩌면 당에서도 절 대통령 후보로 밀 지 않을 수도 있죠" "자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적어도 이혼은 범죄가 아니네. 하지만 두 번의 살인 행위에는 공소 시한이 정해 있질 않다네." 클리트는, 사위에게 베키 스터기스의 사건이 세상에 공개될 경우 어떤 여파가 미칠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데이빗, 난 상당히 관대한 제안을 하는걸세. 이번 흥정으로 난 남 는 게 별로 없지만 넓은 아량으로 자네에게 권하고 싶네. 내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말일세." '기 염병할 사진들만으로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테이프도 마찬가지고요" 클리트가 점잖게 되받았다. "그것이 사실로 입증되든 입증되지 않든 별로 중요치 않네. 이런 엄 청난 추문이 세상에 조금만 새어나간다 해도 자네의 재선 가능성은 물거품이 되고 말지. 더 나아가 자넨 영영 추방당할 수밖에 없네. 자네 가 아무리 발버등친다 하더라도 자네의 남은 생애 동안 그 역겨운 추 문의 딱지가 붙어다닐 거란 말일세." 데이빗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클리트는 1회 전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확신했다. 앞으로도 매 회전 승리를 거두고 결국 데이빗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비를 구하게 되리라. 베 키 스터기스 사건은 추문의 원조격이었지만, 그외에도 데이빗의 추문 을 모으면 한 자루는 족히 되었다. 클리트는 앞으로 그 추문들을 하나 하나 끄집어내어 폭로할 생각이었다. 클리트가 무덤에서 썩은 뒤에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방대했다. 데이텟 메리트가 평생토록 단 한순간도 평화를 얻지 못하리란사실에 클리트는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역시 만족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 정도로 충분 했다. "그 사진은 자네가 보관하도록 하게, 데이빗. 난 다른 사진들이 또 있으니까. 그리고 자네가 내게 스펜서나 그의 심복들을 보낼 경우를 대비해서 내 변호사에게도 그 사진들과 테이프의 복사본들을 건네주 었네. 물론 변호사에게 그 증거물을 넘겨주면서 내가 혹시 자연사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죽게 될 경우줴 언론에 공개하라는 지시를 이미 내 렸지." 운전사가 리무진을 상원의원의 집 앞에 세웠다. 데이빗은 차에서 내리려는 클리트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았다. "잠간만요 장인은 제게 침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배리 트래 비스와 그레이 본듀란트는 어떻게 하죠? 그들과 한패잖습니까? 클리트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꾸했다. '거리가 빈 여기자와 내 딸을 유혹한 남자 말인가? 그럴 리는 없을 거네. 그들은 내게 맡겨두라구? 그러고는 데이텟의 무릎을 다독거렸다. "내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연락주게나, 난 자네가 내 제의에 찬성할 거라고 확신하네." 법무부 장관은 창가에 서서 주먹으로 허리를 누르면서 기지개를 켰 다. 배리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는 내 말을 과연 믿어줄까? 그는 얘기를 듣는 동안에 가끔씩 요점을 물으 려고 말허리를 자르곤 했지만, 정작 얘기가 다 끝난 뒤에는 그 얘기의 진위 여부에 대해 말도 없이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두 사람에겐 일찌감치 관심을 끊은 듯, 텔레비전에서 방 송되는 주요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병원에서 짤막 한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나지막이 욕설을 지껄였다. 하지만 영부인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깊은 안 도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자연히 배리도 그와 함께 기뻐했지만, 한 여성으로서 질투심의 칼 날이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데일리는 배리의 기나긴 독백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에 깊게 잠이 들었다. 그녀는 데일리가 이젠 편히 쉴 수 있어 정말 기뻤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시달렸던가. 이윽고 창가에 서 있던 법무부 장관이 돌아서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왜 메리트 부인이 스스로 대통령을 고 발하지 않았느냐 점이요" 배리는 아무 생각없이 즉각 대답했다. "두려움 때문이죠 그녀는 그를 두려워했어요, 윌리엄. 우리가 커피 를 마시기 위해 처음 만난 날,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죠 난 그녀의 그런 흥분 상태가 모두 조울병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 때 이미 그녀는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 그가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한 거죠 나와의 만남도 그녀가 보낸 첫번째 SOS신호였어.- 윌리엄 얀 시는 그레이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그럼 죠지 알랜은 어떻게 된 거요? "그는 데이빗의 충견이요 데이텟의 마수를 벗어날 만한 배짱이 없 는 인물이지. 데이빗은 뭔가 비열한 수단으로 그의 숨통을 쥐고 그를 꼭두각시처럼 부리고 있는 거요 알랜 부인도 우리에게 그 점을 인정 한 바 있소" "그 말이 맞아요 윌리엄. 그녀는 당신이 맡을 고발 사건의 증인이 돼줄 거예요" "고발 사건이라고? 그는 그 말을 되씹으며 코웃음을 쳤다. "난 고발 사건을 맡지 않았어, 단지 납치를 벌이고 도망치다가 잡힌 두 용의자들의 진술을 받아둔 것뿐이라고"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믿고 있어요 난 당신이 그렇다는 걸 알아 요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우릴 이곳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죠" 그녀는 창가에 서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 나라 행정부의 최고 수반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그렇게 믿기 힘든가요? 저 밖을 보세_Q_" 이른 아침의 햇살 속에서 반짝이는 워싱턴 기념관을 보았다, '저 건물은 대통령들을 위한 기념관이-역대 대통령 중 어떤 이들 은 훌륭하고 명예로운 인물이었지만, 또 어떤 이들은 악당이었어요 그들은 키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으며, 전사이거나 정치가였죠 하 지만 그들은 대통령직을 제외한, 한 가지 공통 분모를 갖고 있죠 바로 그들 역시 인간이란 사실이에요 역사는 그들을 평범한 인간보다 훨 씬 위대한 위인으로 격상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반신반인(半身平人) 의 경지에까지 떠받들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답니다. 그들은 인간이에요 인격적인 흠을 갖고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 생들이죠 그들은 웃거나 울고 화를 내거나 변비에 걸리기도 해요 또 한 자존심이나 고통, 두통, 그리고,,,,- 그녀는 그레이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찔투심을 가질 수 있죠 데이빗 메리트는 아내가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진 거죠 그는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구 그래서 뭔가 일을 저지른 거예요" -그는 전에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 순간 그 생각이 온 몸을 례뚫자 그 통에 그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 말은 누군가 그녀의 귀에 대고 커다랗게 소리친 것처럼 뚜렷 하게 들렸다. "뭐라고? 윌리엄은 멀뚱거리며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아무 말도 안했어, 배리." '짱신이 지금 말하고 있잖- 그녀는 손을 들어 그레이의 말을 막았다. "잠간만요" 그 갑작스런 계시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적인 환청인 양 그녀에게 거대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 엄청난 위력 앞에 그녀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말 그대로 그녀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배리? 그레이는 윌리엄을 밀치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급하 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배리, 대체 무슨 일이지?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스라이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그녀 의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굉음을 좀처럼 꿰뚫지 못했다. -그는 전에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 대체 그 말들을 어디서 들었던가?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은 걸까? 그 말들이 왜 지금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걸까? 그 말이 왜 리토록 중요하게 느껴지는 거지? 그러다가 그 말들의 출처를 기억해냈고 그 해답을 깨달았다. 덕분 에 목덜미가 뻐근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얀 시가 그레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 를 쳐다보았다. "배리, 괜찮아? 별안간 그레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 말이나 해보라니까, 젠장? 데일리가 소파에서 일어나 앉아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대체 왜들 그러지? 배리가 어떻게 됐다는 거이똔' 데일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그는 그녀에게, 훌륭한 기자 란 깊이 파헤친다는 말을, 어떤 경우든 항상 파헤칠 구석이 남아 있게 마련이란 말을, 겉보기에 아무리 시시하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결코 무시하지 말라는 말을 수천번도 더 들려주지 않았던가? 최고의 단서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거나 그렇고 그런 얘기로 전세계를 뒤흔들 사건으로 끌어올릴 단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전 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발견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단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의 주위에 맴돌았다. 그 지 긋지긋한 시간 내내!WVUE에 있는 그녀의 책상 위에 어질러진 종이 조각과 쪽지들 틈 속에 파묻힌 채로 말이다. 나름대로 그 단서를 조사 해봤지만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결코 그 단서를 충분히 파헤치지 않았다. 그래, 지금 단계에서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는 게 좋아. 잘못 생각했 을 수도 있다. 어쩌면 헛수고일 수도 있겠지만, 직업 본능은 그게 아니 라고 속삭였다. 어쨌든 직접 가서 알아봐야 했다. 그녀는 남자들을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가야 해요" "어디로 간다는 거요? "난------, 음,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내가 확실한 걸 알아내기 전까 지는요" "지금 어디론가 가려는데, 그 가는 곳도 모른단 말이오? 그녀는 초조하게 대꾸했다. "물론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요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 고 또 어쩌면 뭔가가 될 수도 있죠 하찌만 가야 해요" "배리. 당신을 이곳에서 내보내줄 수 없어- "부탁이에우 윌리엄, 나에게 누군가를 딸려 보내면 되잖아요? 미국 연방 보안관도 괜찮아요 그가 내게 수갑을 채워도 되구요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그냥 내가 그 일을 하게 해주기만 하면 돼요 엄청난 폭 발력을 지닌 일이 될 수도 있다구요" "대체 그게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요? "지금은 말 못해요" "왜 내게 말을 못한다는 거지? '내 생각이 틀렸을 때, 바보처럼 보이는 게 싫기 때문이에또" 그녀의 고함 이후, 잠시 동한 숨막힐 듯한 침묵이 사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를 보내주시.- 그 말을 한 사람은 그레이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그에게 고개를 돌 려 보니,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그 눈길은 그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비롯한 수천만가지 의미를 전하는 듯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 을. 그를 너무 너무나 사랑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면서 다시 되풀이했다. "그녀를 보내주시요 그녀는 자신이 윌 해야 할지 알고 있소" "법무부 장관님의 소개장을 들고 오셔서 보여주시는데 얼마나 놀 랐는지 모릅니다." 교도소 소장 '푸트 그래이엄'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붙임성 있는 남 자였다. 그는 교도소를 다룬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묘사되는 골목대장 유형의 교도소 소장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안 경을 쓰고 참 친절했다. 