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세 제국의 흥망 성쇠 3대륙에 걸쳐 완성된 알레산드로스 제국 기원전 356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한 왕국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 이가 바로 서방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이 3대륙의 영역을 넘어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 드로스 대제다. 알렉산드로스가 탄생했을 무렵, 멀리 세계의 동쪽에 위치한 주 왕조의 제후국 가운데 하 나였던 진나라는 이미 낙양에서 함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상앙의 변법'을 통해 나머지 여섯 제후국을 병합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원래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야만스럽고 낙후된 소국이었다. 그런데 알렉산 드로스의 부친 필리포스 2세의 과묵하고 안정된 통치 속에서 서서히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부하에게 피살당하고 말았다. 당 시 20세였던 알렉산드로스는 과감한 용기와 뛰어난 지혜로 부친을 살해한 무리들을 숙청하 고,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최고 통치권을 계승했다. 알렉산드로스 왕위를 계승한 뒤, 첫 번째 실행한 일은 바로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정복 에 나섬으로써 부친의 유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해서 페르시아 원정에 데리고 간 3만5천의 군대 또한 모두 기병으로 구성했다. 이런 전투마는 그가 대제국 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전투 도구가 되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소아시아 를 넘어 페르시아 군대와 전투를 시작했다. 1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페르시아 군대는 알렉산 드로스 대군의 진공을 막아 내지 못하고 퇴각했다. 페르시아의 주력 부대 또한 전투에서 패 배해 황후와 황태자가 모두 포로로 잡혔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고대 군사사에서 절세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지혜 를 동원해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는 전투에서 장수들에게 긴 둑을 건설 하게 해 군사를 적진의 성 아래까지 이르게 한 뒤, 나무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했다. 이 계략에 넘어간 페르시아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고, 그들의 국왕은 사절을 파견해 배상금을 주는 대신 페르시아 왕족 부인들을 석방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화평을 요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화평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타인 해역을 따 라 남으로 시리아를 공격하고 이어 이집트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는 이집트가 동절기임을 이용해서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성과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만들었다. 이 도시는 오늘날까 지도 번영해 지중해에서 손꼽히는 무역항이 되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이 곳을 '세계 제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한 곳으로 이름붙였던 것이다. 등대는 1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우뚝 솟 아 있다가 서기 796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깊은 해저로 가라앉았다. 이듬해 봄,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장정에 올라 4만 7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리그에서 동 쪽으로 이동해 나일 강가에 이르렀다. 그 해 10월 1일, 카시미르 고원에서 다시 세력을 재정 비한 페르시아 주력 부대와 결전을 벌였다. 두 군대는 각기 진형을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고,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오른쪽 날개부분 부대가 먼저 페르시아 군대를 향해 정면으로 공세를 폈다. 페르시아 군대는 재빨리 중앙 군대를 왼쪽 날개 부분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가운데는 텅 비게 되고 오른쪽 날개 부분과 간격이 벌어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이 기회를 포착해 그의 기병에게 적군이 중앙을 치도록 해 승리를 얻었다. 이런 종류의 포진법은 바로 '손자 방법'에서 말하는 '예진'과 같은 방법이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의 남은 세력은 모두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더 이사 기력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이미 손안에 들어온 이 제국의 영토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더 넓은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에 그는 모두 6년에 걸친 대장 정을 통해 1만 8천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기원전 323년, 알레산드로스는 바빌론에 새 도읍지를 정했다. 그는 대제국을 향한 꿈을 여 기에서 중단하지 않고 아라비아 반도를 따라 항해하면서 조사에 나섰다. 이렇게 자신의 목 표를 따라 매진하던 그도 어느 날 찾아온 병마에 쓰러지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2세였다. 로마 대제국과 한나발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함께 그가 세운 대제국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약1백 년 뒤 서방 패주의 자리는 당시 날로 강대해져 가던 로마가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246년, 로마 인들은 칼과 방패를 앞세워 시실리 섬을 정복했다. 밤의 장막이 지중 해를 감싸고, 파도와 안개가 로마 군들의 모습을 가려 주었다. 로마군의 육중한 목선을 이끌 고 살며시 카르타고 함대 쪽으로 다가갔다. 가르타고인들이 로마 군을 발견했을 때 이미 상 황은 기울어져 있었다. 로마 군은 긴 나무 사다리를 함대 몸체에 이어 놓고 벌떼처럼 카르 타고 함대로 몰려가 육박전을 벌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화염, 허공을 가르는 검의 광채, 무 수한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이 전투에서 로마 인들이 비록 패주의 자리를 굳혔 지만 대제국으로 가는 그들의 노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그들이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 을 때, 카타르고에는 6살짜리 사내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뒷날 로마 인들에 게 입힌 한니발이다. 기원전 221년, 스페인 남부를 통솔하고 있던 한니발의 매형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25세의 한니발은 매형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고의로 로마 인들의 비위를 건드려 전쟁의 기회 를 포착했다. 막강하던 로마 대군이 그의 무례함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기원전 218년, 카르 타고와 로마 사이에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 병은 군대를 두 군데로 나누어 한 부대는 카르타고 인들의 손안에 있던 스페인으로 향하고, 다른 한 부대는 한니발이 있는 곳을 향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교전을 준비하기는커 녕 오히려 6만 대군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다. 전쟁터를 로마 본토까지 확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매우 대담하고 위험한 전략이었다. 그가 거느린 6만 대군 중에는 보병이 5만, 기병 이 1만 그 밖에 37마리의 코끼리가 있었다. 한니발의 부대에 있는 작전용 코끼리는 적과 대 치하기 위한 좋은 도구였다.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내륙 쪽으로 향했다. 로마 인들이 한니발의 의도를 알아채고 황 급히 그의 자취를 찾았을 때 한니발이 이끄는 대군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한 니발은 알프스 산 꼭대기에 있었다. 로마 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한니발은 과감 하게도 알프스 산을 넘어간 것이다. 천 리에 걸쳐 이어진 알프스 산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동물들조차 지내기가 힘 든 겨울철이었다. 험난하고 비좁은 산길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대군은 힘겹게 행군을 하고 있었다. 망망한 눈밭, 험난한 봉우리들과 골짜기들, 한나발의 군대는 처절한 대가를 지불해 야 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군대를 이러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결국 로마 땅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군대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승리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니발의 대군이 예리한 칼로 로마 군의 심장을 찌른 셈이었다. 로마 군은 자꾸만 쓰러져 갔다. 기원전 216년 8월 3일에 이르러서야 로마 인들은 칸나이 평원에서 한니발의 대군과 대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로마 군은 각 동맹군들의 보병 8만 명과 연합했고 이 밖에 기병 6천여 명이 있었다. 그러 나 한니발은 보병 4만에 1만의 기병이 있을 뿐이었다. 군사력으로 볼 때, 한니발은 분명 열 세였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충원병을 구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두 군대가 격전을 벌일 칸나이 평원은 때마침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들꽃이 향기를 날 리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로마 대군이 좌우 양날개 진영은 두 겹으로 길다랗게 늘어서 각 층마다 여섯 줄의 보병을 배치했다. 뒷열은 중앙군으로 12열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포진법은 이 두 부분의 병력으로 하니발의 군대를 중앙 돌파하려는 것임이 분명한 예형포진 법이었다. 한니발은 말 위에 앉아 로마 군의 진형을 순시하고는 오랫동안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잠시 뒤, 그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큰 소리로 대군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중앙의 정면 부대는 신속하게 사다리형으로 진형을 조종하고 양날개 부분을 돌출시켜 일렬 횡대를 이루었다. 한니발이 명령한 포진 형태는 '사진법'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어려서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한니발은 그리스 시대의 병법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드넓은 칸나이 평원에서 위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나는 정면을 지휘한다." 한니발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칼을 휘두르며 중앙궁에게 재빠르게 뛰쳐 나갈 것을 명 령하자 로마 군의 중앙 정면 부대 또한 앞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때 한니발은 왼쪽 날개 부 분의 기병에게 로마 군의 오른쪽 날개 부분을 향해 돌진하도록 명령하는 동시에 로마 중앙 군을 배후에서 공격해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한니발의 계단형 군진이 송곳 형태로 로 마 군의 정면에 끼여들자 적군의 양날개 진영은 그의 기병의 포위를 받아 공격을 할 수 없 었다. 그 결과 로마 군은 중앙이 뚫리고 양날개 부분은 기병에게 소탕되어 지휘력을 잃고 우왕 좌왕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로마 대군은 그 자리에서 7만의 병력을 잃었고 남은 병사 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바로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데 즐겨 인용되는 전형적인 칸나이의 전투'였다. 비록 그 이후 피폐해진 군사력으로 로마에게 참패를 당하지만,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로 인해 불 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진 제국의 위대한 황제 마케도니아으 기마단이 대장정에 나서고, 로마 대군이 지중해에서 그 위세를 떨칠 무렵 히말라야 산 동쪽의 황화와 양자강 양대 유역의 광할한 땅 위에서는 제, 초, 연, 한, 조 ,위, 진의 일곱 제후국이 천하의 패권을 잡기 위해 중원을 내달리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황토 그 어느 곳에서나 대군이 운집해 천하를 호령했다. 그 전쟁의 횟수나 규모나 병사의 숫자를 비롯한 그 어떤 것도 당시 서방의 전쟁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였다. 교전하는 군대의 숫자 는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 거의 매번 전쟁터에 투입되는 인원이 10 만을 넘었다. 또한 전쟁의 방식도 차전, 진전의 직접적인 대항에서 보병, 기병, 궁노병을 위 주로 하는 야전과 여러 변화를 요구하는 포위전으로 흘러갔다. 그 유명한 진나라의 조나라 의 '장평의 전투'의 경우, 전쟁은 기원전 262년부터 26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조나라 의 40만 대군이 투항한 뒤 결국 갱에 생매장되었고, 진나라의 군대 또한 과반수 이상이 죽 었다. 무수한 장수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참담하게 죽어 갔으며 하천을 벌겋게 물들인 뜨 거운 피로 중원은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역사는 초인적인 지혜와 강력한 무력으로 통일을 이룰 철혈 지도자를 요구 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떨쳐일어나 "효공, 혜문왕, 무 왕,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이라는 여섯 선왕의 유업을 계승해 긴 채찍을 치며 말을 몰 듯이 천하를 제어했다."