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유로운 사랑, 자유로운 이혼 해방의 얼굴 '영원히 당신만의 것'. 낭만적 사랑은 우리 사회의 중심축 중의 하나이다. 사랑하고 사랑받 는다는 즐거운 감정은 교회의 제단 앞은 아니라 하더라도 호적증기소로 우리의 발길을 이끌 고 결혼식에서의 서약대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평생 함께 하도록 도와준다. 하 지만 통계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상당수의 사람들이 혼자 살며, 그 수가 점차 늘 어가는 추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 생활에 적극적이지 않음에도 함께 살고, 또 많은 커플들이 이혼하고 있다. 이처럼 낡은 이상과 새로운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남녀 양성은 함께 하기의 안팎을 우왕좌왕한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결 과는 사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결혼 생활의 문제, 불행, 결별이 얼마나 많은 수고, 자원, 현금을 대가로 지불해 왔으며 앞으로도 또 얼마나 많이 지불하게 될지를 고려한 적도, 계산해 본 적도 없다. 뒷받침할 자료는 없지만 이제 결별은 경제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GNP의 만만치 않은 부분을 집어삼키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개인화는 항상 두 측면을 갖고 있다. 결혼이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매우 엄격하고 미리 예정된 일종의 장치로부터 두 개인 간의 자발적인 결함으로 변화하면서 두 사람이 얼 마나 사랑하느냐와는 상관없이 해결해야 할 새로운 종류의 불쾌함과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아니 좀 더 극적으로 묘사해 보면, 사랑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바로 그 순간 온갖 종류의 패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바로 이 역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를 추적하고 그 내적인 논리를 해독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소망하고 후회하고, 또 만사 불구하고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시작하도록 하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학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그 어떤 것도 단순한 우연일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현 대 세계에, 그리고 '자유'라는 모호한 개념 속에 내재에 있다. 어려움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원칙 자체에 있으며,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얻었지만 동시에 좋든 나쁘든 결과에 대한 책임 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시절: 의무와 확실성 사회사가들은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결혼은 두 사람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두 가족, 혹은 두 씨족간의 결합이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자신의 직관에 따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선택 범위는 지위와 재산, 인종과 종교 따위의 일정한 기준에 의해 미리부터 제한되어 있었고, 결 혼은 가족, 친척, 지역 공동체의 네트워크에 의해 조정되었다.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결혼의 주목적은 경제 단위인 가족의 번영과 생존에 기여하고, 일꾼이자 상 속자인 아이를 생산하는 데 있었다. 16, 17세기 영국 귀족의 사례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부모가 딸들에게 가장 강력한 압력을 행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딸들은 누구보다 더 의존적이었으며 따라서 집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며, 열등한 성의 구성원으로 취급되 었다. 그들에게는 복종 이외에 어떤 다른 대안도 없었다. 결혼하지 않은 것보다는 볼품없는 남편이라도 시집가는 것이 차라리 더 나았기 때문이다...16세기초에는 유언장과 결혼 계약에 서 어린아이들이 마치 가축처럼 거래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계급과 지역에서 아주 흔한 일 이었다...선택의 자유는 딸들만큼이나 아들들에게도 제한적이었다. 보호자로서의 권리를 행사 하고 싶은 바람과 계약이 지닌 재정적 중요성 때문에 아버지는 가족의 통제권 밖에서 결혼 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아들이자 상속자를 생전에 그가 선택한 여성과 결혼시 키려 했다. 아들은 대개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 마련이었다...재정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규제는 물론 상당한 강제를 포함했다. 전통적 결혼체계에서 가장 확실한 낙오자는 무엇보다도 출생시의 신분이나 성별에 의해, 혹은 사회적 지위의 결여에 따라 경 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이 체계의 규칙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유산, 지참금 규정, 재산 없는 사람들의 결혼 금지 등과 같은 법 조항에 의해 사전에 결혼에서 배제되어 버렸다. 이 체계의 또 다른 피해자는 적당 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는 남녀들이었으며,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가 족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 번째 부류의 피해자들이었다. 세계의 문학에서 '사랑과 음모'의 비극이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뒤쳐지지 않는 기품을 자랑하는 두 집안... 옛부터 내려온 원한이 새로운 소동을 낳는다... 숙명적으로 만난 두 원수의 자식들 불운의 두 연인은 목숨을 잃게 된다. 죽음으로써 부모의 갈등을 잠재운다. 전통적 규칙에는 분명히 개인적 소망을 위한 여지가 없으며, 그것이 가족의 소망과 다를 경우 가차없이 억압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들이 결혼이 일정한 안정감과 지속성을 주었 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은 가족과 지역 공동체지만 일단 결합이 성사된 다음에는 당사자들도 그것을 유지하는 일에 주력했고, 다양한 범위의 사회적 매커니즘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배우자 선택이 집안 배경과 지위에 따라 이루 어지는 경우에는 남녀가 중요한 측면에서 관습과 규범을 배우고 동일한 기대치를 공유하고 규칙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안전판이 있었다. 또한 남녀가 가족 농장이나 상점에서 함 께 일함으로써 서로 돕고, 함께 좌절과 위험, 가령 흉년이나 혹독한 겨울 등을 이겨내는 과 정을 통해 서로 더욱 굳게 결속할 수 있었다. 임호프는 이런 일이 농부 가족에게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특정 농장주와 그의 개인적 안녕이 아니라 농장 자체의 복지와 유지이며,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 사는 특정 가족의 생계가 아니라 가족의 계보, 즉 혈통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이 곳을 중심으로 세대와 세대가 거쳐가고 농장주와 농장주의 계보가 이어진다. 다만 농장주는 하나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 다. 그는 하나의 관념, 중심이 되는 기준점이지 하나의 자아가 아니다. 블릭슨도 비슷한 방법으로 한 귀족 가문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배우자들의 관계는 사적이지 않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사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거나 실망시킬 수 없다. 그들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은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생활 속에서 서로에게 지고 있는 의무를 통해서이다. 로한 공작 에게는 부인에 필적할 만한 어떤 여성도 없다. 다른 여성들이 아무리 아름답고 재능 있고 매력적이라 한들 그녀만이 이 세상에서 또 하나의 로한 공작을 탄생시킬수 있는 유일한 여 성인 것이다. 그녀가 받는 대접은 로한 가문을 위한 것이며, 그녀가 도와주는 농부들은 로한 의 농부이며, 로한의 불쌍한 백성들이다. 현대: 자유의 증대와 안전의 감소 사회사들에 따르면 농경 사회에서 현대의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게 취하는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족 집단의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고 한 평생 같이 사 는 사람들의 권리는 강화된 것이다. "서로를 택하는 것은 개인들이지 더 이상 연합하고 동 맹하는 가족들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선택이 언제나 운에 좌우되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이러한 변동이 일어난 초기에는 사회적 배경, 개인 재산, 교육과 종파가 여전히 결정적인 역 할을 했다. 낭만적 사랑도 은밀하게 사회적 규칙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세기 동안 밖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던 쪽에서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자 유를 갖게 된 쪽으로 저울추가 옮겨간 셈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적절한 짝짓기에 대한 생각은 네 개의 연속적 단계를 거쳐 왔다. 첫 단계에서는 자식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부모들이 알아서 결혼을 성사시켰다. 두 번째 단계에 서는 부모들이 여전히 다리를 놓긴 하지만 자식들이 거부할 권리를 가졌다. 세 번째 단계에 서는 자식들이 선택하고 부모들이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인 금세기에 들어서는 자식들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며 그들은 부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별로 엄두에 두지 않는 다. 이처럼 낡은 질서의 붕괴와 함께 마치 뭔가 근사한 것, 즉 외부의 의무와 책임에서 완전 히 자유로운 어떤 개인적 행복이 발견된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미리 정해진 기준 에 따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남녀간의 결합을 정해주지 않는다. 계급과 지위의 장벽을 이 겨내고 마음의 언어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는, 헌신적인 두 개인간의 친밀하고 대단히 개인적인 만남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동화에서처럼 아름답게 끝나도록 되어 있 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후 행복하게 살았더라.' 나를 위해 아침이 밝았다! 오, 어째서 우리 아버지들은 우리처럼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단 말인가?... 아버님들이 화해를 하시면, 나는 당당히 그대를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아그네스, 아그네스! 어떤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될꺼야. 오 그대는 우리의 즐거움이 얼마나 될지 헤아릴 수 있는지? 그러면 이처럼 잔뜩 부푼 희망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많은 희망들이 좌절에 부딪혔 다. 삶은 동화책 속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즈음 사람들이 사생 활에서 부딪히는 가장 큰 문제는 파트너와 어떻게 지내는가 이다."라고 지적한다. 인구학자 들은 통계를 살펴보고는 "이혼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진정한 관계를 맺는 법', '대화로 끝까지 가보기', '사랑을 던져버리는 법'에 대한 얘기가 분분하다. 좀더 심각한 연구자들은 '연속적 결혼'과 '할부 단혼'을 얘기한다. 상황은 정말로 역설적이다. 남성과 여성은 더 이상 가족에 복종할 필요가 없어졌고 예전 보다 훨씬 자유롭게 결혼하고 싶은(혹은 하기 싫은)상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아마 이 런 상황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쉽고 더 만족스러울 것이라 고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도 망치고 있는 것이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찾아서 현대적 삶의 특성 중의 하나는 종종 복잡하고 상호모순적인 수많은 선택지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우리 모두는 이 선택지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새로운 가능성을 동반하고 있는 급속한 사회적 변화, 전통적 결속들의 침식,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지리적 이동 등 다양한 요인들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영향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바리아 주의 산골짜기에서 태어 난 시골뜨기가 공부하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함부르크 같은 도시로 이주하고, 이탈리아의 가르다 호수 옆에서 휴일을 보내고, 말년은 마조르카에서 보낼 계획을 구상할 수 있는 시대 가 되었다. 이는 우리 가자가 예전보다 더욱 더 삶의 골목골목을 더듬어 길을 찾아가면서 우리의 정 체감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학자는 심리학자들이 확인해 주듯이 우리의 '사 랑-삶'은 이러한 사실 때문에 아주 중요해진다. 앞에서 묘사한 대로 우리의 현실관과 자기 존중감은 대체로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것인 새로운 종류의 긴장을 불러오리라는 데 대해 그리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유 롭게 파트너를 고르고 가족, 친족, 혹은 씨족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둘이 함께 하나의 세상 을 건설할 수 있다고 하자. 이것은 자유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상당 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체계에서는 커플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 도록 기대될 뿐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버거와 켈너는 이러한 과업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과거에 결혼과 가족은 그것을 더 큰 공동체와 연결하는 관계망 속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 었다...개별 가족의 세계와 외부 공동체 세계 사이에는 장벽이 거의 없었다...하나의 동일한 사회적 삶이 집, 거리, 마을 전체에 고동치고 있었다. 우리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가족과 결 혼 관계는 아주 넓은 접촉망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각 가족 이 해당 가족만으로 분리된 하위 세계를 구성하면서 나름대로 고유한 규칙과 관심사들을 갖 고 있다. 때문에 커플의 어깨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진다. 과거에는 새로운 결혼의 성사가 이미 확립되어 있는 사회적 패턴에 약간의 변화를 주고 말았지만 오늘날 커플은 그들끼리 자기들만의 사적인 세계를 창조해 내야한다는, 때로는 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과업에 직면 하고 있다...단 한번뿐이라는 결혼의 특성은 이런 과업에 투자하는 것을 특히 위험천만한 것 으로 만드는데, 왜냐하면 결혼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두 사람만의 개성과 이 개성이 갖는 거의 예측 불가능한 앞으로의 발전에 좌우되기 때문이다...짐멜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관계 중 가장 안정적이지 않은 관계 말이다...즉 오직 두 사람만으로만 구성되고 두 사람의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 관계에서 두 사람은 다른 관계들의 결여를 상쇄하기 위해 자기 영역 에 점점 더 많은 것을 투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드라마와 여기에 연관된 위험을 증대시킬 뿐이다. 이 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친밀한 관계를 한 사람이 일대기를 이끌어나가는 기준이 될 수 있는 일종의 항성으로 만들어주는 사회의 원심력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두 파트너가 같은 길 을 가는 것에 동의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과거와 달리 결혼 계약서에 사인함으로써 (사인조차 하지 않고 함께 사는 경우도 있다)하나가 된 두 사람은 서로 매우 다른 배경을 갖고 있기 십상인데, 여전히 두 사람이 족내혼의 법을 따르고 관례적 토대(사회적 지위, 종 교, 국적이나 인종)에 따라 파트너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인생사를 살아왔고, 이 때문에 두 사람에게서는 우선 순위와 바람들, 의사소통 방식과 의사결정 기술이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가 똑같이 동의하는 공동의 기획 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버거와 켈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두 명의 이방인이 함께 만나서 서로를 재정의하는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다...'이방인'이라는 개념은 물론 후보들이 아주 다른 사회계급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자료에 따르면 상황은 그와 반대이다. 낯설음은 예전의 결혼 후보자 들과는 달리 그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자랐다'는 사실 에서 비롯된다. 두 사람의 과거의 구조가 비슷하더라도 그들은 공동의 과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한 발 더 나아가 보자. 과거에는 배우자를 직접 선택하는 경우 무엇보다 가족의 소망을 거스르는 일이 많았지만 사회적, 지리적으로 인구이동이 점점 증가하는 시대에는 자유로운 선택의 원칙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대부분의 커플은 여전히 오래된 규칙을 따르고 있 지만 지역적,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사회적 지위나 종교 혹은 국적이 전혀 다른 사람을 선 택하는 사람들도 많다. 