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랑, 우리의 세속적 종교 전통 뒤에는 무엇이 올까? 아무것도 없을까? 사랑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할 만큼 경솔한 사람은 없으리라. 따라서 이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통이 해체된 비종교적이고 개인화된 우리의 세계에서 사랑의 의미 를 생각해 본 몇 가지 견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직 두가지만이 수없이 많은 가면을 썼었지 나, 우리, 그대 속에서 그러나 모든 것을 겪어냈지 왜?라는 물음 때문에 ... 장미건 아니면 눈이건 또는 대양이건 한때 활짝 피었던 모든 것은 이제는 져 버리고 오직 두 가지만 남았다네. 공허 그리고 상처입은 자아만이(Gottfried Benn 1962:178f). 이 시에서처럼 오직 두 가지만이, 즉 공허와 상처입은 자아만이 남은 상황을 가정해 보기로 하자. 이 공허, 이 텅빔은 무엇을 뜻하는가? 전통의 부재는 우리가 정말 진공 속에 있음을, 지금부터 미래로 펼쳐지며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진공 속에 있음을, 지금부터 미래로 펼 쳐지며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진공 속에 있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수많은 '구심 들'과 '신들'이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까? 아니면 믿을 건 나밖에 없게 되는 건 아닐까? 또는 소비주의로 도피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음식을 먹어치우거나 머나 먼 해변에 서 휴가를 보내면서 말이다. 아니면 이 모든 것에다 우리가 아직 포착하지 못한 탈전통의 몇몇 징후들을, 즉 상처입은 개인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혹은 다른 사람 없이 사는 방법을 규정하는 몇몇 징후들을 합친 것을 뜻하는 것일까? 이를 다른 식으로 질문해 보자. 즉 교회가 텅비어 껍데기만 남았다고(그렇다고 해서 교회 를 없애버리는 것은 기독교도답지 못한 짓이리라) 가정해 보자. 여기서 '텅비었다'는 말은 그저 옛 것을 부정한다는 뜻일까? 또는 굳이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서 생각하기를 고집해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제는 사라져 버린 것을 대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 끝났어, 그게 전부야, 막 내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아마 공허함 아래에서, 텅빔을 가로지르는 틈새에서 얼핏 화려한 과거의 의미의 제국들 그리고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던 이 제국의 규칙들과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종류의 작은 파 라다이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전통에 기대지도, 따라서 규약화되거나 제도화될 수 없으 며 스스로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 작은 유토피아를 말이다. 이것은 그저 개인의 상태에 맞 추어져 있을 뿐이다. 이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적으로나마 탈 기독교적 현대 사회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아 볼 생각인데,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또 전혀 비사회학적이게도 사랑을 탐구해 볼 생각이다. 누구나 미래를 들여다보면 온갖 영예와 지고 함, 심원한 가치를 갖고 있으며, 또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 하도록 하고 어떤 때는 인간의 모든 것을 의미했다가 다른 때는 동물적인 본질을 드러내기도 하는 사랑이 삶에 만족감과 의미를 주는 주요한 원천이 될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안과 질문. 남녀를 대립시키고 가족 구조를 미리 결정하던 계급체제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양성은 새로운 방식의 친화적 공존이 새로운 규범이 되기를 갈망하고 또 이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계급 투쟁이 역설적이게도 평등과 연대의 이념을 낳았듯이 우리도 양성 간의 전 쟁에 힘입어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해 내고, 파라다이스를 재정의하며 해방되고 자유롭게 함 께 사는 날을 향해 나가려는 정치적,사회적 자극을 일깨울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현실 과 함께 새로운 신경증이 등장하고 있는가? 우리의 개인적 삶이 앞으로도 더 이상 종교적 신념, 사회 계급, 굶주린 배 채우기, 핵가족의 기둥 되기에 중심을 두지 않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사랑의 방식을 시험해 보면서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찾는 데 중점 을 두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은 그저 현대적 의상을 걸친 소돔과 고모라일 뿐 인 가? 이것은 우리의 사생활을 넘어 다른 영역들, 그러니까 과학, 정치, 노동 시장,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이익과 잠재력에 너무나 많은 주의를 기울이다가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친밀성은 가짜가 되고 연인 관계도 소 닭 보듯이 할 수 밖 에 없게 되어 결국 함께 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서로가 상대방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좌절감을 맛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베버(1985)는 '자본주의 정신'이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주의의 의도치 않은 부산물임을 지적 했다. 이제 자기 의무를 다한다는 프로테스탄트/직업 윤리는 사라지고 있고 가족 생활의 익 숙한 패턴은 붕괴되고 있으며, 다음 전쟁은 사랑 그 자체를 위한 사랑을 명분으로 내건 전 쟁일 가능성이 높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전쟁의 부수 효과는, 즉 사랑과 온갖 낭만적 생 각과 심리치료적 노력으로 꽉 차 있는 단지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원치 않는 악마는 무엇일 까? 여기에서 정치적 사고나 행동을 위한 발판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는 직접 대답하기보다는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이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1) 왜 사랑은 신흥 종교의 지위로까지 격상되고 있는 것일까? 사랑과 종교를 비교하면 무엇이 명료하게 드러나거나 설명될 수 있을까? 이러한 비교는 어떤 점에서 적절하고 또 어 떤 점에서 부적절한가? 이에 대답하려면 먼저 몇몇 용어들을 정의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용어들이 하도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 바람에 같은 말이 때로는 사랑, 결혼, 사랑하는 관 계의 해체를 의미하다가도 다른 때는 이를 우상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명제는 이 렇다. 즉 성별, 가족, 직업적 역할을 확립시킨 산업 사회의 구조는 무너져내리고 있으며, 사 랑에 관한 현대적 형태가 나가는 길 위에는 수많은 기쁨과 장애물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방에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개인적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고 있는데(하지만 그 래서인지 이것은 순식간에 증오와 절망과 고독으로 전변될 수도 있다) 이제 수백만이나 되 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행복을 찾아나서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이혼율과 재혼율에, 증복 가 족과 연속 가족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2) 이에 대한 반론, 반명제는 "세상은 언제나 그랬다"는 것이리라. 즉 역사가들은 추적 할 수는 없어도 이런 식의 사랑은 항상 존재해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에 이러한 희망을 투여하는 것은 현대적 현상이며, 우리 시대에 특유한 것임을 보여줄 작정이다. 물론 낭만적 사랑이 20세기의 하반기가 되기 오래 전에 발명된 것을 사실이다. 예 컨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표출의 궁극적 형식이라는 생각은 18세기와 19세기에는 현 실과 환상이 뒤섞인 가운데 계속 찬양되었으며, 온갖 고뇌와 환희 속에서 남김없이 표현되 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처럼 시적으로 고양된 애증의 낭만주의가 현대적으로 분 장한 온갖 통속적 대중운동으로 변화되어 문화적 삶의 모든 구석으로까지, 심리치료사들의 저서, 이혼법,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까지 스며 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것이 더 이상 가족의 구성, 물질적 안정, 부모되기 등을 뜻하 지는 않게 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기의 개인적 길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과감히 나가되 파트너의 끊임없는 후원과 동료 에 기댐으로써 이 두 세계가 가진 최상의 것을 얻는 것을 뜻한다. (3) 자기 자신의 사회적 환경을 창조하거나 찾아내야 하는 개인들에게 사랑은 삶에 의미 를 부여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아무도 순종이나 낡은 습관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지 않는 오 늘의 세계에서는 진실, 도덕(성), 구원, 초월, 진정성이 그렇듯이 사랑도 오직 1인칭 단수로 서 존재하는데, 이 현대적 유형의 사랑은 고유의 내적 논리에 따라 그 자체 속에, 사랑을 하 는 개인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랑은 그 자체와 자체에 고유한 주관적 관점에서 자 라나오기 때문에 쉽게 전체주의적으로 바뀔 수 있다. 즉, 외부의 어떤 권위도 거부하고 오직 감성적이고 자발적인 이유에서만 뭔가에 대해 책임지고 타협하고 공정해지려고 한다. 유일 한 의무는 정직해지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죄가 아니며 규칙을 깨는 것도 아니 다. 비록 이 때문에 빼앗고 때리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준다고 해 도 말이다. 따라서 사랑은 물론 단순히 애정이나 친근함을 찾는 한 방식에 불과한 것은 아 니다. 그것은 또한 친밀성이라는 날카로운 칼로 연일을 공격할 수 있는 구실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사랑은 이전에는 국가, 법률, 교회가 강요하던 낡을 속박과 제약에서 벗 어나게 된 여러 희망과 행위의 청사진이 되었고, 또 이 가운데 고유의 내적 논리, 갈등, 역 설을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살을 붙여 논의해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통상 개인과 이들의 성장 과정을 바라보면 모든 소란스 러운 관계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사회학자들은 직업 기회와 여성의 권리 와 같은 외적 요인들 속에서 그 이유를 찾지만 우리는 그 뿌리가 다른 곳에 놓여 있다고 생 각한다. 그토록 많은 감정적 격동이 휘몰아치는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급속하게 변하 는 감정 위에 세워져 있는 생활 형태 속에서 '내 자신'이 되고 싶은 두 파트너의 희망이 본 질적으로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결혼, 가족, 가까운 관계의 해체와 우상화 이리하여 결국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일종의 모순에 처하게 되는데, 어떤 장에서는 이러 한 모순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다른 장에서는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따라서 이제는 이 모순을 해명해 보아야 할 차례가 된 셈이다. 독자들은 결혼과 가족 생활이 해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들이 또 이 두 제도가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 는 뚜렷한 증거들이 또한 이 두 제도가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다른 뚜렷한 사 례들과 상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결혼의 종언을 보여주는 듯 이혼율 이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재혼율 또한 계속 상승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혼 이 여전히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출생률 감소를 보고서는 자식을 갖고 부모가 되는 일이 이제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사람은 수천의 여성들(남성 들)이 불임에서 탈출하려고 온갖 방법을 강구하는 사실 앞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혼'을 선호한다고 해서 가족의 온갖 관습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한 다고 할 수 있을까? 가족 연구자들은 아니라고 대답한다(물론 그렇다고 대답하면 자기 직업 을 잃게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결혼 전에 동거하거나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커플이라 고 해서 제멋대로 또는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며, 이들의 결혼 생활은 결혼한 커 플과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다. 결혼이 이처럼 일시적이고 부실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던 적도 없었다(3장을 보라). 좋 은 직업을 가진 남녀는 경제적으로 독립해 있어 가족의 부양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남녀의 결합은 더 이상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봉건 사회에서처럼 왕조의 유지나 재산의 소 유에 이바지하지는 않는다. 이전부터 아주 당연한 것으로 물려받아 온 결속은 느슨해졌고, 함께 같은 일을 하는 부부는 오히려 예외가 되었다. 요컨대 확고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모 든 것이 사라지고 있다. 그 대신 이전 사회에서는 다양한 직업이나 종종 도시의 다른 부분 에서 찾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의 대우주-소우주 속에서 추구하고 또 찾고 있다. 낭만적 사랑, 애인 두기, 편안한 애정, 성인으로서의 족쇄와 따분한 생활로부 터의 해방, 죄를 용서받는 것, 가족의 역사와 미래의 계획에서 안식처를 찾는 것, 부모로서 의 자부심과 기쁨, 그리고 불가사의한 용의 모습을 지닌 다른 모든 양립 불가능한 것들을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과거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확실성과 도덕적 지침을 잃은 시 대에 왜 이처럼 한결같이 자기의 사적인 행복만을, 무엇보다도 사랑을 위한 결혼만을 추구 하는지 의아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대체로 사랑과 결혼을 분리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 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는 정반대로 사랑을 위 한 결혼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결혼은 안정성을 잃었지만 결혼이 부와 권 력을 전하는 수단에서 단지 감정적 결합과 자기를 찾으려는 욕망에서만 자양분을 얻는(우리 가 알고 있는)환상의 동화로 변한 결과 그 현실과는 반대로 가족과 사랑하는 관계는 소득, 교육 수준, 나이와 관계없이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물론 사소한 형태적 차이만을 보이며)계 속 이상화되고 있다. 