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성 (1)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한밤중의 총 소리 레이몽드는 귀를 기울였다. 또다시 두 번 그 소리가 들렸다. 하도 희미한 소리여서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이몽드는 침대에서 가만히 일어났다. 고요한 한밤중, 휘영청 밝은 달이 정원의 잔디와 숲을 고요히 비추고 있고, 옛 수도원의 허물어진 폐허가 처량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 위를 산들바람이 감돌아, 나뭇가지의 어린 잎새들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때, 또 갑자기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그 여자의 침실 아래 층 서쪽 끝에 있는 객실에서 난 소리 같았다. 레이몽드는 씩씩하고 마음이 굳센 아가씨였으나, 몸이 오싹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 "레이몽드...., 레이몽드..." 옆 방에서 레이몽드를 부르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레이몽드가 잠옷 바람으로 더듬더듬 그 방으로 가니, 사촌 동생 쉬잔이 와락 품안에 안겨 왔다. "레이몽드 언니..., 언니도 들었어?" "응, 너 자지 않고 있었니?" "개 짖는 소리에 깻나 봐... 깬 지 꽤 됐어.... 지금 몇 시나 되었을 까?" "4시쯤 되었을 거야." "저 소리 들려? 누가 객실을 걷고 있어..." "걱정마. 삼촌이 아래층에 계시니까...." "하지만 걱정이 돼. 아빠는 객실 바로 옆방에서 주무시고 계시잖아?" "다발 씨도 거기 계신걸." "그분은 저 반대쪽 끝에 계시잖아. 그러니 아무 소리도 못 들을거야." 두 아가씨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람을 부를까? 고함을 지를까? 그러나, 그들은 목소리르 내는 것조차도 무서워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자 창가에 있던 쉬잔이 소리를 죽여 중얼거렸다. "저것 봐.... 연못가에 남자 하나가..." 과연 한 사나이가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큼직한 물건 하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가는데, 그것이 뭔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담장에 뚫린 조그만 샛문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아가씨가 창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다리 하나가 2층에 닿도록 세워져 있었다. 한 줄기의 불빛이 발코니를 비추고 있었다. 그러자, 또 한 사나이가 역시 무엇인가를 들고서 그 발코니를 건너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더니, 조금 전의 사나이와 똑같은 길로 달아나 버렸다. 쉬잔은 질겁을 하고 맥이 풀려,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을 불러, 도와달라고!" "누가 오겠니? 삼촌이? ... 또 다른 악당이 있어서 삼촌께 덤벼들면 어떡하라고?" "하인을 불러요. 언니 방의 벨은 하인들 방과 통하지 않아...?" "그래, 그래.... 그게 좋은 생각이구나. 얼른 와 주면 좋으련만!" 레이몽드는 침대 옆의 벨을 찾아서 눌렀다. 두 아가씨는 기다렸다. 사방이 쥐죽은 듯이 고요하여 무서워졌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방 아래층에서 맞붙어 싸우는 소리, 가구 넘어 지는 소리, 고함 소리, 무시무시한 신음소리, 목이 졸려 캑캑거리는 소리 따위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레이몽드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싫어, 싫어, 언니, 가지마! 나 혼자 무서워!" 쉬잔이 말렸으나 레이몽드는 쏜살같이 층층대를 뛰어내려 객실의 큰 문 앞까지 와서는 멈칫 서 버렸다. 쉬잔도 비틀비틀 뒤따라와, 레이몽드 옆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 앞쪽 서너발짝쯤 떨어진 곳에, 한 사나이가 플래시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나이는 두 아가씨 쪽으로 플래시를 들이대어 눈부시게 하면서, 한참 동안 얼굴들을 들여다보더니, 태연스럽게 모자를 집어 쓰고, 종이 조각 하나와 밀짚 두 개를 주워 들고, 양탄자 위의 발자국을 지워 버리고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두 아가씨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레이몽드보다 먼저 큰 객실 옆의 작은 침실로 뛰어들어간 쉬잔은, 너무나도 끔찍스런 광경에 그만 질겁을 해 버렸다. 두 사나이가 방바닥에 죽은 듯이 나란히 쓰러져 있는 것이 달빛 아래 보였던 것이다. "아빠, 아빠! ... 왠일이세요...." 쉬잔은 미친 듯이 외쳤다. 잠시 후, 제브르 백작은 몸을 움직이더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다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다발은? 살아있냐? 단도는, 단도는...?" 이 때 하인들이 촛불을 들고 와서 보니, 백작 옆에 쓰러져 있는 사나이는 백작의 심복 비서인 장 다발이었다. 그의 얼굴은 벌써 새파랗게 죽은 빛이었다. 레이몽드는 객실로 달려가 총 한자루를 집어들고 발코니로 나왔다. 아까의 그 사나이는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레이몽드는, 허물어진 수도원의 옆을 따라 달아나는 사나이를 발견했다. 레이몽드는 총을 겨냥하여 쏘았다. 사나이는 쓰러졌다. "맞았다. 맞았어! 내가 가서 잡겠다!" 하인 하나가 소리쳤다. "안돼, 빅토르. 다시 일어났어... 얼른 샛문으로 뛰어가서 거길 지켜라. 거기밖에는 달아날 구멍이 없으니까." 빅토르는 잽싸게 달려갔다. 악당은 다시 쓰러졌다가, 풀 속을 기어가고 있었다. 레이몽드는 또 한 명의 하인을 불렀다. "알베르, 넌 여기서 지켜 보고 있어." 레이몽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총을 집어들고 나가려 했다. 그러자 알베르가 말했다. "가지 마세요. 아가씨..." "염려 말아. 아직 한 방 남아 있어. 그 놈이 만약에 움직이면..." 레이몽드는 단호히 말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알베르는 레이몽드가 폐허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창가에서 외쳤다. "그놈은 아케이드 뒤로 갔습니다. 이젠 안 보입니다. ...조심하세요. 아가씨!" 레이몽드는 옛 수도원을 따라 돌아갔으므로, 알베르에게는 레이몽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페허 쪽을 줄곧 지켜 보면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도둑놈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아케이드를 향해 똑 바로 달려갔다. 30발짝쯤 떨어진 곳에 빅토르와 레이몽드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됐나?" "못 잡았어." 하고 빅토르는 대답했다. "샛문은?" "난 지금 거기서 오는 길이야. 여기 열쇠가 있지 않아?" "하지만..., 틀림없이..." "이건 독 안의 쥐야.... 10분이면 잡히고 만다. 이 도둑놈은...." 총 소리에 잠을 깬 소작인과 그의 아들이 농장에서 달려왔다. 농장 건물은 꽤 멀었지만, 담장 안에 있었다. 두 부자는 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모두들 빈틈없이 뒤졌다. 숲도 덤불도 샅샅이 뒤졌다. 예배당의 문은 꼭 닫혀 있었고, 유리창은 하나도 깨진 데가 없었다. 수도원을 뺑뺑 돌면서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모두가 헛수고였다. 단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었다. 도둑이 레이몽드의 총을 맞고 쓰러진 바로 그 자리에서, 자동차 운전사가 쓰는 주황색 가죽 모자 하나를 주운 것이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암성 (2)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사라진 범인 아침 6시가 되자, 마을 경찰서에서는 디에프 검찰청에 간단한 범죄 상황을 급히 알린 뒤에, 수사 반장이 현장에 달려왔다. 10시에는 두대의 자동차가 저택을 향해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한 대에는 검사와 판사 및 그의 서기가 타고 있었고, 또 한 대에는 르왕 신문과 파리 신문의 두 젊은 기자가 타고 있었다. 낡은 저택이 보였다. 제브르 백작이 20년 전부터 살아온 집이다. 큰 시계가 있는 본관과, 그 양쪽에 두 채의 건물이 있는데, 여기서는 정원의 담장 너머로, 저 멀리 높은 언덕과 파란 바다가 보인다. 제브르 백작은 이 저택에서, 예쁘지만 허약한 금발의 딸 쉬잔과 조카 딸 레이몽드와 함께 살고 있었다. 레이몽드는 2년전에 한꺼번에 부모를 여의어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백작이 데려온 것이다. 저택에서의 생활은 조용했고, 때때로 이웃 사람들이나 찾아올 뿐이었다. 여름에는, 백작은 두 처녀를 날마다 디에프에 데려가 주었다. 백작은 키가 크고 머리는 희긋희끗했지만, 의젓한 미남이었다. 매우 큰 부자여서, 손수 자기의 재산을 다스리고, 비서인 쟝 다발의 도움을 받아 토지를 보살피고 있었다. 판사는 들어오자마자 수사 반장 크비용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범인의 체포는 시간 문제라는 것이었다. 정원의 출구를 모조리 지키고 있었으므로, 빠져 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행은 2층으로 올라갔다. 객실은 완전히 정돈되어 있는 것이 이내 눈에 띄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없어진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화려한 벽장식 융단이 걸려 있었다. 안쪽 벽 널빤지에는, 신화의 장면을 그린 네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루벤스의 유명한 그림들이었다. 판사인 피욜씨가 말했다. "범죄이 목적이 도둑질이었다 하더라고, 결코 이 객실이 목표는 아니었어요." "누가 압니까?" 하고 검사가 말했는데, 그는 말 수는 적었으나 늘 판사의 의견과는 반대였다. "그렇다면 도둑놈은 맨 먼저 저 벽걸이와 그림을 가져갔을 거요." "그럴 겨를이 없었겠지요" "그 점은 곧 알게 되겠죠." 이 때 제브르 백작이 의사와 함게 들어왔다. 백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두 사법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 뒤에, 침실의 문을 열었다. 이 방은 범행 이후 의사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객실과는 반대로 몹시 어질러져 있었다. 의자며 탁자가 넘어지고 부서져 있었으며, 온갖 것이 방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흩어진 몇 장의 흰 종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의사는 시체를 덮어 놓은 시트를 벗겻다. 장 다발이 빌로오드의 평복에, 징을 박은 반장화를 신은 채 쓰러져 있었다. 셔어츠를 젖혀 보니,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의사가 말했다. "즉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단도로 한 번찔린 거지요." "객실의 가죽모자 옆에 놓아 둔 그 단도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단도는 여기에 떨어져 있었지요. 애당초는 저 객실의 무기들 중에 끼여 있었는데.... 운전사의 모자는 살인자의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피욜 판사는 방안을 자세히 살펴보고, 의사에게도 몇 마디 물어 본 뒤, 제브르 백작에게 자초지종을 말해 달라고 했다. 백작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나를 깨운 건 장 다발입니다. 눈을 떠 보니, 다발이 침대 옆에 촛불을 들고, 저렇게 옷을 다 입은 채 서 있었습니다. 그는 밤 늦게까지 일은 하는 수가 흔히 있었지요. 그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객실에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일어나서 침실의 문을 빠끔히 열었어요. 그 순간, 큰 객실로 통하는 저 쪽의 문이 확 열리더니 한 사나이가 내게 덤벼들어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한 대 쳐서, 나는 그만 까무러쳐 버렸습니다. 판사님, 내가 더 자상하게 이야기 못하는 이유는, 주요한 사실밖에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이런 사실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는?" "그 뒤엔 통 모릅니다. 정신이 들어서보니, 다발이 쓰러져 있더군요." "의심이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원수진 사람도 없고요?" "없는데요" "다발 씨도 원수진 사람이 없나요?" "다발에게 그런 사람이 있느냐고요? 다발처럼 좋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20년이 넘게 내 비서 노릇을 해 왔지만, 내 심복이라고 할 수 있고, 주위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호의와 호감밖에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놈들의 가택 침입과 살인에는 무슨 동기가 있었을 게 아닙니까?" "그야 순전히 도둑질이겠지요." "그럼 무슨 도난당한 거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난당한 것도 없고, 없어진 것도 없지만, 적어도 뭔가 가져갔겠지요." "그게 뭔가요?"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 딸과 조카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 애들은 두 사나이가 큼직한 짐을 들고 정원을 지나가는 걸 봤다니까요." 두 사촌 자매가 객실로 불려왔다. 쉬잔은 아직까지도 새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어, 말도 제대로 못 햇다. 레이몽드는 훨씬 더 침착하고 예쁜 얼굴에 그 갈색 눈을 반짝이면서, 간밤의 사건과 자기가 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래, 아가씨 말씀은 틀림없겠지요?" "예, 절대로 틀림없어요. 정원을 지나간 두 사나이는 물건을 들고 갔습니다." "세째 번 사나이는?" "여기서 빈손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플래시로 줄곧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해서 잘은 못 봤지만, 키가 크고 뚱뚱해 보였어요." "아가씨에게도 그렇게 보였나요?" 판사는 쉬잔에게 물었다. "예..., 아니 , 오히려 제가 보기엔 보통 키에 약간 마른 것 같아 보였어요." 피욜 판사는 빙그레 웃었다 똑같은 사실에 관해서도, 목격자에 따라서 의견과 보는 눈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객실에 있었던 사나이는, 큰 키이거나 중키이고, 뚱뚱하거나 빼빼하다는 것이고 정원의 두 사나이는 객실에서 물건을 내갔다고 하는데, 그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다는 말이군요," 이러한 상황에 있는 객실에 수많은 구경군들이 몰려와 있었다. 신문 기자들 외에도, 소작인 부자, 정원사 내외, 이어서 이 저택의 하인들, 디에프에서 자동차를 몰고온 두 운전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 세 번째 사나이가 어떻게 달아났는지, 그것도 알아 둬야겠군요. 아가씨는 이 총으로 쏘았겠죠? 이 창에서....?" "예, 그 사나이가 수도원 왼쪽의, 가시덤불로 덮인 묘석가지 다 갔을 때였어요." "그러나 다시 일어났지요?" "겨우 절반쯤 일어났어요. 그때 곧 빅토르가 내려가서 샛문을 지켰고, 저는 하인 알베를 여기에 남겨서 감시하게 하고, 그의 뒤를 쫓았지요." 그러자 알베르가 말을 햇다. 그런 뒤에 판사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총을 맞은 사나이는 왼쪽으로 달아나지 못했군요. 자네 동료가 샛문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또, 오른쪽으로도 못 달아났어. 달아 났다면 잔디를 지나가는 것을 자네가 봤을 테니까 말야. 그러므로 그 사나이는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비교적 제한된 범위 내에 있는 셈이군요..." 좌중은 모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검사는 빈정거리듯 외쳤다. "수사 범위는 좁아요. 그러니 4시간 전부터 시작한 수색을 계속하기만 하면 됩니다." 피욜 판사는, 벽난로 위에 있던 가죽모자를 집어들고 살펴보더니, 수사 반장을 따로 불러 말했다. "부하 한 사람을 즉시 디에프의 메그레 모자점에 보내서, 이 모자를 어떤 사람에게 팔았는지 알아봐 주게." 검사가 가리킨 수사 범위지역 내에는, 중세에 유명했던 수도원 앙브뤼 메지의 폐허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짓밟힌 풀 속에서는 이내 도망친 범인의 발자취가 눈에 띄었다. 새까맣게 마른 핏자국이 두 군데나 보엿다. 수도원의 끝에 있는 아케이드의 모퉁이에서부터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상자는, 어떻게 레이몽드와 빅토르와 알베르의 눈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판사는, 열쇠를 갖고 있는 정원사에게 예배당의 문을 열게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서, 그 현관의 테두리는 아름답게 조각이 되어 있었다. 예배당 안의 대리석 재단밖에는 아무 장식도 없어 숨을 만한 곳이란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숨으려고 했더라도, 어떻게 들어올 수가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폐허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의 출입문으로 되어 있는 샛문까지 샅샅이 뒤졌다. 샛문 바깥길로 나온 피욜 판사는 몸을 구부렸다. 길바닥에는 자동차의 타이어 자국이 나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레이몽드와 빅토르는, 총을 쏘고 난 뒤에 자동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고 했다. 판사가 넌지시 말했다. "부상자는 제 패거리들과 함게 달아났나봐."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틀림없이 있습니다." 하고, 하인들은 끝끝내 주장했다. 판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침울한 듯이 저택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말 사건은 고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둑이 들어왔는데도 도둑맞은 것은 하나도 없고, 독 안에 들어 있는 범인은 보이지 않으니, 정말 재미없는 사건이었다. 기암성 (3)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이상한 불청객 점심때가 되어, 판사가 제브르 백작의 식사 대접을 받고 다시 객실로 돌아왔을 때, 디에프에 파견되었던 경관이 돌아왔다. 그 가죽모자는 어느 운전사에게 팔았다는 보고였다. "운전사에게?" "예. 운전사가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손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면서, 노란 가죽으로 만든 운전사용 모자가 없느냐고 묻더랍니다. 마침 그 모자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운전사는 치수도 묻지 않고 돈을 치르고 가버렸는데, 매우 급한 모양이더랍니다." "언제야, 그건?" "언제라니요? 오늘 아침이지요?" "그럴 리가 있나? 그건 간밤에 정원에서 발견된 것인데" "오늘 아침이라고 모자점 주인은 말하던데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판사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갑자기 그에게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우리를 태우고 온 운전사를 데려와!" 수사 반장은 얼른 나갔다가 잠시 후에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부엌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는 뺑소니쳐 버렸습니다." "차를 몰고?" "아니요. 우빌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간다며, 마부의 자전거를 빌어 타고 갔답니다. 이게 그 녀석의 모자와 외투입니다." "하지만 맨머리로 떠나지야 않았겠지?" "호주머니에서 노란 가죽 모자를 꺼내 쓰고 갔답니다." "노란 가죽 모자라고? 그럴 리가 있나? 그건 저기에 있는데." 검사는 좀 비웃는 듯이 말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군! 가죽 모자가 두 개라니... 하나는 진짜이고 유일한 증거인데, 가짜 운전사가 쓰고 가버렸고, 또 하나는 가짜인데, 그걸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거요. 아! 그 녀석에게 정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군." "빨리 그 놈을 잡아와요, 수사 반장!" 판사가 외치자. "벌써 멀리 내뻇을걸요." 하고 검사가 말했다. "아무리 멀리 갔더라고 꼭 잡아야 하오." "그야 그러고 싶지만 판사님. 우리는 무엇보다도 여기에 힘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쪽지를 읽어 보십시오. 운전사의 외투 호주 머니에서 발견한 겁니다." 검사가 피욜 판사에게 건네준 쪽지에는 다음고 같이 적혀 있었다. <두목이 죽는다면 아가씨를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 위협의 쪽지는 좌중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백작님, 그리고 아가씨들, 아무 걱정 마십이오. 여러분의 안전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하고, 판사는 두 기자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는 여러분이 신중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번 수사에 참가하시게 된 건 내 호의 때문이니까요. 만약에 내 신임을 저버린다면..." 판사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이 말을 뚝 끊고, 두 청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 청년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무슨 신문의 기자지요?" "<르왕> 신문입니다." "신분 증명서는 갖고 있겠지요?" "예, 여기 있습니다." 증명서는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었다. 피욜 판사는 다른 한 기자에게 물었다. "그리고 당신은? 어느 신문사요?" "예, 저는 여러 신문에 쓰고 있씁니다만..." "신분 증명서는?" "없습니다." "아니, 그건 어찌 된 일이요?" "저는 때때로 이 신문 저 신문에 기사를 써 보낼 뿐입니다. 그것이 떄로는 발표되기도 하고, 때로는 퇴짜를 맞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이름은? 명함은?" "제 이름을 알아서 무엇 하십니까? 명함도 없습니다." "직업을 증명하는 무슨 서류도 없나요?" "직업도 없습니다." "아니, 그럼 자네는..." 하고, 판사는 좀 무뚝뚝하게 말했다. "속임수를 써서 끼여 들어와 가지고 비밀을 캐내려는게 아닌가?" "판사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왔을 때, 아무 말씀도 물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아무 말씀도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수사가 비밀인 것 같지도 않았고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입회하고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범인의 한 사람까지도 말씀입니다." 그는 매우 공손한 말투로 조용조용 말하고 있었다. 매우 훤칠하고 날씬한 썩 젊은 청년으로서, 아주 짧은 바지에, 꼭 쬐는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계집애 같은 장밋빛 얼굴에, 이마는 넓고 머리는 빡빡 깍았으며, 금빛 수염이 더부룩이 나 있었다. 그의 눈은 유난히 총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해 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으나, 빈정거리는 빛은 조금도 없었다. 피욜 판사는 의심나는 눈으로 그를 살펴보고 있었다. 젊은이는 재미 있다는 듯이 외쳤다. "판사님은 저를 공범의 한 사람으로 의심하시는 모양이지만, 만일 그렇다면, 왜 아까 그 패거리들 처럼, 적당한 때에 줄행랑을 치지 않았겠습니까?" "농담은 그만두고, 이름은?" "이지도르 보트를레입니다." "직업은?" "장송 드 사이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입니다." "아니! 이건 사람을 놀리는 건가!" "그렇게 놀라시다니 참 이상하군요, 판사님. 제가 장송 고등학교 학생이면 뭐가 안 됩니까? 아, 이 수염 때문인가 보군요. 안심하십시오. 이거 가짜 수염이니까요." 이지도르 보트를레는 턱에 붙였던 수염을 뜯어 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한결 더 젊고 더 발그레해 보여 정말 고교생다왔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어 어린애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이젠 믿어 주시겠지요? 그래도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럼 이걸 읽어 보십시오. 제 아버님의 편지에 주소와 성명이 있으니까요. 장송 드 사이 고등학교 기숙생 이지도르 보트를레." 믿든 안 믿든 간에, 피욜 씨는 이런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듯이,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여긴 뭐 하러 왔나?" "그저 공부하러 왔지요."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게 아닌가?" "판사님은 잊으셨나요? 오늘은 4월 23일 . 부활절 휴가중이라는걸요." "그래서?" "그래서 저는 이 방학을 제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는 겁니다." "자네 아버지는....?" "아버지게서는 멀리 사브와 지방에 살고 계신데, 저더러 이번에 영불 해협의 바닷가를 돌고 오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렇게 가자 수염을 달고?" "아! 이건 아닙니다. 이건 제 생각으로 한 거여요. 학교에서 우리는 곧잘 모험 얘기도 하고, 변장한 인물이 나오는 탐정 소설도 읽거든요. 우리는 무시무시하고 복잡한 사건을 많이 상상하지요. 그래서 장난삼아 가짜 수염을 달아봤어요. 어른으로 보이는 것이 이로왔고, 파리의 신문기자로도 통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1주일을 시시 하게 보낸 뒤, 어제 저녁에 르왕의 신문 기자와 알게 됐는데, 오늘 아침에 이번 사건을 안 그가 저를 이렇게 데려와 준것입니다." 이렇게 순진하고도 솔직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판사도 경계심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재미있다는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래, 여기에 온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나?" "정말 기쁩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사건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어둠 속에서 여러가지 사실이 불거져 나와, 차츰차츰 진상이 밝혀지는 걸 보는 것처럼 감격적인 일은 없거든요." "아, 진상을 밝히겠다고! 그래, 무슨 해결의 실마리라도 잡았나, 젊은이?" "아니요!" 하고, 보트를레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만..., 짐작이 갈 만한 점도 있고, 또 어떤 점은 아주 명백하기 때문에 결론만 내리면 될 것도 있습니다만..." "허허! 이건 썩 재미있게 돼 가는걸.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건 판사님께서 생각하실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건 생각하는 일입니다. 사실 그 자체 속에 설명이 들어 있지 않은 경우는 드물거든요. 안 그렇습니까?" "좋았어! 그럼 묻겠는데, 객실에서 훔쳐 간 물건이 뭔지 알겠나?" "예, 알고 있습니다." "희한한데! 주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니! 그럼 또, 살인범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나?" "역시 알고 있습니다." 기암성 (4)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범인은 이곳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의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데에 감탄하여, 모두들 그의 말에 바짝 귀를 기울엿다. "그렇다면 살인범이 어디 있는지도 알겠구만?" "예!" 피욜 판사는 두 손을 비볐다. "거 참 잘 됐군! 덕분에 내가 공을 세울 수 있겠는데. 그럼 지금 당장 그걸 알려 주겠나?" "예, 당장이라도...,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한 두 시간 후 수사가 일단 끝난 뒤에 말씀드리지요." 이때, 처음부터 보트를레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레이몽드가 피요 판사에게 나와서 말했다. "판사님, 저분에게, 어제 무슨 이유로 샛문 바깥 길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는지 물어 봐 주세요." 그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보트를레도 당황해 보엿다. "제가요, 아가씨? 저를 어제 보셨다고요?" 레이몽드는 망설이듯 계속 보트를레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다 시 입을 열었다. "저는 어제 오후 4시쯤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저분과 키도 같고 복장이랑 수염도 같은 청년 하나를 만났어요. 그런데 어쩐지 사람의 눈을 피하고 있는 듯 하더군요. 틀림없이 저 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꼭 그런 것만 같아요...." "아가씨께서 잘 못 알고 계신 겁니다. 그걸 증명하는 건 문제 없습니다. 저는 어제 그 시간에 뵐에 있었으니까요." "그 증거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어쨌든 사정이 달라졌는걸. 수사반장, 부하 하나를 저 사람에게 붙여 놓게나. 필요한 정보를 얻을 때까지 말일세." 보트를레는 무척 난처한 빛을 보였다. "판사님, 되도록 빨리. 그리고 비밀리에, 정보를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왜?" "제 아버님은 늙으셨습니다. 그러니 저 때문에 아버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보트를레는 울먹울먹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판사는 약속했다.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까지는 처리하겠네." 판사는, 이번에는 구경꾼들은 다 쫓아 버리고, 수도원의 폐허로 돌아가서, 몸소 수색대를 지휘하여, 이잡듯이 뒤지게 했다. 그러나, 저녁 때가 다 되어서도 아무런 실마리도 얻지 못했다. 그러자, 판사는 이 저택에 몰려와 있는 수많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점으로 미루어보아, 부상자는 우리의 손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으니, 빠져 나갔음에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그를 잡게 되는 곳은 저택 바깥일 것입니다." 그래도, 판사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수사 반장과 의논하여 정원에다 파수꾼을 세워 놓게 하고는, 검사와 함께 디에프로 돌아갔다. 밤이 되었다 다발의 시체는 침실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아래층에서는 보트를레가 숲지기의 감시아래, 기도실의 벤치 위에서 자고 있었다. 밖에서는, 경관들이며 소작인, 그리고 두어 명의 농부들이 폐허의 여기저기를 지키고 있었다. 11시까지 일없이 조용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한 발의 총 소리가 저택의 저쪽에서 울려 왔다. "출동!" 하고, 수사 반장이 고함을 질렀다. "두 명만 여기 남고, 다들 뛰엇!" 다들 뛰어갔다. 어둠 속에서, 사람 그림자 하나가 달아났다. 그러더니 이내 두 번째의 총소리가 더 멀리, 농장 끝에서 터졌다. 모두들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니 소작인의 집 오른 쪽 헛간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저런 악당들 같으니!" 하고, 크비용 수사 반장은 외쳤다. "불을 지른 건 놈들이다. 다들 쫓아가라.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거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불꽃이 몸채 쪽으로 쏠리므로, 우선 불을 가라앉혀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을 다 끄고 보니 2시였다. 그제야 쫓아가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수사 반장이 말했다. "날이나 새거든 조사해 보자. 틀림없이 무슨 흔적을 남겨 놓았을 거다." 모두 폐허로 돌아갔다. 그러나 거기에 남겨 두었던 두 파수꾼이 보이지 않았다. 샅샅이 찾아본 결과, 샛문 바깥길에서 발견되었다. 두 파수꾼은, 꽁꽁 묶이고 입이 틀어막히고 눈이 가려진 채, 땅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수사 반장이 입을 열었다. "백작님, 이건 완전히 놀림감이 됐습니다그려, 총을 쏘고 불을 지른 건 모두 우리를 그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두 파수꾼을 묶어 놓고 일을 치러 버린 거지요." "일이라니요?" "부상당한 놈을 데려간 거지요, 제기랄!" "그랬을까요?" "예, 틀림없습니다. 더 일찍 알아챘어야 했는데. 저도 참 바보였어요. 모조리 잡아 버렸을 텐데..." 크비용 수사 반장은 화가 치밀어 발을 동동 굴렀다. "대관절 어디로 빠져 나갔을까? 여태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이 불한당은? 그렇게도 온종일 이잡듯이 뒤졌는데. 정말 귀신이 곡할 일인데..." 크비용 반장의 놀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날이 새어, 보트를레 소년을 가두어 두었던 기도실에 가 보니 그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숲지기는 의자 위에 몸을 구부린 채 자고 있었다. 그 옆에는 물과 컵 두 개가 있었는데, 한 컵 밑바닥에는 하얀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검사 결과, 보트를레가 숲지기에게 마취약을 먹인 뒤, 창으로 달아난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창의 높이가 2미터 반이나 되므로, 소년은 숲지기의 등을 발판으로 삼지 않고서는 창에 닿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었다. 기암성 (5)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고교생 이지도르 보트를레 이 날 아침, <그랑 주르날> 신문에는 들라트르 박사의 해괴한 납치 사건이 보도되었다. 그 기사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젯밤 10시에, 유명한 외과의 들라트르 박사가 부인과 딸을 데리고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연극 구경을 하고 있을 때, 한 사나이가 두 부하를 거느리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경찰서장 테자르라는 사람인데, 경찰국장님의 명령을 받고, 선생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실은 경찰에서 무슨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인데, 아무도 몰래 일을 처리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꼭 좀 가셔서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연극이 끝나기 전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박사는 그를 따라갔으나, 연극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들라트르 부인은 걱정이 되어서 테자르 경찰서장을 찾아가 만나 본즉, 놀랍게도 남편을 데리고 간 사내는 가짜임이 밝혀 졌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지만, 이 사건은 사실이었다. 왜냐 하면, <그랑 주르날> 신문은 같은 날의 정오판에 다음과 같이 사건의 경과를 보도 했으니까 말이다. 오늘 아침 9시쯤, 들라트르 박사는 그의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기자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박사는 테자르 경찰서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로부터 매우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그 세 사나이는 무척 예의바른 사람이었으니까요."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까?" "약 4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요?" "욋과 수술을 해야 할 매우 위급한 환자가 하나 있었지요." "수술은 잘 됐습니까?" "예, 하지만 그 뒤가 걱정입니다. 여기서라면 안심할 수 있지만, 그런데서..., 그런 주막집 방에서... 살아난다는 건 기적이겠지요..." "환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맹세를 했을 뿐 아니라, 우리 병원을 위해 1만 프랑이란 돈까지 받았으니까요." 박사와의 인터뷰는 이상과 같았는데, 경찰서장도 이보다 더 상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따라서 사건의 진상을 알기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 알수 없는 사건의 진상도, 전날 앙브뤼메지의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지어 본다면, 현명한 사람에게는 짐작이 갔으리라. 