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방문객들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류의 귀중한 보물이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과 병마용 군진을 세계 인류 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진용 박물관은 1979년 10월 1일부터 대외에 개방되어 대만의 학자들을 포함해 모두 2천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세계 각지의 1백여 개 국가와 지역에서 온 사 람들로 그 중에는 68명의 국가 원수도 포함되어 있다. 너무나 많은 관람 인파가 몰려들어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는 진용 박물관 개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진용 군진과 관련 된 사건들은 더욱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레이건, "중국 말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다." 저격을 당한 뒤, 아직 완쾌되지 않은 레이건 대통령과 중국 지도자의 회동이 끝날 무렵이 었다. 레이건은 "귀국을 방문해 직접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인 병마용 군진을 보고 싶습 니다."고 하며 손가락을 얼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흉내를 냈다. 중국 쪽에서는 반드시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1984년 4월 25일, 장사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진용 박물관 선전부 여성 안내원 마청운은 섬서성 문물국에서 보낸 급한 전보를 받았다. "곧바로 서안으로 돌아와 귀빈을 맞을 준비를 하기 바람." 급히 서안에 돌아온 마청운은 성 문물국으로 향했다. 이튿날 섬서성 성장과 문물국 국장 은 마청운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4월 29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진용 박물관을 참관한답니다. 상부에서 보안을 비롯해 모든 접대 작업을 통솔한다는군요, 당신이 가장 뛰어 난 해설자니 그 임무를 맡으시오. 모든 역량을 다해..." 4월 28일, 주중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진용관에 나타났다. 그는 안전 시설을 자세하 게 살펴본 뒤, 해설자에 대해서 물었다. 관장은 접대실로 그를 데려와 마청운을 소개했다. 마청운을 살펴본 서기관은 유창한 북경어로 이튿날 있을 해설 준비 상황을 물어 보았다. "레이건 대통령 각하는 이 곳에서 40분 동안 체류할 것이므로, 20분은 해설 없이 관람과 휴식 시간으로 배치했으며 남은 20분의 반은 통역사가, 반은 제가 해설을 할 것입니다. 제 해설 시간은 휴식실에서 2분, 1호갱 전시실에서 2분, 용갱에서 5분 동안입니다." 마청운의 대답이었다. 이어 그녀는 이튿날 휴게실에서 할 해설 내용을 말해 주었다. 마청운의 해설을 청취한 서기관은 "대단하군요. 예정된 시간에서 3초 차이 밖에 나지 않 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그토록 정확하게 유구한 역사를 설명해 내다니 각하께서 반드시 좋 아하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4월 29일 오후, 대통령은 두 명의 요리사와 함께 진용관에 도착했다. 휴게실로 들어간 레 이건과 낸시는 소파에 앉았고, 그 옆에 개인 경호원들이 자리했다. 두 명의 요리사는 진용관 에서 준비한 음료는 모두 한 쪽으로 밀어 놓은 채, 가지고 온 가방에서 준비한 음료를 꺼내 놓았다. 약 5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레이건 부부는 미소를 띄우며 마청운을 따라 병마용 1호갱 로비로 이동했다. "대통령 각하! 갱 가운데 세워져 있는 흰색의 표지판을 보십시오. 1974년 봄, 이 지역 농 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2천년 동안 진시황과 함께 매장되어 있던 병마용을 발견했습니다. 그 러나 그들이 병마용을 발견했을 땐, 이미 대부분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입상들은 원래의 형태대로 복원한 것입니다." 마청운의 해설에 레이건은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모두 넘어져 있었다면서 병마용의 이 러한 배열을 어떻게 알아 냈지요?" 마청운은 병마용의 발 밑바닥을 가리키며 "병마용들은 모두 부서져 있었지만, 다리 발판 의 위치만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원래의 배열 형태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에 레이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설의 중앙 부분에 왔을 무렵, 마청운은 발 밑의 황토층을 가리키며 "이곳은 로비를 만들어 문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흙으로 메운 곳입니다. 우리 발 밑에 바로 앞에서 본 것과 같은 병마용이 있습니다." 낸시는 고개를 숙여 발 밑의 황토를 보더니 마치 지하의 도용을 깨울까 걱정하는 듯 조심 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규정에 따르면 외국 방문객 가운데 국가 원수 또는 원수급 인사들의 경우에 특별히 직접 들어가 참관할 수 있었다. 특별히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레이건 부부는 통역사를 대동하고 섬서성 성장 이경위부부와 함께 지하갱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낸시는 한 손으로는 마청운 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레이건의 손을 움켜잡았다. 거대하고 위엄 있는 신비한 형상의 도용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웅장한 기세로 미국 대통령의 사열을 받는 듯했다. 도마 앞에서 레이건은 눈을 크게 뜨고 조용히 지켜보다가 오른손을 들며서 마청운에게 물 었다.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마청운은 곁에 서 있던 이경위 성장을 바라보았다. 잠깐 생각을 하던 이 성장은 "우리가 초청했으니 물론 만져 보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레이건은 가볍게 말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가 천천히 뒤로 이동해 말의 엉덩이 부분에 이르렀다. 그는 갑자기 손을 말 엉덩이에서 떼더니 물었다. "혹시 나를 치지 않을까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안전합니다." 마청운의 대답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청운은 이 미국 대통령이 말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다시 설명을 시작했 다."이 말의 두 귀는 마치 대나무를 깎아 놓은 것처럼, 갈기는 구름처럼, 콧등은 조금 벌어 진 듯하게, 그리고 눈은 앞쪽을 향해 있으며 마치 목을 빼고 길게 울부짖는 듯 금방 날아오 를 것 같은 형상으로 조각되었습니다. 중국 고대의 탁월한 조각 예술 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설명을 듣고 있는 레이건과 낸시는 모두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 때 낸시가 말 배 부분의 동그란 구멍을 가리켰다. "말의 배 부분에 있는 이 구멍은 무엇이지요?" "당시 도마를 만들 때는 틀 제작과 조각이라는 두 가지 수법을 함께 썼습니다. 말의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은 속이 차 있으며, 배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고고학자와 예술가들의 분석 에 따르면 이 구멍은 당시 장인들이 배기 구멍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해 두면 도마를 구울 때 균열이 생기지 않고 또한 말 다리가 받는 중력도 줄여 줍니다." 참관을 마칠 시간이 된 레이건은 말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이 도마의 제조 공예는 정말 대단합니다."라며 탄복했다. 레이건 갑자기 몸을 돌리다가 한 머리 부분이 없는 도용과 부딪칠 뻔했다. 그는 "이 도용 은 왜 머리가 없지요?"라고 물었다. "도용의 머리와 몸체는 각각 따로 제작해 구울 때 함께 조합한 것입니다. 도용의 머리는 분리했다가 다시 조합할 수도 있습니다. 이 도용의 머리 부분이 없는 것은 관광객들에게 도 용의 몸체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이건은 재미있다는 듯, "그렇다면 내 머리를 올려 주지요"라고 말한 뒤 다시 물었다. "이 도용의 키는 얼마나 되지요?" "1미터 85입니다." 레이건은 오른손을 들어 도용의 목 부분에 자기 얼굴을 대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 다. "나보다 키가 크군요." 참관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이경위 성장은 레이건 부부와 함께 갱 안에서 기념 촬영 을 했다. 몇백 대의 사진기와 비디오 촬영기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레이건은 눈웃음 을 지으면서 기자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한 뒤 입구에 이르러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병마용 군진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해산" 기자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영어를 모르는 기자들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레 이건 부부 앞뒤로 몰려들어 동거마 전시실로 향했다. 별로 크지 않은 동거마 전시실이 기자 들로 메워졌다. 마청운은 간단하게 해설을 끝마치고 신속하게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 "이 마차는 청동으로 만든 것입니까?"마청운이 해설이 끝낸 뒤 낸시가 물었다. 마치 고대 의 청동 제조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마청운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였 다. "거미뿐만 아니라 사람도 청동으로 주조된 것입니다. 말에 씌우는 마구, 예를 들어 고삐 나 굴레, 말 머리 부분의 장식은 금으로 만든 것이구요. 거마의 총 중량은 2천 2백여 킬로그 램으로 3462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금으로 만든 것이 7백여 개로 3킬 로그램 정도이고 은이 9백여 개로 4킬로그램입니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최초의, 가장 완전한, 그리고 장식이 가장 화려한 청동으로 만든 고대의 마차입니다." 레이건 부부는 이마를 전시관에 가까이 하고 마청운의 해설에 따라 자세하게 관찰했다. 마청운의 해설은 계속 이어졌다. "마차 지붕은 타원형이며 마차는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습 니다. 이는 옛날 사람들이 가졌던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지다.'는 생각에 따라 만든 것으 로, 마차 안에 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한다고 합니다."레이건 부부 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재미있군요. 동거마에 이런 심오한 철학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레이건 부부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했지만 예정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이 곳을 떠 날 수밖에 없었다. 접대실에서 레이건과 낸시는 망명록에 각각 서명을 한 뒤 특별히 새겨 온 영문과 중문이 같이 배열된 인장을 찍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중국어 이름은 루어나더 리건이고 부인 낸시의 중국어 이름은 무지개를 뜻하는 고운 이름의 차이홍이었다. 레이건 부부가 진시황 병마용을 참관한 뒤, 각국의 방송 매체는 앞을 다투어 이를 보도했 다. 모든 신문 가운데 유독 홍콩의 한 신문은 레이건이 말을 어루만지는 사진을 대문짝만하 게 싣고 다음과 같이 표제를 달았다. 레이건 대통령, 말의 엉덩이를 만지다.(말의 엉덩이를 만진다는 말은 중국어에서는 '아첨을 하다'는 뜻) 군중들에게 에워싸인 닉슨 1972년 2월 21일, 북경에서 모택동과 닉슨은 서로 악수를 함으로써 냉전시대의 폐막과 함 께 20여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중국과 미국, 두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 합의했다. 1985년 9월 5일, 진용 박물관은 섬서성 쪽의 전화 통보를 받았다. "전 미국 대통령 닉슨이 진용 박물관을 참관한다고 합니다. 현재 중병을 앓고 있는 터라 아마도 이번 방문이 그의 생애 마지막 중국 방문이 될 것 같습니다. 닉슨 대통령이야말로 중,미 외교 관계 수립에 지 대한 노력과 공헌을 했으니 설사 지금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해도 국가 원수 자격으로 접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십시오." 9월 7일 오전, 닉슨 일행은 진용 박물관에 도착했다. 레이건 대통령과는 달리 조금은 쓸쓸 한 분위기였다. 진용 박물관은 안전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를 했지만 닉슨이 탄 승용차는 박물관 앞 광장 에 도착하자마자 중국 관광객들에게 포위되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공안원들과 경비병들이 재빨리 사람들을 뚫고 들어와 자동차 주위를 통제한 뒤에야 닉슨은 가까스로 차 에서 내릴 수 있었다. "대통령 각하, 안녕하십니까!" 무리 중의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닉슨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들의 눈빛으로부터 자신에게 하는 친절한 인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또한 그 관광객이 알아듣지 못할 영어로 대답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사람들이 차츰 닉슨 곁으로 다가왔다. 공안원들은 신속하게 닉슨을 에워싸고 조그만 통로 를 만들어 귀빈실로 안내했다. "매우 죄송합니다. 하지만 양해해 주십시오. 각하께서 중국과 미국의 수교에 공헌하신 바 가 크기 때문에 중국 국민들은 각하를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일반 평범한 주민들도 각하 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는데다 아주 친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중국 쪽 수행원이 닉슨에 게 일러 주었다. 닉슨은 방금 보았던 장면과 수행원의 설명에 감동을 받은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중국 국민들의 우정에 감사드립니다. 절 대신해서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 오." 닉슨은 곧 이어 경호원의 보호 아래 1호 병마용 전시실로 향했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는 병마용 군진 앞에서 닉슨은 웃음을 거둔 채 조용히 갱 안에 전시된 모든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지하에 복병이라도 있는 듯이 조심스럽게 관람을 마쳤다. "1972년, 내가 처음 만리 장성 팔달령에 올랐을 때, 난 그 위대한 건축물 앞에서 인류 문 명의 기적을 느꼈습니다. 이제 오늘, 진나라 시대의 병마용 군진을 보게 되니 그 때의 기분 이 되살아나는구요." 닉슨의 참관 일정은 레이건 대통령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사이 관광객들이 끊 임없이 닉슨 대통령에게 인사를 해 왔다. 40분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귀빈실로 돌아온 닉슨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본래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중국의 과거를 참관하러 왔는데, 이제 또한 중국의 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무궁 무진한 중국의 잠재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신비한 땅으로 아무리 많이 방문을 한다해도 이 곳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박 물관 종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닉슨이 귀빈실에서 나올 때까지도 관광객들은 광장에 모여 있었다. 