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지은이:위에 난 출판사:일빛 봉사사:한양대학교 김기정 서장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 아티파트로스의 여행 기원전 266년, 페니키아 시돈(현재의 레바논 일대)의 시인이자 탐험가인 안티파트로스는 상선 한 척을 타고 고향인 시돈에서 출발해 지중해를 따라 이오니아 해로 들어갔다. 그는 제일 먼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서부인 올림피아 지방의 고지대에 우뚝 선 제우 스 대신전을 방문했다. 안티파트로스는 '성스러운 길'을 따라 백색의 제단 앞에 이르렀다. 크고 넓은 제단이 올림 푸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문을 지나 높은 단 위에 올라서자, 위대하고 장엄한 대신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높이가 14미터나 되는 제우스 신상은 수많은 보석이 박힌 삼나무로 만든 보좌 위에 놓여 있었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는 왼손으로 황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신 니케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왕의 지팡이를 잡고 있었다. 그 지팡이 위에는 발톱이 날카 로운 매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계단에는 그리스 인과 아마존 인들이 서로 혈전을 벌이는 장 면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신성함과 예술미가 서로 어우려져 있는 전당에서 안티파트로스는 위대한 신의 형상과 그리스의 휘황찬란한 현실주의 조각 예술에 압도되었다. 그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신이 그에게 내려 준 사명을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빛나는 문명 을 역사서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여행의 성공으로 안티파트로스는 그의 몽상이 결국은 실현되리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년 뒤, 그는 계속해서 지중해를 따라 동쪽으로 순항해 소아시아 끝 로도스 섬 의 태양신인 헬리오스의 신상과 마우솔로스 왕의 왕릉, 에페소스에 있는 아프테미스 신전이 라는 인류 문명의 기적과도 같은 장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듬해 봄, 그는 남쪽으로 항해 해 지중해 남부와 나일 강 삼각주에 자리잡은 파로스 섬에 도착해 건설한 지 몇십 년밖에 되지 않은 알렉산드리아 등대에 이르렀다. 아래는 정사각형, 윗부분은 팔각과 원주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가 135미터나 되는 거대한 등대는 암초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티파트로스가 더욱 흥미를 느낀 것은 등대 꼭 대기에 서 있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청동상과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거대한 횃불이었다. 온종일 타오르고 있는 이 거대한 횃불은 항해하는 배들도 정확하게 항구를 찾아올 수 있게 했다. 젊은 혈기로 가득 찬 안티파트로스는 다시 나일 강 하류에 있는 언덕과 리비아 사막 동부 에 이르렀다. 그는 약 반 년의 시간 동안 70여 개의 피라미드를 관찰했다. 경비의 부족과 계 절의 변화로 오래 머무를 수 없었으나 그를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장소, 기원전 4세기 헤로 도토스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공중 정원'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얼굴에 사자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를 뒤로 하고 안티파트로스는 홍해 동쪽 언덕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기원전 264년 봄,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그가 그토록 가 보고 싶어했 던 바빌론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안티파트로스는 헤로도토스를 황홀감에 빠트렸던 '공중 정 원'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역사학자를과 예술의 거장들이 오체 투지로 경배했던 신기한 건축물은 이미 옛날의 풍광은 사라지고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티파트로스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전에 이 위대한 인류 문명의 흔 적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 뒤 안티파트로스는 자료를 정리하는 동시 에 경비를 조달해 동방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바로 그 때 큰 사건이 발생했다. 지중해 에서 카르타고 인과 로마 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로마 대군이 시실리 섬을 공격한 것이 다. 이런 상황 때문에 그는 동방 여행의 꿈을 잠시 거두고 고향인 시돈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을 혐오했던 안티파트로스는 결코 이런 일 때문에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이번 여행에서 목격했던 인류 문명의 기적을 건축 시대별로 자세하게 정리해 "세계 7대 불가사의"라 이름붙였다. 지하 군단의 발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안티파트로스의 동방 여행에 대한 꿈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멀고 먼 동쪽 세계에 서방의 '7대 불가사의'에 필적할 만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카르타고와 로마가 접전을 벌인 지 23년 뒤, 그들의 격전은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카르 타고는 전쟁에서 폐배해 결국 거액의 배상금과 시실리 섬의 주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안티파트로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5명의 학생과 함께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전쟁 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어서 그의 목선은 수시로 로마 군대에게 저지당해 여러 차례 항로 를 바꾸어야 했다. 그들 일행이 아라비아 해역으로 들어갔을 때, 또다시 액운이 그들을 덮쳤 다. 흉폭한 해적들이 그들의 목선을 습격한 것이다. 모든 것을 강탈당하고 두 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으며 안타파트르스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망망 대해를 표류하는 절망 속에서도 그느 별을 관찰해 그들의 위치를 가늠하고 학생들에게 항로를 알려 주었지만 목선이 해안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몽상과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안티파트로스가 세상을 떠나고 2천 년이 지난 1969년 7월 20일, 인류는 사상 처음으로 '아 폴로 11호'를 달에 보냈다. 미국 우주 항공국 사람들이 달 위의 우주인에게 지구 위의 어떤 건축물이 보이느냐고 질문하자 우주인 암스트롱은 중국의 만리 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라 고 대답했다. 암스트롱의 대답으로 인류는 황하와 나일 강 두 지역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중국 의 만리장성이 안티파트로스가 말한 '7대 불가사의'에 필적할 만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 어졌다. 그런 순간에 황토 고원 위에서 갑자기 진제국의 대군이 등장했다. 갑옷을 걸친 8천 여 명의 병사가 전차를 타고 위풍 당당하게 인류의 시야 안으로 돌진해 들어온 것이다. 안티파트로스의 몽상은 다시 부활했다.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는 바로 중국에 있었던 것이다. 1장 지하로부터 들려 온 메시지 혼돈으로부터 탈출 1974년 봄, 극심한 가뭄이 중국 서부 8백 리의 진천을 휩쓸고 있었다. 이제 막 옮겨 심은 보리 묘종은 목마름으로 대지에 고꾸라져 하늘의 은총을 갈구하고 있었다. 물,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물을 구하듯 여산자락에 위치한 서양촌에서도 예외는 아니 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서양촌의 남쪽 감나무 과수원에 석양이 깔릴 무렵, 서양촌의 생산대장 양배언과 부대장 양문학은 과수원 모퉁이에 서서 나무만 자랄 뿐 농작물은 자라지 않는 황폐한 땅을 바라보 며 무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이 서산으로 기울고 새들이 둥지를 찾을 무렵, 양배언은 결심을 굳히고 삽을 들어 돌 무더기 땅 위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양문학은 여산의 골짜기 입구과 발 아래 그려진 원이 일직선상에 있는 것을 가늠해 보고 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신이 돌봐 주시길 바랄 뿐!" 이 때만 해도 이 동그라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서양촌의 조장인 양전의를 비롯해 6명의 장정이 삽을 휘둘러 그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온통 모래와 자갈투성이였지만 가뭄으로 마음이 조급했던 농민들은 쉬지 않았고 땅을 파 내려갔다. 정오가 되었을 무렵 작업은 눈에 띄게 진척되고 있었다. 1미터 정도 파 내려갔을 때 이상하게도 붉은 색의 토층이 나왔다. 삽으로 파헤치려 했지 만 토층이 매우 단단해 '둥둥'하는 소리만 들려 올 뿐 잘 뚫리지 않았다. "우리가 벽돌 굽는 가마터를 판 건 아닐까?" 구덩이 속에서 일하던 농민이 삽을 내려놓고 의아하다는 듯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럴지도 몰라. 노인네들에게 이 일대가 옛날에 벽돌 굽는 가마터였다는 애길 들은 적이 있어."양전의는 이렇게 말하고 괭이를 건네주었다."이걸로 슬슬 파헤쳐 보지." 단단하던 토층은 이 두 장정의 연속 공격에 드디어 구멍이 뚫렸다. 대략 30센티미터쯤 되 는 토층으로 가마의 지붕 같아 보였다(사실은 병마용 구덩이를 덮고 있는 불에 달궈졌던 토 층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잇따라 나오는 도기 파편들도 더 이상 이상할 게 없었다. 붉은 토층을 뚫고 나자 공사는 더 빠르게 진척되었다. 1주일이 못 되어 지름 4미터의 큰 구덩이를 거의 지하 4미터까지 파고들어 갔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곡괭이가 이제 세계 를 깜짝 놀라게 할 방대한 지하 군단과 한 걸음 차이밖에 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된 것이 다. 1974년 3월 29일. 양지발이라는 청년이 곡괭이를 내리친 순간 진시황릉 병마용의 첫 번째 파편이 출토되었 다. 기적의 빛이 지면으로 그 형태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양지발은 그 파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다만 물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양지발과 그 동료들의 곡괭이는 줄기차게 이 지하 군단을 내리찍고 있었다. 그러다 계속해서 머리 부분과 부러진 다리와 팔 조각들이 나오자 사람들은 그 때서야 도기 파편에 주의를 기울였다. "벽돌 가마에서 이게 웬 것들이지? 어서들 파자구. 어차피 물만 나오면 되니까!"양전의의 이와 같은 말에 청년들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곡괭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구덩이 서쪽 벽에서 양지발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큰 소리로 외쳤다."이것 봐! 항아리야." 이 소리에 마침 흙을 나르고 있던 청년이 달려와 보니 확실히 항아리 하나가 흙 속에 묻 혀 있었다."천천히 파라고. 부서지지 않게 하면 집에 가서 감이라도 삭힐 수 있잖아. 노인네 들 말로는 그렇게 삭힌 감이 기가 막히더군!" 일단 목적이 바뀐 사람들은 해동도 달라졌다. 양지발은 더 이상 아무렇게나 괭이질은 하 지 않고 흙을 살살 긁어 가며 조심스럽게 항아리 주변을 파 내려갔다.하지만 토층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양지발은 차츰 당황스러위했고, 그 항아리가 완전히 형태를 드러낼 무렵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눈앞의 것은 항아리가 아니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사람 모양의 도기 인형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망을 위로 들어 올리라는 시늉을 했다. 그 도기 인형이 막 흙더미 위에 던져지려 할 때 갑자기 구덩이 속에서 이상한 울림이 들 려 왔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모여들었다.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해 구덩이를 들 여다보았다. 구덩이 속에는 긴 뿔(실제로는 무상용의 상투)이 나고 굳게 다문 입 위로 팔 자 수염을 기르고 눈을 부릅뜬 도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위압적인 모양이었다. 한 대담한 청년이 괭이 로 이마 부분을 두들겨 보았다. "할아범 모양의 도기구만!" "우리가 판 건 벽돌 굽던 가마가 아니라 절턴가 봐.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도기가 나오겠 어?" 이에 많은 사람이 동조를 했다. "뭐든지 상관할 것 있어?우리에게 시급한 건 물을 찾는 일이야. 빨리 파기나 하자고!"조장 양전의는 다시 사람들을 환기시켰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조장 말대로 그들의 임무는 물줄기를 찾아 내는 것이다. 곡괭이가 다시 휘둘려지면서 무사용의 머리, 잘려진 다리와 팔, 기타 조각들이 걸망에 담 겨 지면으로 올려졌다. 주변의 아이들 몇 명이 출토된 도기 조각들 앞에 모여들었다.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머리 부분 도기를 들어 보더니 흙더미 뒤에 세워 두고는 이를 가상의 적으로 삼아 맹렬한 돌맹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는 머리와 몸통부분을 자기 집 채소밭으로 가져다가 세워 두고는 손에 긴 작대기를 기대어 놓고 작대기 위를 빨간 종이로 묶은 다음, 밀짚 모자를 씌 위서 허수아비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묘종을 끝낸 보리 이삭을 참새떼의 공격으로부터 막 아 주길 바라면서. 도용의 머리 부분을 가져간 사람 가운데 70여 세의 할머니 한 분만이 전혀 손상 없이 도 용의 머리를 보관했다. 흙을 물로 씻어 낸 다음, 자신의 우중충한 토막집의 책상 위에 도용 머리를 조심스레 올려 두고 향을 피워 제를 드렸다. 그 뒤 집안에는 온종일 향내음이 가득 하고 노치네는 며느리와 사이에 다툼도 줄어들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도용을 함부로 함부로 다루고 있을 무렵 구덩이 아래에서는 더 이상한 일이 벌 어졌다. 지면에서 약 5미터 깊이 속에 내화 벽돌이 깔린 평면이 나타났는가 하면 녹 슨 청 동 화살과 3개의 쇠뇌(용수철 장치로 발사하는 활 모양의 고대 병기)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지하 군단이 2천 년 뒤의 인류에게 보내는 첫 번째 신호였다. 병기의 출토는 더 이 상 이 곳이 가마터나 절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모두가 지하수는 못 찾았어도 거대한 벽돌과 청동기를 찾은 것에 기뻐할 뿐이었다. 1920년대에도 농민들은 진시황릉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도안이 새겨진 벽돌을 자주 파냈 다. 당시 섬서성의 성장 주철지를 비롯해 서안의 군벌과 관리들은 옛날 벽돌 한 개당 보리 한 말이라는 비싼 가격으로 이것을 몽땅 사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마귀를 쫗아 내 는 부적 대신으로 이 벽돌을 베개 삼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촌의 사람들도 벽돌 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베개 대신 사용하기 위해 집으로 가지고 갔다. 쇠뇌나 화살촉을 비롯한 청동 출토물은 전부 4.4킬로그램이나 되었다. 어떤 젊은이는 몰래 이것을 모아 근처에 있는 폐품 회수처에서 14원 40전을 받고 팔기도 했다. 기사회생 수리 시설 건설과 수원에 대한 이용을 책임지고 있던 방수민은 우물을 파기 시작한 지 삼 일째 되던 날. 이 곳 지형과 공정의 진척 상황을 보고 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 다. 그런데 지하 5미터에서도 수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양촌을 방문했다. 서양촌에 도착한 방수민은 우물 파던 현장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그 곳에서 발굴된 벽돌이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벽돌과 비슷한 것을 보고 이 곳이 고대의 유적지 가운데 한 곳이리라 생각했다. 이에 그는 곧바로 작업 중지를 지시하고 현 문화관에 전화로 이 사정을 보고했다. 그 날 오후, 임동현 문화관 관장인 왕진성은 문물국 간부인 조강민,정요조와 함께 서양촌 에 도착했다. 생산대장인 양배언에게 보고를 들은 뒤, 그들은 비교적 완전한 도용 3개를 살 펴보고는 만약 이 도용이 진시황릉 봉토 주변에서 출토되었다면 틀림없이 진용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진시황릉으로부터 1.2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이런 것이 발견 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튿날 현 문화관의 조강민은 다시 서양촌으로 와서 도처에서 와서 도처에서 도용과 도기 파편을 거두어들이고 폐품 회수처에서도 청동 화살촉을 찾아 왔다. 모두 여섯 대의 수레에 가득 채워진 출토물을 현으로 보낸 뒤, 그는 도용의 귀,코, 손가락까지 아주 세세한 부분들 을 더 찾아 냈다. 임동현 문화관에서는 이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아직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 심스럽게 복원 작업을 실시했다. 문화관 지도층과 조강민에게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1964년, 전국에서"사청운동"(정치, 사상, 조직, 경제 정화 운동. 