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벤슨 살인사건 (상) 지은이: SS 밴다인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제14장 사슬의 고리 제15장 파이피 -- 개인용 제16장 시인(是認)과 은닉 제17장 위조수표 제18장 자 백 제19장 밴스의 반대심문 제20장 클레어 양의 설명 제21장 가발의 계시 제22장 밴스, 설명을 하다 제23장 알리바이 조사 제24장 체세포 제25장 밴스, 그 방법을 설명하다 ⊙ 작가소개 - 본명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로, 1888년 미국 버지니아 주의 샤로츠빌에서 탄생 - 캘리포니아주의 세인트 빈센트 대학과 포머너 대학 졸업 - 1906년, 하버드 대학원에서 영어학을 전공 - 1907년, 결혼 후 미술평론란과 문예비평란에 많은 글을 올려 명성을 얻음. - 1916년, 순문학 장편소설로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인'약속한 사람'을 발표 제14장 사슬의 고리 (6월 17일 월요일 오후 6시) 밴스와 나는 오후에 한 시간쯤 앤더슨 화랑에서 다음날 경매하기로 되어 있는, 직물로 만들어진 작품을 보며 시간을 보낸 다음 셀리즈에서 차를 마셨다. 스타이비샌트 클럽에 닿은 것은 6시 조금 전이었다. 조금 뒤 매컴과 파이피가 왔으므로 우리는 곧 대화실로 들어갔다. 파이피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껏 멋을 부린 거만한 자세였다. 래트캐처(승마복의 일종)를 입고 뉴마켓풍의 표백하지 않은 마직으로 된 각반을 찼으며, 향수 냄새를 몹시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하고 파이피는 마치 축복이라도 받은 듯 우리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매컴은 마주 상냥하게 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주 무뚝뚝할 정도로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밴스는 그저 고개만 까딱했을 뿐 자리에 앉아서는 만사가 귀찮다는 눈으로 파이피를 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자기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을 어떻게든 변명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잘 안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매컴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파이피 씨, 우리는 당신이 금요일 정오에 차를 차고에 맡기고 관리인에게는 20달러를 쥐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파이피는 불쾌한 얼굴로 매컴을 쳐다보았다. "그것 참 괘씸하군요." 하고 한심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나는 그 녀석에게 50달러나 주었는데." "그렇게 순순히 사실을 인정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하고 매컴이 대답했다. "당신은 신문을 보셨으니까 벤슨 씨가 살해된 날 밤 바로 당신의 차가 벤슨 씨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겠지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주어가며 내 차가 뉴욕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겠습니까?" 파이피의 말투에는 상대방의 아둔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렇다면 굳이 시내에 감출 건 없지 않습니까?" 하고 매컴이 물었다. "롱 아일랜드로 가져갔으면 되었을 텐데 -- " 파이피는 동정어린 눈으로 정말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런 정도는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자세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너그러운 교사가 진도느린 학생을 대할 때처럼 아둔한 지방검사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며 어떻게든 깨우쳐 주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아내가 있는 몸이올시다, 매컴 씨." 하며 그 말투에 어떤 특별한 가치라도 두듯이 말했다. "목요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캐츠킬스를 향해 여행을 떠났는데,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어떤 친구가 있어서 뉴욕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너무 늦게 끝나서 -- 아마 자정이 지나서야 닿았을 겁니다. 그래서 앨빈을 찾아가기로 한 거지요. 그런데 집 앞에 차를 대고 나서 보니 집안이 캄캄하더군요. 그래서 벨을 누를 수도 없어서 차는 그곳에 둔 채 43번가의 피에트로 바까지 걸어가서 밤술을 한잔 하기로 했지요 --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그 집에 '헤이그 앤드 헤이그'를 한 병 맡겨두었었는데, 아직 조금 남아 있었거든요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가게 문이 닫혀 있더군요.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동차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이제 생각해 보니 가엾게도 앨빈은 내가 없는 동안에 총에 맞은 겁니다." 파이피는 말을 마치고 안경을 닦았다. "얄궂은 일이지요...... 나는 친한 친구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참극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나는 그 길로 차를 몰아 어떤 터키탕으로 가서 그날 밤을 묵었지요. 다음날 아침 그 살인사건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고, 뒤에 가서는 내 차에 대한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뭐라고 할까요 -- 걱정이 되더군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걱정'이라는 말은 오해받을지도 모르겠군. 그보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겠군요. 자동차가 내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칫 난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차를 차고에 맡기고 관리인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부탁한 겁니다. 자동차가 발견되면 앨빈 살인사건이 오히려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말이지요." 그 말투와 매컴을 보는 거만한 시선을 보아서 파이피는 검사나 경찰 같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으며, 차고의 관리인을 매수했다고 여긴들 뭐 대수냐는 태도였다. "여행은 어째서 계속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매컴이 물었다. "그랬더라면 자동차가 발견될 염려는 더욱 적어졌을 텐데요." 파이피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그렇게 무참히 살해당했는데 여행을 계속한단 말입니까? 그런 슬픈 일이 생겼는데 구경이나 하고 다닐 마음이 생기겠습니까?......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에게는 자동차가 고장났다고 해두었지요." "당신 자동차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고 매컴이 말했다. 파이피는 상대방이 자기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는데도 자못 온순한 태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그가 자기에게는 사람의 지각을 날카롭게 해줄 힘은 없지만, 적어도 이해력이 없음을 한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만일 내가 세상 모르고 캐츠킬스에 가 있었더라면 -- 아내는 내가 그곳으로 간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 앨빈이 살해된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아마 여러 날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겠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뉴욕에서 하룻밤 묵는다는 말을 아내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리면, 매컴 씨, 내게는 뉴욕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만일 내가 그 차를 몰고 그대로 돌아갔더라면, 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아내는 내가 여행을 도중에 그만둔 것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을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간단할 것으로 여긴 방법을 택한 것이지요." 매컴은 상대방의 유들유들한 위선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그는 불쑥 물었다. "그날 밤 당신 자동차가 벤슨 씨 집 앞에 있었던 것은 리코크 대위를 이 사건에 끌어들이고 싶어한 당신의 생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파이피는 그야말로 뜻밖이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정중하기는 하지만 항의하는 태도를 취했다. "검사님!" 그 목소리에는 상대방의 부당한 트집에 대한 짙은 노여움이 들어 있었다. "어제 말씀드린 내 말 속에 리코크 대위에 대한 의심이 담겨져 있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군요.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으로 그날 밤 자동차를 갖다댔을 때 앨빈의 집 앞에서 대위를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도 말씀드려야겠군요." 매컴은 이거 재미있게 되어간다는 듯이 밴스를 흘끗 보더니 파이피에게로 시선을 돌리고서 물었다. "분명히 리코크 대위를 보았습니까?" "분명히 보았습니다. 어제 그 말을 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었겠지요."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매컴이 다그쳤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오늘 아침 리코크 대위를 심문할 때에 이용할 수가 있었을 텐데......당신은 자신의 안전을 정의추구나 법질서보다 위에 두고 있군요. 당신의 태도는 그날 밤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진술을 의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건 좀 지나치군요." 하고 파이피는 풀이 죽어 말했다. "하지만 내 스스로 난처한 처지로 몰고갔으니 비난은 달게 받겠소." "이미 아시겠지만 -- " 하고 매컴이 계속했다. "만일 다른 검사가 당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정도로 알고 있고, 지금 당신이 내게 보여준 그런 태도를 그에게 취했더라면 당신은 즉시 용의자로 체포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이런 심문을 받게 된 것이 굉장한 행운이라고 해야겠군요." 하고 파이피는 순순히 대답했다. 매컴이 일어섰다. "파이피 씨, 오늘은 이런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그러나 역시 내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할 때까지는 뉴욕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주요 증인으로 구치시키겠습니다." 파이피는 이처럼 신랄한 말에 항의하듯 몸이 굳어지더니, 이내 지나치게 공손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만 남게 되자 매컴은 진지한 얼굴로 밴스를 보았다. "자네의 예언은 적중했네. 나로서는 설마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은 몰랐어. 파이피의 증언으로 대위를 엮을 사슬의 마지막 고리가 생겼구먼." 밴스는 나른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자네의 이론은 일단 만족할 만한 것임을 인정은 하네만, 그러나 말일세, 유감스럽게도 심리적 이론은 그냥 남아 있다네. 모두 다 들어맞는데 꼭 한 가지 리코크 대위가 예외일세. 그 사람은 전혀 타당성이 없어......우스운 이야기지만, 대위에게 벤슨 살해 역할을 맡기는 것은 들소 같은 테트라티니에게 폐병을 앓는 미미의 역할을 주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한 것이지."(1) "다른 경우였더라면 -- " 하고 매컴은 말했다. "나는 자네의 훌륭한 이론을 삼가 받들어 모시겠네. 하지만 리코크 대위에 대한 상황증거며 추정증거가 이처럼 갖추어진 바에야 이러쿵저러쿵할 것도 없지. '그 사람은 머리 한가운데에 가리마를 타고 깃에는 장식손수건을 꽂았으니 범인일 수 없다'는 것은 내 저능한 법률적 두뇌에는 시시한 넌센스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네. 그것은 너무 논리를 무시한 이야기거든." "자네의 이론에 한치의 빈틈도 없다는 것은 인정하네 -- 물론 모든 이론이란 게 다 그렇지만. 자네는 아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그들이 유죄라는 기묘한 이론을 내세워 처벌해 왔을 것일세." 밴스는 피곤한 듯이 몸을 죽 폈다. "옥상에 올라서서 가벼운 식사라도 하면 어떻겠나? 그 이야깃거리도 안되는 파이피라는 사람 때문에 지쳐버렸어." 스타이비샌트 옥상의 여름식당에서 우리는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벤슨 소령을 만났다. 매컴이 합석하자고 권했다. "좋은 소식이 있다네, 소령." 하고 매컴이 말했다. 우리가 음식 주문을 마치자, "범인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가네. 모든 점으로 미루어 그 사람이 분명해. 내일은 만사 결판이 났으면 좋겠군." 소령은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며 매컴을 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데. 지난번 이야기로는 여자가 문제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는데." 매컴은 멋적은 듯이 웃으며 밴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네." 하고 말했다. "내가 마음에 두었던 여자는 조사결과 결백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네. 그 대신 방금 말한 남자가 떠올랐는데, 그 사람이 범인인 것은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어. 그 점에 대해서는 오늘 아침부터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금 아까 어떤 믿을 만한 증인으로부터 자네 동생이 살해된 그 무렵에 그 집 앞에 있는 그를 보았다는 증언을 얻어냈다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별 지장 없다면 말해 주지 않겠나?" 소령은 아직도 눈썹을 찌푸린 채였다. "그야 지장 없지. 내일이면 온 천하가 다 알게 될 텐데...... 리코크 대위일세." 벤슨 소령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방검사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믿을 수 없어. 그 사람과는 유럽에서 3년이나 함께 지내서 잘 알지. 경찰에서 무언가 잘못 알고 있지 싶은데......" 하고 벤슨 소령은 얼른 덧붙였다. "잘못 짚었을 거야." "경찰이 아니라네." 하고 매컴이 말했다. "내가 직접 조사한 결과 그 대위가 떠오른 것이지." 소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 " 하고 밴스가 끼어들었다. "대위에 대해서는 내 생각도 당신과 같습니다, 소령님. 그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분이 내 생각과 같다니 나로서도 기쁘군요." "그럼, 리코크 대위는 그날 밤 그 집 앞에서 무엇을 했을까?" 하고 매컴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벤슨의 집 창 밑에서 사랑의 노래라도 부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고 밴스가 주석을 달았다. 매컴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급사장이 들어와서 지방검사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매컴은 그것을 흘끗 들여다보더니 만족스럽게 코를 울리고는 손님을 곧 안내하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좀더 확실한 것을 알게 되겠지. 난 이 히긴보섬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오늘 아침 리코크 대위의 뒤를 밟게 한 형사지." 히긴보섬은 아주 힘이 세어보이는 파리한 얼굴의 젊은이로서, 눈빛은 흐린 듯했으나 동작은 매우 시원시원했다. 그는 몸을 약간 굽힌 자세로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와 지방검사 앞에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앉아서 보고하게, 히긴보섬." 하고 매컴이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이 사건을 위해 애써주시는 분들일세." "저는 용의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따라잡았습니다." 하고 형사는 매컴을 교활한 눈으로 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대위는 지하철을 타고 주택가인 79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점에서 내리더군요. 그런 다음 걸어서 80번가를 지나고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로 나가서 94번지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수위에게 이름도 대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더군요. 두 시간쯤 그곳에 있다가 1시 20분에 나오더니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저도 얼른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뒤를 따랐지요. 대위는 72번가까지 내려가더니 센트럴 파크를 지나 59번가에서 동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스 아베뉴에서 택시를 내려 걸어서 퀸즈보로 다리 위로 갔습니다. 블랙웰스 섬을 향해 반쯤 건너가더니 난간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5~6분 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조그만 꾸러미를 꺼내 강물에 던졌습니다." "크기가 얼마나 되는 꾸러미였나?" 매컴의 질문에는 누를 수 없는 흥분이 넘실거렸다. 히긴보섬은 두 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보여주었다. "두께는?" "1인치쯤 되어 보이더군요." 매컴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권총 같지 않던가?-- 콜트 자동권총 말일세."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만한 크기였으니까요. 그리고 꽤 무게가 있어 보였습니다 -- 대위가 그것을 다루는 손놀림이나 물속으로 떨어질 때의 상태로 보아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좋아." 매컴은 크게 만족해 했다. "그밖에는?" "그것뿐입니다. 권총을 강물에 던져버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돌아왔습니다." 히긴보섬이 나가자 매컴은 의기양양해서 거보란 듯이 밴스 쪽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이젠 범인이 분명해졌지?......아직도 더 할말이 있나, 밴스?" "응, 많이 있지." 하고 밴스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벤슨 소령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도무지 사정을 알 수가 없군. 리코크 대위가 무엇 때문에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권총을 가지러 가야만 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알겠네." 하고 매컴이 말했다. "그는 벤슨을 쏘아죽인 다음날 세인트 클레어 양 집에 그 권총을 갖다놓았을 걸세 -- 아마 안전하게 감춰둘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겠지. 만일에 자기 집에서 발견되면 큰일이니까." "세인트 클레어 양의 집에 갖다놓은 것은 사건 이전이 아닐까?" "자네가 하는 말 뜻은 잘 알겠네." 하고 매컴이 대답했다.(나 역시 소령이 어제 세인트 클레어 양이 리코크 대위보다 자기 동생을 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어떤 명백한 사실에 의해서 그 여자에 대한 혐의는 없어졌다네." "자네야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자신을 가지고 있겠지." 하고 소령은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의문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리코크가 대위가 앨빈을 죽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네." 소령은 말을 중단하고 한 손을 지방검사의 팔에 올려놓았다. "나는 주제넘게 나서고 싶지도 않고, 자네가 하는 일에 흠을 잡을 생각도 없어. 하지만 그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만은 좀더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네. 아무리 신중하고 양심적일지라도 실수란 있게 마련이니까. 사실이라는 것이 때로는 완전히 거짓인 경우도 있다네. 지금도 그 사실이라는 것이 자네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 매컴은 오랜 친구의 부탁에 마음의 동요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의무에 대한 본능적인 성실성이 친구의 호소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령, 나는 나의 확신에 따라서 행동해야만 하네." 매컴은 단호하게, 그러나 동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1) 이 인용문은 분명 1908년 테트라티니가 맨해턴 오페라 하우스에서 '라 보엠'을 공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제15장 파이피 -- 개인용 (6월 18일 화요일 오전 9시) 다음날 -- 수사가 시작되고 4일째 -- 은 벤슨 살인사건에서 제기된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중대한, 어떤 의미로는 중요한 날이었다. 결정적인 단서라고는 무엇 하나 나오지 않았지만 사건에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으며, 이 새로운 요소가 결국은 범인을 찾아내는 실마리가 되었다. 벤슨 소령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밴스는 매컴과 헤어지기 전에 다음날 아침 지방검사국으로 또 찾아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매컴은 성가신 듯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열성적인 밴스의 태도에 감동하여 승낙하고 말았다. 그러나 매컴으로서는 다른 사람들의 귀찮은 간섭을 하나도 받지 않고 리코크 대위의 체포절차를 밟고 싶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히긴보섬의 보고를 받고 나서 매컴이 리코크 대위를 구속하여 대배심에 넘길 조서를 꾸며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만은 분명했다. 밴스와 나는 다음날 9시에 매컴의 사무실에 갔는데, 그는 이미 나와 있었다. 우리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마침 수화기를 들고 히스 경사를 불러오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 밴스가 놀라운 행동을 보였다. 재빨리 지방검사의 책상으로 가더니 매컴의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아서는 찰칵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전화기를 옆으로 밀쳐놓으며 두 손을 매컴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매컴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미처 정신이 들기도 전에 밴스가 나직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가 온화한 만큼 더욱 박력 있게 들렸다. "리코크 대위를 체포하게 놔두지는 않겠어. 오늘 아침 내가 여기 온 것은 그 때문일세. 내가 이 사무실에 버티고 있는 한 그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릴 수는 없을 걸세. 모든 방법을 다 동원 해서라도 방해할 거야. 자네가 끝내 그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해야겠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지 -- 경관을 불러서 나를 강제로 끌어내는 것. 그러나 상당히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할 걸세. 나는 마지막까지 싸워서 끝장을 볼 생각이니까." 곧이 듣기 어려운 이 협박은 말 그대로 밴스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매컴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하를 불렀다간 -- " 하고 밴스는 계속했다. "자네는 1주일 안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걸세. 그때쯤이면 사실 누가 벤슨을 쏘았는지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민중의 영웅이며 순교자가 되겠지 -- 굉장한 공적이거든 -- 지방검사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의 제단에 내 감미로운 자유를 바쳤다느니 하면서......" 전화벨이 울렸다. 밴스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만 됐네." 하고 밴스가 말하고는 곧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팔짱을 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매컴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떨고 있었다. "밴스, 당장 이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으면 별수없이 자네가 원하는 대로 나는 경관을 부르겠네." 밴스는 미소지었다. 매컴이 그런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두 친구 사이의 다툼은 지능적인 것이었다. 밴스의 행동이 한때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 되긴 했지만, 그런 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위험은 없었다. 매컴의 도전적인 눈빛이 차츰 깊은 당혹의 눈으로 바뀌었다. "자네는 어째서 리코크 대위에 대해서 그렇게 당치도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가?" 하고 매컴이 날카롭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억지를 쓰면서까지 그를 놔주려 하는 거지?" "자넨 정말로 한심한 바보로군." 밴스는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우연히도 남부 태생의 육군대위이기 때문에 내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리코크 대위와 비슷한 사람들은 세상에 몇천 명도 더 되네 -- 떡 벌어진 어깨에 네모난 턱, 여기저기 보풀이 인 양복을 입고, 케케묵은 기사도를 부적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나이, 어머니 말고는 분간도 못하는 녀석......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자네일세, 매컴. 리코크 대위보다 더 상처입게 될 실수를 결코 저지르게 하고 싶지 않은 거야." 매컴의 눈에서 그 험상궂었던 빛이 사라졌다. 밴스의 동기를 알고는 그의 행동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리코크 대위의 유죄를 굳게 믿고 있었다. 매컴은 한동안 가만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어떤 결심이 섰는지 버튼을 눌러서 스워커가 나타나자 펠프스를 불러오라고 했다.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 좋은 생각이 있네." 하고 그는 말했다. "밴스, 자네도 군소리 못할 증거가 나올 걸세." 펠프스가 들어왔다. 매컴이 지시했다. "지금 곧 세인트 클레어 양을 만나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직접 만나서 어제 리코크 대위가 그녀의 아파트에서 가지고 나가 이스트 강에 던진 그 꾸러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알아오게." 매컴은 어젯밤 히긴보섬에게서 들은 보고를 대강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숨겨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하게. 그 꾸러미 속에 있는 것이 벤슨을 쏜 권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넌지시 비추게. 아마 대답을 거부하면서 나가라고 하겠지. 그때는 밑으로 내려와서 계속 감시하게. 그녀가 거는 전화를 교환대에서 들어야 하네. 그리고 편지 같은 것을 어디론가 보내거든 도중에서 압수해야 하고. 만일 외출을 하면 --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 미행하여 가능한 한 샅샅이 알아내도록 하게. 뭐라도 잡히면 즉시 내게 보고하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펠프스는 그 임무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기운차게 뛰어나갔다. "그런 날강도 같은 짓을 하거나 몰래 엿듣는 방법을 자네들 학문 있는 직업에서는 도덕적이라고 여기는가?" 하고 밴스가 물었다. "그런 행동은 자네의 다른 자질과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네." 매컴은 몸을 뒤로 젖히면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개인적인 도덕 같은 것은 지금 문제가 아니야. 문제가 된다고 해도 보다 크고 중대한 고려에 의해서 배제되는 걸세 -- 보다 높은 정의의 요구에 의해서 말이야. 사회는 보호되어야 하네. 이 나라의 시민들은 범죄자나 악인들이 판치는 속에서 자신들의 안전을 내게서 기대하고 있거든.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나는 때로는 나의 개인적 본능과 모순되는 행동을 취해야만 할 경우도 있다네. 어떤 개인에 대한 이른바 도덕적 의무 때문에 사회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거든......물론 자네는 알고 있을 줄 알지만, 그런 반도덕적 수단으로 입수한 정보는 나는 결코 쓰지 않을 작정일세. 단, 그 정보가 상대방에게 범죄적 행동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때에는 나는 공공의 선(善)을 위해서 그것을 쓸 충분한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네." "그야 자네 말이 맞겠지." 하면서 밴스는 하품을 했다. "하지만 사회라는 건 내게는 별로 흥미가 없어. 나로서는 정의보다는 훌륭한 예절 쪽이 훨씬 마음에 든단 말일세." 밴스가 말을 마치자 스워커가 나타나 벤슨 소령이 찾아와서 매컴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벤슨 소령은 22살쯤 되어보이는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나타났다. 여자는 금발을 짧게 자르고 산뜻하고 간단한 연푸른빛 '크레프 드 신' (crepe de chine) 옷을 입고 있었다. 얼른 보기엔 아직 어리고 어딘지 모르게 천한 구석이 보였으나, 태도가 조심스럽고 요령도 있어서 곧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갖게 했다. 벤슨 소령은 그 여자를 우리에게 비서라고 소개했고, 매컴은 자기 책상 맞은편 의자를 그녀에게 권했다. "호프먼 양에게서 자네에게 들려주면 좋을 것 같은 이야기를 조금 전에 들었기에 이렇게 본인을 직접 데려왔다네." 소령은 전에 없이 진지한 태도였으며, 눈에는 납득은 안되지만 기대를 걸어봐야겠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매컴 씨에게 아까 나에게 한 이야기를 그대로 말씀드려요, 호프먼 양." 그녀는 얌전히 얼굴을 들고는 시원시원하고 잘 들리는 목소리로 그 이야기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1주일쯤 전 -- 수요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 파이피 씨가 앨빈 벤슨 씨를 찾아왔었습니다. 저는 타이프라이터가 놓여 있는 옆방에 있었지요. 두 방 사이에는 유리 칸막이가 있을 뿐이어서 벤슨 씨 방에서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제 방에까지도 들린답니다. 파이피 씨가 오고 나서 5분쯤 지난 뒤에 두 분이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처럼 사이좋은 분들이 이상하다 싶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계속 타이프라이터를 쳤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서 저에게도 몇 마디 들려왔지요. 벤슨 소령님이 오늘 아침에 그 두 분이 무슨 말을 했었느냐고 물으셨는데, 여기서도 그때 들은 것을 그대로 말씀드리면 되겠지요? 이야기는 모두 어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한두 번 '수표'라는 말도 들렸고 '장인'이라는 말도 몇 번 들렸습니다. 그리고 벤슨 씨가 한 번 정도 '그건 안되네.' 라고 말하더군요......그런 다음 벤슨 씨가 저를 불러서 금고의 전용서랍에서 '파이피 -- 개인용'이라고 씌어진 봉투를 가져오라고 하셨지요. 그것을 갖다드린 다음 곧바로 장부 부서로 불려갔기 때문에 그 뒤로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약 15분쯤 지나 파이피 씨가 돌아가시자 벤슨 씨가 저를 불러 봉투를 도로 갔다넣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파이피 씨가 다시 찾아와도 벤슨 씨 자기가 있을 때 말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방에 들여놓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봉투는 아무에게도 -- 비록 서면에 의한 명령서가 있더라도 절대로 꺼내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더군요......제 이야기는 그것뿐입니다, 매컴 씨." 여비서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그녀의 말은 물론이고 밴스의 행동에도 그에 못지않은 흥미를 가졌다. 처음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밴스는 그녀를 그냥 예사롭게 흘끗 보더니 갑자기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는 주의깊은 눈길로 바뀌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뚫어지게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매컴이 호프먼 양을 위해서 의자를 바로 놓아주었을 때 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 옆에 놓여 있는 책으로 손을 뻗으며 필요 이상 몸을 굽혀 --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그녀의 머리 옆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계속 지켜보면서 가끔 더 잘 볼 수 있도록 몸을 좌우로 가볍게 기울이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였으나, 나는 어떤 중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밴스가 그토록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프먼 양의 이야기가 끝나자 벤슨 소령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긴 다갈색 종이봉투를 꺼내 매컴의 책상 위에 던졌다. "그거라네." 하고 소령이 말했다. "호프먼 양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얼른 가져오게 했지." 매컴은 그 내용물을 꺼내볼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봉투를 집어들었다. "꺼내보게나." 하고 소령이 권했다. "그 봉투 속에는 사건과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네." 매컴은 고무 밴드를 벗겨내고 봉투 알맹이를 앞에 꺼내놓았다. 그 속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리앤더 파이피 앞으로 앨빈 벤슨이 발행한 1만 달러짜리 수표 한 장과, 앨빈 벤슨 앞으로 파이피가 발행한 1만 달러짜리 어음 한 장, 그리고 이 수표는 위조라는 사실을 고백한 파이피의 서명이 들어 있는 짧은 사과편지였다. 수표는 그해 3월 20일 날짜로 되어 있었다. 고백의 편지와 어음에는 그 이틀 뒤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어음은 -- 90일 기한이며 -- 6월 21일 금요일, 즉 앞으로 겨우 사흘 뒤면 만기였다. 매컴은 꼬박 5분이 넘도록 그 문서들을 들여다보았다. 느닷없이 이런 것이 사건에 끼어들어 꽤나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 서류를 다시 봉투에 챙겨넣었으나 그의 곤혹스러운 빛은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매컴은 여비서를 차근차근 심문했고, 어떤 부분은 되풀이해서 진술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제야 소령을 보면서 말했다. "이 봉투를 한동안 내가 맡아가지고 있어도 되겠나? 지금 당장은 여기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으니 좀더 두고 생각해 봐야겠네." 벤슨 소령과 비서가 돌아가자 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다리를 벌렸다. "아아, 신난다! '모든 것은 여행떠났다, 해도 달도, 아침도 낮도, 저녁도 밤도, 그리고 별도', 그래서 우리도 겨우 이제 전진하기 시작한 모양이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나?" 파이피의 시시하고 해묵은 악(惡)이 새로 끼어들게 되어 매컴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호프먼인가 하는 아가씨는 재미있는 여자야 -- 어떤가, 매컴?" 하고 밴스는 뚱딴지 같은 대답을 했다. "그 아가씨는 죽은 벤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일세. 그리고 역겨운 리앤더 파이피는 분명히 싫어하고 있었어. 아마 그는 아내에게 오해받고 있다느니 어쩌니 해가며 그 아가씨에게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을지도 모르지." "그래, 굉장한 미인이니까." 하고 매컴은 내키지 않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벤슨도 귀찮게 굴었겠지 -- 그래서 싫어했을 걸세." "분명해!" 밴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름다워 -- 정말로. 하지만 거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되네. 저래봬도 상당한 야심과 재능도 있어 -- 맥을 짚을 줄도 알고 있고, 그녀는 풍선이 아닐세. 단단한 줄기 같은 것이 있어 -- 튜턴의 피가 조금 섞여 있는 것 같더군." 밴스는 생각에 잠겼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여보게, 매컴. 그 귀여운 아가씨가 머지않아 자네를 다시 만나자고 할지도 모르네." "수정 점에 그렇게 나왔나?" 하고 매컴이 문득 중얼거렸다. "아니, 천만에." 밴스는 창밖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하자면'무언(無言)의 수행(修行)'을 하고 있다네. 두개골학적(頭蓋骨學的) 고찰에 잠겨서 말일세." "자네가 그 아가씨를 곁눈질로 흘끔흘끔 쳐다본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고 매컴은 말했다. "하지만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모자까지 썼는데 어떻게 두상(頭相)을 분석할 수 있었다는 건가?-- 하긴, 자네들 골상학자들이 '두상'이라는 말을 쓰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골드스미스의 설교자가 한 말을 잊어서는 안되네. (골드스미스의 시에서 인용한 말.)" 하고 밴스는 느긋하게 말했다. "그의 입술에 오른 진리는 이 세상에 수없이 많지. 그것을 어긴 자는 어쩌고저쩌고 한다네......첫째 나는 골상학자가 아닐세. 그러나 시대적, 민족적, 유전적으로 두개골이 모두 다르다는 것은 믿고 있지. 그 점에서는 나는 구식 다윈파일세. 필트다운 인의 두개골과 크로마뇽 인*의 두개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어. 아무리 법밖에 모르는 법학자인 자네라도 아리안 인의 두개골과 우랄 알타이 인의 두개골은 구별할 수 있겠지? 그리고 말라야 인과 니그로 인의 두개골이 어떻게 다른지 정도도 아마 알 걸세. 그러니까 멘델의 법칙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전적인 두개골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지......하지만 이런 고매한 지식은 자네에게는 무리일 거야. 그러나 나는 그 젊은 여자가 모자를 쓰고 머리카락까지 있었는데도 머리의 윤곽이며 얼굴의 골격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다네. 귀까지도 일단은 보아두었지." (*필트다운 인은 'Eoanthropus Dawsoni'라고도 불리며, 1912년 우연한 기회에 '영국 에섹스 군 필트다운에서 발견된 두개골에 의해 이름붙여진 원시인이다. 빙하기 초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로마뇽 인은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유럽으로 옮겨간 원시인으로 추정되며, 1868년 폴 브로커가 프랑스의 도르도뉴 지방 레 제이지에 있는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한 몇 개의 두개골에 의해서 이름 붙여졌다. 북구와 지중해 인종의 원시인으로 여겨진다.) "다시 한 번 나를 만나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거기서 나왔나?" "간접으로는 -- 그렇다네." 하고 밴스는 인정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매컴, 호프먼 양이 털어놓은 이야기와 대조해 보면 어제 오스틀랜더 대령의 설명이 차츰 빛을 내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이 사람아, 벤스." 하고 매컴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그렇게 빙빙 둘러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요점만 말하게." 밴스는 창가에서 천천히 돌아서서 매컴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매컴 -- 내가 하나 묻겠네. 순수한 이론으로서 말일세 -- 파이피의 위조수표는 거기에 따르는 고백편지 및 기한이 다가오고 있는 어음과 함께 생각할 때 벤슨 씨를 없앨 수 있는, 말하자면 '유력한 동기'가 되지 않겠나?" 매컴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자네는 파이피가 범인이라는 건가?-- " "글쎄 -- 상당히 동정받을 만한 처지이기는 하지. 파이피는 분명히 벤슨의 이름을 수표에 서명했어. 그리고 그 사실을 벤슨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네. 그랬더니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그렇게 오래 사귀어온 친구에게서 변상을 위한 90일짜리 어음을 요구받은 데다, 어김없이 지불을 보증하겠다는 고백서까지 써야 했다네......자아, 여기서 그 뒷일을 한번 생각해 보세 -- 첫째로 파이피는 1주일 전에 벤슨을 찾아가서 말다툼을 했는데, 그때 수표 이야기가 나왔겠지. 다몬은 아마 어음기간을 연기해 달라고 핀티아스*에게 빌었을 걸세. 그러나, '그건 안되네.' 라고 냉정하게 거절당했겠지. 둘째로, 벤슨은 그 이틀 뒤에 살해되었는데, 1주일 안으로 어음기한이 끝나게 되어 있었어. 셋째로, 파이피는 벤슨이 살해된 시각에 그 집에 있었는데도 그의 소재에 대해 자네에게 거짓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차고관리인을 매수하여 자동차에 대한 입막음을 시켰다네. 