독일에서는 요사이 12쌍 중 1쌍 꼴로 국제결혼이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 특히 두 '이방인'이 함께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한 가지 관 심사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 정의가 요구하는 대로 어떻게 하면 서로가 상대방이 자 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 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때문에 자신의 과거와 뿌리를 직접 마주해야 하는 일이 있다 해도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와 다른 배경을 가진 파트너를 선택하는 일은 다른 문화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또한 낯선 세계의 두려움과 희망 그리고 사고방식과 사고의 지평 에 얽혀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결혼에 관한 미국에서의 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남녀가 공동의 집단적 배경과 공통의 문화 유산, 사회적으로 비슷하구나 하는 느낌을 공 유하는 경우 과거와의 대면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각자가 상대 방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사적인 기억과 가족의 비밀들뿐이다. 하지만 남녀가 집단적 기 억에 대해 공동의 기본적 가정들을 공유하지 않을 때에는 좋건 싫건 자기표현의 가장 미세 한 측면마저 한 사람의 문화적 역사에 대한 폭넓은 발언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의 일상적인 반경을 한 걸음 벗어나서 파트너를 선택한 이런 결혼들은 현대인들이 어떻 게 배우자를 찾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즉 이러한 결혼에서는 외부적 영향력은 아무 발 언권이 없고, 결혼의 결정은 관련 당사자 두 사람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의 두 문화간의 결혼을 다룬 연구에 따르면 이 결혼들은 "태도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현대적이 다. 그것들은 낭만적 사랑의 이상에 부합하며 매우 개인주의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관 계의 낭만적 토대는 기회인 동시에 문제적이다." 기회는 다음과 같이 그려 볼 수 있다. 상황이 좋다면, 즉 초기의 대담성, 낙관주의, 실험의식 등이 일부라도 유지된다면, 두 문화 간의 결혼은 특히 생기 있고 흥미로울 수 있다. 문화간의 의사소통으로 야기된 문제들이 가 족 안에 통합될 수만 있다면 유대감은 더욱 고무되고, 가족의 지평은 더욱 폭넓어질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결점들이 있다. 이러한 결합에 잠재되어 있는 한 가지 위험은 두 파트너 를 결합시켜 줄 어떤 외부적 지원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결혼을 유지하는 일이 전적으로 커 플에게만 맡겨져 있어서 두 사람이 가진 문화간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결혼의 유지는 더욱 더 어려워진다. 초기에는 차이들이 대체로 뒷전으로 물러나고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는 것만 이 중요하지만 결혼 생활이 진행되면서 각자의 분리된 세계에서 비롯된 차이들이 불가피하 게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고, 두 사람은 그것에 직면하게 된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는 깨끗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분리선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면 아래 잠겨있던 영향 력을 드러내며, 따라서 결국 두 파트너는 이것을 받아들여 해결해야만 한다. 유대인과 비유 대인 사이의 결혼을 다룬 미국의 연구는 이러한 궁지를 이론적으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에 빠지는 첫 순간에는 현재가 강렬하고 영원하리라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때 는 과거나 미래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반면에 사랑을 유지하려면 이와 정반대로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탐색하고 미래의 지도를 그리는 일 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연인들의 자아가 화제가 되는데, 여기서는 여지없이 그들의 문화적 유산들이 얽혀들게 마련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조상, 가족의 연결망, 역사와 연결되지 않는 자아란 있을 수 없다...결혼 생활 중의 대화는 또한 필연적으로 문화, 역사, 전통에 대한 개 인적 감정들간의 대화이기도 한 것이다. 두 문화간의 결혼에 관한 독일의 연구는 경험적 자료들을 통해서 이의 전개 유형을 이렇 게 추적하고 있다. 인터뷰에서...서로 다른 두 문화간에 결혼한 커플들은 두 사람의 관계의 전형적인 단계들 을 이야기한다. 처음 서로에게 빠져드는 기간에는 낙관주의가 넘쳐나고, 축복받은 열린 감정 과 자신의 비순응주의에 대한 자신감에 넘친다. 내적, 외적 긴장을 거치고 나면 한 걸음 뒤 로 물러나 자신의 배경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단계가 온다...사람들은 자신의 가치 체계가 얼마나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종종 평생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다. 만일 이런 식으로 직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 자신의 가치 체계는 언제나처럼 눈에 띄지 않고, 무의식적 으로 남아 있게 된다...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것은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공동의 명분을 찾아서 결혼이 확대가족 시대에 갖고 있던 결속과 의무감을 떨쳐내게 되자 이제 결혼은 홀로 떠 도는 것, 즉 정서적 동반자 관계와 여가를 위한 안식처이자 사적인 공간이 된 듯하다. 이것 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자유로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외부로부터 의 지원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도 된다. 여러 세대의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가족의 '공동 명분'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대신에 이제는 관련된 모든 개인들이 공동의 목표를 협 상해나가야 한다. "우선 여전히 '프라이버시라는 공허한 형상'에...내용을 채워넣어야 한다." 분명히 이것은 새로운 친밀감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 고 있기도 하다. 사랑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동반자 관계의 기반은 무엇인가? 언뜻 보기에 대답은 간단해 보인다. 현대적 정의 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고, 이와 같은 우리의 동반자 관계 는 무엇보다도 정서적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포괄적이면서 모호한 정의인데, 사랑의 구성요 소는 역사적으로 변해왔으며 최근 세기에, 특히 지난 몇십 년 동안 크게 변화해 왔기 때문 이다. 현대 존재하는 사랑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전통적인 사랑, 현대적인 사랑, 포스트모 던한 사랑-이것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료처럼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동시성의 비동시 성'은 온갖 종류의 다양한 규칙과 행동양식은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관념, 기대, 희망들이 '사랑'이란 용어 속에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일대일 관계 대 다중 관계에 관한 입 심 좋은 논의들을 보라). 따라서 '사랑'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요구들은 중재와 조정이 필 요한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근본적인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서구의 현대식 결혼을 위한 공동의 기반, 즉 '두 파트너가 공유하는 정체성'은 대화 속에 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갱신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문제를 말로 표현 하는가의 여부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불일치를 처리하는 서구의 부르주아식 방식-불일치를 말로 표현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보편적인 요건이 아니다. 만일 외국인 과 결혼한 독일인 배우자가 이전 방식을 주장한다면 완전히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몇몇 다 른 문화에서는 친밀한 관계가 '잘 어울리는' 결혼의 기준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 책임을 나누어지고 가족을 부양하며 양성간에 노동을 분담하 고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간 이 지나면서 우리 자신의 사적인 관계 속에서조차 알게 모르게 변해 간다. 특히 '낭만적 사 랑'이 이상으로 제시될 때가 그렇다. 왜냐하면 초기 단계에서는 대체로 타인과 미지의 것에 담긴 매혹적인 타자성이 조장하는 흥분과 즐거움이 생활에 가득하지만 일 년, 이 년, 시간이 흐를수록 불가피하게 서로를 속속들이 알게되고, 일상적인 하루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를 공유하게 됨으로써-지속적이고, 친숙하며, 믿을 만한-새로운 의미의 함께 하 기가 자라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많은 커플들은 이러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도 운명도 아니며, 단지 이 모델이 갖는 불가피한 부분일 뿐이 다. '낭만적 사랑의 덫'이란 첫눈에 반하는 것으로 시작해 이런 형태로는 만족될 수 없는 기 대감 속에서 질질 끌다가 결국에는 실망만 남는 그런 사랑을 의미한다. 미국의 저술가인 제프리 울만은 '독신자 연감'에서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토로한 황홀한 감 정들을 조합해 놓았는데, 그 기록은 그런 감정이 지나간 후 남은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보 여준다. -리차드 버튼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두고 한 말. "당신의 몸은 기적의 작품이다." 얼마 후. "당신은 너무 뚱뚱하고 다리는 너무 짧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첫번째 남편인 콘래드 힐튼 주니어를 두고 한 말. “그는 나를 한 명 의 여자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이해해 준다." 얼마 후. “그와 결혼한 후에 나는 장미빛 안경 을 잃었다. 몸무게가 줄었고 간신히 유아용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리타 헤이워스가 세번째 남편인 알리 칸 왕자를 두고 한 말. “나의 왕자들 중의 왕자.” 얼 마 후. “알리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그가 진절머리난다." 그리고 네번째 남편인 덕 하임즈를 두고 한 말. 나는 지구 어디든 그를 따라 갈 것이다." 얼마 후. 난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그리고 관심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남녀들이 다종 다기한 관점을 갖고 있 는 것이 공동의 기반을 추구하는 것을 무엇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남자들은 가정을 꾸리고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일”과 같은 실제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자들은 정서적인 면을 훨씬 더 강조한다. 그들에게는 감정을 공유하고 친밀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느 남편과 부인이 함께 한 인터뷰는 이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0부인: 나는 이따금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원해요. 0씨: 그래, 하지만 그게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요? 남편과 같이 있을 때 하고 싶 은 게 뭐요? 0부인: 글쎄요, 뭔가를 그저 함께 하는 거지요. 0씨: 침대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뭐 그런 걸 원하는 거요? 0부인: 그보다는 좀더 전반적인-아마도 좀더 대화를 많이 나눈다거나-아니면-결국 문제가 생기죠-함께 앉아서 얘기하거나 혹은 그저 이런 저런 얘기나 수다를 떠는 거지요. 0씨: 하지만 뭐에 대해서? 뭘 얘기한다는 거요?...신문기사, 아니면 일? 당신은 내게 무엇에 대해 얘기하기를 원하는 거지? 그건 다 허튼 소리지,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거요? 0부인: 우리는 서로 얘기를 해야 돼요, 계획들에 대해서. 그리고 바로 그거예요, 당신이 좀 더 얘기를 하게 되면, 좀더 말을 한다면, 그러면- 0씨: 그래, 계획들이란 게 뭐요, 그건 다 쓸데없는 소리일 뿐이야. 당신의 그 어리석은 수다 들... 0부인: 때로는 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해요 당신은, 당신은 전화를 걸어 줄 수도 있고 또 이 런 저런 일도 할 수 있죠. 0씨: 그런 시절은 다 끝났어. 우리는 전화가 한 대뿐이고 그것마저 고장났지...게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실없는 소리일 뿐이야. 결국 그게 다 뭐지? 그저 뭐라 뭐라 떠들고 이런 저런 얘기들 날씨가 어떠냐는 등... 0부인: 오, 여보, 그래요, 하지만 때로는 그건 우리를 연결시켜 주잖아요. 이처럼 남녀가 각자 기대하는 바가 다른 사실은 아마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잠재된 갈등은 최근에 와서야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자기만 소망을 가진 자율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순간 여성들은 이전 세대들이 제공해온 해결책들, 즉 남편에게 순응하고 여자들의 관심사는 희생할 것을 권하는 해결책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 지 않게 된다. 과거에 여성들은 안락한 느낌, 애정과 따스함을 베풀도록 기대되어 왔지만 이제는 점점 본인들이 그러한 감정의 수혜자가 되기를 원한다. 가정의 중재인이나 위안자 역할에 진력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여성 관련 베스트셀러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은 사랑, 적어도 여성을 소진시키고 지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사랑 이라면 거부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여자들은 지나치게 많이 사랑한다”는 진단을 내리는 것 이다. 그것이 바로 양성간의 새로운 '감정의 협약’이 필요한 이유이다. 만일 이것이 충족되 지 않는다면? 바로 “남자를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하지는 말라”는 엄정한 결론이 내려진다. 어려운 결정들: 너무 많은 선택권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결혼은 공동의 명분, 즉 가족과 가족의 생존이라는 철의 사슬로 결 합되어 있었다. 배우자 각자는 분명하게 규정된 임무를 갖고 있었고 정확히 그/그녀에게 무엇이 기대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이 더 이상 하나의 큰 경제 단위가 아니게 되자 이 규칙들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 뒤를 이은 부르주아 가족은 성 역할을 양극화시켰다. 남자는 생계를 담당하고 여성은 가족의 구심점이 되었다.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지금 이러한 표준적 역할들조차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이리하여 독일의 민법을 보 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이제 많은 것을 두 사람이 결정해야 하게 되었다. 표 1986년의 BGB원래 법령(1900년 1월 1일 이후 효력 발생) 과 1976년 결혼법 수정 법령 을 비교한다. 1896년에서는 #1354 남편은 결혼생활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 다. 특히 그는 거주지와 주택에 결정권을 갖는다. 그러나 1976년의 수정 법령에서는 이 조 항이 무효가 되었다. 1896년 #1355 여성은 남성의 성을 취한다는 결혼한 부부는 남편이나 부인의 성을 선택 할 수 있다로 변하였다. 1896년 #1356 부인은...공유된 가계를 운영할 자격과 의무가 있다는 배우자들은 상호동 의에 의해서 가계운영을 조절한다로 변경되었다. 두 파트너에게 가정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여성의 역 할이 종속적이라는 관념을 논박하는 데서 확실히 많은 역할을 했다. 그와 그녀 모두 그들 나름의 권리와 관심사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이처럼 얻은 것이 었다면 함께 잃은 것도 있다. 말로는 아주 간단해 보여도 일상 생활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 계획, 우선 사항들로 무장한 채 공통의 접근 방법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이 싸우는 일은 치열 한 전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혼에는 예정조화의 법칙, 즉 두사람이 대체로 같은 결 론에 도달하도록 보장해 주는 법칙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더 많은 기회를 갖 게 되면 낡은 제한들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만끽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연인과 사사건건 의 견충돌을 일으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삶은 하나의 긴 논쟁과도 같은 것이 된다. 입법자들 이 제안하는 동의에 이르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결혼하기 오래 전부터 성을 선택하는 문제로 커플들이 다투는 일은 드물지 않다(물론 통 계가 보여주듯 자기 성을 유지하는 쪽은 대개 남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커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결혼 전에 의견을 달리 하고 있으며, 혹은 수많은 커플들이 바로 이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사실이 은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곳에 좋은 일자리 가 생겼을 때에는 어디에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도 최악의 문제는 매일 함께 하는 일상 생활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온갖 실 망과 좌절의 지뢰밭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문제는 단순히 가계를 원만히 운영하는 것에 영향 을 미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삶에서의 자신의 역할과 자기 존중감이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 다는 깊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남녀는 최근 들어 "‘남자 혹은 ‘여자, '사랑’ 혹은 ‘관계’, ‘모성’, ‘부성’이 여전히 무엇을 의미하고 또 무엇을 의미해야 할지에 대한 가능한 해석들의 총체적 만화경에 노출”되고 있 다. 