그리고 천하를 꾸짖는 위엄으로 여섯 나라를 평정하고 역사가 그에게 부 여한 위대한 사명으로 완수했다. 기원전 237년, 진시황은 몸소 출정해 그의 기지와 과감한 기질로 여불위와 노애의 무리를 분쇄하고 여섯 나라를 병합하면서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뜻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진시황은 진나라의 군사력이 다른 어떤 제후국보다 더 강력해야 함을 깨달았다. 당시 가 제후국 별로 그 역량을 비교해 볼 때, 진나라의 군대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 실이었지만 진나라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관동의 여섯 제후국이었다. 여섯 나라를 이기기 위해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출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각개 격파의 전략을 수립 한 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각개 격파를 하려면 제후의 합종을 막아야 했다. 여섯 나 라 가운데는 한나라가 가장 약했고 조나라가 가장 강력했다. 이사의 전략에 따른다면 "먼저 한나라를 취해 다른 나라에 위협을 가하고" 다시 조나라를 중심으로 합종해 진나라에 대항 하는 강대한 세력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1년, 조나라 장군 방난이 조, 초, 위, 연, 한 등 다섯 나라의 군사와 합종해 진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이는 바로 조나라를 중 심으로 한 연합 정책을 통해 진나라를 공략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비자는 먼저 제후국 간의 합종을 방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새로운 형세를 감안해 전략 목표를 변화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가 말한 대로 '조나라를 들어' 그 머 리를 침으로써 여섯 제후국의 머리를 없앰과 동시에, '제, 연나라와 친해' 그 몸뚱이를 잘라 버리면 합종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진시황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이사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그는 한비의 전략 방침을 취하 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먼 곳과 친화해 가까운 곳을 공격한는 방식으로 조나라와 더불어 한 나라를 멸망시키려 했다. 당연히 이는 모든 역량을 집중, 투입해 조나라에게 타격을 주겠다 는 중요한 군사 전략면에서의 선택을 뜻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36년, 진시황은 왕전, 양단화, 환기 등에게 명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 격하도록 했다. 당시 조나라의 장군 방난은 연날를 공격 중이었는데 진나라의 군사는 이 틈 을 이용새 상다군과 하간 지역을 점령했다. 그 이듬해 진나라 군사는 평양, 무성을 공격해 한단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조나라는 일촉 즉발의 위기에서 급히 북방으로부터 흉노를 방어 하고 있던 명장 이목을 불러들였다. 이목은 뛰어난 기지로 장수들을 지휘해 진나라 군사와 한단성 밖에서 일대 혈전을 벌였다. 그 결과 진나라 군대는 조나라를 공격한 이래 첫 번째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전투를 지휘하던 군대는 조나라를 공격한 이래 첫 번째 참패를 당했 다. 그러자 전투를 지휘하던 장군 환기는 참패의 죄를 뒤집어쓸까 두려워 연나라로 도망을 갔다. 그 이듬해 진나라 대군은 다시 조나라를 공격 했지만 또다시 이목에게 격퇴당하고 말 았다. 진나라 군대가 이처럼 참패를 당하긴 했지만 조나라의 세력 또한 크게 약화 될 수밖에 없 었다. 게다가 설상 가상으로 기원전 230년에 조나라는 이전에 없던 가뭄이 들었다. 지속적인 전쟁과 가뭄의 폐해에다 정치적 암울함으로 당시 조나라는 이미 멸망의 날이 눈앞에 다가온 상태였다. 이목 장군 또한 두 번이나 진나라 군대를 대패시켰지만 나라를 멸망의 늪에서 구해 낼 수 는 없었다. 기원전 229년, 진나라 장군 왕전과 양단화는 두 길로 나누어 조나라로 향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던 이목과 사마상은 군사를 이끌고 죽음을 불사하고 이에 저항했 다. 두 나라의 군사는 몇백 차례의 교전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군사들의 피가 옷자락을 물들이고 시체가 즐비했으나 1년 남짓한 관전하면서 한단성을 사수하고 있는 병사들을 격려 했다. 또한 위료가 제안한 "군신 사이의 관계를 이간 시키는" 전략을 이용해 조나라의 권신 곽개를 돈으로 매수했다. 곽개는 조나라 왕에게 이목을 무고했다. 또한 그는 장군 사마상이 반란을 꾀해 성을 지키기만 할 뿐, 적을 공격하지 않아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고 거 짓으로 고자질했다. 진위를 가리기 힘들었던 조나라 왕은 곧바로 조총과 안취를 보내 이목 과 사마상의 병권을 대신하게 했다. 이목은 조총이나 안취가 모두 장군의 재목이 아니며 도 저히 진나라의 명장 왕전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막강한 적이 코앞에 닥친 급 박한 상황에서 이목은 국가의 존망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병권을 내놓을 것을 거절했다. 조 나라 왕과 곽개는 사람을 밀파해 이목을 잡아 사형에 처해으며 사마상은 면직시켜 감옥에 가두었다. 이목이 죽자 조나라 군대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그 결과 진나라 군사는 3개월이 못 되 어 한단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강력한 조나라가 멸망하자 약소한 위나라와 연나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더 이상 피하기 어 려웠다. 비록 형가와 같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죽음으로 이에 대항하는 장수도 있었지 만, 이미 패망의 길로 접어든 국가의 운명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 두 나라 또한 조나라의 멸망과 함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위기가 영웅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영웅이라 할지라도 시기를 적절하게 잡지 못하면 더 이 상 영웅이 아니다. 네 나라가 멸말하지 진나라가 상대해야 할 적은 제나라와 초나라 둘뿐이었다. 두 나라의 실력을 비교해 볼 때 초나라의 실력이 제나라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한 진나라는 제나라와 화친한 지 벌써 40여 년이나 되었으며, 초나라의 경우에는 원한의 관계를 맺은 것이 몇 차 례였다. 초와 제, 서로 다른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나라를 사이에 두고 진시황은 다시 한 번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제나라는 비록 약하기는 했지만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먼저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강대국 초나라와 다시 악전 고투를 해야만 했고, 또한 제, 초의 합종으로 인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만약 초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제나 라와 진나라 간의 친교를 일부러 파기할 필요도 없고, 제와 초나라의 합종을 염려하지 않아 도 된다. 일단 초나라만 망하게 되면 제나라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반드시 투항할 것이었다. 이에 기원전 235년, 진시황은 장군 이신을 파견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략케 했다. 그러나 젊고 혈기 왕성한 이신은 적을 과소 평가해 참패를 당하고 진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224년, 진시황은 이번에는 왕전에게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했 다.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 국경에 이르렀을 때, 초나라의 명장 항연은 곧바로 국내의 모두 군사력을 동원해 출정했다. 그러나 왕전은 진영을 지키며 출전하지 않고 일단 충분한 휴식 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하고 병사들의 투지가 왕성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출전의 채비를 마친 60만 대군이 홍수처럼 적군 진영으로 돌진하자 초나라 군사들은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초나라의 명장 항연 또한 전장에서 전사했다. 얼마 뒤 진나라 군 대가 초나라의 수도 수춘을 함락시킴으로써 초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미처 대비도 하기 전에 초나라가 망하자 제나라는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왕전의 군대에게 공략당한 제나라는 결국 망했다. 산동 여섯 나라는 진나라 군대의 15년 동 안의 정벌로 모두 패망했다. 중원의 땅에서 몇백 년 동안 존재했던 군웅 할거의 혼란스러운 상태도 이로써 끝을 맺고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여섯 제후국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통일을 이루었다 해서 이것이 정벌 전 쟁의 끝은 아니었다. 그 당시 중원 북부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흉노족의 세력이 확대되 어,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정벌하는 동안 두만선우가 인솔하는 흉노 대군이 남하해 황하 이 남 지역까지 내려왔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심각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진나라를 망하 게 할 자는 바로 오랑캐"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떠올았다. 또한 오령의 남쪽에 위치한 백월(오늘날의 중국 화남 지방)과 육량 지방의 여러 종족들 또한 진의 통일과 정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흉노족은 그 포악함과 강인함 때문에 공 격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일단 공략에 성공한다고 해도 지켜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는 달 리 '백월'의 경우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부족들이 분산되어 있어 군사면에서 대체로 역량이 미흡하기 때문에 공략하기도 쉽고 성을 지키는 것도 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상화 속에 진시황은 전략면에서 대변화를 꾀해 먼저 약하고 먼 쪽을 공략 하고 나중에 강하고 가까운 쪽을 친다는 정벌방침을 수립했다. 이 방침에 따라 멀리 있는 백월과 치룬 전쟁에서 승리하자, 진시황은 곧바로 장군 몽념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 를 공격하도록 했다. 전략상 방어에서 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마침내 흉노족은 7백 여리 밖으로 격퇴당해 "오랑캐는 남하해 말을 방목하지 못했으며 흉노의 병사들은 감히 활 을 당겨 진나라에 원한을 갚으려 하지 않았다."고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진시황은 군사 전략면이나 행동 방침면에서 모두 철저한 승리를 거두었다. 만리 장성을 건설해 흉노의 남침을 막고 남쪽 백월 지방을 제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새로 운 봉건 대제국이 마치 안개를 뚫고 나온 태양처럼 동반의 신비한 대륙 위에 환하게 떠오르 게 되었다. 역사의 활주로 위에서 1968년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다니엘 교수는 그의 저서'문명의 기원과 고고학'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독립적으로 발전을 이룬 6대 문명에 대한 학설을 내놓았다. 이 6대 문 명이란 바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멕시코와 페루다. 1985년, 중국 고고학의 거장 하내 선생은 은나라 때의 청동기에 관련된 야금, 주조 기술과 무늬 및 갑골 문자의 특질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이를 서방 문명의 고고학 자료와 비교 한 뒤, 중국 문명은 독자로 발생하고 발전한 것으로 외부에서 영향받아 형성된 것이 아니라 는 학설을 내놓아 다니엘의 견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인류의 기원과 문명의 탄생에 대한 논쟁은 전세계 과학계에서 끊임없이 진행 되고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 논쟁에서 누가 승자가 되든 간에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기원전 2-3세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동쪽과 서쪽에서 탄생된 세 군데 강대한 제국이 각기 정치, 경제, 군사, 문화면에서 거의 비슷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 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이처럼 역사의 진행 과정 중에서 마치 동일한 활주로에 자리하고 있 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자세나 방법이 기이하게도 비슷한 양태를 지니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분면, 견식이 있고 포부를 가진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군사 방면의 행 동이나 1만 리에 걸친 원정을 살펴보면, 거의 모두 과학적 탐색의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원정을 하면서 많은 학자들을 대동했다. 그리고 과학, 문화, 정치 분야에서 이미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학자나 그리스 인들에게 그들이 이제껏 가 보지 못한 곳에 대 해 시야를 넓히고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 로마가 흉성할 때의 뛰어난 인물인 카이사르는 27세에 로마군 사령관에 선발되어 31세에 국가 재정 대신직을 맡고, 34세에 이르러서는 제전, 경기 등의 공공 사업을 주관하는 총 책 임자가 되었으며, 37세에 법무관(집정관 아래의 지위)이 되었고, 이윽고 40세에 집정관이 되 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는 공공 시설을 건설했다. 