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언 "리차드, 다음 번에는 무슨 책을 쓸 작정인가? '조나단' 다음에는 뭐냔 말이야." '갈매기의 꿈 (Jonathan Seagull)' 이 출판된 뒤에 나는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었다. "내가 여태까지 쓴 모든 책들이 독자들한테 말해 주었으면 하고 스스로 간구(懇求)했던 바를, 그 책들이 한결같이 전부 말해 주었으므로 나는 단 한 마디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다." 라고. 한동안 경제적인 곤란으로 배를 주린 적도 있거니와, 은행돈을 빌어서 샀던 자동차의 할부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해서 은행에 의하여 자동차를 압류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런 종류의 구차스러운 일들을 경험한 후에 이제는 경제 사정이 많이 호전되었으므로 돈 때문에 굳이 밤늦게까지 일할 필요는 없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것은 즐겁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철이 되면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바다처럼 드넓은 초록색 초원지대로 내 구식 복엽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승객들을 3달러씩 받고 태워 주었다. 그러자 나는 예전에 느끼곤 했던 어떤 긴장감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인가 말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말한 적이 아직껏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글쓰는 일을 조금도 즐겨하지 않는다. 저 바깥 미지의 어둠 속에 내재하는 이데아 (Idea)에 대하여 등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이데아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일을 회피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연필을 집으려고 손을 내뻗지 조차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가다 어떤 환각을 느낄 때가 있다. 다이너마이트가 돌연 폭발하는 바람에 내 앞에 있는 바람벽을 꿰뚫고 유리, 벽돌, 나무 조각 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날린다. 그러자 누군가 그 어지럽게 흩어진 파편들을 밟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목덜미를 그러잡고서 조용히 말한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글로 표현해서 종이 위에다 써놓지 않는다면, 나는 그때까지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테다." 이것이 내가 '환상(Illusions)' 과 마주치게 되었던 경위다. 중서부의 목장지대에서 나는, 심지어 풀밭에 누운 채 정신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커다란 구름의 알갱이들을 증발시켜 흩어지게 하는 것을 연습해 보았다. 그런 식으로 다른 일에 열중해 보아도, 환상과 함께 내게 찾아왔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도저히 내 마음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만약에 누군가....... 이 세상 만사를 능히 아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를 설명해줄 뿐더러,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를 나에게 가르쳐 준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저 높은 곳에 이른 초월적인 영혼의 소유자를 내가 만날 수 있다면 어찌 될까? 가령 싯다르타(Siddhartha)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현상세계(現像世界)에 가득 찬 환상들 뒤에 숨겨진 실체(實體)를 인식하므로 그 환상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그런 초인적인 존재가 우리 시대에 강림한다며 어떻게 될까? 그런 초인간을 내가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어디선가 그가 복엽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 내 비행기가 착륙해 있는 바로 그 초원에 내린다면 어찌 될까?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어쩌면 그는, 기름으로 얼룩지고 풀잎으로 더러워진 내 일기장에 씌어진 글 속에 나타나 있는 그런 구세주와 전혀 비슷하게 생기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환상'이라는 제목의 이 책이 말하는 것을 자칫하면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을 성싶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책에 등장하는 메시아가 내게 들려주었던 말, 예컨대 우리는 정신 적인 자력(磁力)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상념 속에 떠오르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 우리의 생활 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그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에 이르기까지 나 자신을 이끌어 온 데는 아무래도 무슨 까닭이 있음직하다. 그리고 당신도 또한 나와 마찬가지리라.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이 책을 손에 들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책에 실린 모험담 속에 무슨 의미가 깃들여 있는지라 당신은 그 의미를 상기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시점(時點)에 이르게 되었으리라. 나는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나를 찾아왔던 그 메시아가 저 외계의 어떤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 속에 편안히 앉아서(이는 정녕코 소설이 아니다) 당신과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는 자기와 내가 구상했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 나는 것을 재미있어 하며 빙그레 웃고 있지 않을까? 제 1 장 1. 한 주님이 이 땅에 찾아왔다. 주님은 인디애나(Indiana)의 성스러운 땅에 태어나서, 포트웨인(Fort Wayne) 동쪽의 신비스러운 구릉지에서 성장했다. 2. 주님은 인디애나의 공립학교를 다녔으며, 장성함에 따라 자동차 기계공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하여 이 현세(現世)에 관한 지식을 익혔다. 3. 그러나 주님은 다른 나라와 다른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있었고, 주님이 이전에 살았던 다른 차원에서의 삶을 통하여 터득한 예지가 있었다. 주님은 이러한 지식과 예지를 상기했으며, 그렇게 상기함으로써 지혜롭고 강인하게 되었다. 그러자 다른 보통 사람들이 주님의 뛰어난 지력을 알아차리고서 그의 조언을 구하러 찾아왔다. 4.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무릇 인류를 도울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는데, 그가 믿은 바대로 정말 그러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권능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마음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을 낫게 하고 싶은 소망에서 주님께 찾아왔다. 5.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님은 믿었는데, 그가 믿은 바대로 정말 그러했다. 그가 일하는 작업장과 자동차 수리 공장은 그의 가르침과 손길을 구하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어 가득 차게 되었다. 게다가 바깥 거리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으니, 그들은 주님이 지나칠 때 주님의 그림자가 자기들 위에 드리워져서 자기들의 삶을 변화시켜 줄 것을 오로지 갈망했다. 6. 그러한 군중으로 말미암아 몇몇 현장 주임과 공장 지배인들이 주님께 대하여 그의 연장 들을 내려놓고 그의 길을 떠나도록 하라고 명령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밀치락달치락 하면서 주님의 주위에 모여드는 통에, 주님이나 다른 기계공들이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는 자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7. 그래서 주님은 시골로 내려갔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Messiah)로, 기적 을 일으키는 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은 바대로 사실 그러했다. 8. 주님께서 설교할 때 마침 폭풍우가 지나가도 청중의 머리 위엔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 하늘에서 아무리 천둥 번개가 내리칠지라도, 청중의 맨 끝에 있는 사람한테나 맨 앞에 있는 사람한테나 똑같이 분명하게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더욱이 그는 언제나 우화(寓話)를 들어 설교했다. 9.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과 질병, 부유와 빈곤, 자유와 굴종 - 이렇듯 대조적인 인생의 제상(諸相) 가운데 어느 한쪽에 동의하는 힘이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은 즉, 이를 통제하는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지 다른 삶이 아님이니라." 10. 어떤 공장 직공이 말했다. "주님, 그런 얘기는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는 쉬운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와는 달리 인도를 받으시며, 우리와는 달리 애써 일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현세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을 해야만 합니다." 11. 주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옛날옛적에 수정처럼 드맑은 어느 대하(大河)의 밑바닥에 뭇 생물들이 촌락을 이루며 살았느니라. 12. 대하의 물결은 젊은 자와 늙은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착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 지 않고 그들 모두 위로 유유히 흘러가거늘, 물결은 애오라지 수정처럼 드맑은 자신만을 아랑곳하면서 자신의 길을 흘러갔느니라. 13. 생물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강 밑바닥의 바윗돌과 나뭇가지에 착 달라붙어 있었도다. 달라붙는 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이요, 물결에 앙버티는 것은 그들 각자가 태어날 때부터 무턱대고 배운 것이었기 때문이니라. 14. 그러나 한 생물이 마침내 말했다. '나는 달라붙어 있는 것에 싫증이 난다. 비록 내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물결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만 손을 놓아 버릴 테다. 그러면 이 물결은 자신이 가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가리라. 이와 같이 달라붙어만 있으면 나는 권태로 죽게 될 것이다.' 15. 그러자 다른 생물들이 비웃으며, '바보야! 어디 한번 손을 놓아 보렴. 그러면 네가 숭배 하는 이 물결은 너를 송두리째 뽑아 던지므로, 너는 바윗돌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는 권태로 인한 죽음보다 훨씬 더 빨리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도다. 16. 그러나 이 생물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두 손을 놓아 버리더라. 그러자 그는 당장에 뿌리째 뽑히다시피 뒤엎어져서 바윗돌 위로 내팽개쳐지 게 되었느니라. 17.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생물이 다시금 달라붙어 있기를 막무가내로 거부하는지라 물결은 그를 밑바닥으로부터 들어올려 자유롭게 하였도다. 그 후 그는 더 이 상 멍들거나 상처입지 않았느니라. 18. 그가 물결을 따라 하류(下流)로 흘러가자, 그곳에 있던 생물들의 눈에는 그가 신기한 이방인으로 보이는지라, 모두들 깜짝 놀라 소리쳤도다. '기적을 보라! 우리와 진배없는 생물 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아간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러 오신 저 메시아를 보라!' 19. 그러자 물결을 따라 흘러가던 이 생물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이나 마찬가지로 메시아가 아니다. 우리가 용감하게 손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물결은 즐거이 우리를 들어올려 자유롭게 해준다. 우리의 진정한 과업은 이러한 항해, 이러한 모험이다.' 20. 그러나 하류의 생물들은 그 동안 줄곧 바윗돌에 달라붙은 채 '구세주여!'를 한층 더 소리높이 외치더라. 그들이 다시금 눈여겨보았을 적에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런즉 저희들만 뒤에 남게 된 그들은 구세주의 전설을 만들었느니라." 21. 날이면 날마다 전보다 더욱 많이, 더욱 빽빽이, 더욱 열렬히 주님의 주위에 모여든 사람 들이 주님으로 하여금 쉴새없이 그들을 치료하게 하고, 기적을 베풀어 항상 그들을 배부르게 하고, 그들을 가르치게 하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도록 간청하였다. 이를 깨달은 주님께서는 그날 외따로 떨어진 동산 위로 홀로 올라가 그곳에서 기도했다. 22. 주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기도하여 가라사대, "무한한 광채(光彩) <이즈(Is)>시여, 만일 당 신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시고, 그리고 나를 하여금 불가능한 임무를 그만두게끔 하옵소서. 나는 다른 한 사람의 생명조차도 구원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만인이 생명을 달라고 나한테 부르짖고 있나이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했던 것이 유감스럽게 느껴지나이다. 만일 당신의 뜻이거든 나로 하여금 내 엔진과 공구 곁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인간들처럼 살도록 하옵소서." 23.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도 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떠들썩하지도 않고 나지막하지도 않으면 서 무한히 친절한 어떤 목소리가 동산 위의 주님께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뜻이 아니라 그대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대가 뜻하는 바는 곧 내가 그대를 위하여 뜻하는 바이기 때문이니라. 다른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그대 역시 그대의 길을 가도록 하라. 그리하여 부디 행복할 지어다." 24. 이러한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은 주님께서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어린 기계공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동산 아래로 내려왔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우르르 몰려들더니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자기들을 치료해 주고, 가르쳐 주고, 계속 먹여줄 것을 탄원했다. 게다가 기적을 베풀어 자기들을 즐겁게 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주님은 무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기분 좋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제 그만두노라." 하셨다. 25. 이에 소스라치게 놀란 무리는 말문이 막힌 나머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26. 주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느 인간이 하나님께 아뢸진대, 자기가 간절히 소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간에 이세상의 고난받는 자들을 돕는 것이라고 하니, 이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건대, 그가 해야 할 일들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도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분부대로 거행해야만 하느뇨?" 27. "물론이지요, 주님!" 하고 무리가 외쳤다. "하나님께서 그렇듯 원하신다면 지옥 그 자체 의 고통을 받는 것인들 그에게는 기쁨일 터입니다." 28. 설혹 그것이 어떤 고통이든, 혹은 그 임무가 아무리 난감(難堪)한 것일지라도 그렇다는 말이뇨?" 29.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그런 것이라면, 교수형을 당하는 것도 영예려니와, 나무에 못 박혀 화형을 당하는 것도 영광입니다." 라고 그들은 말했다. 30.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뇨?" 라고 주님께서 무리에게 물으셨다. "가령 하나님께서 너희 들 면전에 대고 친히 이르시기를, '너희가 살아 있는 동안 바로 이 현세에서 행복을 누릴 것을 내가 명령하노라.' 할진대, 그럴 때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뇨? 31. 그러자 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골짜기와 산허리에서는 단 한 마디의 말도, 단 하나의 목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32. 그렇듯 침묵을 지키는 군중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우리는 인생의 행복 에 이르는 오솔길에서 하나의 예지를 찾아내게 될 터인즉, 이러한 예지는 우리가 이 현세에 서의 생애를 선택했던 그 연유(緣由)가 되는 도다. 나는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이러한 예지를 터득하게 되었으매, 너희들의 인생을 너희들 자신의 의사에 맡기는 쪽을 선택하는 바이니라. 그러니 만큼 너희들은 제각기 자기가 본래 뜻한 바대로 자기 자신의 오솔길(인생행로-역주) 을 따라 걷도록 하라." 33. 그러더니 주님은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서, 그들을 뒤에 남겨 둔 채 주님 자신의 길을 떠 났다. 그는 인간과 기계의 일상적 세계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제 2 장 내가 도날드 시모다를 처음 만난 것은 한여름 무렵이었다. 나는 4년 동안이나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사람들한테서 10분 비행에 3달러씩 받고 내 구식 복 엽 비행기(biplane: 두겹의 날개를 가진 비행기-역주)에 태워 주는 일에 종사해 온 셈인데, 여태까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비행사를 만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일리노이주의 페리스(Ferris) 바로 북쪽의 하늘을 날고 있다가 내 플 리트(Fleet) 기(機)의 조종실에서 언뜻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건초의 레몬빛과 목초 의 에머럴드 그린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져 있는 목초장에, 황금색과 백색의 페인트를 칠한 구식 트러블 에어 4000기 한 대가 유유자적하게 착륙해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내 생활은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이지만 이따금 외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트래블 에어기를 내려다보며 몇 초 동안 망설인 끝에, 내가 잠깐 들러 본다 한들 그 비행기의 주인한테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나는 절기판을 닫아 천천히 공전(空轉)하게 하고, 방향타에 최대한의 바람을 받음으로써 비행기가 측면 활하(側面滑下)를 시작하도록 조종했다. 그러자 플리트는 나와 더불어 지상을 향하여 비스듬히 하강했다. 윗날개와 아랫날개를 연결한 철선에 부딪치는 바람, 그 부드럽고 상쾌한 바람소리, 프로펠러를 빙글빙글 돌아가게 만드는 구식 엔진에서 들려 오는 느릿한 <폭폭>소리. 나는 착륙지점을 좀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 보안용(保眼用) 안경을 치켜올린다. 거대한 옥수수 밭, 그 녹색 잎의 정글이 비행기가 바로 아래를 휙휙 소리내며 지나치는 듯하다. 이윽고 울타리가 얼핏 내 망막에 비치는가 싶더니, 넓디넓은 목초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 시야가 미치는 저 멀리까지 아스라이 펼쳐진 목초장은 최근에 풀을 베어낸 듯이 보인다. 조금 아까 측면 활하를 하도록 꺾어 놓았던 조종간과 방향타를 바로잡자, 나의 플리트는 지면에 닿을락말락 매끄럽게 날아간다. 비행기 바퀴의 타이어를 스치는 목초 이파리들, 곧 이어 바퀴가 단단한 땅바닥에 부딪치며 덜커덩거리는 소리, 그 귀에 익은 나지막한 소리. 차츰차츰 속도가 줄어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제 바야흐로 엔진의 파열음과 함께 추진력이 별안간 돌발하는지라 나의 플리트는 미끄러지듯이 굴러가서, 또 하나의 복엽 비행기 곁에 멈춰 선다. 나는 절기판을 완전히 닫고 나서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러자 부드럽게 떨꺽떨꺽 소리내며 돌아가던 프로펠러의 회전이 점차로 느려지더니, 마침내 무더운 7월의 절대적인 적막(寂寞) 속에서 그 회전을 멈춘다. 트래블 에어기의 비행사는 비행기의 왼쪽 바퀴에 등을 기댄 채 풀밭에 앉아 있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역시 30초 동안 그를 눈여겨보았다. 그의 침착한 얼굴이 신비스럽게 보였다. 나 같으면 그렇게 침착하지 못했으리라. 내가 착륙해 있는 들판으로 다른 비행기가 날아오더니 내게서 약 10야드 떨어진 곳에 멈춰 섰는데도, 그처럼 가만히 앉아서 잠자코 바라보고 있을 만큼 태연 자약할 수 있었을까? 나는 왠지 모르게 그가 좋아지는 바람에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사를 보냈다. "어쩐지 당신이 외로와 보이더군요." 이렇게 말을 거는 나의 목소리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가로질러 갔다. "당신도 역시 외롭게 보였어요." "나는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번거롭다고 하신다면 나는 다른 데로 가겠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의 이러한 대답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늦어서 미안하군요." "괜찮아요." 헬멧과 보안경을 벗어 던진 나는 조종실에서 기어 나와 땅 위에 내려섰다. 플리트를 타고 두 시간쯤 하늘을 날아다닌 후에 땅을 다시 밟으면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지곤 한다.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당신이 햄과 치즈로 만든 샌드위치를 싫어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햄과 치즈, 게다가 어쩌면 개미가 한 마리 들어 있을지도 모르오."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거니와 자기 소개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몸집이 별로 큰 사람은 아니었다.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그가 등을 기대 고 있는 바퀴의 고무 타이어보다도 더 짙은 검정빛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매의 눈처럼 새카맣고 부리부리했다. 낯익은 친구의 눈이 그렇듯 검은 눈일 경우에는 괜찮지만, 낯선 타인의 눈이 그럴 때에는 정말이지 나는 마음이 켕기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어쩌면 그는, 당수를 배우려는 사람들한테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격렬한 동작을 묵묵히 취 하고 있는 당수 사범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샌드위치 한 조각과 보온 컵에 담긴 물 한 잔을 받아들면서 그에게 물었다. "아무튼 당신은 누구 신지요? 나는 여러 해 동안 이런 일을 해 왔지만, 나처럼 하늘을 유랑하는 다른 떠돌이 비행사를 만나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업자가없더란 말입니다." "이 밖에 내게 알맞은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꾸하는 목소리는 그런 대로 행복하게 들렸다. "기계를 다루는 일과 용접하는 일을 해보았지요. 유정(油井)을 파는 인부 노릇을 좀 하기도 하고, 그리고 캐트(무한궤도식 트랙터를 생산하는 미국 회사의 상표-역주) 트랙터의 운전수 노릇도 했지요. 나는 어느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난감한 문제가 생기곤 해요. 그래서 내가 아무 때나 자유롭게 타고 다닐 수 있는 저 비행기를 만들었죠. 지금은 당신도 보시다시피, 이렇게 시골구석을 순회하면서 손님들을 태워주는 직업에 종 사하고 있어요." "어떤 종류의 캐트 트랙터였는데요?"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디젤 트랙터를 미칠 듯이 좋아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했다. "D-8과 D-9 트랙터였어요. 오하이오주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잠시 동안 트랙터를 몰고 다 녔을 뿐이오." "어이구, D-9 이라고요? 그 집채처럼 커다란 트랙터 말이지요! 이중 복식 저속 기어 장치가 있는..... 그놈을 운전해서 산을 납작하게 밀어붙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산을 움직이려면 그보다 나은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의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살짝 스쳤다. 나는 그의 비행기 아래쪽 날개에 기대선 채 잠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웬일일까? 햇빛이 장난을 치기 때문일까..... 어쩐지 그의 얼굴을 면밀히 눈여겨보기가 몹시 곤란했다. 어떤 신비한 광채가 그의 머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인지, 주변의 배경이 흡사 은회색 안개 가 자욱히 서린 양 몽롱하고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뭐 잘못된 게 있나요?" 그가 내게 묻는 말이었다. "당신이 조금 아까 말하기를, 난감한 문제가 생기곤 했다는데 어떤 종류의 문제였습니까?" "오,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이었어요. 요즈음 나는 당신처럼 홀가분하게 떠돌아 다니 는 것이 그냥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것입니다." 나는 샌드위치를 손에 든 채 그의 비행기 둘레를 돌아가며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그것은 1928년이나 1929년형 비행기인데, 흠집이나 긁힌 자국이 한군데도 없었다. 공장에서 방금 만들어 낸 비행기도 여기 목초장에 착륙해 있는 이 비행기만큼 신품은 못될 것 같다. 낙산염 와니스를 손으로 문질러 스무 번쯤 덧칠한 듯 거울처럼 반들반들 빛나는 면포가 동 체의 목재로 만든 골격(骨格) 위에 팽팽하게 씌워져 있었다. 조종실의 바깥쪽 테두리 아래에는 고풍스런 영국식 금박으로 <돈(Don)> 이라는 이름 글자 가 씌어져 있었고, 비행지도 케이스 위에 기록된 등록명은 라고 되어 있었다. 비행 계기(計器)들은 지금 막 상자에서 꺼내 놓은 듯이 새롭고 말짱한 것들이었는데, 1928년에 최신형으로 출고되었던 원품(原品)인 듯이 보였다. 와니스를 칠한 오우크 목재의 조종간과 방향타 간(桿), 그리고 왼손 쪽에는 절기판, 혼합 가스 및 피스톤 운동 조절 장치가 골고루 구비되어 있었다. 근자에는 아무리 꼼꼼하고 충실하게 원형 복구된 옛날 비행기일지라도 피스톤 운동 조절 장치가 부착된 것은 극히 보기 드물었다. 아무 데도 긁힌 자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체와 날개에 사용된 면포가 찢어져서 다른 헝겊을 대고 누덕누덕 기운 자리도 전혀 없었다. 발동기 커버로부터 주르륵 흘러내린 기름방울 때문에 얼룩덜룩 더러워진 곳도 없었다. 게다가 조종실 바닥에는 한 오라기의 지푸라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마치 그의 비행기는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한 적이 없는 듯했다. 아무튼, 뭐라고 할까? 반세기를 훌쩍 건너뛴 시간의 도약으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급조된 비행기 한 대가 불쑥 내 눈앞에 나타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상야릇하게도 목덜미에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꼈다. "승객을 태워 주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됩니까?" 내가 비행기 너머로 그에게 물은 말이었다. "한 달쯤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섯 주일이 되는 셈이지요."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5주일 동안이나 여기저기 들판을 날아다닌다면, 어느 누가 비행기를 조종하든지 간에 기체에는 흙먼지와 기름때가 끼게 되는 법이다. 하여튼,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조종실 바닥에는 지푸라기 하나 둘 떨어져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어찌 된 셈인지 바람막이 유리창에 기름 자국도 없었고, 날개의 앞쪽 언저리와 동체의 꼬리부분에 건초 이파리가 날아 붙어 생긴 얼룩도 없었으며, 프로펠러에 부딪쳐 죽은 딱정벌레의 흔적도 없었다. 여름철에 일리노이주의 들판을 날아다닌 비행기가 이토록 깨끗하고 말끔하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의 트래블 에어를 5분간 더 살펴본 후에, 날개 밑으로 되돌아가서 풀밭에 앉았다. 나는 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비행기의 조종사를 마주 보았다. 그가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여전히 그 조종사, 그 친구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지금 나한테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는 거지요?" "오, 리처드. 나는 지금까지 사실대로 말한 겁니다." 그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내 이름도 역시 내 비행기의 동체에 페인트로 씌어져 있었다. "한 달 동안이나 트래블 에어기에 승객을 태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비행기에 기름 한 방울, 흙먼지 하나 안 묻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게다가 면포에는 기운 자리도 없고, 조종실 바닥에는 지푸라기도 없으니. 맙소사!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란 말입니다." 그는 나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알 수 없는 일들이 제법 많을 겁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그는 어떤 혹성에서 난데없이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정말이라고 믿기는 했다. 그러나 한 여름날의 목초장 위에 착륙해 있는 그의 비행기가 어찌 저렇듯 보석처럼 깔끔한지를 해명할 도리가 없었다. "네, 맞아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도날드, 당신이 내 비행기를 가져가도 괜찮을 거예요. 나는 비행 기가 없어도 하늘을 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흥미를 느끼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시커먼 눈썹을 위로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 그래요? 어디 더 말해 봐요."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어쩌면 탁상공론처럼 들릴 수도 있는 나의 사견(私見)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생기다니!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하늘을 날 수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걸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기체 역학의 하찮은 제 1원리를 알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어딘가에 또 다른 원리가 숨어 있다고 믿고 싶어요. 앞으로 언젠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비행기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바람벽을 꿰뚫어 통과하고, 또는 다른 혹성을 향하여 날아가고 어쩌고 하는 데 기계의 힘을 빌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기계가 없어도 우리는 어디서나 그런 일을 실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진심으로 염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어설픈 미소를 입가에 띄고 있었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서 내게 말했다. "목초장에서 손님들한테 3 달러짜리 비행기 탑승 놀이 티켓을 팔아먹는 일에 종사하면서 당 신이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게 되리라고 생각합니까?" "중요한 지혜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실행하면서 자기 스스로 깨닫게 되는 지혜가 그것입니다. 가령 내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하여 내 비행 기와, 그리고 저 하늘이 내게 가르쳐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기만 하다면, 나는 지금 당장 그분을 찾으러 길을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 이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의 부리부리한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당신이 그런 지혜를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당신은 인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네, 그래요. 나는 인도되고 있어요. 그런데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나는 무엇인 가가 어디선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해요. 나를 조금은 보살펴 주는 어떤 존 재가 있는 듯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어떤 스승에게로 인도될 것이라고 당신은 생 각하죠?" "혹시나 그 스승이 나 자신으로 판명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요." "어쩌면 그렇게 판명될지도 모릅니다." 최신형의 새 픽업 한 대가 우리를 향해 비포장 도로 위를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픽업은 갈색의 엷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더니 들판 근처에서 정차했다. 차문이 열리자 노인과 어린애가 내려섰다. 어린애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뿌연 먼지는 사라지지 않은 채 공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렇듯 짙은 정적 속에 주위가 쥐죽은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네들은 비행기를 태워 주는 분들이지?" 노인은 이렇게 물었다. 이 들판은 도날드 시모다가 찾아낸 것이므로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잠자코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노인장, 대낮의 푸른 하늘을 훨훨 날고 싶으십니까?" 도날드가 쾌활한 음성으로 대답한 말이었다. "그렇다네. 나를 비행기에 태워 저 하늘에 올라가서 사뭇 오두방정을 떨고 공중제비를 넘을 건가?" 노인이 유난스레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자기의 촌티 물씬물씬 나는 사투리를 우리가 제 대로 알아듣나 어쩌나를 곰곰이 살펴보려는 표정이었다. "노인장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고,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귀한 돈을 받고 나서야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지, 안 그런가?" "네, 하늘을 10 분 동안 비행하는 데 현금으로 3 달러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1분에 30 센트 를 받는 셈이지요. 그만한 값어치는 있다고 거의 모든 사람이 내게 말해 주더군요." 나는 한가롭게 풀밭에 앉아서 이 친구의 상술을 지켜보았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내가 무슨 난데없는 구경꾼이나 된 듯이 어리둥절한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그가 떠들썩하게 과장 선전을 하지 않고 나직한 소리로 담담하게 말하는 폼이 매우 듣기 좋았다. 내 나름대로 탑승객을 유치하는 방법에 어지간히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나는 그 밖의 다른 방법도 가능하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뭇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곤 했었다. "여러분, 저 높은 하늘은 여기보다 10도나 더 서늘함을 보장합니다. 오로지 새들과 천사들 만이 날아다니는 곳으로 올라갑시다! 이 모든 즐거움이 단돈 3 달러, 여러분의 지갑이나 주머니에서 25센트 동전 열 두 개만 꺼내시면 됩니다....." 나 혼자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탑승객을 끌어 모으는 일은 나로 하여금 일종의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이러한 긴장 상태에 상당히 길들여져 있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긴장감이 나를 뒤쫓는 듯한 느낌을 깡그리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행여 탑승객을 끌어 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먹지도 못하게 되리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먹느냐 못 먹느냐 하는 문제를, 승객으로부터 벌어들이는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생활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나는 다소 느긋한 마 음으로, 긴장을 푼 채 풀밭 위에 물러앉아서 도날드를 유심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소녀는 다소곳이 뒷전에 물러서서 도날드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갈색의 눈망울과 금발이 돋보이는 얼굴이지만, 꽤나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아이는 단지 할아버지를 따 라서 여기까지 왔을 따름이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와는 정반대로, 아이들은 타고 싶은 마음에서 조바심을 치는 반면에 어른 들은 조심성 있게 머뭇거리는 것이 보통이다. 나처럼 이런 직업을 호구지책으로 삼는 사람 은 그런 걸 알아차리는 눈치가 저절로 발달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여름 내내 참을 성 있게 기다린다 해도 그 소녀가 우리와 같이 비행기를 탈 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두 분 중에 누가 나를 비행기에 태워 주겠소?" 노인이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렇게 묻자, 시모다가 물을 컵에 따라 마시며 대 답했다. "리처드가 태워 드릴 겁니다. 전 아직까지 점심 식사를 끝맺지 못했거든요. 하나 노인장께 서 기다리고 싶으시다면 그리하셔도 좋습니다." "천만에, 나는 한시바삐 비행기를 타고 싶네. 내 농장 위로 날아오를 수 있겠지?" 노인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물론이죠. 노인장께서 가시고 싶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둘둘 말아 놓은 휴대용 침구와, 공구들이 든 가방 그리고 조리용 냄비 따위를 플리트 의 조종실 앞자리에서 끄집어낸 후에, 노인이 승객석으로 올라가 앉을 수 있게끔 도와준 다 음 그에게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조종실의 뒷자리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조종석의 안전벨트를 내 몸에 고정시켰다. "도날드, 프로펠러를 좀 돌려주겠어요?" "그래, 어떤 식으로 돌릴까?" 도날드가 물 컵을 손에 든 채 내 비행기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프로펠러 옆에 섰다. "너무 빠르지 않게. 천천히 잡아당기도록 하세요. 갑자기 추진력이 생기면 손에서 프로펠러를 놓쳐 버리게 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플리트의 프로펠러를 돌릴 때면 항상 지나치게 빨리 잡아당기는 탓에,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엔진에 시동이 걸리지 않기가 십상이 다. 그러나 이 친구 도날드는 어찌나 천천히 돌리는지, 마치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조 금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드디어 충격 스프링이 찰깍 하며 실린더에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구식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뜻밖에도 너무나 손쉽고 순조롭게 걸린 시동이기 때문에 나는 약간 얼떨떨했다. 도날드 시모다는 자기 비행기 있는 쪽으로 되돌아가서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여자아이한테 곰살궂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별안간 야생의 마력(馬力)과도 같은 추진력이 돌발하여 지푸라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휘 날리는 가운데 플리트는 어느새 하늘에 떠올라 1 백 피트 상공까지 상승했다. (만일 이제 엔진이 느닷없이 꺼져 버린다면 우리는 옥수수 밭에 착륙하는 수밖에 없다.) 곧 이어 5 백 피트까지 상승. (이제 엔진이 꺼진다면 우리는 되돌아가서 목초장에 착륙할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금이라면 서쪽에 있는 목장에 착륙해야 하리라.) 이어서 8 백 피트까 지 상승했다. 노인은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한껏 가슴에 받으면서 손가락으로 남서쪽 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수평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3 분 동안 공중에 뜬 채 농장 주위의 하늘을 선회(旋回)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석탄 덩어리처럼 붉은 색의 헛간들, 그리고 박하나무의 대해(大海) 속에 잠겨 있는 듯이 보이는 상아 빛깔의 농가, 뒤뜰에는 가족들의 식용 채소로 쓰일 상치·토마토·사탕수수 따위가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빛을 내뿜으며 싱싱하게 자라 있었다. 플리트의 상하 두 날개와, 두 날개를 세로로 연결하는 철선에 의하여 흡사 액자에 낀 그림처럼 보이는 농가의 정경(情景)이 마냥 아름답게 느껴졌다. 우리가 농가의 주위를 맴도는 동 안, 조종실의 앞자리에 앉은 노인은 투명한 햇살이 넘실거리는 대기를 통하여 그러한 농가 의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 위에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여인 이 저 아래 포치(porch)에 나타나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노인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얼마 후에 그들 두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를 두고서도 얼마나 똑똑히 서로를 볼 수 있었나를 이야기하리라. 