넷째로, 자네가 다시 다그치자 '헤이그 앤드 헤이그'를 마시러 갔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대목이 좀 시원치 않았어. 게다가 잊어서 안될 것은 대자연의 고독을 찾아 오직 혼자 캐츠킬스로 떠났었다는 처음의 이야기도 -- 어떤 수수께끼의 인물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 뉴욕에서 하룻밤 머물렀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와 아울러 생각할 때 -- 아무래도 수긍이 안되네. 다섯째로, 그는 흥하고 망하는 것을 하늘에 맡기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충동적인 도박사일세.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으로 총기다루는 솜씨도 보통은 아닐 테지. 여섯째로, 리코크 대위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비열하게도 고자질을 해서 그 중요한 시각에 현장에서 대위를 보았다고 했네. 일곱째로 -- 아니, 자네 왜 그렇게 넋나간 얼굴을 하고 있나, 매컴? 자네가 아주 좋아하는 그 요인(要因)이라는 것을 열거하고 있는데 말이야 -- 그 요인이란 무엇인가?-- 동기, 때, 장소, 기회, 행위 같은 것들이지? 빠진 것은 범인뿐일세. 그런데 리코크 대위의 권총은 이스트 강의 바닥에 있네. 그렇다고 해서 대위가 파이피보다 훨씬 더 유력한 용의자라고 단정할 순 없지 않겠나, 안 그런가?" (*다몬과 핀티아스는 그리스의 디오니시오스 왕 시대의 피타고라스파의 철학자이며, 우정의 모범으로 인용된다. 핀티아스는 폭군에게서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집안 일을 정리할 때까지 집행유예를 간청했다. 그 동안 다몬이 대신 갇혀 있겠다고 나섬으로써 그 간청이 받아들여졌는데, 형집행시간이 다가오도록 핀티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형집행 직전에 핀티아스가 달려온 것을 보고, 왕은 두 사람의 우정에 감동하여 사형을 사면해 주었다. 그리고 그 우정을 자기에게도 나누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매컴은 밴스의 설명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책상 위를 노려보며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어때? 리코크 대위에 대해서 마지막 조치를 취하기 전에 파이피와 한번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밴스가 제안을 했다. "자네의 충고에 따르지." 매컴은 몇 분 동안 생각한 끝에 천천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이런 시각에 호텔에 있을까?" "있을 걸세." 하고 밴스가 말했다. "눈을 번득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틀림없이." 파이피 씨는 과연 있었다. 매컴은 그에게 곧 사무실로 나와달라고 했다. "또 한 가지 자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네." 하고 밴스는 매컴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말했다. "실은 벤슨이 사망한 시각 -- 즉, 13일 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14일 새벽이 되겠구먼 --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이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이 저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꼭 알고 싶네." 매컴은 놀란 듯이 밴스를 보았다.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겠지?" 밴스는 자못 유쾌한 듯이 다음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매컴, 자네는 알리바이라는 것을 꽤 신봉하고 있잖나 -- 때로는 완전히 실망할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나? 예를 들면 리코크 대위 말일세. 아파트 관리인의 말 한마디로 히스 경사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제비꽃다발을 억지로 사게 되었다고 해서 자네가 대위를 혼내줄 수는 없지. 그건 자네가 사람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증거가 되거든......자네는 어째서 그 사람들이 각자 어디에 있었는지를 조사하지 않나? 파이피와 리코크 대위는 벤슨의 집에 있었어. 자네가 소재를 조사한 것은 이 두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그날 밤 앨빈의 주위에는 그 밖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을지도 모르네. 친구나 친지들이 가까이에서 밀치락달치락했을지도 모르지. 이른바 밤놀이라는 것을 하며...... 따라서 다시 한 번 그 양반들을 모두 조사하면 풀이 죽어 있는 히스 경사의 슬픔을 날려보낼 만한 것이 나올 걸세." 매컴도 나도 어떤 중대한 근거 없이는 밴스가 이런 제의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매컴은 이 뜻밖의 요청을 한 이유를 알아내려는 듯이 밴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특히 누구를 조사하면 좋겠나?" 하고 매컴이 물었다. "자네는 '모두'라고 했지만." 그리고는 연필을 꺼내 메모할 준비를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고 밴스가 대답했다. "우선 세인트 클레어 양을 적게 -- 그리고 리코크 대위 -- 벤슨 소령 -- 파이피 -- 호프먼 양 -- " "호프먼 양이라고?" "모두 다란 말일세......호프먼 양을 적었나? 다음은 오스틀랜더 대령 -- " "아니, 여보게?" 하고 매컴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 -- 그 밖에도 한두 사람 더 있을지 모르지만 뒤로 미루기로 하지. 우선 그들부터 조사하면 되겠구먼." 매컴이 다시 항의하려는 순간 스워커가 들어와서 히스 경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리코크 대위는 어찌 되었습니까?" 라는 말이 경사의 첫질문이었다. "하루 이틀 좀더 기다리기로 했소." 하고 매컴이 설명했다.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기 전에 파이피와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봐야겠소." 그런 다음 벤슨 소령과 호프먼 양이 찾아왔었던 일을 히스 경사에게 이야기했다. 히스는 그 봉투와 내용물을 훑어보고는 지방검사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별것 아닌 것 같은데요." 하고 경사가 말했다. "벤슨과 파이피의 개인적인 거래가 아닐까요?-- 리코크 대위가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빨리 잡아넣을수록 제 마음이 홀가분해지겠는데요." "내일이면 그렇게 될 게요." 하고 매컴은 격려해 주었다. "조금 늦춘다고 해서 풀죽을 건 없소......대위는 계속 감시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하고 히스는 싱긋 웃었다. 밴스가 매컴을 돌아보았다. "히스 경사에게 줄 명단은 어쨌나?" 하고 가볍게 물었다. "알리바이에 대해 무슨 말인가를 했었던 것 같은데." 매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망설이다가 밴스가 불러준 이름을 적은 쪽지를 히스 경사에게 건네주었다. "다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라오." 하고 매컴은 내키지 않는 듯이 말했다. "여기 이 사람들이 살인이 일어난 날 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조사해 보시오. 혹시 도움될 만한 것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으면 좋겠소. 예를 들어 파이피 같은 경우는 특히 보고가 빠를수록 좋소." 히스가 나가자 매컴은 화가 치밀어 뒤집힐 듯한 눈으로 밴스를 보았다. "모든 일을 휘저어놓고 성가시게 굴 작정 -- " 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밴스가 부드럽게 그 말을 가로막았다. "자네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로군, 매컴. 모르겠나? 나는 자네를 지켜주는 수호신일세. 자네의 때맞추어 나타나는 수호신, 여신의 어머니란 말일세!" 제16장 시인(是認)과 은닉 (6월 18일 화요일 오후 -- ) 한시간쯤 지나자 매컴이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94번지로 보냈던 형사 펠프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왔다. "검사님, 바라시는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그 쉰 목소리에는 감출 길 없는 승리감이 드러나 있었다. "세인트 클레어라는 여자의 아파트로 올라갔었지요. 벨을 눌렀습니다. 그녀가 직접 나왔기에 홀 안으로 밀고 들어가서 심문을 했지요. 물론 대답을 거절하더군요. 벤슨 씨를 쏜 권총을 싼 꾸러미를 알고 있느냐고 으름장부터 놓았으나 그녀는 웃기만 할 뿐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이 아파트에서 나가세요, 구역질 나요.' 라고 하더군요." 형사는 씩 웃었다. "급히 아래로 내려가 교환대가 설치되어 있는 방으로 달려들어가기가 무섭게 그녀의 방 신호등이 켜지더군요. 교환수에게 그녀가 주문하는 번호에 연결시키도록 한 다음 옆으로 밀어내고 제가 직접 들어보았지요. 그녀는 리코크 대위와 통화하더군요.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어제 당신이 여기서 권총을 들고 나가 강물에 던져버린 사실을 저쪽에서 알고 있어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인지 리코크 대위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침착을 되찾았는지 달콤한 목소리로, '걱정 말아요, 무리엘. 어제 일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돼요. 오전중에 깨끗이 처리할 테니까.' 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내일까지 얌전하게 있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 전화를 끊었습니다." 매컴은 말없이 그 이야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자네는 그 대화를 듣고 어떤 인상을 받았나?" "그렇게 물으시니 말씀입니다만 -- " 하고 형사가 말했다. "십중팔구 리코크 대위가 범인이고, 여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매컴은 수고했다고 말하고 형사를 물러가게 했다. "그 포토맥* 남쪽 지방의 기사도에는 정말 질려버리겠군." 하고 밴스가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그 멋쟁이 리앤더 파이피와 고상한 대화를 시작해 볼 시간이 되지 않았나, 매컴?" 밴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가 와 있다는 전갈이 왔다. 파이피는 여전히 아주 세련된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의 불안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포토맥 지방은 포토맥 강의 남쪽, 즉 남부의 여러 주를 일컫는다. 그 중 조지아 주는 리코크 대위가 태어난 곳이다.) "앉으시오, 파이피 씨." 하고 매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좀더 설명을 해주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매컴은 다갈색 종이봉투를 꺼내 그 내용물이 상대방에게 보이도록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이것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다 말씀드리지요." 하고 파이피는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거만한 태도도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했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말을 중단하고 성냥을 다루는 솜씨가 좀 신경질적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실은 좀더 일찍 이 문제에 대해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 파이피는 뜻도 없이 고상하게 손을 흔들어 서류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쪽 팔꿈치에 체중을 걸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그리고는 말을 할 때마다 담배가 입술 사이에서 아래위로 흔들렸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정말 괴롭습니다." 하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니까 불평할 수야 없지요......나의 -- 가정 사정은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장인이라는 양반이 이유도 없이 나를 몹시 싫어하지요. 정말 눈곱 만큼도 안되는 경제적 도움 이외에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서 기뻐하는 위인입니다. 나에게 주지 않는 돈은 실은 아내의 돈입니다. 두세 달 전에 나는 얼마쯤의 돈을-- 정확히 말하면 1만 달러입니다만 -- 써버렸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안 일이지만 그것은 내 마음대로 써서는 안될 돈이었지요. 이 실수가 장인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나는 아내와의 사이에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돈을 모두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 그런 오해가 생기게 되면 아내를 더없이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거든요.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래서 수표에 앨빈의 이름을 이용했던 겁니다. 하지만 곧 그 사실을 그에게 설명하고는 어음을 써준 다음에 내 성의 표시로서 간단한 사과편지도 써주었습니다......단지 그것뿐입니다, 매컴 씨. " "지난 주에 그 사람과 말다툼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파이피는 허를 찔려 낭패한 눈으로 매컴을 보았다. "아아, 그 대수롭지 않은 불행한 일에 대해서도 들은 모양이군요......그렇습니다 --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어서요, 글쎄요......뭐랄까, 결재기간 때문이었습니다." "벤슨 씨는 기한까지 어음을 결재해 달라고 고집했습니까?"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파이피의 태도가 갑자기 활달해졌다. "검사님, 제발 앨빈과의 사소한 다툼에 대해서는 너무 캐묻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보증합니다만 이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니까요. 우리 둘 사이의 아주 개인적인 비밀에 속하는 겁니다." 파이피는 마치 상대방을 절대로 믿고 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하지만 앨빈이 총에 맞은 날 밤 수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의 집에 갔었던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렸듯이 온 집안이 캄캄했기 때문에 그날 밤은 터키탕에서 묵었습니다." "잠깐만, 파이피 씨 -- " 밴스가 끼어들었다. "앨빈 벤슨 씨가 담보도 없이 어음을 받았습니까?" "물론이지요." 파이피의 말은 아주 당연하다는 투였다. "앨빈과 나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 " 하고 밴스가 물고늘어졌다. "그렇게 큰돈이니 당연히 담보를 요구했을 텐데요. 당신이 확실히 갚을 것이라는 걸 그는 어떻게 확신했을까요?" "그가 그렇게 믿었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군요." 파이피는 되도록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밴스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그 사과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파이피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한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밴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사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밴스는 그 뒤로는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매컴은 30분 가까이 파이피를 심문했으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파이피는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 벤슨과의 말다툼에 대해서는 그 이상 깊이 파고드는 것을, 비록 부드러운 태도였지만 굉장히 거부했으며,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결국엔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는걸." 하고 매컴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파이피의 무질서한 금전문제를 캐내어 그의 결점을 알아냈을 뿐이라는 점에서는 히스 경사의 의견과 다를 바 없네." "자네라는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도 둔한가?" 하고 밴스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파이피가 이제 비로소 자네에게 올바른 수사의 선을 제공해 주었는데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다니......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매컴. 잘 기억해 두어야 하네. 1만 달러에 대한 파이피의 이야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일세. 그 돈을 써버리고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수표에 앨빈 벤슨의 이름을 무단도용한 것이지. 그러나 고백서 말고 다른 담보가 없었다고는 나는 절대로 믿지 않네. 앨빈 벤슨은 -- 친구든 친구가 아니든 -- 그만한 큰 돈을 담보 없이 빌려줄 사람이 아닐세. 그는 돈을 돌려받고 싶었던 걸세 -- 사람을 감옥에 처넣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 그래서 내가 끼어들어서 담보에 대한 것을 물어본 것일세. 파이피는 물론 부인했지만, 벤슨이 어떻게 아무 탈없이 어음이 결제될 거라고 생각했었느냐고 내가 몰아붙이자 그는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듯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그 사과문이라는 것을 썼기 때문이 아니냐고 들이대본 거지. 그때 그 사람의 태도로 보아 마음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네 --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것을 말일세. 그는 내 암시에 선뜻 걸려들었다네. 그래서 난 내 추측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지." "그럼, 그 추측이란 게 뭔가?" 하고 매컴이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눈물의 선물이라고 할까?" 하고 밴스는 한숨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자네는 모르겠나? 담보와 관계 있는 무엇인가가 있네. 틀림없을 걸세. 만일 그렇지 않다면 파이피는 말다툼한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을 걸세. 그것으로 자기에 대한 혐의사실이 밝혀진다면 말이야. 그런데 자신이 난처한 처지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날 벤슨의 사무실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해명을 거절하고 있네......파이피는 누군가를 감싸주고 있는 거지 -- 그렇다고 그에게 기사도 정신 같은 게 있다는 것은 아닐세. 그래서 난 의문을 갖는 거야 --- 왜 그랬을까 하고......" 밴스는 몸을 뒤로 젖히고는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내 머릿속에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날 만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네." 그리고는 이어서, "그것은 말일세, 그 담보만 찾게 되면 범인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일세."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고 있는 매컴의 눈에 흥미와 놀라움이 뒤섞인 빛이 떠올랐다. 매컴은 그날 오후 5시 30분에 전화의 상대자와 만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밴스를 보고 활짝 웃었다. "자네의 천리안이 제대로 맞았구먼!" 하고 매컴이 말했다. "호프먼 양이 몰래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전화를 걸어 왔는데, 자기가 한 이야기에 좀 덧붙일 것이 있다는군. 5시 30분에 이리로 올 걸세." 밴스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점심식사하러 사무실을 나와서 전화를 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네." 매컴은 새삼스럽게 밴스를 바라보며, "어째 이상한 일만 자꾸 생기는군." 하고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야." 하고 밴스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마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묘한 일일 걸세." 15분 내지 20분이나 매컴은 밴스에게서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밴스는 갑자기 떠벌이는 능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나중에 가서는 매컴은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제 결론을 내리기로 했네." 하고 매컴이 말했다. "자네는 벤슨 살인사건에서 크게 한몫했거나, 아니면 보기드문 억측의 명수야." "또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네." 하고 밴스는 대답했다. "나의 심미적 가설과 순수이론적 추리가 -- 자네 말을 빌리자면 -- 한몫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 어떤가?" 우리가 점심식사하러 나가기 조금 전에 트레이시가 롱 아일랜드에서 보고할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스워커가 알려왔다. "파이피의 여자관계를 조사해 오라고 보낸 사람 말인가?" 하고 밴스는 매컴에게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마침 잘됐군!" "바로 그 사람일세......이리로 들여보내게, 스워커." 트레이시는 한 손에 수첩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코안경을 들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들어왔다. "파이피에 대해 조사하는 건 아주 쉬웠습니다." 하고 형사가 말했다. "포트 워싱턴에서는 이름이 나 있더군요 -- 얼굴도 꽤 알려져 있어서 --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을 알아내기는 아주 쉬웠습니다." 트레이시 형사는 안경을 적당한 거리로 알맞게 조절해 쓰고는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1910년에 그는 호손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여자는 부자지만 파이피는 별로 덕을 보진 못했습니다. 장인이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지요 -- " "저어, 트레이시 형사 -- " 하고 밴스가 끼어들었다. "호손 파이피 부인이나 그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으로 됐소 -- 결혼 생활이 원만치 못하다는 건 파이피가 스스로도 털어놓았으니까.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있거든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다른 여자가 있소?" 트레이시는 이 사람은 누구냐는 듯이 지방검사를 보았다. 밴스의 발언권에 대해 묻는 것이다. 매컴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사는 수첩을 넘겨가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그것에 대해서 조사한 결과 다른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뉴욕에 살고 있으며 파이피 씨 댁 근처 약방에 가끔 전화를 걸어 전갈을 부탁한답니다. 그리고 그도 그 여자에게 볼일이 있을 때면 그 전화를 이용한다더군요. 물론 약방 주인과는 어떤 약속이 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여자의 전화번호는 알아냈습니다. 뉴욕에 돌아와서 곧 전화국을 통해 가입자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어 잠깐 만나보았습니다. 폴라 버닝이라는 미망인으로서 행실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여자더군요. 웨스트 75번가 268번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트레이시의 보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형사가 나가자 매컴은 밴스를 보고 너그러운 미소를 보냈다. "자네에게는 연료공급이 안된 것 같군." "천만에! 생각한 것보다 잘 해주었는걸." 하고 밴스는 말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대로 찾아내 주었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라고?" 하고 매컴이 되물었다. "내게는 파이피의 여자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는데." "하지만 파이피의 여자관계야말로 벤슨 살인사건을 푸는 열쇠라네, 매컴." 하고 이야기를 마친 뒤로 밴스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컴은 다른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데다 오후에는 사람과 만날 약속도 많았으므로 점심식사는 사무실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래서 밴스와 나는 일단 물러나왔다. 우리는 엘리제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크네드라 화랑에서 프랑스 점묘파(點描派)의 전람회를 대강 둘러보고는 에얼리언 홀로 갔다. 그곳에서는 샌프란시스코의 현악4중주단이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5시 30분 조금 전에 우리는 다시 지방검사국으로 갔는데, 그때는 직원들도 모두 퇴근하고 매컴만이 혼자 남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 호프먼 양이 찾아와서 단도직입적이고 사무적인 말투로 아까는 미처 못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다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하고 여비서가 말했다. "지금도 비밀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이 없으시면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이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저는 직장을 잃게 되거든요." "약속하지요." 하고 매컴이 보증했다. "당신의 비밀을 전적으로 존중하겠소." 여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벤슨 소령님에게 파이피 씨와 앨빈 벤슨 씨에 대한 말씀을 드렸더니, 곧 함께 검사님께 가서 그 이야기를 해드려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이리로 오는 도중 이야기의 일부는 빼는 게 좋겠다고 하신 겁니다. 분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지만, 사건과 관계없는 일이니 말씀드리면 공연히 검사님만 혼란시킬 뿐이라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전 그 말씀에 따랐습니다만, 나중에 사무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앨빈 벤슨 씨의 죽음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가 생각나자 모두 검사님에게 말씀드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죠. 이것이 만일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경우에 제가 숨기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결심이 현명했는지 아닌지 좀 불안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실은 앨빈 벤슨 씨와 파이피 씨가 말다툼을 벌인 날 벤슨 씨가 금고에서 가져오라고 한 것은 그 봉투뿐만이 아니고 다른 것도 있었거든요. 네모진 무거운 꾸러미였는데, 봉투와 마찬가지로 겉에 '파이피 -- 개인용'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벤슨 씨와 파이피 씨가 다툰 것은 바로 그 꾸러미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오늘 아침 소령에게 봉투를 가져다 줄 때 그 꾸러미도 금고에 있었소?" "아뇨, 지난주 파이피 씨가 돌아간 다음 봉투와 함께 꾸러미도 금고에 넣어두었는데, 지난 목요일 -- 그분이 살해된 날 말예요 -- 그날 벤슨 씨가 댁으로 가져갔어요." 매컴은 이 이야기에 약간의 흥미를 보였을 뿐 얼른 대화를 끝내려 하자 밴스가 나섰다. "정말 고맙소, 호프먼 양. 그 꾸러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신 김에 한두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데......앨빈 벤슨 씨와 소령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습니까?" 그녀는 다소 놀란 듯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아주 좋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두 분은 성격이 전혀 달랐으니까요. 앨빈 벤슨 씨는 별로 유쾌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다지 훌륭한 분이 아니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 같군요. 도저히 형제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정도였어요. 사업상의 일로 늘 다투었답니다. 두 분은 언제나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어요." "무리도 아니겠지." 하고 밴스가 맞장구를 쳤다. "성품이 그렇게 완전히 달랐으니 말입니다......그런데 어떤 식으로 서로 의심했나요?" "예를 들면 가끔 서로 상대방을 염탐하는 거예요. 사무실이 서로 맞붙어 있거든요. 그래서 문을 통해 서로 엿듣는 겁니다. 저는 두 분의 비서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엿듣는 것을 가끔 보았죠. 저를 통해 상대방의 일을 알아내려고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요." 밴스는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보고 미소지었다. "당신으로서는 기분좋은 입장이 아니었겠군요?" "아니, 저는 별로 상관없었습니다." 하고 여비서도 마주보며 웃었다. "재미있었는걸요." "마지막으로 엿듣는 것을 본 것은 언제였지요?" 하고 밴스가 물었다. 그녀는 곧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앨빈 벤슨 씨가 살아 있던 마지막 날, 소령님이 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앨빈 벤슨 씨에게 손님이 와 있었지요 -- 여자분이었는데 -- 소령님은 굉장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았어요. 그때는 오후였는데, 앨빈 벤슨 씨는 그날 일찍 퇴근했습니다 -- 그 여자 손님이 돌아가고 난 약 30분 뒤에 그 여자분이 다시 찾아왔지만, 벤슨 씨가 안 계셨기 때문에 저는 벤슨 씨가 퇴근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여자 손님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하고 밴스가 물었다. "아뇨, 모르는데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이름은 밝히지 않았거든요." 밴스는 그 밖에도 두세 가지를 물어보고는, 그런 다음 우리는 호프먼 양과 함께 주택가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23번가에서 그녀와 헤어졌다. 도중에 내내 매컴은 말없이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밴스 또한 우리가 스타이비샌트 클럽의 휴게실 안락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자리잡을 때까지 의견다운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밴스는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는 말했다. "자네는 호프먼 양이 한 번 더 찾아올 것을 예상한 정교한 내 심리적 과정을 알겠지, 매컴? 그건 말일세, 나는 벤슨이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담보 없이는 위조수표에 순순히 돈을 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네. 게다가 또 그 말다툼도 담보 때문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었고. 파이피는 그 또 하나의 자기로 말미암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나는 파이피가 어음을 결재하기 전에 담보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가, '그건 안되네.' 하고 거절당한 것이 아닌가 싶어...... 게다가 그 골디록스*는 좋은 여자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두 탕아의 말다툼을 옆방에 앉아 있으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여자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지. 그들이 다투고 있을 때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는 그녀 말은 굳이 캐들어갈 필요까지도 없지 않겠나? 나는 그녀가 털어놓은 것 이상의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했다네. 그래서 나는 어째서 그것을 빼버렸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지.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은 단 하나밖에 없었네 -- 소령이 그렇게 하라고 권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이 자비롭고 젊은 아가씨는 직선적인 독일인의 혼을 지니고 있는 데다, 선천적으로 자기 본위이며, 조심스럽고 정직한 신념을 타고났거든. 그래서 나는 감히 그런 예상을 해보았던 것일세. 그 아가씨는 고용주의 자애로운 감독의 눈에서 벗어나면 틀림없이 나중에 일이 탄로났을 때의 일을 생각하여 숨긴 이야기를 털어놓을 것이라고 말일세...... 이렇게 설명하고 보면 하나도 신비할 것 없지, 매컴?" (*'골디록스'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욕심많은 소녀인데, 그녀는 결국 분수에 맞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거기까지는 좋아." 하고 매컴은 찌푸린 얼굴로 양보했다. "그러면 이젠 어떻게 돼가는 건가?" "앞으로 어떻게 돼갈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겠네." 밴스는 한동안 태연하게 담배만 피웠다. "자네도 알겠지?" 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 수상쩍은 꾸러미에 담보가 들어 있었다는 걸 말일세." "그런 결론이 될는지도 모르지." 하고 매컴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겠네 -- 자네는 그래주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그야 물론이지." 하고 밴스가 태평스럽게 다음 말을 계속했다. "추론의 기술이 뛰어난 자네의 법률적 두뇌는 그 꾸러미가 운명의 날 오후 플래트 부인이 벤슨 씨의 테이블 위에서 본 보석상자였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매컴은 앉음새를 고치고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가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 "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는지 난 모르겠군. 소령은 그 꾸러미가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할 것 없다고 비서에게 말했을 걸세." "하지만 소령이 그 꾸러미가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도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지 -- 안 그런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사건과 관계가 있고 없는지 알 수 없을 테니까......나는 처음부터 소령이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 이상의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네. 파이피의 뒤를 밟으라고 한 것도 소령이었고, 리코크 대위에게 죄가 없다고 자신있게 단언한 것도 소령이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돼." 매컴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네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이젠 알 것 같군." 하고 그는 느린 어조로 말했다. "그 보석은 결국 사건과 중대한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소령과 만나서 우선 그 점에 대해 물어봐야겠군." 그날 밤 클럽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가 휴게실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벤슨 소령이 나타났다. 매컴이 얼른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소령, 동생의 죽음에 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한 부탁인데, 좀더 도와주지 않겠나?" 소령은 그 참뜻이 무엇인가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매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매컴의 목소리가 겉으로 나타나 있는 부드러움과 아주 다르기 때문이었다. "자네 일을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 " 하고 소령은 한마디 한마디 신중히 생각해 가며 말했다.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기꺼이 돕겠네. 하지만 나로서도 당분간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두세 가지 있네......나 하나만을 생각한다면야 -- " 하고 소령은 덧붙였다. "이야기야 다르겠지만." "그러니까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하고 밴스가 물었다. "어떤 의미로는 -- 그렇습니다. 어느 날 앨빈의 방에서 나는 소리를 언뜻 들은 적이 있었는데, 동생이 죽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다른 뜻으로 해석되더군요." "이럴 땐 기사도 운운해서는 안되네, 소령." 하고 매컴이 설득하고 나섰다. "그 의심이 사실무근이라면 곧 밝혀질 게 아닌가?" "하지만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어림짐작할 일도 아니라네." 하고 소령은 딱 잘라말했다. "이 문제는 나를 젖혀두고 풀어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네." 매컴이 아무리 재촉해도 소령은 그 이상은 한마디도 더 하지 않았으며, 마침내는 적당한 구실을 대고 나가버렸다. 매컴은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짜증스럽게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쳐가며 연신 담배만 빨아댔다. "어떤가, 두목, 좀 질려버린 모양이지?" 하고 밴스가 꼬집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하고 매컴이 투덜거렸다. "이 사건에서는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경찰이나 지방검사국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래." "모두들 이렇게 숨기려 들지만 않는다면 이토록 난처해지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하고 밴스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괘씸한 점은 각자가 모두 누군가를 감싸주기 위해서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는 것 같다는 거야. 먼저 플래트 부인을 보게나. 그 가정부는 벤슨네 집에서 그날 오후 차를 마신 사람이 있었는데도 당사자에게 피해가 갈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해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네. 세인트 클레어 양은 아주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고. 다른 사람에게 혐의가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지. 리코크 대위는 자기 약혼자가 사건에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그 순간부터 그만 벙어리가 되어버렸네. 리앤더 파이피마저도 남이 말려들게 될까 봐 겁이 나서 혼자만 빠져나가기를 거부했네. 그리고 방금 보았듯이 소령 역시 그렇고......정말 야단이야 -- 그러나 다른 일면에서 보면 이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 -- 크게 칭찬까지는 할 수 없어도, 이처럼 숭고한 자기희생적인 사람들과 알게 되어서 말일세." "빌어먹을!" 매컴은 여송연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내 신경은 엉망이 되겠어. 나는 이 문제를 끌어안은 채 우선 눈을 좀 붙여야겠네.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맞붙기로 하세." "문제를 끌어안고 잠을 잔다는 옛날부터의 생각은 잘못된 것일세." 우리가 매디슨 가를 걷기 시작했을 때 밴스가 말했다. " -- 명확하게 사물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말하자면 변명이지. 시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시인은 모두 그것을 믿고 있으니까 -- 대자연의 부드러운 유머라느니, 괴로움의 진정제라느니, 어린아이의 흰 연꽃이라느니, 자연의 감미로운 회복제라느니 하면서 갖가지 말들을 늘어놓지. 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야. 두뇌는 태엽이 감겨 활동하고 있을 때가 잠이 덜 깨어 멍청해 있을 때보다 훨씬 잘 움직이지. 잠은 진정제지 -- 자극제가 아니라네." "그럼, 자네는 깨어 있으면서 생각하게나." 하고 매컴이 퉁명스럽게 충고를 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네." 하고 밴스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하지만 벤슨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닐세. 그 일에 대한 처리방법은 이미 나흘 전에 생각해 두었으니까." 제17장 위조수표 (6월 19일 수요일 오전 -- ) 다음날 아침 우리는 매컴과 함께 시(市) 중심가로 자동차를 몰았다. 9시 전에 사무실에 닿았는데, 히스 경사는 이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사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는데, 그의 말소리에는 지방검사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었다. "매컴 검사님, 리코크 대위를 어쩔 셈이십니까?" 