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평전 지은이 : 로베르토 리돌피 출판사 : 아키넷 봉사자 : 김선미, 최보경 제7판 서문 지금까지 되풀이해서 말해 온 것처럼, 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베어든 나의 책을 사랑한다. 또한 판이 거듭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 많은 독자들 역시 이 책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곱 번째의 이탈리아 판을 준비해 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나는 이 책을 가능한 한 더 낫게 만들고 싶었지만 두 가지 자애가 있었다. 하나는, 약 50페이지의 범위 내에서 내용을 증보, 수정, 개작해 달라는 출판사측의 요구이었고, 두 번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나의 시력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이었다. 하여튼 나는 이러한 상황하래서 최선을 다했으므로 독자들은 이 책 또한 변함없이 사랑해 주리라 믿는다. 1978년 7월 7일 라 바론타에서 로베르토 라돌피 좀 우울한 이야기를 덧붙여야겠다. 나는 오래 전 고문서보관서에서 문서를 다루기 시작하여, 이후 문헌학자로서 그리고 그 뒤에는 역사가로서 이러한 작업을 계속해 왔다. 처음에는 무엇보다 새로운 문서들을 발굴해서 재 간행하는 일이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점점 그 문서들에 담긴 의미를 꺼내는 데 더 힘을 쏟게 되었고, 결국에는 더 많은 더 나은 결과를 위하여 이 일에 전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요즘은 문서를 한 줄씩 얽어나가노라면 때때로 줄과 줄 사이가 흐릿해 보일 정도로 눈이 침침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연구를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초판서문 성경에는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고 씌어 있다. 진실로 모은 인간은 스스로가 태어났고 또 오랜 세월에 걸쳐 조상의 유해가 흩어져 있는 자신의 땅의 산물이다. 우리 피렌체인들은 단단하면서도 결이 고운 이회토로 만들어져 침식되기는 쉬우나 빚기는 힘든 존재와 같다. 무릇 사람이란 같은 땅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을 때 서로를 이해하기가 더 쉬운 법이므로, 나는 감히 피렌체인의 정수라 할 만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관한 이 책을 쓰고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러한 생각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젊었을 시절, 데 상티스가 위대한 서기장에 대해 경탄할 만한 글을 쓰면서도 정작 그를 어쩐지 좋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본 이후일 것이다. 데 상티스는 마키아벨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와 흡사하다. 쾌락을 즐기는 성격에다 사교 모임에서든 난봉꾼들과는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리는 묘한데가 있었다) 그에 대한 오랜 연구와 깊은 애정, 그리고 친구 조반니 파피니의 불같은 성화로 결국 이 책은 빛을 보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또 하나의 책이라니! 그러나 나는 여기서 흔히 하듯이 비르투, 포르투나 개념에 관해서 혹은 (영혼보다 더) 사랑하는 조국에 대하여 모호한 말들을 늘어놓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피렌체 서기장에 대한 글들이 그렇게 넘쳐흐르는 속에서도 정작 그의 전기, 진정학도 단순히 전기 그 자체인 저술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빌라리와 톰마시니의 기념비적이고 기본적인 책들이 있지만, 그것을 전기라 말하기는 힘들다. 그 속에서 전기적인 부분은 과도한 분량의 해석적, 비판적, 역사적 내용에 파묻혀 사라져버린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의 생애에 대한 사실들을 연속해서 파악할 수가 없으며(그 책들을 끝까지 잃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것을 신속히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빌라리는 무려 300페이지를 지나서야 마키아벨리에 관해 약간 언급하기 시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방대한 세 권짜리 저술의 여기저기에는 많지 않은 정기적 단편들이 엄청난 자료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심지에는 새로운 전기적 냉용이 100페이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나치게 빽빽한 내용을 담은 이 두 연구서는 단지 그 순서와 비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료의 해석에 있어서도 종종 좀더 개선될 여지가 있으며, 특히 콤마시니의 책이 그렇다. 다른 조그만 전기들은 독창적인 연구 내용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 새로이 발견된 약간의 문서들을 통하여 그리고 기존의 것을 좀더 낫게 활용함으로써, 이 책에서는 마키아벨리가(가)에 대한 몇몇 사실을 수정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저술 연대도 여기저기서 약간씩 바꾸었다. 학자들이 엄숙히 되풀이해 온 잘못들을 고쳤고 나아가서 몇 개의 중요한 사항들을 제시하였다. 바람을 쏘이고 먼지를 털어서 되살릴 만한 것은 되살렸다. 나에게는 이러하게 청소하고 복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로써 새로운 사실들을 얻게 되었다. 내가 앞서 말한 모호한 논의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 바뀌는 극히 다양한 해석들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나 스스로가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책, 즉 마키아벨리의 생애에 대한 평이하고도 인간적인 서술로서 그 자신의 행동과 말을 통해 그를 그리고자 한 그러한 책을 쓰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이 역사학적 엄격성을 지키느라 시적 호흡을 외면한 일면이 있다고 할 때, 한 시인(마키아벨리가 시인이라고 하는 것을 그 스스로가 약간의 시를 썼기 때문만도 아니요, 또한 사람들이 증오하는 그러한 유의 정치를 설파했기 때문은 더욱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시인이었다)에 대한 이야기로는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라는 우려의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1953년 12월 3일 라 바론타에서 로베르토 리돌피 제 3 판 서문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15년 전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뒤에 재판이 나왔다. 그래서 초판이 인쇄중일 때 출간된 관련 연구들의 경우는 그것을 참고하거나 명기할 틈이 없었다. 뒤이어 나온 이 책의 번역본들 가운데, 옥스퍼드 대학의 세실 그레이슨이 힘들여 내놓은 번역본(런던, 루트리지 앤 케건 폴 출판사, 1963년)만이 내용을 충분히 증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번역과 간행 사이에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만큼 책의 빛이 바랠 수 수밖에 없었다. 이 훌류안 영역본도 물론 이탈리아 재판보다는 나았지만 이미 나이르 먹고 태어난 셈이 되었다. 이 영역본은 미국에서도 재간되었는데(시카고 대학 출판부, 1963. 그러나 실제로는 1965년에 간행됨), 실제 간행까지의 시차를 이용하여 적어도 인쇄상의 조그만 오류들이라도 어는 정도 교정할 여지가 있었지만 틈을 내지 못했다. 끄틍로 에스파냐어 번역본(멕시코, 레나시미엔토 출판사, 1961)은 마키아벨리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등장 인물들의 도판이 매우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장점 외에는 이탈리아 판들과 비교될 만한 점이 없다. 앞서 말한대로, 이 책은 이탈리아 안팎에서 큰 환영을 받아왔다. 이렇게 독자들이 호의를 보인 이유는(군주론 헌사나 만드라골라의 확고한 연대 비정(비정) 같은) (학문적 신발견)이나 인간 마키아벨리에 대한 새로운 주장에 잇는 것이 아니라, 초판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평이한 구성으로 (나 스스로가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그러한 '전기'를 썼다)는 데 있다고 믿는다. 즉 독자들은 바로 나와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판을 내면서, 나는 본문의 내용 자체에는 별로 손대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나나 다른 사람들이 이럭저럭 찾아낸 약간의 새로운 사실들을 덧붙이거나 잘못된 것을 바꾸었을 따름이다. 반면 독자들 중에는 이 전기가 (학문과 예술의 조화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까지 보려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행문은 많이 고쳤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수정하는 부담에서는 벗어나는 대신, 최근 15년 동안 나온 방대한 마키아벨리 관련 문헌들을 담기 위해 주의 내용을 상당히 확대하였다. 그래서 이 판본에서의 주의 분량은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순수한 전기로서 의도된 것이 때문에, 내용상의 인용은 되도록 전기적 사실이나 연대 비정, 작품의 구성 또는 마키아벨리의 저술 목록에 관계된 것으로 한정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마 혹시 내가 종종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너무 언짢게 여기지는 말 것을 학자들이나 또는 이 책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이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 주가 늘어남으로써 생긴 이점도 있었다. 즉 주를 전기적 서술과는 무관한 두 개의 작은 장(장)과 함께 제2부로 몰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제1부의 본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제2부를 수시로 참조함으로써 마치 본문 아래의 각주를 보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란 학술적 저작에서는 언제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학술적 저작만은 아닌 이 책의 경우 그 동안 편집상의 이유로 그것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했다. 나의 뜻으로 그리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똑같은 얼굴이기는 하지만 마치 오랜 지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의 경우처럼 약간 살도 더 붙고 더 젊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더 해야 좋을까? 나는 많은 글을 써왔으나 이 책이야말로 (전방(전방), Laparte davanti)(발레키 출판사)과 함께 내가 가장 아끼는 두 권의 저술 중 하나이다. 독자가 나에게 해주기를 바랐던 일을 내가 그들에게 해준다는 것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1969년 부활절 라 바론타에서 제 5 판 서문 초판 나온 지 18년이 지난 이제 제5판을 내기에 이르렀다. 더 중요한 사실은 4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동안 세 개의 판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요즘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과는 정반대로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호의가 식지 않고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조로 생각된다. 나는 언제나 새판을 준비할 때마다 그것을 좀더 새롭고 산뜻하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 판은 앞선 어는 판보다도 더 많이 개정되었다. 다른 판본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전기에 관한 내용 자체가 여러 곳에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소데리니에게 보낸 (기리비치)로부터 매우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나는 이미 크게 소급되어 왔던 이 글의 저술 연대를 무려 6년 이상이나 더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종래까지 1512년 겨울에서 1513년 사이로 비정되어 오던 저술 연대가 1506년 9울로 소급된 사실을 말함. 이에 대해서는 9장의 관련 내용을 참조할 것 - 옮긴이). 이 외에 도 (가리비치)의 경우만큼은 아니지만,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정치사상사에 대한 서술을 바꾸어놓은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군대의 재편에 관한 부분이나 이탈리아 동맹군 진영에서 귀차르디니와 함께 했던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지막 날들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번 판에서의 가장 크고도 가치 있는 수정은 역시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책의 내용이 증면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눈이 더욱 침침해진 나에게 (사실 날이 갈수로 시력이 떨어짐을 느낀다) 이는 사실 힘겨운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내고 분석하려는 노력에 부응하는 일일 뿐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이해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글의 흐름을 지루하게 할까봐 본문에는 넣기 힘든 새롭고도 일차적인 점들을 덧붙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는 최근 한 세기 동안 흘러 넘칠 지경으로까지 늘어나 마키아벨리 관련 연구라는 강의 흐름이 너무 급박하게 흐르거나, 때로는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지 않도록 밑바닥을 넓게 파주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19778년 로베르토 리돌피 제4판의 경우, 앞의 판본이 이미 절판되었다는 이유로 책을 급히 찍어내느라 인쇄소에서 저자나 출판사의 수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책의 1권과 2권의 많은 부분을 조판에 넘겨버렸다. 그러다 보니 인쇄상의 좋지 않은 오류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출판사와 저자는 이에 대해 독자들의 용서를 구한다. 제1장 초년기의 교육과 경험 아르노 강이 사보나롤라의 몸을 불태운 화형의 찌꺼기를 여전히 실어 보내고 있을 때,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그 수도사의 체포 직후 시작된 하나의 혁명이 조용히 마감되고 있었다. 읍도파(읍도파, I Piagnoni :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파를 반대파가 깔보는 투로 부르던 말 - 옯긴이) 관리들은 모두 관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반대파 사람들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10인 위원회 I Dieci, 8인감찰위원회 gli Otto di Guardia, 정무위원회i Collegi della Signoria등이 폐지되었고, 점차 하위 관직까지 사보라롤라에 반대하거나 혹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와는 무관한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다. 당시 그에게 더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일수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국에서 해임된 읍도파들 중에서 (피렌체 시(시) 찬가 De illust ratione urbis Florentiae)라는 시를 썼던 휴머니스트 우골리노 베리노 외에, 제2서기국의 서기장이었던 알레싼드로 부라치(혹은 브라체시)가 들어 있었다. 브라치는 때때로 격노파(격노파, kli Arrabbiati: 성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가리킴 - 옮긴이) 성향의 정무위원회와 읍도판 지지의 10인위원회 사이에 끼어 일을 어렵사리 처리해 나깆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사보나롤라에 대한 교황의 분노를 달래보려고 끝까지 노심초사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브르키엘로 풍의 풍자 시인이자 유려한 라틴 시인이었던2) 그의 후임으로 80인회 il Consiglio degli Ottanta는 무명의 청년인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를 임명하였다. 비록 마키아벨리 가(가)가 도시의 유력 가문은 아니었다 해도, 그 기원조차 불분명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발 디 페사에서 도시로 이주해 왔으며, 몬테스페르톨리의 옛 군주들과 혈연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은 곧 좋은 시민이 되었다. 빌라니 연대기에는 마키아벨리가가 1260년의 대패배 이후 피렌체서 쫓겨났다가 뒤에 (전면 복귀한)교황파의 주요 가문으로서, 바르바도리 가, 카니자니 가, 소데리니 가와 함께 을트라느노 구(구)의 (이름 있는 시민 집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도시의 많은 관직을 역임했는데, 그 중에서 21명의 곤팔로니에레 gonfaloniere(르네상스기 피렌체의 최고 행정 수반인 정무위원회 의장을 가리키던 관직명. 베네치아의 도제Doge에 해당된다. 중세 이탈리아 도식국가에는 민병대를 보유할 수 있는 행정구역 gonfalone들이 있었는데, 곤팔로니에레란 중앙 정부에 대해 그러한 구역을 책임지는 관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원래의 말뜻 그대로 보자면, 군기(군기, gonfalone)를 든 기수라는 의미이다. 이를 정무위원장이나 정무총감 혹은 행정장관 등으로 옮기는 것은 마치 왕과 같이 더 높은 직위 아래에 있는 하위직인 듯한 인상을 주므로 적적치 않다고 생각된다. 비이탈리아권의 학자들 역시 대개 원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 옮긴이)와 54명의 정무위원 periore(조합의 요직이나 정무위원회의 위원을 가리키는 말. 원래는 교회의 주요한 직책들{나라와 시기에 따라 다양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옮긴이)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도시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일한 사람은 지롤라모라는 인물로, 그는 과두 정부에 공공연이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었다가 결국은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3) 마키아벨리 가가 (부유 시민 poploani grasssi)으로서 품위 있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보다는 발 디 페사에 소유한 토지 덕분이었다. 당시 다른 가계들에 비해 사정이 좋지 않았던 곳은 베르나르도 디 니폴로 디 부오닌세냐 집안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형편이 빈한한 것을 들어 그가 아마도 사생아 가계 출신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나로서는 믿기 힘들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뒤에 그가 사생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토토 마키아벨리의 유산을 상속받아 형편이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극히 절약하지 않으면 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법학 박사였던 그는 마르카에서 회계사 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5)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피렌체에서 그는 법률가로서 일한 적이 거의 없었고 간혹 그런 기회가 있었다해도 보수는 극히 적었다. 대신 그는 사려 깊고 엄격하게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관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최근까지도 아려져 있진 않았던 베르나르도의 (비망록 Libro di Ricordi)이라는 귀중한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우리는 그가 비록 본성보다는 궁핍 때문이겠지만 약간 인색한 편이며, 주의 깊은 성격에다 다소 괴팍한 데가 있으나 그렇다고 저급하지는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게되었다. 그는 돈 문제에 신경을 쓰면서도 공부가 주는 위안도 아는 사람이었다. 