이윽고 노인이 나를 뒤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됐어. 고마우이. 이젠 돌아가도 좋아.'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노인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페리스의 주민들에게 비행기 탑승 놀이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서 페리스 의 주위 상공을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선회했다. 그러고는 사람들한테 어디에서 탑승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목초장 위로 나선형을 그리며 강하했다. 내가 비행기를 가파르게 옆으로 기울인 채 옥수수밭 너머로 측면 활하해서 지상에 착륙했을 때, 트래블 에어가 땅을 박차고 이륙하더니 우리가 방금 지나온 농장을 향하여 곧장 기수를 돌렸다. 지나간 옛날에 나는 5대의 비행기로 편성된 곡예비행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한 순간 나 는 그 옛날처럼 분주하고 어수선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한 대는 손님을 태우고 이륙하는데, 그와 동시에 또 한 대는 착륙하고..... 플리트는 부드러운 덜컹 소리와 함께 바퀴가 땅바닥에 맞닿은 순간, 목초장의 저 멀리 떨 어진 경계선까지 미끄러져 가서 길가에 멈춰 섰다. 시동이 꺼졌다. 노인은 안전벨트를 풀고 나서 내 도움을 받아가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 는 작업복 바지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1 달러 짜리 지폐 석 장을 세어 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놀라운 비행이야....."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좋은 상품을 팔고 있다고 자부하니까요." "아니, 잘 파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자네의 저 친구란 말일세." "네? 뭐라고요?" "내가 장담하네만, 자네 친구는 지옥의 악귀한테 유골을 팔아 넘길 수도 있을 걸세. 아무렴, 내기를 걸어도 좋아. 저 친구를 좀 봐. 지금도 그렇잖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 내 손녀딸 얘기야. 원 세상에, 우리 사라를 비행기에 태우다니!" 그는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트래블 에어를 망연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농가 주위의 하늘을 맴돌고 있는 비행기는 흡사 은빛 티끌처럼 공중에 뜬 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노인의 입에서 도도한 변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뜨락에 서 있는 죽은 나뭇가지에 홀연히 꽃망울이 피어나더니 사과 열매가 맺히는 광경을 목격이라도 한 듯이, 노인은 감격하고 흥분해 있었다. "우리 사라는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높은 곳이라면 질겁을 하곤 했어. 비명을 올리며 새파랗게 질리는 거야. 그 애가 높은 나무에 기어오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맨손으로 호박벌을 만지는 것을 질색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야. 심지어는 사다리로 다락방에 올라가는 것도 몹시 싫어하지. 설혹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서 뜰과 집안에 강물이 범람한다손 치더라도 우리 사라는 높은 다락방에는 올라가려고 들지 않을 거라는 말일세, 그 애는 기계를 썩 잘 만지고 가축들을 곧잘 다루는 놀라운 아이지만, 높은 곳만은 막무가내로 경계와 공포의 대상이 되거든. 그런데 우리 사라가 지금 저 높은 하늘을 날고 있다니!" 그는 오늘 일어난 일과 지난날의 특별한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주 여러 해 전에 게일즈버그와 만머드에서 날아온 지방 순회 비행사들이 우리 비행기와 똑같은 복엽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면서 온갖 종류의 희한한 곡예를 벌이곤 했던 시절을 노인은 회상했다. 나는 저 멀리 떨어져 있던 트래블 에어가 가까이 다가오며 차츰차츰 커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만약에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소녀를 태웠다면 도저히 엄두를 못 냈을 정 도로 가파르게 비행기를 옆으로 기울인 채 나선형을 그리며 들판 위로 강하하다가, 옥수수 밭과 울타리 너머로 미끄러지듯이 측면 활하를 하더니, 3점 착륙(three-point landing : 3개의 바퀴가 동시에 접지하는 착륙-역주)으로 목초장 위에 내려앉았다. 눈앞이 아찔할만큼 놀랍고 뛰어난 비행술이었다. 트래블 에어기를 저런 방식으로 착륙시키는 것을 보면, 도날드 시모다는 굉장히 오랫동안 비행술을 익혀 온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날드의 비행기는 우리 근처의 풀밭 위를 스르르 활주해 오더니 가볍게 덜커덕거리는 소 리를 내며 멈춰 섰다. 너무도 깔끔하게 마무리지은 3점 착륙인지라 가외의 추진력이 필요 없었다. 곧 이어 부드러운 철커덕 소리와 함께 프로펠러의 회전이 정지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프로펠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8피트나 되는 프로펠러의 날개에 부딪쳐 죽은 딱정벌레의 흔적은 아무 데도 없었다. 흡사 기다란 칼날처럼 생긴 날개에 부딪쳐 죽은 곤충이 파리 한 마리도 없다니... 나는 소녀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재빨리 뛰어갔다.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준 다음 전부(前部) 조종실의 작은 도어를 열어 주었다. 그러고는 어디를 밟고 내려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자칫 잘못해서 하익(下翼)의 면포 부분을 헛디딜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때? 기분이 좋으냐?" 내가 소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소녀는 내가 자기한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난 안 무서워!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무섭지 않았어! 우리 집은 조그만 장난감같이 보이고, 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어. 도날드 아저씨는, 내가 무서움을 타는 까닭은 언젠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내게 타일러 주었어요. 할아버지, 나는 이담에 커서 비행사가 될래. 비행기를 한 대 가지고 싶단 말야. 내 비행기를 내 손으로 조종하면서 온 세상을 두루두루 날아다니다가, 탑승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내 비행기에 태워 줄 테야. 난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시모다는 노인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짐짓 쑥스러운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라야, 네가 비행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분이 말씀하시던?" "아니,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어요. 나 혼자 비행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단 말이에요. 나는 원래부터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데 소질이 있잖아요? 할아버지도 내가 그렇다는 것 을 잘 아시지요!" "자, 사라야. 그 얘기는 나중에 엄마한테 말하도록 해라, 이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 노인과 손녀는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픽업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편, 손녀딸은 깡충깡충 뛰어갔다. 하늘과 들판에서 일어났던 일이 그 두 사람한테 신비로운 영향을 끼친 때문인지, 양쪽 다 사뭇 사람이 달라진 듯 기분 이 전환되어 있었다. 두 대의 자동차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또 한 대..... 높은 하늘에서 패리스를 내려다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한나절 동안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 다. 우리는 재빨리 서둘러 일함으로써 열 두세 차례나 손님을 태웠다. 그리고 나서 나는 비행기 가솔린을 사기 위해서 읍내에 있는 주유소로 달려갔다. 그런 다 음에도 서너 명의 승객을 더 태웠고, 또다시 몇 사람을 더 태웠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우리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손님을 태우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해가 저물기 직전까지 비행을 계속했다. 어딘가에서 <페리스, 인구 200명> 이라는 표지판이 내 눈에 띄었다. 어스름이 짙어질 때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페리스의 주민들을 모조리 탑승시켰을 뿐 만 아니라 게다가 다른 마을에서 모처럼 찾아온 사람들도 여러 명 태워 준 것 같았다. 탑승객들이 끊임없이 쇄도하는 바람에 나는 도날드가 사라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하여 자초지종 묻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라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운운 하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는 몹시 궁금했었다. 도날드가 그런 이야 기를 거짓으로 꾸며낸 것인지, 또는 그런 게 아니라면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그에게 직접 물어 볼 생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럴 짬이 없었던 것이다. 손님들이 내리고 타는 동안 나는 가끔가다 한번씩 도날드의 비행기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의 트래블 에어는 더러워지거나 얼룩진 데가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름방울이 흘러 내린 흔적도 없었다. 그토록 깨끗한 비행기를 보고 있으려니까, 그가 딱정벌레들을 요리조 리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비행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 반면에 나는 바람막이 유리창에 들러붙은 벌레들을 한두 시간마다 닦아 내야만 했다. 우리가 일을 끝마쳤을 때에는, 서쪽 하늘가에 아슴푸레한 황혼 빛이 한 조각 남아 있었다. 나는 주석으로 만든 요리용 스토브에 마른 옥수숫대를 올려놓고서 불을 활활 지폈다. 주변의 황금빛 건초와, 가까이 세워둔 비행기의 동체에 부딪쳐 반사되는 불빛이 어둠을 배 경으로 오색 영롱하게 보였다. 나는 식품 상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수프, 스튜, 스파게티가 있군요. 거기다 배나 복숭아도 있고, 복숭아 통조림을 드시겠어 요?" 내가 도날드에게 물은 말이었다. "난 아무래도 좋아요. 무얼 좀 먹어도 괜찮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오." 그가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맙소사, 배가 고프지 않으세요? 오늘은 몹시 바쁘게 일한 날인데!" "당신이 내게 말한 것 가운데 내 식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맛좋은 것이 별로 없었거든. 스튜가 괜찮은 것이라면 몰라도....." 나는 <스위스 비행 장교의 탈출과 침투용 나이프>로 스튜 깡통과 스파게티 깡통을 따서 잽싸게 불 위에 올려놓았다. 나의 겉저고리와 바지에 달린 주머니들은 돈으로 빼곡이 차 있었다. 나로서는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신바람 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몽땅 꺼낸 다음 대강 대강 펴서 하나둘 세어 보았다. 모두 합해서 147달러나 되는 돈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나한테는 꽤나 어려운 나눗셈이었다. "그러니까.....그러니까.....어디 보자.....4를 곱하면 2가 남고..... 히야, 오늘 하루 동안에 손님을 무려 마흔 아홉 명이나 탑승시켰구나! 도날드, 나와 플리트가 하루 1백달러대를 돌파했단 말이오! 당신은 2백 달러대를 쉽사리 돌파했을 것 같아요. 대개 한 번에 두 사람씩 태웠으니까." "대개 그랬지." 그가 가볍게 맞장구를 치더니 말머리를 다른 데로 돌렸다. "아까 낮에 당신이 어떤 스승을 찾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스승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나는 지금 스승을 찾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돈을 세고 있는 거예요! 이 돈이면 내가 일주일을 넉넉히 살 수 있거든요. 아무렴, 일주일 내내 여름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통에 일을 하지 못한다 해도 이 돈으로 얼마든지 먹고 살 수가 있단 말입니다.!" 도날드가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돈 뭉치 속에 빠져 헤엄치기를 다 끝마쳤으면, 이제는 저 스튜 깡통을 내게 건네 주겠소?" 제 3 장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 격류가 되어 넘쳐흐르는 듯 하다. 그들은 무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누군가를 향하여 우르르 떼지어 몰려간다. 그러한 군중은 거대한 바다가 되어 그 사람을 삼켜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익사하기는커녕, 휘파람을 불며 물 위를 걸어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자 장면이 급전하면서, 거대한 바다가 거대한 풀밭으로 변한다. 백색과 황금색의 트래블 에어 4000기 한 대가 하늘에서 내려와 풀밭 위에 착륙한다. 그 비행사가 조종실 밖으로 나오더니, <비행 - 3달러 - 비행> 이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게시한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새벽 3시였다. 나는 곰곰이 꿈을 돌이켜 보면서 웬일인지 행복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까, 큼직한 트래블 에어가 은은한 달빛 아래 나의 플리트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시모다는 휴대용 침구 위에 앉아 있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비행기의 왼쪽 바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듯했다. 내가 두 눈으로 그의 얼굴을 명료하게 보았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여보게 리처드, 그 꿈이 자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해 주던가?" 그는 어둠 속에서 조용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을 꺼냈다. "뭐라고요? 도대체 무엇이 나한테 말해 줍니까?" 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아직도 꿈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비몽사몽간을 오 락가락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새 내가 꿈을 깨다가 깨어났음을 지레 채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며 기습 작전을 펼 것이라고는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네가 방금 꾼 그 꿈 말이야. 그 사람과 그를 따르던 군중, 그리고 그 비행기." 그가 참을성 있게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자넨 나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어. 이젠 알아차리게 되었지, 안 그런가? 언젠가 신문에 이런 얘기가 뉴스로 보도된 적이 있었어. 수많은 사람들이 <기계공 메시아> 며 <미국에 태어난 하나님의 화신(化身)>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도날드 시모다가 어느 날 2만 5천명이나 되는 목격자들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나는 그 얘기를 기억해 냈다. 오하이오주의 어느 작은 읍내에 잠깐 들렀을 때, 신문 판매대 에서 그런 얘기를 보도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 기사는 신문 1면에 실려 있었다. "그럼, 당신이 바로 그 도날드 시모다란 사람입니까?" "그렇소, 내가 도날드 시모다요. 잘 부탁합니다." 그가 자못 격식을 차리며 하는 말이었다. "이제 당신은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앞으로는 더 이상 내 정체를 밝히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거요. 자, 다시 잠이나 자도록 해요." 나는 그 신문기사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야 다시금 잠이 들었다. "당신이 이래도 되는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일단 메시아라는 직업 을 가진다면 당신은 이 세상을 구원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겁니다. 안 그래요? 호텔방 열쇠를 되돌려주듯이, 그렇듯 간단하게 메시아가 자기 직업을 중도에 그만둘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나는 그런 줄 몰랐어요." 나는 플리트의 엔진 커버 꼭대기에 높다랗게 올라앉아서 나의 희한한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날드, 16분의 9인치 짜리 엔드 렌치를 나한테 던져 주시겠어요?" 그는 공구 백을 들들 뒤지더니 렌치를 찾아서 그것을 나한테 던져 주었다. 그가 던진 렌치는 내 앞 1피트 되는 곳에서 속력을 늦추며 정지하더니, 무중력 상태에 두둥실 떠 있는 것처럼 공중에서 느릿느릿 회전했다. 그날 아침에 그는 다른 공구들도 그렇게 떠다니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손이 닿는 순간, 렌치는 크롬 바나디움 강(鋼)으로 만든 항공기용의 보통 엔드 렌치답게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보통 렌치라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8분의 7인치 짜리 싸구려 렌치가 사용 도중 내 손에 망가진 이래로 나는 최상품의 도구들 을 사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렇기에 좋은 물건을 가려 볼 줄 아는 안목이 약간 생겼는데, 이 렌치는 뜻밖에도 최고급품인 스냅 온(Snap-On)이었다. 그것이 보통의 렌치와는 전혀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계공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리라. 게다가 가격으로 말하자면, 이 렌치는 금으로 만든 것이나 진배없이 비싼 물건이다. 그러나저러나 손에 쥐고 일을 해 보면 아주 썩 마음에 드는 한편, 이것으로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결코 망가질 리가 없다 는 그런 흡족한 기분조차 드는 것이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그만둘 수 있지! 하물며, 그만두고 싶은 일을 얼마든지 그만둘 수가 있는 거야. 일을 하려던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달라지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이야. 자네가 그만두고자 하면 심지어 숨을 쉬는 것도 그만둘 수가 있지." 도날드 시모다는 장난 삼아 필립스제 스크류 드라이버를 공중에 두리둥실 떠다니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메시아가 되는 일을 그만둔 거야. 행여 내 말이 약간 변명 조로 들린다면, 그건 아마 내가 아직도 조금은 나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 때문일 거야. 그 일을 싫어하면서 억지로 계속하는 것보다는 그만두는 게 낫지. 훌륭한 메시아는 아무 것도 싫어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이면 어떤 길이든지 걸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네. 물론 이 말은 어느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말이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즈(Is)>의 자식들이며 <정신(Mind)> 의 이데아들이니까. 이 밖에 달리 말하고 싶다면 뭐라고 말할지라도 상관없어." 나는 키너 엔진을 점검하다가 실린더 기부(基部)의 어미나사를 죄었다. 이 구식 B-5는 꽤 쓸 만한 엔진이었지만, 1 백 시간 남짓 비행하면 어미나사들이 저절로 느슨하게 풀리곤 했으므로 미리미리 손을 쓰는 것이 현명했다. 내가 렌치로 죈 첫째 번 어미나사는 4분의 1 바퀴나 되돌아가 단단하게 죄어졌다. 나는 오늘 아침 손님들을 태우기에 앞서서 어미나사들을 모조리 점검해 본 나의 지혜가 스스로 흐뭇하게 여겨졌다. "음, 그렇기도 하겠지요, 돈. 하지만 메시아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들하고는 단연코 다른 것 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죠? 가령 예수님이 생계를 위해 나무토막에 못질하는 직업으로 되돌아갔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어요? 어쩐지 좀 해괴망측하게 들릴 겁니다." 그는 내 말을 되새기면서 그 요지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자네가 말하려는 요지를 잘 모르겠는데..... 예수님에 관해 아리송한 점은, 사람들이 그를 구세주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가 그만두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그만두기는커녕 그 는 이 불길한 뉴스를 들었을 때 자기 나름대로 논리 분석을 시도했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노라.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렇도다. 나는 구세주이려니와 너희들도 역시 그렇다는 말씀이니라! 내가 하는 일을 너희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느니라!'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엔진 커버 위에 올라가 일을 하고 있으려니까 무더운 날씨가 살갗에 느껴졌다. 그러나 하 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어떤 일을 더욱더 많이 완수하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그것을 구태여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효과가 있음을 알았다. 나는 실린더가 엔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미리 방지했다는 데에 만족을 느꼈다. "다른 렌치가 하나 더 필요한 모양인데." 시모다가 내게 말했다. "아니오, 다른 렌치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당신이 지금까지 내 속마음을 대뜸 넘겨짚는 재간을 여러 차례 부렸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의 그런 재간은 보통으로 발달한 정신의 소유자가 파티 석상에서 여흥으로 벌이는 게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발달한 수준에 이른 사람이란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셈이지만. 아시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최면술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초심자일 는지도 모르고요." "뭐 최면술사라고? 히야, 아주 그럴싸한 말을 하는군. 그런데 말이야, 메시아 노릇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최면술사가 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정말이지 메시아라는 직업은 억세게 따분하고 지겨운 일이었어. 그 일이 따분하게 느껴지리라는 것을 어째서 내가 진작 알지 못했을까?" "당신은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내가 약삭빠르게 한마디 끼여들었다. 그는 그냥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만둔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당신은 고려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도날드, 당신이 정상적인 보통 인간의 생활로 되돌아가서 곧바로 정착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일 거예요. 이 점을 생각해 보았느냔 말입니다." 그는 나의 이런 말을 조금도 비웃지 않았다. "물론, 자네 말이 옳아." 그는 이렇게 맞장구를 치더니 손가락으로 자기의 검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한 장소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 즉 하루 이틀 이상을 묵게 되면 내가 어딘가 좀 특이하고 남다른 데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곤 했어. 내 옷소매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암 환자의 병이 거짓말같이 낫거든. 그러니까 일주 일도 채 지나기 전에 나는 또다시 사람들 속에 파묻히게 되는 거야. 하지만 나는 비행기를 타고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천만다행이야.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단 말이야. 내 형편에는 더할 나위 없는 안성맞춤이지." "돈,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층 더 고달프게 될 거예요." "그래?" "그럼요. 우리 시대의 전반적인 추세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것으로 지향하고 있어요. 그것이 비록 완만한 것이기는 해도, 꽤나 거창한 추세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기 에 이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혼자 가만히 있게끔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기적이야.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 다른 사람한테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로 하여금 메시아 노릇을 하게끔 시킬 수도 있단 말이야. 나는 그에게 메시아가 따분한 직업이라고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야. 그런 데다가, 그가 기 어이 도망쳐 버릴 수 없을 만큼 복잡 다단한 문제는 없을 테니까." 나는 엔진 커버로부터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와서 풀밭 위에 섰다. 그러고는 3 번과 4 번 실린더의 어미나사들을 죄기 시작했다. 모두 다가 느슨하게 풀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 개는 약간 위험할 정도로 헐거워져 있었다. "돈, 당신은 피넛(유명한 미국 만화의 제명. 땅콩 같은 조무래기 아이들이 주인공이다-역주) 만화에 나오는 강아지 스누피(Snoopy) 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내가 어디서 진리를 발견했는지에 아랑곳없이 나는 그 진리를 인용할 작정이네. 아무튼 귀띔해 주어서 고맙네." "도날드, 당신은 도망쳐 버릴 수 없을 거예요. 가령 내가 지금 당장 당신을 숭배하기 시작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또 가령 내가 엔진을 고치는 일에 싫증이 나서 나 대신 엔진을 고 쳐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한다면 어쩔 셈이에요? 만약에 당신이 나한테 공중을 두둥실 떠다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만 한다면, 나는 지금부터 해질 무렵까지 벌어들이는 돈을 몽땅 당신한테 드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당신이 만일 그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그럴 적에는 내가 당신한테 기도를 올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겠지요. '내 무거운 짐을 덜어 주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시여!' 하고 당신을 부르면서 말이에요." 그는 단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자기가 도망쳐 버릴 수 없다고 하는 내 말 의 참뜻을 그는 그 당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시모다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 을 나는 어떻게 알 수가 있었을까? "인도에서 만든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신도 그런 야단법석을 겪었나요? 거리거리에 수 많은 군중이 욱시글득시글 몰려들고, 수십 억 개의 손들이 당신을 만지려고 아우성을 치며, 꽃송이와 향료가 사방에 뿌려지고..... 게다가 당신이 그 위에 올라서서 설교를 베풀 수 있도록 은빛 수단으로 장식된 황금색 강단이 준비 되었나요? 그것참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듯싶군요." "아니, 그렇지 않았어. 내가 메시아라는 직업을 신청하기도 전에 나는 그런 야단법석을 도저히 견뎌 낼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이미 알고 있었거든. 그랬기에 나는 미국을 선택했던 것이고, 따라서 나에게는 다만 군중이 있었을 뿐이었어." 도날드 시모다는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는 것을 괴로워했다. 나는 그의 과거를 부질없이 들먹거린 것이 민망하게 여겨졌다. 그는 풀밭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사람들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어. 당신들이 자유와 행복을 그토록 염원할진대 그것이 당신들의 바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자유와 행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 순간 그렇게 될 테니까! 자유와 행복을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 순간 그렇게 될 테니까! 리처드,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대관절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그러나 그들은 듣고자 하지도 않았어. 거의 모두가 그랬어. 그들은 단지 기적만을 보려 하더란 말 이야. 자동차가 충돌하는 광경을 보려고 자동차 경기장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기 적을 보려고 나에게 찾아왔던 거야! 처음에는 몹시 안타깝고 실망이 되더니, 얼마 뒤에는 오로지 따분하게 느껴질 뿐이었어. 다른 메시아들은 그런 따분함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었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어." "그런 식으로 표현하니까 메시아라는 직업이 정말 매력 없게 보이는군요. 나로서는 정나미 가 떨어진다는 말이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지막 나사를 단단히 죈 후에 공구들을 걷어 치웠다. "도날드, 우린 오늘 어디로 향할 참이지요?" 그가 내 비행기의 조종실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플리트의 바람막이 유리창에 들러붙은 딱정벌레들을 닦아내지는 않고, 그 대신에 손바닥으로 유리창 위를 슬쩍 쓸었다. 그러자 죽어 있던 작은 곤충들이 되살아나더니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의 바람막이 유리창은 한번도 닦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엔진도 결코 손질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글세, 나는 잘 모르겠어, 어디로 가는 게 좋을는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은 이 세상사의 과거와 미래를 두루두루 알고 있어요. 그렇죠? 당신은 우리가 오늘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하지만 나는 미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네." 나는 실린더가 잘 작동하는지를 점검해 보다가 잠시 동안 다음과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야! 나는 그저 이 친구와 함께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곤란한 문제는 아무 것도 없을 테고, 나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무슨 일이나 그럭저럭 근사하게 끝장이 날 거야. 그러나 도날드 시모다가 조금 아까 '나는 미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네.' 하고 말했을 때, 그의 어조는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도래(到來)했던 다른 메시아들에게 어 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돌이켜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의 상식은 내게 소리 높이 외치기를, 이륙 직후에 기수를 남쪽으로 돌린 다음 아무쪼록 이 사람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렇게 나 홀로 비행기를 타고 떠돌아다니다 보면 외로 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시모다를 찾아낸 것이 무척 기쁜 한편, 보조 날개와 수직타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아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 졌다. 어쩌면 나는 내 상식이 명령하는 대로 남쪽으로 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륙한 후에 시모다와 더불어 비행을 계속했다. 우리 두 사람은 북쪽 하늘을 잠시 날아가 다가 동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그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래를 향하여..... 제 4 장 "돈, 당신은 이 현세에 관한 그 많은 지식들을 이루다 어디에서 배웠습니까? 당신은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단지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아니야!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정말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많은 지식들을 독학해서 터득하게 되었나요? 주님이 되기 위해서 무슨 공식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나더러 읽어보라면서 책을 한 권 주더군." 나는 상하 두 날개를 연결한 철선을 빨랫줄 삼아 방금 빨아 놓은 비단 스카프를 널고 나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책을 주었다고요?" "그래. 「구세주 입문서(Saviour's Manual)」라는 책이야. 주님을 위한 성경책 같은 것이지. 그 책이 여기 어딘가에 한 권 있을 텐데..... 자네도 관심이 있으면 한번 읽어보라고." "물론, 관심이 있어요. 주님이 나아가야 할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그런 종류의 지침서(指針書) 인가요?" 그는 잠시 동안 자기 조종석의 머리받침 뒤에 있는 소지품 보관 선반을 샅샅이 뒤지더니, 작은 책을 한 권 찾아들고서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은 수에드(suede)처럼 뵈는 가죽으로 장정(裝幀)된 책이었다. 메시아 편람, 초월적인 영혼을 위한 계시록 "도날드, 당신은 「구세주 입문서」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이건 「메시아 편람(Messiah's Handbook)」이라고 씌어 있는데요." "그 비슷한 것이란 말이야." 그는 트래블 에어의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시금 길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역력히 따올라 있었다. 나는 그 책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잠언(箴言)과 짤막한 경구(警句)들을 수집해 놓은 책인 성싶었다. 투시안― 이를 활용하라, 그렇지 않으면 상실하리라. 설혹 그대가 이 책장을 들추어보았다 해도, 그대의 육안에 비치는 사물의 외관이 결코 실체가 아님을 이제 곧 망각하게 되리라. 심사숙고하라 그 점을. 기억하라 그대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대 자신이 애당초 휘말려든 이 시련을 어디서 자초했는지 그 까닭을. 그대는 머지 않아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리라. 이를 기억하라.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수련 도정(道程)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대가 사태의 진상을 명심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대는 죽음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대의 죽음을 다소 진지하게 감내하라. 가령 그대가 웃으면서 형장으로 걸어간다면, 열등한 수준의 생명체들은 늘 상 그러하듯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지라, 그들은 당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리라. "돈, 이 대목 읽어 봤어요? 당신이 투시안을 상실하게 된다는....." "아니." "당신이 필연코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여기 씌어 있군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거야,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테니까. 그와 같은 사태에 대하여 어떤 조처를 취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야." "도날드, 당신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싶은 생각인가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메시아라는 직업을 사퇴한 이 마당에서 그렇게 죽는 것은 별 의의가 없을 거야. 안 그런가? 조용하게 승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을 완수하게 되면, 그때 가서 두어 주 이내에 내 생각을 결정하려고 하네." 시모다가 가끔가다 그러하듯이 지금도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 가 두어 주일 운반하던 말이 진담이었음을 나는 그 당시 전혀 짐작도 못했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주님이 필요로 할 성싶은 지혜가 확실히 그 속에 담겨져 있었다. 배운다는 것은, 그대가 이미 알고 있는 바로부터 예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행한다는 것은, 그대가 실체를 인식하고 있음을 명시(明示)하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른 인간들한테 그들도 역시 그대만큼 잘 알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대는 배우는 자요, 행하는 자요, 가르치는 자이니라. 그대가 어떤 차원의 세계에서 삶을 누리든지 간에 그대의 유일한 의무는 자기 자신한테 충실하는 것이다. 타인이나 다른 사물에 충실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짜 메시아의 표적이니라. 가장 단순한 질문은 가장 심오한 질문이니라. 어디에서 그대는 태어났는가? 어디가 그대의 진정한 고향인가? 어디를 향해 그대는 가고 있는가? 무엇을 그대는 하고 있는가? 이에 관하여 이따금씩 심사숙고하라. 그리고 그대의 답변이 변전(變轉) 하는 것을 애써 통찰하라. 그대는 가장 잘 가르친다, 그대 자신이 가장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을. "리처드, 자네 도통 말이 없군. 그 책을 읽어보느라고 그런가.....?" 시모다가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그래요."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책읽기를 계속했다. 비록 그것이 오로지 주님만을 위한 책이라고 해도 나는 그 책을 손에서 놓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의 언행(言行)이 책으로 씌어져 온 세상에 두루두루 공표 된다 한들,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지어다- 심지어 공표된 것이 사실과는 어긋난 것일지라도. 그대의 진정한 친구들은 그대를 처음 만나보는 그 순간에 그대를 선뜻 알아보리라. 그런 반면에 그대의 지인(知人)들은 천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대를 알고자 함이 저으기 미흡하리라. 책임을 회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내가 책임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책에 무언가 기이한 점이 있음을 언뜻 알아 차렸다. "돈, 책장에 페이지 숫자가 적혀 있지 않군요." "그렇지, 자네가 책장을 펼치기만 하면 자네가 가장 필요로 하는 글이 거기 씌어져 있을 거야." 그가 대답하는 말이었다. "히야, 마법의 책이군요!" "아니야, 자넨 어떤 책을 가지고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네. 날짜가 이미 지난 옛날 신문을 가지고 그와 같은 실험을 해 볼 수도 있어, 자네가 그만큼 주위를 기울여 읽기만 한다면 말이야. 자네 마음속에 무슨 곤란한 문제가 생겼을 때, 가까이 있는 아무 책이나 펼쳐 들고서 그 책이 말해 주는 해답을 열심히 찾아보는 거야. 자네 그리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없었어요." "그렇다면 이제 한번 실험해 보라고." 나는 실험해 보았다. 내가 오랫동안 이 이상야릇한 사람과 같이 지내면 앞으로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두 눈을 감은 채 궁리해 보았다. 그와 같이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전혀 즐겁지 못한 일이 머지 않아 그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예 감을 나는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의 주변에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눈을 계속 감은 채로 그 책을 펼쳤고, 그런 다음에 두 눈을 번쩍 뜨고 읽어보았다. 그대는 이승에서 삶을 누리는 동안 내재하는 학구적 생명체, 즉 명쾌한 영적 존재에 의하여 인도를 받을 것인즉 그러한 존재가 그대의 진정한 자아이니라. 있음 직한 미래로부터 등을 돌리지 말라. 그대가 이 미래로부터 배울 바가 전혀 없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그대는 어느 때나 자유로이 결심을 바꿀 수 있고, 나아가 다른 차원에서의 미래 혹은 다른 차원에서의 과거를 선택할 수가 있느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과거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전생(前生)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 말이 의미하는 뜻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의 의미든 수사학적인 의미든지 간에..... "돈, 내 마음이 꼭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나는 암만 해도 모르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이런 것을 배울 수 있을는지....." "연습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 약간의 이론과 충분한 실습을 몸에 익히면 된다는 말이야. 자네가 배우려고만 하면 한 주일 반쯤이면 충분할 거야." "한 주일 반이라고요?" 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그래, 자네가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게 되면 자네는 모든 해답을 알게 될 거 야. 그리고 자기가 주님이라고 스스로 믿어봐. 그러면 자네는 주님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주님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건 그래. 자넨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메시아 편람」이라는 책을 계속 지니고 다녔다. 시모다는 그 책을 되돌려 달라고 한번도 요구하지 않았다. 