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특종 제1권 산드라 브라운 "아주 좋아 보이는군요,메리트 부인." "좋아 보이긴요? 엉망으로 보일 텐데." '바네사 메리트'는 정말 지쳐 보였다. 배리는 괜스레 겋치렛말을 둘러 댄 것 같아 겸연쩍어, 당황한 모습을 감추려고 조심스럽게 되받았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약간 피곤해 보이는 게 당연하겠죠 어 떤 여자告 특히 난 부인보다 더 끔찍하게 보였을 거예요" "고마워요" 메리트 부인이 거품 크림을 얹은 카푸치노를 산만하게 휘저었다. 만일 신경계에서 소리가 난다면, 메리트 부인이 방금 받침접시 위에 거칠게 내려놓은 티스푼처럼 요란하게 달가닥거리는 소리였으리라. "아휴! 담배를딱한대 퍼울수만 있다면 당신이 펜치로내 손톱을 모두 뽑는다 해도 개의치 않을 거예요? 메리트 부인이 대중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없어, 배리는 부인이 애연가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니코틴 중독이라서 그런가? 왜 그토촉 안절부절못하는지 설명이 될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은 잠시도 가만 있질 못했다. 진주 목걸이를 비트는가 싶 으면, 귓불에 박힌 다이아몬드 귀고리를 만지작거렸고, 아니면 눈 주 위에 거무스름하게 부어오른 부위를 감추느라고 낀 '레이밴' 선글라 스의 각도를 다시 맞추곤 했다. 아름다운 그녀는 그 매력적인 눈동자로 한결 돋보였다. 적어도 오 늘 이 자리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숨이 막힐 정도의 아름다운 연한 푸른빛 눈동자엔 고통과 환멸이 짙게 서려 있었다. 마치 무시무 시한 지옥을 처음 접한 천사의 눈동자라고나 할까. 배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행히 펜치 같은 건 없지만 이건 있답니다." 그러고는 커다란 가죽 가방에서 아직 뜯지 않은 담뱃갑을 꺼내 탁 자 맞은편으로 쭉 밀면서 권했다. 메리트 부인은 유혹에 흔들려 한 대 피우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데꾼한 눈으로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를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몇몇 남자들이 앉아 있는 한 탁자를 빼놓고는 텅 빈 상태였구 손님들 의 비위를 맞추려는 웨이터 한 명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비록 그런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담배를 사양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무래도 피우지 않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피우고 싶다면 마음 놓고 피우세요" 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단지 인터뷰하는 사람에게 여유를 갖 도록 해줄 때를 대비해 담배를 갖고 다닐 뿐이에요" -그러니까 상대를 유혹하려는 미끼란 뜻이군.9-" 배리가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정말 내가 그처럼 위험한 사람이라면 좋겠네요- "사실 당신은 인간에 대한 중요성을 다룬 기사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배리는 메리트 부인이 자신의 보도 기사를 시청했다는 것 자체만으 로도 신선한 기쁨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껸몇 기사는 아주 홀릉하더군요 에이즈 환자에 대한 기사가 그랬 고, 네 아이를 둔 무주택 미망인의 얘기가 그랬죠- "그 기사는 방송 부문에서 수상작으로 추천 받았습니다.- 배리는 그 기사를 직접 기획했다는 말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걸 보며 울었답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난 가끔, 당신이 왜 방송국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글쎄요 아마 지지리도 복이 없어서겠죠" 순간 바네사 메리트는 부드러운 이마에 잔주름을 지었다. "그린 판사 사건지 문제가 된 건 아닐까요? "됐습니다. 메리트 부인." 배리는 곧바로 부인의 말허리를 잘랐다.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화 제로 삼는 게 싫었다. "오늘 왜 날 만나자고 한 거죠? 연락을 받고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부인의 의도가 궁금했습니다." 바네사 메리트의 미소가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미 분명히 밝히지 않았던가요? 오늘 만남은 인터뷰가 아니라고 말예요" '지해합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배리 트래비스'는 왜 메리트 부인이 느닷 없이 전화를 걸어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제의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 었다. 그 두사람은 요 몇 년 동안 만나면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나 누는 사이였지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메리트 부인이 약속 장소로 선택한 곳도 요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 곳은 체사피크 만과 오하이오 주를 연결하는 운하와 나란히 뻗은 '포 토맥' 강 기슭에 자리잡은 여러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였다. 날이 저물 면 강 기슭을 따라 늘어선 클럽들과 음식점들엔 주로 관광객들로 확 들어찼다. 개중에는 점심 시간에도 상당한 수입을 올리는 곳들도 있 지만, 오늘처럼 평일 오후 시간에는 대부분 레스토랑들이 썰렁했다. 어쩌면 메리트 부인은 일부러 한적한 곳을 선택한 건지도 몰랐다. 배리는 카푸치노 잔 속에 각설탕 한 알을 떨어뜨리고 티스푼을 천 천히 회저으며 테라스의 철제 난간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름이 잔뜩 끼어 음산했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선 착장에 정박한 숙박설비를 갖춘 요트와 돛배들이 잿빛 물결에 실려 연신 널뛰기를 하는 듯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드리운 올이 굵은 삼베로 짠 파라솔이 빗물과 비릿한 민물고기 냄새를 머금 고 느닷없이 불어닥친 바람에 펄럭이며 휘말렸다. 이런 거친 날씨에 어째서 바깥에 앉아 있어야 하나? 메리트 부인은 거품으로 뒤덮인 우유를 휘젓다가 이윽고 카푸치노 를 한 모금 마셨다. "카푸치노가 식었네요" "부인, 한 잔 더 하시-어요? 내가 웨이터를 부르죠" '자못 됐어요 난 사실 이걸 마시고 싶지 않아요 커피를 마시면 당 신도 알다시피- 그녀는 한때는 품위 있고 날씬했지만 지금은 볼품 없이 아래로 축 늘어진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리는 부인의 마음을 떠보려고 슬쩍 찔러보았다. '껑계 아닌가요? 그러자 바네사 메리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배리는 선글라스의 짙은 안경에 어린 한 여인의 처절한 솔직함을 발견했다. "난 대화할 상대가 필요해_Q_" "그래서 대화의 상대로 날 생각해낸 건가요? '게, 그래요" "내가 기획했던 두 기사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어서 그러신가요? '지랄까, 당신의 그 연민어린 내용 때문이었죠 난 감동했어요 아 주 깊이." '래 기사가 당신에게 위안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난----난 절친한 친구가 별로 없는데다가 당신은 나와 동년배더 군요 그래서 당신이라면 허심탄회하게 얘길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수그렸다. 순간 길고 숱 많은 밤색 머리카 락이 앞으로 흘러내려 단아하게 뻗은 광대뼈와 귀족적인 턱 선을 부 분적으로 가렸다, 배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뇌까렸다. "그 기사들만으로는 당시 사건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안쓰런 마음 을 갖고 있었는지 전달할 수 없더군요" '아녜요 그 기사들은 분명 그 마음을 전했구 난 그 점에 대해 고맙 게 생각한답니다." 바네사 메리트는 핸드백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선글라스 밑의 눈 시울을 살짝 찍었다. '지것들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메리트 부인은 휴지를 적신 눈물을 내려다보았다. '래 몸에서 물기가 죄다 빠져나갔을 줄 알았는데------." 배리가 부드럽게 물었다. "혹시 부인께선 그 아기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아닌가요?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죠" 그러다가 불쑥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개 모든 사람들이 그애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꺼리는 거죠? 그 앤 분명히 이름을 갖고 있어요 석 달 동안 내 아들은 한 생명체였고 이름을 갖고 있었다구요? "내 생각엔,,,,,,." 그러나 메리트 부인은 배리에게 대꾸할 틈을 주지 않았다. "루시톤은 어머니의 결혼 전 성(P료이었죠 어머니도 첫 외손자의 이름에 당신 성을 따서 지은 걸 알았다면 무척 좋아하셨을 거예요" 부인은 바람에 실려 휘몰아치는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저 멀리 들려 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난 언제나 아이 이름을 로버트로 짓겠다고 생각했죠 실없는 의미 를 전혀 띠지 않은 아주 간단명료한 이름이거든요" 뜻하지 않은 부인의 촌스러움에 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남부 숙 녀인 바네사 메리트는 남부 숙녀에 대해 우리가 흔히 품고 있는 모습 과는 사뭇 어긋난 모습이었다. 배리는 인생을 통틀어 지금처럼 할말 이 없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이 가장 어울리려나? 최 근에 갓난 아들을 차디찬 땅에 묻은 여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장례식이 참으로 멋있었다고 해야 하나? 메리트 부인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뭘 알고 있죠? 배리는 순간 경계 자세를 취했다. 지금 나에 대한 도전인가? -당신이 아기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당신이 도대 체 아는 게 뭐 있겠어? "지금 그 말은--아기의 일-을,,,,, 그러니까 로버트의 죽음을 언 급하는 건가요? '제, 그래요 당신은 그에 대해 뭘 알고 있죠? 배리는 그 질문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부인, 유아 돌연사 증후군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때 메리트 부인이 마음을 바됐는지 대담하게 담깻갑 포장을 뜯었 다. 그 동잘은 마치 꼭두각시의 손놀림처럼 삐걱거리며 서투르기 짝 이 없었다. 담배를 입가에 가져가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 다. 배리는 재빨리 가방에서 라이터를 찾아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바네사 메리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여러 차례 담배 연기를 깊이 빨 아들였다. 하지만 담배 연기로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오히려 점점 더 격앙되었다. "로버트는 자그마한 베개로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누워 자고 있었어 요 언제나처럼 그애를 그렇게 눕혔죠 그러다가 순식간에 일이 벌어 졌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n 목소리가 콱 잠겨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자책하는 건가요? 내 말 잘 들으세요, 부인.- 배리는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메리트 부인에게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메리트 부인의 차디찬 손을 꼭 쥐 었다. 저쪽 탁자를 차지한 사내들이 그녀의 그 충동적인 행동에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얼핏 눈에 띄었다. "로버트는 유아 돌연사로 죽었어요 매년 수천 명의 어머니와 아버 지들은 sn>sC유아 돌연사 증후군'의 약자)로 아기를 잃는 비극을 려습 니다. 그런 비극을 당한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자신들의 육아법을 탓하 는 사람은 없답니다. 비극이 일어나면 책망할 대상을 찾는 건 인간의 본성이죠 결국 마땅한 대상이 없을 경우엔 사람들은 자책감에 빠져 들지요 그 덫에 걸려들지 마세요 일단, 아들의 죽음이 자신에게 책임 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코 거기서 헤어나을 수 없답니다." 메리트 부인이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짱신은 이해 못해요 순전히 내 실수였어외" 선글라스를 뚫고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을 것만 같았다. 부인은 배리에게서 손을 빼내 뺨을 어루만지다가 불안스런 손짓으로 탁자 위, 무릎, 스푼, 목 등을 차례차례 더듬었다. '낌신 말기의 몇 개월 동안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기였어요" 임신 마지막 석 달이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는 듯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다가 로버트가 태어났죠 하지만 그뒤엔 상황이 좋아지리라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더욱 악화됐죠 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 었어_9-" 배리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윌 할 수 없었단 거죠? 극복할 수 없었다? 모든 엄마들은 출산 후 몇 달 동안은 많은 부담을 겪으면서 당혹하게 마련이랍니다." 그러자 메리트 부인이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대꾸했다. "당신은 이해 못해_9-" 긴장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다시 되뇌었다. "아무도 이해 못하죠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내 아버지도 아니었어요 오 맙소시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 겠단 말예요? 걷잡을 수 없는 부인의 감정 표현이 너무나 격렬해 옆 탁자의 남자 들이 그녀를 보려고 모두 고개를 돌렸다. 웨이터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배리는 재빨리 단호한 어조로 속삭였다. '가네사, 제발 자제하세또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잖아요" 배리가 호칭을 빼고 이름을 불러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서인지 메리트 부인은 무너진 감정을 얼른 추스렸다.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던 손도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눈물도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시고 싶지 않다던 싸늘하게 식은 카푸치노로 목을 축이고는 냅킨으로 핏기 없는 입술을 우아하게 닦았다. 배리는 그 변화의 과정을 경악에 찬 눈길로 지켜보았다. 메리트 부인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듯이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 로 물었다. '지금 우리 대화를 절대 기록에 남기지 않겠죠? "그럼요 당신이 처음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 점을 분명히 밝혔 잖습니까? "당신과 나의 위치를 고려해볼 때, 아무래도 이 만남을 제의한 게 실수인 것 같군요 로버트가 죽은 후로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난 그 일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잘못 생 각했어요 그 일을 입에 올리는 게 오히려 더 미치게 만드는군요" 당신은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감정을 해소할 자격이 있죠" 배리는 메리트 부인의 팔을 잡으면서 토닥거렸다. -지신에게 좀더 관대해지세요 그 일은 단순한 유아 돌연사였을 뿐 ol 01~ 9-" 메리트 부인이 선글라스를 벗더니 배리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 다보았다. '정말 그럴까요? 냉혹하게 되받으며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 즉 미합중국 영부 인은 레이밴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어깨에 핸드백을 메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시크릿 서비스(재무성 비밀 검찰 부이자 대통령 비밀 경호 기관-의 비밀 경호요원들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철제 난간 가에 서서 망을 보던 다른 세 요원들과 합류하여 금세 레스토랑의 테라스를 벗어났다. 그들은 영부인을 물샐틈없이 호위하면서 레스토랑 밖으로 빠져나 와 대기 중인 리무진 쪽으로 일사불란하게 걸어갔다. 배리는 청량 음료 자판기에 집어넣을 동전을 찾으려고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개게 25센트짜리 동전 두 개만 빌려줄 사람 없나좌? 마침 그녀 곁을 지나가던 비디오 테이프 편집기사가 대꾸했다 "헤이, 예쁜 엉덩이, 당신에게 더는 안 돼! 당신은 벌써 내게 75센트 나 빛졌단 말야." '래일 꼭 갚겠어요 맹세할게요" "포기하시지, 귀여운 엉덩이," 사라지는 그의 등뒤에 대고 배리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직장에서 성희롱이란 말 들어봤어요? "그럼! 난 그것에 찬성 투표를 했거든." 배리는 결국 가방 밑바닥에서 동전을 찾아내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 다. 다이어트 음료를 위해 그렇게 애쓸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서 말 이다. 그러고는 미로처럼 나누어진 텔레비전 방송 보도국 편집실 공간을 꾸불꾸불 누비듯이 지나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들어섰다. 그녀의 책 상을 생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손목을 면도날로 그을 정도로 머리가 홱 돌아버리리라. 하지만 배리는 서슴없이 가방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그 통에 그 위에 있던 잡지 세 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거 다 읽어본 잡진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리는 순간 배리는 신음을 토해냈 다. '하위 프리料는 보도국 편집실의 편집 과장으로, 바로 그녀의 직 속 상사이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물론 다 읽어보았죠"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세 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어요" 그녀는 수많은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다. 잡지들은 정기적으로 날아 와 책상 위에 마천루처럼 높이 쌓였고, 결국 대부분은 보지도 않은 상 태에서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꼬박꼬박 읽는 것은 -코스모폴리탄-지에 매월 실리는 별점 뿐이었다. 잡지들에 투 자하는 시간이 그게 전부였지만 원칙에 따라 잡지 구독을 중단시킬 순 없었다. 훌륭한 방송 기자들은 닥치는 대로 뉴스를 읽어대는 고물 짝 뉴스의 수집가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녀 역시 훌륭한 방송 기자였다. 예전엔 그랬다. "자네가 읽지도 않는 잡지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생명을 내놓고 있는데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건가? "하위, 정말 날 괴롭히려고 작정을 했군요! 게다가 하루에 담배를 네 갑씩 피워대면서 공기를 오염시키는 양반이 무슨 배짱으로 환경 운운하며 거드럭거려요? "하, 내 방귀 냄새 역시 말할 것도 없겠지? 그녀는 하위의 사악한 미소를 경멸하는 만큼이나 워싱턴 시의 획일 적인 뉴스 사업체들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등치는 WVUE,즉 수 준 이하의 싸구려 독립 텔레비전 방송국의 속좁은 경영자들도 경멸했 다. 엊그제 영부인의 찬사를 받은 그 인기 기획 보도물을 만들 때에도 구걸하다시피 예산을 타냈다. 그 외에도 기발한 기획이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하위를 비롯한 방송국 경영진은 그녀와 똑같은 마음을 지니지 알았다. 그녀의 참신한 기획은 통찰력과 재능, 열정이 부족한 남성들 에게 가로막혀 버렸다. 그녀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이나 품을 신념인가? 그녀는 책상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를 만진 남자 미용사가 그리 훌륭한 솜씨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그 음 습한 바람을 맞은 탓에 엉망으로 되어버렸다. 별난 곳의 약속 장소 게다가 이상한 만남.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와 만난 걸까? 방송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리는 영부인의 말들을 수없이 되새겨 보았다. 바네사 메리트의 목소리에 담긴 억양을 분석하고, 손놀림과 몸짓을 가늠하며 평가하면서, 작별 인사차 던진 그 이상한 마지막 질 문의 의미를 헤아려 보았지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갖고 괜히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가? "전자 우편은 검색해 보았나? 하위의 질문에 상념의 흐름이 끊어졌다. "아직 보지 않았어요." "왜, 그 순회 서커스단에서 도망 나온 호랑이 있잖나? 찾았다고 하 더군. 결국 탈출에 실패한 거지. 그런고로 기삿거리가 될 수 없어.- "어머머, 안 돼요? 그녀는 연기하듯이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그 호랑이를 취재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구요? '거런, 잘만하면 그놈은 엄청난 뉴스거리가 될 수 있었는데! 그 고 양이과 야수는 아이나 뭐 그런 비슷한 걸 잡아먹을 수도 있었겠지.- 정말로 그는 기회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하며 절망하는 듯했다 "하위, 왜 내게 항상 그런 쓰레기 같은 기삿거리만 떠맡기는 거죠? 그냥 내가 싫다는 이유 때문인가요? 아니면 내가 여자인 점이 싫기 때 문인가요? "아휴, 또 그 잘난 여성 해방론인가? 하여튼 난 그 얘기만 들으먼 속에서 신물이 다 올라온다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되받았다. "하위, 당신은 정말로 절망적이군요" 절망적이라--. 바로 그거야. 바네사 메리트 부인은 절망적으로 보였어. 배리는 어서 빨리 상념의 길을 누비고 싶은 조바심이 일었다. '지봐요, 하위. 지금 특별히 내게 얘기할 용건이 없다면 난 일을 하 고 싶군요 보다시피 할 일이 태산같이 밀려 있잖아요- 하위가 뒤로 물러서면서 칸막이 벽에 등이 맞닿는 순간, 그녀는 자 신의 공간이 더욱더 비좁고 갑갑하게 느껴졌다 하위는 계절에 상관 없이 언제나 반소매의 하얀 셔츠를 입고 다녔다. 그리고 검정색 바지 는 항상 반들반들 윤이 났다. 여느 때촤 마찬가지로 넥타이를 클립으 로 고정시켜 놓았는데, 특히나 오늘 고른 넥타이는 꼴사납기 짝이 없 었다. 얼룩이 묻어 있는 닳아빠진 넥타이 끝이 가슴 한가운데에 달랑 거렸다. 비실비실한 엉덩이와 가냘픈 안짱다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 게 두툼하고 널찍한 그 가슴으로 말이다. 그는 팔짱과 다리를 동시에 꼬면서 말을 내뱉었다. '개리, 기사 하나로도 충분해. 자넨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일 한 가지씩 기사를 제출한다는 조건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타먹고 있는 거 라고! 오늘 저녁 뉴스 시간에 내보낼 기사는 어떻게 돼가고 있지? 그녀는 컴퓨터 명령어를 화면에 띄웠다. "나는 여태껏 불발로 끝날 기사만 붙들고 있었어요" "대체 그게 뭔데? '지미 결과가 '아니올시다'로 나왔는데 여기서 얘기한들 무슨 소용 있-어요? 바네사 메리트는 아기가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견디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비록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태도 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냈는지 분명히 밝힌 셈이다. 아기의 탄생 후로 그 '견디기 힘든'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고 했다. 하지만 대체 뭐가 그토록 견디기 힘들었단 얘기지? 그리고 그런 사정을 왜 내게 암시한 걸까? 하위는 배리가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 지 못하고 계속 장황하게 씨부렁거렸다, "난 자네에게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린 사람이나 화성에 최초로 착 륙한 사람, 혹은 바티칸에서 교황을 인질로 잡고 있는 회교 극단주의 자를 생중계로 취재하라는 게 아니야. 멋지고 간단한 기사 한 토막이 면 충분해. 뭔가 그럴 듯한 걸로, 소재는 아무 거나 좋아. 두 번째와 세 번째 광고 시간 사이에 내보낼 60초짜리 뉴스거리면 된다구! 내가 요구하는 건 그게 전부야." -하위, 당신은 왜 그리 생각이 짧죠? 그 얘기가 내게 성취 동기를 불어넣기 위해 들려주는 최고의 연설이라면, 당신이 부하 직원들에게 서 만족스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군요" 그는 그 말을 듣고 다리를 풀더니 허리를 쭉 폈다. 구두코가 날개 모양이고 키가 커보이도록 바닥을 높인 '엘리베이터 구두' 탓에 순식 간에 170센티미터로 커졌다. 자네 문제가 뭔지 알아? 자넨 아주 패기만만한 눈資을 갖고 있지. 아마 못해도 그 유명한 여성 뉴스 앵커인 '다이앤 소이어' 정도는 되 고 싶을 거야.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자네에게 들려줄 얘기가 있지, 그건 바로 자네 싹수가 아예 노랗다는 거야. 자네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어. 자네가 유명한 영화감독과 결혼한다거나 자네만의 주간 뉴 스 프로를 맡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거야. 심지어 이 방송계에서 명성이나 신뢰도 얻지 못할 거라구. 왠지 알아? 자네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실패작이라는 사실을 모든 斗람이 알기 때문이지, 그러니 낚싯 바늘에 거창한 기삿거리가 물리길 기다리지 말고 자네의 그 알량한 재능으로 소화할 기삿거리나 찾아보라고! 내가 방송에 내보낼 수 있 는 걸로 말야. 알았나? 배리는 그 '패기만만한 눈빛'이란 말이 나왔을 때 이미 그에게 등을 돌렸다. 하위 밑에서 일하게 된 첫날부터 그 말을 들었다. 그날 그는 자신이 착해 그녀를 고용하는 거라고 거들먹거렸다. 그러더니 새로운 -치마-를 핀용하기 위해 나름대로 경영 수완을 발휘했고, 다행히 배리 는 -인상이 좋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후로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똑같은 연설을 들어왔다. 자그마치 3년 동안 말이다. 전자 우편에는 몇 가지 소식밖에 들어 있지 않았지만, 모두 다 시급 하게 처리해야 할 사항들이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 어났다. 하위, 오늘은 너무 늦어서 저녁 뉴스를 작성하지 못하겠지만 내일 까지는 꼭 기사를 제출할 거예요 약속하죠" 그녀가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치자 그가 그녀의 등뒤에다 대고 소 리쳤다. '지봐! 어딜 가는 거야丁 "도서관예_9-" "뭣 때문에? "조사할 게 있어서-하위." 그녀는 청량 음료 자판기 옆을 지나치면서 주먹으로 기계를 내리쳤 다. 순간 '와당탕' 소리와 함께 다이어트 콜라 캔 하나가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문득 조짐이 좋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가방과 도서관에서 빌린 한아름의 책들, 그리고 열쇠 꾸러 미와 곡예를 하면서 집 뒷문을 열고 비틀비틀 안으로 들어섰다. 문턱 을 막 넘어서려는 순간 열렬하고 촉촉한 키스 세례를 받았다. "고마워, 크롱카이트" 그녀는 얼굴에서 침을 닦아냈다. "나도 널 사랑한단다." 크롱카이트와 그의 새끼들이 동물수용소에서 안락사당하기로 되어 있던 날, 공교롭게 배리는 거-발' 달린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두 발' 달린 동반자가 자신에게도 삶의 공간이 필요 하다고 선언하고는 그녀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진 바로 그 날이었다. 당시 어떤 애완견을 살려둘지 결정을 내리는데 무척 고심했지만 일 단 내린 선택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크롱카이트'는 황금빛 '리트리버(公아서 잡은 사냥감을 가져오도록 훈련받은 개-종의 유전자 를 지닌 몸집이 크고 털이 긴 애완견이었다. 녀석의 커다란 갈색 눈은 그녀를 숭배하듯이 열렬한 애정을 담고 있었고, 꼬리로 그녀의 장딴 지를 '톡톡' 치면서 살랑거렸다. '저서 가서 볼일을 봐야지 " 그녀는 뒷뜰에 있는 자그마한 밭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껑멍이 문으로 나가렴." 하지만 녀석은 그 자리를 지키면서 애처롭게 낑낑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배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갔다와. 책이 좨나 무겁단 말야." 녀석은 재빨리 시원스레 여러 관목들을 적시고 나서 번개처럼 배리 앞으로 돌아왔다. "우편함에 재미난 것이 들어 있는지 살펴보자꾸나." 현관문 앞에 가보니 투입구 밑으로 우편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썽구서, 청구서. 지불 기한이 넘은 청구서. -으, 지겨워. 이건 백악관 만찬 초대장." 문득 강아지를 내려다보니 녀석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 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냥 네가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말한 거니까 너무 골치 아파 하지 마." 크롱카이트는 2층으로 올라가는 그여 뒤를 졸졸 따라와 침실까지 들어왔다. 침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정장을 벗어던지고 '레드스킨' 상 표가 붙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풋볼 셔츠와 체조 양말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머리솔로 대충 빗어내린 후 뒤로 땋아 늘어뜨렸다. 거을 앞으 로 다가가 이리저리 비춰보면서 중얼거렸다. "아찔할 정도로 예쁜데? 곧바로 그 모습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수년 간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정보원을 심어놓았다. 점원, 비서, 부 정한연인들, 가정부, 경찰, 그외 사회 요직에 앉아있는몇 안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다양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녀에게 귀중한 정보 와 믿음이 가는 단서를 제공해 주는 임무를 충실하게 지켜왔다. 그 중 에는 'D.C. 종합 병원'의 원무과에 근무하는 '앤 첸'이란 아가씨도 있 었다. 앤이 병원내 정보망을 통해 건진 흥미진진하고 짜릿한 소문들 은 멋진 기삿거리로 활용하는 데 나무랄 데가 없었다. 따라서 배리가 확보하고 있는 정보원 중에 가장 신뢰하는 축에 속했다. 배리는 그녀가 아직 퇴근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정용 롤로 덱스썬명, 주수 전화번호가 들어 있는 소형 탁상용 파일)에서 앤의 전화 번호를 찾아내어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병원 전화 교환원이 앤과 연 결시켜 주었다. "안녕, 앤? 배리 트래비스예요 당신과 통화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 인지 몰라요"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이죠? "혹시 메리트 아기의 부검 보고서를 한 부 얻을 수 있을까요? "설마 농담하는 건 아니겠죠? "좀 까다로운 일인가요? "아니요, 절대 불가능해요, 배리, 미안해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번 물어본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왜 그걸 원하는 거죠? 배리가 갖고 있는 논리력을 최대한 짜내 언어의 곡예를 부리며 둘 러대자, 그녀의 정보원도 어느 정도 안심하는 듯했다. "어쨌든 고마웠어요, 앤." 배리는 실망감에 젖어 전화를 끊었다. 아직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지만, 부검 보고서가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미 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침실에서 나와 아래층 부엌으로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면서 크롱카 이트에게 물었다. "크롱카이트, 저녁으로 뭘 먹고 싶니? 식료품 저장실 문을 열고 목소리를 높여 메뉴를 읖었다. 오늘의 특제 요리로는 굵게 간 곡식 알갱이와 과자, 닭고기와 간, 아니면 고기 국물이 있단다." 그러자 크롱카이트는 처량하게 낑낑거리면서 실망감을 역력히 러냈다. 그녀는 안쓰런 마음에서 얼른 덧붙였다. "그럼 '루이지' 파이로 할래? 그러자 녀석은 길쭉한 분홍빛 혀를 쑥 내밀고, 외설스런 구경거리 를 보는 성도착자퍼럼 숨을 헐떡거렸다. 마음속에선 저녁 음식으로 살코기 요리를 먹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이미 될 대로 되라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황금 같은 저녁 시간 에 기껏해야 집에서 셔츠와 체조 양말 차림으로 잡종 개와 대화를 나 누며 몇 시간 동안 자료 조사밖에 할 일이 없다면, 지방질이 몇 백 그 램 더 늘어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잖은가? 전화로 피자 두 판을 주문하는 동안 크롱카이트는 밖에 내보내 달 라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화기의 송화구를 손으로 막았다. L1급한 일이라면 멍멍이 문으로 나가." 그러자 크롱카이트는 모멸감이 어린 눈빛으로 뒷문 구멍을 바라보 았다. 그 출입구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침입자들에겐 적당하지 않 았지만 크롱카이트 정도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크기였다. 그녀는 피자를 반복해서 주문하면서 검지손가락으로 멍멍이 문을 가리켰다. 결국 크롱카이트는 수치스런 기색을 띠면서 그 구멍으로 엉금엉금 기 어 나갔다. 전화를 끊고 보니 녀석은 다시 안으로 들어을 준비를 끝냈 다. 녀석을 위해 뒷문을 열어주었다. 'W분 안에 피자가 도착하지 않으면 공짜란다." 피자를 기다리는 동안, 쌉쌀한 맛이 나는 붉은 포도주 '메를로'를 한 잔 따라 집무실로 개조한 3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신탁기금으로 기퐁-광장에 자리잡은 이 현대식 3층짜리 저택을 구입했다. 건물은 예스럽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고 도시의 모든 편의를 손쉽게 누릴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체적으로 설비를 갖춘 독립식 맨션이었던 3층을 세놓 았다. 하지만 세든 사람이 임대 기간을 6개월 남겨두고 유럽으로 가게 되자. 내친 김에 돈을 들여 비좁은 세 개의 방들을 하나로 터서 커다 란 스튜디오 겸 집무실로 개조했다. 3층 집무실 한쪽 벽면은 비디오 테이프의 보관소로 해놓았다. 그리 고 서가를 마련해 자신이 취재한 보도물,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면들, 그외에도 온갖 주간 뉴스 자료 녹화 테이프들을 보관해 왔다. 비디오 테이프들은 주제별로, 그리고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내 보고 싶은 테이프를 찾아내어 VCR에 넣고 포도주를 흘짝거리면 서 여유 있게 시청했다.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쿡음과 장례식 과정을 완벽하게 녹화해놓 은 기록물이언다. 그런 일이 대통령 가에서 벌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그 비극의 부당성을 두 배로 증폭시키는 듯했다. 그 부부의 결혼은 세 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은 완벽한 한 쌍이라 더욱 그러했다. 대통령 '데이빗 말콤 메리트'는 대통령 지위를 꿈꾸는 미국의 모든 청년들에게 우상이었다. 그는 고전적으로 잘생긴 외모와 운동선수 같 은 건장한 체격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작용하는 매력 과 권위를 소유하고 있었다.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는 그런 남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 는 짝이었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과 남부 태생 이 지니는 매력만으로도 다른 모든 단점을 메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 다가 재치와 지혜까지 겸비했다. 물론 그녀는 정부의 두뇌 집단에 활 력을 불어넣는 영부인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런 점엔 개의치 않았 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영부인을 원했고,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는 그 조건을 쉽게 충족시키는 여인이었다. 대통령 데이빗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고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하지만 바네사의 아버지인 '클리트 암브루스터'는 대통령의 단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날부 터 미시시피 지역의 상원의원 자리를 지켜왔다. 현재 대부분의 미국 인들이 투표로 뽑은 뭇 대통령들보다 오래 살아 꾸준한 활동을 벌이 고 있었다. 그리하여 메리트 부부와 클리트 암브루스터는 여느 절대군주의 가 족들처럼 사진이 가장 잘 받는 삼인조를 구성해왔다. 케네디 이후료 그들처럼 대통령 부부의 사생활이 국내적으로나 전세계적으로 공식 적인 주목과 찬탄의 대상이 된 경우는 없었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 든, 어디를 가든 개인으로나 집단적으로 항상 화제를 몰고다녔다. 따라서 미국들인은 영부인이 첫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열 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대통령 부부의 첫아이는 기존의 완벽함을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아기의 탄생은 '사막의 폭풍틱料料 오orm,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다국 적 군의 작전명-이나 보스니아의 '인종 청소 대학살'보다도 더 많은 언 론의 주목을 받았다. 배리 역시 그 당시 보도국 편집실 모니터로 갓난 아기 메리트의 백악관 입성에 대한 수많은 기사들을 시청했다. 그때 하위가 볼멘 소리로 툭 내던진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방에 찬란한 별이 나타나는지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니了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사건이 터졌다. 아기의 돌연사로 또다시 백악 관은 취재의 열풍에 휩쓸렸다. 온세계가 충격과 경악, 비통에 젖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들 지 않았다. 전미국이 애도했다. 배리는 포도주를 다 마시고 비디오 테이프를 세 번째로 되돌려 감 아 슬픔과 조와에 가득 찬 장례식 장면을 다시 지켜보았다. 상복 차림의 바네사 메리트는 부축을 받고 간신히 서 있었다. 안색 이 백묵처럼 창백한데도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겼다. 비통에 잠긴 그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언론계는 그녀가 아이를 갖기까지 수 년 동안, 그녀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치고 교묘하게 이용해 왔다. 그 리고 자식을 잃은 그녀의 고통스런 모습은 그녀를 진정한 비극의 여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대통령은, 야윈 뺨 위를 지나 입가에 파인 매력적인 깊은 주름살 위 로 눈물이 흐르는 동안에도 가슴을 도려내는 비애를 용기 있게 참아 내는 듯했다. 그날 칼럼니스트들은 아내에 대한 그의 염려와 배려에 대해 앞다투어 촌평을 달았다. 데이빗 메리트는 대통령인 동시에 남 편이자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고-----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새하얀 손수건에 얼굴 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하얀 장미와 베이비 브레스씬나물, 숙근 광대 나물, 지중해 연안 원산의 백색 또는 분홍 꽃이 피는 다년초)로 둘러싸인 손자의 작은 관 위에 자그마한 미시시피 주정부 기를 올려 놓았다. 배리가 영부인 위치에 있었다면 가족만의 자리로 조용하게 아이의 죽음을 애도했으리라. 그리고 남의 불행을 취재 대상으로 삼는 카메 라들과 칼럼니스트들에 대해 분개하고 치를 떨었겠지. 사실 그녀와 동료들은 각기 맡은 일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그 장례식이 인공위성 을 통해 전세계가 시청한 대규모 쇼로 전락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시계를 바라다보면서 이마를 탁 치며 탄식했다. 아휴!24분 39초구나. 조금만 늦게 오지. 그렇잖니, 크롱카이! 그녀는 개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일부러 우리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 같구나." 루이지가 직접 피자를 가지고 왔다. 땀이 번들거리는 장밋빛 안색 과 육감적이고 귀여운 입술, 부스스하고 곱슬거리는 검은 가슴털, 그 리고 대머리가 돋보이는 작고 통통한 이탈리아 남자였다. "트래비스 양." 그는 그녀의 옷차림에 넋을 놓고 바라보며 운을 뗐다. "오늘 밤 이 피자는 연인을 위한 것이길 빌겠습니다." "안됐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군요 그 미트볼 퍼자는 크롱 카이트를 위한 피자예요 그리고 이번엔 양파를 너무 많이 넣지 않았 으면 하는데-. 양파를 너무 많이 먹으면 요 녀석이 방귀를 뀌거든 요 모두 얼마죠? "그냥 외상으로 드리죠" "고맙습니다." 그녀가 두 퍼자 상자를 받아드는 사이에 크롱카이트는 피자 냄새를 맡고 신이 나서 그녀의 발치를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크 롱카이트가 계속 돌고 아까 마신 메를로 포도주, 그리고 허기가 겹친 탓인지 현기증이 일었다. 하지만 루이지는 배달을 할 때마다 으게 을어대는 말을 하지 않고 는 피자를 건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짱신은 영화 배우니까,,,,,." "난 TV뉴스 시간에만 나와요" "그게 그거죠 난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트래비스 양은 좋은 고객이야. 1주일에 두세 번씩은 꼭 전화로 주문을 해주니 우리에겐 정 말 좋은 고객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좋지 않아. 너무 외롭게 살고 있잖아.' 라고 말예요 그러면 아내는-----." '兮래비스 양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겠죠" "아닙니다. 마누라는 당신이 하루종일 일만 하기 때문에 남자를 만 나지 않는 거라고 말하더군요" "루이지, 나도 남자들을 만나요 하지만 좋은 남자들은 모두 임자가 있죠 그리고 내가 만나는 남자들은 기혼자, 동성애자, 소름끼치는 남 자, 아니면 말할 가치도 없는 작자들이 전부랍니다. 어쨌거나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러고서 피자를 건네받으려 했지만 피자 상자는 여전히 그의 손에 서 떠나지 않았다. "당신은 미인입니다. 트래비스 양." "하지만 나 때문에 교통이 막히는 일은 없던데요? "당신 머리카락은 아름답습니다. 아주 멋진 붉은색이죠 게다가 살 결 역시 기막힙니다. 눈은 보기 드물게 녹색을 띠고 있고.- '개 눈빛은 평범한 담갈색이랍니다." 화려한 눈빛이 절대 아니다. 적어도 바네사 메리트의 투명한 사파 이어 우물 같은 눈빛은 결코 아니었다. 그 사이에 루이지의 시선이 그녀의 젖가슴에 꽃혔다. '거떻게 보면 그 부분은 작다고 할 수 있죠" 배리는 얼른 그의 말을 앞질렀다. 지금 이렇듯 말을 가로막지 않으 면 그가 자신의 몸매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기 시작하리란 건 오랜 경 험으로 알고 있던 터였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얼른 되받았다. "하지만 그리 작은 것도 아니죠 달신 몸매는 전체적으로 보면 날씬 하니까_9_" "그리고 점점 더 날씬해지고 있죠-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 그에게서 피자 상자들을 낚아챘다. '以마워요, 루이지. 당신 팁도 외상으로 달아놓으세요 부인께 내 안부도 전해주시구요" 그녀는 애정이 결핍된 자신의 인생을 두고 또 다른 탄식을 듣기 전 에 재빨리 현관문을 닫았다. 크롱카이트가 꼬리를 치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배리는 피자 한 판을 열고 녀석 앞에 내려놓고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남은 피자 한 판을 다시 채워진 포도주 잔과 오늘 오후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들 앞에 놓았다. 피자는 언제나처럼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 를 정도로 맛이 기막혔다. 게다가 두 번째 포도주는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내려갔다. 또한 유아 돌연사 증후군에 대한 조사 역시 황 흘하게 다가왔다. 그 셋 중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건 유아 돌연사 증후군에 대한 조사였다. 하위 프리프는 회의적인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고는 들쭉날쭉한 자동차 열쇠 끝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잘 모르겠는걸." 순간 배리는 그의 책상을 건너뛰어 이빨로 그의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어느 누구를 만나든 이렇듯 내면에 도 사리고 있는 야성적인 면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런 이는 오직 하 위뿐이었다. 그녀에게 야만적인 본능이 일어나는 까닭은 그의 역겨운 습관이나 악명 높은 남성우월주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통찰력이 결여된 애처롭기 짝이 없는 소심함 때문이었다. "그걸 왜 탐탁찮게 여기는 거죠? "주제가 너무 우울해? 그러고는 그 말의 효과를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듯 진서리를 쳤다, 아기들이 침대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런 장면을 연속물로 누가 보 고 싶어하겠나? "갓부모가 된 부부들, 미래의 부모들, 혹은 이미 그런 일을 당한 부 모들이죠 정보라든가 강의를 받고 싶은 이들이 그 프로를 볼 거라구 요 난 우리 시청자들 중 최소한 일부라도 그 속에 끼어 있길 바랄 뿐 ol 01~ 9-" "배리, 완전히 꿈 속에서 살고 있군. 우리에게 시청자들이 붙어 있 는 이유는 뉴스 시간 후에 '치어스'가 재방송되기 때문이야." 배리는 조급해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그녀가 초조 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우둔하게 굴곤 했기 때문이다. "그 주제는 물론 즐점고 기분 좋은 건 아닐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눈물만 짜내는 감상적인 프로만 선호할 필요는 없죠 나는 이 미 2년 전 SIDS로 자식을 잃은 부부와 연락해왔어요 아이가 죽은 후 로 또 다른 아이를 가진 그 부부는 기꺼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이 SII~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설명하겠다고 했다구요" 그녀는 흥정을 끝내려는 각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번 주제는 어두운 터널 끝을 밝히는 한줄기 빛이 될 거예요 고 난 끝에 숭리! 이건 굉장히 고무적이라구요" "이미 인터뷰까지 약속해 능았다구? "물론 당신의 승낙 여하에 달린 문제지만요" 그녀는 그의 마음을 적당히 달래가면서 말을 이었다. "하위, 이 자리에 오기 전에 그 부분들을 정리해놓고 싶었어요 그 래서 지난 1주일 동안 소아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이 문 제를 조사해봤죠 다시 말하지만 이건 아주 시기 적절한 주제예요 특 히 메리트 가의 아기가 죽은 후로는 말예요" "사람들은 그 얘기라면 이제 진저리를 칠걸? "하지만 난 독특한 관점에서 그 문제에 접근하고 있어요" 단순히 호기심을 끌려는 의도에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유아 돌연 사 증후군을 조사하면 할수록 그 주제에 깊이 매료되었다. 분명 철저 히 탐구할 가치와 흥미를 지닌 주제였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하위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는 다시 똑같은 말만 주절거렸다. "잘 모르겠는데." 심드렁하게 대꾸하더니 자동차 열쇠를 굴착기처럼 사용하여 귓구 멍을 후비면서 그녀의 기획안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 내용은 상세하 면서도 간결했다. 하위처럼 끈 팎은 지성의 소유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획안에서 그녀는 저녁 뉴스 방송 시간에 이틀 동안 연속적으로 방영하도록 세 편을 요청했다. 세 편의 유아 돌연사는 각각 다른 시각 으로 초점이 맞춰지게 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이를 위해 사전의 거창 한 선전 계획까지 제안해 놓았다. 그 프로가 실현된다면 기획안에는 설명하진 않았지만 궁극적으로 는, 이 보도 영상물을 시청한 어떤 안목 있는 보도국 PD가 그녀의 통 찰력을 높이 인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방송계의 나병 환자촌 같은 곳으로 알려진 WVUE보도국 편집실에서 그녀를 빼낼 기적이 일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그 사이에 하위가 트림을 했다. 그러고는 자동차 열쇠에 묻어나온 갈색 귓밥 덩어리를 그녀의 기획안 표지 위에 털어냈다. "글쎄, 난 확신이 안 서는데~1 "난 메리트 부인과 인터뷰까지 했어요" 대뜸 그가 끈적거리는 열쇠를 책상 위에 떨어뜨렸다. "뭐라고? 물론 거짓말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상황이 정 어렵다면 "우린 최근에 함께 커퍼를 마셨어요," "자네와 영부인이? '勺래요 그리고 영부인이 먼저 초대했죠 대화 도중에 난 이 기획 물을 입에 올렸어.9_ 그랬더니 부인은 내 기획을 지지하면서 그 문제 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로 약속해 주었답니다." "카메라 앞에서? 순간, 배리는 레이밴 선글라스 뒤에 숨은 채 '금단'의 담배를 떨리 는 손으로 들고 있던 바네사 메리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 다. 완전히 감정이 파멸한 한 여인--- 배리는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대꾸했다. '資론 카메라 앞에서죠" "하지만 기획안에는 영부인에 대한 얘기가 한 마디도 들어 있지 않 "~F?" "부인에 대한 얘기는 깜짝 뉴스로 아껴둔 거죠" 하위는 냉담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그래, 깜짝 놀라긴 했지." 그녀는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위 역시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해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그는 책상 너머로 몸을 쑥 내밀었다. "만일 메리트 부인이 인터뷰에 응한다면- "부인은 틀림없이 응할 거예요" "자네가 그 일을 맡는 동시에 매일 정규 보도 기사도 제출해야 해." 그는 그 말을 내뱉으면서 의자에 깊숙이 앉아 바짓가랑이를 긁적거 렸다. 그녀는 잠시 그 조건을 생각해 보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위, 이 기획물은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해요 난 이 일에 내 모든 시간을 다 쏟아 붓고 싶단 말예요" 그리고 난 샤론 스톤과 섹스를 하고 싶지! 하지만 우린 자신이 원 하는 걸 다 실현할 순 없어, 그렇잖아? 배리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좋아요 그 조건을 받아들이죠" '개리 트래비스 "누구? 영부인은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개리 트래비스 WVUE여기자 말예요" "아, 그래. 말할 때 호흡이 짧은 그 여자 말이지? 미합중국 대통령 데이빗 메리트는 옷소매에 대통령 문장이 새겨진 커프스 단추를 채웠다. 난 최근에 열렸던 기자회견장에 그녀를 부른 적이 있지. 백악관에 대한 그녀의 보도는 언제나 호의적이었거든. 그렇게 생각지 않아? "다분히 그런 면이 있죠" "그래서 그녀가 어떻다는 거지? 바네사는 이미 옷을 다 차려입고 안락의자에 앉아 백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요사이 유아 돌연사에 대한 연속 보도 기획물을 기획하고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나와의 인터뷰를 넣고 싶다는군요'' 데이빗은 턱시도 상의를 입고 거울에 전신상을 비춰보았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개인 시종을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실 데이 빗은 자신의 체격에 걸맞게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그 어떤 노련한 남 성용 장신구를 다루는 전문가보다도 뛰어났다. 재킷은 널찍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도록 맞췄다. 머리는 항상 깔끔하게 다듬었지만 머리카락을 고정시키려고 헤어 스프레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취 향은 머리를 짧게 잘라 이마에 매만져 붙인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그 저 언제나 마음속의 바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항상 점잖고 기 품 있는 정장만 입어서 그렇지, 사실 청바지만 입었다 하면 영락없는 이웃집 청년이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모습에 흡족해 하면서 아내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는 오늘 밤 만찬회장에 참석할 거예요 달톤이 오늘 밤 그녀에게 인터뷰에 대한 확답을 주기로 약속했대요" 백악관 보도 담당관인 '달톤 닐리'는 데이빗과 수석 보좌관인 '스펜 서 마틴'이 직접 선택하여 훈련시킨 인물이었다. "사실 공식적인 인터뷰 요청은 달톤을 통해 들어왔거든요" 바네사는 구슬 장식이 달린 이브닝 핸드백에서 의사의 처방전을 받 아 구입한 약병을 꺼내어 신경 안정제인 발륨 한 알을 집었다. "배리 트래비스는 얼마 전 내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왔죠 처음엔 그 녀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워낙 끈질기게 나와 어쩔 수 없었어요" '기자들은 끈질긴 것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지." "그래요, 그녀의 그 끈질김이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셈이죠 더구나 오늘 오후엔 달톤까지 내게 그녀의 요구를 전달하더군요 둘다 오늘 밤 내게 확답을 듣고 싶어해요" 순간 대통령은 번개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손바 닥에서 작고 노란 알약을 빼앗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이브닝 핸드백 에서 약병을 꺼내 알약을 다시 넣고는 약병을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쑤겨넣었다. "데이빗, 난 그게 필요해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리고 이것 역시 당신에게 필요없지." 그러면서 그녀의 손에서 와인잔을 빼앗아 탁자에 내려놓았다. "술이 약효를 없앤다는 걸 모르나? '지제 겨우 두 잔짼데,- "아니, 세 잔째야. 바네사, 이젠 내게 거짓말까지 하는군,- "좋아요 난 숫자 세는 걸 깜박했어요 하지만 그게 무슨 큰일이라 고 이러는 거죠? 난,,,L "문제는 술이 아니야. 정작 큰일은 그 여기자지, 좀더 정확하게 말 하면 당신 목을 조르는 건 그 여기자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야. 2주 전 쯤 당신이 밖에서 그녀와 만나지만 알았어도 그녀는 결코 당신 집무 실로 전화 하지도 않았을 거라교 어때, 내 말이 사실 아닌가? 그는 바네사와 배리가 만난 그날, 이미 그들의 만남에 대해 보고를 받은 상태라 배리 트래비스의 인터뷰 요청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정 작 우려하는 건, 바네사가 자신의 동의 없이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인 물과 대화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바네사와 별로 믿을 수 없는 방송 기 자와의 만남은 몹시 위험스런 결합이었다. '지제껏 날 염탐해온 건가요? "바네사, 대체 그녀와 왜 만난 거지? "난 단지 얘기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그것도 죄가 되나요? "당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으로 방송 기자를 선택했단 말이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거렸다. "그녀는 내게 감동적인 편지를 써보냈어요 그래서 난 그녀라면 얘 기 나눌 좋은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다음엔 신부님을 알아보지 그래? '게이텟,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공연히 트집잡지 말아요" "그게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면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거지? "그녀가 방송 인터뷰를 해달라고 요청해오기 전까지는 전혀 중요 치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일전에 우리의 만남은 언급할 가치 도 없을 만큼 사소한 일이었어요 난 그녀에게 그날 오후의 만남을 절 처하게 비밀에 부쳐달라는 약속을 받아냈죠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때 난 얘기할 상대가, 특히나 여자가 필요했단 말예요" '개체 무슨 얘기를 나누려고? "그러는 당신은 대체 무슨 얘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녀는 앙칼지게 되묻더니 안락의자에서 펄쩍 뛰다시피 일어나 와 인잔을 잡고 도전적으로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는 치미는 화를 애써 삭였다. "바네사, 지금 당신은 정상이 아니야." '勺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난 지금 정상이 아니에요 그러니 오늘 밤엔 나 없이 혼자 가는 게 좋겠군요" 북유럽 국가 사절단을 초대한 만찬회는 아기 로버트 루시톤의 비극 적인 죽음 이후 바네사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대외적인 행사이다. 조 촐하긴 해도 공식적인 모임이라 바네사가 공직 생활로 다시 모습을 보이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녀는 아기의 죽음 이후로 이제껏 공식적인 자리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석 달은 그녀가 마음을 정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투표권을 가진 국민 들은 그녀가 다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물론 당신은 나와 함께 가야 해." 대통령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만찬회의 여왕이 돼야 한단 말야. 언제나 그랬듯이." "하지 만, ,,,,,-" 하지만은 더 이상 용납 못해! 당신 핑계를 듣는데 이젠 질려버렸 어. 바네사, 우린 극복해야 해. 벌써 석 달이나 지났어? "슬퍼하는 데도 시간이 정해져 있나요? 그는 그 말 속에 돋친 가시를 무시한 채 대꾸했다. L(오늘 밤 당신은 예전처럼 활기차고 싹싹하게 행동해야 해. 당신 본 래의 모습대로 매력과 미소를 잃지 말라구. 그러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 난 모든 사람을 증오해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연민과 동정에 가득 찬 눈길로 날 바라보는 인간들이 모두 다 밉다구요! 그리 고 어쩌다 누군가 말문을 열면 영락없이 시시하고 케케묵은 얘기가 쏟아져나오E, 그럴 펀 정말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구요? 이제 그 정도로 해두지. 그리고 당신도 인간이라면 그들의 그런 감 정에 고마워할 줄도 알아야 해." "세상에? 그녀는 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듯 다시----- -재냐하면 난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야. 젠씸 그건 당신도 마찬 가지 라구." 그녀는 그의 섬뜩한 눈빛에 밀려 다시 안락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리고 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돌아서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이브닝 드레스가 마음에 드는군. 새로 샀나? 그녀는 어깨를 구부정하게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패배를 인정하는 몸짓으로 받아들였다. "몸무게가 줄었더군요 옷장 안의 옷들이 더 이상 맞지 않아요" 그녀는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빗은 방을 가로질 러 문을 열었다. '저서 오게, 스펜서. 갈 준비는 다 됐나? 스펜서 마틴은 데이빗의 어깨 너머로 방안을 휘둘러보다가 바네사 의 모습과 탁자 가장자리에 놓인 빈 와인잔을 발견하고 되물었다. "갈 준비는 다 된 건가? 대통령은 보좌관의 염려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말했다. "바네사는 무대 공포증 비슷한 것에 걸려 있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녀는 언제나처럼 극복해낼걸세." '저쩌면 우리가 그녀를 너무 몰아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만 약 그녀가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면- "그 무슨 소린가? 그녀는 해낼 수 있다네? 그는 아내에게 돌아서서 팔을 내밀었다. '져보 준비 됐겠지? 그러자 그녀는 두 남자의 눈길을 회피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 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데이빗은 스스로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 이를테면 아내와 수 석 보좌관 사이의 불화 같은 것은 철저하게 무시하는 성격이었다. 지 금도 그는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려고 운을 뗐다. "스펜서, 내 아내가 오늘 밤 무척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가켄 "정 말, 그렇군." "고D빈요" 바네사는 냉랭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복도에 나실 즈음, 남편의 팔을 잡고 물었다- "달톤이 배리 트래비스에게 뭐라 대답해야 하죠? '개리 트래비스, 그 여기자? 그런데 뭘 대답해야 한다는 거지? 스펜서가 재빨리 대화에 끼여들더니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달톤에게 바네사와이 인터뷰를 요청했다네." "특별히 정해진 주제라도 있나? 대통령이 냉담하게 대꾸했다. "유아 돌연사 증후군이라네." 배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입에선 말들이 마치 깨진 소화전에서 흘 러나오는 물처럼 쉴새없이 쏟아져나왔다. "난 데이트 상대와 함께 주빈들 앞을 지나갔단다. 아이, 흥분하지 마. 그는 아직도 은밀하게 동성 연애를 즐기는 남자야. 말하자면 우린 서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셈이었지. 그 역시 만찬회 초대장을 받았 지만 같이 갈 여자 짝이 없었던 처지였교 난 대통령이나 영부인과 직 접 얘기할 기회를 부여받은 상태였으니까. 어쨌든 난 그 주빈들 앞을 미끄러지듯 지나치면서 아주 침착하고 분별력 있게 행동했단다. 그러다가 대통령 앞에 이르렀을 때, 이건 정 말로 사실인데,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쥐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트래비스 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밤엔 무척 화사하시군요' 사실 난 그가 정화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날 낮선 사람이나 단순히 아는 사람, 혹은 평범한 여기자 정도로 취급하 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거 아냐? '바바라 워터스'도 나 보단 더 따뜻하게 환대받진 못했을 거야." 크롱카이트는 하품을 길게 하면서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침대 한가운데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내 말이 지겨우니? 배리는 잠시 숨을 돌렸다. L1넌 대통령 부부의 첫아들이 죽은 후 내가 영부인과 최초로 단독 인터뷰를 하게 된 게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모르는구나. 사실 대통령이 그 문제를 나보다 먼저 언급했단다. 그는 메리트 부 인에게서 내 'SIDS연작물'에 대해 들었다고 얘기를꺼냈지. 그러고는 굉장히 훌륭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영부인에게 그 일에 적극 참여하라고 격려했다고 하더구나. 그는 가슴 아픈 상황에 대해 국민 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했지. 그러고서 대통령 부부는 내 게 최대한의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때 내 심정은--글 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게 성 관계를 나누는 중이었다면, 엄청 난 환희를 느꼈다고나 할까." 그녀는 크롱카이트 옆에 누웠지만 이미 침대의 3분의 I을 차지한 녀석은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침대 가장자리에서 균형 을 잡았다. -하위가 만찬회에서의 그 장면을 봤어야 하는 건데- 그는 아직까지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는 걸 알았지만 별로 신경 쓰 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튀어나온 순간, 텔레비 전 소리는 더 이상 배경 음악이 아니었다. 욕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 수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숨쉴 겨를도 없이 수건을 움켜잡고 문 귀퉁이를 돌아 재빨리 침실로 들어섰다. -불행히도 영부인께서는 대통령과 함께, 수천 쌍의 부부들에게 일어나는 비극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여기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30대에서 4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적갈색 머리카락, 커다란 눈과 벌에 쏘인 듯한 입술 은 왜나 놀기 좋아하는 여자인 듯한 인상을 풍겼다. 비록 지금은 그 눈이나 입술에서 미소를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방송 기자 들에겐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대부분 방송 기자들은 쓸모 없는 발성법 학교를 졸업한 동창들처럼 한결같이 메마른 말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이 ?r화면 아랫부분 에 자막으로 나오고 있었다. '배리 트래비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 름이었다. -대통령과 난 이 비극을 경험한 가족들의 숫자를 알고 깜짝 놀랐답 니다." 말하는 이는 바네사 메리트였다. H우리 나라에서만 매년 자그마치 5천 쌍의 가족들이 이 비극을 경 험하고 있죠" -그레이 본듀란트'는 너무나 익숙한 그 얼굴과 목소리에 촉각을 곤 두세웠다. 비록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녀의 말투와 태도가 인터뷰에 대비하여 미리 지시받은 대로 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말이다. 두 손을 무릎에 얌전히 포개고 얼굴 표정만 훈련받은 대로 신중하게 바꾸었다. 회견 기자는 백악관 육아실에서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죽음을 선 포하는 불운한 임무를 맡았던 백악관 주치의인 '조지 알랜' 박사의 의 견을 소개했다. 박사는, 현대 의학은 아직도 유아 돌연사의 원인과 예 방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인터뷰는 보다 개인적인 부분으로 들어갔다. -게리트 부인, 우리 모두는 아드님의 장례식장에서 영부인과 대통 령의 슬픔을 목격했습니다." 중간에 장례식 장면들이 삽입되다가 다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끼제 그후로 석 달이란 시간이 홀렀습니다. 물론 그때의 상처가 아 직 아물지는 않았겠지만 우리의 시청자들은 이제 그 일에 대한 영부 인의 소감을 듣고 싶어합니다." 