양성이 서로에게 반응하는 방식에는 낡은 습관과 새로운 출발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으 며, 이러한 혼동이 가장 은밀한 부분에까지 침투해 들어가고 있다. 누군가가 벽에 이렇게 낙서를 해 놓았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 말 이 모든 어려움을 요약해 준다. 대화로 해결하기: 사랑은 숙제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외적 기준이 없다면 내적 기준을 찾아야 한다. “이 새로 운 사회는...협동과 생존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동시에 그것에 복종 할 것을 주장해야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것은 마치 자기 꼬리를 자기가 잡아당겨 자신을 늪에서 끌어내는 뮌히하우젠 남작 이야기의 현대판 같은데, 이번 경우에는 커플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물론 어떤 경우든 서로 상대방의 생각에 맞추어 자기 생각 을 조율하는 일이 중요하며, '협상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 가는' 시도를 나타내는 신호들이 존재한다. 굴곡진 통로와 구불구불 한 길들로 가득 찬 참으로 말많은 세상에서 지금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사람들은 어떤 때는 서로 맞부딪히다가도 때로는 함께 머물고 또 이따금은 헤어지지만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결과들이 특히 현대 문학의 형태로 서가를 채우고 있지만 문학은 더 이상 “사랑 에 관한 담론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사랑에 관한 담론에 대한 담론일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예로 여기 한 고민남의 독백이 있다. 추측컨대 누구나 자기에게 어올리는 연인을 얻는다. 나는 안나를 얻었고, 우리 둘은 지금 까지 5년 동안 함께 지내왔다.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은 함께 살 아파트를 장만하거나 적어도 아이 하나쯤은 낳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을 한다. 각자의 것을 따로 갖고 있다. 침대, 전화, 영수증, 차, 세탁기. 우리의 관계 양식은 아직 말끔히 해 결되지 않았다. 누가 무엇에 신경쓸 것이며 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누군가와 함께 사 는 것이 독립과 양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 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는 아직도 정식 부부가 아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가 정식 부부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진정 얻어낸 것이 있 다면 건전한 많은 논쟁들뿐이다. 우리는 이것들과 함께 산다. 안나가 매일 밤을 술집에서 보내길 원하는 것에 대해 내가 비난하면 그녀는 나의 소유욕을 비난한다. 휴일을 혼자 보내 고 투스카니에서 함께 여름을 보낼 나의 계획을 단지 낭만적 충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불평을 토로하면 그녀는 내가 그녀를 잃을까봐 치기 어린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마치 우리 의 관계는 오로지 협정서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엄청난 양의 작은 활자로 가득 찬 강 제적인 계약서의 감정적인 문구들...나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한다. 즉 또다시 그녀가 나와 밤을 보내기를 거절한다고 해서 기분상하지 말자.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예요.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땐 어쨌든 당 신도 나랑 있는 것을 즐길 수는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저 그녀와 함 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말 숨이 턱턱 막혀”하고 그녀는 말한 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왜 너회 둘은 결혼하지 않는 거지?”하고 물은 적이 있다. "몇 년 동안이나 두 집 살림으로 골머리를 썩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아마 그 말이 맞을 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선가 보통 부부들은 결혼하고 20년이 지난 후 하루에 서로 얘기하는 시간이 고작8분 정도일 뿐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를 어떻게 대할까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제3자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 혼란의 징후이거나 점점 더 많은 사 람들을 감염시키는 자아의 바이러스 같은 것이 아니다. 이런 류의 해석은 그럴싸하기는 하 지만 피상적이다. 지금 수많은 개인적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현대적 사고방식이 광범 하게 퍼진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과 매일의 일과를 규제하는 엄격한 계명과 금지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무엇이 옳 은 것이고, 무엇이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지가 모든 사람에게는 아주 분명했었다. 무엇 때문에 성가시게 허풍과 복잡한 질문과 장황한 설명들에 신경 쓰겠 는가? 배우자는 각자의 규칙을 알고 있었고 또한 상대방이 규칙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조차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관습과 도덕적 태도들을 위반하고 있었고 규범을 거스르는 중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몇십 년간, 특히 근년 들어 일어난 변동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다. 확고한 규준들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규칙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원하는 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를 질문하면서 말이다. "현대적 커플-말만 많지 사랑은 많지 않다." 커플들은 공동의 명분을 만들어내고 추구하 기 위해서, 즉 그들의 자유로운 사적 공간을 사랑과 결혼에 대해 서로 양립될 수 있는 개념 들로 채우기 위해서 계속 대화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 인내 력, 특히 '관계맺기 작업'으로 이름붙일 수 있는 자질들을 요구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 이며 종종 거의 헛수고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매번 동의에 이르고 나면 해결해야 할 또 다 른 논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한다. 가족의 요 구는 그에게 높은 기대치를 부여한다. '좋은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활동적이고 사려깊고 공 감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견의 불일치는 초기에 즉 눈에 띌 듯 말 듯 할 때 발견되어야 한다. 이 균열을 메우려면 파트너의 요구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외부의 권위가 부재할 때는 커플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점점 중 요해진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심리학과 심리치료의 모든 분과가 일종의 붐을 이루고 특 히 사랑의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이 제시한 절대명령은 열림 마음과 '정직'이었다. 파트너들은 각자의 감정을 인정하고 '자기다워져야 하고'근심걱정 이나 금기와 관습 뒤로 숨지 말도록 권유받았다. 1970년에 출간된 한 자조지침서는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진실한 사랑의 참된 문제들은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비판적이며 진정한, 다시 말 해 두 파트너 모두가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해 상대방의 기대치에 맞추려고 자신을 왜곡하 지 않고 있는 그대로 파트너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관계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더 이상 낡은 의무들에 묶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동 방식의 부산물인 '열린 마 음’이 갑작스레 표어가 되어 새로운 문화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대중문화 는 이를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대중매체는 이를 희석시키지만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즉, 젊은 남녀들은 서로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지 아니면 서로를 거부할지를 두고 고민하는 곤혹스런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감정 하나하나를, 동작 하나 하나를 곰곰이 생각해내고, 검토하고, 규정하며, 목록화해야 하 는 것이다. 나의 걱정과 너의 애착, 그의 아버지 콤플렉스 등 “파트너들은 두 사람이 진심 이어야 하고 위선적이어서는 안되며, 서로에게 거리낌없이 솔직하면서 함께 지내는 것을 배 워야만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두 사람의 관계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진실을 강요하는 것 역시 파괴적일 수 있다. 자기심문이란 단지 아버지들 (그리고 어머니들)의 죄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위험한 무기이기도 하다. “우리 사이에 진실만이 있기를”하고 괴테의 희곡 '이피게니와 타우리스'(유리피데스의 원작에 대강 의 토대를 둠)에서 타오스는 이피게니에게 말한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정신분석이나 종교적 고백과 같은 자기심문의 전통적 양식들이 비교적 성공 을 거둔 것은 성직자나 분석가가 고백하는 사람이나 환자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 계가 깊다. 변화의 윤리: 모든 것을 바로잡기 앞서 서술한 대로 현대 생활의 본질적 특질 중 하나는 전통적 질서에서 벗어났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단 이런 과정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그 흐름은 멈출 수 없게 되었으며, '팽 창 충동’, 즉 진실로 영원한 변화의 윤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람 들을 가로막는 낡은 장벽들-자연법, 신의 말씀, 사회적 관습과 계급적 명령들-은 점차 무너 져가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그만두어야 할 때를 정해주던 규칙들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 다. 대신에 더 많은 것을 찾는 것이 규범이 되었다. 더 빨리, 더 크게, 더 아름답게! 이러한 ‘개선’정신은 자동차 제조나 노동 조건을 훨씬 넘어 연애문제에까지 침투해 들어 간다.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함께 살아가기와 관련해 부여되는 기준은 과거보다 훨씬 더 수 준이 높다고 한다. 더 이상 서로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작은 가정에서 '행복과 충족감’, 아메리칸 드림, '행복의 추구’를 찾으려 한다. 실망은 피할 수 없다. 결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수록 이처럼 장대한 꿈에 비교해 자신의 결혼은 갈수록 초라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꿈은 함정으로 변해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희망을 자극한다. 친밀하며 지속적으로 함께 하는 어떠한 관계에도 분노하고 환멸스럽고 죄 의식에 시달리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는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한 추억을 부풀린다. 한 학생이 어떤 글에서 썼듯이 “가족은 전쟁과 평화이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 고 바로 이것만이 개인적 관계의 현실, 곧 우리가 서로 함께 하는 모든 일들에서 생기는 갈 등과 협상과 위기들과 충돌한다. 한 경험 많은 심리치료사는 이렇게 서술한다. [개인의 성장을 권하고 성숙을 약속하는 결혼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결혼의 다른 측면올 전혀 혹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 다른 측면 또한 성장의 한 부분으로,비탄과 파괴적 폭력,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의 심연에는 바로 그러한 것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나는]가정이 성소, 즉 재미와 즐거움만이 넘쳐나는 장소라고[보지] 않는다-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장 야만스러운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비폭력적이고 비파 괴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함께 사는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동시에 한 사람이 그(그녀)의 개성, 인간사, 희망과 공포를 알아감으로써 그가 만들어 내었던 이미지를 수천 개의 조각들로 깨버리는 일은...오래 걸리고 매우 고통스 러운 경험이다...[이런 의미에서]결혼과 가족 생활은...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훌륭한 장 소이다. 그래서 나는 26년 6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하고 나서 결혼의 목표가 행복이 아 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결혼은 훌륭한 면을 많이 갖고 있다. 그것은 성별과 가치관과 관점 과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결혼은 증오심을 극복할 뿐 아니라 증오할 수 있는 곳, 웃고 사랑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상에 맞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거의 낡은 모텔에 따르면 기 질이나 성향이 아무리 맞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황 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은 이와는 정확히 반대방향을 가리킨다-즉, 단점들을 참 아내고 자신의 기대치를 낮추기보다는 결혼을 그만두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보통의 커플들이 완벽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는 그 어떤 외적 방해물들도 사 라졌지만 바로 이렇게 되자 커플들은 자신들의 ‘완벽하지 못한’결합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혼율이 급상승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한다...왜냐하면 결혼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너무 높은 나머지 변변치 못한 대용품을 참아내 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6주가 지나자 세번째 남편은 더 이상 민첩하게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축 늘어지고 유순해 졌다. 이제 성적인 것에는 넌더리가 난 그는 사회 생활과 직장, 그리고 저녁에 드 브라이스 가족을 초대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노상 송진과 관절염에 대해 얘기했 다. 이에 그녀는 돌연 자신이 스스로를 속여 왔음을 깨달았고 도덕적 정당함과 고결함 때문 에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속여 왔다는 느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 게 꽤나 관대한 마음으로 말하기로 결심했고, 그녀의 발언을 더 인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터 번올 머리에 둘러썼다. '친애하는 세 번째 거미 씨’하고 거미는 말했다. 그리고 털이 많은 그녀의 작은 앞발들을 포겠다. “우리 서로를 품위 있게 대하기로 하죠. 그리고 지저분한 폭 로 따위는 하지 말고 헤어집시다. 우리의 지난 과거의 행복한 기억을 의미 없는 추한 말로 더럽히지 말기로 해요. 나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려 해요. 진실은, 여보,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나는 여지껏 나를 속여 왔어요. 내 영혼을 다해 당신이 영원한 거미 씨가 될 거라고 믿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걸 아셔야 해요. 내 삶에는 네번째 거미 씨가 기다리고 있고, 내게는 그가 전부라는 것을 말예요." 새로운 지평에 대한 이러한 추구는 결혼 안으로부터 촉발된다.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수 록 더욱더 대안에 대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 맥락에서 보자면 새로운 선택들-결 별과 이혼-이 통계상으로는 사소할지 모르지만 제법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선택지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그리고 대중매 체가 이런 관심을 북돋우는 데 일조한다)이전의 함께 살기 방식에 영향을 준다. 결혼이라는 발상을 지지하는 이는 누구나 진정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의식적인 선 택을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유머 작가 플로쓰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두 친구가 술집에서 만났다. A:야, 이렇게 여기 다시 오니 좋네 그려. 다들 어떻게 지내지? 크뢰거 네는 어떻게 되었나? B:오래 전에 갈라섰어. 크뢰거는 작센하우젠에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부인은 어디 사는지 모르겠어. A:그래, 찌어펠트 네는? B:크게 한바탕했지. 찌어펠트는 집을 나가서 지방에서 살고 있네. 마누라는 본하임에서 폴 커와 살고 있고, 폴커는 선생이라네. 자네가 그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 자네는 어 떤가? A:글세, 알다시피 더 이상 아무 소용도 없어졌지. 수지는 정말 괜찮은 친구와 저기 다른 데 서 살고 있고, 난 카린과 낡은 아파트로 돌아왔다네. 카린은 심리학지야. 자네 둘은 어떤 가? B:뭐, 아직은 같이 살고 있지만, 정말이지 자주 헤어질까 생각했었다네. 하지만 아들놈도 있 고, 그보다는, 자네도 알겠지만, 꽤 자주 말이야, 자네가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따 금은 우리도 꽤 잘 지낸다네. 참 이상하지, 그래도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이해하겠 나? A:이봐, 친구, 쑥스러워할 건 없다네. 나도 이해해, 그 점에 대해선 걱정말게나. 예전 방식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변화의 소용돌이를 점점 더 가속화시키고 있다. 