베르나르도는 결코 사치할 만한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으며 안락은커녕 최소한의 생활도 유지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때로는 책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야말로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결점이자 동시에 유일한 열정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직 철하지 않은 책을 사서 스스로 제본하는 애정을 보였으며, 때로는 채식(채식)을 가하기도 하였다. 만일 책을 사지 못하면 즉시 그것을 빌려 보았으며, 법률서뿐 아니라 인문학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피렌체에 인쇄술이 소개된 것은 그가 비망록을 쓰기 시작한 지 불과 사 년전의 일이었으나, 인쇄본을 멀리한 당시의 부유한 애서가들과는 달리 그는 탐욕스럽다고 하 만큼 그 이점을 이용하였다. 그는 초기의 피펜체 인쇄업자들 중 하나인 니콜로 델라 마냐로부터 인쇄 예정인 리비우스의 책 한 부를 받아 그 속에 나오는 지명을 색인하는 일을 맡았다. 12첩의 종이를 쓰면서 무려 아홉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애쓴 대가로 드디어 그는 자신이 열망하던 책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 베르나르도에게서 1469년 5월 3일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태어났다. 위로는 이미 프리마베라와 마르게리타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누나가 둘 있었으며, 남동생을 재산을 남겨준 아저씨의 이름을 따서 토토라고 불리웠다. 어머니는 바르톨로메야 데 넬리오, 그 집안의 한 가문록 작가는 그녀가 몇 편의 종교시를 썼다고 말한 바 있으나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계 유전에 관한 현대의 유전학 이론들에 비추어볼 때, 니콜로의 일생을 불태웠던 시적 재능이 어디에서 연유했는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전적이든 본받아서든 간에 공부에 대한 애정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베르나르도의 기록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유년기 공부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1476년 5월 6일 니콜로는 마테오라는 선생으로부터 라틴어 공부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도나텔로 Donatello)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일곱 살이었는데, 이 나이는 당시의 교육적 통례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다음 해에 들어 그는 산 베네데토 교회의 바티스타 다 포피를 새로운 문법 선생으로 맞게 되었다. (소년은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그것을 참을성 있게 견뎌냈다......,) 지루하게 마련인 유년기의 공부 짬짬이, 그는 아마도 아버지의 초라한 시골집이 있던 산탄드레아의 숲이나 혹은 외가의 시골집을 둘러싼 무젤로의 몬테부이아노 성벽 폐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뛰어다녔을 것이다. 1480년에 그는 산수도 함께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르나르도는 한 해 전에 그의 친척 두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피렌체인들을 희생시킨 전염병에 걸려 몸져 누웠으나 기적적으로 회복 된 후 빈약한 수입과 함께 식구가 줄어들었음을 신고하면서 아이들에 대해 (니콜로는 11살, 토토는 5살로 둘 다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다음해에 두 아니가 파올로 다 론칠리오네라는 선생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음을 보게 된다. 토토가 (도나텔로)를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니콜로는 어느 정도 라틴어를 하게 되었다). 즉 로마의 말로 이미 짤막한 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가 결혼할 무렵에야 겨우 라틴어를 배웠다는 조비오의 악의적인 말이 거짓임을 말해 준다.(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의 말에 현혹되고 있다.!) 반면 니콜로는 그리스어를 배운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아마 초보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결코 그를 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었으며 니콜로 자신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러기에는 아마 돈이 모자랐을 것이다. 그가 읽었던 것들은 분명히 그 시대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듯한 구절들을 외우면서 숙독했을 그런 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성년이 되어 말했던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가 마치 위대한 소명처럼 바로 이러한 유년시절에 시작되었을 것임을 상상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읽게 되는 역사가인 유스티누스 Marcus Junianus Justinus17)(기원전 3세기경에 살았던 로마 역사기. 필리푸스 시대의 역사 Historiarum Philippicarum)를 썼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경 폼페이우스 트로구스기 쓴 같은 제목의 책을 요약한 것임 - 옮긴이)는 그의 아버지의 서가에 없었지만 사려 깊은 베르나르도는 재빨리 그것을 빌려서 니콜로가 12살이 되어 이미 (라틴어를 하고 있을) 무렵에야 되돌려주었다. 반면 그는 비온도의 (로마제국사Deche)(폴라비오 비온도 {1392-1463}의 역사서 Historiaurm ab inclinatione Romanourm decades(1437-1442)는 그 제목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바와는 달리, 고대 로마제국사가 아니라, 5세기경의 서로마제국의 쇠망에서부터 바로 자신의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룬, 현재의 관점으로는 최초의 유럽 중세사이다. 서양에서는 이 책명을 줄여서 흔히 Decades(=Deche)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역사서가 10권씩으로 묶여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옮긴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리비우스의 저술들도 소장하고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아마도 어렵게 색인 작업을 한 대가로 얻었음직한 그 저술들을 1486년에 제본한 것 같다. 당시 17세였던 니콜로는 그 귀중한 책을 찾으러 제본업자에게 갔으며, 아버지가 시골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제본비 조로 (붉은 포도주 세병과 식초 한 병)을 주었다. 아버지의 이와 같은 기록들을 읽노라면, 니콜로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나는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마키아벨리가 고전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고 중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당시 피렌체의 가장 명망 있는 휴머니스트들의 학식과 비교한 것으로, 최근의 연구는 그 의미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라틴 자가들 중 오직 역사가들에게만 관심을 가졌을 뿐) 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번역된 희극 작품들을 베끼거나 모방했을 뿐 아니라 그 유명도와 인기에 연연함이 없이 시들을 읽었다. 그는 단테에 매혹되어 라틴 시인들 중에서도 가장 단테적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루크레티우슬 옮기어 베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각별히 즐거운 일이다. 그는 필사본 혹은 활자본 상태의 라틴어 번역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헤로디아노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를 일고 인용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마키아벨리의 교양과 고전적 바탕이라는 문제에 관해 다룬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거나 암묵적으로 인용했거나 또는 적어도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일람표 하나라도, 고전 고대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져 온 지식의 범위를 크게 넓혀줄 것이다. 단정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가 분명히 연구하거나 읽은 저술가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가 마찬가지로 불분명하게 알고 잇는 여러 사실들이 다른 각도에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키아벨리의 인생을 중반에 이르기까지 살찌웠던(고대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였음이 틀림없다. 그 이후의 생애는 보다 더 (현대사에 대한 오랜 경험) 속에서 보내게 되며, 우리는 다음의 장들을 통하여 이러한 편력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먼저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스스로 목격했던 사건들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뒤에 말했듯이, 인생 초년에 보고 들었던 것들이 (젋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바, 이는 (모든 인생행로에서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것이었다. 그가 인간 행위에 대해 내세운 보편 진리들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을 법하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그 스스로 보는 바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던 기억 덕분으로, 피렌체의 옛 생활 방식을 여전히 접할 수 있던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소길드 세력의 약호로 1382년에 성립되어 1387년 개혁되고 1393년에는 마소 델리 알비치에 의해 조직이 개선, 강화된 유력 시민 정부 il governo di Ottimati는 공화국에 유례 없는 행복과 위대함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단테가 카차귀다 시대의 코무네(코무네0 정부를 그린 것만큼은 절제 있고 품격이 높지는 못하지만, 메디치 가의 집권으로 부패가 만연하기 전, 니콜로 다 우차노와 마소 델리 알비치 시대의 피렌체는 여전히 도덕이 살아 있던 도시였다. 부가 넘치고 상업이 활발하며 세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영민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 당시의 건축물들은 최상의 모습을 뽐냈다. 뒤에 사보나롤라가 경멸 조로 말했듯이, 비록 종교적 성소롤 지어졌던 건물이 사실은 각 가문의 무기고로 이용되기는 했지만, 코지모 데 메디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도시의 기질을 안다. 우리는 50년도 못 가 쓰러지겠지만 이 건물들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이러한 절제된 화려함을 예술적 품위와 문학적 우아함으로 세련미를 더했다. 공적 의례는 장엄성을 과시한 반면, 사적 생활은 이탈리아 어느 곳보다도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예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통치력은 훌륭한 법률보다는 지도의 덕성에서 나왔다. 비록 정치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직에 선임되었고 그 중 소수는 직접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설사 불의와 권력 남용의 경우가 있었다 해도 그것조차 정의의 외양을 가지고 적절한 정도를 넘지 않도록 배려되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침해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인물을 훈련시키는 이러한 어려운 과정은 관직에 들어가기 전, 이미 도시의 명망 잇는 사람들의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이 평민적 도시에 어울리는 소박한 방식으로 행하여졌다. 그들의 명망은 재산보다는 분별력에 연유한 것으로, 그들은 결코 최고위의 관직에서 중대한 국가사를 맡은 뒤에도 자신들의 사무실과 상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단순 소박하다는 면에서 그들은 훌륭한 전기 작가인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가 비교한 바 있는 (그러한 고대 로마인들과) 매우 닮아 있었다. 사실 우아함을 갖춘 로마적 자유가 있다고 찬양해 마지않았던 당시 한 시임의 말과 같이 15세기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 역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인물과 사건들을 로마의 경우와 비교하고자 하는 유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정당화 될 수 있었을 듯하다. 이들 피렌체의 유력 시민들은 경쟁적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글은 평민 귀족으로서, 분명코 인민 주권의 형식을 초대한 존중하려던 사람들이었다. 인민들은 그들을 (동등자 중 일인자)와 같은 존재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통치 아래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들은 지도자들의 지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시장이나 상점 혹은 선술집에 앉아 정무궁Palazzo에서 진행되는 극히 세련되고 섬세한 정치 게임을 받아들였다. 우리 시대의 입헌 군주와 같이, 인민들은 다만 명목상의 주권에 만족하면서 정치를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맡게 놓았던 것이다. 메디치 가 역시 그들이 지배한 처음 50년간은 이러한 게임의 힘든 규칙을 지켰고, 그것을 잘 준수할수록 더 나은 통치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앞서의 과두정권 아래서 향유되었던 풍습과 삶과 만족감이 코지모든 피에로든 또는 로렌초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일인 통치 아래서도 얼마간 지속되었다. 합법적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성의 군주였던 그들은 끊임없이 신변을 경계하면서도 무력으로 통치하기보다는 결코 신민이 아닌 동등 시민들의 동의에 의거하여 다스렸던 것이다. 이러한 평민 군주들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묘한 방식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인물을 장관 지게 앉히고 통혼과 관직 분배로 부와 호의에 균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질시와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며, 거의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배려였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나 째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은 바로 그 해였다. 코지모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시민 군주가 된 피에로는 그 자리를 다시 아들인 로렌초와 주리아노엑 물려주었다. 마키아벨리는 볼테라의 발란(1472)에서 야기된 무자비한 복수와 신의의 파기를 알기에는 당시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1478년 파치 가 사건이 발생했을 때쯤에는 이미 라틴 자가들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는 도시의 명망가라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질시와 원한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최악의 교황이었던 시스토 4세의 묵인 아래 그의 조카들이 허망한 탐욕으로 음모를 꾀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음모자들 중에는 피사 대주교와 교황의 혈족인 젊은 추기경 리아리오도 들어 있었다.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 택한 시간과 장소는 성체 봉현 미사가 있던 성당이었다. 줄리아노는 사해되었으나 로펜초는 죽음을 면하였다. 대주교와 많은 공범자들은 그들이 헛되이 차지하려 했던 정무궁 창 밖으로 목이 매달렸으며, 길거리에서 군중들에 의해 찢긴 그들의 시체는 여러 날 동안 참혹스러운 광경을 연출하였다. 교황은 줄리아노의 죽음에 대해 어색한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진 대주교보다는 자신의 혈족으로 당시 억류 중이던 추기경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였다. 추기경은 결국 풀려났으나, 뒤에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교황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자신과 {나폴리}왕의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주의적 교의를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26) 교황은 세속적인 무기를 쓰기 전에, 먼저 정신적 무기로 로렌초와 장관들을 파문에 처함과 아울러 도시 전체를 금력으로 묶어버렸다. 니콜로의 말처럼, 이러한 조치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무기는 이미 그것의 옹용과 사용자의 악명으로 무뎌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정신적 공격이 피렌체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군대의 공격으로 그들은 지쳤고 마침내는 포초 임페리알레에서의 패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는 용병대의 전례 없는 비겁성에서 기인했는데, 이는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었고 특히 니콜로에게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에서 이에 관해 언급하기 오래 전, 이미 마음속에 그 일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아니 메디치 가는 로렌초의 대담한 결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남자답게 이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나폴리 왕의 손에 맡김으로써 결국 명예를 손상치 않고 평화를 얻어내었다. 물론 이에 대해 교황은 즉시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피렌체에서 로렌초의 명성을 최고조에 달했다. (니콜로가 어른이 되어 썼듯이)(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릇 어떤 일에 대한 평가는 원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그 결과에 달려 있는 법인 것이다. 그 뒤에 발생한 사건들은 로렌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이미 정치적 지략을 발휘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의 어떤 전쟁에서도 피렌체 공화국의 영토는 침범받지 않았다. 단지 평화라는 한마디를 하고 숨을 거둔 시스토 4세의 주음과 함께 막을 내린 롬바르디아 전쟁이나, 피렌체가 새로운 교황 인노첸초 8세에 대항하여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와 동맹한 제후들의 전쟁(1486)에서도 피렌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제 17살이 된 니콜로는 후자의 전쟁을 통해 용병의 경악스러운 행태에 대한 관찰의 새로운 자료를 모을 기회를 얻었으며, 왕의 행동으로부터 (현명한) 군주라면 (신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잔혹하다는 악명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지 또는 한번 한 약속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어떻게 파기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신의 파기의 기술을 그에게 더 장 보여 준 인물은 인노첸초의 뒤를 이은 새 교황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 princip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는 남을 속이는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언제나 속일 사람들을 찾아내었다.