어느 날은 한 번에 320회의 검 투 시합을 열어 수 많은 로마 주민들을 열광케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카이사르 본인의 생활은 지극히 검소했고, 오르지 평민들에게만 끊임없이 열정을 쏟아 부었다. 39세의 카이사 르는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출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휘황찬란한 업적과 재능을 생각 하면서 그는 자신의 위업을 완성하리라 다짐했다.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달리 진시황제는 자신이 직접 대군을 통솔해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인재들을 통솔해 천하를 통일하는 사명을 이룩해 냈 다. 진시황의 수하에는 뛰어난 여러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사상가들이 자리해 그의 천하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이사, 요가, 왕전, 몽념 등과 같은 사람들이 진시황 휘하에서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고, 마침내 진나라가 여섯 제후국을 병합해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하는 데 힘을 더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해 그 어떤 분야이든지 간에 동서양이 한 순간 이라도 동일한 활주로에 서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때로 똑같이 질주하고 또 한 똑같은 빛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다만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실상과 진실이 깊 은 어둠 속에 파묻혀 우리들은 그저 주관적인 상상이나 억측만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중앙 아시아 지역의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쪽으로 중앙 아시아 지역의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쪽으로 중앙 아시아 지역까지 원정했다는 학설을 제시한 바 있다. 또한 근래 어떤역사학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중국 경내까지 원정해 중국의 서북 지구에 토성과 보루를 건축한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 다. 특히 섬서성이나 감숙성에서 발굴된 비잔틴 시대나 로마 시대의 동전 발굴을 그 근거로 삼아 로마 제국이 중국에까지 원정했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가 제시되지 적지 않은 이들이 이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물론 서양 사람들도 있고 동양 사람들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들의 조상이 동양인들에 비해 위대 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속셈이 끼여들어 있을 가능성이 짙다. 후자의 경우는 오랜 세월 경제면에서 힘든 상황을 겪어 온 중국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 조상들을 욕보이기 위 함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이러한 가설이 성립된다고 할지라도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다 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번 생각해 보자. 알렉산드로스가 일단 중국의 감숙성까지 들 어왔다면 중원의 기름진 옥토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한 사료에 따르면 알렉산 드로스는 동방을 정복해 곧장 동해까지 뻗어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그는 동해에 일단 닿으면 그것이 곧 세계의 가장 끝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방에서 일어난 '춘추 오패'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 유망한 기마 부대 간의 한 판 대결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서방의 기마 부대 간의 한 판 대결은 피 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서방의 기마 부대가 용감 무쌍했다면 동방의 전차 부대 또한 결코 흙을 파내는 도구만은 아니었다. 물론 서방의 고대 그리스 병사들 또한 뛰어난 장군과 자신들의 전술에 익숙했겠지만, 동방에도 손무, 손빈, 오자서 같은 뛰어난 군사가들 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시황릉 병마용의 위용을 본 이들은 충 분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1983년 3월, 중국의 고고학자 하내 선생은 일본 방송 협회가 초청한 연설회에서 알렉산드 로스와 로마 대군이 중국에 원정왔다는 학설을 공개 비판했다.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보 가 기록한 시루스는 중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열해 근처로 당시 유럽 사람들 이 알고 있었던 실크 로드의 가장 먼지점이지요, 또한 중국의 섬서성이나 감숙성에서 출토 된 로마나 비잔틴의 금화는 아마도 한나라 당나라 시절 실크 로드가 열리면서 전해진 것으 로 로마 시절에 그들의 군대가 중국에 남기고 간 흔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 학설은 이처럼 부정될 수 밖에 없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 아직까지 동서 방의 군대가 서로 대규모로 교전했다는 흔적은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이 이들 두 지역의 군사 충돌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진 제국이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1840년 마침내 그러한 기회가 왔다.(아편 전쟁)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너무 늦었다. 당 시의 동방 제국은 더 이상 옛날의 영화를 재현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리하여 동방 민족은 세계의 무대에서 오랫동안 비극을 연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 중국인조차 놀란 발견 세상 만사 모든 일의 흥패는 모두 나름대로 규율이 있다. 안티파트로스가 말한 '세계 7대 불가사의'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진이나 화재나 전쟁으로 인해 다 없어지고 오늘날 이집 트의 피라미드만이 나일 강가에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사라져 버린 위대한 기적 의 형태를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병마용의 출토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976년 4월 말, 중국을 방문중이었던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는 섬서성 임동현에서 진짜 사 람 크기와 같은 진나라 시대의 병마용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움과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선념 부총리에게 이 소식의 정확성을 타진해 본 뒤 곧바로 진용 발굴 현장 을 참관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이 때 진용 현장의 박물관 건축 공정은 발굴 작업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3월 9일, 박물관 건축 책임자는 성, 현, 공사 및 생산대의 책임자와 그 지역의 주민 대표를 초청하고, 임동현 화청지에서 협상을 벌여 "먼저 현장에 들어가 시공 준비를 하고 도로 건설, 전기 회로 설치, 시공 용수 문제 해결과 동시에 토지 검증 수속을 한다."는 공동 결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일 단 실제 상황에 들어가자 예상치 않던 일이 계속되었다. 어떤 농민은 건설 지역의 감나무에 이미 여린 잎이 나온 것을 보고 한번 더 감을 수확하고 가을에 나무를 벨 것을 건의했으며 , 또 어떤 이는 벼이삭이 날로 푸르러지는 것을 보고 이 땅에 의지해 연명하는 농민들 때문 에 마음아파했다. 시간이 흐르고 청명절이 다가왔다. 조상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 하는 그 지역 농민들은 공사 현장 부근에 있는 조상의 묘를 옮기는 일에 찬성할 리가 없었 다. 박물관 건축 관계자들이 부딪히는 장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그 지역의 지도자를 초청해서 사상 동원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지도자는 박물관에 대한 투자를 돌려 공장을 세우자고 하면서 이러한 방법이 더 경제적이며 실질적인 것이 아니겠냐는 건의를 해 박물관 건축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용관 건측 팀은 "싱가포로 총리 리콴유가 5월 중순에 진용 발굴 현장을 참관"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시간이 촉박하니 관계자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 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건축 팀은 하는 수 없이 두 눈 딱 감고 도로와 주차장을 건설했다. 몇백 그루의 아름드리 감나무를 베는 데는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두 대의 트랙 터를 이용, 철사줄로 나무를 연결해 쓰러뜨린 다음 다시 사람들이 이를 실어날랐다. 지반이 내려앉은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트랙터를 열심히 움직여 땅을 밝아 주면서, 한편으로는 도로 에 천을 깔아 자동차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사고가 나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5월 14일 오후 3시, 40대의 승용차가 살수차의 인도 아래 현장에 진입했다. 리콴유 총리가 붉은 깃발 을 단 승용차에서 내려 진용 발굴터를 향해 걸어왔다. 난생 처음으로 화려한 승용차 행렬을 맞이한 사람들은 모두 농기구를 던져 두고 이들을 에워쌌다. 리콴유 총리는 진시황 병마용 발굴 현장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이 기세 당당한 지하 대 군을 둘러보고는 한 동안 말이 없이 다만 경이와 흥분과 곤혹스러움이 어우러진 표정을 하 고 서 있었다. 40분 뒤 그는 발굴 현장을 떠나면서 "진시황 병마용의 출토는 세계적인 기적 이자 민족의 자랑거리다."라고 감탄의 말을 남겼다. 그 날 신화사는 전세계에 리콴유 총리가 병마용을 참관한 소식을 알렸다. 이 소식은 전세 계를 흥분시켰다. 진시황 병마용이 발견된 지 이미 2년 남짓, 아직 외국인들은 한 명도 진용 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리콴유 총리는 특별히 그 현장을 참관할 수 있었다. 민감 한 외국인들은 은근히 중국이 자츰 폐쇄와 보수의 성향에서 벗어나 개방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에 더욱 더 많은 외국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이 여산 자락에 있는 지하 대군을 보기 위 해 몰려와 숙연한 자세로 현장을 지켜보았다. 물론 가장 행동이 재빠른 이들은 미국 사람들 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뭇 사람들과 달랐다. 몇 사람은 살며시 접대를 책임지고 있는 여자 안내자 마청운을 따라가 그리 유창하지 않은 중국어로 "지하로 내려가 발굴 작업자들을 도 와 흙을 몇 차 나를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 보기도 했다. 아직 사회 경험이 적은 마청운은 직접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이 미국 사람들을 보고 순 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급여도 줄 필요 없는 이들에게 안 시킬 이유가 없지! 아마도 이 들은 다른 이를 도와 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나봐.' 그녀는 쾌히 허락했다. 몇몇 미국인들은 신이 나서 지하 용갱으로 들어갔다. 일을 하는 사람들의 달구지를 빼앗 아 자신들이 직접 몰기도 하고, 삽을 휘두르며 흙을 파내기도 했다. 마청운이 아무 생각 없 이 그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을 때, 고고학 팀 발굴대 대장 원중일은 공사 현장 에서 서양 사람 몇 명이 자신들이 일하는 모습을 사진 찍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바로 그들에게 발굴 현장에서 떠나줄 것을 요청했다. 몇 개월이 지난 뒤 한 외국 잡지에는 몇 명의 미국인들이 용갱 안에서 발굴을 돕고 있는 사진과 글이 실렸다. 진시황 병마용 발굴에 외국인이 참여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중국이 단 독으로 발굴 작업을 완성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 싸고 세계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마청운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은 걸 알았다. 그녀에 대한 지도부의 비판과 경고에 대해 그 녀는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국인이 발표한 문장과 진용에 대한 주 목은 마청운의 태도와는 상관이 없었다. 1978년 4월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는 잡지 에는 사진과 함께 토핀이 쓴 기사가 실렸다. 믿기 어려운 중국의 발견 키가 약184센티미터나 되고 갑옷을 입은 무사용은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의 상황을 생생 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2천 2백 년 전 몇천 명의 상비군 무사 중 한 사람 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이 서방에서 그 세력을 확장할 무렵 동아시아의 진이라는 나라 의 국왕은 다른 제후국 국가들을 점령해 통일 국가를 만들었다. 역사에 남을 이 승리자는 바로 진시황제다. 그는 중국 최초의 황제이자 만리 장성의 건축자이기도 하다. 기원전 210 년, 그는 15층 빌딩 높이의 여산이라 일컬어지는 거대한 분묘에 묻혔다. 사람들은 그의 능묘 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중국의 다를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이제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최 근 이 능묘에서 1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물을 파던 사람들이 우연히 거대한 지하갱을 발 견했는데 이는 진시황릉의 일부분이다. 현재 고고학자들은 이 값진 보물-6천 좌 남짓의 황 제 보위군으로 실제 사람 크기만한 도용과 도마를 발굴해 조사중이다. 우리가 지켜 본 것은 20세기의 가장 웅장한 발굴이었다. 이 장엄하고 위대한 사람 크기의 도용, 도마가 땅 위로 그 자태를 드러내던 장면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곳, 중 국 위하 변의 황토 아래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적색 도용들이 묻혀 있었던 것 이다. 