사실 그 부상한 강도의 행방 불명과, 이 유명한 외과의의 납치 사건 사이에는 서로 꼭 들어맞는 점이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게다가, 이 가정의 올바름은 수사에 의해서도 증명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줄행랑을 놓은 가짜 운전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 15킬로 미터 쯤 떨어진 아르크의 숲까지 가서, 자전거를 도랑에 버린 뒤, 생 니콜라 마을에 가서 다음과 같은 전보를 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파리, 제 45국, A.L.N. 위독함, 수술 급함, 국도 14호로 의사 보내라.--- 증거는 확실했다. 통지를 받은 파리의 공범자들은, 밤 10시에, 아르크의 숲을 따라 달리고 있는 국도 14호로 외과의를 보낸 것이다. 그 동안에 강도 일당은 불을 지르고, 그 틈을 타서 두목을 꺼내어 주막 집으로 옮겨 놓고, 오전 2시쯤 의사가 도착하자 수술을 했던 것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파리에서 특파된 형사부장 가니마르가, 폴랑팡 형사와 함께 14호 국도변을 수색한 결과, 간밤에 한 대의 자동차가 지나간 것으로도 뒷받침이 되었다. 또, 앙브뤼메지 저택의 샛문 바깥 길에서 디에프까지 가는 도로 위에서도 2킬로미터까지는 자동차의 바퀴 자국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가니마르 부장은 샛문의 자물쇠가 부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의사가 말한 주막집을 찾아 내는 일뿐이었다. 그것은 빈틈없고 노련한 가니마르 같은 형사에게는, 땅짚고 헤엄치기였다. 가니마르와 수사 반장은 주막이란 주막은 다 뒤져 보았다. 그러나 기대한 것과는 달리, 죽어가는 부상자의 행방은 통 알 수가 없었다. 가니마르는 악착스러웠다. 그는 일요일에 혼자서 수사를 할 셈으로, 토요일 저녁을 저택에서 묵으러 돌아왔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 순찰 돌던 경관이 간밤에 한 사나이가 샛문 바깥 길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공범자 하나가 엿보러 돌아온 것일까? 두목은 아직도 수도원이나 그 부근을 떠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 날 저녁, 가니마르는 폴랑팡 형사만 데리고 샛문 바깥에 숨어서 기다렸다. 그러자 12시가 되기 조금 전에, 한 사나이가 숲에서 나오더니,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3시간 동안이나 폐허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몸을 구부리기도 하고, 낡은 기둥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때로는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그런 뒤에 샛문으로 다가와 다시 나가려고 했다. 가니마르는 그의 덜미를 낚아채고, 폴랑팡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는 순순히 손목을 묶인 채 저택으로 끌려왔다. 그러나, 그는 무슨 말을 물어도 판사가 오기전에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월요일 아침 9시에 피욜 판사가 도착하자, 가니마르는 간밤의 일을 이야기하고서는 그 사나이를 데려오게 했다 그 사나이는 이지도르 보트를레엿다. "아니, 보트를레 군이 아닌가!" 판사는 그에게 손을 내밀면서, 정말 기쁜 듯이 외쳤다. "이건 정말 놀랐는데! 우리의 아마추어 명탐정께서 여기에 오시다니.... 형사부장, 소개하겠소, 장송 고등학교생 보트를레 군이요." 가니마르는 적이 당황해 보였다. 보트를레는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피욜 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판사님, 보아하니 제게 관해 좋은 보고를 받으신 것 같은데요?" "됐어! 첫째, 자네는 레이몽드 양이 봤다는 시간에 실제로 뵐에 있었어. 자네를 닮은 자가 누구인가는 곧 알게되겠지. 다음에 자네는 틀림없는 이지도르 보트를레로, 졸업반이고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라는 것도 알았네. 아버님이 시골에 사시기 때문에, 자네는 한달에 한 번씩 외출하여, 보증인인 베르노 씨를 찾아보고 있는데, 그분도 자네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 "그렇다면..." "그래서... 자네는 절대로 자유로운 몸이란 말일세. 다만 자네의 수사가 어떻게 됐는지, 그건 꼭 좀 말해 줘야겠네." 가니마르는, 이런 대화를 시시하게 여기고 나가 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판사가 외쳣다. "부장, 잠깐만.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하오, 보트를레군의 말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소.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보트를레군은 장송 고등학교 내에서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관찰가라는 평판을 받고 있소. 당신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셜록 홈즈의 호적수라고들 말하고 있습디다." "정말인가요!" 하고, 가니마르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정말이고말고, 그이 동급생 하나가 내게 이렇게 써 보내왔소. '만약에 보트를레가 알고 있다고 하면, 곧이 들어야만 합니다. 그의 말은 진실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 안됩니다.'라고. 그러니 보트를레 군, 제발 그 진실을 정확히 말해 주게나." 보트를레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학생들의 농담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판사님. 실은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러분께서 못 보신 점을 두 세가지쯤 발견했다고 해서, 제가 뭣을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요." "예를 들면?" "예컨대, 도둑의 목적입니다." "그래! 확실히 도둑의 목적을 알고 있단 말인가?" "예. 이건 제가 맨 먼저 연구한 점인데, 그건 추리만하면 되는 일입니다." 기암성 (7)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범인은 아르센 뤼팽 "수사는 거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뿐입니다. 아르센 뤼팽을 찾아 낼 수 있는 곳은!" "아르센 뤼팽이라고!!!" 피욜 씨는 펄쩍 뛰어 일어나면서 외쳤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르센 뤼팽, 저 위대한 모험가, 도둑의 왕, 그가 며칠 전부터 맹렬히 쫓고 있던 적이라니.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아르센 뤼팽을 체포한다면, 판사에게는 당장 승진과 두둑한 보상이 보장될 것이었다. 가니마르는 태연했다. 보트를레는 그에게 말했다. "형사부장님께서도 동감이시겠죠?" "응, 그렇고말고!" "이 사건의 주모자가 뤼팽이라는 걸 결코 의심하지 않으셨겠지요?" "조금도! 뤼팽의 수법은 보통과는 다르거든." "정말, 정말 그럴까?" 피욜 판사는 되뇌었다. "정말 그렇고말고요!" 하고, 소년은 외쳤다. "그들이 무슨 머릿글자를 써서 통신하고 있는지, 이 조그만 사실만 가지고도 알 수 있습니다. A.L.N.이 곧 아르세느(ARSENE)이란 이름의 머리 글자와, 뤼팽(LUPIN)이라는 성의 머리글자와 끝글자입니다." "아! 자네는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군 그래.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로군. 이 늙은 가니마르도 손을 들었네." 보트를레는 기뻐서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형사부장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발코니로 다가가서 폐허를 내려다보았다. 피욜 씨가 중얼거렸다. "그래, 놈은 저기에 있을 거란 말이지?" "저기에 있습니다." 하고, 보트를레는 나직이 말했다. "쓰러졌을때부터 저기에 있습니다. 그가 레이몽드 양과 두 하인의 눈에 띄지 않고 달아난다는 건, 논리상으로나 실제로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슨 증거가 있나?" "증거는 공범자들이 남기고 갔습니다. 그 날 아침, 그들 중의 하나가 운전사로 둔갑하여, 여러분들을 여기로 태우고 왔지요..." "증거품인 그 가죽모자를 찾아 가려고?" "그렇죠. 그러나 또다른 무엇보다도, 장소를 봐 두고, 두목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래서 알아 냈을까?" "그렇겠지요. 그는 숨은 곳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두목이 매우 위독하다는 것도 알았겠지요. 그러기에, '두목이 죽으면, 아가씨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의 쪽지를 쓴 거지요." "그러나, 일당이 그 후 두목을 구출해 갔을 게 아닌가?" "언제요? 판사님의 부하들은 폐허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옮긴다면 어디로 옮겨 놓는단 말입니까? 다 죽어가는 사람을 말이예요.... 그랬다간 들켜 버렸을 걸요? 반드시 저기에 있습니다. 의사를 불러 온 곳도 바로 저 곳입니다. 경관들이 애들처럼 불난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 있을 동안에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 있을까? 살아가려면 물과 먹을 것이 필요한데!" "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맹세코, 그는 저기에 있습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보트를레는 손가락을 폐허로 뻗치고, 공중에 조그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그것을 차츰차츰 좁혀 가더니, 마침내 하나의 점을 가리켰다. 그 점을 두 사람의 동료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둘 다 몸을 구부리고, 보트를레와 같은 확신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렇다, 아르센 뤼팽은 저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제는 두 사람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기 어딘가 캄캄한 곳에 숨어서, 제대로 구완도 받지 못한채 그 유명한 모험가가 땅바닥에 누워서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측은하고 처량하기까지도 했다. "만약에 죽는다면?" 하고, 피욜 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트를레가 대답했다. "만약에 죽는다면, 그리고 공범자들이 그걸 확실히 알게 된다면, 레이몽드 양을 잘 지켜 주십시오. 판사님. 복수가 무서울 테니까요." 그 후 조금 있다가, 보트를레는 피욜 판사가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날로 휴가가 끝나니 할 수 없다면서, 디에프를 거쳐 파리로 돌아갔다. 가니마르는, 앙브뤼메지의 폐허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저녁에 급히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다음과 같은 속달이 와 있었다. 형사부장 귀하. 참고삼아 몇 가지의 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르센 뤼팽은 에티엔 드 보드레라는 이름으로, 1년 전부터 파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사교계의 기사나 스포츠 소식 속에서 종종 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대여행가로, 벵골 지방에 호랑이 사냥을 간다거나 시베리아로 여우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많습니다. 사업을 하고 있다지만, 무슨 사업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의 현주소는 마르뵈프 거리 36번지입니다. (아시다시피, 마르뵈프 거리는 45우편국 근처입니다.) 앙브뤼메지 사건의 전날인 4월 23일 목요일부터, 그의 소식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지도르 보트를레 이튿날 아침, 가니마르는 마르뵈프 거리 36번지에 가보았다. 문지기에게 몇 가지 물어 본 뒤에 그의 방에 들어가 보니, 벽난로 속에 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4일전에 그의 친구 둘이 와서, 수상한 서류는 모두 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니마르가 막 나오려고 했을 때, 우편 집배원이 보드레 앞으로 온 편지 하나를 가져왔다. 거기에는 미국의 우표 가 붙어 있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제브르 씨의 네 폭의 그림을 손에 넣으시면, 약속된 방법에 따라 곧 보내 주십시오. 다른 물건도 가능하시다면 함게 보내주십시오.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저도 그곳으로 떠납니다. 이 편지와 동시에 도착 할 것입니다. 그랜드 호텔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하알링턴 바로 이날, 가니마르는 미국인 하알링턴을 공범죄로 잡아들였다. 이리하여 17세 소년의 뜻하지 않은 정보 덕택으로, 사건의 매듭이 차츰 풀려 가고 있었다. 아르센 뤼팽의 체포는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의 파리 주소는 알려졌고, 그의 탈은 벗겨졌으며, 그가 오랫동안 걸쳐 교묘 하게 꾸며 놓은 음모의 하나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는 순간에 들통이 나 버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놀라움과 감탄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떠들어댔다. 신문이란 신문은 모두 이 고교생과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가니마르와 피욜 씨가 그 무능함을 여지없이 드러낸 반면, 모든 승리의 공은 보트를레 에게로 돌아갔다. 기암성 (8)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수수께끼의 연속 세상 사람들은 열광했다. 순식간에 이지도르 보트를레는 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 관해서 뭐든지 다 알고 싶어했다.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장송 고등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붙잡고, 보트를레에 관해서 뭐든지 다 캐물었다. 그리하여, 그가 학우들로부터 셜록 홈즈의 호적수라고 불리고 있다는 평판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 소년은, 신문에서 읽은 정보 이외에는 오직 추리와 논리만으로, 경찰에서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사건의 해결책을 이제까지 몇 번이나 가르쳐 준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 매우 신기한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읽혀지고 있는 조그만 논문이었다. <아르세느 뤼팽 - 그 독특한 방법>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논문은 보트를레가 쓴 것으로, 몇 부를 타이프로 쳐서 돌린 것이었다. 이것은 그 유명한 괴도둑 뤼팽의 갖가지 모험에 관해서 상세히 연구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뤼팽의 행동법, 그의 독특한 계략 신문에의 투서, 협박, 도둑질의 예고' 등, 그의 모든 비결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매우 예리하고 정확한 비평이어서,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중의 호기심과 호의는 대번에 뤼팽에서 보트를레로 돌아갔으며, 이 두사람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서 사람들은 미리 이 고교생이 이길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한편, 파리의 가니마르도, 디에프의 피욜 판사도, 보트를레 없이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가니마르는 하알링턴 씨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으며, 그가 뤼팽과 한패인지 어떤지도 알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 심지어, 그 편지를 쓴 사람이 하알링턴 본인인지 아닌지도 단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알링턴이라는 사나이가, 여행 가방에 돈을 가득 넣어 가지고 그랜드 호텔에 들어왔다는 것 -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실뿐이었다. 피욜 씨도 마찬가지였다. 사건 전 날, 레이몽드 양이 보트를레로 잘못 보았다는 사나이에 관해서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도둑맞은 네 폭의 루벤스의 그림이 어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밤중에 그것을 싣고 갔음직한 자동차의 지나간 흔적은 드러났지만, 그것이 세느강을 건넜는지 어떤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피욜 씨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폐허를 뒤졌지만, 뤼팽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 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트를레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왜 그는 사건을 계속 밝혀 내지 않는 것일가? 이미 거기까지 갔으니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텐데. <그랑 주르날>신문의 기자 한 사람이 베르노라는 가짜 이름으로 슬그머니 장송 고등학교에 들어와, 보트를레를 만나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이에 대해 소년은 매우 슬기롭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뤼팽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강도라거나 탐정의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며,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이라는 현실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7월에 대학입학 자격 시험을 치릅니다. 지금은 5월인데, 나 역시 그 시험에 낙제하고 싶진 않거든요.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겠어요?" "하지만, 학생이 아르세느 뤼팽을 경찰에 넘긴다면,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쳇! 만사에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다음 번 휴가에나...." "성신 강림절 휴가 말입니까?" "예, 6월6일 아침에 첫 기차로 떠나겠습니다." "그럼 그 토요일 저녁에, 아르센 뤼팽은 붙잡히겠군요." "일요일까지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고, 보트를레는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가 이 젊은이를 믿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으리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6월6일! 이 날짜가 모든 신문에 보도되었다. '6월 6일에, 이지도르 보트를레는 디에프행 급행을 탈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아르세느 뤼팽은 체포될 것이다.'라고. 드디어, 그 6월 6일이 되었다. 파리의 생 라자르 역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보트를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의 두 기자는 기어이 그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그는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혼자서 기차에 올랐다. 며칠 밤을 공부로 지새웠기 때문에 피곤했기에, 그는 깊이 잠이 들어 버렷다. 잠이 깨어 르왕이 보였을 때, 앞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그 좌석의 등에 종이 쪽지 한 장이 핀으로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저마다 할 일이 있다. 자네는 자네 할 일이나 해라. 그렇지 않았다간 큰코를 다칠 것이다!--- "좋았어! 놈들은 이제 다급해진 모양이구나." 하고, 보트를레는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그는 르왕 역에서 다리를 좀 풀기 위해, 플랫포옴에 내려서 서너 바퀴 돌았다. 그런 뒤에 다시 차에 오르려고 했을 때, 그의 입에서는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문팔이 앞을 지나다가, <르왕> 신문의 특별판 제 1면을 장식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최신 뉴스 - 디에프에서 들어온 전보에 따르면, 간밤에 앙브뤼메지의 저택에 몇 명의 괴한이 들어와, 제브르 씨의 딸 쉬잔 양을 묶어 재갈을 몰리고, 레이몽드 양을 납치해갔다. 저택에서 5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핏자국이 보였고, 그 근처에서 피 묻은 쇼올이 발견되었다. 가엾게도 아가씨는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디에프에 도착할 때까지, 보트를레는 꼼짝 않고 있었다. 그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짚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디에프에서 자동차로 급히 달려간 그는, 앙브뤼메지의 문 앞에서 판사를 만나, 그 끔찍스런 뉴스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 이상의 것은 모르십니까?" 하고, 보트를레는 물었다. "모르겠어. 나도 지금 막 도착했네." 이 때, 수사 반장이 피욜 판사 옆으로 다가와, 구겨진 노란 종이 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은 쇼올을 발견한 곳 근처에서 주워 왔다는 것이다. 판사는 그것을 살펴보고는, 보트를레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 수사에 별로 도움이 안 되겠지?" 보트를레는 그 종이 조각을 이모저모 뜯어보고 살펴보았다. 그것은 숫자와 점과 기호로 된, 다음과 같은 것이엇다. 2 . 1 . 1 .. 2 .. 2 . 1 . . 1 .. 1 ... 2 . 2 . . 2 . 4 3 . 2 .. 2 . . 4 5 .. 2 . 4 ... 2 .. 2 . 4 .. 2 D DF □ 19F+44 35 13 . 53 .. 2 . .. 25 . 2 기암성 (9)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시체 저녁 6시쯤에 일을 끝낸 피욜 판사는, 서기와 함께 디에프로 돌아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욜 판사는 불안하고 초조한 것 같았으며, 서기에게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물었다. "보트를레 군은 못 봤나?" "예, 못 봤습니다. 판사님" "제기랄, 어딜 갔을까? 온종일 안 보이는 걸."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가방을 서기에게 맡기고는, 저택을 한 바퀴 돌아 폐허 쪽으로 달려갔다. 보트를레는 그 곳에 있었다. 그는 그곳의 커다란 아케이드 옆에서, 솔잎이 깔린 땅바닥에 누운 채, 한쪽 팔을 베고 자고 있는 것 같앗다. 피욜 판사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어찌 된거야? 자고 있나?" "천만의 말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다니! 첫째, 보지 않으면 안돼. 사실을 조사하고, 실마리를 찾아내야 하는 거야." "예, 알고 있습니다.... 그건 평범한 방법입니다. 물론 좋은 방법이죠. 하지만, 저는 또 다른 방법이 있어요. 저는 첫째 깊이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건의 전반적인 흐름을 내다보지요. 그런 뒤에, 이 전반적인 흐름과 일치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가정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에야만 비로소 사실들이 제 가정에 맞는지 어떤지를 살펴보는 겁니다." "그건 참 우스운 방법이군!" "확실한 방법이지요, 판사님. 도리어 판사님의 방법이 확실하지 못한 겁니다." "무슨 소린가? 사실은 사실인걸."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거라면, 옳은 말씀이지요. 하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계략을 쓰고 있다면, 사실 그 자체를 꾸며 내고 마니까요. 여러분들이 수사의 기초로 삼고 있는 이른바 단서라는 것을 상대는 마음대로 늘어놓을 수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뤼팽 같은 사람을 상대로 하고 있을 땐, 그런 사실을 따라가다간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가 버리는 겁니다. 셜록 홈즈 같은 사람도 함정에 빠지고 마니까요." "뤼팽은 죽었어."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일당은 남아 있는데, 그런 선생의 제자들이고 보면, 그들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피욜 씨는 보트를레의 팔을 잡아 끌면서 말했다. "여보게, 실은 중대한 얘기가 있는데, 잘 들어 보게나. 가니마르는 지금 파리에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며칠 후가 아니면 못 올 형편이야. 한편, 제브르 백작은 셜록 홈즈에게 전보를 쳤는데, 홈즈는 다음 주에는 협력하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 말이야, 이런 명사들이 도착했을 때,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일은 다 끝났습니다.'라고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다면, 영광이 아니겠는가?" 이 피욜 씨가 한 것보다도 더 교묘하게 자기의 무능함을 고백하기란 불가능하리라. 보트를레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꾹 참고, 속아 넘어가는 체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 오후에 제가 여러분의 수사에 참가하지 않은 건, 실은 그 결과를 판사님게서 알려 주시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뭘 알아내셨습니까?" "알아보니 이렇게 됐더군. 어젯밤 11시에, 크비용 수사 반장이 저택에 보초로 세워 놓은 세 명의 경관에게, 급히 경찰서로 돌아오라는 반장의 명령이 전달됐어. 그래서 돌아가 봤더니..." "그랬더니 그들은 속은 것이고, 그 명령은 가짜였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앙브뤼메지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말씀이죠?" "맞았어. 그들은 수사 반장과 함께 돌아왔어. 그러나 한 시간 반이나 비워 놓은 동안에 범행이 일어났어." "그 상황은 어땠습니까?" "농장에서 사다리를 가져다가 저택의 3층에 기대어 놓고, 유리창을 뚫고 두 사나이가 쉬잔 양의 방으로 들어가, 고함을 지르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렸어. 그러고는 끈으로 묶은 뒤에, 레이몽드 양의 방으로 들어갔어. 쉬잔 양은 신음 소리와 버둥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조금 후에 사나이가 손발을 묶고 재갈을 물린 사촌언니를 떠메고 가는 것을 보았대. 그들은 쉬잔 양의 앞을 지나 창으로 나갔다는 거야. 쉬잔 양은 무서워서 까무러쳐 버렸어." "그러나 개는 어찌 됐나요? 제브르 씨는 무서운 개를 두 마리나 기르고 있지 않아요?" "둘 다 독약을 먹여 죽여 버렸더군." "정말 알 수 없어! 그야 어쨌든, 두 사나이는 폐허를 지나 샛문으로 나갔어. 그런 뒤에 저택에서 500미터 쯤 가서, 큰 떡갈나무 밑에 이르러 계획을 실행한 거야." "레이몽드 양을 죽일 생각으로 왔다면, 왜 방안에서 해치우지 않았을까요?" "모르겠어. 아마 저택을 나간 뒤에 무슨 일이 생겨서 죽이게 됐는지도 모르지. 아가씨가 용케도 묶은 끈을 풀었을지도 모르고, 내 생각으론, 주운 쇼올은 손목을 묶는 데 쓰였을 것이거든, 어쨋든, 아가씨를 죽인 건 큰 떡갈나무 아래였어. 내가 모은 증거는 틀림없어." "그러나 시체는?"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이상할 게 없어. 사실,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까 바랑즈빌 성당의 낭떠러지 꼭대기에 있는 옛 묘지까지 계속되었거든. 거기는 100미터나 되는 낭떠러지이고, 그 아래는 바위와 바다야. 하루 이틀 지나면 밀물로 시체가 떠오르겠지." "얘기가 참 간단하군요." "응, 여기엔 사실 아무 문제가 없어. 뤼팽이 죽으니까, 그 일당이 전에 협박한 대로, 복수하기 위해 레이몽드 양을 죽인거야. 하지만 뤼팽은 어찌 됐을까?" "뤼팽 말인가요?" "그래, 아마 일당은 아가씨와 동시에 뤼팽의 시체도 꺼내 갔겠는데. 그 증거가 없거든. 폐허에 숨어 있었다는 증거도,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통 알수가 없단 말야. 바로 그 점이 수수께끼일세. 여보게, 보트를레 군, 레이몽드 양의 살해 사건으로 일이 더 까다로와졌어. 두 달 동안, 앙브뤼메지의 저택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만약에 우리가 이 수수께끼를 풀지 않으면, 딴 사람들이 와서 해결해 버릴거야." "언제 오나요? 그 딴 사람들은...?" "수요일.... 어쩌면 화요일일지도 몰라...." 보트를레는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토요일이죠. 저는 월요일 저녁에 학교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월요일 아침 10시에 여기에 나와 계시면 이 수수께끼의 열쇠를 가르쳐 드리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정말인가, 보트를레군?... 틀림없겠나...?" "그렇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어딜 가려고?" "저는 이제 이 사건의 전반적인 의도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실이 그것과 맞아들어가는지 어떤지, 이제부터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만약에 맞아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사실이 틀린 것이 되겟지요." 하고, 보트를레는 웃으면서 대답햇다. "그런 경우엔 더 잘 맞아들어가는 다른 사실들을 찾아야겠지요. 그럼 월요일에 뵐까요, 판사님?" "그러게, 월요일에 만나세." 잠시 후에 피욜 씨는 디에프로 돌아가고, 보트를레는 제브르 백작에게서 자전거를 빌어타고, 코드백 앙 코오로 가는 길을 달렸다. 루벤스의 그림이 어는 길로 운반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였다. 보트를레는 이렇게 가정했다. 즉, 네 폭의 그림은 틀림없이 자동차에 실려갔다. 그러나, 코드백 앙 코오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차에 옮겨 실려, 세느강을 건넜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보트를레는, 달리고 달려 한밤중에 강가의 주막집을 두드렸다.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의 명부도 들여다보았다. 4월23일 목요일에 자동차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럼 마차는? 달구지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어요." 아침 나절 내내, 보트를레는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막 딴 곳으로 가려고 했을 때, 간밤에 묵은 주막집의 심부름꾼 아이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아침 달구지는 봤는데, 강을 건너가진 않았습니다." "뭐라고?" "건너가진 않고, 강둑에 매어 두었던, 쾌속정 같은 것에 짐을 옮겨 실었습니다." "그 달구진 어디서 온 거지?" "그건 제가 잘 알고 있는데요, 바티넬 아저씨의 달구지였어요." "어디 사는 사람인데?" "루브토 마을이요." 보트를레는 루브토 마을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저녁 9시에야 겨우 술집에서 바티넬 씨를 만났다. "응, 그래. 그날 아침, 자동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5시에 나오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이렇게 높다랗고 큼직한 물건 네 개를 내놓더군. 한 사람이 나를 따라와서, 그 물건을 쾌속정까지 싣고 갔었지." "그들을 전부터 알고 계시는 것 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내가 그들의 일을 해 준건, 이번이 여섯 번째인걸!" 보트를레는 몸을 떨었다. "여섯 번째라고요?... 그건 언제부터입니까?" "그날까지 매일이었지! 그때그때의 물건은 다른 것이었지만...., 커다란 돌덩어리거나...., 더 작고 길쭉한 것들이었는데, 보물처럼 소중히 싸 가지고 실어 갔어. 내겐 손도 못 대게 했었지..... 아니, 어찌 된 거야? 그렇게 새파래지다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더워서요...." 보트를레는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뜻밖의 발견으로 너무 기뻐서 정신이 멍해 왔다. 기암성 (10)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약탈된 사원 그는 조용히 돌아와서, 그 날 저녁은 바랑즈빌 마을에서 묵고, 이튿날 아침은 국민 학교 선생과 함께 면사무소에서 한 시간 쯤 보냈다. 그런 뒤에 저택으로 돌아오니, 편지 한 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 두 번째의 경고! 입을 다물고 있거라. 그렇지 않았다간.... > "아뿔싸, 이제 내 몸의 안전을 위해서 좀 조심해야 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놈들의 말대로...." 하고 보트를레는 중얼거렸다. 9시였다. 그는 폐허를 거닐다가, 아케이드 옆에 드러누워 눈을 감앗다. "어때, 잘 됐나?" 약속 시간에 피욜 씨가 온 것이다. "예, 매우 기쁩니다. 판사님," "그렇다면?" "제가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겠다 그 말씀입니다. 이런 편지가 오긴 했지만요...." 그는 편지를 피욜 씨에게 보였다. "이런 제기랄!" 하고, 판사는 외쳣다. "설마 이러한 것 때문에 자네가 구애를 받지야 않겠지...." "그럼요, 판사님. 약속을 지키겠다고 얘기했는걸요. 10분도 못 가서 진상이 밝혀질 겁니다. 진상의 일부가...." "진상의 일부라고?" "예, 제 생각으론, 뤼팽이 숨은 곳을 찾아 내는 것만이 문제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밖의 것에 관해서도 곧 알게 될겁니다." "보트를레군, 나는 자네가 하는 일엔 별로 놀라지 않네만, 그래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는지?" "그야 아무것도 아니죠! 에티엔 보드레, 즉 뤼팽에게 보낸 하알링턴 씨의 편지 속에 내가 늘 수상히 여긴 구절 하나가 있어요. 그건, '다른 것도 가능하시면 같이 보내주십시요.'라는 구절입니다." "그래, 나도 생각 나." "이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미술품? 골동품? 이 저택에서 귀중한 것이라곤 루벤스의 그림고 벽 장식 융단밖에 없어요. 보석? 그건 별 것 아니지요.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그런데 뤼팽 같은 천재가, 다른 것도 보내겠다고 말해 놓고선, 같이 보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그건 물론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가능한 일이었을 거여요. 뤼팽이 그러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지.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았으니까." "실패하지 않았어요. 뭔가 없어졌어요." "루벤스의 그림이야 없어졌지만...." "루벤스와 또 다른 것이 없어졌습니다. 루벤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것으로 뭔가를 바꿔치기 한 겁니다. 루벤스보다도 훨씬 더 귀중하고 진귀한 뭣인가를 말입니다."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안타깝게 그러지 말고 어서...." 두 사람은 폐허를 걸어서 샛문으로 가다가, 예배당 옆에 이르럿다. 보트를레는 걸음을 멈추었다. "뭔지 알고 싶으세요, 판사님?" "응, 알고 싶다뿐인가!" 보트를레는 느닷없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러, 예배당 앞에 세워 놓은 조각상 하나를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아니, 미쳤나!" 피욜 씨는 얼빠진 듯이 부서진 조각상 쪽으로 뛰어가면서 외쳤다. "미쳤어! 이 성자상은 굉장한 것이었는데....!" "그럼요, 굉장한 것이고말고요.!" 보트를레는 지팡이를 다시 휘둘러, 또 성모상을 쓰러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욜 씨는 그의 몸을 꼭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또다시 동방 박사 상의 모가지 하나가 날아가고, 이어서 아기 에수와 함께 구유가 날아갔다. "더 계속한다면 쏘겠다!" 어느 새 제브르 백작이 달려와 권총을 들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깔깔 웃었다. "저걸 쏘십시오, 백작님... 저기,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걸 말여요." 성 요한 상이 부서졌다. "이런!~" 하고, 백작은 권총을 겨누면서 외쳤다. "이런 몹쓸 놈 같으니! 저런 걸작을!" "가짜예요. 이건, 백작님!" "뭐! 무슨 소리야?" 백작은 권총을 내리면서 외쳣다. "가짜에요.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모조품이라구요!" "아니! 원.... 이럴 수가 있나?" "속이 텅 빈 겁니다!" 백작은 몸을 구부리고 깨진 조각물의 파편 하나를 주웠다. "잘 보십시오. 백작님... 석고입니다! 오래 된 돌처럼 잘 손질되어 녹슨, 축축한 석고란 말입니다. 