제 5 장 미국의 중서부에 살고 있는 농부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기름진 땅을 필요로 한다. 집시 비행사들도 역시 매한가지다. 집시 비행사들은 그들의 고객들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하므로, 마을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들판을 찾아내야만 한다. 잔디나 목초가 심어져 있는 풀밭, 또는 귀리 나 밀을 짧게 베어낸 들판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의 동체와 날개에서 면포(보통 아마포)로 된 부분을 뜯어먹을 암소 떼가 근처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는 한편, 들판 옆으로 고객들의 자동차가 오고갈 수 있도록 도로가 나 있어야 하고, 고객들이 드나들 수 있게끔 울타리에 출입문이 나 있어야 한다. 이런 들판은, 비행기가 저공 비행을 하다가 어디엔가 있는 농가의 지붕 위를 지나갈 가능성이 없는 방향으로 널찍널찍하게 펼쳐져 있어야 하고, 또한 이착륙 시에 시속 50 마일로 땅 위를 굴러가는 비행기가 덜커덩거리다가 박살나지는 않을 정도로 평탄해야 한다. 게다가 뜨겁고 적막한 여름날의 한나절 동안, 착륙 직전의 진입 과정과 이륙 직후의 진출 과정을 조용하고 무사하게 이행할 수 있을 만큼 멀찌막하고 길쯔막하게 뻗쳐 나간 모양의 들판이어야 한다. 그런데다가 하루동안 간이 비행장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농장 주인으로부터 받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들판이 어디쯤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우리 두 사람, 즉 메시아와 나는 토요일 아침나절 동안 북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1천 피트 아래편의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보니까 초록빛과 황 금빛으로 어우러진 대지가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르면서 뒤로 뒤로 물러가고 있었다. 도날드 시모다의 트래블 에어는 내 비행기의 오른쪽 날개 옆에서 시끄러운 잡음을 내며 날 고 있었다. 거울처럼 반들반들하게 페인트칠을 한 트레블 에어의 동체와 날개에 부딪쳐 사방팔방으로 반사되는 눈부신 햇살이 내 눈을 찌르는 듯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비행기야.'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요즈음처럼 불경기가 계속될 적에 집시 비행사가 지방을 순회하며 장사를 벌이기 에는 지나치게 큰 비행기였다. 시모다의 비행기는 탑승객을 한 번에 두 명씩 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게가 플리트보 다 두 배나 무겁기 때문에 이착륙 시에 활주로로 이용할 들판이 훨씬 더 널찍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도 한때는 트래블 에어를 소유한 적이 있었으나, 결국은 그것을 지금의 내 플리트와 교환 하고 말았다. 나의 이 작은 비행기는 조그마한 들판에도 착륙할 수 있고, 그런 들판은 마을 과 가까운 곳에서 한결 쉽사리 눈에 띄기 때문이다. 나는 플리트와 더불어 길이 5백 피트의 들판에서도 이착륙을 할 수가 있는 반면에, 트래블 에어는 1천 피트 내지 1천 3백 피트의 들판을 필요로 했다. '이 친구와 어울려 다니면 이 친구의 비행기가 받는 제약에 나도 함께 얽매이게 될 거야.'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저 아득한 땅 위를 내려다본 순간, 과연 어떤 마을 근처에 작고 말쑥한 목장 하나가 이는 것이 언뜻 내 눈에 띄었다. 그 목장은 길이 1천 3백 20피트의 표준 농지를 반으로 분할해 놓은 것인데, 나머지 반은 읍에 팔려 야구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시모다의 비행기는 그처럼 작은 목장에 착륙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 작은 비행기의 왼쪽 날개를 위로 치켜올리고 나서, 기수를 높이고 속력을 줄인 다음에 야구장을 향하여 조심스럽게 강하하기 시작했다. 우리 둘, 즉 나와 플리트는 왼쪽 외야석의 울타리 너머로 훌쩍 날아가서 풀밭 위에 나붓이 내려앉았다. 비행기 바퀴가 굴러가다가 정지했을 때, 아직 더 멀찌감치 굴러갈 수 있는 땅뙈기가 비행기 전방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플리트의 장점을 도날드 시모다한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일부러 그곳에 착륙한 셈이었다. 플리트가 정확하게 조종되기만 하면 얼마나 빈틈없는 착륙 솜씨를 발휘 하는 가를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금 이륙하기 위해서 절기판을 한껏 열어 놓았다. 그러자마자 추진력이 돌발하는 바람에 나는 비행기를 빙그르르 돌려 세웠다. 그런데 내가 막상 떠나가려고 하는 찰나, 시 모다의 트래블 에어가 최종 단계의 착륙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 왔다. 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오른쪽 날개를 위로 치켜올린 트래블 에어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당당하고도 우아한 독수리가 메마른 양골담초 짚단 위에 내려앉기 위해서 공중을 빙빙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모다는 저공에서 위험할 정도의 저속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나는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목덜미의 털이 거슬러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비행기 추락사고를 보게 되리라..... 트래블 에어를 착륙시키자면 울타리 너머를 날아갈 적에 최소한도 시속 60 마일은 필히 유지해야 한다. 그 이하로 속력이 떨어지면, 트래블 에어는 시속 50마일에서 실속(失速)하는 비행기인지라, 기어이 추락과 동시에 폭발하고, 잇달아 불길에 휩싸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비친 광경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 황금처럼 노란빛과 백설처럼 하얀빛으로 빛나는 비행기는, 곤두박질치며 낙하하기는 커녕 도리어 저공에서 고즈넉이 멈추는 듯싶었다. 아니, 완전히 정지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튼 시속 30마일의 속력으로 느릿느릿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거듭 말하건대, 시속 50 마일에서 실속 하는 바로 그 트래블 에어가 공중에 느긋하게 떠 있는 듯하더니, 어느 결에 3점 착륙으로 풀밭 위에 슬며시 내려앉았다. 더욱이 내가 플리트를 착륙시키기 위해 활주로로 이용했던 거리의 절반 내지 4분의 3만을 시모다는 사용했던 것이다. 그의 비행기가 내 곁으로 스르르 굴러오더니 멈춰 섰다. 그 동안 나는 잠자코 조종실에 앉아서 멍청히 구경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엔진을 꺼버린 후에도 나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자네가 아주 멋진 들판을 찾아냈군 그래! 마을도 아주 아주 가깝고. 안 그런가?" 벌써 우리의 첫 번째 고객들이 무슨 일인지 알고 싶다는 듯이 목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 다. 그들은 <혼다 모터사이클>을 탄 두 명의 소년이었다. "무슨 얘기예요? 마을에 가까운 이 들판이 좋다고요?" 여태껏 내 귓속에서 쟁쟁 울리는 엔진의 소음을 이겨내려는 듯이 내가 들입다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반 블록밖에 안 떨어져 있단 말이네! 그렇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었어요. 내 말뜻은..... 당신이 어떻게 해서 여기 착륙할 수 있었느냐는 말이에요, 저 트래블 에어를 타고서! 도대체 그런 착륙이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에요?" "마술이지!" 그가 나를 향해 찡끗 윙크하며 하는 말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도날드..... 정말이에요. 당신이 트래블 에어를 착륙시키는 것을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요." 내가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럭 지레 겁먹는 양을 그는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리처드, 렌치를 공중에 두둥실 뜨게 하고, 온갖 질병을 고치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물 결이 출렁거리는 바다 위를 걷고, 그리고 트래블 에어를 길이 1백피트의 풀밭 위에 착륙시키는 법을 알고 싶은가? 이 모든 기적에 대한 해답을 알아내고 싶다는 건가?" 나는 그 순간 마치 시모다가 레이저 광선총을 나한테 쏘아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말이에요..... 그저 당신이 어떻게 여기 착륙했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 "리처드, 내 말을 들어봐!" 이렇게 말하는 시모다의 목소리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내 귀에 들 려 왔다. 그 공간이 순간적으로 무슨 심연처럼 느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현세(現世)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세상 만물은 무엇인가? 리처드, 그건 모두 환상(Illusions) 이야. 모든 게 하나같이 이러한 현상 세계에 내포되어 있는 환상들이란 말이야. 리처드, 자넨 그 점을 이해하겠나?" 그는 윙크도 미소도 짓지 않았다. 내가 이미 오래 전에 그러한 깨달음을 터득했어야 하는 데도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하여 갑작스레 분노를 느끼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두 소년이 타고 있는 모터 사이클이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비행기 꼬리 옆에 멈춰 섰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열망이 두 소년의 얼굴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네, 알았어요." 나는 이 말밖에는 다른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환상에 관하여 로저(rogger는 통신용어로서 <수신하고 해독함> 이라는 뜻-역주) 함." 소년들은 시모다의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그러므로 목장 주인을 한시바삐 찾아내서 그의 목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내는 것은 나의 일거리가 되었다. 그날 낮에 시모다의 비행기가 어떤 식으로 이착륙을 실행했는지를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 은, 그 비행기가 꼭 가짜 트래블 에어기(機)처럼 보일 지경이었다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리 라. 하여튼 그 비행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트래블 에어기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가벼운 헬리콥터나 혹은 E-2 Cub 기인 듯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나로서는 19분의 9 인치 짜리 엔드 렌치가 흡사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공중에 두둥실 떠 있는 사태를 용인하는 편이 차라리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두 명의 탑승객을 태운 시모다의 비행기가 시속 30 마일로 이륙하는 것을 천연덕스럽게 지 켜보고 있는 것이 도리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심령술에 의하여 지구의 중력권에서 벗어난 물체가 공중을 두둥실 떠다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서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시모다가 그토록 과격한 어조로 말한 것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환상이라..... 예전에도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마술을 배웠을 때... 그렇다, <마술사>들이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너희들이 보게 될 것은 정녕코 기적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마술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이것은 일종의 효과, 즉 마술이라는 환상이다. 요컨대 마술에 의한 착시(錯視)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마술사들은 호도껍데기 속에서 샹들리에를 끄집어내기도 했고, 또는 거대한 코끼리를 테니스 라켓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불현듯 통찰력이 용솟음치는 바람에 나는 주머니에서 「메시아 편람」을 꺼내서 책갈피를 열어 보았다. 펼쳐진 책장에는 두 줄의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어떤 문제든지, 그것을 위한 해답을 그대의 손안에 쥐고 있지 않은 문제는 없느니라. 그대가 문제를 탐구하는 까닭은 그러한 해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니라. 무슨 영문인지 잘 알 수는 없으나, 나는 이 구절을 읽은 순간 지금껏 뒤죽박죽으로 혼란되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나는 이 구절을 암송할 수 있을 때까지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곳 마을의 이름은 트로이(Troy)였다. 트로이의 목장은, 페리스에서의 목초장 만큼이나 신나는 돈벌이를 벌써부터 우리에게 약속해 주었다. 그러나 페리스에서는 어딘가 침착하고 안정된 분위기가 느껴졌던 반면에, 이곳에서는 어떤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처럼 불안한 분위기가 몹시 싫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나의 탑승객들한테는 평생에 단 한 번 있는 최고의 모험일 테지만, 나한테는 그 같은 기기묘묘한 불안감으로 그늘지고 빛을 잃은 탓인지 지리하고 틀에 박힌 일로만 여겨질 따름이었다. 나의 모험은, 지금 나와 더불어 비행하고 있는 이 엉뚱한 인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트래블 에어를 조종하는 불가사의한 방법이나.... 그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게 들려주는 알쏭달쏭한 얘기들..... 트로이의 주민들은 트래블 에어의 비행술에 깃든 기적을 눈으로 보면서도 내가 기대한 만 큼 대경 실색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60년 동안이나 울리지 않던 마을 종탑의 종이 느닷없이 정오에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게 불가능한 일인 줄을 어련히 알기 때문에 영락없이 대경 실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트로이의 주민들은 그게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인 줄을 꿈에도 알지 못하기 때문인지 나처럼 크게 놀라지는 않더라는 말이다. 그들은 제각기 자못 순박한 얼굴로 말하기를--- "태워 줘서 고마워요!" "이걸 직업으로 하십니까? 이것만으로 먹고 살 수 가 있느냔 말예요. 그럼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을 하시는지요?" "어째서 트로이처럼 보잘 것 없는 촌구석을 택하셨나요?" "여보게 제리, 자네 농장이 겨우 구두 상자만 하게 보이더군." 이렇게 자기 친구한테 떠벌리는 손님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 두 사람은 오후 내내 분주했다.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이 계속 꾸역꾸역 모여드는 통에 우리는 꽤 많은 돈을 벌게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한 구석 에서는 나직이 들려오는 속삭임이 있었다. '떠나, 얼른 떠나, 여기서 벗어나란 말이야.' 나는 예전에 그런 말을 무시했다가 그 후 두고두고 후회를 한 적이 있었다. 오후 세 시경에 나는 가솔린을 사러 가기 위해서 비행기의 엔진을 꺼버렸다. 5 갤런 짜리 깡통 두 개를 양손에 들고서 스켈리 주유소까지 두 차례나 왕복했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시모다가 자기 트래블 에어에 급유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퍼뜩 스쳤다. 그는 페리스에서 나를 만나기 이전에 어디 다른 곳에서 자기 비행기에 급유를 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페리스에서 나를 만난 이후로는 한번도 급유를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방울의 가솔린이나 기름을 재차 공급하지 않은 비행기를 타고, 그가 이제까지 일곱 시간을 지나 여덟 시간째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을 나는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에는, 시모다는 선량한 사람이므로 나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을 듯싶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새삼스레 겁이 더럭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가솔린을 한껏 아껴 쓸지라도, 그러니까 절기판을 닫아 최소한도로 회전하게 해서 혼합가스의 흡입량을 최소량으로 줄임으로써 순항 속도(톱 스피드보다 낮은 경제 속도-역주)를 유지한다고 해도, 트래블 에어는 기껏해야 다섯 시간을 계속 비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착륙과 이륙을 거듭하면서 자그마치 여덟 시간 동안이나 비행을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중앙 탱크에 레귤러를 붓고 또 엔진에 1쿼터의 기름을 붓는 동안에도 시모다는 쉴새없이 손님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시모다를 붙들었다. 그가 어떤 부부를 조종실의 앞자리에 올라가 앉도록 도와주고 있을 때였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침착하고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돈, 기름 사정이 어때요? 가솔린이 필요하지 않느냔 말이에요." 나는 5 갤런 짜리 빈깡통을 한쪽 손에 든 채 그의 비행기 날개 끝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는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더니 이맛살을 찡그렸다. 마치 내가 그에게 숨쉴 공기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묻기라도 한 듯이, 그의 얼굴에는 사뭇 어처구니없다는 표정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 별로." 그가 대꾸하는 말이었다. 나는 다소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할까? 초등학교 일 학년생이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교실 뒤에 서 있으라는 꾸중을 들었을 때 이런 기분일까. "리처드, 기름 같은 건 필요 없네." 나는 이 말에 약이 올랐다. 나는 비행기의 엔진과 연료용 기름에 관해서 약간 아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래저래 불끈 화가 치미는 바람에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라늄 연료는 어때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단박에 내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작년에 기름을 넣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조종석에 올라가 앉았다. 부부 탑승객을 태운 그의 비행기가 그 초자연적으로 느릿느릿하게 이륙했을 때, 나는 고속 촬영기로 찍은 영화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나는 사람들이 어서어서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다가, 그 다음엔 손님들이야 있거나 없거나 우리 두 사람이 지체없이 여기를 떠나게 되기만을 염원했다. 마지막에는 나 혼자서라도 당장 여기를 따나 버릴 만한 분별력이라도 있으면 퍽 좋을 듯 싶었다. 한시바삐 이 목장을 이륙한 다음 다른 곳으로 훨훨 날아가다가, 어떤 마을로부터도 멀리 동떨어진 거리에 한적하고 널찍한 들판을 찾아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들판에 자리를 잡고 앉아 깊이 생각을 하고 나서, 그 동안 나와 도날드 시모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내 일기장에 또박또박 적어 놓으면, 그 일로부터 무슨 의미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이렇듯 간절한 바람이 내 가슴의 갈피 사이로 끼여드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고작해야 이것뿐이었다. 나는 플리트로부터 얼마큼 떨어진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시모다가 다시 착륙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큼직한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나는 그의 조종실로 가까이 다가갔다. 프로펠러로부터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받으며 선 채 나는 말문을 열었다. "돈, 나는 그런 대로 꽤 많이 일했어요. 이젠 내가 가야 할 길을 떠날 작정입니다. 어딘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들판에 착륙해서 잠시 동안 조금 한가롭게 지내고 싶거든요. 그 동안 당신과 함께 날아다니면서 즐거웠어요. 언젠가 이담에 또 봅시다, OK?" 시모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한 사람만 더 태워 주고 나서, 우리 둘이 얘기를 나누면 어떻겠나? 저 친구가 지금까지 줄곧 기다리고 있었거든." "아, 그래요? 알았어요." 그 친구는 좀 우그러진 휠체어에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휠체어는 이 들판에 이를 때까지 한 블록이나 되는 거리를 굴러왔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묵직한 중력과 같은 어떤 힘에 짓눌린 듯이 납작하게 비틀린 모양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오로지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은 일념으로 여기에 왔던 것이다. 주위에 사오십 명 가량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더러는 차안에 앉아 있기도 하고 더러는 밖에 나와 서 있기도 했다. 그들은 시모다가 어떻게 그 남자를 휠체어에서 비행기로 옮기려는가 하고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털끝만큼도 그런 눈초리에 개의치 않았다. "하늘을 날고 싶으세요?" 휠체어에 앉은 그 남자는 일그러진 미소를 입가에 띄면서 고개를 비스듬히 끄덕거렸다. 시모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갑시다! 우리 둘이서 거뜬히 해치웁시다!" 시모다가 그 남자한테 말하는 폼은, 마치 테니스 코트의 측선 바깥쪽에서 출전을 못하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선수한테 마침내 출전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돌이켜 보건대, 그 순간에 무언가 유별난 점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단지 시모다의 말소리에 깃들여 있던 강렬한 느낌뿐이었다. 물론 시모다가 무심코 던진 말이기는 했지만, 그 말은 그 남자가 변명의 여지없이 벌떡 일어나서 비행기에 오르기를 기대하는 명령이기도 했다. 그런 다음 구경꾼들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마치 그 남자가 그전부터 앉은뱅이 역을 맡아 연기를 해 오다가 이제야 비로소 자기 역의 마지막 장면을 끝마친 듯 싶었다. 정말이지, 무대 위에서 상연된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한사코 그 남자를 내리누르고 있던 묵직한 중력과 같은 힘이 그로부터 말끔히 떨어져 나갔다. 그는 숫제 지구의 중력권에서 홀랑 벗어난 성싶었다. 그는 흡사 스프링처럼 휠체어에서 튀어나오더니 반 뛰는 걸음으로 트래블 에어 쪽으로 향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나는 그 가까이에 서 있었으므로 그 남자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대관절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하신 것이지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보겠소, 아니면 그만두겠소?" 도날드 시모다가 한 말이었다. "요금은 3달러요. 타기 전에 먼저 돈을 내시오." "나는 하늘을 날고 싶어요!" 그 남자가 마냥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시모다는 보통 때와는 달리, 그가 조종실로 올라가는 것을 구태여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 아까 까지 자동차 안에 있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있었다. 술렁거리는 구경꾼들로부터 종작없는 속삭임이 잠깐 들려왔다. 그러더니 얼빠진 침묵이 주위에 감돌았다. 그 남자는 11년 전에 그의 트럭이 냅다 다리 위에서 떨어진 이래로 지금까지 도통 걷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마치 침대 시트로 만든 날개를 두팔에 매달아 놓은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조종실로 뛰어오르더니 승객석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가 앉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한 마리 새인 양 줄곧 두 팔을 퍼덕거렸다. 방금 두 팔을 선사 받기라도 한 듯이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누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시모다는 절기판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트래블 에어는 풀밭 위를 쾌속으로 달려가다가 이윽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는 비행기를 가파르게 옆으로 기울인 채 나무들 주위를 선회하기도 하고, 또는 날렵한 솜씨를 발휘하여 고공(高空)으로 치솟아 오르기도 했다. 어떤 한 순간이 행복한 동시에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그 같은 순간이 여러 차례 잇달았다. 일종의 기적적인 치료가 그런 치료를 받아 마땅한 남자한테 베풀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건이 발생한 순간에, 문제의 그 두 사람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면 무엇인지 언짢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서로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더니, 마치 하나의 매듭으로 묶인 듯이 한데 뭉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패거리를 이루게 되면 폭도로 표변하는 수가 있을진대, 그것은 추호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1분, 또 1분이 재깍거리며 지나갔다. 저 머나먼 하늘에 솟아오른 채 장난감 비행기처럼 작아 보이는 트래블 에어는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듯이 투명한 햇빛 속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숱한 눈들이 그런 비행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바야흐로 무엇인지 난폭한 일이 기어코 터지려고 하는 참이었다. 트래블 에어는 기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8자를 몇 개 그리기도 하고 급속한 나선형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더니 울타리 너머를 두둥실 두리둥실 떠돌고 있었다. 마치 비행접시가 시끄러운 잡음을 내며 천천히 떠돌다가 착륙을 시도하는 듯이 보였다. 혹시나 시모다가 조금이라도 눈치코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들판에다 탑승객을 내려 준 다음 날쌔게 이륙해서 어디론가 줄행랑을 칠 텐데,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꾸만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었다. 또 다른 휠체어를 밀면서 달려오는 부인도 한 사람 있었다. 시모다의 트래블 에어가 군중을 향하여 활주해 왔다. 그는 프로펠러가 반대 방향을 향하도록 기체를 돌려놓은 후에 엔진을 껐다. 그러자 사람들이 조종실 쪽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두려운 생각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시모다와 그 남자한테 접근하기 위해서 비행기의 동체로부터 면포로 된 부분을 찢어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짓이 비겁한 짓이었을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플리트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절기판과 도관에 펌프질을 한 다음, 엔진을 시동시키기 위해서 프로펠러를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서 조종실의 뒷자리에 올라가 앉은 나는, 플리트가 맞바람을 안고 뜰 수 있도록 기체를 돌려놓았다. 곧 이어 나는 이륙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도날드 시모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조종실 테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흥분한 군중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동쪽 하늘을 날아가다가 재차 남동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얼마 후 내 마음에 꼭 드는 들판이 처음으로 눈에 띄었다. 나에게 그늘을 드리워 줄 나무들이 서 있거니와, 마실 물을 베풀어 줄 시냇물도 흐르고 있는 드넓은 들판이었다. 나는 그날 밤을 묵기 위해서 그곳에 착륙했다. 어떤 마을로부터도 멀찌감치 동떨어진 들판이었다. 제 6 장 그 당시 도대체 그 무엇이, 그 무슨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나는 오늘날까지도 무어라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것은, 뭐라고 할까, 우리가 소위 제 육감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종류의 낌새가 나를 트로이에서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도날드 시모다라는 이름의 그 별난 괴짜 친구한테서도 나를 떼어놓았다. 가령 내가 운명의 손짓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면, 심지어는 메시아조차도 나를 자기한테 붙잡아 둘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과 매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 들판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사방팔방으로 확 트인 풀밭이 하늘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풀밭은 짐짓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내가 한껏 귀를 기울려 가까스로 들을 수 있었던 소리라고는 한 줄기 고운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외로운 신세가 된 셈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누구나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일단 하루 동안만이라도 그런 외로움에서 벗어날라치면 모조리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애당초로 되돌아가서 새삼스레 고독을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케이, 한동안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어." 나는 다소곳한 풀밭을 향해 일부로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무튼 즐거운 일이었어. 어쩌면 그 친구한테서 배울 만한 것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떼지어 몰려드는 어중이떠중이들은 골칫덩이일 뿐이지. 그 사람들이 자못 기분 좋아할 때도 나는 그 사람들한테 쉽사리 물리곤 하거든. 그런데..... 그들은 행여 깜짝 놀라거니 지레 겁을 먹기라도 할 때면, 누군가를 다짜고짜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길길이 날뛰든지, 아니면 무턱대고 그를 하나님처럼 숭배하려고 드는 통에 큰 탈이란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그건 너무 지나친 짓이야!" 나는 이런 말을 지껄이고 있다가 별안간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 막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틀림없이 시모다가 할 법한 말이기 대문이었다. 그는 도대체 왜 거기에 머물러 있었을까? 나는 결코 메시아도 뭐도 아니지만 이처럼 떠나올 분별력이 있었는데..... 환상. 그는 무슨 뜻으로 환상에 관해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말은 시모다의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 한층 더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건 한갓 환상일 뿐이야!" 라고 말했을 때, 시모다는 마치 그 말뜻을 단도직입적으로 내 머릿속에 주입시킬 수 있다는 듯이 과격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하여튼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문제였다. 더욱이 그것이 가져다 줄 선물을 나는 필요로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목탄 덩어리에 불을 붙였다. 잠시 후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콩으로 만든 고기 조각과 마른국수 부스러기를 긁어모은 데다가 두 개의 핫도그를 집어넣은 다음 약한 불에 조림으로써 걸쭉한 우거지 스튜를 만들었다. 핫도그는 사흘 전부터 남아돌아 가던 것인지라 끓여 먹는 것이 건강에 좋을 성싶었다. 식품 상자 바로 옆에는 공구 백이 납작하게 눌리어져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16분의 9인치 짜리 렌치를 끄집어내서 잠깐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휴지로 깨끗하게 닦아냈다. 나는 그 렌치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스튜를 휘저었다. 거듭 말하건대, 나는 혼자 있었으므로 아무도 나를 엿볼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장난 삼아 그 렌치를 시모다가 했던 대로 공중에 띄워 보려고 있다. 그것을 공중으로 똑바로 던져 올린 후에, 그것이 올라가기를 멈추고 내려오기 시작할 순간 두 눈을 반쯤 감고 보니 그것이 0.5초 동안이나마 공중에 더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것이 풀썩 하는 소리를 내며 풀밭이나 내 무릎 위에 떨어지고 나면, 내가 기대했던 효과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모다는 바로 이와 똑같은 렌치를 그렇듯 공중에 띄울 수 있었다. 그는 도대체 어찌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미스터 시모다여, 가령 그것이 한갓 환상에 불과한 것일진대, 그렇다면 대관절 무엇이 실체란 말인가? 현세가 한낱 환상일 뿐이라면,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러한 현세를 살아야 하는가? 마침내 나는 단념했다. 렌치를 두어 차례 더 던져 보고 나서 집어치우고 말았다. 그 같은 짓을 집어치우자마자 느닷없는 기쁨과 행복감이 내 가슴속에 밀어닥쳤다. 다만 내가 지금 현재 위치하는 영역 내에서 존재하거니와, 내가 지금까지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박한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다. 비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릇 존재물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몇몇 환상에 대한 해답도 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나는 어쨌든 행복했다. 나는 혼자 있을 때면 이따금 노래를 부르곤 한다. "오! 나와 페인트, 나의 정다운 날개 달린 말이여!" 나는 플리트의 날개를 다독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플리트에 대한 애정이 우러나왔다. (아무도 내 노래를 엿들을 사람이 근처에 없다는 점을 부디 잊지 말라.) "우리 둘은 하늘을 유랑하리라, 목초장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어느 하나가 무릎을 꿇기 전까지는....." 나는 노래를 계속하면서 가사와 곡조를 내 마음대로 지어 붙였다. "나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을 테다, 너의 날개 뼈가 부러지지 않는 한. 행여나 너의 날개 뼈가 부러진다면 나는 너의 날개를 철사로 동여맬 테다. 그러면 우리 둘은 언제나처럼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 아무렴, 저 푸른 하늘을 힘차게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 내가 마냥 신바람이 날 때면 가사는 끝없이 이어지곤 한다. 내가 가사의 각운을 그다지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메시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생각하는 일을 중단했다. 그가 누구인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듯 당혹스러운 문제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깡그리 집어치우고 말았다. 그러한 까닭으로 내가 행복감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 밤 열 시가 훨씬 지났을 무렵 목탄불이 점차 사위어갔다. 따라서 나의 노래 소리는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도날드 시모다여,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는 플리트의 날개 밑 풀밭 위에다 담요를 펴면서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행복한 비행을 즐기는 한편, 군중에 시달리지 않기를 빌겠어요. 당신이 소망하는 바가 그런 것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방금 내 입에서 나온 그 말을 취소하겠어요. 친애하는 고독한 메시아여, 당신이 찾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을 찾아낼 수 있기를 빌겠어요.' 내가 재킷을 벗어 던지려니까 시모다의 편람이 호주머니에서 불쑥 빠져 나왔다. 공교롭게도 책갈피가 펼쳐져 있기에 나는 펼쳐진 책장을 읽어보았다. 그대의 진정한 가족 관계를 맺어 주는 연줄은 핏줄이 아니라, 서로의 생활 속에 깃든 경의(敬意)와 기쁨에 의한 연줄이니라.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같은 지붕 아래서 성장하는 법은 거의 없느니라. 그런 글귀가 나한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어떤 책이든지 절대로 나 자신의 생각을 바꿔 놓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부스럭 소리를 내면서 담요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마치 스위치를 돌린 전구가 꺼져 버리듯이 내 의식도 가물가물 사라져 버렸다. 잠자리는 따사롭게 느껴졌으며, 나는 무수한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꿈길을 헤매지도 않았다. 어쩌면 저 별들은 환상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아름다운 환상이어라. 내 의식이 다시금 되돌아왔을 때는 마침 동이 틀 무렵이었다. 하늘에는 장미빛 광채가 비스듬히 비껴 있고, 풀밭에는 황금색 그늘이 살포시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햇빛 때문에 잠이 깬 것은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매우 부드럽게 내 머리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지기에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처음에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목초 이파리 같기만 했었다. 다음 순간 그것이 딱정벌레임을 알게 된 나는, 오른손으로 거칠게 후려치다가 하마터면 손목이 부러질 뻔했다. 16분의 9인치 짜리 렌치는 손으로 힘껏 후려치기에는 너무도 단단한 쇠뭉치인지라 나는 그만 졸음이 말끔히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렌치는 보조 날개의 경첩에 부딪쳐 퉁겨지는 바람에 한 순간 풀밭에 묻힌 듯싶더니, 다시금 천천히 떠올라서 의젓하게 공중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지켜봤다. 그러자 렌치는 얌전하게 땅바닥 위에 도로 내려앉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가 정작 그것을 집어들려고 마음먹었을 적에 그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렌치, 내가 즐겨 사용하는 그 정다운 렌치였다. 또 한편 언제나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면서, 제 스스로 성가신 너트와 볼트를 모조리 죄고 풀기를 열망하는 그 렌치였다. "제기랄! 빌어먹을 놈의....." 나는 되도록 욕설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욕설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적이 있는데, 그 이래로 오늘날까지 애써 그 결심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한데다가 얼떨떨한 나머지 욕설밖에는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내 렌치가 어찌 된 셈인가? 도날드 시모다는 여기서부터 최소한도 60마일 가량이나 동떨어진 곳, 말하자면 저 머나먼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렌치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마치 자기 눈앞에서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선사 시대의 원숭이처럼 사뭇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무엇인가 간단 명료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성싶은데..... 마침내 나는 바짝 약이 오르고 신경질이 치미는 통에 사실 규명을 포기해 버렸다. 나는 렌치를 공구 백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팬케이크를 굽기 위해서 목탄에 불을 지폈다. 어디론 가로 황급히 떠나가기 위해서 아침 식사를 허둥지둥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내 마음이 내킨다면 오늘 하루 종일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좋았다. 빵은 프라이 팬 속에서 알맞게 부풀어올랐다. 내가 빵을 막 뒤집으려고 하는 순간, 바로 그때 저 서쪽 하늘로부터 무슨 소리가 내 귀에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정녕코 시모다의 비행기 소리일 턱이 없었다. 중서부 지방에는 줄잡아 수백만 개의 목초장이 있는지라, 그 가운데 한 목초장에 와 있는 나를 어김없이 추적해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시모다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휘파람을 불면서 빵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다보았다. 그가 착륙했을 때 무어라 차분히 건넬 말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그것은 틀림없는 트래블 에어였다. 트래블 에어는 플리트 위를 저공으로 날아오더니 기체를 가파르게 기울인 채 한바탕 멋진 선회를 했다. 이어서 측면 활하를 하며 비행하더니 착륙시의 의무 속도인 시속 60 마일로 강하해서 착륙했다. 시모다는 기체를 플리트 곁에 나란히 세운 다음 엔진을 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모다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나는 휘파람 불기를 멈췄다. 그는 조종실 밖으로 나오더니 목탄불을 피워 놓은 곳으로 가까이 걸어왔다. "리처드, 잘 있었나!" "늦으셨군요." 내가 대꾸한 말이었다. "자칫하면 빵을 태울 뻔했어요, 도날드." "그거 참 안됐군." 