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치를 알기, 결정을 내리기 이처럼 남녀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전망도 다르지만 이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1%년대까지만 해도 대다수 여성들은 이러한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였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이러한 차이는 많은 주목을 끌었고,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획 득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 있어 왔다. 이러한 노력이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불평등 에 대한 인식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따라서 우리는 진짜 불평등과 그 뒤에 숨겨진 이유 들을 불평등에 대한 공적 인식과 구분해야 한다. 남성들의 역할과 여성들의 역할간의 차이 들은 상호 독립적으로 변화하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즉, 실제의 객관적인 사정이 그 하나이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가 나머지 하나이다. 우리가 이처럼 새로운 상황 에 눈뜨도록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현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상 생활의 전 영역에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들의 수가 급 격히 증가하고 있다. 약간 과장하자면 '뭐든지 결정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설거지를 하고 누가 언제 기저귀를 갈며 쇼핑이나 청소를 할 것인지 하는 문제들은 누가 생활비를 벌 며 누가 이사할지를 결정하며 그리고 침대에서의 밤의 기쁨은 반드시 일상 생활을 함께 하 는 정식 결혼한 반려자하고만 즐겨야 되는 것인지 둥의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불명확한 것이 되고 있다. 결혼은 섹스와 분리될 수 있고, 섹스는 부모되기와 분리될 수 있으며, 부모되기 는 이혼과 그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개의 가정, 함께 살기 혹은 떨어져 살기 등에 의해 더 많 은 갈래들로 나뉘어진다. 또한 많은 결정이 언제나 수정가능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더 많은 가지를 칠 수도 있다. 이런 수학적 연산은 비록 동요하는 것이긴 하지만 등식의 한쪽에 꽤 높은 합계를 산출하는데, 이것은 ‘결혼’과‘가족’이라는 확고하고 고결한 용어들 뒤에 은폐되 어 있어서 그렇지 가정에는 많든 적든 다양한 어두움이 드리우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우리의 사생활 어디를 살펴보거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런저 런 결정을 내리도록 강제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필수적인 계획과 합의도 변경 혹은 취소 될 수 있고, 또 이것은 얼마간의 불공평을 수반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당화되어야 한다. 여 기서 발생하는 토론과 언쟁, 실망과 실수들은 위기나 기회들이 남자와 여자에게 얼마나 다 르게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체계적 관점에서 볼 때 주어진 사실을 결정 사항으로 바꾸 는 것은 양날의 칼을 갖고 있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을 자유는 사라져가고 있다. 선택 의 기회란 결정을 내리라는 압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의 느낌, 문제 그리고 그것이 초 래할 수 있는 영향들 때문에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사결정은 그 자체가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 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가능한 해결책들을 가로막는 다른 연관된 사실들과 온갖 모순을 깨닫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종 이사라는 아주 평범한 결정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직업 시장은 직장인 들이 가족의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가족은 이와 정반대 의 것을 원한다. 만약 시장경제가 철저하게 관철된다면 어떤 가족척 결속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경제적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라도 회사의 요구 부응할 수 있도록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상태로 있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속에 방해 받지 않는 개인이 이상적인 직장인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경제 사회는 궁극적으로 무자녀 사회이다. 아니면 아이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독신 아버지나 독신 어머니와 함께 자라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 관계가 가진 인력과 상업적 요구가 가하는 인력간의 이러한 모순은 오직 여자에게 결혼이란 직장의 포기, 육아 임무의 인수 그리고 남편의 직업이 요구한다면 언제라도 이사 하는 것에 동의하기를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지는 한에서만 은폐될 수 있다. 이제는 남녀모두 각자 밥벌이를 원하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니까 이런 곤경이 드러난 것이다. 오직 국 가만이 해결책이나 도움을-즉 모든 시민들을 위한 최저 임금,취업 여부와 무관한 사회적 안 전망, 공동 고용을 막는 방해물의 제거 혹은 특정 직업을 위한 기준의 수정 등등-완전히 제 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공적 계획은 기미조차 없다. 따라서 커플들은 사적인 해결책들 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결국 가능한 선택지 중의 하나를 골라 그들끼리 위험을 배분하라 는 것과 마찬가지다. 핵심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즉 누가 경제적 독립과 보장, 즉 현대 사회 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직업상의 진로를 완전히 내팽개쳐 버리지 않는 한 배우자와 함께 이사하려고 직장을 포기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불이익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보통인데 말이다. 직업에 따른 이동성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덧붙여 아래와 같은 극히 중요한 다른 요인들도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몇 명이나 낳고, 언제 낳을 것이며, 누가 돌볼지 하는 문제, 일상의 허드렛일을 분배하는 만성적인 문제, 피임 결정의 일방성, 낙태 혹은 성적 기 호에 대한 공동 입장의 발견, 심지어 마가린 선전에까지 나타나는 성차별적 광고의 맹습에 저항하기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이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 런 문제들을 생각하다보면 불가피하게 남자의 관점과 여자의 관점에 따라 이 문제가 얼마나 다르게 보일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아이를 낳겠다는 선택은 잠재적 어머니 와 잠재적 아버지에게 정반대의 영향을 주게 된다. 이에 더해 만약 결혼 생활이 마치 일시 적인 타협인 것처럼-말하자면 이혼 준비가 된 것처럼-영위된다면 양쪽 파트너가 두려워하 는 헤어짐은 훨씬 더 재촉될 것이며, 이 모든 결정과 타협의 불공정한 결과는 백일하에 드 러날 것이다. 최근의 모든 기술적 진보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나타난 온갖 금기의 붕괴-공상과학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유전 공학의 온갖 실험 결과들 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을 특수 교육이나 심리 프로그램에 보내는 일이나 임신 중의 개 입 등-를 고려한다면 예전에는 통일된 가족이었던 것이 이제 남자 대 여자, 어머니 대 아 이, 아이 대 아버지와 같은 서로 다른 진영들로 나뉘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 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족간의 합의로 고수되어 오던 것은 끊임없이 내려야 하는 온갖 결 정의 압력 아래서 계속 부서지고 있다. 그런 문제로 가족에 과부하를 주는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쪽은 사람들이 자주 두려워하는 바와 달리 그 사람들 자신이 아니다. 이런 쟁점들 은 대개 비개인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예컨대 탁아 문제를 둘러싼 혼란들은 아이를 돌보는 일은 헌신적인 직장 생활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공식적인 견해의 부산물인데, 이런 견 해는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 방어되고 있던가). 물론 이런 통찰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족에 영향을 주는 외부의 모든 것들- 취업 시장, 고용 제도 혹은 법률-이 왜곡되고 축소된 우리의 사적 생활에 어떻게 침입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가족(모든 대안 가족을 포함해서)안에서 모든 구성원이 관리되고 있고 파트너들간의 모든 불공평을 역전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망상이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조장되고 있다. 심지어 가족 생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모노릇조차 모성과 부성이라는 부분품들로 분해되 기 시작하고 있다. 현재 독일 어린이의 1/10이 편모 또는 편부 슬하에서 자라고 있다. 즉 독신남이나 독신녀에 의해 보살펴지고 있다. 편부모 가족의 숫자는 양쪽 부모가 다 있는 가 족이 감소하는 꼭 그 만큼씩 증가하고 있다. 독신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버림받은’결과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일 때가 많다. (실로 오직 아기들을 만들기 위해서만 필요했던 그리고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아이 아버지들과 했던 싸움들을 고려한다면 독신이야 말로 많은 여성들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열망했던 대로 아이를 키우는 유일한 방식으로서 호 소력있게 다가가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감정과 책임감은 개인화 과정이 얼마나 진행되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한편으 로 아이는 자기 자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의 하나로 여겨진다. 비용도 많이 들고 소모 적이며, 예측할 수 없고 활동을 제한하며, 아무리 주의 깊게 세운 계획이라도 절망적인 혼 란 상황에 빠트리기 쉽기 때문이다. 아이는 태어나는 즉시 부모의 생활을 자기의 요구로 가 득 채운다. 아이의 목청의 힘과 따뜻한 웃음과 함께 부모는 아이의 생물학적 리듬에 따르게 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아이를 절대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는 가장 끝까지 남는,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제1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파트너들은 왔다갔다할 수도 있지만 아이는 남는다. 다른 관계에서 헛되이 찾아 헤맸던 그 모든 것들을 아이에게서 찾거나 아이를 향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잘 지내는 일이 점점 더 어려 워지고 있는 반면, 아이는 동반 관계, 감정의 공유, (아이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면 희한하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을 방식으로 이뤄지는)자연스런 신체적 접촉 둥에서 독점적 지위를 획 득한다. 바로 여기서 모두가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점점 더 희 귀해지고 있는 어떤 격세유전적 사회 경험이 찬양되고 장려된다. 아이들을 맹목적으로 사랑 하고 무대 중앙으로 밀어 넣는 일(지나치게 응석받이가 된 불쌍한 생명들이여!),이혼재판 동 안과 후에 벌어지는 양육권 분쟁들은 모두 이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 는 외로움에 대한 최후의 대안이 되고,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사랑받을 기회를 지 켜줄 수 있는 보루가 된다. 이것은 사방에 만연해 있는 실망감을 벌충하기 위해 생활에 ‘다 시 마법을 거는’사적인 방법이다. 출생률은 저하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처럼 아이들이 중요했던 적은 없었다. 대개 한 명의 아이만이 있다. 한 명 이상의 아이를 키우는 것은 거 의 감당할 수 없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경제적)비용 때문에 아이낳기를 미루 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상상하는 사람들은 세상사를 오직 손익이라는 관점에서만 바 라보는 사람들로, 이들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진 희생자일 뿐이다. 중세의 마지막 자취, 즉 앞서 논의된 대로 산업 사회가 필요해서 보존해 온, 그리고 자연 스런 것으로만 보였던 중세적 성별 역할은 녹아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가 얼마 나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제대로 간파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자들과 심리치료 사들은 고객의 현재의 비참함을 오직 개인의 아동기 때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하려 고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초점을 놓치고 만다. 요즈음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삶이 란 본래가 모순적인 것이며, 자기 삶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그 어떤 전례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들이 가진 고통의 뿌리를 유아기의 체험에서 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오류이다. 양성이 봉건적 역할들을 훌쩍 털어 버리더라도 모든 사람 들은 연인, 부부, 부모로서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평등에 대처해야하는 또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는 심리학자들도 이런 측면에 도전해 이런 차원 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접근 방식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개인의 종말인가, 주관성의 무제한적 르네상스인가? 산업 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남녀의 역할에 관한 봉건시대의 고정관념은 개인 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이런 식으로 밖으로 노출된 우리의 내적인 삶은 지금 한창 붐을 이루고 있는 심리 사업, 다양한 종교 분파, 열광적인 정치적 운동을 촉구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는 우리 자아에 남아있던 한 조각 최후의 사적 영 역마저 상실하고, 제공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고 말하는 교묘하게 조작된 소비자로 변모 하고 있는가? 1970년대의 사회적 충동은 얼핏보면, 그리고 얼핏 보았을 때만, 주체성과 나르시시즘의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좀더 꼼꼼히 살펴보면, 결혼과 가족 안팎에 존재하는 온갖 관계와 헌신들의 일상적 현실 속에는 고된 노동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러한 노동이 미래의 생활 방식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짐을 더욱 무겁게 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변화는 전체적으로 볼 때 더 이상 단지 사적인 현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형태야 어떠 하든 또 반복해서 후퇴를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적 영역이라는 대단히 민감한 영역 안에서 남녀 양성의 관계들을 기워 수선해 보려는 일련의 시도들 그리고 억압을 공유하고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연대를 발견해내려는 시도들이 계속 쌓여나가고 있다. 이것들 은 탁상공론을 일삼는 이론가의 머리에서 나온 그 어떤 전략보다도 더 훌륭하게 사회가 가 진 난점의 뿌리에 도달하고 있다. 개인은 종종 죽었다고 선언되고 매장되어 버린다. 그러나 200년에 걸친 문화적 평가와 이데올로기적 분석 후에도 아직 개인은 살아남아 우리의 마음과 글쓰기를 흘리고 있다-하 지만 오직 ‘주체적 요소’로서만. 이것이 아도르노가 내린 결론이다. 그는 '어릿광대'라는 제 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표준화되고 관리된 인간 단위들 가운데에도 계속 인간은 존재한다. 심지어 보호되기까지 하며 독점적 가치를 획득한다. 그러나 실제로 개인은 자신에게 고유한 단일성의 기능일 뿐 이며, 또한 이전에 다른 어린아이들이 비웃었던 기형아들처럼 일종의 전시 품목과 같다. 개 인은 더 이상 독립적인 경제적 존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특성은 객관적인 사회 적 역할과 모순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그는 자연 보호구역 안에서 길러지고 한가한 명상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일어난 일들과는 모순된다. 당시 일어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강력한 주관성의 르네상스는 아직까지도 재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온갖 종류의 쟁점을 둘러싸고 다양한 소그룹과 서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비록 불안한 조직적 기반 때 문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기성 정당과 제도의 저항에 맞서고 수십억 달러씩 투자하는 산업계의 엄청난 무게에 대항하면서 세계가 위험에 처했다는 테마를 사회적 의제로 올려놓 을 수 있었다. 어떤 테마가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보통 시민들이 쥐었다고해도 과 장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승인을 얻기까지는 한발 한발 사다리를 올라갈 수밖 에 없었다. 박해받고 조롱당하고 아예 배제되는 단계를 거쳐, 마침내 정당의 강령과 정부 시책에 들어가는 길을 말이다. 여성, 환경, 평화와 같은 주제들은 이런 방식으로 쟁점화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들은 아직도 대부분 말뿐이거나 때로는 단순히 제스처를 취하고 말거 나 더 자주는 단지 나도 안다는 식으로 투덜거리고 말뿐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말 의 수준에서만 보면 지금까지 이루어낸 승리가 너무 훌륭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의 대부분은 그저 포장에 불과하거나 기회주의일 뿐으로 진짜 철저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은 정말 가끔씩밖에 찾아볼 수 없다. 