바네사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제 아버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죠. '역경 뒤엔 위대한 기회가 숨 어 있다. 즉, 역경 뒤엔 반드시 위대한 기회가 뒤따른다.' 항상 그렇듯 이 이번에도 아버님께서 옳았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데이빗과 난 그 사건을 계기로 개인으로나 부부로서 한층 강인해 졌음을 느긴답니다. 우린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받았교 결국 극복해냈 기 때문이죠" "새빨간 거짓'껀" 그는 수건을 둘둘 뭉쳐 침실 한귀퉁이로 힘껏 내던지더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그러다가 동작을 멈추고 계속 이어지는 바네사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통령과 난 우리와 똑같은 비극을 당한 유족들이 용기와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있어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레이는 욕지기를 터뜨리며 텔레비전을 껐다. 대본에 따라 승인을 받은 답변서가 밀봉되어 바네사에게 전달됐으 리라. 그 내용을 달달 외워 앵무새처럼 말하라고 말이다. 그 내용은 달톤 닐리가 작성했겠지.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 클리트 암브루스터가 작성했거나, 대통령이 초안을 잡고 스펜서 마틴이 최종 승인을 해주 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전에 인터뷰를 예행 연습하고 그 내용을 고쳤겠지만 어쨌 든 바네사의 말이 아닌 건 분명했다. 겉으로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 왔지만 진정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었다. 목소리에 성적 매력 이 담긴 그 여기자가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고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바네사는 머릿속에 컴퓨터 칩이 내장된 말하는 인형처럼 교묘하게 세 뇌당했으리라. 마음속에 담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품위 있는 행동 이 아니었다. 결코 정치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레이는 침실 벽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견디다 못해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캔맥주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집 크기 만한 폭의 베란다 그늘에 놓인 골풀로 짠 흔들의자에 몸을 내던지다 시피 앉아 캔맥주를 기울였다. 단숨에 구릿빛으로 그올린 목근육을 따라 반이 넘게 캔맥주를 비웠다. 마치 맥주 선전에 나오는 남자 같았다. 시골풍의 배경과 맨가슴을 드러내고 맥주를 시원스레 마시는 모습은 어떤 상표를 붙이든 수백 만 개의 캔맥주를 너끈히 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도 하 지 않았고 아예 관심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골치 아프게 그 이유를 분석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자만심은 생리에 맞지 않았다. 최소한 과거에는, 즉 살아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수주일씩 홀로 보내던 그 시절에는 그랬다. 만일 국립 관광지인 '잭슨 흘'로 차를 몰고 가야 할 상황이라면 면도 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일상 생활에선 면도 역시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살았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아무 튼 언제나 그런 마음가짐을 유지했구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뜻 을 말없이 전달했다. 워싱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배경에는 그 런 요소도 분명 한몫 거들었다. 그는 워싱턴을 빠져나온 것이 너무도 속 시원할 수 없었다.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 위해선 그 체제에 어느 정도 순응이 필요한데, 그레이 본듀란트는 타고난 비순응자였다. 빙하처럼 냉혹하고 차가운 푸른 눈동자로 와이오밍 주의 자랑인 '티턴' 산맥의 만년설로 뒤덮인 험준한 봉우리들을 노려보았다. 몇 킬 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도 손에 닿을 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자줏빛 산맥의 장엄함! 앞마당에서 즐기는 여유. 상상만 해도 가슴 떨렸다. 그러다가 그는 빈 캔맥주를 마치 껌 은박지처럼 가볍게 쭈그러뜨렸 다. 더도 말고 10者 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싶었다, 조금만 더 밖에 있다가 세수를 했으면 그런 꼴을 보지 않았을 텐데--. 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그 특정한 시간대에 TV를 켜고 그 채널을 맞춰 놓았단 말인가? 차라리 그 인터뷰 장면을 보지 말 것을! 배리 트래비스, 당신이 누 군지 모르지만, 무지무지 고맙소! 이제 앞으로 며칠 동안 데이빗과 바 네사, 그리고 백악관 육아실에서 숨진 그 갓난아기에 대한 기억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겠지. 그 인터뷰로 자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다시 살려낼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비위가 거슬려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추 리하고, 온갖 시시한 것들을 갖다붙이리라. 결국엔 또다시 개똥 같은 일에 휘말리겠지, 데이빗 메리트는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바지 호주머 니에 손을 깊숙이 쑤셔넣고서 대통령 집무실 책상 앞을 서성거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드리운 이마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그런 얘긴 생전 처음 들어보는군. 대체 그걸 뭐라고 하지? "윤히하우젠 대리 증후군'이라고 한다네. 형벌을 면하기 위해 스스 로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한 어떤 독일 백작에게서 따온 이름이지." 주치의 조지 알랜의 말에 스펜서 마틴이 옆에서 되받았다. -마조히즘(피학성애, 혹은 자기학대, 피학적인 성힌이라고 볼 수도 있 잖을까? 조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통령 개인 비축품인 스카치 위스키를 잔에 다시 따랐다. "내 전공 분야가 아니라서 철저히는 조사하지 못했네," "하지만 배리 트래비스는 그렇게 했지." 데이빗이 질책하는 듯한 말투로 내뱉자, 주치의 역시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다. 조지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고통이 자신이 아닌 제삼자, 일반적으로 유아에게 가해질 경우 '대리'란 표현이 적용되는 거라네." 대통령이 격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도대체 유아 돌연사 증후군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배 리 트래비스는 어째서 그런 깊은 부분까지 파헤쳐 들어갔냐구? 조지는 스카치 위스키를 재빨리 흘짝거리고 나서 대꾸했다. "그런 증후군에 걸린 성인들은 때때로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들은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네. 자신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얻기 위해서지 그래서 과거엔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판정을 내렸던 원인불명의 유아 사망 사건들이 요 사이 그 살인 가능성 때문에 재조사를 받고 있다네." 데이빗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면서 책상 뒤의 의자에 몸을 내던 졌다. '저째서 창녀 같은 트래비스가 순수한 기획 보도물을 만들지 않고 괴기스런 기삿거리를 끼워넣었단 말인가? 내게도 한 잔 따라주겠나? 주치의는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고맙네." 데이빗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술을 흘짝거리다가 스펜서를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니 더욱 속이 탔다. 스펜서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이번 문제는 골칫거리인 게 틀림 없었다. 그러다가 과감하게 말을 건넸다. 차라리 바네사에게 인터뷰를 하라고 부추기지 않는 건데? 대뜸 주치의가 반박하고 나섰다. 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네.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손해날 게 뭐 있겠는가? -맙소사, 조지! 어떤 손해가 있을지는 자네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데이텟이 신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U그놈의 염병할 SIDS기획물이 베네사를 다시 자극하고 있잖나? 스펜서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고 있다네." 데이빗이 주목하는 이들이 대체 누구냐는 뜻으로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자 스펜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L1우선 정부 관료들이지. 그들은 영부인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을 주목하고 무척 걱정하고 있단 말일세." 그러자 데이빗이 또다시 질책하는 듯한 태도로 주치의에게 돌아서 자 조지는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U영부인이 지금처럼 술을 마셔대는 한, 약으로 안정시키는 것은 불 가능하다네." 데이빗이 주먹으로 눈가를 비볐다. L(그 점에 관한 얘긴데, 클리트는 정말 골칫덩어릴세. 난 요새 그 양 반에게 그녀가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네. 게다가 건강 상태도 엉망인데, 어떻게 정서불안 증세가 보이지 않기 를 바라냐고 말일세." 사람들이 비극에 대처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네." 주치의는 설득력 있는 말을 들려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떤 이들은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린-넉-. 아예 비극을 생각할 여유 조차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하려고 말일세. 또 다른 이들은 종교를 찾 아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린다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알아, 안다구! 하지만 내 장인은 그렇지 않아." 대통령이 주치의의 말허리를 자르며 으르렁거렸다. "원한다면 내가 그 어른께 말씀드려 보겠네." 스펜서의 제안에 대통령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스펜서, 클리트는 자넬 싫어하네. 그 양반이 이 세상에서 바네사의 정서 불안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렐세. 그 리고 그녀 역시 자네를 그리 달갑게 생각지 않아." 그러고는 주치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조지, 자네라면 어떨까 싶군. 자네가 그 양반과 대화를 나 누며 차분하게 설명해준다면- 때-일 전화를 걸어 그분이 염려하는 문제에 대해 자네가 한 말을 전해주겠네. 그래서 우리가 영부인을 신중하게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겠어." 데이텟은 그 문제가 일단락 되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조지." 스펜서가 불쑥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대상은 클리트만이 아니야. 내년에 대통령 선 거가 있잖은가? 현 정부는 영부인을 필요로 하고 있네. 머지않아 곧 필요하게 된단 말이지. 그때를 대비해 그녀가 선거 운동에 나서도록 제대로 추스려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네." 그러더니 주치의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우리에게 영부인을 그런 상태로 넘겨줄 수 있겠나? "물론 그렇게 하겠네, 어쨌든 지금으로선 달리 대안도 없잖은가? "대안은 항상 있게 마련이지." 스펜서의 답변은 시베리아의 냉랭한 바람처럼 집무실 분위기를 싸 "맙소사, 스펜서! 아무리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불 길한 징조를 담은 말만 하나? 우울함파 파멸일랑은 모두 잊어버리게! 그리고 조지." 데이빗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치의와 악수를 나누면서 말을 이었다. "바네사를 자네에게 맡겼으니 난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겠네. 그리고 윤히하우젠인지 뭔지를 설명해줘서 고맙관 로버트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말일세." 그러고는 주치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로버트는 침대 안에서 숨이 끊어졌는데 원인은 알 수 없다. 바로 자네가 공식적으로 내린 결론이야. 그리고 현재도 그 의견에 변함이 없는 걸로 아는데----. 어떤가, 내 말이 맞잖나? "물론 그렇지. 사인은 유아 돌연사 증후군이라네." 주치의는 잔을 얼른 비우고 작별을 고하면서 사라졌다. 스펜서가 대통령과 단 둘이 남게 되자 한 마디했다. '저 친구가 이번 사태를 잘 극복해야 할 텐데." '겁먹지 말게 잘해낼 거야." "하지만 바네사는 어떻게 하지? "그녀는 항상 잘 해냈잖은가? "전에야 그랬지, 하지만 이제 그녀가 감정을 제대로 추스를 수나 있 을지 걱정이로군." 그렇듯 영부인에 대해 대통령에게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 는 사람은 스펜서 마틴 뿐이었다. 데이빗은 수석 보좌관인 스펜서 마틴의 걱정을 이해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그가 문제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난 아직도 내 결정이 옳았다고 보네, 스펜서. 국민들은 바네사의 인터뷰 장면을 보고 싶어했지. 그리고 그녀는 아주 멋있게 잘 해냈어. 정말 끝내줬단 말일세." 하지만 스펜서는 계속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요즘은 왠지 그 일을 수락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느낌이 든 다네, 예감이 좋지 않아. 특히 그녀가 그 여기자에게 먼저 접촉을 시도 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단 말일세." "나도 처음엔 그 점이 마음에 걸렸지. 하지만 결국엔 모든 게 잘됐 잖은가? 인터뷰는 그녀나 우리를 위해 아주 좋은 선전 활동이 되었네. 조지 말대로 손해본 게 전혀 없는 셈이지." 스펜서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대통령은 날카로운 눈길로 대답을 재촉했다, "자, 그럼 어디 두고 보세." 스펜서가 불길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좋아, 이 사람이 대체 누구지? "누구 말야쁜 배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되물었다. 무릎 위에는 시청자들이 보내 온 전보 카드, 편지 들이 한아름 쌓여 있었다. 결과를 낙관하긴 했어 도 이렇듯 엄청난 반응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않았다. '개리, 당신이 정말 이렇게 응큼한 여자인 줄 몰랐는걸? 이런 사람 을 여태까지 감쪽같이 숨겨놓고 있었다니? 마침내 배리는 고개를 쳐들다가 이내 소리쳤다. '저머나, 세상이" 보도국 편집실의 접수 담당을 맡은 여자는 배리의 자리로 갖다주러 온 거대한 꽃다발에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이거, 어디다 둘까? '저쩌나,,,,,." 그녀의 책상 위는 여느 때와 똑같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바닥에 내려놓는 게 좋겠군." 접수 담당자는 꽃다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지걸 보낸 사람이 두꺼비처럼 생겼다 해도 꽃을 사는데 이렇게 많 은 돈을 쓸 능력이 있다면 당신은 봉을 잡은 거야." 코웃음을 치며 배리는 꽃다발에 붙은 카드 봉투를 열었다. 카드를 펼치는 순간 함박 웃음이 피어올랐다. "나 역시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기혼자야." "아휴, 멋진 남잔 항상 임자가 있다니까? 접수 담당자는 배리에게서 건네받은 카드를 훑어보다가 낮익은 서 명과 자필 내용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깍' 하며 그녀가 비 명을 지르자 보도국 직원들이 배리 자리로 몰려들었다. 배리는 그 카드를 다시 건네받아 그걸로 부채질을 했다, '개통령께서 내 재능과 통찰력에 찬사를 보내며 이번 기획물의 우 수성을 찬양하면서, 애국적인 봉사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작은 감사의 징표를 보낸다는군요" 하위가 그들 곁에 다가서며 이죽거렸다. "한 마디만 더 들으면 구역질이 날 것 같군." 배리는 깔깔거리면서 카드를 봉투에 다시 넣었다. 이 다음에 손자 들에게 보여줘야지. "당신은 메리트 가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지 못해 내게 질투를 하는 군요" 하위와 보도국 동료들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그녀의 행운 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이윽고 혼자 남게 되자 배리는 재빨리 전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선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에 시간 있어요? "지금 하는 얘기 진담이야? "냉장고에 뭐가 있죠? "스테이크 두 쪽." "와인은 내가 갖고 갈게요" 배리는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꽃도 가져갈 거예요 보팥 후에 봐요" 30분 안에 온다고 하지 않았나? "잔소리 그만 하고 나 좀 도와줘요" 배리는 대통령의 꽃다발과 와인 두 병, 그리고 야채 꾸러미를 들고 '데일리 웰시'의 현관을 들어서려고 낑낑거렸다. "어디 새 무덤이라도 턴 건가? "카드나 읽어보시죠, 우쭐대는 아저씨." 그는 꽃다발에서 카드를 집어들고 그 내용을 읽다가 나지막하게 휘 파람을 불었다. "우와, 이거 대단한데? 그녀는 유쾌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 정도는 뭐 약과죠" ''그 다음 순서로는 또 뭘 보여줄 거지? "다른 때 같았으면,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흥을 깨뜨리는 당신의 그 탁월한 재주에 대해 가차없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겠지만지금은 몹시 퍼곤해요 그러니 이번엔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하고 대신 이 와 인 뚜껑이나 따기로 하죠" "그 점은 나 역시 대찬성이야." 두사람이 함께 들어간 부엌은 그녀의 책상만큼이나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그 집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 저분했다. 따라서 지금처럼 코르크 마개쁩이를 찾으려고 찬장과 씨름 을 벌이는 일은 아예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요즘 어때요? "보다시피 아직 죽지 않았어." 본명은 '테드 웰시'지만 친구들 사이에선 '데일리'로 통하는 그는 숨을 할근거리去서 금세라도 저세상으로 갈 사람처럼 병색이 완연했 다. 그는 오랜 세윌 동안 국민에게 전할 뉴스를 맡으면서 무지막지하 게 줄담배를 피워온 탓에 '폐기종(肺氣區 조직 내에 공기가 침입하여 폐 가 계속 확장하는 상태-에 걸린 상태였다. '데일리'란 이름은 그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자 마자 어느 일간지 편집국의 잔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부터 얻은 이름이었다. 이후 승진 에 승진을 거듭하여 여러 주요 언론사를 전전하다가 급기야는 모 텔 레비전 방송사 리치몬드 지사의 보도국 편집실 부장이 되었다. 하지 만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방송계에서 일찌감치 은퇴하는 불운을 겪었다. 사회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기엔 아직 너무 젊구 그 혜택을 받을 나 이가 되도록 살지 못할 게 뻔한 그는 현재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간신 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리대 위에서 녹아가고 있는 '스테이크' 두 쪽도 사실은 쇠고기를 갈아서 만든 고기 파이에 지나지 않았다. 배 리는 이럴 줄 알고 와인과 함께 T자형의 '티본 스테이크' 두 쪽을 사 왔다. 데일리가 '소노마 카운티'라는 상표가 붙은 포도주로 목을 축이 는 동안, 배리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휴대용 산소 탱크를 의자 쪽으로 구르며 오다가 그녀를 지나 치면서 실없이 한 마디 했다. "크롱카이트 녀석은 이 큼지막한 뼈 냄새만 맡아도 녀석의 물건이 흥분할 거야." "그렇지 않아요 녀석은 진작에 중성화됐거든요" "아참, 내가 깜박했군. 당신은 그 녀석조차 거세시켰지." 그녀는 고기용 '매리네이드띤초, 포도주, 기름, 향신료 등이 섞인 즙으 로 고기나 생선을 담금-병을 조리대 위에 거칠게 내려놓고 그에게 돌 아섰다. "또 시작인가요? "하지만 내 말이 맞잖아? 당신은 만나는 사내들마다 그들의 물건을 떼버리지, 남자에게 걷어차이기 전에 그들을 먼저 걷어차는 게 당신 방식이잖아." "난 당신을 걷어차지 않았어.8-" "그만한 가치도 엄는 사내니까." 그는 숭을 헐떡거리면서 고통에 겨운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난 아무리 애써도 물건이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늙고 병약한 남자 야. 그러니 당신에겐 아무런 위협도 될 수 없지 바꿔 말해 당신은 날 만나려고 황금 같은 저녁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단 얘기야. 내가 당신 이 만나는 최고의 남자 친구라면, 당신 인생도 상당히 처량한 꼴이 되 고 말 거야." "하지만 데일리,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뺨에 입을 맞친다. "그만 해." 그는 그녀를 밀어냈다, "그리고 스테이크를 너무 익히지 마. 난 피가 밴 걸 먹고 싶거든." 배리는 짐짓 거칠게 나오는 그 태도에 속지 않았다. 그를 향한 애정 은 일방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처음엔 불안한 출발을 보였 지만 이제는 흔들림없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비난도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편안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한 뒤 거실에서 커피를 즐기면서 말문을 열었다. "담배를 피을 수만 있다면 내 수명을 20년이나 메어줄 용의도 있는 '끼미 그렇게 했으면서 뭘 그래요? "아, 그래." 그는 등받이와 발판이 조절되는 낡아빠진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의자 옆에 놓인 휴대용 산소 탱크에선 끊임없이 플라 스틱 관을 통해 콧속으로 산소를 공급해주고 있었다. 건너편에서는 배리가 소파에 편안히 앉아 발을 모으고 앉아 장식용 쿠션을 가슴께에 껴안고 있다가 슬쩍 말을 건넸다. "얼마 전에 니코틴 중독에 빠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아마 당 신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일 거예요." "누군데? '끼건 비밀을 지켜야 해요" "내가 누구에게 얘기한단 말아? 이곳엔 당신 외에 아무도 오지 않 는단말이요. "하지만 당신에겐 나 외에도 친구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이곳에 오 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당신이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난 그들의 동정을 견딜 수 없을 뿐이야." "그렇다면 당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라도 해봐요" "솔직히 공기를 기계로 빨아들이는 병자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또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반복하게 되는군요" 그녀는 노래 부르는 듯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우리 오늘 밤엔 그런 얘기하지 말기로 해요" 그러자 그가 투덜거렸다. "그건 나도 좋아. 그런데 그 수수께끼의 골초는 대체 누군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껸부인이에요" 그러자 그는 구미가 당기는지 눈을 번쩍 떴다. "에이, 인터뷰 전에 마음이 초조해서 그런 거겠지." "아녜요 내가 그녀와 커피를 마시던 날에 발견한 사실이라구요" "당신은 그녀와 단독 인터뷰를 했어. 그런데도 아직도 그녀가 멍청 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깃 "난 결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당신이 지금 그 자리에 앉아 그녀를 그렇게 부른 게 벌써 열 번도 더 넘는다구. 미시시피의 여왕! 바로 당신이 그녀에게 붙인 별명이잖 나? 그리고 당신은 그녀를 두구 독자적인 사고를 전혀 갖추지 않은 여자, 혹은 그런 척하는 여자로 표현했어. 다시 말해, 그녀가 가진 모 든 견해는 그녀가 비위를 맞춰야 할 남자들, 즉 남편과 아버지가 주입 시켜놓은 거란 얘기지. 요컨대 그녀는 머리가 텅 빈 허수아비야. 내가 혹시 빠뜨린 것이라도 있나? "아니, 그 정도면 거의 다 얘기한 것 같군요" 그녀는 한숨을 지으면서 손가락 끝으로 커피잔의 테두리를 쓱 훌으 며 만지작거렸다. '자직도 난 그런 견해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불쌍하 다게 느껴지기도 해요 내 말은 그러니까,-아기가 죽은 게 안됐다 는 뜻이죠 으음- "그래서? 배리는 순간적으로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가 데일리의 질문을 듣 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서라노? "당신은 지금 볼 안을 자근자근 씹고 있어. 그렇다면 뭔가 마음에 짚이는 게 있다는 뜻인데-. 그게 뭐든 당신이 얘기할 때까지 내가 저녁 내내 기다릴 순 없잖아? 그녀는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었지만 데일리에게만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어떤 의혹이나 난관, 스트레스에 부딪칠 때마다, 그는 탁월한 기자만이 지니는 내면 의 탐지기로 그녀의 급소를 찌르곤 했다.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확히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단지- "혹시 목덜미가 근질거리지 않아? "그와 비슷해요" "뭔가 감을 잡긴 했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뭔지는 깨닫지 못한 것 같군." 데일리는 경보 벨 소리를 들은 소방서의 개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으 로 윗몸을 쭉 내밀었다. 특종 냄새를 맡더니 갑자기 건강을 되찾기라 도 한 듯 오랜만에 발그스름하게 혈색이 돌았다. 배리는 열떤 관심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공연히 얘기를 꺼낸 건 아 닌가 싶었다. 이러다 그가 크게 실망이나 하면 어쩌누. 어쩌면 기삿거 리가 전혀 안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솔 직하게 털어놓는다고 해서 손해볼 건 없다. 어쩌면 그는 그녀의 생각 을 이해해줄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피상적인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 다는 훈계를 들을 수도 있는 노룻이었다. "이번 유아 돌연사 증후군 연작물은 세인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 으키고 있죠 내가 그 프로가 '새(우주선, 혹은 인공위성의 속어-를 타 고 있다고 말한 적 있나요? 그 기획물은 인롱위성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다. U그래, 그 프로는 확실하게 당신의 주가를 높여 놓았지. 바로 당신 이 바라던 대로잖아?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 그녀는 커피잔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이젠 먹지 못할 정도로 차 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티스푼으로 슬슬 휘저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려는 누구라도 충분히 이해할 정도 로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아기의 돌연사는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는 사실을, 즉 단순한 사고사란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죠 그런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정말 그럴까요? 라고 내게 반문 하더라구_9_ 바로 그 질문과 당시 그 말투 때문에 난 유아 돌연사 증후군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게 줬죠 그러다가 난 이 증후군으로 자녀를 넷이나 잃 은 한 여인에 관한 괴상한 기사에 접하게 됐답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 아기들의 사인은 그 증후군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해요" "그렇다면 그 여인이,,,- 그) "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아기들은 '윤히하우젠 대리 증후군' 때문 에 죽은 거죠." 배리는 심호흡을 길게 내뿜더니 고개를 쳐들고 강렬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산소량을 조정해야 할 것 같군. 산소가 충분한 건지, 지나치게 많 은 건지 감을 못 잡겠어. 그런데 방금 전. 미합중국 영부인이 자신의 자식을 살해했다고 에둘러 말한 건가? 배리는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어_9_" "그래도 난 그런 의미로 들렸어." "데일리, 맹세코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녜요," "그렇다면 왜 계속 볼 안을 씹는 거야뽄 '勺公 모르겠어꾜 하지만 뭔가 잘못된 건 분명하다구요" 그녀는 소파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지난 주 동안 바네사 메리트와 두 번 만났어요 처음 만난 날, 그녀 는 금단 증세에 빠진 마약 중독자처럼 불안하고 신경이 쇠약한 모습 이었어요 그펀 분명 정서적으로 파탄 일보 직전의 여자였단 말예요 그런데 인터뷰가 있던 날, 뜻밖에도 부인은 전혀 딴 사람이 돼 있었죠 고상하고 침착하며, 냉정하고 정확했을 뿐만 아니라--뭐랄小- 이 탁자처럼 반듯했어요" "인터뷰는 아주 훌륭했어." "하지만 데일리, 그 인터뷰엔 열정이 결여되어 있었어요 당신도 그 걸 눈치챘잖아요? 그녀가 다시 그를 쏘아보자 그는 주춤하는 기색으로 그 말이 맞다 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메리트 부인과의 인터뷰는 그 기획물의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 되 어야 했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가장 김빠진 부분이더군 요 너무나 인위적이었어요 차라리 첫만남 때와 똑같은 태도였다면 난 별로 의심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바네사 메리트의 첫 번째 모 습과 두 번째 모습 사이의 차이가 너무 뚜렷했어요" 데일리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신경 안정제를 두어 알 먹었겠지." '써쩌면요 사실 만찬회장에서 부인을 보았을 때 그녀가 약을 먹었 든지, 아니면 술에 취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물론 그녀는 평소처럼 아주 아름다워 보였죠 하지만 왠지,,-잘은 모르겠지만 걱정돼요 대통령은 그런 사정을 감추려과-. 아, 그건 또 다른 문제죠" 그녀는 잠시 숨을 돌렸다가 화제를 바됐다. "그는 마치 내 오랜 친구처럼 격의없이 날 대하더군요 자연히 난 그의 관심에 우쭐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게 다가 그는 이번 기획물의 제작 전이나 후에 비상한 관심과 지지를 보 냈죠 이 꽃다발을 보세요 그가 국고를 축내면서까지 이런 값비싼 선 물을 보냈다구요" "그런 얼토당토 않은 이론은 이제 집어치우자. 이번 프로에서 당신 이 영부인을 적대적으로 다뤘다면 그가 당신과 당신의 기획물에 그런 태도를 보였겠나? 그게 다 가는 게 있으니까 오는 거라구." "단지 대통령이 느닷없이 날 친구처럼 대하는 상황이 놀랄 따름이 에요 사실 오랫동안 백악관 출입 기자로 활동했죠 그런데 지금까지 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좋은 친구가 된 까닭이 대체 윌까요? '개리, 당신은 방송 기자야. 그리고 그는 내년에 재선거를 치러야 할 정치가라구 그는 이제 모든 기자들에게 추파를 던져야 할 상황이 지, 언론계를 장악해야 선거에서 이기니까 말야." 배리는 그 설명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데이뎃 메리트는 국회의원으 로 몸 담고 있으면서 언론계에 구애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언론계와의 밀월 관계는 그가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는 동안에 도 굳건하게 이어졌다. 요즈음엔 그 관계가 조금은 퇴색하기 시작했 지만 그래도 대다수 언론계는 아직도 그에게 우호적인 편이었다, 게 다가 배리 트래비스는 언론계에서 영향력이 전혀 없는 삼류 기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왜 추파를 던진단 말인가? 마음속에서 갖가지 수수께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바네 사 메리트를 처음 만난 날부터 이어져온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 각들이 함정처럼 여겨져 한 가지 추리를 오래 붙들고 있지도 못했다. '官론 난 이런 모순점들을 아예 무시하고 편안히 잠잘 수도 있겠죠 그러나 한 가지 문제만큼은 결코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사실 난 그 부분이 정말로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요 인터뷰가 끝났을 때 영부인은 날, 이 배리 트래비스를 껴안았다구요" 데일리는 계속 반론자 역할을 맡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건 효과 만점의 선전 활동이지." "아녜요 그건 구실일 뿐이었어요" "뭘 위한 구실이란 거지? "남들이 엿들을 수 없도록 내게 귓속말을 하기 위한 구실이었죠 그 때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했어요 '배리, 제발 날 좀 도와줘요 내 말 뜻을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나요7"' "돌아버리겠군? '재 느낌은 정확해우 데일리, 그녀는 그때 처음 유일하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드러낸 거라구요 그것도 상당히 절박한 말투로 말예요 당신은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죠? "그걸 낸들 어떻게 알겠어? 우선은 '내 남편이 재선에서 이길 수 있 게 도와주세요'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 아니면 '유아 돌연사 증 후군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세요'라든가 '내가 슬 픔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그 말 은 아무 뜻이나 다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아무 뜻이 아닐 수도 있지." "만일 그게 아무 뜻이 아닌 거라면 정말 다행이죠 하지만 그게 뭔 가를 뜻하는 거라면 몹시 위험한 상황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죠" 데일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영부인이 그렇게 고생 끝에 얻은 자 식을 왜 스스로 죽였겠나? "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왔다고 생각해요 바로 윤히하우 젠 증후군이죠" "그녀는 그 증후군의 조건에 맞지 않아. 그런 증후군에 걸린 여성들 은 한결같이 타인의 동정과 관심을 얻으려고 그런 짓을 저지르지. 하 지만 바네사 메리트는 현재 전세계 언론에서 영국 전 왕세자비보다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어. 부인은 이 세상 여성들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여자라구."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사람에게서 그녀가 그런 관심과 사랑을 받 고 있을까요? -지금 대통령을 말하는 건가? 설마 그녀가 남편에게 무시당하다가 그에게 충격을 주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도 있는 거죠"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 "하지만 가능한 일이잖아요 아기 패트릭이 죽었을 때 재클린 케네 디가 받은 사회적인 동정심을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당시 국민의 우 상이 줬죠" "그펀 단순히 신생아를 잃어버린 것 외에도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 으로 작용했지." "하지만 그 비극은 그녀를 전설적인 인물로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했어요 지금 우리의 영부인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후광 효과를 노리 고 있는지도 모르죠" 데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몸짓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다음 이론은 뭐지? '제이즈 바이러스 만일 대통령 부부 중 한 사람이 그 바이러스에 감염췄다면 어쩌죠? 그럴 경우 아기는 검사 결과 양성으로 판명될 수 있어요 메리트 부인은 자신이나 남편의 성생활이 외부에 노출되면서 닥치게 될 국제적인 망신을 겪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 역시 가능성이 희박해. 만일 대통령 부부 중 한 사람이 에이즈 양성 반응자라면 진작에, 이를테면 그녀가 임신했을 때 그 사실이 밝 혀졌을 거야. 게다가 대통령은 정기적으로 건강 진단을 받는다구. I 런 비밀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어." 배리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당신이 맞는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린 무척 명백한 사실을 그냥 스 치고 있는지도 몰라요 만일 그녀의 동기가 평범하면서도 해묵은 앙 심이라면 어떨까요? 난 1녀에게서 자기 의사가 분명한 여인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자신에 대한 거부를 참지 못하는 여자 말예요- "그러니까 요점이 뭐지? "그녀는 대통령의 외도를 앙갚음하려고 아들을 죽인 거죠 "그의 애정행각은 소문만 무성할 뿐이야." 배리가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데일리, 이거 왜 이래요? 그가 호색한이요, 바람등이란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이에요 단지 아직까지 언론에 그가 침실에서 나체의 여인 과 뒹굴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지 않았을 뿐이죠" "하지만 '추적 렐분' 제작진들이 현장에 잠입하여 그런 장면을 찍 고 '마이크 월리小가 그의 고백 장면을 녹화해두기 전까지 그의 탈 선은 뜬소문으로 남아 있을 뿐이야." "그래도 메리트 부인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거예요" "물론 그녀는 알겠지. 하지만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사실 을 전혀 모르는 척할 거야. 바람기 있는 공직자 남편을 둔 아내들도 남편의 임기 동안에는 항상 그렇게 행동하지." "그래도 난 한 여성이 조롱감으로 취급받는 데에서 비롯한 동기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해요" 데일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잡아당겼다. "배리, 당신은 이번 기획 보도물로 방송계의 주목을 받고 있어. 이 번엔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단 말야." '재가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이 일관 아무 상관 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이c?이번 기획물은 아주 훌륭했어. 그 기 획물로 '그린 판사 사건'을 일시적으로 무색케 하구 당신에 대한 비 판이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지.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기사를 조작해내어 갑작스레 당신에게 쏠린 사회의 이목을 활용하려는 속셈 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혹시 이 바닥에서 무명의 설움을 벗어나려고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건 아니냐구? 그녀는 즉시 단호하게 아니라고 못박고 싶었지만, 잠시 숨을 돌리 면서 자신의 동기를 면밀히 재검토해보았다. 혹시 내 목적에 맞게 진 실을 각색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의 객관성에 어떤 야망의 색채가 주 입된 건 아닐까? 아니면, 지난번처럼 보다 극적인 기사를 구성하려다 가 잘못된 결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해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난 이번 사건을 되도록이면 다양 한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검토해봤죠 그 여인은 자식을 잃었어요 그 점에 있어서 난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죠 하지만 그녀는 잔인 한 운명의 희생자라기보다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의 피해자일 수도 있잖을까요? 결국 그런 극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 말예요 요즘은 이 의문이 내 머리에서 한시도 떠나질 않아요 처음부터 이 사건은 수상쩍은 냄새가 났어요 그녀가 왜 내게 전화 를 걸어 만나자고 한 걸까요? 그전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기자에 게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나와 대화하는 동안, 뭔가를 속시원히 말하기보다는 암시하려는 기색이 뚜켠했죠 만일 그 대화가 일종의 고백 비슷한 거라면 어떨까요? 그녀가 대통령 영부인 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난 그 사건을 조사하는 데 이렇듯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사건을 조금 더 깊이 조사하는 것이 나 의 의무라고 생각해_9_ 그리고 이런 얘길 하면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 겠지만, 어쨌든 조국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좋았어. 그런데 딱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구." "그게 뭐죠? "도대체 왜 여기에서 얼정거리고 있는 거야삘 그로부터 1주일 동안 쓸데없는 단서를 찾아 분주하게 쫓아다니다 가 허탕만 치자, 열정도 차츰 식어가기 시작했다. 로버트 루시톤 메리 트의 죽음에 관한 진상을 파헤치면서 배리가 얻은 것은 좌절뿐이었다. 그녀는 데일리와 함께 논의했던, 되도록이면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 을 조사해봤지만 그 어느쪽에서도 확실한 단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캐치 22(전쟁이란 광기의 세계에서 자유로의 탈출이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한 미국 작가 '조셉 헬러'의 소설.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몰아넣 는 상황이나 규칙. 절대 이길 가망이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발목이 잡힌 기분이었다.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그 철저한 조사는 진상을 밝히지 않는 한 결코 이뤄질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임질이 도진 하위는 온갖 지저뚠한 얘기와 추태로 그 녀를 괴롭혔고, 평소보다 더욱 더 불뚱거렸다. 그는 SIDS기획물의 성 공을 질시하여 그녀에게 다른 기자들이 마다하는 일인 가장 마지막 시간대의 뉴스 편집을 맡겼다. 그러나 그녀는 조사 작업에 더 많은 시 간을 투자하기 위해 한 마디 불평없이 맡은 일들을 가장 빠른 시간내 에 끝마쳤다. 영부인이 갓난 아들을 질식사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반역죄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날 반역죄에 대한 형벌은 윌까? 공개 교수 형? 총살형? 배리는 정신적 파탄을 겪는사람은 바네사 메리트가 아니라자신이 라는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귓가에 환청이 맴돌면서 사건의 감춰 진 의미들을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떨치 고 하위가 맡긴 기삿거리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발버등쳤다. 언젠가 폭발하여 그녀 자신이나 경력에 치명적인 블랙 흘(초중력에 의해 빛이 나 전파가 빨려든다는 우주의 가상적인 구멍)을 만들어낼 별에 미래를 거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번스타인'과 '우드워드'가 몇 번의 실 패를 겪어 닉슨 전 대통령이 관련된 '워터게이트' 사건을 포기했다면 어찌 됐을까? 방송국실에서 노트를 들여다보며 메리트 부인 사건에 대한 관점을 추리하고 있을 무렵, 저녁 뉴스의 PD가 집중력을 흐트려놓았다. "이봐, 배리, 오늘 밤 당신 뉴스 도입부 있지? "그게 어쨌는데요? "마이크가 너무 욍욍거려서 말야. 하위는 당신이 직접 세트장에서 생방송으로 도입부를 찍어야 한다고 하는군." 그녀는 탁상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방송 시간까지는 8분밖에 남 아 있지 않았다.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난 오늘 오후 그 뉴스를 찍으면서 땀으로 목욕을 했다구요 덕분에 내 머리는 아직도 땀으로 뒤범벅이죠" '以리고 당신 눈화장도 모두- PD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키자 그녀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어쨌든 생방송을 하든지 아니면, 그 뉴스 자료를 삭제해야 한다군 하위는 이번 기회가 당신이 스타로 데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하는군."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할말은 하고 사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평화를 지키려면 그렀 게 하는 수밖에 없-죠" 그러고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누가 날 찾는 사람이 있으면 화장실에 있다고 말해주세요" PD는 그녀의 등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져길 나가면서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해줄게." 방송이 끝난 후, 배리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전화 응답기를 점검했 다. 첫 번째는 수년째 전화를 걸어온 괴팍한 남자였다. 내용인즉슨, 변 비약으로 유명한 XX제약 회사가 자신에게 부두교(서인도 제도 및 미 국 남부 흑인들 사이에 행해지는 원시종교) 주술을 걸어 만성적인 변비 에 걸리게 됐노라는 황당한 주장이었다. 두 번째는 새로 등장한 '샤를 린'이라는 여인인데, 밑도 끝도 없이 당신처럼 우둔하고 멍청한 여자 는 처음 본다면서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런데 마지막 전화의 주인공 은 뜻밖에도 D.C. 종합병원에 있는 정보원, 앤 첸이었다. "앤? "안녕하세요" 앤 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조심스러웠다. 순간, 배리는 앤이 자 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으면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 에 걸렸다. 배리는 자동적으로 메모지와 연필로 손을 뻗었다. 병원 원무과 직원인 앤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겨칠 전 우리가 얘기한 그 문제 있죠? '거1." "그에 대한 자료는 없어요" "그렇군요" 배리는 상대가 할말이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침착하게 기다렸다. '저떤 과정도 결코 없었습니다." 배리는 숨을 삼켰다. 결코 없었다노? 그렇다면,,-, 선택적인 과정이었나요? 그런 비상 상황에서는 필수적인 과정이 아닌가요? -씬래는 그렇죠 하지만 이번 경우엔 담당 의사가 불필요하다고 판 단했답니다. 그는 그 과정을 수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결국 그 렇게 됐죠" 한 마디로 대통령의 주치의인 조지 알랜이 검시관에게 부검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배리는 너무나 흥분해 자신도 모르게 연 필에 힘을 주다가 연필심이 똑 부러졌다. "확실한가요? "난 이제 가야 해-9_" "몇 가지만 더 물어볼 수 없을까요? "미안해-Q_" 앤 첸은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배리는 메모지를 가방에 쑤셔 넣고 레인 코트와 우산을 집어들고 편집실을 뛰어나갔다. 사실 앤 첸이 병원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 았다. 하지만 막상 사무실 문이 잠겨 있고 불이 꺼져 있는 광경을 보 니 실망감이 밀려왔다. 자동차로 돌아와 카폰 버튼을 눌러댔다. 데일리가 전화를 받자 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찝에 전화번호부 있어요? "안녕하시요" "지금 격식 차릴 시간 없어요" 그 역시 그녀의 절박성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워싱턴 D.C. 전화번호부를 말하는 거야? '거기서부터 시작해 주세요 인명록에서 앤 첸이란 이름을 찾아봐 줘요 C-he-n이에요" "그 여자가 누군데?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아하, 정보원이군. 대체 무슨 일로 그러지? '전화로 얘기하기엔 사연이 너무 길어요" "오늘 밤 뉴스 시간에서 당신이 나오던데? 배리는 책갈피 넘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물었다. "내 모습, 어펐어요? "형편없더군." "그렇게 안 좋았어요? -,첸이란 이름을 찾았나요? "앤이란 이름으론 안 나왔고 대신 入 첸이란 사람은 있군." '勺 전화번호와 주소를 다 알려줘우 어서요" 병원 여직원은 부유한 동네로 소문난 '아담스 모건' 거리에서 최근 에 현대풍으로 개조한 건물에 살고 있었다. 한바탕 뜯어고쳤지만 건 물 내엔 엘리베이터가 없어 배리는 아파트 3층에 다다를 즈음엔 숨이 찼다. 혹시라도 앤 첸이 이 만남을 거절할까 봐 미리 전화도 하지 않 았다. 다행히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에 안심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온바로 텔레비전이 꺼졌다. 그리고 앤이 문구멍을 통해 살펴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앤, 당신과 꼭 좀 얘기해야겠어요" 한동안 시간이 르른 후, 마침내 현관문 날름쇠가 풀렸지만 쇠사슬 장치는 여전히 걸린 채로 남아 있어 문이 조금 밖에 열리지 알았다. 배리는 문 틈으로 앤 첸의 예쁘장한 얼굴을 반쯤 보았다. '져긴 왜 찾아온 거죠? 당신은 여기에 오면 안 돼요" "일단 왔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요? "원하는 게 뭐죠? '래가 뭘 원하냐구요? 당신도 잘 알잖나요? 난 부검이 왜 이뤄지지 앉았는지 묻고 싶어요" "이제 문을 닫겠어요 제발 다신 날 귀찮게 하지 마세요" "앤? 배리는 문 틈에 발을 재빨리 끼웠다. '정말 이해할 수 없군요 갑자기 내게 전화를 해서 알려주더니 지금 은 급작스럽게 태도가 바뀌1) "난 당신이 지금 무슨 얘길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배리는 그녀의 태도가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앤, 대체 무슨 일이죠? 영문을 모르겠군요" 하지만 순간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차렸다. 뜻밖에도 앤의 아름다운 아몬드처럼 양끝이 뽀족한 눈빛이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배리는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누군가 내게 말하지 말라고 지시했나요? '게발 가주세요" "누군가 내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던가요? 그 사람들이 당신을 위 협하고 있나요 앤? 그들이 대체 누구죠? 병원에 있는 당신 상사들인 가요? 아니면 그 사건의 검시관인가요? 혹시 알랜 박산가요? 계속 목소리를 낮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난 내 정보원의 이름을 절대 밝히지 않아요 그건 맹세할 수 있다 구요 그냥 내 말이 맞으면 고개만 끄덕여요 조지 알랜 박사가 검시관 에게 부검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면 그 명령은 대통령에게서 나온 건가요? 공포에 질린 아가씨가 다시 문을 닫으려고 안간힘을 쓰자 배리의 발이 확 옥죄었다. '쌘, 제발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말해줘요" "난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러니 어서 가요 제발 혼자 있게 해질요" 아시아계 아가씨가43킬로그램이 나갈까 말까 한 몸무게로 문을 밀 어붙이자, 배리는 더 이상 소득이 없다 싶어 현명하게 그 직전에 발을 빼냈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현관문에 붙은 놋쇠 번호 판에 적힌 ,X'를 노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떤 망할 자식이 앤 첸의 입을 틀어막았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바네사 메리트는 방 안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WVUE뉴스 를 보도하는 배리 트래비스의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텔레비전을 꺼버 렸다. 그 여자는 왜 그리 멍청하지? 그렇듯 간절하게 암시를 보냈는데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나 몇 가지 측면에서 배리가 자 신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얼마나 비밀을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그녀는 비밀이 밝혀지 는 것을 진정으로 원치는 않았다. 그리고 비밀이 밝혀지든, 밝혀지지 않든 그 때문에 죽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금지된 와인을 다시 술잔에 따랐다. 이젠 주치의나 아버지, 남편의 간섭과 질책이 지긋지긋했다, 그들이 어떻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한결같이 그녀를 몰아세우려 고 작정한 사람들인데-. 생각이 도중에 끊겨버렸다. 요즘 들어 자주 려는 현상이었다. 한 가 지 생각을 몇 초 이상으로 지속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 윌 생각하고 있었지? 아기, 그래 맞아, 아기였어. 언제나 그렇지. 하지만 다른 것도 또 있 었는데, ,-, 바네사는 꺼진 텔레비전을 보는 순간 배리 트래비스가 생각났다. 멍청한 암캐! 꼭 정곡을 찔러줘야 진상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 째서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이미 알아차렸지만 겁이 나서 감 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건가? 과연 그 여기자는 멍청이일까? 아니 면 겁쟁이?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여기자에게선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네사는 그 여기자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 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동쪽 잔디밭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배리를 보는 순간, 값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배리는 바로 그린 대법원 판사의 '죽음'과 관련된 뉴스를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방송했던 그 여기자였다. 게다가 기자회견장에서 아연실색할 정도로 멍청한 질 문을 던져 장내를 웃음 바다로 만들던 장본인이 아닌가?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배리 트래비스는 바네사의 목적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도구였다. 자신에게서 몇 가지 암시를 받은 그 엉터리 기자 가 게임을 시작하기엔 적격이었다. 조금 모자라는 그 기자는 일을 벌 이면서 처음엔 진상과 동떨어진 질문을 던지겠지만, 조만간 보다 능 숙한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진짜 해답을 찾으려고 덤비겠지. 그 기자 를 택하지 않고 WVUE보다 더 유력한 방송국에 그 단서를 흘렸다면 아마 지금쯤 자신은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리라. 따라서 여 기자를 내세웠던 것은, 자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고도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무튼 그 계획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배리 트래비스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녀는 무모할 뿐만 아리라 머리가 모자라는 여자였다. 이젠 어디에 의지하지? 습관적으로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a,아버지." 상원의원은 언제나처럼 걸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니, 아가? 그렇잖아도 조금 있다가 네게 전화를 걸려던 참 이었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니? "잘 지내_9_" "오늘 저녁도 혼자 조용히 보낼 계획이냐길 "데이빗은 무슨 노동조합 대회장에서 연설을 해야 한대요 그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렸어요" '재가 그곳에 가서 너랑 같이 있어주랴린 "아니에요 하지만 고마워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아가야, 넌 혼자 있으면 안 돼요" "데이빗이 오늘 밤에 돌아온다고 했어요 조금 늦겠지만 날 깨워주 -다고 약속했죠" 잠시 침묵이 흐르자, 아버지의 이마에 주름살이 깊이 파이는 모습 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윽고 수화기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내 생각에 아무래도 산부인과 의사를 다시 만나야 할 것 잘구나. 의사에게서 호르몬제를 처방받는 게 어떻겠니? 아버지는 모든 여성병을 호르몬의 불균형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 었다. "그러면 조지가 언짢아 할 거예요" "조지 기분이 어떻든, 우리가 눈치볼 게 뭐 있냐? 상원의원의 목소리가 수화기 안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우린 지금 네 건강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조지는 물론 좋은 친구 지. 나도 그가 배앓이나 독감 같은 일상적인 질병에 대해서는 왜나 실 력있는 의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너에겐 전문의가 필요 해. 정신과 의사가 필요하단 말이다." "아니에요 아버지. 그런 의사들을 만날 필요가 없어요 지금은 모 든 게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구요" "로버트의 죽음으로 네 몸이 엉망으로 되었잖니? 바네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을 꿰뚫는 통렬한 양심의 가책을 무디게 하려고 황급히 와인을 들이켰다. '게이빗이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영부인은 정신과 의사가 필요 없 Ct구요" "그 치료는 비밀리에 이뤄질 수 있다. 게다가 네가 정신적인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정신과 의사를 찾는 걸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니? 내가 데이빗에게 말해보마.'' "안 돼요? '허, 아- '제발요, 아버지. 데이빗을 귀찮게 하지 마세요 난 모든 걸 극복해 낼 거예요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라구.-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이자 스승인 상원의원 클리트 암브루스터 의 무릎에서 정치적인 수완을 터득했다. 그 덕에 아버지와 작별 인사 를 나눌 즈음엔 그에게서 자신의 건강 문제와 관련하여 데이빗과 맞 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발륨을 입에 넣고 와인으로 넘기고는 욕조에서 몸을 푼 후 잠옷과 가운을 걸쳤다. 침대에 앉아 몇 장의 편 지를 쓰려고 했지만 만년필을 제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요 즘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베스트셀러 작품을 들춰보았지만 내용을 이 해하기는커녕 눈의 초점을 맞추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모든 노력 을 포기하고 전등을 끄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바네사?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스펜서." "자고 있었소? "아누 책을 읽고 있었어요" 스펜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를 당혹하게 했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물었다. "원하는 게 뭐죠? -개통령이 당신을 살펴봐달라고 해서 왔소" 그녀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는 오늘 밤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게 된 걸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지, 새삼스런 일도 아닌데 오늘 밤은 왜 그리 수선을 떠나요? 하지만 스펜서 마틴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무례한 말로 그를 화나게 한다는 건 어림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설령 화가 난다 해도 절 대 밖으로 드러내지 인물이었다. 그 태도 역시 그가 받는 훈련의 일부 분이었다. 닉슨 대통령 재임 당시, 정부에는 손바닥 한가운데에 흥터가 있는 -고든 리디-란 사내가 있었다. 그 흥터는 촛불 위에 손바닥을 대고 살 이 녹아내릴 때까지 참아내는 훈련에서 얻은 훈장과도 같았다. 하지 만 그런 리디도 스펜서 마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선천적으 로 잔혹함을 타고난 스펜서는 대통령에게 더없이 귀중한 존재였다. 그는 냉정하면서도 공손하게 물었다. "필요한 건 없소? "뭘 갖다줄 수 있죠? "무엇이든." "폐 끼치고 싶지 않군.9_" U절대 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두겠소 지금 기분은 어떻소? 소름 끼치도록 좋아요 그러는 당신은 어떻죠? 흥분한 것 같군. 알랜 박사를 불러오겠쇼" 바네사가 발작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 작잔 필요 없어.9- 내가 필요한 건----- 그녀는 잠시 힘을 끌어모았다. '재가 필요한 건 이곳에 있는 누군가 내게 아들이 있었구 그애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라구요" "바네사, 그건 이미 인정된 사실이요 왜 자꾸 그 일에 집착하는 거 지? 당신 아들이 그렇게 됐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뭘 어쩌겠다는,,,,~1 "그애 이름을 말해봐, 이 망할 자식아? 그녀는 문밖에 서 있는 그에게 달려들어, 완벽한 맞춤복 상의의 옷 깃을 움켜잡았다. "데이빗과 마찬가지로 네 녀석도 그애 이름을 부르는 게 힘든 모양 이지?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어서! 어서 그애 이름을 말해봐? 입에 거품을 물고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당장 그 이름을 말해보라고? 그때 비밀 경호원이 달려왔다. "마틴 씨, 뭐가 잘못됐습니까? "영부인께서 상태가 별로 안 좋으신 것 같관 알랜 박사에게 지금 당장 이리 오빠고 해주게." 스펜서는 그녀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스펜서, 이제 날 방 안에 가둬둘 건가요? "절대 그렇지 않소 직원들 앞에서 꼴불견이 되고 싶으시다면 어디 맘대로 해보시요"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을 하면서 문을 가리켰다. 바네사 는 잠시 음울한 침묵에 빠져들다가 도전적인 표정을 지으며 술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주치의가 도착했을 즈음에, 그녀는 그 잔 마저 다 비우고 새로 따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스펜서는 주치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조지, 그녀는 술에 취했네." 그녀는 의사가 진찰하려고 하자 그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바네사, 그 약을 먹을 때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리요" 옆에서 스펜서가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할 약을 먹이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할수 없네. 이번에 또 그 약의 효과를 보려면 복용량을늘 려야 한단 말일세." 하지만 그 강철 인간은 요지부동이었다. "난 자네가 윌 해야 하는지에는 관심 없네? 바네사가 가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였다. "어서 내게 그 염병할 약을 줘요! 내가 평화를 누릴 때는 잠잘 때 뿐이니까요 그리고 스펜서가 지적한 대로 난 지금 술에 취했을 뿐, 잠이 오지 않는다구_- 드디어 그 약 성분이 혈관에 돌고 있을 즈음, 데이빗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외출한 사이에 그녀가 벌려놓은 상황에 속이 확 뒤 집힌 듯했다. -정말 안줬군요, 대통령 각하. 그녀는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맴돌았지만 온 몸이 엿가락처럼 축 늘어져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와 스펜서, 그리고 알랜 박사 가 그녀의 침대 발치에서 긴장된 분위기가감도는 가운데 수군거렸다. 그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스펜서가 하는 말을 언뜻 들었다. '거 이상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네." 그 얘긴 정확히 무슨 뜻일까? 그녀는 감미로운 망각 속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이젠 그 망각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가 그들이 동 트기 직전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통령은 배리 트래비스와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수석 보좌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스펜서 마틴은 스피커폰으로 그들의 통화 내용을 빠짐없이 다 들은 상태였다. "그녀가 낚싯밥을 던졌지만 자넨 아주 매끄럽게 처리했어.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정중하게 대화를 잘 끝낸 셈이지. 그녀는 달톤 을 통해 전화를 한 건가? "그래, 그녀는 교과서에 적힌 격식대로 놀더군." "그렇다면 그녀의 요구를 자네가 직접 거절하는 게 보다 더 친절한 인상을 줄 수 있네. 아마 그녀는 자네와 독점적으로 선거 운동 전략을 의논할 수 있는 기회를 요청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일세. 물 론 현재 바네사와도 절친한 사이고 자네에게 꽃다발도 받았으니, 그 녀가 대통령 집무실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 리는 아니지." 데이빗 메리트는 창밖으로 눈길을 던져 잘 가꾼 백악관 정원을 쏘 아보았다. 관광 방문객들이 철제 말뚝 울타리를 따라 줄을 서서 입장 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람이래봤자 전직 대통령들의 식기류나 얼빠지게 쳐다보는 것이 고작인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국민을 경멸했지만, 그들의 대통령 직에는 홀딱 반했다. 두 번째 임기 후에도 이곳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재선 실패의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재선되리라는 것은 이미 정해 진 사실이었다. 일찍이 미시시피 주의 '빌록시' 도시의 빈민가 이동 주택에서 세운 계획이었다. 