나는 빵 반 조각과 마가린 한 덩어리가 담긴 양은 접시와, 그리고 해맑은 시냇물이 담긴 컵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트로이에서는 어떻게 되었나요?" 내가 시모다에게 물은 말이었다. "그럭저럭 잘 되었어." 그는 어설픈 미소를 잠깐 입가에 띄며 이렇게 대답했다.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다네." "과연 당신이 도망칠 수 있을는지를 나는 미심쩍게 여기고 있었는데요." 한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빵을 한 입 뜯어먹었다. "자네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이 빵은 진짜 형편없는 것이로군." 물끄러미 빵을 들여다보던 그가 끝내 한마디 투덜거렸다. "아무도 당신더러 내 빵을 꼭 먹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심술궂게 따지고 들었다. "어째서 모두들 내 빵을 먹기 싫어하죠? 아무도 내 빵을 맛있다고 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왜들 그러는 거죠, 승천하신 주님?" 내가 이렇게 빈정거리자, 그는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으로서 자네를 타이르는 거야. 우선 자네가 이 빵을 좋은 빵이라고 믿어야 하네. 그럼으로써 자네 입맛에 알맞은 좋은 빵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자네의 신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일세. 알겠나? 자네의 믿는 바가 옳다고 충심으로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일을 한번 시도해 보게나. 그러면 그건 뭐라고 할까.....? 홍수가 지나간 후 제분소에 화재가 난 것처럼, 그렇듯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일이란 말이야. 자넨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어렵쇼, 자네가 일부러 이 빵에다 풀이파리를 집어넣은 것 같은데....." "죄송해요. 내 옷소매에 묻어 있던 풀이파리가 어쩌다가 거기 들어간 모양이군요. 그런데 말이에요, 빵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나요? 까맣게 탄 일부분이나 풀이파리가 아니라.... 빵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무엇이냐,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지지리도 형편없군." 그가 빵 접시를 내게 되돌려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금 아까 건네주었던 빵은 한 입만 베어먹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났겠어. 리처드, 복숭아 통조림이 아직껏 남아 있는가?" "식품 상자 속에 들어 있어요." 그는 이런 허허벌판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냈을까? 고작 길이 28피트의 비행기 날갯죽지는, 총 거리 1만 마일에 달하는 대평원에서 결코 쉽게 눈에 띄는 과녁은 되지 못한다. 특히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비행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주알 고주알 캐어묻지 않을 것을 속으로 맹세했다. 그가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줄 테니까 말이다. "당신은 대관절 어떻게 해서 나를 찾아냈지요? 내가 반드시 이 들판에 착륙한다는 법은 절대로 없으니까요. 나는 어느 들판에라도 착륙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복숭아 깡통을 따서는 칼로 복숭아 조각을 꺼내 먹고 있었다. 그리 용이한 재간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비슷한 것들은 끼리끼리 모이게 마련이야.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은 덩달아 같은 무리를 짓는다.> 라는 옛말처럼....." 그는 이런 말을 웅얼거리다가 복숭아 조각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네, 뭐라고요?" "그게 바로 우주의 법칙이라네." "아, 그래요!" 나는 빵을 다 먹고 나서, 시냇가에서 가져온 모래로 프라이팬을 깨끗이 닦아냈다. 참으로 편리한 생활이 아니겠는가? "나한테 좀 설명해 주시지 않겠어요? 내가 도대체 어찌 해서 당신의 존귀한 자아와 비슷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혹시 저 비행기들이 비슷하다는 뜻으로 <비슷하다> 라는 말을 하시는지요? 아마 그런 말씀이시겠죠?" "우리들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한데 이끌리게 마련이지." 그의 이런 말은, 그 어조에 있어서 친절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던져 주는 경구처럼 들렸다. "뭐라고요, 도날드? 지금 막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경구에 대하여 한마디 여쭈려고 하는데요. 어쩐지 당신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말을 나한테 털어놓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우리들>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요? 우리들이라......?" "저 공구 백 위에 얹혀 있는 16분의 9 인치 짜리 렌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네와 나는 그렇단 말일세. 오늘 아침 자네는 저 렌치를 공중에다 두둥실 띄우는 재간을 부리고 있었을 게야. 그렇지? 내 말이 틀렸나?" "나는 아무 재간도 부리지 않았어요! 재가 잠에서 깨어나니까..... 글쎄, 저 렌치가 내 잠을 깨웠어요. 그것이 저절로 공중을 떠다니다가....." "오, 저절로!" 그는 내 말을 짐짓 웃어 넘겼다. "네, 저절로 그랬어요!" "리처드, 기적을 행하는 비결에 관한 자네의 이해력은 빵 굽기에 관한 자네의 이해력과 같은 수준에 도달해 있어." 나는 그 말에 응답하지 않은 채 잠자코 있다가, 둘둘 개켜 놓은 침구 위에 올라앉으며 편안한 자세를 취할 따름이었다. 나는 되도록 침묵을 지켰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기가 마음 내킬 적에 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서 이런 일들을 배우기 시작한다네. 우리가 정신이 말똥말똥할 때는 그런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드는 게 예사니까. 그렇기에 우리의 의식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우리는 기적을 행하게 된다는 말일세."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의 눈길을 따라 보았더니, 구름 한 점이 하늘가를 떠돌고 있었다. 밤이 낮으로 바뀌고 난 뒤 첫 번째로 나타난 구름이었다. "리처드, 너무 성급하게 굴지는 말게나. 우리들은 누구나 좀더 많은 배움과 좀더 나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는 도중이니까. 이제 와서는 그러한 깨달음이 좀더 빠른 속도로 자네한테 찾아올 거야. 자네가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네는 한 사람의 정답고 지혜롭고 영험한 스승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일세." "내가 미처 그걸 알기도 전이라고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그런 건 숫제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아무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아무렴, 자넨 아무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지." "좋아요, 물론 나는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째서 존재하며, 내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이 세계는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요. 그리고 나는 왜 하필이면 바로 이 현세에 살고 있으며, 이승에서의 생애가 끝맺음된 후에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알고 싶어요. 그뿐 아니라 나에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비행기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감스러운데." "뭐가 유감스럽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그런 식으로 되는 일이 아니란 말이야. 이 현세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또한 어떻게 운행하는지를 자네가 배우게 된다면, 자넨 자동적으로 기적을, 달리 말해서 기적이라고 불리게 되는 그 같은 것들을 행하기 시작할 거야.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기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하네. 이를테면, 마술사가 알고 있는 지혜와 비법을 죄다 배우고 난 뒤에는, 그건 더 이상 마술이 아니란 말일세." 시모다는 하늘가를 망연히 바라다보던 눈길을 천천히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리처드, 자넨 다른 보통 사람들과 비슷해. 이런 문제, 다시 말해서 사물의 본질과 관련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자넨 진작부터 체험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편이라네. 그런데 자네는 이런 종류의 지혜를 체험을 통해 알고 있음을 아직껏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야.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보통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말일세." "나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데요." 내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당신한테 평생토록 시끌시끌한 군중과 고독이라는 불행을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런 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안 했는지 나는 도저히 기억할 수 없단 말이에요. 아마도 당신의 질문이 마치 미꾸라지처럼 내 머릿속을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내 입에서 이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러자마자 나는 왠지 모르게 시모다가 '자넨 나중에 기억이 떠오를 걸세.' 라고 말할 참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우기 그의 그런 말이 옳다는 것을, 나는 어쩐지 지레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팔다리를 큰대(大) 자로 쭉 뻗더니, 밀가루가 들어 있는 마지막 포대를 베개삼아 풀밭에 드러누웠다. "나 좀 봐, 리처드. 군중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네가 원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네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으니까. 자네는 흡사 마술사와 같이 신비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디 잊지 말라고. 히야! 참 멋지다. 자넨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려니와 잠긴 문을 통해서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트로이에서 군중이 들입다 당신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나요?" "그들이 그처럼 야단법석을 치는 것을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언제 말했던가? 나는 그런 북새통을 그냥 내버려두었던 거야. 하기야 나는 쇼 같은 것을 다소 좋아하는 편이거든. 우리들에게는 모두 때와 장소에 따라서 마치 서투른 배우처럼 번주그레한 연기를 할 줄 아는 소질이 조금은 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린 결코 주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당신은 중간에 그만두었잖아요? 나는 신문에서 그 얘기를 읽었는데요." "사태를 보아하니, 나는 거의 우격다짐으로 <유일 무이한 전천후 전임 메시아> 의 역할을 송두리째 떠맡게 되었던 거야. 그랬기에 나는 그런 일자리를 냉큼 걷어 치웠다네. 하지만 나의 지식과 지혜 -- 내가 배우고 익히느라고 여러 차례의 생애를 바쳐 온 셈인즉, 그 결과로서 터득한 지식과 지혜를 까맣게 잊어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그렇지?"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풀줄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이것 보세요, 도날드. 대관절 당신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그토록 노심 초사하십니까? 그렇게 이리저리 둘러대지만 마시고, 좀더 허심 탄회하고 솔직 담백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라는 말씀이에요. 사태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자초지종을 숨김없이 저한테 들려주실 수 없겠어요?" 시모다와 나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자네가 나한테 말해주는 것이 당연할는지도 모르네. 내가 애써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네가 나한테 들려주게나. 혹시 자네의 말이 틀린다면 내가 정정해 줄 테니까." 나는 잠시 동안 그의 말에 대해 심사 숙고한 후에, 선제공격으로 그를 호되게 놀래 줄 것을 마음먹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말씀드리죠." 나는 이렇게 운을 떼고 난 다음, 말을 그치고 머무적거리면서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지금 까지 별로 생각해 본 바가 없으므로, 그 내용이 그다지 탐탁하지도 못하고 그 입담이 그리 유창하지도 못한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올 경우에,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참을성을 발휘할 수 있을는지를 넌지시 알아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라서 따가운 햇살이 사방을 내리쬐고 있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 동떨어져 있으므로 내 눈에는 띄지 않는 들판에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밭갈이를 하는 어느 농부의 디젤 트랙터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좋아요, 말씀드리죠.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은..... 내가 페리스의 그 들판에서 당신이 착륙해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건 필연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어요, 그렇죠?"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목초장에서 자라나고 있는 목초처럼 조용했다. 그런 목초를 베어내서 햇볕에 말리면 버석버석 요란한 소리를 내는 건초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말씀드린 것은..... 당신하고 저는 모종의 협약에 의하여 맺어져 있어요. 뭐라고 할까? 일종의 초자연적인 조화나 혹은 서로의 영감을 통한 의견의 일치-- 이런 것에 의하여 맺어져 있다는 말이에요. 나는 이제까지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당신은 잊지 않고 있었어요."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저 멀리서 들려 오는 트랙터 엔진 소리가 바람결에 시나브로 들리다말다 하였다. 내가 말하는 것이 절대로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 편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소재들을 모아 가지고 하나의 실화를 재구성하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3천~4천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나는 말하려고 해요. 날짜는 하루 이틀 틀릴지는 몰라도, 지금부터 3천~4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 오늘 이날에 당신과 나는 만났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종류의 모험 정신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둘 다 희귀한 사건이나 진기한 경험, 혹은 뜻깊은 시련을 통하여 정신의 향상을 꾀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단 말이에요. 어쩌면 파괴자나 살인자를 몹시 혐오한다는 점에서도 우리 둘은 서로 공통된 바가 있어요. 게다가 우린 배우기를 즐겨한다는 점에서 서로 엇비슷하므로, 서로에 관한 지식을 터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엇비슷해요. 한데 당신은 나보다 더 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재회는 조금 아까 당신이 언급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에 의하여 미리 예정된 것은 아닐까요?" 나는 풀밭에서 새파란 풀줄기를 하나 더 뽑아냈다. "나 어때요? 내 말이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느냔 말이에요." "리처드, 내가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했을 때 이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잠시나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네. 우리 두 사람의 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시모다가 아주 의미심장한 어조로 내게 이르는 말이었다. "미래의 시간에 있어서도 우리의 재회는, 마치 쉽사리 낚을 수 없는 대어처럼 이루어지기 어려울 걸세. 그렇지만 말이야, 어쩐지 우리의 재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듯싶은 가망--그런 아슬아슬한 기회가 이 현세의 시간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아무튼, 리처드. 어서 자네 얘기를 계속하게나." "내가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내가 구태여 이런 저런 얘기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체험한 것들을 당신은 벌써 체험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내가 만약에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체험한 것에 대하여 나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게다가 내 생각을 당신한테 알려 주지 않고서는, 내가 배우고자 염원하는 것들을 어느 것 하나 배우지 못할 겁니다. 그렇죠?"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풀줄기를 내버리면서 말을 이었다. "도날드, 이 같은 일이 당신한테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신은 어째서 나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부대끼고 있느냔 말이에요. 누구든지 당신처럼 현세를 초월한 수준에 이른 사람은, 온갖 기적을 행하는 일체의 권능을 부산물로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예 나 같은 사람은 필요로 하지도 않아요. 당신이 이 현세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은 숫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시모다의 얼굴을 슬며시 쳐다보았다.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트래블 에어가 가솔린을 필요로 하지 않듯이 내가 그렇다는 말인가?" 시모다가 두 눈을 감은 채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기껏해야 권태뿐입니다. 이 지상의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번뇌되거나 고통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이 정작 알고 있다면, 그럴 때 흥미진진한 모험이나 의미심장한 시련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의 유일한 문제는, 당신은 어떤 문제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나는 참으로 당돌한 말을 지껄이고 있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그건 자네의 틀린 생각이야. 내가 어째서 내 일을 중간에 집어치웠는지 그 까닭을 자네가 한번 말해 보게나. 내가 메시아라는 직업을 그만두게 된 그 까닭을 알고 있느냐는 말이네." "군중 때문이라고 당신이 말한 적이 있어요. 자기들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당신한테 간청하는 그 어중이떠중이들 말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건 첫째 요인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건 2차 적인 유인이 된단 말이지. 군중 공포증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져야 할 십자가야.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군중이 아니란 말일세. 막상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이 땅에 전파하고자 애쓰는 복음에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하랄 없는 군중이야. 바다 위를 걸어서 뉴욕에서 런던까지 갈 수도 있고, 또는 허허 로운 공간에서 금화(金貨)를 이끌어 낼 수도 있어. 그런 두 기적을 일으킬 수는 있을지언정 암만 해도 군중으로 하여금 내 복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 수는 없단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시모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얼굴 가득히 고독한 표정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토록 고독이 사무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음식이니 잠자리니 돈이니 명성이니 하는 것들이, 그에게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알고 또한 깨닫고 있는 바를 말하고 싶은 갈망에 몸부림치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그를 향해 일부러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런 사태를 자초한 셈이었군요. 그렇죠? 가령 당신의 행복이 타인의 행위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당신도 역시 어떤 문제를 갖고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는 별안간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마치 내가 렌치로 그의 머리를 후려치기라도 한 듯이, 그는 노여운 눈빛을 사뭇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만약에 그를 머리끝까지 성나게 만든다면 그건 결코 현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누구든지 갑작스레 충격을 받게 되면 그만큼 빨리 흥분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그는 어설픈 미소를 잠깐 입가에 띠더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리처드, 뜻밖인데? 이거 정말 뜻밖이야! 그러나 아무튼 자네 말이... 옳기는 하니까!" 그는 다시 입을 다물더니 말이 없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화들짝 놀란 탓인지, 거의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표정을 짐짓 못 본 체하면서 몇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만났다는 둥,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둥, 흡사 새벽 하늘에 떠오른 혜성이나 대낮에 나타난 유성처럼, 엉뚱한 동시에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연달아 내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시모다는 풀밭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한마디 말도 없었다. 정오가 되었을 무렵에야, 우주와 그 안에 내포된 삼라만상에 대하여 나 자신의 견해를 술회(述懷) 하는 일이 겨우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도날드. 이제서야 내 이야기의 실마리가 비로소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만큼 얘기할 것이 수두룩하거든요. 대관절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두루 다 알고 있을까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냔 말입니다." 시모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시 당신이 나한테 나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기대한다면,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어째서 내가 지금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가 있는지요? 나는 예전에 이런 일들에 관해서 전혀 이러니저러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도날드, 지금은 당신이 뭐라고 대답해도 좋을 때가 아닙니까? 제발 무슨 말씀이든지 마음대로 해 보라는 말이에요." 그러나 그는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나는 여태까지 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이 현세의 전경(全景)을 도날드 시모다한테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메시아는 그 동안 줄곧 통나무같이 꼼짝달싹을 않은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 아까 내가 그의 행복에 관하여 우연히 언급했던 말 한마디 속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것을 죄다 들을 수 있었던지라, 마음이 놓인 나머지 잠에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제 7 장 수요일 아침 여섯 시경, 나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르릉 꽝! 어디선가 급작스럽고도 격렬한 폭음이 느닷없이 터져 나오더니 천지를 진동시켰다. 어떤 웅대하고 장엄한 교향곡이, 마치 고성능 폭탄이 폭발하는 듯이 별안간 온 누리에 울려 퍼지는 듯 했다. 천 여명의 합창단이 일제히 소리 모아 부르는 합창, 라틴어로 된 가사, 바이올린과 팀파니와 트럼펫이 한데 어우러진 소리. 하여튼 유리창을 산산조각으로 박살낸 것처럼 요란한 음향이 내 귀청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게다가 땅바닥이 흔들렸기 때문에 플리트가 바퀴를 구르며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플리트의 날개 밑으로부터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렇듯 혼비백산한 내 몰골은, 아마도 400볼트의 전류에 감전된 고양이가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채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뛰쳐나오는 모습과 흡사하게 보였을 것이다. 새벽 하늘에 떠오른 태양은, 마치 열없는 불빛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그런 붉은 색이었다. 청색과 회색을 혼합시킨 페인트로 아무렇게나 그려 놓은 듯이 보이는 구름은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교향곡의 음향이 마치 다이너마이트처럼 굉연(轟然)히 폭발하며 치솟아 오르더니 새벽 하늘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만둬! 그만둬! 음악을 꺼! 그 도깨비 같은 음악을 냉큼 집어치우란 말이야!" 시모다가 미친 듯이 화가 나서 들입다 고함을 쳤다. 그가 어찌나 큰 소리로 악을 쓰는지, 내 귀가 먹먹하도록 울리는 그 굉음 속에서도, 나는 그의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모다의 고함 소리에 그 요란한 음향이 단박에 멎더니, 주변의 공기 속에 여운을 길게 남기면서 차츰차츰 사라져 갔다. 그런 다음 그 소리는 마치 산들바람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성가(聖歌)로 변했다. 나는 베토벤의 음악이 꿈결에 들려 오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시모다는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듯이 계속 고함만 치고 있었다. "이것 봐, 리처드. 내가 음악을 끄라고 말했잖아!" 그러자 음악이 완전히 멎었다. "휴--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다 보았다. "무슨 일에나 때와 장소가 있게 마련이야.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단 말이야, 안 그런가?" "때와 장소라.....음....." "천상의 음악을 자네 혼자 마음속으로 은밀히 듣는 것은 괜찮은 일이야. 또는 이따금 무슨 특별한 경우에 천상의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러나 아침부터 그토록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서야 되겠나? 나는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네. 그런데 자넨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뭘 하고 있느냐고요? 도날드,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있느냐.....?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입니까?"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하릴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콧소리로 무슨 말인지를 웅얼거렸다. 그리고는 비행기 날개 아래로 되돌아가더니 슬리핑 백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메시아 편람」이 펼쳐진 채 풀밭 위에 엎어져 있었다. 그 책을 조심스럽게 뒤집어 든 나는 펼쳐진 페이지를 읽어보았다. 그대가 지니고 있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변명하라. 그러면 그러한 한계는 실제로 그대의 것이 되고야 말리라. 내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인지, 나는 메시아들을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제 8 장 위스콘신 주의 해먼드에서 서너 명의 월요일 승객들을 태워 주고서 그날 낮의 일을 마무리지었다. 그런 다음 읍내로 들어가서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들판으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도날드, 당신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지요?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대로 이 현세가 흥미진진할 수도 있고 혹은 지겹고 따분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이에요. 나는 당신의 그 말을 인정하겠어요. 그렇지만 나는 머리가 명석하게 돌아갈 때도, 하필이면 왜 우리가 이같은 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 이유를 알고 싶단 말입니다. 도날드, 그 점에 대하여 무언가 말씀을 해 주세요." 우리 두사람은 철물점 (문이 닫혀 있었다)과 영화관(「내일을 향해 쏴라」개봉중) 앞을 지나치던 참이었다. 시모다는 대답 대신에 보도 위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뒤돌아보았다. "자네 지금 돈 가진 것 있나?" "제법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죠?" "자네와 둘이서 이 영화를 보고 싶어서 그러네. 어때, 찬성하나?" "글쎄요. 도날드, 당신이나 구경하시지요. 나는 우리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그 녀석들을 너무 오랫동안 외롭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거든요." 난데없이 웬 영화 한 편을 보느냐 안 보느냐 하는 것이 어찌 그리 중요하다는 말인가? 나는 내심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자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비행기들은 아무 일 없이 잘 있을 거야. 우리 같이 영화 구경을 하는 게 좋겠어."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는걸요." "그렇다면 다음 회부터 보면 되지." 시모다는 벌써 입장권을 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어두운 극장 안으로 들어가서, 뒤쪽에 있는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었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까, 관객들이 50명 가량은 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나는 영화에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힌 나머지, 영화를 보러 들어오게 된 경위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언제나 그 영화를 고전적인 가치가 있는 명화라고 생각해 온 바였다. 나는 이번까지 치면, 영화의 주인공인 <버치>와 <선댄스>를 세 번째 만나 보는 셈이었다. 대체로 명화 속에서의 시간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듯이,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의 시간은 마치 간단히 뭉뚱그린 것처럼 급속도로 흘러가는 듯했다. 나는 잠시 동안 영화를 기술적인 각도에서 눈여겨보았다. 각 장면이 어떤 의도로 짜여져서 다음 장면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가, 하필 왜 이 장면이 다음에 나오지 않고 지금 나오는가 하는 문제들을 머릿속으로 궁리했다. 나는 영화를 그런 각도에서 관찰하려고 애를 썼지만, 줄거리에 휘말려드는 바람에 관찰하는 데 소홀해지고 말았다.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 그러니까 <버치>와 <선댄스>가 볼리비아국군에 의하여 완전 포위를 당한 대목에서 시모다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스크린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시모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든지 간에 영화가 다 끝난 뒤에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리처드?" "네." "지금 자넨 하필이면 왜 여기에 와 있지?" "참 좋은 영화잖아요, 그렇죠? 돈, 조용히 하세요. 쉿!" 온통 피투성이가 된 <버치>와 <선댄스>는 어째서 자기네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야만 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영화가 왜 좋은 영화인가, 그 이유를 말해 보게나." 그가 내게 물었다. "재미있지 않아요? 쉿!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것 봐, 정신 차려! 이런 데서 냉큼 벗어나야 해. 이건 한갓 환상에 불과한 것이야." 나는 울컥 짜증이 났다. "도날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영화가 곧 끝날 테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영화가 끝난 후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덕분에 내가 영화를 마저 다 볼 수 있도록 제발 좀더 참아 달라는 말입니다. 오케이?" 그는 강렬하고 극적인 목소리로 내 귀에 대고 나직이 소곤거렸다. "리처드, 자넨 하필이면 왜 여기에 와 있지?" "이것 보세요, 당신이 아까 나더러 여기 들어가자고 청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다음, 마지막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잽싸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네가 반드시 나를 따라 들어올 필욘 없었어. '그만두겠어요' 라고 하면서 사양할 수도 있었잖아." "난 이 영화를 진짜 좋아해요!"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린 탓인지, 앞좌석에 앉아 있던 어떤 남자가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잠깐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날드,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게 무슨 잘못인가요? 어디가 당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러시는 것이냔 말입니다." "천만에, 잘못이라고 할거야 없지."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관을 빠져 나온 우리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중고 트랙터 주차장 옆을 지나쳤을 때, 거기서 부터는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시골길이 들판을 향하여 길게 뻗쳐 있었다. 시모다와 나는, 사랑하는 비행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극장에서 있었던 시모다의 엉뚱한 말고 행동에 대하여 나는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도날드, 당신은 어떤 일이든지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하시지요, 그렇죠?" "때로는 그렇기도 하지." "영화는 어째서 보자고 하셨죠? 왜 갑자기 당신은 <선댄스>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냐는 말입니다." "자네가 한 가지 질문을 했었기 때문이야." "아, 참! 그랬군요. 그러면 지금 나한테 대답해 주실 건가요?" "그게 바로 내 대답이야. 자네가 질문을 했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영화를 보러 갔던 거야. 바로 그 영화가 자네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란 말일세." 그는 은근히 내 얼굴을 곁눈질해 보면서 비죽이 웃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내가 무슨 질문을 했었나요?" 나의 이런 말이 시모다의 기분을 자못 거스른 듯싶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짐짓 침묵을 지키더니 뜨악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리처드, 아까 자네는 이런 말을 했었다네. 자네의 머리가 아주 명석해진 순간에도, 하필이면 왜 우리가 이 같은 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자네의 질문은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네." 나는 비로소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당신은, '바로 그 영화가 나의 대답이다.'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랬지." "왜 그래요?" 내가 이렇게 되물었다. "자넨 이해를 못하는군." "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 영화는 좋은 영화였어.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영화라도 역시 환상이야. 어디까지나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안 그런가? 활동사진이라는 것은 사실상 움직이지도 않는 거야, 단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광선에 의하여 우리 눈에 착시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어둠 속에 세워 놓은 평면의 스크린 위에 비친 영상들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아, 참! 그렇군요." 나는 그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 즉 영화를 보러 가는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일까? 영화라는 것은 오로지 환상에 불과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아마, 오락을 즐기기 위해서 그리하겠죠." "재미 삼아 그런 다는 말이지? 옳은 말이야. 그게 물론 첫째 이유가 될 거야." "도날드, 내가 생각하기에는 교육적인 이유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항상 그렇게 마련이지. 배우기 위해서 그런 다는 것이 둘째 이유가 될 거야." "색다른 것을 즐기는 취미, 혹은 도피." "그것도 역시 재미 삼아 그러는 것이니까, 첫째번 이유에 해당될 거야." "도날드, 기술적인 이유도 있을 것 같아요.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영화관에 가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말하자면 배우기 위해서 그러겠지. 아무튼 그것도 둘째번 이유에 해당되는 것이야." "권태로부터의 도피....." "도피. 그건 자네가 금세 말했던 것이야, 리처드." "사교,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 "리처드, 그건 영화관에 가는 이유만 될 뿐이야. 영화 그 자체를 보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단 말이야. 하여튼 그것도 역시 재미라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첫째번 이유에 포함될 거야." 내가 흥분해서 열심히 주워섬기는 이유들은 한결같이 시모다의 손가락 두 개로 꼽히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서 혹은 배우기 위해서, 또는 두 가지 이유를 겸해서 영화를 본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도날드, 한 편의 영화는 한 사람의 생애와 비길 만 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렇죠?" "옳거니!"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나쁜 생애를 선택하는 것입니까? 하필이면 공포 영화만을 골라 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들은 단지 재미 삼아 공포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닐세. 왜냐하면 그들은 영화관으로 들어갈 적에, 앞으로 거기에서 공포 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시모다가 이렇게 말했다. "도날드, 그렇다면 어째서....." "리처드, 자네 공포 영화 좋아하나?" "아니오." "자네 지금까지 공포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공포 영화를 보기 위해서 많은 돈을 쓰고 있다네. 그런 한편,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런 재미도 없을뿐더러 지겹기만 한 멜로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많은 돈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네....." 그는 말꼬리를 묘하게 끌면서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네, 그래요!" "자네는 반드시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볼 필요는 없어. 그리고 그들도 반드시 자네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필요가 없어. 바로 그것이 우리가 소위 <자유>라고 일컫는 것이지." "그런데 말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대관절 무슨 이유로 공포에 떨거나 혹은 권태로움을 느끼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건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 타인을 공포에 떨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공포 영화를 보아 둘 만하다고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혹은 그들 자신이 공포감에서 비롯된 흥분 상태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화라는 것은 마땅히 그런 식으로 권태롭게 느껴져야 하는 것일는지도 몰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온건하다고 느껴지는 몇 가지 이유를 들먹거리면서, 그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는 생각을 사뭇 즐기고 있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라네. 