게다가 워낙 세심해서 그녀가 지저분한 간호 사 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도 전혀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녀는 미처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 배리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나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지낙 경황이 없이 워싱턴을 출발하다 보니 찾아오겠다는 연락도 미처 하지 못했답니다." 윌리엄 얀시는 미리 그녀를 위해 기름칠을 해둔 터였다. 그는 미시 시피까지 갔다온다는 그녀의 요구를 승낙한 뒤, 그녀가 마음대로 사 용할 수 있도록 개인 제트기를 제공해 주었다. 거기다가 잭슨 공항에 는 그녀를 펄에 있는 센트럴 교도소까지 모시고 갈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푸트 그래이엄은 뒤가 든든한 손님의 뜻하지 않은 방문에 깜 짝 놀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협조하겠다고 나섰다. "샤를린 워터스와의 인터뷰가 그토록 시급하고 중요합니까? "죄송합니다만, 푸트 그래이엄 씨, 그 내용은 극비랍니다." 그는 당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요 하지만 당신과 얀시 법무부 장관께서 국가 안보에 관련된 문제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감히 이의를 제 기하겠습니까? 그가 그녀를 데리고 복도를 지나 어떤 철제 문앞에 다다르자 안에 서- 여자 교도관이 문을 열었다. "그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락 시간에 끌려나왔기 때문 에 골이 단단히 나 있는 상태랍니다. 트래비스 양." 그 죄수는 '닥터 페이퍼'를 마시고 있었는데 푸트 그래이엄과 배리 트래비스가 나타나자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샤를린 워터스 는 바싹 마르고 축 처진 젖가슴과 가냘픈 괄다리에 몸집이 자그마한 여인이었다. 지나치게 머리를 말아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은 자그마한 머리 주변으로 곱슬곱슬한 후광을 드리우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민첩한 움직임은 흡사 참새를 연상시켰다. 샤를린은 배리를 대충 훑어보더니 경멸 어린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져기까지 오는데 왜나 오래 걸리는군." 배리는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워터스 부인." 괴짜인 샤를린은 그녀와 악수를 나누면서 교도소 소장에게 짐짓 정 중하게 말했다. '져자들끼리 밀담을 좀 나눠야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죠? 분명 교도소 소장의 권위에 도전을 하는 태도였지만 푸트 그래이엄 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 물론 괜찮고말고요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마음 놓고 얘기하시 ,l_sn 그러고서 그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여 교도관에게로 갔다. 배리와 샤를린은 자그마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았다, "우선은 오락 시간을 방해해서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담배 가진 것 있소? 배리는가방을뒤져서 몇 주 전 바네사메리트에게 건네주었던 바 로 그 담뱃갑을 내밀었다. 샤를린은 담배 한 개비를 빼내 얇은 입술 사이에 깨물었다. 배리는 그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인터뷰 내용을 녹 음해도 되겠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 담배를 다 내게 준다면 허락하지." 배리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녹음기의 상 태를 점검하고서 곧바로 대화에 들어갔다. "당신은 WVUE에 있는 내 음성 사서함에 여러 가지 흥미로운 내용 을 남겨놓았더군요" "하지만 당신은 날 미치광이라고 생각했겠지," 태1,난,,11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이미 내게 전화를 걸었을 거야." 샤를린은 상대가 발을 잘못 내딛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정확 한 춤꾼이었다. 배리는 전술을 바꾸기로 했다. '지터스 부인, 당신 얘기가 전적으로 맞습니다. 당신이 미친 여자라 고 생각했죠 그리고 사실, 아직도 당신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답니다." 그러자 샤를진은 배리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맞아, 난 사람들이 그렇게 믿도록 꾸며왔어, 내가 미쳤다고 말야. 덕분에 이곳에 도착한 이후 예수를 만나기도 했지. 하지만 그렇게 미 치는 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더군. 미친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도 벌 을 받지 않거든. 당신도 그걸 알게 되면 무척 놀랄걸? 샤를린 워터스는 분명 미친 여자였다. 여우처럼 교활하게 미친 여 자 ,,, ,,. '저음 내게 전화했을 때, 당신은 '그가 이전에도 그런 짓을 저질렀 다'는 내용을 남겨놓았죠 거기서 '깃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나요? '지 멍청한 아가치야, 그럼 내가 누굴 지칭한 거라고 생각하지? 군 말할 필요도 없이 현 대통령 아니겠어? 바로 데이빗 말콤 메리트" 그러더니 부러진 노란 손톱으로 탁자 위를 쿡쿡 젤렀다. "그가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라는 갓난아기를 죽인 건, 내가 지금 여 기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틀림없는 사실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쭌쭌, 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 거이C)내가 말한 대로 그는 전에도 그런 짓을 저질렀어. 그는 과거에 도 갓난아기를 죽인 적이 있단 말야. 아주 오랜 전 일이지." 배리가 미시시피까지 와서 듣고 싶었던 바로 그 정보였다. "죄송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샤를린은 담배 연기를 깃털 모양으로 길게 뿜어냈다. "당시 데이빗 메리트는 암브루스터 상원의원 밑에서 일하고 있었 지, 그는 잘생긴 거물이었어. 그때 그가 건들인 여자는 수십명도 넘었 다더군. 그중 하나가 그의 아기를 임신했지. 그녀의 이름은 베키 스터 기스였어. 그녀는 데이텟이 워싱턴으로 출장을 간 사이에 그의 아들 을 낳았어. 그래서 그가 미시시피로 돌아왔을 때, 그 아기를 그에게 불쑥 내보였지, 하지만 그는 아버지나 남편이 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는 작자였어. 반면에 베키는 그와 결혼하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계 속 성가시게 굴었지 그러던 어느 날 밤, 그의 갓난 아들이 생후 몇 주밖에 안 됐을 때, 그가 그 문제를 끝내려고 그녀의 이동 주택을 찾아왔어. 처음에 두 사 람은 고함을 지르면서 말다툼을 벌였지. 그때 아기가 미친 듯이 울어 댔어. 그러자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아기를 목졸라 죽였어. 물론 애초에 아기를 죽일 의도가 없었을지도 몰라. 단지 아기의 을 음 소리를 그치게 하려 한 거겠지, 하지만 기왕 아기를 죽였으니 그 목격자마저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던 모양이야. 결국 그는 베키 스터기 스를 때려서 죽여버렸지. 그게 바로 그의 이별 방식이었어 " 샤를린은 코를 -팽' 풀더니, 담배를 작은 지취봉처럼 손가락 사이로 돌렸다. -져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변명의 여지가 절대 있을 수 없지. 그 무슨 명목으로든 합리화될 수 없어. 그래서 난 비록 유죄판결을 받 은 중죄인이긴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를 지지하지 않았어." 그 이야기는 단번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었다. 배 리는 인생이란 참으로 요지경 속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충격을 애써 누그러뜨렸다, 무장 강도와 살인죄로 종신형을 언도받은 n세 고령의 참새 같은 할머니가 강대국의 역사를 순식간에 멋지게 바꿔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누가 믿겠는가? 아니, 그녀 자신부터가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샤를린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죄인이 아닌가? 그녀는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려고 그런 얘기를 얼마든지 꾸며낼 수도 있다. 어쩌다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죽음에 구미가 당겼으리라. 배 리의 유아 돌연사 증후군 기회물은 그녀가 지닌 상상력의 불길에 부 채질한 건 아닐까? 샤를린은 자신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줄 멍청이를, 만사를 제치고 미시시피까지 달려와 자신을 만나줄 얼뜨기를 발견한 셈이리라. 이번 얘기는 샤를린이 수년 동안 꾸며낸 얘기 중에 최고의 걸작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실이든지-. 어찌췄든 배리는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얘기는 금세기 최고의 추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칫 잘못했다간, 자신 의 미래 뿐만 아니라 조국의 미래까지도 자신의 어리석음에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 "얘기가 너무- "믿어지지 않는다, 이거지? 샤를린은 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말을 이었다. "아가치는 굳이 내 얘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 정 못 믿겠다면 늙은 클리트 암브루스터에게 물어보라고? "상원의원 말인가요? 샤를린은 마녀 같은 얼굴로 오만상을 지었다. "그는 이 지구상을 스쳐간 정치가 중에서 가장 형편없이 썩어빠진 작자야. 그만하면 말 다한 거 아니겠어? "그도 베키 스터기스를 알고 있단 뜻인가요? 샤를린이 부르르 떨며 커다랗게 외쳤다. "알고 있냐고? 젠장! 이봐, 아가씨. 그 사건을 은폐한 사람이 대체 누굴 것 같아? 그날 밤 데이빗이 바로 그 작자를 찾다갔지, 그래서 그 상원의원이 그 문제를 해결한 거라구? 배리는 반론을 제기했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막강한 힘을 가진 인물이죠 하지만 아무 리 그래도 두 시체를 하루 아침에 사라지게 할 순 없어요 당시 현장 에 경찰이 와서 사건을 조사하지도 않았나요? "그 점을 굳이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샤를린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암브루스터의 호주머니는 힘있는 관리와 권력가들로 가득 차 있 지. 그들에게 전화 몇 통화를 건 것으로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췄어. 베키와 갓난아기는 잘 나가는 녀석들에게는 법정에서 떠들 필요도 없 을 만큼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않았지." 배리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암브루스터가 그 일을 알고 있을 리가 없어요 만일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데이텟 메리트에게 딸을 맡겼겠어요? "대체 아가치는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 거이? 어쨌거나 데이빗 메 리트에게 딸을 주는 건 당연했어. 그는 딸이 미합중국 영부인이 되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잠시 샤를린은 가래를 끌어올려 바닥에 '칵' 내뱉었다. "모두 다 개자식들이야!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건 뭐든 다 하면 서 벌을 받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나 내 남편 같은 족속들은 지은 죄의 대가를 톡톡히 다 갚아야 하지만, 메리트나 암브 루스터 같은 작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지." "유감스럽게도 부인의 말이 맞는 같군요 그런데 지금까지 내게 한 얘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그 사건은 한 20년 전쯤에 일어났나요? 암브 루스터가 그 살인 사건을 성공적으로 은폐했다면 그 증거 역시 철저 히 없애버렸을 거예요 이제 와서 그 사건을 입증할 길은 전혀 없죠" 별안간 샤를린이 손바닥으로 탁자 위를 내리쳤다. 배리는 너무 놀 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이지, 아가씨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여자 중 가장 두 둔한 여자로군! 아가치는 그럼, 지금 내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내 목 숨을 걸고 피 같은 돈을 낭비해가며 워싱턴에 있는 아가씨에게 수차 례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하나? '이 정도로도 당신은 분에 넘친 대접을 받는 거야." 윌리엄 얀 시는 두 손바닥으로 부드러운 탁자를 짚고 맞은편으로 몸 을 기울였다. "우리에게 대통령이 바네사의 아기를 교살하고 그녀를 죽이려 한 증거를 주게. 그러면 자네가 형사 소추를 면하도록 해주겠단 말일세." 하지만 스펜서 마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그 는 자신이 처한 주변 환경을 완전히 초월한 듯, 석고상처럼 앞만 똑바 로 쳐다보고서 입을 열지 않았다. 각종 음식 찌꺼기들과 빈 커피잔들로 어질러진 사무실 안은 밤을 꼬박 새우고 그 다음날로 이어진 심문의 긴장된 열기로 후끈후끈 달 아올랐다. 막무가내로 뿌리치던 데일리는 이미 호텔로 이송된 상태였 다. 두명의 FBI요원들이 그와 동행하여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를 지키며 돌봐주었다. 윌리엄 얀 시와 그레이 본듀란트는 그 사무실 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배리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시시피 교도소에서 그녀가 전화를 걸어 샤를린 워터스와의 대화 내용을 설명해주자 윌리엄이 신중하게 말했다. '내부자의 협조를 받지 않는 한, 이 일을 제대로 진행할 순 없어. 