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지은이: 존 르까레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제1장 - 검문소 제2장 - 서커스 제3장 - 타락 제4장 - 리즈 제5장 - 외상 제6장 - 접선 제7장 - 키버 제8장 - 르 미라지 저택 제9장 - 이틀째 제10장 - 사흘째 제11장 - 알렉의 친구들 제12장 - 동독 제13장 - 핀과 클립 제14장 - 의뢰인에게 보낸 편지 제15장 - 무도회에 가다 제16장 - 체포 제17장 - 문트 제18장 - 피들러 제19장 - 지부회의 제20장 - 청문회 제21장 - 증인 제22장 - 의장 제23장 - 고백 제24장 - 지구위원 제25장 - 벽 제26장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오다 ⊙ <작가소개> 존 르까레(John Le Carre)는 영국 도셋군의 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이며, 스위스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이튼 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외교관을 거쳐 추리소설 작가가 되었다. 르 카레는 프랑스식 이름을 갖긴 했지만 순수한 영국 태생으로,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David John Moore Cornwell)이다. 독일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덕분에 스위스의 빈을 근거지로 하는 영국 첩보부의 부탁으로 잠시 동안이지만 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것이 뒷날 그가 스파이 소설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영국으로 돌아가 옥스퍼드 대학의 링컨 칼리지에서 근대 유럽 어학을 전공하고서 학위를 받았다. 1956년부터 명문인 이튼 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친 뒤 1959년부터는 외무성 2등서기관으로 서독의 본, 함부르크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며 틈틈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아침 5시부터 8시까지, 그리고 주말은 대개 글쓰는 데 보냈다. 그리하여 1961년 첫작품인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 를 발표했고 1962년에 <고귀한 살인> 을 발표했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세번째 작품인 <추운 나라에서 온스파이> 를 발표하고부터 일약 인기작가에 오르며 수입도 상당히 생겨서 1964년 3월에 외교관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 1974년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를 발표하여 또 한 번 독서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바 있다. 제1장 - 검문소 미국인은 리머스의 손에 커피를 다시 한잔 건네주며, "가서 한잠 자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가 나타나면 전화로 연락하겠습니다." 리머스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검문소의 창문 너머로 통행인의 그림자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고만 있다. "아무리 기다려 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아마 그는 시간을 변경한 모양입니다. 나타나기만 하면 경찰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부에서라면 20분이면 달려올 수 있겠죠." "아니야." 리머스가 말했다. "곧 해가 진다." "그렇다고 더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예정보다 아홉 시간이나 지났습니다." "돌아가고 싶으면 자네는 가도 좋아. 수고 많았어." 그리고 리머스는 덧붙여서, "자네가 애쓴 것은 크라머에게 말해 두겠네." "하지만 당신은 언제까지 기다릴 셈입니까?" "그가 올 때까지." 리머스는 감시대의 창문까지 가서 꼼짝 않고 감시를 계속 하고 있는 두 경찰관 사이에 섰다. 경찰관들 손에 들려진 쌍안경은 동독 쪽 검문소를 향하고 있다. "그 사내는 어둡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리머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게 틀림없어." "오늘 아침 당신 말로는 노동자들 사이에 섞여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리머스는 돌아보며, "첩보부원은 항공기와 달라서 예정대로는 못 움직여. 더구나 그는 밀고당해 쫓기고 있는 몸이야. 겁나는 거야. 이 순간에도 문트의 손이 뻗칠는지도 몰라. 이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야. 시간은 그에게 맡길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지." 젊은 미국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기는 하지만 그럴 계기가 잡히지 않는다. 감시대 안에서 벨이 울렸다. 순간 그들은 긴장했다. 경찰관 하나가 독일어로 말했다. "검정색 오펠 자동차입니다. 차 번호는 서독." "이렇게 어두운데 동독 쪽까지 보일 리가 있나. 녀석들 짐작만으로 떠들고 있을 뿐이지." 미국인은 조그만 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덧붙이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문트가 어떻게 알았을까?" "쉿!" 창가에서 리머스가 막았다. 경찰관 하나가 감시대를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테니스 코트의 베이스 라인처럼 하얗게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그 두어 걸음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아올린 방책이 만들어져 있는데, 경찰관은 거기에 설치해 놓은 망원경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감시대에 남아 있던 경찰관은 그것을 보더니 쌍안경을 놔두고 문의 못에 걸려 있는 검정색 헬멧을 떼어내어 단정히 썼다. 검문소의 높은 곳에서 몇 개의 아크 등이 번쩍이며 전방의 도로 위에다 드라마틱한 광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관은 보고를 시작했다. 리머스는 귀담아 들었다. "차는 제1컨트롤을 통과. 탑승자는 여자 한 명. 서류검사를 위해 인민경찰서로 데리고 갔음." 그 뒤 그들은 말없이 기다렸다. "뭐라는 겁니까?" 미국인이 물었지만 리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쌍안경을 집어들고 동독의 컨트롤을 보고 있을 뿐이다. "서류검사 완료. 제2컨트롤로 데리고 감." "리머스 씨, 드디어 당신이 기다리던 사나이가 왔군요. 본부에 연락할까요?" "기다려." "차는 어디에 두었습니까? 뭘 하고 있습니까?" "소지한 돈 검사. 세관이야." 간단히 대답하고 리머스는 차를 지켜보았다. 운전석 문앞에 인민경찰의 경관 둘이 서서 하나는 차 안에 대고 말을 하고 있고, 하나는 조금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 세 번째 경관이 차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기다가 트렁크 앞에서 발을 멈추더니 운전석으로 다시 갔다. 자동차 열쇠를 달라고 한 것이다. 그것으로 트렁크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닫아버리고서 열쇠를 되돌려주고는 도로를 걸어서 사라졌다. 30 미터쯤 앞 동서(東西)의 검문소가 마주보고 있는 중간 지점에 동독군 초병 두 명의 그림자가 보인다. 가죽 장화에 헐렁한 바지. 번쩍이는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서 무슨 말인지를 주고받고 있다. 차 옆에 있던 군인이 기계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통과해도 좋다는 신호다. 도로의 중간쯤, 두 명의 초병이 있는 곳에서 또 한 번 정차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차 주위를 살펴보고 조금 떨어진 곳까지 물러나서 또 뭐라고 얘기하더니 마침내 그것도 마지못한 듯 경계선 통과를 인정했다. 서 베를린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저겁니까, 리머스 씨? 당신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 미국인이 물었다. "그래, 저거야." 윗도리 옷깃을 세우고 리머스는 10월의 찬바람 속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얼굴이 의식되었다. 감시대에 남겨두고 온 미심쩍은 얼굴과 얼굴들. 사람은 달라도 모두 다 같은 표정들. 교통사고의 현장에 모여드는, 아무런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군중과 같은 사람들. 어째서 그런 사고가 발생했는지, 또는 시체를 옮겨도 좋을는지 그들은 전혀 모른다. 아크 등의 조명 아래 먼지인지 연기인지가 자욱하다. 광선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하얀 시트의 영상. 리머스는 차 옆으로 다가가서 여자에게 말했다. "그는 어디 있소?" "체포하러 와서 달아났어요, 자전거로. 그 녀석들은 저에 관해서까지는 모르고 있거든요." "어디로 달아났지?" "우리는 브란덴부르크 근처에 방을 빌려놓았어요. 술집 2층이죠. 거기에 그 사람의 돈과 서류가 있어요. 아마 그리로 갔을 거예요. 그 다음에 탈출할 생각이겠죠." "오늘밤 중으로 말이오?" "그럴 생각이라고 했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잡히고 말았어요. 파울, 비레크, 랜드저, 잘로몬, 모두요. 그 사람도 이젠 틀렸어요." 리머스는 한동안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랜드저까지도?" "어젯밤에요." 경관이 리머스의 곁에 서서, "자리를 옮겨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경계선상에 정지하는 것은 절대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리머스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시끄러." 하고 쏘아붙였다. 독일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자가 입을 열어, "타시지요. 저 모퉁이로 옮기겠어요." 리머스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다음 모퉁이로 옮겨갔다. "당신이 차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소." "제 남편 거예요."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가 결혼한 것까진 카를이 말하지 않았군요." 리머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편도 저와 같은 광학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곳 일이 할당됐거든요. 카를이 말한 것은 제 결혼 전 이름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까지 끌려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 당신 일에." 리머스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이 어디 묵을 곳이 있어야겠지. 알브레히트 뒤러 가(街)에 아파트를 빌려놓았소. 박물관 다음 거리에 있는데, 번지는 28의 A. 필요한 것은 모두 준비되어 있소. 그 사람이 오면 전화로 알려주겠소." "저 여기 있을께요. 당신과 함께." "나도 돌아갈 거요. 곧바로 아파트로 가시오. 전화로 알려줄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야 아무런 의미가 없소." "하지만 그 사람도 이 검문소를 지나올 계획인데요." 리머스가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그가 그렇게 말했소?" "예, 그 사람은 여기 인민경찰에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 하숙집 주인 아들이에요. 그 남자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이 길을 택한 거지요." "그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했단 말이오?" "그 사람은 저를 믿거든요. 뭐든지 다 말해 줘요." 그는 그녀에게 열쇠를 건네주고 검문소로 다시 돌아왔다. 찬바람 부는 곳을 피해서. 안에서는 경관들이 무슨 이야기인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가 들어가니 키 큰 사나이가 일부러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까는 미안하게 됐어." 리머스가 말했다. "신경질을 부려서 정말 미안하네." 그렇게 말하고는 낡은 서류가방을 열고 안을 뒤지더니 마침내 찾던 물건을 발견했다. 반쯤 남아 있는 위스키 병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고맙다고 하고서 술병을 받아든 상급자인 듯한 경관이 각자의 커피 잔에 반씩 따르고 나서 나머지는 블랙 커피로 채웠다. "미국인은 어딜 갔지?" 하고 리머스가 물으니, "누굽니까?" "미국 CIA에 있는 사내야. 아까까지 여기 있었는데." "슬슬 침대로 가야 하는 시간이 온다나 봐요." 상급자 사나이가 빈정대니 모두가 웃었다. 리머스는 컵을 내려놓고, "월경해 오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원호사격에는 어떤 규칙이 있나? 그것도 그 사람이 쫓기고 있을 때에 말이야." "원호사격이 허락되는 것은 인민경찰 녀석들이 우리 서쪽을 향해 발포했을 때에 한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경계선을 넘어올 때까지는 쏘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로군." 상급자인 그 사나이가 대답하기를, "그런 셈입니다, 미스터..." "토머스. 난 토머스라고 해." 그렇게 말하며 리머스는 새삼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두 경관도 각자 자기 이름을 댔다. "요컨대 원호사격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칫 그런 실수를 했다가는 전쟁을 끌어들이게 된다고 겁을 주더군요." 젊은 경관도 위스키의 취기가 돌았는지, "전쟁의 위험이라! 웃기는 이야기지요. 주둔군만 철수하게 되면 벽 같은 것은 내일이라도 철거가 됩니다." 상급자인 경관도 중얼거리듯이, "베를린 그 자체가 없어질는지도 모르지." 그때 갑자기 리머스가 말했다. "오늘밤 탈출해 오는 사내가 있어." "여기로요? 이 검문소 길로 말입니까?" "그 사나이를 살려내는 것엔 대단히 중대한 의미가 있어. 문트의 부하에게 쫓기고 있거든." "단념하는 데에는 타이밍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 말고도 쓸 만한 사람이 있을 텐데요." "그 사나이는 보통이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지 헤치고 나올 머리가 있어. 신분증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이 도움이 될 거야. 자전거도 가지고 있고." 검문소에는 전등이 하나 켜져 있을 뿐이다. 녹색 갓을 씌운 독서용 스탠드이지만, 대신에 아크 등의 불빛이 인공의 달빛처럼 실내에 가득차 있다. 이미 저녁 노을도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주위는 정적에 싸여 있다. 주고받는 말을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지 누구나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 리머스는 창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의 도로와 양쪽의 벽. 더럽고 볼품없는 콘크리트 블럭과 철조망이 싸구려 황색 불빛에 비쳐서 포로수용소의 배경과 같이 보였다. 벽의 동과 서는 부흥의 흔적을 볼 수 없는 베를린. 폐허를 그대로 반으로 잘라놓은 세계. 전쟁의 잔해. 골칫거리 여자라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카를이란 놈이 내게 거짓말을 했어. 말해 주지 않은 것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전세계의 스파이들이 쓰고 있는 수법이지. 거짓말을 해서 행동의 흔적을 감추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나중에는 가르쳐준 상대방에게까지 그 수법을 써먹는 것이다. 카를이 꼭 한 번 그녀를 소개해 준 일이 있다. 작년 쉬르츠 가(街)의 집에서 식사를 끝낸 뒤였다. 그때는 카를이 중요한 정보를 전해 왔으므로 관리관이 만나겠다고 했다. 이 관리관에게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언제나 자신이 먼저 열을 올리고 나서는 버릇이 있었다. 리머스, 관리관, 카를 - 셋이서 식사를 했다. 카를은 본래부터 그런 것을 좋아해서 주일학교의 어린애처럼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잔뜩 차려입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관리관은 한 5분 동안이나 악수를 계속하더니 이렇게 입을 열었다. "만나게 돼서 반갑소, 미스터 카를. 정말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곁에서 리머스는 생각했다. 이 카를이란 놈, 이 말 한마디에 연 200 파운드는 과외로 더 달라고 하겠지. 식사가 끝나자 관리관은 다시 한 번 정성스럽게 악수하고 의미 있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만 헤어지긴 하지만 오늘밤 어딘가에서 자기는 또 위험 속에 내던져질 것이라고 하고는 운전사가 있는 차로 돌아갔다. 그런 뒤에 카를은 큰소리로 웃었다. 리머스도 함께 웃었다. 둘이서 샴페인의 나머지를 해치우며 관리관을 두고 웃었다. 그리고 나서 둘은 '낡은 술통' 이라는 술집으로 갔다. 카를이 꼭 가고 싶다고 해서 갔더니 거기에서 엘비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40세의 금발 여자, 콘크리트 못처럼 단단해 보이는 여자. "알렉, 이것은 나의 중요한 비밀이오." 그래서 리머스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뒤에도 말다툼이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로 그 여자를 알고 있소? 어떤 출신의 여자요? 어떻게 알게 되었소?" 카를은 기분이 상해 대답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일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다. 리머스는 방법을 바꾸어 만나는 장소와 암호를 바꾸자고 했지만 카를은 찬성하지 않았다. 그 이면에 숨겨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이 그 여자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이미 늦었소." 카를의 말에서 리머스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조심하고 되도록 카를 앞에서는 말을 안하기로 했다. 스파이의 테크닉인 속임수를 보다 많이 쓰기로 한 것이다. 그 여자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녀의 차 안에. 그의 첩보망, 그들의 아지트, 그 모두를 알고 있다. 리머스는 새삼스럽게 증오하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첩보계에 관계된 놈은 그가 누구든간에 믿는 것은 위험하다. 그는 전화기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자기 방 다이얼을 돌렸다. 마르타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러 가에 손님을 초대했어." 리머스가 말했다. "남자와 여자야." "부부인가요?" 마르타가 물었다. "비슷해." 리머스가 대답하니 그녀는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경관 하나가 돌아보며, "토머스 씨! 빨리!" 리머스는 감시창으로 달려갔다. "남자입니다, 토머스 씨." 젊은 경관이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자전거에 타고 있습니다." 리머스는 쌍안경을 집어들었다. 카를이었다. 이만큼 떨어져 있어도 잘못 볼 리는 없었다. 국방군의 낡은 방수 외투를 입고 자전거를 끌며 걸어오고 있다. 성공한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것이 분명하다. 서류심사가 끝나고 남은 것은 소지품의 조사와 세관수속을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계속 살펴보니 카를은 자전거를 울타리에 기대어놓고 무심한 몸짓으로 세관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얄밉도록 멋지다. 이윽고 카를이 다시 나왔다. 웃는 얼굴로 관문 앞에 서 있는 사나이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빨간색과 흰색의 가로막대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지나왔다.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해낸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통로의 중간 경계선 바로 위에 서 있는 한 인민경찰관 앞만 지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카를이 무슨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위험을 직감한 듯한 몸짓으로 흘끔 뒤를 돌아보고는 찰싹 핸들 위에 엎드리더니 맹렬한 기세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아직 다리 위에는 초병 하나가 서 있다. 이 병사가 뒤를 돌아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때 전혀 예상치도 않게 서치라이트가 번쩍였다. 번들거리는 백열의 빛이 카를을 잡았다. 빛을 받은 그의 모습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앞에 나타난 토끼를 연상케 했다. 사이렌이 높고 낮게 울리며, 명령을 전달하는 고함소리가 어지럽게 교차되었다. 리머스 앞쪽에 있던 서독 경관 둘이 무릎을 꿇고 모래주머니 틈사이로 자동소총을 재빨리 쏘기 시작했다. 동독의 초병은 조심스럽게 그 총알을 피해 가며 자기네 지역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첫번째 총알이 카를을 앞으로 고꾸라지게 하는 듯 보이더니 두 번째는 몸을 뒤로 젖혀지게 했다. 그래도 그는 자전거를 몰아 초병 앞을 돌파했다. 그러나 사격은 계속되고 마침내 털썩 땅 위로 굴러떨어졌다. 자전거 넘어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 리머스는 하나님께 빌었다. 제2장 - 서커스 템플호프 공항 활주로가 발 밑으로 가라앉듯 멀어지는 것을 리머스의 눈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본래 내성적인 사나이도 아니고, 더구나 철학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쫓겨날 것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인생이며, 앞으로는 이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 점에서는 암이나 징역을 선고당한 사나이와 다를 것이 없다. 그것과 현재와의 갭을 메꾸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겠지만 그 또한 무리라고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듯 그는 시니컬한 분노와 고독한 자의 용기로서 파면을 맞이해야만 했다.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해야겠지만, 마침내 그 위치에서 쫓겨날 때가 온 것이다. 개는 이빨이 튼튼한 동안에는 살아나간다고 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리머스의 이는 이미 뽑혀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뽑아간 자는 문트였다. 10년 전이라면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케임브리지 서커스에 있는 소속불명의 정부기관에도 일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곳을 선택하면 언제까지고 자리를 유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리머스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에게 현장에서 뛰는 것을 그만두고 사무실 안에서 작전계획이나 짜며 일신의 안전이나 걱정하라고 권하는 것은 경마의 기수를 잡아다가 마권 집계원으로 전직하라고 설득하는 꼴이다. 그는 베를린 근무를 계속했다. 연말마다 인사과는 그의 귀임을 문제삼았다. 그것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머지않아 무슨 일이 터지고 말 것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현지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었다. 첩보계에는 윤리규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지배하고 있다. 만사는 결과에 의해서 정당화된다는 것. 자기들 멋대로 이유를 갖다붙이는 관공서라 할지라도 이 법칙에는 맞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리머스는 성과를 올렸었다. 문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문트가 이른바 ‘벽에 쓰여진 문자,’ 즉 임박해 오는 위험의 상징임을 리머스는 이상하리만큼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의 경력은 분명했다. 한스_디터 문트, 라이프치히 태생으로 나이는 42세. 사진도 입수되어 있다. 갈색 머리카락 밑의 무표정하고 냉혹해 보이는 얼굴. 그가 동독 첩보부의 2인자, 현장 작전의 책임자라는 위치에까지 승진한 경위는 리머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가 첩보부 안에서 꺼려 하는 인물인 것도 역스파이들의 입을 통해 익히 들은 바 있다. 동독사회주의통일당에 있어서 최고회의의 구성원 중 하나이며, 기밀방위위원회에 문트와 함께 참석하는 일이 많았던 리메크가 아주 상세히 말해 주었다. 이 사나이는 문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사실로 나타났다. 드디어 리메크는 문트에게 살해된 것이다. 1959년까지 첩보부 안에서의 문트의 위치는 보잘것없는 것으로서, 동독철강조사단의 일원이라는 이름 아래 런던에서 첩보 임무를 맡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동료 첩보원 두 명을 살해하고 겨우 독일로 달아났다가 그 뒤 1년 여는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라이프치히에 있는 첩보부에서 자금국의 국장으로 영전하며 다시 부활했다. 그것은 현장의 작전활동에 자금, 장비, 인원 일체를 지원해 주는 책임 있는 자리였다. 그 해 연말, 첩보부 내에 대규모의 파벌 싸움이 일어나서 그 결과 소련 연락장교단의 세력이 눈에 뛰게 줄어들었다. 고참 몇 명이 이데올로기상의 이유로 파면되고 대신 떠오른 인물이 셋 있었다. 피들러가 대적(對敵) 첩보국장의 자리에 앉고, 얀이 설비책임자로서 문트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문트는 41세의 젊은 나이로 이 기관의 중추인 차관의 요직을 차지한 것이다. 이 이동과 함께 그들은 새로운 작전방침을 세웠다. 그 때문에 리머스는 처음엔 여부원을 잃었다. 그녀는 그의 첩보망에서는 극히 작은 한 귀퉁이에 해당하며, 기록하는 일에 종사하는 데 불과했다. 그런데 서 베를린의 한 극장에서 나오는 것을 노상에서 사살한 것이다. 경찰은 범인을 검거할 수가 없었고, 리머스도 처음에는 자기들 일과는 관계가 없는 사건으로 생각했었는데 그 한 달 뒤에 드레스덴에서 침대차의 보이가 시체가 되어 선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람은 피터 길럼 부하였으며, 해고된 직후였다. 리머스는 비로소 두 사고가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알았다. 이어서 리머스 휘하에 있는 부원 두 명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비참한 사태로까지 정신없이 이어져 갔다. 그리고 이제는 카를까지 희생이 되어 리머스는 베를린을 부득이 떠나게 된 것이다. 부원다운 부원 하나 남겨두지 못하고. 문트가 이긴 것이다. 리머스는 짙은 강철색 머리칼에다 짤닥막한 사나이로서, 몸매는 수영선수를 연상시켰다. 힘이 남달리 뛰어난 것은 그의 어깨와 등, 목덜미, 그리고 잘라내고 남은 나무 그루터기를 연상케 하는 튼튼한 팔과 손가락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복장에 대한 기호는 실용주의 바로 그것. 그런 경향은 모든 면에서 나타나 있으며, 가끔 쓰는 안경만 해도 쇠로 만들어진 테로서 튼튼한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다. 옷은 거의 모두가 화학섬유로 된 것이며 조끼는 하나도 없다. 와이셔츠는 깃 끄트머리에 단추가 붙은 미국식의 것. 수에드 가죽 구두에는 고무로 된 뒤축을 달고 있었다. 얼굴은 남성적 매력으로 가득차 있고, 얇은 입술이 뚜렷한 선을 그리고 있다. 눈은 작고 눈동자는 갈색. 그가 아일랜드계라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뭐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사나이로서, 런던의 클럽에 들어가서는 종업원에게 회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베를린의 나이트 클럽이라면 언제나 정해 놓고 최상급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그것은 섣불리 이 사나이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는 시비를 걸어올까 싶어서이며, 또 한편으로는 돈깨나 있어 보였기 때문이지 꼭 어엿한 신사로 평가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스튜어디스는 흥미 있는 사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구의 신사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부자라고도 보았는데 이쪽은 틀렸다. 나이가 50에 들어섰다고 본 것은 대체로 옳았다. 그녀는 또 독신자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반은 사실이다. 오래 전에 이혼 소동을 한바탕 벌였었고, 어디 먼 곳에 지금은 십대가 되었을 아이들이 있다. 그는 그 아이들에게 시내에 있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은행에서 양육비를 보내고 있었다. "위스키를 드시려면" 스튜어디스가 말했다.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20분이면 런던 공항입니다." "그만하겠소." 스튜어디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창 아래 회녹색 켄트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항에는 폴리가 마중나와 있어서 그의 차로 런던으로 향했다. "카를이 당한 것 때문에 관리관이 저기압인 모양이야." 그는 리머스를 옆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리머스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니 폴리가 이어서 물었다. "어째서 일이 그렇게 된 거야?" "노린 거야, 문트 놈이." "죽었나?" "그런 것 같아. 통과 직전이었어.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았는데. 상대방에서도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저쪽 첩보부가 검문소에 도착한 것은 카를보다 한 발 늦었거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인민경찰이 경계선 20 미터 앞에서 쏘았어. 그는 잠깐 동안은 그대로 달리더니 곧 움직임이 멈춰지더군." "불쌍한 녀석." "그러게 말이야." 리머스가 말했다. 폴리는 리머스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리머스가 알아차린다고 해도 겁날 것이 없었다. 그는 몇 갠가의 스포츠 클럽에 소속되어 있으며, 회원 넥타이를 보란 듯이 매고서 스포츠맨인 척하는 것이 버릇이 된 사내지만 첩보부 안의 일에서는 연락담당이라는 보잘것없는 지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리머스를 요주의인물로 꼽고 있고, 리머스는 그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내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자네는 지금 어느 과에 있나?" 리머스가 물었다. "인사과야." "마음에 드나?" "물론. 재미있는 일이야." "나는 어디로 가게 되나? 이미 정해져 있지?" "관리관에게서 직접 듣게나." "자네는 모르나?" "알고는 있지." "그럼 왜 알려주지 않나?" "그건 위반이야." 폴리의 대답에 리머스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자칫 폭발할 뻔했다.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하나만 말해 주게. 나는 런던에서 하숙을 찾아야 하나?" 폴리는 귀를 후비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찾지 않아도 된다고? 그거 다행이군." 두 사람은 차를 케임브리지 서커스에 가까운 주차 미터 앞에 세웠다. 그리곤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통행증이 없지? 그럼 면회신청서를 써넣어야 돼." "언제부터 통행증이 필요하게 되었나? 매콜은 내게 관한 것이라면 어머니만큼이나 알고 있어." "새로운 규칙이야. 이 사무실에도 인원이 늘어서 말이야." 리머스는 아무 말도 않고 매콜에게는 고개만 끄덕하고 통행증 없이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관리관은 리머스와 악수를 했는데 마치 골절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처럼 신중했다. "상당히 힘들었지?" 관리관 쪽에서 변명이라도 하듯이 입을 열었다. "좌우간 좀 앉게나." 언제나처럼 음험한 목소리, 거드름을 피우는 말투다. 리머스는 의자에 앉았다. 바로 눈앞에 물을 담은 그릇이 올려진 전기 난로가 올리브 그린 색의 불꽃을 내고 있었다. "여기는 좀 춥지?" 관리관은 그렇게 묻고는 난로 앞으로 두 손을 기울여 비벼댔다. 검정 윗도리 밑에 갈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상당히 낡은 것이었다. 리머스는 관리관의 부인을 기억하고 있다. 눈치가 빨라 보이고 몸집이 작은 여잔데, 이름은 맨디라고 했다. 남편이 석탄관리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만 믿고 있다. 이 가디건도 그녀가 직접 짠 것이리라. "요새 비가 안 와서 걱정이야." 관리관이 계속했다. "추위를 쫓아보내려고 하니 공기가 너무 건조해. 이것도 위험하단 말이야."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서 버튼을 눌렀다. "커피라도 한잔하기로 하지. 기니가 휴가중이라 아주 불편해. 다른 여자가 대신 와 있는데, 이건 도무지 눈치가 없어." 이 사나이, 리머스가 처음 만났던 당시보다는 약간 시든 느낌이었지만 그밖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무관심한 척하며, 또 여전히 거만한 몸짓, 문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도 신경을 쓰는 점 같은 것은 옛날 그대로다. 모두가 리머스가 겪어온 세계와는 몇 마일이나 거리가 있는 형식주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미소, 짐짓 꾸미고 있는 듯한 겸손. 뱃속에서는 경멸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어엿한 신사, 예의범절만은 깎듯이 지키겠다고 애쓰고 있는 변하지도 않는 그 속물 근성. 그는 서랍에서 담배뭉치를 하나 꺼내어 리머스에게 주었다. "앞으로 자네는 이런 정도의 담배도 사치스럽게 느껴질 것일세." 그의 말에 리머스는 순순히 긍정하며 그 뭉치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관리관도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에 리머스가 입을 열었다. "리메크가 죽었습니다." "그랬었지." 마치 리머스가 좋은 화제를 골랐다는 듯한 얼굴로 관리관은 말했다. "불행한 일이었어. 그렇게 애석한 일은 없지. 아무래도 여자에게 밀고당했겠지. 엘비라에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 관리관이 엘비라에 관한 일을 알고 있는지 리머스는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트가 사살을 명령한 거야." 하고 관리관이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관리관은 일어서더니 재떨이를 찾아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것을 찾아내어서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두 사람의 의자 사이에 놓았다. "자넨 어떤 기분이었나? 리메크가 사살될 때에. 보고 있었겠지?"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굉장히 화가 났었습니다." 관리관은 고개를 갸웃하고 눈은 반쯤 감은 채, "그런 정도는 아니겠지. 당황했었던 것은 아닌가? 그 편이 자연스럽지." "분명히 당황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자네는 리메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가? 인간으로서의 그에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머스는 모호하게 대답하고, "그러나 그것은 문제삼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고 덧붙였다. "그날 밤 자네는 그 뒤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리메크가 사살된 뒤에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요?" 리머스의 목소리에 열이 들어가 있었다.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리메크가 마지막이었지. 그 일련의 죽음의 최후지. 내 기억에 잘못이 없다면 극장 밖에서 사살된 여자부터 시작해서 드레스덴에서 남자가 당하고, 예나에서의 체포로 이어졌어. '열명의 검둥이 소년들' 은 아니지만 파울, 비레크, 랜드저 - 모두들 죽어갔어. 그리고 그 마지막이 리메크야." 그리고는 울화가 치민다는 듯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손실이야. 자네가 손을 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던 참일세." "손을 들다니, 무슨 뜻인지요?" "넋이 나가버린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몸도 마음도 완전히 탈진해 버려서. "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그건 오히려 당신 쪽이겠지요." 하고 마지막에 리머스가 말했다. "우리들 일에 온정이란 있을 수 없지. 물론 무리한 일인 줄은 알고 있어. 그러나 상대방이 비정한 수단으로 나오면 이쪽에서 강경한 수단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야. 그렇다고 우리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 그러니 그것이 누구든 언제나 그런 장소에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세. 때로는 추운 곳에서 돌아올 필요도 있어. 알겠는가, 내 말의 뜻을?" 리머스는 보았다. 로테르담 교외의 길게 뻗은 길을. 모래 언덕을 끼고 일직선으로 나 있는 긴 길. 피난민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 마일 앞에 비행기의 그림자가 조그맣게 보였다. 행렬이 멈춰서고 누구나 그쪽을 보았다. 비행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래 언덕 위에까지 왔다. 순식간에 그곳에 혼란이 일어났다. 의미없는 지옥이. 폭탄이 투하된 것이다. "관리관!" 리머스가 말했다. "멀리 둘러서 말할 거 없습니다. 내게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무리인 줄은 알지만 조금만 더 추운 곳에서 그냥 있어 주었으면 해." 리머스의 대답이 없자 관리관은 계속했다. "우리 일의 윤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오로지 하나의 가정 위에 성립되어 있네. 우리는 침략자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야. 자네도 그것은 옳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가가 그의 입을 막고 있었다. "우리들로서도 비정한 방법으로 나갈 때가 있어. 그러나 그것은 방어를 위해서일세. 그러니까 그것은 정당한 행동이라고 믿는다네. 우리가 불쾌한 행동을 하는 것은 피아(彼我) 쌍방의 국민을 침대에서 편히 잠들게 하고 싶기 때문이야. 지나치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나? 물론 우리도 때로는 지독히 악랄한 수법을 쓸 때도 있지." 그는 국민학생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윤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너무 무리한 비교론을 폈나? 분명 한쪽의 이상과 상대방의 수단을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논리라고는 할 수가 없지. 하지만-" 리머스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외과의사가 집도하기 전에 일부러 두서없는 말을 하는 경우를 더러 보았지만 이렇게 오래 계속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즉, 그.... 수단에는 수단을, 이상에는 이상을 비교해야 한다는 걸세. 세계대전 때부터 이쪽 우리의 수단은 - 우리란 아군과 적군, 쌍방이라는 뜻이지만 - 어느 쪽이나 거의 큰 차가 없게 되었네. 이쪽 정부가 온건정책을 취한다고 해서 그 이유만으로 우리의 행동이 적만큼 비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단 말일세." 혼자 조용히 웃고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하네." 무슨 소리야, 이건 -- 하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목사를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군.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일까? "그런 까닭으로" 관리관은 계속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문트를 제거하려고 생각하고 있네. 사실--" 말을 꺼내다 말고 초조해졌는지 문 쪽으로 돌아보며, "커피는 어떻게 된 거지?" 관리관은 문앞으로 걸어가서 목을 내밀었다. 리머스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사무실 여자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는 다시 돌아보고서 반복했다. " -- 사실 나는 뼈아프게 느끼고 있네. 어떻게 해서든 머리를 짜서 문트를 제거해야만 한다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현재 동독에는 아무런 거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송두리째 잃었습니다. 당신도 방금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리메크가 마지막이었다고." 관리관은 의자에 앉아서 한동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 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세세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리머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건데," 관리관이 계속했다. "자네, 첩보계에 그만 지쳐버린 것은 아니겠지? 이거 여러 번 같은 질문을 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방금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 되풀이해서 말하는 걸세. 항공기 설계자가 말하는 금속피로점이라는 것 - 분명 그런 용어였지 - 자네도 그런 상태는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는 걸세. 어때?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해 주게." 리머스는 오늘 아침 귀국하던 때를 떠올리면서 관리관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가령 자네가" 관리관이 말했다. "그런 상태라면 우리들은 문트를 없애는 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네. 지금의 복안은 좀 색다른 방법이지만." 여사무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접시를 책상 위에 놓고 두 개의 컵에 커피를 따랐다. 그녀가 방을 나갈 때까지 관리관은 말없이 있더니, "눈치없는 여자야." 혼잣말처럼 말했다. "조금은 나은 것이 있을 것도 같은데. 기니에게 휴가가 너무 잦다고 말해 두어야겠어." 그리고 한동안은 생각에 잠긴 듯 커피를 휘젓고 있다가, "뭐니뭐니 해도 문트를 내쫓는 것이 선결문제야. 참, 자네는 술이 세다고 했지? 위스키라든가 그런 쪽이." 리머스가 그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는 이처럼 관리관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나이였다. "예, 조금. 아니, 제법 마신다고 해두죠." 관리관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트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그 녀석은 살인잡니다. 이 런던에도 1년인가 2년, 동독 철강조사단과 함께 머물렀었습니다. 당시 우리 본부에서는 매스턴이 지휘관 자리에 있었는데--" "그랬었지." "문트는 스파이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외무성 직원의 처가 그랬습니다만, 그녀를 그가 죽였지요." "조지 스마일리도 죽을 뻔했지. 물론 그 여자의 남편은 사살되었고. 문트만큼 기분나쁜 사나이도 없어. 히틀러_유스 출신이며 공산당원이라고는 하지만 이론가나 지적인 면은 한구석도 없어. 오로지 냉전용의 전투원이지." "우리들과 같군요." 리머스가 쌀쌀맞게 말했다. 관리관은 웃지도 않고, "그 사건은 조지 스마일리가 잘 알고 있지. 그가 지금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지만 찾아내어 들어보는 게 좋을 걸세. 그 사람, 17세기 독일문화 연구자로서 첼시 (런던 시내 남쪽의 자치구) 에 살고 있네. 슬롬 스퀘어 뒤쪽이 되는 곳일세. 바이워터 가(街)는 자네도 알고 있지?" "예." "그리고 길럼 역시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지. 길럼은 지금 위성 4호의 일을 하고 있네. 방은 이곳 1층이고. 이 사무실도 자네가 있었던 때와는 형편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네." "예." "그들과 함께 하루이틀 지내보게나. 둘 다 내 계획을 알고 있네. 그 뒤에, 어때, 이번 주말 우리 집에 오지 않겠나?" 그리고는 급히 덧붙여 말했다. "집사람은 친정에 가게 되어 있어서 없을 걸세. 자네와 둘이서만 있게 될 걸세."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때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세. 재미있을 걸세. 게다가 자네는 이번 일로 상당한 거금을 쥐게 될 거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큰 돈일세." "감사합니다." "그러나 자네가 발벗고 나서주었을 때의 이야기야. 즉, 그 - 금속피로점에 도달해 있지 않을 경우의 이야기일세." "문트를 해치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관리관은 조용한 어조로 묻고는 한동안 리머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알고 있었다네. 그러나 감정에 구애되는 것은 금물일세. 우리들 세계에서는 애증의 음역(音域)은 제일 먼저 초월해 버린다네. 개도 듣지 못할 소리라도 말일세. 그리고 최후에 남겨지는 것은 구토의 느낌이라는 것뿐이지. 두 번 다시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도록 해야 하네. 아니,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해 주게나. 그러나 카를 리메크가 사살되었을 때에 자네는 상당히 고민하지 않았는가? 문트에 대한 증오도 아니고 카를에 대한 애정도 아니고, 움직일 수 없는 육체에 타격을 가하는 듯한 불쾌감. 그것을 자네는 맛보았을 거야. 소문이긴 하지만 자네는 그날 밤새 걸어 돌아다녔다고 들었네. 베를린의 밤거리를 계속 걸어다녔다고.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돌아다녔습니다." "밤새 말인가?" "예." "엘비라는 어떻게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문트의 목을 조여주고 싶습니다." "좋아, 좋아. 덧붙여 말해 두는데 앞으로 한동안은 지난 날의 어떤 동료와 만나게 되더라도 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네. 사실" 하고 관리관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였다. " 뒤에 가서 그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게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네. 자네에 대한 우리의 대접이 너무 지나치게 소홀하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면 되는 거야. 방침을 세웠으면 처음이 중요하니까." 제3장 - 타락 리머스가 해고된다는 말을 듣고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베를린에 있어서의 지난 수년 동안의 첩보작전은 대체로 실패의 연속으로서, 누군가가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첩보부원으로서의 그는 이미 나이를 너무 먹은 것이다. 이 일에는 프로 테니스 선수에 못지않은 반사신경을 필요로 했다. 그가 전시중에 뛰어난 일을 해낸 것은 누구나가 아는 바였다. 특히 노르웨이와 네덜란드에 있어서의 공적이 인정되어 종전과 동시에 훈장을 받았다. 이런 뒤에 그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본부에선 그를 곧바로 다시 데려왔다. 이것이 그의 연금에 결정적인 불운을 가져다주었다. 경리과에서 그 경위를 엘시의 입을 통해 전달해 주었다. 본부 청사 내의 구내매점에서 엘시가 한 말에 의하면 불쌍한 알렉 리머스는 근속연수에 중단이 있었으므로 겨우 400 파운드밖에 지급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엘시 자신도 이런 규칙은 당연히 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리머스는 이렇게 오랜 세월을 근무해 오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서 재무성이 귀찮게 군다는 것이다. 첩보를 담당한 부서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란다. 매스턴이 모든 걸 뒤흔들던 최악의 시대에도 지금보다는 나았었는데. 새로운 직원들은 리머스가 구파(舊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들었다. 그들의 자격은 피와 용기와 크리켓, 거기에 프랑스 어를 배운 학력이 필요하지만 리머스의 경우 이것이 반드시 사실이랄 수는 없다. 독일어는 모국어와 같고 네덜란드 어도 우수했지만 크리켓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또 학위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리머스의 임용기간은 아직 몇 개월 남아 있으므로 그 사이에 은행과로 출근하게 되었다. 여기는 경리과와는 달라서 부원들과 그들 작전의 경비를 해외에 송금하는 업무를 주로 하고 있었다. 고도의 비밀을 요하는 것 이외에는 업무의 태반은 사환의 손으로도 처리가 가능한 정도의 일이라, 다시 말해서 머지않아 퇴직시킬 직원을 임시로 배치시켜 두는 과 중 하나였다. 리머스는 전락해 갔다. 전락의 과정은 대개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리머스의 경우는 달랐다. 동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존경과 두려움의 존재에서 불만으로 가득찬 덩어리로 변모해 갔다 -- 그것도 불과 몇 달 사이에. 술꾼의 특징인 멍청해 있는 순간들이 가끔씩 보였다. 특히 술 기운이 떨어졌을 때에는 이 증상이 심해서 정신적인 허탈이라고 간단히 말해 버릴 수 있는 그런 상태로 이상하리만큼 빨리 변해 가는 것이었다. 마침내는 다소 부도덕한 일은 예사로 해버리게 되고, 직원들로부터 잔돈푼을 꾸어쓰고는 갚으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다. 지각 조퇴는 거르는 일이 없고, 뭔지 알아듣지도 못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너그럽게 보아 주던 동료들도 그를 경원하게 되었다. 불구자, 거러지, 병자라고 -- 언제 자기도 그와 같은 존재가 될는지 모른다는 마음에서 겁들을 내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는 그 게으름에 더하여 상식이 없다고 할까 악의라고 할까, 도리가 아닌 줄 알 텐데도 거침없이 행동하는 일이 거듭되더니 결국엔 어느 누구도 그를 상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동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가 해고되는 것을 조금도 겁내지 않는 점이었다. 의지력이 갑자기 주저앉아 버린 것처럼 보였다. 새로 들어온 직원들은 처음부터 이 비밀첩보부를 상식적인 인간의 집단이라고는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리머스가 결정적으로 칠칠치 못한 존재로 변모해 가는 것을 보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몸차림에도 무신경하여 주위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마음쓰려고 하지도 않았다. 본부 내 식당은 본래 젊은 요원들의 영역으로 정해져 있는데, 그는 그곳에서 시치미를 떼고 앉아서 식사를 했으며, 소문에 의하면 알콜류까지 입에 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당연히 외토리가 되었다. 활동적인 인간이 너무 일찍 일할 기회를 빼앗긴 비극. 물에서 끌려나온 수영선수, 무대에서 쫓겨난 배우. 어떤 사람은 그가 베를린에서 실책을 범해, 그 원인으로 인해 그곳의 첩보망이 괴멸되었다고도 했다. 진상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가 전례 없는 가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는 바이고, 박애정신과는 인연이 없어야 하는 인사과 직원들조차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었다. 그가 지나가면 과거 운동선수처럼 모두들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다. "저것이 리머스야. 베를린에서 근무에 문제가 있었다나 봐. 그래서 깨끗이 쫓겨나는 거지." 그리고 어느 날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누구에게 잘 있으라는 말 한마디 없었고, 관리관에게 작별인사조차도 없었다는 소문이다. 그 일 자체는 이상할 것도 없으며 첩보부가 하는 일의 성질상 요원이 사무실을 떠나는 데 송별회를 열거나 금시계를 선물하는 등의 일이 있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리머스의 퇴직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퇴직이 규칙에 의한 임용기간이 끝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점뿐이며, 그와 더불어 경리과의 엘시가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두셋 제공했다. 리머스는 급료를 가불해다 썼었는데, 엘시가 보기에는 그것은 아마도 은행과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달에는 퇴직금이 지급된다. 구체적인 금액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네 자리 숫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불쌍한 남자. 국민건강보험증은 발송이 끝났다. 인사과에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엘시는 코웃음을 치고는 덧붙였다. 물론 이건 비밀이야. 인사과는 입을 다물기로 되어 있거든. 거기에 돈에 관한 이야기도 있어서 저절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 언제나처럼 소문의 출처는 불명이지만 - 그것에 의하면 리머스의 갑작스러운 해직은 은행과의 돈계산에서 부정이 발견되었는데, 그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상당한 액수가 모자랐다. (전화실에서 일하고 있는 푸른 머리칼을 가진 여자의 이야기로는 그 숫자가 세 자리가 아니고 네 자리라고 한다.) 그 대부분은 되찾았지만 나머지 돈은 그의 연금으로 대치했다든가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는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며, 만일 알렉에게 돈을 챙길 마음이 있었다면 본부의 자금 같은 것에 손을 대기보다는 훨씬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거기까지는 리머스의 범죄적 경향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의 엄청난 알콜 소비량, 멀리 떨어진 곳에 부양 가족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경비, 파견지역에서의 봉급과 본국에서의 봉급과의 현격한 차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거액의 돈을 취급하는 사나이가 조만간 해고당할 것을 알았을 때에 느끼는 유혹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의견이 일치된 점은 알렉이 정말로 사무실의 돈에 손을 댔다고 하면 그의 생애는 파멸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실업자 구제기관의 창구에서도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며, 인사과도 또한 추천장의 발급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아무리 적극적인 고용주라도 한번 읽어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냉혹한 것을 써줄 것이다. 공금을 개인적으로 쓴 죄는 인사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 과원들이 그런 사실을 잊을 리가 없다. 알렉에게 본부의 돈에 손을 댄 사실이 있다면 그는 인사과의 미움을 한몸에 지고 무덤에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인사과는 쓸모없는 시체를 위해서 돈을 지불해 주는 곳은 아닌 것이다. 그가 자취를 감추고 한두 주일은 어찌된 셈인가 하고 마음을 쓰는 동료도 몇 명은 있었다. 그러나 오래 된 친구들은 이미 그전부터 그를 피하고 있었다. 신경질이 난 리머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첩보부와 그 운영방법을 비난하고,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기병 친구’는 연대 클럽이라도 되는 듯이 일을 한다고 비웃어댔었다. 거기에 또 미국 정부와 그 비밀정보부에 대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비난했다. 마치 그것들을 동독 첩보부 이상으로 혐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동독 첩보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입을 연 일이 없다고도 할 만큼, 그의 첩보망을 괴멸시킨 죄를 오직 미국 비밀첩보부원의 실책 때문이라고 떠벌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고정관념에 억눌려 있었다고 해도 좋으며, 아무리 위로해 보아도 효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이가 더 나빠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전부터 아는 사이로서 내심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까지도 그를 완전히 단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리머스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수면에 생긴 조그만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새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자 그것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방은 아주 작고 빈약해 보였으며, 벽에는 갈색 페인트를 칠하고 어촌 클로블리의 풍경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정면엔 석조로 된 창고 세 채가 등을 보이고 있으며, 그곳 창문은 언제나 내려져 있어서 심리상, 위생상의 의미로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창고의 2층에는 이탈리아 인 부부가 살고 있는데 밤에는 싸움, 아침엔 또 신나게 융단을 털었다. 리머스는 방을 꾸밀 물건이 없었다. 전구에 씌울 갓을 사고, 집주인에게 실내화 대신에 시트를 두 장 요구했을 뿐 그밖에는 있는 그대로로 견뎠다. 장식이라고는 없는 커튼, 닳아서 떨어진 갈색 융단, 볼품없는 검정 목제 가구, 그 모두가 선원 호스텔의 방과 비슷했다. 손잡이가 망가진 주전자에 1실링 넣으면 더운 물이 나오는 것까지도. 일거리가 필요했다. 저금해 놓은 돈이 한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서는 공금유용으로 해고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첩보부에서 소개해 준 재정착 일거리는 당장 헤쳐나갈 임시방편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그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직장을 실업계에서 구해 보려고 부지배인이나 인사과의 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러다 보니까 공업용 접착제 제조회사가 관심을 가져주었다. 첩보부에서 내준 추천장은 바람직한 것은 못 되지만, 그것을 보고도 자격증명서조차 보려고 하지도 않고 연봉 600파운드의 자리에 채용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간 출근하는 사이에 썩은 듯한 생선 기름 냄새가 옷은 물론 머리칼에까지 스며들어 송장 냄새 같은 것이 그의 코에서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씻어보아도 없어질 리 없었다. 그래서 그 주말에 머리를 박박 깎고는 그가 아끼던 양복 두 벌을 희생하고 나서 리머스는 회사를 물러났다. 다음 한 주일 동안은 교외의 주택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부들에게 백과사전을 파는 일을 해보았다. 그러나 본래 그는 여자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환영하지도 않는 그들이 백과사전을 사줄 리가 없다. 다음날 밤에도, 또 그 다음날 밤에도 엄청나게 큰 샘플을 팔에 안고 지친 몸을 하숙집으로 끌고왔다. 한 주일이 끝나는 날 그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한 권도 팔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회사에서는 놀라지도 않고 판매를 그만둘 생각이라면 샘플을 반환해 달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리머스는 화가 나서 그곳에 샘플을 그냥 둔 채 전화 박스를 나왔다. 술집으로 들어가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셨다. 금액은 25실링이었지만 가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그를 밀어냈고, 부축해 주려던 여자에게까지 그는 욕설을 퍼부었다.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그런 그들도 1주일 뒤에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되었다. 리머스는 그 뒤 그 술집의 단골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도 그의 모습은 사람들 눈에 잘 뛰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술집에서 나오는 가난에 찌든 그의 모습 -- 한마디 말도 없고 친구도 없으며 여자, 개, 동료 하나 없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여편네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내라고 상상했다. 물건 값도 모를 뿐만 아니라 가르쳐 주어도 기억해 두려는 기색이 없다. 잔돈이 필요한 때에는 주머니를 모두 뒤졌다. 바구니를 들고 나가는 것을 잊은 탓인지 그때마다 물건 넣을 바구니를 샀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들도 하나같이 동정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더러운 정도가 지나치다. 주말에도 수염을 깎는 일이 없고 와이셔츠는 어느 것이나 더러웠다. 서드베리 가(街)의 매케이어드 부인이라는 여자가 한 주일에 한 번 세탁물 때문에 들락거렸지만 한 번도 그의 입에서 수고한다는 부드러운 인사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이 여자가 그 동네에서의 주된 소식통이었다. 이런 소식을 상인들은 대개 서로 교환해서 손님이 외상을 달라고 했을 때에 참고로 하는데, 매케이어드 부인의 얘기는 리머스에게 불리한 것들 뿐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는 지금까지 편지 한 통 받아본 일이 없는 모양인데, 이 점을 상인들은 중요시했다. 그는 또 그림 한 장 갖고 있지도 않았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책 몇 권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녀는 추잡한 책이라고 보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외국어로 쓰여진 책이라 장담은 할 수 없노라고 했다. 저금도 얼마쯤은 있겠지만 그것도 바야흐로 바닥을 들어낼 때가 되었으리라. 이상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거기다가 또 그가 목요일마다 실업보험금을 받고 있는 것도 그녀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이 점이 역시 베이스워터의 상인들에게 경고가 되었다. 경고는 반복될 필요가 없었다. 매케이어드 부인에 의해서 그가 붕어가 물을 마시듯 술을 마신다는 것이 전해지고, 또 술집 주인이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술집과 청소부는 외상이 없는 장사지만, 그 정보가 외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에게는 귀중한 것이었다. 제4장 - 리즈 마지막으로 그는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매주 목요일 오전중에 직업안정소에 실업보험금을 받으러 가면 새로운 취업자리를 지시받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는 계속 거부해 왔다. "당신 분야라고는 할 수 없지만 -- " 피트 씨가 말했다. "급료도 상당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일은 쉬울 텐데." "어떤 도서관입니까?" 리머스가 물었다. "베이스워터 심령연구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재단의 거야. 책은 몇천 권이나 되는데, 모두 기탁된 것이라고 하더군. 거기에서 도와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면 하는데." 그는 급부금과 전표를 받았다.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일단 가 있으면 미취업자라는 딱지는 붙지 않게 되지. 이젠 슬슬 일자리를 잡지 않으면 귀찮아질 때가 되었어." 임시직은 피트도 마찬가지 아닌가. 분명 이 사나이를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어. 전시중 첩보본부에서는 아니고. 도서관의 홀은 교회의 그것처럼 썰렁한 느낌이었다. 양끝에 검게 칠한 석유 난로가 놓여 있으며, 파라핀유 냄새가 났다. 중앙엔 법정의 증인석처럼 칸막이가 되어 있고, 그 안에 앉아 있는 것이 사서인 크레일 양이었다. 리머스는 그때까지 설마 여자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직업안정소에서는 아무도 그렇다고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새로 온 조수입니다." 그가 말했다. "이름은 리머스." 크레일 양은 색인 카드에서 얼굴을 들고는 욕설이라도 들은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조수? 그건 무슨 뜻이죠?" "도와드리는 거지요. 직업안정소의 피트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복사한 이력서를 카운터 위로 밀어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들어 한번 훑어보고는, "당신이 리머스 씨 --" 질문의 형식은 아니지만 미주알고주알 사실을 파헤치는 조사의 첫단계였다. "직업안정소에서 온 사람."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쪽에 조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알았어요." 돌같은 미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집어들더니 그녀는 대뜸 누군가와 입씨름을 시작했다. 인사고 뭐고 없이 처음부터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소리도 한층 높여서. 음악회 입장권인가 뭔가가 원인인 듯하다. 리머스는 1-2 분 듣고 있다고 마침내 그곳을 떠나 서가(書架) 쪽으로 걸어갔다. 서가가 줄지어 있는 사이에 젊은 여자가 있었다. 사다리 위에 서서 엄청나게 많은 서류를 분류하고 있었다. "이번에 여기서 일하게 된 리머스인데 ---" 여자는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형식적으로 악수하고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리즈 골드라고 해요. 