하고 히스가 물었다. "되도록 빨리 잡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미행은 시키고 있는데 수상한 점이 많습니다. 어제 아침에 그는 거래은행에 가더니 출납주임 방에 들어가 30분이나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런 다음 변호사를 찾아가 한 시간도 넘게 있다가 다시 은행으로 돌아가서 또 30분이나 머물더라는 겁니다. 애스터 그릴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시쯤엔 그가 사는 건 물을 관리하는 토지건물회사를 찾아가더랍니다. 그가 나간 다음에 알아보니까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내일부터 세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겁니다. 그 뒤에는 친구를 여섯 명쯤 방문하고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 제 부하가 그의 아파트 벨을 누르고 거기가 호지트 씨 댁이냐고 물으면서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그는 한창 짐을 꾸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도망치려는 것 같습니다만." 매컴은 눈살을 찌푸렸다. 히스의 보고를 듣고 걱정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히스 경사님, 리코크 대위는 감시시키고 있겠지요? 당신 눈이 그렇게 번득이고 있는 한 달아나지는 못할 게요." 매컴은 흘끗 밴스를 본 다음 히스 경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내버려둬요. 그러나 만일 리코크가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할 때에는 체포하도록 하시오." 히스는 잔뜩 골난 얼굴을 하고 나갔다. "그런데, 매컴." 하고 밴스가 말했다. "오늘 12시 30분엔 아무와도 만날 약속을 해선 안되네. 이미 약속이 있으니까. 더구나 상대는 여자라네." 매컴은 펜을 놓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또 무슨 엉터리 수작인가?" "자네 대신 약속을 해두었다네. 오늘 아침 내가 그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아마 그때까지 자고 있었던 모양이야." 매컴은 화가 나서 입에 거품을 물고 맹렬히 항의했다. 밴스는 그를 달래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러니 자네는 그저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되네. 내가 자네라고 하며 약속을 했으니까, 만일 만나지 않는다면 큰 실례가 된다네......내가 보증하겠네만, 그 여자를 만나보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걸세." 하고 밴스가 덧붙였다."어젯밤에는 일이 너무 엉망으로 꼬여버려서 -- 나는 자네가 애쓰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폴라 버닝 부인과 만나기로 자네 대신 약속해 두었지 -- 그 여자가 바로 파이피의 에로이즈*란 말일세. 나는 그 여자가 틀림없이 자네를 에워싸고 있는 깊은 우수를 어느 정도는 걷어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네." (*'에로이즈'는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자 아베라르가 가르친 제자로, 그와 열렬히 연애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그와 결혼했으나, 나중에 수녀가 되었다.) "이봐, 밴스!" 하고 매컴이 소리쳤다. "다시 말해 두지만 이 사무실을 이끌어나가는 건 나란 말일세 -- " 거기까지 말하고 매컴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었다. 상대방의 너무도 태연한 태도에 혼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폴라 버닝 부인을 만나는 것이 그리 마음내키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게다. 매컴의 울화는 차츰 가라앉아서 마침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의 목소리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 이름을 대고 약속을 한 이상은 할 수 없이 만나봐야겠군. 하지만 파이피가 그 여자와 그렇게 깊이 사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가끔 들르는 정도겠지, 뭐 -- 갑자기 찾아가는 게 아니라 미리 약속을 하고 가는 그런 사이 말일세." "기묘하군." 하고 밴스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래서 어제 전화를 걸어 롱 아일랜드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 "전화를 걸었다고? 자네가?" "정말 미안하네, 매컴. 하지만 자네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네. 곤히 잠자며 피곤을 풀고 있는 자네를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어. 파이피도 무척 고마워하더군. 가엾을 정도로 말이야. 아내가 기뻐할 거라고도 말하더군. 눈물이 나올 만큼 애처가였다네. 하지만 집을 비운 이유를 설명하자면 아마 온갖 아양과 말재주를 다 동원해야만 할 걸세." "그 밖에 또 나 모르는 사이에 어디어디에다 나를 팔았나?" 하고 매컴이 따지고 들었다. "그것뿐이라네." 하고 밴스는 대답하고 훌쩍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창가로 갔다. 그는 잠시 선 채로 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담배를 피워댔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엔 지금까지의 장난기어린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컴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소령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 이상의 일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했네." 하고 밴스가 말했다. "자네도 물론 이 사건에 대해서 그 사람이 취한 훌륭한 태도로 보아서는 그를 추궁할 수야 없겠지. 더구나 소령은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자네 편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다는 것이 어젯밤 그가 취한 태도로 보아 틀림없네. 그래서, 매컴, 나는 소령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또 그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그것을 알아내는 방법을 생각했네......자네는 호프먼 양이 말한 서로 엿들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 매컴? 그리고 소령이 동생이 살해된 뒤에 생각해 보니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한 말을 언뜻 들은 적이 있다고 한 말도 기억하겠지? 그렇다면 소령이 알고 있는 점은 그의 사업과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고객 가운데 한 사람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걸세." 밴스는 천천히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내게 한 가지 제안이 있네. 소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람을 보낼 테니 회사의 원장부와 거래장부를 좀 보여달라고 부탁을 하게나. 어떤 고객과의 거래에 대해서 알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면 되겠지. 뭣하면 세인트 클레어 양이라고 해도 좋고 -- 파이피라고 해도 좋아. 아무튼 적당한 이름을 들려주는 거야. 내게는 이상한 신들린 예감 같은 것이 있다네. 그렇게 하면 소령이 감싸고 도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리고 소령은 자네가 원장부에 흥미를 갖는 것을 환영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그러나 매컴으로서는 이 계획이 실행가능성이 있다거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벤슨 소령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러나 밴스의 결의가 너무도 굳건하고 그 주장을 굽히지 않기에 결국 매컴도 동의하고 말았다. 매컴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더니 기분좋게 승낙하더군. 정말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일세." 하고 말했다. "선뜻 응해 줄 것으로 짐작했었지." 하고 밴스가 말했다. "소령이 누구를 의심하고 있는지 자네 손으로 직접 찾아내게 되면 그는 고자질했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아도 되니까." 매컴은 버튼을 눌러 스워커를 불렀다. "스티트 씨에게 전화걸어서 오전중에 여기서 만나자고 전해주게 -- 급히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고." "스티트라는 사람은 -- " 하고 매컴이 밴스에게 설명했다. "뉴욕 생명 빌딩에 있는 회계사무소 소장일세.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늘 도움을 받고 있다네." 정오가 조금 못 되어 스티트가 왔다. 늙은이 같은 젊은 남자로서 날카롭고 재기넘치는 얼굴을 줄곧 찌푸리고 있었다. 지방검사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매컴은 부탁할 일을 간단히 설명하고 일하는 데 참고될 만큼 사건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 남자는 곧 사정을 파악하고는 좀 더러워진 봉투 뒤에 두세 가지를 메모했다. 밴스 역시 매컴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동안에 종이쪽지에다 뭔가를 적어넣고 있었다. 매컴은 일어나서 모자를 집어들었다. "자아, 그럼, 자네가 해놓은 약속을 지키러 가야지?" 하고 밴스에게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자아, 갑시다. 스티트 씨, 판사 전용 엘리베이터로 아래까지 모셔다 드리리다." "호의는 고맙지만 -- " 하고 밴스가 끼어들었다. "스티트 씨와 나는 그 영광을 사절하고 일반용 리프트(밴스는 영국적인 취향을 좋아한다.)로 내려가겠네. 아래에서 기다리지." 밴스는 회계사의 팔을 잡고 대합실로 걸어갔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는 10분이나 걸렸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72번가까지 가서 웨스트 엔드 가(街)를 걸어올라가 폴라 버닝 부인의 집으로 갔다. 그 부인은 75번가 모퉁이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벨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으니 강한 중국향료 냄새가 풍겨왔다. "이건 일이 잘될 것 같군." 하고 밴스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향을 피우는 여자는 하나같이 감상적이니까." 버닝 부인은 키가 크고 조금 살찐, 그러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밀짚 같은 머리색깔에 살색은 희고 발그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새침한 얼굴이 젊어 보였으며, 얼빠진 듯한 천진해 보이는 표정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 같았다. 짙은 파란색 눈엔 엄격한 구석이 있어 보였고, 광대뼈와 턱밑의 보일 듯 말 듯 늘어진 피부는 오랫동안의 게으르고 방자한 생활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싱싱하고 고운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나치게 가구를 많이 들여놓은 리코코풍 거실로 우리를 맞아들였을 때의 그 태도는 아주 개방적인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리에 앉자 매컴은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된 데 대한 사과의 말을 했고, 밴스는 지체없이 질문자의 역할을 맡고 나섰다. 밴스는 먼저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바라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를 결정하려는 듯이 주의깊게 부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2~3분 동안 우선 몇 마디 시험해 보더니, 밴스는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고 묻고 버닝 부인에게도 자기의 담배를 권했다. 그녀는 한 대 받아들었다. 그런 다음 밴스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이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는 상대방에서 하는 이야기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동정하며 들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파이피 씨는 이 사건에 부인이 말려들지 않게 하려고 무척 애썼답니다." 하고 밴스가 말했다. "우리로서도 그분이 그토록 마음쓴 데 대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앨빈 씨의 죽음과 관련된 어떤 사정 때문에 부인도 사건에 말려들게 된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사항을 숨김없이 말씀해 주신다면 우리에게도, 부인에게도 -- 그리고 특히 파이피 씨에게도 -- 아주 좋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도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으며, 또한 이해도 하고 있으니 그 점은 믿으셔도 됩니다." 밴스는 '파이피'라는 이름에 특히 힘을 줌으로써 그 말의 뜻을 강조했다. 버닝 부인은 불안한 듯이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불안해 견딜 수 없는 듯이 다시 밴스를 올려다보았을 때의 그녀의 눈은 마치, '이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알고 싶어하시는지 저는 짐작도 할 수 없군요." 하고 그녀는 애써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그날 밤 앤디가 뉴욕에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으시죠?" (그 거만한 멋쟁이 파이피를 가리켜 그녀가 '앤디'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불경죄처럼 들렸다.) "그이가 여기에 온 것은 다음날 아침 9시 가까이 되어서였는데요." "벤슨 씨 집 앞에 세워져 있었던 회색 캐딜락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지 못했습니까?" 밴스는 그렇게 물으면서 상대방의 놀란 표정을 그대로 흉내냈다. 그녀는 자신 있게 미소지었다. "그건 앤디의 차가 아니에요. 그이는 그날 아침 8시 기차로 뉴욕에 왔거든요. 자신의 것과 똑같은 자동차가 전날 밤 벤슨 씨 댁 앞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기차로 오기 잘했다고 말하던걸요." 그녀의 말투는 아주 진지했고 정말 자신 있게 들렸다. 파이피가 이 부분에서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했다. 밴스는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고쳐주지 않았다. 고쳐주기는 커녕 그녀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살인이 일어난 날 밤에 파이피가 뉴욕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깡그리 버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버닝 부인과 파이피 씨가 이번 사건에 말려들게 되었다고 한 것은 실은 좀 다른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실은 부인과 벤슨 씨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녀는 거기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미소지었다. "그것 역시 잘못 생각하 신 것 같군요." 하고 그녀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벤슨 씨와 저는 친구라고 할 정도도 아니랍니다. 사실 거의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녀가 부정하는 말에는 지나칠 정도의 힘이 들어 있었다 --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 완전히 무관심한 척하려던 태도에 그만 지나친 열의가 들어가 버린 게 되었다. "단순한 거래에서도 개인적인 관계가 생길 수 있는 법입니다." 하고 밴스는 상대방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특히 그 중간에 나선 사람이 거래 당사자 두 사람과 똑같이 친구가 되는 경우에는 말이지요." 그녀는 재빨리 밴스를 훔쳐보고는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로서는 전혀 모르겠군요." 하고 그녀는 잡아뗐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잠시 천진스러운 빛이 사라지고 타산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저와 벤슨 씨 사이에 사업상 거래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직접은 없었겠지요." 하고 밴스는 대답했다. "그러나 파이피 씨는 분명히 사업상의 거래가 있었습니다. 그 거래 중에서 하나는 부인을 꽤 깊이 끌여들였을 것으로 보는데요." "저를 끌여들였다고요?" 그녀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으나 그 웃음은 일그러져 보였다. "아무래도 불행한 거래였던 것같이 생각됩니다. 파이피 씨가 벤슨 씨와 거래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도 불행한 일이었고, 부인을 그 거래에 끌어들여야만 할 처지에 몰린 것도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밴스의 태도는 여유 있고 자신만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멋지게 연극을 해도, 그리고 비웃음이나 경멸 같은 것으로는 상대방의 생각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분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너무 뜻밖의 말을 들어서 재미있다는 태도를 보이기로 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지요?" 하고 그녀는 농담투로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디서 들은 게 아니랍니다." 밴스는 상대방의 태도에 장단이라도 맞추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이렇게 조금은 유쾌한 방문을 하게 된 거지요. 우리는 머리가 잘 돌지 않기에 부인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다 가르쳐 주시리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비록 그런 수수께끼 같은 거래가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말이에요." "저런!" 하고 밴스는 한숨을 쉬었다. "실망이 큰데요......그럼, 도리가 없군요. 내가 알고 있는 보잘것없는 정보라도 말씀드리고 부인의 동정심에 호소하고서 다시 매달려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밴스의 말에서 풍기는 기분나쁜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투는 상대방이 느끼고 있는 불안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상대가 자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호의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파이피 씨가 1만 달러짜리 수표에 벤슨 씨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사실을 부인은 모르시나요?" 그녀는 자기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 결과가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저울질하느라고 망설이고 있었다. "아뇨, 알고 있습니다. 앤디는 제게 숨기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럼, 벤슨 씨가 그 사실을 알고 굉장히 화를 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그리고 수표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고 어음과 사과편지를 쓰게 한 것도 아시겠고요?" 그녀의 눈은 노여움으로 번들거렸다. "네, 그것도 알고 있어요 -- 앤디는 그 사람 때문에 그런 행동까지 해야 했지요. 세상에서 총에 맞아죽어도 가엾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앨빈 벤슨 씨일 거예요. 개 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도 앤디의 가장 친한 친구인 척했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 사과문 없이는 앤디에게 돈을 꾸어줄 수 없다니......세상에 그런 것을 사업상의 거래라고 할 수 있나요? 절 보고 말하라면 비열하고 치사하며 엉터리 같은 사기꾼이라고 하겠어요." 버닝 부인은 흥분했다. 고상하고 상냥한 태도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자기가 쓰고 있는 말이 얼마나 상스러운 말인지도 생각지 않은 채 죽은 벤슨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의 말씨는 초면인 사람끼리 만났을 때 지켜야 할 온갖 예절을 깡그리 잊은 것이었다. 밴스는 상대가 떠들어대고 있는 동안 위로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요." 그런 밴스의 말투가 한층 정다움을 깊게 한 모양이었다. 얼마 뒤 밴스는 그녀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사과문 정도로 만족하고 담보까지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벤슨 씨도 동정은 받았을 텐데......" "담보라고요? 무슨......" 밴스는 그녀 말투의 변화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상대방이 잔뜩 흥분해 있는 틈을 노려 밴스는 담보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녀가 두려움을 느껴 엉겁결에 되물었을 때 밴스는 기다리던 때가 마침내 왔음을 알았다. 그녀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일시적으로 덮쳐온 불안에서 벗어나기 전에 밴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벤슨 씨는 총에 맞은 날 사무실에서 조그만 파란색 보석상자를 집으로 가져갔답니다." 그녀는 '흑!' 하고 숨을 들이마셨으나 마음의 동요를 겉으로 내보이진 않았다. "훔친 것으로 보시나요?" 이렇게 물어본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여느 남자라면 이 질문으로 잠시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밴스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질문이 도난당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알아차렸다. "어음의 담보물로 파이피 씨에게 보석을 빌려준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이 말에 버닝 부인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볼연지가 부자연스러운 반점으로 떠올랐다. "제가 앤디에게 보석을 빌려주었다는 말인가요? 절대로 그런 건 -- " 밴스는 말없이 가만히 손을 들어 부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흘끗 쏘아 보았다. 그녀도 지금 너무 완강하게 말을 막 해버리면 나중에 부끄러워질까 봐 그것을 미리 막아주려는 밴스의 뜻을 알아차렸다. 적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이처럼 너그럽고 사려깊은 밴스의 태도에 그녀는 더욱 깊은 신뢰감을 느꼈다.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앉아 두 손을 편하게 놓았다. "어째서 제가 앤디에게 보석을 빌려주었다고 생각하시지요?" 그 목소리에는 여자다운 윤기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나 밴스는 그 질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발버둥이 끝난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침묵은 은사(恩赦)였다 -- 양쪽 모두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제 다음에 나오는 말이야말로 진실임이 틀림없다. "앤디에게는 그렇게 해줄 수밖에 없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벤슨 씨는 그이를 감옥에 집어넣었을 거예요." 그녀의 그 말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파이피에 대한 이상한 자기희생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만일 벤슨 씨가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수표의 지불을 거절하기만 했어도 그의 장인이 그렇게 했을 거예요......앤디는 정말이지 사려분별이 없거든요. 결과를 저울질해 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에요. 제가 늘 고삐를 잡아당기지만......아무튼 이번 일은 그에게 좋은 약이 되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이 세상에서 파이피에게 듣는 약이 있다면 바로 이 여자의 맹목적인 성실성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주 수요일에 벤슨 씨 사무실에서 두 사람이 말다툼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고 밴스가 물었다. "그것은 모두 제가 나빴어요." 하고 그녀는 한숨지으며 설명했다. "어음기한은 다가오는데 앤디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앤디에게 벤슨 씨를 찾아가서 있는 돈을 모두 내놓을 테니 보석을 돌려줄 수 있겠는지 물어보라고 부탁했지요......하지만 벤슨 씨는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럴 줄 미리 짐작은 했었습니다만." 밴스는 동정하듯 잠시 버닝 부인을 바라보았다. "나는 필요 이상 부인을 괴롭힐 생각은 없습니다만 -- " 하고 그는 말했다. "아까 부인은 벤슨 씨에 대해 몹시 화를 냈는데, 그 진정한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탄복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셨습니다 -- 제게는 벤슨 씨를 미워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는 불쾌한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앤디에게 보석을 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한 다음날 벤슨 씨가 저에게 전화를 걸었더군요 -- 오후였는데, 다음날 아침 자기 집으로 아침식사하러 오지 않겠느냐고 하는 겁니다. 자기는 지금 집에 있으며, 보석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요. 그리고 넌지시 비치기를, 어쩌면 보석을 저에게 돌려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 그 사람은 그런 짐승 같은 사내였습니다......저는 포트 워싱턴의 앤디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그러자 앤디는 다음날 아침 뉴욕으로 오겠다고 하더군요. 앤디가 여기 도착한 것은 9시쯤이었는데, 우리는 그때 신문을 보고 벤슨 씨가 전날 밤에 살해된 것을 알았지요." 밴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일어나서 버닝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매컴 씨는 벤슨 소령의 친구랍니다. 그리고 수표와 사과문은 우리가 보관하고 있으니, 매컴 씨가 소령에게 잘 말해서 당장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제18장 자 백 (6월 19일 수요일 오후 1시) 우리가 다시 밖으로 나오자 매컴이 물었다. "그녀가 파이피를 구하기 위해 보석을 빌려주었다는 것을 자네는 대체 어떻게 알았나?"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순수이론적 추리 덕분이지." 하고 밴스는 대답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벤슨은 담보 없이 돈을 꾸어줄 만큼 배짱있는 박애주의자가 아니야. 그리고 가난뱅이 파이피에게 1만 달러에 해당하는 담보물이 있을 리도 없고 말일세. 그런 것이 있었다면 수표위조는 뭣하러 했겠나? 그래서 그만한 액수에 해당하는 담보를 빌려줄 만큼 파이피를 믿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네. 그의 기막힐 정도의 결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감상적인 여자 말고 또 누가 있겠나? 그가 누군가에게 안녕을 속삭이기 위해서 뉴욕에 하룻밤 머물렀다고 말했을 때, '이 율리시즈의 생활에도 칼립소*가 있구나.' 하고 의심할 정도의 불순한 생각쯤은 나도 가지고 있었다네. 파이피 같은 사람이 그 상대가 남잔지 여잔지 밝히지 않는다면 그건 여자로 보아 거의 틀림없거든. 그래서 폴 플라이(영국 희극작가 존 F 풀의 희극에 나오는 게으름뱅이)를 포트 워싱턴으로 보내 그의 결혼생활 이외의 교제활동을 조사시키도록 자네에게 제안했던 걸세. 틀림없이 좋은 여자친구가 있을 줄 알았지. 그리고 분명 담보라고 생각되는 수수께끼의 꾸러미 속에 호기심 많은 가정부가 보았다는 보석상자가 들어 있으리라 보고 나는 생각했지. '흐흠, 파이피의 분별없는 달시니아*가 입을 벌리고 그 남자를 기다리는 감옥에서 구해 주기 위해 번쩍거리는 보석을 빌려주었구나.' 하고 말일세. 또한 그 남자가 수표에 대해 설명할 때 누군가를 감싸주고 있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네. 그래서 트레이시가 여자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 왔을 때 나는 곧 자네 대신 만나자고 했었던 걸세." (*'칼립소'는 바다의 요정으로, 율리시즈(오디세우스)를 사랑하여 영원한 생명을 줄 테니 언제까지나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율리시즈는 고향의 처자에게로 돌아갈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칼립소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하는 수없이 많은 선물과 순풍을 주어 율리시즈를 바다로 떠나보냈다. *'달시니아'는 돈키호테가 마음에 그리던 여자이다. 실제로는 토보소의 뚱뚱한 농부의 딸이지만, 돈키호테의 눈에는 흠잡을 데 없는 절세미인으로 보였다.) 우리는 웨스트 엔드 가에서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73번가에 늘어서 있는 고딕 르네상스 슈와브풍의 주택가를 지나고 있었다. 밴스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매컴은 참고 기다렸다. 이윽고 밴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보게, 매컴. 버닝 부인을 보고 나는 곧 내 결론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네. 그녀는 감상적이고, 너그러운 직업여성에게 흔히 있는 타입 -- 애인을 위해서라면 보석이든 무엇이든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는 타입일세. 그리고 우리가 찾아갔을 때 그녀는 몸에 보석이라고는 하나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네 -- 그런 부류의 여자들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상을 남기기 위해 반드시 보석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법인데 말이야. 그런 여자들은 부엌이 텅텅 비어 있어도 몸에는 보석으로 감고 있다네. 그래서 남은 문제는 '어떻게 그 여자의 입을 열게 하느냐'는 것뿐이었지." "대체적으로 자네는 아주 잘 해냈다고 할 수 있겠는데." 하고 매컴이 평가했다. 밴스는 겸손하게 허리굽혀 절했다. "휴버트 경의 말씀에 황공할 뿐입니다 -- 그건 그렇고, 내가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네의 그 암담한 마음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치지 않았나?" "그야 물론이지." 하고 매컴이 말했다. "나라고 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지. 그녀는 파이피가 살인이 일어난 다음날 아침까지 뉴욕에는 오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벤슨이 보석을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는 걸 파이피에게 전화로 알려준 것을 털어놓았다네. 따라서 사정은 이렇게 된 걸세 -- 우선 파이피는 보석이 벤슨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권총이 발사된 시각에 그 집에 있었네. 그런데 보석의 행방은 묘연하고, 파이피는 그날 밤의 자기 행동을 숨기려 하고 있네." 밴스는 절망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매컴, 요컨대 이 사건에는 자네를 위해서는 나무가 너무 많아. 그래서 자네에겐 숲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일세." "자네는 하나의 특정한 나무를 보기에 바빠서 다른 나무들은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밴스의 얼굴에 언뜻 그늘이 스쳐갔다. "자네 말대로라면 좋겠네만......" 하고 그는 말했다. 이미 1시 30분이 가까웠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앤서니아 호텔 그릴에 들렀다. 식사하는 동안 매컴은 줄곧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었다. 밖으로 나와 지하철을 타고서 매컴은 불안한 듯이 시계를 보았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월 가(街)에 가서 벤슨 소령을 만나보고 싶군. 그가 호프먼 양에게 그 꾸러미에 대해 내게 아무 말 말라고 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어쩌면 그 속에 있었던 것이 보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 " "앨빈 벤슨이 소령에게 그 꾸러미에 대해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자네는 단 한 순간이라도 그렇게 생각했었나?" 하고 밴스는 말했다. "그건 별로 정당했다고 할 수 없는 거래였으니까, 소령에게는 아마 달리 뭐라고 꾸며댔을 걸세." 벤슨 소령의 설명은 밴스가 추측한 그대로였다. 매컴은 폴라 버닝을 만나고 오는 길이이고 말하며 보석 이야기를 특히 강조했다. 그렇게 하면 소령이 스스로 그 꾸러미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으로 기대했었던 것이다. 여비서 호프먼 양과의 약속 때문에, 소령이 꾸러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소령은 몹시 놀란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눈에 차츰 노여운 빛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내가 앨빈에게 속은 것 같군." 하고 소령은 말했다. 한동안 똑바로 앞만 노려보고 있더니 얼굴이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죽었으니 그런 생각은 더는 하고 싶지 않군.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아침 호프먼 양이 나에게 봉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금고 속 앨빈의 개인용 서랍에 작은 꾸러미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는 자네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네. 그 꾸러미에 들어 있는 것이 버닝 부인의 보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자네에게 해봐야 문제만 더 복잡해질 뿐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일세. 앨빈의 말로는 버닝 부인이 채무상의 일로 소송을 당했는데, 보상수속이 취해지기 직전에 파이피가 그 부인의 보석을 가지고 와서 한동안 자기 금고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네." 형사법정 건물로 돌아오는 도중에 매컴은 밴스의 팔을 잡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네의 그 억측은 아직 운세가 다하지 않은 모양일세." "글쎄, 대강은." 하고 밴스가 동조했다. "내가 보기에 앨빈 벤슨은 마치 워렌 헤이스팅스*처럼 발뺌과 속임수를 최후의 방패로 삼고 죽을 결심을 했던 모양일세 -- 빛나는 허위라고나 할까?" (*워렌 헤이스팅스(1732~1818)는 인도의 초대 벵골 총독으로서, 상당한 수완가로 공적도 많았고 적도 많았다. 나중에 탄핵을 받아 독재와 잔혹한 행동을 한 이유로 재판받았는데, 7년 동안 온갖 술책과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싸운 끝에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7만 파운드의 전재산을 날려버리고 말년에는 동인도회사에서 호의로 내준 연금으로 지냈으며, 그 뒤 조지 4세를 알게 되어 그런대로 명예를 회복했다. 그처럼 분방하고 패기에 넘친 인물은 역사상 드물었다고 한다.) "아무튼 소령은 자신도 모르게 파이피에 대해 불리한 쇠사슬의 고리를 하나 더 붙여준 셈일세." "자네는 쇠사슬 수집을 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하고 밴스는 쌀쌀맞게 평했다. "세인트 클레어 양과 리코크 대위를 위해 별러온 쇠사슬은 어떻게 되었나?" "그것도 아주 버리지는 않았지 -- 자네는 내가 완전히 포기해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고 매컴도 지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히스 경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깨끗이 해결됐습니다, 매컴 검사님." 하고 경사는 보고했다. "검사님이 나가신 뒤 정오쯤 리코크 대위가 검사님을 만나고 싶어서 이리로 왔다가 검사님이 안 계셔서 본부로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제가 받았지요. 그랬더니 저를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급히 달려왔지요. 그는 대기실에 있다가 저를 불러세우고는, '범인을 인도하러 왔습니다. 벤슨을 죽인 사람은 나입니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스워커를 시켜서 자백서를 받아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위는 거기에 서명까지 했지요......이것입니다." 경사는 매컴에게 타이프친 종이를 건네주었다. 매컴은 의자 깊숙이 몸을 내던졌다. 지난 며칠 동안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것이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소. 이젠 고생이 끝났소, 히스 경사!" 밴스는 정말 안됐다는 듯이 매컴을 바라보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여보게, 매컴, 자네의 고생은 오히려 지금부터일 것 같은데." 하고 그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매컴은 자백서를 대강 훑어본 다음 밴스에게 건네주었다. 신중하게 읽어나가는 동안 밴스의 얼굴에 차츰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여보게, 매컴 -- " 하고 그가 불렀다. "이 서류는 법률적 가치가 하나도 없다네. 적어도 명색이 판사라면 당장 법정 밖으로 내던질 걸세. 너무 단순하고 지나치게 확실해. '머리말'도 없고 '그러므로', '위에 쓴 바와 같이', '이렇게 되어' 라는 말도 전혀 없지 않은가? '자유의사에 의해', '건전한 정신상태로', '기억에 의하면' 하는 식의 말도 보이지 않는군. 그리고 리코크 대위는 자기를 가리켜 한 번도 '당사자'라고 하지 않았네. 이것은 전혀 가치가 없어. 히스 경사, 나라면 이런 것은 찢어버리겠소." 히스는 너무도 의기양양하고 기쁨에 차 있었기 때문에 밴스의 말을 듣고도 기분을 상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배짱 좋게 웃었다. "밴스 씨, 당신이 보기엔 그렇게 우습습니까?" "히스 경사, 이 자백서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안다면 당신은 아마 히스테리를 일으킬 거요." 밴스는 매컴 쪽을 보았다. "여보게, 매컴, 사실 나는 이것을 중요하게 보지 않네. 하지만 진실이라는 문을 여는 요긴한 지렛대는 될지도 모르지. 아무튼 리코크 대위가 공상적 문학에 취미가 있었다니 매우 기쁜 일일세그려. 이처럼 흥미 있는 동화가 입수되었으니 소령에게 걱정을 집어치우고 아는 사실을 죄다 털어놓게 할 수 있을걸세. 물론 예상이 빗나가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거든." 밴스는 지방검사의 책상으로 다가가서 상대를 설득하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아직 자네를 놀린 적이 없었지? 그래서 또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소령에게 전화걸어 빨리 이리로 오라고 부탁하게. 범행을 자수하고 나선 사람이 있다고 해야 하네 --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라고는 말하지 말게. 세인트 클레어 양이나 파이피 정도로 생각하도록 해두게. 뭣하면 본디오 빌라도*라고 해도 좋겠지. 어쨌든 즉시 오게만 하게나. 기소수속을 밟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하면 될 것일세."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으로, 예수를 재판한 사람.)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군." 하고 매컴이 반대를 표시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오늘밤 클럽에서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때 이야기하면 되잖나." "그때는 아무래도 좋지 않다네." 하고 밴스는 끈덕지게 말했다. "소령이 무언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준다면 히스 경사도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런다네." "도움 같은 건 이제 필요없습니다." 하고 히스 경사가 끼어들었다. 밴스는 정말 감탄한 듯이 놀란 얼굴로 히스 경사를 보았다. "정말 굉장한 분이로군요. 괴테도 마지막에는 '좀더 빛을' 하고 외쳤는데, 당신은 그 빛이 지긋지긋하다니 정말 놀랍소." "여보게, 밴스." 하고 매컴이 말했다. "자네는 또 어째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려고 그러나? 소령을 여기로 불러다 놓고 리코크 대위의 자백서를 논의해 봐야 쓸데없는 시간낭비일 뿐일세. 아무튼 소령의 증언은 이제 필요없어." 목소리는 매정했으나 어딘지 다시 생각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본능은 밴스의 요구를 전적으로 물리치고 있었지만, 지난 며칠 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밴스가 어떤 제안을 해올 때에는 반드시 거기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밴스는 매컴이 망설이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지금 내 요구는 소령의 그 불그레한 얼굴이나 보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욕망에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비록 적은 것이지만 내가 열과 정성을 다해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소령을 이리로 불러오면 아주 커다란 참고가 될 것이라는 것일세." 매컴은 생각에 잠기어 한참 동안이나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나, 밴스가 너무도 끈질기게 요구해 왔기 때문에 결국 그의 제안에 따르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깨달았다. 히스는 분명하게 반대했으나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앉아서 여송연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벤슨 소령은 깜짝 놀랄 만큼 빨리 달려왔다. 