그 중에는 무장한 전사, 사병을 태운 전차와 전마도 있었다. 이들 모두가 최초로 중국 을 통일한 황제의 수행자들이다. 우리들은 빗속에서 이 위대한 예술품을 보면서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렀다. 살아 움직 이는 듯한, 그 중 훼손되지 않은 것들은 똑바로 서서 마치 공격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손상이 심해 가엾게도 부서져 있었다. 시황제가 죽고 나서 4년 뒤, 그 다음 왕조의 통치자의 사병들이 약탈하고 황제의 분묘 일부분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 때 일부 도용이 훼손되었고 또한 대량의 무기도 약탈당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본 것은 다만 고고학 발견의 서막이었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이 조각상 들이 2천 2백 년 전 제작된 6천 군대의 선두 부대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문이 있는 거대한 지하 건축물에 진시황의 분묘를 보위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분묘의 주인은 중국을 통 일하고 만리 장성을 건축했으며, 공자가 귀중히 여기던 유가의 서적을 불태웠고 자신이 중 국을 통일한 첫 번째 황제임을 선포했던 바로 그 시황제다. 이토록 위대한 고고학 발견은 수많은 전쟁과 영광을 거친 중국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우리가 이 곳에서 본 대군은 역사의 시작일 뿐이며, 이 곳에서 1500미터 떨어진 곳이 바로 진시황릉이며 역사의 중심인 것이다. 아마도 이 거대한 분묘 아래에는 제국의 가장 큰 비밀, 중국 역사에서 전무 후무한, 가장 매력적인 보물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진시황 병마용의 상황과 진나라의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진시황 릉 지하 궁전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신비한 지하 궁전은 이러한 추측 속에서 더욱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영혼을 흘리는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내용이든 아니면 글의 길이건 간에 이 글은 병마용과 지하 궁전의 상황을 소개한 이전의 어떤 글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중국 잡지에서 발표한 진시황 병마용 관련 문장 또한 이번 글과 비견할 것이 못 되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란 잡지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매우 신속 하게 미국과 전세계에 진시황 병마용에 관한 기사를 보도해 이에 대한 세인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어쩌면 도무지 믿기 힘든 내용이 될 수도 있었지만, 어째든 이렇게 해서 진시황 병 마용에 대한 소식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1978년 9월, 당시 프랑스의 총리였던 시라크는 이 지하 대군을 향해 끌리는 마음을 주체 하지 못하고 여산 자락의 진용 발굴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전세계에 "세계에는 7대 불가사 의가 있으니, 진용의 발견은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보지 않 으면 이집트에 다녀왔다고 할 수 없듯이, 진용을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중국에 다녀왔 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는 이로써 진시황 병마용 군진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인들의 행동 미국인들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통해 진용과 진시황릉 지하 궁전의 상황을 전세계에 소 개했지만, 진용을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의 반열에 올린 것은 프랑스의 시라크 총리인 셈 이다. 미국인은 자연히 그 명명에서 선두 주자를 뺏긴 체면을 만회하고자 했다. 1979년 4월, 미국의 전 국무 총리 키신저는 북격으로 와서 잠시 머문 뒤, 곧 진용 발굴 현 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 웅대한 진나라 때의 대군을 관람하고는 "세계의 유일 무이한 불가사의"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시황 병마용이 세계 제몇 대 불가사의인가 하는 명명 문제는 이로부터 다시 논쟁거리가 되었다. 키신저가 귀국한 뒤4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979년 7년, 미국의 상원 의원 잭슨이 다시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는 방명록에 "너무도 훌륭하다! 1주일 전에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 았는데, 오늘 난 다시 중국의 진용을 보았다. 이 둘 모두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 만 스핑크스는 한 좌밖에 없는데 반해, 병마용은 몇천 좌에 이르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잭슨이 중국을 채 떠나기도 전, 1979년 8월 29일 미국 부통령인 먼데일이 다시 진용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는 키신저와 잭슨의 말을 총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와서 보아야 할 것이다." 먼데일은 진용을 '진짜 기적'이라고 했는데 이는 병마용의 방대함을 통해 이 군진 속에 숨 어 있는 의미와 오묘함을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살아 숨쉬는 '손자 병법'의 연구가 미 래의 전쟁에 끼칠 수 있는 영향과 미군에 대한 이익이 될 것이라는 점을 곧 깨달았던 것이 다. 사실사 먼데일은 정치가, 군사 전략가의 관점에서, 어찌보면 군사적인 측면에 치중해서 이러한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진용을 참관한 외국인 가운데 제일 먼저 진용 군진에 내재된 의미를 감지한 미국인들이 이 살아 있는 '손자 병법'을 연구할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부통령인 먼데일이 다녀간 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카터, 레이건, 닉슨도 진용현장을 찾았다. 또한 미국의 육, 해 ,공 3군 몇십 명의 고급 장성들도 모두 현장을 방문해 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국방 대학 총장들이 진용관에 들러 이 군진의 배치와 전략 전술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진 용 군진의 주요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진용 군진의 주요 사상을 미국 국방력의 배치와 고 위 장성들의 교학에 응용했다. 철저하게 진용 군진의 전술 정신을 흡수하기 위해 미국인들 은 막대한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1986년 3월 공군 소장 데이비드는 공군 본부와 해병대 로 구성된 사찰단을 인솔하고 진용 박물관을 참관, 연구했다. 백설이 덮인 황토 고원을 넘어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을 취재하러 왔을 때는 막 페르시아 만 전쟁의 포화가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였다. 이 병마용 앞에서 사람들은 전쟁의 분위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으며 또한 페르시아 만 전쟁의 현대화한 무기, 장비, 전략 전 술과 고대 전쟁 사이의 차이점을 더욱 절실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사 페르시아 만 전 쟁의 승리로 그들이 치른 대가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군대에 계급이 없어선 안 되겠는데..... 프랑스 인들과 미국인들이 진용이 세계 제몇 대 불가사의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논쟁을 그 치지 않고 무렵, 중국 당 부주석이자 군사 위원회 부주석인 섭검영이 1979년 4월 9일 진용 발굴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중국 지도자로서 처음으로 세계적 기적의 현장을 시찰 하러 온 것이다. 1호갱은 전시실을 건설중이어서 진용을 다시 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참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섭 원수는 때마침 발굴과 정리 작업을 진행중인 2호갱을 찾았다. 갱안에 근 1백 명 에 이르는 해방군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의아한 듯 책임자인 양정경에게 물었 다. "왜 여기에 아직도 군인들이 있는 거지?" "고고학 발굴 작업을 도와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작업을 한 지 벌써 몇 개월째입니다." 갱 주변의 흙더미 위에서 백전의 노장인 섭 원수는 보, 거, 기 ,노의 독립된 4개의 병과로 구성된 지하 대군영을 살펴보면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구사하는 막강한 군대의 역량을 느낌 과 동시에, 그 뛰어난 진법과 전술 사상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듯했다. 흙더미를 내려오면서 섭 원수는 말했다. "진용갱이야말로 우리 나라 최대의 고대 군사 박물관이다.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을 것 같다. 고위 장교들이 모두 참관해야 할 것이다." 박물관이 아직 건설되지 않았으므로 책임자들은 허름한 벽돌방을 임시 전시실로 삼아 귀 빈을 접대했다. 너무 비좁아서 몇 좌의 도용과 십여 개의 병기만을 진열했던 방에 섭 원수 의 출현으로 몇 개의 전시물이 더 첨가되었다. 전시실로 들어온 섭 원수는 출토된 진 얼마 되지 않은 칼, 창, 방패, 활, 팔모대창, 석궁, 화살촉을 비롯한 병기를 살펴보고는 2천년 전의 야금 공예가 그토록 뛰어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마 앞에 이른 섭 원수는 실눈으로 말의 크기를 가늠해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 다. "이제껏 전투마를 많이 보아 왔지만 이렇게 긴 목과 몸을 가진 말을 본 적이 없는데 이건 어떤 종류의 말이지?" "말의 형체로 볼 때 당시 감숙 하곡의 말과 비슷합니다. 아마도 진나라 때의 말은 대부분 이 중국 서북 지역의 것인 듯합니다. 용갱의 도마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감 숙 하곡의 말 종류로 생각됩니다." 배석한 한 고고학자의 대답이었다. 섭 원수는 손으로 말안장에 있는 도자기로 만든 손잡 이를 만지면서 물었다. "언제부터 말에 등자가 있었지?" 옆에 서 있던 양정경이 대답했다. "고고학 자료나 역사 문헌에서 볼 때 서진 때야 나오게 됩니다." 섭 원수는 그렇게 좋은 말이 서북에서 왔다 하니 서로군에게 이런 준마가 있었다면 상황 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커다란 진용 앞에서 멈춰 선 그는 다 시 갑옷 위에 장식된 술을 가르키며 도용의 갑옷과 장식이 서로 다른 이유를 물었다. "이것은 우두머리 군용으로, 갑옷의 술은 등급을 표시합니다. 진나라의 군대는 병기가 훌 륭하고 전투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군사 제도 또한 당시 여섯 제후국보다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이 등급을 나타내는 술이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양정경의 대답이 었다. "진나라 군대는 모두 몇 등급이 있었나?"섭 원수가 물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20개의 등급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등급은 진용 군영에서 이 미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섭 원수는 생각에 잠기더니 임시 전시실을 나와 여산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환잣말을 했 다. "군대에 계급이 없어서는 안 되겠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그냥 흘려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그 말 뒤에 숨어 있 는 진정한 의미 또한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섭 원수의 옆에 서있던 몇 명의 장교들은 이 말의 무게를 가늠했고 또한 군인이라는 직업적 감수서으로 중국 군대에 일대 변혁이 임 박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 변혁은 섭 원수가 진용을 참관한 지 8년 후에야 비로소 실시되었다. 1988년 8월 1일 중국 당, 정부, 군대의 지도자들은 정식으로 중국 인민 해방군에 계급 제도를 부활시킴으로 써 중국 군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참관을 마치고 차에 오르려던 섭 원수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양정경을 그의 옆으로 불렀 다. "진시황은 왜 병마용을 같이 묻도록 했을 것 같나?" "그는 무력으로 6국을 통일했으니 죽어서도 병마를 잊지 못하고 죽음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도록 한 것이라 느껴집니다." 섭 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 개관할 것인지를 물었다. "올해 국경일입니다." "빨리! 빨리! 좀 더 빨리 하게!" 연거푸 '빨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쓰면서 강조했다. 양정경은 병마용에 대한 섭 원수의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섭 장군님, 박물관에 제자를 써 주시겠습니까?" 섭 원수는 생각에 잠기더니 "나는 악필인데!"라고 말했다. "이 곳은 병마용 박물관입니다. 장군님이 가장 적격일 듯합니다." 양정경은 사전에 준비해 둔 박물관 이름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섭 원수는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종이를 접어서 공문서 봉투에 집어넣었다. 1979년 10월 1일, 섭검영이 쓴'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되었다. 이로써 진나라 시대의 막강한 지하 대군은 세상사람들의 찬탄을 받기 시작했다. 8 진시황릉의 보물을 찾아서 진시황릉의 봉토 위에서 신화사 섬서 지국 1981년 4월 8일자 1974년 진시황릉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병마용이 발견된 이래로 몇 년 동안 지속적인 진 용 고고학 탐사 팀의 시굴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수확을 얻게 되었다. 이는 바로 피살당 한 진시황의 아들과 공주의 순장묘 및 진시황릉 건설에 동원된 죄수들의 묘와 마구갱의 발 견이다. 그 곳에서 대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 중한 실물 자료가 제공되었다. 