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지은이: 울리히 벡 엘이자베트 벡-게른샤임, 역자: 강수영, 권기돈, 배은경 옮김 출판사: 새물결 봉사자: 한양대학교 김용애, 조형 우리는 한 문명의 끝에 와 있다. 이제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우리는 또 다른 문명의 시 작에 서 있는가? 장미건 아니면 눈이건 또는 대양이건 한때 활짝 피었던 모든 것은 이제는 져버리고 오 직 두 가지만 남았다네. 공허 그리고 상처입은 자아만이.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 로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히 파고 들어가는 것이며, 천 번, 만 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용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 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나는 가정이 성소, 즉 재미와 즐거움이 넘쳐나는 장소라고 [보지]않는다-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장 야만스러운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비폭력적이고 비파 괴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함께 사는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동시에 한 사람이 그(그녀)의 개성, 인간사, 희망과 공포를 알아감으로써 그가 만들어 내었던 이미지를 수천 개의 조각들로 깨버리는 일은...오래 걸리고 매우 고통스 러운 경험이다...[이런 의미에서]결혼과 가족 생활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훌륭한 장 소이다. 그래서 나는 26년 6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하고 나서 결혼의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결혼은 훌륭한 면을 많이 갖고 있다. 그것은 성별의 가치관과 관점과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결혼은 증오심을 극복할 뿐 아니라 증오할 수 있는 곳, 웃고 사랑하고 의사 소통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책을 펴내며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다이옥신, 환경호르몬, 산성비. 근대성의 발전과 함께 증대하는 '위험’이라면 사람들은 쉽 게 이런 단어들을 떠올린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르는 환경 위기들 말이다. 조금 시야를 넓혀 보면 핵폐기물 문제나 전쟁 같은 좀더 복합적인 위험들도 떠올릴 수 있다. 최근 몇 년 간 줄지어 일어난 사건들에 데인(!) 한국인들이라면 이에 더하여 건물 붕괴, 가스 폭발, 대 형 화재나 교통사고 같은 단어들도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어떨까? 사랑이 우 리의 근대적 삶 속에 본원적인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몇이 나 될까. 이 책의 공저자인 울리히 벡과 벨리자베트 백-게른샤임은 바로 그러한 명제를 제시한다. 독일 사회학자이며 떠오르는 유럽 좌파 정치 이론가의 한 사람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유명 저널리스트인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은 그의 부인이다. 부부가 함께 ‘사랑’의 문제를 본격 탐구한 연구서가 바로 이 책이다. 사랑과 위험이라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위험’이라는 말을 위에서와 같은 고정관념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주제 선택이 어이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책의 ‘위험’ 개 념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처음부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벡 이 말하는 위험은 반드시 밖으로부터의 침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험의 반 대말은 안전이다. 근대성의 등장으로 개인은 미리 정해진 신분적 운명이나 '전통’, 또는 자 연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와졌지만 이 자유는 또한 무한정의 불확실성, 타협, 선택지들 앞 에 내던져질 자유이기도 했다. 봉건으로부터의 해방은(기든스가 지적했듯이)개인에게 성찰 성의 세계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안전감의 토대인 확실성의 뿌리를 제거해 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현대인은 집단 소속도, 전통도 떨쳐낸 오롯한 ‘나’로서 이러한 불확실성의 세계를 항해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한 그/그녀에게 사랑은 그 자신을 정박시킬 수 있는 마지막 희 망이다. 내 신분, 내 계급, 내 직장, 내 국적,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를 보증 해주지 못하 는 것으로 판명날 때, 사랑은 나의 존재와 나의 존재의 의미와 나의 진정한 자아를 확인시 켜 줄 최후의 보루이다. 그 사랑에 실패할 때, 그 사랑이 나를 배신할 때, 그것은 나의 안전 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다. 눈에 보이는 재난만이 위험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상처 입는 것은 어느 때인가? 우리 자신 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은 언제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우리를 가장 상처 입힌다.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가장 우리 자 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고도 쉽사리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건 다만 그 사람의 잘못이야. 나한테 맞는 짝을 만난다면, 올바른 상대방을 발견 하기만 한다면, 사랑이 나를 구원할 거야!' 우리 모두 한번쯤은, 이렇게 외치곤 한다. IMF 로 대변되는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전에 없는 '사랑’의 물결을 만났다. 신문에서, 시사 프로그램에서, 드라마에서, 공익광고에서, 우리는 경제 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가족간의 사랑’을 신물나게 보아야 했다. 사랑의 힘은 그토록 위대하다! 그것은 소외된 현 대인의 상처 입은 자아의 예방약일 뿐 아니라 국가적, 지구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 적인 치료약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우주의 절대 악으로부터 지구를 구원하는 최후의 해 결책으로(남녀간의)사랑을 제시한 영화<제 5원소>의 스토리라인도 그리 황당한 것만은 아 니겠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사랑 에 걸린 현대인의 높은 희망을 분석하면서, 사랑을 그 어떤 추 상적 가치나 화려한 수사로 환원하기를 거부한다. 대신 실제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서 살아가는 삶의 실제적 과정을 추적한다. 삶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얻어야 하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교육받고 훈 련받아야 하며 그런 와중에서 사랑을 해야 한다. 저자들은 근대성의 근간을 이루는 산업사 회의 구조를 들여다보고 산업 사회의 노동시장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명령들을 살펴보면서 남녀 사이의 '사랑’에 작동하는 구조적 힘들을 밝혀낸다. 가정으로부터 분리된 일터에서 하 루의 대부분을 보낼 것, 공적 노동을 엄격하게 사생활과 분리할 것, 노동시장의 요구에 맞 추어 이동성을 갖출 것... 산업 사회의 노동시장은 이렇게 모든 가족 관계, 인간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오롯한 '개인'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는 필연적으로 그에게 가정 잡사를 해결해 줄 또 한사람의 노동자(곧, 아내)가 딸려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아내는 또한 행복한 가정을 일 구는 주역이기도 하다. 오롯이 개인인 노동자는 아내를 믿고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며 노동시장의 요구에 따라 전력투구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돌보며 그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준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떠한가? 그녀의 삶의 의미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산업 사 회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해 주지 않는다. 산업 사회에서 공적 노동과 가정 잡사를 배분하는 기준은 타고난 성별이다. 이러한 성별 분업은 ‘타고난’ 기준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극히 '봉건적' 이지만 또 한편으로 이것이 없었다면 현대 산업 사회의 모델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극히 ‘현대적’ 이다. 성별 분업이야말로 저자들이 지적한 대로‘산업 사회의 봉건적 중핵’이다. 현대인의 사 랑은 이러한 구조 위에서 펼쳐진다. 남녀의 관계는 얼핏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게 성 역할로부터 영향받는다. 여기서 문제는 산업 사회를 가능 하게 한 토대였던 이 성 역할이 한편에서는 노동시장자체의 발전에 따라 내파되어 간다는 점이다. 현대의 발전한 노동시장은 여성의 공적 노동 참여를 요구하며 이는 여성 자신이 스 스로를 해방시켜 온 여성운동의 성과에 맞물려 여성에게도 ‘오롯이 너 자신이 되라’는 요구 를 강제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들은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저자들은 그런 종류의 시도에 대해 자신의 시계는 그대로 둔 채 여성들의 시계만을 거꾸로 돌리려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더욱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새로운 신의 이름, 새로운 종교의 이름이 되어간다. 결혼한 남녀들은 그들의 결혼을 ‘사랑에 충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이제는 더 이상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가 결혼의 유지를 보증해 주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 남녀는 마땅히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며 아이를 낳았으면 엄마가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하는, ‘원래대로의’ 결혼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결혼을 했더라도 하나 하나의 단계들이 모 두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고 협상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무릇' ‘자고로’ 그렇기 때문에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의사결정과 협상을 요구한다. 이는 한 편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개방성과성찰성의 증대이겠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위태롭고 변 경되며, 어느 하나 확고한 것 없이 요동하는 몹시 피곤한 상황이기도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욱 더 사랑에 희망을 걸고, 결코 배신하지 않을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맨다. 최근 서구 사회에서는 아이가 그러한 사랑의 원천으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 할까. 도대체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나는 왜 아이를 갖고 싶으며 왜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면, 어떻게? 끊임없이 존재의 안전을 위협해오는 위험사회 속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저자들은 우 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대중적인 호소력과 유연한 문체로 유명한 벡 부부답게 이 책은 페이지마다 흥미로운 사 례와 인용구, 무릎을 치게 하는 기발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소설, 영화, 신문기사, 통 계 자료 둥에서 따온 풍부한 예시들이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현 상황에 대한 어떠한 단정 적인 결론도 내리지 않으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섬세한 변화들을 스케치해 내는 저자들 의 솜씨는 감탄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읽는 이에 따라, 읽는 이의 경험과 성별과 연령과 지위에 따라, 서로 다른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다 이 책 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위험사회'의 연장선상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진지한 사회학 저 술로 원을 수도 있고,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로도, 신혼 부부가 앞으 로의 결혼 생활을 좀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참고서로도,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부모들에게 부모노릇의 깊이와 어려움을 가르쳐주는 교과서로도 읽을 수 있다. 페미니즘과 남녀 평등에 대한 대학생 수준의 기본 저서로서도, 여성운동가들을 위한 진지한 토론 자료 로도 이 책은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봄이었다. 처음에는 배은경과 강수영이 작 업을 진행하다가, 권기돈이 합류하고 나누어 번역하고 서로 읽어주면서 한해가 훌쩍 지났 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또 한해가 지나고, 이제야 책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서문 과 1, 2장은 배은경이, 3, 4장은 강수영이, 그리고 5, 6장은 권기돈이 맡아서 초역했지만, 역자들끼리 여러 번 모여서 토론하고 용어나 개념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므로 역자들 모 두가 이 책 전체에 대해 책임이 있다. 공역 과정은 역자들 자선에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경 험이었다. 한사람은 결혼 9년차에 초등학생 아들 하나를 둔 어머니였으며, 한사람은 막 첫 아이를 임신하여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 출산과 초기 양육기에 들어간 새댁이었고, 또 한사람은 여섯살박이 남자아이를 둔 결혼 7년차의 아버지였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 책은 우리들 각자에게도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으며, 그 결과 잣구 하나 하나를 두고 심각 한 견해차가 나타나기도 했다. 작업은 어려웠지만,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이 된 듯하여 뿌듯하다. 이 책의 독일어 원본은 Das ganz normale Chaos der Liebe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역 판을 갖고 번역하였다. 독일어 판이 영역되면서 새로운 자료들이 추가되고 몇몇 구절들이 손질되었으므로 독일어 판과 영어판은 서로 다른 점이 많은데, 영어판에서 의미가 분명하 지 않거나 중요한 자료가 삭제된 부분만 독일어 판을 찾아 대조하였다. 난삽한 번역과 오 랜 작업기간에도 불구하고 독일어판 대조 작업까지 맡아가며 수고해준 새물결 출판사에 감사한다. 처음 작업이 시작된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난 관계로 공역자들의 상황이 많이 변 하였다. 강수영은 미국 버팔로에서, 권기돈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더욱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정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내기까지의 수고로움이 한결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역 자 후기를 쓰는 이 보람있는 작업은 배은경이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1999. 6. 역자들을 대표하여 배은경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집필되었다. 서문은 공동으로 집필했고 1,5,6장은 율리히 벡이, 2,3,4장은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이 썼다. 서문 개인화 그리고 삶과 사랑의 여러 방식들 '도대체 엄마는 왜 그런 남자와 결혼하신 거죠?' 커닝햄의 소설인 '세상 끝의 집'에서 딸 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묻는다. "걱정되지 않으셨어요? 엄마의 진짜 삶을 망쳐 버리고, 뭐랄 까, 어딘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예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 질문이 마치 무슨 귀찮은 파리라도 되 는 양손을 내저었다. 