사회주의 성과를 바로잡기 위 해 1962-66년 사이에 벌어진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혈기 왕성한 조가민 은 위하 북쪽 기슭에서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의 전형으로 낙인이 찍혀 현 전체에 보고된 적이 있었다. 역사 가운데 많은 것들은 미래에 속하는 것이다. 당시는 이른바 4인방이 "비림 비공(관료 주의와 봉건주의를 배척하자는 운동)"을 주도하던 때로 과연 이 사실을 보고해야 하나 고민 하던 그들은 결국 보고를 미루기로 결정했다. 도용이 임동현 문화관에 옮겨지고 두 달 뒤, 한 청년의 우연한 출현으로 이 지하 대군은 광명의 빛을 보게 되었다. 때마침 고향에 와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신화사 기자 린안온은 현문화관을 방문했다가 전 시실 한 뒤퉁에 있는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다가가서 보니 그건 사람과 똑같은 모양을 한 도용으로 갑옷을 이보 병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단언했다. "이것이야말로 2천 넌 전 진나라때의 사병의 모습이야.국가의 보물 급인데!" 어려서 위하의 물을 먹고 자라난 린안온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일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나라 유왕이 거짓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희롱했다던 봉화대, 양귀비가 목욕을 했 다는 귀비지, 항우가 불태운 아방궁, 유비가 교묘하게 위험을 피한 '홍문의 연회' 그는 이러 한 이야기를 들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중학생이 되었을 땐 곳곳으로 유적을 찾아다녔다. 1964년, 23살의 린안온은 서북 정법 대학 신방과를 졸업하고 신화사에 입사했다. 그는 '사 기', '강감이지록', '나치통감'을 비롯한 여러 고전을 독파했다. 책에서 나오는 고향에 관한 구 절은 모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의 도용에 대해서도 과감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린안온은 직업적인 감각과 그의 역사학 방면의 지식을 바탕으로 서양촌을 답사한 뒤 이 지하 군단의 운명을 바꿀 기사 한 편을 작성했다. 진시황릉 출토품-진나라의 무사 도용 섬서성 임동현 여산 자락의 진시황릉 부근에서 무사 도용이 출토되었다. 도용의 키는 1.68 미터 정도로 군복 차림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진나라 시기 사병의 형상에 따라 주조된 것 이다. 실제 사람과 똑같이 만든 이 입상의 도용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진시황릉 주변에서는 이전에도 도용이 출토된 바 있었으나 모두 그리 크지 않은 좌상들이 었다. 이 입상의 출토물이 진귀한 이유는 무사용들이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진시황 때의 사병의 모습에 관해서는 역사서에 기록된 바가 없다. 이 무사용은 올해 3-4월에 그 지역 농민들이 우물을 파던 중 발견한 것이다. 출토 상황으로 추측해 볼 때, 도용 위에는 집이 세워져 있다가 나중에 항우가 이를 불태우자 집이 무너졌고 2천년 동 안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물은 임동현 문화관에서 처리, 발굴 작업을 책임 지고 현재까지 일부만은 정리해 놓은 상태다. 여름 수확기를 맞아 발굴작업은 중단되었다. 진시황릉은 전국 중점 유물 보호 단위이긴 하지만 적절한 보호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농민들은 마음대로 능묘에서 흙을 파내 구덩이를 만들고, 땅을 개간해 종자를 심는다. 출토 된 유물 중의 금속 제품은 폐품으로 취급당해 없어지기도 했으며, 일부 석제나 도기 제품도 함부로 팽개쳐져 있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1974년 6월 24일, 북경으로 돌아온 린안온은 기사 내용을 정리해 '인민 일보'에 발송했다. 인민 일보에서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 문장을 공개하지 않고 내부에서 편집, 발행되는 '정 황회편'에 이 글을 실었다. 이것이 진시황릉 병마용 발굴 상황에 대한 첫 번째 보도였다. 이 글은 곧바로 모택동과 주은래를 비롯한 최고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6월 30일, 국 무원 부총리인 이선념이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문물국은 섬서성과 상의해서 빠른 시일 안에 조치를 취해 이 유물을 적절하게 보호하기 바란다. 이렇게 해서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는 2천년 세월의 봉인을 뜯고 마침내 처음으로 자 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야사에 전해지는 이야기 고고학자들의 논증에 따르면 진시황릉 주위에는 모두 형상이 제각기 다른 도용 1만여 개 와 도마 1천 필 정도가 매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그저 오랫동안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 는 이야기였다. 역대 왕조의 역사서에는 이에 대한 어떤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 는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 : 명나라 말기인 승정 17년(1644년), 농민 봉기의 지도자 이자성은 서안에 서 대순국을 세운 뒤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북경으로 향한다. 한편 도구곤은 몇십만 만주족을 이끌고 산해관 동쪽의 설원에서 호시 탐탐 서쪽을 넘보고 있었다. 잇따른 전란으 로 여산 자락에는 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여전한 가뭄에 난민들은 촌 남쪽 지역에 우물을 파고자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3일만 에 맑은 지하수를 발견했으나 하룻밤 사이에 우물 안의 물이 말라 버렸다.(고고학자들은 그 물이 도용이 있던 지하 갱도로 흘러들었다고 생각한다.) 한 청년이 밧줄을 몸에 묶고 우물로 내려갔으나 벽이 무너진 곳에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한 괴물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칼을 힘껏 휘들렀으나 괴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비명 소리에 사람들은 밧줄을 끌어올렸지만 그는 기절해 버렸다. 소식이 전해지자 더 이상 우물을 파려는 사람은 없었다. 서양촌의 한 노인이 고전을 뒤진 결과, "땅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라는 근거를 찾아 냈다. 바로 '필기'의 형식을 빌어 명나라 말기인 승정 연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 기록이 진시황릉 병마용과 관 련된 첫 번째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이야기 : 청대 선통 연간, 여산 자락의 하화촌에 화흥도라는 노인이 갑자기 병으 로 죽었다. 한 풍수 선생이 서양촌 남쪽의 공터에 묘터를 잡아 주었다. 화 씨 가족은 풍수 선생의 말대로 구덩이를 파 내려갔다. 거의 작업이 완성 되었을 때 이 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도용의 머리가 나타난 것이다. 유족들은 풍수 선 생이 그들의 자손을 끊을 목적으로 이 터를 골라 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 지역의 풍습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뒤 한 곳의 묘지만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삽을 대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신을 그 곳에 묻어야만 했다. 만약 장소를 바꾸면 반드시 집안 의 다른 사람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풍수 선생을 찾아갔다. 갑작스런 날벼락에 놀란 풍수 선생은 그대로 묘터로 끌려갔다. 흥분한 유족들을 통해 도용이 파헤쳐졌다. 풍수 선생 은 이 '괴물'을 보고 진땀이 흐르기는 했지만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대담함으로 오히려 그 곳 에 묻힌 선인들의 자손이 얼마나 훌륭한 인재가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이것이 모두 그 도용 의 공로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나중에 고고학자가 부근 농촌을 조사하던 중에 듣게 된 이야기다. 이 이 야기를 들려 준 노인은 바로 풍수 선생의 후손으로 나아가 이미 팔순을 넘어 있었고 풍수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세 번째 이야기 : 1932년 봄, 진시황릉 서쪽 외벽 20미터 지점에서 한 농민이 1미터 깊이 의 지하로부터 끓어앉은 형상의 도용을 발견했다. 당시는 군벌들이 계속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용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국민당이 퇴각할 때 가지고 갔다고 추측한다. 1948년 가을, 진시황릉 동쪽의 초가촌 부근에서 한 농민이 다시 두 좌의 도용을 발굴했다. 모두 길다란 옷을 앞으로 여미고 머리 뒤쪽에는 둥근 상투가 달려 있었다. 한 좌는 임동현 문화관에, 다른 한 좌는 북경의 역사 발물관 소장 되었다. 네 번째 이야기 : 1964년 9월 15일, '섬서 일보'는 1면 하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다 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임동에서 출토된 진나라의 도용 최근 임동 진시황릉 부근에서 진나라 때의 도용 한 좌를 발견했다. 발견된 장소는 초가촌 에서 서남쪽으로 약150미터 떨어진 곳으로 올해 4월 사람들이 면화 밭을 정리하던 중 지면 으로부터 약 1미터 깊이의 지하에서 발견했다. 이번에 출토된 것은 좌식 여자 도용으로 해 방되기 전 발견된 것보다 더욱 완전한 형태다. 머리, 의복의 무늬가 분명하고, 대범한 모습 을 하고 있는 이 도용은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현재 임동현 문화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는 진용이 매장된 이후 처음으로 정부의 언론 기관이 발표한 것으로 지하군단이 지상을 향해 외친 호소였겠지만 사람들의 무관심과 함께 다시 묻혀 버렸다. 10년 뒤, 그 날을 기다 리며. 2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고학 발굴 특별 발굴 팀의 편성 1974년 7월 5일, 린안온의 글과 이선념의 지시문이 나란히 국가 문물국 국장 왕야추의 집 무실 책상에 놓여졌다. 재빨리 이 두 문서를 살펴본 국장은 망연 자실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그리고 전혀 들은 바가 없었던 사실이었다. 문화재 관리처 진지덕을 불러 물었으나, 그 또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왕 국장은 섬서성 문물국 관리 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구체 적인 상황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섬서성의 답변 또한 마찬가지였다. 7월 6일, 진지덕은 이선념 부총리의 지시문을 가지고, 섬서성 문물 관리회의 책임자와 함 께 임동현 문화관에 도착했다. "이렇게 큰 일을 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죠?" "절터라고도 하고, 가마터라고도 해서 사실이 좀 명확해진 뒤에 다시 보고 드리려고 했습 니다." 문화관 관장 왕진성은 매우 난처해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 속에 있는 고충을 그 대로 토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전시실로 가서 이미 복원되기 시작한 도용 을 보았을 때, 그들의 침묵과 불쾌함은 한 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건장한 갑옷의 무사가 위풍 당당하게 그들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임동현 문화관에서는 이미 농민을 동원해 파다가 중지한 우물 주변에 남북 15미 터, 동서 8미터의 큰 웅덩이를 파헤쳤고, 그 안에서 더 많은 도용을 발굴해 내고 있었다. 국무원과 국가 문물국의 허가를 거쳐, 섬서성 위원회는 '진시황릉 진용갱 발굴 지도 소조' 를 조직했다. 동시에 성 문화재 관리회, 성 고고학 연구소, 임동현 문화관의 표본 조사 전문 위원으로 '진시황릉 진용 고고학 발굴 팀'을 구성했다. 고고학 발굴 팀은 곧 현장에 도착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1호 용갱 7월 15일, 원중일, 항덕주가 이끄는 고고학 팀은생활 용품과 발굴 도구를 가지고 서안을 떠나 진용갱 부근의 숲에서 야영 생활을 시작했다. 이튿날 고고학 팀 대원들은 이미 발굴된 용갱과 도용에 대한 사진 촬영과 측량과 기록을 마친 뒤 새로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이 날부터 발굴이 진행된 용갱을 1호 용갱이라고 불 렀다. 무늬가 새겨진 벽돌과 도용의 형상에 근거해, 이 용갱은 진대의 유적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용갱과 진시황릉의 관계는 확정짓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용갱이 진시황릉 울타리 에서 1.5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이렇게 멀리 도용 부장품을 안치한 경우는 당 시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그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이 결론을 내리 기 어려웠던 부분은 진시황릉 주위에 진대의 귀족 무덤이 수없이 분포되어 있던 터라, 도용 과 능묘의 관계를 신중하게 판단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병마용갱이 전부 파헤 쳐지고 고고학계에서 도용과 진시황릉의 관계에 대해 결론을 내린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어떤 연구자는 이 용갱이 진시황릉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진시황의 할머니인 선태후 무덤의 부장품이라는 새로운 의문을 제시한 적이 있다. 역사의 진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확고 부동한 자료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용갱을 발굴한 지 1주일째 벌써 출토된 도용이 1백기가 넘었지만, 그 유적의 주인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어떤 증거물도 나오지 않았다. 도용이 누구 무덤의 부장품인지조차 밝힐 수 없으니 고고학자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 그 수수께끼를 풀만한 열쇠가 나타났다. 조각 난 도용의 몸체 앞에 아직 녹슬지 않고 새것처럼 빛이 나는 구리 극이 발견된 것이 다. 극의 앞부분은 창(끝이 똑바로 된 병기)과 과(끝이 옆으로 삐져 나온 병기)를 묶어서 만 들어져 있었고, 이 극의 정수리 부분에는 가죽으로 된 집도 달려 있었다. 전체 길이는 2.88 미터 썩어 가는 나무 표면에 엷은 옻칠과 채색된 그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끝 부분에는 구리로 만든 물미(끈을 감싸는 쇠붙이)가 끼워져 있었다. 특히 고고학자들의 시선을 끈 부분 은 극머리 부분의 안쪽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삼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라는 진귀한 명문이 었다. 이는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뜻으로 '사공구'는 아마도 구 리 극을 주조한 공장 이름인 듯했다. 구리 극과 명문의 출현으로 병마용갱이 진시황릉의 부장품이라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되었 다. 또한 2천년 전, 시황제와 여불위 두 사람의 운명적 관계가 우리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기원전 260년쯤 전국 시대 한나라의 적양성이라는 도시에 여불위라는 부자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어느날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인질 로 잡혀 있던 진나라의 태자 안국군(나중에 효문왕)의 아들 자초를 만났다. 안국군은 여러 부인들 가운데서 화양 부인을 가장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에 야심이 있던 여불위는 이러한 점을 이용해 정치에 대한 투기를 시작하게 되 었다. 여불위는 우선 자초에게 조나라의 상류 인사들과 널리 교제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 주고, 다음에 자초의 이름으로 화양 부인에게 진귀한 보물을 선물했다. 화양 부인은 차츰 자초를 주목하게 되었고 자초가 조나라에서 비록 고생은 하고 있지만 인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또한 여불위는 궁정의 대신과 화양 부인의 언니, 남동생을 매수해 그들의 입을 통해 자초를 적자로 삼도록 부추겼다. 적자가 없으면 언젠가는 남편으로부터 소외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화양 부인은 자신이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무기로 안국군을 설득했다. 그리고 이미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장남인 자계를 대신해서 자초를 후계자로 세우는 일에 성공했 다. 이렇게 해서 자초는 진나라의 후계자가 되었고 여불위는 그 보좌관이 되었다. 그러던 어 느 날, 여불위는 자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열고 자초를 초대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한 절세 미녀가 춤을 추며 자초를 사로잡았다. 이때 여불위가 "마음에 드신다면 이 시녀 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자초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여불위의 첩으로 이미 그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결혼한 지 10개월이 채 안되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진나라의 시황제인 영정이었다. 몇 년 뒤, 안국군이 사망하고 자초가 왕위를 계승해 장양왕이 되었다. 여불위는 승상에 임 명되고 문신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장양왕은 겨우 3년만에 병으로 죽어서 열세 살인 태자 영정이 왕위에 올랐다. 