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은 여전하고 문제는 남아 있다. 이 모든 노력들이 얼마나 성공적일까? 통계는 냉정하다. 시술에 응했던 커플들 중 아이를 갖지 못한 비율은 아주 높다. 그렇게도 처절한 희망이 많이 집중되는 시 험관 수정의 경우 특히 그렇다. 이 경우 성공률은 극히 낮아서 공식적인 평가에 따르면 10-15%에 이를 뿐이다. 비판자들은 이 수치조차 낙관적일지 모른다고 지적한다(Fuchs, 1988에 요약되어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최근의 높은 실패율을 고려할 때 시 술을 위한 불임 클리닉이 빠르게 확산되어 가는 현상이 "아이가 없는 커플들에게는 오히려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Brautgam/Mettler 1985: 65). 시술이 성공적이지 않은 경우라도 이것이 아무런 결과도 낳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 개입은 불임 남녀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다. 도리어 이 때문에 고통받는 남녀는 다수이 며, 이들은 점점 증가하는 듯하다. 그들은 그들이 겪은 의료절차들과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 결함이 있고 치료가 필요하다고 규정되는 것에 수반되는 긴장감 때문에 병원성 질환을 앓고 있다. 그들의 자기존중감과 자기확신은 종종 흔들리고, 파트너와의 생활도 갈수록 악화일로 를 걷고, 친구와 지인들과의 접촉도 제한되는데, 이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빡빡한 의료일정이 외부적 관심이나 삶의 다른 영역들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을 전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Pfeffer/Woollett 1983). 아이는 그들이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전부이지만, 태 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왜 반복되는 치료를 그만두지 않는 가? 하지만 생물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함축된 의미까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 이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의학적 진보는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연 구의 부수효과는 얼마 안가서 불임이 재규정되고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렇게 도 많은 치료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왜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지 않겠는가? 사회학자 로트만 (Barbara Katz Rothman)은 이얼게 말한다. 불임을 위한 온갖 새로운 처치들은 불임자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짐을 지운다. 그것은 충붕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부채감이다. 얌전히 그만둘 수 있을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위험함 실험시약을 복용하고, 얼마나 많은 외과시술을 받고, 그리고 몇 개월이나 - 혹은 수 년간이나 - 의무적인 체온 측정과 강박적인 섹스를 해야 하는가? 도대체 언제쯤이 이 커플 이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고' 그래서 마침내 그만둘 수 있는 때란 말인가?(1988: 28) 과거에는 불임이 운명의 문제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결정의 문제 로 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주 최신의 방법들(끊임없는 시리즈물)을 시도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그들은 계속해서 시도할 것이다. 로트 만을 다시 인용해 보자. 어떤 지점에서 불임이 그냥 당사자들 잘못이 아니고 그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 한,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운명이 되는가? 어떤 지점에서 그들은 그들의 생활을 정상적으 로 해나갈 수 있게 되는가? 시도해 볼 다른 의사가 하나라도 더 있거나 해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하나라도 더 있을 때, 불임의 사회적 역할은 어떤 의미로는 언제나 선택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1988 :29).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패턴은 친숙한 것이다. 기술적 진보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와 새로 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해 왔지만, 이것은 동시에 사람들에게 제공된 기회를 이용하라는 정서적·정신적 압력, 때로는 사회적 압력을 가해 왔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만 우리는 인터뷰에서 자주 나타나는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시술 이 성공적이지 않은 커플들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시술받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 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러한 시술이 야기하는 긴장이 얼마나 큰지를 감안한다면 매우 역 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바로 이런 노력이 그들의 결정을 정당화하고 심지어는 그들을 다 소 안심시킨다. 그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을 수행했으며, 바로 그 사실이 그들에 게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단념하지는 않는다. 만일 내가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어떤 시도도 기꺼이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이 나의 실수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제는 나를 포함한 그 어느 누 구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당신이 진정으로 당신의 생물학적 아이를 원했다면 당신은 가 질 수 있었을 거예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MS, 1989년 1-2월: 156의 인터뷰). 부모와 아이: 전혀 새로운 영역 이제껏 묘사한 것과 같은 복잡한 상황은 물론 예외이다. 아이를 원하는 커플들은 대부분 실제로 얻게 된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공적인 임신과 원만한 출산 다음에, 즉 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이 결국 결실을 낳은 후에는 무엇이 뒤따르는가? 우선 아이는 대단한 기쁨의 원천으로 부모들에게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고 그들의 마음 속 에 강렬한 감정을 일깨우며, 부모의 삶을 목적과 의미로 강화시키고, 그들에게 하나의 정서 적 닻을 제공해 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단지 희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아이와 함께 살면 서 실제로 얻게 되는 것임을 많은 연구들은 증명한다(Beck-Gernsheim 1989: 25ff.). 지는 시 절에 가족이라는 하나의 경제 공동체를 갖는 것과 비교하면 현대의 부모되기는 정서적 만족 이라는 면에서 대단한 소득을 선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림의 한 면에 불과하다. 예전과는 달리 부모에게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요구되며 그들의 과업에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농촌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하루의 일과를 공유할 뿐이며, 완전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들만의 욕구도 거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어린 시절은 중요하지 않는 과도기였고, 많은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는 바로 이와 같았다. 중세가 현대와 다른 온갖 특징들 가운데 아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만 큼 두드러진 것은 없을 것이다. ... 전체적으로 아기와 어린 아이들은 첫 5년에서 6년간은 별 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내버려져서 살아남거나 죽는 것으로 보인다(Tuchmann 1978: 49, 52). 18세기와 19세기로 가는 내내 인구의 많은 영역들에서 아이들은 아주 당연한 사실처럼 그저 자라났다. ... 대체로 그들을 신중하게 키운다고는 도 저히 말할 수는 없었다. ...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때 특히 엄격했다. ... 일단 아이 가 자신의 일을 끝마치고 나면 부모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감독하고 가르칠 만한 시간도 그 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이는 대개 방임되었다(schlumbohm 1983:67-72).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부모들은 그들에게 열려진 선택지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부모노릇 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세상을 풍미하던 가치관에 따르면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 이란 신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가 18, 19세기에 점차로 그들 나름의 권 리를 가진 인간으로 여겨지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변화했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 종 교적인 믿음과 전통적 태도는 흔들림없이 여전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 기르기는 당연지사였고, 세대를 거쳐 정해져 내려온 규칙을 따르는 것일 뿐이었다.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종교는 영향력을 상실했고, 전통은 밀려났으며, 계급과 지위에 기반한 공동 생활의 패턴을 무너지고, 사람들은 공동선이라고 불렸던 어떤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현대인 들은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손에 쥐게 되었고, 여기에는 그들 자식의 운명도 포함되었던 것 이다. 이제 전문가들이 기대하고 충고하는 것은 아이에게 가능한 최상의 출발점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직 최고만이 있을 뿐: 현대의 절대명령 아이가 책임있는 시민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특별한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19 세기에 시작되었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1950, 60년대에 이르러서야 대단한 추동력을 얻게 된다. 심리학, 의학, 교육 분야에서의 새로운 진보들은 아이의 미래가 어떤 모양새일지를 보 여 주었다. 한때는 운명의 일격으로 참아내야 할 것이었지만 이제는 교정할 수 있게 된 것 이다. 1960년대의 심리학 연구는 일생의 첫 몇 년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때 제대로 돌 보지 않는 것은 아이가 발전할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았다. 또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더 잘 살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예전에는 매우 제한된 소수에게만 가능했 던 특별한 지원을 아이들에게 제공할 여유가 생겼다. 한편 정치가들은 이전에는 교육 혜택 을 받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앞다투어 경쟁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부모들에게 그들의 본분은 다하라는 압력을 가하는 데 일조했다. 어 이상 아이를 그저 있는 그대로, 아이의 신체적·정신적 특성이나 결함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이 그 자체가 부모들의 노력이 집중되는 중심이 되었다. 이제 가능한 한 결점을 교정하고(사시, 말더듬이. 오줌싸개는 이제 그만)특기를 갖추 게 하는 것(피아노 레슨 붐에, 휴일에는 어학을 배우고, 여름에는 테니스학교, 겨울에는 스 키학교)이 중요해진 것이다. 아이들의 능력을 증진시키고 매혹적으로 제의하는 완전히 새로 운 시장이 형성되고, 곧이어 이런 선택지들은 부모들에게 새로운 의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일 그녀의 치아를 바로 잡아주거나 그의 다리를 길게 만들 수 있다면, 또 눈 치우는 일 이상의 것을 습득하게 하고 프랑스어를 배우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부모들은 느끼게 될 것이다. 혹자는 이것들은 그저 부모들에게 권장되는 지침일 뿐이지 아이를 기르는 현실을 나타내 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문제는 새로운 기준들이 실제로 아이와 함 께 살아가는 일상생활속에서 나타나는가이다. 가용한 데이터는 일관된 그림을 제공해 주지 는 않지만, 부모들이 이 모델들을 다양한 방식의 행위로 바꾸고 있음을 제시한다. 여기 몇가 지 세목들이 있다. 부모들이 과학적 진보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단지 교육받은 중간계 층에 한정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되면 누구나 놀랄 것이 다. 하층계급 가족들에 관한 한 연구에는 이런 글이 있다. "대소변 가리기, 영양섭취 문제와 다양한 발달단계들에 관한 부모들의 지식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과학적 토론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이다"(Wahl u. a. 1980: 150). "아이들이 자신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하고 따라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특히 하층계급 가족들에게 중요해지는데(1980: 41),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개인적 희생이 따르게 된다. 노동계급 여성에 대한 한 조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모든 것들 - 영아기, 체벌, 유년기 근심과 소망에의 공감 등에 대한 태도들 - 은 노동 자 가족의 양육 분위기에서 뭔가가 변했음을 보여준다. 즉 좀더 아이를 중심에 놓는 태도와 실천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Becker Schmidt/Knapp 1985: 52). 이것들이 모두 아이에게 이로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제쯤이면 지나친 관심이 성가시다고 느껴질까? 분명한 것은 부모들, 특히 엄마가 새로운 요구들을 들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첫 과업은 최신 정보를 따라잡는 일이다. 아 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알아야 할 것 사이의 간격은 어느 때고 벌어질 우려가 있다. 한 편으로 오늘날의 젊은 성인들은 일반적으로 아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즉 이전 세대의 같은 또래 사람들과 비교할 때 훨씬 뒤쳐진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예전 에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던 아이들이 그들 주변에 별로 없기 때문이고 부모 자신이 형제 자매가 많은 집에서 자라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만나는 어린 아기 가 바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미니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받는다. 인간이 어떻게 발달하는 가에 관한 지난 20년간 축적된 지식이 매체를 통해 대중적 형태로 유포됨에 따라 '좋은' 부 모들은 이이를 위해서 이러한 진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교육학계에서 '육아의 과 학화'로 알려져 있는 이러한 추세는 정확히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부모들의 일에는 갈 수록 많은 요구들이 생기고, 이를 위해서 부모들은 더욱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아는 항상 쌍방 관계이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과학의 정복'(Gstettner 1981)은 엄마에 대한 정복(그리 흔치는 않지만 아빠에 대한 정복)이기도 하다. 이론들의 그물이 아이에게 던 져지지만 엄마들이 그안에 붙잡힌다. 양육이나 교육에 대한 문제이든, 혹은 아이가 무엇을 입을지, 누구와 휴일을 보낼지, 그리 고 언제 어디로 갈지, 혹은 무엇을 먹을지, 아이가 너무 작거나 크지는 않은지, 너무 시끄럽 거나 너무 조용한 것은 아닌지, 너무 구부정하거나 너무 꼿꼿한 건 아닌지,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충고는 언제나 동일하다. 의사에게 문의해 보시오. 의료면이 없는 잡지는 없으며, 사실 부모(Eltern)나 우리 아이(User Kind)같은 간행물은 판매부수가 어머어마하다. 경험은 중요 하지 않고 부모나 조부모의 한 마디는 더 이상 현대 이론가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아 이를 기르는 일은 과학으로 선포되었고, 따라서 연구하고 배우고 무엇보다도 가르쳐질 수 있게 되었다(Sichrovsky 1984: 38-9). 왜 엄마들은 파없을 하거나 전문가의 충고에 신경쓰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일까? 어려운 점은 바로 그들이 TV와 지역 신문, 학교 보고서를 통해 가정에 침투하는 절대명령의 포화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메시지에는 아이들의 요구를 무시하면 아이에게 해를 줄 것이고 아마도 아이가 삶에서 성공할 기회를 망칠 것이라는 후렴이 반복된다. 유동적인 우리 사회 에서 출세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인생에서 출세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는 대처 능력이 없을 것이다 - 안내서와 잡지를 채우는 이 메시지는 틀림없이 부모들에게 전달된다. 부담을 맡기를 거절하면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된다.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서만 부모들은 모든 이론들을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 처벌이 가장 소중한 그들의 사랑하는 아이에게 타격을 가하기 때문 이다. 아이를 위해 일하는 것은 그저 그런 일이 아닌, 특별한 것이다. 