토마토를 으깨던 엄마의 손은 축축하고 번들번들했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거창한 질문은 하지 않았단다." 어머니는 대답했다. "넌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궁금 해하고 계획하는 게 힘들지도 않니?" 이와 비슷하게 터로우의 소설 '거증 책임'에도 어떠한 미래가 자기를 기다리는지 끊임없 이 궁금해하는 딸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한 아버지가 나온다. "열망과 고통과 모순과 분 노 그리고 온갖 충동과 감정들로 뒤엉킨 쏘니(그의 딸0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턴은 자기 와 클라라(그의 아내)는 차라리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창일 때에는 모든 것이 명 쾌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서구 세계 어디서 자랐건 중간 계급 남녀들은 한결같이 결혼해서 애를 낳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을 열망했다. 모두가 똑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 새로운 시대>에 태어나 느지막이 결혼한 쏘니는 이러저러한 관계, 결혼, 남자 그리고 자신 이 고른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반쯤은 어린애 같은 별난 친구에 관해 끊임없이 의 문을 던지면서,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출발선상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했다. 스턴은 문 득 왜 남편이 필요한지를 깨닫기만 하면 바로 결혼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마르 타가 생각났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책에서 우리는 사랑과 가족과 개인적 자 유 사이에 이해 관계가 충돌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주요한 특징임을 밝혀 볼 것이다. 남녀의 성별 지위를 중심으로 구성된 핵가족은 (이제 더는 편리하게 우리의 사생활 바깥에 머물러 주지 않는)해방과 평등한 권리라는 쟁점 앞에서 산산 조각나고 있다. 그리고 그 결 과가 사랑이라고 불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혼돈이다. 이러한 진단이 옳다면 과연 무엇이 가족 대신 가정적 지복의 안식처 자리를 물려받게 될 까? 물론, 다시 가족일 것이다. 단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이전보다 더 많은, 그리고 더 좋은 가족이겠지만. 협상된 가족, 대안적 가족, 복수의 가족, 이혼 후의 새로운 타협들, 재혼, 또 한번의 이혼, 당신 아이와 내 아이와 우리 아이로 구성된, 그리고 과거의 가족과 현재의 가족들로 구성된 새로운 집합 말이다. 아마 이것들은 핵가족의 확장이자 시간상의 연장으로서 언제나처럼 이 새로운 가족도 당연히 개인들간의 결연일 것이다. 그리고 풍요 롭지만 비인격적이고 불확실한(전통도 사라지고 온갖 종류의 위험에 의해 손상된) 우리 사 회의 으스스한 환경으로부터 일종의 피난처를 대표하기 때문에 여전히 널리 찬양받을 것이 다.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남녀들은 동거나 이혼, 계약 결혼 등을 시도하기도 하고, 가족과 직장, 사랑과 결혼, '새로운'모성과 부성, 우정과 단순한 친분을 조정하려고 분투하면서 올바른 삶의 방식 을 찾아낼 것을 강요받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현재 진행형으로서 도저히 멈춰 세울 방 법이 없다. 이것은 가히 계급투쟁 다음에 닥쳐온 '지위 투쟁'이라 할 만하다. 번영을 구가하 고 사회보장, 평화와 민주적 권리가 당연시되기 시작한 나라들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가족의 요구와 개인적 자유 사이의 모순이나 가족의 요구와 사랑 사이의 모순들이 더 이상 고통과 억압에 맞선 일상의 투쟁 뒤로 감춰질 수 없게 되었다. 전통적인 사회적 정체성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남녀의 성별 역할에 대한 적대 관계가 사적 영역의 심장부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 적대관계는 누가 설거지를 하느냐 하는 문제로부터 섹스와 '바람피우는 문제' 그리고 이 를 통해 드러나는 온갖 태도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찌 보면 사소해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이와 반대로 아주 중요해 보이기도 하는 온갖 문제들에 걸쳐 있으며, 누가 봐도 크든 작든 분명하게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개인의 성장을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더 우상화되고 희망의 무게에 짓눌려 희미해져 간다. 사람들이 사랑에 더 많은 희망을 걸면 걸수록 사랑은 그만큼 더 빨리, 모든 사회적 결속을 잃어버린 채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간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사랑이라는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밀리에, 즉 왜곡 되고 은폐된 방식으로 나타나곤 한다. 처음에는 단지 '나'와 '당신'간의 어떤 사소한 불일치 일 뿐이던 것이 자꾸만 자꾸만 번져나간다. 사랑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긴장이 따르기 마련 이지만, 늘 사랑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왔기 때문에 이런 긴장들을 서로 모순된 두 사회 적 역할간의 충돌로 보지 못하고 각자의 성격이나, 실수, 부주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라난 작은 삐그덕거림들은 결국 어떤 성격을 가진, 혹은 어떤 실수를 한 두 '사 람'사이의 직접적 충돌로 비화되고, 마침내 사활을 건 상호비방전으로 비화되거나 혹은 지 긋지긋하니 헤어지고야 말겠다는 욕망에까지 이르고 마는 것이다. 좀더 쉬운 예를 들어보 자. 노동자와 경영자들 역시 서로의 차이를 개인적인 문제로 이해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서 로 사랑하고, 살림을 차리고, 결혼하고, 함께 일하며 아이들을 길러야 하는 운명은 아니다. 반면에 남자와 여자의 가정적 관계에서는 살림을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 하나 의 불화를 아주 개인적인 동시에 매우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오늘날의 커플들은 외부 세계의 요구에 순순히 그냥 따르기를 원치 않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부부만을 위 한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조정해 가려고 시도하는데, 바로 그러한 시도가 둘의 관계에 내재해 있던 부조화들을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싸움이나 말다툼이 그토록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른 어떤 굳건한 감정적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는 바로 그런 사소한 토닥거림들 이야말로 커플들이 전적으로 의탁할 수밖에 없는 안전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점점 황량해져 가는데, 사람들은 사랑이 깨졌을 때조차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커다란 희망을 사랑에 걸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온갖 개인 적 배신이 난무하는 불쾌한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버팀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 번엔 모든 것이 나아질 거야"라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은 희망과 절망이라는 두 측면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헤어진 두 사람 모두의 기운을 북돋워주며 각자를 개인화시킨다. 우스꽝스럽고 진부하고 희비극적이며 때로는 비극적이기까지 한, 온갖 복잡한 문제와 혼란으로 가득 찬 이 모든 것 - 이 책은 바로 이 문제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어쩌면 단지 사람들이 다른 문 제로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랑', 온갖 기대와 좌절에 짓눌려 버린 이 '사 랑'이야말로 전통이 해체된 이 시대의 새로운 삶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희망, 배신, 갈망, 질투 등 온갖 형태로 나타난다. 독일인처럼 심각한 국민들까지도 괴롭히고 있는 그 모든 중독들 말이다. 사랑이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야말로 현 상황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개인화 : 새로운 출발, 새로운 사회?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자유나 진정한 내가 되고픈 열망 즉 자아찾기 여행을 하필이면 가족과 대립하도록 내모는 걸까? 사람들은 왜 자기의 자아라는 이 가장 낯설고(가장 가까 우므로) 가장 성스럽고 가장 위험한 대륙을 탐험하려고 나서는 걸까? 겉으로는 매우 특이 해 보이지만 사실은 흔하디 흔한 패턴,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열중, 어떤 고통이라도 기꺼 이 감내하겠다는 각오, 자기 자신의 뿌리가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기 의 모든 뿌리를 뽑아 올려 갈기갈기 찢어발기고도 남을 듯한 냉혹성, 이 모든 것들이 이토 록 널리 퍼진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대답은 명백하다. 즉 모든 사람들이 개인주의자가 된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온갖 욕구와 불만, 흥분에 대한 갈망, 그리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독립하려는 생각 등이 문제라는 것이다. 각자 알아서 자기 일만 하도록 내몰아붙이는 일종의 시대정신이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어붙일정도로 기세가 등등하게 사방을 활보하고 있으며, 어떡해서든 이러한 정신에 끼어 맞추어 살도록 사람들을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계속 질문이 꼬리를 잇도록 만들뿐이다. 가족으로부터의 이 거대한 탈출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토록 수많은 삶이 대격변의 와중에 있다 는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루 수백 명씩 이혼하지만 이 문제는 제대로 해 결되지 않고 있다. 나의 자율성과 일종의 개인적 파업권을 핵심으로 하는 이 문제에서만큼 은 노동조합도 별 소용이 없다. 수많은 이혼자들은 오히려 자신을 압도하며 다가오는 위협 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며 자기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소망 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자기만의 의상을 입고 펼치는 아주 독특한 개인적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지금 이 드라마는 전 세 계의 모든 대도시에서 다양한 언어로 공연되고 있으며, 무대를 달리해서 계속 초연되지만 소품은 언제나 똑같다. 왜 그토록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치 집단적 열광에 빠진 듯, 과거에는 결혼이 가져다주는 지복이었던 것들을 포기하고 그것을 새로운 꿈과 바꾸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안전한 법률과 사회 안전망을 벗어나 '열린 결혼'관계로 함께 살아가거나 혹은 혼자 힘 으로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하는 걸까? 왜 독립성, 다양성, 변화 등을 쫓아 자아의 새로운 페이지들을 빠르게 넘겨가며 혼자 살기를 선택하는 것일까? 그러한 꿈이 악몽을 닮아가기 시작한지도 한참 지났는데 말이다. 혹시 이것은 윤리라는 점안제, '우리'라는 습포약, 또는 매일 공동선이 중요하다는 설교를 되풀이함으로써 치료해야 할 자아의 전염병이나 열병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것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탐험이자 비록 낯설지만 지금보다는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 나서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까? 자결권을 향한 이 모든 현란한 마창 시합을 거치고 나면 과연 모든 개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은 과연 새로운 시대, 즉 개인과 사회간의 새로운 관 계를 여는 선구자들인가? 과거의 낡은 계율에 기반한 합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통의 기반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기반은 개인의 일대기들로부터, 즉 매 단계마다 토론하고, 질문 하며, 또 새로운 타협을 이뤄내고 새로운 요구들을 충족시키며,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것 등으로부터 출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기반을 삶의 질서 를 위협하는 일시성이라는 원심력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한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견 해와 이론을 제출하고 있다. 그것의 핵심 단어는 개인화이다. 이 용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이 개념을 가까운 과거의 사례와 비교해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보 자. 가족 내에서 위기의 징후들이 뚜렷해지고 있던 19세기후반까지도 독일 민법의 아버지들 (민법에 오직 '아버지'들만 있는 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은 결혼을 그 자체로 그리고 저절로 정당화되는(특히 기혼자들은 전혀 비판할 이유가 없는)제도로 확립해 놓았다. "독일 국민의 일반적인 기독교적 견해에 부응하여"(이 문구는 마치 기능중의적 교과서에 나오는 '일반적 가치체계'라는 제목의 논의를 베낀 듯 하다)"이 법안은 혼인법의 영역은...개인적 자 유의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 영역이라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혼인은 오히려 혼인 당사자 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도덕적, 법적 질서로 간주되어야 한다" 개인화는 이와 정반대되는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개인의 일대기들은 전통적인 계율과 확실성, 외부적 통제와 일반적인 도덕률로부터 멀리 떨어져나와 개방적이고 개인의 결정에 따라 계속 달라지며, 각 개인에게 일종의 과제로 제시된다. 살아가는 문제에서 개인의 결정 과 관련되지 않는 가능성들의 비율은 점차 줄어들고, 개인적 결정에 열려 있는 일대기의 비율과 개인의 이니셔티브는 늘어나고 있다. 표준적인 일대기는 '선택의 일대기'로 변형되 었고, 그 대가로 온갖 강박증과 '자유의 전율'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주제를 표현하자면 이렇다. 가족이나 결혼이나 부모가 되기나 섹 슈얼리티 혹은 사랑이 무엇인지 또 무엇이어야 하며, 무엇일 수 있는지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의 본질, 예외, 규범, 도덕은 개인 마다, 관계마다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떻게, 무엇을, 왜라 는 모든 세부사상에 걸쳐 도출되고 협상되고 타협되고 정당화되어야 한다. 비록 이것이 그 러한 세부사항들 사이에서 누워 졸고 있던, 그래서 길들여진 것으로 여겨지던 온갖 갈등과 악마들을 풀어놓는 결과를 빚는다 해도 말이다. 오늘날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또 는 좀더 정확히 말자하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개인들은 점점 더 각자의 생활방식의 입법 자, 자기가 범한 위반의 재판과,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하는 사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과거 의 속박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심리치료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들은 계속 지울 수 없는 아픔의 상처에 대해 보복하는 복수자가 되기도 있기도 하다. 사랑은 점점 더 벌어져만 가는 개인들의 일대기간의 간극을 건너 사랑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채워넣어가야 할 하나의 공백이 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주 낭만적인 유 행가 가사, 광고, 포르노 각본, 가벼운 소설 혹은 정신분석의 안내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종교개혁 덕분에 사람들은 교회와 신이 정해준 봉건적 위계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산업적인 세계로 들어섰다. 이 세계는 사람들에게 테크놀로지를 통해 각자 의 이해를 추구하고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무제한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 늘날 정상성과 번영의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개인들은 현재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몇몇 의 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테그놀로지는 개인들의 삶을 접수하 겠다고 위협하고, 번영과 진보에 관한 그 어떤 단언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도록 만들고 있 다. 