친숙한 습관을 고수하는 일은 해결해야 할 극단적 문제들이 없 는 한에는 아주 쉽지만 선택 행위는 적극적인 논쟁을 통해 정당화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결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받아들일만 하겠지만 자유롭 게 선택한 결혼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최상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자기 선택을 정당화해야 하는 것이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각자의 기준들을 자꾸 높여가 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이 두 사람을 갈라 놓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늘날의 커플들이 사랑받고 싶다는 희망으로 함께 결합되어 있는데, 바 로 그것이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완벽한 사랑이라는 발상에 내재한 이러한 개인적인 문제들은 또 다른 요인 때문에 더욱 악화된다.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동 반자 관계는 사회적 진공 상태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는 힘이 작용하는 환경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종종 이러한 힘들이 우리의 노력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즉 현재 의 고용 조직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는 커플이 하나의 팀으로 결속되 었던 데 비해 우리의 작업 조건들은 남녀를 서로 차단시키고 다른 세계로 분리해 낸다. 물론 여전히 부양자/가사 담당자라는 낡은 패턴에 기초한 소위 전통적 결혼들이 남아 있 다. 한 사람은 취업 시장의 스트레스 속으로 내보내고 다른 한 사람을 지루한 일상만이 있 는 가정에 고립시키는 결혼 말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각기 속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 하는 공통의 언어를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언어가 실패하는 그 곳에는 단지 침묵 과 소외만이 있을뿐이다. 그녀는 언제 당신의 숨이 턱에 차 오르는지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당신의 팔이 아파 오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물론 그녀는 당신이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 론 그녀는 당신이 가정을 부양하고, 모든 요구들을 다 감당하고, 모든 비용을 담당한다는 것을 안다. 물론 그녀는 당신의 근심거리나 우울한 기분을 알고 있다. 그녀 또한 그녀 자신 의 근심거리가 있고 기분이 우울해질 때도 있다. 그녀도 자신의 걱정거리를 당신에게 알리 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바로 그곳에 서서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있냐고. 더 이상 활기도, 비상경보도 없고 서로를 따라다니거나 동반하는 일도 없으며, 더 이상 미래에 대해 함께 얘기를 나누거나 하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할 뿐 이고 별다른 마찰 없이 일을 나누어 할 뿐이다...그것이 바로 16년 된 결혼 생활의 평화로 운 행복이 향해가고 있는 미래이다. 삶은 시금털털하고 걸쭉해져 버린 응고된 우유단지 같 고, 당신은 정신은 말짱한 채 그 속에 빠져 있는 파리와 같다. 다른 한편 두 파트너 모두 가정을 떠나 일터로 가고 각자의 삶을 알아서 해나가는, 특히 젊은 층들이 선호하는 다른 종류의 결혼도 있다. 그런데 요즈음 대부분의 전문 직종은 다음 과 같은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암묵적 가정에 기반해 있다. 다른 반쪽인 한 사람에게서 지원을 받고, 사적인 헌신은 철저하게 무시하며 양적, 질적으 로 조직되는 사람. 부수적인 일과 서비스는 그 반쪽인 다른 사람이, 대개 부인이 제공한다. 여성들이 하는 매일의 허드렛일은 남편과 가족에게 음식과 의복, 안락한 가정을 제공하고 다음 세대를 돌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여성들은 남자를 매일의 근심거리와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까다로운 전문 직업이 요구하는 역할을 방해받지 않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만약 그렇다면,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갖게 될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것은 간단한 산수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두 배우자는 이제 무대 뒤의 일을 맡아주고 애 정을 베풀어줄 제3자가 아쉬워진다. 이것이 수많은 가정에서 하루의 힘든 일과 후에 누가 욕실을 청소하고 아이를 데려올지를 두고 성마른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는 사적 노 동분업에 관한 흔한 다툼의 원인으로 속속들이 조사되어 왔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문제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이것을 이론화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정말 필요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가사 노동만이 아니라 감 정노동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기 때문이다. 인간은, 특히 일하는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감정적 지원 역시 필수적이다. 시장의 명령들-속도와 효율성, 경쟁력과 출세-은 가정 으로 스며들어와 불쾌감과 긴장을 조성한다.(일하는 남편과 가정의 명화를 담당하는 여성이 라는 성 역할의 양극화가 19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두 파 트너가 헛되이 서로에게서 감정적 지원과 이해를 받기만을 기다린다면 가정 생활은 어려워 질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이기주의나 개인적 약점이 아니다. 그보다는 집합적인 사건으로 서, 우리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1과 1/2의 직장(직장생활을 하는 한 사람과 가정에서의 일 상을 책임짐으로써 그를 지원하는 또 다른 반쪽의 한 사람을 일컬음-역자)이 초래 한, 수많 은 부엌에서 똑같이 벌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나의 일, 너의 일: 계약에 대한 선호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코너에 몰린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점점 더 사람들은 조언을 구하고 시장은 이에 응답해서 삶을 꾸리는 방법에 대한 특허받은 비결들로 붐을 일으킨다. 봇물처 럼 쏟아지는 책들은 아주 다양하고 다루는 범위도 포괄적이어서 다 따라 읽기도 어려울 지 경으로 마치 살아가기와 사랑하기에 관한 철학의 수퍼마켓을 방불케 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점에서 이렇게 묻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즉 함께 하는 우리들의 삶을 더 수월하게 만 들기 위해 이 책들은 어떤 규칙들을 제시하고 있는가? 곧 깨닫게 되겠지만, 이런 질문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잘못 제기된 것이다. 확실히 실망 과 침묵, 체념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요지를 담은 책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왠지 이 에 못지 않게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자조 지침서들은 한결같이 동반자 관계-함께 지내기 - 라는 주제에 대해 조금도 언급하지 않거나 언급하더라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두고 말고 있 다. 이런 지침서들의 주제는 아주 다르며, 온갖 방식으로 즉 때로는 아주 점잖게 또 때로는 아주 저속하게 변주된다. 하지만 기본 주제는 '우리’에 맞서 ‘나’를 보호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 계약을 할 때 함께 잘기의 일상적 측면들을 가능한 많이 규정”하라고 권 고받는다. 물론 이때 주된 목적은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함께 하기나 혹은 친밀함을 증진시켜 줄 수 있는 방식들로 삶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를 통해 자신의 이해 관계를 보호하는 데 있 는데, 점점 더 많은 커플들이 이 조언을 채택하고 있으며 독일과 미국에서는 이러한 협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상승했다. 그 남자의 약혼녀는 날씬했다. 그는 그녀가 그래서 좋았다. 그는 그녀가 그 모습을 유지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날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힘닿는 일이면 뭐든지 하리라 결심했다...결혼하기 전에 신랑은 신부에게 몸무게가 늘어나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계약서에 동의하도록 했다. 몸무게가 다시 줄어들면 벌금을 반환한다는 조건을 달고서. 이 것은 그저 재미 삼아 한 약속이 아니었다. 이 커플은 뉴욕의 한 변호사의 입회 하에 협정된 혼전 계약서를 만들어서 그 약속을 못박았다. 계약 결혼을 환영했던 1986년경에는 결혼 이후의 사적 공간의 분할에서부터 이혼하면 전 세 아파트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까지 일체의 것을 법적 문서에 상세히 적어두고 있었다. 배우자들이 휴가 장소를 교대로 선택하고 아이를 교육하는 데 평등하게 참가할 것, 서로 상 대방에게 자신의 예전 성적 경험들의 진상을 완전히 밝힐 것 등을 서약하는 혼전계약서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변호사들에 따르면 엄밀한 재정적인 문제에서부터 흔치 않은 라이 프스타일 항목까지 온갖 종류의 혼전 협정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렇게 했는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이점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에도 계약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통점이 더 이상 없다면 자조라는 새로운 철학은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세련된 방식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do ut des’라는 오랜 원칙으로, 번역하면 ‘내가 당신에게서 싫어하는것과 당신이 내게서 싫어하는 것을 교환을 통해 없애자는 의미이다. 이처럼 ‘상호행동의 선택을 위한 협정’을 제안하는 자조지침서들이 이미 나와 있다. 이러한 책에 들어 있는 지침 중의 하나를 보자면 이렇다. 각 파트너는 그/그녀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을 얻는다. 가령 “아침에 찢어진 옷 대신에 멋진 옷을 입기로"계약한다. 그는 “젊은애들과 술 마시러 가지 않고 제시간에 저녁 먹으러 집에 오기로”동의한다. 당신은 간단한 행동들로 시작해서 좀더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다("그 녀는 섹스할 때 좀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그는 나에게 키스를 더 많이 해주어야 한다...") 일체의 외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역설적 으로 새로운 종류의 상호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개방되어 있으면 모 든 것을 협상해야 하고, 공동의 명분이 없다면 각 개인의 사적 관심사는 상대방의 침해로 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종류의 자조 지침서들은 이런 경향을 반영하고 심지 어는 증폭시킨다. 이를 통해 커플의 함께 하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가 다시 한 번 부 정확하게 질문되고 있는 셈인데, 왜냐하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적어도 가장 중요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로부터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현대의 결혼에서 두 파트너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다. 공동의 기반은 전적으로 감정에 달려 있어서 만 일 좋은 감정이 사라지는 것 같다면 그때 결혼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혼에 이처럼 강력한 감정적 속성을 부여하고 우리의 기대를 변화시키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낭만적 사 랑’이라는 개념이다. 과거에는 "평생의 결합이던 것이 특정한 조건하에서만 유지되는 헌신으 로 변화되었다.” 참아내기의 부담 우리 뒤에는 산상의 시련이 있고 우리 앞에는 광야의 시련이 놓여 있다 요즘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보게 되는 주된 매력은 삶에서의 공동의 목표가 아니라 행복의 전망, '제대로 된’파트너, 꿈의 연인과 최상의 친구를 합친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꿈이 변하고 생각보다 친구들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행복은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좀더 공식적으로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각 개인이 차지하는 공간은 가까운 관계를 불안 정하게 만든다. 열린 공간으로서의 가족은...그것이 밥벌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사적인’것으로 남 아 있는 한 원칙적으로는 어떤 규정에도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또한 반대로 어떤 규정에도 열려 있지 않은 것, 적어도 영원한 규정에는 열려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도 한다. 가까운 과거에는 스스로 결정하고 전통적 의무들을 벗어 던지는 것에 희망이 걸려 있었 다. 전도는 분명했다. 어떤 형태건 장애물이 일단 극복되면-가족의 저항으로부터 계급적인 고려들을 거쳐서 돈이 없는 것까지-그때는 진정한 사랑이 승리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러한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점 또한 전적으로 확실했다. 브론테의 '제인 에어'의 결론 처럼. 이제 결혼한 지 10년이 되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서 사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나는 나의 에드워드와 함께 있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도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지루해 하지 않는다...내 생각에 우리는 하 루 종일 얘기한다. 서로에게 얘기한다는 것은 생각을 더욱 살아 있게 만들고, 귀로 들을 수 있게 한다...우리는 성격이 딱 어울린다...완벽한 일치, 그것이 결론이다. 현대에 들어와 사랑이 변하고, 과거에는 두 조력자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던 것이 두 연인 의 공동체로 바뀌면서 감정 그 자체가 어려운 과업이 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현대의 조건 에서 사랑은 한 번 일어나고 마는 사건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현대 사회가 사 랑에 부과하는 온갖 불안감과 좌절들에 맞서 매일 새롭게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하려면 인내와 관대함이 필요하다. 그런 관계는 끈질긴 협상을 필요로 하는데, 때 로는 작은 다툼과 일련의 미니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하지만 진풍경이 끊이지 않고 사정이 점점 어려워져서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참가자들이 서로의 약점과 출입금지 영역에 도통 하게 된다. 사랑은 낡은 족쇄를 벗어 던졌지만 새로운 구역으로부터 공격받게 된 것이다.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그들은 함께 있다. 그들은 잠깐 동안만 얘기를 나눈다. 그들은 침묵을 지킨다. 그것뿐이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말한다. 그리고 말로써 침묵을 지킨다. 그들의 입은 텅 비어 있고 그들의 침묵의 종류는 19개이다. (더 많지는 않다 해도) 그들의 영혼과 결속의 모습은 그들을 화나게 한다. 그들은 세 개의 레코드 판이 올려진 전축과 같다. 그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사랑이 귀여운 목가라고? 그렇기만 하다면 좋으련만. 현대가 제공한 자유는 '위험천만한 기회’이다. 우리의 감정이 강렬하면 할수록 우리는 감정이 일으키는 실수와 오해, 그리고 감 정으로인한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더욱 고통받는 것 같다(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 마찬가지 로 절벽으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실연의 아픔이 단지 유행가의 그렇고 그런 가사만은 아닌 셈이다). 남녀가 서로 함께 살아가려고 하다가 겪게 되는 고통은 순전히 그들 자신만의 잘 못, 즉 지나친 자아중심성의 부산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사랑과 결혼에 대 한 현대적 개념 규정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의 감정이 기초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감정은 변덕스럽다. “마음은 몹시 유연한 근육이다.” 고전적인 문학의 주제는 “그들은 결합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현대 문학에서는 “그들은 함께 살 수 없다"이다. 혹 은 벨러쇼프가 썼듯이 “옛날에는 연인들이 제도적 장벽에 저항했지만 요즘은 행복이라 불리 는 이데올로기의 늪을 헤쳐나가고 있다." 이런 사실로부터 혹자는 자유와 독립과 관련해 이제까지 얻어낸 이득이 소리없이 다시 한 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결론 내릴지 모른다. “마치 과거의 절박함이 현재의 절박함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대식 생활 방식이 실망과 갈 등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엄격한 제약이 있던 앞 세대들이 결코 더 낫 지는 않았다. 옛날 식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은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으로 서로 함께 사는 새로운 방식이다. 이런 방향으로 내닫는 중요한 첫걸음은 해방의 과정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 즉 이 로운 점과 불리한 점간의 지속적인 변증법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인식이 아마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참아내기의 부담, 즉 우리가 소유 한 것을 위한 싸움의 긴장 속에서 행복을 찾는 일을 더 쉽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로미오 와 줄리엣'의 현대판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신 평생의 사랑이라고? 그것은 두 사람이 자신 들의 인생 전체를 위해서 서로를 그럭저럭 참아낼 때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해.” 독립이라 는 스산한 세계에서 사랑은 부담스러운 것이면서도 영원한 지원군으로서 그리움의 대상이기 도 하다. 