크레일 양은 만나보셨나요?" "만나기는 했습니다만 그녀는 전화에 정신이 팔려서 --" "틀림없이 또 어머니와 말다툼하고 있을 거예요. 당신, 무슨 일을 하시지요?" "글쎄, 모르겠는데. 일하러 오긴 했지만." "우리는 분류를 시작하고 있답니다. 크레일 양이 새로운 색인을 만든다나 봐요." 허리가 길고 다리도 길어서 꼴이 사납다고 해도 좋을 만큼 키가 큰 여자였다. 키가 작아 보이라고 뒤축이 없는 발레화를 신고 있었다. 얼굴 모양도 체격과 마찬가지로 이목구비가 너무 커서, 아름답기는 하지만 솜씨가 서툰 사람의 작품 같았다. 나이는 아마 스물두셋. 유태계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서가의 책을 모두 조사하는 거예요. 이것이 그 목록이고. 조사하고 나면 연필로 표시하고서 그것을 색인 카드에 옮겨야 해요." "그래서?" "나중에 잉크로 목록을 써넣는 것은 크레일 양에게만 허락된 일이에요. 그것이 이곳 규칙이지요." "누가 정한 규칙인데?" "크레일 양이지요. 당신은 고고학에서부터 시작하시면 어때요?"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둘이서 함께 다음 서가로 걸어갔다. 그곳 마루에 놓인 구두 상자에 색인 카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전에도 이런 일 하신 적이 있었어요?" "처음이지." 그는 허리를 굽혀 카드를 한 장 집어들며 말했다. "피트 씨가 보냈소. 직업안정소 말이오." 그리고는 카드를 제자리에 꽂고는, "색인 카드에 잉크로 써넣는 것도 크레일 양에게만 허락되었단 말이오?" "그래요." 그녀는 그를 남겨두고 갔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는 책 한 권을 집어들고 표지를 보았다. <소아시아에 있어서 고고학상의 발견 제4권> 이라고 되어 있다. 이곳에는 제4권만 있나 보다. 1시가 되니 리머스는 배가 고파서 리즈 골드가 분류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점심식사는 어떻게 하시오?" "저는 샌드위치를 싸왔어요." 하고 그녀는 약간 부끄러운 얼굴로, "괜찮으시다면 제 것을 함께 드시겠어요? 몇 마일이나 걸어가지 않으면 다방도 없는 곳이에요." 리머스는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가봐야겠소. 사야 할 것도 있고." 그리고는 그녀가 보고 있는 앞에서 창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가 돌아온 것은 2시를 30분이나 지나서였다. 위스키 냄새를 풍기며 쇼핑 봉투를 두 개나 안고 있었다. 하나엔 야채가 가득 들어 있고, 또 하나엔 식료품이 쑤셔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서가와 서가 사이 움푹 들어간 곳에 놓아두고 다시 거친 솜씨로 고고학 부문의 분류에 착수했다. 그 일을 10분쯤 하고 있는데 크레일 양의 시선을 느꼈다. "리머스 씨!" 그는 사다리에 오르려다 말고 돌아보며, "무슨 일입니까?" "여기 있는 쇼핑 봉투 어디서 왔는지 아시나요?" "내 것입니다." "그런가요. 당신 거로군요." 리머스는 가만히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녀는 계속했다. "이 도서관 내에는 쇼핑한 물건을 들여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어디에 두면 되지? 달리 둘 만한 곳도 안 보이기에." "도서관 내에는 안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은 했지만 리머스는 무시해 버리고 고고학 부문으로 눈을 돌렸다. 크레일 양이 계속했다. "점심식사 시간을 규칙대로 지키면 쇼핑을 나갈 시간이 없을 거예요. 우리는 그런 짓은 안합니다. 둘 다 -- 골드 양이나 나나 마찬가집니다. 쇼핑을 나갈 만한 시간은 없어요." "그럼 30분 더 늘리면 어떻습니까?" 리머스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당신들에게도 여유가 생길텐데. 작업시간이 부족하다 싶으면 퇴근시간을 30분 연장하면 되고. 하긴 시간에 쫓기고 있는 일일 경우지만."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한마디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증거겠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은 아이언사이드 씨와 의논하겠습니다." 라고만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5시 30분 정각에 크레일 양이 코트를 입고서, "먼저 갑니다, 골드 양." 하고는 나갔다. 저 여자, 오후 내내 쇼핑 봉투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리머스는 그런 상상을 하며 다음 서가에 가보았다. 리즈 골드는 사다리 제일 아랫단에 앉아서 무슨 팜플렛인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리머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그것을 핸드백에 쑤셔넣고 일어섰다. 리머스가 물어보았다. "아이언사이드 씨란 대체 어떤 사람이오?" "정말로 있는지도 의문이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 여자는 대답이 궁해지면 언제든지 그 이름을 들먹여요. 저도 한번 누군지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그 여자는 갑자기 머뭇거리더니 전 알 거 없다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제로는 크레일 양이 없을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리머스와 리즈 골드는 둘이 함께 웃었다. 6시가 되자 그녀는 문단속을 하고서 열쇠를 관리인에게 주었다. 이 사람은 특이한 노인인데, 리즈의 이야기로는 1차대전 때 강한 전쟁공포증에 걸렸으며, 지난번 전쟁에서도 독일 공군의 공습이 있었던 날 밤에는 밤새 뜬눈으로 새웠다는 것이다. "집은 먼가?" 리머스가 물었다. "걸어서 20분 거리예요. 저는 언제나 걷기로 작정했어요. 당신은?" "그렇게 멀지는 않소." 리머스가 말했다. "그럼 안녕." 그는 천천히 걸어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 좁은 주방에도 불을 켜고 마지막에는 침대의 전기 히터 플러그를 넣었다. 출입문 매트 위에 편지가 한 통 떨어져 있었다. 주워들고 계단의 황색 등불 밑에서 봉투를 뜯어보았다. 전기회사에서 보낸 것인데, 미납금 9파운드 4실링 8펜스를 지불해 주지 않으면 유감이지만 전기를 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크레일 양의 적이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크레일 양이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이었다. 그를 노려보거나 무시하거나 어쨌든 그가 가까이 오면 순간 그녀는 떨기 시작했다. 좌우로 눈을 굴리는 것은 방어물을 찾고 있거나 도망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때로는 격렬한 노여움을 나타낼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가 그녀의 옷걸이에 그의 비옷을 걸어놓았을 때 같은 경우에는 꼬박 5분 동안이나 그 앞에 버티고 선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리즈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리머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무슨 일입니까, 크레일 양?" 하고 물으니, "아닙니다." 하고 그녀는 짧게 숨을 죽이고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비옷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럼 괜찮은 거지요?" 그는 그대로 맡고 있는 서가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날 종일 몸을 떨고 있었다. 오전중의 반은 전화에 매달려 만들어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리즈가 말했다. "어머니에게 보고하고 있는 거예요. 언제나 어머니에게 말하지요. 저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리머스에 대한 크레일 양의 증오는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는 말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봉급날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사다리의 세 번째 계단에 봉투가 놓여 있었다. 겉봉에 써 있는 이름은 철자법이 틀려 있었다. 대번에 그는 그 돈을 봉투째 그녀 앞에 가지고 가서, "LEA입니다, 크레일 양. 그리고 S는 하나뿐이고." 그 말에 그녀는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다. 눈을 크게 뜨고 리머스가 가버릴 때까지 어색한 손짓으로 연필을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로 몇 시간 동안은 전화에 매달려 있었다. 리머스가 도서관에서 일을 시작한 지 3주일쯤 지났는데 리즈가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갑자기 생각난 듯한 얼굴로 그날 오후 5시쯤 말을 꺼냈다. 내일이나 그 다음날이라고 하면 그 사람으로서는 잊어버리거나 갈 생각이 없어져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당일 5시에 말을 하는 것이었다. 리머스는 처음에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다가 결국엔 그러마고 했다. 두 사람은 빗속을 그녀의 아파트까지 걸었다. 두 사람에게는 장소는 어디라도 좋았다 --- 베를린, 런던, 그 밖에 어느 도시라도. 저녁에 내리는 비에 포장된 도로는 빛의 호수로 변하고, 젖은 거리를 차들이 힘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날 밤을 시작으로 리머스는 몇 번이나 그녀의 방에서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권해 오면 언제나 응했고, 그녀 또한 몇 번이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그날 아침 도서관에 출근하기 전에 식탁을 정리해 두는 것이었다. 미리 야채류까지 준비해 놓고 식탁에는 촛불을 곁들였다. 촛불을 켜는 것은 그녀의 취향이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리머스라는 남자에게는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 언젠가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다고 그녀는 당사자인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렉, 당신은 언젠가 가버리겠죠. 하지만 저는 뒤따라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의 갈색 눈이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때는 알려주지."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빌려 살고 있는 방은 침대가 놓여 있는 거실과 주방뿐이었다. 거실에는 팔걸이 의자 두 개와 소파 대용으로도 쓰이는 침대, 그 밖에 책장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페이퍼백판의 책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 거의 전부가 고전이었으나 그녀는 읽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식사 뒤에는 으레 그녀가 수다를 떨고 그는 단지 소파 위에 길게 누워 담배만 피워댔다.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그녀로선 알 수가 없었으며,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서 그의 손을 잡고 뺨에다 갖다대고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알렉, 당신은 대체 어떤 일을 믿지요? 웃지 말고 -- 말해줘요." 그녀가 기다리고 있기에 그가 말했다. "11시 버스를 타면 해머스미스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지. 그리고 그것을 운전하는 것이 산타클로스가 아닌 것도 믿고 있어." 그녀는 그 말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한참 뒤에 다시 한 번 물었다. "하지만 당신도 뭔가를 믿고는 있군요?" 리머스는 어깨를 흔들 뿐이었다. "뭔가를 믿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그녀는 말했다. "신이나 그런 거 말이에요. 난 알 수 있어요, 알렉. 당신은 가끔 그런 얼굴이 되는걸요.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 신부님 같은 표정으로 -- 아니, 알렉, 웃지 마세요. 정말로 그렇게 보여요." 그는 고개를 흔들며, "미안하지만, 리즈, 당신은 틀렸어. 나는 미국인이나 규격화된 교육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군대의 행진이나 군인들 흉내를 내는 사람은 딱 질색이야." 그리고는 웃지도 않고 덧붙였다. "인생이 어떻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알렉,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 "참 빼먹었군. 나한테 생각하라는 놈들은 전부 보기 싫어." 그가 기분이 상한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녀 또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 용기가 없어서지요. 그 마음에는 독이 있어요. 무엇엔가에 대한 증오가! 당신은 광신자예요, 알렉. 그래요, 난 알고 있어요. 다만 무엇을 광신하고 있는지를 모를 뿐이에요. 상대를 개종(改宗) 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광신자. 무서운 일이에요. 복수라든가 그런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는 사람 같아..." 리머스의 갈색 눈이 그녀에게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을 때에는 그 목소리에 담긴 증오감으로 인해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내가 당신이라면," 하고 그는 거칠게 말했다. "남의 일까지 걱정 안하겠어." 그러고는 웃었지만 희롱하는 듯한 익살맞은 웃음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웃음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것을 리즈는 알 수 있었다. "리즈, 당신은 뭘 믿고 있지?"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그렇게 간단히 믿게 되지 않아요, 알렉." 그날 밤 나중에 둘은 또 그 이야기로 돌아왔다. 리머스 쪽에서 말을 꺼내어 -- 그녀에게는 종교심이 있겠지 하고 물었다. "오해하고 있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전적으로 오해예요. 저는 신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그럼 뭘 믿고 있지?" "역사." 그는 순간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웃기 시작했다. "리즈, 놀랐어. 설마 당신이 공산주의자일 줄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웃음 앞에 어린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발끈한 듯도 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것을 보고는 한시름 던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날 밤 그녀는 그를 자고 가게 해서 둘은 애인이 되었다. 새벽 5시에 남자는 돌아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녀는 몰랐다. 그녀는 자랑스러웠고, 남자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아파트를 나서더니 인적 없는 거리를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도로의 조금 앞에 -- 그렇게 멀리는 아니고 20미터쯤 되는 거리에 -- 레인코트 차림의 키가 작고 약간 뚱뚱해 보이는 사나이가 서 있었다. 공원 철책에 기대어 흐르는 안개에 실루엣을 만들고 있었다. 리머스가 다가가니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사나이의 그림자를 덮어 지워버렸다. 그리고 안개가 엷어졌을 때에는 이미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5장 - 외상 그로부터 1주일쯤 지난 어느 날 그는 도서관을 결근했다. 크레일 양은 반가운 마음에서 11시 반에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했다. 점심식사에서 돌아오더니 리머스가 일하게 된 뒤로 줄곧 맡고 있는 고고학 서가 앞에 섰다. 연극 같은 몸짓으로 책들을 훑어보았다. 리머스가 훔쳐간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있는 걸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날 하루 리즈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고 보냈다. 말을 걸어와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한눈도 팔지 않고 일에 열중했다가 저녁때가 되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서는 울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엔 일찍부터 출근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출근하면 그만큼 빨리 리머스를 만날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전 시간이 더디게 지나가는 사이에 그녀의 희망은 엷어져 갔다. 그가 다시는 출근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은 샌드위치 만드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버스로 베이스 워터 로(路)까지 가서 그곳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기분이 좋지 않고 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이었지만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쫓아가지는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도 또한 없어질 때에는 미리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찾으러 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녀는 택시를 세워 그의 주소를 일러주었다. 낡고 더러운 계단을 올라가서 그의 방 벨을 눌러보았지만 고장인지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매트 위에 우유병이 셋, 그리고 전기회사에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려 보았다. 희미하게 신음하는 듯한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 밑에 있는 방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자 하나 더 밑의 층까지 뛰어 내려가니 그곳은 식료품 가게의 구석방이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흔들의자에 노파가 앉아서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리즈는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제일 위층 방에 환자가 있어요. 위급한 모양인데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나요?" 노파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가게로 되어 있는 앞쪽 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아서, 이리 와봐. 아서, 젊은 새댁이 왔어." 갈색 작업복에 회색 펠트 모자를 쓴 남자가 문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젊은 여자?" 리즈가 말했다. "제일 위층 방에 환자가 있어요. 위독해서 문을 열 수도 없나 봐요. 당신, 열쇠 있으세요?" 식료품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열쇠는 없지만 망치는 있는데." 두 사람은 함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식료품집 주인은 아직도 펠트 모자를 쓴 대로지만 대형 드라이버와 망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세차게 문을 두드리고는 숨을 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까 신음소리를 들었어요. 거짓말 아니에요." 리즈가 속삭이듯 말했다. "문은 부서져도 좋지만 변상해 주겠습니까?" "좋아요." 망치가 굉장한 소리를 냈다. 세 번 치고 드라이버로 문틀을 떼어내니 자물쇠도 함께 열렸다. 리즈가 먼저 들어가고 식료품집 주인이 뒤를 따랐다. 방안은 굉장히 썰렁하고 어두웠다. 그래도 한쪽 구석의 노인 침대 위에 사람 같은 것이 보였다. 어머! 늦었나 봐. 리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죽었으면 난 손도 댈 수 없는데.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죽지는 않았다. 커튼을 젖히고 그녀는 침대 곁에 꿇어앉았다.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를께요. 덕분에 살았어요." 그녀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니 식료품집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밑으로 내려갔다. "알렉, 어찌된 거예요? 병났어요? 어디가 아파요, 알렉?" 리머스는 베개 위에서 머리를 움직였다. 움푹 들어간 눈은 감은 그대로고, 핏기 없는 얼굴에 검은 수염만이 눈에 뛰었다. "알렉, 어떻게 된 거예요? 부탁이에요, 말해 보세요!"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다. 어찌해야 좋을지 정신없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일어나서는 좁은 부엌에 가서 주전자를 가스 위에 올려놓았다. 어쩔 셈인지 그녀 자신도 분명히는 모르지만 움직이고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주전자를 가스대에 올려놓은 채 핸드백을 쥐고서 침대 곁의 테이블에서 리머스의 열쇠를 집어들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 4층에서 단숨에 도로로 튀어나가 건너편 약국인 슬리먼의 가게로 뛰어들었다. 송아지 족발의 젤리와 병아리 가슴살, 쇠고기 에키스, 거기에다 아스피린을 한 통 샀다. 문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돌아서서 러스크 비스켓을 한 봉지 추가했다. 계산은 모두 16실링. 남은 것은 핸드백에 들어 있는 4실링과, 우편저금통장의 11파운드가 그녀에게 남은 전재산이다. 예금은 어차피 내일까지는 찾을 수가 없다. 방으로 돌아가 보니 주전자의 물은 끓고 있었다. 어머니가 하던 대로 비프 티를 만들었다. 컵에는 티 스푼을 넣어서 금이 가지 않도록 했다. 그 사이에도 줄곧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 보는 사이에 죽어버릴까 봐 겁이라도 나는 듯이. 비프 티를 먹이자면 그의 몸을 받쳐줄 필요가 있었다. 베개는 하나뿐이고 쿠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문 뒤에서 그의 오버코트를 가져다가 뭉쳐서 베개 밑에 받쳤다. 그의 몸을 만져보고는 굉장히 많은 땀이 짧게 깎은 반백의 머리칼까지 흠뻑 적셔놓은 걸 알고서 놀랐다. 컵을 침대 곁에 두고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쳐들고, 또 한 손으로는 차를 입에 갖다댔다. 스푼으로 떠서 조금씩 넣어주고 아스피린을 두 알 으깨어 그것도 스푼으로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침대맡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며 어린애에게 말하듯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때때로 그의 머리와 얼굴을 흔들며 반복해서 그의 이름을 낮은 소리로 불렀다. "알렉, 알렉." 그의 숨소리는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차츰 평소대로 돌아왔다. 몸도 겨우 편하게 되었는지 고열의 고통도 잊은 듯이 편안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리즈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최악의 사태는 넘긴 것을 알았다. 그때 문득 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었다. 거기서 그녀는 새삼스럽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좀더 일찍 세탁이나 청소를 해놓았어야 했다. 부리나케 부엌에서 융단 청소기와 먼지털이를 가져와서 정신없이 청소에 들어갔다. 갓 빨아놓은 테이블 보를 찾아내어 침대 옆의 테이블에 씌웠다. 부엌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있는 컵이나 접시들을 씻었다. 그것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8시 반. 주전자를 다시 가스 불에 올려놓고 침대로 갔다. 리머스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알렉, 화내지 말아요, 제발." 그녀가 말했다. "곧 돌아갈께요. 정말 나가겠어요. 하지만 밥은 짓게 해줘요. 당신은 병이 난 거예요. 혼자서 이러면 안 돼요. 당신은 -- 알렉."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니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이 흘러내렸다. 그는 그녀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갈색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며 두 손으로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씻기고 수염을 깎아주었다. 그리고는 깨끗한 시트를 찾아내어 바꾸고는 송아지 족발 젤리를 먹이고 슬리먼 가게에서 사온 병아리 가슴살을 주었다. 그가 먹는 모습을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바라보면서 처음 느끼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얼마 뒤 그가 잠든 것을 보고 어깨까지 담요를 덮어주고는 창문 옆으로 다가갔다. 낡아서 찢어진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중간 뜰에 면한 두 개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다. 그 한 곳에서는 TV 화면의 푸른 불빛이 어른거리고 몇 명의 남녀가 화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또 하나의 창에서는 아직 나이 어린 여자가 머리에 컬을 마느라고 정신없었다. 그들이 홀려 있는 꿈의 망상을 보고 리즈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거기 팔걸이 의자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이 가까워 와서 몸이 굳고 한기를 느낄 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서는 바로 침대에 다가갔다. 들여다보는 것과 동시에 리머스가 몸을 움직거려서, 손가락 끝을 그 입술에 대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눈은 감은 채 가만히 그 손을 잡고 침대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그녀는 격렬하게 그를 원했다. 모든 것을 잊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키스를 반복했다. 그도 또한 미소짓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6일 동안 그녀는 매일 찾아갔다. 그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가고 물었을 때에도 동화를 믿을 수는 없다고만 했다. 언제나 그녀는 하나뿐인 침대에 들어가서 머리를 그의 가슴에 묻었다. 때로는 그도 굵은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넣고 힘껏 움켜쥐는 일이 있었다. 리즈는 웃음소리를 내며 아프다고 소리쳤다. 금요일 저녁 무렵 방에 들어가 보니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런데 수염은 깎지 않았다. 어째서 수염은 깎지 않았을까? 그녀는 의아했지만 퍼뜩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방안에서 없어졌다. 시계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싸구려 휴대용 라디오.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달걀과 햄을 사왔으므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그 동안 리머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연거푸 담배를 피웠다. 식사 준비가 끝난 것을 알고는 그는 부엌까지 걸어가서 붉은 포도주병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그녀는 지켜보고 있었지만 불안이 점점 쌓여서 마지막에는 커다랗게 소리치고 말았다. "알렉 --- 알렉 --- 웬일이세요? 이것이 이별인가요?" 그는 테이블을 떠나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직까지 그래 본 일이 없는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긴 시간을 들여서 부드럽게 타이르는 것이다. 막연했지만 그녀가 두려워하던 일을. 마침내 이것이 마지막, 이것으로 모두가 끝나는 것이라고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잘 있어, 리즈." 그는 말했다. "안녕." 그리고 덧붙여서, "뒤따라오면 안 돼. 두 번 다시." 리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전에 말한 대로군요." 밖으로 나온 그녀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추위와 밤의 어두움에 감사했다. 그것이 눈물을 감추어 주었으므로. 그 다음날, 토요일 아침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리머스는 식료품 가게에 가서 외상을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럴싸한 이유를 대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외상을 받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운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렇게나 반 다스쯤의 물건을 주문한 뒤에 - 모두 합쳐 봐야 1파운드도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 가게의 점원이 포장해 주니까 바구니에 쑤셔넣고는 그가 갑자기 말했다. "나중에 계산서를 보내주시오." 식료품 가게 주인은 불쾌한 미소를 짓고는,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그 뒤에 으레 붙는 선생님 소리가 빠져 있었다. "무슨 소리요?" 리머스가 말했지만 그의 뒤로 줄서 있는 손님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주인이 대답했다. "모르는 손님이라서." "어처구니가 없군. 나는 지난 넉 달 동안이나 단골로 다녔는데." 주인도 기색을 바꾸며, "외상 손님에게서는 은행의 보증서를 받기로 되어 있어서." 그 말에 리머스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큰소리치지 마. 이 가게 손님들의 절반은 은행 거래가 없는 사람들이야. 돈 있는 놈이 미쳤다고 이런 가게에 오겠어?" 그것이 사실인만큼 용서할 수 없는 악담이었다. "모르는 손님은" 주인도 혀까지 꼬부라지며 대꾸했다. "팔아주지 않아도 좋아. 어서 나가시지." 그리고 리머스가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달랐다. 장바구니를 빼앗으려고 주인이 리머스를 밀었다고도 하고, 그렇지는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고 안 그렇고는 젖혀두고 리머스가 주인을 때렸다. 나중에 모두가 하는 말로는, 오른쪽 손은 장바구니를 거머쥐고 있었으므로 때린 것은 왼쪽 손. 그것도 주먹을 쥔 것도 아니고 손의 옆쪽을 쓴 것 같았으며, 그 뒤 역시 날쌘 동작으로 왼쪽 팔꿈치가 날아갔다. 가게 주인은 뒤로 나동그라지더니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뒷날, 법정에서의 피해자 주장에 피고도 굳이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두 군데 부상을 입었다. 처음의 일격으로 광대뼈가 골절, 두 번째 타격으로 턱이 박살이 났다. 신문엔 비교적 자세히 써 있었지만 문제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6장 - 접선 밤에는 선반처럼 달아놓은 잠자리에 엎드려 죄수들이 내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소년도 있었다. 식사 때 쓰는 양철 쟁반으로 박자를 맞추어가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장기 복역수도 있었다. 한 소절마다 간수가 큰소리로 소리친다. "시끄러워, 조지. 이 병신 같은 놈아." 그러나 신경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IRA (에이레 공화국군) 의 군가만 부르는 에이레 인도 있었는데 이놈은 그 꼴에 강간죄로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 리머스는 낮에 되도록 운동을 많이 해서 밤에 잠자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애썼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밤은 감옥에 갇힌 것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지는 때이다. 밤이야말로 모든 것이 없어진다. 형무소 안의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환경을 한때나마 잊기 위한 자기 기만은 일몰과 함께 힘을 잃는다. 감옥 식사의 지긋지긋한 그 맛, 죄수복 냄새, 가는 곳마다 배어 있는 소독약 냄새, 죄수들의 아우성 --- 그런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구금된 몸의 고통이 견딜 수 없게 파고 들어오는 것도 밤이다. 리머스는 언제나 런던 공원의 밝은 햇살을 떠올렸다. 그를 가두고 있는 징그러운 강철의 창살을 증오하는 것도 이때이며, 주먹으로 철책을 때려부수고 간수들 머리통을 박살내고 자유의 거리 런던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격정을 누르는 데 힘들었다. 때로는 리즈를 생각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반짝 그녀가 생각난다. 짧은 한 순간 허리가 긴 그녀의 몸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감촉이 생각난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기억에서 쫓아낸다. 리머스는 본래 꿈속에 사는 것에 길들여진 사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같은 죄수들을 경멸하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들이 그를 미워한 것은 누구나가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인물이 그였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사나이! 그는 그 개성의 뚜렷한 부분을 집단화로부터 지켜나갔다. 아무리 감상적이 되는 순간에도 그의 입에서 여자, 가족, 아이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리머스에 대해서 무엇 하나 알지 못했다. 기회를 기다렸지만 그가 다가오는 눈치는 안 보였다. 새로운 죄수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금부터 바야흐로 형무소 생활의 고마움을 맛보게 되는가 하고 죄의식과 두려움과 쇼크로 넋이 나간 무리들. 또 하나는 자신들의 범죄를 털어놓음으로써 이런 세계의 고참으로부터 환심을 사려는 무리들. 리머스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같은 죄수들을 무시하는 것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본래 외부세계로부터 소외당해 있는 죄수들은 여기서도 또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나이를 발견하고는 마음속 깊이 미워했다. 입소 후 열흘 만에 이런 사정은 분명해졌다. 두목격인 자는 존경을 받지 못하고 조무래기들은 위로의 말 한마디 들을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줄지어 서서 식사를 배급받을 때 그 줄을 이용하여 그를 밀치면서 공격하기도 했다. 서로 밀치는 것은 형무소 안에서의 행사 중 하나이며, 18세기의 조스틀링과 비슷했다. 겉으로는 우발사고처럼 보이지만 피해자가 손에 든 양철 밥그릇을 뒤집어엎어 쏟아진 밥과 반찬으로 죄수복을 버리게 된다. 처음엔 오른쪽 옆에 있는 사나이가 리머스에게 부딪쳐 왔다. 그와 동시에 왼쪽 사나이의 손이 가만히 그의 팔로 내려왔다. 이어 문제의 바로 그 동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리머스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양쪽 사나이를 한참 노려만 보고, 입정 사납게 욕을 퍼붇는 간수의 책망을 말없이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간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나흘 뒤 형무소 내의 화단에서 괭이질 작업을 할 때에 그는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두 손으로 괭이를 비스듬히 잡고 있어서 괭이 자루의 손잡이 쪽이 15 센티미터쯤 오른손에서 쑥 나와 있었다. 간신히 그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지만 오른쪽 사나이가 신음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그에게는 공동작업이 허락되지 않았다. 형무소에서는 기묘하게도 출소할 때에 갈색 종이로 싼 영치물을 건네주는데 이것이 최후의 일격이 된다.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혼인 의식을 연상시킨다. 이 반지로써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 종이에 싼 영치물로써 형무소는 죄수를 사회로 되돌린다. 간수는 그것을 그의 손에 넘겨주고 나서 서명을 받는다. 그것만이 그의 소유물 전부인 것이다. 그밖에는 이 세상에 그의 것은 하나도 없다. 리머스는 그것을 지금까지 3개월 중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라고 느꼈다. 문을 나서면 되도록 먼저 그 종이 보따리를 멀리 던져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얌전한 죄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불평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소장은 리머스의 사건에 막연하지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내심 모든 것이 리머스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아일랜드 인의 피 탓이라고 생각했다. 소장이 물었다. "출소하면 뭘 할 생각인가?" 리머스는 웃지도 않고 새로운 인생을 살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소장도 그거 대단히 잘 생각했다고 말하고는, "가족은 어떻게 되었나?" 하고는 덧붙여서 물었다. "집사람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데까지는 해보겠습니다." 리머스는 무관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 물건은 지금 재혼을 해서 --" 보호관찰관으로부터 버킹햄셔 군(郡)의 정신병원에서 간호원이 되어보라는 권유를 받고는 리머스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의 소재지와 메릴본에서 오는 기차 시간을 적어넣었다. "그 철도선은 그레이트 미센덴까지 전철화되어 있어." 보호관찰관이 설명을 보태자 리머스는 그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말했다. 간수들이 종이보따리를 넘겨주자 그는 형무소를 나왔다. 버스로 마블 아치까지 가서 다음은 걸었다. 주머니에 얼마간 돈이 있었으므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이드 파크에서 피카딜리로 나와 다시 그린 파크와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국회의사당 광장으로 빠져나간 다음 화이트홀을 내려와 스트랜드 가(街)로 나가기로 했다. 채링 크로스 역 근처의 대식당까지만 가면 6실링으로 스테이크를 제법 먹을 수 있다. 그날의 런던은 개어 있었다. 봄도 무르익어 어느 공원에나 크로커스와 노란 수선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종일을 걸어도 피곤함을 몰랐다. 다만 무엇보다 먼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보따리를 처분하고 싶었다. 공원의 쓰레기통은 너무 작아서 밀어넣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내용물을 조금 덜어내야겠다. 쳐다보기도 싫은 서류가 있다. 국민건강보험증, 운전면허증, 갈색 관공서용 봉투에 들어 있는 신분증명서. 그러나 갑자기 그는 생각났다. 이것은 별로 걱정할 만한 게 아니다. 벤치에 앉아서 종이 보따리를 조금 떨어진 곳에 두었다. 그리고서 다시 조금 물러났다. 2분쯤 지나서 보따리는 그곳에 놓아둔 채 오던 오솔길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솔길에 다달았을 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되돌아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에 군용 방수 외투를 입은 사나이가 그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그 갈색 종이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리머스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방수 외투의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사나이는 망설이고 있다. 리머스가 되돌아오거나 또는 관심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은데 리머스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어깨를 움츠리기만 하고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또 한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무시해 버렸다. 자갈을 밟으며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뛰어서 쫓아와서는 숨찬 목소리로 약간 화가 난듯이, "부르는데 왜 그냥 갑니까?" 리머스도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상대방을 보았다. "무슨 일이오?" "당신 보따리잖소. 벤치에 그냥 두고왔지요? 부르는데 왜 그냥 가버립니까?" 키가 크고 조금 바랜 갈색 머리를 하고 있는 사나이다. 오렌지 색 넥타이에 엷은 녹색 와이셔츠. 조금은 성미가 급해 보이고, 어딘지 기생 오라비 같다. 런던 상업학교 출신의 교사이며 교외에서 드라마 클럽을 하고 있을 법한 사나이. 마음 약해 보이는 눈. "필요없는 물건이오." 리머스가 말했다. "참견할 것 없소." 사나이는 얼굴이 벌개지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레기통에 넣어야지요." "그건 그렇지만," 리머스가 대답했다. "누군가가 필요할지도 몰라서." 그는 상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사나이는 두 손으로 어린애라도 안듯이 종이 보따리를 안고 그의 앞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리머스가 말했다. "귀찮은데, 당신, 비켜 주시지." "왜 이러십니까?" 상대방 목소리도 한결 높아졌다. "당신을 생각해서 이러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무뚝뚝합니까?" 리머스가 대꾸했다. "날 생각해서? 그래서 30분이나 미행을 한 건가?" 이 녀석, 보기보다는 제법 당돌한 면이 있는데 -- 리머스는 생각했다. 움찔하는 기색도 없는 것이다. 몸이 굳어진 것만은 분명하지만... "베를린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과 비슷해서 ---" "그래서 30분이나 뒤를 밟았다는 게요?" 리머스의 목소리는 찌르는 듯한 빈정거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솔개빛 눈이 상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 "30분이라니, 천만의 말씀. 마블 아치에서 보고 알렉 리머스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빗이 있어서 말이죠. BBC (영국방송협회) 의 베를린 지국에 출장중이었는데 얼만진 모르지만 당신에게서 돈을 빌린 적이 있지요. 이래 봬도 나 양심적인 사람이라서 뒤따라온 겁니다. 확인해 보려고." 리머스는 아무 말도 않고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 녀석 제법인데. 만점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하긴 이야기가 상당히 수상쩍긴 하지만, 그것은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의 참으로 고풍스러운 접근방법이 리머스에 의해서 일축되었다고 생각되자 지체 없이 새로운 이유를 꺼낸 점은 분명히 높이 살 만했다. "리머스가 맞소." 마지막으로 그가 말했다. "그렇소, 당신은 누구시오?" 사나이는 애시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끝에 ‘E’가 붙는다고 얼른 덧붙였다. 엉터리로 대는 이름이라는 것을 리머스는 물론 알고 있었다. 상대는 여전히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과연 이 사람이 진짜 리머스인지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 결국 이야기는 점심식사를 하면서 종이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국민건강보험증이라는 것을 꺼내 확인해 보기로 결론이 났다. 마치 하릴없는 사람 둘이서 때묻은 그림 엽서라도 드려다보고 있는 꼴이군 하고 리머스는 속으로 웃었다. 애시는 값을 묻지도 않고 식사를 주문하고는 그때의 추억이라며 포도주도 몇 병 내오게 했다. 그리고 리머스가 아직도 자기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우기니 속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이없어하며 반복했다. 만난 것이 파티에서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바로 그 쿠르페르스텐담 길 근처에 데렉 윌리엄스가 아파트를 빌려서 살았지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곳 파티에 저널리스트들이 모두 참석했을 때지요. 어떻습니까? 기억납니까? 리머스는 생각나지 않았다. ‘옵저버’ 지의 특파원인 데렉 윌리엄스라는 사나이는 기억에 있었다. 화려한 파티를 여러 번 열어준 재미있는 사나이였다. 대체로 리머스는 이름을 기억하는 데 약한 편이며, 더구나 이야기가 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 그때부터 지금까지 흘러간 세월을 생각하니 -- 애시의 기억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사나이의 세례명은 윌리엄스인데 보통 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하이볼, 브랜디, 크림 드 망트. 참석한 남녀 모두가 엉망으로 취했다. 데렉은 말카스텐의 카바레에 있는 여자들 중 반을 끌어냈다. 모두가 하나같이 육체파 미인들인데.... 어떻습니까, 알렉, 생각납니까? 마침내 리머스도 빌의 이야기가 조금 더 계속되면 기억이 되살아날 듯한 착각에 빠졌다. 빌이 계속했다. 분명히 엉터리로 주워대는 것이겠지만 그렇더라도 꽤 그럴 듯했다. 섹스에 대한 것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여자 셋을 끌고 나이트 클럽에 몰려 들어가는 장면. 정치고문단의 일원인 알렉과 BBC 직원인 빌. 빌은 마침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서 창피를 당할 뻔했는데 알렉이 대신 치러주었다. 빌이 여자 하나를 아파트에 데리고 가고 싶다고 하니 알렉은 다시 10파운드를 꾸어주었다. "아아, 그래 그래." 리머스가 말했다. "생각이 나는구먼. 정말 그랬지." "기억해낼 줄 알았습니다." 애시는 반가운 듯이 안경 너머로 리머스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밝혀졌으니 한잔 더 합시다. 오늘만큼 신나는 날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을 상대의 반응에 따라서 결정하는 사나이가 있는데, 애시가 바로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가 약하다고 생각되면 여지없이 돌진해 오지만, 조금이라도 저항을 느끼면 깨끗이 물러서 버린다. 독자적인 견해나 취미 같은 것은 일체 내보이지 않고 무슨 일에거나 상대방의 그것에 순순히 따른다. 포트넘에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프로스펙트 오브 화이트비 술집에서 맥주도 잘 마셨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군악대 연주를 즐기기도 하고 컴프턴 가(街) 지하실에서 재즈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샤프빌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동정심으로 목소리까지 떨며, 영국에 있어서의 흑인 인구 증가를 논할 때에는 끓어오르는 격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런 철저하게 수동적인 태도는 당연히 리머스에게 반발을 느끼게 했다. 자기가 약자를 괴롭히는 기분에 휘몰리는 것이다. 상대를 서서히 자기가 서 있는 곳까지 유인하여 자기는 살짝 빠져나오려 했지만, 애시 또한 빈틈없이 리머스가 꾀어들인 막다른 골목에서 날쌔게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만 해도 리머스가 악랄하고 심술궂은 태도를 여러 번 취했다. 애시에게 무리한 대화는 그만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깨닫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애시는 그 건방진 행동에 걸맞게 풀이 잔뜩 죽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슨 소리를 들어도 태연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옆 테이블엔 안경을 쓴 음흉하게 생긴 사나이 하나가 베어링 공작법 책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령 이 사나이가 그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고 하면 아마 리머스를 가학적(加虐的)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가 없고, 상대 또한 끈질기게 참아낼 수가 없다. 4시 가까이 되어 비로소 그들은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리머스는 자기 몫은 자신이 치르겠다고 했으나 애시가 받아들일 리도 없었고, 또 돈을 치르고 나서는 수표장을 꺼내어 독일에서 진 빗을 청산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20파운드면 되겠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수표에 날짜를 써넣고는 얼굴을 들어 리머스를 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밝은 눈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물었다. "수표도 괜찮겠지요?" 리머스는 얼굴을 붉히며, "지금은 은행 거래가 없어서 --- 해외에서 방금 돌아온 참이라 어느 은행과 거래를 할까 생각중이었소. 아니, 수표라도 좋아요. 당신 거래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기로 하지." "그렇습니까?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걸 현금으로 바꾸자고 로서히스까지 가는 것도 큰일이지요." 리머스가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보고 애시는 웃었다. 그리고 다음날 1시에 오늘과 같은 이곳에서 만나주면 그때까지 현금으로 바꾸어 놓겠다고 약속했다. 애시는 컴프턴 가 모퉁이에서 택시를 잡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리머스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계속 미행당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플릿 가(街)까지 걸어가서 ‘블랙 앤드 화이트’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점을 몇 군데 들르기도 하고 신문사 게시판에 나붙은 신문을 읽다가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다는 듯이 부리나케 버스에 뛰어올랐다. 버스는 러드게이트 힐까지 가더니 지하철 근처 붐비는 곳에서 정지했다. 그는 곧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6펜스짜리 차표를 사고 마지막 칸에 서 있다가 다음 역에서 내려서 유스턴행으로 다시 갈아타고는 채링 크로스로 되돌아왔다. 역에 닿은 것이 9시. 밖은 으스스하게 추웠다. 역 앞 광장에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가 한 대 있었다. 운전사는 졸고 있었다. 리머스는 차 번호를 확인하고서 다가가 창문 너머로 말을 걸었다. "클리멘트에서 왔소?" 운전사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뜨고는, "토머스 씬가요?" 하고 물었다 . "아니오." 리머스가 대답했다. "토머스는 못 오게 되었소. 나는 하운슬로의 에이미스요." "타시죠, 에이미스 씨." 그렇게 말하고 운전사는 문을 열었다. 차는 서쪽으로 달려 킹스 로드로 향했다. 어디라고 일러주지 않아도 운전사는 갈 곳을 알고 있었다. 관리관이 문을 열어주었다. "조지 스마일리가 출타중이라 당분간 내가 이곳을 빌려쓰고 있다네. 자아, 들어오게." 리머스를 안으로 맞아들이고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 관리관은 홀의 전등을 켜지 않았다. "점심식사 때부터 계속 미행당했습니다." 리머스가 설명을 하고 둘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에 책이 놓여 있었다. 자그마한 방인데 천정은 높다. 18세기풍의 건축 양식, 커다란 창, 장엄하기까지 한 벽난로. "오늘 오전에 그들은 나를 붙들었습니다. 나타난 녀석은 애시라는" 그리고 리머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부드러운 타입의 사나이였습니다. 내일 다시 한 번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뒤 관리관은 리머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식료품 가게의 포드를 때려준 것부터 시작해서 오늘 오전 애시와 만나게 되기까지의 경과를 차례차례 들어나갔다. "형무소는 어땠나?" 관리관의 질문은 리머스가 이 휴식 기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었는가 하는 의미였다. "미안하게 생각하네. 손을 써서 자네에게 대우를 잘해주고 오락도 좀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지만 그것 또한 위험할 것 같아서." "물론 그래서는 안 됩니다." "행동엔 처음과 끝이 일관되어 있을 필요가 있어. 언제나 예외 없이 이치에 맞도록 해두지 않으면 안 돼. 어중간한 행동은 실패의 원인이 되기 쉬워. 게다가, 자네, 앓아누웠더라며? 불쌍한 짓을 했군. 어디가 나빴었나?" "열이 높았을 뿐입니다." "얼마나 누워 있었나?" "열흘쯤입니다." "혼났겠군. 물론 병간호 해주는 사람도 없었을 테고."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여자가 당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관리관이 물었다. "예." 리머스가 대답하고서 또 침묵이 있었다. "저는 그녀를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끌려 들어오게 되나?" 관리관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순간 -- 정말 한 순간의 일이지만 -- 관리관이 시치미를 떼고 있는 냉정함이 흔들린 듯 생각되었다. "그녀가 이 사건에 엉켜들게 된다고 한 사람이라도 있었나?" "아무도 없습니다." 리머스가 대답했다. "문제를 분명하게 해두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는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 공격작전이 말입니다. 그때 부산물도 생길 것이고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잡은 줄 알았던 고기가 잡고 보니 전혀 다른 고기일 수도 있지요. 저는 그 여자를 가까이오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알 만해, 알 만해." "직업안정소의 그 사나이는 누구였습니까? 피트라는 사람? 분명 전시중에는 첩보부에 있었는데." "그런 이름을 가진 남자는 모르겠는데. 피트라고 했나?" "예." "몰라. 처음 듣는 이름일세. 직업안정소에 있었나?" 리머스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모르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관리관은 일어나서, "자칫 주인의 책임을 잊을 뻔했군. 물론, 자네, 한잔하겠지?" "아니, 사양하겠습니다. 오늘밤엔 그냥 이대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교외에 나가서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집’은 비어 있겠지요?" "차를 대기시켜 두었어." 그는 말했다. "내일 애시와의 약속은 몇 시인가? ---- 1시라고 했나?" "예." "할데인을 불러서 스콰시라도 가져오라고 해야겠군. 내일은 의사에게 보여 봐. 열이 높았다며?" "의사는 필요없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게나." 관리관은 직접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서 멍청하게 스마일리의 서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스마일리는 왜 여기에 없습니까?" 리머스가 물었다. "그는 일이 싫어진 것 같아." 관리관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유쾌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야. 필요한 일인 줄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한몫 거드는 것은 싫은 모양이야. 그것이 말하자면 그의 병이지." 그리고 관리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주기적으로 그 병이 도지는 거야." "분명히 그는 저를 따뜻이 맞아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랬겠지. 그는 이 일에 관련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러나 문트에 관한 일은 그가 설명을 했을 텐데? 이번 일의 배경을 말해 주었지?" "예." "문트는 두려운 상대야.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첩보원으로서는 그 녀석만큼 우수한 존재도 없어." "스마일리는 이 작전의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을?" 관리관은 고개만 끄덕이고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그래도 그가 싫다고 합니까?" "그가 싫어하는 것은 윤리상의 문제가 아니야. 피에 진저리가 난 거야. 다른 요원에게 맡기고서 만족해 하는 거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만" 리머스가 말했다. "이 작전에서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 일에 나설 것이 체코나 소련이 아니고 동독이라고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습니까?" "안심하고 있는 것이 좋아." 관리관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점은 충분히 생각하고 있으니까." 두 사람은 문으로 갔다. 거기서 관리관은 리머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고, "이것이 자네의 마지막 일이 되네. 끝내기만 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추운 곳엔 가지 않아도 되게 하겠어. 그런데 그 아가씨 이야기 말인데, 뭐 해주고 싶은 것이라도 없나? 돈이나 그 밖에?" "그것은 일이 끝난 뒤에 제 자신이 생각하겠습니다." "그건 그래. 지금 여기서 뭐라도 하는 것은 위험이 크니까." "가만히 내버려두고 싶을 뿐입니다." 리머스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비참한 느낌을 갖지 않게 할 것. 일자리를 잃게 하지 않을 것. 잊은 채 그대로 두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관리관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밤공기 속으로 가만히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곳으로. 제7장 - 키버 그 다음날 리머스는 애시와 약속한 식당에 20분 늦게 도착했다. 이미 위스키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애시의 반가움이 조금도 달라진 것은 아니다. 애시 자신도 은행에 가는 것이 늦어져서 방금 도착했다고 하며 봉투를 리머스에게 건네주었다. "모두 1파운드 지폐로 했습니다." 애시가 말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미안한데." 리머스가 다시, "그럼 술을 시키기로 합시다." 그는 수염도 깎지 않았고 와이셔츠의 칼라도 더러운 그대로였다. 종업원을 불러 자기에게는 위스키 더블을, 애시에게는 핑크 진을 가져오도록 일렀다. 시킨 술이 나오자 리머스는 잔에 소다수를 따랐는데 손이 떨려 반은 밖에다 쏟고 말았다. 둘 모두 잘 먹고 잘 마셨다. 수다를 떠는 것은 애시였다. 리머스가 짐작한 대로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낡은 트릭이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새 저는 멋진 일을 하고 있습니다. 프리랜서 기자로 외국 신문사에 영국의 뉴스를 팔아먹는 일이지요. 베를린에서 돌아와서 처음에는 무엇을 해도 계속 실패만 하는 겁니다. 그 결과 방송국에서는 계약을 갱신해 주지 않았지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60세 이상의 남성을 상대로 하는 오락지 -- 볼품없는 주간지인데 그 편집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초라한 일이었는데, 결국엔 2차대전 이후의 첫 출판 파업으로 망했습니다. 그때는 물론 한시름 놓은 듯한 기분도 들더군요. 그 뒤 한동안 첼튼햄에 있는 어머니 곁에서 지냈답니다. 예, 어머니는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장사는 곧잘 되는 편이었지요. 그러고 있는데 오랜 친구인 샘 키버라는 녀석으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외국의 신문사를 상대로 영국의 사회생활을 조그만 기사로 만들어서 팔아먹는 사업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당신은 물론 이런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요. 가장무도회의 기사를 600자 정도로 쓰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샘은 거기에다 새로운 생각을 짜낸 겁니다. 미리 번역을 해두었다가 팔아먹는 거지요. 아시겠지만 거기엔 큰 차이가 있거든요. 번역자라는 건 돈만 주면 언제라도 고용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도 할 수 있지만, 반 칼럼쯤의 공란을 신문기사 같은 것으로 메꾸려는 상대방은 번역을 위한 시간이나 비용 같은 것을 아깝게 생각한답니다. 샘의 목적은 편집자와 직접 연락하는 데 있었으므로 그것을 위해서 그는 집시처럼 전 유럽을 돌아다닌 겁니다. 한심한 이야기 같지만, 그 대신 원고료를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받을 수가 있지요." 애시는 이야기를 멈추었다. 리머스가 그 이야기에 끌려들어 자신에 관해서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으나, 그 기대는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그는 단지 내키지 않는 듯 끄덕이고는, "그건 다행이로군." 하고 한마디할 뿐이었다. 애시는 포도주가 마시고 싶었지만 리머스는 위스키를 계속 마셔서 커피가 나오기까지 더블을 넉 잔이나 비웠다. 몸의 컨디션도 좋지 않았겠지만 폭음을 하는 버릇 탓으로 입술을 술잔 모서리로 가져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이 떨려서 술의 태반을 쏟고 말기 때문일 것이다. 애시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당신, 샘을 아시지요?" 하고 물었다. "샘?" 애시의 목소리엔 애가 타는 느낌이 보태어져 있었다. "샘 키버. 우리 왕초지요. 방금 말한 사람이." "그 사람도 베를린에 있었소?" "아니, 독일은 잘 알고 있지만 베를린에서는 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에서는 열심히 일했었지요. 프리랜서 기자인데, 분명히 당신도 만났을 텐데요. 상당히 알려진 사람이니까."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또 침묵. "그런데 당신은 요즈음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애시가 물으니 리머스는 어깨를 움찔하고는, "나는 모가지야." 멍청하게 엷은 웃음을 띠고서, "깨끗이 폐기처분당한 거지." "지금은 잊어버렸습니다만, 베를린에서 하시던 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분명 냉전의 전사 중 한 사람으로 우리들 문외한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바야흐로 시작되는구나 하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화난 얼굴이 되며 거친 어조로 대답했다. "미국놈들을 위한 심부름이지. 우리들 모두가 그렇지만." 애시도 거기서 잠깐 생각하는 척해 보이고, "한번 샘을 만나보는 것이 좋겠군요.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당황하는 듯한 얼굴로, "하지만, 알렉, 당신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건 무리지." 리머스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뭐가 무리입니까? 집은 어딥니까?" "주거부정의 상태지. 좀 불쌍한 신세지만, 하긴 일자리가 없으니. 놈들은 연금도 줄 생각을 안해." 애시는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꽤 힘드시겠군요, 알렉. 그러시다면 내가 사는 곳으로 오십시오. 좁은 곳이지만 당신 하나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습니다. 하긴 야외용 침대로 참아주셔야겠지만. 어쨌건 노숙보다는 낫잖습니까!" "당분간은 어떻게든 될 테지." 리머스는 봉투를 넣어둔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이것이 있는 동안에 일을 찾아내야지." 이렇게 말하며 결심을 했다는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주일쯤 지나면 문제 없어, 찾게 될 게야." "어떤 일거리를 찾아볼 생각입니까?" "거기까지는 모르지. 아무거나 다 좋으니까." "그러나 시시한 일 할 것 없습니다. 당신은 독일어를 제나라 말처럼 잘하는 분인데. 아니, 알고 있습니다. 당신 같으면 얼마든지 좋은 일거리가 널려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소. 미국 출판사에서 백과사전도 팔았지. 심령학 도서관에서 책 분류도 했고, 썩는 냄새가 나는 가죽 공장에서 작업표 검사하는 일도 했어. 그 밖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는 애시를 보지 않고 앞 테이블에 시선을 떨어뜨리고는 흥분한 입술만을 조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애시 또한 그의 흥분에 끌려든 모양인지 온통 테이블을 덮어씌울 듯이 떠들어댔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고,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듯한 어조로 들렸다. "아니, 알렉.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입니다. 당신의 지금 처지를 나는 알 수 있습니다. 나도 굶기를 먹듯 하면서 친구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꼈었으니까요. 당신이 베를린에서 어떤 일을 했었는지도 모르고, 또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이런 경우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접촉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내 경우만 해도 5년 전에 포츠넘에서 샘을 만났으니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빵값이나 버는것이 고작이겠지요. 해로운 말씀은 드리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1주일쯤 지내십시오. 샘에게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 밖에도 베를린 당국에서도 잘 아는 사람인데, 신문기자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런던에 있다면 만나서 이야기해 보기로 하시죠." 