태자를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그야말로 여불위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 는 기세로 진나라 정치를 장악하게 되었다. 기원전 238년, 23세의 영정은 대관식을 거행하고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래서 신 하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던 여불위로부터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래서 신하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던 여불위로부터 실권을 빼앗기 위해 우선 자신의 친어머니를 음란 하다는 이유로 연금시켰다. 이어 여불위를 파면한 뒤, 사천 지방으로 추방시켰고 도중에 자 살로 몰아 넣었다. 시황제가 대권을 장악하고 중국을 통일한 것은 여기서부터다. 1호 용갱에서 출토된 구리 극에 새겨진 명문은 시황제 즉위 초, 곧 여불위가 권력의 절정 에 있던 때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진나라의 청동 병기 제조 기술이 최고조에 이르 고 있었고, 동시에 병마용갱이 진시황릉의 일부에 속한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발굴 현장에 나타난 신비한 노인 진용이 출토된 지 십몇 년이 지난 지금도 고고학 팀의 원중일 팀장은 당시의 발굴 상황을 애기할 때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에는 보름 정도면 용갱을 다 발굴할 수 있으리 라 생각했어요. 기껏해야 부장된 용갱인데 얼마나 크겠나 생각 했던 거지요. 하지만 보름이 지나도 용갱의 끝이 어딘지조차 알 수 없었죠." 용갱을 4백여 제곱 미터 정도 파헤쳤을 때에도 가장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큰 부잔 용갱을 아직 전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 는데!" 고고학 팀은 이 지하 대군의 가장자리가 어디쯤인가 알기 위해 다시 선발 팀을 보내 조사 를 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굴이 잠시 정지되었고 고고학 팀은 4명을 선발해 구멍을 뚫은 뒤 시탐을 해 보 도록 했다. 고고학 팀이 사용하는 도구는 일명 '낙양삽'으로 도굴꾼들이 발명해낸 것이다. 중원의 낙 양 일대의 도굴꾼들은 대부분이 이 삽을 가지고 도굴을 했다. 이 삽은 묘를 파헤칠 필요 없 이 삽을 이용해 지하에 조그만 구멍을 내고 이에 끌려나온 토층이나 기타 물질들을 통해 지 하에 매장된 것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노련한 도굴꾼들은 삽을 꽂기만 하면 거기에서 전해 져 오는 소리나 손의 감각만으로 지하의 모든 비밀을 환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 국에서 고고학 붐이 일어남에 따라 1920년대 후반부터 낙양 삽은 기술적인 발전을 거듭해 고고학 발굴 작업의 전용 도구가 되었다. 고고학 팀은 3미터 간격으로 서쪽 방향을 향해 탐사를 시작했다. 우물을 판 위치에서 1백 미터 떨어진 지하에서도 도용이 묻혀 있음이 낙양 삽을 통해 감지되었다. 고고학 팀 대원들 은 더 이상 탐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삽의 기능에 대해서 의심하다가 이어서는 낙 양 삽을 통해 전해져 오는 정보가 진실일 것인가에 대한 분석을 한 뒤, 마침내 자신들의 고 고학적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고고학 팀 대원들이 이렇게 주저하고 있을 때, 한 신비한 노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가장자리에 대한 탐사를 시작한 지 이틀째, 칠순이 넘은 백발 노인이 탐사 위치로부터 멀 지 않은 나무 아래에 기대어 발굴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고학 발굴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백발 노인이 정학화에게 다가왔다. "당신 이 앉은 자리에 있소. 없소?" 정학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오히려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노인 장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노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사라졌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었다. 탐사 위치를 우물을 파던 곳에서 1백 미터 정도 이동했을 때, 노인은 다시 정학화에게 다 가와서 똑같은 물음을 되풀이했다. 정학화 또한 "노인장이 보시기에는요?"라고 같은 대답을 했다. 노인은 이번에는 떠나지 않고 얼굴이 굳어진 채,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물 었지 않소. 당신이 앉아 있는 거요. 내가 앉아 있는 거요?" 정학화는 자세하게 노인을 살펴본 뒤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하에 있긴 있는 것 같은데....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노인은 살며시 웃으며 정학화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정학화는 노인의 그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보면서 삽을 놓고 노인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우물을 파던 곳으로부터 2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 다다랐을 때, 노인은 여전히 웃음 띤 얼 굴로 정학화에게 말했다. "더 이상 찾을 필요 없소. 용갱의 가장자리는 바로 여기요. 믿든지 그건 당신 자유요."노인은 마치 신선과도 같이, 내리비치는 석양빛을 따라 감나무 수풀 속으 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정학화는 반신 반의하면서도 노인이 알려 준 위치에서 탐사를 시작했다. 과연 도 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더 서쪽으로 가 보았지만 그 이상은 도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1년 뒤, 용갱 전체가 파헤쳐졌다. 노인이 말한 위치는 매우 정확했다. 고고학 발굴 팀은 이 신비한 노인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보았다. 여러 차례 묘를 파는 일을 했던 사람 으로 풍수 선생과 마찬가지로 지하의 도용을 보았을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우물을 파다가 도용을 발견했는데 이를 요괴로 여기고 다시 여러 곳을 파 보다가 이 곳 상 황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 밖에도 노인의 조상이 용갱과 능묘 상황에 대한 자료를 남겨 주었거나 심지어는 그의 조상이나 그 자신이 도굴꾼이었다는 추측 도 나왔다. 어쨌든 간에 이 신비한 인물에 대한 일은 계속 미지수로 남아 있다. 전차와 청동검의 출토 동서로 2백 미터, 너비가 60미터가 넘는 용갱의 규모가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실로 거대한 규모에 놀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분명히 가운데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큰 용갱이 있을 수 있을 수가 있겠 는가!" 고고학 발굴 팀은 용갱 중간에 도용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어 째든 그 범위가 밝혀진 바에야 실제적인 발굴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발굴 팀은 상황을 상부에 보고한 뒤, 대규모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현장에는 발굴 팀 이외에 그 지역에서 모집한 몇십 명의 농민과 1백여 명의 해방군이 발굴에 참가하고 있 었다. 서북 대학 사학과 학생들 몇십 명도 교수의 지도아래 발굴을 돕고 있었다. 1주일만에 1천 제곱 미터를 발굴해 5백여 기의 도용이 출토되었다. 용갱이 차츰 확장되고 도용이 계속 출토됨에 따라 고고학 발굴 팀의 작업도 활발해졌다. 고대의 군사 체제가 '병마 일체'였으므로, 이렇게 많은 무사 도용이 나왔으니 당연히 도마도 매장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도마는 어디에 묻혀 있는 것일까? 사흘 뒤, 마침내 지하의 도마가 소식을 보냈다. 첫 번째 출토물이 빛을 보게 되었다. 마차 를 끄는 높이 1.5미터에 몸 길이 2미터인 4필의 전투마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서서 한 대의 나무로 만든 전차를 끌고 있었다. 전차가 썩긴 했지만 말의 생동감 넘치는 형상은 지금이라 도 막 뛰어오를 듯했다. 도마와 나무 전차의 출토로 발굴 팀들은 모두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러한 격양된 마음은 청동검의 출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도금한 은백색의 청동검은 진흙 속에 묻혀 있었다. 전체 길이 91.3센티미터, 너비 3.2센 티미터로 형태나 길이가 모두 전형적인 진나라 시대의 보검이었다. 이 청동검의 출토는 진 나라 때의 병기 제조와 부식 방지 기술을 연구하는 데 극히 중요한 실물 자료가 되었다. 또 한 이로써 사람들은 "형가가 진왕을 찌르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다시 되새기며 이야기 속 에 들어 있던 먼 옛날의 비밀을 풀게 되었다. 기원전 222년, 강려한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를 쓰러뜨린 뒤, 진나라 병사는 역수에 이르러 연나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나라 태자 단은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형가에게 진나라의 시황제를 찌르도록 했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바람은 차고 역수 또한 춥도다. 사나이 한 번 길을 떠나니 어찌 다시 돌아오겠는가"라며 비분 강개한 마음으로 연나라를 떠나 진으 로 향했다. 형가와 또 한 장수 진무양은 함양에 도착해 진나라를 배반한 장군 번어기의 머리와 연나 라의 지도를 바치고자 한다는 구실로 진시황제에게 알현을 청했다. 궁전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진무양은 진나라 궁의 기세에 질려 두려움에 떨다가 경호병에게 들켜 쫓겨났다. 형가는 혼자서 지도를 받쳐들고 침착하게 나아가 진시황 앞에서 지도를 펼치다가 그만 비수를 떨어 뜨리고 말았다. 이 비수는 태자 단이 많은 돈을 주고 조나라의 서 부인에게서 사 온 것으로 독약을 발라 만든 특수한 흉기였다. 일단 사람의 살갗을 찔러 조금의 피만 나와도 그 자리 에서 죽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형가는 상황이 급박해지자 지도를 놓고 진시황의 소매 쪽으로 달려들어 비수로 찌르려 했 다. 진시황이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형가가 잡고 있던 소매가 찢어졌다. 진시황 은 이 틈에 궁전의 기둥 주위를 돌면서 피하려 했지만 형가는 여기서 그만들 수 없었다. 도 망을 가던 진시황은 손을 뻗어 허리에 차고 있던 청동검을 세 번이나 빼려고 했으나 검신이 너무 길어 뽑을 수 없었다. 위기 상황에서 한 환관이 소리쳤다. "검을 짊어지십시오!"진시황 은 환관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허리의 검을 몸 옆으로 밀어 내 청동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며 형가의 왼쪽 다리를 잘랐다. 형가는 바닥에 누워 비수를 진시황에게 던졌으 나 비수는 빗나가고 말았다. 진시황이 검을 휘둘러 형가를 몇 차례 베어 버리니, 형가는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다. 이 비극적 결말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은 진시황이 차고 있던 보검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 을 가지게 되었다. 왜 기둥울 잡고 돌고 있을 때, 검을 뽑지 못했는가? 검을 지고 뽑는다는 것은 어떤 동작인가? 그의 검이 얼마나 예리하면 형가의 다리를 단칼에 벨 수 있었단 말인 가? 1호 용갱에서 지나라 때의 보검이 출토됨에 따라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이 물음에 대 한 해답이 나오게 되었다. 고고학 발굴에서 입증된 바에 따르면 검은 일종의 병기로 중국 북서 지역의 유족 민족에 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략 은나라 이저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서주 시기에 중원에 들 어오게 되었다. 장안 장가파의 서주 묘에서 출토된 검은 전체 길이가 겨우 27센티미터다. 춘 추 시기 중원 지역의 청동 검은 그리 많지 않지만 검신이 잛아 형태가 비수와 같았다. 이 시기 남부 오월 지역에서는 동검 주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미 출토된 오 왕 광의 검, 오 왕 부차의 검, 월 왕 주구의 검은 모두 천하의 명검이다. 또한 강릉에 있는 망산 1호 무 덤에서 출토된 월 왕 구천의 검은 그 정교함이 당시 검 주조 기술의 절정을 보여 주는 것이 다. 이 보검은 출토되었을 때 전혀 녹슬어 있지 정도였다. 마름모꼴 무늬의 검신 위에는 "월 왕 구천 자작검"이라는 일곱 글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오,월 검의 검신은 모두 60센티 미터 이하로 월 왕의 구천검도 길이가 55.7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은 단검이다. 전국 시대 말기에서 진나라 때까지 청동검의 주조술은 오,월 지역의 검을 토대로 더욱 발 전해 고대 청동검의 주조 기술의 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진나라 때 검의 주석 함유량 은 오,월의 검보다 훨씬 더 증가했고 자연히 금속 밀도를 강화할 수 있게 됨에 다라 그 강 도 또한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진나라 때의 검은 더 이상 오,월의 것 과 같이 짧지 않아 길이가 60센티미터도 안 되던 것이 90-120센티미터로 늘어나 것이다. 검 신의 길이가 길어지고 날이 날카로워졌다. 청동검은 일종의 무기로서 사병들이 차츰 보편적 으로 이용함에 따라 일반 병기로 호신이나 작전에 사용되었다. 물론 통치 계급 내부에서는 보검은 차는 것이 호신뿐반 아니라 신분과 지워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1호 용갱에서 출토된 청동검이 진시황이 당시에 형가를 찌른 검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차고 있던 보검의 길이가 적어도 91.3센티미터 이하가 아니라는 점은 확인할 수가 있 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던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그의 검은 출토된 청동검보다 훨씬 길것 이며 최대 120센티미터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무거운 병기를 허리에 차고 몸을 굽 혀 움직이면 자연히 크게 흔들리게 된다. 진시황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검이 앞으 로 쏠릴 터이고 그러다가 가슴까지 흘러 내려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시황이 키가 크고 팔이 길긴 했지만 1미터 이상 되는 보검을 쉽게 빼낼 수는 없었으리라. 1호 용개의 청동검이 출토된 뒤 고고학 발굴 팀인 장점민대원은 한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책상 위에 종이 뭉치를 올려 두고 검으로 가볍게 종이를 베어 보았다. 단번에 19장의 종이가 베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예리한지 짐작할 수 있다. 과학적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검은 청동, 납, 주석의 3가지 금속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세 금속의 비율이 적당해야만이 검 이 예리해져 "철을 흙처럼, 돌을 가루처럼" 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진나라 때의 검이 2천여 년 동안 매장되어 있었으면서도 그토록 새것 같을 수 있었던 것 은 검신 표면에 10-15마이크론의 크롬 화합물 산화층이 덮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지나라 때에 이미 크로마이징이라는 산화 처리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숭 있다. 유감스 럽게도 이러한 크로마이징기법은 청동 병기가 전쟁이라는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함께 잊혀졌 으며, 이후 1930년대 독일인이 다시 '발명'해 특허를 얻었다. 그렇다면 지나라 사람들은 어떻 게 이런 기술을 검 제조에 이용하 수 있었을까? 이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역사의 기념비, 1호 용갱의 전모 1년여의 발굴 작업을 통해 동서 230미터, 남북 62l미터, 총 면적 1만 4,260제곱 미터의 병 마용갱이 파헤쳐졌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진시황릉 병마용은 모두 세 곳에서 발견되었다. 도용은 8천여 점, 도마는 몇백 필, 나무 전차는 1백여 승, 그리고 대량의 청동 병기가 발굴 되었다. 비록 병마용이 2천여 년 동안 황토 속에 매장되어 완전하진 않지만 그 방대한 군영이 자 태는 여전히 위풍 당당한 장수의 풍모를 잃지 않고 있다. 갱 속의 무사용은 오른쪽 여밈의 짧은 털옷에 허리띠를 하고, 머리를 묶고 볼록한 상투는 머리 오른쪽 부분으로 치우쳐 있다. 다리에는 끈을 메고, 발에는 네모진 입구의 코가 가지런 한 신발을 신고 있다. 어떤 것은 손에 쇠뇌(고대 병기의 일종)와 화살을 들고, 등에는 화살 꽂이통을 메고 그 통 안에는 청동 화살이 가득 들어 있다. 또 손에 긴 창을 들고 위엄 있게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허리에 구부러진 칼을 차고 눈은 앞쪽을 주시한 채 전투 준 비 자세를 취한 것들도 있다. 군진 속에는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도마가 전투 마차를 이끌거나 기사 옆에 서서 전투 명령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그 근육과 각진 얼굴, 날렵하게 생긴 뺨은 전투마의 기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선두와 후미, 주체와 보좌, 보병과 마차, 말이 교차되는 군사 배치 는 너무도 변화 무쌍해 정숙하면서도 약동하는 기운을 느끼게 한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초상을 조각 하는 데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출 토된 그려 놓은 정도였을 뿐이며, 은,주 시대의 청동기일지라도 기물에 부속적인 의미의 노 예를 그린 정도다. 