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어떤 것을 설득하고 또 굳게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만은 항상 성공하였다.) 그는 이와 유사한 책략을 이탈리아의 여러 궁정에서의 일상사와, 인근 로마냐에서 빈번했던 가족 학살(1488)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자유는 장갑(장갑)으로 은폐된 로렌초의 철권 아래서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1470년 1471년 사이, 1480년 1490년에 각각 10년 간격으로 행해진 개혁으로 정보 요직은 점점 더 로렌초의 측근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로써 그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자유의 쇠퇴와 함께, 앞서 말한 바 있던 도시의 옛 생활 방식도 사라져갔으며, 이제는 다만 적어도 그 마지막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한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시대의 변화와 다른 궁정들의 영향 아래 운명적으로 유입된 부패는 정치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풍숩마저 물들였으나, 로렌초는 이를 오히려 통치상의 일환으로 이용하였다. 미키아벨리의 세대가 파행적 사회상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 것도 정확히 바로 이 시기였다. 뒤에 피렌체인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그 같은 부패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는 당시의 부패상을 더욱 직설적이고 신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다. (다름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파멸시킬수록 더 지혜롭고 존경받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 역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당시는 사치와 오락, 호색과 남색(남색)(이른바(피렌체의 악습)이라 불리던 것)이 만연하고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사라져가던 때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그리고 마키아벨리도 언급하고 잇는 바와 같이), 도덕의 이완은 종교의 쇠퇴를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세속적 악습은 사제와 수도사들의 부패에 일부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들이 빚어낸 결과적 현상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안레싼드로 6세가 교황에 즉위한 이후 로마에서 나타났다. 세간의 이러한 악습과 로렌초의 부패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질타의 목소리를 드높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위대한 수도사는 1482년부터 1487년 사이 피렌체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별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490년 중반에 돌아온 그는 이민 끊임없는 설교와 명상과 기도로 강해져 있었으며 충고와 계시를 통해 스스로의 소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복귀 후 자신이 행산 새로운 설교 방식이 호응을 얻은 데 고무된 그는, 악습과 그것으로 악명 놓은 이물들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로렌초는 협박과 회유로 그를 침묵시켜 보려고 했으나, 그는 로렌초의 최근 개혁을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로렌초가 1492년에 죽고 이어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의 정권이 정복되자, 사보나롤라는 투쟁의 승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이자 성인의 삶을 사는 임룰로 존경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약탕과 내란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새로운 평시민 정부 governo popolare(여기서 (평시민 popole)이라 함은, 귀족적 신분인 상층의 부유 시민 popolani grassi 및 유력 시민 ottimati, gran야, maggiori과 하층인 소시민popolo minuto사이에 위치하는 계층으로, 그 구성 요소는 시간과 장소에 딸라 다양하게 변하지만 주로 조합의 마스터나 중간 이상의 상인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때에 따라 사회 계층을 평시민과 소시민의 둘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 경우 평시민에는 상층의 시민 계층까지 포함된다. 이들은 시민 계급 박R의 대중들 moltitudine과는 rqnsaudgl 구별된다. 시민들로 이루어진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의 구성원 수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귀족 공화정과 평시민 공화정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 책 곳곳에서 나오는 (평시민 정부)란 곧 후자의 경우이다 - 옮긴이)를 통해 자유를 고무하고 촉진시민 데 대해 감사하였다. 당시 25세였던 마키아벨리는 이 새로운 정부가 정확히 평시민적이라는 점에서는 만족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지에서 온 수도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국가를 종교, 즉 신에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의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마키아벨리는 적어도 자신의 저술들 속에서 종교를 국가, 즉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그가 읍도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고 오히려 그 반대파인 격노파의 일원일 것이라고 생각함직 하지만, 이 파의 열성적 인물들 명단에는 결코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더욱이 그는 교회의 부패와 로마의 악덕 성직자들 그리고 사악한 사제들에 대항한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업적을 필연코 높이 평가했을 것이며, 설사 그가 자신과 피렌체인들의 기질에 따라 한때 그 몰락한 영웅을 조롱했다고 해도, 좀더 깊고 진지한 생각을 가진 뒤부터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 관해 확실한 날짜가 기입된 최초의 글이자 그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문서들 중 하나로, 리차르도 베키에게 1498년 3월 9일자로 보낸 편지가 있다. 이 속에서 당시 교황의 (분노에 굴복한) 사보나롤라가 주교좌 대성당의 연단에서 물러나 산 마르코 성당에서 행한 두 편의 설교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회에서 한 첫 설교 두 편이었다. 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이제 교황의 정신적 무기와 가톨릭 연명의 세속적 압박과 함께, 피렌체인의 상인적 교활성과 쉽사리 과거를 망각하는 불안정한 기질 때문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선의와 그로 하여금 설교케 하고 종국에는 화형주에 조용히 몸을 맡기게 했던 고결한 이상을 생각할 때, 이 위대한 수도사를 (시류에 영합하고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둘러댔던) 사기꾼이라고 혹평하였던 마키아벨리의 편지는 아마도 오늘날 별로 읽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쯤은 익살로 씌어졌던, 친국에게 보낸 이 편지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과 친구들 간의 재미를 위하여 피렌체인 특유의 독설적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당시 그는 29세, 한창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좋아하고 사보나롤라가 금지시켰다. 화려하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나이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젊은이에게 교황에 대하여 요구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실 로드리고 보르자는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피렌체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한때는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다른 무기 없이 오직 설교만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수복을 꿈꾸었던 인물로 화형주로 보냈던 것이다. 이 화형주는 마키아벨리가 사인(사인)에서 공인(공인)으로 생활을 바꾸기 전에 사림들 사이에서 배운 마지막 교훈이었다. 지금까지 마키아벨리 시대의 사악한 교훈들을 짤막하게 간추려보았다. 비록 자신의 저술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들과 세상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도덕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은 채 논리적 엄격성을 유지하면서 결론을 끌어내는 남다른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관찰과 논증으로부터 도출해 낸 대체로 과학적인 고찰들이 반드시 그 자신의 감정과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이론 속에서는 거의 언제나 이성적인 것이 감정을 압도하였으나, 행동에 있어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둘은 항상 결합되어 그것들로 충만된 마음속에서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이었다. 사실 피렌체인은 성격상 괴팍한 측면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는데, 단테는 이 중 하나를 가리켜 (괴짜bizzarro)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는 곧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수사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피렌체인의 이러한 기질을, 변덕스러우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한결같고 가혹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감미로운 가운데 그것을 발샟메하고 또 성숙시킨 그곳의 토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의 땅은 추위와 더위에 의해,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길들여져야 하는 단단한 돌덩이들로 되어 있어서 열성적이고도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피렌체인의 기질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가혹하고 심술궂은 데가 있다. 이는 아마도 도시민의 세련성 아래 가혹함의 불꽃이 번쩍이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랄한 풍자와 그 유명한 조소적 태도는 반드시 유쾌함과 선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약간 경박함마저 풍기는 이들의 쾌활성을 입증하고 상징하는 말로, 흔히 로렌초 데 메디치의 (바코와 아리안아의 개선 Trionfo 야 baccoe 야 arianna)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후렴구를 싫증날 만큼 되풀이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이렇듯 유쾌한 삶의 외양 밑에 똑같은 정도로 우울하고 씁쓸한 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아무리 덧없다 해도 하고 싶은 대로 즐기라. 내일이면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리니. 피렌체인의 기질을 잘 이해하려면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여기서 가장 육욕적인 사육제 노래가 동일한 음조와 운율을 가지고 다만 가사만 바뀐 채,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헌신적으로 만들어진 성가로서 불렸던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 또한 그 같은 종류의 노래들이나 (만드라골라) 같은 희곡과 함께 (참회 권유 Esortazione alla penitenza)처럼 경건한 내용의 글을 썼다고 해서, 하등 놀랄 일도 장난으로 돌려버릴 일도 아니다. 이 도시에서는 풀치의 가장 피렌체적인 서사시 (모르간테 Morgante)에서도 나타나는바와 같이 불경함과 경건함이 끊임없이 뒤섞이고 있었다. 또한 사보나롤라의 놀라운 개혁과 함께 로렌초의 이교적 시대나 그의 화형 이후 한 행정관이 (신을 찬미하라. 이제 우리는 다시 쾌락을 즐길 수 있으리니)라고 천명했던 바의 격노파와 동무파i Compagnacci(피렌체의 반사보나롤라 졍파를 일컬음 - 옮긴이)의 비행들이 번갈아서 일어났던 것이다. 피렌체의 정치 생활 역시 치열하고 변화 무쌍한 대립상에 의해 지배되는 그 같은 성향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모든 구가들 중에서 최악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법률보다는 정치 지도자들이 오히려 나았던 이 도시에서 16세기의 위대한 정치 저술가 세 명(마키아벨리, 귀차르디니, 도나토 잔노티를 일컬음 - 옮긴이)(그 중 마키아벨리가 으뜸이지만)이 모두 나왔다는 것은 얼핏 이상스러운 우연인 듯도 하겠지만 사실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원래 옛 자치 도시의 자유로부터 기원하였으나 단지 의심이 많고 시기심이 강하며 조급하고 변덕스러운 일상적 기질에 의존함으로써 이후 괴상한 모습으로 바뀌고 변화해 온 결함투성이의 정치 체제 이면에는, 극히 어려운 상황 아래서 남을 통치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통치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준 정치적 교훈의 유익한 경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위정자는 악법으로 인해 장애를 받았으며, 관리는 법률만큼이나 자주 바뀌었고, 외교 사절은 모호하고도 제한된 권한 외에는 아무런 권위도 부여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참주 I tiranni)조차도, 앞서 살필 바와 같이, 도시의 기질에 맞추어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구정을 유지하고 매일매일 그것을 확인하며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간계로써 통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의 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표방했던 (살피고 준비하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신조는 파에솔레와 아느로 강 사이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15세기 피렌체의 국정술(국정술) 학파에도 놀랄 만큼 꼭 맞는 말이었다. 니콜로 마카아벨리가 자라난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학파에서였다. 이 정을 끝내면서 나는 30대의 문턱에 들어선 마키아벨리의 초상을 간략히 그려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형상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던 바로 그 모습만큼이나 이해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한 뛰어난 인물을 과연 자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가 앞선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무려 450년간이나 이해해 보려고 애써왔으나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종종 냉소주의 때문에 비난받아 왔으나, 이는 실상(스스로의 논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의 신념)에 다름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 위대한 이상주의자의 냉횩한 현실주의와 이 낙관주의자의 비관주의를 염두에 두고 그를 이원론적 입장에서 분석한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는 (반인 반수의 존재)인 켄타우로스의 모습으로 간주되는 그 자신의 정치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먼저 지노 카포니가 그에 대해 쓴 그을 인용하면서 시작해 보자. 그의 말은 진실이므로 풀어쓸 수도 있겠지만, 글의 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그대로 옮겨보겠다. (그의 지성은 우아하고 풍요로웠으며 품행은 거침이 없었다. 이해력은 놀랄 만큼 뛰어났으나 반드시 세상사가 그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 그는 정치를 아탈리아가 느끼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높았고 이상은 원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힘은 헛되이 소진되고 위대성은 부패하여 수단의 부재와 전망 속에서 마치 패배 후 진흙탕에 처박힌 로마군의 독수리 깃발처럼 다만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오히려 종교를 고귀한 것으로서 존중하였으며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사랑하였다. 그는 종교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든 잘못된 정치 제도에 분노하였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조소하고 공격하였고 악덕으로 규정하여 자신의 마음에서 축출해 버렸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와 같았고 또한 이탈리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그와 같았으나 아탈리아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실상 다른 어느 곳보다 피렌체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즉 그는 미덕과 악덕의 측면들이 불가피하게 더 부각되어 보이는 그러한 확대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기할 만한 악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론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결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통해 과도한 활력과 애정을 분출하고자 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남에게는 매우 관대했고 자녀들에게는 자애로웠으며 무엇보다 정직했고 조국과 자유를 사랑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더 저열한 인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 스스로가 위대함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다 숨기려 하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좋은 점은 감추고 덜 좋은 점은 내보이는 편이었다. 사실 그는 스스로가 실제보다 더 낮아 보였으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류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만일 사람들이 선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몇몇 사악한 권고들이 (더 이상 소용없게 될 것) 임을 씁쓸한 어조로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저열함을 속속들이 맛보고 언제나 선인이 악인에게 굴복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를 자신의 재능으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법칙으로 재구성해 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악인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선인 쪽에 끼일 인물이었다. 카포니는 마키아벨리가 종교를 애호하였으며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글 거의 어디에서나 비록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예민하고도 열정적인 시인의 정신을 엿볼 수가 있는데, 무릇 시가 있는 곳에 진정코 사악한 것은 없는 법인 것이다. 그러나 선은 사라져가고 악인 만연함을 보면서 그의 정신은 반란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렇게 쓰디쓴 격언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거나 또는 쓴웃음을 통하여 그것을 표출하였다. 