왕조린 기자 신화사의 보도는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발굴에 임한 탐사자들의 노력이나 부장묘와 마구갱 이 최초로 발견되었다는 놀랄 만한 사실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그래서 뭇 사람들 의 시선을 별로 끌지도 못했고, 진시황릉이나 진용의 참관자들 또한 그 상세한 발굴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1976년 가을에 진용 3호갱이 발견되었을 때, 고고학 탐사 팀은 정학화를 팀장으로 현지에 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 훈련반을 조직해 진시황의 능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대규모 탐사를 통해 진시황릉 지하궁 주변의 모든 지하 비밀을 파헤칠 작정이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능묘에 봉분을 만든 사람은 춘추 시대 공자였다. 물론 대다수 연구자들 이 주지하고 있다시피 공자는 봉분과 아울러 그 주변에 나무룰 심어 다른 곳과 구별되는 능 묘 형식을 만들었다. 공자 이전에는 장의자체가 지극히 간단하고 소박했다. 먼저 죽은 자를 야외로 옮긴 뒤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면 그만이었다. 봉분을 만들거나 주변에 나무를 심는 일도 없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장의는 당시 사회 상황이 물질면에서나 사상면에서 제한받 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느 옳은 것이 아니다. 춘추 이전 사람들 은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 였다. 자연히 인공 장식이나 절차는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바로 장의가 소박 했던 근본 이유였다. 은, 주 시대의 경우 관이나 땅을 파서 매장하는 묘혈 방식이 보편화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봉분을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춘추 시대 말기 공자는 부모의 묘혈에 4척(약 1미터) 높이의 언덕을 만들고 몇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이는 공자가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혹 부모의 묘소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생각해 낸 우연의 산물이다. 물론 공자는 이러한 봉분을 만드는 분묘 양식이 후대에 계승되어 중국 분묘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분묘 양식은 어느 새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이후에는 정치적인 색채까지 띠게 되었다. 진시황은 일생 동안 유학을 혐오했지만 유독 능묘의 건축에서는 공자는 최초로 실행한 봉 토 조성과 식수의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체 계화해 방대하고 완전한 형태의 능묘를 건설함으로써 이후 왕릉 건설의 모범이 되었다. 서한의 사학자 사마천의 기록인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은 13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뒤부 터 진시황릉 건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건축 관련 인원수는 가장 많았을 때는 70여만 명에 이르렀으며, 기간은 그가 죽어 지하궁에 묻힐 때까지 능묘의 공정이 완결되지 않았다는 사 실을 상기할 때 전체 39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보아 그 규모의 방대함과 호화스러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진시황의 시신이 지하의 미궁으 로 들어감과 동시에 '진'이라는 전대 미문의 대제국 또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기원전207년, 유방은 함곡관을 공략하고 그 여세를 몰아 곧바로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쳐들어갔다. 유방은 함양에 입성하자 그 지역의 덕망 있는 노인들과 재덕 있는 이들을 불러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견을 선포했다. "이제 여기 모이신 어른들에게 세 가지 법을 약속하겠 으니,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사람을 다치게 한 자, 도둑질 한 자는 그 죄에 따라 서 처벌할 것입니다. 그 밖에 진나라 시절의 가혹한 법률은 모두 폐지하도록 합니다." 유방 은 진나라의 재물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함양을 떠나 패상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왔다. 그는 들어온 지 하루만에 진나라의 황족 8백여 명과 4백 명의 문무 관리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미 유방에게 항복한 진 왕 자영 또한 항우의 방천화간반용극(일명 '방천화극'으로 일컬어지는 고대 무기의 하나)에 가슴을 찔려 결국 절명하고 만다. 이후 8천 명의 강동의 자제들은 물밀 듯이 진나라 황궁으로 쳐들 어가 온갖 재물을 약탈하고 궁녀를 겁탈했으며, 아방궁을 포함한 모든 궁전과 누각을 불태 워 버렸다. 복수심에 불타는 항우의 군대는 돌아가는 길에 진시황릉의 능묘에 이르게 된다. 이에 항우는 능묘를 파헤칠 것을 명했고, 이에 따라 모든 건축물과 능묘는 철저하게 훼손되 었다. 이는 진시황의 능묘가 당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재난이었다. 이후 유방과 항우는 중원 땅에서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결 국 항우가 패전해 오강가에서 목을 찔러 자결하면서 4년에 걸친 초와 한 사이의 전쟁은 끝 을 맺었다. 유방이 황제에 오른 뒤, 나라가 안정됨에 따라 그는 진시황릉을 적절하게 보호할 것을 명 령하고 20호의 민간인들에게 그 능묘의 관리를 맡겼다. 이에 따라 진시황릉도 잠시 동안 안 식을 얻게 되었다. 한나라 이후의 역대 통치자들 또한 진시황릉 능묘를 나름대로 관리했지만 능묘의 지하 궁 전을 도굴하는 액운을 단절시킬 수는 없었다.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곧 장안이 공략당했다. 항소의 군대는 공개적으로 진시황릉을 도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마구 잡이 도굴을 통해 군비와 병기의 부족을 충당하고자 했다. 이 도굴 행위는 항우에 이어 진 시황릉에 행해진 두 번째 대규모 약탈이었다. 청대 도광 연간에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진시황릉의 봉토의 북쪽 허리 부분에 큰 구멍이 생겼다. 부근 악가촌의 한 노인이 이 구멍을 발견했는데, 어느 새 구멍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하얀 이리'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지던 그 지방의 산적 두목이 능묘를 살펴본다는 미명 아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무리들을 이끌고 들어간 그는 그 구 멍이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하얀 이리'는 이 구 멍을 통해 수많은 보물을 훔쳐낼 수 있었다. 이후 다행스럽게 능묘를 지키던 자가 이 사실 을 관아에 알려 구멍을 막았고, 봉분 관리 또한 더욱 철저해졌다. 청나라 관리들의 추측에 따르면, 이 구멍은 당나라 때 황소가 이끈 대군이 능묘를 파헤쳤을 때 생긴 통로 가운데 하 나로, 도굴에 참가했던 병졸들이 현장을 떠나면서 뒷날 다시 도굴할 때 쉽게 찾을 수 있도 록 대충 막아 둔 것이었다. 그러나 황소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고 세월이 한참 지남에 따 라 애써 남겨 둔 구멍에 대한 기억도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우연한 폭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지하 궁전은 다시금 재난을 당하게 되었 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뒤이어 군벌의 혼전이 벌어졌다. 섬서 지방의 군벌은 자신들의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진시황릉에 대한 대대적인 도굴을 자행해 대량의 보물을 약탈했다. 이는 항 우, 황소에 이은 또 한 번의 전화였다. 이후 해방 전쟁이 한창일 때 국민당 서북 군대는 해 방군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진시황릉을 고지로 삼고 봉토 주변에 몇 개의 참호를 팠다. 이제 그렇지 않아도 제형상을 찾아보기 힘든 진시황 능묘는 더욱 만신 창이가 되어 버렸다. 오랜 세월 동안의 침식과 무수한 전쟁의 상처로 오늘날 우리들은 진시황 봉분의 본디 형 상을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최초의 형상이 원추형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방추형이라 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되를 엎어놓은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견만 분분할 뿐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물론 이는 사료의 기록이 불충실하기 때문이 지만 그렇다고 사료라고 해서 영원히 불변하는 절대 기준은 아니다. 봉토의 높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한 시대에 처음 보인다. "분묘의 높이가 50여 장"이 라는 기록이 그것인데, 당시 한 척이 23센티미터였으니 봉토의 높이는 대략 115미터이거나 그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봉토 또한 서서히 마 멸되었을 것이나 한 대 이후의 기록에는 더 이상 진시황릉 봉분의 높이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은 오히려 청대 이후에 외국인들에게 문호가 개방된 뒤에 나타난다. 1906년, 일본 학자 아다치 키로쿠가 중국을 방문해 진시황릉을 탐사했다. 그는 이후 자신 의 저서에서 "능의 높이는 76미터로 중간 부분이 조금 평평한 편이나 계단이 있으며 정상은 넓고 평탄하다. 능묘는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동서의 너비가 488미터, 남북의 너비는 515미터 다." 20세기 초엽 여산을 여행하던 3명의 프랑스 탐험가들 가운데 한 사람은 1917년 진시황릉 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현존하는 능묘 가운데 가장 온전하고 고도가 높은 능묘다. 각 변의 길이가 약 3백 미터이고 높이는 약45미터다. 외형은 세심한 설계로 모 두 3층의 기복을 이룬 봉토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조그만 산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과 같 다." 1961년 중화 인민 공화국 국무원은 진시황릉을 전국 제 1급 유물 보호 단위로 공포했다. 그 해 섬서성 문화재 관리 위원회는 왕옥청에게 감찰과 측량을 실시하도록 했다. 당시 능묘 는 이미 비바람에 깎이고 마멸되어 처음 높이의 2분의 1에 지나지 않는 43미터밖에 남아 있 지 않았다 물론 당시의 관찰로 진시황릉 내부의 유물 분포 상황이나 지하에 묻혀진 비밀에 대해선는 여전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능묘의 모든 것을 밝히기 위해서 정학화의 고고학 탐사 팀이 투입되었다. 마구갱과 희귀 동물갱 정학화는 진시황릉의 봉토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변의 농작물은 거의 수확이 끝나고 넓은 논밭에는 은백색의 잡초만이 가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지형을 살펴 보고 탐사 팀과 함께 꼭대기에서 내려와 능묘 동쪽의 상초촌에 가서 길고 긴 탐사를 시작했 다. 정학화는 여러 해 동안 고고학 탐사 결험과 진시황릉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이 일대에 진시황의 부장품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3일 밤낮이 흘러갔다. 탐사 팀은 전혀 소득을 얻지 못했다. 정학화는 다시 탐사 방법을 바꾸어 원래의 2미터 간격을 50 센티미터 간격으로 줄여 탐사를 하기로 했다. 가을 날 황혼 무렵, 핏빛처럼 붉은 저녁 노을이 진시황 능원에 곱게 깔리면서 사방의 뭇 풀들 또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벽해 상전이라 할 만큼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 온 진시황릉은 천지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찬란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학화가 다시 탐사를 시작해 땅을 뚫고 내려갔을 때, '낙양 삽' 끝에 전해져 오는 이상한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경험이 풍부한 정학화는 그 소리의 자그마한 변화로부터 자칫하 면 놓칠지도 모를 무언가를 포착할 수 있었다. 정학화는 아무 말 없이 삽의 위치를 바꾸어 작업을 계속했다. 1호 병마용갱과 같은 방대 한 지하 군진을 발견해 인류 문명의 기적을 찾아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삽에 딸려져 나 온 것은 도기 파편이 아닌 부식된 뼈의 잔해였다. 그는 모든 탐사 대원을 앞으로 불러 지하 에서 끌어올린 잔해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자신이 들은 소리와 삽을 통해 전해진 감각, 그는 처음 부딪힌 것이 도용이라는 데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도용 옆에서 출토된 뼈 의 잔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게다가 그 형상으로 볼 때 그것은 사람의 뼈가 아니었다. 이 지하 매장품의 비밀을 풀어 가기 위해 정학화는 탐사 상황을 상부에 보고한 뒤 다시 시굴하 기로 마음먹었다. 사방 5미터의 토층을 파헤쳤다. 지하 2미터쯤 들어갔을 때, 도용의 머리 부분 하나가 드러 났다. 이것이 바로 정학화가 탐사할 때 감지해 낸 그 도용이었다. 발굴대원들이 갱에 대한 시굴을 모두 마쳤을 때,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1호 병마용갱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높이 70센티미터의 도용은 기좌식(무릎을 끓고 않은 형상)으로, 등은 서쪽으로 기대고 얼 굴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얼굴과 손 등에는 분홍색의 염료가 칠해져 있었다. 뒷머리는 가 늘고 길게 땋아 내렸으며 연한 녹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또한 눈은 앞쪽을 주시한 채로 대 퇴부 위에 두 손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좌용 앞에는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 쟁반, 등잔 등 서로 다른 형상의 도기들이 놓여 있 었고 도기 쟁반 안에는 검게 부식된 벼와 볏짚이 있었다. 도자기의 앞쪽에는 거대한 뼈가 있었는데 비록 2천 년 동안 묻혀져 있었지만 한눈에 그것이 말의 뼈임을 알 수 있었다. 고고학 팀은 말의 뼈 아래 4개의 동그란 구멍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말의 다리가 그 구멍 속에 놓여 있으며 앞쪽에는 흙으로 만든 조그만 문지방과 문지방 위에 홈이 있다는 것 도 발견했다. 