일과 사랑은 뗄 수 없 이 결합되어 있으며, 사랑이 커 갈수록 일은 더욱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는 듯하다. 소아과 의사 매튜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아이가 그의 완전한 잠재력 - 정서적, 체력적, 지적 으로 - 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일말의 암시에도 그녀의 영혼은 완전히 시들어 버린다. 그 결과 그녀의 촉각은 언제나 자신의 수행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곤두세워져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오직 '비정한' 엄마들,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만이 새로 운 규칙에 따르기를 거부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규정된 기준들은 저항하기가 어렵기 때문 에, 대부분 어마들은 그들이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면서 아주 안하기보다는 차라리 너무 많이 하려고 한다. 또 교육이론들은 사람들이 느슨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부모들은 더욱 전문가에게 문의하도록 다시 내몰린다. 이로써 하 나의 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필요한 것은 정보만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자라나는 아이의 엄마는 여러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육아노동'을 한 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녀가 아이는 말 그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 한 발상을 좀더 면밀히 살펴보자. 누가 만드는가? 자연이 제공했던 것을 교정하거나 금지하 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전문가들이 불려온다. 이 전문가들은 면역처방에 서 심리치료적 운동을 처방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전문적인 의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는 불러올 수 없다. 환자가 그들에게 가야 한다. 어린 아이가 혼자 갈 수 있는 가? 누가 그 준비며 후속 조치들을 수행하는가? 누가 아이를 치과에 데려가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데려가며 아이와 대기실에 앉아 있을 것인가. 누가 하나의 실천에서 다음 실천으로 아이를 이끌고, 숙제를 점검하고 철자 틀린 것을 바로잡아 줌으로써 학교에서의 학습 진도 를 관리해 줄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엄마이다. 그녀는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데, 전문가가 직접 개입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 은 매일의 정상적인 시간 동안에도 아이에 대한 개선의 분위기는 더욱 교묘히, 하지만 골고 루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하에서 엄마는 아이를 도와주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미 국의 한 여성잡지의 말을 빌면 "자극되지 않은 시간은 아기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다 방면의 자극을 위해서 엄마들은 (흔치 않게 아빠들은) 동물원을 쫓아다니고 서커스에 가고, 수영장에 데려가거나 파티를 열고, 친구와 외출시킨다. 많은 면에서 자연스런 유년기는 끝났으며, 그것은 '단계화된' 유년기로 대체되어 가고 있 다. 여기에서도 역시 일에 저항하는 것은 어려운데, 단계화는 단순히 부모의 개인적 기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Papanek 1970). 사람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 다면 이러한 충동은 육아에까지 미치게 된다. 아이를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이 는 길러내야만 하고 부모들은 사회적 등급 위로 올라가려는 열망만큼이나 밑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과 미국인(America and Americans)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스타인벡(John Steibeck)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신랄 하게 묘사한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부모와 닮고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용인 될 수 없다. 그 는 더 잘나고, 잘살아야 하며, 더 많이 알고, 더 잘 차려입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 버지의 장사를 물려받지 말고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꿈은 감동적일 만큼 국민적 차 원이 되었다. 아이는 이제 부모보다 더 잘나야 한다고 요구되기 때문에 자세를 똑바로 해야 하고, 지도받고 떠밀리고, 찬사받고 훈련받으며 입바를 소리도 들으며 강요받기도 해야 한다 (1966: 94). 요약하자면,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아이를 돌보는 물리적 일이 다소 쉽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가정용 기계들, 가공음식, 종이 기저귀). 하지만 이에 대한 대가로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예기치 않게 생겨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유년기의 신체적, 도덕적, 성적 문제들에 강하게 얽매여 있다"(Aries 1962: 560). 이것들은 다른 차원에서도 얘기할 수 있다. "요즘 가족은 역사상 유례없이 육아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Kaufmann u. a. 1982: 530).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든 때로 원치 않았던 짐이었든 자식은 이제는 무엇보다도 '돌보기 힘 든 사람'인 것이다(Hentig 1978: 34). 사랑의 교과목 아이를 가능한 한 최고로 기르라는 지상명령은 일상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씻기 고, 먹이고, 어르고, 껴안아주고, 놀아주는 그 모든 일들은 한 가지 동기를 감추고 있다. 하 나하나의 행동은 그 행동 그대로라기보다는 배워가는 과정으로서 창조성을 자극하고 정서계 발을 도와주고 아이의 학습의욕을 높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아주 오래전인 1783년에, 육아에 관한 한 책은 이렇게 충고한다. 사람들은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놀이는 단순한 놀이 이상의 더 유 용한 것이 될 수 있다. ... 왜 엄마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대로 아이들의 관심을 이끌면서 도, 어떤 규칙에 따라 차례차례 하나씩 이끌어주지는 않는가? 왜 아이의 손을 이끌어서 정 해진 방식대로 만지로 밀고 잡아당기고 쥐고 잡고 놓고 하는 등의 행동을 가르치지는 않는 가? 이것은 일찍부터 아이들이 신체적으로 능숙해지는 것을 도와주는 자연스런 방법이 아닌 가? ... 간단히 말해서 아기들이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놀이와 농담은 반드시 언 어기관과 신체의 다른 부분들을 운동시킬 수 있도록 의도적이면서도 지식을 갖추고 행해져 야 한다(Basedow, Ostner/Pieper 1980: 112에서 재인용). 지난 30년 동안 이러한 가르침은 부모노릇의 규칙들을 실어나르는데 아주 효과적인 대중 매체 덕분에 모든 가정에 침투했다. 아무도, 아주 외딴 산간 마을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조 언 칼럼과 광고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들에게 전달된다. 그 결과는 "유년기를 가족 내의 교 육적 계획으로 변모시키는 광범한 경향"으로 나타났다. "교육받고 교양있는 중간계급 가정 에서 당연시되었던 아이 중심문화는 하층과 노동자계급 엄마에게도 가르치기 쉬운 형식으로 전달되고 있다"(Zinnecker 1988: 124). 부모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잡지는 이렇게 단언한다. 다양한 감각들이 지력과 독창성을 기른다. ... 아이를 학습시키는 방식을 찾아라. 만일 아 이에게 온갖 종류의 인상들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아마도 아이가 독립 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Eltern, 1988년 7월: 150). 일상생활만이 수단화되는 것은 아니다. 애정과 즐거움의 가장 자발적인 신호들까지도 프 로그램에 포섭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특히 ... 아주 어린 단계에서 분위기, 자극, 촉각을 흡수한다. ... 부 모와의 의도적인 접촉과 그들의 사랑스런 보살핌은 아이의 발전에 원동력이 되어준다. ... 손 을 아주 가볍게 배 위에 올려놓고 아이를 큰 애정을 갖고서 안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Eltern 1985/9: 17). 모성적 사랑은 전문가가 제공하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대중잡지뿐 아니라 과학 저술 에서도 감정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다시 말하면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의무이다. 아래의 글은 젊은 부모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목적은 사랑스런 보살핌과 관심이 아이의 지적, 정서적 발전의 토대이며, 아이가 얼마 나 여기에 의존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 아이의 욕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 한 사람의 믿을 만한 보살핌과 사랑이 필요한데, 아이가 밀접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 람, 무엇보다 아이의 엄마가 바람직하다(Das Baby 1980: 3, 23). 따라서 모성적 사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껏 해야 사랑의 노동 정도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너무 열심히 따르는 것이 잘못될 수도 있다. 1969년 소아라 전문의이며 정신분석가인 위니코트(D. W. Winnicott)는 엄마들에 게 이렇게 말한다. 자, 즐기세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즐기세요. 당신이 새로운 구성원 한 명을 생각하는 동안 세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두세요. 당신 자신에게 도취되고 자신과의 사 랑에 빠져보세요. 아이는 당신의 아주 가까운 일부입니다. ... 이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을 위 해서 즐기세요.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귀찮은 일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아이의 입장에 서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 엄마의 즐거움은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 과정은 죽은 상태가 되고, 쓸모없고 기계적인 것이 됩니다(Schutze 1986: 91에서 재인 용). 엄마의 사랑은 중요하지만 또한 확실히 힘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미궁과도 같은 규칙 들이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해로울 정도로 "소유욕이 있고, 희생적이고, 적대적이고, 지배하 려 들고, 순종적이고, 애정을 갈망하거나 마음내키지 않아 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경고한다 (Schmidt-Rogge 1969, Schuze 1986: 123에서 재인용). '애정 지표'는 적정한 수준을 유지해 야 하고 폭발적인 잠재력을 통제할 수 있게 맞추어져야 한다(Grossmann/Grossmann 1980, Schutze 1986: 116-7에서 재인용). 잠재의식마저도 여기에 포함되며 가장 깊은 감정들에까 지 처방이 내려진다. 이것은 많은 준비가 필요한 어려운 과업이다.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정 도로 적당한 감정을 갖는 복잡한 일과 비교해 보면 자발적인 반응들은 아득한 옛날이나 있 었던 일처럼 보인다. 호만(W. E. Homan)(1980)의 책 제목이 이를 간결히 표현한다. '아이들 은 사랑이 필요하고 부모들은 조언이 필요하다. 사랑의 라이벌 기대는 높고 부모들은 자신이 돈과 인내심,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무한히 갖고 있지 않다 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아이가 필요로하는 것을 만족시키려면 어른들은 그들 자신의 요구와 권리, 관심 수준을 낮추어야 하고 때로는 상당한 희생도 치르게 된다. 그 결과는 무 엇보다도 매일의 일과를 담당하는 사람, 대부분의 경우 엄마들이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주변 환경에 요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의 인식이 증대될수록 ... 점점 아이의 이 익을 위해 적어도 한쪽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부모, 특히 엄마의 관심사가 전적으로 포기되지는 않지만 인생의 후반으로 밀려나게 되는 과정이 다(Kaufmann u. a. 1982: 531). 양쪽 부모 모두 압박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이 관계는 변해간다. "아이들은 결혼을 결합시 킨다." "아이는 서로에 대한 우리 사랑의 징표이며 맹세이다." 이 말들은 아이를 갖겠다는 바람과 흔히 연결되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부모되기는 복 잡한 과업이 되었으며, 결혼은 균형잡힌 행위이자 탄력성의 테스트가 되었다. 딜레마는 분명 하다. 아이에게 에너지를 쏟아부을수록 파트너에게 남겨지는 것은 점점 적어진다. 결국 아이 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족생활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쏟아붓는 강렬한 정서적 접촉과 시간 때문에 커플의 관계는 축소된다. 전형적으 로는 이럴 것이다. 부모가 모두 직업을 갖고 있다면 그들의 사용 가능한 자유로운 시간을 아이에게 할애한다. ... 일하는 커플들에게 이것은 파트너끼리 서로 얘기할 여유는 없다는 것 을 의미한다. 둘 중 한 사람이 아이를 돌보는 데 매달이면 다른 사람은 이 시간에 외부의 접촉들을 유지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아이와 연관되지 않는 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한몫했던, 함께 시간을 보내 고 싶은 바람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만일 한쪽 부모만 일을 한다면 - 대개는 아빠 - 그 렇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는 하루종일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저녁에 는 아이와 관련되지 않는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남편과의 대화는 대체로 아이가 어떻게 하루를 지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에 한정된다(Schutze 1988: 107-8). 육아에 관한 모든 책들 가운데는 아이에 대한 지나친 부모노릇의 위험을 다루고 있는 책 들이 있다. 사정은 이렇다. 아이가 태어난 후 부모는 아이를 돌보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다. ... 모든 기대는 아이를 위한 것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흔히 파트너와 함께 이야기할 시간도 에너지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이의 필요에 종속되어 야만 한다. 부모를 위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아이가 남긴 찌꺼기뿐이다. 아주 오랜 동안 생 활을 유지하는 일이 더 급선무라서 부모들은 저녁에 녹초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 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부부 각자만이 아니라 그들의 관계도 매일의 일과 에 묻히고 어떤 의미에선 일과 그 자체가 된다. 더 이상 어떤 최고점의 흥분은 없다. 흥분되 거나 기분좋은 것은 그들 사이에서 전혀 혹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출산 후 첫 며칠의 강 렬한 감정은 무미건조한 상태로 변한다. 어떤 커플들은 그들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지조 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히 함께 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그들이 공유하는 관심을 제 외하고는 서로 함께 할 일이 거의 없다(Bullinger 1986: 57, 39, 56). 인터뷰와 설명에서 우리는 부부의 관계가 육아 전문가의 야심적인 이상들이 우세한 곳에 서는 언제나 뒷자리로 물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복된 후렴구는 이것이다. 아이를 갖는 일은 무척이나 풍요로운 일이며 부모 모두에게 새로운 공동 역할은 제공한다. 하지만 그 뒤 에는 '그러나'가 뒤따른다. 첫 몇 달 동안 우리는 행복에 겨웠고 모든 것이 자극적이고 흥분되었다. 한편으로는 언제 나 너무 피곤했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사정 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이를 갖는 일은 너무 힘겨웠 다. 우리는 언제나 피곤하고 지쳐 있어서 우리 사이의 관계에는 신경쓸 여가가 없다(Reim 1984: 101에서 재인용). 따라서 긴장이 증가하고 두 사람 다 과민해지고 서로 이야기할 시간이 적어짐에 따라 갈 등이 커지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아이는 자라났고 남편과 내가 부모로서의 역할에 대해 점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서 러에 대한 감정은 일시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 우리는 아이가 11개월이 되어서야 어떻 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지, 그리고 아이의 일말고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어 떻게 책임질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Reim 1984: 19에서 재인용). "결혼이 그 의미를 바꾸어서 아이를 사회화하는 것으로 되어간다면 ... 파트너 사이의 갈 등은 불가피하다"(Nave-Herz 1987: 26). 좋은 측면들 - 시간을 갖고, 인내하고 에너지를 찾 고, 감정을 나누는 것 - 은 아이에게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조건에서는 더 이상 아이들이 부부를 결합시키지 않으며,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은 부분적일 뿐이다(Chester 1982). 사랑이 지나칠 때 아이들은 어떤가? 그렇게도 열렬히 집중된 희망과 기대에서 아이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 가? 