매컴이 자백서를 건네주자 자신의 허둥대는 모습을 감추려고도 않고 얼른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읽어가는 동안 그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그 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들고는, "이건 아무래도 알 수가 없는데. 정말 놀랄 뿐이야. 나는 리코크 대위가 앨빈을 쏘았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하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소령은 실망한 듯이 자백서를 매컴의 책상 위에 놓고 몸을 의자에 묻었다. "자네는 이것으로 만족 못하겠지? 매컴, 안 그런가?" 하고 소령은 물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하고 매컴이 말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일부러 출두해서 자백할 리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에게 불리한 증거가 많이 있었지. 벌써 이틀 전에 체포할 생각이었다네." "범인이 분명합니다." 하고 히스가 끼어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었지요." 벤슨 소령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말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 다시 말하자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네만 -- 리코크 대위에게는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동기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소령의 그 말 속에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지 모두들 알아차렸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실은 -- " 하고 매컴도 말했다. "나도 세인트 클레어 양을 한번은 범인으로 생각했었네. 그래서 리코크 대위에게도 그 점을 넌지시 말했었지. 그런데 뒤에 가서 그녀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네." "리코크 대위는 그것을 알고 있었나?" 하고 소령이 다급히 물었다. 매컴은 잠깐 생각했다. "아니, 알고 있다고야 할 수 없지. 아마 그는 아직도 내가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할 걸세." "아아!" 소령의 탄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새어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하고 히스가 잔뜩 골이 나서 물었다. "여자의 명예를 위해 그가 대신 전기의자에 앉으려 한다는 말씀입니까?-- 말도 안되는군요. 그런 이야기라면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것이지, 실생활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미치광이가 되지 못합니다." "나에게는 그만한 확신이 없소, 히스 경사." 하고 밴스가 느린 말투로 끼어들었다. "여자란 언제나 건전하고 실제적이니까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않지만, 남자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요." 밴스는 반응을 살피는 듯한 시선을 소령에게로 보냈다. "소령님, 어째서 리코크 대위가 갤러하드 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갤러하드 경은 아서 왕 이야기에 나오는 전형적인 기사로, 성반(聖盤)을 찾아가는 여행에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사람이다.) 그러나 소령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로 얼버무리며 리코크 대위가 한 행동의 동기에 대해서 처음에 비추었던 것마저 설명을 피했다. 밴스는 계속 여러 가지 질문을 해보았으나 그 침묵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히스는 좀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밴스 씨, 당신이 아무리 뭐라고 하든 리코크 대위의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사실을 보십시오, 사실을! 그는 벤슨 씨를 위협하면서 두 번 다시 세인트 클레어 양에게 손을 대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었다지요? 그런데 벤슨 씨는 그녀와 함께 외출하고 돌아온 날 총에 맞아죽었습니다. 리코크 대위는 권총을 그녀의 집에 숨겨두었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알고는 총을 가지고 나가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아파트 관리인을 매수하여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했고, 그날 밤 12시 30분에 벤슨 씨 집에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습니다. 심문을 받을 때도 어느 것 하나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이런데도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내가 멍텅구리겠지요?" "상황은 확실히 이론의 여지가 없군요." 하고 소령도 동의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는 없을까요?" 히스는 그 질문에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하고 경사는 계속했다. "리코크 대위는 밤중에 의심이 나서 권총을 들고 아파트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벤슨 씨가 그녀와 함께 있는 현장을 보고는 달려들어서는 위협한 대로 쏘아죽인 거지요. 물론 그녀도 관련이야 있겠지만 총을 쏜 것은 리코크 대위입니다. 이렇게 자백서까지 받아놓았으니......이 나라 어느 배심원들 앞에 내놓아도 유죄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정직하고 법률을 존중하는 사람들 -- 정말 감탄하겠소." 하고 밴스가 중얼거렸다. 스워커가 문 앞에 나타나서, "신문기자들이 몰려와서 법석입니다." 하고 찌푸린 얼굴로 알렸다. "자백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고 매컴이 히스에게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 그래서 법석일 겁니다. 하지만 검사님의 허락만 떨어지면 지금 발표할까 하는데요." 매컴이 고개를 끄덕이자 히스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밴스가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았다. "내일까지 덮어둘 수 없겠나, 매컴?" 하고 그는 물었다. 매컴은 당황했다. "못할 것도 없지 -- 좋아. 하지만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나?" "자네를 위해서일세 -- 다른 이유가 없다면. 자네의 전리품에는 안전하게 자물쇠를 잠가두면 되지 않겠나? 허영심은 24시간쯤 눌러두고, 벤슨 소령님도 나도 리코크 대위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내일 이때쯤이면 세상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알게 될 걸세." 다시 논의가 들끓었으나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뻔한 것이었다. 매컴은 밴스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밴스의 요구에 반대한 것도 실은 주로 그 정보를 확인해 보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몸을 앞으로 내밀고 리코크 대위의 자백을 발표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태도로 보아 그게 틀림없다. 밴스는 그러나 조심성 있게 무엇 하나 털어놓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의 굳센 결의가 이기고 말았다. 매컴은 히스에게 그 기자회견을 다음날까지 미루도록 일렀다. 소령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 결정에 찬성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신문기자 여러분에게는 -- " 하고 밴스가 권했다. "내일은 깜짝 놀랄 만한 굉장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것쯤은 말해도 될 게요." 히스는 맥이 빠져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갔다. "저 히스 경사는 성급한 사람이로군 -- 무모하기도 하고." 밴스는 다시 한 번 자백서를 집어들고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그런데, 매컴, 자네의 죄수를 이리로 불러냈으면 좋겠는데 -- 출두영장인가 하는 것 말일세. 그가 오면 창에 놓여 있는 그 의자에 앉히고, 자네가 유력한 정치가에게나 대접하는 고급 여송연을 한 대 권하게나. 그리고 나서 내가 정중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주의해서 잘 들어보게...... 소령님도 물론 그 자리에 함께 계셔야 합니다." "그런 요구 정도라면 이의없이 받아들이겠네." 하고 매컴은 미소지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그와 이야기해 보려던 참이었다거든." 버튼을 누르자 불그레한 얼굴의 씩씩해 보이는 서기가 나타났다. "필립 리코크 대위의 소환장을 가져오게." 하고 매컴이 명령했다. 서류를 가져오자 매컴이 거기에 서명했다. "벤에게 주고 서두르라고 이르도록." 서기는 복도로 나가는 문을 지나 사라졌다. 10분쯤 지나자 시형무소의 보안관보가 죄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제19장 밴스의 반대심문 (6월 19일 수요일 오후 3시 30분) 리코크 대위는 완전히 절망에 빠진 채 될 대로 되라는 듯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왔다. 어깨는 축 처지고, 팔은 맥없이 늘어졌으며, 눈은 며칠 동안 잠 한숨 못 잔 사람처럼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러나 벤슨 소령을 보고는 언뜻 자세를 가다듬고 걸어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보니 앨빈 벤슨에게는 말할 수 없는 증오심을 품고 있었어도, 그 형인 소령에겐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놓여 있는 처지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외면했다. 소령은 재빨리 대위 옆으로 다가가서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걱정할 것 없어, 대위."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앨빈을 쏘았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네." 대위는 더없이 고맙다는 눈으로 소령을 마주보았다. "하지만 제가 쏘았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쏘겠다고 미리 말도 했습니다." 밴스가 앞으로 나와서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리 앉으시지요. 지방검사님이 그때의 상황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비록 살인을 자백하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으면 법률은 유죄로 인정하지 않지요. 게다가 이번 사건에서는 당신보다 더 의심스러운 사람이 또 있기 때문에, 당신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두세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유죄가 실증되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다른 용의자를 뒤쫓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리코크 대위와 마주앉고서 밴스는 자백서를 집어들었다. "당신은 이 자백서에서 벤슨 씨가 당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13일 밤 12시쯤 벤슨 씨 집으로 가서 죽였다고 자백했습니다. 이 '부당한 행동'이란, 즉 벤슨 씨가 세인트 클레어 양에게 치근거린 그걸 뜻합니까?" 리코크 대위의 얼굴에 도전적인 표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어째서 쏘았는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 그러나 세인트 클레어 양과 이 사건을 관련시키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하고 밴스가 동의했다. "그 여자는 관계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약속드리지요. 그러나 동기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모두 말씀해 주어야 합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리코크 대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동기는 지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날 밤 벤슨 씨가 세인트 클레어 양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러 나간 것을 어떻게 알았나요?" "마르세유까지 뒤를 밟았거든요."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뒤 벤슨 씨 집에 간 것은 어떤 이유에서죠?" "여러 가지 생각을 거듭하던 중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나는 마침내 콜트 권총을 꺼내가지고 그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정열이 넘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밴스는 다시 자백서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당신은 여기에 이렇게 말했군요. '나는 웨스트 48번가 87번지 그 집 현관으로 들어갔다.' 하고......그럼 벨을 눌렀습니까? 아니면, 현관이 잠겨 있지 않았습니까?" 리코크 대위는 대답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문득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난 것이리라 -- 그날 밤에는 한 번도 현관의 벨이 울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진술한 가정부의 증언이 말이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대위는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싶군요 -- " 하고 밴스가 말했다. "그러나 별로 급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중요하시다니 말씀드리지요. 벨은 누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건 아닙니다." 이제 대위는 망설이지 않았다. "마침 그 집 앞에 까지 갔는데 그가 택시를 타고 와서 -- " "잠깐만, 그 집 앞에 다른 자동차가 한 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회색 캐딜락인데요." "예, 보았습니다." "그 안에 타고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나요?" 또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분명치는 않았습니다만, 파이피라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남자와 벤슨 씨는 동시에 집 밖에 있었군요." 리코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동시는 아닙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지요......2~3분 뒤 집에서 나왔는데, 그때 파이피 씨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집안에 있을 때에 그가 자동차를 갖다댔다는 말이로군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시 아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지요. 벤슨 씨가 택시를 타고온 뒤에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옆으로 다가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럼, 당신과 벤슨 씨가 집안으로 들어간 다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벤슨이 모자와 지팡이를 모자걸이에 걸고서 우리는 거실로 들어갔습니다. 벤슨은 테이블 옆에 앉고 나는 선 채 할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권총을 꺼내 쏘았습니다." 밴스는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매컴은 긴장하여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벤슨 씨가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어찌 된 까닭일까요?" "내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책을 집어든 모양입니다......무관심한 척하기 위해서 그랬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과 벤슨 씨는 집안에 들어가서 곧장 복도에서 거실로 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벤슨 씨가 총에 맞았을 당시 재킷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던 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소?" 리코크 대위는 신경질적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지금 생각났습니다만, 벤슨 씨는 처음 2~3분쯤 2층에 올라가 있었습니다......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 " 하고 대위는 필사적으로 덧붙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기억하진 못하거든요." "무리도 아니지요." 하고 밴스는 동정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가 내려왔을 때 그의 머리카락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진 않았습니까?" 리코크는 멍청하게 눈을 치켜떴다. "머리카락이라고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머리카락의 색깔 말입니다. 벤슨 씨가 테이블 램프의 빛을 받으며 당신 앞에 앉았을 때 무언가 달라진 점이 없었느냐고 묻는 겁니다 -- 머리카락의 색깔이 어딘가 좀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았냐고요?" 대위는 눈을 감고 그때의 광경을 다시 떠올려보려고 애쓰고 있는 듯했다. "아니 -- 생각나지 않는데요." "이건 사소한 점입니다만 -- " 하고 밴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벤슨 씨가 내려왔을 때 그의 말투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까?-- 즉, 목소리가 흐리멍덩하다거나 좀 더듬거린다거나 하는 점이 없었느냐는 그 말입니다." 리코크 대위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군요." 하고 대위는 말했다. "말투는 여느때와 다름없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때 혹시 테이블 위에 파란 보석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못 보았습니다." 밴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벤슨 씨를 쏘고 거실에서 나갈 때 물론 불은 껐겠지요?"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밴스가 덧붙여 말했다. "분명히 껐을 겁니다. 파이피 씨가 자동차를 댔을 때에는 집안이 캄캄했다고 했으니까요." 그러자 리코크 대위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생각이 얼른 나지 않아서요." "이제야 생각이 났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껐습니까?" "그야 -- " 하고 대위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리고는 겨우, "스위치를 내려서 껐지요." "그럼, 스위치는 어디 있었나요?" "생각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생각날 겁니다." "홀로 나가는 문 옆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 어느쪽에요?" "그런 것까지 어떻게 기억합니까?" 하고 대위는 힘없는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몹시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하지만 문 오른쪽에 있었던 것 같군요."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 말입니까, 나가면서 오른쪽 말입니까?" "나가면서 오른쪽입니다." "그렇다면 책장이 놓여 있는 쪽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밴스는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권총에 대한 문제인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어째서 권총을 세인트 클레어 양 집으로 가져갔습니까?" "나는 비겁했습니다." 하고 그는 대답했다. "내 아파트에서 발견될까 봐 겁이 났습니다. 물론 그녀에게 혐의가 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혐의가 가게 되자 당신은 부리나케 권총을 들고나가 이스트 강에다 던져버렸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탄창의 총알이 한 발 없어져 있었겠군요 -- 그 사실은 의심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상황이었겠고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물 속에 던져버린 것이지요." 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참 이상하군요. 그렇다면 권총이 두 자루 있었나 보지요? 강바닥을 샅샅이 뒤져 콜트 자동권총을 한 자루 찾아냈는데, 탄창이 가득차 있더군요......리코크 대위, 세인트 클레어 양 집에서 가지고 나와 다리에서 던져버렸다는 권총이 '당신' 것이라는 게 확실합니까?" 나는 강에서 권총을 찾아낸 사실은 모르고 있었으므로 밴스가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요는 그녀도 함께 끌어들이려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매컴도 그 점을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리코크 대위는 몇 분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에는 몹시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권총은 두 자루가 아닙니다. 탄창은 내가 다시 채워넣었습니다." "아아! 그랬었군요." 밴스의 목소리는 유쾌하고 침착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대위. 당신은 무엇 때문에 오늘 여기에 출두하여 자백했죠?" 리코크 대위는 턱을 앞으로 내밀고 이 반대심문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그의 눈빛에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이냐고요? 그것이 내가 취해야 할 오직 하나의 명예로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에게 부당한 혐의를 씌웠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괴로워하는 것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으로 대화는 끝났다. 매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보안관보가 대위를 데리고 나갔다. 대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기이한 침묵이 방안을 휩쌌다. 매컴은 두 손을 머리 뒤에서 깍지끼고, 눈은 천정을 노려본 채 담배만 뻑뻑 빨고 있었다. 소령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감탄하고 만족한 얼굴로 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밴스는 매컴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세 사람의 표정과 태도에 이 대화에 대한 저마다의 각기 다른 반응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 매컴은 당혹해 했고, 소령은 기뻐했으며, 밴스는 빈정거리는 얼굴이었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밴스였다. 그 말투는 구김살없이 밝다기보다는 거의 귀찮아하는 듯했다. "이 진술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알았겠지? 그 순정적이고 고결한 대위는 참으로 놀랍고도 어설픈 만차우젠*일세. 아무리 천성이 그렇기로 그토록 거짓말에 서툰 사람은 처음 봤다네.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닐세. 그런 솜씨로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려 들다니, 정말 애교로 봐줘야겠군. 그는 틀림없이 자네가 자백서 하나만 보고 불문곡직 사형집행인에게 넘길 줄 알았던 모양이지. 매컴, 이젠 자네도 눈치챘겠지? 대위는 그날 밤 어떤 식으로 벤슨 씨 집에 들어갔는지조차 생각해 두지 않았다는 것을 말일세. 죽여버리려는 사람과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갔다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으로 설명은 했지만, 파이피가 바깥에 있었다고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말 어이가 없더군, 안 그런가? 게다가 벤슨 씨가 평상복 차림이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는 얼른 먼저 한 진술을 뒤엎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러자 벤슨 씨를 2층으로 뛰어올려보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지 않던가? 운좋게도 신문에는 가발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벤슨 씨가 옷과 구두를 바꿀 때 머리카락도 물들인 것처럼 넌지시 말해 보았으나 대위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짐작조차하지 못하더군. 벤슨 소령님, 동생분은 틀니를 빼면 말이 새어나오곤 했겠지요?" (*만차우젠은 바바라아 지방의 제롬 폰 뮌히하우젠 남작(1720~1797)으로서 굉장한 허풍쟁이라는 이유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예, 그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습니다." 소령은 대답했다. "그날 밤 앨빈이 틀니를 빼고 있었다면 -- 당신이 아까 한 말에 의하면 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 리코크 대위도 틀림없이 그 점을 알아차렸어야 했지요." "대위가 알지 못한 부분이 또 있습니다." 하고 밴스가 말했다. "예를 들면 보석상자나 전기 스위치의 위치 등이지요." "그 이야기가 나오자 리코크 대위는 몹시 당황해 하더군요." 하고 소령도 거들었다. "앨빈의 집은 구식이라서 샹들리에에 늘어져 있는 스위치가 하나 있을 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고 밴스가 말했다. "그러나 리코크 대위의 가장 큰 실수는 권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으로 완전히 두 손 들게 되었지요. 권총을 강물에 던져버린 중요한 이유는 탄피가 한 개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탄창에 총알이 가득차 있더라고 하자, 자신이 다시 채워넣었다고 설명하면서 강바닥에서 찾아낸 총이 바로 자기 권총이라고 주장했지요......이야기는 뻔합니다. 세인트 클레어 양을 범인으로 생각하고서 그 죄를 자기가 뒤집어쓰기로 각오한 겁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소령이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 " 밴스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대위의 태도는 좀 이상해. 그가 이번 범죄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그렇지 않다면 다음날 세인트 클레어 양의 아파트에다 권총을 감추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리코크 대위는 다른 남자가 자기 약혼녀에게 관심을 보이면 위협을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위협을 실천에 옮길 수도 있는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사람이지.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을 걸세 -- 그것은 분명해. 그러나 그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물론 권총을 쏜 사람은 그가 아닐세. 이번 범죄는 계획적인 것이었는데, 대위에게는 그런 계획 같은 게 없었어. 대위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마음을 굳히고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로 모든 것을 기사도 정신으로 해치우는 그런 사람일세. 이런 종류의 기사도는 진정한 뜻에서의 아름다운 행위라고 할 수 없네. 그것을 신봉하는 자들은 자기의 장한 행위를 알아주기 바라는 법이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돈 판을 몰아내는 일에서는 그들이 가장 철저하지. 예를 들어 그 대위만 해도 사랑하는 미인의 장갑이나 핸드백을 못 보았을 리 없거든 -- 보았다면 틀림없이 가지고 갔겠지. 사실 리코크 대위가 벤슨 씨를 쏘아죽이고 싶어한 것은, 그가 쏘아죽이지 않았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거야. 호박 속의 투구벌레를 들여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리코크 대위가 그를 해치우고 싶어한 것은 심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해치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네." 밴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동그란 연기가 날아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나친 상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리코크 대위는 그렇게 해치우려고 했으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이미 끝난 뒤였을 거야. 틀림없어. 파이피가 대위를 본 것도, 다음날 세인트 클레어 양 집에 권총을 감춰둔 것도 이것으로 모두 설명이 되지, 안 그런가?" 전화벨이 울렸다. 오스틀랜더 대령이 지방검사에게 할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매컴은 간단히 통화를 끝내고는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밴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 피에 굶주린 자네 친구가 아직 아무도 체포하지 못했느냐고 물어왔네.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짐작이 가지 않는다면 자기가 귀중한 조언을 하나 해주겠다는구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는 속이 느글거릴 정도로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군. 지금의 자네 심정이 어떻다고 말해 주었나?" "아직 오리무중이라고 해두었네." 매컴은 침울하고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말은 리코크 대위를 범인으로 여기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음을 알리는 그 특유의 방식이었다. 소령은 매컴의 옆으로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자네 기분은 이해하겠네." 하고 소령이 말했다. "이런 일에는 늘 실망이 따르기 마련이지. 하지만 무고한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보다야 죄 있는 사람이 법망을 벗어나는 편이 낫지 않겠나?......너무 무리하지 말고, 실망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하게나. 이제 곧 올바른 해결이 나고 말 걸세. 그때는 -- " 소령은 거기까지 말하고 턱에 힘을 주더니 다음 말은 앞문 잇새로 내뱉었다. " -- 나도 자네를 방해하지 않겠어. 일이 잘되도록 돕겠네." 소령은 매컴에게 싱긋 웃고는 모자를 집어들었다. "지금부터 사무실에 가 있을 테니, 나에게 볼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게나. 혹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니까 -- 그럼, 또." 소령은 감사의 뜻이 담긴 눈으로 밴스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매컴은 몇 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끔찍해지는군." 이윽고 그는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이 사건은 갈수록 어려워져. 나는 이제 지쳐버렸다네." "그렇게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이 사람아." 밴스는 소탈하게 충고했다. "인생의 사소한 일을 가지고 끙끙거려 봐야 이로울 것 없다네." 무슨 일이든 새롭지 않다. 무슨 일이든 진실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대수롭지 않다. "몇백만이라는 병사가 전쟁에서 죽었지만 그 일로 인해서 자네의 백혈구가 손상되지도 않았고, 자네의 뇌세포에 염증이 생긴 것도 아니라네. 그런데도 자네 관할구역에서 고맙게도 쓸모없는 사내 하나가 총맞아 죽었을 뿐인데, 자네는 밤잠도 못 자고 진땀을 흘리고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자네는 정말 모순투성이일세그려." "시종일관 -- *" 하고 매컴이 입을 열려는데 밴스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에머슨은, "어리석은 시종일관은 째째한 정치가, 철학자, 목사들이 찬양하는 속좁은 인간의 주문(呪文)이다." 하고 말했다.) "에머슨의 인용은 그만두게. 나는 에라스무스가 훨씬 더 좋거든. 자네는 '우둔함에 대한 예찬'을 읽어야겠구먼. 한없이 힘이 솟아날 걸세. 그 산양 수염을 기른 네덜란드의 늙은 학자라면 대머리 임금이 죽었다고 해 그토록 절망적으로 한탄하지는 않았을 걸세." "나는 자네 같은 밥벌레로 태어나지는 않았네." 하고 매컴은 발끈하여 되받아주었다. "나는 선거에 의해서 이 자리에 --- " "알고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어디 또 있으리.'* 라고 말하려는 거겠지?" 하고 밴스가 맞장구쳤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과민이 되지는 말게나. 리코크 대위는 연극 솜씨가 모자라 감옥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아직 적어도 다섯 사람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닌가? 우선 플래트 부인, 파이피, 오스틀랜더 대령, 호프먼 양, 그리고 버닝 부인 -- 이렇게 말일세. 어째서 한 사람씩 불러다 자백시키지 않나? 히스 경사도 좋아서 춤을 출 텐데."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어디 또 있으리'는 조금 오역된 것으로, 리처드 라블 레이스(1618~1658)의 '싸움터로 나가는 루커스터에게' 라는 제목을 가진 시의 한 구절이다. '칼이나 말이나 방패만큼 (귀여운 사람이여) 그대를 사랑할 수도 없고 찬양하고 싶지도 않다' 라고 되어 있다.) 매컴은 완전히 풀이 죽어 이렇게 놀려대도 화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화는 커녕 밴스의 그 태평스러움에 이끌려 오히려 기분이 조금 좋아진 것 같았다. "실은 말일세 -- "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해보려는 것도 바로 그거라네. 아직 손대지 못한 것은 누구부터 먼저 불러들일까 망설였기 때문이야." "기대가 되는군." 그렇게 말한 다음 밴스는 물었다."그렇다면 리코크 대위는 어쩔 셈인가? 석방해 버리면 그가 실망할 텐데." "실망할 테면 하라지!" 매컴은 수화기를 들었다. "당장 수속을 밟는 게 좋을 것 같아." "잠깐만 기다리게." 하고 밴스가 손을 들어 매컴을 막았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거니까 조금 더 그냥 놔두게.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더 누리도록 말일세. 시용*의 포로처럼 독방에 가둬두면 크게 도움이 될 때가 올지도 모르네." (*시용은 스위스 레만 호숫가의 성채 감옥으로, 제네바의 애국자 프랑수아 보니발이 사보이 공 샤를 3세에 의해서 유폐되어 있었다. 시인 바이런 경이 그것을 노래한 유명한 '시용의 포로'라는 시가 있다.) 매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매컴이 차츰 밴스의 지시에 따를 기분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의 마음이 너무 혼란하여 수습이 어려워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물론 확신이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 그보다는 밴스가 입으로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생각된 것이 커다란 원인이었다. "자네는 파이피와 그 정부(情婦)가 이 사건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 하고 밴스가 물었다. "그 밖의 몇천 가지도 더 되는 수수께끼와 함께 말인가?-- 물론 생각해 보았지." 잔뜩 화가 난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사리에 맞춰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수수께끼가 되어버린단 말이야." "여보게, 매컴." 하고 밴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하는 일에 수수께기란 없다네. 다만 문제가 있을 뿐이지. 그리고 어느 한 사람에게서 일어난 문제는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 다른 사람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어. 다만 인간심리의 지식과 그 지식을 인간의 행위에 적용하는 일을 필요로 할 뿐이라네. 간단한 이야기지." 밴스는 벽시계를 흘끔 보았다. "자네가 부탁한 그 스티트 씨는 '벤슨 앤드 벤슨 주식중개소'의 장부를 어떻게 했을까? 난 큰 기대를 가지고 이렇게 마음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이 말은 매컴에게 효과가 지나쳤다. 지루할 만큼 질질 끄는 밴스의 이죽거림과 빗대어 놀리는 말투에 그만 자제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매컴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책상을 한 손으로 내리쳤다. "자네의 그 거들먹거리는 태도에는 이젠 진저리가 나!" 하고 그는 대놓고 불평을 터뜨렸다. "자네는 무언가를 알고 있든지, 아니면 모르고 있든지 그 어느쪽이겠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런 식의 지식 자랑 같은 건 이제 그만두게나. 만일 알고 있다면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 당연하잖아? 벤슨이 살해되고서 지금까지 자네는 이러니저러니 변죽만 울려왔는데, 누가 죽였는지 짐작이 간다면 나도 알고 싶단 말이야." 매컴은 몸을 뒤로 젖히고서 여송연을 꺼냈다. 신중하게 끝을 자르고 불을 붙이면서도 밴스 쪽은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울화통을 터뜨린 것이 아무래도 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밴스는 매컴의 화가 폭발하는 동안 '다 저녁때 웬 바람이냐'는 듯한 태도였다. 이윽고 그는 다리를 죽 뻗고 매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게, 이 못난 친구야, 나는 자네가 꼴사납게 흥분하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겠네.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당연하니까. 하지만 그럭저럭 이 희극도 막을 내릴 때가 온 것 같군. 나는 지금까지 자네를 속여온 게 아니야. 사실, 내게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있다네." 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품을 했다. "굉장히 더운 날씨로군.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 안 그런가? 위대함은 더러운 이 세상에 그토록 가까이 있고. 신은 인간에게 그토록 가까이 계시도다. 의무의 목소리 나직이 속삭일 때는 다해야 하나니. 젊은이는 대답해야 한다 -- 하겠노라고. (이 시는 애머슨의 '자유의지' 중 제3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내가 바로 그 숭고한 젊은이일세. 그리고 자네는 의무의 목소리이고 -- 정확하게 말해서 나직이 속삭이지는 않지만, 안 그런가? '그대의 임무는 무엇인가?' 괴테는 이 물음에 대해 '때에 맞는 요청' 이라고 대답했었지 -- 하지만 행하기는 어렵다네 -- 나는 그 요청이 좀더 서늘한 날에 왔으면 했지." 밴스는 매컴에게 모자를 집어주었다. "자아, 뒤따르게.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1) 모든 업무에는 때가 있느니라'-- 오늘은 이것으로 사무실 일은 끝내는 거야 -- 스워커에게 그렇게 말하게. 자네도 좋겠지?-- 귀여운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네. 미인을 찾아가는 거야. 바로 세인트 클레어 양 말일세." 매컴은 밴스가 허풍떠는 태도가 아주 중대한 목적을 감추려는 가면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또 밴스가 알고 있는 것, 또는 단순히 의심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할 때, 자기 방식대로 번거롭게 빙빙 둘러서 하기 때문에 비록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훌륭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매컴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리코크 대위의 자백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임이 드러난 이상 진상을 알아낼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어떤 제안이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매컴은 곧 버튼을 눌러 스워커를 불러서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다고 말했다. 채 10분도 못 되어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94번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1) 이 전도서 3장 1절의 인용은 밴스가 늘 구약성서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생각나게 해주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직업적 문학가의 작품에 싫증나면 성경의 웅장한 문장에서 자극을 찾는다네. 현대인이 무슨 글인가를 꼭 써야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하루에 두 시간은 성경의 역사가와 함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네.' 라고. 제20장 클레어 양의 설명 (6월 19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우리가 지금 발을 내디딘 계몽의 탐구는 좀 힘들지도 모르네." 주택가로 가는 도중에 밴스가 말했다. "그러나 굳센 의지로써 나와 더불어 참아주는 거야.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인지 자네는 상상도 못할걸? 게다가 유쾌한 일도 아니니까. 나는 감상적이 되기에는 너무 젊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범인을 못 본 척 외면해 주고 싶은 마음이 반쯤은 없지도 않네." "자네, 어째서 또 세인트 클레어 양을 찾아가는지 가르쳐주지 않겠나?" 매컴이 체념한 듯이 물었다. 밴스는 기분좋게 거기에 응했다. "좋고말고. 사실 자네가 알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네. 그녀와 관련하여 해명을 필요로 하는 게 몇 가지 있어. 첫째, 장갑과 핸드백일세. 