그는 스스로의 웃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선하고 고귀한 것을 따르고 믿는 자신의 감정을 비웃었다. 또한 좀더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자산을 조소하였다. 그의 성격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다음의 8행시에 그려진 작화상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씌어진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의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바라네. 하지만 바람은 나를 더욱 괴롭게만 하네. 나는 우네. 하지만 울어도 가슴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나는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들이 두렵기만 하네. 모든 것들이 나에게 새로운 고통을 주네. 그래도 바라면서, 나는 울고 웃고 태우며, 또 내가 듣고 보는 것들을 두려워하네. 휴머니즘의 아들이지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방탕한 자식 같은 존재였던 그는, 자신의 학문에서보다 더욱 정신면에서 휴머니스트들과 다른 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류트)를 배우고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았다. 반면 당시 놀라울 만큼 발전되었던 시작예술에 대한 언급은 그의 글을 통해 단 한번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이다. (이 지방(......) 앞서 발한 바처럼 한때 사멸했던 시와 그림과 조작들을 되살려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그야말로 다름 아닌 고전 고대의 용맹성과 질서가 되살아나기를 바랐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균형이 잘 잡히고 중키의 호리호리한 풍모에 당차고 대담하든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은 검었고 안색은 희었지만 약간 창백하였다. 머리는 동그랗고 작았으며 이마가 높은 편이었다. 그의 두 눈은 빛났으며 굳게 다문 얇은 입술에는 언제나 약간 조소 어린 웃음이 머금어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를 그린 몇 종류의 훌륭한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마키아벨리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만났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만이 그 희미하면서도 뜻 모를 미소의 의미를 충실히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제 2 장 서기장 마키아벨리 1998년 5월 28일, 80인회는 까다로운 심사 절차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젊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제2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지 겨우 닷새 뒤의 일이었다. 전기 작가들은 지금까지 마키아벨리에게 이러한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몰락이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식으로 그는 당시의 경험으로부터 하나하나 교훈을 얻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미 그 해 2월부터 서기국의 한 하위 관직을 얻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든 그는 사보나몰라와 그를 따르던 읍도파의 몰라긍로 갑자기 더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읍도파들 가운데는 다름아닌 제2서기장 알레싼드로 부라치가 들어 있었으며, 아울러 그의 자리를 놓고 니콜로와 경쟁했을 만한 몇몇 인물들로 끼어 있었던 서이다. 니콜로의 임명 건이 6월 15일 80인회의 심의를 통과하고 법에 따라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베네치아의 경우를 본따 14새게말에 도입된 일종의 민회. 그 규모가 최대일 때는 구성원의 수가 약 3,000명에까지 이르렀다 - 옮긴이)의 최종 결정에 부쳤을 때, 그의 경쟁자로 나선 사람들이 공립대학 pubblico studio(스투디오란 르레상스기의 대학을 일컫는 말 - 옯긴이)의 수사학 교수였던 프란체스코 가티와 공증인 안드레아 디 로몰로, 그리고 순교자에 대한 재판 과정을 조작함으로써 악명을 얻었던 바로 그 프란체스코 디 세르 바로네였다는 사실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라고 흘려보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아도 서기적에 오래 종사한 두 인물과 불량배로 악명 높지만 그 무혈 혁명에서 공을 세원 한 인물을 제치고, 비록 재능은 뛰어나지만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고 경험도 일천한 젊은이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6월 19일 제2서기국의 장으로 선임되었다. 그곳은 물론 권위나 위엄에서 공화국의 제1서기장과 비교될 수 없었지만 중요한 자리였다. 이 두 관직에 대해 잘 아리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둘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이제 더 연륜이 많고 그 일에 더 능숙한 사람들이 젊은 새 서기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때까지 도시 내에서 명성은커녕 연대기에서든 공사(공사)의 문서에서든 그에 대한 언급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던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에 마치 신화의 주인공처럼 성숙한 용사의 모습으로 사람들 깊숙한 곳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서기국의 관직들은 설사 그것이 보좌직이라 해도 박사나 공증인이나 어느 정도의 명성을 가진 문필가로 채워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관례는 시민 모두로 선출자 자격을 확대한 1498년 2월 13일의 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선임자나 동료들, 또는 후임자나 부하들을 막론하고 누구나 그러한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문학사에서 기억되거나 적어도 다른 학자의 글 속에 언급될 만한 글들을 남겼다. 반면에 그는 공문서상의 명치에서 (메쎄레 messere)난 (세레 sere)라는 칭호가 붙지 않는 사실에서 보듯이 박사도, 공증인도 아니었다. 또한 산물이든 시든 간에 그의 생에 전반기에 씌어졌다고 확신할 만한 작품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이 주요 저술은 물론이고 약간이라도 주목할 만한 소품들조차도 모두가 명백하게 생애의 후반기, 아니 후반기의 또 후반부인 서기장 재직 이후에 씌어진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사육제 시편들 약간과 연애시 몇 편의 제작 연대를 그의 젊은 시절로 비정해 볼 수도 있으나, 이는 단지 그러한 추측을 반증하지 못해서일 뿐이지 결코 더 강력한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가족과 친족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우리는 그가 쓴 1497년 12월 2일자 편지를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전 (마키아벨리 가) 전체를 대신하여 부유한 파냐 교구 교회의 소유권을 요구하는 파치 가의 주장을 일축하고 그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페루자의 추기경 조반니 로페즈에게 탄원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쓴 것으로서 날짜가 명기된 최초의 글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가가 아직은 젊은 나이의 니콜로에게 이러한 일을 시킨 것은 사실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시 아버지인 베르나르도가 가장으로서 여전히 생존해 있었을 뿐 아니라 법학 박사에다 결코 문재(문재)가 없었던 것도 아니가 때문이다. 어쨌든 이 편지가 그의 재능을 내보이고 있으며 법률가 풍의 장중함 아래 장래 대작가로서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의 일단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역시 이 문제에 관해 추기경에게 서간을 보낸 정무위원회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이 편지의 결과 마키아벨리 가가 교회의 소유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니콜라가 마키아벨리 가라는 자신의 문중 안에서 문재를 인정받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들 누구에게가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지금 우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문필가들 중 제일 말석을 차지했던 인물들까지도 그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그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을 분 아니라 당시의 나이까지 그가 쓴 글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문필가고 활동한 적이 없다는 거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의 생애 전반기에 대한 이러한 모호함은 후반기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해명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는 말보다는 일을 더 사랑했으며, 문필보다는 삶을 더 좋아하였다. 그는 생각이 메마른 자신의 동시대인들이나 동료들 대부분과는 달리 결코 문필가는 아니었다. 그가 저작 활동은 시작한 것은 스스로의 (오랜 경험)이 이미 자신의 젊은 시절을 살찌운 바로 그 (끊임없는 독서)를 기름지게 만들고 비교의 재료를 제공하고 난 이후였다. 사실 그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경험이 결여된 도서란 무익할 뿐이었을 것이며, 거꾸로 그러한 독서가 없었다면 그것을 통해 본 일들을 경험 속에서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이러한 사실이 그의 문을 열고 가려진 젊은 시절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줌으로써 성숙한 시절의 저작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열쇠가 된다 하더라도, 그의 서기장 선출을 둘러싼 작은 비밀을 해명하는 데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일 지난 세기의 몇몇 학자들이 한 말대로 그가 1494년이나 1495년 이후 보좌직 또는 그 보다 하위 직급으로 서기국에서 근무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점이 명료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 같은 주장을 한 누구도 이를 입증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많은 오류에 빠짐으로써, 그러한 주장에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말의 신빙성조차도 빼앗아가 버렸다. 엉뚱한 문서를 바탕으로 피렌체 서기국에 대한 그러한 주장을 지지하려 했던 한 역사가는 진실로 (어이없는 웃음과 측은함의 대상이 될 법한) 실수를 범한 셈이었다. 그러므로 니콜로의 선출을 둘러싼 비밀을 밝혀줄 수도 있는 견습시절에 대한 희망 섞인 추측은 더욱 신빙성 있는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제쳐놓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그것은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국정술의 연구에) 전념했던 날들을 세고 있는 한 유명한 편지의 냉용과도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가 센 햇수 속에는 분명히 서기직으로 보냈던 날들 모두가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렌체 서기국을 연구한 앞의 역사가는 니콜로의 선임이 1498년 4월 30일에 있었던 한 결의 사항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 이 결의에 따르면, 사절을 타국에 파견할 때면 젊은이들이 국정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청년 하나를 대동케 하였다. 하지만 (연대기 작가 파렌티에 의하면)(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희망으로 부풀게 했던) 이러한 특별 조치가 우리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었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마키아벨리가 그러한 조치 이전에라도, 그를 이어 뒤에 서기장이 된 도나토 잔노티(23장을 보면 1527년 6월초 메디치 가를 축출한 공화 정부가 마키아벨리가 봉직했던 서기장 자리에 프란체스코 타루지를 임명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는 얼핏 역시 1527년 잔노티가 마키아벨리를 이어 서기장직에 올랐다는 이 장에서의 언급과 상충되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이에 관하 s사실을 정확히 말하자면, 타루지는 1527년 6월 10일 경 10인위원회 서기장직에 임명되었고, 잔노티는 같은 해 9월 23일 타루지의 후임으로 이 직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약 석 달 후의 일이었다 - 옮긴이)가 그랬듯이 어던 사절들을 따라 외국에 나갔다 왔을 개연성이 없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가설도 버리고 나면 이제 아주 그럴 듯한 추정 한 가지가 남는다. 즉 그의 재능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그의 당시 조건에 비하면 그래도 높은 이 관직이 그에게 돌아간 데는, 누군가 명망 잇는 시민 또는 서기국과 관련이 있으면서 동시에 정무위원회에 힘을 가진 인물의 영향력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드리아니라는 이름을 마음에 떠올리게 된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제2서기장에 오른 해와 같은 1498년 2월 13일 스칼라의 후임으로 공화국의 제1서기장, 즉 제1서기국의 장으로 취임한 인물로 조비오가 마키아벨리의 선생이었다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우연의 일치일까?) 조비오가 진실을 쓰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일부러 진실이 아닌 것을 더 자주 쓰려고 했으며, 마키아벨리 역시 그의 악의와 중상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는 이 사실의 단편은 비록 정확성은 부족하겠지만 완전히 엉터리는 아님이 분명하다. 조비오는 적어도 그가 쓴 (우리 시대의 역사 Historiae sui temporis)로 인해 많은 피렌체인들과 사이가 벌어지기전까지는 피렌체 및 그 시민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위의 사실을 성급하게 폐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마키아벨리의 주요 전기 작가들도 그가 제멋대로 지어낸 세부 사실들은 제외하고라도 마키아벨리가 마르첼로 비르질리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만은 진정하고 있다. 무론 여기에는 마키아벨리가 그에게서 라틴어를 배웠으리라는 추측은 당연히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부친인 베르나르도의 (비망록)에 의해 부정되기 전에 이미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되고 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전기 작가들은 마라첼로 비르질리오와 마키아벨리 사이가 어떤 식으로든 선생과 자제의 관계는 될 수 없었을 것이라든가, 또는 학식에서 차이가 지는 친구간에 배움을 나누는 통상적인 관계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단호하게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의 선생이었다고 확언하기는 않겠다. 하지만 그들이 나이라는 잘못된 근거를 내세워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했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그들의 주장인즉, 마키아벨리는 아드리아니보다 불과 5살 아래였기 때문에 (하지만 사실은 9살 연하였다) 제자가 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누구라도 이러한 주장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아드리아니는 피렌체 공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9살이나 어린 마키아벨리가(5살 아래라도 마찬가지지만) 왜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를 천거했다는 것은 단지 조비오의 글에 근거한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어쨌든 합리적인 데가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지금까지 찾고 있었던 그의 서기장 선출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사실상 성채 안의 성주와도 같은 존재였던 아드리아니야말로 그의 학생이라고 생각되던 사람을 그 성채로 들어오게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 누구도 정무위원회에 사람을 천거하는 데 있어 그보다 큰 권위를 지닌 인물은 없었으며, 정무위원회라고 해서 그의 보좌역이자 가장 가까운 협력자를 뽑는 일에 굳이 이래라 저래라 반대 의사를 표명할 리는 없었다. 일단 그가 정무위원회를 설득하기만 하면, 그것의 권위를 빌려 (복잡한 후보 지명과 심사)에도 불구하고 80인회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사람을 뽑는 것이 별로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대평의회에서는 더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그곳에서의 마지막 심사에서 마키아벨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가티였고 체코네가 그 뒤를 잇고 있었는데, 이 중 가티는 메디치파 열성분자가 아닌가 의심받고 있었으며 체코네는 야비하게 그를 이용했던 사람들조차도 경멸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드리아니와 마키아벨리가 조비오의 말처럼 사제지간이 아니라 단지 친구 사이였을 뿐이라고 해도, 그가 마키아벨리의 선임에 찬성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정무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두 사람 사이가 정말로 친구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제2서기장의 장남이 제1서기장을 대부로 맞게 되었을 때,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에도 둘이 가깝거나 친밀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같은 부서의 동료들이 쓴 편지들 속에서는 그러한 느낌이 흘러넘치고 있는데 말이다. 사실 한쪽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쪽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엄숙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아드리아니로서는 길들여지지 않고 쾌활한 성격의 젊은 동료에게 편안함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궁정식의 장중한 품위를 유지하려는 아드리아니와는 달리 꾸밈없이 글쓰고 꾸밈없이 살아가고자 했던(매우 활기찬 성격의 소유자였던)것이다. 운이 따라서건 재능 덕분이건, 아니면 둘 다가 작용했건 간에, 어쨌든 마키아벨리가 서기장이 되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서기장이란 직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피렌체 공화국에는 제1서기장과 제2서기장이 있었는데, 비록 전자의 권위 또는 적어도 그의 영향력이 후자를 덮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가가가 제1서기국과 제2서기국을 책임지고 있었다. 원래 제1서기국은 대외 관계와 외교서신을, 제2서기국은 국내 관계와 전쟁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이 바뀌고 중첩되었다. 10인위원회가 기능하는 동안은 일의 일부가 그곳 서기국으로 이관되었는데, 제2서기국은 결국 10인위원회와 합쳐지거나 일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0인위원회와 합쳐지거나 일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0인위원회 역시 정무위원회가 제1서기국을 통해 그렇게 한 것처럼 외국에 파견된 사절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다시 관청들간의 일이 얼마나 뒤섞여 있는 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정무위원회가 시작한 외교 서신을 10인위원회가 이어받아 답하고 있는 경우까지도 보인다(두 관청의 서기장들은 각각 대외. 