자네가 그런 사살을 믿을 수 있겠나? 아니야, 자네는 결코 믿을 수 없을 거야." "네, 나는 믿을 수가 없군요." 내가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자네가 그 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때까지, 어떤 사람들은 왜 불행한지 그 까닭을 자네는 항상 궁금하게 여길 것일세. 리처드, 그들은 스스로 불행해질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불행한 거야. 그래도 그들의 그런 상태는 나름대로 좋은 편이야." "흥!" 내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우리들은 게임을 벌이고 재미를 추구하는 동물들이야. 우린 이 우주의 수달피들이란 말이야. 그런데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환상들이 상처를 입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상처를 입을 수도 없으려니와 죽을 수도 없어. 하지만 우리가 좋을 대로 믿을 수는 있어. 우리가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고 믿고 싶으면 얼마든지, 이를테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상세한 세부 묘사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믿어도 좋다는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희생자라고 믿을 수도 있어. 저희들끼리 죽고 죽이면서 행운과 불운에 의하여 이리저리 휘둘리는 희생자들이라고." "그렇다면 여러 차례의 생애를 거듭 살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지금까지 본 영화는 몇 편이나 되는가?" "글쎄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혹성에서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혹은 다른 혹성에서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하여튼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것은 모두 다 고작해야 활동사진인 동시에 환상일 뿐이야." 시모다가 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반면, 우리가 빚어낸 환상들과 더불어 흥미를 추구할 수도 있어. 안 그런가?" "도날드, 당신은 이 영화와 같은 생애를 얼마 동안 살고자 하십니까?" "리처드, 자넨 얼마 동안 살기를 바라는가? 자네는 오늘 밤 내가 영화를 보자고 했기 때문에 덩달아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지. 그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여럿이 덩달아 사는 것을 즐겨하는데,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의 생존기간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단 말이야. 오늘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은 다른 영화에도 여러 번 같이 출연한 적이 있어. 그 영화보다 이전이 먼저냐 이후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네가 어느 영화를 먼저 보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야. 그렇지 않으면, 자넨 서로 다른 스크린 위에서 그들 두 사람을 동시에 볼 수도 있을 것일세.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보기 위해서 극장표를 사지. 시간이라는 현실과 공간이라는 현실에 대한 회의를 일단 보류함으로써 입장료를 지불하는 셈이란 말일세. 비록 어느 한쪽도 진정한 의미의 실체는 아닐지라도..... 그러나 그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은 이 혹성이나 또는 그 밖의 어떤 시간--공간체계에도 출현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네." "그러면 시간--공간 체계에서 얼마 동안의 생존 기간을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까?" "영화를 한번도 보러가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아, 알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이 탐구하는 지혜(즉 주체적인 자각지-역주)를 터득하게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맞아." 시모다가 내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 내포되어 있는 시간--공간의 연속체는 일종의 도장(道場)이라고 말할 수 있어. 꽤나 초보적인 도장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시공(時空)이라는 환상이 설혹 권태롭게 느껴진다 해도 많은 사람들은 그 같은 환상 속에 머무르고 있지. 그들은 객석의 전등불이 일치감치 켜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말이에요, 도날드. 누가 이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씁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한테 묻는 대신에 다만 자기 자신한테 물어 본다면 지극히 많은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데, 그건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야. 리처드, 누가 이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쓰지?" "우리가 씁니다." 내가 대답했다. "누가 연기를 하는가?" "우리들이죠." "촬영 기사, 영사 기술자, 극장 지배인, 매표원, 필름 배급자는 누구인가? 이 모든 사람들을 지휘·감독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언제나 이들의 한복판을 거리낌없이 오락가락하면서, 필요할 경우에는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똑같은 영화를 되풀이해서 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글쎄요, 내가 한번 알아맞혀 볼까요? 누구든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도날드?" "리처드, 자넨 그만하면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나?"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대중에게 그처럼 인기가 있나 보죠? 영화가 우리들 자신의 생애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냐는 말입니다." "아마..... 그런 까닭으로 그렇기도 하고, 어쩌면 그렇지 않기도 할거야. 아무튼 그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안 그런가? 그런데 말이야, 리처드. 영사기란 무엇인가?" "정신이 아닐까요?" 나는 자문 자답하는 듯이 이렇게 말하다가--- "아닙니다, 상상력입니다. 도날드, 당신이 뭐라고 말씀하실 지라도 그건 우리의 상상력입니다."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가?" 시모다가 내게 물었다. "그건 모르겠는데요." "우리의 상상력으로 표출하기로 동의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영화가 되지 않을까?" "글쎄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도날드." "리처드, 자네는 한 릴의 필름을 손에 넣을 수가 있다네." 시모다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필름은 모두 완결된 동시에 골고루 구비되어 있는 것이라네. 처음, 중간, 끝이 거기에, 바로 그 동일한 순간 속에, 즉 수백만 분의 일 초 속에 들어 있으니까. 필름은 거기에 기록된 시간의 범위를 넘어서 언제든지 현존하고 있어. 가령 영화가 어떤 것인지를 자네가 안다면, 극장 안에 들어가기 전에 자넨 어떤 내용의 영화가 전개되리라는 것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지. 거기에는 투쟁과 환락, 승자와 패자, 로맨틱한 사랑과 서글픈 실연, 그리고 천재지변 등이 있을 거야. 그 모든 일이 일어날 예정이라는 것을 자네는 미리 알고 있는 셈이지. 하지만 영화 이야기에 사로잡히고 빨려 들어가기 위해서, 또 한편 영화의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하기 위해서 자네는 그 필름을 영사기에 건 다음 한 장면 한 장면을, 순간순간 렌즈를 통하여 스크린 위에 차례차례 영사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네. 어떤 환상이든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일세. 그러므로 자네는 영화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장료를 지불하여 표를 사서는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 극장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거야. 그러면 영화가 자네를 위해서 시작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아무도 실제로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상처에서 흐르는 피도 고작해야 토마토 소스 같은 물질일까요?" "아니, 피는 확실히 피지.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에 끼치는 효과나 영향력으로 보아서는 차라리 토마토 소스라고 하는 편이 나을 걸세." "그럼 실체라고 하는 것은 대관절 무엇입니까?" "실체는 현상(現象)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초월적인 것으로서 사물의 본질이 되는 것이야.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게임이나 놀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지 간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네. 어떤 날은 나쁜 역을 맡기도 하고, 또 한편 이튿날은 좋은 역을 맡기도 하니까. <이즈(Is)>는 우리가 빚어낸 환상들과 우리의 게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심지어는 알아차리고 있지도 않다네. <이즈>는 애오라지 자기 자신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야. 그리고 우리들은 <이즈>를 의탁하고 모방함으로써 완벽하고 완결된 존재물이라고 <이즈>는 알고 있다네." "내가 완벽하고 완결된 <이즈>를 향하여 발전하고자 하는지 아닌지를 나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도날드, 권태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시면 좋겠는데요....." "리처드, 하늘을 쳐다보게!" 불현듯 시모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가 하도 갑작스럽게 화제를 바꾸는 바람에 나는 엉겁결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근처에 있는 어떤 농가의 지붕마루에 끊어진 덩굴손이 가볍게 너울거리며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초저녁 하늘에 떠오른 애잔한 달님은 은가루 같은 달빛을 지붕마루 위에 뿌리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하늘이군요." 내가 탄성을 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완전무결한 하늘인가, 리처드?" "그럼요, 도날드. 언제나 완전무결한 하늘이지요." "단 일초도 쉬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저 하늘이 완전무결한 하늘이라고 자네는 내게 단언할 텐가?" "어이구, 저런! 너무 그렇게 다그치지 마세요, 나도 그쯤은 알고 있으니까요. 네, 그래도 완전무결한 하늘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언제나 완전무결한 바다야. 그러면서 또한 언제나 생성하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어." 시모다가 한 말이었다. "가령 완전무결한 것, 즉 이상적인 것이 곧 정체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천국(Platoon이 말하는 완전무결하고 영원불멸한 이데아계와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지닌다-역주)은 한낱 썩은 물이 괸 늪일 따름이야! 따라서 <이즈>는 축축한 과자에 불과한 걸세." "뭐라고요, 축축한 과자라고요?" 나는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그의 말을 되뇌었다. "완전무결하면서,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변전한다.....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요. 나는 앞으로 당신의 견해를 옳은 것으로 믿겠습니다." "자네는 벌써 오래 전에 그런 견해를 받아들였다네. 자네가 굳이 언어의 시제(時制)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물고 늘어진다면....."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날드, 당신은 단지 이 동일한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권태롭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 내가 이 동일한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고? 설마..... 혹시나 자네가 그렇다는 말이 아닌가?" "어째서 내가 말하는 것은 죄다 틀리기만 합니까?" "어째서 자네가 말하는 것은 모두 틀리냐고?" 시모다는 이렇게 뇌까렸다. "도날드, 나는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요. 장래의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리처드, 자네는 부동산업 같은 직장이 자네한테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네, 부동산업이나 보험업이 내게 어울릴 것 같아요." "가령 자네가 미래를 염원한다면, 부동산업이 좋을 거야. 부동산업에는 장래성이 있으니까." "죄송해요, 도날드. 그렇게 말을 비꼬지 마세요." 나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미래도 어떤 과거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큼 이 같은 환상의 세계, 즉 현세에서 한시바삐 정답고 친절한 스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주쯤이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글세, 리처드. 나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나는 시모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웃음기가 없었다. 제 9 장 하루하루가 꿈결같이 흘러가는 듯싶었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모다와 나, 우리 집시 비행사들은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을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거리며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부터 마을의 이름과 탑승객들한테서 벌어들인 돈으로 여름날들을 헤아리기를 집어치우고 말았다. 내가 시모다로부터 배운 것들, 하루의 비행이 끝난 뒤 우리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들, 그리고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때때로 일어난 기적들-- 이런 것들이 한결 더 강한 기억을 나의 뇌리에 남겨 놓았기 때문인지, 나는 이런 것들로 여름날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결국에 가서는 그 같은 기적들이 전혀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미루어 상상하라, 우주는 아름답고 올바르며 그리고 완전무결하다고. 어느 때인가 들추어 본 편람이 이런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오로지 이 점만을 확신하라. 이즈(Is)는 그대의 상상력보다 훨씬 더 뛰어난 상상력으로 우주를 상상하고 있음을. 제 10 장 그날 오후는 한가롭고 조용했다. 어쩌다가 뜨내기 손님이 한두 명 들렀다 갈 뿐이었다. 나는 틈틈이 내 정신력을 집중시켜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알갱이들을 증발시켜 흩어지게 하는 것을 연습했다. 나는 한때 비행교관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늘, 쉬운 일을 도리어 어렵게 만들곤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만큼 모름지기 지난날의 내 학생들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난들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듯하다. 아무튼 지금 학생으로 되돌아간 나는, 오만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날카로운 눈초리로 뭉게구름을 한껏 노려보면서 한참 동안 끙끙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옛날의 내 학생들 보다 똑똑하기는커녕 한술 더 뜨는 미련퉁이가 된 게 아닐까? 그러나저러나 지금 나에게는 독학보다 오히려 선생님의 가르침이 한층 더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의 유별난 선생님인 도날드 시모다는 플리트의 날개 밑 풀밭 위에 팔다리를 쭉 뻗고 누워서 일부러 잠든 체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뚝을 발끝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자 그는 부스스 눈을 떴다. "도날드, 나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아니야, 자넨 충분히 해낼 수 있어."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니 다시금 두 눈을 감았다. "도날드, 나는 무척이나 애를 써 봤어요. 하지만 헛수고였단 말이에요. 그럭저럭 잘 될 듯하면 그때마다 별안간 구름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더욱 커다랗게 피어오르곤 하거든요." 그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내게 구름을 하나 골라 주게나. 좀 쉬운 걸로 골라 주면 좋겠네. 나는 여러 가지 구름 가운데 가장 큼직하고 고약하게 생긴 것을 골랐다. 흡사 산더미 같은 그 구름은 키가 3천 피트쯤은 되는 데다가, 마치 연옥(煉獄)의 악귀가 내뿜는 희뿌연 연기처럼 시시각각 뭉치며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저기 저쪽 사일로(사료와 풀 따위를 넣어 그 신선함을 유지·저장하는 원탑 모양의 건조물-역주) 너머에 떠 있는 저 구름이에요. 이제 거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했어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잠깐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산봉우리 구름 말이지? 그런데 리처드, 자넨 어째서 나를 미워하는가? 도대체 왜 그러는가?" "내가 당신을 미워한다고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이런 일을 부탁드리는 것은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짐짓 엉너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는 어떤 도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죠? 하지만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내가 좀더 작은 구름을 고를 수도 있는데....."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리며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아뭏든 내가 시작해 보겠어. 자, 어느 구름이라고 했지.....?" 나도 역시 시모다를 따라, 그 거대한 적운(積雲)이 떠 있는 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수백만 톤의 비를 머금고 있던 그 괴물 같은 구름은 어느새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난데없이 푸른 하늘이 드러나서 무슨 공동(空洞)처럼 몹시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크!" 내가 나직이 탄성을 발했다. "어차피 한번 해볼 만한 일은 훌륭하게 해낼 가치가 있는 것이로군....." 그는 속담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자네가 늘어놓는 낯뜨거운 찬사를 덮어놓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네. 내가 사뭇 정직하게 말하건대, 그건 내게 아주 쉬운 일이라네." 그는 우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작은 뭉게구름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리처드, 저 구름을 한번 해보게, 이제는 자네 차례니까. 준비! 시작!" 나는 그 작은 구름 떼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것이 나를 마주 쏘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발 사라져라. 어서어서 꺼지란 말이야! 나는 입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그것이 없어져 버린 자리에 텅빈 공간이 생기리라는 상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열선(熱線)이 마구 쏟아지는 환영(幻影)을 그 구름 위에다 퍼붓기도 했다. 빨리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란 말이야, 거기 가서 다시 나타나는 것은 괜찮으니까! 그러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고 7 분이 지나가면서, 구름이 차츰차츰 사라져 버렸다. 비록 다른 구름들이 조금씩 커지기는 했을망정, 하여튼 내 구름은 없어지고 말았다. "자넨 별로 빠르지가 못하곤. 그렇지?" "나는 이번이 처음이었잖아요.! 이제 겨우 시작하려고 하는 초보자란 말이에요. 불가능하고 거짓말 같은 일에 대하여 처음으로 도전해 본 셈인데..... 당신은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자넨 별로 빠르지가 못하다' 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자못 멋들어지게 해치운 편이잖아요. 당신도 두 눈으로 보셨으니까 잘 아실 텐데.....!" "나는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네. 자네가 그 작은 뭉게구름한테 그토록 집착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네를 위하여 없어져 주었으니까 말이야." "집착했다고요! 나 참 기가 막혀서..... 나는 그야 말로 젖먹던 힘까지 총동원해서 그 구름을 흩어지게 만들었는데요! 그러니까 불덩어리, 레이저 광선, 집채만한 커다란 진공청소기, 이런 것들을 총동원해서....." "리처드, 그게 바로 부정적인 집착이라는 말일세. 가령 자네가 실제로 자네 생활에서 그 구름처럼 걷어치우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자네는 그렇듯 야단스럽게 눌어붙지 말아야 한다네. 그 대신에 마음을 좀더 느긋하게 먹은 다음, 자네의 생각으로부터 그것을 제거해야만 한다네. 다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제대로 풀릴 거라는 말이야. 알겠나?" 구름은 자기가 하필이면 왜 꼭 그 방향으로, 어째서 꼭 그만한 속도로, 그리고 도대체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이 구절은 「메시아 편람」이 반드시 내게 돌려줄 필요가 있었던 말이다. 구름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충동에 의해서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가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 곧 가야 할 장소는 바로 여기라는 그런 순간적인 동기에 의하여...... 그러나 무릇 구름 뒤에 숨겨진 존재 이유와 존재양식을 저 하늘을 인식하고 있다. 한편 그대가 지평선 너머를 넘겨다볼 수 있을 만큼 드높이 날아오른다면, 그럴 제 그대 또한 그대의 존재이유와 존재양식을 인식하게 되리라. 제 11 장 그대에게 소망이 주어진다면 그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도 또한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법이니라.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대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우리는 마을에서 멀리 동떨어진 드넓은 초원에 착륙했다. 일리노이주와 인디애나주 사이의 주 경계선을 따라 비행하고 있을 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들판이었다. 착륙 지점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3에이커 정도 되는 큰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말에게 물을 먹이거나 말의 몸을 씻어 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연못이었다. 그러니까 이 드넓은 초원은, 수많은 말들이 풀을 뜯어먹을 수 있도록 방목해서 기르는 데 이용되는 목장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비행기 탑승을 원하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으므로, 오늘은 우리 두 사람을 위한 휴일인가 보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리처드, 내 말을 잘 들어보게." 시모다가 말문을 열었다. "아니, 듣지 말고........거기 조용히 서서, 내가 하는 일을 눈여겨보기만 하라고. 자네가 이제부터 보게 될 것은 기적도 뭐도 아니라네. 원자물리학에 관한 책을 한번 읽어보게 되면 어린아이라도 물위를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치 거기에 물이 있다는 것을 도통 의식하지 못하는 듯이 뒤돌아 서더니, 연못가로부터 몇 야드쯤 되는 거리를 연못의 수면 위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렇듯 놀라운 광경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 연못은 진짜 연못이 아니라, 연못처럼 생긴 평평하고 너른 반석 위에 뜨거운 여름날의 신기루가 드리워져 있는 듯이 보였다. 시모다는 수면 위에 똑바로 서 있었다. 그의 비행장화 언저리에는 잔물결이 일지도 않았거니와 물거품도 튀어 오르지 않았다. "자, 리처드. 자네도 이리 와서 한번 해 보게나." 나는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시모다가 저곳에 저렇게 서 있지 않은가! 나는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마치 파란색의 깨끗한 리놀륨 장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날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지요? 당신이 행여 나한테 무슨 마술을 걸어 놓은게아닙니까?" "나는 다만 어떤 사람이든지 조만간 배워서 알아차리게 될 것을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을 따름이네." 그가 대답한 말이었다. "리처드, 자넨 이제 썩 잘하는군." "하지만 나는........" "리처드, 이것 봐. 물은 흡사 고체처럼 단단하고 딱딱할 수도 있어." 가죽으로 만든 비행장화를 두 발에 신고 있는 시모다는 그렇게 말하면서 발을 굴렀다. 그러자 바윗돌에 가죽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가 또다시 발을 구르자 이번에는 물거품과 물방울이 우리 두 사람의 비행장화 위로 튀어 올랐다. "리처드, 자네도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을 거야. 자, 나처럼 해보게나." 우리는 얼마나 빨리 기적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일까! 미처 일분도 지나기 전에 나는 물위를 걷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며, 그리고......뭐라고 할까? 아무튼 내 생각은 180도로 뒤바뀌어졌다. "그러나 가령 물이 지금처럼 고체 상태로만 있다면, 그럴 적에 우리는 어떻게 물을 마실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물위를 걸을 때와 똑같은 방법과 이치가 그때도 역시 통한다네. 그것이 고체냐 아니냐, 또는 그것이 액체냐 아니냐,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일세. 자네가 물이 액체이기를 바란다면, 그럴 때 자넨 그것을 액체로 생각하고 그게 액체인 듯이 행동하면서 그걸 들이마시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기체이기를 바랄 때는, 그게 기체인 듯이 행동하면서 그걸 코로 호흡하면 되는 걸세. 자, 그렇게 해보지 않겠나?" 아마도 어떤 초자연적인 정령의 현존재성에 의하여 그런 일이 가능할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같은 일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일정한 거리의 반경, 예컨대 50피트 반경의 원둘레 이내에서만 일어나도록 허용되고 있으리라....... 나는 수면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연못 속에 오른 손을 담갔다. 그것은 액체였다. 그런 다음에 나는 엎드려 누운 채 연못의 푸름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것이 기체라고 확신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은 온화한 액화산소와 흡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콧구멍으로 대뜸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숨통이 막힌 나머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말이다. 다시금 일어나 앉은 나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시모다를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을 그가 알아차리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리처드, 말해 보게나." 그가 선뜻 내게 이르는 말이었다. "어째서 내가 말을 해야만 하나요?" "반드시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언어로 표현될 때에 한결 더 정확한 의미를 드러낼 수가 있다네. 자, 리처드. 어서 말해 보게." "가령 우리가 물위를 걸을 수 있으려니와 그걸 호흡할 수도 있고 또 한편 마실 수도 있다면, 땅덩어리도 그와 똑같은 식으로, 즉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는지요?" "음, 아주 좋은 질문이야. 자, 리처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바를 빠짐없이 주목하도록 하게." 그는 자못 활달한 걸음걸이로 쉽사리 연못가까지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흡사 페인트로 칠해진 호수 위를 걷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시모다의 발이 처음으로 연못 가장자리의 땅을 밟았을 때, 다시 말해서 풀이 드문드문 돋아난 모래밭에 그의 발이 닿은 순간 그의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몇 걸음 내딛는 동안에 그는 어깨까지 차오른 흙과 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마치 연못은 갑자기 하나의 섬이 되어 버리고, 그 반면에 연못 주변의 땅덩어리는 바닷물로 변해 버린 성싶었다. 그는 잠시 동안 풀밭 속에서 헤엄을 쳤다. 그가 철벅철벅 소리 내며 헤엄을 치니까, 검은 진흙탕이 흡사 몰타르 방울처럼 그의 둘레에 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땅의 표면 위로 떠오른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풀밭 위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자 사람이 <땅 위를 걷는 것>이 내 눈에는 사뭇 생소하고 이상하게 보이면서, 별안간 그것이 도리어 무슨 기적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연못의 수면 위에 똑바로 선 채 그의 눈부신 연기(?)에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는 짐짓 연극 배우처럼 허리를 굽히며 근사하게 절했다. 그러더니 내 연기를 한번보고 싶다는 듯이 나를 향해 박수 갈채를 보냈다. 나는 연못가까지 걸어갔다. 흙이 액체라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나는 발끝으로 흙을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거무죽죽한 흙색의 잔물결이 흡사 파문처럼 수초밭쪽으로 둥글게 퍼져 나갔다. 이 수초 밭은 도대체 깊이가 얼마나 될까? 나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내 입에서 큰 소리로 튀어나올 뻔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수초 밭의 깊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2 피트쯤 됨직했다. 아무렴, 그 깊이가 결코 2 피트를 넘지는 못하리라. 그러면 나는 마치 여울목을 건너가듯이 수초밭 속을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으리라. 나는 자못 대담하게 연못 가장자리의 땅 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마자 나는 머리 위까지 차오른 흙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흡사 가파른 낭떠러지에서 느닷없이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땅속은 캄캄한 어둠처럼 검정색이었다. 나는 와락 겁이 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호흡을 멈춘 채 표면으로 떠오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단단한 고체 상태의 연못물이 있는 쪽으로 가려고 다리를 제멋대로 버둥거리는 한편, 연못의 가장자리에 매달리고자 두 팔을 마구 내두르며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시모다는 수초밭 위에 편안히 앉아서 큰 소리로 웃음보를 터뜨리고 있었다. "자넨 참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학생이로군. 리처드, 자넨 그걸 알고 있나?" "나는 그런 학생도 뭐도 아니에요! 도날드, 제발 나를 여기서 꺼내 주세요!" "자네 스스로 거기서 나오게." 나는 일단 허우적거림을 멈췄다. 내가 이 흙을 고체라고 믿으면 나는 곧장 바깥으로 기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것이 고체처럼 단단하고 딱딱한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리라...... 그러자 나는 드디어 바깥으로 기어 나올 수가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무튀튀한 진흙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내 꼬락서니는 아주 가관일 것 같았다. "이크! 자네, 땅속에서 한바탕 헤엄을 치고 나오더니 땅강아지처럼 흙투성이가 되었군!" 시모다의 푸른색 티셔츠와 청바지에는 더러운 얼룩 한 점도, 흙먼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맙소사!" 나는 이런 외마디소리를 내지르면서, 머리칼에 묻은 진흙을 털어 내기 위해서 머리를 냅다 흔들어 댔다. 그러고는 귓속으로 들어간 진흙을 떨어버리기 위해서 손바닥으로 귓바퀴를 찰싹찰싹 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풀밭 위에 잘 놓아둔 다음 재빨리 연못가로 걸어갔다. 그때 그 순간 연못에 괴어 있는 물은 물론 순전한 액체였다. 그 물 속으로 냉큼 들어간 나는 지극히 전통적(?)이고도 보편적인 목욕법에 따라 몸을 씻었다. "도날드, 이보다 더 좋은 목욕법이 있는 줄로 나는 알고 있는데요." "음, 더 빠른 목욕법이 있지." "돈, 구태여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거기 앉아서 실없이 웃기만 하세요, 나 혼자 힘으로 그것을 생각해 내는 고생을 기꺼이 치를 테니까 말입니다." "오우케이, 오우케이!" 이윽고 목욕을 끝마친 후에 나는, 흠뻑 젖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플리트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조종실에 들어가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젖은 옷들을 플라잉 와이어(flying wires : 방향타를 움직여 주는 철선 - 입력자 주) 에 걸어 햇볕에 말렸다. "리처드, 오늘 배운 것을 잊지 말도록 애를 쓰게나. 우리가 지혜를 자각한 순간들을 깜박 잊어버리기는 무척 쉬운 일이야. 그러한 순간들이 과거 어느 때의 덧없는 꿈이거나 혹은 지나간 옛날의 기적이었다고 그릇 생각하기가 쉽다는 말일세. 유익한 것은 결코 기적일수 없으며 아름다운 것은 결코 꿈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네." "도날드, 당신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시지만, 이따금 이 세상도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해질녘의 노을빛, 흰 구름, 푸른 하늘..."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실체를 반영하는 그 같은 이미지가 꿈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말일세. 요컨대 그러한 이미지 속에 내재하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실체임을 깨달아야 한다네. 리처드, 자넨 그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겠나?" 나는 시모다의 말을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을 듯하기에 고개를 끄덕거려 보았다. 나중에 나 혼자서 「메시아 편람」을 슬그머니 펼쳐보니까, 다음과 같은 구절이 씌어져 있었다. 현상 세계(現象世界)는 그대의 연습장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그 책장 위에다 계산 연습을 한다. 이 현세는 결코 실체가 아니다. 그대가 마음이 내킬 때마다 거기에 실체를 표출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대는 또 한편 연습장의 책장 위에 엉뚱한 얘기나 혹은 거짓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뿐더러, 때로는 자유로이 책장을 찢어 버릴 수도 있다. 제 12 장 근본적인 죄악은 <이즈>를 제한하는 것이니라. 아서라. 후텁지근하면서도 나른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오후였다. 아침녘부터 간간이 쏟아지던 소나기는 잠시 그쳤다. 마을의 중심가를 벗어난 시모다와 나는 몹시 질척거리는 길을 걸으며 들판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도날드, 당신은 바람벽을 통하여 걸어갈 수 있지요. 그렇죠?" "아니, 그렇지 않다네." "내가 <그렇다>고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는 내 질문방식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신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요." "우린 확실히 관찰력이 예민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안 그런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람벽>입니까, 혹은 <걷는다는 것> 그 자체입니까?" "음. 그건 더 형편없는 질문인데. 자네의 질문은 말이야..... 내가 하나의 제한된 시간-공간으로 옮아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추정이거든. 나는 오늘 자네가 나에 대하여 그런 추정을 내리는 것을 받아들일 기분이 도저히 나지 않는다는 말이네."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시모다를 비스듬히 건너다보았다. 내가 묻는 바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내 질문에 너무나도 솔직담백하게 대답해주지 않고서 이렇게 둘러대는 것일까? 나는 짜증이 울컥 치미는 것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자기가 이런 일을 행하는 방법을 나로 하여금 파악할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할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것일까? "그건 말이야, 리처드." 시모다가 내 속마음을 눈치챈 듯이 상냥한 음성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자네로 하여금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내 나름대로 도와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네." "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마음이 내킬 때면 당신이 바람벽을 통해 걸어가는 상황을 현시(顯示)할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어때요, 내 질문방식이 좀더 나아졌습니까?" "음, 꽤 좋아졌군. 그러나 자네가 더욱 정확한 사고방식을 구사하려면....." "도날드, 말씀하지 마세요. 내가 뜻하는 바를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시모다를 힐끔 곁눈질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육체>라고 생각되는 것은 시간-공간의 연속체라는 이같은 통념 속에 표출되어 있는, 한정된 의미의 본체라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바람벽>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 질료(質料)로써 우리를 속박하는, 즉 물적인 제약이라는 환상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떻게 해서 <육체>라는 환상으로 하여금 <바람벽>이라고 생각되는 환상을 통하여 옮아가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지요?" "잘했어!" 그가 자못 큰 소리로 말했다. "질문을 그처럼 유효 적절하게 하면 저절로 정답이 나온다네. 그렇지?" "아니요, 아직은 저절로 정답이 나오지 않았는데요. 도날드, 당신은 대관절 어떻게 해서 바람벽을 통하여 걸을 수 있습니까?" "리처드, 저런 저런!" 그가 버럭버럭 악을 쓰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주 그럴싸하게 질문을 잘하더니만, 왜 갑자기 그런 변덕과 심술을 부리는가? 나는 결코 바람벽을 통하여 걸을 수는 없다네.....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할 때면 자넨 마음속으로 그 무엇인가를 미리 억측하고 있는가본데, 나는 그런 것들을 추호도 억측하지 않는다네. 가령 내가 그런 것들을 억측할 경우에, 나는 자네의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만사를 그토록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도날드, 당신은 내 말뜻을 벌써 알고 계시잖아요?" "단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자네는 노력도 해보지 않겠다는 말인가? 물 위를 걷는 것도 처음엔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자넨 연습을 거듭함으로써 능숙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남이 보기에도 쉬운 일로 보일 수 있었다네." 내 입에서 길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도날드, 이제부터는 내 질문에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렴, 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라네. 그 대신에, 자네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내가 물어볼 참이네." 그는 무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근심걱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도날드, 당신이 말했잖아요? 육체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다. 바람벽이라고 하는 것도 환상이다. 그러나 본체(즉 실체)는 진정한 것이다. 따라서 본체가 환상에 구애되거나 장애를 받을 리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건 내 말이 아닐세. 바로 자네가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맞는 말이죠?" "물론이지." "도날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리처드, 자넨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벌써 다 끝났잖아? 그러면 다 된 것이라는 말일세." "어이구!