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거위는 밖에 있다 저자명: 마 드얀 사가르, 스와미 크리쉬나 프라부, 스와미 아난드 샤르보 역자명: 김현국 출판사명: 황금꽃 출판년도: 1998 출판사 전화: 02-544-4202 묵자책의 페이지: 314 @ff "...나는 그대가 갖기 않은 것을 빼앗아 가야 하며, 그대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어야 한다. 그대는 나에게 전혀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에게 어떤 새로운 것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대가 기억하도록 돕는 것뿐이다." 오쇼 @ff 차례 머리말 거위는 밖에 있다 그저 그것을 보라 정상도 없고, 골짜기도 없다 초월이 불성을 가져온다 완벽한 불완전함 나는 평범함을 찬양한다 오직 하나의 시간, 지금 신비의 차원 놓아 버림을 즐겨라 나는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 것이다 오쇼에 대하여 문의안내 @ff 머리말 내가 키스도 못 해 보았던 어린 시절, 나는 미국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와 사랑에 빠 져 있었다. 그것은 야구였다. 날이 어두워서 경기가 중단되었을 때, 점수는 8:8 이었 다. 그리고 나는 불현듯 집에 가면 큰일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서둘러 집에 도착했을 때, 저녁식사는 벌서 끝나 있었다. 나의 누나 마지(Marg ie)가 현관을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아빠가 지금 당장 방으로 올라오래." 내가 누가 를 지나쳐 가려 할 때, 그녀는 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의 거위가 구워져 버렸 어."(1) 나의 순결한 귀가 그런 표현을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누나들이란 심술궂은 선사들이다. 여러 해가 흐르고, 보스턴 레드삭스팀의 유격수가 된다는 나의 꿈도 오래 전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난 뒤, 나는 또 다른 선사 오쇼(Osho)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뜻은 약간 다르지만 누나와 비슷한 말을 했다. "너의 거위는 밖에 있다!" 알다시피, 새끼 때 병 속에 넣어진 거위에 대한 아름다운 선화가 있다. 거위는 병 속에서 자랐고, 마침내 꺼내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다. 지난 수백년 동안 선승들을 미 치게 만들었던 그 공안은 바로, "어떻게 거위를 죽이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거위를 꺼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선승이 아니라면, 당신은 쉽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그 따위 바보같은 거위를 병에서 꺼낸답니까?" 아니면, "이봐요. 병이야 깨뜨려 버리 고, 그놈의 거위나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부활절 요리로 먹읍시다." 자, 당신이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알겠다. 하지만 이 공안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 했다는 것만은 인정하라. 당신도 알겠지만, 거위는 당신의 의식, 자유로운 영혼, 궁극의 실재를 상징한다. 그 리고 병은 당신의 마음을 상징한다. 달리 말하면, 이 공안이 말하는 것은 당신의 의식 이 마음이라는 심리 구조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며, 당신이 순수한 의식의 궁극적인 자유, 순수한 명상, 순수한 해방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거위를 저녁 식탁에 올려 놓 은 것보다는 나은 대답을 찾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명한 선사 남전이 어떻게 이 질문을 논하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이야 기는 이렇다. 한 번은 육긍이 남전에게 병 속의 거위라는 오래된 문제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청 했다. 육긍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병 속에 거위 새를 넣고, 다 자랄 때까지 먹이를 주어 키웠습니다. 어떻게 거위를 죽이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그 거위를 꺼낼 수 있습니까 ?" 남전이 크게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육긍!" "예, 스승님!"육긍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 오쇼가 이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처음 들은 순간, 나는 얻었다 - 즉각적인 선이었 다. 나의 누나가 틀렸던 것이다! 거위는 구워진 것이 아니라, 밖에 있었다! 이 커다란 영적 깨달음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병 밖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쇼이고, 마지의 동생인 나, 크리쉬나 프렘(Krishna Prem) 은 여자들만 보면 다시 병 속으로 들어오고 만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 이 걸렸다. 오쇼는 밖에 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언짢 게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의 스승과 사랑에 빠져 있다. 그리고 내가 오쇼를 볼 때, 그리고 그의 자유를 볼 때, 나는 나 또한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낀다. 그 리고 가끔씩, 그 일별을 맛보기도 한다. 내가 최근에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나의 누나 마지와 함께 차를 몰고 우리가 자랐던 옛 집에 가 보았다. 우리는 이제 모두 '큰 아이들'이 되었고 아버지는 이미 오 래 전에 육체를 떠나신 뒤였다. 그 옛날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나는 마지를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만약 에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내가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인도에 가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마지는 웃으며 말했다. "너의 거위가 구워졌겠지!" 이번에는 나도 올바른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거위가 밖에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도 암으로 그녀의 육체를 떠났다. 나에게 남긴 그녀의 마지 막 말은 큰누나의 역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진실한 것이었다. "성장해라." 우습게도, 오쇼가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네가 깨닫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너의 책임이다." 이것은 누나들과 선사들이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다 행히도... 나는 당신이 이 작은 책을 사랑하게 되어,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당신 자신의 거위 를 점검해 보는데 이 책을 하나의 길잡이로 삼기를 바란다. 당신의 거위는 나왔는가? 당신은 마침내 자유로워졌는가? 사랑을 담아 스와미 크시슈나 프렘(Swami Krishna Prem) (1) You goose is cooked. 속어로 '큰일났다'는 의미로 쓰임. @ff 거위는 밖에 있다. 사랑하는 오쇼, 거위가 정말 밖에 있습니까? 아난드 브하보(Anad Bhavo), 거위는 결코 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거위는 언제나 밖 에 있었다. 이것은 선의 공안(1)이다. 먼저 그대는 선의 의미와 공안의 의미를 이해해 야 한다. 선은 종교도, 교리도, 강령도 아니다. 선은 심지어 탐구도 연구도 아니다. 선은 비 철학적이다. 선적인 접근법의 근본은 모든 것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며, 빠 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은 완벽하다. 목적지는 다른 어디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있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만이 유 일한 실체이다. 따라서 선에는 수단과 목적지, 방법과 목적지 사이의 구별이 없다.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들은 이중성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그들이 끊임없이 비이중 성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들은 사람 안에 분열된 개성(personality)을 창조해 낸다. 그것은 일에게 닥친 가장 큼 재앙이었다. 모든 이른바 '착한 사람들'은 정신분열적인 인간을 창조해 냈다. 그대가 현실을 수단과 목적으로 분리시킬 때, 그대는 인간 자체 를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인간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현실이기 때 문이다. 그의 의식은 분열된다. 그는 여기에서 살지만 사실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언제나 저기, 다른 어딘가에 있다. 그는 언제나 찾고 있으며, 언제나 묻고 있다. 결코 살지 않고, 결코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무언가를 하려 하고 있다. 더 부자 가 되고, 더 권력을 얻고, 더 영적이 되고, 더 성스럽고, 거룩해지려 한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향한 이러한 끊임없는 갈망은 긴장과 불안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그는 존재가 가져다 주는 모든 것을 놓치게 된다. 그는 저 멀리의 것에 관심이 있고, 신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이 눈은 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신은 바로 그의 안에 있다. 따라서 선에 관해 이해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은, 거위는 결코 병 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공안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들려 주었다. 매우 철학적인 성격의 관리인 육긍(2)이 한 번은 이상한 스승, 남전(3)에게 병 속에 거위라는 오래된 공안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청했다. 육긍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병 속에 거위 새끼를 넣고 다 자랄 때까지 먹이를 주 어 키웠습니다. 어떻게 거위를 죽이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그 거위를 꺼낼 수 있습 니까?" 남전이 크게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육긍!" "예, 스승님!" 육긍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 그것은 단지 보는 것의 문제이다. 그것은 단지 깨어있음, 잠에서 깨어남의 문제이 다. 그대가 꿈 속에 있다면 거위는 병 안에 있다. 그대가 깨어있다면 거위는 결코 병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리고 꿈 속에서는 거위를 병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거위가 죽든지, 아니면 병이 깨져야 한다. 양쪽 모두를 선택할 수는 없다. 병을 깨뜨리든지, 거위를 죽여야 한다. 자, 작은 병 속에 들어 있는 다 자란 거위... 어떻 게 그 거위를 꺼낼 것인가? 이것이 공안이다. 공안은 일반적인 수수께끼가 아니다. 왜냐하면 공안은 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 수께끼란 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대는 단지 맞는 답을 찾아 내기만 하 면 된다. 그대는 답을 찾아 낼 수 있다.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 내기 위해서는 단지 지 혜가 필요할 뿐, 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공안은 풀리지 않는다. 그대는 공안을 해결 (solve)할 수 없다. 단지 용해(dissolve)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공안을 용해시 키는 방법은 그대의 존재 상태를 꿈꾸는 상태에서 깨어있음의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다. 꿈 속에서 거위는 병안에 있다. 그리고 병을 깨뜨리거나 거위를 죽이지 않고, 그 거위를 병안에서 꺼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꿈 속에서라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불 가능하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출구가 있다. 잊지 말라. 그 출구는 수수께끼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그대는 깨어나야 한다. 병과도 아무 관련이 없으며 거위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그대는 깨어 나야 한다. 그것은 단지 그대와 관련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남전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이유이다. 육긍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병 속에 거위 새끼를 넣고, 다 자랄 때까지 먹이를 주 어 키웠습니다. 어떻게 거위를 죽이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그 거위를 꺼낼 수 있습 니까?" 남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크게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육긍!" 자, 이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질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엉뚱하고 모순 적이다. 그것은 그것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실, 그것은 문제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남전이 "육긍!"이라고 소리친 순간, 육긍은 깜짝 놀라 "예, 스승님!" 하고 대답했다. 이 단순한 전략으로 육긍의 존재 상태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스승은 선생이 아니다. 스승은 그대를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그대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할 뿐이다. 그 손뼉은 하나의 방법이다. 손뼉은 단순히 육긍을 현재로 데 려왔다. 게다가 그것은 너무나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처럼 영적인 공안을 물을 때, 그대는 스승이 대답 대신 크게 손뼉을 치며 "육긍!"하고 지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갑자기 그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되돌아온다. 한 순간 그는 모든 문제를 잊는다. 병 이 어디 있고, 거위가 어디 있는가? 손뼉을 치며 소리를 치는 이상한 스승만이 있을 뿐이다. 갑자기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그는 언제 문제에서 빠져 나왔는지도 모르게 문제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마치 뱀이 낡은 껍질에서 빠져 나오듯이 그는 문제로부터 빠져 나온 것이다. 일순간 시간이 멈췄다. 스승과 손뼉 소리, 그리고 갑작스런 깨어 남. 바로 그 순간, 스승은 말한다. "보라!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 문제는 사라진 것이다. 공안은 사라질 수 있을 뿐, 결코 풀릴 수 없다.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을 뿐, 사라 질 수 없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공안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생각과 논리적인 추론에 익숙한 사람들이 선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선은 공부되어질수 없다. 선 은 몸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흡수되어야 한다. 살아 있는 스승으로부터 흡수되어야 한 다. 그것은 말을 넘어선 전이이다. 등잔의 불꽃이 전이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 는 등잔이다. 이제, 이 상황... 육긍이 질문을 하고, 스승은 손뼉치고 소리를 지르는 이 모든 상 황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안에서 그다지 영적인 점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 다. 매우 실망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언가가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결코 보 여질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것은 오직 스승의 침묵이 제자의 침묵 속으로 스며들 때, 두 침묵이 만나 하나로 녹아들 때에만 일어난다. 바로 그때 봄(seeing)이 일어난다. 스승도 눈을 가지고 있고 제자도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자의 눈은 감겨 있다. 원가 방법이 필요하다. 제 자가 스스로의 노력 없이 저절로 눈을 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자가 스스로 노력하 려 한다면, 그는 요점을 놓치고 말 것이다. 누가 그 노력을 할 것인가? 선 추종자의 한 사람으로, 영국 불교 협회의 설립자이며, 서구 세계에 선 불교를 널 리 알렸던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Christmas Humphreys)는 이 공안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그대는 그 차이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말하자면 문제를 측면에서 바라보는 방법이 있다. 논리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는 이런 이야기는 단지 넌센스로 비춰질 것이고, 그들은 더 이상 읽으려 하지 않을 것 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읽어 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넌센스를 기대하게 된다. 왜냐하 면 상식, 즉 논리적인 마음이라는 좁은 집은 곧 뒤에 남겨지고, 마음은 그 본연의 기 쁨이라는 무한의 언덕 위에서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상반되는 문 제들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이렇게 말해 보자. 병 안에 들어 있는 살아 있는 거위 한 마리를 가정해 보자. 어 떻게 거위를 다치게 하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그 거위를 꺼낼 수 있겠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저기, 거위가 있다!'" 자, 요점이 완전히 빗나갔다. 그것은 철학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우선,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는 선이 불교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첫 발부터 잘못 디딘 것이다. 선은 불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수피즘(4)이 이슬람 교와 아무 관련이 없고, 하시디즘(5)이 유대교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탄트라(6)가 힌 두교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탄트라는 틀림없이 쉬바(7)와 관계가 있고, 수피즘은 마호멧(8)과 그리고 하시디즘은 모세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전통, 관습, 신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살아 있는 모세, 살아 있는 마호멧은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전달할 수 있다. 말 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아무런 설명도, 논리적 증명도 필요 없이, 여러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를 자신의 주위에 만들어 낼 수 있 다. 깨달음은 거의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대는 사랑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 다. 사랑은 이성 밑에 있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듯이, 마찬가지로 그대는 깨달음에 빠 진다. 깨달음은 이성 위에 있다. 그대는 말을 초월해 버린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제자의 집에 머물고 있었던 스승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제자는 좀 걱정스러웠다. 왜냐하면 스승은 너무나 기이하고 예기치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 가족은 그를 지하실에 머물도록 하고 문을 잠가 버렸다. 그는 한밤중에 춤을 추고, 노래하고, 소리를 지르고, 아무도 없는 데서 설교를 하는 등, 이웃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지하에 있으 면 그가 언제 정신이 나가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가 족은 모든 창문과 문을 닫은 뒤, 잠가 버렸다. 한밤중에 그들은 갑자기 깨어났다. 누군가 지붕 위에서 정신없이 웃으며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어찌된 일이냐고 서로 묻 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 구르고 있는 스승을 발견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올라오셨습니까?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지하실에 가두었던 것인데!" 스승은 말했다. "그래서 웃은 거라네. 갑자기 위로 떨어져 버렸지 뭔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라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거든. 위로 떨어지다니!"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사랑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듯이, 깨달음은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뭔가 비슷한 점이 있다. 바로 떨어짐이라는 것이다. 논리에 맞지 않 는, 설명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떨어짐이다. 그 일이 일어난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에게 일어났다 해도, 그대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 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다.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는 선을 '선 불교'라고 부른다. 그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 다. 선은 불교가 아니다. 분명 선은 붓다의 가슴 속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핵심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근본적인 핵심이기도 하고, 짜라투스트라(9)의 핵심이기 도 하며, 노자(10)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달은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핵심이 며, 꿈에서 깨어난 사람들의 핵심이다. 거위는 밖에 있다는, 거위는 결코 병 속에 들 어 간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 처음부터 문제 자체가 없었음을 깨달은 따라 서 어떤 해답도 필요치 않음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핵심이다.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는 말한다. "말하자면 문제를 측면에서 바라보는 방법이 있 다. 논리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는 단지 넌센스로 비춰질 것이다... " 그는 스스로가 논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않다면 그것은 넌센스가 아 니다. 넌센스(nonsense)란 의미(sense) 밑에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선은 의미를 초월한 것이다. 넌센스가 아니다. 의미(sense) 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닿을 수 없는 저 멀리의 것이다. 논리란 지극히 평범한 게임에 불과하다. 약간의 지성이라 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게임을 할 수 있다. 그대가 논리를 넘어서는 순 간, 그대는 선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선은 넌센스가 아니다. 선은 의미를 초월한 것이다. 그가 '넌센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체가 그의 뿌리깊은 논리 지향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그들은 더 이상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읽어 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넌센스들을 기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식, 즉 논리적인 마음 이라는 좁은 집은 곧 뒤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뒤에 남겨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뒤에 남겨 둔다는 것은 아직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의 이정표를 남겨 놓았을지 모르지만 그 길 은 똑같다. 하나도 다르지 않다. 아마도 그대는 한참을 걸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가 가고 있는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차이점은 단지 양의 차이일 뿐, 질적인 변화 는 없다. 논리는 그저 뒤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다. 논리는 초월된다. 넘어가게 된다. 거기에 는 차이가 있다.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있어났던 일이다. 미얀마의 한 밀림지대에 소형 비행기가 남겨지게 되었다. 군인들은 황급히 후퇴하고 있었고, 어떤 기계적인 문제 때문에 그들은 그 비행기를 가져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 여 그 지역의 원주민들이 비행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이 일종의 소달구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 에 없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소달구지가 가장 발달된 운송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서 그들은 그 비행기를 소달구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무척 즐 겼다. 그것은 그들이 보았던 가장 훌륭한 소달구지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그 원시 부족의 사람이긴 하지만 조금 더 멀리까지 나가 본 사람이었다. 그는 자동차나 트럭, 버스 등을 본 적이 있었 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소달구지가 아니라 자동차입니다. 자동차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알거든요." 그리하여 그는 그 비행기를 수리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 다. 말도, 소도 없이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멋진 장남감이었 다!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그들은 몇 번씩이나 그것을 이리저리 들여다 보고, 들어가 앉아 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단지 몇 미터 움 직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비행기 조종사가 그 원시림을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고 말했다. "뭣들 하고 있는 겁니까? 이건 비행기예요. 하늘을 날 수 있다구요!" 그는 원주민 두명을 비행기에 태웠다. 비행기가 하늘로 떠올랐을 때,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모든 꿈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직 신만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들은 하늘을 나는 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하늘 을 날아가는 비행기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것이 하늘의 신들이 라고 믿고 있었다. 자, 똑같은 기계가 소달구지로 이용될 수도 있고, 자동차로 이용될 수도 있다. 그러 나 소달구지와 자동차의 차이는 단지 양적인 차이일 뿐, 질적인 차이는 아니다. 비행 기가 지상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변해 버린다. 그것은 소달구지나 자동차를 완전히 넘어서 버린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 버린 것 이다. 따라서 논리는 뒤에 남겨지지 않는다. 논리는 단순히 초월되어질 뿐이다. 따라서 크 리스마스 험프리이스가 공안을 넌센스 또는 불합리라고 부르거나, 논리가 뒤에 남겨졌 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가 아직도 논리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는 말한다. "...그리고 마음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제 이 말은 완전히 어리석은 말이다. 마음은 자유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때, 거기 마음은 없다. 선은 무심(no-mind)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마음의 자유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커다란 차 이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음은 자유롭지 않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자유롭다. 자 유롭던, 자유롭지 않든,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마음은 단지 멈춰 버렸을 뿐이다. 그대는 언제나 들어갈 수 있었지만 한 번도 그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새로운 문으로 들어선 것이다. 존재의 문, 영원의 문으로... 선... '선(Zen)'이라는 바로 그 말은 산스크리스트어인 드야나(dhyana)(11)에서 온 것이다. 드야나 명상을 뜻한다. 그러나 '명상(meditation)'이라는 말은 또 다시 마음 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음이 명상하고, 마음이 집중하며, 마음이 사색 한다. 마음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드야나란 단순히 마음없음(no-mind), 집중하지 않 음, 사색하지 않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 명상하지 않음의 상태, 단지 침 묵의 상태, 모든 생각들이 사라져 버린, 깊고 심오한 침묵을 의미한다. 의식의 호수에 아무런 물결도 일지 않을 때, 마치 거울처럼 별과 나무, 새들과 사람들, 존재하는 모 든 것들을 단지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을 때, 어떠한 왜곡도, 어떠한 해석도, 어떠한 편견도 없을 때를 의미한다. 그와 같은 왜곡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그대의 편견, 그대의 관념, 그대의 교리, 그대의 습관.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느 말한다. "...마음은 그 본연의 기쁨이라는 무한의 언덕 위 에서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짜 넌센스이다! 먼저 "마음은 자유로워질 것이다."라는 말... 마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자유와 마음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마음은 구속이 다. 마음은 감옥이다. 마음 속에 살 때, 그대는 갑옷에 싸인 듯한 삶을 살아간다. 온 갖 종류의 생각들, 이론들, 체계들, 철학들에 둘러 싸인 채... 인류의 모든 과거, 온 갖 미신들 -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 자이나교(12),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등 - 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대의 마음은 성경이나 코란(13), 기타(14), 혹은 자본 론(15), 공산당 선언(16)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대는 아마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대 의 감옥을 꾸며 놓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건축가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옥은 감옥이다. 그 건축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7) 일수도 있고, 칼 마르크스일 수도 있으 며, 알버트 아인쉬타인일 수도 있다. 그대는 선택할 수 있다. 감옥은 여러 형태와 크 기로 만들어질 수 있다. 실내 장식은 그대의 몫이다. 그대는 그 안에 아름다운 그림들 을 걸어 줄 수 있다. 바닥 전체에 카페트를 깔 수도 있다. 그대의 기호에 맞게 벽을 칠할 수도 있다. 여기 저기 조금씩 변형시킬 수도 있다. 창문을 왼쪽에 낼 수도 있고, 오른쪽에 낼 수도 있다. 커튼의 천도 고를 수 있다. 그러나 감옥은 감옥일 뿐이다. 마음은 그 자체가 감옥이다. 모든 사람들은 감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대가 감 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그대는 결코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 의 감옥은 매우 아늑하고, 편안하고, 편리할 수도 있다. 금과 다이아몬드로 매우 아름 답게 장식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을 떠나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그 감옥을 꾸 미는데 너무 많은 애를 썼기 때문에 그 곳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감옥은 감옥이다. 금으로 만들어졌든 진흙으로 만들어졌든, 그것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대 는 결코 자유의 무한함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결코 자유의 아름다움과 광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의 광휘는 여전히 갇혀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대는 신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거위는 언제나 밖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 이다. 그대는 온갖 종류의 꿈들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 꿈들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꿈은 꿈일 뿐이다. 머지않아 모든 꿈들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러나 마음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하나의 꿈이 부서지고 나면, 마음은 즉시 또 다 른 꿈을 창조해 낸다. 사실, 마음은 언제나 또 다른 꿈을 준비해두고 있다. 옛 꿈이 미처 부서지기도 전에 마음은 그대에게 새로운 꿈을 제공한다. 더 나은 꿈... 더 우아 하고, 세련되고, 더 과학적이고, 더 기술적인 꿈을 제공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대 는 빠져 든다. 또 다시 욕망이 일어난다. "이제 이것을 시도해 보자. 이제껏 다른 꿈 들은 이루어지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꿈이 불가능하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어 떤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희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희망이 그대로 하여금 끊임없이 꿈들을 쫓도록 만든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올 때, 그 대는 자신의 전 생애가 꿈이 만들어진 것과 똑같은 재료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바보가 떠들어대는 이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그러나 아무 의미도 없는...(18)."그러나 이것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방식이다.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는 말한다. "...그리고 마음은 그 본연의 기쁨이라는 무한의 언덕 위에서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단 한 방울의 선 체험조차 갖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서양에 선의 철학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결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은 "그 본연의 기쁨이라는 무한의 언덕 위에" 도달할 수 없다. 마음에게는 본연 의 기쁨이 없다. 마음은 온갖 불행의 원인, 유일한 원인일 뿐이다. 마음 외에 또 다른 불행의 원인은 없다. 따라서 마음은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기쁨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마음이 살아가고 있는 고통스런 상황에 반대되 는 상상에 불과하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게 기쁨의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한다면, 마음의 정의는 온통 부정 적인 것들일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기쁨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고 통이 없는 상태, 죽음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부정적인 정의일 뿐이 다. 마음은 지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마음은 단지 고통없음에 대해 이 야기할 뿐이다. 고통없음이라는 목적지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난 다고 해서 그래가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혹 그렇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은가? 그대에게 아무런 병이 없다는 것이 그대가 좋은 건 강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질이 다른 이야기이다. 어떤 사 람이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을 수는 있다. 의사가 진단상으로는 아무 잘못된 것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넘쳐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건강이 아니다. 질병의 부재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건강의 현존은 아니다. 질병의 부재는 건강의 현 존과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그대는 고통스런 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가 지복에 차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는 그저 행복하지도 괴롭지도 않은, 천국과 지옥의 변방에 머물고 있을 분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보다도 더 나쁜 상황이다.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사 람은 최소한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쓰기 때문이다. 고통스럽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단 지 그 경계선, 그 변장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는 고통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복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뒤에서 밀어 대는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그가 도약을 시도할 만큼 그를 다그치고 있지 않 다. 그는 정체된 채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고통은 부정적인 상태이다. 지복은 긍정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마음은 오직 고통만 을 알 뿐이다. 마음은 결코 "그 본연의 기쁨이라는 무한의 언덕"을 알 수 없다. 왜냐 하면 마음 안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단지, 그대가 사회적 의무를 효과 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사회의 창조물일 뿐이다. 마음은 그대를 조종 하고, 그대를 노예로 만들려는, 그대를 가능한 한 비지성적으로 만들려는 기성 사회의 전략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성적인 사람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를 뒤져 보아도, 지성을 찬양하는 이야기는 단 한 구절도 없다. 온갖 쓰레 기들이 가득하지만 지성을 찬양하는 대목은 단 한 구절도 없다. 미신은 찬양받는다. 믿음은 찬양받는다. 온갖 종류의 어리석은 것들은 찬양받는다. 모든 종교들, 조직화된 종교들은 인간을 로보트로, 기계로 만들려 애써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붓다나 예수와 같은 사람들이 그처럼 적은 이유이 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 학교, 정부, 교회, 국가는 모두가 어린아이를 파괴하 려는 싶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어린아이는 매우 연약하다. 섬세하고 무력하다. 그대는 어린아이를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파괴하기 위한 기본 전략은 마음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아이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 마음을 줌으로써 아이가 자기 안의 깊은 곳에 있는 기쁨의 자질을 잊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에서 가져 온 순수함을 잊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잊어버리고 단지 사회의 톱니 바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는 좋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아이는 좋은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아이는 좋은 역장이 되어야 한다. 좋은 교수가 되어야 한다. 이런저런 것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성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복에 차 있어서는 안 된다. 사회는 지복에 차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지복은 삶 전체의 희생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지복을 희생 할 수는 없다. 일단 지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는 지복을 위해 살고 지복을 위 해 죽는다. 따라서 지복의 사람은 사회의 구속력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사회는 오직 고통에 찬 사람들만을 지배할 수 있다. 교회는 오직 고통에 찬 사람들만을 착취할 수 있다. 또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는 말한다. "그때가 바로 상반되는 문제들의 진정한 해결 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상반되는 문제"는 없다. 상반되는 것들은 상반되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보 완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하나의 현상이 다.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이 상반되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것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서로를 돕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도 없고, 어떠한 해결책도 필요치 않다. 그리고 선은 상반되는 것들의 해결책이 아니다. 선은 초월이다. 더 높은 시야이다. 모든 이중성이 어리석어 보이는 높은 하늘 위를 날고 있는 새의 시야이다. 달 위를 걸었던 최초의 사람에게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일은 갑자기 자신이 미국인 이라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지구 전체가 하나였다. 국경은 없었다. 지구 위에는 지도 가 없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대륙, 아시아 대륙, 이 나라, 저 나라... 모두가 사라졌다. 그가 모든 반대 진영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기 때 문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소련도 미국도 없었다. 전 지구가 단지 하나였다. 그리고 그 미국인이 내뱉은 첫마디는 "나의 사랑하는 지구여!"였다. 이것이 초월이 다. 한 순간 그는 모든 조건화들을 잊었던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지구여!" 이제 온 지구가 그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침묵의 상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전 존재가 그대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상반되는 것들은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춤추며, 서로의 속으로 사라진 다. 그것은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된다.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는 말한다. "이렇게 말해 보도록 하자. 병 안에 들어 있는 살 아 있는 거위 한 마리를 가정해 보자." 이것은 철학의 방식이다. 선의 방식이 아니다. "가정해 보자." - 그것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알든지 모르든지이다. 남전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정해 보라. 이제 내가 크게 손뼉을 친다. 그리고 '육긍!' 하고 외친다. 그대는 '예, 스승님!' 하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 나는 말할 것이다.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 이렇게 한다면 모든 요점은 사라져 버린다. 며칠 전 저녁 다르샨(19)에서 나는 니루파(20)를 불렀다. 그녀는 한 손에 골절상에 입은 상태였다. 그녀는 나의 곁에서 춤을 추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춤을 출 수가 없 었다. 그녀가 단지 앞줄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녀를 불렀다. 잠시 그녀는 주저했다. 모두가 웃었다. 왜냐하면 한 손으로 무얼한단 말인가? 그러나 선은 한 손만으로도 가 능한다. 한 손으로 치는 손뼉 소리! 그리고 그녀는 멋지게 해 냈다. 물론 나만이 그 소리를, 한 손으로 내는 손뼉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대가 두 손으로 손뼉을 칠 때 조차도 그 에너지는 하나이다. 그대의 왼손과 오른손은 둘이 아니다. 양 손은 그대 안 에 연결되어 있다. 양 손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모두가 하 나의 존재에 속해 있다. 모든 상반되는 것들은 하나의 존재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 다. 그대가 가정한다면 그대가 가정한다면 그대는 그 아름다운 공안의 모든 맛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병 안에 들어 있는 살아 있는 거위 한 마리를 가정해 보자. 어떻게 거위를 다치게 하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그 거위를 꺼낼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는 "거위를 죽이지 않고" 라고조차 말하지 못한다. 참으로 예의바른 영국 인이다! "거위를 다치게 하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사실 "병을 깨뜨리지 않고"라 고 말하면서도 그의 가슴은 무너졌을 것이다. "해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간단하지 않다. 애초에 그것은 해답이 아니다. "저기, 거위가 나왔다!" 그는 공안의 모든 아름다움을 망가뜨렸다. 그러나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 는다. 그것은 단지 생각의 방식이다. 마음의 방식이다. 교황이 한 신자에게 T.I.F 라는 머릿글자가 새려진 실크 슬리퍼를 선물 받았다. 그 의미를 궁금히 여긴 교황 성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발가락부터 넣으시 오(toes in first)." 아난드 브하보, 그대는 묻는다. 사랑하는 오쇼, 거위가 정말 밖에 있습니까? 거위는 언제나 밖에 있었다. 거위는 결코 병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것은 단지 꿈 속에서의 질문일 뿐이다. 깨어나라! 사랑하는 오쇼, 저는 서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철학에 어떤 사랑 혹은 지혜가 담 겨 있습니까? 저는 아직도 그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난드 볼프강(Anand Wolfgang), 그대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는 그대가 이제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결코 그것을 찾지 못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독일인들은 그것을 거의 찾아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캄캄한 밤에 어두운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 를 찾는 장님과도 같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그것을 찾아 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을 탄생시켰다. 칸트(21), 헤겔(22), 피히테(23), 마르크스 그리고 포 이에르바흐(24) 등등... 볼프강, 그대가 이렇게 묻는 것은 좋다. 저는 서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철학에 어떤 사랑 또는 지혜가 있습니 까? 사랑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철학은 논리를 의미하며 논리는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는 과학의 근본이지, 삶의 근본은 아니다. 논리는 죽어있는 사물 이나 물건을 다루는데 적합한 것이다. 논리의 밑바탕은 분석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무 엇인가를 분석하는 그 순간, 그대는 그것을 죽인다. 따라서 그대가 만약 논리를 통해 삶을 찾으려 한다면, 그대는 결코 삶을 찾을 수가 없다. 방법 자체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대는 장미꽃을 꺾을 수 있다. 그대는 그것을 분석할 수 있다. 그대는 질서정연하 게 라벨을 붙인 병들 속에 모든 성분을 분리해서 넣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 져 있을 것이다. 바람과 비와 태양 속에서의 아름다움, 생명, 기쁨, 바람에 흔들려 추 는 춤이 업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장미는 다만 약간의 화학적 물질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화학적 물질들은 장미꽃이 아니다. 그러한 화학적 물질들은 장미가 꽃을 피게 하는 상황일 뿐이다. 그것들은 장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 다. 그것들은 단지 장미가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할 뿐이다. 그 화학적 물질들이 없어지면 장미는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춤추는 사람을 분석하는 것과 같다. 그대가 그 속에서 춤과 같은 무언 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뼈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불결한 것들을 찾 아 낼 것이다. 그러나 춤은 찾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가수의 목을 자른다 해도 거기 에서 노래를 찾아 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노래는 목으로부터 나온다고 믿 어 왔다. 목은 단지 매개물일 뿐이다. 노래는 그 너머로부터 온다. 목은 좋은 전단 수 단도 될 수 있고 나쁜 전달 수단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전달 수단일 뿐이다. 매 개물을 분석한다고 해서 저 너머의 세계로부터 실려오는 그것을 찾을 수는 없다. 사랑과 논리는 결코 만나지 않는다. 만날 수 없다. 논리는 외부의 여행을 의미하고, 사랑은 내면의 여행을 의미한다. 논리는 분석을 의미하고 사랑은 유기적인 단일체를 의미한다. 논리는 다수, 다양함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사실, 과학자들은 이제 더 이상 우주를 유니버스(universe) (25)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우주를 멀티버스(multiverse)라고 불러야 한다. '유니버스'는 사랑의 사 람들이 만들어 낸 시적인 이름이다. 유니버스란 '하나(uni)'를 의미한다. 과학에 따르 면 우주는 하나가 아니다. 우주는 많다. 우주는 멀티버스이다. 사랑의 사람들만이 통 합을 안다. 사색가들은 통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전체의 통합 안에서 사람은 사랑과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지혜는 사랑의 그림자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지혜가 있다. 사랑이 살아 있는 때 춤이 있 고, 노래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지혜의 본질이다. 만일 논리가 그 대에게 지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 다. 즉 지식과 지혜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는 그대에게 지 혜를 줄 수 있다. 그때 지식은 지혜와 동등하고, 동의어여야 한다. 그러나 지식은 지 혜와 동의어가 아니다. 지식은 모두 빌려 온 것이고, 쓰레기일뿐이다. 그것은 다른 사 람들로부터 모은 것이다. 지혜는 그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지혜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지혜는 그대의 내부에서 폭발하여 외부 세계로 버져 나간다. 그것은 마치 빛이 퍼지는 것과 같다. 그대는 지혜를 나눈다. 그러나 축적할 수 없다. 지식은 구걸되어지는 것이고, 지혜는 함께 나눈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 이다. 볼프강, 철학은 그대에게 사랑이나 지혜를 줄 수 없다. 그러나 철학은 계속해서 희 망을 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철학을 통해 해결이 가능한 질문이라면, 그 질문은 어리 석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라. 만약 그대가 철학을 통하여 어떠한 답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한 가지를 증명할 뿐이다. 그대의 질문이 어리석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질문이 정말로 의미 있는 것이라면 철학은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대는 다른 방 향으로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방향을 나는 선이라고 부른다. 그 방향을 나는 깨 어있음이라 부른다. 이론화하거나 철학화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적이 되는 것. 더 지 식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을 버리고, 그것을 버림으로써 그대가 비어 있게, 완전히 비어 있게 되는 것. 그 비어있음 속에 명료함, 깨끗함, 순수함, 순결함, 어린 아이와 같은 경이로움과 경외심이 있다. 그리고 그 대가 바로 그대 안의 사랑과 지혜 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것들은 함께 자란다. 지식과 논리는 함께 성장한 다. 지혜와 사랑은 함께 성장한다. 소르본느 대학의 한 유명한 동물학 교수는 학기말이면 언제나 구술시험을 치르는 습 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똑같은 질문을 했다. "벌레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 해 보라." 물론 학생들은 한 학기 내내 빈둥거렸다. 그리고 시험보기 직전에 열심히 벌레에 대 해 공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결국 교수는 학생들이 모두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시험을 볼 때가 되었 고, 학생들은 벌레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첫 번째 학생이 시험을 보러 왔을 때, 교 수는 물었다. "코끼리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해 보라." 순간 학생은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벌레와 같은 꼬리를 가지고 있으며, 벌레는 다음과 같이 분류됩니다..." 지식은 언제나 우둔하다. 만약 그대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좋다. 그러나 그대가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질문이 주어진다면 그대는 곤란해 진다. 그대는 단지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기계적인 것이다. 어떻 게 기계적인 것이 그대가 현명해지도록 도울 수 있겠는가? 지식은 범주화에 불과하다. 옛날에 잘생긴 젊은 사자가 있었다. 그 사자는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붙잡혀 와서, 미국으로 옮겨져 동물원에 전시되게 되었다. 그것은 사자를 매우 불행하게 했다. 왜냐 하면 사자는 정글에서 다른 동물들과 자유롭게 놀던 시절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러한 얼마 후 사자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사자는 자신 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차피 창살 뒤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최고의 동물 원 사자가 되자고 생각한 것이다. 옆 우리에는 또 다른 사자가 있었다. 늙고 게으른, 책임감도 없고, 야망이나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사자였다. 그는 하루 종일 태양 아래 누워 있을 뿐, 관람객들에게 아무 런 흥미거리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사자는 우리 안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는 갈기머리를 흔들고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리며 진정한 동물 의 왕처럼 행동했다. 관람객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들은 이제 옆 우리에서 잠만 자는 나태한 늙은 사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젊은 사자는 자신이 주목을 받는 것이 좋았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매일 오후 사육사들은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러 우리로 왔다. 관람객들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게으른 늙은 사자에게는 큰 그릇에 붉은 말고기를 주어졌 다. 그러나 인기를 끌고 있는 젊은 사자에게는 썩은 오렌지와 바나나와 호두만이 주어 졌다. 이것은 그를 불쾌하게 했다. 사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내가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모양이다. 좀 더 해 보자." 그는 으르렁거리고 이를 갈 뿐 아니라, 울부짖고 창살을 흔들기까지 했다. 관람객들은 늘어만 갔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그의 행동을 보러 왔고 그는 지역 신문 의 한 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사는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게으른 사자는 붉은 고깃덩어리를 먹었고 젊 은 사자는 채식을 해야 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육사를 불러 세웠다. "이제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그는 불평했다. "옆 우리의 게으른 사자 에게는 큰 고깃덩어리를 주면서 나에게는 오렌지와 바나나와 호두를 주다니... 이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동물원에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나를 보러 옵니다. 내가 그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 모든 일을 하고, 그 모든 결과를 이끌어 내는 바로 그 사자입니다. 왜 내가 저녁으로 고기 를 먹을 자격이 없소?" 사육사가 대답했다. "젊은 친구, 자네는 자네가 얼마나 행운인지를 모르는군. 이 동 물원의 조직표에는 사자가 한 마리만 있으면 되네. 자네는 원숭이로 길러지고 있는 거 라네." 철학자들은 사물을 범주화한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어 떻게 범주화할 것인가, 어떻게 모든 것을 나누어 각각의 범주에 넣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쪽이고 저것은 저쪽이고... 그들은 계속 이렇게 나누어 나간다. 그 들은 삶의 유기적 통일성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나무와 산과 별과 동물들과 새들과 남자와 여자 속에 흐르는 삶의 궁극적인 원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통합적인 요 소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 통합적인 요소가 바로 여러 종교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 붓 다가 니르바나(26)라고 부르는 것, 예수가 신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볼프강, 그대는 철학에서 어떤 지혜도, 어떤 사랑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그대는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대답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갖가지 앵무새와 같은 정보들, 사실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지껄이는데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은 단지 컴퓨터가 되는데 불과하다. 그 정도라면 그대보다 컴퓨터가 더 잘 수 행할 수 있다. 그대 안에서 컴퓨터가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 내면의 존 재, 그대의 자유를 향한 올바른 방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의 노력의 전부 이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는 사랑할 수 없다. "사 랑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이 컴퓨터하는 것을 안다. 그것은 모든 사랑의 몸짓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갑자기 전기가 나간다면... "그르륵, 그르 륵, 그르륵..." 또는 건전지가 다 된다면, 먼저 그대는 건전지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컴퓨터는 다시 말할 것이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간을 더 로봇처럼 만들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시도하고 있다. 며칠 전에 나는 신문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먼테인 메이팅(Mundane Mating), 토론토, 2월 25일. "미래의 남자와 여자는 성적 파트너 로봇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기술의 발달 은 흥분제, 최음제 그리고 화학적 오르가즘을 통해 그들 마음 속의 욕망들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 이 모임에서 성의학자들은 남녀간의 성관계는 계속되겠지만 정해진 기간동안에만 이 루어질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이 아이는 낳지 않고, 임신이라는 심오하고 근본적인 경험만을 원하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한 성의학자는 로봇과의 성관계가 꿈같은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고, 성적인 발 전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런 일은 일어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성관계를 해 왔다. 그리고 마흐트마(27)라고 불리는 사 람들 - 간디, 교황 그리고 테레사 수녀 - 그들은 모두 말한다. "만약 당신들이 성관계 를 가져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번식이다." 그 때, 그것은 죄가 아 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순수한 기쁨을 위해,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성관계를 가진 다면 그것은 죄이다. 자, 번식은 화학적, 생물학적인 것이며, 즐거움은 더 높은 가치이다. 어떤 동물도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동물들의 성관계를 본 일이 있는가? 거기 어떤 즐거움이 있는 가? 심지어 그들은 서로 "안녕!"하고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계가 끝난 뒤에 "고마워요, 또 봅시다 !"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정말 지루한 것처럼 보인다. 교미하는 동물들을 보라. 그들은 지루해 보인다. 마치 어떤 생물학적 힘이 그들에게 그 일을 강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끝나면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연애 편지를 쓰 지도 않는다. 즐거움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다. 즐거움은 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마하트 마들은 번식을 제외한 모든 동물적인 것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번식이야말로 동물 적인 것이다. 모든 동물들이 번식한다. 거기에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차이점은 그들은 교미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 그 안에서 아무 재미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싹트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적 인 에너지를 변형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번식은 미덕으로 간주되고, 즐거움은 비난받 아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사람들이 언제나 인간적인 즐거움을 로봇과 같은 현상 으로 만들어 왔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이불 속에서 사랑을 해 왔다. 만약 화성인이 지구에 온다면, 특히 인도에 온다면 그는 사람들이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 사람들이 번식을 하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그의 가장 큰 궁금증은 '어떻게 이 사람들이 번식을 할까?' 하는 것일 것이다. 아무도 성관계를 갖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섹스는 그만 두고서라도 그는 손을 잡는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부부가 화성에 도착했다. 물론 그들의 궁금증은... 왜냐하면 그들은 화성인들이 어떻게 성관계를 갖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노력을 다해서 알아 보 았다. 다른 사람들의 성관계에 대해 알아보지 위해 지구에서 쓰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 다 - 그들은 몰래 화성인들의 침실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알아 낼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화성인 부부에게 매우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연구 여행을 온 것이지요. 우리들은 당신들이 어떻게 관계를 갖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들은 말했다. "간단합니다!" 그들은 냉장고에서 두 개의 병을 꺼내어 그것을 다른 병에 섞었다. 그리고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성관계를 묻던 그 부부는 아무런 성행위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말했다. "뭘 하시는 겁니까. 커피를 만드는 겁니까?" 화성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아홉 달만에 이 병에서 아이가 나올 겁니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재료를 혼합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번식하는 방법입니다." 지구에서 온 부부는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했다. "그러면 하나만 더 알려 주십시 오. 당신들은 어떻게 커피를 만듭니까?" 그러나 화성인들이 옷을 벗고 섹스를 시작했다! 지구인 부부는 정신없이 웃어댔다.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화성인들은 커피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화성인들이 물었다. "뭣 때문에 웃으십니까? 왜 웃으시지요?" 그들은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번식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커 피를 만들고 있다구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 우리에게 준 커피가 바로..." 인간은 모든 것이 기계적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과학적인 번식법 또한 찾으려 노력해 왔다. 이제는 사랑도 더 이상 개인적인 일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혜는 이미 교회나 대학에 의해 장악당했다. 물론 사회는 결혼을 통하여, 모든 법을 통하여, 모든 합법적 구속을 통하여 사랑의 99퍼센트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1퍼센트가 개인 의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조차 사회는 못마땅해한다. 그것 또한 줄여야 한다고 생각 한다. 사회는 그대의 사랑마저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지혜는 이미 오래 전에 사회에 빼앗겼고, 이제 사랑도 빼앗겨야 할 것이다. 이제 그대는 기계로, 노예와 같은 기계 로, 노예로 변해 간다. 그리고 그대는 앵무새와 같은 말들만을 반복할 것이다. 한 남자가 목사의 집 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가정부가 문을 열자 그 남자는 말했 다. "주문하신 기름 2만 5천 리터를 가져왔습니다." 가정부는 깜짝 놀라서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는 더 놀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앵 무새를 기억해 냈다. 그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소리쳤다. "네가 기름 2만 5천 리터를 주문했니?" "아니오." 앵무새가 말했다. "정말이야? 거짓말 아냐?" 목사가 말했다. "예!" 앵무새가 소리쳤다. "그럼 잠깐 기다려봐!" 목사가 말했다. "만약 네가 거짓말 한 것이 밝혀지면 너의 날개를 펼쳐 벽에다 못 박아 버리겠다." 잠시 후, 기름을 주문한 것이 앵무새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는 앵무새를 벽에 못박 았다. 벽에 매달린 앵무새는 슬픈 표정으로 창밖의 교회 앞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을 보 았다. 그는 머리를 들고 말했다. '아, 예수님, 당신도 기름 2만 5천 리터를 주문하셨 습니까?" 인간은 앵무새가 되었다. 나의 산야신(28)들은 이 모든 새장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철학, 이론, 과학 그리고 온갖 쓸데없는 것들이 그대 주위에 창조해 좋은 새장에서 빠 져 나와야 한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부분적으로, 점진적으로, 서서히, 내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 나와야 한다. "육긍!" "예, 스승님!" 육긍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보라." 남전이 말했다. "거위는 밖에 잇다!" 오늘은 이만(Enough for today). (1)공안 : 불가의 수형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의 실마리로 삼는 문제. (2)육긍 : 남전의 제자 중 유명한 인물로, 일명 육환. 후에 육긍대부로 알려짐. 지 양선성의 태수였음. 30년간 하산하지 않던 남전에게 가르침을 펼 것을 간청해 결국 남 전이 그의 뜻을 받아들여 하산, 그 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함. (3)남전(748-834) : 당대 승려. 마조의 제자이며 조주의 스승. 신정 하남성 추린으 로 속성은 왕씨. 757년 9세의 나이로 밀현 대외산의 대해선사에게 출가한 이래 여러 스승 밑에서 경전을 공부했으나 현묘한 이치는 경론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조 문하 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음. 스스로 왕노사라 칭하며 30년동안 한번도 하산하지 않음. 지양의 태수를 지낸 육긍대부가 남전을 참방, 스승으로 모심. 834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남. (4)수피즘(Sufism) :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Sufi)는 그 수도승을 말함. 마호멧이 죽은지 2세기 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프(suf)'는 '양털'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무더운 사막지방에서 두꺼운 양털 옷을 입고 내면의 '서늘한 곳'으로 침잠하는 수행을 실천했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음. 수피 휠링(회전춤)이나 지크르(일종의 주 문)가 유명함. (5)하시디즘(Hasidism) : 18세기 초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유대인 사이에 널리 전파 된 성속일여의 신앙을 주장하는 종교적 혁신운동. 창시자는 바알 셈(Baal Shem Tov)이 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벤 엘리에제르(1698-1760)이다. 하시디즘이라는 말은 헤브라이 어의 하시드(경건한 자)에서 유래한 것. (6)탄트라(Tantra) : 탄트라라는 말은 '진실의 언어', 또는 '인간의 언어라는 뜻으 로서, '확장', '계속', '번식'을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지혜를 확장하고 계속적 으로 번식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밀교, 곧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라는 말 이 생겨났다. 탄트라 불교란 인도불교의 후기 밀교로, 8세기 이후 인도에서 꽃피어 티 벳과 몽고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탄트라는 사고가 아닌 감각을 통해 지혜를 확장하는 구도의 길을 추구하며, 따라서 모든 감각의 집합인 성을 중요시했다. (7)쉬바(Shiva) : 힌두교 쉬바파의 최고신. 별칭 나타라자. 쉬바는 우주의 파괴를 상징하며, 창조와 유지를 상징하는 브라만, 비쉬누와 함께 브라만교의 3신의 하나이 다. 그 성품은 광폭하여 전적으로 파괴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열병으로 가져오기는 하는 무서운 신이지만, 춤과 음악을 즐기며 이를 관장하고, 고행자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생식을 지배하는 신으로 보기도 한다. (8)마호멧(Mahomet, 570?-632) : 고대 아라비아의 예언자(nabi), 이슬람교의 창시 자. 아라비아 원음으로는 무하마드(Muhammad). 40세가 되었을 때, 세속적 생황에서 이 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 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마침내 새로운 교를 창시하게 되었다. (9)짜라투스트라(Zarathustra, BC 630? - BC 553?) :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 조로아 스터교의 교조. 영어명은 조로아스터. 20세 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세 경에 아후 라 마즈다신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 (10)노자 :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의 창시자(성 이. 자 담. 이름 이. 노담이라고 도 한다. 초나라 고현출생).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의 수장실사(장서실 관리인)였다.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 서방으로 떠나던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 2편의 책을 써 주었다는데 이것이 '도덕경'으로,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11)드야나(dhyana) : 인도어로 명상을 뜻하며, 불교에서 선으로 번역되기도 함. (12)자이나교(Jainism) : 인도에 현존하는 유서 깊은 종교. 기원전 6-5세기 경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신론적 종교이다. 고타마 붓다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마하 비라(Mahavira)에 의해 그 종교적인 체계가 확립되었다. 마하비라는 그들의 낡은 교리 를 개혁하여 널리 퍼뜨림으로서 교조로 취급된다. 살생금지와 무소유 등의 계율에 맞 는 엄격한 도덕적 행위를 강조하며 여러 가지 점에서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현재 는 인도 전역에 걸쳐 신자가 180만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교세가 쇠락했으나 상 인이나 긍융업자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경제적 영향력이 막강하다. 오쇼 역시 자이 나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코란(Koran) : 아랍어로 '읽혀야 할 것'이라는 뜻을 지닌 이슬람교의 경전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멧이 619년경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의 계시, 설교를 집대성한 것. (14)기타(Gita) :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를 줄여 부르는 말로, 신(Bhagavad) 의 노래(Gita)라는 뜻이다. 인도인들이 가장 애독하는 경전. 원전은 2세기경에 완성된 것으로,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제6권에 편입되어 있다. 가족간 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괴로워하는 아르쥬나에게 크리쉬나가 마부로 확신하여 가르침 을 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5)자본론(Das Kapital) : 잉여가치설에 관한 이론을 담은 마르크스의 주저. (16)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발표한 사회주의지지 성명서. (17)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로 정신분석학 의 창시자. 처음에는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의 탐구를 시도했지만, 후에 최면요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연상법을 도입했다. 성본능을 중시하여 모든 것의 원인을 성에 귀결시키는 이론 체계를 세웠다. (18)셰익스피어의 맥베드 마지막 5막에 나오는 맥베드의 대사.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 위에서 흥이 나서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가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바보가 떠들어대는 이 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그러나 아무 의미도 없는..." (19)다르샨(darshan) : 인도어로 '보다' 라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을 친견하는 것을 뜻함. (20)니루파 : 당시 오쇼와의 다르샨때 곁에서 춤을 추던 제자. (21)칸트(Immanuel Kant, 1724-1804) : 독일의 철학자.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비판'등 많은 저서들이 있다. (22)헤겔(Georg Wilhelm Friedrch Hegel, 1770-1831) : 독일의 철학자.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 (23)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 독일의 철학자.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의 한 사람. (24)포이에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 :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기독교 및 관념적인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유물론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제 기했으며, 그의 철학은 후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25)uni눈 '단일', multi는 '많다'는 뜻의 접두어. (26)니르바나(nirvana) :한역으로는 열반.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 산스크리트어. 어 원의 본뜻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 고뇌 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27)마하트마(mahatma) : '큰', '위대한'이라는 뜻의 마하(maha)와 '영혼', '진아' 를 뜻하는 아트마(atma)가 합쳐진 단어. (28)산야신(Sannyasin) : 구도의 길에 입문한 사람을 뜻하는 힌두교 용어. 원래는 출가하여 세상의 모든 집착을 모두 끊고 수행하는 구도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쇼는 과거의 모든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지금 여기'로 뛰어드는 사람, 삶에서 일어나는 모 든 기쁨과 축복들을 거부하지 않고 전적으로 즐기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이나 고 통들을 거부하지 않고 깨어 있는 의식 속에 경험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려는 자를 산야신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ff 그저 그것을 보라 사랑하는 오쇼, 저는 우리가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 듯이 느껴집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침체의 늪은 저를 질식시킬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코 그것을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은 거위가 이미 밖에 있다고 말씁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 거위를 붙잡는 것 이 그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까? 아난드 바가와티(Anand Bhagawati), 거위를 붙잡는 것은 어렵다. 거위는 밖에 있기 때문이다. 거위가 병안에 들어 있었다면 거위를 붙잡는 데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을 것 이다. 병은 죽은 것이다. 그대는 병을 붙잡을 수 있다. 병은 철학과 같다. 병은 신학, 교리, 강령, 의식, 교의와 같다. 단지 시체일 뿐이다. 거위는 살아 있다. 거위는 삶 그 자체이다. 그대는 붙잡을 수 없다. 그것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적인 것이다. 누가 누구를 붙잡는단 말인가? 그대가 거위이다! 그리고 마음은 그대의 병이다. 마음은 부서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물질이 아니다. 단지 생각이며 상상리 뿐이다 꿈이 만들어질 것과 똑같은 재 료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대는 꿈을 파괴할 수 없다. 그대는 꿈을 죽일 수 없 다. 그대는 꿈을 칼로 자를 수 없다. 그대는 꿈을 불태워 버릴 수 없다. 그대는 잔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 때 꿈은 사라진다. 사실은 꿈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 왜냐하면 꿈은 원래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뿐 이다. 