이게 그 진짜 걸작에서 남아 있는 전부예요.... 이것이 그 놈들이 며칠 동안에 해 놓은 작업입니다! ... 바로 루벤스의 그림을 베껴 그린 샤르프네 씨가 1년 전에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이번에는 피욜 씨의 팔을 잡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판사님? 훌륭합니까? 거창합니까? 예배당을 도둑맞다니! 조각품들은 송두리째 없어지고, 회반죽 인형으로 바뀌다니! 참으로 비상한 일이 아닙니까, 판사님! 정말 천재가 아닙니까, 이 사나이는!" "자네는 흥분하고 있군, 보트를레군" "흥분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런 인물이 하는 짓이라면 무엇이고 감탄할 만하지요. 그 사나이는 모든 것 위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도둑질 속에는 풍부한 구상이 있고, 능력과 권위와 절묘함이 있어, 몸이 오싹 할 지경입니다." "그가 죽어서 안됐군. 그렇지만 않았더가면, 노틀담 성당의 탑까지도 훔쳐 갔을 텐데...." 보트를레는 어깨를 으쓱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죽었더라도, 판사님을 깜짝 놀라게 할 겁니다" "하기야 그의 시체를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면 나도 감격되지 않는 건 아니야.... 물론 그의 일당이 그 시체를 꺼내 가 버리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더구나...." 하고, 제브르 백작도 끼여들었다. "내 가엾은 조카딸을 해친 놈이 바로 그 놈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예, 바로 그놈이고 말고요." 하고, 보트를레는 장담했다. "레이몽드 양의 총을 맞고 폐허에서 쓰러진 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가 또 쓰러져서, 아케이드까지 기어가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거예요. 이건 정말 기적이었는데, 그 점에 관해선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이 돌의 피신처까지 겨우 왔는데.... 여기가 결국 그의 무덤이 되고 만 셈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지팡이로 예배당의 문턱을 두드렸다. "아니! 뭐라고?" 피욜 씨는 깜짝 놀라 외쳤다. "이 곳이 무덤이라고? 이런 데서 숨을 수가 있을라고..." "여기가 숨은 곳입니다. 여기가...." 하고, 보트를레는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미 뒤져 봤지 않아?" "잘못 뒤졌던 거죠." "여기엔 숨을 곳이 없습니다. 난 예배당을 잘 알고 있어요." 하고, 제브르 백작이 말했다. "아닙니다. 백작님, 숨을 곳이 있습니다. 바랑즈빌 면사무소에 가서 옛 서류를 조사해 보십시오. 그것을 보면, 이 예배당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걸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뤼팽이 그런 것까지 알았을까?" "예배당을 훔쳐 가는 일을 하다가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겁니다...." "여보게 보트를레 군,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 이 때 제브르 씨가 하인을 불러, 예배당의 열쇠를 가져오게 했다. 세 사람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살펴 본 뒤에 보트를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제단이 모조품이라는 건 이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제단 앞쪽에서 시작되어, 밑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뤼팽은 일을 하다가 지하실을 발견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보트를레는 백작이 가져오게 한 곡괭이고, 계단을 두들겼다. 석고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럴 수가 있나! 빨리 알고 싶군." 하고, 피욜 씨는 중얼거렸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보트를레는,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이 새파래져 가지고 말했다. 그는 곡괭이를 부지런히 놀렸다. 그러자 갑자기 곡괭이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무슨 단단한 것에 부딪혀 튀어 올랐다. 그러고는,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곡괭이에 맞은 돌덩어리와 함께 제단의 나머지가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보트를레는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성냥불을 켜 들고, 구멍 위를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계단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앞쪽, 거의 입구의 포석아래에서 시작되어 있군요. 여기선 맨 아래 층계가 보입니다." "깊은가?" "3,4미터나 돼 보입니다." "거 참 이상하다." 하고, 피욜 씨는 말했다. "레이몽드 양이 납치됐을 때, 세 경관이 잠깐 떠난 사이에, 공범자들이 이 지하실에서 시체를 꺼내 갈 만한 겨를이 있었을 것 같지 않은데.... 게다가 또, 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야, 내 생각으론, 시체는 거기에 있을거야."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구멍 속에 세워 놓고, 보트를레는 사다리의 끝을 힘껏 눌렀다. "판사님,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기암성 (11)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앙브뤼메지의 지하도 판사는 촛불을 들고 내려갔다. 제브르 백작이 뒤를 따랐다. 보트를레도 사다리를 디뎠다. 그가 내려가면서 기계적으로 세어 보니, 사다리에는 18개의 단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촛불이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하실을 그의 눈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땅바닥에 내려가 보니, 고약한 냄새 - 썩은 냄새가 났다. 그러자 갑자기, 떨리는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뭔가요? 왜 그러시지요?" "보트를레군...." 하고, 피욜 씨는 더듬거렸다. 그는 너무나도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판사님, 침착하시지요." "보트를레군, 저기에...." "뭔가요?" "저...., 제단에서 떨어진 돌 밑에 뭐가 있어..., 돌을 밀었더니 손에 닿지 않겟나... 오, 끔찍스러워라!" "어디 있습니까?" "이 쪽에.... 냄새가 나지 않나? 옳지, 거기.... 그것 봐...." 그는 촛불을 들어 땅바닥에 누워있는 물체를 살며시 비추었다. "아앗!" 보트를레는 질겁을 하며 외쳤다. 세 사람은 얼른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반쯤 벌거벗은 시체가 끔찍스럽게 뒹굴고 있었다. 몰랑몰랑하고 푸르스름한 살이, 군데군데 찢겨진 옷 사이로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머리였다. 아까 떨어진 돌덩어리로 으깨진 그 머리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보트를레는 얼른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 후에 피욜 씨가 올라와서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수고가 많았네, 보트를레 군. 숨은 곳을 발견한 것 외에도, 두 가지 점에서 자네 판단이 옳았다는 걸 알았네. 첫째, 레이몽드 양이 쏜 사나이는, 자네가 처음부터 말한 대로, 확실히 아르세느 뤼팽이었어. 다음에, 그가 확실히 에티엔 드 보드레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어. 셔어츠에 E.V에라는 머리글자가 있었거든.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어떤가?" 보트를레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자네는 내 말을 안 듣고 있나?" "아니요. 듣고 있습니다." 피욜 씨는 계속해서, 시체가 뤼팽임에 틀림없음을 증명하려고 들었으나, 보트를레는 건성으로만 듣고 있었다. 거기에 백작이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하나는, 이튿날 셜록 홈즈가 이 곳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잘 됐다! 가니마르 형사부장도 오고, 이건 재미있겠는걸." 하고, 피욜 씨는 유쾌한 듯이 외쳤다. 그러고는 또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더욱더 잘 됐어. 이 양반들이 와도 별로 할 일이 없겠는걸. 보트를레군, 오늘 아침에, 바위 위에서 어부가 젊은 여자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디에프에서 알려왔군 그래." 보트를레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시체라고요...?" "젊은 여자의 시체래.... 상처투성이여서, 오른팔의 부어오른 피부에 금팔찌가 박혀 있지 않았더라면, 신원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적혀 있어. 그런데 레이몽드 양은 오른팔에 금팔찌를 끼고 있었거든. 그러니 이건 분명히 백작님의 불쌍한 조카따님에 틀림없어. 어떻게 생각하나, 보트를레 군?" "글쎄요.... 저로선, 모든 것이 맞아들어갑니다. 모든 사실이, 제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가정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난 잘 모르겠는데."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십시오. 저는 4시나 5시쯤에 돌아오겠습니다. 학교는 할 수 없지요. 밤 12시 기차로 가지요 뭐," 보트를레는 자전거를 집어 타고 떠나갔다. 디에프에 도착한 그는 <라 비지>신문사에 들러, 최근 2주일 동안의 신문을 조사했다. 그런 뒤에, 거기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앙베르뫼 마을로 달려가, 면장과 사제 신부와 지서장을 만났다. 성당의 종이 3시를 쳤다 그의 조사는 끝나 있었다. 그는 신바람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되돌아옸다. 바다에서 불어 오는 거센 바람을 가슴에 담뿍 받으면서,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앙브뤼메지가 보였다. 그는 저택으로 총하는 비탈길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길을 가로질러, 가로수에서 가로수로 줄 하나가 처져 있는 것이 별안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보트를레의 자전거는 줄에 걸려 사정 없이 넘어져 뒹굴고 말았다. 요행히 돌더미에 부딪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보트를레의 머리통은 박살이 날 뻔했다. 보트를레는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뒤에 무릎 살갗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멍든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른쪽으로 조그만 숲이 이어져 있었으니, 범인은 그리로 달아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줄을 풀었다. 그런데, 줄이 매어져 있던 왼쪽 나무에 쪽지 하나가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는 그 것을 펴 보았다. < 세 번째의, 그리고 마지막 경고! > 그는 저택으로 돌아와, 판사가 정해 놓고 일하는 1층의 방으로 갔다. 피욜 씨는 서기 앞에 앉아서 뭔가 쓰고 있다가, 서기를 내보낸 뒤에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된건가? 보트를레군? 손이 피투성이가 아닌가?" "별 것 아닙니다.... 다만, 자전거가 이 줄에 걸려서 한바탕 굴렀을뿐입니다. 그런데 이 줄이 이집 세탁장의 빨랫줄이라는 걸 아셔야만 하겠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고!" "저는 여기서도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겁니다. 누군가가 여기서도 줄곧 저를 지켜 보고 저의 얘기도 엿듣고 있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 "틀림없습니다. 그게 어떤 놈인지, 판사님께서 찾아 내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로선 약속했던 설명이나 해드리고 끝장을 내야겠습니다. 제게는 지금,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글세, 그것 참..." "쳇! 두고 보십시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어쩃든 서둘러야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곧 정리해 버려야겠습니다. 크비용 반장님이 주워서 판사님께 드린 그 종이 조각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으셨겠지요?" "절대로 아무한테도. 하지만, 그런 것에 무슨 가치가 있겠나?" "있고말고요. 그런데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아직까진 그 쪽지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보트르레는 갑자기 말을 끊고 판사의 손을 자기의 손으로 꼭 누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쉿! .... 누가 엿듣고 있어요. ... 밖에서..." 모래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보트를레가 창가로 달려가 내다보았다. "벌써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나 꽃밭이 짓밟혔을걸요..." 그는 창을 닫고 돌아와 앉았다. "보십시오. 적은 이제 조심조차도 않게 되었습니다.... 놈들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그는 그 종이 조각을 탁자에 펴 놓았다. "이 종이엔 점과 숫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네 째 줄은 지금 문제가 안 되는 것 같고, 그 밖의 줄엔 5이상의 숫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다섯 개의 홑소리글자를 알파벳 순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결과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a.a..e..e.a. .a..a...e.e. .e.oi.e..e. .ou..e.o...e..e.o..e ai.ui..e ..eu.e "보시다시피, 이것만 가지곤 아무것도 알수가 없습니다. 이걸 푸는 열쇠는 매우 쉽고도 어렵습니다. 쉽다는 건, 홑소리를 숫자로 바꿔 놓고, 닿소리르 점으로 바꿔 놓기만 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매우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하지야 않겠지요" "꽤 어렵다는 건 사실이야." "그럼 풀어 봅시다. 둘째 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둘째 부분에서 점을 닿소리로 바꿔 놓고 보면, demoiselles(아가씨들)이란 낱말밖엔 그럴사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쉬잔과 레이몽드의 두 아가씨일까?" "틀림없습니다." "그 밖엔 모르겠지?" "아니요. 마지막 줄의 한 가운데가 끊겨 있는 것을 실마리로 하여, 같은 식으로 알맞은 말을 찾아보면, 당연히 aigulle(바늘.첨탑)란 낱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옳아.... aigulle란 낱말임에 틀림없구먼..." "이젠 마지막의 낱말인데, 처음의 두 글자가 닿소리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여기에 알맞은 낱말은 네 개가 있습니다. 즉, fleuve(강), preuve(증거), pleure(운다),그리고 creuse(속이 빈, 구멍 뚫린)입니다. 처음의 세 개는 aiguille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마지막의 creuse를 취합니다." "그러면 aiguille creuse(구멍 뚫린 바늘, 속이 빈 첨탑)란 말이 되는군. 자네의 해석이 옳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더 두고 봐야겠지요.... 이 aiguille creuse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그보다도 더 주의하고 있는 건, 이 종이의 재료입니다. 지금도 이런 양피지를 만들어 내고 있을까요? 게다가 이 네겹으로 접은 데가 헐어 있는 점이며...., 특히 윗면에는 이렇게 빨간 봉랍의 자국이 있어요...." 이 때 보트를레는 얼른 말을 끊었다. 서기 브레두가 문을 열고, 검찰 총장이 갑자기 방문했다고 알렸기 때문이다. "경찰 총장님께서 이 앞을 지나가시다가, 잠깐 한 마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서, 대문 앞에서 뵈었으면 하십니다." "이상한데...." 하고, 피욜 씨가 중얼거렸다. "어쨋든 가 보자, 보트를레군, 잠깐만 실례하겠네." 판사는 나갔다. 그러자 서기는 문을 닫아 잠그고는,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뭘 하는 거요?" 보트를레는 깜짝 놀라 외쳤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얘기하기가 더 좋지 않겠나?" 하고, 브레두는 대꾸했다. 보트를레는 옆 방으로 통하는 다른 문쪽으로 뛰어갔다. 보트를레는 그 순간 알아챘던 것이다. 공범은 바로 판사의 서기, 브레두였던 것이다! 브레두는 쌀쌀하게 웃었다. "여보게, 젊은 친구. 그 문의 열쇠도 내가 갖고 있다네." "그럼 창이 있다!" "너무 늦었어." 브레두는 권총을 쥐고 창 앞에 버텨 서면서 말했다. 빠져 나갈데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도 대담하게 탈을 벗고 나오는 적에 대해서는 스스로 몸을 지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트를레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불안으로 가슴을 죄면서 팔짱을 꼈다. "좋아, 얼른 끝내 버리자." 서기는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꺼냈다. 참으로 무섭게 생긴 사나이엿다. 마치 거미의 몸처럼 길고도, 가는 다리에 팔은 커다랗고, 몸통은 크고 동그란데, 얼굴은 우락부락했다. 보트를레는 다리가 막 떨리고 휘청거려 앉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해 봐라, 뭐가 필요한지를..." "그 종이다. 사흘 전부터 찾고 있는 중이다." "없다." "거짓말 마라. 내가 들어왔을 때, 지갑 속에 넣는 걸 봤다."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우리를 귀찮게 굴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란 말이다." 그는 여전히 권총을 겨눈 채, 보트를레에게 다가왔다. 그 힘찬 말투, 매서운 눈, 쌀쌀한 미소, 보트를레는 몸이 오싹했다. 보트를레가 진짜 위험을 느껴 본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놈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적이라는 느낌이 들엇다. "또 다음엔?" 하고, 소년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 "그 다음엔? 그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브레두는 다시 입을 열었다. "1분밖에 없다. 자, 결심해라. 서투른 수작 하지 말고... 어서 그 종이를 내놔." 보트를레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의 바로 눈앞에는 새카만 권총 구멍이 열려 있었다. 구부린 손가락이 방아쇠를 꼭 누르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어서 그 종이를 내놔, 그렇잖으면...!" 브레두는 되풀이 했다. "옛다!" 하고 보트를레는 외쳤다. 그가 지갑을 꺼내 서기에게 내밀자, 서기는 얼른 그것을 낚아챘다. "좋았어! 너도 그만하면 됐다 좀 겁쟁이지만, 상식은 있군. 자, 그럼 이만 실례한다. 그는 권총을 집어 넣고, 창의 자물쇠를 돌렸다. 이때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뛰어내리려다 말고, 지갑 속을 살펴보았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 이 안엔 종이가 없잖아? 잘도 속였구나." 그는 이를 갈면서 다시 방안으로 뛰어내렸다, 두 방이 총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보트를레가 권총을 쏘았던 것이다. "빗나갔다, 애송아!" 하고, 브레두가 소리를 질렀다. "손이 떨리고 있지 않나. 무서운 모양이지?" 그들은 맞붙어 방바닥 위를 뒹굴었다. 밖에서는 누군지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이내 상대방에게 깔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손이 칼을 치켜들었다가 내리쳤다. 바로 그 순간, 보트를레는 어깨에 고통을 느끼며, 그의 손은 축 늘어졌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의 저고리 안 호주머니를 뒤져 그 종이를 꺼내 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창을 뛰어 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여러신문은, 앙브뤼메지의 저택에서 일어난 최근의 사건들-예배당의 속임수, 아르세느 뤼팽과 레이몽드양의 시체의 발견, 판사의 서기 보레두에 의한 보트를레의 부상 등을 보도하고, 다음의 두 뉴스도 실려 있었다. 그것은 가니마르의 행방 불명과 셜록 홈즈의 납치사건이었다. 홈즈는, 런던 한복판에서 대낮에, 도버행 기차를 타려고 하다가 납치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뤼팽의 일당은, 17세 소년의 놀라운 지혜로 한때 무너질 뻔했다가, 또다시 되살아나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뤼팽의 두 강적, 홈즈와 가니마르는 제거되었다. 보트를레는 싸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이러한 적과 싸우기란 불가능했다. 기암성 (12)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뤼팽과 보트를레의 대결 그로부터 6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 그 날은 7월 14일(프랑스 혁명 기념일)의 전날이었다. 한 사나이가 객실에서 홀로 신문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굳센 얼굴 모습에, 기다란 금발의 젊은이였다. 좀 불그스름한 그의 턱수염은 그 끝이 짤막하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옷차림은 영국 목사처럼 수수한데, 그 사람됨은 어딘지 모르게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그랑 주르날> 신문에는, 기다란 활자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이 금방 눈에 띄었다. --- 우리 신문은 이지도르 보트를레 씨로부터, 그의 폭로 기사를 독점 게재키로 허가를 얻었다. 내일 수요일에, 우리 신문은 당국에서 알기도 전에, 앙브뤼메지 사건의 모든 진상을 발표할 것이다.--- 금발의 사나이는 누군가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10시구나, 전보를 받아 보았다면, 곧 올텐데...." 이윽고,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그는 얼른 나가서 한 소년을 맞아들였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데, 얼굴은 매우 창백해 보였다. 그들은 한참동안 말없이 쏘아보고 서 있었다. "고맙네, 보트를레 군." 금발의 사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내 편지를 받아보고, 진상의 폭로를 이 회견 뒤로 미뤄 준데 대해서, 그리고 이 회견에 기꺼이 응해 준 데 대해서 감사해야겠어." "기꺼이라기보다도...." 하고, 보트를레는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뤼팽씨. 그 편지 속의 협박은 내게 대해서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를 겨냥하고 있었으니 만큼, 더욱 효과적이었지요." "별수가 없었네." 뤼팽도 웃으면서 대꾸했다.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써 봐야지. 나는 자네가 자신의 안전 같은 건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는 걸, 겪어 봐서 알고 있거든. 자네는 브레두에게도 반항을 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최후 수단은 자네 아버지뿐이었어..... 자네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 점을 이용했던 것뿐이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거지요." 보트를레가 대답했다. "어쩃든 좀 앉게나, 보트를레군. 그리고 내 감사는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 변명만은 거절하지 말아주게." "변명이라니요? 왜요?" "브레두가 자네에게 폭력을 쓴 데 대해서 말일세." "사실 그건 나도 놀랐어요. 그건 평소의 뤼팽식의 행동은 아니었으니까요. 단도로 찌르다니...." "그건 내 지시가 아냐. 브레두는 신입생이거든. 내 부하들이 일을 맡아 하면서, 그 판사의 서기를 우리 편에 끌어들이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들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요." "사실 브레두는 특별히 자네만을 맡아 보게 했으니까. 그는 우리에게 귀중한 존재였어. 그런데 풋내기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빨리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좀 지나쳤던 거야. 그래서 자기 혼자 생각으로 자네에게 칼질까지 했기 때문에, 우리 계획도 잡쳐 버리고 말았다네." "뭘요! 그까짓 건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그래서 난 그 녀석을 톡독히 혼내 줬지. 하지만 그 녀석의 입장으로 보면, 자네의 조사가 자꾸만 진행되니까 당황했던 거지. 자네가 우리를 몇 시간만 더 가만히 있게 해 주었던들, 자네 역시 그런 변은 당하지 않았을 거야." "그랬더라면, 나도 가니마르나 호움즈와 같은 운명을 당했을 거란 그런 말씀이죠?" "맞았어. 어쨌든 자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알고 난 몹시 걱정했어. 오늘도 자네의 창백한 안색을 보니, 미안하기 짝이 없구만. 지금까지 나를 원망하고 있진 않겠지?" "내가 만약 그럴 생각만 있었다면, 가니마르의 동료들을 얼마든지 데리고 올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를 믿고 이렇게 무조건 만나 주시니, 이제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나이의 싸움은 참으로 이상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더 이상 예의바를 수가 없었다. 뤼팽은 매우 침착했으며, 흥분한 빛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또다시 벨이 울렸다. 뤼팽은 얼른 문을 열러 나갔다. 그는 곧 편지 한 통을 들고 돌아왔다. "잠깐 실례하겠네." 뤼팽은 그렇게 말하고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전보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읽었다. 그러더니 그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맑아지고, 몸은 꼿꼿해지고, 이마의 핏대가 부풀어올랐다. 그는 다시 투사가 된 것이다. 자신을 가지고, 사건과 인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는 전보를 탁자 위에 놓고, 그것을 주먹으로 쥐면서 외쳤다. "자, 보트를레 군, 이제 우리끼리 정말 솔직한 얘기를 해 보세!" 보트를레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 보려는 자세를 취했다. 뤼팽은 침착한, 그러나 쌀쌀한 말투로 시작했다. "탈은 벗어 던지세. 공연히 발라맞추는 짓거리도 그만두세. 우린 서로 상대방을 잘 알고 있는 적이야. 서로 적으로 행동하고, 적으로서 상대하세." "적으로서요?" 보트를레는 깜짝 놀랐다. "그렇지, 적으로서 상대하는 게 옳아. 그건 나로선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그리고 적에 대해서 괴롭다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말야. 그렇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세. 그러니 이런 기회를 잘 이용하란 말이야. 난 자네한테서 약속을 받지 않고선 여길 떠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있을 뿐이지." 보트를레는 더욱도 놀라 가지고 얌전하게 말했다. "이건 참으로 뜻밖입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난 당신을 그런 분으론 도무지 생각지 않았는데요. 왜 그렇게 성을 내십니까? 협박인가요? 우리가 적이라니..., 왜 그렇습니까?" "내 얘길 들어봐. 어떻게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하나의 사실에 있는 거야. 확실함,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사실에. 그건 말이야. 내가 최근 10년동안, 자네같이 강력한 적을 만나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야. 가니마르나 셜록 홈즈 따윈 어린애같이 대했었지. 그런데 자네에 대해선, 나는 늘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됐어. 아니, 그 보다도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됐단 말이야. 그래. 현재로선 내가 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이지도르 보트를레가 아르센 뤼팽을 이기고 있는 거야. 내 계획은 다 뒤집혀 버렸어. 내가 어둠 속에 감춰 두려고 애쓴 것을 자네는 다 밝은 데로 끌어내고 말았어. 자네는 내 방해만 하고, 내 길을 막아 버리는 거야. 정말 지긋지긋하다... 브레두가 자네에게 말했는데도 소용이 없었기에, 이제 내가 직접 자네에게 똑똑히 말해 두는 거야." 보트를레는 머리를 흔들었다. "결국, 어떻게 하나는 겁니까?" "가만히 있으라는걸세! 저마다 제 할 일이나 하라는 거지." "다시 말해서, 당신은 마음대로 도둑질을 하고, 나는 나대로 그냥 돌아가서 공부나 하라는 건가요?" "공부를 하든 말든, 자네 좋도록 하면 돼. 내겐 상관 없는 일이니까... 다만,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둬 달란 말이야." "어째서 내가 그렇게 방해가 된단 말씀입니까?" 뤼팽은 보트를레의 손을 꽉 잡았다. "잘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 하지 말아. 지금 자네는 나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쥐고 있어. 자네는 그 비밀을 알아 낼 권리는 있겠지만, 그것을 공표할 자격은 없잖은가?" "내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암, 알고 있고말고, 나는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자네의 생각과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었어. 브레두가 자네를 습격했을 때, 자네는 모든 것을 말해 버릴 뻔했어. 그랬는데 자네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폭로하기를 늦췄던 거야. 그런데도 오늘은, 이 신문에 약속을 했겠다! 기사는 다 준비돼 있겠지. 그래서 내일은 발표가 될 것이고..." "맞았어요." 뤼팽은 일어서서 한쪽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결코 발표시키지 못할거야!" "아니, 발표합니다!" 보트를레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맞서서 쏘아보았다. 그러자 뜻밖이 힘이 보트를레의 온몸에 용솟음쳤다. 마치 그의 가슴 속에서 어떤 불꽃이, 새로운 감정, 대담함, 자존심, 투지, 모험심에 불을 질러 놓은 것과도 같았다. 한편 뤼팽도, 원수의 칼앞에 나선 결투자처럼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기사는 넘겨 줬나?" "아직 안 넘겼소." "지금 갖고 있나... 몸에?" "그렇게 바보인 줄 아시오!" "그렇다면?" "겹봉투에 넣어서 기자에게 맡겨 놓았소. 내가 밤 12시까지 신문사에 가지 않으면, 그대로 인쇄하기로 돼 있소이다." "이런 고약한 놈같으니! 선수를 쳤구나." 뤼팽은 화를 버럭 냈다. 이제는 보트를레도 승리감에 취하여, 조롱하듯 비웃었다. "웃지 마라, 이 녀석아!" 하고, 뤼팽은 호통을 쳤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는 구나. 내가 하려고만 한다면... 이런, 웃고 있어!" 그들 사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한참 후, 뤼팽은 한 걸음 걸어나가 보트를레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랑 주르날> 신문사로 뛰어가라." "싫소!" "편집장을 만나라." "싫소!" "편집장에게, 기사가 틀렸다고 말해라." "싫소!" "다른 원고르 써라. 앙브뤼메지 사건에 관해서 세상에서 믿고 있는 대로 정식 발표해라." "싫소!" 뤼팽은 택상 위에 있는 쇠자를 집더니, 그것을 뚝 부러뜨려 버렸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그는 이마에 구슬처럼 맺히는 땀방울을 씻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자기의 뜻에 거역을 당해 본적이 없는 그는, 이 젊은이의 옹고집에 쩔쩔매고 있었다. 그는 보트를레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려 놓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 다오, 보트를레. 마지막의 발견으로 내가 죽은 것을 확인했으니까. 이 점에 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없다고, 그렇게 말해 다오. 내가 그러기를 바라니까. 모두가 내가 죽은 줄로 알고 있어야만 해. 그렇게 말해야 해. 무엇보다도 네가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네가 만약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네 아버지는 오늘 밤에, 가니마르나 셜록 홈즈처럼 납치당할거다." 보트를레는 빙그레 웃었다. "웃지 말고 대답해 보게." "대답하지요. 거역하는 건 대단히 안됐지만, 난 얘기한다고 약속했으니까 얘기해야겠소" "그럼 내가 말한 대로 얘기해." "난 진실대로 얘기할 거요." 하고, 보트를레는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런 건 당신이 이해 못 할지도 모르지만, 진실은 큰 소리로 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기사는 내가 쓴대로 실릴 겁니다. 뤼팽이 살아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뤼팽이 왜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죽은 줄 알아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의 이유도 알게 될 것이고요." 그리고,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 아버지는 납치되지 않아요." 두 사람은 또다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서로 상대방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서 있었다. 한참 후, 뤼팽이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내일 새벽 3시에, 내가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내 부하 두명이 네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네 아버지를 끌어 내다가, 사니마르와 셜록 홈즈가 있는 곳으로 보내도록 마련돼 있다." 보트를레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반말지거리로 대꾸했다. "하하, 선생께서 모르고 계셨구먼. 내가 예방책을 써놓았다는 것을! 그래, 내가 어리석게도 우리 아버지를 들판의 외딴 집으로 들어가시게 할 만큼 순진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나?" 오, 젊은이의 얼굴 위에 빛나는 유쾌한 웃음! 그의 입술 위에 떠오른 빈정거리는 웃음, 그리고 당당하게도 반말지거리를 함으로써 대번에 적과 같은 수준으로까지 뛰어오른 이 젊은이! 그는 계속 했다. "알겠나, 뤼팽. 자네의 커더란 결점은, 자네의 계략이 늘 완전무결하다고만 믿고 있는 점이네, 자네는 스스로 내게 졌다고 말했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네! 결국, 자네는 언제나 자네가 이기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남들에게도 계략이 있다는 걸 잊고 있어. 내 계략이야 매우 단순한 것이지만 말야." 그의 말은 매우 시원스러웠다. 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사슬에 매인 사나운 짐승을 건드리고 있는 장난꾸러기 꼬마처럼, 씩씩하고 활달하게 방 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정말 이 순간에야말로 그는, 이 대모험가에게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엄청난 복수를-세상에도 무서운 복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을 끝마쳤다. "뤼팽, 나의 아버지는 사봐 같은덴 계시지 않아. 프랑스의 그 반대쪽, 어느 큰 도시의 한복판에, 20명이나 되는 우리 편 사람들에게 보호를 받고 계시다네,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나? 세르부르의 병기고의 한 직원 집에 계시다네. 거기는 밤이면 문이 닫히고, 낮에도 출입증을 갖고 안내인과 함께가 아니면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 곳이야." 그는 뤼팽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친구에게 얼굴을 찡그려 보이는 아이들처럼, 뤼팽을 잔뜩 약올렸다. "더 할말이 있나, 선생?" 조금 전부터 뤼팽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서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행동으로 나오려는 것일까?