많은 행위와 사실들이 전혀 설명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여전히 진실이다. 즉 지금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미래의 몇몇 주제들은 분명 우리 지배자들의 선견지명이나 국회의 토론 혹 은 사업계와 과학 내부에 존재하는 권력의 대성당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제도화된 무지의 저항에 대항하고, 종종 혼란되고 도적(주의)적이며 의구심에 가득 찬 분파들의 노력에 의해 비로소 의제로 제시될 수 있었다. 그리고 민주적 전복은 전 혀 예기치 않았던 승리를 거둬 왔다. 그것도 다름아닌 독일에서, 즉 당국의 완고한 신념으 로 인해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광기에 가득찬 살인적 관료 정책에 대해 맥없이 순응해 왔던 바로 그 독일에서 말이다. 이것은 그나마 이제는 지치고 초라해진 부르주아 좌파 지식인을 위한 우유에 적신 빵 한 조각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퇴각에 불과한 것을 반란이라도 되는 것처럼 재해석하는 경박스러움일 뿐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어찌 되었든 사태가 더 나아지고 있다고 주장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는 시를 쓰고 오후에는 핀 을 만들며 저녁에는 낚시를 가는 ‘새로운 인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난 20년 동 안 공공의 의식 속에서 일어난 시대적 문제의식의 변동과 변화를 단지 보이스카웃이나 계급 투쟁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지신의 완고한 전제 사항들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독립적인 경제적 삶을 상실하면서 개인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확히 여기에 오류가 있다. 개인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복지국가 안에서 새로운 경제 적 지위를 획득했다. 개인은 일차적으로 특정 사업의 피고용인이 아니라 집단 거래와(그의 자격과 이동성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사회적 안전망에 의해 조직되고 완충되는 노동 시장의 참여자이다 이리하여 나는 나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존재로서 자발적으로 사회적 기 준에 적응한다는 아주 독특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존재는 분명 최근 사망한 부르 주아 개인의 부활이 아니며,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매력에 유혹당해 스스로 자기의 계급적 역할을 기만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망상도 아니다. 좀더 간결하게, 어쩌면 너무 지나치게 단 순화시켜 본다면 이렇게 된다. 즉 이 사회적 존재는 어쨌든 항상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밖 에 없는 운명을 지닌 자기 일대기의 무대 감독인 것이다. 개인화된 사회 내에서 우리들 각자는 다름아니라 바로 자신을 자기 인생의 중심축이며 자기의 능력, 선호, 관계 등등을 계획하는 지휘 본부로 바라보도록 배워야 한다(영원히 불 이익을 당할 고통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만약 우리 자신의 일대기는 우리 자신이 쓰는 것 이라면 '사회’는 우리가 조작할 수 있는 하나의 변수 정도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의 부족은 분명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문제일 테지만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변변찮은 성적을 갖고 의과대학을 간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의 고유한 삶을 침 해해 들어오는 사회적 결정인자들은 ‘환경적 변수’로 가공되어 ‘창조적 수단’에 의해 개량 되거나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일상 생활 속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기회를 선택하고 열어젖히며, 그리하여 자신의 미래를 위 해 계획을 세우고 의미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살아 남으려면 우리는 우 리 모두가 탐닉하고 있는 이 영리한 섀도우 복싱 뒤에서 자기중심적 태도를 발전시켜야 하 며, 세계와 나 자신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야한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창문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개인적 해결책 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표준화된 방식에 동조하고 그에 맞 춰 행동하라는 압력도 상당히 존재한다.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수단들은 또한 동일성을 유발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시장, 화폐, 법률, 이동성, 교육 등의 모든 영역에 고유한 방식으 로 적용된다. 개인이 처한 상황은 취업 시장에 깊숙이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의존성의 이 른바 결정판으로,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회가 시장 원칙을 모 든 사람에게, 즉 아직도 전통적인 지원 시스템(예컨대 결혼 등)에 의지하고 있는 극소수 사 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는 반드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 우리는 개인이 되라는 압력과 표준화된 전략을 채택하라는 압력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러나 이 사실만 갖고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곤경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 운 취업 시장의 요구는 꽤나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적인 삶과 우리의 공적인 입장이라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을 서로 연결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대기를 만 들어 가는 동안 회사, 사무실, 비즈니스 공장이 우리의 사적인 가정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다. 이처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순적이 다. 개인의 결정은 외부의 영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외부 세계처럼 보이는 것이 개인 적 일대기의 내부가 되고 있다. 우리의 사적인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결정들이 사실은 환경과 우리 주변의 외부적 결정들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었음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로서는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위험, 알력, 난점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다. 그것들은 크건 작건 정치인들이 토론하고 있는 공적인 삶의 거의 모든 측면, 즉 이른바 '사회적 안전망의 구멍’, 임금 협상과 노동 조건, 관료주의 척결, 교육 제공, 교통 문제 해결, 환경 보호 등을 둘러싸고 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일대기는 점점 외부인들에 의해 쓰여지 고 있으며, 우리의 사적인 결정들은 우리 손을 떠나고 있다. 개인적인 선택이나 행동 또는 책략들은 사람들을 특정한 삶의 행로로 안내하는 동시에 사회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위치를 부여한다. 특정한 학교에 들어가기, 시험에 합격 또는 불합격하는 일, 이러저러한 직업을 선 택하는 일 등을 그런 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명백히 자유롭고 사적인 결정이나 행동 방식조차 정치적 정황이나 공적인 기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육을 보라. 교육 분야에서 최상층부의 결정은 개인의 개별적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느 날 갑자기 비특권 집단이 지원받을 가치가 있다고 결정되어 장학금을 받게 되거나 아니면 이와 반대로 이런 지원이 철회되고 엘리트를 지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 다. 가족 문제나 이혼 법률, 납세 입법이나 연금 제도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각자가 처해 있는 재정적 지위에 따라 결혼이나 재혼을 장려 또는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공식적 의사결정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개인들의 일대기들은 그만큼 더 위기에 민감 하게 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열쇠는 고용에 있다. 따라서 쉽게 취직하려면 적절한 훈 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사회적, 물질적으로 잊혀져 버리고 만다. 따라서 직업 훈련의 제공이야말로 젊은이들이 사회 속에 자리잡도록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와 동시에 경제적 또는 인구학적 변동은 한 세대 전부를 사 회의 주변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누가 지원받을까에 대한 공식적 결정은 시장 의 필요에 따라 내려지기 때문에 '한 세대 전체, 즉 또래 집단이 전혀 아무런 발판도 얻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고용 기회를 갖지 못한 특정한 연령 집단 전부에 게 일종의 보상책으로 정부가지출하는 부적절한 급여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공식적 사고와 각종 규제 조치들은 아직도 ‘표준화된 일대기’노선을 따르고 있다. 이 개념 이 점점 더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예컨대 사회 보험은 오늘날과 같은 대량실 업 시대에는 거의 충족시킬 수 없는 기준에 따라 그리고 가족 안에서 그리고 남녀 양성간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전혀 발맞추지 못하는 그런 기준에 따라서 지불되고 있다. 오늘날 '가족을 위해 밥벌이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소득자와 부양자, 보살핌을 제공하는 사람과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의 역할이 공유되고 교체되는 가족으로 대체되었다. 전혀 손상되지 않 은 가족은 가지각색의 수많은 '깨어진 가정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독신 아 버지들이 자녀 양육 등에 대해 어머니에게 독점권을 주는 이혼 법률의 차별적 관행에 맞서 고 있다. 산업 사회의 중심축들, 즉 사회 계급, 핵가족, 성별 역할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사회는 산 업주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해 감에 따라 이러한 기능들을 대신 떠맡게 된 새로운 사회복지 체계와 행정적, 정치적 제도들을 갖추어 가고 있다. 이들은 규범을 부과하고, 공식적 기준에 서 ‘일탈한’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승인 또는 처벌을 분배하며 오늘날에는 오직 인 구의 아주 작은 부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확실성들을 가정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과 정에 개입한다. 이런 방식으로 공적 계획은 점점 더 실제 생활과 모순되고, 산업 사회의 구 조는 규범적 율법주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위험에 처하고 있다. 그 결과 사적이자 정치적인 쟁점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증폭되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주관성이 자라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개인화는 개체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 인화는 오히려 소비자 의식과 자기확신의 혼합물이다. 이러한 자기확신은 삶의 만병통치약 이 되어 개인적 해결책을 찾아내고, 불확실성에 대해 대처하고 또 의심스러운 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비일관성을 수용하고 그것을 유쾌한 시니시즘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아주 풍부 해질 수도 있다. 이리하여 마치 수천 명의 카프카적 인물들이 되살아오고 있는 느낌이 틀 정도다. 즉 아주 흔하며, 앞으로 만나게 될 장애물들을 수족관 속의 물고기인 양 에둘러서 피해갈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세속적인 사람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녀 양성간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환경 오염에 맞서고 평화를 지키려는 주의 주장들 속에 어떤 종류의 계몽 정신이, 물론 지식인들의 다소 현학적인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생활에 꼭 들어맞는 형태의 계몽 정신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작은 새싹을 두고 너무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진실로 계 몽된다는 것이 일상의 수많은 잡사로부터 자기만의 조그만 구석자리를 다듬어내는 것을 포 함한다면, 자각이라 불리는 이 조그마한 식물은 만일 자신의 사적 일대기라는 정원 안에서 정성스레 보살펴지기만 한다면 오늘날에는 통상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여지는 잘 자란 '계몽’이라는 난초의 야생 혹은 잊혀진 사촌이라 할 만할 것으로 자라날 것이다. 사람들이 “황금빛 자아 주위를 춤추고 있다”거나 혹은 개인적 성장이 제공하는 정글 속에서 길을 앓 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추진력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이 추진력이 일시적이거나 비일관적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걸맞 지 않고 낡아빠진 진부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지배적인 이론들에 따르면 이런 경험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도 없다. 하지 만 분명 이러한 경험들은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이 겪었던 어떤 경 험보다도 더 중요하고 믿을만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코웃음거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다 양한 차원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 논의하려면 전혀 다른 두 개의 경험 영역 사이 의 경계선상에 서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설명이 필요없지만 다른 사 람의 눈에는 절대적으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의식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전달하려는 어떤 시도도 변명의 여지없이 추상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할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여 기에 딜레마가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가 이 세계 속에서 가진 잠재력 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고 또 점점 더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반면 어 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논의하는 것이 쓸데없는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다른 어떤 사람 들은 그런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적어도 우리 시대를 ‘나르시시즘의 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이러한 규정은 지금까지 방출되어 온 에너지의 범위와 효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왜곡 을 불러오거나 얼마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개인들은 지금 대체로 비자발적으로 그 리고 사회 변화에 이끌려서 스스로를 찾거나 탐색하고 있다. 그들은 점점 더 적합하지 않은 것이 되어 가고 있는 역할들(즉 남자, 여자, 가족, 직업)의 지배에 맞서(적극적인 의미에서 의)새로운 생활 방식을 시도하고 ‘경험’해 보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하며, 이제까지는 대개 억눌러야 했던 충동들에 한번쯤은 굴복해 보고 싶어한다. 그들 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즐기려 하며, 살면서 만나게 되는 좋은 것들에 대해 기뻐할 줄 아는 의식을 키워간다. 그들은 점점 더 각자의 욕구를 권리로, 필요하다면 공식적 지시와 강제들에 맞서서라도 반드시 옹호되어야 할 권리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를 즐길 수 있는 감각을 개발하고 있으며,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기 삶은 자기가 지켜 야한다는 고도의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사적 영토가 위험에 빠질 때면 언제라도 사회적, 정치적으로 활동을 벌일 준비가 되어있다. 종종 정치 행동을 조정하고 조직하기 위 한 기존의 형식과 모임을 무시하고서라도 말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의무'에 기반한 새로운 윤리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윤리는 독불장군식 오해가 아니라 가변적이며, 따라서 언제나 투사 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 개인을 사회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인 것이다. 자신의 삶과 발상 속에 들어 있는 표준적 유형들을 벗어 던지는 것은 영원한 습관, 결코 끝나지 않을 개인의 학습 과정이 되었다. 고착된 낡은 이미지들 대신에 인류에 대한 새로운 그림들이, 특히 변화 가능성, 개인적 발전과 성장의 가능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그림 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일차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통해 규정하는 것은 단지 가설에 불과한 것이며, 아직은 우리가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과거로부터의 잔 재일 뿐이다. 지금 개인들이 느슨하게 무리지어 함께 밟아가고 있는 이 전인미답의 길은 이제까지 계몽 이 가리켜 온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자연 법칙을 이해 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며 생산을 증대시키고 물질적 부를 증가시키며 경제적, 사회적, 정치 적 환경을 변화시키고, 바로 그런 다음에야 마침내 여성과 남성을 허드렛일로부터 해방시키 는 식으로 문제가 제기되지는 않게 된 것이다. 