그러나 리머스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기사 같은 건 쓸 줄 몰라. 그런 일은 못해." 애시는 리머스의 팔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건 나중 문제로 하고" 라며 진정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하나하나 차례대로 정리하기로 하시지요. 그래,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짐 말입니다. 옷이라든가 가방 같은 거." "아니, 아무 것도 없어. 가지고 있는 것은 깡그리 팔아버렸지. 그 종이 보따리 말고는." "종이 보따리?" "공원에서 벤치에 두었던 갈색 뭉치 말이야. 그것도 버릴 생각이었는데." 애시의 방은 돌핀 스퀘어에 있었다. 리머스가 짐작한 대로 조그맣고 사람의 눈을 피한 느낌이었다. 독일에서 급히 끌어모아 왔다는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맥주잔, 농부들이 쓰는 파이프. "주말에는 첼튼햄의 어머니 집에서 보내기 때문에" 하고 설명한 뒤에, "여기는 평일에만 쓰고 있습니다. 쓰기에 알맞고 편리하지요."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리고 나서 좁은 응접실에 야외용 침대를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4시 반이 되었다. "여기에서 얼마 동안이나 살았소?" "그러니까 -- 1년 조금 넘었습니다." "살기 괜찮소?" "이런 아파트는 절차가 아주 간단해서 신청서에 이름을 써넣기만 하면 언젠가는 전화가 걸려와서 방이 비었다고 알려준답니다." 애시가 차를 끓여서 둘이 마셨다. 리머스는 여전히 마음의 평안함을 모르는 사나이처럼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시까지 끌려 들어갔는지 말수가 적어졌다. 차를 마신 뒤에 애시가 말했다. "가게 문을 닫기 전에 먹을 것을 사오겠습니다. 그 뒤에 앞으로의 계획을 천천히 의논하기로 하지요. 오늘밤 늦게라도 샘은 찾아갈 수 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만나게 되면 그만큼 이야기가 쉬워지니까요. 그전에 한잠 자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꽤 피곤해 보이는데."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정말로 고맙소." 손으로 엉성한 동작을 해보이더니, "이렇게까지 대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깨를 애시는 가볍게 두드려 주고 군용 방수 외투를 집어들더니 밖으로 나갔다. 애시가 건물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리머스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출입문에는 조심해서 빗장을 내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중앙의 홀에 전화 박스가 두 개 나란히 있었다. 메이다 베일에 있는 ‘집’의 다이얼을 돌려 토머스 씨의 비서를 바꿔달라고 했다. 곧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머스 씨의 비서입니다." "샘 키버 씨의 대리인인데요" 리머스가 말했다. "그는 초대를 승낙하고 오늘밤 토머스 씨와 만나겠다는군요."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연락처는 토머스 씨가 알고 계시는지요?" "돌핀 스퀘어." 라고 리머스는 대답하고 번지를 알려주었다. "그럼 부탁해요." 건물 관리사무실 창구에서 몇 가지를 물어본 뒤에 애시의 방으로 돌아왔다. 야외용 침대에 걸터앉아 두 주먹을 바라보다가 잠시 뒤 거기에 누웠다. 애시가 권한 대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눈을 감으니 리즈가 생각났다. 베이스워터에 있는 그 방에서 자기 옆에 누워 있었던 그녀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애시가 깨워서 눈을 떴다. 키는 작아도 꽤 뚱뚱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회색 장발을 곱게 빗어넘기고서 더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중부 유럽풍의 액센트가 조금 섞여 있다. 십중팔구 독일어에서 온 것이겠지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키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샘 키버. 셋이서 진을 마셨다. 떠드는 것이 애시의 임무인 양, 마치 베를린 시대로 되돌아간 듯했다.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오늘밤은 마음껏 마시자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키버는 내일 일 때문에 늦게까지 함께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애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중국 요리집에서 식사를 하자고 말을 꺼냈다. 라임하우스 경찰서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식당인데, 손님이 술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기묘한 일이지만 애시의 부엌에는 버건디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들고 택시에 탔다. 요리는 고급이고, 그들은 가지고 간 포도주를 두 병이나 비웠다. 두 병째가 되니 키버도 다소 입이 가벼워져서 서독과 프랑스를 돌아 막 귀국했다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현재 정세가 소란한 상태이며 드골의 세력이 커져가기 시작한다. 앞으로 사태가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 10만이나 되는 콜론이 알제리아에서 철수해 오므로 파시스트의 움직임은 당연히 활발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정세는 어떻습니까?" 애시가 재촉하듯이 물으니 키버는 리머스에게 눈을 주었다가, "그것은 미국이 그들을 지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는데." 하고 이야기에 끌려드는 듯했다. "그건 무슨 뜻이오?" 리머스가 물었다. "즉, 이런 이야깁니다. 덜레스가 한쪽에서 대외정책을 밀어붙이고, 그것을 다른 한쪽에서는 케네디가 문제삼는 겁니다. 독일 국민은 울화통을 터뜨리고 있지요."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정말로 미국답군." "알렉은 우리의 친구 미국인이 싫은가 봐요." 하고 애시가 그럴 듯한 말을 했지만 키버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으며, 그저 중얼거리듯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허어, 그런가." 그 뒤에도 키버의 연기는 끈기 있게 계속되었다. 이놈, 요령을 알고 있군 - 하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말을 다스리는 데 능숙한 사람은 저쪽에서 다가오는 것을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무리한 부탁을 해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간단히 입발림에 넘어갈 줄 아느냐 하고 조심하고 있는 상대에게는 말을 부리는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니 애시가 말을 꺼냈다. "워두어 가(街)에 신나는 곳이 있습니다. 샘, 당신은 한번 가본 적이 있죠. 재미있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차를 불러 타고 가보지 않겠습니까?" "잠깐 기다려요." 리머스의 말 속에는 세찬 느낌이 들어 있었다. 애시는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먼저 물어볼 것이 있소. 여기 계산은 누가 하나?" "내가 하지요." 애시가 급히 말했다. "샘과 납니다."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소?" "천만에." "아시다시피 나는 빈털터리 몸이오. 이런 곳에서 돈을 쓸 수는 없어." "알고 있어요, 알렉. 지금도 당신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건 그렇지." 리머스는 끄덕이고, "분명히 신세를 졌소." 이어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생각을 바꾸어 입을 다물었다. 눈썹을 찡그리고는 있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다. 키버는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택시 안에서 리머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애시가 계속 비위를 맞추고 있어도 귀찮은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뿐이다. 워두어 가에 닿아서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렸으나 리머스나 키버는 요금을 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애시가 앞장서서 여성잡지가 진열되어 있는 쇼윈도 앞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막다른 곳에 야한 빛깔의 네온이 번쩍이고 ‘갯버들 클럽 -- 회원제’라 쓰여 있었다. 문 양쪽에는 여자의 사진이 잔뜩 걸려 있고, 그 위에 인쇄체 글씨로 ‘자연 연구 -- 회원에 한함’이라고 적은 종이가 압정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애시가 벨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의 엄청난 거구의 사나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난H회원이오." 애시가 말했다. "여기 두 신사분은 일행이고." "회원증을 보여주시지요." 애시는 수첩에서 엷은 노란색 카드를 꺼내어 사나이에게 주었다. "동행하신 분은 임시회원비로 1인당 1파운드씩 내셔야 됩니다. 틀림없이 추천하시는 거지요?" 그렇게 말하고 사나이가 회원증을 돌려주려고 하는데 옆에서 리머스의 손이 재빨리 빼앗았다. 순간적으로 회원증을 훔쳐보고는 애시에게 돌려주고, 동시에 뒷주머니에서 2파운드를 꺼내더니 입구에 서 있는 사나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2파운드야." 리머스가 말했다. "우리 임시회원 두명 분이야." 그리고는 어안이 벙벙해 있는 애시를 무시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더니 커튼이 쳐 있는 입구로 들어섰다. 안은 어두컴컴한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도어맨을 뒤돌아보고 리머스가 말했다. "테이블을 잡아주게. 그리고 스카치를 한 병. 우리끼리만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해." 도어맨은 잠시 망설였으나 거스리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는지 세 사람을 안내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사이에도 먼 곳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에서는 가장 뒷자리의 테이블을 차지했다. 연주중인 밴드맨이 둘. 여기저기에 여자들이 두세 명씩 무리를 지어 자리에 앉아 있다. 그 중에서 두 명이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섰지만 거구의 도어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스키를 내오는 동안 애시는 초조한 듯 리머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키버는 몹시 싫증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웨이터가 술병과 세 개의 잔을 내왔다. 각자의 잔에 조금씩 위스키를 따르는 것을 세 사람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리머스는 웨이터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서 잔에 따라놓은 분량의 배를 따랐다. 그런 뒤에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내밀며 애시에게 말했다. "설명해 주시지. 나를 대체 어쩔 셈이오?" "뭘 말입니까?" 애시의 말소리는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뭐, 뭘 설명하라는 겁니까, 알렉?" 리머스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가 석방되던 날 당신은 형무소 앞에서부터 미행을 했어. 베를린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꾸지도 않은 돈을 억지로 떠맡겼지. 호화판 식사까지 선심을 쓰더니 아파트로 나를 데리고 갔고." 애시는 얼굴빛이 달라지며, "그것이 마음에 안 든다면..." "입 다물어." 리머스는 세찬 어조로 계속했다.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어. 아까 꺼내보인 회원증에 머피라고 적혀 있던데, 그것이 당신 본명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럼 머피라는 친구에게서 빌려왔나?" "아니, 사실은 그런 사람은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가끔 여자 생각이 나면 여기에 오죠. 그래서 가짜 이름으로 이 클럽에 들어온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리머스는 여전히 막된 어조로 계속했다. "당신 방을 세얻은 사람의 이름이 머피로 되어 있는 것은 무슨 이유지?" 거기서 키버가 입을 열었다. "너는 돌아가도 좋아." 하고 애시에게 말하고, "나머지는 내가 마무리짓겠다." 여자 하나가 스트립을 시작했다. 젊기는 하지만 보기에도 접대부 출신 같은 아가씨인데, 넓적다리에 상처의 흔적이 있었다. 바짝 마르고 길기만 한 나체여서 에로틱한 구석은 전혀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솜씨도 없고 성의도 없었다. 느리게 몸을 돌리면서 가끔 생각난 듯이 사지를 실룩거린다. 음악 소리를 단편적으로 밖에 듣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동안 계속 그들의 테이블에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조숙한 어린이가 어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갑자기 음악의 박자가 빨라졌다. 마지막에 브래지어를 벗더니 머리 위로 높이 올렸다. 야위고 빈약한 몸매. 그 세 군데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스팽글 (스트리퍼의 젖꼭지를 가리는 은종이) 이 매달려 있어서 오래 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연상시켰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리머스와 키버 둘이. "베를린에서는 훨씬 더 멋진 것을 봤다고 할 것 같은 얼굴인데?" 리머스가 이렇게 말하며 키버를 쳐다보니 아직도 그는 화난 얼굴이었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 대해 타이르는 말인가?" 키버가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도 베를린에는 가끔 갔지만 공교롭게도 나이트 클럽에는 흥미가 없었어." 리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잖은 척하는 것이 아니야. 내 성격이 합리적일 뿐이지. 여자를 안고 싶을 때에는 좀더 손쉬운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춤을 추고 싶을 때에는 좀더 멋진 곳을 찾아가고..." 리머스는 듣는 체도 않고, "그 간들거리는 녀석이 무엇 때문에 날 붙들었는지 그 설명을 들려줄 수 있겠지." 하고 말하니 키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고말고. 그것은 내가 지시했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야. 돈벌이가 되는 일이 있어서 의논하고 싶었거든. 통신과 관계가 있는 일인데." 그 뒤 말이 끊기고, "통신이라..." 리머스가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럴 듯하군." "나는 통신사를 운영하고 있어. 국제적인 뉴스를 파는 일이지만 원고료는 충분히 나오지. 굉장히 비싸게 사들이고 있어.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을 활자화하는 사람은 누구지?" "사실 놀랄 만큼 비싸게 사들이고 있어. 당신 같은 경험 많은 사람이 -- 국제적인 움직임과 관련 있는 경험을 기초로 해서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실을 제공해 줄 마음만 먹는다면 경제적 고통 같은 것은 당장 해결해 줄 수가 있는데." "그 재료를 기사로 써서 출판하는 상대는 누구지, 키버?" 리머스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순간, 극히 짧은 순간의 일이지만 불안한 그림자가 수염이 없는 키버의 얼굴을 스쳤다. "단골 거래처는 국제적이야. 연락원을 파리에 두고 있으니까 우리 통신사 기사라면 어떤 것이든지 팔아먹을 수가 있어. 솔직히 말해서 어떤 출판사가 사갔는지 모를 경우도 더러 있지." 하고 리머스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밝은 미소를 짓고는,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야. 뉴스만 재미가 있으면 거래처에서는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해 주지. 곧바로 주문을 해오는 그런 형편이야. 당신은 알 거야. 상대는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참견하는 그런 무리는 아니고 말이야. 물론 현금거래지. 더구나 그것을 외국은행 구좌에 넣어주니까 세금 따위로 골치아픈 일도 없고." 리머스는 가만히 있었다. 잔을 두 손으로 잡고 바라보고 있었다. 공격이 꽤나 급하군. 그것도 너무 노골적이고. 리머스는 언젠가 뮤직 홀에서 들은 농담이 생각났다. ‘명망 있는 숙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지만 -- 그러나 해보지 않고는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가 없고’ 라는 것이다. 전술적으로는 이 성급함도 옳은 공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자식 판 돈이라도 탐나는 놈이다. 형무소의 경험도 아직 생생하고 사회에 대한 분노도 대단하다. 게다가 나만큼 노련한 사람이면 새삼스럽게 훈련시킬 필요도 없고, 지금 상태로서는 영국 신사로서의 자부심을 다치게 했다고 가장할 체면치레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현실적인 입장에서 내가 깨끗이 거절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일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첩보부가 배신자를 그냥 둘 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막을 넘어 카인을 쫓은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이 나를 추적할 것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이것은 그들에게는 커다란 도박인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따라지가 나올는지 장땡이 나올는지는 까보아야 알 것이 아닌가. 우물쭈물하는 것은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스파이 작전을 짰다고 해도 결국에는 무익한 계획이 되고 만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사들은 뜻밖에도 관공서 매점에서 팔고 있는 싱거운 양배추 정도로도 무서운 반역죄를 범할 수 있지만, 이것이 사기꾼이나 거짓말쟁이 범죄자의 부류라면 어떤 아첨에도 꼼짝 않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리머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상당한 돈을 받지 않고선..." 하니까 키버는 다시 위스키를 따르고, "1만 5천 파운드, 착수금으로 즉시 내놓겠다고 하더군. 돈은 이미 베를린의 지방은행에 예치되어 있으니 적당한 증명서류만 제시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찾아쓸 수 있어. 증명서류도 우리 거래처에서 준비해 주지. 다만 거래처에서는 향후 1년 간 다음 질문의 권리를 보류해 두고. 그 대신 거기에 대해서도 또 5천 파운드를 지불해 주지. 장차 당신에게 취직할 필요가 생길 경우에는 거기에도 충분한 협력을 아끼지 않고 말이야." "대답은 언제까지 해주면 되나?" "지금 당장.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기만 하면 돼. 우리 거래처를 만나게 되면 이야기는 알아서 쓰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어." "만나는 장소는?" "쌍방을 위해서 영국이 아닌 곳에서 만나는 게 편리할 것 같아. 우리 거래처에서는 네덜란드가 어떠냐고 하고 있던데." "공교롭게도 여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리머스가 힘없이 말했다. "내 멋대로이긴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어." 키버는 비위를 맞추는 듯한 어조가 되었다. 그 소리나 행동이 대단히 침착해서 사업을 위해 당연히 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투다. "내일 오전 9시 45분발 여객기로 헤이그로 떠날 준비가 다 되어 있어. 어때, 내 아파트에 가서 자세한 의논을 했으면 하는데." 계산은 키버가 하고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았다. 가는 곳은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키버의 방은 호사를 다한 것으로서, 다만 그 세간들은 고급품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급히 끌어모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런던에는 책을 미터 단위로 파는 가게도 있다고 하고, 또 소장하고 있는 그림에 벽의 색깔을 맞추어주는 실내장식사도 있다고 한다. 특별히 신경이 섬세하지도 않은 리머스로서도 여기가 호텔이 아니고 개인 주택에 있는 방이라는 느낌을 받기가 어려웠다. 키버가 방문을 잠그고 나자 (창밖은 우중충한 안뜰로서 직접 거리에 면하고 있지는 않았다) 리머스가 물어보았다. "여기서 산 지는 얼마나 되나?" 상대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어. 기껏 해야 몇 달이지." "웬만해서는 꾸려가지 못할 집이군. 물론 당신에게는 여기서 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겠지만." "고맙군." 스카치 병과 소다수 사이펀이 은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 커튼으로 막힌 저쪽은 욕실과 세면실로 되어 있는 듯하다. "첩이라도 둘 만한 방인데, 이 비용을 전부 노동자 국가가 대어주나?"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둬." 키버는 쏘아붙이고서 덧붙였다. "용무가 있으면 내 방과 직통으로 통하는 전용전화가 있어. 언제라도 일어날 테니까." "옷 갈아입는 정도는 혼자서도 하지." "그럼 잘 자게." 키버는 간단히 말하고 방을 나갔다.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워 있구나 하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침대 옆의 전화벨 소리에 깨었다. "6시야." 키버가 말했다. "앞으로 30분이면 식사야."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 리머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택시는 미리 키버가 전화로 불러놓았는지 7시가 되니 현관의 벨이 울렸다. 키버가 말했다. "준비는 되었나?" "짐은 없어." 리머스는 대답했다. "있다면 칫솔과 면도기 뿐이야." "그 준비는 되어 있어. 다른 준비는 되어 있나?" 리머스는 눈썹을 한곳으로 모으면서, "되어 있다고 생각해. 담배 있나?" "없지만" 키버가 대답했다. "비행기 안에도 있어. 그것보다 이것을 봐두도록 하게." 그리고는 리머스의 손에 영국 정부의 여권을 건네주었다. 리머스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 사진까지 붙어 있다. 한 귀퉁이에 외무성 마크가 선명하게 튀어나와 있고, 새것도 낡은 것도 아니다. 신분은 회사원, 독신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손에 받아들고 처음에는 리머스도 약간의 동요를 느꼈다. 이렇게 되면 조만간 결혼할 날이 올 모양인데, 앞으로의 내 인생이 옛날 그대로 계속되는 과정을 밟게 될는지도 모른다. 리머스가 말했다. "갖고 있는 돈이 없는데...." "그런 건 필요없어. 회사에 가면 있으니까." 제8장 - 르 미라지 저택 그날 아침은 서늘했다. 잿빛의 엷은 안개가 축축하게 살갗에 와닿았다. 공항은 리머스에게 전시(戰時)를 생각나게 했다. 여객기 몇 대가 반쯤 안개에 싸인 채 각각 그 주인의 도착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나면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 소리가 석조 바닥에 울렸다. 여자 하나가 뛰어간 모양이다. 동시에 바로 옆에서 엔진 소리가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비밀을 함께 지니고 있는 의식이 가득차 있다. 우월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까. 새벽, 밝기 전에 일어난 사람들 사이에선 그리 생소하지 않은 느낌이며, 밤이 가고 아침이 다가오는 것을 함께 본 경험이 낳은 것이리라. 종업원들도 여명의 신비에 충만되어 추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표정으로 손님들이나 그들의 짐들을 전선에서 돌아온 사람들처럼 쌀쌀하게 취급하고 있다. 오늘 아침의 그들은 일반 시민 같은 것은 사람축에도 넣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키버가 리머스에게 짐을 건네주었다. 그가 말한 대로 준비가 완벽하다고 리머스도 감탄했다. 짐이 없는 손님이라면 남의 눈을 끌게 될 것이 분명하다. 키버의 계획엔 빈틈이 없었다. 항공회사의 데스크에 가서 여권에 사인을 받아야 한다. 도중에서 길을 잃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키버가 흥분해서 포터에게 고함친 것이다. 리머스는 속으로 웃었다. 키버란 놈 여권에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럴 필요가 없지. 그자에게는 이렇다 할 실수는 없을 테니까. 여권 담당관은 비교적 젊게 보이며 몸집이 작은 남잔데, 정보부의 넥타이를 매고서 윗도리 깃에 뜻을 알 수 없는 배지를 몇 갠가 달고 있었다. 생강빛 수염과 북구풍의 액센트. 그것만은 평생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담당관이 리머스에게 말했다. "여행은 오랫동안 하시게 됩니까?" "2주일 간." 리머스가 대답했다. "그러시면 여권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31일이 갱신 날짜입니다." "알고 있소." 키버와 둘이 나란히 승객 대합실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리머스가 말했다. "키버, 당신도 상당히 의심이 많은 사나이로군." 상대는 얌전하게 웃고는,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계약과는 관계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20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커피를 주문했다. 키버는 그 뒤에 덧붙여서 웨이터에게, "이것을 치워주지." 하고 먼저 손님이 쓴 컵, 쟁반, 재떨이 같은 것이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곧 웨건이 이리로 올 겁니다." 웨이터가 대답했지만 키버가 다시 말했다. "하여간 치워주게." 하고 화를 내며, "이런 더러운 것이 눈앞에 있으면 불쾌해." 웨이터는 묵묵히 돌아갔다. 카운터 쪽으로는 다가가지 않았으니 커피를 시켰을 리가 없다. 키버는 안색이 바뀌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만해 둬." 리머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버려 둬야지. 인생은 짧아." "뭘 하는 놈이야. 돼먹지 않았어." "자, 자, 진정해. 떠들기에는 장소가 나빠. 우리들이 여기 있었던 것을 기억시키는 거나 같아." 헤이그 공항에서의 수속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키버도 불안에서 벗어났는지 여객기에서 세관 사무실까지의 짧은 거리를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네덜란드 인인 젊은 세관원은 손에 든 짐과 여권을 형식적으로 훑어볼 뿐이고, 그 다음에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기분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소." 키버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말했다. "정말 고맙소." 두 사람은 세관 사무실을 나와서 복도를 따라 공항 빌딩 건너편에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거기서부터는 키버가 앞에 서서 여행자들 한 무리가 진열대의 향수, 카메라, 과일 등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를 빠져 한가운데 있는 출구 쪽으로 갔다. 유리로 된 회전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리머스는 문득 뒤돌아보았다. 신문판매대 옆에 ‘컨티넨탈 데일리 메일’ 지가 쌓여 있었는데 그 뒤쪽에 안경을 낀 사나이가 서 있었다. 개구리를 연상케 하는 작은 사나이인데 묘하게 흠칫흠칫거리면서 진지한 표정을 한, 겉으로 보기에는 공무원 같은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런 부류일 것이다. 주차장에서 차가 한 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번호를 붙인 폴크스바겐인데 운전석에는 여자가 타고 있었으나 그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운전 태도는 느긋해서 교통신호가 황색으로 변하면 무조건 차를 세웠다. 갈 곳은 처음부터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차가 뒤따르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리머스는 상상할 수 있었다. 윙 미러로 어떤 차인지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번은 CD (국방성) 의 번호를 단 검은색 푸조를 발견했지만 모퉁이를 돌 때에는 가구점의 트럭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전쟁 당시부터 헤이그의 지리에는 밝았으므로 차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북서쪽으로 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슈베닝겐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마침내 길은 교외를 벗어나 바다를 바라보고 모래 언덕 가장자리에 방갈로가 줄지어 있는 근처로 가까이 갔다. 거기서 차는 멈춰섰다. 여자가 내려서 그들을 차에 남겨둔 채 제일 가까이에 있는 크림 색 조그만 방갈로로 다가갔다. 현관의 벨을 눌렀다. 현관에 걸려 있는 주물로 만들어진 간판에 ‘르 미라지’(기적) 라고 쓰여진 고딕풍의 글씨체가 약간 푸른색으로 튀어나와 있으며, 창에 종이를 발라놓은 것으로 보아 모든 방이 밀폐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친절해 보이며 약간 뚱뚱한 여자가 여자 운전사의 어깨 너머로 차 쪽을 바라보더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를 본 순간 리머스는 큰어머니 생각을 했다. 별것 아닌 일로 곧잘 매를 맞았지만 그리운 추억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기쁜 일은 없군요." 두 사람은 그녀의 뒤를 따라 방갈로로 들어갔다. 키버가 앞에 서 있었다. 운전사는 차로 돌아갔다. 리머스는 방금 지나온 도로를 바라보았다. 300미터 가량 뒤에 검은색 차가 서 있다. 피아트일 것이다. 아니 푸조일는지도 모른다. 레인코트를 입은 사나이가 차에서 내렸다. 홀 안에 들어서니 여자가 리머스의 손을 따뜻이 감싸쥐었다. "와주셔서 우리 미라지 저택으로선 대환영입니다. 여행은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즐거운 여행이었소." 리머스가 대답했다. "비행기, 아니면 배?" 키버가 대신, "여객기였어, 평온무사한 여행이었어." 하고 항공회사의 경영자같이 말을 한다. 그러자 그녀는, "그럼 식사준비를 하겠습니다. 특제요리 말이에요. 솜씨를 발휘하겠습니다.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 "그런 걱정은 안해도..." 리머스의 입에서 말이 반이나 나왔는데 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당황해 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키버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 남자는 가죽 단추가 붙은 방수 외투를 입고 있었다. 키는 리머스와 비슷했지만 나이는 조금 더 들어 보이고, 회색 피부의 사나운 얼굴에 깊은 주름이 가 있다. 군대에 몸을 담았던 남자일 것이다. 그가 손을 내밀며, "피터스라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손질이 잘 되어 있다. "여행은 유쾌했습니까?" "예." 키버가 급히 입을 열었다. "아주 무사했습니다." "아아, 샘. 리머스 씨와는 의논해야 될 일이 상당히 많아. 자네에게는 이 이상 볼일이 없을 것 같네. 그 폴크스바겐으로 돌아가면 되겠어." 키버는 미소지었다. 그 웃음 속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리머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럼, 리머스, 또 보세." 키버의 목소리는 밝게 들렸다. "행운을 빌겠네."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키버와 악수를 나누지는 않았다. 키버는 여러 번 이별의 인사를 반복하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리머스는 피터스의 뒤를 따라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레이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었다. 가장자리 장식이 눈부신 것이었다. 창문가에는 화분을 줄세워 놓았다. 거대한 선인장, 담배나무, 그 밖의 것도 고무나무와 비슷하게 잎이 넓은 진귀한 것들뿐이다. 가구들도 은은하고 고풍스러운 것으로, 방 중앙에는 테이블이 하나, 조각으로 장식된 의자가 둘. 테이블을 씌워놓은 엷은 밤색 천은 테이블 커버라고 하기보다는 융단에 가깝다. 두 개의 의자 앞에는 메모용지와 연필이 놓여 있다. 식기를 얹어두는 선반에는 위스키와 소다수가 보인다. 피터스는 그리로 걸어가서 두 사람분의 마실 것을 만들었다. 리머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의 내 행동에 선의는 일체 들어 있지 않소. 알겠소, 이 뜻을? 나도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소. 우리는 둘 다 프로가 아니오? 당신은 돈에 팔린 배신자를 손에 넣었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부탁하는데,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둥 그런 소리는 말아주시오." 말소리는 초조하고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피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신의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키버에게서 들었소." 조금도 감정이라고는 들어 있지 않은 음성으로 미소도 보이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게 주인을 때리지는 않았겠지." 소련인이라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의 영어는 완벽에 가까웠다. 오랜 세월 문명의 유쾌함과 즐거움을 맛본 사람의 평정과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이 테이블 앞에 마주앉으니 피터스가 질문을 시작했다. "키버는 내가 얼마를 준다고 했소?" "베를린의 은행에서 1만 5천 파운드 찾을 수 있다고 하더군." "틀림없소." "그리고 또, 다음 1년 간 계속해서 질문하는 권리를 보유하고, 나를 계속 이용할 경우에는 다시 5천 파운드 추가한다고 했소." 피터스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러나 그 조건을 수락한 것은 아니오." 리머스가 계속했다. "당신이나 나나 그런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1만 5천 파운드를 은행에서 찾으면 나는 그 즉시 사라지고 싶소. 나라를 판 인간이 어떤 식으로 취급되는가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 여기서 폭로된 첩보망이 당신들 손에 의해 거두어지고 있는 꼴을 세인트 모리츠 산장 안에서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마시오. 그들이라고 바보는 아니지. 누구를 잡아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단 말이오. 아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쫓고 있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게요." 피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은 물론 안전한 장소에 숨어야 하지." "철의 장막 저쪽이오?" "그런 뜻이지." 리머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마 예비질문에 사흘쯤 보내겠지. 그것을 보고한 뒤에 세세한 지령을 받게 되겠지?" 피터스가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리머스도 흥미를 가지고 그를 바라보며, "하, 처음부터 전문가를 파견한 건가? 아니면 모스크바 당국은 여기엔 손을 대지 않은 건가?" 피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머스를 바라만 볼 뿐, 그러다가 드디어 앞에 놓여 있는 연필을 집어들고는, "당신의 전시중 임무부터 들려주시지."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알고 있을 텐데." "그렇긴 하지. 그러나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싶소. 말해 주시오." "나는 1939년 기술장교로서 소집되었소. 훈련이 끝났을 때 어학에 자신 있고 해외의 특수임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모집이 있었소. 군대 일에 싫증이 나 있을 무렵이었으며, 네덜란드 어와 독일어는 그 나라 사람 못지않게 할 수 있고, 프랑스 어도 상당히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즉시 응모했소. 네덜란드는 전부터 알고 있었소. 아버지가 라이덴에서 기계공장을 가지고 있어서 9년이나 살았던 일이 있기 때문이오. 틀에 박힌 면접이 끝나고 옥스퍼드 근처의 학교로 보내져서 소위 테크닉이라는 것을 교육받았소." "그 시설을 맡고 있는 사람은?" "나중에까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는 스티드 애스프라라는 사람이고, 또 필딩이라고 하는 옥스퍼드 대학의 지도교수. 이 두 사람이 그 시설의 책임자였소. 41년에 나는 네덜란드로 파견되었소. 2년 가까이 이곳에 있었지. 그 당시에는 첩보부원이라고 알려지기만 하면 마지막이어서, 그 다음날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상황이었소. 살해용이었지. 더구나 네덜란드만큼 그런 종류의 일을 하기 어려운 나라도 없었소. 모든 장소가 모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소.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본부를 설치할 장소도 없었거니와 무전기 세트를 설치할 곳도 없었소.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므로 무척 고생스러웠소. 43년에 이곳을 탈출하여 영국 본토에서 2개월 동안 머물다가 노르웨이에서 한동안 일했소. 그것은 네덜란드에 비하면 소풍간 것과 같았지. 45년에 임무가 끝나 다시 네덜란드로 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공장을 운영해 보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내 계획대론 되지 않아서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이며 브리스톨에서 여행안내소를 하고 있었던 녀석과 동업형식으로 그 일을 시작했소. 그 일이 18개월 계속되었지만 결국엔 팔아넘기게 되었소. 그때 뜻밖에 정보부에서 편지가 왔소. 귀국할 마음이 없는지를 묻는 거였소. 그러나 그때는 일에 지쳐 있어서 망설이던 끝에 좀 생각해 볼 여유를 달라고 하고는 런디 섬의 임대별장을 빌렸소. 거기에서 또 1년쯤 상황을 관망해 보았으나 그것도 싫증이 나서 내가 편지를 뛰웠소. 그렇게 해서 49 년말에 또 한 번 정보부원으로 되돌아간 거요. 그것은 물론 실패로 끝났소. 연금의 권리도 삭감되고, 그 뒤로는 뻔한 비참한 맛을 보게 되었지. 어떻소,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 빠른가?"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그 여자가 준비한 식사를 내왔다. 냉동 쇠고기를 듬뿍, 빵과 수프. 피터스는 메모용지를 치우고 두 사람은 말없이 먹었다. 이런 식으로 질문은 계속되어 갔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피터스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은 서커스 (첩보부) 에 되돌아갔다는 거군." "그렇소. 한동안은 책상머리의 일이 주어졌소. 보고서를 검토하고 철의 장막 안의 여러 나라 군사력을 확인하고 부대의 주둔지 같은 것을 밝혀내는 일이었소." "소속은?" "위성 4호. 나는 거기에 50년 2월부터 51년 5월까지 있었소." "함께 일한 사람은?" "피터 길럼, 브라이언 드 그레이, 조지 스마일리. 51년이 되니 스마일리는 우리와 헤어져서 대적(對敵) 첩보부로 옮겨갔소. 51년 5월 나는 DCA로서 베를린에 파견되었소. DCA란 현지 관리관 차장을 말하며, 작전행동의 전면적인 관리를 맡고 있소." "당신 밑에서 일한 사람은?" 피터슨은 말을 들으면서 재빨리 연필을 놀리고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의 속기법을 쓰고 있는 듯했다. "하켓, 서로, 드종. 드종은 59 년 교통사고로 죽었소. 살해당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증명할 길은 없었소. 이상의 인원으로 첩보망을 조직하고 내가 그 책임자였소. 좀더 자세히 듣고 싶소?" 하고 딱딱한 어조로 물으니, "물론.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듣기로 하지. 계속해 보시오." "54 년말에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거물을 잡았소.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국방성의 차관인 프리츠 페거였소. 그때까지의 일은 잘 진척되지 않았으나, 54년 11월에 우리는 프리츠를 연락상대로 쓸 수가 있었소. 그로부터 만 2년 간 그의 연락이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사라지고 그 뒤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소. 소문으로는 감옥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다음 연락상대를 잡기까지는 3년 걸렸소. 1959 년이 되어 카를 리메크가 나타났소. 카를은 동독공산당 최고회의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첩보부원으로서는 최상의 존재였소." 피터스가 말했다. "그도 지금은 죽고 없소." 수치감에 젖은 듯한 그의 표정이 리머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총에 맞을 때에 나도 그곳에 있었소." 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그 사나이에게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그가 죽기 직전에 그를 배반한 거요. 그는 그 여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그녀는 첩보망의 전모를 알아버렸소. 카를을 없애버린 건 당연한 일이지." "나중에 당신도 베를린에 가야 하니까 그때 다시 한 번 자세히 듣겠소. 카를이 죽고 나서 당신은 항공기로 런던으로 돌아갔소. 그리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런던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렇소." "런던에서의 일거리는?" "은행과요. 부원들의 봉급이나 급여를 감사하는 것과 비밀리에 해야 할 어떤 목적을 위한 해외송금을 관리하는 거지. 애들이라도 해낼 수 있는 일이오. 지시를 받고 지불증에 사인을 하는 것 뿐이니까. 때로는 너무 평온무사해서 골치가 아플 정도였소." "부원들과는 직접 연락을 했소?" "그런 일은 할래야 할 수가 없지. 각각 그 나라의 현지 주재원이 요구액을 알려왔소. 그것을 상사가 점검해서 지불하기로 결정이 되면 우리에게로 넘기는 게요. 대개의 경우에는 우리 손으로 적당한 외국은행에 그 금액을 불입했소. 저쪽에서는 현지 주재원이 직접 인출하여 첩보부원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밟았소." "첩보부원은 어떤 방법으로 표시되지?" "숫자요. 서커스(첩보부) 에서는 그들을 부르는 데 컴비네이션(글자의 조합) 을 쓰고 있소. 각 첩보망마다 컴비네이션이 정해져 있어서, 그 끝에 숫자를 더한 것이 각 첩보부원인 게요. 카를의 경우는 8A니까 그 뒤에 1을 첨가하면 그가 되지." 리머스의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다. 피터스는 그런 그에게 상습도박사의 눈으로 차가운 시선을 테이블 너머로 보내고 있었다. 이 리머스가 얼마나 도움을 주게 될까? 이 사나이로 하여금 나라를 팔게 한 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유혹하고, 무엇이 그를 두렵게 하고 있는가? 그가 증오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이 사나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최상의 결정적인 패는 끝까지 숨겨두고 되도록 비싼 값에 팔아넘길 속셈은 아닐까 ? 그러나 피터스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리머스는 이미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다. 흥정을 견뎌낼 상태가 아니다.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사나이, 인생을 알고, 고백을 알고, 게다가 그 둘을 모두 배반한 인간이다. 피터스는 전에도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전향자. 아무도 모르는 밤에 새로운 교리를 발견한 사나이. 안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확신의 힘에 의해서 자기 임무를, 자기 가족을, 자기 조국을 배반한 사나이. 새로운 목적에 충만되고 새로운 희망에 불타고는 있지만, 그런 중에도 여전히 배신의 낙인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교육받은 사실을 누설할 때에는 육체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뇌와 싸우게 된다. 십자가를 불태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배교자(背敎者)와 같아서 본능과 물욕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 그들이다. 피터스 자신도 그 양극성에 잡혀 있으며, 그의 역할은 상대에게 위안을 주고 상대방의 자부심을 파괴시키는 데 있다. 그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 두 사람이 다같이 서로 인정하고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머스는 피터스와 인간적으로 밀접해지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자부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터스 역시 몇 가지 이유에 의해서 리머스가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생략이라는 수단에 의한 거짓말일는진 모르지만, 거짓말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자존심을 위해서 반항을 위해서, 또는 순수하게 직업상의 고집에 의한 것일는지도 모르지만, 그 거짓말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피터스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 리머스가 직접 스파이인만큼 이 심문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피터스가 선택을 원하지 않는 점에 리머스가 선택을 하게 될 것도 알고 있다. 리머스는 물론 피터스가 원하는 정보의 종류를 예상하고 있다. 그것에 응하는 태도에 있어서 무심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이야말로 보는 눈이 있는 자의 눈으로는 훨씬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에 덧붙여서 알콜에 몸을 망친 사나이 특유의 변덕스러운 허영심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피터스가 말했다. "베를린에서의 당신 임무를 좀더 상세히 설명해 주시지. 1951년 5월부터 1961년 3월까지의 일을 말이오. 그전에 한잔 더 하기로 할까." 리머스는 피터스가 테이블 위에 있는 상자에서 담배를 한 개비 뽑아서 불을 붙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담배상자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피터스는 결코 그 담배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은 점, 막상 입에 담배를 물 때에도 반드시 제조회사 이름이 박힌 쪽에 불을 붙여 그 부분을 먼저 재로 만들어버리는 점. 그런 동작은 리머스를 만족시켰다. 피터스 또한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쫓겨본 일이 있는 몸이 틀림없다. 피터스는 특이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표정이 없고 회색 얼굴을 하고 있다. 혈색은 오래 전에 없어져 버린 듯하다. 아마도 혁명 초기에 어딘가에 있는 감옥에서 상실한 것이리라. 지금은 전혀 별개의 얼굴을 손에 넣어, 이것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빳빳한 잿빛 머리칼만은 희게 변색이 되겠지만, 얼굴 그 자체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리머스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나이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결혼은 했을까? 그의 몸 주변에는 뭔가 정통적인 것이 감돌고 있다. 그것 또한 리머스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권력과 확신의 정통성. 피터스의 입에서 거짓말이 나올 때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며, 그 거짓말은 계산된 것이다. 필요한 거짓말. 애시의 경우처럼 서툰 속임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애시, 키버, 피터스 -- 그들 사이에는 인간으로서의, 신분으로서의 계단이 있었다. 첩보기관에 절대적인 계급조직이 필요한 것은 리머스도 철칙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생각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또 이데올로기의 계단이기도 했다. 애시는 돈을 탐낸 용병(傭兵), 키버는 동조자, 그리고 이 피터스에게 있어서는 목적과 수단은 하나인 것이다. 리머스는 베를린 당시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피터스는 말하는 도중엔 거의 끼어들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질문을 보태고 자기 의견을 말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반드시 기술적인 면에 흥미를 느꼈을 때의 일이며, 리머스의 기질에도 딱 들어맞는 전문지식을 피력했다. 어느새 리머스도 질문자의 냉정한 전문가 의식에 응답하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 두 사람 사이에 공통의 것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동유럽 첩보망을 조직하는 데는 상당한 세월을 필요로 했다고 리머스가 설명했다. 처음에 그 도시에는 2류 스파이들이 떼지어 있어서 수집되는 정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베를린에서의 하루하루는 칵테일 파티에서 새로운 요원을 보충하여 만찬 석상에서 지령을 내리면 아침 식탁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리게 되는 형편이었다. 그들 전문가에게는 악몽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요원들 중 반은 상대방에게 이미 간파되어 있는 상태로서 일은 지리멸렬, 정보만 무성하고 확실한 근거와 활동무대가 너무도 빈약했다. 1954 년에 가서야 페거를 포섭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각국의 첩보부가 보다 고도의 스파이 활동을 필요로 한 56년은 그들의 힘만으로는 움직임을 알아낼 길이 없게 되었다. 페거의 등장이 그들에게 그런 능력을 잃게 하고 신문기사와 큰 차이 없는 2류 정보밖에는 수집할 수 없는 존재로 떨어뜨려 버렸던 것이다. 진실한 물건을 원했다. 그것을 손에 넣기까지는 다시 3년을 필요로 했다. 어느 날 드종이 동베를린 근교에 있는 어떤 소나무숲으로 소풍을 갔다. 차에는 영국 주둔군의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그는 운하를 끼고 나 있는 비포장도로에 차를 세우고 문을 잠갔다. 식사를 마치고 빈 바구니를 차에 넣으러 갔다. 그의 아이들이 앞장서서 뛰어갔다. 아이들은 차에 도착했는데 멈춰선 채 의아해 하고 있었다. 바구니를 그곳에 버려둔 채 뛰어서 되돌아왔다. 누군가가 차의 문을 억지로 열어놓은 것이다. 손잡이가 망가지고 문이 조금 열린 상태였다. 드종은 도구함 안에 카메라를 넣어둔 것이 생각나서 얼른 차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분명히 손잡이를 억지로 비튼 흔적이 있었다. 손목 소매에 숨길 정도의 강철 파이프 토막을 이용한 듯하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냥 있었다. 코트도 있고, 아내 것인 종이에 싸인 몇 개의 포장물도 그대로 있었다. 운전석에는 담배 깡통이 놓여 있고, 그 깡통 안에 니켈로 된 조그만 대롱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종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미녹스라고 불리는 초소형 카메라의 필름. 집에 돌아온 드종은 필름을 현상해 보았다. 최근 열린 동독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최고회의 의사록이었으며, 기묘한 우연이기는 하지만 그 무렵 다른 루트를 통해 입수한 내용과 대조해 보니 그 사진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리머스가 이 사건을 담당했다. 그는 이 사건을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베를린에 부임한 뒤로 이렇다 할 공적도 세우지 못했고, 또 상임 파견원으로서의 정년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 1주일 뒤에 그가 직접 드종의 차를 같은 곳에 세워두고 그 근처를 돌아다녀 보았다. 드종이 소풍을 간 지점은 마을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운하를 앞에 두고 폭파된 토치카 진지의 잔해가 두 군데, 뒤로는 운하를 따라 이어진 오솔길에서 바짝 마른 모래땅이 200 미터쯤 이어지고 동쪽 끝에 보잘것없는 소나무숲이 바라다보인다. 그러나 그곳은 인적이 없다고 하는 장점이 있어서 - 베를린에서는 드문 곳이지만 - 감시당할 걱정이 없는 곳이었다. 리머스는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다. 차 쪽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접근해 올 사람이 어느 쪽에서 나타날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 사이에서 차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밀고자의 신뢰를 유지하는 기회가 사라진다. 그러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되돌아와 보았으나 차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내심 혀를 차며 서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최고회의는 앞으로 두 주일은 열릴 예정이 없었다. 3주일이 지나서 그는 다시 드종의 차를 빌려서 20달러 지폐로 1천 달러를 소풍용 바구니에 넣었다. 차는 잠그지 않고 두 시간쯤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돌아와 보니 도구함에 담배 깡통이 들어 있었다. 소풍 바구니는 없어졌다. 담배 깡통의 필름은 기록사진으로서는 1급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6주 사이에 그는 그것을 두 번 되풀이하고 두 번 모두 같은 결과를 얻었다. +리머스는 마침내 광맥을 찾아낸 것을 알았다. 이 정보원(情報源)을 '메이페어' 라고 이름짓고 런던에는 오히려 비관적인 보고서를 보내놓았다. 하다못해 반이라도 힌트를 주게 되면 본부에서는 지체없이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야말로 리머스가 무엇보다 피하고 싶었던 일이며, 이것이 아마도 그를 노후자(老朽者) 정리에서 구출해 줄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런만큼 런던의 본부가 직접 담당하겠다고 나설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령 어떤 방법으로 그들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해도 첩보본부가 무슨 이론이든 내세워 방침을 정하고 주의를 주고 작전을 지시해 올 위험성이 있었다. 본부에서는 새로운 달러 지폐의 힘으로 정보사진을 찍게 하고, 그 필름을 본국에 보내고, 그와 동시에 밀고자의 정체를 밝혀내는 작전을 세우고 그 성과를 보고하게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더 그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국방성에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머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된다. 그는 3주 동안 미친 듯이 일을 계속했다. 최고회의의 모든 인물을 명단에 의해서 하나하나 검토해 갔다. 의사록에 접근할 수 있는 서기국원에 대해서도 전원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는 위원 및 서기국원 중에서 누설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31명으로 추려 명단 마지막 페이지에 써넣었다. 31명을 뽑아내어 보았지만 불완전한 그 경력을 놓고 그 중에서 누설자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리머스는 조사를 다시 본래의 자료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 방법을 취했어야 했다. 아무튼 그는 그때까지 받은 의사록 사진 복사에 페이지 표시도 안 보이고 장별(章別)도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았다. 두번째와 네번째의 것에는 글자 몇 개가 연필인가 크레용으로 지워져 있었다. 이것은 그 복사가 의사록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초고를 찍은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거기서 수사범위는 서기국 안으로 한정되게 되었다. 서기국 직원은 아주 소수이다. 의사록의 초고를 또렷하고 주의깊게 사진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그 촬영자에게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개인적인 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상할 수 있었다. 리머스는 각 개인의 경력표로 되돌아갔다. 서기국에 카를 리메크라는 사나이가 있다. 본래는 위생병 하사로서 영국에서 3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었다. 여동생은 포메라니아 (폴란드의 북서부, 본래 독일령, 옛날 이름은 프러시아) 에 살고 있었으나 러시아 군 침입 후 소식을 모른다. 리메크는 아내가 있고 카를라라는 딸이 있다. 리머스는 과감한 수단을 쓰기로 결심했다. 런던에 조회하여 리메크의 포로번호가 29012인 것과 1945년 11월 10일 석방된 것을 알았다. 동독의 어린이용 SF (공상과학소설) 를 한 권 사서 그 면지에 어린애 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독일 글을 써넣었다. '이 책의 소유자는 1945년 12월 10일, 노스 데븐셔 지방의 비드퍼드에서 태어난 카를라 리메크 - 달세계 우주 여비행사 29012호(서명)' 그리고 그 밑에 덧붙여서, '우주비행을 희망하는 사람은 직접 C. 리메크를 만나보고 그 지시를 받을 것. 응모용지는 동봉해 있음. 우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다른 편지지에 줄을 몇 개 긋고 이름, 주소, 나이의 칸을 만들고 그 페이지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넣었다. '응모자는 전원 면접함. 희망 일시와 장소를 기입할 것. 채용된 때에는 7일 이내에 통지함. C. 리메크.' 그 편지지를 책갈피에 꽂았다. 리머스는 역시 드종의 차로 같은 장소에 가서 책 겉장 밑에 낡은 100 달러짜리 지폐 다섯 장을 넣고 좌석에 놔두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책이 담배 깡통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기에는 필름을 말아놓은 것이 3개 들어 있었다. 그날 밤 리머스는 현상에 착수했다. 하나는 어김없이 최근에 있었던 최고회의의 의사록이었으며, 두번째 것은 코메콘 (동구경제 상호원조회의) 과 동독과의 관계 수정 초안이었고, 세번째 것은 동독 첩보기관 조직의 명세서, 각 부문의 기능과 부원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한 것이었다. 피터스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그 자료가 모두 리메크 한 사람에 의해서 흘러나왔다는 말이오?" "그렇지 못할 이유라도 있소? 그가 그 사정에 정통해 있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을텐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피터스가 자기 자신에게 하듯이 말했다. "공범자가 있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나중에 가서는 있었소. 그것은 지금부터 말하겠소." "뭘 말하려는지 우리는 알고 있소. 그러나 그가 그 뒤에 끌어들인 부원 말고 높은 곳에서 도움을 받은 흔적은 없었소?" "아니, 그런 낌새는 없었소. 조금도." "지금 되돌아보아도 그런 눈치는 안 보였다고 말할 수 있겠소?" "말할 수 있소." "당신이 그 자료를 서커스(첩보부)에 보냈을 때, 아무리 리메크가 그런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정보가 너무 완벽하다고 지적받진 않았소?" "그런 적은 없었소." "리메크의 카메라 입수처를 질문받지는 않았소? 누군가의 지시로 그것을 촬영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오." 리머스는 잠시 망설였다. "아니. 분명히 그런 질문은 받지 않았소." "이상하군." 피터스는 차갑게 말하고, "아니, 실례했소. 계속하시오. 당신의 설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생각은 없었소." 리머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정확히 1주일 뒤, 그는 또 차를 몰고 운하로 갔다. 이번에는 그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비포장도로에 들어서서 보니 풀밭 위에 자전거 세 대가 눕혀져 있고 200 미터쯤 하류 쪽에 남자 셋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차에서 내려 모래땅 앞의 소나무숲 쪽으로 걸었다. 20 미터쯤 갔을까? 큰소리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뒤돌아보니 세 사람 중 하나가 그를 손짓해 부르는 것이었다. 다른 둘도 이쪽을 향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머스는 그때 낡은 방수 외투를 입고 있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있었는데 빼내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상대방 세 사람은 하나를 가운데에 끼고 이미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가 두 손을 주머니에서 빼면 그 순간에 사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의 주머니 속에 리볼버 권총이 숨겨져 있는 것은 그들로서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리머스는 중앙에 서 있는 사나이로부터 10 미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리머스가 물었다. "당신이 리머스요?" 사나이는 뚱뚱하고 키는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타입이었다. 영어로 말했다. "그렇소." "영국 국적증명서 번호는?" "PRT_L58003_1." "대일 전승기념일날 밤에는 어디 있었소?" "네덜란드의 라이덴. 아버지의 공장에 네덜란드 인 친구 몇 명과 함께 있었소." "조금 걸으시오, 리머스 씨. 그 방수 외투는 거추장스럽겠구먼. 벗어서 당신이 서 있는 곳에 두고 가시지. 내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리머스는 망설이다가 어깨를 움츠리고는 그것을 벗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소나무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리머스는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계속했다. "그가 누구인지는 나처럼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오. 내무성에서 세 번째 자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최고회의의 서기국원, 인민보호 공동위원회의 위원장. 그것이 그 사나이의 지위요. 그가 나와 드종을 알고 있는 것은 그 위치로서는 당연한 일인데, 아프타일룽(첩보부) 의 대적 정보 파일을 보았다고 생각되오. 그의 정보 입수경로는 셋이 있었소. 최고회의, 국내의 정치경제관계 보고서, 또 하나는 동독 방위기관의 파일에 접근하는 것이지." "그러나 방위기관의 경우에는 한도가 있어. 외부인은 누구이든 간에 파일의 이용이 금지되어 있소."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그것이 허락된 것이오." "그는 그 돈을 어떻게 했소?" "그날 이후 돈을 건네주는 것은 내 역할은 아니었소. 첩보부가 직접 처리하기로 되어 서독 은행에 입금시키게 되었으니까. 그는 그 이전에 내게서 받은 돈조차도 되돌려줄 정도였소. 런던에서는 그 전액을 그를 위해 송금해 왔소." "런던에는 어느 정도로 보고했소?" "그때부터는 모조리 보고하기로 했소. 안할 수가 없었지. 그것을 첩보부는 그대로 국방성에 보고했고. 그 다음에는 말이오," 그리고 리머스는 독이라도 삼킨 어조로 덧붙였다. "그 비참한 종말이 찾아오는 것도 결국 시간문제였소. 국방성의 위세를 등에 업고 런던은 점점 탐욕스러워져 갔으니까. 우리들을 들볶기 시작한 것이오. 그에게 더 많은 돈을 주고 더 많은 정보를 빼오게 한 게요. 끝에 가서는 우리들 쪽에서 카를에게 새로운 동료를 포섭해서 첩보망을 만들기 전에는 무리가 아니냐, 단독행동으로는 요구하는 만큼의 정보를 수집할 수 없을 거라고 주의를 주는 형편이었소.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 그것이 카를에게 긴장을 강요하고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게 했으며, 우리들에 대한 그의 신뢰도 엷어지게 했거든. 그것이 결국 파국의 시작이었소."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어느 정도나 끌어냈소?" 리머스는 다시 망설였다. "어느 정도라고 대답할 수가 없소. 그러나 예상 밖으로 오래 계속된 것은 사실이오. 하긴 밀고는 그 파국이 생기기 이전에 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마지막의 몇 개월은 정보의 내용이 보잘 것 없었소. 당국에서 의문을 품고 좋은 재료에서 그를 멀리한 것이 분명해요." "대개는 어떤 것을 알려주었소?" 하나하나 세다시피 카를 리메크가 누설한 정보의 대부분을 말했다. 그의 기억력은 피터스도 인정할 만큼 놀랍도록 정확했다. 상당한 양의 알콜이 들어갔는데도 전혀 그 영향이 없는지 날짜와 이름을 정확히 말하고, 그에 더하여 런던에서의 반응을 설명하여 그 진술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쓰여진 금액에 대해서도 요구된 액수와 지불된 액수를 말하고, 정보망에 끌어들인 그 밖의 스파이에 대해서도 그 가담한 일시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에 피터스가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요. 아무리 안성맞춤인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아무리 조심스럽고 또 열심이었다고 해도 개인의 힘으로 그렇게까지 상세한 것을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그것이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사진 촬영까지는 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는 할 수 있었소." 리머스는 갑자기 불쾌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놀랄 만큼 교묘하게 해낸 것이지. 