시대와 시대적 문제들이 변해감에 따라 사랑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설계도이자 유토피아로 남게 되었다.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은 나쁜 신호이다. 나는 사람들이 읽는 이야기에 나오는 위대한 연 인들이 과연 여자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도 남자가 여자를 계속 사랑하고 아이를 돌보듯 이 그녀를 돌봐줄지 궁금하다. 독자는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그 모든 불쾌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 나는 그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 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나이 들어 가는 것이라고. 4. 내 모든사랑을 아이에게 '사랑,결혼,유모차.' 사랑은 당신을 교회로 달려가게 하고 곧이어 아이가 태어난다. 1950년 대의 세상은 이처럼 간단해 보였다.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 두 사람 이 결혼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으며, 또 결혼하기로 했다고 해도 당연히 아이를 낳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우리는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적어도 다음과 사실만은 분명하다. 고도 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는 1960년대이래 출생률이 급격하게 감소해 왔다. 구독일연방공화국 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오랜 기간 가장 급격한 출생률의 감소를 보여 왔으며, 최근에 와서 는 전통적인 '아기'의 나라 이탈리아가 이보다도 훨씬 낮은 출생률을 보여준다. 아이에 대한 사랑을 다룬 19세기의 노래와 시는 여기에서 아이에 대한 사랑을 종종 '여서 의 본성과 연결하였는데, 그런 감정들은 이상화되어 일종의 낭만적 아우라를 띠곤 했다. 20 세기 후반에 와서 아이에 대한 사랑은 부모노릇을 다룬 잡지와 육아 관련 책들의 주제나, 부모들이 올바른 방법을 취해서 아이를 최상급으로 기르라고 지시하는 가르침과 교육적인 충고에 짓눌린 화제로 변해 버렸다. 애정은 권장할 만하지만, 단 적당해야 한다. 이런 경우 에도 '지나친 애정이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수 수가 있다 (Gronemeyer 1989: 27). 아이에 대한 사랑, 이것은 인류 역사 이면에 존재하는 기획의 일부인 영원하고 자연적인 유대인가, 아니면 한 술 더 떠서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것인가? 그러나 실상은 그보다 더 복잡해 보인다. 우리가 들여다 봐야 할 것은 엄마와 아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품고 있는 꿈과 갈망은 무엇이며, 의무와 부담은 무엇인가? 몇십 년 전의 부모노릇은 어떠했으며, 또 지금은 어떤가?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 바라기 과거에는 결혼과 부모되기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날의 남녀가 요즘보다 더 애지중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산업화이전 사회에서 아이는 경제적인 이 유에서 긴요했는데, 그들은 집과 들에서 부모를 도왔으며, 나이든 부모를 돌보았고 재산과 성을 대물림했다(예를 들면 Rosenbaum 1982; Tilly 1978). 부유층계층에서는 아이들이 상속 자로서, 그리고 지참금 소유자로서 재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아이들은 대체로 환 영받았고 이따금은 열렬히 아이를 원했다는 점, 첫 아이거나 아들일 경우에 특히 더 그랬다 는 사실을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식들이 소용없고 심지어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던 상황도 있었다. 가령 자식이 너무 많아서 가족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을 경 우가 그러했다. 누구도 자기 아이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얽혀들 여유는 없었다. 1800년 경 바바리아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한 예이다. 농부는 아내가 사랑의 첫 징표를 잉태하면 기뻐한다. 둘째와 셋째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 는 여전히 기뻐한다. 하지만 넷째 아이 때는 그렇게 기뻐하지 않는...이후 태어나는 자식들을 그는 모두 자신과 나머지 가족들의 입에서 빵을 빼앗아갈 적대적인 생명체로 여긴다. 아무 리 온화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다섯째 아이에게는 무관심해지고 여섯째 아이 는 사산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큰소리로 공공연히 떠들어대는 것이다(imhof 1981: 44에서 인용). 민속학자 레오프레히팅(Karl von Leoprechting)도 1855년에 이와 비슷한 글을 썼다. 그런데 이많은 아이들 중에 단지 몇 명만이 살아남는데, 기껏해야 12명중 4명 정도를 기 대할 수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대체로 아주 어린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들 때문에 슬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사는 아름다운 천사라고 생 각했으며, 또 그들에게는 살아남은 아이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얼마 있어 일을 도울수 있을 만큼 나이먹은 아이가 죽을 때는 그땐 모든 사람이 슬퍼했다(Bad Tolz-wolfratsbauer Neueste Nachricbten, 1988년 8월 11일: Ⅳ). 20세기 후반의 결혼은 더 이상 불가분하고 불가피한 부모노릇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러한 변화는 부분적으로 경제와 관련을 갖는다. 산업화로 인한 부산물로서 경제적 단위인 가족이 해체되자, 아이를 갖는 것의 재정적 이점들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에 그에 따른 비용 이 증가했다. 그 이후 '축복받은 자식에서 짐스러운 자식으로'라는 말로 요약되는 격심한 변 화가 있었다(Bolte 1980: 66). 지난 20년간, 그리r 지난 몇 년 동안 이러한 변하는 더욱더 대 단한 기세를 얻어왔다. 그것은 대체로 한 아이를 기르는 비용이 급격히 증가해왔다는점, 그 것도 수입과 인플레이현 비율, 혹은 물가지수보다 현격히 빠르게 증가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의미있는 경험으로서의 지식과 자아 오늘날의 남녀는 어떤 물질적 이점을 염두에 두고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정서적욕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다른 동기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아이들은 주로 '심리적 효용성'을 갖고 있다(Fend 1988: 160). 다른 연구들이 제시하는 자료 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이들은 어떤한 경제적 이이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사정은 정반대이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서 어려운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지원이나 도움을 기대할수 없다. 그러기 에는 사회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개인화하는 쪽으로 너무나 강력하게 치우쳐 있다. 실제 로 남겨지는 보상이란 아이들의 정서적 가치이다. 그것은 책임져야 하는, 뭔가 맡겨져 있으 며 정서적으로는 없어서는 안된다는 소중한 느낌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세대속에 구현 되고 인간의 형상으로 다시 표상되는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이다(Hurrelmann 1989: 11-12). 이러한 '심리적 효용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련의 동기들이 있는 데, 그것은 아마도 아이가 부모사이를 가깝게 해 준다거나 상황이동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 자리를 채워줄 것이라는 점이다. 인구학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를 갖는다 는 것은 점점 뿌리내림과, 의미로 가득하나 삶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아이와 의 긴밀한 관계에 기반을 둔 '행복에의 요구'와도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뚯한다(Munz 1983: 39). 아이를 바라는 마음은 자아와 관련되어 있고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부모들은...출산, 양육 과 육아 그리고 아이의 부양을 통해 그들 자신을 위한 뭔가를 얻고자 한다. ... 자신의 아이 를 통해 자기자신을 발겨나려는 소망은 갈수록 확산되어 간다. ... 아이를 갖는 일이 더 이상 봉사나 일종의 헌신 혹은 사회적 의무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대다수 부모들에 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대신에 아이 갖기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인 정받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추이 이면에 놓여진 기본적인 패턴에 한 가지 유사점이 있음을 알 려주는 신호를 볼 수 있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결혼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났던 변화는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두 경우 모두 가 족단위의 생존이라는 공동의 명분은 사라졌다는 점이다. 두 경우 모두 개인간의 관계는 덜 경제적으로 되었으며, 그 대신에 더욱 개인적이고 사적으로 되었는데, 이에 따라 모든 희망 과 이해관계들의 변화가 수반되었다. 또한 두 경우 모두에서 관계맺기는 개인화된 세계에서 의 모든 당사자들의, 비대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점증해가는 정서적 필요에 대체로 의존해 있다(강렬한 감정에 내재된 모든 보상과 공포까지 포함해서). 사회화에 관한 연구에서 지네 커(Jurgen Zinnecker)가 지적하고 있듯이, 삶의 객관적 기반이 무너져 갈수록 세대간의 관계 에서 더욱 더 '상상적인 것'이 뚜렷해진다. 성인은 어린시절이나 청년기를 '실현되지 못한 유 토피아적 꿈의 영사막'으로 사용한다(1988:129). 이런 경향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상호작용하 는 방식에서 볼수 있으며, 또한 그보다 오래 전에 부모노릇과 연결되어 있는 소망에서도 나 타난다(Beck-Gemsheim 1988a: 123ff 참조). 고도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은 항상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규율에 따라 행동하고 또 성공하도록 길들여진다. 아이는 이와는 반대로 삶의 '자연적' 측면에 나타내는데, 이런 점 이 바로 그렇게도 큰 호소력을 갖는 것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과 몇몇 젊은 남성들이 인터 뷰를 통해, 그리고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생생하게 묘사하는 하나의 약속을 아이는 제 시한다. 아이와 함께 하면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고도로 기술적인 삶속에서 그들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욕구들을 얼마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내와 침착, 염려의 욕구이고, 세심하며, 애정어리고, 열려있고 가까워지고자 하는 욕구인 것이다. 여성들 에게 엄마노릇은 책임있고 진지하게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일반적으로 감정을 방해물로 간 주하는 일의 세계로부터 도피할수 있는 대안을 여성들에게 제시해 주는 듯 하다. 전적으로 아이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은 삶의 인지적 측면을 거스르는 것을 그리고 영혼을 파괴시키는 그 모든 삶의 뻔한 일과에 대한 살아 있는 평형추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에게서 얻는 그처럼 생기있는 에너지와 즐거움을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Boston Women's Health Collective 1971: Ⅱ.644). 다소 "'부자연스러워진' 환경 속에서 (어린)아이의 자연스러움"이란 주제가 표본조사들에 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자연스러움이다. 이들은 1970년대에 독일의 학교에 도입된 심리 이념과 교육적 목표 하에서 성장해 왔는데,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 즉 결국에는 '다방면에 걸쳐 축소된 인성'을 초래하는 굳은 마음과 억눌린 감정에 몹시 민감해져 있다. 따라서 아이는 '진정한 사람들, 믿을 만한 관계'와의 접촉을 약속해 주는 것 같다 (Hasing/Brandes 1983: 208에서 인용). 여기서 하나의 대안이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것처럼 보인다. 향수어린 눈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성장과정을 보는 방법이 그것이다. "아이들은 손 상되지 않고 생생히 살아 있는 채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우리의 심장은 돌부스러기와 먼지 로 변해간다"(같은 글에서 인용). 이러한 '새로운 부모' 세대를 관찰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쓴다. 엄마와 아빠는 자아가 없는 척하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아이들에게서 상당한 보상을 기 대한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일종의 거래의 문제이다. ... 그들은 아이를 통해 성장하기를 원 한다. 아들과 딸은 부모가 자발적이고 감각적이면 방해받지 않고 창조적인 인성을 가지려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부모가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 이가 부모를 기르는 것이다. 정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아들과 딸은 부모의 자아이상을 구현 하고 있다(Boop 1984: 66과 70). 여기에서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자유로운 개인이 된다는 것에는 그것대로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유럽인은 자유를 선고 받았다. 그 는 고향을 상실했다"(Weymann 1989:2). 아이를 갖고 돌보고 부양하는 일은 삶에 새로운 의 미와 중요성을 부여해 줄 수 있고, 사실상 개인의 사적 존재의 핵심이 될 수 있다. 다른 목 표들이 임의적이고 상호교환될 수 있는 듯하고 내세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현세의 희망이 덧없어진 바로 그곳에서, 아이는 단단한 발판과 가정을 발견할 기회를 준다. 이러한 동기들은 종종 사회적 계층의 아래쪽에 위치한 사람들에게서 직접 표현된다. 가족 계획에 관한 스위스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아이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주된 목적으로 생 각하는 태도가, 특히 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사라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Hopflinger 1984: 146-7). 하층 가족에 대한 독일의 한 연구도 동일한 추세를 지적하고 있 다(Wahl 1980: 34-8). "가족과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삶이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속한 곳을 알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삶이 더 멋있어질 것이다. 밤낮 종일토록 혼자 산다면 아 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 가족과 함께라면 내가 이룬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이 삶이 본질이 되어가는 것이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집단에만 해 당되는 것은 아니다. 관련 인터뷰들을 살펴 보면 '새로운 여성들'과 남성들도 거의 유사한 발언을 하고 있음을 곧 발견하게 된다. 가령 한 여성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이와 나만의 가족을, 누군가 나를 원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을 원했어요"(Dowrick/Grundberg 1980: 80에서). 새로운 사회적 경향들을 묘사하는 작가들은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삶의 의미 를 찾으려는 격렬한 추구에 관한 - 때로는 아이러니컬하게, 때로는 험난조로 - 언급한다. 새로운 부모들은 뭔가 정박할 곳을 찾고 있으며, 세상의 지도가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동 안 어딘가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핏줄을 얻으려고' 아이를 가지려하는 것이다 (Dische 1983: 32). 어떤 만화는 아이를 부모의 신념추구 수단으로 삼는 '아이를 가지려는 기묘한 욕구'를 그리고 있다(Rooos/Hassauer 1982: 70). 한 여성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다. 나는 아이를 가졌죠 ... 나 자신에 대해 도무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때였어요. 대학에서 의 학업을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게 뻔했죠. 내가 속해 있던 정치 서클은 비교조적 좌파였는데, 그곳의 분위기는 우울함과 정말감에 쌓여 있었죠. 함께 있던 사람들은 각자 제갈길을 갔고, 남자 친구는 금발 여자에게 빠져 있었어요. 80년대에 팽배했 던, 미래는 없다는 식의 태도가 이미 프랑크푸르트의 보켄하임 구역의 거리와 술집들을 하 나씩 점령해가기 시작했죠. 나를 헌신할 무엇과 준거점들이 점점 상실되가는 것이 나를 행 복/태평함과 당황/두려움 양쪽을 왔다갔다 하게 했어요. 나는 자유롭다는 것이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오리혀 자유는 아주 혼란스러울 정도로 양면을 갖고 있죠 ... 내가 아이를 가진 또다른 이유는 ... 공허가 두려워서였어요. 공허가 내 앞에 뻥 열려 있었고 나의 미래도 불확실했죠. ... 가정을 갖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를 두렵게 만드 는 자유로부터 도망친 거예요(Hasing/Brandes 1983: 180-1).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서 아이를 갖지 않는다? 물론 아이를 갖는 것을 어렵게 하는 강력한 장애들도 있다. 가령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 는 '나만의 인생'은 과거에는 남자들에게만 영향을 주었던 개인화된 사회의 한 양상이었는 데, 이제는 여성들에게도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시작한 지 채 얼마 안가 곧 뒤 를 보살펴 줄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아이를 돌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아주 명백해 진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력하게 아이를 갖기를 어렵게 하는 이유는 부 모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급격히 많아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연구자들이나 공무집행자들이 지금껏 관과해 왔던 문제이다. 