노동계급의 태도를 연구해 보면 이런 증거를 얻을 수 있다. 면접원: "당신에게는 가족과 아이를 갖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쉴러 씨: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쉴러 부인: "당신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죠?" 셀러 씨: "내게는 가족이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아요." 탈러 부인: "가족과 아이가 중심이고, 가장 중요하죠." 부모들의 삶에서 이처럼 단호한 어조로 삶에서 핵심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거의 없을 것이다. 가족과 아이를 갖는 것만이 삶에 주관적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Wahl et. al. 1980: 34-5).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인 동시에 불가사의하다. 가족은 해체되는 동시에 받들어 모셔지고 있다. 사람들의 행동 방식으로부터 신념에 관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사랑하는 한 쌍이라는 우리의 이상적 이미지 속에서 제7천국(옛날에 하늘은 7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맨 위층에는 신과 천사가 산다고 했다. 극도의 쾌락을 느낄 때 "제7천국에 있다"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 역자)과 정신적 고통은 아주 가까운 이웃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 이들은 같 은 성의 다른 층 - 탑방과 고문실 - 에 살고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들이 만사를 제쳐두고서라도 아이를 갖기를 열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생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족 생활이 그렇게 매력을 갖 고 있다고 하는데도, 즉 동반자 관계, 부모되기, 사랑이라는 가정의 파라다이스 속에서 개인 의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데도 왜 이혼율은 급격히 증가하는가? 무엇 때문에 양성은 서로의 목줄기를 쥐어뜯으면서도 참된 사랑을 찾고 파트너와 함께 개인적 성취를 이루는 것에 그토 록 큰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일까? 또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희망에 그토록 높은 기대치를 부 여함으로써 뻔히 실망하는 일을 반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부부로서의 삶을 이상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남녀가 이혼하는 이 양 극단적인 사태는 새로운 신념의 두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신념은 뿌리뽑힌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에서 빠르게 추종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들의 희망은 사랑에 있다. 사랑이라 는 이 강력한 힘은 그 자체에 고유한 규칙에 따라 사람들의 기대, 불안, 행동 패턴 속에 자 신의 메시지를 새겨 넣고, 사람들이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하도록 이끌고 있다. 마치 사랑은 가족 안의 현실적인 삶이나 혹은 사랑을 통해 더 커다란 행복을 누리려는 사 람들과는 분리된 자기만의 다른 세계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교리에 따르면 참된 사랑을 위해 결혼, 가족적 결속, 부모되기, 그리고 결국 자기에게 기대고 있는 사람들의 안 녕까지 희생시키는 사람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의 규칙을 따르고, 마음의 요청에 응답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성취하도록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그 또는 그녀는 죄가 없다. 따라서 사랑을 아주 높이 평가하지 않는 질서를 고수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어떤 위기는 다른 위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은 아이를 가진 가정에서 이혼은 다른 어떤 삶의 위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온다. ... 이럴 때 말고 달리 언제 우리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압도적인 충동을 느끼겠는가? 달리 언제 아이들이 부모들에 맞서는 무기로 사용되는가? 다른 위기들과 반대로 이혼은 사랑, 증 오, 질시 등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열정을 표면에 떠오르게 한다. ... 대부분의 위기 상황 - 지진, 홍수, 화재 -에서 부모들은 본능적으로 만사를 제치고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 시킨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는 아이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 자 리로 밀려난다. 부모 자신의 문제가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혼 소송이 진행될 동안 부모들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아이들을 무시한다. 이리하여 집안의 질서가 깨지고 아이들은 내동댕이쳐진다. 따로 사는 부모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적고, 아이들의 욕구에도 덜 공감하기 마련이다. 이 격렬한 공황 상태에서는 벌거벗은 이기주의가 승리한다 (Wallerstein/Blakeslee 1989: 28-9). 사랑에 대한 믿음이 이처럼 캘빈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것이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캘빈주의는 신도들에게 신을 기쁘게 하려는 너희들 자 신의 욕망에 세상을 복종시키라고 격려, 아니 강요했는데, 이것은 전통과 단절하라는 메시지 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현대인의 방식의 숭배도 이런 생각을 다시 취해 순수 함과 참된 사랑을 찾아야 하는 개인의 의무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가족적 결속과 단절하라 고 우리에게 고무 또는 강요하고 있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포기하는 것은 사랑의 위반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이다. 사랑을 이상화하는 것은 모든 거짓된 형태의 사랑과 단절하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이것은 사랑이 이미 우리에게 행사하고 있는 엄청 난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울러 일상 생활의 찬에 박힌 범사와 다투면서 이러한 이상에 맞 추어 사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사랑 속에서 궁극적인 것을 소망하고 희망하는 이런 태도는 하나의 믿음, 종교적인 정신 상태를 구성하는데, 이것은 행동, 즉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 다.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바리새인, 배교자, 무신론자, 이단자들이 있다. 그리 고 사랑에 냉소적인 사람도 사랑에 과도하게 집착했다가 환상에서 깨어난 실망한 사람임이 드러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믿음과 행위 간에는 많은 모순이 있기 때문에 이 두 수준을 명 확히 분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지식, 우리의 믿음과 관련되어 있을 뿐 행동과는 겨의 관련되어 있지 않다. 행동은 정반대의 것을 보여주거나 기껏해야 믿음을 왜곡되게 나타낼 뿐이다. 나아가 믿음과 확실성의 반비례 법칙이라 이름할 수 있는 현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편안하게 일상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고 지 낸다. 항상 불확실한 일들에만 주의가 집중되며, 불확실한 일들이 불쑥 일어나 확실성의 사 라질 때야 비로소 우리의 개인적 삶을 설계하는 데서 사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고 통스러울 만큼 뚜렸해진다. 아무리 이러한 역할을 부정하려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궁극적인 대답을 가져다 준다는 이러한 유사 종교적인 믿음은 행동 방식 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며 과연 어떻게 표현될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게는 사랑을 포함해 우선적으로 중요한 몇가지 일이 있는데, 사랑은 동성애건 이성애건 17년간이 나 결혼 생활을 하는 중에 다시 한번 열정적인 것에서부터 모성적이고 동료애적인 것에 이 르기까지 수많은 모습과 크기로 다가온다고 말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강력하게 요구하는가를 잴 수 있는 잣대 중의 하나는 이혼율인데, 이것은 얼마나 깊은 헌신이 포기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1장을 보라).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든 연구는 그래도 하나같이 가족과 결혼에 대한 열망만은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 을 보여준다. 비록 '즐거운 나의 집' 이라는 간판이 얼마 동안 약간 비뚤어지게 걸려 있었다 고 말이다. 신혼초에 이혼한 후 재혼하는 수치 역시 높다(연방통계청 1988: 71과 표 3.23). 이혼한 부모의 아이들은 행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 은 종종 이것이 쉽게 도다할 수 없는 목표임을 보여준다(Wallerstein/Blakeslee 1989: 38-9).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으며, 따라서 삶이 이러저러한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닫힌 공간에서 실제로 다른 개인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베버(1985)는 내면적 금욕의 징후 를 찾기 위해 캘빈주의적 믿음을 담은 기록드을 연구했지만 이제 우리는 참된 사랑에 대한 믿음의 징후를 찾기 위해 자조 지침서, 심리치료서, 이혼소송서 등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신흥 종교로서의 사랑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본질은 사랑을 종교와 비교함으로써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이 다. 양자는 완벽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하는데, 이 행복을 성취하는 노선이 아 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종교는 모두 일상의 고통에서 빠져나와 일상성에 새로운 아 우라(aura)를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식상하고 낡은 태도들은 내팽개쳐지고 세계는 새로운 의미로 가득 차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의 경우 모든 에너지는 다른 무한한 현 실, 즉 유일하게 참된 현실이자 모든 유한한 삶을 포괄하는 현실로 향한다. 그런데 사랑의 경우 이처럼 모든 일상적 경계선을 열어젖히는 것이 성적 열정 속에서 감각적·개인적으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각 속에서도 이어난다. 연인들은 서로를 다르게 보고, 그래서 달라지고 다르게 되어 서로에게 새로운 현실을 열어준다. 각자의 역가/ 이야기(history)를 드러내는 가운데 연인들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미래를 새로운 모습으로 그려나간다. 사랑은 '두 사람을 위한 혁명'(Alberoni: 1983)이다.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적대적 현실과 도덕률을 극복하면서 연인들은 진정 두 사람의 사랑을 증명한다. 연인들은 자기 감정에 고무되어 새로운 세계, 즉 지상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두 사람만의 왕 국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원형적 도전 행위'(Alberoni)로서의 사랑. 현대적 사랑은 바로 이것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 이는데,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자칫 실용적 해결책과 편리한 거짓말이 횡행할 세계에서 그 것은 진실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자 진실로 나와 네가 접촉해 몸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며 뒤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서로가 만 나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확인하며 후원하려는 갈망이다. 또 가정에 대한 갈망이자 현대 생활이 낳는 의심과 불안에 대항할 수 있는 신뢰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 다. 아무것도 확실하거나 안전하지 않다면, 심지어 오염된 세계에서 숨쉬는 것조차 위험하다 면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갑자기 이러한 꿈이 악몽으로 뒤바뀌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외견상으로는 견고해 보이는 일상적 현실의 경계선들을 뛰어넘고 있다. 추 억은 나를 어린 시절의 나 자신으로 되돌려 보낸다. 나는 구름을 신기해하며 구름 뒤에 감 추어져 있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책을 읽으며 다른 시대로 상상의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 이다. 내 머리 속에는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저 세상의 다른 누군가의 삶에서 나온 장면으로 가득하다. 결코 들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가 나의 내면의 귀에서 속삭인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특별한 체험 가운데 사랑은 각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질병이나 죽음과 달리 사랑은 의식적인 또는 실용적인 조작에서 벗어나 있다. 또 사랑은 명령에 따라 만들어질 수도 없다 는 것이다. 사랑을 찾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을 구하고 있는 것이며, '내세'는 현 세 속에서 자기 목소리와 몸과 의지를 갖고 존재하고 있다. 종교는 우리에게 사후에도 삶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은 죽음 전에 삶이 있다고 말한다. 버거가 지적하듯이 사랑의 극단적 측면들을 무질(Robert Musil)처럼 예리하게 묘사한 작 가는 없을 것이다. 성적 갈망은 남녀가 쓰고 있던 사회적 가면을 갑자기 벗겨내어 두 사람의 예의바른 행동 아래 감추어져 있던 놀라운 동물적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삶의 매끄러운 일상을 격렬하게 무 너뜨린다. 