이에 대한 대답은 논란거리인데, 좀더 세련되게 표현하면 이 문제는 여전히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점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면서 아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개인 잠재력은 발견되고 더 계발될 수 있게 되었으며, 계급, 성별, 지위는 더 이상 장애가 될 수 없고, 전적인 방치와 혹독한 무관 심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만일 유럽의 덜 발전된 지역에서 과거에 유년기가 어떠했는지를 묘사한 글을 읽는다면 - 지루하고 혹독하고 억압적이며 견디기 어렵고 지치게 하는 - 이처 럼 도저히 목가적일 수 없는 시대가 끝나버린 것을 아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Ledda 1978; Wimschneider 1987). 그렇지만 과보호받는 것 또한 그만큼 단점이 있다는 의혹이 서서히 생겨났다. 이런 유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양육에 대한 이론들은 유년기를, 여러 단계에 대한, 그리고 또 있을 수 있는 결함에 대한, 주의깊은 감독과 주시를 요구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아이는 언제나 필요 한 의존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아이의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욕구나, 현재와 미래의 욕구들은 규정되어야 하고 보살핌을 받고 조정받아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서 사랑이란 미명 아 래 부모들은 그러한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얻는 자신의 즐거움을 감출 수가 있다. "적절한 잡지와 책들로 무장한 채, 부모들은 정서적인 분출로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유아원을 교훈적 인 온실로 변화시킨다"(Gronemeyer 1989: 27). 금세기초에 엘렌 키(Ellen Key)는 이렇게 묘 사한다. 아이는 항상 이 일은 그만두고 뭔가 다른 일을 해야 하며, 뭔가 다른 일을 발견하거나 그 거 하고 있거나 찾고 있거나 원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원해야 한다. 아이는 언제나 자 신이 좋아하는 대로 따르기보다는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끌려간다. 이 모든 것은 사랑과 관 심과 판단하고, 도와주고 충고하는 것에서 얻는 기쁨에서 진행되며, 인간이라는 작은 물질 덩어리를 '모범적 어린아이'의 시리즈물에 나오는 완벽한 본보기로 갈고 닦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Liegle 1987: 29에서 재인용). 현 상황은 역설적이다. 부모노릇에 관한 대중적인 과학적 글이 여전히 인쇄되어 쏟아져 나오고, 나오는 책마다 새로운 제안을 담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그들이 예전에 옹호했던 태 도에서 이미 천천히 뒷걸음질치고 있다. 몇몇 저자들은 그들이 "교육적 측면을 포기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Honig 1988). 한때는 마치 적절한 부모노릇이 확신 있고 자율적인 아 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점차 아이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 양육자의 입장에서 자기를 포기한 사랑은 이제는 무자비한 것으로 여겨지고, 아이들에 대한 열성은 완벽한 형태의 통제와 훈육으로, 즉 조련으로 여겨진다"(같은 글 71). 이러한 비판적 입장은 가족 심리치료의 경험뿐 아니라 경험적 연구의 결과에 의해서도 뒷받 침된다(가령 Lempp 1986; Richter 1969). 어른이 - 특히 엄마가 - 계속해서 자신을 포기하 는 경우가 결코 늘 아이를 위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심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억눌린 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표면화되어 다소 숨겨진 적의를 띠고 아이와 파트 네에게로 향하게 된다. 자신의 모든 기대를 아이에게로 투사시키고 아이를 온갖 격려로 괴 롭히는 것은 매우 쉽다. 종종 아이들은 "엄마의 자기존중감을 지탱시켜 주는 역할을 억지로 강요"받는다(Neidhardt 1975: 214). 이 모든 것들은 소규모 핵가족의 숨막히는 분위기 속에 는 사랑과 함께 적대감이 감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적 가족이 어린 아이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아붓는다 해도, 거기에 이기적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행위는 '소유욕'에 대한 암시 그 이상의 의미를 제시한다(Aries 1962: 562). 앞에 놓인 미래와 함께 아이는, 나름의 일대기와 야심, 실망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굉장한 성공을 해서 정상에 오르고 말겠다는 오랜 꿈을 지닌 부모와 대면하게 된다. "내 아이는 나보다 더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를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은 그/그녀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큰 기대가 충족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대부분 부모들은 틀림없이 조용히 후퇴해서 아이를 계속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 이렇게 되지 않기도 한다. 오늘날 의 가족에는 종종 간과되고 잊혀지며 억압되는 다른 측면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족의 성 원들이 아이를 때리는 일이 점점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아이와 청소년들이 신체적으로 학대받고 성폭행당하고 정서적으로 거부되는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최근 조사자료를 토대로 하면 그 숫자는 적어도 30만에서 40만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런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추산할 수 있다. 이것은 독일에서는 18세 이하 1,100만 명의 어 린이와 청소년들의 대략3%에 해당된다. 이러한 현상 이면에는 분명히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모들의 선한 의도들이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결과를 맺게 된다는 점이다. 좌절된 희망은 실망과 공 격으로 변하게 된다. 이에 대한 조사에서 나온 결론은 이러하다. 부모들은 '나의 아이에게 최상의 것을' 원한다. 그리고 종종 바로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아이가 정말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음에는 주목하지 못한 다. 한 아이만 있는 가정의 추세는 ... 이러한 현상을 재촉한다. ... 요즘 부모들은 공개적으로 든(대개의 경우) 은밀하게 자신이 아이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고 전문직에서 출세하 도록 아이를 몰아댄다. 청소년들이 부모의 기대에 따라 살지 못하는 가족들에서는 미래의 계획에 대한 긴긴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과 긴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 좋지 못한 성적 이나 반항적인 행동은 아주 빡빡한 취업시장에서 자식이 발판을 마련할 기회를 빼앗아갈 수 도 있다고 우려하는 부모들은 신경이 예민해지고 성급해지는데, 이것이 곧바로 양쪽 세대에 게 서로를 공격하는 행위를 초래할 수 있다(Hurrelmann 1989: 12). 같은 연구들은 또한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갖는 것 이면에 있는 특별한 동기들을 조사한 다.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아이들은 더 이상 일손이나 상속자의 자격으로 필요한 것이 아 니다. 그들을 가짐으로써 얻는 보상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서적 가치에 있다. 전문가들이 익 히 알고 있듯이, 이것은 다음과 같다. 강렬하지만 마찬가지로 매우 불확실하고 위기로 가득한 보상이다. ... 산업화 이전 그리고 산업화 초기 사회와 비교할 때 오늘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매우 긴장되어 있고 결렬하다. 하지만 양측 모두, 부모와 자식에게는 갈수록 이 소중한 자산인 서로의 관계를 다루기가 어 려워진다(같은글).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에서 핵가족이 과도하게 정서적으로 되어가고 소규모 가족 내의 분 위기는 위험할 정도로 과열되어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성인의 파트너 관 계에서도 이러한 온실효과가 나타나지만, 그래도 이 경우에는 압력이 너무 높이 올라갈 때 에 대처할 만한 안전밸브가 있다. 적어도 결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와 는 이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어떤 합법적인 탈출통로도 제시될 수 없으며, 사회는 "부모는 아이를 상실한다"고 단정적으로 진술해 버린다. 이러한 사실을 꼼꼼히 생각해 본다면 사랑이 있는 곳에 종종 적대감이 있다는 사실은 이 해할 만하다. 물론 이것이 처음에는 낯설어 보이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불편하게 느껴지 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랑과 적대감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의 결과로서 연 결되어 왔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높은 희망들과 결합된 사랑은 사라져 버리기 쉽고 급속히 쓰디쓴 실망과 잔인함으로 빛바랠 수 있다. 오래도록 눈을 감아 왔지만 우리는 경찰 기록이 말해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랑은 우리의 위대한 성과 중 하나이며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의 기반이지만, 우리는 사랑의 어두운 측면이 없이는 사랑을 얻 을 수 없다. 사랑의 어두운 면은 때로는 잠시 동안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몇 년간 좀체 로 사라지지 않는다. 실망과 쓰라림, 거부와 증오심.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은 것이다. 5. 이브의 두 번째 사과 또는 사랑의 미래 그러면 이제 다시 한번 사적인 것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추앙하고 있는 현대의 숭배물들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사랑, 결혼, 가족이라는 말로 찬미되고 은폐되고 신 성화되는 우상들 말이다. 이 모든 문제에 등을 돌리고 다른 대륙과 문화로 도망갈 수만 있 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낯선 곳으로 도망칠 수도, 어깨를 으쓱하고 그냥 떠나버릴 수도 없다. 사랑을 연구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진정한 나'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 런 신들을 탐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지금 내면이라 소용돌이치는 안개, 감정이라는 플라 톤의 동굴, 애정이라는 내밀한 방, 미움과 절망이라는 희생의 제단으로 향하고 있다. 모든 남녀가 자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다시 말해 복지 국가와 취업 시장이 설계 하고 건축한 사랑의 궁전과 오두막으로 말이다. 지금 여기서는 바로 미래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미래는 아마 우리가 현재를 좀더 잘 이해 하고, 모퉁이에 서서 세기를 엿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서로에게 투사하며 자아의 거울 속의 암실에서 찾아 헤매는 사랑은? 아마 이런 진단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결혼과 가족 생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늘 위에 그름 사다리를 놓고 구름 속에서 뻐꾸기 둥지를 꾸미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오늘도 그렇지만 내일도 여전히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함께 꾸려나가기 위해 온갖 소망에 기대겠지만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이제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모든 것을 동원해 내게 된 테크놀로지 사회가 사적인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남녀 모두 철두철미한 이해 관계와 계약, 돈벌기 그리고 억지로라도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사회 속에서 거의 혁명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상실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써넣으면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동화를 믿는 쪽이 다 나을지도 모르 겠다. 이름을 써넣어 주세요! 황새가 가져다 주는 아기나 산타 클로스의 선물꾸러미만으로 도 가족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으니 말이다. 많은 사간을 들여 매일 공중누각을 세우고 노 력하는 가족이야말로 행복하니 말이다. 사랑과 가족이 비상업적, 비계산적, 비착취적 등 모든 아님의 장소인 것이 사실이라 해보자. 또 이 아님이 이미 낡아빠지거나 괜한 겉치레 또는 별반 중요하지 않은 장식이 아니라 결정 적이고 현대적인 것으로서 계급 체계나 정치적 유토피아 같은 표지판들이 사라지고 있는 탈 전통 사회의 사적 영역에서 하나의 지향점을 제공하는 형식이라고 해보자. 이 모든 이야기 가 본질적으로는 다 맞다면 현대의 핵가족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허약한 구축물로서 이 러한 가족 형태를 창조했고 그것에 안정성을 주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동력 즉 산업화, 시장 경제, 화폐, 테크놀로지, 법률 등의 진전에 따라 붕괴 위기에 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철 저한 현대화는 '현대적' 핵가족의 토대를 지양하는 것이다(1장의 '산업 사회: 봉건제의 현대 적 형태', 62쪽을 보라). 물론 가족은 '필수불가결'하고, 더 나아가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세상 만사에 대한 남성들의 꿈을 이론적으로 영구화하려 하면서 사회학자 들이 던지는 이러한 최고의 찬사조차도 그리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불확실성과 온갖 위험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든 희망을 걸려 하지만 이처럼 허약한 '본질'이 어떻게 될지는 그리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미래 속으로 선을 그어 현대의 전개 양상을 그대로 연장시키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따라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것이 가장 일차적인 질문이다. 사랑의 혼란은 이제 말끔이 정리되어 현대화 노선 즉, 평 등, 세세한 계약서, 접근권과 법이론 등에 맞추어 적절히 조직화될까? 가장 전망 좋은 고지에서 (원래 우리의 사유는 미래의 현상을 선취하는 힘이 있으므로 현 실을 미리 질러가 살펴보자면) 미래를 엿보면 사랑하기는 예컨대 사과나무 키우기나 부기와 큰 차이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아래의 미래의 시나리오 뒤에 들어 있는 기본적인 이론적 발상은 다음과 같다. 즉 사랑이라는 세속적 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고 있 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신비로움을 잃고 합리적 체계로 변형되는 중이라는 것이다. 아마 다음과 같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다. 즉(유전)공학자와 법률 문서가 승리할 것이 다. 앞으로는 시장의 힘과 개인의 충동이 혼합된 사회가 등장해 안전하고 계산가능하며 의 학기술적으로 최적화된 '사랑'(또는 결혼이나 부모되기)이라는 이상이 사람들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헛된 희망에서 깨어나기: 핵가족으로 되돌아가기 가족의 미래를 논할 때 사람들은 흔히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아버지-어머니-아이라 는 친숙한 유형의 핵가족을 '무 가족'이라는 모호한 개념과 비교하거나 아니면 다른 종류의 가족이 핵가족을 대체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금까지의 우리의 분석이 옳다면 특정한 유형의 가족이 다른 유형의 가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거나 따로 사는 형태가 엄청나게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거나 따로 사는 형태가 엄 청나게 다양해지고 나란히 병존하게 될 것이다. 특히 개인들은 삶의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 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독신, 결혼 전의 동거나 결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기, 한두 번 이 혼한 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모되기 등. 하지만 아래와 같은 한가지 추세만큼은 그리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즉 어제를 내일의 모델로 삼아 핵가족으로 되돌아가자는 환상이 강력하게 나타날 것이다. 결혼과 가족 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많은 경우 과도한 이기주의의 징후이며, 정공법으로 이것과 싸우고 이를 통해 여성을 우리 속으로 다시 몰아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부와 내조자라는 주어진 역할 밖에서 '내 인생'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사적,정치적 노력은 자연히 회의나 저항에 마주치게 된다. 이른바 가족이라는 것을 구하기 위한 조치들은 표준적인 가정규범을 지향하고 있다. 밥벌이하는 남편과 가정을 지키는 아내와 두 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 가정. 그러나 이것은 19세기 초에 와서야 존재하기 시작한 규범이다. 하지만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부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 침해주고 있는 강력한 요인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대다수 여성들은 경제적 독립과 직업적 안정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사실 기혼 여성을 포함해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전체적인 숫자는 계속 상승해 1988년(독일의)기혼 여성들은 거의 두 명 중에 한명 꼴로, 미혼 여성은 57.6%가 고용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여성 중 적어도 절반이 여전히 남편의 재정적 부양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업의 증가와 노동 시장의 축소는 전통적인 양성의 역할을 존속시키고 재고착시키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은 지 금 임금 노동에서 방출되어 남편을 내조하는 일로 되돌아가고 있으며, 많은 여성들은 특히 아이를 갖고 싶을 때 이런 선택을 하게 된다.