그 홈의 크기는 말의 목을 끼워 놓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비록 말을 순장시키 는 데 사용한 부대 장비는 없었지만 말의 뼈가 죽기 전에 몸부림치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 고 있었으며, 그 뼈에 남아 있는 새끼줄의 흔적으로 보아 분명히 말을 묶어 갱 안에서 생매 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학화는 갱의 위치와 출토된 기물들로 보아 이와 유사한 마구갱이 이 곳 말고도 존재할 것이며 어쩌면 병마용 군진과 마찬가지로 방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또한 이는 진시황릉 능묘의 전체 부장 분포도에서 하나의 완전한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정학화는 갱 옆으로 남북 방향과 서쪽 방향으로 나누어 탐사를 시작했다. 1개월 뒤, 마구 개의 위치와 배열 방식이 거의 규명되었다. 전체 분포는 남북으로 세 줄로 배열되어 있었는 데, 길이가 대략 1킬로미터인데 갱의 밀도로 계산해 볼 때 적어도 2백 좌의 부장갱이 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탐사 후에 결론을 정확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정학화는 36좌의 부장갱을 다시 시굴했다. 출토된 기물은 제 1좌의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도기 쟁반, 구리 고리, 쇠도 끼, 쇠삽, 쇠등잔이 더 발굴되었으며, 쟁반과 도기 항아리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대구, 중구, 소구 이 글자의 발견은 부장품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정확한 근거가 되었다. '대구''중구''소구' 라는 것은 진나라 때 궁정의 마구간 명칭으로 이 부장갱이 상징하는 것이 진시황 궁정의 마 구간 또는 진시황 생전의 궁정의 말 사육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쇠갈퀴, 쇠삽, 쇠도끼는 말을 사육할 때 쓰는 도구이며, 도기 쟁반, 항아리는 말 사육에 쓰이는 그릇, 곡식 알맹이와 볏짚은 말이 먹는 음식물, 도자기나 쇠로 만든 등은 야간에 말을 사육하던 사람들이 쓰던 조명 기구였던 셈이다. 마구갱의 발견은 역사서에 충분히 기재되지 않았던 진나라 당시 말 사육에 관한 방법과 마구간의 편성에 대해 진귀한 실물 자료가 되었다. 마구갱의 발견과 시굴 후, 탐사대는 다시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능묘 동쪽으로 탐사 범위를 확대하고, 또 한 팀은 서쪽을 '제2기지'로 삼아 탐사하기 시작했다. 1977년 봄, 능묘 서쪽의 탐사조는 바깥쪽과 안쪽 담 사이에서 마구갱과 유사한 부장품 31 좌를 발견했는데 그 또한 남북으로 3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다만 그 간격이 마구갱보다 조 금 클 뿐이었다. 부장개의 내용과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탐사대는 중간 한 줄의 17개 갱을 시굴했다. 뜻밖에도 이들 갱 안에는 직사각형의 기와관이 있을 뿐, 다른 유물은 출토되지 않 았다. 그 기와관의 뚜껑을 열자, 그 속에도 작은 동물 뼈와 조그만 도기 쟁반만 들어 있었는 데 그 형태가 마구갱의 것과 비슷할 뿐 뼈는 말의 것이 아니었다. 과학적인 검증을 거친 결 과, 이 뼈는 사슴과 새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동물의 뼈가 들어 있다면 그 성격이 마구갱과 같을텐데 사육자는 갱 안에서 발견되지 않 았다. 그렇다면 이 부장갱 안에는 사육하는 사람을 모방한 도용이 없단 말인가? 고고학 팀은 의문을 가지고 동서로 배열된 부장갱에 대해 일부 발굴을 시작했다. 각 갱 안에는 한 좌의 기좌용만이 들어 있었는데 그 조형과 자세가 마구갱에서 출토된 기좌용과 비슷했다. 다만 몇 좌만이 1호 병마용갱의 도용과 그 크기가 비슷했고 자세는 기좌용과 달 리 모두 서 있는 모양이었다. 또한 두 손도 기좌용과 달리 소매 속에 끼워져 있었다. 자세나 복식으로 볼 때 이 몇 기의 신분은 기좌용의 도요보다는 높은 사육 업무를 책임진 관리였을 것으로 여겨졌다. 시굴 상황으로 분석해 볼 때, 중간의 17좌는 희귀 동물갱과 조류갱으로 양쪽에 기좌용이 나 똑바로 선 도용이 있었다. 만약 마구갱이 상징하는 것이 진시황의 개인 말 사육장이었다 면 희귀 동물갱과 조류갱도 분명 궁정의 '원유(고대 동물이나 식물을 기르던 곳으로 주로 제왕의 화원을 일컫는 말)'라고 볼 수 있다. 각기 다른 두 군데 부장갱 또한 모두 진나라 때 의 궁정 제도와 황가의 생활 풍속을 보여 줌과 동시에, 후인들에게 진시황의 사상과 정치면 의 심리 상태를 분명하게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진시황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지만, 마 구갱과 희귀 동물갱과 조류갱의 발견을 통해 우리는 진시황이 이미 인간의 가치를 높이 평 가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각기 생매장한 말과 진귀한 동물과 조류가 들어 있었지만 상 육자는 모두가 도용으로 대체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명확해진다. 예술과 장례 제도라는 외형을 통해 진시황시대에 생산력의 증대에 대한 나름의 인식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에 따라 전체 진시황 능묘의 배치를 살펴본다면 3개의 병마용 군진과 진 시황릉의 연결 구도 속에 포함된 의미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 지휘부의 성격을 가진 진시황 병마용 제3호갱에서는 특수한 지위를 지닌 장수 도용 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가 보통의 관료로 그 신분이 제 1,2호 갱에서 발견된 장군 도용보 다 낮았다. 한 군대 진영의 지휘부로서 장군이나 원수가 없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박물관 해설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군대 진영의 최고 통솔자는 진시황 본인이었다. 진나라 때의 제도에 따르면 군대가 출정할 때에야 비로소 진시황이 임 시로 장수를 임명해 병권을 상징하는 병부를 내주었으며, 평시에는 임명하지 않았으니 군권 이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어떤 군 사 집단이건 간에 평시나 전시나 모두 구체적인 책임을 지고, 작전을 수행하는 장수가 있어 야 한다. 만약 진나라의 병마용이 그려 내고 있는 것이 병사의 포진도로서 평상시 때의 출 정이나 작전도라고 할지라도 관리나 구체적인 책임을 지는 장수가 있어야 할 것 아니가, 만 약 그렇지 않다면 이 군대는 오합지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지휘자가 없을 경우 모든 훈련이나 후방 근무를 제대로 실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우리는 3개의 병마용갱 옆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진나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분묘를 제쳐 두고, 이 군진의 최고 지휘자를 진시황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마구 갱과 희귀 동물갱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있는데, 특히 이 진나라 시대 분묘의 주인이 바로 병마용 군진의 최고 지휘자일 가능성 또한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묘의 주인은 아마도 생전에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유명한 장수로, 그와 병마용 군 진 사이의 관계는 마구갱, 희귀 동물갱의 모든 동물과 사육자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불 가분의 관계였을 것이다. 어떤 한 학자는 "만약 이 진나라 시대 분묘의 주인이 군진의 최고 통솔자라면 진용 군진의 성격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것이다. 곧이 군진은 더 이상 진시황 을 위해 부장된 것이 아니라 이 묘의 주인을 위해 부장된 것이리라"고 했다. 그러나 마구갱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말과 도용은 모두 누가 누구를 위해 부장된 관 계가 아닌, 모두가 진시황을 위해 부장된 것이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진대 묘의 주인과 병 마용 또한 모두가 진시황을 위해 부장된 것이다. 이양자는 도용과 진짜 사람, 진짜 말의 관 계 속에서 비록 완전히 상반된 구성을 보이지만, 이러한 구성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중시하 는 진시황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탐사 팀은 살해된 인간의 부장갱을 발견했다. 이는 또 다른 배경 아래서 발생한 정치적 결과물로, 이는 이미 죽은 진시황 본인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것이다. 비극적인 진 제국의 멸망과 마찬가지로 위세 당당했던 진시황조차 전혀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처참한 제단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좌승상 이사와 막내아들 호해를 이끌고 중차 부령 조고를 비롯한 막료와 태감의 호위 아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순행에 나섰다. 대부대가 낙양에서 출발해 무하관을 지나 단, 한의 두 수역을 지났다. 그리고 양자강을 따 라 호구산과 회계령을 거쳐 갔다. 진시황은 회계령에서 대우(요순 시대 치수의 영웅)에게 제 사를 지내고 그 공을 돌에 새겼으며. 또한 남동 지역에 남아 있던 씨족 사회의 혼인 풍습과 남녀의 음란한 현상에 대해 "태평 성세를 위해 천하에 교화의 풍을 계승하여 민속을 정리하 도록 한다."라는 새로운 봉건 사상을 내놓았다. 회계령을 떠날 때, 진시황은 뱃길을 따라 낭야에 이르렀다. 방사 서복의 말에 따라 진시황 은 쇠뇌수(고대 병기의 하나인 쇠뇌를 쏘는 사람)와 함께 상어를 잡으러 바다에 들어갔다. 대어를 잡은 진시황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차서 낭야대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 문득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느끼고 서쪽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한다. 행렬이 평원진에 도달 했을 때. 진시황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좌승상 이사는 급히 말을 돌려 함양으로 향할 것 을 지시했다. 하북 지역의 하구에 다달았을 때, 진시황은 이미 운명의 시간이 닥쳐왔음을 감지하고 억 지로 몸을 일으켜 이사와 조고를 불러 유서을 작성하게 했다. 유언의 내용은 북방에서 흉노 족을 지키고 있는 태자인 부소에게 함양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나이 50세에 세상을 뜨니,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지 겨우 12년만 의 일이었다. 진시황이 죽은 뒤 승상 이사는 새로운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왕의 죽음을 알 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선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시황제 으 죽음은 그 자신과 호해와 조고, 그리고 몇 시종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이사와 조고 는 비밀리에 계획을 세운 뒤,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시황의 시체를 온도가 조절되는 수레에 실었다. 겉으로 모든 것이 예의에 합당한 듯했지만, 사실 조고에게는 딴 속셈이 있었다. 그의 강요 와 꾀임에 빠져 이사 또한 결국 진시황의 유언을 변조하는 데 찬성했고, 태자 부소와 대장 군 몽념에게 검을 보내어 자살하도록 명령하고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를 황제로 옹립했다. 부소와 몽념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느라 행렬은 일부러 길을 돌아 함양으로 향하고 있 었다. 긴 여정과 무더워로 진시황의 시체는 부패해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사와 조고 는 소금에 절인 생선 몇 수레를 가져다가 시체 썩은 냄새를 가리려 했다. 행렬이 막 함양으 로 들어서려고 할 때, 부소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이사와 조고는 정식으로 진시황의 죽음을 공포했다. 9월에 부패한 진시황의 시체가 여산 진시황릉에 매장되고 호해가 등극했 다. 조고는 승상에서 낭중령으로 승진되고 이사는 승상직을 연임했다. 조고의 사주로 호해는 등극하자마자 제일 먼저 부소를 추종하던 장군 몽념에게 독주를 내 렸다. 이어서 6명의 왕자와 10명의 공주를 함양으로 압송해 길거리에서 참수했다. 그 밖의 황실의 종친들 가운데 어떤 이는 자살하고 또 어떤 이는 도망가다가 피살당했다. 화근을 철 저하게 뿌리뽑기 위해서 호해는 조정에서 이견을 가진 신료들을 차례로 모두 죽였다. 마지 막으로 조고의 유혹으로 호해의 등극을 도왔던 이사마저 함양에서 요참(허리를 자르는 형 벌)에 처했다. 진 제국이 무너지고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경악할 만한 피의 역사도 묻혀져 갔다. 후인들은 당시 조정 안팎에서 어떤 살육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1976년 10월, 고고학 탐사 팀은 진시황릉 동쪽에서 17좌의 순장묘를 발견했다. 그 분묘의 형태와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 팀은 그 중 8좌에 대해 시굴 작업을 단행했 다. 묘의 매장 구조는 모두 경사진 갱도가 나 있는 갑자 형태였다. 묘의 특수한 구조는 묘의 주인이 황실 종친이나 귀족이나 대신인 것을 나타낸다. 진나라의 평민은 이런 갱도가 나 있 는 묘지에 묻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묘 안에서 발견된 거대한 관곽 또한 평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순장묘들 안에서는 유골들이 흐트러져 있거나 이상한 기물이 발견됨으로써, 당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장면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유골은 하체 부분이 관 옆의 황토에 묻 혀 있고 머리뼈는 곽의 뚜껑에 놓여져 있었다. 또 어떤 시체의 머리뼈는 관 밖에 있었고 그 밖의 뼈는 관 안에 놓여 있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한 시체의 몸체와 사지 부분이 서로 분 리되어 아무렇게나 관내에 놓여 있고 머리 부분만이 관 외부의 흙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 었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머리뼈의 오른쪽 이마 위에 부러진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이 발견 되었다. 매장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발굴된 8좌의 묘 가운데 결국 한 좌에서는 유골은 발견하지 못한 채, 검 한 자루만이 발견되었다. 