이미 그 곳에서 40여 분을 기다린 것이다. 닉슨은 다시 사람들에게 에워싸였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났 고 여기저기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신이 타야 할 승용차를 찾던 닉슨은 다른 한 쪽에서 영어로 인사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미국 관광객들도 그 자리에 모여들었다. 닉슨 대통령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겨우 승용차에 오를 수 있었다. 차가 천천히 움직 이기 시작하자 닉슨은 다소 흥분된 모습으로 문을 열고 사람들의 인사에 답했다. 살며시 눈 물이 그의 두 뺨에 흘러내렸다. 1972년 당시, 모택동 주석과 역사적인 악수를 한 뒤 미국으로 돌아온 닉슨 대통령은 자신 의 중국 방문과 행동에 대해 질책하는 미국의 양 당과 국민들 때문에 곤혹스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안목과 지혜를 가진 미국의 국무 총리 키신저는 닉슨이 이루어 낸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한 적이 있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공정하게 당신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역사가 바로 이러한 키신저의 결론을 입증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이바지한 닉슨의 공적은 모든 이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늙은 부인들과 일광욕하는 금발 미녀 여산 서유령 제2봉우리에 있는 노모전은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여와씨를 기념하기 위 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와는 "황토를 가지고 사람을 빚어"인류를 만들었으며, 여산에서 "오색의 돌을 빚어 푸른 하늘을 메우고, 자라 다리를 잘라 하늘을 떠받치는 네 기둥을 세웠 다."고 전해지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기념해 그녀를 '여산 노모'로 존칭했다. 그리고 그녀 가 돌을 빚었다는 서유령에 기념 사당을 지어 놓고 이를 노모전이라 일컬었다. 해마다 음력 6월 6일이 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녀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 가운데 가장 경건한 이들은 나이 많은 부인들로 거의 모든 이들이 각기 상차림을 준비해 여산에서 밤을 지새우며 향을 피우고 계속해서 절을 올린다. 이러한 풍속은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1990년 7월 어느 날, 열댓 명의 나이 많은 부인네들이 여산 노모를 참배하고 돌아오고 있 었다. 머리에는 예쁜 야생화가 꽂혀 있었고, 목에는 염주를 걸고 있었다.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용관에 들러 막 구경하러 들어가는 참이었다. 1호 전시관에 들어선 노인들 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땅에 무릎을 끓고 갱 안의 병마용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 다. 영문을 모르는 관광객들은 그저 멍하니 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안내원이 달려와 그들에게 물었다. "뭘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모르나? 신에게 절하는 거지." 관광객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은 신이 아니예요. 2천 년 전 사람들이 진흙으로 만든 병마용이지...." "2천 년 전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 그게 신이지 뭐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들은 계속 절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몇 명의 금발 미녀들이 전시관 앞 돌 계단 위에서 일광욕을 할 생각으로 옷을 벗고 있었다. 바지와 윗옷을 벗고 셔츠까지 벗어 버린 그녀들의 몸에는 분홍색 투명한 핫 팬티만 달랑 남았을 뿐이다. "여기서 일광욕하지." 작열하는 태양 빛에 실눈을 뜬 서양의 금발 미녀들은 중국 진용 박물관 돌계단에 전혀 거 리껌이 없이 몸을 기댔다. 그 때 절을 끝낸 노인들이 전시관 밖으로 나오면서 일광욕에 여념이 없는 반라의 여인들 과 마주치게 되었다. "에그머니나!" 맨 앞에 나오던 노인이 깜짝 놀라 다시 전시관 안으로 도망치듯 되돌아 들어갔다. 뒤에서 따라오던 일행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서너 걸음 앞으로 걸어나오다 다시 흰 피부의 벌거 벗은 여자들을 보고는 똑같이 놀라 소리치면서 전시관으로 되돌아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부인들을 한참을 쑥덕거리며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마침내 부 인들은 이 땅의 주인이자 나이를 더 먹은 어른으로서 따끔하게 충고를 해야 한다는 데 동의 하고 씩씩거리며 금발의 처녀들 앞에 나섰다. "어디에서 빌어먹던 것들인데, 감히 조상님들을 욕되게 하고 있어! 그러다가 벼락 맞을 라." 난데없는 고함 소리에 놀란 금발의 처녀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 저 눈만 말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무언가 자신들에게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 은 그녀들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서양인들을 격퇴했네!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 필자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서술해 보았다. 맹인들의 방문 1987년 여름, 20여 명의 외국인 맹인들이 단체로 진용 박물관을 참관하러 왔다. 박물관으 로서는 처음 맞이하는 맹인 손님이었다. 참관자들의 나이는 60세 이상으로 그 가운데 두 명은 이미 팔순이 넘어 있었다. 물론 간호를 책임진 10여 명의 여자들은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박물관 관원들은 모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열심히 이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1호갱 전시 실에서 안내원의 해설에 따라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는 흥분의 빛을 감추지 못했 다. 모든 참관자들 가운데 이마에 혹이 난 할머니가 가장 활달했는데 이 이마에 난 혹은 그 녀의 활달함의 표시로 북경 길거리에서 나무에 부딪혀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안내원의 설명이 끝나고 참관자들이 로비로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 유감의 빛이 역력했다. "어리석게도 한 마디 묻겠어요. 병마용을 한번 만져 볼 수는 없을까요?" 박물관 책임자는 생각 끝에 이 특수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최선의 만족을 안겨 주기로 했다. 그러나 1호 용갱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단 줄지어 서 있는 병마용갱 군진 속으로 20여 명의 맹인이 들어가면 그 뒷일은 가히 짐작할 만했던 것이다. 한 군데 안심할 수 있는 곳은 복원실로, 현재 복원중인 한 필의 도마와 도용이 있었으므로 갱 안에 배열된 병마용 군진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할 수 있었다. 20여 명의 맹인들이 부측을 받으며 복원실에 들어섰다. 안내원들은 도용의 머리를 그들의 손 위에 올려 주며 한 사람씩 만져 보도록 했다. 맹인들은 수척한 손으로 도마와 도용의 상 부를 조심스럽게 만져 보고는 거의 모두가 땅 위에 끓어 앉아 도용과 도마의 다리를 껴안았 다. "보았어, 모두 보았어..."팔순의 맹인이 말 다리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듯 소리쳤다. 진한 눈 물이 인생의 역정이 새겨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사용의 어깨를 잡고 이마를 도용의 가 슴에 기댄 이마에 혹이 난 할머니도 눈물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서러움을 당한 아이가 2천 년 전의 노인에게 자신의 인생의 불행을 토로하는 듯했다. 특이한 참관이 끝났다. 20여 명의 맹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박물관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 시했다. "우리들은 봤어요. 중국의 위대함과 중국인의 선량한 마음을 봤어요." 중국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맹인들의 이 가슴 절절한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맹인들이 영혼 으로 본 것들이 더욱 진실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애로 제약을 받아 왔던 사람들의 영혼은 무엇보다도 강하고 기민하기 때문에 무궁 무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생활의 세세한 부분조차도 그들의 민감한 정서를 감동시킬 수가 있다. 다른 이들의 언행을 통해 그들은 인간의 가치, 권리,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11 진시황릉 지하 궁전으 수수께끼 역사서의 기록 병마용 군진과 동거마의 출토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역사상의 기적에 감탄함과 동시에 진시황릉의 지하궁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병마용의 기적은 더욱 예측 불허의 신비함을 지녔을 진시황릉의 지하궁을 모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시황릉 지하궁의 구조와 형태에 대해서는 이미 중국 역사서에 적지 않은 기록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사마천의 '사기''진시황 보기'는 진시황릉의 건축과 지하 궁전의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이 처음 즉위해 여산에 치산 공사를 벌였다. 천하를 통일한 뒤 전국의 도형자(귀양 가는 사람)가 70여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시켜 지하수를 세 번 지날 만큼 깊이 파고, 구리 물을 붓고 관을 안치했다. 궁관과 백관, 기기와 진괴들을 운반해 그 곳에 가득 채웠다. 장인으로 하여금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 장치가 된 쇠뇌를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 으면 곧 그를 쏘도록 했다. 수은으로 온갖 하천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고 기계를 이용해 수은을 흐르게 했다. 위로 천문을 갖추고 아래로 지리를 구비했다. 인어의 기름으로 초를 만 들어 꺼지지 않도록 했다..... 대사(장례식)가 끝나고 부장품도 다 매장하자 묘도의 가운뎃문 을 폐쇠하고 또한 묘도의 바깥문을 내려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폐쇠하니 다시는 빠져 나오는 자가 없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최초로 언급된 뒤 진시황릉의 건축과 훼손, 그리고 지하궁의 형태에 관한 수많은 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어 '한서''유향전''수경주''위수''삼진기''삼보고사' 따위가 바로 그것인데, 그 기록들은 대부분 '사기'의 내용을 좀 더 발전시킨 것들이다. 반고 의 '한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을 여산의 언덕에 묻은 다음 아래로 세 번 지하수를 지날 만큼 깊이 파고 위로 삼 분(세 개의 봉분)을 높였는데, 그 높이가 50여 장(한장은 열 척)이고 사방으로 5리 남짓을 에워쌓았다. 둥근 돌로 유관을 삼고 인어로 등촉을 삼았으며, 수은으로 강물을 만들고 황금 으로 오리와 기러기를 만들었다. 항적(항우의 본명)이 그 궁실과 조형물을 불태우니 뒤를 따 르는 이들이 모두 그 나머지를 발굴했다. 이후에 목동이 그 곳에서 양을 길렀는데 양이 구 멍 속으로 들어가자 목동이 횃불을 들고 양을 찾으러 들어갔다가 진시황의 관곽을 불태우고 말았다. 북위 시대의 지리학자인 역도원이 쓴 '수경주'의 기록은 더욱 상세하다. 진시황이 죽자 크게 장사를 지내 여융의 산(여산의 다른 이름. 주나라 때 그 곳에 여융이 란 나라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에 묘소를 조영했다. 일명 남전이라 하는 곳인데, 그 여산 의 북쪽에는 금이 많고 남쪽에는 옥이 많아 시황제가 그 아름다운 이름을 탐내 그 곳에 묻 히게 된 것이다. 산의 허리를 자르고 돌을 파고 들어가 아래로 세 번씩이나 지하수를 지나 구리로 덧널을 만들었고, 주위 30여 리를 에워싸 위로 천문의 별자리 모양을 그렸으며 아래 로 수은을 흘려 사방의 하천으로 삼았다. 천하의 오악과 구주등 지리의 위세를 갖추고 궁관 과 백관, 기이한 기물과 진기한 보물로 그 안을 가득 채웠다. 분묘의 높이가 50장이었다. 항 우가 관중에 들어와 발굴하니 30만 명이 30일 동안 보물을 운반했는데도 다함이 없었다. 관 동의 도적들이 외관을 녹여 구리를 얻었다.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잘못해 지하궁을 불태웠는데, 그 불이 90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과는 달리 동한 시대 위굉은 사마천의 틀을 벗어나 다른 측면에서 진시황릉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가 쓴 '한구의'에 보면 승상 이사가 진시황에게 아뢰는 글이 기록되 어 있는데, 이는 진시황릉의 지하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승상 이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신이 부리는 노예 72만명으로 여산을 가꾸어 이미 그 깊이가 극에 달해 아무리 파도 들어가지 못하고 불태우고자 해도 태울 수 없으며, 두드리면 휑하니 비어 있으며, 마치 하늘의 형상의 내려온 듯합니다. 아무리 파도 들어갈 수 없고, 불태우고자 해도 태울 수 없으며, 그 깊이가 3백 장에 이른 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 이후에도 여러 문헌에서 진시황릉과 지하 궁전에 대한 묘사는 끊 이지 않았으며, 그 내용 또한 날로 늘어나 더욱 세세하고 복잡하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에 대한 기록이 차츰 늘어간 긴가민가할 정도로 신비감에 싸이게 된 것은 후세 사람 들의 상상력이 덧붙여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임동사화'라는 글에 보면, 진시황이 죽은 뒤 2세 황제 호해가 '사구의 음모'(진시황이 사 구평대에서 죽자 진시황의 유언장을 고쳐 호해를 태사자로 삼고 장자인 부소와 장군 몽념을 죽일 것을 명했다)가 발각되어 뭇 왕자들이 자신의 황제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진시황의 유지라고 속이고 여러 왕자들을 순장케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선제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이들을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모두 따라 죽게 하라."고 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러한 명령이 떨어지자 자식이 없는 비빈이나 궁녀들의 애 처로운 울음 소리가 궁전을 진동시켰을 것이다. '임동사화'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몰인정한 호해는 절망에 빠진 후궁들을 강제로 지하궁 깊은 곳으로 내몰았다. 후궁들 가 운데 어떤 이들은 어두운 지하궁에서 밟히기도 하고 놀라 혼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호해는 장인들에게 지하궁의 제 1관문을 봉쇄하도록 명했다. 물론 후 궁들은 어두운 지하 궁전에서 고스란히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장인들이 지하궁의 문을 봉쇄한 다음 여전히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운 호해는 공사가 끝나고 휴식을 취하면서 상금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노예와 장인들을 모두 지하궁에 가두고 마지막 지하궁의 문을 닫았다. 그들은 시황제의 순장품이 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지하궁에 갇힌 장인들 가운데 어떤 젊은 장인 한 명만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하궁 내부에서 밖으로 통하 는 수로를 직접 설계한 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물길을 따라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이 어떤 물길을 따라 탈출했는지, 또한 탈출한 다음에는 어디러 갔는지는 물론 전혀 알 수 없다. 