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아주 쉬운 일인 듯 생각되는군요." "그건 물위를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다 배우고 나면 싱거운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네. 그전에 몰라서 쩔쩔매던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테니까." "도날드, 바람벽을 통해 걷는다는 것은, 지금 나한테는 단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리처드, 자네가 <불가능>이라는 말을 천번만번 되풀이해서 말하면 그 당장에 어렵던 일들이 자네를 위하여 저절로 쉽게 되는 줄 아는가?" "죄송합니다, 도날드.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내가 그 일을 실행하기에 적당한 때가 오면, 한번 잘해 보겠어요."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저이는 물위를 걸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람벽을 통해 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저렇듯 주눅이 들어 있도다." 시모다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읊조렸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었어요. 그러나 이건....." "너의 한계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자꾸만 변명하라. 그러면 너는 스스로 그 한계에 얽매이게 되리라." 그는 이런 말을 무슨 경구처럼 읊조리더니, 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리처드, 자넨 일주일 전에 바로 이 흙 속에서 헤엄을 치지 않았던가?" "네, 그랬어요." "그렇다면 말이야.... 바람벽이라는 것은 수직으로 쌓아 놓은 흙더미에 불과하지 않은가? 환상이 어느 방향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 자네한테는 그렇게 중요한가? 수평적인 환상은 정복할 수 있으면서도 수직적인 환상은 정복할 수 없다는 말인가?" "도날드,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요. 당신은 나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일에 자못 통달해 있는 것 같군요." 그는 나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잠시 동안 자네를 혼자 버려 두고 여길 떠나갈 때가 되어야 자네 말대로 그렇듯 통달할 수 있을 걸세." 동구 밖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은 주황색 벽돌로 지은 커다란 건물로서, 사료와 곡식을 저장해 두는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비행기들이 있는 들판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창고를 끼고 한참 돌아서 가야 하는데, 시모다는 직접 들판에 이르는 오솔길로 접어듦으로써 훨씬 더 빠른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 비밀의 지름길은, 그 커다란 창고의 주황색 벽돌담으로 통하여 길게 뻗어 있는 것이었다. 별안간 그는 오른쪽으로 돌아서더니 벽을 꿰뚫고 걸어 들어갔다. 곧 이어 그의 모습은 벽돌담 뒤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건대, 나도 그 즉시 그의 뒤를 곧장 따라갔더라면 주황색 벽돌담을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고 다만 길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따름이었다. 그가 여태까지 머물러 있던 장소를 새삼스레 둘러보면서, 이윽고 내가 손을 내밀어 벽돌을 만져 보았을 때 그것은 보통 때처럼 딱딱한 벽돌이었다. "도날드, 앞으로 또 기회가 오면 나도 실행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비행기들이 있는 들판을 향하여 멀리 돌아가는 길을 나 홀로 걸어갔다. 플리트와 트레블 에어가 있는 들판에 이르렀을 때, 나는 다짜고짜로 시모다에게 말을 걸었다. "도날드, 나는 이제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그 결과 당신은 이 현세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트래블 에어의 날개 위에 서 있던 시모다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가솔린을 연료탱크 속에 부어 넣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그렇다면 말이야, 도대체 누가 이 현세에 살고 있을까? 리처드, 자네는 지금 현재와 여기 현장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을 내게 지적해 줄 수 있겠나?" "무슨 말씀이세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해 줄 수 있겠냐니요? 나요! 나야말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로군." 시모다는 새삼스레 찬탄해 마지않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연구해서 여태껏 비밀에 싸여 있던 우주의 신비를 발견한 것이 무던히도 기특하게 여겨진다는 그런 표정을, 그는 사뭇 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오늘 자네한테 점심을 사주기로 약속했던 것이 새삼스레 생각나는군. 자네가 항상 배우고자 쉴새 없이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그 태도에 나는 내심으로 탄복하고 있다네." 나는 시모다의 이런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결코 나를 비웃거나 빈정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도날드, 당신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물론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어요. 나를 비롯한 40억 남짓한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오, 하나님 맙소사! 나는 자네가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게 진담일 줄이야! 리처드, 자네한테 점심을 사주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해야 하겠네. 햄버거도 맥주도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 그리 알게나! 나는 지금까지 자네가 자못 중차대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 것이라고 내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갑자기 말허리를 꺾더니, 노여움과 연민이 뒤섞인 시선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자네는 그러한 사실을 확신하고 있나? 그러니까 자네가 주식 브로커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런 말인가? 증권거래 위원회의 새로운 정책, 즉 50퍼센트 이상의 주식 투자 손실에 관련된 유가증권 목록에 대한 위임 강사로 말미암아 자네의 생활이 온통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 되고 말았나 보다고 내가 짐작하더라도 과히 틀리지 않겠지? 또, 아니면 자네는 토너먼트 경기에 참여하는 직업적인 장기 선수와 똑같은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인가? 이번 주 내내 진행되고 있는 뉴욕 오픈 대회에서 페트로샨이니 피셧니 브라운이니 하는 선수들은 50만 달러의 상금을 획득하려고 눈이 벌겋다네. 그런데 자네는 오하이오주 메틀랜드의 촌구석에 위치한 이 목초장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1929년형 구닥다리 복엽 비행기 플리트와 더불어 들판에 착륙해 있는 자네, 지금 자네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을까? 첫째, 이 목초장을 간이비행장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목장 주인한테서 받아낼 수 있을까? 둘째, 10분 동안의 비행기 탑승을 원하는 손님들이 얼마나 될까? 셋째, 키너 엔진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어떤 식으로 정비해야만 하는 것일까? 넷째, 저 푸른 여름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내리듯이 별안간 엄청난 우박이 쏟아진다면, 나는 목숨이나 제대로 부지할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자네와 함께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도무지 몇 명이나 된다고 자네는 생각하는가? 40억 남짓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네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자네 입으로 단언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거기에 그렇게 멀뚱멀뚱이 선 채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게 장담할 셈인가? 이를테면 40억의 인간들이 제각기 40억개의 서로 별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지로 부정하는 그따위 허무맹랑한 말로 나를 기죽게 만들 작정인가?" 그는 말을 너무나 빨리 주워섬겼기 때문에 몹시 숨이 차서 헐레벌떡거렸다. "오늘 나는 어쩌면 맛좋은 햄버거를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었을 텐데.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도는 그 치즈를 곁들여서.......도날드, 당신이 사주려던 점심을 깡그리 날려 버린 것이 굉장히 아깝게 여겨진단 말이에요." 내가 그에게 투덜거린 말이었다. "미안하네. 나도 역시 자네한테 기꺼이 사줄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저러나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옛날 얘기니까 미련 없이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거야." 내가 그때 마지막으로, 시모다가 이승에서 살고 있지 않음을 끈덕지게 추궁해 보았다. 그 이후로는 내 쪽에서 먼저 그런 화제를 꺼내는 것을 삼가려고 애썼다. 내 나름대로 그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고자 상당히 노력했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간 뒤에야 나는 편람에 씌어져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대가 가령 허구적 인물의 역할을 잠시 동안 실습해 본다면, 육체를 소유하고 아울러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려주는 현실적인 사람들보다, 도리어 허구적인 인물들이 훨씬 더 실감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그대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제 13 장 그대의 양심이야말로, 그대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에 대한 공명정대한 척도가 된다. 그러므로 그대의 양심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그날 밤 도날드 시모다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단순하고 조촐하면서 명약관화한 진리가 아닐까? 그와 동시에, 하나의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이 되지 않을까?" "대체로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당신은 꽤 중요한 일부분을 소홀히 다루고 있군요." "그래?"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당신도 역시 이런 뜻으로 말했다는 것을 내가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 습관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내가 굳이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가 자못 의젓하게 시모다를 꾸짖는 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우리 주변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비틀비틀 걸어오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 왔다. 나는 재빨리 시모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돈, 저 소리 들리지요?" "음, 누군가가 저기 있는 모양인데....." 그는 앉은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어둠 속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이윽고 그의 모습을 삼켜 버린 어둠 속에서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느닷없이 터져 나왔다. 그가 무슨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미처 알아듣지를 못했다. "괜찮다니까 자꾸만 그러네." 시모다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는 당신의 방문을 기쁘게 여긴다니까...... 당신이 여기서 서성거릴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자, 이리 와요. 우린 진심으로 당신을 환영해요." 이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 왔는데, 몹시 무겁고 억센 액센트가 들어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언뜻 듣기에는 러시아인이나 체코인의 액센트는 아니었고, 오히려 트랜실바니아(Transylvania : 트랜실바니아는 현재 루마니아의 중부와 북서부 지방을 일컫는 지명-역주) 인의 액센트와 비슷하게 들렸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녁 시간을 즐기고 계신 당신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시모다는 목탄불이 타오르고 있는 불가로 그 사람을 데리고 왔다. 글쎄, 뭐라고 할까? 중서부 지방에서 그런 남자를 밤중에 보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키가 작고 깡마른 체격에다가 흡사 늑대처럼 생긴 그 남자의 모습은 보기에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는 검정색 야회복을 차려 입고, 게다가 붉은 공단으로 안감을 댄 검은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는데, 자기 모습이 불빛을 받아 드러나자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한 듯이 보였다. "나는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이 들판은 우리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거든요." 그 검은 망토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시모다가 대꾸한 말이었다. 그는 그 남자의 말을 곧이듣지 않는 듯 했다. 그 남자가 어설픈 거짓말을 둘러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시모다는 그 순간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잠깐 어리둥절해 있던 나도 무슨 영문인지를 빨리 알고 싶었다. "마음을 푹 놓으시고 몸가짐을 편안하게 하세요." 나는 그 남자에게 친절하게 하느라고 무척 노력을 하였다. "우리가 당신한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남자한테 그렇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심히 주눅이 들고 지레 겁을 먹은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아무쪼록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는 절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그런 미소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네, 당신은 나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이토록 절박한 상태가 아니라면 이런 청을 드리지도 않을 텐데.....당신의 피를 좀 마셔도 괜찮겠습니까? 조금이면 됩니다. 피는 내가 먹고사는 양식이거든요. 나는 지금 인간의 피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의 영어는 별로 신통치 못했으므로 나는 그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액센트에서 나는 무언가 위험스러운 것을 언뜻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날쌘 동작으로 후닥닥 일어나서 방어태세를 취했다. 어쩌면 최근 몇 달 동안에 거의 볼수 없었던 재빠른 동작이었으리라. 내가 함부로 설치는 바람에 내 주위에 있던 건초 이파리들이 흩어져 날리다가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검은 망토의 남자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보통 때는 전혀 악의가 없을뿐더러 남을 해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 체격이 그렇게 작은 편이 아니어서, 그 남자고 보기에는 내가 사뭇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외로 꼬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내가 한 말을 제발 잊어 주십시오! 피에 관한 얘기는 없었던 걸로 칩시다. 하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요?" 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머지 더욱 난폭한 기세로 그 남자를 몰아세웠다. "당신은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을 제정신으로 지껄이는 거요? 나는 대관절 당신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혹시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내가 흡혈귀라는 단어를 미처 입밖에 내기 전에 시모다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리처드, 손님이 말씀하시는 중인데 그처럼 무례하게 끼여들면 되는가? 선생, 하던 말씀을 어서 계속하시지요. 내 친구는 성미가 좀 급한 사람이라서......" "도날드, 이 사람은 아무래도......." 나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이렇게 웅얼거렸다. "리처드, 조용히 해! 그렇게 덤비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니까." 시모다가 느닷없이 큰 소리를 내지르며 마구 야단을 치는 통에 나는 얼떨결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나는 공포와 의문이 뒤섞인 눈초리로 그 남자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 남자의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본디 타고난 것인 듯했다. 우리가 피워 놓은 목탄불의 환한 불빛 속에서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있는 이 검은 망토의 괴신사(怪紳士)로부터 나는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부디 내 말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이처럼 흡혈귀로 태어나고자 스스로 선택했던 것은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해도 나는 오로지 운이 나빴기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선생님들, 나에게는 친구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밤 소량의 신선한 피를 마셔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지독한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틀이 넘도록 피를 마시지 못하면 나는 그만 죽게 되지요! 선생님, 나로 하여금 당신의 피를 빨아먹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조금이면 됩니다. 한 핀트(약 0.471-역주 : 단위는 나와있지 않다-입력자주) 이상은 필요하지도 않아요." 그는 혀끝으로 입술을 핥으며, 송곳니를 그러낸 채 나를 향하여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는, 시모다가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거친 행동을 막아서 나로 하여금 고분고분 복종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나오면 진짜 피를 보게 될 거요. 어디 두고 봅시다! 당신이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당신 목숨은 없어져 버릴 테니까........." 나는 그 남자를 죽여 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실랑이질이 더 이상 벌어지기 전에 그 남자를 옴짝달싹못하게 묶어 놓고 싶은 마음은 너무도 간절했다. 그는 틀림없이 내 말을 곧이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일단 발을 멈추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시모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말하려던 요지가 이제 분명해졌습니까?" "대강 그런 것 같아. 아무튼 고맙네." 꼭 흡혈귀 같은 그 남자는 새삼스럽게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입 언저리에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긴장을 푼 채, 자기 자신을 자못 흐뭇하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 가득히 떠올랐다. 그의 그런 모습은 연극 공연이 무사히 끝난 다음 무대에 서 있는 배우와 흡사하게 보였다. "리처드,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피를 마시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 아시고 마음놓으세요." 그 검은 망토의 괴신사가 아주 친근하고 귀에 익은 영어로 내게 하는 말이었다. 별안간 그의 영어에는 심히 귀에 거슬리던 그 억센 액센트가 완전히 없어졌다. 정말이지,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영어였다. 내가 사뭇 어리벙벙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의 내부에서 밖으로 내비치던 불빛이 저절로 꺼져 버린 듯이 차츰차츰 사라져 갔다. 5초가 지났을 때 그는 아주 사라져 버렸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텅 빈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시모다가 불가에 다시 앉으면서 내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말한 바를 그대로 행동에 옮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내 체내에서 아드레날린(부신 수질 호르몬-역주) 의 분비량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인지, 나는 여전히 흥분 상태에 사로잡힌 채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어떤 괴물과도 싸울 준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도날드, 나는 이런 <괴기물>에 알맞은 체질이 아닌가봐요. 그러니까 대관절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내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자면......그 도깨비 같은 작자는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트랜실바니아 출신의 흡혈귀였다네." 시모다는 그 작자보다 한층 더 억센 액센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트랜실바니아 출신의 흡혈귀를 이곳에 출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사고(思考)-형상(形象)> 이었어. 가령, 자네가 어떤 논지(論旨)를 분명히 밝히고 싶은데 상대방이 자네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가 가끔 있을 거야. 그럴 때면 자네의 뜻을 명시해 줄 수 있는 간단한 <사고-형상>을 그의 눈앞에 출현시킴으로써 정신을 차리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일세. 알겠나, 리처드? 그런데 말이야, 내가 오늘 밤 행한 일이 다소 지나친 것이었다고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 검은 망토와 날카로운 송곳니, 더욱이 그 억센 액센트까지 모든 게 너무 그럴듯했었나? 그 작자가 자네한테 너무 무시무시하게 보이지는 않았는지 묻고 있는 걸세." "그 망토 하나는 최고급으로 보이더군요.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 <사고-형상>은 지극히 상투적이고 진부한 나머지 촌스러운 느낌이 들 지경이었어요. 나는 털끝만큼도 겁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무섭기는커녕........." 시모다는 하릴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런가? 그렇지만 최소한도 자네가 내 말의 논지를 파악할 수는 있었을 거야. 실상은 바로 그게 중요한 점이니까." "내가 무슨 논지를 파악했다고요?" "리처드, 자넨 내가 만들어 낸 흡혈귀에 대하여 그토록 과격한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자네가 부득불 다른 사람한테 해를 끼치게 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자네가 원하는 바를 행동에 옮길 작정이었던 거야. 안 그런가? 하물며 그 작자는 자네한테 애원하기를, 자기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그 흡혈귀는 내 피를 빨아먹으려고 했어요!" "그건 바로 우리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취하는 행동이야. 그 사람들이 만일 우리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받게 될 것이라고 사뭇 위협조로 말할 때,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의 피를 우격다짐으로 빨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말일세. 알겠나?" 나는 시모다의 말을 곰곰이 심사숙고하면서 한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고, 나는 언제나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오늘밤과 같은 경우는 내 평상시의 생각에 전적으로 부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인가 빠지고 어딘가 어긋난 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자네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이윽고 그가 입을 열더니 이와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용인되어 온 어떤 격언을, 자네는 맹목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이야.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격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야. 올바른 격언은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라'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상처를 받든지 받지 않던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뿐이야.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렇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지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리처드. 아까의 그 흡혈귀는 자네한테 애걸복걸하면서 말하기를, 가령 자네가 자기한테 피를 주지 않는다면 자기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어. 요컨대 고통을 받겠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인 동시에 결정이야. 거기에 대하여 자네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자네 자신의 선택인 동시에 결정이라는 말일세. 그 작자한테 피를 주든지, 그자를 아예 무시하든지, 그 자의 손발을 꽁꽁 묶어 버리든지, 그자의 심장 한복판에 큼직한 십자를 때려 박든지......아무튼 그건 자네가 선택하기 나름이야. 따라서 그 흡혈귀가 십자가를 원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마음 내키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그 작자에게 있는 것일세. 세상만사가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거야. 선택, 또 선택...... 이렇게 선택이 되풀이되면서......." "당신이 세상만사를 그런 눈으로 본다면........" 내가 막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시모다가 불쑥 내 말을 가로막았다. "이봐, 리처드. 내 말을 잘 들어 봐, 아주 중요한 말이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완전히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어때? 내 말이 옳지, 리처드?" 제 14 장 그대의 생활과 관련된 온갖 사건들과 숱한 인간들이 그대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은 그대가 그들을 그곳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가질 참인가? 이를 선택하는 일은 그대 자신의 의사에 달려 있다. "돈, 당신은 이따금 외로워질 때가 없나요?" 이런 질문을 시모다에게 해볼 생각이 내 머릿속에 불현듯이 떠오른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오하이오주의 라이어슨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을 때였다. "리처드, 난 깜짝 놀랐는데, 자네가........." "쉿, 잠깐만." 내가 그의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내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이에요. 도날드, 당신은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느껴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까?"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아니, 내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잠깐만 더 기다려 주세요. 도날드, 우리 집시 비행사들은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이 모든 사람을 단지 2, 3분 동안 만나 볼 수 있을 따름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가끔가다 한 번씩 어중이떠중이들 가운데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천차만별의 사람들 속에서 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마치 저녁 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떠오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그녀에게 인사말이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저 조용히 한자리에 마주 앉아서 소박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10분 동안 내 비행기를 타거나 혹은 타지 않거나 간에, 그것이 고작이고 그런 다음에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답니다. 이튿날이면 나는 셀비빌이나 또는 어디 다른 곳으로 떠나가게 되니까,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그게 외로움이라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도날드, 나 자신이 변함없는 우정을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없는 떠돌이 친구일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영속적인 우정을 베풀어 줄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보다는 잠자코 있었다. "도날드, 내가 그런 친구를 찾을 수 있겠어요?" "이젠 내가 말해도 좋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이 카페의 햄버거는 얄따란 기름종이로 절반쯤 싸여져 있는데, 이 종이를 벗겨내면 수많은 깨알들이 쏟아져 나와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것이었다. 그 자잘한 깨알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지만, 햄버거는 꽤나 맛이 좋은 편이었다. 시모다는 한참 동안 말없이 햄버거만 먹고 있었다. 나도 역시 그렇게 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 참인지 자못 궁금하게 여기면서. "리처드, 우리들은 자석과 같아. 안 그래? 아니, 자석은 아니지, 구리줄을 친친 감아놓은 쇳덩이일 뿐이지.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자석화 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일세. 우리들 내부에 존재하는 전압량을 구리줄을 통하여 외부로 흘려 보내면, 우리가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끌어당길 수 있을 거야. 자석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아. 자석은 어디까지나 자석일 뿐이야. 자석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어떤 것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반면에, 그 밖의 다른 것은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말이네." 나는 포테토칩을 한 개 집어먹고 나서 그를 향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한 가지 빼먹은 게 있어요.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런 자석이 될 수 있느냔 말입니다." "자넨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네. 우주의 법칙이니까. 리처드, 기억이 나는가? 언젠가 내가 자네한테 말한 적이 있잖아, 유유상종이라고? 그러니까 자네는 오로지 침착하고 순수하며 명석한 자네의 본질 그대로 존재하면 되는 거야. 우리는 본질적인 우리 자신을 그대로 내비치면서 매순간마다 스스로 자문자답하고 있다네, 이것이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이냐고. 따라서 우리가 '그렇다' 라고 대답할 때만 우리는 자동적으로 자석이 되는 거야. 그럼으로써 본질적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는 사람들을 저절로 물리치게 되는 반면에, 우리가 서로서로 배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 곁으로 끌어당기게 된다는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크고 강한 믿음이 필요할 거예요. 게다가 그런 믿음을 가다듬는 동안에 사뭇 외로워질 수도 있잖아요?" 시모다는 햄버거를 먹고 있다가 아리송한 눈길로 나를 넘겨다보았다. "믿음은 아무 관계없어. 집어치우란 말이야. 믿음은 눈곱만큼도 필요 없으니까. 정말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야." 그는 느닷없이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소금병, 프렌치 프라이, 케첩, 포크, 나이프 따위를 양쪽 옆으로 밀어붙이더니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깨끗한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가 그러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나는 바야흐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즉 무엇이 내 눈앞에 출현할 것인지에 대하여 어지간히 궁금증을 느꼈다. "리처드, 자네가 참깨 한 알만한 정도의 상상력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면서, 자기가 깨끗이 치워놓은 테이블 한복판에 깨알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그 깨알을 예로 들면서 말을 이어 가려는 듯했다. "세상 만사가 자네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일세." 나는 그 깨알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금 시모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바라건대 당신들 메시아가 한자리에 모여서 의견을 통일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일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그런 사태를 다스릴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은 믿음이라고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거든요." "그렇지 않아. 난 내가 얼마 전에 메시아 노릇을 했을 적에 그 같은 통념을 바로잡고 싶었다네. 하지만 그것은 산상(山上)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싸움이었어. 지금으로부터 2 천년 전, 혹은 5 천년 전에는 상상력을 뜻하는 단어가 없었다네. 그랬기에 자못 엄숙하기 짝이 없는 추종자들이 한동아리를 그럴듯하게 이름짓기 위해서 옛날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최선의 단어는 바로 <믿음>이라는 단어였지. 게다가 그 까마득한 옛날에는 아직 참깨라는 식물도 없었다네." 그 당시에 참깨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하나의 사실로서 알고 있었으나, 시모다의 이런 능청맞은 거짓말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내가 자석화 함으로써 나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자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상상하라, 이런 말씀이시죠? 예를 들면, 일리노이주의 태러건에 있는 한 목초장에 모여든 군중 속에서 어떤 아름답고 지혜롭고 신비스러운 여인이 불현듯 나타나는 것을 상상해 보라는 말씀이시죠? 나는 물론 그렇게 할 수야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게 아닙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는 낙담한 눈빛으로 자신의 천국을 사뭇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 시간 시모다의 천국은, <엠과 에드나카페> 의 양은 접시처럼 둥그스름한 천장과 차가운 푸른색 전등으로 표상화(表象化) 된 것 같았다. "단지 자네의 상상일 뿐이라고? 그야 물론 자네의 상상이지! 지금 자네가 살고 있는 이 현세는 자네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야. 자네는 이제까지 그걸 망각하고 있었나? 자네의 사유(思惟)와 인식(認識)이 있는 바로 그곳에 자네의 경험이 있다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사고하는 영역 내에서 그 존재 이유와 존재 양식이 성립한다는 말일세. 오, 내가 염려하던 것이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군. 리처드, 내 말을 명심하게. 생각하라, 그러면 풍요하게 생장(生長)하리라! 생각한다는 것은 즐거움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창조적인 현시(顯示)이기도 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참된 친구를 발견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네. 자네의 상상력은 <이즈>를 티끌만큼도 변화시키지 않으려니와 실체에 대하여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아. 그런데 말이야, 리처드. 우리가 지금 이러니저러니 입에 올리고 있는 이 세상은 워너 브라더즈식의 세상이며, 이 같은 현세에서의 삶은 MGM 식의 생애와 매한가지일 걸세. 이를테면 우리가 이 현세에서 누리는 삶은 한 순간 한 순간이 한낱 환상인 동시에 상상일 따름이야. 아무렴, 모든 게 하나같이 덧없는 꿈일 뿐이야. 두 눈을 빤히 뜬 채 백일몽을 꾸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마음속에 그려내는 상징으로 구성된 그런 몽상에 불과하다는 말이야." 그는 테이블 위에다 자기 포크와 나이프를 잇대어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나의 다리를 놓음으로써 자기가 앉아 있는 장소와 내가 앉아 있는 장소를 연결 지으려는 것 같았다. "리처드, 자네는 간밤에 자기 자신이 꾼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느끼곤 할거야. 그렇지? 그와 마찬가지로, 자네가 멀쩡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위하는 생활 속에 나타나는 사물에 시선을 던지면서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물어 보게 된다네. 자네가 문득문득 돌아다볼 때마다 자네의 생활 속에는 번번이 비행기가 자리를 잡고 있을 텐데, 자네의 그런 생활에 대하여 스스로 자문 자답하는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라는 말일세. 알겠나?" "글쎄요........ 아마 그렇겠지요, 돈." 나는 내심으로 시모다가 좀더 천천히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런 사상을 내 머릿속에다 한꺼번에 쏟아 붓지 않는다면 좋으련만....... 이처럼 새로운 사상을 분속(分速) 1 마일로 전개한다면 그건 지나치게 빠른 속도가 아니랴? "리처드, 자네가 가령 간밤에 비행기에 관한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은 자네한테 무엇을 의미할까?" "음, 자유를 의미할 것 같아요. 비행기 꿈은 나한테 도피, 비행, 나 자신의 해방,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 같거든요." "리처드, 자네는 그런 자유를 얼마나 절실히 소망하고 있는가? 자네가 한낮에 꾸는 백일몽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뜻이야. 자네를 끊임없이 묶어 놓는 일상사, 권위, 권태로움, 지구상의 중력 -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꾀하는 자네의 의지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걸세. 그런데 말이야, 리처드. 자네가 아직껏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은, 자네 자신은 벌써부터 자유롭다는 것, 더군다나 자네 자신은 언제든지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야. 만약에 자네가 이 참깨의 절반만큼이라도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면........자네는 마술사처럼 자유자재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될 거야. 오로지 상상력만 있으면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리처드, 자넨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디 말 좀 해보게나." 웨이트리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이따금씩 시모다를 건너다보곤 하였다. 접시를 닦으면서 시모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녀는, 저처럼 기묘한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얼굴 가득히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도날드, 당신은 외로움을 느낄 때가 아예 없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일부러 고독을 즐기고 싶을 때가 가끔 있기는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없다>는 말일세. 때때로 나를 찾아 주는 친구들은 이 지구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거든. 그건 자네도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만." "아니, 그런 말이 아니에요. 지금 현재 이 같은 차원의 세계, 이 상상의 세계에서 외롭지 않으냔 말입니다. 도날드, 당신이 뜻하는 바를 좀더 구체적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 좋겠어요. <자석화>하는 기적을 조금이라도 나에게 보여 주시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걸 꼭 배우고 싶거든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자네가 나한테 보여 주는 거야. 