좀 성급한 감이 있지만 이 길을 계속 따라가 보면 도달하게 될 최후의 그곳을 전면에 내세워 본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당신 자 신의 퍼스낼리티를 발전시켜라, 그러면 그것이 당신의 결혼, 가족, 직장 동료, 직업 경력, 관 료 사회 그리고 우리가 지원과 세계를 다루는 방식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다. 하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다. 즉 어떻게 해야 사회적 존재로 남아 있으면 서 당신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유를 향한 이러한 발걸음을 가능하게 해 줄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일까? 2. 사랑으로부터 그냥 관계로 사회의 개인화와 인간관계의 변화 대중가요는 여전히 영원한 사랑을 찬미한다. 최근의 여러 조사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누 군가와 함께 사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거기서 냉정한 외부 세계에 반대되는 친근 함, 따뜻함, 애정을 발견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의 이미지에는 깊은 균열이 있음을 숨길 수 없다. 연극, 영화, 소설뿐 아니라 상당히 입조심하며 쓰여진 자서전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서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양성 사이의 싸움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 드라마이다. 결혼상담 사업은 성황을 이 루고 가정법원은 북적거리고 이혼율은 높아만 가며, 심지어 아주 정상적인 가정의 일상 생 활에서조차도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왜, 도대체 왜 같이 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 엘리아스가 답을 찾는 길을 제시한다. "어제 일어난 일을 모른다면 오늘 일어나는 일 또 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과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전근대 사 회의 속박, 명령, 금기들을 점차 내던져 버리는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새로 운 희망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거기서 자기가 여전히 새로운 곤경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두 요소의 결합이 오늘날 우리가 사랑 이라고 알고 있는 폭발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랑은 이전보다 더 중요해진다 전통적 결속의 단절 전근대 사회와 현대 사회를 비교할 때는 언제나 이전 시대 사람들의 삶이 여러 개의 전통 적 결속들-가업, 마을 공동체, 고향, 종교로부터 사회적 지위와 성별 역할에까지 이르는-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강조한다. 이 결속들은 항상 두 개의 얼굴을 갖는데, 그것들은 한편으로 는 개인의 선택을 엄격하게 제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숙함과 보호, 안정적인 자리매김 과 확실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결속이 존재하는 곳에서 개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개인 은 더 큰 단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조상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묶여 있었다는 사실은...일반적으로 그들의 작은 세계, 그 들의 소우주가 좀더 큰 또 하나의 대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다...소우주와 대우주 사 이의 이러한 결합, 즉 모든 것을 통일시켜 주는 크나큰 세계 안에-기독교 신앙에 따르자면,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의 품안에-수천 수만의 작은 세계들이 담겨 있는 이러한 결합은 단지 최하층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싸움을 하지 않게 해 주거나, 홀로 삶을 꾸리기 위해 고군분 투하지 않도록 해준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우리 조상들에게 페스트나 기근, 전 쟁과 같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감정적 안정성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현대 사회로의 이행과 더불어 일어난 여러 수준의 변화들은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개인화 과정을 초래했으며, 이는 사람들을 전통적인 결속, 신념, 사회 관계로부터 떼어내었다. 베버 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러한 과정은 구원에 대한 모든 확신을 없애버 리고 사람들을 깊은 내적 고립으로 밀어 넣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세기에도 이 과정은 다양한 수준에서 계속되었다. 그것은 복잡다단한 하부구조를 가진 우리 의 복합적인 경제 체계에서도, 세속화의 진전, 도시화, 개인적 이동 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 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화 과정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현재와 같은 독특한 차원에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들 각자는 점점 더 특정한 공동체나 집단의 경계 밖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가도록 기대되고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결속의 단절은 개인에게 이전의 강제나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 러나 그와 동시에 촘촘히 짜여진 사회가 제공했던 지원과 안전감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세 속화가 퍼져가고 새로운 생활 패턴이 출현하고 여러 가치체계와 종교들이 사람들의 마음속 에서 경쟁하게 됨에 따라, 이전에 개인에게 지향과 의미와 더 큰 우주 속에서 정박지를 제 공했던 많은 이정표들이 사라졌다. 그 결과 철학자와 역사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종 종 묘사하는 대로 내부적 안정성의 심대한 상실이 초래되었다. '탈주술화’와 함께, '내적 고 향상실’인, 넓디넓은 우주 속에 철저히 홀로 남겨진 존재라는 새로운 상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움은 인류와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의 세계는 과학적 이해력이 성장함에 따라 탈 인간화되었다. 인류는 우주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연에 묶여 있지 않다. 자연 현상에 대해 갖고 있 던 감정적인 ‘잠재 의식적 동질감’역시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은 점차 상징적 내용을 잃어가고 있다. 천둥은 더 이상 분노한 신의 목소리가 아니고 번개 역시 신이 던진 정벌의 창이 아니다...돌과 식물과 동물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고, 사람들 역시 이제는 그것들이 이해하리라 믿으면서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사람과 자연의 접촉은 없어졌 고 이 상징적 연대가 생산해 냈던 강력한 감정적 에너지도 사라졌다. 이것을 개인화 과정의 초기 국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세기가 지나감에 따라 해석과 신념의 전통적 형태, 즉 사회적으로 규정된 대답은 점점 사라지고 개인들은 넓은 범위의 새 로운 질문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특히 20세기 후반에 두드러지는데, 이는 많은 부분 새로운 생활 양식과 교육 기회가 선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하층 인구집단의 생활 수준은 ‘극적이고 전체적이며, 사회사적으 로 볼 때 하나의 혁명’이라고 묘사될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이전 세대가 매일매일 생 존을 위해 투쟁하고, 가난과 배고픔의 단조로운 반복밖에 알지 못했다면, 이제는 인구의 상 당 부분이 자기가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기 위해 모든 범위의 가능성을 이용할 수 있을 만 큼 충분한 수입을 얻게 되었다. 또다른 요인은 1960년대에 시작된 교육 기회의 확산이다. 이는 수천 명의 어린아이들을 생계의 책임이나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진되는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들은 심리적 의미에서 청년기, 다시 말해 대기 기간과 유예 시 기를 얻었다. 그들은 일상 생활의 요구를 넘어서는 주제를 자유롭게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자기 정신을 새로운 경험 영역들, 다른 전통과 사고 방식에 열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사회 변화의 결과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의 밥벌이와 직접 연관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궁금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이 다소 편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새로운 위급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바로 지금 막 우리의 사적 생활 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오래된 철학적 테마이다. 이 질문들은 우리에게 대답을 찾으라고 하고, 스 트레스를 주고, 때로는 공황 상태로까지 우리를 몰고 간다. 세계에 대한 오래된 해석 방식 은 이미 진부해져 버렸고, 개인들은 새로운 의문과 함께 홀로 남겨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 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감과 불안 정성의 느낌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존재의 이면에 무엇 이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또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심리치료사인 프랑클에 따르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흔한 질병이다. 우리는 더 이상 프로이트 시대처럼 성적인 좌절에 직면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마 주하는 것은 실존적 좌절이다. 오늘날의 전형적인 환자는 아들러 시대와 같이 열등의식 콤 플렉스로 고통받기보다는, 텅빈...실존적 허무와 결합된 깊은 무의미함으로 고통받는다.” 개인적 안정성의 원천 18세기의 지배적 생활 패턴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가족이 아니라, 경제적 단위를 구성하는 ‘확대가족’을 포함한 대규모 가구 속에서 이루어 졌다. 그것의 최우선적 요구는 생계를 꾸리 고 다음 세대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개인적 선호나 느낌 혹은 동 기를 따질 여유가 거의 없었다. 배우자를 고르고 결혼을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필 요 때문이었고, 개인들끼리 서로 잘 맞는지의 여부는 별다른 관심거리가되지 못했다. (농부의)‘개인적 행복’은...함께 일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주고, 빚을 갚을 지참금을 가 지고 오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에 있었다. 이것 역시 행복의 일종임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 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사랑, 곧 배우자의 퍼스낼리티와 연결되고 실용적 인 기초로부터는 독립된 그러한 사랑이 발전될 기회란 거의 없었다. 사회사 연구가 보여 주었듯이 현대 사회로의 이행과 더불어 널리 영향을 끼친 전환이 일 어났다. 일을 공유하는 한 팀이 감정을 공유하는 한 커플로 바뀐 것이다. 부르주아 가족의 출현은 '감정이 가족 영역을 점령’하도록 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족에 대한 현대적 이 미지의 특성인 프라이버시와 친밀성을 도입했다. 이 모든 일들이 전통적 결속이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국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아마 우 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가족은 감정과 헌신이 집중되는 장소이며, 이러한 가족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사회가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점차 사라져 간 다 른 가이드라인이나 사회적 확실성들과는 분명히 대립된다. 가족 속에서의 삶은 과거의 가이 드라인들을 대체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사람들이 점차 지향점을 상실하고 있다고 느끼 게 되면서 커졌다. 가족은 내적 고향상실을 좀더 견딜 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들어주 는 피난처가 되었으며, 낯설고 적대적인 것으로 되어 가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항구 가 되 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의 출현이다. 아마 그것은 대인 관계 의 안정성이라는 말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형태의 결속들이 의미를 잃 어 갈수록,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결속들이, 우리가-잠재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세상에 서 우리의 자리를 찾고 우리의 물질적, 정신적 안녕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 어갔다. 사회적 지원과 만성 질병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 결과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보여 준다. 다 른 사람과 맺는 친밀한 신뢰 관계는 매우 중요한 감정적 보호를 제공하며 새로운 조건에 쉽 게 적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설령...은퇴하여 일의 세계로부터 떠나게 되어...사람들과의 사회적 접촉 기회가 상당히 감 소되더라도, 이것이 필연적으로 그가 점점 더 우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있는 한에는 말이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고, 늘 이해해주고 의지가 되며, 언제라도 개인적인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사람과 맺는 특정한 관 계의 질이 특별한 보호 요인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적 정박지로서의 사랑과 결혼 우리의 정서적, 정신적 안정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밀접한 지원에 의존한다면, 사랑 은 우리 삶의 심장부로서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한다. 낭만적 사랑과 영원한 사랑의 결합이 라는 이상은 두 파트너 사이의 밀접한 감정적 결합으로부터 자라나며, 두 사람의 삶에 실체 와 유의미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 파트너는 나에게 태양이며, 달이며, 별이며, 심지어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하기까지 한다. 뤼케르트의 고전적인 연애시 '너는 나의 달'을 보자. 너는 나의 달, 나는 너의 지구 너는 네가 내 주위를 공전한다고 말하지 난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건 오직 하나 밤마다 내가 빛나는 건 너 때문이라는 것 뿐 너는 나의 영혼, 너는 나의 심장 너는 나의 기쁨, 너는 나의 고통 너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 내가 솟아 오를 하늘 오, 너는 나의 무덤, 그 속에서 나는 모든 근심 묻어버리고 영원히 쉬리라! 너는 고요, 너는 평화, 너는 내게 허락된 천국 네 사랑으로 내 사랑도 가치있게 되고 네 시선은 나를 거룩하게 만들지 너는 내가 나 자신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나니, 나의 선한 영혼, 나의 더 나은 자아여! 이는 대인 관계가 주는 안정성이라는 것이 낭만적 사랑에 기초해 있음을 드러내 준다. 다 시 말해서 그 내적 핵심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는데, 우리의 삶에 의미와 안전을 제공 해 줄 다른 준거점들이 점점 더 많이 사라져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열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아붓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희망을 다른 사람에게, 이 남자 혹은 저 여자에게 걸게 된다. 그/그녀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똑바로 세워주고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게 해 준다고 가정된다. 파일이 냉정하게 한 마디로 표현 한 바와 같이 ‘낭만적 부부애' 란 실로 이 세계의 필수품이었던 것이다. 베나르트와 쉴라퍼) 는 다음 글에서 이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예전에는 좀더 쉬웠으리라. 사람들은 교회와 국가를 믿으며 살았고, 좋은 아내이 자 어머니가 되면 천당에 가리라고 믿었다. 이제 신은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도시 에는 없기 때문에 오직 사람만이 실존적 의미의 원천으로 남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 게 일터는...진심으로 몰두하거나 만족하는 장소가 아니다. 남아 있는 것은 가족, 기꺼이 자 기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뿐이다. 그리하여 이해, 의사소통, 보살핌은 친근한 관계의 조그만 반경 속으로 축소되었다. 그것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사무실의 서릿발같은 상 호작용 속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시간은 흘러간다...하지만 무엇을 위해? 삶의 의미가 무엇 인지에 대한 의문은, 자기 인생의 중심축을 발견하기 위한 준거점이 되어 줄 다른 사랍(혹 은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좀더 참을 만한 것이 된다. 그러고 나서야 사랍들은 겨우 이 텅 빈 우주 속에 자신을 위한 문명화된 섬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결혼은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결혼의 기본 패턴을 추적해 온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결혼은 ‘현실에 대한 사회 적 설계’ 에서 중심 요소가 되어 왔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함께 살아가면서 사소한 일상 사로부터 세계 정치의 거대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공유된 태도와 의견과 기 대의 우주를 세우게 된다. 