항우가 관중에 들어와 진시화릉을 파헤쳤을 때 갑자기 황금 기러기 떼가 지하 궁전에서 날아올라 하늘에 가득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삼국 시대 오나라 보정 원 년(서기266년)에 현재 베트남의 광치성에 있는 일남에서 태수를 지내고 있던 장선에게 정교 하게 만들어진 금 기러기가 헌상되었다. 장선은 당시 금 기러기에 새겨진 명문을 보고 그것 이 진시황릉의 부장품일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고고학자인 장문립은 이미 춘추 전국 시대에 유명한 장인 노반이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나무 기러기를 만들어 송나라 성벽까지 날렸다는 기록에 근거해 이후 몇백 년이 지난 진나라는 충분히 황금 기러 기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장문립 또한 그것이 진시황릉에서 나온 것인지의 여부는 확답하지 않았다. 고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진시황릉에는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사람과 서로 장사를 할 수 있 는 지하 시장이 있어 상호 물건을 교역했다고 하는데, 과연 어떻게 물건을 사고 팔았으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었는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전설에 나오는 지하 시장과 엇비슷한 공간을 발견했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어 흥미를 더할 뿐이다. 진시황릉의 남쪽에 위치한 상진촌에 사는 70대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몇십 년 전 자신의 할아버지가 우물을 팔 때 지하에서 매끄러운 돌판을 발견해 동네 사람들과 힘과 합쳐 그것 을 들어올렸더니 그 속에서 아주 깊고 어두컴컴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고 한다. 젊은이 두 사람이 허리에 새끼를 묶고 횃불을 들고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들이 말하길, 지하 공간은 끝 이 안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큰데 내부에 돌로 만든 방이 있었으며, 그 안에 화려한 옷을 입은 미녀 몇 사람이 누워 있었고, 사방에 돌로 만든 등받이가 없는 의자나 보통 의자 따위 가 놓여 있었으며, 구리로 만든 기물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옥의 원혼 을 만날까 두려워 황급히 유황과 석회를 뿌려 입구를 막고 돌판을 다시 원상태로 옮긴 뒤에 흙을 덮었다고 한다. 이후 고고학자들이 그 노인의 안내로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58년 이후 몇 차례에 걸친 수리 사업과 농지 개량 사업으로 인해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 다.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그 지하 동굴 또한 진시황릉의 지하궁에 딸린 건축물로 황제의 오 락장이거나 전설에 나오는 시장과 같은 장소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며 진용이 출토된 이후 고고학자, 사학자, 지질학자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이 각각의 분야에 따라 10여 년 동안 과학적인 탐구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수수께끼가 서서히 풀림과 동시에 또 다른 질문과 곤혹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1년, 중국 사회 과학원 지질학자들은 현대 지구 물리학의 과학적 방법을 사용해 진시 황릉에 대해 두 차례 시험 탐사를 실시했다. 그들은 능의 봉토에 구멍을 뚫어 지하에 있는 흙의 견본을 채취하고 이에 대한 화학 성분을 분석한 결과, 토양의 수은 함량이 70-140ppb 였고, 가장 깊은 곳에서 채취한 흙은 280ppb의 수은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분명 진시황릉 봉토 전체가 대량으 수은으로 띠를 두루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질학자들은 본래부터 봉토 자체에 수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시황릉의 봉토에 관한 기록을 찾다가 역도원의 '수경주''위수'가 가 장 상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지(양어장, 연못)의 물은 여산의 동쪽에서 나오는데 본래 수원을 따라 동쪽으로 흘렀다. 이후 진시황이 여산의 북쪽에 안장되자 물은 여산을 돌아 흘러 동쪽에서 들어와 북쪽에서 물줄기를 틀었다. 진시황이 능을 조성하면서 흙을 이용하니 그 땅은 깊은 진흙땅이 되고 물 이 고이면서 못이 되었다. 그래서 이를 일러 '어지'라고 했다. '수경주'의 기록은 우리들에게 여산의 샘물은 본래 북쪽으로 흘렀는데 진시황이 긴 둑을 조성하면서 샘물 또한 북쪽에서 꺾여 동쪽을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지금 진시 황릉에서 남쪽으로 약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길이 약 1500미터, 높이 10미터의 긴 둑의 흔 적이 남아 있다. '수경주'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릉은 바로 이 어지의 흙을 사용해 봉토를 만든 셈이 된다. 현재 진시황릉에서 북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양어장은 하나의 구덩이로 전체 용적은 진시황릉의 봉토의 부피를 훨씬 넘어선다. 1982년 5월, 지질학자들이 또다시 진시황릉을 찾아왔다. 그리고 어지촌의 구덩이 속에서 토양을 채취해 성분 검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어지촌의 구덩이에 있는 토양의 수은 함량은 평균 35ppb로 진시황릉의 봉토에 함유된 수은량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만약에 역도원의 기 록이 사실이라면, 시험 결과는 본래 어지촌의 토양은 수은 함량이 거의 없었으며 이후 진시 황릉이 조성된 뒤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진시황릉 지하 궁전 안에 있는 수은이 흙에 스며든 결과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사기'에서 진시황릉의 지하궁은 "수은으로 온갖 하천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고 기계를 이용해 흐르게 했다."고 기록한 것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진시황릉에 대한 오랜 조사를 통해 사료에 기록된 내용들에 대해 날 이 갈수록 의혹을 품게 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반고가 쓴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항우가 진시황릉에 들어가 "그 궁실과 조형물을 불태우 니 뒤를 따르는 이들이 그 나머지를 모두 발굴했다."고 했다. 이후 지리학자 역도원은 반고 의 기록에 더 보태, "항우가 관중에 들어와 발굴하니 30만 명이 30일 동안 보물을 운반했는 데도 다함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반고나 역도원의 역사상의 지위나 그 영향력을 생각할 때, 후세 사람들은 그들의 서술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량의 실 물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고 과학적으로 분석되면서 기존 역사서에 적힌 기록들에 대한 회의 와 아울러 그 허점이 하나둘씩 파헤쳐지고 있다. 오랜 시간 진시황릉에서 시굴을 책임져 온 고고학자 정학화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진시황릉 지하궁의 봉토는 부분적인 지반 침하 현상도 보이지 않고, 판축(흙을 다 지면서 높이 쌓아 올라가는 토목 공법)으로 굳혀진 지층 또한 커다란 변화는 보이지 않는 다. 또한 지금까지 봉토와 전체에서 발견된 도굴 구멍은 2개인데 그나마 지름 1미터 이하, 깊이는 겨우 9미터의 소규모다. 더군다나 이 두 곳 모두 지하궁을 파헤치고 그 위에 불을 질렀다면, 어째서 지표에 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까? "반고는 그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기록한 것 같고, 역도원 또한 생각나는 대로 적은 듯 하다. 그리하여 우리 고고학자들은 더욱 미로로 빠져들 뿐이다." 정학화는 이처럼 기존의 역 사 기록에 대해 심하게 비판하면서 이를 부정했다. 사실 필법에 엄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사마천의 경우, 항우의 진시황릉 분소 사건은 단지 유방과 항우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유방 이 항우를 비판하면서 "항우는 진의 궁전을 불태우고 황제의 무덤을 도굴해 그 재물을 약탈 했다."고 한말을 적었을 뿐 그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한 적이 없다. 이에 반 해 '사기'보다 훤씬 늦게 쓰여진 '한서'나 '수경주'는 오히려 항우의 도굴과 방화를 마치 자신 이 목격한 것처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또한 항우가 도굴한 뒤 방화했다는 사실을 의심케 만드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진시황릉 고고학 팀의 장점민 부대장도 오랜 연구를 통해 정학화 선생과 동일한 결 론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반고와 역도원의 서술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 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만약 항우가 지하궁을 불태웠다고 한다면, 내부의 건축물이나 관곽 또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관곽 안에 있을 시황제의 유 골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가? 함께 불태워 버렸는지 아니면 난도질을 해 가루로 만들었는지? 항우의 성격이나 복수심으로 볼 때, 만약에 시황제의 유골이 발견되었 다면 단지 지하궁만을 불태울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항우가 다급한 가운데 불을 지르면서 시황제의 관곽과 그 안에 있던 유골을 포함한 지하궁 전부를 불태웠다고 한다면, 이후 목동의 과실로 시황제의 관이 불태워졌다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다. 설사 이와는 반대로 항우가 지하궁을 불태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목동 이 횃불 하나로 지하궁 내부 깊은 곳까지 들어가 지하 몇십 미터에 매장된 관을 불태웠다는 것은 상식면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지하궁은 본래 밀폐된 곳이었기 때문에 산소가 결 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은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설사 목동이 지하궁으로 들 어 갔다고 할지라도 시황제의 관에 다가서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서'의 기록은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발굴된 지하궁 주변의 부장품을 보면, 서쪽 묘도의 곁방에 해당하는 곳에서 완전한 형태의 동거마 2쌍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을 넣은 목조 겉널은 전혀 불탄 흔적이 없이 자 연스럽게 부패된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북쪽 묘도의 곁방 또한 중요한 부장품들이 일부 보 존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만약 진시황릉의 지하궁을 정말로 항우의 30만 대군이 도굴하고 방화했다면, 이 부장품들이 그처럼 완전한 상태로 보전될 수 없었을 것이고 하필 더욱 깊이 매장된 지하궁의 보물만을 모두 도굴해 갔는가에 대해서 전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미 도굴된 상태라면 내부의 수은은 이미 그 옛날에 증발해 현재처럼 진 시황릉의 봉토와 그 지하 토양에서 많은 함량의 수은이 검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지금까지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추론해 볼 때, 진시황릉의 지하궁은 분명 대규모 약탈 따위 로 훼손된 적이 없으며 또한 불태워진 적도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서'에서 항우가 진시황릉을 분소시켰다고 기록하고, 아울러 목동이 능원의 일부에 실수 로 화재를 일으켜 능원의 건축물이 불탔다고 적은 것은 모두 지하궁의 화재와 연결된다. 이 는 반고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적은 것에 불과하다. 진시황릉의 분소하는 문제에 대해 그는 신중하지도 또한 엄정하지도 못했다. 이는 그의 학문 태도가 옳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그런데도 반고를 숭배했던 역도원은 오히려 제멋대로 사실을 날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 의 상상에 가까운 역도원은 서술은 단순히 진시황릉의 분소와 도굴의 문제뿐만 아니라 진 시황릉에 관한 그 밖의 기록에서도 여전히 억측과 가공을 일삼아 역사의 본래 면도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진시황이 능의 터를 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여산에 잡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시황이 죽자 크게 장사를 지내 여산에 묘소를 조영했다. 일명 남전이라 하는 곳인데, 그 여산의 북쪽에는 금이 많고 남쪽에는 옥이 많아 시황제가 그 아름다운 이름을 탐내 그 곳에 묻히게 되었다." 생각건대 진시황이 자신의 능을 선택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13세였다. 어려서부터 궁정에 서 자라 세상 물정에 익숙할 리 없던 그가 여산의 한 구석에 황금이나 옥이 많다는 것을 어 찌 알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몇 년 동안 지질학자들이 진시황릉 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조 사한 결과 대량의 금은커녕 진흙이나 모래에 섞인 사금도 거의 미미할 정도라는 것이 밝혀 졌다. 결국 '여산의 북쪽에 금이 많다.'는 역도원의 발언은 의혹과 회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 분하다. 게다가 당시 진시황의 능묘 위치를 선택하는 국가적 대사에 조정의 문무 신료들이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국왕 한 사람의 말에 아무런 의견 개진 없이 전격 동의 했다는 것 또 한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역도원의 견해는 거의 의심 없이 1천여 년 동안 받아들 여졌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장문립, 장점민을 비롯한 사학자들을 통해 번복되 고 새롭게 역사의 실제와 부합하는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다. 진시황릉 여산의 한 구석에 자리잡게 된 원인 가운데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진나라의 수도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전함에 따라 정치, 문화의 중심 또한 동쪽으로 옮겨 갔고, 진 왕의 능묘 지역 또한 자연스럽게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고대에는 왕족의 장지를 지극히 중시해 나라의 수도 부근에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었 다. 진나라가 옹성에 도읍을 정했을 때는 진공의 묘지가 대부분 옹성 부근이었다. 1986년 고 고학자들이 발굴한 진공 1호 대묘는 바로 이러한 장례 역사를 실증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진나라의 수도가 옹성에서 동쪽으로 옮겨 간 뒤에는 진나라 왕이나 왕족의 묘지 또한 동쪽 으로 옮겨지기 시작해, 함양에서 임동현 한욕향 부근까지 늘어서게 되었다. 근년에 고고학 탐사 결과 이 일대에서 진나라 때의 대형 묘소 및 기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그 좋은 증거 라 할 수 있다. 진시황제도 이처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연장선상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한 것이다.