울리히(무질의 소설『특징 없는 인간[Der Mann ohne Eigenschaften』의 주인공) 가 보나데아와의 거친 만남 후에 말하고 있듯이 사랑은 사람들을 '광란하는 바보'로 바꾸며, 성적 체험은 이런 능력을 발휘해 '또다른 수준의 의식이 지배하는 섬'처럼 정상적 현실 속으 로 '침입해 들어온다.' 이와 관련해 같은 대목에서 울리히가 성을 실생활의 다른 파괴적인 요인, 특히 연극, 음악, 종교와 비교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Berger 1983: 235-6).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 노랭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 며, 이는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사랑을 성취하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새로운 형태의 존재를 향 해 스스로를 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응답이 있으리라는 아무런 확신도 없이 행복에 보내는 광상곡이다. ...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정말 응답이 온다면 그것은 오히려 분에 넘친 것, 전혀 얻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기적의 선물로 보이게 된다. ... 신학자들은 이러한 선물을 독특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은총이라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 즉 나의 연인이 그/그녀 또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리하여 두 사람이 모두 서로에게 사로 잡혀 버리는 순간이야말로 시간이 멈추어 서는 환희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Alberoni 1983: 39-40). 사랑은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또는 문화적 전통이나 설교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설계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성적 충동의 힘과 지속성으로부터 그리고 개인의 깊은 소망으로부터 자라나는 유토피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외적의미와 전통에 방 해받지 않는 종교이다. 그 가치가 연인들이 서로에게 깊이 이끌리고 주관적으로 서로에게 헌신하는 데 있는, 그리고 아무도 신도가 될 필요는 없으며, 따라서 개종할 필요가 없는 종 교말이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사랑이 전통을 결여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믿음은 모든 신조에 실망하고 난 다음에 생기며, 효과적인 주체적·문화적 세력을 이루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거나 정당에 가입할 필요가 전혀 없는 믿음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나 마 금기에서 해방된 성의 결과이자 우리에게 지당한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 온갖 다른 믿음 에 대해 광범위하게 환멸을 맛본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의 사회 구조에 걸맞게 사랑을 관장 하는 외적인 도덕기관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연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느끼는가만이 중요 해진다. 확고한 가르침을 결여한 종교는 대개 사라지지만 교회와 목사 없는 종교인 사랑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은 현재 온갖 사회적 규제에서 해방된 성적 욕구의 엄청난 힘만큼이나 확실 하다. 사랑은 조직될 수 없는데, 이것은 결국 사랑은 독립적이며 또 사랑은 문화적으로 온갖 곁가지를 침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유일한 장소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비전통적·탈전통적 종교가 되지만 우리 자신이 이러한 종교의 사우너이고 우리의 소원 자체가 기도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옛날에 법을 부여하던 것들, 즉 교회, 국가, 전통적 도덕이 물러나게 되면서 사랑까지도 옛날의 표준적인 패턴과 확립된 규약들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개인적 선호도 와 가치로부터 규범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실증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힘으로서 사랑이 가진 지위를 낮추지는 못한다. 반대로 그것을 확 인해부고 있다. 여기서 교회와 성경, 의회와 정부는 하나로 통합된다. 즉 사랑은 각자에게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조직하는 법을 안내해 주는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이상이자 우리의 바람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이 해결책이 실제로는 대개 표준적인 것이기 일쑤지만 말이다. 사랑 문제에서 연인들을 인도해줄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직관이기 때문에 이 사랑과 관련 된 전 과정은 순환적이며, 따라서 이 과정에 대한 토론 역시 마찬가지다. 심리치료사들은 이 처럼 얽히고 설킨 개인적 고통과 체험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밝혀보려고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설명해주기로 되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 - 나는 나이다 - 조차 쿤데 라(Milan Kundera)가 『우스꽝스런 사랑(Laughable Loves)』(1974: 92)에서 역설적으로 지 적하듯이 어떤 것을 그 자체를 통해 정의하려는 특별한 시도일 뿐이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사랑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이러한 순환성을 잘 보여준다. 사랑스럽다/사랑스럽다 사랑에 빠진 주체는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자기 욕망의 특별함을 제대로 이름하지도 못한 채 그저 사랑스럽다라는 어리석은 이 말에 의지라고 만다. ... 여기에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 지만 나는 이것을 풀 열쇠를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왜 아무개를 욕망하는가? 나는 왜 아무개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욕망하는가? 내가 욕망하는 것은 아무개의 전부(실루엣, 모 습, 분위기)인가? 그렇다면 이 사랑하는 몸 속의 무엇이 나를 미혹하는 물신의 소명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정도로 사소한 부분이 아닐까? 너무 시시한 게 아닐까? 손톱 이 까까인 모양, 약간 비스듬히 부러진 이빨, 타래진 머리칼, 말을 하다가 담배를 피다가 손 가락을 펼치는 모양새? 이 모든 몸의 주름살들에 대해 나는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사 랑스럽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이것은 독특하기에 나의 욕망이다. "그거야!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거라구!" 하지만 내가 내 욕망의 특별함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나는 더욱 더 그것에 이름을 줄 수가 없다. 과녁의 정확함은 이름의 동요와 상응한다. 욕망에 특유한 것, 욕망에 고유한 것은 말로 적절하게 담을 수 없다. 이렇게 언어가 실패하고 나면 오직 하나 의 자취만이 남는다. '사랑스럽다'는 말. ... 사랑스럽다는 말은 피로, 언어의 피로가 남긴 헛된 자취이다. 나는 말에서 말로 뛰어다 니며 내 이미지의 고유성을 '다른 말들로' 옮기려고 분투하지만 단지 내 욕망의 적절함을 부 적절하게 표현하고 만다, 하나의 여행이지만 이 여행의 목적지에서 나의 최종적 철학은 도 어반복을 인정할 - 그리고 실행할 - 수 있을 뿐이다. 사랑스러운 것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당신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Barthes 1987: 18, 20-1). 하지만 이렇게 사랑을 고귀하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에 게 도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약간 돈 것처럼 사랑의 광란으로 빠져드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다면, 교육, 과학의 진보, 세계 시장, 기술적 위험처럼 전혀 다 른 영역을 더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외부 세계는 통계, 수치, 공식 등 추상물의 탄막으 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알려주지만 이것들 중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사랑을 일종의 반란으로 우 리를 둘러싸고 있는 막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접촉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특별하고 강렬한 체험, 특수하고 감정적이고 열중하게 하고 피할 수 없는 체험을 가능하 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류의 사회적 접촉들이 힘을 잃 어가고 있는 지금 정치는 너무나 구태의연해지고 계급은 통계학 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며 심 지어 직장 동료들조차 서로를 위한 시간을 거의 내지 못하고 있다. 교대 근무제와 유연 노 동시간이 그것을 금하기 때문이다. 사랑, 그리고 특히 그것이 부추기는 온갖 충돌 - '누가 요리할 것인가라는 영원한 쟁점'부터 '어떤 종류의 섹스를 할 것인가'까지, 부모 되기에서부 터 자기를 표출하느라 서로를 괴롭히는 일까지 - 은 독점권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은 당신 이 진정 당신 자신과 다른 누군가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당신 주위의 삶이 비인 간적인 것으로 보일수록 사랑은 더욱 매력적이게 된다. 사랑은 온갖 감동에의 신성한 몰입 일 수도 있다. 사랑은 숲속의 조깅이 사무원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 안식을 숫자만 가르고 앉아 있어야 하는 직장인에게도 가져다준다. 즉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다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전통이 짧은 사회는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왔다. 텔레비전, 맥주, 풋볼, 모터 사이클, 고급 프랑스 요리 - 삶의 매 단계들마다 이러한 우상이 끊이지 않고 제공되어 왔다. 당신은 여전 히 다른 누군가와 공동의 기반을 확고히 공유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클럽에 가입하거나 아니 면 평화 시위에 참여하거나 또는 멀리 있는 친구와 우정을 나눌 수도 있다. 또는 옛날의 신 들에게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새로운 신들을 찾거나 또는 유물을 딱거나 아니면 운수를 점 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계급투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며 자유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계급투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며 자유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 다. 비록 한때 존재했다고 볼 수도 있던 이 황금 시대가 이제는 끝났음을 누구나 알고 있지 만 말이다. 사랑이 이러한 다른 도피로들과 구분되는 이유는 사랑은 만질 수 있고, 특별하고, 개인적 이고, 바로 지금의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분출은 연기하거나 건네줄 수 없으며, 양성은 원튼 원치 않든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무도 지금부터 사랑에 빠지자, 지금부터 사 랑에서 빠져나오자고 결정할 수는 없지만 매 순간마다 덧문을 지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 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대용품이나 피뢰침이 아니며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수출 품목이나 텔레비전 광고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널리 번지고 있는 사랑의 붐은 현재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개인의 욕구를 일일이 통제하는 시장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익명적이고 조립된 패턴을 반영한다. 계급과 빈곤, 종교, 가족, 애국(주의)과 같은 과거의 낡은 범주들에 이어 어떤 새로운 테마 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들은 종종 불확실성, 불안, 성취되지 않았고 또 성취될 수도 없는 갈 망(이것은 종종 포르노그라피에서 날카롭게 제시되지만 즉각 표준화되어 버리고 만다), 페미 니즘, 심리치료 등으로 가장되지만 점차 자체에 고유한 광채와 리듬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승진되거나 아니면 좌천되거나 하는 일 또는 최신 컴퓨터를 구하거나 아니면 일한 만큼 제 대로 급료를 받도 있지 못한다고 느끼는 등 삶의 온갖 부침보다 훨씬 더 유혹적인 전망을 열어 나가고 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을 뜻한다"(가브리엘 마르 셀[Gabriel Marcell]). 우리네 삶이 얼마나 유한하고, 외로우며 연약한지를 뼈저리게 느낄수 록 이 빛나는 희망은 그 만큼 더 즐겁고 매혹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질병과 죽음, 개인적 재난과 위기가 찾아오면 과연 사랑의 맹세가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거짓에 불과한지가 드러 나는데, 바로 이러한 점에서 사랑이라는 세속적 종교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삶에 의 의와 의미를 준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달리 표현하면 죽어간다는 생각만으로 도 정상적인 삶이 산산이 부서지고 아주 의심스러운 것으로 되는 고통과 공포의 순간에 사 랑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다. 깨어지지 쉬운, 조심스럽게 만들어놓은 껍질이 (적어도 일시 적으로나마) 활짝 열려 왜? 무엇 때문에?와 같은 질문들을 낳는다. 너무나도 그리운 함께 함의 기억을 먹고 사는 질문들을 말이다. 종교가 구속력을 잃으면서 사람들은 사적인 성소에서 위안을 구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 은 친밀성과 섹스 속에서의 안주를 초월하는 희망과 관련되어 있다.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 는 것과 자리에 누운 서로를 돌보는 일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랑이 약함, 노령, 실수, 과실, 나아가 범죄까지도 이겨낼 수 있을 때 사랑의 힘은 증명된다. '어떤 운명이 닥치더라도'라는 약속이 실제로 지켜질지는 다른 종교도 똑같이 마주치게 되는 또 다른 질문이다 질병은 새 로운 종류의 헌신을 낳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퍼부음으로써 우리의 실수와 약점을 덮을 수 있다는 희망 뒤에는 사랑이란 고백 행위이며 종종 무정한 사회에 저항하는 몸짓이라는 믿음이 숨어 있다. 