부모노릇은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요하는 일이 되었다 ('오직 최고만이 있을뿐' 이라는 제하의 내용을 볼 것. 226쪽). 그리고 이것은 아이를 갖겠다 는 결심을 더욱 어렵게 한다(Beck-Gemsheim 1988a: 149ff.). 아이에게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기를 기대하면 할수록 부모는 아이갖기를 계획하고 있는 중이라도 더 더욱 오래 기다리게 된다. 이런 사정은 전계층에 걸쳐 해당되며 더 이상 사회 적 사다리를 올라서는 일에 관심을 갖는 중간계층에 걸쳐 해당되며 더 이상 사회적 사다리 를 올라서는 일에 관심을 갖는 중간계층에 제한된 일이 아니다. "특히 하층계급의 경우, 아 이를 갖고 교육시키는 데 드는 비용을 출세와 성공의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Fuchs 1983: 348). 필요조건의 목록은 용돈고 아이의 방에서부터 휴가, 장난감, 운동에 이르기까지 길어 졌고, 아이가 학교에 가거나 직업훈련을 받는 오랜 기간 동안 드는 잡비 역시 만만치 않게 되었다. 이러한 기준들은 대중매체가 유포하고 있으며, 폭넓게 전체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 고 있다. "우린 아이 가질 여유가 없어요"는 커플 자신의 생활수준에 대해 뭔가를 드러내 주는 것 못지 않게, 그것은 또한 그들이 아이에게 제공하기를 원하는 생활수준, 아니 실은 전문가의 충고에 따라 아이에게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는 생활수준을 드러내 준다. 새로운 규칙은 "현대인은 그들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정도만큼만 아이를 가질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책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Haussler 1983: 65). 물질적인 것은 단지 한 측면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문 가의 충고는 훨씬 더 많은 측면들을 포괄하고 있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교육을 받아 의식화된 중간계급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일반일들에게는 TV와 잡지를 통해서 알려진다. 이 권위자들에 따르면 아이는 적합한 주거와, 이웃에서부터 안정되고 애정어린 가 정에 이르기까지 올바를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자조지침서들이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기르는 일은 '위대하고 책임있는 임무'라는 사실이다(Boston Women's Health Collective 1971: Ⅱ,644). 그렇게 많은 책임이 있다면 결과는 분명하다. 관찰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잠정적인 엄마와 아빠들은 '아이의 이익을 위해서 ... 최대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최선을 다한다(Roos/Hassa- uer 1982: 189). 그들은 머리 속에 필요조건들의 목록을 담고 다니는데, 목록은 전보다 더욱 길어졌다. 안전한 일터, 좋은 주택, 진보적인 학교와 적절한 교육. 여기에 환경문제까지도 포 함된다. 많은 사람들은 오존층이 엷어지고 숲이 죽어가는데 아이를 갖는 것을 도대체 어떻 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다. (대중적인)과학에 대해서 한발 앞서가고 자신의 책임을 매우 의식하는 젊은 여성들은 종 종 그들의 애정생활을 엄격하게 테스트한다. 과중한 부담을 감당하면서 아이가 요구하는 안 정감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이전보다 더욱 그들은 스스로를 엄하게 추궁한다. 만 일 내 아이의 인성이 내가 얼마나 잘 돌보는가에 따라 좌우된다면 나는 그것을 제대로 할 만큼 충분히 정서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이는 최근의 심리학적 사고를 의식하고 있는 남 녀들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는 새로운 양심의 문제이다. 나는 양육이 요구하는 개인적 조건 들에 적합한가? 나는 아이가 제대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내적 자질들을 갖고 있는가? 만일 그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 그들이 아이를 원하든 않든 간에 - 결과는 틀림없이 아 이를 갖지 않기, 혹은 적어도 아직은 안된다는 것이다. 다음의 동거에 관한 경험적 연구의 결과물을 보자. 많은 사람들은 '그저 나중에' ... 관계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혹은 개인적으로 더 안정감을 느끼게 될 때에 가서야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 사람들은 충분히 성숙되 었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그것은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아이를 감당할 수 있 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 사람들은 충분히 성숙되었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그것은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아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 때문이다. ... 이 런 생각은 종종 엄마노릇에 대한 불안감과 연결되어 있는데, 여성들에게 엄마노릇은 자신의 성격을 중대하고도 예외적으로 시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Nichteheliche Lebensgemeins chaften 1985: 77). 아이를 갖고 키우는 것의 기준이 높아짐에 따라 이에 대한 의사결정의 새로운 패턴을 인 실할 수 있다. 그것은 '책임있는 선택: 아이 갖지 않기'(Ayck/Stolten 1978)로 알려져 있는데, 말하자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특이한 나선형 효 과가 진행중이다. 즉, 아이들이 줄어들수록 더욱 아이들 하나하나가 소중해지고 그 아이에게 더 많은 권리가 주어진다. 아이가 더욱 중요해지고 비용이 들수록, 사람들은 이 거대한 과업 에서 갈수록 뒷걸음질치고 아이 없이 지내기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크(Ayck)와 쉬톨 텐(Stolten)은 '책임질 수 없이 아이를 갖지 않는다(Kinderlos aus Verantwortung)'의 서문 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이 책은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비판하기보다는 오늘날 아이에게 제공되는 것을 비판할 목적을 갖는다. 그들은 보호와 음식, 마실 것 이상을 요구하는데, 그들의 이러한 심리적 요 구들은 종종 무시된다. ... 의식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아이를 갖지 않는 일은 새로운 도덕적 태도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책임의식의 표현이다(1978: 12, 18, 25). 아이 갖기 계획 최근에는 아이를 갖거나 갖지 않거나 하는 결정이, 자신의 삶의 즐거움과 박탈감에서부터 부모노릇의 의무와 기쁨에 이르는 일련의 전체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다. 로스와 하사우 어(1982)의 책 제목인 '아이를 원하기: 찬반양론(Wanting a Child: Pros and cons 1982)'이 보여주듯이, 결정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항상 그에 대한 찬반 논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는 희망과 두려움을 생생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연구들은, '찬반양론에 대한 숙고가 전형적 인 종류의 불안전함, 양면성과 모순들을 분명하게 함을'(Urdze/Rerrich 1981: 94) 확인해 준 다. 결정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상황은 종종 오래 질질 끄는 과정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특 히 새로운 여성들(그리고 때로는 남성들)에게 해당되는데, 이들은 정보도 많고 자신의 강점 과 약점을 잘 알고 있으며 올바른 이유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싶어한다. 이는 다시 계 급, 지위, 성적 정체성에 관한 전통적인 사상들이 더 이상 사람들을 탄탄히 놓인 길로 인도 해 주지 않는 사회의 한 특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유형의 학교교육을 원하든지, 어떤 훈련을 받을지에서부터 어디에서 살 것이며 누구와 함께 살지에 이르는, 장단기 전략들을 계획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일대기를 스스로 구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관련된 여성관련 서적들이 보여주듯이, 이처럼 미리 계획해야 할 필요성은 갈수록 여 성의 생활과 어머니노릇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개입해 들어온다. 여성을 위한 한 안내선은 올바른 절차를 제시하고 있다. 장래의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그런 후 "정말로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Boston Women's Health Collective 19 71: Ⅱ, 640). 이 주제에 대한 자서전과 연구들을 훑어보면 이런 충고를 따르고 있음이 드러난다. 한 경 험적 연구는 이렇게 보고한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여성들은 자발성의 부족을 토로한다. 그 들은 아이를 갖는 일은 과거에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이제는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만 한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Nichtrheliche Lebensgemeinschaften 1985: 78). 솔직한 감정 을 생각해 보거나 일기를 쓰고 여자친구들과 대화하고, 그리고 전보다 더 많이 파트너와 대 화함으로써 새로운 여성들은 엄마노릇하기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으 며, '정보를 갖기' 원하고 '예방하고' 혹은 필요하다면 '자신을 무장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전부 알기를' 원한다(Sichtermann 1982: 7-11). 이것은 확실히, 양면감정으로부터 탈출구를 찾고자 결정을 내리는 긴 여정에서 그들이 자 신들의 경험을 글로 씀으로써 서로를 도우려고 하는 한 가지 이유인 셈이다. 우리에게 처음 이책을 만드는 작업은 중요한 일이었다. 이 책은 이제는 넌더리가 난다는 느낌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3, 4년동안 아이를 갖는 것에 관해 얘기를 해왔다. 우리 두 사람 은 그에 대해 토론했고 친구들, 동료와 우리 나이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도 얘기를 나누었다. ... 이제 책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우리의 일대기에서 한 단계가 일단락되었다. 아이문제는 우리에게 구체화되어 갔다(한 대학강사, Bach/Deutsch 1979: 26에서 인용). 내 남자 친구는 언제나 나에게 아이를 원하는 이유들을 써보라고 말했다. 나는 3년간 그 렇게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듯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사소한 것들 뿐이었 다(그래픽 디자이너, Hahn 1988: 179에서 인용). 예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웠던 일이 이제는 일부 인구집단에게는 매우 복잡한 것 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어는 것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머리에서부 터 나온다. 새로운 여성은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으면 안된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환영받겠지만, 아이를 바라는 일은 더 이상 단순한 소망이 아니며, 그것은 한 무더기의 찬반양론의 문제임을 의미한다. 아이들 은 계획에 따른 결과물이며, 그라스가 표현한대로 '고안된 출산'이요 '두뇌출산'인 것이다.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튀어나오는 주요 용어들마저도 징후적이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원하는 것을 진단하기"(Kerner 1984: 153), "어느 부분에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지 찾기"(Dowrick/Grundberg 1980: 100), "아주 끝까지 생각해보기"(Kerner 1984: 153)를 말 한다. 당연히 쌍둥이를 임신한 부모들은 "쌍둥이에게서 정신분열증 환자가 나올 확률이 높 다는 말을 즉각" 떠올린다(Hasing/Brandes 1983: 152). 어쩌면 이는 극단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더 살펴보자. 블루 칼라 노동자와 세일즈 여성은 임신 첫 몇 달 동안 그녀가 임신 에 관해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읽었다"고, 특히 '다양한 출산방법에 대해서'(Reim 2984: 172)읽었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이론과 논쟁의 전체적인 네트워크는 아이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그라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현대식 동화에서 튀어나온 자랑할 만한 커플, 아름다운 커플, 고양이는 있어도 아이는 없 다.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뭔가 잘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녀가 '정말로' 아이를 원할 때 그는 '아직은'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나는 이론적으로 아이를 상상할 수 있 어"라고 말하면, 그녀는 자극을 받은 듯 "나는 그럴 수 없어. 더 이상은 아니야. 책임을 진 다는 것은 사물을 정신차려 보는 것을 의미해. 당신은 어떤 미래를 아이에게 주고 싶은 거 지? 미래는 없어. 아이들은 이미 충분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많아. 인도, 멕시코, 이집트, 중 국에 말이지. 통계를 한 번 봐"(Grass 1980: 12). 아기를 맞을 준비 마침내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 종종 오랫동안 계획을 한 후의 일이지만 - 사람들은 어 떻게 해나가는가? 아이를 기대하는 즐거움은 흔히 다른 감정들로 채색된다. '미리 생각하는 일'은 계속된다. 태어날 아이를 처음 생각할 때조차 커플들은, 그리고 특히 여자들은 지난 몇 년간 잡지 시장의 큰 부분을 차지해 버린 대중화된 과학적 정보의 포화 속에 놓이게 된 다. 다음은 20세기 후반에 부모로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방법에 대한 안내서에서 일부 추려낸 것이다. 임신 전 여자가 (때로 남자도) 해야만 하는 일 100년 전의 의과학자들 덕택에 우리는 적절한 영양섭취가 아이의 성장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은 지난 세기에 완성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제 적당한 영양섭취는 더 이른 시기에, 즉 엄마가 될 계획이 있으면 아이를 갖기 몇 년 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1969년에 나온 한 자조지침서는 이렇게 충고한다. "임신중에 여성이 무엇을 섭취할 것인가를 상당히 강조했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이 ... 가장 최 상의 건강상태일때만 임신을 계획하라고 충고한다"Schonfelddt 1969: 8). 상담 매뉴얼인 "OKO-TEST: 유아자문위원(Ratgeber Kleinkinder)"(1988년 5월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1989 년 4월까지 총63,000부를 인쇄했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된다. 엄마의 생활방식이 ... 모유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 채식위주로 식사하고 유기 농산물을 섭취한 여성들의 모유는 질적으로 더 나아진다. 임신기간 동안 잠시 식습관을 바 꾸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오염물질들은 수 년간이나 신체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25-6). 미래에 태어날 아이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면 제대로 먹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 다. 의학이 새로운 지평을 향해 큰 걸음을 내딛음에 따라 고려해야 할 새로운 요소들이 등 장한다. 한 건강 상담가는 이렇게 제안한다. "임신 초기부터 최상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 해서는 임신 전에 철저한 건강검진을 계획하는 것이 좋다"(Beck 1970: 238). 혹은 일찌감치 "임신을 계획하기 전이라도 유전자 상담을 받는다면 훨씬 좋다"(Junge Familie: Das Baby-Journal, 1988/5: 38). 가능한 최상의 조건에서 임신을 계획하려면 전문가의 조언을 받 는 것은 권장할 만한 것이다. 사례는 더 있다. 널리 읽히고 있는 한 여성 잡지에는 '임신 카운트 다운'이란 표제하의 상 세한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의 아이를 보호하라"는 모토하에, 첫 단계는 임신 전 몇 달간 시간을 갖고 치과의사, 부인과의사를 방문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고 양이를 기르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톡소플라즈마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과 유태계 여성, 지중해 지역 출신의 여성들은 특별한 유전적 민감성 때문에 받아야 할 특별한 테스트가 포함되어 있다(McCall's 1986년 1월호: 42). "계획을 통 해 더 나은 아이를"이란 표제의 유사한 프로그램은 임신 6개월 전에 시작하는 이상적인 '임 신 전 관리'를 제안하는데, 그 제안은 두 파트너 모두의 검진과 다양한 혈액검사와 혈압검 사, 균형잡힌 식사에 대한 정보, 알콜과 흡연, 약물을 삼가고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 등을 포 함한다. 이러한 노력의 목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더 나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평범한 아이를 갖겠는가? 더 나은 아이는 머 리에서 발끝까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들은 훌륭한 자세를 갖고 있다. 안짱다리도, 평발 도, 등이 굽지도 않았다. 민첩하고 성격이 밝으며 침착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 턱이 반 듯해서 이도 고르게 자란다. 잘 생긴 두개골은 그 속에 든 뇌가 반듯하게 자랄 수 있을 만 큼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있다(Observer, 1987년 4월 26일자). 태어나지 않은 아기: 다치기 쉬운 생명체 임신 준비기에 적용되던 지침들은 그 '대단한 사건'이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많이 적용된 다. 온갖 종류의 예방조치들과 보호처리가 요구된다. 