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보면, 그의 능묘 서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 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의 부친인 양왕의 능묘다. 진시황릉이 여산을 매장지로 정한 원인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풍수 관념의 영향 때문이 다. 진시황릉은 오른쪽으로 푸르고 빼어난 여산을 기대고 있고, 왼쪽으로 호탕한 위수를 끼 고 있다. 또한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마주해 천혜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진시황의 능원은 조상의 능묘가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어져 만년에는 동쪽에 거한다는 나름 의 사상에 부합되는 한편, 산에 기대 능묘를 조성함으로써 풍수의 관념을 정확하게 반영하 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역도원의 황금과 옥에 대한 언급은 그릇된 상상력일 뿐이다. 현대의 연구 성과 1966년, 아일랜드의 보인 강에서 북쪽으로 1,2 킬로미터 떨어진 낮은 구릉지대에서 거대한 능묘가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고 조사한 결과 이 능묘는 기원전3150년 무렵에 만 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 유명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5백 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이 아일랜드의 고대 능묘(뉴그레인지)는 세계 많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마이클 오켈리는 능묘에 대해 자세하게 탐사한 끝에 의외의 발견을 했 다. 능묘의 대문 위쪽에 돌 하나가 직사각형의 창문을 가리고 있는데, 이 창문은 반쯤 열려 진 상태이고 그 돌은 이동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특이한 창문에 흥미가 생긴 그 는 고심 끝에 이 창문이 어떤 천문 현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 창문이 하나의 관찰 구멍이라면 어떤 특정한 시간에 모종의 독특한 천문 현상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천문학 연산을 꾀했으며, 마침내 이것이 고대인들이 동지의 햇빛을 관측하는 독특한 설비라는 사실 을 확인했다. 1967년 동짓날 새벽, 오켈리는 혼자서 능묘에 갔다. 태양이 지평선에 떠오르는 순간 그는 찬란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능묘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태양이 하 늘 높이 떠오름에 따라 능묘를 비추던 광선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더욱 강한 빛이 되어 능 묘 안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는 강렬한 태양 광선 속에세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바 로 동짓날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각이었다. 몇 분 뒤 태양은 계속 높이 떠올랐고, 햇빛도 창 문을 통해 서서히 이동하면서 능묘는 다시 신비한 암흑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오켈리의 발견은 고대 능묘 자체에 대한 발견과 마찬가지로 서방 역사학계와 고고학계, 그리고 천문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느 5천 년 전 인류가 이미 동지가 다가오는 시각을 정확하게 관측하고 판정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력과 비범한 지혜를 가졌다는 점을 발견해 냈다. 이는 고대 인류 문명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물론 이 분묘와 창문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와 그에 따른 새로운 발견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인간과 천체의 관련성 가운데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욱 놀라운 발견은 몇 기의 능묘와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천체와 고대 인류의 밀접한 관련을 설명하는 그림이 다.1960년대 초,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서한 시대 벽화묘인 성상도, 서안 교통 대학 교내에 있는 서한 시대 벽화 묘인 28수성도, 그리고 호북성 수현에서 발견된 전국 시대 초기의 증 후 을묘에서 발굴된 아치 형의 칠기 덮개에 그려진 성상도. 이것이 바로 더욱 놀라운 발견 의 실체였다. 낙양과 서안과 교통 대학 캠퍼스 안에서 발견된 서한 시대의 묘는 주실의 천장 부분과 사 면의 벽에 모두 여러 자지 색채로 현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내용은 정확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위쪽은 하늘을 의미하고 아래쪽은 산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늘을 대표하는 태양, 달, 구름 그리고 하늘을 날아가는 각기 다른 형태의 선학들뿐만 아니 라, 가장 놀라운 그림은 청, 백, 흑색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동심원으로 이 동심원 안에는 80여 개의 별이 그려져 있었다. 고고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것은 중국 고대 천 문에 나오는 28수성도(옛날 천문학에서 하늘을 4궁으로 나누고 다시 각 궁마다 일곱 성수로 나누어 전체 28개를 그린 그림)임이 밝혀졌다. 전국 시대 초기 것인 증후 을묘에서 발굴된 아치 형 칠기 덮개 위에 그려진 성상도부터 서한 시대 고분 벽화에 그려진 성상도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기 때문 에 그 사이에 전후 맥락을 잇는 또 다른 능묘의 성상도가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묘의 기원은 언제이고, 그 주인은 또한 누가 될 것인가? 1965년, 하내 선생은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추정을 내린 바 있다. 고대 분묘의 벽에 천문의 그림을 배치한 것은 그 기원을 진나라 때로 추정할 수 있다. '사 기''진시황 본기'에 보면 "진시황의 능묘는 위로 천문을 갖추고, 아래로 지리를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분명 능실 천장 부분에는 해, 달, 별의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새겨져 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임동현 진시황릉 내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고학자이자 진용박물관 관장인 유우휘 선생 또한 하내 선생의 이같은 견해에 동의하면 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한 진시황릉 지하 궁전에 대한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무엇보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와 그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 록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 출토된 실물과 자료들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 갑골문 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적지 않은 이들이 '사기'에 나오는 은나라 왕족에 대한 세세한 기록에 대해 회의를 표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은허에서 갑골문이 출토됨에 따라 이러 한 기록이 모두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사마천의 가계도 그의 역사 기록이 나름의 신빙성이 있음을 보증하는 좋은 근거다. 사마천의 선조들 가운데는 많은 이들이 진나라의 신료 출신 이고, 그의 부친 사마담 또한 한나라의 태사령이라는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진시황 지하 궁전의 구조는 물론 극비에 속한 것이었겠지만 당시 진나라 궁정에는 당대의 일이기 때문에 분명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구의'에 보면,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이 '장정(조목별로 정한 규정)'에 따라 건축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장정이라는 것이 이 른바 시공을 위한 설계 도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때, 분명 진나라 궁정에는 그 기록이나 도면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나의 좋은 예로 중산국 국왕인 유승의 능묘 안에서도 장정과 유사한 설계 도면이 출토된 바 있다. 유방의 대군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공략했을 때, 유방은 휘하의 장군 소하에게 "진나라 의 승상과 어사가 숨기라고 명령한 도서"를 거두어들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적지 않은 도 서가 회수되었다면 분명 한나라 왕조의 주요 관료들은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구조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마담은 당시에 기밀에 속한 이러한 사료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사마천은 이러한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기'를 저술했으므로 자연 히 여러 기밀 사료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으니라 여겨진다.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사기'에 적혀 있는 진시황릉 지하 궁전에 대한 기록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 각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후대 사람들이 지하 궁전의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현재까지 장기간에 걸쳐 진시황릉에 관 해 탐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정학화 선생의 자료에 따르면, 진시황릉 봉토 아래의 지하 궁 전은 동서 너비 485미터, 남북 길이 515미터로 총면적은 25만 제곱 미터라는 것이 판명되었 다.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지하 궁전은 세계에서 그것에 필적할 만한 유적을 찾아볼 수 없 는 유일 무이한 것이다. 현대 과학 기술의 한계로 말미암아 진시황릉 지하 궁전은 그 깊이를 아직까지 정확하게 산출할 수 없는 형편이다. 현재 진시황릉 지하 궁전은 낙양 삽을 이용해 겨우 지하 26미터 깊이까지 밝혀졌는데, 분석을 한 결과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달구질을 해 만들어 놓은 토 층이라는 사실뿐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세 개의 지하수를 지나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데, 이는 세 군데 지하수를 통과했다는 말로 해석된다. 진시황릉 부근의 수자원에 관한 자료 에 따르면 제 1층의 지하수는 지면에서 16미터이며, 제2층과 제3층의 깊이는 아직 측정되지 않았다. 설사 측정을 해낼 수 있다 해도 2천 년 전의 것과 현재의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 이기 때문에 지하수의 위치를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깊이를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을 것이 다. 비록 상황이 이렇기는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관련 자료에 따라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깊이 에 대해 꽤 실제에 가까운 여러 추측을 하고 있다. 여러 추측 자료 가운데 원중일 선생의 것이 가장 얕은데, 그가 추론해 낸 결과에 따르면 지하 궁전의 깊이는 24미터 정도이며 이 보다 더 깊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밖에 유운회 선생은 최소한 50미터 정도일 것 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다음 진시황릉 지하 궁전이 "세 군데 지하수를 지나쳐"건설되었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 로 끝없이 흐르는 지하수를 막아 냈을까? 어떤 학자는 '사기'에서 "구리 물을 붓고 그 곳에 관을 안치했다."고 한 것이나 '한구의'에서 "구리물을 부어 지하수를 끊고 문석으로 막은 다 음 단칠을 했다."고 한 기록에 근거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은 구리물을 부은 뒤 문석으로 막고 다시 도색을 한 다음에 단약을 발라 완전히 밀폐시 켰기 때문에 지하수가 궁전 안으로 새어들 수 없었다. 이러한 추론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방법으로 지하 궁전 내부의 침 수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회의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민간에 떠돌던 이야기, 곧 지하 궁전이 완전히 봉쇄되어 그 곳에 갇힌 왕자, 공주, 그리고 장인들 가운데 지하 수로를 설계했던 한 젊은 장인만이 바로 그 수로를 통해 탈출해 간신히 살 수 있었다는 바로 그 이야기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80년대 말, 섬서성의 지하 광물국 기술자인 손가춘은 진시황릉에서 북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진나라 때의 연못에 대해 자못 진지한 연구를 했다. 그는 그 결과 역도원이 '수경주' 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 당시 이 곳에서 봉분을 쌓기 위한 흙을 구하느라 결국 연못이 만들 어지게 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 연못을 만든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 하 궁전의 배수관에서 물이 나오는 지점을 엄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 이 제기되자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 이론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수자원 문제 전 문 연구원인 소우정이 연못에 대한 탐사를 시작했다. 옛날 연못처럼 물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연못 밑바닥에 뿌리를 대고 자랐던 연꽃이나 갈대는 분명 어떤 실마리를 주기에 충분했다. 탐사를 시작하면서 그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큰 길 양쪽과 사하 의 북동쪽 삼각 지대의 갈대 숲에서 혼탁한 사하의 물과 전혀 다른 맑은 물이 흘러 나오는 수로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마침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에게 물어 보았다. 그 여인의 말에 따르면 그 용수로의 수원은 갈대 숲에 위치한 창수천으로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 다. 그는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그 지역의 농민에게 현지 수원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 농민은 연못 유적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삽만 파도 물이 나옵니다." 소우정은 정확하게 계산해, "배수관의 한계 때문에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가장 낮은 부분 의 표고는 연못 중심의 표고인 430미터보다 절대 높지 않다. 따라서 지면 아래 40-50미터 사이이며 깊어도 55미터를 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창수천'이 지하 궁전의 배수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확실히 흥미 있는 문제이기는 하다."