혼자 자기를 책임져야 하고, 오롯이 자기 혼자서 결정을 내려야만 하며, 그리하여 자신 의 삶과 사랑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를 지경에 처해 있다. 이 모든 과제에 대핸 전혀 준 비되어 있지 않으며 자라면서 배운 적도 전혀 없는 데도 말이다. 개인화는 남성과 여성이 산업 사회가 제시한 삶의 방식, 즉 핵가족이라는 삶의 방식에 따라 남녀에게 주어지던 성별 역할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동 시에(바로 이것이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키고 있다)노동 시장과 훈련 그리고 이동성 때문 에 자기만의 삶을 오롯이 건설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인간 관계와 친구들에 대한 책 무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다(그렇게 하지 않으며 당장 물질적 불이익이라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처럼 자유를 찾고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개별적 투쟁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일반 명령에 순응하기 위한 일반적 움직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일반 명령은 개인의 일대기가 노동 시작을 중심으로 계획되도록 명령한다. 즉 특정한 자격을 갖추고 언제나 이 사가 가능할 것을 요구한다-특히 행복한 가정 생활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전혀 고려하 지 않은 채 행복한 가정의 중요성만 설파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동성을 매우 높이 평가하 는 경향이 있다. 자유롭다는 느낌과 실제 자유는 기존의 가족 생활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가족적 삶의 모습을 찾아 나가도록 장려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발명품이 아니라 복지국가 가 중간에 완충 역할을 해주는 노동시작으로부터 태어나는 늦둥이에 불과하다. 노동시작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실은 모든 사람이 이러저러한 압력에 순응하고 취업 시작의 요구 조건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자유이다. 그러므 로 개인의 삶에서는 이러한 압력들을 내면화해 자신의 인격과 일상 생활, 그리고 미래를 위한 계획에 통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해지고 있다. 비록 그런 압력들이 당신 가족의 요구 와 가족 안에서의 노동 분업(이것은 본질상 일반 명령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과 불가 피하게 충돌하더라도 말이다. 외부적 또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겉으로는 개인적 실패로 - 대부분은 여성 배우자의 잘못으로 - 보이는 사건들이 실제로는 특정한 가족 모델, 즉 하나의 노동 시장 일대기와 평생의 가사노동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 있지만 두 개의 노동 시작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 는 없는 가족 모델의 실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시장 일대기는 내적으로 두 배우자가 모두 자기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개의 원심적 일대기를 서로 연결하는 일은 아슬아슬한 공중 곡예로 중심잡기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는 이전 세대에게는 그리 널리 기대되지 않았으나(점점 더 많은 여성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고 노력함에 따라)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세대에게는 더욱 더 많이 요구될 과제이다. 이것은 물론 한쪽 측면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남녀 양성강의 이 모든 카우보이-인디 언 놀이 속에서 전혀 예상 못한, 굉장히 낯선, 즉 에로틱하지도 섹슈얼하지도 않은 모순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노동시장의 요구와 온갖 종류의 (가족, 결혼, 어머니 되기, 아버지 되기 또는 우정)인간관계의 요구 사이의 모순말이다. 노동시장이 이상적으로 제시하 는 이미지는 이렇다. 스스로를 하나의 유연한 기능 단위로 바꿔 언제라도 이동 가능한, 경 쟁적이며 야심만만하며 따라서 자기의 존재나 정체성에 관련된 사회적 헌신들을 기꺼이 무 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개인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한시라도 직업상의 요구에 응할 준비 가 되어 있는 이 완벽한 직장인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이사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개인화라는 용어는 이처럼 복합적이고 다면적이며 따라서 애매모호한 현상, 즉 좀더 정 확하게 말하자면 사회적 구조 변동을 포괄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들은 마땅히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것 모두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실천적 함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 떤 각도에서 보면 선택의 자유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내면화된 요구들에 순응하라는 압력 을 의미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는 자기가 책임질 것을 의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 주의를 조장하는 바로 그 조건들이 새롭고 낯선 의존들을 생산한다. 즉 스스로의 존재를 표준화하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개인들은 전통적 강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노 동시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즉 (직업 훈련 기회나 대중교통으로부터 유치원의 위치 와 등교시간, 학자금 융자, 그리고 노후 연금에까지 이르는) 사회복지적 규제와 혜택에 의 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전통적인 결혼과 가족이 구속을 의미하지 않듯이 현대의 개인(주의)적 삶 이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유와 구속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혼합물이 또다 른, 좀더 현대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또다른 혼합물에 의해 대체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새로운 혼합물이 우리 시대의 도전에 더 잘 적응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아무리 골치 아픈 일이 많더라도 거의 아무도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이 를 잘 보여준다. 물론 시계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지만, 이들은 자기 시 계가 아니라 오직 여성들의 시계만을 되돌리려고 할뿐이다. 오래되고 유서 깊은 규범들은 쇠퇴해가고 있으며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당연시되던 일들이 이제는 토론되고, 정당화되고, 협상되고, 동의 를 얻어야 할 문제가 되었으며,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언제라도 취소될 수 있는 것이 되 고 있다. 이리하여 이제 친밀성 찾기에 나선 배우들은 각자의 역을 연기하고 구경하고 토 론하는 비평가요 연출가이자 또한 관객임이 드려나고 있지만, 친밀성을 성취하기 위해 필 요한 규칙들을 순발력있게 합의해 내는 데까지는 쉽게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규칙들은 계속 되어 잘못되고 부당하고 따라서 순전히 잠정적인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는 단단하게 굳은 것들, 새롭지만 여전히 낡은 흑백 논리적 사고 속에서 도피처를 찾으라 는 말이 차라리 구원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만해, 이제 됐어. 그것으로 충분해." 그 결과 기이하고도 모순적인 진실로 가득찬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까지 금기 시되어 오던 것들이 끝까지 실험되어 곧 정상적인 것이 되고 있다. 이것은 전염성이 강해 서, 심지어 이전부터 확실하다고 생각되어 오던 것들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조 차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의심할 바 없이 차이는 관용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반대 입장에 서 보면 그것은 철권에 의해 멈춰져야 할 아노미, 방종 혹은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보이기 쉽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전통적 확실성에 대한 갈망은 생계와 사회적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그리고 개인화 과정이 시작됨으로써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에 깃 들게 된 깊은 문화적 불확실성에 대한 대답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별 역할이 심 지어 일상 생활 속에서도 얼마나 힘없이 스러져가고 있는지를 한탄하면서, 거창하게 조국 과 민족의 구원 운운하며 호소하는 통상적인 말투 속에서도 슬쩍 엿보인다. 개인화 과정은 늘 있지 않았나? 그런데 이러한 개인화 과정은 늘 있지 않았나? 고대 그리스는 어떠했던가(미셀 푸코)? 르네상스기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중세 궁정 문화는(노베르트 엘리아스)? 사실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개인화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늘날 번영을 구가하고 있 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비록 같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쩌면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 중 가 장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은 현재 개인화의 거대한 파도가 대중적인, 광범위하면서도 체계적 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부유한 서구의 산업 국가에서 진행되 어 온 (장기적 관점에서 설계된)현대화 과정의 부수 효과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이것은 일 종의 노동시장 개인주의이므로, 따라서 이것을 전설적인 부르주아 시민을 되살려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시민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는 오직 소규모의 엘리트 집단만이 자기 관심사에 몰두할 수 있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지 만 오늘날에 와서는 개인화와 결합된 '위험한 기회들'역시 민주화되고 있는 중이다. 좀더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생활 방식 자체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번영, 교육, 이동성 등등의 상호작용 속에서 말이다. 독일에서는 지난 십 년간 높은 실업률로 인해 가혹한 퇴보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 층집단에서조차 생활 수준이 "극적으로, 광범위하게, 그리고 사회사적으로 볼 때 혁명적으 로" 향상되었다. 이전 세대들이 흔히 생존을 위한 하루하루의 투쟁 속에서 빈곤과 굶주림 의 단조로운 순환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알지 못한 반면, 오늘날에는 인구의 넓은 계층이 각자의 삶을 계획하고 조직할 수 있을 만한 생활 수준에 도달했다(물론 빈부격차의 심화가 수반되었다). 70년대 이후 교육 분야에서, 특히 여성 교육 분야에서 이룩한 진보의 중요성 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 여성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 순간, 여성 문제가 등장했다." 교육은 덫을 풀어준다. 그것은 여성이 가정주부로서 직면하고 있는 온갖 제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며, 불평등의 부당성을 폭로한다. 자신감을 키워 주고, 오랫동안 거부되어 온 전리품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싸움터에 나서려는 마음을 강화시 켜 준다. 스스로 번 소득은 결혼 관계 안에서 그녀의 위치를 강화해주고,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결혼관계를 지속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켜 준다. 이 모든 것이 불평등을 실제로 제거해 버리지는 않았지만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날카롭게 하고, 그것들이 부당하고 지겹고 정치적 동기를 가진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에 대해 몇 안 되는 개별적 사례로부터의 성급한 일반화라고 반대할 수도 있고, 또 이 처럼 주변적인 흐름과 경향이 예견하고 있는 듯한 그럴듯한 미래를 과장하고 있을 뿐이라 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개인화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갑작스 런 영향을 미치는 돌발적 방향 전환이 아니라 사실 어느 곳에서는 좀더 일찍, 또 다른 곳 에서는 좀더 늦게 시작된 장기적 발전 과정의 결과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묘사가 머나먼 낯선 나라로부터 온 뉴스 같을 테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상 생활에 대 한 아주 친숙한 설명 같기도 할 것이다.(1인 가구의 비율로 측정해 볼 때 현저한 개인화 경 향을 나타내는 소수의 독일 도시들, 예컨대)뮌헨,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의 상황은 동 프리즐 랜드, 중부 프랑코니아 혹은 북 바바리아 같은 시골 지역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후기 산 업사회에도 장인과 농업 노동자가 있듯이 개인화가 매우 많이 진행된 지역, 도시, 시골에도 여전히 계급 구분, 전통 혼례, 핵가족이 남아 있다. 봉건제와 사회적 신분이 널리 남아 있 었는데도 여전히 19세기를 산업 사회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개인화된 사회의 윤곽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 은 이런 현대적 발전들을 서로 연결해 주면서 작동하는 경향과 힘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유일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처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뿐이며, 이것은 관찰자에 따라 이러 저런 표제 아 래 기재된다. 우리를 둘러싸고 그리고 우리 안에서 맹위를 떨치는 격변과 연속성간의 투쟁 에서 현실은 안쪽 모두를 무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상황에 대한 얀켈로비치 의 묘사는 독일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의 생활에는 연속성과 함께 심대한 변화가 병존하고 있다. 미국의 문화는 가지각 색이기 때문에 문화의 연속성을 강조하기를 원하는 관찰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 며, 이와 반대로 미국인이 가변적인 속성을 기록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또 그렇게 할 수 있 을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문제는 언제나 이런 것이다. 즉 만약 중요한 것들이 변화했다 면...그것들은 온갖 문화 영역에 침투하고, 경제적, 정치적 생활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그리 고 만약 그것들이 아주 중요하다면 생활의 연속성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킬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일부러 그림을 균형 있게 그리지 않았다. 오래되고 친숙한 것보다는 새 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강조했고, 성공보다는 갈등과 위기에 더 많이 주목했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온갖 쟁점들에 직면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러한 격동이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만의 말대로 "완전히 행복한 시대에는 아마 어떤 문학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 회과학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두 책, 똑같은 '대상'(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객관적'이라 면)에 대한 두 가지 관을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많은 경 험을 함께 했다. 