그러나 역사가 발전해 주나라 말기, 전국 시대에 이르면 인간의 형상에 대한 그림이나 조각이 전대에 비해 대단히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병마용 의 조형은 토템이 퇴색하고 사상이 중시되면서 인간이 존중을 받는 세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런 예술 전통이 진나라 말기 극심한 전쟁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그 문명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5년 7월 21일, 신화사는 진시황 병마용 1호 용갱의 발굴 소식을 보도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지하 대군이 마침내 20세기 말 현대인 앞에서 열병식을 하기 위해 그 자태를 드 러낸 것이다. 3 2호 용갱의 발견 병마용 박물관의 설립 1975년 8월, 북대하 해수욕장. 고회를 넘긴 섭영진 원수는 따뜻한 해변가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먼 바다를 보고 있었 다. 비취빛 바다는 쉼없이 백전 노장의 발아래 어른거리고 파도에 휘말려 흩어지는 물거품 이 그의 몸에 와 닿았다. 절로 마음이 상쾌해졌다. "안녕하십니까?"해수욕을 마치고 물에서 나온 국가 문물국 왕야추 국장이 그의 곁으로 다 가왔다. 문득 예전에 왕 국장이 말하던 진용갱이 궁금해진 섭 원수가 이에 대해 물었다. "규 모나 형체는 대충 파악이 되었습니다. 대량의 도용과 도마가 출토되었습니다."왕 국장은 상 세하게 발굴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대단하군. 이처럼 거대한 지하 군단이라면 따로 박물관 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한데."진용을 보호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국가 경제 상황을 고려해서 감히 제안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사실 경제적 어려움은 왕 국장이 주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고, 더욱 중 요한 문제는 당시 비림 비공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건립을 제안했다가 자칫 정치적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섭영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국무원에 보고해서 검토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와 국장은 이튿날 서둘러 북경으로 돌아가 곡목과 여추리 두 부 총리에게 병마용 박물관 설립에 관해 보고했다. 두 부총리는 흔쾌히 동의해 상세한 보고서 를 국무원의 정례 회의에 상정했다. 이선념 부총리의 주재 아래 열린 회의에서 마침내 박물 관 건립과 그 이름을 '진시황릉 병마용 박물관'으로 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8월 26일, 왕야추 국장은 자못 흥분한 상태에서 서안에 도착해 섬서성 당 위원회와 함께 관계자들을 소집해 박물관 건립에 관한 문제를 토론했다. 1주일내에 초보적인 설계안을 만 들어 자신이 북경 국무원에 제출한다는 것과 아울러 박물관 기초 공사를 위해 1호 용갱의 경계선과 도용의 분포 상황을 더욱 세밀하게 조사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1976년 정월, 주은래가 죽고 등소평이 세 번째 실각한 그 때에 박물관 건설을 위해 파견 된 이들이 잇따라 현장에 도착해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를 하는 동안에 유물을 보호하기 위 해 1호 용갱에서 출토된 도용과 도마를 흙으로 다시 덮어 두었다. 사라진 보물, 악부종 1976년 춘절이 지난 그 이튿날 오후, 공사 현장에서 당직 중이던 발굴 팀의 원중일 팀장 은 홀로 진시황릉 부근을 거닐고 있었다. 1년 남짓 고생한 결과 1호 용갱의 전모가 밝혀지 게 되었다. 마침내 지하 군단이 새롭게 사람들의 품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랫 동안 고고학에 몸담아 온 그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능 주위를 무심히 걷던 원중일은 진시황릉에서 1백여 미터 떨어진 흙더미에 서서 잠시 석 양에 물든 여산을 바라다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막 돌아가려는 순간, 그의 눈에 무언가 반 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직업상의 습관에 따라 몸을 굽힌 그는 무너진 흙더미 에서 손톱만한 물건을 발견했다. 문득 이것이 무언가 귀중한 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원중일의 예감은 적중했다. 주변에 있던 흙을 긁어 내 유물을 꺼내 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진나라 시대의 악부종으로서 말할 수 없이 진귀한 유물이었다. 높이가 13.3센티미터, 양쪽의 선(앞의 뽀족한 부분) 사이의 길이가 7.2센티미터, 고(위의 납작한 부 분) 사이가 5.8센티미터. 무(매다는 곳의 위쪽 부분)의 넓이가 68*4.8센티미터였다. 정(무에 서 고까지의 사이)과 고에는 금박에 뿔 없는 용의 무늬를 넣었고, 전(한가운데의 무늬 띠) 사이와 종대(종 중앙에 돌기가 있는 부분) 또한 금박에 구름 무늬가 있었다. 무늬는 세밀하 고 분명했으며 호화스럽고 또한 아담했다. 땅 속에 2천 2백여 년을 파묻혀 있었는데도 금은 의 무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당시 야금술의 발전이 상당했음을 밝혀 주는 좋은 증거인 셈 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의 고리의 한 쪽에 새겨진 '악부'라는 소전체(진시황 때 이 사가 만들었다는 글씨체) 글자였다. 이 두 글자의 발견은 종 자체의 발견보다 더욱 커다란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이 글자를 통해 1천 년 넘게 역사가와 음악사가들이 심각하게 논쟁 해 온 역사의 수수께끼가 마침내 풀렸기 때문이다. 악부는 고대 중국의 황실에서 경축행사나 제사 때 필요한 음악을 관장하던 부서였다. 황 실의 행사에는 언제나 술과 더불어 악기 연주가 일반적이었다. 기원전 297년, 진나라와 조나라가 민지에서 회합을 가지게 되었다. 주연이 시작되자 진나 라 소왕이 옆에 서 있는 위염에게 눈짓을 했다. 위염은 그 즉시 슬(거문고에 가까운 고대 현악기)을 갖다 바쳤다. "듣자하니 조 왕께서는 음률에 밝으시다구요. 여기 귀한 슬이 있으 니 한 곡 연주해 보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원컨대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 왕은 진 왕의 요청이 자신을 능멸하는 일임을 직감했으나 이를 물리칠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 다. 이 때 조 왕을 따라온 인상여가 한켠에서 연주하시는 것도 무방하다고 권했다. 난감해진 조 왕은 인상여를 흘낏 쳐다보고는 마지못해 연주를 했다. 진 왕은 조 왕이 굴욕감에 얼굴 이 벌개진 것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조나라 시조인 열후께서 금을 잘 연주했다 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왕께서 직접 연주하시는 것을 들으니 과연 집안 내력임을 실감하겠 군요." "즉시 어사(역사서 기록자)에게 오늘의 일을 사책에 기록토록 하라."진 왕의 명에 재빨리 붓을 들은 어사는 "진 소왕 28년 가을 길일. 진 왕과 조 왕이 민지에서 회합해 진 왕이 조 왕에게 술을 탈 것을 명하다."고 적고 큰 소리로 낭독했다. 이에 진나라 군신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때 인상여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진흙으로 만든 항아리를 들고 진 왕에게 다가 서면서 대왕께서 진 나라 악기를 잘 연주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청컨대 이 부(타원혀으 로 생긴 항아리 모양의 진나라 악기)를 연주하시어 함께 즐기도록 해 주시옵소서라고 말했 다. 난데없는 요청에 놀란 진 왕은 오히려 오만하게 어찌 한나라의 군주가 부를 칠 수 있느 냐면서 이 말은 분명 나를 우스개로 만들려는 뜻이 아닌가라고 밤문했다. 그러자 인상여가 매섭개 질타했다. "그렇다면 대왕께서는 진 나라가 강대하다고 해서 그 위세로 우리 나라를 욕보이시는 것 아닙니까? 오늘은 양국의 화의를 위해 만나는 날이니 만약 대왕이 청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상여, 이 사람 머리를 땅에 부딪쳐 왕의 온 몸에 피를 뿌리겠나이다." 인 상여의 협박에 경악한 진 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진흙 항아리를 가져다 젓가락으 로 가볍게 치자, 이 때다 싶게 인상여가 소리쳤다. "오늘 성대한 모임에 진 왕께서 부를 치 시니 이 또한 사책에 응당 기록하리라." 조나라 어사가 달려와 죽통에 쓰기 시작했다. 다 쓴 어사가 큰 소리로 낭독했다. "조 혜문왕 20년 가을 길일. 조 왕과 진 왕이 민지에서 회합해 조 왕이 진 왕에게 부를 칠 것을 명하다."인상여의 기지와 용기에 진 왕은 어쩔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킨 진 왕이 조 왕에게 헌주하고 다시 조 왕이 답례를 하면서 양국은 상호 불가침 과 상화 우호를 위한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진나라의 초기 악기는 진흙으로 만 든 부처럼 조악한 수준이었다. 부 이외에도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했던 형가의 죽마 고우 고 점리가 잘 쳤다는 축(거문고와 유사한 악기로 대나무로 만들었고 대나무 채로 친다.)이란 악 기가 있었는데, 이 또한 아주 단순한 악기였다. 게다가 '한서''예악지'에 보면 한 무제 때 "악 부는 한 대에 생겨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데 진시황릉에서 악부종이 출토됨으 로써 악부는 바로 진나라 때 세워졌음이 실물로 증명된 셈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얼마 뒤 악부종이 출토된 곳에서 악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 곳은 진나라 도성인 함 양에 설치된 악부를 모방한 것으로 각종 제사에서 사용되는 예약을 다루게 했다. 아룰러 일 정한 숫자의 연주자들이 상주하면서 제삿날마다 예약을 다루게 했다. 애석하게도 이 악부는 2년여를 지탱하다 결국 항우의 대군에게 불태워지고 말았다. 진귀한 악부종 또한 이 때 흙 속에 매몰되어 2천년이 지난 지금 빛을 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악가들의 감정 결과, 악부종은 내벽에 4개의 조음띠가 있고 음은 C조인데, 그 조형이나 음질면에서 진대 악기 가운데 드문 걸작품이라고 한다. 악부종의 출토는 곧바로 학계의 비 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진대 궁정 예약의 격식이나 악기의 발전사를 연구하는 학 자들은 실물자료가 제시됨에 따라 연구에 큰 도움을 받았다. 악부종은 섬서성 박물관에 1급 유물로 소장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출토된 지 10년 뒤인1986년 10월 분실해 지금까지 행방 을 알 수 없다. 새로운 발견, 2호 용갱 1호 용갱 전시관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은 흥분과 경악으로 몰고 간 한 사건이 일어났다. 1호 용갱에서 북동쪽으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또 하나의 병마 용갱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른바 2호 용갱의 출현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이미착수한 1 호 용갱의 전시과 시공의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2호갱은 1호갱과 어떤 관계인 가? 서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만일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 문물국과 섬서성 위원회 쪽은 2호갱 발견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현자으로 사람을 파견했다. 만약 1호갱과 2호갱이 연결 되어 있다면 기존의 설계와 기초 공사에 쏟은 노력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2호갱의 범위와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 탐사원 들은 시험 발굴 탐사를 강화함과 동시에 두 용갱 사이에 7대나 되는 도랑을 팠다. 그 결과 두 용갱은 독립된 존재로 연결되어 있지 않음이 판명되었다. 국가 문물국과 섬서성 위원회 으 간부들이 안부의 숨을 쉰 것은 물론이다. 1976년 4월, 국가 문물국의 비준을 얻어 발굴대원들은 2호 병마용갱에 대한 시굴에 들어 갔다. 2호 용갱은 1호 용갱과 달리 L자형의 지하 건축물이었다. 전체 길이는96미터, 너비는 84미터, 깊이는 5미터로 총면적은 6천 제곱미터였는데, 대략 1호 용갱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 구조는 정확하게 좌우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른쪽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갱도 식 건축으로, 전부 8칸에 앞뒤로 회랑이 있고 동서 양 끝에 각기 두 갈래의 경사진 도입로 가 있었다. 왼쪽은 직사각형으로 또한 갱도식 건축이며, 오른쪽과 마찬가지로 앞 뒤 두 부분 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반부는 거의 정사각형으로 6칸으로 나뉘어져 앞 뒤로 회랑이 관통하 고 있었다. 동서 양쪽 벽과 북벽에는 각기 두 갈래의 경사진 도입로가 있었다. 갱 안에는 모 두 89대의 나무로 만든 전차와 2천 좌 이상의 도용과 도마, 그리고 몇만 점이나 되는 청동 병기가 매장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 등 네 부분의 서로 다른 병 과로 이루어진 대형 군진으로, 대부분이 보병인 1호 용갱과 구분되었다. 궁노병과 쇠뇌 최전방에는 궁노병(활과 쇠뇌를 쏘는 병사)으로 구성된 소형 방진이 배열되어 있다. 진나 라 시대에는 활을 쏘는 병사들의 경우 경장비와 중장비의 구별이 있었는데, 가볍게 무장한 사수는 '척장'이라고 일컬었다. 이는 활을 쏘는 방식에 따라 이름 붙인 것으로, '인강'은 어깨 로 활을 잡아당기는 것을 나타내고, '척장'은 발로 밟아 활을 당기는 궁노병을 말하는 것이 다. 진용 2호 용갱의 큰 진 앞에는 334좌의 궁노병으로 편성한 독립된 소형 방진이 배열되 어 있다. 1백여 년 전 엥겔스는 고대 전쟁에 대해 논술하면서 "군대의 역량은 보병, 특히 활을 쏘 는 사수에게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호 용갱에서 출토된 궁노의 방진은 뛰어난 장비인 궁 노가 고대 전쟁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 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진대에 이르러 궁노 병이 이미 상대적으로 독립된 완전한 형태의 병과로 존재했으며, 전술면에서 전차병이나 기 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활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궁노 군진의 중요성은 무기의 뛰어 남이나 전술상의 위치뿐만 아니라 특히 신중하고도 엄격한 사수의 선발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진나라의 궁노수는 반드시 젊고 건장한 용사여야만 했고, 최소한 2년 동안의 엄격 한 훈련을 거쳐야 비로서 사수가 되어 군진에 설 수 있었다. 특히 군사학 전문가들은 방진의 모두 강노를 든 입사수가 자리하고, 방진의 가운데는 활 을 든 궤사수(끓어앉은 자세의 사수)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군진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전투의 과정과 전략에 따라 만든 것임에 분명하다. 적이 접근하면 먼저 입사수가 쇠뇌로 촉(쇠뇌로 발사하는 대형 화살)을 발사하고 이어서 궤사수가 다시 활로 화 살을 쏜다. 이와 같이 교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촉과 화살을 번갈아 발사했다. 2호갱 에서 출토된 입사용과 궤사용은 이러한 진나라의 군대의 전투력과 사격 기술의 규범을 반영 하고 있다. 입사용은 얼굴은 오른쪽으로 등은 왼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몸은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 다. 그리고 왼쪽 허벅지를 약간 구부리고 오른쪽 허벅지로 뒤를 받치고 있으며, 왼쪽 발은 앞으로 오른쪽발은 옆으로 향해 있다. 왼쪽 팔은 약간 들어올려 활을 잡고 오른쪽 팔은 가 슴까지 구부리고 있으며 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향하게 한 전형적인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 다. 또 궤사용은 왼쪽 허벅지를 세우고 오른쪽 허벅지를 끓어앉은 형태인데, 왼쪽 무릎은 위 로 향하고 오른쪽 무릎은 아래로 향하게 해 또한 고대 병법에서 가장 화살을 잘 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신체적인 균형을 유지시켜 더욱 정확하게 목표물에 명 중시킬 수 있도록 한다.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받침대 없이 소총을 쏠 경우 진용의 사수 가 취하고 있는 자세로 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라고 한다.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일찍이 고대 전쟁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쇠뇌는 서서히 자취 를 감추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문자 기록을 통해 그 대강의 형태만을 추측할 뿐 쇠뇌의 본디 형태나 그 응용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호 용갱에서 거의 1백 개의 이르는 쇠뇌가 출토되어 고대 병기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과 연 구에 의심할 수 없는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쇠뇌는 활에서 유래하지만 활과는 달리 먼 거리를 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기다. "그 소 리와 위세가 마치 사람이 성을 내는 것과 같다고 해 그 이름을 쇠뇌라고 했다."고 한다. 한 나라 사람들은 쇠뇌를 황제(중국의 전설상의 제왕)가 발명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월 춘추' 의 저자는 초나라 사람 금 씨가 쇠뇌를 발명했다고 했다. 물론 어떤 주장이 사실과 맞는지 는 고증할 수 없다. 