그것은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대화에서, 습관이나 경험의 공유에 서, 자기의 다른 반쪽과 자기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서 개발된다. 이렇게 공유된 이미 지는 또한 계속해서 협상되고, 이동되고, 대체되고, 질문되고, 다시 추인된다. 결혼 뒤에 있는 근본적인 테마가 단지 우리의 삶이 가진 사회적 구조뿐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점점 더 정체성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특히 결혼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가 밝혀낸 측면이다. 우리는 많은 수준에서 우리의 파트너와 교환을 추구하며, 또한 자 기 자신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역사를 찾아 헤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상처 나 실망과 화해시키려 하고, 우리의 목표를 계획하며, 우리의 회망을 공유하려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본다. 그러므로 당신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또한 나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당신은 나의 은밀한 삶의 이미지’이며, '나의 더 나은 자아'이 다. 결혼은 ‘개인적 자아의 발달과 유지에 특화된’제도가 되었다. 사랑과 정체성은 서로 밀 접하게 얽혀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사랑이 막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이런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것...자신의 자아를 저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달성된다. 즉 그녀와의 대화, 서로가 서로에게서 인정을 갈구하는 만남, 수용, 이해, 그리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대면시키고 해방하는 것을 통 해서. 몇 해 동안 함께 지내온 커플의 친밀한 교환 속에서도 마찬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해결되지 않은 질문과 슬픔으로 가득찬 과거가 풀어헤쳐진다. 모든 사람들을 구성하는 과 거와 현재야말로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필요한 조망을 제공해 준다. 사람들은 그 질문에 귀기울여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들어 주어야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귀를 통해서만 자신의 역사가 완전해지 는 것처럼...파트너 각자가 갖고 있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미지는 함께 이야기하면서 태어나고, 확신되고, 수정되고, 변화한다...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토론된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결혼 카운셀러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그보다 더 확실하게는 높은 이혼율을 통해, 우 리는 처음에 이토록 열성적으로 모색되었던 대화들이 너무나 자주 뒷걸음질치고, 메말라가 고, 혹은 주저되며, 차단되고 중단되거나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제부터 이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현상, 즉 커져가 는 갈망과 잦은 실패가 어떻게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지를 추적하게 된다. 그것을 한 문장 으로 단순화시켜 보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즉 사랑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내재한 실망은 우리가 사랑에 걸고 있는 희망에 못지 않게 현대적인 현상인, 진정한 자아 찾기에 대한 관 심의 산물이라고 말이다. 사랑은 이전보다 더 어렵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살거야': 찬반양론 전근대 사회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엄격한 규칙과 규제들로 틀 지워져 있었다. 이런 것들이 사라져 감에 따라 삶에 주어졌던 제한은 약해졌고, 선택의 여지가 늘어났으며, 선택의 가능성 또한 많아 졌다. 많은 면에서 삶은 예전보다 덜 제한되고 훨씬 더 유연해졌 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또한 우리들 각자가 수많은 의사결정에 직면해야 함을 의미한다. 휴가를 어디로 가며 무슨 차를 살 것인가와 같은 자잘한 것으로부터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며 어떤 학교에 보낼지 등과 같은 장기적 사안에 이르기까지, 의사결정의 수준은 모든 범위에 걸쳐 있다. 우리는 책임 있는 시민과 비판적 소비자가 될 것, 가격을 따지고 환경친 화적이 될 것, 최근에는 핵 에너지의 안전성이나 약물의 오남용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것 등등을 기대받는다. 그러나 현대정신 분석가들이 지적해 온 바처럼 이와 같이 과잉 공급된 선택지를 갖고 살아가기는 종종 개인에게 과중한 부담이 된다. 개인이 혼자 살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스트레스 요인이 증가한다는 사실은 지금까 지 간과되어 왔다. 파트너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쟁점들, 즉 무슨 TV 프로 그램을 보고, 어디로 여행을 가며, 어떤 가구를 들여놓고, 어떻게 여가를 보낼 것인지 하는 문제들은 의사결정 과정에 두 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상, 바람, 습관, 규범들을 들여오 는 것이 된다. 결과는 뻔하다. 의사결정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많이 다투게 될 것이다. 커플의 의견이 맞지 않을 가능성은 사람들이 선택의 자유 뒤에서 새로운 제한들에 부딪히 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증가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로이 계획하고 결정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는 개인주의 논리가 들어선다. 즉 경제적 단위로서의 가족은 점점 붕괴되고 노동 시장과 개인에게 의존하는 새로운 생계 방식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 이 일자리를 찾는 방식은 시장의 법칙-예컨대 유연성과 이동성, 경쟁과 경력 같은-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러한 법칙은 사적 헌신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법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직장과 수입, 사회적 지위에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의 일련의 구조적 변동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변동의 영향은 특히 전후 독일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모든 형태의 이동성-직장과 가족, 노동과 여가, 훈 련, 취업과 퇴직 사이에 일어나는 지리적, 사회적, 일상적 이동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결속(이웃과의, 동료와의, 지역 관습 등등과의)으로부터 떠나도록 끊 임없이 강요한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교육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성 장해 온 환경으로부터 떠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전문적 자격을 획득했다는 것 은 취업 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취 패턴은 물론 한 집단 전체에 영향을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 각자에게도 자신의 반쪽에 대해 결정 을 내릴 것, 그리고 그것의 성공 혹은 실패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질 것 등을 강요한 다. 이러한 외부적 묘사는 이제까지 일어난 변화들 중 일부만 거론한 것이다. 개인화의 이면 에 깔린 논리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일대기를 늘 새롭게 적응가능한 것이 되도록 요구하며, 그러면서 어떤 예정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은 관계된 사람들에게(그 일대기의 주인 공뿐만 아니라 그의 파트너, 가족, 친구...등에게도)내적으로도 영향을 준다.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성취하려 노력하는 중에는 뜻하지 않게 글자 그대로 ‘나만 의 공간’을 둘러싼 전투가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나 심리치료, 문학작품 속에 터져나오는 이런 말들이 반드시 우리 모두가 이기주의의 집단적 폭발로 고통받고 있음을 뜻 하지는 않는다. 자기를 발견하고 싶고 자기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들은 사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그리고 그리하여 그들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사회적 압력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동성 을 갖추라는, 그리고 교육을 받고 직장을 잡으라는 요구들 말이다. 사적인 문제라는 가면을 쓴 채 개인들의 일대기 속에 무더기로 나타나고 있는 그런 저런 테마들은 사실 이러한 압력 의 결과들이다. 삶이 "DIY 일대기”의 형태로 바뀌는 이 때,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발 견은 “단지 우리의 가치 체계 꼭대기에 빛나는 새로운 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삶의 새로 운 도전들에 대한 문화적 대답”, 혹은 간단히 말해 사회적 의무인 것이다. 여기서 즉각 질문이 제기된다. 파트너 각자가 자기 계획과 자기 문제를 갖고 있는데, 여 기에 온갖 압력과 제한들까지 더해진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연 DIY 일대기에 남아 있는 여지는 얼마만큼이나 될까? 한 쪽 파트너가 다른 쪽 파트너에게 추가적인 걸림돌 혹은 방해 요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회적 환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면, 도대체 삶을 공유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나 가능한 것일까?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공유하는 우주가 세워지는 대신 각자 따 로따로 자기의 우주를 방어해야만 하는, 그래서 끝내는 거의 무제한적인 다툼 속으로-때로 는 점잖게, 때로는 쓰디쓰게-빠져들고 마는 상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골치아픈 일이 될 테지만 자조지침서들이 추천하는 사랑과 결혼 및 친밀한 관계에 대한 새로운 발상들을 이런 관점에서 비교해 보자. 어떤 것은 부드럽고 또 어떤 것은 거칠지만, 그 다종다기한 발상들이 보여주는 주된 추세는 바로 자기주장에 최고의 우선성을 두어야 한 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사무실이나 버스 속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조차 그래 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마술적 처방은 진정성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구절은 가장 자주 인용 되는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공리인데, 가장 명백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구절은 수많은 인 사 카드, 머그컵, 침대머리에 붙이는 포스터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한다. 나는 너의 기대를 채우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 역시 내 기대를 채우려고 있는 게 아니겠지.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만약 우리가 우연히 서로를 발견한다면 아름다울 테지.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 뤼케르트의 연애시와 얼마나 대비되는 얘기인가! 대부분의 자조지침서들은 이렇게까지 나 가지는 않더라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한때는 적응을 요구하던 곳에서 이제는 의식적인 분리를 추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르치는 것은 이른바 건설적 불일치이다. "사랑에 대해서 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심리치료는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영혼이 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도록 격려하며, '결혼 계약서’에 '함께 하는 일 상의 여러 측면들’을 '개인적 자유’의 권리로부터 '헤어질 경우의 협상’에 이르기까지 '가능 한 한 상세하게 규정해 놓을 것’을 권한다. 이런 구절들은 개인화 뒤에 깔린 기본 패턴이 파트너와 함께 사는 일에도 적용되고 있다 는 사실을 반영한다. 자신의 목표와 권리를 가진 독립적인 개인들은 오롯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직은 누군가와 삶을 공유하는 것 사이에 어려운 균형잡기를 시도하고 있 다. 과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나 때로는 이 근본적인 딜레마에 대 한 치료책으로 제시되는 것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확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 하지 않을 수 없다. “싸움이 사람들을 묶어준다"고들 하지만, 대체 그 결과로 바람직한 창조 적 긴장상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될 것이며, 낙관적인 책 제목처럼 ‘창조적 이혼’이 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또다른 책에 따르면, 만약 그런 협상들이 깨어진다 하더라도-결코 실패로 생각되지 않는 -성공적인 이혼’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상향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미리 고려 된 것이어야 한다.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더 나은 새 이미지를 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이 행동수정 교과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성공적인 이혼 이후에는 '작은 연애사건들’이 유용하다.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난잡하지는 않은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연애사건들은 '자아가 가진 경험의 저수지’에 기여하기 때문에 ‘유의미할 것이다.' 만일 또다시 사랑이 실패하고 희망이 사라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다. 모토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이다. 과연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일 것인가? 우리의 낭만적 갈망을 유발한 개인화는 필연적으로 언제나 탈낭만적인 세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단 말인가? 오래된 결속들에 더 이상 묶이지 않는 탈낭만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 자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삶, 환경, 심지어 외모나 감정까지도 선택할 수 있다...보호와 의존의 오래된 위계질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끝 낼 수 있는 자유로운 계약들이 있을 뿐이다. 시장은 오래 전에 생산관계를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확대되었지만, 이제는 모든 관계를 포괄할 만큼이나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모든 사람의 삶이 보다 유연하고 적응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해서 여기서 멈추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또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선택할 수 있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사회가 커플에게 경제적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엄격한 규칙을 부 과하였다. 결혼은 각기 지신의 영역을 가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일손이자 상속인으로서 환 영받았던 아이들로 이루어진 팀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대답되어야 할 질문 들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다. 아내는 가정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해야 한다면 풀타임이 좋은가 아니면 파트타임이 좋은가? 남편은 승진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에만 목표를 두어야 하는가 가사를 분담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남자주부로 가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은가? 아이를 갖는 것은 좋은 생각인가? 만약 그렇다면, 언제 몇 명이 나 낳아야 하는가? 낳는다면 누가 아이를 돌봐야 할 것이며, 낳지 않는다면 누가 피임의 책 임을 져야 할 것인가? 파트너들은 아마도 조만간에,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불일치를 노출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꼭 그들로 하여금 타협을 거부하거나 지독하게 심술궂은 마 음이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고용인으로서의 그들의 일대기가 그들에게 명백한 한계를 지워주며(그들이 일터에서의 난점들을 용케 피한다 하더라도)자기 삶을 자기가 바라는 바대 로 구조짓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려되어야 할 것은 실제로 내려지는 의사결정들 뿐만은 아니다. 시간적인 측면 역시 고 려되어야 한다. 실로 모든 결정이, 결혼생활이 지속되는 동안에 철회될 수 있다. 사실 의사 결정이 여러 가지 예측불가능한 거부의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 중의 하나는 그것이 반드시 철회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화된 일대기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결정을 갱신하고 최적화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새로운 도전에 자 신을 열어 두어야 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그리고 기꺼이 배워야 한다고 기대하는 새로운 심 리학적 접근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가정은 분명 따분한 결혼의 일상에 매인 커플들이 겪는 침묵과 무관심을 물리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유한 위험도 있다. 