는 식으로 모호 하게 말하면서 정확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물론 진시황이 매장되고, 능묘에 강힌 어떤 젊 은 장인이 이 배수관을 따라 '창수천'으로 올라왔는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결론을 내리는 이 가 없었다. 수수께끼의 해명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진시황릉은 중국에 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자들을 세계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중국 학자들의 지하 궁전에 대한 분석이나 추론은 오히려 실제 상황 속에세 제약을 받는 경 우가 있다. 그러나 해외 학자들은 좀더 개방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 대담하고 다양 한 논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의 진시황 병마용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절정에 이르러 있던 1978년 4월,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상상도를 발표했다. 또한 스위스 제네 바에 위치한 유럽 핵 연구 센터의 세 명의 과학자들은 1984년 10월에 출판된 '토크'제 9집에 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우리들은 여러 분야의 종사자로 구성된 연구 팀을 구성해 기존의 물리적 발굴 방식이 아 닌 최신 비파괴 기술을 사용해 중국 서안의 여산에 위치한 진시황릉을 탐사할 것을 제안합 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유도 코일과 발전기를 도입해 지표에서 몇 군데의 특정 부분에 구멍을 뚫은 뒤, 이 부분과 여산 위에 자장의를 비롯한 전자 장치를 설치하는 것입 니다. 이러한 방법이 가지는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규모의 발굴을 실시할 필요 없이 지표 에 지름 20센티미터의 구멍을 뚫고 이를 통해 플라스틱 관을 연결하면 불필요한 훼손을 막 을 수 있습니다. 이러 방법을 통해 진시황릉의 실제 위치, 능묘의 깊이와 체적과 규모를 파 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 세 명의 과학자들은 1985 년 1월 25일에 출판된 '토크'잡지에서 다시 '고고학에 응용되는 비파괴 탐사와 단층 분석 엑 스선 촬영학'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실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발굴을 통하지 않고 지하에 매장된 보물을 탐지할 수는 없는가라는 몽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몽상은 결국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물리학자가 전 학과 자학을 결합해 지구, 금속, 인체를 투시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 그 뒤 과학자들은 더욱 나은 방법으로 지하 광물을 찾고 병을 진단했으니 이것이 바로 엑스선 단층 촬영이다. 그 응용 범위는 매우 광범위해서 만약 이를 고고학 분야에 응용한다면 유물의 표본이 없다 고 할지라도 고고학 종사들에게 고대 유적과 매장 유물의 정확한 위치와 자세한 자료를 제 공할 수 있다. 진시황릉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 가운데 하나다. 비록 문헌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 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사적과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만도 기본적인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능묘 내에 대량의 청동 구조물, 곧 묘실을 에워싸고 있는 청동 벽이나 청동 기둥, 그리고 아치 형 천장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료에 따르면 능묘에 는 청동으로 주조된 4개의 고리 형태의 구조가 있는데 그 중 3개는 지하수를 막는 데 쓰였 고 다른 하나는 묘실 자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청동의 중량은 거의 1천 톤에 이를 것이다. 진시황의 지하 궁전과 유물에서 우리는 최신의 비파괴 탐사 방법을 통해 고리 형태의 청 동물에서 나오는 전류를 감지해 낼 수 있다. 우리는 다음 두 단계에 따라 진시황릉에 대한 비파괴 탐사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능묘 지하 궁전 구조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여산 부근에 지름 20센티미터의 구 멍을 파고, 시험을 통해 얻어낸 수치에 따라 지하 궁전의 모형도를 제작한다. 둘째, 엑스선 단층 촬영을 통해 지하 궁전 내부의 매장물을 탐사해 고고학 발굴팀에게 중 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우리들은 고성능 물리 실험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큰 지구 물리학적 장치를 설계할 것이 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진시황릉을 그 예로 삼아 위에서 말한 이론을 검증 할 수 있다. 지면 위의 능묘를 그 물리학적 형상면에서 살펴보면 그 깊이가 적어도 지하 500-1500미터에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하 궁전에 있는 고리 형태의 청동물이 지름 25미터일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이 러한 각각의 청동물은 그들 아래에 위치한 능묘에 전사장을 형성함으로써 그 내부에 매장된 물체를 탐색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과학 탐사 팀을 결성해 현대의 비파괴 기술로 진시황릉을 탐색하는 것은 기술과 역사라는 두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중국 과학원이 이 방법에 대한 허가를 내주기를 희망한다. 중국의 고고학자, 지질학자, 지리학자와 함께 이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싶다. 우리들은 현장 에 들어가 이 전자 감응과 음파 설비로 진시황릉을 탐사하기를 희망한다. 작업이 끝난 뒤, 탐사 구멍을 메우면 현장은 원래대로 복원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구사이 허락된다면 우리 는 상세한 기술적인 부분의 건의문을 작성할 것이다. 이들 세 과학자의 건의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국 과학원은 여러 이유를 들어 허 가해 줄 수 없음을 통보했다. 이에 따라 물론 비파괴 탐사나 엑스선 단층 촬영도 실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수수께끼가 풀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 며, 또한 그 날이 결코 멀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있다. 12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 귀중한 유산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 유물이란 인류가 남긴 자연 또는 사회 활동의 자취로, 그것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간 에, 또한 선진적이든 낙후되었든 간에, 또는 대중을 위한 것이든 제왕이나 귀족을 위한 것이 든 간에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서 한 민족의 생존과 번식, 투쟁과 발전, 그 민족의 사상과 과학 수준을 드러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라는 오랜 노정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에 대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지만, 그 어떤 역사를 반영하는 유물의 가치는 사람들이 역 사에 대해 내리는 평가에 영향이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 민족과 그리고 전 인류가 보호, 연구, 이용해야 하는 진귀한 역사적 보물이다. 중국 왕조의 역사에 혜성처럼 나타나 처음으로 전국을 통일했던 진 제국은 전란 등의 원 인으로 그리 많은 문자 기록이나 실물 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의 풍진 속에 그 역사는 차츰 더 희미해져만 갔다. 진시황릉 병마용, 동거마, 마구갱,희귀 동물갱의 발견과 발 굴, 또한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비밀에 대한 탐색 작업은 이러한 역사의 공백을 보충해 주 었다. 또한 각기 다른 측면에서 중국 민족의 정신 면모를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소박하 면서도 생동적인 도기 문화, 장대한 청동 문화, 전대 미문의 야금 기술, 탁월한 전차의 포진 들은 모두 진대 역사의 경전과도 같은 것이다. 출토된 문물은 모두 고대 선조들의 빛나는 지혜와 창조력의 결정체이며 유구한 중국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여러 민족과 문 화를 처음으로 통일한 대제국의 입체적이고 완전한 상징이기도 하다. 2천여 년 동안 매장되 었다가 출토된 유물은 민족의 단결과 국가의 통일을 보호, 유지해 주는 데에서 크나큰 호소 력과 응집력을 가지며 그 밖의 정신이나 물질로 대신할 수 없는 고리 역할을 해 주었다. 이 와 동시에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의미와 신비하기 그지없는 기운 은 이미 다른 민족이나 국가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 재보가 된 셈이다. 진시황릉 유물에 대한 17년 동안의 발굴과 보호 작업을 돌이켜보면 고고학 팀들과 관리자 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또한 진용 박물관의 방명록만을 살펴보더라도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이 곳을 찾은 방문객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발굴과 관리 과정에서 생긴 결함을 은폐할 수는 없다. 유물의 귀 중함과 더불어 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중국의 야외 고고학 발굴 작업은 세계의 수준과 비교해 볼 때 다소 낙후되었다는 점을 숨길 수 없다. 당연히 그로 인한 결함도 나타나기 마 련이다. 병마용 발굴 초기에 중국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소장이자 유명한 고고학자인 하내 선생은 발굴 작업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병마용을 어떻게 농민이 감자를 캐내 듯이 발굴한단 말인가? 이를 복원하면서도 체를 사용하거나 솔로 벅벅 문질로대고 게다가 물로 흙을 쓸어 내다니... 이건 고고학의 방법과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내 선생은 직접 현장을 찾은 적이 없으므로 그가 진용 발굴이나 복원에 대해 들은 소식 이 조금 과장된 감도 없지 않겠지만 이러 말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 러한 발언을 했던 당시까지 어떤 부분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발굴이나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 기 때문이다. 1978년 말, 진용 공사 현장에서는 발굴과 복원, 박물관 건설, 대외 개방 준비가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고학 팀을 제외하고 현장에는 군인, 농민, 실습 나온 학생들까지 한몫 거들고 있었다. 어떤 농민은 오전에는 곡괭이를, 오후에는 진용갱으로 와서 발굴용 삽을 들 어야 했다. 고고학 지식과 유물의 가치에 관해 전혀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도용은 자연히 밭에서 캐 먹는 감자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많은 도용들이 그들이 힘껏 내려치는 삽 앞에 머리, 코, 어깨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또한 넓게 파헤쳐 놓은 진용갱은 폭우에 대처 할 방 법이 없어 나무로 만든 전차나 도용, 도마의 채색이 모두 빗물에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봄, 하내 선생은 전문가와 학자 1백여 명을 이끌고 진용 발굴 현장에 나타나 발굴 과정에서 나타난 결함과 실수를 뼈아프게 지적했다. 진시황 병마용의 발굴 작업은 잠시 정 지되었다. 이어서 국무원, 국가 문물국과 섬서성 문물국, 고고학 연구소에서 파견한 전문가 들이 직접 발굴 현장으로 와서 조사,연구를 실시했다. 또한 실제 작업자들과 함께 발굴 과정 에서 생긴 실수를 전체적으로 반성하고 새로운 과학전 고고학 발굴 방법을 제정했다. 이에 다시 새롭게 병마용의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진시황 병 마용의 발굴은 다시 "발굴, 정지, 발굴"이 반복되었다. 지금까지 전체가 발굴되고 복원이 완 결된 3호갱을 제외하고는 1호갱의 대부분과 2호갱은 시굴 뒤 다시 메워졌다. 1호갱에서 정 식으로 발굴되고 복원된 도용과 도마는 전체 용갱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또한 2호갱은 정 식으로 발굴되지도 않았다. 현재 외부에 공개되고 있는 것은 3호갱과 1호갱의 극히 소량의 병마용이며, 2호갱은 아직 개방하지 않은 채, 8천개의 병마용 대부분이 잠시 세상에 자태를 비친 뒤 다시 황토 속에 매장되었다. 그 웅장한 군진과 오묘하기 그지없는 군사 전략, 절세 의 예술품에 대한 감상의 기회가 여전히 막혀 있다. 비록 이렇게 많은 유감을 남기고는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드시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유물에게 불행한 상황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 몇십 년 동안 발굴된 유적이나 능묘에 서 볼 수 있듯이, 유물의 훼손은 비극적인 일이다. 1958년 정부가 계획해서 주체적으로 발굴 한 명대의 정릉에서 출토된 몇백 필의 방직, 자수 예술품은 거의 파손되고 변질되었다. 또한 정릉 지하 궁전에서 출토된 3구의 유골 또한 '문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60년대 초, 주은래 총리가 섬서성을 시찰하러 왔을 당시 섬서성 정부는 당대 건릉과 기타 제왕의 묘를 발굴하고자 하는 계획을 내놓은 적이 있었으나 허가를 받지 못했다. 주은 래 총리는 정릉의 자수, 방직품이 훼손 되었던 사실을 들어 허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 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중국은 출토한 유물을 훼손되지 않게 하고 과학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조상이 물려 주신 유산은 몇 년 동안은 더 토지의 신께 보호를 부 탁드립시다. 그런데 진시황 병마용은 이미 토지신의 비호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이 진나라의 대군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유물이 필요로 하는 요구를 들어 주기에는 아직 역부족 이었다. 이 때문에 빚어진 실수와 결함, 우려와 탄식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웅장한 1호갱의 병마용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아치 모양의 전시실은 그 건축 양식면에 서 도용 못지 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그러나 설계에서 시간과 자금과 재료의 부족, 운송의 곤란함 같은 인위적인 요인과 자연적 원인의 결합으로 이 전시실의 결함은 이제 복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관광객들이 1호갱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것은 아래쪽의 직사각형의 용갱으로 당시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긴 통로가 이제는 전시실 벽 밑에 매몰되어 더 이상 복구할 방법 이 없다. 이는 병마용 군진 배치의 예술성과 놀라운 군사 전략의 일면을 반감시켜 버렸다. 또한 복원 전문가 장지군 선생이 전시실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눈이나 비 따위의 이상 기후 에 따라 갱 내부의 습도가 상대적으로 상승하여, 정상 날씨에도 햇볕 때문에 갱 안의 온도 가 2시간 사이에 7도나 올라가고 습도는 오히려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습도와 온 도가 변화해 갱 안에 있는 진용 표면의 채색 무늬 그림에 손상을 주고, 특히 복원할 때 파 편을 붙이기 위해 사용했던 화학 접착제가 도용을 크게 손상 시켜 오히려 수명을 단축시키 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시실의 건축 구조는 지하 4.5미터로 전체 넓이가 비교적 좁은 3호 용갱의 경우 그 온도와 습도의 차이가 한층 선명해 손상도 더욱 심각하다고 했다. 