아주 미미한 편차를 빼놓고 모든 일이 종 합적인 계획에 따라 착착 진행되어 왔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데이빗 말콤 메리트가 설계한 미래를 방해할 순 없었다. 그 무엇도! 스펜서는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그 여기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바네사에 대한 질문을 덧붙인 게 마 음에 걸리는군." '재 아내의 행복은 이제 국민들의 관심사가 돼버렸잖은가? 그녀가 바네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거라네."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데이빗은 얼버무리는 듯한 스펜서의 대답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 며 돌아섰다. 스펜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껸 주 전 배리 트래비스란 여자가 난데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지. 그러더니 이젠 우리가 가는 곳마다 불쑥 튀어나오고 있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욕지기를 터뜨렸다. "바네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멍청이 같은 여자를 끌어들인 거지? 그리고 그 여기자는 왜 아직도 정보에 굶주려 있는 걸까? 유아 돌연사 증후군 기획물을 만들기 전이라면 그녀가 D.C. 종합병원 주변에서 얼 정거리며 정보를 캐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기획물이 끝 난 후에 그러는 이유가 대체 윌까? 데이빗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점은 나 역시 내내 마음에 걸리던 점일세. 하지만 그녀의 정보 원은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게 췄잖은가? 배리 트래비스가 그 병원에 서 또 다른 정보원을 구하는 건 이제 힘들걸세." 배리 트래비스는 그 정보원을 비밀리에 심어 놓았다고 생각했겠지 만, 스펜서의 정보원은 그보다 훨씬 더 비밀리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었다. 대통령은 언론에 비밀 정보를 누설한 앤 첸에게 누가 어떤 방식 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단지 스펜서에 게서 그 문제를 처리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뿐이다. 스펜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돌에 새겨도 될 만큼 확정적인 사실이었다. 스펜서는 그런 면에서 매우 유능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가 알아 서 다 해결해 버린다. 그에겐 설명도, 합리화도, 이유도 필요없었다. 도무지 입씨름을 벌일 꼬투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친구, 그레이 본듀란트는 달랐다. 사사건건 그 실행 명령이 어디서 나오며, 이유가 무엇인지 물고 늘어졌다. 데이빗 메리트는 행동에 들어갈 때 정당성을 따질 필요없이 곧바로 이행하길 바랐다. 편의주의를 원했고. 행동의 정직성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정직성은 그레이에게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 였다. "난 배리 트래비스가 단지 지나치게 열정적인 기자라고 생각하네. 그녀는 아주 작은 기회를 붙잡았을 뿐이야. 그 기회를 과대 포장하고 허풍 떨면서, 작은 인기에 편승하여 주가를 최대한 높이려고 발버등 을 치는 거지. 그 와중에 그녀는 불행히도 우리에게 성가신 존재가 돼 버렸지만 말일세." 대통령은 낄낄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모두가 알다시피 얼빠진 여자야. 여보게, 긴장을 풀고 여유 를 갖게나. 우리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만큼 영리한 여자가 아닐세." "잘 모르겠군, 데이텟." 스펜서의 목소리엔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그녀가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하네. 예전에 공식적인 대실수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지금쯤 우리와 맞설 수 있는 언론계의 실력자가 될 수도 있었지. 그 빌어먹을 끈질긴 근성만 보더 라도 그녀가 지닌 잠재적인 자질을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잖은가." "아니면 무모함과 맹목적인 야심을 증명해줄 수도 있지." "어느 쪽이든 그녀가 계속 고집스럽게 나온다면 우리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네." 데이텟은 수석 보좌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종종 말이 필요없을 때가 있었다. 마치 유격대원들이 적군들로 가득 찬 정글 속을 통과할 때 무언의 의사소통으로 길을 선택하듯이, 두 사 람은 눈빛 하나만으로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서로에게 경고했다. 지 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스펜서, 자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자네가 알아서 하도록 하게," "그리 하는 게 좋겠네." 배리는 속기로 기록해둔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내용을 심각한 표정 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이나 말투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 친밀한 사이에서 주고받는 잡담과 비슷했다. 그 는 그녀의 단독 인터뷰 요청을 확고하고 공손하게 거절하면서도, 결 코 그녀를 실망시키거나 놀라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로선 단독 인 터뷰 요청은 단순한 구실에 지나지않았다. 사실 전화를 건 진짜 목적 은 영부인에 대해 좀더 탐문해보기 위해서였다. 배리는몇 주전 바네사메리트와만나카푸치노를 마신 그우중충 하고 바람이 거셌던 날 이후료 워싱턴 정가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극적인 사건의 낌새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 무 것도 건질 수 없었다. 그녀의 정보원들은 한결같이 굳게 입을 다물 었다. 하루종일 차고 다니는 삐삐도 끝끝내 침묵을 지켰다. 비록 그 번호는 정보원들과 데일리만이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그 바닥 의 규칙을 어기고 그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지만 그들은 진정 아무 것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이 또다시 풍부한 상상력으로 지레 짐작했 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앤 첸과 관련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벌어졌고, 덕분에 침 튀기는 확신에 다시금 발동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달톤 닐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메리트 부인이 앞으로 얼마 동 안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요양 상태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그 는 그 깜짝 발표로 기자들을 충격에 빠뜨린 뒤, 곧바로 대통령의 짤막 한 성명서를 읽어내려갔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과 본인은, 바네사가 아들의 비극적인 사망으 로 인한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할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해 영부인 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녀가 개인으로서나 진정한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 한 존재인지를 그녀에게 주지시켜 왔습니다. 그녀는 가족과 조국을 위해서 정상적인 업무에 다시 임하기 전에, 먼저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회복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녀는 휴식 기간을 더 연장해 달라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성명서 낭독이 끝난 뒤 닐리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의 설명 에 따르면, 이번 회복 과정은 백악관 주치의인 조지 알랜의 지휘로 진 행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영부인이 알콜 중독을 비롯한 그 어떤 중독 현상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배리가 목소리를 높여 영 부인이 공직에 언제 다시 나설 예정이냐고 묻자, 닐리는 아직 그 점은 고려해볼 때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 이후로 닐리는 뉴스에 굶주린 언론계에 메리트 부인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전해주었다. 알랜 박사에 따르면, 그녀는 회 복과 요양 프로그램에 대단히 순조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대통령은 배리에게, 아내에게 관심을 보여준 점에 대해 감사하며 그녀에게 안부를 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아내가 회복 과정에 아주 잘 적응해나가 상태가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으며, 그녀의 회복이 더없이 기쁘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영부인에 대한 진실은 철저하게 장밋빛 장막으로 가려져 있 었다. 배리는 무심결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끔찍하군? 어느새 목덜미가 다시금 근질거렸다. 뭔가 분명 잘못 돌아가고 있 어. 그녀는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D.C. 종합병원입니다. 어느 분과 연결해 드릴까요? "앤 첸 양 좀 부탁합니다." "첸 양은 퇴직하셨는데_- "방금 뭐라 하셨죠? "첸 양은 이곳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외 통화하고 싶 으신 분은 안 계십니까? "아, 아녜요 감사합니다." 배리는 재빨리 수화기를 내려놓고 앤 첸의 집 전화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잠시 후 수화기에선 그 번호가 결번임을 알리는 컴퓨터의 합 성음이 흘러나왈다. 그로부터 5분도 채 안 되어, 배리는 차를 몰고 앤 첸의 아파트로 직행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올라 가 X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을 여러 차례 눌렀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낙담한 그녀는 맞은편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문에 귀를 대보 니 인기척과 함께 소곤소곤 얘깃소리가 들려왔다. '져보세요? 그녀는 그 안의 사람을 부르면서 문을 두드렸다. "첸 양을 찾는데, 알 수 있을까요? 이윽고 문이 열리구 세련된 모습으로 머리를 뒤로 묶고 도안 문자 가 새긴 셔츠를 입은 경영자 타입의 젊은이가 나타났다. 셔츠의 단추 가 허리춤까지 풀려 있고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니 서둘 러 옷을 입은 모양이었다. 배리는 그의 어깨 너머로 흘끔거리고는 아 가씨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참이란 걸 알았다. 거실 바닥에는 퍼크 닉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앤을 찾고 있다고 하셨죠? 그녀는 이사 갔습니다." 그는 한시바삐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그 일이 식사든 뭐든,,,-. "그때가 언제죠? '저번주 금요일이나 목요일쯤 췄을 겁니다. 아파트 관리인이 토요 일에 그 집을 깨끗이 청소했으니 주말 전이란 건 확실합니다. 또 그전 엔 하루종일 일꾼들이 그 집을 들락날락거렸죠" "혹시 아시는지 ,,,~1 "그녀가 이사간 곳 말입니까? 아니, 전혀 모릅니다. 그녀가 D.C. 종 합병원에서 일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젠 그곳에서 일하지 않아요 퇴직했다더군요" "흐음, 그럼 나도 도무지 모르겠는걸요" "와줘서 고마워_a,데일리," 배리는 뒷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져엔 향긋한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래가 어떻게 정중한 초대를 거절하-나? '7시에 그곳에서 봐요 그 리고 저녁 식사도 부탁해요'라고 했잖아." 데일리는 크리스마스 그림이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가스 레인지 앞 에서 냄비 속의 스파게티 소스를 휘저었다. 그녀는 2년 전 그 앞치마 를 선물로 받고 그뒤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데 일리가 앞치마를 어디서 찾아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그녀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크롱카이트를 다독거리며 물었다. '지 녀석에게 음식을 줬나요? "익히지 않은 고기 완자를 주니까 통째로 집어삼키더군." 데일리는 국자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돌아섰다. '재가 왜 으슥한 뒷골목에 차를 세워두고 뒷문으로 이 집에 들어와 야 하지? 지금 스파이 게임을 하고 있는 건가? '거녁 식사한 후에 얘기하죠" 그는 군소리없이 그녀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음식 접시들을 비우고 나서 그들은 곧바로 거실에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데일리가 속이 확 찬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구 크롱카이트 역시 커다 란 머리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쉬는 동안, 배리만이 집 안을 분 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녀는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날름쇠가 채워 졌는지 두 번이나 점검했다. 게다가 밖에서 안을 엿볼 수 없도록 블라 인드로 창문을 가렸다. 마침내 데일리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질문을 던졌다. '끼봐, 대체 무슨 일이O次'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갖다대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 소리를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해놓고 데일리 옆에다 등받이 없는 의자를 놓았다 "당신은 아마 지금 내가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사실 난 지금 감시당하고 있어요 오늘 오후 내 무선 전화기도 꺼놓았 죠 이후로는 전화 응답기에 녹음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우리가 얘기를 할 땐, 특히 바네사 메리트에 대해 얘기할 때는 아주 신중하게 해야 해요" 그는 시끄럽게 떠드는 텔레비전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당신은 이 집이 도청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or" "그렇다고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죠" 그녀는 앤 첸이 사라진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이내 덧붙였다. "아파트 관리인과 얘기해봤더니 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임대료 를 다 지불하고 짐을 꾸려 떠났다는 거예요" "그렇게 떠나는 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이를테면 다른 직업을 구했다거나 다른 아파트가 생겼다는 이유 말야." "그녀는 병원 동료나 관리인에게 새 주소도 남겨놓지 않았어요 그 건 단순히 이사를 가는 사람치고는 너무 이상하잖아8-" '저쩌면 성질 못된 남자 친구를 정신 차리게 해주려고 그럴지도 모 -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있었어요 게다가 난폭한 애인도 없단 말예요 그녀는 나와 말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무척 두려워했 죠 그건 분명 누군가, 그녀가 내게 정보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그녀에게 겁을 주어 입 다물게 한 거라구요" 데일리는 침묵을 지키고 아랫입술을 잡아당기기만 했다. '개통령 부부는 왜 아기를 부검하지 않은 거죠? 주치의인 알랜은 아기가 죽었을 때 현장에 없었어요 그런 사고사의 경우, 관련 법규를 보면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부검을 하도록 돼 있죠" "하지만 배리, 우린 지금 미합중국 대통령과 영부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경우, 법은 응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구." "만일 자식이 뚜렷한 이유 없이 느닷없이 죽어버렸다면, 정화한 사 인을 알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메리트 부부는 부검에 반대한 거죠? 뭔가를 감추는 게 아니라면 말예요" "부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데일리는 그 얘긴 그만하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구." "난 이제껏 시간이 날 때마다 바네사가 내게 속삭였던 그 이상한 말들을 되새겨보았어요 그 말 속에 고백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요? "만일 그녀가 정말 갓난 아들을 죽였다면 왜 스스로 고백하겠나? '재면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죄가 밝혀지길 바라기 때문이죠 잠재 의식적으로 징벌받고 싶어하는 거라구요." "당신이 얘기하면 할수록 부인의 병이 점점 더 깊어지는 느낌이군.'' 배리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추고 초조하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어디 있죠? 하이포인트에 있을까요? 메리트 가의 휴양지는 워싱턴에서 남서부에 위치하여 차편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쉬난도어' 강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공식적으로는 지명을 밝힐 수 없는 모처에서 그 녀가 쉬고 있는 것으로 돼 있지만 말야." "그들 말대로 그녀가 건강하고 단지 휴식을 취하는 거라면 왜 모든 걸 비밀에 부치는 거죠? "만약 영부인이 심각하게 아프다면, 클리트 암브루스터 의원이 딸 의 병을 고치려고 두 팔을 걷고 나섰을 거야.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좋은 의료시설에 입원시키고 온갖 방법으로 치료하려 했겠지. 암브루 스터 의원 사무실과도 얘기해 보았나? "물론 해보았죠 그쪽 보좌관들도 닐리의 발표를 주문처럼 되뇌이 더군.9_" "만약 그녀의 건강에 정말로 문제가 있다면 상원의원은 요양 기간 을 늘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거야. 그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딸에게 최고 의료 서비스를 베풀도록 했을 거라구." "마찬가지로 딸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의원은 어 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사건을 은폐하고 딸을 보호하려고 발버등쳤을 거예요" '게기랄, 당신 얘기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다 지끈거려? "당신은 자꾸만 내 길을 방해하는군요 그리고 내가 옳다는 걸 바라 지 않구요" "난 당신이 틀리는 걸 원치 않을 뿐이야. 그린 판사 사건 때처럼 휴 대용 사슬톱을 들고 나뭇가지 위에서 설치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구." '지건 그 사건과는 전혀 달라요"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래. 그때 대실수를 겪은 뒤로 지금에서야 당 신은 약간의 신뢰도를 얻기 시작했지. 그런데 만일 당신의 그런 생각 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어쩌면 지저분한 소동에 휘말리게 될지 상상 이나 해보았냐고? "당신은 내 추리가 맞을 경우 내 주가가 얼마나 높이, 그리고 빠르 게 치솟을지 상상해 봤나요? "자신만의 주간 특집 프로를 꿈꾸기 전에 먼저 자신이 윌 갖고 있 는지 확인하는 게 낫지 않을까? 육감이야, 배리. 바로 그거라고 육감 은 기자들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어."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배리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누군가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혹은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살인자가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총을 들고 시체 옆에서 체포됐다고 해봐요 그 럴 경우, 그때 그 시간에 현장에 있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기사를 쓰 죠? 그래요, 우린 육감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 훌륭한 기사는 육감으로 시작된다구요 육감은 직접 현장에서 사건을 눈으로 목격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직업적인 본능이죠 데일리, 당신이 믿지 않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번 일을 추진하는 건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사실 난 바네사가 무 척 걱정돼요 그녀의 진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심하게 왜곡당하고 있어요 백 번 양보해서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교 바네사의 아기는 보도된 대로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었다고 쳐요 그렇다 해도 그 녀는 엄청난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 이상에 걸릴 수도 있겠죠 그 래서 그녀가 백악관에 골칫거리가 되었다면 그들은 그녀를 대중의 이 목이 닿지 않는 은밀한 곳에다 격리시킬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대통령이 그녀를 강제로 가둬두었다고 생각하는 거이똔' 곰곰 따지고 보니 그녀의 가설이 더없이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겅말 믿기 어려운 얘기죠? "우리가 이제껏 다룬 얘기 중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로군." 그는 뭔가 헤아리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권력이란 자체가 독특한 심리 상태를 갖고 있지, 역사를 살 펴보면, 몇몇 대통령들이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그리고 그 경우 중엔, 정서불안에 빠져 남편의 재선 가도에 장애물이 될 영부인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일도 포함될 수 있겠지," 배리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맙소시 추리를 하면 할수록 점점 부정적인 결론이 나오는군요" "배리, 우리의 결론은 아직 추리 단계에 지나지 않아." 그녀가 대뜸 뽀로통하게 종알거렸다. "흥, 그걸 내게 일깨워줄 필은 없잖아요" "하지만 그게 내 일인걸? "당신은 더 이상 내 직장 상사가 아니라구요" "그래, 맞아. 이제 난 당신 친구지. 하지만 배리- 그가 약간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요즘 전세계의 찬사와 더불어 인정받기 시작했어. 그러니 이번만이라도 스스로 여유를 가질 순 없을까? 그녀는 그의 말투가 탐탁지 않았다. "데일리, 이젠 심리학 시간인가요? 배리 트래비스의 머리 뚜껑을 열고 그녀를 이상하게 만드는 요인이 뭔지 분석할 시간인가 보죠? "난 이미 뭣 때문에 당신이 이상하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어.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당신 역시 그게 뭔지 알고 있다는 거지." 그녀늘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겠군요" "당신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도 이런 위험찬 사건을 끝까지 물 고 늘어지려는 동기가 그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려는 욕구와 전혀 무관 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의)1 '게, 그래요 난 당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 어요 게다가 내 동기가 어떻든, 반드시 밝혀내야 할 사건이에요 내 말에 동의하나요? 그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런 사건이 정말로 벌어지고 있다면 동의하지."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내 풋내기 시절의 상처를 들추는 짓은 그만 하고 날 도와주세요" "어떻게? '재게 진상을 말해줄 사람은 과연 누굴까? 암브루스터 상원의원? 데일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치원은 알고 있거나 믿는 진실이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집단의 방 침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지킬 인물이야. 뼛속까지 정치인의 생리가 배어 있는 작자지. 백악관에 심어둔 자기 파의 사람 이 설령 '칼잡이 잭(Is8s년 런던에서 수많은 여성을 죽이고 사체를 손상 시킨 범인이 스스로 일컬은 이름. 체포되지 않아 지금까지 정체불명으로 남아 있음>'이라 하더라도 궁지로 몰아넣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아. 그런 데 하물며 그 상대가 사위인데, 과연 의원이 호락호락 입을 열 것 같 나? 과거에 데이빗 메리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의원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잘 생각해 보라구." "좋아요 그럼, 메리트 부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없을까 요? 이를테면 그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다가 사이가 틀어진.~1 그러다 돌연 번쩍 새로운 생각이 스치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왜3 1, 인질들을 구한 군인 말예요? "본듀란트? "본듀란트! 맞아요! 개리 본듀란트? "개리가 아니고 그레이야." "그래-a,그레이, 메리트 부부와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친 밀한 사이였죠 그레이라면 내게 진상을 얘기해줄 거예요" 곧이어 터져나온 데일리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숨이 가빠 헐떡거리면서 가르랑건리는 소리와 뒤섞이자 배리는 불쾌했다. "차라리 '러시모어 :츠미국 사우스 다코다 주 서부에 있는 산. 조지 워 싱턴, 제퍼슨, 링컨, 루즈벨트의 얼굴이 산허리에 조각되어 있음-의 얼굴 중 하나와 인터뷰를 하는 게 더 나을걸? 그레이 본듀란트보다는 그들 이 더 친절하고 대화에 호의적으로 나을 테니까, 후후. 그레이는 코브 라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작자야." "그는 무슨 사연을 갖고 있죠? 대체 어디 출신이에요? 데일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거들먹거렸다. "그 문제 역시 당신의 뛰어난 육감을 발휘해야 할 거야." 그녀가 낙담에 겨운 목소리로 되받았다. -데이빗 메리트가 보좌관으로 지명할 때, 혜성처럼 난데없이 갑자 기 나타난 인물이죠" (L하지만 겉보기만 그런 거라구. 사실 따지고 보면 스펜서 마틴도 그 에 못지않게 신비로운 인물이야. 메리트 정부 이전 그들의 활동은 베 일에 가려 있지. 내 생각엔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런 신비한 후광을 드 리우고 있는 것 같아." "왜 그런 거죠? -껌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그런 거-지," -개체 본듀란트는 그 구조 작전 이전엔 뭘 했죠? -지대한 일을 계획했겠지. 사실 그들 세 사람, 즉 마틴과 본듀란트, 그리고 메리트는 함께 정찰대 훈련을 받은 해병대 출신이야. 그들 셋 중에서 대통령은 타고난 정치가로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었지, 그리고 성격이 뱀처럼 음흥한 스펜서 마틴은 현재 정부 내에서 맡고 있는 역 할과 딱 어울리는 인물이야. 그런데 본듀란트는-삼인조 중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이지. 그에 대해 알고 싶다고? 그 친구는 언제나, 오 줌을 지릴 정도로 내게 겁을 줬지, 내 생각인데, 그는 대통령에게도 오줌을 지릴 정도로 겁을 줬을 거야." (L그가 바네사에게 지나치게 애착을 보여 대통령에게 해고된 게 아 닌가요? 난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코웃음을 치며 데일리가 툴툴거렸다. ,거리에 녹이 슬었나? 생각하는 게 왜 그 모양이이? 그 일이 벌어졌 을 때 어디 있었어? 별로 오래된 일도 아니잖나." 그 당시에 하위가 몇 가지 일로 내게 돌아버릴 지경이라, 프로 레 슬링계에 떠도는 부정 사건을 떠맡겼죠 덕분에 난 본듀란트가 워싱 턴 정가에 복귀하고 얼마 안 있다가 해고된 사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어_- "사실 제대로 파악할 것도 별로 없었어, 본듀란트는 워싱턴의 모든 기자들에게 좌절만 안겨주었거든. 그는 카메라를 교묘하게 피해다녔 고, 인터뷰는 절대 사양했지. 신문에는 그에 관해 시시껄렁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사들이 실렸지만. 한결같이 진실과는 전혀 동떨 어진 얘기였어." "그럼 그에 관한 진실은 대체 뭐죠? "나도 몰라.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은, 대통령이 본듀란트와 영부인이 몸을 섞었다고 생각했다면 어째서 본듀란트에게 구조 작전 의 지휘권을 맡겼느냐는 거야. 결국 본듀란트를 국민의 영웅으로 만 들었어. 질투심에 불타는 남편의 행동으로 보기엔 이상하지 않나? 데일리는 그녀의 말을 막으려는 듯이 검지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리고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게 한 가지 더 있지. 대통령은 그를 해고하지 않았어. 그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을 때, 대통령은 백악 관으로 돌아와달라고 했지. 그때 본듀란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고 맙네. 하지만 안 돼.'라고 말했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끼봐, 아가씨. 당신만 정보원이 있는 건 아니야. 비록 무덤에 이미 한 발을 내딛고 있는 몸이지만, 다른 한 발은 아직도 워싱턴 정가의 여러 그룹들에게 환영받고 있다구." "당신이 그렇게 백악관 내부 사정에 밝다면 본듀란트가 지금 어디 에 있는지도 알겠네요? "그는 서부의 모처로 갔어, 네모진 주(外D중 한 군데로 말야." 모든 준비를 끝내고 배리는 하위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하기로 결심 했다. 두 사람은 그가 즐겨 찾는 미리 요리해놓은 식품을 파는 식당으 로 갔다. 배리는 부탁을 늘어놓기 전에 그가 마음놓고 식사를 즐기도 록 해주었다. L(하위, 제발 부탁이에요 정식 허가를 내주세요 며칠 정도면 된단 말예.- 하위는 고기완자 샌드위치에서 흘러나온 육즙을 마지막 빵조각으 로 닦고는 입 안에 쑤셔넣었다, 그러고는 우물우물 씹었다. L(자네도 알다시피 여행은 돈이 많이 들어. 미안하지만 우리에겐 그 만한 예산이 없다구." U일단 여행 경비는 내 돈으로 충당할게요 영수증을 모아놓을 테니 나중에 방송국에서 결재해주면 돼요 물론 내가 그 기사를 뉴스거리 로 만들면 말예_9-" 그녀는 이렇듯 희생해서라도 그의 승낙이 떨어지길 기대했다. 이번 여행은 전국을 들끓게 만들 특종 뉴스 프로를 제작할 기자로서의 권 리를 확실하게 부각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사실 엄청난 기삿거리가 아니라면 왜 하위 프리프 같은 인간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는가? 그는 양파를 씹으며 그녀의 요구를 숙고하다가 운을 資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쌩선지나 기사 내용도 밝히지 않고 내 승낙이 떨어지길 바라나? '지낙 폭발력 있는 사건이라서요 이 사건을 조사하는 데는 비밀을 지키는 게 기본이죠"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위의 입에서 풍기는 양파와 마늘 냄새 때문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만일 내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외부로 새나간다면, 사건 내용을 아는 사람 역시 위험에 처할 수 있어요- 하위가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툴툴거렸다. '기봐, 그럼 아예 그 개똥 같은 기삿거리를 NBC에 팔아버리지 그 래? 그곳 닭대가리들은 분명 그 기삿거리를 사줄 거라구.- '去마워요 하위, 사실 당신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죠~1 그녀는 가방을 집어들면서 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위는 깜짝 놀라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왜 툴툴거리지 않는 거지? '개냐하면 난 이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젠킨스 국장님께 갈 수 있 기 때문이죠 난 위계 질서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당신에게 먼저 내 요 구를 말했던 것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분명하게 내 요구를 거절했 으니 이젠 떳떳이 가게 되었네요" 그녀의 입에서 WVUE국장 이름이 흘러나오자, 하위는 공포로 심 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젠킨스 국장은 내 결정을 지지해줄 거야." 그는 공포를 감추려고 짐짓 자신만만한 말투로 내公社다. "그는 자네가 취재 여행을 요청할 정도로 뻔뻔스런 여자란 사실에 하도 기가 막혀 배꼽 잡고 웃을걸? 배리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생글거렸다.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아참, 그분에게서 받은 쪽지 내용에 대해 말 안했던가요? 하위는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내용은내 SIDS보도물에 대한 뜨거운 찬사로 가득 적혀 있어 요 그는 앞으로도 내가 그런 비슷한 기획 보도물을 계속 제작해주길 바란다고 했죠 내 재능이 쓰레小 같은 기삿거리에 파묻혀 대단한 인 적 낭비라고 하던걸요? 그뿐만 아니라 내가 공익 프로의 제작에도 참 여하길 바라고 있었어_9_ 스튜디오가 아니라 밖에서 현재 프로그램을 진행하듯이 단독으로 출연하는 프로 말예요" 그녀는 괜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쯤 그가 당신에게 그 얘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니었나요? 어쨌든 난 상관 없어.9- 아마 그가 너무 바빠 당신에게 아 직 얘기할 시간이 없었나 보군요." 그러면서 갈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한번 고려해 보지." "그럴 필요없어요 정말이에요 잊어버리세요 내가 곧바로 젠킨스 국장에게 말하는 게 낫겠어요" "잠깐만! 가만 있어봐! 제발 부탁인데 내게 1분만 시간을 줘.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해오면 어떡하란 말야릴 그는 머리를 뒤어짜면서 향미료 잎사귀를 조금씩 씹었다. "그 기삿거리가 정말 엄청난 거라고 맹세할 수 있나? "가르강튀아(프랑스 풍자작가 라블레가 15펀년에 지은 가르강튀아 중에 나오는 명랑한 거인을 일컬음. 고래가 물을 들이켜듯 술을 마시고, 말 처럼 대식가임)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는 창문 옆을 지나가는 아가치를 흘낏거리면서 오이 피클 한 조 각을 입 안에 넣고 겨드랑이를 긁적거렸다. "좋아, 다녀오라구. 하지만 날 생각하면서 자위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하위의 너저분한 표현에 소름이 확 끼쳤다. "폰데로사 소나무 숲에 온 걸 환영합니다." 배리는 공터 입구를 지나 그레이 본듀란트의 집으로 통하는 자갈 길로 차를 몰면서 소리쳤다. 데일리의 정보원인 어떤 전과자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과 가명을 이용했다. 그리고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현찰을 써가면서 오후 늦 게서야 목적지에 도달했다. 안전을 위한 그런 예방 조치가 과민 반응 이길 바랬지만, 모든 것을 단순히 운명에 맡길 순 없었다. 와이오밍 주 북서부 지방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본듀란트의 집은 상식을 훨씬 벗어난 곳이었다. 단층짜리 목장 주택은 이제 막 장려한 가을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사시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 집 앞으로 가려면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르는 암반 위를 지나가야 했다. 집은 통나무와 돌로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 한 마디 보태지 않고 현관 베란다가 집 너비만 했다. 말 세 필이 작은 방목장에서 한 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집 뒤에 있는 헛간은 집보다 더 오래 되어 보였다. 문이 활짝 열린 별채의 차고 안에는 앞바퀴 대신 썰매를 단 '스노우모빌'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차고의 바깥벽 옆에는 장작들이 아름드리 쌓여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말들 외에는 생명 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심하게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주변 지세는 험악하고 위협절이었다. 울퉁불퉁한 산악 지대의 전경을 바라 볼수록 배리는 자꾸만 초라하게 느껴졌다. 틀림없이 그레이 본듀란트 도 그녀를 그렇게 생각할 것만 같았다. 렌트카에서 내리면서 그녀는 그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에 관해 듣고 읽 어본 정보에 ~1춰보건대, 그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환대해줄 가능성 은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쓸데없이 마음을 졸였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집 에 없었다. 몇 분 동안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지만 집 안에선 아푸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에3,빌어먹을! 전직 해병대원과의 만남에 대비하느라 정신적으로 이미 녹초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지금 상황에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수고와 대가를 치렀다. 하 다못해 잭슨 홀로 가서 관광이라도 하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레이 본듀란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현관 베란다에 있는 골풀이 깔린 흔들의자에 앉았다. 티턴 산맥의 전경은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히리 만치 대장관이었다. 혼들의자에 앉아 잠시 여유를 가지고 자연의 경이로운 모습에 빠져든다는 것이 더없이 기뻤 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또 다른 자연 현상, 즉 생리 현상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로부터 15분쯤 뒤, 그녀는 가방을 의자 위에 내버려두고 현관문 으로 되돌아갔다. 차고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현관문 역시 잠겨져 있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생각이 스쳤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안에 들어서자 마자 거실이 나타났다. 거대한 대들보가 드높은 천 장을 튼튼하게 떠받치고 있었구 널찍한 거실 맞은편 끝에는 거대한 벽난로가 돌벽을 위압하고 있었다. 실내 장식은 철저하게 남성적이었 다. 벽난로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소파들은 청록색으로 염색한 무두질 한 송아지 가죽으로 덧씌웠고 단단한 목재로 만든 거실 바닥에는 안 장 깔개처럼 보이는 거대한 순모 응단이 깔려 있었다. 괘종시계의 똑 닥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곤 집 안엔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희 미하게 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남성의 체취가 떠돌았다. 남성용 향수 냄새가 집 안 전체에 워낙 강렬하게 고루 배어 있어 고개를 돌리면 금방이라도 그레이 본듀란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리석은 생각을 질책하며 거실을 재빨리 가로질러 커다란 침실로 들어섰다. 침실 역시 바닥은 딱딱했지만, 한쪽 구석에 자리잡 은 어질러진 침대 모습은 거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의 도적으로 침대를 바라보지 않고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섰다. 세면대 위엔 칫솔 한 개만 달랑 꽃혀 있었구 선반엔 수건이 단정하 게 개켜 있었다. 문 뒤에 붙은 놋쇠걸이에 걸린 셔츠를 보는 순간, 그 셔츠를 만지고 싶은 욕구를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무명 셔츠는 감촉이 더없이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욕실 안은 잘 정돈된 편이었다. 다만 독일의 라인 강변 도시 '괼른' 이 원산지인 화장수가 요 근래 사용한 적이 없었는지 병 마개 위에 먼지가 두텁게 끼어 있었다. 거울이 붙은 세면장을 열고 그 안을 엿보 고 싶은 충동이 스쳤으나 추잡스런 사생활 침입이 될 것 같았다. 화장실을 사용한 뒤 손을 씻고 크롬으로 도금한 고리에 걸린 수건 에 손을 닦았다. 수건이 약간 축축했다. 아마 얼마 전에 그가 얼굴이나 손을 닦은 듯했다.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묘한 곤혹감과 흥분이 꿈틀거렸다. 또다시 집주인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이곳에 있 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래, 주위가 너무 조용하고 나 혼자라서 묘한 기분에 빠져든 거야. 침실을 빠져나오면서 배리는 물 한 컵만 들이켜고 곧바로 나가겠다 고 이 자리에 없는 주인과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부려은 쉽게 찾았다. 하지만 냉장고 안에는 여섯 개들이 캔맥주 한 묶음만이 보였고, 청량 음료나 생수병은 눈에 띄지 않았다. 냉동실 안 역시 쇠고기 토막을 비롯한 몇몇 냉동 식품 외에 네모난 얼음이 저장 되어 있을 뿐이었다. 얼음을 띄운 수돗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약속에 따라 곧바로 현관 베란다로 나와 집주인을 기다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겠지. 장시간 집을 비워둘 것 같으 면 이렇듯 문도 잠그지 않고 나갔을 리 없을 테니까. 이윽고 오렌지빛 황혼에 물든 화려한 수채화는 자줏빛 어스름으로 바뀌었다. 별들이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평생토록 본 적이 없는 수많은 별들이 찬란한 빛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마치 신 비로운 은하수가 짙은 어둠을 뚫고 밖으로 터져나오는 듯했다. 사방에 어둠이 깔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다.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차가운 밤 공기가 파고드는데도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머리가 밑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턱이 가슴에 부딪쳤다. "이건 미친 짓이야? 왝 소리를 지르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리고 뭐라 더 얘기하기도 전에 흘린 듯이 집 안으로 들어가 따스한 가죽 소파에 누웠다. 주션을머리에 벤 지 몇 초지나지 않아곯아떨어졌다. '타다닥? 당구공들이 경쾌하게 부딪치면서 귀퉁이에 있는 공받이 속으로 굴러떨어지자 하위 프리프는 코웃음을 쳐가며 희희낙락했다. "우와, 이겼군! 내가 모두 몇 번 이긴 거요? "세 번이_- "으흐흐! 그럼 15달러 벌었군. 아, 물론 당신이 7판 4승제로 다시 나 와 붙지 않는다면 말이요" "아니,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당신에겐 완전히 졌소" 하위는 상대에게서 15달러를 건네받아 호주머니에 쑤셔넣으면서 보통 때와는 다른 희한한 승리에 연신 우쭐거렸다. 하지만 상대방 남 자의 눈빛은 너무 뽐내지 않는 게 좋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패배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개신 내게 술 한 잔만 사주시요" "술? 거, 좋지! 윌 마시고 싶소? 상대는 얼음을 넣은 보드카를 주문했다. 하위가 카운터로 가서 보 드카와 자신이 마실 맥주를 갖고 돌아온니 상대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하위가 그 앞에 앉았다. "난 여기 오래 머물 수 없소" 사실 하위는 당장 떠날 생각이었다 상대방은 유명 상표의 보드카 를 주문했다. 낯선 사내와술 몇 잔 더 걸치면 숭리로 벌어들인 공돈 을 고스란히 까먹을 것 같았다. "휴,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그 사내는 술을 흘짝거리며 물었다. '개체 어떤 계통의 일에 종사하는데 고러쇼? 하위는 맥주 안에 소금을 섞으면서 우쭐거렸다. "방송 기자요 런NUE가 내 직장이지." "그럼 텔레비전에 나온단 말이오? 아니요 난 골치 아프게 방송 출연 같은 건 하지 않소 바보 같은 뉴스 앵커들이나 하는 짓이지. 난 기자들에게 뉴스거리를 배분하는 직책을 맡고 있소" -그럼, 방송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돈 책임을 지고 있-구려? L1우리 방송국에서 방송되는 내용은 모두 다 내가 책임지고 있소" 하위는 상대방의 관심에 으스대며 자신의 일을 그럴싸하게 꾸며대 기 시작했다. U어떤 기자가 어떤 기사를 맡고. 어떤 기사를 녹화할 것이며, 어떤 프로를 방송하고 그 방송을 몇 시간짜리로 할지 모두 내가 맡고 있소 그래서 난 하루에도 수백만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하요" "책임이 참으로 막중한 위치에 있군요" 하위가 대범하게 대꾸했다. '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압력들은 내 발전의 밑거름 일 뿐이_-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하위 프리프가 세면용 거울을 볼 때마다 꿈 꿔 왔던 깔끔한 외모였다. 그 사내가 풍기는 분위기는 때때로 하위 자 신도 갖친으면 하는 부분이었다. 우선 그 친구는 세련된 말솜씨로 상 대를 구슬리고 부추기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그 사내는 냉정을 잃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 당구를 칠 때 연달아 세 판,을 하위에게 지고도 전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 친구는 여자들에겐 억제할 수 없는 욕정을, 남자 들에겐 두려움에서 비롯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요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상히 알고 있 겠군. 방송 뉴스를 누구보다도 먼저 보고받을 테니 말이오" "아, 그건 두말하면 잔소리지." "대체 요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소? 하위는 매력적인 사내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뉴스거리 를 찾으려고 머릿속을 뒤져보았다. "흐음, 글쎄을시다. 우리 방송국의 한 기자가 엊그제 삼인조 갱단이 총질을 할 때 현장에 있었소 그래서 시체들을 천으로 덮어씌우기 전 에 그 피해자들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었다요" 하지만 그 사내는 엷은 미소만 홀리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리고- "아까 당구 게임은 참 재미있었소 그럼 난 이제 가봐야- "우리가 최근에 건져낸 최대의 뉴스거리는 바로 유아 돌연사 증후 군 보도물이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아기가 침대에서 죽는 일 말이오" 하위는 이 말로 상대의 관심을 되살려내었으면 싶었다. "아하, 그렇소? 됐다! "바로 내가 그 보도물을 기획했소 그 기획물의 내용 중엔 대통령의 아기에 관한 추적조사도 포함돼 있었지." "대통령 아기의 죽음은 참 비팔적인 일이오" "그 과정 중에 우린 대통령 영부인과 인터뷰도 했소"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셨군. 영부인은 여간해선 인터뷰를 하지 않잖소? "그건 우리 WVUE와의 단독 인터뷰였소" '개체 어떻게 그런 어려운 일을 성사시킨 거요? '비, 당신도 알 만한 방법이요 몇 군데 전화를 해서 예전에 내게 신세진 사람들에게 보답할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지." 그는 백악관을 상대하는 일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거드럭거 리며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한 잔 더 하겠소? "아니,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내가 지금 취한다면 당신에게 다시 당 구에서 날 이길 기회를 제공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남자가 싱긋 웃자 하위 역시 그 웃음을 되받았다. 하위는 터놓고 대 화할 만한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어쩌면 친구 한 명을 사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괜스레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나도 텔레비전에서 영부인과의 인터뷰 장면을지켜보았소 질문들 이 아주 날카롭던데. 그 기자 이름이 뭐더라? '개리 트래비스요" 하위는 잇달아 그녀를 고용하게 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직업도 없이 빌빌거리고 있었지. 처음 그녀를 보자, 와, 쌈박한 계집인데? 그래,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대신 연방 통신위 원회(연방 정부의 독립 기관으로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 전신, 전화, 위성 통신 들을 감시힌에서 점수 좀 따자고 생각했소 더구나 인상이 아주 좋더 군." 하위의 새 친구가 낄낄거리면서 말을 받았다 '지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잖소? 같이 일할 거라면 예쁜 여자로 뽑 는 게 당연하지, 어떻소? 하위는 새삼스레 상대를 할금거렸다. 얘기가 통하는 친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 뭣 좀 아는 사람일세그려." 그러더니 새 친구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개리와 난 한동안 잘 지냈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와 일하 는 게 점점 성가시고 골치 아픈 일이 돼버렸지. 그래서 그후로 난 태 도를 바꾸게 되었다요 그런데 그녀는 그런 변화에도 두말 없이 적응 했소 다른 사람들처럼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단 뜻이지. 하지만 그 대신 그녀는 일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 시작했 소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오히려 안 좋을 정도로 지나치게 큰 야심을 품은 거조- "대체 얼마나 큰 야심을 품었길래 그러오? "아,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일이오 바로 그 유아 돌연사 기획물 성공 으로 그녀는 머리를 구름 위에 두고 눈에는 별빛을 머금었지. 사실 그 보도물은 내가 기획했는데 말이오. 지금도 그녀는 특종 건에 매달려 날 애먹이고 있소" "저 런? 새 친구는 더 이상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저 의자 등받 이에 등을 편안하게 붙이고 술잔 속의 얼음을 빙빙 휘저었다. "대체 그 특종이 뭐요? "그 부분에 있어서 난 두.손 다 들었소 그녀는 결코 말해주려고 하 지 않더군." '제헤이, 그러지 말고 한번 말해보시요" '깽세코 난 모르.P. 다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맞으면 그 사건의 진상이 워터게이트 사건도 저리 가라 할 정도라고만 했소" 그러자 그 사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그러면 진짜 특종이겠군." "말도 마쇼! 그게 정말 특종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조사차 며칠 출장을 갔다온다며 훌잭 떠났소" '거디로 간다고 했소? 순간 그 사내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탁자 위의 땅콩을 집 어들던 하위는 손과 입이 잠시나마 얼어붙는 느낌이 스쳤다. 이거 내 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괜스레 배리의 기삿거 리로 너무 많이 수다를 떤 것 같은데? "그녀는 목적지도 말하지 않았소" 그러자 그 남자의 미소가 쩍쩍 갈라져 입가에서 사라졌다. "아무런 암시도 없었단 말이오? "전혀 ." "그 여자는 비밀이 무척 많은 편이군." "어쨌거나 그녀도 여자 아니겠소? 그 누가 여자의 마음을 헤아린단 말이오? 하위는 입 안에 든 땅콩을 씻어내리려고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아참, 너무 늦었군. 당신이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붙잡아둔 것 같소 보드카, 고마웠소" 하위는 새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뒤따라 주섬주섬 일어났다. "나도 즐거웠소" "물론 그렇겠지. 이 악당, 15달러를 벌어 집에 가게 줬잖소? "언제 또 겨뤄봅시다? 하위는 내기 당구에 너무 빠져 있는 인상을 상대에게 주지 않음과 동시에 상대가 자신을 호모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난 1주일에 이틀 정도는 이곳에 들리는 편이오 특별히 다른 계획, 이를테면 다른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일이 없을 때는-- 그 사내는 하위와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말을 건넸다. "그럼 또 봅시다." 하위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상대의 자신만만한 태 도를 질투하고 찬탄하면서,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쉽사리 친구를 사귈 수 없 을 듯싶었다. 스펜서 마틴은 두 블록 정도 차를 몰고 가다가 백미러로 자신의 모 습을 흘낏 살펴보더니 껄껄 웃으며 야구 모=小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 안에 숨어 있던 기다란 곱슬머리가 어깨로 흘러내렸다. 연이어 가 짜 콧수염도 떼어버렸다. 하위 프리프를 구슬리면서 몸에 밴 담배와 맥주 냄새를 없애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벌레 같은 놈! 스펜서는 백악관으로 돌아가면서 하위에게 욕지기를 터뜨렸다. 하지만 하위에게서 자신과 데이텟이 원하는 정보를 건져냈다. 배리 트래비스는 아직도 특종이라고 착같하는 뉴스거리를 추적 조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기삿거리에는 혹시 대통령이나 영부인, 혹은 로 버트 루시톤 메리트가 관련있는 건 아닐까? 스펜서는 하위 프리프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 다면 하위 성격에 자신이 알코 있는 사실을 신나게 떠벌리고는 못 견 去을 테니까. 물론 하위가 모르는 것을 스펜서 역시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어떡하든 그 부분을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서둘러야 할 일이었다. U기쁘시다니 나도 기쁘군요 가스톤 부인,,-. 아, 아니오 메리트 부인은 내 결정에 만족하실 거요 -좋습니다. 그럼, 내일 이렇게 합 시다. 6시 겔찰까지 자동차를 보내겠소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럼 그때 봅시다." 조지 알랜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는 수화기 를 노려보았다. 그때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남편 앞의 책상 위에 커피잔 하나 를 내려놓고서 나머지 한 잔을 들고 책상 맞은편에 있는 가죽 의자에 앉았다. "누구죠? 그의 집무실은 대사관 거리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애비뉴 근처에 자 리잡은 안락한 현대식 저택 2층에 꾸며놓았다. 조지는 커피 맛을 음미 하며 되물었다. "애들은 침대에 있소? -게, 침대에 있어요 하지만 불 끄기 전까지 10분 더 여유를 줬죠" 아만다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개체 누군데요? "바네사를 위해 고용한 개인 간호사요 가스톤 부인은 새 환자가 뜻 밖에 거물이란 사실에 무척 흥분하더군. 영부인을 간호하게 된다는 게 영 믿기지 않는 모양이야." "바네사는 계속 간호가 필요한 모양이죠? 알랜 부부는 대통령 부부와 신혼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예방 조치일 뿐이오 데이빗은 의료계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항상 그녀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난 그녀가 그냥 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생각이 맞소" "그녀가 지속적으로 간호받아야 할 상태라면 왜 병원에 입원시키 지 않는 거죠? "아만다, 취조는 이제 그만 해? 조지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의자를 빠져나오는 통에 의자가 벽에 '쾅' 부딪쳤다. 그러더니 술병 진열장으로 다가가 목이 가는 유리병에 담아 마개로 막은 브랜디를 꺼내 커피잔에 약간 부었다. 그녀는 조지를 달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당신을 취조하는 게 아녜_- "그래, 취조가 아니지. 요즘 우리가 하는 모든 대화는 항상 반대심 문으로 이뤄지고 있으니까? 아만다도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되받아쳤다. "그건 당신이 그만큼 자기 변명에 빠져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아무 리 순수하게 질문을 던져도 당신은 항상 비위가 상해 있잖아요" "맙소사. 아만다! 당신 질문은 결코 순수하지 않아. 던지는 질문마 다 항상 뭔가를 조사하고 의심하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구." 그녀는 급기야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피해망상증 환자예요! 데이빗이 당신 입을 틀어막게 한 게 뭔진 몰라도 이 세상 모든 걸, 심지어 나조차 두려워하고 있다구요" "대체 당신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나? "난 당신이 그 일을 발아들인 후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아_9_" "당신이 틀렸어, 아만다? "아빠? 조지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문가에 서 있는 어린 두 아들이 눈에 잡혔다. 잠옷 차림의 아이들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여려 보였다. 아이 들의 얼굴은 세수를 막 한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아이들을 보는 순간 조지의 분노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안녕, 애들아. 어서 이리 오렴." 아이들은 문가에서 머뭇거리다가 형이 먼저 방 안의 적대적인 분위 기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동생은 형의 옷자락을 잡고 그 뒤를 따랐 다. 조지는 의자에 다시 앉아 두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둘을 꼭 껴 안았다. 아이들에게서 싱그러운 비누와 치약, 샴푸 냄새가 풍겼다. 청결함 을 상징하는 냄새였다. 청결함이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기억이 가물 가물했다. 자신에게선 오랫동안 그 냄새를 맡지 못한 탓이었다. 큰애가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산수 시험에서 A를 받았어요" 작은 애도 질세라 얼른 장단을 맞췄다. '썬생님은 오늘 내게 책을 크게 읽어보라고 했어요 난 글을 모두 알거든요" "그거 굉장하구나! 너희 둘 모두에게 상을 줘야겠는걸? 이번 주말 에 계획이 있니? 아빠랑 영화 구경갈까? 아니면 비디오 게임할까? 뭔 가 아주 특별한 행사를 갖자꾸나." '껌마도 같이 가는 거지? 조지는 아만다를 흘낏 쳐다보았다. "물론 엄마도 함께 가는 거지, 엄마만 좋다면 말이다." "엄마, 함께 갈 거죠? 그녀는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엄마가 지금 원하는 건 너희 둘이 침대로 돌아가는 거란다." 또다시 몇 차례의 포옹과 지연 작전들이 펼쳐진 뒤에, 그녀는 아이 들을 집무실과 복도를 거쳐 침실로 몰아내었다. 그로부터 30여 분이 지나 조지가 부부침실에 들어서자 머리를 빗고 있는 아만다가 보였다. 그녀의 머리 모양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와 똑같이, 턱에서 찰랑거리는 우아한 단발머리였다. 그리고 그 머리 색은 눈빛과 마찬가지로 짙은 초콜릿 색을 띠었다. 이제 곧 잠을 잘 시간이라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팬티와 부 드러운 소매없는 티셔츠 차림이었다. 조지는 잠시 문가에 서서 그녀 를 바라보았다. 독립기념일 파티에서 그녀를 처음 소개받은 순간부터 그녀에게 흘딱 반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데이트를 시작 했교 그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동침을 요구하기까지는 여섯 달이 란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곧바로 승낙하면서, 그가 왜 그리 늑장을 부렸는지 궁금해 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이듬해 독립기념일에 결혼 식을 올렸다. 그녀는 그의 일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미치는 부담을 전혀 버겁 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일과 관심거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위해 사랑에 가득 찬 가정을 꾸미는 것 외에도 '조지타뜬 대학에서 예술사를 가르치고 있었고 학대받는 여성들의 보호소에서 일하는 자원 상담가이기도 했다. 그밖에도 그녀는 테니스 코트장에서는 그의 훌륭한 맞수가 돼줄 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를 자 유자재로 구사하며 각종 파티를 성대하게 이끄는 능력도 갖추었다. 심지어 언제나 맵시있게 옷을 입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하게 행동 하는 여자였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e,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는 머리를 빗어내리는 섬세한 그녀의 팔목과 우아한 움직임을 관 찰했다. 매일 밤, 백 번의 텟질. 버지니아 출신인 어머니가 딸에게 물 려준 무척 사랑스런 습관이었다. 텟질에 따라 위아래로 들썩거리는 가슴의 움직임에 그는 넋을 잃었다. 부드러운 무명 티셔츠 밑으로 요 철처럼 튀어나온 젖봉오리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뉘우치는 기색이 뚜렷한 말투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는 화를 내서 미안해." 그러자 아만다는 거울에 비친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公지, 난 사과 같은 건 원치 않아요" 이내 돌아앉아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난 내 남편을 원할 뿐이라구요"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당신은 이미 날 갖고 있잖아?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을 가진 사람은 데이텟이에요 그는 나와 아이들에게서 당신 을 빼앗아갔다구요"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그녀의 탐스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만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아니요,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난 당신을 다시는 되찾지 못할까 봐 걱정돼요"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과 아이들은 내 생명보다도 던 소중해. 난 당신과 애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그녀는 그의 눈을 그윽하게 들여다보았다. '公지, 당신은 우리를 잃어버리고 있어요 매일 밤 점점 더 멀리 가 고 있다구요 내가 아무리 발버등쳐도 더 이상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 는 것 같아요 당신은 비밀에 휩싸여 있어요 점점 더 낯선 사람이 돼 가고,,,,,,." 그녀는 목이 메이는지 말을 잇지 못했고,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게발 울지 마, 제발." 그는 그녀의 뺨과 떨고 있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 역시 방금 그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아차 렸다. 그를 움켜잡고 있는 그녀의 태도에 그 뜻이 역력했다. 그의 입맞 춤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입맞춤은 열렬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적 이었다. 그녀는 그 절망을 침대에까지 가져왔다. 마치 격렬한 성관계를 나 눠서라도 남편에 대한 데이빗 메리트의 영향력을 정복하려는 듯이 고 삐풀린 욕정으로 몸을 불살랐다. 조금도 주저없이 그의 열정을 받아 들였고, 그의 키스에 다리를 벌렸다. 이윽고 그가 그녀 안에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은 광적인 희열 속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그들은 성적인 포만감 속에서 땀에 젖은 몸을 서로 꼭 껴안 고서 영원한 사랑과 헌신을 속삭였다. 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조지의 헌신이 훨씬 더 절대적이며, 압도적 이란 사실을 절감했다, 배리는 낯선 감촉에 언뜻 눈을 떴다. 그리고 왼쪽 가슴 아래쪽에 와 닿은 소총의 총신을 보았다. 벌떡 일어나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총신을 따라 조 심스럽게 눈길을 움직였다. 소총 손잡이 위에는 강철 총신보다 더 차 갑고 단호한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버티고 있었다. "순순히 털어놓는 게 좋을 거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려고 했지만 너무나 겁에 질려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뭐라구요? "당신이 여기 내 집에 있는 이유 말이오" 그는 소총 끝으로 그녀의 젖무덤을 살짝 밀어올렸다. "어서? "난 어제 저녁 도착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현관 베란다에서 몇 시간 동안 당신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추워졌죠 그리고 잠이 쏟아졌어요 다행히 문이 열려 있 길래 난 당신이 손님이 하룻밤을 묵어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랬군. 유감스럽지만 난 반대하요" "그건 그렇고, 내 이름은 배리 트래비스예요"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비록 상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난 당신을 만나려고 워싱턴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괜한 여행을 한 셈이군." 그는 소총을 어깨에 걸치면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테니 당장 내 집에서 나가시오." 그러면서 그녀가 일어설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배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안간 그녀 는 팔을 돌려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거떻게 내게 총을 겨뒀죠? 당신 미쳤어요? 하마터면 날 죽일 수도 있었디ts~l) 느닷없는 옹격을 받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가씨, 내가 당신을 죽일 마음이었다면 당신은 진작에 죽은 목숨 이었소 그리고 설령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 해도 내가 그 피로 내 소 파를 더럽혔을 것 같소? 그러고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가 방을 집어들어 그녀에게 던졌다. '저서 나가시요 이 지저분한 읽을 거리들과 항께 사라지라구." 