그것이 바로 환영, 신기루라는 의미의 인도어 마야(maya)가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본다. 지평선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인 것처럼 보인다. 땅과 하늘이 거기서 만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조금만 노력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은 그대가 닿을 수 있는 곳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그 곳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잔지 존 재하는 듯이 보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은 결코 만나지 않는 다. 그러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대가 이른바 지평선이라고 하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지평선은 점점 더 그대로부터 멀어진다. 그대와 지평선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똑같다. 알버트 아인쉬타인은 존재 안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빛의 속도뿐이라고 말했 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다. 나는 그가 옳은지 그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변하지 않는 또 한가지를 안다. 그것은 그대와 지평선 사이의 거리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다. 한 치도 줄어들 수 없으며, 한치도 늘어날 수 없다. 실재와 비실재 간의 차이 그 거리는 줄어들 수 없다. 마음은 비실재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을 볼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때문에 이 미친 스승 남전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 그 는 논리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라, 그러면 거위가 나온다."라 고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가 하는 말과 같은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험프리이스는 말한다. "저기, 거위가 나왔다!" 남전은 그렇게 말 할 수 없다. 남전은 저기나 여기에 대해 말하고 있자 않다. 남전은 그 때 혹은 지금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 결코 병 안에 들어 간적이 없다. 들어갈 수가 없다." 고 말하고 있다. 그대의 의식은 언제나 자유롭다. 의식은 자유 그 자체이다. 그러나 바가와티, 문제 가 일어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붙잡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 너머의 것을 붙잡고 싶어하는 그대의 마음이다. 잊지 말라. 환영은 실재를 붙잡을 수 없으며, 실재는 환영을 붙잡을 수 없다. 환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붙잡 을 수 없다. 그리고 실재 역시 환영을 붙잡을 수 없다. 어떻게 환영을 붙잡을 수 있겠 는가? 환영은 전혀 존재하고 잇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고타마 붓다는 말한다. "그대가 완전히 텅 비게 되고, 깨어 있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단지 그대를 흔들어 깨움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악몽 이다. 병 속의 거위란 악몽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깨어남은 때로운 매우 기이한 상 황 속에서 일어난다. 그런 일은 많이 있었다. 찰스 디킨스(1)가 편집한 조세프 그리말디(2)의 회고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올해 7월에 새들러즈 웰즈(Sadler's Wells)에서 매우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은 그 후 한동안 그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화제거리였다. 사건은 이러했다. "영국 해군의 조지 해리스 선장은 오랜 영행 뒤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승무원들은 급료를 지불받았고, 선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유흥을 즐기기 위해 선장을 따라 런던 을 갔다. 당시 새들러즈 웰즈는 수병들의 이름난 유흥지였고, 때로는 객석 전체가 뱃 사람들과 그들의 여자 친구들로만 가득 차기도 했다. 해리스 선장의 선원들 일행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여러 해 동안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던 사 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동료들과 함께 쇼가 진행되는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날밤 그리말디 의 쇼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모든 청중들이 정신없이 웃고 있었지만, 이 불쌍한 친구 만큼 그의 농담과 유머를 즐기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사람좋은 그의 동료들은 그가 즐거워하고 있는지 염려해 주었고, 수화를 잘하는 한 친구가 공연이 재미있느냐고 물 었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이 친구도 수화를 통해 온갖 즐거움의 몸짓을 섞어 가며, 이렇게 우스운 공연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쇼가 계속되었고, 그리말디의 농담과 유머는 더욱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스워졌 다. 그리고 마침내 극장이 떠나갈 듯한 격렬한 웃음과 박수가 쏟아졌고, 이 벙어리 남 자도 가장 기뻐하며 함께 박수를 쳤다. 박수가 끝났을 때, 갑자기 그가 옆자리의 동료 에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쳤다. '이렇게 웃기는 친구는 처음이야!' 동료가 깜 짝 놀라 소리쳤다. '이봐, 잭! 자네 말을 하고 있잖아!' 그가 말했다. '말? 정말, 내 가 말을 하고 있어. 들을 수도 있어!' "이 일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고, 결국 여섯 명의 친구들이 이 친 구를 어깨에 태워 홀을 행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었고, 귀머거리에 벙 어리인 사람이 그리말디의 코미디 덕분에 말을 하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 입 에서 입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엄청난 흥분과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 술집의 여주인은 그리말디가 자신이 치료한 환자를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벙어리였던 남자에게 자신을 그렇게 웃겨준 사람을 보고 싶다 면 다음날 아침에 연락하라고 말했다. 사정이야기를 들은 그리말디는 약속된 시간에 그가 머무는 집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그 친구들 은 아직도 그에게 일어난 이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떠들어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기쁨의 표시로 모든 사람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영일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말을 하거나 듣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듣고 말하는 능력을 잃었던 것 은, 더운 지역을 항해하며 너무 강한 햇빛을 쬐었기 때문인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리 고 어젯밤 그는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자신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을 한참 동안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처럼 즐겁게 했던 그리말디 의 쇼가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무척 애를 썼으며, 실제로 말을 하게 되어 동료들뿌만 아니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그 곳에 함께 있었던 찰스 디브딘(3)은 그 남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이 대답으로 볼 때,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정말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해리스 선장에 의해서 다시 한번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약 6개월 뒤 어 느 저녁 무렵, 그리말디가 코벤트 가든의 배우 휴게실에서 그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우연히 그곳에 들른 선장은 말하기를, 그와 함께 있었던 기간 동안 그 남자 의 행동에는 그를 사기꾼으로 볼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선장은 그가 완전히 감각을 되찾은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를 뿌리까지 뒤흔들어 버린 웃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병 속에 있었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병 바깥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 40년의 귀머거리, 벙어리의 세월이 사라져 버렸다. 그 것은 단순한 망각이다. 그것이 바로 스승의 현존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때로는 스승이 없이도 일 어날 수 있다. 그리말디는 남전이 아니었다. 그리말디 자신도 깜짝 놀랐다. 자신의 눈 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남자를 깨우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일은 과거에 예기치 못한 기이한 상황에서 일어나곤 했다. 사실, 그런 일은 예기치 못한 상황일 때 더 많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기대는 마음에 속한 것이기 때문 이다. 아무 기대도 없을 때 그대는 더욱 이완되고 더욱 고요해지며 편안해진다. 거위 는 이완되어 있을 때 더 쉽게 그 존재하지 않는 병을 빠져 나올 수 있다. 거위가 긴장 한 채 병에서 빠wu 나오려 한다면, 바로 그 긴장이 거위를 나오지 못한게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바가와티, 그대는 말한다. 왜 그 거위를 붙잡는 것이 그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까?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거위를 붙잡으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붙잡 으려는 노력을 놓아 버린다면, 그것은 즉시 가능해진다. 단번에 가능해진다. 단 한 순 간조차 필요치 않다. 언젠가 한 저명한 유럽의 의사가 한 노인을 진찰하고 있었다. 면밀하게 검진을 하고 그의 막연한 불평들을 들어 보았지만 의사는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 의사는 화전의 육체적인 증상들은 부리깊은 삼정적 스트레스와 억 압 때문에 생겨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아마도 역사상 최고의 희극인일 조세프 그리말디가, 바로 그날 밤 공연을 위해 마을에 와 있다고 말하면서, 방금 내가 말했던 일화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그로서는 진단은 내릴 수 없다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환자에게 제안했다. "오늘밤에 그리말디의 공연을 보러 가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노인의 얼굴에 괴로움과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는 소리쳤다. "이런, 이해 를 못 하기는군요. 내가 그리말디란 말입니다!" 가짜 스승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무 스승도 없 는 상황에서도, 어떤 자연적인 우연에 의해 누군가가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노자는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나무 밑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위대하 다는 스승들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그는 진리를 붙잡 기 위해 너무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바로 그 노력이 장애물이었다. 그 이른 봄날 아침, 새들이 노래하고, 나무는 바람에 나부껴 흔들리고, 태양은 빛나며, 꽃향기가 퍼 질 때... 그는 깨달음에 대한 모든 것을 잊었다. 가끔씩은 깨달음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깨달음이 라고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그대를 미치게 만들 것이다. 돈을 깨달음만큼 그대를 미치게 만들지 않는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대는 원하는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다. 단지 약간 의 노력, 약간의 교활함, 약간의 계산, 그대 안에 있는 약간의 유태인적인 성향을 이 용한다면, 그대는 해낼 수 있다. 그대 안의 광적인 성향을 이용한다면, 그대는 정치인 이 될 수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처음 나타났을 때, 그가 금세기의 가장 역사적인 인물중의 한 사람 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뛰어난 심리학자와 뛰어난 신학자인 두 친구가 그의 연설을 처음 들었을 때, 그들은 이 미친 사람이 결코 이름을 떨칠 수 없 을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점에서 그들은 모두 동의했다. 한 사람은 심 리학적인 문제들의 전문가였고, 다른 사람은 신학적인 문제들에 관한 전문가였다. 그 것은 심리학자와 영혼주의자 간의 놀라운 일치였다. 신학자였던 그 사람은 마침내 교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쯤, 아돌프 히틀러는 세 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교황의 옛 친구인 심리학자가 그를 찾아와 말했디. "이제 어떻게 이야기하려나? 우리는 그사람이 정치 세계에서 결 코 이름을 떨칠 수 없으리라는데 동의 했었네. 그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지. 그 지성을 자랑한다는, 그리고 정말 자랑할 만한 독일같은 나라에서 그 사람에게 넘어가는 사람 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나라가 아닌가! 누가 이 미치광이에게 넘어가겠는가? 우리는 동의했었네. 하지만 이제 자넨 어떻게 이 야기하려나? 그는 정말로 이름을 떨쳤네. 이제 그의 이름은 영원히 역사의 일부가 될 걸세." 교황은 심리학자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하지만 그땐 아직 내가 오류 없는 사람이 아니었네!" (5) 신경증 환자들, 정신이 돌아 버린 사람들, 얼간이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날릴 수 있다. 그들은 위대한 정치가가 도리 수 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다. 유명해 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정상에 서고자 하는 미친 욕망뿐이다. 정상은 붙잡을 수 있 다. 깨달음은 붙잡힐 수 없다. 따라서 바가와티, 그대가 그것을 붙잡으려 애쓸수록 그것 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그대는 손아귀에 깨달음을 움켜쥘 수 없다. 그것이 깨달음 을 붙잡는 유일한 방법이다. 펼쳐진 손으로 그대는 온 하늘을, 모든 별들을, 존재 전 체를 잡을 수 잇다. 그러나 닫힌 주먹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더 닫힐수록, 더 곽 움 켜쥘수록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더 닫힐수록, 더 꽉 움켜쥘수록 그 안에 어떤 것 이라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깨달음은 열린 손으로, 그대 존재의 이완되 고, 고요한, 평화로운 휴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노자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여러 해 동안 그는 붙잡으려,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날 아침 그는 자신이 찾고 있던 것에 대해 그저 잊어버렸다. 그 아침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밝았다. 사방에 환희가 넘 쳐나고 있었다. 누가 깨달음을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한 순간 그 욕망이 사라져 버렸 다. 그리고 그 때 우연히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노자는 그 낙엽이 위에서부터 천천히,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보 았다. 그는 단지 바라보는 자가 되었다. 아무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보았다. 그는 흔 들리는 나무, 아침 산들바람 속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에 깨어 있었다. 그 나뭇잎이 땅 에 내려앉을 때, 노자 안의 무언가도 함께 내려 앉았다. 갑자기 "유레카!"의 느낌... (6) 갑자기 터져 나오는 기쁨의 폭발... "아!" 그는 춤을 추었다. 거위는 밖에 있었다 ! 거위가 밖에 있을 때, 춤추고, 노래하고, 웃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그대는 결코 병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그런데도 병 안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그 모든 어리석음을 보고 웃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믿음이 유일한 감옥이었다. 그대는 묻는다. 저는 우리가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영원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여기 있었고, 그대 는 지금 여기 있다. 그리고 그대는 언제나 여기 있을 것이다.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 다. 이제 파괴되는 것도 없다는 것은 공인된 과학적 진실이다. 만약 물질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왜 의식이 파괴되어야 하는가? 물질은 존재의 매우 조잡한 차원에 속한 것 이다. 조잡한 것이 그처럼 존재에 의해 존중받는다면, 왜 더 높은 차원의 현현(manife station)이 존재에 의해 존중받지 못해야 하는가? 높은 것은 더욱 존중받는다! 만약 물질이 영원히 지속되고, 파괴가 불가능하다면, 의식도 역시 파괴될 수 없다. 의식은 생명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그보다 높은 것은 없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에베레스트 이다. 더 높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정상이다. 존재 전체는 그 정상을 향해 움직여 가 고 있다. 급할 것은 없다. 서두름이라는 생각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마음과 시간은 동의어이다. 그대의 마음이 멈추는 순간, 시간 또한 멈춘다. 그대가 더 마음 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대는 더 시간 속에 있다. 그대가 덜 그대의 마음 속에 있을 수록, 그대는 더 시간에서 벗어난다. 예수가 말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물론 성경과는 관계가 없다. 성경은 예수의 많 은 아름다운 말들을 빠뜨렸다. 그러나 진리는 살아남아 전해지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이 이야기는 수피 신비가들에 의해 전해 내려왔다. 그 구절은 이러하다. 누군가가 예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여러 번 신의 왕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신의 왕국에 관해서 가장 특별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말씀하시는 신의 왕국 안의 가장 특이한 현상은 무엇입니다까? 예수가 말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 곳 에 시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기이하고 예기치 못한 대답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뭔가 다른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 아버지 하느님이 거기 있을 것이다. 성령이 있 을 것이다. 모든 성인들이 있을 것이다. 천사들이 하프를 켜며 "할레루야"를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등등... 그러나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는 말 한다. "그 곳에 시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옳다. 영원이란 시간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이 세 종교를 탄생시킨 유대의 전통은 한 번의 삶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한번의 삶 이라는 생각이 서두름을, 걱정을, 도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갈망을 만들어 낸다. 정 확히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지, 무엇 때문에 도달하려 하는지, 그리고 정말 도달한다면 그땐 무얼 하려 하는지도 모른 채... 그대는 안절부절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짧고, 이미 그대의 손을 벗어나고 있으며 머지않아 죽음이 그대의 문을 두드릴 텐데, 그대는 아직 충족되지 못했고,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그대의 번민은 깊어지고, 그대의 고뇌는 더욱 커지면, 그대의 삶은 짐이 되어 그대는 질질 끌려가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대가 이루어 내 지 못할까 봐 끊임없이 두려움에 떤다. 그것이 바가와티가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침체의 늪은 저를 질식시킬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 코 그것을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이루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필요한 것은 모두 일어났다. 그것은 처음부터 거 기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즐겨야 한다.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달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70년에 불과한 짧은 생이 라는 관념은 커다란 두려움을 일으킨다. 삶의 3분의 1은 잠으로 낭비될 것이고, 또 다 른 3분의 1은 교육과 학교, 대학, 모두 무의미한 것들에 낭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 아 있는 3분의 1은 먹을 것을 벌고, 아내와 다투고,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에게 잔소 리하고, 이웃과 싸우고, 이런저런 경쟁하는데 쓰여질 것이다. 사실 만약 그대가 어느 날 조용히 앉아서, 이제까지 그대의 삶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적어 본다면 그대는 충 격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해왔는가? 작은 일들조차 그대의 시간의 많은 부분 을 앗아 간다. 매일 수염을 깍고... 몇 시간 씩이나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자들을 보라 - 거울조차 지쳐버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대는 똑같은 바보같은 신문을 읽 는데 낭비하는가? 그것은 같은 이야기들이다. 새로운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것(news)은 없다. 모두 오래된 것들뿐이다. 수천 년 동안 일어났던 똑같은 강간 사건 들이 있을 뿐이다. 며칠 전 쉴라가 영국 신문의 기사를 가져왔다. (7) 한 주교가 - 주교가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 많은 여자들을 강간한 죄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것이 그가 하는 유일 한 일이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그 일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불쌍한 주교의 잘못은 그가 붙잡혔다는 것뿐이다. 잡히지만 않는다면 모든 주교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정해져 있다. 그렇게 훈련되었 다. 그들의 모든 생활 구조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거짓되고, 사이비이며, 이 중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었고, 그가 저지른 모든 강간은, 모두 그의 아름답고 영적인 설교 뒤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그는 사람의 위대한 것들에 대해 설교한다. 금욕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운 설교와 학식, 종교적 성자라는 가면 덕분에 그는 온갖 종류의 여자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 고 그들은 14살, 16살, 18살의 순진한 소녀들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왔다. 그러나 종교적인 장막 뒤에서 그런 일이 행해질 때 그것은 휠씬 쉬워진다. 한 페이지를 채우는 긴 기사였다. 나는 쉴라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필요 없으니 네 가 보관해라. 이것은 해묵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났었다. 이것은 리쉬와 무니와 주교와 성자들이 언제나 해 왔던 일이다. (8), (9) 이 사람은 운이 없 었을 뿐이다." 나의 선생님 중 한 사람은 매우 아름다운 노인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기 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종종 시험 감독을 하곤 했던 것이다. 나는 이 노인 을, 그의 정직함과 진실성을 사랑했다. 그는 교실에 들어와 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것을 베끼든, 책을 가져오든, 쪽지를 가져오든 반대하지 않는 다. 그것은 이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나의 관심사는 너희들이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들킨다면 문제가 커질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라. 만약 너희들이 들키지 않을 확신이 있다면, 나로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붙잡힌다면, 나는 너희들을 구제해 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오 분을 주겠다. 눈을 감고 상황을 잘 생각해 봐라. 책이나 쪽지 등을 가져온 삶은 그것들을 나에게 가져와라. 아무 문제삼지 않겠다. 그러나 일 단 속이기로 작정을 했다면 절대 붙잡히지 말아라. 그 때에는 충분히 똑똑하고 영리해 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를 기억해라. 너희가 충분히 영리하다면, 그 쪽지들을 가져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가 쪽지를 들고 있다는 것은 너희가 충분히 영 리하지 못하는 것을 증명할 뿐이고, 따라서 너희는 틀림없이 붙잡힐 것임을 경고 해 둔다." 그러면 학생들은 즉시 복사한 종이와 쪽지들을 가져왔고, 선생은 거의 모든 학 생들의 쪽지를 받아 갔다. 그러나 나는 그 노인을 사랑했다. 그는 진실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속이는 것이 아 니라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대가 신문에서 읽는 것은 일부 붙잡힌 사람들이다. 모두가 똑같은 일들을 한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큰 차이 는 없다. 양적으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 질은 똑같다. 살인이 일어나고 있고, 강간 이 일어나고 있으면, 전쟁이 계속된다. 모든 어리석은 일들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되고, 그대는 이런 모든 것들을 읽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TV의 쇼를 보 고, 똑같은 오래된 경전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들은 이미 수천 번이나 들었던 것들 이다. 그대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안다. 그런데도 그대는 계속 관심을 두고 있다. 칠십 년 중에서 단 칠분 만이라도 단지 그대만의 것인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한 가하면서 산만하지 않은 이완된 시간, 자신의 존재 안에 휴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 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칠분조차도 놓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대는 서두르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바람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은 없다. 죽음이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공허하고, 충족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조급함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조급함은 일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조급함 은 그대를 계속해서 달리도록 만들며, 그대가 그림자를 쫓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림자 를 쫓는 동안 그대는 또 다시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바가와티, 그대는 말한다. 저는 우리가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대가 여기에서 나와 함께 있다면, 서두름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라. 시간은 모두 잊어라. 예수는 말한다. "그 곳 나의 신의 왕국에서 시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나 는 그대에게 말한다. 시간을 놓아 버려라.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그대는 신 의 왕국에 있다. 왜 신의 왕국을 기다리는가. 나는 예수의 말을 뒤바꿔 놓고 싶다. 예 수는 말한다. "신의 왕국에 들어가라. 거기에 더 이상 시간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맞지 않다. 이것은 말을 마차 뒤에 묶어 놓은 것이나 같다. 어떻게 신의 왕국 에 들어갈 것인가? 어디를 통해서 신의 왕국으로 들어갈 것인가? 사실은, 신의 왕국에 는 시간이 없다는 바로 그 생각이 그대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 것이다. "어떻게 빨리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신의 왕국에 들어가서 시간도, 아무 문제도, 불안도 없는 영원한 지금 속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지금'이라는 것은 '그 때'가 되 어 버린다. 지금이 목표가 되어 버린다. 만약 그대가 요점을 파악한다면, 나는 시간을 놓아 버리라고 말할 것이다. 바로 그 놓아 버림 속에 거위는 밖에 있다. 시간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놓아 버려라. 그러면 그대는 신의 왕국 안에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대는 언제나 그 안에 있었 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시간이 그대 주위에 악몽을 만들어 내고, 마음이 모든 종 류의 꿈들을 창조해 냈던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들의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대는 말한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침체의 늪은 저를 질식시킬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 코 그것을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나는 역시 두렵다. 그대가 그것을 이루려고 시도한다면, 바가와티, 그대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루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모두 버려라. 모두 잊어라. 순간 속에서 기뻐 하라. 그대는 저 멀리 뻐꾸기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까마귀의 소리, 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다. 서두름도, 어제도, 내일도 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들에 핀 백합꽃을 보라. 그 꽃들은 솔로몬 왕의 영광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화려하 다." 무엇이 이 보잘것없는 백합꽃의 비밀인가? 예수가 말하는 그 비밀은, 그들은 내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를 산다는 것이다. 삶은 현재이다. 따라서 그것 을 이루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그 안에 있다! 까비르는 말한다. "그대는 바다 속에서 목말라하는 물고기와 같다." 그대는 바다 안 에서 태어났다. 그대는 바다의 일부분이다. 그대는 바다 안에서 살고 있고, 그 바다의 한 현현이며, 그 바다 안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대는 바로 바다의 파도와 같다. 그러나 물고기는 바다 안에서 목말라한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어떤 다른 바다, 다른 삶,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신의 왕국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쓰레기를 내버려라! 지금 이 순간 외에 다른 신의 왕국은 없다. 나무들은 이미 그 안에 있으며 산들도 이미 그 안에 있다. 오직 인간만이 홀로 떨어져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길을 잃게 된 이유는 바로 그것을 붙잡으려는 노력, 이해하려는 노력,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개념 구조를 만들려는 그 노력이다. 존재는 모 순적이다. 그대가 그것을 논리적으로 만들려 한다면, 그대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 다. 그대는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바가와티, 그대는 말한다. 오쇼, 당신은 거위가 이미 밖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 거위를 붙잡는 것이 그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거위는 이미 밖에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요점을 보라. 거위에 대해 생각하 려 하지 말라. 한 순간의 생각으로 그대는 이미 저 멀리 가 버린다. 생각에 몰두하지 말라. 단지 보라. 그것은 계속해서 생각만 하며 제자리를 맴돌아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단한 지식이나 철학적 통찰력이나 논리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수양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가슴의 문제이다. 단지 그것을 보라! 그대 눈의 모든 눈물을 닦고, 그대의 눈에 쌓여 있는 모든 먼지 들을 닦아 내고 단지 존재를 보라.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장이 그대의 깨달음 이 될 수도 있다. 붓다는 마지막 새벽별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 별이 사라질 때 붓다 는 깨달았다. 깨달음은 성취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그 자체이다. 그 러므로 그대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 애쓰지 말라. 그대는 개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 을 보았을 것이다. 개들은 매우 철학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들이다. 개들은 아리 스토텔레스증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대는 겨울날 아침, 개들이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은 즐길 수가 없다. 꼬리 때문이다. 꼬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들은 그 꼬리를 잡고 싶어한다. 그들은 뛰어오르고, 꼬리도 뛰어 달아난다. 그들은 더 열심히 뛰어오른다. 논리적 결론은 이렇다. 즉 충분히 열심히 뛰지 않았다는 것, 더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꼬리도 더 빨라진다. 그 리고 그들은 미쳐간다. 그것은 자신의 꼬리이다. 그것을 쫓을 필요는 없다. 존재, 깨달음, 진리, 그것은 모두 그대에게 속해 있다. 그것을 붙잡을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것을 성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은 성취된다. 그 때 그것은 붙 잡힌다. 사랑하는 오쇼, 저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정치가입니다. 저에게 뭔가 해주실 말씀이 있으십니 까? 워너(Wernaer), 그대는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렸다. 그대는 듣지 않을 것이다. 정치 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그대는 혁명적인 급진적 정치가이다. 그것은 이중, 삼중의 암이다! 정치가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급진적이고 혁명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추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 아름다운 말들을 찾아 낸다. 어떠한 정치가도 혁명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일한 혁명은 영적인 혁명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정치가도 급진적이 될 수 없다. '급진적'이라는 그 말 자체가 뿌리를 뒤흔드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는 기껏해야 나뭇잎들을 쳐낼 뿐이다. 뿌리와 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직 깨달음만이 그대를 뿌리로 데려간다. 오직 명상만이 그대 를 문제의 근원으로 데려간다. 정치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정치가도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 세계는 여전히 똑같은 우울한 회전 목마(sorry-go-round)를 타고 있다. (10) 사실 불행은 나날이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이 모든 혁명가들과 급진적인 정치가들은 기껏해야 해악만 끼치는 것으로 밝혀졌을 뿐이다. 물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 더라도.. 그러나 의도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그리고 정치가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피하려 하고 있다. 자신의 문제들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세계의 문제들, 경제, 정치, 역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사회 변혁, 개혁과 같은 것들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 의 문제들에서 도망치기 위한 전략, 미묘한 전략들이다. 그것은 위험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실은 겁쟁이에 불과하면서도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워너, 먼저 그대 자신의 문제들을 바라보라. 그 문제들과 만나라. 먼저 그대의 존재 를 변형시키려 노력하라. 오직 스스로 변형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변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대는 묻는다. 저에게 뭔가 해주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두 가지를 기억하라. 첫 번째는 파멸의 세 가지 원칙이다. 이 세상에는 파멸에 이르 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섹스, 둘째는 도박, 그리고 셋째는 정치이다. 섹스는 가장 재미있다. 도박은 가장 흥분된다. 그리고 정치는 가장 확실하다. 두 번째로, 혁명의 근본 원칙을 또한 기억하라. 그것은 혁명이 일어날 때, 세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달라진 다. 정치가들은 오랫동안 전 세계를 움직여 왔다. 그러나 어디로, 어느 목적지로 이끌어 왔는가? 이제는 우리가 이러한 게임의 모든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적어도 우리는 정치가들이 이끌어온 5천 년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전에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5천년 간의 정치적 게임들이 진행되는 동안 무엇이 이루어 졌는가? 인간은 똑같은 어둠, 똑같은 불행, 똑같은 지옥 속에 있다. 그 렇다. 정치는 계속해서 그대에게 희망을 준다. 결코 오지 않는 더 나은 내일이라는 희 망을 준다.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정치는 인민의 아편이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99.9퍼센트 그것은 사실이다. 단지 0.1퍼센트만 사실이 아니다. 붓다, 예 수, 노자, 자라투스트라... 이런 몇몇 사람들만이 그 0.1퍼센트에 포함될 수 있다. 그 밖에 99.9퍼센트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가 옳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밝혀졌다. 종교는 사람들을 약에 취한 상태 속에 머물러 있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를 참을 수 있게 해주는 잠, 온갖 종류의 노예화와 기아를 견뎌낼 수 있게 만드는 잠 속에 머 물러 있게 한다. 더 나은 내일이라는 희망 속에 머물러 있게 한다. 종교들은 보통 죽 음 이후를, 다른 세상에서의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한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묻는다. "죽음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납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라. 대신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지금 죽음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왜냐하면 죽음 전 에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죽음 이후에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속 된다. 그대의 의식은 똑같을 것이다. 죽음 이후든 이전이든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육체는 달라질 것이다. 그릇은 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내용물은 똑같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내용물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일 뿐, 그릇에 대해서 일어나 는 것이 아니다. 거위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병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 그대는 아마도 남들과 다른 병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 잘 만들어진, 더 나은 재료로 만든, 더 세련된 크 리스탈로 만든, 다이아몬드로 만든 병을 자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런 차이가 없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그대의 의식, 거위이다. 처음에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편을 줘 왔다. 내일이라는, 죽음 이후라는 아편을 줘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혼미한 상태 속에 있다. 마취약 의 지배 아래, 종교라 는 마취약 아래 있다. 이제 정치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심지어 공산주의마저도 인 민들을 위한 아편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종교이다. 그 전략은 똑같은다. "내일은 혁명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 그대는 내일을 위해 그대의 오늘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 지 60년이 지났다. 그리고 내일은 아직도 그때와 다름없이 멀기만 하다. 인도에 혁명이 일어난 지, 간디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 났다. 그러나 내일은 여전히 멀다. 사실 전보다도 더 멀어졌다.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 들은 헛된 희생을 한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자신의 삶을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 다. 죽음을 당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자살을 범했던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들 이 인류에 위대한 봉사를 한다고 믿으며 자살한 것이다. 세상에 더 이상의 광기를 창조해 내지 말라, 워너. 세상은 이미 광기로 가득 차 있 다. 나의 한 친구가 정신병원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병실을 회진할 때, 환자들 에게 "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라고 묻곤 했다. 그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을 들 어 보면 대개 환자의 현실 인식 정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 환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당신과 똑같은 이유로 여기 있어요. 바깥 세상에서는 성공하지 못했거든요." 환자들이나 의사들, 국민들이나 정치가들,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다. 모두가 아야 톨라 호메이니들이다! (11) 온갖 미치과이들이 세상에 폴려 나와있다. 워너, 만약 그 대가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정치를 던져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한 명의 호메 이니를 줄이는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오쇼. 저는 당신이 지식은 쓸모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극적인 목적지로 안내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탐(Geetam), 그대의 질문에는 내가 인정할 만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그대는 말한다. "저는 당신이 이렇게 말씁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든 불교 경전들도 이렇게 시작된다. 그것은 매우 진실한 태도이다. 기독교나 유대 교, 힌두교, 이슬람교의 경전들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불교 경 전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스승이 그렇게 말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 이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스승이 이야기한 것과 그대가 들은 것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그대와 스승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마음, 편견, 개념, 선입견이라는 장벽이다. 따라서 그대가 듣는 것이 반드시 스승에 의해 말해지는 것은 아니다. 기탐, 그대가 "저는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좋다. 그대는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은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말했을 수도 있고, 다른 것을 말했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모든 산야신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나의 말을 인용할 때면, 읹지 말라. 그것은 그대가 들은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내가 한 말일 수도 있더. 그러 나 전혀 내가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다른 것을 말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대는 말한다. 저는 당신이 지식은 쓸모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식은 매우 유용하다. 지혜가 쓸모 없다! 시 장에서, 사업에서, 정치에서, 지식은 필요하다. 어디에서든 지식은 필요하다. 과학, 기술, 모든 곳에서 지식은 필요하다. 지식은 매우 유용하다. 실용적이다. 제혜는 완전 히 쓸모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지혜의 아름다움이다. 지혜는 유용한 물 건이 아니다. 그대는 어떤 식으로도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그대는 지혜를 팔 수 없 다. 살 수도 없다. 지혜는 전혀 실용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지혜는 꽃피어남이다. 장미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새의 노래 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슨 소용인 가? 존재를 둘러보라. 별들, 구름들, 산들, 강들...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모두 쓸모 없다. 왜 나비는 그토록 아람다운가? 왜 신은 나비의 날개를 그리는 데 그토록 신경을 쓰는가? 이것이 다 무슨 이유인가? 기억하라. 외부의 세계는 효용의 세계이다. 그리고 내면의 세계는 효용이 아닌 의미 의 세계이다. 외부 세계는 내면 세계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야 만 한다. 외부 세계에서 그대는 빵이 필요하다. 그대는 버터가 필요하다. 그대는 집 이, 기계가, 옷이, 쉴 곳이 필요하다. 그대에게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러 나 내면 세계는 그저 호사스런 세계일 뿐이다. 그것은 필요의 세계가 아닌 기쁨의 세 계이다. 그것은 순수한 환희이다. 만약 누군가 그대에게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소용'이라는 그 말 때문이다. 사랑은 상품이 아니다. 세계는 사랑 없이도 계속될 수 있다. 이미 사랑 없이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은 완벽하다. 사 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사랑이 일어났을 때이다. 때문에 모든 사회는 사랑 을 반대한다. 음악가들 없이도 세계는 완벽하게 계속될 것이다. 누가 음악가 따위를 필요로 하겠 는가? 그들은 기차를 운전할 수도 있고, 비행기를 조종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세계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인도를 여행하곤 했었다. 바로 몇 달 전에 죽은 나의 친구 하나는 여행을 사랑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인도 전역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빠른 기차를 탔 다. (12) 그리고 그는 작은 역도 지나치지 않고 정차하는 완행 열차를 타기를 좋아했 다. 10시간이면 갈 수 있는 여행이 4일, 5일, 때로는 일 주일씩 걸렸다. 그리고 나와 함께 여행할 때면 그는 언제나 완행 열차를 타자고 우겼다, 한 번은 그의 말대로 완행열차를 탄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즐거운 여행이었 다. 왜냐하면 그는 제일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곳, 가장 깨끗한 우유를 마실 수 있는 곳, 과자가 맛있는 곳, 신선한 사과와 망고를 먹을 수 잇는 곳 등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그와 여행하는 그 5일 동안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다.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역의 짐꾼들, 역장들, 기관사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았다. 그는 언제나 이런 완행 열차를 타고 여행했었 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차는 역마다 한 시간이나, 30분, 혹은 두 시간씩 서있다 가곤 했다. 그중 한 역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역 전체가 망고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 다. 수백 그루의 망고나무들이 있었다. 그는 나를 역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나무를 오 르기 시작했다. 나는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그가 말했다. "망고가 익었어!" 나는 말했다. "기차가 떠나기라도 하면 큰일날텐데!" 그는 말했다, "걱정 말고 어서 따라 올라오기나 하게." 나는 그를 따라 나무로 올라갔다.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말했 다. "이제 가야 해. 기차가 떠날거야." 그는 말했다. "걱정 말게. 우리 위에 있는 저 남자 보이나?" 거기 한 남자가 있었다. "저 사람이 기관사라네. 저 사람이 내랴오기 전에는 기차가 움직일 수 없어." 나는 그 순간을 즐겼다! 삶은 그대의 방식처럼 효용으로서 살 수가 있고, 또한 놀이로서 살 수도 있다. 음 악, 사랑, 꽃들, 별들, 시, 그림, 춤, 모두가 내면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나는 지식 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대가 세상에서 무언가를 할 때, 그대의 지식을 이용하라. 바깥 세상에서 지혜를 이용하는 것은 어리석다. 세상에서 차를 운전하며 명상에 빠지는 것 은 위험하다. 세상에서 그대는 그대의 모든 능력과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그 러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 붙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일이 끝났을 때, 그대는 바깥 세상으로의 문을 닫고 내면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춤을 추라. 노래하라. 명상하라. 사랑하라. 살아라. 그 대는 유연하고 유동적이어야 한다. 기탐, 나의 말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의 마음을 끌어들이지만 않는다면, 그대는 나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세상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언제든 그대의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 히말라야의 동굴 속에 앉아 있다면, 그대는 그대의 지식을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리고 외부 세상은 내면의 세상만큼이나 아름답다. 만약 우리가 양쪽 모두를 선택할 수 있다면, 왜 하나만 선택하는가? 나의 모든 메시지는 "그대는 케익을 먹을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다" (14) 는 것이 다. 왜 절반만을 가지려 하는가? 지식은 바깥 세상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내면 세계에 서 지식은 장애물일 뿐이다. 그리고 내적인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내면에서 그것은 엄 청난 기쁨이다. 그러나 바깥에서 그것을 사용하려 하지 말라. 두 가지 일 모두가 일어났다. 서양은 지식만을 가지고 살아왔다. 때문에 서양은 내 적인 차원을 잃었다. 내적인 꽃피어남을 잃었다. 자기 자신의 존재와의 접촉을 잃었 다. 동양은 그 반대였다. 지식은 쓸모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동양은 비과학적이 되었 고 비실용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외적인 세상은 완전히 시들어 버렸다. 동양은 가난하 고, 추하고, 비과학적이 되었다. 서양은 자신의 영혼을 잃었고, 동양은 자신의 육체를 잃었다. 그리고 인간은 이 두 가지 보색들이 추는 춤이다. 이 둘은 춤을 추는 파트너들이다. 이 둘은 양 날개와 같 다. 그대는 하나의 날개로 날려 한다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서양은 떨어졌다. 동양은 떨어졌다. 양쪽 모두 완전하 실패로 드러났다. 우리는 양 날개를 가진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지식, 과학, 기술의 날개, 그리고 명상, 깨달음, 사랑, 자유의 날개. 양 날개가 깊은 동시성 속에, 깊은 일체감 속에, 일치와 조화 속에 기능할 때, 그 때에만 인간은 완전하고 전체적이 된다. 지식은 내면 세계에서는 필요치 않다. 내면 세계에 대해 그대는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극적인 목적지로 안내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인 목적지는 없다. 처음부터 이것을 확실히 해 두라. 목적지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궁극적인 목적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즉각적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즉각적(immediate)이다. 궁극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즉각성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다. 그리고 목적지는 없다. 순례 그 자체가 목적지이다. 한 걸음 한 걸 음이 목적지이다. 각각의 순간이 목적지이다. 이를 위해서, 지식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지식은 목적지를 위한, 성취를 위한 안 내자이기 때문이다. 목적 없는 즉각적인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순수성이다. 지식이 아니다. 순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 디오니소스가 "빛나는 무지(luminous ignoran ce)"라고 불렀던 것,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15) 빛나는 무지, 알지 못함(not-knowin g)의 깨달음 상태. 그대는 언제나 깨달음을 궁극의 앎(knowing)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틀렸다. 깨달 음은 궁극적인 알지 못함의 상태이다. 그것은 빛나는 무지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 이다. 성자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그는 해변에서 알록달록한 돌들, 조약돌들, 조개 껍질들을 줍기 시작한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들꽃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단지 꽃을 모으는 그 순수한 기쁨만을 위해... 주일 학교의 여선생님이 자신의 반 꼬마들에게 십계명을 하나 말해 볼 수 있겠느냐 고 물었다. 유치원정도의 나이인 사내 아이가 일어서서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간음하 지 말라!" 이것이 빛나는 무지이다. 너무나 순수하다. "간음하지 말라!" 아름다운 젊은 여선생이 열한 살 난 자기 반 학생이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어느 날 방과후에 그를 불러 물었다. "빅터, 요즘 성적이 왜 이렇게 엉망이니?"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아이가 말했다.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그래?" 선생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누구와?" "선생임이요." 아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빅터," 속으로는 좋아하며 여선생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이 얼마나 바 보같은 소린지 모르겠니? 사실 언젠가는 나도 남편을 갖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어린 아이는 원하지 않아." "아, 그건 걱정 마세요." 빅터가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제가 조심할께요!" 꼬마 조니가 엄격한 아버지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꿀벌(honeybee) 이 날아와 그들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아이는 아무 이유 없이 돌로 벌을짓이겨 버 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잔인하구나. 잔인했던 벌로, 너는 일년 동안 꿀(hone y)을 먹을 못할 것이다." 잠시 후, 조니는 땅바닥에 앚아 나비(butterfly)를 보고 발로 밟았다. 아버지가 말 했다. "좋다. 너는 앞으로 일년 동안 버터(butter)를 먹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집으 로 돌아왔을 때, 조니의 엄마는 바쁘게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방에 들어 섰을 때, 그녀는 바퀴벌레(cockroach) 한 마리를 발견하고 즉시 밟아 버렸다. (16) 조 니가 능글맞게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할까요, 아니면 아빠가 말씀하실래 요?" 한 초등 학교 교장이 새로 온 3학년 담임 선생의 첫 수업을 지켜보기 위해 그녀의 반에 들렀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여선생이 말했다. "앞줄에 앉아 있는 저 꼬마아이는 2 학년인데 여기 남아 있겠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너무 똑똑해서 2학년으로 돌려보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똑똑하단 말이오? 아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 보시오." 교장 선생이 말했 다. 선생이 아이를 앞으로 불러서 물었다. "나는 앉아서 하고, 남자들은 두 다리로 서서 하고, 개는 세 다리로 서서 하는 것이 뭐지?" "악수죠." 아이가 말했다. "나는 두 개밖에 없는데, 암소는 네 개를 가지고 있는 게 뭐지? 그녀는 계속 물었 다. "다리죠." 아이가 대답했다. "교제(intercourse)를 뜻하는 네 글자 단어가 뭐지?" (17) 그녀가 다시 물었다. "말(talk)이죠." 여선생은 교장 선생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 어떻게 할까요?" 그는 선생을 구석으로 데려가서 속삭였다. "4학년으로 올려 보내는 게 낫겠소. 나는 세 가지 다 틀렸소!" 사랑하는 오쇼, 저 역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심각한 이야기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프렘 브리타(Prem Brita), 이것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심각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노력해 보겠다. 하지만 성공할 것 같지 않다. 나는 결코 심각해 본 적이 없 다. 심각한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나는 심각하지 않다. 하지만 프렘 브리타를 위해 한 번 시도해 보겠다. 누가 아는가? 그녀가 나의 이야기에서 뭔가 심각한 점을 찾아 낼 지...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에서 내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 내가 의미하지 않았던, 내 가 꿈도 꾸지 않았던 온갖 것들을 찾아 낸다. 그리고 그녀는 심지어 나의 말에서 뭔가 를 이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옛날 유대 마을에서는, 신혼 부부가 결혼한 다음날 랍비가 찾아와 신부가 처녀였는 지 침대보를 확인해 보는 전통이 있었다. 젊은 신부는 이 관습을 알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그 관문을 통화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밤중에 일어나서 침대보에 잉크를 살짝 쏟았다. 그러나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는 실수로 녹색 잉크를 쏟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예상대로 랍비가 찾아와 침대보를 검사했다. 갑자기 랍비가 소리쳤다. "이런 짐승같은 놈! 쓸개가 찢어지도록 찌르다니!" 아니다. 이것은 심각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해 보자. 한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물었다. "실례지만 부그러워서 얼굴이 붉어진 적이 있 나요?" "아! 있어요." 할머니가 말했다. "네 번 있었죠. 첫 번째는 내가 남편 앞에서 옷을 벗었을 때였고, 두 번째는 외간 남자 앞에서 옷을 벗었을 때, 세 번째는 그 대가로 돈 을 받았을 때, 그리고 네 번째는 그 대가로 돈을 지불했을 때였어요. 당신은요?" 그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저는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두 번 할 수 없었 을 때였고, 두 번째는 한 번도 할 수 없었을 때였죠." 역시 실패했다! 나는 표적과 목표를 믿지 않기 때문에 훌륭한 궁수는 되지 못한다. 때문에 나의 화살들은 표적만 제외하고 온갖 곳으로 날아간다. 마지막 시도를 해 보겠다. 해마다 열리는 하늘 나라의 사냥 행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령만은 그 사냥 행사 에 참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 사냥에 참가하기만 하면 꼭 엉덩이에 총 알을 한 방씩 맞았던 것이다. 하느님은 마침내 그를 참가하도록 설득하고, 대신 사냥이 끝날 때까지 잘 감시해 주 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냥이 끝날 무렵에 또 다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총성이 들 렸고, 설령은 괴로워하며 두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하느님은 노하여 수풀 속으로 뛰어들어가 요셉을 끌어 냈다. "요셉! 아직도 그가 마 리아와 한 짓을 용서할 수 없겠니?" 오늘은 이만. (1)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 : 영국의 소설가. (2조세프 그리말디(Joseph Grimaldi, 1778-1837) : 영국의 광대이며 판토마임가. (3)찰스 디브딘(Charles Dibdin, 1745-1814) : 영국의 작곡가, 소설가, 배우, 극장 매니저. (4)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 거리에 위치한 유명한 오페라 극장. 정식 명칭은 로얄 오페라 하우스. (5)'로마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무류설(infallibilism)을 빗대어 한 말. (6)유레카(Eureka) : "알았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통에서 왕관의 금 순도 측정법 을 알아 내고 알몸으로 뛰쳐나와 외쳤다는 소리. (7)쉴라(Sheela) : 이 강의 당시 오쇼의 비서였던 인도인 여자 제자. 후에 미국 오 레곤 공동체 시절에 오쇼를 배신하고 돈을 챙겨 달아남, (8)리쉬(Rish) :고대 인도의 성자, 스승을 이르는 말. (9)무니(muni) : 고대 인도의 제사장. (10)회전목마는 merry-go-round. merry는 '즐거운'. (11)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aniac, 1900-1989) : 이란의 종교가, 정치가, 이란 혁명의 최고 지도자. (12)오쇼가 '아차리야 라즈니쉬(아차리야: 선생님)'로 불리며, 인도 전역으로 강연 여행을 다니던 시절을 말함. (13)망고(mango) : 열대 과일의 왕이라 불리는 인도의 과일. (14)You can't eat your cake and have it. '케익은 먹으면 없어진다. 먹기도 하고 가지기도 할 수 업다.'는 격언. (15)디오니소스(Dionysos)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 로마 신화에서는 바코스(B achos)라고 한다. 바커스로도 불린다. 포도 재배를 각지에 보급, 문명을 전달했다고 하며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인 한편, 포도 재배와 관련하여 술의 신이 되기도 한 다. (16)바퀴벌레(cockroach) : cock은 남성성기를 뜻하는 속어. (17)intercourse : 원래 '교제'를 뜻하는 말로, 흔히 '성교'를 의미함. (18)네 글자 단어(four letter word) : fuck, shit, cunt 등의 외설어. @ff 정상도 없고, 골짜기도 없다 사랑하는 오쇼, 당신은 정상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메아리 치는 골짜기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당신에게 갈 수 있을까요? 스와미 데바 라하만(Swami Deva Rahaman), 정상도 없고, 골짜기도 없다. (1) 모두가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다. 존재에는 아무런 계급 이 없다. 존재는 하나의 광대한 전체일 뿐이다. 존재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여러 범주로 나누려 한다. 무지한 사람, 깨달은 사람, 죄인, 성자, 범죄자, 고결한 사람, 악명 높은 사람, 유명한 사람, 도덕 적인 사람, 부도덕한 사람, 똑같은 게임에 불과하다. 사람들을 나눈 뒤에 더 높은 범 주에 들어가, 남보다 더 성스러운 체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가 정상도 없고 골짜기도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기억하기를 바란 다. 우리는 모두가 대양과 같은 하나의 전체에 속해 있다. 가장 작은 풀잎 하나도 가 장 커다란 별만큼이나 의미 있다. 그것들은 모두가 똑같은 하나의 우주적 연극 속에 참여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가 우리주의 아름다움, 우주의 기쁨, 우주의 노래, 우주 의 축제에 기여하고 있다. 작은 풀잎 하나라도 없어진다면 존재에는 뭔가가 부족해질 것이다. 무언가가 빠져 있을 것이다. 뭔가 빈 자리가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나의 시각은 분열적이지 않다. 나의 산야신들은 나의 추종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를 모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데바 라하만,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 그런 개념을 사용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지 말라. 오쇼, 당신은 정상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메아리치는 골짜기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정상도 골짜기도 하나의 전체의 일분이다. 정상은 골짜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골짜기도 정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누가 더 중요한가? 모두가 상호의존적 이다. 삶은 의존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 삶은 영원한 상호 의존성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 그 곳은 아름답다. 그대가 무엇이든 그대는 사랑스럽다. 정상에 서고 싶어하는 욕망은 그릇된 욕망이다. 욕망이라는 것은 하나같이 그릇된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욕망들은 어떤 다른 욕망들보다도 더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 면 다른 욕망들은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욕망들의 충족을 통해 그대가 좌절 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족되든, 충족되지 않든 좌절은 피할 수 없다. 욕망 이 충족된다 해도 그대는 좌절하게 될 것이다. 사실 더 크게 좌절할 것이다. 이제 그 대는 자신이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얻었 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또한 그대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다 해도 그대 는 좌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일생을 소비했는데도 그대는 그 하나의 욕망도 충 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희망이 부서져 버린다. 희망은 결국 부서질 수밖에 없다. 희망한다는 것은 절망을 쫓는 것이다. 갈망한다는 것을 좌절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에 있어서는 적어도 성공과 실패, 성 취와 비성취의 가능성들이 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성취라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거위는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 이 없다. 거위는 이미 밖에 있다. 그대는 골짜기를 즐기기 시작하는 그 순간, 그대는 정상에 있다. 어떠한 다른 정상도 없다. 어느날, 나는 문득 '이제는 충분하다!'고 결정했다. 나는 정상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골짜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기적을 보았다. 골짜기가 사라진 것이다. 사 실 처음부터 골짜기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정상에 있었다. 그러나 항상 정상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대의 눈은 저 멀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대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놓 친다. 그것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대의 마음은 저기 푸른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대를 에워싸고 있다. 진실은 그대 자신의 심장박동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 그대의 호흡보다, 그대 몸 속을 흐르고 있는 피보다, 그대의 골수보다, 그대의 의식 그 자체보다 더 가까이 있다. 그것은 그대의 핵이며, 그대의 존재이다! 라하만, 정상을 구하지 말라. 정상을 찾는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놓칠 것이다. 그리 고 놓치면 놓칠수록 그대는 악순환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대가 놓칠수록 그대는 더 도 달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놓칠수록 그대는 더 노력한다. 더 놓칠수록 그대는 더 미국인이 된다. "다시, 또 다시 시도해 봐, 더 열심히." 간단한 결론이다. 그대가 놓치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가 충분하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한다. 그 러나 그대는 여전히 놓칠 것이다. 그것을 달성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대는 불가 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날 수가 없다.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그것은 만물의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다. 붓다는 계속해서 말한다. "아에스 담모 사난따노(Aes Dhammo Sanantano)" - 이것이 만물의 본성이다. 만물의 본성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그대는 결코 불행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지옥에 살게 될 것이다. 지옥은 우리의 창조물이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함으로써 지옥을 만들어 낸다. 천국은 우리의 본성이다. 천국은 우리의 천성이며 우리가 언제나 있는 그 곳이다. 그대는 신이 아담과 이브를 그의 왕국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버렸다는 성경의 이야 기를 들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신이 그들을 쫓아낸 이유는 매우 독재적이다. 그들이 신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평범한 아버지처럼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광적인 아버지이다! 아주 사소한, 단지 어 린아이다운 반항, 그것은 천성의 일부이다. 성장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아담과 이 브가 신에게 복종하지 않은데 대해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성의 시작이다. 그것은 혁명의 시작이다. 그것은 성장의, 성숙의, 자유의, 존엄성의 시작이다. 그들은 동물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모든 다른 동물들은 착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고, 성격을 읽고, 계명을 따라고, 아무 의심도 없이 모든 지시를 따르고... 그들은 아직도 똑같이 하고 있다. 때문에 개는 여전히 개로 남아 있고, 독수리는 독수 리로 남아 있으며, 물소는 물소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당나귀는, 아무리 성자처럼 보이 고 거룩해 보일지라도, 여전히 당나귀로 남아 있다. 오직 인간만이 성장했다. 인간의 성장은 바로 이 반항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반항은 당연한 것이다. 모든 아이는 그런 반항과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아이가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아이는 "아니오"를 주장한다. 사실 아이가 " 아니오"를 말할 수 없다면, 아이는 결코 "예"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의 "예"라 는 대답은 "아니오"라는 바탕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니오"라는 칠판이 기본 적으로 필요하다. 그러한 "아니오"의 칠판이 있어야만 아이는 아름다운 "예"를 쓸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을 통해 그는 "예"를 말할 수 있는 인간의 궁극적인 성장 또한 막았다. 그 모든 이야 기는 독재적이며 추하다. 둘째로, 인간을 어디로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전 존재가 에덴 동산이다! 어떤 다 른 장소도, 어떤 다른 공간도, 어떤 다른 시간도 없다. 전 우주가 신성하다. 따라서 그대가 어디에 있든 그대는 에덴 동산 안에 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 도달해야 한다 는 생각이 인간에게 주입된 것이다. 그대는 낙원에 있다. 그러나 그대가 낙원에서 추 방당했으며 낙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생각이 그대의 근심과 그 모든 불행, 그 모 든 고뇌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그대는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갈망한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가 바로 그 곳이기 때문이다. " 바로 이 몸이 붓다이며, 바로 이 곳이 연꽃의 낙원이다." 어떠한 다른 불성도, 어떠한 다른 연꽃의 낙원도 없다. '낙원(paradise)'이라는 말은 페르시아어의 피르다우스(firdaus)에서 나온 것이다. 피르다우스란 동산을 의미한다. 똑같은 이야기이다. 에덴 동산의 이야기인 것이다. 모 두가 낙원을 찾고 있다. 그대는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니르바나, 깨달음, 사마 디, 신의 왕국, 궁극의 진리... (2) 그대는 계속해서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 나 그대는 여전히 놓칠 것이다. 그대가 낙원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낙원에 있으면서도 꿈과 같은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은, 다른 어딘가에, 정상에 다다르고자 하는 그대의 욕망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주장은,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단지 조용히 앉아 주위를 둘러보 라. 조용히 앉아 내면을 바라보라. 그대는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아에스 담모 사 난따노(Aes Dhammo Sanantano), 이것이 만물의 본성이다. 그대는 다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장미는 장미이며 장미일 뿐이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그대는 장미를 미치게 만들 수 있다. 그대는 장미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을 심어 줄 수 있다. "너는 장미가 되어야 한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니? 바람에 흔들리고, 태양 아래 춤을 추며 삶을 놀이로 받아들이고 있다니! 심각해져라. 침울해져라. 경건해져라. 코란을 읽어라. 기 타를 읽어라. 성경을 읽어라." 그대는 장미를 미치게 만들 것이다. 장미들이 그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장미들이 그대가 하는 말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들이 그대의 정치가들, 성직 자들, 교수들의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 다. 그것이 바로 장미들이 그처럼 아름답고 그처럼 순수해 보이는 이유이다. 그대의 성직자들은 그렇게 아름다워질 수가 없다. 그들은 교활해질 수밖에 없다. 커다란 모텔에 투숙한 복음 전도사는 자신의 방에서 몇 시간 동안 책을 읽은 뒤, 아 래층의 술집으로 내려가 배회했다. 거기서 그는 예쁜 외투 보관소 여직원과 대화를 나 누게 되었다. 그녀가 일을 마친 뒤, 그들은 몇 잔의 술을 마시고, 함께 그의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 전도사가 그녀의 블라우스를 벗기기 시작했을 때, 그녀 는 걱정스러운 듯이 보였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물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거룩하신 분이잖아요." "자매여, 이것은 성경에 씌어져 있소."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믿었고, 그들은 함께 매우 즐거운 밤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날 아 침, 근가 떠날 준비를 하다가 물었다. "어젯밤에 당신이 이야기한 성경 구절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좀 보여 주시겠어요?" 대답 대신 복음 전도사는 전등 밑에 있던 성경을 펼쳐, 표지 안쪽의 여백에 누군가 가 써 놓은 것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런 낙서가 있었다. "외투 보관소 여직원이 섹 스를 한다." 이들이 그대의 성직자들, 복음 전도사들,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신경증 에 걸려 있으며, 동시에 전 인류를 신경증으로 몰아넣는다. 그 모든 영적 넌센스를 피 하라. 영적 넌센스는 진짜 넌센스이다. 다른 모든 넌센스들은 매우 흔하고 평범한 것 들에 불과하다. 사실 세속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처럼 어리석어질 수가 없다. 현실 이 그대를 보호하고 과학이 그대를 보호한다. 그대 자신의 실용주의적인 분별력이 그 대를 보호한다. 그러나 종교적 넌센스에는 거칠 것이 없다. 현실도 없고 기준도 없다. 그대는 판단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대는 온갖 비의적 헛소리들(bullshit)에 농락당한 다. (3) 그리고 그대의 성직자들은 대단한 헛소리꾼들이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그대에게 헛 소리를 쏟아 대고 있다. 그대는 그들이 쏟아 놓은 신성한 소똥(bullshit) 속을 허우적 대고 있다. 이제는 빠져 나와야 할 때이다. 데바 라하만, 지금 그대가 존재하고 있는 방식이 그대에게 가능한 유일한 방식이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즐겨라. 그 상태를 사랑하라. 그러 면 정상은 바로 그대의 가슴 속에서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문득 자신 이 에덴 동산에서 깨어났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여기에 있음의 문제이다. 그대는 묻는다. 어떻게 제가 당신에게 갈 수 있을까요? 나에게 올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가야 한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신경 증을 창조해 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얼마든지 있다. 기 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불교... 전세계 300개의 종교들이 있다. 그대는 그대에게 맞는 신경증을 선택할 수 있다. 온갖 모양과 크기의 신경증들이 구비되어 있 다. 그대는 쉽게 원하는 종류의 광신주의, 신경증을 고를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일 생동안 그대를 묶어 둘 것이다. 그러나 단지 묶어 두기만 할 뿐, 춤추고, 노래하고, 축하할 시간이나 공간은 주지 않을 것이다. 모든 목표는 근본적으로 그대 안에 분열과 위선을 창조해 낸다. 그대는 그대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대가 아 닌 그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서서히 그대는 그대가 아닌 다른 것이 된 체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실패만 하는 것은 매우 굴욕적인 일이기 때문 이다. 적어도 그대는 다른 사람인 체할 수 있다. 그대는 가면을 쓸 수 있다. 