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고착시키는 두 가지 요인, 즉 실직과 출산은 삶의 패턴을 양극화하는데 아주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여성들은 남성들만큼 좋은 자격을 갖추지 못하는 한 교육이나 직업의 사다리에서 다시 맨 밑바닥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과거와 미래를 정치적으로 뒤섞어 버리는 이같은 처사는 특히 제도권에서 어머니의 역할 을 과장함으로써, 특히 사회적으로 일하는 엄마를 나쁘게 이야기하고 어머니에게는 죄책감 을 떠안김으로써 훨씬 더 위력을 떨친다. 탁아 시설을 설치한지 않거나 아이를 맡기고 찾는 시간을 고정시킴으로써 어머니들이 일과 아이 돌보기를 조정할 수 없게 하는 것도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이 때문에 사적이고 공정인 영역에서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치루는 전투는 정말 치열하게 전개된다. 남자들은 교활하게도 모성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지만 정 작 남자 자신은 직업이냐 아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하거나 승진시켜 달라고 애원하지 않아 도 된다. 일자리 갖는 것을 어렵게 만들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아원의 고정시간제는 심 지어 어머니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구질서를 복구시켜 주는 작지만 아주 효과적인 지렛대 이다. 이것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실업 수준을 낮추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취업 시장의 문을 닫아걸면 가족을 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 에 어떤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간과해 왔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 좌절 되고 남편의 재정적 부양에 매달려야 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젊은 여성들이 어떻게 반응할 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또 이에 따라 그만큼 많은 수의 젊은 남성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밥벌이의 멍에를 짊어질지도 (또는 온갖 직업적 문제를 감안할 때 짊어질 능력이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아무튼 기대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냉엄한 현실 간의 불일치 (여성들은 평등한 교육 기회를 통해 이를 체계적으로 깨달아가고 있다)는 여성들의 사적인 세계로 스며 들어가 온갖 언쟁과 좌절로 분출되고 있다. 현대 사회가 부부의 어깨 위에 짊 어지워 놓은 사적인 고투와 고통이라는 짐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은 어 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취업 시장에 존재하는 장벽들은 핵가족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혼 법정의 복도와 결혼 상담소의 대기실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이와 동시에 여성들은 다시 한번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 성들은 다시 한번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쫓 아내어 부엌으로 돌려 보내려는 사람들은 이혼이 점점 더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것은 여성의 사회보장 체계에 구멍을 내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사적,공적 생활에서 성의 구질서를 복구하려는 시도가 근본적인 오류임을 확연히 보여준다. 이것은 한편으로 성별과 무관하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개인적 성취에 따라 성공 여부를 결정해버리는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의 법률적 입장과 상충된다. 다른 한 편으로 가족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격변은 사적인 문제로 잘못 규정되고 있으며, 사회 적 변화와의 모든 연결 고리는 무시되거나 부정되고 있다. 파경에 이른 결혼을 어떻게 재결합시킬지를 놓고 흔히 제시되는 몇 가지 제안을 살펴보기 로 하자. '가족 훈련'에 참여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충분한 카 운슬링을 받는다면 결혼의 어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결혼 생활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포르노나 합법적 낙태나 페미니즘이므로 이것들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등. 이처럼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발전은 철저하게 무시되는 것이다. 베버에게서 하나의 이미지를 빌리자면, 현대화라는 것은 싫으면 다음 모퉁이에서 내려버 릴 수 있는 마차가 아니다. 정말로 가족의 상태를 1950년대로 되돌리려는 사람들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머니에게 출산 장려금과 보조금을 주거나 가사 노동의 이미지를 화려하게 꾸며 간접적으로는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내야 할 뿐만 아니 라 공개적으로 여성들에게 기회와 교육을 제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마 보통 선거권과 함께 정말 골치 아픈 문제가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성들은 정보를 얻을 수 없어야 할 것이다. 텔레비전에 자물쇠를 채우고 신문을 검열해서라도 말이다. 요컨 대 남녀가 평등하게 공유하게 된 현대의 모든 성취는 영원히 남성의 전유물로 재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평등하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일과 가족의 모순 또 다른 가능성은 여성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 평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인 은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현대의 보편원리가 철저하게 관찰되고 가사 노동, 의회, 공 장, 경영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의 분할이 극복된다면 말이다. 여성 운동에서 진행되는 여 러 논의를 보면 흔히 남녀를 평등하게 대우하라는 요구가 '남성들이 움직이는 세계'를 바꾸 라는 요구와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경제적 안정, 권력 획득, 의사 결정 의 공유를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또한 공공 생활에 더욱 '여성적인' 태도와 가치를 도입하려 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규정되지 않고 있다. 만약 노 동 시장에서는 만인이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평등을 이해한다면 독신자들의 사회가 나타날뿐이다. 현대적 삶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논리는 외톨이를 전제하고 있다(Gravenhorst 1983: 17). 시장 경제는 가족, 부모되기, 파트너 관계에 대한 욕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적 개인 적으로서의 삶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노동 시장이 아주 유연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시장을 앞세워 가정 파탄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결혼이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고 남자는 바깥 에서 일을 한다'와 동의어인 이상 일과 가족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은폐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부부가 가사도 나누어 맡아야 하게 되자 이러한 사실이 커다란 소동을 일으키 며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시장 논리에 따라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파트너들을 라이벌과 개쳬로 만들어 현대 생활에서 좋은 것을 놓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독일 등 지에서 독신자 가정과 독신 부모의 수가 급증하고 있음을 볼 때 이것은 단순히 공론에 불과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영위하리라 예상되는 삶의 방식을 고려해 보아도 아주 분명해 보인다. 삶을 혼자서 꾸려나가는 데는 몇 가지 원초적인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예방책을 세워야 한다. 모든 경우의 수를 찾아서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우정의 망을 만들고 보호해야 한다. 물론 우정은 그 자체로서 삶의 커다란 기쁨 중의 하나이며 짧은 만남이 주 는 매력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소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직업과 자부심 그리고 사회적 지원을 갖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이것들 또한 돌 보고 보호해야 한다. 이처럼 사적인 우주는 그 나름의 특성, 강점, 약점을 가진 사람의 자아 주위에서만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수록 이것이 모든 가까운 파트너관계에 대해 극복할 수 없 는 장애가 될 위험도 더 커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될 위험 도 더 커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아무리 열렬히 갈망하더라도 말이다. 외톨이 삶은 누군가 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와 동시에 이 누군 가를 진정한 '나만'의 삶 속에 통합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외톨이 삶은 타 인이 부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그녀에게 남겨진 공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고독감을 피하는 것을 중심으로 계획되어야 한다. 매번의 접촉이 각각 한 사람의 시간, 일상 습관, 잘 짜여진 일정표, 사교 생활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세심하게 계 획된 계기 등과 관련해 서로 다른 요구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아주 활동적인 외양뒤에 서 어슬렁거리는 홀로됨의 두려움을 덜도록 계획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교묘한 균형은 진정한 관계에서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누구나 그러한 관계를 열망하는데도 말이다). 독립을 성취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친밀성을 사보타지하는 것임이 드러나고 외로운 사람 은 자기만의 밀실의 문을 걸어잠그는데, '나만의 삶'을 방어하기 위해 외벽에다 또 한 줄 벽 돌을 쌓는 것이다. 독신자가 영위하는 이런 삶의 형태는 사회적 변화의 기묘한 부수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 경제가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의 삶의 원형이다. 사장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사회적 결속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이 논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일수록 깊은 우정 은 그만큼 더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역설적인 사회적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데, 사 회적 접촉 수중이 높을수록 깊은 관계는 형성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현재로서는 사실의 기술이기보다는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망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양성이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 는 이상 이러한 양상이 전개될 것으로 쉽게 예측해 볼 수 있다. 일부 여성운동을 포함해 모 든 사람들은 당연히 한때 남성들에게만 주어지던 것들이 이제는 여성들에게도 확대될 것이 라고 기대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직업 세계에서 남성들만큼 유능하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이러한 길은 평등한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는 행복한 세계가 아니라 분열과 의견의 불일치로 나갈 뿐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결혼 생활 이후의 결혼: 이혼 뒤의 확대연속가족 예를 들어 22세기 사람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전환하고 있는 우리의 중기 산업시대를 되 돌아본다면 아마 웃음을 지으며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정치적 압력 집단이 너무나 많구나, 사람들은 투표도 하고 제안하고 연합하고 음모를 꾸몄구나. 모든 것이 대 미디어들에 의해 속속들이 까발려졌구나. 하지만 막상 진정 새로운 시대는 관심밖으로 밀려나 그저 무시되기 만 했을 뿐이구나. 하루하루가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가운데 은밀하게 진행된 이러한 변화 가 각종 위원회에서 유권자 모임까지 바쁘게 돌아다닌 정치인들은 거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결과를 초래했구나. 사람들이 계속 정부와 정치인들만 쳐다보고 있을 때 막상 결정적인 요인들은 슬쩍 뒷문으로 스며 들어와 세계를 뒤엎은 것은 얼마나 희한한 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를 찾으려면 산업 사회가 강변해 온 몇 가지 확실성을 옆으로 재쳐두어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달리는 기차에서 좌석의 재 배치 문제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이 설사 기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또 어디로 향하 고 있는지 모른다고 놀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우리 는 변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무엇이 실행 가능한가에만 집중함으로써 - 좌석을 이동함으로써 - 더 큰 차원이 있다는 것을 잊는 경향이 있다고 해 서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기묘한 것은 이런 것이다. 즉 단지 좌석을 재배치하고 있 을 뿐인데도 기차가 어디로 갈지, 어디를 돌아갈지, 어디서 설지를 결정하는 데 일조하고 있 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혁명적 발상들이 슬쩍 정상적인 것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뒷문은 어떤 것들인가? 이 뒷문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노동 시장에서의 평등이 그것으로, 이것은 고전적 산업사회가 강제한 성별 제한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노동 시장에 참여 할 수 있음을 뜻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몇몇 다른 뒷문과 마주치게 될텐데, 여기서는 먼저 이혼을, 즉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회전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혼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 자. 이혼 그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롭기는커녕 이혼은 현대적 사고 방식의 전형 을, 즉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지평 위에 있는 다른 모든 것처럼 취소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의 전형을 보여줄 뿐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결코 취소할 수 없는 자 유로운 선택'이라는 교회의 결혼관과 달리 결혼은 모순적 성격을 드러내 왔으며 혼인 서약 은 파트너들에게 이제 다시 동의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 쨌단 말인가? 다른 한편 이혼이 정상적인 것이 됨에 따라 길고도 고통스러운 적응 과정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고 있는데, 이 문들은 남녀 양성과 여러 세대가 서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계속 변경되고 재배열될 것이다. 처음 단계에서는 이런 사실이 은폐될텐데, 물론 충분히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처럼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냐에 따라 새 로운 원칙이 관철되는 방식이 달라질텐데, 이것은 얼마 후 이 세상에서 가장 정상적인 행위 의 극적인 결과를 가리기 위한 우리 현대의 표어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아무튼 변 화는 또한 사적으로도, 즉 이러저러한 사람과 이들의 결혼과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 운명의 일부인 것처럼 일어날 수도 있는데, 따라서 이들의 결혼이나 가정 생활을 돌보기처 럼 크게 확대해 슬로우 모션처럼 또렷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거시적인 구조적 변화는 직접 보거나 실험할 수는 없다. 이러한 변화는 통계학의 안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몇 십년 후에야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적 달걀에서 부화되어 나왔음을 깨달을 수 있다. 사회적 신화와 근시안적인 심리치료사들에 따르면 부부 관계는 이혼과 함께 (이에 따른 고통을 다스리기 위한 적당한 시간 후에) 끝장난다. 이런한 견해는 법률적(성적,공간적)분리 가 완료되면 결혼의 사회적,감정적 현실도 끝장난다고 잘못 보고 있다. 