워싱턴을 떠나기 전, 배리는 본듀란트와 영부인 사이의 소문난 애 정 행각을 요란하게 묘사했던 신문들을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 신문 기사들은 모두 터무니없는 내용이었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의 가방을 허락도 없이 뒤졌다는 사실에 먼저 화가 치밀었다. "내 가방을 뒤졌군요? "무단 침입자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요" "본듀란트 씨, 그 신문은 내 읽을 거리가 아니라 조사 자료예요 난 기자란 말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더더욱 내 집에서 나가야 하오." 그러고서 그녀가 마치 그 명령에 순종할 거라고 생각한 듯이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배리는 그 틈을 타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태까지 험한 꼴도 적잖이 당하고 살았지만 총부리로 위협당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직선 탄도 거리만큼 떨어진 것도 아닌 바로 젖가슴을 희롱당하다니. 그가 진짜 자신을 쏘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문대로 과연 무시무시 한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은 겁주기 작전일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말 한 마디에 설설 기면서 순순히 이 집에서 떠나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백기를 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으며 옷 매무새를 매만지고 나서 목청 을 가다듬었다. "본듀란트 씨? 싸늘한 침묵이 감돌아도 그녀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용기를 내 어 열려 있는 침실문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난,,,,,, 어머? 그는 셔츠를 벗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두 눈을 씻고 보아도 군살은 제로였다. 그리고 그외 모든 부분은 만점이었다. 완벽한 100項 만점 말이다. 가슴에 V자형으로 난 털이 배꼽 아래까지 이어졌구 한쪽 옆 구리에는 흥칙스런 흥터 자국이 나 있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모든 신문들은 그에 대한 기사를 실을 때마다 사진을 구하기가 힘 들어 한결같이 망점이 굵은 스냅 사진을 실었다. 사진 속의 그는 비행 기 조종사용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참으로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화강암 같은 턱, 싸늘하게 사선을 긋고 있는 입술, 머리를 짧게 깎아 시원스레 드러난 이마, 그리고 선글라스 하지만 사진 속에 찍힌 평면의 모습은 실제로 그의 몸매를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본듀란트 씨, 난 당신을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이나 기다렸어요" "그건 댁 문제_9_" "당신은 적어도,1~ "난 당신에게 아무 것도 빛지지 않았소" 말문이 막힌 그녀는 아무 질문이나 던져 시간을 끌기로 했다. "지금 몇 시죠? ,,qh]."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한쪽 부츠와 양말을 벗어서 바닥에 떨 어뜨렸다. '재벽 4시란 얘긴가요? "트래비스 잃 당신은 내게 시간이나 물으려고 워싱턴 D.C.에서 여 기까지 날아온 거요? 그는 勺머지 양말과 부츠도 벗어 던졌다. "아니요 난 바네사 메리트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고 D.C.에서 여기까 지 온 거예요" 바네사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녀에게 다이아몬드처럼 예리한 눈길을 꽃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헛걸음을 친 거요" "우리가 얘기하려는 건 무척 중요한 사안이에요" 하지만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혁대를 풀고 진바지를 스스럼 없이 벗었다. 바지 속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리라고 예상했으나 배리는 그 어 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내면에선 격렬한 반응에 부딪치고 있 었지만 말이다. "본듀란트 씨, 그런 일로 내가 충격받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잘못 판 단한 거예요" "그렇소? 내 장담하건대, 당신은 충격받았소" 그는 부드럽게 그 말을 내뱉더니 그녀 옆을 지나쳐 욕실로 가는 듯 했다. 그러나 별안간 번개처럼 몸을 돌려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의 맨가슴에 갑작스레 접촉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 큰 충 격을 받아서인지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 다. 그의 시선이 마술처럼 그녀의 넋을 빼놓은 동안, 그의 손은 그녀의 스웨터 밑을 정열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소매는 그가 캐미-書소매 가 없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성용 속옷) 끈을 어깨에서 벗겨낼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거 친 손바닥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는 순간 그녀는 벽 쪽으로 비틀비 틀 물러섰으나 그는 유령처럼 따라붙었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그녀의 가슴을 덮치자, 그녀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면서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입술과 혀 를 온 몸으로 느끼려는 욕망이 일었다. 몸의 모든 세포가 마치 우렁찬 기상 나팔 소리에 놀라 잠에서 화들짝 깨어 일어난 듯했다. 내면에선 억제하거나, 심지어 통제할 수 없는 생명의 열정이 활화산처럼 폭발 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그처럼 강렬한 욕망에, 그처럼 압도적이고 원초적이며 무의식적인 짝짓기 본능에 순식간에 함몰되 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들은 사랑에 눈먼 사람들처럼 휘청휘청 침대로 향했다. 그녀가 서슴없이 스웨터를 벗는 와중에 캐미솔의 끈 하나가 밑으로 흘러내리 면서 한쫄 젖무덤이 출렁거리며 드러났다. 두 사람은 구겨진 침대보 위에 쓰러져 서로를 미친 듯이 애무하면서 규칙도, 제한도 없는 레슬 링 시합에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스커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순식 간에 팬티를 벗겼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를 어루만졌다. 깊숙이, 저 안으로------ 짜릿하면서도 뜨거운 그의 손길은 마치 한 줄기 번갯불 같았다. 그 녀는 온 몸을 지지는 쾌락에 신음을 토해내면서 그의 애무에 엉덩이 를 들어올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아랫배로 내려와 가볍게 입을 맞 추더니 그녀의 맨살을 간지럽히면서 젖가슴으로 다시 올라왔다. 그녀 는 그의 단단한 뺨에 손바닥을 대고 사포(性的 같은 감촉에 진한 쾌 감을 느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애무의 손길을 펼치면서 무척이나 자극적이고, 몽롱한 꿈 속으로 이끌었다. 덕분에 그녀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절 정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그녀는 당혹감도 느끼지 못할 만큼 황홀감 에 폭 젖어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몸을 꼭 붙들고서 그의 손가락 들을 안으로 깊숙이 밀어붙이고는 힘껏 옥지면서 허리를 돌렸다. 이윽고 열정의 파도가 물러가자 그녀는 난파선의 희생자처림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땀으로 목욕을 하구 녹초가 된 모습으로 눈을 꼭 감고 숨을 깊이 내쉬면서 들썩거렸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뚫어지 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 의 남성을 쥐어주었다. 그가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봐. 이제 와서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겠지? 그녀는 입술을 벌려 경악에 가득 찬 숨을 내뱉고 마른침을 삼켰다. '개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그는 그녀의 가랑이에 손바닥을 대고 천천히 벌렸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내려오자 그녀의 두려움에 찬 비명소리는 이내 순수한 동물적인 신음소리로 바뀌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적극 적으로 나섰다, 주저없이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여성의 심처를 자신 에게 기울여, 칵테일을 마시듯 그녀를 마셨다. 그 사이에 그녀는 단단히 발기한 남성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건드려 보다가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몸을 비틀어 그의 남성으로 격렬하게 덤벼들었다. 순간 그는 강렬한 쾌감에 몸을 떨며 원색적인 욕설을 터뜨렸다. 하지만 절대적이며 원초적인 흥분의 순간들을 겪으면서 다음 순간 밀어닥친 새로운 충격에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다. 그의 남성이 그녀의 심처로 들어와 ol성의 기운을 내뿜는 충격에는,,,,,,. 그 절정 의 체험은 온 몸에 서서히 번지는 따스하고 잔잔한 감각의 파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그녀 안에 무한한 힘과 열기를 일시에 폭발하는 유성과 같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그 엄청난 폭발은 그녀의 내면에 있 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빨아들여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 완벽 한 진공 상태를 만들어냈다. 그녀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침대 옆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의 살갗이 땀으로 번들거렸고 가슴팍의 털들이 착 달라붙 었지만, 얼굴만큼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게다가 심리 상태를 반영이 라도 하듯 두 주먹을 옆구리에 늘어뜨리고 쥐고 펴기를 반복했다. -지로써 내 마음을 돌려놓았다고 섣불리 판단하진 마시요 내가 샤 워를 끝내기 전까지 내 집에서 떠나는 게 좋을 거요" 그러고서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닫았다. 배리는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마치 꿈이 아닌가 싶었 다. 이 게임은 어린 시절 기억의 잔영이 아닐까? 집 안 분위기가 도무 지 견딜수 없을 때마다, 부모들이 자제력을 잃고 미친 듯이 싸을 때마 다 그녀는 침대 속으로 들어가 눈을 꼭 감곤 했다. 지금의 악몽에서 탈출하여 또 다른 세계, 즉 황홀함과 사랑과 평화가 넘치며 모든 것이 즐겁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또 다른 현실, 또 다른 세계 속에서 깨 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지만 어린 시절 그런 세계로의 탈출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 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떠보니 아직도 그레이 본듀란트의 침 대였다. 그리고 자신의 옷가지가 침대와 바닥에 흥물스럽게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어지럽기는 그녀 역시 똑같았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침실을 떠 날 때 욕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가방은 아까 놔둔 대로 소파 위에 놓여 있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그 안에 찢어진 캐미솔을 쑤셔넋 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나서려는 찰나 걸음을 멈췄다. 지금 만약 떠난다면 아무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꼴이 된다. 아니, 가슴에 깊이를 헤아 릴 수 없는 처절한 당혹감만을 안고 가겠지. 그녀는 순간적인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구차한 합리화나 정당화로 양심을 모독하 진 않았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그 우연에 발을 내디딘 것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능동적이며 열정적으로 그 일에 참여했으며, 이미 엎 질러진 물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운명을 돌이킬 순 없었다. 그 경험은 그녀에게 값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행동 결과를 책임지구 비참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최소 한 한 조각의 체면이라도 되찾는 것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과정 중 에 뭔가를 배을 수도 있으리라. 10여 분이 지나 그가 부엌에 들어섰다. 그녀는 조리대에 등을 기대 고 서서 그를 기다렸다. "본듀란트 씨, 공식적으로 말해 난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공식적으로 말해서 트래비스 양, 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소" 그는 찬장에서 머그잔을 꺼내 그녀가 끓이고 있던 커피 포트에서 커피를 따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말해줄 테니, 원한다면 수첩을 꺼내서 기록해도 좋소" 그러고는 그녀에게 돌아섰다. "그건 바로 남녀가 육체 관계를 맺는 썽첼라는 거요" 그녀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겉으론 입에 힘을 주면서 대꾸했다. "당신은 무섭고 잔인하게 보이면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겠죠 하 지만 그래봤자 아무 효과도 없을 거예요" "그럼 효과 있는 방법이 대체 뭐요? "내게 진상을 말해주는 거죠- "그건 절대로 안 돼? 그는 버럭 성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L1애당초 내가 워싱턴을 떠난 까닭 중 하나는, 바로 기자들에게서 멀 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요 당신들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위해 영 혼이라도 팔 족속들이지. 그리고 기사가 없으면 그럴 듯하게 기사를 꾸며내잖소? 그는 그녀에게 조롱어린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트래비스 양, 당신 역시 그들과 같은 부류지만 이번엔 아무 것도 팔지 않았소 다만 아낌없이 주었을 뿐이지." 그녀는 침실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대꾸했다. "그건, ,-, 사고였어 요" -허허, 그 무슨 당찮은 소리요? 내 물건은 자신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 잘 알고 있었소" 배리는 입 밖으로 뜻하지 않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리고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미 그를 기다 리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던 터였다. 본듀란트 씨, 제발 부탁이에요 난, 그나마 남아 있는 내 직업 의식 을 되찾고 싶을 뿐이에.- -허, 당신에게 그런 게 있을 줄은 물랐는걸? 그녀는 두 주먹을 옆구리에 붙이면서 앙칼지게 따졌다. 그럼 내가 당신을 유혹하려고 이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생각하 나요? 그는 짐짓 태연스런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특별히 그렇진 않았겠지. 하지만 아까 침대에서 그런 상황이 닥쳤 을 때 난 당신의 입에서 그 어떤 거절 의사도 듣지 못했소" 아까 침대에서 그가 들었을 소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그녀는 얼 굴을 붉혔다. "난 단지 메리트 부부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 온 것 뿐이에.9_" "제기랄, 대체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소? 난 당신에게 아 무 것도 말해주지 않겠소" "신문 기사가 모두 거짓이란 말조차 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官론 그 기사들은 새빨간 거짓말이오" '겅말 바네사 메리트와 관계를 맺지 않았나요? "빌어먹을,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p_ "그녀가 그렇게 불행해진 건 당신 탓이 아닌가요? "그녀가 불행하다면 그건 아마 그녀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일 거요" '겅말 그렇게 확신하나요? "확신하냐니? "정말 그애가 단순히 죽은 거라고 확신하냐구요? 아니면 로버트 루 시톤 메리트가 살해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料- 그레이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나지막이 욕지기를 터뜨렸다. 그 녀가 마침내 급소를 찔렀다. 그녀는 사랑을 나눌 때처럼 맹렬한 기세 로 대화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그녀를잠에서 깨우기 전부터 그녀가몇 주 전 바네사와 인터 뷰를 했던 그 여기자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 인터뷰에서 원하 던 것을 모두 얻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기억들을 다시 밖으로 끌어내려고 그녀나 그녀 비슷한 인간이 언젠가는 찾아오 리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수주 전부터, 곧이어 닥칠 기자들의 침입에 대해 적개심을 축적해 왔다. 그런 탓에 앞서 벌어진 일에 대해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잔뜩 곤두선 신경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여자와 잠자리를 갖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의 뜻에 적극적으로 따라줘 아무런 마찰도 빛지 않고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뭔가가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사실 그녀가 계획적으로 유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긴 스커트, 스웨터, 부츠는 성적 환상을 부추기기 위한 옷차림은 결코 아니었다. 잠을 불편하게 잔 탓인지 그녀의 눈밑은 벌겋게 부어 있었고, 부서진 마스카라 파편이 뺨 위에 달라붙었다. 게다가 립스틱은 이미 오래 전 에 지워져버렸구 머리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아찔하리 만치 매력적이었다. 촉촉히 젖은 꿈 속 같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관계를 약속하는 듯했고 실제로 그리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까 화끈한 잠자리로 그의 고집을 누그러뜨렸을 거 라고 생각했다면 엄청난 오산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녀가 집과 사생 활을 침범한 것을 더욱 더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경 멸을 스스로 자초한 꼴이었다. 그는 커피를 단숨에 죽 들이켜고 프라이팬과 냄비를 난로 위에 얹 어 놓았다. 식료품 저장실에서 칠리(열대 아메리카산 고추로, 매운 맛이 강함) 캔 하나를 따서 냄비에 붓구 따로 그릇에다 달걀을 깨서 넣었 다. 달걀을 휘저어 거품을 내서 한쪽으로 치워두고 칠리가 지글지글 끓는 동안, 잔에 커피를 다시 따라 흘짝거렸다. 그녀는 빈 머그잔을 치켜올렸다. "나도 마셔도 될까요? "맘대로 하시요 당신이 끓였잖소? 당신이 차를 몰면서 잠에 곯아 떨어지는 건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그녀가 작고 귀여운 손으로 커다란 머그잔을 잡고 아기를 어 르듯이 흔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길을 의식하고 그 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당신 뺨을 때려서 미안해요 난 지금까지 손찌검한 적이 없는 데 본듀란트 씨, 당신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 도통한 사람이더군요" "나도 그런 말은 자주 들었소" 그러고는 칠리를 휘저으면서 물었다. "날 어떻게 찾아낸 거요? "워싱턴에 있는 정보원들을 통해서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난 무척 현명하게 행동했으니까." "난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소 트래비스 양. 그런데 미흔 여성이 맞 소? 혹시 숨겨둔 애인이 있는데 나와 불륜 관계를 맺은 건 아닌가? 그 말에 그녀는 아까의 행동이나 모욕적인 말보다 훨씬 더 화가 치 솟았다. 분노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길로 그를 야멸차게 쏘아보 면서 대꾸했다. "아니오 난 불륜 관계 같은 건 맺지 않아요 그런 일이라면 나보단 당신이 훨씬 더 경험이 풍부할 텐데요? 그레이는 난로 쪽으로 돌아서서 냄비 옆에 있는 프라이펀 위에 버 터 한 스푼을 떨어뜨리고 난롯불을 켰다. 버터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면서 여기자를 집 밖으로 집어던지지 않고도 그녀가 제 발로 사라지게 할 방법이 무언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사실 열댓 가지가 넘는 방법으로 조용히 순식간에, 그리고 고통없이 사람을 죽 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그녀의 말에 그는 상념 속에서 벗어났다. "고맙소" "모두 몇 에이커나 되죠? "한 50에이커(떼이커는 약 4046.8평방미터)쯤 될 거요" "이 넓은 곳에 혼자 사나.Q?"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소" "당신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본듀란트'란 마을이 있다 는 걸 알고 있겠죠? 혹시,,,,,,." "아니요 이름이 같은 건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요" '기축들을 키우세요? 방목장 말들은 빼놓구요" "소 몇 마릴 키우고 있을 뿐이요" "그래서 냉장고에 고기가 가득 차 있던 거군요" 그레이는 몸을 돌려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난 그저 물 한잔과 얼음 몇 개를 빌렸을 뿐이에요" 그녀는 대꾸하면서 턱을 도전적으로 치켜올렸다, '지곳을 염탐하면서 또 뭘 발견했소? "난 염탐하지 않았어요" 그는 다시 몸을 돌려 프라이펀에 녹아내린 버터를 골고루 펴고서 그 위에 휘저어 놓았던 달걀을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 식빵 두 쪽을 토스터에 집어넣고 계란을 뒤집개로 적당히 펴서 접시 한가운데 올려 놓았다. 이후 거품이 보글거리는 칠리를 국자로 퍼서 계란 위에 쏟아 붓고 역시 매운맛이 나는 '타바스코 소스'를 그 위에 듬뿍 뿌렸다. 때 마침 식빵이 구워져 튀어올랐다. 그는 두 쪽의 식빵을 접시 위에 올려 놓고는 접시와 포크를 식탁 위에 차리고 다리를 벌려 그 앞에 앉았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맞은편에 앉았지만 그는 그녀를 무시한 채 음식을 입 안에 몇 차례 퍼넣었다. 먹기를 멈추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물었다. "배고프오? "약간.- "좀 먹-소? 그녀는 미텁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글쎄요" 그튼"理깨를 으쓱거렸다. "난로 위 냄비에 좀 남아 있을 거.Q-" 그녀는 식탁을 떠났다가 잠시 후 약간의 음식을 갖고 돌아왔다. 그 는 그녀가 음식을 조심스레 입에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물 zl리며 삼키더니 이내 활기차게 먹기 시작했다. L(이곳은 외딴 곳인데 외롭진 않나요? 그녀는 음식을 씹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전혀 ." '지겹지도 않구요? "절대 그렇지 않소." -은퇴 전에, 당신은 아주 모험적인 삶을 살았잖아요 워싱턴의 자극 적인 생활이 그립지 않아요? 그랬다면 진작에 그곳으로 돌아갔겠지," '지간을 어떻게 보내죠? 내 하고 싶은 대로 보낼 뿐이오."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는데요? -재정적인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요" LI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은 아까 우리 기자들이 무례한 족속이라고 규정했잖아요"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캐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목장 경영 이.p_" 그 간단한 대답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소떼를 키우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흐음, 그걸 어떻게 배웠죠? '저렸을 때부터 배웠지," '저디서요?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잘 모르잖아요"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a,트래비스 양." 그녀는 실망을 가누지 못해 길게 한숨 지었다. "당신은 비밀 군사작전에서 이미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고, 게다가 대통령의 보좌관이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소떼나 키우는 한가로운 생활에 절대로 흥미를 느낄 수 없어.9. 나로선 당신이 새로운 직업에 만족한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가 없군요" "난 당신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상관 없소" "소떼를 돌보느라 하루종일 밖에 나가서 말을 타고 돌아다니나요? 그는 일일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카우보이처럼 가축떼를 돌보기만 하냐구요? "그렇소 돌봐줘야 할 때 돌봐주고 있을 뿐이요" '저제도 가축을 돌보고 있었나요? 밖에 나가서 소떼와 같이 있었냐 구요? "아니, 어제는 잭슨 흘에 갔었소" '저머, 나도 그곳에서 왔는데. 어쩌면 우린 거리에서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겠네_9-" 그러고는 빈 접시를 옆으로 밀어냈다. "음식 맛이 괜찮군요 고마웠어요" 느닷없이 그가 유쾌하게 껄껄 웃었다. "쇠고기 요리였다면 아주 맛있었다고 했겠군." "내가 왜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죠? "당신은 내게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기 때문이지. 성유희가 별로 효 과가 없으니까 이젠 친근한 척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 모양인데, 사 실 모든 잡담이 내 마음을 돌리려는 수작이 아니고 뭐겠소? 솔직히 말 해, 트래비스 양, 난 당신의 첫번째 수작이 더 마음에 드요" "그건 수작이 아니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사고였다? 그럼 당신은 만나는 모든 낭자와 곧장 침대로 향하는 타입이오? '래 말은,-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녀는 식탁 쪽으로 눈길을 내려깔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날 그렇게 우습게 본다고 해도, 나로선 당신을 비난할 자격 이 없군.Q_" "아하, 이제 공범자에서 참회자로 돌변하는군." "정말 몹쓸 사람이군요? 그녀는 앙칼지게 소리치면서 벌떡 일어나 식탁을 내리쳤다. "난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지. 당신은 용감하거나, 아니면 어리석은 것뿐이요 그 둘 중 어느 쪽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어떤 식으로 날 대하든 난 당신에게, 내 자신이나 메리트 부부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을 거요 그리고 당신이 그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아무 관심도 없소" '개가 아까 아기 메리트의 죽음에 대해 한 말을 듣지 못했나요? "들었소 하지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지. 앞으로도 그럴 거_- 그는 그녀의 접시를 자신의 접시 위에 올려놓고 싱크대 안에 담가 놓고서 물을 틀었다. '재 내 말을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거죠? '재냐구? 당신들 기자들이 곧잘 던지는 미끼잖소? 어떤 멍청이들이 텁석 물기를 기대하면서 던지는 미끼 말이요" "당신은 내가 심각한 말을 단순히 농담삼아 던졌다고 생각하나요? 그러자 그는 수돗물을 잠그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우리가 비록 서로를 안 지 얼마 안 되지만, 나로선 당신이 정상적인 사람의 머리를 빙빙 돌게 만들려고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 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소 그러니 여기서 나와 장난을 치 는 대신 방송국 PD와 잠자리에 드는 게 어떻겠소? "흥, 그렇게 할 순 없죠 내가 아는 그 어떤 PD도 바네사 메리트의 연인이 아니니까요" 그는 속에서 욱 하고 치미는 분노에 스스로 겁이 났다. 그 분노를 밖으로 쏟아내기 전에 재빨리 뒷문으로 향했다. 등뒤로 그녀가 뒤쫓 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번개처럼 뒤따라와 그 앞을 가로막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잡았다. 그녀는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은 내가 홍미진진한 기삿거리를 내 몸과 맞바꾸려고 여기 왔 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지금 내 자신과 직업을 위태롭게 행동한 게 너무나 원통해요 당신은 날 잘 몰라요 그러니 내가 저 현관문 밖으로 슬그머니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고, 당 신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무척 힘들다고 얘기할 때는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_- 그녀의 말투에 담긴 간절한 그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 리고 서서히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서 손을 거두고 스커트 양옆으로 내려뜨렸다. "내가 처참한 기분 속에서도 굳이 여기에 남아 있는 건, 당신에게 그 사건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려는 거예요 그 일은 단지 나와 내 경력에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이 죠 그러니 일단 내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세요 그런 다음에도 나더러 떠나라고 한다면 두말 없이 떠나겠어요 한 입으로 절대 두말 하지는 않겠어요 5분이면 돼요 어때우 받아들일 수 있겠죠? 그는, 그녀가 상당히 훌륭한 연기를 펼쳤지만 뭔가 어색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의 타고난 경계심은 군대에서의 정찰 훈련 덕분에 극도로 예리했다. 그 훈련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겉으로 드러난 내용만으로는 판단해선 안 된다고 배웠다. 그리고 삶의 체험 은 그에게 기자들이란 쓰레기 청소부들과 같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 다.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희생자의 뼈를 발라내고 그 속 을 외부에 노출시켜 놓고 또 다른 희생자에게 달려든다. 냉정한 견해를 지닌 그였지만, 배리 트래비스가 바네사 아들의 돌 연사에 대해 알고 있거나 추측하고 있을 내용에 바착 구미가 당겼다. 이건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밑져야 본전 아니겠냐는 심정으로 5분 제의를 수락하고 말았다. "밖에서 얘기합시다." 그는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그녀는 가장 윗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 았다. 선뜻 파고드는 아침 냉기에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고 두 팔로 정 강이를 감쌌지만, 그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수첩을 꺼내놓고, 그가 그 얘기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보 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막상 말을 꺼내기가 거북살스러웠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군요" 아스라이 새벽 안개로 뒤덮인 계곡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산자락이 아직은 똑똑히 보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번져가는 해돋이가 안개를 솜사탕처럼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중이었다. 대기는 싸늘하지만 상쾌 했다. '첫간은 집이나 차고보다 훨씬 오래돼 보이더군요" 관찰력이 뛰어나군! "그 헛간은 내가 이 땅을 사기 전부터 있던 건물이요 원래 이곳에 지었던 집에 딸린 부속물이라더군. 현재 난 그곳을 고쳐서 쓰고 있을 뿐0]~" 방목장 울타리 안에서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뛰어다녔다. "말들의 이름은 뭐죠? '저놈들은 이름이 없소" 그는 그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들에게 이름도 붙여주지 않았어요? 참 딱하군요 그런데 왜죠? "트래비스 양, 그것도 인터뷰에 포함되는 내용이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되받았다. "하,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동물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다니,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보네요 하물며 내 애완견인 크롱카이트란 이름은 녀석의 개성을 담고 있다구요" 크롱카이트를 입에 담더니 표정이 부드럽고 화사하게 변했다. "그 녀석은 덩치가 크지만, 산만하고 응석을 잘 부리는 갓난아기예 요 당신도 애완견 한 마리 키워보세요 그 녀석은 당신의 좋은 친구가 돼줄 거예요" "난 고독을 좋아하- "흐음, 맞아요 이곳에선 고독을 실컷 즐길 수 있겠군요" "지금 시간이 재깍재깍 지나고 있소" 드디어 그녀는 그에게 일격을 가했다. 참으로 통렬한 일격이었다. "난 바네사 메리트가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해요" 그레이는 이를 악물면서 입 밖으로 말이 새어나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배리는 몇 분 동안 숨도 돌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는 시간을 재 는 걸 잊어버렸지만 적어도5분이 지난 건 확실했다. 그녀는 영부인이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동기를 늘어놓고는, 조사 과정과 도중에 부딪친 방해 공작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현재 영부인은 요양 중이라더군요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는 거짓말로 대꾸했다.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소" "그녀가 아들이 죽은 직후 공식적인 활동에서 손을 뗀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재클린 케네디도 아들이 죽었을 때 그랬죠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마음을 추스릴 수 있잖아요? 또 지금 정도면 안정 을 되찾았다고 보는데-. 게다가 백악관측 주장대로 그녀가 쉬고 있을 뿐이라면 어째서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는 거죠? 왜 미시시퍼에 있는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거냐구요? "그녀가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아오? "나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백악관 발표에 따르면, 그녀는 알랜 박사의 보호를 받고 있 다고 하는데, 그 주치의는 여전히 워싱턴에 있더군요 도대체 그들이 감추려는 비밀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들에겐 비밀이 란 없소" "그렇다면 당신은 앤 첸의 이상한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거죠? 그 녀는 오랫동안 신뢰가 깊은 정보원으로서 내 일에 기꺼이 협조해 왔 다구요" "당신이 그녀를 화나게 한 건 아니오? "난 그녀를 화나게 할 만큼 잘 알지 못해요" "당신은 나와 전혀 모르는 사인데도 내 약을 바짝바짝 올렸잖소? 배리는 입술을 뽀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어요 그녀를 찾아갔을 때 난 첫눈에 그걸 알았죠"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좋수 그녀가 겁에 질려 있었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가 쥐를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잖소? 그리고 설령 바네사의 행동이 약간 비정상적이라 하더라도, 그녀 역시 당신의 탐문을 받지 않고 혼자 슬 픔을 삭일 사생활 정도는 있는 거 아니오? 배리 트래비스라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여기자가 지적한 애매 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은 그가 오래 전부터 매달려온 문제들이기도 했다. 그는 창자가 꼬이는 고통을 느껴 벌떡 일어나 베란다 가장자리 로 걸어갔다. "맙소사, 그녀가 그런 일을 겪어야 하다니?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두 눈을 꼭 감고 속에서 터져나오려는 울분을 애써 억눌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근처에 배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 었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녀는 조용하게 물었다.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어요 당신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군요 그렇죠? 그리고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요" 5분이라 했지만, 그녀와의 대화를 수락한 것이 그렇듯 원통할 수가 없었다. 그날 아침 두 번씩이나 허리를 굽혀 그녀의 커다란 가죽 가방 을 들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지간 다 췄소" 그러고서 그녀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배리는 넘어지 지 않으려고 근처에 있던 베란다의 기등을 붙잡았다. '져태껏 내 얘길 다 들었으면서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나요? "트래비스 양, 당신은 목적지도 없는 길에 들어섰소 당신이 제시한 모든 모순점들은, 추악하면서도 충격적인 기삿거리를 만들려는 당신 의 은밀한 야심과 비뚤어진 상상력이 진실의 파편들을 왜곡시켜 재구 성한 것들에 지나지않소 그러니 그것들이 당신에게 제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당신은 정부 요 직에 있는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릴 거요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당신 을 해치려 들기 전에 조사를 중단하라고 충고해주고 싶소 그 아기와 I아기가 죽은 원인에 대해선 모두 잊어버리시오= "난 잊을 수가 없어요 그애의 죽음과 관련하여 발표한 내용은 분명 사실이 아니라구.Q-"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단, 뭘 하든 나에 대해선 잊어주시요" 그러고서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잠가버렸다. 하위는 국장의 부름을 받자 별안간 창자가 뒤틀려 뒤가 급해졌다. 화장실 볼일을 마치고 황급하게 나와 곧바로 2층 카펫이 깔린 사무실 로 직행했다. 시건방진 비서가 쌀쌀맞은 말투로 '그들이' 진작부터 그 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사무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사무실에는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젠킨스 외에도 낯선 두 사내가 더 있었다. 한 사내는 창가 앞에 서 있었구 다른 사내는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젠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꺼서 오게, 하위." 하위는 기가 질린 듯 오금도 펴지 못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예정에 없는 지금과 같은 모임은 언제나 불길한 소식을 안겨주어 긴 장이 되었다. 이를테면 직급의 급격한 변동이나 예산안의 엄청난 축 소 혹은 직원들을 싸잡아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자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젠킨스 국장님." 하위는 겉으로 침착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자신을 마치 무슨 용의 자를 대하듯이 훑어보는 두 명의 엄숙한 사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부러 국장에게만 눈길을 고정시켰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끼분들은 -에서 나왔네." 하위는 똥끝이 바싹 조여왔다. 염병할 IRs(내국세청-지난 3년 동 안 소득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수사팀을 보내다니! '지분들이 자네에게 배리 트래비스에 대해 몇 가지 질문할 게 있다 군.- 순간 하위는 안도감에 그만 웃음이 터져나을 뻔했다. 어느새 겨드 는 랑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허리춤을 적셨다. "그녀에 대해 윌 물어보신다는 거죠? 느닷없이 젠킨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자네가 그녀에게 일을 맡겨 출장을 보냈나? "어, - 국장의 질문은 상당히 교묘해서 어정정하게 대답하다간 큰코 다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자칫하다간 배리가 벼락을 맞을 뿐 만 아니라 자신도 똑같은 궁지에 몰릴지도 모른다. 반면에 아니라고 대꾸하떤, 일급 비밀에 관련된 특종이라는 그녀의 직감이 옳다고 우 기면서 그 지지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리라. 하위는 창가를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F밈 요원 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사내는 의자에 앉아 있는 동료와 마찬가지로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내게 어떤 사건을 조사한다면서, 며칠 동안 출장 을 다녀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내가 지시한 일이 아닙니다." 창가에 서 있는 요원이 물었다. "무슨 사건입니까? "나도 모릅니다. 그녀가 독자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사건이죠" 두 번째 요원이 따졌다. "그녀가 당신과도 상의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우린 특별히 그 문제만 가지고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 는 그 사건이 특종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저떤 낌새 같은 것도 눈치채지 못했단 얘깁니까? 하위는 며칠 전 내기 당구를 치고 술 한 잔을 마셨던 새 친구도 그 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음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믿기 힘든 얘기군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난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육감을 뒷받침할 만한 확증을 찾아내기까지는 그 내용 을 밝힐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녀의 직속 상관 맞습니까? "그렇습니 다." "그런데도 당신은 부하 직원이 무슨 사건을 조사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위는 다리가 후들후들거렸지만 곧바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당신들은 나의 인사 경영 철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난 평소 부하 직원들이 주도적으로 일을 해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재량권을 주죠 특히 지금처럼 사건이 특종일 경우엔 마음껏 풀어줍니다. 다만 관용 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게서 엄청난 기삿거리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젠킨스는 하위의 말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한 듯했다. 젠 킨스가 곧바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트래비스 양은 이번 주 내내 출장 기간이라고 하더군? "그렇습니다. 그녀는 그저께 출장을 떠나면서 이번 주 안으로는 돌 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연방수사국 요원이 물었다. '저디로 간다고 했죠? "그건 내게 얘기 안했습니다." 그 말에 요원들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위는 그 눈빛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이에 젠킨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출장 경비는 방송국에서 나갔나? "그녀가 그 사건을 뉴스 프로로 제작했을 때에 한해 출장비를 지출 하기로 했습니다. 전 아무 성과도 없는 일에 회사 돈을 쏟아붓게 하지 는 않을 겁니다." "그녀의 정치관은 어떻습니까? 하위는 창가의 요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겅치관이라노? "그녀의 정치적 성향을 얘기하는 거요 간단히 말해 좌팝니까, 우팝 니까? 하위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꾸했다. "글쎄.a,내 생각 같아선 그녀는 자유주의자 같습니다. 그녀는 항상 여자들, 업주에게 혹사당하는 노동자들, 외국인들 같은 인생 패배자들 의 편을 들었죠 그리고 그녀는 메리트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하위는 그 부분에서 싱글거리며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미 소 짓지 않았다. '개통령은 최근에 그녀에게 꽃다발까지 보냈습니다. 그녀는 그 꽃 다발을 받고 뛸 듯이 좋아했죠" 하지만 연방수사국 요원들은 그 말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 다. 그러다가 의자에 앉은 요원이 물었다. "트래비스 양이 어떤 단체에 가입했는지 아십니까? 무슨 운동 단체 나 분파, 혹은 사교 집단 같은 곳 말입니다." "그럼요 그녀는 감리교 신잡니다." 하위가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 요원이 눈을 희번덕거렸고 다른 요원이 되물었다. "혹시 광신도는 아닙니까? "아니오 그녀는 멍청이 같은 말이나 욕설을 거리낌 없이 씁니다." "그녀는 특정 당이나 급진주의 단체에 호의적이지 않나요? '小런 건 모르겠교 다만 몇몇 항의 집회에 참가했던 건 알고 있습 니다." "뭘 반대하는 집회였죠? "출판 금지, 다우림 파괴, 참치 대신 돌고래 먹기 등등이죠" "그 집회에서 과격 행동을 하지 않았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생활은 어떻습니까? "사생활에 대해선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남자 친구는 없습니까? '겅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는 없습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없나요? "그녀는 혼자 삽니다.'' "가까운 친구는? 하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에게서 그런 얘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말하자 면 일과 결혼한 여자니까요" "그녀의 부모는 어떻습니까? "돌아가신 걸로 압니다." "그들의 이름을 아십니까? 어디에서 살았죠? "죄송하지만, 부모님은 그녀가 우리 회사에서 입사하기 전에 돌아 가셨습니다." 하위는 이제껏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제서야 그들이 상습적인 범죄자를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배리 트 래비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양심에 찔려 괴로웠다. 배 리가 골칫거리 부하 직원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연방수사국 요원들에 게 그녀에 대해 거리낌없이 얘기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무슨 사건에 연루됐나요? 뭘 잘못한 겁니까? "그냥 형식적인 조사일 뿐입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요원이 일어나면서 말을 이었다. "그녀가 영부인의 건강을 알아본다면서 전화를 걸어와 영부인의 상태와 거처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위는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지 얼굴을 활짝 폈다. -저런, 그녀는 그저 친구로서 전화를 건 것뿐입니다. 배리는 영 부인과 인터뷰하면서 무척 가까운 사이가 췄죠" 그러자 다른 요원이 말을 받았다. "백악관에선 누구든지 대통령이나 대통령 가족에 대해 소란스럽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일단 의심을 하는 경향이 있죠" 두 요원은 젠킨스와 하위에게 시간을 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 하고 방에서 나갔다. 하지만 하위는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몹시 못마땅하여 찡그 린 젠킨스의 표정이 마치 족쇄처럼 하위의 발목을 옥죄였다. L(혹시 알고 있으면서 저들에게 말하지 않은 내용이라도 있나? (L그런 건 없습니다. 국장님." n대체 그녀의 특종이란 게 뭔7料' -자까 저들에게 말한 대루 전 맹세코 그 특종이 뭔지 모릅니다. 다 만 배리는 그 사건이 터지면 워터게이트 사건도 애들 장난이 될 거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 정치적인 사건이군? U그녀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큰 사건이라고 했죠" 젠킨스는 권위에 찬 집게손가락을 하위에게 겨뒀다. 난 내 방송국에서 급진적인 미치광이가 날뛰는 꼴은 도저히 못 봐 주네." -국장님, 배리는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단지 유능한 기자일 뿐입니 다. 국장님도 그녀에게 보낸 메모에 그리 쓰셨잖습니까? -난 그녀에게 어떤 메모도 보낸 적이 없네, 프리프 지금 도대체 무 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는가? "조지? 바네사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주치의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U잠에서 깬 모습을 보니 반갑군.9- 기분은 어때요? '별로 좋지 않아요" 그녀는 속이 울렁거렸고 눈앞의 영상들이 흔들려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조지에게서 진정제 주사를 맞은 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 난 것 같았다. "내가 어찌된 거죠? 데이빗은 어디 있죠? '개통령과 난 당신이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 습니다. 그래서 우린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죠" 그가 그녀의 팔을 다독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치 손을 눈으로 보 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을 만진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아무 감각도 느 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더구나 팔목에 정맥 주사바늘을 꽃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들어가는 데도 말이다. 잠시 후 침대 다른 편에서 어떤 인물의 움직임이 시선을끌었다. 정 신을 차리고 보니 웬 간호사가 웃고 있었다. "전 제인 가스톤이라고 합니다." 대략 55세쯤 돼 보이는 그 간호사는 넓적한 얼굴과 넉넉한 표정, 그 리고 흰머리가 반쯤 섞인 짧은 머리 모양의 여인이었다. 조지가 간호사를 소개했다. "가스톤 부인은 앞으로 하루종일 당신 옆에 있을 겁니다. 부인은 당 신을 아주 잘 간호해 왔소 그리고 당신 역시 지금까지는 아무런 무리 없는 착실한 환자였소" 바네사는 당혹스러웠다. 방 안은 낮익은 정경이었지만 어디인지 도 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재가 왜 정맥 주-를 맞고 있죠? 주치의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 동안 당신이 음식을 자꾸 토해내 탈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거요" 그 사이에 간호사가 그녀의 혈압을 체크했다. 바네사는 갑자기 공 포에 사로잡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가 무슨 병에 걸렸나요? 그들이 내게 윌 숨기는 건 아닐까? 혹시 사고를 당해 팔다리 중 하 나가 잘려나갔나? 아니면 총에 맞은 걸까? 하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무시무시한 가능성들은 곧바로 또 다른 무 서운 현실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래, 데이빗이 날 이리로 데려왔어. "데이빗은 어디 있죠? 난 그와 얘기하고 싶어요" "대통령은 오늘 서해안에 갔습니다." 조지는 쾌활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론 그는 오늘 밤 돌아올 거요 그러니 어쩌면 당신은 오 늘밤 늦게나 내일 아침 그와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재게 왜 간호사가 필요한 거죠? 내가 곧 죽게 되나요? 그녀가 일어나 앉으려 하자 조지가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게리트 부인, 물론 그런 건 아니니까 마음 편히 갖고 누워 계시요" 이어서 제인 가스톤에게 시선을 두었다. "영부인을 좀더 진정시귀는 게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알랜 박시텀1~ "부탁이a,가스톤 부인." "알겠습니다. 박사님." 간호사는 고개를 까딱거리고 방에서 나갔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바네사의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희미하고 힘이 없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그분더러 내게 와달라고 해주세요" "바네사, 유감스럽지만 그렇겐 할 수 없소 먼저 데이빗의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그때 간호사가 주사기를 갖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바네사의 엉덩이 에 주사를 놓았다. 그 사이에 조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마음 편히 갖고 우리의 간호를 받는다면 훨씬 빨리 회복될 거요" "내가 어디가 잘못된 거죠? 그리고 아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나요? 제인 가스톤이 알랜 박사를 보면서 쯧쯧거렸다. "딱하기도 하셔라. 아직도 임신 중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에요" 조지는 섬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기? 바네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내 아기를 데려갔나요? "부인이 쉴 수 있도록 방에서 나갑시다." '깐 돼요 제발- 숨을 헐떡이며 바네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날 떠나지 말아요 당신들은 날 미워하죠? 난 그걸 알아요 대체 내게 말하지 않은 게 뭐예요? 내 아기가 죽지 않았나요? 알랜 박사는 간호사에게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내고 방에서 나갔다. 가스톤 부인도 재빨리 그 뒤를 따라 방에서 나온 뒤 문을 닫았다. 바네사는 뭔가를 기억해내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상당히 중요하다 는 생각이 맴돌았지만, 정작 어찌된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 튼 생각해야 했교 기억해야 했다. 반드시 기억해내야 할 뭔가가 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뭐지? 그러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절규와도 같은 신음소리가 소용돌이쳐 올라왔다. 아기 침대에서 들어올린 생기없는 자그마한 몸뚱아리가 떠 올랐다. 동시에 그날 밤 백악관 복도에 울려퍼졌던 자신의 비명소리 가 생각났다. '재 아기, 내 아기,,-. 요 하느님. 제가 잘못했어요" 눈물이 두 뺨을 흠뻑 적셨다. 애간장을 저미는 비통은 나약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활기를 띠게 해주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이곳에 무력 하게 누워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팔목에서 정맥주사 바늘 을 고정시키기 위해 붙인 반창고를 거칠게 떼어냈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속이 뒤틀리는 헛구역질을 참으면서 혈관에서 정맥 주사 바늘을 빼냈다.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마치 公定대장간에서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 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며 침대로 다시 눕히려 는 듯했다. 있는 힘을 모두 다 짜내어 간신히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방 안은 옆으로 기울었고, 창밖의 나무들도 모두 45도 각도로 취어 있었다. 계속 속이 메슥거렸지만 다행히 위장이 텅 빈 듯했다. 두 다리는 두뇌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마침내 5분이란 시간과 피눈물 어린 노력을 들인 끝에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이후 계속되는 헛구역질과 현기증을 참아내며 다리를 침대 밑으로 대롱대롱 내려뜨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충분한 용기와 힘을 모았다가 바닥에 발을 내디定다. 허나 다리의 힘이 몸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이라 힘없이 침대 옆으로 푹 고꾸라졌다. 바닥에 누워 숨을 격렬하게 몰아쉬면서 흐느꼈다. 너 무나 힘에 부쳐서 일어설 수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이런 비참 한 꼴로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안 돼.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리 쉽게 해줄 순 없어! 달팽이나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손, 발, 어깨, 발꿈 치를 원생동물의 위족(세포 표면에서 형성되는 원형질 돌기로 운동 -부 착,생식 ,포식 등을 하는 기관)처럼 사용하여 조금씩 조금치 앞으로 나아갔다. 간신히 문 앞에 이르렀을 즈음엔, 온 몸이 땀으로 목욕한 듯했구 머리카락과 잠옷은 피부에 착 달라붙었다. 잠시 자궁 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누워 휴식을 취했다. 차츰 땀이 식으면서 몸이 오슬오 슬 떨렸다.. 고개를 들고 문 손잡이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달만큼이나 높다랗게 붙어 있는 듯했다. 문을 두드리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없어 소용없었 다. 생각다 못해 냉기가 감도는 나무로 만든 문에 손바닥을 붙이고 서 서히 기어올랐다. 팔과 가슴 근육들에 최대한 힘을 주어 마침내 한쪽 정강이를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다시 기나긴 고통의 몸부림 끝에 나 머지 한쪽 정강이도 바닥에 붙이고 무릎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고 가까스로 돌리면서 몸으로 문 을 밀었다. 순간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리자 그녀는 복도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어깨가 바닥에 세차게 부딪치자 날카로운 고통이 팔까지 이어졌다. '저머나, 메리트 부인! 우 맙소시 알랜 박사님? 고함소리. 달음박질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겨드랑이를 껴고 들어올렸다- 두 비밀 경호요원들은 축 늘어진 그녀를 들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조지 알랜이 요원들을 팔꿈치로 밀어젖히면서 들어섰다. "고맙수 신사 양반들." 한 요원이 물었다. "알랜 박시럼, 구급차를 부를까요? "구급찬 필요없소" 그는 청진기로 바네사의 고동소리를 점검했다. "가스톤 부인, 정맥주사기를 새 것으로 갖다주겠소? 그때 다른 요원이 대통령이나 마틴 씨에게 연락해야 되냐고 물었 다. 주치의는 메리트 부인이 안정되는 대로 직접 전화를 걸겠다고 대 꾸했다. 두 요원은 그 말을 듣고 방에서 나갔다. 조지가 간호사에게 돌아섰다 '껸부인의 팔과 다리를 묶어야겠소" '거무 심한 건 아닐까요? "가스톤 부인, 우린 그녀가 다시 침대에서 빠져나오다가 바닥에 쓰 러지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요" "알랜 박시럼, 영부인이 일어나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_Z렇게 하시 도록 도와드리고 싶군-9. 사실 지금 상태에선 침대에'1딕어나는 게 건강에 더 좋을 듯합니다. 제가 볼 때는 우리가 영부인에게 진정제를 너무 많이 투여한 것 같아9_" "당신 충교 고맙소" 조지는 짐짓 엄격한 목소리로 이내 덧붙였다. "하지만 환자에게 무엇이 가장 좋을지는 주치의인 내가 판단하요 그러니 제발 내 지시를 순순히 따라주시오. 내 뜻은 바로 미합중국 대 통령의 뜻이기도 하단 말이s,알아듣겠소? "알겠습니다. 알랜 박사럼." 바네사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비록 그 말의 일부는 의미와 연관짓기 힘들긴 해도 어째서 내 몸을 내 맘 대로 일으킬 수 없단 말인가? 데이텟은 어디 있지? 아버지는 어디 계신 걸까? 그리고 난 어디에 있지? 아마 지옥에 있겠지. 아니, 틀림없이 지옥에 있어. "어디? "와이오밍 주라는군." "제기랄? 스펜서는 대통령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면서 대통령파 함께 나란히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그 직후 원색적인 언어의 태풍이 회몰아쳤다. 데이텟은 빌록시 조선소의 노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배운 속어들을 입에 올렸다. 메리트의 집안은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첫 번째 선거전 때 이미 세상에 밝혀졌다. 그리고 대통령에 출마했을 즈음에는, 부유한 특권층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유권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는 공립학교에서 요리사로 일했지만, 집안은 여느 맞벌이 부부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마음 편한 휴식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평생 변변한 집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덕분에 데이빗 메리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하류층 트레일러 주차장에 세워진 이동식 임대 주택에 서 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선거 운동 참모부는 데이텟의 비천한 출신을 감추기보 다는 그가 '미국인의 꿈'의 전형이란 사실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한 마디로, 21세기의 에이브라함 링컨이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엄청난 장애물들을 극복해냈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의 지도와 보호도 막대한 도움이 되었지만, 암브루스터가 처음부터 관심 을 보인 데이빗 메리트의 지성과 결단력으로 마침내 그 지위를 거머 쥐게 되었다. 반면에 젊은 데이빗의 가난에 따른 치욕스런 사생활은 철저하게 베 일에 가려졌다. 그의 부모 모두가 알올중독자였다는 사실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그는 부모가 알콜중독으로 세상을 떠나 기 훨씬 이전부터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덕분에 아버지 장례식을 치 르던 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에 취했다. 당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랜 옛날부터 경멸과 멸시의 대상인 부모에게서 마침내 해방되 었음을 자축하기 위해 마신 술이었다. 스펜서는 대통령을 힐끔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분노는 오래 가지 않았다. 대통령은 산소를 과다 하게 소비하는 격한 숨소리를 제외하곤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스펜 서가 지금 이 시간을 택해 그 불길한 소식을 전한 까닭은, 그 소식이 매우 중요한 사안일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비밀을 지켜야 했기 때문 이다. 비밀 경호요원들도 3,4미터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어 대화 내 용을 엿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호요원들은 대통령이 스펜서와 얘기를 나눌 때면 으레 거리를 두고 쫓아왔다. 따라서 스펜서와 대통 령 사이의 일은 모두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이윽고 대통령이 성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리 트래비스가 와이오밍 주에 갔다는 걸 어떻게 알아냈나? "그녀는 이틀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네. 그 동안 기르는 애완견을 개 보관소에 맡겨놓았더군." 대통령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녀가 워싱턴을 떠났냐고 묻지 않았네. 자네가 어떻게 그녀가 와 이오밍 주에 갔다는 걸 알아냈냐고 물었단 말일세." 스펜서는 대통령의 질책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모든 사람들, 특히 대통령의 경우 분노의 모습을 보이는 건 일종의 약 점이라고 여기는 성격이었다. "자네가 캘리포니아에 가 있는 동안, 난 그녀와 함께 일하는 녀석과 얘기를 나눴다네." 스펜서는 방송국 주변 술집에서 하위 프리프와 만난 얘기를 들려주 었다. "그 녀석은 정말 얼간이더군. 녀석이 트래비스의 행선지를 전혀 몰 랐다는 결론을 내렸다네. 어제 아침 방송국에서 연방수사국 요원들에 게 녀석이 한 얘기가 내가 들은 얘기와 똑같았거든. 요원들 보고로는 녀석이 사건이 커지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더군. 그러니 원가 알 고 있었다면 분명 털어놓았을걸세." "그녀의 집은 수색해 보았나? "공식적으론 해보지 않았네. 수색 영장이나 그럴 듯한 꼬투리를 전 혀 확보하지 못했거든." '기공식적으로는 어땠나? "물론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시켜 훑어보게 했지," 스펜서는 야비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런데 그 전문가는 그녀가 단서를 남기지 않으려고 왜나 애쓴 흔 적이 보였다더군. 그는 메모지나 스크랩 자료 영수증, 그밖에 그녀의 행선지와 목적에 관련된 그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네, 고작 찾아 낸 건 그녀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여성의 정신 이상과 유아 돌연사 증 후군'에 관한 책자들뿐이었다네." 데이빗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녀는 아직도 그 문제를 조사하고 있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우린 내셕널 공항 주차장에서 그녀의 차를 찾아내 지난 며칠 동안 그곳 탑승자 명단을 조사해 보았지. 그런데 아 무리 눈을 껏고 찾아보아도 그녀의 이름이 없더군. 게다가 신용카드 도 사용하지 않았네," 그 말을 듣고 대통령이 달리기를 멈추자 스펜서 역시 다리를 펴면 서 그 옆에 다가섰,다. 뒤따라오던 경호요원들도 일정 거리를 두고서 멈췄다. 