어떤 가 식, 인격, 복장, 겉모습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겉모습 뒤에서 살아가기 시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대의 가면만을 볼 것이고 그것을 믿을 것이다. 일단 그들이 그것 을 믿기 시작하면, 그대 역시 그것을 믿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대가 성 스럽고 거룩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게임이다. 그대가 그 게임을 시작하지만 머지 않아 그대 스스로 그 게임에 말려든다. 그대 자신의 거짓말에! 그리고 일단 그대가 자신의 거짓말에 걸 려들게 되면, 그대는 진실을 감추려 한다. 진실을 회피하려 한다. 진실을 억압하려 한 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거짓말에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금잔화 이면서 장미가 되는데 일생을 투자한다. 그대는 장미이면서 다이아모드가 되는데 일생 을 투자한다. 그대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이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인 류는 수세기 동안 이런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나의 말은 상처가 된다. 그것은 작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 은 엄청난 차원의 문제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완전한 거짓과 허위의 위선적인 삶 을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가 투자한 모든 것들을, 그의 마음 전체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것은 분명 상처가 된다. 때문에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 만큼 지성적인 일 부의 사람들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자기가 자유주의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말 고리타분해." 고등학교 치어리더 소녀가 로커에서 옷을 갈아 입으며 옆 친구에게 말했다. "글세 내 남자친구 들이 내 허리 위로만 애무를 해야 한다잖아." "어머, 정말 안됐다." 친구가 불쌍한 듯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글세." 치어리더 소녀가 낄낄대며 말했다. "물구나무서기를 배워 볼까해." 그것이 바로 그대의 종교인들이 해 오고 있는 일이다. 시르새사나((sieshasana), 머 리로 물구나무를 서는 요가 기술이다. 틀림없이 그것은 무언가를 충족시켜 준다. 바로 에고이다. (4) 그대가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을 할 수 있다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하는 체할 때, 그것은 에고를 채워 준다. 자연스러운 것은 에고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대가 음식을 먹고, 먹는 것을 즐긴다면, 거기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대나 섹스를 하고 그것을 즐긴다면 거기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대가 섹스를 하고, 그것을 즐긴다면, 거기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그러나 그대가 만약 금욕을 한다 면, 거기에는 자랑할 것이 있다. 그대가 단식을 한다면, 그대는 다른 누구도 갖지 못 한 것을 가진 것이다. 이제 그대는 더 우월하고 더 높고 더 위대하고 더 큰 사람, 선 택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부자연스러운 것에는 그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비록 그것이 그대의 전 생애를 파괴한다 해도... 에고는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가 이 모든 에고의 게임을 버리지 않는다면, 위선은 세상에서 사라질 수 없다. 아파트에 새로 이사온 랍비 골드스타인은 복도 건너편의 이웃과 인사를 하기로 마음 먹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을 때, 그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옷은 별로 걸치지 dsk g은 젊은 아가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미소지슨 미녀 앞에 어안이 벙벙해진 랍비는 정신이 없는 가운데 그녀에게 이상 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자는 앞집에 새로 이사온 설탕입니다. 이웃 한 컵 빌릴 수 있을까요?" 그대는 부자연스러워지려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본성은 온갖 방법으로 스 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본성은 계속해서 떠오를 것이다. 그대는 그 본성을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억압해야 할 것이다. 라스베가스 도박장의 아침 8시였다. 두 남자가 내기 상대를 기다리며 아직도 주사위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그 때 화려하게 차려 입은 갈색 피부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말했다.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운이 좋을 것 같아요. 2 천 달러를 걸고 싶어요. 한 번 해 보시겠어요?" "그럼요. 아가씨." 한 남자가 말했다. "그쪽에서 주사위를 던지시죠."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괜찮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팬티를 벗고 주사위를 던져야 운이 좋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바지와 팬티를 벗어 버렸다. "엄마는 새 팬티가 필요해!"하고 외치며 주사위를 던진 그녀는 환성을 질렀다. "내가 이겼다!" 그리고 그녀는 돈과 바 지와 팬티를 집어 들고 황급히 도박장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은 정신을 잃은 듯 서로 보다가,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봐, 그런데 주사위 숫자가 뭐였어?" 그가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자네가 보고 있을 줄 알았지!" 우리는 jd말 기이한 인류를 창조해 냈다. 그리고 이러한 미친 지구, 미친 인류가 만 들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종교적이고 영적인 데 있다. 그대는 진리를 찾고, 신을 찾고, 정상을 찾는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시을 찾는 것을 잊었다. 찾아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대 자신을 찾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찾기 위 해서는 어디로도 가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대는 그대의 모든 욕 망, 야망, 목표들로부터 자신을 거둬들여야 할 뿐이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라하만, 그대는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의 적이 아니다. 나는 그 대에게 내개 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대가 내가 되려 한다면, 그대는 기껏해야 복사품 이나 위선자가 될 것이다. 모조품이 될 것이다. 나는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나의 추종자들이 아니다. 나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 이 아니다. 단지 동료이며, 함께 축하하고 함께 춤추는 사람들일 뿐이다! 나에게 있어 존재는 하나의 축제이다. 잔치이다. 존재는 춤추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다. 그리고 춤은 내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춤은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일어나야 한다. 바로 이 침묵이 춤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정상도 갈망하지 말라. 단지 그대가 있는 그 곳에 전적으로 존재하라. 거위는 밖에 있다! 정상을 갈구할 때, 거위는 병 속에 있다. 그러한 정상들이 병(bott le)이다. 그러한 목표들이 병이다. 그러한 것들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대를 가 두고 있다. 미래는 그대의 구속이며, 현재는 그대의 자유이다. 이점에서 나는 예수나, 뭇다, 크리쉬나(5), 마하비라(6), 그리고 다른 누구와도 완 전히 다르다. 고의든 아니든 그들은 인류에게 모방의 패턴을 만들어 냈다. 나는 이 모 든 모방의 패턴을, 이 모든 상황을 부숴 버리고 싶다. 나는 그대가 단지 그대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그대가 무엇이든, 그대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그대는 아름 다워지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있다. 만약 그 대가 고통을 원한다면... 그리고 정말로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들의 유일한 기쁨은 고통에 있다. 더 많은 고통에 있다. 더 고 통을 받을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고통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 소란떨지 말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라. 그러나 정상은 그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그 정상에 올라서도 그대는 또 다시 또 다른 정상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학생 기숙 학교의 여자 교장 선생님이 어느 날 밤, 꽤 성숙해 보이는 한 여학생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포브스 선생님," 그녀가 외쳤다. "저 방금 강간당했어요!" 자, 진정해라, 멜리사." 교장선생님은 엄격하게 말했다.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냉장고로 가서 레몬 반쪽을 먹는 것이다." "레몬 반쪽이요?" 놀란 여학생이 물었다. "그것이 임신을 막아 줄까요?" "아니지," 교장선생님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바보같은 웃음을 없애줄거야." 그것이 바로 종교인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대 얼굴을 모든 미소를 없애 버리는 것, 그대가 가능한 한 슬퍼 보이도록, 가능한 한 우울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결코 웃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했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만약 그가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웃지 않았다는 것 은 사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뻐하 라! 나는 끊임없이 그대에게 말한다. 기뻐하라!"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웃지 않 았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웃음은 세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성스러운 사람들에게는 맞 지 않다. 성스러운 사람들은 끊임없이 슬퍼해야 한다. 대문에 그들은 슬프고 병적인 사람들을 숭배하는 오랜 전통을 만들어 냈다. 병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그대는 더 숭배받을 것이다. 그대가 새디스트(7)이거나 매저키스트(8) 일수록 그대는 더 숭배받을 것이다. 자신을 고문하고, 남들에게도 스스 로를 고문하라고 가르쳐라. 그들은 그것을 고행이라고 부른다. 승려가 되라. 세상을 포기하라... '승려(monk)'라는 단어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 러나 사실은, 성장의 기회가 되는 것은 관계이다.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 다. 그대를 그대의 진정한 본성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그 모든 삶의 모험과 도전이다. 승려들은 계속해서 지진아로 남아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람의 토양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들 은 기껏해야 온실 속의 식물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에 꺼내 놓으면 즉시 말라 죽어 버 린다. 그들은 매우 두려움에 찬 사람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두려움에 떤다. 존재하 지도 않는 지옥을 두려워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천국을 갈망하며... 그 지옥과 천국 사이에서,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놓친다. 연애에 서투른 젊은이가, 웬만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여자에게 성적인 욕망을 일 으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자의 손을 자신의 성기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는 말을 들 었다. 여자 친구를 차에 태우고, 사방에서 연인들이 다정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오솔 길에 차를 세운지 한 시간만에, 그는 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녀 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녀는 그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심한 욕설을 끊임없이 퍼부 어댔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가 대꾸를 하려 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 고 즉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다그쳐 물었다. "자, 할말 있으면 해 봐!" "할 말 있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제발 이 손 좀 놔 줘." 사랑하는 오쇼. 저는 심한 말더듬으로 고통받고 있는 동성애의 카톨릭 신자입니다. 저를 이 곤 경에서 구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갸네쉬와르(Gyaneshwar), 그대가 벗어나야 할 첫 번째 것은 카톨릭이다. 그것이 진 짜 문제이다. 동성애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유의 일부이다. 만약 두 사람이 성적인 관계를 맺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한다면, 거기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람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직자들과 정치가들 은 모든 곳에 코를 들이밀고 참견을 한다! 그들은 그대 안에 죄의식을 만들어 낸다.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죄의식을... 만약 두 남자가 사랑에 빠져 있다면, 거기 잘못된 것이 뭐가 있는가? 그들이 누구에 게 무슨 해를 끼치고 있는가? 사실 그들이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행복해 보인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게이(9)'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즐거워 보이는 레즈비언(10)들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슬퍼 보인다. 그들은 매 우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남자 동성애자들은 매우 즐겁고, 행복하고, 정말로 달콤해 보인다.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해 보았다. 왜 레즈비언들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을 까? 아마도 그것은 여자들의 영원한 기쁨인 잔소리를 즐길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사 실, 여자들의 잔소리가 없었다면 아무도 종교적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의 모든 성자들은 잔소리의 부산물이다. 그대의 성자들은 모두가 여자들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여자들이 그들을 영적인 길로 몰아간 것이다. 세상 안에서는 여자들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수도원으로 달아나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을 찾으러 간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단지 아내로부터 달아나 는 것뿐이다. 레즈비언들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가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이 서로를 괴롭힐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한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아무런 신비가 남아 있지 않다. 남자는 머리로 산다. 그리고 여자는 가슴으로 산다. 가슴은 신비스러운 무언가가 있 을 때에만 즐거워한다. 공안과 같은 것. 병 속의 거위. 병을 깨뜨려도 안 되고, 거위 가 죽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거위는 나와야 한다... 가슴은 신비로운 것을 즐긴다. 머리는 신비로운 것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는 골치 아픈 문제, 수수께끼같은 것에 관 심이 있다. 수수께끼라면 머리는 뭐든 흥미를 갖는다. 머리의 방식은 논리적인 것이 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는 신비스런 존재이다. 여자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가슴으로 내 려와야 한다. 그러나 남자는 머리에서 산다. 때문에 여자는 언제나 골치거리이다. 남 자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빠져 나갈 수 도 없다. 그 신비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그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준다. 여자 는 남자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러나 남자끼리라면 일은 간단하다. 양쪽 모두 논리적이다.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한다. 서로의 논리를 이해한다. 서로의 수학과 계산을 이해한다. 남자에게 있어, 남자란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야 할 신비가 아닌, 풀어야 할 문제이다. 풀릴 수 있는 문제, 푸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문제이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때문에 남성 동성 연애자들은 즐거워 보인다. 레즈비언들은 매우 슬퍼 보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게이들은 점점 더 여성적인 되어 간다. 그들은 어떤 아름 다움, 세세함, 부드러움, 우아함을 가지기 시작한다. 레즈비언들은 남성적이 된다. 자 신의 여성적인 우아함을 잃기 시작한다. 남자같고, 거칠고, 공격적이 된다. 따라서 갸 네쉬와르, 그대가 여자였다면 동성연애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거기 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노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남성이다. 왜 신경을 쓰는가? 왜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만약 그대가 남자와의 관계를 즐기고 있다면, 그 것을 즐겨라! 기독교의 하느님 스스로도 동성애자인 것으로 보인다. 삼위일체는 세 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떻게 그들이 자식을 낳을 수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단 하명의 여 자도 없다! 단지 성령(Holy Ghost)만이 조금 의심스럽다. 아마도 성령은 양성애자인 모양이다. 유령들(Ghosts)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버 지와 아들과 성령... 무슨 삼위일체가 이렇단 말인가? 상당히 동성애적이다! 그들은 삼위일체 안에 단 한명의 여자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말썽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한 명의 여자는 그 삼위일체 전체를 파괴하기에 족했을 것이다. 그것은 삼위일체가 아 니라 삼각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진짜 문제들을 바라보기 시작해야 한 다. 그리고 거짓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해결되어야 할 진짜 문 제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 마음의 책략이다. 거짓 문제들을 만들어냄으로 써, 진짜 문제들이 자라나는 동안 그대가 계속 그 거짓 문제들에 붙잡혀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랜 전략이다. 정치가들, 성직자들,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사 람들은 계속해서 그대에게 풀어야 할 가짜 문제들을 줌으로써 그대가 그 가짜들에 마 음을 빼앗기도록 한다. 동성애 자체는 의미가 없다. 사실 그것은 전혀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그 동성애 때 문에 여지껏 얼마나 많은 소동들이 있어 왔는가! 아직도 사람들이 동성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고, 살인을 당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 나라들이 있다. 이상한 세 상이다! 이것이 20세기의 세상인가? 동성애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해결해야 할 수 천가지나 되는 진짜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장난감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나의 노력은 그대의 모든 관심을 장난감들로부터 거둬들여, 그대가 삶의 진짜 문제 들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진짜 문제들에 초점을 맞 춘다면 그 문제들을 해결될 수 있다. 자, 나는 동성애가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 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신경써야 하는가? 연애는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그들만의 친밀함이다. 사회적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된다면 그것은 세계 인구 조절에 도움이 도릭 서이다. 그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세계를 위해 매우 좋은 일일 것이다. 더 적은 사람들이 태어날 것이고, 지구는 짐을 덜 것이며, 가난도 줄어들 것이다. 물론 고아들 도 줄어들고 테레사 수녀같은 사람들고 줄어들 것이다! 피임약이나 피임 기구, 불임 수술에 대한 필요성도 줄어들 것이다. 물론 폴란드인 교황(11)의 할 일도 없어질 것이 다. 그것이 그의 모든 업무이다. 일 년 내내 그는 피임과 임신조절, 불임 수술, 낙태 를 비난한다. 동성 연애는 이 모든 문제들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동성애에 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일한 문제는 그대의 카 톨릭이다. 존경받는 보스턴 가문의 장남인 로드니는 동성 연애 남자 친구와 비컨힐에서 드러내 놓고 살 생각임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말도 안 된다, 로드니," 부모가 말했다. "우리 가문은 존 윈스로프 가문 못지않은 명가문이다. 이제껏 그런 스캔들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아버지, 저는 그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제발, 아들아, 그는 카톨릭신자잖니!" 그것이 진짜 문제이다! 그대의 카톨릭에서 빠져 나와라.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카톨 릭에서 벗어나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 모든 어리석은 이데올로기들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마치 그 대가 아담과 이브인 것처럼, 지구상의 첫 번째 남자, 첫 번째 여자인 것처럼 살기 시 작하라. 출발선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그리고 그대의 말더듬 문제라면, 거기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마도 그대가 말을 더듬게 된 것은 동성애 때문에 너무 많은 쓸데없는 걱정들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 른다. 나는 스트레스와 긴장 때문에 말더듬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나의 이웃에는 잘 생기고 건강한, 모든 면에서 지적인 젊은 이가 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가 말을 더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그 의 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는데, 그는 아버지 앞에 서자 즉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 는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그는 완벽하게 괜찮아졌다. 나는 그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는 말을 더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말이 안 나옵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때도 나는 갑자기 떨기 시작합니 다. 나는 아버지의 편지조차 말을 더듬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만 아니 라면 나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말더듬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압 박감, 긴장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가 되는 r서입니다. 아버 지가 당신을 당신의 어린 시절로, 당신의 옛 두려움으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그리 고 그 두려움들이 당신의 지성을 뒤덮여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 다. "이렇게 해 보십시오. 다음 번에 아버지가 오실 때에는 한 마디도 놓치지 말고 말 을 더듬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해 보라니까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반대로 더듬으 려고 노력하세요. 단 한마디도 더듬거리지 않고는 내보내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 십시오!" 그는 말했다. "도대체 무슨 제안을 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여지껏 더듬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실패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방법은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아 보 이는군요." 나는 말했다. "한 번 해 보세요." 아버지가 왔고, 나는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방법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더듬을 수가 없었다. 그대가 노력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아야만 일어나는 일들 도 있다. 왜냐하면 그 노력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며, 두려움에서 나온 노력은 아 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면요법가들은 그것을 "역효과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고 하자. 넓이가 이십 미터쯤 되는 텅 빈 길을 혼자 자 전거를 타고 있다. 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때 길가에 있는 돌로 된 이정표를 본다. 그리고 갑자기 그대의 자전거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 돌 이정표를 향해 가기 시 작한다. 그대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정표를 피하려 한다. 이제, 이십 미터 넓이의 길에서 장님이라 해도 그 이정표에 부딪칠 확률은 아주 적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대의 초점은 더욱 그 이정표에 집중된 다. 이제 길 전체가 사라진다. 오직 그 이정표만이 거기 서서 원숭이 신 하누만지(12) 처럼 당신을 쳐다보며 낄낄대고 있다. 마치 자력처럼 그대를 끌어당기며... 그대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지만 계속 그쪽으로 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가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피할 수 없는 일 이라고 느낄수록 그대는 더욱 더 그대의 에너지를 다해 그것을 피하려 한다. 그대는 긴장된다. 전 세상이 하누만지만하게 줄어들어 버렸다. 그리고 쾅! 이것은 근본적인 삶의 법칙 중의 하나이다. 동성애가 원인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정 말 문제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그대의 태도이다. 그대는 동성애로부터 문 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문제가 된다. 갸네쉬와르, 나의 제안은 아름답게 더듬으라는 것이다. 말더듬을 노래로 만들어라! 그대도 즐길 것이고, 듣는 사람들도 즐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 있 는 이유이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치유될 것입니다!" 신앙 부흥 집회에서 복음 전도사가 외쳤다. 목발을 짚은 여자와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복음전도사는 여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주머니?" "스미스 부인입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지난 20년 동안 목발 없이는 걷지를 못했습니다." "좋습니다. 스미스 부인," 그가 말했다. "저기 장막 뒤로 가셔서 기도하십시오." 그가 다시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데 이듬은 타무엣트인니다. 뎌는 늘 혀딸븐 소디를 낸니다." "좋습니다. 사무엘스씨," 복음 전도사가 말했다. "저 장막 뒤로 가셔서 스미스 부인 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몇분이 지난 뒤, 복음 전도사가 말했다. "자,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기적을 보십시오. 스미스 부인, 왼쪽 목발을 장막 너머로 던지십시오." 목발이 날 아왔고,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스미스 부인, 오른쪽 목발도 장막 너머로 던지십시오." 두 번째 목발이 날아왔고, 청중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용기를 얻은 복음 전도사가 외쳤다. "사무엘스씨, 우리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크고 분명한 소리로 뭔가 말해 보세요." 사무엘스가 대답했다. "방금 트미트 부인이 언던방아를 띠었뜬니다!" 그래서 거기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훨씬 더 커다란 기적이다! 불필요 한 일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즐겁게 더듬어라. 그것을 즐겨라. 그 때 그대는 말더 듬을 없앨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조심하라! 그대가 말더듬을 없애고 싶지 않다면 나 의 말을 듣지 말라. 그저 계속 말을 더듬지 않으려 애써라. 나의 제안은 더듬으라는 것이다. 구두쇠가 되지 말라. 모든 곳을 말더듬으로 채워라 ! 그대가 누구를 만나든 더듬어라! 단 한 번의 기회도 놓치지 말라. 재대로 말할 수 있는 단어도 제대로 말하지 말라. 더등어라! 그러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일단 그대가 이완하면, 일단 그대가 즐기기 시작하면, 일단 긴장이 사라지고 나면 말더듬은 사라질 것이다. 만약 말더듬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좋다.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거기 에는 아무것도 해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은 무해하다! 삶을 가능한 한 쉽게 받아들여라.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 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삶은 신비(mystery)이다. 해결되어야 할 것이 아닌, 살 아야 할 신비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오쇼, 당신이 말씀하실 때,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삶은 고통(misery)이다. 해결될 수 없는, 살아야 할 고통이 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나로서는 삶은 신비이다. 해결할 문제가 아닌 살아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고통'이라고 들을 수도 있다. 스스로 불필요한 문제들을 만들어 내지 말라. 그래서 그대의 모든 에너지가 본질적 인 문제에 집중될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란 오직 한 가지이다. 너 자신을 알라. 사랑하는 오쇼. 저는 달에 가는데 엄청나게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이 갈망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달에 관한, 한두 가지 농담을 들려 주실 수 있습니까? 간다르바(Gandharva), 아마도 그 때문에 그대가 나에게 온 것일 것이다. 그대는 미 치광이(moonstruck) (13)이다. 즉 정신이 돌았다는(lunatic) 말이다! '돌았다(lunati c)'는 말은 단순히 달에 부딪쳤다는 것을 의미 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곳은 미친 사 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대는 달에 온 것이다! 그대의 오랜 갈망이 충족되었다... 거위 는 밖에 있다! 하지만 그대를 위한 두 가지 농담이 있다. 달에 착륙한 우주 비행사는 곧바로 이 기이하고 새로운 땅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 가 걷기 시작한 지 십오 분쯤 되었을 때, 그는 빈 그릇을 열심히 막대로 휘젓고 있는 사랑스런 달 처녀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달을 탐험하기 위해 여기 온 우주 비행 사입니다." 달 처녀는 젓기를 멈추고 그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당신도 우리 달 사 람들과 똑같이 생겼다니 놀랍군요." 그녀는 옷을 벗어 던지고는 말했다. "저는 지구 여자들과 똑같은가요?" "예, 그렇군요," 이제는 흥분한 우주 비행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왜 그릇을 젓고 있지요?" "아이를 만들고 있어요."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몇 분 뒤, 그릇 속에서 아 이가 나타났다. "그럼 지구에서 우리가 어떻게 아이를 만드는지 보시겠습니까?" 우주 비행사가 말했 다. 그녀는 동의했고, 우주 비행사가 말했다. 그녀는 동의했고, 우주 비행사는 그녀에 게 정열적인 시범을 보여 주었다. "아주 즐겁군요." 그녀는 끝난 뒤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디 있죠?" "아, 아이가 나오려면 아홉 달이 걸립니다." 우주 비행사가 설명했다. "아홉 달이라구요?" 그녀가 물었다. "그럼 왜 휘젓기를 멈췄죠?" 지구의 과학자들이 달과 지구의 생물학적 차이를 밝히기 위해 일주일 동안 달에 머 물고 있었다. "이 행성에서는 어떻게 종을 번식시키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지구 과학자가 달 과학자에게 물었다. "기꺼이 시범을 보여 드리죠." 달 그룹의 리더는 세 개의 머리가 달려 있는 육감적 인 달 미녀를 불러 냈다. 그들은 잠시 서로의 촉수를 비볐고, 그러자 즉시 여자의 등 에 작은 주머니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분이 좀 더 지나자, 마치 꽃이 피어나 듯 주머니가 열리며 작은 달 아기가 떨어졌다. 성인처럼 완전히 발달되었지만 크기만 작은 달 아기는 방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 예기치 않은 경험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지구 과학자들은 지구의 생식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달 사람들은 시범을 보여 줄 것을 청했다. 몇 번을 사양하던 지구 탐험대의 과학자 대표는 마침내 동의했다. 미모의 조수를 선택한 그는 방 구석의 간이 침대로 가서 지구의 사람들이 익숙한 방식대로 관계를 가졌다. 달 사람들은 모든 각도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일이 끝났을 때, 그들의 리더 가 말했다. "확실히 유별나군요. 그리고 흥미로웠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하 지만 아기는 어디 있죠? 시범이 실패했나요?" 지구 과학자가 대답했다.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접촉이 성공적이었자면, 아기는 대략 아홉 달 후에 태어날 것입니다." "아홉 달이라구요?" 달 사람이 소리쳤다. "놀랍군요! 하지만 박사, 지구 아이가 아 홉 달이나 뒤에 태어날 것이라면, 왜 마지막에 그렇게 서둘렀죠?" 오늘은 이만. (1)스와미(Swami) : 승려를 뜻하는 인도어로, 전통적으로 구도자나 요기의 이름 앞 에 붙여 왔던 호칭. 오쇼의 산야신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될 때에도, 남자 산야 신의 이름 앞에는 '스와미'가 붙고 여자 산야신의 앞에는 어머니, 모성을 의미하는 ' 마(Ma)'가 붙는다. (2)사마디(samadhi) : 삼매, 자아와 마음의 한계를 넘어 우주의식과 합일된 상태를 일컫는 말. 이 상태를 체험함으로서 명상자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넘어서 '아는 자' 를 알게 된다. 동시에 죽음이나 무덤을 뜻하기도 한다. (3)bullshit : 소똥 또는 쓸데없는 헛소리. (4)에고(ego) : 인간이 '나'라고 믿는 허상. (5)크리쉬나(Krishna) :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중요한 신으로 비쉬누 신의 화신. 바 가바드 기타에서 아르쥬나에게 가르침을 펴는 이도 바로 이 크리쉬나이다. 크리쉬나를 BC 7세기경의 실존 인물로 보는 이도 있다. (6)마하비라(Mahavira, BC 448? - BC 376?) :자이나교(Jainism)의 창시자. 붓다가 거의 동시대 인물. '마하비라'는 '번뇌를 물리치고 해탈을 얻은 자'라는 뜻의 존칭. 부모의 죽은 후 출가하여 12년의 고행 끝에 잠브히야가마(Jamvhiyagama) 근처에서 깨 달음을 얻었다. 30여 년 동안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법하며 곳곳을 여행했고 72세에 파트나시 근교에서 생을 마쳤다. (7)새디스트(sadist) : 상대방에서 고통을 줌으로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성욕. 프랑 스의 소설가 사드(Sade)의 이름에서 유래됨. (8)매저키스트(masochist) : 상대방으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 적 만족을 얻는 이상성욕인 매저키즘(masochism)을 가진 사람. 이런 경향의 인물을 묘 사하고 자기 스스로도 이러한 경향을 가졌던 작가 매저크(Masoch)의 이름을 따서 오스 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인 크라프트 에빙(Kraft Ebing)이 붙인 말. (9)게이(gay) : 남성 동성 연애자를 듯하며, gay라는 단어 자체가 '명랑한', '쾌할 한'을 의미한다. (10)레즈비언(lesbian) : 여성 동성 연애자. (11)폴라드인 교황(Polack pope)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Polack은 폴라드인을 부 르는 속어. 오쇼는 각 나라별 특성을 빗대어 많은 농담을 했는데, 폴라드인은 어리숙 함, 유태인은 장사꾼 기질, 독일인은 딱딱함, 이태리인은 놀기 좋아하는 기질 등으로 표현된다. (12)하누만(Hanuman) :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서 라마와 시타를 돕는 원숭이 장군. 이성적인 신하의 상징으로 현재는 신으로 받들어져 곳곳에 사원이 있다. 지(ji) 는 존칭형 어미. (13)moonstruck은 '미친'을 의미하는 단어로, moon(달) + struck(부딪친, 얻어맞은) . 옛 점성학에서 사람이 미치는 것을 달의 영향이라고 생각한 데서 유래. 역시 미쳤다 는 뜻의 lunatic에서 luna 또한 달, 달의 여신을 의미함. @ff 초월이 불성을 가져온다 사랑하는 오쇼. 왜 인도인들은 섹스를 즐거움이 아닌 필요의 관점으로 생각합니까?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섹스를 초월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억압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쇼, 때로 당신이 붓다와 미친 사람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듯이, 억압과 초월 사이에 사람들이 착각을 일으킬만한 어떤 유사점이 있습니까? 무케쉬 바르티(Mukesh Bharti), 인도 문화는 세상에 전개된 문화 중 가장 타락 문화 이다. 가장 타락한, 속속들이 타락한 문화이다. 그것은 너무나 타락해서 어떻게 죽어 야 할지조차 잊었다. 죽기 위해서는 약간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대가 죽는 방법을 모 른다면, 그대는 그저 무기력하게 연명해 간다. 죽음은 부활의 한 과정이다. 각 개인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듯이, 각 각의 문화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각각의 사회, 각각의 문명은 삶에 서 죽음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삶으로 거쳐가야 한다. 인도 문화는 수천 년간 죽지 않 은 유일한 문화이다. 세상에는 여러 문화가 있었다. 앗시리아(1) 바빌론(2), 그리스, 로마, 이집트 문화, 그들은 모두 꽃피어났다. (1), (2), 그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아름다움, 그들의 조각, 그들의 미술, 그들의 시, 그들의 연극에 바쳤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이 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 가족의 모든 과거 사람들이 살아 있다면... 그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 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끝까지 올라가 아담과 이브, 하느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다면, 그렇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대는 짓밟혔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늙은 사람들, 그 모든 시체들은 장미처럼 섬세한 어린아이를 짓밟기에 충분하다. 프리드리히 니체(3)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는 "신은 죽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신은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울 것이다. 산처럼 거대할 것이다. 그는 인간의 신선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탐험을 허 락하지 않을 것이다. 늙은이는 너무나 신중하고, 너무나 교활하며, 너무나 계산적이 고, 너무나 유태인적이다. 그의 모든 과거의 경험은 어린아이를 파괴하기에 충분하다. 어린아이는 탐험을 필요로 한다. 어린아이는 탐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물론 탐험을 하려면 그대는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성장의 한 부분이다. 사람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 한다. 사람은 틀림없이 같은 실수를 계 속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지적이다. 사람은 새로운 실수를 발명해 낼 수 있을 만큼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 확장되는, 성장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의식이 완성되는 방법이다. 삶은 시험과 실수의 과정이다. 노인은 모든 잘못과 실수를 피한다. 그는 옳은 일만 하는데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탐험과 모험은 그의 삶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자 신의 두려움 때문에 그는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노인은 그들이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이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 는 일이다. 인도는 기이하다. 어떤 면에서는 비상하다. 이런 일은 어떤 것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다. 모든 나라와 문화와 문명은 살았었고, 죽었고, 그리고 다시 부활했다. 인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진짜 장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플라스틱 조화와 같다. 인 도는 생명력보다는 안정에 더 관심이 많다. 인도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영원히 지속해 나가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매순간을 전체적으로 살 것인가... 이것 은 지속의 문제가 아닌 깊이의 문제이다. 오직 삶을 깊이 사는 사람들만이 삶이 무엇 인지를 안다. 삶을 지속적인 관점에서 사는 사람들은 수평적이고 표면적인 삶만을 살 뿐이다. 그들의 삶은 가면이다. 그 안에는 진정한 것이 없다. 따라서 나는 인도의 문 화는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일종의 표류 상태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령 문화이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삶을 기쁨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은 사라져 벌렸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고 영원한 것, 플라스틱과 같은 것들만이 모이게 되었다. 그것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이것이 노인의 방식이다. 노인은 언제나 안전, 무사함, 예금 잔액만을 생 각한다. 그는 언제나 두려움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죽음이 언제나 그의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결코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삶이다. 그는 지도에 없는 곳, 미지의 속으로 가는데 관심이 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 고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오직 그들만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 한 순간만 이라도 진정하게,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 한 순간 의 전체적인 경험이 모든 영원보다도 훨씬 거대하다. 그것은 영원 전체를 포함한다. 무한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수천 년 동안을 양배추나 꽃양배추들처럼 성스 러운 모습으로 연명해 갈 수도 있다. 양배추들은 죄가 없다. 그리고 꽃양배추들은 위대한 학자들이다. 양배추는 대학 교 육을 통해 꽃양배추가 된다. 꽃양배추는 펀디트(4), 신학자, 종교인들이다. 이 나라는 이러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짐은 엄청나다. 누군가, 이 나라를 다시 살게 하기 위해서 먼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나라를 다시 살게 하기 위해서 먼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위한 기본 조건이 다. 삶의 기술 이전에 죽음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나라는 악취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과거를 자랑한다. 이 나라는 거짓을 사랑한다. 성스러움을 자랑한다. 영적임을 자랑한다. 그 것은 모두 무의미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토대가 없이 사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원을 이야기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먼저 근본적인 토대가 있어야 한다. 삶은 필요들의 단계이다. 먼저 육체적인 면이 돌봐져야 하며, 물질적인 생활이 보장 되어야 한다. 과학은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만약 그대가 과학을 제쳐 두려 한다면 그대는 종교를 놓칠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예술의 세계가 있다. 이것이 삶의 세 가지 근본적인 차원이다. 과학이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생물학적 인 것, 인간의 외적인 필요물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는 내면 깊숙한 곳, 내 적인 것, 주관적인 것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미학의 세계가 있다. 예 술, 시, 음악, 춤, 연극, 문학. 배고픈 사람은 시를 생각할 수 없다. 배고픈 사람은 명상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인도의 에고는 그 가난을 숨기려 한다. 소위 인도 정 신주의(Indian spiritualism), 전세계를 영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겠다는 이른바 인도 문화의 희망은 단지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그것은 완전한 넌센스이며 헛소리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체면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유일한 방책이다. 그들은 오직 이런 장막 뒤에서만 체면을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육체가 배고프다는 것을 안다. 그들 은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 으며 어디 하나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인구의 98퍼센트가 거지와 같은 상태에서 살 고 있다. 아무도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양 부족 상태 에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영양 부족일 때,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의 육체뿐만이 아 니다. 기억하라, 영양부족은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그대의 정신을 파괴한다, 마음은 스스로를 위한 자양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육체가 충족되어야 한다. 육체가 충족된 후에도 무언가가 남아 있을 때, 그 때 그것은 외세포로 간다. 마음은 사치품이 기 때문이다. 마음은 인간이 육체적인 필요를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에 너지가 남게 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 여분의 에너지가 뇌가 되고, 마음 이 되고, 심리가 된 것이다. 심리적 필요가 충족될 때, 완전히 충족될 때, 이제 또 다시 더 많은 에너지가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영적인 것으로, 명상으로, 불성으로 변형된다. 그러나 인도는 슬픈 상황에 있다. 그리고 가장 슬픈 일은, 인도인들이 그것을 드러 내기 보다는 숨기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화가 났다. 그들은 내가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와가 났다. 그들이 나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를 존경하고, 위대한 마하트마, 신의 화신, 그리고 온갖 쓰레기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 이 있다. 내가 그들의 상처를 계속해서 감춰 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누구의 상처도 덮어줄 수 없다. 나는 그것들을 치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치유의 과정은 완전히 다른 과정이다. 먼저 그대는 그대의 상처를 태양 아래, 바람 속 에 드러내야 한다. 그대는 상처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아프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비밀로 감추었던 상처가 갑자기 드러난다면... 그대는 믿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위대한 정신주의자라고 믿어 왔지만 나는 그 모든 거짓과 위선을 안 다. 그리고 가장 큰 위선은 두 가지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것은 음식과 섹스이다. 음식과 섹스는 기본적인 필요이다. 그것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음식은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하다. 사람은 섹스 없이도 생존할 수 있다. 별로 즐겁지는 않겠지만 살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음식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는 말라 죽을 것이다. 만약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석 달, 90일은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완전히 건강하고 지방과 여러 다른 형태로 그의 몸에 충 분한 여분의 식량이 축적되어 있을 때이다. 그렇다면 그는 석 달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러한 생존은 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식인 행위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이다. 그대가 굶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고기를 먹는다. 따라서 나는 단신을 반대한다. 그것은 가장 나쁜 종류의 육식이다. 단 식을 하면 그대는 매일 1킬로그램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 무게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대가 소화시키는 것이다. 석 달 안에 그대는 죽을 것이다. 사람은 음식 없이 한 동안 살아 있을 수 있다. 섹스 없이는 살아 있을 수 있다. 생 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종족은 섹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종족을 위한 음식이다. 섹스는 종족을 위한 음식이다. 섹스가 없다면 인류는 사라질 것이다. 따라 서 금욕을 가르쳐 온 사람들은 살인자들이다. 인류에 금욕을 가르쳐 온 사람들은 근본 적으로 인류의 뿌리를 자르고 있다. 만약 그들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인류는 살아남 지 못했을 것이다. 마하비라는 없었을 것이다. 붓다도, 크리쉬나도, 마호멧도 없었을 것이다. 까비르( 5)도, 나나크(6)도... 만약 그들의 아버지가 금욕이라는 생각을 따랐다면 그들은 없었 을 것이다. 그것은 잘된 일이다. 붓다의 아버지는 금욕이라는 바보같은 생각을 따르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세계는 가장 위대한 꽃피어남의 하나를 잃 었을 것이다. 만약 금욕이 지속된다면 인류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매우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 대가 오직 그대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기적이다. 인도인들은 계속해서 영성과 무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얼굴로 금욕에 대해 이야기한다. 금욕은 이기주의이다. 절대적인 이기주의이다. 그대의 부모와 그들의 부모, 그리고 또 그들의 부모들이 모두 그대를 탄생시키는데 함께 참여했다. 이제 와서 금욕을 시도하 고 금욕을 강요하는 것은 그대가 인류의 미래라는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을 의미할 뿐이 다. 그런데 그대는 그것을 무욕이라 부르는가? 그것을 영성이라 부르는가? 그것은 순수한 이기주의이다. 마치 그대가 전 존재의 중심인 것처럼, 마치 전 존재 가 단지 그대를 위해 존재한다는... 그대는 이미 생산되었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모두 다 사라져도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한 금욕의 가르침이 계속되지만 아무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부자연스 러운 가르침은 따를 수가 없다. 그것이 금욕이 지닌 유일한 장점이다. 단지 몇몇 바보 들만이, 광신자들만이,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만이 그것을 따르려고 애쓸 것이다. 그 러나 지적인 사람들이라면 아무도 그러한 생각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두 가지 문제점을 만들어 낸다. 하나는 교활한 사람들, 그 들은 위선적이 된다. 그리고 순진한 사람들, 그들은 죄의식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인도 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같은 일이 더 큰 규모로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것은 전염병이다. 그 병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그 진원지는 인도인 듯 하다. 사람들에게 위선과 죄의식을 일으키는 전염병이다. 그것이 세계에 대한 인도의 유일한 기여이다. 두 가지 모두 추한 예에 불과하다. 세계는 위선도, 죄의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성직자, 승려, 마하트마, 성자가 되고, 죄의식을 갖는 사람들은 그들의 추종자들이 된다. 이것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게임이다. 그대는 묻는다, 무케쉬 바르티. 왜 인도인들은 섹스를 필요의 관점에서 생각합니까...? 그들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들에 게는 섹스 또한 하나의 필요이다. 빈곤한 사람의 눈은 모든 곳에 그의 필요를 투영한 다. 그대는 그대가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그대는 그대가 들을 수 있는 것만 듣는다. 그대는 끊임없이 그대의 필요에 따라 선택을 하고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여자도 단지 맛있는 음식으로 보일 뿐이다. 생각 그 자체가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 는지를 보여준다. 세계의 모든 언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들이 있다. 사람들은 '먹는다.'와 같은 말 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인이 여자에게 "나는 너를 먹고 싶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사랑인가? 연인들이 서로 물어뜯고, 연인들이 서로를 씹는다. 마치 껌을 씹듯이. .. 연인들이 서로에게 이빨 자국을 남긴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시란 말인가? 서로 손 톱으로 할퀴고... 이것이 과연 사랑인가, 아니면 그 뒤에 뭔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사랑은 서로간의 깊은 보살핌이어야 한다. 음식, 물건, 먹고 물어뜯는 관점에서 생 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추한 표현들이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온갖 종류의 필요 속에서 살아왔다. 따라서 섹스 또한 단지 필 요, 기껏해야 하나의 해방감이나 진정제가 되어 버린다. 그대가 크게 재채기를 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해방감이다. 어떤 짐, 어떤 긴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충족이 없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다. 인도인들은 마치 도둑질을 하듯이, 마치 어떤 옳지 않은 일을 하듯이 섹스를 한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신을 거역하는 것처럼, 어떤 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섹스를 한다. 물론 그들은 섹스를 해야 한다. 그들은 섹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다른 필요들이 충족되지 않는 한, 섹스는 단지 하나의 필요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충족될 때, 사랑은 완전히 다른 차원을 갖기 시작한다. 그 차원은 즐거움이며, 춤이 며, 음악이다. 그 때 그대는 섹스를 이완으로, 진정제로, 재채기로서 이용하지 않게 된다. 그대는 나누기 시작한다. 사랑이 더 중요해지고, 섹스는 그 다음 문제가 된다. 섹스가 필요일 때, 사랑은 단지 말일 뿐이다. 섹스만이 유일한 것이다. 생식 행위만 이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은 전 세계를 통해서 과학적으로 관찰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왜인가? 그들은 즐길 수 있는 다른 기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보상자, TV도 없다. 그들은 하루 여섯 시간 동안 의자에 붙어 있을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의자도 없다. 그들은 어떤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호텔에 갈 돈도 없고, 극장에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춤추거나, 노래 를 부르러 갈 돈도 없다. 모든 가능성이 막혀 있다. 하루의 피곤함, 판에 박힌 일상, 똑같은 틀에 박힌 일들... 유일한 가능성, 그들이 할 수 있는 무료 오락은 섹스뿐이 다. 그것이 그들의 일과의 마지막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잠을 자기 전에 종교적으로 1-2분을 섹스에 바친다. 그리고 나서 깊은 잠에 빠진다. 한 신혼 부부가 교외에 위치한 그들의 집에서 한 독신자를 대접하고 있었는데, 대화 가 성도덕쪽으로 흘러갔다. 인도인 독신자가 남편에게 따져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자유주의자라면, 내가 천 달러를 내고 당신 부인의 가슴에 키스하도록 할 수 있소?" 부부는 아무 거리낌없이 그 액수에 동의했고, 부인은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벗었 다. 그러나 사내는 그녀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몇 분 동안 얼굴만 비벼 댔다. 마침내 남편이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어서 거기에 키스를 하시오." 사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그러고 싶지만, 사실 제가 그럴 만한 금전적인 여유가 없군요." 문제는 그대가 다른 무엇을 할 만한 여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인의 마음 에 섹스는 동물적인 행위로 남게 된다. 그들에게 섹스는 결코 시적인 아름다움의 영역 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결코 사랑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대가 인도인에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즉시 그대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사랑'은 즉시, 자동적으로 '섹스'로 해석된다. 인도인에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온 나라의 수백만 인도인들과 이야기해 온 나의 경험이다.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해도, 그 단어가 그들에게 도달할 때쯤이면, 그것은 섹스가 된다. 그들은 섹스만을 안다. 사랑은 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랑을 섹스로 이해하 는 것은 너무나 큰 오해이기 때문에 대화가 될 수가 없다. 인도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대는 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대는 영혼에 대해, 모크샤(7)에 대해, 니 르바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대는 베다(8)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면 오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앵무새처럼 수천년 동안 그러한 말들을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대의 말을 이해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단어 만은 이해할 것이다. 그대가 신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그 의미를 안다. 그 경험은 모 르지만, 적어도 그 의미는 전달된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단어 의 의미조차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한참 더 멀리 있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 그녀는 막 샤워를 끝내고 있었다. 그녀는 풍만한 핑크빛 알몸 을 떨며, 발끝으로 걸어서 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누구세요?" "장님(blind man)입니다."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한 손을 핸드백쪽으로 뻗으며 다른 손으로는 문을 열었다. 그녀가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입이 귀까지 찢어져 히죽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양 팔에 커다란 짐꾸러미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 볼 수 있잖아요!" 그녀는 외쳤다. "그럼요," 그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그런데 이 블라인 드는 어디에 달아 드릴까요?" 로맨틱한 청년이 한 여자와 공원 벤치에 앉아 첫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 의 매력적인 말과 매너가, 많은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그녀에게도 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달이 정말 아름답군요." 그는 속삭였다. "정말 그래요." 그녀는 동의했다. "하늘에는 정말 별이 밝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풀밭에 이슬이 아름답군요(Some dew on the grass)." (9)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녀는 분개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가 아 니에요!" 인도인들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들은 결코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는 것은 기계적인 성적 작용뿐이며,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은 성적인 수성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경험이다. 그들은 섹스를 즐거움으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섹스는 즐거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놀이이다. 사랑은 재미이며, 즐거움이다. 그리고 사랑이 그 마지막 정점에 이르게 되면, 즐거움은 기도가 된다. 이것이 세 가지 단계이다. 필요, 즐거움, 기도. 그리고 만약 그대가 사랑을 그 궁극 의 정점, 최고조의 정점에서 경험하지 못했다면, 기도로서 경험하지 못했자면, 그대는 정말로 삶을 산 것이 아니다. 그대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그대는 말한다. 무케쉬 바르티. 왜 인도인들은 섹스를 즐거움이 아닌 필요의 관점으로 생각합니까? 그들은 즐거움이나 놀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심각한 사람들이다. 매우 성스럽고 매우 영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걸어다니는 송장들이다. 그대는 그들 에게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다. 단지 우울한 얼굴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성자들과 오래 지낼 수 없다. 성자와 24시간을 함께 있는 것은 차라리 형벌 이다. 보상이 아니다. 24시간 안에 그는 그대가 삶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를 너무나 슬프게 만들 것이고,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그 대가 죄의식을 느끼고 죄인처럼 느끼도록 만들 것이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 이다. 종교인들은 오직 한 가지만을 즐긴다.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고 사람들의 웃음을 빼앗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비난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가르치고 사랑을 가르치며, 순간 속 에서 삶의 평범함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와 같이 가르치는 이유는 어디에도 다른 삶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은 없다. 이것만 이 유일한 세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다른 세상을 위해 이 세상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나는 희생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나는 고행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나는 단식을 가 르치고 있지 않다. 나는 금욕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나는 삶의 축제를 가르치고 있 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수천 년 동안 놓쳐 왔던 것이다. 그들은 섹스를 즐거움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불행이다. 그리고 그들이 섹스를 즐거움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그들은 섹스를 기도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 하다. 그대는 말한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섹스를 초월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억압되어 있을 뿐입니 다. 섹스의 초월은 오직 섹스가 기도의 꽃피어남에 이를 때에만 가능하다. 그 전에는 섹 스는 초월될 수 없다. 그대는 그 경계선에 이르렀을 때에만 섹스 너머로 도약할 수 있 다. 그러나 그 때 그것은 금욕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전체 속으로의 에고의 사라짐이 다. 그것은 사실은 성의 초월이 아니라, 우주적 오르가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 은 궁극적인 전체와의 합일에 이르는 것이다. 그대가 여자와 사랑을 할 때,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대는 반대극과의 어떤 합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동안 합일은 일어난다. 드물게 일어난다. 왜냐하 면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 면 그대는 잔지 사랑을 하는 시늉만을 할 뿐이다. 아주 가끔만 남자와 여자가 정말로 일치되어, 한 순간 조율이 일어난다. 그 때 한 순간 오르가즘의 기쁨이 일어난다. 무엇이 오르가즘의 기쁨인가? 한순간 동안 에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순 간조차도 의미 있고 소중하다. 어떤 값비싼 다이아모드보다도 더 소중하다. 똑같은 일 이 더 깊은 차원에서, 기도 속에서도 일어난다. 기도란 그대가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하 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우주와 만나려 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단지 창문이 될 뿐이 다. 그대는 더 이상 창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 창문을 통해서 별과 구름과 새들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그대는 저 너머로가고 있다. 사랑은 그대에게 창문을 넘어 별들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일단 그대가 날아오 르면 창은 저 뒤에 남는다. 일단 그대가 창을 떠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대의 에고는 그 창에 의해 틀이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대가 창을 뒤로 하고 떠나면 그대 의 에고 또한 뒤에 남는다. 에고는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거기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에고 역시 거기에 없다. 심리학자들은 에고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먼저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린아이는 먼저 엄마의 존재를 느끼고, 아빠와 형제들과 벽과 그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의 존재를 느낀다. 서서히 그는 이 사실을 자각하 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있다. 엄마는 때로는 저기 있고 때로는 없지 만,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먼저 타인에 대한 경험이 일어난다. 그리고 에고가 생겨 난다. 그것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상대방이 사라지고 그리고 나서 에고가 사라 진다. 역순으로 진행된다. 일단 그대가 연인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작은 틀을 떠나고 나면, 그대가 스스로를 저 너머로 데려가고 나면, 에고는 사라진다. 붓다는 그것을 니 르바나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아름답다. 니르바나란 단순히 '불꽃이 꺼짐'을 의미한 다. 램프가 꺼지고 갑자기 불꽃이 전체 속으로 사라지듯이, 그대는 궁극적인 사랑의 상태 속에 있게 된다. 그 때 그대는 초월을 아다. 에고의 초월은 섹스의 초월이 된다. 그러나 기억하라. 초월은 섹스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대의 순간적인 섹스 가 우주적인 섹스로 완성된 것이다. 그대는 존재 그 자체의 오르가즘과 하나가 된 것 이다. 이제 그것은 매순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잃을 수 없다. 이제 거 위는 정말로 밖에 있다! 그대는 다시 병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섹스의 초월은 섹스의 억압과는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그러나 억압은 그대가 초월 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한 노처녀가 경찰에게 달려와 소리쳤다. "강간당했어요! 그 놈은 나의 옷을 찢고 숨 이 막힐 정도로 불같은 키스를 퍼부었어요. 그리고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저를 범했어 요!"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부인." 경찰관이 말했다.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23년 전 9월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23년 전이라구요?" 경관이 외쳤다. "23년 전에 한 일을 가지고 어떻게 체포를 하란 말입니까?" "아! 누구를 체포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경찰관 아저씨." 여자가 말했다. "단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것뿐이에요." 그대는 모든 그대의 소위 성자라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섹스를 비난한다는 사실에 놀 랄 것이다. 왜인가? 만약 그들이 초월했다면 왜 이렇게 섹스에 집착하는가? 인도에 경전에서 그대는 여성에 대한 놀랄 만큼 외설적인 묘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대의 플레이보이(Playboy)와 같은 잡지들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카주라호(Kh ajuraho), 코라나크(Konarak), 푸리(Puri)의 사원들에 가서 보라. 그러면 그대의 소위 도색잡지들은 단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카주라호는 전 세 계에서 가장 외설적인 조각들을 담고 있다. 게다가 그것을 짓는 데는 수백 년이나 걸 렸다. 바위에 조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플레이보이지에 나오는 누드 모델의 사 진이 아니다. 수백 년의 작업, 수천 명의 조각가들이 그 일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 나의 사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 개의 사원들이 있다. 왜 사원에 조각을 한 것 인가? 사원이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관계가 있다. 성자들은 그것이 필요하다. 종교적인 사람들ㅇ느 그것이 필요하다. 그 것이 그들의 환상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자기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것이 실제로 보여지기를 바란다. 또한 인도의 경전을 보면 그대는 인도의 신들이 세계 최고의 '강간의 신들'이라는 데 놀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천국의 미녀들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꾸만 땅으 로 내려와 지상의 여자들을 유혹하고 강간한다. 그들은 천국의 미녀들에 싫증이 났다. 천국의 미녀들은 이제 신선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늙지 않고 언제나 독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땀을 흘리지 않기 때문에 샤워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몸은 보통 몸이 아니다. 그들의 몸은 금과 은으로 되어 있다. 금과 은의 몸을 가진,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의 눈을 가진 여자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날 것이다. 그것은 장난감이지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결코 그대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고, 베개를 던지지도 않는다. 어떠한 극적인 사건도, 인간적인 삶도 없다.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온다. 모든 인도의 데바(deva), 즉 인도의 신들은 성적이다. 그들은 성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전들을 써왔던 그대의 성자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단어로 여자를 묘사한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은 동 시에 섹스를 비난하는 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섹스를 비난한다는 것을 그대에게 분 명히 하기 위해 그러한 말들을 하는 것이다. 한 늙은 독신녀가 유서를 준비하기 위해 젊은 변호사를 고용했다. "나는 그 동안 저 축해 놓은 돈이 만 달러 있어요." 그녀는 설명했다. "이 돈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쓰 고 싶어요. 이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인 적이 없어요, 하 지만 내가 죽을 때면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관심을 보일 거예요." 대화가 무르익어 갔다. "8천 달러는 이 마을 최고의 가장 성대하고 환상적인 장례식 을 치르는데 쓰고 싶어요." "글쎄요." 변호사가 말했다. "장례식을 치르는 데 쓰기에는 좀 많은 돈이군요. 하지 만 당신의 돈이니까 원하시는 대로 쓸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2천 달러는 어 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생각이 있어요." 늙은 여자는 노골적인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나는 이제 까지 한 번도 남자와 자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그것을 해 볼 작정이에요. 보시다시피 내 외모는 별볼일 없지만, 2천 달러면 나를 즐 겁게 해 줄 만한 젊고, 잘생긴 남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날 밤 그 변호사는 그 대화를 아내에게 전했다. 그들은 서로 그상황에 대해 이야 기 했고, 의외로 아내는 2천 달러를 벌게 되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몇 분 뒤 그들은 차를 몰아 그 독신녀의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며 변호사는 아내에 게 일러 두었다. "두 시간 후에 다시 데리러 와요." 약속된 시간에 돌아온 아내는 경적을 울렸다. 집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길게 경적을 울렸다. 위층의 창문이 올라가더니 변호사가 머리를 내밀로 외쳤다. "4일 후에 다시 와! 장례는 시의회장 (10)으로 하기로 결정하셨어." 이것이 사람들이다. 진짜 사람들이다. 그들의 얼굴에 속지 말라. 그들을 깊이 들여 다보라. 그러면 그대는 엄청난 광기를 발견할 것이다. 억압은 광기를 가져온다. 초월 은 불성을 가져오다, 그렇다. 무케쉬 바르티, 나는 붓다와 미친 사람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다고 말 했었다. 그 유사점은 붓다는 마음을 넘어가고, 미친 사람은 마음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섹스의 초월과 섹스의 억압 사이에도 같은 유사점이 있다. 초월은 섹스를 넘 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나가야 한다. 섹스는 사다리로서 이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억압은 섹스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억압은 신경증을 만든다. 초월은 꽃피어남을 가져온다. 그대 안의 모든 최상의 것들 의 꽃피어남, 그대의 진정한 존재의 꽃피어남. 그것은 숨은 광휘의 드러남이다. 사랑하는 오쇼. 최근에 당신은 빌헬름 라이히 (11)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몇 년간 그에 대해 공부하고 책도 썼습니다. '성은 에너지이고, 현재에 살아야 하며, 신은 삶 이다'라는 당신의 생각은 그의 생각과 같지만, 당신은 그를 휠씬 넘어섭니다. 어떤 점 이 그의 한계입니까? 에드워드 만(Edward Mann), 나도 빌헬름 라이히에 관해 그대가 쓴 책을 읽었다. 나 는 또한 그대가 그 책에서 나를 인용했던 것도 기억한다. 빌헬름 라이히와 나의 생각 은 분명히 표면적인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빌헬 름 라이히는 사상가이지 명상가가 아니다. 그리고 어둠 속을 더듬어 가던 사상가도 가 끔은 무언가를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눈을 갖는다는 것은 왅너히 다른 현상이다. 그렇다. 때로는 어둠 속을 헤매다가도 문을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장님도 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눈을 갖게 되는 것, 빛을 가지게 되는 것, 더듬지 않고 곧바로 문을 향해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나는 틀림없이 빌헬름 라이히를 인정한다. 그가 명상가가 아니면서도, 명상가들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그를 인정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그의 한계 이기도 하다. 그는 단지 사상가일 뿐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들을 가르칠 수 없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들을 실천할 수 없다. 사실은 그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 다. 그의 글이 아닌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그대는 그의 무지를 엿볼 수 있다. 빌헬름 라이히의 아내는, 그가 질투심이 많은 남자였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자, 이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섹스를 초월한 사람이라면 질투는 불가능하다. 그는 끊임없이 소유욕과 질투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해서는 매우 의 심이 많았다. 마침내 그들은 이혼해야 했고, 이혼의 원인은 빌헬름 라이히 대문이다. 그는 온갖 종류의 여자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유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무소유의 이름으로, 우정과 나눔의 이름으로 많은 연애 사건들을 일으켰다. 그러나 같 은 일이 그의 아내에는 허용도지 않았다. 그는 마을을 떠날 때조차 친구들에게 아내를 감시해 달라고 말하곤 했다. 빌헬름 라 이히의 아내도 정신분석학자였다. 이것은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 나 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사상가였던 것이다. 사상가들은 좀 교활한 데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한 온갖 종류의 변명들을 찾아 낸다. 그러나 타인등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 의 한계이다. 