대내 관계 서신을 구분하는 비망록과 자료철을 가지고 있었다.) 두 기관 사이의 차이란 단지 각각이 실제로 맡은 일과 그것을 기록한 장부상의 차이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정무위원회와 10인 위원회는 사실상 종종 같은 기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 두 기관 사이에서 두 서기국은 내정, 외교, 전쟁 등 모든 일에 관여했으며, 더욱이 공화국 고위 장관들이 짧은 임기로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풀려나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서기국은 여러 번에 걸쳐 개편되었는데, 당시 가장 최근의 개편은 서기장 바르톨로메오 스칼라가 사망한 직후인 1498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른 주요 관직의 선임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제1서기국의 경우, 330피오니노 봉인금화를 연봉으로 받는 제1서기장에는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드리아니, 80피오리노 연봉의 서기보에는 안토니오 델라 발레가 임명되었다. 제2서기국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서기국 장의 임무를 동시에 관장하는 (정무위원회 서기장 il segretario della Signoria)으로서 연봉은 역시 봉인금활로 192피오리노였는데, 이는 대금화(대금화)로 따져서 128피오리노를 약간 상회하는 가치가 있었다.(피오리노 화폐는 원래 중세초에 은화로 제작되었으나, 1252년 금화 fiorino d'oro로 주조되었다. 이 금화의 앞면에는 피렌체의 수호 성인인 세례 요한상이, 뒷면에는 도시의 문장인 백합이 새겨져 있었다. largo(=fiorino d'oro in oro)이며, 다른 하나가 역시 본문 중에 언급되고 있는 봉인금화 fiorino di suggello(=소금화 fiorino piccolo)이다. 대금화란 말은 금화 둘레가 커져서 무게도 늘어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봉인금화란 말은 그것의 무게를 달고 질을 검사한 후 지갑이나 상자에다 넣어 봉인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이 당시의 화폐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R. Ridolfi, Opuscoli, p. 169 ; N. Machiavelli, Machiavelli and His Friends : Their Personal Correspondence, tr. & ed. by James B. Atkinson and David Sices (DeBalb., 1996), p. 440, n. 2 ; L. Martines, The social World of the Florentine Humanists 1390 - 1460 (Princeton, 1963, p. 128,m n. 154 ; E. R. Chamberlin, the world of the Italian Renaissance (London, 1982), Appendix I - 옮긴이). 그리고 서기보는 아코스티노 베스푸치와 안드레아 디 로몰로로서 가각 봉인금화 96 피오리노아 60피오리노의 연봉을 받았다. 이들은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를 비롯한 또 다른 서기보들과 함께 때로는 10인위원회 서기장을 보좌하곤 하였다. 이 10인위원회 서기국은 얼마 후인 7월 14일의 결의에 따라 마키아벨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무나 봉급 또는 부하 직원의 면면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다만 명목상 자신이 섬겨야 할 상급자를 10명 더 가지게 되었을 따름이다. 마키아벨리가 맡게 된 직책의 성격에 관해 당시의 전기 작가들이나 문필가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직책 자체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렵고 논란이 많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마키아벨리의 시대에조차도 일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았을뿐더러 그것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직책을 공화국의 제1서기장 직과 혼동하여 그를 살루타니, 브루니, 포초, 스칼라 등의 인물들과 같은 등급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잘못을 고친다면서 거꾸로 마키아벨리에게 부연된 직책의 중요성과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2서기국의 (책임자는 니콜라우스 마클라벨류스)라는 기록이 1500년의 서기국 공식 명부에 버젓이 올라 있으며, 1502년의 명부에는 좀더 명시적으로 그를 가리켜 직접 (제2서기장)이라 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법적인 측면을 넘어 실제적 측면에서 제2서기국의 장이었다.)고 말한 일급의 한 문학사가 비판하면서, 그가 (계속해서) 서기장 직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했던 앞서의 피렌체 서기국 연구가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어떤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판이야말로 거의 직관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수많은 학자들의 어리석은 주장들을 교정케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피렌체의 서기장 Segretario fiorentino)이란 호칭은 그가 쓴 서명들 중 하나를 글자 그대로 옮긴 것으로,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오랫동안 바로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인용되었으며, 마키아벨리라는 그 위대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호칭 아래 그의 저작들이 출판되었다. 살루타티도 브루니도, 비록 그들이 최고의 명성을 지닌 서기장으로서 살아 생전에는 이탈리아의 도시와 궁정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처럼 별칭으로 불리는 영예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영예는 지금 우리가 서기국의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음을 알게 된 바로 그 인물, 젊고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자신감과 재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 인물에게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동시와 이탈리아에 대해 (나 여기에 있노라!)라는 그 유명한 말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제3장 첫 번째의 사절 임무들 마키아벨리가 서기장 직에 취임한 당시, 피렌체인들의 주요 관심사는 피사의 탈환 문제였다. 서기국을 거쳐 나가는 대내외의 모든 일들 중 이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피사의 반란은 샤를 8세의 간여와 동의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피렌체인들은 무엇보다 그것을 상실케 한 원인이었던 왕으로부터 그 도시를 돌려받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뒤, 속았다가 것을 깨닫고 거꾸로 기회를 엿보다가 배반하는 긴 시간을 보낸 후, 결국 그들은 군사력으로 그것을 다시 빼앗고자 하였다. 만일 피렌체가 과중할 정도였던 대외적 욕심을 버리고 프랑스와의 끈끈한 밀착 관계를 포기함으로써 당시 샤를 8세에 대항하여 뭉쳐있던 이탈리아 국가들의 적의를 사지 않도록 했더라면, 피렌체의 피사 탈환은 쉽사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는 오랜 전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으며 또 사보나롤라도 설교에서 그것을 옹호했기 때문에, 피렌체의 입장은 확고하였다. 특히 사보나롤라의 친프랑스적 설교는 이탈리아 동대의 깃발 아래 교속(교속)의 양군대를 동원하고 있던 교황을 격분케 하였다. 결국 로마 교황청이 피사 탈환을 양해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거리를 둘 것과 사보나롤라의 목숨을 요구함으로써, 피렌체 정부와 교황청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대결의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 국면은 사보나롤라의 죽음으로 종결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당시 피렌체와 이탈리아 주요국들이 어쩐 관계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정책은 어떠 했는지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샤를 8세는 사보나롤라의 체포 하루 전에 죽었지만, 이로써 이탈리아의 평화와 운명에 대한 프랑스 군의 위협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전임자와 같이 두 시칠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는 말한 나위도 없고 할머니로부터의 계스권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밀라노 공이라고까지 칭함으로써(루이 12세의 조부인 루이 드 발로아는 1389년 밀라노의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첫 부인에게서 낳은 딸 발렌티나와 혼인하였다. 뒤에 1441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잔갈레아초의 손녀 비앙카 마리아와 결혼한 것을 기화로 밀라노를 장악하자, 루이는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 옮긴이) 자신의 심중을 일찌감치 드러낸 바 있었다. 따라서 알프스 이남의 보든 나라들은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반 샤를 ehdauod은 이미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이 후계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숙고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여러 나라가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피렌체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히지만 피렌체의 경우, 비록 새정부가 사보나롤라 정부의 극단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멀리하고 알프스 이북의 공허한 약속보다는 좀더 가까이서 믿을 만한 우방을 찾는 쪼긍로 방향을 잡고는 있어ㅗT지만, 프랑스 탐새게는 가장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승부에서 승리했고 그래서 더 이상 공의회도 샤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교황은 이제 이탈리아에서 가문의 영예를 키우는 쪽으로 자신의 생각을 돌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루이 12세의 호의와 도움이 필요했다. 그가 현재의 결혼생활을 청신하고 자신에게 형수 뻘 되는 죽은 샤를의 미망인과 혼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교황은(정신적 호의를 베풂으로써 그 대가로 세속적 권력을 얻으려는) 의도 아래 이 쉽지 않은 두 사안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이제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우호감을 by시하기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피렌체의 피사 탈환에 찬성할 뿐 아니라 베네치아의 동의를 얻도록 도와줄 용의까지도 있음을 피력하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흑안공(흑안공, II Moro : 스포츠차의 안색이 검다는 데서 유래한 별칭, 혹은 그의 미들 네임이 (Mauro)라는 데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일찍이 (완벽한 참주)라고 불렸던 인물 - 옮긴이) 로도비코 스포프차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렌체의 피사 탈환을 반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접 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을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보고있던 흑안공은 피사 문제에 대한 베네치아 공화국을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보고 있던 흑안공 피사 문제에 대한 베네치아의 간섭이 차후 더 큰 주장으로 가는 빌미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정책의 방향을 바꾸어 피렌체인들의 뜻에 찬성할 뿐 아니라 그 일이 성사되도록 도와주려고 작정하였다. 이는 특히 사보나롤라와 그 파당이 제거된 후, 정권이 좀더 믿을 만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데도 그 이유의 일단이 있었다. 물론 피렌체 공화국이 그에 대한 프랑스 왕의 적개심을 완화시켜 주거나 또는 왕과 베네치아의 세력에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렌체의 피사 탈환을 베네치아가 완강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은 이미 말한 대로이므로, 이제는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들이 피렌체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부연하는 것만이 남은 듯하다. 제노바와 시에나 같은 인접 공화국들은 피렌체와 오랜 적대 관계에 있었다. 부근의 루카 역시, 흑안공의 개입으로 겉으로 중립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이웃의 적대국이었다. 로마냐 지방의 경우, 볼로냐의 참주 벤티블리오와 이몰라 및 포를리의 여 참주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피렌체에 우호적이었다. 반면 라엔차는 베네치아 편에 서있었다. 다른 요인들이 끼어들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이 피사 주변에서 진행되던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 전쟁은 서기국에 자리를 잡은 마키아벨리의 일상적 관심사였으므로, 우리는 이에 관해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피렌체인들은 그 해 5월 산 레골로에서 작은 패배를 맛본 이후, 즉시 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던 파올로 비텔리를 군 사령관으로 부름과 동시에 로도비코 스포르창게데도 구원을 요청하였다. 스포르차는 중원군과 돈과 언약으로 공개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고, 교황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만 약속에 그치고 말았다. 1498년 6월 1일 엄숙히 지휘봉을 잡은 새로운 지휘관은 곧 활기차게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때까지 피사가 굳게 지켜왔던 부티, 비코피사노, 리브라파타를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협상을 통해 차지하였다. 베네치아는 직접 원군을 보내거나 또는 견제 공격으로 피사를 도우려 했지만, 가르파냐나로 진군하려던 시도가 좌절되고 로마냐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Tdmu 시에나와 페루자를 통해 군대를 보내려는 계획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베네치아는 파엔차를 경유하여 카젠티노에서 전투를 벌여 드디어 10월께는 비삐에나와 몇 개의 성채를 손에 넣었다. 이는 피렌체로서는 영토의 심장부를 위협받는 결과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피사로부터 비텔리가 소환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물론이고 망명 상태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던 피에로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는 그 해 겨울이 우울하고 쓸쓸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력한 적군과 대치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동시에 그보다 더 강하고 적대적인 날씨라는 자연 현상에 대처해야만 하는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영토 획득을 열망한 피렌체인들 만큼의 강력한 동기를 갖지 못한 베네치아인들은 먼 곳에서의 전쟁에서 힘을 소모한 데 지친 나머지, 결국 페라라 공이 마련한 타협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피렌체는 피사에 대해 단지 제한된 지배권밖에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베네치아는 그들대로 이를 치욕으로 생각하였다. 이 중재안은 또 피렌체가 베네치아에 상당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정해 놓았는데, 후자로서는 이 액수가 불명예의 대가로는 충분치 못한 것이었던 반면, 전자로서는 배상금 지급이 옳지도 않을뿐더러 참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흑안공에 대항하여 프랑스 왕과 연합 관계에 있던 산 마르코 공화국(베네치아를 일컬음 - 옮긴이)이 그들에게 좀더 직접적이고 이익이 되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비록 조약 자체는 거부했지만 공교롭게도 조약에서 약정된 시간에 맞추어 자국군을 철수시켜 버렸다. 이로써 피렌체는 이제 모든 세력에게서 버림받은 상태였던 피사에 자신의 모든 전투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망록 속의 마키아벨리 자필 편지나, 또는 보좌직에게 구술시키든지 그들에게 직접 쓰도록 한, 제2서기국과 10인위원회의 문서보관소를 가득 채우고 잇는 편지들을 통해 이 전쟁의 추이를 따라가는 일은 쉽지만, 동일한 비망록과 문서철 속에서 서기장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기란 매우 어렵다. 설사 편지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매일 매일의 편지들만을 검토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더욱이, 장관들의 이름으로 씌어졌던 이러한 편지들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의 것인지를 알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암도 때로는 편지의 형식에만 간여했을 것이지만, 또 때로는 그 내용에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서기국을 둘러싼 비밀의 벽을 뚫고 마키아벨리의 재능이 한껏 빛을 발하는 경우는 특정한 군사. 정치 문제에 관해 장관에게 사실을 알거나 혹은 자문에 응하기 위해 쓴 보고서에서이다. 한 예로서 (피사 전쟁 논고 Discorso della guerra di Pisa)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피렌체가 베네치아로부터 스스로의 옆구리를 노리던 칼을 빼앗은 뒤 새로운 다짐으로 피사 탈환의 시도를 재개한 때인 바로 이 당시, 더 정확히 말하면 1499년 5월에 씌어진 것이었다. 명석학도 치밀하며 힘찬 느낌을 주는 이 글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마키아벨리 최초의 정치 저술로서 이미 사자의 발톱 같은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장군들과 그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데서 나타나는 명쾌성, 날카로운 판단력, 다부진 문체의 이 저술을 읽노라면, 정무위원회가 왜 날이 갈수록 그 서기장을 신임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서기장들은 이와는 다른 방식의 일까지도 하곤 했다. 때때로 그들에게는 위임업무나 나아가서는 사절의 임무까지도 부여되었는데, 이는 경비 절감이나 일의 성격상, 또는 어떤 긴급한 이유 때문에 정식으로 대사를 보내기가 마땅치 않을 때 그러하였다. 이때 서기장에게 붙은 호칭은 공식 대사를 뜻하는 암바쉬아토레 ambasiciatore나 오라토레oratore가 아니라 그냥 대리인의 의미를 지닌 만다타리오 mandatario였다. 그들의 임무는 평화 조약이나 동맹 관계에 관해 협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관측하고 보고하거나, 중성이 덜하면서도 긴급을 요하는 일을 처리하거나, 절차에 따라 선출될 대사에 앞선 예비 작업을 하는 것또는 이 대사들을 수행하고 보좌하며 조연하는 동시에 그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종류로 처음 맡은 임무는 당시까지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던 피사 전재에 관련된 긋오 그 기간이 얼마 소요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피옴비노의 참주이자 피렌체의 용병 대장들 중 하나였던 야코포 다피아노에게로 보내졌는데, 당시 그는 급료 인상과 지휘권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자신이 문서 속에서 밝힌 유명한 판단에 따르자면, (말을 잘하지만 결단력이 없으며 행동은 더 형편없는) 이 소참두와 그사이에 일었던 일의 결과는 우리에게 알려져 잇는 그대로다. 