그 리고 대통령을 제외하고 이번 사건을 내막을 아는 내부자는 스펜서 마틴뿐이야.' 그러고서 그는 부하들에게 스펜서를 데려와 취조할 것을 명령했다. 스펜서는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여유 있게 그곳을 찾아왔지만 아직 아무런 협조도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스펜서의 면책에 반대했는데, 스펜서의 완강한 침묵은 그 런 그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또한 법무부 장관에게 차라리 바보 천치에게 증언을 기대하는 게 나을 거라고 경고했는데, 이제 그의 말이 사실로 증명된 셈이었다. "쓸데없이 시간과 정력만 낭비하는 꼴이 될 거라고 내가 말했잖소? 그가 변호사를 부르지 않는 것도 다 그 이유가 있는 거요 그는 자신 이 한 마디도 불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서 있소 고문을 당해 죽을지언 정 데이빗 메리트를 배반하지 않을 거란 말이오." 윌리엄 얀시는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마틴 씨, 이미 당신 부하들 중 일부는, 면책을 받으려고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로 작정했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당신은 여러 중범죄에 연루돼 있기 때문에 연방 교도소에서 수십 년은 족히 썩을 거란 말이오_"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위 프리프는 어떻소? 마틴 씨, 혹시 그 이름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지 않소? 틀림없이 그러겠지, 당신은 그의 살인 용의자니까." 스펜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거요 그는 심지어 내가 그를 총으로 쏴서 채소 저장고에 가뒀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을 거요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그곳에 나타나서 뭘 하려 했는지 설명해 야 하기 때문이지, 다시 말하지만, 우린 지금 시간만 낭비하는 거요" 그레이가 계속 이의를 달자, 윌리엄은 벗겨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좋소, 마틴 씨. 지금 이 제안은 앞으로 30초 동안만 유효하오 만일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당신은 미국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요란하고 엄청난 의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게 될 거요" 스펜서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나 느물스럽게 말했다. "~H범죄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 어서 날 체포하시오 하지만 윌리엄, 그 대신 다시는 내게 완력을 쓰지 마시요 그런 짓은 당신이나 나의 명예를 더럽힐 뿐이_- 윌리엄은 나지막이 욕설을 터뜨렸다. 스펜서는 그에게 능글맞은 웃 음을 보내더니 문가로 향했다. "윌리엄, 그레이와 잠시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눠도 괜찮겠소? 윌리엄은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레이는 스펜서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그들 뒤로 문이 닫히자 스펜서의 냉정 함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는 그레이의 목덜미를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고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날 그런 개 같은 저장고에 처박다니! 널 꼭 죽이고 말겠어? 그레이는 스펜서의 손길을 뿌리치고 옆으로 밀쳤다. "하지만 자넨 그렇게 하지 못할걸! 날 죽이는 건 어리석은 짓인데, 자넨 결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잖나? 적어도 지금까지 는 말일세." 순간 스펜서의 눈에는 흥미로운 눈빛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순식간 에 그 특유의 냉소적인 눈빛으로 바뀌었다. "대체 네가 뭔데 이러는 거지? 훌륭한 경찰관이라도 되는가? 그레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대꾸했다. "지금 이 기회를 가치있게 활용하게. 자넨 얀시의 제안을 받아들여 야 해." "넌 정말 그 얀시나 그 누군가가 메리트 정부를 몰락시킬 수 있다 고 생각하는가? 스펜서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교활하게 낄낄거렸다. "그레이.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결국 자네나 얀시는 모두 바보 취급을 받게 될 거야. 친구, 자넨 지금 줄을 잘못 섰어. 우린 이제 껏 철저하게 조심해 왔지. 데이빗은 모든 면에서 빈틈이 없어. 그건 자네도 잘 알겠구먼." "그의 정부가 무너진다, 어쩐다는 얘긴 자네에게 하찮은 소리로 들 리겠지, 스펜서. 하지만 자넨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자넨 이미 죽은 목숨이거든." 스펜서의 오만하고 능글맞은 미소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스펜서, 이제야 감을 잡기 시작한 건가? 그래, 자넨 바네사나 그녀 의 아기에 대한 데이텟의 음모에 깊이 연루돼 있어. 그러니 자네가 살 아있는 한, 데이빗에겐 빈틈이 남아 있는 셈이네. 일단 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자넨 이미 저세상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데이텟은 얼마든지 제 2의 레이 가궤트를 찾아낼 수 있네. 그 친구 를 기억하나? 내가 대통령의 골칫거리가 되자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날 암살하려고 했던 그 젊고 훌륭한 해병대원 말일세. 자넨 자기 만족 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지금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 지 못하고 있어. 그나마 얀 시와 거래를 하면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지." "썩 꺼져버려, 이 개자식? "스펜서, 정말 완벽하군. 방금 그 언행은, -신을 방어할 뽀족한 수 단이 없는 멍청한 놈들의 전형적인 방어 본능과 정확히 일치한단 말 일세." 그러고는 그레이는 사무실의 문을 열고 어깨 너머로 말했다. "이제부턴 뒤를 조심하게, 친구." 그 다음날 오후, 배리는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없는 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우선, 조지 알랜의 자살 기도 소식이 -워싱 턴 포스트' 지의 1면에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다. 현재 그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으며 그의 아내가 병상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 부부는 어떻게 그 사실을 이틀 동안 비밀에 부쳤죠? "그 가족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거지. 닐리의 방침이었다 는군." 그레이와 배시는 미국 연방 정부의 손님으로서 일급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방문 밖에는 미국 연방 보안관들이 보초를 서주었다. 옆방에 묵은 윌리엄 얀 시는 틈만 나면 전화통에 매달렸다. 초레이와 배리는 가끔씩 그의 감정적인 대화 내용을 엿들었다. "불쌍한 아만다. 남편의 그 모숨을 보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 했을까요? "그녀는 총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그의 집무실로 달려갔다는 군. 만일 그녀가 달려가지 알았다면, 그대로 책상에서 숨이 끊어졌을 뻔했지."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는 살아야 해요 그리고 살아난다 해도 절대 로 식물인간이 돼서는 안 돼요" "어찌됐든 그 일은 그녀나 두 아들에게 무척 힘든 경험이 될 거요 대체 그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지? "내 생각에,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절망적이고 막막한 심정에 서 그런 선택을 내린 것 같아요" 그레이는 야멸차게 투덜거렸다. "그렇더라도 그 길이 아닌 다른 대안이 얼마든지 있었잖소? 어처구 니없군! 얀시는 그에게 재판정에서 증언하는 조건으로 다른 대안을 제시했을 수도 있었소" "만약 그가 기력을 회복하면 윌리엄은 분명 그렇게 할 거예요" 그녀는 그레이의 얼굴에서 황당해 하는 표정을 보고는, 그가 현재 알랜의 자식들 만한 나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레이는 면도도 하지 않고 지치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사실 모두가 피곤에 찌든 상태였다. 지난48시간은 순간순간이 사건의 연속이었다, 휴식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최소한 데일리만은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호텔 방에서 비교적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는 중이었다. 그녀가 그를 찾아가자 그는 겉으로는 집으로 갈 수 없어 불만스럽게 툴툴거 렸지만 케이블Tv,룸 서비수 자신을 경호하는 두 젊은FBI요원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두 젊은이는 데일리가 취재 기자 시절에 려 었던 허풍스런 얘기에 넋이 빠져 있었다. 배리는 커피 탁자 위에 놓인 -워싱턴 포스트-지 전면에 실린 기사 를 흘낏 내려다보았다. "스펜서는 신문에 자신에 대한 기사가 이처럼 보잘것없이 실려 기 분 상하지나 않았을까요? "오히려 좋아했겠지. 그는 신비스런 분위기를 꾸미는데 취미가 있 거든. 되도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적게 아는 것을 좋아했소" 배리는 그 짤막한 기사를 다시금 훑어보았다. "난 이 기살 믿을 수가 없어요" "나도 애써 경고해 주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소 데이빗이 그를 제거하는 건 시간 문제였지, 다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데이텟 이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재빨리 행동했다는 사실이요"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대통령이 살인 강도 사건의 배후 인물이 라고 생각하나요? 그레이는 졸린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펜서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소 그를 죽인 두 살인 강 도는 이마에 ,FBI'라고 문신을 새기지 않았을 거-9. 하지만 대체 강도 들이 얼마나 간이 크길래, 그런 무시무시한 사내를 희생자로 선택했 겠냔 말이오? 스펜서는 항상 무기를 갖고 다녔소 칼 외에도 발목에 항상 권총이 있었지, 그를 죽이고 금품을 털어간 작자가 누구든, 그들 은 이미 그런 사실을 꿰뚫고 있었던 거요 살인범들은 그를 무장해제 시키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 배리는 미시시피에서 엄청난 진실을 듣고난 뒤에는 대통령의 잔인 무도함에 대해 설마하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는 털끝만치도 양심 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 가장 충성스런 친구를 죽일 수 있는 인물 이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두 팔로 가슴을 껴안았다. "우리 이름도 그의 살인 명단에 올라가 있겠죠? "물론이 오." "그런 그가 이 문젠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녀는 신문 전면에 세 번째로 실린 자신과 그레이에 관한 비중 있 는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네사 메리트는, 친구인 배리 트래 비스와 그레이 본듀란트에게 부탁해서 자신을 테이버 하우스에서 탈 출시킨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들은 방문객을 받지 않는 병원의 엄격한 규칙 때문에 은밀히 행동해야 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배리와 그레이를 납치범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오판 이라고 주장했다. 이상이 병상에서 그녀가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트래 비스와 본듀란트는 그녀를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데려다준 죄밖에 없 었다. 그녀를 즉각 병원으로 후송하려고 헬리콥터를 대기해놓은 아버 지에게로 이게 어디 납치란 말인가? 그레이가 바네사의 선언에 대해 평가를 내렸다. "분명 그 원고는 클리트가 쓴 글일 거요 그리고 그 글은 데이텟의 비위를 건들일 게 틀림없소 그는 그저 우리가 도망 중인 납치범으로 서 총에 맞아 죽었으면 속이 시원했겠지. 하지만 이제 그 사건에 대한 아내의 얘기를 뒷받침해줄 도리밖에 없게 췄소 바네사와 클리트의 깨기를 믿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 " '내가 만일 지독스레 고집센 성격이라면 그들이 우리에 대해 좋게 얘기해주는 내용들을 믿지 않았을 거예요 싱린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렇게 됐죠" 그는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린 싸움을 중재하여 화해시킨 셈이_e,배리." 그런 것도 같았다. 특히나 다음 순간, 법무부 장관이 방 안에 들어 와 그들에게 새로운 뀨스를 전해주었을 때는 말이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당신을 보자는군." 배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날요? 그레이가 미심쪄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이유가 뭐요? "그는 그녀에게 특종을 주고 싶다는 거요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배 리에게 진 빛을 갚겠다는 거지." "어떤 특종이죠? 대체 뭘까요? 