가족 연구는 그 동안 아주 게으르지만 이제 가족이 핵세포라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 소스라치게 '결혼 생활 이후 의 결혼'(nachehelichen Ehe)이라는 다른 현상을 발견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반대인 '결혼 생활 내의 이혼'(innerehelichen Scheidung)은 무시하고 있다. 팔을 잃고도 계속 사용하려는 사람처럼 이혼한 사람들은 헤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계속 한다. 전처나 전 남편 이 여전히 커다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그녀의 상실에 대한 그리움과 비탄이 차지하는 공간만큼이나 크다. 결혼을 성, 사랑하기, 함께 살기와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만이 이혼은 결혼의 종말이라 는 헛소리를 할 수 있다. 물질적 부양 문제, 아이들, 오랫동안 함께 한 생활에 주목한다면 이혼은 분명 심지어 결혼의 법률적 종말조차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혼 상태의 '별거 결혼' 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전환된다. 이 단계에서 이혼한 부부는 이별했음에도 이별을 가로막는 차원들과 맞닥뜨린다. 이혼을 가로막는 이러한 측면들, 즉 배우자들이 영혼의 살갗을 피가 나도록 긁어대도록 만드는 이 러한 측면에는 아이들은 도저히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포함된다. 그리하여 무엇을 빌미 로 하건, 어떤 형식이건 부정적인 동거라도 하자는 생각이 함께 살 때만큼이나 따로 살 때 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지난 번 만났을 때 당신은 나의 벌어진 상처에 맨홀 뚜껑처럼 꼭 들어맞는 말을 했죠. ... "난 우리 관계가 언젠가 다시 정상으로 되었으면 해." ... 오 맙소사,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잊고 대답할 수 없었으니까요. 마비될 것만 같았어요. 들어보세요. 난 당신과 같은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아요. 차갑고 불 꺼진 현재 속에서는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겠어요. 언젠가 우 리가 마치 사랑의 대전쟁을 치룬 두 노병처럼 언젠가 만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 이 되는 게 당신에게 바람직하고 기분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죠. 용기와 관용을 치하하는 명 예 훈장을 서로에게 수여하면서 말이죠. 한때는 천국과 지옥까지 서로를 쫓아다니다 이제는 정원에서 평화롭게 앉아 있는 운좋은 두 탈주병들. 잔디의 스프링클러가 한 곳에서 맴도는 잠자리처럼 돌아가고, 나는 당신 아이들과 놀면서 당신 직장 문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를 듣겠죠. 그러다가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내 고독과 가난이라는 문제까지 덧붙여 괜히 미 안해하면서 말이죠. 당신 아내는 우리에게 차를 내온 다음 사려 깊게도 금방 사라지겠죠. ... 당신은 알아야 해요. 이러한 상상이 나를 오싹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걸! 시간이 다 른 모든 것을 극복하듯 우리도 정복하리라는 생각을 난 혐오해요. 왜 아무도 시간에 맞서지 않죠? 시간은 사람들이 늘 생각하는 것만큼 전능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죠. 그저 전투 없는 전쟁터만 남길 뿐이에요. 내가 있는 곳, 있던 곳, 있을 곳에는 결코 풀이 자 라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간직하기 위해 이렇게 영원히 계속 글을 써야 한 다고 해도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겠어요. 난 당신과 너무나 가까우니까요. 이것이 내가 우리 를 지키고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그 옛날이 기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식이에요(Strauss 1987). 이혼이라는 법률적 행동이 옛날이 옛날의 결혼과 새로운 결혼을 구분하는 기준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은 여러 종류의 결혼이 가족의 각종 경계선과 겹치고 교차한다는 것을 알지 못 한다. 이혼한 사람들은 부양비, 아이들을 공유해온 삶을 포함한 수많은 차원에서 여전히 서 로 묶여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지불하는가? 한 사람이 한 결혼을 떠나 다른 결혼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 간에 밥벌이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무너진다. 하나의 결혼에 대해서는 좋았을 수도 있던 것이 둘 혹은 그 이상의 결혼에 대해서는 결코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노동과 소득이 전 과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재혼 후에 한 사람은 그저 결핍을 공유할 뿐이다(Lucke 1990). 부모되기는 나뉘어질 수는 있지만 끝날 수는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 후 따로 살아 도 여전히 부모이며, 이것이 일상 생활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시 협상해야 한다. 따라서 가족은(깨어질 수도 있는) 결혼과 이혼 상태의 부모되기(이것은 어머니되기와 아버지되기로 나누어진다)로 나뉘어진다. 후자는 (보통) 법정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적 대 관계가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헤어진 부모 사이에서 아이나 아이들 문제를 형식적으 로는 제쳐놓을 수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공동의 기반'이라는 찌꺼기 가 남게 되는데,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결코 끝날 수 없는 가족 생활이 느슨하고 은밀한 형 태로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관련된 개인들에 따라 어떤 일이든 초래될 수 있 지만 헤어진 부모가 됨으로써 받게 되는 진짜 충격은 예를 들어 두 사람 중 하나가 이사하 기로 결정하자마자 즉각 느껴지며, 이에 따라 양지는 그들 관계를 재협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이별과 법률적 이별은 관련된 성인들에게서보다는 아이들에게 훨씬 더 동일시될 수 없다. 이혼한 부모는 공간적으로든 법률적으로든 적어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지만 아이 들은 이중 생활을 시작해야 되는데, 그에 따라 아이들은 서로 부정적으로 관계맺는 두 가족 사이에서 정서적, 물리적으로 스스로를 분리해야 한다. 이리하여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모 호해진다. 비밀 유지가 강요되며 이에 따라 부모에게 따로 진실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부 모들이 자기 목적을 위해 아이들을 무기로 이용하는 사태 속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이 다른 부모에 대해 느끼는 질투심까지 함께 떠안아야 한다. 이혼한 부모의 아이들이 일종의 다가족에 어떤 식으로 묶이건 또는 이혼이 장단기적으로 아이들에게 아무리 커다란 영향을 미치더라도 아이들은 결혼의 연속성과 분리불가능성을 상 징한다. 비록 원래 가족에게는 더 이상 주소가 남아 있지 않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부모와 끝끝내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기껏해야 누구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만 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인데, 이것은 결국 다른 쪽 부모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로 얽혀 있지만 비우호적인 두 가족과 함께 사는 방식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 다. 따라서 이혼은 언제나 제한적이며, 또 특정한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이혼은 성인들을 위한 것이지 아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가족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부모가 여전히 가족의 핵이다. 가족 생활을 영위할 곳이 없더라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되는 일은 아무튼 새로운 핵가족이나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해보라(우연인지 이것은 사방을 언제든지 쉽게 떠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 함께 살지를 정해야 하는 맞벌이 부부의 생 활과 비슷해 보인다). 이것은 이혼을 가족의 붕괴와 동일시하는 것이 성인들의 바람을 반영하고 있는 편견일 뿐 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편견을 이해할 때만이 이혼은 결혼과 가족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가족은 여전히 현실이다. 새로운 핵가족 속에서 부딪칠지도 모를 온갖 적대적인 관계에서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아이들은 생물학적 부모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취소할 수 있고 다시 할 수도 있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파트너 관계와 새로운 가족의 경계선을 조용히 넘나드는 아이들 속에서 가족은 여전히 유지된다. 따라서 부모가 헤어진 후 새로운 핵가족 속에서 어머니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는 가족의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모호하게 된다. 또는 그러한 아이의 가족 이미지는 적어도 가족의 다 른 구성원들의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은 다른 두 가족에 동시에 속하기 때 문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가족은 거의 해소할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사회적,물질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삶을 계획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 다. 결혼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가족 생활 간에 점점 벌어져 가고 있는 이러한 간극은 조부 모 세대를 보면 훨씬 더 분명해진다. 이혼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부모의 부모들은 아 무런 잘못도 없이 손주들을 뺏길 수 있다. 이것은 통상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적 접 촉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조부모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혼이 쪼개 버린 가족의 잔재를 상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혼이 정상적인 것이 되면서 소규모 핵가족 구성원들간의 관계도 변해왔다. 이것은 생물학적 부모와 사회적 부모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며, 그래서 원래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를 제삼자가 분간하기 어렵다. 이혼율이 증가하면서 실제로 생물 학적 부모와 사는 아이들이 예외적인 경우가 되고 있다(Gross/Honer 1990). 혼합 가족에서 자라나는 경우가 훨씬 더 흔한 것이다. 즉 상이한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새롭고 일시적이며, 더 이상 핵가족이 아닌 가족을 이루며, 마치 다른 사회 계층이나 출신인 듯한 '형제' '자매'와 함께 산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이혼은 원형적인 소가족에서는 결합되어 있던 생물학과 사회의 고리를 체계적으로 느슨하게 한다. 나아가 출산 의학이 정교한 방법으로 혼외 수정법을 자동화시킴으로써 사회적 부모와 생물학적 부모 간의 고리를 끊듯이 광범위 한 이혼 역시 이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반복되는 이혼 때문에 양성 관계와 세대들간의 관계가 깨어지고 복잡하게 뒤섞이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상호관련되어 있는 확대 가족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데, 이 가족의 구조는 외부에서는 꿰뚫어보기 어렵다. 어떤 의미 에서 이혼은 개인주의의 열망과 상충될 수 있으며 개인주의를 고립시킨다. 지금까지 지배적 인 견해가 무엇이건 이혼이란 단지 한 가족에서 다음 가족으로의 이동을 의미할 뿐이기 때 문에 이혼이 사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견해는 사 실이 아니다. 이런 견해는 가족 내부와 가족들간의 여러 가지 중복적인 차원들을 무시할 때 만, 그리고 이른바 핵가족의 소위 핵에만 주목할 것을 고집할 때만 설득력이 있을 뿐이다. 경험을 내세우는 숱한 소망 섞인 생각들은 수백만의 이혼이 사회구조와 가족 구조에 얼마 나 커다란 격변을 일으키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계속 핵가족을 중심으로만 생각하여 무수한 자료를 들이밀며 핵가족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가족 연구는 언젠가 맹목적 경험주의 의 다른 기묘한 생산물들과 함께 폐기 처분되고 말 것이다. 이브의 두 번째 사과: 강요된 남성 해방 여성 해방이 모든 이의 입에서 오르내리다 못해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가족들의 모임에서조차 밤새 열띤 논쟁으로 분출하고 있는 반면 남성들이 이전까지의 역할에서 벗어 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거의 화제도 되지 않는다. 물론 누구나 중년에는 위기를 겪는다. 또 장발의 남자들, 섬세한 남자들, 독신남 집단들, 동생애 클럽들이 존재한다. 지금 은행 광고에 서는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는 아버지가 주연을 맡고 있다. 그리고 이제 페니스와 직업과 로 켓 간의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해 졌다. 이것에 대해 다시 뭐라고 한 마디 하는 것은 이 주제에 관해 무수히 쏟아져 나와 있는 문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일 뿐 이리라(Simmel 1985; Ehrenreich 1984; Goldberg 1979; Pilgrim 1986; Theweleit 1987; Brod 1987; Hollstein 1988). 하지만 이렇게 깊이 금간 남성적 껍질이 과연 제거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제거될 수 있 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며, 또 어떤 남자가 자기에 대해 그리고 생활 속의 자기 역할에 대 해 생각해 본 후 강제적인 남성성 또는 이와 반대로 사전에 규정되는 부드러운 여성성(이것 은 여성의 소망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을 모두 피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도 마찬가지다. 설상가상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려는 시도도 거의 없었는데, 아마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마 여성 해방을 모방하거나 반대로 뒤로 물러나 이 운동의 기묘함과 과잉됨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남성들이 아직 스스로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표시이리라. 여성운동을 불타오르게 하는 남성 이미지는 가부장적 압제자, 섹스 기계, 과학에 눈먼 환 경파괴자에서 기죽은 남편, 정서적 절름발이, 정자 기증자, 애나 똑같은 가족의 부속품 사이 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이처럼 이상화된 부정적 모습을 일부라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헤겔이 발전시키고 마르크스가 세련화시켰으며 지금 여성운동이 남성과 여성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주인과 노예 이론은 일련의 이유 때문에 전혀 정확하지 않으며, 또 그런 적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성 분할에 따르면 남편은 집에서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만 주인일 뿐 집 에 임금을 가져오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 그가 가족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허 깨비 같은 지위는 종속적인 임금 노동자가 되는 것을 감내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 다. 많은 경우 전설적인 가부장들은 그저 묵묵히 또는 투덜투덜대면서 자기 관심이나 의구 심은 억누르고 상급자의 요구에 알아서 기어 왔으며, 여전히 지금도 그러하다. 월급을 주는 조직에 대한 복종, 직업적 이기주의, 경쟁과 출세에 대한 관심의 이면에는 가 족에 대한 관심이 자리잡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가족 감정'은 가정에 대 한 헌신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집안 살림의 물질적 형태를 이루는 직업에 스스로를 종속시 키는 데서 나타난다. 그의 운명은 일종의 이타적인 자기억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이익이 아니라 집에 먹여 살려야 할 굶주린 입이 있기 때문에 연이은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다. 남성의 권력과 욕망은 노동 세계의 미치광이 같은 경쟁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서 남성은 지속적으로 성적 만족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서 남성은 지속적으로 성적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길로 곧장 달려나갈 수 없었다. 오직 부부 의 침대 속에서만 그리 비밀스럽지 않은 충동이 재촉하는 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할 수 있 었다. 하지만 부부의 침실로 이르는 길은 공장의 문을 거쳐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신체적, 상징적 부담을 떠 안아야 했다. 남성의 이상적인 행동은 성적 충동에 저항하고, 그 것을 승화시켜 내고,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기능을 습득하며, 얼굴이 없는 익명의 고용주에 게 맞춰 구성된 조직 기구 속에서 자리를 찾는 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고 나서야 비 로소 소외된 인성, 부드러움, 사랑, 성적 욕구를 추구하고 발달시킬 수 있다. 남성 문화는 억 압하고 억압되는 문화이다. 왜냐하면 남성 문화는 추상적일 것을 전제하며, 일에서의 성공을 최우선으로 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남녀의 관심과 정반대이며 지발적인 사랑과 도 반대되는 것이다. 