복원 작업을 통해 다시 제 위치를 찾은 병마용의 경우에 몇 차례 예상 밖의 붕괴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결과가 빚어진 것은 도용에 대해 어떤 붕괴 예방 조치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붕괴로 인해서 일차 복원되었던 완전한 도용들이 다시 조각 나 버렸다. 부서진 파 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공 복원을 위해 단절면에 사용했던 화학 접착제다. 이런 절단면 에서는 마땅히 사용했어야할 금속제 연접 강화 부품이나 복원에 사용해야 하는 효과적인 물 질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단 한 번 복원된 적이 있었던 도용이 붕괴하게 되면 다 시 파편 조각이 될 것은 뻔한 결과였다. 진용갱의 토질은 황사가 주성분으로 보호 전문가의 시험 결과, 황사 토질의 경우 건조하 면 부피가 30퍼센트 정도 감소된다고 한다. 햇볕 때문에 용갱 안에 있는 흙으로 다져 만든 벽은 이미 수축되어 균열이 발생한 데다가, 여산 자락의 농민들이 돌을 캐기 위해 폭파 작 업을 했기 때문에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진용갱에서도 사람들이 진도 3의 지진에 해당하는 미세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용갱의 흙벽에 균열이 생기고 이것이 번져 수시 로 도용이 매몰될 위험에 처했다. 1호갱에는 갱 중앙을 관통하는 거대한 균열이 생겼는데 이는 이미 전시실 담 밑을 타고 전시실 외부까지 뻗어 나가 아치 모양의 건축물을 위협하고 있다. 비록 오영기 선생을 중심으로 한 복원 전문가들이 강철 틀로 벽을 지탱시켜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고는 있지만 이런 방법으로 이 흙벽이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병마용의 얼굴 채색의 변질, 온도 로 인한 병마용의 부식 문제, 지진에 따른 병마용과 박물관의 안전 문제 등등 끊임없이 문 제가 제기되고 있다. 시멘트가 응고된 정도의 강도를 가진 도용은 2천 년 동안 매장되어 있 으면서도 변질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출토된 지 10여 년 밖에 안 돼 어떤 도용은 몸 전체에 푸른 곰팡이가 나타났으며 금속 재질의 병기 또한 산화해 가고 있다. 청동은 일단 산소에 접촉되면 구리 산화물이 되기 때문에 본래의 형태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진용의 보호는 이미 촌각을 다투는 문제가 되었다. 진용의 훼손에 대해 관리자들은 이 모 든 문제를 해결할 처방을 빠른 시일 내에 찾아 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시간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 진용관 앞에서 발생한 대폭파 사건 1991년 3월 20일, 임동현 공안국에서는 성,시 공안 기관에 다급하게 보고서 한 부를 올렸 다. 이 보고서에는 진용관 부근에서 발생한 폭파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폭파 시각, 장소와 사상자 수, 그리고 범인의 자살 원인과 폭파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루가 지난 3월 21일, '섬서 일보'는 제 1면에서 이 폭파 사건을 보도했다. 임동현 공안 기관에서 조사한 폭파사건 이번 달 19일 정오, 임동현의 진용관에서 동쪽으로 3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폭파사건이 발생해 3명이 사망하고 3명이 경상을 입었다. 성, 시 공안당국에서는 보고를 받고 신속하게 현장으로 출동해 해당 지역 공안 기관에게 사건을 수사하게 하고 상처를 입은 군중들을 구 조하도록 했다. 백수현공안 기관의 협조 아래 8시간 동안 수사가 진행되었다. 폭파범은 왕건영으로 현재 나이 26세, 백수현의 농민이다. 혼인 문제로 비관해 유서를 남 기고 폭약을 휴대한 채, 3월 19일 정오 1시에 진용과 부근의 사진관에서 진나라 시대 복장 을 입고 사진을 찍으려 했다.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에 폭발이 일어났다. 범인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구조 활동을 벌였으나 사진사 2명은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 이 기사는 임동현 공안국의 보고서를 기초로 쓴 것이지만, 보고서에 기록된 "동거마의 모 조물을 타고 사진을 찍고 있을 때"라는 구절은 빠져 있다. 이는 기자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 라 고민 끝에 삭제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신문 보도의 이면에 있는 무엇 인가를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전해져 타고 있던 동거마가 진짜 동거마 라고 소문이 퍼질 경우 '좋지 않은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건이 발생하고 며칠 뒤, "진짜 동거마가 폭파되었다."라는 소문이 현지 농민과 서안시의 시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진용 박물관 앞에서 발생한 폭파 사건은 진용관 책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또한 그들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폭파 사건이 있었던 그날 저녁, 서안에 있던 원중일 관장은 서둘러 진용관으로 돌아왔고, 박물관 직원들을 불러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직 원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강조하는 동시에 공안 당국자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부 탁했다. 진용 박물관이 그 곳에 존재하는 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건들, 어느 날 진용관의 유물이 파괴되거나 유실된다면 역사 앞에 어떻게 고개를 들 것인가? 참으로 우울한 현실이 었다. 박물관 직원의 고민 병마용 박물관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외부뿐만 아니라 박물관 내부에도 산재해 있다. 서 안으로부터 7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박물관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적막하고 처량 한 것이다. 관람객들이 몰려왔다 가 버리면 박물관 안에 감돌던 생기도 그들과 함께 사라지 고, 박물관 식구들은 다시 적막함과 공허함에 휩싸이게 된다. 진용관의 물 사정 또한 마찬가 지였다. 필자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 얼굴의 오물을 씻을 물조차도 너무도 귀한 것임을 체 험했다. 문화와 교육, 수원과 교통, 이 모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진용 박물관 근무자들은 많은 불편을 느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병마용과 생존을 함께하겠다는 비장한 마음과 강한 의지로 이 생활 을 버텨 내고 있었다. 하지만 진용 박물관의 모든 관계자들이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운명과 맞서고자 했다. 그들의 목표는 진용 관에서 벗어나 더욱 넓은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대졸 여성 신입 직원 두 사람은 고고학 전공이 아닌데도 정부의 배치 명령에 따라 이 곳에 보내졌다. 사직을 하고 재취업을 하는 분위기가 아직 조성되어 있지 않은 섬서성에 서 그들은 다른 국영 기관으로 전근 갈 것을 꿈꾸고 있었다. 고고학을 전공한 또 한 사람의 신입 직원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의 어떤 길은 때로 개인 스스로 선택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전 제가 왜 별 생각 도 없이 고고학을 전공했는지 모르겠어요. 졸업 후에도 제가 자진해서 이 곳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고고학을 전공한 학생에게 이 곳에 파견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고 고학 연구에 뜻을 세우고 이 곳의 직업과 이 곳에서 얻는 성과가 다른 곳에서보다 더 뛰어 나다고 생각한다면은요. 하지만 전 걱정이 됩니다. 설마 일생 동안 이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 또한 한 인간의 앞길이 너무 투명한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너무 투명 하다면 재미도 없고 때로는 오히려 두려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전 이제 겨우 스무 살이예 요. 만약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고 여기에서 백발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한다면 그런 제 미래 는 상상조차 하기 싫어요..... 설사 진용에 대한 연구로 한 자리 차지한다고 해도 그게 뭐 대 수겠어요? 진용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어차피 세계 고고학사에서 일부분일 뿐인데요. 진 정한 고고학자가 되려면, 그래서 고고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한다면 진용에 대 한 연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안목을 더 넓혀 고대 인류 문명의 전반에 대한 연구와 발굴을 계속해야겠지요.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하내 선생이 그 좋은 예지요. 중국 문화 유적에 대한 발굴뿐만 아니라 5년 동안의 영국 유학 생활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고고학 발굴 작업에 참 가했기 때문에 위대한 하내 선생이 만들어진 겁니다.... 전 진용을 떠나 외국으로 가고 싶어 요. 그리고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싶어요. 인류학은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학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영역이 무궁 무진하고 고고학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독립된 학문이지요. 물론 이 건 실현할 수 없는 휘황찬란한 몽상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심정이 복잡합니다. 작업 능률도 오르지 않구요. 제가 좋아하는 것은 병마용도 동거마도 아닌 박물관 밖의 야외 그리고 산천 에서 자라고 있는 초목이지요. 제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청춘의 기운과 대자연에서 끊 이지 않고 솟아나는 힘입니다. 필자는 진용 관계자들의 근심을 생각해 보았다. 정치적인 어려움, 발굴의 험난함, 보존 기 술의 부족, 환경의 제한에서 오는 궁핍한 생활과 모자라는 수원, 인간과 인간의 마찰 아이들 의 교육 문제, 세대 차이 등. 이 모든 것이 마치 조그만 시내가 흘러 강이 되듯이 진부한 여 러 가지 생각들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맹목적인 낙관이나 정치적인 필요로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가정, 인생과 업무의 관계,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이해 득실, 또한 이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새로운 느낌과 사고를 통해 각기 서로 다른 가치관을 형성한다. 그렇 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새로운 미지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진용의 발굴과 진용 박물관의 건설에 대해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점 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용 박물관은 앞으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 진용을 바라보고 있는 인류가 그 미래를 주시하고 있다. 13 항로에서 이탈한 역사의 흐름 역사에 대한 인식 진용의 발견과 발굴은 오늘날 인류에게 닫혀진 있던 대제국 진나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대제국으로 향하는 문 앞에서 우리는 그 옛날 제국의 풍모를 더욱 분명하게 느 끼며 고대 인류의 비범한 창조력과 투쟁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중원을 통일해 봉건 전제 국가를 설립한 진시황은 2천여 년 동안 끊임없이 명예와 굴욕, 칭송과 비난의 엇갈린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2천년의 세월로 도 바꿀 수 없는" 봉건 제도의 토대를 다진 독특한 성격의 인물로서, 아무리 비난한다고 할 지라도 그의 위대한 공적이 물거품이 될 수는 없다. 그를 비난하는 대목 가운데 가장 민감 하고 분명한 논쟁거리는 바로 분서 개유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진실과 사회 변혁에 대한 영 향을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진시황의 분서 갱유 사건에 대한 여러 사료의 기록은 가기 다르지만 결국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당시 불태워진 서적의 종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기'이 외에 여섯 제후국의 역사서이며, 또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시경'' 서경'을 비 롯한 유가의 서적과 그 밖의 제자 백가의 책들이다. 다음으로 '비방'과'유언 비어'로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명으로 460여 명의 사람을 생매장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다. 몇천 년 동안 사람들은 분서 갱유를 예를 들어 진시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중국 문화를 훼손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처럼 진시황을 비난하고 헐뜯던 사람들 가운데 이 사건의 관건이 되는 또 다른 인물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또한 이러한 인물과 그가 대표하는 사회 계층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이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시황이 자 행한 것으로 알려진 분서 갱유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승상 이사다. 이사가 사건의 중요 인물이라 말하는 이유는 바로 대량의 서적을 불태운 것이 그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실을 과장해 떠들지 않았다면 사건의 종말은 또 다 른 상황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사는 당시 이미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군주를 위해 충성해야 하는 사대부 계층에 불과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 사대부보다는 좀더 많은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렇게 계층 내부에서 스스로를 자멸케 하는 사건이 가끔 발생했음을 찾 아볼 수 있다. 전국 시대의 손빈은 자신의 동창인 방연에게 두 발이 잘리는 악형을 당하자 이후 마릉도에 병사를 매복시켜 방연을 쏘아 죽였다. 진나라 시대에 이사는 뛰어난 계략으 로 자신과 같이 순자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한비자에게 독약을 먹여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이후에는 진시황의 손을 빌어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유생들을 황량한 벌판에 매장시키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사 또한 동료에게 함양 거리에서 요참을 당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 다. 이러한 사대부 계층의 자멸 행위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어 갔다. 많은 이들이 진시황의 분서 갱유가 중국 문화를 파멸시켰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죄를 진시 항 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지만 이는 진시황의 죄를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 면, 분서 갱유는 법가를 대표로 하는 진나라 시대의 문화가 유가를 대표로 하는 관동(함곡 관 동쪽 지방) 문화를 파괴한 사건이다. 