하지만 각 장에서 서로가 쓴 내용들간의 차이를 조절하거나 지워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몇몇 부분은 중복되고 일부 생각은 끊임없이 빙빙 돌며 제자리로 돌 아오게 되고 말았는데, 우리는 이것들이 우리의 논의가 가진 잠정적이면서도 가설적이며 모험적인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냥 두기로 했다. 부부로서 각 자 사랑의 혼돈에 관해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은 버뮤다 해변에서 에스키모어를 배우려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위험은 명백하다. 아주 다른 상황에서였지만 다음과 같은 일리치의 묘사는 우리가 남녀 독자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당신들은 우리가 하는 일이 똑같은 산 봉우리를 여섯 번 등정하는 일 또는 큰산의 둘레를 빗자루를 타고 여섯 번 도는 일과 비슷 하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지옥으로, 지옥의 똑같은 구멍으로 거듭거듭 내려가고 있구나 하고 상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매번마다)...다 른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1. 사랑이냐 자유냐 함께 살기, 따로 살기 혹은 목하 전투중 자유, 평등, 사랑 사람들은 온갖 것과 온갖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안달루시아 지방, 할머니, 괴테, 하얀 피부 위에 걸쳐진 검은 망사 스타킹, 치즈 샌드위치,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자의 따뜻한 미 소, 갓 구운 빵, 떠다니는 구름들의 희롱과 발장난, 에르나, 에바, 폴, 하인쯔-디트리히...이 모든 것을 동시에,연속적으로,과도하게,조용하게,또 손으로, 이빨로, 말로, 시선으로, 그 뿐 만 아니라 대단히 강렬하게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성적인 사랑(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이 워낙 강력하고 격동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광범위한 사랑의 잠재력을 단 한 번의 애 무, 한 마디의 말, 한 번의 키스에 대한 열망으로 축소시켜 버리곤 만다. 양성간에 매일 벌어지는 온갖 다툼들, 즉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거나 아니면 냉전으로 흐 르는 온갖 싸움들, 또 결혼 생활파 관련된 전투와 결혼 생활 바깥에서 벌어지는 온갖 다툼, 그리고 결혼 전, 후 그리고 결혼 생활 중에 일어나는 온갖 싸움들은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사랑에 굶주려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척도일 것이다. 그런 싸움들 속에서 우리 가 상대방을 공격하는 가장 흔한 무기가 바로 사랑이다. “당장 낙원을!” 세상 사람들은 바 로 여기가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러한 외침은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난 사 람들, 자유를 찾아, 공존의 자유를 찾아 헤매지만 자유에다 자유를 더하면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 대한 위협이나 심지어 사랑의 파괴를 가져오기 쉽다는 것을 누차 깨달아온 사람들의 불안감 속에 메아리쳐 울리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결혼하고 사랑 때문에 이혼한다. 사람들간의 온갖 관계는 마치 상 호 교환 가능한 것처럼 지속되는데,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짐을 최종적으로 내던지기를 원 하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법칙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혼 판결 위에 세워진 오늘날의 바벨탑은 과대 평가된 사랑의 기념물이다. 사람들은 이제 막 환상에서 깨어나고 있다. 때로는 싸늘한 냉소조차도 쓰라린 사랑의 최신 변종일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온갖 갈망의 도개교를 들어올려 버리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참을 수 없는 고통으 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 몇백 년 동안 신에 대해 얘기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과 가 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들 가슴 깊이 숨겨져 있는 구원과 애정에 대한 갈망, 그것 을 둘러싼 야단법석, 비현실적이고 진부한 대중 가요 가사들-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초월 을 꿈꾸는, 즉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저 세상을 갈망하는 이 모든 광신적인 낌새들을 보라 (이 점은6장에서 한층 더 자세히 검토되고 있다). 두 사람이 하나의 개인으로 마주 서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이 세속적인 신흥 종교는 가정의 사생활 속에서, 이혼 변호사 앞에서, 결혼생활 상담소에서 끊임없이 벌어지 고 있는 투닥거림들을 통해 격렬한 종교적 논쟁이 되어버렸다. 사랑에 대한 갈망은 현대의 근본주의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근본주의적 신념에 반대하는 사 람들마저 이러한 갈망에 굴복하고 있다. 사랑은 종교 이후의 종교이며, 모든 믿음의 종말 이후의 궁극적 믿음이다(이러한 비유법은 6장 이하에서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이처럼 일 종의 종교가 되어버린 사랑은 마치 원자력 발전소 옆에 종교 재판소가, 혹은 우주 로켓 앞 에 한 송이 데이지 꽃이 서 있는 형국이다. 아무튼 사랑의 아이콘들은 우리 마음 가장 깊 은 곳에 자리잡은 소망의 물을 마시고, 여전히 우리 안에서 꽃피고 있다. 사랑은 사생활의 신이다. '현실’사회주의는 철의 장막과 함께 사라졌지만 우리는 지금 현 실 팝송 제국의 시대를 살고 있다(6장의 '현재의 낭만주의: 사랑은 팝송'을 참조하라. 로맨 티시즘이 승리했으며, 심리치료사들은 잔뜩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존재의 의미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최소한 일상 생활의 매력과 압력 아래에서라면 인 생은 허무하지 않다. 어떤 강력한 다른 힘이 밀고 들어와 이전 세계들의 신, 국가, 계급, 정치 혹은 가족이 지배하던 곳의 빈틈을 메웠다. 중요한 것은 ‘나’ 이다. 나, 그리고 나의 보조자인 너. 그리고 만약 네가 아니라면 또다른 어떤 너. 여기서 사랑은 결코 충족과 같은 것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 충족은 사랑의 오직 한 측면, 사랑의 맹렬한 한 측면, 즉 육체적 스릴을 가리킬 뿐이다. 심지어 에로티시즘의 강력한 유 혹조차도 새롭지만 여전히 친숙한 기쁨을 암시하며 정욕을 일깨우는 에로티시즘의 온갖 숨 겨진 약속조차도 충족을 의미하거나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일단 목적이 '성취’되고 나 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매혹적으로 보이던 육체는 아무렇게나 옷이 벗겨진, 어떠한 매력도 없는 낯선 살덩어리로 보이게 되지 않던가. 충족이란 얼마나 쉽게 차가운 시선으로 변해버리는지! 바로 조금 전까지도 모든 경계가 사 라지고, 너와 나를 하나로 만들며, 두 개의 걸어다니는 타부들이 압도적인 절박함으로 뒤엉 켰던 그 곳에서, 우리는 지금 비판적인 눈으로, 흡사 육류 검사관처럼, 소와 돼지를 그저 소 시지로만 바라볼 뿐인 푸주한의 눈길로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는 것이다. 어쨌든 사랑의 수렁과 함정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평원에서의 삶과 폭풍의 언덕을 혼동 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사랑은 쾌락, 신뢰, 애정이며 이와 동시에 분명히 그와 정반 대의 것, 즉 권태, 분노, 습관, 배신, 외로움, 위협, 절망 그리고 쓴웃음이기도 하다. 사랑은 당신의 연인을 빛나게 하고, 그를 기쁨의 원천으로 바꿔놓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그녀 속에서 단지 지방층과 깎지 않은 수염 그리고 수다만을 발견할 뿐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사랑은 도대체 은총을 모르며 맹세에 얽매이지도, 계약을 지키지도 않는다. 무엇 을 말하거나 의도하거나 행하건, 마치 입과 손과 신체의 다른 부분이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 어떤 법정이 있어 버림받고 오해받은 연인들이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한 소송을 벌일 수 있겠는가? 사랑 문제에 대해 공정하고 진실되며,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결할 수 있는 재판관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전 세대들은 먼저 자유와 남녀 평등이 달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그 모든 영광과 갈망, 욕망을 찬연히 꽃피우리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희망했다. 사랑과 불평등은 불과 물처 럼 상호 배타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이러한 이상의 끄트머리를 붙잡은 것처 럼 보이는 이 마당에, 우리는 정반대의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평등하고 자유롭기를 원하는 두 개인은 과연 어떻게 두 사람의 사랑이 자라날 수 있을 공동의 지반을 찾아낼 수 있을까? 자유란 구식 라이프 스타일의 잔해를 벗어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 다른 사 람들의 발걸음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만의 북장단에 발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말 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 이 두 평행선은 결국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지 않을지도 모르고 지금 우리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남녀 성별 투쟁의 현재 상황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는 저 강력한 메시지의 결과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데조 차2천년이 걸렸다. 하지만 역사적인 시간 차원에서 볼 때는 단 1초도 되지 않아, 즉 채 20 년도 되지 않아 전과 마찬가지로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공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깨 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도 평등하다.” 그것이 단지 사랑과 결혼에 관한 문제이기만 해도 좋으련만. 하지만 이제 양성 관계는 더 이상 겉으로 보기에 쌍방이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만, 즉 섹스, 애정, 결혼, 부모되기 등으로 만 정의될 수 없게 되었다. 일, 직업, 불평등, 정치, 경제 등 다른 모든 것을 고려해야만 하 는 것이다. 문제가 그리도 복잡한 까닭은 이처럼 양성 관계가 서로 공통점이 없는 수많은 요소들의 불안정한 집적이기 때문이다. 가족에 관해 논의하려면 직장과 수입도 함께 고려해 야 하며,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교육, 기회, 이동성, 그리고 특히-이제 여자들도 남자들 과 같은 자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것들이 얼마나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있는가를 함께 고찰해야야만 한다. 남성과 여성간의 불평등 상태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 10-20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자료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으로는, 특히 성, 법률, 교육 측면에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성적 인 변화를 제외한 다른 영역의 변화들은 실제보다는 그저 의식이나 문서로만 그치고 만 경 우가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취업 시장과 보험, 연금 수혜에서는 남녀의 태도나 조 건에서 별다른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외견상으로는 상당히 역설적인 결과 를 가져오고 있는데, 양성이 더욱 평등해 보일수록 양성간의 영속적이고 유해한 불평등을 그 만큼 더 분명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의식과 낡은 조건의 이러한 역사적인 혼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폭발성을 갖고 있 다. 여성의 상태를 의식하고 있는 고학력 여성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더 많은 평등과 함께 파트너로서 대우받기를 기대하지만, 노동 시장과 남자 동료들로부터 나오는 이와 정반대의 경향에 맞부딪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남성들은 말만 그럴듯하게 평등을 설교해 왔을 뿐 말 과 행동을 일치시키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양쪽 모두에서 포기하기를 거부했던 온갖 환상의 얼음이 녹아 내리고 있다. (교육과 법률 면에서)양성의 자격은 점점 동등해지고 있으나, 불 평등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 모두는 이것을 점점 더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으며, 불평등은 점점 더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평등하게 살고 싶은 부인의 바람과 불평등한 현실간의 모순, 그리고 말로는 공동 책임이라는 구호를 내세우지만 일상 생활은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완고함 간의 모순은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 다.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서 아주 적대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러한 모 순이 미래 사회의 전개 방향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최초로 온갖 대립 과 기회와 모순과 함께 남녀라는 성별에 따른 '신분적’규정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호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들의 의식은 현실을 크게 앞질러 가고 있는데, 누구 도 이러한 의식의 시계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전투 에 돌입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명제는 먼저 남녀간 사랑의 다양한 모습이 가진 ‘전면성’ 과 관련된 자료를 기준으로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것이며, 그 이후에는 이론적으로 해 명되고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성과 결혼 서구의 모든 산업 국가에서 이혼율의 지속적인 증가를 알려주는 여러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다. 독일은 아직 상대적으로-말하자면 미국에 비해-낮은 이혼율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거의 1/3의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고 있다(대도시에서는 거의 1/2, 지방 소도시와 시골지역 에서는 대략 1/4). 이혼율은 1985년부터 미미하게 감소하는 추세지만 오랫동안 결혼 생활 을 지속해 온 부부간의 이혼은 상당히 증가해왔고, 1984년까지는 이혼율이 재혼율을 상회 했다. 이후 이혼한 남녀들은 정점 더 새로 결혼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결혼하는 추세가 정체했던 것과 일치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재결합한 부부의 이혼율과 자 녀가 딸린 부부의 이혼 역시 증가 추세이다. 이에 따라 부모로서 맺는 관계의 정글 역시 자 꾸만 커져가고 있다. 내 아이, 당신 아이, 우리 아이. 이처럼 그때그때 관련된 사람에 따라 규칙도 달라지고, 서로 반응도 상이하고, 전쟁터도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공식적인 이혼율과 결혼율은 '비공식적 결혼’의 급격한 증가에 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1989년 현재 약 250만 명에서 300만 명의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 은 채 동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 이들 (법외혼아)의 숫자 역시 같은 추세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들의 숫자가 1967년 에는 전체 아동의 4.6%이었으나 1988년에는 1%로 증가했다(스웨덴에서는 10%에 이르렀 다). 그러나 이런 비공식적 부부의 이혼에 대해서는 쓸 만한 통계치를 구하기가 힘들다. 이 런 식으로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지난 10년 동안 4배로 늘어났지만 이러 한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작 놀라운 것은 지난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토록 격렬 한 찬반 논쟁의 대상이었던 ‘사실혼’이 이제는 아주 일반적인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사실이다. 