대통령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새 끔찍한 편집증 환자가 됐군." "맞는 말이네. 우린 그녀의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자 여행사 직 원들을 일일이 탐문 수사하다가 마침내 그녀에게 비행기표를 팔았다 는 직원을 찾아냈지. 트래비스는 가명을 쓰고서, 현찰로 잭슨 홀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샀던 걸세. 비행기 승무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즉 각 알아보더군." "그녀는 그레이를 만나러 갔군." "그래, 그레이를 만나러 간 걸세." 스펜서는 대통령만큼이나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쩍어도 우리의 최종적인 결론일세." 데이빗은 허공을 노려보며 깊이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기자들을 혐오해, 그 친구가 그녀와 얘기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운에 맏기겠다는 뜻인가? 데이빗은 코끝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면서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우리가 늦었다면 어쩌겠나? 그녀가 그레이와 얘기를 나 누는 데 성공했구 그레이가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면- "그렇다면 우린 잠재적인 문제를 안게 되는 셈이지." "LH년이 선거인데 지금 '잠재적인' 문제에 얽매일 순 없네." 스펜서는 데이텟의 눈을 뜰어지게 쳐다보았다. "데이빗, 나도 동감일세. 그 여기자가 침묵을 지키도록 확실하게 해 놔야 한다고 생각하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조깅을 시작했다. "스펜서, 자네가 알아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록 하게." 스펜서는 그와 보조를 맞추면서 대답했다. "즉각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 '지금 나한테 허풍떠는 거 아냐? FBI라니? "하위가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배리는 잭슨 흘 모텔에서 데일리와 장거리 전화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방 안 조명이 약해선지, 아니면 걱정 거리가 늘어서인지 얼굴이 핼쓱했다. "글쎄, WVUE방송국에 두 연방수사국 요원이 찾아와 하위에게 나 에 대해 물어봤대요? 그녀는 데일리에게 하위에게서 들은 얘기를 기억나는 대로 전했다. "그 사람들은 말 그대로, 하위의 간을 콩알만하게 했대요 하위는 그 당시 생가슴 앓던 심정을 두 번 다시 물을 필_9도 없이 상세하게 털어놓더군요" "배리,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배리가 처참했던 어린 시절에 몸이 익힌 두 번째 자신의 방어 수법 은 바로 냉소적인 유머 감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유머 감각은 위험상황에선 전혀 쓸모 없었다. 속으론 데일리가 걱점할 필요없다고 얘기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부추겼다. "그 사건이 월 뜻한다고 생각하죠? "당신이 어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걸 뜻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거죠긴 '거쩌면 달톤 닐리일 수 있지 당신의 끈질긴 전화 통화가 백악관의 보도 담당관의 심기를 언짢게 할 수도 있다구. 그래서 달톤 닐리는 영 부인이 잘'지내고 있다는 발표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도 물라. 결국 연방수사국 요원들을 시켜 당신을 뒤좇게 한 건 당신이 이 일에서 손을 메게 하려는 수작이지," "그렇지 않으면요?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않으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까지 의심해 봐야겠지. 그 부 분에 대해 하위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요뭔들은 하위와 젠킨스에게 그 조사는 형식적인 과정일 뿐이 라고 말했대요 그래서 하위는 바네사에 대한 나의 관심이 최근 인터 뷰에서 맺어진 우정의 표현이라고 했다더군요" "그들이 그 말을 믿는 것 같았대? "겉보기에는요 어쩌면 믿는 척했는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지." '게일리, 우린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어요" 이후 간간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데일리의 씨근거리는 숨소리 를 제외하곤, 두 사람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에 젖어들다가 마침내 그 가 운을 뗐다. "아참, 잊어버릴 뻔했군. 본듀란트는 어떻게 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듀란트가 어전냐고? 침대에서, 아니면 침대 밖에서? 침대에선 그는 엄청나게 근사한 사내였다. 하지만 밖에 서 는, , ,-. '계상대로였어요 적대심이 강하고 무뚝뚝했죠" "두 팔 벌리고 당신을 환영해 주지는 않던가? 어떤 의미에선 그런 것도 같았는데.-, "글쎄우 꼭 그렬다고 할 순 없어요" "그가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아무 암시도 주지 않았나? "전혀요 하지만 고의로 그런 건 아닌 것 같더군요 그리고 그와 바 네사 사이에 강한 유대감이 남아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최소한 본 듀란트 쪽에서 그랬죠" "당신은 그들이 불륜 관계라고 생각하는 거O次' "두 사람이 몸을 섞었든, 섞지 않았든 그는 여전히 감정적으로 그녀 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더군요 무심결에 바네사가 혹독한 상황을 려 고 있을 거라고 탄식하던걸요? 그가 아기의 죽음에 대한 그녀의 슬픔 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어요" "배리, 어떤 것도추측은하지 마. 내 말못 알아듣겠어? 아직도 모 르겠냐고? 어떡해서든 사실을 알아오란 말야? "글쎄우 당신 얘기가 그와 다시 부딪쳐보란 뜻이라면 난 사양하겠 어요 그는 내게 그 사건을 잊어버리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자신 에 대해 잊어달라고 했다구요 그래서 난 이제부터 그렇게 하려고 해 요 사건은 계속 조사하겠지만 본듀란트를 조사 과정에서 완전히 빼 버리겠어_- "당신, 게서 대체 무슨 일을 려은 거야긴 "아무 일도 겪지 않았어요" 맙소사! 본듀란트 집에서 몇 분간의 성의 유희를 위해 기자로서의 자세와 객관성을 송두리째 제물로 바쳤다는 걸 털어놓느니 차라리 죽 어버리겠어.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받았다. "알았어. 너무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 같군.n "이번 사건이 걱정돼서 그래요" "그래서 앞으로도 이 사건에 매달릴 거야길 "아무렴요 나 같은 시시한 기자의 고용주가 F래의 방문을 받을 정 도잖아요? 내 앞에 문이 닫히면 닫힐수록, 난 누군가 뭔가를 숨기려고 발버등친다는 확신이 든다구요" "언제 돌아올 거야린 "내일요 워싱턴 행 비행기를 타고 갈게요 그 동안 바네사에 대한 새로운 소식은 없었나요? "똑같은 얘기들뿐이야." "내일 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당신, 잘 지내죠? "음, 괜찮아." 그러고는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배리? 흐이. 당신이 뭔가 끔찍한 일을 당한다면-. 정말 조심해 야 해, 알았지? 그녀는 염려에 가득 찬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가 몹시 그리워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와의 감정적인 접촉이 끊어질까 봐 수화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데일리는 친구라기보다는 가족이었고, 친부모보다도 더 부모 같은 사람이었다. 억눌렀던 피로가 밀려와 온 몸이 노곤해지자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세면대 위의 거울은 침실 화장대의 거울보다 더 냉정했다. 자 신이 봐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화장은 36시간 전 에 한 게 끝이었다. 눈 주위에 말라붙은 화장품은 평소보다 훨씬 깊이 파고들었다. 지금 서른세 살이다. 앞으로 10년 뒤인 마혼세 살엔 어떤 모습일까? 쉰세 살 때는? 비교할 기준이 없었다. 어머니가 한창 때 돌 아가셔서 자신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배리는 샤워 커튼을 밀어젖히고 물을 틀었다. 물줄기가 젖가슴을 내리치는 순간, 냅다 비명을 질렀다. 눈을 내리깔고 어디가 어떻게 되 었기에 톡 쏘는 아픔을 느끼는지 살펴보았다. 가슴 부위가 불그스름 하게 생채기가 났다. 수염에 긁힌 자국들이었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샤워기 밑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 세찬 물줄기에 그레이 본듀란 트에 대한 기억들이 말끔히 껏겨내려갔으면,-. 벌거숭이 그의 몸은 미끈하면서도 강인하고 유연했다. 싱싱한 그의 몸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숱한 경험과 풍상을 겪은 몸이었다. 곳곳의 흥터 자국들이 그의 몸에 강렬한 매력을 안겨주었다. 눈 주위 의 주름살과 희끗희끗한 옆머리 때문에 얼굴이 더욱 돋보이듯이. 샴푸로 머리를 감으면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피로와 압박 감에 짓눌려 과거의 회상 속으로 위험 수위까지 깊이 빠져들었다, 감 정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처음엔 데일리. 그 다음엔 부모님. 그 리고 이젠 레이저 광선처럼 꿰뚫어보는 푸른 눈동자와 잔인한 입술을 가진 훤칠한 사내가 생각났다. -아버지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래요 본듀란트 씨. 아버지는 날 사랑하지 않았죠 그리고 내 어머니도 사랑하지' 않았답니다. 만일 그랬다면 왜 어머니를 속였겠는가? 왜 결혼생활 내내 외도를 했겠는가? 왜 그렇듯 한평생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어머니의 비난 을 부인하면서 귀청이 떨어지도록 독설과 고함을 치며 어머니와 나에 게 불행과 공포로 가득 찬 나날을 안겨주었는가? 사랑했다면 어째서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했는가? 라스베가스 한 호텔에서 매춘부가 코코 넛 향기가 나는 러브 젤을 그의 몸에 발라주고 있을 때 그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었다. 살아 생전 고상한 최후를 맞이하겠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은 그답게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했던가? 남편이 결혼 서약을 어긴 사실에 대해 언제 한 번이라도 엄중하게 꾸짖은 적 이 있던가? 또한 빈들거리며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딸이 태어나 어엿 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거쳐야 할 각종 통과 의례들에 아무런 신 경도 쓰지 않은 남편에게 속시원하게 욕설이라도 퍼부은 적이라도? 가족에 대해 애정이라곤 전혀 없고 무관심한 남편을 두고 역사상 가 장 찾아보기 힘든 족속이라며 야단치거나 비난한 적은? 아니면 아버 지가 죽은 후 그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무지막지한 개망나니였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던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우아하게 장례식을 치른 직후 남편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지 집으로 곧장 가 수면제를 한 병이나 먹었다. 1주일 동안 장례식 두 번을 치렀다. -그래우 본듀란트 씨. 당신은 내 약점을 확실하게 찔렀군요 샤워를 끝내고 수건을 집어들었다. 엄청난 불행을 려고 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녀들의 행 동 양식에 관한 책과 토크쇼에 관심을 가졌다. 덕분에 그 문제에 관련 된 심리학이라면 훤히 꿰뚫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딸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한 가지는 색정광이 되어 만나는 모든 남자들에게서 어떠한 형태로든 사랑과 관심을 얻어내거나, 또 한 가 지는 남자들을 거부하고 동성인 여성에게서 사랑을 구한다. 하지만 배리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남자들의 성적인 관심을 갈구하며, 그를 통해 자존심을 세우는 매 춘부는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반대의 유형도 아니었다. 남자들은 단지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간혹 육 체적인 매력과 세련미가 있구 어느 정도 이지적인 남자를 발견하면 즐기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과 장수 그리고 관계의 한계와 범위 는 그녀가 정한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세워놓았다. 상황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그녀였다. 그날 아침 본듀란트와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그때처럼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뜨 거운 욕정 속으로 생각없이 무모하게 빠져드는 현상은 정신적인 면에 서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어머니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배리는 어머니처럼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을 배반당하는 실수는 결 코 저지르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앞으로도 욕망과 스스로 인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몸을 섞을 작 정이었다. 하지만 몸은 줄지언정 머리는, 특히 마음은 절대 주지 않으 리라고 맹세했다. 그레이는 루군가 쿠션으로 얼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아 언뜻 잠에서 깨어났다. 본능적으로 베개 밑에 놓아둔 권총을 집어들려 했지만 다음 순간, 누군가 가슴을 타고 앉아 두 팔을 무릎으로 짓누르고 있음을 깨달았 다. 그는 용쓰면서 발버등을 쳤다. 순간 몸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쿠션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침입자 녀석이 낄낄거렸다. 그레이가 그 웃음소리의 작자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순간, 상대는 쿠션을 옆으로 내던졌다. 스펜서 마틴의 얼굴이 흥물스럽게 나타나 싱글거렸다. "여보게,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있다보니 그새 약골이 됐나? 그레이는 그를 밀치고 침대에서 굴러 내려왔다. "미친 놈! 네 녀석을 죽였어야 하는 건데? "옛날 일은 모두 까맣게 잊어버렸나? 오히려 내가 널 죽였어야 했 -" "대체 여긴 어쩐 일인가? 몰래 내 집에 숨어들어와 게임을 하자는 거야? 빌어먹을, 지금 몇 시지? 오줌이 마렵군." "다시 만나서 반갑다, 그레이." 스펜서는 욕실문까지 그레이를 따라왔다. "그새 몸이 좀 여윈 것 같군 그래." 그레이는 욕실문 뒤에 걸린 청바지에 손을 뻗었다. 바지를 입으면 서 옛 동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자넨 몸이 좀 불었군. 백악관 요리사의 솜씨가 괜찮은 모양이지? 스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를 계속 뻬물고는 대꾸했다. "자네가 떠난 뒤 내가 가장 아쉬웠던 점이 뭔지 아나? "내 매력? "아니, 바로 자네가 내 곁에 없다는 점이었지. 그후로 모든 사람들 이 내게 아부를 떨기 시작하더군. 난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보좌관 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가 아닌가? 그래서 내가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 도 사람들은 내 지시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따른다네. 하지만 그레이, 자넨 달랐어. 자넨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취급했어, 쓰레기처럼." L(그래서 자네가 여길 찾아왔늘小?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내가 그리 워서?" 그레이는 스펜서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집에 걸린 시계라곤 부엌 난로 위에 있는 것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동 트기 직전의 시각이었다. 배리 트래비스와 즐기던 이후로 벌써 -시간이나 지났다. 배리가 다 녀간 지 딱 하룻만에 스펜서가 불쑥 찾아왔다는 점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레이, 자넨 언제나처럼 별로 웃지 않는군. 하지만 이렇게 자네와 함께 있으니 무척 반갑구먼." 그레이는 스펜서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 내가 언제는 안 그런 적이 있던가? 난 자네가 날 가장 필도 로 할 때 곁에 있어뒀지." 그러면서 스펜서를 몇 초 동안 겨눠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거피 마시겠나? "좋지. 그리고 먹을 것 좀 주게나." 그레이는 배리에게 해줬던 것과 똑같이 아침 식사를 차려주었다.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식사를 끝낸 후 스펜서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 이런가? "윌 말인가? '지 조용함 말야." "아니. 언제나 이보다 더 조용하지. 이곳엔 얘기할 사람도 없거든." 그레이가 커피를 흘짝거렸다. "고독한 사나이, 그의 이름은 그레이! 강인하고 조용하며 꿋꿋하고, 미소 짓지 않는 영웅. 그는 대중을 피하교 고독한 삶을 추구한다네. 젠장, 마치 서사시의 한 구절을 읽는 것 같구먼. 혹시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지금으로부터 1띠년 후, 초등학교 학생들이 자네에 대한 민요 를 배우게 될지." 그레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레이가 인질 구출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수많은 출판사와 영화 제작업자들이 그의 실제 모험담을 홍행작으로 만들려고 덤벼들 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선수금을 제시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 았다. 이미 이곳을 사들였교 남은 한평생 편안히 지낼 돈을 저축해 둔 탓이었다. 당시 추잡한 인간들 속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 람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레이는 식탁에서 접시들을 치우고 커피 주전자를 가져와 각자의 잔에 다시 커피를 채웠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스펜서에게 와이오밍 주까지 내려온 이유를 또 물었다. "이유는 단순해, 그냥 자넬 보려고 왔다네. 사실은 데이텟의 지시로 시애틀에 가야 하는데, 이참에 여길 들러서 자넬 보고 가는 게 좋겠다 고 생각했지," 물론 데이빗은 스펜서에게 지시를 내릴 위치다. 하지만 스펜서는 단순하게 움직이는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행동에는 항상 복합 적인 동기가 도사리고 있었으며, 그가 일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스펜서가 정찰대에 복무할 때, 대대는 물론 전체 연대에서 타의 추 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군인이었다. 모든 면에서 즉, 무기, 첩부 생존 에서 항상 일등이었다. 두려움을 몰랐다. 그리고 기계 같았다. 스펜서 의 두개골 안에는 두뇌 대신 컴퓨터가 들어 있다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었다. 또한 가슴에 심장 대신 엔진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레이는 식탁 맞은편에 앉은 그 사내에게 영혼이 없음을 절대적으 로 확신했다. "스펜서,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군.- 스펜서 마틴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끼런 젠장! 그래, 거짓말을 몹시 기쁘다고 말하진 않겠어. 로워. 되받았다. 했네. 그리고 자네가 그걸 알아챘으니 그레이, 자넨 예나 지금이나 무척 날카 감각이 전혀 녹슬지 않았단 말일세.- 그러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자네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네.- 그레이는 내심 놀랐지만 마음의 평정을 굳게 지켰다. '게이텟은 자네가 워싱턴으로 돌아와주길 바라고 있어. 또다시 스펜서가 강조했다. "천만에, 그가 그럴 리 없네,- 스펜서는 두 손을 들어올려 그레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래 말 끝까지 들어보게.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내야. 젠장, 이 말하지 알아도 자네 역시 잘 알고 있을걸세. 그는 완고하고 내가굳 성격이라서 자신와 결정을 철회하거나 잘못을 단호한 깨어나도 못하지.- 사과하는 짓은 죽었다 "그래서 그가 자넬 보내 대신 그 일을 하라고 시켰단 말인가? "구차하게 자네에게 빌진 않겠어. 다만 데이빗을 대신해서 자네 - 덩이가 워싱턴으로 돌아서기를 요청하네,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말 일세." "내 엉덩이는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네.- 스펜서는 창밖의 장대한 경치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레이, 자넨 그 위대한 큰곰이 아닐세." "난 산이 좋다네." '勺건 나도 마찬가지야. 산이란 기어오르구 스키를 타교 요들송을 부르기에 딱 맞는 곳이지. 이곳엔 휴가 때 오도록 하고 우선은 나와 함께 워싱턴으로 돌아가세나. 자넨 재능을 썩히고 있어. 대통령은 자 네가 필요해. 나도 자네가 필요하지, 그리고 조국이 자넬 필요로 한단 말일세." '거참 감동절인 연설이귄 누가 써췄나? 닐리? "진담일세." "조국이 날 필요로 한다고? 그레이는 날카롭게 코웃음을 쳤다. '허튼 소릴랑 그만둬! 조국은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관심도 없어. 조국은 내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원치 않아. 그리고 나 역시 조국 에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네. 진작에 그리 될 일이었어." "좋아, 애국적인 의무는 접어두기로 하지. 하지만 데이빗은 어떻게 하지?" "웃기는군! 그는 내가 필요없어. 요즘 그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 르고 치솟고 있지. 내년에 야당에서 어느 불쌍한 멍텅구리를 내세워 맞서겠지만, 내년 선거는 쓰잘데없는 공허한 행사가 될 게 뻔하네. 데 이빗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될 게 확실하기 때문이지. 그렇게 잘 나가 는 그에게 왜 내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가 날 필요로 한다는 말은 자 기 엉덩이에 종기가 날 필요가 있다는 말과 똑같아? "꼭 그렇지는 않지," 스펜서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면서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 느새 해가 떠올라 숨막힐 듯한 절경을 밝혀주는 가운데 산봉우리의 만년설들이 황금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스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네사의 문제가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처럼 돼버렸네." "무슨 문젠데? 스펜서가 그레이에게로 돌아섰다. "아기가 죽은 일 말일세. 그녀는 그 일 때문에 아직도 심한 흥분 상 태에 빠져 있지." '저느 어머닌들 안 그렇겠나?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꿴서가 심각하게 되받았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네. 지나친 슬픔은 다른 문제들까지 악 화시키고 있지. 그녀는 이제 혼자 놔둘 수 없는 상태란 말일세," 그리고 바네사가 조지 알랜과 상근 간호사의 간호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데이빗은 그녀가 미친 짓을 할까 봐 걱정하고 있다네. "자해 행위 같은 것 말인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문제지. 어쨌든 데이띳은 자네가 돌아온 다면 그녀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네." "그는 내 치유력을 너무 과신하는군 게다가 데이빗도 아내를 어찌 할 수 없는데, 대체 내가 뭘 한단 말인가? 그 말에 스펜서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재롭게 떠도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관한 뜬소문들을 가라앉혀주게. 바네사는 최근에 공식적인 일정을 너무나 오랫동안 중단하고 있다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잖나? 번써 뜬소문이 돌기 시작했단 말일세. 보기좋은 결혼생활은 데이빗의 재당선에 큰 도움이 되지. 반면에 파경으로 치닫는 결혼생환은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게 마련이라네. 자 네만 돌아온다면 그런 뜬소문들이 하루 아침에 잠잠해질걸세, 그리고 이 점만은 명심해두게. 데이빗이 아량이 넓은 인물이지만, 아내의 연 인이었던 남자에게 두 번 다시 도움을 구하진 알을 거네." 그레이는 턱이 으스러져라 이를 갈면서 탁자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펜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다 보니 이번엔 여기자까지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네. 그 골칫거리는 바로 배리 트래비스란 여자지, 그녀는 지금까 지 지나치게 사적인 부분들을 캐묻고 다녀 우리에게 아주 불편한 존 재라네. 자신도 신뢰도가 별로 좋지 않으면서 말일세." 스펜서는 항상 갖고 다니는 휴대용 컴퓨터 위에 손을 올려놓고 배 리 트래비스의 경력 사항을 띄웠다. "하지만 바네사에게 인터뷰 기회를 얻은 이후로 배리 트래비스란 여자는 마치 영부인의 가장 절친하고 믿을 만한 친구인 양 행세하고 다닌다네, 사실 그녀는 인생 실패작에 지나지 않지만 때때로 부정확 한 대포가 최악의 위협이 될 수도 있지," "그녀는 이미 위협이 됐다네. 이곳에 왔었거든." "이곳에? 언제? "어제." 스펜서는 의자로 돌아와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질짓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그녀가 그냥 심심풀이로 워싱턴 주변이나 들쑤시고 다니는 줄 알았지, 그런데 예까지 찾아오다니! 그녀가 자넬 찾아왔다젼 그건 장난이 아닌데? "아, 물론 그녀는 장난이 아니지. 그녀는 나와 바네사에 대한 신문 기사들을 오려서 가방에 하나 가득 넣어 왔더군. 사전 준비를 다 끝내 고 이젠 동지들을 구하려고 장사를 시작한 셈이라네. 난 그녀에게, 메 리트 부부에 대해선 할말이 전혀 없으며 그들에 관한 얘기 역시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해주었지." "그녀가 대통령 부부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가? 그레이가 음울하게 낄낄거렸다. '져보게, 이건 웃기지도 않는 얘기지만 그녀는, 바네사가 아기를 죽 이고 유아 돌연사라고 우긴 것이라고 믿더군." "설마, 농담이겠지? "자네도 알다시피 난 농담과는 담쌓고 지내는 사람이잖나." 스펜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우린 그녀가 좌익 성향을 지닌 여잔 줄 알았는데,...,. 아 니, 바네사가 그런 짓을 했다고 그 여자가 정말로 믿고 있단 말인가?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군?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지," "하지만 트래비스가 그런 정보를 외부에 누설할 경우, 우리에게 얼 마나 엄청난 해악을 끼칠지는 내가 자네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걸세. 데이빗은 물론, 내년 선거 뿐만 아니라 바네사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어. 바네사는 지금도 아주 상태가 안 좋네. 조지 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계속 투약량을 늘이고 있지. 그런데 설상가 상으로 바네사가 포도주에 맛을 들이는 통에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네. 그 와중에 트래비스의 터무니없는 추측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바네사는 완전히 파멸하고 말걸세." 그레이는 순간, 응통성 없이 편협된 길로 빠져드는 스펜서의 의중 을 훤히 꿰뚫었다. 데이빗의 대통령 직을 보호하고 유지하며, 더불어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기 위해 악착같음이랄까. "그 트래비스란 계집은 지금 어디 있나, 그레이? 그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지싱턴으로 돌아가는 중이겠지, 내가 꺼지라고 했거든." 스펜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싱턴으로 전화를 걸어야겠네. 데이빗이 이 소식을 당장 듣고 싶 어할 테니까." "전화는 침실 탁자 위에 있네." 스펜서는 부엌을 떠나면서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고맙네, 그리고 아침 식사, 참 멋졌네." 그레이는 뉴스와 기상 예보를 들으려고 라디오를 켜놓고는 평소대 로 순서에 따라 부엌을 치우기 시작했다. 우선 상하기 쉬운 음식을 냉 장고에 다시 넣고 그밖의 식료품을 저장실에 넣어두었다. 커다란 주방 용구를 넣어두는 찬장을 열고서 손잡이가 달린 칼 모 양의 주걱을 넣어두면서 권총을 슬쩍 챙겼다. 그러고 나서 수도 꼭지를 틀었다. 잠시 후 싱크대엔 거품으로 뒤덮 인 온수로 가득 찼다. 음식을 담았던 접시들을 그 안에 넣고 씻으면서 도 시선을 토스터에 두었다. 이윽고 크롬을 입힌 토스터 표면에 등뒤 의 움직임이 포착되는 순간, 그는 혁대에 꽃아둔 권총을 뽑고는 번개 처럼 돌아서서 총을 公法다. 권총 손잡이에서 비누 거품이 부겨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여행이 꼭 그리 지루하고 뒤숭숭한지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게다가 내셔널 공항은 터키의 저잣거리처럽 혼돈의 극 치를 이루었다. 덕분에 공항 주차장에서 차를 찾아 방송국에 도착했 을 무렵에 배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편집실 안으로 살그머 니 들어가 책상에 우편물이나 메모가 있는지 살펴보고, 제발 마주치 는 사람도 없고 얘기할 상대도 없이 떠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전자 우편에는 아무 내용도 없었지만, 전화 응답기엔 네 통이 녹음 되어 있었다 두 통은 아는 사람들에게서 걸려온 것이었교 세 번째는 그녀의 블라우스에 묻은 얼룩을 뺄 수 없다는 세탁업자의 전화였으며, 마지막은 왜 자신에게 전화를 주지 않느냐는 괴팍한 여인 샤를린의 메세지였다. 배리는 샤를린의 특종 속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보이 스카우트 반의 테곤리스트 침투? 아니면 에스키모들을 상대로 활동하는 마피 아? 콘 플레이-옥수수를 얇게 편 식품) 안의 청산가리? "딱한 일이야." 배리는 전화 응답 내용을 지우면서 중얼거렸다. "너무 외로워서 얘기할 상대를 찾고 있나 봐." "누가? "어머나, 하위? 그녀는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면서 냅다 소리쳤다. "살금살금 다가와 날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요? "양심에 걸리는 게 없다면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12떡없을 텐데? "또 시작이에요? 난 지금 기분이 비참하단 말예요" 하위가 날카롭게 다그쳤다. "자네가 뭐가 어떻다구? 난 어떤지 아나? 연방수사국 요원들이 들 이닥쳤을 때 자네의 그 잘난 엉덩이를 감싼 사람은 바로 나라구, 그리 고 자네의 그 앙큼한 거짓말 덕분에 젠킨스 앞에서 얼간이 취급을 받 은 것도 바로 나란 말야, 메모? 캇, 메모라니? "하위,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해요 내가 절실하지 않았다면 결코 거 짓말도 하지 않았을 거예_9-"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지만 그가 가로막았다. "배리, 대체 무슨 일을 조사하는 중이지? 어서 말해봐." "좀더 알아내기 전까지는 밝힐 수 없어요" '지번에 출장갔을 때 왜 촬영기자와 함께 가지 않닸나? 사실 그녀는 특종 기삿거리를 추적한다면서 촬영기사와 함께 가겠 다고 요청하지 않은 점을 돌대가리 하위가 언제쯤 깨닫게 될지 궁금 했었다. 영상 자료가 없는 TV기획 프로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 인가? "아직 촬영기사와 함께 나설 단계가 아니에요 하지만 누군가 자신 의 의견을 기록에 남길 준비가 되었을 땐 당신에게 가장 먼저 그사실 을 보고 하겠어요" 별안간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난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은퇴할 생각이야. 얼마 안 되는 내 연금마 저 날려버릴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생각을 달리 하는 게 좋을 거야. 자넨 위험률이 너무 많은 선수지만, 난 자네에게 내 돈을 모두 건 셈 01~lirl= "그 점에 대해선 영원토록 감사할 거예요 하지만 로키 산맥 분수령 과 두 시간대(경선을 따라 나눠진 같은 표준시를 쓰는 지대)를 가로질러 이제 막 도착했어요 내 애완견을 찾아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 잠에 곯 아떨어져야 할 처지라구요" 그녀는 그의 몸을 밀치면서 그 곁을 지나쳤다. "좋아, 좋다구 아예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 그래? 단, 나까지 끌고 들어가지는 말라구! 내가 자넬 위해 싸워준 건 지난번이 마지막이야." 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그가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그리고 지금 모습이 너무 끔찍하군." 배리는 크롱카이트를 보관소에 하룻밤을 더 맡겨둘까도 생각해봤 지만 친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쓸데없이 녀석을 오 랫동안 가둬두고 싶지 않았다. 보관소가 문닫기 직전에 간신히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 직원이나 크롱카이트 모두 그녀를 보고 반겼다. 개 보관소의 젊은 여직원은 그 녀에게 크롱카이트를 내주면서 생글거렸다. '녀석이 점잖으면서도 응석을 아주 잘 부리더군요" '게, 그래요 하지만 이 녀석은 품위 있는 개랍니다." 배리가 무릎을 꿇고 크롱카이트의 털을 쓰다듬자, 녀석은 기다란 혀로 그녀의 얼굴을 극성스럽게 할았다. 녀석의 넘치는 기쁨은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좀처럼 줄 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찝 안에 들어가는 대로 아주 맛있는 걸 줄게." 녀석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찔롱카이투 이제 그만 진정해," 누군가 그녀의 집 앞 주차지에 차를 대놓아 그녀는 반 블록쯤 떨어 진 곳에 차를 주차시켜 놓았다. "크롱카이트, 제발? 크롱카이트는 40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로 가죽끈으로 된 개줄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녀석은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는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더 미칠 듯이 날뛰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배리는 자칫하다간 녀석에게 질질 끌려갈 것 같아 녀석의 목에서 개줄을 풀어주었다. 크롱카이트는 개줄을 풀어주자 마자 천분의 I초 가 지나기도 전에 공중으로 몸을 날려 길 위를 내닫기 시작했다. 발톱 으로 보도 위를 딸깍딸깍 두들기면서 번개처럼 집으로 치달았다. 그녀는 녀석에게 소리쳤다. "멍멍이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 그러고는 가방과 짐꾸러미를 들려고 뒷좌석으로 몸을 숙였다. 그런데 순간 마치 거인의 손이 후려치듯 엄청난 폭발의 충격으로 그녀는 땅바닥에 나쉽굴었다. 거대한 화염덩이가 밤하늘로 치솟으면서 인근 주택가를 섬뜩한 지 옥의 불길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저머머, 세상에세상에세상이" 그녀는 땅을 짚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반 블록 떨어진 자신의 집에서 펼쳐진 지옥경을 보며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바라보 았다. 그 위로는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달빛을 가렸다. 너무나 놀라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흥분이 뻗쳐 을 랐다.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일어서자 마자 인도로 내달리기 시 작했다. 아니, 달려가려고 애를 썼다. 쓰러질 듯 말 듯한 몸부림에 지 나지않았지만. "크롱카이트? 힘껏 소리를 내지른다 했지만 꺼이꺼이 우는 소리에 가까웠다. "크롱카이트! 얘야, 이리온? 집의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보도를 휘청휘청 걸어가면서도 폭발 현 장의 열기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아가씨, 미쳤소? 그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등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남자는 그녀와 몸싸움을 벌이면서 외쳤다. "누가 좀 날 도와주시오! 이 아가씨가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오? 잠시 후 여러 사람의 손길이 그녀를 뒤로 끌어냈다. 그녀는 발버등 을 쳐봤지만 쓸데없는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거리로 끌고와 위험 지역에서 벗어난 이웃집 마당에 데려다 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전하고 싶었지만 입에선 흐느낌만이 흘러나왔다. "크롱카이트! 오. 크롱카이트? "크롱카이트가 이 여자 갠가 봐요" "그렇다면 그 갠 죽었다고 봐야지. 집 안에 있었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저게 누구 집이죠? 배리는 주변의 목소리들을 희미하게 의식할 뿐이었다. 이웃사람들 이 집에서 쏟아져 나왔고 보도와 거리는 어느새 얼빠진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저 멀리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배리를 도와준 이웃사람들은 그녀가 화재 현장으로 덤벼들지 않을 거라고 믿었는지, 그녀를 놔주고 그녀의 집 앞으로 몰려가 화재를 구 경했다. 배리는 풀밭 사이의 울타리 관목 쪽으로 뒷걸음쳐서 보금자 리가 불길 속에 녹아드는 모습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젠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방관자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면서 사고 경위를 짜맞추고 있었다. -저기 소방차들이 오는군. 이 인파를 헤치고 들어을 수 있을까? L(우리 집 지붕에 물을 좀 뿌려줬으면 좋겠는데." '찝 안에 아무도 없었나? 강아지만 있었다는관 누군가 그러는데 그 강아지는 집주인의 개 였대.9." 배리는 훌쩍거리면서 모깃소리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오 크롱카이트" 그때였다. 느닷없이 거대한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뒤로 와락 끌어당겼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괴한의 손은 그녀의 입을 더욱 힘 차게 틀어막았다. 배리는 이웃집 뒤뜰 풀밭을 구두 뒤축으로 찍으면 서 버터보려고 했지만, 납치자가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두 사람이 집 뒤의 골목에 이르자 그녀는 괴한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그 우악스 런 손길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곧바로 앞으로 넘어져 무릎이 까져 다 시 포로가 되었다. 그녀는 기회를 틈타 비명을 질렀지만 집 반대편에 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구급차의 소리 를 꿰뚫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다시 땅에 발을 내딛으려고 바등대자 괴한이 재빨리 그녀를 거칠게 껴안으면서 속삭였다. "입 다물지 않으면 가만 안두-어." 그녀가 두려움에 질려 더 이상 저항차지 않자 괴한은 그녀를 끌고 또다시 이웃집 마당을 거쳐 뒷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 의 집에서 커다란 도로 두 군데를 빠져나와 저쪽에 떨어진 보도 한쪽 가에 주차시켜놓은 자동차에 다다랐다. 괴한이 자동차 문의 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그녀는 이빨로 그의 손바닥에서 살집이 두둑한 부분을 힘껏 물어뜯고 그의 배에 팔꿈치를 내리꽃았다. 그가 주춤하면서 욕설을 토해내는 사이에 배리는 필사적 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오래 가질 못했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멈춰세웠다. 괴한은 그녀를 돌려세우고 몸이 으스러져라 쥐고 마구 흔들었다. "제기랄, 나한테 그만 덤비시오! 난 당신을 살리려고 그러는 거_Q" 이윽고 격렬한 흔들림이 멈추자, 그녀는 그레이 본듀란트와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안경 갖고 있소? 그는 메릴랜드 교외로 차를 몰았다. 운전 실력은 훌륭했지만 제한 속도를 준수하며 안전 운전을 했다. 자칫 교통 경찰에게 걸려 딱지를 떼는 일은 가장 원치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블록 정도 운 전을 하면서 백미러에 시선을 떼지 않고 살피다가 미행자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무도 그를 찾고 있지 않은 듯했다. 아직은--. 그는 아직도 배리가 그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옆 좌석에 앉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자동차 앞유리창 밖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안경 갖고 있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멍한 눈길로 그를 몇 초 동안 쳐다보다 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그녀는 그 혼란스러움에도 가방을 끝까지 어깨에 메고 있었다. "콘텍트렌즈를 빼내고 안경을 쓰시요" 그녀는 입술을 적시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그걸,- "그냥 알고 있었소 어서 내 말대로 하시요 그리고 거기 야구 모자 를 쓰고 머리카락을 다 집어넣으시요" 그러고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야구 모자를 건네주었다. "뭣 하러,,,,,, 왜-,,,- '개냐하면 누군가 당신을 알아보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요" "누가 날 알아본다는 거죠? "아까 당신 집을 산산조각낸 녀석들. 당신이 보기에 누굴 것 같소? '재 개가 죽었어요" 그녀는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오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소심한 사람처림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알았 다. 그런 일에는 도통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아까 난폭 한 괴물처럼 구는 것보단 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무작정 차량 흐름을 따라가다가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24시간 영업을 하는 커피숍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우린 할 얘기가 많소 하지만 당신이 계속 실성한 사람처럼 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면, 어떻게 당신과 함께 저 안으로 들어가겠소? 그의 얘기대로 그녀는 콘택트렌즈를 빼내고 안경을 썼다. 참 묘하 군. 그녀가 소파에서 잠든 사이 가방을 뒤졌을 때 보지 못했는데--. "손수건 있소? "아니요" 그녀는 옷소매로 콧물을 쓱 닦았다. "야구 모잔 쓰지 않을래요 날 알아널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그러고서 그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 갔다. 그녀 뒤를 따라 그가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여자 종업윈이 미소 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면서 빈 탁자로 안내했다. 종업원이 번들거리 는 메뉴판을 내밀자 그가 사양했다. '거피 두 잔만 주시요" 커피숍은 대체로 조명이 밝은 편이었고, 손님은 별로 보이지 않았 다. 정찬실 한쪽 구석엔 밧줄이 둘러처져 있었구 바닥에는 기름에 튀 긴 햄과 팬케이크 시럽 탬새가 코를 찔렀다. "본듀란트 씨, 내 집이 폭삭 내려앉은 직후 당신이 날 유괴하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이죠?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종업원이 두 사람에게 커피를 따라주고 물러가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요 그게 바로 당신이 암시하는 뜻이라면 말0]~" "그래요, 난 그런 뜻으로 물은 거예요" '어쨌든 당신이 틀렸소" 그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면서 덧붙였다. "당신 애환견 일은 정말 안췄소" "자기가 기르는 말에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은 사나이가 할 소린 아 닌 것 같은데? '기봐우 내가 당신을 그 현장에서 끌고온 건 다 당신을 위해서요" "그런데 왜 날 강제로 끌고온 거죠? 그저 호위하듯 데려울 순 없었 나요? "그건 안까 당신이 이성적으로 얘기 나눌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 소 어떡하든 당신을 그곳에서 도피시켜야 했구 그게 가장 빠른 방법 이었소 그들이 당신을 처치할 거라는 내 예감이 적중했소 하지만 이 제 나와 갈라지고 싶다면 당신 좋을 대로 하시요"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당신이 지금 무슨 얘길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9_" "그렇다면 입 닥치고 내 말 들어요"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긴 채 그를 응시했다. 그 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껀저, 폭발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고 싶소 브링크레이가-. "크롱카이트예요" "크롱카이트가 당신보다 먼저 집 안에 들어갔겠지." '찝 뒷문에 멍멍이 문이 있거든요 아니, 있었어요" "당신은 항상 그렇듯 뒷문으로 집에 들어가오? "네, 1래_Q_" "그렇다면 그들이 그 문에다 폭탄을 설치했군." 그녀는 탁자 위로 몸을 바싹 기울이면서 물었다. "누가요? 그리고 당신은 거기서 뭘 하고 있었죠? 왜 내 뒤를 쫓아 워싱턴까지 온 거냐구요? 내 뒤를 밟았나요? LI당신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섣부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고 경고해주려고 온 것뿐이요 당신은 대통령이 결코 공개할 수 없는 사건의 냄새를 맡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신경질적으로 잘근거렸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죠? 당신이 내 집을 방문한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스펜서 마틴이 날 찾아왔소" "그는 백악관과 관련된 인물이잖아요?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하지만 정확히 말해, 그는 데이빗 메리트 의 오른팔이요 설명을 덧붙이자면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인 물이지." -그렇다면 왜 우린 그 작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건가요? -개냐구? 그가 그걸 원치 않았지. 유령처럼 백악관을 누비고 다니 길 원했소 그래야 익명성을 이용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거 든.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인물이지만, 현재 대통령 수석 보좌관이요" U본듀란트 씨, 당신 얘기는 사실과 전혀 다르군요 대통령 수석 보 좌관은,I~ LI프랭크 몽고메리는 잊어버리시요 허수아비 아부꾼에 지나지 않으 니까. 대통령이 뼈다귀를 던지면 그걸 물어오려고 기를 쓰고 달려가 는 개란 말이오 그 친구가 그럴싸한 직함과 멋진 집무실, 그리고 특진 을 갖고 있다 해도, 스펜서야말로 데이빗의 숨어 있는 분신이오. 데이 빗은 모든 일을 먼저 스펜서와 의논해서 처리하고 있소 스펜서는 데 이빗과 관련된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 해왔지. 말하자면 데이텟의 숨은 조력자요" "그가 대체 어떤 일들을 하는데요? '처드렛일들이지." 배리가 눈썹을 치켜뜨며 되받았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 그 지위가 위태로을 허드렛일이겠군요" 그레이는 굳이 그녀의 얘기에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스펠서 마틴은 대통령이 직접 하기엔 애매한 일들을 대 신 해온 것이군.9- 그리고 당신이 그 사실을 아는 건 당신 역시,,,,,- "숨은 조력자였소" "그렇군요" 그녀의 눈資은 마치 그레이의 양심의 거울인 양 안경알을 통해 그 를 꿰뚫어보았다. "그러나 그 일을 그만두었소 그리고 워싱턴을 떠난 뒤로 1년이 넘 게 스펜서와는 연락을 끊고 살았소 그러다가 당신이 내 집에 다녀간 후로 그가 불쑥 나타난 거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 그렇지 않소 그가 내 집을 방문한 이유는 당신이 날 찾아와 바네사에 대해 물어봤다고 짐작하거나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요" "그래서 그에게 뭐라고 했죠? 내 말은 그러니까,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냐는 뜻이에요" 그레이는 그 질문의 의미를 금세 파악했다. 그녀는, 그가 가장 최근 에 관계를 맺은 여자를 친구에게 자랑했는지 알고 싶은 뜻이 역력했 다. 아까 그녀에게 물린 손이 불쾌하리 만치 욱신거렸다. 처음 만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뺨을 갈긴 그녀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배리 트 래비스란 여자는 터무니없이 대담하고 뻔뻔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그 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연약해 보였다. 그토록 아끼는 애완견이 처 참하게 살해당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녀를 다시 껴안고 싶다면 지금이 가장 완벽한 기회였지만, 그는 사양하기로 했다. "스펜서에게 당신이 나에게 정보를 캐러왔다고 했소 그리고 당신 머릿속엔, 바네사가 아기를 살해하고 유아 돌연사로 위장했다는 참으 로 방정맞은 생각으로 꽉 차 있다고 했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구요? 맙소사! 그들이 내 집을 잿더미로 만 든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내가 만일 아무 것도 모른다고 부인했다면 그는 분명 그 말이 거 짓임을 계뚫었을 거요 그러다가 더욱 힘들고 복잡한 연기를 해야 했 겠지. 아무튼 스펜서를 보자 마자 당신의 그 터무니없는 가설에 뭔가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소 그렇지 않았다면 스펜서가 와이오밍 촌구석까지 내려와 내가 윌 알고 있는지 괘냈겠소? "당신은 그 점이 바로 그가 방문한 목적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 는군요" "그렇소 이건 그의 재킷 안쪽 호주머니에 있던 민간 여객기 표요 워싱턴에서 잭슨 흘까지의 왕복표지." "그래서요? "스펜서는 내게 대통령 심부름으로 시애틀로 가는 길이라고 둘러 댔소 하지만 그런 심부름을 다녀을 경우엔 관영 비행기를 타는 게 정 상이요 더구나 이 비행기 표는 가명으로 구입했더군. 그리고 잭슨 흘 에 도착해서도 또 다른 가명으로 렌트카를 빌렸지. 그는 애초부터 시 애틀에 갈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던 거요 그렇소 트래비스 양. 그는 친분을 나누려는 목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었소 다시 말해 당신 기사 가 현 정부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거라는 생각에 그들은 발설하지 못 하도록 무슨 짓이든 할 거요" "오 맙소시" 그녀는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으며 핏기 없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이제 정말 은일났군외 내가 맞았어요 그 아기는 유아 돌연사로 죽은 게 아니었어.9-" "당신은 언제 처음 의심을 품게 된 거요?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허공만 노려보았다. "트래비스 양럴 "아, 미안해.9-" 머릿속이 복잡한지 그녀는 관자놀이를 쓱쓱 문질렀다. (L다른 사람에게서 내 가설이 사실이란 얘기를 듣게 되다니! 정말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범죄군요" "백악관을 장악한 남자에겐 더 특별하겠지 자, 내게 다 털어놔 보 시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언제 처음 눈치챈 거요? -바네사가 울적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했을 때 부터죠 그 직후 그녀가 의지력 하나로 버티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어_9-" 배리가 영부인과 최초로 만난 이후 벌어진 사건과 그TV보도물 기 획 과정을 설명했다. 그레이는 그녀의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바네사와의 대담 장면을 보았소" -그때 내가 인터뷰한 바네사 메리트는 몇 주 전 내가 만난 무기력 하고 비참한 여성과는 사뭇 달- U그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요 바네사는 조울병(상쾌하고 흥분된 상 태와 우을하고 억제된 상태가 번갈아 나타나는 증상) 환자요" 그레이는 놀라 입을 쩍 벌린 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언제부터 그랬죠? "아주 오래 전부터요 내가 알기론 결혼한 직후부턴 것 같소- 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감쪽같이 사실을 감친나요? "적절한 치료와 세심한 감시를 받아왔기 때문이오 그 증상 덕분에 그녀는 탁월한 선거 운동원 역할을 톡톡히 해냈소 언제나 기분이 흥 분된 상태였지. 언제나 그랬소 물론 항우울증약과 항정신병약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덕분에 지금도 그녀의 병적인 상태를 아는 사람 은 그녀를 아주 잘 아는 몇몇 사람에 불과하요 약을 먹기만 하면 제 역할을 너끈히 잘해냈지. 그런데 아기의 죽음으로 그녀의 균형이 깨 져버린 거요 스펜서가 그 부분에 대해 인정하더군. 난 텔레비전에서 그녀를 본 순간,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지." "그러니까 당신은 그녀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군요" 그는 즉각 교묘한 대답으로 그 미사일 공격을 피했다. "난 데이빗을 더 잘 알고 있소" "당신은 데이빗과 수석 보좌관이 내 집의 폭파 사건에 관련 있다고 믿는 건가요? '기제껏 내 말을 건성으로 들은 거요? 제기렌 물론 난 그리 믿고 있소 스펜서는 잭슨 홀로 오기 전에 그런 조치들을 취해놓았던 게 틀 림없소 오늘 그 폭발로 인한 사망자가 당신 애완견 뿐이란 걸 알고 나면 그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당신을 제거하고자 할 거요" 배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앙게 질렸다. 숨을 급하게 몰아처더 니 평소보다 더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은 지금 내 목숨이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란 뜻인가요? "말하자면 그렇소"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토할 것 같아요" 그레이가 날카롭게 막급떴다. "안 돼! 여기서 소동을 벌일 순 없소 입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셔 봐요" 그레이는 그녀의 토악질이 잦아들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물을 찾자 그는 여자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은 배리 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부인께서 어디 편찮으신가요? 그레이는 이 거짓 미소가 얼마나 멍청이처럼 보일지 생각하면서 뚜 벅 대꾸했다. '띱덧 때문이요 아침 나절에 욕지기가 일고 그러다가 저녁 무렵에 인다더군요" '저머나, 그래도 임신 초기가 지나면 없어진다는군요, 부인. 죄송합 니다만, 지금 몇 개월째죠? '찔음 ,) 배리가 우물거리자 그레이가 다시 말을 받았다. - "석 달째요" 종업원은 배리의 어깨를 다독거리면서 뜨거운 차를 건네주었다. 그 레이는 배리 대신에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곧 집 사람이 좋아질 텐데, 어쨌든 고맙소" 종업원은 배리에게 기운을 내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배리는 물을 여러 모금 마시며 이죽거렸다. "거짓말에 아주 능숙하군-9-" "당신은 그렇지 못하더군." - 그레이는 그녀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금 세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이었다. "본듀란트 씨, 내가 당신을 이 일에 끌어들인 꼴이 줬군요" 그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탓이에요 내가 당신을 보러갔기 때문게 당신 생명도 위태로워 진 거라구요 그들이 결코 공개되는 걸 원치 않는 이야기를 당신도 알 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초조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쓸데없이 이곳에 와 무시무시한 위험을 자초한 거예요 와 이오밍 주의 산골짜기에 안전하게 숨어 있어야 하는건데, 지금이라도 당신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당신이 그들만의 비밀을 안다는 걸 잊을 거예요 당신이 날 깨끗이 쫓아버렸다고 생각하겠죠" 그는 그녀의 단순함이 우스웠지만 겉으른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결코 잊지 않소 어떻게 해서든 일의 매듭을 짓는 사람들이 지. 지리적인 거리는 그들에겐 아무 문제도 아니요 아기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났든, 바너씬가 어떤 일을 당하든 모두 매장하고 말 거요 그리 고 우리의 호기심과 함께) "그런데 이곳에 어찌 그리 빨리 왔나요? "난 스펜서의 컴퓨터를 때려부수고 렌트카를 돌려주려고 차 열쇠 와 관련 서류를 공항에 있는 급한 탑승객을 위한 대기실에 슬쩍 떨어 뜨렸소 그러고서 그의 비행기 표를 사용했지." 배리는 잭슨 흘을 경유하는 여객기가 몇 대 없다는 걸 떠올리면서 물었다. "당신도 내가 타고온 비행기에 타고 있었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당신을 못 봤는데n "아마 工랬을 거요" "아." 그녀는 어떻게 그가 교묘하게 자신을 피했는지 곰곰 헤아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 내게 미리 경고하지 않았죠? 그리 했더라면 크롱카이트가 애꿎 게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들의 첫 번째 경고가 '최후 의 일격'일 줄은 예상 못했소 난 그저 은밀한 위협으로 시작할 줄 알 았지. 병원에 있던 당신 정보원의 경우처럼. 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숨 통을 끊으려고 마침내 칼을 빼든 거요 당신이 겁에 질려 침묵하길 바 란 게 아니.P_ 당신이 죽길 바랐던 거.- "그건 아까도 들었던 얘기예요" 그녀는 볼 안쪽을 우물우물 씹었다. "스펜서와는 어디서 갈라진 거죠? "무슨 뜻이오? "그 비행기 표를 어떻게 손에 넣었냐는 거예요 어떻게 용케 빠져나 왔죠? 그는 그녀에게 어느 정도 얘기해걸야 할지 생각하면서 한동안 그녀 를 겨눠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말을 내뱉었다. "난 빠져나오지 않았소" "데일리, 이쪽은 그레이 본듀란트 씨예요 그레이, 이분은 데일리 웰시 씨랍니다." 배리는 데일리가 새벽 2시의 기습 방문을 문제삼지 않아 그렇게 고 마을 수가 없었다. 그저 툴툴거리면서 옆으로 비켜서서 그들이 집 안 으로 들어오게 해주었다. 잠자다가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이 분명했다. 대못처럼 솟아오른 회 색빛 머리카락이 마치 자유의 여신상의 왕관 장식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닳아빠진 속셔츠 아래로 복서형 반바지가 옹이진 무 릎을 살짝 가렸다. 검정 양말로도 새하얗고 털이 없는 볼품없는 다리 를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배리와 그레이는 커피숍을 떠나면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려 다음 행동을 어멓게 할 것인지 의논할 공간이 필요하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레이는 데일리의 집으로 가자는 그녀의 제안을 묵 묵히 따랐다. 막상 그 집에 도착해 그녀는 그레이의 표정을 보면서 그 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재빨리 눈치챘다. 피난처로 삼을 장소가 이곳 이 고작이라면 그들의 미래는 정녕 암담하다는 표정이었다. 데일리의 작은 집은 요새 같은 곳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을 뿐만 아 니라, 낯선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데일리는 쥐꼬리만한 연금과 호흡 장치로 생명을 연명해 나가는 중증 환자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모 두가 사실이었다. 데일리가 거실 조명을 켜는 동안 배리가 사정을 설명했다. "나도 엄청난 실례란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린 달리 갈 데도 없 小,-. 그들이 크롱카이트를 죽였어요" 순간 그의 손이 조명 스위치 위에서 얼어붙었다. "크롱카이트를 죽였다고? 누가 그런 짓을 했지? '쌔기하자면 길어요" "난 밤새워 들을 수 있어." 그는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통스런 표정 을 지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자 그녀는 주저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여느 때 같으면 그녀가 그를 안아주는 쪽이었고, 그는 그녀의 애정 표 현을 물리치는 심술쟁이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먼저 포옹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약간은 서 툴지만 진지한 마음으로 그녀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개자식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코롱카이트의 음식에 독을 넣 었나? 이 녀석들을 잡기만 하면,,,-, 대체 누가 그런 거야건 배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눈물을 닦으려고 안경을 벗었다. "말할 게 너무 많아 뭣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데일리는 습관적으로 산소 호흡 장치를 굴리면서 발판이 있는 안락 의자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그녀도 늘 앉던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그레이는 계속 서 있었다. 데일리는 그때까지 은퇴한 국가 영웅이 은 둔지에서 빠져나와 야심한 시각에 이곳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이유 에 대해 아무런 호기심을 보이지 않다가 마침내 그레이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이 여기에 어쩐 일이지? "내 집이 오늘 밤 폭파됐거든_Q" "폭파췄다고? 지금 '우르릉-쾅'을 말하는 거O刃 그는 그녀에게서 그레이에게로 시선을 두다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 았다, "데일리, 내 집이 사라졌어요 파괴줬다구요 모든 게 다또 내 비디 오 테이프 자료들까지_Q_" 그녀는 비통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수년 동안 공들여 모은, 다시 구 할 수도 없는 그 귀중한 비디오 테이프들을 떠올렸다. "본듀란트 씨는 뒷문에 폭발물 장치가 설치돼 있었을 거라고 생각 하죠 크롱카이트는 멍멍이 문으로 나보다 먼저 집에 들어갔다가 변 을 당한 거예_- 순식간에 데일리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른 거지? "대통령이에_9-" "다시 한 번 말해 봐? 미합중국 대통령? "본듀란트 씨는 내가 바네사의 건강과 아기의 죽음에 대해 묻고 다 닌 질문들 때문에 대통령이 날 제거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맙소사? 데일리는 탄식을 내뱉으며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근거로-아니, 일단 좀 자리에 앉아주시-소? 지금 이 자세에서 당신과 얘기하려면 내 목이 빠질 것 같소" 순간 배리는 오랜만에 따스한 기운이 번지는 듯했다. 그레이는 거 실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리, 즉 소파의 그녀 옆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 앉자 데일리가 질문을 던졌다. L(대체 무슨 근거로 메리트 대통령이 배리 입을 막는답시고 그런 짓 까지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는 단지 내가 배리와 얘기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날 처리하려 고 스펜서 마틴을 급히 파견했습니다." "처리한다'는 의미는? "암살한다는 뜻이죠" "난 그와 당신이 친구라고 생각했소" "과거엔 그랬죠 그러나 그는, 내가 배리에게서 아기의 죽음에 관한 모종의 의견을 들었을까 봐 염려되어 날 암살하려고 와이오밍 주까지 내려온 겁니다. 이 정도면 당신도 그들이 배리의 기사가 세상에 알려 지는 걸 막기 위해 얼마나 광분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데일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지 미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오? 배리가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 "그래요 틀림없는 사실이죠 본듀란트 씨, 어서 더 설명해 주세요" 그가 데일리에게 스펜서 마틴의 방문과 관련된 의심스런 점들을 설 명하는 동안, 배리는 워싱턴행 비행기를 탄 사람들 중에 어떻게 그레 이를 보지 못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비행기를 함께 탄 사람들에 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그레이를 보지 못했 을까? 그래.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변장한 게 틀림없어. 몸 색깔이 다양하게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그의 능력은 그에 대한 신뢰 심을 늘려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대한 불신만 마음속에 더욱 깊이 심어주었다. 데일리가 그레이의 얘기를 요약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스펜서 마틴은 와이오밍에 오지 않은 것으 로 돼 있단 뜻이로군." "그는 내 집의 어떤 물건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식사할 때 사용한 은제 식기들만은 예외였는데, 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깨끗이 껏어버렸 죠 그가 아무 것도 손대지 않는다는 점은 내가 첫 번째로 발견한 위 험 경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스펜서 마틴은 지금 어디 있는 거요? 데일리의 질문에 그레이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한동안 거실엔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배리가 데일리의 질문에 말을 보탰다. "본듀란트 씨는 그에게서 어떻게 도망쳤는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그러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내의 엄숙한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가 사람을, 그것도 옛 친구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그의 싸늘한 눈빛과 가늘게 찢어진 입술이 입증해 주었다. 만약 그가 스펜 서 마틴을 자기 방어 차원에서 죽였다면 충분히 용납될 행동이리라. 하지만 그의 그런 얘기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데일리가 그녀의 마음속에 묻어둔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스펜서 마틴은 지금쯤 대통령에게 뭔가 보고를 하지 않았겠소? "대개는 그렇습니다. 