그리고 그는 명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 에너지를 즐거움으로, 기도 로, 그리고 마침내 희열의 현존으로 변형시킬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미쳐 버린 이유이다. 불을 가지고 노는 것은 위험하다. 만약 불의 성질 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성은 불이다. 왜냐 하면 성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변형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불을 가지고 노 는 것은 틀림없이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그 위험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는 옳은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님이었다. 그는 명상의 기초가 필요했 다. 그는 붓다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미친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그대는 말한다. 에드워드. 성은 에너지라는 당신의 생각은...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나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분명한 차이를 잊지 말라. 빌헬름 라이히에게 있어 그것은 생각이다. 장님 도 빛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귀 머거리도 음악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그가 음악을 이해하 고 음악을 경험하도록 해 주지는 못한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 들은 나의 경험이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모든 말들은 철학자로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전혀 사상가가 아니다. 나에게는 생각은 매우 저급한 행위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나의 경험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섹스에 대한 나의 생각이 아니라 실제적 인 경험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경험한 것을 그 대도 경험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나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 는다. 빌헬름 라이히는 광신자였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이 자신을 믿기를, 절대적으로 믿 기를 원했다. 그는 매우 독재적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의 마음 속에 어떠한 의심이 일 어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는 두려움, 박해의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마치 자신이 끊임없이 박해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기라도 하 는 것처럼... 이것이 광신적인 마음의 징후이다. 그는 성장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올바른 토양이 필요했다. 그것이 없었 다. 그가 나의 산야신의 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안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 탄 생했을 것이다. 그는 병 속에서 살았다. 거위는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병에, 그의 사상 에, 철학에 너무나 집착했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박해의 의심의 두려움이 그를 미치 게 만들었다. 그대는 말한다. ...성, 현재에 사는 것, 그리고 신은 삶이라는 당신의 생각은 그의 생각과 같지만.. . 그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같아 보일 분이다. 현재에 살면서 어떻게 박해를 느낄 수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박해를 느낄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다름 순간에 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온 생애 동안 그는 현재에 사는 것에 대해 말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말에 불 과했다. 단순한. 말일 뿐이었다. 그는 결코 현재에 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 가 되었다는 낡고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언자가 된다는 이러한 어리석은 유대교의 사상은 많은 서양 사람들을 괴롭혔다. 기독교인들, 이슬람교인들, 유대교인들... 인도 밖에서 태어난 이 세 종교는 모두 예 언자라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 다. 그리고 빌헬름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제자였다. 칼 구스타프 융 (12)도 같은 생각 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추종자였다. 그리고 아들러 (13)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프로이트의 추종자였다. 모두 유대교적인 마음의 부산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인류의 구원이 자신들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어딘가 다른 속에 사는 것이지,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다. 며칠 전 쉴라(Sheela)가 한 기독교 신학자의 글을 가지고 왔다. 나에게 반대하는 방 대한 분량의 글이었다. 그는 나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 선입견을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이랬다저랬다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은 나에 반대하는 말을 하고, 한 번은 나에 동조하는 말을 했다. 그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 말 중에는 마 음에 드는 말이 한 가지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매우 의미심장한 비평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쇼가 죽는 순간, 그의 모든 운동은 비누 방울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 그것이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이유가 없다. 나는 지금을 산다. 나는 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나의 운동이 비누 방울처럼 사라지든 그렇지 않든 무슨 문제인가? 나는 비누 방 울들을 사랑한다. 비누 방울들은 태양 아래서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비누 방울을 만들 수 있도록 사라져야 한다. 나는 비누 방울을 독점 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사실은 예수에 의해 창조된 비누 방울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 라졌다면 세상은 더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면 이 폴란드인 교황도 여기 없었을 것이 다. 이제 그들은 실제로 있지도 않은 비누 방울에 관한 쓸데없는 소동들을 만들어 내 고 있다. 붓다가 창조한 비누 방울, 그것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인류에 대한 커다란 축 복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불료 승려들, 신학자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어리 석은 사람들... 우리는 그들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전에 나는 불교 경전을 읽고 있었다. 불교 경전에는 각각의 불교 승려들이 따라야 할 3만 3천 가지의 규칙이 있다고 씌어져 있다. 3만 3천가지 규칙이라니! 단지 기억하 는 데만 해도 컴퓨터가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어떤 규칙들인가? 내가 그대에게 규칙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 불교승려가 화장실에 갈 때, 그는 변기 뚜껑을 아주 천천히 들 어올려야 한다. 어떤 잡음도 없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거기에는 언제나 똥을 먹는 아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대의 똥을 먹게 된다면 그것은 그대의 책임이다. 그대는 그 때문에 후생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대단한 종교 규칙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다고 하는 예 언자의 사상...예수가 이미 왔었고, 기독교인들은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왔다고 떠들어대지만, 인류의 구원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는 이러한 단순한 사실조 차 보지 못한다. 2천 년이 지났다. 그는 매우 무능한 예언자임이 증명됐다. 무슨 구원 이 일어났는가? 자이나교도들은 마하비라가 인류를 고양시키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인류는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붓다도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한다... 나는 이 모든 넌센스들을 완전히 멈추고 싶다. 나는 그 누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여 기 있지 않다. 왜 내가 그대를 구원해야 하는가? 일은 그대의 부모가 저지른 것이다. 나는 책임이 없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인류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 도 책임이 없다. 나는 나의 순간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을 , 태양 아래서 이 아름다운 비누 방울을 즈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독일에서 온 기독교 신학자인 그는, '물론 지금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오쇼가 죽을 때 그것은 사라질 것이 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라져야 한다. 나는 그것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할 것이다. 그것 은 한 순간도 남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이러한 예언자적 사명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어느 정도 미친 사람들이며 신경증 환자들이다. 착한 사람들조차, 예수와 같은 사람들 조차도 상당히 신경증적인 성향이 있다. "유일한 신의 독생자." 이 신경증을 보라. 그 러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뭔가? 사생아(bastard) (14)들인가? 예수는 자신이 처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무슨 넌센스인가! 엄 청난 신경증, 엄청난 히스테리이다! 순수한 백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로 부터의 어떤 잔해들이 그 바탕에 있다. 게다가 그는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서 조차도, 십자가에 매달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신에게 외쳤 다.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의 기대를 볼 수 있겠는가? 그의 요구를 볼 수 있겠는 가? 그는 좌절하고 화가 났다.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 적이 일어나기를, 신이 내려와서 그의 독생자를 구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 신도 내려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이 없기 때문이 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손을 하늘로 쳐들고, "압바(Abba), (15) 아버지"를 부르며... 이것은 유치한 태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다. 나에 있어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나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원한다. 나 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신의 독생자가 아니다. 나는 그대들 의 구원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거위는 밖 에 있다. 에드워드 만, 빌헬름 라이히는 반역의 삶이 아닌 반항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차 이는 미묘하다. 그는 반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것이 반항할 때, 그대는 그것에 집착한 채로 남아 있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반항은 일 종의 부정적인 집착이다. 나는 반항하고 있지 않다. 나는 단순히 분리되어 있다. 나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현재를 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도, 미래도 가지 고 있지 않다. 이 순간이 전부이다! 사랑하는 오쇼 저는 아무 질문이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아무 목적 없는 미친 소리를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드얀 마디아(Dhyan Madia), 내가 이제껏 해 온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거기 어떤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나보다 더 미친 사람을 찾을 수 있는가? 나는 완전히 미쳤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나는 어 떠한 사상가도 가질 수 없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상가들은 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변함없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내가 무엇이든 말한 그 순간, 그것은 끝난 것이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어떤 나의 책도 읽어 보지 않았다. 나는 제목조차 기억 하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 "오쇼, 당신은 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라고 묻는다 면, 나는 말한다. "정말인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겠지. 그 사람은 오래 전 에 죽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말에는 목적이 없다. 장미꽃만큼이나 목적이 없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매일 아침 햇빛 속의 이슬 방울들처럼 목적이 없다. 무슨 목적이 필요한 가? 나는 어떤 면에서도 목적이 없다. 그것은 순수한 즐거움이다. 마디아, 세 명의 폴란드인들이 사창가의 문 밖에서, 그 안의 서비스의 대가로 얼마 를 지불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둘은 밖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30분 뒤, 안에 들어갔던 친구가 얼굴에 미소를 머 금은 채 나왔다. "어떻게 됐니? 어땠어?" 친구들이 물었다. "음, 나는 5즐로티 (16)를 내고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키가 늘씬한 섹시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어. 그녀는 나의 옷을 벗기고, 두 개의 둥근 파인 애플 링을 나의 물건 에 끼운 뒤에 천천히 그것을 먹어치웠어. 정말 대단했어!" 두 번째 폴란드인이, 친구의 말에 기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그는 나왔 고,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됐니?" 나머지 두 사람이 물었다. "음, 나는 10즐로티를 냈어. 그리고 이 친구의 경우와 같았어. 하지만 내 경우엔 그 여자가 나의 물건에 네 개의 둥근 파인애플 링을 끼우고, 아주 아주 천천히 그것을 먹 어 치웠어" 세 번째 폴란드인이, 이미 매우 흥분한 채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15분 뒤 슬 프고 침울한 얼굴로 나왔다. 친구들이 물었다. "뭐가 잘못됐니? 어떻게 됐어?" "글쎄," 슬픈 폴란드인이 말을 시작했다. "시작은 좋았어. 나는 20즐로티를 냈고, 그녀는 여섯 개의 둥근 파인애플 링을 나의 물건에 끼우고, 거기에다 크림까지 한 스 푼을 얹었어." "와!" 친구들이 소리쳤다. "그것뿐이 아니야." 세 번째 친구가 계속했다. "땅콩 가루 한 줌과 달콤한 과자 부 스러기와 핫쵸코 소스, 그리고 멋진 붉은 체리까지 위에 얹었어." "정말 대단하구나."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니?" "글쎄 그것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내가 먹어 버렸어!" 오늘은 이만 (1)앗시리아(Assyria) 문화 : 이라크 북부에 세워졌던 국가 앗시리아에 형성되었던 고대 문화. BC 612년 멸망하였다. (2)바빌론(bABYLON) 문화 : 바그다드의 남쪽 80 km 지점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고 대 도시 바빌론에 형성되었던 문화. (3)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 - 1900) :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 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이며,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이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시작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수많은 명저를 저술했다. 특히 말년에는 '신은 죽었다.'고 설파했고, 영원회귀라는 마치 불교의 윤회설과도 흡사한 사상을 펼쳤으며, 삶을 긍정하는 인간, 초인의 이상을 펼쳤다.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 기 시작하여,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오쇼는 그의 책 "짜라투 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대해 강의한 바 있다. (4)펀디트(pundit) : 힌두교의 학자. (5)까비르(Kabir, 1440? - 1518) :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의 베나레스에서 어느 힌 두교 수도승과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태어난 직후 길에 버려졌다고 한다. 마침 근 처를 지나던 어느 이슬람교도 부부가 그를 주워다 키웠으며, 그래서 끼비르 역시 양부 모의 직업을 따라 평생을 베짜는 직공으로 살았다. 젊어서 인도 민중종교 운동(박띠 운동)의 지도자인 라마난다(Ramannanda)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헌신과 사랑 의 시들을 탄생시켰다. 그는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기에 제자들이 그의 시를 받아 적었 으며, 타고르와 마하트마 간디의 극찬을 받았다. 그의 시는 타고르의 '기탄잘리'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시크교의 개조인 나나크를 비롯하여 근세 힌두교 개혁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6) 나나크(Nanak, 1469 - 1538) : 시크교의 창시자. 인도인으로, 이슬람교의 강한 영향을 받아 힌두교의 개혁을 시도한 시크교를 창시하였다. 펀잡 지방 라호르 근방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특이한 종교적 성격을 나타냈다. 10대 후반에 결혼 하여 관청에 근무하였으나, 어느날 영감을 받고 출가하여 고행자로서 여러 지방을 돌 아 다녔다. 유일, 절대의 신을 믿어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로 귀일 된다고 설파하고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형식주의를 싫어하여 기성 종교의 각종 의식, 우상 숭배를 배척하였고, 따라서 인간은 평등하다하여 카스트 제도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가르침은 시크교 제5대죠가 편찬한 '근본성전'에 잘 나타나 있다. (7)모크샤(moksha) : 산스크리트어로 해탈이나 자유를 뜻한다. 자아의 이중성과 무 지를 깨닫고 그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 (8)베다(Veda) :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신화적 제식문학의 일대 집대성. 베다란 ' 지식' 또는 '종교적 지식'을 의미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베다 문헌은 리그 베다(Rigv eda), 사마 베다(Samaveda), 야주르 베다(Yajurveda), 아타르바 베다(Atharvaveda)의 4종류가 있다. 아리안족들이 인도에 정착한 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힌두인들은 이 베다가 인간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신이 리쉬(Rishi, 성자)들에게 가르친 것, 리쉬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라 생각하며 신성시했다. (9)Some dew on the grass : dew를 do로 잘못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풀밭에서 합니 다." (10)시의회장 : 빈민들에 대한 시의회의 무료 장례식. (11)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 y), 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남. 대기 중의 기를 응집하여 인체에 활용할 수 있는 특별한 상자까지 고안했던 기인이며 심리학자로 1939년 이후에는 미국에서 활동했다. 의학계와 기독교, 정부의 탄압을 받아 허가 없이 약을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했 다. 라이히는 기초 자연 연구에 관한 '피고'로서 재판 바는 것을 거절한 끝에 법정 모 독죄로 2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정신병 증세를 보이다가 1957년 연방교도소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저서로 '들어라, 소인아 (Listen, Little man)'가 있다. (12)칼 쿠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 스위스의 정신 분석학자. 초기 에는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일컬어질 정도였으나, '리비도)근본적인 에너지, 생명력)' 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주장함으로서 프로이트와 결별했 다. 그는 인간 마음의 심층에는 개인의 체험에 의존하지 않는 원초적인 '집단 무의식' 이 유전적으로 전달된다고 믿었다. (13)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 : 오스트리아의 정신 의학자. 헝가리계 유태 인으로 처음에는 프로이트의 연구 모임에 참가하였으나, 그 후 독자적인 '개인 심리 학'을 수립하였다. 그는 성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트의 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 존재에 보편적인 열등감, 무력감과 이를 보상 또는 극복하 려는 권력에의 의지, 즉 우월의 욕구라고 주장했다. (14)bastard : 개새끼, 사생아라는 뜻의 욕설. (15)압바(Abba) : 아빠. 하느님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 (16)즐로티(zloty) : 폴란드의 화폐 단위. @ff 완벽한 불완전함 사랑하는 오쇼. 당신은 실수가 없는 사람입니까? (1) 토마스 비 켐피스(Thomas V.Kempis), 나는 실수를 함에 있어 실수가 없다! 먼저, 나 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완벽주의란 모든 신경증의 뿌리기 때문이 다. 인류가 완벽함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인류는 결코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완벽함이라는 바로 그 생각이 전 인류를 광기의 상태를 몰아갔 다. 완벽함이라는 바로 그 생각이 전 인류를 광기의 상태로 몰아갔다. 완벽함의 관점 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그대가 이상, 목표, 가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라는 관점에서 생각함을 의미한다. 그대에게는 실행해야 할 정해진 행동 양식이 있고, 만약 그대가 그 양식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대는 크나큰 죄의식을, 죄인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행동 양식이란 언제나 그대가 따를 수 없는 것이기 마련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따를 수 있다면 그것은 에고에 있어서 별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완벽주의자가 추구하는 이상은 본질적으로 달성할 수 없을 만한 것이어야 한 다. 오직 그 때에만 그것은 달성할 가치가 있다. 그 모순을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모순은 정신 분열증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임을 그대는 너무나 잘 안다. 그것은 만물의 본성상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다지 완벽주의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 거기에는 에고를 충족시켜 줄 것이 별로 없다. 그대의 에고는 그것을 씹을 수도, 그것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날 수도 없다. 에 고는 불가능한 것을 필요로 하며, 불가능한 일은 바로 그 불가능함의 특성상 일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두 가지의 선택만이 남는다. 첫 번째는, 그대가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순진하고 단순하 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대는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죄의식은 병 적인 상태이다. 나는 그대 안에 그 어떤 죄의식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그대가 죄의 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환희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죄의식은 완벽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두 번째 선택은, 만약 그대가 교활하다면 그대는 위선자가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 을 성취한 것처럼 가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남들을 속이고, 심지어 그대 자신 마저 속이려 할 것이다. 그대는 환상과 환영 속에 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신성치 못한, 매우 비종교적인, 매우 해로운 일이다. 가장하는 것, 위선의 삶을 사는 것은 죄의식을 지니고 사는 삶보다 휠씬 더 나쁘다. 죄의식을 갖는 사람은 적어도 단 순하다. 그러나 가장하는 사람, 위선자, 성인, 이른바 성자, 마하트마들은 사기꾼이 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이다. 스스로에 대해서 비인간적이다. 그들은 억압해 야 한다. 그들은 속으로는 끓어오르게 될 것이다. 화와 분노로 가득 찰 것이다. 그들 의 화와 분노는 온갖 방식으로 분출될 것이다. 미묘한 방식으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분노는 나타날 것이다. 심지어 착하고 괜찮은 사람인 예수와 같은 사람들조차도 화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아무 죄없는 순수한 것들에 반대한다. 그대는 믿지 못할 것이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왔다. 그 바보 무리를 사람들은 '사도들'이라고 부 른다. 예수가 배가 고팠고, 그 모든 무리들도 배가 고팠다. 그들은 무화과나무에 이르 렀다. 무화과나무는 제철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 무화과 나무를 비난했다. 나무에 저주를 퍼부었다. 자, 어 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한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적을 너 자신만큼 사랑 하라."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그는 제철이 아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 나무조차 용서하지 못한다. 이러한 분리, 이러한 정신 분열증이 수천 년 동안 인류에 퍼져 있었다. 그는 말한 다. "신은 사랑이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지옥을 관리하고 있다. 만약 신이 사랑이라 면, 제일 먼저 파괴도어야 할 것은 바로 지옥이다. 지옥은 즉시 불태워져야 한다. 사 라져야 한다. 지옥이라는 바로 그 사상은 질투의 신으로부터 나온 사상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태인으로 태어났고 유태인으로 살았으며, 유태인으로 죽었다. 그는 기독교인 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유태인의 신에 대한 개념은 그다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탈무드 (2)는 말한다. 신 자신이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질투의 신, 질투가 아주 심한 신이다. 나는 마음씨 좋은 신이 아니다! 나는 그대의 삼촌이 아니다!" 이런 신은 지옥을 창조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대의 삼촌도 아니고, 마음씨도 좋지 않으며, 질 투하는 그러한 신과 함께 천국에서 사는 것조차도 지옥일 것이다. 그와 함께 살면서 무슨 낙원이 될 것인가? 그것은 절대 군주적인, 독재적인 분위기가 될 것이다. 자유도 사랑도 없을 것이다. 질투와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그래서 소위 좋은 사람들이라는 자들조차 인간 불행의 원인이 되어 왔다. 그것은 상 처가 된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과거를 파헤쳐 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불행의 원인이 되는 모든 뿌리들은 우리의 과거 속에 있다. 똑바로 기억해 두라. 그대의 과거는 알렉산더 대왕 이나, 줄리어스 시저, 티무르 (3), 징기스칸 나디르 사흐 (4)와 같은 사람들보다도 예 수, 마하비라, 공자, 크리쉬나, 라마 (5), 붓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역사책은 그러 한 악인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그대 무의식의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대의 인격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은 소위 좋은 사람들 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 물론 그들은 약간의 장점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 시에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중성은 완벽주의라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자이나교인들은 마하비라가 전혀 땀을 흘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완벽한 사람이 어떻 게 땀을 흘릴 수 있겠는가? 나는 땀을 흘릴 수 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 리고 나는 완벽함보다 오히려 땀을 흘리는 쪽을 택할 것이다. 여름에 땀을 흘리는 것 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숨구멍도, 땀구멍도 없는 합성의 플 라스틱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온 몸은 숨을 쉰다. 그것이 그대가 땀을 흘리는 이 유이다. 땀을 흘리는 것은 그대의 체온을 변함없이 유지하기 위한 자연스런 작용이다. 이제, 마하비라의 몸 속은 지옥처럼 타고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일정한 체온을 유 지할 것인가?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이나교인들은, 뱀이 마하비라의 발을 물었을 때 그 발에서 피가 아니라 우유가 나 왔다고 말한다. 자, 우유가 나오러면 마하비라의 발은 발이 아니라 유방이었어야 한 다. 그리고 발에 유방이 달려 있는 남자는 서커스단으로 보내져야 한다. 이것이 그들 의 완벽함의 개념이다. 완벽한 사람은 피와 같은 더러운 것, 피와 같은 살벌한 것은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유와 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우유와 꿀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악취를 풍길 것이다. 우유는 요구르트로 변할 것이 고, 꿀은 온갖 종류의 모기와 파리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그는 파리들로 완전히 뒤덮 여 버릴 것이다. 나는 이런 완벽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하비라는 너무나 완벽해서 오줌을 누지 않았다. 배설을 하지 않았다. 배설같은 것 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그대는 마하비라가 변기에 앉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의 모든 똥은 다 어디로 사라 지는가? 그렇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동같은 놈(Shittiest man)' 이었을 것이다. 나는 인간에 관한 의학 보고서를 읽었다. 가장 긴 변비의 사례.. 8개월이었다. 이 의사들은 마하비라를 몰랐다. 8개월은 아무것도 아니다. 40년이다! 이것은 인간이 배 변을 통제할 수 있었던 최장 기간이다. 이것은 진정한 요가이다. 인간의 전 역사상 가 장 위대한 변비의 기록... 그리고 나는 누구도 그를 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바보같은 생각들이 단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자행되어 왔다. 그대가 만약 이 러한 생각들을 그대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오줌을 누면서 그대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무얼 하고 있는가? 변기에 앉아 있어도 그대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몽에서 피가 나온다면 그 것은 수치이다. 얘수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친구를 살리지만, 그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살아남지 못 한다. 장님과 귀머거리를 치유하겠다고 하지만, 단 한사람의 바보도 깨달음을 인도해 주지 못한다. 한 사람의 바보도 어리석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 주지 못한다. 한 사람의 인간도 구하지 못한다. 그의 머리를 때리고,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라고 말해 주지 못한다. 토마스 비 켐피스, 나는 매우 실수를 잘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신경증적이 지 않고, 정신병적이지도 않으며, 완벽주의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완벽하지 않음을 사랑한다. 나는 이 세계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를 사랑한 다. 세계는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가 성장하고 있는 이유이다. 만약 세계가 완벽했다면 세계는 죽었을 것이다. 성장은 오직 불완전한 것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완벽함이란 완벽한 정지를 의미한다. 완벽함이란 궁극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그때 그 이상 갈 길은 없다. 정신과 의사가 손가락 끝을 마주 대고 등을 기대고 앉아서, 앞에 서 있는 매우 불안 해 보이는 남자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괜찮아요." 그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나는 당신보다도 훨씬 더 심각 한 정신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많이 고쳤습니다. 자, 어디 내가 당신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봅시다. 당신은 심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자신이 폭스테리 어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증세가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선생님." 환자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검정 점과 갈색 점이 있는 작은 폭스테리어 강아지입니다. 아, 선생님, 제발 저를 도와 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시 오. 더 이상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저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의사는 침대를 그리키며 말했다. "자, 자, 먼저 여기에 누우십시오. 그리고 나서 우 리 함께 당신 망상의 뿌리를 찾아 봅시다." "아, 그럴 수 없어요, 선생님." 환자가 말했다. "저는 가구 위에 올라가면 안 되거 든요." 일단 한 생각이 그대 안에 깊이 뿌리내리면, 그것은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 완벽주 의는 신경증적인 생각이다.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보같은 폴란드인 교황에게는 알맞지만 지적인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다. 지적인 사람이라면 삶이 모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삶은 시험과 실수를 통한 탐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것이 바 로 삶의 기쁨, 삶의 정수이다. 나는 그대가 완벽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단지 가능한 한 완벽하게 불 완전하기를 바란다. 그대의 불완전함을 기뻐하라! 그대의 평범함을 기뻐하라! 소위 " 교황 성하(His Holiness)"같은 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모두 "사기꾼님들(His Phonin esses)"이다. 만약 그대가 "교황 성하"와 같은 그러한 거창한 말이 좋다면, "평범하신 분(His Very Ordinariness)"같은 직함을 만들어라. 나는 평범함을 가르친다. 나는 어 떠한 기적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단순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 또 한 매우 단순해져서, 이 양극단으로부터, 죄의식과 위선의 양극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정확히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이 바로 정상이다. 성 베드로가 가브리엘 대천사에게 골프 시합을 신청했다. 성 베드로의 첫 번째 드라 이브 tit이 홀인원이 되었다. 가브리엘의 첫 번째 드라이브도 같은 결과를 낳았다. 다 음 js tit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성 베드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쳐다 본 뒤 말했다. "우리 기적은 그만 두 고 골프를 좀 치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실수 없는 사람' 이 아니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살 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다. 나는 나의 마지막 숨 이 다할 때까지 계속 실수를 저지르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마지막 숨이 귾어질 때조차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면, 그대는 죽음을 정복할 것이다. 한 선사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선의 방식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들 도한 평범함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의 아름다움이다. 어떠한 종교도 그처럼 높 은 평범함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스승은 이제 매우 늙어, 거의 여든 살이었다. 그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이 제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두 번 다시 지는 해를 볼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해는 지평선으로 지고 있다. 내가 그대들을 부른 것은 나에게 어떤 새ㅗ운 죽음의 방식에 대한 조언을 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좀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말했다. "새로운 방식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말했다. "이제껏 사람들은 침대에서, 침실에서 흔해빠진 방식으로 죽음을 맞아 왔다. 그런 모든 방식들은 이미 전에 있었던 방식들이다. 그리고 나는 언재너 새로운 방식으로,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하기를 좋아한다. 누가 좀 알려 달라. 선 자세로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침묵이 흘렀다. 한 사람이 말했다. "예, 저는 서서 죽었다는 선사에 관해 들어본 적 이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러면 그것은 탈락이다. 그대는 머리를 대고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모두들 말했다. "저희는 그런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물구나무 서서 죽는다 는 것은 상상도 못 해 봤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말했다. "그게 좋겠다!" 늙은 선사는 땅에 대고 물그나무를 섰다. 그 리고 그가 죽었다는 모든 징후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제 자들이 당황스런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 늙은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들은 물구나무 서서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법은 결코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 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침대에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완벽하게 알 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의 스승은 거기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제안했다. "빨리 가 봅시다. 스승의 늙은 누이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 다. 그녀도 승려입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해 주든지 아니면 무슨 조언이라도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 늙은이보다도 더 미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려갔다. 누이가 찾아왔고, 그녀는 동생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이 녀석아, 너는 평생 골칫거리였다. 최소한 죽을 때만큼은 평화롭게 죽어라. 공연한 소 동을 일으키지 말고... 왜 이 불쌍한 제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거냐. 일어나서 침대에 누워라!" 늙은 선사는 웃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말했다. "누가 이 미친 구이를 여기로 데려왔는가? 내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죽지도 못하게 하는군!" 그러나 그는 말했다. "좋아요. 알았어요, 이것이 누나의 마지막 부탁이로군요. 나는 누나의 충고를 한 번도 따랐던 적이 없지나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으로 누나의 말을 들어 드리지요." 그러나 그녀는 그가 죽는 것을 보기 위해 거기 서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너 는 그냥 거기 누워 있어라. 나는 가겠다. 그리고 꼭 침대에서 정상적으로 죽어라!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그리고 그녀는 떠나갔고, 늙은 선사는 침대에서 정상적으로 죽었다. 삶은 이래야 하는 것이다. 나는 성자가 아니다. 나는 성인이 아니다. 그 모든 어지러운 헛소리들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는 틀림없이 좀 미쳐 있다.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내가 미쳤기 때문이다! 결코 성자들에게 의지하지 말라. 결코 성인들 에게 의지하지 말라. 그들은 그대를 돌게 만들 것이다! 골방의 티 타임이었다. 부랑자 무리들과 그들의 동료 여행자들이 피워대는 마리화나 (6) 의 짙푸른 연기가 가득 찼다. 갑자기, 복도에서 법의 이름으로 문을 열라는 우렁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아직도 타고 있는 마리화나를 정신없이 모아서 뻐꾸기 시계 속에 쑤셔 넣었다. 방에 들어온 경찰들은 열심히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뻐꾸기 시계 앞으로 다가가 시계를 새벽 3 시에 맞췄다. 작은 문이 열리더니 새가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이봐, 친구, 지금 몇 시야?" 사랑한느 오쇼. 저는 줄리어스 시저나 나폴레옹처럼 소위 위대하다는 사람들, 그리고 소크라테 스 (7)와 같은 실제로 위대한 사람들 뒤에도 여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늘 여성 숭배자로서 여성을 찬양하다가 결국에는 여자의 바보가 되어 버리곤 했습니다. 당신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실제 가능한 수 이상의 많은 여성들이 곁에서 일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여성들이 곁에서 일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자유 롭게 남아 있고, 그들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프렘 프라사드(Prem Prasad), 줄리어스 시저, 알렉산더, 나폴레옹 등 소위 위대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여성에 의해 조종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 다. 여자는 한 가지 매우 특별한 특질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어찌 보면 작은 것들에 매 우 만족해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아이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 고 있다. 창조성을 향한 그녀의 욕망은 충족된다. 여자는 자연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창조자가 된다. 그 점에서 남자는 무력함을 느낀다. 남자는 아이를 생산할 수 없다. 빈 자궁과도 같은 무엇인가가 그의 내면을 아프게 한다. 그는 여자 앞에서, 특히 사랑 하는 여자 앞에서 증명하고 싶어한다. "나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쓸모 없는 맹장같은 존재가 아님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다. "는 것을... "나는 세상에, 세상의 아름다움에, 권력에, 예술에, 음악에, 춤에 무언가 를 기여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것, 그것은 모든 남자 안의 매우 무의식적인 갈망이다. 그리고 한 남자가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 순간, 즉시 그 갈망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벎으로써, 대통령이나 수상이 됨으로써, 세상을 정복함으로 써 자신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미완성을 남는다. 그는 여자와 경쟁할 수 없다. 여자는 너무나 원만하고, 너무나 중심에 있으며, 땅에 뿌리내리지 못 할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에 갈 것이고, 달에 갈 것이며, 세상의 정복자가 될 것이 다. 위대한 과학적 진리를 발견할 것이고, 전쟁에서 싸울 것이고, 미지의 것을 탐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는 무언가각 빠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는 생물학적인 것이다.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 여자는 화학적으로 균등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 남자는 생물학적으로 약간의 불균형 상태에 있다. 한쪽 부분은 무겁고, 다른 쪽 부분은 좀 가볍다. 그리고 그러한 불균형은 그의 안에 내적인 긴장을 만들어 낸다. 그 것이 바로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잘 미치고,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많이 자살하 며, 남자들이 여자보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대가 세계를 둘 러본다면, 여자들은 지배하는 데 관심이 없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세계는 남자들에 의 해 지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자는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충족감을 느낀다. 남자는 언제나 달려가고 있다. 어딘가를 가고 있다. 언 제나 가는 중이다. 모든 남자들은 미국인 관광객들이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못 한다. 그것은 심지어 자궁 속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두명의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있는 엄마는 임신 몇 달 후면 자궁 속의 아이가 사내 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잘 알 수 있 다. 사내 아이는 발로 차기 시작한다. 그는 벌써 알렉산더 대왕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 다! 여자아이는 조용히, 편안히, 명상적으로 있다. 별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자가 쉽게 남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남자가 우월하기 때 문이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남자의 힘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정 반대이다. 여자가 여러 면에서 우월하다. 그리고 그러한 열등감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남자는 열등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남자는 역사 전체를 지배해 왔다.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여자를 노예화하려 애 써 왔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 른다. 그러나 모든 남편들은 잘 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밖에서와 같은 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갑자기 개가 된다. 불쌍한 개가 된다.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추고 있는 개! 집을 나설 때, 그는 천둥처럼 나간다. 그러나 집 으로 돌아올 때면, 그는 모든 가스를 잃고 돌아온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집으로 돌 아와, 하루 종일 읽었던 똑같은 신문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단지 여자를 피하기 위해 서... 그 신문은 단지 장막일 뿐이다. 심지어 자그마한 여자라해도 위대한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를 제 정신으로 돌려 놓기에 충분하다. 인도의 악바르(Akbar) (8) 대제의 생애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그의 친구 중 한 사람인 비르발(Birbal) (9)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알기 로는, 아무리 아닌 척하는 남자들도 모두가 여자의 지배를 받습니다." 악바르는 기분 이 상했다. 그는 말했다. "자네가 그것을 증명해 보게. 분명히 지배당하지 않는 남자 도 있을 거야. 자네의 말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내가 자네에게 아 름다운 말 두 마리를 주지. 나네가 한 번 찾아 보게. 암탉도 몇 마리 데려 가게. 만 약 자네가 아내에게 잡혀살지 않는 남자를 발견한다면, 그땐 그에게 검은 말이나 흰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값비싼 말들이라네." 그 시절에는 말은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비르발은 델리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그는 암탉을 선물해야 했다. 단 한 곳에서만 그는 약간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엄청난 근육질의 남자가 자 신의 근육을 주무르며 태양아래 앉아 있었다. 비르발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내에게서 쥐여사는 남편입니까?" 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근육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손을 잡아 보시오. 내가 보여드리겠소!" 그는 비르발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힘껏 손을 움켜쥐었 다. 그리고 말했다. "자 다시 물어보시겠소?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한 대 쳐 드리지! 그런 질문을 듣는다는 자체가 모욕이오! 누가 나를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오?" 집안에서는 아주 작은 여자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 남자가 한 손만으로도 으깨 어 버릴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여자였다. 십자가도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단지 목을 살짝 누르기만해도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비르발은 물었다. "당신 아내는 어디있소?" 그는 말했다. "저 안에서 요리하고 있는 여자가 내 아내요. 그녀를 보시오. 그리고 나 를 보시오. 그리고 누가 주인일지 결정하시오."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했기 때문에 비르발은 말했다. "틀림없이 당신이 주인이로군 요. 나의 결론을 바꿔야겠소. 자, 왕이 선물로 주신 검은 말이나 흰말 중 한 마리를 선택하시오." 그러자 남자는 여자를 보고 말했다. "어떤 말을 고를까? 검은 말? 아니면 흰 말?"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흰말로 하세요!" 비르발이 말했다. "자 암탉이나 받으시오! 다 끝났소! 당신은 근육의 힘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오." 여자는 심리적 지배권을 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가의 한 사람이었던 앤드류 카네기 (10)는 그의 인생의 마 지막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어떻게 그처럼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말했다. "비결은 없소. 나는 그저 아내가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있 을지 알아 보고 싶었을 뿐이오. 하지만 나는 실패했소. 아내가 이겼소." 프라사드, 그대는 묻는다. 저는 줄리어스 시저나 나폴레옹처럼 소위 위대하다는 사람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실제로 위대한 사람들 뒤에도 여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소위 위대하다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 그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아내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위대해지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들에 있어서도 그것은 사실이다. 한 젊은이가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저는 결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아내, 크산티페(11) 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위험한, 아마존족(12)같은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소크라테스를 때리곤 했다. 한 번은 뜨거운 끓는 물을 그에게 부은 적도 있었다. 그년는 차를 만들 기 위해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화가 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얼굴에 그 물을 부어 버 린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못생긴, 매우 못생긴 남자였다. 들창코에, 쳐다볼 만한 가치라고는 전 혀 없는 구역질나는 모습이었다. 크산티페는 그를 더욱 구역질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의 얼굴의 절반은 일생 동안 화상을 입은 채로 남아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 젊은이는 적절한 사람을 찾아 온 것이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남편 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아테네 사람들 모두가 당신의 아내 와 당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델피의 신탁(13) 으로부터 공인을 받은 가 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온 것입니다. 지금 저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해여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대는 결혼을 해야 한다." 젊은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말했 다. "당신은 크산티페와 같은 아내와 함께 살아 보고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는 말했다. "그렇다. 만약 그대가 좋은 아내를 얻는다면, 그녀는 그대가 인생에서 성공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녀는 그대 안에 야망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젊다. 그대는 야망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나의 아내와 같은 아내를 얻 게 된다면, 그대는 철학자가 될 것이다. 간의 아내는 내가 동요하지 않는 기술을 뱅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성공이든 실패든, 불행이든 행복이든 나에게는 똑같다. 그녀는 내가 중심에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어느 쪽이 되었 든 그대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니 결혼하라." 붓다가 깨달은 것은 그의 아내, 야소다라(Yashodhara)때문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마호멧이 신의 예언자가 된 것도 그의 아홉 명의 아내들 덕분일 것이다. 이들은 방해 와 괴롭힘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월의 세계를 찾기 시작했고, 내 면을, 내적인 초월의 세계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온 세상 을 잊을 수 있었다. 아내, 여자는 그대 주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세계이다. 그녀는 그대가 가는 곳 어디에서든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그대의 소위 위대하다는 사람들은 여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위대하다고 할만한 사람들 또한 대부분 여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 비록 그들 자신은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이것은 추하다. 나는 왜 여자들이 깨닫지 못하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 이유는 어느 남자 도 여자를 극단에까지 몰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 다. 그것은 단지 남자의 무능력함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를 그러한 지점까지 몰고 가 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들은 언제나 땅에 속해 있고, 중심이 잡혀 있다. 남자 는 땅에 있지 못하고, 중심이 잡혀 있지 않다. 남자는 변덕스럽다. 그는 안정이 필요 하다. 중심이 필요하다. 런던의 소호(Soho) 거리를 걷던 젊은이가 세찬 바람에 휘날리는 초미니스커트를 끌 어내리려 애를 쓰고 있는 매력적인 여자를 보았다. 모자를 들어 인사하며 그가 말했 다. "바람이 심하군요(airy) (14), 그렇죠?" "제기랄, 그럼 대체 뭘 기대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깃털?" 쉴라와 조지는 프랑스의 고풍스런 중세풍의 마을에서 신혼 여행의 첫날밤을 보내고 있었다. 밤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내기 위해, 쉴라는 야경꾼이 매시간 종을 칠 때마다 관계를 갖자고 수줍은 듯이 말했다. 조지는 기대에 부풀어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 러나 네 번째 종이 울린 후, 그는 담배를 사러 나가는 체하면 밖으로 나와, 비틀거리 며 야경꾼의 종탑으로 갔다. "이봐요, 할아버지," 그는 목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 좀 도와 주십시오. 남은 밤 시간 동안 종을 한 시간마다 치지 말고 두 시간마다 쳐 주세요!" "아," 야경꾼이 콧수염을 만지며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해 주고 싶군, 젊은이. 하 지만 그럴 수 없소." "왜요? 돈이 문제라면 제가 돈을 드릴께요!" 조지가 외쳤다. "그게 아니오." 노인이 대답했다. "사실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삼십분 마다 종을 쳐 달라고 벌써 돈을 주고 갔고." 저는 늘 여성 숭배자로서 여성을 찬양하다가 결국에는 여자의 바보가 되어 버리곤 했습니다. 그대가 여성 숭배자라면 그대는 필연적으로 여자의 바보가 되어 버릴 것이다. 왜냐 하면 숭배는 환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숭배는 오직 거리가 있을 때에만 가 능하다.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는 더 바보같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가 여 자에게 걸려들 때 그대는 그 빌어먹을 바보로 변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대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걸려들려 노력했었다. 따라서 그대는 쉽게 빠져 나올 수도 없다. 쥐덫은 결코 쥐를 따라가지 않는다. 쥐덫은 단지 중심이 잡힌 채로 땅에 뿌리를 내 리고 앉아 있다. 허황된 낭만주의에 사로잡힌 쥐는 쥐덫 안의 편안함을 꿈꾸기 시작한 다. 그 안의 음식의 냄새, 스파게티와 갖가지 음식들... 그리고 붙잡힌다. 잡히기는 쉽다. 그러나 다시 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쥐덫에는 입구만 있을 뿐, 출구는 없기 때 문이다. 따라서 프라사드, 그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나는 어떤 여자도 숭배하지 않는다. 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매우 사실적이 다. 내가 남자나 여자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거기에는 어 떠한 허구도 없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쥐덫에 붙잡히고 나면, 그대는 또 다시 끊임없 는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 편안해 보이고, 더 따뜻해 보이고, 더 아 름답고 더 향기로워 보이는 쥐덫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향기로운(spicy)' 이라는 단어는 '배우자(spouse)'라는 단어의 복수형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혼이란 매 우 이상한 사건이다. 제일 먼저 디저트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심장 이식수술을 받은 환자가 의사를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식이요법을 지시받았고, 담배를 금지당했으며, 적어두 하루 8시간의 수면을 취하라는 충고를 받았 다. 마침내 환자가 물었다. "성생활은 어떻습니까. 선생님? 관계를 가져도 괜찮을까요?" "당신 부인하고만 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말했다. "너무 흥분하시면 안 되니까요." 중년의 남편이 의사를 찾아왔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성적 능력이 사라져가는데 대 해 끊임없이 불평을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의사는 그에게 알약 한병을 주며 그 약이 놀라운 작용을 할 것이라고 보증했다. 한달 뒤 그 남자는 돌아왔고, 틀림없이 결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더군요. " 그는 말했다. "하룻밤에 세 번씩 했습니다." "잘됐군요." 의사가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이제 뭐라고 하시나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직 집에는 안 들 어갔거든요!" 그대는 내게 묻는다, 프라사드. 당신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에 있어서 비밀이란 없다. 아니면 그대는 그것은 "열린 비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다. 나는 닫힌 주먹처럼 살지 않는다. 나 는 펼쳐진 손처럼 산다. 어떤 것도 감추어지지 않고, 어떤 것도 비의적이지 않으며, 어떤 것도 비밀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실제 가능한 수 이상의 많은 여성들이 곁에서 일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자유롭게 남아 있고 그들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나의 열린 비밀은 바로, 그대 주위에 매우 많은 여자들을 둘 때에만 그대는 자유로 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여자들은 너무나 서로에게 신경을 쓰는 나머지, 그대를 홀로 내버려 둔다. 사실, 그들은 그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는다. 그들은 질투와 시기 심 때문에 다른 생각을 잊는다. 만약 누군가가 여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를 원한다 면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이 나의 열린 비밀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내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또한 그 누구도 소유하지 않는 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마약 그대가 어떤 여자를 소유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대가 어떤 여자에게 소유당한다 해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 의해서 소유 당하지도 않는다. 나느 그저 계속 앉아서 나 자신의 일만을 계속할 뿐이다. 사실 그 일이란 아무 일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 그 여자들이 떠들어 대도록 내버려 둔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때 문에 그들은 나를 완전히 잊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실제 가능한 수 이상의 많은 여성들이 곁에서 일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니다. 그대는 얼마가 한계인지 모른다. 하늘도 그 한계가 될 수 없다! 새로운 코 뮨 (15)이 일어나면 그대는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곁에서 일을 하도록 할 것이다. 때문에 내가 죽었을 때조차도 내가 더 이상 여기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리는 데 몇 년이 걸릴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소동과 춤과 사랑과 온갖 종류의 바보같은 일들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그대는 내가 아직 여기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 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자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그들이 남자들보다 더 실용적이고, 현실 에 대처하느 더 큰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땅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좀 더 하늘을 향해 있으며, 여자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매우 실용적인 배치이다. 만약 여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면 세계는 많은 어리석은 것들을 놓아 버릴 것이 다. 예를 들어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옷과 패션쇼와 모델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무기, 원자 폭탄, 수소 폭탄 등과 같은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어떤 여자도 이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 을 것이다. 이런 일을 할 숭 있는 것은 오직 남자들 뿐이다. 십자군 (16)은 사라질 것 이다. 종교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지하드 (17)는 사라질 것이다. 어느 여자도 이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매우 실용적이다. 실제적이다. 여자는 옷과 화장품, 아름다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들은 좋다. 그것은 그대를 더 살아 있 게 해 준다. 남자의 관심은 매우 위험하다. 그들의 관심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이며, 경제학적인 것들 뿐이다. 그것들은 점점 거 많은 해악만을 끼친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인류에 봉사한다는 이름 아래 가장 많은 해악이 일어난다. 3천 년 동안 5천 번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 모든 공은 남자의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죽어간다. 어떤 여자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화장품이나, 옷, 디자인, 드라마, 새 접시 때문에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 때문에 세계 대전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코뮨이 매우 땅에 기반을 두고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여러 생을 통한 나의 경험과 관찰에 따르면, 나무는 먼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뿌리가 더 깊이 내려갈수록 가지는 더 높이 올라간다. 만약 그대가 꽃이 별에 다다르 기를 바란다면, 그대는 땅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계속해서 혼돈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 속에 있다. 그것은 그 들이 모두 부리에 대해서는 생각도 않은 채, 저 너머, 저 멀리, 별에 도달하려고만 해 왔기 때문이다. 붓다는 여자에 반대했다. 그는 여자를 입문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종교가 5 천년을 지속될 수 있지만, 마침내 여자를 입문시키는데 동의했기 때문에 5백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관찰은 정반대이다. 여자 없이는 5백년도 지속되지 않 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가 죽었던 바로 그 순간, 남자들은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그것은 사상 전쟁이었다. 32개의 분파가 즉시 생겨났다. 바로 그 날 말이다! 붓 다의 육체는 아직 다 타지도 않았는데, 32개의 철학 학파가, 32가지 해석이 일어났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가 죽었을 때, 그 열두 명의 바보들은 모두 사라졌다. 세 명의 여자들이 그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리기 위해 거기 있었다. 그러나 단 한명의 남자도 없었다. 창녀인 막달라 마리아 (18)가 거기 있었고, 그녀의 여동생 마르타가 있었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거기 있었다. 그 모든 사도들, 그 광신도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바티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예수는 죽었다. 이제 문 제는 신학, 철학,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 세명의 여자들은 신학이나 철학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몸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더 실용적이고, 더 진실하고, 솔 직하고, 순수했다. 그들은 그 남자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그들은 비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모든 남자들은 사라졌다. 유다는 예수의 가장 학식있는 제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은화 30냥에 예수 를 팔아 넘겼다. 어느 여자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모든 제자 들 중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적인 사람들은 쉽게 배신한다. 그들은 세상 에서 가장 변절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슴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머리만 있다. 그리고 머리는 교활하며, 계산적이다. 여자는 가슴으로 산다. 따라서, 나의 코뮨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기능할 것이다. 코뮨은 먼저 땅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정원사들이 하는 일이다. 먼저 그대는 식물에 토양과 비료를 주어야 한다. 뿌리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면 꽃은 저절로 나오게 된 다. 꽃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꽃은 나올 수 없다. 뿌리가 꽃은 양 날 개와 같다. 그대가 양 날개를 가지고 있다면 하늘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첫 번째 것, 기본적인 것, 근본적인 뿌리이다. 여자는 모든 생명의 뿌리이다. 남자는 기껏해야 가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꽃이 피 어나는 가지, 아름다운 가지, 별에 도달하려는 열망, 갈망. 그들은 함께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프라스드, 내가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여기에 두고 있는 이유이다. 서서 히 서서히 그들은 모든 토양을 흡수할 것이고, 그대를 자유롭게 놓아 줄 것이다. 꽃으 로 자라날 수 있도록 남자를 자유롭게 놓아 줄 것이다. 진정한 코뮨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수용할 것이다. 모든 과거의 코뮨들을 죽어야 한다. 그것들은 오직 남자들의 손에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코뮨들은 결코 여자 들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떠한 여자도 코뮨을 창조할 수 없었 다. 여자들은 별에 도달하기를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코뮨이란 동경, 열망, 성장하고자 하는 커다란 열망, 탐험하고자 하는 무한한 충동 을 의미한다. 어떤 여자도 코뮨을 위한 주춧돌을 놓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남 자는 언제나 저 멀리의 것에 관심이 있다. 따라서 남자는 코뮨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어떠한 남자도 뿌리를 줄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과거의 문제였다. 여자는 뿌리를 줄 수 있지만 꽃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남자는 꽃을 줄 수 있지만 뿌리에는 관심이 없다. 깊은 동시성(synchron icity), 깊은 조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에서 이루려 하고 있는 일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여자들로 모든 고객들을 만족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진취적인 여자 포주가 3층짜리 매춘굴을 열었다. 그녀는 1층에는 유능함을 고려해서 전직 비서들을 두었고, 2층에는 미모를 고려해 전직 모델들을 배치했으며, 3층에는 지적인 점을 고려 하여 전직 학교 선생들을 배치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대부분 손님들이 3층 으로 몰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이유를 물었고, 마침내 오랜 고객 중의 한 사람 으로부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글쎄요." 그 신사가 말했다. "학교 선생들이 어떤지 아시잖아요. 제대로 할 때까지 계속 시키거든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열린 비밀이다. 나의 여자 산야신들은 정말로 완벽하게 잘하 고 있다. 그들은 그대가 제대로 할 때까지 계속 시킬 것이다! 회사의 크리스마스 파티 다음날 아침, 남편이 숙취로 괴로워하며 깨어났다. "죽을 지경이군." 그는 투덜댔다. "그럴 수 밖에요." 그의 아내가 말했다. "어젯밤에 당신은 정말 바보같은 짓을 했어 요." "내가 어쨌는데?" "당신이 당신 사장과 말다툼을 벌였고, 사장은 당신을 해고했어요." "저런, 빌어먹을 사장놈, 지옥에나 가 버려라!" "바로 그게 당신이 사장한테 한 말이예요." "내가?" 못 돔겠다는 듯 그가 말했다. "에이, 그 씨팔놈의 늙은이!" (19) "바로 그게 내가 한 짓이에요." 아내가 대답했다. "월요일에 다시 출근하세요." 매우 실용적이다! 샘이 그의 아내 베키에게 물가가 너무 올라서 지출을 줄여야겠으며, 의식, 극장, 공 연 등도 삼가야겠다고 말했다. 베키가 불평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샘, 당신이 섹스만 제대로 해도, 우리가 운전 기사를 쫓아낼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러나 남자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산다! 한 남자가 집으로 돌아와, 가장 큰 성기를 가진 남자를 뽑는 대회에서 상으로 받은 버본 한 병을 자랑스럽게 아내에게 보여 줬다. "뭐라구요?" 그녀는 외쳤다. "그럼 그 사람들 앞에서 그걸 보여 줬단 말이에요?" 그가 대답했다. "이기는데 필요한 정도만 보여 줬어, 여보, 이기는데 필요한 정도만 !" 사랑하는 오쇼. 저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에게 할 질문들을 적었었습니다. 제가 편지를 다 썼을 때마다, 저는 제가 쓴 모든 것들이 헛소리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그것들을 휴지 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께서 저에게 몇 마디 말을 해 주시기 원합니다. 비록 제가 당신의 말을 거의 귀기울여 듣지 못하고, 그저 당신의 말이 들리는 곳에 앉아 있 을 분이지만 말입니다. 제가 여기에 도착한 이래로 저는 정말 화가 났었습니다. 저는 서양에 있을 때 아무 문제도 없었고, 결코 스승을 찾지도 않았었습니다. 지금 저는 여기에 있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애닐리스(Anneliese), 내가 그대에게 일어난 것이다. 이제 되돌아감은 없다. 그리고 돌아간다 해도 내가 그대와 함께 갈 것이다. 나는 어디에나 그대를 따라다닐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화가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의 모든 즐거움이다. 일단 화가 나면 그들은 걸려들고 만다. 물론 서양에서 그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오직 지금여기가 아 니라면 다른 어디에서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서양이든 동양이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전에 맛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맛보았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중 독적인 어떤 것, LSD (20)와 같은 어떤 것을 맛보고 나면 그대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맛이 그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맛이 그대를 따라다닐 것 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순수한 LSD이다! 그것은 화학적 LSD가 아니다. 그것은 연금술적인 것이다. 어떠한 화학적 LSD보다도 휠씬 정제된 LSD이다. 그것은 진 정한 소마(Soma) (21)이다! 그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나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애닐리스. 그저 나와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저 조율되어 있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말은 그대를 나에게 조율시키기 위한, 그래 서 그대가 잠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그대가 말한다. 제가 편지를 다 썼을 때마다, 저는 제가 쓴 모든 것들이 헛소리인 것처럼 느껴졌고. .. 그렇다! 그것들은 헛소리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무얼 하란 말인가? 나를 휴지통으로 이용하라. 그대가 쓴 것이 무엇이든, 의미 있는 이야기든, 헛소리든... 사실 그것은 모두 헛소리들이다. 내가 보는 한에서 는 모두가 헛소리들이다. 따라서 그대는 그것을 나에게 보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편지들을 이용해서 미친 소리들을 할 것이다. 한 빈민굴을 거지가 구걸로 모은 돈을 들고, 윌 스트리트의 한 고급 술집에서 좀 쉬 었다 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한 재벌 실업가는 그 거지같은 사람의 몰골과 악취에 치를 떠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 거지같은 남자를 돌아보며 빈정대듯 말했다. " 깨끗함은 신성과 다름없는 것이다 - 존 웨슬리." 그의 말은 무시되었다. 몇 분 뒤 그 실업가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깨끗함은 신선성과 다름없는 것이다 - 존 웨슬리." 여전히 그는 무시되었다. 마침내 눈에 띄게 화가 난 실업가는 그 남자의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깨끗함은 신 성과 다름없는 것이다 - 존 웨슬리." 마침내 빈민굴 거주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엿이나 먹어라! - 테네시 윌리암스." 그대는 나에게 어떠한 헛소리들이라도 물을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더 큰 헛소리를 되돌려 줄 것이다. 나는 그 점에 있어 전문가이다. 그것은 내가 자랑할만한 유일한 전 문 분야이다. 그리고 질문이 더 터무니없을수록 나로서는 더욱 즐겁다. 왜냐하면 그보 다 더 터무니없는 대답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황당한 질문을 하는 것 을 황당한 대답을 바라고 있음을 의마할 뿐이다. 그리고 황당함에 있어서는 누구도 나 를 능가할 수 없다! 애닐리스... 한 남자가 식당에 들어가서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여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왔을 때, 그는 그녀의 엄지 손가락이 커피잔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스크램블드 에그 요리가 도착했을 때, 그는 다시 그녀의 엄지 손가락이 계란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목 격했다. 이것은 너무 심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말했다. "아가씨, 나는 당신 손가락이 내 커피잔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 말하지 않았소. 하지만 이 젠 내 계란 요리에까지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은 너무하지 않소?" 여종원이 말했다. "사실은 저는 엄지손가락 관절에 심한 관절염이 있어요. 그런데 의사가 따뜻한 데 손을 넣으면 통증이 줄어든다고 하지 뭐예요." 그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러면, 당신 항문 속에다 집어 넣지 그러시오?" "아, 물론 그렇게 해요." 여종업원이 대답했다. "주방 안에 있을 때만요!" 오늘은 이만. (1)이 질문 역시 '로마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무류설(infallibilism) 을 빗대어 물어본 말. (2)탈무드(Talmud) : 유태인 율법학자들이 사회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 구전, 해설한 것을 집대성한 책. 