결국 매일매일 진절머리나는 일을 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이다. 일은 일이다. 그뿐이다. 주인-노예 개념이 양성 관계에는 얼마나 부적절한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주인에게는 노예가 필요하지만 여성 해방의 시대에 남자는 더 이상 여자에게 의존 하지 않으며, 좀더 정확히 말해 더 이상 아내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양성 사이에서 진 행되어 온 권력 투쟁에서 남성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아주 패가 좋다. 섹스와 사랑이 더 이상 결혼과 물질적 부양에 속박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남성은 원한다면 "사랑과 섹 스는 예스, 결혼은 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여성 해방의 대 의를 촉진하는 셈이다. 직업 없는 여자를 평생 먹여 살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파 트너가 직업을 갖도록 해야 하는데, 따라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하는 것이다. 즉 여자 쪽 파트너의 재정적·사회적 독립이 하나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 게 부림을 당해야 하는 오랜 멍에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여기서 남성 해방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따라서 그것에 대해 아 무 말이 없는 것이다. 남성 해방은 남성에게 강요된 부정을 향유하는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 들이 주부와 어머니 역할에서 탈출하듯이 애써 적극적으로 탈출해서 노동이나 과학, 정치와 같은 또다른 세계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이미 자기 뒤에 이 모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 그런데도 성적 자유와 직업적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에 힘입어 여 성들은 남성들을 이전의 의무에서 해방시켜 왔다. 아마 남성 해방은 여성 해방이 전혀 의도 하지 않은 하나의 결과일 것이다. 남성들은 혼자서만 밥벌이하는 역할을 강탈당했다? 좋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성들이 더 이상 재정적 부양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들 도 성(sexuality)을 깨달아가고 있다? 좋다, 그렇다면 이것은 섹스는 결혼 속에서만 가능하 다는 원칙을 고수하던 여성들이 그러한 입장을 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방에서 모든 것 에 적극적인 여성들이 계속 늘어가고 있다. 우정, 성, 사랑, 애정은 더 이상 결혼 반지에 속 박되지 않으며, 이것은 여성들에게도 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남성들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해방할 때 자기만 해방하지 말고 남성 해방의 대리인으로서 그렇게 해 달라고 격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물론 남성들은 자신들 이 객관적으로는 이렇게 영리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지만, 남성들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역할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격려함으로써 어리벙벙하고 마음씨 좋은 구경꾼으로서 남성들의 자기 해방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다. 남성들 자신의 해방, 즉 혼자서만 밥벌이할 필요가 없 게 되는 것은 마치 저절로 굴러들러온 호박덩굴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최근에 두 번째로 이 브가 또 한번 사과를 선물한 셈이다. 여성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가져다 줌으로써 지금 늙은 '성주'의 역할이 부활되고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또 여성 해방에 분노하는 속 좁은 남성들 은 분명 자기 자신의 상황을 전혀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처럼 선물로 주어진 남성 해방(남성들은 이러한 행운이 불운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에는 당연히 흠집이 있다. 즉 여성 해방은 남성 없이 진행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남성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것은 뭔가 전혀 다른 어떤 것에 이식되어 있는 해방없는 해방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세계의 한가운데에 자신들이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 주위로는 페미니스트들의 총 구에서 피어오르는 화약 냄새가 휘감겨 오르고 있다. 대들보가 내려앉고 있다. 남자들의 남 성성을 기념사는 콘크리트 기념비가 무너지고 있다. 남자들의 남성성을 기념하는 콘크리트 기념비가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남자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며, 삶은 이전과 하등 다를 바 없이 행복한 척하는 것이 제일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힘을 동원해 서라도 말이다. 감추어놓은 힘이 얼마나 많은가. 역공을 취해 남자들을 그토록 심하게 다룬 데 대해 여성들에게 보복할 시간은 아직 충분한 것이다.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남성들의 짐이 여성들의 반란과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 다. 여성들 스스로도 밥벌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성공하자, 가능한 한 많이 벌자, "자, 해보지"등과 같은 남성들의 강박관념이 남성들 자신의 즐거움까지 포함해 모든 참된 즐거움 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남자들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 다. 분명 한때는 모든 것 - 출세하라, 참아라, 더 멀리, 더 멀리, 더 빨리 - 이 하나로 수렴되 었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이 갑자기 텅빈 공허로 돌변해 버리고 말았다. 가장 잘 알 듯 하면 서도 거의 모르고, 멋진 제복을 입었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저 멍텅구리 남자의 실체를 발가벗기고 발견하고 실감해야 할 것이다. 이제 뭔가를 알거나 느낀다는 것은 대륙횡단 여 행처럼 온갖 모험을 거쳐야 비로소 스스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이 되리라. 따라서 이것은 남성들이 거칠게 되거나 삶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가정과 직장의 메커니 즘들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음을 말해 준다. 모든 것을 뒤엎고 일상사를 의문시하고 조사하 고 질문하고 양보하지 않고 저항적으로 되고, 사사건건 맞서기를 고집할 수도 있으리라. 그 렇지 않으면 다만 썩고 상하고, 늘 그랬듯이 기생충이 되고 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 사 노동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청결에 신경을 쓸 일은 아니게 된다. 남자가 침대 밑의 먼지 까지 신경써야 하는가? 아마 약간 더러운 것이 좋을 것이다. 양말에 구멍이 하나 정도는 뚫 어져 있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아마 치즈 샌드위치 부스러기와 더러운 포크에다 아무데나 내팽개친 반바지는 오히려 예술에 가까울 것이며, 예술가인 보이스(Joseph Beuys)라도 이러 한 조합을 부러워했으리라. 아마 그의 「끈적거리는 방구석」은 아름다움과 가사에 대한 남 성들의 생각을 서투르게나마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착수하라, 시도하라, 더러운 시트를 쌓아두어라, 싸워라, 웃어라, 질서로부터 고작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잠복하고 있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살아가라, 그저 살기 시작하라, 결코 다시 멈추지 마라. 남성들은 이런 식으로 앞으로는 현실에서는 이러한 세계에서 살겠 지 하는 희망적인 관측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런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을 전혀 모르고 있다. 아무튼 이것만큼은 사실일 것이다. 즉 이른바 '젊은 성인 남성들'은 직업 훈련을 받지 않 은 여성과의 남성들의 여성 해방에 대한 태도와 전략을 바꾼 것 또한 사실이다. 즉 남성들 은 개방적이고 아주 관용적인 척 하는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이 흘러간 옛노래가 되었지 만 벌써 구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중심점이 발견되어 고정되었다. 즉 아이, 그리고 아울러 '없어서는 안될' 어머니가 그것이다. 여성 문제를 어머니와 아이 문제로 바꾸어 놓음 으로써 -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 많은 남성들은 이제 다 시 소파에 기대어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부모되기가 분열되어 어머니되기가 아버지되기와 대립될 때는 앙갚음이 시작되는데, 이것은 아무리 늦어도 이혼 전에, 또는 이혼할 때 그리고 이혼 후에 진행된다. 이 때가 되면 남자들은 문득 부성애를 다시 발견하곤 그동안 가족과 함께 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고, 또 결혼 중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것이 었는데 말이다. 지금까지 아주 기분좋게 누려 왔던 불평등이 역전되면서 아버지는 이 역전 된 불평등의 희생양이 된다. 이제 법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어머니가 모든 것에 대해 발 언권을 갖게 되며, 아버지는 어머니가 허용하는 것만 해야 한다. 그러나 법률은 보통 거의 아무것도 허용해 주지 않는다. 아버지가 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혼한 아버지가 되기는 확실히 더 어렵다. 모든 것이 이 미 너무 늦어 버렸을 때 아이로 상징되는 가족은 희망과 구체적인 노력의 중심이 된다. 아 이에게 많은 시간과 주의를 쏟게 되는데, 마치 결혼 중에도 틀림없이 그랬다는 듯이 말이다. "정말 그 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하고 말이다. 남자는 이혼하면서 아버지로 서의 감정에 직면하게 된다. 또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방의 목적이 달아나는 순간 에야 뒤늦게 깨닫고서 비탄에 빠지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그에게 등을 돌린다. 서서히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 의지할 곳 없음을 느끼며, 법률이 정한 시간말고는 아이와도 만날 수 없게 되며, 새로 깨닫게 된 부성을 전혀 부당하게 가두고 있 다고 여겨지는 온갖 장벽들. 그의 분노, 고통, 쓰라림은 때로 이제 그가 낡은 사고 방식과 존재 방식을 떨쳐내려고 애쓰고 있음을 예고해 주는 충격파가 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늙은 아담은 불필요한 준재가 되었다. 남자다워야 한다 는 낡은 생각은 이제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아직 도 말끔히 포기하지 않은 데 있다. 남성들의 존재의 주춧돌인 노동권을 가질 수 있도록 여 성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를 만드는 일에서도 남편들은 정자 기증자, 의사, 시험관의 연합에 의해 경주에서 밀려나지는 않을까 두려워해야 하게 되었다. 성기에만 집착하는 남자들의 뻔한 섹스 이야기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은 나비처럼 훨훨 날아 가 버렸다. 남성들은 계속 허구를 먹고 살 수도 있겠지만 허구가 붕괴되고 어쩔 수 없이 사 라지게 되면 자유로이 새로운 존재 방식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가 이것을 알아차리 지 못했거나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해서 최근에 두 번째로 이브가 건네준 사과가 더 맛있지 는 않을 것이다. 결혼식 하객인 이혼: 결혼 계약서 핵가족에 만연해 있는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동시에 일반적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이 얼마나 까다로워졌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와 정반대 사실도 진실이다. 이미 심한 긴장 앞에 노출되어 있는 핵가족은 거기에다 또 온 갖 공적 의무라는 큰 짐까지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끔찍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 만 핵가족이 나라의 쓰레기 더미 취급을 당하면서 온갖 방식으로 오용되고 있는 것 또한 분 명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교사 부족을 메우기 위해 아이들을 집에서 가르쳐야 하는 사실을 언급할 수 있으리라. 또 오염된 공기와 물 그리고 음식물에 들어있는 온갖 유해 물질은 가 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모의 일, 특히 어머니의 일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는 사실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서로 공모하고 있는 당국, 전문 가, 산업체들이 주방에 쏟아내고, 내던지고 뿜어내는 모든 것을 식단에서 제거해야 하기 때 문이다. 아이를 언제 얼마나 낳을지도 일일이 계획해야 하고, 직업과 사회보장 조항에 일일 이 맞추어 아이들을 키워나가야 한다. 실업 급여가 바닥나면 가족이 생계를 떠맡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동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시장이 요구하는 만큼 이동할 뜻이 없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일자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몇몇 권리를 잃게 된다. 현대의 약장에는 이러한 '작은 질병'을 다스리고 이 가족 속의 '감기'를 다스리는 약이 있 는데, 협약, 계약, 대책, 상담이라는 약을 복용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가정의 평화를 가져와 야 할 이 저울이 그러나 불확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계획, 추측, 논쟁이 불가피하다는 점 이다. 이 약은 오히려 그것이 고친다고 주장하는 질병의 일부임이 드러나고 있다. 가족은 이 제 더 이상 정서적 안식처가 아니며 어떤 사람의 다른 자질을 자랑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깥 세계와 똑같이 규격화되어 있을 뿐이다. 연인들 사이의 계약은 사랑의 값어치 를 떨어뜨린다. 혼전 협약은 결코 현대의 새로운 발명품이 아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부와 권리의 분배 에 관한 복잡한 약조를 맺는 것이 관습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처럼 파트너들간의 관 심사가 아니라 가문의 책임이어서 신부의 아버지는 결혼지참금을 준비하고 신랑과 그의 가 족은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재상을 제공해야 했다. 이러한 결혼 협약의 의미와 제반 사항 은 현대의 결혼 협약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이혼의 결과를 조절하고 일상 생 활의 규범을 세우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일종의 붐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얼마나 불편해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서류에 예비책이 많이 들어있을수록 심연으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서명자들의 두려움은 더 커지게 되어 있는데, 역설적이지 만 이러한 협약은 이러한 심연에 다리를 놓아 주기로 되어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혼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혼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규 칙이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혼이 본인이나 사랑하는 친지들에게 언제라도 닥칠 수 있 는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이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시 다음 번 항해에 나설 때는 침몰한 정기선의 생존자처럼 구명조끼를 입을 것이다. 이 구명 조끼가 바로 바로 양 당사자들이 서명한 혼전 협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배가 침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며, 그저 쉽게 예상되는 손실을 아주 덜 참혹스럽게 만들어줄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성인으로서 이혼의 비참함을 겪거나 아이 때 부모가 이혼한 씁쓰레한 경험을 한 사 람들이 마치 정치인들이 제휴 관계를 맺는 것처럼 새 파트너와 협상을 시작한다고 해서 과 연 놀랄 일인가? 끝은 새로운 시작의 후견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문제는 뻔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커플이 혼인신고를 하러 등기소에 가기도 전에 결혼 시절 과 결혼 후에 나타날 수 있는 온갖 까다로운 문제들이 쏟아져 나온다. 누가 무엇을 갖고 누 가 누구에게 지불하는가가 주된 문제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으나(종종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에 대한 싸움도 미리 한바탕 치루어야 하며, 그래서 이혼할 경우 각자가 무슨 권리를 가질지를 명기하고 이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다툼을 차단하기 위해 자녀 양육 방법 에 대해서도 협약을 맺는다. 그리고 같은 취미를 가질지 말지, 휴가를 가는 것, 그리고 특히 까다로운 문제로 각자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 등에 관한 계약이 체결된다. 계약을 맺는 사 랑하는 파트너들이 다음과 같은 방침에 따라 서로의 야망을 후원하는 데 동의하는 것은 흔 한 일이다. 즉 내가 당신이 출세하는 것을 도와주면 당신도 내가 가사에서 벗어나 적절한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방침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보다 훨씬 더 상세한 내용까지 나간다. 구두를 닦는 것부터 아침밥을 짓는 것에 이르기까지 가정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섹스 행위에서는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 누가 이사 준비를 할 것인가? 