그는 첫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종전의 액수로 유지하도록 하고 두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그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언질을 줌으로써 사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7월 12일, 그는 좀더 중요한 두 번째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 역시 피사 전쟁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가 만난 인물은 이몰라와 포를리의 백작이자 흑안공의 서출 질녀인 카테리나 스포르차였는데, 임무는 전년도의 15,000피오리노의 급료를 받고 피렌체를 위해 싸웠던 그녀의 막내아들 오타비아노 리아리오와의 용병 계약 건이었다. 작년 말, 그는 선택 사항이었던 다음 해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백작은 그녀의 아저씨는 물론 자신의 머리 위로까지 몰려드는 구름떼를 보면서도 짐짓 속을 숨긴 채, 그 계약 건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문의하였다. 피렌체는 어머니를 자기 편으로 삼기 위해 그 아들을 한 해 더 고용하려고 했지만, 급료로는 10,000피오리노만을 계상하고 있었다. 피렌체가 마키아벨리를 보내 협상코자 한 것은, 유는한 지휘관을 갖춘 500면의 정예 보병대를 확보하고, 가능하다면 피사 전쟁에 쓰일 포탄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히지만 피렌체인드로서는 무엇보다도 인접 지역에 위치하여 그들 나라를 방어하거나 또는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는 요새로 이용될 수 도 있는 백작광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13일 피레체를 떠난 마키아벨리는 카스트로카로에서 멈추어, 그곳의 군수품 사정과 초병 활동에 관해 정무위원회에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15일 포를리에 도착한 그는 백작을 알현하였다. 아직은 무명인 이 위대한 정치가 앞에 로마냐의 작고 소란스런 국가를 통치하면서 달련된, 아름다운 몸과 드높은 기상으로 유명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성벽 위에서는 어떤 남성보다도 더 식씩하고 침실에서는 또 어떤 여자보다도 더 뜨거웠던 그녀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첫 남편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잃고도, 당당하게 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와 아이들을 위하여 나라를 지켜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남편 역시 살해되자, 그녀는 다시 한번 가차없이 복수하였다. 36세의 나이로 재차 미망인 된 그녀는 조반니 데 메디치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았는데, 그와의 사이에,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고 스포르차 가계의 호전적 기질과 더불어 어머니의 거침없이 사나운 성격을 이어받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 - 옮긴이). 지금은 옆방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협상을 진행중인 그 피렌체의 서기장은 앞으로 언젠가 이 젊은이에게 이탈리아의 마지막 희망을 실은 깃발을 치켜들도록 요청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의 서기장이 이 여장부 앞에 나아갔을 때, 조언이 목적인지 아니면 감독이나 지시가 목적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친척이 보낸 사절과 함께 있었다. 그녀의 친척인 밀라나 공은 다시 교황의 버림을 받은 데다, 최근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진 못하던 피렌치인들과도 사실상 멀어진 상태에서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프랑스군이 눈사태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병사와 그 외 전쟁 물자 조달이 화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한 협상에서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경쟁 상대인 셈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백작에게 자신의 이두를 얘기하자, (피렌체인들은 언제나 말을 그럴 듯하게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시원치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는데, 이러한 반응은 당시의 피렌체인들이 흔히 접하던 것이었다. 그는 또한 그녀가 밀라노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자산의 제의에 대한 답을 곧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바로 그 다음 며칠 동안 몇 가지 대답을 받았으므로 앞의 약속 자체는 잘 지켜진 셈이었지만, 그 대답들이라는 것이 각각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데 대해서는 (일이란 더 많이 논의될수록 더 잘 알게 되는 법) 이라는 말로 정당화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백작이 (잰 체하고 )있다고 피렌체에 전갈을 보냈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 밀라노의 사절이 지키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계속해서 밀라노로 떠났다. 탄약도 여분이 없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런 상황 아래 시국에서는 아드리아니가 전투 인력의 수급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기보인 보오나코르시는 (계약서를 그 귀부인의 코앞에 들이밀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니 물러설 수밖에! 마키아벨리에게는 마치 악마가 살아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잇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내 12,000피오리노의 급료를 주기로 하고 합의문에 막 서명하려는 찰나, 그녀는 피렌체가 자국 방어를 서면으로 약속해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하지만 피렌체로서는 원래 그것을 다만 말로써 약속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변덕에 접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노한 감정을 더 이상 (말과 제스처로만)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일을 끝맺지 않은 상태로 둔 채 즉시 피렌체로 떠나버렸다. 피렌체에서는 그와 그의 편지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마키아벨리가 보낸 편지들로부터 내가 보기에 핵심적 사항이라 생각되는 사실들을 추론해 낸 것이리라. 만일 백작이 사태를 관망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이는 피렌체인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일이될것인데, 왜냐하면 그 귀부인의 호의와 군대를 얻으려는 다툼에서 시간과 프랑스 왕이야말로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키아벨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그는 그녀의 아저씨인 밀라노 공이 베네치안 군과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프랑스의 막강한 군대 상이게 일단 갇히게 되면 그녀도 더 이상 (잰 체하지)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비록 그 잘난 여인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야릇한 미소가 결코 그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8월 1일 피렌체로 돌아온 마키아벨리는 평상시와 같이 다시 서기국 업무에 매달렸다. 부오나코르시가 포를리에서 그에게 보낸 편지들을 믿는다면, 서기국에서는 그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피사 근교에서의 전투가 다시 가열됨에 따라 업무량도 폭주하고 잇는 상태였다. 마키아벨리가 돌아오던 바로 그날 피사 바로 아래의 진을 치고 있던 피렌체 군은 8월 6일 대포로 성벽을 40브라차(토스카나의 면적 단위로 1braccia는 약 0.3364 제곱 미터 - 옮긴이) 가량 부수었고, 10일에는 로카 디스탐파체 요새를 빼앗았다. 이곳을 빼앗김으로서 도시를 피렌체군에 열어줄 지경에 이르자, 모두가 도망할 궁리를 할 정도로 겁에 질린 피사인들은 항복 조건을 협상하기 위한 대표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적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몰랐던 비텔리는 아직 전투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승리가 눈앞에 다가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 군대를 퇴각시켜 버렸다. 그날과 다음날이 지나갈 때까지도 공격의 징조가 보이지 않자 피사인들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물론 성벽 사이의 부서진 틈으로 비텔리가 잃어버린 기회를 다시 되찾을 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하지만 공격을 재촉하는 정무위원회의 편지(이 중에는(엣소르타토리아 풀케리아 exhortatoria pulcherrima) 가장 아름다운 격문이라는 뜻 - 옮긴이)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이는 제2서기국 문서 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록 마키아벨리의 자필은 아니지만 그가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에도 불구하고, 비텔리는 사태를 좀더 지켜보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말라리아로 병력이 크게 손실을 입자, 9월 14일 포위망을 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표시하였다. 한동안 도시는 전쟁 비용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 5월이래, 1499년 후반기 동안 봉직할 10인위원회의 새로운 위원들이 선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위원회가 도저히 수행 불가능한 전쟁에 공금을 낭비했다는 오명 때문이었다. 결국 정무위원회가 공석중인 위원회의 역할을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카아벨리의 일이 바뀌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10인위원회의 위원들이 임명되지는 않았지만 위원회 자체는 존재하고 있었고, 또 그 서기국은 오히려 더 바빠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실제에 있어 10인위원회의 서기국은 제2서기국과 거의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참을성 잇게 기다리는 파울로 비텔리의 시중한 성격은 조바심을 자 치는 피렌체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의 비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탐파체 사건 이후로는 설사 남을 덜 의심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를 그토록 유명한 용병 대장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허 능력 없고 비겁하다고 욕했을 법하다. 더욱이 이곳은 피렌체가 이니던가. 급기야 사람들은 그의 배반을 입에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앞서의 촉구성 편지에 뒤이어 또다시 비난조의 편지들이 비텔리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역시 마키아벨리에 의해 구술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정과 불신이 극에 달해, 이에 놀란 비텔 리가 피사를 재차 공략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냉담한 반응밖에 얻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조바키노 과스코니를 수반으로 새롭게 바뀐 정무위원회는 무언가 일이 진행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토록 녹초가 딘 시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지휘관이 이끄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비용을 더 부담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들 중도에 해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들이 정무위원회에서 극비로 처리되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그의 편지들을 통해 우리의 서기장이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물론우리는 당시 정무위원들(원문에서는 (Signori)라는 용어를 상용하고 있으나 이는 (priori)와 동일한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 중 하나가 그의 혈족으로서 알레싼드로의 아들인 또하나의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올로 비텔리를 벌하기 위해 취해진 마키아벨리주의적 방법이 우리의 마키아벨리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카쉬나로 소환된 비텔리는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그의 동생 비텔로초는 용케 빠져나갔지만 결국은 뒤에 더 전문적인 추적자에 의해 똑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파올로는 피렌체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가 정말 결백해서인지 아니면 용감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고 버티다가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정의를 내세워 무자비함에 대해 d\그것은 명백한 불의에 불과하다고 말할 사람도 잇겠지만, 어쨌거나 피렌체인들은 그러한 조치에 크게 만족하였다. 곤팔로니에레와 그 휘하의 관리들은 큰 칭송을 들었다. 그토록 세련되고 예의에 밝은 이 사람들의 정신 깊숙한 곳에서 잔혹한 어떤 기원(앞서 말한 바처럼)이 한 줄기 섬광처럼 솟아올랐던 것이다. 이 평시민 공화국은 그야말로 기꺼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한 whdawkda군을 시범적으로 처단할 만큼 본보기를 중요시하였다. 귀족 공화국이었던 베네치아가 카르마뇰라에게 가한 조치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일의 진행 방식이 일종의 예술 작품과 같은 것이었고, 당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한 국가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 마키아벨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건 간에, 비텔리 건을 가혹하다고 비난한 한 루카 서기장의 편지를 가로채 보고는, 스스로를 공화국 (대변인)으로 간주하는 서기장의 전통에 따라 그것에 격렬히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피렌체인들은, 비록 사람과 상황은 다를지라도, 사보나롤라의 경우에서 보는 것 같은 사악한 조치들을 가차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이 파올로 비텔리의 목을 도끼로 자른 행위는 반드시 정의를 세우려는 것보다는 당시 도시를 옭아매고 잇던 매듭을 잘라버리려고 한 데에 그 본위가 있었다. 일단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자,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은 이미 이탈리아로 들어와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도비코 스포르차는 빨리 몸을 피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방어책도 생각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롬바르디아의 큰 도시들도 차례차례 침입자의 손으로 떨어져갔다. 그리하여 흑안공은 결국 5년 전의 자산의 손으로 프랑스 군을 이탈리아에 불러들임으로써 스스로 자초했던 눈사태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흑안공이 도주한 지 20일이 채 되지 않아 밀라노와 공국 전체가 프랑스 왕의 손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흑안공과 왕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피렌체는 급히 환영을 표하였고 비록 시기를 놓쳐 조건이 더 나빠지긴 했지만 승리한 쪽과 동맹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왕의 군대를 빌려 피사를 재탈환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지친 상태였던 피렌체인들은 이로써 다시 거액의 돈을 지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자비로 피사를 공략하려 하는 피렌체인들을 돕기 전에,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추기경이었다가 뒤에 발랑타노아의 전사이자 공작이 된 체사레 보르자를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이는 교황이 왕의 이혼을 특별히 허락해 준 데 대한 보상이었다. 발렌티노(우리는 앞으로 보르자를 이렇게 부르기로 하겠다)는 교회의 군세에다 프랑스 군 원병을 보태고, 여기다가 왕의 이름과 깃발까지 빌린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쉽사리 이몰라와 프를리를 차례로 손에 넣었다. 비록 백작의 용기가 (여자의 가슴처럼 조바심치던 많은 수비군들 틈에서 남성적 기백으로 뭉쳐져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를 자신들의 보호아래 두고 있던 피렌체인들로서는 이는 결코 적지 않은 굴욕이엇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처럼 위험천만한 세력을 이웃에 두게 되었다는 불안감이었다. 프랑스의 욕심은 피렌체인들에게 잠시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왕은 폐위된 흑안공이 공화국에 빌려준 돈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정무위원회는 마키아벨리를 밀라노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월 27일자 편지들을 통해 이미 그가 도착하리라는 사실이 트리불치오의 총독과, 막강한 루앙 추기경의 비서인 뤼숑 주교에서 전달되었으며, 2월 5일에는 사절의 신임장이 작성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 흑안공의 동생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이 밀라노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으며 더욱이 흑안공 자신이 스위스와 독일의 정병을 이끌고 그곳으로 오는 도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죠T다. 그러자 피렌체는 마키아벨리의 출발을 취소하고 사태의 추이를 좀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흑안공은 놀라운 속도로 자신이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지만 왕이 되돌아오고 스위스 용병들이 배신하는 통에 빼앗았던 것을 더 빨리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스스로의 자유까지도 상실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인물의 생각과 야망이 이제 좁은 감옥의 틀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던 거이다.) 이로써 피렌체인드의 피사 공략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이제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 그란 동시에 피렌체는 프랑스인들이 원하는 조건과 돈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때는 용명을 날린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만 악명만을 가진 스위스 군대, 즉 왕의 가스코뉴 보병이 6월 초하루 보몽의 지휘 아래 피아첸차를 떠나 피렌체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피렌체 공화국의 부담 아래 볼로냐의 참주를 한번 쥐어짜 보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마키아벨리는 벤티볼리오(볼로냐의 참주 - 옮긴이)의 적벽 성채를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군대를 이끌고 지나는 길에, 보몽은 벽돌을 몇 개씩이나 빼버렸네. 그 동안 피렌체는 피사 공략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고 있었다. 돈은 기대했던 것보다 잘 걷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롬바르디아 지방 전체를 단 며칠만에 쉽사리 장악했던, 그토록 두려움의 대명사였던 군대가 그 동안의 저항으로 지칠 대로 지친 도시의 성벽 앞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싸움은 끝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6월 10일, 피렌체는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루니자나까지 들어온 보몽에게 두 명의 전권 대사를 보냈다. 