다만 사료에 근거하면 청동으로 만든 쇠뇌는 전국 시대에 이미 대규모 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책'에 보면, "천하의 강궁 경노는 모두 한나라에서 만들어 지는데, 계자에서 생산되는 쇠뇌, 소부에서 생산되는 시력, 거래등의 명궁은 모두 6백 보 밖 을 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멀리 서쪽 지방에 있는 진나라 군대 또한 자연스럽게 이 강력한 신형 무기를 받아들여 "앞에는 강노, 뒤에는 섬과"라고 하는 최신형 군진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2호 용갱에서 그대로 재현했던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가장 중요한 쇠뇌 또한 끊임없이 개선되고 발전해 갔다. 진용에서 출 토된 쇠뇌는 역사서에 기록된 것과 다른 것도 있고 그 형태 또한 다양하다. 어떤 특수한 강 한 쇠뇌는 64센티미터의 쇠뇌의 몸체에 나무를 겹치고 다시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달았다. 물론 이러한 장치는 모두 쇠뇌 몸체의 강도를 증강시켜 장력을 강화하고 사정 거리를 더욱 멀리 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쇠뇌의 몸체뿐만 아니라 특대형 동촉에 도 적용할 수 있다.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부식되징 않은 청동 촉들은 무게가 1백 그램 에 이르고 길이는 보통 촉의 두 배나 된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큰 동촉이다. 특수하고 강한 쇠뇌에 길고 무게가 나가는 동촉을 발사한다면 기존의 어떤 무기 도에도 비할 수 없는 강력한 살상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진대에는 이러한 강한 쇠뇌나 동촉보다 훨씬 선전적이고 살상력이 뛰어난 연노라 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순행 도중에 낭야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 때 진시황의 명을 받아 동해의 봉래, 방장, 영주 등 삼신산에서 장생 불사의 선약을 구하 고 있던 서복이 알현하러 왔다. 교활한 서복은 9년 넘게 몇만 금을 허비하고도 끝내 선약을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시금 진시황을 속여 봉래산(중국의 신선 사상에 나타나는 상상 속의 산)에 선약이 있는데, 바다에 거대한 상어가 길을 막고 있어 배가 산에 도착하기도 전 에 전복되고 만다고 아뢰었다. 불사에 대한 간절한 바람 때문에 그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 었던 진시황은 직접 바다로 나아갈 것을 결심했다. 연노를 장착한 배에 올라 산동 반도 앞 바다로 나아가니 과연 거대한 고래가 솟구쳐 갈 길을 막았다. 진시황은 연노로 고래를 쏘아 죽였다. 당시 진시황과 그 호위병들이 사용했다는 연노가 과연 어떤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또한 '사기'에 기록된 바, 진시황릉의 지하 통로에 설치되어 침입자가 있을 경우 자동으로 발사하게 되어 있다는 '암노' 또한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세계의 병기 발전 사에서 가장 먼저 쇠뇌를 정규군에게 지급해 전쟁터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한 나라는 의심할 바 없이 중국임에 틀림없다. 서구의 경우는 중세에 들어와서도 아직 쇠뇌처 럼 살상력이 강한 무기는 발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차 군진 2호 용갱의 궁전 방전은 나름의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을뿐더러 독립된 군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독립성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2호 용갱 전체 군진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군 진은 각기 다른 병과와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궁노 방진의 오른쪽은 방대한 전차 군진이 자리하고 있다. 세로 8열, 가로 8열의 64대의 전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전차에는 갑옷 입은 도용이 세 개씩 있다. 좌우는 전투병이고 중앙은 어수, 곧 운전병인 셈이다. 어수 는 키가 1.9미터 이상으로, 발판 위에 서서 두 손을 앞으로 곧게 뻗고 있다. 두 손바닥은 서 로 마주보면서 마치 재갈 끈을 잡은 듯 반쯤 벌려져 있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 사이 에 말의 재갈 끈을 끼우기 위한 틈새가 있으며, 엄지손가락 안쪽에는 반원형의 도기로 만든 고리가 붙어 있다. 아마도 재갈을 당길 때 손가락을 보호하는 일종의 물림쇠인 듯하다. 세 좌의 도용 모두 전포(상하 일체형의 군복)에 어깨와 팔뚝을 덮을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있다. 또한 손에는 보호대를, 목에는 네모 반듯한 모양의 동정을, 무릎 아래 또한 보호대를 착용하 고, 발에는 네모나고 입구의 코가 가지런한 신발을 신었다. 머리 꼭대기 오른쪽에는 상투를 틀었고, 그 위에 둥근 모양의 부드러운 흰 모자를 쓰고 모자 위에 다시 끝이 말아올려진 긴 관을 얹었다. 입가에는 팔자 모양의 짧은 수염이 붙어 있고 두 눈은 앞쪽을 노려보는 듯 용 맹과 위엄이 절로 풍기는 형상이다. 중국 고대의 전쟁에서 전처를 사용하기 시작산 것은 은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주 를 거치는 1천여 년 동안에 전치는 그 종류나 편제, 장비, 전술 따위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 났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실물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차 연구는 그저 고대 전적의 기록에 의존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어떤 역사가들은 진대에는 이미 전차가 사라지고 기병으 로 대치되었다고 단언하는 경우도 있었다. 2호 용갱에서 대형 전차진이 발견됨으로써 고대 전차의 편제, 장비, 전술 등에 관한 실물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을뿐더러 기존의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관점 또한 크게 바뀌게 되었다. 전차 부대의 방대한 군진은 진대의 전차, 특히 용 갱에서 발견된 형태의 경전차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의 발전이나 전술상의 변화에도 전차는 쇠퇴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개량되고 발전되어 독립된 병과로 발전했음을 알려 준다. 전 차병은 기병이나 궁노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나라 군대의 정예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으며, 결코 다른 병과가 대치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 존의 견해와는 달리 전차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마땅히 동한이후의 일이라고 보아 야 할 것이다. 기병 군진 전차가 전쟁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이를 대치한 것은 기병이다. 기병 군진의 응용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라지게 될 정도로 인류 전생사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 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은대의 갑골문에 이미 기병 작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기병은 아직 보편화한 것이 아니었으며 주로 북서 지구의 유목 민족에 한정되 어 있었다. 또한 그 전투 규모도 작아서 참다운 의미의 기병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병이 구체적으로 전술에 응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 기 사(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도록 편리한 호복, 곧 북방 오랑캐 복장을 채용함)'의 개혁을 계 기로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기병을 전쟁에 응용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 터 기병은 독립 병과로 체제를 갖추고 전쟁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진나라 시황 제가 산동여섯 나라를 합병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도 기병은 탁월한 전과를 올렸으며, 특히 오월과 흉노 정벌에서 기병은 그 밖의 다른 병과를 능가하는 최강의 주력 군단이 되었 다. 고대 기병에 관한 연구 또한 실물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상상력에 의존했 을 뿐 그 장식이나 구성, 그리고 군진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2호 용갱에서 출토된 1백 좌 기병 군진의 모든 것을 현실로 재현해 주었다. 기병용의 복장은 보병이나 전차병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들은 붉은 색의 매화가 그려진 둥굴고 작은 모자를 쓰고, 양쪽 끈을 턱 밑에서 붙잡아 맸다. 상의는 몸에 짝 달라붙게 만들 었고 하의는 끝자락을 오므라들게 만든 긴 바지를 입었으며 단화를 신었다. 그리고 짧고 작 은 갑옷을 걸친 것 이외에 어깨나 손은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았다. 복장이 간소하고 가벼운 것은 기병의 전술적 특징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기병은 빠르고 갑작tm럽게 기습 공격을 가해 적으로 하여금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들은 무엇보다 민 첩한 행동과 과감함이 요구된다. 그들이 무거운 갑옷에 넓고 긴 전투복을 착용하지 않는 이 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병마용갱의 기병 군진은 실물의 완전한 재현이다. 기병들은 모두 180센티미터 이상의 키 에 균형 잡힌 체형과 민첩하고 예리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신체나 얼굴에서 드러나 는 연령상의 특징을 볼 때, 과연 '육도'에서 말하는 "기사를 고르는 법은 나이 40세 이하, 7 척 5촌(173센티미터)이상, 건장하고 민첩하며 체력이 보통이 넘는 사람을 고른다."는 말에 적합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고대 기병들이 안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한시대로 그 이전 에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진용갱에서 도마가 출토됨으로써 이는 완전히 부전 되었다. 출토된 도마의 등에는 안장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안장의 양쪽 끝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있고 표면에는 안장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이 조각되어 있다. 안장 주위에는 주름 모 양과 장식과 짧은 띠. 뒤에는 안장을 고정시키는 끈이 있고 밑에는 복대도 달려 있다. 다만 등자가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아직 이를 사용사지 않았음을 뜻한다. 연구자들은 등자는 서 진시대 때부너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실물이 출현함에 따라서 진나라 시대, 또는 그 이전의 전국 시대에 이미 안장이 사용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장을 사용함에 따라서 기병의 양손이 더욱 자유로워 지고 아울러 전투 능력이 증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2호 용갱에서 발견된 기병 군진은 전체 대형 군진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배열 상태로 볼 때 이미 당시에 기병의 신속 한 공격을 전술상의 특징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용갱은 왜 불태워졌는가? 용갱의 파괴 상황 진시황 병마용이 출토된 지 20여 년이 지나 지금 진용 박물관을 찾는 많은 이들이 적지 않은 병사용들이 여전히 사지가 절단되거나 머리 부분이 훼손된 형태로 진흙 위에 누워 있 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차례 격심한 전쟁이 벌어졌던 것처럼 그 광경이 처참 해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다. 흙으로 쌓은 토벽의 대들보 위에는 도처에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용갱에 큰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문명에 대한 파괴 행각에 대해 탄식을 금할 수 없는 한편 도대체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일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진용 박물관을 방문한 필자 또한 다른 이들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원중일, 정학화, 이정현을 비롯한 병마용 연구의 권위자들을 만나 오랜 시간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이야기들 들을수록 사건의 원인과 배경은 더욱 더 오리 무중이 되고 말 았다. 왜냐하면 전문가들은 각기 다른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전문가가 아닌 필자의 관점에 서 보면 어느 것이나 다 일리가 있는 추리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러 전문 가들의 설을 소개해 보겠다. 항우의 화공설 중국 진용학 연구회 회장이며 병마용 박물관 관장이 원중일은 '항우의 화공설'을 취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필자에게 설명했다. 나는 병마용을 항우의 군대가 훼손시켰다고 본다. 1호 용갱의 시굴과 발굴을 통해 우리들 은 비정상적인 몇 가지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유물이 옮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 를 들어 어떤 곳에는 전혀 전차 유적이 없는데도 전차에 달린 청동으로 만든 갈고리가 출토 되었고, 어떤 도마의 경우는 귀나 꼬리의 일부 그리고 장식 등이 본래 도마가 없었던 긴 복 도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둘째, 유물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용갱 안에서 많 은 동검의 칼집이 출토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동검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일곱 번째 판 구멍 안에 있던 진흙 속에서도 동검의 칼집이 출토되고 그 안에서 약 8센티미터 길이의 검의 끝 부분이 발견되었지만 칼몸 자체는 발견할 수 없었다. 출토된 긴 병기 가운데 손잡이는 있으 나 머리 부분이 없고 또는 순(창의 자루 끝을 싼, 쇠붙이로 만든 원추형의 무기 장식품)은 있으나 머리 부분은 없는 것들이 비교적 많았다. 이러한 예는 유물이 어떤 이들에 의해 훼 손되고 도둑맞았다는 것을 뜻한다. 발굴의 결과로 볼 때, 1호 용갱 전체와 2호 용갱 일부분은 모두 불에 탄 뒤 함몰된 흔적 이 있다. 화재의 원인은 무엇인가? 몇 년 전에 어떤 이가 용갱 내부의 메탄 가스로 인해 자 연 발화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는데, 나는 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발굴 과정 에서 용갱 내부의 유물 가운데 부식할 만한 것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갱 내부 의 유물 안에 놓여진 것도 도기와 청동기뿐이다. 갱 안에 진흙이 있기는 하지만 그 진흙은 가는 모래가 많이 섞여 있을 뿐 대체로 다른 물질은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메탄 가스를 방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자연히 메탄 가스로 인한 자연발화는 불가 능하다 나는 항우가 용갱에 불을 질렀다고 보는데, 그 이유에 대해 '임동현 진용갱시굴에 관한 제 1차 보고서'에서 이미 논술한 바 있다. 지금 다시 몇 가지를 보충하고자 한다. 이후 발굴 과 정에서 주목할 만한 흔적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호 용갱의 2차 발굴에서 우리는서한 시대 합장묘를 발견했다. 무덤안에서 오수전이 발견되었는데, 그 동전은 한 무제 시기에 만 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용갱은 한 무제 시대에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가 되었 다는 사실과, 아울러 용갱의 훼손은 적어도 한 무제 이전에 저질러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1호 용갱의 바닥은 두께 10-44센티미터의 진흙으로 덮여져 있는데 평균 약 20센티미터의 두께다. 그러나 2호 용갱은 겨우 2-5센티미터였다. 1호 용갱의 동쪽 끝에 있는 긴 회랑에서 극히 얇은 대나무 껍질로 엮은 체 구멍 같은 편직물의 탄화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용 갱이 건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훼손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에 한참 뒤에 훼손되었다 면 두 용갱의 진흙은 더욱 두텁고 많이 퇴적되었을 것이고 대나무로 만든 직물이나 마로 꼬 은 새끼, 그리고 화살대 같은 작은 물건들은 이미 썩어 버려 또다시 탄화된 흔적이나 재의 흔적을 남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역사 문헌에 기록된 바와 거의 일치한다. 한서 '초원왕 열전'에 보면, "항우가 관중에 들어와 진시황릉을 발굴하니 30만 명이 30일 동안 재물을 옮겼으나 다하지 못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물론 아직까지 항우가 진시황릉을 발굴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검증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항우의 대군이 진시황릉을 발굴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검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항우의 대군이 진시황릉을 지나쳤고 아울러 진시황릉 주변의 건축을 불 태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도 당시 능원 건축 유적지에 가 보면 깊게 퇴적된 기와 파편이나 검게 탄 흔적을 볼 수 있다. 병마용은 진시황 능원의 일부분이다. 항우의 군대는 능원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용갱 또한 파손하려 했을 것이다. 