진시황이 도서의 개인 소장을 금지시키고 분서 갱 유를 일으켰지만 당시 관동의 수구 세력은 여전히 완강한 저항을 하면서 진시황의 명령에 대항했으며,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서를 비밀리에 소장하는 한편 유가 학설의 부활을 꾀했다. 그들은 이후 더욱 번성해 중국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 세력을 지켜 오게 되었다. 한나라가 흥기했을 때, 민간에서는 소장하고 있던 제자 백가의 서적을 모두 풀어 놓 았다. 전국 시대 백가 쟁명의 여운이 다시 일어나 음양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등의 학설 이 유가와 병존했다. 그러나 한 무제 시기에 "백가를 축출하고 오직 유가만을 숭상한다."는 정책이 집행되면서 각 학설은 중국 정치 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오로지 유가만 남게 되 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들에게 진시황의 '금서'정책이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준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진시황이 분서 갱유가 중국 문화를 단절시키거나 큰 재해를 가져다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항우로 대표되는 관동 세력에 의해 빚 어진 전화가 당시 선진 문화와 기술에 더욱 치명적인 폐해를 가져다 주었다. 그 찬란한 조 소, 서예, 회화, 문학, 음악 등의 예술과 뛰어난 주조, 야금 제련 등의 과학 기술의 정수는 바로 항우로 인해 그 맥이 단절되었다. 진시황 병마용과 동거마에서 출토된 그 실물 유적들 이 이러한 주장을 증명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병마용의 사실적 표현 예술, 도기 제작, 동거 나의 야금 주조와 청동검의 크로마이징 처리는 선진 기술 또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전 달되어 좀처럼 풀기 어려운 과학 기술 공예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항우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욱 치명상을 준 것은 한의 무제였다. 항우가 초래한 전화는 당 시 세계에서 으뜸가는 중국 문명을 단절시켰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지만, 한 무제가 취한 유 가 독존의 문화 정책은 중국 문명을 철저하게 쇠락시키고 끝내 파괴시키는 지경까지 몰고 갔다. 한나라 초기에 부흥한 유가의 학설은 그저 제자 백가 가운데 한 학파에서 제기한 것일 뿐 이었다. 노자, 장자, 묵자, 양주등 쟁쟁한 제자 백가들의 학설이 여전히 조정이나 민간에 커 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유학 또한 이들과 병립했다. 그러나 한 무제가 '독존 유 술'을 명령함에 따라 유가를 제외한 제자 백가의 학설은 차츰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에 자연히 유가의 학설은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유학은 본래 지 닌 창조력과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게다가 기존의 단순하고 소박한, 그래서 인 생과 현실에 밀착되어 있는 학문의 성격에서 차츰 이탈하게 되었다. 독립된 사상과 학설이 시대의 도전을 받으면서 결국 역사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한 무제의 대일통사상이다. 만약 이러한 대일통 사상이 그저 언어, 도량형, 역법, 예악을 비롯한 사회 생활의 형식적인 방면에만 국 한되었다면, 이는 민족 역사의 발전에 부합하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러나 안타깝게도 한 무제가 실시한 '독존 유술'의 근본 목적은 정치적 대일통 아래에서 사상 의 통일 또는 사상적 대일통 아래에서 정치의 통일이었다. 이러한 정치, 사상의 통일은 군주 개인의 의지와 견해의 구체적인 표현 방식이다. 이로 인해 중국의 군주 전제 정치는 더욱 '대일통'을 향해 나아가고, 인간의 정신과 생존 방식이 완전히 군주의 권력과 의지에 종속되 게 만들었다. 진시황의 '갱유'사건에 관한 기록은 서한 이전 시기의 사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주로 유가 학자들의 구전에 의지하고 있다. 한 무제가 유가 지상주의의 기치를 높이 든 이 후, 위굉이라느 자가 나타났다. 그는 유가 학파와 군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정고문관사서' 라는 글에서 민간에서 떠도는, 진시황이 여산의 한 골짜기에서 7백여 명의 유생들을 생매장 했다는 말이 사실인 듯 기록했다. 또한 이후 역사학자 왕충은 위굉과 같은 목적에서 '논형' '어증편'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시황이 시경, 서경의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했 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사실이다."라고 기록했다. 왕충의 단정적인 기록에 따라 진시황은 '유생 생매장'의 죄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당시의 진시황은 '유생을 생매장'한 것이 아니고 허장 성세로 백성과 군주를 기만한 일부 '방사'를 죽였을 뿐이다. 물론 진시황이 방사를 생매장해 죽인 방법은 지나치게 잔혹한 것이 다. 만약 2천 년 뒤인 지금 법률에 따라 사기죄를 적용한다면 몇 년의 감옥살이 정도가 적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세운 유학은 역대 왕조의 파란을 거치면서 특히 '삼강 오륜' '군신에 대한 충성과 절개''인의 도덕'과 같은 정치색이 짙은 사상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치면 에서 백성들을 압박하고 사상면에서 그들을 구속함으로써 진보를 추구하는 사상과 정신을 말살시켰다. 중국 민족의 지혜와 비범한 상상력, 그리고 참신한 창조력은 '사서''오경'의 가르 침 아래 차츰 우매화, 경직화하기에 이르렀다. 명,청 시대에 이르자 과거가 활성화하면서 팔 고(명,청 시대에 과거의 답안용으로 채택된 특수한 형식의 문체)가 성행하고, 이에 반해 전 문직에 대한 교육은 철저하게 말살되었으며, 사학, 예술 방면은 유가의 보수 사상의 제약ㅇ 르 받았다. 이에 과학 기술은 '보잘 것 없는 재주'로 인식되어 멸시당했다. 선교사를 통해 서방 문화가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유럽의 과학자, 혁명가가 피와 불의 대가로 1천 년 암흑의 중세기를 파괴하고 고대 과학 기술을 현대 과학 기술로 변환시킬 때 에도, 중국은 유가의 전통 사상 속에 움츠리고 앉아 중원 대국이라는 어리석은 꿈에 도취되 어 있었다. 굴원, 악비, 해서 등의 충신들이 계속해서 나타났지만, 장형, 조충지, 심괄 같은 과학자들은 자꾸만 줄어 들었다. 서양인들이 대포와 총으로 폐쇄된 중국의 문호를 열었을 때에도 전통적인 사대부들은 유교 문화를 서양 문명을 제지시킬 정신적 무기로 삼았다. 완 전히 다른 적자 생존의 문화로 무장한 서양인들 앞에서 여전히 '인의 도덕'만을 일삼는 중국 인들은 더 이상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유교라는 전통문화를 지주 삼아 세워진 고대 제국은 결국 새로운 문명의 충격 속에 침몰될 수 밖에 없었다. 중국 민족은 외부 민족에게 유린을 당하고서야 인간의 창조력을 말살시키는 문화 정신 속 에 고립되어 왔음을 깨달았다. '5.4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사, 오우, 노신, 이대조, 호적과 같 은 인사들은 "타도 공가점(공자네 가게. 곧 공자 사상을 타도하자.)"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중화 민족은 피와 화염의 세례를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병마용을 보면서 필자는 다음 과 같은 상상에 빠져들었다. 만약 당시의 진나라 문화가 관동 문화를 정복했다면, 만약 진시 황이 밝힌 그 횃볼이 유가 학설을 더욱 새롭게 할 수 있었다면 과연 중국 민족의 역사는 어 떻게 달라져 있을까? 치유되기 어려운 역사의 상처 1988년 12월 22일, 인도의 총리 간디는 진시황 병마용을 참관한 뒤,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위대한 역사의 문명지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곳 서안에서 중국과 인도의 교류 가 시작되었다. 이 위대한 국가와 민족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다! 간디의 이 같은 말은 당나라 때의 고승 현장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이야기와 이보 다 훨씬 일찍 장건이 서역으로 향한 역사와 휘황찬란했던 실크 로드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이 이야기들에서 그들은 모두 서안을 기점으로 삼아 서쪽으로 멀리 지중해 동부까지 뻗어나가 있다. 전체 길이가 7천여 킬로미터나 되는 길 위에서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아름답기가 초원에 만개한 꽃잎들 같고 섬세하기가 거미줄과 같은" 진귀한 채색의 비단을 로마 제국까지 운송했다. 로마 귀족들은 일찍이 "로마 성내에서는 황금과 같은 값어치를 가 지는" 이 비단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이 얻어 왔던 것은 로 마의 금은 보화, 파르티아의 석류와 기타 각국의 콩, 오이, 호두, 깨, 파 같은 농작물이었다. 물론 그 이후 불교와 불교 예술 또한 이 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중국 문화와 예술에 지대 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첫 번째 이야기 1988년 가을, 한 무리의 서양 관광객들이 진용관을 참관하러 왔다. 진용관 1호 전시실에 이르렀을 때, 한 민접한 청년이 재빨리 사진기를 꺼내 용갱 중앙에 서 있던 병마용에 초점 을 맞췄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박물관 직원 한 사람이 다가가 청년의 사진기를 빼앗아 덮개를 열고 필름을 빼 버렸다. 필름이 모두 노출되어 버린 서양 청년은 원통해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그 박물관 직원은 서양 청년의 이러한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고 갱 병에 붙여져 있는 '촬영 금지'라는 팻말을 가리켰다. 필자 일행은 취재할 때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직원을 찾아 물어 보았다. "그 말이 사실입 니까?" "정말입니다. 분명히 촬영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도 사진을 찍기에 규정에 따라 조 치했습니다." "글세, 상황을 잘 모르겠지만 왜 하필 필름을 노출시키는 식의 방법을 택했습니까? 중국 에 한 번 다녀가기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다른 관광 사진들을 전부 버리게 되지 않습니 까?" "당신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일반 외국 관광객들, 특히 제3세계 국가의 관광객들이 만약 전시실에서 사진을 찍었다면 전 먼저 경고를 했을 겁니다. 그리고 뭐 처벌까지 이르게 하진 않았겠지요, 그러나 어떤 관광객들은 여기가 무슨 1백 년 전의 돈황이나 원명원쯤으로, 마음대로 약탈하고 짓밟고 불태워도 되는 곳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전혀 주저하는 빛이 없지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물론 먼 이전의 일들이긴 하지만.... 좀 지나치지 않앗나 싶기도 하지만 우호라는 것은 서로가 존중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데 내가 당신을 존중할 리가 없지요. 특히나 이전에 중국 에서 약탈과 만행을 자행했던 나라의 사람들은..." 직원은 필자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제 생 각이나 행동이 틀린 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필자는 이렇게 답했다. 두 번째 이야기 진용 박물관의 치안 사무실에 필자와 몇 명의 경비원들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치안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매치기들이 이 진용 박물관에도 나타나지요?" "몇 년 전엔 소매치기들이 많았지요. 대부분이 서안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특징은 평평한 신발이나 운동화를 신었는데 대부분 새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3-4일에 한 번씩 신발을 버리고 새것으로 장만했습니다. 바로 공안원들이 그들의 족적을 쉽게 찾아 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차림새가 수수하고 윗도리의 단추들이 떨어져 있는 게 보통이었지요. 언제나 차림새가 수수하고 윗도리의 단추들이 떨어져 있는 게 보통이었지 요. 언제나 만원 버스나 시장에서 소매치기를 하니까요. 우리가 이런 특징들을 파악한 뒤에 는 소매치기들을 좀더 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때부터 차츰 줄어들어 지금은 한 사람 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때 또 다른 경비원이 말했다. "1990년 11월에 발생한 사건은 조금 달랐지요." "뭐가 달렸습니까?" "그 땐 북경에서 마침 아시안 게임이 열리고 있을 때라 외국 관광객들이 많았지요. 그런 데 며칠 동안 계속해서 외국인들이 공안실에 들려 사진기, 돈 같은 귀중품들을 도난당했다 고 신고하는 겁니다. 우리들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요, 왜 요 며칠 사이에 외국인만 터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것일까 하구요. 며칠 동안 조사해 본 결과, 저희들은 범인을 잡을 수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안의 치기범들과는 전혀 다른 자들이었지요. 모두 양복을 잘 차려 입고 있어서 사업가들 같았어요. 모두 9명이었는데 3명씩 3조로 나뉘어 맨 앞쪽의 사람은 외국인을 따라가고, 제2진은 그 뒤를 바짝 따라 엄호하고, 제3진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손에 사진기를 들고 주위를 관찰하며 따라가는 겁니다. 우리들은 그들이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 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3조로 나뉘어 그들을 관찰한 결과, 하루만에 여섯 사람을 체포할 수 있었지요. 조사 결과 사진기 3대와 약 1만 3400원 상당의 외환을 소매치기한 것으로 밝 혀졌습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공안 당국의 현상 수배범으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소매치기 의 대상이 모두 서양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중국인들은 대상으로 삼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에 그들은, 중국인은 너무도 가난해서 차마 양심상 털 수가 없었고 이에 반해 서양 사 람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훔치고 나서 일종의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역사에서 그들은 중국 민족의 것을 공공연하게 약탈하고 총칼을 휘두르며 허세를 부린 데다 오늘날도 정책면에서 그들의 이러한 약탈을 도와 주고 있는 꼴을 볼 때, 이렇게 절도 행각 을 벌이는 것이 죄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경비병의 설명을 들은 필자는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눈물과 피 로 범벅한 고난에 찬 과거의 역사를 과연 잊어야 하는가, 아니면 가슴 속 깊이 각인시켜야 하는가?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곧 배반을 의미한다." 문득 누군가가 한 이 말이 생각났다. 이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것인가? 어떤 마음 자세로 이 변화 무쌍하고 복잡하기 그 지없는 세상을 포용해야 할 것인가? 이는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내일에 대한 희망 몇천 년의 역사를 지나, 우리는 어느덧 20세기의 마지막에 서서 우리들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염황(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서 비장한 마음가짐과 진취적인 시도 속에 일순간 세상 을 진동시킬 만한 기적을 창조해 제국의 위용을 자랑했다. 1980년대 초, 홍콩, 마카오, 파리, 런던, 뉴욕을 비롯한 세계 대도시의 유물 교역 시장에는 수많은 희귀한 유물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가격은 날로 폭락해 누구 든지 원하는 자는 마음껏 이 위대한 인류의 흔적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물이 넘쳐 나고 싼 값에 쉽게 판매가 이루어졌던 희귀한 현상은 서방의 각 경매 장과 유물 소장가와 국가 박물관의 공황을 가져왔다. 