한쪽 배우자는 아주 만족하는데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면, 혹은 두 사람 모두 변화를 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방향이 전혀 다르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내가 전적으로 가족에 헌신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남편과 아내 모두가 일단은 동의한 커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러나 몇 년 후에, 가정 생활의 단조로움과 고립감에 싫증이 난 아내는 직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게 된다. 현재의 가족 패턴에 꽤나 행복해 하고 있는 남 편은 그러한 변화에 위협을 느끼고, 남편이 가진 관례적 권리를 주장한다. 다른 한편 1960 년대에 전통적인 순결한 결혼의 이상을 갖고 결혼했는데 몇 년 후에 책을 통해 '열린 결혼’ 이란 이상을 알게 된 커플이 있다고 해 보자. 한 사람은 여전히 가족의 신성함을 지키려 하 는데 다른 한쪽은 소설의 사례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도대체 누가 옳은가? 때로는 그 누구도 옳지 않다. 더 이상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고 서로 다른 기대와 제약에 의해 영향을 받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일대기만이 기준이 될 때, 급격한 고정 관념의 변화 앞에 모든 것이 놓여 있게 될 때, 옳고 그름이란 실로 모호한 범주가 되어 버 린다. 사람들의 소망이 펼쳐질 수 있는 주관적 해석의 공간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으며, 이 는 종종 서로 다른 종류의 소망을 갖고 있게 마련인 두 배우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결 과 수많은 부부들이 바로 오해받고 상처입었다고 느끼는,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이다. 남자 대 여자 고전적인 페미니즘 저작들은 대개 여성들이 더 이상 억압당하지 않을 때에 남녀가 서로 잘 살아갈 수 있는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담고 있었다. 이것 이 전제하고 있는 바는 사랑은 자유롭고 평등한 파트너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792년 메리 울스톤크래프트가 쓴 '여성 권리의 옹호'를 보자. 여성들이 남자들로부터 얼마간이라도 독립적으로 되기 전에는 그녀들에게서 정조를 기대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아니, 그녀들을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로 만들어 준다고 하는 천성 적인 애정의 힘조차 헛된 기대가 될 것이다. 여자들이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하는 한, 그 녀들은 교활하고 비열하며 이기적일 것이다. 애완견 같은 애정과 아양떠는 애교에 만족해하 는 남자들은 아둔하다. 사랑이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니까...남자들이 우리를 묶은 사슬 을 관대하게 풀어주고 노예적 복종 대신 합리적 동지애로부터 만족을 느낀다면, 그들은 우 리에게서 더 사려깊은 딸, 더 자애로운 누이, 더 신의있는 아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우리 는 그들을 진실한 애정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존경하는 법을 배우 게 되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이런 자랑스런 희망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 는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사정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남 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 현대화 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가 되면 서 일어난 변화들에 대한 논의들이 일반적으로 예전의 삶이 현대적인 것으로 이행하면서 개 인들을 구시대의 의무와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전제하고 있다. 사회사와 여성학 연구의 발견들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관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 자면, 그것은 반쪽짜리 진실이다. 인간성의 ‘다른’반쪽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가 시작될 무렵에 개인화는 전적으로 남성만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피히테의 자연법은 이러한 사실을 잘 예시하고 있다. 거기서는 여성이 남성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가 이렇게 묘사된다. 그녀는 인격을 양도했으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유지하지만 필연적으로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남편에게 준다...그녀가 그녀의 재산과 모든 권리를 그에게 이전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살아있고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오직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리고 그의 시선과 그의 일 속에 있을 때만이다. 그녀는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 가기를 그만둔다. 그녀의 삶은 그의 삶의 일부가 된다(그녀가 남편의 이름을 받는다는 사실 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또, 미국의 역사가 데글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서구에서 개인주의의 발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는 개인적 권리 와 행위의 원칙을 칭송했지만,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개인은 전적으로 남성이었다. 당시 에 여성은 전반적으로 뒷바라지하는 조력자로만 여겨졌고, 자신의 권리를 갖는 개인은 분명 히 아니었다. 서구 사상에서 하나의 개념으로서의 개인이 언제나 확신하는 바는 각 인간-즉 각 개인-뒤에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을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 었다. 법률과 관습에 의해 가족의 우두머리인 남성을 제외하고는. 표준적인 남성 일대기와 표준적인 여성 일대기가 처음부터 매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는 것은 정확하게 현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이다. 19세기 동안 여성들의 삶의 범위는 확대되지 않았고 가정 내부의 영역에 제한되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물리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일이 그녀에게 맡겨진 특수한 임무가 되었다. 남편과 그의 걱정거 리에 귀기울이는 일, 가족간의 다툼을 중재하는 일, 간단히 말해 오늘날 '감정 노동’또는 '관 계를 위한 보살핌’이라 불리는 그런 일들 말이다. 남편이 적대적인 세계로 용감하게 한발 한발 내디딜수록, 아내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 위기에서 서로 내적인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더욱더 “온전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게 머물러 있도록 기대되었다. 점점 더 합리화의 길로 달려가는 이 세상에서 그녀는 합리성 반 대쪽에 있는 감정에 서서 남성에게 평온함과 친밀함의 오아시스를 제공하도록 기대되었던 것이다. 여성의 매혹적인 세계는 고요한 행운의 오아시스, 생활의 시의 원천, 파라다이스의 자취 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그 어떤 ‘여성 문제’나 좌절한 여류문학가, 가방끈긴 경제학자에 의해서도 강탈당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보존하기를 원한다...신이 도와주신다면, 가 난한 사람들이나 극빈 '노동자’들에게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여성에게 매혹당하는 것은 감정적 따스함, 순진함과 신선함 때문이다. 그런 점에 서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너무 많이 일하는 남자들보다 우월하다. 만약 교육에 의해 여성의 이 가장 매력적인 면이 파괴된다면, 이 자질들이 그녀에게 부여해 준 남성을 매혹시키는 힘 은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되고 말 것이다. 독립성을 얻고 남자처럼 되려는 시도는 여자들을 퇴보시켜왔다. 여성에게 가장 큰 명예는 단순한 여성성이다. 이것은 흔들림 없는 정서와 겸손함,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 이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미덕을 갖추고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된 것은 독립적으로 되기 위해서였으며, 여자는 남자를 위해 그에게 주어졌다. 18, 19세기의 수많은 정치학, 철학, 종교, 과학, 예술에서 발견되는 이 같은 진술은 당시 에 확립되고 있던 ‘대조적 미적’개념의 실제적 핵심을 밝혀준다. 가족 밖의 남성에게 더 많 은 자기주장이 요구될수록 가족 안에 있는 그의 아내는 더욱더 자기부정에 길들여져야 했던 것이다. 이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존을 확실히 단언하는 수많은 법령들에서 나타난다. 여 성은 남편의 성을 사용하고, 그의 시민권을 공유하며, 그와 함께 살고, 그의 소망에 맞추어 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편지를 뜯어보고 살림살이와 지출에 대해 일일이 지시 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아내의 개인적 소유물의 처분권은 많은 경우 남편에게 이전되었다. 그러한 규제의 대가는 매우 크고, 분명히 여성에게 불리했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남성과 여성의 소망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정의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무리 한쪽(여성)에 게 억압적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협정은 확실한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하 에서는 심지어 아주 조그만 선택권조차도 가족의 화목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다. 중요한 것은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여성이 진정 원하는 것은 남자에게 선택되는 것 이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남성을 통치하게 되어 있는 성으로서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드 럽고 참을성 있고 순종적으로 됨으로써 자신을 매력적으로 만드는...습관을 배워야만 한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소녀시절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남자는 어떤 의미에서 왕이었다. 그는 집안의 우두머리였다. 여자는, 그녀가 결혼했다면, 세계 속에서 남편이 차지한 장소와 남편의 생활방식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게 옳은 것처럼 보였고 행복의 토대인 것 같았다. 만약 당신이 당신 남자의 생활방식을 참을 수 없다면 아내라는 직업을 갖지 말아야 한다. 즉 그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 에 포목 도매상이 한 사람 있다고 하자. 그는 로마 카톨릭 신자이고, 교외에서 살기를 좋아 하며, 골프를 치고 휴일에는 해변에 놀러가기를 좋아한다. 당신은 바로 그것과 결혼한 것이 다. 그것을 좋아하도록 마음을 다잡아먹고, 그리고 실제로 좋아해라.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 은 아닐 것이다. 그 이후 급속도로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남성만의 특권이었던 것-즉 예전의 행동 패 턴을 벗어던지는 것-이 19세기 후반, 특히 1960년대 이래로 여성에게도 가능해졌다. 이는 특히 교육에서 두드러진다. 닫힌 문이 하나 둘 열린 것은 20세기 초였지만 진정한 변화는 50년이나 지난 뒤,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이 제공된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어났다. 오랫 동안 당연시되었던 소녀들에 대한 불이익이 공공연히 의문시되었고, 이러한 노력들은 기대 를 훨씬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교육 수준에서 나타났던 뚜렷한 남녀의 격차는 불과 20 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수준의 국가 교육에 소년 소녀가 거의 동수로 참여하는 것으로 바뀌 었고, 이러한 경향은 대학에까지 이어졌다. 집 밖에서 일하는 것 또한 하나의 예이다. 주부이자 아내라는 모텔이 부르주아 가족의 이 상이었지만 낮은 계층의 여성들은 남편의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돈을 벌어올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후반에는(가족 안에서의 일이 점차 생산과정과의 연결을 상실해 갔 던)중간계급 여성들도 점점 더 수입의 원천을 찾기 시작했다. 사적인 재산이 없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갔다. 그러나 중간계급 사회에서는 그런 노동이 시 간적인 제약을 받았고, 결혼하면 그만두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여성의 자리는 여전히 가정 이었다. 진정으로 널리 영향을 끼친 변화는 1950년대에 일어났다. 다른 산업화된 국가에서와 마 찬가지로 독일에서도 첫번째로 일어난 변화는 결혼하고 가정 밖에서 일을 하는 여성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기혼여성이 첫 출산까지 일을 하다가, 출산 후 잠시 직장을 떠나고, 아이들이 다 큰 후 다시 돌아오는 경향이 뒤따랐다. 두 번째 국면은, 이것 역시 모 든 산업사회에서 일어난 것인데, 아이가 있으면서 가정 밖에서 일을 하는 여성-즉 일하는 어머니-의 수가 두드러지게 늘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여성의 노동은 일종의 잠정 협정 상태 이다. “일하지 않는 것은 여성들에게도 점점 더 예외적인 상황이 되고 있다. 즉 몇 안 되는 자녀를 돌보는 기간 동안에만 국한된 것으로.” 인구학적 변화 역시 이러한 변화에 일조하였다. 기대 수명은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계속 상승해 왔고, 20세기 말경에는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높아졌다. 반면 자녀수는 철저하게 줄 어들었는데, 유럽에서 이러한 경향은 19세기에 시작되어 1960년대 이래 가속화되었다. 이 두 가지 변화의 결합 효과가 표준적인 여성 일대기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확대가족 이 붕괴되고 대신 부르주아 가족이 들어선 이후 여성들이 맡아왔던 주된 임무인, 자녀 양육 은 이제 그녀의 삶 전체에 있어서 아주 작은 부분, 완전히 일시적인 기간만을 차지하는 일 로 바뀌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새로운 시기, 즉 여성들이 더 이상 어머니 역 할에 매여 있거나 매여 있도록 요구되지 않는 '빈 둥지’기간이 등장하였다. 교육, 전문직, 가족 생활, 입법 등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의 결과, 일하는 여성들은 가족 에 대한 헌신의 정도를 조금씩 줄이고 남편으로부터의 부양도 덜 기대하게 되면서 어떤 형 태로든-종종 모순적인 형태로-독립을 성취하고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 화에는 물론 주관적인 측면도 있다. 이제 여성들도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깨 닫고 있다는 것, 아니 사실은 깨달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여성들도 반드시 가족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 인생계획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퍼스낼리티에 초점을 맞춘 자신의 인생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들은 스스로를 어떻게-무엇보다 우선 재정적인 면에서- 돌볼 것인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어떻게 남편 없이 지낼 것인지에 대해 계획을 세워야 한 다. 그녀들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가족의 ‘부속물’로 여기지 않고, 권리와 이해 관계, 그 리고 자기 자신의 미래와 선택지들을 가진 한 사람의 개인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에 입센의 '인형의 집' 마지막 장면이 있다. 헬머:...당신은 이런 식으로 당신의 가장 신성한 의무를 무시하는거요? 노라:내 가장 신성한 의무? 그게 뭔데요? 헬머:내가 그걸 당신한테 말해 줘야 하오? 당신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지, 아니면 뭐 겠소? 노라:나한텐 다른 의무도 있어요, 그것과 똑같이 신성한 의무가. 헬머:그런 건 있올 수 없소. 도대체 무슨 의무 말이오? 노라:나 자신에 대한 의무요. 헬머:당신은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아내이고 어머니야. 노라:그딴 거, 이제 더는 안 믿어요. 내가 믿는 건 내가 그런 저런 것들 이전에 인간이라 는 거죠, 당신처럼...아니 어쨌든 이제 나도 인간이 되어보려고 해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변화가 양성 사이의 관계에 끼친 영향이다. 여기서는 분명 더 이상 남성과 여성을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처럼 매일매일 고단하게 생계 꾸리기에만 전념 하게 하거나 19세기 부르주아 모델에서처럼 서로 보완적이지만 여성의 종속을 전제하는 상 호대립적인 성별 역할에 제한시키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결속이 나타나고 있다. 동지애로 뭉쳐진, 혹은 좀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유사한 성격과 삶에 대한 태도를 가진 두 사람 사이 의 파트너쉽이라는 결속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운동 저작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결속이며, '인형의 집'의 결말 부분에서 언급된 것처럼 희망으로 빛나는 '가장 놀 라운 어떤 것’인 것이다. 헬머:노라-내가 당신한테 낯선 사람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는 거요? 노라:오, 토르발트-그건 굉장한 기적이 필요할 거예요... 헬머:그 굉장한 기적이란...어떤 거요? 노라:우리 두사람이 둘 다 바뀌어서-오 토르발트, 난 이제 더 이상은 기적을 믿지 않아 요. 헬머:하지만 나는 믿을 거요 말해줘요 “바뀌어서”...그 다음엔 뭐요? 노라:우리가 함께하는 삶이 진짜 결혼생활이 되겠죠. 물론 여기서는 부푼 희망이나 기적의 가능성보다는 오늘날 그토록 많은 결혼과 남녀관계 를 따라다니는 실망과 실패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함께 산다는 것은, 표준 일대기가 변화 함에 따라, 분명히 양성 모두에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삶을 어 떤 방식으로 꾸려갈 것인가를 선택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구속들을 살펴본 앞의 논의는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을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남성과 여성이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진정한 파 트너로 행동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해 왔지만 이런 상황은 결코 미리 주어져 있 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림을 완성해 보자. 