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가지의 결말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즉, 적을 즉각 철저하게 쳐부순다는 것뿐이었으리라. 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세라도 보트를레에게 덤벼들어 목을 죌 것만 같았다. "더 할말이 있나, 선생?" 하고 보트를레는 되물었다. 그러자, 뤼팽은 탁자 위에 전보를 집어 보트를레에게 내밀면서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봐, 아가야, 이거나 읽어 봐라." 보트를레는 상대방의 태도가 너무나도 부드러운 데에 갑자기 불안해져서 정색을 했다. 그는 그 종이를 폈으나, 이내 얼굴을 들고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첫 글자쯤은 알겠지. 전보를 보낸 곳의 이름말이다. 잘 봐라, 셰르부르란 것을..." "그래... 그래...." 보트를레는 더듬거렸다. "그래..., 셰르부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도 역시 명백하지 않으냐? '짐은 다 옮겼다. 친구들도 같이 떠났다. 아침 8시까지 기다림. 이상없음.' 그래 뭐를 모르겠단 말이냐? '짐'이라는 말인가? 쳇! '보트를레의 아버지'라고 쓸 수는 없지 않겠나? 그 다음은 또 뭐야? 어떤 방법으로 그런 일을 했나고? 20명이나 호위가 있었는데, 네 아버지가 셰르부르 병기고에서 끌려 나간 기적 말이냐? 쳇! 그런 것쯤이야 어린애 장난이지! 어쨌든 짐은 보내 놓았다. 어때, 할 말있니, 아가야?" 보트를레는 온몸을 긴장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태연스런 얼굴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떨리고, 턱은 씰룩거리고, 눈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슨 말을 좀 더듬거리는가 싶더니, 입을 다물고는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 아버님...아버님..." 이 뜻하지 않은 결과는 뤼팽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도 했지만, 한없이 감동적이고 순진한 느낌을 자아내게도 햇다. 뤼팽은 그렇게 울먹이는 모습을 차마 볼수가 없다는 듯이 모자를 집었다. 그러나 문 앞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 망설이다가, 천천히 되돌아왔다. 조용한 흐느낌 속에 , 소년의 두 어깨는 애절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뤼팽은 그 위로 몸을 구부리고 말했다. "울지 마라, 아가야. 일단 싸움판에 뛰어든 이상, 이런 일쯤은 각오해야 돼. 힘을 내어 참아야지." 그 목소리에는 조금도 승리자다운, 사람을 모욕하는 듯한 데는 없었다. 뤼팽은 부드럽게 게속햇다. "네 말이 옳아. 우리는 적이 아냐.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너에 대해서, 너같이 총명한 존재에 대해서, 어쩐지 호감과 감탄을 느껴 왔다. 그러니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라. 하지만 이 말은 꼭 해두고 싶구나. 내게 맞서는건 그만두어라... 이건 허영심이나 경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너도 알겠지만, 싸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얼마나 무궁무진한 계책이 있는지 너는 잘 모르고 있다. 네가 알아 내려고 헛수고를 하고 있는 그 에귀유 크뢰즈(AIGUILLE CREUSE)의 비밀만 하더라도, 굉장한 무진장의 보물일지도 모르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희한한 은신처일지도 몰라... 내가 거기서 끌어 낼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생각해 보아라! 나는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다는 걸 너는 모르고 있어... 그런데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승리를 잡았다고 믿는 순간에, 그것은 네게서 빠져 나가 버리고 만다. 제발 그만둬! 그렇지 않으면, 나는 부득이 너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수 없게 돼. 그건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고는 보트를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되풀이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가야. 그만둬 다오! 난 너에게 고통을 주고 싶진 않다." 보트를레는 얼굴을 들었다. 이제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결정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뤼팽에게 말했다. "만약에 원고를 고쳐 써서, 당신이 죽은 것으로 한다면,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주시겠다고 맹세하시겠습니까?" "맹세한다. 내일 아침 7시에, <그랑 주르날> 신문의 기사가 내 요구대로 돼 있으면, 내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를 풀어 드리겠다." "좋아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보트를레는 말했다. 그는 얼른 일어나서 모자를 집어들고, 뤼팽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을 빠져 나갔다. 뤼팽은 보트를레가 나가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가엾은 녀석...." 기암성 (13)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진상의 폭로 이튿날 아침, <그랑 주르날> 신문의 제 1면에는 다음과 같이 보트를레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앙브뤼메지 비극의 진상 나는 이 글에서 두 가지의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사건 전체를 설명하려고 한다. 다음에 말하는 사실들 중의 어떤 것은 증명된 것이 아니고, 나의 가정으로 메워져 있는데, 이러한 가정도 사실은 엄밀한 확실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첫째의 수수께끼에 관해서 말하겠다. 즉, 치명상을 입었다고 볼 수 있는 뤼팽이 40일간이나, 캄캄한 굴 속에서 구완도 받지 않고, 약과 먹을 것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사건의 시초로 돌아가자. 4월23일 목요일 오전 4시, 아르세느 뤼팽은 대담하기 짝이 없는 강도질을 하다가 들켜 폐허쪽이 길로 달아나던 중,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이끌고 가다가 다시 일어났다. 거기에는 그가 우연히 발간한 지하실이 있으니, 거기에 숨을 수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리로 다가갔다. 몇 미터밖에 안 남았을 때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기진맥진한 그는 단념했다. 적이 왔다. 그것은 레이몽드 드 생 베랑 양이었다. 이것이 비극의 서막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처녀의 발 아래에는 죽어가는 부상자가 있다. 그는 2분 후에는 체포되리라. 그런데, 이 사나이는 그 여자가 쏜 총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 여자는 그를 수사관의 손에 넘길 것인가? 만약에 그가 쟝 다발을 죽였다면, 그렇지, 그 여자는 그를 운명에 맡겼으리라. 그러나 그는, 다발이 제브르 백작의 정당 방위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얼른 말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그의 말을 곧이들었다. 그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다. 여자는 자기가 상처를 입힌 사나이를 수사관의 손에 넘길 것인가? 여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억제할 수 없는 측은한 마음에서, 처녀는 그를 도왔다. 그 여자는 뤼팽이 몸짓으로 시키는 대로, 핏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기의 손수건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그러고는 뤼팽이 내주는 열쇠로 예배당의 문을 열었다. 그는 처녀의 부축을 받아 들어갔고, 그 여자는 다시 문을 잠그고 떠났다. 만약, 이 때에 예배당을 뒤졌더라면, 뤼팽은 미처 기운을 회복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돌을 떠들고 지하실의 계단을 내려가 자취를 감추지 못하고 붙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당을 뒤진 것은 6시간 후였으며, 그것도 건성이었을 뿐이다. 이리하여 뤼팽은 목숨을 건졌는데, 그것은 누구에 의해서였던 것인가? 하마터면 자기를 죽일 뻔했던 여성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그 후부터, 생 베랑 양은 본의든 아니든 간에, 그의 공범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그를 경찰에 넘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간호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부상자는, 자신이 도와서 숨겨 준 은신처에서 죽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앞을 내다보고, 모든 꾀를 다 썼다. 판사에게 아르센 뤼팽의 생김새를 거짓으로 말한 것도 바로 그 여자다. (이 점에 관해서는 두 사촌형제 간의 의견이 서로 어긋났던 일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뤼팽의 공범자가 운전사로 변장하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운전사에게 알린 것도 그 여자다. 가죽 모자를 바꿔친 것도, 그 여자를 협박하는 편지를 쓰게 한 것도 그 여자다. 그렇게 해 놓으면 아무도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판사에게 내 생각을 말하려고 했을 때, 전날 샛문 바깥길에서 나를 보았다고 말하며, 피욜 씨에게 나를 의심하게 만들어 내 입을 다물게 한 것도 그 여자다. 그것은 확실히 위험한 술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주의를 불러 일으켜, 거짓 고발로 나를 괴롭힌 그 여자에 대해서 경계심을 품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유효한 술책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시간을 벌 수가 있었고, 내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으니까. 이리하여 그 여자는 40일 동안, 뤼팽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약을 주고, 그를 간호하여 완쾌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첫째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아르센 뤼팽은 첫째는 들키지 않기 위해, 다음엔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했던 구원을 자기의 곁에서, 바로 저택 안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지금 뤼팽은 살아있다. 그래서 둘째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것이 앙브뤼메지의 제 2의 비극에 해당하는 것이다. 뤼팽은 살아나서 자유로운 몸이 되고, 또 다시 일당의 두목으로 전과 같이 실권을 쥐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가 어찌하여 경찰과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죽은 것으로 믿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는가? 나는 그의 그러한 노력과 끊임없이 무딪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생 베랑 양이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뤼팽은 40일 동안 이 아름다운 처녀를 대할 수 있었는데, 그 여자가 옆에 없을 때에는 있어주기를 바라고, 옆에 있을 때에는 그 매력과 아리따움에 괴로워하고, 마침내는 자기를 돌봐 주는 여인에게 반해버렸던 것이다. 감사는 사랑으로 변하고, 찬미는 정열로 번해버렸던 것이다. 그 여자는 구원인 동시에, 그의 눈에 즐거움이었고, 외로운 때의 꿈이었고, 그의 빛이요 희망이었으며, 그의 생명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 베랑 양은 뤼팽의 사랑에는 무관심했으므로, 그를 찾아갈 필요가 적어짐에 따라, 점점 찾아가는 일이 뜸해지다가, 그가 다 낫자 발길을 끊어 버린다... 그러자 그는 절망하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무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은신처에서 나와 습격을 준비하고, 6월6일 토요일, 일당의 도움을 받아 처녀를 납치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 납치 사건을 아무도 모르게 해야만 한다. 수사도, 추측도, 희망조차 완전히 막아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 베랑 양을 죽은 것으로 믿게 해야만 한다. 살인을 가장하고, 수사에 대처해서 증거를 만들어 둔다. 그러면 범행은 확실해질 테니까. 게다가 이 범행은, 공범자가 예고했던 대로, 두목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서 실행된 것처럼 꾸몄으니, 이 얼마나 교묘한 생각인가! - 이것은 과연, 두목의 죽음을 믿게 하는 실마리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믿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확증을 주어야 한다. 뤼팽은 내가 참견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곧 예배당의 속임수를 알아채리라. 그리고 지하실을 발견하리라. 그런데 지하실이 비어 있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계획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리리라. 지하실이 비어 있어선 안된다! 마찬가지로 생 베랑 양의 죽음은, 바닷물이 그 여자의 시체를 밀어 올리지 않는다면, 결정적인 것이 못되리라. 바닷물이 생 베랑 양의 시체를 밀어 올린 것처럼 하자! 이 두가지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 뤼팽 이외의 사람에게는, 그러나 뤼팽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그가 예측한 것처럼, 나는 예배당의 속임수를 알아채고, 지하실을 발견하고, 뤼팽이 숨어 있었던 지하실 속으로 내려갔다. 그의 시체가 거기에 있었다. 뤼팽의 죽음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순간도 그런 추측은 인정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곡괭이로 움직여진 돌덩이가 슬쩍 닿기만 해도 떨어져서, 가짜 뤼팽(시체)의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어,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게 하려고 거기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곧 알아챘다. 또 하나의 발견이 있었다. 그 후 반 시간이 지나서, 생 베랑 양의 시체가 디에프의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나는 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이 처녀의 것과 비슷한 팔찌를 끼고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생 베랑 양의 시체라고 믿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시체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때 나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고, 또 이내 알아챘다. 며칠 전에 나는 디에프의 <라 비지> 신문에서, 앙베르뫼에 묵고 있던 젊은 미국인 부부가 음독자살을 했는데, 바로 그 날 밤에 그들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앙베르뫼로 달려갔다. 그 이야기는 사실이었으나, 시체가 없어졌다는 점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두 자살자의 형제들이 시체를 찾으러 와서, 검시가 끝난 뒤에 운반해 갔기 때문이었다. 이 형제들이라는 자들이 아르센 뤼팽과 그 일당이었음을 의심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증거는 나온 셈이다. 우리는 아르센 뤼팽이 처녀를 죽인 것으로 가장하고, 자기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세상에 믿게 하려고 한 이류를 알고 있다. 그는 사랑을 하고 있고,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는 어떠한 일도 꺼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와 생 베랑 양의 역할을 연출시키기 위해, 두 시체를 훔친다는 믿을 수 없는 일까지도 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가 숨기려 하고 있는 진상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무도? 아니다..... 뤼팽은, 적어도 세 사람만은 좀 의심을 품을지도 모르리라고 생각했다. 즉, 가니마르와 셜록 홈즈와 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니마르를 납치했다. 셜록 홈즈도 납치했다. 그리고 브레두를 시켜 나를 칼로 찔렀다. 다만, 애매한 점이 한 가지 남아 있다. 왜 뤼팽은, 내게서 에귀유 크뢰즈의 종이 조각을 빼앗으려고 그렇게도 기를 썼던 것인가? 설마, 그것을 되찾아 가기만 하면, 다섯 줄로 되어 있는 그 글을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그 글의 내용보다도 그 종이 조각 자체나 그 밖의 무슨 실마리가 나에게 어떤 정보를 줄까봐 염려가 되었던 것일까? 그야 어쨌든, 앙브뤼메지 사건의 진상은 이상과 같다. 거듭 말하거니와, 내 설명과 내 자신의 조사 속에는 가정이 상당한 구실을 하고 있다. 뤼팽과 싸우는 경우, 증거와 사실만을 기다린다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뤼팽이 준비해 놓은,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론으로 유도되는, 그런 증거와 사실을 발견하게 될 우려가 많은 것이다. 사실들이 모두 밝혀지는 날에는, 나의 가정은 모든 점에서 확증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 바이다. 이리하여 보트를레는, 한때 아르센 뤼팽에게 정복당하고, 아버지의 납치에 당황하여 패배한 것으로 체념했으나, 결국은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진상은 너무나도 희한하고 기기묘묘했으며, 그가 할 수 있었던 증명은 너무나도 논리적이고 명확했으므로, 그는 진상을 그릇 전하기를 용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온 세상이 그의 진상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던 것이다. 그의 기사가 발표된 바로 그 날 저녁에, 여러 신문들은 보트를레의 아버지의 납치 사건을 일제히 보도했다. 보트를레 자신은, 3시에 세르부르에서 보내 온 전보로 이미 그 것을 알고 있었다. 기암성 (14)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추적 너무나도 호된 타격에, 소년 보트를레는 한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가 그 기사를 발표하게 된 것은, 어떠한 신중성도 무시하게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열정에 이끌려서 한 일이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설마하니 아버지가 납치되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는 충분히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르부르의 친구들은 아버지를 보호하고, 혼자만은 결코 밖에 내보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지도 먼저 뜯어 본 뒤라야 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위험은 없다. 뤼팽은 위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트를레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번의 타격은 정말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고 손을 쓰자는 것이었다. 그는 저녁 8시 급행을 탔다. 기차 안에서, 그는 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무심코, 플랫포옴에서 샀던 저녁 신문을 펴 보았다. 거기에는, 아침 신문의 그의 기사에 간접적으로 대답하는 뤼팽의 편지가 실려 있었다. 편집국장 귀하,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이런 평범한 시대에는 세상의 주목거리가 되는 모양입니다만, 사생활에는 일반대중의 불건전한 호기심이 뛰어넘어서는 안 될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진실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까? 이제 진실은 다 알려져 있으며, 나는 그것을 서슴지 않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 베랑 양은 살아 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보트를레 소년의 조사는 완전히 정확합니다. 모든 점에서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마음의 상처를, 내 가슴 속의 감정을, 깊이 깊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조용한 생활을 바라고 있습니다. 생 베랑 양의 애정을 얻기 위해서도, 가난한 그 여자가 숙부와 사촌동생으로부터 받았던 수 많은 작은 모욕들을 그 여자의 기억에서 지워주기 위해서도 조용한 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 여자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비록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얻기 힘든 보물이라 할지라도, 그 여자의 발 아래에 갖다 바칠 것입니다. 그 여자는 행복해 질 것이고, 나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조용한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며, 또 적에게 화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이 그것을 거절한다면, 매우 중대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 둡니다. 그리고, 하알링턴 씨에 관해서도 한 마디 말씀해 두겠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의 백만 장자인 쿨리 씨의 비서로서, 주인으로부터 유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옛 미술품을 모아 들이라는 명령을 받은 훌륭한 청년입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내 친구 에티엔 드 보르레, 즉 아르센 뤼팽인 나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제브르 백작의 네 폭의 루벤스의 그림과 예배당의 조각품을 안전한 곳에 옮긴 날까지, 내 친구 보드레와 하알링턴 씨 사이에는 성실한 거래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하알링턴 씨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불행한 미국인을 풀어 주고, 백만 장자인 쿨리 씨를 혼내 주고, 내 친구 에티엔 드 보드레, 즉 나를 칭찬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알링턴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속기만 한 무고한 사람이기 때문이며, 쿨리 씨는 난처한 일이 생길까봐, 자기의 비서가 억울하게 잡혔는데도 두둔하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드레, 즉 나는 이 인정머리 없는 쿨리 씨로부터 미리 받은 50만 프랑의 돈을 돌려 주지 않고 지니고 있음으로써 그의 비 양심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하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르센 뤼팽 보트를레는 기차 안에서 이 편지를 읽고, 몇 시간이고 불안해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 이런 편지를 신문에 냈을까? 그것은 마치 보트를레 자기를 속이기 위해 쓴 것 같기만 했다. 소년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으로 납치를 당한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자, 이렇듯 상대하기 힘든 무서운 적과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은 철없는 짓이 아닌가 싶어, 한없이 괴로웠다. 싸우기도 전에, 이미 뤼팽은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풀이 죽은 것도 잠시일뿐, 몇 시간을 푹 자고 나니 그는 다시 기운이 회복되었다. 그가 아침 6시에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완전히 자신을 되찾아 가지고 있었다. 역에는, 보트를레의 아버지를 머물러 있게 해 준 병기고의 직원 프로베르발이, 13세 난 딸 샤를로트를 데리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그들을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납치되시다니,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요?" "그럴 리는 없겠는데, 아무튼 행방 불명이 되셨단 말이야." "언제부터입니까?" "그걸 모르겠어." "뭐라구요?" "어제 아침 6시에, 여느 때처럼 내려오시질 않기에, 내가 올라가서 문을 열어봤더니 안 계셨어." "그러나 그저께는 계셨겠지요?" "그럼, 그저께는 방을 떠나시지 않으셨어. 좀 피곤하다고 하시기에, 샤를로트가 정오에 점심과 오후 7시에 저녁 식사를 갖다 드렸지." "그렇다면 아버지가 없어지신 건, 그저께 저녁 7시와 어제 아침 6시 사이였군요?" "그래, 그저께 밤이야. 그런데 밤중엔 아무도 병기고에서 나갈 수가 없는데...." "그래도 역시 나가셨으니까 안 계시는 거겠죠!" "그럴 리가 없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는걸." "침대에 이불이 펴져 있었던가요?" "아니," "방도 꺠끗이 치워져 있었고요?" "그래, 파이프도 담배도 읽으시던 책도, 다제자리에 있었어. 그 책 속에 자네의 이 조그만 사진도 있더군." 보트를레는 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폐허와 나무가 있는 잔디밭에서,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서 있는 자기의 사진임에 틀림없었다. "이건 내가 보낸 사진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앙브뤼메지의 폐허에서 찍힌 겁니다. 아마 판사의 서기가 한 짓이겠지요. 그 녀석은 아르센 뤼팽의 일당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사진을 가지고 아버지를 믿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해서 내 집에 들어올 수가 있었겠나?" "그건 나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속임수에 넘어가신 건 확실합니다. 내가 근처에 와 있는데 아버지를 만나 보고 싶어한다고, 누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그 말을 곧이 들으셨겠지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 곳에 가시자, 놈들이 덮쳐 버렸겠지요." "하지만 아버님은 그저께 온종일방을 떠나지 않으셨고, 밤중엔 아무도 드나들질 못하는데...?" "그야 알아보는 길이 있습니다. 그저께 병기고에서 보초를 선 사람을 만나 보십시오. 빨리 갔다오세요." 프로베르발이 나가고, 보트를레와 샤플로트만이 남아 있었다. 소년과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보트를레는 다정스럽게 소녀의 손을 잡았다. 소녀는 숨이 막힌 듯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소년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두 팔 속에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소녀가 우는 것을 가만히 보고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다 네가 한 일이지? 사진을 갖다 드린 것도 바로 너고, 그렇지? 안 그래? 우리 아버지가 그저께 방에 계셨다고 말했지만, 안 계셨다는 걸 너는 이미 잘 알고 있었지? 우리 아버지가 밖에 나가시는 걸 네가 도왔으니까 말이야...." 그는 소녀의 팔을 풀고 얼굴을 들게 했다. 가엾게도 그 얼굴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자, 이제 다 끝났어. 이런 얘기는 그만 하자... 그러나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다 얘기해 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이라도 하는 걸 못 들었니? 어떻게 해서 모셔 갔니?" 소녀는 곧 대답했다. "자동차로... 그 사람들이 자동차 얘기 하는 걸 들었어요." "그래 어느 길로 갔지?" "그런 건 몰라요."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슨 말을 하지 않던?" "아니... 그렇지만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서둘러야 겠어. 내일 아침 8시에, 두목이 그리로 전화를 걸 테니까.'라고 말이예요." "그리로라니? 어디야? 잘생각해봐. ... 무슨 도시의 이름이 아니던?" "그래요... 사토... 뭐라는 이름이었는데..." "샤토브리앙? 샤토 티에리?" "아니, 그런 이름이 아니었어요...". "샤토루?" "맞았어요. 샤토루예요." 보트를레는 소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일어나서, 문을 열고 역으로 달려갔다. 기암성 (15)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아버지의 편지 이튿날 아침, 보트를레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딴 사람으로 변장하여, 샤토루에 도착했다. 큼직큼직한 바둑판 무늬의 밤색 양복에 짧은 바지를 입고, 기다란 털양말에 여행용 모자를 쓴데다 얼굴은 빨갛게 칠하고 갈색 수염을 달고 있는 품이 영락없이 30세 쯤 되어 보이는 영국인 같았다. 샤토루에서 알아본 결과, 보트를레의 아버지가 그 부근에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는 희망에 부풀어 2주일간이나 찾아 다녔다. 그러나 아무런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차츰 자신을 잃어 갔다. 그래도 실망을 안은 채, 며칠을 더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통해 제브르 백작 부녀가 앙브뤼메지를 떠나 니스 근처로 이사갔다는 소식을 알았다. 그리고 하알링턴씨가 풀려 났다는 것도 알았다. 아르센 뤼팽의 말대로, 그의 무고함이 밝혀졌던 것이다. 보트를레는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아무 보람도 없이, 마침내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월요일 아침, 그는 파리에서 되돌려 보내진, 우표도 붙어 있지 않은 편지 한 통을 받고 매우 놀랐다. 봉투에 적힌 것은 아버지가 쓴 글씨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손이 떨려서, 한참 동안, 감히 뜯어 보지도 못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이것은 저 악독한 적이 꾸며놓은 함정이 아닐까? 이윽고 보트를레는 뜯어 보았다. 그것은 확실히 아버지께서 손수 쓴 아버지의 편지였다. 그는 읽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편지가 네 손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납치된 날 밤은, 밤새도록 자동차에 실려간 뒤, 아침에 마차로 옮겨졌다. 내 눈은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볼수 없었다. 내가 갇혀 있는 성은 건축과 정원의 식물로 판단하건대, 프랑스의 중부 지방에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들어 있는 방은 3층에 있고 창이 두 개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등나무 덩굴로 거의 막혀 있다. 오후엔 때때로 정원을 자유롭게 거닐 수 있으나, 감시는 엄중하다. 나는 요행을 바라고 이 편지를 써서 돌에 묶어 놓는다. 언젠가는 이것을 성벽 밖으로 던질 수 있겠지. 그러면 어느 농부가 주워 갈지도 모른다. 걱정하지는 말아라. 대우는 잘 해주고 있으니까. 너를 사랑하고 있는 이 늙은 아비는, 네가 나를 걱정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괴롭구나. 보트를레. 보트를레는 곧 우체국 스탬프를 보았다. 퀴종(앵드르도)이라고 찍혀 있었다. 앵드로도라면, 몇 주일 전부터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곳이 아닌가! 그는 늘 지니고 다니던 소형 안내서를 들여다 보았다. 퀴종이란 마을은 에귀종에 있다.... 거기도 지나갔던 곳이다. 그는 영국인의 변장을 집어치웠다. 이 고장에서는 이미 눈에 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농부 차림을 하고 퀴종으로 떠났다. 그 곳은 조그마한 마을이었으므로, 편지를 부쳐 준 사람을 쉽사리 찾아 냈다. "지난 수요일에 부친 편지 말인가...?" 하고 촌장은 말하면서, 친절히 상의에 응해 주었다. "토요일 아침에, 칼을 가는 샤렐 영감을 길에서 만났더니, '촌장님, 우표가 없는 편지도 들어가나요?'하고 묻기에, '그럼, 들어가고 말고! 다만, 받아보는 쪽에서 돈은 치러야지.'라고 대답해줬어." "어디서 오나요, 그 샤렐 영감님은?" "프레슬란에서." "그럼, 그 편지는 거기서 오다가 주웠겠군요." "그렇겠지." 다음 금요일, 프레슬린에서 장이 서는 날, 보트를레가 장터의 주막집에서 점심을 먹고 막 나오려니까, 샤렐 영감이 손수레를 밀면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곧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의 뒤를 밟았다. 샤렐 영감은 도중에 두 군데서 걸음을 멈추고, 오랜 시간 동안 수십개의 칼을 갈았다. 그러고는 크로쟝과 에귀종 쪽으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보트를레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5분도 채 못 걸어가서, 영감의 뒤를 발고 있는 것이 자기 혼자만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사나이가 걸어가는데, 샤렐 영감이 걸음을 멈추면 그도 서고, 다시 떠나면 그도 걷는 것이었다. '영감을 감시하고 있구나. 영감이 편지를 주운 걸 눈치채고, 영감이 담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지 어쩌는지 알아보려는 것이겠지.' 하고 보트를레는 생각했다. 그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 성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고장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여, 크로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샤렐 영감은 한 시간 쯤 쉬었다. 그런 뒤에 그는 내를 건넜다. 그런데 이때, 보트를레가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그 알 수 없는 사나이가 내를 건너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는 영감이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더니, 보이지 않게 되자, 들판 가운데로 통하고 있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어떻게 한담?' 보트를레는 어느 쪽을 따라갈까 한참 망설이다가, 딱 마음을 정하고, 그 알 수 없는 사나이의 뒤를 빠짝 따르기 시작했다. '저 놈은, 샤렐 영감이 곧장 가 버린 것을 보고 안심한 게로구나.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성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하고 보트를레는 생각했다. 그 사나이는 개천 위에 솟아 있는 어두컴컴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에 다시 밝은 오솔길로 나왔다. 보트를레도 숲에서 나왔으나, 그 사나이가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랐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하고는, 얼른 뒷걸음질쳐서 방금 나왔던 숲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오른쪽에 높다란 성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기다! 저기다! 저 성벽 안에 아버지께서 갇혀 계신 거다! 뤼팽이 희생자들을 가둬 두고 있는 비밀의 장소는 드디어 발견된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거의 기다시피하여,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성벽은 언덕보다도 더 높았다. 그런, 그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저택의 지붕을 볼 수 있었다. 이 지붕에는 끝이 뾰족한 높은 탑이 솟아 있고, 찹의 주위에는 가느다란 종루가 뺑 둘러서 있었다. 보트를레는, 이 날은 그만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깊이 생각하여 작전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뤼팽을 여기까지 쫓아온 이상, 싸우는 시간과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렸다고 생각하고, 그는 그 곳을 떠났다. 다리 옆에서 그는, 우유를 가득 담은 통을 메고 가는 두 여인을 만나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저 숲 뒤에 있는 성은 뭐라고 부릅니까?" "저건 에귀유의 성이라고 해요." 