아이들은 언제 낳을 것인가? 누가 아이들을 돌 보며 누가 두 가지 일을 함께 할 것인가? 이 모든 것과 훨씬 더 많은 것이 공증인이 공인해 준 구속력 있는 협약서를 통해 명기될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커플들이 부부 싸움 중에 온갖 오해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이러한 서류를 자세히 뜯어보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아주 냉정하게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는 규정하는 것은 뼈아픈 일인 동시에 상당히 역설적인 일이기도 하다. 두 파트너는 일단 이혼하기로 합의하면 통찰력을 발휘해 본인들이 나 다른 사람들, 특히 아이들 앞에서 이혼을 야단스럽게 만들지 않기로 약속한다. 이혼을 '삶의 자연스런 파생물' 로 보고 이혼을 앞에 놓고 다투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Partner 1984: 128). 어떤 이들은 심지어 결혼식 자체보다 훨씬 더 큰 파티를 열어 이혼을 축하하기 도 한다. 이러한 '우호적 이혼'이라는 이 허위-문명적인 생각 뒤에 정말 어떤 감정이 숨어 있을지 의아할 정도다. 계약 결혼 -'감정의 계약' -은 분명히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이 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이러한 계약 자체의 해소를 촉진하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전에는 결코 교환될 수 없었던 이익들이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제공되는데, 이 때문에 파트너들은 이해 관계의 불일치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임이 드러나자마자 서로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종류의 자발적 계약 아래 시작된 결혼의 과정과 지속 기간을 연구한 것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런 결혼은 다른 결혼보다 끝내기가 훨씬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당사자들은 결혼을 더 일찍 끝내자고 생각하게 된다. 이리하여 결혼은 서로의 욕구를 일시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소작지로 바뀌는 것이다. 가족을 '치유하고' 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이와 다른 시혜도 있는데, 현 대 사회는 이를 이용해 자해로 인한 상처를 미봉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주부들에게 저급한 직무를 보상하기 위해 번지르르한 임금을 지급하라고 외치기도 한다. 독일에서 결혼하는 것 은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극소수의 지위 중의 한이다. 아 마 우리는 결혼 자격증 수여로 끝나는 훈련 과정을 설치해야 될지도 모르겠다(이것은 실직 교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부부 싸움에도 새로운 특질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하여 두 명의 서투른 심리치료사들은 심리학적인 반- 진실로 서로에게 우아하게 상처를 입힐 수 있 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가족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는 난관 중의 한에 빠 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혼 카운슬러의 동정심이나 각종 광고지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패턴은 항상 똑같다. 냉혹하고 험난한 바깥 세상이 정반대가 되어 주기로 한 것, 즉 가족 은 예측가능하고 관리가능한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가족 생활에 대한 무슨 정치적 개혁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결혼하는 데 따른 '안전상의 위험'이 이에 대한 보험으로 상쇄됨에 따라 아주 느리게 차츰차츰 이루어져 왔다. 이것은 아주 당연하다. 정치 적 참여도 유토피아에 대한 대망도 모두 더러운 접시를 깨끗이 닦아내지는 못하여, 파트너 의 저항을 물리치고 다른 파트너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못한다. 이혼이 늘 어날수록 계약도 많아지고, 따라서 더 많은 이혼이 일어나는 식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것 이다. 결국 사랑은 한때 거처와 안식처가 되어 주던 곳과 대립하게 되고, 변덕스럽게 되며, 스스로 소진되어 가는 것이다. 조립식 블록처럼 된 부모되기: 유전 공학과 자식 설계 최근까지 가족은 자연의 산물, 즉 사회적,물질적 유전 관계를 결정하고 친족 관계를 수립 하는 등의 혈연 관계였다. 그런데 이제 인간 본성의 자연적 기초가 출산 의학, 기관 이식, 유전 정보의 해독을 통해 기술적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족에 새삼 관심이 집중되 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연이라고 알려진 우리의 환경이 계속 시들어가고 위기에 빠지게 된 사실에 훨씬 더 커다란 주의가 기울여지는 바람에 비자연적 세계를 산출하고 있는 생명 과학의 믿을 수 없는 승리는 거의 제대로 간파조차 되지 않아 왔다. 그런데 지금 자연과 가 족 간의 오래된 연결 고리가 끊어지고 있는데, 그 결과는 겨우 질문의 형태로 단지 추측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지금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에 대한 사고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지고 있다. 첫 번째 생각에 따르면 어머니되기와 아버지되기에 개입한다는 원리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계몽주의 이래 인간은 자연을 길들이려 노력해 왔다. 이를 위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 는 것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설령 우리가 지금 인간이 만들어지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항상 상당한 위험 요소를 내포하 고 있지만 또한 인간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테크놀로지 옹호자 들은 주로 선천적인 질병을 배아 발생 전에 치료할 수 있으며, 더 많은 불임 부부들에게 자 기 자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더욱이 자연적인 부모되기는 사회 적,법률적 부모되기와 오랫동안 결합되어 있었지만 아이가 생물학적 부모와 함께 성장할 확 률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다른 견해는 나도 동의하고 있는데, 세상은 언제나 그러했다고 주장하며 일반화 속으로 도망치는 것은 당혹스러운 문제에 대답하지 않고 새로운 기법을 동원해 문제를 은폐하려는 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질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 것인지 동물 의 것인지가 도저히 구분되지 않는 실험실, 또 마취제 없이도 한 사람의 성격을 바꿀 수 있 으며 굳이 배아 발생 전의 세포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실험실에서는 새로운 차원이 아직 눈에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새로운 차원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중 나선, 게 놈(genome)분석, 유전자 교정법, 양성 수정과 단성 수정 등이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 을, 즉 이전의 모든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어머니되기와 아버지되기의 인류학적 상수들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처럼 획기적인 변화는 아마 세포와 세포핵을 다루는 생물학과 화학에서는 그리 잘 드러 나지 않겠지만 이 새로운 테크놀러지가 가족과 친족 체계에 초래하거나 앞으로 초래할 결과 들 속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때 동일한 것이었던 사회적 부모되기와 생물학적 부모되기는 일련의 단계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자연적 과정으로부터 시작해 조립식 불록처럼 다양한 구성 요소를 결합해 나간다. 입양이나 이혼도 다른 방식으로 생물학적 부 모되기와 사회적 부모되기의 고리를 끊고 있지만 지금까지 가족 단위 안에 철저히 봉쇄되어 왔던 인간의 잠재력을 증폭하고 선별하고 있는 의도적인 기술적 조작이 수반되고 있는 점에 서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가족 사회학에 대해서는 양날을 보여준다. 사회적 부모되기는 생물학 적 구속에서 풀려나와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다. 즉 부모가 되는 것과 아이를 갖는 것이 두 가지 분리된 현상이 되어 서로 독립적으로 조직될 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측면을 정자와 난자를 결합하고 선별하는 것과 관련되는 반면 부모가 되는 것을 그 나름대로 존재하며 재 정의 되어야 한다. 기술적으로 재생산과 가족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병원에서 처 리하거나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발된 특정한 여성 집단에게 대리 분만을 시킴으로써 말이 다. 이 말은 과학적 허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른 한편 부모되기가 더 이상 유전적 구성에 제한되지 않게 되면서 우리의 상상은 우리 곁에 음울하게 달라 붙어 있는 반면 현실은 먼 곳으로 달아나게 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머지 않아 아이의 성별을 결정하거나 아이의 외모와 있을 수 있는 질병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배아 이식, 시험관 아기, 쌍둥이나 세 쌍둥이를 가지기 위한 약, 정부 감독 항에 전문가가 운영하는 전문 영업소에서 냉동 보존된 배아의 구매 - 이중 일부는 이미 정상적 인 것이 되었으며 다른 것도 시간 문제일 뿐이다. 아기가 시험관에서 양육될 수 있다면 모성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모성을 항상 자기 실존의 일부로 간주해 온 여성들에게 이것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신 생아의 아버지, 형제, 자매, 삼촌은 과연 누구일까? 이미 자기 배아를 냉동 보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직업 상황이 안정된 후에 낳거나(미국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어 머니에게 배아를 이식해서 임신가 출산을 맡김으로써 어머니와 할머니가 같은 사람이 되고 그 아이가 어머니의 자매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 왜 그럴 수 없겠는가? 누가 이런 시도를 (최종적으로)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누가 봐도 두 가지 이점을 약속해주는데도 말이 다. 여성들은 자기 직업에 충실할 수 있으며, 아이들을 인구 수치에 따라 조절해 시장을 만 족시키고 연금 수해자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수의 임금 벌이가 존재하도록 보장할 수 있 을 것이다. 아,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문제들은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재생산 의학에 종사 하는 의사들은 일이다. ...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다만 고통을 덜자는 것뿐이다. ... 당신은 할 일이 없다. ... 강제도 없다. ... 이 테크놀러지는 그 자체가 아주 중립적이며, 중요한 것은 단지 일에 신중을 기하는 것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용은 막아야 한다. 우리의 법률체계 와 책임감 있는 과학자들이 이것을 보장해줄 것이다." 잠시, 전혀 그럴 듯하지 않은 이 예측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다. 이 테크놀로지의 밀물을 막는 법률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사실은 전혀 없다). 갑자기 양편이 상호 선의와 존중 속에 서 아무도 상대방에게 호통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에서 찬반 토론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전혀 비현실적인 이러한 접근법은 환자에게 선택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구실 아래 탈-가족 사회의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보여준다. 멈출 수 없는 현저한 의학적 진보가 가족 생활의 새로운 설계에 기름을 부을 것이며, 유전학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입법이 이를 축봅해 줄 것이다. 그 결과 부모되기가 자연적 과정과의 연결 고리를 잃어버리고 생물학이 제 마음대 로 날아올라 과연 어디서 경계선을 그을 것인지 그리고 사회는 언제 스스로를 보호하는 노 력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혁명은 전혀 정부의 개입 없이, 법률 초안 없이, 의회에서의 어떠한 논쟁이나 투표도 없이 그저 의학적 진보의 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 진찰에 급여 를 지불하는 우리의 공공 의료보험체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이것만큼은 아주 분명하다. 즉, 유전 공학자와 연구자들은 이 결과에 책임이 없는 것이다. 지금 이용가능해지 고 있는 광범위한 성과를 이용할지 않을 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사회뿐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렇게 하고 싶을 것이다. 먼저 실제로 선천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다음에는 건강을 해쳤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은 다른 모든 서비스와 상품에서의 최적 보상 범위와 일치한다. 일단 이것이 시장에 등장해 재 중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개인적 소망과 욕구를 일깨우게 되면 수요가 발생하고 사용되는 상품이 된다. 윤리는 소피자의 욕망에 대항할 지탱력을 갖고 있지 않다. 혹시 자기가 아프거 나 불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먼저이고 우생학에 대한 두려움은 그 다음이다. 목구 멍이 포도청이지 도덕적 고려는 그 이후인 것과 마찬가지다. 위대한 공적, 다방면에서의 현 대화는 다음 세대에서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다음 세대에 대한 한 세대의 책임은 다음 세대가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에 국한될 수 없다. 부모의 의무는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될 때 시작된다. 모든 혈우병 환자는 보험료 납부자들의 공동체에 짐이 되므로 발생기의 모든 태아는 32개 세포 단계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을 것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이 진단되면 낙태시킬지 아니면 개선, 즉 태아 요 법을 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선천적 질병에서 멈춰서겠는가? 결국 부모의 소망이 고려되어 태아에게 전달될 수 있다. 아이가 금발인지 갈색 머리일지, 약간 땅딸막하 거나 작을지 등 이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될 수 있다. 아무튼 다른 누군가와 만나 전통적인 체위를 거치는 독신자도 이러한 기술 서비스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Gavvert 1988: 87, 89-90). 유전학적 파라다이스에서 이러한 사태는 사람들의 생각, 믿음, 두려움에 따라 곧게 펴질 - 만년의 칸트가 언젠가 인류에 대해 묘사했던 - '휘어진 막대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랑과 재생산, 부모되기와 애정을 분리하고 나아가 각자에 고유한 영역과 제도를 나누어주는 것이 아주 매혹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결혼해서 운에 따라 아이를 갖는 옛 방법으로는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특히 더 호소력이 있을 것 같다. 소실점과 시험적인 정체성: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넘어서 당신과 우리 둘다 뭔가를 자유롭게 원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게되면 우리는 원하는 대 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우리가 "꿈을 잃어버린 불행", 즉 유토피아를 상실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소망하는 법을 잊어 버렸다. 우리는 전통을 그리고 전통이 표상하는 희망을 벗어던져 버렸으며, 지금은 희망의 기억, 또다른 길에 대한 기억, 초월적인 목표까지 벗어던지고 있다. 다른 이들은 이를 위해 대상과 국민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첫째, 유토피아는 사라져 버렸고, 둘째,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가 되었으 며, 섯째, 계몽된 평균적 유럽인들은 무엇을 소망하기에는 너무나도 계몽되어 버렸다. 아니 잃을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를 정말 위협하는 상실이 어디서 다른 모든 것을 그늘지게 하 고 있단 말인가? 오늘날 희망이 없고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사방에 만연해 수많은 사유의 시도를 마비시키 고 있다고 해서 상상력을 이용하지 말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희망이 없다고 느끼려면 비밀스럽게 모든 것이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 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되 전혀 다르게, 탐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해방적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하에서도 약탈이 있을 수 있듯이 패배주의가 공인된 상황에서 는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으로 대응하는 상상력, 그리고 사실에 입각하라는 엄격한 요구에 억제되지 않는 상상력에 기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 좁게만 생각하고 있으 며, 이것이 창조적 발상에 조종을 울리고 있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다른 누군가와, 그것도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롭게 공유할 수 있으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무엇이 실행가능한가를 생각하지 말고 아주 자유롭게 대답해 보자. 유토피아도 일정한 순서에 따라 조직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두가지 측면을 구분할 만하 다. 