이 책은 유대교의 율법, 전통적 습관, 축제, 민간전승, 해설 등을 총망라한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유산으로 유대교에서 '토라(Torah)'라고 하는 ' 모세의 5경' 다음으로 중요시된다. (3)티무르(Timur, 1336-1405) : 중앙아시아 티무르제국의 건설자. 유럽인은 Tamerla ne이라 불렀다. 해마다 사방으로 원정하여, 1395년에는 모스크바 부근가지 진군하였 다. 98년에는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고 많은 재화를 약탈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동방의 명나라를 정벌 하려고 떠났으나,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였다, (4)나디르 사흐(Nadir Shah, 1688-1747) : 이란 아프샤르와조의 창시자. 사파비 왕 에게 충성을 바친 투르크의 아프샤르족 출신으로, 사파비왕조 타마스프 2세를 옹립하 여 터키, 러시아 등과 싸워 몇 차례 격파하자, 타하마스프콜리칸 칭호를 받았다. 후에 타마스프를 폐위시키고, 왕의 어린 아들을 즉위시킨 뒤 자신이 섭정하였다. 그러나 17 36년 아바스 3세를 폐하고 나디르 사흐라고 자칭,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아프가니스 탄의 칸다하르, 카불, 인도의 수도 델리, 우즈베크의 프라하 등을 점령하였다. 1747년 쿠르드족 반란 진압차 출병중 막사에서 부하에게 암살됨. (5)라마(Rama) : 인도 신화에 나오는 비쉬누신의 7번째 화신이며,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주인공. 코살라 왕국 다사라타왕의 첫째 왕비의 맏아들로서 소년시절부 터 활을 잘 쏴 악마를 물리치고 상으로 마법의 화살을 받았다. 비테의 국왕 자나카의 왕궁을 방문하였을 때, 아무도 당길 수 없던 쉬바신의 활을 만월같이 당겨, 자나카왕 의 딸 시타와 결혼하였다. 후에 실론의 마왕 라바나가 라마를 시기하여, 라마의 아내 시타를 납치해 간다. 라마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전투가 서사시 '라마야나'의 최대 주제로, 원숭이 장군 하누만이 충실한 신하로 등장한다. (6)마리화나(marihuana) : 인도, 아라비아 지방의 야생삼인 인도대마초의 암그루 꽃 이삭과 상부 잎에서 분리한 호박색 수지를 가루로 만든 마약. 이것을 사용하면 감각을 잃고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해지며 유쾌해져서 자기를 상실하고 헛소리를 하며 환각, 환상 등의 정신적 이상을 나타낸다. (7)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자기 자신의 '혼 (psyche)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 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 다. 결국 젊은이들을 미혹케 한 죄로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 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에 의해 자세히 그려졌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 관해 썼던 글 들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8)악바르(Akbar, 1542-1605) : 인도 무굴제국의 제 3대 황제로 사실상 무굴제국의 확립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14세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즉위 초에는 부왕의 친구인 바이람칸이 섭정하였으나, 1560년에 그를 추방하고, 이어 측근들을 숙청하여 황제의 통치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40여년 동안 영토확장전쟁을 계속하여 고대 제국의 아소카왕에 비견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무굴 체제로 일컬어지는 정치체제를 확립하였다. (9)비르발(Birbal) : 악바르 대제의 궁중 광대였다고 전해지는 인물. (10)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 : 미국의 대 부호, 강철왕, 자선 가. (11)크산티페(Xanthippe) : 소크라테스의 아내. 후처였다고도 전하지만 확실치는 않 다. 아내로서 남편의 언동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항상 상스러운 말로 욕하는 등 남편 을 경멸하여, 악처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아마존족(Amazon)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무사족. 복수형으로 아마조네스라 도도 한다. 여자만의 부족이어서 남자가 태어나면 모두 이웃 나라로 보내거나 죽여 버 렸고,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계절에 다른 나라의 남자와 만났다고 한다. 여자 는 활을 쏘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렸을 때 오른쪽 유방을 도려내 버리고 키웠다 고 전한다. (13)델피의 신탁(Oracle of Delphi) : 그리스의 옛 도시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있었 던 신의 계시를 받는 장소. (14)airy를 hairy(털이 많은)로 잘못 들을 수 있음. (15)코뮨(commune) : 공동체 (16)십자군(crusades) :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 한 대원정. 그 때 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십 자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17)지하드(jihads) : 성전. 성년이 된 남자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된 이슬람교 젖파 의 의무. '오른손에는 검, 왼손에는 코란'이라고도 표현되듯, 옛날부터 비이스람교도 에 대한 약탈전쟁으로 간주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무력에 의한 지하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펜에 의한' 평화적 전투가 강조되고 있지만, 최근까지도 지하드의 기치 를 내걸고 일부 이슬람교 단체들이 이스라엘 등의 서방 국가 등에 대하여 게릴라전과 테러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18) 막달라 마리아(Maria Magdalena) : 예수 여제자. 갈릴리 서쪽 막달라 출신으로 '일곱 악령'에 시달리다가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고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루가 8: 2).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마태 27:56),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와(루가 23:55), 요한 및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부활한 예수를 만 났다(루가 24:1-10). (19)screw the old goat! screw는 fuck과 비슷하게 쓰이는 욕설로서, '성교하다'라 는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20)LSD(lysergic acid diethylamide) : 환각 유발약으로 LSD-25라고도 한다. 환각 작용이나 중독성이 일반적인 마약보다도 심하다. (21)소마(Soma) : 인도의 고대 베다의 소마제에 등장하는 신주, 환각작용이 있는 술 이나, 환각제였던 것으로 추정됨. @ff 나는 평범함을 찬양한다 사랑하는 오쇼. 저는 대학이 줄 수 있는 모든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저는 아직도 무지 합니까? 프리탐 싱 박사(Dr. Pritam Singh), 지식은 무지를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지 식은 거짓된 현상이다. 지식은 전혀 지혜가 아니다. 오히려 지쳰가 반대이다. 지식은 빌려 온 것이며, 지혜는 그대 내면의 존재로부터의 꽃피어남이다. 플라스틱 조화라면 빌어올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장미꽃을 원하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내면의 존재 안에서 그 꽃들을 키워야 한다. 어떠한 대학도 그것을 해 줄 수 없다. 어떠한 경 전도 그것을 해 줄 수 없다. 어떠한 학식도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것은 모두가 소용없는 노력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속여 왔다. 그러한 것들은 그대를 박식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박식해지는 것과 아 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장님도 빛에 관해 박식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빛을 전혀 모른다. 그는 빛을 경 험한 적이 없다. 그는 빛에 관한 모든 종류의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으며, 논쟁을 벌 일 수도 있고, 철학화하고, 체계화할 수도 있다. 빛에 관한 대논문을 쓸 수 있다. 그 러나 그는 빛의 기쁨을 맛본 적이 없다. 단 한줄기의 빛도 본 일이 없다. 그는 무지개 를, 꽃들의 빛깔을, 나비의 날개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초록색 나무들도, 별들도, 해 도, 달도 보지 못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놓쳤다. 그가 쌓아온 것들은 그저 쓰레기 일 뿐이다. 빛에 대해 매우 박식한 장님이 되는 것보다는, 무지하더라도 눈을 가지는 편이 낫 다. 그러나 대학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어떠한 사회도 그대가 현명해 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명함은 사회의 모든 투자에 반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이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을 기계적인 삶을 살도록, 로봇과 같은 삶을 살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성을 주장할 것이다. 그들은 반역이 향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살기를 위할 것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지혜와 함께 찾아온다. 자유와 지혜는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사회도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공산주의 사회, 파시즘 사회, 자본주의 사회,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사회... 어떤 사회도 사람들이 자신의 지성 을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기 시작하 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위험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체제에 대해서, 가진 자들에 대 해서, 갖가지 압박과 착취와 억압을 가하던 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위험해진다. 교회에 대해, 정부에 대해, 국가에 대해 그들은 위험해진다. 사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불타고 있고, 살아 있으며,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바란다. 죽음은 그에게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것이 다. 그러나 갖가지 어리석은 것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팔아 버릴 수는 없다. 그는 그들에게 봉사할 수 없다. 다라서 사회는 오랜 옛날부터 그대에게 거짓 지 식을 공급해 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학교와 대학의 기능이다. 잊지 말라. 그러한 학교들은 그대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과거에 봉사한다. 기존의 권리를 위해 봉사한다. 물론 그들은 그대의 에고를 계속 더 크게 키워 준다. 그들은 계속 더 많은 학위를 준다. 그대의 이름은 점점 더 길어진다. 그러나 이름만 길어질 뿐이다. 그대 자신은 점점 더 짧아진다. 마침내 증명서만 남고, 사람은 사라져 버리는 시점이 온다. 처음에는 사람이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만, 나중에는 증명서가 사람을 가지고 다닌다.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다. 프리탐 싱 박사, 대학을 통해서 현명해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지혜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정반대의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지식은 마음의 것이고, 지 혜는 무념의 상태이다. 지식은 거위 둘레에 병을 창조해 낸다. 아름다운 병, 매우 아 름답게 채색된 병, 그러나 그것은 그저 병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정말로 살아 있는 거위가 들어 있을 순 없다. 병 속에는 기껏해야 박제된 거위나 거위를 그린 그림이 들어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학자라는 자들이다. 그들은 박제 토마토, 감자들이다. 모두가 쓰레기가 가득 찬 박제이다. 그것은 겉보기 에는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대는 단지 병만을 가지고 다닐 뿐이다. 그리고 병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지식은 축적하려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 식은 끊임없이 스스로 불어난다. 지식은 산아 제한을 믿지 않는다. 그대가 어떤 한 가 지를 알게 된다면, 그대는 도 다른 것이 궁금해 질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질문이 대답되어질 때마다 10가지 새로운 질문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같은 일 이 반복될 것이다. 10가지 질문이 대답되어지고, 그대는 그대에게 준비되어 있는 100 가지 질문을 맞이한다. 그것은 계속 퍼져 나간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그대는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대는 묻는다. 왜 저는 아직도 무지합니까? 그것이 그대가 무지한 이유이다. 그대는 아직 지식의 환상, 마음의 환상으로부터 빠 져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부터 나와라, 마음이 바로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병이다. 그대가 마음을 놓 아 버리는 그 순간... 마음은 그대의 생각일 뿐이다. 마음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가공의 것이다. 그것은 단지 환영일 뿐이다. 그것은 꿈이 만들어진 것과 똑같은 재료 로 만들어져 있다. 그대는 간단히 마음에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순간이다. 프리탐 싱 박사. 왜냐하면 "대학의 모든 학위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왜 아직도 무지한가?"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사실 대단한 통찰력이기 때 문이다. 여러 해 동안 지식을 쌓아 왔던 것이 순전히 시간낭비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라. 거기에서 빠져 나와라. 그대가 마음에서 빠져 나오는 그 순간, 그대는 병에서 빠 져 나온 것이다. 보라... 거위는 밖에 있다. 그 때 그 모든 하늘의 자유, 그 모든 통 찰의 자유가 있다... 며칠전에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학위들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네 가지가 있 었다. B.A(문학박사), M.A(문학석사), ph.D(철학박사), 그리고 LL.D(법학박사)가 있었다. 모두 합치면 뭐가 나오는가? 바마프들드(BAMAPHDLLD)이다! (1) 브리즈(Breeze)라는 이름의 젊은 대학생이, 문학 학사와 법학 박사 공부에 짓눌려 과로로 스러졌다. 의사가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2) 너무나 아들을 원하는 한 교수가 흥분한 채 산부인과의 대기실에서 안절부절하고 있 었다. 마침내 의사가 분만실에서 나와서 그에게 말했다. "다 됐습니다. 존스 박사님. 축하합니다!" 아직도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말했다. "제가 아빠가 됐나요, 아니면 엄마가 됐 나요?" 이것이 바로 바마프들드의 의미이다. 시골에 사는 교수 부부가 지역의 지주로부터 가장무도회에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암소로 분장하고 가기로 결정하고 남편이 앞에, 그리고 부인이 뒤에 들어갔다. 파티는 지주의 대 저택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고, 그 앞은 들판이었다. 그래서 그 들은 먼저 복장을 갖추고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들판을 반쯤 지났을 때, 앞쪽에 위치해 있던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겁먹 지 말아요, 여보. 하지만 앞에 수소가 우릴 쳐다보고 있어." 그들은 계속 걸었고 수소는 계속해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수소가 땅을 긁으며, 의미 있는 눈빛을 보내며 그들을 향해 오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어, 여보. 우리 쪽으로 와!" 남편이 말했다. "이제 어쩌지요?" 아내가 소리쳤다. 남편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을게. 하지만 당신은 각오를 단단히 하 고 있는게 좋겠어!" 젊은 영국인 교수가 첫 미국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도시의 홍등가에서 숙소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여주인은 기쁘게 기에게 밤을 보낼 방을 제공했다. 다음 날 점심 식사 후에 친구가 잠자리가 어땠느냐고 물었을 때 젊은 영국인은 대답 했다. "글세, 방 치장 한 번 요란하더군. 그런데 세상에 무슨 룸써비스 아가씨가!..." 소위 학식있는 사람들, 학자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가공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현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들은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 그리 고 그대의 삶을 기쁨으로, 지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현실이다. '신'이라는 단어는 신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역시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 신'이라는 단어, 또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은 커다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이 무엇인지, 사랑의 신비가 무엇인지 알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어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 단어가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 다. 모든 지식적인 사람들의 눈은 학설이나 신학, 교리, 교의 등으로 너무나 뒤덮여 있다. 때문에 그들은 볼 수가 없다.r 그들의 눈은 투명하지 않다. 그리고 지혜란 투명 함이다. 해맑은 시야이다. 사상으로 흐려지지 않은, 온갖 먼지로 흐려지지 않은 시야 이다. 그대는 매순간 스스로를 청소해야 한다. 왜냐하면 먼지는 매순간마다 거울 위에 쌓 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r,대가 여기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욕실의 거울에도 먼지가 쌓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밤에도 먼지는 쌓인다. 욕실의 문 도 닫혀있지만, 먼지가 모이고 거울에 달라붙는다. 먼지 입자들은 공기 중에도 퍼져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그대는 거울을 닦아야 한다. 내면의 마음, 내면의 거울, 내적인 자기 반성에 있어서는 더욱 더 주의해야 한다. 매 순간 그대는 먼지를 닦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한다 - 매 순 간 산야신은 과거에 대해서 죽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때 그는 투명하게 남는다. 그의 거울은 깨끗하게 남아 있다. 그때 그의 시야를 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때 그는 기독교도도 아니고, 힌두교도도 아니며, 이슬람교도도, 불교도도 아니다. 그 때 그는 단순히 하나의 거울일 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비춘다. 내면과 외면을 단순 히 비춘다. 그 비춤으로부터 지혜는 태어난다. 지혜는 그대의 투명함, 그대의 명료함, 그대의 빛나는 존재의 꽃피어남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사실 스승의 역할이란 사회가 그대에게 한 일을 원상태대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그것은 반대학교(anti-university)이며, 반학교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어떤 것, 다른 차원의 어떤 것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 안의 어떤 것을 불러일으켜 그대가 소위 경전, 단어, 이론들로부터 벗어나, 단지 평범해질 수 있 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대는 어떤 허세도 없는 그대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나는 의식의 평범함을 찬양한다. 나는 여기에서 그대에게 초인을 가르치고 있는 거 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로 그 초인사상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인 도에서도 스리 오로빈 (3)가, 그의 전 생애동안 초인, 마음의 초월, 초자연이라는 생 각으로 인도의 에고를 배불려 왔다. 이 모든 신비적인 넌센스들은 인간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어 왔다. 때문에 그것 은 완전히 불타 버려야 한다. 그 이하로는 안 된다. 불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탈 수 있는 모든 것이 불타 버리고 그대의 진정한 자아만이 남아야 한다... 나는 비의가(esoteric)가 아니다. 나는 비술가(occult)가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또 다른 세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초자연, 초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모든 인간의 평범함을 찬양한다. 인간의 평범함 분만 아니라, 동물과 나무, 강, 바위들의 평범함을, 이 신성의 평범함을 찬양한다. 나에게 있어서 신성과 평범함은 동 의어이다. 만약 나에게 평범함과 신 중 한 단어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신'이라는 단어 를 버릴 것이다. 그것은 정말 빌어먹을 것(goddamned) (4)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저 순수한 평범함... 그리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즐겁게, 춤추며, 축하하며 사는 삶. 그 때 지혜는 피어난다. 그 때 봄은 찾아오고, 풀잎은 스스로 자라난다. 사랑하는 오쇼. 인도에 대한 당신의 연민의 대가로서, 당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분노와 비난뿐 입니다. 매일같이 인도의 신문과 잡지는 당신에 대한 저질 비평들로 가득 차 있습니 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 썩은 문화를 계속해서 두들겨 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인도가 그처럼 많은 연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차이타냐 키르티(Chaitanya Keerti),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내가 인도가 완전히 잊어버린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처가 된다. 인도는 진실을 잊어버렸다. 수 천년 동안 인도는 안개 속에서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인도는 그와 같은 상태에 매우 집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도는 달리 집착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 도의 에고를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2천 2백 년동안 인도는 정치적 노예 상태에 있었다. 자, 2턴 2백년 동안 노예 상태 로 존재한 나라는 적어도 정치적인 면세서는 에고를 충족시킬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 다.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세계의 정복자를 자랑할 수도 없다. 5천년 동안 인도는 매우 미신적인 방식으로 살아왔다. 성직자들은 그 어떤 나라보다 도 절대적으로 인도를 지배해 왔다. 그리고 성직자란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사람들이 다. 그들의 착취와 억압 때문에, 그들이 5천년 동안 인도의 영혼에 해독을 끼쳐 왔기 때문에 인도는 진리로 향한 어떠한 길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성직자들은 만리장성처럼 진리를 가로막고 서 있다. 그것은 성직자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진리냐, 아니면 성직자냐... 양측이 함께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 둘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만약 진리가 이기 면, 성직자는 사라진다. 따라서 성직자들이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 진리는 허락될 수 없었다. 인도만큼 성직자들에 의해 지배된 나라는 없다. 그것은 5천년 동안의 영적인 노예 상태였다... 인도의 에고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학도, 기술도, 부도, 정치 적 자유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 는 일정한 버팀목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는 버팀목이 필요하다. 개인은 에고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은 실체이며. 실체는 에고를 필 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종족, 교회, 정부, 이러한 것들은 에고 없이 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가 없이는 이것들은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이다. 그것들을 한 데 묶어 주는 거짓 중심점이 바로 에고이다. 따라서 붓다는 에고 없이 존재할 수 있지 만, 불교도들은 그럴 수 없다. 크리쉬나는 에고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힌두교인들은 그럴 수 없다. 언제나 기억하라. 거짓 실체는 거짓 중심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다 면 그 거짓 실체는 말라 죽어 벌릴 것이다. 나라로서, 국가로서, 종족으로서의 인도는 어떻게 해서든 거짓 중심을 만들어 내야 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이나, 기술, 과학, 정치적 권력과 같은 평범한 선택은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적 갈망, 또 다른 세계뿐이었 다. 그리고 그것은 쉽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며, 반증 할 수도 없다. 다른 세상의 희망 속에 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누가 그 희망을 창조해 낼 것인가? 이제 그대는 교활한 성직자, 브라만 (5)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들은 명상가들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 대 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대에게 다른 세상의 지도를 주기까지 했다. 그들은 세계 지도, 이 세계의 지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그들에게 '팀북투' (6)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의 각 부 분을 설명해 줄 수 있다. 한 개의 천국뿐만이 아니다. 일곱 천국, 7층으로 이루어진 천국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다... 그들은 그대에게 일곱 지옥의 자세한 모습을 세세 하게 알려줄 수 있다.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은 종교적 허구이다. 힌두교인들은 일곱 지옥을 믿는다. 마하비라는, 자이나교인들은 세 개의 지옥과 세 개의 천국을 믿는다. 마하비라의 시대에 어떤 나자가 있었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사 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이름은 산자야 빌레티푸타(Sanjaya Vilethiputta)였다. 그 는 말했다. "그것은 모두 헛소리이다. 사실은 7백 개의 지옥과 8백 개의 천국이 있다. " 그러나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마하비라는 세 개만을 말했고, 힌두교에서는 일곱 개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산자야 빌레티푸타는 말했다. "그들은 거기까지밖에 못 가 봤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의 모든 지역을 살펴 보았다." 한 번은 라다소아미(Radhasoami)의 추종자가 나에게 왔었다. 그들은 14개의 천국, 1 4단계의 낙원을 믿는다. 물론, 그들 종교의 창시자는 14번째에 도달했었다. 다른 사람 들은 사다리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라마와 크리쉬나와 붓다는 일곱 번째 천국 어딘 가에 있으며, 예수, 마호멧, 짜라투스트라는 여섯 번째의 어딘가에 있다. 나나크, 빠 지르, 미라 (7)는 다섯 번 어딘가에 있다...등등 그런 식이다. 모두 각자의 능력에 달 려 있다. 그는 그 천국과 지옥의 완전한 지도를 가져왔다. 그는 내가 승인해 주기를 바랬다. 내가 그 지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뭐라고 말할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 고 싶어했다. 나는 말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는 좀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가면 혼란만 일으킬테니 가지 말 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말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나는 안다. 그대의 스승 은 14번째에 도달해 있다. 나는 그가 거기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말했다. "나는 15번째 천국에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14번째 천국에서 끌어 올려 달라고 늘 나에게 애원을 하고 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화가 났다. 그러나 14번째가 있다면, 왜 15번째는 안되는 가?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며, 반증할 수도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뉴욕의 한 상점 주인이 보이지 않는 머리핀을 팔고 있었다. 그 리고 물론 여자들은 엄청나게 매혹되었다. 보이지 않는 머리핀이라니! 한 여자가 상자 안을 들여다 보았다... 물론 보이지 않는 머리핀이므로 그것을 볼 수는 없다. 상자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말했다. "정말 있는 거예요?" 상점 주인은 말했다. "있겠지요!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말입니다. 사실은, 몇 달 전에 다 팔았는데, 아직도 팔리고 있지 뭡니까!" 어떤 것이 보이지 않을 때, 그대는 그것을 계속 팔 수 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 가 없다. 인도는 보이지 않는 상품을 세계에 팔고 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상품이 아무 것도 없다. 자연히 그들은 나에 대해 화가 나 있다. 내가 상품은 눈에 보여져야 하며,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빈 상자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병 안에는 거위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5천년 동안 그렇게 좋은 장사를 해 왔는데, 내가 그들의 근본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타냐 키르티,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분노는 단지 그 들의 두려움을 보여 줄 뿐이다. 언제나 기억하라. 분노는 거꾸로 서 있는 두려움이다. 분노 뒤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숨어 있다. 두려움은 분노의 또 다른 면이다. 그대가 두 려워질 때마다, 그 두려움을 감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를 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그대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그대의 주위에 장막을 만들어 낼 것 이다. 그대는 분노 뒤로 숨을 수 있다. 인도인들의 마음은 정말로 나를 두려워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도인들의 마음뿐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상품을 가지고 똑같 은 종류의 장사를 하고 있는 세계의 모든 다른 마음들 역시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 들은 모두 두려워한다.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낼 때면, 나는 내가 제대로 쳤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즐 긴다! 그들은 사랑과 자비, 동정, 이해를 가장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진짜 모습 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내가 바 라는 대로 하고 있다. 그들은 나의 손 안에 있다.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나 나 에게 걸려든 것이다. 이제 그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것이다. 내가 그를 휘저어 댈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따라다닐 것이다. 머지않아 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태양 아래 서게 될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낼 때, 그들은 사실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 이다. 그리고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격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방어 하려하며, 방어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분노는 단지 그들의 무 력감을 보여 줄 뿐이다. 아름다운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한 남자가 중국에 갔다. 그가 나라로 들어갈 때...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임에 틀림 없다. 그는 국경 부근에서 군중들을 보았다. 두 사람이 거의 서로를 죽일 듯이 보였 다. 그들은 소리지르고, 펄쩍 뛰고, 모든 분노의 몸짓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영화나 연극인 것처럼... 그들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잔잔 하고 고요했으며, 그들의 얼굴은 이완되어 있었다. 그들은 매우 중심이 잡혀 있고 안 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처럼 소리지르고, 칼을 휘두르고, 뛰어오르고, 밀치고, 서로 달려드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군중들은 그저 거기에 서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좀 지쳤고 다분하기도 했다. 사람은 뭔가 흥분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 라도 일어나야 한다. 그 때, 두 사람 중 한 남자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붉어졌고 그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그러자 군중들은 흩어졌다 싸움은 거기서 끝난 것 이다! 이 새로운 방문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구경꾼에게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 니다. 그들은 서로를 죽일 듯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싸움이 일어날 시점에 이르렀습 니다. 한 사람이 정말로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흩어진 것 입니까?" 그 구경꾼은 말했다. "그들은 모두 도교인들로서, 노자의 추종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교 학교의 시험입니다. 한 사람이 화가 나게 된 순간, 그는 진 것입니다. 싸 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보여줬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의 분노는 그가 겁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상대방은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는 정복자입니다. 그는 차분한 채로 남 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근원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정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차이타냐 키르티, 나는 인도 전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편지를 쓰고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은 평정을 잃고 있 다. 그것은 가짜 평정이다. 왜냐하면 가짜 평정만이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관용 이라는 그들의 신념,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다른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신념은 흔들리 고 만 것이다. 방문 밖을 나서지도 않은 단 한 명의 사람이 나라 전체에 혼란을 일으 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 깊은 현상이다. 그것은 그 모든 거짓 영성의 5천년이 인도에 아 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것이 바로 내가 전 세계에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의 주장에 힘을 더해준다. 나는 하나의 주장을 내세우고, 그 들은 그 이론을 증명해 준다. 그들은 나를 돕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충격 요법, 전기 충격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이 진짜 인 도 문화이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국외로 추방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이 그들 이 떠들어대는 관용이며, 다른 관점의 수용이라는 것의 실체이다. 또 한 사람은 내가 아라비아해에 던져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도양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인도양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폭력의 나리이며, 예언자와 현인들의 나라, 성자들과 마하트마들의 나라, 온갖 멍청이들의 나라인 것이다. 두 명의 인도인 사립 탐정들이 침실 창 밖에 숨어서 의뢰인의 부인이 외간 남자와 함께 침대에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역시 의심한 대로군." 한 인도인이 말했다. "저 친구 다음에 들어가지." "좋은 생각이야." 다른 인도인이 말했다. "그런데 저 친구는 얼마나 빨리 끝낼까? 마이애미 비치(Miami Beach)의 신성한 소똥 아쉬람(Holy Cow dung Ashram) (8)의 창 시자인 거룩하신 인도인 스승, 스와미 엣세트라난다 파라마한사(Swami Etceterananda Paramahansa) (9)가 여행을 하던 중, 덥고, 지치고, 목이 마른 채로 작은 농가에 도착 하여 농부에게 마실 것을 청했다. "술 한잔 드릴까요, 선생님?" 농부가 물었다. 인도인 스승은 움찔했다. "천만에, 나는 술을 마시지 않겠소, 형제여." 그는 단호하 게 말했다. "나는 서약을 했기 때문이오. 그 사악한 술은 단 한 방울도 나의 입술을 통과할 수 없소. 당신네 집의 신선한 우유 한 잔이면 족할 것이요." 농부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우유를 담은 잔에 럼주를 듬뿍 부었다. 그것을 받아 들 어 한껏 들이킨 스승은 입맛을 다시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오 신이여! 얼마나 놀라운 소입니까!" 뛰어난 몸매의 비서인 조안에게 있어 휴가철은 썬탠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대 부분의 시간을 봄베이의 타지마할 호텔의 옥상에서 따뜻한 햇볕을 듬뿍 받으며 보내고 있었다. 첫 날, 그녀는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둘째 날, 그녀는 그 위에서 그녀가 어떻게 하든 아무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온몸을 골고루 태우기 위 해 가운을 벗어 버렸다. 그녀가 살을 태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수건으로 엉덩이만 가린 뒤 다시 엎드렸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몹시 당황한 어린 사환이, 계단을 뛰어올라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호텔 측은 당신이 옥상에서 햇볕을 쬐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 제처럼 목욕 가운을 입어주시면 저희로서는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요?" 조안은 오히려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여기있는 것은 아 무도 볼 수 없을 텐데요. 게다가 수건으로 가리고 있잖아요." "예. 알고있습니다." 당황한 어린 호텔 사환이 말했다. "하지만 목욕 가운을 입지 않으시면 만찬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봄베이의 시장님이 도시의 모든 명사들을 초 청하셨거든요."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뭐가 문제죠?" 그녀는 말했다. "이해가 안되는군 요. 왜 만찬을 시작할 수가 없나요? 만찬과 내 목욕 가운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상관 있습니다. 아가씨." 당황한 그는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만창장의 채광창 위 에 누워 계시거든요." 자, 어떻게 만찬을 시작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인도인들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하늘만 쳐다본다. 게다가 그런 좋은 경치를!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모르고 신을 바라보고 있는 체할 것이다. 그들은 똑바로 채광창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광경을 즐기고 있 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길고 긴 기도를 하느나고 만찬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은 옥상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 척할 것이다. 이 나라는 가장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나는 그들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 는 그들을 아프게 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들 나라의 묵은 상처로부터 고름을 짜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에게 화가 나 있다. 그들은 나를 비난하 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고 비난하는 것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나를 쉽사시 무시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동의하거나 반대해야한다. 어느 쪽이든 나는 좋다. 하지만 나는 명확한 구분을 바란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와 함께 한다 해도 - 그들은 나와 함께 하고 있다 - 우리 는 이 모든 썩은 문화를 변형시킬 수 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줄 수 있다. 그들은 연 민이 필요하다. 5천년 간의 영적, 정치적, 경제적 노예 상태... 차이타냐 키르티, 이 문화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데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변할 준비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어렵다. 변화는 그 들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변화는 그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들 과거로부터의 유 물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인도의 유물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들은 과거 때문에 고 통받고 있다. 그들은 과거만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를 기억하라. 어린아이는 미래만을 가지고 있다. 아이에게는 과거가 없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결코 과거의 향수를 생각하지 않는다. 등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는 모든 것이 새로울 뿐이다. 추억이 없다. 젊은이는 현재에 산다. 현재는 너무나 아름답다. 과거라고 해야 어린 시절뿐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준비 기간이었을 뿐이다. 젊은이는 미래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람 은 현재가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 나갈 때에야 미래르 생각하지 시작한다. 노인은 과거만을 생각한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다. 죽음이, 어두운 밤이 그를 기다 리고 있을 뿐이다. 노인은 그것을 피하고 싶어한다. 유일한 방법은 미래에 등을 돌리 고 과거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어린아이는 미래를 바라보고, 노인은 과거를 바라본다. 젊은이는 현재에 머무른다.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한 문화가 매우 새로운 상태일 때, 그 문화는 미래를 바라본 다. 그 문화는 별을 향한 거대한 포부가 있다. 그것은 자라나고 확장된다. 한 문화가 정말로 젊은 상태일 대, 그 때 그 문화는 현재에 머문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일어 나지 않는다. 사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문화가 늙게 될 때, 그 문화는 향수, 과거, 이제는 없어져 버린 황금 시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개인에게 있어서고 청년기는 새로운 현상이다. 과거에 어린아이는 유년기에서 곧바 로 성년기로 가곤 했다. 청년기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아직 도 그렇다. 가난한 나라의 원시 부족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섯 살, 다섯 살 짜리 아이들이 어른처럼 일을 한다. 일곱 살, 여덟 살짜리 아이들은 이미 근심을 짊어 지고 있다. 그들은 젊어질 기회를 갖질 못할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세대차가 없었 다. 세대차는 새로운 현상이며, 매우 의미 있는 현상이다. 그것은 처음 생겨난 것이 다. 처음으로 세대차라는 것이 가능한 시기가 된 것이다. 세대차는 풍요한 사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세대차가 나타는 것은 일정한 부가 쌓였을 때이다. 아이와 어른이 마주보고 있을 때 세대차는 없다. 아이는 미래를 바라보고, 어른은 과거를 바라본다. 따라서 어린아이와 어른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우정만이 있다. 그 들은 마주 보고 있다. 과거에는 언제나 그러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살았다. 세 대차는 없었다. 청년기는 세계의 새로운 현상이다. 청년은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그는 새로 운 얼음을 깨뜨리며 나아간다. 그는 지금 여기에 살려고 한다. 그렇다 과거에도 몇몇 개인들은 그러한 끊임없는 젊은 속에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이었을 뿐, 문화는 아니었다. 이제는 문화도 현재에 살기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현재를 사는 문 화가 나타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되려면 많은 개인들이 있어야 한다. 시간에 대한 인도의 개념은 그대에게 많은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인도의 개념으로 볼 때, 최고의 시대는 지났다. 그것이 첫 번째 시대, 황금 시대였다. 그들은 그 시대 를 '샤드야 유가(Satya Yuha)', 즉 진리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것은 역사 이전의 시대 이다. 그 때 삶은 가장 아름다웠다. 그것은 황금의 절정이였다. 그 때 시간은 네 발로 걸었다. 즉 매우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타락이 시작되었다, 시간에 대한 인도인의 생각은 반다윈적(Anti-Darwinian)이고 비과학적이며 완전히 비인간적이다. 타락이 시작되었다. 진화, 발전이 아닌 타락의 시대가 온 것이다. 모든 것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시간은 세 발로 걷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혼미해졌으며 균형을 잃었다. 이 세 다리의 시대를 '뜨레따(Treta)'라고 부란다. 그리고 더욱 타락 해갔다. 시간은 두 다리만을 갖게 됐다. 이제 더욱 힘들어졌다. 이 시대를 '드와빠르 (Deapar)'라고 부른다. 즉 두 다리의 시대이다. 그리고 지금은 네 번째인 마지막 시대 로서, 가장 좋지 않은 단계이다. 이것은 '갈리 유가(Kali Yuga)'라 부른다. 이제 세 다리가 없어져 버렸다. 시간은 언제라도 넘어질 듯이 하나의 다리만으로 서 있다. 한 다리의 시대이다. 게다가 그 한다리도 이미 무덤 속에 있다. 이것은 매우 암울하고 우울한 비전(vision)이다. 이것은 늙고 부패한 나라의 비전이 다. 인도의 재탄생이 필요하다. 새로운 유년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에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 사상들을 지키려 할 것이다. 그 사상들은 인도의 유일 한 보물이다. 따라서 내가 그 사상들을 공격할 때, 그들에게 나는 적으로 비칠 것이 다. 친구는 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적은 친구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 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날 오후, 무덤 파는 인부가 자신의 일에 열중하여 너무 깊이 구덩이를 파 내려 간 나머지, 일이 끝났을 때 밖으로 기어 올라올 수가 없었다. 밤이 찾아오고 날이 추워지자 그는 더욱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그는 도와달라고 소 리를 질렀고, 마침내 지나가던 술 취한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날 좀 꺼내 주시오!" 인부가 간청했다. "추워 죽겠소!" 술 취한 사람은 무덤 속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인 부를 발견했다. "추울 수 밖에, 친구." 술취한 사람이 주변 흙을 구덩이 속으로 차 넣 으며 말했다. "흙을 덮지 않았으니 당연하지 않소!" 자, 만약 그대가 술에 취한 사람에게 물어 본다면, 그는 자신의 논리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취한 상태를 통하여 실재를 볼 것이다. 인도인들은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이없이 찬양을 받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 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이렇게 지적해 주지 않았다. "당신들은 삶이 아닌 죽음을 살고 있다. 당신들은 시들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진짜 삶을 사는, 전체적인 삶을 사는 열정과 열의,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찬양받아 왔다. 그들의 핏기 없는 얼굴은 거룩한 후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들의 반 삶적인 태도들은 위대한 영적 환상으로 칭송되었다. 그들의 병적인 경험들은 사마디로 불리워져 왔다. 그들의 광기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마치 그런 광기가 그 들이 초월적인 어떤 것을 받아들인 증거라도 되는 듯이... 그들의 뜻 모를 헛소리들은 비위적인 것으로 생각디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바보들이 숭배받아 왔으며, 매저키스트들은 고행자로, 새디스트들은 위대한 성자들 로 간주되어 왔다. 갖가지 변태들에게 영적 의미가 주어졌다. 이제, 수천 년에 걸친 이 모든 거짓을 폭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거위는 밖에 있다! 나는 잃을 것이 없다. 기껏해야 그들은 나를 죽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의 죽음마저도 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충격을 주어, 그러한 넌센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혼수상태에서, 잠의 상태 에서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차이타냐 키르티, 나는 계속할 것이다. 그들은 계속 나를 비난 할 수 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삶에 긍정적인 태도' 때문이다. 그들은 반삶적인 철학 속에 살아왔다. 그들은 그대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모두 반대한다. 그 들은 억압적이다. 그들은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계속해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다닌다. 자신의 알몸을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그들의 담요 는,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숭배를 받고 있다. 세상에서는 너무나 많은 바보들이 있다. 때문에 인도인이라면 누구든 제자를 구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대가 인도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대는 충분히 스승이 될 수 있다. 나는 내 눈 앞에서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제자 중의 한 명인 미르말라 스리바스따바(Nirmala Srivastava)는 이제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은 길다. 성스러우신 자가뜨자나니(Jagatjana i)-"온 세상의 어머니"- 마따지 니르말라지 스리바스따바지(Mataji Nirmalaji Srivast avaji)이다. 전에 그녀는 나와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묵타난다 (10)의 아쉬람을 지나가게 되었다. 묵타난다 아쉬람의 사람들이 오 분 동안만 쉬면서 차 한잔 을 마시고 가도록 나를 초청했다. 그것은 긴 여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차 한 잔 마시는 것은 나쁠 것 없겠지." 어쨌든 나는 차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 분 동안 머물게 되었다. 니르말라는 묵타난다를 보았다. 그녀는 이런 바보같은 외모의 구역질 나는 광대같은 남자가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차를 마신 후, 우리가 다시 차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말했다. "이런 사람이 영 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다면 왜 저는 안 되지요?" 나는 말했다. "너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되었다. 여기 오스트렐리아에서 온 사람이 나에게 한 질문이 있다. 니르말라는 지금 오스트 렐리아에서 위대한 영적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때때로 당 신은 라비야 엘-아다위야(Rabiya el-Adawiya)라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마따지 니르말라 데비지(Mataji Nirmalaji Deviji)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녀 역시 라비야 엘-아다위야와 같은 범주입니까? 이 오스트렐리아인은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그녀를 잘 안다. 그녀는 몇 십년 동안 나의 제자였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없 다. 영적인 것도, 명상적인 것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묵타난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 었다. 그리고 이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대는 미국에 있는 위대한 사르다르 요기(Sardar yogi), 요기 브하잔(Yogi Bhajan) 의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델리 공항의 짐꾼이었다. 그는 묵타난다가 칠백 명의 미국인들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때 그의 이름은 사르다르 하르브 하잔 싱(Sardar Harbhajan Singh)이었다. 그는 가난한 짐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히 묵타난다보다 휠씬 그럴듯하게 보였다. 더 인상적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이런 생 각이 들어왔다. "이런 바보가 파라마한사(Paramahansa)가 되고, 사뜨구루(Satguru) (1 1)가 될 수 있다면, 왜 내가 짐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는 일을 버 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지금은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시크교 지도자이다. 바로 며칠 전에 그가 자신의 모든 제자들과 함께 델리로 돌아왔다. 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그의 옛 사장이 그 곳을 지나쳤다. 그는 델리의 타지마할 호텔 잔디밭에서 제 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요기 브하잔을 보았다. 그는 사르다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람이 "위대한 마하트마"일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기 브하잔은 이런 점에서는 단순한 사람이다. 묵타난다난 니르말라 데비 (Nirmalaji Devi)보다 휠씬 더 단순하다. 그는 제자를 통해서 사장에게 이렇게 전하게 했다. "나의 방으로 오십시오. 할 말이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요기가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잔뜩 흥분한 채 떨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브하잔이 말했다. "사장님, 저 모르시겠습니까? 사장님 밑에서 짐꾼으로 있었던 바로 그 사르다르 하르브하잔 싱입니다. 저를 잊으셨습니까? 이제 그는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가요? 자 네가 그렇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위대한 요기가 되었다니!" 그리고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것은 묵타난다 때문이었다. 모두가 묵타난다의 공이었다! 인도인들은 그런 쓰레기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세계에 팔 수 있는 유일한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대변더미들을 벗어 던지지 못한다. 그것은 악 취가 풍긴다! 그러나 여전히 팔리고 있다. 세상에는 그런 대변더미들을 동경하는 사람 들이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른다. 인도는 그들의 희망이 다. 이제 그들은 이용당하게 된다. 인도인들은 나에게 화가 나 있다. 모든 인도의 스승들은 나에게 화가 나 있다. 왜냐 하면 내가 그들의 전통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를 이용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는 그대에게 어떠한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 다. 인도 문화, 인도 종교, 그 모든 넌센스를 주입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난 단지 그 대가 기독교,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여 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대가 그대 자신이 되도록, 단지 그대 자신이 되도록 돕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나의 산야신들은 나의 추종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나의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 을 사랑하며, 그들 또한 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떠한 계급도 없다. 나는 그대보다 더 성스럽지도, 더 높지도 않다. 나의 이런 모든 주장들은 인도의 투자에 반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반대할 수 밖에 없다. 차이타냐 키르티. 나는 삶을 긍정 한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삶을 부정해 왔다. 어느 날 오후, 니르말라가 길을 걷다가 친구 비말라를 만났다. 그녀는 친구 비말라 가 임신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니르말라가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임신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애." "네가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아." 비말라가 말했다. "내 남편도 그랬어. 하지만 지금 은 다 괜찮아. 사실 지금 나는 임신 팔 개월이야." "어떻게 했는데?" "스와미 엣세트라난다에게 갔었어." "아, 우리도 갔었어." 니르말라가 대답했다. "나도 남편하고 거기서 육개월 동안이 나 머물렀는걸." "나보같은 소리 하지마." 비말라가 말했다. "혼자 갔어야지!" 그들은 나에게 반대하는 온갖 종류의 논쟁거리들을 찾아 낼 것이다. 그들은 논쟁하 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오직 논쟁만을 해 왔다. 그러나 그들 은 논쟁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철학을 논하고 있는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철학을 논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나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존재를 논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만약 나의 말이 단지 철학적 논쟁이었다면, 그들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인도에는 많은 철학이 있었다. 붓다는 베다를 비판했고,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 다. 마하비라는 우파니샤드 (12)를 비판했다. 거기에는 문제는 없었다. 샹카라 (13)는 붓다와 마하비라를 비판했다. 거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라마누자 (14)는 샹카라를 비 판했다. 거기에는 문제는 없었다. 이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만약 그대가 단지 철학 적 입장만을 위해 논쟁을 한다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어차피 변덕스 런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사람의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철학을 위해 논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전혀 철학적이지 않다. 나는 완전히 존 재적이다. 그 때문에 그들이 곤란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 정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느낀다. 그 때문에 분노와 비난과 갖가지 저질 비평들을 퍼 붓고 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 줄 뿐이다. 그들은 나에 대해 만들 어 내는 그러한 저질 비평들은 그들의 상황을 표면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 과 빈곤함과 추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목적에 맞는다. 봄베이의 한 부동산 업자가 부유한 고객에게 부동산을 보여 주며 온갖 노력을 다해 설득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곳 날씨는 이 나라에서 최고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아무 도 죽은 사람이 없답니다." 바로 그 때, 한 장례 행렬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천천히 거리를 따라 행진하 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동산 업자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며 엄숙하게 말했다. "불쌍한 장의사 양반, 굶어서 죽 다니!" 인도인들은 논쟁을 하는데 있어 영리하다. 만약 내가 논쟁을 했더라면, 그들은 수천 가지 논쟁거리들을 찾아 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논쟁을 하고 있지 않다. 나는 단순 히 달을 가르키고 있을 뿐이다. 나의 손가락은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리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나의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달을 보라. 그리고 이제 정말 달을 보아야 할 시간이다. 그대는 묻는다. 차이타냐 키르티. 그런데도 당신은 이 썩은 문화를 계속해서 두들겨 대고 있습니다... 나는 계속 두들겨 댈 것이다. 그 문화는 너무나 썩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단지 약간 의 망치질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무자비하게 두들겨 댈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묻는다.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나와 같은 사람들의 일이다. 그것은 언제나 나와 같은 사람들의 일이었다. 아테네의 재판장이 소크라테스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춘다면, 우리는 당신을 석방할 수 있소. 그러면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될 것이 오."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한말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숨을 쉬는 것 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진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나의 망치질은 더 심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더 많은 쓰레 기들을 표면으로 끌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망치질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것 은 수술과 같은 망치질이다. 이 빌어먹을 나라의 많은 썩은 부분들이 사라져야만 한 다. 인도에게 그 이하로는 소용이 없다. 약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수술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큰 모험일 것이다. 그러나 환자가 죽다는 해도, 해가 될 것은 없다. 적어도 어떤 공간이 생길 것이다. 적어도 사람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환자는 어쨌거나 이 미 죽어 있다. 이 나라는 유작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인도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 다. 우리는 타락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그 날, 인도는 모든 삶의 질을 잃 었다. 그 때 이후로 인도는 유작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나의 노력은 진정한 재탄생이 가능해질 수 있도록, 이 나라에 진정한 죽음을 주려는 것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만 가능하다. 다른 방법은 없다. 죽음은 삶이 돌아 올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 말라. 사실은 삶과 죽음은 반대가 아니 다. 삶과 죽음은 서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날개와 같다. 삶과 죽음은 서 로 돕는다. 삶과 죽음은 상호 보완적이다. 나는 그대에게 전체적으로 살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또한 전체적으로 죽을 것을 가 르친다. 진정 종교적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맛은 전체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진 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때, 나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것이나, 더 높고 더 성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순수한 삶, 평범한 삶을 뜻할 뿐이다. 나는 평범함을 찬양한다. 나는 평범함을 찬미한다. 나는 평범함을 숭배한다. 오늘은 이만. (1)bamaphdlld. fuddle은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하다는 뜻이 있음. (2)You are killing yourself by degrees! : by degrees '학위 때문에'. 숙어로는 ' 점차적으로'. (3)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 1872-1950) : 인도 벵갈 지방에서 출생. 7살 때 영국으로 건너 갔으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다. 라마크리쉬나의 영행을 받아 우 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를 공부하였으며, 한때 정치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남인도의 폰티첼리에 은거하면서 요가 수행과 지도, 저작에 몰두했다. (4)goddamned. '신이 저주할'. (5)브라만(Brahman) : 인도 카스트의 4계급 중 성직자. (6)팀북투(Timbuktu) : 아프리카 서부 말리(Mali) 중부에 있는 도시. 일반적으로 멀 리 떨어진 곳을 뜻하기도 함. (7)미라(Meera, 15c - 16c경) : 인도의 여류 시인이며 황태자비, 크리쉬나를 열렬히 사랑하여 시적인 찬미의 노래들을 남겼다. (8)아쉬람(ashram) : 원래 '휴식처'를 의미하는 말로, 흔히 한 명의 스승을 중심으 로 형성된 수도원을 뜻함. (9)파라마한사(Paramahansa) : '지고의 백조'란 뜻으로 인도에서 높은 영적 성취를 이룬 자에게 붙여주는 존칭. (10)묵타난다(Muktananda, 1908-1982) : 인도 봄베이에서 활동했던 영적 스승. 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거리에서 한 수도승(니트야난다)을 보고 충격을 받아, 히 말라야 산 속에 들어가 수도승의 서약을 하고 25년간 맨발로 인도 전역을 순례하였다. 25년만에 다시 우연히 니트야난다를 만난 묵타난다는 그의 지도 아래 수행에 정진, 19 56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965년부터 서양인 제자들이 몰려들어 큰 명상센터를 이루게 되었다. (11)사뜨구루(Satguru) : sat 는 진리, guru 는 스승을 뜻함. (12)우파니샤드(Upanishad) : 고대 인도의 철학서. 브라만교(Brahmanism)의 성전 베 다에 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그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Ved anta: 베다의끝)라고도 한다. 현재 200여 종이 전해지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이 십여 종은 고우파니샤드로 불리며, BC 600- AD 300년경, 늦어도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이 다. 그 후 십수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크 리트어로 씌어져 있다. 우파니샤드의 원뜻은 사제간의 '가까이 앉음'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게 되었다. 그 근본 사상은 우주의 본체 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의 사상 이라고 할 수 있다. (13)샹카라(Shankaea, 700-750) : 인도의 철학자. 남인도 브라만의 아들로 가우다파 다의 제자인 고빈다에게 사사한 후 인도 전역을 편력하면서 각지에 사찰을 건립하였 다. '브라흐마 수트라(Brahma-sutra)'에 대한 주석서,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 타'에 대한 주석서등 많은 저작이 있다. 인도 최대의 철학자로서, 불이일원론을 주장 하였다. (14)라마누자(Ramanuja, 1055-1137) : 인도 중세기의 철학자. 남인도 출생. 샹카라 와 더불어 2대 철학자로 불린다. 비쉬누파의 야무나차리아(Yamunacharya)에게 배우고, 유일절대의 브라만(brahman)을 가르치는 우파니샤드의 철학 사상과, 비쉬누신에 대한 열렬한 귀의를 통한 합일을 설파하였다. 그의 은총 사상은 일반 민중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ff 오직 하나의 시간, 지금 사랑하는 오쇼. 저는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 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유혹에 바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그리고 또한 예수 자신이 이렇게 요구합니다. "아버 지, 가능하다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드얀 프라보드(Dhyan Prabodh), 종교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중 많은 부분은 단지 과거로부터의 유물에 불과하다. 진정한 종교, 본질적인 종교는 오직 지금에만 가 능하다. 인간은 이제야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과거는 매우 유치했다(childi sh). 어린아이와 같았던(child-like) 것이 아니다. 기억하라. 단지 유치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필연적인, 불가피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 다. 단지 그대가 종교에 대해 생각할 때, 결코 과거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 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현재의 관점에서 생각하라. 상대성 이론을 생각할 때, 그대는 뉴턴을 끌어올 필요가 없다. 물론 뉴턴은 과학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지났다. 그가 했던 모든 것, 그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알버트 아인쉬타인의 등장과 함께 뉴턴은 끝났다. 그는 단지 과학적 성장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주석으로 남게 될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의 모든 업적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우주선을 타고 달 에 갈 때에도, 소달구지를 발명한 사람의 공헌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소달구지 없이는 우주선은 전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소달구지를 발명한 사람을 계 속 숭배하지는 않는다. 그대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주선을 다룰 때에는, 소달구지에 대해서는 잊는 편이 낫다. 그것은 도움이 안 된다. 그 기술은 이 제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다. 종교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감정적이다. 종교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과학적이지 못한다. 종교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불합리하고 미신적이다. 종교는 두 가지 시기를 거쳐 왔다. 첫 번째는 기도의 시기였다. 그것은 종교의 소달 구지 시대와 같다. 두 번째 시기는 명상이다. 그것은 종교의 우주선 시대이다. 그 둘 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 근원과 작용과 모든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우리 는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그에 대한 많은 혼동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설명하려 한다. 그대는 주의해서 들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기도의 종교에 조건화되어 있기 때 문이다. 그 무게는 무겁다. 모든 인간은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 있다. 그리고 스승의 역할은 더욱 더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이제는 명상적이 되도록 돕는 것으로 끝나지 않 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이 시작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대 안의 많은 것들이 부정되어져야 하며, 많은 쓰레기들을이 퍼내어지고, 많은 먼지가 청소되어야 한다. 모 든 과거가 해체되어야 한다. 그 때에만 그대는 본질적이고 성숙하며 어른스런 종교의 차원을 향해 날개를 펼칠 수 있다. 기도는 두려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과거의 종교들은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 이다. 그들의 신은 그들 두려움의 산물일 뿐이다. 그들의 신은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이며, 투영이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두려움에 서 그들을 보호해 줄 아버지의 형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에는 수없이 많은 두려움이 있다. 불안과 고통, 마주쳐야만 하는 문제들, 풀 수 없는 문제들, 다리를 놓을 수 없 는 골짜기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커다란 어둠에 싸여 있다. 인간은 보호의 손길이 필 요하다. 보호물로서, 안전장치로서의 누군가를 원한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양육된다. 부모와의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 이는 보호받고 위로받고,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모든 필요가 풍족된다. 걱정할 필요 가 없다. 책임도 없다. 아이는 보살펴진다. 아이는 부모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얼마지나지 않아 아이는 자기 발로 일어서야 할 것이 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발로 일어서는 순간, 커다란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제 누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인가? 이제 누가 나를 위로해 줄 것인가? 그리고 문제는 매일 점점 더 커 진다. 삶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죽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죽음은 풀어야 할 궁극적 인 문제이다. 죽음에 대한 커다란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 모든 아이들은 뒷걸음치기 시작한다. 모든 아이들은 유년시절의 상대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 한가지의 걱정도 없는 인생의 유일한 시기였기 때문이 다. 이것은 퇴행이다. 이러한 퇴행이 기도로 생각되어 왔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무릎을 끓고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한다... 모든 종교가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가끔은 신을 "어 머니"라고 부르는 종교들도 있다.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여자가 주도권을 가진 사회에 서는 신은 어머니이며, 남자가 주도권을 가진 사회에서는 신은 아버지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신은 결국 부모라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 사회, 문화가 각자의 신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말한다. "신은 그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그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 라 신을 만들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너무 나 많은 신이 있다. 그러나 그 신은 그대가 만들어 낸 허구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 앞 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정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짓 의 하나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같다.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대 자신의 모습 앞에 무릎을 끓고 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그 대의 반영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기도... 그러한 모든 기도는 어린애같은 것이 다. 그것은 퇴행이다, 이런 말은 그대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프라보드, 그대는 묻는다. 저는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 니다. 사실은 그대가 요구하기를 멈추는 순간, 그대는 기도를 멈출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방법이다 - 때때로 나는 그대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완곡한 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세상을 창조한 어떤 신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물론 존재 속에서 신성의 질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신이 아니다. 그것은 좀 더 가깝 고, 침묵에 가까우며, 기쁨에 가깝다.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대는 결코 신을 만나, "안녕하세요? 저는 수천년동안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어디 숨어 계셨어요?"라고 인 사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은 사람이 아닌 현존이다. 그리고 내가 '현존(pressence)'이라고 말 할 때, 조심 해서 들어라. 왜냐하면 그대는 또 다시 그대 자신의 조건화에 따라 나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대는 '현존'을 어떤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 다. 그대는 또 다시 같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신은 그대 존재의 내면 깊은 곳의 현존 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현존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아니다. 금세기의 위대한 유태인 사상가의 한 사람인 마틴 부버는 "기도는 '나'와 '당신' 사 이의 대화"라고 썼다. '당신'은 없다. 따라서 대화는 불가능하다. 모든 대화는 독백이 다. 그리고 '당신'이 없으므로 '나' 역시 없다. '나'와 '당신'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당신'이 없는 '나'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나'의 한계를 짓는 데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마틴 부버 (1)는 옳다. 그는 과거의 모든 종교를 정의하고 있 다. 부버 자신이 과거의 짐을 안고 있었다. 그는 결코 유태인 피부를 벗어날 수 없었 다. 그는 갇혀 있었고, 유태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커다른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박 속에 살고 있었다. '나'와 '당신'이라는 유대교적인 사상은 기도의 기본적인 형태이다. '나' 없이. 그 대는 기도할 수 없다.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없이, 그대는 기도할 수 없다. 