그 물건들에 대해서 납득이 될 때까지는, '양귀비꽃도 흰 연꽃도 그대가 어제 맛본 달콤한 잠으로 이끌지는 못하리라.'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2막 3장에 나오는 대사) 겠지. 그리고 기억하고 있겠지? 벤슨이 살해된 날 여자 손님이 찾아왔을 때 소령이 엿들었다는 호프먼 양의 이야기 말일세. 나는 그 손님이 세인트 클레어 양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날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나중에 다시 왔는지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네. 그리고 또 그날 오후 그녀는 무엇 때문에 벤슨네 집으로 차를 마시러 갔었는지도. 또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그 보석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 그 밖에도 또 여러 가지가 있네. 예를 들면 왜 리코크 대위는 그 여자의 집으로 권총을 가져갔을까? 대위는 어째서 그 여자가 벤슨을 쏘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대위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그녀는 왜 처음부터 대위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까?" 매컴은 비관적이었다. "그 여자가 그런 것을 다 털어놓을 것 같은가?" "나는 크게 기대하고 있다네." 하고 밴스가 대답했다. "완전무결하고 고상하고 상냥한 기사(騎士)가 스스로 살인자라고 자수하고 나서서 수감되어 있으니 그녀가 마음의 짐보따리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해될 건 없을 걸세......하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나가선 안되지. 내 보증하네만, 자네들 경찰식의 거칠기만 한 반대심문은 그녀에게 먹혀들지 않을 걸세." "그럼, 자넨 어떤 식으로 정보를 끌어낼 생각인가?" "화가들이 말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해야지. 되도록 세련되고 신사적인 방법으로." 매컴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는 나서지 않기로 하지.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모두 자네에게 맡기기로 하겠네." "아주 머리를 잘 쓴 제안일세그려." 하고 밴스가 말했다. 아파트에 닿자 매컴은 구내전화로 아주 중대한 용건이 있어 찾아왔다고 알렸다. 우리는 곧 세인트 클레어 양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리코크 대위의 행방에 대해서 무척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응접실에서 우리와 마주앉은 그녀의 얼굴은 몹시 파리해 보였으며, 꼭 쥔 두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느 때의 그 냉정하던 신중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눈에는 수면부족의 흔적이 뚜렷했다. 밴스는 곧바로 요점으로 들어갔다. 그 어조에는 거의 경박스러울 정도로 서글서글하여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풀어버렸고, 우리의 방문이 그저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을 뿐인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런 소식을 알려드리게 되어 안됐습니다만, 리코크 대위가 자신이 벤슨을 죽였다고 자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정직성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실라와 칼립디스*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셈이지요. 대위가 과연 극악무도한 악인인지, 아니면 두려움을 모르는 순결한 기사인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그의 설명으로는 이야기가 너무 간단한데다, 정작 중요한 점이 애매합니다. 거기다 -- 그 중 황당한 것은 사실상 있지도 않은 스위치로 벤슨 씨 방에 있는 불을 껐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게 되었는데, 그는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사람을 감싸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그처럼 용감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닌가 싶군요." (*실라나 칼립디스는 시칠리아 섬 메시나 해협의 유명한 암초로, 고대에는 항해하는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진퇴양난의 비유로 흔히 쓰이고 있다.) 밴스는 가볍게 고개를 들어올려 매컴을 가리켰다. "여기 계신 지방검사님은 반드시 나와 의견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법률가란 터무니없이 머리가 딱딱해서 한번 이렇다 하고 마음먹으면 좀처럼 융통성이 없지요. 기억하겠지만, 벤슨 씨가 이 세상에 살아 있던 마지막 날 밤 당신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점과, 그 밖에 이치에도 맞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매컴 씨는 당신이 그 신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밴스는 매컴에게 익살맞은 비난의 미소를 보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게다가 리코크 대위가 그렇게까지 영웅적으로 감쌀 만한 사람은 세인트 클레어 양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만은 당신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으니, 당신의 행동과 벤슨 씨의 행동이 엇갈리는 두세 가지 의문점을 설명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그런 설명을 하셨다고 해서 리코크 대위나 당신에게는 조금도 불리해지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지금 매컴 씨의 마음속에 있는 대위에 대한 의심을 말끔히 씻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밴스의 방식은 클레어 양의 응어리진 마음을 푸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매컴은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에 대한 밴스의 혹평 때문에 부글부글 속이 끓고 있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인트 클레어 양은 몇 분 동안 꼼짝 않고 밴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마침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로서는 어떻게 당신을 신뢰해야만 할지, 또 어째서 믿고 대답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리코크 대위님이 자수한 지금에 와서는 -- 마지막 만났을 때 그렇게 할 것 같은 눈치가 보여 걱정하고 있었습니다만 -- 당신 질문에 대답해서 안될 이유는 하나도 없지요......그런데 당신은 그분이 결백하다는 것을 정말로 믿고 있나요?" 그녀의 마지막 질문은 갑자기 튀어나온 절규처럼 들렸다. 누르고 또 누르고 있었던 감정이 냉정의 껍질을 뚫고 폭발해 버린 것이다. "정말로 믿고말고요." 하고 밴스는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매컴 씨에게 물어보아도 아시겠지만, 아까 검찰국에서 나오기 전에도 나는 리코크 대위를 석방하도록 열심히 설득했습니다. 당신의 설명을 듣게 되면 그를 풀어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여기까지 이렇게 나오도록 한 것이지요." 밴스의 말투와 태도가 클레어 양에게 신뢰감을 준 것 같았다. "무엇을 알고 싶으시지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밴스는 마음속의 분노를 겨우 억누르고 있는 매컴에게 나무라는 듯한 눈길을 흘끗 보낸 다음 클레어 양을 보았다. "먼저 당신의 장갑과 핸드백이 어째서 벤슨 씨 집에 있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설명해 주시지요. 그 물건들이 그 집에 있었다는 점이 지방검사의 마음을 가장 괴롭히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열성어린 눈으로 똑바로 매컴을 보았다. "그날 밤 나는 벤슨 씨의 초대를 받고 그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불쾌한 일이 생겼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그의 태도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전사에게 타임스 스퀘어 근처에 차를 세우게 하고 혼자 돌아왔어요. 몹시 화도 나 있었고, 또 서두른 탓도 있어서 장갑과 핸드백을 차에 놓고 내렸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생각났을 때는 이미 벤슨 씨의 차는 가버리고 없었죠. 더구나 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집까지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내 소지품이 벤슨 씨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가 자기 집으로 가져간 거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고 밴스가 말했다. "하지만 타임스 스퀘어에서 걸어오셨다면 꽤 멀었겠군요." 밴스는 매컴을 돌아보며 놀리듯이 미소지었다."그것 보게. 그렇게 되었는데 클레어 양이 어떻게 새벽 1시 이전에 돌아올 수 있었겠나?" 매컴은 무섭게 화난 얼굴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 " 하고 밴스는 계속했다. "어떤 이유로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어두워졌으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침착했다. "나는 벤슨 씨의 주식중개소를 통해서 상당히 많은 돈을 손해보았습니다. 언뜻 떠오른 생각에 그가 일부러 나에게 손해를 주고 있으며, 그가 조금만 신경을 써준다면 그 돈을 다시 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전부터 나에게 귀찮게 굴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런 비열한 일까지 꾸미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겠어요? 그래서 그의 사무실로 쫓아가서 의심스러운 점을 분명하게 따졌지요. 그랬더니 그는 그날 밤 함께 식사라도 하면서 그 일을 의논해 보자고 하더군요. 그의 목적은 잘 알고 있었지만, 하도 내 처지가 다급했기 때문에 잘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여하튼 가기로 했었던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 저녁식사가 정확히 몇 시에 끝나야 한다는 식으로 벤슨 씨에게 말했습니까?" 그녀는 깜짝 놀란 눈으로 밴스를 보았지만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가 이런저런 말을 해가며 재미있게 하룻밤을 보내자고 했기 때문에, 나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 아주 분명하게요 -- 가긴 가겠지만, 정각 밤 12시까지만 같이 있겠다고요. 어떤 파티든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요......아시고 계시겠지만 -- "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나는 노래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밤 12시에는 집으로 돌아온답니다. 그것이 자기 희생 가운데 하나 -- 속박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 내 스스로 만들어놓은 규칙입니다." "아주 좋은 규칙이며 현명한 대처였습니다." 하고 밴스는 칭찬했다. "당신의 그 습관은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겠지요?" "네, 물론이에요. 그래서 나에게는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붙었답니다." (*신데랄라는 마녀의 명령대로 밤 12시만 되면 반드시 무도회에서 돌아와야 한다. 만일 그것을 어기면 그 순간부터 누더기옷을 걸친 모습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오스틀랜더 대령이나 파이피 씨도 그것을 알고 있었겠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벤슨 씨가 살해되던 날 당신은 그 집으로 왜 차를 마시러 갔습니까? 그날 밤에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클레어 양의 볼에 갑자기 붉은빛이 돌았다. "그 점에 대해서도 별로 숨길 게 없어요." 하고 그녀는 또렷하게 말했다. "벤슨 씨 사무실에서 나와 다시 생각해 보니 그와 함께 식사하기가 싫어져서 집으로 찾아갔었던 거예요. 처음에는 사무실로 다시 돌아갔었는데 벌써 퇴근했다고 하더군요 -- 나는 만나서 다시 한 번 최후로 부탁을 하고는 약속을 취소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 이야기를 웃어넘기며 차나 마시고 가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라며 나를 택시에 태워보냈습니다. 그 뒤 7시 30분쯤 그는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하면서 리코크 대위가 위협하던 말을 들려주며 겁을 주어보았지만, 벤슨 씨는 그런 건 엄포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냥 웃어넘겼겠지요?" 클레어 양의 얼굴에 다시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밴스는 위로하는 미소를 보냈다. "오스틀랜더 대령은 당신과 벤슨 씨를 마르세유에서 보았다고 하더군요." "네, 나는 정말 부끄러웠어요. 대령님은 벤슨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겨우 2~3일 전에도 나에게 그에 대한 충고를 해주었었거든요." "그분과 벤슨 씨는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요?" "그랬어요 -- 한 1주일 전까지는. 하지만 대령님은 얼마 전에 벤슨 씨가 다루던 주식을 사들였다가 나보다 훨씬 더 손해를 보았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벤슨 씨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고의로 우리를 속였다고 아주 심한 말로 나에게 털어놓았지요. 그날 밤 마르세유에서도 대령님은 벤슨 씨에게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벤슨 씨와 차를 마실 때 옆에 있었던 그 멋진 보석은 어떻게 된 겁니까?" "미끼지요." 하고 여자는 대답했다. 그 경멸하는 듯한 미소는 벤슨을 얼마나 혐오하고 멸시했는지를 어떤 신랄한 혹평보다도 훨씬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신사는 보석으로 내 머리를 혼란시킬 계획이었지요. 진주목걸이를 꺼내주며 식사하러 갈 때 걸라고 했지만, 나는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으며 나에게 물건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으면 -- 그것과 똑같은 보석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서, 21일에는 틀림없이 수중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물론이겠죠 -- 21일에는." 하고 밴스가 빙그레 웃었다. "매컴, 들었나? 21일에는 리앤더 파이피의 어음기한이 끝나게 된다네. 돈을 갚지 못하면 보석을 빼앗기게 되겠지." 밴스는 다시 세인트 클레어 양에게 말을 걸었다."벤슨 씨는 식사하는 데도 보석을 가지고 갔습니까?" "아뇨, 내가 목걸이를 거절해서 크게 실망한 것 같았습니다." 밴스는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듯 정답게 바라보며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부디 권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습니다. 법률가들이 흔히 쓰는 말로, 자칫 잘못 말하면 뒤에 가서 당신이 말려들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나 그녀는 전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살인이 일어난 다음날 아침 리코크 대위님이 여기에 와서 벤슨 씨를 쏘아죽일 작정으로 12시 30분쯤 그 집에 갔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깥에서 파이피 씨를 보았는데, 그 사람도 벤슨 씨를 만나러 온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계획을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나는 파이피 씨가 대위님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권총은 내 아파트에 숨겨두고, 만일 물어보거든 프랑스에서 잃어버렸다고 말하라고 했어요......그렇게 된 거예요. 나는 대위님이 벤슨 씨를 쏘고 나서 -- 뭐랄까요, 내가 너무 당황해 할까 봐 신사답게 거짓말 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가져다 버리기 위해서 내게 맡겼던 권총을 다시 빼앗아갈 때에는 더더욱 그렇게 생각되었고요." 그녀는 매컴을 향해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당신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했던 거예요. 내가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그렇게 되면 리코크 대위님에 대한 혐의는 풀릴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대위는 조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밴스가 말했다. "지금은 나도 그것을 알고 있어요. 좀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만일 정말로 그분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결코 권총을 내 아파트로 가져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눈이 흐려졌다. "정말 가엾은 분이에요. 그분은 내가 범인인 줄 알고 자수하신 거죠." "참으로 안됐습니다." 하고 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리코크 대위는 당신이 어디서 권총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을까요?" "나는 군인들 중에 아는 사람이 많아요...... 대위님의 친구분들이나 벤슨 소령의 친구분들도. 게다가 지난 여름에는 산에 올라가서 재미삼아 권총 쏘는 연습을 꽤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밴스는 일어나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 많은 참고가 되었어요." 하고 말했다. "매컴 씨는 이번 살인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보았지요. 첫째는 당신이 혼자서 보르지아 부인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둘째는 당신과 리코크 대위의 공동행위 -- 말하자면 사수연탄(四手連彈) 이라는 것이지요. 셋째는 대위가 단독으로 방아쇠를 당겼다는 겁니다. 법률가의 머리라는 것은 정말 정교하게 되어 있어서 모순된 여러 가지 설을 동시에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매컴 씨는 이번 사건에서 아직도 당신들 두 분이 혼자서 또는 공모하여 저지른 범행이라고 믿고 싶어한다는 거지요. 이리로 오기 전에 나는 매컴 씨를 설득하려고 꽤 노력했습니다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당신의 입을 통해서 직접 이야기를 듣게 하려고 억지로 끌고온 것입니다." 밴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노려보고 있는 매컴 옆으로 다가갔다. "어떤가, 매컴?" 하고 밴스는 유쾌한 듯이 말했다."세인트 클레어 양이나 리코크 대위, 둘 중 하나가 범인이라는 망상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겠지?......내가 부탁했듯이 리코크 대위를 가엾게 생각하고 풀어주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애원하는 배우 같은 몸짓으로 두 팔을 벌렸다. 매컴은 분통이 거의 폭발할 직전까지 와 있었으나 꾹 눌러 참고 일어나더니 여자 곁으로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세인트 클레어 양." 하고 매컴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이 사람의 넓은 도량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이나 리코크 대위가 범인이라는 심증은 버렸다고 약속합니다. 밴스 씨는 내 머리가 터무니없이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합니다만......그러나 나는 밴스 씨조차도 용서하려고 합니다. 하마터면 당신에게 아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를 뻔했는데, 그가 그것을 말려주었으니까요. 석방서류에 서명을 끝내는 즉시 리코크 대위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걸어서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로 나왔을 때 매컴이 밴스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이 사람, 밴스! 내가 그 소중한 대위를 언제 가둬두려고 했고, 또 언제 자네가 풀어주라고 내게 애원했단 말인가? 내가 이미 그 두 사람 어느쪽도 범인이라고 생각지 않고 있다는 것은 자네는 알고도 남지 않나?-- 자네라는 사람은 -- 정말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군." 밴스는 한숨을 쉬었다. "저런! 자네는 이 사건에서 이미 내 도움은 필요없다는 건가?" 하고 씁쓸하게 물었다. "여자 앞에서 나를 우롱해서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건가?" 매컴은 여전히 흥분해 있었다. "자네의 그 어릿광대 같은 행동이 얼마만큼이나 수확이 있었는지 모르겠군." "뭐라고?" 밴스는 크게 놀란 얼굴을 했다. "오늘 들은 증언은 범인을 결정짓는 데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걸세. 게다가 장갑과 핸드백 문제도 풀렸고, 그리고 왜 그녀가 벤슨 씨 사무실에 찾아갔었는지, 그녀는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앨빈과 단둘이 저녁식사를 했는지, 처음에 왜 벤슨의 집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는지, 보석은 또 어째서 그 집에 있었는지, 대위는 왜 그녀의 집에서 권총을 가지고 나가 강에 버렸는지, 자수는 왜 했는지 등을 모두 알게 되지 않았나?......정말 기가 막히는군. 이만큼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자네는 기쁘지도 않은가? 이것으로 먼지가 꽤 떨려 나가서 주변이 깨끗해졌는데도 말이야." 밴스는 걸음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말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녀가 밤에 외출을 하면 반드시 밤 12시에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는 점일세. 이 점을 무심코 들어넘겼거나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네, 매컴. 가장 중요한 점이거든. 전부터 내가 말하지 않던가? 벤슨을 쏜 사람은 그날 밤 그녀가 벤슨과 식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다음엔 누가 벤슨을 죽였는지 가르쳐 주겠다는 건가?" 매컴은 냉소했다. 밴스는 연기의 동그라미를 하나 하늘을 향해 날려보냈다. "그 바보를 쏜 녀석이라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매컴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랬었나? 언제 그런 하늘의 계시를 받았지?" "첫날 아침, 벤슨의 집에 들어가 채 5분도 안되어 알았지." 하고 밴스는 대답했다. "흐흠, 그렇다면 어째서 내게 귀띔해 주어서 이런 번거로운 수고를 덜도록 해주지 않았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밴스는 익살맞게 설명했다. "첫째, 자네에게는 나의 경외서적(經外書籍) 지식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 나는 자네가 빠져들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어두운 숲과 늪에서 자네를 구해 내는 것이 먼저였다네. 자네라는 사람은 기막힐 정도로 상상력이 모자라니까, 안 그런가?" 마침 택시가 지나가자 밴스가 불러세웠다. "웨스트 48번가 87번지."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매컴의 팔을 잡았다. "지금부터 플래트 부인을 만나보세 -- 그런 다음에 내가 간직해 둔 비밀을 모두 자네에게 털어놓겠네." 제21장 가발의 계시 (6월 19일 수요일 오후 5시 30분) 가정부는 그날 오후 우리의 방문을 굉장히 불안하게 맞아들였다. 크고 튼튼해 보이는 여자였는데, 몸에서 기운이 다 빠진 듯한 모습이었으며 얼굴은 오랫동안의 걱정으로 여위어 있었다. 우리가 가자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스니트킨이 그녀가 사건의 진행상태를 보도하는 신문을 빠짐없이 읽고는 미주알고주알 끝없이 캐묻더라고 했다. 가정부는 우리가 있는데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태도로 거실에 들어와서 밴스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두려워도 피할 길 없는 시련 앞에 세워졌기에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밴스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겁에 질린 눈으로 흘끔 마주보고는 곧 얼굴을 돌려버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감추어두었던 어떤 소중한 비밀을 상대방이 꿰뚫었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밴스는 대뜸 물었다. "플래트 부인, 벤슨 씨는 가발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썼었나요?-- 다시 말하자면 가발을 쓰지 않고 사람을 만나는 적이 있었나요?"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아뇨, 그렇지 않았어요 -- 그런 적은 절대로 없었죠."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플래트 부인. 당신이 알고 있는 한 벤슨 씨는 가발을 쓰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절대로 없었단 말이지요?" 가정부는 한동안 눈살을 찌푸리며 말이 없었다. "꼭 한 번 가발을 벗어 오스틀랜더 대령님께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나이든 신사분인데, 자주 놀러오시지요. 대령님은 오랜 친구이며, 한때는 함께 살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 말고는 없습니까?" 가정부는 다시 생각에 잠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없었습니다." 잠시 뒤에 그녀는 대답했다. "거래처 상인들에겐 어땠소?" "상인들에게는 특별히 신경을 쓰셨습니다......그리고 모르는 분에게도."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날씨가 더운 날이면 흔히 가발을 벗고 여기 앉아 계셨지만, 언제나 저 창문의 해가리개를 내리셨지요." 그녀는 복도에서 가장 가까운 창문을 가리켰다. "현관의 돌층계에서 방안이 들여다보이거든요." "좋은 것을 가르쳐 주었소." 하고 밴스는 말했다. "그러니까 돌층계 위에 서면 창문이나 쇠창살을 두드려 방안에 있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낼 수가 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 저도 한번 심부름을 나갔다가 열쇠를 잊어버려서 그렇게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플래트 부인? 벤슨 씨를 죽인 사람도 그런 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먼." "네,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고 그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벨을 누르지 않고 창문을 두드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벤슨 씨와 상당히 잘 아는 사이라고 생각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네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투에는 자신이 없었다. 이야기가 그런 쪽으로 가게 되면 가정부에게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창문을 두드렸을 경우 벤슨 씨는 가발을 벗은 채 그를 집안으로 들여놓았을까요?" "아니, 그럴 리가 없지요. 모르는 사람이라면 절대 들여놓지 않았을 겁니다." "그날 밤 벨이 울리지 않은 것은 분명한가요?" "네, 분명해요." 대답은 아주 확실했다. "현관 돌층계에는 전등이 있나요?" "아니, 없습니다." "누가 창문을 두드렸는지 벤슨 씨가 내다보면 어둠 속에서도 알 수가 있을까요?" 여자는 대답을 망설였다. "글쎄요, 어떨까. 아마 모를걸요." "현관문을 닫은 채 바깥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없소?" "없습니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가끔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을 때 벤슨 씨는 목소리로 상대방을 알아보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그럴 거예요." "열쇠 없이는 아무도 현관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가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현관문은 자동으로 잠기게 되어 있으니까요." "흔히들 쓰는 스프링 자물쇠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잠금장치를 틀어놓으면 어느쪽에서도 문을 열 수 있겠군요?" "네, 그런 잠금장치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 " 하고 가정 설명했다. "벤슨 씨가 움직이지 않게 해두었습니다. 저에게 조심성이 없다면서 -- 만일 잠금장치를 틀어놓은 채 제가 그냥 나가기라도 하면 문은 열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밴스가 복도로 나가고 잠시 뒤에 현관문을 열었다닫았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플래트 부인의 말이 옳구먼." 하고 돌아오더니, "그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한가요?" "그렇습니다. 저와 벤슨 씨 말고는 아무도 열쇠를 가진 사람이 없어요." 밴스는 상대방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벤슨 씨가 총에 맞은 날 밤 침실의 문을 열어놓은 채 잤다고 했는데, 늘 그렇게 열어놓소?" "아닙니다. 대개는 닫고 잡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너무 더워서 열어놓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연히 열어놓게 된 것이로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문이 닫혀 있었다면 총소리가 들렸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죠?" "잠이 깨어 있었다면 아마 들렸을 겁니다. 하지만 잠이 들어 있었다면 들리지 않았겠지요. 이렇게 오래 된 집들은 문이 두꺼우니까요." "아주 멋지군!" 하고 밴스는 문에 대한 평을 했다. 그리고 복도를 향해 열려 있는 육중한 마호가니 쌍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보게, 매컴, 이른바 우리의 문명이란 아름다운 것, 내구력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싸구려 대용품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네. 자네도 오스왈드 스펭글러(1880~1936, 독일의 역사철학자)의 <운터강 데스 아벤트란트스> (Untergang des Abendlands, 서양의 몰락) 를 읽어야겠군.(1) 더할 수 없이 투철한 논문일세. 어느 야심 있는 출판사가 우리의 방언으로 번역해서 명성을 떨치면 좋으련만. 그 책에는 현대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퇴폐 시대의 모든 것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거든. 예를 들면 저 육중하고 고풍스러운 문을 보게나. 비스듬히 붙여진 널빤지, 아름답게 도려낸 곡선, 이오니아풍의 기둥, 조각된 가로목 등 그 모두가 훌륭하지 않은가? 저것을 날마다 기계가 5만 장씩이나 찍어내고 있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얄팍한 셀락 칠 판자와 비교해 보게. '이리하여 세상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밴스는 한동안 물끄러미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플래트 부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정부는 아까부터 의아한 눈으로 더해가는 불안을 누르면서 밴스를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 "벤슨 씨는 저녁식사를 하러 나가면서 보석상자를 어떻게 해놓았죠?" "어떻게 해놓긴요." 하고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냥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죠." "나간 다음에 보았군요?" "네, 일단 치워둘까 했습니다만 결국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벤슨 씨가 나간 다음 누군가가 현관에 왔거나 집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틀림없지요?" "네, 틀림없습니다." 밴스는 일어나서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가정부의 곁을 지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마주섰다. "플래트 부인, 당신의 결혼 전 성은 호프먼이지요?" 두려웠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 말았다. 여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눈은 크게 떠지고 아랫입술은 조금 벌어졌다. 밴스는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그 태도에 노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가 평정을 되찾기 전에 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당신의 예쁜 딸을 만났소." "내 딸이라고요?......" 하고 가정부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호프먼 양 말이오 -- 금발의 귀여운 아가씨, 벤슨 씨의 비서 말이오." 가정부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꽉 다문 잇새로 말했다. "그녀는 내 딸이 아니에요." "허허, 플래트 부인!" 하고 밴스는 마치 어린아이라도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왜 그런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나요? 며칠 전 벤슨 씨와 차를 마신 여자에게 당신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내가 자꾸 따져묻자 당신이 몹시 당황해 하던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내가 그녀를 호프먼 양이라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었지요?......그런데 어째서 호프먼 양의 일에 대해 그토록 마음을 쓰나요, 플래트 부인? 그 아가씨는 아주 좋은 처녀지요. '플래트' 대신 '호프먼'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탓할 건 없잖습니까? '플래트'는 보통 '장소'라는 뜻이지만 '충돌'이나 '폭발'이라는 뜻도 있고, 때로는 '부풀어오른 빵'을 뜻할 때도 있지요. 하지만 '호프먼'이란 '궁전에서 임금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오?-- '부풀어오른 빵'보다야 얼마나 멋진 이름입니까?" 밴스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 태도는 가정부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가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하고 가정부는 호소하듯 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 이름을 붙여주었죠. 이 나라에서는 어떤 여자든 자기만 똑똑하면 기회를 잡아 출세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또 -- " "알겠소, 플래트 부인." 하고 밴스는 웃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호프먼 양은 머리가 좋지요. 당신이 가정부로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딸의 출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군요. 말하자면 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셈이군요.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그런데 따님은 혼자 살고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 모닝사이드 하이츠에 있지요. 하지만 매주 만나죠." 그녀는 겨우 들릴 만한 소리로 말했다. "물론 만나고 싶을 때는 언제나 만나겠지요......그러니까 따님이 비서로 있기 때문에 당신은 벤슨 씨의 가정부가 되었군요?"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밴스를 올려다보았다. "네 -- 그렇습니다. 벤슨 씨가 어떤 분인지는 딸에게서 들었어요. 게다가 벤슨 씨는 밤늦게 딸을 이리로 불러다가 과외의 일을 시키곤 했거든요." "그래서 당신은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따님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군요?" "네 -- 그렇습니다." "살인이 일어난 다음날 아침 매컴 검사가 주인이 이 집 어딘가에 총기 같은 것을 감춰두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몹시 당황했는데, 왜 그랬나요?" 가정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저는 --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당신은 당황했었소, 플래트 부인. 왜 그랬는지 내가 말해줄까요? 당신은 호프먼 양이 총을 쏜 것으로 생각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된 겁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딸애는 그날 밤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그것은 맹세합니다 -- 정말 딸애는 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1주일에 걸친 신경의 긴장이 이제야 풀린 것이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괜찮아요. 안심해요, 플래트 부인." 하고 밴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어느 누구도 호프먼 양이 벤슨 씨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캐내려는 듯이 밴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 오랫동안 그 걱정으로 마음졸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 밴스는 자기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하는 데 15분 이상이나 걸렸다. 겨우 그녀도 마음을 놓는 듯해서 우리는 그 집에서 나왔다. 스타이비샌트 클럽으로 가는 동안 매컴은 말 한마디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플래트 부인과 만나봄으로써 드러난 새로운 사실 때문에 꽤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밴스는 꿈을 꾸듯 담배를 피우며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건물을 이따금 얼굴을 돌려가면서 바라보았다. 우리가 48번가를 지나 동쪽으로 차를 달려 뉴욕 성서협회 앞에 이르자 밴스는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그 건물의 아름다움을 한번 보라며 고집을 부렸다. "기독교는 그 건물에 의해서만 그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 하고 밴스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두세 가지의 예외는 있지만, 이 거리에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 건물이라고는 교회나 그 비슷한 부류에 속하는 건물뿐이니까. 미국 사람들은 덮어놓고 크기만 하면 아름답다고 하거든. 스카이스크레이퍼(마천루)라고 불리고 있는 네모난 구멍이 뚫린 커다란 궤짝 같은 건물은, 단지 크다는 것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네. 구멍이 40개나 뚫려 있는 궤짝은 20개 뚫린 궤짝보다 두 배나 아름다운 걸세. 참으로 단순한 공식이지......길 건너에 있는 저 조그만 5층 건물을 보게. 거리의 여기저기에 있는 스카이스크레이퍼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 게다가 인상적이 아닌가?......" 밴스는 클럽까지 차로 달리고 있는 동안 꼭 한 번 그것도 간접적으로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었다. "여보게, 매컴. 친절이란 요란하게 장식해 놓은 모자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더군. 나는 오늘 착한 일을 했다네. 그러고 나니 내가 제법 덕있는 사람 같은 기분이 드는군. 부인도 플래트 오늘밤은 아마 훨씬 편한히 잠잘 수 있을 걸세. 그 동안 그레이트헨 ('파우스트'에 나오는 아가씨) 때문에 굉장히 마음졸이고 있었을 테니까. 장한 여자지, 과연 어머니다웠어. 미래의 아무개 영부인이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앉으나 서나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걱정했을까?" 그렇게 말한 밴스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매컴을 보았다. 그 뒤 옥상정원에서 저녁식사를 마칠 때까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우리는 의자를 뒤로 물리고 메디슨 스퀘어의 가로수 너머로 거리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매컴 -- " 하고 밴스가 입을 열었다. "모든 편견을 버리고 사태를 신중히 생각해 보게. 자네도 이제는 그날 권총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플래트 부인이 왜 그렇게 당황했었는지, 그리고 벤슨과 함께 차를 마신 젊은 여자에게 그토록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뭐냐고 내가 묻자, 그녀가 왜 그렇게 몹시 흥분했었는지 알게 되었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수수께끼는 풀린 셈인데......" "자네는 그 가정부와 딸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나?" 하고 매컴이 물었다. "나의 추파 덕분이지." 밴스는 매컴을 달래는 듯한 눈을 했다. 처음 그 아가씨와 만났을 때 내가 계속 '추파'를 보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뭐, 자네를 나무랄 생각은 없네......그리고 그때 두개골의 특성에 대해 몇 마디 주고받은 일도 기억하고 있나? 나는 호프먼 양이 벤슨의 가정부와 육체적 구조가 너무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네. 호프먼 양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튀어나왔으며 턱모양이 반듯하고 두정골(頭頂骨)의 구조가 평평하며, 중간형의 코를 하고 있더군......그 다음 나는 귀를 보았네. 플래트 부인은 귓불이 뾰족한 목양신(牧羊神)형 -- 또는 다윈 형이라고 불리는 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두었었다네. 그런 귀는 유전되거든. 그래서 호프먼 양의 귀가 모양은 좀 다르지만 같은 형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상당히 확실하게 혈연관계가 있다고 짐작했다네. 