그저 무심코 물어 봤던 것인데, 그런 대답에 그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귀유 성이라고요! .... 아, 그래요!... 그런데 여기는 어딘가요? 앵드르 도인가요?" "아녜요. 앵드르 도는 개천 저쪽이어요.... 여기는 크뢰즈랍니다." 보트를레는 눈이 아찔했다. 에귀유 성! 크뢰즈 도! 에귀유 크뢰즈! 그 종이 조각의 열쇠다!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이 이기리라.....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여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걷기 시작하였다. 기암성 (16)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역사상의 비밀 보트를레는 당장에 결심했다. '이번에는 나 혼자서 행동하리라!' 고, 경찰에 알리면, 발은 더뎌지고 비밀은 새어나가며, 그러는 사이에 뤼팽은 반드시 눈치를 채고 유유히 달아나 버리리라. 이튿날 아침 8시에, 그는 짐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묵고 있던 퀴종 근처의 주막집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맨 먼저 눈에 뜨인 덤불 속으로 들어가, 농부의 옷을 벗고 전처럼 영국인 화가로 변장했다. 그러고는, 이 고장에서는 가장 큰 읍인 에귀종의 공증인을 찾아갔다. 그는 공증인에게, 이 고장이 마음에 들어 적당한 집이 있으면 부모님과 함께 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증인은 몇 군데의 집을 알려 주었다. 보트를레는, 에귀유 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넌지시 말을 던져 보았다. "글세요, 하지만 에귀유 성은, 5년 전부터 우리 집 손님의 것으로 돼 있는데, 팔 집이 아닙니다." "그럼, 그 사람이 살고 있겠군요?" "그 사람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성이 좀 음산해서 마음에 안 든다며 작년에 떠나버렸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안 사나요?" "아니요. 이탈리아 사람 한 분이, 여름철에만 세 들어 살고 있는데, 안프레디 남작이라는 분입니다." "그래요? 안프레디 남작이라면, 아직 젊은 편이고 점잖게 생긴 분이죠?"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남작이 손님과 직접 계약을 했거든요. 그것도 계약서를 주고 받은 것이 아니고, 편지만으로 그렇게 정해 버렸대요..." "하지만 남작을 알고는 계시겠죠?" "아니요, 성에서 통 나오질 않아서... 더러 나온다 하더라도, 자동차로 밤중에만 나오는 모양이니 말입니다. 장은 늙은 식모가 보고 있는데, 그 여자도 통 말을 않는답니다. 참 이상한 사람들예요...." "댁의 손님은 그 성을 팔지 않을까요?" "안 팔겁니다." "그 분의 성함이 뭡니까?" "루이 발메라라는 분인데, 주소는 몽 타보르 거리 34번지입니다." 보트를레는 가까운 역으로 가서 파리행 기차를 탔다. 다음 날, 세 번이나 헛걸음을 친 뒤에야 겨우 루이 발메라 씨를 만날 수 있었다. 30세쯤 된, 솔직하고 호감이 가는 사나이였다. 보트를레는 굳이 돌려 말할 필요도 없을 듯 싶어 솔직히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틀림없이 아버지는 그 에귀유 성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다른 희생자들도 같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집에 전세 들어 있는 안프레디 남작에 관해서 알고 계신 바를 좀 알아보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나도 잘은 모릅니다만, 작년 겨울에 몬테카를로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 때 우연히 내가 성의 임자라는 걸 알아 가지고, 프랑스에서 여름철을 지내고 싶으니 성을 빌려 달라고 하더군요." "아직 젊은 사람이죠?" "그렇습니다. 눈이 날카롭고 머리는 금발이고." "수염은요? " "끝이 둘로 갈라져 있더군요. 그리고 어딘지 영국 목사처럼 생겼습니다." "그 놈이예요. 바로 그 놈이예요!" 하고 보트를레는 중얼거렸다. "아니! 그 놈이라니요?" "댁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은 아르센 뤼팽임에 틀림없습니다." 루이 발메라는 이 말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뤼팽의 모험도 보트를레와의 싸움의 결과도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을 비비면서 기뻐했다. "이젠 에귀유 성도 유명해지겠구나.... 빨리 팔아 치워 버리려고 했는데. 이젠 됐어. 다만...." "다만...?" "다만 신중히 행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대방이 뤼팽이고 보면...." 보트를레는 자기의 계획을 말했다. 밤중에 혼자 담을 뛰어넘겠다는 것이었다. 루이 발메라는 곧 그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높은 담은 쉽사리 뛰어넘지 못할 겁니다. 설령 뛰어넘었다 하더라고, 저의 어머니께서 기르시던 두 마리의 사나운 개가 아직도 성 안에 있으니까요." "그까짓 것들! 독만두라도 먹이죠, 뭐." "좋겠죠! 하지만 개는 그렇다 치고, 그 다음에 건물 안엔 어떻게 들어가시렵니까? 문은 튼튼하고, 창에는 창살이 달려 있어요. 그뿐인가요, 들어갔더라도 누가 안내를 합니까? 방이 80개나 있는데." "하지만 3층의, 창이 둘 달린 방인 걸요." "오, 그것이라면 알아요. 등나무 방이라고 불리는 방입니다.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찾아 내겠어요? 계단이 세 개나 있는데다가 복도가 얼마나 복잡하다고요. 지금 아무리 설명해 드려도 소용 없을 겁니다." "그럼, 같이 가 주실 수는 없을까요?" 하고, 보트를레는 웃으면서 말했다. "안돼요. 어머니와 프랑스 남쪽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거든요." 보트를레는 여관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막 떠나려고 했을 때, 뜻밖에 발메라 씨가 찾아왔다. "내가 같이 가 드릴까요?"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럼 같이 가십시다. 이런 모험은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자, 이게 내가 헙력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면서 발메라는 빨갛게 녹이 슨 커다란 열쇠를 보트를레에게 내주었다. "이 열시로 열 수 있는 문은?" 하고 보트를레는 물었다. "성벽에 오랫동안 버려 둔 채로 있는 비밀의 샛문 열쇠요. 그건 세 들어 가는 사람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답니다. 들판 쪽 숲 기슭에 뚫려 있어요." 그러자 보트를레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놈들은 그 비밀 문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따라가던 그 사내가 정원으로 들어간 건, 틀림없이 그 문으로 였어요. 어쨌든 이번 싸움만은 우리가 이길 겁니다. 물론 섣불리 굴어선 안 되겠지만요!" 그로부터 이틀 후, 여윈 말이 끄는 떠돌이 마차 한 대가 크로장에 도착했다. 마부는 마차를 마을 변두리에 있는 외딴 헛간에 넣어 두는 것을 허락받았다. 마부는 발메라였다. 그 밖에 세 청년이 버드나무 가지로 의자를 엮고 있었는데, 그들은 보트를레와 장송 고등 학교에 다니는 그의 두 친구였다. 그들은 달빛없는 밤을 기다려, 따로따로 정원 근처를 얼쩡거리면서, 거기서 사흘을 묵었다. 그 동안 보트를레는 한번 성벽의 샛문을 보러 갔다. 그것은 가시 덤불에 가려져 있었고, 성벽의 돌 무늬와 뒤섞여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흘 째 저녁에야, 하늘에 커다란 검은 구름이 끼었으므로, 모두들 사정을 살피러 가기로 결정했다. 기암성 (17)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공격 네 사람은 작은 숲을 지났다. 그런 뒤에, 보트를레는 덤불 속을 기어가, 가시 울타리에 손을 여기저기 찢기면서 반쯤 몸을 일으켜, 열쇠를 살그머니 자물쇠에 꽂고 살짝 돌렸다. 그러고는 문을 미니, 문은 삐꺽거리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열렸다. 그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보트를레 군, 잠깐 기다려, 그리고 자네들 둘은 나갈 길이 끊기지 않도록 문을 지켜봐줘." 그렇게 말하고는, 발메라는 보트를레의 손을 잡고 캄캄한 나무 사이를 거쳐 잔디밭가로 나왔다. 때마침 한 줄기의 달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뾰족뾰족한 종루들로 둘러싸인, 바늘 끝 모양의 탑이 솟은 성이 보였다. 에귀유 성이란 이름은, 이러한 탑의 모양에서나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창에는 불빛 하나 없었고, 소리 하나 들려 오지 않았다. 발메라가 동행자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쉿!" "뭐요?" "저기에 개가 있어...." 개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메라는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두 마리의 하얀 그림자가 뛰어와서, 주인의 발 밑에 뒹굴며 몸을 비벼댔다. "얌전히 굴어라.... 거기 누워! 됐어... 이젠 움직이지 마라." 그러고는 보트를레에게 말했다. "자, 이제 가지, 안심이야." "길은 틀림없겠죠?" "그럼, 지금 테라스에 가까이 왔어. 거기에 잘 안 닫히는 겉창이 하나 있는데, 바깥에서 열 수가 있어." 아닌게 아니라, 거기에 가서 조금 당겨 보니, 겉창은 곧 열렸다. 발메라는 유리칼로 창유리 한 장을 잘라 내고, 걸쇠를 돌렸다. 그런 뒤에 그들은 한 사람씩 발코니를 뛰어넘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발메라가 말했다. "이 방은 복도 끝에 있어. 다음 칸은 널따란 현관인데, 그 저쪽 끝에 계단이 있고, 그리로 올라가면 아버님이 계시는 방으로 갈 수가 있어." 그러고 나서 그는 한 걸음 내디뎠다. "따라오고 있지, 보트를레?" "예, 예." "아니, 안 오지 않아?... 왜 그래?" 그는 보트를레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싸늘했다. 그리고 그는 보트를레가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왜 그러는 거야?" "아무것도 아녜요. ... 좀 무서워요." "무서워?" "예." 하고 , 보트를레는 솔직하게 말했다. "주눅이 든 거예요. 주위가 하도 고요해서... 그러나 곧 괜찮아질 거예요... 자, 인제 괜찮습니다." 과연 그는 일어섰다. 발메라는 그를 방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그들은 더듬더듬 복도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하도 조용조용히 걸어갔으므로, 서로 상대방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향해 가고 있는 현관에는 희미한 불빛이 있는 것 같았다. 발메라가 기웃해 보니, 계단 아래에 탁자가 있고 그 위에 희미한 등불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하고 발메라는 속삭였다. 희미한 등불 옆에, 총을 든 한 사내가 파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본 것일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인기척을 느꼈음에는 틀림없다. 총을 겨누었으니 말이다. 보트를레는 큰 화분에 몸을 붙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꼼짝 않고 있었는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러는 동안 파숫군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아무것도 움직이는 기척이 없으므로, 안심한 듯 총을 내렸다. 그러나 머리는 여전히 화분 쪽으로 돌린 채로였다. 10분, 15분, 무서운 시간이 흘렀다. 계단의 창으로 달빛이 새어 들었다. 보트를레는 문득, 그 달빛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15분이나 10분도 못 가서, 자신은 달빛에 훤히 드러나게 되리라. 땀방울들이 그의 얼굴에서 떨리는 손 위로 떨어졌다. 그는 너무나도 무서워서, 하마터면 일어나서 달아날 뻔했다. 그러나 발메라가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나서, 눈으로 찾아보았다. 그런데, 그가 어둠 속을 기어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척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발메라는 벌써 계단 아래, 파숫군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그냥 지나갈 셈인가? 혼자 올라가서, 갇혀 있는 사람을 구출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지나갈 수가 있을까? 이제 발메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았다. 답답하고 무서운 고요가 그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느닷없이, 사람 그림자 하나가 파숫군에게 달려들었다 등불이 꺼지고, 맞붙어 싸우는 소리가 났다. 보트를레는 재빨리 뛰어갔다. 두 사람의 몽둥이가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보트를레는 그것을 들여다 보려고 몸을 구부렸다. 그때 신음 소리와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보트를레의 팔을 잡았다. "빨리 가자!" 그는 발메라였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가, 양탄자가 깔린 복도의 입구로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넷째번 방이야." 하고 발메라는 속삭였다. 그들은 이내 그 방의 문을 찾아 냈다.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대로,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 자물쇠를 부수는 데에 그들은 30분이나 숨을 죽이고 소리를 내지 않도록 애를 써야만 했다. 마침내 방으로 들어갔다. 보트를레는 더듬더듬 침대를 찾아 냈다. 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는 아버지를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저예요. 이지도르예요... 그리고 친구 한 사람하구요... 아무 걱정 마세요... 일어나세요. 아무 말씀 마시구요..." 아버지는 옷을 다 입고 방을 막 나서려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 안에 갇혀 있는 건 나혼자가 아니다." "또 누구예요 가니마르? 호움즈?"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못 봤다." "그럼 누구예요?" "처녀 하나가 있어." "틀림없이 생 베랑 양이겠죠?" "이름은 모르지만... 정원에 있는 걸 여러 번 멀리서 봤다... 그리고 내가 창에서 몸을 내밀면 그 여자가 있는 방의 창이 보인다. 그럴 때면 내게 손짓을 했지." "어느 방인지 아세요?" "응, 이 복도의 오른쪽 셋째 번 방이다." "푸른 방이구나...." 하고 발메라가 중얼거렸다. "그 문은 문짝이 둘이니까, 쉽게 열 수 있어." 아닌게 아니라. 곧 한쪽 문이 열렸다. 보트를레의 아버지가 처녀에게 알리러 들어갔다. 10분 후에 아버지는 처녀를 데리고 나와서 아들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생 베랑 양이다." 네 사람은 계단을 급히 내려갔다. 발메라는 계단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쓰러져 있는 파숫군을 살펴보았다. 그런 뒤에 , 세 사람을 테라스의 방쪽으로 끌고 가면서 말했다. "저 놈은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꺼야." 보트를레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두 마리의 개가 샛문까지 따라왔다. 거기서 보트를레는 두 친구들과 다시 만났다. 그들은 모두 정원으로 나왔다. 새벽 3시였다. 기암성 (18)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풀린 수수께끼 보트를레는 이 첫 승리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레이몽드를 안정시켜 놓고는, 곧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아르센 뤼팽의 일상 생활에 관해서, 두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뤼팽은 사흘이나 나흘 걸려서 올 뿐인데, 저녁에 자동차로 왔다가 아침 일찍 떠나 버린다는 것이었다. 올 때마다 갇혀 있는 두 사람을 만나 주었는데, 두 사람은 다 그의 태도가 공손하고 상냥했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성안에 와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뤼팽 외에는 늙은 식모 하나와 파숫군 둘밖에 없다고 했다. 보트를레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 놈들만이라도 무시할 건 못돼요. 지금 곧 쳐들어가기만 한다면..." 보트를레는 즉시 자전거를 타고 에귀종 읍으로 달려가 여덟 명의 경관과 반장을 데리고, 아침 8시에 크로장으로 되돌아 왔다. 두 경관은 마차 옆에 남아서 파수를 섰다. 다른 두 명은 샛문 앞을 지키고, 나머지 네 명은 반장의 지휘 아래, 보트를레와 발메라와 함께 성의 정문 쪽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늦어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한 농부가 말하기를, 한 대의 자동차가 1시간 전에 성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저택 안을 뒤져 보았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몇 벌의 의복과 내의, 그리고 가구 몇 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보트를레와 발메라가 그 보다도 놀란 것은, 그 부상자가 사라져 버린 점이었다. 현관의 바닥에는 싸운 흔적 하나 없었고, 한 방울의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뤼팽이 에귀유 성에 들렀다는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만약에 처녀가 있었던 방의 옆방에, 훌륭한 꽃다발이 대 여섯 개나 놓여 있었고, 거기에 아르센 뤼팽의 명함이 핀으로 꽃혀 있는 것이 발견되지 않았던 들, 보트를레 부자와 발메라, 생 베랑 양의 주장은 사실이었는가를 의심받아도 별수가 없었으리라. 그 꽃다발은 처녀로부터 무시를 받은 채 시들어 있었다. 그 중의 하나에는, 명함 외에, 레이몽드가 뜯어 보지도 않은 편지 한 통이 붙어 있었다. 그날 오후, 판사가 그 편지를 뜯어 보니, 거기에는 10 페이지에 걸쳐서, 애원과 약속과 협박과 절망, 오컨대, 경멸과 증오밖에는 받아보지 못한 애절한 사랑의 넋두리가 씌어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레이몽드 양, 나는 화요일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잘 생각해 두십시오. 나는 더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결심입니다. 화요일 저녁, 그것은 바로 보트를레가 생 베랑 양을 구출한 날의 저녁이었다. 생 베랑 양이 풀려났다. 뤼팽이 탐내던 처녀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뤼팽이 사랑을 위해 휴전을 갈망한 나머지 볼모로 골랐던 보트를레의 아버지도 역시 풀려났다. 두 포로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러한 뜻밖의 뉴스에, 온 세상이 놀람과 기쁨으로 끓어 올랐다. 그리고 또 알 수 없었던 에귀유의 비밀도 이제는 발표가 되어, 세계의 구석구석에까지 알려졌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건의 추이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패배한 모험가를 비웃는 노래가 유행했다. '뤼팽의 사랑'이니, '아르센의 흐느낌!'이니, '소매치기의 한탄!'이니 하는 노래가 거리에서 일터에서 불리어지고 있었다. 레이몽드는 기자들로부터 쉴 새 없이 질문을 받았으나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거기엔 편지도 있었고, 꽃다발도 가련한 연애도 있지 않았던가~! 뤼팽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대신에 보트를레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예견하고, 모든 것을 밝혀냈다. 생 베랑 양이 판사 앞에서 자기의 납치 사건에 관해서 한 말은, 이 소년이 상상했던 가정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보트를레는, 아버지에게 사봐의 산중으로 돌아가기 전에 몇 달 동안 휴양을 취하도록 권고하고, 아버지를 생 베랑 양과 함께, 제브르 백작 부녀가 겨울철을 지내기 위해 머물고 있던 니스의 근처로 데리고 갔다. 다음 날, 발메라도 자기의 어머니를 이 새로운 친구들의 곁으로 모시고 갔으므로, 제브르 백작의 별장을 중심으로, 조그만 모임이 이루어졌다. 10월 초에, 보트를레는 파리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는 아무 사건도 없이, 조용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체 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뤼팽과의 싸움은 모두 끝나지 않았던가? 이 점에 관해서는, 뤼팽 쪽에서도 깨끗이 인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의 다른 희생자였던 가니마르와 셜록 홈즈가 세상에 다시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들이 경찰서 앞에서, 묶인채 자고 있는 것을 넝마주이가 발견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1주일간이나 넋이 완전히 빠져 있다가 정신이 되돌아왔다. 그들은 '제비호'라는 요트에 실려, 아프리카를 돌고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즐거운 여행이었고, 몸도 자유로왔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때때로 뱃사람들은 외국의 항구에서 상륙을 하는데 자기들만은 뱃바닥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아마 며칠 전부터 잠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을 풀어 준 것은, 뤼팽이 졌음을 인정한 것이고, 이제는 싸우지 않음으로써,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그의 패배를 더욱더 두드러지게 해 주었다. 그것은 루이 발메라와 생 베랑 양의 약혼이었다. 이 두 젊은이들은, 같은 생활 환경 속에서 친밀히 지내다 보니까,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발메라는 레이몽드의 어딘지 고독해 보이는 듯한 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으며, 인생에 상처를 입고 애정을 갈망하고 있던 레이몽드는, 자기를 살려 내는 데 그렇듯 용감했던 사나이의 힘에 감동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좀 걱정을 하면서, 결혼식날을 기다렸다. 뤼팽이 다시 공격해 오려고 하지 않을까?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데도 가만히 있을까? 그러나 결혼식은 예정된날, 제 시간에 치뤄졌고, 레이몽드 드 생베랑 양은 루이 발메라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운명마저도 보트를레의 편이 되어, 그의 승리를 굳건히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의 팬들 사이에, 보트를레의 승리와 뤼팽의 패배를 축하하는 큰 잔치를 베풀자는 의견이 나왔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었으므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보름 동안에, 300명이나 찬성자가 모였다. 파리의 모든 중.고등 학교의 졸업반마다 두 명씩에게 초대장이 보내졌다. 신문에서도 크게 떠들어 댔다. 축하회는 매우 성대했다. 그러나 이 축하회에서, 보트를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겸손했다. 그리고 어떤 명탐정보다도 더 훌륭하다는 극도의 찬사를 받고 그는 매우 기뻤으나, 약간은 어리둥절하고 거북스러웠다. 그의 기분이 그렇다는 말을 간단히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또 그는 어린애 같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자기의 기쁜 마음을 솔직히 말했다. 사실, 아무리 그가 이성적이고 자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그는 이 몇분 간이야 말로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장송 고등학교의 학우들에게, 특별히 축하해 주기 위해서 온 발메라에게, 제브르 백작에게,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인사말을 끝마치고, 모두들 축배를 들고 있을 때, 홀 끝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그 쪽을 보니, 어떤 사람이 신문을 흔들면서 몸짓을 하고 있었다. 식탁의 주위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으며, 신문은 이손 저손으로 건너가고, 손님 하나가 펼쳐진 신문을 훑어볼 때마다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읽어요, 어서 읽어요." 하고 맞은 편 사람들이 외쳤다. 보트를레의 아버지가 식탁에서 일어나, 신문을 받아다가 아들에게 주었다. "읽어요. 읽어요.!" 사람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보트를레는 일어서서, 푸른 연필로 줄쳐진 대목을 발견하고, 그 기사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 목소리는 읽어감에 따라 차츰차츰 놀라는 목소리로 변해 갔다. 이 놀라운 폭로 기사는, 이제까지의 그의 노력을 모조리 수포로 돌려 버리고, 에귀유 크뢰즈에 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뒤집어엎어 버림으로써, 아르센 뤼팽에 대한 그의 싸움이 헛됨을 새삼 알려주었던 것이다. 기암성 (19)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대 역전 - 아카데미 회원 마시방 씨의 공개장 - 편집국장 귀하 1679년 3월 17일 1679년, 즉 루이 14세의 시대에, 파리에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조그만 책 한 권이 발행되었습니다. <에귀유 크뢰즈의 비밀> 모든 진상을 처음으로 폭로함. 궁중에 알리기 위해, 100권을 저자 스스로가 찍어 낸 것임. 이 3월 17일 오전 9시에, 이름 모를 젊은이 하나가, 자기가 썼다는 이 책을 궁중의 높은 양반들에게 돌려 주기 시작했습니다. 네 권을 돌렸을 때, 궁중의 한 근위 대위가 이 젊은이를 붙잡아서 국왕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곧, 이미 나누어 준 그 네 권을 압수하고, 나머지 책도 모두 모아서, 국왕이 손수 불 속에 던져 버렸으나, 한 권만은 국왕의 것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 뒤에, 국왕은 이 젊은이를 생트마르그리트 섬의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이 죄수야 말로, 그 유명한 '철가면'의 사나이였던 것입니다. 만약에 대위가, 국왕이 눈을 돌린 틈을 타서, 불 속에서 아직 불이 붙지 않은 한 권을 꺼내지 않았던들, 진실은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 대위는 그로부터 여섯 달 후에, 가용에서 망트에 이르는 한 길에서 암살을 당했는데, 살인범은 그의 옷 속을 샅샅이 뒤졌으나, 오른 쪽 호주머니 안에 있었던 보석은 빠뜨렸습니다. 이 보석은 나중에 발견되었는데, 매우 값비싼 다이아몬드였습니다. 대위의 서류 속에서, 손으로 적은 노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불 속에서 꺼낸 책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그 책의 첫 부분을 간추려 써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비밀에 관한 것으로, 대대로 국왕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밀은 국왕들이 가지고 있었떤 막대한 보물의 존재와 그 장소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이 보물은 해가 갈수록 줄곧 불어나기만 햇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14년 후 프랑스 혁명 때, 탕플의 탑 속에 갇혀 있었던 루이 16세는, 왕실을 감시하는 장교 한 사람을 은밀히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조상 중에 내 조부님이신 루이 14세 대왕 밑에서 그누이 대위로 있던 분이 계시지 않은가?" "예, 있습니다, 폐하." "그렇다면 그대를 믿을 수가... 그대를 믿을 수가...." 루이 16세는 망설였습니다. 그러자 장교가 이렇게 국왕의 말을 이었습니다. "국왕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지 모르겠다 그런 말씀이시죠? 그 점만은, 오 폐하!..." "그렇다면, 내 말을 잘 듣게." 국왕은 호주머니에서 한 권의 조그만 책을 꺼내어, 그 마지막 한 장을 찢었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베끼는 게 낫겠군....." 국왕은 네모진 종이에, 그 책장으로부터 점과 선과 숫자로 된 다섯 줄을 베껴 썼습니다. 그런 뒤에, 그 책장은 태워 버리고, 베껴 쓴 종이를 네 겹으로 접어, 붉은 봉랍으로 봉하여 장교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이것을 왕비에게 드리면서, '국왕으로부터 왕비와 왕자에게'라고 말해주게..." "만약에 왕비께서 뭔지 모르신다면..?" "그럴 경우엔 이렇게 말해주게. '에귀유의 비밀에 관한 것입니다!'라고, 그렇게 말하면 아실거야." 루이 16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책을 벽난로의 새빨갛게 일렁이는 불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루이 16세는 1973년 1월 21일에 단두대에 올랐습니다. 왕비 마리앙트와네트는 파리의 콩시에르즈리 감옥에 옮겨졌으므로, 장교는 국왕에게서 받은 분부를 수행하는 데 두 달이 걸렸습니다. 어쨌든 남 몰래 온갖 꾀를 다 써서, 어느 날 겨우 마리앙트와네트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왕비만이 알아 듣도록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국왕 폐하로부터 왕비와 왕자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국왕에게서 받은 봉합 편지를 건네 주었습니다. 왕비는 간수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편지를 뜯어 보고, 그 알아볼 수 없는 다섯 줄의 글자를 보고 놀란 것 같았으나, 곧 알아챈 듯 했습니다. 왕비는 쓴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리고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는가?" 왕비는 망설였습니다. 이 위험한 쪽지를 어디에 감춘담? 마침내 왕비는 기도서를 열고, 그 종이 조각을 책의 가죽 표지와 그것을 싼 양피지의 사이에 끼워 넣고, 장교에게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나?" 어쩌면 이 종이 조각은 왕비의 목숨을 건져 주었을 지도 모르는데, 너무 늦게야 손에 들어왔다는 의사 표시인 것 같았습니다. 왜냐 하면, 왕비도 다음 10월에 단두대에 올라 죽어갔으니까요. 그런데 이 장교는,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서루 속에서, 루이 14세의 근위 대위였던 증조부가 적어 놓은 노트를 발견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 즉 모든 여가를 이용해서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밝혀 내자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의 온갖 문서를 샅샅이 뒤져 본 결과, 에귀유에 관한 몇 가지의 사실을 찾아 냈습니다. 에컨대, 케사르 앞에 끌려 나왔을 때, 목숨을 살려 준 대가로 에귀유의 비밀을 밝혔다고 씌어 있고, 샤를르 3세와 북방 야만족의 두목 롤과의 사이에 맺은 조약에는, 롤을 가리켜 '에귀유의 비밀의 소유자'라고 했으며,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왕인 윌리엄 1세의 깃대 끝은 뾰족하고, 에귀유처럼 구멍이 뚫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쟌다르크는 에귀유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르왕에서 사형을 받아야 했고, 앙리 4세는 때때로 '에귀유의 덕에 의해서'라고 말했고, 프랑스와 1세는 1520년에 르아브르의 시민들에게, '프랑스왕은 각 도시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비밀을 대대로 물려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그 대위의 증손자인 이 장교가, 위털루 전투 때인 1815년에 써낸 책 속에 있는 것을 나는 오늘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나는 직접 확인하고 매우 놀랐는데, 이 책에는 또 그보다도 더 뚜렷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워털루 전투 때, 나폴레옹의 장교였던 이 장교는, 어느 날 저녁, 자기의 말이 쓰러져서 어떤 성문을 두드렸더니, 늙은 기사가 나와서 그를 맞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늙은이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크뢰즈의 냇가에 있는 이 성은 루이 14세가 지어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그의 특별한 명령에 따라서, 에귀유의 모양을 한 뾰족탑과 종루로 장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성을 지은 것은 1680년이었습니다. 1680년이라면, 그 책이 발행되고 '철가면'이 투옥된 이듬해입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뚜렷해졌습니다. 즉, 루이 14세는 나라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질 것을 미리 내다보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비밀에 관한 그럴싸한 설명을 주기 위해, 이 성을 지어 그러한 이름을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에귀유 크뢰즈? 그것은 뾰족탑이 서 있고, 크뢰즈의 냇가에 있는 국왕의 성이다'이로써 세상 사람들은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획은 뜻대로 된 것입니다. 왜냐 하면, 200년도 더 지난 뒤에 보트를레 씨가 그 함정에 빠졌으니까요. 편집국장님, 그러기에 나는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뤼팽이 안프레디라는 이름 아래, 발메라 씨로부터 크뢰즈 냇가에 있는 에귀유 성을 빌어, 거기에 두 사람을 가둬 놓은 것은, 장차 보트를레 씨의 수사가 틀림없이 성공하리라고 내다보아, 자기가 필요로 하는 평화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루이 14세의 역사적인 함정을, 바로 보트를레 씨 앞에 파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반박의 여지 없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즉, 프랑스 왕의 마지막 후계자인 뤼팽은 그의 천재적인 두뇌로써, 알아 내기 힘든 문서의 뜻을 알아 내기에 이르러, 마침내 에귀유 크뢰즈에 관한 왕실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편지는 여기서 끝나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자기의 패배를 깨닫고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신문을 떩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해괴한 이야기에 흥분하여,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가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 어떻게 반박하고 나올 것인지, 가슴을 죄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발메라가 다정스럽게 그의 손을 풀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지도르 보트를레는 울고 있었다. 기암성 (20)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에귀유의 조약 새벽 4시, 보트를레는 장송 고등학교의 친구 집에 있었다. 그는 뤼팽에 대한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학교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철없는 맹세! 어리석은 싸움! 무기도 없는 외톨이 소년이 저 능력을 가진 천재와 대결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암호의 해석은 틀렸던 것이다. '에귀유'라는 말은 그 크뢰즈 냇가의 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가씨들'이라는 말도 레이몽드와 쉬잔 양을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그 쪽지의 암호는 수백 년 전에 씌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니 모든 것을 다시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단 하나의 확실한 자료는, 루이 14세 때에 발간된 책뿐일 것이다. 그런데, '철가면'의 사나이가 찍어 낸 100권 중, 타지 않고 남은 것은 두 권 뿐이다. 한권은 근위 대위가 훔쳐가서 없어져 버렸다. 또 한 권은 루이 14 세가 간직한 뒤, 루이 15세 에 전해졌다가 루이 16세가 태워버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페이지를 베껴 쓴 것은, 마리앙트와네트에게 전해져, 기도서의 표지 밑에 감추어 져 있을 것이다. 그 쪽지는 어찌 되었을까? 보트를레의 손에 들어와 있는 것을, 뤼팽이 브레두 서기를 시켜서 빼앗아 간 것이 그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마리앙트와네트의 기도서 속에 끼워져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문제는, 왕비의 기도서는 어찌되었느냐? 는 것이 된다. 