사랑과 결혼을 변화시킨 새로운 요인은 사회학자들이 추적한 것처럼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곧 남성이-좀더 자기 자신이 되었다거나 개인적으로 되었다는 것 따위가 아니다. 새로운 것은 여성들의 개인적인 일대기이다. 그것은 여성들을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의무로부터 해방시키고 1960년대 이래 점점 더 기세좋게 바깥 세상으 로 내보내고 있다. 좀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사람은 오직 남자이 고 여성은-그녀 자신의 관심이나 퍼스낼리티를 희생하면서-그 남자와 여타의 다른 사람들 을 돌보는 보완적인 일만 해야 했던 시절에는 가족 응집력이 많든 적든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성의 분업’은 이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며, 우리는 여성 사에서, 그러므로 여성과 남성 모두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기를 목도하고 있다. 오늘날 사랑 에 빠진 두 사람은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설계한 일대기를 성취할 기회와 걸림돌이 함께 자기들 앞에 펼쳐져 있음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하는 삶에 대해 거는 기대들은 이미 이러한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버나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결혼은 두 개의 결혼으로 이루어져 있다-즉 남편의 결혼과 아 내의 결혼. 이러한 정의는 오랫동안 숨겨져 왔으나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저작들이 밝혀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수많은 남녀들이 '사랑’이라는 마술적 단어에 희망을 걸고 있으나, 그 희망의 방식과 내용은 수없이 다양하며 넓은 범위에 걸쳐 었다는 것이다. 러빈 의 도발적 문구처럼, 그들은 서로 ‘친밀한 이방인’이며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은 그들 사이의 분업이나 각자의 화제거리, 그들 일상생활의 중추를 이루는 의사소통의 우선순위와 양식에는 물론이고 성적인 소망과 에로틱한 꿈에까지 적용된다. 이렇게 서로가 각자 너무나 다른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마 그다지 새로운 사실은 아 닐 것이다. 새로운 것은 그 차이를 다루는 방법이다.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을 자기만의 소 망을 가진 사람으로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 이들이려 하지 않게 된다. 그녀들은 점점 더 많은 만족을 요구하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실패할 때 최종적으로 초래되는 것이 바로 이혼이다. 이혼의 이유에 대한 연구들은 여성들 이 남성들보다는 훨씬 더 좋은, 그러니까 감정적으로 충만한 함께 하는 삶을 기대하며, 결 혼생활에 대해 남성들보다 훨씬 더 많이 불만스러워함을 보여준다. 입센의 노라 역시 마찬 가지였다. 노라는 그녀의 남편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가정을 떠났고, 그것이 ‘특정한 결혼’, 즉 그녀 자신의 생각에 들어맞는 결혼이 되어야만 돌아오려 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경향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여성들은 실망에 부닥쳤을 때 자기의 희망을 버렸지만 오늘날의 여성들은 자기의 희망을 고수한 채 결혼을 버린다. 최근의 한 조사연구는 이혼한 여성들에게 그들의 결혼이 외부적 기준에서 볼 때는 모든 점에서 훌륭하고 원만한 것이었는데도 남편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대답은 대 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결혼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기 때문에 떠났다. 우리 어머니들이 수용할 만 하다고 여겼던-그리고 실제로 우리 자신이 결혼하면서 생각했 던-결혼생활의 기준은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여성들은 버젓한 집, 그녀를 부양하는 남편, 보살펴야 할 아이들 이상의 무언가를 원했다. 그녀들은 감정적 친밀성, 평등 한 파트너쉽을 원했고,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런 식으로 갈등의 가능성은 커지고, 동시에 어려움을 줄일 기회는 줄어든다.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보살핌을 더 많이 배울수록-사실 개인주의 시대에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다-그녀들은 자기 어머니나 할머니가 했던 것, 즉 남편의 요구에 맞춰주고 자기 자신을 희 생하는 방식은 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전에 응집력을 보장했던 접착제들, 즉 과거에 여성이 맡았던 역할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부정하기, 최소한 겉으로라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끝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감정 패치워크(가족들에게 감정적인 문제들 이 생겼을 때 감을올 풀어주고 화해시킴으로써 가족 간의 분열을 봉합하는 일을 조각 이불 만드는 일에 빗대어 표현함-역자)를 떠맡기를, 이제 누가 이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가? 많은 여성들은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에 싫증을 내고 있고, 많은 남성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 지않다. 남자든 여자든, 직장에서 경쟁 압박을 받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산더미 같은 감정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면, 누구라도 부담을 느끼게 된다. 딜레마는 이러한 사회적 격변과 생활 리듬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균열을 만들어 낸다는 사 실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양성 모두가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는(그리고 일단의 사람들에게 는 자기 발견의 원천을 제공하기도 하는)익숙치 않은 주장들에 마주치고 있으며, 또한 종종 자기 자신의 모순된 태도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면서, 옛날의 역할 모델과 새로운 사실 사이 에서 옴쭉달싹 못하고 있다. 더 이상은 '안돼’와 ‘아직은 아니야 '사이의 이러한 단계가 불안 정한 혼합물, 그러니까 분명히 남녀 모두에게 고통스런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선, 독신 여성의 빈곤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저학력이며 가족이 제공하는 전통적 인 보호를 갖지 못한, 그러면서도 개인 단위로 디자인된 일대기에 대처할 무기를 갖추지 못 한 여성들에게 해당된다. 이러한 여성들에게는 '복지와는 거리가 먼 남편만’이 있거나, 아니 면 점차 증가하는 독신, 이혼 여성의 경우처럼 남편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빈곤의 여성 화’라고 알려져 있는 것 뿐이다. 한편 반대편 끝 쪽에서는 또다른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독립적인 경력을 추구하지만 많은 경우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여성들에게 영향 을 준다. 즉, 성공한 전문직 여성의 고독이다. 이런 종류의 변화는 예컨대 심리학자 밀러에 의해서도 묘사된다. 그녀의 임상경험에 의하 면, 여성들이 심리치료를 받으러 오는 이유는 지난 몇 년 새 두드러지게 달라져가고 있다. 1970년대의 환자들은 주로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그러는 동안 자신이 얼마 나 많은 자기 것들을 포기했는가를 자각하게 된 중년 여성들이었는데, 요즘에는 주로 직업 적으로 성공한 전문직 여성으로 좀더 젊고 과로하는 경향이 있는 독신 혹은 이혼 여성이 심 리 치료사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의 삶에서 충족되지 않는 감정적 욕구를 발견하고 있다. 일생을 직업에 바친 여성에게는 이제까지 무시해 온 삶의 감정적인 부분을 기꺼이 보살펴 줄 ‘마누라’가 없는 것이다. 결과는 분명하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관계 를 보살필 에너지를 갖지 못한 채 두 사람 모두가 전통적으로 성공이라고 규정되어 온 것을 추구하느라 바쁘든가 아니면 전문직 여성이 자기에게는 전혀 파트너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 든가.” 에리카 종의 소설 '낙하산과 키스'의 여주인공 이시도라는 후자의 범주에 딱 맞는다. 유명 작가이고 세 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이시도라는 이렇게 생각하며 회한에 젖는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여자들은...남자들에게 진실인 것이 자기한테도 진실일 거라고(잘못) 생각하죠 그 성취가 자신에게 명성과 재산과 멋진 연인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후유, 우린 결국 사정은 정반대란 걸 알게 되죠. 우리가 이룬 그 모든 것들을 가지 고 사랑의 백화점에 가 보세요 그걸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건 우리에게 위협을 느끼는 남자, 오그라든 페니스, 그리고 자포자기뿐이죠. 결국 우린, 왜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지 후회하게 되고 말아요. 직업적 영광을 얻는 대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바로 우리 자신 의 개인적 행복인데 말이죠. 동시에 새로운 역할을 시도하고 있는 몇몇 여성 집단은 ‘모든 여성은 남자가 있든 없든 홀로 서야 한다’라는 모토 아래 예전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 하는 것은 남자를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논리적 귀결로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의 권 리에만 맞춰진다.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 중의 하나가 여성 문학시장이다. 여기서 는 양성 사이의 관계가 종종 싸늘한 대립으로 변질해 버린다. 제목들은 종종 도발적이기까 지 하며, 상징적 가치 이상의 것을갖고 있다. '지금은 나를 위한 때’같은 제목은 하나의 슬 로건이다. 우리는 ‘우리’ 대신 ‘그 아니면 '나’라든가 ‘나는 나 자신이다’같은 말들을 발견한 다. 지금껏 종속적이었던 여성들은 이제 ‘원수 갚기’의 때가 왔음을 깨닫고 있다. 두 개의 몸이 더 이상 야단법석 떨지 않고 다음 번의 성적 만남을 위해 결합할때 그 몸에 속해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로 남아 있으며, 그 한 쪽이 ‘여성혐오주의자'로 불리는 반 면 다른 한편에선 ‘매력적인 왕자님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선언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마지막 단계는 ‘혼자이기를 선택하기’이다. 여자들이 낡은 역할을 거부하는 데 대한 남자들의 반격은 그다지 잘 진술되지 못했다. 이 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남자들이 아직까지는 더 많은 권력을 향유하고 있고 빠져나갈 틈새 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자들이 자기 느낌을 표현하거나 좌절을 정식화하기를 여자들보다 훨씬 더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찰자의 시각과 성 별에 따라 이에 대한 진단은 다양하게 내려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불안한 남성’을 읽어 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억압된 감정, 이해하기를 꺼리기, 특권을 포기하기를 거절하기라고 적는다. 이토록 불편한 시대에 남성들에게 내려진 그들의 평결은 처신은 잘 하지만 현명하 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남성들은 비록 새 옷을 입었지만 예전과 똑같은 가부장이라 는 것이다. 새로운 징조들은 남성들에게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며, 그들이 사회화된 방식과도 부합하지 않고, 그들의 자기존중감에 많든 적든 공격을 가한다. 출신 배경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대 부분의 남성들은 다음의 진술에 동의할 것이다. “도대체 여자들이 원하는 게 뭐야!” 많은 남성들이 원칙적으로는 여성들이 옳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나, 설거지나 아이돌보기 같은 그 어떤 불편함이라도 그들의 삶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면 그 즉시 꺼리거나 저항하게 된다. 그 무엇보다 새로운 어떤 '열린 마음’이 발견되고 있지만, 이것은 상황이 남성들에게 불편한 것 이 되기 시작하면 곧 제한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새로운 종류의 이상적 여성이 생겨났는데, 그녀는 독립적인 동시에 남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에 기꺼이 순응하고 의존하려 하는 여성 이다. 또다른 연구에 인용된 한 남성의 언급을 보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당신과 대화가 통할 만큼 충분한 지성을 갖춘 대학 나온 여자, 살아 가는 내내 당신의 사업과 의사결정 과정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자신만만한, 그러나 그러면 서도 가족을 보살피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다. 만약 당신이 그런 여자를 발견한다면, 당신이 이겼음을 알게 될 것이다. 관련된 모든 이에게 고통을 주는 이러한 실망을 고려하여, 지난 몇 년 동안 여성운동은 새로운 테마, 즉 해방되는 일과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일 사이에 균형을 잡는 어려운 작업 쪽으로 돌아섰다. 그 누구도 수많은 제약이 있었던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는 않으며, 서로 평등한 존재로서 사랑에 가득찬 파트너쉽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역시 여전하다. 하 지만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자주 궁금해하고 있다. 두 사람이 완전히 평등한 존재로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사랑은 해방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가? 그게 아니라면, 사랑과 자유는 양립불가능한 대립물인가? 한편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자율성을 빼앗아 갔음을 깨닫고 있다. “당신이 내게 뒤집어 씌운 건 노예생활이었어요. 당신은 나를 늙은 말을 탄 당신의 산쵸 판사로 만들고, 내 정체 성과 내 삶 모두를 빼앗아갔죠.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사랑한 건, 내겐 너무 큰 재앙이었어요.” 다른 한편에서는 스스로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한 대가로 애인을 잃는다. “우 리가 무지몽매한 상태를 벗어났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 썼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랑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적인 삶에 대해 배운 그 모든 것들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계몽이란 언제나 고통스럽더라도 가치있 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확신이 싸늘하나마 위로가 된다." 바로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 것 같다. 낡은 종류의 관계는 여성의 주도권을 억압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관계가 잠시 위태로와졌다가 도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새로 등장한 종류의 관계는 두 개의 분리된 일대기를 만족시켜야 하고, 그것이 안되더라도 최소한 두 개의 일대기를 존중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 결과 숱한 말 싸움과 고통이 초래되 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인간 젠더의 역사에서 하나의 불운한 잠정적 단계의 소산 일 뿐이다. 에리카 종은 이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지만 함께 살 수는 없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아마도 이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한 사람의 개인 이 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감히 해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시행착오 정도 뿐일 것이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또 시도해 보면서, 그들은 가장 좋아 보이는 삶의 방식을 선택 해야 한다. 사회학 연구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일시적인 방책들은 점점 더 여성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단지 그녀들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어려운 문제는 남는다. 만약 현재의 어려움이 단지 하나의 국면 이상의 것이라면? 만약 그것이(처음에는 오직 남성만을 포함했으나 최근에는 여성들도 포함 하게 된)자기 자신이 되기를 향한 시대적 움직임의 불가피한 결과라면? 두 개의 일대기가 서로 같이 짜여지는 것은 가능할까? 아니면 그런 것을 시도하는 것은 엔진에 너무 많은 모 래를 쏟아붓는 일이 되어 같이 탄 차를 삐걱거리게 만들고 끝내는 멈춰세워 버리고 말 것인 가? 중년의 위기 통계를 보면 놀랄 만한 일이 밝혀진다. 18년 혹은 20년 동안 결혼 관계를 지속한 장기적 이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부부의 이혼율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설 명은 심리학적 자조지침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중년의(결혼의)위기에 대해서는 많은 말 들이 있다. 중년기는 커플이 그 동안 함께 한 삶의 결과 이미 탄탄한 기초를 달성하고 이제 는 각자 상대방과 다른 이해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하는 그런 시기이다. '내게 자유를 달라’ 는 것은 이 국면에서 나오는 선전포고의 외침이다. 이것은 종종 질질 끌며 오래 계속되는 다양한 종류의 권력 투쟁과 결합한다. 대개 상대의 제의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해서 가끔 은 신체 질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자기를 편틀어 줄 사람을 찾아 헤매기도 하며, 때로는 폭력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 모든 전략들은 “우리들 중 누가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 남을 것 인가?”