게다가 그 밖에도 비슷한 점이 있었지 -- 예를 들어 피부 색깔이며 키 등 -- 두 사람이 모두 키가 크지 않던가?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몸 중앙부가 팔다리에 비해 아주 큰 편이었지. 어깨가 좁고 손목과 발목이 작으며 엉덩이가 튀어나온 편일세. 호프먼 양이 플래트 부인의 처녀시절 이름이라는 것은 짐작에 지나지 않았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밴스는 의자 속에서 좀더 편한 자세로 고쳐앉았다. "그럼, 이쯤에서 자네의 법률적 고려에 참고가 될 만한 사항으로 들어가야겠는데...... 첫째로 13일 밤 12시 30분 조금 전에 어떤 나쁜 사람이 벤슨의 집에 가서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창문을 두드렸으며, 벤슨이 그를 집안으로 들여놓았다고 가정하세......이 가정에 의한다면 방문자에 대해 어떤 추정을 내릴 수 있을까?" "벤슨과 그 사람은 아는 사이라는 추정이 나오겠지." 하고 매컴이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네. 그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전부를 교수형에 처할 수는 없지 않겠나?" "여보게, 매컴. 좀더 깊이 생각해 보게나." 하고 밴스가 나무랐다. "벤슨을 죽인 자는 벤슨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이며, 적어도 옷차림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네. 내가 언젠가도 말했듯이 가발을 벗고 있었다는 건 지금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네. 가발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보 브란멜*에게는 없어서 안될 장신구니까. 자네는 이 문제에 대해 증언한 플래트 부인의 말을 들었겠지? 야채가게의 심부름꾼 아이에게도 벗겨진 머리를 보이지 않는 벤슨이 영광스러운 관을 머리에 쓰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과 만났을 것으로 생각하나? 게다가 벤슨은 몰골만 그랬을 뿐만 아니라 틀니까지도 빼놓고 있었다네. 또한 칼라도 넥타이도 없이 허름한 스모킹 재킷에 침실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던 말이야.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게, 이 사람아......칼라도 안 달고 목덜미도 그대로 드러내놓은 채 금단추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남자, 호감이 가겠나? 마치 귀부인이 머리카락에 클립을 달고 있는 모습과 같을 걸세......그처럼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단둘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몇 사람인가는 뻔하지 않은가?" (*보 브란멜은 조지 블라이언 브란멜(1778~1840)을 말한다. 그는 멋쟁이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지 얼마 안되어 3만 파운드의 유산을 상속받고 런던 사교계에서 온갖 향락을 누렸다. 조지 4세가 황태자였던 시절에 그와 친하게 지내서 세도가 굉장했으나, 얼마 뒤 다투고 헤어졌으며, 도박에서 재산을 날리고는 프랑스로 달아났다가, 한때 칸에서 영국 영사로 있었으나, 마침내 백치처럼 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한다.) "한 서넛쯤 되겠지." 하고 매컴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체포할 수는 없는 일일세." "할 수만 있다면 체포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밴스는 케이스에서 새 담배를 꺼내면서 계속했다."그 밖에도 유력한 추정을 해볼 수가 있다네. 예를 들면 범인은 벤슨의 가정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일세. 가정부가 자는 곳이 거실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점, 여느 때처럼 문이 닫혀 있으면 총소리가 들릴 염려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네. 그리고 또 그 시각에는 그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걸세. 그리고 또, 범인의 목소리는 완전히 벤슨의 귀에 익은 것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되지.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이상했다면 늘 도둑을 두려워하고, 또 리코크 대위의 위협까지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므로 절대로 집안에 들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일단은 수긍이 가는 가설일세......그 밖에는?" "보석일세, 매컴 -- 그 사랑의 대변자지. 그 보석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았나? 벤슨이 그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보석상자는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있었어. 다음날 아침에는 보이지 않았지. 그렇다면 범인이 가져갔다고 볼 수밖에 없군 -- 자네, 어떻게 생각하나?......그날 밤 범인이 그 집에 간 이유 중 하나는 그 보석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않나? 만일 그렇다고 하면 보석이 그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벤슨 씨와 가장 친한 '호의를 가진 사람'는 누구였나 하는 것이 되지. 그리고 특히 그 보석을 갖고 싶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말이 맞네, 밴스." 하고 매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걸세. 나는 그 동안 줄곧 파이피가 마음에 걸렸어. 오늘 히스 경사가 리코크 대위의 자백서에 대한 보고를 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파이피의 체포영장을 내리려던 참이었네. 그리고 그 자백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나는 다시 파이피를 의심하게 되었지. 오늘 오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어.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비로소 내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군. 파이피야말로 바로 범인일세!-- " 매컴은 바닥에서 들어올리고 있었던 의자 앞다리를 갑자기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놈을 한심하게도 놓아주고 말았으니......" "조급할 것 없네." 하고 밴스가 말했다. "파이피 부인의 무릎에서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을 테니. 그리고 자네 친구 벤 핸런은 도망자를 잡아오는 데는 으뜸가는 사람이 아닌가?......그 가엾은 파이피는 당분간 그냥 놔두게, 굳이 오늘밤에 잡아들일 필요는 없어 -- 내일이면 자네는 그를 상대도 하지 않을 테니까." 매컴은 빙글 돌아서며, "뭐라고 -- 상대도 하지 않는다고?-- 어째서 그런 소릴 하나, 밴스?" "그렇잖은가?" 하고 밴스는 귀찮은 듯이 설명했다. "그처럼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싫은 놈이 또 어디 있나? 내 말이 틀리나? 아무리 봐도 호감가는 자는 아닐세. 꼭 필요치 않는 한,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도 질색일세......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네만 그는 범인이 아닐세." 매컴은 완전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꼬박 1분이 지나도록 밴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했다. "파이피가 결백하다면 대체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밴스는 시계를 흘끔 보았다. "내일 아침 우리 집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오게. 그리고 히스 경사에게 알리바이 조사를 해오라고 하고. 그러면 누가 벤슨 씨를 죽였는지 가르쳐 주지."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매컴에게 감명을 주었다. 밴스가 지킬 자신 없는 약속을 그렇게 함부로 할 리가 없다는 것을 매컴은 알기 때문이다. 그의 장담을 무시하거나 적당히 깎아서 듣기에는 너무도 밴스를 잘 알고 있었다. "왜 지금은 가르쳐 주지 않지?" 하고 그는 물었다. "정말 안됐네만 -- " 하고 밴스는 양해를 구했다. "오늘밤 나는 필하모니의 '특별연주회'에 갈 작정일세. 세자르 프랑크(1822~1890, 프랑스의 작곡자)의 D단조를 연주한다네. 게다가 스트란스키의 기질은 그 전음계적 정서에 꼭 맞거든......자네도 신경도 가라앉힐 겸 함께 갔으면 좋겠구먼." "그만두겠네." 매컴은 잔뜩 골이 나 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브랜디와 소다수야." 매컴은 우리와 함께 택시 타는 데까지 왔다. "내일 아침 9시에 오게." 자리에 앉자 밴스가 말했다. "사무실에는 조금 늦게 나가겠네. 히스 경사에게 전화해서 알리바이 표를 잊지 않도록 하게." 그리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밴스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런데 말일세, 매컴, 플래트 부인의 키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1) 이 책은 초역(抄譯)인지도 모르지만 최근 라는 영어 번역판이 나와 있다. 제22장 밴스, 설명을 하다 (6월 20일 목요일 오전 9시) 다음날 아침 9시도 채 못 되어 매컴은 밴스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한마디 물어보고 싶은데, 밴스 -- " 하고 그는 식탁 앞에 앉자마자 물었다. "엊저녁 헤어질 때 자네가 한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멜론부터 들게나, 이 사람아." 하고 밴스는 말했다. "북부 브라질에서 가져온 것인데, 맛이 아주 좋다네. 제발 후추나 소금을 쳐서 제맛을 잃게 하지는 말게. 그건 정말 한심한 습관이거든. 하긴 -- 멜론에 아이스크림을 채워먹을 정도로 한심하지는 않지만. 미국인의 아이이스크림 이용법에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네. 파이 위에 얹고, 소다수에 넣고, 봉봉같이 딱딱한 초콜릿으로 껍질을 씌우기도 하지. 달콤한 비스켓 사이에 끼워넣고서 그것을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라고도 하고, 심지어 거품을 일게 한 크림 대신에 샬로트 뤼스(카스터드를 넣은 카스테라)를 넣는 녀석까지 있다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 " 하고 매컴이 다시 말을 꺼내는데 밴스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멜론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에는 놀라운 점이 있지. 멜론은 두 종류밖에 없다네 -- 마스크멜론과 수박이지. 아침식사에 쓰이는 멜론은 모두 -- 캔털루프, 시트론, 너트메그, 캐사바, 하네디우 등 -- 그 모두가 마스크멜론의 변종이야. 그런데도 세상사름들은 캔털루프는 속칭인 줄 알고 있거든. 필라델피아 사람들은멜론은 무엇이나 모두 캔털루프라고 부르고 있지. 이런 종류의 마스크멜론은 제일 처음 이탈리아 캔털루프에서 재배되었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군." 하면서도 매컴은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엊저녁 자네의 말뜻은......" "멜론 다음에는 아마 캐리가 자네를 위해서 특별요리를 만들어줄 걸세. 그것은 내 미각상의 걸작이거든 -- 물론 캐리의 도움은 받았지. 이것을 생각해 내는 데 몇 달이나 걸렸는지 모르거든 -- 말하자면 배합의 구성을 위해서지. 아직 이름은 붙이지 않았네 -- 아마 자네라면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 줄지도 모르겠군......그 요리를 만들자면 우선 완전히 삶은 달걀을 으깨 거기에 폴 뒤 사뤼 치즈 가루를 섞은 다음, 향료와 사철쑥잎을 조금 넣어야 하네. 이렇게 만든 반죽을 농어 흰살의 등심살로 싼다네 -- 마치 프랑스의 팬케이크처럼 말일세. 이것을 명주실로 묶어 특별히 만든 아몬드 가루 속에서 굴려가지고는, 소금기 없는 버터로 튀긴다네. 이 정도는 만드는 방법을 대강만 설명했을 뿐이네. 아주 미묘하고 자세한 점은 모두 생략한 걸세." "듣기만 해도 맛있을 것 같군." 매컴의 말투에는 성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요리강습이나 받자고 여기 온 것이 아닐세." "여보게, 매컴, 자네는 뱃속을 즐겁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과소평가하고 있군." 하고 밴스는 계속했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적인 향상을 위해 절대적으로 확실한 안내 가운데 하나라네. 그리고 또한 개인의 기질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정확한 척도지. 야만인은 야만인답게 요리해 먹네. 인류 초창기에 사람들은 모두 소화불량에 시달렸지. 우상이나 악마 또는 지옥이라는 관념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산물일세. 그런 것들은 위장이 약해서 생겨난 것들이라네. 그러다가 사람들은 요리기술을 익히게 되어 비로소 문명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요리기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문화적 영광도 최고봉에 다다른 것이라 할 수 있지. 미식가 예술이 저하되면 인간도 따라서 저하하네. 맛도 멋도 없는 표준화된 미국 요리는 인간 쇠퇴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어. 완전한 조합이 이루어진 수프는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 이상으로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거야." 매컴은 식사하는 동안 밴스의 수다를 멍청하게 듣고 있었다. 매컴은 두세 번 화제를 사건 쪽으로 돌리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밴스의 수다로 무시되고 말았다. 캐리가 식탁을 치우고서야 밴스는 비로소 매컴이 찾아온 목적을 화제에 올렸다. "알리바이 보고는 가지고 왔겠지?" 이것이 밴스의 첫번째 질문이었다. 매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녁 자네가 돌아가고 난 다음 히스 경사를 찾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네." "그거 안됐군!" 하고 밴스가 말했다. 밴스는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정리함 중 하나에서 무엇인가가 잔뜩 적혀 있는,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매컴에게 건네주며, "그것을 대강 한번 읽어보고 나서 박식한 자네 의견을 들려주게나." 하고 말했다. "이건 어젯밤 음악회가 끝난 다음에 작성했다네." 나는 나중에 그 서류를 받아서 벤슨 살인사건에 관한 다른 낙서나 서류들과 함께 철해 두었었다. 여기에 그것을 옮겨적는다. [가정] 안나 플래트 부인이 6월 13일 밤 앨빈 벤슨을 사살했다. [장소] 그녀는 가정부로서 벤슨의 집에 살고 있는데, 범행이 일어난 바로 그 시각에 그 집에 있었음을 시인했다. [기회] 그녀는 벤슨의 집에 피해자와 단둘이 있었다. 모든 창은 문마다 안에서 잠겨져 있었으며 현관문도 잠겨 있었다. 그밖에 들어갈 길은 없다. 그녀가 거실에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벤슨에게 집안일에 대해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을 구실삼아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벤슨 바로 앞에 가서 섰다고 해도 반드시 벤슨이 얼굴을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책을 읽던 자세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벤슨을 사살할 목적을 가지고도 그의 주의를 끌지 않고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벤슨은 가정부 앞에서라면 어떤 모습으로라도 상관치 않았을 것이다. 틀니나 가발을 벗고 실내복 차림을 한 벤슨을 가정부는 늘 보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가정부라면 범행에 편리한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그녀는 자지 않고 벤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부인했지만 벤슨은 귀가시간을 알려놓았을지도 모른다. 벤슨이 혼자 돌아와서 스모킹 재킷으로 갈아입는 것을 보고 가정부는 그날 밤 엔 찾아올 사람이 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벤슨이 집에 돌아온 직후의 시간을 택했다. 벤슨이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그가 벤슨을 살해한 것처럼 추측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법] 그녀는 벤슨의 총을 사용했다. 벤슨은 틀림없이 한 자루 이상의 총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권총을 두는 장소로는 거실보다 침실이 더 적당하며,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은 거실에서 발견되었으므로 다른 것은 아마 침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가정부였으므로 2층에 권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벤슨이 독서하기 위해 거실로 내려간 다음, 그녀는 권총을 꺼내 앞치마 밑에 감추고서 내려갔다. 범행 뒤 권총은 버렸거나 감추어두었다. 그것을 처치할 시간은 아침까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벤슨이 집에 총기를 두고 있었는가?' 하는 심문을 받았을 때 공포에 떨었었다. 우리가 침실에 권총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기] 그녀는 딸에 대한 벤슨의 태도가 걱정되어 가정부가 되어 벤슨과 함께 살았다. 딸이 밤중에 그 집에 와서 일을 할 때에는 은밀히 경계했었다. 최근 벤슨이 수상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딸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 가정부처럼 딸의 앞날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어머니라면, 딸을 구하기 위해서는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보석이 있다. 그녀는 그 보석을 딸에게 주기 위해 감추어두었을 것이다. 벤슨이 외출할 때 과연 그것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아두었을까? 만일 어디에 치워두고 나갔다면 집안 사정에 밝고 충분히 시간적 여유가 있는 가정부 말고 누가 찾아낼 수 있겠는가? [행동] 그녀는 세인트 클레어 양이 차를 마시고 간 사실에 대해 처음에는 거짓말을 했다가 뒤에 가서야 세인트 클레어 양은 범행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노라고 변명했다. 이것은 그녀의 직관일까?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범인이기 때문에 세인트 클레어 양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무고한 사람에게 혐의가 씌워지는 것을 바라기에는 그녀는 너무나도 모성적이었다. 그녀는 어제 딸의 이름이 나오자 몹시 당황했다. 모녀관계가 드러나면 벤슨 살해동기가 폭로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총소리를 들었다는 점을 시인했다. 부인해 봐야 실험에 의해서 거실에서의 총소리가 그녀의 방에까지 충분히 들린다는 것이 증명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혐의를 두게 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일일이 불을 켜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 집안에서 총소리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하면 살펴보거나, 아니면 주인을 깨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첫번째 심문 때에 그녀는 분명히 벤슨을 싫어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심문할 때마다 점점 더 불안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냉정하며 똑똑하고 의지가 강한 독일형 여자이며, 이번과 같은 범죄를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키] 그녀의 키는 약 177cm 이다 -- 실험해 본 범인의 키와 일치한다. 매컴은 이 요약서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 그렇게 하는 데 꼬박 15분이나 걸렸다 -- 그리고 다 읽고 난 뒤에도 10분이 넘도록 말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리 잘된 법률문서는 아닐세." 하고 밴스가 변명했다. "하지만 대배심원에서도 이해하리라고 생각하네. 물론 자네가 교정보아도 좋네. 별 뜻도 없는 문장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용어를 써서 그럴 듯하게 말일세." 매컴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식 창문 앞에 멈춰서서 한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래, 자네 힘으로 사건은 드디어 종결이 된 것 같군 -- 정말 훌륭하네. 나는 처음부터 자네가 어디를 눈여겨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네. 어제 플래트 부인의 심문 같은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지. 실토하네만 그 여자를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네. 벤슨은 어지간히 그 여자에게 원한을 산 모양이로군." 매컴은 고개를 숙인 채 뒷짐지고 방향을 바꾸어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 여자를 체포하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이상한 이야기지만, 그 여자와 이번 사건을 연관시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매컴은 밴스의 앞에서 멈춰섰다. "자네도 처음에는 그 여자를 문제삼지 않았었겠지? 벤슨의 집에 들어가 보고 나서 5분도 못 되어 누가 범인인지 알았다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밴스는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아서 몸을 길게 뻗었다. 매컴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괘씸하게도 자네는 그 다음날 아무리 확실한 증거라고 해도 이것은 여자의 범행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 예술이니 심리학이니 어쩌고 하면서 내게 연막을 쳤지." "물론 그랬지." 하고 밴스는 또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여자가 한 행동이 결코 아닐세." "여자의 행동이 아니라고?" 매컴의 목청이 갑자기 커졌다. "그렇다네. 범인은 여자가 아닐세." 밴스는 매컴이 들고 있는 종이쪽지를 가리켰다. "그 내용은 자네를 약간 시험해 본 것 뿐일세......가엾은 플래트 부인, 그 여자는 어린 양처럼 결백하다네." 매컴은 쥐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던지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매컴이 이토록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 감탄할 정도로 자제하고 있었다. "이보게, 나의 친애하는 멍청이 선생." 하고 밴스는 아무런 느낌 같은 것은 없는 나른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일세, 자네가 말하는 정황증거라든가 물적증거가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를 자네에게 실증해 보이고 싶었다네. 플래트 부인에 대한 나의 고발은 오히려 자랑해도 좋다고 나는 생각하네. 이런 것으로써 자네는 그 여자를 유죄로 만들 수도 있다고 나는 확신해. 그러나 자네의 고매한 법률이론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겉만 그럴 듯할 뿐 잘못된 것일세......정황증거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거든. 그 이론은 현대의 민주주의 이론과도 비슷하다네. 민주주의 이론은 선거에서 무지(無知)한 표를 긁어모으면 영지(英知)가 생긴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지. 정황증거의 이론은 약한 쇠사슬의 고리를 충분한 숫자만큼 모으면 강한 쇠사슬이 된다고 하는 점에 바탕을 두고 있잖은가?" "자네가 오늘 나를 이리로 부른 것은 -- " 하고 매컴이 차디찬 목소리로 물었다. "법률론을 강의하기 위해서였나?" "아니 아니, 천만에!" 하고 밴스는 유쾌한 듯 말했다. "다만 내 해명을 받아들이게 하자면 사전준비부터 해야겠기 때문이었네. 진범에 대한 물적 또는 정황증거라는 것을 나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런데도 나는 자네가 그 의자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처벌받지 않고 나를 죽일 수 있을까 골똘히 계획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누가 진범인지도 확실하게 알고 있다네."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결론내릴 수 있다는 건가?" 매컴의 목소리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주로 심리분석에 의해서지 -- 각 개인이 저마다 지닌 가능성의 과학이라고 해도 좋을 걸세. 인간의 심리적 본성에는,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헤스터 프린의 <주홍글씨> 만큼이나 뚜렷한 낙인이 찍혀 있다네......하긴 나도 호손은 읽지 않네만, 내게는 뉴잉글랜드 기질이 맞지 않거든." 매컴은 입을 꼭 다물고 얼음처럼 차갑고 매서운 시선을 밴스에게 던졌다. "그러니까 자네가 지적한 희생자의 팔을 붙잡고 법정에 끌어내어 판사를 보고는, '이 사람이 벤슨을 사살한 사나이요. 증거는 없지만 사형을 선고해 주십시오. 더없이 총명한 나의 친구이며, 농어에 속을 넣는 요리의 발명자인 파일로 밴스가 이 사람이 사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요.' 하고 내가 말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가?" 밴스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설령 자네가 그 범인을 체포하지 않는다고 해도 슬퍼하거나 풀이 죽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다만 자네가 죄도 없는 사람들을 분별없이 쫓아다니는 것을 멈추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범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는 것이 적어도 자네에겐 인도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네." "알았네 -- 그럼, 가르쳐 주게나. 그리고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게." 벤슨을 누가 죽였는지 밴스가 그 범인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미 매컴의 마음속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러나 왜 밴스가 이렇게 여러 날 동안 그를 애타게 했는지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그날 아침 늦게였다.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았을 때 매컴은 밴스를 용서했지만, 지금 당장의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겨우겨우 참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신사의 이름을 밝히기 전에 아직 두세 가지 해두어야 할 일이 있네." 하고 밴스는 말했다. "우선 첫째로 그 알리바이 보고서를 보여주게나." 매컴은 주머니에서 타이프친 서류철을 꺼내 건네주었다. 밴스는 외눈안경을 고쳐쓰고 찬찬히 그 서류를 읽어나갔다. 그리고는 방을 나갔는데,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서는 다시 한 번 보고서를 읽었다. 특히 그 중 어느 대목에서 눈길을 멈추고 그 가능성을 헤아려보듯 한참 머물러 있었다."기회가 있군." 마침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밴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듯이 물끄러미 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보고서를 죽 훑어보았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 " 하고 그가 말했다. "오스틀랜더 대령은 13일 밤 모리어티라는 브론크스 구(區) 참사회 의원과 함께 47번가의 피카딜리 극장으로 '미드나이트 폴리즈'를 보러갔었군. 밤 12시 조금 전에 극장에 도착해서 끝까지 구경했는데, 공연이 끝난 것은 새벽 2시 30분쯤이었고......자네는 이 참사회 의원을 알고 있나?" 매컴은 밴스의 얼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모리어티와는 만난 적이 있네. 그런데 뭐가 잘못됐나?" 나는 그 목소리에서 흥분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브론크스의 그 참사회 의원은 지금쯤 어디 있을까?" "집에 있겠지. 아니면 서머셋 클럽에 있을지도 모르고......때로는 시청에도 볼일이 있겠고." "흐음!-- 그런 활동을 하다니 정치가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군......수고스럽지만 모리어티가 집에 있는지, 아니면 클럽에 가 있는지 좀 확인해 주지 않겠나? 크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네." 매컴은 밴스를 거의 찌를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서재의 전화기 앞으로 갔다. "모리어티는 집에 있더군. 막 시청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네." 하며 매컴은 되돌아와서 말했다. "시내로 나가는 도중에 잠깐 여기로 들러달라고 부탁해 두었네."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밴스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해볼 만한 일이기는 하지." "자네는 지금 낱말 뜻 알아맞추기 게임이라도 하고있는 건가?" 하고 매컴이 물었지만 그 질문에는 유머도 호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맹세해도 좋네만 나는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어. 알리바이란 -- 전에도 자네에게 말했듯이 -- 마음놓을 수 없는 위험한 것이라 철저하게 의심해 볼 필요가 있거든. 그리고 알리바이가 없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네. 예를 들어 이 보고서에 의하면 호프먼 양에게는 13일 밤의 알리바이가 없군. 영화관에 갔다가 그 다음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지만, 그 동안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쩌면 어머니를 찾아 벤슨의 집에 갔다가 늦도록까지 있었을지도 모르지. 의심스럽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나 만일 그 집에 갔었다고 해도 그녀의 유일한 죄라면 딸이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가졌다는 것뿐일세......한편, 여기에는 이른바 철근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는 튼튼한 알리바이도 두세 가지 있거든 -- 엉터리 같은 비유지. 철근 같은 건 간단히 두드려 부술 수 있네 --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그러니 얌전히 참고 기다리게. 이 알리바이는 하나하나 면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꼭 있거든." 15분쯤 지나서 모리어티가 왔다. 20대 후반의 착실하고 잘생긴 젊은이로, 옷차림도 단정했다 --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참사회 의원의 개념과는 너무도 달랐다 -- 그리고 거의 브론크스 사투리가 없는 분명하고 정확한 영어로 말했다. 매컴이 소개시키며 그를 부르게 된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바로 어제도 살인수사과에 있다는 사람이 한 분 찾아왔더군요." 하고 모리어티가 대답했다. "그 보고는 들어와 있습니다만."하고 밴스가 말했다. "좀 막연한 듯해서요. 그날 밤 오스틀랜더 대령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대령은 나를 저녁식사와 폴리즈에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10시에 마르세유에서 만났지요. 그리고 밤 12시 조금 전까지 피카딜리 극장에 가서 새벽 2시 30분쯤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령님 아파트까지 함께 걸어가서 또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 3시 30분쯤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어제 형사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니 극장에서는 박스에 앉아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당신과 오스틀랜더 대령은 공연중 내내 박스에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제1막이 끝나자 내 친구 하나가 박스로 찾아왔기 때문에 대령님은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손을 씻으려고 나갔었습니다. 제2막이 끝나자 대령님과 나는 바깥 옆골목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지요." "제1막이 끝난 것은 몇 시쯤이었습니까?" "밤 12시 30분쯤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옆골목이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밴스가 물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극장 옆을 따라서 큰길로 나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박스 바로 가까이에 '출구'가 있어서 곧장 옆골목길로 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날 밤 그 출구를 이용했습니다. "제1막이 끝나고 대령은 얼마 동안 자리를 비웠습니까?" "몇 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제2막이 시작되자마자 돌아왔습니까?" 모리어티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막이 오르고 조금 뒤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10분쯤입니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10분 동안의 막간시간을 보태면 대령은 20분쯤 자리를 비운 셈이 되겠군요." "예 -- 그랬을 겁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모리어티가 나가자 밴스는 의자에 기대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뜻밖의 수확이었네." 하고 밴스가 말했다. "피카딜리 극장은 벤슨의 집에서 모퉁이 하나만 돌면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런 경우의 가능성을 자네는 생각해 보았나?......대령은 말일세, 참사회 의원을 미드나이트 폴리즈에 초대해 놓고 옆골목으로 통하는 출구 가까운 박스에 자리를 잡았네. 밤 12시 30분 조금 전에 자리를 떠나 골목길을 거쳐 벤슨의 집으로 가서 창문을 두드렸겠지. 벤슨이 문을 열어주자 집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쏘아죽이고는 서둘러 극장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르네. 20분이면 시간은 충분하니까." 매컴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으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 " 하고 밴스가 말을 계속했다. "암시적 상황과 확증적인 사실을 검토해 보세...... 세인트 클레어 양의 이야기로는 대령은 벤슨이 부추기는 주권을 사들였다가 큰 손해를 보고 벤슨의 부정행위를 욕했었다고 하네. 1주일 이상이나 벤슨과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어. 그러니 둘 사이에 나쁜 감정이 서려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네 -- 대령은 마르세유에서 세인트 클레어 양이 벤슨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지. 그런데 그녀는 언제나 밤 12시에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대령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밤 12시 30분이라는 알맞은 시각을 택했겠지. 처음에는 좀더 늦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즉, 새벽 1시 30분이나 2시까지 -- 극장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을 말일세 -- 육군장교니까 콜트 45구경 권총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테고, 아마 사격솜씨도 명사수 축에 들었을 걸세 -- 그리고 대령은 누군가를 빨리 체포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네 -- 그것이 누구라도 상관없어 보였어. 그래서 자네에게 전화까지 걸어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기까지 했네 -- 대령은 벤슨이 그런 옷차림으로 집에 들여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일세. 벤슨과 15년이나 사귀어온 친한 친구였거든. 플래트 부인은 벤슨이 가발을 벗어 대령에게 보여주는 장면도 실제로 목격했다네 -- 게다가 대령은 그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을 거고. 오랜 친구에게 놀라운 뉴욕의 밤거리를 보여주겠다면서 안내를 맡았다가 여러 번 그 집에서 묵은 적도 있었을 걸세......어떤가? 이런 정도면 자네 마음에 드나?" 매컴은 일어나서 눈은 거의 감은 채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는 대령에게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있었군 --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는 대령을 알고 있느냐고 묻기도 하고 식사에 초대도 했었군......먼저 물어보겠는데, 대령이 범인이라는 생각은 어째서 하게 되었나?" "범인이라고?" 하고 밴스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 쓸모없는 늙은 바보가 범인이라니, 여보게, 매컴. 그런 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다니......대령은 그날 밤 정말 손씻으러 가서 눈썹을 매만지고 넥타이를 고치기도 했을 걸세. 사실 박스에 버티고 앉아 있으면 무대 아가씨들 눈에 띄거든." 매컴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두 볼은 붉으락푸르락하고 눈은 불길처럼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밴스 쪽에서 먼저 상대방의 노여움을 아랑곳하지 않는 침착한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내가 한 일은 정말 운이 좋았어. 아무튼 그 대령은 손씻으러 가서 모양을 내는 구식 멋쟁이가 틀림없네 -- 나도 그럴 것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오늘 아침에는 정말 놀라운 진척이 있었어. 자네의 감정이 좀 상하기는 했겠지만. 자아, 지금 자네 앞에는 다섯 명의 다른 사람이 있네. 자네가 조금만 법률적인 머리를 쓰면 그들을 누구라도 유죄로 만들 수가 있지 -- 적어도 고발단계까지는 가져갈 수가 있을 거야." 밴스는 명상에 잠기듯 머리를 뒤로 젖혔다. "우선 세인트 클레어 양 말이야 -- 자네는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그녀의 범행으로 단정하고는, 소령에게 곧 체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었지. 범인의 키에 대한 나의 실험 같은 건 논리정연하고 결정적이니까, 법정에서는 쓸모가 없다면서 거들떠보지 않으면 되네. 내 장담하네만 판사는 동의할 걸세 -- 다음은 리코크 대위로 넘어가세. 그 사나이를 감옥에 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직접 내가 실력행사까지 해야 했어. 자네는 그 사나이를 잡아다가 훌륭한 사건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겠지 -- 그 유쾌한 자백은 건드리지 않고도 말일세. 자네가 어떤 곤란에 빠지면 대위가 도와주었을 걸세. 그는 자네가 유죄로 인정해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까 말이야 -- 세 번째는 그 사랑스러운 리앤더 파이피를 살펴보기로 하세. 일을 만들자면 다른 누구보다도 편리한 사람이지 -- 상황증거가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으니까 -- 사실 싫증날 만큼 넉넉하거든. 파이피라면 어떤 배심원이라도 기꺼이 유죄로 인정해 주겠지 -- 네 번째는 자랑스럽게 플래트 부인을 지적하겠네. 그녀 역시 상황증거가 완벽해. 단서며 추정이며 법률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상당히 많으니까 -- 다섯 번째로 오스틀랜더 대령을 내세워보세. 방금 대령에 대한 고발 내용은 복습을 마쳤지. 좀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한결 정교하게 다듬어낼 수 있었을 것이네만." 밴스는 일단 말을 멈추고 애교어린 짖궂은 미소를 매컴에게 보냈다. "부디 명심해 주기 바라네. 이 다섯 사람은 그 어느 누구라도 범인으로 추정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네. 모두들 시간, 장소, 기회, 방법, 동기, 행동에 관한 법률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유일한 약점이라면 그 다섯 사람 모두가 무죄라는 거지. 참으로 난처한 일일세그려 --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 걸 어쩌나?......그런데 다소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 모두가 무죄라면 어떻게 해야겠나?......이거 야단일세." 밴스는 알리바이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이 알리바이들을 검토해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내가 보기에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이런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밴스가 대체 어떤 목표에 이르려고 하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매컴 역시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밴스의 이런 엉뚱한 방법 속에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어떤 줄거리가 있다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 " 하고 밴스는 감회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벤슨 소령의 차례일세. 어떤가, 해보겠나?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걸세. 바로 가까이에 살고 있으니까. 소령의 알리바이는 완전히 그 아파트의 야근 관리인의 증언에 달려 있네." 밴스가 일어났다. "그 야근 관리인이 지금 있을 줄 어떻게 아나?" "아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두었거든."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밴스는 이미 매컴의 팔을 잡고 반장난처럼 문 쪽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하고 그는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매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었지. 자네는 인생을 너무 고지식하게만 생각하고 있다고." 