그들은 푸카 델리 알비치와 조밤바티스타 리돌피였는데, 특히 후자는 당시 공화국에서 최고위직에 잇던 사려 깊은 인물로 여론과는 달리 피사 공략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그들을 보좌하였는데, 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하루는 전장에서 공사가 10인위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다른 날은 사무실에서 거꾸로 10인위원회가 대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6월 22일 피렌체에서 편지를 구술하고 있었으나, 24일에는 (그 무시무시한 프랑스 군영에서) 알비치의 서명이 달린 편지를 직접 쓰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군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는데,그것은 그들의 적이었던 피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고용한 피렌체에 대해 그러하였다. 흑안공이 최근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스위스 용병이 오히려 그들을 고용한 쪽에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병사들은 훈련되지 않고 광폭한 데다 장군이란 자는 능력과 권위가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여기에다 군인들이 양식을 낭비하거나 숨기는 등의 탐욕과 악의를 자행함으로써 식량이 부족해지자, 곧 난동 사건들이 거의 매일같이 발생하였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원래 아픈 상태에다, 보몽에게도 스스로 말했듯이 몸과 마음이 다 괴로워진 리돌피는 그만 피렌체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사태가 곧 그들이 프랑스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자신의 말이 얼마나 옳은 것이었던가를 입증한다고 주장하였다. 군영에 홀로 남은 알비치와 마키아벨리는 난동을 부리는 병사들을 제어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 군이 이렇듯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 느긋하게 전투 준비랍시고 하고 있을 때, 피사의 사절이 군영에 도착하여 도시를 피린체에 넘겨주는 것을 연기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프랑스 군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이미 이와 유사한 제의가 있긴 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피사인들이 유예 기간으로 넉 달을 요구했던 반면, 이제 군대가 성벽 바로 밑에까지 이르자 그 기간이 단 한 달로 줄어들었다. 보몽은 이러한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마키아벨리의 의견과는 달리 피렌체측 사절이 결렬한 어조로 이에 단호히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6월 30일 성벽을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전황은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는데, 왜냐하면 이 (무시무시한) 군대는 결코 자신들이 식량 보급대를 공격할 때와 같은 기백으로 성 안을 향해 진격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닌 무적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섰다. 진실은 알려졌네. 어찌하면 프랑스인들도 패배할 수 있는가가. 성벽 아래에서의 이러한 한심한 행동 이후에도 병사들의 불손함은 꺽이기는커녕 오히려 켜져 갔으며, 따라서 난동 사태는 나날이 더 악화되어 갔다. 결국 가스코뉴 보병들이 먼저 엉뚱하게 급료가 적다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이어 7월 9일 일단의 스위스 병사들이 전체의 묵인 하에 반란을 일으켜 피렌체 사작을 감금해 벼렸다. 마키아벨리는 그 지옥 같은 난동 속에서도 굽힘없이 그와 함께 있으려 했으나, 알비치는 (피렌체로 돌아가 이 일을 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곧 이를 짤막하지만 격동적인 어조의 편지에 담았다. 몇 시간 후 사절은 스스로 1,300두카토를 몸값으로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 난폭한 행위를 끝으로 수위스 병사들은 떠나가 버렸고, 이로 인해 그토록 손쉽고도 빨리 해렬되리라 생각했던 일이 졸지에 왕에게는 불명에를, 피렌체인들에게는 손해와 조롱 거리를 남기고 끝나 버렸다. 군대가 철수하는 데서 새로이 힘을 얻은 피사인들이 점점 저항에 성공하기 시작하자, 피렌체로서는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불평을 토로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손볼 수 있을지를 알아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 임무를 맡기기 위해 그들은 알비치에 이어 피사 공략전에 파견되었던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와 함께, 이 일의 진행 과장을 가장 소상히 아는 인물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선임하였다. 제4장 첫 프랑스 사절 시기 니콜로가 피사에서의 위험한 임무를 위해 출발하던 5월 10일 바로 그날에, 그는 아버지를 잃엇다. 어머니는 4년 전인 1496년 10월 11이레 세상을 떠났다. 누나들은 이미 결혼을 해서 프란체스코 베르나치와 베르나르도 미네르베티라는 남편을 맞았다.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은 단지 남동생인 토토뿐이었는데, 그는 사제의 길을 택하였거나 혹은 그러려고 하고 있었다. 분명히 니콜로는 아버지를 잃은 누구나가 그러한 것보다 그의 공백을 더욱 뚜렷이 느꼈을 것이며, 일생 중 그대로 고통이 덜한 때를 생각하며 달래게 마련인 충격의 흔적은 더 무겁게 그의 말음을 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메쎄르 베르나르도와 니콜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다. 둘은 익살맞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거의 형제 사이와 같이 가까웠으며, 서로간에 말이나 글로, 또는 산문이나 시로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니콜로는 아버지가 운명한 후 그가 썼던 사물(사물)과 일찍이 자신의 어린마음을 담아두었던 손때 묻은 책들을 정리하다가, 이런저런 것들 사이에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써 보낸 소네트 한편을 발견하였다. 이 시는 그가 시골의 아버지에게서 살찐 거위 한 마리를 받았을 때 썼던 것이었다. 메쎄르 베르나르도는 아들이 시내에서 바쁜 나머지 말리비틀어 진 육포와 건과로, 혹은 (빵과 나이프)만으로 식사를 대충 때우고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한 달 도 더 넘게 호두와 무화과와 콩과 육포를 먹고 살았네. 그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네 오랬동안 그곳에 그렇게 머문다는 것이. 마치 피레솔레의 황소가 굶주린 채로 제 콧등을 핥으며 아르노 강을 내려다보듯이, 야채 가게 여주인의 달걀과 푸줏간의 양고기, 쇠고기를 쳐다보고난 있었지. (...) 그러다 마침내, 나의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사 보내셨지 오리와 거위를. 당신께서는 잡숫지 않으시고. 이젠 고인이 된 베르나르도여! 그의 위대한 니콜로는 그가 운명한 후에도 여전히 애정 어린 친근함으로 또 다른 농담을 던질지니. 1504년경이었던가. 산타 크레체의 한 수도사가 와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마키아벨리 가의 묘역에 불법적으로 다른 사람이 묘를 썼으니 빨리 그것을 옮기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니콜로는 (그 수도사의 장광설에 대해 ) 이렇게 답하였다. (뭐 그대로 두시구려. 제 부친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이셨으니, 동무가 많을수록 더 좋아하실 테니까요.) 그러한 농담 속에서 우리는 불경함을 느끼기보다는 다른 준은 이들을 향한 동정심을 본다. 그것은 불손함도 무관심도 아니다. 그것은 몇 년후, 일찍이 아버지가 교회에 기증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던 것을 이행했을 때 보여준, 그의 위대함에 걸맞는 커다란 관용의 마음이며 후하고 너그러운 품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니콜로는 바삐 돌아가는 공무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는 사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얼마 되지 않은 유산이지만 그것을 동생인 토토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의논할 틈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베르나르도가 운명한 당시는 서기국이 피사 원정을 준비하느라 허둥대고 있을 때였으며, 얼마 후 그도 사절과 함께 전장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다음 임지로 가야만 했는데, 이번 목적지는 프랑스였다. 마키아벨리에게 이는 첫 해의 임무이자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든 경력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피사 원정에서 진짜로 얻은 것은(그 일에 쏟은 노고와 그 과정에서 겪은 위엄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6피오리노 금화가 아니라, 바로 이 여행 그 자체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가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토스카나 밖에 나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그는 가방 속에,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I Commentari)를 놓고 외국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 호기심 많은 관찰자에게 외국 사람들이란 마치 막 첫장을 펼친 책처럼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미지의 대상이었다. 자시의 고향 피렌체는 마키차벨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알프스 이북의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었음에 틀림없지만, 아직까지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바로 그 민족들이 이제는 거꾸로 피렌체와 이탈리아에, 그리고 특히 마키아벨리라는 천재 정치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차례였다. 그들은 강력한 통일성에서 나왔다. 그들은 복종의 관습에 잘 적응되어 있었고 자국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주의 이름 아래 뭉쳐 있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은 이미 프랑스 대사로 프란체스코 괄테로티와 로렌초 렌치를 파견해 놓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카사와 마키아벨리가 도착한 후에도 그곳에 남아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특별 사절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두사람이 만다타리오로 지칭되고는 있었지만( 이 책 54쪽의 사절 명치 참조 - 옮긴이), 이번의 파견은 7월 18일자 결의 사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델라 카사와 마키아벨리는 지위와 권위의 측면에서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전자가 나이나 신분 면에서 위인 데다가 공문서에서 먼저 거명되었고 사절 신임장의 말미에 먼저 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점들이 그들 사이의 우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신임장의 내용도 모두 마키아벨 리가 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기 작가나 문학사가들은 둘의 봉급이 다르다는 사실에 오도되어 이러한 점을 잘 알지 목하고 있었다. 카사의 경우 매일 8리라(즉 당시의 가치로 따져서 1과 3분의 1 피오리노 금화)와 일당을 받은 반면 마키아벨리는 4리라를 받앗다. 빌라리는 후자가 (더 하급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봉급을 반밖에 못 받은 것인가? 사실은 이러하다. 델라 카사는 국가로부터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급료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사절 선임 과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공화국이 그가 받기로 되어 있던 특별 수당에서 서기국의 관습에 따라 (그의 정상 급여)를 감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가외의 급료를 더 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무위원회 판단으로는, 그들 자신의 변명과 불만이 남들의 불만과 비난보다 먼저 왕국에 전달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래서 대사들에게 훈련을 전하기에 앞서 이러한 점을 빨리 주지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그들이 받은 지시는 이랬다. (힘이 닿는 한말에서 내리지 말고 가능한 빨리 가라.) 이에 따라 그들은 7워 18일에 목적지로 출발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여행 속도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볼로냐에서 멈추었는데, 이는 정무위원회의 명령으로 벤티볼리오와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파르마에서 피아첸차로 가는 동안, 그들은 피사의 진지에서 이탈한 천여 명의 스위스 병사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에 대한 앞서의 경험도 잇고 해서, 부득이하게 그들을 피해 우회로를 택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러한 상황은 마키아벨리의 여정을 지연시키기보다는 더 재촉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지만 (혼란과 사고) 때문에 두 사절은 도중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일에 대한 열의로 충만되어) 그들이 리용에 도착한 때는 7월 26일었다. 앞서부터 그곳에 상주해 있었던 두 명의 대사 중에 괄테로티는 이미 이탈리아로 떠난 상태였고 렌치는 왕국의 분위기와 임무 수행의 방법에 대한 특별 정보를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극소에 남아 있었다. 원래 그에게는 사절들을 왕에 알현케 해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마키아벨리 일행이 도착하기전에 이미 리용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렌치는 귀국길로부터 더 멀어지는 여행에는 더 이상 같이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사실 그는, (스스로 피렌체에 보고했듯이 이제 (어떤 큰 일도 다룰 수 있는 )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 직후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동안 신임 사저들의 열의는 리용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원래 아무것도 없이 역마로 달려왔기 때문에, 말이며 하인이며 옷가지들을 그속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공화국은 사절들에게 그리 넉넉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일행은 떠나기 전에 선금으로 각자 80피오리노씩 지급받았으나, 한 주 만에 각자가 쓴 돈이 벌써 30피오리노에 달했다. 이는 무려 22일분의 급료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리하여 리용에서 머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졍부로부터 받은 현금은 모두 바닥이 났으며, 그들이 개인적으로 가져온 돈까지도 상당액을 써버린 상태였다. 아니, 그들은 결코 프랑스 땅에서 여유로울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7월 30일, 결국 그들은 스스로 왕의 일행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타고 왔던 말은 그에 지불된 돈만큼의 힘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왕은 당시 시골에 만연하고 있던 역병을 피해서 요리조리 신속하게 길을 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5일, 그들은 생피에르 르 쿠티에에 가 가 있었으며, 따라서 네베에 머물고 있던 왕을 거의 따라잡을 뻔하였다. 그들은 그 조그만 마을에서 정무위원회에 보내는 각자의 편지를 썼다. 마키아벨리는 이 편지 속에서 (슬쩍) 자신의 개인적 요구 사항을 담은 편지를 끼워넣었다. 그 내용은 그나 동료나 둘 다 쓰는 돈이 다를 바 없으니 자신의 급료를 동료와 똑같이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어조는 자못 대담하다.(만일 제가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저 역시 프란체스코만큼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다달이 저에게 지급되는 20두카토가 쓸데없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혹시라도 뒤의 경우가 맞다면, 원컨대 저를 소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사절들은 (모든 불편과 감염의 두려움도 뒤로 한 채) 드디어 네베에서 왕의 일행과 만났다. 그들은 도착 즉시 루앙을 접견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 말을 빌린다면, 우리가 이후로 전능의 조르주 당브와즈이며 루앙의 추기경이라 부를 인물이었다. 추기경과, 그를 통해 그 직후 만난 왕과의 첫 대면은 솔직하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왕이든 장관이든 어느 구구도 피사 공략에서 나타난 무질서한 상황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임무의 핵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프랑스인들에게는 단지 수치일 분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인 즉, 피렌체인들에게는 일단의 책임이 있으며 자신들 역시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이미 과거사이므로 지금부터는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왕의 명예를 되찾고 공화국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애써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프랑스어와 궁정 라틴어를 섞어가면서 말했지만, 그것을 보통의 피렌체 말로 옮기면 결국 왕 군대의 유지비용을 여전히 피렌체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절의 고민은 그들의 용건이 끝난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즉 그들이 온 것은 단지 피사 건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하고 상대방에게 잘못을 전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들은 공화국이 전쟁을 계속할 돈도 그와 같은 군대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할 의사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 스스로가 피사 공략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중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왕과 그를 둘러싼 장관들은 즉각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반란과 도주의 오명을 얻은 스위스 군에 대한 급료는 여전히 피렌체인들의 몫이기 때문에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뼈있는 말들이 오가자, 이야기는 처음과는 달리 냉랭한 분위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피렌체 사절들을 물러가게 하면서, 왕은 앞으로 3일쯤 뒤에 몽타르지에 머물 테니 그곳으로 좀더 나은 제안을 들고 오기 바란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들은 8월 10일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곧 여전히 앞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루앙과 언쟁을 벌였다. 그들간의 대화는 거의 언제나 귀머거리들이 논쟁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각각의 상대방의 의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싫증날 정도로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피렌체인들을 비난하였다. 