보트를레는 조금 쉬고 나서, 유명한 옛 문서 수집가인, 자기 친구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그 결과, 그것이 카르나발레 박물관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물관의 문이 열리자마자, 보트를레는 친구와 함께 자동차에서 뛰어내렸다. "여어! 보트를레 씨!" 놀랍게도, '에귀유 크뢰즈 사건'을 맡은, 여러 신문사의 기자 10여 명이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했다. 모두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온 목적을 알게된 관장은, 그들을 한 유리 상자 앞으로 안내하여 책 한 권을 보여 주었다. 보트를레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을 집었다. 첫째, 책을 싼 양피지다. 책 앞쪽의 표지 사이를 찾았으나, 감춰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책 뒤쪽의 양피지를 벗기고 보니, 종이 한 장이 불거졌다. "야, 있구나!" 보트를레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고는 둘로 접은 쪽지를 꺼냈다. "어서 읽어봐. 붉은 잉크로 썼는데그래, 저것봐, 꼭 피같아. 어서 읽으라니까!" 보트를레는 읽었다. "나의 아들을 위하여, 1073년... 마리앙트와네트." 갑자기, 보트를레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왕비의 사인 아래, 있었다.... 있었다...., 검은 잉크로 씌어진 '아르센 뤼팽'이라는 두 낱말이. 모두들 차례차례로 그 종이를 집어 들고는,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마리앙트와네트... 아르센 뤼팽."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르센 뤼팽!" 하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이 귀중한 쪽지 아래에 적혀 있는 악마 같은 이름을 한결 더 무서워 보이게 했다. "그렇소, 아르센 뤼팽이오. 뤼팽은 모든 것을 알아 내고, 훔쳐 냈습니다." 하고, 보트를레는 말했다. "훔치다니, 뭣을?" "물론 그 종이 조각이죠! 루이 16세가 쓴 종이 말입니다. 나는 그걸 한 때 갖고 있었어요. 이것과 똑같은 것이었어요. 뤼팽이 왜 그 종이를 내가 갖고 있지 못하게 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그 종이를 살펴보기만 해도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종이에 씌어져 있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틀림없이 성공할 자신이 있습니다." "어떻게요? 그 문서가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루이 16세가 그 설명을 써 놓은 책을 태워 버렸는데?" "옳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근위 대위가 불에서 꺼낸 한 권은 무사히 남아 있을 겁니다."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남아있지 않다는 증거도 없으니까요." 보트를레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비밀을 쥐게 된 대위는, 그것을 군데군데 베껴 쓰기 시작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설명을 주지 않고 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는 이 비밀을 이용하려는 유혹에 결국은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고요? 그가 죽었을 때 몸에 지니고 있었던 그 굉장한 보석이 증거지요. 그는 그것을 틀림없이 왕실의 보물창고에서 꺼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춰 둔 곳은 아무도 모르므로, 에귀유의 비밀이 되고 만 겁니다. 뤼팽도 내게 그와 비슷한 말을 했는데, 그의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얘기에 관해서 널리 선전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에귀유의 조약'이라는 책을 찾고 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립니다. 어쩌면 어느 시골 구석에서라도 나올지 모르니까요." 곧 신문 광고를 냈다. 그리고 보트를레는,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을 시작했다. 대위는 가용 근처에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바로 그 날로, 그곳으로 갔다. 물론 200년이나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으리라고는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추억이나 그 고장의 전설 같은 데에 흔적이 남아 있는 그런 예도 있는 것이다. 그는 가용 근처에서 파리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알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는 조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루이 16세가 갇혀 있을 때 탕플 탑에 파견되었고, 그 후 나폴레옹의 장교로 워털루 싸움에 나갔던 사나이의 증조부인, 그 대위의 이름을 알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애쓴 보람이 있어, 그는 마침내 두 개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나는 루이 14세를 섬긴 라르베리 씨라는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공화국 시대의 라브브리라는 시민이었다. 이것을 알아 낸 것만으로 벌써 중요한 단서가 잡힌 셈이었다. 그는 이 라르베리 씨나 그 자손에 관해서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신문에 냈다. 그에게 대답을 써 보낸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전에 신문에 편지를 실었던 아카데미 회원 마시방 씨였다. 보트를레 씨에게 참고로, 볼테르의 글 한 구절을 알려 드립니다. 이것은 그가 지은 책 '루이 14세 시대'의 원고 속에서 내가 발견한 것인데, 그 책 속에는 빠져 있는 부분입니다. <루이 14세는 어느 날, 라르베리 씨가 암살되고 훌륭한 보석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황급히 마차를 타고 납시었다. 국왕은 매우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다 글렀다... 다 글렀다...' 중얼거렸다. 이듬해 이 라르베리의 아들과, 벨린 후작에게 시집간 딸은 프로방스와 브레타누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여기에는 무슨 곡절이 있음에 틀림없다.> 이 글에서 어떤 실마리를 끌어 낼 수 있는지, 그리고 두 사건의 사기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당신은 아시겠지요. 라르베리 씨에게는, 아마도 장교 라르브리의 할아버지일지도 모를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는 것으로보면, 라르베리가 남겨 놓은 서류의 일부는 그 딸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 서류 속에는, 대위가 불 속에서 꺼낸 그 한 권의 책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조사해 보았더니, 렌 부근에 벨린이라는 남작이 살고 있는데, 이분이 벨린 후작의 자손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행여나 싶어, 어제 이 남작에게 편지를 냈습니다. 제목에 에귀유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한 권의 낡은 책을 혹시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물어 본 거지요. 나는 지금 그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 당신과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후에, 보트를레는 마시방 씨의 집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마시방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편지를 써놓고 조금 전에 나가고 없었다. 보트를레는 편지를 뜯어 보았다. <약간의 희망을 주는 전보를 받고 떠납니다. 렌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당신은 저녁 기차를 타고, 렌에서 내리지 말고, 벨린 역까지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역에서 4킬로미터 쯤가면 성이 있으니, 거기서 만납시다.> 보트를레는 저녁에 브레타뉴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리고 이튿 날 아침 6시에 벨린 역에서 내렸다. 그는 숲속으로, 4킬로미터의 길을 걸어갔다. 저 멀리 높은 언덕,기다란 저택이 보였다. 보트를레는 벨을 눌렀다. 하인이 문을 열고 물었다. "어찌 오셨습니까?" "벨린 남작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명함을 내주었다. "남작님은 아직 안 일어나셨으니까, 좀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벌써 어떤 분이 먼저 오시지 않았습니까? 수염이 희고, 허리가 구부러진 분인데...." 보트를레는 신문에 난 사진으로 마시방의 모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물었다. "그분은 10분전에 오셨는데, 응접실로 모셔 드렸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기암성 (21)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손가락 사이로 사라진 비밀 마시방과 보트를레는 매우 반갑게 만났다. 그들은 그 종이 조각이며, 이제부터 보게 될 책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마시방은 벨린 씨에 관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했다. 남작은 지금 60세이고, 오래 전부터 홀아비가 되어 딸 가브리엘 드빌몽과 함께 살고 있다. 왜냐 하면, 그 여자는 자동차 사고로 남편과 큰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남작님이 올라오시랍니다." 하인은 그들을 2층의 넓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책상과 서류 상자, 문서를 쌓아 놓은 탁자들 외에는 별다른 가구는 없었다. 남작은 그들을 친절히 맞아 주었다. "마시방 씨의 편지를 받고 전보를 쳐 드렸지요. 에귀유에 관해서 씌어진 책을 내 딸이 본 일이 있었답니다." "그래서요?" 하고, 보트를레는 재촉했다. "그래서 내 딸이 어제부터, 그 수많은 헌 책들 속을 뒤져 봤지요." "그래서요?" "그래서 마침내 찾아 냈지요."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느냐고요? 저 탁자에 갖다 놓았다는데...옳지..., 저기 있군...." 보트를레는 벌떡 일어났다. 탁자 끝에 산더미 처럼 쌓인 서류 위에, 빨간 가죽 표지의 조그만 책이 있었다. 그는 그 책을 덥썩 쥐었다. 마치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하려는 것처럼. "맞습니다! 이겁니다." 하고, 보트를레는 흥분하여 외쳤다. "음... 제목은... 틀림없는가?" 하고, 마시방도 감격한 듯이 물었다. "틀림없고 말고요! 보세요" 보트를레는 가죽에 새겨진 금글자를 가리켰다 - <에귀유 크뢰즈의 비밀> "이 첫장을 읽어 보세요. - 모든 진상을 처음으로 폭로함. 궁중에 알리기 위해, 100권을 저자 스스로가 찍어 낸 것임." "그걸세. 그거야." 하고, 마시방도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이 불에서 써낸 책이야. 루이 14세가 태워 버린 책이야." 그들은 책장을 넘겼다. 처음의 절반은 라르베리 대위가 써놓은 설명과 같은 내용이었다. 갑자기 보트를레는 읽기를 멈추었다. 그 종이 조각! 왼쪽 페이지의 한 가운데에, 점과 숫자로 된, 그 신비로운 다섯 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그가 그렇게도 골똘히 연구한 종이 조각의 글과 똑같았다. 기호의 순서도 똑같았다. 그 앞에 다음과 같은 조그만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모두 루이 13세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조그만 표로 간추려져 있다.> 그러고는 다음에 그 표가 실려 있고, 그 다음에 그 표의 설명이 있었다. 보트를레는 천천히 읽어 나갔다. <보시다시피, 이 표는 숫자를 홀소리로 바꿔놓아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그 수수께끼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먼저 네째 줄에 관해서. 이 네째 줄에는 수단과 지시가 들어 있다. 이 지시에 따라 수단을 밟아 가면, 반드시 목적에 도달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에귀유 크뢰즈의 참 뜻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처음의 석 줄에 의해서 알 수가 있다. 첫째 줄은, 내가 국왕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으로, 나는 이미 국왕에게 알려 놓았거니와....> 여기서 보트를레는 어리 둥절하여 읽기를 멈추었다. "왜 그러는가?" 하고, 마시방이 물었다. "뜻이 통하질 않아요." "정말 그렇군. '첫째 줄은 내가 국왕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제기랄! 찢겼어요! 두 페이지가! 다음의 두 페이지가!... 이 흔적을 보세요!" 분노와 실망으로 보트를레는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마시방이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정말 그렇군... 뜯어 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요새 찢긴 것 같아, 나머지 책장도 모두 구겨졌어." "대체 누가 그랬을까? 어떤 놈이...? 하인이 공범일까?" 보트를레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소리쳤다. "어쩌면 몇 달 전에 한 짓인지도 모르지." 하고 마시방을 말했다. "어쨋든..., 누군가가 이 책을 찢어 가지고 간 것만은 틀림없어요. 그런데 남작님." 하고, 보트를레는 남작을 불러 물었다. "남작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누구 수상쩍은 놈은 없습니까?" "내 딸에게 물어봅시다." 벨린 씨는 하인을 불렀다. 몇 분 후에 빌몽 부인이 들어왔다. 아직 젊은 여자인데, 슬픔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곧 그 여자에게 물어 보았다. "아주머니께서 이 책을 책장 속에서 찾아 내셨다지요?" "예. 끈으로 묶어 놓은 것 중에서 찾아 냈습니다." "그래 읽어 보셨습니까?" "예. 어젯밤에..." "그 때도 이 두페이지는 없었습니까? 이 숫자와 점의 표 다음에 두 페이지 말입니다." "아니요, 없어진 책장은 한장도 없었는데요." 하고 부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누군가 찢었군요...." "하지만, 이 책은 간밤에 내내 내 방에 있었는데요." "오늘 아침엔?" "오늘 아침에, 마시방 씨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손수 여기에 갖다 놓았지요."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나도 몰라요... 다만...." "뭐라고요?" "조르즈..., 내 아들 녀석이 오늘 아침에 이 책을 가지고 놀았어요." 부인은 후다닥 방을 나갔다. 보트를레와 마시방과 남작도 따라갔다. 어린이는 제 방에 있지 않았다. 샅샅이 찾아본 결과, 마침내 저택의 뒤에서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세사람들이 하도 흥분하여 무섭게 물어 보는 바람에 어린이는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모두가 이리저리 찾아보느라고 야단 법석을 피웠다. 보트를레는, 손가락 사이로 물이 새어 나가듯, 진실이 그에게서 빠져 나가는 듯한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빌몽 부인의 팔을 잡고, 남작과 마시방과 함께, 7객실로 돌아와서 말했다. "이 책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두 페이지가 찢겨 나갔으니까요... 그러나, 아주머니는 그것도 읽으셨겠지요?" "네." "뭐라고 씌여 있던가요?" "네... 나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특히 그 두페이지는 정말 흥미가 있었어요. 그것은 진상의 폭로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아주머니,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 진상은 정말 중대한 것이니까요. 에귀유 크뢰즈라는 것은...." 이때 하인이 들어왔다. "마님께 편지가..." "저런... 우편 집배원은 벌써 지나갔는데..." "어떤 사내아이가 가져왔습니다." 빌몽 부인은 편지를 뜯어서 읽더니, 갑자기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가슴에 손을 대고, 곧 쓰러지려고 했다. 편지는 방바닥에 떨어졌다. 보트를레는 그것을 주워서 읽었다. - 입을 다무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아들은 잠든 채 영영 깨어나지 못할 거요..... -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부인은 그렇게 더듬거리고 있을 뿐, 아들을 도우러 갈 기운조차도 없었다. 보트를레는 그 여자를 안심시켰다. "별것 아닙니다. 그저 공갈일 뿐입니다. 그런 것을 해서 누구에게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르센 뤼팽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하고, 마시방이 넌지시 말했다. 보트를레는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손짓을 했다. 적이 이 집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트를레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당장, 빌몽 부인으로부터 그 비밀의 열쇠를 얻어 내고 싶어했던 것이다. "아주머니,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아무 위험도 없으니까요..." 부인은 이야기할까? 그는 그렇게 믿고, 그렇기 기대했다. 부인은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때 또 다시 문이 열리더니, 이번에는 하녀가 들어왔다. 하녀는 당황한 듯한 듯이 말했다. "마님... 조르즈 도련님께서.., 조르즈 도련님께서..." 이 말에 어머니는 대번에 기운을 되찾았다. 어김없는 어머니의 본능에서 누구보다도 더 빨리, 그 여자는 계단을 굴러 떨어지 듯 내려가 현관을 지나서 테라스 쪽으로 뛰어갔다. 거기에는, 어린 조르즈가 안락의자에 드러누워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야! 자고 있으니...!" "갑자기 잠이 들어 버리셨어요. 마님." 하고, 하녀는 말했다. "제가 잠들지 못하게 하고 방으로 모셔 가려고 했으나, 벌써 주무시고, 손이...손이 싸늘해 지셨어요." "싸늘하다고!... 어머나, 정말이구나... 아이고, 하느님, 하느님..., 제발... 깨어나게 해주소서!" 보트를레는 손을 살짝 호주머니에 넣어서 불쑥 권총을 꺼내어 가지고, 마시방을 향해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마시방은 미리부터 젊은이의 거동을 지켜 보고 있었던 듯이 얼른 몸을 비켰다. 그러나, 벌써 보트를레는 그에게 달려들면서 하인들에게 외쳤다. "거들어 줘! 이놈은 뤼팽이다!" 거세게 덤벼드는 바람에, 마시방은 버들의자 위에 나가둥그러졌다. 그러나 7, 8초가 지나자 마시방은 다시 일어나 보트를레의 목을 조르고, 그의 권총을 뺏어 들고 있었다. "좋아..., 됐어... 꼼짝마라... 2,3분망 참아라. 하지만 정말 날 알아보는데 넌 꽤 시간이 걸렸구나. 마시방으로 둔갑하는 데, 그의 머리라고 베어들고 나와야만 되겠니?" 뤼팽은 이제 똑바로 버티고 서서 무서운 얼굴로 겁에 질린 세 하인과 넋을 잃은 남작을 둘러보면서 비웃었다. "이지도르, 너는 실수를 했구나. 네가 뤼팽이란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 친구들은 내게 달려들었을 거다. 그랬더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4 대 1이야!" 그러고는 하인들에게로 다가갔다. "자, 얘들아. 무서워할 건 없다. 너희들에게 욕을 보이진 않을 테니까... 아니, 네 놈이 아니냐! 내게서 받은 100프랑짜리, 이리 내 놔라. 난 네 얼굴을 알고 있다. 아까 편지를 너희 마님에게 전해 달라고, 네게 돈을 줬지. 자, 빨리빨리. 몹쓸 놈 같으니...." 뤼팽은 하인이 내준 푸른 지폐를 받아서 짝짝 찢어 버렸다. "배반자의 돈...., 이 따윈 손이 더러워진다." 그는 모자를 벗고, 빌몽 부인에게 깍듯이 절을 했다. "용서하십시오, 부인. 사람이란 그렁저렁 살아가다 보면, 특히나 나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만, 자기로서도 부끄러워질만한 잔인한 짓을 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종종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드님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렇지도 않은 주사니까요. 아까 여럿이서 어린애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을 때, 팔에 주사를 좀 놓았을 뿐입니다. 기껏해야 한 시간만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용서를 빕니다. 그러나 부인은 입을 다물고 계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는 또다시 인사를 하고, 지팡이를 집어들고는 보트틀레에게 마치 보호자같은 말투로, '잘 있거라, 아가야!'하고 말한 뒤에, 하인들의 코끝에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면서, 유유히 걸어 나갔다. 보트를레는 몇 분간 기다렸다. 빌몽 부인은 한결 침착해져 가지고, 아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이후로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아다. 에귀유의 비밀은 여기서도 또, 과거의 어둠 속에서와 마찬가지고 이 어머니의 두뇌 속으로 깊숙이 파묻혀 버린 것이다. 보트를레는 단념하고 떠났다. 10시 반이었다. 11시 50분에 기차가 있었다. 보트를레는 천천히 정원을 걸어 나와, 역으로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 여자를?" 느닷없이 마시방이, 아니 뤼팽이, 길가의 숲에서 불쑥 나타나며 소리쳤다. "어때, 그럴듯하게 꾸며 놓았지? 네 친구들은 아슬아슬한 짓을 잘 하지? 어찌 된 영문인지 통 모르겠지, 안 그래? 그리고 마시방 이란 아카데미 회원 같은 이는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천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만약 네가 착하게만 군다면 보여 줄 수도 있어. 그러나 우선, 네 권총을 돌려 줘야겠어. 그래.... 그걸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라고... 옳지, 됐어.... 그게 더 좋아. 아까 저기서 한 짓보다는... 그게 무슨 짓이야, 비열하게! 하기야 아직 어리니 별수야 없겠지만... 하지만 난 널 원망하진 않는다. 자, 그 증거로 내 자동차를 태워 주마." 그렇게 말하고는 뤼팽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마시방 노인의 그 의젓한 차림새를 하고서, 뤼팽이 그렇게 개구쟁이 같은 짓을 하는 것을 보고, 보트를레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었구나, 웃었어!" 하고, 뤼팽은 기쁜 듯이 발을 구르며 외쳤다. "알겠니, 아가? 네게 모자란 것은 웃는 얼굴이야. 너는 네 나이에 비해서 너무 점잔만 뺀다. 너는 매우 좋은 녀석이야. 무척 순진하고 소박한 데가 있어 좋아. 그러나 정말 웃음이 없는 게 흠이다."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바로 가까이에 들려 오고 있었다. 그러자 뤼팽은 느닷없이 보트를레의 팔을 잡고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쌀쌀하게 말했다. "인제부턴 가만히 있어 주겠지, 응? 너도 인제 별수 없다는 걸 잘 알았을 거다. 공연히 애만 쓰고 시간만 낭비해서 무슨 소용이냐? 세상에는 도둑놈이 얼마든지 있다.그 놈들이나 쫓아 다니고, 나는 가만 놓아 두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알겠지?" 뤼팽은 자기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라도 하듯이, 보트를레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나도 참 바보지! 네가 나를 가만 놓아 둘 사람인가? 너는 뜻을 굽힐 녀석이 아니야... 아! 내가 왜 이렇게 참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를 묶어, 재갈을 물려 버리는 것쯤 문제도 아닌데... 그리고 몇 달 동안이고, 너를 햇빛도 못 보게 하는 것쯤은... 그리고 나는, 내 선조인 프랑스의 국왕들이 준비해 놓은 평화로운 은신처에 들어앉아서, 친절하게도 나를 위해 쌓아 놓은 보물을 즐길 수가 있을텐데.... 하지만 그게 아니야.내 팔자는 끝까지 실수를 하면서 살도록 돼 있는 거야. 별수 없지 않니? 사람이란 누구나 약점이 있게 마련이니까... 나는 네게 대해서 약점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다 끝난 건 아니야. 네가 에귀유 크뢰즈에 손을 대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멀었어... 쳇! 이 뤼팽도 열흘이나 걸렸다. 너라면 10년은 족히 걸릴거다. 어쨌든, 우리 둘 사이에는 그만큼의 차이는 있거든." 자동차가 도착했다. 뤼팽이 문을 열자, 보트르레는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차 안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진짜 마시방이었다. 뤼팽은 보트를레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껄걸 웃었다. "염려 마, 편히 주무시고 계시니까, 만나 보게 해 주겠다고 아까 약속했지 않아? 이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겠나? 너희들이 성에서 만난다는 걸, 나는 간밤에 알았다. 그래서 아침 7시에 여기에 와 있다가, 마시방 씨가 지나가는 걸 낚아챘지. 그러고는, 주사 한 대를 푸욱.... 자 이젠 됐어! 그럼 잘 자요, 할아버지... 비탈 위에 내려놓아 드리지. 양지에, 춥지 않도록, 저기에, 좋아... 이만하면 됐다. 내 모자를 들고 있거라. '제발 한푼 적선합쇼' 하는 꼴이 됐구나... 아! 이 늙은 마시방아, 그대가 감히 뤼팽이 하는 일에 참견을 해!" 두 마시방이 마주 대하고 있는 꼴을 보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하나는 잠들어 머리를 흔들흔들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정색을 하고 열을 올리고 있다. "자, 이제 전속력으로 달리자... 타게나, 이지도르. 운전사, 더 속력을 내. 속도 계기에는 115킬로미터 밖에 안 나와 있잖아! 아, 이지도르, 인생은 단조롭다고 말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인생이란 희한한 것이다. 다만 알 필요는 있어...! 난 그 인생을 잘 알고 있다. 아까 성에서, 네가 벨린 노인과 지껄이고 있을 때, 나는 창가에 붙어서서, 그 역사적인 책장을 찢었는데, 그 때는 별로 즐겁진 않았다! 그런 뒤에, 네가 에귀유 크뢰즈에 관해서, 빌몽 부인에게 물어 보고 있었을 때에도! 그 여자는 말을 할까? 그래, 말 할 거야... 아니, 말하지 않을꺼야... 과연 어느 쪽일까?... 나는 소름이 끼쳤다. 만약에 말을 한다면, 내 발판은 송두리 채무너지고, 내 생활은 다시 시작해야 했을 거다. 그리고 하인은 제때에 올까? 오겠지... 아니, 안 올거야 하고 걱정을 하고 있을 때, 하인이 왔지. 그러나 보트를레가 내 탈을 벗기겠지? 천만에, 저런 멍청이가! 하지만 혹시.., 됐어..., 아니야, 이건 안 되겠는걸... 나를 곁눈질하는구나.... 안 되겠는걸..., 권총을 꺼내겠구나! 아! 정말 재미있었어! ... 이지도르, 너는 너무 많이 지껄인다. 자, 자지 않겠니? 나는 잠이 오는구나. 잘 자게나...." 보트를레는 뤼팽을 보았다. 그는 벌써 자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전속력으로, 지평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비상한 호기심을 가지고, 탈을 쓰고 있는 뤼팽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어느덧 아침부터의 흥분과 실망에 지친 나머지 그도 또한 잠이 들어버렸다. 그가 잠을 깼을 때, 뤼팽은 책을 읽고 있었다. 보트를레가 그 책 제목을 들여다 보니, 그것은 철학자 세네카의 <루킬리우스에의 편지>였다. 기암성 (22)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케사르로부터 뤼팽에게 '쳇! 이 뤼팽도 열흘이나 걸렸다... 너라면 10년은 걸릴거다.!' 벨린의 성에서 나오면서 뤼팽은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은 보트를레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보트를레는 이 말이 뜻을 곰곰 생각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즉 뤼팽이 에귀유 크뢰즈의 진상을 얻었다. 즉, 뤼팽이 에귀유 크뢰즈의 진상을 알아내는 데 있어서, 자기의 노력과 보트를레의 노력을 비교해서 말한 것은, 두 사람이 다 목적에 도달하는 데 똑같은 수단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수단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뤼팽은, 마시방과 마찬가지로, 1815년에 나왔다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 덕택으로 마리앙트와네트의 기도서 속에서, 그 중요한 종이 조각을 찾아 내게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그 책과 종이 조각-이 두가지만이 뤼팽이 의지한 근거였던 것이다. 보트를레는 당장에 분명히 결심했다. 그는 장송 학교의 친구 집에서 나와, 가방 하나를 들고 아무도 모르게 파리 한복판에 있는 조그만 호텔로 옮겨 갔다. 그는 이 호텔에서 며칠이고 나가지 않았다. 문을 잠그고 방에 커어튼을 치고 틀어막혀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열흘'이라고 뤼팽은 말했다. 보트를레는, 열흘이라는 기간을 잡아서, 그 동안에는 오지 그 책과 종이 조각의 내용에 관해서만 생각하려고 애썼다. 이럭저럭 열흘이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11일째도, 12일째도.... 그러나 13일쨰가 되자, 한 줄기의 빛이 그의 머리속에 번쩍였다. 물론, 그는 문제의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답을 얻는 방법을, 틀림없이 뤼팽이 사용했을 그런 방법의 하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유인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그 책 속에서, 에귀유 크뢰즈의 비밀과 관계가 있는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보트를레가 잘 살펴보니, 그 모든 사건에는 근본적으로 공통되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즉, 모든 사건은 예외없이, 노르망디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해괴한 사건의 주요 인물은 모두가 노르망디 사람이거나, 나중에 노르망디 사람이 되거나, 또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활약한 사람들 뿐이었던 것이다. 보트를레는 닥치는 대로 역사책을 뒤적거려 보았다. 생클레르 쉬르 에프트 조약 이후에, '에귀유의 비밀의 소유자'가 된 롤은, 노르망디의첫 번째 공작이었다. 에귀유처럼 구멍이 뚫린 깃대를 가지고 있었떤 사람은,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왕인 윌리엄 1세였다. 이 비밀을 알고 이었던 쟌다르크를 영국인이 태워 죽인 것은 르왕에서였다. 또 옛날, 에귀유의 비밀을 케사르에게 바친 대가로 목숨을 건졌던 적군의 장수는 코오 지방의 두목이었는데, 코오지방이라면, 노르망디의 한복판에 있는 지방이다. 르왕, 센강변, 코오지방... 정말, 모든길이 이 쪽방면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 같다. 노르망디 공작으로부터, 그 후계자인 영국의 국왕들에게 전해진 에귀유의 비밀은, 그후 프랑스의 국왕들에게로 옮겨졌는데, 특히 프랑스의 두 국왕의 이름을 든다면, 첫째 앙리 4세이다. 앙리 4세는 르왕을 점령하고, 디에프 부근에서 아르크의 싸움에 이겼다. 다음은 프랑스와 1세인데, 그는 르아브르라는 도시를 세우고, 다음과 같은 뜻깊은 말을했다. '프랑스 왕은 각 도시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비밀을 대대로물려받고 있다!'라고... 르왕, 디에프, 르아브르.. 이 세 개의 큰 도시는 세모꼴의 세 꼭지점이 되는 셈인데, 이 세모 꼴의 한복판이 르오 지방인 것이다. 17세기의 일이다. 루이 14세는, 알 수 없는 사나이가 진상을 폭로한 책을 불에 태워 버렸다. 라르베리 대위가 한 권을 꺼내어, 거기서 알아 낸 비밀을 이용하여, 보석을 훔쳐 냈고, 노상 강도의 습격을 받고 죽는다. 그곳이 바료 가용이었다! 가용이라면, 르아브르에서나 르왕에서나, 디에프에서나 다 같이 파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그만 도시이다. 1년 후에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중앙지를 골라서 에귀유의 성을 지었다. 그것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을, 노르망디로부터 그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르왕, 디에프, 르아브르, 코오 지방의 삼각형,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한쪽은 바다이고, 또 한쪽은 센강, 나머지 한쪽은 르왕에서 디에프에 이르는 두 개의 골짜기. 한 줄기의 빛이 보트를레의 머릿속에 번쩍였다. 이 곳이야말로 뤼팽의 활동 무대이다. 과거 10년간, 뤼팽의 모든 강도 사건은 바로 여기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의 비극만 하더라고 그렇다. 앙브뤼메지라면, 르아브르에서 디에프로 가는 길가에 있는 것이다. 르왕, 디에프, 그라브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코오 지방의 삼각형의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아르센 뤼팽은, 몇 년 전에 그 책을 손에 넣은 뒤, 마리앙트와네트가 종이 조각을 감춘 곳을 알아가지고, 마침내 그 기도서에서 그 종이 조각을 훔쳐 낸 것이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 비밀을 '발견'해서는 정복한 지방에 눌러앉은 것이다. 보트를레도 곧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아침 일찍, 걸어서 르왕을 떠났다. 얼굴 모습을 딴판으로 바꾸고, 프랑스를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견습공의 모양으로,바랑을 지팡이 끝에 꿰어 달아, 어깨에 메고서. 그는 센 강변을 따라서 걸어갔다. 며칠이고 며칠이고, 뤼팽이 활약했음직한 곳을 쫓아 돌아다녔다. 마을에서 마을로, 강에서 바다로, 보트를레는 코를 벌름거리고 귀를 쫑긋쫑긋하며, 무엇에서고 그 깊은 뜻을 맡아 내려고 애쓰면서 찾아다녔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센 강 어귀에 있는 도시 옹플뢰르가 보이는 주막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의 맞은 편에서 한 사나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빨간 얼굴에 뚱뚱한 몸집, 손에는 회초리를 갖고 있고, 긴 작업복을 입고 있는 폼이, 이 고장에 서는 장을 따라 돌아 다니는 노르망디의 말장수 같았다. 조금 후에 보트를레는, 이 사나이가 자기를 알아내려는 듯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야! 나의 잘못된 생각이야. 이런 말장수를 만난적은 없어.' 하고, 보트를레는 생각했다. 그 사나이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커피와 꼬냑을 주문하여 마셨다. 보트를레는 식사를 끝낸 뒤, 돈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그 말장수의 식탁 옆을 지나려니까, 그 사나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안녕하시오, 보트를레 씨." 보트를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고, 그 사나이의 옆에 앉았다. "예, 나는 보트를레입니다만... 당신은 누구시죠? 어떻게 나를 알아보셨지요?" "곧 알아봤지. ... 물론 신문에 난 자네 사진밖엔 본 일이 없지만, 헌데 자네는 변장이 서투르군." 보트를레가 그를 유심히 보니, 그도 역시 얼굴 모습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보트를레는 또 물어보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알수 없는 사나이는 빙그레 웃었다. "나를 몰라보겠나?" "예, 한번두 본적이 없는데요." "나는 셜록 홈즈야." 이 이상한 만남은 뜻깊은 일이었다. 보트를레는 인사를 나눈 뒤에, 홈즈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여기에 와 계신 것은, 그 사람 때문이죠?" "물론!" "그렇다면... 이 쪽 방면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군요..." "그렇게 확신하고 있지..." 홈즈의 의견이 자기와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트를레는 기쁘기만 하지는 않았다. 만약에 이 영국인이 목적을 이룬다면, 승리를 나눠 갖게 되는 것이고, 또 어쩌면 이 사나이가 자기보다도 먼저 도달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증거가 있습니까? 무슨 실마리라도?" "걱정하지 말게." 하고, 영국인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웃으면서 말했다. "난 자네와 경쟁하진 않으니가. 자네는 그 종이 조각과 책이겠지만... 난 그런 것 별로 믿지 않아." "그렇다면, 실레지만... 선생님은?" "나는 뤼팽의 유모 빅토와르가 있는 곳을 알아 냈어. 국도 제 25호에서 멀지 않은 농가에서 살고 있어. 릴에서 르아브르로 가는 길 말이야. 빅토와르만 지켜 보고 있으면, 뤼팽을 잡는 건 문제 없거든. 뤼팽과 나 사이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뿐이야...." 홈즈의 말투에는 힘겨운 적수에 대한 무서운 증오심이 서려 있었다. "자, 이제 어서 가보게, 사람들이 보고 있어. 위험하네... 그러나 내 말을 잊지 말게. 뤼팽과 내가 마주대했을 땐, 정말 비극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말야!" 보트를레는 홈즈에게 뒤질 염려는 없다고 생각하여, 안심하고 그와 헤어졌다. 게다가, 오늘 우연히 홈즈를 만나서 또 하나의 자료를 얻지 않았는가! 