그레이가 썩 마음에 내키지 알는다는 듯이 입맛을 쩝잽 다셨다. '개리, 괜히 흥분하지 마시오 내 생각엔 가지 않는 게 좋겠소" '재 가지 말라고 해요? 특종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물건인데? "이미 그런 기회가 있었잖소?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기회를 누리지 말란 법은 없죠" 그레이는 윌리엄에게 돌아서서 불만스럽게 내쏘았다. "배리가 돌아온 뒤루 당신은 허구헌날 전화통을 붙잡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군. 우리가 그저 허수아비처럼 여기 죽치고 앉아 있는 동 안에 말이오. 왜 우리를 풀어주지 않는 거요? 당신 능력으로 능히 이 번 사건을 종결지을 수 있잖소? 대통령 집무실로 쳐들어갑시다! 그래 서 그 망할 자식에게 수갑을 채우고 권리서를 읽어주교 이 빌어먹을 일을 단숨에 끝냅시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소 우린 지금 미합중국 대통령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요," "나도 우리가 지금 누구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하지만 그는 살인자란 말이오? 그레이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언성을 높였다. "진정하시오? 윌리엄은 맞고함을 치고 나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린 메리트 부인과 그녀의 아기를 위해 그에게 보복하고 싶은 당 신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만약 대통령이 그런 범죄들을 저지 른 것이 사실이고, 모든 증거가 분명하다면,,,,,,." 그는 그레이가 말을 가로막으려는 눈치를 보이자 재빨리 덧붙였다. "우린 대단히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요 우리가 까딱 실수를 저지르 면 그는 면책권을 행사해서 일찌감치 도망갈 거요 그러니 일단 조사 보고서가 작성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배리가 암브루스터와 얘기할 기 회를 주도록 합시다. 그건 전혀 위험한 상황이 아니란 말이_p_l 그레이가 성난 목소리로 뇌까렸다. '진짜 위험이 뭔지 내가 얘기해 주겠소 암브루스터는 데이빗만큼 이나 극악한 범죄자요 당신도 샤를린 워터스란 여자가 했던 얘기를 기억하고 있을 거요 클리트가 저지른 범죄 목록이 내 팔 길이 정도는 된단 말이요 그러니 이번에 배리는 어쩌면 죽음의 함정으로 곧장 걸 어들어가는 꼴이 될 수도 있소" 법무부 장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암브루스터는 메리트 부인이 오늘 오후 병원에서 퇴원한다고 말 했소 그녀도 약속 장소에 오기로 돼 있으니 그는 그 어떤 폭력도 생 각할 수 없을 거요" 그러고는 배리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씨만하면 당신이 해볼 만한 게임 아닌가? "물론이죠? 그레이가 퉁명스럽게 잘라 물었다. "언제, 어디서요? "상원의원의 집, 오후 8시요" 정각 저녁 8시에 배리는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비밀 경호요원이 문을 열어주더니 그녀에게 공손하게 가방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 는 그 안을 조사해보고 그녀에게 되돌려주면서 휴대용 금속 탐지기로 그녀의 온 몸을 홑어 내려갔다. 그 사이에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그녀를 맞이하려고 나왔다.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쥐면서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트래비스 양, 오늘 밤 이후로 우리 사이의 모든 오해를 과거로 돌 려버립시다. 난 이미 틴rVUE에 있는 당신의 고용주에게 얘길 해놓았 소 그는 나에 대한 개인적인 호의의 차원에서 당신을 복직시키겠다 고 했소 이제 당신은 직장을 되찾게 된 거요" -기원님, 고맙지만 난린兮UE에 근무하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나 적 선을 베풀 듯이 고용하는 건 사양하고 싶군요" 그는 관대한 미소를 흘리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말한다 해도 당신을 비난할 수 없구먼. 오늘 밤 이후, 당신 은 기사를 최고로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테니까." '기원님이 내게 약속하신 그 특종이 대체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아가쮜의 속을 태우지 말아야겠군."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이끌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꾸며놓은 거실로 들어섰다. 대리석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따뜻한 불길 덕분에 방 안에 는 화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네사는 주름 장식이 달린 드레스 가 운을 입고서 빅토리아 시대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가냘픈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팔엔 아직도 정맥 주사가 꽃혀 있었지만...-. 그리고 벽난로 앞에 서서 그 선반에 한 팔을 걸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다. 그가 거기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 집 밖에는 그를 기다 리는 자동차 행렬이나 수행원들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배리는 집 안에 들어을 때 입구에 배치된 두 명의 비밀 경호요원들을 보고 그들이 바네사를 경호하는 줄로만 알았다. 배리는 애써 불안감 을 삼켰다. "안녕하시오, 트래비스 양." 그녀는 입천장에 얼어붙은 혀를 간신히 례내어 대꾸했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심장의 고동소리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안녕, 배리." 배리는 바네사에게 시선을 돌려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안녕하세요, 메리트 부인." "함께 그 난리를 겪었는데도 아직도 날 그렇게 불러요? 날 바네사 로 불러줘요" "고맙습니다." 배리는 상원의원이 권하는 의자에 앉아 그들 세 사람을 바라보았 다. 마치 법정의 증인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총살당하 기 직전 자신을 쏠 사격 분대를 바라보는 사형수 기분? 배리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네사를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아지신 것 같군요" "네, 훨씬 좋아졌죠. 그레이는 어때요? 배리는 대통령을 흘낏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U그는 어젯밤 스펜서 마틴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 았답니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슬픔에 잠긴 척하면서 끼여들었다.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_9_" 배리가 다시 바네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레이가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 당신과 그레이가 날 테이버 하우스에서 구출해준 것에 대해 정말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곳에서 조지의 치료를 더 받았더 라면 아마 죽고 말았을 거예-Q_" 순간 배리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고 싶어졌다.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이지? 여기가 무슨 앨리스의 이상한 나란가? 내가 앨리스 처럼 거울을 통과하여 이상야릇한 세계 속으로 들어온 건 아닌가? 암 브루스터 상원의원의 집 문턱을 넘어온 이후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배리는 얘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 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네사는 정말로 조지 알랜이 혼자서 자신 을 죽이려 했다고 믿는 걸까? 하지만 지금으로선 배리는 이 기괴한 각본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 지 침착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납치 사건의 문제를 해결해줘서 고마웠습니다. 바네사." '띨요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할 문제였는걸요" 바네사는 간단하게 그 사건에 대한 얘기를 끝맺었다. 상원의원은 배리에게 술을 들지 않겠냐면서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을깨뜨렸다. "뭘로 하겠소? "고맙습니다만 됐습니다. 웬만하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으면 싶은 데요 왜 절 이곳에 초대했죠? "트래비스 양, 우리 세 사람은 아가치에게 진 빛을 갚는 차원에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요." 이번 만남을 위해 상원의원은 그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기로 한 듯 했다. 대통령은 그녀와 인사를 나눈 후 줄곧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녀 는 계속 그의 비참한 눈길을 의식하고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클리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래가 앞서 말한 대로 우린 지금까지의 오해를 남김없이 청산하고 싶소 그간 서로의 악의와 오해를 깨끗이 잊어버리자는 의미에서 우 린 당신에게 기사의 독점권 형식으로 화해를 제의하는 거요" "그게 대체 무슨 기사죠? 클리트가 데이빗을 쳐다보자, 데이빗은 바네사를 흘낏 내려다보더 니 다시 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네사와 난 이혼하기로 했소" 배리는 너무 놀라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아니, 굳이 말을 내 뱉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설명이 계속 이어져 그럴 틈이 없었다. "달톤 닐리가 내일 정오에 언론에 그에 대한 성명을 발표할 거요 하지만 닐리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소 이게 바로 내가 그를 시 궈 국민들에게 발표할 성명서인데 당신에게 미리 한 부를 주겠소" 그러면서 정장 상의의 가슴 안쪽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배리 에게 건네주었다. '치금 읽어봐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봉투를 뜯고 대통령의 문장이 찍힌 두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서두의 감칠맛 나는 인사말을 눈 으로 훌고 나서 본론에서부터 큰 소리로 읽어내려갔다. "아들의 죽음으로 아내와 본인은 커다란 대가를 치렀습니다. 또한 공직에 수반되는 갖가진 압력은 그녀의 불행을 크게 가중시켰습니다. 우리 부부 중 어느 누구도 결혼 서약을 이렇듯 파기하게 된 데 대해 상대편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비록 이번 일의 책 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지만, 우리는 이 파경에 대한 각자의 개인 적인 책임을 달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본인은 대통령직을 위해 자 상한 남편이 될 기회를 수없이 놓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바네사는 참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헌신적인 여성이었습 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녀만큼 오랫동안 인고의 세월을 버터낼 순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에 대 해 깊은 감탄과 애정을 보내고자 합니다." 배리는 읽기를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혼이 깃들지 않은 형 식적인 초상화들을 보는 기분이 스쳤다. 그들 세 사람의 얼굴에는 억 지 미소가 얼어붙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성명서로 눈길을 돌렸다. "본인과 바네사는, 국민 여러분이 이러한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환 멸과 슬픔에 빠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세계의 수 백만 가정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이런 어려움은 그 누구에게나 닥 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린 단지, 국민 여러분이 우리 두 사람을 무 조건 질책하기보다는 이 불행한 상황을 솔직하게 밝히는 우리의 처지 를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장인이신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을 본받아 바네사와 난 각자의 공직 에 전념해 왔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국민 여러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여러분에게 봉사하고자 합니다. 본인은 여러분의 대통령으로 서,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밑에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데이빗 말콤 메리트의 서명이 쓰여 있었다. 배리는 그 성명서를 접어 다시 그 공문 봉투에 집어넣었다. '찡장히 달변이군요 각하."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아주 정직하지 못하네요" "방금 뭐라 했소? 배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높다란 다이빙 보드에서 점프를 하는 기분으로 말을 내뱉었다. "각하, 솔직히 이번 이혼은 대통령께서 슬퍼할 일이 전혀 아니죠 오히려 안도하고 계시겠죠 왜냐하면 이번 일은 거래의 조건이기 때 문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암브루스터 상원의원과 바네사를 상대로 한 거래 말예_9_" 클리트가 화를 버럭 냈다, "그런 무례한 말이 어디 있소? 