그랬을 뿐이오." "그럼 영국의 첩보부에서는 그가 그 자료를 손에 넣게 된 경로나 일시를 확인하라는 지시는 없었소?" 리머스는 즉시 대답했다. "명령은 없었소. 리메크가 그 점에 대해서는 신경을 날카롭게 하기에 런던은 정보의 입수만으로 만족했던 거요." "그랬군." 피터스는 중얼거리더니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또 말했다. "말이 난 김에 물어보겠는데, 당신은 그 여자에 대해서 알고 있소?" 리머스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그 여자라니?" "카를 리메크의 여자 말이오. 리메크가 총에 맞은 날 밤 서베를린에 잠입한 여자." "그 여자가 어쨌다는 게요?" "1주일 뒤에 시체로 되어 발견되었소. 살해당한 것이지. 아파트를 나서는 것을 차에서 저격한 것이오." 리머스가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그것은 내가 쓰던 아파트요." "아마도 그 여자는" 피터스는 가르쳐주는 듯한 어조로, "당신 이상으로 리메크의 정보망을 알고 있었을 게요." 리머스가 되물었다. "그렇다면?" 피터스는 눈썹을 모으고는, "이상하게도" 하고 말했다. "누가 죽였는지 모른단 말씀이야." 카를 리메크에 관한 것이 끝나자 리머스는 연달아서 그만큼의 중요성은 갖고 있지 않은 스파이들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가 주관하던 베를린 사무소의 기구, 연락 방법, 요원, 그 밖에 자질구레한 일들 -- 아지트, 연락, 기록, 촬영기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진술은 길고 깊게 이어져 밤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다음날 밤 리머스는 마침내 침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베를린에 있어서의 서구측 정보기관에 대해서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모조리 다 말해 버렸다. 그 이틀 사이에 위스키 두 병을 비웠다. 단지 하나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피터스가 끝까지 카를 리메크에게 공범자가 있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은 점이다. 그것도 고위층의 누군가가 협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전에 관리관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리머스는 그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관리관도 또한 리메크의 정보입수 과정을 단독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카를에게 몇 명의 동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리머스가 처음 그와 운하 앞에서 만났을 때에도 두 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잡을 필요조차 없는 조무래기에 불과했다. 카를 스스로가 그것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 또 피터스가 카를의 단독행동을 부정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카를이 접촉할 수 있는 정보입수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피터스와 관리관은 완전히 같은 생각인 것이다. 아마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 이외에 누군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나이야말로 관리관이 그렇게도 애써가며 문트의 마수에서 지키려고 한 인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카를 리메크는 이 인물과 손을 잡고 입수한 정보를 공급했던 것이 분명하다. 관리관이 베를린에서 하룻밤 리머스의 아파트로 카를과 두 사람만의 접촉을 위해 왔을 때에 그 인물의 이름이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내일만 되면 모든 것이 명백히 밝혀질 것이다. 내일이야말로 리머스는 마지막 수단을 써볼 작정이었다. 엘비라를 죽인 자는 그도 의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녀까지 살해할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엘비라는 리메크의 협력자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인물의 손으로 살해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거기에 이 문제를 설명하는 유일한 포인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니, 그것도 또한 무리한 해석일는지도 모른다. 이 해석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숨어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계산에 넣지 않고 있는 듯하다. 엘비라는 서베를린에서 살해되지 않았는가. 그는 또 엘비라가 살해된 사실을 관리관이 그에게 알려주지 않은 점을 수상히 여겼다. 피터스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에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게 하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러나 그것도 역시 근거 없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되었다. 관리관에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 아마 그 이유란 늘 그렇듯이 어마어마하게 멀리 두른 것으로서 거기까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일주일은 써버릴 각오가 필요하다. 그는 잠에 빠지며 입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카를은 바보 같은 사나이였어. 그 여자에게 당한 거야. 여자의 짓이 틀림없어." 그리고 엘비라도 당연히 그 보답을 받아서 지금은 죽어버렸다. 그는 리즈를 떠올리고 있었다. 제9장 - 이틀째 그 다음날 아침 8시에 피터스가 나타나더니 인사도 없이 테이블에 앉아서는 질문을 시작했다. "거기서 당신은 런던으로 돌아갔소. 그런 뒤에는 무엇을 했소?" "모가지지. 공항에서 인사과 녀석의 얼굴을 보고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소. 나는 그 길로 관리관에게 가서 카를에 관한 건을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소. 그 사나이는 죽었습니다 하고 말이오. 달리 할 말도 없었고." "그래, 당신은 어찌되었소?" "처음에는 한동안 런던에서 빈둥거리고 있으면 된다고 하더군. 적당한 연금을 받는 자격이 생길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들었소. 친절하게 말해 주기에 나는 오히려 기분이 거슬렸소.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었지. 그렇게까지 돈을 주고 싶으면 좀더 확실한 방법을 택하면 어떻습니까? 근속기간에 중단이 있었다는 등 획일적으로 따지지 말고 그 기간 전부를 합해 주면 당연히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해주었소. 그러나 그 말은 관리관을 화나게 했을 뿐이며, 결국 내게 떨어진 자리라는 것이 은행과라는 시시한 일로서, 여자들과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소. 당시의 일은 별로 기억도 안 날 정도요. 나는 답답함을 술로 달랬소. 짜증나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터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이 쫓겨나는 이유가 되었소. 술을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되었겠지." "은행과의 일에 대해서 기억해 보시지." 하고 피터스가 재촉했다. "그렇게 시시한 일도 또 없을 게요. 나는 원래 사무직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오.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베를린에서 미쳐 날 뛴 거지만. 소환된다는 것을 알고는 좌천이구나 하고 정신이 들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어떻다는 게요?" 리머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은행과 사무실은 내 뒤에 여자가 둘 있었소. 서스바이하고 래렛이라는 이름인데, 나는 목요일과 금요일이라고 불렀소." 재미있지도 않은 듯이 웃어보였으나 거기에 피터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이라고는 서류를 회부해 주는 것 뿐. 회계과에서 문서가 들어오지요. '이러이러한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이유로 700 달러를 내주도록 승인되었음. 준비해 주기 바람.' 이라는 식으로 요점만을 쓴 것이지. 즉시 '목요일' 과 '금요일' 이 일을 시작합니다. 지령서를 파일에 철하고 스탬프를 찍으면 이번에는 내가 수표에 사인을 하거나 은행에 송금수속을 의뢰하게 되고." "은행은?" "블랫 앤드 로드니 은행. 시티 (런던의 상업 및 금융 중심지) 에 있는 조그만 은행이오. 모든 게 첩보부다운 절차이며, 무슨 일에나 이튼 학교 출신이라면 신중 제일주의로 뭉쳐져 있소." "어쨌든 그래서 당신은 전세계에 널려 있는 첩보부원의 명단을 알았다는 거로군?"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소. 그 점이 역시 그 친구들의 빈틈없는 면이니까. 나는 분명히 수표에 사인하여 은행으로 의뢰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수취인의 이름은 백지였던 게요. 동봉하는 안내서와 그 이외에도 빠짐없이 사인하고서 그 서류를 특별송달과로 되돌려주지요." "그곳은 어떤 과요?" "전 직원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오. 거기에서 이름을 써넣어 우송하지요. 실로 빈틈없이 짜여져 있소." 피터스는 실망하는 얼굴을 보였다. "수취인의 이름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단 말이오?" "조직상으로는 불가능하더군." "그럼 어떤 기회에?" "때로는 비밀사항이 눈에 뜨일 때도 있었소. 은행과, 회계과, 특별송달과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기회와 마주칠 때가 있지. 교묘한 조직이라고 알고 있는만큼 간혹 특수한 자료에 다가가면 눈앞이 약간 밝아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게요." 그리고 리머스는 일어서서, "그 명단은 작성해 놓았소." 하고 말했다. "기억나는 모든 지불 상대를 적어두었소. 내 방에 있으니까 가지고 오겠소." 그는 그곳을 나와 발을 끌듯이 하고 걸어갔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이후로 그는 줄곧 그런 걸음걸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돌아왔을 때는 싸구려 공책에서 잡아찢은 듯한, 줄이 쳐진 종이 두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설명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어젯밤에 써둔 거요." 피터스는 빼앗아 자세히 읽고는 강한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으며, "좋아." 하고 말했다. "아주 좋아."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롤링 스톤 (굴러가는 돌이라는 뜻) 이라고 이름붙여진 놈이오. 나는 그 일 때문에 두 번이나 해외여행을 했었소. 한번은 코펜하겐, 또 한번은 헬싱키였소. 그것도 그곳 은행에 돈을 불입하는 일만으로." "금액은?" "코펜하겐에서는 1만 달러, 헬싱키에선 4만 독일 마르크였소." 피터스는 그것을 연필로 적어넣었다. "수취인은?" "모르오. 우리들은 '롤링 스톤' 의 외국 예금계정을 다루었을 뿐이오. 첩보부에서 가명의 여권을 받아가지고 코펜하겐의 왕실 스칸디나비아 은행과 헬싱키의 핀란드 국립은행을 찾아갔소. 돈을 예금하고 공동명의로 되어 있는 예금통장을 받았소. 나도 가명이었지만 그 구좌의 공동예금자 - 물론 요원 중 한 사람이겠지만 - 이 녀석 또한 가명이었음이 분명해요. 이 녀석의 사인 견본은 본부에서 받아가지고 있었소. 나중에 그 요원이 통장과 가짜 여권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예금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가명 뿐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이해시킬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당신이 있었던 곳에서는 언제나 그런 절차를 밟았소?" "아니, 그것은 특별한 지불방법이고, 관여할 수 있는 것은 명단에 있는 인물들 만이오." "그래서?" "아주 소수의 사람 밖에는 모르는 약호로 불려지고 있었소." "그 약호는?" "아까도 말한 대로 '롤링스톤' 이오. 그래서 수시로 1만 달러씩, 각국의 수도에서 그 나라의 통화로 지불되는 게지." "수도에 국한되어 있었소?" "내가 알기로는. 그 과로 옮겨가기 전에도 '롤링스톤' 에 대한 지불이 파일에 철해져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었소. 그러나 그런 경우 은행과는 현지의 주재원을 통해서 지불했었소." "당신이 은행과로 옮겨가기 전에는 어느 도시에서 지불됐었소?" "오슬로가 있더군.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소." "수취인의 이름은 언제나 같소?" "아니, 거기에도 첩보부의 조심성이 있었소.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 테크닉은 소련으로부터 배운 모양인데, 내가 알기로는 가장 복잡한 지불방법이라고 할 수 있소. 같은 방법으로 나도 여행 때마다 가명을 바꾸고 그 이름에 맞는 여권을 사용했소." 이 진술은 피터스를 기쁘게 한 모양이다. 그의 조사에서 빠져 있었던 부분을 채워주었을 것이다. "그 요원에게 가짜 여권을 주면 그는 그것으로 돈을 인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군. 한데 그 여권 말이오,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서 발송되었는지 알고 있소?" "아무 것도 모르오. 다만 예금되어 있는 나라의 비자 (입국사증) 가 필요한 것 말고는. 거기에 입국 스탬프도 있어야 하고." "입국 스탬프?" "그렇소. 가짜 여권을 국경에서 사용했다고는 생각이 안 돼. 그것은 은행에서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시했을 뿐이겠지. 요원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여권으로 여행했을 게요. 입국은 합법적으로 하고, 은행에서만 가명의 여권을 사용하는 것이지. 하긴 이것은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초기에는 지불이 현지 공작원의 손으로 되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지불을 위해 런던에서 현지로 가게 되었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소?" "이유는 알지. 나는 은행과 여자들에게 물어보았소. 그 '목요일' 과 '금요일' 이라는 여자에게 말이오. 그랬더니 그것은 관리관이--" "관리관? 그렇다면 관리관이 직접 그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나?" "그런 셈이지. 그 처리는 관리관이 직접 하고 있었소. 함부로 현지 주재원을 움직이면 은행의 눈을 끌게 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소. 그래서 나를 연락원 대신으로 쓴 것이지." "당신이 그 여행을 한 것은?" "코펜하겐이 6월 15일. 그날 밤 안에 비행기로 귀국했소. 헬싱키는 9월말이며, 이때에는 이틀을 묵고 아마 28일에 돌아왔을 게요. 헬싱키에서는 꽤 재미있는 추억이 있었소." 하고 그는 싱글벙글 웃었지만 피터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다른 지불에 대해서는 -- 그 날짜를 아시오?" "안됐지만 기억이 없소." "그러나 그 하나가 오슬로였던 것은 분명하군." "오슬로가 틀림없소." "현지 주재원의 손을 거칠 때와 새로운 지불방법 사이에 어느 정도의 날짜 차이가 있었소?" "분명한 기억은 없소. 그러나 그렇게 긴 것은 아니었을 게요. 아마 1개월, 아니 조금 더 되었던가." "그 첩보부원은 첫번째 지불 이전에도 상당한 기간 일한 흔적이 있었소? 파일은 어떻게 되어 있었소?" "파일에서는 아무 것도 몰라요. 거기엔 지불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오. 첫번째 지불은 59 년초로 되어 있었지만 다른 날짜는 기입되어 있지 않았소. 그것이 열람자를 한정하고 있을 경우의 처리 방침이며, 그때마다 별개의 파일이 작성되지요. 원장을 쥐고 있는 인간만이 종합해서 전모를 알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게요." 지금은 피터스도 계속 연필을 놀리고 있었다. 아마 이 방 어딘가에 테이프 레코더가 숨겨져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나중에 다시 글로 옮기는 데 시간이 걸릴 테지. 피터스가 받아쓴 내용은 오늘밤 모스코바로 보내는 전보의 자료가 될 것이다. 헤이그의 소련 대사관에서 담당 여자들이 하나하나 다시 정서해서 철야작업으로 발신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피터스가 말했다. "금액도 상당히 크고 지불 방법도 복잡한 걸 보면 비용도 꽤 들었을 텐데, 그것을 당신이 했단 말이오?" "내가 하다니? 내가 그런 것을 할 수가 있겠소? 자금원은 관리관이 쥐고 있지.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방식은 마음에 안 들었소. 너무 힘들고 너무도 복잡하고, 게다가 빈틈이 하나도 없어서. 직접 본인을 만나 현금을 건네주어서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과연 그 사람이 위조된 여권은 주머니에 넣어둔 채 자기 자신의 여권으로 국경을 넘었는가? 나한테는 이런 것조차도 의문이오." 지금이야말로 리머스에게 있어서는 문제를 구름으로 싸서 상대에게 토끼를 쫓게 할 때가 온 것이다. "뭐라고? 어떤 뜻이오?" "아마도 그 돈은 은행에서 인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일 그가 철의 장막 안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나이라고 한다면 돈은 아마 예금계정대로 남겨두었을 것이 분명하단 말이오. 언제라도 인출이 가능하도록 해두는 것이지. 그것이 내 생각이오. 그러나 그 이상은 생각해 본 일이 없소. 생각해 봐야 뾰족한 수도 없는 일이니까. 복잡한 구조의 극히 일부분밖에는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오. 당신은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무리 괴롭혀 봐야 대답할 수가 없는 일이오." "돈을 인출하지 않았다고 하면 여권의 사용기간 때문에 귀찮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나는 베를린에 있을 때에 카를 리메크를 위해서 같은 준비를 해 주었었소. 그가 활동할 필요가 생겼는데 우리와 연락이 안 될 경우를 생각해서지. 그때는 주소를 뒤셀도르프로 하고 서독의 위조 여권을 준비해 두었었소. 미리 약속해 둔 처리방법으로 그가 언제라도 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해둔 것이지. 여권의 기간은 끝나지 않게 되어 있었소. 그때가 되면 특별여행과에서 입국사증과 함께 다시 갱신해 주게 되니까. 관리관은 그 사나이의 경우에도 아마 같은 수를 썼을 게요. 이것은 내 상상이지만." "여권이 발행된 것은 확실하오?" "은행과와 특별여행과와의 연락장부에 그 기록이 적혀 있었소. 특별여행과라는 것은 위조된 여권과 입국사증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소." "그렇겠군." 피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새로운 질문으로 넘어갔다. "당신이 코펜하겐과 헬싱키에서 쓴 이름은?" "로버트 랭. 더비에서 온 전기기사로 되어 있었소. 이것은 코펜하겐의 경우요." "정확히 코펜하겐에 간 것은 언제요?" "아까도 말했지만 6월 15일. 나는 그날 아침 11시 반쯤 그곳에 닿았소." "이용한 은행은?" 리머스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놀라겠는데, 피터스, 그것도 잊어버렸소? 왕실 스칸디나비아 은행이오. 거기에 기록해 두었을 텐데." "확인해 두고 싶었을 뿐이오." 상대방의 대답은 차분했으며 여전히 연필을 놀리며, "그럼 헬싱키에서 쓴 이름은?" "스티븐 베넷. 플리머스의 조선기사요." 그리고 다시 비꼬는 말투로 덧붙였다. "간 날짜는 9월말이고." "도착한 날 은행에 가보았소?" "갔었지. 그것은 24일인가 25일인데 분명치는 않소. 그것도 앞에서 말했는데." "돈은 영국에서 가지고 나갔소?" "그런 짓은 할 수 없지. 어느 경우든지 미리 현지 주재원의 예금계정에 불입해 두었소. 그것을 그 주재원이 준비해 두었다가 공항에서 내게 넘겨주는 게요. 돈은 수트게이스에 들어 있었소. 그것을 내가 은행에 가져가는 것이지." "코펜하겐의 주재원 이름은?" "피터 젠센. 대학 구내에서 책방을 하고 있소." "비밀첩보부원이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던 이름은?" "코펜하겐에서는 호르스트 카를스도르프. 분명히 그랬을 게요. 그래, 틀림없소. 생각이 났는데, 카를스도르프가 분명하오. 내가 몇 번이나 카를스호르스트라고 말할 뻔한 것을 기억하고 있소." "신분은?"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에서 온 매니저." "또 한 사람의 이름은? 헬싱키 쪽 말이오." "페히트만. 아돌프 페히트만. 스위스 세인트 갈렌의 사나이인데, 이 친구에게는 직함이 있었소. 음, 그래, 페히트만 박사, 공문서 보관소의 직원이오." "좋아. 그래 두 사람이 다 독일어를 하는 사람이었소?" "그렇소. 그것은 나도 조심해서 관찰했소. 그러나 독일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소." "왜?" "나는 이래봬도 베를린에서 조직의 장(長) 이었소. 그런 문제를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동독의 고급 첩보부원의 움직임을 베를린에서 보고 모르지는 않소." 리머스는 일어나서 선반으로 다가가더니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피터스의 생각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도 거기에 특별한 조심성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 사건은 특수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었어. 당신에게는 모르게 한 것이겠지."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마시오." 리머스가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모르면 어떻게 되겠소?" 그야말로 그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고집부릴 각오가 되어 있는 부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에게 앞으로의 진술에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의 진위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할 필요가 있다. 관리관이 이렇게 말했었다. "놈들은 자네의 주장에 관계없이 추리해 볼 거야. 이쪽에서는 자료만 주고 저쪽의 결론에 회의적인 표정만 짓고 있으면 돼. 그들의 지적 능력과 자만심에 맡겨두면 되네. 그로 말미암아 그들끼리 사이에 당연히 의혹이 생기게 되겠지. 그 점일세, 우리가 노리고 있는 것이." 사실 피터스는 새삼 우울한 진상을 알게 되었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로군, 리머스." 그 뒤 곧 피터스는 방을 나갔다. 리머스에게는 쉬고 있으라고 하고는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으며 멀어져 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제10장 - 사흘째 그날 오후와 다음날 아침까지 피터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리머스는 방에 남아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초조한 마음은 점점 쌓여갔지만 전해오는 말 한마디 들을 수가 없었다. 묵고 있는 집 여주인에게 물어보아도 두툼한 눈썹을 움직이며 미소지을 뿐 도대체 알 수가 없다. 11시쯤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담배를 산 뒤에 멍청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변에서는 처녀 하나가 갈매기를 향해 빵 조각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녀는 등을 이쪽으로 보이고 있었는데 바닷바람에 그 길고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고 코트 자락은 뒤집힌 채 뒤로 젖혀진 몸뚱이가 바다를 향해 당겨진 활을 연상케 했다. 리즈가 그에게 몸을 주었을 때 저 모양과 같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영국에 돌아가는 대로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내야겠다. 찾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조그만 것에의 애정 --- 평범한 생활에 대한 신뢰. 종이봉투 안에 든 빵을 찢어서 물가에까지 다가가서 갈매기에게 던져주는 순진함. 그것은 그에게는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사소한 일에의 관심이다. 갈매기에게 던져주고 있는 빵조각이든, 또는 애정이든 그것이 무엇이었든 돌아가서 찾아낼 필요가 있다. 리즈도 역시 찾고 있을 것이다. 1주일 뒤에는 -- 2주일 뒤가 될는지도 모르지만 -- 귀국할 수 있을 테지. 관리관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에는 그도 저금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된다. 충분한 돈이 손에 들어올 것이다. 1만 5천 파운드와 퇴직금과 연금. 관리관의 말마따나 그런 정도라면 추운 나라와는 결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길을 둘러서 방갈로로 되돌아왔다. 그것이 15분전 12시. 여자는 아무 말 않고 그를 맞았다. 안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니 여자가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기는 몇 초 만에 끝나고 12시 반에는 그녀가 식사를 날라왔다. 그리고 반갑게도 영국 신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는 유쾌한 마음으로 3시까지 읽었다. 여느때 같으면 활자에는 볼일이 없는 사나이이지만 그 신문만은 정성들여 천천히 읽어나갔다. 신문에 난 조그만 일까지 기억에 담으며 사소한 사건 속의 인명에서 주소까지 머리에 넣었다. 그는 그것을 그의 독자적인 기억법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외웠다. 모든 주의력을 집중시켜서. 3시에 피터스가 돌아왔다. 리머스는 그의 얼굴을 보자 중대한 결과가 생긴 것을 느꼈다. 어느 쪽도 테이블 앞에 앉으려 하지 않았고, 피터스는 방수 외투도 벗지 않았다. "나쁜 소식을 갖고 왔소." 하고 그가 말했다. "영국에서는 당신을 수색하고 있소. 오늘 아침에 들어온 소식으로는 항구에 감시를 세웠소." 리머스는 무감각하게 반문했다. "그 이유는?" "명목상으로는 형무소를 나와서 정해진 기간 안에 경찰서에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거요." "그리고 사실상은?" "국가기밀보호법에 저촉되는 범죄. 소문에 의하면 지명수배가 되어 있는 모양이오. 당신 사진이 런던의 석간 신문 모두에 실려 있소. 그 설명 기사는 막연한 것이지만." 리머스는 버티고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관리관이 한 일이다. 그가 수색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애시나 키버가 체포되어 입을 열었다고도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사의 책임은 관리관에게 있다. 그가 말했었다. "2주일 안에 그들은 심문하기 위해서 자네를 어딘가로 데리고 갈 것이다. 어쩌면 해외로 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도 2주일이면 끝날 것이고, 그 다음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진행될 거야. 자네는 그동안 얌전하게 숨어 있으면 돼. 사건은 저절로 결말이 날 테니까.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 자네도 나만 믿고 있으면 되네. 문트를 없앨 동안 자네 생활비는 작전상의 예산으로서 확보하도록 손을 써놓았어. 당연한 조치니까." 그것이 지금 이런 꼴이다. 그와의 약속에서 이런 상태는 분명히 없었다.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었나 하고 이제 와서 뒷걸음질을 칠 수도 없다. 피터스에 대한 협력을 거절한다면 작전을 망치게 된다. 물론 피터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테스트일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가 되면 동행을 거부하는 것은 의혹을 사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앞으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그 밖에 어딘가 동구권으로 옮겨가게 되면 두 번 다시 풀려나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명목상으로 그는 서구(西歐) 에서의 지명수배자다. 그가 서구에로의 석방을 희망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된다. 관리관이 한 일. 그렇게 보아 틀림없다. 조건이 너무 좋았다. 그것은 그도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 친구들이 여분의 비용을 쓸 까닭이 없다. 돈을 미끼로 하지 않는 한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아니고는. 관리관으로서는 그렇다고 까놓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고통과 위험을 사들이기 위한 돈이었다. 그 돈 자체가 경고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가 물었다. "어떻게 그들이 알았을까?" 그렇게 말한 순간 번쩍 떠오른 것이 있어서, "당신 친구인 애시, 그자가 나불거렸다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키버." "그럴 수도 있겠지." 피터스가 대답했다. "당신이라도 나처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게요. 우리들의 일은 확실성과는 인연이 머니까. 어쨌건--" 하고 초조한 듯이 덧붙였다. "당신이 서구측으로부터 쫓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오." 리머스는 그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당신들이 나에게 올가미를 씌웠군. 그렇지, 피터스? 그리고 배를 쥐고 웃고 있겠지. 아니면 우리의 동료가 누설했다고 하는 게요?" 그러나 피터스가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자만이 심하군. 당신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어." "그렇다면 왜 내게 미행을 붙였소. 오늘 아침 나는 산책을 나갔었소. 해변까지 가보았는데 그 동안 갈색 옷을 입은 조그만 사나이 둘이 20미터씩 간격을 두고 미행했소. 돌아오니 즉시 이곳 마나님이 당신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 일밖에는 말할 수 없어. 당신 상사들이 어떤 방법으로 이번 일을 알았는지, 그것은 지금 당장의 우리들 문제는 아니오. 요컨대 그들은 이번 일을 알고 있소. 그것이 사실인 게요." "런던의 석간신문을 가지고 있소?"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여기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오. 우리는 런던으로부터 전보를 받을 뿐이야." "그것은 거짓말이오. 당신의 전신기는 모스크바 본부와의 연락 이외에는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을 텐데." 피터스는 화가 난 얼굴로, "이번에 한해서 두 군데 외신국과의 직접 통신이 허락되어 있소." 리머스는 냉소지으며, "그렇군. 그러고 보니 당신은 대단한 거물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으면," 하고 그는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는지 "여기에도 모스크바가 직접 손을 대고 있소?" 피터스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지금으로서는 당신이 취할 길은 둘 중 하나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장차의 안전을 꾀하든지, 아니면 당신 스스로 자신을 지키든지. 그 어느 쪽인가를 골라야만 해. 결국엔 체포될 몸이니까. 위조든 무엇이든 신분증명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도 없지. 영국의 여권은 앞으로 열흘이면 기한이 끝나게 되어 있고." "제3의 방법이 남아 있소. 스위스의 여권과 돈을 마련해서 탈출시켜 주면 되지. 그 다음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겠소."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럼 당신의 심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군. 아직은 내가 필수품이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 심문이 끝나고 나면 나를 어쩔 셈이오?" 피터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희망사항이 있소?" "새로운 인격을 원하오. 스칸디나비아의 여권이 좋겠지. 그리고 돈이오." 피터스가 대답했다. "굉장히 구식 수법이군. 그러나 일단 상사에게 의논해 보겠소. 그럼 함께 가주실까?" 리머스는 망설이고 있다가 잠깐 웃음을 띠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까지 나오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 보시지.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확인할 길이 없어서. 어쨌든 우리들은 오늘밤 출발하오. 애시와 키버가," 하고 어깨를 흔들며, "어떤 일을 덧붙일까?" 리머스는 창가에 다가갔다. 잿빛으로 저물어가는 북해 위로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밑에 갈매기의 무리가 선회하고 있었다. 처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준비해 주시오." "동구행 비행기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 베를린행이라면 앞으로 한 시간. 그것을 타기로 하지. 상당히 붐비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맡겨버린 리머스지만, 그날 밤에도 다시 한 번 피터스의 솜씨에 새삼스럽게 탄복했다. 여권은 이미 옛날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모스크바가 그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명의는 해외판매원 알렉산더 드웨이트. 입국사증이나 국경 스탬프가 잔뜩 찍혀 있어서 정말 해외 판매를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낡은 여권이었다. 공항에서 네덜란드 국경 경비원도 두말없이 형식적으로 스탬프를 찍었다. 피터스는 3~4명 뒤에 줄서서 이 수속에는 무관심한 척하고 있었다. 둘이서 '여객 전용' 이라고 되어 있는 구내에 들어갔을 때부터 리머스는 서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선반 위에 국제적으로 읽히고 있는 신문 중 중요한 것들이 늘어놓여 있었다. '피가로', '르몽드', '노이에 취르히 자이퉁', '디벨트', 그 밖에 영국의 일간지, 주간지 등이 5~6 종 있었는데,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에 안에서 여점원이 나와서 '이브닝 스탠다드' 를 한 부 선반에 올려놓았다. 리머스는 얼른 다가가서 그것을 집어들었다. "얼마요?" 물으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고 네덜란드 통화가 한푼도 없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30 센트입니다." 여점원은 대답했다. 검은 머리의 비교적 예쁘고 대담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영국 돈으로 2실링 있소. 이곳의 꼭 1길다에 해당하는데 이것으로 되겠소?" "좋습니다." 그래서 리머스는 2실링 은화를 건네주었다. 뒤를 살펴보니 피터스는 아직 여권을 수속중이며, 책상을 향해 있어서 리머스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남자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거기서 신문의 각 페이지를 재빨리, 그러나 완전히 훑어보았다. 신문은 휴지통에 쑤셔넣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피터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사진이 간단하고 막연한 기사와 함께 실려 있었다. 리즈의 눈에 뛰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여객용 로비로 향했다. 약 10분 뒤, 그들은 함브르크 경유 베를린행 여객기에 타고 있었다.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고 처음으로 리머스는 불안을 느꼈다. 제11장 - 알렉의 친구들 같은 날 밤, 두 명의 사나이가 리즈를 찾아갔다. 리즈 골드의 하숙집은 베이스워터의 북쪽 끝에 있었다. 싱글 침대가 두 개에 가스레인지. 가스레인지는 검은 회색의 꽤 예쁜 것으로서 신형이었다. 구식 물건이라면 부글부글 거품을 내는 듯한 소리를 내겠지만 이것은 기분좋게 슉슉 소리가 났다. 리머스가 있을 무렵 그녀는 그 불을 바라보곤 했었다. 어두워진 방에 단 하나의 빛이 거기서 흘러나온다. 그이의 신상에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이 방 침대에 누워 있었을 텐데. 그녀의 침대에, 문에서는 안쪽이 되는 곳에 있는 침대에. 그녀는 그 곁에 앉아서 그이에게 키스를 하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되도록 그의 일을 생각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짧은 한 순간, 눈을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일을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하면 말투라든지 몸짓 같은 것은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던 눈매, 아니 그보다는 더 많았던, 그녀를 무시하던 모습들이....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생각해내려 해도 재료가 하나도 없었다. 사진, 기념품,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 함께 지내던 친구도 없었다. 도서관의 크레일 양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지만, 그이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사람들의 이목을 끈 그 실종사건으로 인해 과연 그렇군 하고 입증이 되어버린 셈이다. 리즈는 한번 그가 거처하던 방에 들러서 하숙집 주인을 만나본 일이 있었다. 어째서 그럴 마음이 생겼는지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만나러 가본 것이다. 주인은 알렉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방세도 주말까지는 신사처럼 어김없이 지불해 주었다. 1주일 분인지 2주일 분인지가 밀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친구라는 남자가 찾아와서 귀찮게 따지지도 않고 깨끗이 청산을 해주고 갔다. "난 언제나 리머스 씨를 신사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만 앞으로도 그럴 참이에요. 상류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 반대라고 해도 그 사람은 정말로 신사였어요. 그야 물론 그 사람도 인간이니까 때로는 기분이 나쁠 때야 있었겠지요. 술을 과음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정치 못한 꼴로 돌아오는 것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만 여기에 찾아왔던 조그만 남자, 그 사람이 좀 이상했어요. 안경까지 끼고 묘하게 흠칫거렸었거든요. 리머스 씨에게서 특별히 부탁을 받았다나. 방값 중 나머지를 청산해 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 정도로 신사다운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리머스 씨가 무슨 일을 해서 돈벌이를 해왔는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에요. 이것은 분명합니다. 꼭 한 번, 식료품 가게의 퍼드에게 난폭한 짓을 했지만 전쟁 뒤론 누구라도 그런 정도의 실수는 할 수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방 말입니까? 그 방은 이미 나갔습니다. 한국에서 온 신사분에게 빌려드렸지요. 리머스 씨가 떠난 이틀 뒤였습니다만." 그것이 아마 그녀가 도서관 근무를 그만두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 그 건물 안에는 그이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사다리, 책장, 책들, 색인 카드. 그의 손이 언제나 만지던 것들이다. 언젠가 다시 그곳에 돌아올는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다고 그는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것을 믿으라는 것은, 내 몸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크레일 양도 그가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급료의 미청산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를 괴롭힌 괴물이 괴물답지도 않게 급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 것이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리머스가 가고 난 뒤, 리즈는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이는 어째서 식료품 가게의 퍼드를 때렸을까? 성격이 불덩이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격과는 별개의 문제로서, 그 사람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열이 내리고 병이 낫게 되자 그 행동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전날밤 그녀에게 이별의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는 그 다음날 퍼드를 때리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다른 해석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 자신이 인정을 거부했다. 그녀에게 싫증이 나서 안녕을 고하고 다음날 아직 이별의 흥분에서 깨어나기도 전이라 퍼드의 태도에 화가 나서 때려준 것이라는 해석이다. 거기에는 뭔가 알렉으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긴 했지만. 하지만 그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상상밖에는. 처음에 그녀는 그와 퍼드 사이엔 몇 년 전부터 깊은 원한이 엉켜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얽힌 문제. 아니면 알렉의 가족 중 누군가와 관계가 있는 일. 그러나 퍼드를 보자마자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이 사나이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타입으로,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독선적이며 말할 수 없이 밉살스러운 성격인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알렉에게 퍼드에 대해 보복할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토요일이라는 날을 고를 리가 없다. 주말의 가게가 붐비고 있을 때에는 여러 사람들 눈에 뜨일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당의 지부회의석상에서 그날의 일이 화제가 되었다. 때마침 지부의 회계위원인 조지 핸비가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퍼드의 가게 앞을 지나가던 참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구경하고 있었던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왔다고 한다.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던지 그는 곧 <워커> 지의 편집실에 전화로 알렸다. 그래서 기자 한 사람이 재판정에 파견되어 그날이 <워커> 지는 한 면을 비워 이 기사를 싣기로 했다. 내용은 전형적인 항거 기사로서, 기자는 날카로운 필치로 리머스의 행동을 보스 계급에 대한 증오가 갑자기 사회의식에 눈뜨게 되어 폭발한 것이라고 대서특필했다. 핸비에게 이야기를 해준 사나이 (그는 안경을 낀 조그만 사나이로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이트 칼라 중 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의 말로는 그것은 분명히 우발적인 것이며, 다시 말하자면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알렉의 사건은 핸비에게는 이 사회가 자본주의제도 붕괴의 발화점 바로 앞에 와 있음을 입증하는 좋은 재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핸비가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에 리즈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녀와 리머스의 사이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조지 핸비가 밉살스러운 사나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무슨 일이나 과장해서 크게 떠벌이는 아니꼬운 난쟁이, 냉소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몸에 손을 대보려고 노리고 있는 남자.... 그때 손님이 둘 찾아왔다. 겉보기에 경찰관으로는 다소 지나치게 말쑥했다. 안테나가 달린 검은색 소형차를 타고 왔다. 하나는 키는 작았지만 약간 살찐 편이다. 안경을 쓰고 이상하리만큼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상냥해 보이는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 남자를 리즈는 까닭도 없이 믿고 싶은 느낌이었다. 또 하나는 민숭민숭한 얼굴이 -- 그렇다고 해서 수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소년 같은 인상을 주었으나 그래도 40을 넘은 것은 분명했다. 둘은 특별지서에서 왔다고 하면서 셀로판 케이스에 들어 있는 사진이 붙은 신분증명서를 내보였다. 말을 하는 것은 오직 살찐 남자였다. "당신이 알렉 리머스와 가까운 사이였다죠?" 그녀는 머쓱했지만 살찐 남자가 너무 진지한 얼굴이라 꼬치꼬치 따진다는 게 멋적게 느껴졌다. "예." 리즈가 대답했다. "어떻게 그것을 아셨나요?"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소. 그런 곳... 그러니까 형무소 말인데, 그런 곳에 면회를 갈 때에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 좋소. 리머스는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거짓말인 줄은 알고 있었소. 그가 형무소 안에서 사고가 생길 경우 누구에게 알려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당신 이름을 댔다더군." "그랬었군요." "누구 다른 사람이 당신과 리머스가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소?" "아뇨." "재판정에는 나가보았소?" "아뇨." "신문기자나 빗쟁이 같은 사람이 찾아오지는 않았었소?" "없었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제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정도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함께 일했어요. 심령연구도서관입니다. 그러니까 그곳 서사인 크레일 양만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우리 사이까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크레일 양은 좀 이상한 사람이라서...." 하고 리즈가 덧붙였다. 남자는 한동안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리머스가 퍼드를 때렸다는 말을 듣고 꽤 놀랐겠소?" "예, 물론이에요." "왜 그랬다고 생각하시오?" "모르겠습니다. 퍼드 씨가 외상을 거절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그분은 그전부터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있었다고 생각돼요." 수다가 지나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누구에겐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혼자만이라는 것이 너무 쓸쓸하고... 게다가 말해서 안되는 것도 아니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에 우리는 이야기를 했어요. 저녁식사도 함께 했고요. 그것은 특별한 식사였고, 또 알렉이 그날 밤에 성대한 식사를 하자고 했을 때 저는 그것이 마지막 밤이구나 하고 느꼈었어요. 그분은 어디에선가 붉은 포도주를 한 병 가져와서 저는 좋아하지도 않는데 혼자서 반이나 마셔버렸답니다. 그 다음에 제가 물어보았죠. 이제 이별인가요? 이제 다 끝나는 것인가 하고요." "그는 뭐라고 했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길고 긴 침묵이 흐른 뒤에 그 남자는 전보다 한층 더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 말을 믿었소?" "모르겠어요." 그녀는 갑자기 알렉의 신변이 걱정이 되었다. 왜 걱정이 되는지 그 까닭은 모르지만. 남자가 또 물었다. "리머스에게는 아이가 둘 있소. 그 이야기도 하던가요?"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을 물었을 때에 당신 이름을 댔소. 왜 그랬다고 생각하시오?" 그 남자 스스로도 자신의 질문에 당황하고 있는 듯이 보였으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먹을 쥔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리즈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는 그분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도 당신을 사랑했소?" "예, 아마도. 하지만 모르겠어요." "당신은 지금도 사랑하고 있소?" "예."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 같은 것을 했소?" 이것은 젊은 남자의 질문이었다. "아뇨." 살찐 남자가 급히 물었다.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따뜻한 어조로 되풀이하고는, "그에게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그것은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 있소.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생겼소. 그래서 그가 퍼드를 때린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는데, 어떻소? 무심코 그가 입에 올린 말이나 대수롭지 않은 동작이나 뭐 그런 것 중에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짐작케 하는 것은 없었소? 있었다면 얘기해 주지 않겠소? 알렉을 구해내기 위해서요." 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 주세요." 그녀는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이이상 묻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두 사람은 순순히 문 쪽으로 걸아나가다가 나이 많은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수첩에서 명함을 꺼내어 소리라도 날까 봐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 남자는 무척 얌전한 성격인가 보다 하고 리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 리머스의 일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말이지만 -- 내게 전화해 주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아시겠소?" "당신은 누구시지요?" "알렉 리머스의 친구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잠깐 망설이더니, "하나만 더 물어보아야겠군." 하고 덧붙였다. "이것이 마지막 질문인데, 알렉은 당신에 대해서... 당신과 당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소?" "예." 그녀는 희망을 잃어버린 기분으로 대답했다. "제가 이야기했거든요." "당에서는 어떻소? 당신네들 관계를 알고 있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얼굴에 두려운 빛을 띠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분은 지금 어디 있나요?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왜 말씀해 주지 않으세요? 전 그분의 힘이 되어드릴 생각이에요. 그분을 도왔었는데.... 아니, 미쳐버려도 좋아요. 정말로 그래요. 형무소로 편지도 보내봤어요. 받아들일 리는 없을 줄 알지만 언제라도 좋으니 돌아와 달라고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고 있겠다고...." 끝에 가서는 눈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흐느끼고 또 흐느끼면서 방 한가운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버티고 서 있었다. 살찐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외국에 갔소."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우리도 모르고 있소. 미친 것은 아니지만 자세한 사정을 말 못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 대해서는 우리가 도울 거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돈이든 뭐든." "당신은 누구신가요?" 리즈가 또 같은 질문을 했다. "알렉의 친구요." 젊은 남자도 똑같이 말했다. "친구란 말입니다." 두 사람이 조용히 층계를 내려가는 소리를 그녀는 듣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길거리로 나갔다. 창에서 내려다보니 검은색 소형차를 타고 공원 쪽으로 사라졌다. 그런 다음 명함 생각이 난 그녀는 테이블에서 집어들고 불빛에 비춰보았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명함이어서, 경찰관 정도의 사람이 쓰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볼록 튀어나온 것이었는데 신분이나 소속 경찰서 같은 건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름과 주소뿐. 경찰관이 첼시에 산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첼시, 바이워터 가(街) 9번지, 조지 스마일리.' 그 밑에 전화번호. 이상한 일이었다. 제12장 - 동독 리머스는 좌석의 안전 벨트를 풀었다. 사형선고를 얻도받으면 누구나 오히려 생기가 돌아온다고들 한다.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몸의 파멸과 희망이 동시에 달성되는 것이다. 리머스도 배짱을 갖고 나니 그와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다. 잠깐뿐일 것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한동안 마음의 평안을 맛보았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또 불안과 초조가 덮쳐왔다. 그리고 차츰 기운을 잃어갔다. 관리관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같은 느낌을 맛본 것은 리메크와 교섭하던 때니까 작년 봄의 일이다. 카를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서독으로는 한 번도 나간 일이 없었는데도 무엇인지 그를 필요로하는 특별 임무가 생겨서 카를스루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리머스는 급히 손을 써서 쾰른까지는 항공편을 이용하고, 그곳 공항에서 차를 잡았다. 날도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으므로 카를스루에까지의 고속도로는 별로 붐비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이미 대형 트럭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좌로 우로 누비며 위험을 각오하고 반 시간에 70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 그의 앞 40 미터쯤의 전방에서 피아트로 생각되는 소형 승용차가 고속도로로 비집고 들어왔다. 리머스는 브레이크를 밟고 헤드라이트를 비추면서 경적을 울렸다. 그래서 충돌만은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불과 1초의 차이였다. 다시 추월하면서 곁눈으로 소형차를 보니 뒷자리에 아이들이 넷, 손을 흔들면서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핸들에 매달려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리머스가 투덜거리며 다시 차에 속력을 더했을 때 그의 등뒤에서 그 무서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의 두 손은 열병환자처럼 떨렸다. 얼굴이 화끈해지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겨우겨우 차를 도로에서 벗어난 곳에 세우고 내려서서 크게 한숨을 쉬며 급정차한 대형 트럭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두 대의 대형차 사이에 끼어 무참히 찌그러져 버린 피아트. 그 잔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미친 듯한 경적이 울려퍼지고 푸른 라이트가 번쩍일 뿐이다. 아이들의 시체가 갈기갈기 찢겨져서 학살된 피난민처럼 모래 언덕 사이의 도로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뒤로 그는 속력을 줄여서 달렸으므로 카를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 다음부터는 차를 운전할 때마다 그 소형차의 뒷좌석에서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대던 아이들과 괭이자루를 쥔 농부 같은 손으로 핸들을 거머쥐고 있던 아이들의 아버지 모습이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었다. 관리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열병의 일종이라고 간단히 웃어넘겨 버렸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멍청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는 미국인 여자가 하이힐에 비닐 주머니를 씌우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이 여자에게 메모를 건네주어서 베를린에 있는 녀석들에게 전달하게 하는 방법도 머리에 떠올랐으나 그것도 단념하고 말았다. 여자는 아마 딴 생각이 있어서 접근해 오는 것이라고 오해를 할 것이며, 피터스가 눈치챌 위험도 있다. 게다가 이제 와서 그렇게 해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단 말인가? 관리관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짜놓은 대로 일은 되어가고 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궁금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관리관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말해 준 것은 테크닉 뿐이었다. "간단히 가르쳐줘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할 순 없어. 요컨대 그들이 자력으로 찾아낸 것처럼 되어야 하는 것이네. 일부러 번잡하게 떠들어대어서 혼란시키고, 어떤 부분은 잊어버렸다고 하고서 끝을 맺지 말아야 하네. 상대방에서 자네의 행동을 캐어보도록 유도하라는 것이야. 기분 나쁘고 심술궂고 아주 취급이 곤란한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걸세. 술만 퍼마시는 것도 좋겠지. 이데올로기적인 말은 금물이네. 그 녀석들은 사상같은 것은 믿지 않아. 자네는 어디까지나 돈에 매수된 인간으로 취급될 것일세.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적국의 내부갈등이지만 전향자의 말 같은 것을 덮어놓고 믿을 리는 없을 거야. 게다가 놈들은 '추리작업' 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지. 그 바탕은 이미 되어 있다네. 지난날의 일들, 얼른 보아서는 별것 아닌 것 같은 모호한 증거.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을 끄는 것이라네. 자네가 그들의 보물찾기의 마지막 단계가 되기 때문이지." 그때도 관리관의 그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이만큼 준비공작이 되어 있는데 그냥 포기해 버릴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나는 장담할 수 있어. 이것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 이것으로 우리는 특별한 목적을 얻을 수가 있어. 알렉, 분투를 빌겠네. 우리는 이미 승리를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그런 말들을 듣기는 했지만 그들의 고문을 견뎌낼 자신은 그에게 없었다. 쾨스틀러가 쓴 책에는 옛날 혁명가는 불붙은 성냥을 손에 잡고 손가락에까지 불이 타들어와도 참아내어야 하며, 그것이 고문을 견디기 위한 훈련이라고 되어 있다. 자세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읽어본 이상 잊을 수 없는 무서운 내용이었다. 템플호프 공항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들을 맞는 베를린의 불빛이 발밑에서 떠올라오는 듯했다. 여객기가 대지에 닿으면서 그 충격을 느끼는 순간 세관과 이민국 건물이 반만 밝힌 조명 속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머스는 아는 얼굴을 만날까 봐 두려웠다. 공항 안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니까. 피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 세관과 이민국에서 형식적인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불안이야말로 사실은 그의 진정한 소원이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지금의 행동을 계속하려고 어둠 속에서 결심은 하고 있었지만 우연이라는 것이 방해할는지도 모른다는 최후의 희망을 거기에 걸고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피터스는 지금까지 되도록 그와 동행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조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서베를린까지 오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감시나 방어에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여기는 동유럽으로 가는 항공노선의 중간 기착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넓디넓은 대합실을 지나서 중앙의 출입구까지 가더니, 피터스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곧 방향을 옆으로 나 있는 조그만 출구 쪽으로 바꾸었다. 그 바깥에는 주차장이 있고 택시도 세워져 있었다. 거기서 피터스는 걸음을 멈추더니 머리 위에서 번쩍이는 조명을 받으며 여행 가방을 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에 안고 있던 신문을 천천히 접어서 레인 코트의 왼쪽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다시 여행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동작이 끝나기 전에 주차장 쪽에서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번쩍이며 그들 둘을 빛으로 감싸더니 곧 다시 사라져버렸다. "따라오시오." 피터스는 그렇게 한마디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아스팔트 길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리머스는 조금 뒤처져서 그를 따라갔다. 주차장의 가장 앞줄까지 다가가니 검정색 메르세데스 벤츠가 차내등을 켜고 뒤쪽 문을 열어주었다. 리머스보다 10 미터쯤 앞에 있던 피터스가 서둘러 다가가서는 뭐라고 운전사에게 낮은 소리로 말하고 나서 리머스에게 말했다. "이 차요. 빨리." 그것은 메르세데스 벤츠 180의 낡은 차인데, 리머스는 말없이 올라탔다. 피터스는 옆자리에 앉았다. 차는 곧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소형 DKW의 곁을 지나갔다. 그 차에는 운전석에 남자가 둘 타고 있었다. 20 미터 전방의 전화 박스에도 남자 하나가 벤츠가 사라져가는 것을 전화를 걸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뒤창으로 내다보니 DKW가 따라오고 있다. 상당한 환영이군 하고 그는 속으로 웃었다. 차는 천천히 달렸다. 리머스는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의 베를린은 보기도 싫었다. 달아날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인 줄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앉은 채 오른쪽 손 하나로 피터스의 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다. 차에서 뛰어내리면 뒤따라오는 차가 총알 세례를 퍼부을 것이다. 그것을 전후좌우로 피해 가면서 뛴다면 달아날 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베를린에서라면 도와줄 곳은 얼마든지 있다. 탈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계선 통과는 너무 간단히 끝났다. 이렇게 간단하리라고는 리머스도 예기치 못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10분쯤 어물거리고 있었던 것은 통과가 예정된 시각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독측 검문소에 다가가니 DKW가 속력을 내어 엔진 소리를 한결 크게 내면서 그들의 차를 앞질러 갔다. 그리고 그 차는 경찰관 검문소 앞에서 섰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그 30미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2분쯤 지나니 빨간색과 흰색이 교대로 칠해진 차단봉이 올라가고 DKW를 통과시키려 했다. 그것을 본 두 대의 차는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벤츠의 운전사는 기어를 2단에 놓고 엔진에서 비명 소리를 낼 만큼 액셀을 밟았다. 운전사 자신도 핸들을 잡은 손을 한껏 뻗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동서의 검문소 사이는 50 미터. 그것을 가로지르는 사이에 리머스는 무심코 바라보았다. 동독 쪽의 벽에 새롭게 보강공사가 된 흔적이 있었다. 사격 총구, 감시대, 철조망을 얹어놓은 이중 블럭. 정세는 분명히 긴박한 상태인가 보다. 벤츠는 동독 쪽 검문소에는 서지도 않았다. 차단봉은 이미 올려져 있었다. 차는 곧바로 통과했다. 인민경찰복을 입은 남자도 쌍안경을 들여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DKW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10분 뒤 다시 어디선가 나타나서 아까처럼 뒤를 따라왔다. 지금은 리머스가 탄 차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리머스는 처음엔 동베를린에서 일단 차를 세워 다른 차로 바꾸어타서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는 장면 정도는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눈치는 보이지 않고 동쪽을 향해서 계속 밤거리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피터스에게 물어보았다. "어디까지 가는 거요?" "이미 와 있소. 독일민주공화국에. 여기에 당신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소." "좀더 동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물론 그렇게 될 거요. 하지만 여기서도 하루나 이틀 묵게 될 것이오. 독일인도 당신과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니까." "그렇겠지." "하긴 당신이 한 일들의 대부분은 독일에서였지. 당신이 한 설명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달되었소." "그랬더니 나와 만나고 싶다고 하던가?" "요구해 온 것은 아니오. 