자네의 생활 속으로 어떤 사물을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그것이 벌써부터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네." "어떤 것을 상상할까요? 내가 조금 아까 말했던 그 아름다운 여인을 상상해 볼까요?" "아니, 자네의 그 여인은 ......... 지금 당장은 안 되겠는데........ 처음에는 그보다 좀 작은 것을 상상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 "그러면 도날드, 지금 나한테 실습을 권유하는 것입니까?" "음, 그렇다네." "오케이, 알았어요. 그럼.......<푸른색 깃털>." 내가 이렇게 말하자 시모다는 자못 멍청한 눈길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리처드, 뭐라고? 푸른색 깃털?" "여인은 너무 큰 것이라 안 되고, 그보다 작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다고 당신이 말씀하셨잖아요, 도날드?"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아, 리처드. 그럼 푸른색 깃털이야. 자, 그 깃털을 상상해 보게. 그 형체를 되도록 생생하게 자네의 눈앞에 떠올리는 거야. 깃털의 전체적인 윤곽, 털 하나하나와 그 끄트머리, 점차로 뾰족해지는 가장자리, 깃털이 V자형으로 갈라지는 틈새기, 뻣뻣한 깃대 둘레에 붙어 있는 잔털 등. 대충 그런 모습을 잠깐 동안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가, 모든 게 선명해지면 바로 그 순간에 심상(心像)을 외부로 해방시켜야 한다네." 나는 일분 동안 두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내 육체의 눈이 아닌 내 마음속의 눈을 통하여 하나의 심상(心像)을 보려고 노력했다. 길이가 5인치쯤 되는 깃털의 심상. 털 끄트머리의 빛깔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파랑으로 보이기도 하고 눈부신 은백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면서 내 머리 뒤편의 어둠 속에 가볍게 떠 있는, 선명하고 산뜻한 모습의 깃털. "리처드, 자네가 하고 싶으면 깃털의 주위를 황금색 광채로 둘러싸도 좋아. 그렇게 하면 일종의 치료제 같은 효력을 발휘하기도 하려니와, 깃털의 심상을 한결 더 진정한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니까. 더욱이 그런 황금색 광채는 우리 내면의 정신적 자력을 발휘함에 있어서도 자못 효과가 있다네." 나는 눈을 감은 채 내 마음속의 깃털을 황금색 광채로 둘러싸고 나서 시모다에게 말했다. "그렇게 했어요." "좋아, 됐어. 리처드, 자네 이젠 눈을 떠도 괜찮네." 나는 비로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날드. 내 깃털은 어디 있지요?" "자네가 그 깃털을 자네의 상상력으로 선명하게 그려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흡사 매크 트럭처럼 자네를 향하여 질주해 오고 있을 걸세." "뭐라고요? 내 가벼운 깃털이 흡사 매크 트럭처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일세." 그날 오후 내내 나는 깃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짐짓 여기저기 찾아보기도 했으나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서 나는 뜨끈뜨끈한 칠면조 고기 샌드위치로 식사를 들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그 깃털이 내 눈에 띄었다. 깃털의 사진과 그 아래 인쇄된 작은 글자들이 유유 상자의 거죽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오하이오주 브라이언에 소재하는 '푸른색 깃털' 농장이 스콧 낙농회사를 대행하여 포장함.> "돈, 이것 보세요! 내 깃털이 마침내 나타났어요!" 그는 우유 상자를 살펴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자네가 현실의 깃털을 원하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도날드, 나는 초심자 에요. 나 같은 신출내기한테는 어떤 깃털이든지 하여튼 나타나기만 하면 일단은 되는 게 아니겠어요?" "자넨 마음속으로 오로지 깃털 하나만을 보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깃털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가?" "깃털만을 보았는데요." "그러니까 그렇지. 리처드, 자네의 정신적 자력에 의하여 무엇인가를 자네의 현실 속으로 끌어당기고 싶을 때는, 심상 속에다 자네 자신의 모습도 아울러 그려 넣어야 한다네. 내가 미처 이런 말을 들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생소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쨌든 간에 내가 이런 일을 해냈다는 것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한편 흥미진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정신적인 자력을 발휘함으로써 나의 첫째 번 목표물을 현시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비록 하찮은 깃털이었지만, 내일은 이 세상을 목표로 할거야!" 내가 사뭇 의기양양한 투로 이렇게 말하자, 시모다는 짐짓 질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리처드, 조심해야만 하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제 15 장 그대가 언명하는 진리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렇다! 언제든지 진리는 현존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충족된다. 나는 플리트 아래 풀밭 위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동체의 밑에서 새어나온 기름을 닦아내고 있었다. 어찌된 셈인지 그 영문을 잘 모르겠으나, 플리트의 엔진은 예전에 비해서 기름을 덜 흘리는 편이었다. 도날드 시모다는 탑승객 한 명을 태워 주고 난 뒤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풀밭 위에 앉아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리처드, 내 말 좀 들어보게. 이 세상 사람들이 너나할것없이 모두들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고 있는 동안, 자네는 매일같이 저 미친놈의 복엽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3달러 짜리 탑승놀이 티켓만 팔아먹고 있잖아? 그렇게 뜬구름처럼 무책임하게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을 깨우쳐 주겠다고 자네가 감히 소망할 수 있는가, 안 그런가?" 그는 또다시 나를 시험해 보고 있었다. "앞으로 자네는 이와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게 될 거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알고 말고요. 하지만 말이에요, 도날드. 첫째로,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을 깨우쳐 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장차 행복에 도달하게 될 길을 걸으면서 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오케이. 그럼 둘째 번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로, 사람들은 누구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이든지 간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셋째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살기 위해 선택한 방식, 즉 존재 양식에 대하여 누군가 질문할 때 당당하게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꼭 응답해 줘야만 하는 사람은 물론 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지." 시모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기 주위에 둘러앉은 구도자(求道者) 들의 무리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런 답변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물며 우리 자신한테도 반드시 응답해 줄 필요는 없어요. 가령, 우리가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음..... 무책임하다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안 그래요?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대체로 우리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또는 어째서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하는가, 그 까닭을 알려고 애를 쓰면서 거기에 한층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가 새 한 마리의 생태를 관찰하거나, 혹은 개미 한 마리를 발로 밟아 죽이거나, 혹은 차라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돈 때문에 마지못해 하거나 간에, 즉 우리가 삶의 방식을 어떤 것으로 선택하든 지간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나는 잠깐 엉거주춤 하고 있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때요, 내 답변이 지나치게 길었나요?"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좀 지나치게 긴 답변이야." "알았어요, 도날드. 음...... 내가 어떻게 감히 이 세상 사람들을 깨우쳐 주겠다고 마음을 먹을쏘냐." 나는 이런 말을 우물우물 중얼거리면서 비행기 밑으로부터 몸을 굴려 나왔다. 그리고는 비행기 날개가 드리워 주는 그늘 아래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했다. "도날드, 이렇게 대답하면 어떨까요?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저희들이 선택한 대로 살게끔 허용해 주고, 그와 동시에 나 자신으로 하여금 내가 선택한 대로 살게끔 스스로 허용한다." "옳거니!" 그는 짐짓 탄성을 발하며 이렇게 말하더니 나를 향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 "진짜 메시아다운 답변이야! 간단명료하고, 솔직담백하고, 단도직입적이고, 그리고 인용하기에 적절한 답변이니까.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다는 말일세. 게다가 질문자는, 이런 답변을 한참 동안이나 심사숙고해 본 뒤에야 이것이 자기 질문에 합당한 답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간신히 판단할 수 있을 걸세." "도날드, 다른 질문으로 나를 더 시험해 보세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면서 나 자신의 이성이 그에 즈음하여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관조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었다. "리처드, 가령 어떤 질문자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자넨 어떻게 대답할 텐가? '주님이시여, 나는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친절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스스로 원하는 바를 그대로 나는 그들에게 베풀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친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리처드, 이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 작정인가?"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짐짓 어물쩍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도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는지.... 오리무중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뭐라고? 리처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오, 도날드. 농담 삼아 해본 말이에요. 이 저녁 시간을 좀더 유쾌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에서 기분 전환 삼아 무해한 농담 한마디 한 것뿐입니다." "자네가 저녁 시간을 유쾌하게 즐기고 싶을 때면 그 방법에 있어서 무던히 조심하는 게 상책일 걸세. 자네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네한테 던져 주는 문제들은 결코 농담이나 게임이 아닐 테니까. 그들은 행여 월등한 정신 수준에 이른 사람들도 아니려니와, 게다가 자기 자신이 구세주임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그런 구도자도 아닐 바에야, 평범한 선남선녀들이 자네로부터 해답을 구하려는 문제들이 저희들한테는 절대로 농담이나 게임으로 여겨질 턱이 없다는 말일세. 알겠나, 리처드? 자네에게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반드시 그것의 선물인 해답이 아울러 주어지는 셈이니까. 리처드, 자네 그 해답을 서슴없이 말해 보게나. 다시는 '잘 모르겠는데요' 운운하는 그따위 말을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 되네. 만일 그랬다가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하면서 얼마나 신속하게 자네를 말뚝에 묶어 놓고 화형을 집행할 수 있는지를 자네는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될 테니까." 나는 짐짓 자만하는 표정을 얼굴 가득히 떠올리면서 앉은 자세를 새삼스럽게 고쳐 앉았다. "구도자여, 그대가 해답을 구하고자 나를 찾아왔으매 나는 그대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노라. 황금률(마태복음 7장 12절의 교훈 - 역주) 에 말하건대, <무엇이든지 남한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어차피 맞지 않는도다. 가령 그대가 우연히 매저키스트(피학대 음란환자 - 역주)를 만났다고 가정하라. 그는 남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바를 그대로 남들에게 행할진대, 그러면 그대는 어찌 하겠는가? 혹은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연못에 산채로 던져지는 영광을 갈망하는 악어 신(神)의 숭배자를 만난다면 그대는 어찌 하겠는가? 더욱이 저 <착한 사마리탄> (누가 복음 10장 30절 ~ 37절의 교훈 - 역주)을 만나게 된다면....... 바로 그 작자야말로 문제의 그 에피소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벌여 놓은 장본인이나 다름없으리라. 하여튼 <강도를 만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사마리탄>이 발견했을 때 그는 그렇듯 부상당한 사람이 기름과 포도주로써 상처를 치료받기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왜 그런 생각을 했으리요? 만약에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자기 상처를 영적으로 치료하는 데 그 조용한 순간들을 이용하면서, 공교롭게도 자기가 처하게 된 상황에 의한 운명의 도전을 스스로 향유하고 있었다면 어찌 되었으리요?" 내가 사뭇 떠벌리는 설교의 내용이 나 자신의 귀에는 어지간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심지어 황금률이 <남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는 남을 대접하라> 는 식으로 바뀌어진다 한들, 우리는 자기 자신 이외의 타인이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지 도저히 알아차릴 수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황금률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정직하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더라도, 결국은 다음과 같도다. <너희는 진심으로 남에게 행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행하라.> 가령 매저키스트를 만났을 때 이 율법을 적용한다면, 단순히 그가, 그대로 하여금 자기에게 매질해 주기를 소원한다는 이유만으로써 그대는 부득이 그의 채찍으로 그를 매질해 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니라. 또 한편, 악어신의 숭배자를 악어떼한테 던져 줄 필요도 없는 것이니라." 나는 이렇게 말꼬리를 맺고 나서 시모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요? 너무 장황하고 말이 많은 답변인가요?" "늘 그러하듯이 너무 길어. 리처드, 자네가 행여 짤막하게 답변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자네의 설교를 듣고자 찾아온 청중의 90 % 는 그만 잃어버리고 말 걸세." "그럼 어때서요? 청중의 90 %를 잃어버리는 것이 뭐 그렇게 잘못된 일입니까? 내가 그를 향해 이렇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설혹 그런 청중을 모조리 잃는다 한들 그게 그렇듯 대수로운 일이냔 말입니다. 나는 말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알 수밖에 없으려니와, 내가 말하고 있는 것만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그게 잘못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도날드? 얼씨구, 손님! 비행기 한번 타시지요, 현금으로 3 달러인뎁쇼!" "오, 리처드! 놀라운데........" 시모다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떡 일어서더니 청바지 엉덩이에 둘러붙은 지푸라기들을 손바닥으로 털어 냈다. "네에? 뭐라고요?" 나는 일부러 심술을 부리며 이렇게 되물었다. "리처드, 자넨 이제 막 졸업했어. 이제부터 명실공히 주님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단 말이네. 바야흐로 주님이 된 기분이 어떤가? 자네 소감을 한마디 들려주게나." "지독한 실망과 좌절감뿐인데요." 시모다는 지극히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곧 익숙하게 될 걸세, 리처드." 그대의 이승에서의 사명이 완수된 바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아내는 일종의 시금석이 여기에 있다. 설령 그대가 여지껏 살아 있을진대, 그렇다면 그대의 사명은 아직 완수되지 못한 바이니라. 제 16 장 수많은 철물점들이 하나같이 길쭉스름한 모양의 건물들이다. 끝없이 이어져 있는 길고도 긴 선반들은 그야말로 끝간데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마치 영원을 향하여 이어져 가는 듯이...... 나는 헤이워드 철물점에서 비행기 부속품을 몇 가지 사기 위해서 어둠침침한 구석 쪽의 선반들을 여기저기 뒤지고 있었다. 플리트의 꼬리썰매(기체를 안정시키는 착륙장치-역주) 에 쓰일 8분의 3인치 짜리 어미나사와 볼트, 그리고 로문워셔(나사를 끼울 때 밑에 대어 풀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역주) 등이 당장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적당한 물건을 이것저것 골라 보고 있는 동안, 시모다는 철물점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애써 지루함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듯 싶다. 왜냐하면 그는 철물점에서 아무 것도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무릇 사람들이 도날드 시모다처럼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같은 상황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 어찌 될까? 거듭 말하건대,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사고-형상> 과 무색투명한 공기, 그리고 허허 로운 공간으로부터 만들어 낼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는 부속품이나 혹은 노동력을 전혀 투입하지 않고서도 기계 장치 등을 수리할 수가 있다면, 온 세상의 경제 기반은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나에게 필요한 나사 여섯 개를 전부 찾아낼 수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가지고 카운터 쪽으로 되돌아갔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은 지극히 부드럽고 조용한 음악을 틀어 놓고 있었다. 그것은 '그린 슬리브즈'로서, 내가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가슴에 황홀한 기쁨을 안겨 주곤 하는 멜로디였다. 지금은 루트(기타와 비슷한 14~17세기의 현악기-역주)로 연주되는 멜로디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운드 시스템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총인구 400명 밖에 안되는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희귀하고 진기한 사운드 시스템이라고 나는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내가 잠시 후 알아보니까 철물점의 주인 양반 헤이워드씨도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헤이워드 철물점 안에 비치되어 있는 어떤 사운드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겨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이워드씨는 카운터에 놓여 있는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서, 시모다가 싸구려 기타로 연주하는 멜로디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 싸구려 기타는, 세일하는 상품들을 진열해 놓은 선반에서 우리의 메시아인 도날드 시모다가 찾아낸 악기였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향이 철물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73센트를 지불하고 나서 카운터 앞에 잠자코 선 채로 새삼스레 그 멜로디에 도취되어 있었다. 싸구려 악기인지라 양철 깡통을 울리는 듯한 음질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세기(世紀)의 안개 자욱한 영국에 대한 향수를 한결 더 불러일으키는 음향이 나직나직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오, 도날드. 무척이나 아름다운 음악이군요! 당신이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고는 난 미처 몰랐어요!" "맙소사, 그걸 여태 몰랐다고? 그렇다면 말이지 리처드,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기타를 건네주었을 경우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기타를 칠 수 없거늘 이를 어찌 하랴?' 하고 대답했을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하는가? 정말이지 예수님께서 그런 답변을 했을까, 리처드?" 시모다는 기타를 제자리에 갖다 놓더니, 햇빛이 눈부신 바깥을 향해 나와 함께 걸어 나왔다. 그는 조금 아까 일단 접어두었던 얘기를 다시금 계속했다. "혹은 러시아어나 폐르시아어를 말하는 사람이 찾아왔을진대, 그 영험한 분위기로 미루어 메시아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어떤 주님이, 그 사람이 러시아어나 폐르시아어로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라고 자네는 생각하는가? 혹은 주님께서 D-10 캐트 트랙터를 운전하고 싶거나 혹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을 적에 그러할 수가 없어도 되겠느냐는 말일세." "그렇다면 당신은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죄다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죠, 도날드?" "리처드, 자네도 또한 그렇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어. 나는 단지 내가 이 세상만사를 두루두루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따름이라네." "그럼 나도 역시 당신처럼 기타를 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래서는 안 되지. 자넨 나와는 다른 연주 스타일을 가져야 할 테니까."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아까의 그 철물점으로 한달음에 되돌아가서 그 기타를 살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저 다만 호기심만이 동할 뿐이었다. "리처드, 자네가 기타를 칠 수 없다고 스스로 믿는 바로 그 헛된 미신과, 자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리적인 금제(禁制)를 깡그리 떨쳐 버려야 한다네. 그러한 자기 부정의 심리 상태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는 말일세. 그러고는 마치 기타가 자네의 생명, 즉 자네의 진정한 자아의 일부분이 되는 듯이 여기면서 기타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는 거야. 이 현세와 엇갈리는 차원에서의 생존기간 동안에 기타는 진실로 자네 생명의 일부분이 되기도 하니까 그렇게 알게. 자유 자재로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것이 자네한테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임을 스스로 자각한 다음에는, 자네의 무의식으로 하여금 자네의 손가락들을 지배하게끔 함으로써 기타 연주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네. 알겠나, 리처드?" 나는 언젠가 그와 어슷비슷한 얘기를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최면술을 통한 학습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학생들 자신이 예술의 거장과 하등 다름이 없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말해 주면, 그 같은 자기 암시에 걸린 학생들이 마치 자기 자신이 최고의 예술가가 된 듯이 초인적인 재능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또한 문학 작품을 창작할 수 있게 된다는 그런 얘기였다. "도날드, 내가 기타를 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그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처럼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어요. 그래서 그러한 고정관념을 떨쳐 버리기가 굉장히 어렵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 모름지기 자네한테는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걸세. 여러해 동안의 학습과 연습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기타를 자연스럽고도 정정당당하게 다루어도 좋다는 허락을 자네 자신에게 베풀게 될 테니까. 다시 말하건대, 여태까지 부정적인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자네의 마음이 이제는 충분히 고통을 받은 셈인즉, 그 결과 기타를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자네 자신에게 일러줄 거야." "그런데 말이에요, 도날드. 내가 비행법과 조종 기술을 배우는 데 어째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나는 그걸 아주 빨리 터득했거든요." "리처드, 자네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었나?" "그럼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거든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비행법을 배우고 싶었어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가서 하얀 구름들이 저 아래 떠 있는 것을 내려다볼 때마다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곤 했어요. 그리고 아침나절 뉘집 굴뚝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고운 연기가 바람 한 점 없는 하늘로 곧장 솟아오르던 광경을 오래오래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보다 더욱 아름답고 더욱 감동적인 광경도 볼 수가 있었는데... 오! 도날드, 당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리처드, 자넨 기타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지? 안 그런가?' 이렇게 물어 볼 참이시지요? 그렇죠, 도날드?" "맞았네. 자넨 기타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정말 없었던가봐!" "오, 도날드! 지금 나는 갑작스럽게도 이상야릇한 느낌이 드는데요. 뭐라고 할까? 온몸에서 맥이 쑥 빠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당신은 비행법과 조종기술을 그런 식으로 배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는군요. 그렇죠? 과거의 어느 날, 트레블 에어의 조종실 안으로 들어간 당신은 그냥 그런 식으로 하늘을 날아올랐던 것입니다. 그전에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경험이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오, 하나님 맙소사! 이 같은 생각을 하니까 내 온몸에서 맥이 빠져 버리는 듯하다는 말이에요." "저런! 알고 보니 자넨 상당히 직관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군." "다날드, 당신은 면허증을 따기 위해서 비행 시험을 치르지 않았지요? 아니, 잠깐만 더 기다려 봐요. 심지어 당신은 면허증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죠? 표준 비행사 면허증 말입니다." 시모다 아리송한 눈길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을 듯 말 듯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어른거렸다. 그에게 면허증을 꺼내 보이라고 내가 당돌하게 도전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도, 그는 얼마든지 그럴 자신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처드, 그 종잇장 말인가? 그런 종류의 면허증이면 된다는 말이지?" "네, 그 종잇장을 말하는 거예요."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찾아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갑도 꺼내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오른손만 폈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그의 큼직한 손안에 한 장의 비행사 면허증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자기한테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기를 기다리면서 그때까지 줄곧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빛깔도 바래지 않았거니와 구김살도 가지 않은 그의 면허증이 선뜻 내 눈에 띄었을 때, 그것이 10초 전에는 이 세상에 정작 존재하지도 않았다가 그가 오른손을 펴 보인 바로 그 순간 거기에 나타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기에 그 면허증이 그렇듯 흠도 티도 없이 말끔하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간에 나는 그것을 집어들고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공인된 비행사 자격증임에 틀림없었다. 운수성의 관인이 찍혀 있을 뿐 아니라 성명은 <도날드 윌리엄 시모다>, 주소는 인디애나주에 소재 하는 어느 소도시로 되어 있었다. 아무튼 D.W. 시모다가 단발 및 쌍발 육상 비행기, 비행계기, 글라이더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자격 평점을 취득한 상업조종사임을 입증해 주는 면허증이었다. "도날드, 당신은 수상비행기나 헬리콥터를 다룰 수 있는 자격 평점은 취득하지 않았던가요?" "글쎄, 행여 그런 것이 필요하게 된다면 어차피 그런 것을 가지게 될 테니까....." 삼뭇 어설픈 표정을 떠올리며 이렇게 우물쭈물 대답하는 시모다의 얼굴이 하도 우스꽝스럽게 보여서 나는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도 나를 뒤따라 제풀에 낄낄거렸다.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건물 앞의 보도를 쓸고 있던 청소부가 우리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자기도 역시 히죽이 웃어 보였다. "도날드, 나는 어찌 하면 좋을까요? 나는 <정기 항공로 운송 비행기>를 다루는 데 필요한 면허증을 따고 싶거든요?" "리처드, 자네 자신의 고유한 면허증은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자네 혼자 힘으로 취득해야만 할걸세." 그가 자못 엄숙한 어조로 하는 말이었다. 제 17장 제크 사이크스가 사회를 보는 라디오 대담 프로에서,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업었던 도날드 시모다의 일면을 처음으로 발견하게되었다. 밤 아홉 시에 시작되어 자정 무렵까지 계속된 사이크스의 토크쇼는 보통 시계포 만한 비좁은 방에서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그 방은 자동전화기, 여러 가지 기기(器機)의 조절 장치, 그리고 스폿 상업 광고용의 테이프 카트리지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선반 등으로 사면 벽이 빼곡이 차 있었다. 제프 사이크스는 맨 먼저 시모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서 쇼를 시작했다. 떠돌이 비행사들이 구식 비행기를 타고 지방을 순회하다가 사람들한테서 돈을 받고 비행기에 탑승시켜 주는데, 그 같은 행위에 불법적인 요소는 없느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없다>일 것이다. '거기에는 불법적인 요소가 없다. 그런 구식 비행기들도 여느 제트 여객기와 마찬가지로 신중하게 검사를 받는다. 그 비행기들이 아무리 구닥다리일지라도, 철판으로 만든 여느 현대식 비행기보다 더욱 안전하고 튼튼하다. 그러므로 떠돌이 비행사에게 필수적인 것은 오로지 비행사 자격증과 아울러 농장 주인의 <간이비행장 사용 허가>일 뿐이다.' 하지만 시모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제프, 우리가 하고 싶은 바를 행할 때는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는 이렇게 한마디로 딱 잘라 대답했던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의 말이 진실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저러나 그런 구식 비행기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몹시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는 라디오 청취자들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을 대상 삼아 얘기하는 화자(話者) 쪽에 좀더 재치 있고 약삭빠른 답변이 필히 요구됨직하다. 하지만 시모다의 말은 결단코 그러한 답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눈치코치 없는 답변이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한 지 일분쯤 지났을 때였다. 청취자가 프로듀서를 불러내는 전화가 걸려온 것인지 사이크스의 책상 위에 있는 수신 표시 전화기의 버튼에 불이 켜지더니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오, 1번 전화를 거신 분이 있군요." 제프 사이크스가 하는 말이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부인, 말씀하십시오." "지금 내 목소리가 방송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부인.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방송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우리의 초대 손님은 비행기 조종사이신 시모다씨입니다. 자, 어서 말씀을 계속하시지요, 방송이 나가고 있으니까." "네, 나는 시모다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이 누구나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닐뿐더러, 더욱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떠돌이 비행사와 더불어 하늘을 이리저리 부질없이 날아다니는 것, 그 이상의 책임을 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말입니다." "부인, 이 세상에는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고, 또 한편 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도 역시 후자와 똑같이 자기 자신이 마음 내키는 것을 행하는 셈입니다. 그렇죠.....?" "시모다씨,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우리는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야만 밥벌이를 할 수 있으며, 그 만큼 고생을 한 뒤에야 밥 먹을 자격이 있다고요. 그렇죠, 시모다씨?" "우리가 그럴 마음만 내킨다면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마음에 드는 일을 하라>는 말씀이시죠? 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그따위 넉살을 부리고 다니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답니다. 정말이지 내 입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가령 <네 마음에 드는 일을 하라 !> 면서 사람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내버려둔다면 그들은 이 세상을 파괴해 버릴 거예요. 그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을 파괴시키고 있어요. 자연계의 저 초록색 식물들과 저 강과 저 바다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좀 살펴보란 말이에요 !" "부인, 설혹 이 세계가 파괴된다 해도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겁니다.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수십억개나 또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 가운데서 우리의 새로운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동시에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삶의 터전이 될 혹성을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에나 그런 혹성이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수화기 저쪽에서는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시모다는 그 부인의 비위에 적당히 발라맞출 수 있는 답변을 하고자 하는 심산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대경 실색한 채 시모다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는 원근 화법 적인 관점에서 여러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의 수많은 생애들을 동시적으로 통찰하면서 그같이 얘기하고 있었다. 오직 메시아다운 사람만이 그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각지(自覺智)를 회상할 수 있는 예언자적 능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전화를 건 그 부인은 시모다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토론을 벌였다. 자기 눈앞에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 있는 이 하나의 세계, 즉 이 즉물적인 차원의 세계가 토론의 쟁점이 되는 것이라고 그녀는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탄생은 곧 시작이요, 죽음은 곧 종말이라고 믿는 통념에 그녀는 사로잡혀 있었다. 시모다도 역시 그 부인의 말뜻을 처음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째서 그런 걸 무시해 버렸을까? 대관절 왜 그랬을까? "시모다씨, 당신은 만사 태평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그 부인은 왈칵 역정이 치밀어 오르는 듯 전화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본디 악덕이라는 것은 없다, 결코 죄악이 우리들 주위를 횡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죠? 그러니까 악덕이나 죄악이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렇죠?" "부인, 우리가 괴로워야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 무결한 전체(모든 사상(事象)을 통합하고 있는 이 우주와 같은 전체 - 역주)의 일부분, 한 점의 하찮은 티끌에 불과한 일부분만을 우리의 육안으로 보고 있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세는 완전 무결한 전체에 비교해 볼 때 한 점의 티끌에 지나지 않으려니와, 게다가 그 하나의 점은 한결같이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인. 일체의 사상(事象)이 통일된 전체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으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동의 없이는 죽을 수가 없을뿐더러 고통을 당할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있을 따름이지,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모다의 이러한 답변은 분명코 그 부인의 의구심과 당혹감을 진정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부인은 잽싸게 시모다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고지식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찌 해서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을 그렇듯 죄다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말,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인, 나 자신도 내 말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시모다가 불쑥 꺼내 놓는 말이었다. "다만 내 말이 옳다고 믿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시모다를 쳐다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이전에 자기의 생각을 실제로 시험해 보았더니 어김없이 효과가 있더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의 생각이 현실적으로도 옳은 것이며 실행 가능한 것임을 이 세상 사람들한테 버젓이 증명해 주었던 바 - 그가 행한 난치병의 치료, 여러 가지 기적들, 현재와 현장에서 그가 직접 경험해 본 생활 - 이런 것들에 관하여 그 부인에게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시모다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실눈을 뜬 채 조심스럽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희끄무레한 회색 조명등에서 흘러나온 빛이 방안 가득히 너울거리는 가운데, 시모다는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이 내 눈에는 어떤 흐리멍덩한 이미지, 혹은 무언가의 어슴푸레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에 황당 무계하게 들릴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의 생각들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는 도날드 시모다. 그는 추상적인 사고력이 부족한 청취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애써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거니와, 청취자들에게 취사 선택의 여지를 주지도 않았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던져 주기 때문에 중요시된 인간,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누린 적이 있는 인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선사한 인간, 이런 인간들은 어느 누구든지 애오라지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삶을 영위했던 인간이었으며, 거의 신성하게 느껴질 만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심혼(心魂)의 소유자였습니다. 