그 친구는 심지어 내 집에서 백악관에 전화를 건다는 핑계를 대고 식당에서 나갔죠 하지만 나에 대한 처단 소식이 포함된 완벽한 보고를 하기 전까지는 데이텟에게 전화를 걸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마 오늘 밤 데이빗은 스펜서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며 잠을 설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대통령은 와이오 밍으로 사람을 급파하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스펜서는 그곳에 가 지 않은 것으로 돼 있기 때문이죠" 배리가 얼른 그 말을 되받았다. "하지만 조만간 누군가가 그의 소식을 궁금해 하며 그에 대한 탐색 을 시작하지 않을까요? "스펜서는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가 아무도 없소 데이빗과 그의 정 부(制約가 전부라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성장 과정을 알아 두는 게 좋겠군. 그는 작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제나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던 약하고 촌스런 아이였소 하지만 사실 평범 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똑똑했지. 오랜 세월 동안 학교 깡패들의 조롱거리로 시달림을 받으면서 그는 최고의 깡패가 되기로 결심했소 그리고 마침내 치 목표를 이루고 말 았지. 다시 말해 워싱턴에서 가장 무서운 깡패가 되고 만 거요 스펜서 와 맞선다는 건 곧 대통령의 집무실에 침을 뱉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 었소 그는 자신의 행선지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소 그의 보고 대상은 오직 데이텟뿐이오." 그때 배리가 이의를 제기했다. '개통령 수석 보좌관이 그렇듯 엄청난권한을 누릴 순 없을 거예요 법무부 장관인 얀시나 FBI,그리고,,-1 그녀는 그레이가 머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말을 중단했다. '씰리엄 얀시는 좋은 사람이요 메리트 정부에 길들여지기엔 너무 나 선량하지. 그래서 그는 장관에 임명된 이후로 데이텟과 여러 차례 마찰을 빛어왔소 하지만 당신은 내 말을 믿어야 하요 스펜서 마틴의 첩보 조직은 나치 독일의 SS친위대처럼 가장 우수하면서도 잔인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소 그들은 비밀 경호요원을 비롯해 정부 산하의 모든 정보 조직에 침투해 있지. 스펜서의 부하들은 언제나 대기 상태 요 그리고 만일 스펜서의 명령이 자신들의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전 달된 명령과 틀리면 그들은 두말없이 스펜서의 말에 복종하오" 배리는 두 팔로 어깨를 감쌌다. '정말 겁나는 얘기군요" '勺들은 성격이 잔인한 사람들이요 대부분이 그렇게 훈련을 받은 특수 부대 출신들루 제대 후 싸을 대상을 찾지 못해 몸이 근질거리는 작자들이지," 배리는 그 순간 그레이가 자신의 심정을 의연중에 드러내는 게 아 닌가 싶었다. "하지만 사안이 아주 중요할 경우엔 스펜서가 직접 일을 처리하요" '겅찰대의 옛 전우를 암살하는 일 같은 것 말이군." 그레이는 섬뜩한 미소로 데일리의 말을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죠 하지만 그외 대부분의 경우엔 다 른 사람에게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 일들은 스펜서가 출장 을 갔을 때 이루어지도록 손을 쓰지. 그래야만 그 임무를 맡은 하수인 이 잡히거나 추적 가능한 증거를 남겼을 경우에도 스펜서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경우에도 그가 배리의 집에 폭발물이든 뭐든 처리를 지시해 놓고 그때를 맞춰 출장온 거라고 보 고 있습니다. 그의 출장은 혼히 있는 일이고 대개는 그 누구도 이상하 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기간 내에 돌아옵니다." "하지만 지금쯤 데이텟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는 배리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박했다. "일단 데이빗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 스펜서가 와이오밍 에서 하려던 일을 실패했다는 걸 깨닫겠지." 그 엄숙한 선언으로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러다가 데일리가 그레 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중동에서 해낸 일에 대해 무척 탄복하고 있소" 그레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그의 찬사에 사의를 표했다. "그런데요? "미안하지만, 지금 당신이 우리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요" 그 모욕적인 발언에 그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당신이 의심을 품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내가 워싱턴을 떠날 때, 데이텟과 내가 알력을 빛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바로 그의 아내 때문이었잖소? 배리는 데일리의 무모한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던지는 질 문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맞는 말입니다. 바네사가 최종적인 불화의 원인에 포함돼 있었조- "그러니 당신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겠소? "당신 말은 그러니까, 내가 데이빗 메리트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그 모든 얘기를 꾸미고 있다는 겁니까? 데일리는 그 특유의 솔직한 태도로 그렇다고 했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사실이요" 그러자 그레이는 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일은 내가 시작한 게 아닙니다. 내가 특종 기삿거리를 가지고 트래비스 양에게 접근했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녀가 아기의 죽음 에 관한 의문을 품고 날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의문들 은 내가 품고 있는 부분과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배리는 깜짝 놀라면서 격분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내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거죠? 당신 은 마치 내가 극악한 기회주의자인 양 날 대했잖아요? 당신은.L '개리, 이 친구가 계속 말하도록 내버려둬 " 데일리는 그녀의 말허리를 자른 뒤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의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거요? 그러자 그레이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렸다. "바네사는 매력적이고 상냥한 여잡니다. 한편으론, 역사상 가장 얄 밉구 가장 자기 중심적이며, 가장 교활한 여자죠 난 그녀가 아버지와 데이텟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계획을 그들도 모르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배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처음 그녀 에게서 받은 인상과 상당히 일치하는군요"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그런 정신적인 문제들이 깔려 있지 만 바네사가 절실하게 아기를 원했다는 건 사실이요 어떻게든 아기 를 가지려고 했소 심지어 의사들이 그녀의 병 때문에 임신 포기를 권 유했는데도 말이오" 그때 데일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면서 물었다. '껸이라니? "그녀가 조울증 환자래요" 배리가 얼른 대꾸하고 연이어 그레이가 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님 맙소사? 데일리는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자신의 상태를 발표하지 않은 건 정말 유감스럽더군요 그 사실을 밝히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잖아요? 이를테 면 조울증 환자들이 그녀가 그 병을 갖고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극복 하구 보람찬 인생을 사는 모습에 크게 용기를 얻었을 거예요" 그레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하지만 아기가 죽기 전에 가능한 일이었지." 배리도 힘없는 목소리로 동의했다, "맞아요" "그들은 그날 밤 그녀를 혼자 남겨두는 게 아니었수 배리." '게간에 알려지기로는, 그 일이 벌어지기 하루 전에 백악관의 가정 부가 집 안에 급한 볼일이 생겨서 다음날은 출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던데- 데일리가 그때를 떠올리자 그레이가 그 말을 받았다 "가정부는 분명 사전에 그런 요구를 했었죠 그렇다면 의문점을 생 각해볼까요? 바로 그 당시 그곳에 유모 대신 애를 봐줄 사람이 왜 없 었느냐는 점입니다. 어째서 바네사 혼자 아기를 돌봐야 했을까요? 비 상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데이빗이나 스펜서 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더구나 당시 사건 관련자들은 바네사가 비 상 사태에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배리가 그의 의문에 설명을 붙였다. "바네사가 조울증 환자란 사실을 감안해볼 때, 아기의 탄생 이후 보 통 여성들이 려는 일반적인 분노, 무력감, 속박감 들을 정상적인 경우 보다 훨씬 털 심하게 느꼈을 거예요" 그러고는 그레이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의문점을 털어놓지 않은 거예 우 안 그런가요? 당신은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던 거예요" "물론 난 침묵으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당신이 방금 말한 그 런 의도로 그랬던 건 아니오 우선, 난 당신의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 소 바네사는 아기를 목졸라 죽이지 않았소" 배리는 초조한 목소리로 따지기 시작했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군요 당신은 바네사의 아기가 유아 돌연사 증 후군으로 죽은 게 아니라는 덴 동의했잖아요? "그렇소" 그렇다면 이해가 안 되는군요 바네사가 아기를 죽인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누가--- 그녀는 부드럽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하던 데일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눈길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데일리 역시 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을 알아차렸다. 다시 그레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게리트 대통령?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죠? -한 남자가 생후 석 달된 아기를 죽일 정도로 증오에 활활 타오를 이유가 대체 뭐겠소? 그녀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아기가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면- 그레이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창가로 뚜벅뚜 벅 걸어갔다. 틀림없는 결론이었다. 지금까지의 숱한 의문들, 이를테면 바네사의 비탄과 무력감, 부검의 포기, 기사로 올리는 걸 저지하려는 무자비한 방해 공작들, 그리고 특히 본듀란트와의 관계가 명쾌하게 설명이 되 었다. 점차 그녀의 시선이 그레이에게로 옳겨졌다. 그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창문에 드리워진 빛 바랜 커튼 사이를 내다보고 있었다. 데일리도 안락의자에서 일어섰다. '기합중국 대통령을 영아 살해범으로 지목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려서 더 이상 얘기를 들을 수가 없군. 나처럼 늙고 시시한 병자에게 는 특히 그런걸. 난 이제 침대로 돌아갈 거요 당신들 두 사람은 필요 할 때까지 얼마든지 이곳에 있도록 하시오." 산소 탱크가 설치된 손수레 바퀴가 삐걱거리면서 거실에서 굴러나 갔다. 데일리가 흘을 지나쳐 침실로 들어가기까지 그 소리가 온 집안 에 울려퍼졌다. 이윽고 데일리가 침실문을 닫자 순식간에 무거운 정 적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배리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대통령은 바네사와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찬성했어요." "진상을 감추려는 고도의 전술에 지나지 않소 생각해 보시오 문제 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쉬쉬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게 더 의심스 럽겠소? "흐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요" "내가 지닌 모든 걸 걸고 내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요" "지금도 바네사를 걱정하고 있군요? 그는 몸을 돌려 배리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과거에 그녀가 안정된 정신 상태에서 조리있게 말하는 모 습을 보고 아기의 죽음에 대한 의심 따윈 잊었겠죠 하지만 그녀의 인 터뷰 장면을 지켜보면서 당신은, 비록 바네사가 조울증 환자의 특성 인 기복이 심한 기분과 행동을 보였더라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의 의심은 더욱 더 깊어졌겠죠 그러다 내가 당신을 찾아왔고, 내 의견이 당신이 그간 염려했던 생각들과 맞 아떨어진 거예요 아기가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은 게 아니라는 생각 말예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펜서 마틴의 느닷없는 방문이 그 간 품어온 의심에 결론을 맺게 해준 거죠 이제 당신은 바네사의 목숨도 위태롭게 췄다고 믿고 있어요 만일 데이빗 메리트가 아이를 죽였다면, 그 첫 번째 범죄를 확실히 은폐하 기 위해 아내마저 아무 거리낌없이 죽일 수 있을까요? "그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위인이오 당신이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그는 이 정권을 유지하면서 두 번째 임기를 보 장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요" 배리는 갑자기 온 몸에 엄습해오는 섬뜩한 한기를 몰아내려고 두 팔을 싹싹 비볐다. "당신 표정을 보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군. 오늘은 이만하고 내 일 아침 다시 의논해 봅시다. 어서 가서 눈 좀 붙이시요" '치금 그 말, 진담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눈을 붙이겠어요? '仁저 누워서 눈을 감아 보시오 그럼 잠이 들 테니까."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그와 논쟁할 힘도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 쉬 며 거실 뒤쪽을 가리켰다. "흘 끝에 객실이 있어요 말이 객실이지, 그 안은 정말 별 볼일 없 죠 침구라곤 간이침대가 달랑 하나 있는데, 차마 거기서 자라는 말은 못하겠군요 거기서 마지막으로 잔 건 크롱카이트였거든요" 그레이가 데일리의 닫혀진 침실문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를 믿을 수 있소깃 '재 목숨을 걸고요" "그렇다면 그들도 당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요" '래가 여기 오는 건 아무도 몰라요" '재 그런지 설명해줄 수 있겠소? "아니요, 지금은 싫어요" 데일리와의 우정은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특별한 감정이었 고 그 이유를 굳이 그레이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예요 당분간 우린 안 전하다구요" "좋소" 그는 마지못해 그녀의 의견을 따르는 듯했다. "난 여기에서 잘 테니 당신이 그 간이침대에서 자도록 하시오" 그녀는 흘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젠 발을 옮기는 것조차 힘 에 겨웠다. 오늘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기억은 없 었던 것 같았다. 두 번째 침실 옷장 안에는 데일리의 둔감한 취향과도 어울리지 않 을 만큼 꼴사나운 잠옷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그 잠옷 윗도리를 들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틀어놓았다. 거의 24시간 내내 잠을 자지 못했다. 덕분에 눈은 모래가 들어간 것 처럼 껄Y러웠구 온 몸의 관절과 근육끼 욱신욱신 쑤셔왔다. 아까 폭 파 사건으로 인해 무릎마저 벌겋게 까져버렸다. 데일리의 구급 상자 에서 가져온 아스피린 두 알을 삼키고 온 몸을 비롯하여 머리까지 욕 조의 뜨거운 물 속에 망설임없이 푹 담갔다. 육체적인 고통이 뜨거운 물 속에서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지만, 정신적인 상처와 두통이 더욱 격렬해졌다. 매 순간 지구상에서 숱한 인간들이 자연적인 재해, 질병, 전쟁, 살인 등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데 말 못하는 잡종개의 죽음을 애도하는 건 참으로 사치스런 감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눌 길 없는 상실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무 리 울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욕조 수면에 튀며 잔물결을 일 으키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욕조의 물방울들과 함께 눈물 방울들이 뺨 위로 미끄러져 내려와 턱끝에서 가슴으로 떨 어지더니 그 밑의 계곡을 거쳐 보다 큰 물 속에 합류했다. 이젠 다 을 었다고 마음을 추스릴 때마다 크롱카이트와 관련된 사랑에 가득 찬 추억들이 생각나서 다시금 고통의 주기가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때마 다 새로운 눈물이 눈꺼풀 사이로 스며나와 욕조 속으로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차가운 외부 공기로 살갗에 소름이 돋아나자 욕 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음을 알아차렸다. 눈을 떠보니 그레이 본듀 란트가 문가에 서서 한 손은 문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은 문설주 를 잡고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로 몸을 가린다는 것은 이미 헛된 짓 이었다. 그는 이미 볼 것을 다 보았고 다 만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아 주 열정적으로,,,,,,- 몸이 그날 아침 그의 침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 한 방식으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열기 가 맹렬한 속도로 온 몸으로 번져나갔다. "괜찮소? 그녀는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 울고 있더군." 그녀는 적당한 대답이나 행동이 생각나지 않아 말없이 그를 쳐다보 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 전, 무심결에 그녀의 몸을 훑어본 그 순간 그의 시선이 딱 한 번 흔들렸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로케트, 트램프 도크였소" 그녀는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 말들 있잖소? 그건 내 말들의 이름이오" 그러고서 문을 닫고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상원의원 클리트 암브루스터가 백악관을 찾아와 대통 령과 즉각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보좌관들은 대통령이 잠에 서 깨어나긴 했어도 아직 개인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클리트는 대통령이 나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대통령 비서들은 상원의원을 대통령 집무실에 모겨놓고 커퍼를 대접했다. 상원의원이 두 잔째 커피를 거의 다 마실 즈음, 데이빗 메리 트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사위인 대통령은 평소처럼 생기가 넘치면서도, 왠지 초조한 기색이 감도는 듯했다. "클리투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오셨습니까? 아, 고맙네." 대통령은 커피를 들고온 비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받았다. '지제 상원의원과 나만 있도록 자릴 비워주게나." 클리트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급했다. 게다가 새벽 4시부터 깨어나 옷을 갈아입고 대통령을 방문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이 될 때까지 집 에서 -워싱턴 포스트-지를 읽으면서 왜 많은 시간을 죽인 터였다. 자 연히 그 기나긴 기다림에 약이 바짝 달아올랐다, 클리트가 다짜고짜 내公社다. "오늘 당장 내 딸을 만나고 싶네." "어제 장인께서 하이포인트에 오셨단 얘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그 돌팔이 의사가 날 딸애와 만나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도 들었겠군? '깔리투 그녀가 그렇게 원해서 그런 겁니다. 그나저나 장인께선 고 혈압 치료를 받고 계신 겁니까? 안색이 꼭 사탕무처럼 시뻘겋군요" 사위의 노골적인 조롱에 클리트는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여보게, 데이빗, 대체 바네사의 어디가 잘못된 건지 알고 싶네. 그 녀를 왜 격리시켜놓았나? 게다가 상근 간호사까지 붙여놓다니! 내 딸 이 그 정도로 아프다면 병원에 입원시켰어야지." "진정하세_a,클리트 그렇게 자꾸 흥분하시다간 바네사보다 장인 어른을 먼저 병원으로 모셔가야 할 것 같군요" 데이텟은 상원의원을 소파에 앉히고 그 옆자리에 앉았라. "바네사는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알콜과 약은 상극이지 않습니까? 조지와 난 그 점을 그녀에게 애써 상기시켰구 결국 그녀도 알콜 의존 증을 치료받는 데 동의했습니다." "알콜 의존증이라니? 딸애의 증세가 그런 병명이 붙을 정도.로 심각 해졌단 말인가? "임상적으로 그녀의 상태가 정확히 그런 건지 저도 좀 의심스럽습 니다. 그 상태에 대해선 바네사 본인이 주장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 는 매일 몇 잔의 포도주를 마시는 습관을 지금 중단하지 않으면 나중 에 심각한 문제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렇다면 그애가 이제껏 왜 그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지? 그리 고 자넨 또 그 얘기를 왜 이제사 해주는 건가? '거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인 어른의 자문을 구하고 싶었죠 하지만 바네사가 장인께는 말씀드리지 말라고 극구 절 말렸 습니다." "왜 그런 거지? "수치스러웠던 겁니다. 클리트" 데이텟은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잔에 커피를 다시 따랐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실망하는 걸 원치 않았던 겁니다. 아 시다시피 태양이 장인에게서 뜨고 진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그앤 언제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내 게 찾아왔고 난 그앨 위해 최선을 다해 문젤 해결해 주었다네." 아내가 죽었을 때 바네사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하지만 클리트는 혼자서 한창 예민한 10대의 딸을 키워야 한다는 점에 대해 전혀 당황 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언제나 '아빠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네 사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맹목적으로 사랑했구 딸의 어린 시절부터 아내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딸아이에게 발휘했다. 어쩌면 딸아이를 약간 응석받이로 키웠을지는 몰라도, 그런 점은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세상엔 애지중지 다뤄야 할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며 바로 딸아이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바네 사가 성년기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자, 딸 애를 더욱 더 보물처럼 다루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이텟의 목소리에 상원의원은 깊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꺼쩌면 아내는 이제부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아니, 장인 어른께 더 이상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녀는 내게, 장인 어른께 공식 적인 발표 내용 외의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더군요 물론 공 식적인 발표 내용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이번 에 자신의 불행을 혼자 삭이기로 단단히 결심한 모양입니다." "대체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은가삘 "조지가 그녀를 안정시키교 그녀 역시 그리 느낄 때까지는 지금처 럼 해야 할 겁니다. 그녀는 아기를 갖기 전의 영부인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약물치료를 규칙적으로 받는다면 그렇게 못될 이유가 없 죠 생각을 그리 하시면 될 겁니다." 대통령은 클리트가 할말을 앞질러 말하고는 대형 화면의 'Ilr리모 컨을 집어들었다. 클리트가 보니, 줄곧 대화하는 동안 데이텟의 관심 은 자신과 텔레비전 화면 양쪽으로 나눠져 있었다. 대체 뭣 때문에 대 통령이 텔레비전에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증이 일어 고개를 돌려 텔레 비전을 지켜보았다, 'Ilr화면에는 불길에 잔뜩 그올린 나무들, 연기가 피어오르는 돌더 미, 바삐 돌아다니는 소방관들을 배경으로 한 기자가 뉴스를 전했다. "소방관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불길이 듀퐁 광장의 인근 주택가로 번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다행히 오직 한 건물만 태우고 불길이 진화 되었습니다." 아직도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건물의 잔해가 카메라에 잡혔다. 기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아침 ATF(재무부 소속의 알콜-담배 ,무기 담당 사무국) 요원 들과 화재보험회사 직원들이 폭발 원인의 단서를 찾기 위해 연기로 뒤덮인 이곳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고는 메모를 내려다보면서 덧붙였다. '지 건물은 지역 독립 방송국인 WVUE의 기자이며 최근 유아 돌연 사 증후군의 기획 보도물을 제작한 배리 트래비스 양의 집이라고 합 니다. 트래비스 양은 폭발 사고에서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아직 행적 이 tl닌지지 않아 인터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곧이어 현장 취재 기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스튜디오의 앵커맨이 화 면에 나왔다. 데이빗이 텔레비전을 끄자 장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걸세,- 데이빗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배리 트래비스 말입니까? "내가왜 그여자를 만난단말인가? 집이 저리 된 건 안된 일이지만, 사실 그녀는 엉덩이의 가시 같은 존재야. 글쎄, 바네사의 요양에 대한 내 입장을 밝혀달라고 내 사무실 직원들을 어찌나 귀찮게 했는지, 아 마 자넨 상상도 못할걸세." 그러더니 방망이를 휘두르는 시능으로 그녀에 대한 혐오감을 표시 했다. '저쨌든 난 바네사를 만나봐야겠네. 그애는 내 맘을 알아야 해. 어 떻게 아비가 포도주 몇 잔 때문에 사랑하는 딸을 꾸짖겠는가? 게다가 그애가 그리 된 건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네.- '제 의견도 같습니다. 전 그녀에게 자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수없이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장인 어른도 바네사가 얼마나 철저한 완벽주의 잔지 잘 아시잖습니까? 그녀는 조울증 때문에 얻게 된 자신의 한계를 증오하고 있습니다." 데이텟은 상원의원의 등을 다독거리면서 문으로 데려갔다. "자, 저도 장인 어른과 오랫동안 얘길하고 싶지만 오늘 아침엔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오후엔 바네사와 전화 통화를 해서 장인 어른의 안부와 사랑을 전해드리죠" "꼭 그렇게 해주게나." 상원의원은 어린아이처럼 데이빗이 이끄는 대로 문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미합중국 대통령인 데이빗 메리트가 몇 마디 진부한 정보로 장인의 마음을 달래고 유창한 말솜씨와 솔직 담백한 미소로 장인을 쉽게 집무실에서 내보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데이빗 메리트가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클리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다시 문을 닫았다. 데이빗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장인을 쳐다보았다. "클리투 왜 그러시죠? "데이빗, 과거를 한 번 생각해보게. 난 사람의 재능과 잠재력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네. 그런데 난 자네에게서 그 두 요소를 모두 발 견해냈지. 사실 난 대통령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대통령을 만들고는 싶었지. 자넨 내게 필요한 순수한 원석(原料이었네. 그리고 내 지도를 아주 잘 받아들였지. 뭐든지 빨리 배우는, 그야말로 정치 우등생이었 어. 자네에 대한 내 직감은 을았고, 난 자네가 더없이 자랑스러웠네." "고맙습니다." "그러나 18년 전 어느날 밤, 자네가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고 잔뜩 겁에 질려 강아지처럼 낑낑대면서 날 찾아왔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 게 기억하고 있다네, 그날 밤 일을 기억하는가, 데이빗 군? 데이빗이 팽팽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대체 뭘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가 말하려는 점은- 클리트 암브루스터가 데이텟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날 밤 사건이, 지금 날 심히 불쾌하게 몰아붙이는 이 사건과 매 우 유사하다는 걸세." "오 맙소시 클리트 그렇게 비교하시면 안 되,- 상원의원은 대통령의 가슴에 주먹을 질어박아 말을 막았다. "나도 자네와 내 딸의 결혼생활이 완벽치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결혼생활이란 게 어디 있나? 난 자네 가 여기저기서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니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젠장, 그래도 지금까지 자네의 그런 면조차 감싸고 돌았네. 왠지 아나? 자네 를 사위이기 이전에 한 남자로 인정했기 때문일세. 그리고 더 나아가 자네의 바람기를 눈감아준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자네가 바네사를 행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지." 그러고 나서 목소리를 뚝 떨어뜨리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내 딸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나도 눈이 확 뒤집힐걸세, 내 말 알아듣겠나, 데이빗 군? "말 조심하십시오 클리트 지금 그 말씀은 미합중국 대통령을 협박 하시는 투로군요" 클리트는 부아가 치밀어 마구 公아붙였다. "그래, 염병헬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누구 덕분에 그 자리에 앉게 췄는지 잘 기억하는 게 좋을걸세. 난 자넬 만들었고 또한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어. 그리고 그 쓰레기 같은 스펜서 마틴이나 비밀 부대 놈들은 결코 두렵지 않아. 난 이 도시에서 자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 도의 힘을 갖고 있지.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수많은 친구와 적들을 사 방에 뿌려놓았고, 그들 모두 내 손바닥 안에 있단 말일세." 그는 대통령이 자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잠시 뜸을 들였다. '써보게, 알랜 박사가 하이포인트에서 내 딸 치료를 다 끝내면 그애 가 정상적인 상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나? "맹세합니다." 그러자 상원의원은 한동안 그를 쏘아보았다. "데이텟, 내게 거짓말하지 않는 게 좋아. 만일 그랬다간 자네의 그 물건과 대통령직에 작별 키스를 해야 할걸세." 데이빗은 장인을 집무실에서 내보내고 나서 곧바로 컴퓨터를 켜서 스펜서의 휴대용 컴퓨터와 연결하는 암호를 쳤다. 아무 내용도 뜨지 않았다. 아무 것도! 스펜서의 기계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휴대용 컴퓨터의 프로 그램에 여러 가지 안전 장치를 걸어놓았다. 따라서 이렇듯 작동이 완 전히 멈춰버리는 경우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 한은. 만일 컴퓨터가 그의 걱정대로 정말 부서졌다면, 스펜서와 의 은밀한 통신 내용도 모두 소멸됐다고 봐야 했다. 그 컴퓨터 프로그 램에는 이런 비상 사태에 대한 대책까지 모두 입력돼 있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컴퓨터 시스템이 아니라 스펜서와의 연락 불 능 그 자체가 걱정이 되었다. 뭔가 지극히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의미했다. 스펜서는 퇴역하지 않는 한, 대통령과의 접속 장치를 스스 로 망가뜨릴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은 그레이가- "그레0] !" 데이빗은 마치 욕지기를 내뱉듯이 그 이름을 토해냈다. 성자(資料 그레이! 데이빗이 저지른 딱 한 가지 실수! 그레이를 측근으로 삼은 이유는 그의 냉정함을 무자비함으로 잘못 판단해서였다. 순식간에 맨 손으로 살인을 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나이가 그렇게 훌륭한 인간 일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레이의 도덕관은 마치 기름칠을 잘 채놓은 바퀴에서 삐그덕거리는 톱니 같았다. 그런 그레이 본듀란트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그는 그만 다른 사내 의 아내를 사랑하고 말았다. 바로 대통령의 아내를-. 데이빗은 스펜서와의 연락 두절을 그레이 탓으로 돌리고 보니 분노 와 두려움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씩씩거리며 시내 한구석에 자리잡은 어떤 사무실의 컴퓨터 단말기와 접속하는 암호명을 쳤다. 그쪽 컴퓨 터로부터 기밀사항 취급 허가를 받은 뒤 곧장 한 단어를 입력했다, '본듀란트' 그쪽 컴퓨터 단말기를 조작하는 사내, 즉 스펜서 최고의 비밀 대원 은 그 정도로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할지 금세 파악하겠지. 그리고 최대 한 빨리 와이오밍 주로 가서 그곳 상황을 체크하리라. 이제 데이빗은 가만히 앉아서 회답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아니,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비서실 에 ATF사무국 국장에게 전화를 걸라고 지시를 내렸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간 후 데이텟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자네 요원들은 어젯밤 듀퐁 광장에서 발생한 폭파 사건에 대해 뭣 좀 알아냈는가? 국장은 대통령의 흔치 않은 관심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즉 시 대답했다. "각하, 조사를 이제 막 시작한 상태라서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습니 다만, 아직까지는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습니다." "배리 트래비스는 메리트 부인과는 절친한 친구라네. 따라서 그 폭 발 사건으로 내 아내가 무척 불안해 하지.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지금 영부인은 자극을 받으면 안 되는 상황일세. 난 그녀에게 관계 당국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네. 그래서 말인데, 자넬 귀찮게 하긴 싫지만 내 사정이 어떤지 자네도 이해할 수 있겠지? 국장은 경계심이 약간 풀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물론이죠 이해하고말고요 메리트 부인께 조사는 순조롭게 진 행되고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사건을 종결시킬 수 있겠지? "그럼요 그 부분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습니다. 각하." "그렇게 해준다면 메리트 부인과 난 무척 고맙겠네. 그런데 오늘 아 침 자네 요원 중에서 트래비스 양과 얘기한 사람은 없었는가? 그녀의 심리 상태는 어떻던가? "유감스럽게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폭파 사건 이후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사건 직후 그녀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개가 그 사건으로 죽었기 때문이죠" "흐음, 거참 안됐군. 그나저나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계속 연락 주 -나." "알겠습니다. 각하." 데이빗은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마음이 불안하기는 전화를 걸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스펜서는 그 폭파 사건이 백악관까 지 의심받지 않도록 단단히 조치를 취했을 터였다. 그럴지라도 조사 가 형식적인 수준에서 끝날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두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오늘은 정말 골치 아픈 아침이군. 장인의 위협에 대해선 1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상원의원은 자신이 떠벌리는 것처럼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자랑하는 친구 나 적들의 대부분은 이미 은퇴했거나 망령들었거나, 혹은 저 세상 사 람이 된 지 오래라서 인기 절정의 대통령에게 파멸을 안겨줄 능력조 차 없는 이들이었다. 게다가 상원의원은 구린 구석이 너무 많아 대통령을 해치려 하다간 자신이 먼저 다치기 십상이었다. 막말로 클리트와 데이빗은 '옷장 속 해-곯평범한 부인이 실은 밤마다 남편에게서 옷장의 해골에게 키스하라고 강요당한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 소문날까 두려운 집안의 수치를 의미 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겉으론 위협을 해도 옷장문을 열 고 그 해골들을 외부에 공개할 리 없었다. 그렇다 해도 장인은 딸이 잘 지내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만족하기 전까지는 계속 바네사의 일로 해서 데이빗을 괴롭힐 판국이었다. 어 서 빨리 장인의 염려를 가라앉힐 조치를 취해야 했다. 오늘 늦게라도 스펜서와 의논해서,-, 커다랗게 욕지기를 터뜨렸다. 오늘따라 스펜서가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대체 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차마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사내를 보면서 두려움에 떤 적은 없지만, 아직도 그가 그런 짓 을 저질렀다는 걸 믿을 수가 없군." "그는 손쉽게 그런 짓을 저지를 위인입니다." "누가 슁게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거죠? 배리는 데일리와 그레이 본듀란트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부겨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자신도 커피 한 잔 따라 그들이 둘러앉아 있는 식 탁에 합석했다. 그러면서도 애써 그레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예언 한 대로 단잠을 이룬 탓이었다. 데일리는 그녀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나서 대답했다, "그레이는 지금 우리의 대통령이 영아를 충분히 살해할 위인이라 고 날 설득하고 있어." '치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에 대해 난 아무런 증거도 갖고 있지 않 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 얘길 듣고 날 과대망상증이나 편집증 환 자, 혹은 거짓말쟁이로 생각한다 해도 할말이 없소" "반대로 우린 당신을 믿을 수도 있죠" 그레이는 배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날 아침 처음으로 그녀 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려 황급히 눈을 내리깔아 커피 속의 크림을 휘젓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척했다. '거디 한번 그 얘기나 들어보자구." "인질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데이텟은 내게 인질들을 구조하도록 특공대를 조직해 지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가 내게 그런 임무를 맡긴 데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죠'' 데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었잖소? "그럴 자격을 갖춘 인물은 나 외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독 날 지명하여 그곳으로 보낸 까닭은 날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바네사와 당신 사이의 소문 때문이었나요? 배리의 질문에 그레이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렇소 난 서른 명의 대원들을 추렸습니다. 그들은 해병대 정찰대 중에서 가장 우수한 대원들이었죠 그 청년들은 당신들 몰래 접근하 여 당신들이 눈치챌 틈도 없이 당신들의 눈썹을 뽑아낼 정도로 가공 할 전투력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우린 페르시아 만의 항공모함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적진의 상공으 로 날아갔죠 F16편대의 비행기들이 적의 이목을 끄는 틈을 타 우린 그곳에 비밀리에 착륙했습니다. 그후 대략 5킬로미터를 걸어서 문제 의 도시 안으로 침투했소 그곳의 악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 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예산을 전쟁을 위해서만 쓰고 있었고, 공중위 생이나 삶의 질 같은 것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 도시는 역사적인 유물들과 폐허가 된 시가지가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보부가 우리에게 알려준 감옥의 위치는 매우 정확했고 우리 역시 그곳에 침투할 방법을 이미 잘 습득한 상태 였습니다. 예전에 그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우리 정부에 그곳 지도와 보안 상태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죠 그곳 보안 상태는 그리 복잡하거나 조직화돼 있지는 않았지만, 경비병들은 모두 중무장한 군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이미 인질들이 갇혀 있는 방의 위치까지도 정확히 파악해놓고 있었조=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 이 사전에 그와 비슷한 지형 지물로 충분히 연습을 해두었고 작전에 따른 모든 행동에 대해 시간까지 맞출 정도였습니다. 처음엔 모든 일이 척척 들어맞았습니다. 가장 먼저 우린 쥐도 새도 모르게 보초들을 해치웠습니다. 우리 부대가 인질들을 찾아내면 그들 이 흥분에 빠져 소란을 피울까 걱정했는데, 모두들 예상 외로 아무 말 없이 우리의 수신호에 따라주었죠 인질들 모두가 영양부족과 질병으 로 매우 허약해져 있었고, 그중 두 명은 부상을 입은 후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걸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계획이 어긋나기 시 작했죠 우리가 미리 짜놓은 탈출로를 따라 어떤 감방으로 들어가 보 니, 뜻밖에도 여러 경비병들이 소년 죄수를 끌어다놓고 번갈아가면서 욕을 보이고 있더군요 그 방은 원래 경비병들이 있을 장소가 아니라 서 마음놓고 그곳으로 들어갔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린 거죠 순 식간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쌍방 간에 총탄이 빗발쳤구 그 와중에 내가 가장 먼저 죽인 사람은 바로 그 소 년이었죠" 그레이는 잠시 수렁 같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배리쓱 데일리는 숨 소리도 내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아,,,,, 그 소년은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였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엄지와 가운데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소년의 넓적다리 뒤쪽을 타고 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더군요 바 닥에도 소년의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죠 그 소년은 창자가 탈장이 된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 개자식들--. 어쨌든 소년은 처절하게 울부짖 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도 죽지 못해 처절한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겁니다. 난 즉시 소년을 쏴버렸습니다." 그레이는 눈물이 괸 눈을 치켜들고서 커피잔을 들었지만 입에 대지 는 않았다. 그저 그 우악스런 손으로 커피잔을 움켜잡았을 뿐이었다. "우린 그 성도착증 괴물들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었지만, 동시에 우 리측도 피해를 입었죠 얼마나 많은 복도를 빠져나가야 할지 순식간 에 까맣게 잊었습니다. 인질들도 냉정을 잃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우린 그런 똥구덩이 같은 곳에서는 결코 죽고 싶지 않았습 니다. 마침내 기적적으로 그 감옥을 빠져나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곤곳 군대도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더군요 우린 미국을 증오하 면서 총질에 광분한 군대에게 포위되고 만 것입니다. 그 미친 놈들은 우릴 죽이려는 욕심에 미쳐 있다 보니 움직이는 건 무엇이든, 심지어 같은 편끼리 쏘아댔습니다. 우린 그 와중에 일시적으로 총탄을 피할 엄폐물을 찾아내어, 곧바 로 헬기를 타고 탈출할 수 있는지 무전으로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헬리콥터들은 예정된 장소보다 더 가까운 곳까지 올 수 없는 상황이 었습니다. 만일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왔다가 격추되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가 황천행이 될 건 뻔한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우리측 대원이 정찰을 나갔다가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골목을 발견했습니다. 어디와 연결되는 골목인지도 모르고 그곳으로 무작정 뛰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겐 감옥을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죠 하지만 우리가 그 골목에 들어선 순간, 지붕 위에서 저격병들이 우 리에게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습니다. 대원들은 저격병들을 귀신 같은 솜씨로 처치했지만, 5분 후 우린 어떤 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있 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레이는 배리와 데일리의 눈을 뚫어질 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당시 아파트 건물 창문 쪽에서 저격병의 총탄이 날아와 우릴 엄폐 물 뒤에 묶어놓았죠 대원 중 누군가가 녀석을 미사일로 끝장내자고 했지만, 자전에 데이빗은 되도록이면 민간인에게 피해가 없도록 하라 고 지시를 내린 터였죠 데이빗은 우리의 행동이, 전세계적으로 사악 한 자들의 전투 의지에 불을 당기는 공격적인 작전이 아닌, 단순한 구 조 작전으로 끝나길 원했던 겁니다. 결국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누군가 미끼가 되어 저격병이 총을 쏘도록 유인하는 순간, 우리측 명사수가 그를 명중시 키는 것뿐이었죠 그때 난 그 미끼가 되기로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난 저격병의 목표물이 췄고 내 부하들은 그때를 틈타 저격병을 생포했 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역전되는 순간, 내 부하 중 하나가 저격병이 아닌 내게 암살용 소총의 총부리를 겨누었죠 그의 이름은 '레이 가레트'였습니다. 알라바마 출신의 체격이 크고 뼈대가 굵은 사내였죠 난 루이지애나가 고향이라, 같은 남부 출신인 우린 곧잘 남부에 대해 농담을 나누곤 했습니다. 자연히 난 그를 선택 했고 함께 전략을 의논하고 훈련을 했는데, 그런 그가 결정적인 순간 에 날 죽이려고 한 겁니다. 바로 직전, 우린 서로 눈길이 마주쳤죠 그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에 의심을 품었던 게 분명 했죠 그 한순간의 머뭇거림이 내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가 방아치를 당기는 걸 잠시 미루는 사이에 적의 저격병이 그를 쏘고 말았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허공을 노려보다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들도 그후의 얘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이후에 우린 여섯 시간의 사투 끝에 헬기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우린 가궤 트의 시신까지 들고 왔구 덕분에 그는 영웅으로 추대되어 이 땅에 묻 혔습니다." 이윽고 배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나긴 침묵을 깨면서 물었다. '저잼 당신이 틀렸을 수도 있죠 경황이 없다 보니 착각해서------." "그 당시 그의 의도는 분명했소 그는 내게 불과 3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단 말이요 다른 대원들은 그의 행동을 미처 보지 못했지만 난 똑똑히 보았소" 데일리가 그 말을 받았다. "배리,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이 저지른 대실수를 잊은 거야? 대통령 은 작전 때문에 한 미국인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했다면서 그레이 본 듀란트 씨에 대한 추모사를 발표했잖아? '저머나, 그걸 잊고 있었군요 그레이, 당신의 성공적인 귀환으로 전국은 열광의 도가니로 돌변했고. 그 와중에 그 대실수에 대해 아무 도 관심 갖지 않았죠 하지만 당시 난 그 일이 달톤 닐리에게 그 얼마 나 당혹스런 사건이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달톤은 기자 회견장에서 작전의 성공과 인질들의 무사 귀환을 발표한 후, 당신이 조국을 위해 최고의 희생을 치렀다는 대통령의 짤막한 담화문을 낭독 했죠 대통령은 그 추도문에서 그레이 본듀란트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군인이자 애국자, 그리고 좋은 친구였다고 말했 어요 그 말이 낭독되는 동안, 기자회견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시을 을 적셨답니다." "데이빗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얘길 듣고 자신의 암살자가 날 죽 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거요 사실도 확인해보지 않고 준비했 던 성명서를 낭독시킨 거지." "그들은 그 젊은이가 매수 가능한 인물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 을까.Q?" "난 레이 가궤트가 돈에 매수됐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레이의 그 말에 두 사람은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가레트는 돈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할 친구가 아니오 난 스펜서 가 대통령의 전령으로서 그에게 접근해 나, 이 그레이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 스파이, 배신자라고 부추겼을 거라고 확신하오 가레트는 단순한 하수인이 아닌 훌륭한 해병대원이었소 다시 말해 서 내게 총을 겨눈 건 전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이행하고 있었을 뿐 이오 그외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조차 그가 날 배신할 동 기는 될 수 없었소 난 그를 비난하지 않소 그는 단지 데이빗과 스펜 서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지. 가레트를 죽인 사람은 적군의 저격병 뿐 만 아니라, 바로 데이빗과 스펜서이기도 하요" "그 문제로 대통령과 맞붙을 생각은 없었나요? "물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수 배리, 그러나 섣불리 그를 건들였다간 내 손에 쥔 카드만 다 내보이고 더욱 큰 피해를 입기 십상이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은 백악관을 도망치다시피 서둘러 빠져나왔잖소? 데일리의 예리한 질문에 그레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개통령이 무서워서 일을 그만둔 게 아닙니다." 그러자 데일리가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亨심코 나온 말이니까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시요" "내가 백악관의 일을 그만둔 까닭은 더 이상 데이뎃 메리트를 섬기 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그에겐 성가신 존재잖소? 게다가 와이오밍 은 백악관에서 그리 멀다고 할 순 없지." '거-이빗은, 내가 자신에 대해 손금 보듯 훤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 다. 우선은 가레트 문제가 그렇고, 이젠 바네사의 아기 문제로 더욱 더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죠 결국 그는 나라는 골칫거리를 단번에 해 결하려고 스펜서를 보낸 겁니다." 배리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문01011_~~1 "당신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벌어질 상황이었소 사실 오래 전부터 그 일이 닥치길 기다렸지. 데이텟은 내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 가 영웅으로 추켜세워질 무렵엔 감히 날 제거할 수 없었소 그래서 그 는 국민들의 환호와 찬사를 나와 함께 나누고 즐거워한 거요 그러나 일단 국민들의 관심이 내게서 멀어지자, 이젠 사람들의 이 목을 끌지 않으면서 날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요 배리, 당신이 있든 없든 그가 날 죽이는 건 시간 문제였소" "자, 무엇이 문제인진 알았어. 그럼 이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 겠소?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진 않았지만, 이 짧은 여생을 대통령을 파멸시키려 한 죄로 연방 교도소에서 끝내고 싶진 않거든." 그레이가 데일리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되받았다. "일단 아기에 관한 진상이 세상에 밝혀진다면 현 정부는 자연히 괴 멸하게 돼 있습니다." 배리도 얼른 맞장구쳤다. (L동감이에요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거예요 하지만 지금 내가 걱정 되는 건 바네사예요 이 순간에도 대통령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 재는 바로 바네사이기 때문이죠" 난 애당초 바네사의 '요양'을 조금도 믿지 않았습니다. 데이텟은 그녀를 어딘가에 가둔 겁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데일리가 물었다. "그레이, 대체 그 이유가 뭐요? 그녀에게 겁을 줘 아기가 죽은 진짜 원인에 대해 입을 다물게 하 기 위해섭니다. 난 지금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습 니다. 그가 볼 때 바네사는 당연한 대접을 받고 있는 거죠 그는 그 모든 일이 그녀가 자신을 속여서 그녀 스스로 초래한 일이란 생각을 끊임없이 그녀에게 강요하구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설득 방식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죠" '썰득 방식이라노? (L나도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소, 배리." "대체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어떻게 된 거요? 데일리가 화제를 돌리자 그레이가 스스럼없이 되받았다. (L그건 내가 알고 싶은 부분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좀더 파악하기 전 까진 일단 그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독자적으로 일을 해나가고 싶군요" "그게 대체 무슨 일인데요, 그레이? "그냥 계획들을 세우고 있을 뿐이오." 그는 그 계획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밝히고 싶지 않은 눈 치였다. 그때 데일리가 나섰다. "원한다면 이 집을 얼마든지 당신 작전 본부로 활용하도록 하시오" "고맙지만, 난 당신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데일리가 껄껄 웃었다. '재가 잃을 게 뭐가 있겠소? 게다가 이곳은 안전하오 아무도 당신 이 이곳에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할 거요" 그레이는 배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어젯밤에 그렇게 말하더군요" '개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친구 사이인 걸 비밀로 해두고 있소" "그 이유가 뭡니까? 배리가 야멸차게 딱 잘라 말했다. "그건 데일리와 나와의 문제예요" '저쨌든 그레이, 당신은 내 말을 믿어도 좋소 이곳은 당신에게 가 장 안전한 장소가 될 거요" 데일리의 얘기가 끝나자 그레이가 배리에게 물었다. "당신 일은 어떻게 되는 거요? 데일리가 배리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이미 직장에서도 곤란에 처해 있소 연방 수사국 요원들이 그곳에서 그녀에 관해 탐문하고 다닌다더군." 그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정상적인 요원들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 스펜서 부하들 이죠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모든 부하들을 위장시키고 있습니다. 배리, 방송국에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소? "난 이 내용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친구는? "데일리를 빼놓고는 아무도 없어_Q-" "애인은? 그녀는 그 질문 속에서 비웃음이 담아 있음을 느끼며 간략하게 '없 다'고 대답했다. "잘됐군.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소" '지난밤 이후로 나도 곰곰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메리트 부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는 배리도 꼭 꼭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절대적으로 찬성입니다." 그레이가 배리에게로 돌아섰다. "여기서 데일리와 함께 몸을 숨기고 있으시요 이 일은 나 혼자 조 사하겠소 단, 약속하-소 무슨 단서가 생기면 당신에게 가장 먼저 알 려주겠다고 말이오" "당신들이 뭘 어떻게 한다구요? 아이구, 이거 고마워서 정말 눈물 이 나을 지경이군요." 그녀는 두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당신들 두 사람은 마치 내가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말을 하는군 요 심지어 내 계획까지 대신 짜주고 말예요 고맙긴 하지만, 당신들 제의는 절대 사양하겠어요 나도 다 계획이 있다구요 그건- '피송합니다만 아가치, 이곳은 제한 구역입니다." "하지만 이 집은 내 집이에요 난 배리 트래비스라구요" 그녀의 예상대로 그 말은 마법의 지팡이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주변을 서성이며 아무에게서나 기삿거리를 찾아 헤매던 기자들이 카메라맨들을 데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에서 그녀에게 로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이웃사람이나 목격자들의 인터뷰에서는 더 이상 건질 게 없었다. 모두 다 그게 그거였다. 가능하면 모든 각도에서 사건을 추적해봤지 만 새로운 기삿거리가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당국에서도 폭발 원인 을 밝히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특히 ATF사무국 요원들은 입에 자물쇠를 달았는지 아무 정보도 제공해주질 않았다. 그런데 행방을 알 수 없던 배리 트래비스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 러니 그녀에게 마이크와 비디오 카메라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자, 여러분도 보다시피 내 집은 완전히 파괴췄어요 이젠 이것밖엔 남은 게 없죠" 그녀는 두 손을 확 펼쳤다. "그러나 가장 큰 손실은 바로 내 애완견, 크롱카이트가 죽었다는 거 - "폭발 사고 이후로 어디에 있었습니까? '개 이제껏 나타가지 않았던 거죠? "폭발 원인에 대해 뭣 좀 아시는 게 있습니까? 그녀는 한 손을 치켜들어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가로막았다. "난 폭발 원인을 밝히는 일은 당국에 맡겼습니다." "단순히 사고였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그 질문의 뜻이 애매모호하다는 듯이 의아한 눈초리로 그 기자를 쳐다보았다. "물론 사고였어요 거기메 어떻게 다른 원인이 있겠어요? 당국의 조사가 끝나면, 그때 가서 사고 원인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 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레이는 스펜서 마틴이 일을 그렇게 처리해 두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 이제 그만 실례,) 기자들은 폭발이 일어날 당시 그 자리에 그대로 주차돼 있던 그녀 의 자동차까지 쫓아왔다. 개중에 찰거머리 같은 이들은 방송국까지 쫓아왔지만, 그녀는 방송국 주차장에서 차를 세워두고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그들을 민첩하게 피해갔다. 결국 그들은 방송국 출입구에 배 치된 청원 경찰에게 가로막혀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1시간 전 그녀는, 숨어 있으라는 그레이와 데일리의 충고를 거부하 면서 이렇게 말했지. '난 결코 남몰래 숨어다니진 않을 거예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런 다고 해도 전혀 효과가 없기 때문이죠 만약 당신 말대로 스펜서 마틴 의 정보 조직이 그렇게 이 나라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다면 내가 어디 에 숨어 있든 결국은 찾아낼 거예요 둘째루 내 직업은 사건을 보도하는 일이죠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사건에 휩싸이고 말았어요 그러니 현재의 유명세를 내 직업에 활용 하지 알는다면 그야말로 내가 미친 게 아니겠어요? 세번째로, 내가 공개적으로 나다닐수록 또 다른 치명적인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레이, 당신이 앞서 말한 대로내가사람들 의 주목을 받는 한, 대통령은 결코 날 해치지 않을 테니까B. 데이빗은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에요 또다시 내 생명을 위협 하는 '사롸 따윈 일으키지 않을 거예요 그런 짓은 제아무리 순진한 사람도 수상쩍게 여길 게 뻔하니까. 자, 신사 여러분! 난 외부에 노출 될수록 안전하답니다.' 잠시 후 그녀가 방송국 안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마른 들판의 불길 처럼 사방으로 삽시간에 번져갔다. 하위는 여느 때와는 달리 신속하 게 그녀의 자리로 달려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리고 곧바 로 인상적인 인사말을 던졌다, '개리, 우린 자네가 통구이 신세가 된 줄 알았는데, 이거 뜻밖이군? '씰망시켜 드려서 미안하군요" '치금 자넬 최대한 신사적으로 대하고 있는 줄이나 알라子."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왠지 이빨빠진 호랑 미처럼 굴고 있으니까. "오늘 밤 저녁 뉴스 시간에 특종 사건에 관한 단독 인터뷰를 방송 하는 게 어떻겠어요? 바로 나와의 인터뷰 프로죠 지금 내 모습 그대 로 방송에 내보내는 거예요" 그녀는 전날 밤에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꺼때요? 보다시피 가련하고 불쌍한 모습이죠? 이런 내 모습을 크 게 잡으면 시청자들에게서 눈물 한두 방울쯤은 쉽사리 뽑아낼 수 있 을 거예요" 그러자 가느다란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거 정말 기차겠군? "그리고 내일부터 내가 그 후속 뉴스를 기획 보도하는 거예요 기사 중에 누군가와 사별해야 했고, 또한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비켜간 심 정을 담은 비극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문장들을 넣는 거죠 일단 난 충격의 피해자들을 상대하는 성직자와 십리학자들을 찾아가 보탬 이 되는 얘기들로 내용을 구성할 작정이에요 그러다가 주말쯤엔 당 국에서도 폭발 원인에 대해 발표하겠죠" "그렇게 빨리? '재 생각엔 이번 조사는 길게 늘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는 그에게서 고개를 외면한 채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저쨌든 난 그들의 결론을 듣고, 그들이 단서들을 짜맞춰 사건을 재 구성하고 폭발 원인을 알아낸 과정에 대해 보도할 거예요" "우아! 자네 정말 대단하군! 이거 장난이 아닌데? 그는 혹시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어깨 너머를 힐끔거렸다 '지러다가 이번 사건이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 -군. 혹시 누군가 자네가 추적하는 특종 사건 낌새를 눈치챈 건 아니 야? 자네가 조사하는 사건이 이번 폭발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냔 말일세." "하위, 실베스타 스텔론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군요 그 둘은 절대 관련이 없어요 내가 추적하는 특종 사건이라구요? 우와? 그녀는 집짓 과장되게 깔깔거렸다. "그게 아무리 엄청난 사건이더라도 내 눈앞에서 집이 폭발한 일과 어떻게 비교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젠킨스 씨에게도 마음 놓고 있 으라고 전해주시구요 난 이미 죽음과 마주쳤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누구든 그런 경험을 겪으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답니다." 그녀는 손가락을 '탁' 퉁겼다. "이제부터 당신은 전혀 다른 배리 트래비스를 보게 될 거예요" 그레이는 그녀가 서툰 거짓말쟁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면 그가 잘못 판단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정말 뿌듯하군." 하위가 가슴을 쭉 폈다,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내가 조금만 더 자네를 돌봐주면 자네의 그 작고 예쁜 엉덩이가 제대로 활짝 피어날 거라고 말야." 배리는 겉으론 환심을 사려고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론 이를 바드득 갈았다. 데이빗은 백악관 안에 있는 대통령 전용 체육관에서 좌절감을 운동 으로 풀고 있었다. 그곳에 놓여 있는 다양한 헬스 기구들을 정복해야 할 적으로 생각했다. 롯등과 귓불, 턱, 손끝에서 땀방울이 비오듯이 홀 러내렸다. 기력을 최대한 모으자 잘 발달된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다. 와이오밍으로 급파된 심부름꾼이 오늘 아침 일찍 컴퓨터로 그에게 보고를 해왔다. 