기암성 (23)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그 이상한 암호 쪽지 르아브르에서 릴로 가는 길은 디에프를 지나가고 있다. 코오 지방의 이 큰 길 근처의 한 농가에 빅토와르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빅토와르는 곧 뤼팽이다. 왜냐 하면, 바늘 가는 데 실이 가듯, 늘 뤼팽을 보살피고 있는 이 유모 없이는 그 주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타까워라... 안타까워..." 하고 보트를레는 되풀이했다. "내 가정에는 틀림이 없다. 이제 이 코오 지방의 서쪽만 뒤져 보면 된다. 코오 지방은 넓지 않다. 10년이 걸려도 좋다. 뤼팽은 거기에 있다. 뤼팽이 발견한 것을 나라고 발견 못 한다는 법은 없다." 그는 때때로 큰 길가의 비탈에 앉아서, 늘 몸에 지니고 있는, 그 종이 조각 베껴 쓴 것을 골똘히 연구하곤 했다. 그 종이 조각의 아라비아 숫자는 홀소리 글자로 바뀌어 씌어져 있었다. 또 때때로 여느 때와 같이, 우거진 수풀 속에 엎드려 몇 시간이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시간은 넉넉했다. 미래는 그의 것이었다. 저녁에는 농가를 찾아가 하룻밤 묵었다 가곤하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모두들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했는데, 그는 겨울의 기나긴 밤에 사람들에게 곧잘 이야기를 시켰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에귀유에 관한 전설을 아느냐고 으레 물어 보았지만, 얻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생주엥이라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바위투성이의 바닷가로 내려갔다. 푸른 하늘, 밝은 태양 아래 눈부신 에머랄드 빛의 가엾는 바다! 깍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있고, 벽돌담이 허물어진 것이 있었다. 좀더 걸어가자니까, 조그만 성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성문에는 녹슨 낡은 자물쇠가 걸려 있는데, 그 위쪽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프레포세의 성>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아 조그만 비탈을 내려간 뒤, 나무로 난간을 한 좁은 길로 들어갔다. 이 작은 길 끝에는, 바다로 떨어지는 가파른 바위의 뾰족한 꼭대기가 망루처럼 움푹패여서 조그만 동굴을 이루고 있었다. 동굴의 한복판은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였고, 벽에는 수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보트를레는 피곤하기도 해서, 짊어진 바랑을 벗어 던지고 앉아서 깜박 잠이 들어 버렸다. 잠시 후, 그는 동굴 안의 서늘한 바람결에 눈을 떴다. 그리고, 한참 동안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 막 일어나려고 했을 때, 별안간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몸이 오싹해졌다. 손이 떨렸다. 그리고 머리털 뿌리에서 땀방울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니야.아니야... 이건 꿈이야. 착각이야... 이럴 수가 있을까?" 그는 후다닥 무릎을 꿇고 들여다 보았다. 두 개의 커다란 글자, 크기가 30센티미터쯤 되는 두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 두 글자는 분명히 데(D)와 에프(F)였다. D와 F! 놀라운 기적이다! D와 F, 틀림없이, 그 종이 조각의 두 글자다! (주 : 이전 암호문에서 네째 줄이 표현글자의 한계로 인해 누락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보트를레는 그 네째 줄의, 수단과 지시를 말하고 있는 줄의 글자를 생각해 내기 이해, 그 종이 조각을 다시 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 그 옛 성의 옆을 지나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양지기 하나가 언덕 위에서 양떼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다. "저 동굴, 저기... 저 동굴은..." 그는 입술이 떨려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양지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저 동굴, 저기... 저 성의 오른쪽에 있는 동굴엔 이름이 있나요?" "저거요! 에트르타의 사람들은 모두 '아가씨들(demoiselles)'이라고 부르죠." "뭐, 뭐요?... 뭐라고 하셨죠?" "아, 글쎄 아가씨들의 방이라고 부른대도요...." 보트를레는 너무나도 기뻐서, 하마터면 양지기의 목을 졸라 버릴 뻔 했다. 아가씨들! 그 종이 조각 속에서 알고 있는, 단 두 개의 낱말 중의 하나! 그는 이제 알았다! 그 종이 조각의 참뜻을 알아 낸 것이다. 아가씨들의 방! ... 에트르타... '그렇다.... 그것임에 틀림없다. 왜 이런 걸 좀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머릿 속이 환히 밝아져 가지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양지기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만 가 보세요. ... 고마워요.." 사나이는 어리둥절해 가지고, 개를 휘파람으로 부르면서 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되자, 보트를레는 다시 성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성을 거의 다 지나가다가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는 두 손을 비비면서 생각했다. '내가 돌았나! 만약 그 놈에게 들킨다면, 그 놈의 일당에게 들킨다면? 한 시간 전 부터, 이 곳을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니....' 그는 꼼짝않고 있었다. 해는 이미 져서, 어둠이 차츰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살금살금 곶의 끝 쪽으로 기어나가, 마침내 낭떠러지의 끝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손을 뻗쳐 우거진 풀을 헤치고,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바로 눈앞, 낭떠러지와 거의 같은 높이의 바다 위에, 높이가 80미터도 더 되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잇었다. 그것은 널따란 화강암의 바닥 위에 똑바로 서 있는 거창한 탑 모양의 바위였다. 그 밑바닥은 수면과 같은 높이로 보이고,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차츰 가늘어져서, 마치 바다 괴물의 거대한 이빨과도 같았다. 이 무시무시한 돌은 낭떠러지처럼 희끄무레한데, 그 표면에는 차돌이 줄줄이 가로 박혀 여러 개의 줄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군데군데 갈라지고 우둘투둘한데, 그런 곳에는 약간의 흙과 풀의 잎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전체가 강대하고 견고하고 어마어마하여,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파도와 폭풍쯤엔 꿈쩍도 하지 않을 듯해 보였다. 그 바위가 떡 버티고 있는 모습은,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낭떠러지 못지않게 웅장하고, 그 주위의 공간의 넓이 못지않게 광대했다. 보트를레는 갑자기 눈을 감고 떨리는 두 손으로 이마를 꼭 쥐었다. 오, 저기에! 그는 너무나도 기뻐서 죽을 것만 같았다. 저기 에트르타의 '뾰족 바위(에귀유)' 꼭대기 주위를 갈매기들이 날고 있는데, 그 조금 아래의 갈라진 바위 틈에서 한 줄기 희미한 연기가 솟아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기암성 (24)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열려라 참깨 에트르타의 에귀유(뾰족 바위)는 크뢰즈였다.(구멍이 뚫려 있었다.)! 낭떠러지 위에 솟아 있는 우람한 아치 모양의 아발 문에서 4,5십 미터 떨어진 곳 바다 위에, 뾰족 모자 꼴의 어마어마한 뾰족 바위가 솟아 있는 것이다. 얼마나 희한한 발견이냐! 뤼팽 다음으로 보트를레가 2천년도 더 되는 커다란 수수께끼를 푼 것이다!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케사르는 고올(프랑스의 지명)을 정복할 수 있었고,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노르망디 사람들은 나라에서 세력을 떨쳤다. 이 비밀을 갖고 있었던 영국의 왕들은 프랑스를 지배했고, 이 비밀을 잃었을 때 그들은 패배했다. 저 바닷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왕국이 있다. 그것은 은신처인 동시에 굉장한 보물창고이다. 수백 년 동안 불어난 왕들의 보물, 프랑스의 모든 황금, 백성들로부터 짜낸 모든 것, 유럽의 싸움터에서 모은 모든 전리품-이런 것들이 모두 이 왕실의 동굴 속에 쌓여 있다. 금화,은화,보석,다이아몬드,패물 등 온갖 것이 거기에 있다. 누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도 없다. 아니다! 뤼팽이 있다. 뤼팽이라는 천재가 있다! 보트를레에게는 이제 어떻게 하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느냐 만이 문제였다. 바다로 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바다 쪽으로 드나드는 구멍이 있을 건 틀림없다. 그러나 육지 쪽으로는? 보트를레는 에트르타 쪽으로 내려가, 여관을 정하여 저녁 식사를 끝낸 뒤, 자기 방으로 올라가, 그 종이 조각을 폈다. 그에게 있어, 이제 이 종이조각의 뜻을 푸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그는 곧, 에트르타라는 낱말의 세 홀 소리 글자가 첫째 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첫째 줄은 다음과 같이 씌어진다. e.a.a.. etretat(에트르타) 이 에트르타 앞에 올 수 있는 것은 어떤 낱말일까? 아마도 이 마을에 대해서 에귀유의 위치를 설명해 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에귀유는 왼쪽에, 즉 서쪽에 있다..... 그는 이리저리 생각해 본 결과, 서풍은 해안 지방에서는 아래쪽 (aval) 바람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 낭떠러지의 문은 바로 '아래쪽(abal)의 문'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내어, 이렇게 써 보았다. En aval d'Etretat(에트르타의 아래쪽) 둘째 줄은 아가씨들(Demoiselles)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줄이다. 그는 곧, 이 말의 앞에 '.... 의 방'이라는 말을 이루고 있는 홀소리 글자가 이어져 있는 것을 알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두 줄의 글을 적었다. En aval d'Etretat(에트르타의 아래쪽) La chambre des Demoiselles(아가씨들의 방) 세 째 줄은 더 어려웠다. 갖은 궁리 끝에, '아가씨들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프레포세의 성(le fort de Frefosse)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내 다음과 같이 거의 완전한 문장을 꾸몄다. En aval d'Etretat(에트르타의 아래쪽) La chambre des Demoiselles(아가씨들의 방) Sous le fort de Frefosse(프레포세의 성 아래) ............................ Aiguille creuse(에귀유 크뢰즈) 이것은 네 개의 기본적인 공식이었다. 이 공식에 따르면, 에트르타의 아래쪽으로 가서, 아가씨들의 방으로 들어가고, 아마도 프레포세의 성 아래를 지나서 에귀유에 도달하는 것이었으리라. 어떻게 해서? 넷째 줄에 적힌 방법에 따라서였으리라. (주 : 넷째줄이 누락된데 대해서 자꾸 사과하게 됩니다만, 이 작품에서는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암호문을 알고 있더라도 위의 내용을 보시면 알겠지만 특수한 지방의 특수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다 프랑스어이므로 맞추기가 거의 곤란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넷째줄을 다룰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일반 추리물처럼 미스테리를 독자가 푸는 것보다는 어드벤쳐를 즐기는데 촛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더 특수한 공식으로서, 에귀유로 가는 길을 찾아 내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보트를레는 곧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었다. 즉, 육지와 뾰족 바위의 사이에 정말로 직접 통하는 길이 있다면, 그 땅굴은 아가씨들의 방에서 출발하여, 프레포세의 성 아래를 지나, 낭떠러지로부터 100 미터쯤 똑바로 내려가, 바다의 바위 아래 뚫린 굴을 지나서 에귀유 크뢰즈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고. 이 땅굴이 입구는? 그것은, 거기에 새겨져 있는 두 글자 D와 F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무슨 교묘한 장치로 그 문이 열리는 것이리라. 보트를레는 이튿날 오후, 다시 낭떠러지 위로 올라갔다. 뱃사람으로 변장한 그는 더욱 젊어보였다. 짧은 바지에 셔츠만 입은 그는, 12 세쯤의 꼬마 같았다.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두 글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곧 실망했다. 아무리 그 위를 두드리고 밀고 만져 보아도, 글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장치도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 글자들에는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주 : 아래 내용부터는 넷째줄의 암호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D와 F는 이 종이 조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낱말의 머리글자가 아니냐? 즉, 에귀유로 가기 위해, 거쳐 가야 할 길에서 꼭 머물러야만 할 장소, 아가씨의 방과 프레포세의 성을 가리키고 있는 글자가 아니냐? 그렇다면 DF라고 함께 묶여 있는 것은, 아가씨의 방과 프레포세의 성과이 사이에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이 줄의 처음에 있는, 따로 떨어져 있는 D는 아가씨들의 방, 즉 맨 먼저 들러야 할 동굴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그리고 줄의 한가운데에 있는 F는 프레포세의 성으로서, 아마도 거기가 땅굴의 입구임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이 여러 가지의 기호 중에서, 두 개가 문제이다. 왼쪽 아래에 줄이 그어진 장방형과 19라는 숫자인데, 이것들은 아무리 보아도, 동굴안에 있는 사람에게, 성 아래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보트를레는 이 장방형 때문에 애를 먹었다. 주위의 어딘가에, 무엇인가 그 비슷한 것이 있지 않을까? 그는 오랫동안 찾았다. 그리고 막 단념하려고 했을 때에, 동굴의 바위에 뚫려 있는 조그만 구멍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것은 이 방의 창 같았으며, 바로 장방형이었다. 땅바닥에 새겨져 있는 D와 F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보니, 종이 조각의 두 글자 위에 그어져 있는 줄은 이것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눈은 정확히 창의 높이에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창은 육지 쪽으로 나 있었으므로, 맨 먼저 동굴과 육지를 잇는 작은 길이 보였다. 이어서 성이 서 있는 언덕 기슭이 보였다. 보트를레는, 성을 보려고 왼쪽으로 몸을 기울인 순간, 종이 조각의 왼쪽 아래에 동그랗게 그려진 줄의 뜻을 깨달았다. 창의 왼쪽 아래에 한 덩어리의 차돌이 불거져 나와 있는데, 그 이 손톱처럼 구부러져 있는 것이 영락없이 총의 조준점 같았다. 그래서 이 점에다가 눈을 갖다대니, 맞은 편 언덕의 한 조그만 부분만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전부 낡은 벽돌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트를레는 이 벽으로 달려갔다. 벽의 길이는 10미터쯤이나 될까? 그 표면은 풀과 나무로 덮여 있었다. 그는 아무런 실마리로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19라는 숫자는 무엇일까? 그는 동굴로 돌아와, 노끈과 자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끈을 차돌 모서리에 매고, 19미터의 길이에 조약돌을 묶어서, 육지쪽으로 던졌다. 조약돌은 겨우 작은 길의 끝에닿았을 뿐이었다. 보트를레는 이내 깨달았다. '이런 바보가! 그 옛날에 미터를 썼을 리가 없잖아! 그 때는 토와즈 (1토와즈는 1.949미터) 야. 19는 19토와즈임에 틀림없어." 보트를레는 계산하여, 끈의 37미터쯤 되는 곳에 매듭을 지어 가지고, 아가씨들의 방의 창으로부터 37미터의 거리에서, 프레포세의 벽에 닿는 곳을 찾았다. 그러고는 그 곳의 벽에 자라나 있는 풀잎을 헤쳐 보았다. 순간, 그는 '앗!'하고 소리를 질렀다. 집게 손가락 끝으로 누르고 있는 매듭이, 벽돌 위에 돋을 새김을 한 조그만 +자의 중심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조각에서 19다음에 오는 기호는 +였던 것이다. 그는 화끈 달아오르는 흥분을 억제하기에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얼른 +를 잡고, 그것을 밀면서, 수레바퀴라도 돌리듯이 돌렸다. 벽돌은 흔들렸다. 그는 더욱 힘을 주었다. 벽돌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돌리지 않고, 더 힘을 주어 밀었다. 곧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걸쇠가 벗겨지는 소리인지,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그리고 이 벽돌의 오른쪽으로, 1 미터 너비의 벽이 뱅그르를 돌더니, 땅굴의 구멍이 보였다. 보트를레는 미친 듯이, 벽돌이 끼워져 있는 천문을 잡아, 사정없이 되돌려 닫아 버렸다. 놀람과 기쁨, 그리고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의 얼굴은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는 눈앞이 아찔하고, 머리가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기암성 (25)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에귀유 크뢰즈의 지하도 이제 그의 일은 끝났다. 적어도 그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끝난 것이다. 저녁에 그는 파리의 경찰국장 앞으로 긴 편지를 썼다. 조사의 결과를 곧이곧대로 보고하여, 에귀유 크뢰즈의 비밀을 알리고, 이 일을 끝마치기 위해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는 답장을 기다리면서, 이틀 밤을 연달아 아가씨들의 방에서 지냈다. 겁에 질리고, 신경이 곤두서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랐다. 사람의 그림자가 줄곧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자기가 동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이 온다...., 자기의 목을 조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벽돌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첫날 밤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틀째 밤은, 별빛과 초생달빛 아래, 문이 열리고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세어보니,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 그 다섯 사람은 큼직한 짐을 나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곧장 들판을 지나 르아브르의 길로 나갔는데, 그런 뒤에 자동차 한 대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후에 또 사람들이 지나갔다. 네 사람..., 다섯 사람... 모두들 꾸러미를 들고 갔다. 2분 후에 또 한 대의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그는 더 이상 지켜 볼 기분이 나지 않아, 여관으로 돌아가서 잤다. 아침에 잠을 깨니, 여관의 소년이 편지 한통을 가져왔다. 뜯어보니, 가니마르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그는 얼른 달려 나가서 손을 내밀었다. 가니마르는 그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자네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군." "뭘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이번엔 그 놈을 잡을 수 있겠지?" "적어도 뤼팽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뤼팽이고 보면, 달아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자네는 그 놈이 달아나리라고 생각하나?" 가니마르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지금 뤼팽이 에귀유에 있다는 증거는 없거든요. 간밤에 그의 일당 11명이 나갔는데, 그도 그 중에 들어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에트르타의 에귀유는 달아나지 못하겠죠." "자네 말이 옳아, 중요한 건 에귀유 크뢰즈야. 그 밖의 것은 또 기회가 있겠지. 자 이제 얘기나 좀 하세." 가니마르는 새삼 거드름을 피우면서 위엄 있게 말했다. "보트를레 군, 이번 사건에 관해서는 절대로 비밀을 지키도록 자네에게 당부해 달라는명령을 받고 왔네." "누구 명령인가요? 경찰 국장인가요?" 보트를레는 놀리듯이 말했다. "더 높으신 분이야." "국무 총리인가요?" "그보다도 더 높으신 분." "저런, 저런!" 가니마르는 목소리르 낮추었다. "보트를레 군, 나는 대통령을 만나 뵙고 오는 길일세. 이 사건은 매우 중대한 국가의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특히 전략상의 이유인데..., 식량이라거나 최신 발명 무기같은 것을 감춰 둘 수가 있거든." "그러나 이런 비밀을 어떻게 숨겨 둘 수 있습니까? 뤼팽 일당 외에, 우리만 하더라도 벌써 몇명이나 되는 데요. 그리고 이 미래의 병기고를 점령하려면 그 곳을 공격해서 뤼팽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런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할 수야 없지 않아요?" "물론, 사람들은 뭔가 짐작이야 하겠지만, 그러나 똑똑히는 모를 거야. 어쨌든 해 보세." "좋아요. 그럼 계획은?" "나는 부하의 절반을 데리고 자네의 뒤를 따라가겠네. 만약 뤼팽이 에귀유에 없다면, 숨어서 지키고 있다가라도 잡고야 말 거야. 만약에 있다면..." "만약에 있다면요, 가니마르 씨, 그는 바다 쪽으로 난 뒷구멍으로 에귀유를 빠져나갈 거예요." "그런 경우엔, 내 나머지 부하들의 손에 잡히고 말거야." "그렇겠습니다. 하지만 썰물 때에는 고기잡이들이 근처의 바위에 붙어 있는 조개며 새우를 잡고 있을 테니까,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밀물 때에 할 작정이야." "그 때엔 배로 달아날 겁니다." "고기잡이 배를 열 두어 척 준비해서 부하를 하나씩 태워놓고 있다가, 잡아버릴거야." "고기가 그물 사이로 빠져 나가듯이, 그 배들 사이로 빠져 나가 버린다면?" "좋아, 그 때엔 가라앉혀 버리지." "에? 대포로 말입니까?" "물론이지, 르아브르에 군함도 한 척 준비해 놓았어. 내가 전화만 걸면 언제든지 즉각에귀유 근처로 나타날 거야." "잘 알았습니다. 가니마르 씨, 그럼 언제 공격하시렵니까?" "내일 낮 밀물이 지는 10시 정각에." "좋습니다." 보트를레는 겉으로는 쾌활한 체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불안했다. 그 날 밤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9시 45분, 가니마르는 12명의 힘이 센 부하들을 거느리고, 낭떠러지로 올라가는 길 아래에서 보트를레와 만났다. 10시 정각에 그들은 벽돌담 아래에 도착했다. 그리고 행동을 개시했다. "왜 그래, 보트를레? 얼굴이 새파랗지 않나?" 가니마르가 씽긋 웃으면서 말하자, "가니마르 부장님도 죽을 상을 하고 계신걸요." 하고 보트를레는 대꾸했다. 그들은 다리가 떨려 앉지 않을 수 없었다. 가니마르는 말했다. "겁이 난 건 아니지만, 제기랄!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그 놈을 잡으려 할 때엔, 으례 이렇게 흥분이 된단 말이야.... 자, 이제 문을 열어. 누가 보고 있진 않겠지?" 보트를레는 벽으로 다가가, 돌을 힘껏 밀었다. 땅굴의 문이 열렸다. 등불을 켜 들고 비추어 보니, 땅굴의 천장은 동그랗고, 굴 바닥과 마찬가지로, 온통 벽돌로 덮여 있었다. 한참 걸어가니, 갑자기 층층대가 나타났다. 보트를레가 세어 보니, 45 단이었다. 그것은 벽돌로 된 계단인데,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발에 닳아서 가운데가 움푹 패어 있었다. "야단 났는걸!" 앞장 서 가던 가니마르가, 무엇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왜 그래요?" "문이 있어! " "제기랄!" 하고 보트를레는 문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부수지도 못하겠는데요, 이건 정말 쇳덩어리입니다." "다 글렀구나, 자물쇠도 없어." 하고 가니마르는 말했다. "문이란 열도록 돼 있는 거예요. 자물쇠가 없다면, 달리 여는 비결이 있겠지요." "비결이라니?" "그걸 알아 내야죠, 그 종이 조각으로. 네째 줄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거든요." 가니마르는 종이 조각을 펴 들고 말했다. "44라는 숫자와 왼쪽에 점이 있는 세모꼴만 가지곤 뭔지 알수가 있어야지." "그렇지 않아요. 문을 잘 살펴보세요. 문의 네 구석에 세모꼴의 철판이 붙어 있지요. 그리고 이 철판엔 모두 큰 못이 박혀 있어요. 왼쪽 아래의 철판에 박힌 못을 움직여 보세요. 십중 팔구 틀림없을 테니까요." 가니마르는 보트를레가 말한 대로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44라는 숫자는..." 하고 보트를레는 곰곰 생각하면서 중얼거렸다. "어디보자... 우리는 지금 계단의 마지막 단에 있다... 계단은 45단이 있어... 종이에 있는 숫자는 44인데, 왜 45일까? 옳지! 가니마르 씨, 한 단만 더 올라가 주셔요..... 됐어요. 이제 제가 이 못을 움직여 보지요. 틀림없을 겁니다." 아닌게아니라, 그 무거운 문이 돌쩌귀 위에서 스르르 돌았다. 널찍한 동굴이 눈앞에 열렸다. 동굴 속은, 저 쪽 끝에서 스며드는 햇빛으로 어슴프레했다.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낭떠러지의 바위가 갈라진 틈이었다. 맞은 바래기로 5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에귀유의 뽀죡 바위가 물결 위에 솟아 있었다. 그 저 쪽으로는 널따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 갈라진 틈새기 옆에 난간이 있어서, 그것이 계단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되어 있었다. 모두 그 쪽으로 갔다. 군데군데, 벽에 조그만 창이 있고, 그 창에서는 언제나 에귀유가 보였다. 뽀죡 바위는 갈수록 커 보였다. 바닷물과 같은 높이에 이르기 조금 전에 창은 없어지고, 굴 안은 캄캄해졌다. 보트를레는 큰 소리로 계단을 세었다. 358 단째에 더 넓은 복도로 나왔는데, 거기에도 못으로 철판을 붙여 놓은 철문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제는 뻔해요." 하고 보트를레가 말했다. "종이 조각에 357이라는 숫자와, 오른쪽에 점을 찍은 세모꼴이 있어요. 또 아까같이 하기만 하면 돼요." 둘째 번 문도 첫번째 문처럼 열렸다. 기다란 굴이 나타났다. 그 굴은 군데군데 천장에 매달려 있는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벽에서 물기가 스며 나와, 물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었으나, 걷기 좋도록 끝에서 끝까지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우리는 지금 바다 밑을 걷고 있군요." 하고 보트를레가 말했다. 그들은 줄곧 걸어갔다. 굴의 끝은 한결 넓은 하나의 동굴로 되어 있었는데, 그 맞은편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가니마르가 말했다. "이제 정말 에귀유로 올라가는 모양이군.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러나 조금 가다 보니까, 왼쪽에 또 하나의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곧 오른쪽으로, 세째 번 계단이 있었다. 형사부장이 말했다. "이건 어려워졌는데, 우리가 이쪽으로 가면, 놈들은 저 쪽으로 달아나겠지. 누가 가서 사정을 살펴보고 왔으면 좋겠어." "제가 갔다 오지요..." "보트를레 군, 자네가? 좋아, 그럼 나는 부하들과 함께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네... 이 목만 지키고 있으면, 딴 데로 빠져 나갈 구멍은 없으니까, 그럼 보트를레 군, 조심하게! 조금이라고 무슨 일이 있으면, 되돌아오게..." 보트를레는 가운데 계단으로 얼른 사라졌다. 30단째에 문이 있어서, 더 갈 수가 없었다. 자물쇠의 단추를 잡아 돌려 보니까, 쇠가 걸려 있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방이 하도 넓어서 천장이 낮아 보였다. 휘황한 등불 아래, 방안에는 수많은 상자며, 그 밖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가구, 의자, 궤, 찬장.... 마치 골동품 가게의 지하실 같았다. 좌우로 두 개의 계단이 보였다. 아마 아래의 동굴로 통하는 계단이리라. 그러나 맞은 편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에 띄었으므로, 보트를레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쪽으로 조사를 계속했다. 또 30단. 그리고 문, 좀더 좁은 방, 맞은 편에 올라가는 계단. 또 30단, 그리고 문. 더 좁은 방... 보트를레는 내부의 구조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수 많은 방들이 위아래로 포개어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올라갈수록 방은 좁아졌으며, 모두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네째 번 방에는 등불이 없었다. 바위틈으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10미터 쯤 아래로 바다가 보였다. 보트를레는 가니마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왔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금아, 날 살려라!'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참기엔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무슨 위험이 닥쳐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하여, 뤼팽의 일당이 에귀유를 고스란히 버리고 달아나 버린 것이나 아닌가 싶었다. '한 층만 더 올라가 보고 그만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역시 30단을 올라가니 문이 있었다. 그는 언제라도 달아날 자세를 갖추고서, 살그머니 문을 밀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방은 다른 방과는 달리 쓰이고 있는 것 같았다. 벽에는 장식 융단이 걸려 있고, 방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며, 금은으로 아로새겨진 식기장 두 개가 마주 놓여 있었다. 좁고 깊은 바위틈에 만들어진 조그만 창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식탁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는 레이스의 상보가 덮여 있고, 과일 접시와 과자 접시, 샴페인 술병, 꽃 등이 화사하게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세 사람 몫의 식사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보트를레는 가까이 가 보았다. 냅킨 위에는 식사할 사람의 이름을 적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맨 먼저 아르세느 뤼팽의 이름이 보였다. 맞은 편에는 뤼팽 부인. 세번째 쪽지를 집어들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이지도르 보트를레'라고 자기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가! 기암성 (26)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프랑스 왕들의 보물 그 순간 커튼이 열렸다. "어서 오게. 보트를레 군. 좀 늦었군, 점심은 12시로 정해져 있었는데. 그런데 왜 그러나? 나를 몰라보겠나?" 보트를레는 뤼팽과 싸워 오는 동안, 여러 번 놀라움을 겪었고, 이번에도 마지막 싸움이니만큼, 얼마든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거야말로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나이는 모든 것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 마땅히 뤼팽이어야만 하는데, 그건 발메라 씨가 아닌가! 보트를레가 아르센 뤼팽과 싸울 때 도움을 청했던 그 발메라 씨! 현관에서 뤼팽의 부하를 거꾸러 뜨려서 아니, 거꾸러뜨린 체하여 보트를레의 아버지와 레이몽드를 달아날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용감한 친구가 뤼팽이라니! "당신이... 당신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보트를레는 더듬더듬 말했다. "물론이지!" 하고 뤼팽은 외쳤다. "자네는 내가 마시방 씨로 변장한 것을 보았다고 해서, 정말로 나를 완전히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이 정도의 재주는 부리지 않을 수 없는거야. 만약에 뤼팽이 그렇게 마음대로 변장을 할 수 없다면, 뤼팽일수는 없는 거지. 안 그런가? 그런데 뤼팽은, 진짜의 뤼팽은 바로 나란 말이야! 자, 보트를레 군, 똑똑히 보아 두게나...." "하지만.... 당신이 그렇다면..., 그럼 레이몽드 양은..." "그래그래, 잘 말해 주었어..." 뤼팽은 다시 커튼을 젖히면서 불렀다. "아르세느 뤼팽 부인!" "앗! 레이몽드 양이군요!" 하고 소년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르센 뤼팽 부인이야! 아니, 차라리 발메라 부인이라고 하는 게 좋겠지. 어쨌든 정식으로 결혼한 내 아내거든. 그것도 다 자네 덕택이지만 말이야. 사랑하는 보트를레 군." 그러면서 그는 손을 내밀었다. "정말 고맙네... 자네도 나를 원망하고 있진 않겠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이지 보트를레는 조금도 그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뤼팽이 내민 손을 잡았다. "마님,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하인 하나가 식탁 위에 요리를 담은 쟁반을 놓고 갔다. 보트를레는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뤼팽의 태도가 무척 재미있어서, 자리에 앉았다. 뤼팽은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가니마르씨와 그 부하들이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일까? 뤼팽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암, 정말 자네 덕택이고 말고, 물론 우리들, 레이몽드와 나는 첫날부터 사랑했어. 그건 정말이야.. 레이몽드의 납치라거나 감금이란 건 다 거짓이었어.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일단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이상, 레이몽드는 물론이고 나도,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서 좌우되는 그런 일시적인 관계가 우리 사이에 맺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뤼팽으로 있는 한, 사정은 그럴 수 밖에 없었어. 하지만 내가 옛날대로 다시 루이 발메라로 되돌아간다면, 사정은 달라져. 그래서 나는 자네의 고집을 이용하기로 했던거야. 자네는 끝끝내 나를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고, 그 에귀유 성을 찾아 내고야 말았으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내 뒤에 숨어서 뜻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런 말이군요?" "암, 그렇지! 누가 발메라를 뤼팽이라고 의심했겠나? 발메라는 보트를레의 친구이고, 뤼팽으로부터, 뤼팽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를 구해냈는데 말이야. 아! 정말 희안한 일이었어. 정말 즐거운 추억이야! 크로장의 모험, 발견한 그 꽃다발, 레이몽드에의 그 가짜 연애 편지! 그리고 그 후에, 나 발메라가 나 뤼팽에 대해서,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취해야 했던 가지가지의 조심성! 그리고 또 그 축하회의 날 저녁, 자네가 내 품안에서 까무러쳤던 일! 아, 모두가 즐거운 일들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보트를레는 레이몽드를 살펴보았다. 그 여자는 말없이 뤼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뤼팽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눈에는 애정이 어려 있었으나, 또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서글픈 듯한 빛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뤼팽이 그 여자 쪽으로 눈을 돌리자, 그 여자는 다정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식탁 위에서 손을 마주 잡았다. 뤼팽이 말을 이었다. "보트를레 군, 이 조그만 보금자리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럴싸하지? 물론 가장 기분 좋은 곳이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말야.. 하지만 여기가 마음에 들었던사람도 몇몇은 있었지... 