우리의 삶에 목적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사랑과 종교는 비슷하다는 생각은 사랑 자체가 죽 을 때는 끝나게 된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관계가 끝나는 것은 이 신흥 종교에서는 무의미하 며, '사랑을 위해' 상호 이해 속에서 헤어질 때만 연인들은 약간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아 마 미래 세대에게는 연인을 바꾸는 것이 직업을 바꾸는 것과 비슷해 질 것이고 사랑의 변동 은 사회적 변동과 비슷해질 테지만 당분간 이혼 법정에서 벌어지는 언쟁은 이와는 반대의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 지금 여기, 당신과 나, 우리의 상호 헌신, 우리의 삶의 방식 등에 지배된다는 것을 뜻한다. 지연은 말도 안되고, 신의 도움을 호소하거나 내세까지 행복 을 연기하는 것도 말도 안된다. 설혹 우리가 현세에서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불일치와 서로 에 대한 부푼 기대가 틀림없이 해결되고 성취되고야 말 그런 자비로운 천국은 결코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사랑은 가차없고, 현찰 지불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당신이 연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뜻하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사랑의 느낌은 언제나 증오로 바뀔 위험에 처해 있다. 헤어진 연인들은 집을 잃고 주거 허가까지 읺을 수 있다. 그들은 요양소에 갈 권리도 없다. 그러므 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거부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 이혼으 로 황폐화된 사람들을 위한 강력한 보호 단위처럼 행동하고 있는 심리치료사들은 엄청나게 많은 책을 쓰고도 남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믿음은 두 집단을 낳는데, 지금 이 두 집단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부자와 외부자, 축복받은 사람과 축복을 잃은 사람들의 망 속으로 얽혀들어 가면서 한때는 가까운 관계였지만 이제는 모든 관계가 미약해져 가는 바람 에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궁극적인 사랑을 찾아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사랑과 종교는 비슷하지만 커다란 차이도 있다. 사랑은 사적인 우주이지만 종교는 존재하는 신들과 굳게 맺어져 있다. 연인들은 스스로가 그들 자신들의 교회이고 그 들 자신이 성경이다. 비록 성경을 해독하기 위해 때로 심리치료사들에게 의지하더라도 마찬 가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규칙과 금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사적인 사랑의 체계는 무 수히 많이 존재하지만 커플이 서로에 대한 믿음을 숭배하는 목사처럼 행동하기를 그치자 마 자 즉각 이 체계들은 마술적인 힘을 잃고 해체된다. 사랑은 연인들이 서로에 대한 낯설음을 극복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역사적인 것으로 만들 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들을 재료삼아 둥지를 만든다. 이 둥지는 함께함의 중심적으로 장식 되며, 둘이 함께 하고 있는 꿈을 담은 나는 양탄자로 바뀐다. 이런 식으로 물신, 희생 제의, 식전, 향연, 일상적 의례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가시적 맥락을 창조한다. 이 사적인 신념은 공식적으로 재가받고 관리되는 대신 개별적으로 양식화되고, 발명되고 장식된다. 미키마우스 와 곰인형을 껴안는 것, 노란색은 어느 것이나 사랑을 뜻한다는 데 동의하는 것, 둘만의 은 밀한 세계에서 사용할 별명과 별칭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랑이 끝날 수도 있고, 그러 면 모든 것이 상실되고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성가신 두려움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대변하고 있다. 종교의 지평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시작과 끝, 시간과 영원, 산 자와 죽은 자 속에 자 리잡고 있으며,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 시간이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찬양된다. 이와 반대 로 사랑의 지평은 좁고 특별하며, 나와 너의 작은 세계로 이루어지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이 배타적이고 누가 봐도 이기적이며, 논리상 부당함과 잔인함 사이의 어디쯤엔가 위치해 있으며 독단적이고 법의 범위 밖에 있다. 사랑의 절대적 명령은 다른 소망들을 가로지르고, 사랑의 원리들은 사랑을 표준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사랑은 개인화의 위험에 저항할 수 있는 최상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이는 사랑이 다름을 강조하지만 모든 외로운 개인들에게 함께함을 약속해주기 때문이 다. 사랑은 낡아빠진 지위 상징이나 돈이나 법률적 고려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 하고 직접적인 느낌에, 이 느낌이 타당하다는 신념에, 그리고 이 느낌이 향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한다. 연인들 자신이 입법자이며, 서로에게서 기쁨을 느끼며 자체의 법을 제정한다. 사랑의 역사: 민주화된 낭만주의 물론 이러한 식의 생각에 대해서는 "세상은 언제나 그랬으며". 아무리 멋지고 또는 혼란 스럽더라도 출산, 성적 욕망, 억압, 열정, 친밀성, 증오, 폭력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한결같은 드라마였다는 식으로 반대 견해를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는 쉬 워 보인다. 우리가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존재하는 한 성교육 문제는 모든 시대에 언 제나 대중들의 관심사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흑인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이든 아니면 11세기 회교도이건 15세기 기독교도든 고대 그리스의 노예이건 아니면 압제 하에 있 건 또는 민주주의 하에 있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생물학자, 심리학자, 극작가(플라우투스[Plautus], 셰익스피어, 클라이스트 [Kleist], 베케트[Beckett], 핀터)들처럼 다양한 증인들이 모두 한번쯤은 똑같은 이야기를 했 는데, 즉 사랑은 언제나 삶의 비밀스런 핵심이었거나 아니면 결코 그렇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어느 쪽이건 우리의 쪽이건 우리의 이론은 거짓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논점을 좀 더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성적 행동의 생물학적 효과나 이것을 둘러싸고 성장해 온 대규모 사회적 제도들이 아니다. 우리의 주제 는 우리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징적 세계로서의 사랑이며, 이 세계가 빈곤, 출세주의, 기술적 위험, 환경 의식과 같은 다른 상징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있다. 중세의 전사 사회나 계급 체제에서는 사랑이 일정한 역할은 했어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 만 우리가 보기에 요즘은 상황이 그 반대이며 미래에는 훨씬 더 그러할 것이다. 바꾸어 말 해 사회가 번영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계급적 고려나 기존의 권위에 그만큼 덜 구속되며, 사람들의 주의는 감정적 충족에 대한 열광적 추구에 집중된다.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사랑만이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다 는 믿음은 사회의 근대적 변화가 낳은 논리적인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약간 거칠게 표현하 면(이것은 이 명제를 취약하고 따라서 논박당하기 쉽게 만들겠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교, 계 급, 사랑이 차례로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왔다. 물론 이것은 서열과 같은 순서로 갖고 있거나 진보같은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각 나름대로의 범위를 가지면서 자 체의 원리와 지평을 변화시켜 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고 느끼는 개인들은 교회나 신의 보호나 계급을 찾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신뢰할 수 있 는 사람, 즉 자신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후원과 이해를 약속해 주는 사람을 찾는 다. 물론 비동시적인 것들과 중복되는 영역들이 수없이 많지만 초점이 입장을 변화시켜 왔 다. 이에 상응해, 베버의 말을 빌리면 '선도적인 가치', 곧 문화적으로 중요한 요소나 부적절 한 요소를 집어내거나 지워버리는 '빛'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산업자본주의가 단순히 전통적 가치와 믿음을 기생적으로 먹고 산다는 뜻이 아니 다. 그것은 산업주의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태도와 새로운 목표가 확립되고 있다는 뜻이다. 산업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경쟁적인 태도들과,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다 양한 방식과 동맹할 수 있다. 사랑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틀지우고 있는 사회 구조들, 즉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 가족의 이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그리고 사람들의 개인적 욕구와 소망을 조직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가치들과 같은 사회 구조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생각은 사랑이 역사의 경과 속에서 의미의 변화를 겪었다는 이론을 지 지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에로스 편에 있다. 우리의 문화에서 섹스와 에로틱한 사랑 사이 의 관계는 현실과 잠재성 간의 관계와 같다. 실생활이 가져다 주는 축복이나 저주는 우리의 갈망을 짓누르며, 열정은 짐꾸리기와 다름없어 보이고 접시 위의 질긴 고기가 아니라 메뉴 판의 매혹적인 설명과 다름없어 보인다. 과학의 '현실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열정적 사랑에 대해서는 항상 도착과 가깝거나 방종 바로 옆에 있는 자리를 할당해야 마땅했다. 사회학자 와 자본가들은 모두 쉽게 사랑이 자기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고 의심하는데, 현실주의적 관 점을 고집한다면 이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연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행동을 세계관에 맞추고, 이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다른 세기와 다른 문호가 우리 시대와 같은 과학적 지혜 없이도 장삼이사에게 예약석을 마련해 두고 또 우리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 는 방식으로 사랑의 기예를 세련화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얼핏 한번 생각해보기만 해도 사랑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화사와 사회사를 보면 열정적 사랑 하나에도 수백 가지 형태가 있음을 알 수 있 다(북경 오리구이처럼 독특한 사랑이나 멋진 핸드백처럼 드물게나 찾아볼 수 있는 사랑은 논외로 하겠다). 초기 인도, 중국, 아라비아에서 사랑은 기예의 한 형태였으며, 플라토닉한 사랑도 있었다. 육체의 죄악은 기독교 수도사들이 조장한 것이었다. 통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고귀한 연인을 향한 양식화되고 세련된 궁정식 사랑도 있었다.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 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열정도 있었다. 아무런 제약도, 권위도 인정하지 않은 이러한 열 정은 결국 귀부인에 대한 열정이 되어 유럽의 지배 계급에 의해 궁정에서 수용되고 문인들 사이에서 모방되어, 이 사랑에 고유한 양식은 이 시대 내내 그리고 그 이후까지 에로틱한 환상을 물들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방을 경계하고 비난하는 교회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나이와 교육면 에서 신과 가까웠던 교부들은 풍문과 성경에서 배운 것에 기대어 부부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류하는 어려운 과제에 전념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는 대개 그들에게서 나온 것 이며, 따라서 중세의 사랑, 출산, 체면, 예절, 금지된 체위 등의 요점에 관한 사회적 보고서 는 성직자들의 노여움으로 물들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고백을 통해 양심을 정화하 기 전과 정화한 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지도 모르겠다. 옛날의 유명한 사람들을 이렇게 찾아다니다 보면 적어도 가능성 - 옛날에는 현실이었던 - 의 범위는 드러난다(문헌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 제 우리는 우리가 종종 두려워하는 뿌리뽑힌 조형적 인간보다는 플라톤이 권하는 아름다움 의 목격자 쪽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푸코는 1984년에 죽기 직전에(『성의 역 사』를 완성하고) 이렇게 말했는데, 아마 그가 옳을지도 모르겠다. "도덕이란 규칙의 규약을 준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도덕적 규약이 사라짐에 따 라 실존의 미학적 규약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푸코는 법, 도 덕적 훈계, 엄격함, 욕구의 위계 대신 고대의 '삶의 기예'. '실존을 양식화하기', 그리고 '자신 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개인적 특질을 발전시키기'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schmid 1986: 680에서 재인용). 얼마나 올림피아적인 계획인가! 미래의 우리 이웃들은 고대 그리스인일 것이다! 아니면 아마 아랍인들, 르네상스기의 연인들, 음유시인들, 또는 우리가 아직 전혀 모르는 제4, 제5, 제6의 집단들일 것이다. 과거로부터 끌어온 풍부한 증거를 왜곡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나는 사랑과 결혼의 관 계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주요한 시기(우연히도 종교로서의 사랑이 출현한 것과 들어맞는 다)를 구분하고 싶다. 첫 번째 시기는 고대와 중세 전체를 포괄하고 18세기말까지 이어지는 긴 단계이다. 이 단계의 기본적인 전제는 사랑과 열정은 결혼에 반하는 죄악이라는 것이었 다. "아내를 첩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세네카, 성 제롬[St. Jerome] 의 재인용, Flandrin 1984: 155). 따라서 이것은 적어도 귀족과 지배 계급에게서 결혼의 의무 나 권리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첩과의 사랑은 고상할 수도 있었음을 의미했다. 두 번째 시기는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산업주의의 과실 위에서 성장한 새로 운 중간 계급은 귀족들의 '방종한 도덕'을 비난하면서 사회에 청교도적인 태도를 강요했다. 