세상에! 그건 그 어느 때보다 더 뻔 뻔스러운 말이군! 여보시오, 트래비스 양, 우리가 당신을 이곳에 초대 한 이유는? '영부인의 이혼에 관한 특종을 조건으로 내 침묵을 사고 싶기 때문 이겠죠 상원의원님, 각하, 미안하지만 거래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네사가 반쯤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가 우뚝 섰다. "당신이 어떻게 이런 거래를 할 수 있죠? 그녀는 영부인의 손바닥을 봉투로 내리쳤다. "그가 당신의 아기를 언제 죽인 거죠? "비밀 경호요원들을 부르겠네." 데이텟이 거실 밖으로 나가려는 장인을 막아섰다. "아닙니다. 클리트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그 문제를 탁 터놓고 얘 기해보죠 트래비스 양은 수주 동안 내 명예에 똥칠을 하고 다녔습니 다. 물론 그레이가 뒤에서 조종한 덕분이죠 하지만 이제 그녀는 내 쪽의 얘기를 들어볼 때가 된 겁니다." 그러고서 배리를 당당하게 마주보았다. "난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를 죽이지 않았소 당신이 그런 우습지도 않는 중상모략적인 결론에 어떻게 도달하게 췄는지 알다가도 모르겠 지만,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건 분명하오_" "바네사는 당신이 그 짓을 저질렀다는 걸 넌지시 내게 알려주었어 요 요 몇 주 동안, 갖가지 사건을 려으면서 그녀의 말을 믿게 뤘죠" "바네사가 똑바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우울증에 깊이 빠져 있을 때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인 것에 지나지 않소 그런데 당신은 그 말 을 근거로 잘못된 추리를 하게 된 거지." 배리는 무릎을 꿇고 바네사와 눈높이를 맞추면서 물었다. "바네사, 당신이 처음 내게 연락을 했을 때 정말 우울증에 깊이 빠 져 있었나요? 아니면, 겁에 질려 있었던 건가요? 당신이 방 안에 있을 때 그가 아기를 교살했나요? 아니면 당신은 그저 그가 베개를 손에 들 고 아기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한 건가요? "그 아기는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었소" 배리는 대통령의 말을 무시한 채, 바네사의 손을 꼭 잡았다. "바네사, 그가 당신의 아기를 죽이고 당신마저 살해하도록 내버려 둘 건가요? "트래비스 양, 경고하는데 한 마디만 더 하면,,,,-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거래를 하게 된 거죠? 아버지가 평화로 운 이혼 조건으로 당신의 영원한 침묵을 요구하지 않았나요? 그가 당 신에게 이 거래를 강요한 이유가 대체 뭐죠? 바네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버지는 내가 겁을 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난 데이빗과 이혼하고 싶어요" 데이빗이 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바네사, 조용히 해!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저 마? 그래도 배리는 물러서지 않고 바네사에게 호소했다. '개통령이 재선 가능성에 장애가 될 걸 아는데도, 당신과의 이혼에 동의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죠? 그가 당신과 이혼을 해야 할 만큼 절 박한 이유가 대체 뭐죠? 바네사는 괴롭고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크고 푸른 눈동자 가 배리에게 떠나질 않았다. "난,,,,, 난 몰라요" '띨른다구요? 그렇다면 내가 대신 말해주죠 그 이유는 당신 아버 지가 대통령에게 이혼을 거부한다면 무서운 비밀을 공개하겠다고 협 박했기 때문이에.9_" "트래비스 양,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소-= 데이빗에 이어 클리트도 한 마디 거들었다. "데이빗, 비밀 경호요원들을 불러오겠네." 하지만 배리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안중에 없었다. "바네사, 당신 아버지는 그 몸이 어디 묻혀 있는지 알고 있어요 난 지금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에요 진짜 땅에 매장된 시신이 있 죠 바로 또 다른 아기의 시신이랍니다. 오래 전 베키 스터기스란 여자 가 낳은 아기죠 그 아기는 아버지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 서 그 아기의 아버지, 즉 당신의 남편이 그 아기를 죽였죠 그리고 당 신 아버지는 그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바네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 말이 사실인가요? "물론 사실이 아니란다! 바네사, 이 여자는 미치광이야. 모든 사람 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 그녀가 하는 말을 단 한 마디도 믿어선 안 된단다." "신사 여러분, 더 이상 허세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 한 사람의 입을 막는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순 없죠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게 끝났습니다." "이런, 염병할? 대통령의 성난 고함소리에 응답이라도 하듯 비밀 경호요원들이 문 을 열었다. "각하? 대통령은 초조한 기색으로 그들에게 문을 닫고 나가라는 뜻의 손짓 을 보냈다. "나가! 지금 우린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잖나? 데이텟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계속 고함을 질렀다. 배리는 흔들림없이 침착하게 물었다. "각하, 이번엔 누가 당신을 위해 그 더러운 일들을 해줄까요? 알랜 박사는 당신의 범죄를 도운 걸 고민하다가 자살까지 기도했어요" "그가 자살을 기도한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걸 한탄했기 때 문이요 그는 의학계의 배리 트래비스라고나 할까? 즉, 완전한 실패자 요 게다가 머리를 쏘는 일에서조차 실패했잖소? "스펜서 마틴은 어떻게 되었죠? 당신은 어젯밤 누군가를 시켜 그를 죽였어요 그가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신이 아기 를 교살했을 때 그도 방 안에 있었나요? 그때 바네사가 울부짖었다. "당신이 스펜서를 죽였나요? 데이텟은 잠시 바네사에게 악의에 가득 찬 눈총을 보내다가 배리에 게 말했다. "난 그 아기를 죽이지 않았소 대체 내가 그 말을 몇 번이나 말해야 제대로 알아 듣겠소? 만약 스펜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도 당신에 게 똑같은 말을 해주었을 거요 난 아기를 죽이지 않았소 저 여자가 죽인 거란 말이요"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손가락으로 바네사를 가리켰다. 그러자 바네 사는 충격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바네사는 아들을 죽이지 않았어요 베키 스터기스가 아들을 죽이 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말예요 당신이 그애를 교살했죄" 바네사가 온 몸을 들썩이며 울부짖었다. -세상에! 하나님 맙소사? 배리가 말끝에 힘을 주며 바네사에게 말했다. -게, 맞아요 그런 다음 그는 그 젊은 여자마저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죠 그나마 그는 그 경험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배웠답니다. 보다 교활 한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 거죠" 바네사는 다시 아버지를 다그쳤다. -아버지, 그 말이 사실인가요? 아버지도 알고 있었나요? 상원의원은 마치 공기가 다 빠진 풍선처럼 무기력한 모습으로 의자 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모습은 -여 년 동안 어깨를 짓눌러왔던 죄 책감의 무게를 비로소 느끼는 듯했다. 바네사가 갈라진 목소리로 절규했다. L1사실이군요 요 맙소시 어째서 아버지는 날 이 사람과 결혼시킨 거죠? 어째서 내게 그의 아기를 가지라고 권했냐구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흐느껴 울면서 말을 이었다. "난 아기를 원했죠" 그러고서 마치 악의 화신을 쳐다보듯이 남편을 노려보았다. L1어떻게 그앨 죽였죠? 그토록 가녀리고 그토록 해맑은 아기를 말 예요? 대통령이 까칠한 목소리로 껄껄 운었다. U바네사, 당신은 정말 감상적인 멍텅구리로군. 그리고 사기꾼 뺨치 게 거짓말도 잘하는데? 당신은 아기를 보면 정신이 혼란스러웠지. 특 히 아기가 우는 걸 참지 못했어. 당신은 너무나 무능해서 아기를 제대 로 돌봐주지도 못했지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게다가 당신은 그 아기를 사랑하지도 않았어, 그레이가 당신 몸 속에 뿌린 씨앗에서 자라났교 당신이 이제 같잖게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그놈은 사실 당 신이나 그 누구에게든 지겹기 짝이 없는 골칫거리였지, 놈은 애시당 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우리가 이렇게 수많은 문제들 로 고통을 겪진 않았을 거라고" 배리는 대통령의 독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클리트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달랐다. 노여움에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를 번뜩이 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힘없이 비틀거리면서 소파 등받이를 힘겹게 짚고 몸을 지탱했다. '기 개자식! 그레이가 아니었어. 스펜서였단 말야? 대통령이 어처구니가 없어 되받아 소리쳤다. "스펜서였다고? 배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펜서라니? 바네사는 팔에 연결된 혈관 주사 튜브에도 아랑곳없이 바퀴 달린 링게르걸이를 끌고 남편에게 걸어갔다. "그래, 스펜서, 스펜서였다고? 그녀는 그의 얼굴에 그 말과 침을 동시에 내뱉었다. "당신은 그레이가 내 애인이라고 생각했어, 애초부터 당신은 그렇 게 생각하고 싶었지. 의무감과 도덕관념이 투철한 그레이 본듀란트란 사내가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를 범하다니? 그녀는 한껏 그를 비아냥거렸다. "데이빗, 이제라도 정신 차려! 그레이가 내게 잘해준 이유는 당신의 여성편력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도 당신은 아 내를 건들인 사내가 스펜서란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거지." 그녀는, 데이빗이 그토록 신뢰했던 사내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 것 이 더없이 고소하고 행복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나와 살을 섞은 사내는 분명 그였어. 그것도 내가 원해서 벌어진 일이었지. 다만 문제는 별볼일 없었다는 사실이야. 침대 위에 서 그는 당신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어. 게다가 당신과 똑같이 무정하 고 잔인한 냉혈한이었어, 그는 아기가 죽은 걸 기뻐했다구." 그 부분부터 그녀는 목이 콱 메었다. "스펜서가 그 아기를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내 가슴은 산산조각 났어. 하지만 내 아들은 당신 아들이 아니었지, 적어 도 난 당신 아기를 갖지 않았어." 대뜸 데이빗이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그러자 클리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늙은 사지처럼 포효를 하며 사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간단하게 그를 밀쳐버렸다. '깔리트 당신은 이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아-" 데이텟이 소름끼지는 소리로 껄껄거렸다. "당신은 아무 힘도 없어.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렇지! 당신은 거세된 사내와 같아. 당신은 이제 날 협박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 을 내리게 할 만한 배짱이나 구실이 전혀 없다고? 그러고서 아내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바네사, 이혼에 대해 마음을 바긴어. 이혼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이혼에 대한 동기를 바꾼다는 얘기야. 내가 당신과 이혼하 는 이유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연인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던 한 여자 가 얼마나 추악한 잡년인지 이 세상에 알릴 때가 됐기 때문이지? 데이빗은 계속 음흥한 미소를 지으며 배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 뭐가 신상에 좋은지 알고 있다면 일찌감치 줄행랑이 나 치시지. 그리고 맘이 있다면 본듀란트와 놀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 물론 틀림없이 이미 그래봤겠지만 말야." 그러고서 당당하게 성큼성큼 문가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그레이 본듀란트와 얀 시 법무부 장관, 그리고 한 무리의 料-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각하, 대통령께선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윌리엄, 이게 지금 무슨 뚱단지 같은 짓인가? 그레이는 얀시와 메리트를 지나쳐 두 여인에게 다가전다. "모두들 괜찮습니까? 배리는 흐느껴 우는 바네사를 품에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괜찮아요" "당신은 어떻소? -난 좋아9_ 충격을 받긴 했지만 말예.9. 그는 맨손으로 날 죽일 것 만 같았죠" "그럴 기미만 보였다면 내가 먼저 그를 죽였을 거요" 그는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상원의원과 대통 령을 체포하는 과정을 도와주었다. 데이텟은 더 이상 고상하고 평화로운 대총경이 아니었다. 미친 사 람처럼 광분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얀시는 대통령의 독설 세례 속에서도 명예를 지키며 냉정하게 권리서를 읽어주었다. 데이빗은 이도저도 안 되니까 다시 바네사를 공박했다. 