이렇다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 쪽에서 그들에게도 대화할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판단했을 뿐이지." "그래 그 다음에는? 독일에서 어디로 가는 게요?" "다시 더 동쪽으로." "거기서는 누구와 만나게 되지?" "궁금하시오?" "별로. 단지 동독첩보부 녀석들이라면 나도 대강은 알고 있거든. 그래서 물어봤을 뿐이오." "누가 나타날 것 같소?" "피틀러겠지." 리머스는 즉시 대답했다. "방위본부의 차장이지. 문트의 다음 자리에 있는 사나이이지만 중요한 심문은 언제나 그가 하기로 되어 있지 않소. 싫은 놈이야." "어디가?" "잔인한 난쟁이. 그놈의 소문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소. 피터 길럼의 부하를 잡아다가 거의 죽게 만든 것도 바로 그놈이지." "스파이 사업은 크리켓 게임과는 다르니까." 피터슨은 독기 있는 말을 했고, 그 뒤 둘은 말없이 있었다. 예상대로 피들러로구나 하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피들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파일에서 사진으로 본 적도 있고 과거에 부하에게서 이야기로도 들은 바였다. 지나칠 정도로 바짝 마르고 단정한 용모를 한 남자로서 나이는 아직 젊고 수염이 없는 얼굴이다. 검은 머리에 밝은 갈색 눈. 지성적이지만 잔인한 성격. 부드러우면서도 날쌘 몸가짐 속에 참을성이 있고, 따라서 그만큼 집요한 면도 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강한 것 같지 않으나 상대를 파멸시키는 데 있어서는 망설임이 없다. 이 나라의 첩보부 안에서는 특이한 존재였다. 첩보부 안에서의 파벌 싸움에는 한 번도 가담한 적이 없다. 승진할 생각조차 없는지 문트의 그늘에서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첩보부 안에는 이런저런 파벌이 적지 않았으나 이 남자를 어느 파 사람이라고 찍어서 말하기는 어려웠다. 함께 일하고 있는 녀석들도 복잡한 부문의 주도권 쟁탈전에 이 사나이가 과연 어떻게 처신할 생각인지 그것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외톨박이 늑대라고나 할까. 두려움과 미움을 받고 의혹의 대상이며 그 가슴속에 어떤 의도가 감추어져 있어도 그는 그 모든 것을 파괴적 냉소라는 겉옷으로 감싸서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관리관도 말한 적이 있다. "피들러야말로 우리가 노리는 과녁일세." 그것은 서리 군(郡)의 쓸쓸한 곳에 있는 관리관의 집에서였다. 리머스, 관리관, 피터 길럼, 이렇게 세 사람이 표면에 놋쇠 판을 붙이고 멋진 조각으로 장식한 탁자에서 만찬을 들고 있었던 때의 일이었다. 일곱 난쟁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예쁜 집, 거기에서 관리관은 비즈 구슬 같은 아내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피들러를 한마디로 평한다면 고승(高僧)에 딸린 종자(從者) 라고 할 수 있어. 순종하면서도 언젠가는 고승의 등에 단검을 꽂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꼴이지. 문트와 싸우게 하기에는 그놈이 가장 적당 -- 아니,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길럼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문트도 그놈의 용기를 싫어하고 있어. 피들러는 유태인이고, 문트는 철저하게 유태인을 싫어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어느 모로 보나 마음이 맞을 리가 없어. 그 점에 착안해서 우리의 일은," 하고 그는 길럼과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이 분명하게 말했다. "피들러에게 무기를 주는 거야. 문트를 파멸케 할 무기를. 리머스, 그것이 자네 일이야. 알겠나? 그를 충동질해서 그 무기를 쓰게 하는 거야. 물론 간접적으로 말이야. 자네가 그자와 얼굴을 맞대는 일은 우선 없다고 보아도 좋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빌겠네." 그와 관리관은 함께 웃었다. 길럼도 따라 웃었다. 그때에는 유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었는데... 하긴 관리관의 기준에서라면 어떤 모습으로 뒹굴어도 유쾌한 것이었겠지. 12시는 넘었을 것이 분명하다. 차는 제법 오랫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숲을 지나고 광야를 벗어났다. 차를 세우니 바로 DKW가 뒤따라와서 나란히 섰다. 리머스는 피터스를 따라 차에서 내려서 뒤따라온 차에 남자가 세 사람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차 밖에 나와 있었다. 세번째 남자만이 뒤쪽 좌석에 남아서 차내등의 불빛 아래 무슨 서류를 보고 있었다. 반은 그림자에 가려진 깡마른 모습이다. 차가 세워진 곳은 못 쓰게 된 마구간이 몇 개 늘어서 있는 앞인데, 안채는 30미터쯤 앞에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얼핏 보기에는 통나무와 흰 칠을 한 벽돌로 지은 나지막한 농가였다. 그 뒤로는 다시 수목이 울창한 구릉. 달이 떠올라서 맑게 개인 밤하늘에 지붕의 능선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었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피터스와 리머스가 앞장을 서고 두 남자가 뒤따라왔다. 뒤따라온 차 속의 남자는 움직일 기색도 없이 차 안에서 여전히 서류를 읽고 있었다. 문앞에까지 가서 피터스는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는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 중 한 사람이 왼손에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로 문을 열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머스는 피터스에게 말했다. "저 녀석들은 물어볼 생각도 없는가 본데, 나를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저 친구들은 생각하라고 고용되어 있는 것은 아니야." 피터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그 중 한 사람을 돌아보고는 독일어로 물었다. "그는 올 건가?" 독일인은 어깨를 움츠리고 차 쪽을 보고는, "옵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단독행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 남자의 안내로 집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사냥 때에 쓰는 오두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반은 낡고 반은 새것이다. 조명은 머리 위의 희미한 전등 하나뿐이므로 꽤 어두웠다. 한동안 쓴 일이 없었던지 곰팡내가 코를 찌른다. 하나하나 모든 게 관공서 냄새가 난다. 화재가 났을 때의 주의서. 관청처럼 녹색으로 칠해진 문, 튼튼한 용수철 자물쇠. 거실은 특히 쓰기에 편하도록 되어 있으며, 갑작스럽게 끌어모은 것이기는 하지만 무게가 있어 보이는 가구류가 갖추어져 있었다. 벽에는 어디나 마찬가지로 소련 지도자들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리머스의 눈으로 보면 이런 비밀성의 결여야말로 동독 첩보부의 관료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 첩보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로서는 지겹도록 보아온 일이었다. 피터스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리머스도 그 옆에 앉았다. 10분쯤 아니면 좀더 될까? 둘은 기다렸다. 마침내 피터스는 고개를 들어 방 한쪽 구석에 어색한 모양으로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불러오게. 우리가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게. 그리고 뭐 먹을 걸 좀 주게. 배가 고파." 남자가 문앞까지 갔는데 피터스가 다시 불러세우고서, "위스키도 부탁하네. 당번에게 그렇게 말하게. 위스키에 잔을 몇 개쯤." 리머스가 말했다. "당신, 여기에 처음이 아니군." "몇 번 왔지." "무슨 용건으로?" "비슷한 거지. 아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것도 일이니까." "상대는 피들러요?" "그렇소." "좋은 사람이오?" 피터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유태인으로서는 괜찮은 편이겠지." 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다보니 피들러가 서 있었다. 한 손엔 위스키 병, 다른 손에는 잔 두 개와 미네럴 워터. 키는 170 센티미터 이하로 보였다. 암청색 싱글 양복인데 윗도리가 꽤 긴 옷이다. 날씬한 모습이지만 어딘지 동물 같은 느낌도 드는 독수리빛 눈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문앞에 서서는 두 사람은 본 척도 않고 문 옆에 서 있는 감시원을 보고, "가도 좋아." 라고 말했다. 독일 남부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누구에게 식사를 가져오도록 시키도록." 피터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시켰소. 그 친구들도 알지. 그런데도 아직 안 가져옵디다." "그들은 신사인 척하는 버릇이 있어서." 피들러의 영어에는 쌀쌀맞은 느낌이 있었다. "식사를 날라오는 일도 따로 사환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이 피들러라는 인물은 전쟁중에는 캐나다에 있었다. 리머스는 그 생각을 떠올리고는 그의 사투리가 수긍이 되었다. 부모는 독일에서 망명한 유태인으로서 공산주의자였다. 그들 일가는 1946년에 귀국했었지만 그 뒤로는 모든 개인적인 이익을 희생하고 스탈린의 독일 건설사업에 가담하려고 광분했던 것이다. 그는 덧붙여서 말하는 듯한 어조로 리머스에게 말을 걸었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소, 리머스." "나 역시 마찬가지요, 피들러." "여기가 당신 여로의 끝이오." 리머스는 서둘러 물었다. "그렇다면?" "피터스는 아마 거꾸로 말했겠지만 당신은 앞으로 더 동쪽으로는 갈 필요 없소, 안됐지만." 그 말 속에는 재미있어하고 있는 느낌마저 있었다. 리머스는 피터스를 돌아다보았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이오?"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피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실이오. 나는 중간 다리 역할만 했을 뿐이오. 그런 수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소. 미안하오, 리머스." "왜 꼭 이런 식이라야 되지?" 피들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불가항력 같은 것이오. 당신에 대한 최초의 심문은 서구에서 행해졌소. 거기에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기관으로는 다른 나라의 대사관, 그나마 하나 뿐이오. 독일민주공화국은 서구 쪽에 외교사절을 보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오. 현재는 그렇다는 말이오. 그래서 우리의 섭외부문이 이런 수단을 써서 지금 우리에게 거부되고 있는 기능, 연락, 외교상의 특권을 이용하도록 계획했소." 리머스는 혀를 찼다. "비겁한 놈. 비열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군! 내가 이 나라의 비겁한 첩보기관을 믿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둘러치기 수법을 썼겠지. 그래서 러시아인 같은 것을 이용해서!" "분명히 우리는 헤이그 주재 소련 외교관을 이용했소. 우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지. 거기까지는 이쪽 작전이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믿고 있소. 지금도 우리나 다른 누구도 예상도 못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소. 영국에 있는 당신 동료는 어느새 당신의 행동을 알고 있소." "예상 못했다고? 자신들이 알려놓고 예상치 못했다니 대체 무슨 뜻이지? 틀림없지, 피들러. 당신이 일부러 알린 것이 분명해." 언제나 칼자루를 이쪽에서 쥐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잊지 마라 -- 그것이 관리관의 주의사항이었다. 그렇게 해야만이 비로소 그들은 내 입에서 끌어낸 사실을 중요시 여기게 된다. "바보 같은 억측이군." 피들러는 한마디로 단정해 버리고 피터스에게 눈을 돌려 뭐라고 러시아 어로 떠들어댔다. 피터스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서 리머스에게 말했다. "난 이만 실례하겠소. 행운을 빌겠소." 그리고는 나약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는 피들러에게 인사하고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손을 문의 손잡이에 올려놓고는 다시 돌아보며 한 번 더 리머스에게 말했다. "행운을 빌겠소, 리머스." 다시 무슨 말인가 하려는데 리머스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한 채 싸울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피터스도 입구에 선 채 움직일 기색이 없다. 리머스는 새파란 얼굴로 분한 듯,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목소리는 떨리고 심상치 않은 느낌이 감돌았다. "동독에게는 직접 해낼 만한 용기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큰아버지에게 납치를 부탁하다니 정말 이처럼 나약한 첩보부, 나라가 두 동강난 가련한 국민에겐 어울리는 방법이로군. 국가라고나 할 수 있겠나. 정부 같은 것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어? 최하급 독재국, 정치적으로 마취환자에 불과해!" 손가락으로 피들러를 가리키며 그는 여전히 고함치고 있었다. "피들러라는 불쾌한 새디스트가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어. 전형적인 비열한 인간. 전쟁중에는 캐나다에 있었지. 거기가 제일 안전했으니까. 공습이 시작될 땐 그 바보 같은 머리통을 엄마의 앞치마에 파묻고 떨고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문트에게 빌붙어 사는 구역질나는 녀석. 엄마가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코흘리개. 불쌍하게 생각하네, 피들러. 아침에 눈을 떠보니 소련이 철수하고 없다면 어쩔 셈인가? 그때는 이 나라의 국민도 그냥 있지 않을 걸세. 대학살이 시작된다는 걸 각오하고 있어야 해. 엄마나 큰아버지가 살려줄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큰 오산이야. 지은 죄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만 하지." 피들러는 어깨를 흔들면서, "이것 봐, 리머스. 여기까지 왔으니 병원 의사에게 왔다고 생각하시지. 조금이라도 빨리 조사가 끝나면 그만큼 빨리 고향에 돌아가게 되는 거야. 오늘은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어." "내가 돌아가지 못할 것을 자네가 모를 리 없지." 리머스는 반격했다. "자네가 데려왔잖나. 날 영국에서 쫓겨나게 한 것도 이 나라 놈들이 쓴 비열한 수법이지. 하긴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여기까지 유인해 올 수 없었겠지만." 리머스가 자기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 가늘지만 힘이 있어 보이는 것을 피들러는 바라보면서, "지금은 입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자네도 군소리할 처지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텐데. 우리의 일은 -- 그 점에서는 자네도 마찬가지겠지만 -- 모든 것이 개인보다는 전체가 중요하다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도 첩보기관을 자신들의 팔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자네 나라의 첩보부 또한 영국식 염치라는 옷을 입혀놓고 있겠지만 개인의 희생도 전체를 위해서 필요할 때에는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나는 자네가 그렇게 화내고 있는 것을 보니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자네의 입에서 영국 국민의 생활윤리 따위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야. 어쨌든," 하고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바꾸어서, "자네 자신의 행동만 해도 순수주의자의 견지에서 본다면 틀렸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는 못할 걸세." 리머스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면서 피들러를 노려보고는, "너희들 계략은 알고 있어. 자네는 문트의 애완용 개. 그런 주제에 그의 자리를 노리고 있지. 하긴 그 소문이 자자하니까. 드디어 이제야 그 소망을 달성하시겠군. 문트의 지배권에도 종말이 오다니. 그것이 이번 사건이겠지." "무슨 소린지는 모르지만," 피들러가 말하자 리머스는 냉소지으며, "어찌되었건 나를 잡아온 것은 대성공이지." 상대방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어깨를 흔들면서 말했다. "분명 작전에는 성공했지. 그러나 자네의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상당히 있어. 그것을 지금부터 밝혀볼 생각이야. 어쨌거나 멋진 작전이었던 것은 분명해. 우리의 임무수행상 유일한 필수품을 손에 넣었으니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리머스는 피터스 쪽을 보면서, "그러면 당신 성적도 올라가겠지." "이건 성적 문제가 아니야." 피들러는 잘라서 말했다. "그런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더니 한동안 리머스를 바라보다가, "그렇지만 자네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네. 믿어주지 않을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알리지 않은 것은 사실일세.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오히려 우리의 본심이네. 물론 자네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앞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일하게 할 생각도 있었어. 그러나 그것도 지금은 바보 같다는 생각마저 드네. 그러면 누가 그들에게 알려주었지? 자네는 쫓겨나서 전락의 길을 헤매고 있던 인간이야. 집도 친척도 친구도 아무도 없어. 그런데도 자네가 실종된 것을 그들은 알고 있어. 누군가가 말했다고 봐야 하겠지만 -- 애시나 키버라고는 생각되지 않네. 그 둘은 지금 체포되어 있으니까." "체포되어 있다고?" "그런 모양이야. 자네 사건에 개입된 것은 아니야. 다른 사건으로...." "허허." "내가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야. 네덜란드에서 보내온 피터스의 보고를 듣고 그것으로 우리가 만족했다면 자네는 돈만 받고 그 자리에서 망명할 수도 있었어. 그러나 자네는 다 털어놓지 않았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전부 다야. 게다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네.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하네만." "나는 함정에 빠졌군.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여기서는 모두들 좋아하고 있겠구먼."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틈에 피터스는 얼른 피들러에게 인사하고는 가만히 방을 나갔다. 그 인사란 판에 박힌 것이었지만. 피들러는 위스키 병을 집어들고 두 개의 잔에 조금씩 따랐다. "공교롭게 소다수가 없는 모양일세. 대신 물이면 어떻겠나? 소다수를 내오라고 했는데 레모네이드인가 뭔가를 가지고 왔어." "레모네이드는 싫어." 리머스는 갑자기 피로감을 느꼈다. +피들러는 고개를 저으며, "자네 자존심에는 손들었네만, 그러나 걱정할 건 없어. 식사를 끝내고 빨리 자도록 하게." 감시원 하나가 식사를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검정 빵에 소시지와 새로 만든 샐러드. "있는 것으로 대강 차린 모양인데," 피들러가 말했다. "참아주게나. 감자가 떨어진 모양일세. 지금이 감자가 한창 귀할 때가 돼놔서 말이야." 두 사람은 그 뒤로 말없이 식사를 했다. 피들러의 먹는 태도는 놀랄 만큼 느려서 칼로리를 계산이라도 해가면서 먹고 있는 듯이 보였다. 감시원 두 사람의 안내로 리머스는 침실로 갔다. 짐은 들어다 주지 않았다. 영국을 떠나올 때 키버가 건네준 가방 하나지만 리머스는 그것을 들고 좌우로 감시원을 끼고 현관에서 곧장 이어지는 넓은 복도로 걸어갔다. 짙은 녹색으로 칠한 커다란 두짝 문앞에서 감시원 하나가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라고 리머스에게 턱짓을 하기에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군대 막사를 연상시키는 좁은 침실로서 엉성한 침대가 둘, 의자가 하나. 책상이라는 것도 명색 뿐이었다. 죄수의 방과 비슷했으며 벽에 여자 사진이 몇 장 붙어 있다. 창은 잠겨 있었다. 안쪽에 또 하나 문이 보인다. 감시원 둘이 더 안으로 가라고 눈짓을 한다. 안쪽 문을 여니 그 방도 처음의 것과 똑같은 구조인데, 다만 침대가 하나뿐인 점과 벽에 아무 것도 없는 점이 달랐다. 감시원이 아침식사를 가지고 깨우러 왔다. 검정 빵에 커피 대용품. 리머스는 침대에서 내려가서 창가로 다가갔다. 건물은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창 아래는 험하게 경사가 지고 깊은 골짜기로 되어 있으며,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정상이 모자처럼 보인다. 골짜기 건너편에도 같은 소나무숲 언덕이 파도처럼 좌우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푸른 숲이 끊기고 붉은 맨땅이 길다랗게 일직선으로 달려간 것은 벌목한 목재를 운반하는 길이거나, 산불이 번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잘라놓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집도 없고 교회도 없었다. 지난날 사람이 살았던 흔적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길뿐이다. 누런 비포장도로가 골짜기 밑에 크레용으로 그려놓은 듯이 이어져 있었다. 소리도 없었다. 이렇게 크고 넓은 곳이 소리 하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추위는 매서웠지만 날씨는 좋았다. 어젯밤에는 비가 왔었는지 땅은 젖어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나하나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멀리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들조차 분명하게 볼 수가 있었다. 신맛이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리머스는 천천히 옷 갈아입을 준비를 했다. 대강 주워입고 빵을 집어드는데 피들러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일세." 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식사 방해는 안할 테니까 천천히 먹게나."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리머스는 이 사나이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포가 느긋한 사나이이다. 혼자서 그의 방에 들어와서가 아니다. 아마 옆방에서 감시원이 대기하고 있겠지. 리머스가 두 손을 든 것은 그 참을성이다. 한번 마음먹은 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듯한 그 태도. 리머스도 내심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피들러가 말했다. "자네는 흥미 있는 문제를 제공해 주었어." "알고 있는 것은 모조리 다 말했으니까." 그는 미소지으며, "아니, 그런 말은 못하지. 전부가 아닌 것은 분명해. 자네가 한 말은 자네가 알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는 것들 뿐이지." "말솜씨가 제법이군." 리머스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식사 쟁반을 옆으로 밀쳐놓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담배에. "질문을 시작하겠네." 하고 피들러는 단체경기를 권하는 사람처럼 유난히 긴장되고 친근한 표정을 지으면서, "첩보기관의 베테랑으로서 자네에게 묻고 싶네. 자네는 우리에게 준 정보가 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어떤 정보 말인가?" "리머스, 자네가 말한 것은 정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 리메크에 대해서는 말해 주었어. 그러나 그것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야. 베를린에 있어서의 자네들 조직과 배치, 개개인 인물의 특징도 설명해 주었어. 그러나 그것 또한 내가 보기에는 낡은 정보에 불과해. 정확히 말하자면 말일세. 배경 설명도 구체적이고 이야기의 줄거리도 매력이 있어. 가끔 옆길로 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재미가 있어. 여기저기에 낚싯줄을 던져보고 싶은 잔챙이들까지 준비를 했더군.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1만 5천 파운드의 값이 나가는 정보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러고는 그는 다시 미소지으며, "시세가 그런 정도는 된다고 할 수야 없겠지." 리머스가 말했다. "먼저 말해 두겠지만 이 계약은 내가 먼저 꺼낸 게 아니야. 제안해 온 것은 당신네들이지. 자네와 키버, 그리고 피터스지. 잘 들어봐, 피들러. 밥상은 당신네가 차렸어. 값도 당신네가 붙인 거야. 이 작전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내가 욕먹을 이유야 없지." 그렇고말고, 당연히 책임은 자기들이 져야지 하고 리머스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실패는 아니야." 피들러가 대답했다. "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런 상태라면 끝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있어.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해 준다면 또 모르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가 알려준 것은 정보의 한 부분에 불과해. 지금 '롤링스톤' 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걸세. 다시 한 번 묻겠네. 내 입에서나 또는 피터스나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 같은 내용의 말을 자네가 듣게 되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했겠나?" 리머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불안을 느꼈을 테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전에는 없었던 일이 아니잖은가. 자네도 어떤 부문, 어떤 계급에 스파이가 잠입해 있는 것을 찾아낸 일이 몇 번 있었겠지. 그때는 어떻게 했나? 설마 첩보부원 모두를 체포하지는 않았겠지. 올가미를 씌우려 해도 첩보부원 전원을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지. 느긋하게 참고서 정세 변화에 희망을 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을 걸세. '롤링스톤' 의 활동도 그것이 어느 나라를 노리고 있었는지, 그것까지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피들러는 소리내어 웃고는, "리머스, 자네는 행동하는 인간이지 평가하는 성격은 아닐세. 그런 정도는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좀더 기초적인 것일세." 리머스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래, 그 파일 -- '롤링스톤' 의 활동에 대한 파일 말인데, 어떤 색이었나?" "쥐색인데 중앙에 붉은 십자가가 붙어 있었네. 그것은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표식이야." "그 밖에 다른 표식은?" "<극비> 라고 되어 있고 열람이 허락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 가령 파일이 거기에 적혀 있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을 때에는 안을 들춰보지 말고 즉시 은행과에 되돌려주어야만 되는 규칙이라네." "열람이 허락된 사람은?" "<롤링 스톤> 에 대해서 말인가?" "그렇다네." "관리관 입회하의 부관, 관리관, 관리관 비서, 은행과, 특별기록과의 브림 양, 그리고 위성 4호. 그것이 전부일 거야. 참, 그래! 특별송달과도 들어 있었던 것 같군. 하긴 마지막 것은 확실치는 않은데." "위성 4호란 어떤 일을 하나?" "소련과 중공을 제외한 철의 장막 안의 여러 나라를 상대하지. 이른바 공산권 말이야." "동독을 말하나?" "공산권이라고 했어." "과 전체가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 이유는 나도 모르네. 그런 것을 취급해 보기는 처음이라... 물론 베를린에도 극비문서는 있었지만 그것은 사정이 좀 다르지." "당시 위성 4호의 구성원 이름은?" "그거? 음. 분명히 길럼, 해버레이크, 드종이었어. 드종은 베를린에서 막 돌아왔을 때였지만." "그들 모두가 파일을 보아도 좋다는 것인가?" 리머스는 차츰 마음이 조려오는 듯이, "글쎄, 그런 뜻이겠지. 하지만, 피들러, 나 같으면...." "과원 전체를 일괄해서 명단에 올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데." "나는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어. 어쨌든 나는 모르는 일이니까. 난 은행과 직원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파일을 열람자들에게 갖다주는 것은 누가 맡았지?" "비서과의 누군가가 했겠지 -- 기억은 안 나네만. 벌써 몇달이나 되었으니...." "그렇다면 비서과의 누구라고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관리관의 비서는 올라 있었다고 했는데."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래, 자네가 말한 대로야.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제 생각이 나는군." 리머스는 놀란 듯한 목소리로, "그건 우리 과에서 맡아서 하고 있었다네." "은행과에서는 자네 말고 또 누가 그 일을 했나?" "나 혼자지. 그 과로 옮겨가니 내 담당이 되었다네. 그전에는 여 사무관 하나가 그 일을 맡았었던 모양인데, 내가 인계받자 명단에서 지워졌네." "그러니까 자네가 직접 다음 열람자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이로군?" "그... 그래.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 "누구에게 넘겨주었지?" "그, 그건.... 잊어버렸네." "생각해 봐!" 피들러의 목소리는 크지는 않았으나 갑자기 날카로워져서 리머스를 놀라게 했다. "관리관의 부관이었다고 생각되네. 우리 손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보고할 필요도 있었고, 또 거기에 대한 의견도 들어야 했거든." "자네에게 가지고 온 사람은?" "가지고 오다니?" 리머스는 점점 평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네에게 넘겨준 사람이 누구냔 말이야? 명단에 있는 사람 중 누구에게선가 받았을 텐데?" 리머스는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면서 자신의 뺨을 만지고 있었다. "글쎄. 누군가에게서 넘겨받은 것만은 분명한데 그것이 누구였더라. 잘 생각이 안 나는데. 그 무렵 나는 술을 좀 과하게 마시던 때라." 그의 어조는 우스울 만큼 비굴해졌다.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기억해내는 게 좀..." "다시 한 번 말하겠네. 생각해 봐. 누가 자네에게 파일을 넘겨주었나?" 리머스는 책상 앞에 앉은 채 머리를 흔들었다. "기억이 안 나. 어쩌면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날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야. 정말로 생각이 안 나. 옆에서 재촉하면 더 그래." "관리관의 비서가 아닌 것은 분명해. 자네가 넘겨준 상대가 부관이니까. 자네가 그렇게 말했어. 그러나 그 말에 잘못이 없다면 명단에 올라 있는 모든 사람은 관리관보다 먼저 보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야." "그래. 그랬던 것 같아." "특별기록과의 브림 양도 있잖나." "그 여자는 극비 파일을 보관하는 금고실의 직원이야. 문제의 그 파일이 회람에 돌려지기 전에는 그 여자 방에 보관해 두지." "그럼--" 피들러의 어조가 다시 부드러워지며, "자네에게 가지고 오는 것은 위성 4호 중 어느 한 사람일 수도 있겠군." "그랬지. 그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 리머스는 실컷 얻어맞고 자백하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피들러의 번쩍이는 듯한 빠른 두뇌의 회전과는 도저히 맞설 수 없다고 단념한 모습이었다. "위성 4호의 방은 몇 층에 있었는가?" "2층." "은행과는?" "4층. 특별기록과 옆이지." "누군가가 파일을 들고 올라온 기억이 나는가? 아니면 자네가 계단을 내려가서 받아왔는가?" 리머스는 거의 절망적으로 계속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갑자기 피들러를 돌아보고 큰소리로 고함쳤다. "그래, 그랬어! 분명히 가지러 갔어. 피터에게서 받았어!" 리머스는 다시 살아난 듯한 표정이었다. 흥분으로 얼굴마저 붉히며, "그랬어. 나는 언젠가 피터의 방에까지 받으러 간 적이 있었어. 간 김에 둘이서 노르웨이에 관해서 이야기한 생각이 나는군. 알고 있겠지만 우리 둘은 그 나라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지." "피터란 길럼을 말하는 건가?" "바로 그 피터야. 깜박 잊고 있었군. 그는 앵카라에서 몇 달 전에 돌아왔었지. 그 친구도 명단에 올라 있었어! 분명히 피터야. 명단에는 위성 4호와 나란히 PG 라고 괄호를 치고 적혀 있었거든. 피터 길럼의 머리글자야. 그 친구 말고도 전에 누가 있었는데, 특별기록과에서 그 이름 위에 흰 종이를 덧붙이고 피터의 머리글자를 적어넣은 것이지." "길럼의 담당지역은?" "공산권 동독. 주로 경제관계의 일로서, 맡은 일은 별것 아니지만 사람은 상당한 인물이야. 그가 파일을 가지고 올라온 일도 있었어. 지금 생각났어. 하지만 그 사람은 처음부터 첩보에 대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왜 그 과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그전에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식량부족 문제를 조사했었어. 진정한 의미의 정세조사지." "자네는 그 사람과 국제정세를 논한 일이 있었나?" "그건 금기로 되어 있어. 게다가 극비 파일과는 관계도 없고. 그 점에 대해서 특별기록과의 브림에게서 주의를 받은 적이 있었고, 파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말 것, 질문도 엄금이라고 하더군." "그러나 '롤링스톤' 작전에서 그처럼 주도면밀한 방첩상의 보호를 한 것을 보면 길럼의 소위 정세조사 업무가 그 작전의 일부를 필요로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피터스에게도 말했지만," 리머스는 거의 외쳐대고 있었다. 책상을 치면서. "그것이 어떤 작전이든 동독에 대한 것이라면 내가 모르고 넘어갈 수가 없지. 모든 작전은 베를린의 첩보조직을 거쳐서 이루어지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나?" "그렇겠군." 피들러는 얌전히 수긍하면서, "자네가 모를 리가 없지." 그리고 그는 일어섰다. 창가에까지 걸어가 밖을 바라보더니, "가을이 되면 이곳 전망이 일품이지. 너도밤나무의 단풍진 모습이 얼마나 고운지 보여주고 싶군 그래." 제13장 - 핀과 클립 피들러는 질문을 좋아했다. 법률가 출신인 그는 증언의 결함을 찾아내고 진실과 그 사이에 있는 모순을 지적하는 쾌감만으로 질문을 계속하는 경우조차 있는 듯이 보였다. 저널리스트와 법률가에게 있어서 그 자체가 궁극의 목적인 추구의 기쁨, 지칠 줄 모르는 탐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리머스는 그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잔돌이 섞인 길을 따라서 골짜기 아래까지 내려갔는데 도중에 삼림지대에도 들어가 보았다. 생각보다는 넓은 길이 나 있었는데 여기저기 움푹 패인 곳이 있고 벌목한 목재가 방치되어 있었다. 걸어가면서 피들러는 아까 리머스가 한 말들을 검토하고 있는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케임브리지 서커스에 있는 건물과 거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어떤 계급의 출신인가? 런던에서는 어디쯤에서 살고 있는가? 부부가 같은 국, 같은 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급료, 휴가, 규칙 등에 대해서 묻고 그들의 연애, 소문, 사상까지도 알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사상과 연관된 질문이 많았다. 리머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뭘 말하는 건가, 사상이란?" 그는 반문했다. "우리들은 마르크시스트와는 다른 보통 인간인데 사상같은 그런 골치 아픈 것을 뭣 하러 가지고 있겠나." "그렇다면 기독교도들인가?" "글쎄, 약간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르겠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런 행동을 하나?" 피들러는 물고 늘어졌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겠지." "왜 없으면 안 되나. 아마 그들은 그런 것은 모를거야. 생각해 보려고도 안했겠지. 인간은 누구나가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리머스의 대답에는 견딜 재간이 없다는 느낌이 엿보였다. "그럼 자네 사상을 들어볼까." "못 견디겠군." 리머스는 그렇게 한마디 했을 뿐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나 피들러는 단념하지 않았다. "자신의 희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지?" 리머스는 마침내 신경이 곤두서서, "그들이 행동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누가 그랬나?" "행동에는 정당성이 있어야 하네. 무엇을 근거로 그런 행동이 옳다고 믿고 있나? 어젯밤에도 말했듯이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분명하다네. 동독에 있어서 첩보부라는 기관은 당 활동의 필연적인 연장이라고 할 수 있어. 첩보부원은 평화와 사회발전을 위한 투쟁의 전위이며 선구자인 거야. 스탈린이 말한," 하고 미소짓고는, "오늘에 와서 스탈린을 인용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어. <50 만의 인간이 청산되는 것은 통계상의 문제로 처리하고, 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은 국가적 비극이라고 떠들어댄다> 라고. 그는 말하자면 대중의 부르주아적 감상을 비웃고 있는 걸세. 빈정거리는 데 명수였으니까. 하지만 그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반혁명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하는 행동을 불과 몇몇 개인이 희생되거나 제거된다고 해서 멈출 순 없지 않겠나. 결국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지. 우리도 합리적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만이 전면적으로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야. 어떤 로마 인의 말에 <한 남자를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죽게 하는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고 했다네. 그것은, 이 사람아, 자네들 기독교도들의 성경에 나오는 것일세." "아마 그렇겠지." 리머스는 넋나간 듯이 대답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 철학은 무엇인가?" 리머스도 강한 어조로, "자네들 모두가 딱 질색이라고 생각하네." 그런 대답에도 피들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도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겠지. 단순하고 부정적이고 우매한 대답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견해임에는 틀림없어. 그런데 영국첩보부 녀석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모르겠네. 생각해 볼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과 사상에 대해서 토론해 본 일이 없다는 말인가?" "없어. 우리는 독일인이 아니니까."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망연히 덧붙였다. "다만 그들이 하나같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것만은 확실하네." "그래서 그것이 자네들의 활동을 정당화시켜 주는가? 예를 들면 그 때문에 인류의 생명을 빼앗거나 손님들이 들어찬 레스토랑에 폭발물을 던지는 자네들 비밀요원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가?"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된다고 생각하네." "우리들도 그것이 가능해." 피들러는 말했다. "나 자신도 그렇게 해서 목적이 달성된다면 레스토랑에 폭탄을 장치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네. 잘잘못은 뒷날 밝혀질 테니까. 많은 여자, 많은 아이들을 희생시키지만 그만큼 빨리 목적에 다가갈 수 있지. 그러나 기독교도들로서는, 자네들 기독교도들의 사회에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일텐데." "왜 할 수 없나. 그들에게도 자기방어는 필요하지 않은가." "그들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야말로 구제받아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지. 그리고 자기 희생을 숭고한 것으로 보고 있을텐데." "나는 모르겠어. 아무러면 어떤가." 리머스는 덧붙여서, "스탈린도 서슴지 않았던 일이 아닌가." 피들러는 미소지으며, "나는 영국인이 좋아." 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역시 좋아했지. 아버지는 영국인이라면 무조건 좋아했어." "그런 말을 들으니 훈훈한 느낌이 드는군." 리머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피들러는 담배를 리머스에게 건네주고 불을 붙여주었다. 길이 다시 험한 오르막이 되었다. 리머스는 운동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어서 앞장서서 걸었다.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니 피들러가 주인의 뒤를 따라가는 삽살개처럼 경쾌한 몸짓으로 뒤를 따랐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갑자기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숲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어느새 두 사람은 조그만 언덕의 정상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서서 내려다보니 그때까지 한 덩어리로 보이던 소나무숲도 여기저기 회색 너도밤나무의 집단으로 끊겨져 있었다. 골짜기 너머 건너편 언덕의 허리쯤에 어젯밤을 보낸 사냥 오두막이 보였다. 정상 한가운데에 벤치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잡목이 쌓여 있는 것은 숯을 굽고 있는 모양이었다. 불을 끈 자리가 아직도 젖은 채 남아 있었다. 피들러가 말했다. "잠깐 쉬었다가 돌아가기로 하세." 그리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그런데 그 예금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자네가 일부러 외국은행까지 집어넣으러 간 거액의 돈은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말했을 텐데? 첩보부원 한 사람에게 주기 위한 것이라고." "그 요원은 철의 장막 안에 있는 사나이인가?"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하네." 하고 리머스는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첫째 액수가 커. 그리고 지불방법이 복잡하고.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한 거야. 그리고 관리관이 관계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고." "그 요원은 돈을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나?" "그 말도 했지. 나는 모른다고. 돈을 받으러 왔는지 어쨌는지도 모르네. 나는 아무 것도 몰라. 단지 한 사무원에 불과하니까." "예금통장은?" "런던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그들에게 돌려주었지. 내 가짜 여권과 함께." "코펜하겐 또는 헬싱키의 은행에서 런던의 자네 앞으로 편지가 온 일은 없었나? 물론 자네 가짜 주소로 말일세." "글쎄, 모르겠는데. 어찌되었거나 무슨 편지든 직접 관리관의 손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자네가 은행구좌를 열면서 쓴 싸인 -- 그 견본도 관리관이 가지고 있겠지?" "그럼. 여러 번 연습을 시켰으니 견본은 그들이 많이 가지고 있겠지." "하나가 아니고?" "물론. 여러 페이지나 써놓았거든." "그랬군. 그렇다면 자네가 은행구좌를 열고 나서도 은행에 여러 번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군. 자네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인을 위조하여 자네 몰래 여러 번 편지를 했다고 볼 수도 있고." "사실 그래. 그것이 목적이었겠지. 뿐만 아니라 백지에 사인을 해둔 것도 꽤 있었네. 나는 그전부터 누군가가 그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녀석이 있다고 생각했네." "그러면 그 내용을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리머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네는 그 점을 크게 오해하고 있네. 사인이 많은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문서는 본래 대량으로 움직이고 있다네. 우리들의 경우에는 말하자면 그것이 늘 하는 일의 일부이며, 특별히 유의해야 되는 일도 아닐세. 새삼스럽게 내가 문제삼을 이유가 없지. 더구나 그 내용은 직접 행동하는 우리는 알 수가 없다네. 나는 일생 동안 그런 일을 해왔다네.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일부이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만이 아는 그런 일이었다네. 첫째, 서류정리 같은 것은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런 일 때문에 밤새 자지도 않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내 쪽에서 사양한다네. 다만 여행이라면 두 말 않고 달려들었지. 작전용 기밀비를 끌어낼 수도 있었으므로 상당히 도움이 되었어. 그렇기 때문에 '롤링 스톤' 작전의 내용을 걱정하며 종일 책상에 매달려 있는 그런 일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네. 게다가 또," 하고 약간 계면쩍은 얼굴을 하고 덧붙였다. "술이 좀 과하기도 했고." "그건 앞에서도 들었어." 피들러가 말했다. "그리고 그 정직한 점을 높이 사니까 자네 말을 믿고 있네." 하지만 리머스는 점점 거친 말씨로, "믿지 않아도 좋아." 피들러는 웃음을 흘리며, "그 점이야. 바로 그 점이 자네의 좋은 점이야. 위대한 악덕이지. 무관심이라는 미덕. 불끈 화도 내고 거드름도 피우지. 그러면서도 언제까지나 뒤를 끌지도 않고 말이야. 고장난 녹음기라고 할까. 사실 자네 같은 사람은 다루기가 어려워. 하지만 우리는 연구했지." 그리고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피들러는 말을 계속했다. "그 돈이 인출되었는지 어떤지를 자네 손을 빌려서 확인해 보려고 말일세. 자네 같으면 은행에 편지를 보내서 그 구좌의 잔액을 확인해 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나. 지금 자네는 스위스에 있는 것으로 하고, 그 나라의 호텔을 주소로 사용하는 거야. 자네는 이의가 없겠지?" "잘 될는지 모르지만 관리관이 내 사인을 써서 은행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면 이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마 어렵다고 보는 것이 틀림없을 것 같은데." "어느 쪽이든 손해볼 것은 없어." "무엇을 알 수 있을 것 같은가?" "예금은 그대로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가령 인출을 했다고 하면 문제의 남자가 언젠가는 그 땅에 나타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이것은 대단히 참고가 되는 일이네." "꿈 같은 이야기로군.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한 거물이라면 그렇게 간단히 꼬리가 잡힐 리는 없을 걸세. 서유럽 어느 나라에 들어가서 조그만 마을의 영사관에서 목적한 나라의 입국사증을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자네들이 조사하고 있는 루트를 끊어버릴 수도 있어. 과연 그 사람이 동독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보고 뒤쫓을 생각인가?" 피들러도 즉시 대답하지는 않았다. 넋이 나간 듯이 계곡 건너편을 보고 있더니, "자네 스스로도 말했듯이 자네는 지금까지 내용도 모르는 채 시키는 일을 해왔어. 그래서 나도 이렇게 말해야겠네. 이것도 또한 자네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이야. 어쨌든 자네들의 소위 ‘롤링 스톤’ 작전이 우리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군." "우리라니?" 그는 미소지으며, "독일민주공화국 말일세. 뭣하면 공산권이라고 해도 좋네. 나는 그런 점은 별로 개의치 않는 성미니까." 리머스는 지금 피들러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갈색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러면 나는 어쩔 셈인가?" 하고 물었다. "편지쓰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리고 한층 높은 목소리로, "이젠 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말해 주어도 무방하지 않겠나?" 피들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말고." 하고 순순히 응했다. 그런 뒤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리머스가 말했다. "나는 아는 것은 다 말했어. 자네와 피터스는 내게서 모든 걸 들어서 알고 있어. 이젠 별 볼일 없는 내가 은행에 보낼 편지에 대한 것을 거절한다면? 그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네. 내가 죽거나 말거나 자네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야. 결국엔 소모품에 불과한 인생이니까." 그러자 피들러가 대답하기를, "솔직히 설명하겠네. 알고 있겠지만 변절자를 심문할 경우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네. 그리고 자네의 경우에 제1단계는 거의 끝났어. 우리가 수긍하고 기록에 남길 만한 것은 대개 말해 주었지. 그러나 자네 나라의 첩보기관이 핀과 클립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네. 물론 우리가 질문을 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자네도 또한 자진해서 말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해. 즉, 쌍방에게 무의식적인 선택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앞으로 한두 달 사이에 그 핀과 클립에 대한 지식이 갑자기 절대적으로 필요해질 가능성이 있다네. 리머스, 이것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문제이며 대개는 제2의 단계에서 밝혀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을 네덜란드에서 자네에게 부탁하려고 흥정을 시도했으나 깨끗이 거절당했네." "그래서 그때까지 나를 확보해 두려는 것인가?" 피들러는 미소지으며, "역스파이 작업은 참을성이 있어야 하네. 절대로 참아낼 수 없을 정도까지 참아야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피들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때?" 리머스가 재촉하니까 갑자기 피들러는 격렬한 어조로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약속해 두겠네. 그 질문에는 대답해도 좋은 때가 오면 바로 대답하겠어. 알겠나, 리머스. 자네를 적당히 위로하자면 할 수 있는 처지에 내가 있네. 기껏 한 달, 아니 그렇게도 안 걸리겠다고 말해서 자네를 진정시킬 수야 있겠지.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고 대답하겠네. 그것이 사실이니까. 자네도 어느 정도의 힌트는 내게 주었어. 그것을 철저하게 확인해 볼 때까지는 자네의 석방 문제를 운운할 수도 없다네. 그러나 앞으로 내가 예상하고 있는 방향으로 사태가 발전해 간다면 자네는 틀림없이 자네편이 필요하게 될 걸세. 그리고 그 자네편이란 나밖에 없을 것이네. 그것을 나는 독일인으로서 자네와 약속하겠네." 리머스는 넋이 나간 듯이 한동안은 말이 없다가, "좋아." 하고 말했다. "해 보겠네, 피들러. 하지만 만일 자네가 내게 사기친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목을 비틀어버릴 테니까 그런 줄이나 알고 있게." 피들러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걸세." 상대가 없는 자기 단독행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정신적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타인을 속이는 행동 자체가 반드시 힘든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요컨대 경험문제이며 그것이 직업이고 그것이 전문이라고 마음먹어 버리면 그만이며, 또 대개의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예를 들면 사기꾼, 배우, 노름꾼들은 때로는 그 연기를 떠나서 관객의 줄 안으로 숨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비밀첩보부원만은 그런 구제에 마음을 편히 할 수는 없다. 그에게 있어서 상대를 속이는 일은 무엇보다 좋은 자기 방어인 것이다. 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속에도 있으니 먼저 자기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 달려들는지 모르는 충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돈이 손에 들어왔다고 해서 면도칼을 사는 것은 금물이다. 아무리 박식하다고 해도 바보 같은 농담 말고는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다정한 남편이었고 아비였다고 해도 언제나 사랑하고 믿어주는 상대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 리머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혼자 외따로 떨어져서 밤낮없이 모략을 일삼고 있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혹의 두려움. 그것을 의식한 그는 최선의 방책을 강구했다. 혼자 있을 때라 할지라도 위장된 모습을 바꾸지 않는 것이며 자신이 아닌 제2, 제3의 인물로서 살아갈 것을 자기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발자크는 죽기 직전까지 그가 창조한 인물의 건강상태를 걱정했다고 하는데, 같은 말을 리머스에게도 할 수가 있었다. 창조의 힘을 버리지 않고 창조한 인물에 그 자신을 동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 능력을 지금 여기서 피들러를 상대로 펼치고 있다. 불안과 동요, 면목 없음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연출하는 오만. 그것은 그 본래의 성격과 비슷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연장이었다. 약간 발을 저는 듯한 걸음걸이, 옷차림에 무신경하고 먹는 것에 무관심한 점, 그리고 알콜과 담배에 대한 애착, 혼자 있을 때에도 그 습관을 충실히 지켰다. 아니, 오히려 그런 면을 한결 돋보이게 할 정도였으며, 자신에 대한 첩보부의 부당한 조치를 불평하는 것이었다. 오늘밤은 그것이 특히 심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침대에 들어가서까지도 커다란 허위에 자신을 맡기는 위험한 경지에 일부러 빠져 들어갔다. 관리관이 노린 것은 놀랄 만큼 적중했다. 피들러는 몽유병자처럼 관리관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었다. 그 두 사람 사이의 관심이 점차 같은 것으로 변해 가는 모양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정도였다. 두 사람이 하나의 계획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 실행을 위해서 리머스가 파견된 듯한 생각조차 드는 것이었다. 아마 그것이 올바른 답일 것이다. 피들러야말로 관리관이 그토록 열심히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하던 바로 그 사람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러나 리머스는 그 추측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지는 않았다. 실정을 알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문제에 그는 무관심했다. 아무리 추리해 본들 그럴 듯한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실이기를 그는 신에게 빌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런 경우라야만 그의 귀국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제14장 - 의뢰인에게 보낸 편지 다음날 아침 리머스가 아직 침대 속에 있을 때에 피들러가 사인을 요하는 편지를 들고 들어왔다. 한 통은 스위스의 스피츠 호반에 있는 자일러 호텔 알펜블리크의 편지지로서, 지질은 얇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또 한 통은 구스타드의 팰리스 호텔의 것이었다. 리머스는 첫번째 편지를 읽었다. 코펜하겐 왕실 스칸디나비아 은행 귀하 본인은 지난 수 주일 동안 여행중에 있으므로 영국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3월 3일자로 조회를 부탁한 본인 및 칼스도로프 씨 공동예금의 잔고에 대해서 아직 회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늦어지는 일이 없도록 말미에 기재하는 본인의 숙소로 다시 한 번 통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본인의 체제기간은 4월 21일부터 2주간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12구 드 콜롬 아베뉴 13번지 마담 Y 드 상글로방 번거로움을 끼쳐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로버트 랭 "3월 3일자 편지라는 말이 써 있는데, 난 편지 같은 것은 한 번도 보낸 적이 없네." "그건 그래. 자네만이 아니야. 우리가 알고 있기로도 아무도 편지는 보낸 적이 없어. 그러니 은행은 더욱 책임을 느낄 걸세. 가령 그들이 관리관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바 있어서 이 편지와 그 편지 사이에 모순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3월 3일자의 편지를 분실함으로써 그런 잘못이 생겼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은행은 자네가 요구한 보고서에 3월 3일자 편지는 받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여서 보내줄 걸세." 두번째 편지도 내용은 첫번째 것과 똑같은데 다른 것은 이름뿐이다. 파리의 주소도 같았다. 리머스는 백지 한 장과 만년필을 집어들고서 ‘로버트 랭’이라는 사인을 6번쯤 써본 다음에 첫번째 편지에 서명했다. 그 뒤 두번째 사인인 ‘스티븐 베넷’도 충분히 연습한 다음에 편지에 써넣었다. "근사해." 피들러가 말했다. "정말 근사하군." "이걸 어떻게 할 셈인가?" "내일 스위스 국내에서 우체통에 넣을 걸세. 인터라켄과 구스타드에서 말이야. 파리로 회답이 오면 전보로 알려주기로 되어 있네. 1주일이면 회답이 오겠지." "그때까지는?" "자네와 단둘이서 살게 된다네. 지루할 것은 나도 알고 있어. 이 자리에서 미리 사과해 두겠네. 산책이나 근처 언덕을 누비는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네. 자네도 좀더 흉금을 털어놓고 잡담을 해주면 좋겠어. 런던에 관한 것, 케임브리지 서커스 본부에 대한 것, 그 안에서의 일들, 각 요원의 소문거리들, 보수, 휴가, 집무실, 서류, 요원, 다시 말하자면 자네 나라 관청의 핀과 클립을 말하는 것일세.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일들. 하찮은 자질구레한 일들. 그 모두를 듣고 싶네. 참, 그리고 생각난 김에 말해 두겠네만..." 피들러의 어조가 갑자기 바뀌었다. "뭔데?" "여기는 시설이 되어 있다네. 우리를 위해서 며칠씩 이곳에 머물러주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설이 되어 있지. 기분전환을 위한 것일세." "여자를 안겨주겠다는 건가?" "맞았네." "사양하겠네. 자네들과 달라서 나는 아직 여자를 필요로 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어." 피들러는 그의 대답 같은 것은 들은 체도 않고 빠른 말씨로 계속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자네에게는 여자가 있었어. 도서관 여자." 리머스는 돌아보았다. 두 팔을 앞으로 벌리면서, "말해 두겠어." 하고 소리쳤다. "두 번 다시 그런 말 말게. 농담이건 협박이건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건 해서는 안 돼. 알겠나, 피들러. 해봐야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걸세. 또다시 입에 담을 때에는 나는 벙어리가 될 거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테니까. 문트인지 스탐버거인지 모르지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녀석에게 내가 한 말을 전하게." 피들러가 대답했다. "전하지. 잘 일러두겠네. 하지만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 그날 오후 두 사람은 또 산책을 나갔다. 하늘은 흐리고 구름은 낮게 깔려 있어서 공기도 미지근했다. 피들러는 무심한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나는 꼭 한 번 영국에 간 일이 있었네. 캐나다로 가는 도중이었으며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지. 부모님을 따라서 갔었어. 물론 나는 아주 어릴 때였으며 이틀쯤 묵었지."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니까 말이지만," 피들러는 계속했다. "그 뒤에도 --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네만 -- 나는 그곳으로 부임하게 되었었네. 문트 대신에 철강 조사단의 임무를 맡게 될 예정이었지. 그 사람이 런던에 파견되어 있었던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알고는 있지." 하고 리머스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했다. "그가 어떤 조사를 하고 있었는지 나는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언제나 쓰는 수법으로 다른 블럭의 조사단에 침투해 들어갈 것을 노리고 있었겠지. 영국 경제상태의 내막을 어느 정도는 알아냈을 것이 분명해. 그렇다고 크게 성공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리머스의 말에는 성의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문트는 요령있게 움직였을 것이 분명해. 거뜬히 해치웠을 거야." "나도 그런 말을 들었다네." 리머스가 말했다. "사람을 둘씩이나 죽였다더군." "그 사건을 자네도 알고 있었는가?" "피터 길럼에게서 들었어. 그는 그 일을 조지 스마일리와 함께 담당했다지. 문트는 자칫 조지도 죽일 뻔했었다더군." "페난 사건이었지." 피들러는 생각에 잠겼다. "문트가 그 사건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야." "그건 분명해." "외국 조사단의 일원으로 외무성에는 사진과 인상서(人相書) 가 있네. 그 사람이 영국 첩보원 전원을 상대하면서 그 나라를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람의 솜씨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러나 리머스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 첩보부에서는 그 자의 체포에 별로 성의가 없었다고 하더군." 피들러는 갑자기 돌아보며, "뭐라고? 다시 말해 보게." "피터 길럼의 말로는 아무래도 첩보부의 진의는 문트를 체포하지 않는 쪽에 있었던 것 같아. 당시 우리 부의 조직은 현재와 상당히 달랐으며 지금의 작전관리관 대신에 지도관이 실권을 쥐고 있었어. 매스턴이라는 사람이었지. 이것도 역시 길럼에게서 들은 말인데, 페난 사건에 있어서 매스턴은 처음부터 실패의 연속이었어. 문트가 잡히기라도 한다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형편이었던 모양이더군. 문트가 재판에 회부되면 사형이 선고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심리 도중에 우리 본부에서 하고 있는 일에도 여러 가지 부정이 들어날 것이 분명했거든. 매스턴의 전생애가 파괴될 위험이 있었던 거야. 피터로서도 그 실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문트에 대한 수사가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네." "확실한가, 그것이? 길럼이 분명히 그런 말을 했나? 전면적인 수사는 하지 않았다고?" "물론 분명히 그렇게 말했네." "문트의 탈출에 대해서 매스턴과 연관된 것 말고 다른 이유를 든 것은 없나?" "다른 이유라니?" 피들러는 고개를 흔들었을 뿐 한동안 걷고 있다가 마침내 말했다. "페난 사건 뒤에 철강조사단은 해산되었어. 나의 런던 출장이 취소된 것도 그 때문이야." "문트는 당시 머리가 돌았었군. 사람을 죽이고 도망다닐 수 있었다니. 발칸 반도 근처라면 또 모르지만 -- 하긴 자네 나라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 런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도 남을 텐데." "그것을 문트는 해낸 거야." 피들러는 다급한 듯이 말했다. "더구나 멋진 일을 남겨둔 채." "키버와 애시를 키워놓은 것을 말하는 건가? 놀라운 이야기로군." "그들은 페난의 여자를 찾아다녔어."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카를 리메크에 관해 얘기해 주게나." 피들러가 다시 시작했다. "그는 한 번 관리관과 만난 일이 있지?" "그래, 베를린에서 만났지. 1년쯤 전이야. 아니, 좀더 전이었나." "베를린의 어디서 만났지?" "내 아파트야. 나까지 셋이서." "용건은?" "우리 관리관은 성공할 듯한 일을 보면 자신이 직접 손을 대고 싶어하는 성질이 있어. 우리는 카를을 통해서 유력한 정보를 수집할 수가 있었네. 그것을 아마 런던에서는 높이 평가했겠지. 관리관은 자신이 베를린까지 와서 카를과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라고 명령을 했네." "불쾌했겠군." "왜 그런 생각이 드나?" "하지만 그는 자네 스파이가 아닌가. 다른 요원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상식이 아닌가." "관리관은 보통 요원은 아니지. 우리들의 부장일세. 카를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중요시되는 것으로 허영심을 자극받은 거야." "세 사람이 함께 있었나? 줄곧?" "그래. 아니, 그렇다고 할 수도 없겠군. 아주 잠깐 내가 자리를 뜨고 둘만 있었던 일이 있었네. 15분쯤이야. 더 되지도 않았어. 그것은 관리관이 원했던 거야. 몇 분 동안만 카를과 단둘이서 있고 싶다고 했지. 이유는 몰라. 그래서 나는 구실을 만들어 방을 나갔어. 구실을 무엇이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아니, 생각이 났어. 위스키가 떨어졌다고 했지. 그리고 실제로 드종의 방에까지 가서 한 병 가져왔어." "자네가 밖으로 나간 그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르나?" "알 수가 없지. 게다가 나는 처음부터 흥미도 없었고." "뒤에 카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가?" "물어보지도 않았으니까. 카를은 본래 뻐기는 데가 있었네. 언제나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지. 게다가 관리관을 깔보고 있는 듯한 말을 하기에 듣기에도 기분이 나빴고. 