모든 현상을 종합해 볼 때, 묘의 주 인들은 대부분 살해당한 뒤 사지가 찢겨져 매장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묘의 주인들의 황실 종친이나 귀족들이었다는 근거는 독특한 묘의 구조 외에도 묘 안에서 대량의 금, 은, 구리, 옥, 칠기, 비단 따위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것 은 은 두꺼비로, 입 안쪽에 "소부"라는 두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는 이 제기가 진나라 소부 또는 중앙의 구리 주조 관서인 소부에서 제조된 뒤에 묘의 주인이 소유한 것임을 나타 낸다. 이런 진귀한 기물들 또한 평민들이 소유하거나 구경하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호해가 빚어 낸 역사의 참극을 연상시켰다. 난잡하게 어지러진 유골 들은 피살당한 왕자, 공주 또는 종실의 대신들의 것으로, 정상적인 죽음으로는 결코 받아들 일 수 없었다. 과학적 검증의 결과 이 일곱 구의 유골은 20세를 전후한 여자의 것으로 보이 는 한 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30세 전후의 남성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나이 대의 남 자가 일제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더욱 주의를 끄는 것은 묘실 안 에서 묘를 팔 때 난방을 위해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숯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모두 묘를 파던 시기가 동절기였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호해가 왕자, 공주, 신료들을 피살하도록 명령 했던 시기 또한 늦겨울이나 이른 봄의 추운 계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진시황의 폭정과 가혹한 형벌, 그리고 노역과 지나치게 긴 병역 때문에 백성들이 이에 반발해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물론 진나라를 패망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하윤곤 이 말한 대로 "진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은 호해가 왕위를 찬탈한 뒤 모든 것을 도리에 역행 해 끌고 갔기 때문이고, 진나라 통치 집단의 모순, 분열을 조성해 통치 역량을 나약하게 했 기 때문이다."고 볼 수도 있겠다. 만일 호해가 왕위를 계승한 뒤, 힘써 정치를 하고 사회 모순을 조금이라고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면 그렇게 빨리 진나라가 와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조정 내부 관료 집 단의 단결과 이익을 보호했다면 설사 봉기가 일어났다 해도 이를 막아 낼 충분한 역량이 있 었을 것이다. 당시 진나라의 장수 장한이 몇십만의 노역자들을 무장시켰다면 습격해 오는 주장의 농민 봉기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북방에서 방어 중이던 진 왕조의 30만 정예병과 대장군 몽념이 장한과 병사를 합쳐 공동으로 적에 대응했다면 유방이나 항우 의 대군도 함곡관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함야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패망시키지 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다시 재현될 수 없다.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진나라가 급속히 패망했다 는 사실뿐이다. 모든 가설은 역사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또한 "역사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시황 능묘에서 발견된 17좌의 순장묘는 후세 사람들에게 이 피비 린내 나는 역사를 통해 생활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치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9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 신기한 금방울 4년여의 각고의 노력 끝에 정학화는 그의 탐사 팀과 함께 상초촌의 부장갱, 마구갱과 희 귀 동물갱, 1,2,3,4 호갱,그리고 진시황릉 조성자의 묘지, 진가구에 있는 부장용 도기를 만든 가마터를 비롯해 능묘 외부의 지하에 숨겨진 비밀을 거의 모두 파헤칠 수 있었다. 1980년 여름, 정학화는 능묘 외부에서 다시 능묘 내부로 들어와 탐사를 계속했다. 10월 3 일,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한 고고학 발견이 서서히 그 서막을 열고 있었다. 진시황릉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4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탐사를 진행하 면서 발굴 또한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병마용 군진과 같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유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초의 신선한 분위기는 차츰 사라지고 반복되는 탐사의 단조로움 속에 탐사 팀들은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탐사대원 양서덕이 지하 7미터 부근을 파 내려가고 있을 때 삽에 딸려 나온 진흙을 보니 손가락 첫 마디 크기만하 금방울이 섞여 있었다. 그는 손으로 금방울에 묻어 있는 촉촉한 진흙을 털어 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대원들을 지휘하고 있 던 정학화에게로 달려갔다. "구슬을 발견했어요. 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금방울을 받아 든 정학화는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흥분된 마음으로 진시황릉 봉토로부 터 약 20미터 떨어진 곳으로 달려온 그는 금방울을 양서덕에게 건네 주고 낙양 삽을 지하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다시 촉촉한 황토가 묻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토층을 밀어 내자 은방울 과 금방울이 하나씩 자태를 드러냈다. 다년간의 고고학 탐사를 통한 지식과 경험으로 그는 매장된 기물이 또 하나의 희귀한 보물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금실 초롱의 술이 끌려나왔을 때, 그는 땅 위에 꿇어앉았다. 그 곳 7미터 지하에는 정학화가 4년 동안 그토록 찾아 헤맸던 동거마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청년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탐사기간에 무언가 허탈한 기분에 젖어들 곤 했다. 물론 저명한 고고학자로서 그의 이러한 감정은 다른 젊은 대원들과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조그마한 발견들 모두가 진시황릉 능묘와 진나라 역사를 보여 주는 서로 다른 의미의 중요한 열쇠였으며, 이 모든 성과는 사실상 그와 동료들의 4년 동안의 탐사의 결과 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스승이자, 고고학의 대가인 하내 선생의 충고를 잊지 않고 있 었다. "고고학자의 수준과 성과를 평가할 때는 그가 무엇을 발굴해 내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것들을 발견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고고학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노력을 통해 중요한 고고학 발견의 팀장 또는 참여 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화려한 정치 생활을 했던 진시황의 경우에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진시황의 기세 등등한 병마용 군진을 앞에 두고 그 위풍 당당한 마지막 순행의 진용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 을 듯했다. 진시황은 "죽음을 보기를 삶과 같이 하라"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일생을 같이했 던 거마를 자신의 순장품으로 선택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그 화려한 거마부 대는 어디에 매장되었단 말인가? 이제 그 실마리가 정학화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동거마의 발굴과 붐비는 관람객 정학화는 진용 박물관장 양정경의 사무실에서 손수건에 싸 온 것들을 풀러 놓았다. "이것 이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뭘 발견했지요?"양정경은 상대방의 눈빛으로부터 능묘 안에서 중요한 고고학 발견이 이 루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것입니다. 동거마(구리로 만든 수레와 말)입니다."정학화는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의 금방울, 은방울과 금실 초롱의 술을 가르키며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말머리의 장식품들입니다. 만약 발굴만 해 낸다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양정경은 눈앞에 놓인 금빛 나는 물건과 정학화의 흥분된 모습을 보며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기쁘면서 한편으로 안심을 못 하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확신할 수 있습니 까?" "네. 동거마가 아니라면 다른 부장품에 이런 기물이 딸려 나올 수 없습니다." 동거마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양정경은 다른 몇 명의 고고학 대원을 불러 식별 하도록 한 결과, 모든 일치된 의견을 냈다. 양정경은 상황을 곧바로 상부에 보고하는 한편, 탐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했다. 1980년 10월 15일, 국가 문물국 국장 임질빈이 섬서성 성위원회 지도자와 성 문물국 국장 과 함께 진용 박물관을 시찰하러 왔다. 양정경은 정학화에게 동거마를 발견한 상황을 임질 빈 국장에게 브리핑하도록 했다. "무슨 근거로 확신합니까?"국장이 의문을 제기했다. 정학화는 출토 기물을 가리키면서 일일이 설명했다. 금방울, 은방울과 금실초롱의 술 이외 에 동거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무늬가 있는 구리 파편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만약 정말 동거마라면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겠군요.""먼저 탐사를 해서 진위를 파악하동록 합시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10월 8일, 고고학 팀장 원중일과 정학화는 탐사 상황에 근거, 세밀하게 계산해 매장된 동 거마의 위쪽 토층이라고 추측되는 곳에 직사각형의 선을 긋고 탐사를 시작했다. 11월 3일 두 대의 동거와 여덟 필의 동마 및 두 개의 동어자(청동으로 만든 마부)가 7-8 미터 깊이에서 자태를 드러냈다. 2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매장되어 있어서 동거마는 흙더미 의 압력에 형태가 일그러져 있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한 거마가 완전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은 장식품은 윤기가 나고 금으로 된 물건들은 빛이 나고 있었다. 정학화의 추측이 현 실로 증명되었다. 11월 4일,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장녕금과 장업대원 오영기는 출 토된 동거마 사진을 가지고 비행기편으로 북격에 도착해 국가 문물국에 보고했다. 사무실에서 당 회의를 열고 있던 국가 문물국 국장 임질빈은 조용히 대기실로 나왔다. "지시에 따라 동거마 주위에 구덩이를 팠습니다. 두 개의 동거, 여덟 필의 동마와 두 좌의 구리로 만든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국장님께서 보시면...."장녕금은 임질번에게 사진을 건 네 주었다. 경의와 찬사, 논의.... 이 중대한 고고학 발견 앞에서 더 이상 다른 어떤 회의도 진행될 수 가 없었다. 임 국장은 장녕금, 오영기에게 사회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의 하내 소장을 찾아 보고하도록 하는 동시에, 국가 문물국 부국장 손일청을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으로 파견해 구체적인 상황을 처리하도록 했다. 장녕금, 오영기 두 사람이 북경에세 관련 부서에 상황을 보고하고 진용 박물관으로 돌아 왔을 때, 진시황릉 능묘의 상황은 크게 변해 있었다. 동거마가 발굴된 당일, 이미 그 소식은 지역 주민들에게 "진시황릉에서 진짜 말, 마차와 같은 크기의 동거마가 출토되었다."에서 다 시 "진시황릉에서 금말과 금마차가 발굴되었다."로 마지막엔 "진짜 말과 마차가 발굴되었 다."라고 와전되고 있었다. 소식은 재빨리 임동현과 서안으로 퍼져 나갔다. 그 지역의 농민, 서안과 임동의 간부, 노 동자, 시민, 게다가 그 곳을 여행하고 있던 외국인들이 대거 진시황릉 능묘로 '진짜 말과 마 차'를 보기 위해 몰려왔다. 이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원중일과 정학화는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동거마의 구덩이 옆에 건초로 울타리를 세우고 밤낮없이 이를 지키도록 했다. 동거마 쟁탈전 동거마가 출토된 위치는 바로 부근 농촌 사람의 보리 경작지였다. 밭 임자는 계속해서 사 람들이 몰려와 보리 이삭을 밟고 엉망 진창을 만드는 것을 보고 급히 새끼줄과 나무 막대를 찾아 동거마 구덩이 주변을 둘러쌌다. 또한 동거마를 참관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에 입구를 설치한 다음, 판지를 잘라 표를 만들고 입구에서 '입장권'을 팔기 시작했다. 입 장권 가격은 진용 박물관 표 가격의 꼭 절반이었다. 멀리서 이를 참관하러 온 사람들은 조 바심이 나는 터라 이 입장권의 성격에 관계 없이 너도나도 표를 사서 동거마를 구경하러 갔 다. 동거마가 출토된 구덩이 주변은 이미 그 지역 농민들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진용관 작 업자들도 동거마 갱으로 들어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반 외지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입장권 을 사야만 했다. 몇 명의 섬서성 문물국 지도자들이 이를 무시하고 입구로 진입하려다가 농 민들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진용 박물관 측에서는 그 지역 군대와 연결을 시도, 부대를 파 견시켜 주기를 요청했다. 유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해방군은 1개 소대 병력을 진시황릉 능묘안으로 진입시 키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해당 지역 주민들은 자신의 자산이 해방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보 고 조금도 양보하려들지 않았다. 군인과 민간인들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해방군에서 는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 가운데 한 명은 급히 병원으로 수송되어 겨우 목숨을 건졌 다. 