그런 커플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이처럼 비공식적이 고도 비전통 적인 삶이 하나의 생활 패턴으로 확립되고 있는 사실이 이러한 변화의 속도를 더 잘 보여주 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족, 결혼, 직장은 여전히 인생의 설계, 인생의 조건, 적절한 일대기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단단한 초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이후 이와 관련된 모든 지점에서 온갖 선택의 가능성과 질문이 나타났다. 결혼을 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 동거만 할 것인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가족 안에서 할지 아니면 밖에서 할지, 아버지란 함께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되는지, 그 리고 이런저런 일을 직업을 얻기 전에 해야 할지 아니면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후에 할 것 인지 또는 직업을 가진 채로 동시에 해야 할 것인지...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자명하 지 않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온갖 문제에 대한 계획과 협상은 원칙상 취소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양 쪽의 당사자가 불평등한 부담을 얼마나 정당화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한때 결혼과 가족을 통해 요약되던 온갖 행동과 태도가 해체되고 분화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개념과 현실을 서로 연관시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가족, 결혼, 부모되기, 어머니, 아버지 등의 획일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이러한 용어들 뒤에 감춰진 삶의 점증하는 다양성을 은폐하고 위장하게 된다. 즉, 이혼한 아버지, 한 아이에 여 러 명의 아버지, 같이 아이를 키워주기만 하는 아버지, 외국인 아버지, 의붓아버지, 살림하 는 아버지, 주거만 같이 하는 아버지, 주말 아버지, 일하는 아내를 둔 아버지 등을 말이다. 가구 구성 또한 사회의 변화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고 있 다. 1인 가구 비율은 독일 전체로 보아 1/3을 이미 넘어섰으며(35%),그럼에도 계속해서 증 가하고 있는데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뮌헨 같은 대도시에서는 약50%나 된다.1900년에 는 전체 가구의 44%가 5명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6년에 이 숫자는 6%로 줄었으며, 반대로 2인 가구는 1900년에 15%이던 것이 1986년에는 30%로 증가했다. 1980 년대 후반 현재 독일 인구의 약 15%인 900만 명 가량이 혼자 살고 있는데, 이 비율은 계 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이들 중 ‘독신’의 전형-즉 젊고 미혼인 전문직 종사자-에 들어맞는 사람은 절반이 겨우 넘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주로 여성으로, 배우자와 사별한 노인이 많다. 따라서 이런 경향을 남녀 관계에서 무정부성이 증대하고 남과 연루되기를 꺼리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식으로 단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반대의 경향 역시 분명 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혼율이 1/3이라는 것은 2/3의 ‘정상적인 결혼’ 과 가족(이 용어가 무엇을 은폐하고 있건 간에)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한 세대가 지나는 동 안, 특히 소녀들과 여자들 사이에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은 틀림 없다. 예전에는 단지 젊은 남자들만이 '여러 여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허락되었지만, 그것도 비공식적이었으며 거기에는 언제나 남들의 능글맞은 웃음이 따라다녔다. 오늘날에는 반수가 훨씬 넘는(61%)소녀들이 여자들에게도 성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중의 반은 동시에 두 명 이상의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들이 우리를 오도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이전보다는 훨씬 더 방만해 진 성적 태도 역시 엄격하게 규범화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결혼과 가족을 삶 의 모델로 채택하는 것은 거부하지만 정서적 헌신은 추구한다. 안정적인 관계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이상이자 목표이다. “상대방에 대한 충실성은 법이나 종교적 윤리를 통한 공적인 정당화나 압력이 없어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며, 수많은 논란이 있어온 ‘가족과 결혼은 사라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이기도하고 아니다 이기도 한 것이다. 교육 취업 시장과 고용 독일 헌법은 여성에게 법적인 평등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1977년 새로운 결혼법과 가족법 이 발효되고 나서야 비로소 몇몇 중요한 형태의 차별이 제거될 수 있었다. 이제 적어도 서 류 상으로는 남녀를 차별대우할 아무런 근거도 없게 되었다. 여자들은 처녀 때의 성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법적으로 남편이 가족과 아이를 책임져야 했지 만 이제 그러한 법률은 폐지되었고, 누가 가장 노릇을 할 것인가는 배우자들끼리 의논해서 결정할 문제가 되었다. 또 양쪽 배우자 모두에게 집밖에서 일할 자격이 주어졌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부모 모두의 책임으로,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때-법조항을 그대 로 인용해보자면-“합의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하기 위한 이러한 대폭적인 개혁과 함께 전후 독일 에서 나타난 가장 뚜렷한-거의 혁명적인-변화는 동등한 교육 기회의 부여에서 찾을 수 있 을 것이다. 1960년초까지만 해도 교육 분야에서의 여성 차별은 너무나 분명했다(놀랍게도 상류 계층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1987년에는 교육받는 소녀들의 숫자가 소년들과 거의 비슷해졌으며, 고등학교 졸업자는 오히려 남학생들보다 많았다(53.6%).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변화들도 적지 않았다. 직업 훈련에서는 성에 따른 편견이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1980년대 초에 여성 노동자는 약 40%가 어떠한 공식 자격증도 갖고 있지 않았던 데 비해 남성 노동자는 단지 21%에 그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 학하는 여학생의 비율 또한 지난 10년간 80%에서 63%로 감소했다(남학생의 경우 90%에 서 73%로 감소). 여학생들은 여전히 특정 분야를 더 선호하고(거의 70%가 인문학, 어학 혹 은 교육학을 선택한다), 교직에 진출하는 여학생들은 ‘하급의’교사직을 얻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전의 사정과 비교해 볼 때 교육 분야가 여성화되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 혁명이 결코 노동 시장이나 고용 체계의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교육에서는 열린 문이 “고용과 노동 시장 앞에서는...쾅하 고 다시 닫혀버렸다.” '남성' 전문직에 진출한 여성의 수가 약간밖에 증가하지 않은 것은 다 른 영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교체와 대조적이다. 1970년대 동안 내내 요구된(그리고 격려 된)여성 취업은 위계의 아래쪽과 위쪽이 거꾸로 되어 있는‘봉건적 성별 패턴’을 계속 따르고 있었다. 즉, 사회에서 핵심적이라고 정의되는 분야일수록 여자들이 더 적게 대표되고 있으 며, 거꾸로 주변적이고 영향력이 없는 집단일수록 여자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관련된 자료들은 이것이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영, 고등 교육, 대중매체 둥에서 모두 진실임을 보여준다. 정치 분야에서 여성이 최고위직을 차지할 가능성은 여전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한편 으로 1970년이래 정치적 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은 계속 증가해 왔으나 다른 한편으로 정책 결정의 핵심에 다가갈수록 여성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었다. 사회민주당의 여 성 할당제는 바로 이런 현상을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얼마만한 효 과를 낼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할 테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여성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던 것은 정당의 각종 기구들이었다(1970년의 약 14%에서 1982년에는 20.5%로 증가되 었다). 의회에서도 여성의 비율은 증가하고 있는데, 지방 의회의 비율이 가장 높다(주의회에 서의 여성 비율은 6%에서 15%사이로 다양하며, 시, 군 의회에서는 의원의 9.2%~16.1%가 여성들이다). 사업 분야에서도 극소수의 여성들만이 진정으로 영향력이 있는 지위에 있으며, 영향력이 덜한 직종(가령, 개인 사무실 같은 곳)에서는 여성들의 비율이 아주 높다. 약간만 높은 수준 으로 올라가면 사법 제도 내의 그림도 이와 아주 비슷하다. 이 분야에서 여성 비율은 매우 높다(예컨대 1979년에는 10%의 검사가 여성이었으며,1987년에는 16%로 늘어났다).그러 나 연방법원 같은 곳, 즉 “우리 공화국의 중요한 법적 결정이 내려지고 다음 수십 년간 우 리 사회가 나아갈 길이 제시되는 곳에서는 여성들이(거의)존재하지 않는다.” 고등교육분야에서도 직위 피라미드의 정상에 있는 여자들은 여전히 아주 드물다. 1986년 의 경우 총 9956명의 최고위-최고 연봉의 교수직중 여성이 차지한 자리는 단지 230개뿐이 었다. 이보다 직위가 낮아질수록 여성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는데, 봉급을 덜 받는 교수직과 불안정한 중간 수준의 자리들 그리고 조교직에서, 특히 '주변적 분야' 에서는 여성 비율이 상당히 높다. 똑같은 그림이 대중 매체에서도 발견된다. 직위가 높을수록 여성들이 발언할 기회는 줄어들게 되어 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여성의 경우 주로AD나 가벼운 오락 부서에 서 일할 가능성이 크며, 중요한 정치나 경제 부서에서 일할 가능성은 이보다 훨씬 적고, 정 책이 결정되는 상층에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직업에 필요한 자격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난다는 말은 최소한 비교적 젊은 여자들의 경우 에는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제대로 교육받았고, 종종 어머니들(그리고 왕왕 아버지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받는 인상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 면 직업 세계의 많은 영역에서 여성들은 침몰하고 있는 '배’를 인계받았기 때문이다. 여성들 이 차지하는 전형적인 일자리는 대개 미래가 불확실한 것들이다. 비서, 방문 판매원, 교사, 반숙련 산업 노동자 등. 일자리의 숫자를 줄이려는 강력한 경향, 즉 예의바른 사회학자들의 은어로 ‘적지 않은 합리화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분야들은 정확히 대부분 여자들이 일하는 영역들이다. 이것은 특히 공장 노동에 적용된다. '여성들’의 일거리는 대부분 전자, 식품, 의 류나 직물 산업처럼 기계화되기 어려운 일들, 즉 기계화된 공정 사이의 틈새를 메우거나 고 도로 자동화된 공정으로 만들어진 물건의 끝마무리를 하는 일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머지 않아 극소전자공학에 의해 대체되거나 또는 완전히 자동화될 가능성이 큰 일들이다. 실업 통계가 잘 보여 주듯이 많은 수의 여성들이 이미 이런 식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최근까지 실업자로 등록된 여자의 비율은 항상 남자보다 높았고,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1950년에 여성 실업률은 5.1%였다(남자 2.6%). 1989년에는 9.6%로 상승했다(남자 6.9%). 전체 노동 력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1/3인데 반해, 1988년의 경우 서독의 실업자 약 200만 명 중에 절반 이상이 여자였다. 1980년부터 1988년 사이에 대졸 실업률은 남자의 경우 14% 증가한 반면 여자의 경우에는 39%나 증가했다. 게다가 이 수치에는 주부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떠난 여성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난 10년간 ‘복합 실업’, 즉 주로 가사 노동으로 물러난 사람들의 숫자는 몇 배로 늘었다(1970년에 6,000명이었으나 1984년 에는 이미 121,000명에 달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여자들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상승 중이 다. 노동 시장 참여도, 실업률, 준실업 상태 모두가 그렇다. 직업에서의 여성 차별을 보여주는 이러한 그림은 대체로 저임금에 의해 완벽한 모습을 갖 추게 된다. 1987년의 산업 노동의 경우 여성 노동자들은 시간당 16.69DM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남성 임금의 73%밖에 되지 않는다. 1960년이래 시간당 남녀간 임금 격차는 상대적 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동등한 훈련과 비슷한 연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개 남자들 이 더 많이 받는다. 예컨대 여성 사무직 노동자는 평균적으로 남성 월급의 단지 64%만을 받고, 생산직 여성들은 남성 동료 소득의 단지 73%를 받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더 젊은 세대 여성들의 기대치나 요구와는 분명히 모순된다. 자이덴스피너 와 부르거가 공동으로 집필한 "소녀 ’82"의 중요한 연구 성과 중의 하나는 ‘15세에서 19세 사이의 소녀들에게는 직업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혀준 데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결혼이나 아이를 낳는 일보다 훨씬 더 중시되었다(1982). 이처럼 오 늘날의 젊은 여성들은 전문직의 자격을 갖추어 좋은 일자리를 얻으려 하지만 노동 시장에 서는 이와 정반대의 경향과 마주칠 뿐이다. 그녀들이 이 적나라한 충격에 어떻게 장기적/ 단기적으로, 사적/정치적으로 대처하는지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남녀의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오직 한 쪽(여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 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사실상 그것은 남자들이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새로 장벽을 쌓아올리고 있는 고용 시장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여자의 일’, 즉 일상의 잡일, 육아 등의 다른 영역에서도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남성의 시각에서 본 여성 해방과 가사 노동 1985년 가을에 출판된 메츠-괴켈과 뭘러의 대표적인 실증적 연구서인 '남자'는 참으로 양 가적이지만, 이러한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명확한 그림을 제시한다. 프로쓰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성들이 남녀의 역할에 대해 조화론적인 관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고 하고 있다. “남자가 더 강하며, 직업을 갖고 가족을 부양하기를 원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약 하고, 현재 떠맡고 있는 가족 내의 역할을 지키기를 원하며, 단지 그런 연후에나 상대적으 로 소박한 직업에 종사하고 싶어한다. 그녀는 남편을 존경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제 이러한 태도는 말로는 개방적 정신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행동은 더욱 완고해진 모습으 로 대체되었다. “남자들의 반응은 분열되어 있다. 남자들은 지신들이 설교하는 것을 실천하 지 않는다. 공통의 이해 관계를 갖고 있다는 슬로건 뒤에 실제로는 불평등을 감추고 있다.” 지난 20년간, 특히 집안 살림과 육아와 관련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아버지들 은 요리, 설거지, 청소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계와 육아에 재정적으로 기여하는 데 만족 하고 있다.” 당연한 귀결로“대다수 남자들이 남자 주부 역할은 인정하지만 오직 나 아닌 다 른 남자들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말로는)유연한 척하면서 낡은 역할을 고 수하는 것은 아주 교활한 처사이다. 남자들에게는 ‘남자들은 가사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남녀 평등을 인정하는 것이 전혀 모순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이들은 새로 운 논거를 들어 이를 설명해오고 있다. 10년 전에는 많은 남자들이 여성들이 겪는 고용상의 차별을 열등한 훈련 수준에 입각해 설명했었다. 