물론 능원은 지상에 노출되어 있어 쉽게 알 수 있지만 용갱은 지하에 깊이 매장되어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진시황릉의 건축은 몇십 년을 걸쳐 이 루어졌으며, 이에 참가한 인원 또한 몇십만에 이른다. 그들 가운데 진시황릉의 내부 구조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고, 항우의 군대 내에도 그러한 이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항우는 분명 진시황릉 근처에 병마용갱이 있다는 것과 용개의 정확한 소재지도 알 수 있 었다. 따라서 바로 그들이 능원 건축물을 불태움과 동시에 용갱도 파손시켰다는 점은 어렵 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용갱 내부에는 진귀한 보물은 아닐지라도 진짜와 동일한 형태의 사람과 말을 세워 둔 진나라 군대와 1만 개가 넘는 실전 병기가 있었다. 게다가 항우는 초 나라 귀족 출신의 장군으로 진시황이 무력으로 초나라를 짓밟았을 때 할아버지와 숙부를 잃 었다. 자신의 아름다운 꿈을 깨뜨린 진나라 군대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지녔음은 당연 하다. 복수의 염원으로 그는 자신의 군대에게 진시황 용갱을 파헤칠 것을 명했다. 병마가 훼 손되고 병기가 약탈되었으며 건축물 또한 크게 부서진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은 분명하다. 진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병마용갱을 훼손할 수 없었 다. 진나라가 망한 뒤 4년 동안에 걸친 초한전쟁에서 항우는 오강가에서 자결하고 한 고조 는 정권을 장악해 진시 황릉에 군대를 파견해 능원을 보호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대규모 훼손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나는 병마용갱이 훼손된 시기는 진,한의 과도기에 발 생한 정치적 혼란기였다고 생각한다. 훼손의 당사자는 그 조건이나 기능성으로 보아 항우임 에 틀림없다. 장례식의 분소설 저명한 고고학자이며 중국 진용학 연구회 상무 이사인 정학회는 원중일 관장과는 달리 장 례식을 위해서 자진해서 불태워 버렸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필자에게 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메탄 가스에 의한 자연 발화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메탄 가스에 의해 저절로 불이 났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갱 속에 메탄 가스가 생성될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불 이 날 수가 있는가? 불에 탄 유물의 흔적과 역사 문헌에 기록된 것을 종합해 볼 때, 원중일 선생이 제시한 항우에 의한 훼손설이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능원에 대 한 더욱 자세한 조사 결과와 정리한 자료로 볼 때 나는 용갱이 훼손된 진정한 원인은 진나 라 사람들 자신들이 의식의 일환으로 스스로 불에 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근거로 삼는 것은 1977년, 능원의 서쪽에 있는 내외성의 담 사이에서 발견된 L자 모 양의 마구갱이다. 이 곳을 정리하면서 나는 갱의 도입구 마지막 부분의 맨 아래층에서 가는 새끼 무늬의 벽돌로 쌓아올려진 길이 140센티미터, 너비 90센티미터, 높이 60센티미터의 아 궁이를 발견했다. 개도 입구에는 나무를 모아 놓는 곡과 바람을 불어넣는 통풍구가 뚫려 있 었다. 그리고 갱의 바닥 서쪽과 화로 앞에는 그다지 길지 않은 공간이 있는데 많은 재가 쌓 여 있었다. 이는 분명 용갱을 건설한 뒤에 장의의 일환으로 불에 태우는 의식을 행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다음 능원 안에서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배자갱, 곧 부장품이 있는 갱이 발견되었다는 점 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동거마와 한 조가 되는 부장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은 철저하게 불에 타서 훼손되었지만 동거마가 있는 그 밖의 부분은 훼손되지 않았 다. 병마용갱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다. 1호 용갱은 상당히 철저하게 불에 탄 흔적이 있다. 2호 용갱의 북동쪽 모서리에 끓어앉은 진용은 그 훼손 정도가 1호 용갱과 대략 비슷하고, 그 나 머지 전차, 기병, 보병이 혼성되어 있는 세 번째 구역은 3호갱과 마찬가지로 훼손되지 않았 다. 현재 진시황릉의 주변 담 안팎에서 지하 부장갱 가운데 훼손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 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다음 몇 가지로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훼손된 부장갱은 대개 대형이나 중형으로 건축 구조는 경사로가 많고 경사로 반대편 갱벽 에는 수혈식 작은 구멍이 나 있다. 갱 안에는 달구질로 다진 흙으로 쌓아올린 칸막이 대들 보가 있고, 갱은 약간의 지나다닐 수 있는 구멍과 긴 회랑으로 되어 있으며 벽과 회랑은 곧 거나 또는 나선 모양으로 되어 있어 서로 통하도록 되어 있다. 갱의 밑바닥과 사방 벽과 천 장은 나무로 막아 놓았는데, 특히 천장 부분은 나무에 갈대를 깔아 입구를 막았으며, 사방벽 또한 판벽과 기둥을 중첩시켜 세워 놓았다. 갱의 밑바닥에는 먼저 침목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비교적 두꺼운 판자를 다시 깔았다. 푸른 벽돌을 바닥에 깔았고, 바닥에 깐 벽돌 양쪽 에 작업자에서 사용하는 나무 버팀목을 바닥에 깔았고, 바닥에 깐 벽돌 양쪽에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나무 버팀목을 사용해 밑바닥 부분까지 길게 통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형식의 특 징은 마치 가마처럼 불에 잘 타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훼손되지 않은 부장갱은 대부분 수혈식 작은 갱이다. 어떤 갱은 입구나 천장을 모두 나무 막으로 막았지만 갱 사방의 벽이나 밑바닥에는 판벽이나 벽기둥, 버팀목이나 포장된 흔적 따위가 없이 부장품만 가득하다. 그 중에는 사각형의 함 모양인 나무 겉널이나 관 등이 있 고 어떤 경우에는 도기로 만든 관도 있었다. 이상 부장갱의 훼손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특징에서 살펴볼 때, 이른바 항우가 병 마용갱을 불에 태워 훼손시켰다는 관점은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진 시황 병마용 박물관은 1호 용갱을 수리하면서 이미 발굴한 용갱 유물과 유적을 보호하기 위 해 진나라 당시의 건축 양식에 따라 나무로 갱을 덮었다. 1년 뒤 우리들이 다시 발굴했을 때, 그 나무들은 이미 부패해 거의 못 쓰게 되었다. 그렇다면 항우가 관중에 들어왔을 때 용 갱은 이미 3년 전에 파묻힌 상태가 되기 때문에 내부의 목재는 분명 모두 썩은 상태였을 것 이다. 또한 남아 있는 것들 중에도 더 이상 완전한 형태의 나무 구조의 장부(건축에서 끼워 맞추는 것)나 가설해 놓은 것이 발견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발견된 유물의 탄 화 상태는 나무가 불에 타기 전에 비교적 양호한 상태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밖에도 항우가 능원을 불태운 목적은 복수와 재물 약탈에 있었다. 이미 관련 있는 부 장갱을 분명하게 살피고, 진시황의 지하 궁전을 훼손시킨 현상이나 도굴의 분석에서 볼 때, 그들의 지하능 약탈과 훼손은 그다지 심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진시황릉의 지상 건축물과 지하 부장갱을 발굴한 결과에 근거해, "항우가 진시황의 궁실과 건축물을 불태우고 지나가는 이들이 혹 그것을 보고 발굴했다."는 기록이 초나라 병 사들이 능원의 지상 건축물에서 먼저 재물을 약탈한 뒤 불태웠으며, 불타는 폐허 속에서 다 시 재물을 파 가는 정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며칠을 머물면서 항우는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함양을 공략해 진나라 왕 자영을 살해하고 그 궁전을 불태웠는데 그 불이 3일 동안 타올랐다. 재물과 부녀들을 약취해 동쪽으로 되돌아갔다."는 기록에서 볼 때, 항우 는 관중에서 아주 짧은 기간만 머물렀다. 이러한 짧은 기간에 진시황릉의 지하 궁전을 파헤 치고 부장품을 약탈한 뒤 이를 불태우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병마용을 비롯해 지하에 묻혀 있는 부장품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었다. 이와 동시에 병마용에 대한 발 굴 상황을 살펴볼 때 대다수 병기는 약탁되지 않고 그 장소에 비교적 질서 정연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나는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이 불에 타 훼손된 진정한 원인은 바로 진시황을 장 례 지내면서 스스로 불을 행하는 일종의 장의 형식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보충할 점은 이러하 장의가 역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은, 주 시대 이래로 '제천 번시(나무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그것을 태워 하늘에 제사를 지냄)'의 의식이 전승되어 왔다. 이렇게 스스로 불을 지르는 일종의 자분형식은 하남성 안양현 소둔의 은나 라 유적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나라 민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나라 민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발전하면서 중원 문화를 흡수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군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자를 자칭해 짐이라 하니, 짐은 시황제, 곧 황제의 시작이 된다."고 했 다. 그는 자신을 하늘의 아들, 곧 천자라고 여겼다. 그래서 죽은 뒤에는 하늘, 곧 자신의 모 체로 되돌아가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영향 아래서 진시황은 이전의 제천 번시 방식을 채용했다. 그래서 자신의 묘지에 넣는 부장품을 태워 하늘에 알리는 일종의 장의를 거행했고 이로써 그부장품들이 주인인 자신을 따라 하늘 나라로 갈 것이라고 믿었다. 목동의 실화설 다음에 필자가 방문한 것은 중국 진용학 연구회 이사이고 미술가인 이정현이다. 그는 병 마용갱이 불태워진 것에 대해서 또 다른 설을 주장하고 있다. 원중일 선생과 정학화 선생이 제시한 두 가지 관점 또한 나름의 일리가 있다. 이러한 원 인이 용갱의 훼손을 불러왔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제기된 메탄 가스에 의한 자연 발화설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연구해 본 결과 이러한 견해들 에 완전히 승복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 생각은 병마용갱의 화재는 어떤 목동의 실수 때문 이라는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 볼 수 있다시피 용갱의 바닥은 빗물을 통해 운반된 것으로 여겨지는 10-14겹의 진흙 침전물로 되어 있다. 이는 용갱이 불태워져 훼손된 것이 진나라가 망한 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임을 말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나무로 만든 골조가 일단 불타 무너지면 몇 미터의 토사층이 곧 함몰해 지금과 같은 진흙이 생기는 현상은 없다. 따라서 14겹의 진흙 침전물은 꽤 오랜 세월의 지표 변화에 따라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3-4년 내에는 이러한 진흙이 쌓일 리 없다. 따라서 원중일 선생이 추측한 것처럼 기원전 207년에 항우가 관중에 들어왔을 때 그의 군대에 의해 용갱이 훼손된 것이 아니다. 정학화 선생이 제기한 진나라 사람들의 자분설은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또한 문제가 있다. 전국 시대 말기의 진나라에 이러한 의식이 존재했는가 여부에 대해서도 확실치 않다. 게다 가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를 통해 우리는 진시황릉 주변의 부장품은 단지 병마용갱뿐만이 아 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발견되거나 출토된 끓어앉아 있는 도 용이나 또한 몇 년 전에 발견된 마구갱, 희귀 동물갱(진귀한 동물들을 산 채로 매장한 갱)도 부장품이라 할 수 있다. 이미 공포된 바대로 대량의 말들이 산 채로 매장되었으며, 진귀한 동물들 또한 살해된 뒤에 관에 넣어졌다는 흔적은 볼 수 없다. 또한 적지 않은 끓어앉은 도 용들 또한 대부분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료에 따르면 진시황의 궁년들도 산 채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오로지 세 개의 용갱에서만 분소 의식이 행해졌겠는가? 병마용의 재료는 도자기를 만드는 흙이다. 바탕이 두텁고 흙은 보드랍고 매끄럽다. 또한 구울 때 온도는 1천 도가 넘어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목적은 분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보 존해 만세토록 다함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진나라가 자신들 스스로 부장 품을 태우는 의식을 행하고자 했다면 왜 이토록 힘들게 도용을 만들고 준비했을 것인가? 재 료의 영구성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과 의식의 찰나성은 근본적으로 모순이 된다. 함양이나 서주에서 출토된 서한 시대 병마용은 진대 병마용에 비해 약산 작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 의 비슷하다. 한대 병마용은 출토되었을 때 대부분 상태가 양호해 장례 때 자신들 스스로 훼손시킨 흔적을 볼 수없다. 진과 한은 겨우 몇십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을 뿐이다. 한나라가 진나라의 제도를 승계하면서 장례 의식만 크게 변화시켰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이 바 로 진용갱이 당사자들 자신이 불태운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불태워진 것이라는 데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게다가 진시황 병마용의 병기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훔쳐 간 상태다. 자부 설에 따르면 토사층이 곧 붕괴한 셈이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병기들을 훔쳐 갈 수 있었 겠는가? 메탄 가스에 의한 화재가 발생해 용갱이 훼손되었다는 관점은 이론면에서 타당하지만 실 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메탄 가스로 불이 났다는 견해의 현실성을 확보하려 면 반드시 여산 지역의 물 상황, 토질, 기후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 실험에서 나 름의 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다. 단지 밀폐된 갱 안에서 나무가 썩어 메탄 가스가 나오고, 그 것이 발화해 화재가 났다는 이론은 그다지 만족할 만한 해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용갱의 화재와 그로 인한 훼손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내 생각 은 이러하다. 진 왕조가 멸망하고 진시황릉이 훼손된 뒤 진시황릉의 능원은 이미 옛날의 영광은 사라지 고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저 우연히 지나치는 이들이라고는 나무꾼이나 목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 이미 발굴된 서한 시대 말기의 묘지로 판단하건대 진용갱이 화재로 분소된 시기는 대략 진나라가 망한 이후 서한 시대 말기 전이 라고 여겨진다. '한서'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시황을 여산의 언덕에 묻은 다음 아래로 세 번 지하 수를 지날 만큼 깊이 파고 위로 삼분(세 개의 봉분)을 높였는데, 그 높이가 50여 장(한 장은 열 척)이고 사방으로 5리 남짓을 에워 쌓았다. 둥근 돌로 유관을 삼고 인어로 등촉을 삼았 으며, 수은으로 강물을 만들고 황금으로 오리롸 기러기를 만들었다. 항적(항우의 본명)이 그 궁실과 조형물을 불태우니 뒤를 따르는 이들이 모두 그 나머지를 발굴했다. 이후에 목동이 그 곳에서 양을 길렀는데 양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목동이 횃불을 들고 양을 찾으러 들어 갔다가 진시황의 관곽(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곽이다.)을 불태우고 말았다." '한서'는 동한 시대 초기에 쓰여졌다.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목동의 실화에 관한 이야기는 이전의 '사기'에 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추측하건대 저자는 당시 민간에 전해지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근래 고고학자들은 진시황릉을 세밀하게 고찰한 뒤, 진시황릉의 봉토는 도굴한 흔적이 없 으며 지하 궁전 또한 도굴당하지 않았다는 결론들 내린 바 있다. 그렇다면 도굴을 위한 구 멍이 없는데 어떻게 '양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건대 이 구멍은 지표면에서 그다지 깊지 않는 곳에 있는 진용갱의 입구일 것이다. 진용갱은 능원의 일부다. 당시 항우 군대가 진용갱을 파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방화를 하지는 않은 상태 였다. 이는 이후 발굴된 3호갱이 전혀 불탄 흔적 없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러한 이유는 복수심에 불타는 항우의 군대였지만 호화스럽고 장대한 능원에 비해 초라한 듯 보이 는 진용갱을 보면서 그다지 불에 태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 다. 만약 그 때 방화해 소진되었다면 용갱 바닥의 14겹 진흙층은 생기기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어떤 목동이 양떼를 몰고 진용갱이 있는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 옛날 항우의 군대가 진용갱으로 들어가기 위해 파 놓은 입구는 이미 흘러든 흙 과 잡초로 뒤엉켜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데 풀을 먹느라 정신이 팔린 양이 잘못해 그 곳으 로 빠지고 말았다. 