하긴 깔보는 것도 당연한 것이, 하는 짓이 이상했거든. 사실은 관리관을 보내놓고 우리 둘이서 한바탕 웃어주었으니까. 카를의 허영심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아. 그 만남 전체가 카를에게는 팔에 주사 한 대 맞은 정도로 끝난 것 같았네." "카를이 오히려 실망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어. 돈은 말만 떨어지면 보내주고 애지중지해 주는데 기분 나쁠 놈은 없지. 그것은 반은 내 죄고 반은 런던의 죄였어. 녀석도 그렇게 신바람을 내지 않았더라면 정보망을 여자에게 누설하지도 않았을 거야." "엘비라 말인가?" "그래." 둘은 또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피들러가 먼저 자신의 회상에서 깨어나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좋아지기 시작했어. 다만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어서 꺼림칙해. 자네와 만나기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지만." "무슨 일인데?" "자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 말일세. 나라를 배반한 이유." 리머스가 무슨 말인가 하려는데 갑자기 피들러가 웃어대며, "분명히 말해서 좋은 솜씨라고는 할 수 없겠군."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은 1주일 동안 구릉지대를 돌아다니면서 보냈다. 저녁이 되면 산장으로 돌아왔다. 맛없는 식사를 이상한 냄새가 나는 백포도주로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런 다음에는 난로불 앞에 앉아서 슈타인해거를 마시면서 늦게까지 이야기했다. 난로불은 피들러의 착상이었다. 처음에는 불을 지피지 않았으나 감시원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땔나무를 가져오도록 이르는 것을 리머스는 들었다. 그때는 생각조차 안했는데 산바람을 쏘이고 하루를 보낸 다음 난로불과 독한 술로 온기를 되찾으면 그의 입은 저절로 가벼워져서 지난날 자기가 맡았던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 말이 많아졌다. 녹음이 되고 있을 것으로 상상은 되었지만 그것도 리머스는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남에 따라서 차츰 피들러의 긴장은 높아갔다. 한번은 - 저녁때 꽤 늦은 시각이었는데 - 두 사람은 DKW를 타고 외출을 했다. 전화 박스 앞에서 피들러는 차를 세웠다. 리머스에게 차에 있으라며 열쇠를 맡기고 어딘가에 한참 동안 전화를 걸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에 리머스가 물었다. "왜 산장에서 걸지 않고?" 피들러는 고개만 흔들면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하고 말했다. "자네도 마찬가지야. 조심해야겠어." "왜 그러나?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가?" "자네가 코펜하겐의 은행에 불입한 돈 -- 그것에 대해서 편지 보낸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이지. 잊을 리가 있나."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피들러는 차를 움직였다. 말없이 구릉지대를 여기저기 드라이브하고 다니다가 얼마 뒤에 차를 세웠다. 발밑은 거대한 두 계곡의 합류지점이며, 치솟은 소나무의 짙은 그림자가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황혼이 서서히 어둠으로 바뀌고 양쪽의 험준한 경사면은 잿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피들러가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신경쓸 건 없네. 걱정할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하고는 말 소리에 힘을 주고 리머스의 팔에 손을 올려놓으며, "다만 자네가 잘못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어. 잠깐이면 끝날 테니까 이해해 주겠지?" "이해하라고는 하지만 무슨 일인지 모르고서야 어쩔 도리가 없잖은가. 상대가 어떻게 나올 건지 기다릴밖에. 하지만, 피들러, 내 목숨까지는 걱정 안해도 되네." 그리고 잡힌 팔을 빼내려 하니까 피들러의 손이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리머스는 살갗에 닿는 촉감이 불쾌했다. "자네는 문트를 알고 있나?" 피들러가 물었다.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가?" "그에 대해서는 자네와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건 그래. 우리들은 그에 관해서 이야기했지. 그의 수법은 질문보다는 사살이 먼저고,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방침이지. 우리같이 언제나 질문이 사살보다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직업에서 보면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리머스는 피들러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피들러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계속했다. "상대의 답변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이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리머스는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에 피들러가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직접 심문을 해본 적이 없어. 언제나 내게 맡기고는 이렇게 말했지. '그들에 대한 심문은 자네가 해줘야겠어. 심문 하나는, 옌스, 자네에게 당할 인물이 없으니까. 잡아오는 것은 내가 한다.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자네 역할이야.' 이것도 역시 그의 입버릇이지만 스파이 전쟁이란 화가의 일 같아서 나무망치를 들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이 필요해. 일이 끝나면 나무망치를 두들기게 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목적까지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내가 그 나무망치일세.' 그는 나에게 언제나 그런 말을 했네. 처음에는 그와 내가 주고받는 농담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네. 그가 일단 마음을 먹으면 상대의 입을 열게 할 것도 없이 깨끗이 살해해 버렸어. 여기서 죽이고 저기에서 죽이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없애는 것이었네. 내가 물어보았네. 부탁도 했었지. '왜 체포하지 않습니까? 한 달이나 두 달쯤 나에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죽여버리면 아무짝에도 못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 쐐기풀은 꽃이 피기 전에 잘라버릴 필요가 있다고. 그는 그 대답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두말 할 것도 없이 첩보부원으로서의 그는 대단히 우수한 존재이며, 우리 첩보기관을 위해서 여러 차례나 굉장한 공을 세운 바 있어.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는 그대로야. 그에게는 정연한 이론이 있다네. 우리는 가끔 밤 늦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때 그는 커피를 마시네. 다른 음료수는 일체 입에 대지 않지. 언제나 커피로 정해져 있다네. 그의 말에 의하면 독일인은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우수한 스파이가 되기는 어렵다고 했지. 그것이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對)스파이 활동의 경우라네. 그 임무에 임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말라비틀어진 뼈다귀를 물고 늘어지는 늑대들을 연상케 한다는 거야. 뼈다귀를 빼앗아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먹이에게 달려들지 않는다는 거지. 그 뜻은 알고 있네. 분명히 그가 말한 대로야. 하지만 그에게도 지나친 면이 있어. 왜 비레크를 죽여버렸을까? 왜 그를 내게서 빼앗아갔는가? 비레크는 그가 말하는 새로운 먹이였거든. 우리는 아직 뼈다귀에서 살코기도 뜯어내지 않았어. 알겠나, 리머스? 왜 그를 빼앗아갔는지? 왜? 왜? 왜? 왜지?" 리머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둠에 싸여 있는 차 안에서 피들러의 격정이 높아가고 있음을 리머스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밤낮없이 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네. 비레크가 사살된 뒤로 나는 그 이유를 캐내게 되었어. 처음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닌가 싶었지. 내 마음속이 질투심 때문이라고 나 자신을 달랬었지. 일에 열중하고 보면 어느 나무 그늘에도 배신자의 모습이 보이게 되거든. 우리들과 같은 세계에서 일하고 있으면 사물을 보는 눈이 그런 식으로 되기 꼭 알맞지. 그러나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 밝혀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어. 그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네. 그는 겁내고 있어. 입이 가벼운 자가 우리 손에 오게 되는 것을 겁내고 있었다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머리가 어떻게 됐나?" 리머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이해가 돼. 알고 있듯이 문트는 영국에서 거뜬히 탈출했네. 그건 자네가 말해준 것일세. 그리고 길럼이 자네에게 뭐라고 했지? 영국 첩보부는 그를 잡을 생각이 아니었다고! 왠가? 그 이유를 내가 말하지. 그는 그들의 사람이었네. 그들은 그를 전향시켜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어. 알겠지, 리머스? 그것이 문트의 자유의 값이었어. 그것과 받은 돈이." "당신 미쳤군!" 리머스가 소리쳤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면 그는 자네를 죽일 거야.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돌아가기로 하세." 그때 비로소 리머스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지만 피들러는 계속 말했다. "그건 자네 말이 틀렸어. 지금의 자네 말은 자기 자신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야. 그러니 우리는 협력할 필요가 있네." "그건 거짓말이야!" 리머스는 소리쳤다. "나는 자네에게 여러 번 말했어. 영국 첩보부에서는 그랬을 리가 없어. 케임브리지 서커스가 공산권에의 공작에 그를 역이용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 직무분담의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야. 자네는 우리 관리관이 동독 첩보부의 차관을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베를린으로 파견되어 있는 사람들 모르게 그런 짓은 할래야 할 수가 없지. 피들러, 자네는 돌았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거야!" 그리고는 갑자기 웃어댔다. 그 뒤에 조용하게 말했다. "자네는 그 사람의 지위가 탐나는 게지. 사나이로서 한심한 일이야. 이야기로는 들은 적도 있지만 그런 술수는 소동만 일으킬 뿐이고 스스로를 파멸로 끌고갈 뿐이네." 그 뒤로는 한동안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다. "코펜하겐의 돈 말인데." 피들러가 말했다. "은행이 자네에게 답장을 보내왔어. 은행에서는 혹 실수가 있었는가 해서 굉장히 걱정하고 있네. 돈은 자네가 불입한 뒤 정확히 1주일 만에 자네의 공동예금자가 인출해 갔네. 지난 2월에 문트가 이틀 간 덴마크에 갔었는데 그날과 맞아떨어지고 있어. 그 나라에서 세계과학자회의가 열리게 되어서 가명을 써서 그 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비밀첩보부원에게 연락차 갔던 거야." 거기서 피들러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여 말했다. "다시 한 번 은행에 편지를 보내주겠나? <모두 순조롭다. 착오없이 잘 되어가고 있다> 고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제15장 - 무도회에 가다 리즈는 당본부에서 온 편지를 읽고 어떤 취지로 보낸 것인지 의아했다.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반가운 결정인 것은 틀림없지만 왜 처음부터 그녀 자신의 의견은 조금도 묻지 않았을까? 지부위원회가 추천한 것인가, 아니면 본부 자체에서 선택한 것인가 그것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본부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하나도 없다. 물론 강사 몇몇과는 만나기도 했고 지부회의에서 당의 위원장과 악수한 적도 있다. 아마 문화위원회에 있는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겠지만, 그는 금발의 모양 내기를 좋아하고 기분 나쁠 만큼 붙임성이 좋은 사나이였다. 이름은 분명히 애시라고 했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마 어딘가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두었겠지. 아니면 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 사나이는 다른 데가 있었다. 모임이 끝나면 ‘블랙 앤드 화이트’에 데리고 가서 커피를 사주면서 남자 친구가 있는지 끈덕지게 물었었다. 그렇다고 바람둥이 같은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또 가령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 밖에 내기에는 어딘지 괴짜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어쨌든 그녀 신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원이 된 지 얼마나 되었는가?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향수병에 걸린 적은 없었는가? 남자 친구가 여러 명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중에서 특별히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있는가? --- 그런 식으로 그녀는 호의를 보인 적도 없었는데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계속했다. 동독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현상, 노동자 시인이라는 개념, 그 밖에도 이것저것 화제가 풍부한 사나이로서 동구권은 어디고 모르는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행을 상당히 많이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이 남자를 교사라고 점쳤다. 강의하는 듯한 유창한 말솜씨로 이야기를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그 뒤 투쟁기금 캠페인이 있었을 때에 그 애시가 선뜻 1파운드나 내놓는 것을 보고 굉장히 놀라기도 했다. 그래, 그 남자가 추천한 것이 분명해.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애시였었군. 그가 기억하고 있었더랬어. 그의 입에서 런던 지구의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지구에서 다시 본부나 아니면 그런 곳에 그녀의 이름이 전해진 것이리라. 이런 식의 생각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당은 언제나 이런 비밀주의를 택하는 것이 상례니까 -- 혁명당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른다. 비밀주의. 솔직히 말해서 어딘지 그늘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 리즈에게는 조금은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필요성이 있겠지. 곤란한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무리도 많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어보았다. 본부의 편지였는데, 윗부분이 새빨갛게 인쇄되어 있었다. 첫머리에 ‘우리의 동지’라고 써 있는 것이 군대 같은 느낌이라서 싫었다. 리즈는 아직 ‘동지’라는 말에 익숙해 있지 않았다. 우리의 동지 최근 우리 당과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과의 사이에 서로 당원을 교환하자는 말이 거론되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 토론한 바 있소. 그 목적은 우리 두 당이 상호간 평당원을 교류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 있소. 동독측의 의견으로는 현재와 같이 영국 내무성이 차별방침을 견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가까운 장래에 동독의 당원 중 열성적인 당원이 영국에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소. 그런 점에서도 서로가 경험한 바를 교환할 필요가 절실히 요망되고 있으므로 이에 평당원의 교류가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오. 이런 취지에서 동독의 지부로부터 우리 지부의 서기 중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가두에서의 선전활동에 좋은 성적을 올린 당원 5명을 선발하여 파견하라는 요청이 있었소. 선발된 동지는 3주간에 걸쳐서 동독 지부의 연구회에 참석하고 공업과 사회생활의 발전에 대해 공부하여 서구 파시스트의 도전의 증거를 직접 그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우리 당원에게는 젊은 사회주의 조직의 성과를 알게 되는 최상의 기회라고 생각되오. 이상의 이유로 우리는 지구 지부에 대하여 이번 출장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젊은 당원의 명단을 요청한 바 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귀하의 이름이 천거되었소.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귀하가 자진하여 우리 계획의 제2의 부분, 우리와 동일한 산업기반에 서 있고, 따라서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문제를 안고 있는 동독 당원과 교류하는데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는 바이오. 남 베이스워터 지부와 라이프치히 근교 노이엔하겐 지부와의 편성이 확정되어 있소. 노이엔하겐 지부의 서기장 프레다 뤼만은 귀하를 성대하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소. 귀하 같은 적임자를 발견하게 된 것을 우리로서도 최대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오. 또한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모두 동독 문화국에서 지출하기로 결정되어 있소. 귀하가 이 선발을 영예로 생각하고 개인적인 사정을 뒤로 미루고 기꺼이 수락할 것으로 확신하오. 동독 방문은 내달말인 23일 전후가 될 것이오. 단, 선발된 각 동지는 각각 별개의 행동을 취하게 되어 있소. 초대 일자가 같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오. 귀하의 수락 여부는 가급적 신속히 보고하기 바라오. 세부사항은 그 뒤에 통지하겠소. 읽으면 읽을수록 기묘한 느낌이 들 뿐이었다. 적어도 외국에 가는 문제를 그렇게 단시간 안에 결정하라니. 도서관 근무는 비교적 간단히 그만둘 수가 있지만 그것을 본부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짐작되는 일이 있었다. 역시 애시였다. 그 사람이 휴가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금년 휴가를 받을 수 있는가? 만일 있다면 미리 신청을 해둘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을 물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후보자의 이름 정도는 알려줄 법도 한데 -- 아마 그것까지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역시 써 있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또 본부에서 이런 긴 편지를 보내오는 것도 귀한 일이다. 본부에서는 서기의 손이 모자라서 언제나 편지는 요점만 적어보내는 간단한 것으로 정해져 있다. 때로는 전화로 처리해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것은 너무 많은 글자의 배열이다. 타이프를 친 솜씨도 아주 꼼꼼한 것이 본부에서 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지 서명만은 틀림없이 문화부 조직책이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본부의 타이핑 서류 말미에 써 있는 조직책의 사인을 여러 번 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멋없는, 반쯤 관료적이고 반유태교적인 문체에서 그녀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친숙해지고 말았다. 가두에서의 대중동원 활동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니 그것도 참 이상한 이야기다. 그녀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오히려 그런 당의 활동을 꺼리고 있었다. 공장의 정문 앞에 서서 확성기로 외쳐대고 길거리에서 ‘데일리 워커’ 지를 판매한다든지, 지방선거의 후보자를 위해서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는 등이 그녀에게는 소름끼치도록 싫은 일이었다. 평화운동은 그렇게 신경쓰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은 의의도 있고 사리에도 맞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리를 지나다가 어린이들을 보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어머니들을 보고, 문앞에 서 있는 노인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 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가 있다. 거기에는 평화를 위한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투표를 위해 투쟁하는 의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문판매를 위한 투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도 아마 누구나가 다 획일화되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지부의 모임에서 10명이나 되는 당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명을 토론하면서 사회주의의 선봉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또 역사의 필연성에 대해 논하면서 신념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런 다음 거리로 한 발자국 나서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팔 가득히 ‘데일리 워커’ 지를 안고 한 부 파는 데 한 시간 두시간 걸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그녀 또한 때로는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팔리지도 않았는데 판 척하고 1다스쯤 자기가 사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다음 모임에 나가서는 마치 많이 판 듯이 자랑까지 한다. 자기가 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골드 동지는 토요일 밤에 18부나 팔았다 - 18부나!' 그것은 그날 밤의 의사록에 기록되고 지부의 회보에도 실리게 된다. 기뻐한 지구위원이 투쟁기금보고서의 제1면에 조그만 글씨지만 찬사를 보내준다. 그것은 이렇게 작은 세계인 것이다. 모두가 좀더 솔직해 주었으면!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아마 그것은 누구나 하고 있는 짓이며, 다른 사람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그녀 이상으로 잘 알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지부의 서기로 발탁된 것은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제안한 사람은 멀리건이었다. '열성적이며 또한 매력있는 우리의 젊은 동지...' 그가 그녀를 추천한 것은 서기로만 발탁해 주면 고마운 나머지 그녀가 잠자리를 같이 해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다른 당원이 한 표를 던진 것도 역시 그녀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타이프를 칠 줄 안다는 강점도 있다. 그녀라면 그 일만은 너끈히 해낼 것이므로 주말에 타이핑을 부탁하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상당히 일손을 덜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또한 그녀의 힘으로, 모두가 바라고 있는 조용하고 품위 있는 모임을 열게 될 것이다. 혁명적이면서도 소란하지 않고 기분좋은 클럽을 만들 수 있다. 그런 하찮은 일들이 그녀에게 표가 던져진 이유였다. 알렉도 그런 것들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다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카나리아를 기르는 사람이 있듯이 공산당에 가입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야." 그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한 것처럼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남 베이스워터의 지부는 그런 상태였다. 지구위원회도 그런 점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번의 일에 그녀가 지명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지구위원회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 유일한 설명은 애시에게 있었다. 아마 그녀가 그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가 별종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만큼 자세히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즈는 좀 야단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혼자서 흥분해 있을 때에 누구나가 하는 몸짓이다. 어쨌든 외국에 갈 수가 있다. 마음껏 나래를 펼치고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일이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여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가게만 되면 즐거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독일인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부터 서독에는 호전주의자, 복수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고 동독이야말로 민주주의자, 평화애호가의 나라라고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선량한 독일인이 모두 한쪽으로 모이고 악인들만이 또 한쪽으로 모이는 그런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악인 쪽 독일인이었다. 아마 그것이 당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화해시키기 위한 배려 -- 애시가 그녀에게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질문을 했을 때 이미 그런 생각이 그 사람들의 가슴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비로소 설명이 되는군. 갑자기 그녀는 훈훈한 마음으로 당에 대해 감사했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상냥한 사람들이구나. 그녀는 당원이라는 사실에 자랑을 느끼고 기쁨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책상으로 걸어간 그녀는 그 서랍에서 낡은 학교 가방을 꺼냈다. 거기에는 지부의 이름이 찍힌 용지와 회비 수령 스탬프가 들어 있었다. 용지 한 장을 뜯어서 구식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에 꽂았다. 그 타이프라이터는 그녀가 타이프를 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지구위원회가 보내준 것으로, 키 중에 약간 튀어나오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밖에는 멀쩡했다. 기쁘게 수락한다는 뜻의 편지를 곱게 작성했다. 그녀가 소속되어 있는 당의 본부가 이렇게 근사한 곳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엄격하기는 해도 이렇듯 정이 두텁고 공평하고 진실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냐. 모두가 좋은 사람들뿐이구나.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그녀는 서랍을 닫으려다가 스마일리의 명함이 눈에 뛰었다. 깊은 주름과 고지식한 얼굴을 한 작은 체구의 사나이가 떠올랐다. 그녀의 방문 앞에 서서 이런 말을 했었다. '당에서는 당신과 알렉의 관계를 알고 있소?' 라고. 난 참 바보야. 그 말에 그렇게 마음쓸 것은 없는데. 제16장 - 체포 피들러와 리머스는 그 뒤로 말없이 차를 달렸다. 해가 져버린 산속은 검은 동굴과 비슷하고 멀리 깜박이는 한 점 불빛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불빛을 연상시켰다. 피들러가 차를 산장 옆에 있는 조그만 창고 같은 곳에 집어넣고 두 사람은 현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산장에 들어가려는데 숲속에서 소리가 났다. 피들러를 부르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20 미터쯤 떨어진 저녁 어스름 속에 세 남자가 서 있다. 피들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슨 용건이지?" 피들러가 물었다. "할 이야기가 있소. 베를린에서 왔는데." 피들러는 망설이며, "감시원 녀석들 어디 갔지?" 하고 리머스에게 물었다. "현관에 있으라고 했는데."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홀에 불도 켜두지 않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피들러는 사나이들에게로 다가갔다. 리머스도 잠시 기다렸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불빛 없는 건물을 지나서 뒤쪽에 있는 별채로 들어갔다. 보기에만 그럴 듯하게 날림으로 지은 집이며 주위에는 어린 소나무를 심어서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안에는 침실이 세 개 있을 뿐이며 복도 같은 것은 없었다. 리머스에게 주어진 것은 가운데 있는 방으로서, 안채에 가까운 쪽 방이 감시하는 두 사람의 것이다. 세번째 방에 누가 있는지는 리머스도 몰랐다. 한번 그 방과 자기 방 사이에 있는 문을 열려고 해보았으나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을 때에 커튼의 레이스 틈새로 들여다보고 같은 모양의 침실이라는 것을 알았었다. 어디를 가든 감시 두 사람이 붙어서 50미터의 거리를 두고 따라다녔는데 그때는 별채 있는 곳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리머스는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1인용 침대가 하나, 조그만 책상이 있을 뿐이고 책상에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워낙 철저한 독일인인지라 그곳에서 옆방에 있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시당하는 정도로 동요될 리머스는 아니다. 신출나기 스파이와는 다르다. 베를린에서는 그것이 생활의 일부였다. 멍청하게 있으면 호된 변을 당할 때도 있지만 결국 그것은 상대가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것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상대의 단서를 잡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엔 자신이 있었으며 세밀한 관찰력과 정확한 기억력도 도움이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수한 스파이인 그는 반드시 스파이를 잡아냈다. 미행 팀이 즐겨쓰는 방법, 트릭을 통해서 그 약점을 알고 아주 작은 틈새로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런 리머스에게 감시당하는 것 정도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때도 산장과 별채를 잇는 임시출입구를 통해서 감시원들의 방으로 들어가서 막연하지만 이상한 예감을 받았다. 별채 건물의 조명은 안채의 어딘가에서 조작하게 되어 있는지 불을 켜고 끄는 것이 모두 안 보이는 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가끔 아침에 그는 갑자기 머리 위에서 전등이 켜져서 잠을 깼다. 밤엔 반대로 전등이 곧 꺼진다면서 침대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날 밤 그가 별채에 들어간 것은 9시가 지난 직후였는데 전등은 이미 꺼져 있었다. 여느때는 11시까지는 켜져 있었는데 그날 밤만은 유독 꺼져 있었으며, 덧문도 또한 모두 닫혀져 있었다. 안채와의 사이에 있는 문은 열려져 있었으므로 복도를 통해서 황혼 무렵의 엷은 빛이 간신히 감시원의 침실에까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으로는 빈 침대가 둘 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방안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등뒤에서 문이 닫혔다. 아마 저절로 닫혔겠지만 리머스는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안은 캄캄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안 나고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감각이 예민해졌다. 토키 영화의 음향장치가 갑자기 서버린 느낌이다. 여송연 담배 냄새가 났다. 아까부터 나고 있었던 냄새였으나 그 동안 몰랐었다. 어둠 속에서 장님처럼 촉각과 취각이 특별히 예민해졌다. 주머니 속에 성냥이 들어 있었지만 그것을 쓸 생각은 없었다.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등을 벽에다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설명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상대방은 그가 감시로 쓰는 방에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 방에서 움직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전에 지나온 안채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닫힌 문 손잡이를 만지는 소리가 들리고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완전히 갇혀버린 것이다. 그래도 리머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틀림없다. 그는 이 방에 감금된 것이다. 천천히 몸을 낮추어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한 손을 윗도리의 안주머니께에 찌르고 가만히 있었다. 싸움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히려 구제받은 듯한 느낌이며, 머릿속에서 기억이 재빨리 달려가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무기는 자신의 몸 가까이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재떨이, 두 개의 동전, 만년필, 어느 것으로도 상대방을 찌르거나 눈을 도려낼 수가 있다.' 전시중, 옥스퍼드의 그 집에서 조용하고 몸집이 작은 웨일스 인 하사관이 자주 입에 담던 교훈이었다. '나이프, 지팡이, 권총, 무엇이든지 동시에 두 손을 쓰지 말라. 왼손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아랫배에 단단히 붙여둘 것. 무기로 이용할 것이 눈에 뜨이지 않을 때에는 두 손을 펴고 엄지손가락을 구부리지 말고 펴둘 것.' 리머스의 오른쪽 손이 성냥갑을 세로로 꽉 쥐어 부숴뜨렸다. 삐죽삐죽한 성냥갑 나무 조각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런 다음 그는 벽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 방 한쪽 구석에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소리가 날 것을 각오하고 그것을 방 한가운데까지 밀어냈다. 그리고 몇 발자국인가를 세어가며 의자에서 물러나서 두 벽이 맞닿는 구석에 몸을 기댔다. 그 사이에 그의 방과 통하는 문이 기세 좋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앞에 서 있다. 보려고 해도 두 방에 모두 불빛이 없으므로 볼 수가 없었다. 달려나와 덤비려는 기색은 안 보인다. 한가운데로 옮겨다 놓은 의자가 교묘한 작전으로서 그 장소를 그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은 모른다. 적이 덤벼들게 해야 된다. 그것도 빨리 덤벼들게 해야 한다. 언제까지고 기다리다가는 그들 중 하나가 안채의 중앙 스위치를 올리고 불을 켤 위험성이 있다. "덤벼봐! 겁나나? 바보들!" 그는 독일어로 소리쳤다. "난 여기야. 이 구석이야. 잡아봐!" 움직이는 기색도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난 여기야. 안 보이나? 이런 멍청이들!" 순간 한 발자국 내딛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서 다시 한 발자국. 그 다음에는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사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리머스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냥갑을 던져버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한 발자국씩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서 전진했다. 그 손끝이 따뜻한 것에 닿았다. 군복의 뻣뻣한 감촉이다. 리머스는 짐짓 왼손으로 상대의 팔을 두 번 두드렸다. 분명하게 두 번. 그랬더니 겁먹은 소리가 귀밑에서 독일어로 속삭였다. "한스?" "쉿! 조용!" 리머스는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손을 뻗쳐 상대방의 머리칼을 붙잡고 앞으로 끌어당겨 넘어뜨리고는 오른손을 칼처럼 세워 상대의 목을 내리쳤다. 이어서 팔을 붙잡고 고개를 세운 다음 목구멍이 위로 향하게 몸을 꺾었다. 그 다음엔 상대가 저절로 바닥에 들어눕도록 내버려두었다. 사나이의 몸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자 전등에 불이 켜졌다. 문 입구에 인민경찰의 젊은 장교가 여송연을 입에 물고 서 있었다. 뒤에는 부하가 둘. 하나는 평상복이며 아주 젊다. 손에 든 권총은 리머스가 보기에는 손잡이 뒤에 장진 레버가 붙어 있는 체코식이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누워 있는 사나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밖으로 난 문을 누군가가 열쇠로 열었다. 그가 누구인지 리머스는 돌아다보려고 했다. 방향을 조금 바꾸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아마 장교였을 것이다.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리머스는 다시 얼굴을 제자리로 천천히 돌려서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두 손을 겨드랑에 꽂은 채로 있었는데 커다란 타격을 받고 두개골이 날아가 버리는 줄 알았다. 정신을 잃기 직전 무의식의 바닷속을 떠돌면서 자기를 때린 흉기는 리벌버 권총이거나, 아니면 길게 끈을 매다는 고리가 손잡이에 달려 있는 구형 권총일 것이라고 느꼈다. 죄수들이 무슨 노래인지 부르는데 간수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소리에 그는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니 강한 광선처럼 고통이 뇌수를 꿰뚫었다. 움직이지 않고 누운 채 눈을 부릅뜨고 색채가 있는 여러 가지 조각들이 눈앞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에는 자기 몸을 확인해 보았다. 두 다리는 얼음처럼 차고 시큼한 죄수복 냄새가 코를 찌른다. 노래 소리는 멈춰졌지만 다시 한 번 들려왔으면 하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두 번 다시 노래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한 손을 들어서 볼을 만져보려고 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손은 뒤로 수갑이 채워져 있고 다리도 마찬가지로 묶여 었었다. 피의 흐름이 정지되어 있어서 사지가 모두 차가웠다.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바닥에서 5센티미터 정도 들어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두 무릎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뻗으려고 하니까 순식간에 전신을 고통이 휩쓸어와서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고문대에 올려진 사나이가 마지막으로 지르는 신음 소리와도 비슷해서 스스로도 참담했다. 그 자리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통을 이기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의 옹고집은 다시 한 번 다리를 천천히 뻗어 보려고 했다. 역시 무서운 아픔이 다시 찾아왔다. 리머스는 그 원인을 알고 있었다. 쇠사슬로 두 손 두 발이 뒤로 묶여 있는 것이다. 다리를 뻗으려고 하면 사슬이 죄어들어서 결국은 어깨를 떨어뜨리고 상처난 머리를 돌바닥에 눕혀야만 했다. 그들은 그가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죽도록 두들겨패 주었을 것이다. 차갑게 늘어진 전신이 시퍼렇게 멍들고 모든 관절이 다 아팠다. 감시하던 사나이가 죽기라도 했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머리 위에 커다란 전등이 번쩍이며 마치 병원 같은 강렬한 광선을 내뿜고 있었다. 가구는 없고 희게 칠한 벽이 사방에서 막고 있으며 강철로 된 문이 보였다. 스마트한 진회색. 런던의 거리에서 보는 색깔.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 아무 것도 없다. 생각할 것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격심한 고통뿐. 그들이 들어오기까지 여러 시간 거기에 누워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백열광의 열기가 점차 높아져 온다. 목이 말랐지만 사정을 하느니 참았다. 마지막으로 문이 열리고 문트가 나타났다. 문트라는 것을 눈빛으로 알았다. 스마일리가 언젠가 그에 대해서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제17장 - 문트 부하들이 리머스의 수갑과 족쇠를 끄르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 자신도 한참 애쓴 끝에 겨우 바로 서려는데 사지에 피의 흐름이 다시 시작된 때문인지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관절에 갑자기 이완감을 느끼고 그 자리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들은 도와주기는커녕 곤충을 관찰하는 아이들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경비병 중 하나가 문트 옆으로 빠져나와 다가오는데 서라고 소리쳤다. 리머스는 벽이 있는 데까지 기어갔다. 거기 있는 흰 벽돌에 두 손바닥을 붙여 몸을 의지하며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반쯤 일어났을 때에 경비병이 발로 걷어찼다. 다시 쓰러지고 또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경비병이 거들어주며 벽에 기대어세웠다. 그러나 몸 중심을 왼쪽 발에 가도록 하고 있는 걸 보니 세워놓고는 다시 걷어찰 생각임을 알아차렸다. 리머스는 온몸의 힘을 짜내어 몸을 앞으로 내밀 듯이 하면서 숙였던 머리를 상대방의 얼굴에 부딪쳤다. 리머스는 상대를 덮치며 함께 쓰러졌다. 경비병은 일어났으나 리머스는 쓰러진 채 앙갚음해 올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트가 뭐라고 지시를 하자 경비병은 리머스의 어깨와 다리를 잡고 둘러멨다. 귓가에 감방의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는 그대로 복도로 메고 나갔다. 무섭게 목이 탔다. 운반해 간 곳은 좁기는 하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방으로서 알맞게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책상과 팔걸이 의자. 테두리가 쇠로 되어 있는 창문을 스웨덴제 블라인드가 반쯤 가리고 있다. 문트가 책상 앞에 앉고 리머스는 눈을 반쯤 감은 채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경비병은 입구에 서 있었다. "목이 말라." 리머스가 말했다. "위스키 말인가?" "물이면 돼." 문트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유리 물병과 컵을 테이블 위에 가져다 놓으며 이어서, "먹을 것도 가져다 주어라." 하고 말하니 경비병 중 하나가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수프와 얇게 자른 소시지를 가지고 왔다. 리머스가 마시고 먹는 모습을 그들은 말없이 보고 있었다. 얼마 뒤에 리머스가 물었다. "피들러는 어디 있지?" 문트는 간단히 대답했다. "체포되었어." "무슨 이유로?" "적국과 내통하여 인민의 방위를 게을리한 죄야." 리머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의 승리로군. 언제 체포했나?" "어젯밤." 리머스는 잠시 기다렸다. 그런 다음 다시 문트를 똑바로 보면서, "나를 어쩔 셈이지?" 하고 물었다. "자네는 중요한 증인이야. 물론 나중에 이 사건 재판 때에 출두해 주어야 하네." "문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런던에서 꾸민 공작의 일부를 분담했다는 것이로군." 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경비병에게 명령하여 리머스에게 갖다주도록 했다. 경비병은 마지 못해서 리머스의 입에 물려주었다. "멋지게 당했어." 리머스가 말했다. 그런 다음 허탈하게 말했다. "영리한 녀석들이군." 문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사이에 리머스는 상대의 과묵에 익숙해졌다. 예상 못한 일이지만 문트의 음성에는 뜻밖에 밝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입을 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 이상하리만큼 강한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한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무의미한 말을 주고받느니 차라리 아무리 오랜 시간이라도 침묵을 지킨다. 직업적으로 심문을 하는 사람이 되면 무엇보다도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그것으로 먼저 죄수의 정신면을 지배하고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 그는 전혀 다르다. 테크닉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는 사실을 존중하는 행동인이며 리머스 또한 그것을 좋아했다. 문트의 외모는 완전히 그 기질과 일치했다. 스포츠맨형. 금발을 짧게 깎고 긴장한 장사 같은 얼굴, 무서운 냉철함이 엿보이고 매사에 직선적일 듯한 인상을 준다. 유머나 일시적 기분 같은 것은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젊게 보이기는 했지만 젊은이다운 발랄함은 없었다. 상급자는 그것을 진지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체격도 좋았다. 옷이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어떤 옷이라도 소화해낼 그 체격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리머스는 그가 살인자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냉혹성과 강한 자만의 태도는 확실히 살인자의 특징이다. 문트는 완전히 비정의 사나이인 것이다. 문트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자네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는 죄명도 있어. 살인죄." "그럼 감시하던 그 자가 죽었군." 말과 함께 격렬한 고통의 물결이 리머스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간첩죄에 대한 자네의 재판은 좀 이론적인 것이야. 그러니까 나는 피들러 사건의 재판을 공개하라고 주장하고 있지. 그것이 또 최고회의 간부들의 뜻이기도 한 것 같아." "내 자백이 필요한 것이겠지?" "그렇지." "다시 말하자면 자네는 아직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말이 되겠군." "증거는 잡을 수가 있어. 자네의 자백을 받게 되니까." 문트의 목소리에 위협하고 있는 기색은 없었다. 거드름을 피우거나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자네의 경우엔 정상참작의 여지가 충분히 있어. 자네는 영국 첩보부로부터 압력을 받았어. 공금횡령죄를 추궁당해서 그것 때문에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공작에 가담하도록 강요되었지. 법정은 그런 경우에 범한 죄에는 동정을 하게 되네." 리머스는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공금횡령으로 문책당한 것을 어떻게 알았나?" 그러나 문트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들러는 경솔했어." 문트가 말했다. "나는 피터스가 보낸 보고서를 읽고 즉시 그것을 알았지. 자네가 위장침투된 인간이라는 것, 피들러가 그 함정에 빠지게 될 듯하다는 것을. 피들러는 처음부터 나를 싫어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물론 너희 쪽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 교묘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어. 누가 생각해냈는지 말해 봐. 스마일리인가? 그 자가 한 짓인가?" 이번에는 리머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피들러가 직접 조사한 심문조서를 보고 싶었어. 내게 보내라고 했는데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어물거리더군. 그래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 그런데 그는 어제 그것을 최고회의 간부들에게 보냈어. 그러면서도 내게는 그 사본도 보내지 않은 거야. 런던의 성공이지. 그곳에는 상당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는 것 같아." 리머스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네가 스마일리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젠가?" 문트가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물음에 대해서 리머스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그 순간 머리에 격심한 고통이 덮쳐왔다. "마지막에 만난 것이 언제야?" 문트가 다시 물었다. "기억이 없어." 리머스는 간신히 대답했다. "실제론 스마일리는 지금 우리 조직에서 빠져 있어. 지금은 그저 가끔씩 일을 돕고 있을 뿐이고." "그는 분명 피터 길럼의 친구였지?" "그렇게 생각해." "길럼은 네가 본 바로는 동독 경제 상태를 연구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첩보부로서는 좀 색다른 부문 같단 말이야. 요원도 몇 안 되지. 자네에게 물어봐도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고." "사실 그대로야." 미친 듯이 맥박치는 머릿속에서 청각과 시각이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눈이 열기와 함께 아파오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마지막으로 스마일리를 본 것이 언제야?" "기억이 없어. 생각 안 나." 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기억력이 뛰어난 친구야.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제일 마지막에 만난 것이 언젠가 하는 것은 어떤 인간이라도 기억해낼 수 있는 거야. 어때,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그 만난 것은 자네가 베를린에서 귀국한 뒤인가 아닌가 하고." "뒤라고 생각해. 우연히 만났어. 그래 그건 관공서 안에서였어. 그것도 딱 한 번. 런던에서지." 리머스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땀이 이마에서 배어나오고 있었다. "문트, 나는 이 이상 말 못하겠어. 가슴이.... 토할 것 같아." "애시가 자네를 잡으려다가 결국은 함정에 스스로 빠지고 말았어. 그때 자네와 함께 식사를 했어, 그렇지?" "사실이야, 함께 식사를 했어." "식사는 4시에 끝났어. 그 다음에 너는 어디로 갔나?" "시티 (런던의 금융상업 중심지) 로 갔을 거야.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문트, 괴로워." 그는 머리를 싸안고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어 머리가 부서지는 것 같아...."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갔나? 왜 미행을 따돌렸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애써서 미행을 따돌렸나?" 리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두 팔 사이에 파묻었다. "이 질문에만 대답해. 그 다음에는 천천히 쉬어도 좋아. 침대에 누워도 좋고. 자고 싶으면 자도 된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아까 그 방으로 돌려보내겠다. 알겠나, 리머스? 다시 수갑을 채우고 마룻바닥에 짐승처럼 뒹굴게 돼. 자, 어디에 갔었지?" 머리를 울리는 피의 흐름이 점점 맹렬해지더니 방안 전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의에서 소리가 들리고 발자국이 소란스럽게 울렸다. 반짝반짝하는 것이 망막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소리와 중심이 그의 몸에서 멀어져 갔다. 누군가가 고함치고 있는데 그를 향한 것은 아니다.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문을 연 것이 분명하다. 방안은 사람으로 가득차 있다. 그 사람들 모두가 고함치고 있었다. 그 무리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몇 사람인가는 밖으로 나갔다. 걸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발자국 소리가 머리를 때리는 맥박이 되어 울렸다. 그 울림도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처럼 차가운 천이 이마에 덮여지고 부드러운 손이 그의 몸을 들어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침대였다. 그의 발치에 피들러가 서 있었다. 여송연을 입에 물고...... 제18장 - 피들러 리머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트가 있는 침대. 이곳 창에는 쇠창살이 안 보인다. 커튼과 반투명 유리가 있을 뿐이다. 연한 녹색 벽, 짙은 녹색의 리놀륨. 그리고 피들러가 담배를 물고 서 있다. 간호원이 식사를 가져왔다. 달걀에 걸죽한 수프와 과일.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지금은 먹어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먹고 있는 모습을 피들러는 바라보면서 물었다. "기분은 어때?" "말로 할 수 없어." "하지만 좋아지고 있겠지?" "그런가 봐." 그런 다음 망설이다가, "그 병신 같은 놈! 나를 이 꼴로 만들었어." "자네는 감시병을 죽였어. 기억나지?" "죽인 건 알아. 그놈이 그런 이상한 수법으로 나오려면 그런 정도의 저항은 각오해야지. 나를 잡을 생각이었다면 처음 자네와 함께 있을 때가 좋았겠지. 불을 모두 끄고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지? 계획이 지나친 것 아닌가?" "계획이 지나친 것은 이 나라의 경향이 그래. 다른 나라라면 효율만을 생각하면 되겠지만." 거기서 또 잠시 말이 끊겼다가 리머스가 물었다. "자네는 어떤 식으로 당했나?" "나 역시 심문을 받으면서는 좀 당했지." "문트의 부하들에게 말인가?" "문트의 부하와 또 문트에게서 직접.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어." "그것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한 놈들의 수법이지." "아니, 아니야. 내가 말하는 것은 육체적 의미가 아니야. 육체적으로는 악몽 같은 것이라고 체념을 해버릴 수도 있어. 아다시피 문트는 나를 쓰러뜨리는 것에 특별한 흥미를 갖고 있어. 입을 열게 하는 것 말고도." "자네가 그 이야기를 조작했다는 건가?" "나는 유태인이니까." "그렇게 됐군." 리머스는 애처로운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특별하게 취급된 이유야. 그 동안 그는 끊임없이 내게다 대고 속삭였어. 이상한 기분이었어." "그가 뭐라고 했기에?" 피들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중얼거리듯이, "그것도 이제는 끝났어." "뭐야? 무슨 일이 생겼나?" "우리가 체포된 날 낮에 나는 문트를 인민의 적으로서 최고회의에 체포영장을 청구해 두었지." "하지만 이상하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피들러! 그 사내가 이제 와서...." "자네 건 말고도 그에게 불리한 증거가 하나둘이 아니야. 나는 지난 3년 동안 하나하나 증거를 수집해 왔어. 자네도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증언을 해주었지. 그렇게 됐을 뿐이야. 입증이 되었다고 생각되어 나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해서 최고회의 구성원 전원에게 보냈지. 물론 문트는 제외하고. 간부들은 그것을 내가 체포영장을 청구한 날 받았어." "우리가 체포된 날인가?" "그렇게 되지. 문트가 저항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어. 최고회의 간부들 중에 그의 동조자가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적어도 그의 예스맨이 몇인가는 있어. 내 보고서를 보고는 깜짝 놀라 즉시 그에게 연락을 한 패거리들이지.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그가 패배할 것을 나도 물론 알고 있었어. 최고회의는 그를 내쫓기 위해서 필요한 무기는 갖추고 있지. 보고서를 받아본 그들은 나와 자네가 심문당하던 며칠 동안에 여러 번 그것을 읽어보고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겠지. 자기 혼자만이 아니고 전원이 본 이상 방치해 둘 수는 없다고 생각되어 드디어 행동에 나선 거야. 공통의 두려움, 공통의 약점, 공통의 지식이 그들에게 행동을 서두르도록 채찍질한 거지. 문트에게 반기를 들지 않고는 그들 자신이 위험해지거든. 그래서 청문회 개최가 결정된 거야." "청문회?" "물론 비공개이며 내일 열릴 예정이야. 문트는 구속되어 있어." "다른 증거란 대체 어떤 것인가? 자네가 수집했다는 거 말일세?" "곧 알게 돼." 피들러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은 자네가 직접 입회하게 되니까." 그 뒤 한동안 피들러는 아무 말도 않고 리머스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청문회 말인데," 리머스가 말했다.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간부회의장이 주재하지. 인민을 재판하기 위한 법정은 아니야. 이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하네. 주안점은 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진상을 밝혀내는 데에 있어. 조사위원회 같은 취지의 것이야. 최고회의가 개최를 명하고 일정한 문제에 대하여 조사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지. 그 보고에는 청문회의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런 사건에서는 그 의견이 판결과 동일한 효과를 갖게 돼. 그러나 그것은 공표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최고회의의 사무처리 중 일부로서 실현되게 된다네." "운영은? 검찰관이나 변호인은 어떻게 되나? 재판관에 해당하는 사람은 물론 있겠지만." 피들러는 대답했다. "재판관은 셋. 사실상 검사와 변호사에 해당되는 사람도 있어. 내일 법정에 나가보면 알겠지만 내가 문트의 죄를 입증하는 검사의 처지고 카르덴이 그의 변호를 맡고 있어." "카르덴?" 피들러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 사람은 아주 착실한 인물인데 겉보기에는 사람 좋은 시골 의사처럼 보이지. 그 자그마한 사람은 부켄발트에 살고 있네." "왜 문트는 스스로 해명하지 않나?" "카르덴이 변호해 주기를 문트는 바라고 있어. 카르덴은 증인을 신청하겠다고 했네."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자네가 문제일세." 거기서 다시 말이 끊겼다. 끝에 가서 피들러는 생각을 가다듬어가며 말했다. "나는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어.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네. 그가 내게 상처를 입힌 것이 나에게 대한 증오, 나에게 대한 질투에서 생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별로 마음 쓰이는 일은 아니었어. 알겠나, 내 마음을, 리머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야. 아무리 심한 고통이라도 오랫동안 계속되면 나중에는 별로 마음 쓰지 않게 되는 것일세.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지. '정신을 잃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는 사이에 이 고통에도 견딜 수 있게 된다. 자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길들여지게 해줄 것이다.' 하고. 고통이란 바이올린의 줄처럼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되는 데까지 높일 수 있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이에게 청력을 길러주려고 연습시킬 때처럼 자연의 힘이 차츰 성능을 발휘하게 되는 걸세. 문트는 끊임없이 나에게 속삭였지. 이 유태인 놈아. 나는 알 수 있었어. 분명하게 알 수 있었지. 그가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위한 것인가 당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 나 개인이 미웠기 때문인가 하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어. 그가 증오하고 있었던 것은...." "그만, 됐네." 리머스는 단언하듯이 말했다. "자네는 알고 있겠지. 그놈은 악인이야." "그래." 피들러도 말했다. "그는 악인이야." 그는 흥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모양이다. "나는 자네 일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네. 자네와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았지. 기억하고 있겠지, 모터를?" "모터?" 피들러는 웃으며, "이건 내 잘못이군. 너무 직역(直譯)을 해버렸어. 내가 말하는 모터란 동력, 즉 엔진을 움직이게 하는 것, 기독교인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미안하지만 난 기독교인은 아닐세." 피들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니, 자네는 내 말의 뜻을 알고 있어." 그러고는 또 미소를 짓고서, "자네 자신도 관여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일세.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문트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나? 그는 나에게 자백하라고 했어.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고 계획한 영국 스파이들에게 협력했다는 자백을 받고 싶었지. 자네는 그가 말하는 취지를 물론 알고 있었을 거야. 이것은 모두 영국 첩보부가 세운 작전이며 목표는 우리를 유혹해서 -- 아니, 나 하나라고 해도 좋지만 -- 우리를 부추겨서 우리 첩보부가 자랑하는 최상의 인물을 없애려 했다는 거야.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무기로 우리 쪽을 겨냥하게 했다는 것이지." "그 친구가 내게도 그런 증언을 시키려고 했지." 리머스는 별로 관심도 없는 듯이, "마치 나 혼자서 이 이야기 전부를 꾸미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 이야기야. 가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 나는 단지 하나의 가설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만 -- 자네가 그런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면 자네들에게는 죄없는 인간을 장사지낼 의도가 있었던 것이 되네." "문트는 사람을 죽인 인간이야." "자네들의 목표가 그가 아니라고 가정을 한다면 말이야. 죽이려는 상대가 문트가 아니고 나라고 한다면? 런던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사정에 따라서 다르겠지. 그럴 필요가 있다고만 한다면...." "그렇겠지." 피들러는 만족한 듯이 말했다. "필요가 있다면 이라. 스탈린과 같군. 교통사고와 통계표.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네." "왜?" 피들러가 말했다. "자네는 잠을 좀 자두게.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하게. 그것이 무엇이든 가져다 주겠네. 내일은 자네도 말할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문앞에까지 걸어가더니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어. 그것은 악몽 같은 것이야." 이윽고 리머스는 깊은 잠에 빠졌다. 피들러가 아군이며 가까운 장래에 문트를 사형대에 보낼 수가 있게 되어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제19장 - 지부회의 리즈는 라이프치히에서 행복했다. 소박한 생활이 오히려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희생의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가 묵고 있는 그 조그만 집은 가난하고 어두컴컴했다. 부족한 식사마저도 거의 모두가 아이들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와 뤼만 부인은 식사때마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뤼만 부인은 라이프치히 노이엔하겐 지부의 지부장이다. 작은 몸집에 머리는 이미 백발이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교외의 자갈 채취장 감독이었다. 리즈는 성직자 단체의 합숙생활 같다고 생각했다. 수도원이라든가 기부츠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라든가 그런 곳에서 하는 생활의 즐거움. 배부르게 하지 않아야 세상이 좋아질 것으로 느껴졌다. 리즈는 본래 어느 정도는 독일어를 알고 있었다. 큰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생각하던 것보다는 쉽게 기억이 되살아나서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상대로 말을 걸어보았더니 아이들도 웃으면서 이런저런 지적을 해주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대했다.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 온 것으로 알았는지 경원하는 눈치마저 보이더니 3일째가 되니까 용기를 내어 ‘저쪽 나라’에서 초콜렛도 가져왔는지 물었다. 그녀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며 오히려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도 그녀를 거리낌없이 대해 주었다. 밤에는 당의 일이 있었다. 당비를 체납한다든지 집회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팜플렛을 나누어주고 다닐 때도 있었다. 