누구에게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그대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 기도는 요구를 의미한다. 기도는 요구이다. 아무리 위장되어 있 고, 아무리 교묘하게 아름다운 옷과 가면 뒤에 숨었다 해도... 그것은 요구이다. 그대 는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신은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을 기억하라. 내가 정말 의미하는 것은, 존재(existence)는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이다. 존재는 창조자를 필요로 하지 않 는다. 창조성이 있다. 그러나 창조자는 없다. 창조자와 창조성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야 한다. 오직 그 때에만 그대는 명상의 산봉우리를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 다면, 그대는 과거의 유치한 패턴에 한정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사원의, 유대교당 의, 교회 안의 신상 앞에 무읖 끓고 엎드려, 갖가지 바보같은 짓들을 하고 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러한 바보같은 짓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그대는 그것이 바보같은 짓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군중이 그대와 함 께 있을 때, 다수가 그대와 함께 있을 때, 그대는 안전함을 느낀다. 그대만이 혼자 있 을 때, 그대는 두려움을 느낀다. 명상은 홀로있음의 경험이다. 매우 용기 있는 사람만이 그러한 차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기도는 군중 현상이다. 기도는 집단 의식의 일부이다. 그대가 군중 속에 있 을 때, 틀림없이 커다란 확신이 그대 안에 일어난다. 그것은 전염적이다. 왜냐하면 그 렇게 많은 사람들이 틀렸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수는 언제나 틀리게 되어 있다. 맞는 사람은 오 직 드물게 나타날 뿐이다. 진리는 정상이며 절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레레스트와 같다. 그대는 많은 군중들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갈 수 없다. 그 정상에는 충분한 공간 이 없다. 가장 높은 정상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홀로 설 수 있을 뿐이다. 명상은 완전히 혼자가 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경험이다. 기도는 군중 현상이 다. 군중 심리이다. 따라서 힌두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 기도의 종교로 남아 있다. 명상의 종교가 되고자 했던 두 종교마져도 뒷걸음질쳤다. 불교와 자이나 교, 이 두 종교는 명상의 종교가 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오직 붓다와 마하비라, 두 사람만이 해 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죽은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의 종교는 낡고 퇴행적인 양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두 종교 모두 기도의 종교가 되고 말 았다. 이제 자이나교인들은 마하비라 앞에서 기도한다. 이것은 오히려 더 나쁘다. 왜냐하 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로부터 약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지만, 자이나교인들은 마하비라 로부터 어떠한 지지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스꽝스럽고 믿을 수 없는 일 이다. 왜냐하면 붓다의 마지막 말은 "스스로에 대해 빛이 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만들어진 신상이 바로 불상이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불상 은 사원에 앉혀진 첫 번째 조상이다. 수천개의 불상이 있는 불교 사원들이 있다. 중국에 있는 한 사원은 만불사라고 불린 다. 하나의 사원 안에 일만 개의 불상이 있는 것이다. 온 산이 사원이 되어 버렸다. 만약 붓다가 돌아오다면, 그는 자기 머리를 두드리다가 자살해 버릴 것이다. 프라보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오르가즘의 우주를 믿는다는 것 이다. 창조자와 창조물, 높은 것과 낮은 것, 신성한 것과 비천한 것, 이것과 저것, 그 러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의 유기체를 믿는다. 존재를 화가와 그림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화가와 그림은 분리된 두 가지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오직 춤추는 자와 그의 춤이라는 관점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대는 그 둘을 분리 할 수 없다. 춤추는 자와 춤은 하나이다. 그리고 춤의 최고 절정에서,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 남는다. 그것이 바로 명상의 경험이다. 그대가 존재 속으로 사라지는 것, 이슬 방울이 바다 로 흘러들어 바다가 되는 것. 그리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다가 이슬 속으로 흘러들어 이슬방울이 되는 것이다. 바다와 이슬은 더 이상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신이 그대 밖에 있는 어떤 것 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은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신이란 단지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핵임을 의미한다. 침묵의 핵,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 비밀스럽고 절대 적으로 때묻지 않은 공간, 그대의 본성... 그것이 신이다. 그러나 '신'이라는 단어는 그대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말이란 매우 골치 아픈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단어들은 과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단어들은 과거에 의 해 만들어졌으며, 과거의 짐을 안고 있다. 어떠한 단어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단어 의 의미는 과거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내가 그러한 과거로부터 온 단어들을 사용해야 하며 - 왜냐하면 다른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 동시에 그 단어들이 그대에게 새로운 의미를 일깨워 줄 수 있도록 그 단어들을 변형시키고 변화시켜야 한 다는 것이다. 단어들은 낡았다. 병은 낡았다. 그러나 포도주는 새것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던 한 노파가 수퍼마켓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 곳은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녀는 소화전에 개를 묶어 놓았다. 개를 묶어 놓았다. 개를 묶자마자, 동네에 풀려 있는 모든 개들이 무방비 상태의 개에게 와서 냄 새를 맡기 시작했다. 길모퉁이에 서 있던 경찰이 이 광경을 보고, 노파를 불러 개를 혼자 두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왜 그러는지 묻자 그는 대답했다. "할머니, 이 개는 발정기(heat)입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물론 먹지(eat). 이 녀석은 뭐든지 잘 먹어." 경찰관이 말했다. "이 개가 새끼를 가질(bred) 때라구요." 노파가 대답했다. "빵(bread)도 먹고, 케익도 먹어. 뭘 주든 잘 먹는다니끼." 완전한 절망 상태에 바진 경관이 말했다. "이 개를 진정시켜야 된다구요(be laid)!" 노파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폈다. "그럼 해 봐(lay her)! 안그래도 늘 경찰견이 갖고 싶었으니까!" 단어는 위험하다. 오해의 가능성이 너무 많다. 그대는 말한다, 프라보드. 저는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 니다. 사실은, 그것은 그대가 기도를 하지 않도록 만드는 나의 방법이다. 만약 요구할 것 이 아무것도 없다면, 왜 기도를 하겠는가? 그렇다면 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와 같은 사람조차도 여러 면에서 어린애처럼 유치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가 없다. 그는 종교의 소달구지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는 유대교의 전통에 속해 있었 다. 그는 유대교인으로 살았고, 우대교인으로서 말했으며, 유대교인으로서 죽었다. 그 가 생각하고, 바라보고, 인식하는 모든 방식은 순전히 유대교적인 것이었다. 그는 진짜 반역을 하지 못했다. 그는 단어의 의미 그 자체로서의 반역자가 아니었 다. 반대로 그는 자신이 전통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는 자신이 옛 예언자 가 예언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모든 예언을 이루기 위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넌센스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을 예언할 수 없다. 과거는 미래를 아는데 있어 완전히 무력하다. 미래 란 열려 있는 것이다. 만약 미래가 예언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닫혀 있다면, 그것은 이 미 과거이다. 그대는 이미 미래가 열리는 것을 막아 버린 것이다. 미래는 닫혀 버린 것이다. 예수는 "내가 너희들이 기다리던 그 구세주이다."라는 것을 유태인들에게 확신시키 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애쓰 고 있었다. 온갖 기적들을 행하고,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방법 을 동원했다. 이것은 혁명가의 방식이 아니다. 혁명가는 단순히 과거로부터 자신을 단 절시킬 뿐이다. 혁명가는 과거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예수는 여전히 유대교적인 의미의 예언자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예언자란 정치적인 성향을 띤 종교인이다. 종교와 정치는 섞일 수 없다. 그 둘을 섞는다면 나오는 것은 혼란과 뒤범벅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가 했던 일이다. 한편에서는 종교적 이 되려 노력하며, 또 한편에서는 자신이 과거의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임을 증명하 려 애쓰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과 종교적 성향의 결합은 그의 안에 커다란 혼 란을 일으켰다. 그는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다지 명료함을 볼 수가 없다. 그는 맑지 않다. 그는 안개 속에 있다. 예수 자신의 말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아버지, 가능하다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 주소서." 이것이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욕망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가. "아버지, 가능하다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 주소서. 그러나 제 듯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것은 모순이다. 분명한 모순이다. 이 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내맡긴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내맡긴 사람은 아무 할 말이 없다. 일어난 일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뿐이다. 대체 이 '만약'은 어디에서 오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의 안에는 이런 욕망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제발... 그러나 만약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좋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다. 이것은 모순이다. 예수 자신의 욕망은 이 잔이 치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통, 이 십자가형, 이 죽음을 치워 버리고 싶은 것이다. 싶은 곳에서 그는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십자가형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과 별 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그를 죽이기 위해 공모했던 랍비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정 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적 배경은 같았다. 랍비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 성직자들은 예수가 가짜임을 증명하여 애쓰고 있었 다. 그리고 예수는 반대로 이러한 것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진짜 구세주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너희들은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의 독생 자를 구하기 위해 내려오시는 것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못 박혀 있었 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기대는 분노로 변해 간다. 고통의 순간, 그는 소리친다.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 그러나 그가 소리쳐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은 없다. 그를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그 자신의 생각이다. 그 자신의 투영이다. 그 자신의 환상이다. 그는 히스테리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말하며 항복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내맡김이 아니다. 마지못해, 단지 체면을 지키려는 술책일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군중들은 그 모든 광경을 조롱하 고 비웃고 있다.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모욕하고,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가짜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 다. 그의 제자들마저도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도망쳤 다. 만약 붙잡힌다면, 예수도 신에게 구원을 받지 못한 마당에 누가 그들을 구해 주겠 는가? 불쌍한 친구들, 그들은 도망쳤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가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일 뿐이다. 이것은 자신을 내맡긴 사람의 방식이 아니다. 어떻게 그대 자신의 투 영물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기도는 모순을 향해 가게 되어 있 다. 기도에서 그대가 갖는 기대는 근본적으로 모순적이다. 기도는 그대가 내맡긴 것을 요구한다. 오직 그 때에만, 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내맡겼다면, 그 때 거기 이루어져야 할 것이 무엇이 남아 있는가? 만약 충족되어야 할 어떤 요구가 남아 있다면, 그대는 내맡긴 것이 아니다. 이 모순을 보라. 기도는 그대에게 불가능한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대는 신에게 무엇이든 요구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그대는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완전히 내맡겼 다면, 그 때 요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디에서 그 요구가 오는가? 누가 요구하 는가? 그리고 만약 그대가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면, 그대는 내맡기지 못할 것이다. 따 라서 기도는 충족될 수 없다. 기도 속에 들어 있는 이 간단한 전략을 볼 수 있겠는가? 기도는 그대가 아무것도 요 구하지 않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거기 이루어져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대는 어차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에게 완전히 다른 종류의 종교성을 가르친다. 그것은 명상의 종교이다. 그 대는 숭배하거나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것은 신을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다. 왜 신을 쫓는가? 신이 그대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를 용서하라. 그를 잊어버여라!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질문,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이 몸-마음(b ody-mind) (2)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 의식은, 이 의식의 기적은 무엇인가? 바로 이 깨어있음의 기적이 밝혀져야 한다. 그대는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그대의 존재를 벗겨야 한다. 계속 벗겨 나가라... 그대 겹겹의 층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겹겹이 싸여 있던 모든 층들이 버려지고 제거되었을 때, 그대는 그대의 손 안에서 순수한 무, 비어있음, 수니야따(shunyata)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대 내면의 정수이며, 태풍의 중심이다. 양파의 껍질을 제거해 나가는 것은 사회와 문화, 과거,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병(bo ttle)을 제거하는 것이다. 바로 그대가 만들어 낸 병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 가 병을 제거해 버렸을 때, 거위는 밖에 있다. 이제 그대는 우주 그 자체만큼이나 무 한하다. 영원 그 자체만큼이나 끝이 없다. 그대는 그것을 신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신성하다. 그것은 가장 높고 가 장 위대한, 존재의 꽃피어남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 외부 어딘가에 있는 신이 아니 다. 그대는 그 신성에 기도할 수 없다. 그대는 그 신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기도할 수는 없다. 신성은 그대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문는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까? "너희들은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는 결코 그대에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말하 고 있었다. 만약 예수가 그대에게 온다면, 이 한 가지를 기억하라. 그대와 예수 사이 에 대화의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2천년의 간격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아버지와의 작은 간격조차도 거의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아버지에게 말 을 해 보라. 그것은 벽에 다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대의 아버지도 똑같이 느 낀다.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 2천 년은 큰 간격이다. 바로 지금 예수가 돌아온다면, 그대가 보기에 예수는 마치 피그미족처럼 보일 것이다. 그대는 왜 이 남자가 2천년 동안 숭배 받아 왔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대는 그에게 전혀 감사를 느낄 수 없을 것이 다. 그대는 그에게서 쉽사리 무수한 잘못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 중 가장 머리 나쁜 사람조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수없이 많은 교회 를 세우고 숭배해 온 그 사람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했던 그 사람인가? 이자가 그 사람인가?" 그러나 2천 년 동안의 끊임없는 채색 작업... 그것이 바로 교회와 신학자, 철학자, 성직자들의 일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칠을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층을 덧입힌다. 만약 그대가 이 두꺼운 층들을 깊이 파 내려가다면 그대는 정말 난처해질 것이다. 그대가 예수를 발견하게 될 때, 그대는 정말 실망할 것이다. 그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 시절에 그는 비범했다. 그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 시절에는 비범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보다 휠씬 더 뒤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예수보다 2천 년이나 앞서 있다. 그가 말하는 방식, 그가 말하 는 것들은 그대에게 와 닿지 않는다. 프라보드, 그대는 말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그는 그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말할 때, 나는 그대에게 말하 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한 말은, 그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다. 그는 그대와 동시의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그가 그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매일 마주치는 문제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오는 사람 들은 예수의 유물 혹은 붓다의 유물, 또는 마하비라의, 크리쉬나의, 짜라투스트라의 유물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람들의 과거 유물을 안고 있다. 그리고 나는 현대의 사람이다. 나는 20세기를 향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20세 기의 군중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엘리트들, 가장 높은 지성을 가진 사 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대는 2천 년 전을 살고 있다. 현 시대의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어떤 사람은 천 살, 어떤 사람은 이천 살, 어떤 사람은 삼천 살이다. 그리고 더 늙은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힌두교인들은 그들의 베다 경전이 가장 오래 된 경전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 마치 오래 되었다는 것이 어떤 명예라도 되는 듯이... 경전이 오래 되었다는 것은, 단지 그대가 그 때 이래로 움직이 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대는 아직도 그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 가들은 힌두교의 경전, 베다가 5천년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힌두교인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다가 적어도 9만년은 되었다고 말한다. 오래 되었을수록 좋은 것이다.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오래된 것은 모두 다 황금이라고 생각하는 듯하 다... 사실은 삶은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다. 아침 태양 아래, 연꽃 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방울만큼이나 신선하다. 별들만큼, 갓 태어난 아이의 눈만큼, 바로 지금 이 새소 리만큼이나 신선하다. 삶은 오직 하나의 시간만을 안다. 그것은 지금이다. 예수는 그대에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대에 대한 생각 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대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그의 시대의 사람들 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유대교적 사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대교적 종교 개념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제 나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쓰레기일 뿐이다 -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과거에 인류는 매우 가난했다. 과거 전체가 길고 긴 기아, 배고픔, 병, 기근, 홍수 에 시달렸다. 온갖 질병들의 시대였다. 인간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대는 한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가장 지적인 젊은이들은 점점 더 명상을 향하고 있지만, 동양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점점 더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나보다 테레사 수녀를 더 좋아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빵이 필요했기 때문이 다. 인도를 둘러본다면 그대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개종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자는 한 사람도 기독교로 개종되지 않는다. 거지들, 고아들, 과부들, 원주민들, 하 루에 한 끼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된다. 기독교는 그들의 마 음을 끈다. 그들의 문제는 빵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그 양식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 양식을 우리에게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과학이 할 일이다. 그것은 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는 이제 과학과 종교를 구분하기 시작해야 한다. 과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과학으로 해야 하며, 기술로 할 일은 기술로써 해야 한다. 만약 기름이 떨어져 그대의 차가 멈췄다면, 그대는 그저 차 옆에 무릎을 끓고 앉아 이 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용할 기름을 주시고..." 그것은 이 기도와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는 주유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종교가 그대의 삶 전체를 지배하도록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해 왔다. 빵에서부터 신에 이르기까지 그대의 모든 삶을 지배하도록 애써 왔다. 그들 은 그것이 구별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그들은 과학과 기술에 반대한다. 버트런드 러셀 (3)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전 인류가 풍족해진다면, '우리에게 일 용할 양식을 주시고'와 같은 기도는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말은 옳 다. 그러한 기도는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대의 교회들, 사 원들, 성직자들은 힘을 잃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 인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대에게 힘을 줄 과학과 기술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는 과학에 반대했다. 매우 필수적인 과학조차도 반대했다. 그는 이 나라 사람들이 적어도 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만큼 원시적으로 살기를 원한 다. 그가 위대한 과학의 발명품으로서 받아들인 유일한 것은 물레뿐이다. 그리고 그는 마하트마로 숭배 받았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죄보다 도 더 휠씬 더 큰 죄이다. 그러나 그이 죄는 매우 미묘하다. 그대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는 종교적 쓰레기 같은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을 믿어야 한 다. 왜 우리가 과학을 믿어야 하는가?" 내가 강조하는 것은, 삶은 다차원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구분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음악은 음악가들에 의해 다루어져야 한다. 수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질 일이 아니다. 춤은 화학자가 아니라 무용수에 의해 다루어져야 한다. 시는 심리학자가 아니 라 시인에 의해 다루어져야 한다. 과학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다. 과학은 인간의 지성 이다. 기도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지구를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모든 어리석은 짓들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낙원을 이 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직자들의 전략이다. 그들은 오직 그대가 가난할 때에만, 그대가 굶 주릴 때에만 그대를 지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불행할 때, 그대는 성직자의 발 밑에 엎드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과 그대 사 이의 중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신이 살고 있는 곳의 주소도, 신이 무슨 언어를 말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직자의 전문 지식이다. 그는 신이 산스크리트어 (4)를 말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그대가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면 성직자는 필요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직 자는 신이 아람어 (5)와 헤브루어 (6)를 사용한다는 것을 안다. 그는 그대가 아람어와 헤브루어를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 언어들을 배운다면 그는 웃 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아람어나 헤브루어 혹은 산스크리트어 속에는 아 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그대가 그 언어들을 모르면, 그대는 무지한 채 남아 있고 성직자는 계속 현 자인 체 한다. 그는 계속 그대를 이끌 수 있다. 장님이 또 다른 장님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의 권력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이제 그는 매우 교활해졌다. 수세기에 걸친 착취를 통해 그는 그대를 착취하는 모든 술수와 기교를 배웠다. 유명한 여성용 장갑 수입업자인 지그문트 스타인버그씨가 예고도 없이 그가 다니는 사원의 랍비를 방문했다. 랍비는 엄청난 부자인 이 신자의 방문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 다. 왜냐하면 그는 사원에 잘 안 나오고 종교적 열의가 부족한 점을 기부금으로 대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사원을 방문한 것은 뜻밖에도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랍비님," 일상적인 인사말을 한 뒤에 스타인버그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제 가 가장 사랑하는 누군가에 관한 일로 당신께 왔습니다. 나만의 것, 나의 사랑, 명견 대회에서 세 번이나 입상한 나의 소중한 푸들 강아지 '웨스트민스터 3세'가 이번 단식 일에 열세 살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서 그에게 할례 (7)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 랍니다." 랍비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하지만 스타인버그씨,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유태 종 교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의를 일으킬 것입니다. 사원은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의 랍비직도 취소될 것입니다. 여성 전도회도 해체될 것입니다. 사원 건축 모금 운동도 중단될 것입니다. 타종교인들은 우리를 비웃느라 정시을 못 차릴 겁 니다. 임원들은 나의 목을 자를 것입니가." 그러나 스타인버그씨는 확고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랍비에게 말했 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현금으로 5천 달러를 사원에 기부하겠습니다." "스타인버그씨," 랍비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왜 처음부터 그 개가 유태견이라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성직자들은 정말로 교활해졌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어떻게 하면 권력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류를 고통 속에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략이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지복에 차 있 고, 황홀경 속에서 상아 가는 세상... 춤과 노래와 함께 순간에서 순간으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대의 낡은 종교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 의 사원과 교회와 유대교당들이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연기처럼 사 라질 것이다. 그대의 고통이 사라짐에 따라 그대의 소위 종교 또한 사라질 것이다. 종교는 정말로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는 그대를 미묘한 무의식 상태 속에 있게 했다. 종교는 그대에 게 커다란 희망을 준다. 그러한 희망들은 단지 마약일 뿐이다. 그것은 어떠한 화학적 마약보다도 더욱 위험하다. 그것은 온 인류를 중독시켰다. 예수는 말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무슨 죄 말인가? 그러나 모든 종교는 죄의 사상과 더불어 존재해왔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무엇이었던가?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복종은 죄가 아니다. 불복종은 성장의 부분이다. 모든 아이들은 - 언제가 되었든 - 부모에게 거역해야 한 다. 그리고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 왜냐하면 삶은 짧기 때문이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직 그때에만 '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라고도 말할 수 없다. 불복종은 진정한 복종이 꽃피어나기 위한 바탕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원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신이지 불 쌍한 뱀이 아니다. 뱀은 인류의 가장 큰 은인이며, 최초의 진정한 구세주이다. 왜냐하 면 뱀은 아담과 이브에게 불복종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는 최초의 스승이었다. 뱀이 없이는 인류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도, 붓다도, 공자도, 노자도 없었을 것이다. 그 모 든 공이 불쌍한 뱀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죄의 원인은 신, 그 자신이다. 신이 금지했 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은 큰 동산이었다. 거기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신은 아담과 이브 가 그 나무의 과일을 먹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 하나는 지식(knowledge)의 나무였으 며, 다른 하나는 삶(life)의 나무였다. 자, 왜 신이 그들의 앎(knowledge)과 삶을 두 려워해야 하는가? 그대는 성직자들의 모든 전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직자는 두 가지를 두려워 한다. 앎과 삶이다. 그는 그대가 알게 되는 것을 막음으로서 자신만이 아는 자로 남아 있으 려 한다. 그는 그대가 삶을 전체적으로 강렬하게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가 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그대를 방해한다. 그는 그대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그대를 마비 시킨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다. 신은 최초의 성직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 아담과 이브의 앎을 두려워 해야 하는가 ? 오히려 정말로 축복해 주었어야 한다.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너희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이 두 나무로 가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가장 소중한 것 이다. 사람의 전체성(totality)을 깨달으라. 삶의 신비를 깨달으라, 탐구하라. 아는 것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미지의 것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대는 우주의 신비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만약 신이 정말로 사랑과 애정 이 있었다면 제일 먼저 그렇게 충고했어야 했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말해 주어야 했다. "살아라. 열정적으로, 전체적으로 살아라. 강렬하게 살아라. 황홀경으로 살아라. 이것이 바로 너희들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그 두 그루의 나무이다." 만약 내가 그의 위치에 있었다면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충고였을 것이다. "이 나무들 아래서 살아라. 원한다면 언제든 다른 과일들을 즐길 수도 있다. 변화를 위해서 그대 는 어디로든지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신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지 말아라." 왜인 가? 아담과 이브가 아는 자가 되어 신 자신과 동등해질까 봐 두려운 것인가? 아담과 이브가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될 것이 두려운 것인가? 앎은 명상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앎의 나무는 명상의 나무이다. 신은 명 상을 금지한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깊은 핵에 도달할 때, 앎은 폭발한다. 그리고 그 대는 무한한 빛으로 흘러 넘친다.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알게 될 수록, 그대는 더 삶을 살게 된다. 더 삶 을 살게 될 수록, 그대는 더 알게 된다. 앎과 삶은 함께 손잡고 춤추며 간다. 앎과 삶 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명상가에게는 양쪽 모두가 일어난다. 그러나 두려움에 기초한 종교는 양쪽 모두를 두려워한다. 이것이 여기서 내가 가르치는 것의 전부이다. 알아라. 그리고 살아라. 두려움 없이 살아라. 주저하지 말고 알아라. 뱀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뱀과 아담과 이브에게 이렇게 말하 기 때문이다. "신은 두려워하고 있다. 만약 네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는 신과 같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의 우월성은 없어지고 너는 신과 똑같아질 것이다. 그 리고 삶의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는 신과 똑같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신은 두 려워하고 잇다. 신은 계속해서 너를 지배하고 깊어한다." 자, 누가 죄를 지었는가? 누가 남의 권리를 침해했는가? 신인가, 아담과 이브인가? 그러나 예수는 여전히 썩은 과거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인간이 죄를 지었 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런 죄도 볼 수 없다.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은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그대가 무슨 죄를 짓고 있다는 말인가? 그대가 살아가고 있는 본능은 자연에 의해 주 어진 것이다. 그대의 섹스는 자연이 준 선물임, 음식을 먹을 때 즐거운 것은 그대 본 성의 일부이다. 그대는 아름답게 살고 싶고, 편안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대는 집 주위 에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깊다. 그대는 따뜻한 수영장을 갖고 싶다. 그대는 남자를, 혹은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한다. 나는 거기서 아무런 죄도 보지 못한다. 그대는 죄를 짓고 있지 않다. 그대는 단지 본성을, 그대의 자연스런 천성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종교들은 그대를 비난해 왔다. 철저하게 비난해 왔다. 종교들은 모든 자연스 러운 것들을 비난해 왔으며, 그러한 비난을 통해서 그대 안에 거대한 죄의식을 만들어 냈다. 그대의 가슴은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죄의식은 그대를 뒤로 끌어당 긴다. 그것은 그대에게 그 어떤 전체적인 삶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죄의식은 그대의 춤이 절정에, 최대치에 이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 죄의식은 그대가 노래하고 소리 지르고 기뻐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죄의식은 그대를 억누른다. 나는 그런 종류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예수는 말한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무슨 유혹 말인가? 무슨 유 혹이 있는가? 삶은 말할 수 없이 단순하다! 그러나 그대는 어떤 것들을 유혹이라고 부 를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유혹이 된다. 예를 들면, 나는 자이나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그러나 그것은 어떨 수 없다. 사람은 어쨌든 불행한 상태들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열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나는 토마토를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이나교에서는 완전한 채식을 하는데, 그 불쌍한 토마토는 고기의 색깔을 지녔기 때문이다. 단지 색 깔뿐이다.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그 색깔 자체만으로도 자이나교인들이 반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토마토는 나의 집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고, 나는 그것을 맛볼 수 없었다. 내가 열 여덟 살 때, 나는 힌두교도인 몇몇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갔었다. 나만 자 이나교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힌두교도였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나는 밤에 음식을 먹지 도 않았다. 왜냐하면 자이나교인들은 밤에는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큰 죄이다. 왜냐하면 밤에는 모기가 음식에 떨어질 수도 있고, 곤충이 기어 들어갈 수도 있는데, 그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살아 있는 생물을 먹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는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빛이 환한 낮에만 음식을 먹어야 한다. 밤에는 물을 마셔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밤에는... 누가 알겠는가? 그대가 의식적으로 죽이 려 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는 열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밤에 음식을 먹지도 않았고, 토마토를 먹어 보 지도 못했다. 그것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나는 시장에서 토마토를 보았다. 그것은 정 말로 유혹적이었다. 토마토는 명상적으로, 그처럼 중심 잡힌 채, 그처럼 땅에 뿌리내 리고 앉아서 유혹하고 있었다. 감자 역시 자이나 가정에서는 허락 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땅 밑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 위험하 다. 그것은 그대의 영혼에 어둠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름 피서지로 소풍을 갔을 때, 친구들은 모두 신과 정치와 성들을 구경하느라 음식을 준비하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원래 게으른 사람이었다. 나는 음식 을 요리하지 못한다. 다른 것들은 잘 요리한다... 하지만 음식은 요리하지 못한다. 차 도 못 끓인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나는 배고픔을 느꼈다. 하루 종일 산길을 걷고 신선한 공기를 마셨기 때문이다. 나 는 배가 고팠고, 밤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걱정스러웠다. "어떻게 될까? 친구들이 밤이 되어서야 음식을 만든다면, 나는 저녁을 먹지 않고 자야 할 텐데..." 나는 위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윽고 친구들이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토마토, 감 자, 음식의 감미로운 냄새. 나는 유혹과 도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나는 결 심했다. "단지 토마토와 감자 몇 개 대문에 지옥의 불 속에서 고통받느니 하룻밤쯤 굶 은 채로 자는 것이 낫겠다. 죽지는 않겠지." 그러나 배고픔은 너무나 컸다. 그리고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모두 지옥에 간다면 나 혼자 천당에서 무얼 한단 말인가? 그 바보같은 자이나교 성인들과 함께 천 당에 있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지옥에 있는 것이 낫지 않은가? 적어도 지옥에서는 토마 토나 감자를 요리할 수 있고, 잘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은 충분하니 말이다. 요리를 못하는 나도 거기에서는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설득하려 했다. "여기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도 너희 가족 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네가 밤에 음식을 먹은 것이나 토마토와 감자를 먹은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주저하며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한밤중에 음식을 모두 토해내고 나 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나무도 토하지 않았다. 그들은 곯아 떨어졌고 코를 골며 잤다. 나만이 토했다. 그것은 나의 심리 때문이었다. 죄를 지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내가 토한 것은, 단지 토마토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태 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모든 태도를 버려야만 삶을 전체적으로 살 수 있 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분명해졌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삶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살 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사느 것은 전혀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기도에 찬성할 수 없다. 예수는 말한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수 가 유혹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한가? 그는 신이 자신을 유혹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이 인도한다면 왜 내 맡기지 않는가? 그렇다면 진짜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완전한 유혹 에 빠지게 하소서. 어차피 당신께서 인도를 하시는 것이라면, 왜 헷갈리게 하십니까? 인도하시기로 하셨으면 확실하게 인도해 주소서!" 그는 유혹받고 있었다. 그의 기도가, 그가 유혹받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 리고 그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는 그대나 마찬가지로 인간이었으며, 그대만큼이나 살아 있었다. 그에게도 인간의 본성대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모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것이 있었고 더 선호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 렵다. 과거가 너무나 무겁게 그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유혹에 바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악은 없다. 따라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구원받을 필요도 없다. 단지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무의식, 무지, 비각 성의 상태이다. 나는 그것을 악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황이며, 도 전이며, 모험이다. 그것은 악이 아니다. 존재는 악이 아니다. 존재는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기회이다. 그리고 물론, 성장의 기회는 그대가 수천 가지 방식으로 유혹 당할 때에만 가능해 진다. 그대가 미지의 열망에 끌리고, 그대 안에서 엄청난 욕망이 일어 나 터져 나올 때에만 가능해 진다. 그대가 미지의 열망에 끌리고, 그대 안에서 엄청난 욕망이 일어나 터져 나올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때 그대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 는 유일한 것은 무의식, 비자각뿐이다. 그것 역시 정복해야 할 커다란 도전이다. 더 의식적이 되어라. 더 작가적이 되어라. 더 살아나라. 그대의 모든 생기가 흐르게 하라. 스스로를 방해하지 말라. 그대의 본성을 존중하라. 그대 자신을 사랑하라. 그리 고 불필요한 가정을 하지 말아라. 두려움 없이 삶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라. 탐험하라. 그렇다. 그대는 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사람은 실수를 통 해서 배우는 것이다. 그대는 많은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올바 른 문을 찾아 내는 것은 실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올바른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틀린 문을 수없이 두들겨 보아야 한다. 그것은 게임의 일부이다. 놀이의 한 부분 이다. 골드버그 부부는 장남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절약하고 저축했다. 마침내 그들은 돈 을 모아 그를 동부 지역의 명문 기숙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 부부는 기차역가 지 나와, 눈물로 그를 배웅했다. 몇 달 뒤, 아들은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는 아들 새미(Sa mmy)가 돌아와 너무나 기뻤다. 엄마가 그를 맞으며 말했다, "사멜라 (8), 돌아오니 너 무 좋구나." "어머니," 아들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저를 사멜라라고 부르지 마세요. 무엇보다도 저는 이제 성인입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저를 사무엘이라고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사과하고 나서 물었다. "나는 네가 그 곳에 있는 동안 유대교 율법에 맞는 음식만 먹었기를 바란다." "어머니, 우리는 현대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낡은 세상의 전통에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유대음식이건 아니건 모든 음식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제 말 을 믿으세요. 어머니도 모든 음식을 드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럼 적어도 가끔 유대교당에 가서 감사 기도는 했니?" 아들은 대답했다. "정말, 어머니, 솔직히 수많은 비유대교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유대교당에 가는 것이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어머니 저에게 그런 요구 를 하시는 것은 정말 부당합니다." 마침내 골드버그 부인은 분노를 억누른 채, 장남을 쳐다보고 말했다. "사무엘, 너 할례는 그대로니?" 과거는 계속 그대 주변을 맴돈다. 그것은 감금 상태와 같아. 만약 그대가 유대교도 이거나, 기독교도이거나, 힌두교도이거나, 자이나교도이거나, 혹은 불교도라면, 그대 는 진짜 인간이 아니다. 할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그대는 죽은 것이다. 그대는 송장 이다. 사람은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때에만 살게 된다. 현재에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프라보드, 이 기도들은 두려움에 사로집힌 사람들의 투영과 욕망 외에 아무것도 아 니다. 나는 그대에게 두려움이 아닌 사랑을 가르친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종교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신을 두려워하는(God fearing)'이 라는 표현을 쓴다. 그것은 추한 표현이다. 그런 표현은 버려야 한다. 종교적인 사람이 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사람은 두려움을 느낄 수 없 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두려움을 통해 살아가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삶을 사랑 하며 살아간다. 이런 기도들은 모두가 두려움에서 나온 기도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 하소서." 이 모든 것들을 버려라. 좀 더 생기를 찾아라. 좀 더 현재를 살아라. 헨리가 첫 사냥 여행을 다녀왔다. 그가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동업자인 모리스는 그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헨리가 그에게 말했다. "음, 나는 안내원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갔어. 하지만 자네 도 나를 알지 않나. 2분만에 나는 길을 잃었어. 나는 정말로 숨을 죽이고 걷고 있었 지. 그런데 갑자기 자네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큰 곰이 내 앞에 서 있었지. 나는 뒤로 돌아서서, 있는 힘을 다해 빠르게 달아났지. 하지만 그 곰은 더 빨리 쫓아 오기 시작했다네." "내가 그 놈의 뜨거운 콧김을 목덜미에 느꼈을 때, 놈이 미끄러져 넘어졌다네. 나는 시냇물을 뛰어넘어 계속 달렸네. 하지만 나는 숨이 찼고, 곰은 다시 내 뒤를 따라왔 지. 놈이 거의 등에 닿을 정도로 따라왔을 때, 놈은 다시 미끄러져 넘어졌다네. 나는 계속 달렸고, 마침내 수풀이 없는 벌판에 도착했지. 곰은 온 힘을 다해서 쫓아왔고, 나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 그 때 다른 사냥꾼들을 보고, 살려달라고 소리쳤지. 바로 그 때 다시 곰이 미끄러져 넘어졌어. 덕분에 내 안내원이 놈을 겨냥 할 수 있었 고, 곰을 쏴 죽였다네." 모리스가 말했다. "헨리, 정말 대단하군. 자네는 정말 용감해. 나같으면 아마 바지 에 오줌을 싸고 말았을 거야." 헨리가 그를 쳐다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디. "모리스, 곰이 왜 자꾸 미끄러졌다 고 생각하나?" 사람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 그런 삶을 완전히 멈춰야 할 때이다. 인류는 새로운 새벽이 필요하다.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예수는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바꾸고 싶다. 나는 '사랑이 신 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대가 신은 사랑이라고 말할 때, 사랑은 신의 특성 중의 한 가지가 될 뿐이다. 즉 신은 다른 특성도 있을 것이다. 지혜, 정의, 기타 등등... 나에 게 있어서는 사랑이 신이다. 신성은 사랑의 특질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랑의 향기 이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러나 그 향기는 기도가 아니라 깊은 명상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기도는 두려움의 냄새를 풍긴다. 예수나 붓다나 크리쉬나를 욕하는 것이 그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가 없다. 상처가 되면 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에 괴로워하기보 다,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라. 왜냐하면 나는 누구를 반대하는 데는 관심이 없 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나 붓다, 마하비라, 크리쉬나에 대해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목초지, 새로운 차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 운 차원은 우리의 낡고 썩은 마음과는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이 그대 에게 상처가 될 때면, 기억하라. 그대가 괴로운 것은 진실 때문이 아니다. 그대가 괴 로운 것은, 그대가 집착해 있는 그대 자신의 거짓 때문이다. 그대가 진실과 거짓 사이 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할 때면 언제나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선택하라. 왜냐하면 그 것이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만. (1)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 유태인 사상가, 종교학자. 어려서부터 유 태교 신비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자라나 그 유산의 보존과 소개에 힘썼다. 그는 유대 적 인간은 관계내에서 산다고 생각하여, '나'와 '너'의 연관을 중심 문제로 수립한 독 자적인 실존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2)몸-마음(body-mind) : 오쇼는 몸과 마음은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접 두사 and는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3)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 영국의 수학자이며, 철학자, 논 리학자,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기여했다. 정치, 교육, 인생에 대해 다수의 평론 을 썼다. 특히 기독교에 반대 입장을 취하여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책을 썼다. 1951년 노벨 문학상 수상. (4)산스크리트어(Sanskrit) : 고대 인도의 경전을 기록할 때 썼던 귀족, 성직자 등 지식인들의 언어. (5)아람어(Aramaic Language) : 서셈족에 속하는 아람인의 언어. (6)헤브루어(Hebrew language) :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로서 구약성서를 기록했던 언 어. (7)할레(circumcision) : 남성의 성기 일부, 특히 포피를 의례적으로 절제하는 습속 으로 특히 유대교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실시됨. (8)사멜라(Samelah) : Samuel의 애칭. @ff 신비의 차원 사랑하는 오쇼. 최근의 천체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우주 주위의 모든 물질을 구성 하는 원자는 우주의 순환으로부터 나왔으며, 그 순환은 적어도 두 차례 이상 반복된다 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제가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는데 별 도움이 되 지 못합니다. 제가 과학자로서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월터 헐츠(Walter Hultzsch), 과학은 존재의 신비를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 을 통해서 어떤 신비감을 느낀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과학의 연구 방식 자체가 그 경험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마치 장님인 사람이 귀를 통해 보려 하거나, 귀머거리 인 사람이 눈을 통해 음악을 들으려 하는 것이나 같다. 방식 자체가 장애가 된다. 과학은 일정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방법이 과학의 범위를 한정시킨다. 그 방법론이 과학을 규정하고 정의한다. 그리고 과학에 있어 한계를 정하는 것은 절대 적으로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명상은, 그리고 과학과 종교적 의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질 것이다. 과학은 어떠한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 절대적으로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 약 그대가 어떤 사실에 대해 매우 명확하다면 그대는 신비를 느낄 수 없다. 그대가 명 확해지면 명확해질수록 신비는 더 사라져 없어진다. 신비는 어떤 모호함을 필요로 한 다. 신비는 어떤 불명확함, 어떤 불분명함을 필요로 한다. 과학은 사실적이다. 신비는 사실적이지 않다. 신비는 존재적이다. '사실(fact)'은 존재의 한 부분이다. 매우 작은 한 부분이다. 그리고 과학은 부분을 다룬다. 부분을 다루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부분은 작기 때문에 그대는 분석할 수 있다. 그대는 부분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그대는 손 안에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그 대는 그것을 분석하고 분류할 수 있다. 그 질과 양, 그리고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확 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과정에서 신비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 과학은 신비가 살해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신비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을 통해 다른 문 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마음의 차원은 과학의 차원이다. 그리고 명상의 차원은 불 가사의하고 신비한 차원이다. 명상은 모든 것을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명상은 그대를 미지의 곳으로, 지 도에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 명상은 그대를 서서히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하나로 용해 되는 지점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관찰자는 관찰자 이고 피관찰자는 피관찰자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명확한 구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대는 자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대는, 그대의 연구 대상에 흥미를 갖거나, 빠져버리거나, 압도당하거나, 열정적이되거나, 사 랑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초연해야 하며, 매우 차가워져야 한다. 차갑고 완전 히 무관심해져야 한다. 그리고 무관심함은 신비를 죽이다. 명상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 사이에 하나의 다리가 있다. 그 다리는 가슴이라 불린 다. 가슴은 정확히 이 둘 사이에 위치한다. 이 때문에 시인은 어슴푸레한 황혼의 나라 에서 산다. 시인 안의 어떤 부분은 신비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인의 고통 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정반대의 두 차원을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 들은 미치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언제나 좀 미쳐 있는 기인으로 간주한 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들 안의 일부분은 광포한 채 남아 있다. 그들은 사실의 세계에 있지도 않으며, 존재의 세계에 있지도 않 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의 사이(limbo)에 있다. 시인도 어떤 신비의 맛을 경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드물다. 왔다가는 사 라진다. 신비가는 거기에는 산다. 그러나 시인은 단지 가끔 뛰어올라, 중력을 초월한 기쁨을 맛볼 뿐이다. 그러나 일 분도 못 되어, 또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중력의 힘에 못 이겨 떨어진다. 시는 일종의 깡충깡충 뛰기이다. 가끔씩 그대는 하늘에 머문다. 한 순간 동안 뿐이 다. 때문에 시인은 절망한다. 몇 번이고 그는 절정에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몇몇 일별을 가진다.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단지 몇 번의 초월적 일별을 경 험할 뿐이다. 그러나 신비가는 신비의 세계 속에 산다. 그의 접근 방식은 과학을 완전히 초월할 것이다. 그는 마음 속에 있지 않으며, 가슴 속에 있지도 않다. 그는 그 너머에 있다. 양쪽 모두를 초월해 있다. 월터, 만약 그대가 정말로 신비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그대 존재 속의 새 로운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나는 과학자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과 학이 그대에게 있어 외부적인 부분만 남을 수 있게 하라는 말이다. 연구실 안에 있을 때는 과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연구실을 나오면 과학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라. 그리고 과학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새소리를 들어 보라. 과학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꽃을 바라 보라. 왜냐하면 그대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꽃을 바라볼 때,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것 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이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장미가 아니 다. 경험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경험은 경험을 하는 사람에 달려 있으 며, 경험의 질에 달려 있다. 과학자가 장미꽃을 바라볼 때, 그는 색깔과 화학, 물리 학, 원자, 전자, 중성자, 그 외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아름다움만을 제외한 모든 것 을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바로 장미이다. 시인에게 있어, 화가에게 있어, 장미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장미는 미지의 것, 초월적인 것, 삶의 비밀의 현현이다. 그에게 장미는 신성의 상징이며, 하늘의 그 무 엇, 머나먼 별의 그 무엇을 존재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장미는 땅에서 자라나며 땅 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땅의 부분은 아니다. 장미는 자라나며 땅에 뿌리를 내 리며 있다. 그러나 땅의 부분은 아니다. 장미는 땅보다 휠씬 더 큰 어떤 것을 포함하 고 있다. 장미는 모든 구성 요소들의 총합이 아니다. 과학자는 그 구성 요소들의 총합 으로서 장미을 알 뿐이다. 거기에 그 이상은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 이상의 어떤 것 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대가 장미를 분석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을 사라진다. 장미는 아름다움이 내려올 수 있는 가능성이며,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땅의 수용성이며, 조악함으로부터 섬세함 을 향한 수용성이다. 시인은 그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이지 생각이 아니다. 따라서 그대가 실험실을 나설 때, 원자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라. 우주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라. 오히려 다른 시작으로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라.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시인의 시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볼 때, 결코 생물학의 관점으로 그녀를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모든 의미를 놓 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생물학이 아니다. 그녀는 어떠한 생물학이 가질 수 있는 것보 다도 휠씬 더 큰 존재를 지니고 있다. 그대가 사랑하는 여자와 키스할 때, 입술과 입 술을 통해 화학적으로 무엇이 옮겨지는지를 생각하지 말라. 그대는 구역질이 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어떤 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 모든 시인들이 이야기 해온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아해질 것이다. 그것은 단지 박테리아와 세균, 수백만 마리의 세균을 교환하는 것일 뿐이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사랑하는 여자와 성관계를 가질 때, 호르몬의 관점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사랑의 행위는 단지 기계적 현상이 될 것이다. 그대는 거기 있지만, 또한 거기에 없을 것이다. 그대는 단지 관찰자일 뿐 참여자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모든 비밀은 바로 참여하는 것이다. 꽃을 바라볼 때에 꽃이 되라. 꽃 주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라. 바람은 시원하 고, 햇살은 따뜻하며, 꽃은 활짝 피어 있다. 꽃은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즐거워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할레루야를 노래하고 있다. 함께 노래하라. 무관심과 객관성, 초 연함을 버려라. 모든 과학적 태도를 버려라, 좀더 유동적이 되라. 좀 더 용해되고, 좀 더 녹아들어라. 꽃이 그대의 가슴에 이야기에 하라. 꽃이 그대의 존재 속으로 들어오 게 하라. 꽃을 초대하라. 꽃은 손님이다. 그러면 그대는 어떤 신비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신비를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단계는...그대가 만약 한 순간이라도 참여자가 될 수 있다면, 그대는 열쇠를 가진 것이다. 비밀을 안 것이다. 이제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 참여자가 되어라. 걸을 때, 단지 기계적으로 걷지 말라. 계속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지 말라. 걸음이 도어라. 춤을 출 때, 기교적으로 추지 말 라. 기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대는 기교적으로 옳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대 는 춤의 모든 기쁨을 놓칠 것이다. 춤 속에서 스스로를 용해시켜라. 춤이 되어라. 춤 추는 자에 대해서는 잊어라. 그러한 깊은 일체감이 그대 삶의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할 때...그대가 어디에서나 자아의 사라짐, 예고없음, 무의 거대한 경험을 하기 시작할 때, 꽃은 거기 있지만 그 대는 없을 때, 구름이 내부와 외부의 하늘을 떠돌고 있지만 그대는 거기 없을 때, 그 대 자신에 관한 한 절대적인 침묵만이 있을 때, 그대 안에 아무도 없을 때, 단지 순수 한 침묵, 태초에 침묵, 논리나 생각, 감정, 느낌에 의해 흩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침 묵만이 있을 때.. 그것이 명상의 순간이다. 마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마음이 사라질 때, 신비가 시작된다. 신비와 마음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신비와 마음이 본질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 그 것은 어둠과 빛의 관계와 같다. 그대는 한 방 안에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 만약 어둠을 원한다면, 그대는 불을 꺼야 한다. 그대가 빛을 원한다면, 그대는 어둠을 잃어야 한다. 그대는 한 가지만을 가질 수 있다. 빛의 현존은 어둠의 부재이며, 어둠 의 현존은 빛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은 실제로는 둘이 아니다. 똑같은 현상 이, 존재할 때에 빛이 되고,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어둠이 된다. 그대는 동시에 두 가 지를 볼 수 없다. 동시에, 있으면서 없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떨어져 나와라. 예술과 시, 그림, 춤이 더 중요해지도록 하라. 그것은 그대를 더 명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뛰어들라. 만약 그대가 시 적인 무언가를 맛보게 된다면, 그대는 궁극의 모험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종교는 세 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층은 과학이다. 그대의 몸이 물질로,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종교 역시 그 표면은 과학으로 구성 되어 있다. 나는 과학에 반대하지 않는다. 과학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은 외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대의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외부의 동심원일 뿐이 다. 그리고 과학보다 깊은 곳에 있는 두 번째 동심원이 있다. 그것이 예술이며 미학이 다. 그리고 세 번째, 그것이 명상이다. 그대가 이 세 동심원 속으로 들어갔다면, 서서 히 그대는 네 번째에 이르게 될 것이다. 네 번째 단계를 동양에서 '뚜리야(turiya)'라고 부른다. 아무 이름도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단지 하나의 숫자를, 네 번째라는 단어를 부여한 것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 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 때문에 아무 이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신비조차도 넘 어선 것이다. 명상은 그대를 신비로움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표현될 수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 아무것도 말해진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 되어 왔다. 오직 그러한 궁극적인 절정의 경험을 통해서, 그러한 궁극의 무아경 속에서만이, 월 터, 그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묻는다. 사랑하는 오쇼, 최근의 천체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우주 주위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는 우주의 순환으로부터 나왔으며, 그 순환은 적어도 두 차례 이 상 반복된다고 합니다. 두 번 반복되든, 세 번 반복되든, 그것이 어떻게 그대가 우주의 일부임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그것은 수천 번 반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관계도 없 다! 그대는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제가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 다. 어떤 사실도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차원 속을 속속들이 여행해야 한다. 그대 또한 묻는다. 제가 과학자로서 가능성이 없다. 나는 그대에게 그릇된 희망을 줄 수 없다. 과학자 로서 그대는 신비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가 과학자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과학이 그대 삶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게 하라는 뜻 이다. 왜 과학이 그대 삶의 전부가 되게 하는가? 왜 과학이 그대 삶 자체를 의미하게 하는가? 그대의 논리적인 마음, 분석적인 마음을 이용하는 것은 좋다. 그것은 완벽하 게 좋다. 그것은 유익하다. 세계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세계는 과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대는 인류에 크나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이다. 그대는 과학이 그대 삶의 전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도니다. 그렇게 한다 면, 그대는 단지 궁전의 현관(porch) (1)앞에서만 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 현관이 궁전이라고 생각하며 그 앞에서 수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춥고, 때로 는 너무 더울 것이다. 때로는 비가 올 것이다. 그것은 열려 있는 현관이다! 그리고 궁 전은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현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라. 나는 그 현관 을 부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관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현관은 현관일 뿐이다. 현관을 통과하라. 이용하라. 그대에게는 아름다운 궁전이 있다. 왜 그대 존재의 모든 궁전을 탐험하지 않는가? 시를 탐구하라. 음악을 탐구하라. 춤을 탐구하라. 명상을 탐구하라. 그리고 마침내, 궁극의 네 번째 단계로 사라져라. 그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거위는 밖에 있다. 사랑하는 오쇼. 심각하고 슬픈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들은 깨달은 뒤에도 심각하고 슬 픈 채로 남아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과 같이 재미있는 사람이 됩니까? 프렘 죠티(Prem Jyoti), 누군가 심각한 사람이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심각한 사람이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심각한 사람은 깨달을 수 없다. 심각함은 병이다. 심각함은 영혼의 암이다. 심각함은 삶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어떻게 잘못된 접근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심각한 사람은 단 순히 병에 걸린 환자이다. 물론 수천 년동안 심각한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해 왔다. 그 것이 그들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다른 즐거움은 없다. 오직 지 배하는 즐거움뿐이다. 칼릴 지브란 (2)에 관한 아름다운 우화가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산책을 하곤 했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허수아비가 서 있는 넓은 들판이 있었다. 허수아비가 서 있는 것은, 곡식으로부터 들짐승과 새들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 칼릴 지브란이 허수아비에게 물었다 "너는 달이 가도 해가 가도 계속 여기 서 있구나.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니?" 그러자 허수아비가 말했다. "천만에요. 보기에는 지루하거나 힘들어 보일 지 모르 죠. 하지만 나는 나의 일을 즐기고 있답니다." 칼릴 지브란이 말했다. "도대체 뭘 즐긴단 말이지? 내가 보기에는 즐길 만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허수아비가 말했다. "남들을 겁주는 것이 나의 기쁨이랍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동물들과 새들을 놀라게 하지요! 그들은 나를 보면 도망칩니다. 여기서는 내가 최고랍 니다. 가장 힘있는 사람이죠. 모두들 날 두려워 합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 심각한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런 일들을 해 오고 있다. 정치라는 이름으로, 종 교라는 이름으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사람들을 괴롭히 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가학-피학성 변태 성 욕자(sado-masochist )들이다. 가학-피학성 변태 성욕자들은 결코 깨달을 수 없다. 그대가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사 람들의 99.9 퍼센트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대는 그저 전통적인 생각들을 따르 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이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들어 왔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그들 을 판단할 적당한 기준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자이나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마하비라는 전혀 깨달은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 이다. 그들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평생 웃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완전한 거짓말임에 틀림없 다. 나는 그가 웃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의 전생애는 완전히 색다른 향기 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웃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가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짊어지고 있어야 하므로 매우 심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왔으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 그는 구세주이며 메시 아이다. 그는 그대 과거의 죄로부터, 그리고 미래의 죄의 가능성으로부터 그대를 구원 해야 한다. 자연히 그는 히말라야와 같은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대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그러한 생각은 추한 것이다. 그 모든 생각이 그대의 자유를 파괴해 버린다. 심지어 그대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이 대신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대는 모든 책임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붓다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스스로에 대해서 빛이 되라. 다른 누 구도 그대를 구원해 줄 수 없다." 따라서 붓다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심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는 해방된 것이다. 그의 안에는 미묘한 기쁨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붓다가 이기적이고 자기만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깨달 은 사람이 이기적일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있어 예수는 온 인류를 생각하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다. 마하비라는 벌거벗은 채 살았다. 그것은 자이나교인들이 보는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 다.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는 알몸으로 살 것이며, 모든 죄로부 터 자유롭기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많은 고통을 겪는다. 