그의 보고는 데이텟이 듣고 싶어했던 내용이 아니었 다. 현장 조사 결과, 스펜서가 그레이 본듀란트의 집에 들리지 않은 것으로 나왔다. 대통령이 그 부분에 대해 본듀란트가 뭐라고 말했는 지 입력하자 그 심부름꾼은 두 번째 폭탄을 터뜨렸다. 그곳에선 본듀 란트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데이빗은 그 보고 내용을 샅샅이 훌었지만 스펜서가 그곳에 갔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다만 스펜서는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신중하고 은밀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또한 그레이 역시 어떤 절박한 동기가 없 이는 결코 사라질 인물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 점을 근거로 스펜서 가 그레이를 없애버리기 전에 그레이가 먼저 스펜서를 없애버렸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만일 추론이 맞다면 그레이는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추리의 결론은 이곳 체육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 져야 할 만큼 너무나 엄청나고 실망스러웠다.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짤 시간이 필요했다. 그레이가 대통령과 싸우는 것을 겁낼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백악관에 도전했다면 벌써 겁에 질려 벌벌 떨게 뻔하지만, 그레이는 맞붙는다 해도 기죽을 위인이 아니었다. 또한 포기하거나 도망갈 인 물도 아니었다. 그레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그 어떠 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끝까지 주장을 고집했다. 그의 신념은 '지브 롤터(스페인 남단의 항구도시로 영국 식민지-만큼이나 견고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고지식함은 데이빗이 그를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 이기도 했다. 데이빗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자신들 세 사람에 대한 원대한 계획 을 세워두었다. 그 자신은 의회와 국가에 무엇이든 확신시킬 수 있는 충분한 지배력과 권위, 그리고 정치 수완을 타고났다. 스펜서는 그들 삼인조 중에서 무자비한 폭력배였다. 그에게 정당성이란 필요치 않았 다. 그저 일을 능률적이고 확실하게 수행하면 그만이었다. 반면에 그 레이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언제나 상황을 모든 각도에서 분석하여 최선의 방책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들 세 사람이 뭉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레이가 바네사와 눈이 맞아 양심의 가책을 받기 전까진 그랬다. "염병할 자식? 데이빗은 헬스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수건을 집어들었다. 얼굴과 목덜미를 수건으로 닦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 오게." 비밀 경호요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 옆에는 뜻밖에도 그 레이 본듀란트가 따라 들어섰다. 경호요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했다. "각하, 뜻밖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데이텟은 콘크리트 도로의 한 구획에 균열이 생기듯 얼굴에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이! 맙소사, 이거 정말 뜻밖이군? 그레이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은 언제나처럼 얼음 동굴 이었다. "그간 너무 오랫동안 연락도 못해 이렇듯 뜬금없이 찾아왔네." 그레이는 데이텟의 모습을 한번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각하, 이제 우리 국민들이 편안히 발뻗고 잠잘 수 있을 것 같군. 대통령이 국내외의 모든 적을 혼자서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만큼 이리 튼튼하니 말일세? 그들은 악수를 하고 서로의 등을 두드리면서, 몸짓으로 나타내는 말을 맞추는 제스처 게임을 연출했다. 그들의 행동은 경호요원에게 두 사람의 우정을 의심받을 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항간에 떠도 는 그들 사이의 불화에 대한 소문은 절대 근거 없는 듯이 보였다. 그 레이가 백악관을 떠났을 때도, 겉보기에 그들의 우정은 언제나처럼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인질 구출 작전의 화려한 성공은 그 우정을 더 욱 더 견고하게 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데이빗은 자신의 격노를 감추려고 연기력을 최대한 짜내야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전문가에게 허를 찔린 꼴이었다. 방금 탁 월한 전략가그레이를 생각하던 중이었잖은가? 그레이는 겉으론 순진 한 척하면서, 사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교묘하게 감친다. 와이오 밍 주의 산으로 들어갔을 때 역시 예고도 없었고 무장 해제한 상태였 다. 백악관 비서진들은 그를 잘 알고 있어 수상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친구로서 대통령을 찾아왔으니 얼마나 멋진 사내인가! 순간 데이텟은 그레이가 주도하는 대로 게임을 따라가자니 분통이 터졌다. 최소한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그럴 수밖 에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데이빗이 음료수 진열대로 가면서 물었다, "뭘 마시고 싶나? "아무 거나 괜찮네." 데이빗이 오렌지 주스 두 잔을 갖고 돌아왔다. "나원,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 그러고는 그레이와 잔을 부딪쳤다. "운동을 방해한 게 아닌지 모르겠군." "아닐세, 그렇잖아도 곧 그만두려던 참이었지. 몸도 이젠 예전 같지 않더구먼." "못 믿겠는걸? "잠시 욕조에 들어가 있어도 되겠나? "그럼, 얼마든지? 데이빗은 곧바로 반바지를 벗고 김이 모락모락 피오르고 거품으로 뒤덮인 소용돌이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아하, 기분이 상쾌하군. 자네도 들어오지 않겠나? "아니, 난 괜찮네." 그레이는 소용돌이 욕조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았다. "자네 머리가 예전보다 더 희끗희끗해진 것 같군, 그레이." "유전이지. 내 아버지도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앴다는 얘길 하지 않 았던가? 근본적으루 그레이 본듀란트는 변한 것이 없었다. 몸은 여전히 탄 력이 넘치고 강인했으며, 표정은 예전처럼 강철 같은 의지를 보였다. 이동식 주택에서 백악관까지 출세한 사나이에게 질투심이란 좀처럼 드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에 대한 그의 증오심은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 외모면에선 그레이보다 데이빗이 훨씬 더 근사했다. 어쩌면 지적인 면도 앞설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부분도 그레이보다는 더 강인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상대가 그 누구든지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들여 다볼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과 도덕관이 투철했다. 그들이 갈라서기 훨씬 이전부터도, 이를테면 함께 군대에 있을 때도 그레이와의 눈싸 움에서 먼저 지는 쪽은 데이빗이었다. 데이빗은 그레이의 원칙들을 경멸했구 명예와 도의심, 그리고 고귀한 가치관을 신조로 삼는 그의 모습에서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그레이에게 부여하는 강인함을 질투했다. "자넨 아직도 배가 편편하군. 촌구석인 와이오밍에 살아도 약골이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그곳은 살기 힘든 고장이지. 내가 워싱턴에서 근성을 기르지 못했 다면 결코 견뎌내질 못했을걸세." 데이빗이 낄낄거리면서 되받았다. "난 자네의 그 유머 감각이 그리웠다네. 감정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데도 내 배꼽을 잡게 만들거든," 그러더니 장식 타일로 뒤덮인 욕조 테두리에 양 팔을 걸쳤다. 그리 고 그 대답은 이미 알 것 같았지만, 아무 내색 않고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워싱턴에는 무슨 일로 온 건가? '져자 때문일세." 그건 데이빗으로선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이었다 그레이는 다시 한 번 그의 의표를 찔렀다, 데이빗은 웃음으로써 당혹감을 감췄다. '써자라고? 어떤 여자가 감히 멋지고 힘센 총잡이, 본듀란트를 쓰 러뜨렸는가?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로군." '쌔석하지만 사실이라네." 데이빗은 '끙' 하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제발, 자네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말로 자네에 대한 내 인상을 망가뜨리지 말게나. 자넨 '아흔 살 먹은 노인네'처럼 변하지 않았어. 나 역시 그러길 바라네." 그레이는 어설프게 미소를 짓다가 얼른 거두었다. "물론 난 변하지 않았네. 그래서 더욱 더 그녀는 내게 딱 어울리는 상대지. 그녀는 일단 보기에 좋고, 포르노 영화에서나 나을 법한 목소 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머리가 안 좋다네." "그 불가사의한 아가씨도 이름은 있겠지? "배리 트래비스라네." 데이빗은 무심결에 움찔거렸다.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그녀는 미운 오리새끼 같은 여자라네. 물 론 목소리 하난 정말 자극적이더군. 얼굴도 그만하면 반반하고, 몸매 도 좨나 잘 빠진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레이, 이 친구야, 그녀는 말썽 꾸러기야. 만일 육체 관계 이상으로 발전하면 자넬 꽉 붙잡고 놔주지 않을걸세. 그러면 자넨 결코 그녀를 떨쳐버릴 수 없을 거야. 자넨 지금 누구와 즐기고 있는지 알고 있나? "물론, 난 지금 그녀와 즐기고 있는 중일세," 두 사람이 호색한들처럼 한바탕 킬킬거리다가 데이텟이 다시 말문 을 열었다. "물론 그것도 아주 나쁘다곤 볼 수 없지." -날 목장에서 이곳까지 다시 불러낼 정도로 정말 꿀맛이었다네." '기곳엔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 생각인가? 그레이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야 그녀를 충분히 맛볼 때까진 있어야겠지." 데이빗은 주스를 다 마시고 빈 잔을 타일 위에 올려놓고는 온탕에 서 나왔다. 그러고는 타월로 허리를 감싸고 그레이 옆으로 의자를 끌 고와 자리를 잡았다. 옛 친구와의 대화는 방금 빠져나온 온탕보다 더 몸을 뜨겁게 했지만, 그 기회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만일 그레이 가 우정 어린 재회의 코메디를 계속하고 싶다면 기꺼이 응할 마음이 었다. 연기력에서만큼은 그레이보다 훨씬 더 뛰어나지 않은가? 이미 그 방면에 숱한 경험을 쌓아온 터였다. 대체 그녀와는 어디서 처음 만난 건가? 그 흥미진진한 얘기를 빠 짐없이 듣고 싶구먼." L(그녀는 내가 사는 곳까지 추적해 왔다네. 지난주 어느 날 난데없이 내 집에 나타났지," "왜 나타난 거지? -기삿거리 때문이라네. 기존의 기삿거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 고 싶어서였지. 그녀는 인질 구출 작전에 대한 추적 조사 뉴스를 기획 하고 있었다네." -그래서 설마 색 꺼지라고 한 건 아니겠지? 자넨 기자들을 싫어하 잖나? "난 그녀의 직업과 섹스를 하진 않는다네, 데이빗." 데이빗이 왁자껄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아는가? 또다시 썰렁한 유머라구." 그러고는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방금 기억이 났는데, 어젯밤 그녀의 집이 잿더미가 췄더군." "그렇다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증스런 짓이지." "아침 뉴스 시간에 그녀가 나왔더군. 기자들에게 답변을 하는 모습 을 보니 여전히 기가 펄펄 살아 있던걸." "폭발 사건으로 더욱 자극받았기 때문이지." "그렇군. 그래, 자네 두 사람은 어디에 묵고 있나? 호텔? "아니, 친구집에 있다네." 배리 트래비스의 친구는 테드 웰시라는 전직 기자였다. 스펜서의 부재중에도 데이빗은 스펜서의 정보망을 퉁해, 욕실 가운 차림으로 집앞 잔디밭에 떨어진 조간 신문을 집어드는 웰시의 사진을 보았다. 보고에 따르면 그 늙은 별종은 폐기종을 앓고 있어서 숨이 언제 끊어 질지 모르는,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다. 트래비스와 웰시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였다. 그 두 사람 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한 웰시의 집에서 미국 대통령을 파멸시킬 음 모를 꾸미고 있다니! 정말 웃기는군. 언제든 맘만 먹으면 그들을 한 꺼번에 제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가 문제였다. 그가 그들을 지휘하는 한, 그들 삼인조 가 데이빗에게 가하는 위협은 결코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레이가 말을 건넸다. "친구로서 하는 얘기지만, 자네가 배리와 나 사이의 그 흥미진진한 내막을 알지 못하다니 정말 뜻밖이군. 스펜서가 자네에게 이미 말했 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돼서 그 역시 목장으로 날 찾아왔거든." 그 순간 데이빗의 미소에 금이 갔다. 세계 최고의 배우가 바야흐로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펜서는 휴가 여행을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사실 일 중독자 인 그를 떠나보내기 위해 왜나 공을 들여야 했지. 그는 가는 길에 자 네에게 잠간 들른다고 했는데 떠난 후로 아직 소식이 없다네. 혹시 그 가 와이오밍을 떠나면서 어디로 간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는 아무 계획도 언급하지 않았네. 자네도 스펜서를 잘 알잖나? 그는 대개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을 때 나타난다네. 내 집을 방문하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각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도착을 알리더군." 데이빗은 지금까지 스펜서가 아직도 살아 있으리라는 실날 같은 희 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살아 있지 않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스펜서는 죽었다. 그레이가 죽였다. 그래도 그 점에 대해 특별히 좌절하거나 상심하지는 않았다. 어쨌 든 스펜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 누구도 필 요 없었다. 하지만 곁에 두면 대단히 쓸모 있는 존재였다. 그만한 재능 과 맹목적이며 확실한 충성심, 복종심을 지닌 사내는 드물었다. 그리 고 더 나아가서, 그처럼 양심이 없는 사내는 아주 희귀한 존재였다. 그레이란 녀석. 자신에게서 그렇듯 귀중한 재산을 빼앗고도 뻔뻔스 럽게 눈앞에 나타나, 그 일을 마치 농담하듯이 뻔뻔스럽게 얘기하다 니! 데이빗은 그 괘씸한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주 신중하게 그 분노를 억눌렀다.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짓은 분별 력없는 행동에 지나지않았다. 게다가 그런다고 해서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룻에 담을 수도 없었다. 이제 와서 한탄하며 쓸데없이 정력을 낭비하는 짓은 비생산 적인 일이며, 약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 아닌가? 스펜서 역시 자신의 이런 태도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수긍했으리라.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 영부인은 지금 이곳에 있나? 그레이의 질문은 양치기의 지팡이처럼 깊은 상념에 빠진 데이빗을 콕콕 찔러댔다. -아니,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져전히 '지명을 밝힐 수 없는 모처'에 머물고 있는가? "그렇다네. 난 그 비밀을 지키기로 엄숙히 맹세를 했지." 그러자 그레"i는 허벅지 위에 괄꿈치를 세우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 다. 바로 데이빗이 즐겨 취하던 친밀한 자세이기도 했다. "데이빗, 난 이제껏 그녀를 죽 걱정해 왔네. 그녀는 잘 있는가? 이제 좀 솔직히 얘기해보게. 닐리가 언론에 발표하는 그런 새빨간 거짓말 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 바네사는 지금 진짜 어떤 상탠가? "자네의 새로운 침대 친구를 위해 대신 취재를 하는 건가? "우리가 한 침대에 있을 때 그녀는 인터뷰보다 훨씬 더 멋진 일을 해준다네." "그녀의 입이 꽉 차 있었을 테니 인터뷰는 어려웠겠지, 안 그런가? 그레이는 정도껏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금 갸름하고 훤칠한 얼굴에 진지한 기색을 띠었다. '재가 볼 때, 바네사는 아기가 죽은 이후로 정상이 아니었네. 지금 어디가 많이 아픈가? 데이텟은 순간 그레이를 목졸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울컥 치밀었 다. 녀석은 남의 아내를 건들였다. 녀석과 바네사의 관계에 대한 소문 은 이젠 잠잠해졌지만, 그렇기 되기까지 쉽게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바네사의 아기가자신이 아닌 그레이란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 또한 이 녀석은 어떻게 그 북극해 같은 푸른 눈빛에 아무런 사치의 뜻도 담지 않고 그 사생아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하지만 미합중국 대통령은 기적적인 의지력으로 분노를 애써 다스 렸다. 아무리 말솜씨가 능숙할지라도 그레이를 살해한 뒤, 그가 백악 관 대통령 전용 체육관 소용돌이 욕조에 빠져죽었다는 얘기를 언론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겁없는 스펜서조차도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를 법무부 장관과 국민에게 전할 순 없으리라. 그는 살인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레이, 사실 그 동안 우리도 무척 힘들었네. 바네사의 상태를 굳 이 따지자면 지나친 죄책감이라 하겠지. 완벽한 어머니가 되지 못하 교 아기를 살리지 못해 그런 증상이 나타난걸세." 나도 혹시 그녀가 그런 상태가 아닐까 걱정했다네. 내가 알기론 조 지 알랜 박사가 그녀를 치료하고 있다던데, 그 부분에 명망 있는 적절 한 인물인가? 아주 뛰어난 의사라네. 벌써 수년 동안 그녀만 치료해온 주치의지. 그녀를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데 뭐가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다네. 두고 보게. 그녀는 이번 위기만 극복하면 다시 좋아질 테니까," "나도 그러길 바라네." 데이빗이 벽시계를 홀낏 쳐다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레이, 만나서 무척 반가웠네. 우리의 만남을 이렇게 끝내긴 싫지 만 30분 후에 각료 회의가 있어서 말일세." "무슨 소린가? 자네와 이렇듯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게 되어 오히려 내가 더 운이 좋았네." 그레이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그와 악수를 나누면서 말을 이었다. "부디 바네사에게 내가 안부 전하더라고 말해주게나. 그런데 혹시 그녀를 찾아가 볼 순 없을까? "유감스럽지만 불가능할걸세. 요즘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지만, 클리트 상원의원을 만나는 것조차 거절했다네. 아참, 그리고 배리 트래비스에겐 집 문제에 대해 내가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해주게나." "알겠네, 그렇게 하지." 비밀 경호요원들이 체육관 문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대통령을 호위 하여 숙소로 향했다. 데이텟이 한 요원에게 말했다. "본듀란트 씨를 자동차까지 모셔드리게나." 그러자 그레이가 심드렁하게 되받았다. "아닐세, 그럴 필요없네. 나도 이곳에서 일했잖은가? 이곳 길은 훤 하게 케뚫고 있단 말일세." 대통령도 그레이처럼 무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그래도 내 말대로 하게. 우린 옛 친구들을 정중하게 대접하는 걸 좋아하잖나." 말투로 보아 대통령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데이빗은 전화로 조지 알랜에게 그레이 본듀란트의 깜짝 방문을 알 려주었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나 무척 즐거웠다고 말했지만, 조지는 그 말에 숨은 뜻을 예리하게 꿰뚫었다. 데이빗은, 그레이가 워싱턴을 슬 금슬금 돌아다니면서 로버트 루시톤 메리트의 사인을 조사하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조지는 그 아기가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었다고 몇 번이고 되 뇌었다. 운명의 그날 밤 집에서 소환을 받고 백악관의 육아실로 달려 가 보니 데이텟이 아기가 요람에서 죽어 있더라고 선언했고 조지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이면에 숨은 내막을 알고 싶지 않아 질문도 별로 던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지시대로 아기 장례식을 서둘러 진행했고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바네사는 참견하길 좋아하는 여기자를 이 사건에 끌어들였고 데이빗에 따르면 그 여기자는 그레이 본듀란트에 게 접근했다고 한다. 그 동안 데이빗은 육아실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 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약간 왜곡시켜왔음이 틀림없었다. 그런 상황 에서 그레이 본듀란트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 일에 의심을 품고 파헤 치는 게 영 못마땅했다. 대통령의 위선의 가면을 벗길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레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조지가 물었다. "흠, 그 기자는 어떻게 하지? 뉴스에서 보니 그녀의 집이 폭발로 인 해 폭삭 가라앉았더군." "나도 그리 들었다네. 불행한 일이지. 하지만 그나마 그런 개인적인 위기로 그녀의 관심을 우리 쪽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을걸세." 대통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그건 모두 다 바네사 잘못일세, 배리 트래비스의 집요한 관심도 모 두 다 그녀가 책임질 문제지. 만일 바네사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그 여기자도 우릴 귀찮게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대통령은 숨을 돌린 뒤 물었다. "오늘 바네사는 어떤가? 그렇게 해서 전화 건 용무로 점잖게 화제를 돌렸다. 조지는 당혹감 을 애써 억누르고 영부인의 최근 상태를 알려주었다. 데이빗은 조지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지시 내용을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 었다. 누구나 그의 전달 사항을 듣기만 하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 었고 조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대통령의 표적을 정리하는 날. 조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순 간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거리자 처절하게 몸서리를 쳤다. 요란한 천 등소리가 귓전에 울려퍼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에서 구역질이 일어났다. 아만다에게 전화할까? 건강하구 차분한 아만다. 그녀는 조지가 일 으키는 온갖 혼란의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잔잔한 섬 같았 다. 때때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희망이 샘솟는 듯했다. 비록 그의 미래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폐광 같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더욱 더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 를 왜 그녀에게 안겨준단 말인가? 결국 아내에게 전화하는 대신 신경 안정제를 먹었다. 그 지시는 여느 때 같으면 데이빗이 스펜서에게 맡겼던 추잡한 짓 거리였다. 스펜서는 이만한 일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킬 인물이 아니 었다. 신경 안정제도 먹지 않았으리라. 조지는 대체 데이빗이 어떻게 스펜서에게서 맹목적인 복종심을 이끌어내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 이 없었다. 아니면 그 반대인가? 다시 말해, 데이텟은 꼭두각시에 지 나지 않고 스펜서야말로 그의 조종자가 아닐까? 스펜서는 자신이 저 지른 짓에 대해 정말 아무 동기나 이유가 필요없는 작자일까? 아무래 도 이 추측이 가장 맞아떨어질 듯싶었다. 스펜서는 무자비하게 자란 인간이었다. 평생 여자를 사랑하거나 여 인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또한 사랑의 결실인 아기를 잉태시킨 적도 없거니와 꿈틀거리는 새로운 생명을 품에 안고 눈물어린 눈으로 아기를 내려다본 적도 없었다. 따라서 평생토록 죄책감이나 후회 같 은 감정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그런 점에서 조지는 겁쟁이일지 몰라도, 스펜서 마틴보다는 나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관념일 뿐이었다. 아무튼 요즘 스펜서는 어디 론가사라져버린 듯했다. 데이빗은 합축적인 말로, 그레이가 스펜서의 해명되지 않는 실총에 책임이 있다는 뜻을 비쳤다. 만일 그레이가 스 펜서를 죽인 게 사실이라면, 그 무자비한 녀석을 저 세상으로 보내기 전에 먼저 배아픈 고통의 교훈을 주었으면 좋으련만. 때맞춰 이 구역질나는 진흙탕을 빠져나간 그레이는 참으로 현명한 인물이었다. 문득 조지는 자신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 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레이가 '난 이곳을 떠나네,' 선언하더니,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리고 자선의 목에 스스로 올가미를 걸지 않았다. 반면에 조지는 그러지 못했고, 그 밧줄은 시시각각 목을 조여왔다. 그는 콧마루가 아플 때까지 꼬집다가 손을 내리고 장식 판자로 꾸 민 서재의 작은 문을 쳐다보았다. 또다시 찬두 시간 이곳에 앉아 하염 없이 그 문만 노려보다가 결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고 말겠지, 명령 을 곧바로 옮기지 않고 미루면 미룰수록 그 결과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테고 비열한 짓이라는 생각에 괴롭기만 하리라.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네처럼 비실비실 의자에서 일어섰다, 서재를 떠나 흘을 가로질러 걷는 동안,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무겁게 울려퍼 졌다. 병실의 공기가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제인 가스톤 부인은 환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헌신적인 간호사였다. 매일 아침 환자를 정성껏 목욕시키고 침대보도 자주 바꿔주었다. 하 지만 병실은 어디까지나 병실이었구 독특한 냄새를 지니고 있었다. 조지 알랜이 병상으로 다가갔다. '껸부인은 어떻소? 간호사는 환자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대꾸했다. '껸부인은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조지는 바네사를 건성으로 검진했다. 그녀의 얼굴을 애써 회피한 채 심장 박동수를 재보고, 기록부에서 혈압과 체온을 살펴보았다. 다 행히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도무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자신이 없었다. 만일 그리 한다면 다시는 아만다의 눈을, 심지어 자신 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껸부인은 아까 흥분해서 우셨어요 내게 일으켜달라고 애걸하시더 군요 알랜 박시럼, 영부인이 그렇게 원하시는데 난 도저히------." "충고 고맙소, 가스톤 부인." 박사님, 난 당신께서 훌륭한 의사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나 역시 낄가 훌륭한 의사라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는 간호사에게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더 이상 비전문가의 충곤 듣고 싶지 않군-a,가스톤 부인." "난 단지 환자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생각할 뿐입니다." "당신이 보기엔 내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소? L(물론 생각을 하시겠죠 하지만 난 지금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 -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어깨를 뒤로 확 젖혔다. -나도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쌓아온 숙련 간호사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계속 주제넘은 발언을 하고 있는 것 같소" 메리트 부定에게 진정제를 너무 많이 투여했어요. 그 점에 대한 내 의견은, -- 별안간 조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난 당신 의견을 묻지 않았소? L(하지만 리튬 투약량도 너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L당신도 연구소 보고서를 볼 수 있잖소? 그녀의 리튬 혈중 농도는 적정치를 유지하고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그 연구소와 그 보고서 내용을 전혀 믿을 수가 없군요? 조지는 심장이 사납게 방망이질쳐 숨이 턱턱 막혔다. 무릎이 엿가 락처럼 흐물거렸고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을 것만 같았다. 눈에 띄게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바뀌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굳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L가스톤 부인, 당신은 이제 이곳에서 일할 필요없소 어서 짐을 챙 겨 당장 떠나시요 오늘 밤 사람을 시켜 당신이 워싱턴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소"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부르르 떨었다. "날 해고한다는 뜻인가요? U당신은 더 이상 메리트 부인의 요양 프로그램에 적격한 간호사가 아니.P. 이제 당신은1)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완강하게 저으면서 바네사의 손을 잡았다. 난 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내 환자이기도 해요 영부인을 이런 상 태로 내버려두고 떠날 수 없다구요 당신이 내 솔직한 의견을 물어본 다면, 그녀가 중독 상태이며 흔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이라고 말씀드리 고 싶군.9_" -자진해서 가지 않겠다면 완력을 쓸 수밖에 없군." 그러고서 성큼성큼 방 안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 소리쳐 비밀경호 요원들을 불렀다. "배리 트래비스 양인가요? '거1,누구시죠? 뉴스 편집실이 시끌벅적해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힘들었다. 배리는 손가락으로 반대쪽 귀를 막 고 여인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이포인트를 아시나요? 배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곳이 어떻다는 거죠? '띤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안 돼_a,나도 몰라.9. 더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군.9_" 비탄에 잠긴 여인의 목소리가 손끝까지 전해왔다. "누군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해-9-" 그러고서 의문의 여인이 전화를 끊었다. 배리는 급히 전화 교환원을 불렀다. "방금 나와 통화했던 여자 말예요 혹시 누구이며 어디서 전화를 거 는 건지 밝히지 않았나요? "아누 그녀는 그저 당신과 통화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 여자도 1치광이던가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고마워요" 수화기를 내려놓자 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날 할 일은 모두 끝낸 상태였다. 저녁 뉴스 시간에 보낼 기사는 이 미 작성해 PD책상 위에 갖다놓은 터였다. 그러니 조금 일찍 퇴근한 다 해도 아허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시청자들에게, 특히 데이빗 메리트 대통령에게 집 을 잃은 뒤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긴 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대로 효과가 있는 듯했다. 배심원들은 아직도 그녀의 집 폭발 원인을 심리하고 있었다. 그러 나 폭발 원인이 그녀가 대통령과 영부인의 사생활을 침범한 행위와 관련이 없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징조가 뚜렷했다. 그녀는 보도국을 번개처럼 빠져나가면서 괴전화로 얻은 이번 근거 가 확실할 경우를 대비해 카메라맨와 함께 갈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다가 좀더 신중하기로 마음을 고쳤다. 우선 직접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서 기삿거리가 건질 만하다면 그곳에서 펼쳐지는 사걸들을 비디오로 찍으면 되리라, 하지만 먼저, 총에 맞지 않고 하이포인트로 잠입해 들어갈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오? 배리가 성마르게 대꾸했다. "그레이, 내가 방금 말했잖아요? 전혀 모르는 목소리였다구요? 데일리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개리, 저 친구를 화나게 만들지 마. 그는 단지 당신이 조급하게 떠 나지 않도록 그런 거니까." 배리는 데일리가 그레이 편을 들자 더욱 분통이 터졌다. "나와 함께 어서 빨리 떠나자고 그 누구에게도 요청하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그냥 이곳에 머물러 있어요 난 괜찮아요 후자서도 너끈히 그 단서를 추적할 수 있으니까요" '개리, 그 여자는 괴팍한 사람일지도 몰라. 샤를린처럼 말야." "그렇지 않아요 누군진 알 수 없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괴팍한 여잔 결코 아니에요 세련되교 교양을 갖춘 목소리더군요 그리고 겁 에 질려 있었어요 난 그녀의 말을 믿어요" 하지만 데일리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하이포인트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없잖아? 자칫하다간 제2의 '그린 판사 사건지 될 수도 있다구. 그러다가 얼굴에 달걀 세례를 받고 엉덩이에 돌멩이를 맞을 수도 있단 말야." 옆에서 그레이가 물었다. "그린 판사 사건이 대체 뭐요? "아무 것도 아니에_- 배리는 잘라 말하고서 데일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두 손으 로 허공을 내리쳤다. '개화는 이것으로 끝이에요 난 이제 갈 거예요" 진작에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만 갖고 있었어도 데일리의 집으로 돌 아와 굳이 그 계획을 털어놓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비디오 카메라를 폭발 사건으로 잃어버린 후 최근에 새로 산 것을 그만 상자째 데일리 의 객실에 처박아둔 것이 불찰이었다. 그녀는 비디오 카메라에 건전 지를 끼우고 상태를 점검한 뒤 가방 안에 집어넣고 걱정스러워하는 동지들에게 돌아섰다, "자, 그럼 갔다올게요 행운이나 빌어줘요" 데일리는 너무나 걱정스러워 숨을 헐떡거리다가 그레이에게로 고 개를 돌렸다. "자넨 해병대 출신이잖나? 무슨 좋은 수가 없나? "그녀의 네 다리를 돼지처럼 꽁꽁 묶어놓는 것 외엔 뽀족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쩔 도리 없이 내가 그녀와 같이 가야겠죠 그녀 때문에 우리 둘 다 총에 맞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권총을 헉대에 꽃았다. 순간 배리의 무선 호출기에 신호가 왔다. 데일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 정보원인가? "당신 외에 이 번호를 아는 사람들이 그들밖에 더 있겠어요? 그녀는 호출기에 찍힌 전화 번호가 누구 것인지 기억할 수 없었지 만, 그 전화 번호로 연락을 하자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남 자의 목소리에 차량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섞였다. 그는 시간 낭비 없 이 간단하게 내용만 전달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배리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자, 그럼 함께 가실까요? 데일리는 문가까지 삐걱거리는 산소 공급장치를 질질 끌면서 뒤따 라와 질문을 던졌다. "방금 통화한 사람이 누구이-하이포인트에 대한 정본가? "아누 쓸모 없는 정보였어요" 배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에 피어오른 희미한 미소를 감 추지 못해 그 말이 거짓임을 드러냈다. "뭔가 알게 되면 즉각 전화줄게요 그러니 이젠 마음 놓고 편히 쉬 세요" '저디 다치는 데 없도록 조심해서 행동해. 그래야 당신들이 감옥에 있을 때 내가 찾아가 보기라도 하잖아? "루이지애나 어디죠? '지라고? "루이지애나 출신이라고 했잖아요? 루이지애나 어느 도시죠? "외딴 곳이라 당신은 듣지도 못했을 거요" '지래뵈도 지리학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구요" "그래디란 곳이오." '저머, 정말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곳이네요" 그레이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잡고 운전에 집중했다. 남서쪽 도로를 타고 버지니아 교외로 향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드넓은 목초지, 말 목장, 숲들이 정겨운 모습으로 휘휘 스쳐지나갔지만 두 사 람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데일리의 집을 떠난 이후로 두 사람은 그제서야 말문을 열던 터였 다. 배리는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과 불안한 상념 속에 빠져들고 싶지 않아 자연스런 화제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보낸 성장기는 어펐나요? "좋았소" "유년 시절은 잘 보냈나요? "괜찮았소" "별로 좋지 않았단 뜻인가요? "LH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말했소? "그렇다면 좋았단 뜻인가요? "유년 시절은 괜찮았소 이제 줬소? "아무리 화가 난다고 날 귀머거리로 만들 필은 없잖아요? 난 단지 당신 같은 남자가 어떤 배경에서 자랐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나 같은 남자? 그는 빈정거리며 다시 물었다. "내가 대체 어떤 남자란 말이오? 그녀가 머릿속으로 할말을 미처 고르기도 전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키 큰 남자죠O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부모님은요? "두분이.- '싼듀란트 그러지 말고 한 번 털어놔봐요"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허리케인 태풍이 그분들이 일하시는 사업 장을 덮쳤을 때 돌아가시고 말았소"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거머, 안췄군요 그때 몇 살이었죠? "아홉 살 정도" 그녀는 그의 부모님이 태풍으로 죽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왠지 낮설기만 했다. 아니, 장난꾸러기 소년의 모습으로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생일 파티에서의 게임에 열중 하거나,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가족끼리 오붓하게 모여 앉아 선물을 뜯는 장면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와이오밍 주에서 함께 있던 그날 아침,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목장 일을 배웠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버님은 항상 소떼를 키우면서 사신 분이요 또한 시내에서 수리 점을 운영하셨지. 와이오밍 주에서 아버님만큼 엔진을 잘 고치는 분 은 없었소 그리고 어머님 역시 아버님만큼이나 기계 만지는 데는 도 통하신 분이셨지." 배리는 잔뜩 경직된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펴지는 모습을 보았다. "당신은 부모님을 사랑했군요" 그는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대꾸했다. "난 당시 어린애였소 어린애들은 부모님을 사랑하게 마련이요" 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부모님들이 설령 존경스 럽지 않을 때도 말이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누가 당신을 키웠나요? '치가와 친가의 조부모님들이 번갈아 날 키워주셨소 그분들은 아 주 좋은 분들이셨지. 하지만 이제 다들 돌아가셨소" "사촌 형제는 없나요? "사촌 누이가 한 명 있소 아직도 그래디에 살고 있지. 그녀는 주 교육위원회 위원장, 침례 교회 집사이며 공인회계사인 남자와 결혼해 서 네 명의 아이를 낳았소" "참 좋겠군요 귀여워해줄 조카들이 넷이나 있어서 말예요" "난 그애들을 만나보질 못했소" "왜죠? '깨형은 내가 위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당신은 정말 위험 인물인가요? 그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 레이저 광선 같은 눈빛은 -녀의 폐부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지금쯤이면 당신도 알 때가 되지 않았나? "그래_-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쩌면 당신은 아주 위험한 사람일 수 있죠" 그러고는 자동차 앞 유리창을 내다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캄캄 한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았다는 걸 깨달았다. 2차선 도로의 양쪽에 늘 어선 숲들도 어느새 밤의 외투를 덧입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후에 말 문을 열었다. "아까 데일리 집을 떠나기 전에 나와 통화한 사람은 법무부에 있는 내 정보뭔이었어요." "법무부에 당신의 정보원이 있다고? "그게 그렇게 놀랍나요? "그 사람 이름이 뭐요? 부서는 어디고 직급은 어떻게 되오? "당신도 잘 알다시피, 그런 건 말할 수 없어요" (L그렇다면 난 그가 스펜서의 첩자가 아니길 빌 도리밖에 없겠군." 배리는 가시돋친 그의 말을 무시했다. '정보원이 당신과 대통령이 오늘 비밀 면담을 했다고 알려줬어요" "맞는 얘기요" 세상에, 그런데도 당신은 그 사실을 나와 데일리에게 얘기하지 않 았군_9_" "도무지 얘기할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미합중국 대통령과 장장 15분 동안이나 밑담을 나눴어요 그런데도 얘기할 게 전혀 없단 말인가요? "난 그냥 들러서- "그냥 들렀다구요? 오효 나도 그럴 순 있겠죠 하지만 데이텟 메리 트는 결코 내게 사적인 면담을 허용하지 않을 거예요" "난 비밀 경호원 내에 친구들이 있을 뿐이오_ 그리고 단지 그의 반 응이 어떤지 탐색하려고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본 거요" "그래, 어떻던가요? "그는 너무 놀라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하더군." 그는 그녀에게 그 대화 내용을 들려주고 나서 이내 덧붙였다. "그에게 스펜서가 마지막 임무를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지." "그게 전분가요? "그렇소"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 정보원은 당신에게 왜 내가 데이빗과 만난 얘기를 전한 거요? '재 안전을 염려하기 때문이죠 내 정보원은 나와 함께 일하는 동지 에 대해 신경이 곤두서 있답니다. 이를테면 대통령이 어떤 오지랄 넓 은 기자의 입을 막으려고 당신을 이용해 덫을 놓을지도 모른다고 일 깨워준다고나 할까요? "난 더 이상 대통령을 위해 일하지 않소" "그건 당신 주장이죠 솔직히 난 당신과 대통령이 진정 어떤 관계인 지 확신이 서질 않아요 그 실체를 알기 위해선 도대체 얼마나 많은 껍질을 벗겨내야 하죠? 당신은 그의 아내의 연인이 되기 전에는 그와 의형제 사이였어요 따라서 그 점은 현 상황을 여러 가지로 애매모호 하게 만들 수 있죠" 그가 운전대를 힘껏 움켜잡으며 물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겠소? "난 단지 당신의 충성심이 둘로 나눠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뿐 - 그는 그 주장에 대해 부정도, 해명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쏘아대기만 했다. "그와 대화 도중에 내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얘기를 하다가요? "내가 당신에게 흘딱 반했다는 말을 하면서 그리 된 거_- 배리는 순식간에 뺨이 발그스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말보단 그래도 듣기 좋은 얘기군요 비록 저속한 내용이긴 하 지 만." "내 기억으로도 그렇소 저속했지." 배리는 다시 본론으로 화제를 바꾸려고 질문을 던졌다. "그가 바네사에 대해 무슨 말을 하지 않던가요? '재로운 내용은 전혀 없었소" "흠, 그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줬다면 당신이 내게 말해줬을까요? "아마 알려주지 않았을 거요" "왜죠?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난 세계를 뒤흔들 특종 뉴스를 위해 사소한 위험은 감수할 각오가 돼 있어.9_" 코웃음을 치더니 그가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련하시겠나? 하지만 난 결코 그럴 수 없소 내 목숨도, 바네사의 목숨도 심지어 당신들의 목숨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소 당신도 일단목숨이 붙어 있어야다음번 고용계약을맺을때 몇 천 달러를 더 받을 수 있잖겠소? 그리고 난 이번 사건에서 당신들이나 바네사, 그리고 내 목숨을 살려낸다면 앞으로 득의양양한 풋내기 때문에 내 전략이 위협받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할 거요" 그녀는 가슴이 뜨끔했다. "난 전문가예요" '저쩌면 TV뉴스 시간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이포인트에 서는 스튜디오 카메라들이 우릴 에워싸지는 않을 거요 우린 지금 무 장한 요원들이 지키는 곳으로 가고 있단 말이요 그리고 분명히 말하 지만, 당신은 그런 일에 전문가가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난 훨씬 더 강인해요" "오호 나도 당신이 용기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소 당신이 기삿거리 를 얻으려고 어느 선까지 갈 수 있을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혹시 당신은 그 일을 잊어버린 거 아니오? 그가 워낙 결연하게 다그치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물론 난 잊지 않았어요 난 그 일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답니 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본듀란투 당신도 그 일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죠" 그녀의 반격이 제대로 먹혀 그의 턱 근육이 비틀어졌다. 그녀는 의 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도로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 만족은 오래 가질 않았다. 별안간 그녀의 비명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조심해쪼" 그는 능숙한 솜씨로 민첩하게 운전대를 돌려 가까스로 충돌을 퍼했 다. 그 커브길에 가장 먼저 2열 종대의 경찰 모터사이클 네 대가, 그 뒤를 이어 소방차와 관영 차량, 그리고 구급차 한 대가 차례차혜 튀어 나왔다. 모두 다 아찔한 속력으로 움직였다. 그레이는 반대편 차선 도랑에 바싹 붙어 있다가 그 차들이 모두 지 나가자 급히 틴턴을 해서 그들을 뒤쫓았다. "저들을 따라가려구_Q?" "염병할, 보면 모르겠소? "하지만 왜- 그레이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머리 위를 보시오." 배리가 차창에 뺨을 대고 하늘을 바라보니, 헬리콥터 두 대가 동체 를 옆으로 기울이고 앞쪽 숲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익명의 여인 말이 옳았소 이곳에선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소" 그녀는 반대괸 방향을 가리키면서 되받았다. "하지만 하이포인트는 저 너머에 있잖아요? "물론 대통령 휴양지는 호수 반대편에 있소 하지만 하이포인트는 이곳 전지역을 일컫지. 그리고 주치의인 조지 알랜의 주말 별장이 바 로 저곳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소" 그는 헬리콥터들이 이륙한 숲속의 어떤 지점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거곳이 바로 그들이 바네사를 가둬두고 있는 곳이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지금까진 육감뿐이었지만 방금 전에 확증을 얻었소 아까 소방차 론 뒤따르던 관영 차량은 아마도 비밀 경호원들이 탔을 거요" 그는 여전히 운전대를 굳게 붙잡고서 자동차 행렬의 마지막 차량의 미등을 따라잡으려고 배리의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밑바닥까지 있는 힘껏 밟았다. "당신은 저 장면이 윌 뜻한다고 생각하죠?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가 싫었지만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알랜 박사는 그녀를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적어도 고의로 그러진 않는다는 얘기죠 그리핀 비밀 경호 요원들이 그녀를 지키는 상황에 선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거예요" "아기가 죽던 날 밤에도 백악관에는 비밀 경호요원들이 우글거렸 소 그들은 아기가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었다는 의사 발표를 들 었을 때도 침묵을 지켰지. 조지 알랜은 대통령에게 숨통이 확 잡혀 있 는 한, 어떤 행동이든 어떤 말이든 다 할수 있단 말이요" 비상 자동차 행렬은 주민이 대략 1만 5천 명 되는 그림같이 아름다 운 소도시 '싱린'으로 들어섰다. 그 소도시가 대통령 휴양지와 인접해 있는 탓인지, 지역 주민들은 그런 자동차 행렬이 가로수가 늘어선 길 거리의 정적을 깨뜨리는 데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그레이는 신중하게 거리를 두고 그 행렬을 뒤따라갔다. 두 블록 정 도 떨어져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을 무렵-그들은 어떤 병원의 비상 구 안으로 들어섰다. 배리가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만일 바네사가 응급 치료가 필요하다면 어째서 헬리콥터로 긴급 수송을 하지 않은 거죠? 하지만 두 사람이 그 의문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전에 구급차의 뒷 문이 활짝 열리더니 조지 알랜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머리가 마구 헝 클어지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 린 모습이었구 연신 머리를 긁적거렸는지 머리카락 끝이 온통 곤두 서 있었다. 그와 운전수, 그리고 위생병이 구급차에서 바퀴가 달린 들 것을 끌어내렸다. 그 들것에는 흰 천으로 덮인 사람의 형체가 꼭꼭 묶여 있었다. 배리 가 비명을 질렀다. "오 맙소시 안 돼? 위생병들은 그 들것을 자동 유리문을 향해 밀고갔다. 관영 자가용 에서도 우울한 표정을 턴 두 남자가 뛰어나와 들것의 뒤를 따라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 뒤에 혼자 남은 조지 알랜이 허리를 구부려 인도 위에 토악질을 해 댔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깊이 잠들어 있던 클리트 암브루스터가 눈을 떴다. 침대에서 몸을 굴려 탁자 위의 시계를 살펴보았다. "제기랄? 이 시각의 전화는 모종의 비상사태를 의미했다. "여보시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이십니까? 보좌관의 절제된 목소리를 예상하던 그는, 나쁜 소식의 전령이기보 단 잠자리 상대자로 더 어울리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 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자 몹시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업 여성과 관계를 가진 터라 불 안하게 그지없었다. 뇌리에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은, 과거에 잠자리를 같이 한 직업 여성이 의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고객들에게 치명적 인 바이러스의 감염 사실을 통보하는 게 아닌가 했다. "누구요? '개리 트래비습니다. 바네사의 친구, 기자- 상원의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성을 벌컥 내며 침대보를 박차고 일 어나 다부진 발로 침실 바닥을 구르면서 침대 위에 앉았다. 배리 트래 비스가 바네사의 친구라고 소개하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허풍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기자라고 말한 것조차 주제넘은 발언이었다. 그는 딸 애가 최근에 그 엉터리 기자에게 인터뷰 기회를 제공했던 이유가 대 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원하는 게 뭐요? '기원님과 꼭 할 얘기가 있습니다. 바네사에 대한 얘기죠" "당신, 지금 몇 신지나 알고 있소? 그리고 대체 내 전용 회선 번호 는 어떻게 알았나? 내 사무실 직원들이 내가 언론계 사람들과는 딸 문 제를 얘기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못박아뒀을 텐데? "의원님, 난 지금 그런 얘기를 하자고 전화 드린 게 아닙니다." "내게 그런 농담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소? 대체 날 뭘로 보나? 이만 전화를 끊읍시다." "의원님! 잠깐만요! 잠간만 전화를 끊지 말고 제 얘길 들어보세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불안과 초조감에 쉽게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무선전화기를 들고 욕실로 들어가 변기에 오줌을 누면서 물었다. '개체 무슨 일이오? 또 다른 폭발이 있었소? "전 의원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변기에 물을 내렸다. '저중간한 소린 내 취향이 아니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전 지금 속임수를 쓰는 게 아닙니다. 또한 제가 전화를 건 사안은 의원님이 웃어넘기거 나 가볍게 무시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제발 절 믿어주십시오 정말 아주 중대한 문젭니다. 저와 만나주시겠습니까? 그는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비볐다. "젠장------! 나중에 후회할 게 뻔하겠지만, 일단 그렇게 합시다. 내 일 내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내 비서와 약속 시간을 잡으시오" "아직 제 말 뜻을 이해 못하시는군요 전 지금 당장 의원님을 만나 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당장? 빌어먹옳 지금은 한밤중이란 말이또" '게발 부탁입니다. 전 지금 싱린 시에서 링컨 거리와 폴 미도우로 교차로에 있는 간이식당에 있습니다. 의원님을 기다릴 테니 꼭 나와 주십시_- 그러고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상원의원은 침실 벽면을 향해 욕 지기를 터뜨리면서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침대 가장자리로 몸 을 숙여 술잔에 '잭 다니엘'을 조금 따랐다.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통 화 내용을 무시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망설였다. 그 기자는 대체 바네사에 대해 뭘 알고 있길래 아 침까지도 기다릴 수 없다는 건가? 그는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쳐다보는 듯 독살스런 눈길로 전화기 를 노려보았다. 이제 다시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기자 의 절박한 목소리는 꾸민 것이 결코 아니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로부터 짧분 뒤 싱린으 로 차를 몰았다. 수없이 하이포인트를 방문한 탓에 그 도시의 지리에 대해선 훤히 꿰뚫고 있었고, 덕분에 운전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기억의 촉수는 어느새 18년 전 어느 날 밤의 사건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도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야 했다. 당시 미시시퍼 교외 에 있는 농장에서 모처럼 며칠 동안의 휴가를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곳에서의 삶은 더없이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날 밤만은 예외였다. 난데없이 집 안을 뒤흔든 요란한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가정부가 잠옷 가운의 허리띠를 동여매면서 부엌 뒷방에서 허 등지등 나오고 있었지만 현관문에 먼저 다다른 사람은 클리트였다. 문 앞에 서서 익사 직전의 고양이처럼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기 진맥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빗 메리트가 나타났다. 순간 번갯불 이 작렬하면서 그외 뺨 위에 피로 물든 길게 긁힌 자국을 밝혀주었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인가? '의원님의 잠을 깨워서 죄송합니다만, 저로선 이렇게 급히 찾아을 밖에 없었습니다.' '뭐 잘못됐나? 사고를 당한 건가? 데이빗은 가정부를 보며 초조한 눈길을 던졌다. 클리트는 가정부를 수 다시 그녀의 방으로 되돌려 보내고 데이빗을 서재로 데려왔다. 탁상용 전등을 켜고 젊은이에게 브랜디를 따라주었다. 데이텟은 창 가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서양배 모양의 술잔인 '스니프터'를 움켜잡 고 단숨에 비웠다. '자네, 평소와는 다르군.' 클리트는 긁힌 자국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수 있도록 데이텟에 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아주 몹쓸 일을 당한 게 분명해. 어디, 그 얘기나 들어보세.' 클리트는 가죽으로 된 안락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내뻗고 시거를 집어들었다. 그 사이에 데이빗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있었습니다.' 클리트는 평소 즐겨 사용하는 라이터를 쥐고 흔들면서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지난 여름에 이곳에 있었을 때 처음 만났죠' 지 지역 여자란 말인가? 어디서 만났지? 이름이 뭔가? 가족은? '그녀의 이름은 베키 스터기스입니다만, 의원님은 그녀에 대해 잘 모르실 겁니다. 그녀는 이동식 주택가의 인간 쓰레기죠 난 고속도로 에 자리잡은 무식한 백인 노동자들이 주고객인 어느 작은 술집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습니다. 우린 그곳에서 장난을 치면서 목을 껴안고 키스와 애무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애무는 순식간에 열정으 로 변했죠 그녀는 이내 내 온 몸을 더듬었습니다. 바깥에 나가지 않으 면 망신살이 뻗칠 정도였죠 우리가 그 술집을 나서자 마자 그녀는 날 끌어안았습니다. 결국 우린 그 건물 담벼락에다 대고 그 짓을 했죠- 클리트로선 보호를 맡고 있는 그에게 성적인 문란함을 책망한다는 건 다분히 위선적인 행동이었다 데이빗만한 나이 때 클리트 역시 무 모한 탈선을 수없이 저지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성적인 분별력과 훌륭한 판단력을 갖추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나 성숙한 뒤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선 어느 정도의 질책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난 유명한 정치가들이 두뇌를 쓸 곳에 자신의 물건을 함 부로 놀렸다가 백악관에 입성하지 못한 꼴을 여러 번 보았네. 그들은 함께 놀 상대와신중하게 대할 상대를 착각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게야.- '그 점에 대해선 저도 압니다. 하치만 하나님께 맹세하건대, 그녀가 해롭지 않은 여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정말 예쁘구 매력이 넘치 며 부담없는 여자였죠 낙농장에서 배달용 트럭의 배차 담당자로 일 하면서 가족도 없이 근근히 혼자 벌어먹고 사는 삼류 인생이었습니 다.' 클리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 여자가 그렇듯 해롭지 않은 인물이었다면 자넨 어째서 이 늦은 시간에 얼굴에 피를 홀리면서, 내 사랑하는 아내가 생전에 애지중지 하던 동양산 양탄자 위에 음식물을 토해낼 듯한 인상을 쓰고 있나? '제가,-, 제가 그녀를 죽였습니다.' 순간 클리트가 입을 벌리자, 불을 붙인 시거가 무릎 위에 떨어질 뻔 했다. 잠시 뒤 정신을 가다듬고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브랜디를 따라 서 술잔을 입에 갖다댔다. 그러고는 아까 데이빗이 마신 것과 똑같이 술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저 젊은이에게 걸었던 자 신의 꿈이 뜨거운 차 속의 각설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분이 었다. 데이빗 메리트는 암브루스터의 선거 운동 본부에 자원 봉사자로 들 어와 놀라운 활약을 거듭하면서 순식간에 유급 직원으로 올라선 젊은 이였다. 클리트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데이빗은 해병대를 막 전역한 절도 있구 패기만만하며 직관력이 뛰어난 젊은이였다. 그리고 윗사람 의 지도를 거의, 아니 전혀 받지 않고도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로 일을 척척 처리하곤 했다. 그 결과 클리트는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더욱 더 많은 책무를 맡겼다. 클리트는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데이빗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보 좌관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2년 동안 데이빗은 클리트에게 최상의 인 재이며 정치 귀재란 사실을 입증했다. 클리트는 그때부터 데이빗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훌륭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춘 데이빗의 재능을 한껏 살려주고 싶었다. 데이텟은 젊은 시절에 돈을 푼푼이 모아 최대한 활용하면서, 경제 학에 관한 실용적이며 쓸모있는 지식을 터득해 두었다. 또한 여가 시 간을 틈틈이 쪼개어 법률과 정부 조직의 각 활동 영역에 대해 공부했 다. 게다가 뛰어난 군복무 경력과 잘생기고 말끔한 외모. 똑똑한 두뇌 와 논리정연한 말솜씨 등을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그날 밤까지는 추 잡한 소문에 쉽쓸리지 않은 청년이었다. 클리트는 그 젊은이에게 걸어가 그처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죄의 대가로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다듬던 의원이 근엄하게 다그쳤다. '자네가 그녀를 죽이게 된 데엔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 '하나님께 맹세하건대, 사고였습니다' '하나럼께 맹세하지 말고 내게 맹세하도록 하게, 데이빗 군.' '클리트 의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클리트는 한동안 데이텟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그 혼비백산한 얼 굴에서 가식적인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겁에 질려 있는 젊은이에 지나지않았다. '좋아.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건가? '그 일을 얘기하자면 먼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 첫번 째 만남 이후 이곳에 내려울 때마다 전 그녀를 만났습니다.' 클리트는 시거를 한쪽 입가에서 다른 쪽 입가로 굴리면서 물었다. '크리스마스 때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부활절 때도? 데이빗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바네사에게 환심을 살 동안에도 그랬단 말인가? 이제 보니 자넨 우리 둘을 완전히 우롱했군? 클리트가 호통을 치자, 데이텟은 감정이 격해지는 듯 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클리투 오햅니다. 의원님도 제가 바네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잘 F시잖습니까? 전 그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이동식 주택에 사는 쓰레기 같은 술주정뱅이 여자와 함께, 무식한 백인 노동자들이나 가는 싸구려 맥주집 담벼락에 서서 몸을 섞고 싶었단 말인가? 그게 바로 자레가 영위하고 싶은 애정생활 의 방식인가? 한바탕 분노를 쏟아내고 나니 클리트는 머리가 텅 빈 듯했다. 휘청 거리듯 안락의자로 돌아가 시가를 격하게 피워대면서 성질을 누그러 뜨렸다. 데이빗은 영리하게도 의원이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가지도 록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클리트가 입을 열고 으르렁거렸다. '어서 나머지 얘길 다 해보게? -그런데 지난번에 전화를 해보니 그녀는 이상하게도 저더러 집으로 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잠시 말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배가 이만큼 불러 있다니,' 클리트는 눈을 부릅뜨고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 브랜디 병 좀 갖다주게나.' 의원이 금방이라도 그 술병으로 데이빗을 사정없이 후려칠 것 같았 지만, 데이텟은 일단 그 말에 순순히 따랐다. 클리트는 브랜디를 두 잔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그래서 그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얘긴가? '그땐 그랬습니다. 그리고 몇 주 전 애를 낳았죠 사내였습니다.' '자네 애였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데이빗은 대화를 시작한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물론 제 아들일 수도 있었죠 하지만 전 수십 명의 아버지 용의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애가 제 아들이라고 우겼었습니다.' '우겼었다고? 지금 과거형을 쓴 건가? '그녀는 그애가 내 아들이니, 당연히 와서 그애를 봐야 한다며 날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전 그녀의 말대로 하지 않을 경우, 그 녀가 미친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그녀에게 돈을 좀 주려고 그곳으로 찾아갔습니다. 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 대한 내 책임을 돈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다면서, 오로지 결혼 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클리트는 그 모든 얘기가 하나씩 흩어져, 마치 데이빗 메리트의 정 치적인 미래를 싹 쓸어담은 관에 못을 박는 느낌이었다. 작고한 아내 가 애지중지한 동양산 양탄자에 구토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하 는 염려가 들기 시작했다. '전 그녀에게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겐 이미 사랑하는 약혼자가 있다는 것까지 설명했죠------. 데이빗은 잠시 말을 멈추고 클리트를 쳐다보았다. '전 물론 바네사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 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진 결혼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녀도 제가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클리트는 그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다그쳤다.