아들을 죽 인 사람은 자신이 아닌 그녀이며, 그 이후 자신이 한 짓이라곤 그녀를 보호하려던 것뿐이라고 했다. L(아기를 교살한 건 그녀야! 내가 아니라 그녀란 말야! 그녀는 그 정 도로 미친 여자라고? U각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대통령은 미시시피에서 벌어진 전혀 다른 범죄의 용의자입니다." U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얀시, 클리트! 클리 트 이들에게 바네사가 얼마나 몹쓸 병에 걸렸는지 얘기해주시죠" 클리트는 입을 열었지만 입술이 축 늘어져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 다. 게다가 턱이 부르르 떨리는 통에 말은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얀시가 데이빗 메리트에게 설명했다. (L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증언할 기회를 갖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그의 증언은 목격자의 증언만큼이나 귀중합니다." "당시 육아실에는 스펜서, 바네사, 그리고 나밖에 없었어. 그런데 지금 스펜서는 죽었교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야." 난 지금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린 미시시피 살인 사건의 목격자를 확보해 두고 있습니다." 마침내 법무부 장관의 말이 데이빗 메리트의 귀를 가린 분노의 장 막을 꿰뚫는 듯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얀시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클리트에 게 눈길을 돌렸다. 클리트는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교 이제 개인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자신의 손으로 파괴시킨 사내를 말없이 마주보았다. 데이텟의 눈이 사악하게 일그러지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지 교활한 개자식!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안에는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와 있었습 니다." 베키 스터기스의 부드럽고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울려퍼지는 동안, 텔레비전 스튜디오의 사람들은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깊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전세계로 위성 중계되는 이 프로를 시청하는 다 른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루 그녀의 얘기에 넋을 잃었다. 그녀는 무릎 위로 단단히 움켜쥔 두 손을 노려보았다. '겅신을 차렸을 때 무서운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기를 바랐죠 하지 만 악몽이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내 아기는 진짜로 죽어 있었어요 그 애의 작은 시신은 데이빗이 떨어뜨리고 간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었 습니다. 사방에 유혈이 낭자했죠 난 그게 내 퍼라고 생각했어요 데이 빗이 날 졸도시킬 만큼 때렸거든요." "데이빗 메리트, 대통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거-. 하지만 그땐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 때문에 관자놀이가 으스러진 부위를 가리려고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두개골이 부서진 중상을 입은 탓 에 두피를 조잡하게 꿰매야만 했다. 그녀는 그런 꼴 사나운 모습을 스 스로 무척 의식했다. 배리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지만 오늘 밤에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스카프 외에는 장신 구를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 "그에게 처음 얻어맞은 뒤 곧바로 의식을 잃었죠 나중에 깨어나 보 니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목의 맥박을 짚고 있었죠 그는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더군요 데이빗에게서 내가 죽었다고 들었기 때문이죠" "그는 또한 상원의원에게는 당신이 아기를 죽였다고 말했죠" 그 말이 끝나자 마자 그녀는 거칠게 항변했다. "난 아기를 죽이지 않았어외 데이빗이 그랬죠 그리고 난 상원의원 에게도 사실대로 얘기했어요 그는 날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죠 그 는 다 처리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날 안심시켰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했나요? "그는 전화로 의사를 불렀습니다. 그 의사는 내 트레일러로 와서 내 두피를 봉합해주고, 진통제 주사를 놔주었죠" '껸원으로 옮기지도 않았단 말입니까? '거1." '경찰에는 언제 신고했죠? "상원의원이 직접 보안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죠 경찰들이 트레 일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배리는 섣불리 그녀를 자극하지 않 았다. 베키가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렸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죠 그는 그들에게, 내가 아기를 죽였다고 하면서 날 체포하라고 했어요 그들은 날 시내 로 끌고와 취조를 시작했죠 내가 영아 살인자라는 진술서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했어요 난 거부했죠 하지만 얼마 버티질 못했습니다.- '걸국 그들 말대로 했군요" '게, 그렇게 했죠 그들은 날 독방에 가둬왔는데, 머리가 너무 아팠 고 구토도 두 차례나 했죠 몸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어요 그래서 난 아기를 죽였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난 아 기를 죽이지 않았어요 데이빗 메리트가 아기를 죽였죠 그는 나까지 죽였다고 생각하고 현장을 떠났던 거라구요? 배리가 중간중간에 약간씩 얘기를 잡아주는 가운데, 베키 스터기스 는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조작한 오심 사건을 상세히 설명했다. 암 브루스터는 그 일을 위해 정치권에도 힘을 썼다. 결국 베키 스터기스 는 며칠 만에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그녀는 카운티 유치장에서 주 교 도소로 이송되어 거기서 죽 형을 살다가, 샤를린 워터스를 통해 사건 의 진위를 알게 된 배리의 도움으로 이틀 전 감방에서 나왔다. 법무부 장관 얀시는 미시시피 당국자들에게 중재하여 그녀를 워싱턴으로 데 려왔다. 배리가 물었다. "당신은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당신의 주장보다는 데이빗 메리트 의 주장을 더 믿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니까 당신은, 상원의원이 진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당신을 교도소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보시 나요? "잘 모르겠지만, 난 그가 데이빗이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날 속인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이빗 메리트는 지금까지 당신이 죽은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어제까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난 상원의원이 그까지 속인 거라 고 생각합니다." 배리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명백한 사실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 언젠가 필요할 때, 베키 스 터기스를 사위에 대한 지렛대로 사용하려고 그녀를 숨겨뒀다는 사실 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암브루스터가 그녀를 절실히 필요로 하기 전에 배리가 먼저 그녀를 발견했다. "스터기스 양,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 감옥에 갇혀 있었나요? "네, 가석방 요청도 두 번이나 거절당했죠" "왜죠? 수감 기록을 보면 당신은 모범수였는데."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가석방 위원회에서는 그냥 내 요청 을 거부했습니다." 배리는 시청자들 스스로가 명백한 결론에 이르도록 잠시 침묵을 유 지했다. 즉, 베키 스터기스가 절대로 가석방되지 못하도록 암브루스터 가 배후에서 손을 쓴 것이란 결론에 말이다. '치난 몇 년 동안 당신은 샤를린 워터스란 여인과 한 감방에 있었 는데, 그 기간에 그녀에게 당신 얘기를 털어놓았나요? 베키 스터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뎃이 대통령이 된 후에 그 얘기를 했죠 처음에 샤를린은 날 믿지 않았어요 그녀는 내가 그 얘기를 만들어낸 걸로 생각했죠 하지 만 영부인의 아기가 백악관 육아실에서 죽었을 때, 그녀는 내 말이 사 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그녀는 유아 돌연사 증후군에 대한 당신 프로를 본 후에는 더욱 그런 쪽으로 생각이 굳어 졌습니다.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가 살해된 후에 유아 돌연사 증후군 으로 죽은 것처럼 꾸몄다고 말이에요" "스터기스 양, 이제 오늘 밤 질문 중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군요 난 지금 이 프로의 시청자들이 모두가 왜 당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침묵을 지켰는지 알고 싶어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교 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왜 단 한 번도자신이 누명을썼고 사실이 아닌 진술서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호 소하지 않은 거죠? 베키는 방금 지적받은 자신의 모순을 완전히 인정한다는 듯이 어깨 를 들썩거렸다. '재가 실종됐을 때, 그 누구 한 사람 걱정해주지 않았어요 내가 감 옥에 있는 동안, 아무도 날 찾아주지 않았답니다. 난 그 도시에서 오래 살지도 않았죠 사람들은 뜨내기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났듯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걸로 생각했겠죠 난 가족도 없답니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 내 사정을 얘기하겠습니까? "그래도 변호사는 있지 않았나요? '게, 있었죠 보안관 사무실에서 그들은 그날 밤 곧바로 내게 변호 사를 붙여주더군요 하지만 그 변호사는 진술서에 서명을 하는 게 좋 을 거라고 날 구슬렀답니다. 그는 내가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죄 가 더 무거워진다고 겁을 줬죠 그가 말하길, 일단 살인 사건에 대한 소송이 벌어지면 난 패소를 하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고 했어요 게다가 오랫동안 몸이 아팠습니다. 한 번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교 도소내 양호실에 누워 있기도 했죠 때때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답니다. 2년이 지난 후에야 머리가 정상으로 돌아왔죠 그 즈음부터 변호사에게 편지를 써보냈지만 그는 한두 번 답장을 보내주다가 말더군요 그러다 얼마 안 돼서 전혀 답장이 오지 않았죠 난 전화로 그에게 연락해보려고 했지만 언제나 그가 없다는 말만 들 었교 그는 내게 전화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변호 사가 교도소로 날 찾아왔죠 그의 이름을 어딘가에 적어두었는데, 아 무튼 그는 내 변호사가 죽었다면서 나더러 더 이상 자신들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약 계속 그렇게 귀찮게 한다면 암브루스터 가 가만 있지 않을 거란 얘기였죠 그 무렵 데이빗은 국회의원이었습 니다. 결국 난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데이빗 메리트와 클리트 암브루 스터에 대한 내 얘기를 그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스터기스 양, 참 좋은 질문입니다. 당신의 말을 우리가 왜 믿어야 하죠? 데이빗 메리트가 당신 아기를 죽였고 또한 당신을 죽도록 때렸 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라도 있나요? "아노,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난 그가 내 아기의 아버지였다는 사 실을 입증할 수는 있습니다." 베키가 자신 있게 덧붙였다. "아기가 살해당한 날, 난 아기의 몸에서 머리카락 한 올과 손톱들을 떼어냈습니다. 난 그것을 지금까지 작은 종이 상자 안에 보관해 왔죠 현재는 얀시 씨가 갖고 있습니다. 그는 실험을 해보면 데이빗이 아기 의 아버지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했죠 그 유물은 아기가 남긴 전부라 난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았지만, 얀시 씨는 연구소의 실험이 끝 나면 곧바로 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아기가 그 진실을 -넋줄 겁니다." 배리는 인터뷰를 끝내는데 이 마지막 구절보다 더 적절한 문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고맙습니다. 스터기스 양." 그러고는 돌아서서 자신의 얼굴만을 잡는 스튜디오 카메라를 정면 으로 바라보았다. '껍무부 장관 얀시의 말에 따르면 그 머리카락과 손톱들에 대한 DNA예비 실험 결과는, 데이빗 메리트가 베키 스터기스의 아들의 아 버지로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체포와 진술 과정도 빠른 시일 내 에 재조사할 예정입니다. 담당 검사는 그녀가 길고 긴 심리와 재판 과 정을 다시 밟게 될 거라고 암시했습니다. 