그 결과 욕망은 지하로 내려갔고 변태는 심리학자와 의사들의 치료를 받아야 할 '일탈적 성 행동'의 범주로 떠밀려 들어갔다. 세 번째 시기는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단계이다. 중간 계급의 엄격한 도덕은 도리어 금지 된 기묘한 행동에 대한 은밀한 관심을 일깨웠고, 그리하여 온갖 이국적인 환상들이 널리 퍼 져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랑은 아주 유혹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성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토대가 되었 고 개인들에게 중간 계급의 규범에 맞서 자기 운명을 추구하고 삶의 기쁨과 슬픔에 맞설 수 있도록 해준 온갖 대담한 발상들(이것들은 한때 기묘함과 무분별한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은 이제 공동의 재산이 되었다. 사랑은 자아들의 만남이자 당신-나를 중심으로 한 현실의 재창조이며 어떤 금지도 부과되지 않는 범속화된 낭만주의로서 지금 대중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사랑이라는 세속적 종교로 말이다. 사랑, 수도사, 산업사회 이전의 질서 아리에스(Philippe Aries)와 플랑드랭(Jean-Louis Flandrin)은 두 사람의 아주 자극적인 연 구서에서 "우리 사회와 다른 거의 모든 사회에서, 우리 시대와 다른 거의 모든 시대에서 결 혼 내의 사랑과 결혼 밖의 사랑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Aries 1984: 165; Flandrin 1984). 자기 아내에게 과도한 사랑을 표시하는 사람은 ... 수치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과도 한 사랑은 연인들이 결혼 밖에서 느끼는 고삐 풀린 열정이기 때문이다. 도리를 아는 사람이 라면 열정적으로가 아니라 도리에 맞게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욕망을 절제해 부인과의 성 교에 몰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세네카, Aries 1984: 169에서 재인용). 이처럼 결혼 생활을 엄격하게 꾸려나간 이유를 읽어 보는 것도 상당히 매력이 있을 것이 다. 심지어 그 현명한 몽테뉴(Montaigne)조차 에세이에서 "결혼은 경건하고 신성한 결합이 며", 따라서 성적 욕망은 "어떤 엄격함에 의해 조절되는 진자하고 신중한 쾌락", 즉 "말하자 면 조심스럽고 세심한 관능"이 아니라면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였다(Flandrin 1984: 161). 즉 몽테뉴조차 신학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같은데, 신학자들은 출산을 결 혼의 주된 목적으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전적으로 친족과 허약한 부계에 의존하 고 있는, 상속인은 반드시 남자로 할 것을 의무화한 권력 구조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과제를 담당해야 했던 기혼 부부는 말로만 따로 살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고해 신부 의 무시무시한 모습뿐만 아니라 국가와도 다투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러한 전투와 정치에서 확실히 승리하려면 남자 아이가 필요했다. 권력, 궁정, 재산을 적들에게 넘겨야 할 지도 모르는 것이 두려워 모든 사람들은 남자 아이를 낳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 다. 아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전쟁에서의 패배와 동일한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교회가 부부의 성교를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도덕적 행동으로 바꾼 것은 오히려 자비로운 것이었다. 사 회 질서가 사람들의 감정, 즉 사랑과 욕망에만 기대고 있었다면 사회 질서는 통제할 수 없 는 충동에 권위를 이양하고 사랑과 전쟁을 뒤섞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고려하면 결혼을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한 제도로 만들기 위한 교회의 개 입은 아주 합리적인 것이었거나 적어도 그 시대와 어울리는 것이었다. 몇몇 양상은 요즘의 우리들에게는 불가사의하게 여겨지지만 그 이후 국가가 사회 질서를 보호하는 일을 헌법에 따라 선출된 기관차 차별화된 법률 체계에 위임했기 때문에 지배체제는 성교의 결과와 그만 큼 더 무관하게 되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수도사와 신학자들이 그들의 미묘한 과제를 얼마나 교묘하게 수행했는지를 보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너무나 지나치게 욕망에 몰두해 육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내를 마치 전혀 자기 아내가 아닌 듯이 열정적으로 공격하고 나서도 아내와 성교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아내에게 너무 끌려드는 남자는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 피타고라 스 학파의 섹스투스(Sextus)의 손을 들어준 성 제롬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다. ... 남자가 아내를 창녀처럼 이용해서도 안되고 아내가 남편에게 첩처럼 접근해서도 안되 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예절과 존중을 다해 결혼의 이 신성한 성례전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Benedicti 1584, Flandrin 1984: 155에서 재인용). 이러한 정당화 역시 흥미롭다. 다름아니라 수도사들은 훨훨 타오르는 열정이 반드시 집 안에만 머무르지는 않으며 그것은 다른 곳에서 기쁨에 넘친 작은 연옥들을 불밝힐 수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수천 가지 음탕한 술책, 수천 가지 음란한 계략, 새로운 체위와 온갖 흉측한 사랑의 기교와 함께 아렌티노(Arentino)가 그린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자세를 가르친다. 아내의 몸 속에서 일어난 불이 백 가지 다른 불을 붙여 그들은 갈보처럼 된다. 아내들이 일단 이런 식으로 길들여지면 남편들에게서 도망쳐 나와 다른 기사들을 찾 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로 인해 남편들은 절망에 빠지고 아내를 죽이려는 유혹에 사로잡 힌다. 그러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Brantome, Flandrin 1984: 161에서 재인용). 수많은 텍스트에는 이처럼 교화적인 내용과 음탕한 내용이 뒤섞여 있다. 저자들은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을 비난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래서 전혀 스스로를 억제 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가 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하의 에로티 시즘을 조장하고 보존시켰음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매력적 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혼은 아이를 낳기 위한 결합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또다른 측면이 들어 있다. 즉 결혼 밖에서의 열정이 그것으로 이것은 아무리 교회가 눈살을 찌푸린다고 해도 부유하거나 권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었 다. 도덕적 행동과 속세적 행동이 구분되었는데, 물론 이로 인해 때로 무척 난처하고 당황스 러운 일도 일어났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은 결혼의 의무와 무관하게 사랑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또 대개는 여성이 희생양이 되었지만 말이다). 결혼 안에서의 사랑과 결혼을 안정시켜 주었던 것처럼 보인다. 결혼 생활이 언제나 타오르 는 감정의 위협 아래 있지는 않았으며 사랑을 영원함과 부모되기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에로틱한 예술과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하는 예술은 남녀가 함께 머무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번성해 왔다.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이 법칙은 형태는 약간 다르지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사랑을 위 해 결혼한다는 생각은 그저 사랑과 결혼을 공존하게 만듦으로써 이 둘 사이의 모순을 해결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일한 해결책이란 이 둘을 순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뿐이 다. 우리 시대는 기능 분화의 시대이지만 또한 사생활과 성생활을 한 덩어리로 만듦으로써 이 둘은 하나라는 믿음을 이상화하고 또 기능 분화의 법칙을 전복시키고 있기도 하다. 옛 수도사라면 틀림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사업 윤리, 관습 깨기, 간통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에로틱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청교도적 이상을 대립시키는 것 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자유의 이념 속에 파토스가 존재한다는 것만이 부르주 아 사회의 모순인 것은 아니다. 충실한 결혼 생활 또한 부르주아들이 지배자들에 맞서 외친 자유와 평등이라는 혁명적 절규와도 모순된다. 성공하기 위해 사업가는 봉건적 규범이나 구 속과 단절해야 하고 경쟁자들의 욕구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집에 돌 아오는 순간부터는 도덕적 질서가 지배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 과 종교는 모두 무시하면서 합리적 행동을 지도적인 원리로서 추천한다. 그러나 합리적이라 는 것은 온갖 구속을 떨쳐내고, 자기 목적을 추구하며, 어떤 주인에게도 봉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직관과 경험에 의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자유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아무튼(다른 사람들의) 모든 주관적 관심에 맞서 반드시 방 어해야 할 정언명령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정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우리의 실존은 우리의 활동의 결과 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활동에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 칸트는 돈을 부리는 재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기업가와 마주친다. 이러한 태도는 주체 - 우리들 각자가 모두 주체이다 - 가 직접 우리 자신의 권리를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 이를 제안하지 만 성과 사랑이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근거에서 그리 고 무엇에 기반해? 자유가 사업가에게는 낡아빠진 봉건 사회의 규범을 무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점잔 빼 는 부르주아적 관습과 단절할 연인들의 권리는 어떨까? 당신 마음대로 사업하고 당신 마음 대로 사업하고 당신 마음대로 사랑하라, 중간 계급의 억압적 도덕이 지닌 특유의 위선을 폭 로하라, 이 도덕으로 하여금 은밀하고 불법적인 사랑에 깊이 감염되게 하라 등 이런 발상들 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리하여 사랑과 육욕적 열정은 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관습으로부터의 사랑의 탈출은 탈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또한 이 관 습을 관습 자체에 맞서게 한다. 사랑이 매력적인 것은 이 사랑이 낡은 도덕적 구속들로부터 자유를 부여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낭만주의 - 여기서는 무제한의 주관성, 사랑하고 고통을 겪을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 는 자본주의의 부상이 낳은 두 번째 가능성이 다. 급속하게 변하는 온갖 하위 문화와 끓어오르는 소비주의를 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 세기에 결혼에 대한 엄밀한 도덕적 규약, 산업화, 주관성, 사드(Sade) 후작의 유산, 낭만주의 시, 문학과 실생활에서의 온갖 기행을 일삼는 일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은 전혀 역사적 우 연이 아닌 셈이다. 현재의 낭만주의: 사랑은 팝송 낭만주의에서 기원한 사랑은 그래서인지 '사회'에 맞선 공모이다. 사랑은 아무런 장벽도, 아무런 계급도, 아무런 법도 알지 못한다. 사랑 자체의 장벽, 계급, 법을 빼놓고는. 따라서 이처럼 전복적인 사랑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히스테리 기미를 갖고 있다. 옌젠스베르거(Hans Magnus Enzenberger)가 낭만파 시인 브렌타노(Clemens Brentano)에 관한 '다큐멘터리' 소 설(1988)에서 이것을 멋지게 그려 보인 바 있다. 아우구스테 부스만(Auguste Busssmann)이 클레멘스 브랜타노에게(란트 슈트, 1808년 가 을) 금요일 아침 오 그대 끔찍할 정도로 추잡하고 비열하고 가증스럽고 사랑스러운 클레멘스 클레멘스여 왜 그대는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가? 오늘 밤 그대는 입맞춤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나를 보러 오면 난 당신을 때리고 물어뜯고 할퀴고 죽도록 밟아뭉갤 것이다. ... 3년 후 그녀의 사랑 때문에 '죽도록' 밝아뭉개진 후 시인은 아래의 독특한 고별시에서 그 의 증오심을 털어낸다. 그래 이제 나는 그대를 마지막으로 죽인다 그대 무례한 암캐여! 그대의 죄에 물든 무릎에 저주를 그대의 값싼 방종한 육체에 저주를 그대의 추잡한 가슴에 저주를. 예의와 진실성이라고는 없는 사람 온통 수치와 거짓으로 가득 찬 사람 비열한 육욕에 더러운 베개. 그대의 거짓스런 입 위에 구역질나는 입맞춤하느라 내가 허비한 모든 시간에 저주를 ... 안녕 그대 거짓말쟁이여, 제발 그대의 삶이 잘못 되기를 문이 있다 거기에서 나의 애처로운 마음은 마지막으로 떠난다, 그대 마녀여 그대의 침실로 들어가는 모든 발이 썩어 문들어지기를! 나는 그대를 안 적이 없었다, 나는 그대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나가버려야 할 악몽이었다... [옌젠스베르거는 이렇게 쓴다] 친해하는 불행한 아우구스테, 당신은 당신과 한줌밖에 되지 않은 당신의 동시대 남녀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사 랑' - 또는 같은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을 발명했다는 나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한평생 사람들은 결혼 하고, 좋은 배필이나 나쁜 배필을 만나고, 도와줄 사람을 찾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행복 이나 불행을 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비교적 늦게, 당신이 살던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 들은 뭔가 다른 어떤 것이, 즉 출산, 노동, 소유를 초월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자기 삶을 자기 손안에 넣을 수 있다는 듯이. 얼마나 위험하고 중대하기 짝이 없는 생각인가! 온갖 찬미를 받는 나의 자아와 상대방인 그대. 작지만 이제 영원한 것 이 된 육체와 영혼. 