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보게. 자네가 그 창녀에게 결혼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 뒤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그녀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더군요' 데이빗은 다시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다가 두 손을 내리고 양 무릎을 잡았다. '그녀는 화장대 서랍을 아기 요람으로 쓰고 있었는데, 아기가 그녀 의 고함측 놀란 것 같았습니다. 애가 울기 시작하자 그녀는 머리가 획 돌아버린 듯했죠 혼자서 아기를 키우는 데 청춘을 바치고 싶지 않다 면서 소리 지르더니 그만-아기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전 아기에게서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고 해봤지만, 그녀는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힘이 구지막지했죠 결국 그녀는 아기를 목졸라 죽이고 말 았습니다.' 클리트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외쳤다. 's,하나님 맙소사! 그녀가 아길 죽였단 말인가? 데이빗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차게 울던 아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잠잠해졌죠 죽어버린 겁니다.' '왜 경찰을 부르지 않았나? 데이빗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 고 그 미친 여자가 절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이 상처가 생긴 겁니다. 그녀는 마치 살팽이처럼 덤벼들었습니다. 전 제 자신을 방어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우린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였죠 그러다가 그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그 통 에 그녀는 두개골이 깨진 듯했습니다. 새빨간 퍼가 흘려내렸죠 그녀 역시 죽고 말았습니다.' 데이빗은 얼른 두 눈을 감으려 했지만 어느새 눈물이 뺨 위로 흘러 내렸다. 그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점점 격해지면서 어깨를 들색 이면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실수에 실수가 겹치다 보니 이제껏 의원님이 절 위해 해주신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함께 공들여온 모든 것들이 헛되이 무너져 버렸습니 다. 그리고 바네사를 생각하면-_e,하나님? 데이빗은 꺼이꺼이 울면서 덧붙였다. 기제 바네사가 절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번 사건이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클리트는 처음부터 죽을 운명이었던 여자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 았어야 할 아기 때문에 데이빗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를 대통령으 로 만들려고 그동안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지 않았던가? 따라 서 데이빗의 실수에 따른 정치적 결과뿐만 아니라 자신의 투자 이익 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 문제를 깨끗이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이빗은 한술 더 떠서, 바네사를 클리트의 신속한 개입에 대한 보증 수표로 내밀었다. 수년 동안 사랑했고 이제는 결혼하려 했 던 남자가 쓰레기 같은 백인 여자를 임신시켰구 결국은 사고로 죽였 다는 사실을 안다면 바네사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는가? 클리트 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웅대한 계획에서 본다면, 베키 스터기스란 여자와 그녀의 아기는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었고, 데이빗 말콤 메리트는 위대한 운명 을 타고난 존재였다. 그는 언젠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힘 을 거머질 위인이었다. 그런 그의 놀라운 잠재력과 가능성이 어째서 그 단 한 번의 실수로 희생되어안 하는가? 또한 바네사 역시 아무 죄 도 짓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품어온 모든 꿈과 희망들을 뭣 때문에 순 식간에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결백한 내 딸아이가 왜 가장 커다란 고통을 받는단 말인가? 클리트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없었다. '알았네. 여보게, 이젠 마음을 진정시키게.' 의원은 데이빗에게 다가가 등을 한 번 찰싹 내리쳤다. '가서 목욕을 하고 브랜디를 좀더 마신 후 잠을 자두게. 이후로 그 일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아야 하네. 영원히? 데이텟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처리하겠네.' 데이빗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어떻게 의원님께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나 죽었는데. 대체 어떻게 하신다는 건지L 의원은 굵고 짧은 집게손가락으로 데이빗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처리 방법은 내가 고민할 문제일세. 내가 할 일은 그 문제를 없었 던 일로 만드는 거고 자네가 할 일은 그 일을 몸과 마음에서 깨끗하 게 지워버리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는가?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리고 앞으로 무분별한 외도는 금물이네! 또다시 마음에 드는 여 자가 생기면, 차라리 직업여성을 찾아가 한바탕 즐기고 나서 돈을 내 앞으로 청구하란 말일세.' '알겠습니다.' '우리가 자넬 대통령으로 만들지 못할 때, 떼거리의 매춘부들이 난 데없이 나타나 자네에게 부친 확인 소송을 걸어온다면, 그땐 당당하 게 응하게나. 어때, 할 수 있-지? 의원이 미소짓자 데이빗도 쭈뼛거리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의원님.' '자, 그 여자의 이동식 주택은 어디 있나? 클리트는 그날 밤 그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했다. 데이빗이 말한 대 로 그곳은 아수라장이었지만 클리트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 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정확히 48시간 이후로 베키 스터기스 사건 은 잊혀진 과거가 되고 말았다. 데이빗은, 클리트가 시체 두 구를 없애버린 방식이나 과정에 대해 질문은커녕 아무런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클리트가 베키 스터기스 의 존재 자체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방식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 았다. 그리고 클리트의 암시에 따라, 마치 그런 사건이 처음부터 일어 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8년 동안 두 사람 은 그 사건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며칠 전 아침, 클리트가 그 문제를 미묘하게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외손자의 죽음으루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젊은 여성과 그녀의 갓 난아기에 대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 두 사건은 전혀 달라보였지 만, 어떤 면에서는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었다. 은연 중에 신경을 톡톡 건드리고 있을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맴돌았다. 18년 전 아기를 죽인 사람은 그 어머니가 아니라, 데이텟 메리트가 아니었을까? 사실이 그렇다면, 이번에도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 건 아 닐까? 배리는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의 도착을 기다리면서도 두려운 마음 으로 간이식당 문을 바라보았다. 영국 조지왕 시대의 건축 양식이 대부분인 이 소도시에 초라한 간 이식당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간이식당은 번쩍거리는 크롬과 청록 빛 비닐 벽지는 지나치게 화려하기만 하고 품위없는 1950년대풍 실내 장식이었다. 바닥에는 검정색과 하얀색의 타일이 바둑판 무의로 깔려 있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식당 안의 손님이라곤 몇몇 병원 직원들 과 밀크쉐이크를 번갈아 요란하게 먹는 10대 남녀 한 쌍뿐이었다. 배리와 그레이는 병원 비상구를 내다볼 수 있는 널따란 창가 옆 자 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조지 알랜은 발작적인 구토가 가라 앉자 재빨리 몸을 추스리더니 병원 안으로 들어간 일행들의 뒤를 쫓 아갔다. 그 뒤로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레이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 바네사의 몸이 들것에 실려 들어간 비상구 문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핑크빛 탁자에 팔을 올려놓고 있다가 가끔씩 주먹을 쥔 손을 꼿꼿이 세웠다. 그는 왠 지 궁지에 몰린 듯하면서도 극도로 위험한 인물처럼 보였다. 배리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勺들은 아마 그녀가 자살한 것처럼 위장할 거예요" "차라리 내가 그 일과 아무 상관 없었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바네 사는 아기를 죽이지 않구 스스로도 목숨을 끊지 않았을 거요- 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 는 그 접촉에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레이, 미안해요 나도 당신이 바네사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어 요 그리고 그 아기는- 그녀는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 자식이었죠, 그렇죠理 "내 아기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는 잘라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팔에서 걷어냈다. "아기는 진작에 죽었고. 이제 그녀 역시 죽어버렸는데." 배리로선 그의 거부 반응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웠다. 개망나니였던 아버지조차도 흔치 않게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육체적으로 그녀를 거 부하거나 의도적으로 쑥스럽게 만든 적은 없었다. "본듀란트 씨, 지옥에나 떨어져.8_rn 그러고서 충동적으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음 같아선 그레이를 슬 픔에 썩도록 내버려두고 그대로 식당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암브루 스터 상원의원이 곧 도착할 시간만 아니라면, 정말로 그렇게 했으리 라. 별수 없이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위에 손을 얹고 거울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거울속의 자신을 바라보려고 얼마 동안 마음을 다지면서 용기를 짜내야 했다. 어쩌면 그레이보다는 자신 때문에 더 욱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그의 고통은 자연스러웠고 감정 역시 솔직 했다. 반면에 자신의 고통과 감정은 모순투성이였다. 직업적인 이익과 양심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도덕적으로 진퇴양난에 빠져든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역사적인 사건의 직접적인 목격자였다. 그 사건이 자신의 경력에 미칠 엄청난 잠재력을 생각하면 솔직히 당흑스러웠다. 이 미 증유의 사건을 현장에서 방송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기자가 된다는 사 실에 머리가 다 어찔했다. 하지만 한 여인의 잘못된 죽음은 결코 축하할 사건이 아니었다. 더 군다나 개인적으로 관련돼 있는 사람의 죽음인데-. 만일 그녀가 아기의 죽음에 관한 수수께기를 파헤치지 않았다면 바네사도 살해당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종에 눈이 멀어 미친 말처럼 이리저리 뛰 어다니다가 그만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어버린 건 아닐까? 배리 역시 이러한 비극을 낳게 된 과정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아니 면, 바네사는 배리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전화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 런 최후를 맞이하도록 운명지어졌던 것일까? 배리는 결코 그 의문들에 해답을 내릴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남은 생 애 동안 그 의문들에 쉽싸여 고통받을 일만 남았다. 두 손을 껏고 종이 휴지로 얼굴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오다가, 클리 트 암브루스터가 입구로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얼른 입구로 가 서 그를 맞이했다, "암브루스터 의원님." 말을 건네면서 순간, 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해둔 말 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주위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딸이 죽었다고 전하는 사람의 얘기를 기 분좋게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한밤중에 날 깨우리 만치 엄청난 이유가 아니라면, 앞으로 신상에 해로을 거요." 위협하듯 대꾸하며 그녀를 따라 탁자로 다가섰다. "웬만하면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는데,,,- 그러다가 그레이 본듀란트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췄다. 그레이가 자 리에서 일어났다. "클리트 의원님, 오래간만입니다." 상원의원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레이를 경멸 하는 듯했으며, 그 이유를 추측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버 지로서 딸의 명예를 짓밟은 남자를 괘씸하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특히 그 딸이 개인적인 정절까지 문제시되는 미합중국의 영부인이라면 말이다. "본듀란트, 자네, 예서 뭘하는 건가? 상원의원은 그레이가 내민 손을 피하면서 으르렁거리다가 배리에 게로 돌아섰다. '지 사람이 바로 당신이 암시한 '아주 중요한 일지오? '이원님, 일단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에게 사정을 설명할 기회를 주 십시오 커피 좀 드시겠습니까? '씰소" 클리트가 자리를 잡자 배리와 그레이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의 원은 그레이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몬타나 주에서 아주 어려운 걸음을 했늴" -와이오밍 줍니다. 그리고 이곳을 원해서 온 건 아닙니다." 자네가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한다는 얘긴 정말 금시초문이군." -그레이는 몇 사람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겁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구요" 클리트 암브루스터의 눈꼬리가 우스꽝스럽게 올라갔다. -정말이오? 누구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거요? 그린 판사의 생명? 그녀는 그의 조롱에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냉정을 지켰다. -기자로서의 신의를 믿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만 제가 이제부 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한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틀림없는 사실입니 다. 우선 제 얘기를 다 들어보시고 의원님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보십 시_P_ 제 말에 동의하십니까? "난 내 딸과 관련된 얘기에만 관심이 있소" 배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문을 열었다. -기원님, 저는 의원님의 외손자가 사고로 죽었다고는 생각지 않습 니다. 제가 믿기론 그 아기는 살해당했습니다. 사실은 목이 졸려 죽었 지만,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처리된 거죠'' 클리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개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요? 바네사가1) 그레이가 의원의 말을 가로막았다. '게이텟이 아기를 죽인 겁니다." 의원은 미동도 없이 두 눈만 두 사람 사이를 바삐 오갔다. 그러다가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자네, 미쳤나? 그레이는 태연스레 대꾸했다. "아닙니다. 데이빗이 그 아기를 죽인 이유는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 지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다니? 클리트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거칠게 항변했다. "본듀란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놈만큼은 내 딸을 도덕적으로 비 난할 수 없어! 주제 파악도 못하고 중상모략에만 열을 올리는 이 개망 나니 같은 녀석! 네 놈을 이 자리에서 당장 쏴죽일 거야? 순간 그레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데이텟은 그 아기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처지 였죠 그는 오래 전에 정관절제 수술을 받았단 말입니다." 배리는 그 뜻밖의 소식에 상원의원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그레이는 그녀의 가냘픈 비명소리를 무시하고 의원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클리트 의원님. 심지어 바네사 조차 모르고 있죠 수년 동안 그녀는 온갖 방법을 써가며 임신하려 했 고, 그 녀석은 결코 이를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의 말에 따 르는 척했습니다. 녀석은 아기를 가지려고 애쓰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변태적인 쾌락을 즐겼던 겁니다." 배리는 그레이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그가 복잡미묘한 인물이란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젠 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껍질을 갖 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낸 듯 싶으면 그는 다시 또 다른 껍질을 벗겨 그녀를 놀래주었다. "데이텟 메리트는 결코 정관절제 수술을 받지 않았네. 만일 그랬다 면 이미 내가 알고 있었겠지. 다시 말해서 자넨 지금 내게 터무니없는 개수작을 떨고 있는 셈이야." "클리트 의원님이 절 믿든 안 믿든 상관 없습니다. 전 단지 제가 아 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이죠 데이빗은 여자를 임신시킬 수 없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바네사는 그에게 임신 소식을 전한 후에야 그 사 실을 알았죠" 클리트는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레이를 노려보았지만, 배리는 그의 적대감이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자넨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나? "바네사가 내게 전화를 해서 알려줬습니다." 그 새로운 말을 듣자 배리는 너무나 황당했다. 그레이가 은퇴해서 와이오밍 주에 살면서 바네사와는 연락을 끊고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상원의원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녀만큼이나 놀랐는지 얼굴이 칠흑빛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에도 그레이는 냉담하게 덧붙였다. '勺녀는 내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죠 그리고 내게, 이제 앞으로 어 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자네 애였단 말이군."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젠장, 물론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 두 남자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암브루스터 의원은 비 난의 눈길로 그레이는 반항의 눈길로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다가 먼 저 그레이가 물었다. "제 얘길 끝까지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아닙니까? 클리트는 어서 얘기해보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레이는 배리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쪽을 흘낏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기원님이 텔레비전에서 보신 겉모습들과는 전혀 달리, 데이빗은 바네사에게서 임신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 다. 그 얘기는 그때까지 뜬소문인 줄로만 알았던 저와 바네사와의 관 계에 대한 확증이었기 때문이죠 의원님은 데이빗이 아주 사소한 모 욕에도 얼마나 크게 역정을 내는지 잘 아실 겁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 시요 그후 바네사에게 어떤 삶이 펼쳐졌을지 말입니다. 제기렐" 그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텟은 그후 아홉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지옥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는 우선은 모든 축하와 선전 활동을 유지할 수밖 에 없었지만, 암중으론 이미 심판의 날을 정해놓고 칼을 갈고 있었던 겁니다." 의원의 널찍한 어깨가 구부스레한 것을 보면, 이젠 그레이의 얘기 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가는 듯했다. 그때 배리가 갑자기 말문을 열어 잠시 동안 자리를 가득 메운 무거 운 침묵을 갈랐다. "대통령은 왜 조지 알랜에게 낙태 수술을 시키지 않은 거죠? 클리트 역시 맞장구쳤다. "그 점은 나도 궁금하네." "낙태는 그녀에게 그다지 고통스런 처벌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그레이는 주저없이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데이빗은 그녀의 부정을 가장 철저하고 잔혹하게 응징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잔인한 처벌은, 그녀가 아기를 낳고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의 경계심이 누그러질 때를 기다렸 다가 손을 쓰는 것이었죠 마침내 그녀가 긴장을 풀던 어느날 밤 가차 없이 칼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바네사는 그 살인 사건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그는- 배리는 그레이가 의원에게 그 다음 얘기를 차마 입에 올리기를 힘 겨워한다는 걸 알카차렸다. 그래서 노인에게 그 얘기를 대신 해주기 로 작정했다. "메리트 부인은 모종의 이유로 내게 연락했습니다. 난 그녀가 위험 신호를 보내려고 애를 썼을 거라고 믿습니다." "위험? "그녀에게 위험이 닥친 거죠 대통령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에요" 배리는 의원을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리원님, 사실 오늘 밤 의원님께 전화를 드린 까닭은 우리가 보기에 대통령은,-, 영부인이 대통령의 범죄 행각을 증언할 수 없도록 만들 었기 때문입니다." "증언할 수 없게 만들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의민가? 배리가 병원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클리트 역시 병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병원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판유리에 식당의 실내 장식과 우울한 그들의 얼굴이 비쳤다. "바네사는 두 시간 전쯤 구급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하여 저 안으로 실려갔습니다." "조지 알랜의 별장에서 말인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들을 뒤쫓아왔죠" 클리트는 더 이상 강력하고 오만하며, 권위주의에 가득 찬 정치가 처럼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에 유일한 자식이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는 소식을 전해들은 가련한 아버지였다. 지난 몇 달 동안 그의 얼굴은 나이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거듐해 왔다. 그의 얼굴 곳곳에서 주름살 이 깊이 파이면서 무겁게 축 늘어졌다. 그는 불신과 거부로 가득 찬 목소리로 힘없이 내뱉었다. "난 며칠 전에도 주치의 별장에 가보았네." "그럼 바네사를 보셨나요? 그레이가 묻자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순간 그의 턱 밑 의 살집이 출렁거렸다. "조지는 그녀가 쉬고 있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린다고 했네, 그 래서 이 아비조차 만나길 거부한디러군. 그는 그녀가 절대 휴식을 취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네." 그레이는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클리트 의원님. 조지는 데이텟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합니 다. 데이텟이 아기를 죽인 그날 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비밀 경호요원들이 그곳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네." "그들은 의원님의 외손잔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내 말을 믿으십 시요 데이빗은 스펜서의 도움을 받아 이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획해 왔습니다. 불 보듯 빤한 사실이죠 그들은 바네사에게 엄청난 양의 약 물을 투여했습니다. 분명합니다. 만일 그녀가 이미 죽었다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클리트가 그 말을 되뇌었다. "죽었다니? 지금 자네 얘긴-- 의원의 시선이 그레이에게서 배리에게로 옮겨졌다. 이후 배리는 의원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그 식당을 빠져나와 병 원 비상구로 뛰어가다시피 들어갔다. 비밀 경호요원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직 간호사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어보았 지만 의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배리와 그레이를 이끌고 한 쌍의 자동문을 지나쳐 복도 안으 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때마침 복도 끝에서는 조지 알랜이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조지는 아까 바네사의 몸을 병원 안으로 들여보냈 을 때와 똑같이 불안하고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암브루스터 의원이 배리, 그레이와 함께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암브루스터 의원님, 대체,,,,,, 대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내 딸은 어딨나? 의원은 조지가 기대고 서 있는 문을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그애가 저 안에 있나? "아닙니다." '끼 개자식! 또 거짓말인가? 의원이 거칠게 밀치려 하자 조지 알랜은 그의 소맷부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의원님, 잠간만요 이곳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의료진이 검진하 기 전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클리트는 흐느끼는 듯이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조지의 옷깃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이 교활한 녀석! 네 놈이 내 손에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게야? 긴급 상황이 발생한 것을 눈치채고 병원 직원들이 복도 끝에 나타 났지만, 그곳 경비 과장은 감히 상원의원 일행을 가로막을 용기는 없 어 보였다. 클리트는 조지가 지키고 있던 문을 활짝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다 가 화들짝 놀라 문설주께 등을 기댔다. 방 안의 벽면에는 아까 배리와 그레이가 보았던 바퀴 달린 들것이 붙어 있었다. 들것 위의 인물을 묶 었던 끈은 사라졌지만, 그 인물은 푸른 천에 뒤덮인 채 아무런 움직임 도 없이 그저 누워 있을 뿐이었다. -하나럼? 마치 천이 찢어지는 소리로 의원이 절규했다. 문설주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타일 바닥을 타닥타닥 걸어갔다. 배리 와 그레이는 의원의 양 옆에서 언제든지 그를 부축할 태세로 그를 따 라갔다. 조지 알랜 역시 그들을 뒤따라 방 안에 들어섰으나, 그의 격렬 한 항의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그들이 들것 앞에 이르렀을 때, 의원은 말없이 두 손을 옆구 리에 붙이고 들것 위의 푸른 천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보다 못한 그레이가 불렀다. "클리트 의원님?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레이는 푸른 천의 양쪽을 잡고 걷어냈다. 그 시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들 사이에서 침을 삼키거나 헐떡 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뜻밖에도 간호사인 제인 가스톤의 얼굴이 었다. '제인 가스톤 부인은, 조지 알랜 박사가 바네사를 하이포인트에 격 리 수용하면서 바네사의 간호를 맡긴 개인 간호사였어요" 배리는 크롱카이트가 데일리의 집에 올 때마다 누워서 선잠을 즐기 던 간이침대에 드러누워 데일리에게 어젯밤 사건을 설명해주었다. "그건 그렇고 날 쫓아내지 알라, 정말 고마워요" "그럼 여기 말고 어디 갈 데라도 있는 건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그야말로 처량한 부랑아 신세로군 요 만일 내가 나병 환자라 해도 지금보단 덜 따돌림받았을 거예요 아무래도 내 목에 방울을 달아 사람들에게 내가 접근하고 있다고 미 리 알려줘야 할 것 같네.- 데일리가 코웃음을 치며 되받았다. "별로 웃기지 않는 농담이군." 어느덧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어쨌든 어젯밤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죠 제인 가스톤 부인은 어제 오후, 조지 알랜의 하이포인트 집에서 심장 마비를 일으켰어요 의사는 그녀를 되살리려고 애를 써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던 거죠" 그후 얼마 동안 물건들이 뒤죽박죽 어질러진 작은 방 안에는 데일 리의 씨근덕거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방 안에는 배리가 집 폭발 사건 이후로 사모은 얼마 안되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홑어져 있었다. 옷가지들의 대부분은 포장도 뜯지 않고 쇼핑백 안에 그대로 처박아 둔 상태였다. 데일리는 간이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고. 배리는 스 타킹을 신은 발을 그의 허벅지 위에 걸쳐놓았다. 데일리가 그녀의 발 에 마사지를 해주는 중이었다. "간호사가 그날 오후에 죽었다면 어째서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 다가 시체를 치운 거지? "알랜 박사는 워싱턴으로 우선 바네사를 되돌려 보내야 했죠 그녀 가 가스톤 부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그 녀를 백악관으로 데려가려고 긴급 헬리콥터를 요청했죠 하지만 바네 사는 헬기가 다가을 무렵 가스톤 부인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됐다는군 요 도저히 위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심이 컸던 모양이에요 의사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그 동안 정이 깊이 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가스톤 부인의 아들이 이 도시에 사는데, 그와 즉각 연락이 안 됐나 봐요 알랜 박사는 그 아들에게 알리고 나서, 부인의 시신을 병원으로 옮겨놓으려고 했던 건데- "그런 일들은 흔히 있는 일들이지," "하지만 고인이 영부인의 개인 간호사일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지 죠 알랜 박사는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부인의 사망사실이 언론에 알 려지는 걸 두려워했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데일리가 중얼거렸다. "그건 그럴 듯한 얘기군. 물론 당신이 내 의견을 묻는다면 어설픈 핑겟거리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야." "그래요 어쪘거나 알랜 박사는 아들이 좀처럼 나타나질 않자 더이 상 기다리기 힘들다고 보고 구급차를 불렀죠 그래서 덕분에 그레이 와 난 도로에서 그 자동차 행렬을 발견하고 그들을 뒤쫓아 시신과 마 주치게 된 거예요"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게 다 사실이 아닌 추측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야. "아, 그 안쪽 좀 문질러줘요" "그런데 당신이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을 현장에 불러냈다는 사실이 좀 믿기 어렵군." "그건 불행히도 사실이에요 암브루스터 상원의원과 WVUE카메라 맨이 마주친 순간은 정말 절묘했죠 그 카메라맨은 내 끔찍한 실수가 드러난 직후 현장에 도착했어요 덕분에 그는 나와-그레이가 깜짝 놀 라는 모습과 암브루스터 의원이 거의 졸도할 듯한 모습, 그리고 부인 의 아들인 랄프 가스톤 씨가 도착하는 모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카 메라에 담을 수 있게 되었죠 부인의 아들은 어머니의 죽음이 몰고온 충격뿐만 아니라, 내가 일으킨 북새통은 물론, 떠들썩한 후유증에 휘 말린 셈이죠 그 와중에 병원에 불만을 품은 몇몇 사람들이 그 지역 언론에 그 사건을 귀띔해주었구 그 결추-당신도 알다시피 사건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답니다. 우리들은 그 지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 게 되었죠 1나마 방송국 사람들이 더 구린 냄새를 맡기 전에 사건의 여파가 잠잠해진 게 천만다행이에요 그래도 난 사건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도망쳐나왔죠" 그녀는 눈을 비비고 코를 풀었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뒤로 줄곧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의원은 그녀와 똑같이 자신을 우스깡스런 바보로 몰고 갔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옆에서 듣 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녀에게 격렬한 비난과 욕설 을 퍼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겁을 준 죄만 하더라도 말채찍으로 맞 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언젠가는 전문인답지 않은 행동에 대해 대 가를 치를 날이 있으리라 경고했다. 그리고 그때 가서 용서와 변명을 늘어놓아도 소용없으리라 으름장을 놓았다. 배리는 그 모든 말이 진 심이라 믿으며 그의 경고를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 그 이후로 그의 협박은 마치 단두대의 섬뜩한 칼날처럼 그녀의 목 위에 걸려 있는 꼴이었다. 그 심판의 칼날이 언제 어떻게 떨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죽은 목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장 기적으로 볼 때, 의원의 보복에 미리부터 겁낼 필요는 없었다. 자칫하 다간 그 미지의 처벌 방식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스스로 파멸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_오 데일리." 그녀는 팔로 눈을 가리면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저쩌다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모든 상황들이 날 그런 결론으로 끌어가고 있었어_9. 미합중국 대통령이 한두 건의 살인 사건의 주모자란 결론 말예요 사실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했 다면, 그 결론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느꼈을 거예요" 다독거리는 듯이 데일리가 답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믿듯이 논리적인 생각이 최선의 구원책이라 곤 생각지 않아. 역사를 돌이켜볼 때, 위대한 인물들치고 논리에 침을 뱉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거會" "날 위로해 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세요 그저 날 절망 속 에 빠져 있도록 내버려둬요 난 불행을 당해도 아무 할말 없다구요" 그는 그녀의 엄지발가락 밑 볼록한 부분을 문질러 주었다. "알았어. 이참에 완전히 패배자로 전락하겠단 건가?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그린 판사 사건보다 더 치명적인 결정타가 되는 셈이군." 그러자 그녀가 모기 소리만하게 종알거렸다.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그레이가 들것에서 천을 걷었을 때, 바네 사의 사랑스런 밤색 머리카락과 크림빛 살결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 했죠 하지만 뜻밖에도 거기엔 낮선 여인이 누워 있었어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뻔했죠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알다시피 '헬레네' 화산 처럼 폭발했구 그레이는~ 데일리는 그녀의 말을 재촉했다. "그레이는 어떻게 나왔지? "그는 유명한 마술사 '데이빗 카퍼필드'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 라져버렸죠" 그녀의 무모함은 여러 가지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그중에서도 그레이의 갑작스런 실종은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일찌감치 체념을 하고 암브루스터 의원의 분노를 달게 받아들 였다. 시간으로 따지면, 상원의원은 딸이 죽었다고 믿었던 그 몇 분 정도로만 배리를 모욕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녀는 워싱턴 언론계의 조롱거리가 될 운명이었다. 그린 판사의 사건 이후 조각조 각 모아온신뢰성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공중분해될 처지에 놓여 있었 다. 그녀가 다시 언론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일은 몇 년의 세월 이 필요할지, 아니 어쩌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는 지도 몰랐다. 설령 그녀가 그 사실을 방송국에 알리지 않았다 해도 소문은 반드 시 퍼지게 마련이었다. 그곳 펜실바니아 애비뉴는 그 소도시의 중심 시가지였다. 그런데 호화 배역들이 연출한 대실패작에 대한 소문이 어찌 쉽게 감춰질 수 있-는가? 그녀는 웃음거리가 될 각오를 단단히 했다. 아마도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리라. 하지만 그 어떤 마음의 상처도 그레이가 그녀를 내버려 두고 도망간 것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병원에서 제인 가스톤의 얼굴을 보다가 그레이의 얼굴로 시선을 돌 려보니, 뜻밖에도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생동감에 넘치는 얼굴이었다. 사실 암브루스터 상원의원보다는 그레이의 반응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상원의원의 반응이 훨씬 더 독설적이고 너무 요란한 탓에 그 녀는 그만 잠시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지독한 탄핵이 끝날 즈 음에 그레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병원을 다 찾아보고 주차장들까지 차례차례 뒤져보았죠 하지만 아무도 그가 떠나는 걸 못 봤다는 거예요 내 차는 원래 주차돼 있던 곳에 그대로 있더군요 그러니 그가 어떻게 그 도시를 빠져나갔는지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거죠" 그녀는 엄지손가락 손톱을 매만지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그 분야에 경험이 많은 그가, 나처럼 바보 같은 여자의 망 상에 넘어가 그런 수치를 당한 게 원통했을지도 모르죠" 데일리가 신음을 흘리면서 꾸짖었다. '게발 부탁이이 난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얘길 들으면 구역질이 나." "난,,,,,,." "당신이 본듀란트를 설득한 게 아니야. 당신은 그 일로 엄청난 성공 을 거둘 수 있다고 우쭐거린 죄밖에 없어. 그저 그가 이미 갖고 있던 의심을 확증시켜줬을 뿐이야. 기억 안 나나? "하지만 그를 만나 얘기를 나뒀기 때문에 그는 스펜서 마틴을 죽여 야 했어요" "자기 방어였을 뿐이야." "당신은 그렇게 확신하나요? "그럼, 당신은 그걸 의심한단 말야丁 "글쎄요 대통령이 아무 것도 감출 게 없다면 어째서 그레이 본듀란 트를 없애려고 와이오밍 주로 스펜서 마틴을 보낸 걸까요? 내가 그에 게 정신나간 가설을 들려줬기 때문에 그레이는 스펜서 마틴이 찾아온 진정한 목적을 오해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스펜서와 나의 방문 시 기가 겹치는 것도 어앰 우연의 일치였을지도 모르구요 대통령은 자 신의 수석 보좌관이 실종됐으니 지금쯤 틀림없이 대대적인 수색과 조 사를 벌이고 있을 거예요." 데일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뚜벅 내뱉었다, -勺레이는 마틴의 흔적을 다 없애버리고 어쩌면 그 시신도 도저히 발견될 수 없도록 처리해 놓았을 거야. 시신이 없으면 살인죄도 성립 될 수 없지." "하, 그 부분은 기술적인 문제군.- -아무튼 그는 그 문제를 그다지 염려하는 것 같지 않았어." U그래요 그리고 바네사를 훨씬 더 염려했어요 우리가 바네사가 죽 었다고 생각했을 무렵에 그는 마치 산송장처럼 보였죠" 그는 단지 육체적 쾌락 때문에 바네사와 불장난을 벌인 게 아니었 다. 그녀를 진실로 사랑한 것이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출세를 포기할 정도였다. 자신과의 소문 때문에 그녀의 결혼생활이나 공적인 위치가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평생의 직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녀를 너무 나 사랑했기에 친아들에 대한 그 어떤 권리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기 가 태어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또한 적막하기 짝이 없는 귀양지 같은 곳에서 홀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겐 뼈를 깎는 고문이었으리라. 평생동안 그런 사랑을 받아보질 못한 배리는, 그 헌신적인 사랑이 천박하고 이기적인 바네사 암브루스터 메리트에게 헛되이 썩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척 기분 상했다. 물론 그녀가 아프다는 것은 사 실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녀가 사람들을 뒤에서 조종해도 좋다는 정당한 명분이 될 수는 없었다. 어째서 바네사는 날 이 일에 끌어들인 걸까? 어째서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흐려놓고 나에게 이상한 암시 를 주었을까? "그는 상당히 젊고 정력적인 남자야." "으응? 뭐라구요? 지금 누굴 말하는 거죠? 본듀란트? 배리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 점에 대해선 난 잘 모르겠어요" 데일리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되받았다. "당신 둘은 잘 안,,,,- "그래_a,안 맞아요? '허허, 당신은 그를 좋아했던 것 같던데? '기거 왜 이래요? 본듀란트 씨는 나름대로 장점을 갖고 있긴 하죠 하지만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남자라구요 그는 튼튼 하고 말수가 적은 남잔데, 내가 바로 가장 역겨워하는 타입이죠 게다가 그는 친구를 죽여놓고 자기 방어라고 우기면서 자신의 주장 외엔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9. 어디 그뿐인가요? 주제파 악도 못하교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에게 눈이 멀어 있죠 또한 그 는 험준한 산골에서 은둔자처럼 살아가는 유령 같은 괴짜예요 아니 설령, 그가 요 앞 길모퉁이에 살고 있구 올해의 '강직 -사회 참여상'을 수상한 남자라고 쳐요 하지만 그는 이미, 배리 트래비스라 는 여잔 걸어다니는 재난이며 일촉즉발의 골칫거리라는 자신의 견해 를 공공연히 밝혔어요 아무튼 지금 이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군요 난 그 남자에게 관심이 없고 어쨌든 그 역시 지금은 행방을 감친으니 까_9. 이제 됐나요? "그와 만난 지 얼마만에 함께 잠자리에 들었지? "한 90초 후? "맙소사, 배리? '心理요 정말 전문가다운 접근이었죠 당신이 매춘부라 해도 그리 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잠시 '훅' 하며 한숨을 내뿜었다. '지제 내 기자로서의 생명이 끝장났으니, 아무래도 쾌락을 맛보면 서 돈을 버는 길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9_" 데일리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매춘부가 된다구? 그 모습이 어서 빨리 보고 싶군? "흥, 내 모습을 보는데 특별 서비스 요금을 더 추가시킬 거예요" 그녀는 간이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음엔 기운을 좀 내려고 대화를 시작한 건데, 오히려 기분이 더 울적해지는군요 가서 샤워나 해야-어.- "샤워를 해도 마음의 고통은 치료할 순 없을걸? "그래요 하지만 어쨌든 샤워는 해야겠어요" 그녀는 쇼핑백을 뒤져 새로 산 속옷 한벌을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속옷에 붙은 정가표를 떼어냈다. 래-일리, 지금 내게 한 가지 소원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난 바네사 메리트가 내게 커피를 함께 마시자고 전화했던 날로 되돌아게 해달라 고 빌고 싶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의 제의를 단번에 거절하고 말 거예요? "그 말뜻은 메리트 부부의 아기가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었고 그외 다른 사건들은 모두 당신의 잘못된 판단과 과대 망상으로 빛어 진 것들이라고 확신한다는 얘긴가? 그러자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당신은 그게 아니라는 건가요? "얘야, 정말 얼굴이 환해졌구나? 암브루스터 상원의원은 딸을 부등켜 안았다. '지렇게 널 다시 보게 되니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구나."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보게 되어 정말 기뻐요" 그녀 역시 의원을 껴안았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불안감을 느끼고 그 녀에게서 팔을 풀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밝은 미소는 10달러짜리 가짜 다이아몬드 귀고리처럼 금세 사그라들었다. '저도 오늘 아침 거울을 보았어요 제 모습에는 '환하다'는 표현이 결코 어울리지 않죠" "얘야, 넌 몇 주동안병상에 누워 있다가이제 막일어났는데, 뭘 더 바라니? 우선은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눈 깜짝할사이에 제 혈색 을 찾게 될 게다." 데이빗 메리트가 옥수수 가루를 넣어 살짝 구운 머핀 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끼여들었다. "제 눈엔 아내가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이는데요? 세 사람은 바네사의 방에서 유럽식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클리트의 주장에 따르면, 바네사에게 가장 해로운 것이 카페인이었지 만 그녀는 벌써 커퍼를 두 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얘야, 이참에 집에 와서 몇 주 동안 푹 쉬는 게 좋겠구나. 날마다 양지바른 곳에 누워 낮잠을 실컷 자구 영양가 풍부한 남부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거야. 데이텟,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우리가 또다시 이앨 미시시피 강변으로 몰아내야겠나? 사위가 선거용으로 써온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는 것을 보면,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말과 표정을 연습해둔 것이 분명했다. '날리투 전 그녀를 이제 막 데려왔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당장 그녀를 내 곁에서 떠나보내기가 아쉽군요 게다가 미시시피에서 치료 받은 탓에 병세가 많이 호전된 겁니다. 그간 조지가 그녀를 위해 애 많이 썼죠" 상원의원은 조지 알랜에 대한 사위의 의견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저께 밤 그 의사는 날 보더니 똥줄이 당기는 표정을 짓더군," 바네사는 화장대 앞에 앉아 귀고리를 매만졌다. "어떤 걸로 하죠? 양쪽 귀에 각기 다른 귀고리를 대면서 남편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 았다. "진주 귀고리가 제일 좋은 것 같은데, 아버지가 보시기엔 어때요? "진주가 좋을 것 같구나." '지건 다 엄마 거죠" "그래, 나도 알아." "고등학교 I학년 무도회 때, 아버지는 내게 이걸 해도 된다고 하셨 죠 그때 일 기억나세요, 아버지? 그러다가 내가 한쪽 귀고리를 잃어 버리자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죠 그래서 난 무도회 다음날, 체육관을 샅샅이 뒤진 끝에 다시 찾아냈어요 그리고 그때 입었던 분홍색 드레 수 기억나세요? 아버진 재봉사가 그 옷을 너무 짧게 만들었다고 화를 내셨죠 내 무도회 짝은 스미스 집안의 남자애였어요 그앤 프린스톤 대학에 진학했다가 성적 불량으로 퇴학당했죠 그후로 그애가 어떻게 뤘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군_Q" 바네사가 조울증 환자로 밝혀지기 이전에는 클리트도 그녀의 기분 이 격렬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당혹해 하고 슬퍼했다. 그녀는 우울해 하다가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엔 또다시 불안해 하거나 지나치게 까불거렸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 녀가 격앙된 모습은 별로 보질 못했다. 어쩌면 발작적인 증세이거나 항우울약이 지나치게 많이 투여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 두 증세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비슷했는데, 그녀가 격리 치료를 받은 이유도 그런 병적인 증세가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췄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그녀의 불안정한 상태를 눈치챘지만 일부러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바네사의 말을 중단케 하고 클리트에게 주치의의 처 지를 설명했다. "클리트, 사실 그날 밤 조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 서 그를 비난할 순 없잖습니까? 그 간호사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런 데 설상가상으로 그 여인의 아들과 제때 연락이 되지 않았죠 그런 상 황에서 배리 트래비스가 장인 어른과 그레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들이 닥쳐 일데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자칫하면 그 사건이 방송에까지 나 가게 될 뻔했죠 다행히 우리가 사전에 그 사건을 무마했기에 망정이 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러고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배리란 여잔 정말 그 시체가 바네사라고 생각했습니까? 클리트는 뭉툭한 검지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면서 대답했다. "그 여자는 내게 귀가 따가을 정도로 호되게 야단 맞았지. 하지만 난 아직도 그녀에 대해 분이 다 풀리지 않았네,- 바네사가 화장대 앞을 떠나면서 대화에 끼여들었다. "그 일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으면 해요 내 팔을 좀 봐요 소름이 다 돋고 있잖아요? 뜬소문이라도 내가 죽었다는 얘길 들을 때마다 정 말 소름이 끼친다구요" 갑자기 클리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여자 때문에 겪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이 세상 에 무책임한 기자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여자는 그중의 최고라고 할 수 있지. 대체 어떻게 그 여잔 그런 돼먹지 못한 생각을 갖게 된 거냐? 얘야, 혹시 그 문제에 대해 할 얘기는 없니? 얘기요? 아, 하이포인트에서 지낸 얘기를 들려달라는 뜻인가 요? 하지만 그패 기억은 모든 게 몽롱하기만 해요 그곳을 어떻게 떠 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이곳 내 침대 에 누워 있었고, 조지가 앞으로는 훨씬 좋아질 거라고 말해주더군요~1 "사실이 그렇소 여보" 데이빗이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하 지만 클리트는 바네사가 재빨리 그 입술을 피하는 모습을 놓치지 알 고 보았다. "조지는 간호사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고 하더군_9. 그 일은 참 안됐어요 제가 실제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지만 말예요" 그러고서 그녀는 가냘픈 팔목에 끼운 무거운 팔찌의 위치를 다시 조정했다. '씨 팔찐 참 거추장스럽군요" 클리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정말로 가스톤 부인을 만난 적이 없나? "그렇다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기억나지만 여러 사람 을 데려다놓고 그녀를 골라내라면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부인 의 얼굴을 전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아무래도 이건 끼지 말아 야 할까 봐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목에서 팔찌를 벗겨 화장대 위에 떨어뜨렸다. 순간 '쨍그랑' 소리가 방 안 공기에 파문을 일으켰다. "조지 알랜은 너와 간호사가 상당히 친했다고 주장하던데? 데이빗이 그녀 대신 얼른 말을 받았다. "조지 말이 맞습니다. 여보 당신은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이야." '게이빗, 난 그녀를 결코 만난 적이 없어요 내가 그녀를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아는 사람은 바로 난데, 정말 그녀를 만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언제나 내 생각을 고치려 드는 거죠? 당신은 언제나 그러는데, 그게 싫어또 그러면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단 말메요" "당신은 바보가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날 바보 취급하고 있어요" 데이텟이 부드럽게 말하며 달랬다. '져보 당신은 지금까지 치료를 받아왔어. 그 와중에 가스톤 부인에 게 정이 듬뿍 들었지. 하지만 당신은 진정제 약효 때문에 그 일을 기 억 못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좋아요, 좋아. 어찌줬든 난 그녀가 내 침대 발치에서 죽었다는 사 실만은 믿고 싶지 않아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상한단 말예요" 그러고는 다른 팔찌를 손목에 끼고 손을 흔들어 보았다. '끼 팔찌가 좋아요 팔찌 장식물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거 든요 꼭 크리스마스 샐매 방을 소리 같아요" '씨번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눈치 못챈 사이에 성큼 다가오겠지," 데이빗은 다시금 세련된 미소를 지으면서 점잖게 말했다. "그리고 우린 종을 울리면서 새해를 맞이할 거야. 바로 대통령 선거 의 해를. 이제 배리 트래비스를 비롯하여 금년의 모든 불쾌한 사건들 은 잊어버리고 내년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기로 하지." 마치 연설을 하듯 데이텟이 두 손을 격렬하게 비볐다. "우린 엄청난 선거 계획을 세워야 하오" "난 그 부분은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클리트 역시 딸의 말뜻을 받아들여 맞장구쳤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자넨 아직 때도 안 뤘는데 너무 서둘고 있어. 우선은 바네사의 활기를 되찾도록 하세. 선거 전략을 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잖나? '치금 계획을 세우기에 결코 이른 시각이 아닙니다." 바네사가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건 생각만 해도-. 내 말 들어봐요, 데이텟. 난 오랜만에 기분 이 참 좋아졌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몸이 오늘 아침 기자회견 장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클리트는 '이스트 룸'에서 오전 11시에 기자회견이 열릴 예정이란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바네사도 그 자리에 참석할 예정이라 니! 그 때문에 영부인의 전속 스타일리스!푸의복, 머리형 등의 디자이 너)가 백악관으로 급히 달려왔다. 그 여자가 부지런히 바네사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주고 화장을 해주었지만, 숙련된 기술로도 쑨밑은 검은 기미나 수척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네사가 불안스레 물었다. "내가 왜 그곳에 참석해야 하죠? "단 몇 분이면 돼." 그러자 클리트가 불만스런 목소리로 하네사의 말을 거들었다. "어서 바네사의 질문에 대답해보게나. 어째서 딸애가 그 기자회견 장에 있어야 하는가? 데이빗이 무뚝뚝하게 되받았다. "바네사가 배리 트래비스를 우리의 인생 속으로 끌고 들어왔기 때 문입니다.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응급실의 그 개망 신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죠 요즘 수많은 유언비어와 術士문들이 무섭게 번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소문들을 잠재을 수 있는 유일 한 길은 가스톤 부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 그 원인을 설명해주는 것 뿐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 나라의 영부인을 무척 보고 싶어합니다. 바네 사, 지금까지 백악관에 날아온 당신의 쾌유를 비는 카드와 편지는 아 마 수천통 정도 될 거야. 그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에 고마 움을 표시해야지." '官론 나도 그 사람들의 관심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요 내 직 원들을 시켜서 곧바로 답장을 써보내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기자회견 만큼은 연기할 순 없나요? 단 며칠이라도 말예요" 데이빗이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지미 예정된 일이야. 만일 예정이 틀어지면 달톤이 노발대발할걸? 게다가 지금 그 일을 취소하면 당신이 개인 간호사까지 고용하면서 하이포인트에 있어야 했던 이유에 대해 더 많은 의심을 사게 될 거야. 알다시피 요사이 난더 이상언론의 부정적인 표적이 될 수없는처지 -. 당신은 이미 내게 치르게 한 대가로도 부족한 거야삘 클리트가 대뜸 나서서 고함을 꽥 질렀다. "데이빗! 그게 무슨 소린가? 나원 참? 대통령이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피송합니다. 너무 심하게 말을 한 것 같군요 진심으로 한 말은 아 닙니다." 그러고는 아내에게 다가가 양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순간 클리트 는 이번에도 딸애가 몸을 움츠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데이빗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우린 지금 모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하지만 당신은 그중 에서도 가장 심한 것 같군, 원한다면 오늘 회견장에는 나오지 않아도 돼.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나도 당신이 그 일을 견뎌낼 수 없 는데, 굳이 그 행사장에 참석하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아." 바네사가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자, 클리트는 딸의 눈에 혼란스러 움과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에요, 데이빗. 그곳에 참석하겠어_9- 영부인으로서의 내 의무 잖아요? 그러자 데이빗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잘 생각했어! 그래야 내 여자지! 이번 일이 당신에게 무리라고 생 각했다면 애당초 기자회견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조지는 당신이 그 일을 해낼 거라고 장담하더군. 사실 그 친구는 당신이 자유 롭게 사회 활동을 할수록 당신 건강도 더 좋아질 거라고 말했지." '기자회견장에서 난 윌 하죠?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 달톤이 가스톤 부인에 대한 간략한 추모 사를 낭독할 거야. 당신이 그 추모사를 썼다고 발표하면서 그 글을 대 신 낭독하는 거지. 당신이 할 일은 그저 그곳에 서서 카메라들 앞에서 우아한 포즈나 취해주는 것뿐이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클리트가 여유 있게 대신 대답했다. "물론 내 딸은 그 일을 할 수 있을걸세. 바네사가 언제쯤 회견장으 로 내려가-하나? "11시 직전까지 오면 됩니다. 장인 어른께서 ZL려 곁에 있어주신다 면 전 이제 마음 놓고 다른 볼일을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데이빗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바네사, 뭣 좀 먹으려무나." '개고프지 않아요 아까 전에 오렌지 주스를 마셨어요"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다. "아버지, 아까는 데이빗이 있어서 얘길 못했는데, 그가 혹시 그레이 를 언급하지 않았나_Q?" "유감스럽게도 그렇단다." 클리트가 불퉁거렸다. 딸에게 그저께 사건 현장에 그레이 본듀란트 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데이빗이 은연 중에 그 얘기를 비쳤을 때는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그곳에서 람보의 최후를 봤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야기가 지 지부진해지는 것 같구나." "그가 지금 워싱턴에 와 있단 얘긴가요? "그랬단다. 하지만 지금쯤 꼬리가 빠지게 와이오밍 주로 줄행랑을 치고 있을 게다." "아버진 언제나 그를 미워하셨죠 그러시면 안 돼요 그는 내게 항 상 잘해줬어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 "바네사,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죠? 그가 이곳엔 왜 나타난 거예요? '쌔기하자면 길단다." "그래도 난 듣고 싶어_Q" "그 문젠 다음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넌 지금 할 일이 많잖니? 하지만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졸라댔다. "난 그레이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자칫하면 그녀가 마음의 평정을 잃고 발작적으로 나을 것 같았기에 클리트는 우선 그녀를 달랠 생각으로 간단하게 요약해주었다. "나도 그가 이곳에 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그가 배 리 트래비스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뿐이지. 난 그처럼 위험한 한 쌍은 생전 처음 보았지만, 어찌 보면 그 두 사람처럼 죽이 잘 맞는 짝꿍도 없을 것 같더구나." "어쩌다가 그레이가 그녀와 연결된 거죠? "낸들 알겠니? 그리고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 여잔 행실이 나 빠. 그리고 본듀란트는,,,,,,. 허참, 바네사, 왜 그런 얘길 묻는 거지? 넌 내가 그를 좋게 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잖니? "그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사 실은 전혀 그렇지 않죠 그는,,,,,." 클리트는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입술에 댔다. "바네사,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버진 아셔야 해요 난 그 얘길 해야만 한다구요'' 미용사가 기자회견을 대비해서 꾸민 그녀의 아름다운 가면에 여기 저기 균열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녀의 푸른색 눈망울에서는 격한 감 정의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딸의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며 클리트가 부드럽게 달랬다, '지금은 안 된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모든 게 다 엉망이에요 나도 엉망처럼 보이지 않나요? 데이빗은 내 상태가 좋아진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난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건 아버지도 잘 아실 거예요, 그렇잖나요? 내면이 완전히 파멸된 사 람처럼 보이지 않냐구요? 난 그걸 똑똑히 느낄 수 있어요" "쉬, 쉬." 그는 딸을 진정시키면서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품에 묻고 그녀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내 말 잘 들어라, 바네사. 이 아비가 항상 네 일을 대신 처리해오고 있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아직도 난 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있단다. 넌 예전처럼 그냥 날 믿기만 하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해주겠 다. 모든 것을 다. 내 분명히 약속하마, 알겠지?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뗐다. 그는 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그 뜻이 딸을 지배하는 혼란스러움과 신경계에 스며든 약기운을 베뚫 고 내면에 전달되길 바랐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트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자, 이제 코에 화장분을 다시 발라야 할 것 같구나. 미합중국 영부인이 화장이 엉망이 된 술집 마담 같은 꼴을 보일 순 없잖나? 그녀는 욕실로 향하다가 다시 돌아섰다. "오늘 아침엔 스펜서도 나오겠죠? "그럴 게다. 그런데 그건 왜?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곳에 돌아온 후로 그를 보지 못해서 요 단지 그 뿐이에요" 상원의원이 짙은 눈썹을 치뜨면서 콧마루도 함께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나 역시 요즘 백악관에서 보지 못했다." (2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