세계 경제 정보 조직과 각국의 유물 보호 관리 기구는 즉각 요원을 파견해 이 진상을 파헤친 결과, 이러한 현상의 원인 제공자 가 바로 중국임이 밝혀졌다. 독일의 한 잡지인 '디 자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현재 서방 국가로 들어오는 중국 유물의 양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많다. 심지어 신석기 시대의 도기도 대량으로 시장에 유입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전세계 유물 소장가의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렇게 헐값에 처리되는 희귀한 유물들은 모두 비공식 무역 통로를 통해 들어와 국제 시장에 반입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서방 기자의 보도는 과장이 아니었다. 국가 문물국의 통계에 따르면 1984년 이래 중국 각 지역의 박물관과 유물 보호 단위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은 모두 3백여 건으로 몇만 점의 진귀한 유물이 외부로 빠져 나갔다고 한다. 섬서성 내에서는 1987년과 1988년 2년 동 안만 해도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한 절도 사건이 11번이나 일어났다. 진시황릉 발굴 현장에서는 왕갱지라는 절도범이 그 지역 창고에서 진나라 때의 도용 머리 부분을 훔쳐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7일째 되던 날, 곧 1987년 3월 4일 에는 서안시 한 회사의 직공인 장선귀가 여러 가지 공구를 챙겨 들고 현 문화관에 들어와 사전에 답사해 둔 길을 따라 몰래 문화관 3층으로 올라왔다. 문화관 전시실에서 그는 13개 의 청동편종을 묶어 놓은 철사줄을 풀고 국가 일급 유물인 서주 시대의 청동 편종(한벌로 되어 있는 연주용 종) 세 점과 방준(술잔) 한 점을 훔쳐 달아났다. 나중에 공안 기관에 붙잡 힌 장선귀는 사형에 처해졌다. 1987년 가을, 하남성 영보현의 농민인 유춘리는 섬서성의 건릉에 들어가 건릉 2호의 부장 품을 도굴하려 했으나 기회가 좀처럼 닿지 않자 계획을 바뀌 건릉 박물관 내의 소장품을 훔 치기로 했다. 1988년 3월, 유춘리는 친구 유영신과 함께 손전등, 활톱, 절단기 따위의 공구를 챙겨 박물관으로 가서 관광객들 속에 섞여 영태 공주 묘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한눈을 팔 무렵 유춘리는 석관으로 숨어 들어가 깊은 밤까지 기다린 뒤 작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한밤중에 여자 기마용 두 좌를 훔쳐 다시 석관으로 숨어들었다. 그 다음 날 오전, 유영신은 사전 계획에 따라 관광객들과 다시 능묘의 갱도로 진입해 유 춘리와 절도한 유물을 빼 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절도한 물건을 1200원이라는 헐값 으로 밀수업자에게 팔아 넘겼다. 1988년 6월 4일, 유춘리와 또 다른 동료 두 명은 다시 건릉 박물관에 들어가 위와 같은 수법으로 장회태자의 묘에서 황색 삼채 여자 도용 6점과 녹색 삼채 여자 도용 1점을 훔쳤 다. 범인 3명은 고향에서 이를 팔려다가 체포됨에 따라 진귀한 국보급 보물의 해외 유출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박물관 안의 진귀한 유물이 시시 때때로 절도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의 시 선이 벌판의 고대 무덤들에 쏠려 있었다. 그들은 삽, 괭이 또는 뇌관이 장착되어 있는 폭약 따위로 묘를 파헤치고 유물을 훔쳐 폭리를 취했다. 이러한 고대 분묘에 대한 도굴 행위는 날이 갈수록 극렬해져서 고대 분묘와 문화 유적지에 대한 파괴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국에서 해마다 도굴되는 고대 분묘는 몇만 곳에 이르렀고 유실되는 유 물과 그 가치 또한 계산하기 힘들 정도다. 또한 도굴꾼들의 설비도 놀랄 만큼 발전했다. 1990년 7월, 장안의 풍호 유적지에서 도기가 대량으로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절도자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일찍이 고고학 탐사 팀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상당한 정도의 탐사 경험과 발굴 수준을 겸비하고 있음이 밝 혀 졌다. 현장에서 발견된 214개의 탐사 구멍으로부터 밝혀진 기술의 정교함, 빠른 속도, 우 수한 설비는 진시황릉 탐사 팀들조차도 경탄할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이미 개발된 문화 유적지 주변에서는 또 다른 기이한 현상이 슬며시 자행되 고 있었다. 1986년 2월 28일, '섬서 일보'의 독자 투고란에서 이 같은 상황이 폭로되었다. 그 기사의 내용은, 여산 화청지와 서안 대안탑등의 유적지에서 일하는 사진사들이 관광객들에 게 사기를 치는 행위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에 대해 많은 관람객들이 적절한 처 벌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닷새 뒤, '섬서 일보'에서는 제1면 머릿기사로 이러한 군중들의 투고에 답했다. 국내외 관광객에게 사기 행각을 벌인 사진사 구속 2월 4일 오후, 홍콩 관광객 풍지강을 포함한 일행 4명은 여산 화청지를 유람한 뒤 봉화대 에 오르려 했다. 이 때 7명의 농민 복장을 한 사람이 몇 필의 말을 끌고 와서는 그들에게 말을 타고 산에 오르도록 했다. 약 10분 후 그들은 관광객들에게 강제로 말에서 내리게 한 뒤 150원을 걷어 갔다. 여행객들은 산에서 내려온 뒤 여산 공안국에 이 일을 신고했고 공안 당국이 이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이들은 여산진 농민들임이 밝혀졌다. 그들은 허가증도 없이 여산 풍경 지구에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 이와 같은 사기 행각을 벌여 온 것이다. 2월 21일, 공안국은 정력량을 비롯한 4명에게 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해 각기 벌금 30원과 구류 15일에 처했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우린 우리가 받아들인 전통 가운데 어떤 것들이 우리의 운명과 존엄성을 해치는 일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따라 우리의 생활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20세기의 만종이 울려 퍼지고 있는 지금, 역사는 다시 인류의 새로운 기원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동방의 중심에서 21세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을 따라 다시 웅비할 수 있을지, 그것은 모두 우리들 손에 달린 것이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자아 성찰이 필요한 때다. 우리가 역사와 자신을 정확하 게 인식하고 용감하게 비수를 들어, 형가가 진시황을 찌른 것과는 전혀 다른 비분 강개한 기상으로 자신들의 피부를 찔러, 우리의 몸 속에 흐르는 야만성과 우매한 독을 빼내 버린다 면 중국 민족이라는 거대한 용은 진정으로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후기 진시황 병마용 군진은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 할 만한 것으로 그 절세의 기상은 이미 모든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제 병마용의 발견, 발굴과 진시황릉을 통해 이루어 진 필자의 사색을 글로 적은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는 필자가 해방군 예술학원 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얻은 수확으로 필자의 은사와 여러 사람들의 도움 아래 이루어진 결 과다. 명대의 13릉 발굴에 대해 쓴 장편 서사 문학 '풍설정릉'으로 인해 필자는 한 역사 고고학 자, 명대 정릉 발굴에 직접적인 책임자인 조기창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도움 아래 필자는 역사의 풍진 속에 매몰되어 있던 고대의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 참혹하게 부서져 버 린 역사의 순간들을 조합해 중국 몇천 년 문화 속의 정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 었다. 이 고대 세계로 들어서면서 필자는 서서히 그리고 아주 깊게 그 당시 세계 속에 빠져들었 다. 인류는 이 푸른 지구 위에 모여 살면서 차츰 성숙되어 가는 길고 긴 시간 속에 휘황찬 란한 고대 문화를 창조했다. 세계 4대 문명국의 하나인 중국은 그 심연하고 유서 깊은 고대 문화로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쟁과 자연 재해, 세월 의 잔혹함으로 길고 긴 역사는 어느 순간에 단절되어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게 되어 세월이라 는 사해에서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었다.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이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이들에게 세상의 빛을 부여했을 때, 사람들은 인류 문명의 선조들이 창조해 낸 걸출한 성과 에 찬탄을 보냄과 동시에 일련의 곤혹감 또한 감출 수 없었다. 이에 필자는 이 신비한 영역 에 대해 하나의 시도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용 삽을 빌어, 문학이라는 형 식을 통해 세월 속에 묻힌 토층을 파헤쳐 나가는 이 작업으로 숨겨진 역사의 일부분이나마 빛을 주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명의 흔적을 느끼도록 해 주고 싶었다. 해방군 예술 학원에서 학습하던 마지막 학기, 필자는 고향을 떠나 학원으로 돌아왔다. 친 구들은 아직 학원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북경의 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모든 기숙사는 침묵에 덮여 있었다. 필자는 사무실에서 페르시아만 전쟁에 대한 글을 쓴 황헌국 선생을 만났다. 황 선생은 필자에게 "위에 난, 이 반 년의 실습 기간 동안 장편 하나 써 보 게나. 고고학 방면에서 말일세.."라고 말했다. 선생의 열정과 격려에 감사하면서 필자는 결심 을 굳힐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서안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 2개월 동안의 취재 방문을 시 작했고, 이 책이 완성되었다. 지금까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취재 방문 기간에 그 지역 주민들이 보여준 배려와 관 심이었다. 출발 전 북경의 유명한 고고학자 조기창, 왕암선생과 청년 작가 고금은 몸소 섬서 성 친구에게 편지를 써 주었다. 중국 음악 학원에서 학습하던 곽군죽은 눈보라를 마다 않고 줄을 서서표를 사 주었다. 서 안에 도착한 뒤 섬서성 문물국 문물처 처장인 유운회 선생, 섬서성 박물관 왕인파 관장, 진 용 박물관 원중일 관장이 필자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진용 박물관 사무실 장금룡 주임도 필자를 위해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서북 대학을 갓 졸업한 설애홍은 생활의 편의를 봐 주 었다. 취재가 시작되자 박물관장 오영기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도와 주었다. 솔직하 게 고백하건대,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사상, 관점들은 거의 모두 여러 분들이 몇 년 동안 연 구하고 모색한 결과들로서 사심 없이 내게 전해 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만약 이 글 속 에 진정 사상성이 엿보인다면 그건 모두 그들의 내심에 흐르는 뜨거운 피의 결과이다. 북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섬서 무경총대의 강도귀 선생, 서안시 공안국의 고서원 선생이 모두 생활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서안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달 동안의 취재 방문을 통해 필자는 이 책을 구성할 소재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인으로서 많은 가르침도 얻을 수가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것은 더욱 값진 교훈으로 가슴 속 에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 졸작이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는 더 많은 분들의 배려가 있었다. 북경 외국어 학 원의 호효리는 외국어 자료의 번역을 맡아 주었다. '곤륜'잡지의 정보도 주임, 장준남, 정로 남, 이 모든이들이 이 책의 발표와 출판에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다. 독자들도 필자 와 마찬가지로 이 분들에 대한 감사와 또한 선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해 주기 바란다. 1992년 10월 위에 난 옮긴이 후기 고대와 근대, 현대와 미래가 뒤죽박죽인 20세기의 끝에서 미래가 예견된 현재를 사는 사 람들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인가? 우리는 때로 그 어느 옛날로 되돌아가는 거꾸 로의 여행을 떠나면서 혹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다. 여전히 현실에 살고 있으면 서....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제일 많이 빌려 본 책이 '사기'였다. 수험생처럼 역사 사실을 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덤덤하게 통독하는 것일 뿐이었는데, 무엇이 그리 이끌었는지 나는 읽고 또 읽었다. 그 과정에서 얻어진 것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자신의 삶 어느 한 구석에 분명 그 사고의 흔적이 살아남아 때로 나 자신을 좌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할 뿐이다. 수많은 국내 유적지 여행과 마찬가지로 해외 소재 유적지의 경우도 아무런 준비 없이 시 작된다면 그저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는 그런 무미 건조한 여행이 될 것이다. 나는 진시황 릉에 대한 일련의 지식을 쌓았는데도 아직 현장에 가 보지 못했다. 번역을 시작하면서 과연 나는 진용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문득 떠오른 것은 역 사 교과서에 나오는 '분서 갱유',그리고 또한 영상이 가져다 주는 효과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영화 '진용'의 장면, 특히 맨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언제라 도 떠나면 될 듯싶다. '중국 고대사의 불가사의, 진시황릉'의 번역 작업은, 비록 우리 것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어떤 날의 기억을 다시 회생시켰다. 그리고 우리가 쉽사리 접할 수 없는 역사의 구 석구석을 알 수 있게 했다. 작업을 통해 오히려 학교 시절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 듯 싶다. 비록 이 글 속에 중국 민족으로서 느껴야 했던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애착과 역사 사 실에 대한 평가가 나를 또 다른 감정에 빠져들게 하지만 말이다. 어째든 역사의 배후에 숨 겨진 사실과, 그들의 평가로부터 주어지는 사유의 기회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값진 것인가라 는 생각을 한다. 문화란 과연 무엇일까? 또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대학 시절 졸업 여행에서 처음으로 느꼈던 문화에 대한 첫 번째 느낌은 상당히 그윽하고 따스했다. 웬지 문화에 대한 느낌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런 기회를 갖게 해 준, 언제나 열성과 진지함으로 가득 찬 도서출판 일빛의 이성우 대 표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번역의 미흡함을 메워 준 남편 심규호와 엄마가 일하는 것이 가장 싫다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1998년 2월 유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