스트레스, 일련의 희망, 이전 세대들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행복의 기 대,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서로에게 너무 많이 기대하는 바람에 전혀 새로운 종류의 불행을 여는 것. 실망은 당시의 파라다이스의 이면이었으며, 당신의 새로운 준칙은 양성간의 전쟁을 새로 근본적으로 뒤틀어놓았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따른 결과를 추적하는 글을 무수히 쓸 수 있을 테지만 당신이 나를 믿지 않을까 두렵다. 당신의 소설이 모범을 세웠고 실제로 광범한 문학의 원형을 제시했다 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사랑 이야기가 아직도 수많은 형태로 변형되어 극장을 채우고 있는 사실은 이러한 결과 중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우구스테 당신이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당신의 이야기는 일상적이고 밋밋하고 시시한 것이 되 었으며, 수백만 번씩이나 반복되는 바람에 황폐화되었고 백만 번이나 이마를 찌푸릴 만큼 커다란 고통의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리라. 모든 과학이 당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군 의 전문가, 카운슬러, 돌팔이 부대가 이 끝없는 이야기 그리고 이 이야기에 달라붙은 상투어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고, 이 이야기는 매일 법정에 나나나 계속 재심리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시대가 순수한 감정들을 발견한 동시에 이혼도 발명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 없기 때문이다(Enzensberger 1988: 92, 190-1, 228-9). 아우구스테 부스만과 클레멘스 브렌타노는 자신과 서로에게 아주 무자비하게 집착함으로 써 두 사람이 나아갈 길을 실험하고 헤쳐나갔다. 고난으로 가득 찬 사랑의 오디세이의 선구 자들이었지만 예젠스베르거가 시사하는 대로 사랑의 발명자는 아니었다. 이들이 뒤에 남겨 놓은 엄청난 규모의 파편더미에서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전하는 플라톤의 단편들이 엄청나게 흩어져 있다(서점에는 함께 살기에 관한 플라톤적 대중 지침서들이 가득한데, 대부분의 책 들은 플라토닉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음유시와 연애 소설에서 퍼져나오는 메아리도 있다. 고대 인도의 지혜도 부활하고 있다(이러한 책들이 잘 팔린다고해서 놀랄 일은 전혀 없을 것 이다). 한때 궁정의 사교계에서나 시도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온갖 개인주의적 사태들은 실제 로는 재발견된 옛날의 전통과 규범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사랑을 연애 소설을 응용해서 읽는 것이고 팝송에 나오는 대로 사는 것 이며, 개인의 삶을 치유해 주는 자아의 철학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충동은 오래 전에 그리고 흔히 아주 먼 곳에서 발명된 환상(아마 사랑의 낭만적 핵심을 차지하고 있을 이국주의)과 뒤섞이거나 심지어 그러한 환상에 지배된다. 어딘가에서 읽고 듣고 실제로 경험한 인상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것 또한 팝송의 가사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들의 말과 감정을 이용해서 만든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테와 브렌타노는 아마 그들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 아니면 편지대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편지를 쓰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또 실제의 만남을 고대하거나 반영하며 단서를 끄집어내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던 일은 아마 끝나버렸을 것이다. 이런 사랑은 이제 수천의 시청자들을 위해 쓰여지 는 각본과 함께 보고 들은 사랑(텔레비전과 심리 치료에서 아주 표준화된 형태로 제시된다), 통조림화된 사랑으로 대체되었다. 한때 사랑은 가족간의 유대와 금기를 파열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벽들이 무너지자 사랑은 더 이상 충격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아무런 저항도, 또 타파해야 할 규칙도 없어지 자 사랑은 더 이상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심지어 도덕과 무관한 것으로까지 여 겨지게 되었다. 사랑은 오직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온갖 관계들에 관해 끊임없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거래가 이루어지며, 층층이 쌓 인 조언과 심리 치료, 직접 포르노그라피처럼 해보라는 암시, 그리고 사랑에 대한 수많은 편 견 - 관련 당사자는 잊어버리는 - 아래에서 사랑은 질식되어 버린다. 더 이상 과학이 진리 를 갖고 비진리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이한 진리들을 서로 비벼댈 뿐이듯 낭만적 사 랑도 많은 사랑 가운데 한 가지 종류일 뿐이어서 혼란과 오해를 낳는다. 사랑이 보호막이라 는 생각은 서서히 하라지고 있는데, 너무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어 특별히 우리의 것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 또 대개는 이것들이 서로 맞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은 드물고 희귀한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개인화된 사회에서 커다란 매력 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참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19세기식 기인과 영웅에게는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도 실존적인 문제가 되었다. 아니 좀더 신랄하게 표현해 보다. 우리 주변에서는 사랑이 점점 더 적은 사랑 - 부모의 사랑, 덤으로 하는 섹스, 연애질, 동료애, 가족의 헌신 -으로 해소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랑의 죽음과 더불어 전체주의적인 '위대한 사랑' 이 대대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고립된 현대의 시민들은 계급적 연결망이 안락한 사회적 확실성과 사회적 지위를 충족시 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만 고유한 사귐을 생각해 내야 한다. 이상주의적 낭만주의와 심리치료적 낭만주의는 현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해주며", 그래서 연인들은 사랑하기로 선택 한 사람에 관한 이런 저런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누군가를 이상 화하기에 편리하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현실을 줄곧 회피한다. ... 환상은 욕망의 선 결 조건일까?" 살로메(Lou Andreas-Salome)가 지적하듯이 천 배나 증폭된 외로움속에 있는 이런 종류 의 사랑은 자신의 메아리에 귀기울임으로써 세상에 달랑 나 홀로 있다는 느낌을 극복하려고 한다. 즉, 자신이 이상화한 것을 통해 보고 자기 연인의 단점을 덮어줌으로써만 외로움은 끝 날 수 있는 것이다. 개인들은 여전히 혼자지만 적어도 가깝다는 느낌을 가질 수는 있기 때 문이다. 다시 일상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만이 다시 외로워지는 것을 늦출 수 있는 유일한 치유책이다. 또는 실망스러운 연인이 곁에 있을 때는 일종의 자 기-아이러니와 각자가 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웃어넘김으로써 이러 한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랑, 즉 가깝고도 먼 사랑만이 살아남을 수 있 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낭만적·현실적 핵심이며, 실로 사랑의 발명품이다. 사랑은 두 사람을 위한 외로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타인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환상을 키우지만 실은 우리 자신으 로 채워질 뿐이다. 하지만 이 상태는 우리를 도취케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의 본질에 진 심으로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뿐이다.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것이며, 천 번, 만 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용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Andreas-Salome 1986: 59). 주관적인 입법자로서의 사랑: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전투와 역설 교회는 더 이상 아무 할 말이 없고 법률은 다만 사회적 변화를 반영할 뿐인 지금 사랑하 기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처럼 보이거나 또는 그런 것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처럼 사랑의 규칙이 개인들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당연히 아주 당혹스럽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막상 그런 경우 개인들은 사적인 삶을 침해하는, 그 자체에 고유한 논리와 역 설을 가진 어떤 도식 안에 붙잡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상투적인 사라으이 연 극을 그대로 따라하는 배우인 것이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관계로서의 사랑도 미 리 예정된 일련의 행태와 위기를 갖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외관상으 로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보일 뿐이다(Weitman 1944도 보라). (1) 사랑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타당하고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주는 핵심 요인인 동시에 세상 속에서 혼자 있는 외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사랑은 외로움의 대안이며, 따라서 반개인적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다른 누군가와 아주 가까워지는 동시에 아주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싶은 꿈이다. 이와 반대로 개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파트너로 함께 사는 삶을 이상화하도록 만든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라면 현실주의자라도 이상주의자로 바뀔 수 있는데, 파편화되고 불확실해진 세계는 사람들을 사적인 사랑의 삶에서 안전과 위 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내몰기 때문이다. (2) 사랑의 사회적 도식은 익명적 또는 역학적 모델과 반대로 책임을 떠맡는 능동적인 행 위자에게 의지한다(하지만 나중에 보겠지만 사랑의 역학은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외부 세계와 대립적인 사랑의 왕국 안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행위자이고, 개인적으로 책임감이 있으며, 목적의식적이고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의 왕국은 사람들을 사 로잡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이 왕국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달아날 길은 없다. 강력한 감정에 휘둘려진 개인들은 "이것이 진정한 나이고 이것이 바로 나이다"는 확신에 기 뻐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낯설지만 사실은 미리 규정되어 있는 역할을 연기하게 되는 것이 다. 자신의 가장 심원하고 가장 즐거운 감정에 접하는 유일한 길은 성 역할, 노동 시장, 경 제와 같은 진부한 매개체를 통하는 방법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는 왕인 동시에 노예이거나 입법자와 재판관이 동시에 간수가 된다. 기적이나 구원에 대한 믿음은 이미 오래 전에 모두 내버렸지만 극히 평범한 일이라도 제대로 균형을 유지시키려면 언제나 기적이 일어나 주어 야 하는 것이다. (3) 우리는 사랑을 전통적이거나 형식적인 방향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방향에 따 라 정당화해야 한다. 사랑은 어떤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하는 것, 우리의 개인적 희망과 두려움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오직 연인들만이 그들의 사랑에서 무엇이 참되고 올바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들 자신이 자신들의 재판관이지만 또한 규 칙을 재작성할 수 있는 입법자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한쪽 파트너가 현행범 으로 적발되더라도 봐주기 같은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며, 항소권 또한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과 정의의 언어는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4)사랑은 자기 스스로에 기초해 있다. 사랑은 항상 그리고 오직 감정적인 토대위에만 자 리잡을 수 있다. 이를 조작적 용어로 말하면, 연인들 외에는 아무도 두 사람의 사랑하고 있 는지를 결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두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의 근본적 형태이자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개인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사랑은 아주 극단적이어서 무책임한 것도 사랑에 포함된다. 연인들만이 사랑을 끝내기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 컨대 오직 감정이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 다. (5) 사랑은 의심에 대한 우리의 대안이다. 즉, 우리는 사랑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 19세기에 사랑은 비합리적인 것, 부르주아 규범과 반대되는 것, 불확실하고 외래적인 것으로 뱀같은 매력을 가진 요부로 상징되었다. 현재의 상황은 정반대이다. 수많은 지주들이 해체되 고 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궁극적인 피난처가 된 것이다. 옛날에는 사랑이 사회적 관습의 압 력 때문이 무너지거나 불타올랐다면 지금 사람들은 사랑하는 관계가 적대적인 세계로부터 몸을 숨겨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6) 사랑은 연인들이 채워 넣어야 할 공란이다. 사랑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함께 동의해야 할 결정 사항인데, 이것들은 이와 관련된 금 기, 기대, 불충실함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당연히 이들 자신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한 규 범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한 결정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관한 규범을 스스로 설정하는 것으로, 이는 양심의 문제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꾸러미의 실 내용물은 양 주체가 상호 합의 하에 창출해내는 것으로, 그 주위에는 온통 함정과 잠재적인 재난이 가득하다. 