지부장 모두가 모이는 지구위원회에 참석해서 농업생산물의 중앙배급제도에 관한 토론을 듣는 날도 있고 근교의 공구공장에서 열린 노동자협의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4일째, 그것은 목요일이었는데 이 지구 지부의 모임이 있었다. 이것은 리즈에게는 다시없이 신나는 경험이었다. 여기서 배운 실례를 거울삼아 언젠가는 그녀의 손으로 베이스워터의 지부회의를 개혁해 나갈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의 토의는 굉장한 제목이었다. ‘두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공존.’ 참석자도 기록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 지부원에게 통지가 나갔으며 그날 밤은 인근 지구에 비슷한 종류의 집회가 없는 것까지 미리 조사해 두었었다. 거기에 또, 늦게까지 쇼핑을 할 수 있는 날도 아니었다. 참석자는 7명이었다. 7명의 당원과 리즈, 지부장, 거기에 지구위원회의 남자. 리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꾸미고 있었으나 사실은 굉장히 흥분하고 있었다. 강연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도 마음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겨우 그것이 가능해지자 그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긴 복합어가 튀어나왔다. 베이스워터의 회합과 아주 흡사했다. 교회에 다니던 무렵 주중에 열리던 저녁 기도회를 꼭 닮았다. 비슷비슷한 무표정한 얼굴들, 경건하고 적은 인원의 모임, 비슷하게 어마어마한 의식과잉, 몇 안 되는 사람들 손에 위대한 사상이 쥐어져 있는 듯한 기분.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녀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 그녀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 모임은 절대적인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방해받을 수도 있고 부끄러운 꼴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발을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러나 7명의 당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의미가 없다고 하기보다는 더욱 나쁜 존재이며, 이래 가지고는 조직이 안 된 대중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무기력의 표본 같은 것으로서 이 사람들에게는 실망했다. 회의장은 베이스워터의 학교 교실보다는 나았다. 그렇다고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다. 베이스워터 때에는 회의장 물색에 흥미를 느낄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당의 모임이라는 것을 숨기고 전혀 다른 집회처럼 보이게 했다. 술집 안쪽 구석방을 빌리기도 하고 아디나 카페의 방 하나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사람들 눈을 피해서 당원의 집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빌 헤이즐이 입당하게 되자, 중학교 교사인 그가 담당하고 있는 교실을 제공해 주었다. 거기에도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또 교장은 빌이 연극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도 사실이 밝혀질까 봐 걱정이 되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평화 홀’의 실내장식은 베이스워터의 것보다도 더욱 못하다. 맨 콩크리트 벽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레닌의 사진. 어째서 이곳 사람들은 사진틀을 이렇게 멋없는 것을 쓸까? 오르간의 파이프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가구들은 하나같이 먼지투성이이다. 파시스트의 장례식장에서 옮겨다놓은 느낌이다. 알렉이 한 말이 적절한 것이었을까? '당신은 필요한 것을 옳다고 믿고 있을 뿐이야.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는 그 자체의 가치나 기능이 없어.' 또는 이런 말도 했다. '개는 가려운 데를 긁지. 개가 다르면 가려운 곳도 달라.'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알렉이 한 말은 틀렸어. 천만의 말씀이야. 평화, 자유, 평등, 그 모두가 진실이야.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사실이야.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 그 법칙이 올바르다는 것은 당이 증명해 주고 있어. 아니야. 알렉의 말은 틀린 거야. 진리는 개인의 바깥에 존재해. 그것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어. 개인은 거기에 따라야 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희생물이 되는 거야. 당은 역사의 선구자, 평화를 위한 투쟁의 전위.... 그녀는 붉게 인쇄된 활자를 훑어보면서 약간의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참석자가 왜 이렇게 적을까? 7명은 너무 적다. 그 7명이 하나같이 기분나쁜 얼굴이다. 기분이 나쁜 것은 배가 고파서일까? 모임은 끝났다. 리즈는 뤼만 부인이 뒤처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은 문 옆에 있는 커다란 책상에서 팔다가 남은 책들을 그러모아서 출석부에 기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외투를 입었다. 그날 밤 밖은 추웠기 때문이다. 강연한 사람은 일반 토론에는 입회하지 않고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 버렸다. 참석자가 너무 적어서 화가 난 것일까? 하고 리즈는 생각했다. 뤼만 부인은 문 옆에 서서 손가락을 전등 스위치에 대고 있었다. 그때 바깥 어두운 곳에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문앞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리즈는 문득 애시가 왔나 하고 생각했다. 키가 큰 금발의 남자로서 역시 가죽 단추가 달린 비옷을 입고 있었다. "뤼만 동지요?" 남자가 물었다. "예." "영국의 골드 동지와 만나고 싶은데, 그녀는 동지와 함께 있소?" "제가 엘리자베스 골드입니다." 그녀가 말하니 남자는 홀에 들어와서 등뒤로 문을 닫았다. 그래서 광선이 정면에서 그의 얼굴을 비쳤다. "나는 이 지구의 위원이며 할텐이라 하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아직 문 입구에 서 있는 뤼만 부인에게 무슨 서류인가를 내밀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즈를 보았다. "최고회의의 위촉으로 골드 동지에게 말을 전하러 왔소." 하고 그 남자는 리즈를 향해, "이제부터 당신의 일정은 변경됩니다. 특별회의에 참석하도록 초대장이 나왔습니다." "어머." 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최고회의에까지 내 이름이 알려져 있을까? 꿈도 못 꾸던 일인데.... "이것은 우리가 보내는 호의입니다." "하지만 전 뤼만 부인에게...." 어째야 할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리즈는 입을 다물었다. "뤼만 동지도 이 사정은 이해해 줄 겁니다." 뤼만 부인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예, 물론이지요." "특별회의는 어디서 열리나요?" 할텐이 대답했다. "그 장소 문제도 있으므로 오늘밤 중으로 출발해야 됩니다. 길이 꽤 멉니다. 괴를리츠 근처라서." "괴를리츠라면.... 어느 쪽인가요?" 또 뤼만 부인이 다급히 말했다. "동부예요. 폴란드와의 국경 근처." "우선 차로 집에까지 모시겠습니다. 짐을 챙기시고 곧 출발해야 됩니다." "오늘밤 지금 곧장 말인가요?" "그렇소." 할텐은 리즈에게 꾸물거릴 틈이 없다고 하는 듯했다. 검은색 대형차가 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사가 딸려 있었으며 본네트에는 깃발을 세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군용차인가 싶기도 했다. 제20장 - 청문회 법정은 학교 교실 정도의 넓이였다. 한쪽에 5~6개의 벤치를 놓고 거기에 경비를 맡은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 속에 방청객의 얼굴도 섞여 있었다. 최고회의의 인물들과 고급 관리들이다. 반대쪽은 이 청문회의 위원석인데 세 명의 남자가 윤기도 없는 오크 재(材)의 탁자를 앞에 두고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천정에서는 합판으로 만든 크고 붉은 별이 세 가닥 쇠줄에 매달려 있었다. 벽은 리머스의 감방과 같이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탁자에 의자를 밀어붙이듯이 하고 두 남자가 마주보고 있다. 하나는 60세 정도에다 검은 옷에 회색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 독일에서는 시골 교회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복장을 한 남자이고, 마주보고 있는 또 한 사람은 피들러였다. 리머스는 경비병 두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뒷자리에 앉았다. 방청객들 머리 사이로 문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도 역시 경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금발 머리를 짧게 깎고 유난히 어깨가 넓은 그의 몸을 눈에 익은 죄수복이 감싸고 있었다. 리머스에게는 자신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데 문트가 죄수복으로 출정해 있는 것이 이 법정의 분위기를 -- 피들러의 영향이라고 할까 -- 기묘할 정도로 잘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리머스가 자리에 앉으니 곧 탁자의 중앙에서 의장이 벨을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서 그쪽을 본 순간 그의 전신을 전율 같은 것이 뚫고 지나갔다. 의장은 여자였던 것이다. 여지껏 모르고 있었던 것은 반드시 부주의라고 할 수만도 없었다. 나이는 50쯤. 눈이 작고 가무잡잡한 피부. 머리를 남자처럼 깎았기 때문이다. 소련 주부들이 즐겨 입는 활동적인 검은색 튜닉 (짧은 윗도리) 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보초에게 문을 닫으라고 손짓하고는 서두도 없이 말을 시작했다. "본 청문회의 취지는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재판이 비공개라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이것이 최고회의의 명령에 의한 청문회라는 것도. 우리는 최고회의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도 미리 말해 둡니다.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증언은 무엇이든지 청취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피들러를 가리켰다. "피들러 동지, 먼저 발언해도 좋소." 피들러는 일어섰다. 탁자를 향해서 가볍게 인사하고는 곁에 두었던 서류가방 안에서 한쪽을 검은 끈으로 묶은 서류 다발을 꺼냈다. 그런 다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빠른 말투가 유창하게 흘러나왔지만 어딘지 모르게 망설이고 있는 듯한 구석이 있었으며, 리머스로서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리머스는 그것이 상관을 사형대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사나이의 역할에 알맞는 연기라고 해석했다. "이미 아시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만일을 위해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문트 동지의 행동에 대한 보고서를 최고회의에 제출한 그날 이 피들러는 전향자인 리머스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똑같이 구속되고 똑같이 가혹한 강압으로 이 중대한 고발이 모두가 우리의 충실한 동지를 내쫓으려 음모를 꾸민 파시스트의 모략이라고 자백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고서를 읽어보시면 리머스가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된 경위, 우리가 그를 붙들어 그의 나라를 배반하도록 설득하고 우리 독일민주공화국에까지 데리고 온 경위도 아실 줄 압니다. 리머스의 행동이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는 아직도 문트가 우리가 지적하듯이 영국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을 보더라도 리머스를 적의 첩보부가 위장침투시킨 함정이라고 보는 것은 웃기는 견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수사의 주도권은 완전히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리머스가 제공한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증언은 과거 3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우리가 계속해 온 조사의 마지막 마무리를 지어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사의 경과는 서류로 작성하여 여러분께 올렸으므로 더 이상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트 동지에 대한 이 고발의 취지는 그가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로서는 그 밖의 다른 죄로 고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전부터 영국 첩보부에 정보를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광범위한 여러 부서와 국을 비록 무의식이었다고는 하지만 부르주아 국가의 예속자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는 침략적인 반당(反黨) 그룹을 비호해 주고 그 보수로서 거액의 외국 화폐를 수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과는 그 모두가 적의 앞잡이였기 때문에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스_디터 문트는 제국주의자의 스파이였습니다. 이 범죄의 형벌은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며, 우리의 형사법전에는 이 이상의 중대한 죄는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국가를 이보다 더 위태롭게 하는 범죄는 없고, 우리 당 기관이 이보다 더 철저히 감시해야 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다시 계속했다. "문트 동지는 42세. 현재 인민방위성의 차관이라는 직위에 있습니다. 미혼이며 정상이 아니라고까지 할 수 있는 역량의 소유자입니다. 당의 이익을 위해 몸 바쳐 왔고 방위를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행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경력의 일부를 말씀드리자면 28세 때에 첩보부에 투신하여 필요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견습기간을 보낸 다음에는 스칸디나비아 제국 --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지에서 특수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땅에서 첩보망의 확립에 성공하고 적 진영 안에서 파시즘 선동자들과의 투쟁에 활약해 왔습니다. 당시 그가 첩보부 내에서 최우수 인물이었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지 여러분, 그가 그 활동의 초기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사실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대전 직후 그의 노력에 의해서 그 땅에 첩보망이 확립된 사실이 그 뒤 수년이 지난 다음에는 그가 핀란드,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구실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원호물이 되고 그 반역적 행위의 값으로 그에게 외국은행으로부터 수천 달러를 끌어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문트 동지를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파시스트들에 의한 희생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겁 많고 나약한 단계를 지난 탐욕이야말로 그의 반역행위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거부(巨富)를 쌓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의 금전욕을 만족시킨 교묘한 방법이 오히려 사직당국이 그 범행 흔적을 잡는 단서가 된 것입니다." 피들러는 말을 멈추고 법정 안을 둘러보았다. 그 눈은 열기를 띠며 빛나고 있었다. 리머스는 넋이 나간 듯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불행한 사건을 철저히 다스려 그 밖의 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들러는 외쳐댔다. "악랄한 범죄를 꾸미는 자, 야음이나 남 모르는 시간에 부정한 계획을 세우는 무리들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방청인들 속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이런 범죄를 꾸미고 인민의 피를 팔아먹으려 획책해도 결코 감시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피들러의 연설은 벽을 하얗게 칠한 좁은 방안에 모인 몇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군중을 향해서 절규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리머스에게는 피들러가 목숨을 걸고 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문회, 고발된 인간, 증인들의 행동은 모두 정치적인 비난 밖에 있었다. 이런 사건에 반고발(反告發)이 예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피들러도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의 등뒤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의 논쟁은 기록에 남게 되고, 그것을 논리로 때려부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피들러는 책상에 올려놓은 파일을 펼치고, "1956 년말, 문트는 동독 철강조사단의 일원으로 런던에 부임했습니다. 그 임무 뒤에서는 망명자 그룹의 파괴공작에 종사했었습니다. 그 작업의 과정에서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는 멋지게 임무를 완수하고 굉장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여기서 리머스는 중앙의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의 위원을 주시했다. 의장 왼쪽에 겉보기엔 젊은 남자가 눈을 반쯤은 감고 피들러의 변론을 듣고 있었다. 빗질도 하지 않은 장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혈색 나쁜 여윈 얼굴은 금욕주의자를 연상시켰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앞에 놓인 서류 다발을 신경질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리머스가 보기에는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문트 편 중 한 사람인 듯했다. 반대쪽에는 약간 나이 든 남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약간 대머리진 머리에 개방적인 느낌이며 정말로 호인 같은 얼굴이다. 사람이 너무 좋아 아둔할 정도가 아닐까 하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문트의 운명은 이 세 위원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마도 얼굴이 젊게 보이는 남자가 그의 변호를 맡고 여자 의장이 유죄를 논할 것이다. 거기서 세 번째 남자는 양자의 의견이 정반대인 것에 당황해 하다가 결국엔 의장에게 동조하게 되지 않을까. 피들러는 변론을 계속했다. "그가 런던 근무를 끝낼 때쯤 정세가 새롭게 전개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커다란 위험 속에 있었습니다만 마침내 영국 비밀경찰과 충돌을 일으켜 체포영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문트는 외교관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 NATO와 영국은 아직도 우리 나라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 지하로 잠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항만에 감시의 눈이 번득이고 그의 사진과 인상서는 영국 전역에 배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지하에 숨어든 지 이틀 뒤, 문트 동지는 택시로 런던 공항으로 가서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기가 막힌 솜씨군.’ ‘멋지게 해냈군.’ 하고 말씀들 하시겠지요. 사실 멋지게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도로, 철도, 선박, 항공, 어떤 루트도 영국의 전 경찰의 감시하에 있었습니다만 문트 동지는 런던 공항에서 항공기로 탈출했던 겁니다. 기가 막히다고 할 수밖에 달리 찬사를 보낼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동지 여러분께서도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시는 것은 아닐는지요? 문트가 영국 본토에서 탈출한 것은 너무도 멋지고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영국 관리와의 공모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뒷자리에서 저절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처음보다는 한결 거칠어진 느낌이다. "진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문트는 영국 정부에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단시간이기는 하지만 역사적인 접촉이 있었고, 문트는 양자택일에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빛나는 생애를 제국주의 나라의 감옥에서 마치느냐, 아니면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본국으로 극적인 귀환을 하고서 그 대가로 그들과의 약속을 실행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영국 정부가 제시한 귀국 조건은 문트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에 대해 영국측은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에는 당근을, 그리고 그 등뒤에서는 곤봉을 휘두르고 있으므로 문트는 마침내 변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영국측이 취해야 할 수단은 문트의 지위를 승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입증은 불가능하지만 서유럽의 첩보망 파괴에 문트가 그처럼 성공을 거둔 것도 그 배후에는 제국주의 진영의 수뇌부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서유럽측이 그 충실한 협력자를 위해 그들 소모인원을 희생시킴으로써 문트의 권력을 증대시켰다고 보는 것이 반드시 망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물론 입증을 한 것은 아닙니다만 수집된 증거에 의하면 이런 가정이 충분히 성립된다고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1960년, 문트 동지가 동독 첩보부의 대적 첩보부문을 주관하는 지위에 오르자 세계 각처의 첩보망으로부터 우리의 상층부에 스파이가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카를 리메크는 적의 스파이였습니다. 그가 제거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화근을 잘라 없앴다고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잠입에 관한 소문은 그 뒤에도 여전히 소멸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말, 지난날 우리의 협력자였던 사나이가 레바논 주재 영국 스파이에게 접근했습니다. 이것은 그 직후에 탐지된 일입니다만 전에 일하던 우리 첩보부 중에서 두 부문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팔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제안은 곧 런던에 통보되었습니다만, 런던에서는 너무도 간단히 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사실이며, 그에 대한 해석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제공된 정보가 이미 영국 첩보부에 입수되어 있었다고 말입니다. 더구나 그 정보란 가장 최신의 것이었다는 점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60년 중엽 이후부터 우리 해외 첩보요원은 그 수가 놀랄 만큼 적어져 갔습니다. 파견된 지 불과 수 주일 만에 체포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적이 우리 첩보요원을 역스파이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 수는 미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럴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기억에 잘못이 없다면 1961년 봄으로 생각됩니다만, 우리에게 우연한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만 모종의 방법을 통해 우리 첩보부의 정보를 얼마나 영국측이 쥐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것이었으며, 정확성은 물론이고 놀랄 만큼 최신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문트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상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의외의 사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손으로 조사를 시작하고 있으니, 저에게는 손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선입관 탓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고백합니다만 그 순간 문득 의혹이 저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너무도 막연한 것이며 지나치게 공상적이라고도 생각되었습니다만, 그 정보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문트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징후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만 적국으로 새어나가는 정보 출처로서 의혹을 가장 안 받는 인물은 대적 첩보부문을 통괄하는 자리에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여기에 의혹을 갖는 것만큼 황당무계하고 멜로드라마틱한 것은 없습니다. 동조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입에 담는 사람이야! 이 피들러 자신도 의식적으로 이 추론(推論)을 피해 온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 망설임은 유감스럽게도 잘못이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번에 결정적인 증거가 입수되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증거를 제출하고자 합니다." 그는 뒤를 돌아보고 가장 뒷자리를 향해, "리머스." 하고 말했다. 양쪽의 경비병이 일어나서 리머스를 재촉했다. 그는 방청석 사이로 난 폭 50 센티 정도의 통로를 지나 방의 중앙에까지 나아갔다. 경비병 하나가 탁자를 향해서 서도록 리머스에게 지시했다. 불과 2미터 앞에 피들러는 서 있었다. 먼저 의장이 물었다. "증인의 이름은?" "알렉 리머스." "나이는?" "50." "결혼은 했는가?" "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현재는 독신입니다." "직업은?" "도서관원." 피들러가 화가 난 듯 끼어들었다. "자네는 전에 영국 첩보부의 요원이었잖나?" "그렇습니다. 1년 전까지는." 피들러는 다시 계속했다. "청문회 위원들께서는 자네의 심문조서를 읽으셨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자네가 작년 5월 피터 길럼과 주고받은 대화를 보고해 주기 바란다." "문트와 관계된 것 말씀입니까?" "그렇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나는 당시 서커스(첩보부)에 있었습니다. 런던의 근무처인 케임브리지 서커스에 있는 첩보부 본부. 그때 우연히 복도에서 피터와 지나다가 만났습니다. 나는 그가 페난 사건에 관계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조지 스마일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디터 프라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 이 사나이는 그 사건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문트, 그 사람도 관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터는 매스턴이 - 매스턴은 그 사건의 담당관이었습니다 - 매스턴이 문트의 체포를 원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피들러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 말을 자네는 어떻게 해석했나?" "페난 사건을 혼란시킨 것이 매스턴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문트가 중앙형사재판소에 끌려나오게 되면 필요 이상의 것들이 들춰지게 되니, 그것을 매스턴이 원치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의장이 입을 열었다. "문트가 체포되면 법적으로 기소되는가?" "누구의 손에 잡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경찰이 체포한 경우라면 당연히 내무성에서 보고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권력이 압력을 가해도 그가 법적으로 기소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음에는 피들러가 질문했다. "만일 자네들 첩보부에서 체포한 경우에는?" "문제가 전혀 달라집니다. 아마 심문이 끝나면 이곳 동독에 갇혀 있는 우리 요원과의 교환을 제안할 것입니다. 아니면 그에게 티켓을 줄 겁니다." "그 티켓을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처분하는 것입니다." "죽이는가?" 질문은 다시 피들러에게 돌아왔다. 청문위원들은 앞에 놓인 파일에 뭔가를 열심히 써넣고 있었다. "어떻게 처분하는지는 모르지요. 그런 문제에는 관여해 본 일이 없으니까." "영국측의 이익을 위하여 역스파이로 쓰는 일은 없는가?" "있겠지요. 하지만 성공한 적은 없습니다." "어떻게 알지?" "몇 번이나 말했었습니다. 나는 여느 사무직원과는 다르다고. 베를린이라는 현지에서 4년 동안이나 지휘를 맡았었으니까. 만일 문트가 우리의 요원이었다면 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지요." "그렇군." 피들러는 그 답변에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청문회에 참석해 있는 모두를 만족시켰다고는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음은 질문을 ‘롤링 스톤’ 작전으로 옮겨서 리머스의 입에서 그 상세한 설명을 듣고자 했다. 극비 파일의 열람에 지나치게 복잡할 만큼 주도면밀한 조치가 취해져 있었던 점에서부터 코펜하겐과 헬싱키의 은행에 문의편지를 보내고 그 회답을 한 통 받게 된 사실까지 진술하게 한 다음 피들러는 위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헬싱키에서는 회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문제의 개요는 이렇게 됩니다. 리머스는 6월 15일에 코펜하겐의 은행에 돈을 입금시켰습니다. 가지고 계시는 서류에 은행에서 보내온 회신을 복사하여 첨부해 두었습니다. 왕실 스칸디나비아 은행이 로버트 랭에게 보낸 것으로서 - 로버트 랭이란 리머스가 코펜하겐에서 구좌를 개설하면서 사용한 이름입니다 - 편지를 보셨습니까? 파일에 번호 12로 되어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입금액은 1만 달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주일 뒤에 공동예금자의 손으로 전액이 인출되었습니다만--" 하고 피들러는 가장 앞줄에 앉아서 꼼짝도 않는 문트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6월 21일에 명목상으로는 우리 첩보부의 비밀 사명을 띠고 코펜하겐에 간 것은 본인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곧 다시 계속했다. "이어서 리머스는 다시 예금을 하기 위해서 9월 24일경 헬싱키로 갔습니다." 거기서 목청을 더욱 높이고 문트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10월 3일 문트 동지는 핀란드에 잠입해 들어갔었습니다. 이번에도 첩보부의 특수이익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붙여졌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피들러는 천천히 위원석으로 돌아서서 소리를 낮추고 위압하듯이 물었다. "이 증거를 상황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일 그렇다고 하신다면 또 하나 들어주기시 바랍니다." 그리고 리머스 쪽을 바라보며, "증인, 자네는 베를린에서 활동중에 카를 리메크와 연락을 취했다. 사회주의통일당 최고회의의 전 서기 카를 리메크와. 그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 "그는 우리 요원이었습니다. 문트의 부하에게 사살되기 전까지는." "맞았어. 그는 문트의 부하에게 사살되었어. 문트 동지가 심문할 틈도 주지 않고 처형해 버린 수많은 스파이 중 하나였지. 그러나 그가 문트의 부하에게 살해당할 때까지 영국 첩보부의 요원이었던 것은 틀림없나?"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 자네들이 관리관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나이가 리메크와 만날 때의 모습을 말해 주게." "관리관은 카를과 만나기 위해서 런던에서 베를린에까지 찾아왔습니다. 카를은 우리가 쓰고 있는 요원 중에서도 가장 유능한 스파이였습니다.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됩니다만 관리관은 그와 만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피들러가 끼어들면서, "리메크는 신뢰를 받고 있었군?" "런던은 카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보에는 한 번도 잘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관리관의 의향을 듣고 나는 즉시 연락망을 통해 카를을 내 아파트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카를을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관리관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지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런던이 크게 노리는 것이 뭔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 무렵 정보가 중단되어 있었으므로 런던이 구실을 붙여서 직접 카를과 연락할 작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도록 준비했군. 그런 다음에는?" "처음부터 관리관에게서 15분 정도 자리에서 떠나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위스키가 떨어졌다면서 드종의 집에까지 가서 위스키를 두 잔쯤 마시고 술을 한 병 얻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뭐가요?" "관리관과 리메크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내용은?" "돌아왔을 때에는 이야기가 끝난 뒤였습니다." "질문은 이상일세. 자리에 돌아가도 좋네." 리머스가 뒤쪽 자기 자리에 돌아가자 피들러는 다시 위원들 쪽을 쳐다보고, "먼저, 스파이 리메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살된 카를 리메크 말입니다. 그가 베를린의 알렉 리머스에게 흘려보낸 정보 중 리머스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모두 리스트를 작성해서 여러분 앞에 제출해 놓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혐오해야 할 반역행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리메크는 영국 첩보부에 우리 첩보진의 전 조직에 대한 직책과 그 담당자에 관해서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리머스의 증언이 믿을 수 있다면, 그런 가장 비밀이 지켜져야 할 부문의 움직임을 팔아먹는 일이 그 사람 리메크에게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최고회의의 서기국원인 그 사나이는 의사록을 적에게 팔아넘겼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회의의 기록을 편집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첩보부의 비밀사항일 경우에 리메크를 그것에 얼마나 가까이 가도록 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경우 1959년말에 최고회의 중요기관 중 하나이며 우리 방첩조직의 구성문제를 토의하는 인민방위위원회에 있으면서 리메크와 함께 일한 자를 고려에 넣을 필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리메크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첩보부의 기록 파일을 열람해도 좋다고 허락한 자가 문제가 됩니다. 1959년 이후 (이 해에 문트가 영국에서 귀국한 점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리메크의 경력의 각 단계에서 그의 발탁을 요청하고 언제나 그를 책임 있는 자리에 앉혀온 자는 누굴까요? 말씀드리지요. 그 스파이 활동에 있어서 그를 비호할 수 있었던 특별한 지위에 있었던 인물, 한스_디터 문트 바로 그 사람입니다. 리메크가 어떻게 해서 베를린의 서유럽 스파이단과 맺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서 피크닉에 나간 드종의 차에 필름을 넘겨줄 수 있었는가? 리메크의 행동에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드종이 차를 세운 위치, 피크닉의 날짜,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그는 알아냈을까요? 리메크 자신은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드종의 뒤를 서베를린의 집에서부터 미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런 사실들을 아는 방법은 인민경찰의 보고밖에는 없습니다. 드종의 차가 검문소를 통과하면 우리 인민경찰은 절차상 방위성에 보고를 합니다. 문트는 그 보고를 이용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리메크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상이 한스_디터 문트에 대한 기소의 이유이며 리메크는 단지 하나의 꼭두각시이며 문트와 제국주의 국가를 잇는 하나의 고리에 불과했습니다!" 피들러는 여기에서 말을 멈추었다가 이윽고 다시 조용히 덧붙여서, "문트, 리메크, 리머스, 이것이 지휘계통을 나타내는 사슬이었습니다. 이 사슬의 고리는 가능한 한 다른 고리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첩보기술상 확립된 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따라서 리머스가 그 증언에서 문트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진술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런던의 지도자들이 완전한 방첩에 성공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롤링 스톤’이라고 불리는 작전이 특별한 조치하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피터 길럼이 주관하고 ‘롤링 스톤’ 파일의 열람자 명단에 추가된 부분이 우리 공화국의 경제정세의 조사기관이라고밖에는 리머스가 모르고 있는 사실, 또한 이 피터 길럼이 문트의 영국 주재 당시의 행동을 수사한 담당관 중 한 사람이었던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젊게 보이는 위원이 연필을 멈추고 피들러를 보았다. 차디찬 시선으로 날카롭게 질문했다. "리메크가 문트의 스파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문트는 그를 제거했소?" "문트에게는 달리 수단을 강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리메크는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부(情婦)가 우쭐하고 무분별한 마음에서 그를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문트는 한편으로는 리메크의 사살 명령을 내리고, 또 한편으로는 본인에게 도망치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각될 위험을 막아두고 뒷날 여자를 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문트가 쓴 수단을 생각해 보면 1959년 그가 독일로 귀국한 뒤에 영국 첩보부는 대기작전을 취했습니다. 문트가 과연 얼마나 협력할 것인가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지시를 내리고 한동안 동태를 보았지요. 물론 정보에는 보수를 보내고 더 중요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문트는 우리 첩보부 안에 있어서 - 당으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 그다지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실을 알 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알게 된 사실을 보고한 것입니다. 그 장소는 서베를린과 스칸디나비아 제국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처음에는 영국측도 신중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중 스파이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그 정보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이미 다른 루트를 통해 들어와 있는 정보와 비교 검토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들도 노다지 광맥을 찾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문트는 문트대로 그 반역행위를 그 동안 익힌 조직적이고 능률적인 방법으로 착착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 이 또한 추론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동지 여러분, 이 일에 관계한 저의 오랜 경험과 리머스의 증언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임을 알아주기시 바랍니다. 처음 몇 개월은 그들도 문트를 포함한 정보망의 확립에 나서지도 않고 문트를 개인적인 정보제공자로만 취급했습니다. 돈을 지불하고 지령을 내리는 연락도 베를린 기관과는 무관하게 했습니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런던에 위장한 소기관(小機關)을 설치했습니다. 그 주관자가 피터 길럼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에 있어서 문트를 그쪽 진영에 끌어들인 인물입니다.) 그 일의 내용은 첩보부 안에서도 일정한 범위 내의 요인 밖에는 몰랐습니다. '롤링스톤' 이라고 칭하는 특수조직으로서, 보수를 지불하고 보내온 정보를 신중하게 검토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문트가 영국의 스파이인 줄은 몰랐다고 하는 리머스의 주장은 이상 말씀드린 이유로서 사실상은 그의 손을 거쳐서 보수가 지불된 점과, 결국은 리메크를 중간에 세우고 문트가 입수한 정보가 런던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던 사실과 조금도 모순되는 점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9년말 문트는 런던의 수뇌들에게 최고회의 안에 런던과 문트 사이의 연락을 담당할 인물을 발견했다고 알렸습니다. 이것이 카를 리메크였습니다. 문트는 어떻게 리메크를 발견하게 되었을까요? 문트는 어떤 방법으로 리메크의 협력의사를 확인했을까요? 문트의 특수한 지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방위를 위해서 파일에 접근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화 도청, 통신물의 개봉, 감시자를 고용하는 일, 그 모두가 그에게는 자유로웠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확고한 권리로 심문할 수가 있었고 아주 상세히 사생활을 조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민의 방위를 위해서 준비된 무기를 살해 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혹을 없애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분노로 말미암아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성적인 자신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런던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는 이로써 아시리라고 생각됩니다. 문트의 정체는 절대 비밀을 유지하고서, 리메크의 가담을 허락하고 문트와 베를린 파견기관과의 간접적인 연락을 꾀했습니다. 이것이 리메크와 드종, 및 리머스와의 접선한 진상입니다. 리머스의 증언은 이 관점에서 비로소 올바른 해석을 내릴 수가 있으며 문트의 반역행위의 평가가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는 돌아서서 정면에서 똑바로 문트를 바라보고 소리쳤다. "여기에 우리의 배신자 테러리스트가 있습니다. 인민의 권리를 팔아먹은 인물이 있습니다! 이상으로 드릴 말씀은 대강 끝났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충실하고 민첩한 방위자로서 문트는 그 명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비밀을 폭로할 위험이 있는 몇 개의 입을 영원히 막아버린 것도 분명합니다. 파시스트적인 행위를 계속하고 첩보부 안에서의 자기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인민의 이름으로 살륙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이 이상 더 흉악한 범죄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점차 그를 둘러싸기 시작한 의혹으로부터 카를 리메크를 멀리해야겠다는 것이 리메크 사살의 명령을 내린 이유이며, 리메크의 정부 살해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원 여러분, 이 청문회의 결과를 최고회의에 보고하기에 앞서 이 범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겁내지 마시고 인식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한스_디터 문트에게 있어서 죽음이야말로 가장 자비로운 형벌이라고 저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21장 - 증인 의장은 얼굴을 들어 피들러와 마주보는 자리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왜소한 사나이에게 말했다. "카르덴 동지, 문트 동지를 위해서 변론을 시작해 주십시오. 증인 리머스에게 질문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비틀거리며 일어선 이 왜소한 사나이는 보기에도 순박한 농촌 출신의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으며, 머리는 이미 백발이었다. 금테 안경을 한 손으로 밀어올리며 비교적 느낌이 좋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문트 동지의 주장을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리머스의 증언은 새빨간 거짓말이며 고의인지 불행인지 우연인지 피들러 동지는 그 음모에 말려들었습니다. 우리 첩보부를 분열시켜 우리 사회주의 국가의 영예로운 방위기관의 파괴를 노리는 침략행위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본래부터 카를 리메크가 영국의 스파이였던 사실은 우리로서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충분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트가 리메크의 행동에 가담하여 당을 팔고 돈을 받았다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오해이며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고발에 도대체 어떤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원래 피들러 동지는 권세욕에 눈이 멀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리머스가 베를린에서 런던에 돌아가자마자 그 순간부터 모종 역할을 맡았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그는 타락의 길을 헤매는 연기를 멋지게 해냈습니다. 술에 빠져 스스로를 잃고 여기저기에서 빚을 지고 다니더니 끝에 가서는 대중이 보는 앞에서 상점 주인을 구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밖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반미적 감정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것이 일부러 우리 첩보기관의 주의를 끌기 위한 공작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영국 첩보기관이 문트 동지의 주위에 고의로 정황증거를 뿌려놓은 것이 확실합니다. 외국은행에 거금을 예입시키고 그 나라에 문트가 출장하는 날짜와 때를 맞추어 그 돈을 인출합니다. 피터 길럼의 입을 통해,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전해 들은 증거들을 흘려보냅니다. 관리관과 리메크를 비밀리에 만나게 하고 리머스가 없는 자리에서 중대한 의논을 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그 모두가 조작된 증거를 만들어 피들러 동지의 손에 들어가도록 계획된 공작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멋지게 성공하여 우리의 피들러 동지는 적의 비열한 계획에 한 몫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공화국에 있어서 가장 근면한 방위자 중 한 사람인 문트 동지를 죽여없애려는 흉악하기 짝이 없는 작전에 말입니다. 영국측이 이와 같이 악랄한 수법으로 나오게 된 것도 그들이 원래 인민의 복지를 희생시키고 그 평화를 짓밟고 인신매매나 다름없는 행위를 해온 것을 생각하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베를린에 동서를 가르는 방벽이 생긴 오늘, 서유럽 스파이진의 잠입이 완전히 봉쇄된 지금, 그들로서는 이 이상 다른 길이 없었겠지요. 우리는 이 모략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피들러 동지는 최선의 경우라 할지라도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죄에 해당하며, 최악의 경우라면 제국주의자 스파이와 내통하여 노동자 국가의 안녕을 어지럽히고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려고 획책한 크나큰 죄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이상의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는 밝은 얼굴로 법정을 향해 목례를 하고는) 그렇습니다. 그 충분한 증거를 갖추었습니다. 동지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도록 이처럼 격렬한 피들러의 동태를 우리 민첩한 문트 동지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이미 몇 개월 간에 걸쳐서 문트 동지는 피들러의 마음을 좀먹고 있는 사악한 의도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리머스를 영국에서 납치해 온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문트 자신이었습니다. 가령 문트 동지가 영국측 첩보진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런 수를 쓰는 것은 스스로 목을 조이는 것이며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헤이그에서 리머스를 최초로 심문하고 그 보고서가 최고회의에 도착했을 때 문트 동지가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방치해 둘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리머스가 이 땅에 오고 피들러가 그 심문에 나선 뒤부터 보고서의 제출이 중단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문트 동지가 피들러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원래 둔감한 사람도 아닙니다. 헤이그에서 피터스의 최초의 보고서가 도착하자마자 문트는 그 보고서에서 리머스가 코펜하겐과 헬싱키로 떠난 날짜를 보았습니다. 그 한 가지 사실로만도 그는 이번 리머스의 행동이 영국측의 모략의 일단이라는 것을 눈치챘던 것입니다. 리머스의 영국 탈출이 일부러 문트의 꾐에 빠진 체하며 문트를 제거하기 위해서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날짜는 분명히 문트가 덴마크와 핀란드를 방문한 때와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런던이 그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그날을 택한 것에 불과합니다. 단지 이런 적국의 모략에 대해서 ‘초기의 징후’에는 문트도 또한 피들러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것으로 우리 첩보부안에 스파이가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의 적발에 고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경로를 거쳐 리머스가 우리 독일인민공화국에 도착한 뒤에 문트는 흥미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리머스가 피들러의 마음에 의심을 불어넣는가를 지켜보았습니다. 무심코 던지는 말끝에서 넌지시 풍기는 암시 속에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너무 무리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여기저기에 뱃속 검은 교활함을 가지고 의혹의 씨를 뿌려나가는 모습을, 이에 대한 준비공작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레바논의 사나이에 관계된 것이 그것입니다. 피들러의 수중에 들어간 기적적인 특종. 그 두 가지가 모두 우리 첩보부의 고위층에 스파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게 할 수단이었습니다. 이 공작은 놀랄 만큼 교묘히 진행되었습니다. 카를 리메크를 잃은 패배를 영국측에서는 적절히 역이용하여 멋진 승리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전환시키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트 동지도 또한 영국측이 피들러의 손을 빌어서 그의 숙청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데 팔장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지극히 효과적으로 그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런던에서의 조사를 미세한 점에까지 실시했습니다. 리머스의 베이스워터에서의 이중생활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점검해 놓았습니다. 초인적이라고도 할 치밀한 계획도 어딘가의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노리고 추구해 왔던 것입니다. 그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리머스는 끈기 있게 장기간에 걸쳐서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갔었지만 빈곤, 오랜 술타령, 방자한 생활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 - 아니, 무엇보다도 그 고독 속에서 - 참모습을 훔쳐볼 수 있을 것이다. 말벗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마 그것은 여자겠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찾게 되고 그 가슴에 또 하나의 혼을 안아보고 싶은 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트 동지의 생각은 틀림없었습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노련한 스파이, 우리의 알렉 리머스도 지극히 초보적인 과실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잘못을...." 하고 그는 웃고 나서, "그것은 지금부터의 증언에 의해서 밝혀질 것이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 그 증인은 문트 동지가 미리 준비해둔 것입니다. 경탄할 조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잠시 뒤에 그 증인을 신청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두고보라는 듯이 잠깐 웃고는, "그에 앞서 괜찮으시다면 우리의 기괴한 스파이 알렉 리머스에게 한두 가지 질문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묻겠는데" 하고 카르덴이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은 재벌인가?"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두시오." 리머스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돈이 없으니까 이런 유혹에 걸려들었지." "분명히 그렇지." 카르덴이 말했다. "한탕 할 생각이었군. 그렇다면 당신은 돈 한푼 없는 건달이라고 보아도 좋겠군?"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돈을 꾸어줄 만한 친구는 없었나? 그냥 주는 사람도 좋아. 빚을 갚아주는 사람도 좋고." "그런 친구가 있었다면 이런 곳에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소." "전혀 없다고? 허어! 하지만 어딘가에 할 일 없는 자선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 당신은 이미 옛날에 잊어버렸는데 상대는 입은 은혜를 잊지 못하는 때도 있고. 그런 사람이 당신의 궁한 형편을 알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주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빚쟁이를 만나 빚을 갚아준다든지, 그런 친절을 자청해서 베풀어 주는 수도 있는 법인데." "불행하게도 없었소." "없다면 다음 질문. 당신은 조지 스마일리를 알고 있는가?" "물론 알고 있소. 그는 케임브리지 서커스에 있었던 사람이니까." "그 스마일리도 현재는 영국 첩보부의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페난 사건 뒤에 퇴직했소." "그렇게 되었군. 문트 때문에 혼이 난 사건이지. 한데 당신은 그 뒤로 그와 만난 적이 있나?" "한두 번." "당신이 공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리머스는 망설이다가, "만난 일 없소." 하고 대답했다. "형무소로 면회를 가진 않았나?" "그렇소. 거기에 찾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소." "형무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만난 일 없소." "형무소를 나온 다음 석방된 날 당신은 애시라는 사나이와 만났지?" "그렇소." "둘이 함께 소호가 (런던의 식당가) 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지. 그래 애시와 헤어지고 당신은 어딜 갔었지?" "기억이 없소. 아마 술집에 들렀을 것이오만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억이 전혀......" "그렇다면 당신의 기억이 되살아나도록 해주지. 당신은 플릿가에 가서 버스를 탔어. 버스로 일부러 먼길을 둘러 지하철로 바꾸어타고 마지막에는 자가용차로 첼시로 갔지. 당신 같은 노련한 스파이로서는 조금은 풋나기 같은 방법이었어. 생각나나, 리머스? 그래도 생각이 안 난다면 그때의 보고서를 보여줄 수도 있어. 준비되어 있으니까." "아마 틀림없겠지요. 그래서?" "조지 스마일리는 바이워터 가(街)에 살고 있어. 킹스 로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네. 당신 차는 바이워터 가로 꼬부라졌어. 우리의 요원은 그때 9번지에서 차를 내렸다고 보고했어. 마침 그곳에 스마일리의 집이 있지." "쓸데없는 억측이오." 리머스는 말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에잇 벨스’라는 술집이오. 그 술집은 마음에 들어서 가끔 가지요." "자가용차로 말인가?" "그것도 틀리는군요. 타고 간 것은 택시였소. 돈이 생기면 안 쓰고는 못 배기는 성미라서." "그런데 그전에 그렇게까지 멀리 둘러서 갔나?" "그런 짓은 안합니다. 여기 스파이가 잘못 보았겠지요. 다른 사람의 뒤를 밟았을 게요. 흔히 있는 일이니까."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는데, 당신이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 스마일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나?" "그럴 리가 없을 게요." "당신이 형무소에 들어간 다음 당신의 관계자에게 돈을 준다든가, 당신이 애시와 만난 경과를 듣고 싶어한다든가?" "없는데요, 카르덴 씨. 당신 질문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뭘 알고 싶은 겁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스마일리 본인을 만나서 물어보시지요. 사람마다 생각은 다 다르니까." 카르덴은 그 답변에 오히려 만족해 하는 듯했다. 미소짓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경을 고쳐쓰고서 열심히 파일을 찾으면서, "아, 그리고" 하며 잊고 있었다는 듯이 질문을 계속했다. "당신이 식료품 가게에 외상을 달라고 했을 때의 일인데, 그날 당신의 주머니 속에는 돈이 얼마나 남아 있었나?" "없었소." 리머스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그때는 1주일 동안 수입이라고는 한푼도 없었으니까. 아니, 열흘이 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동안 어떻게 생활했지?" "그럭저럭. 앓고 있어서, 굉장한 열이 나서 말이오. 1주일이나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했소. 그래서 아마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으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싶은데." "당신은 당시 도서관에서 받을 급료가 좀 남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걸 알고 있소?" 리머스는 날카롭게 반문했다. "설마 그곳에--" "왜 그 돈을 받으러 가지 않았소? 그것만 있으면 외상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글쎄, 왜 그랬을까. 기억에도 없지만 아마 토요일 아침이라 도서관 문이 닫혀 있어서 그랬을 게요." "그렇군. 토요일 아침에는 도서관이 잠겨 있었군. 그건 분명한가?" "그렇게 생각될 뿐이오." "수고했소. 질문은 그뿐이오." 리머스가 자리에 돌아오니 문이 열리며 여자 간수가 들어왔다. 커다란 체구에 보기 싫은 여자다. 회색 제복 한쪽 팔에 계급을 나타내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리즈가 있었다. 제22장 - 의장 그녀는 천천히 법정으로 들어와서 강렬한 조명의 눈부신 실내를 둘러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있어서 마치 갑자기 깨워놓은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리머스는 새삼스럽게 리즈가 젊게 느껴졌다. 리머스가 경비병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리즈는 걸음을 멈추었다. "알렉!" 그녀 곁에 있던 경비병이 그녀의 팔을 잡고 조금 전까지 리머스가 서 있던 곳으로 인도했다. 법정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의장이 갑자기 질문에 나섰다. "당신의 이름은?" 리즈는 긴 팔을 밑으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똑바로 펴고 있었다. "당신 이름은?" 의장은 다시 되풀이했다. 이번 목소리는 조금 컸다. "엘리자베스 골드." "영국 공산당의 당원이지?" "예." "지금은 라이프치히에 묵고 있지?" "예." "몇 년도에 입당했지?" "1955년. 아니, 54년인데 그것은...." 그 말은 삑 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벤치가 거칠게 밀려져 나가고 좀 쉰 듯한 리머스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히 울려퍼졌다. "그만둬! 그만두지 않겠어, 이 새끼들! 그 여자를 못살게 굴지 마!" 리즈는 두려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리머스는 버티고 서 있었다. 옷이 뒤틀려 있고 창백한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군인의 주먹이 날아가니 그 자리에 쓰러지려 했지만 곧바로 좌우의 군인이 일으켜 세우고는 두 팔을 등으로 비틀어 올렸다. 리머스는 머리를 가슴에 대고 너무도 격렬한 고통으로 경련을 계속하고 있다. "행패를 부릴 성싶으면 끌어내는 것이 좋아." 의장은 그렇게 명령하고 리머스에게도 경고한 다음 덧붙여서 말했다. "발언을 하고 싶다면 나중에 기회를 주겠다. 그때까지는 기다릴 것." 그리고 리즈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언제 입당했는지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기다리다가 의장은 어깨를 흔들었다. 그 다음에는 몸을 좀더 앞으로 내밀 듯이 하고 리즈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질문을 계속했다. "엘리자베스, 당신은 당내에서 비밀 유지의 필요성을 배웠겠지." 리즈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 설령 동지일지라도 당의 조직, 당원의 성격에 대해서는 서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리즈는 다시 한 번 끄덕이고는, "예." 하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지금부터 이 규칙에 대해서 엄격한 시험을 치르게 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도 좋아. 오히려 모르는 편이 무사히 끝난다.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그리고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 문제는 이런 정도로 하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 세 사람은 당내에서도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며, 최고회의의 명령으로 당의 방위를 위해서 이 임무를 맡고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도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이 답변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충실하고 또한 용감하게 답변함으로써 당신은 사회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가 있다." "하지만 누가," 그녀는 조그만 소리로 외쳤다. "누가 재판을 받고 있는 겁니까? 알렉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의장은 그녀의 어깨 너머 문트에게 시선을 보내며, "누가 재판을 받고 있다고는 할 수가 없어. 그것이 이 사건의 요점이며 고발한 사람만 있고 심판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아. 더구나 고발자가 되든 피고발자가 되든 상태는 같은 것이다. 모르고 진행되면 그만큼 당신 자신의 공정성을 유지할 수가 있어." 잠깐 동안 이 좁은 방안을 침묵이 지배했다. 