자이나교 철학에 따르면 그대가 고통받는 것은 오직 과거의 억압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위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면, 그것은 아직도 그의 억압이 남아 있었다 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그는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모든 행위가 대가를 치러 야 한다. 자이나교인들의 말에 의하면, 마하비라가 알몸으로 길을 걷고 있을 때 길 위에 가시 가 서 있다면, 가시는 즉시 뒤집어져 버릴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하비라에게는 아무런 죄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는 마하비라에게 아무런 상처도 줄 수 없 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고 자이나교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마하 비라는 심각하다. 크리쉬나는 심각하지 않다. 크리쉬나는 춤추고 노래하고 피리를 분다. 보리달마 (3)가 깨달았을 때, 그는 7일 동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여러번 사람들 이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우스워서 웃고 있다. 거위는 언제나 밖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위를 병안에서 끄집어 내려고 애쓰고 있었 다. 그러나 병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모든 노력은 순전히 우습고 어리석은 것이 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온 세상에 대해서 웃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전혀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힘들 게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어려워진다. 노력 자체가 장벽이 된 다." 누가 깨닫고 누가 깨닫지 않았는지, 그대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바로 며칠 전에 나는 이런 편지를 받았다. "당신이 정말 깨달았다면, 당신은 히말라 야로 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들은 언제나 은둔하지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알려지거나 찬양받지 않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맞다면, 마하비라니 예수, 붓다, 크리쉬나, 라마, 짜라투스트라, 마 호멧, 이런 사람들 중에 깨달은 사람은 없다. 그들은 모두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 기 때문이다. 그들은 히말랴여로 숨지도 않았고, 익명을 살지도 않았으며, 찬양받지 않은 채 죽지도 않았다. 그러면 또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난다. 이 사람은 어떻게, 숭배받지 않고 알려지지 않 은 채 사는 히말라야의 성자들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들이 진짜 깨달은 사 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어떻게 이들을 알게 되었는가? 만약 그가 그들을 알고 있 다면,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만이 비밀을 아는 것이 허용되는 유 일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바보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선입견을 뽐낸다. 나는 그대에게 누가 깨달았고 누가 깨닫지 않았는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해와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간단한 현상 하나를 알려 주겠 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가학-피학성 변태 성욕자들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 신에게 고통을 주고 남들에게 고통을 주느 사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깨 달을 수 없다. 깨달음은 지복이다. 깨달음은 심각해 질 수 없다. 깨달음은 진실 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황홀경이 될 것이다! 프렘 죠티, 그대는 묻는다. 사랑하는 오쇼, 심각하고 슬픈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되면...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심각하고 슬픈 사람이 깨달았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심각하고 슬픈 사람이 아니거나, 아니면 그 대가 잘 못 들은 것이다. 심각하고 슬픈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는 있지만, 깨 달을 수는 없다. 그들은 교황이나 마더 테레사, 마하트마 간디, 모라지 데사이 (4), 샹카라차리야 (5), 아야톨라 호메이니, 이맘 (6), 성직자들이 된다. 교회, 유대교당, 힌두사원, 모스크, 시크사원에는 이런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심각한 사람들 이 그들은 깨달은 사람 주위에 모여들어, 깨달은 사람이 꽃피운 모든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죽은 전통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통은 심각해야 한다. 전통 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전통과 관습은 즐거울 수 없다. 전통이라는 그 자체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전통은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억압과 착취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즐거운 표정으로는 사람들을 착취할 수가 없다. 그들은 매우 심각해져야 한다. 그들은 그대를 슬프게 만들고, 삶 자체를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그대 안에 커다란 두려움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두려움 때문에 그대가 그들의 손아귀를 빠져 나가지 못 하게 해야 한다. 그대는 그들의 조종을 받게 된다. 나와 같은 사람은 그대를 착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곳은 사원이라기보다는 선술 집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심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곳이다. 우리는 아름다 운 놀이에 빠져 있다. 그대가 그것을 놀이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심각함은 사라지고 문제는 가벼워진다. 그대는 춤추듯이 걸을 수 있다. 그대를 짓누르고 있는 무게가 없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가에 그들의 모든 명성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하고 더 침울해 보일수록, 그들은 '그대보다 더 성스러운' 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들은 단식을 할 것이 다. 자연히, 단식을 하면 사람은 심각해진다. 그들은 웃을 수 없다. 배고플 때 그대는 웃을 수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웃는 것마저도 허락할 수 없다. 그것은 웃음의 문 제가 아니다. 자신은 단식을 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데 사람들이 웃고 있다면... 그것은 용서될 수 없다. 자연히, 그대가 단식하는 사람에게 갈 때, 그대는 심각해진다. 그대는 심각해져야 한다. 그것은 기본적인 예의이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자기 몸을 파괴하고 있는 사람,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자기 몸을 고문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그 광경 자체가 슬프다. 그대는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소위 성직자라 불리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성직자들에게 경의를 표한 뒤에 바로 자리를 뜨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앉 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대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 은 그대 안에 커다란 죄의식을 만들어 낼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단식을 하고 있는데 그대는 잘 먹었다면, 죄의식은 생겨날 수 밖 에 없다. 그들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 있는데 그대는 두발로 서 있다면, 그대는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그대는 "나는 아직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거꾸로 물구 나무 서 있는 이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겠는가? 만약 신이 그대가 물구나무 서 있기를 바랬다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신이 동성애를 원했다면, 아담과 브루스(Bruce)를 창조했을 것이다. 너무나 간 단하다! 무엇 때문에 이브를 만드는가? 불필요한 문제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바보같은 성직자들은 부자연스러운 일을 게속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그러한 부자연스 러운 접근방식이 그들을 심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기 때문 에, 힘이 빠지고 지치고 지루해진다. 그러나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그대 또한 지루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모이셰는 그의 아들이 커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랍비를 찾아가 자문 을 구했다. 랍비가 말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탁자 위에 탈무드와 토라 (7)와 돈을 놓 고, 아이더러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탈무드를 잡는다면 아이는 랍비가 될 것입 니다. 토라를 집는다면 아이는 법률가가 될 것입니다. 그 아이가 돈을 집느다면 아이 는 상인이 될 것입니다. 모이셰는 이 말에 동의하고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는 탁자 위에 있는 것들을 쳐다보 더니, 모두 다 집어 들었다. 모이셰는 당황하며 랍비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요?" 랍비가 대답했다. "이 아이는 카톨릭 성직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슬픈 사람들이 카톨릭 성직자, 힌두교의 샹카라차리야, 이슬람교의 이맘과 같 은 사람들이 된다. 이 심각한 사람들은 인간성을 상실하다. 그들은 앵무새가 된다. 그 러나 앵무새가 되는 것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그대는 앵무새가 되기 위해 대단한 지성이 필요치 않다. 그대는 앵무새가 되기 위해 많은 용기가 필요치 않다. 그저 약간 의 기억력만 있으면 된다. 베다타 기타, 코란을 암송할 수 있다면, 그대는 존경받고 숭배받을 것이다. 그대는 아무런 창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아무 공헌도 하지 않는다. 그대는 세상에, 세상의 기쁨에 아무 공헌도 하지 않는다. 반대로 파괴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천 년에 걸쳐 조건화되어 있으며, 계속해서 그 조건화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앵무새들이 숭배를 받는다. 한 농부가 언제나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앵무새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농부는 그 앵무새가 떠드는 것이 지겨워져서 닭장에 가두어 버렸다. 수탉 은 앵무새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봐, 왜 주인이 자네를 여기에 가두었나?" 앵무새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해 준다면 내 암탉 중에 네 마리를 자네에게 주지." 그러나 앵무새는 계속 침묵 을 지켰다. "이보게, 왜 주인이 자네를 여기 가두었는지 알려 준다면, 내가 자네에게 암탉 열 마리를 주지." 앵무새는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날 좀 가만 내버려 둘 수 없겠어? 나는 정치범 이란 말이야!" 이런 슬픈 사람들은 성직자나 정치가가 되거나, 위대한 학자, 교수, 철학자, 신학자 가 된다. 그러나 결코 깨닫지는 못한다. 그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꽃의 가벼움, 깃털의 가벼움, 무지개의 다차원적인 색깔을 가져야 한다. 아침에 노래하는 새의 기쁨을 지녀야 하며, 구름의 자유를 지녀야 한다. 단 한 가지가 필요하다. 가슴 가득한 지복... 어떤 궁극으로부터의 지복이나 천국의 지복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지복, 바로 이 순간의 지복! 그대의 눈이 지금 이 순간 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을 때, 과거도 미래도 없을 때, 이 순간 이 너무나 완전하고 너무나 강렬하게 그대를 감싸고 있어 아무것도 뒤에 남지 않을 때 의 지복! 오직 이러한 지복을 느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을 얻었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대가 행복한 평범함 속에 살아간다면, 그대는 깨달은 것이다. 어떠한 영적 넌센스도, 어떠한 신비적인 넌센스도 필요치 않다. 라비노비츠네 집의 변기가 낡았다. 시드니씨는 회사를 쉬는 날, 페인트칠을 해 주기 로 약속했다. 그는 차고에 있던 밝은 녹색 에나멜 페인트를 가져다가 변기를 깨끗하게 칠했다. 그의 아내 에델이 잡지를 가지고 들어가 변기에 앉아, 명상하고, 그 잡지를 읽었다. 그녀는 일어나려 할 때에야 자신이 붙어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시드니를 불렀 다. 그는 그냐를 떼어 내려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떼어 낼 수 없었다. 에델은 절망감 속 에 외쳤다. 거기 서서 뭣하고 있는 거예요! 의사를 불러요. 의사라면 적어도 고약이 붙었을 때 어떻게 다치지 않고 떼어 내는지 알 것 아니에요!" 시드니는 전화통으로 달려가 의사에게 당장 와달라고 말했다. 이것은 정말 응급 상 황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병원이 환자들로 가득 차 있어서 적어도 두 시간은 있어야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드니의 머리 속에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변기 나사를 빼내어 그녀가 침대 에 엎드려서 의사를 기다릴 수 있게 했다. 두 시간이 네 시간 같았지만, 어쨌든 마침 내 의사가 왔다. 시드니는 의사를 침실로 안내한 뒤, 아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저 정도면 선생님을 오시라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사는 세심하게 들여다 본 뒤 말했다. "아주 훌륭하군요... 하지만 왜 이렇게 싸구 려 액자를 쓰셨죠?" 삶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여라! 삶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너무나 우습다. 삶은 너 무나 재미있기 때문에, 그대가 완전히 말라붙어 버리지 않는 한, 그대는 심각해질 수 없다. 나는 모든 측면에서 삶을 살펴 봤지만, 삶은 언제나 재미있다. 어떻게 바라보더 라도 삶은 재미있다. 자세히 바라보면 바라볼 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삶은 피안 으로부터의 아름다운 선물이다. 프렘 죠티, 나는 모든 심각함에 반대한다. 나의 방식은 유머를 통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종교적 특질은 유머 감각이다. 진리도, 신도, 덕도 아니다. 유머 감각이 다. 만약 우리가 온 지구를 웃음과 춤과 노래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우리가 이 지구 를 기쁨의 카니발로 빛의 축제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처음으로 지구상에 진정한 종교성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오쇼. 독일의 가장 큰 뉴스 잡지인 '슈피겔(Spiegel)'이 마침내 당신과 당신의 산야신 들, 그리고 아쉬람에 대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기자는 당신에 관한 여러 가지 놀랍 고 훌륭한 이야기들을 전함녀서, 심지어 당신을 폴란드인 교황과 비교하기까지 합니 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카리스마 앞에 복종하는 군중들 이나, 뿌나 순례자들이 오쇼 앞에 복종하는 행동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교회와 그 들 교파의 권위자들만이 거기에 동의하지 못할 뿐이다." 사랑하는 오쇼, 당신은 이런 그들의 말을 좋게 느끼십니까, 아니면 불쾌하십니 까? 나는 기쁘다. 나는 언제나 폴란드인들을 사랑했다. 교황은 둘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폴란드인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폴라드인이 코끼리라면, 교황은 단지 코끼 리의 끝 부분, 꼬리 부분이다! 물론 나는 교황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나는 그렇게 심각한 사람이 아니 다. 나는 그렇게 종교적이지도 않다. 나는 매우 평범하다. 교황이 되려면 매우 비범해 야 한다. 카리스마에 관한 한, 나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세상의 그 누구도 마찬가지로 평범하다. 카리스마라는 바로 그 생각 자체가 반인간적이다. 그것은 사람 들을 나누어 놓는다. 그리고 카리스마를 창조해 내는 모든 목적은 조건화를 만들어 내 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가 벌거벗은 자이나교 승려를 보러 간다면, 그대는 그에게서 아무런 카리 스마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런 방식으로 조건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는 단지 추하고, 구역질 날 듯한, 창백하고, 병든, 안절부절못하는, 눈은 거의 죽어 있고, 얼굴에서 지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온 몸이 쭈그러들어 있는 한 사람을 볼 것 이다. 그렇다. 그의 몸에는 큰 부분이 단 한 군데 있을 것이다. 바로 배이다. 왜냐하 면 자이나교 승려들은 하루에 한 번만 먹기 때문에,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이나교 사상에 조건화되어 있지만 않다면, 그 모든 자이나교 승려들 의 모습은 단지 우습고 만화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자이나교인들에게 있어 그 모습 은 카리스마를, 거대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자이나교 승려들, 특히 알몸으로 지내는 디감바라(digambara)파의 자이나 승려들은 매년 자기 손으로 머리카락을 뽑는다. 만약 그대가 이 광경을 본다면, 그것은 단지 추 하고 폭력적인 미친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자이나교인들은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그것을 본다. "뭔가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다. 그 사람은 단지 머리카락을 뽑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가끔 아내가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뽑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또는 정신병원에 가 본다면, 그대는 자기 머리 카락을 뽑고 있는 사람들을 볼 것이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스스로에 게 폭력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억압된 분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 안교적인 마음으로 볼 때, 그것은 카리스마적이다. "이 얼마나 큰 희생인가!" 교회에 가서 십자가를 볼 때, 만약 그대가 기독교에 조건화되어 있다면, 그대는 죽 음이 숭배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한다. 만 약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없었을 가능성이 많다. 기독교의 정신을 지배해 온 것은 예수가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이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를 '기 독교(Christianity)'라고 부르지 않는다. '십자가교(Crossianity)'라 부른다. 십자가 는 단지 죽음, 자살을 상징할 뿐이다. 그것은 삶에 대해 긍정적인 상징이 아니다. 그 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전 인류에 대한 예수의 위대한 희생을 상징한다. 카리스마란 어떤 조건화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똑같은 교황이 2년 전에는 카리스마 적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카리스마적이 되었다.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인가? 단지 그가 교황으로 뽑혔기 때문이다.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카리스마 적이 되었다. 이제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에게 감명을 받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 었다. 똑같은 사람이 60년이 넘도록 거기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 다. 이것은 단지 만들어진 환상일 뿐이다. 똑같은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때, 카리스마를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통 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그는 모든 카리스마를 잃는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 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케렌스키라 (8)는 매우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국무총리였다. 혁명기간 중에 그는 도망갔고, 15년 동안 아무도 그 카 리스마적인 지도자에 대해서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잊었다. 그러나 레닌 (9)이 나오기 전에는,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라 전체 를 지배했었다. 15년 후에 그는 뉴욕에서 식료품점 주인으로 죽었다. 죽고 나서야, 그 가 다름 아닌 케렌스키라는 것이 밝혀졌다. 15년 동안 그는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었 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카리스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카리스마적이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든 엉터리같은 것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단순한 사람, 조건화되어 있지 않은 사람, 순수한 사람, 평범한 사람을 높이 본 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구분이 사라지기를 바라다. 죄인과 성자, 성스럽지 않은 사 람과 성스러운 사람, 불경스러운 사람과 신성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과 비도덕적인 사 람의 구분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나는 그런 모든 구분을 없애 버리고 싶다! 사람은 단 순히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나는 교황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은, 나는 어떠한 비교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교란 기본적으로 잘못된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일 뿐이다. 나는 예수와 비교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교황이라면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붓다나 짜라투스트라, 노자와 비교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모든 비교는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노자이고, 나는 나이다. 비 교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장미 덤불을 레바논의 삼나무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비교의 문제가 아니다. 어덯게 연꽃과 금잔화를 비교하겠는가? 사실은, 두 송이의 연꽃이라 해도 서로 비교될 수 없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이러한 비교라는 생각과 함께 살아왔다. 우리는 언제나 비교한다. 우리는 언제나 사람들을 구분하여 상자에 담아 둔다. 누가 누구인지, 어떤 범주에 속하는 사람인지... 여기서의 나의 모든 노력은 모든 구분을 없애고 개인의 유일성을 선언하기 위한 것 이다. 나를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라. 나는 단순히 나 자신일 뿐이다. 착하든 나 쁘든, 성스럽든 성스럽지 않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나는 단순히 나 자신일 뿐이다. 다른 누구와도 비교된다는 그 생각 자체가 메스꺼운 생각이다. 신은 결코 복사품을 창 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원본만을 창조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시의 본래 얼굴을 가지고 온다. 그러나 나는 폴란드인은 사랑한다. 그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폴란드인이 서커스단 사무실로 들어와, 10미터 높이에서 그물도 없이 머리부터 땅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제안했다. 지배인은 ale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대로 갔다. 폴란드인은 10미터 높이까지 올라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머리부터 뛰어내 렸다. 머리를 땅에 부딪친 그는 잠시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지배인은 넋을 잃었다. "정말 믿을 수 없군요!" 그는 소리쳤다. "하루밤 공연에 백 달러를 주겠소." 폴란드인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좋아. 하룻밤 공연에 3백 달러를 주겠소." "싫소." 폴란드인이 대답했다. "천 달러를 주겠소." 지배인이 말했다. "싫소." 폴란드인이 대답했다. "마음을 바꿨소. 이젠 더 이상 뛰어내리고 싶지 않 소. 나는 이렇게 아플 줄 몰랐소." 한 폴라드인이 자신이 세 개의 고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누구 에게든 이 말을 하고 싶어, 길에서 만나 첫 번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이 합하면 다섯 개입니다. 내기하겠소?" 그리고 그는 내기에 졌다. 그 친구는 고환이 한 개밖에 없었다. 폴란드 여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남편을 보고 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해 줘요." 폴란드인 남편은 대답했다. "어떻게 나에게 그런 일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이오? 그렇 게 하면 당신은 죽고 말거요!" 아내는 간청했다. "누구나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은 말할 수 있는 법이에요. 당신 은 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셔야 해요." 폴라드인은 대답했다. "좋소." 그는 침대로 들어가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그가 일 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완전히 병이 나아서 침대에서 뛰쳐나와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 다. 그리고 닭털을 뽑으며 거실에 있는 아이들에게 한 시간 안에 저녁이 준비될 것이 라고 소리쳤다. 아이들은 깜짝 놀라,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울고 있는 위층으로 뛰어올라왔다. "아 빠. 왜 울고 계세요? 이건 기적이에요! 엄마가 완전히 나았어요!" 그는 대답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엘레나 루즈벨트 (10)에게도 이렇게 할 수 있었 다면!..." 폴라드인의 마음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작용하다! 폴라드인의 마음은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마음이다! 슈피겔지가 한 가지 좋은 일을 했다. 나에게 폴란드인이 떠오르게 해준 것이다. 늙은 폴란드인 장군이 외딴 별장에서 젊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침입자 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두 명의 보초를 집 앞에 세워 주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보초들은 장군의 침실 불이 너무 오랫동안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들은 의심스럽게 여겨, 살짝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장군의 아내는 꽤 지루한 듯이 알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폴란드인 장군은 역시 벌거벗은 채, 근심에 찬 얼굴로 한 손에 권총을 들고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서더니, 아래르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남자답게 서라, 안 그러면 쏘겠다!" 그대는 이 유명한 격언을 기억하는가? "빵은 꼭 버터를 바른 쪽이 바닥으로 떨어진 다." 그러나 한 폴란드인이 빵을 떨어뜨렸는데, 버터를 바른 쪽이 위로 떨어졌다. 그는 즉시 우주의 근본 법칙에 이상이 생긴 것을 보고하기 위해 폴란드인 교황에게 달려갔 다. 처음에 교황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시간을 달라고 요구 했다. 그는 그 격언에 대한 옛 경전들을 모두 연구했고, 신에게 기도하며, 확실한 답 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몇 달 뒤, 교황은 마침내 답을 가지고 왔다. 그는 폴란드인에게 말했다. "버터를 반 대 쪽에 바른 것이 틀림없소." 데바 야차나(Dva Yachana), 그대는 묻는다. 사랑하는 오쇼, 독일의 가장 큰 뉴스 잡지인 '슈피겔(Spiegel)'이 마침내 당신과 당 신의 산야신들, 그리고 아쉬람에 대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기자는 당신에 관한 여러 가지 놀랍고 훌륭한 이야기들을 전하면서, 심지어 당신을 폴란드인 교황과 비교하기까 지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카리스마 앞에 복종하는 군중들이나, 뿌나 순례자들이 오쇼 앞에 복종하는 행동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완전히 틀렸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들이 나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 여 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와 전체 사이에서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복종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가 교황에게 갈 때, 그것은 복종의 문제이다. 그러 나 여기 이것은 하나의 연애 사건이다. 그 곳에서 그대는 교황에게 복종한다. 왜냐하 면 그는 신을 상징하며, 신의 독생자를 상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 다. 나는 그 누구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대가 나와 함께 있을 때, 그대는 연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 복종의 문제는 없다. 그대는 단지 존재와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나는 단지 하나의 기 회이며, 수단이며, 기껏해여 하나의 촉매제일 뿐이다. 나는 산야신들은 나의 추종자들이 아니다. 나는 교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내가 본 것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나는 단지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여기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나의 여행의 동반자들이다. 그대 는 나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으면서, 서서히 그대는 존재를 향 한 깊은 복종을 즐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나는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모든 공은 그대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현존은 오 직 한 가지를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대가, 자신이 빠져 있는 어리석음의 패턴 을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다. 교황은 그대에게 똑같은 어리석은 패턴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수천년 동안 사람 들은 이러한 교황이나 성직자들에게 복종해 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성직자가 아니다. 나는 군중을 모으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전통을 창조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단순히 나 자신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를 즐기 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이 곳은 기쁨의 장소이다. 복종이라는 말 자체가 여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도 복종하고 있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다. 그대가 그대의 본래 얼굴을 발견하는 그 순간, 그대는 전체와의 교류 속으로 들어 간다. 슈피겔지가 뿌나 순례자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 다. 그러나 외부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런 오해는 생겨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구경꾼일 뿐이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단 지 관찰자가 되는 것으로 안 된다. 오직 참여할 때에만, 혀 끝에 느껴지는 맛이 그 비 밀을 드러내 줄 것이다. 매년 열리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장엄한 부활절 의식 중에는, 그 도시의 랍비장 이 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경건한 행사가 진행되는 중간에 성당으로 들어와, 오래 된 두루마리를 교황에게 증정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래서 매년 교황은 랍비에게 그것을 받아 들고 그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그것을 다시 랍비에게 돌려주고, 랍비도 고개를 숙여 답례한 후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신비로운 의식은 너무나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어서 아무도 그 의식이 어 떻게 시작된 것인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폴란드인 교황이 첫 부활절 의식을 맞았을 때, 그는 완전히 무의미한 관례가 되어 버린 이 의식을 끝내 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랍비장이 그 두루마리를 건네 주었을 때, 교황은 모 든 교황청이 경악하는 가운데 그것을 펼쳐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 만찬의 계산서였다. 사랑하는 오쇼, 정말 미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농담 때문에 끊임없이 웃습니다. 심지어 한 번 은 졸면서 당신의 농담을 듣다가, 웃으며 잠을 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농담이 무 엇이었는지조차 모릅니다! 요가 랄리타(Yoga Lalita).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들려주어야겠다! 사실은 네 가지 농담이 있었다. 세 가지는 오늘 그대에게 들려 주겠다. 그리고 네 번째 농담, 뚜리야 (turiya)는 그대가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도록 48시간을 주겠다. 그대가 그것을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네 번째 농담도 알려 주겠다. 첫 번째 농담은 그대가 수슈프티(sushupti), 즉 꿈 없는 잠의 상태에 있을 때 들었 던 농담이다. 자연히 그대는 그것을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요가 랄리타는 나의 도서관 담당자이기 때문에 그녀가 나의 농담들을 모아 둘 수 있도록 다시 알려 줘야 한다. 나는 그녀를 만나지도 않고 도서관에 가지고 않기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는 방법은 그녀가 잠들어 있는 강의 시간뿐이다. 이것이 첫 번째 농담이다. 목사와 신부 그리고 랍비가 헌금으로 들어온 돈 중 얼마나 개인적으로 쓰고, 얼마를 교회에 바쳐야 하는지를 계시받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바닥에 선을 긋습니다." 목사는 말했다. "돈을 전부 공중으로 던져서 오른쪽 에 떨어지는 것은 제가 갖고, 왼쪽으로 떨어지는 돈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저의 방법도 근본적으로는 같습니다. 단지 원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원 안에 떨어지는 것은 나의 돈이고, 바깥에 떨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랍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같은 방법입니다. 저도 모든 돈을 공중으로 던 집니다. 하느님이 붙잡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랄리타, 두 번째 농담은 스와쁘나(swapna), 즉 꿈의 상태에서 그대가 들었던 것이 다. 그 중 어떤 부분은 아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약간의 파편들만이 드문드 문 퍼져 있을 것이다. 광기에 찬 한 젊은이가 도시 중심부 호텔의 40층 창문 끝에 앉아 뛰어 내린다고 위 협하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경찰이 몇 피트 낮은 옆 빌딩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러 나 그를 안전하고 구해 내려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교구의 신부가 불려 왔고, 그는 이 장면을 보고 서둘러 설득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렴, 나의 아들아," 그는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이 청년에게 말했다. "너 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해 보렴." "아!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젊은이가 대답했다. "뛰어내리겠어요!" "안돼! 멈춰!" 신부가 소리쳤다. "너를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해 보아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뛰어내리겠어요!"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생각해 봐라," 신부가 간청했다. "너를 사랑하시는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생각해 보렴!" "예수, 마리아, 요셉이요? 그게 누굽니까?" 청년이 소리쳤다. 마침내 신부가 소리쳤다. "뛰어내려, 이 유태인 개새끼! 뛰어내려!" 그리고 세 번째 농담은 그대가 자그루띠(jagruti), 소위 깨어 있는 상태에서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깨어 있는 상태는 아니다. 아마 이것이 그대를 계속 웃 게 만드는 농담일 것이다. 정말 미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농담 때문에 끊임없이 웃습니다. 심지어 한 번은 졸면서 당신의 농담을 듣다가, 웃으며 잠을 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농담이 무엇 이었는지조차 모릅니다! 아마 이 농담이었을 것이다. 어느 가족이 헝가리에 살고 있던 그들의 할아버지를 모셔와, 딸과 그 딸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로 했다. 그 노인은 뉴욕의 모든 모습에 매혹되었다. 어느 날, 그의 손자 얀 켈이 할아버지와 센트럴 파크의 동물원에 갔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노인도 잘 아는 것 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웃는 하이에나의 우리 앞에 왔을 때, 노인은 호기심이 생겼 다. "얀켈, 헝가리에서는 웃는 동물이 있다는 소리는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 얀켈은 근처에 서 있던 수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 유럽에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웃는 하이에나를 보신 적이 없었답니 다. 제가 할아버지에게 알려 드릴 수 있개, 이 하이에나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겠습 니까?" 수위는 말했다. "글쎄요, 이 놈은 하루에 한 번 먹습니다." 얀켈은 할아버지를 보고 이디시 (11)어로 통역을 해 주었다. "할아버지, 이 놈은 하 루에 한 번 먹는대요." 수위가 계속했다. "놈은 일 주일에 한 번 목욕을 합니다." "할아버지, 이 놈은 일 주일에 한 번 목욕한대요." 노인은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수위가 다시 말했다. "이 놈은 일 년에 한 번 짝을 짓습니다." "할아버지, 이 놈은 일 년에 한 번 짝을 짓는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군, 하루에 한 번을 먹고,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을 하는군. 하지만 일 년에 한 번밖에 짝을 짓지 않는데, 왜 웃고 있지?" 오늘은 이만, (1)porch : 본건물에 딸린 지붕이 달린 현관. (2)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 레바논 태생의 수학자, 수필가, 소설 가, 시인, 화가. 12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년 후 혼자 레바논으로 돌아와 유명한 '지혜의 학교(Hikmat)'를 다님.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가 1908년부터는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함.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지브란은 4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며 '예언자', '사람의 아들 예수' 등 종교적인 작품들과 그림들을 발표했다. 오쇼는 그의 '예언자'에 대해 강의한 바 있다. (3)보리달마(?-528?) : 보리다르마(Bodhidharma), 일명 달마대사. 중국 선종의 시 조. 고타마 붓다로부터 28번째로 선의 법맥을 이은 사람. 남인도(일설에는 페르시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후에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527년 중국 남방에 도착하였고, 양자강 건너 하남 지방의 승상으로 가서 소림사에 머물렀다. 9년 면벽 좌선 후 혜가에서 선의 법통을 물려 주었으며, 이것이 중국 선의 시작이 되었다. (4)모라지 데사이(Morarji Ranchbodji Desai, 1896-1995) : 인도의 정치가. 77년 총 선거에서 자나타당이 승리함으로써 총리에 취임하였으나 당이 분열되자 79년 사임하였 다. (5)샹카라차리야(Shankaracharya) : 힌두교의 지도자. (6)이맘(Imam) : 이슬람교 교단 조직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직명. (7)토라(Torah) : 구약의 제1부모로, 모세 5경이라고도 함.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 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하다.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대교의 율법서. (8)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y, 1881-1970) : 러시아의 정치가. 정치 범을 변호하는 정치재판을 맡아 명성을 얻었고 이후 법무장관,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 총리 겸 러이사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후에 코르닐로프 반란을 유발시켜 사태를 수습 하지 못하고, 10월혁명 때 여자로 변장하여 가까스로 탈출, 전선의 카자흐 부대를 이 끌고 수도 탈환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940년 이후 만년에는 미국에 있으면서 '회상록'을 집필하였다. (9)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 : 러시아의 혁명가, 정치가. 1917년 러 시아 10월 혁명의 중심인물. (10)엘레나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 :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미국의 여성 사회 운동자로 아동 복지, 빈민 구제에 힘썼음.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 령의 부인. (11)이디시(Yiddish) : 주로 유럽과 미국의 유태인들이 쓰는 언어. @ff 놓아 버림을 즐겨라. 사랑하는 오쇼, 삶에 대해 어떤 하나의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합니까? 마그릿(Margrit), 삶을 놓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삶에 대해 특정한 태도를 갖는 것 이다. 태도란 마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삶은 마음을 넘어선 것이다. 태도란 우리 가 꾸며 낸 것이며, 편견이며, 허구이다. 삶은 우리가 꾸며 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바로 삶의 호수에 이는 물결에 불과하다. 바다에 이는 물결이 바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풀잎이 지구에 대해서, 혹은 달, 해, 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모든 태도는 이기 적인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다. 삶은 철학이 아니다. 삶은 문제가 아니다. 삶은 신비이 다. 그대는 그 삶을 살아야 하다. 어떠한 양식이나 조건화에도 따르지 않고 살아야 한 다. 그대는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지구상의 최초의 인간이라고 생각해야 하다. 그는 아담과 이브 이다. 그 때 그대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그대는 더 상처 입기 쉬워지고 더 열려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더 상처 입기 쉬워지고 더 열려 있게 될수록, 더 큰 삶의 가능성이 그대 앞에 열린다. 그대의 태도는 장애물과 같은 작용을 한다. 그 때, 삶은 결코 삶 그 자체의 모습대로 그대에게 와 닿지 못한다. 삶은 그대의 철학과 종교, 사상에 맞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죽는다. 그리고 나서 그대가 얻은 것은 죽은 시체이다. 그것은 삶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해 오고 있는 짓이다. 힌두교인들은 힌두교적 인 태도에 따라 살아가고, 이슬람교인들은 이슬람교적인 태도에 따라 살아가며, 공산 주의자들은 공산주의적인 태도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태도는 그대 삶 그 자체를 접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진실을 기억하라. 태도는 삶을 왜곡하고 판단한 다. 오래 된 그리스의 이야기가 있다. 한 광적인 왕이 아름다운 황금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값비싼, 수천 개의 다이 아몬드로 치장된 침대였다. 그리고 그는 궁전에 손님이 올때마다, 그 침대를 제공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특정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손님은 침대에 맞아야 했다. 손님의 키가 크면 왕은 길이에 맞게 그를 잘라 냈다. 물론 침대는 너무나 값진 것이었 기 때문에 침대는 바꿀 수는 없었다. 사람이 바뀌어야 했다. 마치 침대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침대를 위해 존재하듯이... 그리고 기존의 침대에 들어맞는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표준적인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라. 표준적인 사람이란 허구이다. 그리고 침 대는 표준의 삶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왕은 수학자였다. 그것은 복잡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드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키를 잰 뒤,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수로 나누었다. 그는 정해진 평균값을 얻었다. 도시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젊은이, 늙 은이, 난쟁이, 거인도 있었다. 그러나 평균이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정말로 평균값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시 안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결코 평균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평균치의 삶이란 허구이다. 그래서 누가 손님이 되든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만약 침대보다 작은 사람이 오 면, 왕은 거대한 장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키를 잡아늘이도록 하였다. 그것이 아마도 롤핑 마사지 (1)의 시초였을 것이다. 아이다 롤프(Ida Rolf)는 이 왕에게서 배운 것이 틀림 없다. 물론 모든 손님들은 죽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잘못이 아니었다. 왕은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모든 일을 한 것뿐이었다. 마그릿, 그대가 삶에 대해 하나의 정해진 태도를 자기고 있을 때, 그대는 삶 그 자 체를 놓칠 것이다. 삶은 광대하다. 그 어떤 태도로도 삶을 담을 수 없다. 그 어떤 정 의 속에도 삶을 가두어 둘 수 없다. 그렇다, 그대의 태도는 어떤 한 가지 관점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한 가지 관점만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의 관점을 전체인 듯 주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관점을 전체라고 주장 할 때, 그대는 삶과의 연결을 잃는다. 이제 그대는 그대의 태도에 둘러싸여, 마치 누 에고치에 싸인 듯한 상태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불행해 질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대의 모든 소위 종교들은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들이 그대 에게 말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삶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붓다는 말하다. 태어나는 것은 고통이다. 젊음도 고통이다. 늙음도 고통이다. 죽음 도 고통이다. 전 생애가 기나긴 비극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태도를 가지고 시 작한다면, 그대는 붓다가 절대적으로 맞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 것이다. 그대가 바로 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삶은 고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전혀 붓다에 게 동의하지 않는다. 삶은 고통이 된다.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않다면 삶은 영원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 영원한 기쁨을 알기 위해서는, 가슴을 열고 손을 펼쳐야 한다. 주먹을 움켜쥐고 삶에 접근하지 말라. 손을 펴라. 무한한 순수함을 가지고 삶으로 들어가라. 태도란 교활한 것이다. 그대는 맛을 보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않고, 살아 보 지도 않고 이미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그대는 이미 일정한 결론에 도달해 버렸다. 그리고 이미 그대 안에 결론이 나와 있다면, 그대는 삶을 통해 그 결론들이 확인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삶이 그 결혼들을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모든 마음 이 그것을 증명할 방법과 수단, 증명, 정보들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마음은 스폰지와 같다. 계속 빨아들인다. 마음은 기생충이다. 일단 정해진 결론이 자리잡게 되면, 그 중심에서부터 그것은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한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를 연구해 온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왔다. 특 히 서양에서는, 그 중에서도 미국에서는 13이라는 숫자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 의 호텔에는 13층이 없다. 12층에서 바로 14층으로 넘어간다. 13이라는 숫자는 피하 다. 방 번호가 13인 방도 없다. 12호실에서 바로 14호실로 넘어간다. 왜냐하면 아무도 13호실이나 13층에서 지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두려움이 있다. 13이라 는 숫자는 뭔가 불길하다는 생각이다. 이 사람은 온갖 종류의 자료를 모았고, 매달 13일에 얼마나 많은 사고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미 쳤는가를 뒷받침해줄 엄청난 분량의 자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위대한 연구를 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자 뭐라고 말씀하시겠 습니까?" 나는 말했다. "한 가지만 더 해 보시오. 당신은 많은 노력을 해 왔소. 하지만 한 가 지만 더 해 보시오. 이제 12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시오. 당신은 똑같은 자 료들을 얻게 될 것이오. 왜냐하면 12일에도 사람들은 미치고, 자살하고, 살인하고, 강 도질을 하기 때문이오. 그 모든 일들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에 불과하지만, 당신이 특정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 뿐이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정보와 증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태도가 옳다고 느끼는 것이오." 마그릿, 나는 그대에게 아무 태도도 없는 삶을 가르친다. 이것은 근본적인 나의 경 험의 하나이다. 만약 그대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모든 철학, 모든 주 의를 버려라. 손을 펼치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태양 아래로 나아가, 그것이 무엇인 지 보라. 과거에는 우리의 지각이 문이라고 생각했다. 진실이 지각을 통해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좀다른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지 각은 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지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겨우 2퍼센트의 정보만이 들어가도록 허락받고 98퍼센트는 문 밖에서 제지당한다. 그대의 삶에 대한 사고 방식 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제지당하고 단지 2퍼센트만이 걸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자, 2퍼센트의 삶만을 사는 것은 전혀 사는 것이 아니다. 100퍼센트를 살 수 있는데 왜 2퍼센트만을 살려 하는가? 마그릿, 그대는 묻는다. 삶에 대해 어떤 하나의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을 분만 아니라 위험하다. 왜 아무것도 미리 기대하지 않은 채, 삶이 그 자신의 춤과 노래를 마음껏 펼치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아무 기대없이 살지 못하는가? 왜 순수한 그대로의 것을 보지 못하는가? 왜 삶에게 우리 자신을 강요하는 가? 우리가 삶에게 우리 자신을 강요할 때, 손해를 보는 것은 다른 누가 아니다. 삶에 그대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대의 손해일 뿐이다. 런던에서 세 명의 문학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들은 점심 식사를 마치 고 돌아오는 길에,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일단의 매춘부들을 보았다. "저런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셰익스피어 전공인 첫 번째 교수가 심각 하게 말했다. "화려체의 매춘부들(A flourish of trumpet)? (2) 안소니 트롤로프 (3)의 권위자인 두 번째 교수가 한 마디했다. "매춘부들의 회합(A chapter of trollop)이군요." 그러나 최고의 대답은 가장 젊고, 별다른 전공 분야가 없는 교수로부터 나왔다. 그 의 대답은 "명 매춘부 선집(an anthology of pros)"이었다. 삶에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 편이 낫다. 삶에 아무런 구조도 부여하지 않고 끝이 없 이 남겨 두는 편이 낫다. 분류하고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 편이 낫다. 그 때 그대는 더 아름다운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더 우주적인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왜 냐하면 실제로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하나의 지복에 가득 찬 전 체이다. 존재는 하나의 유기적인 단일체이다. 가장 작은 풀잎, 초라한 나무에 달려 있 는 가장 작은 잎사귀라 해도 가장 큰 별만큼이나 의미가 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하나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스펙트럼이다. 그대가 구분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대는 그대 마음대로 노선을 정하고 한정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과 삶의 신비를 놓치는 방법이 다. 우리는 모두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고뇌와 원인이다. 우리는 모 두 특정한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초라해진다. 왜냐하면, 그 때 삶의 모든 측면에서 기껏해야 하나의 차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래 삶은 다차원적이다. 그대는 액체와 같이 유동적이 되어야 하며, 더 용해되고 융합 되어야 한다. 그대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해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을 문제로 보지 말라. 삶은 엄청나게 아름다운 신비이다. 삶을 마셔라. 삶은 순수한 포도주이다. 삶에 취해라. 성공적인 사업가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여인을 발견하고, 잊을 수 없을 만한 결혼식 을 준비했다. 그는 디자이너에게 가장 좋은 수입 실크와 공단으로 신부용 웨딩 드레스 를 만들게 했고, 자식의 결혼 예복 역시 정말 볼만한 고급으로 준비했다. 결혼식은 정말로 숨을 죽이게 하는 광경이었다. 비용을 전혀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갓 결혼한 이 부부가 캐나다로 신혼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긴급한 전보가 날아왔다. "동업자에게서 온 거로군." 신랑이 설명했다. "급한 사업 문제요. 지금 당장 가 봐 야 하겠소." "하지만 우리 신혼 여행은 어떻게 하구요?" 신부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사업이 먼저요." 그가 말했다. "먼저 가 있어요. 나중에 비행기를 탈테니 오늘 밤 에 도착할 거요." "하지만 오늘 밤까지 못 오시면요?" 신부가 울먹였다. 신랑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당신 먼저 시작하고 있어!" 사업가는 자기만의 철학이, 자기만의 태도가 있다. 과학자도 자기만의 태도가 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태도라는 작은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간다. 나의 노력은 그대를 투옥 상태로부터 꺼내 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대에게 아 무런 교리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어떠한 교의도 주지 않으며, 어떠한 삶 의 지침도 주지 않는다. 나는 단지 수백년 동안 그대에게 지워져 있던 짐들로부터 그 래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도우려 하는 것뿐이다. 만약 그대가 산과 같은 과거의 무 게를 벗어 놓을 수 있다면, 그대가 마치 지구상의 첫 번째 사람인 것처럼 살기 시작할 수 있다면,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신성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 지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이 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히, 머지않 아 그대는 붓다의 염세적인 태도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고, 모든 것 이 괴로움이라는... 나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경험은 정반대이기 때문이 다. 모든 것이 지복이다. 모든 것이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 대가 어떻게 삶에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대의 눈에 일정한 안경을 쓰고 접근하느 냐, 아니면 깊은 신뢰와 사랑 속에 아무 보호막 없이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랑하는 오쇼. 과거의 모든 유명한 예술가들은 보헤미안 (4)과 같은 자유분방한 기질이 있음이 잘 알려져 왔습니다. 창조성과 규율(discipline) (5)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산토쉬 스네흐(Santosh Sneh), 보헤미안과 같은 삶이야말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유 일한 삶이다. 다른 모든 삶들은 그저 미적지근한 삶에 불과하다. 그것은 삶을 열정적 이고 강렬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점진적인 자살을 시도하는 것에 가깝 다. 예술가들이 반역의 삶을 사는 것은 과거에는 피할 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창조 설은 존재 안의 가장 큰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창조를 원한다면, 그대는 모든 조 건화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창조성은 베끼기에 불과하다. 그것 은 단지 복사품일뿐이다. 오직 개인이 될 때에만 그대는 창조적이 될 수 있다. 그대가 군중의 심리 한 부분이라면 그대는 창조할 수 없다. 궁중 심리는 창조적이지 않다. 군 중 심리는 끌려 다니는 삶만을 안다. 군중 심리는 춤도, 노래도, 기쁨도 모른다. 그것 은 기계적이다. 물론 기계적이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대는 존경 을 얻을 것이다. 그대는 명예를 얻을 것이다. 대학은 그대에게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 할 것이다. 국가는 그대에게 금메달을 줄 것이다. 그대는 마침내 노벨상을 받게 될지 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추하다. 진정한 천재는 이러한 모든 넌센스를 던져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뇌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노벨상을 주는 것은, 기존 제도에 대한 그대의 봉사가 존경받 을 만하다는 뜻이며, 그대가 착하고 순종적인 노예라는 뜻일 뿐이다. 그대가 실을 잃 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다니고 있는 길을 따라 잘 걷고 있는데 대한 존경의 표시일 뿐 이다. 창조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갈 수 없다. 그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다. 그는 삶의 정글을 뒤진다. 그는 혼자 간다. 그는 군중의 마음으로부터, 집 단적인 심리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집단적인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차원의 마음 이다. 소위 바보들조차도 집단적인 백치들보다 낫다. 그러나 집단은 나름대로의 뇌물 이 있다. 집단은, 집단적인 마음의 방식이 유일한 바른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예우하다. 과거에 모든 창작인들 - 화가, 무용수, 음악가, 시인, 조각가들 - 이 존경받는 것을 포기했던 것은, 존경을 포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종의 보헤미 안과 같은 삶을, 방랑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것만이 그들이 창조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미래에는 그래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나의 말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느낀다면, 그렇다면 미래에는 모든 사람들 이 개인으로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헤미안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헤미안과 같은 삶은 정해진 삶, 진부하고 틀에 박힌 삶, 점잖은 삶의 부산물이다. 나의 노력은 집단적인 마음을 부수고, 각각의 개인이 자시에 대해서 자유로워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 때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 사실은, 개인이 각자의 반역성 안에 존경받게 되는 그날, 그 때에만 인류는 정말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는 아직도 태어나지 않았다. 아직도 자궁 속에 있다. 그대가 보고 있는 인류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각각 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물론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을 해서도 안 된다. 그것 또한 자유의 한 부분이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일에 코를 들이밀고 참견을 했다. 심 지어 완전히 개인적인 일이나, 사회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일에조차 간섭을 했다. 예를 들면, 그대거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사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세상의 일이 아니다. 만약 두 사람이 사랑 속에 함께 사귀 기로 했다면, 사회는 그 사이에 끼여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회는 모든 수단을 통 해, 직접적인, 간접적인 방법으로 끼여든다. 경찰이 연인들 사이에 서 있게 된다. 치 안 판사가 연인들 사이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사회는 그 대를 돌봐줄 초강력 경찰, 신을 창조해 냈다. 신이라는 개념은, 그대가 목욕탕에서조차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도록 만든, 열쇠 구 멍으로 엿보는 호색가와 같다. 이것은 추하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이 끊임없이 그 대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추하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신인가? 사람들을 훔쳐 보고 쫓아 다니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단 말인가? 마치 세계 최고의 탐정인 듯이 보 인다. 인류는 새로운 토양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토양이다. 보헤미안주의는 반 작용이었다. 꼭 필요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나의 비전이 받아들여진다면 보헤미안주 의는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지배하는 소위 집단적인 마음이라는 것이 없 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와 더불어 휴식할 수 있을 것이 다. 물론 그대는 다른 누구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삶에 관한 한, 그 대는 자신만의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 때에만 창조성은 가능하다. 창조성이란 개인적인 자유로부터 퍼져 나오는 향기이다. 그대는 묻는다. 스네흐. 창조성과 규율(discipline)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규율(discipline)'이란 아름다운 단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모든 아름다운 단 어들이 그러했듯이 잘못 사용되어 왔다. 규율이란 단어는 '제자(disciple)'라는 단어 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단어의 어원이 지닌 뜻은 "배움의 과정"이다. 배울 준비가 된 사람이 제자이며, 배울 준비가 되는 과정이 규율이다. 지식적인 사람은 결코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소위 지식에 너무 마음을 두고 있다. 그 의 지식이란 에고의 자양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는 진 정한 규율 속에 있을 수 없다. 소트라테스는 말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단 한가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 그것이 규율의 시작이다. 그대가 아무것도 모를 때, 당연히 알아보고 탐구하고 조사 하려는 커다란 갈망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가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따 르는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그대가 배운 것이 무엇이든, 계속해서 그것을 놓아 버려야 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지식이 될 것이며, 지식은 더 이상의 배 움을 방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규율의 사람은 결코 축적하지 않는다. 매 순간 그는 자신이 알게 된 것에 대 해 죽고, 다시 무지해지다. 그 무지는 진정한 빛이다. 나는 디오니소스가 무지를 빛이 라고 부른데 동의한다. 빛나는 무지의 상태에 있는 것은 존재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의 하나이다. 그대가 그러한 무지의 상태에 있을 때, 그대는 열린다. 거기 장벽은 없고, 그대는 탐험을 떠날 준비가 된다. 힌두교인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미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인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 나의 산야신들은 그것을 할 수 있다. 내가 지식을 나누어 주고 있지 않다 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그대들의 지식을 파괴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런 일은 매일 벌어진다. 매일 나는 많은 편지들, 많은 질문들을 받는 다. 서양에서 온 한 친구가 있다. 그는 3-4년 동안 나의 책을 읽었고, 너무나 감동을 받아 나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나에게 오고 싶었다고 한다. 이 제 그는 나에게 왔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좌절을 느끼고 있다. 4년 동안 그는 나를 깊이 사랑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제 전과 같은 말을 할 수 가 없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를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당신은 제가 고이 간직해 두었던 생각들을 계속 부숴 버립니다." 책을 읽는 것은 쉽다. 책은 그대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의 손 안에 있지 않다! 그대는 나의 책을 그대의 생각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그대의 생각에 따라 해석할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너무나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 다! 그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사상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 다. 그리고 그는 나의 책에서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말들만을 찾으며 환상 속에서 상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을 때, 환상은 산산이 부서지게 되어 있다. 나는 모든 환상을 부수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렇다. 그것은 그대를 힘들게 하고, 그대를 괴롭힐 것이 다. 그것이 내가 일하는 방식이다. 나는 그대의 뿌리를 뒤엎어 버릴 것이다. 그대가 마음으로서 완전히 부서져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희망은 없다. 규율이라는 말은 잘못 해석되어 왔다. 사람들은 생활을 절제하라는 뜻으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고 남들에게 지시하는 의미로 규율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다. 수천 가지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인간에게 부과되었다. 그리고 사람 이 수천 가지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고 살아갈 때, 사람은 창조적 이 될 수 없다. 그는 갇혀 있다. 어디를 보든 벽이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두 던져 버려야 한다. 그에 게는 자유와 공간이 필요하다. 광대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는 온 하늘과 그 모든 별들 이 필요하다. 오직 그 때에만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자발성이 자라나기 시작할 수 있 다. 따라서 기억하라. 내가 의미하는 규율이라는 말은 십계명과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계명도 주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어떻게 배우는 상태로 남아 있으 면서도 지식적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통찰을 그대에게 주고 있을 뿐이다. 그대 의 규율은 바로 그대의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 고 거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규율을 줄 때, 그것은 결코 그대에게 맞을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너 무 헐렁하거나 너무 꽉 낄 것이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있을 때, 그대는 어딘가 바보 같이 느껴질 것이다. 마호멧은 신자들에게 규율을 주었다. 그 규율은 그 자신에게는 좋은 것이었지만 다 른 사람들에게는 좋을 수 없다. 붓다는 수백만의 불교도들에게 규율을 주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좋았겠지만 다른 누구에게도 좋을 수 없다. 규율이란 개인적인 일이다. 그것 이 빌려 온 것이라면, 그대는 틀림없이 정해진 원칙, 죽은 원칙에 따라 살기 시작한 다. 그리고 삶은 결코 죽어 있지 않다. 삶은 매순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삶은 끝없 는 흐름이다. 헤라클레이투스(6)는 옳다. "그대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사실은 나는 "그대는 같은 물에 한번도 발을 담글 수 없다." 고 말하고 싶다. 강은 너무나 빨 리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각의 상황과 그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남들에 의해 주어진 기존의 대답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간에 따라 상황에 감응해야 한다. 인류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겠는가? 5천 년 전에 마누(Manu)(7)가 힌두교인들에게 법전을 주었고, 그들은 아직도 그것을 따르고 있다. 3천 년전,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계명을 주었고, 그들은 아직도 그것을 따르고 있다. 5천년 전, 아디나타(8)가 자이나 교인들에게 계율을 주었고, 그들은 아직도 그것을 따르고 있다. 전 세계가 이러한 계 율들 때문에 미쳐 버렸다. 그 계율들은 이미 기한이 지났다. 그것은 이미 오래 오래 전에 땅 속에 묻혀야 했다. 그대는 송장을 안고 있으며 그 송장들은 썩은 냄새를 풍기 고 있다. 그리고 그대가 송장들에 둘러싸여 살아갈 때, 그대에게 무슨 삶이 가능하겠 는가? 나는 그대에게 순간을, 순간의 자유를, 순간의 책임을 가르친다. 똑같은 것이 이 순 간에는 옳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틀린 것 될 수 있다. 변함 없으려 하지 말라. 그렇 지 않으면 그대는 죽게 될 것이다. 오직 죽은 사람만이 변함이 없다. 그 모든 모순과 함께 살아 있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아무런 과거와의 관련이나 미래와의 관련도 없이 매순간을 살아라. 순간의 상황에 따라 순간을 살아라. 그러면 그대의 감응은 전체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성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전체성이 창조성이 다. 그 때,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 거기에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오쇼 저는 제가 스스로에 대해 그저 지루해하고 있으며, 아무런 활기도 느낄 수가 없 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저는 이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삶 속의 기쁨을 놓치 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봅 루카(Bob Luka). 요즘 새로 나온 진정제가 있는데 아무 효과가 없어서 자꾸만 먹 어 보게 된다고 한다. 그것을 시험해 보라! 시험해, 시험해 보고, 또 시험해 보라. 미국인이 되라! 그러나 세 번 이상은 하지 말라. 시험해 보고, 시험해 보고, 또 시험 해 보라. 그리고 멈춰라. 왜냐하면 바보가 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말한다 저는 제가 스스로에 대해 그저 지루해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발견이다. 그렇다. 위대한 발견이다! 정말 드문 사람들만이 자신이 지루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은 지루하다. 정말로 지루하다. 그들 자신만 빼고는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지루하다는 것을 아는 위대한 시작이다. 이제 여기에 관한 몇 가지 점이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것은 커다란 특권이다. 그것은 인류의 존엄성의 일부이다. 그대는 지루한 물소나 지루한 당나귀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지루하지 않다. 지루하다는 것은 그대가 살고 있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위대한 사건이 될 수 있다. "나는 지루하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위대한 사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그대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좋은 징조이 다. 좋은 시작이다. 그것은 매우 밝은 시작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라. 왜 사람은 지루함을 느끼는가?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타인들에 의해서 주어 진 죽은 패턴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에 따라 살기 시작하라. 진짜 사람만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가짜 사람은 지루함을 느끼게 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은 지루해질 것이다. 자이나교인은 지루해질 것이다. 파르시교인(9)은 지루 해질 것이다. 공산주의자들는 지루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진짜 삶은 눌러둔 채, 그들은 거짓 삶을 살기 시작한다. 지 루함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가짜 삶이다. 그대가 만약 정말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그대는 결코 지루해지지 않을 것 이다.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그 날, 나의 부모, 아버지, 가족들 모두는 내 가 과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과학자에게는 더 나은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의사나 기술자가 되기를 바랬다. 나는 절대적으로 거절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 다.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루한 삶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로서 저는 성공할지도 모릅니다. 명예와 돈과 권력과 명성을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깊은 속에서는 지루한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아무 전망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대학에서 가장 초라한 과목이다. 그들은 내가 미래를 낭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 명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그대가 무엇을 원하느냐의 문제이다. 결과에 신경쓰지 말고 그것을 하라. 그 때 그대의 지루함은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옳다고 하는 방식대로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정해진 방식대로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루함 의 초석이다. 전 인류는 지루하다. 왜냐하면 신비가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 수학자가 되어있고, 수 학자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 정치인이 되어 있으며, 시인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 사업가 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른 곳에 가있다. 아무도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대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만약 그대가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 다면, 지루함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대는 묻는다. 봅 루카 저는 제가 스스로에 대해 그저 지루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대가 지루해하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존재를 존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대는 말한다. 저는 아무런 활기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활기를 느낄 수 있겠는가? 활기란 그대가 원했던 것을 할 때에만 흘러 넘친 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빈센트 반 고흐(10)는 그림을 그리며 너무나도 행복해 했다.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동생이 그에게 보내 주고 있는 돈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4일은 굶고 3일은 먹었다. 그 4일간을 그는 굶어야 했다. 왜냐하 면 캔버스와 물감과 붓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척 행복했다. 활기가 넘 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겨우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자살을 했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봅 루카, 그대의 소위 삶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것을 그린 후에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오랜 염원이었던 석양의 그림을 끝마쳤을 때, 그는 이런 편지를 썼다. " 나의 일은 끝났다. 