지금의 1호, 2호 용갱이었을 것이다. 목동이 횃불을 들고 들어가 양을 찾 다가 잘못해 화재가 나고,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진시황릉이 불탔다는 말이 돌기 시 작했다. 이는 다시 와전되어 지하 궁전의 화재로 이어져 진시황의 관곽이 불탔다는 이야기 가 만들어졌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진용갱의 화재와 그로 인한 훼손의 진정한 원인이다. 역시 황우의 방화인가? 고고학자이며 중국 진용 연구회 상무 이사인 장중립은 이러한 여러 학설들을 비교한 다음 에 진상은 역시 원중일 관장이 주장한 '항우의 방화설'이 아닐까 하고 필자에게 애기했다. 우선 나는 메탄 가스에 의한 자연 발화설에 반대한다. 진용갱은 지하 갱도식의 토목 구조 건축물이다. 용갱의 주위는 벽으로 둘러쌓았고 갱 안에 서로 격리된 흙담은 흙을 틀에 넣고 다져서 만들었다. 갱 바닥에는 푸른 벽돌을 깔았고 갱의 꼭대기는 나무 골조 위에 자리를 깔았다. 자리 위에는 다시 찰흙으로 한 겹 덮고 찰흙 위에 다시 2미터 정도의 봉토를 덮었 다. 용갱을 건축할 때 사용한 경사진 도입로 또한 나무를 세워 울을 만들고 흙으로 채웠다. 그래서 완공 뒤의 용갱은 완전히 밀폐된 지하 건축물이 되었다. 따라서 이처럼 밀폐된 건축 을 한 번에, 그것도 철저하게 태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소에 필요한 충분한 산소가 없기 때문이다. 설사 메탄가스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인화하기 힘들었을 것인데, 하물며 메탄 가스의 발생도 가능치 않은 마당에서랴!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러한 훼손의 참상은 용갱이 파괴자에 의해 온통 구멍투성이가 될 정도로 망가뜨려진 뒤에야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용갱 내부와 외부의 여러 곳에서 공기가 대류하는 상황 에서 인화되어 큰 화재가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처럼 용갱을 처참하게 파괴해 구멍투성이로 만들고 외부 공기를 유통시키게 한 것은 크 게 두 가지 원인, 곧 인위적인 파괴와 자연수의 침수를 통한 훼손 이외에는 없다. 진용갱이 대규모로 약탈되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므로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다. 약탈자가 용 갱으로 들어오려면 먼저 용갱의 꼭대기에 있는 덮개를 파서 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우 선 용갱의 덮개를 열어야만 용갱을 파괴하고 약탈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약탈에 참가한 사람 들은 차츰 많아졌고, 용갱의 건축 또한 차츰 크게 훼손되었다. 용갱의 파괴가 심화할수록 갱 안 공기의 유통은 그만큼 자유롭게 되고 마침내 발화해 철저하게 불타고 만 것이다. 대규모 파괴와 약탈은 진용갱의 화재와 그로 인한 훼손의 조건이자 호기였던 셈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나는 메탄 가스를 통한 자연 발화설을 부정함과 동시에 정학화 선생이 제시 한 '자분설'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용갱 출토의 상황을 분석한 결과, 화재로 인한 훼손은 진 말에서 한 초로 넘어가는 사회 적 대혼란기에 저질러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이처럼 크게 훼손시 킨 이들으 분명 대규모 집단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이 집단이 용갱을 약탈한 것은 일반 적인 보물이나 재화를 약탈하는 것과 성질이 다르다.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택해서 약 탈해 간 흔적이 엿보인다. 진용갱에서 사라진 것들은 주로 과, 창, 극, 검 따위의 병기류와 거마기구 그리고 차륜이다. 대다수 금이나 구리로 만든 기물은 여전히 갱 안에 남아 있다. 따라서 나는 약탈 집단이 군사 조직과 유관하며 아마 어떤 군대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 렇지 않고 만약에 약탈자들이 일반적인 도굴범들이었다면, 진용갱에 남아 있는 많은 금동 기물은 그들에게 전혀 값어치 없는 물건으로 간주되었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또한 왜 그들 이 화살촉이나 구리로 만든 수, 쇠뇌를 발사하는 틀, 용종이나 그 밖의 기물은 훔쳐 가지 않 고 남겨 놓았는가를 전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 도굴범들이라면 용갱을 파괴하는 데 자신들의 힘을 낭비하는 일도 없을뿐 더러 도굴한 뒤에 다시 불을 질러 자신들을 노출시키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 지 그처럼 우둔한 도굴범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미 용갱의 약탈자는 일부 군대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제시한 상태에서 그 시기는 대략 진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라고 본다면 이 시기에 진시황릉을 지나치거나 근접한 군사 집 단을 조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먼저 진나라 장한이 인솔한 부대를 생각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여산의 죄수들로 조직된 진나라 정부군이었다. 장한은 진나라 소부에 임명 되었는데, 진시황릉 공사의 후기 책임자였다. 진 2세 황제 2년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 정권을 위협하자 장한은 진 2세에게 청원해 여산의 죄수들을 방면하고 그들에게 무 기를 지급해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장한이 죄수의 무리를 이끌고 농민군을 공략한 것 을 가지고 어떤 이가 바쁘게 조직된 군대였기 때문에 병기가 모자라 용갱의 활, 쇠뇌, 검 따 위를 도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병마용의 훼손과 연관 시킨다면 스스로 함정을 파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가령 장한의 군대가 병기를 훔쳤다고 하더라도 왜 그들이 도용을 파괴했는가는 전혀 해석할 수 없다. 게다가 용갱의 병기와 몇십 만의 죄수로 조직된 군사의 비율을 생각한다면 전혀 맞지 않는 해석이라 하겠다. 또한 어떤 이는 주장의 군대가 진시황릉 일대를 지난 적이 있는데, 이들이 진용갱을 약탈 하고 훼손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설 또한 성립되기 힘들다. 주장이 인솔한 농민 봉기군은 단 지 진시황릉의 주변을 지나쳤을 뿐이다. '사기''진시황 본기'에 보면, "2년 겨울, 주장이 희에 도달했는데 병력의 수가 10만이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회'의 정확한 지점은 진시 황릉에서 북쪽으로 2킬로미터 되는 곳에 위치한다. 따라서 주자의 군대는 진시황릉에 도착 하기도 적에 이미 장한이 조직한 군대에게 크게 패하고 도주한 셈이 된다. 다음 유방이 인솔한 군대는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들어왔다. 물론 역사서에 명확하게 기 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 또한 진시황릉을 지났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유방이 관중 에 들어온 뒤 취했던 행동으로 보아 그들이 진용갱을 약탈하거나 훼손시켰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여겨진다. '사기''고조본기'에 보면 유방이 항우의 죄상 10가지를 말하는 대목이 나오 는데, 그 가운데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면 잔학한 약탈을 하지 말라 약조했으니 이것이 네 번째 죄목리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유방이 병마용을 약탈하고 불태웠다면 항우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용갱을 불태워 훼손시킨 것은 유방보다 늦게 들어온 항우의 짓이며 그 원인은 원중일 선생이 말한 이유와 동일하다. 이정현 선생은 항우가 용갱을 약탈하고 파괴하기는 했지만 이를 태운 적은 없으며 어떤 목동이 실수로 화재를 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나는 이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설사 항우 가 용갱을 불태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찌 한 작은 목동이 용갱을 이처럼 철저하게 불태 울 수 있었겠는가? 이 주장에는 자연히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목동이 가 지고 있던 양 중에 몇 마리가 용갱에 빠졌을까? 만약 한 마리였다면 단지 용갱 하나만 불태 워졌을 것이다. 또한 만약에 여러 마리가 용갱 두 군데에 나누어 떨어졌다면 이는 이미 용 갱의 지표면에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나무 골조 등이 떨어져 나간 상 태에서 불이 난다고 할지라도 용갱 전체를 불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런 상태라면 갱 안에 이미 번 물이 들어와 나무 골조물이 젖어 있는 상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결코 쉽게 발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메탄 가스에 의한 자연 연소설이나 장례 의식에 따른 분소설, 그리고 목동의 실화설은 병 마용의 지하 건축물이 대규모로 파괴되고 또한 약탈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저절로 연소되거나 아니면 장례 의식에 따라 일부러 분소시켰다면 인위적인 약탈이나 파괴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목동이 실수로 불을 냈다는 주장은 동시에 두 개의 지하 건축물이 그 것도 철저하게 불태워진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병마용 연구의 권위자 네 사람과 대담을 끝내고, 필자는 눈앞에 쌓인 두툼한 기록 노트를 보며 망연 자실했다. 병마용갱이 불태워진 원인에 대한 갖가지 분석과 나름의 해답에 대해 많은 지식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마치 동서 남북을 구분할 수 없 는 미로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메탄 가스 설''장례식의 분소설''목동의 실화설'이 지니고 있는 논리면에서 보이는 결함에 대해서는 이미 장중립 선생이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현재 진용 박물관의 공식 설명은 원 중일, 장중립 두 사람의 '항우의 방화설'을 채용하고 있다. 이 이론이 대체로 여러 사람들에 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설 또한 단점이 있다. 바로 용갱 밑바닥에 있는 14겹의 진흙 침전물에 대한 사실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시황릉이 완성된 지 겨우 3년만에 항우의 대군이 병마용갱을 대규모로 파헤치고 약탈고 파괴를 자행한 다음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면, 지하 건축물 천장에 있는 흙은 당연히 밑바닥에 떨어져 지면과 병마용을 뒤덮게 되 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통해 운반되어진 것이 분명한 14겹 두께의 진흙 침전물은 어떻 게 생겨난 것일까? 항우에 의한 방화설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듯 병마용은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용갱이 왜 파괴되고 불태 워졌는가에 대한 문제는 가장 큰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만일 앞으로 누군가가 그 역사의 진실을 해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의 큰 경사가 될 것이다. 5 신비한 지하 군진 3호 용갱의 수수께끼 진시황 병마용갱 현장에서는 박물관 건설 팀, 발굴 팀, 시탐 팀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각 팀마다 긴밀한 협조 속에 작업하고 있었다. 1976년 5월 11일, 한 탐사 대원이 1호 용갱의 북서쪽 25미터 지점에서 3호 병마용갱을 발 견했다. 의심할 바 없이 또다시 기쁜 소식이었다. 1977년 3월, 고고학 전문가가 3호 용갱에 대해 소규모로 시험 발굴을 한 결과 이는 형태나 내용 모두 1호, 2호 용갱과 전혀 다른 지 하 군영 장막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체 면적은 겨우 3백 제곱 미터로 2호 용갱의 20분 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건축 형태가 특이해 내부 구조가 수수께끼 같았다. 1호 용갱의 평면도는 직사각형이고, 2호 용갱은 곡척(L자 모양) 형태이지만, 3호 용갱의 평면도는 불규 칙적인 요자 형태였다. 동쪽에는 길이가 11.2미터, 너비가 3.7미터의 경사진 도입로가 있는 데, 도입로 반대쪽에 차마(전차와 말)를 두는 방이 있으며, 그 양쪽에 각기 동서로 곁방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3호 용갱은 보존 상태가 아주 나빴다. 물론 1호 용갱에도 부서지거나 본래 자리에서 이탈된 흔적이 남아 있고, 또한 병기류의 경우 도둑맞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도용 의 머리 부분은 거의 갱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3호 용갱의 경우는 대부분의 머리가 사 라지고 없었다. 도마의 머리 또한 훼손되어 불완전했고, 갱 안에도 그 일부나 파편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1호, 2호 용갱보다 더욱 난폭하게 약탈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 지만 이상하게도 불에 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마치 목조 건물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 스럽게 함몰한 것 같았다.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3호 용갱의 본디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곳 은 고대 군진 지휘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 고고학사에서 유일한 발견이었다. 3호 용갱 의 건축 양식, 전차와 말의 특징, 도용과 병기의 배열 등은 고대 전쟁과 출정 전의 의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다. 3호 용갱이 발굴된 것과 동시에 그 곳에서 서쪽으로 1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남북으로 갑 자형의 커다란 무덤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묘실의 면적은 3백 제곱 미터, 깊이는 12미터 이며, 사방에 2층의 대가 있고, 북쪽 경사로의 도입구는 길이가 40미터다. 묘실 내부를 시탐 해 썩은 목판을 발굴했다. 이 커다란 무덤이 3호 용갱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굴대는 '3호 병마용갱 발굴 상황에 대한 1차 보고서'에서 "이 무덤이 세 개의 병마용갱과 한 조를 이루 고 있는가, 그리고 무덤의 주인은 3호 용갱의 지휘차인가 아닌가 여부는 이후의 발굴에서 검증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무덤 주인이 군진의 지휘자인지 아닌지는 둘째 문제이고, 3호 용갱의 발굴은 고대의 군사 포진도가 완전한 형태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지극히 중요했다. 중국 고대 전쟁사를 살펴보면, 춘추 오패(중국 춘추 시대의 패자 다섯 사람. 제의 환공. 진의 문공. 초의 장와. 오의 합려. 월의 구천)가 등장하기 이전의 군대 지휘관은 병졸보다 앞에서 적진을 향했기 때문에 자연히 군진의 앞이나 군대 전반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 다. 그러나 차츰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고 전투 횟수가 증가하면서 지휘관이 있는 장소도 뒤 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국 시대 후기에 이르면 지휘관의 위치는 군진 속에서 독립되고, 아울러 지휘관을 보좌하는 별도의 참모 기관이 조직되기에 이른다. 3호 용갱을 보면, 진나라 군대는 지휘 기관이 독립되어 전체 군진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지휘 기관을 독립시킨 것은 지휘관이 면밀한 작전 방안을 작성 하거나, 적진을 한눈에 파악해 말 그대로 '지피 지기'하는 데 꽤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시황 병마용의 3호 용갱이 발견됨으로써 당시에 이미 군사 전술이 아주 발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3호 용갱은 전체 군진의 지휘 기관인 만큼 그 구조가 갱 내부의 배치 또한 특수하게 되어 있었다. 전차와 말이 있는 방은 동서 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이며 동쪽은 도입로와 마주 보고, 북쪽과 남쪽은 각기 곁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차와 말이 있는 방에서 채색화가 그려진 덮 개가 발견되었다. 전차의 뒤에 대기하는 도용의 숫자도 달랐다. 1호 용갱의 경우 승무원 3명과 몇 명의 병 사가 뒤를 따르는 것이 보통인데, 3호 용갱은 전차 위에 4명이 타고 뒤를 따르는 보병 숫 자 또한 달랐다. 우선 전차에 서 있는 도용은 중간에 어수와 군리용이 앞뒤로 배열되어, 있 고, 나머지 두 사람은 좌우에 서 있다. 군리용은 짧은 상의에 테두리가 꽃무늬로 되어 있는 갑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끝이 말려 있는 긴 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손을 약간 들어 칼집 안 의 검을 살짝 누르는 자세를 하고 있다. 관의 형식으나 갑옷, 그리고 자세를 분석한 결과, 신분은 어수보다 높지만 1호 용갱의 전차 뒤에 서 있는 장군용보다는 낮다고 추측된다. 나 머지 좌우에 있는 도용은 복장으로 보아 지위가 더욱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고대 전쟁사에서 볼 때, 4인이 승차한 지휘용 전차는 이미 춘추 시대부터 있었다. 3 호 용갱에서 출토된 전차는 의심할 바 없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춘추 시 대의 전차와 다른 점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 지휘용 전차의 용도나 역할을 무엇이었을 까? 