최근 교육의 확대에 따라 더 이상 이러한 주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 역할이라는 새로운 방어벽이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61%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승진을 못하는 주된 이유로 가사 부담을 꼽았다...10살 이하의 아이들이 있는 가족에서 일, 가사, 육아를 나누는 방식으로 어떤 것이 가장 좋겠느냐는 질 문에 대해 절대 다수(80%)의 독일남자들은 여자가 집에 머무르고 남자가 직장을 갖는 방안 을 지지한다...남자들의 눈에는 이것이 여성들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객관적 인 사실로 보일 뿐이다...여성에 대한 쟁점을 아이들에 대한 쟁점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여 성 평등론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요새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 소수지만 계속 증가하고 있는 남성 집단, 즉 남자 주부나 독신 아버지의 존 재가 이런 견고한 진지마저 허물고 있는 것은 역사의 작은 아이러니들 중의 하나이다. 저자들은 남성들이 갖게 된 새로운 여성 이미지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다음과 같이 빈정대 며 요약한다. 즐거운 나의 집은 옛말이 되었다. 남자들은 여성의 의사결정권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한 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독립적인 여성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독립 적인 여성은 자신의 일을(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의 일까지)책임지고 알아서 처리하며, 그리 하여 남자들의 짐을 얼마간이라도 덜어주어야 한다...남자들은 심지어 이런 종류의 여성 해 방으로부터도 꽤 많은 긍정적 측면을 발견할 능력을 갖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 해방을 골치 아파하는 것은 오직 여자의 ‘독립’이 남자들에게 위협이 될 때,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그리고 남성의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뿐이다. 역할을 바꿔 남자 주부이자 새로운 아버지가 된 소수의 남자들에 대한 최초의 조사를 보 면 이러한 그림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결정은 엄격하게 제한된 의미에서만 자발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계속 직장 생활을 하길 바라는 여자 파트 너의 바람이나 요구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었다. 몇몇 경우에는 아기를 가질 때까지만이라 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가사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낡은 남성적 이데올로기 를 들여다보면 막상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상 당히 시사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남자 주부들은 누구나, 아무래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단조로운 일상사 속에서 고립감과 함께 뭔가 충족되지 않은 느낌을 강하게 갖게 된 다". 남자 주부들은 주부증후군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무리 닦고 쓸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 는 가사일, 인정의 부재, 자신감의 상실. 그들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최악의 것은 청소죠. 그건 정말 끔찍해요. 매일 해봐야 진짜로 알 수 있을 텐데. 이를테 면 당신이 금요일날 무엇을 닦아 놓아도 다음 주 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 똑같은 먼지가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러니 지겹지 않겠어요. 최소한 맛이 가게 하는 일임엔 틀림없죠...이건 거의 바다 한복판에 서 걸레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이런 경험이 쌓이게 되면 사람을 소외시키는 직장 일’과 가사 노동을 일부러 맞바꾸었던 남자들조차 견해를 바꾸어 집 밖에서의 일이 자기존중감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받는 데 필수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리하여 하다못해 시간제 직장이라도 찾으려 고 한다. 이런 종류의 역할 바꾸기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집안 일을 맡아서 하는 남자들은 칭찬 받는 반면 같이 사는 여자들은 ‘나쁜 어머니’라고 비판받는 사 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요컨대 양측이 서로의 역할에 익숙해지는 이상적인 관계의 외관 뒤에서는 온갖 모순이 쌓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에서 보냐에 따라 진보와 퇴보가 갈라질 수 있다. 최 소한 여성들에게는 그렇다. 현재의 젊은 여성들은 분명히 어머니들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만끽하고 있다. 더 많은 권리, 더 많은 교육 기회, 사생활이나 고용 면에서 더 많은 선택지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좀더 꼼꼼히 현실의 사회적 변화들을 살펴보면 이 러한 새로운 자유의 공간들이 사회의 보장을 받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취업 시장의 발전 경향, 그리고 정치나 경영 동의 중요한 직위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려는 남성들의 고집 스런 태도를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접한 의견 차이는 사소한 충돌에 불과하고 진짜 투쟁 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게 된다. 출발점과 앞으로의 전망 모두가 대단히 양면적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여성들의 조건은 지난 세대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더 좋은 일 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교육받은 남 편들은 이미 직장에서 훨씬 앞서 나가고 있으며, 여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생 가사 노동’ 을 선고받는다. 재정적인 독립과 취업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은 애정 어린 부부 관계와 모성 에 대한 요구와 충돌한다. 이것은 직업을 포기하고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무 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여자들에게 특별히 잘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여성이 개인 으로 되어가는 복잡한 과정 전체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과 '다른 사람을 위한 존 재’간의 불편한 동요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해방의 정신은 다시 가두 어지지 않는다. 교육을 통해 여자들의 인식 능력을 배양시켜주면서도 가족이나 직업, 정치 에서 나타나는 현재의 봉건적 상태를 유지하려는 남자들의 진부한 주장들을 여자들이 여전 히 꿰뚫어 보지 못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엄청나게 근시안적이고 순진한 발상이다. 지난 10년간 남성 쪽에서도 얼마간의 움직임이 있어 왔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낡은 상투어는 이제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남자들도 이제 온갖 감정을 표현하고 약한 면을 인정할 수 있기를 원한다. 섹스에 대해서도 새로운 태도를 개발하고 있다. “섹스는 이 제 고립된 충동이 아니라 남성 인격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나타난다. 배우자에게 사려 깊 게 행동하는 것은 남성들에게도 중요하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전히 여자들과는 다른 조건에 처해 있다. 그들에게 평등이란 말은 여 자들에게서와는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여성에게 이 말은 더 많은 교육, 더 좋은 취 업 기회, 더 적은 가사 노동을 의미하지만 남자들에게는 정반대의 것을 의미한다. 더 가혹 한 경쟁, 실직 그리고 더 많은 가사 노동.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전히 꿩도 먹고 알 도 먹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특히 자신의 경우에는)남녀 평등이 낡은 형태 의 분업과 양립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가 위협으로 변할 때면 언제나 자연의 이치에 호소하는 오래된 노선을 따라 생물학적 근거를 동원해 심각한 불평등을 정당 화함으로써 자신의 말과 행동간의 모순을 은폐하려한다. 남성들은 먼저 출산 능력을 가진 여자들이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며, 둘째 따라서 가사와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직업 생 활을 삼가거나 하위직에 머물러야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제 막 표면화하고 있는 반목과 논쟁은 대단히 민감한 영역에서 남자들에게 영향을 미치 고 있다. 남녀 양성의 역할에 관한 남성들의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따르면 남자의 '성공’은 경제적, 직업적 성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직 안정된 수입만이 '집안을 제대로 먹여 살 리는’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라는 남성적 이상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의 미에서 보면 일반적 규범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조차 장기적으 로는 경제적 유능함에 달려 있게 된다. 따라서 남자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업무에 따 른 스트레스를 내면화해야 하며, 이러한 기대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또는 쓰러질 지 경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일해야한다. ‘남성의 노동능력’의 이러한 구조가 한편으로는 노동력을 통제하는 고용주의 보상과 처벌 전략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누라와 두 명의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 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하기가 더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남성 노동력에 대한 과 중한 착취는 여성이 표상하는 ‘행복한 가정’을 전제한다. 직업의 에토스가 가하는 압력 때문 에 남성들은 정서적으로 대단히 의존적으로 된다. 노동분업 때문에 남성들은 본질적인 면과 정서적인 능력을 배우자에게 위임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동시에 남녀 관계와 관련해 모든 일을 조화롭게 처리하려는 강박증세가 증가하게 된다. 남자들은 갈등의 조짐들을 무시해버 릴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배우자가 정서적 지원을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철회하게 될 때 이들은 매우 취약하게 된다. 가정 생활이 행복하지 않고 긴장되고 험악하다면 남성들은 이중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배우자의 이해 거부가 극 에 달하면 이해 부족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명제들 남녀를 갈라놓는 여러 가지 쟁점과 갈등은 이처럼 양성을 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몇몇 사회 구조가 이처럼 사적인 것 속에서 와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은밀한 지표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양성간의 관계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아래의 세 가지 명제로 묘 사되는 것과 같은 이론적 측면을 갖고 있다. (1)성별 역할이 미리 규정되는 것은 쉽게 버릴 수 있는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 산업 사회 의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다. 남녀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았다면 전통적인 핵가족은 전혀 존 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핵가족이 없었다면 전형적인 생활 양식과 노동 양식을 갖춘 부르주 아 사회도 없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적 산업 사회의 이미지는 인간 노동의 불완전한 상품화, 더 정확하게는 분열된 상품화에 기반하고 있다. 완전한 산업화, 완전한 상품화는 전통적인 형태와 역할을 가진 가족과 상호 배타적이다. 한편으로 임금 노동자는 가사 노동자를 전제 하며, 시장을 위한 생산은 핵가족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산업 사회는 남녀의 불 평등한 역할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불평등들은 현대성의 여러 원리와 모순되며, 현대화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남녀가 실제로 평등해질수록 가족의 토대(결혼, 부 모되기, 섹슈얼리티)는 더욱 불안해진다. 달리 말해 2차세계대전 이후의 현대화 단계동안 산업 사회는 크게 진보했지만 이와 동시에 해체되기 시작했다. 보편주의를 내세운 시장 경 제는 그 자신의 출입금지 구역을 인식하지 못했고, 여성들에게서 오히려 산업 사회의 요구 에 따라 가정과(임금을 벌어와 여성과 가정을 부양하는)남편을 돌보는 것이 '숙명적 임무’라 는 생각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노동과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커플들의 일대기를 서로에게 적응시키고 허드렛일을 나눠 하기가 남녀간에는 더욱 어려워졌고,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보 호책에 내재하는 여러 간극이 분명하게 드러나 버렸다. 오늘날 사방에서 나타나고 있는 남 녀간의 갈등은 실제로는 산업 사회 내에 존재하는 여러 모순적 경향들의 개인판이며, 이처 럼‘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산업 사회의 봉건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토대를 흔들어 놓고 있다. (2)사회 계급의 구성원으로부터 개인을 만들어내는 변화의 통학은 가족의 문턱에서도 멈 춰 서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스스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려(아주 기이하게 느껴지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힘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체현하고 있다) 완고한 성 별 역할이나 봉건적 속성, 이미 규정되어 있는 방식을 벗어던지고 있거나, 아니면 자기 존 재의 아주 깊은 곳까지 흔들리고 있다. 이들은 ‘나는 나 그리고. 나는 여자다’라는 신념을, 또 ‘나는 나’이고 또. 나는 남자다’는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나’와 여자로서의 나에게 기대 되는 것, 그리고 ‘나’와 남자로서의 나에게 기대되는 것은 별개의 세계이다. 여기서 개인화 과정은 아주 모순적인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남자와 여자들은 전통적인 역할 규범에서 풀려나 ‘나 자신의 인생’을 찾으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회적 결속 상태가 빈 약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어떤 아주 가까운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도록 내몰리게 된다. 나의 내적인 감정들을 누군가와 공유하고픈 욕구는 다른 사람과 한 마음과 한 몸이 된다는 결혼의 이상 속에서 그대로 표현되지만 인간의 일차적인 욕구는 아니다. 이 욕구는 우리가 더욱 개인화될수록, 그리고 그에 따른 이익이 커짐과 동시에 손실도 커짐을 깨달아갈수록 더욱 크게 자라난다. 그 결과 결혼과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길이 대개는 조만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말게 되는 것이다. (3)20세기에 특징적인 갈등 양상은 남녀의 모든 동거 형태(부부 가족 혹은 독신 가족, 결 혼 전, 결혼 중, 결혼 후)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언제나 완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가족은 오직 사건의 무대일 뿐 원인은 아니다. 배경막을 바꾼다 해도 연 극은 그대로이다. 남녀가 연인, 부모 부부, 임금 노동자, 개인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 로 맺고 있는 밀접하고도 복잡한 관계는 약화되기 시작하고 있다. 또 다른 선택지(가령 다 른 지방에서 직장 갖기, 다른 방식으로 허드렛일 분배하기, 가족 계획 수정하기, 다른 사람 과 성관계 갖기 등)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결혼한(그리고 결혼하지 않은)남녀간에 싸 움이 시작된다. 이런 문제들에 관한 결정은 우리에게 양성이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남자와 여자에게 어떻게 다르게 다가가는지를 깨닫게 한다. 