우선 이 절에서는 서로 사랑하려는 시도를 뒤엎는 외적 요인들, 즉 불평등, 이동, 자아 추구를 살펴 보기로 하자, 다음 절에서는 탈전통적 사랑에 고유한 혼란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것이 사랑이라는 세속적 종교를 다루는 6장의 주제이다). 단순한 문제에서부터 출발해 보기로 하자. 같은 철로를 달리기로 되어 있는 두 개인의 일 대기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현대 사회는 유목 사회이고 우리는 일상 생활, 휴가, 직업생활에서 늘 이동 중에 있으므로 우리를 좀더 안정된 리듬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브레이크를 찾아야 한다. 경제 성장을 제한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동성을 제한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덜 바쁘고 더 자기충족적으로 되는 방법을 되찾는 것은 우리의 사 회 생활을 개선하는 거대한 일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통량 따위를 조절하는 것과 함께) 아주 사회민주적이고 아주 혁명적인 어떤 것을 최고 의제로 올려놓는다. 우리는 노동을 소득과 분리시켜야 한다. 부유해진 사회 라면 적어도 이전의 모든 사회와 시대에서 비롯된 명령을 포기하는 것을 꿈꾸어야 하며, 생 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방향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서는 시민들의 연금과 급부에 관한 논쟁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회 보장과 급료 봉 투를 분리해서 적어도 가끔씩은 사람들이 일할지 말지를 결정하게 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일자리를 위해 가족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하는 에움길이 단축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함께 살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곳을 마련될 것이다. 두 파트너가 종종 방향 감각을 잃게 되는 사적인 영역에서는 성적 불평들이 단지 관련 당 사자들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피상적 쟁점이 아니라는 사실이 종종 간과된다. 이처럼 근본 적인 불평등은 사실 산업 사회의 태생적인 특징이며, 가정 안팎의 노동에 대한 산업 사회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현대저거 변화와 반동적 구조간의 모순에 기초에 있으며, 이러한 모순은 단순이 사람들에게 가족이냐 직업이냐를 선택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다. 현재의 위계질서를 영구화시키는 압력을 받는 한 양성은 겨코 평등해지지 못할 것이다. 유일한 출구는 산업 사회의 전체 구조를 다시 생각해 만족스러운 사생활에 대 한 사람들의 욕구를 고려할 수 있도록 이 구조를 재조직하고 성 장벽을 넘어 새로운 균형을 찾는 방법뿐이다. "핵가족으로 되돌아가자"거나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갖도록 하자"는 거짓된 대안 대신 제3의 대안을, 즉 사회적 동물인 우리의 욕구가 인정되고 충족될 수 있도록 시장 요건을 제한하고 완충시킬 수 있는 제3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제1장에서 소묘된 해석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가족이 개인들의 공동체가 됨에 따라 제2의 역사적 일보 속에서 생산과 사적인 욕구는 가족 내에서 분열된다. 틀림없이 돌출되게 되어 있는 어려움들은 부부가 협약을 맺어 함께 사는 동안 이 두 기능을 결합할 수 있을 때만 해결될 수 있다. 이사 준비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우선 이사에 따른 몇가지 해로운 효과를 덜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사하는 사람은 개인(보통 남성)이며, 아내를 포함한 가 족은 그의 뒤를 쫓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당연시되어 왔다. 부부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은 장기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직업을 포기하거나 가족을 쪼개는 것 = 이것은 종종 이혼을 향한 첫걸음이 되기도 한다 - 인 것같다. 사회는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유용한 대안은 협력적 이동일 텐데, 이러한 노선에 따르면 당신이 그/그녀를 원한다면 당신 은 그/그녀의 배우자에게 훌륭한 제안을 마련해야 한다. 고용 사무소는 전체 가족을 위한 직업 상담과 직업 소개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기업과 정부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빈 말만 늘어놓지 말고 여러 조직을 포괄하는 협력적 고용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실제로 가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공헌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예컨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아카데 미의 취업 시장에서처럼) 몇몇 영역에서는 앞으로 (계속 집에서 살아도 되는) 일자리들이 축소되지는 않을지를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이나 인간 관계를 이유로 이사하지 않으 려는 것을 인정해 주는 법률 조항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직업의 만족도를 평가 할 때는 가족에 대한 위험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현재의 대량 실업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할 수 없 이 비현실적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효과가 이와 다른 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을 텐데, 예컨대 노동의 압력을 제공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이 증가할 것임을 뚯하며, 그리하여 노인과 병자에 대한 보호와 고용 시장을 분리시키게 될 것이다. 엄지 손가락을 죄는 고문 기구(노동의 압력을 은유함 - 역자)를 이처럼 느슨하게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복지국자의 각종 보장책, 노동일 축소). 대량 실업으로 인해 수백만의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지만 유연 생산(lean) 조직은 더 적을 직원으로 생산성을 향상시켜 왔기 때 문에 이 주체는 조만간 틀림없이 정부의 의제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가족 편에 서서 시장의 역동성을 후퇴시키는 것은 절반의 해결책일 뿐이다. 사람 들은 다시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어떤 규칙과, 과거로부터 물려받 은 어떤 지침도 없으며, 따라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은 관련 당사자들에 의해 합 의 되어야 한다. 이러한 합의에는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관계를 갖게 되면서 그에 저절로 따르는 관계들을 재보고, 이 관계들이 전통적인 가족 관계 속에 설치되어 있는 장벽 과 올가미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추구를 지원할 수 있는지 체계로서 어떤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를 찾아내야 것이 포함될 것이다. 우정과 같은 재미없는 개념도 부활되어야 한다. 사랑처럼 매혹적이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생각을 나누는 두사람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추구되는, 따라서 더 오래 지속되는 신뢰할 만한 파트너 관계로서의 우정 말이다. 헨리 밀러(Henry Miller)의 말대로 "친구는 당 신에게 인드라 여신처럼 수천 개의 눈을 갖게 해준다. 당신은 친구를 통해 무수한 삶을 산 다"(Sxhmiele 1987: 162에서 재인용). 우정은 그저 당신 뜻대로 되지 않으며 당신이 젊더라도 쉽게 오지 않는다. 우정은 시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대기를 위협하는 원심력에 맞서 조심스럽게 보호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부부가 모두 직업을 갖는 결혼과 비슷하다). 우정은 어려운 순간에 서로를 받쳐 주고 건설적 비판에 자기를 열어둠으로써 재삼 재사 새로워져야 하며, 공동의 생명선처럼 작용하여 서로의 혼란과 약점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한다. 지인관계는 이보다는 더 느슨한 형 식인데, 이런 식으로 서로를 얽는 것은 한계와 의심으로 가득 찬 개인의 일대기에 대해 안 전망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바꾸어 말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적합하고 삶의 비참함 과 광기를 피하기 위한 어떤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사항 은 특기할 만하다. 즉 가까운 동시에 독립적으로 되는 것,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이상으로 홀로 되어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인들의 사회가 되면서 옛날 식의 함께 살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있다. 대신 우리에게는 독립적이면서도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형식 - 두 파트너가 함께 시험하고 도 시 계획가, 건축가, 지주도 수용할 수 있는 - 이 필요하며, 그럼으로써, 각 파트너는 각자의 외딴 구석으로 침잠하거나 아니면 이와 같은 정도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기를 추구하면서 집단의 압력과 표준적인 삶의 패턴을 없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것은 어떤 탈산업적인 계몽의 첫 번째 징후일 텐데, 이것이 산업주의의 몇몇 파괴 적 특징들을 제거해줄 것이다. 자기의식, 공유, 인간에 대한 사랑, 신체, 자연과 다른 생물들, 동일한 차장 찾기, 자신의 발견, 홀로 시간 보내기, 논쟁, 허드렛일 하기 등과 같은 가치들에 새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항해를 동반해주고, 후원해 주고, 비판해 주는 친구 찾기. 이것들 가운데 특별히 새로운 것은 전혀 없지만 이것들은 산업화가 우리에 게 착륙시킨 굳게 고정된 가족 생활 패턴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있다. 자기를 찾고 이와 함 게 기획되고 시험적인 정체성을 찾는 것이 이전의 가족 역할에서 주어지던 엄격한 규범, 즉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 착한 아이가 되는 것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 겠는가? 한편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동하고 빈번히 일에 파묻히면서도 이웃이나 종족이나 지 역 사회가 아니라 가족을 사생활의 중심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해진 역 할에서 빠져나오기는 어렵다. 이 역할로 인해 가족 생활은 안정감을 부여해주는 힘이 되며, 뭐가 필요할지를 미리 예측할 수 있고 각자의 특질을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 다. 이러한 점에서 가족은, 우리가 우리는 누구인지(이것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하는 물음 과는 반대된다)를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데 이러한 추구는 실험과 인내심에 따라 크 게 달라질 것이다. 가족은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고 자아의 미지의 대륙을 찾아 방황하며 우 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자아들을 탐색하는 보이 스카우트단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 가족을 결혼과 교환하는 것은 한가지 덫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지만 곧장 다 른 덫에 빠지고 마는 얕은 수에 불과해 보인다. 가족이 성인들로 하여금 아이 같은 사람이 되어 허물을 벗고, 그리하여 마침내 가족 생활이 모든 가족 구성원을 위한 발견 프로그램의 되는 것을 가로막는 한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권리를 원한다! 케케묵고 낡아빠진 어른들에 맞서 차별을 타도하라!" 라는 외침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갈 것 을 촉구하고 있다. 가족을 개방적으로 만들어 가족 구성원들이 홀로 있기를 꿈꿀 수 있게 하는 것, 이와 동시에 정체성 위기와 결혼의 소용돌이보다 오래 갈 수 있는 우정의 망을 키 우는 것은 기대가 지나치게 부푼 결혼을 구제하고 이혼의 공황과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핵가족은 은근히 택하기 쉬워 보이는 프로그램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것은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보였으며, 그래서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되지 않았거나 적절히 대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야 복수를 당하게 된다. 훌륭한 전범으로 수용되고 공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새로운 모델, 즉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롭고도 생기있는 모델을 싹틔울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는 이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가능성들의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가족이 탈-부르주아 가족으로 대체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분명 잘못 일 것이다. 이미 우리는 다양한 탈 부르주아 가족을 갖고 있으며, 남녀가 다투고, 스스로 재 조직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자기 자신의 역동성과 신조 - 때로는 색안경 -를 발전시킴에 따라 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겨우 존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추구가 구체화 단계에 이른 것 같지는 않다. 미래에 적합한 새로운 생활방식의 창조는 아직도 거의 바뀌지 않은 옛 방식(일정하게 가사를 분담하는 동시에 일정하게 직장도 포기하는 것. 이러한 일은 종종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기도 한다)의 완강한 방어 때문에 저지되고 있는 것 같다. 사 람들은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열광하지만 자세히 보면 실제로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언젠가 삶을 자기 손안에 넣을 수 있는 그날을 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최초이 어려운 일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진정한 문제들에 직면하기는커녕 일상 생활의 세세한 일에 붙잡혀 있었다. 자유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지나간 기쁨이 짤랑거리는 색바랜 찌꺼기에 빠져 있으며 사소한 승리 따위에 탐닉하여, 성장과 춤과 오락의 잔치판에 취하고, 우리 안팎의 사소한 해 방 지대와 정점을 둘러싼 논쟁과 싸움에 빠져 지내고 있는 것이다. 함께 살기 위한 더 나은 방식을 가리키는 지평과 꿈들은 산업 사회 이전에 존재했던 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것들은 산업 사회 이전에 존재했던 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것들은 산업 사회의 산물 롤 사생활, 결혼의 어려움, 부모되기, 가족, 섹슈얼리티, 성 정체성 따위는 모두 단지 개인적 인 문제일 뿐이라고 산업 사회가 주장한 결과이다. 또 다른 세계를 위한 우리의 꿈, 이념, 설계는 결코 현재의 권력이 우리더러 가지라고 부추기는 투사도나 환상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가 개별적으로 저지르고 그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실수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상황 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즉, 우리가 철저한 갈망 속에서 지금 까지 발견된 어떤 탈주로를 통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상적 갈등에 시달리도록 만드는 바로 그러한 상황 말이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는 이 실수들은 정당하다. 향수에 어려 사생활의 매력을 미화하는 것은 수많은 개인들이 자기 일대기를 스스로 쓰기 시작한 사실 앞에서 무 익한 것임이 증명되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삶의 사적인 측면에서 출발하고 작고 사소한 일로 찾아오지만, 그래도 세 속성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보거나 밖에서 보면 사랑은 늘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들에, 즉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습관들에, 그리고 아울러 나와 너의 초상과 이것이 은 폐하고 있는 일반적 태도에 묶여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인격화되어 있는 물려받 은 역할에 묶여 있으며, 그/그녀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서 새롭게 시작하는 법이다. 즉 방황 하고, 길을 잃고, 시도하고, 시시덕거리고, 해내고, 식식거리는 질투의 뱀구덩이 속에서 일어 날 때, 뚫고 지나간 불길이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는 것에 놀랄 때, 고독이 친구와 기억, 책 속의 이상한 세계들에 대한, 그리고 마치 수면에 비춰지는 하늘을 보고서야 비로소 저기 저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호수에 대한 아늑하고 반짝이는 관조를 선물해 준다는 것을 발견 할 때 사랑은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이어서 함께 나누기 어려우며, 한 사람의 지각과 감수성 그리고 세계의 색깔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차원을 제공 해준다. 이것은 적어도 우리로 하여금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묻도록 자극해 주리라. 사물을 보는 이러한 방식,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 따르는 불확실성과 의미는 우리 시대의 사 활적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점차 제멋대 로 날뛰는 테트놀로지와 우리 주의에서 온통 죽어가고 있는 자연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 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