고고학자 원중일 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름의 결론을 내린 바 있다. "3호 용 갱의 전차는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도 선구차로서 행군 중에는 길 안내를 하고 작전 때에는 앞서 직전으로 달려나가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이러한 해석은 역사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싸움터의 정세를 살펴볼 때 사용하 는 지휘자 전용차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3호 용갱의 남북 양쪽에는 두 개의 큰 공간이 있었다. 그 두 공간의 앞 복도와 전차와 말 이 있는 방이 연결된 곳에서 썩은 나무 가로대가 발견되었다. 가로대는 옻칠이 되어 있었는 데 구리로 만든 둥근 모양의 못 4개는 일정한 간격으로 달려 있었다. 유적으로 판단하건대 문 가로대의 못 4개는 유막(진영에 치는 장막)을 치기 위해 사용된 듯하다. 전차와 말이 있 는 방에서 남쪽 켵방으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유막을 걸어 양쪽 공간을 분리시킴으로써 독 립된 공간으로 활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북쪽의 공간 또한 남쪽과 마찬가지로 문 가로대 와 구리로 만든 못이 발견되었는데, 다만 건축 형태가 약간 간소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 다. 고고학자들은 이 방을 남북 곁방이라고 이름붙였다. 발견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남쪽의 곁방은 군사 책임자들이 작전을 짜거나 휴식을 하던 침실로 판단된다. 남쪽 곁방에는 40좌 의 갑옷을 입은 무사용이 대열을 이루어 서 있으며, 북쪽 곁방 또한 22좌의 무사용이 도열 하고 있다. 3개 병마용갱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그 건축 양식도 각기 다르고 도용의 배열이나 병기 분포, 그리고 그 사용 방식 또한 각기 나름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1,2호 용갱으 도용은 작 전 대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3호 용갱에서 출토된 전체 64좌의 무사용은 좁은 길에서 서 로 마주 보고 있는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남북 곁방에 있는 무사들의 배열 방식은 모두 상 호 대응되어 경비나 호위를 하듯 위엄 있게 도열한 형상이다. 1호 용갱의 무사용은 전포를 입거나 갑옷을 입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머리 모양은 땋아서 상투를 틀거나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뚜렸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무기다. 1호와 2 호 용갱에서는 과, 극, 검, 만도(갈고리처럼 생긴 무기) 따위가 대량으로 발견되었지만, 3호 용갱에서는 고대 전쟁터에서도 보기 힘든 칼날이 없는 병기인 수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무기는 위쪽이 뾰족한 다각추로 되어 있고 몸체는 나무 자루를 박아 넣을 수 있도록 둥굴게 만들어져 있는데, 대규모 작전보다는 근거리 살상이나 의장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3호 용갱의 호위 병사들이 지녔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역사학자들이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의식에 대해 연구해 왔다. 사료 에 따르면 이러한 의식은 이미 석기 시대부터 치러졌고, 특히 은나라 때에 성행했다고 한다. 서주에서 춘추 전국 시대의 경우도 전쟁 전에 점을 치는 것이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였 다. 점을 치는 방법은 거북의 배 껍데기나 소의 어깨뼈(견갑골)에 구멍을 뚫고, 그것을 불에 구워 나타나는 균열을 통해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대의 경우는 사료가 발견 되지 않아 이러한 의식이 행해졌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미 이러한 의식이 사라지고 없었다는 섣부른 판단을 내린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3호 용갱에 서 도마나 병기 이외에도 1호, 2호 용갱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은 동물의 뼈나 사슴뿔의 조 각이 발굴됨으로써 진나라 또한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의식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 다. 다만 진대의 경우 그러한 의식이 어떻게 전쟁에 응용되고 어떤 역할을 했는가의 문제는 향후 발굴의 성과에 따라 더욱 상세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완전한 고대 진병도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전쟁의 규모나 횟수가 차츰 늘어남에 따라서 전쟁의 진법 또한 크 게 변화, 발전했다. 전쟁을 치루는 양쪽은 각기 일정한 조직형태에 따라 진을 형성해 공격과 후퇴, 분산과 포위를 능수 능란하게 할 수 있는 전투 대형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전투에 임해 진열을 펼치는 '진'인 셈이다. 이른바 군진은 전쟁을 통해 형성된 일종의 조직 예술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형식으로 변화, 발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을 고대 병서의 진본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오히려 통속 소설 속의 전쟁 묘사 장면을 통해 신비로운 분위기로 포장되어 전해지면서 오늘날의 우리들은 더욱 그 진면목을 알기 어렵게 되었다. 당대의 사료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가운데 '이정 문대'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보면, 당 태종 이세민이 군사 전문가인 이정에게 '오행진'에 대해 물어 보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정이 이에 '방, 원, 곡, 직, 예' 의 다섯 종류의 진법을 들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대의 병서에 나오는 진법에 관한 이야기는 대단히 번잡하고 또한 각각의 설명이 일치하지 않는 다. 만약 여러 가지 형태의 진형에 대해 개괄해서 설명하고자 한다면 앞서 이정이 제시한 다섯 가지 진법이 가장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정은 이세민의 물음에 답하면서 "무릇 군사가 이 다섯 가지를 익히지 않는다면 어찌 적과 임해 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정중한 어투로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방, 원, 곡, 직, 예의 진법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1972년 4월,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에 있는 서한 무제 시대의 무덤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 한 '손자병법'과'손빈병법'등 4900여 쪽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손자병법' 가운데 '십진'에 보 면 "무릇 진에는 10가지가 있으니, 방진, 원진, 소진, 수진, 추행의 진, 안행의 진, 화진, 수진 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손자는 진법을 10가지라고 했으나 그 가운데 화진은 화 공법을 , 수진은 수공법을 말하는 것으로 순수한 의미의 진법은 아니다. 그래서 손빈은 손자 병법을 계승하면서 십진 가운데 위에서 말한 두 가지를 빼고 방진, 원진, 소진, 수진, 추행의 진, 안행의 진, 구행의 진, 현양으 진의 팔진법으로 축소시켰다. 이른바 팔진법은 바로 이렇게 손빈이 처음 제기해 이후 군사가들이 이를 더욱 다양한 형 태로 변화,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진법을 창출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그 어떤 진법도 전체 구성상 이 팔진법을 벗어나는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팔진법 또한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현양의 진법'은 전투 대형을 배열이나 조합이 아니라 정기등을 많이 설치해 적을 유인하는 일종의 책략일 뿐이다. 또한 '소진'과 '수진'은 전자가 대오를 흐트러뜨리고 후자는 집합시킨다는 점에서 다를 뿐 양자가 이른바 직진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는 '안행의 진법'과 '구행의 진법'의 경 우도 마찬가지여서 양자 모두 곡진의 범주로 개괄시킬 수 있다. 또한 '추행의 진법'은 말 그 대로 송곳처럼 예리하게 적진을 돌파해 적의 심장부로 파고든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리할 '예'자를 써서 '예진'이라 부룰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손자의 '십진'과 손빈의 '팔진' 을 더욱 축약시켜 개괄한 것이 바로 이정의 '오진법'이라 할 수 있다. 병마용갱의 출현은 바로 이러한 진법의 실물을 우리들에게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하여 그 속에 담긴 군사 전략과 군사 사상의 맥락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 용갱이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배열된 것은 결코 되는 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진 나라의 정예 군사 진법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1호 용갱의 경우 지극히 규격에 맞는 직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 바로 '방진'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 이다. 방진의 전차와 말과 무사용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있는데, 전체적으로 봉, 익, 위, 본과 같이 방진에서 불가결한 구성 부분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용갱의 최전방은 가로로 세 줄씩 모두 204좌의 무사용이 배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 긴 관을 쓴 장군용 세 개를 빼놓고 나머지는 모두 활을 손에 배치된 궁노병 집단과 마찬가지로 공격 부대에 속한다. 그 전법은 먼저 화살을 일제히 쏘아 적진을 흐트러뜨리고, 그 다음 후속의 대군이 성난 파도처럼 돌격 해 백병전을 전개해 승기를 빼앗는 것이다. 이 때 전차 위에서 청동 보검을 든 장군이 지휘 를 한다. 한편 남북 양쪽의 무사용은 중무장을 했는데, 쇠뇌를 들고 군진의 양측면을 향해 발사하 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형태는 방진 가운데 '양날개'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군의 뒤쪽에 는 3열의 병사들이 본진에 등을 돌리고 가로로 배열되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위'에 속한다. 양날개와 위는 적군이 본대의 측면이나 뒤쪽에서 공격하는 것을 방어해 전투 중에 협공당하 지 않도록 하지 데 있다. 1호 용갱의 방진이 수많은 보병이 전차를 에워싸고 돌격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반 해, 2호 용갱의 군진은 각기 다른 네 가지로 나뉘어 복합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우선 첫 번째 공간은 334좌의 궁노병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각형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두 번째 공 간은 64대의 경전차로 구성된 사각형의 대형이며, 세 번째 공간은 19대의 중형 전차와 1백 명 이상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의 견고한 보루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네 번째 공 간은 6대의 전차와 124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노병과 기병은 전국 시대 말기, 특히 진나라 시대에 상대적으로 독립된 병과로 발전했 다. 그러나 전투 중에는 독자적인 군진이 될 수가 없었다. 궁노병의 경우 강력한 살상력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군진이 요구하는 다양한 변화를 수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 다. 이와 반대로 기병은 행동이 경쾌하고 민첩하지만 그들이 지닌 무기는 가벼운 활이나 쇠 뇌뿐으로 살상력에 한계가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들은 그 밖의 다른 병과와 조화를 이루어 야만 한다. 2호 용갱의 네 개 군사 집단은 이렇듯 단독으로 군진을 형성한 것은 아니지만 상호 조합 해 막강한 살상력과 공격력을 겸비해 전쟁터에서 무적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병과의 상호 배합을 통해 강력한 전술을 운용하는 방법은 차가운 병기, 곧 창이나 칼 처럼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병기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더욱 규모가 방대하고 복잡한 '입체적 군진'으로 활용되고 있다. 안행의 진 1호 용갱과 2호 용갱이 모사한 것이 바로 실전의 군진이고 3호 용갱은 지휘부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이 세 개의 용갱은 의심할 바 없이 상호 밀접한 연관을 지닌 군사 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병과를 배열하고 조합한 것은 어떤 군진의 원칙에 따 른 것일까? 분명한 것은 이 대형 군진의 배열이 춘추 시대 이전의 진법과 명백히 다르다는 점이다. 진용갱의 군진 구성과 병과 배열은 전쟁터의 상황 변화에 따라서 군진고 병과의 배치를 다 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궁노병의 선봉이 사격을 한 뒤 재빨리 양 쪽으로 물러나 후미에 주력 부대에게 길을 열어준다. 기병은 적의 형세에 따라 빠르게 돌격 해 보병 주력 부대와 함께 적을 협공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전술상의 변화는 춘추 시대 중기의 전차전에서 이미 선보였으나 전국 시대에 들어와 보병과 기병이 대두함에 따라 서 이처럼 협공을 위주로 한 진법이 더욱 성숙하게 되었다. 춘추 시대에 일렬로 전개하는 전차진의 싸움은 이처럼 추격, 포위, 정면 공격을 중심으로 한 전술로 대치되어 마침내 '안 행의 진(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비스듬히 줄지어 공략하는 방법)'이 형성되기에 이르렀 다. 병마용의 군진이 '안행의 진'의 재현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쟁이 시작되면 앞 에 있는 궁노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적진을 무너뜨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1호 용갱의 보병 주력 부대는 재빨리 전방으로 돌격하고 이와 동시에 2호 용갱의 기병과 전차병이 적군 의 정면을 피해 신속하고 맹렬한 기세로 측면 공격을 감행한다. 1호 용갱의 보병 주력군은 적군과 접전함과 동시에 흩어져, 기병, 전차병과 함께 적을 포위해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처 럼 만들어 마침내 섬멸시키고 만다. 이것이 바로 손자가 말하는 "무릇 전쟁은 정으로 합치 고 기로 승리한다. 그래서 기를 잘 운용하는 자는 천지처럼 다함이 없고, 강물처럼 마르지 않는다."의 진면목일 것이다. 1호 용갱은 전통적인 전차병과 밀집 대형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군단이며, 배치된 병력은 2호 용갱 전체 병력의 3배에 이른다. 2호 용갱은 궁노병, 기병, 전차병으로 이루어진 군진이다. 후자가 전차와 기병을 중심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적진을 돌파하는 사이에, 1호 용갱의 대군은 '천지처럼 다함이 없고 강물처럼 마르지 않는'기세로 정면에서 적군과 맞부딪 친다. 이러한 포진 방법은 대전진 속에 소전진을 포함시키고, 대군단과 소군단이 서로 호응 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해 말 그대로 신출 귀몰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방진이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진법이 안행의 진에 활용되어 천지를 진동시킬 만한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 것이다. 천고유일의 황제라 할 수 있는 진시황은 바로 이러한 획기적인 군사전술 사상과 이를 실 현할 수 있는 막강한 대군을 가지고 중원을 석권하고, 10년도 채 안 되어 한, 조, 위, 연, 초, 제나라의 산동 6국을 합병해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이다. 1974년 3월, 서양촌의 한 농민이 도기 파편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마침내 1977년 10월에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8천 명 지하 군단이 인류 앞에서 거대한 위용을 선보였다. 오 랜 세월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동방의 오래된 제국, 그 신비한 역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나 기 시작한 것이다. 동방 문명의 새로운 소식이 중국 신화사 통신사를 통해 전세계로 타전되고 있을 때, 서구 의 심문, 방송사 또한 또 다른 충격의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스 통신사의 보도가 그 처 음을 장식했다. "1977년 11월, 거대한 묘지가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의 감정에 따르면 그 묘지는 아마도 23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친이자 마케도니아 국왕이었던 필리포스 2 세의 것인 듯하다." 한편 국영 이탈리아 방송국은 "1977년 12월 말까지 이탈리아의 옛 도시 폼페이의 고고학 발굴은 이미 전후 30년의 역정을 거쳐 왔다. 이 곳은 기원전 98년 화산이 폭발하면서 도시 전체가 매몰되고 말았다. 고고학자들의 과학적 탐사를 통해 전체 도시의 형태와 구조가 거의 완전하게 파악되었으며 많은 궁전의 잔해 또한 발굴되어 보존될 수 있 었다." 동서양에서 서로 오가는 소식을 통해 인류는 우리 자신들의 영원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