이 말은 심지어 커플이 두 사람의 결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온갖 구멍을 도덕적 지침, 카마 수트라(Kama Sutra), 심리치료적 노하우 등 이미 제시되어 있는 해답들 로 메워 둘이 함께 창출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강화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7) 어떤 전통으로부터도 뒷받침을 받지 않는 사랑은 어떤 형태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다. 또는 적어도 개인적인 일탈만은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는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에게 동 의할 것을 기대하고 또 그것만을 인정한다. 어떤 불일치나 폭력의 사용도 규칙을 깨는 것으 로 간주되어 공식적으로 처벌된다. (8) 사랑 또는 함께 함의 의미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데, 이는 사랑이 세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이다. 이 체계의 주된 위협은 함께 함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계속되어야 한다면 어떤 형태로 계속되어야 하는지를 누가 결정하는가에 있다. 연인 들은 두 개의 레버가 달린 두 개의 덧문을 갖고 있다. 아주 갑작스럽게, 즉 다른 한쪽의 결 정에 따라 아주 갑자기 관계가 끝장날 수도 있지만 어디 호소할 곳도 없다. 결국 주관적 감 정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데, 즉 각자가 자신의 꿈(또는 날개를 접고 기다리고 있는 상충 하는 제안들)에 따라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온갖 오 해를 둘러싼 끊임없는 설전 뒤에는 일방적인 결정이라는 단두대가 도사리고 있어, 여기 연 루된 사람들은 우리 속에 갖힌 쥐들처럼 서로의 감정 영역 주위에서 신경질적으로 허둥댈 수밖에 없다. (9) 사랑은 둘을 위한 독단주의이다. 만사가 잘 되면 즐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일이 잘 안 되면 쓰라린 믿음의 충돌이 일어난다. 독단적 측면은 서로의 감정이 조화를 이루어 충만해 있을 때는 숨어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진정함'을 놓고 다투는(이 진정함만이 두 사람의 감정의 타당함과 올바름을 보장해준다)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근본적 갈등이 발생하자마자 즉각 수면위로 떠오른다. 진실되기란 다르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임이 드러나며, 서로 갈등하 는 진실들이 부상한다. '아주 정직해지는 것',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이 갑자기 긑장내기,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그 자체로서 독단적이며 개인적 선택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 과정은 현대적 사랑 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연인들은 두 사람의 지고의 행복감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동시에 뿐만 아니라 쉽사리 딱딱한 얼음 바닥 위로 추락할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함께 함이 단호하게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두 가지 상호배타적인 독단들로 쪼개진다면 말이다. (10) 사랑은 도구적이고 합리적인 행동과 반대된다. 이것은 추구하거나 계획적으로 한발한 발 다가가거나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흔들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사랑은 또 통상 다른 형 태의 활동으로부터 유래하는 부수 효과도 아니다. 결혼 또한 사랑을 포획하거나 길드이기 위한 처방이나 장치와는 무관하다. 사랑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분배되며, 따라서 압력 집 단이나 정당을 형성하는 데 이용될 수는 없다. 사랑을 기치로 내건 정치 정당은 환영을 좇 고 있을 뿐이다. (11) 우리 시대의 사랑은 탈전통적이고 비전통적이며, 이제 도덕적 또는 법률적 의무에 의 해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게 된 성적 욕망으로부터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자유로운 의사와 상호동의가 사랑을 인도하는 별들인 이상 사랑은 제도화되거나 규약화될 수 없으며 또는 어떤 일반적 의미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더 이상 설교의 힘을 잃어버린 종교가 곧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은 반면 성직자 없 는 종교가 된 사랑은 성적 매력의 힘을 바탕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외 적 기준이 모든 타당성을 잃고 번영하는 시장 - 팝송에서 포르노르래피를 거쳐 심리 치료 에 이르기까지 - 이 개인적 열망의 수문을 열어놓고 있는 지금 이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 속에서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가? 간단히 말해 순수한 관계로서의 사랑은 모든 전통적 구속에서 풀려나와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새로운 관계 방식의 근본적 형태가 되고 바람과 행동을 규정하는 기본틀이 되는데, 이 속에 서 온갖 쟁점, 법률, 행동, 법률 소송 - 실제로는 모든 것 - 은 전적으로 연인들의 수중에 들어간다. 따라서 왜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지를 지배하는 기본 유형은 전적으로 현대적인 진보관이나 계몽관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통상 미리 규정되어 있던 모든 것을 전적으로 개 인들의 결정에 맡기는 현대적 사고 방식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유혹적이 생각도 하나의 함 정을 숨겨놓고 있는데, 스스로 내린 결정이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문제가 떠오를 때에 야 비로소 이 함정을 발견할 수 있다. 대답은 언제나 같다. 즉 개인들은 서로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또한 자치의 근본적 형태이지만 그것은 견 제와 균형에서 벗어나 있고, 심판도, 규범도, 법률적 절차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사랑의 딜레마들을 비난과 불일치의 참담한 늪에서 건져 올려 중립적 법정으로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사랑에 빠졌다가 이제 빠져나온 투 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서로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리며, 자신의 평결을 강제하기 위해 최선 을 다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민주주의는 원을 한 바퀴 다 돌아 결국 정반대의 것임이 드러 난다. 증오의 무제한적 폭발을 멈출 수 없는 친교의 잔인함에 사로잡혀 있던 두 사람이 서 로의 약점을 다 알면서 상대방에게 퍼붓는 이 증오를 누가 멈출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사 랑은 마치 국가가 개입하기 전의 중세의 종교 전쟁으로 바뀌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의 사회적 설계에 따르면 사랑은 순풍을 타고 긴 항해에 오른 바이다. 한두 번의 폭 풍우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항해해 나갈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선장, 돛, 돛대, 선체가 모 두 조각나고 끊임없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나서면 혼란이 닥친다. 여기까지 이르면 온통 쪼개진 널빤지로 새는 것을 막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두 선장을 항해 지도를 놓고 싸 우고 부서진 조종 장치로 서로를 친다. 사랑의 매력은 자유, 합의, 만족의 감정을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상태가 정반대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싶어한 다. 오직 동의와 자유로운 선택에만 기초한 것이 두 모험가들이 보물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서로 다툴 때라고 해서 면책 조항을 가진 조건적 자유로 수정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해 놓고는 말과 달리 이처럼 함정에 빠트 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관성에, 오직 주관성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외 부의 의무에 전혀 구속되지 않을 때 이러한 주관성을 순식간에 독단적이고 잔인한 것이 되 고 만다. 연인들은 스스로의 법률을 창조하지만 사랑이 주는 마술적 힘이 날아가 버리고 자 기 이해가 중심 무대를 차지하자마자 무법 상태에 문을 열어 주게 된다. 사랑은 두 사람이 아무런 유보 없이 서로를 열 것을 요구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사용될 수 있는 친숙함이라는 사악한 도구를 상대방에게 넘겨주게 된다. (시장에서 개인들로 단련되는) 사람 들은 사랑을 스스로의 입법자로 재창조함으로써 사랑을 자신의 견해와 이해에 뜯어 맞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해심 많고 자비로운 『신약선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질투심 많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구약성서』의 하나님도 함께 겪게 되는 이유이다. 사랑의 불가피한 전쟁: 조건들 사랑의 역학은 한 가지 법칙을 따른다. 개인적 욕구를 지향하는 주관성과 친밀성은 법을 모른다는 법칙. 이 법칙은 모든 외적 통제력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하도록 되어 있다. 이 법칙은 물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변화 뒤에 있는 '이념'을 소묘한 것이며, 우리의 현실 뒤에 있는 있음직한 전개 양상을 암시하면서 사랑의 미래를 예기하고 있다. 이러한 변 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아래와 같다. -남성과 여성은 직업 분야에서 소득과 지위 면에서 평등해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경제적 제약들이 줄어들거나 심지어 사라지기까지 함으로써 사랑을 파트너들간의 주요한 끈으로 만 들고 있다. -상이한 배경을 가진 커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아주 다른 두 가지 일대 기의 원심력을 중지시킬 수 있는 공동의 지반을 찾아내고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관련된 두 남녀의 손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커플들은 상대방의 노동 상황을 거의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므로, 두 사람을 하나 로 묶어줄 수 있는 공유된 체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와 교회는 결혼과 가까운 관계에서 입법자 역할로부터 후퇴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 랑이 친밀성을 철저하게 자기관리 하에 두려고 할 때 나타나는 고유한 갈등의 잠재력이 터 져 나올 여지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개인화 - 즉 개인적 훈련, 승진, 그리고 노동 시장과 비개인적 법규에 충실하기 - 는 사 랑이 외로움에 대한 최상의 해답이며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육체적·감정적 체험을 약속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된) 중요한 지표와 장기적 추세들은 이러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예컨대 이혼법은 전세계적으로 국가와 법률이 후퇴하고 있음을 증 명해주고 있는데, 유죄 당사자의 원칙은 '결혼 생활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깨어졌다'는 원 칙으로 대체되어 왔다. 따라서 과연 누가 잘못이냐는 문제는 빠진 채 오직 이혼의 재정적 측면과 양육 문제 같은 결과만이 다루어지게 되었다(Lucke 1990).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른바 일탈적 형태의 사랑이라도 범죄에서 제외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무엇이 합법적인가라는 문제는 오직 관련 당사자들에게 맡겨진다는 것 을 뜻한다. 교회에서 내놓은 공적인 경고문이 보여주듯이 교회, 특히 가톨릭 교회가 결혼과 가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톨릭의 정통 교리를 엄격하게 고수하는 교회에서조차 도덕적 주장과 실제 행동 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 말은 산아 제한은 물론 낙태 수치에도 적용되는데, 예컨대 가톨릭이 지배적인 폴란드에서 그러하다. 폴란드는 유럽에서 낙태 수치가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런 개입 없이 이런 종류의 행동을 방치할 때마다 사람들이 아주 기묘해 보이는 행동 방식 속으로 빠져들거나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역설에서만큼 사랑에 고유한 논리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자유의 역설 자유가 모든 것이라면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비록 사랑이 이와 정반대의 것을 행하는 데 계속 열중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당 신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자제해 주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 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사르트르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묻고 있다. 바로 타인이 나를 존재케 하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왜 타인을 전유하고 싶어하는가? 그러 나 이것은 정확히 특정한 전유 양식을 내포한다. 우리가 손에 쥐고 싶어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 그 자체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다. 압제자는 사랑을 경멸하며 오히려 공포 에 만족한다. 그가 신하들의 사랑을 얻으려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또 신하들을 노 예로 만들 수 있는 한층 더 경제적인 방법을 발견한다면 그는 그것을 즉시 채택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노예화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는 기계 적으로 흘러나오는 열정의 대상이 되는데 열중하지 않는다. 그는 자동 인형을 소유하기를 원치 않으며, 따라서 그에게 굴욕감을 주고 싶으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열정은 심리학적 결정론의 결과라고 말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사랑을 주는 이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존재가 싸구려가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미치도록 사랑한 것이 미약 때문이라면 이들의 이야기는 별로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완전한 노예화 는 사랑을 주는 사람의 사랑을 죽인다. ... 