매컴은 정색을 하고 저항하며 뒷걸음질쳐서 붙잡힌 팔을 부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밴스의 결의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꽤 심한 말다툼이 오간 끝에 결국 매컴이 꺾이고 말았다. "이런 연극에는 정말 질려버렸어." 하고 매컴은 택시에 올라타서 투덜거렸다. "나도 벌써 오래 전에 질려 있다네." 하고 밴스가 말했다. 제23장 알리바이 조사 (6월 20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벤슨 소령이 살고 있는 체이섬 암스는 46번가의 제5 애버뉴와 제6 애버뉴의 중간에 있는, 조그만 고급 독신자 아파트였다. 간소하지만 품위가 있어 보이는 정면 입구가 도로와 맞닿아 있고, 보도에서 이어지는 돌층계가 두 단 있을 뿐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좁은 홀이 있고 왼쪽에는 막다른 골목처럼 작은 응접실이 딸려 있었다. 구석 쪽으로 엘리베이터가 보이고 그 옆으로 좁은 쇠층계가 엘리베이터를 감싸듯이 위로 뻗어 있었으며, 그 밑에는 끼워놓은 듯한 전화교환대가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제복 차림의 두 젊은이가 근무중이었는데, 한 사람은 엘리베이터 문에 기대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교환대에 앉아 있었다. 밴스는 입구 옆에서 매컴을 잡아끌어 세웠다. "아까 전화로 물어보았더니 이 두 사람 중 하나가 13일 밤 근무했다더군. 어느쪽인지 확인한 다음 그 위엄 있는 검사의 직함으로 겁을 주어 얌전하게 기를 꺽어놓게. 그런 다음 내게 넘기도록 하게나." 매컴은 내키지 않는 듯이 안으로 걸어갔다. 그는 두세 가지 질문을 하더니, 그 중 한 사람을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와서, 짐짓 위엄을 보이며 용건을 설명했다.(1) 밴스는 상대방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질문을 시작했다. "벤슨 소령은 그의 동생이 살해된 날 밤 몇 시에 돌아왔소?" 관리인의 눈이 커다랗게 되었다. "11시쯤 돌아오셨습니다 -- 연극이 끝나고 바로 뒤에요." 대답하기 전 한 순간 그는 주춤했을 뿐이다. (이하 지면을 절약하기 위해서 질의 응답을 연극대사 식으로 쓰겠다.) 밴스 : "당신에게 말을 걸었소?" 관리인 : "예, 연극구경을 갔었는데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래서 머리가 다 아프다고 했습니다." 밴스 : "1주일이나 지난 이야기를 어떻게 그처럼 잘 기억하고 있소?" 관리인 : "그날 밤 소령님 동생이 살해되었으니까요." 밴스 : "살인사건으로 그토록 흥분해 있었다면, 그날 밤 벤슨 소령의 행동에 대해서도 모두 잘 기억하고 있겠군?" 관리인 : "물론입니다. 소령님은 살해된 분의 형님이 아닙니까?" 밴스 : "그날 밤 돌아왔을 때 벤슨 소령이 혹시 날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관리인 : "별다른 말씀은 안하셨습니다. 다만 그처럼 시시한 연극을 보게 된 것은 운나쁜 13일이기 때문일 거라고 했습니다." 밴스 : "그밖에 다른 말은 없었소?" 관리인 : (히죽 웃으며) "13일을 내 행운의 날로 해주시겠다며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모두 주셨습니다 -- 5센트, 10센트, 그리고 25센트짜리 동전 말고 50센트짜리 은전도 하나 있었지요." 밴스 : "모두 얼마였소?" 관리인 : "3달러 45센트였습니다." 밴스 : "그리고 나서 소령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소?" 관리인 : "예, 제가 엘리베이터로 모셔다 드렸지요. 소령님은 3층에 살고 계시니까요." 밴스 : "그 뒤로는 다시 외출하지 않았소?" 관리인 : "예,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밴스 : "어떻게 그것을 아시오?" 관리인 : "외출하신다면 제가 봤겠지요. 밤새도록 교환대에 있거나 엘리베이터를 운전했으니까 나가시는 걸 제가 못 볼 리가 없지요." 밴스 : "야근은 혼자서 했소?" 관리인 : "밤 10시 이후에는 언제나 한 사람만 근무합니다." 밴스 : "이 아파트에는 현관 말고 다른 출입구는 없소?" 관리인 : "없습니다." 밴스 : "그 뒤에 소령을 본 것은 언제였소?" 관리인 : (잠깐 생각한 다음) "벨을 눌러서 잘게 깬 얼음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갖다드렸습니다." 밴스 : "그것이 몇 시였소?" 관리인 :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아, 그래. 밤 12시 30분쯤이었습니다." 밴스 : (희미하게 웃으며)"아마 소령이 시간을 물어보았겠지?" 관리인 : "그렇습니다. 물어보셨습니다. 소령님은 거실의 탁상시계를 봐달라고 했습니다." 밴스 : "어째서 그런 것을 물었을까?" 관리인 : "그것은 이렇습니다. 제가 얼음을 가지고 올라가니까 소령님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습니다. 얼음을 거실 주전자에 넣어두라고 하시더군요.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데, 벽난로 위의 탁상시계가 몇 시인지 보아달라고 하시더군요. 회중시계가 멎어서 맞추어야겠다면서요." 밴스 : "그 밖에 다른 말은 없었소?" 관리인 : "별 말씀 없었습니다. 전화가 걸려와도 방으로 연결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잠이 오니까 깨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밴스 : "꼭 그렇게 해달라고 다짐을 하던가요?" 관리인 : "글쎄요 -- 그렇게 볼 수 있지요." 밴스 : "그리고 또 다른 일은 시키지 않았소?" 관리인 : "예, 수고했다면서 불을 끄시기에 전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밴스 : "어느 불을 껐지요?" 관리인 : "침실의 불입니다." 밴스 : "거실에서 침실이 보이나요?" 관리인 : "아니오, 침실문은 복도 쪽으로 나 있습니다." 밴스 : "그렇다면 불이 꺼진 것은 어떻게 알았소?" 관리인 : "침실의 문이 열려 있었고, 불빛이 복도로 비치고 있었습니다." 밴스 : "나올 때에는 침실문 앞을 지나왔겠군?" 관리인 : "그야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지요." 밴스 : "그때까지도 문이 열려 있었소?" 관리인 : "예." 밴스 : "침실의 문은 그것 하나뿐이오?" 관리인 : "예, 그렇습니다." 밴스 : "당신이 방에 들어갔을 때 소령은 어디에 있었소?" 관리인 : "침대 속에 있었습니다." 밴스 :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요?" 관리인 : (조금 발끈해서) "보였으니까요." 밴스 :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그 뒤 소령이 다시 내려오지 않은 것은 틀림없겠지요?" 관리인 :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내려오셨다면 제 눈에 띄었을 겁니다." 밴스 : "당신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간 사이에 내려올 수는 없었을까요?" 관리인 : "그럴 수야 있지요. 하지만 소령님에게 얼음을 갖다드리고 새벽 2시 30분쯤 몬태규 씨가 돌아올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가동시키지 않았거든요." 밴스 : "그러니까 벤슨 소령에게 얼음을 갖다준 다음 새벽 2시 30분쯤 몬태규 씨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엘리베이터로 올려다 주지 않았다는 말이로군?" 관리인 : "그렇습니다." 밴스 : "그 동안 이 홀을 떠난 적은 없었소?" 관리인 : "예, 내내 여기 앉아 있었습니다." 밴스 : "그러니까 밤 12시 30분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소령은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고 했지요?" 관리인 : "그렇습니다 -- 아침이 되어 어떤 여자가(2) 전화를 걸어 동생되시는 분이 살해되었다고 알려올 때까지는요. 그리고 10분쯤 지나자 대령님이 내려오셔서 외출했습니다." 밴스 : (관리인에게 1달러 주며)"수고했소. 이젠 됐소. 하지만 우리가 여기 왔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되오. 만일 어기면 구속시킬 거요 -- 알았소?......그럼, 볼일 보시오." 관리인이 나가자 밴스는 호소하는 듯한 시선으로 매컴을 보았다. "매컴, 사회를 옹호하기 위해서, 보다 높은 정의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최대다수의 최대의 선(善)을 위해서, 공공의 선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위해 다시 한 번 자네의 선천적인 기호 -- 자네 자신은 어떤 용어를 쓰는지 모르지만 -- 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을 참아주어야만 하겠네. 야비한 말로 하자면 나는 지금 곧 소령 방을 몰래 뒤져봐야겠어." "무엇 때문인가?" 매컴의 어조에는 절규라도 할 것 같은 항의가 담겨져 있었다. "자네는 완전히 미쳐버렸군. 관리인의 증언에 미심쩍은 점은 하나도 없었네. 내가 좀 둔한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 증인이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네." "물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 하고 밴스는 태연하게 동의했다."그래서 위에 올라가 보고 싶은 걸세 -- 자아, 가세. 매컴, 이 시간에 소령이 불쑥 돌아오지는 않겠지...... 게다가 -- " 하고 밴스는 기분 맞추듯이 미소지었다 -- "자네가 모든 원조를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매컴은 온갖 힘을 다해 항의했으나 밴스도 그에 못지않게 완강히 자기의 주장을 고집했다. 그리고 몇 분 뒤에 우리는 여벌로 비치해 둔 열쇠로 벤슨 소령의 방문을 열고서 그의 아파트에 불법침입했다. 공용복도 쪽으로 난 입구는 하나뿐이었는데, 그 문을 열자 좁은 복도가 곧장 안쪽의 거실로 이어져 있었다. 그 복도 오른쪽 입구 바로 옆에 침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밴스는 곧장 거실로 들어갔다. 오른쪽 벽에 벽난로와 벽난로 장식선반이 있는데, 그 위에 구식 마호가니 재(材)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벽난로 장식선반 가까이 저쪽 모퉁이에 조그만 테이블이 놓여 있고, 물주전자 하나와 컵 여섯 개가 한 세트를 이룬 은제 아이스워터 세트가 올려져 있었다. "저것이 바로 그 편리한 탁상시계로군." 하고 밴스가 말했다. "이것은 그 관리인이 얼음을 넣었다는 물주전자고 -- 셰필드*의 모조품이야." (*셰필드 은그릇은 1742년 영국의 금세공가 토머스 불소벨이 처음 만들었는데, 동판에 얇게 은을 입힌 것이다. 버킹검과 셰필드가 그 제조의 중심지이며, 후자의 이름을 따서 불리고 있다. 이 방법이 알려지자 은그릇은 값싸고 만들기 쉬워 일반화되었다.) 밴스는 창가로 가서 8미터 정도 밑에 있는 포장된 뒤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이 창문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겠군." 하고 말했다. 그는 몸을 돌려 한동안 서서 복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만 열려 있었다면 관리인에게도 침실의 불이 꺼지는 것이 쉽게 보였겠군. 통로의 벽이 하얗기 때문에 반사된 빛도 꽤 밝았겠고 말이야." 그리고 다시 되돌아와서는 침실로 들어갔다. 입구 쪽으로 시트가 덮인 작은 침대가 있고, 그 옆 나이트 테이블에는 전기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밴스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소켓의 줄을 잡아당겨 불을 켰다가 다시 껐다. 그런 다음 매컴을 한참 지켜보았다. "관리인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소령이 빠져나간 방법을 알았겠지 -- 어떤가?" "하늘을 날아서 나갔겠지." 하고 매컴이 대답했다. "그와 비슷하네, 아무튼 -- " 하고 밴스는 말했다. "아주 교묘해......자, 들어보게, 매컴 -- 밤 12시 30분에 소령은 잘게 깬 얼음이 필요하다며 전화를 걸었네. 관리인이 얼음을 가지고 올라와 거실로 가다가 열려진 침실문으로 안을 보니 소령이 침대에 누워 있었어. 소령은 얼음을 거실 주전자에 넣어달라고 해서 관리인은 홀을 지나 거실을 가로질러 구석에 놓인 테이블까지 갔겠지. 그때 소령은 벽난로 장식선반 위의 시계가 몇 시인지 봐달라고 했네. 그래서 관리인이 시계를 보니까 밤 12시 30분이었지. 소령은 이제 그만 자야겠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는 나이트 테이블 위의 불을 끄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네 -- 물론 옷은 미리 입고 있었겠지 -- 관리인이 얼음을 넣고 홀로 다시 나오기 전에 급히 공용복도를 뛰어나가 층계를 달려내려가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 전에 한길로 나갔을 걸세. 관리인이 얼음을 넣고 나오며 침실문 앞을 지날 때에는 만일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해도 방안이 캄캄하니 소령이 그대로 침대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겠지 -- 머리가 아주 좋지 않나?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매컴은 양보했다. "하지만 자네의 그럴 듯한 추리도 돌아오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걸 잊었군." "그것은 소령의 계획 중에서도 가장 간단했을 걸세. 그는 아마 길 건너편 어느 집 문간에 서서 이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들어가기를 기다렸겠지. 관리인은 몬태규 씨가 새벽 2시 30분에 돌아왔다고 했어. 바로 그때 소령은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틈을 노려 살짝 현관으로 들어와 층계를 걸어서 올라왔을 걸세." 매컴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도 소령이 날짜와 시간을 관리인에게 분명하게 기억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았겠지?" 밴스는 계속했다. "시시한 연극 -- 두통 -- 운수나쁜 날, 운수나쁜 날이란 물론 13일이지. 하지만 관리인에게는 운수좋은 날이었지. 돈을 한 웅큼 -- 그것도 전부 은화로 말이야. 팁을 주는 방법치고는 좀 묘하지 않나? 어때? 아마 1달러짜리 지폐로 주었다면 잊었을지도 모르지." 매컴의 얼굴은 어둡게 흐려 있었으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평온하고 무감동했다. "나는 역시 플래트 부인에 대한 자네의 설명 쪽을 택하겠네." "아직 기다리게, 일이 끝난 것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밴스는 일어섰다. "나는 흉기를 찾아내고 싶어." 매컴은 어느새 어떤 흥미와 함께 혹시나 하는 태도로 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흉기가 나온다면 물론 하나의 뒷받침이 되겠지만......자네는 정말로 흉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나?" "틀림없네." 하고 밴스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밴스는 서랍장 옆으로 가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집 주인은 앨빈 벤슨의 집에 권총을 두고 오지 않았네. 게다가 권총을 버리기에는 너무 교활한 사람일세. 지난번 전쟁에 참전한 소령이니까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건 없지. 사실 소령이 권총을 한 자루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도 몇 명은 될 걸세. 더구나 결백하다면 -- 소령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 늘 두던 그 자리에 놓아두어도 이상할 게 없겠지. 총은 없앴다면 그것이 오히려 의심을 사기 쉬울 테니까. 그리고 거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심리적 요소가 담겨있다네. 범인이 아닌데도 의심받는 사람은 오히려 감추거나 버리지 -- 예를 들어 리코크 대위처럼 말일세. 그러나 진짜 범인은 결백을 가장하기 위해서 사용한 흉기를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도로 갖다놓는다네." 밴스는 여전히 서랍장을 뒤져나갔다. "그러니까 문제는 소령이 평소에 권총을 어디에 넣어두는지 그 장소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네......이 서랍장에 두지는 않은 모양이군." 밴스는 서랍을 닫으면서 말했다. 다음에는 침대 밑에 놓아둔 여행가방을 열고는 그 속을 살폈다. "여기에도 없군." 하고 밴스는 별로 초조해 하는 기색도 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 밖에 그럴 듯한 곳은 옷장밖에 없겠는데." 그는 방을 가로질러가서는 옷장의 문을 열고 천천히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거기 윗선반에 불룩한 권총 케이스가 달린 군인용 혁대가 누구의 눈에도 띄기 쉽게 내던져져 있었다. 밴스는 세심한 주의를 해가며 그것을 집어다가 창문 가까운 침대 위에 놓았다. "그것 보게. 틀림없지, 매컴." 하고 밴스는 신이 나서 몸을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혁대와 케이스를 특히 자세히 보게 -- 케이스 덮개만 빼고 -- 온통 먼지투성이로군. 덮개가 비교적 깨끗한 것은 최근에 열었다는 증거지......물론 단정할 수야 없겠지. 하지만, 매컴, 자네가 늘 단서단서 하니 말일세." 밴스는 조심스럽게 케이스에서 권총을 꺼냈다. "보게나, 권총에도 먼지는 없어. 최근에 손질을 한 모양일세." 그 다음에 밴스는 손수건을 총구에 틀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빼들고는 살펴보았다. "이것 보게 -- 총구 속도 깨끗하군......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세잔의 그림 모두를 법학사님의 학위에 걸어도 좋네만 총알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을 걸세." 밴스는 탄창을 빼내어 나이트 테이블 위에 놓으니 총알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일곱 발이었다 -- 이런 형의 권총에는 총알 일곱 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매컴, 자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단서라는 것을 하나 더 제공하겠네. 총알은 오랫동안 탄창에 넣어두면 조금 변색되지. 탄창이 밀봉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잘 봉해진 새 총알, 즉 상자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라면 훨씬 오랫동안 광택을 유지할 수가 있다네." 밴스는 탄창에서 굴러나온 첫번째 총알을 가리켰다. "이 총알을 보게 -- 맨 마지막 탄창에 들어 있었던 것일세 -- 다른 것보다 광택이 있지. 이것으로 추정한다면 -- 자네는 추정의 명수니까 -- 이것은 새 총알이며 아주 최근에 탄창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밴스는 똑바로 매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헤지든 주임이 보관하고 있는 것 대신 여기에 넣은 총알일세." 매컴은 자칫 최면술에 끌려들 것 같은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다. 그리고 참으로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직 나는 플래트 부인에 대한 자네의 설명 쪽이 더 걸작이라고 생각하네." "내가 그린 소령의 초상화는 이제 겨우 윤곽이 잡혔을 뿐일세." 하고 밴스는 말했다. "가필하여 분명한 모양을 갖추는 것이 지금부터의 일이지. 그러나 우선 간단한 교리문답부터 해보세......13일 밤 12시 30분에 동생 앨빈이 집에 있다는 것을 소령은 어떻게 알았을까?-- 소령은 앨빈이 세인트 클레어 양을 저녁식사에 초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네 -- 소령은 엿듣는 버릇이 있다는 호프먼 양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 그리고 또 세인트 클레어 양이 밤 12시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도 소령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걸세. 어제 세인트 클레어 양과 헤어지고 나서, 그 여자가 우리에게 한 이야기 중에 진범을 단죄하는 데 도움될 만한 점이 있다고 내가 말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어디에 가든 밤 12시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는 점일세. 따라서 소령은 앨빈이 밤 12시 30분쯤에는 집에 돌아와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네. 물론 집에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지. 또 만일의 경우에는 기다리고 있으면 되니까 -- 동생은 거의 벌거숭이로 형을 만나줄까?-- 물론 만나주겠지. 소령은 창문을 열고 들어보니 틀림없는 형의 목소리였지. 앨빈은 형 앞에서 옷차림 같은 것에 마음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틀니도 가발도 없이 맞아들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지......소령의 키는 꼭 들어맞는가?-- 틀림없네. 며칠 전 나는 자네 사무실에서 일부러 소령 옆에 서보았거든. 거의 180cm 쯤 되었네." 매컴은 탄창이 빠진 권총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밴스는 다른 사람을 나무라는 말을 늘어놓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매컴도 그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자아, 다음은 보석일세." 하고 밴스가 말했다. "언젠가 내가 한 말을 잊지는 않았겠지? 파이피의 담보를 찾아낼 때가 범인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라고 한 말 말일세. 그때 나는 소령이 보석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네. 소령이 그 꾸러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호프먼 양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침내 그 확신을 굳히게 되었네. 앨빈은 그것을 13일 오후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지. 소령은 틀림없이 그것을 알고 있었어. 짐작컨대 그 사실이 그날 밤 앨빈의 생명을 빼앗기로 소령이 마음먹게 한 것일세. 매컴, 소령은 보석이 필요했던 거야." 밴스는 기세좋게 벌떡 일어나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자, 남은 건 그 보석을 찾아내는 일뿐일세......살인범이 그것을 가져갔을 거야. 그렇지 않고는 그 보석이 그 집에서 사라질 까닭이 없지. 따라서 보석은 이 아파트에 있어. 소령이 사무실로 가지고 가면 누구에겐가 들킬 염려가 있고, 은행금고에 맡기면 은행직원이 신문에 난 보석 기사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권총에 적용한 같은 심리가 보석에 대해서도 들어맞네. 소령은 시종일관 자기의 결백을 꾸미고 있거든. 또 사실 그 보석을 둘 곳으로는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지. 사건이 완전히 일단락되고 나서도 그것을 처분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매컴, 함께 가세. 자네의 괴로운 심정은 나도 알고 있네, 자네의 심장은 본래 마취제에는 몹시 약하니까." 매컴은 어리둥절한 채 밴스를 따라 복도로 걸어갔다. 나는 매컴이 몹시 가엽게 생각되었다. 밴스가 소령의 유죄를 실증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건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밴스가 소령의 알리바이를 조사하자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부터 매컴도 그 밴스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으나, 밴스가 자기를 애태우는 것이 못 견디게 싫은 것만큼, 그 조사의 결과가 그로서는 결딜 수 없이 두려웠던 것이라고 나는 처음부터 느꼈다. 매컴은 오랫동안 벤슨 소령과 우정을 맺어왔는데, 결국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진상과 맞부딪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도 지금에야 알아차렸지만 그는 도저히 피할 길 없는 상황에 몰리면서도 여전히 밴스의 마음이 오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한가닥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 진행이 한 단계씩 오를 때마다 온 힘을 다해 반대함으로써 운명 자체의 모습을 바꿀 길이 없을까 하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밴스는 앞장서서 거실로 들어가서 한 5분쯤 버티고 선 채 거기 놓여 있는 가구들을 둘러보았다. 한편 매컴은 입구에 서서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가늘게 뜬 눈으로 밴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전문수사관을 데려와서 방안을 이잡듯이 뒤져도 좋겠지만 -- " 하고 밴스는 그의 생각을 말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걸세. 소령은 대담하고 교활한 사람이야. 그것은 그 넓고 네모난 이마, 사람을 위압하는 듯이 쏘아보는 동그란 눈과 곧게 뻗은 척추뼈와 안으로 들어간 배를 보면 알 수 있지. 그런 사람의 심리작용은 모두 직선적이고 분명하다네. 그는 포의 D 장관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에 나온다) 처럼 보석을 남 모르는 곳에 힘들여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걸세. 게다가 또 감춰야 할 이유도 없었어. 다만 사람 눈에 띄지 않게만 해두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물론 자물쇠와 열쇠가 있어야 하겠지. 그런데 침실에는 그런 감출 곳이 없네. 그래서 이리로 온 걸세." 밴스는 구석에 놓인 자단 책상으로 다가가서 서랍을 열었는데 자물쇠는 잠겨 있지 않았다. 다음에는 테이블의 서랍을 열어보았는데 그것도 잠겨 있지 않았다. 창가의 조그만 스페인풍의 장롱 역시 기대에 어긋나고 말았다. "매컴, 어떻게 해서든지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야." 하고 밴스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방안을 살피고 침실로 돌아가려고 할 때 밴스의 눈은 가운데 테이블 밑에 있는 여송연 상자에 멎었다. 그 여송연 상자는 사카시아산 호도나무로 만들었는데, 낡은 잡지들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는 주춤 걸음을 멈추고 급히 그 상자 쪽으로 가서 뚜껑을 열려고 했는데 잠겨 있었다. "글쎄!" 하고 밴스는 의아한 듯 말했다. "소령은 무슨 담배를 피우는지 모르겠군. '로메오 에 율리에타 펠페시오나도스'일 것 같은데 -- 그렇다고 자물쇠를 채워둘 만한 물건은 아닌데 -- " 밴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튼튼해 보이는 청동제 나이프를 집어들고 그 칼끝을 여송연 상자 자물쇠 위의 틈새에 끼워넣었다. "그런 행동은 하면 안돼." 하고 매컴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비난에 차 있었으나 그에 못지않은 고뇌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매컴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는 파란 비로드의 보석상자가 들어 있었다. "보게나, 이게 바로 '말 못하는 보석이 말 이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걸세." 하고 밴스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매컴은 침통한 얼굴로 여송연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옆에 있던 의자에 허물어지듯 몸을 던졌다. "아아!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 점에서는 -- " 하고 밴스가 대답했다. "자네는 모든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구제의 길이 없는 늪에 빠져 있는 걸세 -- 그러나 자네는 말일세, 반 다스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간단히 유죄로 믿으려 했었잖나? 그런데 정말로 죄가 있는 소령을 앞에 놓고는 어째서 뒷걸음질인가?" 밴스의 말투는 비웃는 듯했으나, 그 눈에 떠올라 있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빛이 말투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단단한 우정으로 맺어져 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감상적인 말이나 혹은 동정적인 말을 주고받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매컴은 절망적인 몸짓으로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두 손으로 머리를 싸안고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하지만 동기는?" 하고 그는 주장했다. "그까짓 한줌의 보석 때문에 형제를 죽이는 사람은 없어." "그야 없겠지." 하고 밴스는 동의했다. "보석은 단지 부록일 뿐일세. 물론 여기에는 중대한 동기가 있었을 걸세 --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 회계사에서 보고서가 나오면 완전히 -- 적어도 태반은 -- 알게 될 거야." "그래서 자네는 장부를 조사해야겠다고 말했군." 매컴은 결연하게 일어났다. "가세,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해줌세." 그러나 밴스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벽난로 장식선반 위에 놓인 동양풍 디자인의 낡은 촛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모조품치고는 정말 일품이로군." (1) 그 관리인은 켈리 가(街) 621번지에 사는 잭 폴리스코였다. (2) 틀림없이 플래트 부인이었을 것이다. 제24장 체세포 (6월 20일 목요일 정오) 아파트를 나오면서 매컴은 권총과 보석함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6번가 모퉁이의 약국에서 히스 경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곧 검사국에서 만나고 싶으니 헤지던 주임과 함께 오라고 알렸다. 또 회계사인 스티트에게도 전화를 걸어 되도록 빨리 보고를 듣고 싶다고 했다. "자네도 알았겠지?" 우리가 형사법정건물로 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타자 밴스가 말했다. "내 방법이 자네 방법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말일세. 처음 발단에서부터 누가 했는지 알고 있으면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은 없지. 그런 선견지명이 없으면 교묘한 알리바이 같은 것에 속아넘어가기 쉽다네......내가 모두의 알리바이를 조사해 달라고 한 것은 소령이 범인임을 알았기에 범인인 그가 얼마나 교묘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았을까 궁금했었기 때문일세." "그렇다면 왜 모두의 알리바이를 조사시켰나? 오스틀랜더 대령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데 시간을 낭비해 가면서까지 그럴 건 없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소령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 이름과 함께 끼워넣지 않으면 그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처음부터 소령의 알리바이를 조사해 달라고 했더라면 자네는 아마 틀림없이 거절했을 걸세. 제일 먼저 대령의 알리바이를 조사시킨 것은 아무래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일세 -- 그 생각은 제대로 들어맞았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누구든지 한 사람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면, 소령의 알리바이 검토에 자네가 좀더 적극성을 띠지 않을까 생각했다네." "하지만 자네 말대로 처음부터 소령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나? 만일 그랬다면 지난 1주일 동안 적어도 마음 고생만은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이 사람아, 그렇게 간단히 몰아붙이지 말게나." 하고 밴스는 말했다. "처음부터 내가 소령을 비난했다면 자네는 명예훼손과 비방죄로 나를 체포했을 걸세. 소령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줄곧 자네에게 감추어 자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오늘 그 사실을 자네에게 납득시킬 수가 있었던 것일세.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한 번도 자네에게 진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네. 끊임없이 암시를 주고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여 자네 스스로 진상을 간파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지. 그러나 자네는 화가 날 정도로 생각이 비뚤어져서 내 암시를 깡그리 무시하거나 아니면 곡해하더군." 매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네 말은 알아듣겠어. 하지만 어째서 자네는 그런 식으로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었다가는 부숴버리곤 했나?" "자네는 몸도 마음도 상황증거의 포로가 되어 있었어." 하고 밴스가 지적했다. "소령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려면 우선 상황증거 같은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자네에게 이해시키는 수밖에 없었지. 소령에게 불리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 물론 소령은 그걸 알고 있었지. 어느 누구도 소령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형제를 죽인다는 건 꾸며진 장난으로, 카인의 시대 이후론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지. 내가 온갖 지혜를 짜내고 있는데 자네라는 사람은 하나하나 트집을 잡아 닥치는 대로 반대했고, 나의 겸허한 노력을 꺾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었네...... 자네도 사내라면 이것을 인정하게나 -- 내가 끝까지 버티지 않았다면 소령은 혐의조차 받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말일세." 매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 있어. 예를 들어 소령은 왜 리코크 대위의 체포를 그토록 열심히 반대했을까?" 밴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네는 정말 단순한 친구로군, 자네 같은 사람은 죄라고는 평생 짖지 못할 걸세, 매컴 -- 당장 붙잡힐 테니까 말이야. 소령으로서는 범인체포에 아무 관심도 없는 척했던 거지. 자네가 리코크 대위를 체포하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척하면 소령의 처지가 더욱 확고해진다는 것을 자네는 모르겠나? 자기에게 씌워질지도 모르는 혐의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또 어디 있겠나? 그리고 소령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자네는 결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자네는 그만큼 고결한 선비가 아닌가?" "하지만 소령은 한두 번 세인트 클레어 양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내게 보였다네." "그야, 이 사람아, 교활한 꾀를 그 기회에 이용한 것일세. 대위에게 혐의가 돌아가도록 꾸민 거지. 리코크 대위는 세인트 클레어 양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앨빈을 공공연하게 협박했네. 그 여자는 앨빈과 단둘이 식사하기로 되어 있었지. 그러니 다음날 아침 앨빈이 육군용 콜트 권총으로 사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면 대위 말고 혐의를 걸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나? 소령은 대위가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알리바이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파이피를 참고인으로 추천한 것을 보아도 소령이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가를 이제는 자네도 알겠지? 소령은 자네가 파이피를 심문하면 리코크 대위가 앨빈 벤슨을 협박한 사실이 자네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이미 계산에 넣어둔 거라네. 게다가 소령이 파이피의 이름을 꺼낼 때 자못 뒤에 가서야 생각난 일인 것처럼 꾸민 점도 잊어서는 안되지. 문득 떠오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던 것일세 -- 그는 정말 빈틈없는 악마야." 매컴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내가 소령은 기회를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그 기회란 말일세 -- " 하고 밴스는 계속했다. "앨빈이 함께 식사한 여자가 누구인지 자네가 알고 있다고 했으므로 소령의 예상은 한 번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지. 그때 자네는 그녀를 기소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네. 소령은 자네의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던 걸세. 기사도 정신이 넘쳐흐르는 이 도시에서 증거야 어찌되었든 아름다운 여자가 살인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예가 없다는 것을 소령은 알고 있었거든. 소령은 스포츠 정신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이 범죄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끝나게 되기를 바랐던 걸세. 그래서 자네가 그녀에게로 혐의의 시선을 돌리자 그로서는 더는 바랄 수가 없을 만큼 좋게 된 셈이지. 그리고는 그 여자가 사건에 말려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연극을 한 걸세." "그래서 자네는 그의 장부를 조사시키고, 자백서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사무실로 나와 달라는 말을 나에게 시킬 때도 세인트 클레어 양이 자백한 것처럼 넌지시 풍기도록 했구먼." "그야 물론이지." "그렇다면 소령이 감싸고 돌던 사람은 -- " "소령 자신이었지만 자네에게는 세인트 클레어 양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겠지." "소령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면서 자네는 왜 또 오스틀랜더 대령을 이 사건에 끌어들였나?" "소령을 화장시킬 장작을 그가 제공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나는 대령이 앨빈 벤슨과 친한 사이이며 완전히 동류임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형편없는 허풍쟁이라네. 어쩌면 벤슨 형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세. 그리고 파이피에 대한 대강의 지식을 얻어둠으로써 만일에 생길지도 모르는 그 반대의 가능성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싶었다네." "하지만 파이피에 대해서는 이미 대강 알고 있지 않았나?" "아니, 내가 말하는 건 물적단서가 아니라 파이피의 본성 -- 그의 심리라네 -- 특히 도박꾼이로서의 개성을 알고 싶었던 걸세. 알겠나, 매컴? 이것은 타산적이고 냉혈적인 도박꾼의 범죄일세. 그런 특수한 타입의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거든." 매컴은 아무래도 당장은 밴스의 이론에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소령은 금고 속에 있는 보석에 대해 동생이 거짓말을 했다고 진술했는데, 자네는 그 말을 믿었나?" 하고 매컴이 물었다. "그 엉큼한 앨빈은 보석에 대한 것을 형에게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겠지." 하고 밴스는 대답했다. "아마 파이피가 언젠가 찾아왔을 때 엿들어서 알아냈을 걸세......엿듣는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범죄의 동기를 거기서 짐작하게 되었다네. 자네가 자랑하는 스티트 씨가 그 점을 밝혀주길 바라고 있네." "자네 설명으로는 이 범죄는 순간적으로 생각나서 저지른 우발적인 범행인 것 같군." 매컴의 말은 사실은 질문이었다. "실행의 세부적인 것은 순간적으로 떠올랐겠지." 하고 밴스가 설명을 보탰다. "소령은 아마 예전부터 동생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해 왔을 걸세.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가는 결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아마 열 가지 이상 계획을 꾸몄다가는 모두 버렸겠지. 그런데 13일에야 기회가 온 걸세. 모든 조건이 저절로 소령의 목적에 알맞게 되어 있었거든. 세인트 클레어 양과 앨빈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러 간다는 말을 듣자 소령은 동생이 아마 밤 12시 30분쯤이면 집에 혼자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지. 그 시각에 해치운다면 혐의가 리코크 대위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계산도 했겠고. 소령은 앨빈이 보석을 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어 -- 이것 또한 하늘이 내린 좋은 조건이고 보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절호의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셈이었네. 남은 일은 알리바이를 만들어 실행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뿐이었지.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해냈는지는 이미 내가 설명한 그대로일세." 매컴은 몇 분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얼굴을 들었다. "자네 덕분에 소령이 범인이라는 확신이 생겼네." 하고 매컴은 인정했다. "하지만 난처하군. 나로서는 그것을 입증해야 하거든. 그런데 이렇다 할 법적 증거가 지금으로선 별로 없으니 말일세." 밴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자네들의 엉터리 같은 법정이나 어리석은 증거의 규정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다네. 하지만 어쨌든 자네를 납득시켰으니 자네의 도전을 회피했다고 하지는 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걸세." 하고 매컴은 우울한 듯 동의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의 근육이 차츰 긴장을 더해 갔다. "밴스, 자네는 자네 몫을 해냈네. 남은 일은 내가 맡겠네." 히스 경사와 헤지던 주임은 우리가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매컴은 여느 때처럼 차분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때는 이미 완전히 자신을 되찾고 있었으며, 임무를 수행할 때면 보이는 그의 특징인 무뚝뚝하고 정력이 넘치는 태도로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진범이 누군지 알아낸 것 같소, 히스 경사." 하고 그는 말했다. "우선 좀 앉으시오. 이제 자초지종을 설명하겠소.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 있소." 매컴은 벤슨 소령의 권총을 총기 전문가에게 넘겨주었다. "이 권총을 조사해서 벤슨을 살해한 흉기인지 아닌지를 말해 주십시오, 헤지던 주임." 헤지던 주임은 느린 걸음으로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창틀에 권총을 놓고 헐렁한 윗도리 주머니에서 여러 가지 도구를 꺼냈다. 그리고는 보석상들이 쓰는 확대경을 한쪽 눈에 끼고, 언제나 끝이 날지 짐작도 안되는 일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먼저 총머리를 떼어서 방아쇠를 내려놓고 발화전을 꺼냈다. 슬라이드를 빼고 연결 나사를 풀어서 반동 스프링을 빼냈다. 권총을 완전히 분해하려는 줄 알았더니 총신 안을 광선에 비춰보기 위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 그는총을 창을 향해 들어올리고는 총구에 눈을 갖다댔다. 