데이빗 메리트는 암브루스 터 상원의원과 함께 법집행 방해죄로 고발당해 있지만 살인죄로 기소 될지의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현재 가택 연금 상태에 들어가 있으며, 오 늘 오후에는 상원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또한 여러분도 알다시피 의 회에서 데이빗 메리트를 탄핵하고 그의 해임을 의결한 후, 부통령이 었던 파이어시 씨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현재 '블레어 하우스(미국 대통령의 영빈관-안에 연 금돼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 얀시는 그에 대해 두 가지 방면으로 조사 를 벌일 예정인데 그중 하나는 미시시피에서의 범죄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죽음입니다.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는 아직 속단하기 이른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통령들이 갖가 지 추문에 휘말려온 건 사실이지만 이와 비길 만한 사건은 전혀 없었 습니다. 데이빗 메리트는 범죄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증언 과정 과 그에 따른 기소 가능성을 모면하기 위해 미시시피에서의 범죄 현 장을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연방법의 중대한 위반으 로서 그가 미합중국 대통령의 지위에서 물러나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지금까지 배리 트래비스였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안녕, 어서 들어와요" 배리는 옆으로 비켜서면서 그레이를 임시 숙소인 호텔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고맙소 당신과 한방을 쓰게 되다니, 이거 정말 영광이군. 당신은 엄청난 인기인이 췄소? "내 명성도 룸 서비스에게는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나 봐.9. 아직도 그들에게 '클럽 샌드위치(식빵을 세 겹으로 하여 그 사이에 닭고 기, 또는 칠면조 햄, 토마토 마요네즈 등을 넣똔'를 주문하면 내 머리가 다 회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든요" 그러더니 시계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벌써 릴분이나 지났어요 난 지금 굶어 죽어간단 말예요" "조명 기구가 어떻게 된 거요? "조명 기구는 아무 문제 없어요 이렇게 하는 게 더 아늑해서 그런 것뿐이에.9-" 방 안은 창가에 있는 희미한 전등불을 제외하고는 불이 다 꺼져 있 었다. 하지만 커튼이 활짝 젖혀 있어 도시의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배리는 방금 목욕을 끝내고 나온 듯 귀밑에서부터 발목까지, 호텔 에서 제공한 보풀지게 짠 새하얀 테리천 가운으로 몸을 감쌌다. 머리 카락은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 인터뷰를 봤소" 그녀는 숨을 멈추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좋았어, 배리." 하지만 그녀는 그의 미소로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괜스레 겸손을 떨 었다. "난 한 게 전혀 없어요 그 특종 자체가 프로를 이끌어갔죠- "당신이 없었다면 그 특종도 없었지.- '게리트와 암브루스터가 없었다면 특종도 없었을 거예요 특히나 베키 스터기스의 얘기를 세상에 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게 가슴이 아 파요" "그녀는 지금 어디 있소? '注텔에요 윌리엄이 그녀에게 두 명의 여성 보안관을 붙여주었죠 그녀는 내일 교도소로 돌아가서 미시시피 판사가사건을 재심리할 때 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을 거예요" "인터뷰는 아주 감동적이었소 머지않아 그녀를 석방하라는 국민들 의 강한 항의가 있을 거요" '겨소한 그녀는 배심원들의 심리를 받게 되겠죠 그녀가 유죄 판결 을 받는다면 난 아마 까무러치고 말 거예요 유죄로 판결받는다 해도 이미 형량을 다 채웠겠지만 말예요-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물었다. '%NN에는 어떻게 해서 들어간 거요? "그 어느 방송국보다 최상의 조건을 제시했죠 그러니 내가 어쩌겠 어요?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멋쩍게 말을 이었다. '字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당신 샌드위치가 도착했군." 그는 웨이터에게 응답하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를 대신해 계산 서에 서명을 하고 음식 쟁반을 소파 앞에 있는 커피 탁자 위에 내려놓 았다. "아만다 알랜이 전화를 했어요 조지가 차도를 보여 의사들이 좋아 하고 있다더군요 그녀는 낙천주의자예요 그를 너무나사랑하기 때문 에 그가 살아나기만 하면 모든 걸 다 용서하겠대요" "그럴 줄 알았지. 데일리는 어떻소? -가 그의 호텔 경비를 대고 있어요 그를 혼자 삭막한 집구석에 놔두는 게 싫어서 그래요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행은 충분하잖아쪼 삭막한 그 집에서 죽게 내버려둘 순 없어요 게 다가 우리가 그곳에서 함께 보낸 끔찍했던 마지막 며칠 동안이 생각 나서 도저히 그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는 앞으로 어디에서 살게 되는 거요? 그녀는 빵 조각을 집어들면서 대꾸했다. "난 집을 살까 생각하고 있어요 교외에 있는 주택으로, 데일리와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구해봐야죠 내 집에 대한 보험금도 기대 이상 으로 후하게 나왔고 지금 교섭하고 있는 월급도 어마어마하니까 앞 으로내가원하는건뭐든다할수 있어요 그리고내가집에 없을 때 그의 친구가 돼줄 개도 구해"딱떠요 이제 또 다른 개를 사랑할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해요 물론 크롱카이트의 빈자리는 아무도 채 워주지 못하지만 말예요" "데일리에게 그 생각을 비춰보았소? "그는 동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면서 호통을 치고 있지만 조만간 생 각이 바뀔 거예요" 그녀는 애정이 듬뿍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고서 접시를 한쪽으로 밀었다. "당신은 굶어죽기 일보 직전 아니오?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리가 잘못됐소? "아노" 갑자기 짜증스런 목소리로 대답을 하더니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이제 그토록 원하던 걸 손에 넣었소 전국의 모든 방송국들 이 당신을 끌어들이려고 아우성치고 있으니까. 이젠 부르는 게 값 아 니오? 당신은 역사에 남을 인터뷰를 했소 앞으로는 샴페인을 터뜨리 는 일만 남은 셈이지." "나도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오." 그녀의 목소리에 서글픔이 묻어났다. "하지만 대통령을 몰락시키는 일이 그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당신 도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대통령을 몰락시킨 건 아니오. 데이빗이 스 스로 몰락을 자초한 거지." "물론 당신 말이 맞아요 바로 요것도 한몫 거들었만요" 그러면서 그녀는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재가 지금 이렇게 상반된 감정을 느끼는 건 아마도 하위 때문인 것 같아요 하위는 허무하게 희생을 당했죠 그렇게 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나도 간접적으로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죠" "그 책임은 스펜서에게 있소"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마치 산후 증상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힘든 산고를 치르면서 아 기를 낳았지만 아기를 사랑할 자신이 없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이죠" 그러다가 눈길을 먼곳으로 돌렸다. "오늘 오후, 바네사가 내게 전화를 했어요" 그러자 그레이는 그녀에게 캐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내가 프로 내용을 조금만 조작했다면 훨씬 더 자극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도, 베키 스터기스의 인터뷰를 감정이 절제된 자 세로 진행해준 걸 고마워하더군요" 배리는 잠시 뭔가를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절제된 자세는 아마도 내가 성숙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 죠 그래요 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많이 성숙했어요 개인적으로나 직 업적으로 말예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_- "어쨌거나." 그녀는 자기 반성 투의 말투를 떨쳐버리듯 짐짓 활기차게 말했다. "바네사는 오늘 밤 백악관을 떠난다고 하던데, 그리 슬프진 않을 거 케요 소름 끼치는 기억들이 있는 장소를 떠나는 거니까요 그녀는 베키 스터기스의 얘기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했죠 전화 상으로도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극악한 일을,,,,,. 아참, 이 말은 바네 사가 한 말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에요 하여튼 그런 일을 저질렀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되뇌이더군요 아버지는 잔인한 범죄를 은폐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데이빗과 결혼시켰죠 다시 말해서 그 런 악질과 결혼하도록 딸을 부추긴 셈이죠 때문에 그녀는 지금 배신 감까지 느끼고 있답니다. 그녀는 결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 더군요" "그는 딸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할말이 없을 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양반은 아마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 배리가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윌리엄 얀 시에게, 로버트 루시톤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시 작하면 최대한 협조를 하겠다고 약속했답니다. 이제 생명의 위협을 三낄 필요가 없게 췄으니 자유롭게 진실을 밝힐 거예요 데이텟은 그 아기를 죽였지만 사인을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조작한 건 스펜서의 착상이었죠" "그다운 생각이었소 일을 간단하게 만드는 게 스펜서의 특기거든." "바네사는 그를 사랑했을까요? "스펜서를? 천만에. 그녀는 모든 남자에게서 원하는 걸 그에게 원 했을 뿐이오 바로 관심과 보호였지. 그녀는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데이텟에게 보복한 거요 데이빗에 대한 충성심이 결코 변 하지 않을 듯했던 남자를 통해서 말이오 하지만 스펜서마저 그녀에 게 등을 돌리자 그녀는 더욱 위태로워졌지." "그래서 당신에게 돌아선 거로군요" "그녀는 내게 우정을 원했소" 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탁자를 빙글 돌았다. "그 우정이 그녀가 당신에게 원한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아_- "하지만 그게 전부였소" "나한테 말한다고 해서 어디 덧나나요? "정말 말할 게 아무 것도 없소" "나한테도 얘길 못하겠다는 건가요? '싼 바네사를 원치 않았구 실제로 아무 관계도 없었소 이제 만족 하겠소? '게, 그래요 하지만 그 말을 해주는 게 그렇게도 힘들었나요? 그는 손가락을 뽀족탑처럼 세워 입술 한가운데에 붙이고 그녀를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는 그의 불타는 듯한 눈길을 견디다 못 해 찬 마디 던졌다. '재 그래요? "당신이 왜 그리 의기소침한지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 음, 감상적 인 표현이기는 하나, 내가 당신에게 변치않는 사랑을 맹세하지 않았 기 때문에 그런 거요." 그녀는 숙녀답지 않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또 그렇게 우쭐거리는 건가요? 당신은 정말 아주 나쁜 버릇을 갖 고 있군요, 그레이 본듀란트"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착 깔았다. "난 당신과 함께 여기 있소"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잠옷 가운 허리띠를 잡고 천천히 그 녀를 끌어당겼다. '지번에 사게 될 집은 얼마나 클 것 같소? "그건 왜 묻죠? '껍무부에서 일자리를 제의받았소 프리랜서직이지만 아주 재미있 는 일이지. 그래서 앞으로는 워싱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 소 그러니 머물 만한 곳을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그렇군_Q-" 그녀의 가슴이 별안간 방망질을 쳤고 식욕이 되살아났다. 아니, 사 실 그녀는 몹시 굶주려왔다. '널케트 트램프 도크는 앞으로 어떻게 하죠? '래가 멀리 떠나 있는 동안 그 녀석들을 돌봐줄 사람과 장소를 구 할 거요 그리고 어차피 프리랜서직이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와 이오밍 주로 가보면 되지." '지미 계획을 다 세워놓았군요" "그밖에 다른 계획도 세워놓았지 " 그는 그녀의 허리띠를 잡아당겨 가운을 열어젖히교 두 손을 그 안 으로 미끄러지듯 넣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눈길은 최면 에 걸린 듯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당신은 언젠가, 당신이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내 게 말한 적이 있지. 하지만 배리, 솔직히 난 당신에게 아주 관심이 많 았소 이젠 당신 부모님이 당신에게 남겨준 감정의 찌끼를 모두 내버 리시요 당신 아버지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소 그는 바로 자신을 속인 것뿐이지. 실상은 당신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말이오" 그러더니 그는 그녀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의 얼굴을 끌어 당겨 키스를 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부드럽게 탐닉하는 동안, 그녀의 배에선 힘이 쭉 빠지고 영혼은 힘차게 날개짓을 했다. 