예를 들어 누가 아이를 돌볼 지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의 직업 경력이 우선적인지를 결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누가 누구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될지 를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런 결정들은 개인적인 면과 공적인 면을 모두 갖고 있다. 공적 지원(탁아, 유연한 노동 시간, 적절한 사회보장제도)이 없다면 사적 전투들은 악화될 것이 며, 거꾸로 충분한 외부 지원은 가정에서의 긴장을 완화시켜 줄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을 찾기 위한 공적, 사적 전략은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제 우리의 세 가지 기본 명제-산업 사회의 ‘봉건적’성격, 남녀 관계에서 나타나는 개인 주의적 경향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혼란스런 축복임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 -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적당한 자리에 온 것 같다. 산업 사회: 봉건제의 현대적 형태 성 역할의 독특한 특징은 계급 구분과 비교해 보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급 간의 전쟁이 근로 대중 사이에 널리 퍼진 빈곤과 고통 때문에 일어났고 공적 투쟁을 통해 해결되었던 데 반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갈등들은 대부분 사적 관계 속에서 분출하며 부 엌, 침실, 놀이방에서의 싸움으로 해결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징후는 온갖 감정들에 대해 끊임없이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또는 아무 말 없이 거부하거나, 또는 고독 속으 로 달아났다가 다시 일상적인 수다로 돌아오거나, 또는 갑자기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게 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밀어닥치고, 이혼할까 말까 하는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골치 썩 고, 아이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면서, 상대로부터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빼앗으려 싸우면서 도 여전히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또 그러려고 애쓰는 것, 일상 잡사들의 틈바구니로부 터 가해지는 압력(실은 이러한 압력은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에 날카롭게 신경 쓰는 것 동 의 온갖 일로 가득 차 있다. '남녀 양성간의 진지전’이든 아니면 ‘나 자신으로의 후퇴’이든, ‘나르시시즘의 시대’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사회 구조-산업 사회가 가진 봉건적 중핵 -는 바로 이런 식으로 사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산업 체계에 의해 발생한 계급투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적 현상으로, 이는 산업이 작 동하는 방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남녀 양성간의 전쟁은 현대적 계급 갈등의 양상에도 들어 맞지 않고, 그렇다고 과거의 유물도 아니다. 그것은 제3의 변종이다. 임금 노동이 가사 노동 을 전제하고 또 생산 부문과 가족 부문이 19세기에 그 영역이 나뉘어짐으로써 비로소 존재 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양성간의 전쟁은 노동과 자본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우리 산업 세계의 산물이자 토대이다. 남자와 여자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지위가 부여 되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지위는 기이한 잡종이다. 즉 남자와 여자라는 것 자체가 현대의 산업 사회 속에 세워진 현대적 위계, 다시 말해 남자는 위, 여자는 아래라는 위계를 가진 일종의 ‘현대적 신분’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적인 사고와 구식의 행동 유형이 서로 상반되는 인력을 갖고 있음을 고려해 볼 때 투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되는 지 위 역할들은 현대화 과정의 초기에서의 계급 문제와 같은 방식으로 충돌하지는 않지만 현 재, 즉 현대화 과정의 후기에 들어와 사회 계급이 대부분의 의미를 잃고 새로운 발상이 가 족, 결혼, 부모되기 그리고 사적 영역 전체를 파고들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초기의 계급 문 제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기반을 잡기 시작한 산업화는 핵가족(이것은 이제 다시 전통적 모습을 잃어가 고 있다)의 형성을 조장했다. 집밖과 집안에서의 노동은 모순적인 방향에 따라 조직되었다. 집안에서는 무보수 노동이 당연시되던 반면 집 밖에서는 시장의 힘이 적용되었다. 가족과 결혼은 공동의 이익을 함축하고 있었던 반면 다른 관계들은 파트너들끼리의 계약을 함축하 고 있었다. 또 취업 시장이 장려하는 개인적 경쟁과 이동성은 가정의 정반대되는 기대,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고 가족이라고 불리는 공동 프로젝트에 투자할 것 을 요구하는 가정의 기대와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시대, 즉 현대성과 반현 대성, 시장의 효율성과 가족의 지원이라는 정반대 방향과 가치 체계에 근거해 조직된 서로 다른 두 개의 시대가 서로 보충하고, 조건을 규정하고 모순을 일으키며 서로 결합하고 있는 셈이다. 가정과 일터의 분리에 의해 야기된 남성과 여성의 일상적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 라서 시장 가치에 근거한-보수, 직장, 승진 등에서의 차이-한 가지 불평등만 있는 것이 아 니다. 이것과 결합된 또 다른 종류의 불평등들이 있다. 생산은 노동 시장을 통해 규제되고 관련된 노동은 화폐와 교환되어 수행된다. 그런 노동을 수행하려면 사람들은-고용주에 얼마 나 의존하는가에 관계없이-스스로를 자가공급재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만 새 로운 일자리, 새로운 임무, 새로운 관점이 제공된다. 반면 무보수 가족 노동은 결혼을 통해 당연한 의무로 부과되고, 본질상 의존을 함축하게 된다.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안다-은 ‘주어진’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고, 수입원과의 연결고리인 배 우자에게 계속 의존하게 된다. 이런 일자리를 어떻게 분배할지는 토론거리도 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산업 사회의 봉건적 중핵이 있는 것이다. 한사람의 운명, 즉 평생 가사 노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노동 시장에 적응해 돈벌이를 할 것이냐는 원칙적으로는 산업 사회에서조 차도 요람에서부터 결정된다. 이런 봉건적 '성별 운명’을 완화, 무효화, 악화 또는 은폐하는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인 것이다. 사랑은 눈이 멀었다. 사랑은 사랑자체 가 야기하는 온갖 고민들의 유일한 탈출구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통상 사랑 뒤에 현실적 불평등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곤 한다. 그러나 불평등은 실재하고, 바로 그것이 사 랑을 진부하고 쌀쌀맞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이론과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친밀성에 의한 테러’의 위협처럼 보이는 것 은 현대의 이념들이 단지 인구의 절반, 즉 '집밖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 될 때 일어나는 모순의 결과일 뿐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리는 한 성별에게는 보 류되고 다른 성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산업 사회가 오롯이 산업적이었던 때는 결코 없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반은 산업적이고 반은 봉건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봉건적 측면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일과 가정 생활을 분리하는 전 제 조건인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복지 국가가 성립되었을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한편으로 취업 시장의 요구에 따라 삶을 꾸려나간다는 생각이 여자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이것 자체는 그다 지 새로운 움직임이 아니라 오히려 산업 사회의 지배적 원리가 성별을 넘어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남녀 분할이 일어났다. 노동력이 확대 되어 여자들까지 포함하게 됨으로써 가족의 이상, 남녀 성별의 운명, 부모됨과 섹스에 관한 온갖 금기들이 끝장나기 시작했으며, 부분적이었지만 심지어 가정과 직장이 재통합되기도 했다. 쪼기 서열(닭 둥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개체들끼리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위계 순으로 쪼고 쪼이는 서열-역자)로 알려진 우리 산업 사회의 사회 구조는 수많은 상이한 요소들에 기반하고 있다. 서로 상충하는 규칙을 가진 가정과 직장간의 분업,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태어날 때부터 규정해버리는 역할들, 그리고 사랑이 만들어낸 두터운(혹은 짧은)층과 배우 자와 부모로서 서로를 아끼고 돌보겠다는 맹세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균형을 잃은 엄청난 구조물. 되돌아보면 이러한 구조가 상당한 대립 속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화는 너무 자주 한쪽 측면만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양면적인 것인데도 말이다. 19세기의 산업 혁명과 함께 현대의 봉건적 성별 패턴이 도입되었고, 현대적 조치들은 반동 적 진보를 동반했다. 밖에서의 생산적 노동과 가정에서의 가사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또 정당화되었으며, 결국 영원한 진리로 이상화되었다. 남성 철학자들, 성직 자들, 과학자들의 동맹은 이러한 사회 현상들에 남자의 ‘본질’과 여자의 ‘본질’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어 버렸다. 다시 말해 현대화는 농업 사회를 정말로 없애 버린 것이 아니다. 현대화는 새로운 시대에 고유한 봉건적 규칙들을 창조하였고, 그것이 지금 다음 단계에 와서 효력을 상설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현대화 과정은 19세기와는 정반대의 효력을 미쳐 왔다. 19 세기에는 현대화가 임금 노동과 가사 노동을 날카롭게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반면 오늘 날의 현대화는 이 양자를 다시 묶으려는 투쟁을 불러오고 있다. 여자들을 의존적인 상태로 묶어두었던 온갖 제한들은 취업 유인책으로 대체되어 왔으며, 남성/여성 역할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은 남녀 양성 모두가 성별에 따른 무조건적 요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대 체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가 향해 나가고 있는 방향을 가리킬 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회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생활 유형과 취업 기회로 쪼개져 있는 한 우리의 시장 경제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남녀 모두 경제적으로 독립 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목표는 남녀 유별이라는 전통적 핵가족 이 여전히 고용 조건과 사회 입법, 도시 계획, 교과 과정 동의 지침으로 남아 있는 한 이루 어질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가정에서 실망과 죄의식을 번갈아 가며 치루고 있는 '세기의 전투’가 맹렬히 계속 되고 있는 것은 남녀 양성이 모두 집 밖에서는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도 사생활에서는 이러한 관념을 내던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단지 하나의 불 의를 또다른 불의와 맞바꾸고 있을 뿐이다. 가정과 가사 노동으로부터 여자들을 자유롭게 하려면 남자들은 ‘이 현대적인 봉건적 존재’에 적용해야 하고, 바로 여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떠맡아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귀족을 농부의 농노로 바꾸 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남자들도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엌으로 돌아오라!”는 요구에 복종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여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하나의 측면일 뿐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남녀 양성간의 평등은 양성간의 불평등을 전제하는 제도들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을 고용 제도, 도시 계획 그리고 소위 사회 보장이 요구하는 낡은 틀에 우겨 넣기는 거의 무망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에서 유래하는 긴장 때문에 부부가 ‘역할 바꾸기’ 혹은 ‘허드렛일 분담’등 전혀 본질과는 무관한 해결책을 놓고 격렬하게 싸운다고 해서 놀랄 일은 전혀 없는 것이다. 성별 역할로부터의 해방? 하지만 앞에서 요약해 본 관점은 기묘하게도 경험적 자료와 대비된다. 이러한 자료들은 사실 남녀의 성별에 따른 위계의 갱신이라는 정반대의 경향을 아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다. 따라서 도대체 무슨 의미로 자유에 대해 말한단 말인가? 이 말은 남자와 여자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가? 어떤 조건에서 실현 가능하며, 또 무엇이 그것을 방해하는 가? 앞서 언급한 자료들이 증명해주듯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을 얼마간이나마 전통적인 임무로부터 해방시키는 중요한 변화들이 있어 왔다. 서로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우 리는 다섯 개의 주요한 노선을 식별해 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제 기대 수명이 더 늘어났기 때문에 여성들의 일대기가 전파는 다른 모양을 갖게 되었다. 임호프의 사회사 연구가 뚜렷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인구학적 여성 해 방’을 가져왔다. 통계적으로 볼 때 19세기까지 여성들의 수명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숫자 의 살아남은 아이들을 낳고 키울 만큼밖에 되지 않았던 반면 오늘날 ‘모성적 의무’는 약 45 세면 끝난다. ‘아이들 곁에 있어주기’는 일시적인 단계가 되었고, 전통적으로 여성 삶의 초 점으로 간주되어 온 이러한 시기를 지난 후 평균 30년의 ‘빈 둥지’기간이 뒤따르게 되었다. “오늘날 독일에서만······약 500만 명의 '전성기’여자들이 부모 역할을 끝낸 뒤에...자주...실 질적으로 의미 있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둘째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적 발전이 가사노동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오늘 날 가사 노동에 따르는 사회적 소외는 이 노동 자체에 고유한 특정이 아니라 전통적인 생활 양식에 대한 태도가 변화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개인화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핵가족은 가족의 독립성을 강조해 가족을 하나의 섬으로 만들며 주변의 가족들, 관계들, 이웃들 그리 고 소수의 지인들과만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그 결과 주부는 무엇보다 고립된 노동자가 되 었다. 다른 한편 자동화가 수많은 임무들을 인계받았다. 다양한 가전 제품, 기계 그리고 소비재 들은 주부의 짐을 덜어주지만 동시에 주부가 하는 일의 의미를 빼앗아가고 있다. 이제 그녀 의 일은 기성품, 유료 서비스 그리고 기술적으로 개량된 기계 장치들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도 않고 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뒷마무리질’이 되어 버렸다. 요컨대 고립과 자동화 는 가사 노동의 '탈숙련화’를 가져오고, 그 결과 많은 여자들이 성취감을 찾아 집밖의 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셋째로 모성은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 역할과의 가장 강력한 연결 고리지만 여성들을 전통 적 의무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어 피임법과 합법적 낙태 허용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높 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제 아이들과 모성(그리고 이에 따른 모든 결과)은 더 이상 ‘자연적 운명’이 아니다. 최 소한 원칙상으로는 아이들은 원해서 낳는 것이고, 따라서 모성도 계획되는 것이다. 