저 명단을 보게나, 저 사람들은 에귀유의 주인으로서, 여기에 발자취를 남긴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 사람들이야." 벽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케사르. 샤를마뉴 대왕 롤. 윌리엄 1세. 영국왕 리처드. 루이 11세. 프랑스와 1세. 앙리 4세. 루이 14세. 아르세느 뤼팽. "차후로 여기에 이름이 적힐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고 뤼팽은 말을 이었다. "아! 이 명단은 이로써 끝난 거야. 케사르에서 뤼팽까지, 이것이 전부야. 멀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이 이상한 성을 구경하러 오겠지. 알겠나, 뤼팽이 없었더라면, 이 비밀은 영원히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했을 거야. 아! 보트를레군, 이 버려진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나! 파묻힌 비밀을 캐내어, 그 유일한 주인이 된거야! 저 수많은 황제들 다음으로, 이런 유산을 이어받아, 에귀유에 살게 되다니!..." 그의 아내의 몸짓으로 그는 말을 끊었다. 그 여자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무슨 소리가..., 아래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그 여자가 말하자, "물결 소리야." 하고 뤼팽은 대답했다.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물결 소리는 저도 알아요. 다른 소리예요." "그렇다면 무슨 소릴까, 여보? 나는 점심에 보트를레 군밖에는 부르지 않았는데." 하고 뤼팽은 웃으면서 다시 하인에게 말했다. "샤롤레, 이 손님이 들어오신 뒤, 계단의 문은 잠갔겠지?" "예, 그리고 빗장도 걸어두었습니다." 뤼팽은 일어섰다. "이봐요, 레이몽드,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아니! 당신, 안색이 나쁘잖아." 그는 아내와 하인에게 몇 마디 소근거렸다. 그리고는 커튼을 들어올려, 두 사람을 내보냈다. 아래에서의 소리가 더욱 더 뚜렷해졌다. 보트를레는 생각했다. '가니마르 씨가 기다리다 못해. 문을 부수나 보다.' 뤼팽은,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매우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에귀유를 발견했을 때, 이곳은 형편없이 황폐해 있었어! 루이 16세와 프랑스 대혁명 이후 100년간, 아무도 이 비밀을 모르고 있었던 게 뻔했어. 동굴도 계단도 다 허물어져 가고 있었고, 동굴 속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모두 고쳐 놓지 않으면 안되었지." 보트를레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왔을 때, 여기는 비어 있었나요?" "비어있는 거나 다름없었지. 국왕들은 나처럼, 에귀유를 창고로 쓸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피난처로 썼을까요?" "그렇겠지. 적이 쳐들어왔을 때라거나, 안에서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말야. 그러나 본래의 용도는...,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아마 프랑스 왕들의 보물 창고였을거야." 소리는 더욱더 커져갔다. 가니마르는 첫째 번 문을 부수고, 이제 둘째 번 문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리라. 보트를레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수많은 고기잡이배들이 에귀유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군함 한 척이 커다란 검은 물고기처럼,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아, 시끄러워라!" 하고 뤼팽은 외쳤다. "얘기 소리가 들려야지! 더 위로 올라가지 않겠나? 자네도 에귀유를 구경하고 싶을거야." 그들은 위층으로 돌라갔다. 뤼팽은 방에 들어간 뒤, 문을 잠갔다. "이건 내 그림 방이야." 벽에는 온통 그림이 걸려 있었다. 모두 걸작뿐이었다. "오, 이건 굉장한 모조품들이군요.!" 하고 보트를레는 감탄했다. 뤼팽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네 뭐라고 했나? 모조품이라고! 이런 바보 같으니! 모조품은 마드리드, 피렌체, 베네치아, 뮌헨, 암스테르담에 있어." "그렇다면... 이건?" "유럽의 모든 미술관에서 꾸준히 모아 들인 진짜 그림이야. 그 대신 거기엔 훌륭한 모조품으로 바꿔 놓았지. 프랑스에 세계의 걸작을 모아 준 것은 나 뤼팽이었다는 걸, 훗날 사람들은 알게 될 걸세. 마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말이야... 이것 보게. 보트를레 군, 이것이 제브르 백작 댁에서 가져온 네 폭의 루벤스일세..."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줄곧 들려오고 있었다. "이건 정말 못 견디겠는걸! 더 위로 올라가세." 또 계단을 올라갔다. 또 문이 있었다. "이건 벽걸이의 방이야." 벽 장식 융단은 벽에 걸어 놓지 않고, 둘둘 말아서 끈으로 묶어, 꼬리표를 붙여가지고 방바닥에 놓아 두고 있었다. 뤼팽이 그 중의 몇 개를 펴 보였다.눈부신 주단, 빌로드, 명주, 금은으로 짠 천들... 그들은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시계의 방, 책의 방, 레이스의 방, 골동품의 방... 위로 올라감에 따라 방은 점점 좁아졌다. 그리고 그 때마다 소리도 멀어졌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석의 방이야." 하고 뤼팽은 말했다. 이방은 다른 방들과는 전혀 달랐다. 역시 둥그런 모양이었으나, 천장이 매우 높고, 원뿔꼴로, 이 에귀유성의 꼭대기 방이었다. 방바닥에서 천장 꼭대기 까지는 15미터나 20미터 쯤은 되어 보였다. 기암성 (27)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뤼팽의 고백 낭떠러지 쪽으로는 창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바다 쪽으로는, 아무도 들여다 볼 염려가 없었으므로, 두개의 유리창이 틔여 있어서, 그리고 충분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방바닥엔 진귀한 나무의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벽에는 뺑 둘러 진열장과 그림이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중에서도 최고의 보물들뿐이야." 하고 뤼팽은 말했다. "이제까지 본 것들은 모두 팔 물건이야. 그러니까 들락날락하지, 장삿속이니까 말야. 그러나 이 방에 있는 것들은 모두 신성한 물건들뿐이야. 저 보석들을 보게, 보트를레 군. 칼데아의 보석, 이집트의 목걸이, 켈트의 팔찌... 저 조각품들, 그리스의 비너스, 코린트의 아폴로...이 유리 상자 속에 있는 것 외에, 세상에 진짜라곤 아무것도 없어.보트를레 군...자네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났던 가짜 왕관의 소동을 기억하고 있겠지. 이것이 바로 그 진짜 왕관이야. 저것은 다빈치의 진짜 '모나리자'이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래쪽에서 나는 소리는 점점 가까와져 오고 있었다. 바다에는 검은 군함과 고기잡이배들이 보였다. 소년은 물었다. "그런데 보석은요?" "하하! 이 꼬마 보게. 자네도 특히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하기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네와 마찬가지겠지만 말야. 자, 잘 봐두라고!" 뤼팽은 사정없이 발을 굴러, 마룻바닥의 널빤지 조각 하나를 벗겨 냈다. 그러자 동그란 통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 통은 비어 있었다. 좀 떨어진 곳을 또 그렇게 하니, 또 통하나가 나타났으나, 역시 비어 있었다. 다시 세번 때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으나,역시 모두가 비어 있었다. "허허, 이건 실망했는데!" 하고 뤼팽은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루이 11세나 13세때는 이 다섯 개의 통은 가득 차 있었을 거야. 그러나 루이 14세나 15세 때에, 전쟁이며 사치로 모두 써버렸겠지! 보다시피, 지금은 이렇게 텅텅 비어들 있어..."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 "아니야. 보트를레 군. 또 있어, 여섯 번째로 감춰 둔 곳이! 여기엔 아무도 손을 못댔어. 이건 마지막 재산이야... 이것 보게, 보트를레 군." 그는 몸을 구부리고 나무 뚜껑을 들어 올렸다. 통에는 쇠금고가 들어 있었다. 뤼팽은 호주머니에서 복잡한 흠이 팬 열쇠를 꺼내어 금고를 열었다. 눈이 부셨다. 온갖 보석이 번쩍이고, 온갖 빛깔이 타오르고 있었다. 파란 사파이어, 새빨간 루비, 초록빛 에머랄드, 노란 토파즈... "봐, 보트를레. 그들은 온갖 금화와 은화는 다 써 버렸지만, 이 보석 상자엔 손을 안 댔네. 온갖 시대, 온갖 나라의 것이 다 있어. 여왕들이 외국에서 결혼해 올 때 가져온 것도 여기에 있어. 스코틀랜드의 마가릿도, 사봐의 샤를로트도, 영국의 마리도, 피렌체의 카트린 드 메디치도, 오스트리아의 모든 공주들도, 도이칠란드의 마리아 테레사도, 마리 앙트와네트도, 모두가 자기의 몫을 가져왔지, 봐 보트를레, 이 진주들을! 그리고 이 다이아를, 프랑스 왕관의 다이아몬드인들 이렇게 훌륭하진 못할 거야." 뤼팽은 일어나서, 맹세라도 하듯이 손을 들고 말했다. "보트를레, 온 세계에 말해 다오, 뤼팽은 왕실의 금고 속에 있었던 보석을 하나도 집어 내지 않았다고, 단 하나도 말이야. 나는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야. 이것은 프랑스의 재산이니까..." 아래에서는 가니마르가 서두르고 있었다. 메아리치는 소리로 미루어, 마지막에서 둘째번의 문, 골동품의 방문을 공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뤼팽은 말했다. "이 금고는 열린 채 놔 두자, 그리고 저 다섯 개의 빈통들도 모두..." 그는 방안을 한 바퀴 돌아 유리 상자며 그림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이 모든것들과 헤어지다니, 얼마나 슬픈 일이냐! 정말 가슴 아픔일이지. 나는 가장 행복한 시간을 여기에서 보냈네, 내가 사랑하던 이 물건들을 홀로 마주 보면서... 그런데 내 눈은 다시는 저것들을 보지 않을 것이고, 내 손을 저것들을 만지지 않으리라."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몹시 피로한 빛이 감돌아 있어, 보트를레는 어쩐지 그것이 가엾게 느껴졌다. 이 사나이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깊이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리라. 기쁨도, 자랑도, 창피함도 여느 사람 이상으로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창가에 서서, 손가락으로 바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더 슬픈 것은, 저것을 모두 버리고 가야 하는 일이야. 아름답지 않은가? 저 가엾은 바다... 그리고 하늘..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에트르타의 낭떠러지, 저 세 개의 문 - 아몽 문과 아발 문과 대문.. 이곳의 성주를 위해 있는 저 거창한 개선문들. 그리고 그 성주는 바로 나였어, 모험의 왕! 에귀유 크뢰즈의 왕, 기이한 초자연의 왕국, 케사르에서 뤼팽으로 그것이 전해졌던 것이야. 이 무슨 운명이었던가!" 그는 껄껄 웃었다. "동화 속의 임금님이라고? 아니, 천만에! 세계의 왕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거야. 이 에귀유의 꼭대기에서 나는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어. 보트를레, 이 사이타파르네스의 왕관을 들어 올려 보게나... 전화기가 두 대 보이지... 오른쪽 것은 파리 직통이고, 왼쪽 것은 런던 직통이야. 모두 특선이지. 런던을 통해서, 나는 미국과도, 아시아와도, 오스트리아와도 연락하고 있었네. 이 모든 나라에 연락원도 두고 있었어. 미술 골동품의 국제 무역이지. 보트를레, 나는 내 권력에 머리가 아찔할 때가 있어..." 아래층 문이 부서졌다. 가니마르와 그 부하들이 뛰어다니며 찾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뤼팽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다 끝났어..... 한 처녀가 내 눈앞을 지나갔기 때문이야. 금발에, 슬픔이 깃들인 아름다운 눈, 그리고 특히 얌전한 마음을 가진 처녀가 내 앞을지나갔어. 그래서 다 끝난 거네.... 내가 손수 이 어마어마한 건조물을 부수는 거야... 그 밖의 일은 모두가 허망하고 유치해졌어. 이제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여자의 금발...그 슬픔에 잠긴 눈... 그리고 그 얌전한 마음 뿐이야." 형사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마지막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뤼팽은 소년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알겠나, 보트를레. 왜 내가 너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 뒀는지? 몇 주일 전부터, 너를 없애 버릴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내가 부하들에게 각자의 몫을 나누어 주었고, 네가 그 날밤, 낭떠러지 위에서 그들을 만나게 된 까닭을 알겠냐고? 너는 알거야. 즉, 에귀유 크뢰즈는 곧 모험이기 때문에, 그것이 내 것으로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모험가야. 그렇지만 에귀유를 빼앗기면, 모든 과거는 내게서 떨어져 나가 버리고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다네. 레이몽드의 눈이 나를 바라봐도, 내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그런 평화와 행복의 미래가 시작되는 거야..." 그는 성이 나서, 문 쪽을 돌아보았다. "조용히 해, 가니마르, 내 연설은 아직 안 끝났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져 갔다. 마치 대들보로 문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트를레는 뤼팽의 앞에 선채,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뤼팽이 무슨 꾀를 쓸지 알 수 없어, 그저 일이 되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뤼팽이 에귀유를버린 까닭은 알았다. 하지만 왜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려고 하는 것일까? 무슨 계획일까? 가니마르에게서 달아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레이몽드는 대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뤼팽은 생각에 잠기면서 중얼거렸다. "정직한..., 정직한 아르세느 뤼팽이 되는 거야. 이제 도둑질 같은 건 그만두고... 여느 사람의 생활을 하는 거지... 아니! 조용히 하지 못할까, 가니마르! 이 바보 자식 같으니! 그래 넌 모르겠지, 내가 지금 역사적인 연설을 하는 중이고, 그것을 보트를레가 후세에 전하기 위해 듣고 있다는 것을!" 뤼팽은 껄껄 웃었다. "시간만 낭비다. 가니마르 같은 것이 역사적인 연설의 뜻을 알 리가 없지." 그는 붉은 분필을 집어들더니, 벽에다 커다랗게 썼다. 아르세느 뤼팽은 에귀유 크뢰즈의 모든 보물을 프랑스에 넘겨 준다. 다만 이 보물은 루브르 박물관에, '아르세느 뤼팽의 방'을 만들어서 보관할 것. "이제 내 양심도 편해졌어, 프랑스와 나 사이엔 빛이 없어졌으니까..." 하고 뤼팽은 말했다. 공격대는 힘껏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널빤지 한 장에 구멍이 뚫렸다. "아뿔사!" 하고 뤼팽은 외쳤다. "가니마르도 때로는 성공하는 때가 있군. 여보게 친구, 그 문은 단단하네..., 나는 아직도 시간은 있지만... 보트를레, 그럼 잘 있게나...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 그는 '동방의 세 박사'를 그린 커다란 세 폭 병풍 쪽으로 달려갔다. 오른쪽의 한 폭을 접으니 조그만 문 하나가 나타나, 그는 그 손잡이를 잡았다. "잘 해 봐라, 가니마르!" 한 방의 총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뤼팽은 팔딱 뒤어 뒤로 물러났다. "저런 망할 자식 같으니, 심장을 노렸구나! 솜씨가 늘었나 본데... 동방 박사도 망했는 걸! 심장을 맞았으니! 싸구려 파이프처럼 부서져 버렸어..." "항복해라, 뤼팽. 움직이면 쏜다!" 가니마르는 부서진 널빤지 틈으로 권총을 내밀고, 눈을 번쩍이면서 외쳤다. "그렇게 쉽게 잡힐 줄 아느냐!" 사실 뤼팽은 얼른 옆으로 몸을 비켜 버렸다. 가니마르는 문에 뚫린 구멍으로 똑바로는 쏠 수 있었지만, 뤼팽이 있는 쪽을 겨누고 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뤼팽은 위태로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뤼팽이 빠져나가려 하고 있던, 세 폭 병풍 뒤의 문은 가니마르의 바로 맞은 편에 있었으니까. 만약에 달아나려고 하다가는 형사부장의 총알을 맞을 것이다. 형사들이 애쓴 보람으로, 또 널빤지 한 조각이 부서져, 가니마르는 더 자유롭게 몸을 놀릴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3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금빛 나무의 진열장이 뤼팽의 몸을 지켜 주고 있었다. "거들어 다오, 보트를레, 그렇게 곁눈질만 하고 있지 말고, 쏘아라, 어서!" 늙은 형사부장은 성이 머리끝까지 나서 거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사실 보트를레는 이제까지 열심히 보고만 있었을 뿐,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니마르가 부르는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손은 권총을 잡았다. '내가 결심만 하면, 뤼팽은 파멸이다. 더우기 그건 내 의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의 눈이 부딪쳤다. 뤼팽의 눈은 마치, '이 소년이 감히 패배자에게 마지막 타격을 가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은 위에서 아래까지 세차게 흔들렸다. "거들어 다오, 보트를레, 놓쳐선 안돼" 하고 가니마르는 소리를쳤다. 보토를레는 권총을 올렸다. 기암성 (28)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예정된 퇴각 다음의 일은 눈 깜작할 사이에 일어났으므로,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뤼팽은 몸은 구부리고 벽을 따라 뛰기 시작하여, 가니마르가 휘두르는 권총의 바로 아래, 문 옆을 스쳐가는가 했더니, 갑자기 보트를레는 방바닥에 나둥그러지고, 무지무지한 힘으로 자기의 몸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뤼팽은 보트를레의 몸뚱이를 살아 있는 방패처럼 공중으로 들어 올려, 그 뒤에 몸을 가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달아나고야 말걸, 가니마르! 뤼팽에겐 언제나 꾀가 있단 말이다." 그는 날쌔게 세 폭 병풍 쪽으로 뛰어 갔다. 그리하여 한 손으로 보트를레를 자기의 가슴에 꼭 붙이고, 다른 한 손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살아난 것이다.... 곧 그들의 눈앞에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자." 하고, 뤼팽은 보트를레를 앞으로 떼밀며너서 말했다. "육군을 무찔렀다.... 이젠 프랑스 해군과의 싸움이다. 어때, 볼만하지? 자, 어서 달아나자, 보트를레..." 그들은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내렸다. 군데군데 바위 틈에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수십 미터 밖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들과 검은 군함을 보았다. 아래 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때 그들은 바다와 같은 높이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곧 널따란 동굴 속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두 개의 등불이 어둠 속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림자 하나가 쑥 불거지더니, 여자 하나가 뤼팽의 목을 감았다. "빨리,빨리! 전 걱정했어요! 여태 뭘 하고 계셨어요? ... 아니, 혼자가 아니시군요?" 뤼팽은 그 여자를 안심시켰다. "우리 친구 보트를레야... 보트를레가 아주 잘 해 줬어.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시간이 없으니까... 샤롤레, 거기 있나? 배는 어찌 됐나?" "배는 준비돼 있습니다." "그럼 떠나자!" 곧 모터 보트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모터 보트야" 하고 뤼팽은 말했다. "어때, 놀랐지, 보트를레? 모르겠어? 저 물은 밀물 때에 이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에 불과해. 그래서 결국 나는 여기에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안전한 항구를 가지고 있는 셈이야..." "하지만 닫혀져 있는걸요. 아무도 여기에 들어올 수도 없고, 여기서 나갈 수도 없겠네요." 하고 보트를레가 말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곧 증명해 보일 테니까." 뤼팽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먼저 레이몽드를 보트에 태운 뒤, 보트를레를 데리러 돌아왔다. 소년은 망설였다. "무서운가?" 뤼팽이 물었다. "뭐가요?" "군함에게 격침을 당할까 봐?" "아니요." "그렇다면 가니마르 편, 즉 정의,사회,도덕의 편에 머물러 잇는 것이 자네 의무이고, 뤼팽 편, 즉 치욕과 불명예의 편을 따라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자네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네... 당분간, 우리는 둘 다 죽은줄 알게 해 둘 필요가 있어... 내가 장차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를 조용히 있게 해 줘야만 하거든." 뤼팽이 팔을 꼭 잡고 있으므로, 아무리 거역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보트를레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호감을 이 사나이에게 느끼고 있는 이상, 그런 기분에 따라간들 상관없지 않겠는가? "자, 가자!" 하고 뤼팽은 소리쳤다. 보트를레는 고분고분 보트까지 따라갔다. 이 보트의 모양은 매우 기묘해 보였다. 그들은 갑판에 오르자, 곧 뚜껑문에 걸려 있는 사다리를 내려갔다. 뚜껑문은 다시 닫혀 버렸다. 사다리 아래에는 등불로 훤히 밝혀진 매우 좁은 방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레이몽드가 와 있었다. 뤼팽은 통화기를 들고 출발 명령을 내렸다. 보트를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느끼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어어, 배가 가라앉지 않나요?" 하고, 보트를레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안심해.... 우리가 있는 윗동굴에서 저 아래에 있는 작은 동굴로 가는 동안 뿐이니까, 아랫동굴은 절반이 바다로 틔어 있어서, 썰물 때면 그리고 들어갈 수가 있어... 조개 줍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어... 아! 지금 아랫동굴에서 바다로 나가고 있다. 통로가 좁거든! 꼭 이 잠수정의 너비만큼밖에 안돼..." 아닌게 아니라, 동굴 밖으로 나가니까 파란 빛이 보였다. 그것은 뱃전의 유리창과, 바다의 윗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잠망경을 통해서 배안으로 비쳐왔다. 그러자 곧 그림자 하나가 그들 위를 미끄러져 갔다. "곧 공격이 시작되겠군. 놈들의 배가 에귀유를 에워싸고 있어. 하지만 놈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진 못할걸." 뤼팽은 통화기를 들었다. "샤롤레, 바다 밑을 떠나지 마라... 어디로 가느냐고? 말했지 않아? 뤼팽 항이지...지금 속력을 다내고 있는 건가? 물이 있을 동안에 도착해야 한다. 오늘은 부인이 계시니까..." 잠수정은 바다 밑의 암석 위를 스치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바닷말이 물의 흐름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또 하나의 그림자, 먼젓것보다 더 긴 그림자가 지나갔다. "군함이다!" 하고 뤼팽은 말했다. "곧 대포가 입을 열겠구나... 에귀유를 폭파할까? ... 어어이, 샤롤레! 자고 있는 것 아냐?" 잠수정은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암석의 벌 다음에는 모래밭이 나오고, 그런 다음에는 또 암석의 벌이 나타나곤 했다. 뤼팽은 샤롤레를 불렀다. "자, 떠오르지, 이제 위험은 없다." 그들은 바다의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바닷가에서 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이 때 보트를레는 이 모터 보트가 얼마나 빨리 달리고있는가를 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디에프의 앞바다에서는 고기잡이 배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물 속에 잠겨서 가지 않으면안 되었다. 그로부터 20분이 지난 뒤, 그들은 바닷가를 향하여 비스듬히 달려갔다. 이윽고 배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뚫어서 만든 바닷속의 조그만 항구로 들어간 뒤, 가만히 떠올랐다. "뤼팽 항이야." 하고 뤼팽은 알려 주었다. 기암성 (29) 원제 / L'AGUILLE CREUSE (1909) 작가 / Maurice Leblanc ♣ 슬픈 종말 여기는 디에프에서 2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으로, 좌우로 두 군데에 낭떠러지의 무너진 곳이 있었으며, 아주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이었다. 고운 모래가 가느다란 해변의 언덕을 덮고 있었다. "내리게, 보트를레. 레이몽드, 내 손을 잡아요. 샤를레, 너는 에귀유로 돌아가서, 가니마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오너라. 무척 궁금하구나." 보트를레가, 이 뤼팽 항이라는 닫혀진 항구에서 어떻게 나갈 것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낭떠러지 아래에 쇠사슬 다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뤼팽이 이렇게 말했다. "저 낭떠러지 너머가 뇌빌레르라는 곳인데, 나는 거기에 농장 하나를 사 놓았네. 나는 이제까지의 사업에서 손을 떼고, 세상 일엔 아랑곳없이, 어머니와 아내와 더불어, 거기서 어엿한 시골 양반의 생활을 할 작정이네. 이제 괴도 신사는 죽었고, '농부 신사 만세!'라 그런 말이야." 사다리가 끝나자, 빗물로 움푹 팬 가파른 길이 나섰다. 그 안 쪽까지 간뒤에, 그들은 난간이 붙어있는 계단 같은 것을 올라갔다. 30분쯤 올라가니 언덕이 나왔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땅바닥을 파서 지은 움막이 있었다. 그것은 바닷가를 지키는 세관 관리의 집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오솔길 모퉁이에 세관 관리 하나가 나타났다. "아무 일 없었나, 고멜?" 하고 뤼팽이 그에게 물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두목." "수상쩍은 놈도 없어고?" "예, 두목... 그런데..." "뭐야?" "오늘 아침 제 마누라가 보니까, 뱃사람 하나가 마을에서 얼쩡거리더랍니다." "어떻게 생긴 놈이야, 그 뱃사람은?" "이상하게 생겼는데..., 영국사람 같더랍니다." "그래! 그래서 부인에게 뭐라고 했나?" 하고 뤼팽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잘 살펴보라고 일러 뒀습니다. 두목" "잘 했다. 여기서 두어 시간, 샤롤레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거라. 무슨 일이 있거든... 난 농장에 있을 테니까." 그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보트를레에게 말했다. "걱정스러운데... 셜록 홈즈일까? 만약 그 놈이라면, 단단히 골이 나 있을테니 속 꽤나 썩이겠는걸."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되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쩐지 나쁜 예감이 드는데." 그는 보트를레의 팔을 잡고, 앞장서 가고 있는 레이몽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 보트를레, 저 여자는 내가 뤼팽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저 여자가 미워하고 있는 모든 과거를 저 여자의 추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까?" 그는 흥분을 억누르면서, 확신을 가지고 말을 이었다. "잊어버리겠지! 암, 잊어버리고 말고! 나는 저 여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으니까. 나는 감히 아무도 범할 수 없는 피신처, 에귀유 크뢰즈를 희생했다... 나는 또 내 보물도 권력도 자존심도 다 희생했다. 나는 앞으로도 무엇이고 다 희생하리라... 나는 이제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인간, 정직한 인간밖에는 아무것도 말이야. 왜냐하면, 저 여자는 정직한 사람밖에는 사랑하지 못하니까..." 그는 엄숙하게 말하며 계속 열정적으로 중얼거렸다. "아! 알겠나, 보트를레? 내가 내 모험의 생활 속에서 맛본 그 어떤 맹렬한 기쁨도, 저 여자가 내게 만족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 눈초리만큼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럴 때면 내게는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느끼네, 그리고 나는 울고 싶어지지..." 보트를레는 그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뤼팽의 눈에 눈물이 흐르다니, 사랑의 눈물이! 레이몽드는 매우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돌아보았다. "저기 고멜 아주머니가 달려오고 있어요...." 아닌게 아니라, 세관원의 아내가 헐레벌떡 농장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뤼팽도 황급히 다가갔다. "뭐요? 무슨 일이요? 어서 말해 봐요!" 숨이 막혀, 고멜의 아내는 더듬더듬 말했다. "어떤 남자가... 객실에 어떤 남자가 와 있는걸 봤어요." "오늘 아침의 그 영국인입니까?" "예! 그러나 다른 변장을 하고 있어요...." "그를 만나 보았나요?" "아니요. 그러나 그는 어머님을 만났어요. 그가 막 나가려고 했을 때, 발메라 마님과 딱 마주쳐 버렸지요." "그래서?" "그는 루이 발메라를 찾고 있다면서, 수령님의 친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니까 마님은, 아들은 여러 해 동안 여행 중이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러니까 가 버렸나요?" "아니요. 그는 들판 쪽의 창에서 손짓을 했어요... 누구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뤼팽은 망설이는 것 같았다. 고함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레이몽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예요... 어머니 목소리예요..." 뤼팽은 레이몽드에게 달려들어, 정열적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가자! 어서 달아나자, 네가 먼저다..." 그러나 곧 그는 주저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야, 그럴 순 없어... 미안해, 레이몽드... 불쌍한 어머니가 저기에... 여기에 있어 줘.... 보트를레, 레이몽드의 곁을 떠나지 말아 주게." 뤼팽은 농장 주위의 울타리를 따라서, 문 앞까지 뛰어갔다. 레이몽드도 보트를레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뤼팽과 거의 동시에 거기에 도착했다. 보트를레는 나무 위에 숨어 있었는데, 농가에서 울타리로 통하고 있는 오솔길을 세 사나이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가장 키가 큰 사나이가 앞장을 섰고, 다른 두 사나이는 여자 하나를 껴안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비명를 지르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으나, 보트를레는 그 사람이 셜록 홈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흰 머리가 그 여자의 파리한 얼굴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네 사람은 다가오고 있었다. 울타리까지 오자, 홈즈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뤼팽은 걸어 나아가, 그의 앞에 딱 버티어 섰다. 두 원수는 말없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똑같은 증오심으로, 그들의 얼굴은 씰룩거렸다. 그들은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뤼팽이 침착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부하들에게 그 여자를 풀어 주라고 해라!" "싫다!" 두 사람이 다 결투를 시작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둘 다 온몸에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공연한 말질이나 도발적인 조롱 같은 것은 이제는 없었다. 오직 침묵, 죽음과 같은 침묵뿐이었다. 레이몽드는 가슴을 졸이면서, 대결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그 여자의 팔을 잡고 꼼짝도 못 하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뤼팽이 다시 말했다. "부하들에게 그 여자를 풀어 주라고 해라!" "싫다!" "내 말 들어, 홈즈..." 그러나 뤼팽은 말을 더 해서 무엇 하랴 싶어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홈즈라는 이름의 이 자존심과 의지롤 똘똘 뭉쳐 있는 거인에 대해서, 으름장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만사를 각오하고, 느닷없이 그는 저고리의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영국인은 미리 알아차리고, 붙잡아 놓은 여자 쪽으로 뛰어가, 그 여자의 이마에 권총을 바짝 들이댔다. "꼼짝 마라, 뤼팽! 쏘아 버릴 테다." 동시에 그의 두 부하도 권총을 꺼내어 뤼팽을 겨누었다. 뤼팽은 복받쳐 오르는 울화를 꾹 참고,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원수에게 가슴을 드러내 놓은 채, 쌀쌀하게 말했다. "홈즈, 세 번째로 말하겠는데, 그 여잘 풀어줘라." 영국인은 비웃었다. "이 여자에게 손댈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런 말이냐? 자, 자, 웃기는 소린 작작 하고. 네 이름은 발메라도 아니고, 뤼팽도 아니다. 그런 건 다 훔친 이름이니까. 그리고 또,네 어머니로 가장시킨 이 늙은 여자만 하더라도, 너의 오랜 공범자이자, 네 유모인 빅토와르가 아니냐!" 홈즈는 실수를 했다. 그는 복수심에 끌린 나머지, 자기의 말에 떨고 있는 레이몽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뤼팽은 그 틈을 타서, 날쌔게 총을 쏘았다. "빌어먹을!" 하고 홈즈는 외쳤다. 총에 맞은 홈즈의 팔은 축 늘어져 버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쏘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쏘라니까!" 그러나 어느 새 뤼팽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 쪽에 있던 놈은가슴을 맞고 땅바닥에 나둥그러졌고, 다른 한 놈은 턱을 얻어맞고 울타리에 쓰러졌다. "정신 차려, 빅토와르... 그 놈들을 묶어버려... 자, 이제 우리 둘이서 겨루자! 이 영국놈아.." 홈즈는 어느 새 왼손으로 권총을 집어들고 겨누었다. 한 방의 총소리..., 이어서 비명 소리... 레이몽드가 두 사나이 사이에 뛰어들어, 영국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비틀거리며, 목에 손을 대고는 뱅글뱅글 도는가 싶더니, 뤼팽의 발 아래 푹 쓰러져 버렸다. "레이몽드.. 레이몽드!.." 뤼팽은 정신없이 그 여자에게 달려들어, 꼭 껴안았다. "죽었어...!" 하고, 그는 소리쳤다. 모두들 멍하기 서 있었다. 홈즈는 자기의 행위에 당황한 것 같았다. 빅토와르는 더듬더듬 말했다. "얘야... 얘야.." 보트를레는 그 쪽으로 가서, 몸을 구부리고 살펴보았다. 뤼팽은 '죽었어! 죽어버렸어!' 하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마치 아직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그의 얼굴은 갑자기 고통으로 일그러지더니, 미친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괴로와서 못 배기는 어린애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죽일 놈 같으니!" 증오심에 사로잡혀, 그는 그렇게 외쳤다. 그러고는 왈칵 몸을 날려 홈즈를 넘어뜨리고, 그의 목을 졸랐다. "얘야... 얘야..." 하고, 빅토와르는 울부짖었다. 보트를레가 그리고 뛰어갔다. 그러나 벌써 뤼팽은 손을 놓고, 땅바닥에 쓰러진 원수옆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너무도 가련한 광경이었다. 어둠의 장막이 이 싸움터를 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 영국인은 묶여서 재갈을 물린채, 풀 속에 팽개쳐져 있었다. 노래 소리가 널따란 들판의 고요를 흔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에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뤼팽은 일어났다. 그는 그 단조로운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레이몽드와 함께 조용히 살려던 그 행복한 농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뒤에, 사랑 때문에 죽게 된 가엾은 여인을, 새하얀 얼굴을 하고 영원히 잠들어 있는 레이몽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농부들이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뤼팽은, 죽은 여인을 그 실팍진 팔로 안아 올려, 등에 업었다. "갑시다, 빅토와르." "가자, 얘야." "잘 있게, 보트를레." 뤼팽은 그렇게 말하고서, 그 소중한 짐을 짊어진 채 늙은 유모를 데리고 말없이 바다 쪽으로 걸어가더니, 이윽고 그 모습은 깊은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