약 5분 동안이나 총신 안을 들여다보고 햇빛이 내부의 여러 부분에 비치도록 그것을 조금씩 앞뒤로 움직여 보았다. 이윽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공을 들여서 권총을 본래대로 조립해 나갔다. 그런 다음 어슬렁어슬렁 자리로 돌아와서는 한동안 눈만 껌벅이며 앉아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 " 하고 헤지던 주임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쇠테 안경 너머로 매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이 권총인 것 같습니다. 단정하긴 어렵습니다만, 그날 아침 총알을 조사했을 때 특수한 줄 자국을 보았는데, 이 권총 내부의 줄이 그 총알의 줄 자국과 일치하는군요. 이것도 확실한 말씀은 못 됩니다. 헬릭스미터로 이 총신을 조사해 봤으면 좋겠습니다."(1) "그러나 지금 주임님 생각에는 이 권총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 " "좋아요. 가지고 가서 완전히 조사가 끝나면 그 결과를 즉시 알려주십시오." "그 권총이 틀림없습니다." 헤지던 주임이 가자 히스 경사가 이렇게 말했다. "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압니다만, 확신이 없는 한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습니다......대체 이건 누구의 권총입니까, 검사님?" "이제 밝히겠소만." 매컴은 아직도 진상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싸우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완전히 막혀버릴 때까지 소령이 범인이라는 말을 자기 자신의 귀에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털어놓는 것은 스티트 씨의 보고를 듣고 나서 하겠소, '벤슨 앤드 벤슨 주식중개소'의 장부를 조사해 달라고 했는데, 이제 올 때가 되었소." 스티트를 기다리는 동안 매컴은 다른 일을 처리하려고 했으나 마음만 앞설 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15분쯤 지나자 스티트가 들어왔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지방검사와 히스 경사에게 인사했는데, 밴스를 보자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좋은 충고를 해주셔서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안목이 높으십니다. 좀더 오래 벤슨 소령을 잡아두셨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사무실에 있는 동안 벤슨 소령은 줄곧 내 옆에 붙어서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는걸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한 겁니다." 하고 밴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매컴 쪽을 돌아다보았다. "여보게, 나는 어제 점심식사를 하면서 스티트 씨가 조사하고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소령을 사무실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궁리했다네. 리코크 대위의 자백이 있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구실로 소령을 사무실에서 불러낸 거지. 사실 소령을 이리로 불러올 필요는 없었어. 다만 스티트 씨가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네." "뭣 좀 찾아냈소?" 하고 매컴이 회계사에게 물었다. "아주 많습니다." 그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회계사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여기 간단한 보고서가 있습니다......밴스 씨의 충고대로 주식대장과 회계 보조기입장을 조사하고 대체출납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원장부는 손대지 않고 주로 그 회사 간부들의 활동상황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벤슨 소령이 상습적으로 자기 명의로 고쳐쓴 증권을 담보로넣고서 매매 차액의 이익금을 벌어들이는 데 보증으로 써왔으며, 비상장주(非上場株)의 투기에도 상당히 깊이 관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기서 그는 큰 손해를 보았더군요......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앨빈은?" "그도 매한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지요. 2~3주일 전에 컬럼버스 모터스 주식에 공동투자한 것이 맞아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는 그 돈을 자기 금고에 챙겨넣었습니다 -- 비서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만일 벤슨 소령이 그 금고의 열쇠를 차지하게 된다면 -- " 하고 밴스가 끼어들었다. "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행운이 되는 셈이로군." "행운이라니요?" 하고 스티트 씨가 말을 받았다. "단지 주형무소로 끌려갈 걱정만은 없었겠지요." 회계사가 돌아가자 매컴은 돌부처처럼 앉아서 눈은 정면의 벽에 못박혀 있었다. 소령의 유죄를 본능적으로 부인하고 싶어서 붙잡은 지푸라기가 하나 더 손에서 사라진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들고 듣고만 있는 매컴을 보고서, 나는 그의 눈에 완전히 체념해 버리는 빛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매컴은 기진맥진한 사람처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헤지던 주임의 전화일세." 하고 말했다. "그 권총이 틀림없는 모양이야."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히스 쪽을 보았다. "히스 경사, 그 권총은 벤슨 소령의 것이오." 경사는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며 놀란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차츰 얼굴은 평소대로 무신경한 표정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별로 놀랄 것도 없군요." 하고 경사가 말했다. 매컴은 벨을 눌러서 스워커를 불렀다. "벤슨 소령을 전화로 불러 범인을 체포하려고 하니 얼른 와달라고 말해 주게나." 매컴이 스워커를 시켜서 전화를 걸게 한 그 심정을 우리는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다음 매컴은 히스에게 소령의 용의점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것을 끝내고 그는 일어나서 사무용 책상 앞에 놓인 테이블을 중심으로 의자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벤슨 소령이 오면, 히스 경사 -- " 하고 말했다. "나는 그를 여기에 앉힐 작정이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기와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자리를 가리켰다. "당신은 그 오른쪽에 앉으시오. 펠프스를 데려다놓는 게 좋을 게요 -- 만일 그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좋고 -- 그를 왼쪽에 앉히시오. 하지만 내가 신호할 때까지는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되오. 신호를 하면 그때 체포하시오." 히스가 펠프스를 데리고 오자 그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그때 밴스가 말했다. "히스 경사, 조심하시오. 체포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순간 소령은 죽을 힘을 다해 덤벼들 거요." 히스는 마치 그런 정도야 하고 경멸하듯 미소지었다. "밴스 씨, 사람을 체포하는 것이 처음인 줄 아십니까?--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사실 소령은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 지나치게 신경질적이니까요." "마음대로들 하시오." 하고 밴스는 그에게 일임했다. "하지만 일단 내가 경고는 해두겠소. 소령은 냉정하고 경험도 많은 사람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요. 그러나 마침내 끝으로 몰려서 이젠 완전히 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질 거요.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에서 평생을 두고 누르고 또 누르고 있었던 것을 육체적으로 폭발시킬 겁니다. 정열도 감동도 감격도 언제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언젠가는 그 돌파구를 찾게 마련이오. 어떤 사람은 폭발시켜 주변에 피해를 입히고 -- 어떤 사람은 자살을 하게 되지요 -- 그러나 그 원리는 마찬가지요. 심리반응이 문제지. 그런데 소령은 자살형이 아니오 -- 그래서 나는 폭발형으로 보는 거요." 히스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심리학에 대해서는 무식하지만 -- " 하고 경사가 말했다. "그러나 인간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밴스는 나오는 하품을 깨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나는 밴스가 앉아 있던 의자를 조금 뒤로 물려 테이블과의 거리를 다른 사람들보다는 넓게 잡는 것을 보았다. "검사님." 하고 펠프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으로 검사님 고생도 끝나는군요 -- 저는 리코크 대위가 영락없이 범인이라고 생각했었지요......벤슨 소령을 의심하기 시작한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이 사건의 모든 공은 히스 경사와 살인수사과로 돌리겠네." 하고 매컴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안됐네만, 펠프스, 지방검사국과 이 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은 모두 빠지기로 했다네." "하는 수 없군요. 세상이란 다 그런 거 아닙니까?" 하고 펠프스는 알겠다는 태도로 말했다. 우리는 긴장된 침묵 속에서 소령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컴은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세 번 스티트 씨가 놓고간 보고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번 냉수기 옆으로 물을 마시러 갔다. 밴스는 앞에 놓여 있는 법률책을 아무데나 펼치고는 서부의 어느 판사가 내린 뇌물사건의 판결문을 재미있게 미소지으며 읽고 있었다. 히스와 펠프스는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하여 거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벤슨 소령이 들어왔을 때 매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맞이했는데, 여느 때 같으면 의당 하게 될 그와의 악수를 피하기 위해 몹시 바쁜 듯 서랍 속의 서류를 휘젓고 있었다. 그런데 히스는 명랑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친근하게 그를 맞이했다. 소령에게 의자를 끌어내어 앉으라고 권하기도 하고, 날씨가 어떻다는 둥,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밴스는 법률책을 덮고 발을 끌어당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음새를 바로했다. 벤슨 소령은 허물없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는 매컴을 흘끗 보았다.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모르지만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소령, 실은 두세 가지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 별 지장이 없다면 말일세." 매컴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어딘지 늠름한 데가 있었다. "뭐든지 물어보게나." 소령은 선선이 대답했다. "자네는 육군용 권총을 가지고 있나?" "가지고 있네 -- 콜트 자동권총을 한 자루 -- " 소령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언제 손질하고 총알을 채워놓았나?" 소령의 얼굴에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 " 하고 소령은 말했다. "내부 청소도 몇 번인가 했네. 하지만 해외에서 돌아온 뒤로 총알은 한 번도 갈아넣은 적이 없는데." "최근 혹 누구에게 빌려준 적은 없었나?" "내 기억으로 그런 일은 없네." 매컴은 스티트 씨의 보고서를 집어들고 잠깐 들여다보았다. "손님들에게서 선불거래증권을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에 자네는 어떻게 그에 응할 셈이었나?" 소령의 윗입술이 비웃음으로 치켜올라가며 하얀 이를 보였다. "그랬군, 그랬었군 -- 우정이라는 탈 뒤에 숨어서 -- 다른 사람을 보내 장부나 조사시키다니!" 나는 소령의 목덜미에 붉은 반점이 나타나서 귓불까지 번져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런 목적으로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네." 소령의 비난에 매컴은 발끈했다. "오늘 아침에는 자네 아파트도 구경했다네." "그렇다면 자네는 가택침입까지 했단 말인가?" 소령의 얼굴은 이제 새빨갛게 되었다. 이마에는 파란 힘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버닝 부인의 보석도 찾아냈고......어째서 그것이 자네 아파트에 있었나, 소령?" "어째서 거기에 있었든 자네가 알 바 아닐세." 하고 소령은 말했다. 그 목소리는 차디찼고 여전히 침착한 태도였다. "그러면 어째서 호프먼 양에게 그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시켰나?" "그것도 자네가 알 바 아닐세." "자네 동생을 죽인 총알이 자네 권총에서 발사되었다는 것도 내가 알 바 아닌가?" 하고 매컴이 조용하게 물었다. 소령은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매컴을 한참 노려보았다. "자네가 하고 있는 행동은 분명히 배신행위라는 걸세 -- 체포하기 위해서 사람을 불러다놓고는, 이쪽에서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기화로 죄를 뒤집어씌우는 질문을 하다니, 정말 말할 수 없이 비열한 사람이로군." 밴스가 나서며, "바보 같으니라고!" 그 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채찍처럼 따끔한 데가 있었다. "친구이기 때문에 무죄이기를 바라고 끝까지 기대를 걸면서 묻고 있는 것을 보면 모르겠소?" 소령은 흥분한 얼굴로 갑자기 밴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야!-- 이 바보 멍텅구리 같은 녀석아!" "당신 말이 맞아." 하고 밴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매컴 -- " 하고 소령은 떨리는 손으로 매컴을 가리켰다. "두고 보라고, 진땀나게 해줄 테니까......" 온갖 잡소리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 소령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콧구멍은 벌름거렸고 눈알은 번들거렸다. 그 노여움은 인간의 한계를 이미 벗어나 있었다. 중풍이라도 앓는 사람 같았다 -- 얼굴이 일그러져서 징그럽고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매컴은 그 동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눈은 감은 채 꼼짝않고 참고 있었다. 마침내 지나친 분노로 소령의 말투가 횡설수설해지자 매컴은 눈을 들어 히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 경사가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신호였다. 그러나 경사가 손을 쓰기도 전에 소령이 먼저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났다. 일어서자마자 그 기세를 몰아 재빨리 몸을 빼더니, 히스 경사의 얼굴에 번개 같은 일격을 가했다. 경사는 의자에 앉은 채 눈을 희번덕거리며 바닥으로 나가뻗어 버렸다. 펠프스가 달려나가 붙잡았다. 그러나 소령의 무릎이 위로 올라가더니 그의 아랫배를 보기좋게 한 방 먹였다. 펠프스는 바닥에 고꾸라져서 신음소리만 냈다. 그런 다음 소령은 매컴과 마주 섰다. 그 눈은 미친 사람처럼 번들거리고 입술은 한껏 뒤로 젖혀져 있었다. 거친 숨결을 따라 코도 벌름거렸다. 어깨를 곱추처럼 둥굴게 하고 두 팔을 늘어뜨린 자세로 주먹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 태도에는 억누르기 어려운 무서운 악의가 가득차 있었다. "다음엔 너!" 목구멍에서 쥐어짜낸 독기어린 목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미친 개처럼 앞으로 나섰다. 이런 난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조용히 앉아서 눈을 반이나 감고 한가하게 담배만 피우고 있던 밴스가 이때 갑자기 테이블을 돌아 앞으로 나섰다. 그는 두 팔을 앞으로 내밀더니 한 손으로 소령의 손목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팔꿈치를 잡았다. 그리고 날쌔게 뒤꿈치를 빙글 돌려 뒤로 물러섰다. 소령의 팔이 어깻죽지 뒤까지 비틀어올려졌다. 괴로운 외마디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밴스에게 붙잡힌 채 갑자기 축 늘어져 버렸다. 그때 히스가 정신이 들었다. 비틀거리며 얼른 일어나서 달려왔다. '철컥' 수갑이 채워졌다. 소령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아프다는 듯이 어깨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괜찮아질 거요." 밴스가 소령에게 말했다. "관절의 인대(靭帶)가 좀 늘어났을 뿐이오. 2~3일 지나면 나아질 거요." 히스가 앞으로 나와서 말없이 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사과인 동시에 감탄의 표시였다. 나는 그래서 히스가 좋다. 경사와 소령이 나가자 펠프스가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안락의자에 앉혀졌다. 매컴이 한 손을 밴스의 팔에 걸었다. "가세." 하고 말했다. "나는 이제 쓰러질 것 같아." (1)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헬릭스미터란 현미경에 대놓고 총신(銃身) 안쪽을 자세하게 조사할 수 있는 기계였다. 제25장 밴스, 그 방법을 설명하다 (6월 20일 목요일 오후 9시) 같은 날 밤 터키탕에서의 목욕과 저녁식사가 끝난 뒤, 완전히 우울에 빠져 있는 매컴과, 명랑하고 쾌활한 밴스,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스타이비샌트 클럽의 구석진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30분 이상이나 우리는 말없이 담배만 피워댔는데, 밴스가 자기의 생각에 매듭이라도 지으려는 듯이 불쑥 입을 열었다. "히스같이 머리가 굳어서 상상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과 일반사회 사이에 일종의 울타리를 치고 있는 꼴이라니......정말 슬픈 일일세." "지금 세상에 나폴레옹은 없어." 하고 매컴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만일 있다고 해도 형사는 되지 않을 걸세." "그런 직업을 갖고 싶었어도 -- " 하고 밴스가 말했다. "그 체격으로는 퇴짜나 맞았겠지. 내가 보기에는 자네들 경관은 키와 체중에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뽑는 모양이더군. 체격에 있어서 일정한 규격에 맞아야 한다 -- 취급해야 하는 범죄가 마치 폭동이나 갱 사건밖에 없는 것처럼 말일세. 크다는 것 -- 이것은 예술에서나 건축에서나 정식요리에서나 탐정에서나 위대한 미국의 이상인 모양일세. 정말 어이없는 관념이지." "아무튼 히스는 그래봬도 배짱이 보통이 아니야." 하고 매컴이 변명하듯 말했다. "자네에 대한 나쁜 인상도 지금은 깨끗이 잊었을 걸세." 밴스는 웃었다. "석간신문에서 그만큼 푸짐한 칭찬을 받게 되면 누구든지 기분이 좋아지지. 소령에게 얻어맞은 것마저도 아마 풀어졌을걸 -- 정말 기묘한 일격이었다네. 회전력을 이용한 것이지. 히스의 몸은 정말 튼튼한 모양일세......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빨리 일어날 수 없었을 거야......하지만 펠프스가 안됐어. 아마 평생 동안 무릎이 불편할 거야." "소령의 반응에 대한 자네의 추측은 옳았네." 하고 매컴이 말했다. "결국 자네의 심리학적 잔소리에도 쓸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굳이 인색할 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네의 그 심리학적 추리 덕분에 수사가 궤도에 오른 셈이니 말이야."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매컴은 밴스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밴스, 자네는 소령이 범인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처음부터 확신을 갖게 되었나?" 밴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지금부터 이 범죄의 특질 -- 아주 뚜렷한 특징을 생각해 보기로 하세. 총이 발사되기 직전 벤슨과 범인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을 걸세 -- 한 사람은 앉고 또 한 사람은 선 채로. 그러다가 벤슨은 책을 읽는 척했다네. 자기가 할말은 다 해버렸으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 다 끝났다는 뜻이겠지. 범인은 더 이상 말해 보아야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나이답게 대처할 결심을 하고서 총을 꺼내 앨빈 벤슨의 관자놀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겠지. 그런 다음 불을 끄고 나간 걸세......이것이 현장이 보여준 사실이며, 또한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된 것일세." 밴스는 두세 모금 담배를 피웠다. "그럼, 이 사실을 분석해 보세나......내가 처음부터 지적했듯이 범인은 몸을 겨누지 않았어. 명중률은 훨씬 높지만 완전히 죽게 할 가능성이 적거든. 그래서 범인은 맞추기 어렵고 실패할 위험은 있지만 -- 동시에 한층 확실하고 효과적인 -- 방법을 택한 것일세. 그 수법은 말하자면 대담하고 직접적이고 거침이 없었지. 강철 같은 신경과 고도로 발달한 도박 본능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그런 직접적이고도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거야. 따라서 신경질적인 사람, 흥분하기 쉬운 사람, 충동적인 사람, 또는 겁이 많은 사람은 모두 용의자에서 제외되었네. 범죄의 솜씨가 뛰어나고 사무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과 범인의 유죄를 인정할 만한 물적증거가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이 범죄가 굉장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에 의해 냉정하고 치밀하게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이 뚜렷했어. 그 범죄에는 교묘함이나 상상력 같은 것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 모든 특징이 공격적이고 결단적인 정신 -- 정적(靜的)이고 의지가 강하고, 일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명확하게 처리하는 데 익숙한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네......매컴, 자네도 겉으로 나타난 징후를 보고 사람의 성격을 판단할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자네 이론의 줄거리쯤은 나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네." 하고 매컴은 자신없는 대답을 했다. "그럼, 됐어." 밴스는 계속했다. "행위의 정확한 심리적 본질이 드러났으니 남은 일은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이런 종류의 계획을 세웠을 경우, 이번 사건과 똑같은 방법으로 해치울 정신과 기질을 가진 관계인물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일세. 우연히도 나는 오래 전부터 소령을 알고 있었기에, 그날 아침 현장 상황을 대충 훑어본 순간 그 사람의 행동이라는 생각이 뚜렷이 떠올랐지. 그 범죄는 모든 점에서 볼 때 소령의 성격과 정신상태의 완전한 심리적 표현이었거든. 그러나 만일 개인적으로 소령을 알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용의자가 아무리 많았어도 범인의 개성을 뚜렷하게 알고 있으므로 그를 골라낼 수 있었을 걸세." "하지만 소령과 같은 타입의 다른 사람이 했다면?" 하고 매컴이 물었다. "사람의 기질은 저마다 모두 다르다네 -- 두 사람이 때로는 비슷하게 보인다 해도 말일세." 하고 밴스는 설명을 계속했다. "이번 경우는 소령과 같은 타입에, 같은 기질을 가진 다른 사람이 했을지도 모른다는 건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령 그렇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개연성의 법칙을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네. 개성과 본능에 있어서 거의 같은 사람이 둘 뉴욕에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두 사람이 모두 벤슨을 살해할 이유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네. 그러나 파이피가 등장하여 그가 도박꾼이고 수렵가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능성은 적었지만 아무튼 그의 기질을 조사해 보기로 했지.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모르기 때문에 오스틀랜더 대령을 통해 정보를 얻어낸 셈인데, 대령의 이야기를 듣고 파이피는 곧 문제 밖의 인물이 되었네." "하지만 그는 담력도 있고 뒷일은 생각지도 않는 노름꾼이며, 분명히 돈에도 쪼들리고 있지 않았나?" 하고 매컴이 이의를 내세웠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무모한 노름꾼과, 소령처럼 대담하고 분별있는 도박꾼은 크게 다르다네 -- 그 둘 사이에는 심리적인 깊은 골이 있지. 사실 그 두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충동이란 정반대의 것이라네. 무모한 노름꾼은 불안과 희망과 욕구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분별있는 도박꾼은 편의주의와 신념과 판단에 따라서 움직이거든. 한쪽은 감정적이고 다른 한쪽은 이성적이지. 소령은 파이피와 달리 선천적인 도박꾼으로서 끝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네. 이런 종류의 자신감은 무모와는 다르다네. 이 둘이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말일세. 소령은 자기는 절대로 틀림없고 안전하다는 본능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 프로이트파 심리학자들이 '열등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반대되는 것일세 -- 자아광(自我狂)의 한 가지로서, 과대망상증의 변종일세. 소령에게는 그것이 있었지만 파이피에게는 그것이 없었어. 그리고 그 범죄엔 범인이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에 파이피가 결백하다는 걸 알았던 것일세." "어렴풋이나마 나도 알 것 같군." 하고 매컴이 말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징후가 또 있었다네. 심리적인 것 이외에도-- " 하고 밴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시체의 복장이 평상복차림에 가발과 틀니가 2층에 그대로 있었던 점, 범인이 그 집 구조를 잘 알고 있었던 점, 벤슨 자신이 범인을 맞아들였다는 점, 그 시각에 벤슨이 혼자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 -- 이런 것들이 모두 소령이 범인이라는 걸 말해 주는 점들일세. 그리고 또 있네. 범인의 키가 소령의 키와 일치한다는 점이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네. 내 추정이 소령의 키와 맞지 않았더라면 총알에 편류(偏流)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뿐이지. 세계 제일가는 헤지던 주임의 의견은 어떻든간에." "그것이 여자의 범행이 아니라고 그토록 자신 있게 말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나?" "우선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건 결코 여자의 범죄가 아니었다는 점일세 -- 즉, 여자라면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는다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여자라도 여자인 이상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근본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면 감정적이 되거든. 여자가 그런 범죄를 냉정하게 계획하고, 그처럼 사무적인 능률로써 실행한다 -- 150~180 cm의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방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한 방에 해치운다 -- 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니까. 그리고 또 여자는 앉아 있는 상대를 앞에 두고 자기는 서서 사물을 논하지는 않는다네. 아무래도 여자들은 앉아 있는 걸 더 안전하게 느끼는 모양이거든. 여자는 앉아야 말이 잘 나오고, 남자는 서는 편이 말이 잘 나오지. 그리고 벤슨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이 여자였다면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게 권총을 꺼내 겨냥하기는 어려울 걸세.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자연스러운 동작이지만, 여자는 옷에 대개 주머니가 없으므로 핸드백 말고는 권총을 숨길 곳이 없지.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여자가 눈앞에서 핸드백을 열었다면 남자는 틀림없이 경계했을 걸세 -- 여자의 기분이란 믿을 것이 못 되어 화가 나게 되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고 남자는 의심하게 되지...... 그러나 -- 이런 것들은 모두 젖혀두고라도 -- 범인이 여자라는 가정을 할 수 없게 한 것은 벤슨의 벗겨진 머리와 침실용 슬리퍼였다네." "자네는 아까 -- " 하고 매컴이 말을 끊었다. "범인은 그날 밤 필요하다면 과감한 수단을 쓸 각오로 그 집으로 갔다고 말했어. 그런데 이제 와선 그것이 계획적인 살인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네. 그 두 가지 표현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네. 살인은 계획적이었어--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러나 소령은 목숨을 건질 마지막 기회를 희생자에게 줄 작정이었다네. 나는 이렇게 보네. 소령은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서 형무소가 눈앞에 어른거릴 상태가 되었는데도, 동생은 자기를 구해 줄 만한 돈을 금고 안에 넣어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그래서 범행을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할 결심을 하고 그날 밤 동생 집으로 갔겠지. 처음에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동생에게 털어놓고 돈을 꾸어달라고 부탁했을 거야. 그러나 앨빈은 아마 모르긴 해도 '지옥에나 가라'고 했겠지. 소령은 되도록이면 죽이지 않고 목적을 달성해 보려고 조금쯤은 애원도 했을 테지. 그러나 독서가인 앨빈은 들은 척도 않고 책을 읽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더 이상 애원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거지." 매컴은 한동안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네 말을 모두 인정하겠네. " 하고는 조금 뒤에 다시 말했다. "그러나 내가 아직 이해 안되는 점은, 오늘 아침에도 자네가 말했듯이 소령은 일부러 리코크 대위에게 혐의가 가도록 살인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하는 것일세." "형체와 구성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조각가는 조상(彫像)의 필수부분에 어딘가 결함이 있으면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가 있다네." 하고 밴스가 설명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심리를 잘 아는 심리학자는 어떤 인간의 행위 속에서 빠져버린 요소가 있으면 그것을 지적할 수가 있지.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메로스의 아프로디테 -- 즉, 미로의 비너스를 말하는 것인데 -- 의 없어진 팔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이러쿵저러쿵 많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일세. 미적 구성의 법칙을 아는 유능한 예술가라면 그 팔을 본래대로 정확히 복원할 수가 있지. 그런 복원은 단순히 맥락(脈絡)의 문제에 지나지 않아 -- 빠져버린 요소를 이미 알고 있는 요소와 연결해서 조화시키면 되니까." 밴스는 자기의 말을 고상하게 강조할 때면 으레 하는 몸짓을 했다. "다음에는 혐의를 파헤치는 문제인데, 이것은 계획적인 범죄의 경우에는 언제나 중요한 요소가 되지. 그런데 이번 범죄의 전체적 구상은 실증적이고 결정적이고 구체적이니까, 그것을 구성하는 각 부분 또한 실증적이고 결정적이고 구체적이어야만 되네. 따라서 소령으로서는 단지 자기가 의심받지 않도록 조건을 배치해 놓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생각이 너무 소극적이고, 이 범죄의 다른 심리적 여러 조건들과도 일치하지 않네. 이 범죄를 생각해 낸 타입의 실제적 정신의 소유자는 필연적으로 특정한 실체적인 의혹의 대상을 마련해 놓았을 걸세. 그 결과 리코크 대위에게 불리한 물적증거가 자꾸 드러나기 시작했고, 소령이 아주 적극적으로 대위를 옹호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대위가 미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세인트 클레어 양이 희생자로 선택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네. 그러나 그 여자의 장갑과 핸드백이 앨빈 벤슨의 집에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 소령이 파이피를 증인으로 끌어들여서 대위의 협박사실을 우리에게 일러준 사실이 생각나자 나는 그녀가 용의자에 섞이게 된 것은 처음부터 계산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잠시뒤 매컴이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켰다. "밴스 -- "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 일은 이제 끝났어. 그리고 내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 그전에 나는 좀 자고 싶네." 일주일도 채 못되어 앤터니 벤슨 소령은 동생 살해범으로 기소되었다. 독자 여러분도 기억하고 있듯이 루돌프 한새커 판사 주재로 열린 그 재판은 전국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AP 통신사)는 가맹된 각 신문에 매일 많은 기삿거리를 보냈고, 그래서 전국의 모든 신문들은 몇 주일에 걸쳐서 이 재판과정을 크게 보도하여 제1면을 장식했다. 지방검사국이 격렬한 논쟁 끝에 이 사건을 승리로 이끈 경위, 증거가 간접적이라서 배심원들이 제2급 살인으로 판결을 내린 경위, 항소심에서 앤터니 벤슨이 20년 이상의 종신형을 선고받게 된 사정 등 -- 이런 모든 사실은 공식 또는 공표된 기록에 의해 보존되어 있다. 매컴은 검사로서는 법정에 서지 않았다. 피고의 오랜 친구였으므로 그 처지가 괴롭고 난처하여 사건을 수석검사보인 설리번에게 모두 맡겼는데, 그에 대해선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벤슨 소령은 형사재판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변호사를 대동했다. 브러슈필드와 바우어도 피고의 변호인단 속에 끼어 있었다 -- 브러슈필드는 영국에서 말하는 소위 사무변호사였고, 바우어는 변론자로서 활약했다. 그들은 가능한 온갖 법률적 흥정을 해가며 싸웠으나 산더미처럼 쌓인 피고의 불리한 증거 앞에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매컴은 소령의 유죄를 확신하게 된 다음 벤슨 형제의 사업실태를 면밀히 검토해 보고, 스티트 씨가 처음 보고해 온 이상으로 사태가 악화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의 증권은 상습적으로 개인의 투기를 위해 유용되고 있었고, 앨빈 벤슨은 약삭빠르게 굴면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데 성공했으나, 소령은 투자에 실패해 거의 빈털털이가 되어 있었다. 소령으로서는 유용한 증권을 되찾고 형사상 처벌을 면해야만 했는데, 그 유일한 희망은 앨빈 벤슨이 당장 죽어주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을 매컴은 입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령이 살인을 한 바로 그날 동생의 금고에 손대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굳은 반제(返濟) 약속을 했다는 사실도 함께 법정에 내놓았다. 더구나 그 반제 약속에는 동생의 재산 일부를 끌어내어 충당하겠다는 뜻도 언급되어 있었다. 또 이미 담보로 들어가 있는 증권을 담보로 잡히고 48시간 기한의 어음을 발행한 사실도 드러났다 --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앨빈이 살아 있었다면 곤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비서 호프먼 양은 검찰측에게는 유력하고 더구나 머리도 좋은 증인이었다. 벤슨 앤드 벤슨 주식중개소의 내부사정에 대한 그녀의 진술은 소령에 대한 검찰측 고발을 확고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플래트 부인은 형제간에 심한 말다툼이 가끔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또 살인이 일어나기 약 2주일 전에 소령이 앨빈을 찾아와서 5만 달러를 꾸려다가 실패하자, "네 목숨과 내 목숨 중 어느쪽인가를 선택해야 될 때, 아찔한 꼴을 당하는 것은 내가 아닐 거다." 하고 겁을 주더라는 진술도 했다. 체이섬 암스의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살인이 일어난 날 밤 2시 30분쯤 아파트로 돌아왔다는 시어도어 몬태규 씨도 택시가 아파트 앞으로 꺾어들어갈 때 어떤 사나이가 길 반대쪽 통용문에 서 있는 것이 헤드라이트에 비쳤었는데, 아무래도 벤슨 소령 같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증언은 소령이 체포된 다음 파이피가 증인으로 출두하여 '헤이그 앤드 헤이그'를 마시러 피에트로 술집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소령이 46번가에서 6번가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파이피는 그때는 단순히 소령이 브로드웨이의 레스토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려니 생각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그런데 파이피 자신은 소령에게 들키지 않았었다. 이 증언은 몬태규 씨의 증언과 앞뒤가 맞아서 소령이 면밀하게 만들어놓은 알리바이를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렸다. 변호인측에서는 두 증인이 모두 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사보 설리번은 소령이 그날 밤 관리인에게 들키지 않고 어떻게 외출했으며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밴스가 설명해 준 그대로 도면을 그려가며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배심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보석은 범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살인현장에서 옮겨질 수 없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밴스와 나는 그 보석을 소령의 아파트에서 발견하게 된 경위에 대해 증언을 했다. 범인의 키에 대한 밴스의 실험도 법정에 제출되었으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려운 과학적인 반대논리가 많이 나와 혼란을 일으켜서 이상하게도 효과가 없었다. 권총에 관한 헤지던 주임의 감정은 변호인측에서 항변하기에 가장 어려운 장애물이 되었다. 재판은 3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매컴의 지시에 따라 설리번은 재수없이 이 사건에 말려든 무고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일은 되도록 법정에 제출하지 않도록 힘썼으나, 부끄러운 사실들이 적지 않게 드러났다. 그러나 오스틀랜더 대령은 자신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두고두고 매컴을 원망했다. 재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 무리엘 세인트 클레어 양은 브로드웨이의 커다란 오페라에 프리마 돈나로 출연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어 2년 가까이나 장기흥행을 계속했다. 그 뒤 그녀는 기사도 정신이 넘치는 리코크 대위와 결혼했는데, 두 사람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파이피는 여전히 부부 사이가 원만하게 계속되고 있었으며 여전히 우아했다. '그리운 앨빈'은 없어도 그는 정기적으로 뉴욕에 나왔다. 나는 가끔 그가 버닝 부인과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쩐지 그 여자가 좋았다. 파이피는 1만 달러를 마련하여 -- 어떻게 마련했는지는 모르지만 -- 그녀의 보석을 되찾아주었다. 덧붙여 말하지만, 보석 주인의 이름은 재판에서 공표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 소령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던 날 밤 밴스와 매컴과 나는 스타이비샌트 클럽에 있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는데, 지난 몇 주일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밴스의 입술에 짖궂은 미소가 천천히 퍼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매컴, 이번 재판은 아주 기괴한 것이었네." 하고 밴스가 불평을 했다. "진짜 증거는 하나도 제출되지 않았으니 말이야. 벤슨 소령은 완전히 가정과 추측과 암시와 추정만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니......'하나님, 죄없이 법률의 사자 우리에 갇혀버린 다니엘을 도와주소서!'일세." 놀랍게도 매컴은 정색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 그렇네." 하고 매컴이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말하는 심리학적 이론으로 유죄판결을 얻어내려고 했더라면 설리번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걸세." "그럴 테지." 하고 밴스는 한숨을 쉬었다. "자네들 법률학자들은 지능적으로 일할 단계에 이르면 전혀 쓸모가 없어지니까." "순이론적으로는 -- " 하고 이윽고 매컴이 말했다. "나도 자네의 주장을 이해하네.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랫동안 물적 사실만 다루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걸 그만두고 심리학이나 예술로 전향할 수가 없다네......그러나 -- " 하고 그는 그저 지나치는 말처럼 덧붙였다. "앞으로 법정증거만으로 해답이 안 나올 경우에 자네의 도움을 청해도 되겠나?" "언제라도 명령만 내리게나. 자네 일인데 달려와야지." 하고 밴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말일세, 자네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는 오히려 법적증거들이 완벽하게 자네의 희생자를 지적하고 있을 경우가 아닐는지 모르겠군." 밴스는 다만 악의없는 익살조로 이렇게 말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하나의 예언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