따라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물건 처럼 소유하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는 특별한 유형의 전유를 요구한다. 그는 자유를 자유 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서약인 저 우월한 형태의 자유에 만족할 수 없다. 사랑이 맹세에 대한 순수한 충성이라면 누가 만족할 것인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 는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자유롭게 서약했고 또 내가 나의 말을 어기지 않기로 했 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누가 만족하겠는가? 따라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서약을 요구하지만 서약 때문에 화가 난다. 그는 자유롭게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이 자유로서의 자유가 더 이 상 자유롭지 않기를 요구한다. 그는 타인의 자유가 스스로 사랑이 되기로 결심할 것을 - 그 리고 사랑의 시초뿐만 아니라 매 순간에도 이것을 - 바라지만 이와 동시에 이 자유가 스스 로의 감금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광기 속에서처럼, 꿈속에서처럼 자유가 스스로에게 사로 잡히거나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기를 바라는 것이다(Sartre 1956: 342-3). 진정성의 역설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해 일인칭 단수이다. 나의 체험, 나의 진실, 나의 초월, 나의 구원 등. 이것은 원리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모두 진정성을 전제한다. 정직함은 무엇을 뜻하며 무엇 에 기초하고 있는가? 정직함은 그럼에도 계속 의심받을 때 시작되는 자유 낙하를 어떻게 멈 추는가? 어떤 감정에 대한 나의 태도는 감정 그 자체만큼 확실해야 하는가? 다른 누군가의 감정적 진실 때문에, 즉 나로서는 당연히 파악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확 신에 따라 나의 사활적 이해 관계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요구를 부정하는 진실 때문 에 압력을 받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루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단순하고 처방가능한 원칙, 즉 인간이 살아가며 사랑하는 과정에서 정직함과 부정직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지난 삼백 년이 통찰을 옆으로 제쳐놓을 수 있는 원칙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말하도록 허용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별도로 제쳐두고라도 우리는 과연 정직해야 하는가? 심지어 끊임없이 요동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다른 사람은 나의 체온과 온도계처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 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정직할 수 있을까? 모든 실존이란 궁극적으로 바탕 없는 기획, 따라서 부정직해지는 일 없이? 도덕에 대한 심리 치료사들의(또 심리 치료사들에 대한 도덕의) 영향력을 재기는 어렵지 만 그들은 확실히 두려워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은 사랑 대신에 개인의 허약한 건강, 지원 요구를 내놓는데, 따라서 이들이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랑 개념이란 정직함에 대한 부 정직한 이해에 기초한 영원한 상호적 심리치료뿐이다(Luhmann 1984: 210-11). 행위의 역설 아마 빈곤은 제거될 수 있고 불평등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 위험과 기술적 위 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랑은 목표가 되거나 축원될 수도, 억지로 이루어질 수도 없으며, 어떤 제도로 제약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일어나고, 번개 치듯 나타나며, 개 인적 또는 사회적 통제를 받지 않는 법칙에 따라 사라질 뿐이다. 그 반대인 무관심도 마찬 가지다. 이것은 사랑처럼 일어나거나 사랑의 습격을 단 한 번이라도 받으면 즉각 부서져 버 린다. 그러나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노선인 합리적 수단 - 목적이라는 노선을 따르 지 않고 과연 어떻게 사랑을 성취하고 유지하며 존속시킬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적어도 지금 시도하고 있는 방식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목표에 저항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목표 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우리가 바라던 바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변형된다면? 사랑과의 사랑에 빠진 이 새로운 시대는, 말하자면 기술적·합리적 위업의 절정기에서 지 금 최종적인 행복에, 즉 합리적 권력들에 저항하고 현대적 사고 방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 가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신자들과 모방가들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행복에 굴복해가고 있다. 지나가는 김에 한 마디 하자면 위험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사랑을 숭배하 는 것의 단순한 이면일 뿐인 불안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설명되거나 논박될 수 없으며 실제 로는 묘사조차 될 수 없다. 온갖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아마 바로 그것 때문에 정녕 아무도 자신이 느끼는 것을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쟁하는 관점들 사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금기를 벗어난 사랑도 그 자체에 고유의 가치 체계와 행 동의 논리를 갖고 있다는 이론이 실생활에서 근거를 더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적어도) 현 재 지배적인 두 가지 사고 방식은 그만큼 설득력이 적어 보인다. 먼저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이 채택하는 견해가 있는데, 모든 감정적 혼란의 원인 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인성과 유년기 체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소묘해온 상황에서 최소한 우리는 동요와 투쟁이 반드시 개인적인 신경 증이나 외상적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한 가지 결론만큼은 분명하게 끌어낼 수 있다. 이것들은 그에 못지 않게 사랑의 고유한 모순과 사랑의 당혹스러운 동학 때문에 초래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의 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충격과 동요의 원천을 심리적 문제와 개인의 과거로 소급시키기를 고집하는 것은 등반 사고를 '항문기 질환'이나 '억압된 리비도' 의 팽창 경제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잘못된 결론은 다양한 사회 이론에서 마치 다 합의된 듯이 널리 지지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사회는 전통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는데, 이 의미는 문서화되어 전달되 고 비판되고 정당화되어야 하며, 또 의미가 증발하거나 타당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 서 낭독대와 설교단이 다음 세대들의 마음과 머리에 그것을 주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다른 길을 밟아 나가고 있다. 사랑은 전통적인 가치와 규약을 벗어던짐으 로써 감각적·감정적 측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영향 력 아래 사람들은 느낌이야말로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준다고 믿으며 이러한 생 각에 따라 살고 있으며, 따라서 아주 내밀한 감정과 갈망을 신뢰하고, 사고를 전달하거나 의 식적·무의식적 충동과 욕구에 반작용하는 모든 낡은 방법 없이 삶을 꾸려나간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개인적 종교이다. 즉 사랑은 각 개인 속에 원천을 두며, 외로움을 없애 주 겠다고 약속한다. 또 이것은 개인적 희망과 두려움에 기초한 무전통 또는 탈전통으로, 시자 들에게 목적 의식을 제시하고 사랑의 전장에서 자기의 욕망과 힘을 발견할 수 있는 기쁨을 준다. 미래로부터의 회고적인 일별, 또는 마지막 성 발렌타인 데이 이제 21세기로 도약해 이 책이 쓰여지고 있을 때 작성된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의 기사로 이 책을 마치기로 하자. 보스턴 - 역사책들을 보니 우리 선조들은 1990년에 마지막 발렌타인 데이를 축하하고 말 았다. 이미 그 해에 하루 날을 잡아 전국적으로 사랑을 축하한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 인 것이 되었다. 섹스, 마약, 로큰롤 시대의 유품이라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발렌타인 데이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며, 1980년에 말에는 내내 큐피드라 는 미명 아래 벌거벗은 아이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모든 박물관으로부터 기금을 회수하 자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또 부모들은 상점에서 파는 발렌타인 카드에는 반드시 경고 표 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해에 작성된 한 위원회의 사랑에 관한 보고서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 위 원회가 사랑은 '변화된 의식 상태' - 전문가들이 이런 딱지를 붙였다 -를 초래했다고 결론 지은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말은 안정된 시대였던 90년대에 대해 아주 분명하고 또 불길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랑은 약물이었고 미국인들은 그 남용자들이었다. 그러한 징후는 전국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으며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위원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말썽투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종종 착란 사태에 빠지고 백일몽을 꾸거나 허공을 응시하는가 하면 '맹목적 사랑'이라 알려진 상태를 노출하기 일쑤였다. 많은 사람들 이 식욕 상실, 심장박동수 증가, 얼굴이ㅡ 지나친 홍조를 나타내고 있는데, 얼핏 보기만 해 도 누구나 이를 간파할 수 있었다. 위원회가 사랑의 남용이라 지적한 것이 건강에 미칠 타격도 우려스러운 것이었지만 재정 적 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즉 적대적 기업 합병을 전략화한 이래 연인들 때문에 손실당한 생산성을 연간 GNP 중 수 백만 달러에 달한다고 위원회는 추산했다. 이 위원회는 이와 반대되는 사례로 일본을 지목 했는데, 일본은 사랑을 공식 기념일로 축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위원회가 더 말할 필 요가 있을까? 미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랑에 관심을 가져왔다. 반세기 전의 한 세대는 "사랑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나 "당신에게 사랑밖에 줄 게 없어"와 같은 낡은 기치 속에 들어있던 잠재의식 적인 메시지들을 의문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성년이 된 우드스톡(Woodstock)세대가 중년에 들어서면서 온갖 종류의 약물에 물릴대로 물려 이를 말끔히 포기하고는 사랑에 주의를 돌렸다. 그들은 연약한 자식 들 속에서 사랑의 나침반을 찾았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저 열렬한 환희를 가져다 준 어떤 것에 대해 누가 우려하지 않겠는가?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알고 있지만 90년대 이전에 사랑은 명사거나 동사였다. 그러나 이때가 되면 사랑은 점점 더 '사랑 중독자'와 '사랑 상용자'처럼 더 형용사로 사용되기 시작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상대방에게 낚였다고 묘사했다. 사실 사랑은 의존을 낳았으며, 더 나쁘게는 공의존을 낳았다. 이것이 바로 1989~90년의 한겨울에 많은 베스트셀 러들의 주제가 되었다. 21세기가 되자 미국인들에게는 이름, 성별, 12단계 지원 프로그램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것 이 일상사가 될 터였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앨리스구요, 사랑에 빠져있어요." 그러나 1990년대에도 이미 수백만의 사람들은 인종에 따라 함께 살았던 선조들과는 달리 중독에 기 초해 온갖 모임과 만남을 형성했었다. 다름아니라 전에 마약 밀매인이었던 에리카 종 같은 권위자가 회복에 관한 글을 쓰는 것으로 전업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절제가 유행 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1990년에 이 위원회의 권고안이 수용될 수 있는 토대를 깔아 주었다. 사랑 이 일종의 유행병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는 행동을 요구했던 것이다. 대법원은 작업장에 대한 무작위 사랑 검사를 승인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를 원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이 조성되었다. 교사들에게는 젊은이들에게 사랑의 위험을 가르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판매금지되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렌타인 데이는 더 이상 용인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저 마지막 발렌타인 데이를 사랑에 빠지는 일로부터 긴 하산이 시작되 었던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을 극히 쇠약하게 만들었던 최종적인 무절제, 가장 널 리 퍼져 있던 몽롱함은 대지에 떨어졌다. 이리하여 이제 사랑은 통제권 아래에 들어오게 되 었다. 오늘날에도 가끔 일부 커플이 함께 얼굴은 붉히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지만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사실 회복이 결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결국 발렌 타인 시대 이후에 우리는 곤궁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서는 절제라는 저 놀라운 목표를 거 의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90년의 우리 선조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사랑 없는 미국'에 서 살고 있다(Ellen Goodman, 「마지막 발렌타인 데이[The Last Valentine's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