나는 충족되었다. 나는 무한한 만족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는 자살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자살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체적으로 살았다. 그는 삶 의 양초의 양쪽 끝에 동시에 불을 붙여 강렬하게 불태웠다. 봅 루카. 그대는 백 년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삶은 단지 바싹 메마른 뼛조각 과 같을 것이며, 쓸모 없는 짐에 불과할 것이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삶 속의 기쁨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 문입니다. 내가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대의 삶의 패턴을 받아들이라고 말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내가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의 방식에 따라 그 말을 해석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해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화성인이 맨하탄에 비행접시를 착륙시킨 뒤,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걸인이 구걸을 하고 나섰다. "선생님"걸인이 말했다. "1다임(dime) (11)만 주십쇼" 화성인이 물었다. "1다임이 뭐요?" 걸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맞아요, 1쿼터(quarter)(12)만 줘요" 나는 그대가 받아들인 의미의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에게 짐 지워진 모든 것 들을 거부하라. 그것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대가 피안으로부터 가져온 내 면 깊은 곳의 핵 받아들여라. 그때, 그대는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기쁨의 폭발이 일어난다. 그대의 정수가 흐르기 시작하고, 삶은 정말 로 지복에 넘치는 것이 된다. 한 젊은이가 혼수 상태에 빠졌고 친구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땅속에 묻히 기 직전에 그는 살아 있다는 징후를 나타냈다. 그는 살아났고 죽은 느낌이 어땠는지 질문을 받았다. "죽다니!" 그는 소리쳤다. "나는 죽지 않았었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발이 차고 배가 고팠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네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호기심에 찬 친 구가 물었다. "음, 내가 천국에 있다면 배가 고플 리가 없고, 지옥에 있다면 발이 차가울 리가 없 다고 생각했지" 봅 루카. 그대는 그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 는 배가 고프고, 발은 차갑다. 일어나서 좀 뛰어라! 교육도 별로 받지 못하고 사회적 예절도 모르는, 한 가난한 청년이 백만장자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그를 부모에게 소개하기 위해 고풍스런 대저택으로 그를 초대 했다. 그는 비싼 가구들과 하인들, 그리고 모든 부유함의 표시들을 보고 주눅이 들었 다. 그러나 저녁 식사시간 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긴장하지 않은 듯이 보이려 애를 썼다. 커다란 식탁에 앉은 뒤, 포도주를 마셔 약간 취기가 돈 그는 큰 소리로 방귀를 뀌고 말았다. 여자의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그 가난한 청년의 발 옆에 엎드려 있던 자신의 개를 쳐 다보았다. "로버!"그는 꾸짖듯 말했다. 그 가난한 청년은 비난이 개에게로 돌아간 것에 안심하고, 몇 분 뒤 다시 방귀를 뀌 었다. 주인은 개를 쳐다보며 '로버!"하고 다시 소리쳤다. 몇 분 뒤 그가 세 번째로 방귀를 뀌었다. 주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로버, 이자가 더 이상 너를 욕먹게 하기 전에 어서 꺼져 버려!" 봅 루카, 아직 시간이 있다. 그대가 이제껏 살고 있었던 감옥을 벗어나라! 그것은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가능하다. 도박꾼의 용기와 같은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앓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하라. 그대는 그대의 사슬을 잃을 수 있을 뿐이 다. 그대는 그대의 지루함을 잃을 수 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그대 안의 이 끊 임없는 느낌을 잃을 수 있다. 그밖에 잃을 것이 또 무엇이 있는가? 낡은 틀에서 벗어 나 그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라. 모세나 예수, 붓다, 마하비라, 크리쉬나가 아닌 그대 자신을 받아들여라. 그대의 책임은 붓다나 짜라투스트라나 까비르나나나크의 것 이 아니다. 그대의 책임은 오직 그대의 것이다. 책임을 져라. 그리고 내가 '책임(responsible)'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잘못 해석하 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나는 의무나 책임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 니다. 나는 단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해 감응(respond)하 라. '감응할 수 있게(responseable)'되어라. 그대는 무책임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에게 기대하는 모든 책 임감을 충족시키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런 삶에 잃을 것이 뭐가 있는가? 그대는 지루 하다. 이것은 좋은 상황이다. 그대는 활기를 잃었다. 그대는 지루하다. 이것은 좋은 상황이다. 그대는 활기를 잃었다.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이 밖에 또 뭐가 필요한가? 뛰쳐나오라. 뒤돌아보지 말라! 사람들은 말한다. 뛰어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라. 나는 말한다. 먼저 뛰어들어 라. 그리고 나서 실컷 생각하라! 사랑하는 오쇼 미친 사람이 붓다가 될 수 있습니까? 아난드 나바니트(Anand Navaneet). 오직 미친 사람만이 붓다가 될 수 있다. 소위 제 정신인 사람들은 기껏해야 불교도가 될 수는 있지만 붓다가 되지는 못한다. 기독교인 이 될 수는 있지만 예수가 되지는 못한다.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지만 예수가 되지는 못한다. 오직 미친 사람들만이........ 나의 초대는 세상의 미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미친 사람들을 위한 깨달음의 안내자이다. 러시아 감방에 갇혀 있는 일단의 철학자들이 탈옥을 결심했다. 그들은 복제품 열쇠 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탈출하기로 했다. 자정이 되어 그들 중 하나가 감방 문을 열기 위해 나갔다. 그러나 몇 분 뒤, 그는 슬픈 얼굴 을 하고 돌아왔다. "어떻게 됐소?"나머지 사람들이 물었다. "아, 우리 계획이 소용없게 됐소. 우린 탈출할 수 없소. 정신 나간 간수가 문을 닫 는 것을 잊었소. 이젠 열쇠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됐소!" 철학자들은 붓다가 될 수 없다!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한 철학자가 그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는 멈춰 서서 예수를 보고 물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요?" 예수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양쪽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다 시피 이 친구들과 함께 매달려 있소" 철학자가 말했다. "음,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사다리를 가져다가 당신을 내 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 주신다면 고맙지요."예수가 대답했다. 30분 뒤, 철학자는 사다리를 가지고 돌아와 십자가로 올라갔다. 그는 오른손의 못을 빼고, 다시 왼손에 박힌 못을 빼냈다. 예수가 거꾸로 고꾸라지면 소리쳤다. "이 바보같은 놈아! 발에 박힌 못부터 빼야지 !" 사랑하는 오쇼 저는 완벽하고 궁극적인 절대적 사랑에 빠지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다르모(Dharmo). 완벽하게,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빠진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이 다. 좀 더 인간적이 되어라.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 말아라. 불가능한 것은 사람들을 불필요한 히스테리로 몰아가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수백 년 동안이나 불가능한 가치 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완벽, 절대와 같은 그런 거창한 말들을 배워 왔다. 그 리고 우리는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앵무새처럼 그런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 인간적이 되어라. 어떤 면에서든 완벽함을 꿈꾸지 말라. 왜냐하면 모든 완벽주의는 신경증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이 되고, 인간의 모든 약함과 한계성을 받아들여라. 왜 완벽하게 빠지고 싶어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만약 그렇게 완벽하게 빠질 수 있다면.......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러나 단지 설명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단지 설명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다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너무나 외로움을 느낀다. 완전하게 절 대적으로 궁극적으로 희망을 잃은 느낌이다." 그대는 되돌아가기를 갈망하기 시작할 것이다. 삶의 맛을 좀 더 느껴 보기를 갈망할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서로의 안으로 함께 녹아드는 것은 좋다. 그러나 왜 그것을 궁 극적인 것으로 만들려 하는가? 왜 그처럼 의미없는 단어를 끌어들이는가? 한 순간 동 안 서로에게 녹아들고,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부족한가? 그 때 거기 에는 리듬이 있다. 그대는 녹아들고, 그 용해를 즐기고,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그것 은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듬은 언제나 풍요를 가져온다. 만약 그대가 영원히 용해되어 버린다면, 거기에는 리듬이 없을 것이다. 음악도 춤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삶이 아니라 죽음일 것이다. 나의 모든 접근법은 그대가 인간적이 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수 백년 동안 그대 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 왔다. 나는 그대의 인간적인 성품을 반긴다. 나에 게는, 인간적이라는 말은 신성과 동의어이다. 때때로 어디엔가 빠졌다가 다시 돌아옴으로써 또 다시 빠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완벽 하게 아름다운 일이다.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또 다시 자신을 찾는 리듬을 창조해 내 라. 삶은 음악이다. 그리고 음악은 양쪽 모두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음악은 단조로워질 것이다. 다르모, 나는 그대가 절대적으로, 궁극적으로, 완전히 빠지도록 도울 수 없다. 나는 순간을 사랑한다. 나는 순간의 즉각성을 사랑한다. 나는 '궁극적인'과 같은 단어들을 매우 싫어한다. 그것은 아득히 먼 단어들이다.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단지 겉치레의 단어들일 뿐이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한 송이의 장미꽃이 훨씬 더 의미가 있다. 장 미는 절대적이지 않다. 아침에 장미는 피어나고 저녁이 되면 져 버린다. 그것이 장미 의 아름다움이다. 장미는 순간적이다. 그것은 기적이다! 궁극적인 장미란 인조의, 플 라스틱 장미뿐일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을 수 없기 때문 에 그 장미는 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고, 또 다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을 배워야 한다. 사랑에 있어서의 친밀함과 거리를 배워야 한다. 사랑에서 거리가 생 기면 언제나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열망을 불러 일으킨다. 만약 서로 들러붙어 있어서 떨어질 수 없다면, 그대의 사랑 생활은 악몽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명상하라. 다르모. 이것은 아름다운 우화이다. 오직 나만이 이것을 우 화라고 부를수 있다. 결혼 전 이름이 아델스타인인 로잘리 마졸리는 난쟁이와 결혼을 했다. 얼마 동안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어느 날 로잘 리가 가정법원에 나타난 난장이 해 리와의 이혼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졸리 부인, 틀림없이 당신은 남편과 결혼할 때, 그 사람이 난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판사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와 헤어지려 합니까? 이 결혼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아! 존경하는 판사님" 로잘 리가 흐느끼며 말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섹스만 빼고는 모든 것이 좋았어요" "섹스요?" 판사가 말했다. "그가 난쟁이라는 것이 섹스와 무슨 상관이 있지요?" "그게요....."그녀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코를 맞대고 있을 때는 그의 발 가락이 그 안으로 들어온답니다. 우리가 발끝을 맞대고 있을 때는 그의 코가 그 안으 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안에 들어와 있을 때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 립니다. 아! 존경하는 판사님. 저는 너무 외로워요!" 완전히,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빠져야 할 필요는 없다. 마음을 편히 가져라. 때때 로 자신을 잃어버려라. 그것은 좋다. 그대 자신을 잃어버리고, 몇 번이고 다시 자신을 찾아라. 그것은 아름다운 드라마이다. 자신을 잃고 자신을 되찾는, 존재의 아름다운 드라마이다. 그리고 '궁극'이니 '절대'니, '완벽'이니 하는 말들은 버려라. 이 모든 단어들은 철학자들의 발명품이다. 삶은 즉각적이다. 삶은 언제나 '지금여기'이다. 인 간의 모든 연약함을 지닌 채, 장미꽃의 연약함을 지닌 채 순간을 살아라. 그러면 그대 는 머나먼 천국의 광휘가 아닌, 순간 속의 위대한 광휘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 제나 지금이고, 그것은 언제나 여기이다.! 순간적인 것을 비난하지 말라. 순간 속에서 기뻐하라. 놓아 버림을 즐겨라. 오늘은 이만. (1)롤핑 마사지(Rolfing) : 미국의 심리요법가 아이다 롤프(Ida Rolf, 1897-1979)가 창안해 낸, 정신-육체적 긴장 해소를 위한 깊은 마사지 기법 (2)strumpet, trollop, pros는 모두 매춘부를 뜻함. (3)안소니 트롤로프(Anthony Tollope, 1815-1882) : 영국의 소설가. 인간 심리에 대 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는 소설들과 정치적인 소설들을 썼음. (4)보헤미안(Bohemian) : 보헤미안인. 체코인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15세기경 프랑스인은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화을 하는 예술가, 문학가, 배우,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5)discipline : 규율, 수양, 훈련. (6)헤라클레이투스(Herakleitos, B.C 544?-483?) :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이오니아 학파의 선두주자. 상속을 싫어하며 자기 집도 아우에게 줄 정도로 고매한 지조를 지닌 그는 때로는 오만불손하기도 하여 당신의 에페소스 시민들은 물론, 호메로스나 피타고 라스 등 시인, 철학자들까지도 통렬하게 비방하였다. 불을 우주의 근원으로 보고 만물 이 불에서 나와 불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생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다. 로고스(Logos)에 의해 만물의 조 화가 유지된다고 보았으며, 이 로고스에 따르는 삶이 최고의 삶이라고 하였다. 스토아 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자신의 사상을 잠언풍의 문체로 기술하였는데, 너무 난해 하였기 때문에 '스코티노스(어두운 사람)'라는 별명이 붙었다. 오쇼는 그에 대해도 강 의한 바 있다. (7)마누(Manu) : 인도 신화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 마누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세수 를 하고 있을 때 한 마리의 물고기가 그의 손 안에 들어와, 자신을 길러 달라고 부탁 하면서 그 대가로 머지 않아 닥칠 대홍수의 위험으로부터 마누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 하였다. 그 뒤 대홍수가 일어나자 마누는 물고기가 시키는 대로 미리 준비해 놓은 배 를 물고기의 뿔에 붙잡아 매고 히말라야 산의 최고봉으로 대피하였다. 홍수가 물러간 뒤 산에서 내려와 제식을 끝냈을 때 어디선가 '이다'라는 여성이 나타나, 함께 다시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설화와 유사하다. 또한 마누는 최초의 법전인 '마누법전'의 창제자로 알려져 있다. (8)아디나타(Adinatha) : 24명의 자이나교 조사(띠르탕까라) 중 첫 번째 인물. 마지 막 24번째가 마하비라. 아디나타는 말은 첫 번째 신이라는 뜻. (9)파르시교(Parsim) : 이슬람교도에 의해 박해로 8세기에 현재의 인도 구자라트주 해안지방에 이주한 조로아스터교. 후에 봄베이를 중심으로 상공업을 크게 일으켜 인도 경제계에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다. (10)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 네덜란드의 화가. 화가가 되기 전에는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직원에 종사하였다.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 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 년 반 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 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 으며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하였다. 고갱에게 그 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 유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 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으며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 라버려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정 신없이 그림을 그려댔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 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1)다임(dime) : 미국 화폐 단위, 10센트. (12)쿼터(quarter) : 미국 화폐 단위, 25센트. @ff 나의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 것이다. 사랑하는 오쇼, 저는 종종 아쉬람에 대해 묻는 질문을 듣습니다. 지금 이 곳은 너무나 생명력으 로 넘치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행사들 외에도, 이 안에는 모든 볼거리들과 음악, 옷, 기술적인 면들에 있어 너무나 많은 창조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 신이 사라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육체를 떠날 때, 아쉬람은 죽은 단체가 될까요? 그리고 당신은 단지 신성시되고 잊혀질까요? 비노이 토마스(Binoy Thomas), 나의 관심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이 순간 너머에 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이며, 유일한 공간은 여기 이다. 따라서 나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과거도 미래 도 아무 소용없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의 방식이다. 마음은 과거와 미래의 관점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마음은 현재를 경험할 수 없다. 마음은 끊임없이 현재에서 벗어난다. 마음은 시계추와 같다. 왼쪽 끝까지 움직인다. 마음은 좌익주의자이거나 우익주의자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접근 방식은 정확히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사용한 중간이라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 그는 마짐 니까야(majjim ni kaya), "정중앙의 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만약 그대가 시계추를 가운데 둘 수 있다 면 시계는 멈춘다. 시계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나 은유적으로 뿐만 아 니라, 마음은 실제로 시간이다. 시간은 세 가지가 아닌 두 가지 시제로 이루어져 있 다. 현재는 시간의 일부가 아니다. 과거는 시간이다. 미래는 시간이다. 현재는 피안으 로부터 시간의 세계 속으로 스며든 그 무엇이다. 그대는 시간을 수평적 선으로 생각할 수 있다. A다음에는 B이고, B다음에는 C이고, C다음에는 D이고, 계속 그런 식이다. 그것은 선적인 진행이다. 존재는 수평적이지 않 다. 존재는 수직적이다. 존재는 A에서 B, B에서 C 하는 식으로, 선적으로 움직이지 않 는다. 존재는 강렬함의 차원에서 움직인다. A에서 더 깊은 A로 ,더 깊은 A에서 그보다 더 깊은 A로 움직인다. 존재는 순간 속으로 빠져든다. 과거와 미래로 생각되어지는 시간은 마음의 언어이다. 그리고 마음은 문제들을 창조 해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해답은 알지 못한다.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 들은 마음의 발명품들이다. 존재는 신비이지 문제가 아니다.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 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나는 나의 순간을 살고 있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그대가 보기에는 매우 무책임해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 면 책임감에 대한 나의 기준은 사람들의 소위 책임감이라는 생각과는 완전히 정반대이 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에 대해, 존재에 대해 책임을 다한다. 의무감이라는 의미에서 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자발적으로 감응(respond)한다는 의미에서 책임을 다한다. 상 황이 어떠하든지, 나는 그 상황에 전적으로 조율되어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는 살아 있다. 내가 죽었을 때, 나는 죽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문제도 보지 못한 다. 그러나 나는 그대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다. 비노이 토마스. 그대는 말한다. 저는 종종 아수람에 대해 묻는 질문을 듣습니다. 그대에게 묻는 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들이 미래를 걱정 해야 하는가? 그들은 아쉬람에 오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오지 않는다. 그들은 여기에 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를 염려한다. 그들은 미래에 대 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한 사람들은 또한 어리석다. 그들이 영원히 살것인가? 그들은 마치 그들이 영원히 여기 있을 것처럼 나와 나의 일에 대해 걱정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다. 그대 역시 이 순간, 여기에 있다. 만약 만남이 가능하다면 엄청나게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다. 만약 만남이 가능하다면 엄청나게 아름다운 무 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 바보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생각을 계속 한다. 그 들은 남을 속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속인다. 바로 지금, 그들은 나를 비난하 고 있다 바로 지금, 그들은 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가 이곳을 떠나 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염려하며 커다란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죽는 순간, 나에 있어서 모든 세계가 죽는다. 그 때, 일어날 일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이다. 나는 존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맡지 않는다. 누가 그 책임을 떠맡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책임을 떠맡으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완전히 실패 했다. 예를 들어 지구상을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하나였던 고타마 붓다는, 그가 세 상을 떠난 뒤에 어떤 종교도 생겨나지 말아야 한다며 매우 염려했다. 숭배되지 말아야 하며, 그의 조상이 만들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걱정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그것을 강 조하고 또 강조했다. 42년동안 그는 끊임없이 "나를 숭배할 필요는 없다." 라고 설교 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나를 숭배하지 말라."고 강조하 면 강조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야말로 숭배받을 만한 사람이다."하고 느 꼈다. 이것이 바로 반작용의 법칙이다. 세계에는 다름 어느 누구의 상보다도 많은 불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불상을 반대했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불상이 만들어졌기 때문 에, 우르두어나 아랍어, 그리고 그 외의 이슬람 언어에서 '붓다(buddha)라는 말은 조 상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단지 약간만 변형되었을 뿐이다. 조상을 뜻하는 단어 는 '붓드(budh)'이다. 붓드는 조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붓드라는 말은 붓다에서 온 것 이다. 무수히 많은 불상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조상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 었다. 사실은, 그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강조하는 자체가 틀림 것이다. 왜 그가 미래를 염려해야만 했는가? 그대가 더 이상 거기 없을 때에도 그대의 생각대로 미래가 펼쳐져야 한다는 그 욕망은 정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인류를 지배하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죽은 뒤에조차도 인류를 지배하고 싶 어한다. 나는 아무도 지배하고 있지 않다. 나는 정치가가 아니다. 나는 오늘이든 내일 이든 누가 나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지금, 똑같은 일이 지두 크리쉬나무르티(1)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50년 동 안 끊임없이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스승이 아니면 왜 50년 동안이나 계속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가? 그 안에는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두렵다. 두려움이 있다. 그는 자신이 숭배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더 열을 올리면 올리수 록, 더욱 더 그 바보들은 "이 사람이 진짜 스승이다. 얼마나 겸손한지 보라! 남보다 신성해지려는 허세도, 욕망도, 야망도 없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 라. 크리쉬나무르티는 붓다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다시 하고 있다. 그것은 전혀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된 게임이다.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은 이상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말했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그리고 그들은 먹었다. 하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인간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호기심이 일어난다. 따라서 나는 누구에게도 "나 를 숭배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거기 없을 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바보들은 바보들이다. 그 들이 나를 숭배하든, 누구를 숭배하든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숭배하고 싶다 면 그들은 숭배할 것이다. 그리고, 비노이 토마스, 그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는 가? 그들은 틀림없이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자이나교도, 불교도, 크리쉬나 무르티 숭배자들일 것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그렇게 나를 염려했다면 그들은 크리쉬나를 버렸을 것이다. 그들이 마호멧을 버렸는가? 그들이 붓다를 버렸는가? 만약 그들이 솔직하고 진실했다면 그들은 모든 종교를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해서 그들의 성경과 그들의 젠드아베스타(2)와 베다와 마하비라, 짜라투스트라를 끌고 다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나에 대해서만 염려를 한다. 그들이 속해 있는 단체 들은 다 무엇인가? 그렇다면 힌두교나 이슬람교, 자이나교, 공산주의는 무엇인가? 모 든 단체는 죽게 되어있다. 오직 사람만이 살아 있다. 어떠한 단체도 살아 있었던 적이 없다. 어떻게 단체가 살아 있을 수 있는가? 단체란 원래 죽은 것이다. 따라서 다음번에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그런 질문을 해 온다면, 그들에게 이렇게 물 어 보라.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떤 단체나 어떤 종교, 신학, 철학에 속해 있는 가? 만약 속해 있다면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만약 그런 단체에 속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람 들은 죽은 단체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지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단체들 안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대가 그 단체들을 바꿀수는 없다. 그대는 온갖 종류의 제도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 결혼이 무엇인가? 제도이다. 그리고 아직 미친 사람들만이 제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 다. 결혼은 죽은 것이다. 가족이 무엇인가? 나라가 무엇인가? 민족이 무엇인가? 모두 제도이다. 그러니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사실은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이런 질문들을 한다. 나에 관한 한, 나는 다음 순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심지어 지금 이 문 장이 완성되지 않은 채 남는다 해도, 나는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 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침표도 찍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배하려는 욕망이 없다. 그 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숭배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숭 배를 일으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안에 들어 있는 그 모든 광기의 심리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 는 말한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자, 2천 년 동안 많 은 사람들이 바로 이 단순한 이유, 단순한 동기 때문에 가난해지려 애썼다. 그래서 신 의 왕국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 모순을 볼 수 있겠는가?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이 신의 왕국을 가져다 준다면 이것이 무 슨 가난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탐욕을 유발하는 좋은 동기일 뿐이다. 만약 예수가 정 말로 옳았다면, 그는 단지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은 왜 하는가? 누구나 신의 왕국 을 원한다. 누구나 영원한 보물을 가지기를 원한다. 만약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져야 하고 희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이제는 자신들이 들었던 말이 정확히 무엇 이고 그들이 해왔던 일이 무엇인지, 더 명료하고, 더 투명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 다. 사람들은 언제나 오해한다. 스승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스승에게 오지 않는다. 왜 냐하면 스승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오해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이 더 이상 거기 없을 때에만 찾아온다. 왜냐하면 죽은 스승은 조종하고 조작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바로 며칠 전, 소위 자이나교의 성자인 깐지스와미(Kanjiswami)가 죽었다. 그는 자이나교인들에게 너무나 큰 숭배를 받았었다. 자이나교인들은 이미 "다음 존재의 순 환, 다음 번 창조 때에는 그가 첫 번째 띠르탕까라, 즉 자이나교의 첫 번째 창시자가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 나는 그의 사진을 보았다. 누군가 나에게 그 사진을 보내 온 것이 다. - 자이나교인들은 그의 자세를 고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왜냐하면 띠르탕까라나 띠르탕까라가 될 사람은 연화좌(3)를 취한 채 죽어 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뼈 중 일부를 부러뜨렸음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열 두명은 되는 사람들이 그의 죽은 육 체를 특정 요가 자세로 만들었다. 그대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 그는옷을 입곤 했다. 그러나 자이나교인들에 따르면, 오직 죽 을 때 알몸으로 죽는 사람만이 궁극의 자유에 도달한다. 그래서 그들은 옷을 벗겼다. 이제 시체는 그것을 제지할 수 없다. 옷이 벗겨지고, 연화좌로 앉혀지고, 그리고 추종 자들은 기뻐한다.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자기 일을 즐기는 듯이 보였던 한 하녀가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일을 그만두겠 다고 통보했다. "왜 떠나려고 하지?" 안주인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니?" "불안해서 일분도 이 집안에 있을 수가 없어요." 하녀가 대답했다. "불안하다니? 무슨 뜻이지?" "침대 위에 붙어 있는 문구 때문이에요 -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4) 주인이 가 버리는 순간, 그대는 오직 말만을 가지에 된다. 말은 조작될 수 있다. 말 은 해석될 수 있다. 말은 해석될 수 있다. 말은 그대의 편견에 따라 색이 입혀질 수 있다. 그러나 비노이 토마스, 나에 대한 한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 이유 때문 에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먼저 나는 끊임없이 모순적인 사람이다. 나의 말에서 교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 가능할 것이다. 나의 말에서 교리나 강령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은 누구든 미쳐버릴 것 이다. 그대는 마하비라로부터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는 일관된 사람이었다. 매 우 논리적이다. 그대는 붓다에게서 철학을 만들어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는 매우 수학 적이다. 그대는 크리쉬나무르티에게서 철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는 50년 동안 똑 같은 말을 계속 반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의 말에서 단 하나의 모순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 그대의 구루(5)가 아니 다. 나에게 의지하지 말라." 그러나 그는 미묘한 방식으로 하나의 철학을 창조해 내고 있다. 그 사상은 너무나 변함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갇히고 싶어한다. 그것은 너무나 건전하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순간 속에 산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순간에만 진실이다. 나는 나의 과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고 나는 미래를 전 혀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말을 원자 폭탄과 같다. 나의 말은 하나의 사상 체 계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의 철학이 매우 체계적일 때에만 그대는 죽은 단체 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무런 결함도, 아무런 결점도 없을 때, 모든 의심이 해결되 고, 모든 질문이 풀리고, 삶의 모든 면에 대한 대답을 알게 되었을 때에만 그대는 죽 은 단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는 너무나 모순적이기 때문에 나의 주위에 죽은 단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 능하다. 왜냐하면 죽은 단체는 기본적으로 죽은 철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교리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원칙도 주고 있지 않다. 반대로 나는 그대가 줄곧 지니고 있었던 모든 철학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나는 그대의 사상과 신념과 강령과 교리를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자리를 채우려 하지 않는다. 나의 작업은 순수한 조건화 제거 작업이다. 나는 그대 를 새롭게 조건화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열린 채로 둔다. 따라서 그대는 여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나의 산야신들은 모두 독특한 개인 들이다. 그들이 따라야 할 특정한 양식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이 없다. 고정된 구조가 없다. 단지 유동성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대에게 십계명을 주고 있지 않다. 단지 유동성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대에게 십계명을 주고 있지 않 다. 나는 그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주고 있지 않다. 왜냐 하면 나는 개인을 믿으며, 개인의 위엄과 개인의 자유를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통 찰력을 나누고 있다.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대가 나의 통찰력에 따라 살 도록 만들기 위해 나누는 것은 아니다. 크리쉬나무르티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지 말라. 나를 따라 하지 말 라." 그러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때, 그는 매우 기분 나빠하 고 불쾌해한다. 그것은 좀 미묘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그는 말한다. "나를 따르지 말라."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따른다 그 때 그는 불쾌해한다. 만약 그대가 정말로 진실 하다면, 그대는 "나를 따르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대를 따르고 싶어한다면, 그 때 그들을 막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그대의 할 말을 했다. 이제 그들이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문제이다. 그대는 그들이 스승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그대를 따르고 싶어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막을 수 없 다. 그대가 그들을 막는다면, 그것은 남을 따르지 말라는 그대의 생각을 그들에게 강 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매우 볼쾌해한다... 바로 며칠 전, 그는 봄베이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산야신들에게 그가 어디세 어 강연을 하든 거기에 가서 첫 줄에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오렌지색 옷 (6)을 입은 사람들을 보는 순간, 그는 즉시 깨닫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는 소 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자, 왜 이렇게 기분 나빠하는가? 뭔가 깊은 곳에 남을 통제 하려는 욕망이 있음에 틀림없다. 오렌지색 옷을 입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 인가? 만약 누군가가 오렌지색 옷을 입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다. 미묘한 전략... 조종하고,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매우 간접적인 전략이 있다. 나는 단순히 나의 통찰력과 나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그 리고 나와 함께 그것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환영이다. 당연히, 내가 죽게 될 때, 내가 그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체계를 찾아 내고 만들어 내려는 바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보는 바보이다.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에 의해 서 만들어진 종교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실은 유머 감각을 가지 는 것과 종교를 만드는 것은 반대적인 것이다. 종교가 슬픈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 버트런드 러셀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살아 있었다면 나는 "와서 보시오." 라 고 말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마 하비라는 심각했고, 예수도 심각했고, 마호멧도 심각했고, 샹카라차리야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러셀은 옳은 것처럼 보인다. 이 슬픈 사람들이 모든 죽은 종료 제도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나는 종교를 만들어 내려 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종료를 만든다는 그 생각 자체가 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대 안의 유머 감각이, 그대 안의 웃음이 풀려 나오도록 하고 있다. 나에게는 웃음이 기도보다 더 신성하고, 춤이 만트라(7)를 외우는 것보다 더 영적이며,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교회나 사원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우주적이다. 완전히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것, 순수한 무(無)가 되는 것이 성자가 되는 것보다 훨 씬 더 의미 있다. 순수함과 유머감각을 가지고 기쁘게 삶에 참여한다면 그대는 이처럼 엄청나게 살아 있는 삶의 경험 주위에 죽은 제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죽은 제도는 먼 저 죽은 뭔가가 있어야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성자들의 시체로부터 만들어진 다. 나의 모든 접근은 심각하지 않다. 진지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한 외판원이 작은 마을의 호텔에서 방을 얻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가 거의 떠나려 할 때, 종업원이 말했다. "아마 방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0호실에 침대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여자 분이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침대 주위에 는 칸막이가 쳐 있고 여자 분은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냥 조용히 손님의 침대로 가 시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그 제안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약20분 뒤, 그는 매우 흥분한 채 돌아왔다. "세상에!" 그는 소리쳤다. "그 침대에 있는 여자는 죽었지 않소!" "알아요." 종업원이 말했다. "하지만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죠?"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다. 매우 호기심이 많다. 비노이 토마스, 그대는 말한다. 저는 종종 아쉬람에 대해 묻는 질문을 듣습니다. 지금 이 곳은 너무나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행사들 외에도, 이안에는 모든 볼거리들과 음악, 복장, 기 술적인 면들에 있어 너무나 많은 창조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 이 사라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합니다. 그 바보들에게, 일들이 살아 있는 동안 여기로 오라고 말해 주라. 그대가 아름다운 장미꽃을 볼 때, 그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녁이 되어 장미꽃이 시들어 버리 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 꽃잎들이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고, 원래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대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대는 꽃과 함께 춤을 춘다. 그대는 하늘을 향해, 별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를 본다. 그대는 "이 새가 죽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즐긴 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이 사람들이 바로 죽은 제도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가 살아서 노래를 하고 하늘 높이 날고 있을 때에는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새가 죽었을 때, 그들은 아름다운 황금 새장을 만들 수 있다. 사원과 유대교당과 교회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숭배할 수 있다. 죽은 새는 위험하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죽은 제도를 만들어 내게 될 그 사람들이다. 나의 사람들이다. 나의 사람들은 죽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와 함께 코뮨에 있었던 사람들은 한 가지는 확실하게, 분명하게 배웠을 것이다. 삶은 제도 안에 가두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가 삶을 제도 안에 가두려 하는 순간, 그대는 삶을 파괴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은 축하할 것이다. 내가 죽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축하할 것이다. 그들은 나의 삶을 축하하 고 나의 죽음을 축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기억하라. 종교는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아 무런 죄의식도 만들어 내고 있지 않다. 종교의 창조에는 한가지 원리가 있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전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진짜 창시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 니다. 예루살렘의 고위 성직자, 즉 랍비와 본시오 발라도(8)이다. 이 사람들이 유다와 공모하여 기독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진짜 "삼위일체"이다. 예수는 단지 구실 일 뿐이다. 예수와 같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나면, 그대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손은 예수의 피로 붉게 물든 것처 럼 보일 것이다. 이제 이 상처를, 이 죄의식을 지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유일 한 방법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 바로 숭배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를 숭배할 가능성은 없다. 나는 즐겁게 살고 있다. 아무도 나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 만약 내가 음식을 구걸하기 시작한다면, 그때 나는 죄의식을 만들어 내게 될 것 이다. 그 때 나는 그대 안에 미묘한 심리 작용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대 안에서 무 언가가 일어나서, 마침내 그대는 나를 숭배하는 것 외에는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것이 다. 마하비라는 알몸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숭배받는다. 그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단식 을 했다. 붓다는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모든 쾌락을 포기했기 때문에 숭 배받는다.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는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 왕처 럼 살고 있다. 나를 숭배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나에게 보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죄의식도 일으키지 않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쉽게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 죄의식을 계속 짊어지고 가는 것은 의미가 없 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염려하는 그 모든 질문들은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가 들은 언제나 미래를 염려해 왔다. 한 위대한 정치가가 개에게 물렸으나 상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상처가 아 무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마침내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상처를 한 번 보더니 개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의심한대로 개는 광견병이었다. 환자에 게 혈청을 투여하기에도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의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정치가는 의사의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의사가 그를 위로했다. "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유서를 쓰실 것까지는 없습니 다." "유서를 쓰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환자가 대답했다. "앞으로 물어뜯을 사 람들 명단을 쓰고 있는 겁니다!" 나는 미래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이 순간만 해도 너무나 벅차다. 너무나 넘치고 있 다. 나는 그 안에서 즐기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삶의 방식이다. 순간에서 순간 으로 사는 것....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인류의 모든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여 기 온 것이 아니다. 그따위 쓸 데 없는 짓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내가 누구인데 미 래 인류의 모든 진로를 결정하는가? 나는 기쁘게 나의 순간을 살고 있다. 그것으로 충 분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사람들 또한 그들 나름의 사는 방식을 찾을 것이다. 괴로워 하든, 즐거워하든 그것은 모두 그들의 지성에 달려 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의 일하는 방식은 철학이나 교 리나 교의, 교회를 만들어 내기가 불가능한 그러한 방식이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여든 다섯 살의 윌 존스가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친구들과 떠들기 위해 마을의 술집 으로 찾아들었다. 존스씨는 최근 열 아홉 살의 아름다운 소녀와 결혼을 해서 마을의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었다. 몇몇 남자들이 그에게 술을 사며 그의 첫날밤 이야기를 들 으려 모여들었다. "나의 아들들 중 가장 어린 녀석이 나를 방으로 안고 들어가서, 젊은 신부가 있는 침대에 나를 올려 주었지. 우리는 함께 밤을 보냈고, 그리고 나서 나의 다른 세 명의 아들들이 나를 침대에서 들고 나왔다네." 그를 둘러싼 남자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왜 침대에 올려놓을 때는 어린 아들 한 명 뿐이었는데 침대에서 들어낼 때에는 세 명이나 필요했는지 물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버텼거든." 매순간을 전체적으로 살아나 그대는 묻는다. 비노이 토마스 지금 이곳은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생명력이 넘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시 각은 지금 여기의 시각이다. 우리는 그 너머를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너머에는 아 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오든 그것은 언제나 지금이다. 시간은 허구이며, 지금은 실재이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연결을 끊어 버렸 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수많은 창조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모든 에너지는 과거에, 혹은 미래에 막혀 있다. 그대가 과거와 미래로부터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거두어들일 때,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다. 그 폭발이 창조성이 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매일, 매순간, 그것은 더욱 강렬하고 열정적 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미래를 조종하려 하고 있지 않다. 나는 예언자도 메시아도 아니다. 예수와 같은 사람들의 주장 - 그들이 온 인류를 죄 에서 구하기 위해 왔다는 - 은 나에게는 유치해 보인다. 크리쉬나는 바가바드 기타에 서 이렇게 말한다. "종교가 길을 잃을 때면 언제나 내가 다시 올 것이다." 나에게는, 이것은 모두 헛소리이다. 아무도 와야 할 필요가 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 아서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즐겁고 지복에 찬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따라서 내가 더 이상 여기 없게 된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똑 같은 방식으로 살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죽음은 그들에게 더 큰 강렬함을 가져 올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그대의 삶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배경이다. 그러나 나의 아 쉬람은 결코 죽은 단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단체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 상 나의 아쉬람이 아닐 것이다. 그대는 묻는다. 당신이 당신의 육체를 떠날 때, 아쉬람은 죽은 단체가 될까요? 그리고 당신은 단지 신성시되고 잊혀질까요?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바그완(9)이라고 선언 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할 일을 남겨 두지 않는다. 왜 내가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남겨 두어야 하는가? 나는 내가 축복 받은 자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그리고 나는 나의 사람들이 그들 또한 축복 받은 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부추기고 있다. 나를 신성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이미 그것을 했다. 그대가 할 일이 무 엇이 남아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다.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는 틀림없이 한 가지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은 사적인 이야기이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는 나의 모든 산야신들이 축복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선언할 것이다. 전 세계의 수천 명의 바그완들 ! 나를 위해 어떤 특별한 장소를 마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사람들 속으 로 녹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디서든 바다의 맛을 볼 수 있고, 똑같은 짠맛을 느낄 수 있듯이, 그대는 나의 어떤 산야신을 맛보든 같은 맛을 발견할 것이다. 바그완 의 맛, 축복받은 자의 맛을.... 나는 올바른 때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코뮨이 시작되면 나의 모든 산야신들은 바그완이라 불릴 것이다. 그 때 그것 은 정말로 바그완 운동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오쇼. 만약 삶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깨달은을 얻고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 가 무엇입니까? 데바 비풀(Deva Vipul),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말해 왔던 것이 다. 그러나 그대는 듣지 않는다. 그대의 질문은 그대가 아직도 듣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질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만약 삶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만약'이나 '그러나'와 같은 말들은 소용이 없다. 만약 삶이 아름답다면... 그렇게 그대는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은 아름답다. 따라서 깨달을 필요는 없다. 비풀, 그대는 폴란드인인가? 한 아가씨가 앓고 있는 폴란드인 친구를 위한 선물로 책방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혹시 종교적인 책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녀는 대답했다. "천만에요. 내 폴란 드인 친구는 병이 회복되고 있는 중이에요." 그대가 그 '만약'을 버릴 수 있다면 그대는 회복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만약' 이 거기 있다면.... 나는 그 만약이 거대한 산처럼 그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깨달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게 아 름답다. 그러나 그대가 가정법의 질문을 시작한다면, 그대는 삶을 맛본 적이 없는 것 이다. 그 '만약'을 버려라. 그러면 그대는 깨달을 것이다. 깨달음을 위해서 할 일은 많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쓸데없이 나 자신의 뒤쫓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 닫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날, 그대는 그대의 꼬리를 뒤쫓는 일을 멈춘 다. 그대는 단지 태양 아래 앉아 일광욕을 즐긴다. 한 폴란드인 지주가, 정오 휴식 시간에 헛간 앞마당이 너무 조용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무슨 일인지 알아 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하인이 바지를 열어 젖힌 채 마당을 지나 헛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주인은 하인을 다시 불러서 헛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물 었다. "아, 주인님, 저 안에서 저희는 정말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건초 더미에 머리를 묻고, 그리고는 누가 그것을 했는지 알아맞혀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재미있겠는데!" 폴란드인 지주가 대답했다. "나도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럼요." 하인이 말했다. "부인께서도 벌써 6주 전부터 하고 계신걸요!" 그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을 버려라. 그 '만약'을 버린 사람들은 이미 함께 하고 있다. 붓다, 크리쉬나, 짜라투스트라, 그들은 단지 그 '만약'을 버림으로써 게임 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나 비풀, '만약' 과 '그러나'를 버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마음은 바로 그런 것 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마음을 이루고 있는 벽돌들이다. 그리고 모든 마음은 폴란드인이다. 기억하라. 폴란드인 교황이 인류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알아야 한다는 추 기경들의 권유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음, 좋소." 폴란드인 교황이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있 어야 합니다. 먼저, 그녀는 장님이어야 합니다. 내가 그녀에게 뭘 하는지 볼 수 없게 말입니다. 둘째로, 그녀는 귀머거리여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게 말입 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유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게임을 즐기려 하지만 많은 조건을 단다. 그리고 바로 그 조건들이 그들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막는다. 그대가 아무런 조건을 달지만 않는다면 삶은 아름다운 게임이다. 그대가 아무런 '만 약' 이나 '그러나'가 없이 삶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그 때 깨달음에 대한 필요는 없 다. 실제로 깨달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삶에 대한 이완되고 편안한 접근, 존재에 대한 깊은 동시성(synchronicity), 전체와의 에고 없는 교감이다. 폴란드인 스트립 댄서가 오디션을 받기 위해 극장 지배인을 찾아갔다. 연기를 시작 하기 전에, 그녀는 무대 위에 커다란 붉은 사과를 롤려 놓았다. 그리고 부드럽고 관능 적인 음악에 맞춰 자신의 연기를 시작했다. 음악이 격렬해지고 그녀는 거의 알몸이 되었다. 심벌즈와 드럼 소리에 맞춰, 그녀는 극장 지배인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가운데 무대를 가로질러 뛰어올라 인상적인 세 번 의 회전을 보여 준 뒤, 마지막 드럼 소리에 맞춰 다리를 앞뒤로 벌리고 커다란 붉은 사과 위로 내려 앉았다. 그녀가 일어나서 인사를 할 때, 사과는 사라지고 없었다. 일순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극장 지배인은 정신없이 박수를 보냈다. "당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거요. 도쿄, 런던, 함부르크, 뉴욕, 그리고 파리의 최 고 극장에 출연시켜 주겠소." "안돼요! 파리는 안돼!" 스트립 댄서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왜 파리는 안 된다는 거죠?" 지배인이 말했다. "파리는 당신 연기를 보여 주기에 가장 좋은 도시 중의 하나요." "안돼요, 파리는 안돼요! 파리에서는 우리 엄마가 수박을 가지고 이 연기를 하고 있 어요!" 사랑하는 요소. 무엇이 물고기를 물 밖으로 뛰어오르게 합니까? 스테판 리옹(Stephen Lyons), 이상한 질문이다... 수장쩍은 질문이다! 미래에 물고 기를 태어날 계획인가? 나는 물고기나 물고기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그대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바다, 똑같은 물, 뻔한 것들에 지쳤을 것이다. 그들은 깨 달음, 니르바나를 찾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니면 아마도 이미 알고 있는 세계로부터 빠져 나와 어떤 미지의 맛을 보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인도 신화에서는 첫 번째 신의 화신은 물고기의 형상으로 찾아 왔다고 말한다. 그것 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생명은 바다에서 물고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가장 원 시적인 생명의 형태인 것이다. 그러면 비교해 보라... 물고기조차 호기심이 많고 궁금해한다. 그리고 전혀 호기심이 없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남들로부터 빌려 온 쓰레기같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탐험하지 않는 사람들... 물고기조차 물에서 뛰쳐나오 려 한다는 것은 그대가 물고기보다도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기독교인은 기독교도인으로 살아가고, 힌두교도는 힌두교도로, 이슬람교도는 이슬람 교도로 살아간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뽐낸다. 그들은 가장 원시적인 생명 의 형태인 물고기보다도 훨씬 못하다. 사람은 의문을 품어야 한다. 사람은 탐험을 해 야 한다. 그대가 힌두교인이나 이슬람교인으로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한 것이다. 그 것은 그대의 운명이 아니다. 탐험하라, 물에서 뛰어올라라, 주위를 둘러보라. 수백만 가지의 가능성들이 있다. 그리고 그대가 더 많이 탐험할수록 더 많은 가능성이 그대의 것이다. 그대가 더욱 더 미지 속으로 들어갈수록 그대는 더 완성된다. 미지에 대한 도 전은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쩌면 물고기는 단지 나의 농담을 들으려고 물에서 뛰어올랐을 것이다. 켄토르 부인은 남편이 하녀와 놀아난다고 의심을 품었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며칠 집을 비우게 된 그녀는, 어린 아들 허비에게 아빠와 하녀를 잘 감시하라고 말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물었다. "허비, 무슨 일이 있었니?" "글쎄요." 꼬마가 말했다. "아빠와 하녀 누나가 침실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옷을 벗 었어요. 그리고..." "그만! 그만!"켄토르 부인이 외쳤다." 아빠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자." 아빠는 문 앞에서 화난 아내와 울고 있는 하녀,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아들을 만났 다. "허비, 아빠와 하녀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보렴." 켄노르 부인이 소 리쳤다. "아까 말했던 대로예요, 엄마." 허비가 말했다. "아빠와 하녀 누나가 침실로 들어갔 어요. 그리고 옷을 벗었어요." "그래! 그래! 계속해, 허비!" 켄토르 부인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리고 뭘했지?" 허비가 대답했다. "왜 있잖아요, 엄마. 아빠가 시카고에 있었을 때, 엄마와 버니 아 저씨가 했던 것을 했어요." 따라서 스테판 리용, 그대가 다시 물고기가 물에서 뛰어오르는 것을 본다면 농담을 들려 주라. 아름다운 아가씨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에게 다가갔다. "와." 그녀는 감탄하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엄청난 근육질의 팔을 가지고 있군요 !" "그럼요." 그는 대답과 함께 한 손으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자 신의 근육을 가리키며 말했다. "18인치입니다! 오늘 아침에 재봤지요." "와." 여자가 또 감탄하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정말 크고 아름다운 가슴을 가지 고 있군요!" 남자는 웃으며, 양팔을 벌리고 말했다. "45인치입니다! 오늘 아침에 재봤지요." 그녀는 매우 놀랐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물건을 가리키고 말했다. "얼마나 길지요?" "2인치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겨우?" 그녀는 실망해서 물었다. 그 남자다운 사나이는 깊은 숨을 내쉰 뒤, 그녀를 쳐다보고 말했다. "물론 땅에서부 터 재서 말입니다!" 자, 비노이 토마스, 그대는 나의 농담에서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나의 농 담에서 죽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요소. 그렇습니다. 오쇼, 그렇습니다. 더 이상 병(bottle)도 없고, 당신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오직 희열 속에 저의 발가락을 뒤틀도록 만드는, 이 취한 듯한 기쁨만이 있 습니다. 그러나 오쇼... 그 농담이 무엇이었습니까? 요가 랄리타(Yoga Lalita), 궁극의 농담, 유일한 농담... 관리육긍이 남전에게 '병 속에 들어 있는 거위"라는 오래된 문제에 대해 설명을 청했다. "어떤 사람이 병 속에 거위 새끼를 넣었습니다." 육궁이 말했다. "그리고 완전히 자 랄 때까지 먹이를 주어 키웠습니다. 어떻게 거위를 죽이거나 병을 깨뜨리지 않고 거위 를 꺼낼 수 있습니까?" 남전은 크게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육궁!" "예, 스승님!" 육궁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보라." 남전이 말했다. "거위는 밖에 있다." 이것은 존재 안의 유일한 궁극의 농담이다. 그대는 깨달았다. 그대는 붓다이다. 아 닌 체 하는, 어떤 다른 사람인 체 하는 붓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은 그대 의 가면을 벗겨 내는 것이다. 보라, 랄리타. 거위는 밖에 있다. 그대는 거위를 다시 병 속에 집어넣게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한 번 거위가 나오게 되면 그대에게는 아무런 문 제거리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문제를 가지고 사는 방법만을 안다. 문 제없이 사는 법은 모른다. 그래서 그대는 계속 거위를 병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 이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0)의 아름다운 이야기 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수천 생 동안 신을 찾아왔다. 나는 그를 보았다... 때로는 저 멀리서, 저 멀리 별 근처에 있는 신을... 나는 뛰어갔다. 내가 거기 도달할 때쯤이면 그는 더 멀리 달아나 있었다. 그것은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나는 문 앞에 도착했다. 그 문 앞에는 간판이 있었다. '이 곳은 신이 사는 집이다.' - 노자의 집!" 라빈드라나트는 말한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매우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근심스러웠 다. 무서움에 떨면서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막 문을 두드릴 참이었는데, 불현 듯 이 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문을 두드리고 신이 문을 열고 나온다면, 그 다음엔 뭔가?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아닌가! 나의 여행, 나의 순례, 나의 위대한 모험, 나의 철학, 나의 시, 나의 가슴 속의 갈망... 모든 것이 끝난다! 그것은 자살이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깨닫고," 라빈드라나트는 말한다. "나는 신발을 벗었 다. 왜냐하면 내려가다가 발소리가 들려서 신이 문을 열고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 다. 그러면 어쩌는가? 내가 그 계단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온 그 순간으로부터 나는 결 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때 이래로 나는 수천 년 동안 도망치고 또 도망쳐 왔다. 나는 아직도 신을 찾고 있다. 비록 이제 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이제 나는 그 노자의 집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곳에서 신을 찾아 헤맨다. 두려움은 없다. .. 그러나 그 집은 피해야 한다. 그 집은 나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그 집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 만약 실수로라도 내가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모 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통찰력이다. 인간은 문제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불행 속에서 살고 있다. 문제 없이 살기 위 해서는, 불행 없이 살기 위해서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25년 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살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일종의 자살과 같은 것임을 안다. 나는 단지 나의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아무것 도 할 일이 없다. 만약 그대가 많은 침묵이 그대의 존재 안으로 스며들도록 허락할 수 있다면, 오직 그 때에만 그대는 거위를 병밖에 내버려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얼 마 지나지 않아 그대는 다시 거위를 병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거위를 병 속에 두 는 것은 그대에게 어떤 할 일을 준다. 그것은 그대가 계속 무엇엔가 전념하고, 염려하 고, 걱정하고, 근심하도록 만든다. 문제가 없는 순간에는 마음도 없다. 문제가 없는 순간, 에고는 없다. 에고와 같은 마음은 문제들이 넘쳐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인간은 자신의 에고를 살찌우기 위해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진 짜 문제가 없다면 인간은 문제를 창조해 낼 것이다. 인간은 문제들을 만들어 낼 수밖 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더 이상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랄리타, 이것이 나의 단순한 선언이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 나무, 바 위, 돌, 산, 별... 모든 것이 신이다. 거위는 결코 병 속에 있었던 적이 없다. 거위를 다시 병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바로 문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다. 이제 그는 어 떻게 거위를 꺼낼지 묻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건다. 첫째로, 병은 깨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거위도 죽지 말아야 한다. 이제 거위는 크다. 병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 능하다. 병이 깨지거나 거위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병이 깨지는 것도, 거위가 죽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대는 거위를 죽이지도 않고, 병을 깨뜨리지도 않으면서 거위 를 꺼내야 한다. 그것은 만물의 속성상 가능하지 않다. 아에스 담모 사난따노(Aes dha mmo sanantano), 이것이 삶의 법칙이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행복해 한다. 왜냐하면 거위를 꺼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병을 짊어지 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랄리타가 거위를 담은 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진실은, 그 병은 단지 그대의 상상이며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꿈이 이루어진 것과 똑같은 재 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간으로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다. 그 때문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반대한다. 내가, 그대가 신이며, 그대가 붓다이며, 그대 이외의 신은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다. 그대는 죄인이 되고 싶다. 그대는 죄의식을 가지고 싶다. 그대는 지옥에 던져지고 싶다. 그러 나 그대는 자신이 붓다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깨달은 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는 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가 풀릴 때, 그대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가치 있는 유일한 일이며, 의미 있는 유일한 일이다. 내가 그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다. 이 장소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이 곳은 붓다필드(11) (buddhafield)이다. 나는 그대가 갖지 않은 것을 빼앗아 가야 하며, 그대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주어야 한다. 그대는 나에게 전혀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대에게 어떤 새로운 것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 는 단지 그대가 기억하도록 돕는 것뿐이다. 그대는 그대 존재의 언어를 잊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다시 깨달았다. 나는 나 자신을 기억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 을 기억한 그 날 이래로 나는 묘한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그대에 대해 연민을 느낀 다. 그러나 또한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대를 보며 웃고 있다. 왜냐하면 그대는 실제로 는 문제에 처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에게는 연민이 필요치 않다. 그대에게는 망 치질이 필요하다. 그대는 머리를 세게 맞아야 한다! 그대의 고통은 가짜이다. 지복이 그대의 본성이다. 그대는 진리이다. 그대는 사랑이다. 그대는 지복이다. 그대는 자유이다. 오늘은 이만. (1)지두 크리쉬나무르티(Jiddu Krishnamuryi, 1895-1986) : 남인도의 브라만 가정에 서 태어났음나, 신지학회 회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신지학회 본부 내에서 살기 시작 했다. 열 다섯 살인 1909년 마드라스의 해변가에서 놀다가 신지학회의 실질적인 지도 자였던 리드비터(Leadbeater)에게 발견되어, 미래의 구세주(미륵불)가 내려올 육신으 로 선택되면서 인생의 전환을 맞이했다. 수많은 추종자들의 숭배를 받으면서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동방의 별 교단'을 이끌면서 영국, 인도, 유럽, 네덜란드, 호주 등 지에서 수많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35세 되던 해에 미륵불이 되기를 거부하 는 '동방의 별 교단 해체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충격을 던진 채 홀로 교단을 떠나, 전 세계를 여행하며 홀로 강연했다. 198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쇼는 여러 강의에서 그를 비판했지만 또한 자주 그를 깨달은 사람으로 인정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그가 죽 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해 했다. 지금도 오쇼 아쉬람의 정문 옆 정원에는 '크리쉬나 무르티를 기리며'라는 기념비가 있다. (2)젠드아베스타(Zendavesta) : 조로아스터교의 성전 (3)연화좌 : 결가부좌. 승려나 수행인들이 앉는 자세.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왼쪽발을 오른쪽 허벅다리 위에 놓고 앉는 항마좌와 그 반대의 길상좌가 있다. (4)성경에 나오는 말. (5)구루(guru) : 스승 또는 부모 등의 뜻하는 인도어. 원래 '무겁다'는 뜻이었으나, 전화되어 정신적, 종교적 스승을 듯하는 말이 되었다. (6)오렌지색 옷 : 오렌지색은 인도 승려들의 전통적인 승복 색으로, 초기에 옷는 그 에게 입문하는 산야신들에게 오렌지색의 수도복인 로브를 입고,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는 말라(염주)를 두르게 했다. 이 오렌지색은 태양이나 생명력을 상징하며 삶의 강 렬한 체험을 통해서 자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1989년 이후부터 머룬(자 주색)로브로 바뀌게 되며 아쉬람 안에서만 입게 되었다. (7)만트라(mantra) : 진언.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베다 시대'부터 널리 행해졌다. (8)본시오 빌라도(Pontior Pilatos) : 로바의 티베리우스 황제 때의 사마리아, 이도 메아, 유대의 제 5대 총독. 라틴식 이름은 폰티우스 필라투스. 성격이 잔인해서 유대 인들의 탄압하였다. 예수가 유대인들의 고소로 그에게 잡혀 오자, 그의 무죄를 인정하 면서도 민중의 강요에 굴복하여, 예수 대신에 강도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에게 사형 을 선고하였다. (9)바그완(bhagwan) : 인도어로 신을 뜻하며, 혹은 내면의 신성을 깨달은 자를 부를 때 쓰는 존칭. 1988년까지 불려지던 오쇼의 경칭이기도 하다. 1960년대를 통해서 오쇼 는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불같은 말을 토해내는 아차리야(Acharya,선생님) 라즈나쉬 로 불려졌으며, 1971년 그의 주변으로 동서양의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고, 그의 작업이 새로운 차원으로 바뀜에 따라 '바그완 스리 라즈니쉬(Bhagwan Shree Rajneesh)'로 불 리게 된다. 그리고 1989년 4월, 오쇼는 그에게 붙여져 있는 모든 호칭을 버리고 '바다 와 같은'의 의미를 지닌 오쇼(Osho)로 불리게 되었다. (10)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 인도의 시인, 철학자, 극작가, 작고가. 캘커타 출생. 벵골 명문의 대성이라 불리는 아버지 데벤드라나트의 1 5명의 아들 중 열 넷째 아들로, 11세경부터 시를 썼고, 16세 때 처녀 시집 '들꽃'을 내어 벵골의 셸리라 불렸다.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학적 교양을 닦고, 1877년 영국에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며 유럽 사상과 친숙하게 되었다. 귀국 후 벵골어로 작품을 발 표하는 동시에 스스로 작품의 대부분을 영역하였고, 산문, 희곡, 평론 등에서도 문재 를 발휘하여 인도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아내와 딸의 죽음을 겪은 후, 작품이 종교적 으로 되었으며, 1909년에 출판한 시집 '기탄잘리'로 1913년 아시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아 세계에 알려졌다. (11)붓다필트(buddhafield) : 붓다장. 오쇼가 사용하는 용어로 내면의 붓다가 성숙 해 갈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에너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