일 년 뒤 그 부상자는 신체 장애자 판정을 받고 퇴역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대는 더 이상 이를 수호할 수 없게 되자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지역의 권한은 다시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위급한 상황이 날마다 계속되고 있는데도 진용 박물관은 손을 쓸 수 없게 되자 임동현으로 사람을 파견, 이르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제의 초점은 이를 보호하는 것에서 차츰 이 동거마의 소유가 어디 에 속하는 것인가라는 점으로 옮겨졌다. 진용관은 섬서성 관련 부서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 곳 또한 해결 방법이 없자 국가 문물 국에 이를 긴급 보고했고, 국가 문물국은 다시 공산당 중앙 선전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며칠 뒤 중앙 선전부로부터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동거마는 진용 박물관으로 옮겨 거기서 정리, 복원해 전시토록 한다."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진용 박물관 측에서는 즉각 임동현 위원회로 사람을 파견해서 현과 협상토록 했다. 임동현에서는 동거마를 진용 박물관으로 운송하는 데 협조하기로 결정했다. 동거마는 지하 7미터에 매장되어 있었으며 게다가 토층의 압력으로 한 대의 동거는 무려 1500개 이상의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어떻게 안전하고도 완전하게 그리고 빠른 시간 안 에 이를 박물관으로 운반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작업 팀들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박물관 팀 오영기 는 부근 공장에서 대형 철판을 얻어 와서 이를 실어나르기로 했다. 철판이 작업 현장에 도 착하자 농민들이 이를 막아 섰다. 이송 책임을 맡고 있던 장녕금이 중앙에서 온 전보를 보 여 주었지만 농민들은 그저 자신의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다급해진 장녕금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깔려서 못 쓰게 되는 보리에 대해서는 진용 박물관 측에서 모두 배상하겠습니다." 다시 배상액에 대한 협상이 벌어졌다. 결국 농민들의 요구대로 트럭이 한번 들어갈 때마다 3백 원(당시 농민 한 사람의 1년 수입)을 지불하겠다 는 서약서를 쓰고 문제가 해결되었다.(1개월 뒤 실제 보리 수확량의 5배 가격을 지불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동거마의 주변에 깊이 10미터 가량의 깊은 도랑을 팠다. 동거마 를 둘러싼 두께 1미터의 흙고 함께 동거마를 목판으로 에워싸자 네 개의 대형 나무 상자가 되었다. 철판을 크레인으로 구덩이에 넣은 뒤 동거마가 있는 흙 아래쪽으로 조금씩 집어넣 어 마침내 상자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크레인을 이용해 트럭에 실어 운반했다. 동거마가 박물관으로 운반되고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1981년 8월 7일, 북경의 중앙 방 송국이 최초로 동거마의 발견과 복원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오랜 침묵 끝에 알려진 이 소식은 곧바로 세계를 진동시켰다. 한 달 뒤인 9월 18일, 병마용을 참관하기 위해 방문하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이 동거마 참관을 신청했다. 아직까지 대외 전시를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진용관 관계자들의 협의와 섬서성 문물국, 그리고 국가 문물국의 허가를 거쳐 구스타프 국왕은 최초로 동거마를 참관한 외국인이 되었다. 발굴된 동거마는 두 대였다. 1983년 8월에 1500개 남짓한 조각으로 크게 훼손되었던 한 대의 동거와 네 필의 동마와 한 좌의 마부가 '2호 동거마'로 명명되어 전면 복원되었다. 1983년 9월, 문물국 간부와 전국 각지의 전문자가 여산 영빈관에 모여 '2호 동거마의 정 리, 복원에 대한 감정 회의'를 열어 그 회의 석상에서 "동거마의 복원은 정확하고 완전하게 행해졌다."는 감정이 내려졌다. 이에 국경일인 10월 1일에 동거마가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 게 공개되었다.(또 한 대의 '1호 동거마'를 1987년 5월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뛰어난 기술 동거를 끄는 4필의 동마(청동 마차)를 체형이 크고 이마에 빛나는 금, 은 장식물이 달려 있다. 둘글고 커다랗게 뜬 눈은 앞쪽을 향하고, 약간 들창코인 콧구멍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있다. 또 고르게 난 이빨은 재갈을 물고, 길다란 갈기는 바람에 나부끼며, 대나무처럼 곧게 선 귀는 주인의 명령에 언제라도 달려가기 위한 듯 쫑긋 세워져 있다. 한편 마부는 몸집이 넉넉하고 자신 만만하며, 팔 자 수염은 그 운치를 더하고, 머리에 쓴 초운관과 허리의 청동 단검은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완만한 곡선을 이룬 눈썹 아래로 가늘 게 뜬 눈은 앞을 응시하며, 오른손은 채찍을 높이 치켜들고 6가닥의 고삐를 잡은, 출발 전 만반의 준비를 갖춘 태세다. 동거의 돔 형 지붕과 사 면의 벽에는 색깔이 선명한 변형 용봉 권운문 과 운기문의 도안 이 그려져 있고, 자층(수레의 끝채 끈에 있는 가로목)의 양쪽 끝과 멍에에는 무늬가 있는 은 으로 만든 고리가 박혀 있다. 또 바퀴 축에는 방울이, 복대에는 술 장식이 달려 있다. 전체 적으로 눈부시게 우아한 풍격을 지니고 있어 화려함 속에서도 순박함이 느껴진다.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고 또한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들어 있어, 절묘한 공예 조형으로 인한 생 기가 보는 이들에게 2천 년의 시간 차를 거의 느끼지 못하게 한다. 야금 주조 기술 또한 현 대인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진짜 말과 수레의 2분의 1 크기인 이 동거마는 20세기에 발견된 전세계 청동기 중에서도 가장 크다. 전체의 무게는 1243킬로그램으로 이렇게 호화스런 장식을 하고 완전한 형태를 갖춘 고대 동거마의 발견은 세계 최초다. 뿐만 아니라 그 비할 데 없는 공예 기술과 높은 수준의 야금 주조 기술 앞에서는 이제까지 출토된 모든 고대 청동기가 빛이 바래는 것도 무 리가 아니었다. 1983년 10월에 방문한 루마니아의 지도자는 전시된 동거마를 보고 "우리들 은 이 역사적 고고학 발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것은 2천여 년 전의 위대한 문명 창조 자의 지혜의 결정이다. 세계 야금의 역사는 마땅히 다시 써야 하며 모든 것이 여기부너 시 작되어야 한다."고 했다. 동거마의 계시 교통 수단인 수레가 언제 발명되었는지 고증하기는 어렵지만, 1930년대에 하남성 안양 송 둔에서 출토된 몇십 대의 나무로 만든 전차를 보건대, 중국에서 수레를 사용상 것은 37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은, 주, 춘추, 진, 한, 수, 당의 모든 왕조마다 수레가 출토 되었지만, 거의 모두가 목제였기 때문에 썩어 버리거나 파손이 심해서 고대 수레의 전모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출토된 진나라 시대의 동거마는 마치 타임 캡슐처럼 2천 년 전 수레의 진짜 모양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주고 있다. 두 대의 동거는 모두 한 줄로 나란히 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형태인데, 안쪽의 두 마리 말이 끌채(큰 수레의 양쪽으로 길게 앞으로 내밀어 있는 두 개의 나무, 그 끝에 멍에를 걸 어 말에 씌워 끌게 한다.)를 끌고, 바깥쪽의 두 마리는 직접 수레를 끈다. 1호 수레는 '입거' 로 마부와 탑승자가 모두 서는 형식이고, 2호 수레는 '안거'로 마부는 앞에 앉고 탑승자는 지붕, 난간, 창문, 문짝이 있는 탑승실에 앉도록 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꽃무늬가 그려진 지붕을 얹은 탑승실과 내부에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2호 수레는 고급 관료용 수레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시황제의 순행 행렬 속에 있는 수레 두 대를 모방한 것이지만 시황제 자신의 어거는 아닌 듯하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가 탄 수레는 '금은거' 이고 여섯 마리의 말이 일렬로 서서 끌며, 그 뒤에는 음양 오행에 따라서 각각 다섯 색깔의 '입거'와 다섯 색깔의 '안거'를 거느렸으며, 창문을 열고 닫음으로써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온량거였다고 한다. 이처럼 위용이 대단한 시황제의 수레 뒤로 문무 백관, 황후 비빈, 공주의 수레가 수행해, 순행할 때마다 각지에 대 제국의 위용을 크게 과시할 수 있었다. 시황제에 대한 재평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동거마를 통해 우리는 일생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진시황 의 휘황찬란하고 위풍 당당한 순행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일세 영웅의 성 격과 사상 속에 깊이 새겨진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도 하다. 시황제는 6국을 합병하고, 남으로 백월(오늘날의 중국 화남 지방)로 원정을 나갔으며 북방 에 만리 장성을 쌓았고, 다섯 번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는 등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오랫 동안 후대 사람들은 그의 천하 통일의 업적을 찬미했지만, 만리 장성 축조와 천하 순행, 그 리고 서복에게 명해 동해에서 불로 장생 약을 구해 오게 한 것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 를 해 왔다. 때문에 시황제는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 이 되었다. 몇 년 전 중국 고대 문명의 상징인 만리 장성에 대해 "만리 장성은 인순 수구(낡은 인습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묵은 관습이나 제도를 지키고 따름), 곧 보수적인 성격을 나타낸 것 이다. 만리 장성을 쌓음으로써 외피를 만들어 외부세계를 보는 눈을 스스로 감았다."고 하는 견해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시황제가 대행렬을 동반해 동쪽으로 순행하고 바다로 진출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만리 장성을 축소한 것은 물론 군사상 필요했기 때문이었지만, 바뀌 생각해 보면 만리 장 성의 높고 긴 벽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서쪽과 북쪽의 고원 지대인 광막(진나라의 발상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고, 그 대신에 동방의 넓은 대지와 푸른 바다로 눈을 향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진나라의 대군이 백월을 점렬했을 때, 시황제는 병사들에게 원주민과 결 혼하거나 정착할 것을 권장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들의 의의를 단순히 군사적인 면에 한정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시황제가 확립한 제국의 판도를 보면 그것이 거대한 키 모양을 하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넓은 대지에 사는 사람들은 고원 지대의 산꼭대기에 쌓은 벽, 곧 만리 장성에 등을 대고 평원과 무궁한 바다를 눈앞에 두고 있는 형상이다. 배후에 있는 길 이 완전히 폐쇄된 이상 앞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시황제는 중국의 운명을 바로 동방의 푸른 바다에 걸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시황제는 다섯 번의 순행 중에 네 차례나 동쪽의 해안을 방문했다. 해안을 따라서 남쪽으로 회계령, 낭야, 지부산, 갈석도 등에 그는 드높이 누대를 만들고 거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시황제의 생애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정복에 대한 본능 을 최대로 발휘했다. 그는 무쇠 같은 팔로 건곤(하늘과 땅)을 뒤집어 천하를 통일시켰다. 그 러나 그의 정복욕은 고갈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워 사신에 대 한 도전을 시작했다. 이러한 도전은 극히 비장한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그는 의연히 정복의 여정을 늦추지 않았다. 시황제는 서복 일행을 푸른 바다 저쪽에 있다는 신비의 나라에 파견 해 불사의 약을 구해 오게 했다. 진용관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우연히 어떤 여직원을 만났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진용 관에서 자랐는데 3년 동안 군대 생황을 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다른 이들보다 복잡하거 나 많은 경력을 지닌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중국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한 이해 나 진시황에 대한 견해는 오히려 필자를 크게 놀라게 했다.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시각에서 엄숙하고 공정한 태도로 필자에게 깊은 감동과 계시를 주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진시황은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건립하고 통 치하는 제국의 흥성과 발전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진시황은 결코 대 다수 황제들처럼 주색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는 힘껏 천하를 다스리고자 했고, 이 중화 제국이 영원히 강대해져 쇠락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바람에서 그는 대담하게 신기하고 허황된 영단과 묘약, 곧 장생 불사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 게도 진시황의 휘하에 있던 신하와 방사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일했습니다. 결국 중국은 미지의 바다를 탐색하고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지요. 아마도 진시황의 즐거움은 자신과 적, 그리고 죽음과 싸워 이기는 것에 있었는지도 모릅 니다. 그 실질적인 내용은 바로 위대한 정신과 의지의 상징인 셈이지요. 인간의 양강의 기운 은 바로 이러한 싸움에서 이기는 데에 언젠가 우리들이 이러한 정신의 내적 의미를 진정으 로 체득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중화 민족의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인류 문 명의 태양이 다시 동방에서 떠오를 테니까요. 22세의 처녀가 내린 논단과 전망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탁월한 견해에 감복했다. 뿐만 아 니라 그녀와 무언가 이야기를 더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분명 이러한 양강의 기운, 정복 정신이 다시 생겨난다면 중화 민족의 미래으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