첫째, 마키아벨리가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듯이, 왕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피렌체인의 돈으로 피사 전투를 계속하려 하지 않는 것. 둘째, 스위스 군이 피사 공략에서 이탈한 후 그들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 셋째, 스위스 군 사건 이후 왕의 다른 군대가 피렌체의 영토내로 들어가는 것을 거절한 것. 마키아벨리는 정무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정무위원님들께서는 결코 훌륭한 편지나 달변의 연설들이 유용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도시가 프랑스 왕가에 보여온 신뢰감이나, 전왕의 시대에 했던 일들, 우리가 그 동안 쓴 돈, 그 동안 겪었던 위험, 얼마나 자주 헛되이 돈을 썼는지, 최근의 사건들과 우리의 힘이 커짐으로써 왕의 권력은 이탈리아 내에서 오히려 안전하게 확보되리라는 것,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은 믿기 힘들다는 것들을 아무리 얘기하려 해봐야 모든 것이 헛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문제들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그곳 상황에 어두운 사람들이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과 현재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있으며 오직 군세를 갖추거나 돈을 줄 것 같은 자들만을 높이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미 지쳐서 합리적인 선 이상을 넘지 않으려는 공화국이란 모루와,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챙길 뿐인 왕이란 망치 사이(모루 incudine와 망치 martello의 비유는 진퇴양난을 뜻하는 이탈리아식 표현임 - 옮긴이)에서, 그리고 급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왕궁과 대답을 거의 내놓으려 하지 않는 정무위원회 사이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이 다니지 불충분하고 보상도 없는 위임적 위치에 서 있던 두 사절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지옥과 같이 느껴졌으며 결국은 사태가 조국의 파멸로 끝날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인들의 요구를 무언가 받아줄 만한 아무런 권한도 지니지 못한 우리의 계급과 위신으로 침몰 직전의 상황을 다시 되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에) 신임 전권 대사를 보내는 거시 필요하며, 덧붙여(새로운 제안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그것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헛일이었다. 사절들의 불안감은 필요시 특별 전령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궁한 당시의 처지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결국 다시 재촉한 끝에 급료를 올려 받게 되었다. 이는 동생인 토토의 노력과 곤팔로니에레의 호의 덕분이었다. 이 소식을 먼저 전해 준 것은 바로 토토였다. 이 결과 겉으로 보아 마키아벨리의 수당은 동료와 같아졌지만, 그가 정상적으로 받는 봉급까지 계산에 넣을 때 사실상 그는 훨씬 더 많은 수입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그는 또 그 같은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얘기된 바이지만, 사절의 협상 과장에 대한 명문의 편지들도 모두 바로 그의 자필로 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인정받고 있는 것은 필체보다는 문체 쪽이다. 피렌체에서 그 편지들은 큰 찬사를 받았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찬사는 어느 날 그러한 찬사를 전해 들은 진실된 성품의 부오나코르시가 그 편지들이 얼마나 쉽고도 명쾌하게 씌어졌는가를 이야기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이와 같은 수입의 증대와 피렌체인들의 찬사 덕분에 그는 프랑스에서 겪고 잇던 고통을 일부나마 덜게 되었다. 그에게는 친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절친한 부오나코르시의 편지가 역시 큰 위안이 되었는데, 그는 니콜로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 서기국의 용병들 중에서도) ((용병 glistradiotti)이란 원래 16세기 당시 베네치아가 고용한 마케도니아 혹은 슬라브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아마도 서기국 관리끼리 스스로를 지칭하는 일종의 속어인 것으로 생각된다 - 옮긴이) 그 이상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한껏 우쭐해 있었다. 물론 니콜로는 다른 (용병들)의 추신이 달린 다정하고 유쾌한 편지들도 받았는데, 모두가 그가 없는 사무국은 분위기가 영 재미없고 쓸쓸하다며 그쪽이라도 (제발 빌어먹길) 바란다는 (문장 속에 (제발 빌어먹길 mille cancheri)이란 표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고 허물없는 사이에 주고받는 반어적 의미의 속어로 생각된다 - 옮긴이) 애정어린 내용이었다. 그 동안 왕은 몽타르지에서 멜뤼으로 옮겨갔으며, 피렌체 사절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처한 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들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시임 대사가 그러한 대답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약속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그러한 임무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프랑스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맨 먼저 프란체스코 페피가 대사로 선출되었으나 가려 하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루카 델리 알비치가 다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 또한 피렌체 사절들이 그의 임명 소식을 왕국에 알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자신이 갈 수 없는 사유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가 사적으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스스로 내세운 이유는 몸이 불편하고 경비도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와 조반니 리돌피가 뽑혔지만, 그들 역시 알비치처럼 그것을 거절하였다. 이렇게 되자 마키아벨리 일행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말았다. 9월 3일쯤에는 급보를 전하기 위한 돈조차도 수중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잭 없이 즉시 그곳을 떠나 작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프랑스인들의 분노와 위협은 점점 더 커져갔다. 루앙은 심각한 경고를 보냈고, 이는 왕과 피렌체 간의 사이가 완전히 파국 상태를 맞는다는 뜻으로 보였다. 마키아벨리는 (고토록 많은 비용과 그토록 깊은 염원을 갖고 추구해 왔던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이런 식으로 와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편지에 써 보냈다. 피렌체로부터의 대답은 여전히 열을 달라는데 겨우 하나만 주거나 아니면 아예 이도 저도 없는 정도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9월 20일 자의 한 편지에서, 정무위원회는 대사로 보낼 사람도 찾을 수 없고 (그러한 임무를 수행케 할 만한 히도 없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시민들의 생각을 왕의 요구에 따르도록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왕이 만족할 정도의 돈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피렌체 사정은(재정 결핍)을 이유로 사절들이 그토록 애타게 요쳥해 왔던 작은 액수의 돈조차도 주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피렌체 공화국은 그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부딪히자,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고는 심신을 편히하기 위해 파리로 가버렸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여전히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왕을 쫓아 블로아로 갔다. 혼자 남은 그는 두 사람 몫의 열성을 가지고 루앙과 왕을 타협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이리저러 애써보았지만, 협상 거리도 없이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하려고 왕궁의 분위기를 그려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의 장기인 날카롭고 단호한 판단력이 잘 드러난다. 며칠 전의 편지에서 그는, 왕이 나폴리 원정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시키는 이유로(특히 그가 피사의 예를 통해 최근에 보았듯이, 힘이 필요한 곳에서는 분필과 명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폴리의 서기장이 여기에 와서 합의를 끌어내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일단 무언가를 약속하고 주려는 경우에만 귀를 기울이는 족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곧 받아들여지리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새로운 생가가 거리를 찾았는데, 그것은 발렌티노가 교황의 이름과 돈을 빌려 또 다른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혹자는 이것이 콜론나 가를, 또 혹자는 파엔차, 리미니, 페자로를 비롯한 로마냐 지방의 참주들을 겨냥한 것이라고도 하였다. 혹은 불로냐를 치려는 의도인지도 몰랐다.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교황이 모든 일을 용인한 이유는 발렌티노가 승리하는 것을 정말 원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야욕이 비록 무절제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그에 대해 공공연히 저항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르자 가의 야욕이 겨냥한 것은 로마냐였음이 곧 밝혀졌지만, 그들이 과연 그것에 만족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시 피렌체인들의 의심을 샀다. 그러다가 이 교황의 아들이 메디치 가와 음모를 꾸미는 듯한 기미를 보이는 데다가 그가 피에로를 권좌에 복귀시키겠다고 드러내놓고 거들먹거리자, 피렌체인들의 의심은 급기야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태는 말하자면 공화국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프랑스와의 친선이 바야흐로 노골적인 적대 관계로 바뀌려는 바로 그 시점에 태풍을 알리는 먹구름이 공화국의 경계로 몰려들고 있는 형국인 셈이었다. 10월 11일에도 마키아벨리는 어쩔 도리없이 대사가 스위스 용병의 봉급 문제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여전히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루앙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게 그거지. 사실이야. 히지만 우리는 그 대사라는 친구가 오기 전에 다 죽고 말거네. 그러나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죽는 꼴을 보게 될걸세.) 피렌체인들을 불장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르자가 즉각 손을 든 리미니와 페자로를 수중에 넣는 동안, 두려움으로 인해 갑자기 제정신을 되찾게 된 피렌체인들은 곧 대사와 돈을 조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왕의 일행을 쫒아 낭트로가 있던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신임 대사 피에르프란체스코 토싱기가 만족스런 답변을 가지고 10월 16일 이쪽을 떠났음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답변은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1월 4일 왕으로 하여금 발렌티노가 피렌체인들에게 피해를 입힐 짓을 추호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점을 그에게 알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에게 보내도록 할 정도는 되었다. 바로 이날 보르자의 야심에 대한 이러한 토론중에 나온 것이 추기경에 대한 그의 유명한 응답이었다. 그 내용인즉, 루앙이 이탈리아인들은 도대체 전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하자, 마키아벨리는 즉시 프랑스인들은 정치 lo stato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반박하면서 그것을 안다면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큰 힘을 가지도록 방치했겠느냐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이 전능의 대신관 맞설 만한 대담성과 기민성만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시에 자신이 보낸 거의 모든 편지 속에서, 현상태의 피렌체를 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왕의 힘 앞에서는 과거의 분노와 이유와 권리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쪽이 현명할 것이라고 조언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일만 두카토는 바로 내고 나머지는 분할하는 방법으로 스위스 용병에 대한 말썽 많은 급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왕은 돈이 늦어지는 것을 흔쾌해하지 않았지만, 분할금은 그들이 크게 부담되지 않는 액수로 쪼개졌고,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왕궁에서 좀더 나은 시간을 보내 수가 있었다. 그는 또한 이제 곧 고향 땅과 친구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아마 이제는 애정이 식은 집보다는 일더미가 쌓여 있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들로 가득 차 서기국으로 되돌아갈 욕심이 더 컸을 것이다. 그가 프랑스에 오래 머무는 동안, 누이 역시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코 베르나치와 결혼했던 바로 그 누이였다. 일찍이 아버지의 죽음에도 공무에 바쁜 나머지 미처 슬픔을 나눌 틈도 없었던 그에게 이렇듯 다시금 슬픔이 닥치자, 그는 스스로가 (뒤죽박죽 혼란상태에 빠져 있다)고 썼던 주변 정리를 위해 이제 돌아가게 해다라고 정부에 허락을 구했다. 하지만 이 외에도 그의 귀향을 부추긴 다른 일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친구인 비아조로부터 (그의 편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의 다른 서기보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로부터 (이는 확실한 사실이다.) (어려운 말로 된) (원문의 (in grammatica)란 라틴어를 우회적으로 지칭하는 표현 - 옮긴이) 익살스런 장문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의 복귀가 계속 늦어진다면 서기국 관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그의 삶이며 영혼을 다 바쳤던 제2서기국에 있어, 그는 바로 그것의 영혼이자 삶 그 자체였다. 그의 서기보들에게서 온 편지들, 그리고 베스푸치에게서 온 최근의 이 편지로 미루어볼 때, 그동안 그들은 서기장의 부재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기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던 그의 재치있고 유쾌한 말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왕은 낭트에서 투르로 옮겨갔고 마키아벨리 역시 그 뒤를 따랐는데, 그때가 11월 21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공화국을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성하(성하)의 신성함에 어울리는)교황에 음모에 관한 자신의 마지막 경고와 조언을 담은 편지를 썼다. 여기서 그는 늘 되풀이하던 대로, 그들 스스로는 부정한 맘모나 신의 친구amicox de mammona iniquitatis(맘모나 신의 악덕한 부를 상징하므로, 이 어구의 의미는 재물을 주고받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편을 만든다는 것 - 옮긴이가 되어야 하며, 그 길만이 프랑스 궁정에 친구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임 대사가 느긋하게 부임해 오고 잇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크리스마스 무렵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는 12월 12일자 편지를 통해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당일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귀향길에 올랐지만, 오는 데 한달 반이나 걸린 토싱기보다는 훨씬 더 빠른 발걸음이엇다. 그는 1501년 1얼 14일 피렌체에 도착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이나 외국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프랑스 땅에 머물고도 그는 안장 주머니를 채울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었다. 아마 리용이나 파리의 인쇄소에서 나온 책 한 권도 들고 오지 않았으리라. 15세기를 마감하는 그 해의 한 이탈리아 휴머니스트에게 당시의 프랑스 문학이란 아직 별것이 아니었으며, 비용의 발라드조차도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것만큼 그의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 모르긴 해도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어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 정도를 가지게 된 것을 확실하겠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음미하지는 못했을 거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가 왕궁에서 들은 것은 우리가 앞서 본 바대로(예컨데 주 29의 본문에 있는 루앙의 말은 원문에는 라틴d어로 적혀있다. - 옮긴이) 세련되지 못한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호기심 많고 영민한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도 없이 6개월을 한 나라에서 보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k 그랬듯이 그곳의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 묻고 말하는데 열심이었을 것이다. 무론 당시 프랑스 평민들이 학식있고 명민한 피렌체인들과는 비교되기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사절 임무에 관한 통신문들중, 궁정에서 일어난 토의 과정을 기술할 때 그는 보라는 듯이 약간의 프랑스어를 쓰거나 또는 말을 프랑스어식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그래도 한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인에게는 별 소용이 없겠지만(사실 그는 문인은 아니었다), 정치 관측자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 법하다. 이는 좌우간 그의 정신을 고양시켰을 뿐 아니라, 종이에 쓰기보다는 마음속에 담아온 관찰 의 보따리에다가 이번 여행이 덧붙여준 또 하나의 유용한 지식이었다. (프랑스 견문 Ritratti delle cose di Francia)이나, 또는 (갈리아 관측기 Denatrua Gallorum)(지나치게 경직된 독일 학계는 이 글의 저술연대를 이 시기로 잘못 비정해 왔다) 처럼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조차도, 바로 이러한 첫 프랑스 사절의 경험 속에서 아직 모양이 다 갖추어 지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자양분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열매는 결코 금방 익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열매라기보다는 차라리 씨앗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다른 유사한 경험들과 어우러져 어느 날 마키아벨리의 정신과 사상 속에서 싹이 트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