여기에는 결단코 예외가 없습니다." 이슥한 여름밤의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전화를 건 사람은 어떤 남성 청취자였다. 그가 시모다에게 다짜고짜 호통을 치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 왔다. "이 몹쓸 이기적인 사람 같으니! 선생, 당신은 반(反)기독교인,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냐 하슈?" 시모다는 의자에 똑바로 앉은 채 잠깐 동안 미소를 짓고 있더니, 짐짓 휴식을 취하려는 듯이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그러는 양이 어찌나 침착하고 평온하게 보이는지, 마치 그가 개인적으로 그 남자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저에게 말씀하실 것이 있다면 어서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들한테 이르시되, 우리 자신의 형제와 진배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적이 되는 작자들은 무턱대고 떠들기를, '아무쪼록 이기적이 되라.' 혹은 '남들이야 지옥에 떨어지든 말든 외눈 하나 깜짝하지 말고, 오직 네 자신만을 위해 살아라.' 하는 식이니 이래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천국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시모다씨, 당신은 매우 위험한 인물이오. 그걸 알기나 하슈? 가령 이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고 나서 제각기 제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어찌 되겠소? 그럴 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하여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냔 말이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어쩌면 이 부근의 은하계에서 가장 평화스러운 혹성이 될 것 같은데요." 시모다가 대답하는 말이었다. "선생, 지금 당신이 지껄이는 얘기를 우리 집 아이들이 혹시 듣게 될까봐 몹시 걱정이 되는구려." "당신의 아이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얘기인데요?" "도날드 시모다, 당신의 말마따나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나는 엽총을 가지고 지금 당장 당신의 그 비행기가 착륙해 있는 들판으로 달려가서, 당신의 그 밥통 같은 골통에다 구멍을 뚫어 놓을 자유가 내게 있을 거요. 안 그렇소?" "물론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자마자 수화기를 내동댕이치다시피 난폭하게 내려놓는 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왔다. 이 마을 어딘가에 분노에 휩싸인 주민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시모다의 말에 분노를 느낀 사람은 결코 그 남자 하나만은 아닌 듯했다. 다른 남자들과, 게다가 성난 여인들까지 모두들 전화를 걸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수신 표시 수화기의 모든 버튼이 일제히 불이 켜지더니 저마다 깜박거리는 것이었다. 오늘밤의 이 토크쇼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진행 될 필요는 없었다. 웬일인지 나 자신조차도 간혹 가다 시모다의 말이 종작없이 들리지 않는가? 시모다는 똑같은 내용의 말을 달리 표현함으로써 구태여 청취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좀더 명확하게, 그리고 좀더 완곡하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젠가 트로이에서 사람들이 돌연히 시모다를 에워쌌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 내 가슴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막연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이 지체없이 이 마을을 떠나야 할 때가 코앞에 닥쳐왔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스튜디오 안에서는 「메시아 편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그대는 권태로운 일상 다반사를 희생시켜야만 한다. 이는 반드시 용이한 희생은 아니다. 아까 밤 아홉 시에 이 토크쇼가 처음 시작했을 때, 제프 사이크스는 청취자들한테 오늘밤의 초대 손님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주(洲) 41번 도로변에 위치한 존 토머스씨의 목초장에 우리 두 사람의 비행기들이 착륙해 있고, 우리가 밤이 되면 비행기 날개를 지붕 삼아 그 밑에서 잠을 자곤 한다는 얘기도 덧붙여 말했었다. 시모다의 말이 앞날의 미국적 생활 규범과 다음 세대를 이어갈 자식들의 도덕관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면 큰일이라는 의구심에 잔뜩 사로잡힌 사람들로부터, 사나운 분노의 파도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듯한 낌새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쇼가 끝나자면 아직도 30분이 더 남아 있는데, 사태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될 뿐이었다. "선생, 내말을 잘 들으슈. 나는 당신을 빛 좋은 개살구, 그러니까 겉 다르고 속 다른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오." 다음 번에 전화를 건 사람이 이렇게 들입다 악을 쓰는 소리가 전화줄을 타고 내 귓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시모다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나는 사기꾼입니다! 우리들은 완전 무결한 전체로서의 세계에 비교해 볼 때 한낱 허무 맹랑한 가짜에 불과하니까요. 더군다나 우리들은 우리의 본질과는 별다른 그 무엇을 겉치레로 꾸미고 있거든요.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이 육체가 우리 이간의 본질은 아닐 뿐 더러, 하물며 원자와 분자가 우리 인간의 본질이 될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본질, 즉 우리의 실체가 되는 것은 죽일 수도 없거니와 파괴시킬 수도 없는 <이즈(Is)>라는 이데아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구태 의연한 통념에 따라서 아무리 이의(異意)를 제기한다손 치더라도....." 가령 시모다가 말하는 내용이 내 마음에 언짢게 여겨진다면, 그럴 적에는 언제든지 내 마음대로 스튜디오를 떠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내게 상기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도날드 시모다 자신일터였다. 또한 성급한 폭도들이 기어코 시모다에게 린치를 가할 요량으로 횃불을 치켜 든 채 우리들 비행기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면 어쩌나 하고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있는 양을 눈치채고서, 나의 소심함을 비웃어 줄 사람도 또한 도날드 시모다 자신이 아닐까................? 제 18 장 작별 인사를 나눌 시에 그대 서러워 말라. 훗날의 재회를 기약히기에 앞서 오늘의 이별이 필요한 것이니라.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든, 이승에서의 삶이 끝난 후든, 참된 친구들의 재회는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이튿날 정오경, 아직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러오기 전이었다. 시모다가 내 비행기의 날개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리처드,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자네가 파악했을 때, 자네가 나에게 일러준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아무리 많은 기적을 거듭거듭 실행할지언정 그래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내가 사뭇 서글픈 고백을 했을 때 자네가 내게 들려준 답변을 기억하고 있느냔 말이네." "아니오, 기억나지 않는데요." "그랬던 시기는 기억이 나는가, 리처드?" "네, 그 시기는 기억에 떠오르기는 합니다. 그때 당신의 얼굴에 갑작스레 짙은 외로움이 번지던 모습이 나의 뇌리에 강한 기억을 남겨 놓았거든요. 그렇지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요?" "리처드, 자넨 이런 말을 했었다네. 가령 내가 하는 말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나 자신이 어떤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와서 터득하게 된 지혜일 거야. <내 의사가 타인에게 전달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그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 만물이 연기(緣起)되어 있는 양식에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전 생애를 어느 누구하고라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양식을 생각했었다네. 그러나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야. <이즈>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구태여 내가 어중이떠중이들한테 설명해주는 것을 <이즈>는 원하지 않을 테니까." "도날드, 그거야말로 너무나 뻔한 얘기잖아요? 그래요, 나 같으면 진작에 그런 얘기를 당신한테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 "고맙네, 리처드." 시모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조를 바꾸면서 - "나는 하나의 이데아를 찾아낸 것인즉, 바로 그 이데아를 찾아내기 위해서 나는 이 현세에서의 삶을 살았던 바이며, 이제 곧 필생의 과업을 완수하려는 참이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아주 시큰둥한 얼굴을 하면서 '돈, 그야 뻔한 얘기죠, 뭐' 라고 한마디로 무시해 버리는도다. 맙소사 !" 그는 말끝을 매듭지으면서 말꼬리에 웃음을 달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슬픔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리어 있었다. 어찌 된 셈일까...? 나는 그때는 그 까닭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제 19 장 불의와 비극 쪽에 경도된 그대의 뿌리깊은 통념은 그대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이는 표적이니라. 모충(毛蟲)이 세계의 종말이라고 믿는 것을 주님은 나비의 탄생이라고 믿는도다. 나는 그 전날 「메시아 편람」에서 이와 같은 구절을 읽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경고가 될 줄이야..... ! 한 순간은 <만사태평> 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으리라. 평상시와 다름없이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는 한편, 트래블 에어가 느릿느릿 활주해 오더니 프로펠러 바람을 한바탕 일으키며 사람들 가까이 에서 멈춰 섰다. 나는 플리트의 날개 위에 올라선 채 연료 탱크에 가솔린을 붓고 있었다. 그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내게는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비행기 바퀴의 고무 타이어가 돌연히 폭발하는 듯한 폭음이 내 귀청을 세차게 때렸다. 이어서 시모다의 비행기 근처에 옹기중기 모여있던 사람들도, 뒤따라 폭발을 일으킨 듯이 대뜸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평화롭기만 하던 <간이 비행장> 이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트레블 에어의 타이어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했다. 엔진이 계속 공전(空轉) 하는 소리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내 귀에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조종실 테두리의 아래쪽 면포에 직경 1피트쯤 되는 구멍이 뻥 뚫리어 있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시모다는 누가 사정없이 밀어젖힌 듯이 그 반대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고개가 푹 꺾어져 있는 그의 몸뚱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날드 시모다가 저격을 당했다 !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나의 뇌리를 스쳤다. 엉겁결에 가솔린 깡통을 떨어뜨리며 플리트의 윗날개에서 정신없이 뛰어내린 나는 트래블 에어가 착륙해 있는 풀밭 쪽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아마도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하기까지 단 일초도 걸리지 않았으리라. 나는 무슨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싶었다. 혹은 아마츄어 배우들이 연기하는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혼잡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엽총을 손아귀에 움켜쥔 한 괴한이 사람들 틈에 뒤섞여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 얼핏 내 눈에 띄었다. 내가 시모다의 조종실을 향하여 황급히 달려가고 있을 때, 그 괴한은 내 옆을 지나치며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 순간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내가 만일 기병도(騎兵刀) 같은 기다란 칼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면 그를 찔러 죽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당시를 돌이켜보건대, 나는 그에 대하여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하등의 충격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나 혹은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한시바삐 내 친구 시모다의 곁으로 가겠다는 일념만이 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는 흡사 수류탄을 맞은 사람처럼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의 왼쪽 반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것은 마구 짖어진 옷 조각, 너덜너덜 하는 살점들, 게다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붉은 피로 뒤범벅이 된 무슨 덩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행 계기판의 우측 하단에 연료 도관의 조절 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곳에 그의 머리가 냅다 부딪친 바람에 그는 그렇듯 곤두박이다시피 수그러진 모양이었다. 그가 행여 낙하산의 멜빵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면 이렇게 심히 앞으로 고꾸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날드 ! 어때요? 괜찮아요?" 내가 이렇게 물었다. 어차피 어리석은 질문이리라. 그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나를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자기 몸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말미암아 그의 얼굴도 역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리처드, 자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은가?"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가 말을 할 수 있고, 더구나 생각까지 할 수 있다면 그다지 염려할 상태는 아니지 않을까...? "약간 곤란한 상태인 것 같은데요, 도날드? 그렇지만 아무 염려 없을 거예요." 그는 움쭉달싹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머리만 약간 움직일 따름이었다. 느닷없는 두려움이 내 가슴속으로 밀어닥쳤다.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양 엉망진창인 상처와 그 상처에서 흐르는 붉은 피보다 오히려 그의 쥐 죽은 듯 잠잠한 상태가 나로 하여금 훨씬 더 겁먹게 만들었다. 나는 그런 공포감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시금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한테는 적이 없다고 나는 생각했었는데요." "그렇다네, 나는 적이 없어. 그건....친구였어. 나를 증오하는 어떤 사람이 나를 죽임으로써 그 자신의 생활에 파탄을 가져오게 된다면..... 부디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할 텐데....." 조종실의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조종사 좌석과 양쪽측면의 마름널빤지들이 온통 피로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비행기 자체는 그리 극심한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체를 새로이 깨끗하게 만들자면 꽤나 큰 작업을 벌여야 될 것 같았다. "도날드, 이런 비극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합니까?" "아니....." 그는 드디어 호흡이 곤란해진 것 같았다. 몹시 헐떡거리면서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연극이나 쇼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자, 우린 어서 서둘러야 하겠어요 ! 도날드, 당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료해서 말끔히 낫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 손님들이 한창 붐빌 때 우리는 부지런히 장사를 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내가 이런 객적은 농담을 지껄이고 있을 때, 나의 친구 도날드 시모다는 연료 도관의 조절 장치 쪽으로 조금 휘청거리더니 마침내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실체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거니와 더욱이 주체적인 자각지를 깨달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별안간 어떤 굉연한 소리가 내 귀속에서 우르릉우르릉 울리면서, 그와 동시에 온 세상이 비스듬히 기우뚱거렸다. 나는 그 순간 구멍이 뚫린 동체의 측면에서 미끄러지듯이 아래로 떨어져 풀밭에 내려섰다. 그 부근의 풀밭은 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음 순간 내 재킷의 주머니에 있던 「메시아 편람」의 무게가 나로 하여금 옆으로 비틀거리게 만든 듯했다. 내가 땅바닥에 넘어졌을 때 「편람」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풀밭 위에 펼쳐지더니, 책장이 바람결에 펄럭거렸다. 나는 무심결에 「편람」을 집어들었으나, 구태여 그 책을 들추어보고 싶은 마음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끝나야 한단 말인가?'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님이 이제까지 내게 들려준 모든 말씀은 하나같이 아름다우나 허망한 언어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기에 어떤 미친개가 난데없이 들판에 나타나서 함부로 총알을 갈겼을 때 그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 할 수도 없었단 말인가? 나는 세 차례나 연거푸 읽기 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편람의 책장에 씌여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책에 담긴 모든 말은 하나같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에 필 로 그 절기가 가을로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나는 플리트를 타고 난기류(暖氣流)를 따라 남쪽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비행기를 착륙시키기에 적합한 들판은 보기 드물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려고 모여드는 군중은 날이면 날마다 점점 더 불어났다. 사람들은 한결 같이 나의 구닥다리 복엽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근자에는 나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밤늦게까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그들은 내가 지펴 놓은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마시멜로우 주스를 들이켜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실상은 그다지 큰 병에 걸려 있지 않았던 어떤 사람이, 나와 이야기하고 나서 어쩐지 병이 한결 나은 것 같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가다 한 번씩 생기곤 했다. 그러면 이튿날에는 전날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끌린 나머지 기묘한 눈초리로 내 얼굴을 살펴보면서 한층 더 바싹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도망을 치다시피 날짜를 앞당겨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플리트는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원활한 비행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 가솔린을 덜 소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걸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플리트의 엔진에서 새어나오는 기름의 양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프로펠러의 바람막이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딱정벌레의 수도 훨씬 줄어들었는데, 틀림없이 차가운 가을 날씨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 작은 곤충들이 비행기를 피해서 요리조리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똑똑해진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서는 시간의 한 줄기 강물이 그 흐름을 정지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의 시계는 도날드 시모다가 피격된 그 여름날의 정오를 가리키며 멈춰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그와 같은 종말을 믿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마지막 장면이 내 마음에 깊숙이 고착되어 있기 때문인지 나는 그때의 끔찍한 경험을 시나브로 되풀이하여서 이제까지 1천 번이나 겪은 것 같았다. 아무튼 무슨 변화가 일어나서 시간의 강물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금 흘러가기를 나는 간절히 염원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장면은 결코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무엇을 배우기로 계획되어 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10월 하순경에 어느 날 밤에, 나는 미시시피주에서 물밀 듯이 쇄도하는 군중에 질겁한 나머지 부랴부랴 그곳을 등지고 길을 떠났다. 플리트를 겨우 착륙시킬 수 있을만한 넓이의 텅 빈 들판이 내 눈에 띄었으므로 나는 플리트와 더불어 거기에 착륙했다. 나는 잠들기 전에 새삼스럽게 시모다의 마지막 순간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왜 그렇게 죽어갔을까? 그가 반드시 그렇게 죽어야할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가령 그가 내게 들려준 말들이 진실이라면... 나는 뼛속 깊이 외로움을 느꼈다. 지난날처럼 함께 이야기하고 가르침을 배푸는 한편, 기발한 질문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나를 기꺼이 상대해 줄뿐더러, 내 참신하고 명석한 지성을 칼날처럼 갈고 다듬는 데 필요한 숫돌의 역할을 맡아 주는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없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상대로 그리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지난날의 시모다와 비교해 볼 때 별로 재미없는 상대방이었다. 그는 나의 정신적인 당수 사범으로서 언제나 나를 아슬아슬한 궁지에 몰아넣은 다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곤 했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윽고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잠결에 꿈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목장의 파란 풀밭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엽총에서 발사된 산탄(霰彈)이 트래블 에어의 옆구리에 뚧어 놓은 큼직한 구멍을 꿰매고 있었다. 비행기부품용 면포 한 뭉치와 낙산염 와니스 한 깡통이 그의 옆에 놓여져 있었다. 그는 나한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식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 꿈이 나에게 어떤 진실을 보여 주고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도날드 !"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하여 뒤로 돌아섰다. 내 가슴속에서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엇갈리는 바람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나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더니 히죽이 웃었다. "잘 있었나, 리처드 !" 그가 내게 말했다. 나는 두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탓인지 별안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다 ! 절대로 죽음이란 것은 없다. 더욱이 이 사람은 나의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던가? "도날드 ! 당신은 살아 있군요 ! .... 뭘 하려는 거예요.....?"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를 얼싸안았다. 그는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실체였다. 그는 가죽으로 만든 비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 가죽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다독거리다가 옷소매를 통하여 그의 팔을 꽉 눌러 보았다. "리처드, 잠깐 실례해도 되겠지? 나는 지금 여기 있는 이 구멍을 꿰매고 있는 중이거든." 나는 그를 만나서 너무도 기쁜 나머지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꼈다.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리라 ! "와니스와 면포를 가지고요?" 내가 시모다에게 물었다. "이 파손된 동체를 와니스와 면포로 수리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도날드, 당신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아도 되요. 벌써 모든 것이 다 끝나 있잖아요 ! <당신의 심안(心眼)으로서 완전 무결한 것을 보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자, 보세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너덜너덜 찢겨진 데다가 피로 붉게 물든 면포를 가리기 위해서 내 손을 휘장처럼 움직였다. 내 손이 슬며시 면포를 쓰다듬으며 지나감에 따라서 그 큼직한 구멍이 점차로 사라져 갔다. 그러자 보기 흉하게 파손되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치 새 비행기처럼 흠도 티도 없는 모습만이 거기에 남아 있었다. 정말이지, 기수에서부터 꼬리날개에 이르기까지 면포를 꿰맨 흔적일곤 한군데도 없거니와, 흡사 거울처럼 반들반들하게 페인트를 칠한 - 그런 모습의 트래블 에어가 거기에 있었다. "오, 자넨 이런 식으로 한다는 말이지 ! 아주 잘 하는데 ! " 시모다가 이렇게 말하더니 새삼스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기의 빙충맞은 제자가 드디어 <정신적인 기계공>으로서 제법 쓸 만한 기능을 습득하게 된 것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는 눈빛이 그의 검은 눈망울에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일을 거뜬히 해치운 것이 내게는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꿈의 세계에서는 나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 그런 일을 처리하는 당연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돈, 음식을 만들고 있군요 !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음식을 만들고 어쩌고 하는 것을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잖아요? 하여튼 무얼 만들고 있는 겁니까?" "팬케이크." 그가 짐짓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말이었다. "리처드, 자네의 행복한 생활을 위하여 내가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그건 말이야..... 이 팬케이크를 만드는 방법을 자네한테 가르쳐 주는 것이라네." 그는 주머니칼로 두 조각을 베어낸 다음 나한테 한 조각을 건네주었다. 내 입에 들어간 그 팬케이크 조각의 괴상 망측한 맛이란... 맙소사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 고약한 맛이 내 혀끝에 남아 있는 듯하다. 뭐라고 할까? 무슨 나무 톱밥을 오래 된 도서 접착용 풀로 적당히 뭉뚱그린 것을 돼지기름으로 지져 낸 것 같은 그런 맛이었다. "맛이 어떤가?" 그가 내게 묻는 말이었다. "오, 도날드. 이건 너무 한데요 !" "이 도깨비 영감의 복수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알겠나, 리처드?" 그는 우거지상이 된 내 얼굴을 힐끔 곁눈질해 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싱그레 웃었다. "나는 횟가루로 이걸 만들었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몫의 팬케이크 조각을 프라이 팬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자네의 주의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내가 일부러 이런 팬케이크를 만들었다는 말일세. 리처드, 자네가 누군가를 배움의 길에서 인도하고 싶을 때는, 자네가 몸소 찾아낸 지혜를 갖고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명심해야 하네. 이런 어설픈 팬케이크 조각을 갖고 사람들을 가르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이야. 알겠나?" "아니오! 저는요... 이렇게 할 거에요. 사람들이여, 나를 사랑하고 더욱이 나의 팬케이크를 사랑하라 ! 이는 생명의 양식이니라 ! 아멘." "좋아, 잘 하는군. 하지만 내가 장담할 게 하나 있는데..... 자네가 누군가에게 최초의 만찬을 베풀면서 이런 팬케이크를 대접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최후의 만찬이 될 테니까, 자네가 미리 알아서 잘 하라고." 그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도저해 참을 수가 없었다. 시모다도 역시 나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멈추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러한 침묵 속에서 시모다의 얼굴을 새삼스레 눈여겨보았다. "도날드, 당신 지금 살아 있는 것이지요, 그렇죠?" "그럼 자넨 지금 내가 죽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신 똑바로 차리게나, 리처드." "그러면 이게 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간밤에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어나면 저절로 잊어버리기 때문인지, 애써 기억을 돌이켜보아도 잘 기억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꿈속에서 당신을 만난 것도 잊어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모름지기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건 꿈이야. 이 현세와는 별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어떤 시간 - 공간이든지 이 현세와는 다른 차원의 시간 - 공간이라면, 그것은 이 현세에 살고 있는 순박하고 온건한 선남선녀들한테는 꿈의 세계로 여겨지게 마련이야. 더군다나 자네는 당분간 이 현세에서의 삶을 계속 누리게 될 테니까 이건 꿈이라는 말일세. 그렇지만 자네는 지금 이렇듯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러한 기억을 돌이켜봄으로써 자네의 사고방식과 자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걸세." "내가 또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도날드, 당신은 이 세상으로 되돌아올 생각이 있느냔 말입니다." "아니, 나는 그럴 생각은 없다네. 나는 시간이라는 것과 공간이라는 것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살고 싶으니까. 나는 사실상 이미 그런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야. 이 즉물적인 차원의 세계에 얽매여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리처드. 우리 사이에는, 이를테면 자네와 나,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가족에 속하는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는 서로를 이어 주는 연줄이 있다네. 그러니까 가령 무슨 난감한 문제가 생겨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것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 잠을 자도록 하게. 그러면 내가 여기 이 비행기 옆에서 자네를 만나서 그 문제를 서로 상의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자네가 마음속으로 내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면 내게 연락이 닿을 수 있다는 말일세." "도날드......." "왜 그러나, 리처드?" "도날드, 당신이 총에 맞은 일말이에요.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지요? 당신은 산탄을 정통으로 심장에 맞고 쓰러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토록 참혹한 죽음에 무슨 권능과 영광이 깃들여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날개 옆 풀밭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리처드, 나는 1면 기사감이 되는 메시아는 아니었어. 그렇기에 사람들한테 반드시 무언가를 입증할 필요는 없었지. 달리 말하자면 내가 소위 <불사신> 임을 부득부득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네. 그런 반면에 자네는 사물의 외관(즉, 본질의 외면적 표현-역주)에 홀린 나머지 자칫 이성을 잃거나 또는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수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어." 그는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수련을 쌓기 위해서 유혈의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다는 말일세. 게다가 내게는 재미난 일이거든. 살아 있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더운 여름날에 한없이 깊은 호수 속으로 갑작스레 뛰어드는 것이나 매한가지라네. 얼음처럼 차디찬 물이 살갗에 느껴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칠 거야. 그처럼 급격한 변화에서 비롯되는 충격과 고통이 한 순간 죽음의 뒤를 따른다는 말이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런 충격과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에 동화하게 되는데, 그것은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차가운 물 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야. 하지만 그와 같은 경험을 여러 차례 거듭하게 되면 심지어 그 충격마저도 차츰차츰 약화된다네." 이런 말꼬리에 길다란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동안 잠자코 있던 시모다가 일어서면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리처드, 자네가 필히 말해야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주님을 따르는 군중의 수효에 의하여 주님의 품격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 점을 부디 잊지 말고 기억하도록 하게, 리처드." "도날드,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약속하지요. 그렇지만 말이에요, 돈. 나는 이 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게 되면 그 당장에 주님 노릇을 그만두고 어디론가 영원히 도망쳐 버릴 작정입니다. 아시겠어요?" 아무도 트래블 에어의 프로펠러를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별안간 프로펠러가 돌아가더니 엔진은 어느새 파르무레한 찬 연기를 내뿐고 있었다. 이어서 엔진이 힘차게 작동하는 소리가 목장의 푸른 공간에 울려 퍼졌다. "리처드, 자네의 약속을 받아들이겠네. 그러나......"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어설픈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의 그런 얼굴은 내 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듯이 보였다. "받아들이겠지만,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말해 봐요. 무슨 얘기인지 내게 들려주십시오. 뭐가 잘못된 게 있다는 말씀입니까?" "자넨 군중을 싫어해. 그렇지?" "네, 군중이 밀치락달치락 하면서 내게로 몰려드는 것은 아주 딱 질색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혜로운 생각을 주고받는 것은 얼마든지 좋아요. 그러나 당신이 당했던 것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이 덮어놓고 나를 숭배한다든지 혹은 턱없이 내게 의존하려고 드는 것은........설마한들 당신이 내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어요. 행여 그렇다면 나는 진작에 줄행랑을 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리처드, 어쩌면 내가 멍청이인 데다가, 그리고 어쩌면.... 자네가 의례 알고 이는 뻔한 사실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만일 모르는 점이 있을 때면 자네가 내게 그 점을 가르쳐 주게나.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것을 글로 쓴다면 그게 뭐가 잘못인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네. 메시아는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재미있었던 일들, 그리고 자기 자신한테 성과를 가져온 지식과 지혜 - 이런 것을 글로 써서는 안 된다는 법률이라도 이 세상에 있느냔 말이야. 가령 메시아의 말이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은 총으로 그를 쏘아 죽이는 대신에 그의 말이 기록된 책을 불태운 다음 그 잿덩이를 막대기로 두드려 팰 수도 있을 테니까, 그의 말이 책으로 씌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혹시나 메시아의 말이 사람들 마음에 든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책에서 그의 말을 읽어 볼 수도 있고, 또는 저희들 마음에 드는 말을 종이에 써서 냉장고 도어에 붙여 둘 수도 있으며, 또는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이치에 맞는 듯한 사상들을 가지고 즐거운 놀이를 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그의 말이 책으로 씌어진다면 그게 무슨 잘못이 되겠느냔 말이야. 안 그런가? 하지만 내가 어쩌면 멍청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지." "책으로요?" "왜? 그러면 안 되나?" "책을 한 권 쓰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알기나 하세요? 그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데..... 나는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단 한 마디도 더 이상 쓰지 않을 것을 스스로 맹세했단 말이에요 !" "그래? 어이구, 저런! 미안하이." 시모다가 머쓱한 얼굴을 하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자넨 책을 써본 적이 있단 말이지?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군 그래." 그는 트래블 에어의 아래쪽 날개를 딛고 올라가서 미끄러지듯이 조종실로 들어갔다. "자, 언제 또 만나세. 내가 자네한테 말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도록 노력하는 게 좋을 걸세. 군중이 자네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런데 말이야, 리처드. 자넨 책을 쓰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분명코 그렇다는 말인가?" "그럼요, 분명코 그래요, 더 이상 한마디도 쓰지 않겠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비행장갑을 손에 꼈다. 그리고는 절기판을 앞으로 열어 젖혔다. 그러자 엔진 속에서 혼합가스가 폭발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내 귀에 들려왔다. 그 소리는, 플리트의 날개 밑에서 잠자고 있는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내 주위를 소용돌이치며 맴돌았다. 이윽고 내가 눈을 떠보았을 때도, 꿈결에 들리던 그 소리는 여전히 내 귓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 혼자 외로이 들판에 남아 있었다. 보드라운 초록빛 풀로 뒤덮인 들판은, 마치 초록색의 눈이 동틀 무렵 온 누리에 소리 없이 내려 쌓인 듯이 고즈넉하게 보였다. 나는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더듬어내 일기장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간밤에 꾼 꿈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재미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인간들, 즉 타인의 세계에 강림했던 메시아인 동시에 나의 진정한 친구였던 누군가에 관해서. 리처드 바크 연보 1936년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출생. 후에 캘리포니어주 롱비치로 이사하여 롱비치 스테이트 칼리지에 재학중 퇴학, 미공군에 입대함. 1957년 (21세) 파일럿 자격을 획득함. 1958년 (22세) 프리 라이터(Free writer) 로서 뉴욕과 로스앤젤리스에서 비행기 잡지의 편집에 종사함. 이때 베를린 위기가 고조되어 공군에 재입대. 프랑스에서 1년을 지냈음. 1963년 (27세) 처녀작「Stranger to the Ground」를 발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우량 도서로 선정 됨. 1966년 (30세) 제 2작 「Biplane」발표. 이 작품은 처녀작「Stranger to the Ground」와 함께 미국도서관협회에 의하여 <젊은이를 위한 양서 25권>의 하나로 선정되었음. 1970년 (34세) 제 3작 「갈매기의 꿈 (Jonathan Livingston Seagull)」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