그의 손가락이 단단하고 민감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젖봉오리에 머 물렀다. 그가 지그시 누르며 깃털이 내려앉듯이 어루만지는 동안, 그 녀는 그의 옷과 씨름을 벌였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젖봉오리를 물고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정열적이며 아무 스스럼없는 욕정의 화신처럼 그와 몸을 섞었다. 그녀는 대체 그런 것을 어디서 배웠을까? 그의 쾌락을 유도해내는 성적인 기술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된 걸까? 그 녀의 조상 중에 그 어둠의 지식을 터득한 이교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까지 그녀가 려은 그 어떤 일도, 그녀의 몸이 그의 몸에 응답하 는 방식에, 혹은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그 욕구에 견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녀가 환희의 순간에 들어서려기 직전, 그도 똑같이 느꼈다. "지난번처럼 고함을 지를 거요? "당신이 내 입을 막지만 않는다면요" '씨번에도 고함을 지르도록 내버려둘 순 없지." 연이어 그는 신음소리를 토해내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몸 을 더욱 깊이 밀어붙였다. 그녀는 그의 몸이 점점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면서 조이는 유쾌한 압력에 숨을 헐떡였다. L(난 정말-. 당신이 날 막지 않는다면-고함을 지를 거예요" 순간 그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진한 키스를 선사했다. 하지만 그 자세는 두 사람이 동시에 절정을 느끼면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말았 다. 그는 그녀의 젖무덤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짧 게 이어지는 한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퍼졌다. 잠시 후 그녀마저 그의 가슴 위로 무너져내리면서 그의 목에 코를 비볐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윽고 가슴에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그녀의 얼굴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집게손가락 끝이 그녀의 볼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사이에 엄지손가락 은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애무했다. 그가 이렇듯 깊은 애정을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녀는 단 한 마디만을 속삭였다. "본듀란트" (L당신도 알 거야. 그 목소리만으로도 날 흥분시킨다는 걸. 정말 사 람을 당혹하게 만들더군." 그녀는 나지막하게 키들거리면서 고개를 숙여 그의 목에 사랑의 자 국을 남겼다. '내게 홀딱 반했나요?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껌벅이는 그의 눈은 그녀가 정곡을 찌르지 못했음을 암시하 고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과감히 물어보았다. "그럼 날 사랑한단 뜻인가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지만, 그의 매 력인 푸른 눈망울에 확실한 대답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이 속삭였다. '겅말로? '거무 좋아하지 마시요 난 당신 생일이나 발렌타인 데이, 그외 어 떤 기념일도 절대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난 애인에게 가슴과 꽃을 동 시에 바치는 남자가 아니거理" 그녀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 "앞으로도 날 속일 건가요? "아니 ." 그의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이 확고부동했다. '쩔대 그럴 일은 없소" "그럼 난 가슴도, 꽃도 필요 없어요" "섹스는 어떻소? "그래우 그건 필요하죠" 얼마 후, 그들은 커다란 침대에 숟가락처럼 옆으로 겹쳐 누워 있었 다. 그녀의 엉덩이의 풍성하고 부드러운 살결은 가는 털로 뒤덮인 그 의 하복부에 감싸였구 그의 턱은 그녀의 머리 정수리를 살며시 누르 고 있었다. 또한 그의 팔은 그녀를 감싸안구 손은 그녀의 우유빛 가슴 을 덮었다. 가끔씩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젖봉오리를 지분거렸 다. 그리고가끔씩 그녀는그의 손을들어올려 몇 주전 그에게 물렸 그 자리와 똑같이 그의 가슴에 입을 맞추곤 했다.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꿈나라로 가기 직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으음? '끼건 좀 역설적인 얘긴데 해도 될까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진지한 침묵 속에서 그가 귀 를 곤두세우고 있음을 알았다. "난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말예요" 그러자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파묻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알고 있소" 에필로그 배리의 책상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5분 안 으로 세트장에 가야 했다. 그 정도면 한 통화 정도는 받을 수 있을 성 싶었다. 아마 그레이겠지. 그는 종종 방송 시간 직전에 전화를 걸어 성공을 빌어주곤 했다. 그녀는 그러한 예측에 상냥한 미소를 홀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써제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봤지, 머리를 염색했나? 샤를린 워터스였다. '러리 색깔을 좀 강조했죠 마음에 드나요? "아니, 원래대로 다시 해야 할 것 같더군." 배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샤를린은 이제 자신만큼이나 유명해 져 있었다. 방송과 활자 매체를 통해 메리트 정부의 몰락에 관한 기사 를 다를 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교도소에 갇힌 죄 수가 이제 배리를 동료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 동안 어전어_a,샤를린? "뱃속에 가스가 찼어. 점심 식사 시간에 콩이 나왔거理" "참 안췄네요 저, 죄송하지만 난 지금 방송 시간이 다 됐거든요" "지금은 아주 좋아서 죽을 지경일 거야. 그게 다 아가리가 그 사건 을 조사한 덕분이지." 베키 스터기스가 부활한 뒤로 벌써 여섯 달이 지났다. 메리트와 암 브루스터의 사건은 아직 계류 중이었다. 검찰은 증거를 확보하고 정 리하기에 여념이 없었구 퍼고측 변호사들 역시 검찰측을 상대할 만 한 반증 자료들을 긁어 모으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비록, 면책이나 사면을 조건으로 피고인들의 유죄를 뒷받침해 주겠다는 검찰측 증인 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었지만 말이다. "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 니에요 나의 노력으로 앞으로도 그런 비양심적인 권력 남용 사건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길 기대하지만 말예요" "난 그런 기대는 절대 하지 않아. 사람들은 원래 생긴 대로 놀게 돼 있거든." 배리는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3분 남았다. 수화기를 턱과 어깨 사이에 끼구 책상 서랍에서 거울과 화장용 분첩을 꺼냈다. 이젠 전체적으로 화장할 시간도 없었다. '지갈린. 이렇게 통화하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하지만- "난 하루속히 그 망할 자식들이 교수형 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 그 들이 베키에게 그런 몹쓸 짓을 했는데, 어떻게 이 지구상에 살게 내버 려두느냐구? "그들이 유괴 판결을 받으면 사법 당국에선 당연히 그들에게 절절 한 처벌을 내릴 거예_Q_" 샤를린은 코웃음을 치며 당국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냈다. "내가 당신에게 베키 얘기를 꺼냈을 때, 최소한 당신은 뭔가를 해냈 어. 비록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당신은 그 일에 손을 댔지." '거1." "하지만 그녀는 그러질 않았어. 그녀는 빌어먹게도 손끝 하나 까딱 하지 않았지." "그래요 그녀는 교도소에 있었으니까요 그녀 말대로 그럴 여건이 전혀 , ,,, ,,." '지, 바보이 베키말고 메리트 부인 말야." 배리는 거울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다시 손으로 들었다. "메리트 부인이라구요? "방금 내 말 못들었어?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라고? 분명 배리는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배리가 한쪽 눈으로 시계를 보 고, 다른 한쪽 눈으로 거울을 보는 동안, 샤를린은 계속 그녀의 귀에다 대고 조잘거렸다. 그래, 뭔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어. "바네사 메리트에게 베키 스터기스의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단 뜻 인가요? ,,1럼? "그때가 언제주 샤를린? '지가 언제야겐 "언제 그녀에게 그 얘길 했냐구요? 베키 스터기스와 그 아기에 관 한 얘길 말예요" "가만 있자, 물론 베키에게서 그 얘기를 들은 후였지. 분명 메리트 부인이 영부인이 된 직후였을 거야." "샤를린, 지금 또 얘길 꾸미시는 거라면) "아가치는 내 친구야, 난 친구에겐 얘길 꾸미지 않는다구? 배리는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재가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당신은 메리트 부인, 당시 영부인에게 베키 스터기스와 데이빗 메리트 사이의 사건 을 얘기해 줬다는 거죠? "그래, 내가 당신에게 얘기한 그대로 말해줬지, 난 그녀에게 데이빗 메리트가 베키의 아들을 죽이고 상원의원이 그 사실을 은폐했다고 설명해 주었어," 배리는 현기증이 일었다. 핑핑 도는 것을 막으려고 괄꿈치를 책상 에 괴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떠받쳤다. 샤를린이 계속 주절거렸다. "난 그녀가 살인자와 결혼했다는 편지를 거듭거듭 그녀에게 써보 냈지. 하지만 그녀는 내 편지를 무시했어. 최소한 난 그렇게 생각했지.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교도소로 날 찾는 전화를 걸어왔지. 물론 그녀 는 가명을 썼지만, 내가 수신인 지불부담으로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전 화번호를 하나 알려주더군. 그렇게 해서 우린 30분이 넘게 통화를 했 어. 전화 박스에서 내 뒤로 줄지어선 여자들이 성을 냈지만 난 그애들 에게 꺼져버리라고 했지." 배리의 책상 위에 있는 시계가 똑딱거렸지만, 그 소리보단 심장의 고동 소리가 더 커다랗게 들렸다. 그녀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억 지로 참았다. 그때 조연출자가 배리의 방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개리?90초 남았어요" 배리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물었다. "샤를린, 영부인이 당신에게 전화했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은 없나요? 샤를린이 커다란 소리로 대꾸했다. "물론 얘기를 했지. 하지만 그들이 내 말을 믿을 것 같아? 로버트 레드포드의 학창 시절 애인이었-엘비스의 사생아를 낳았 다는 여인의 말을? 그래, 그 누가 그녀의 말을 믿겠는가? "그래서,,,, ,,." 배리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배리? 조연출자가 다시 나타났다. "당신, 괜찮아요? 이제 1분 남았어.- "곧 갈게요" 그리고서 배리는 샤를린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배키 스터기스의 얘기를 들려주니까 그녀가 뭐라고 하 던가요? "그녀는 그것을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고 더 이상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내지 말라고 하더군. 그렇지 않으면 FBI를 시켜 날 혼내주겠다 나? 난 그녀에게 이곳으로 와서 베키를 만나보고 그녀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라고 했지만 그녀는 안 된다고 했어.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지. 그러면서 그녀는 그 일이 이미 오래 전에 벌어진 사건이교 게다가 사 실이라고 믿기도 어렵다고 주장했어. 당연히 난 울화통이 터질 수밖 베 없었지. 그후 난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 그녀와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내 경고를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어. 결국 그녀는 그후 2년도 안 돼서 임신을 해버렸지, 내가 그렇게 경고를 했건만 그녀는 그 사내의 애를 갖고 만 거야. 그녀는 정말 미친 여자임이 틀림없어." 그러나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는 결코 미친 여자가 아니었다. -배리, 제발 날 도와줘요 내 말뜻을 당신은 아직도 눈치채지 못 했나요? -만일 그녀의 동기가 평벙하면서도 해묵은 앙심이라면 어떨까요? -난 로버트 루스톤을 죽이지 않았소 그녀가 죽였꼬 그 점과 관련해선 데이빗 메리트는 진실을 말했다. -그녀는 미친 여자요! 그리고 교도소의 철학자, 샤를린 워터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미친 사람들은 그 무슨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거든. 당신도 그 걸 알게 되면 무척 놀랄 거야. 배리는 알아듣기도 힘든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샤를린, 그후 바네사 메리트와 다시 통화한 적 있나요? "딱 한 번 있지.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어 당신에게 전화해 보라고 하더군." 배리는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책상 아래로 축 늘어진 전화기에선 샤를린의 공허한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