라는 질문을 둘러싸고 빙빙 돌고 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현재의 결혼 장면을 지배하는 공유된 삶 속에서 살아 남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두 개의 서술은 서로 대조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우선 에리카 종의 소설 '비상의 두려움'은 결혼 안에서 보는 시 각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이 억누르는...갈망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때로는 올바른 길을 찾아내고 싶은, 당신 의 머리 속에서 당신 자신이 여전히 홀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은, 미쳐버리 지 않고 숲속의 오두막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지 알아내고 싶은 갈망, 간단히 말해 누군가 의 반쪽으로 지내온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당신이 여전히 오롯이 당신 자신으로 남아 있는지를 알아내고 싶은 그런 갈망이다...5년 동안의 결혼생활은 나로 하여금 고독을 갈구하게끔 했다. 다음으로 밖에서의 시각을 보자. 어느 결혼 카운셀러는 이렇게 묘사한다. 대부분의 결혼은 함께 하기와 공유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다. 개인은 거의 사라지고, 모 든 것이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삶에 종속된다. 결혼다운 결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 월이 필요하며, 높은 응집력과, 서로를 위하고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목표한 바의 직업적 지위를 성취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이 요구된다...그러나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흘러간 뒤 에...젊은 시절의 활력은 날아가 버리고, 반짝거리던 희망도 없어졌으며, 직업적 목표는 달성 되고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기는 힘들게 된 때에, 바로 그러한 때에 오래된 질문이 새로운 다른 모습으로 훨씬 더 급박하게 다시 나타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자기 자신을 확신하 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꾸리고 싶은, 새로운 종류의 열정이 등 장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불가피하게 배우자를 향한 질문이 된다. 당신은 내 가 누군지 정말 아느냐?”...결혼을 깨어버리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포기하는 것 보다는 덜 위협적인 듯 보인다. 이런 패턴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심리적 발달의 법칙에 기댈 수도 있겠다. 성숙을 향한 단 계들은 언제나 어떤 형태의 분리를 수반한다. 결혼의 공생관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중년의 위 기는 가령 청년기에 겪는 싸움과 고통에 비길 수 있다. 이 갈등은 많은 면에서...청년기에 일어나는 부모와의 투쟁과 비슷하며, 실제로 같은 목적 에 이바지한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재창조하기, 공생적 통일성으로부터 헤어나오기, 다른 사람은 결코 진정으로 나의 고독을 공유할 수 없음을 깨닫기. 그러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사건의 자연스런 과정, 즉 결혼에 대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어떤 패턴으로 보일 수 있는 것도 사회사의 관점에서 검토되었을 때는 여지없이 그 특 수성이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 중년의 위기는 사회적인 사건이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묘사해 온 개인화 과정의, 특히 상당히 진전된 단계의 결과이며, 여성들의 삶의 맥락도 이 과정에 포함되게 된 시기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인 구학적 변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기대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남으로써 많은 커플들이 그러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혼하지 않을 경우)결혼이 지속되는 기간은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1870년에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살기를 맹세 한 커플은 평균적으로 23.4년을 함께 살았다. 1970년의 커플은 28.2년간, 1930년의 커플은 36년간을 함께 살았는데, 1970년에 결혼식을 올린 커플은 43년 동안 함께 살게 된다. 중년의 위기는 이 세 가지 요인-일반적인 추세로서의 개인화, 특히 여성의 개인화, 기대 수명의 연장-이 함께 발생하는 곳에서만 대량으로 발견된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중년의 위 기란 아주 새로운 경험인데, 왜냐하면 20세기 후반부까지만 해도 인구의 많은 부분이 중년 기에 이를 때까지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단계를 다음과 같이 추적해 볼 수 있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건 결혼에 대해서건 개인적 결정의 여 지가 거의 없었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팀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자신의 정체성 을 찾으려는 욕구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이 등장하자마자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변화들은 여러 가지 상 황이 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보도록 강요하게 되면서 더욱 심화된다. 결국 우리들이 번듯한 가정과 경력을 확립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 앞에 많은 세월이 놓여 있음을 깨달을 때에, 우리의 태도는 변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게 전부였나?”이런 질문이 이전보다 훨 씬 더 큰 압박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바로 이 순간에, “내가 배우자를 위해서 어떤 것들을 포기해 왔는가?”라는 물음이 우리에 게 던져진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세웠던 거창한 계획들을 회상해내고, 공유된 삶이 만든 타협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의 많은 부분은 대개 상대방 탓으로 돌려지게 되고, 결혼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희생양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잠재의식적으 로 이렇게 인식한다.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또다른 무언 가도 있다고(즉 피아니스트가 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고 남아메리카로 이민갈 용기는 없 고). 그러나 설혹 출발선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은 이 부득이한 일부일처제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공간과 시간을 요구하고 싶어하며, 상대방 또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 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그쪽이 저항하면 할수록 자기는 더욱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결국 이런 식으로 파트너는 적으로 변하게 되고 결혼은 자기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안전판, 피뢰침 또는 대리판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뒤이어 일어나는 싸움의 진행과정은 종종 역설적이다. 즉 “당신과 함께인 것도 좋지 않고 당신이 없는 것도 좋지 않다”는 코스를 따르는 것이다. 두 파트너가 끊임없이 새로운 변이 들과 단계적 확전 속에 수년간 전쟁을 치르면서도 결코 헤어지려 하지 않는 사례는 수도 없 이 많다. 헤어졌다가 다시 돌아오고, 함께 살지만 정말은 따로 따로라고 선언하며, 안녕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별거를 하고, 그리고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 다고 느낀다. 몇 년동안 그러한 움직임을 지켜본 친구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연루되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불 합리한 상황으로 여길 것이다. 여기 다시 대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두 가지 묘사가 있다. 우선 하나는 팔라치의 소설 '남자'에 나오는 것이다. 난 단지 당신에게...내가 왜 그런 관계를 계속하길 거부하는지 설명하는 편지를 주러 돌아 왔던 거예요...하지만 나를 속박했던 끈은 이미 끊어졌고, 숨이 턱턱 막혀가면서 그걸 고치 는 건 정말 최악이예요. 나의 이 평정, 나의 이 초연함을 어지럽히는 것보다 더 나쁜 건 없 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거였죠...하 지만 나를 흔들어놓는 데는 전화 한통화면 충분했어요. 일주일 동안 두려움에 떨며 지냈고, 그 다음 주에는 이미 나는 믿질 않았어요. 중대한 실수였죠. 탈출한 지 17일째 되는 날 새 벽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올렸어요. “여보세요, 나야! 나라구!”...그리고 몇 시간만에 나는 비 행기를 타고 있었죠. 내가 가요, 나의 돈키호테, 내가 간다구요. 당신의 산쵸 판사는 아직도 당신의 산쵸 판사예요. 언제나 그럴 것이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의지할 수 있어요. 내가 여 기 있어요!...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살아 남는다는 건 불가능해요. 도망쳤 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요. 다음은 결혼 밖에서 한 부부를 관찰한 어느 심리치료사의 설명이다. 물론 꾸준히 다투었고 의견이 맞지 않았으며 따로따로 휴가를 떠나곤 했다. 끊임없이 별 거하겠노라고 말은 하지만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일이 그렇게 진행되도록 구체적인 조치 를 취하지는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둘 다 아주 쉽사리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내가 카린을 따로 불러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그녀는 자기가 가진 거의 말도 안되는 망상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기는 '완전히 혼자'가 될 것이며 아무도 자기를 ‘돌봐주 지’않을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녀는 상당히 훌륭한 직업적 경력을 갖고 있었으 며 그 덕분에 남편 디터보다 훨씬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을 갖고 있었는데도!). 한편 나는 디 터가 카린이 싸들고 나서는 짐을 즉각 풀지 않으면 자기는 “다락방에서 목을 매고야 말겠 다”고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외부인이 이들을 보면 두사람 모두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물론 결혼 이외의 생활에서는 둘 다 잘 적응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서로를 떠나 홀로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라도 한 사람을 뒤에 남겨두고 떠 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격렬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조 용히 대화를 나눌 때면 각자 오래 전부터 서로 헤어질 준비가 '실제로’되어 있었다고 말하 고 있었다. 이런 패턴은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공생의 함정, 즉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만큼 희망도 없 는 결과를 낳는 구조를 명백히 드러낸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서 자율성과 의존, '밀접함과 거 리감’, '융합과 저항’사이의 영원한 투쟁을 본다. 그러나 그러한 복잡한 상황은 왜 벌어지는 것이며, 왜 해결 불가능한것일까? 이 책에서 제시된 사회학적 시각에 따르면, 그것은 우연 히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아담과 이브 때부터 계획 된 자연의 법칙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들의 표 현이자 반영이다. 그것들 뒤에는 우리의 사생활을 결정하는 모든 모순적인 갈망과 기대와 의무들이 놓여 있다. 앞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랑은 이전보다 더 중요해질 뿐만 아니라 더 어려워진다. 종이 위에서는 두 개의 가닥을 따로따로 잡아낼 수 있지만 개인의 마음 속에서 는 그것들이 불가분하게 서로 얽혀 있어서, 차례차례 일련의 역설들과 어려움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에 이름이야 뭐라고 붙여도 좋다. 친밀성 대 개인성이든, 공생 대 자기 자신의 삶 이든 간에. 여기서 이론적 측면에서 정식화해 본 이 딜레마는 물론 많은 현대소설, 특히 여성문학에 서 하나의 테마가 되고 있다. 다시 두 개의 사례를 비교해 보자. 첫번째 사례는 다시 에리 카 종의 여주인공 이시도라인데, 그녀는 내적 독백을 통해 자신의 양립 불가능한 소망들을 표현하고 있다. 나:혼자라는 게 왜 그렇게 끔찍한 거지? 나:그건 만약 어떤 남자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어떤 정체성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 지. 나:하지만 넌 한 남자가 너를 전적으로 소유하고 너의 숨쉴 공간을 다 차지해 버리는 걸 네가 싫어한다는 걸 알지 않니? 나:알아-하지만 난 그걸 지독하게 원해. 나:하지만 네가 실제로 그렇게 되면, 넌 덫에 걸렸다고 느끼게 될 걸. 나:알아. 나:넌 서로 모순되는 걸 원하는 거야. 나:알아. 나:넌 자유를 원하고 또한 밀접함도 원하는 거야. 나:안다니까. 그리고 다시 팔라치로 돌아가 보자. 애인이 그의 요구로, 결속으로 압박해 올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둑맞는 것 같은 느낌 을 받는다. 애인을 위해 직업이나 여행이나 낭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몹시 불공평해 보 인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수백 수천의 분노와 자유의 꿈을 키우며, 매혹당하 지 않는 실존을 갈망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금빛 햇살 속을 비행하는 한 마리 갈매기처럼 날아다니고 싶다. 애인은 말못할 고통으로 우리를 묶는 사슬이며, 우리가 우리 날개를 펴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애인이 더 이상은 없고 열린 공간이 무한하게 펼쳐질 때, 그래서 아 무런 애정도 속박도 없이 쏟아지는 금빛 햇살 속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럴 때에 우리는 더욱 공포스런 공허를 느끼게 된다. 그토록 포기하기를 꺼려했던 직장이나 인생 역정 또는 로맨스들이 이제는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며, 우리는 우리 자 신이 우리의 되찾은 자유를 갖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더는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주인 잃은 개나 무리를 벗어난 한 마리 양처럼 잃어버린 노예생활이 아쉬워 눈물 흘리며 그 텅빈 공허 속을 헤매 돌아다닌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의 영혼의 간수가 요구하는 대로 사는 삶으 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 분명히 이 기본적 딜레마는 우리의 모순적인 개인화 사회에 붙박혀 있는 특징이다. 이것 은 모든 커플들에 영향을 미치지만, 특히 오랫동안 지속된 결혼에 큰 혼란을 일으킨다. 딜 레마의 양 측면, 즉 자기자신이 되는 것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둘이 모두 뚜렷 이 나타나고 제각기 주목해 달라고 아우성쳐대는 곳이 바로 이 오래된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나날, 견뎌내야 했던 넌덜머리나는 습관, 짜증, 의례, 타협들을 생각해 보라. 내 남 편 내 아내를 제외한다면 과연 누가 그토록 직접적으로, 그토록 냉혹하게, 그토록 가까운 곳에서 내 삶을 침해해 들어올 것인가? 우리가 겪어온 모든 일들, 우리가 공유하는 추억들, 기쁨과 고통들을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한 가닥에 닿아 있다. 다른 누가 그토록 많이 나의 일부일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그리고 그들은 한 폼이 되었다” 는 오래된 성경 구절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 모두로 느껴질 수 있 다. 즉 어떤 때는 위협과 저주로, 또 다른 때는 위안과 약속으로, 반복적으로 차례차례 또는 동시에 두 가지 모두로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망설임,(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 자기 쪽에서 깨끗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한 쪽이 미련 을 갖고 남아 있고, 그래서 결국은 두 사람 모두 결코 그 관계로부터 떠나 버리지 못하는 그런 상황을 설명해 준다. 국외자는 여기서 단지 승자 없는 반복적인 논쟁, 결코 끝나지 않을 싸움만을 본다. 수수 께끼의 해답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우리의 현대적 갈망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드디어 나를 위한 시간이 왔다”라는 발상과 뒤얽혀 있으며, 이 둘은 정반대의 논리를 갖고 서로 대 립한다. 이런 상황 하에서 커플은 다툼을 두려워하기도 모색하기도 하며 또한 계속 다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채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커플 각자는 상대방으로부터 제공되던 안정감 은 상실했더라도 그러나 결혼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어떤 자신감을 얻는다. 나는 이제야 왜 아내가 돌아오기를 원하는지 알았소. 그건 그녀가 내 안에 만들어 놓은 것들 때문이오. 그녀가 나를 떠났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존재하기를 멈췄던 거요. 그게 바로 그녀가 내게 해 놓은 일이었소! 나는 그녀와 함께 살 수는 없소-그건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었소. 그렇지만 그녀 없이도 살 수가 없소, 그건 그녀가 나를 나 자신의 어떤 고유한 존재도 가질 수 없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오. 바로 그게 그녀가 나와 함께 보낸 5년 동안 내게 한 일이오, 그녀는 세상을, 내가 그녀의 관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곳으로 만들었소. 나는 혼 자여야만 하오. 하지만 전과 똑같은 세상 속에서는 그게 안되는 거요. 그래서 내가 당신의 요양소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거요. 내가 거기 들어가 혼자 있을 수 있겠소? 대용물로서의 아이?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모순적인 규칙들 아래 성인 파트너와 함께 살기란 종종 몹시 고통스럽고 모욕스러운 일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남자도 여자도 스스로를 보호하고 감정적 소진의 위험을 낮추기 위한 전략들을 개발해 내고 있는 것은 극히 타당한 논리적 귀결로 보 인다. 