물론 많 은 자료들은 아직도 남편이나 파트너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어머니 역할을 다하거 나 또는 자녀 부양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이 많은 여성들에게 한갓 꿈에 불과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은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적어도 아이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 는지, 원한다면 언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낳을지를 함께 결정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부 부의 성생활은 더 이상 필연적으로 출산과 연결되지는 않으며, 자신감을 갖고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되고 발전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탐구가 종종 남성적 규범과 충돌하 는 경우도 적지 않다. 넷째 이혼율의 증가는 결혼을 통한 부양이란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에렌라이히의 표현에 따르면 여자들은 종종 단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남편을' 택 한다. 독신 어머니의 거의 70%가 한 달에 1,200마르크로 만족해야 한다. 여성 연금수령자 들과 함께 이들이 빈민구제기관을 가장 자주 이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도 해방된 것 이다. 즉 남편에 의한 일생 동안의 부양으로부터 단절되었다. 통계를 보면 여성들이 노동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역사적인 교훈을 배웠고 이로부터 자기 나름의 결론을 내렸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교육 기회의 평등화 역시 젊은 여성들이 취업 시장에 진입하려는 동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이 모든 요인들, 즉 인구학적 해방, 보상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 피임, 이혼 법률들, 직업 훈련과 취업 기회들이 합쳐져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현대의 봉건적 역할에서 느끼는 온갖 제 약을 걷어치우려고 하는 것이다. 분명 이런 움직임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나감으로써, 즉 유연하고 자격을 갖추고 이동성을 갖추고 그리고 직업 의식을 갖추려고 함으로써 가족에게는 두 배 혹은 세 배의 타격이 가해지고 있다. 더구나 여자들을 전통적인 위치로 되돌려 보내려는 힘들도 작동하고 있다. 만약 우리의 시장 경제가 정말 제대로 운영되고 또 모든 남자와 여자가 각자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면 이미 지독하게 높은 실업률은 지금보다 몇 배나 더 증가할 것이다. 대량 실업과 대 량 실직이 존재하는 한, 여성들이 결혼에 대한 직접적 의존에서 풀려나더라도 집 밖에서의 일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그녀들은 남편의 부양이 철회된 뒤 에도 경제적 보호 조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배우자가 제공하는 부양으로부터 ‘자 유로운’ 상태와 직장을 가질 ‘자유가 있는’상태 간의 어중간한 위치에 다시 어머니라는 역할 이 끼어든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낳고 돌보며 책임지고 자식들을 자기 인생의 불가피한 부 분으로 보는 한, 아이들은 취업 경쟁에서 환영받는 ‘장애물’로 그리고 격심한 생존 경쟁을 피하기 위한 매력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왔다갔다하면서 이처럼 모순적인 선택지 사이에서 뭔가 결정하려고 한 다. 이들의 난처한 처지는 행동 방식에 반영된다. 이들은 직업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이처럼 모순적인 결정을 내림으로써 인생의 각기 다른 국면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순적인 조건과 기대를 어떻게든 조화시켜 보려 하는 것이다. 여성들을 둘러싼 환경이 이 러한 혼란을 한층 더 조장하고 있다. 여성들은 왜 직업을 갖는 문제를 경시했는지를 캐묻는 이혼 법정의 질문을 그저 참고 넘겨야 한다. 사회복지기관들은 왜 아직도 어머니로서의 의 무를 다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또 자기 야심 때문에 안 그래도 어려운 남편의 직장 생활 을 망쳐놓았다고 비난받는다. 이혼 법률과 이러한 법조문 뒤에 숨겨져 있는 현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노동 시장의 폐쇄성, 가족 내의 온갖 잡사가 가져다주는 큰 부담-젊은 여성 들에게 개인화는 바로 이러한 의미로 비추어질 것이다. 남자들이 처한 상황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여자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돌보는’낡은 역할 을 포기하고 경제적 생존을 위해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찾을 것이 요구되지만 남자들의 경우 독립적인 소득자 역할이 낡은 패턴과 조화된다. 남성들의 고정관념에 따르면 ‘직장인’, 재정적 자기충족 그리고 남자다운 행동은 모두 하나로 합쳐진다. 남자들은 배우자(부인들) 의 부양을 받아본 적이 없고 생계를 위해 일할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에 따르는 배후에서의 지원은 전통적으로 아내가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부성의 기쁨과 의무 는 언제나 여흥의 하나로서 조금씩 복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부성은 직업을 갖는 것에 대 한 장애물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일자리를 갖는 것이야말로 부성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달리 말해서 여자들을 전통적 역할로부터 몰아낸 모든 요인들이 남자들 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들의 삶의 맥락에서 부성과 직업 경력 그리고 경제적 독립과 가족 생 활은 일반적인 사회 환경과 대립하는 모순이 아니다. 사실 남성의 역할은 그것들과 양립 가 능하도록 미리 처방되어 있다. 또한 이것은 개인화가 남자들로 하여금(취업 시장에서 밥벌 이를 한다는 의미에서)전통적인 남자다움의 방향을 따라 행동하도록 조장한다는 것을 의미 하기도 한다. 따라서 혹시 남자들이 성별 역할에 따른 이러저러한 명령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유 들 때문이다. 사실 가장역할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모순적이다. 시간도, 그럴 필요도 없고 또 자기가 즐길 것도 아닌 무언가를 위해 정력과 시간을 희생하면서, 승진을 위해 싸우며, 동일시할 수 없지만 동일시해야 하는 직업적, 조직적 목표를 위해 녹초가 되도록 일하면서, 전혀 친절하지 않은 ‘무관심’에 대처해가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압력을 가하기 전까지는, 그것도 이중적 의미에서 압력을 가하기 전까지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내재적 동력은 찾을 수 없다. 여자들이 노동에 합류한다면 우선 남자들은 가 족의 유일한 부양자라는 멍에에서 풀려 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자들로 하여금 아내와 가족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압력을 줄여주고,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장 모 두에서 새로운 종류의 관계를 맺게 해 줄 것이다. 다른 한편 남자들의 삶 중에 여자들에 의 해 지배되는 측면이 새로운 경향을 띠고, 또 일상사와 정서적인 면에서 얼마나 의존적인지 를 어렴풋이라도 깨닫게 되면 아마 가정의 분위기도 바뀔 것이다. 이 두 측면 모두가 남성 들로 하여금 남성적 역할을 덜 고집하게 만들고, 새로운 종류의 행동을 시험해 보도록 자극 할 것이다. 말다툼을 더 많이 할수록 부부가 가진 서로 다른 위치가 명백해진다. 두 가지 주요한 '촉 매들'이 있으니, 아이들과 경제적 보장이 그것이다. 이를 둘러싼 갈등은 결혼 생활이 지속되 는 동안에는 숨겨진 채 있을 수도 있으나 일단 이혼하기로 결정하면 분명하게 표면화된다. 한 사람의 소득자에서 두 사람의 소득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책임과 기회가 개 편되기 때문이다. 대략 여자는 이혼 후에 수입없이 아이들만 떠맡고 남자는 수입은 있고 아 이는 없는 상태가 된다. 언뜻 보기에는 2인 소득자 모델이 이혼 후의 1인 소득자 모델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다. 여자는 수입과(대부분의 이혼 판결에 따르면) 아이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보수 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든 아니면 법원이 생활비 지급이나 퇴직 보험의 공유를 명령하기 때문이건 양쪽의 남녀가 경제적으로 평등할수록 아버지들은 자연적으로 또 법적으로 자기들 이 불리한 처지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아이는 생물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여성에게 속한 자궁의 산물이며, 아이를 소유하는 쪽은 여성이다. 물론 누가 난자 의 주인이며 누가 정자의 주인인지는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말이다. 아 이 아버지는 언제나 여자의 호의와 재량에 달려있다. 특히 낙태와 관련된 모든 문제와 관련 해 이것이야말로 진실, 또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진실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들이 점점 더 엇나가게 됨에 따라 일종의 진자 운동이 생겨난다. 남자들은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자주 보기 위해 직장에서의 출세를 위한 이러저러한 계획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곳은 텅빈 둥지일 뿐이다. (특히 미국에서)법원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을 뺏긴 후 자기 아 이들을 유괴하는 아버지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신 호라고 할 수 있다. 개인화는 남자와 여자들이 헤어지도록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나 그것은 또한 역설적으로 양쪽을 서로의 품안으로 다시 밀어 넣고 있기도 하다. 전통이 희미해져 감에 따라 가까운 관계가 갖는 매력은 증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추구한 다. 신이 먼저 가 버렸거나, 혹은 우리가 신을 대체해 버렸다. 한때 '믿음'이라는 단어는 '경 험하였음'을 의미했으나 이제는 '우리의 더 나은 판단에 기댄다면'이라는 다소 초라한 어조 를 띠게 되었다. 신이 사라져 감에 따라 사제에게 갈 기회도 사라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선별해 줄 수 있는 의지처를 잃 어버리게 되었다. 최소한 스스로가 만들어 낸 비참함을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던 분류 체계 는 통계와 기록의 안개 속으로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다. 소식을 주고받고 기억을 함께 하며 융성했던 이웃관계들 역시 이제는 일자리들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차차 소멸해가고 있 다. 새로운 지인들을 만들 수는 있으나 자기 주변만을 뱅뱅도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클럽 에 가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접촉 범위는 더 넓어지고 더 다채로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 접촉하는 사람들이 많고 피상적인 데 머무르기 때문에 만약 뭔가 다른 것이 조금만 더 요구되어도 갑작스레 서로에 대한 관심이 끝나 버릴 수도 있다. 심지어 정사조차도, 이렇게 덧없이 마치 악수에 불과하듯 한번의 교환으로 끝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태를 계속 앞으로 몰고가거나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주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관계들은 결코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 안정적인 일차적 결속을 대체할 수는 없다. 여러 연구가 보여주었듯이 다양한 접촉과 지속적인 친밀성은 둘 다 모두 필요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많은 주부들도 종종 불안감과 고립감에 시달리 며, 자조 집단을 구성한 이혼남들은 수많은 사회적 접촉을 갖고 있더라도 혼자라는 고독감 은 참기 어렵다고 말한다. 현대의 온갖 발전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는 우리가 사랑을 이상화하는 방식 속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들의 사랑법 속에는 사랑에 대한 찬미가 있다. 이러한 찬미는 우리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잃어 버렸다고 느끼는 것들을 상쇄해 주는 일종의 균형추이다. 신이나 사제나 계급 또는 이웃도 아니라면 최소한 그래도 <너> 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러한 '너’의 크기는 만약 너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을 압도해 오게 되었을 공허감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이는 결국 가족과 결혼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물질적 안정과 애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온갖 위기와 의혹에도 불구하고 아마 결혼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직면하게 될 것, 즉 고독의 위협이야말로 결혼의 가장 믿을만한 토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에 관한 수많은 논쟁들이 있다. 부르주아 핵가족은 신성시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저주받아 왔다. 사람들은 오직 위기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아니면 거꾸로 온갖 실망만 안겨준 대안의 잔해를 모아 만 들어진 완벽한 가족이라는 환상으로 도망쳐 왔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모두 잘못된 전제 에 기반하고 있다. 가족은 무조건 좋은 것 또는 이와 반대로 무조건 나쁜 것이란 딱지를 붙 이려는 사람들은 가족이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유서 깊은 온갖 차이들이 표면으로 노출되 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가족 안에서 그리고 가족 밖에서 남녀 양성은 이제까지 계속 누적되어온 모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은 무슨 의미일까? 개인화 과정의 동학이 가족 생활에 속속들이 스며 들면서 모든 형태의 함께 살기가 근본적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한때는 한 개인의 일대기를 가족과 결합시키고 있던 온갖 연결고리들이 이제는 헐거워지고 있다. 한 남자의 일대기와 한 여자의 일대기를 부모라는 이름으로 함께 엮어 주었던 평생 동안의 핵가족은 이제는 예 외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일대기의 매 단계마다 다양한 가족적 환경과 비가족적 환경들 을 오고가는 것이 규칙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일대기 뒤에 자리잡고 있는 가족적 뿌리는 우리가 점점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움직여 나감에 따라 서서히 잘려나가 영향력을 상실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여러 개의 가족적 단계와 비가족적 단계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점점 더 그/그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통계적 혹은 일시적 관 점에서 벗어나 좀더 장기적으로 일대기들을 살펴보면 가족 생활이 어떻게 개인화되며, 어떻 게 전통적 우선 순위들을 역전시켜 왔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가족적 결속들을 털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혼율, 재혼율 그리고 결혼 전과 결혼 중 그 리고 결혼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형태의 함께 살기에 대한 자료를 통해 일대기를 개관 해 보면 가장 잘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연구 결과들은 서로 모순적이고, 결혼 생활에 대한 찬반 여부에서도 모순이 나타난다. 가족이냐 아니면 무가족이냐라는 양자택일 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수가 제3의 가능성을 ‘결심하고’있다. 현재 상황에 적절해 보이는 것들을 계속 시험해 보며 다양한 형태들을 뒤섞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함께 사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들을 시험해 보고 있는 중 이며, 그에 따르는 고통과 노력들을 견뎌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험의 끝이 어떨지 포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온갖 '실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시도해 보는 것을 단념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