이때 주요한 추진력은 의학적 진보, 특 히 산전 연구 분야에서의 진보이다. 인간의 생명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관해 19세기 의 여성들은 매우 부정확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이루어진 임신과 출 산 사이의 9개월간에 대한 아주 상세한 연구는 전에는 막연했던 태아의 원시적 상태에 대해 이제 총천연색 사진으로 첫 세포분열의 시작부터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모습까지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태아가 어떻게 성장하고 영양섭취와 신진대사가 어떻게 가능하며 어 떤 외적 요소들이 모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런 영향들을 통제할 수 있으려면 태아를 품고 있는 여성들은 일련의 지시를 받 아야 한다. '주의! 임신한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위험!'(Ratgeber aus der Apotheke, 1989년 3 월 15일자: 14).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의 건강이 아니라 아이의 건강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수많은 음식이 태아에게 해로운 것으로 지목되고 결국은 엄마에게 금지되 는 음식의 블랙리스트가 작성되는 것이다. 당연히 임신중인 엄마는 알콜, 커피, 검은 홍차와 니코틴을 삼가야 한다(Bruker/Gutjahr 1986: 54). 육류와 소시지를 자주 섭취하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OKO-TEST, Ratgeber Kleinkinder. 25). 임신한 여성은 연성치즈와 반연성치즈, 살균처리가 되지 않은 치즈를 먹어선 안된다. 온갖 종류의 치즈에서 외피를 벗겨내서 딱딱하고 얇게 조각낸 가공된 치즈로 바꾸어야 한다. 마 찬가지로 날고기와 돼지고기, 소시지도 먹어선 안된다. ... 덜 익은 고기도 역시 삼가야 한다 (Ratgeber aus der Apotheke, 1989년 3월 15일자: 14). 엄마의 젖은 반드시 제대로 영양소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조언들은 아이가 태어나 도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는 생선을 섭취할 것을 요구받는다. 모유에 포함되어 있는 생선기름의 대사 산물들은 ... 생후 첫 몇 달 동안 아이의 뇌가 빨 리 발달하는 데 필요하다. 베버 교수는 "오메가-3 지방산이 부족하면 중추신경계와 눈에 이 상이 생긴다"고 경고한다(eltern, 1988/4:15). 기꺼운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임산부는 압력을 받게 되고 일어날 위험들은 상세히 제시된 다. 아이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이다. ... 임산부는 특별히 민감한 생명체를 몸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엄마에게 위험하지 않은 세균들이라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을 초래할 수도 있다. ... 리스테리아에 감염되었을 때, 정상적이라면 임산부는 단지 약간의 독 감 증세만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임신중이 아니라면 해롭지 않을 이러한 세균들이 태어나 지 않은 아기에게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간, 비장, 부신, 폐와 위장에 작은 혹이 생길 수도 있고, 순환기나 호흡기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 리스테리아는 뇌에도 영향을 미 쳐서 발작이나 수막염, 조산 혹은 선천적 결함을 낳을 수도 있다. 병에 걸린 아이 중 대략 40%가 출산 후 사망하며 많은 아이들이 영구적 정신지체아가 된다. ... 톡소플라즈마 역시 일반적으로는 엄마에게선 발견되지 않지만 ... 아이에게는 해로울 수 있다. 이에 다른 위험은 병세가 약한 경우에는 발작과 더딘 성장에서부터 심각한 정신지체와 눈의 이상, 심지어는 시력상실에까지 이른다(Ratgeber aus der Apotheke, 1989년 3월 15일자: 14). 이상적인 예비 엄마는 뱃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따라서 그에 따라 삶도 바꿀 것이 요구된다. TV 드라마를 보는 것마저도 아이의 앞날에 해로운 것으로 판명될지 모르며 따라서 보지않는 것이 상책이다. 아이들은 엄마의 자궁 속에서 『달라스』와 『다이너스티』를 골라 본다. 나중에 그들은 이런 연속극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태어나기 전이라도 그들은 특정한 영화로 조종되고 프로그램화되어 그것에 탐닉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면 TV 연속극을 보지 않는 것이 낫다(Junge Familie: Das Baby-Journal, 1988/5: 38). 지역의 대학과 성인 교육 프로그램, 교회, 생태학적 집단, 지역기관과 국가기관들, 그리고 자칭 타칭 전문가들, 이 모두가 임산부를 위해, 그리고 때로는 예비 아빠를 위한 조언을 내 용으로 한 강의와 강좌를 제공하고 있다. 다루는 주제들은 갈수록 풍성해져 간다. 항 대중 잡지의 언급에 따르면, "대부분의 임신 강좌들은 운동과 호흡법, 임산과 출산과정에 대한 의 학적 설명들에 머물지 않는다. 이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까지 포함되며, 엄마와 아빠는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지를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발언에 뒤따르는 보고에는 '예비 부모들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접촉할 수 있는 세 가지 새로운 방법' 이 제시되는데, 이 세 방법은 '산전 발 마사지', '심리-촉각 접촉'과 '산전 대학' 이다(Eltern 1985/9: 15). 출산의 '이유'가 특별한 쟁점인 것만큼 '어떻게' 출산할 것이냐도 쟁점이 된다. 19세기에는 대부분 아이를 집에서 낳았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20세기에는 병원 분만이 우 리 사회에서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세기말이 되자 어떤 것도 당연히 받아들여 질 수는 없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TV나 매체를 통해 어디가 출산의 최적 장소인지를 토론 한다. 주 병원들, 개인 부인과 전문 클리닉, 집에서 출산을 돕거나 병원으로 출장오는 경험 많은 산파. 제공된 선택의 범위는 어리둥절할 만큼 넓고, 그러니 마찬가지로 정말로 책임있 는 부모들은 무엇이 최상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출판시장이 반응을 보였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출산계획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 성을 누리고 있는 작가 키칭어(Sheila Kitzinger)는 '스스로 출산계획 세우기'를 도와준다 (1980: 156ff). 관련된 세부사항들과 가능한 복잡한 상황들을 고려하라, 전자 심장모니터를 사용하는 것에서(사용할지의 여부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경막마취와 전신마취여부를 결 정하기 위한 신토기논 주사의 사용(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하에서)까지(아마도 무모하게 부 모노릇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의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일간지에서도 '최적의 준비'를 도와주는 '포괄적인 점검목록'을 싣는다(Starnberger Neueste Nachrichten/Suddeutsche Zeitung, 1989년 2월 21일자: Ⅳ). 그런 후 "클리닉의 개별 견학을 약속하고 산모병실과 분만 실을 방문하고 의사나 산파를 방문"할 수 있다. 묻고 싶은 질문들은 아마도 "분만과정을 모 니터하는 기계장치로는 어떤 것을 비치해 두었는가(초음파, 심음도, 태아두피 전극장치)이거 나 또는 정기적으로 이 기계들을 사용하는가"일 것이다. 임신은 자연적인 사건일지 모르지만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 자연은 더 이상 우리가 부 여한 의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대체로 전문가의 손에 놓여 있다. 경험적 지식은 평 가절하되는 경향이 있어서 여성은 경험있는 친구와 이웃에게 귀를 기울이고 싶어하지 않는 다. 그보다는 "즉시 의사에게 문의를 하고 그가 제시하는 것을 따르고 그밖의 다른 것들은 하지 않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의사는 임산부에게 아 버지나 남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Schonfeldt 1985: 31). 여담: 사랑, 책임감, 불확실성에 휘말려서 이 모든 제안들은 새로운 아이를 탄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간단한 지침과 규칙들의 목록에 서 일부를 뽑은 것에 불과하다. 이것들이 '이용할' 만하다고 해서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 은 아니며, 아직까지 우리는 실제 행동에 관한 어떠한 신뢰할 만한 데이터도 갖고 있지 않 다. 하지만 현대 부모들 - 특히 엄마들 - 이 부모와 조부모보다는 훨씬 더 전문가의 조언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증거를 통해 알 수 있다(Rolff/Zimmermann 1985; schutze 1981; Zinnecker 1988). 모든 길잡이 책과 안내서, 강의와 강좌들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Bullinger 1986: Reim 1984 참조), 요즈음의 부모들을 '부모노릇 매니아'라는 신종 바이러스 에 걸린 사람들로 묘사하는 힐난조의 발언들도 많다(예컨대 Kursbuch, 1983/72와 1984/76). 그렇다고 모두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은 아니다. 표적집단의 면면은 대강 다음과 같다. 가장 감염되기 쉬운 부류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도시에 살며 첫 아이를 꽤 나이들어 낳고자 하는 중간계급 여성들이다. 다른 여성집단들도 역시 영향받기 쉽지만 차이점은 사회계층과 교육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전문가에게 의존한다는 점인데, 심리학 교과서에서 페미니즘 문헌을 거쳐서 저녁반 강좌, 교회 팜플렛, 잡지에 이르기까지 그 취향이 다양하다. 따라서 '새로운 부모되기'는 극소수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만일 전형적인 특질들만을 추적 해 본다면 아마도 그 범위가 광범할 듯 하다. 우리 사회의 교육수준이 점점 나아짐에 따라 - 독일 고등학교 학생의 1/4 이상이 대학에 갈 자격이 주어진다 - 그리고 더 많은 여성들 이 이에 포함됨에 따라 이런 경향은 갈수록 뚜렷해진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 특히 젊 은 사람들이 - 도시나 도시 근처에 산다. 작고 외떨어진 마을이나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수는 예전보다 줄어들어 간다. 또한 많은 수의 아이를 낳는 가정도 줄어들고 있으며, 한 아 이 가정을 훨씬 선호한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여성들은 '노산모(老産母)'가 될 대까지 어머 니되기를 미루고 있다. 광범위한 '부모되기 매니아'라는 그림은 얼핏 그럴 법해 보이지만, 이 그림은 그 이면의 원인들을 들여다 보지 않고 단지 현상만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 그림 속에 나타나지 않은 내적인 논리를 가정해 볼 때만이, 왜 현대적 조건 하에서 아이를 사랑하고 함께 사는 일이 모순의 덤불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인지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대결해야 할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불안전감: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규정해 주고 서로가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 빚지고 있 는 것을 정의해 주었던 확실성이 점차 사라져 갔다. 현대인은 안락한 둥지와 자연스럽고 정 당하다고 간주되어 온 둥지의 안전한 법칙들로부터 자신이 추방당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다. 그들을 새로운 길로 몰아세우는 주된 일격은 기술적 진보에서 온다. 혁신적 발명들이 등 장하는 급겨간 속도는 부모들의 전통적인 우월한 지식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쟁점이 산전 진단이든 아니면 모유속의 독성이든 간에 증조모의 옛이야기는(그것이 여전히 남아있 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외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자연의 목소리 혹은 심지어는 상식에도 의존할 수 없게 된다. 책임의 원칙: 부모노릇에 적용되는 전통적 원칙으로부터의 해방은 부모의 주도권이라고 불리는 과업을 넘겨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아이의 생명을 창조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개선하도록 기대된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 는 보상적 형태의 일로 이해되어 간다. 혹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세상이 나빠질수록 더욱 더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가령 체르노빌 사건 이 후 오염되지 않은 분유를 찾는 일). 국제적인 규모로 일어나는 환경 위험들은 가족의 사적 인 부엌과 침실로까지 침투해 들어와서, 하루의 일과를 가득 채우는 더 많은 의무와 활동이 된다. 상호모순된 조언: 사람들은 불안전감, 이상, 책임감, 그리고 위험에 처한 환경들 모두를 한 꺼번에 감당해야만 하기 때문에,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쇠퇴해 가는 전통적 설명들을 대신해서 믿을 만한 설명들을 제공해 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에게 의존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과학적 연구와 안내서가 개입해 들어오게 된다. 이 부분에서 과 학적 연구와 안내서가 개입해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주는 영향은 종종 독자들의 불 안전감을 없애기는커녕 더 증폭시키는데, 그것은 전문가, 자칭 권위자, 정신과의사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함에 따라 서로 모순되는 의견들이 분분하게 일어났다 사라지곤 하기 떄문이 다(모유는 건강에 이로운가 아닌가, 아이가 원할 때 수유할 것인가, 아니면 계획된 시간에 맞추어 할 것인가). 이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구조적 요인에 의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과학에 앞선 지식이 거의 모두 언젠가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는 마당에 이 첫째 원칙인 과 학마저 오류가능성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망치려는 시도: 출구인 듯 보이는 것 - 자신이 선택한 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돌아가기, 자연으로 돌아가기, 자발적이고 진정해지는 법을 재발견하기(안내서들이 제시하는 또다른 대중적 충고) - 도 동일한 딜레마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적 생활은 상당한 정도 의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지식 없이 살아가려는 모든 시도는 이해할 만한 것이 면서도 동시에 헛된 것이다. 증폭제로서의 사랑: 아이를 기르는 행동은 정서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긴장감을 요구한다. 아이, 그 나약하고 작은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아이를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부모 들은 계속해서 듣는다. 이러한 절대명령은 부모들의 가장 약한 곳, 즉 그들의 아이들에게 투 자하는 희망과 바람을 자극해서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닫아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조언을 따르지 않는 경우 일어날 대해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리지 때문이다. ... 무슨 일이라도 어떻 게 될까? 과연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지침을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할 듯하다. 이 모든 것들을 조각조각 맞추어 보면 한쪽 부모가 사랑과 그 시녀인 희망과 두려움을 갖 고 품었던 아이에 대한 감정들이 어떻게 역설을 낳게 되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사고에 따르면 부모들은 자식에게 책임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또한 어떤 실수나 수정의 여지도 없다. 성인 파트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대체로 이것 저것 시험해 볼 여지가 있지만(혹은 모든 방법이 실패한다면 이혼도 가능하다),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비 대칭적 계약으로서, 모든 결정을 일방적으로 부모가 감당해야 하며, 부모의 실수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기회를 망쳐놓기 쉽다(이렇게 교육전문가들은 말한다). 따라서 아 이의 복지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만 어떻게 책임을 다할지 불확실한 상태를 아이에 대한 사 랑과 연결짓는 것은 그 자체로 신랄함과 재난으로 넘쳐나는 곤경이며, 그런 점에서 특히 아 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부모되기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라 할 수 있다. 의무적인 산전 진단 지금은 기술의 시대이다. 그리고 임신은 더 이상 자연스런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임신은 예방조처와 의학적 모니터를 요구하는 문제적인 상황이다. 임신이 소위 위험요인의 영향을 받는다면 - 책들이 알려주는 대로 위험요인은 무수히 많다 - 산전 진단이 요청된다. 한 대중잡지의 커버스토리는 과학자들이 밝혀놓은 지식들을 알기 쉬운 언어로 바꾸어놓은 내요으로 가득한 가운데서, 이렇게 진지하게 묻는다. "임신중 초기 검사? 당신의 아이는 건 강하게 태어날 것인가? 어떤 종류의 테스트인가? 그리고 언제 해야 하는가? 위험하지는 않 은가?" (Eltern 1989/6: 커버스토리) 혹 어떤 장애가 발견될 때는, 부모들은 어려운 결정에 봉착하게 된다. "이처럼 약삭빠른 시대에는 사소한 질병과 사소한 장애라도 한 사람의 인생 에서 발전, 통합, 출세와 자기존중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Roth 1987: 100-1). 이 문장 은 인간의 유전자 연구자와 전문가들의 예방의학 회의에서 발언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책임있는 부모라면 아이가 장애자가 되도록 놔둘 것인가? 아이가 이 세상을 불리하게 시작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대답은 책 임감과 나아가 사랑에서 비롯된 낙태일 것이다. 독일연방회의에서 유전공학 위원회의 전(前) 위원이었던 다엘레(Wolfgang van den Daele)는 최근의 추세를 이렇게 묘사한다. 산전 진단 결과에 대한 여성(혹은 부모들)의 반응은 종종 '이것 아니면 저것'의 방침을 따 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그들은 단순한 질병이나 그저 질병에 걸릴 위험만 있어도, 혹 은 그 피해가 클지 사소할지 명확하지 않더라도 낙태를 선택하는데, 그 결과 건강한 태아를 죽이게 될 가능성은 꽤 높게 된다 ... 