가족과 결혼 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변화들은 이런 움직임의 징후들을 보여 주고 있다. 결혼 전에 심리치료 받기, 결혼계약서 작성하기, 그리고 팝송 가사대로 “헤어지 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기”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채 함께 살기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레퍼 토리의 범위는 넓다. 몇몇 사람들은 그 어떤 헌신도 하지 않으려 하고, 실망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아예 관계 의 진척에 대한 희망조차 키우지 않으려 한다. 이것을 요즘 나오는 책 제목들로 다시 한번 써 보면 이렇게 된다. '꿈을 넘어서'단계에는 '친밀함에 대한 공포'가 자라나는 것이다. 에리 카 종의 소설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바로 이것을 묘사하고 있다. "당신은 내 짝, 내게 꼭 맞는 짝이오”. 그가 말했다. “이제 당신을 발견했으니, 난 당신을 결코 보내지 않을 거요” “오 달링" 그의 말 속에 진실이 담겨있을 거라는 느낌과 싸우면서, 그녀는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신기루야, 한낱 꿈이란 말야...이토록 뜨거운 열정은 절대로 오래 가지 않아 이렇게 매력적인 남자는 자기 방식대로 구애해 들어와 여자 마음을 사로잡고는, 그러고는 단호하게 떠나 버린다구. 그녀 는 조쉬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 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다시는 그런 준비를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만약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 은 그 모든 희망을 억누른다면, 타자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려는 우리 시대의 열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누구를 그리워하고 누구를 껴안을 수 있을까? 한 남자도 한 여자도 아니라 면, 아마도 한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선택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개인화 역사의 첫 단계는 사람들에게 안정감과 정체성을 주었던 오래된 결속을 약화시켰 다. 남자와 여자가 자기를 찾기 위해 서로에게 향하고 사랑을 그들 존재의 중심으로 만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이제 우리는 그 다음 단계에 도달했다. 전통적인 결속은 오직 부차적인 역할만을 하고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취약하고 실패하기 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아이 뿐이다. 그것은 이 사회 속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기본 적이며 깊고 지속적인 결속을 약속한다. 다른 관계들이 서로 간에 변화가능하고 철회가능한 것이 되어갈수록 아이는 더욱더 새로운 희망의 초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영원성의 궁극적 보장, 한 사람의 삶에 닻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최근의 인구학적 변화도 이해할 만하다. 첫째, 혼외 관계에서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굉장히 다양 한 원인이 작용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미혼모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이다. 남편이나 혹은 전통적인 종류의 파트너쉽 없이 혼자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여성말이 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늘날 중요한 커플은 여자와 아이 로 이루어진 커플이다.” 아니면 크레켈이 빈정댄 것처럼, "새로운 정치적 단위는 모자라고 불린다.” 새로운 여성 문학에 속하는 한 소설은 이것을 이렇게 공식화하고 있다. 나는 서른 여덟 살에 애를 낳고 싶어요...난 그 일을 완전히 혼자서 하길 원해요. 정자 은 행을 통해서나 아니면 하룻밤 상대로부터 말이죠. 그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불을 밝히지도 않은 채, 그저 내 몸을 내맡겼다가 한참 뒤에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해요. 이런 종류의 희망은 최근 생식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미 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결혼 생활을 하던 당시에 체외수정을 시도했다가 이제는 이혼을 했는데도 냉동된 그 수정란을 이식받기 원하는 여성들이 보고되고 있다. 전 남편들은 그녀 들을 고소했는데, 그것은 결혼이 해체된 이후 그들은 아버지로서의 모든 역할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이미 한 판례에서 여성의 승소를 결정하고 그녀에게 태아에 대한 일시적 후견권을 부여한 바 있다. 바로 여기에 다가올 미래의 시나리오가 있다. 남자 대한 사랑이 증발해버린 곳에서, 여성은 홀로 태아를 지켜나가길 원한다. 이러한 경향이 현재 대다수 여성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미혼모에 대한 태도가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거의 모두가 결혼한 여성만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1980년대 초에는 전체 소녀의 반 이상이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 대중서나 잡지들이 "혼자 아이낳기...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고 있는 것 역시 징후적 이다. 어떤 제목은 도전적인 자기확신으로 '남자 없이 더욱 행복한 독신 엄마'를 공언한다. 최근 여성들의 글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모티브는 이것이다. 즉 아이에 대한 사랑이 남자에 대한 사랑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한 다. 이제는 하퍼(그녀의 아들)와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기 위해 내가 만들어야 할 삶과 사랑의 조건이 어떤 종류인지 알아요. 만약 누군가 다가와서는 날 위한다면서 그걸 망쳐버리려고 한다면, 전 그를 때려주고 짐 싸서 내쫓아 버릴거에요...이것도 하퍼가 나를 변화시킨 일면 이죠. 남자들이 내 삶에서 차지하고 있던 중요성은 사라졌어요. 내가(직업적으로, 물질적으 로, 사적으로, 그리고 하퍼와의 생활 속에서)스스로 이뤄낸 모든 것들은 그 어떤 남자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순전히 독립적인 것들이죠. 나에게 무얼 하라고 말하거나 이러쿵 저러쿵 명 령하는 남자친구는 하나도 없어요. 오리아나 팔라치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것이 훨씬 뚜렷하게 나 타난다. 네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생각하면 할수록 그를 사랑했던 것이 후회스럽다...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내게 왔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지. 그들은 날 실망시키는 유령들 같았어. 난 무언가를 구해 보려 했지만 항상 실패하고 말았단다.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사랑 이란 아이를 품에 안고 그 애가 얼마나 외롭고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그 엄마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아마도 그건 진실일거야. 그 애가 무력하고 연약하게 머물러 있 는 한, 적어도 그 애는 너를 모욕하거나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란다. 에리카 종의 글 전체를 흐르는 감정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아이들은 낭만적 사랑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진한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그녀는 조쉬와 헤어지게 된 이후로 또 하나의 아기를 열망해 왔다...하지만 누가 그녀의 환상속의 아기 아버지가 될 것인가?...그렇다면 그냥 아이를 낳고 애 아버지는 차버려? 어쨌든 그녀는 혼자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이것이 새로운 가족, 즉 엄마와 아이들, 그리고 엄마의 연인(또 는 새 남편)인 것이다. 어쨌든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엄마와 아이들이다. 남자는 그 저 왔다가 가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에리카 종은 실수를 했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엄마와 아이들'로 구성된다는 것 을 당연시 할 수 없다. 많은 경우에 남자들은 이혼 후에도 엄마에게 양육권을 주기보다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며, 이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남성들은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우고', '이혼한 아버지의 슬픔'은 심각해지고 있다. 한 카운셀러의 말을 보자. "나는 남자 들이 아이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우는 것을 봐 왔어요. 과거에는 아이들 때문에 소리쳐 우는 건 오직 여자들뿐이었는데 말예요. 특히 나이가 젊은 아버지들은, 양육권을 얻지 못했을 때 극적인 상실감으로 고통받곤 하지요. 그런 경우가 우리에게는 가장 어려운 사례지요." 이미 언급한 바대로 새로운 종류의 유괴가 있다. 점점 더 많은 남자들이 양육권을 얻지 못했을 때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아직은 그런 경보가 울릴 만큼 심각하지 않은 곳에서라도 보통 남녀들에게 서 일어나는 어떤 흐름은 식별해 낼 수 있다. 성인 파트너의 무관심과 냉정한 침묵 때문에 자신이 거절당했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을 아낌없이 아이 에게 주고 싶어한다. 한트케의 '아이 이야기'는 이런 예를 보여준다. 친구가 없는 시기였다. 심지어 아내조차도 불친절한 낯선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것이 아이를 훨씬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이 시기에 부부 사이에 서로 나눈 것이라곤 기껏 해야 사실 관계 차원에 머물렀으며, 그들은 종종 서로를 단지 '그' 또는 '그녀'로 생각하곤 했다...아이를 낳고나서 아내는 자기가 거의 하루종일 갇혀 있는 답답한 집안에서만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그녀의 모습에 관심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그 를 짜증나게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특별한 존재이기를 그만두었고, 뛰어난 업 적을 이룬 '그녀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만두었다...그는 경솔하게도 일말의 망설임도 생각도 없이 가장 다정하고 친밀하며 비밀스런 몸짓을 아이에게 보냈으며, 아내와의 일상적 나눔 속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결국 그에게 맞는 것은 아이이며, 이제 여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바로 여기에 결코 통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중요한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최근 수년간 등장한 '새로운' 여성과 새로운 어머니들의 수많은 자전적 기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 봄으로써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녀들은 스스로가 아이에 대한 느낌의 강렬함에 놀라 고 압도되며 심지어 위축되기까지 한다고 반복해서 기술한다. 그녀들은 어떤 종류의 결속, 즉 그들의 삶의 다른 어디에서도 알지 못했던, 그토록 깊고 모든 것을 감싸는 '위대한 낭만 적 사랑'을 경험한다고 한다는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 던지 나는 당신이 혹시 심장마비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라고 썼다. 또다른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정으로 사랑을 배우고 있다...너(아이)로 하여 나는 친밀성 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너와 토론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가? 일년에 네 번쯤이나 그럴까? 그와 함께 있으면 가장 나 자신에게 충실해질 수 있는 그 런 친구에게는 가까이 다가가는가? 시간 약속이나 해야 그럴까? 예의범절과 지혜와 유머로 나를 전율케 하는, 그러나 나와 함께 살지는 않는 낯선 사람에게 나는 가까이 다가가는가?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너한테 가는 것만큼 가깝게 다가가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 애는 내 삶의 위대한 낭만적 사랑이다. 나는 낭만적 사랑을 강하게 불신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자기만족을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 애에 대해 갖는 감정이 과거에 내가 느낀 그 어떤 것보다도 여성잡지/중세의 시/종교적 신화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사랑에 근접한 것임을 안다...감정적, 심리적, 정치적, 사회적, 그 어느 쪽으로 보아도 내 딸 은 나에게 달갑지 않은 변화였다. 나는 겁먹었다. 결단코 그 어떤 남자에게서도 당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말이다.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나는 희생자였다. 그렇 지만 나는 억압을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실제로 그것을 사랑과 기쁨으로 끌어안 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여성성의 핵심이자 자연적 결속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런 진술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어머니와 아이의 감정적 결속이 오늘날보다 훨씬 약 했음이 밝혀진 이상, 그러한 감정을 우리의 유전적 속성이라고 공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 럽다. 이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방식과 더욱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이와 결속을 맺기 시작하는 것이 아주 매력적인 이유는 그 관계 가 다른 성인과의 관계와 매우 다르다는 점에 있다. 아이는 나와 선천적인 관계를 맺고 있 으니, 이 관계를 일대기의 우연한 일치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 결속은 모든 것을 감싸안고, 지속적이며, 끊어버릴 수 없다.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아내며 그러고는 차버 리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아이와의 관계를 어떤 의미에서 그 어떤 다른 관계들보다 우월하 다. 아이는, 적어도 그가 아직 어린 동안만큼은 실망하거나 상처받거나 혹은 버림받을 위험 없이 모든 사랑과 헌신을 투자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유토피아를 찾아서? 산업화 이전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변화해 옴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관 계맺는 방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의 세 단계를 추적할 수 있 었다. 1단계, 즉 가족이 하나의 경제단위로 구성되었던 곳에서는 남녀 어느 쪽도 개인적 일 대기를 갖지 않았다. 2단계, 즉 '확대가족'이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는 남자들이 그들의 삶을 꾸리는 데 주도권을 갖도록 기대되었다. 가족 응집력은 여성 권리의 희생을 대가로 유지되 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새로운 3단계가 시작되었다. 남녀 모두가 자기 자신의 삶을 만 들어갈 축복과 짐을 부여받은 새로운 시대가. 이러한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분명 진정한 파트너쉽을 세울 기회가 있지만, 양성이 헤어져 서 쓸쓸히 반대쪽으로 떠나가도록 할 위험 역시 마찬가지로 아주 많다. 문제의 핵심은 '당 신 자신이 되는 것', 그리고 똑같이 자신의 자아를 모색하는 그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함께 사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에 있다. 다음에는 무엇이 일어날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툼과 오해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우리에게 남은 믿을 만한 말동무란 오직 심리 치료사뿐인 그런 상태가 올 것인가? 아니면 플레센의 소설에서처럼 끌어안을 애완동물밖에 남지 않을 것인가? "그의 아들은 동부전선에서 전사했다...그의 아내는 달아났다...자기 자신 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는 고양이를 키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 달라질 것이고, 두 개의 스스로 만드는 일대기가 서로를 처리하며 융합될 수 있는 규칙과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황폐화된 관계가(그리고 그런 관계 속의 사람들이)필 요로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이다."라는 결혼 카운셀퍼의 통찰은 옳 은 것일 수도 있으나, 분명 이제 더 이상 충분한 것은 못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관 계들의 선차성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각 개인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사적 헌신은 그것이 시장의 목적에 착취될 수 있을 때에만(이동적이고, 유연적이며, 경쟁적이고 직업의식이 있을 때에만)고려될 수 있다고 보는 경향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그 런 변화는 정치인과 권력자, 조직과 제도의 통찰을 요구한다. 즉, 우리 사회가 기존의 지배 적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더는 생산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불가등하게 된 중대한 단계 에 도달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과거처럼 계속한다면 우리는 양성 사이의 전면전이라는 어마 어마한 재정적, 감정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며, 사회는 사적, 재정적인 혼란 속에 빠질 것 이다. 사적 수준에서 남자와 여자들은 과거에 여성적인 미덕이라고 여겨졌던 것들, 즉 이해, 인내, 양보를 실천해야 하며, 계속하여 새로운 타협을 시작하는 용기를 발견해야 한다. 유토 피아일 뿐이라고? 우리는 단지 노력해 볼뿐이다. 웹을 인용해보자. "우리는 한 문명의 끝에 와있다. 이제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우리는 또 다른 문명의 시작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