염색체 이상이 발견되는(가령 XYY 같은)경우는 거의 심각한 상태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이런 경우도 '예방 차원에서' 이상 있는 태아를 낙태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1985: 145-6). 산전 진단은 안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유도한다. 그것은 확실히 부모들 자신의 이 해관계, 장애아 때문에 겪게 될 스트레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소망을 고려하는 것이지만 그와 똑같은 정도로 역시 '아이의 이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 의 유전자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는(고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 다) 그것은 인간의 개입을 넘어서는, 간단히 말하면 운명의 문제였었다. 그런데 이제 유전자 기술이 많은 비밀들을 밝혀낼 수 있게 되자 비밀들은 결정을 내려야 하고 가능하다면 예비 부모들이 피해가야 할 문제로 바뀌었다. 점점 더 많은 진단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부모들도 더 많은 책임감을 갖게 된다. 실험실에서 발견된 것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한다(그리고 은밀하게 명 령한다). 양수 진단 후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정말 다운증후군의 아이를 기르기 위해 우리의 생활을 완전히 바꾼다고 하더라도 다른 엄연한 현실들이 가로막고 있었어요. ... 우리가 나이들면 누가 다 자란 이 아이를 맡아 줄까요? 국가가 정신지체자에게 제대로 된 인간적인 서비스를 실제로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다운증후군 아이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 나요? 양심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피보호자가 될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선택할 수는 없었어 요(Rapp 1984: 319). 지금의 임신은 불과 10년 저네 비해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때는 일단 임신을 하기로 결정 하거나 혹은 우연한 임신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임신을 끝까지 유지할 지에 대해 계속 결정 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었다(Hubbard 1984: 334). 그런데 변화는 산전 진단과 함께 생겨났다. 이제는 '잠정적 임신'이란 것이 존재한다 (Rothman). 예비 어머니는 그녀의 임신을 내심 일정하게 유보한다. 실험실의 테스트가 완결 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 양수검사의 경우 20주째를 의미한다 - 많은 여성들은 어떤 희 망도 중지하고 감정을 조절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어떤 상황이 이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실험실에서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라고 신호를 보 내고 난 후에야 즐거운 기대감이 생겨날 수 있다. 다음은 산전 진단의 결과에 대한 한 현장 연구에서 인용한 것이다. 양수검사로 인해 강요된 상황 속에서 여성이 임신에 대해 갖는 태도는 단지 잠정적일 뿐 이다. 그녀는 임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 대부분 의 여성들은 그럭저럭 근심걱정을 몰아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은 점차 로 태아와 맺게 되는 유대감이다. 여성은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 뱃속의 생명체가 결국 아기가 될 수 없고 그저 유전자적 사건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낙태될 태아라면, 어떻게 그 녀가 자기 몸속의 아기와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기 시작하고 아이를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 하고, 그의 엄마라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Rothman 1988: 101-3) 한편에서는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새로운 개입 방식을 사용할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다. 당분간은 출산 전으로 개입이 한정되어 있지만, 곧 임신 전까지 개입할지 모른다. 십 중팔구 미래의 전망은 대체로 이러할 것이다(Beck-Gernsheim 1988b). 즉 자손의 유전자 구 성을 골라내거나 포기하거나 의도적으로 혼합하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유전자 구성은 테스트 튜브 안에서 유전자 벽돌로 만든, 최상급의 결과를 보증하는 일종의 건축물이 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자연스러운 임신법에 의존할 필 요가 없게 될 것이고, 대신에 최적의 유전자적 생산물을 만들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통한 기준을 통과한 정자와 난자를 이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가능성의 범위는 매우 크지만, 그 것들을 하나하나 시험하기 위해서 사랑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존 로크는 "자연을 부정하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Rifkin 1987 : 30에서 재인 용). 이것이 재생산 기술의 시대에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의미하는 바를 수츠(Yvonne Schutze)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그러면 아이에 대한 사랑은 당연히 부모가 아이의 유전적 자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가로 측정될 것이다"(1986: 127). 아이 바라기: 환자로서의 부모지망자들 만일 우리가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최 근 연구에 따르면 필사적으로 임신을 시도하고 아이를 갖기를 원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사 람들이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어림잡아서 전체 커플의 대략 10-15%가 수정단계에 문 제가 있다. 그저 잘 되지 않는 것이다(Michelmann/Mekkler 1987: 44). 그래서 현대 의학이 이들에게 소위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미 부인과의 상례가 된 호르몬 처치에서부터 시험관 수정이나 급속 냉동시킨 난자와 정자은행을 사용하는 인공 배란에 이르기까지 그 방 법이 다양하다. 사용되는 방법이 재래의 것이든 독특한 것이든 모두 하나의 목표를 갖는다. 커플이 열렬히 원하는 아이를 생산하는 것, 이런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의학 전문가들이 임신하도록 도와줄 때 어떤 장애와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걸까? 그에 대한 전망과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좀더 꼼꼼히 살펴보자. 우선 체온을 재고 호르몬 처리를 받는 등 불임처치의 표준적인 준비된 일부 과정이 있다. 이때부터 성생활은 대체로 -그리고 '이상적인' 경우에는 완전히 - 의학적 통제하에 들어간 다. 그것은 경쟁적인 스포츠나 의무적인 운동으로 전환되어(언제 하고 혹은 언제 하지 않는 가, 그리고 어떻게, 어떤 자세로 하는가)지시에 따라 하게 된다. 이것은 성관계를 단순한 생 물학적 행위로 환원시키고, 그것의 '잉여적' 측면들, 에로틱하고 자발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은 억압해 버린다. 스릴은 없어지고 자신에 대한 감정은 파트너에 대한 감정만큼이나 상처를 입는다. 다음의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을 보자. 불임치료의 주된 문제는 사랑의 행위를 질서로 규제하는 데 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에 서 모든 자발성을 없앤다. 나는 배란기에만 그를 원하게 되는 단계를 겪었다. 다른 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듯 했다. 섹스가 잡일처럼 여겨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것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소 성가 시고 특별히 흥분되지도 않았다. 얼마간은 경직되었다. 나는 섹스에 관한 모든 것을 계획했 다(Pfeffer/Woollett 1983: 28). 좀더 복잡한 처치법으로 옮겨가면, 섹스를 규제하는 것말고도 씨름해야 할 다른 요소들이 있다. 그 과정들은 건강을 위협하거나 정서적 긴장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종종 너무 길 고 시간을 낭비하며 비용이 많이 들고도 제약이 많다. 다음은 시험관 수정의 여러 단계들에 관한 생생한 설명이다. 주기의 7일째 되는 날까지 똑같은 일이 매일 반복된다. 적어도 정상적인 일과 정도는 허 용된다. 이참에 알약을 복용하고 에스트로겐 수치를 결정하기 위한 정맥혈을 채혈하고 엉덩 이에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 오후 3시에 클리닉에 전화를 해서 저녁 호르몬 할당량을 확인 한다. 남편이 내게 주사를 놔준다. 그는 피부과 의사이다. IVF 팀은 실험실에서 보고된 환자 의 호르몬 수치를 두고 토론을 하고 나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처치를 그만할 것인지, 아니면 더 자극을 줄 것인지...... 처치가 진행되어 갈수록 채혈은 점점 고통스러워진다. 바늘을 찌를 때마다 내 몸이 침범 당하는 것 같다. ... 하지만 호르몬과 함께 희망도 투여된다. 남편과 나는 더욱 신경이 예민 해지고 긴장되어 간다. 10일째부터 우리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주기의 8일째에서 13일째 사이에 많은 것이 결정된다. 우리는 집에 앉아서 소포의 지름과 호르몬 수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천자(centesis)할 날, 배아 이식할 날, 우리가 꿈꾸는 아이가 태어날 날을 잡는다. ... 우리는 희망에 들떴고 우리의 희망은 매일매일 초음파실의 어둠침침 한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것에 좌우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면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긴장된 시기가 온다. IVF 처지가 우리의 생활을 송두리 째 지배했지만, 우리는 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끊임없이 시 달렸다. 나는 아침에 검사하기 위해 눕기 전에는 언제나 소포가 사라졌거나 줄어들었을까봐 조마조마했다. 매번 스크린에 검은 점처럼 거품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면 안도했다. 마침 내 배란일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 11시에 배란을 유도하기 위해 주사할 것입니다." 나는 점 점 침착해져 갔지만 남편은 갈수록 긴장되어 갔다. 36시간 안에 난자가 제거되면 나머지는 그의 책임이었다. 절대적으로 그는 기능을 해야만 한다. 임상용어로는 "파트너가 신선한 정 자 샘플을 제공한다" 다음 이틀간 난자가 제거되고 정자가 생산되고 배아가 옮겨지는 모든 일들이 벌어지며,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클리닉에서 계속적인 의학적 모니터하에서 진행된다. 그러고 나면 환 자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그때도 지시사항이 있다. 나는 환자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 만 그때도 지시사항이 있다. 나는 아주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스포츠나 사우나, 무거 운 물건을 드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2주 동안 성관계를 갖지 마세요"(Fischer 1989: 48-56). 이상은 아주 전형적인 경험의 서술이다. 처치가 성공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무엇보다도 영 구적인 긴장과 염려의 상태가 야기된다. 배란이 되었는지, 수정가능한 난자가 천자과정에서 발견되는지, 수정된 난자에서 세포분열이 일어나는지, 호르몬 수치가 충분히 높은 상태인지, 착상이 성공적인지 ...... 인지 아닌지의 연속이다. 정상적일 경우에는 보이지 않고 주목받지 않은 채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여러 개의 분리된 가시적 단계들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지에 관한 연구가 보여주듯이(Holzle 1989; Klein 1987; Lorber/Greenfield 1987; Williams 1987)그것은 여성들에게 처치는 정서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주며 정서적인 애착을 낳게 한다. 각각 새로운 단계가 완성되어 가면 서 커플은 그들이 목표, 즉 아이를 갖는 것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다음 인터뷰를 보자. 그들은 현미경을 통해 존과 내가 유리접시에 든 우리의 배아들을 보게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그것을 믿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저기에 그들 이 있다. ...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정말로 그것들을 아이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다. 하지만 이 세포들은 아이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 ... 우리의 아이 ... 처음으로 추상적 인 희망이었던 '아이'가 현실로 다가왔다(Klein 1987:8). 처음으로 희망이 가시적 형태를 취한다. 이것은 여성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연한 것도 어떤 비이성적인 반응도 아니다. 반대로 기술적 절차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것을 잊는 일은 쉽지 않다. 비록 처치가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거의 성공할 뻔 했다, 첫 단계들은 잘 진행되었다. 아마 다음 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리고는 다시 한번 처치 를 시작한다. 기술적 가능성은 은밀하게 유혹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연구에 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을 수 있다. "시험관 수정 및 이에 대한 경험이 갖는 내적 특성의 일부인 정서적 강렬함 때문에 ... 곧바로 여성들은 기꺼이 추가 처치를 시도하게 된 다"(Williams 1987: 2). 이 점은 위에 인용된 인터뷰에도 예시되어 있다. 이미 강력한 감정을 일으켜 놓은 유리접시의 내용물을 보고 난 후에 "그 후 당신이 받는 것은 이런 전화내용이 다. '안됐군요. M 부인, 다음 번을 기대해 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못견디게 갈망하게 되고 다시 한번 서명하게 된다. 당신은 그것에 아주 가까이,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 정도로 가까이 있는 듯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해서 당신은 다시 한 번 노력해야만 했다" (Klein 1987: 8). 감정의 청룡열차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여성들은 아찔한 감정의 혼란상태를 경험한다. 이것 역시 우연한 일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제공된 처치의 산물이다. 처치는 아주 상이한 단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각 단계의 위험과 기회를 평가해 보아야 한다. 엄격한 실험실 결과들은 마술적 메기 지가 된다. 여기 한 여성이 ZIFT 처치 동안에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을 묘사한다(ZIFT란 시 험관 수정과 관련된 방법으로, 세포분열 단계보다 앞선 배아 이전의 단계의 수정란을 난관 에 투여하는 것이다). 나는 처치과정 이전에 수정약을 복용하는 2주 동안 낙관적인 마음으로 임신에 임했고, 2 주가 지난 후에는 안에서 자리잡았을지도 모르는 배아가 잘못될까봐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분되었다. 진행과정은 악마적인 사랑을 하는 상황과 비슷했는데. 피 부를 잡아당기고 학대하는 것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ZIFT 첫날에 나는 내 난소에 서 11개의 난자를 얻어냈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는 흥분되었다. 어떻게 내가 잘못될 수 있겠 어? 하지만 밤이 되자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난자들이 전혀 수정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애당초 남편과 내가 절망적이리만치 어울리지 않아서 우리의 정자와 난자가 몸 밖에서는 구 애를 하려고 들지 않으면 어떡할까? 아침이 되어 수정란이 생기지 않으면 어쩌지? 간호원이 일찍 전화를 걸어서 수정란이 생겼다고 말해주었다. 네 개의 난자가 수정된 것 이다. "와서 받아가세요" 그녀는 말했다. 초대를 받은 내 가슴은 몹시 뛰었다. 나는 마치 특 별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 입었고 머리도 감았다. 내가 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다면. 그리고 내 안에서 그들이 분 열하고 자랄 수 있다면. ZIFT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희망을 가졌다. 아니, 그런 표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이 나를 마취시키고 배 한가운데를 아주 작게 가르고는 세 개의 배아(네 번째 것은 만약을 대비해서 냉동되었다)를 나의 건강한 도뇨관을 통해서 한쪽 난관으로 떨어뜨릴 때는 희망에 들떠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배아들이 해야 할 일은 기다림에 애탄 나의 자궁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제 무엇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런데, 무엇인가가 그렇게 했다, 어떤 무엇인가가. 내 배아들은 자리잡지 못했다. 사라져 버렸다. 이 사실이 명확해졌을 때, 시술하고 난 뒤 2주 동안 내 자신도 한동안은 슬픔으로 태아처럼 위축되어 버렸다. 그런 절대 죽음이 아니며 유산도 아니고 오로지 임신미수였다. 하지만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의 배아들을 위해 슬퍼하고 있었던 것 이다(Fleming 1989). 그녀의 반응은 특이하지도 극단적이지도 않다.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이는 처치 기술과 마 주했던 여성들은 최고의 즐거움과 비참한 심정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것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의사들이 하라는 대로 별 수 없이 끌려다니고 있다고 느 낀다. 이 분야의 개척자들조차도 이런 상황은 분명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처치에서의 기술적 진보가 매력을 잃게 되는 측면은 자신을 "재생산 프로그램의 환자 로 인정하면서 목표에 거의 도달했다고 느꼈던 수천의 남녀들이 겪게 되는 희망과 실망, 신 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이다"(Brautigam/Mettler 1985: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