그 뒤 리즈의 입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으므로 의장은 본능적으로 귀를 내밀었다. 리즈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알렉이 무슨 짓을 했다는 겁니까?" "말해 주었잖아." 의장이 말했다. "모르는 게 공평을 유지할 수 있다고. 모르면 모를수록 좋아. 아는 데까지의 진상을 말하는 것. 그것이 당신에게 최선의 길이야." 의장은 몸을 앞으로 내밀어서 리즈가 다시 몸짓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일 것을 기다렸으나 아무 말도 않는 것을 보고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겠지. 그렇다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좋아. 아니, 하지 않으면 안 돼.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말하다가 손으로 카르덴을 가리키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 동지가 질문하고 싶어하고 있어. 긴 이야기가 아닌 듯하니 답변만 끝내면 곧 귀국시켜 주겠다. 사실대로 말해야 돼." 카르덴이 일어섰다. 교구위원 같은 상냥한 미소를 띠고서, "엘리자베스." 하고 그가 말을 걸어왔다. "알렉 리머스는 당신의 애인이었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게 된 곳은 당신의 근무처인가? 베이스워터에 있는 도서관?" "예." "그전에는 만난 일이 없는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신에게는 애인이 여러 명 있었지, 엘리자베스?" 그녀가 대답을 했다손 쳐도 리머스의 고함 소리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카르덴, 이 돼지야! 그만두지 않겠어!" 그러나 그녀는 그 고함소리를 듣고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커다란 소리였다. "알렉, 가만 있어요! 아니면 끌려나가게 돼요." "맞아." 의장이 차갑게 말했다. "내쫓아 버리겠어." 카르덴은 부드러운 말씨로 계속했다. "알렉은 공산주의자였나?" "아뇨." "그는 당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걸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어요. 제가 말씀드렸으니까요." "당신이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는 뭐라고 했지." 사실대로 말해도 좋은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질문이 연이어 날라오기에 생각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말,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가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이 참혹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질문이 무엇을 캐내려 하고 있는가, 그것을 알 때까지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입을 한번 잘못 놀려 알렉이 죽게라도 된다면 -- 그가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르덴이 다시 물었다. "그는 뭐라고 말했지?" "웃었습니다. 그런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이니까요." "무관심하다고 당신은 믿고 있었나?" "예, 물론입니다." 위원석의 젊은 남자가 두 번째 발언을 했다. 여전히 눈은 반쯤 감은 채로, "당신은 그의 말을 인류의 올바른 태도라고 인정하는가? 그가 역사의 진행, 변증법의 필연성을 외면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을 뿐입니다." 그러자 카르덴은 곧 물러서며,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그러면 그는 낙천가였었나? 언제나 웃는다든가.... 특히 그런 문제에는?" "아뇨. 절대로 웃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공산당원이라고 하니까 웃었어. 왜 그랬는지 아는가?" "당을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르덴은 무심한 척 물었다. "싫어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리즈는 감상적인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는 좋고 나쁜 감정이 뚜렷한 사람이었는가?" "아뇨.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식료품 가게 주인을 때렸어.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순간 리즈는 카르덴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그 달콤한 음성도, 호인처럼 보이는 얼굴도 믿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생각해 본 일은 있겠지?" "예." "그래 어떤 결론이 나왔나." 리즈는 한마디만 했다. "아무 것도." 카르덴은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교리문답을 잊어버린 목사처럼 실망한 얼굴을 조금은 보이면서, "당신은" 하고 이미 알고 있다는 투로 "리머스가 가게 주인을 때려주려고 한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 "아뇨." 리즈는 대답했다. 그것이 너무 빨랐던 때문인지 다음 순간 카르덴의 미소가 강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리머스와 만난 것은 언제지? 오늘은 물론 빼고." "형무소에 들어가고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전이라도 좋아. 마지막에 만난 것은?"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가차없는 것이었다. 리즈는 법정을 보고 있는 것이 속이 탔다. 리머스를 뒤돌아보고 싶었다. 얼굴만 보면 어떻게 답변해야 되는지 그의 지시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서 대답하기는 두려웠다. 어떤 고발, 무슨 이유로 이 질문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렉을 구해내고 싶어하는 것을 물론 그들은 모를 리 없다. 그것을 그녀는 두려워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다. 한 사람이라도 조언해 줄 사람은 없을까? "엘리자베스, 오늘 말고 마지막에 리머스와 만난 것은?" 저 소리. 저 목소리가 싫은 것이다. 비단처럼 고운 목소리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입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 사람이 퍼드 씨와 싸우기 전날 밤." "싸움! 싸움이 아니야, 엘리자베스. 가게 주인은 대항하지도 않았어. 그럴 마음도 없었던 것 같아. 리머스의 수법은 스포츠적이라고 할 수가 없었어." 카르덴은 웃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한 사람도 웃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욱 불안했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한 장소는?" "그 사람의 방입니다. 병이 나서 출근을 못하게 되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는 제가 들러서 식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먹을 것을 사오기도 했나?" "예." "친절하군. 비용도 꽤 들었을 텐데." 카르덴은 동정하듯 말했다. "당신은 그 동안 그를 부양해 주었군." "부양하다뇨. 돈은 알렉이 냈는데요. 그 사람...." "허." 카르덴은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 그는 돈을 좀 가지고 있었구먼?" 앗, 하는 느낌이 리즈의 머리를 스쳤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그,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닙니다." 당황해서 그녀는 말했다. "예, 1파운드인가 2파운드쯤, 그보다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돈이 없어서 제대로 지불도 못했습니다. 전기료나 방세 같은 것도 모두 나중에 치렀습니다. 예, 그 사람이 가고 난 다음에 말입니다. 친구분이 와서 지불해 주었습니다. 돈을 치른 것은 친구분이지 알렉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카르덴은 조용히 말했다. "지불은 친구가 해주었군. 일부러 찾아와서 깨끗이 청산해 주었어. 리머스의 옛날 친구로군. 베이스워터로 옮겨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남자지. 당신은 그 친구를 만난 적이 있는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허어. 못 만났다? 그래 그 친절한 친구는 그 밖에 어떤 돈을 지불해 주었나? 당신, 알고 있겠지?" "아뇨. 그것은...." "왜 대답이 분명치 않나?" 리즈는 큰소리로 말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망설였어.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그 친구에 대해서 리머스에게 들은 적이 있지? 돈도 많고 리머스가 사는 곳을 알고 있는 남자에 대해서." "아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 같은 것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었군." 법정은 기분나쁜 침묵으로 가득차 있었다. 리즈로서는 말하자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시야를 잃어버린 어린애와 같았다. 그런만큼 그 침묵은 더욱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그녀가 모르는 기준에서 그녀의 대답을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이 무서운 침묵에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당신은 급료를 얼마나 받고 있었나, 엘리자베스?" "1주일에 6파운드입니다." "저금은?" "아주 조금. 몇 파운드 뿐입니다." "당신 방세는?" "1주일에 50실링." "꽤 비싼데, 엘리자베스. 꼬박꼬박 치르고 있나?" 그녀는 슬픈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치르지 않지?" 카르덴은 이어서, "돈이 없는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저, 연금증서는 있습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보내주었거든요." "모르는 사람?" "예." 갑자기 눈물이 그녀의 뺨에 흘러내렸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탁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묻지 말아 주세요! 누군지 알 수도 없습니다. 6주쯤 전에 그것이 왔습니다. 시티의 은행으로부터. 어느 자선단체 같습니다만. 금액은 1천 파운드. 정말로 모릅니다. 어느 분이 보내주셨는지. 은행에서는 자선단체의 선물이라고 할 뿐입니다. 당신은 다 아시지요. 가르쳐 주십시오, 누가 그랬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녀는 울었다. 법정에 등을 돌린 채 눈물과 함께 어깨가 흔들리고 몸이 떨렸다. 법정 안에는 누구 하나 꼼짝하는 사람도 없었다. 끝에 가서 그녀는 손은 밑으로 내렸지만 얼굴은 숙인 채 들려고도 않았다. 카르덴은 시원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조사해 보지 않았지? 당신은 가끔 1천 파운드나 되는 증서를 모르는 남자에게서 늘 선물로 받아왔는가?" 리즈의 대답이 없자 카르덴이 계속했다. "당신이 조사하지 않았던 것은 보낸 상대자를 짐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어때, 그렇지?" 그녀는 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것을 리머스가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리머스의 친구가. 그렇지?" "예." 그녀는 용기를 짜내어 간신히 말했다.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식료품 가게 주인도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재판이 끝난 뒤 어디에선가 큰 돈을 보내왔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화제가 되어 있었는데, 저는 그것도 틀림없이 알렉의 친구분이 하신 것으로...." "이상한 이야기로군." 카르덴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참으로 이상해." 그리고 이어서, "그런데, 엘리자베스, 리머스가 형무소에 들어간 뒤에 당신에게 연락해 온 사람은 없었나?" "예."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이제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입에서 알렉에게 불리한 증언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것을. 돈에 관해서인가, 친구에 관해서인가, 아니면 가게 주인에 관한 것인가. "확실한가?" 카르덴의 눈썹이 금테 안경 너머에서 치켜 올라갔다. "예." "그러나, 엘리자베스." 카르덴은 끈질기게 물었다. "당신 이웃집의 이야기론 리머스의 재판이 끝난 바로 뒤에 남자가 둘 찾아왔더라는데. 혹시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소위 애인인가? 가끔 돈을 보내주는 애인. 리머스 같은?" "알렉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울면서 소리쳤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지만 리머스는 당신에게 돈을 주었어. 두 남자도 돈을 주고 갔지." 그녀는 흐느껴 울며, "그,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럼 그 두 사람은 누군가?"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갑자기 카르덴이 소리쳤다. 그가 큰소리를 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구냔 말이야?" "모릅니다. 차를 타고 왔어요. 알렉의 친구라고 하면서." "또 친구야? 그래, 뭐 하러 왔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 알렉이 한 이야기의 내용을 묻고 또 묻고 했습니다.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하면서...." "어떻게 연락하지? 어디로 연락하라고 했나?" 간신히 그녀는 대답했다. "그분은 첼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스마일리. 조지 스마일리입니다. 제가 전화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했는가?" "안했습니다!" 카르덴은 파일을 내려놓았다. 죽음 같은 침묵이 법정을 에워쌌다. 리머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카르덴이 말했다. 침착한 만큼 목소리가 한층 위압적으로 들렸다. "스마일리는 리머스가 이 여자에게 진상을 털어놓은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리머스는 영국 첩보부가 예상치 않았던 일을 한 가지 해버렸지요. 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그 품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카르덴은 웃었다. 마치 그것이 재치 있는 우스개나 되는 듯이. "리머스는 카를 리메크와 같은 짓을 했습니다. 여러분, 그는 같은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카르덴은 계속했다. "그래, 리머스는 일신상의 이야기를 한 일이 있는가?" "아뇨." "당신은 그의 과거를 알고 있었나?" "예. 단지 베를린에서 일한 것은 들었습니다. 무슨 정부의 일인가를 했다던데." "그렇다면 과거의 이야기를 한 셈이 아닌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는가?" 긴 침묵이 흐르고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무소에 들어가고 난 다음 왜 만나러 가지 않았지? 면회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분이 반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호, 그래 편지는?"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꼭 한 번. 기다리고 있다고 썼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지도 싫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나?" "예." "형기가 끝나고도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는가?" "예." "그에게는 몸을 의탁할 곳이 있었는가? 기다리고 있는 직장은? 도와줄 친구는?" "모릅니다. 저는.... 모릅니다." "당신들의 인연은 사실상 끊어졌다는 이야기로군?" 카르덴은 냉소를 띠고서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다시 다음 사내를 찾고 있었지?" "아닙니다! 저는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격정을 누르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편지를 쓰지 않았지? 왜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지 않았지?"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분과 약속을 했습니다. 찾지 않겠다고. 절대로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형무소에 갈 생각을 미리 하고 있었군?" 드디어 해낸 듯한 투로 카르덴이 말했다. "그, 그런 일. 저는 모릅니다. 모르는 일은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밤," 카르덴은 끝까지 물고늘어졌다. 목소리는 거칠고 겁을 주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있었다. "식료품 가게 주인을 때리기 전날 밤, 그는 당신에게 그 약속을 되풀이시켰겠지? 틀림없겠지?" 지쳐버린 그녀는 이젠 틀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당신은 안녕이라고 했고?" "예, 우리들은 안녕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식사를 하고 난 다음이겠지. 그렇다면 꽤 늦은 시간이었겠군. 아니면 그날 밤은 자고 갔나?" "식사 뒤인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곧 돌아간 것은 아니고 한동안 밖을 걸었습니다. 어디로 걸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는 무슨 이유로 당신과 인연을 끊겠다고 했나?" "인연을 끊겠다고는 안했습니다. 다만, 해야 될 일이 있다고, 복수를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리고 그런 다음 -- 아마 한참 뒤가 되겠지만 -- 일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기다려만 준다면...." "그래서 당신은 말했군." 하고 카르덴은 비꼬는 투로,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겠다고. 당신은 그의 애정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예." 리즈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돈을 보내주겠다고 말을 했나?"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자긴 겉보기처럼 옹색하진 않으니까, 제가 어디 있는지 찾아서 보내주겠다고."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자선단체라면서 1천 파운드를 보내와도 조사해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이젠 모두 다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왜 저를 잡아왔지요?" 카르덴은 차가운 얼굴로 그녀가 울음을 그치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하고 그는 청문회 위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이 피고측이 채택하는 증언입니다. 이처럼 지성이 감정으로 흐려져서 경계심을 돈 때문에 잃어버린 여성을 영국의 우리 동지가 당 사무국의 일을 맡기기에 적당하다고 보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그리고 먼저 리머스를 보고, 이어 그 시선을 피들러에게 옮겨가며 냉혹한 어조로 덧붙였다. "증인은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그러나 리머스가 그녀 같은 여자와 만나게 된 것은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침략자의 음모가 치정으로 말미암아 들통나는 예는 이것이 처음은 아닌 것입니다." 가볍게, 그러나 단정하게 청문회 위원들에게 인사하고 카르덴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리머스가 일어서 있었다. 이번에는 경비병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런던에 있는 놈들의 대가리는 돈 것이 분명하다." 리머스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 이어서 또 그녀를 내보내주라고 소리쳤다. 지금 분명하게 알았다. 그 순간, 영국을 떠나던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내가 형무소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바보 같은 자가 뒤처리를 하면서 돌아다닌 것이다. 청산할 것을 청산해 주고 식료품 가게에 손해배상을 해주고 방세를 치러 주고, 그리고 또 리즈도 만족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미친 놈 같은 이야기다. 무엇을 노렸을까? 그 계획은 피들러를 죽일 생각이었을까? 그들의 동료 첩보원인 나를 매장하려고 한 것일까? 설마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작전을 파괴할 생각이었다니. 아니면, 그것은 스마일리 개인의 생각이었는가? 쓸데없는 그의 양심이 그를 그렇게 몰고간 것일까? 어떻든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다. 리즈와 피들러를 이 사건에서 분리시키고 나 혼자 모든 책임을 지는 일이다. 어차피 나는 영국 첩보부에서 쫓겨난 몸이다. 피들러만이라도 구할 수가 있다면, 만일 그가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만 있다면, 아마 그것이 리즈를 구하기 위한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 녀석들은 어째서 이렇게 세세히 그 경위를 알고 있을까? 그날 스마일리의 집까지 가는 데 미행당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도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것은 절대로 틀림없다. 게다가 그 돈 - 첩보부의 돈을 훔친 이야기를 이 녀석들은 어디서 들었을까? 그것은 다만 첩보부 안에서의 신용을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이었을 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그 사실을? 대체 어떤 방법으로? 화가 나고 당혹스럽고, 또 자책하면서 그는 천천히 벤치 사이를 걸어갔다. 교수대로 향하는 사나이의 걸음걸이로. 제23장 - 고백 "좋았어, 카르덴."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돌처럼 굳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머리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인 그의 주변은 섬뜩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체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제에서 오는 것. 그것으로 그의 온몸은 강철 같은 강한 의지의 덩어리로 보였다. "좋아, 카르덴. 그 여자를 돌려보내." 리즈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지고 검은 눈에는 눈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알렉... 안 돼요." 아무도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리머스 한 사람. 키 크고 군인처럼 의연한 그의 모습 뿐.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녀는 더욱 큰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든 저를 위해서라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전 괜찮아요. 알렉, 정말 괜찮아요." "조용히 해, 리즈." 리머스는 어설프게 말했다. "이미 늦었어." 그리고 의장 쪽을 보면서, "이 여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지금 곧 석방해서 귀국시켜 주시오. 그 다음의 일은 내가 말하겠소." 의장은 곁에 앉은 양쪽 사나이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여자는 법정에서 나가도 좋다. 그러나 재판이 끝날 때까지 귀국은 허락할 수 없다. 귀국 시기는 우리가 결정한다." "이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단 말이야." 리머스는 계속 소리쳤다. "카르덴의 말이 옳았어. 이것은 작전이었어. 신중하게 계획된 작전이니까 여자는 알 리가 없지. 쓸모없는 그 도서관에서 일에 지쳐 있었던 여자야. 이런 여자를 닥달해야 무슨 소용이 있나!" "그녀는 증인이다." 의장은 짤막하게 말했다. "피들러가 질문할 수도 있어." 지금은 이미 피들러 동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었던 피들러는 자기 이름을 듣고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이 되었다. 리즈는 그때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그 짙은 갈색 눈이 한동안 그녀를 마주보고 있더니 이윽고 그녀의 혈통을 알았는지 엷은 미소를 보냈다. 이 고독하고 왜소한 남자, 놀랄 만큼 침착하다고 리즈는 생각했다. 피들러도 같은 말을 했다. "이 여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 점은 리머스의 말이 틀림없습니다. 석방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소리는 지치고 힘이 없었다. 의장이 말했다. "석방해도 좋은가? 질문할 것은 없는가?" 피들러는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손을 오히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재판보다도 흥미 있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녀로서 알 만한 이야기는 모두 다했습니다. 자신의 의무는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런 다음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방해 주십시오. 아무리 윽박질러 봐야 모르는 것은 말할 수가 없겠지요." 그리고 그 뒤에 일부러 형식을 갖춘 어조로 덧붙였다. "이 증인에게는 질문이 없습니다." 경비병이 문을 열고 바깥 복도를 향해 간수를 불렀다. 조용한 법정 안에 대답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피들러가 갑자기 일어섰다. 리즈의 팔을 잡고 문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리머스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 이상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영국에 돌아가시오." 피들러는 그녀에게 말했다. "빨리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오." 갑자기 리즈는 자제력을 잃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어깨에 여간수가 손을 얹었다.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고 쓰러질까 봐 부축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방에서 데리고 나가니 경비병이 문을 닫았다. 울음소리가 차츰 멀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더 이상 할 말도 없다고 생각지만," 리머스가 입을 열었다. "카르덴이 밝혀낸 대로 이것은 분명히 조작된 것이오. 카를 리메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공산권에 있어서 유능한 요원을 송두리째 잃었소. 다른 녀석들은 이미 옛날에 살해되어 버렸고. 웬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새로운 요원의 육성보다 문트의 손이 빨리 뻗쳐왔소. 나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관리관을 만났소. 피터 길럼도 함께 있었고, 조지 스마일리도 동석했소. 그때 이미 조지는 퇴직한 몸이었으며 첩보원보다는 좀더 그럴 듯한 문헌학인가 뭔가 하는 일을 하고 있었소. 그런 때에 이번 계획이 거론되었소. 미끼로 쓸 인물을 하나 만든다 -- 관리관이 그런 식의 표현을 했소. 그 사나이의 행동을 미끼로 해서 상대가 덤벼드는가 어떤가 동정을 살피는 게요. 덤벼든다고 하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귀납법(歸納法)’이라고 스마일리가 말하더군. 가령 문트가 우리의 비밀공작원이었을 경우, 그에게 보수는 어떤 방법으로 지불할 것인가? 그 관계서류는 어떤 체제로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그 가정을 그대로 준비해 두었소. 이것은 피터가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1년인가 2년 전에 어떤 아라비아 인이 동독 첩보부의 내부조직을 팔려고 왔었소. 그때는 매정하게 거절해 버렸는데 지난 다음에야 거절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소. 피터는 그것을 이용하자고 제안했소. 그것을 사들이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 게요. 이것이 근사한 아이디어였소.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게요. 물론 미끼 역할은 내가 자청했소. 술로 몸을 망치고 빚을 지고, 그리고 끝에 가서는 리머스란 놈이 공금에 손을 대고 있다는 소문을 냈소. 그것으로 이야기의 줄거리가 완성되었소. 소문을 내는 쪽은 경리과의 엘시를 중심으로 해서 두세 명이 맡아주었소. 그 친구들이 제법 그럴 듯하게 해주었지." 거기서 그는 조금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어느 날 아침 - 사람들이 모이는 토요일 아침이었소 - 바로 그 소란을 일으키니 즉시 지방신문이 달려오더군. '워커' 지에서까지 크게 다루어주었고, 그래서 당신네 동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지. 이 나의 동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때 이후로...." 하며 경멸하는 듯한 어조가 되어, "당신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기 시작한 게요." "무덤은 네가 들어갈 곳이야." 문트가 조용히 말하며 그 담청색 눈으로 리머스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마 피들러 동지의 것이기도 하겠지." 리머스는 들은 척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피들러를 탓할 것은 없어. 마침 그의 직책이 이 문제의 초점에 있었을 뿐이니까. 이곳 첩보부 안에서 너를 교수대로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피들러 하나만이 아니야." "그 교수대로 가게 될 놈은 너다." 문트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너는 감시원을 죽였어. 나에 대한 살인미수이기도 해." 리머스는 웃으며, "‘어둠 속의 고양이는 다 비슷하다’.... 스마일리가 흔히 쓰던 말이지. 거기에 위험이 있다고. 알겠나?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어. ‘서로 보복하자면 끝이 없다’고. 그 사람도 그래서 신경쇠약이 된 모양이야. 페난 사건 후로는 그전의 그가 아니었어. 런던에서 일어난 문트 사건, 그것이 스마일리에게도 상당한 타격을 준 듯해. 그래서 그는 첩보부에서 떠났지. 이번 문제에서도 무엇 때문에 첩보부가 내 빚을 갚고 내 여자의 뒷치닥거리를 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스마일리의 착상이었던 모양이야. 그의 그런 생각이 모처럼 잘 되어가던 작전을 엉망으로 만든 거지. 그 사람은 양심이라는 것의 가책을 받고 서로를 죽이는 짓은 잘못이라고 생각한 게지. 그렇더라도 그만큼 애써서 준비공작을 해놓고는 그것을 부수고 돌아다니다니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러나, 문트, 스마일리는 자네를 미워하고 있었어. 우선 우리들 전부가 미워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아. 입밖에 내지만 않았을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런던에서는 이 계획에 열중했던 거야. 모두들 흥미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했지. 사실 당시의 우리들은 비참한 상황에 있었어. 문트와의 승부에는 모조리 패했지. 남은 유일한 길은 문트를 죽이는 것뿐이었어. 또 그만큼 신나는 게임이라고 할 수도 있었던 게지." 그리고 새삼스럽게 청문회 위원들을 바로 쳐다보며, "당신들은 피들러를 오해하고 있소. 그는 우리편이 아니오. 런던이 피들러 같은 지위의 사내와 공모해서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이다니 생각이나 할 수가 있는 일이오? 물론 그를 계산에 넣은 것은 사실이오. 그가 문트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누구나 아는 일이지. 피들러는 유태인이오. 문트가 유태인에 대해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는 당신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겠소. 말할 만한 배짱은 아무도 안 가진 모양이니까 대신 내가 말해 주는 게요. 문트는 피들러를 계속 괴롭혀 왔소. 지금까지 줄곧 여지없이 조롱해 왔소. 그것도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들은 모두 문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소. 그런데도 참아온 것은 일하는 솜씨가 다시 없이 뛰어났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는 한 순간 망설이는 듯한 얼굴이더니 곧 이어서, "그러나.... 이 문제에는 피들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소. 피들러 자신은 무엇 하나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소. 이데올로기는 확고 -- 분명히 당신들은 그런 표현을 썼지." 그리고 그는 청문회 위원들을 보았다. 그들도 또한 기묘하다고 할 만큼 무감동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갑지만 질리지도 않은 시선이었다. 피들러는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 억지로 꾸민 듯한 냉정한 자세로 리머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윽고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리머스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리머스, 이것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자네 자신이야. 오랜 경력의 최후를 장식하려 한 일인데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자네 표현을 빌리자면 도서관에서 일에 지쳐 있는 쓸모없는 계집아이와 말일세. 그것을 런던은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스마일리 단독으로는 조사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어서 이번에는 문트를 향해, "그런데, 문트, 이상한 일이 있어. 그들은 자네가 리머스의 행동을 빠짐없이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리머스에게 그런 행동을 지시한 거야. 그러나 그들은 그 뒤에 식료품 가게에 위로금을 주고 밀린 방세를 청산하고는 그의 여자에게 연금증서까지 사보내 주었어. 그들로서는 특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만한 경험을 가진 그들이 여자 하나에게 1천 파운드나 되는 거금을 주다니. 더구나 그 여자라는 것이 공산당의 일원, 그리고 상대의 사내가 1페니도 없는 건달이라고 믿고 있을 텐데. 스마일리의 양심 같은 것을 들먹일 것은 없어. 런던은 모두 알고 있었던 거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스마일리의 말이 옳았어. 공격에 대한 공격. 보복에 대한 보복. 이것은 영구히 반복되어 끝이 없지. 나만 하더라도 이런 데까지 끌려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네덜란드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계속해서, "더구나 그 여자까지 끌고오다니 천만 뜻밖이야. 하지만 바보였어. 나라는 인간은." 피들러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그러나 문트는 바보는 아니었어. 문트는 목표를 쥐고 있었지. 그 여자만 데려오면 유리한 증언을 시킬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확실히 눈치가 빠른 인물이지. 그는 그 여자의 연금증서에 관한 일까지 알고 있었어. 놀랄 수밖에 없지. 믿기지 않는 일이야. 어째서 그가 거기까지 알 수 있었는가?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나는 그것을 잘 알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어. 그 말에 거짓은 없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일 거야." 그리고 문트를 향해, "자네는 그 사정을, 어째서 그 사정을 알았는지 여기서 설명해 주겠지?" 문트는 1초쯤 망설였다. 그 1초가 리머스에게는 길고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헌금액을 보고 알았지." 문트가 대답했다. "한 달쯤 전에 그 여자는 당에 내는 헌금 액수를 매달 10실링으로 높였더군. 그것을 듣고 어디에서 그런 여유가 생겼는지 조사를 시켰지. 그것이 성공한 거야." "교묘한 설명이로군." 피들러가 차갑게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생각컨대," 하고 의장이 옆에 있는 두 위원을 보아가면서 말했다. "본 청문회는 최고회의에 보고서를 제출할 단계에 온 듯합니다." 그리고 그 작고 무자비한 눈을 피들러에게 돌리면서 덧붙여 말했다. "그 밖에 할 말이 있는가?" 피들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거기에 또 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일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없다면," 의장은 이어서 말했다. "우리 위원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었으므로 발표하겠습니다. 피들러 동지를 직위해제한다. 금후의 조치는 최고회의 징계위원회가 결정한다. 리머스의 구속은 이대로 계속한다. 그런데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 청문회는 집행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특별변호인은 문트 동지와 협의하여 영국 스파이이며 또한 살인범인 알렉 리머스에 대해서 어떤 소송을 제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리머스를 보고 문트를 보았다. 그러나 문트는 그 시선을 피들러에게 못박고 있었다. 목을 달아맬 동앗줄의 길이를 재고 있는 간수 같은 비정한 눈으로. 리머스는 그 순간 오랫동안 농락당해 온 사나이의 놀라운 명석(明晳)으로 이 잔인한 트릭의 전모를 알았다. 제24장 - 지구위원 리즈는 창가에 서 있었다. 여간수에게 등을 돌리고 멍청하게 조그만 안뜰을 바라보면서 분명히 여기서 죄수들이 운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무실 비슷한 느낌이 드는 방에 들어와 있었다. 전화기가 몇 개 있고 그 옆 책상 위에 식사를 위한 쟁반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손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피로로 말미암아 머리가 아팠다. 육체적인 심한 피로. 사지가 쑤시고 얼굴이 뻣뻣하고 울어서 그런지 피부가 꺼칠꺼칠했다. 몸도 더러워져서 목욕을 하고 싶었다. "왜 먹지 않지?" 여간수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먹었는데...." 동정해서가 아니다. 기껏 식사를 갖다주었는데 왜 손도 대려고 하지 않나? 이 여자 혹시 바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여간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지금부터 긴 여행을 하게 될 거야. 도착해서 마음껏 먹을 수도 없을 텐데." "무슨 뜻이지요?" "영국의 노동자는 굶주리고 있어." 여자는 스스로 만족해 하며 떠들고 있다. "자본가가 그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지." 리즈는 되받아주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는지 몰랐다. 게다가 알아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었다. 이 여자가 말해 주겠지. "여긴 어디지요?" "모르고 있었나?" 여간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물어봤으면 좋았을걸." 하고 창 너머를 턱으로 가리키며, "저 녀석들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저 사람들은 누군데요?" "죄수야." "어떤 죄를 지었나요?" "국가의 적." 여자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스파이, 선동자." "스파이인 줄 어떻게 알지요?" "당은 뭐든지 알아. 당이 조사할 마음만 먹으면 본인이 모르는 일이라도 알아낼 수가 있어. 말로는 들어본 일이 있겠지?" 그리고 여간수는 리즈를 잠깐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이어서 말했다. "영국인이라! 돈 있는 놈들이 너희들 미래를 먹이로 하고 있어. 너희들은 놈들에게 먹이로 제공되고 있는 거야. 그것이 영국인의 현 상황이야." "누가 그런 소릴 하지요?" 여자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기가 한 말에 만족해 하고 있는듯이 보였다. "그럼 여긴 스파이 감옥이군요?" "사회주의 세계의 진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 무리들을 넣어두는 형무소야. 과오를 범할 권리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무리들, 역사의 진행을 가로막으려고 계획한 무리들을 위해서야. 요는 반역자의 감옥이지." 하고 간결하게 결론을 내렸다. "저 사람들은 어떤 나쁜 짓을 했나요?"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은 개인주의를 뿌리뽑지 않고는 실현할 수 없는 거야. 집 지을 땅에 돼지 우리가 있어서는 큰 빌딩을 세울 수 없으니까." 리즈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며,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했죠?" "나는 이래봬도 지구위원이야." 여간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형무소가 담당 지역이야." "높은 분이군요." 하고 리즈가 다가가서 말하니, "나는 노동자야." 그녀는 강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다만 두뇌 노동자를 상류계층으로 보는 오류는 범하지 말도록. 그런 계층 같은 것이 있을 수야 없지. 노동자는 하나야. 육체노동자와 두뇌노동자는 앤티시시스(정반대) 가 아니야. 당신, 레닌을 읽어본 일이 있어?" "그럼 이 형무소에 들어오는 사람은 지식인들 뿐이로군요?" 여자는 웃으며, "그렇게 되지.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칭하는 반동주의자. 개인을 위해서 국가와 싸우려는 무리들이지. 후르시초프가 헝가리의 반혁명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지 아나?" 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흥미가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이 여자가 입을 다물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했어. '좀더 빨리 저술가을 사살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라고." 리즈는 서둘러서 물었다. "이번 사건에서는 누가 죽게 되나요? 재판이 끝난 뒤에." "리머스지."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유태인, 피들러지." 리즈는 비틀거렸지만 손이 의자의 등받이를 잡게 되어 간신히 바로 설 수가 있었다. "리머스가 무슨 짓을 했는데?" 조그만 소리로 그녀가 물으니까 더럽고 능글맞은 실눈으로 리즈를 보았다. 놀랄 만큼 몸집이 큰 여자로서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찰싹 빗어붙이고 굵은 목이 뒤에서 겹쳐져 있다. 얼굴도 너무 커서 눈이나 코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감시원을 죽였어." "왜 죽였는데요?"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며, "유태인은 어쨌는가 하면..." 하고 말을 이었다. "충실한 동지에 대해서 가증스러운 고발을 했어." "그런 이유로 피들러는 죽게 되나요?" 리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유태인 놈들은 모두 다 같아. 문트 동지가 그들을 다루는 요령을 잘 알고 있지. 그런 무리들은 우리들 나라에는 필요없어. 당에 가입하면 당을 저희들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입당하지 않은 놈들은 박해받는다고 생각하고 있고. 처치곤란한 녀석들이야.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리머스와 피들러가 손을 잡고 문트를 내쫓으려고 계획을 세웠다는 거야. 아직도 먹고 싶지 않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은 쟁반을 가리켰다. 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먹어둘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키지 않지만 대신 먹어준다는 티를 징그럽도록 과장해 보이고, "감자까지 있군. 주방에 당신 애인이 있는 모양이야." 그 농담에 스스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 웃는 얼굴이 리즈 몫의 식사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리즈는 다시 창가로 돌아왔다. 그 혼란한 머릿속에 치욕, 비통, 불안한 감정이 소용돌이가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리머스에 대한 불길한 기억이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았다. 법정에서 본 그의 모습이. 의자에 굳어버린 듯 긴장하고 앉아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그 모습이. 그녀가 그를 파멸시켰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그녀를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경멸의 표정. 그것은 아마도 공포의 빛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리머스가 만일 무엇을 할 생각이었는지 그것만이라도 가르쳐 주었더라면 - 아니, 지금도 그것이 분명하게는 이해가 안 되지만 - 그녀로서도 그에게 유리하게 거짓 증언을 하고 그 사람들을 속일 수도 있었을 텐데. 미리 가르쳐만 주었어도! 리머스가 그녀를 이해해 준 것만은 틀림없다.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그가 원할 때에는 기꺼이 그의 생각에 따를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될 수만 있다면 그녀가 그의 모습, 그의 의지, 생활, 그의 이미지, 그의 괴로움, 온갖 것을 똑같이 함께 하고 싶어하던 것을. 그 기회가 오기만을 빌고 있었던 것을. 하지만 말해 주지 않고서는 그녀로선 알 도리가 없다. 베일에 싸인 음험한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의 답변이 가져온 결과의 두려움. 그녀의 뜨거운 머릿속에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수 천이나 되는 미세한 생물이 죽어간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느꼈던 그 기억. 아까 그 법정에서만 해도 거짓 증언을 하거나, 진실을 주장하거나 그리고 또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 결국엔 한 사람의 생명이 파괴된다. 그녀의 증언이 그렇게 되도록 강요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아니, 그 한 사람만이 아니고 또 한 명의 유태인 피들러의 생명도. 상냥하게 대해 주던 사람.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빨리 영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던 사람. 그 피들러마저도 사살된다. 여간수가 그렇게 말했다. 왜 피들러가 죽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죽게 되는 사람이 그녀를 심문하던 초로의 남자, 아니면 벤치의 가장 앞줄에서 병사들의 사이에 앉아 있었던 금발의 사나이여서는 안 되는가? 그녀가 돌아볼 때마다 언제나 미소를 짓던 사나이, 짧게 깎은 금발, 빤질빤질한 뺨에 엷은 웃음으로 구겨지던 얼굴, 이 따위 재판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장난거리라고 비웃고 있는 듯한 그 웃음. 왜 그 사나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리머스와 피들러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녀는 여간수를 향해서 또 한 번 물어보았다. "어째서 우리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요?" 여간수는 쟁반을 밀어두고 일어섰다. "명령이야. 당신을 그냥 두느냐 마느냐를 지금 의논하고 있는 중이야." "그냥 두다니요?" 리즈는 멍청히 다시 물어보았다. "증언시킬 문제가 있는 거야. 얼마 뒤면 피들러가 재판을 받게 돼. 아까도 말했지만 피들러는 리머스와 공모했다는 혐의가 있어." "하지만 이상하군요. 독일과 영국이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공모를 했을까요? 리머스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그분은 당원이 아니에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그런 이야기는 일체 비밀이야." 하고 대답했다. "최고회의만이 알고 있는 일이지만 아마 그 유태인이 데리고 왔겠지. 어쨌든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니에요, 당신이 모를 리가 없겠지요. 이 형무소의 지구위원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만은 얘기했겠지요." 리즈는 되풀이해서 물어보았다. 목소리에 교태까지 섞어가며. "그건 그렇지만," 여자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절대비밀이란 말이야."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가 수화기를 들어 귀에다 대며 흘끔 리즈를 보면서 곧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동지." 그리고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당신을 당분간 잡아두기로 했대." 하고 말했다. "최고회의는 피들러의 재판에 들어가는 모양이야. 그때까지 당신은 문트 동지가 희망해서 잡아두기로 되었어." "문트가 누구죠?" 여자는 능글맞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최고회의가 원해서야." "전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울어버렸다. "전...." 여자는 대답했다. "당은 우리 이상으로 우리의 일을 알고 있어. 당신은 여기 있게 돼. 그것이 당이 바라는 바니까." "문트는 누굽니까?" 리즈가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리즈는 느릿느릿 복도를 걸어갔다. 끝없이 이어진 복도. 쇠창살 너머로 경비병들이 여러 명 서 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쇠문을 열고 그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안뜰을 지나고 나서 또 계단을 내려갔다. 리즈에게는 그것이 지옥의 끝까지 이어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언제 리머스가 죽었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몇 시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감방 바깥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녁 5시쯤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밤중인 12시일는지도 모르고.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멍청하게 어둠 속에 시선을 두고 소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것이 이처럼 무서운 것인 줄 몰랐다. 한번 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 자신의 소리에 대한 기억 뿐. 고형물같이 단단한 어둠. 그 안에서 소리를 내니까 주먹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느낌이다. 침대에 누워서 두 손을 몸 주위에서 움직여 보지만 어둠 속에서는 무게가 불어나는지 물속에서 물건을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감방이 조그만 줄은 알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에 보아두었기 때문이다. 감방 안에는 그녀가 엎드려 있는 침대와 수도꼭지도 없는 세면기, 조잡하게 생긴 테이블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전등이 꺼지자 그녀는 급히 침대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다리를 부딪쳐서 침대인 것을 알고 공포에 떨면서 그 자리에 누웠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문이 갑자기 열렸다. 복도의 희미한 불빛으로 그림자를 본 것만으로도 그 사나이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민첩해 보이는 그 몸매, 날카로운 뺨의 윤곽, 짤막하게 깎아올린 금발. 빛을 등지고 사나이는 들어왔다. "나는 문트다. 따라오도록 해."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있는 음성이지만 딴 사람이 들을까 봐 겁이 나는지 소리를 낮게 누르고 있는 느낌이다. 리즈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여간수의 말이 생각났다. "문트는 유태인을 다루는 방식을 알고 있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그녀는 침대 곁에서 그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왜 서둘지 않나.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문트는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서둘러야 돼." 끌려서 복도를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채 문트가 소리 안 나게 그녀의 감방에 쇠를 채우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난폭하게 그녀의 팔을 거머쥐더니 뛰다시피 복도를 걸었다. 멀리서 에어컨디셔너의 모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가끔 그들이 가고 있는 복도와 교차되는 통로에 인기척이 나면 문트는 곧 걸음을 멈췄다. 때로는 도로 물러나서 그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그녀에게 걸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런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녀가 순순히 따라오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가 멈춰섰다. 거기 있는 더러운 쇠문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소름끼치는 기분으로 그것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겨울 밤의 차디찬 공기가 달콤한 느낌으로 얼굴에 와닿았다. 또 다시 재촉을 받으며 두어 걸음 계단을 내려가니 볼품없는 채소밭으로 이어지는 자갈길로 나왔다. 그 길 막다른 곳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이 있고, 그 밖은 일반도로였다. 문 앞에 차가 한 대 세워져 있고 그 곁에 알렉 리머스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지 마." 하고 문트가 달려가려는 그녀를 막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문트가 혼자서 다가갔다. 사나이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섰다. 그것을 그녀는 1년이나 되는 듯한 느낌으로 기다렸다. 추위와 불안으로 심장이 높이 뛰고 몸이 떨려왔다. 간신히 문트가 되돌아왔다. "따라와." 문트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리머스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두 사나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조심해서 가." 문트는 쌀쌀맞게 말했다. "하지만, 리머스, 너도 똑똑한 사내는 아니군. 이 여잔 피들러와 같은 유태인이야." 그 다음에는 아무 말 않고 빠른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만졌다. 그는 반쯤 몸을 틀어 그 손을 뿌리쳤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그녀는 두어 걸음 물러서며, "알렉." 하고 작은 소리로 불렀다. "알렉,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석방된 건가요?" "가만!" 리머스가 막았다.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야. 자, 어서 타." "그 남자, 피들러는 어떻게 한대요? 어째서 우리를 석방했대요?" "임무가 끝나서 석방했을 뿐이야. 타라고. 빨리!" 그 굉장한 의지의 힘에 그녀는 등을 밀리듯이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리머스도 곁에 앉았다. "그 남자는 무슨 약속을 했나요?" 그녀는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의혹과 불안을 한층 강하게 들어내며, "당신과 피들러가 아까 그 남자를 없얘기 위해서 공모했다는데, 그런데 어째서 석방시켜 주었나요?" 리머스가 차를 출발시키자 차는 갑자기 좁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빈 들판이 이어지고, 저 멀리에 단조로운 구릉의 선이 저녁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리머스는 시계를 보고, "여기서 베를린까지 다섯 시간의 거리야. 15분 전 1시에 쾨니크까지 도착해야 된다고 했어. 서두르면 시간은 충분해." 한동안은 리즈도 말이 없었다. 앞쪽 유리를 통해 보이는 도로에는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일로 뒤죽박죽이었다. 둥근 달이 떠오르고 들판은 하얗게 서리로 덮여 있다. 차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겨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렉, 제가 걱정이 되었나요? 그래서 문트에게 부탁해서 저를 풀어주게 했나요?" 리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과 문트는 서로 적이 아닌가요?" 그래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는 속력을 내고 속도계는 120 킬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구멍투성이인 고속도로라 몹시 흔들렸다.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차가 다가와서는 옆차선으로 끼어드는 것도 예사였다. 팔꿈치는 핸들에 닿을락말락, 덮어씌울 듯한 자세로 난폭하기 짝이 없는 운전이다. "피들러는 어떻게 될까요?" 리즈가 갑자기 물으니 이번에는 리머스가 대답했다. "총살이겠지." 리즈는 다급히 물었다. "당신이 총살당하지 않는 것은 왜죠? 문트를 죽이려는 일에는 당신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요? 모두들 그렇게 말했어요. 거기다가 감시원도 죽였다던데.... 어째서 문트는 당신을 용서해 주었나요?" "그렇게 알고 싶어?" 갑자기 리머스가 소리쳤다. "그럼 말하지. 당신이 - 당신도 나도 -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말해 주지. 문트는 런던의 사나이, 즉 그들의 스파이야. 영국에 있는 동안에 매수되었어. 당신과 나의 증언이 런던의 교활한 작전을 뒤엎어 문트는 위기를 면했는데, 진정한 목표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야. 문트의 진영 안에서 그 깜찍한 유태인이 진상을 알기 시작한 거지. 그 위험에서 문트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이 작전의 진정한 목적이었어. 런던은 우리들을 이용해서 그 사내를 죽게 한 거야. 유태인을 죽게 한 것이지. 결국 비참한 것은 우리들 둘 뿐이야." 제25장 - 벽 "그랬군요, 알렉." 그녀가 말했다. "그래, 제 역할은 뭐였나요?"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사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건 말이야, 그건, 리즈, 내 상상일 뿐이지만 내가 지금까지 알게 된 것과 아까 문트가 한 말을 종합해 보면 이런 이야기가 돼. 피들러가 문트에게 의심을 품었어. 영국에서 귀국한 그때부터 의심하기 시작한 거지. 문트가 이중스파이일 거라고 점을 찍은 거야. 물론 그것은 그가 문트를 미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 -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본 것이 실은 바로 본 거였어. 문트는 분명히 런던의 앞잡이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눈치를 챘다고 해서 그 피들러를 없애버리기에는 힘이 모자랐던 거야. 그래서 런던이 문트를 대신해서 그 역할을 맡기로 한 거지. 내게는 그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런던에 있는 놈들이 하는 짓이란 속이 뒤집힐 정도로 관료적이며, 아마 모르긴 해도 근사한 클럽의 어느 방에 모여 앉아 따뜻한 난롯불 앞에서 의논들을 했겠지. 피들러 하나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가 없다. 당원 전부에게 알리고 고발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은 의혹 자체를 없애는 데 있으니까. 정식 복권, 문트의 명예회복이야. 그들은 문트 때문에 그 작전을 짜낸 거야." 그는 말을 하면서 전방의 트럭을 추월하려고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왼쪽 차선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뜻밖에 트럭 쪽에서도 다가왔으므로 구멍투성이의 길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나에게 문트가 의심을 받게 되도록 하는 공작이 주어졌어. 나는 당연히 긴장되었지. 드디어 마지막 일을 끝내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비참한 생활도 하고 상점 주인을 때려주기도 했지. 그것은 모두 당신도 알고 있는 일이겠지만." "그래서 사랑도 했다는 건가요?" 그녀가 조용하게 말하니 리머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문트가 알고 있었던 점이야. 그에게는 이 계획이 내통되어 있었던 거야. 문트는 나를 붙잡게 하고는 심문을 피들러에게 맡겼어. 그렇게 한 것도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오를 사람이 피들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내 역할은 진실을 사실대로 그들에게 인식시키는 일, 문트를 영국 스파이로 알게 하는 일." 거기서 잠시 망설이다가, "그리고 당신 역할은 나의 그런 증언을 송두리째 뒤집는 것이었어. 그렇게 함으로써 피들러는 사형이 되고 문트는 구제되는 거지. 파시스트들의 음모에서 구출된 형식으로 말이야. 연애를 이용하라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온 우리들의 원칙이지." "하지만 어떻게 영국 첩보부는 제게 대한 일까지 알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서로 만나게 될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리고 리즈는 갑자기 소리질렀다. "알렉, 아무리 그 사람들이라고 해도 누구하고 누구가 사랑하게 될 것인지 알 방법은 없잖아요!"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어. 서로 사랑을 하든 말든 관계없는 일이었어. 그들은 당신이 젊고 예쁜 공산당원이니까 골랐을 뿐이야. 초대받으면 독일에 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나를 그 도서관에 보낸 것은 직업소개소의 피트라는 사나이인데, 그것도 그들이 알고 시킨 일이지. 피트는 전쟁중 첩보부에 있던 녀석인데 그들에게 매수된 것이 틀림없어. 그들로서는 나와 당신을 만나게만 해놓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지. 가령 단 하루라도 좋아. 그것을 이유로 뒷날 당신을 찾아가지. 그리고 돈이라도 보내면 거기에 무슨 내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으니까. 사실은 어찌되었거나 말이야. 아마 당신이 내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케 할 셈이었겠지. 즉, 우리들을 함께 있게 하고 그 뒤에 내 부탁이라고 하면서 당신에게 돈을 건네줄 작정이었던 거야. 다만 나와 당신 경우는 그 조작이 진실로 되어버렸지만...." "그래요. 우리들은 겉으로만 애인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기분나쁜 이야기로군요. 마치 전 종마(種馬) 앞에 서 있는 기분이군요." 리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돈만 주면 마음이 풀릴 거라고 생각했을까?" 리즈가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원인 줄 알고 있으면서 이런 함정에 빠뜨리고는...." 리머스가 말했다. "그 녀석들은 양심으로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니야. 모두가 작전상의 필요에 의해서지." "전 그 감옥에서 나오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문트도 사실은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 남자가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가 이 모략을 알고 있을 위험도 있고, 또 조금만 머리를 쓰면 모두 알아버릴 가능성도 있잖아요. 어쨌든 피들러에게는 죄가 없어요. 그렇죠? 그것은 단지 유태인이라는 것만으로." 그녀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유태인이 어쨌다는 거예요!" "그만하지 못해!" 리머스도 소리쳤다. "아무래도 문트가 날 보내준 것이 이상해요. 아무리 그것이 당신과의 약속이었다고 해도."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에게 있어서는 내가 지금 가장 위험한 여자예요. 영국에 돌아가서 만일 내가 이 자초지종을 임원에게 귀띔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를 석방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리머스는 대답했다. "그놈의 계획은 우리들의 도주를 구실로 첩보부 내에 아직 피들러의 일당이 남아 있다고 최고회의에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이야." "다른 유태인을 체포하나요?" 리머스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것으로 그의 지위를 확보할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거지." "또다시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 당신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치욕과 분노로 가슴이 답답해 와. 하지만 나는 세상 사람들과는 별종의 인간이야. 그렇게 만들어졌어. 어떤 것도 믿지 못하는 사내가 되어 버렸어. 이 작전을 진행시킨 놈들은 따라지가 아니면 장땡이라는 위험을 저질렀어. 그리고 피들러가 패하고 문트가 승리했어. 런던은 승리를 잡은 거야. 그것만이 의미였어. 비열하고 추악한 작전이었던 것은 틀림없어. 그러나 보람은 있었지. 그것만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법칙인 거야." 소리는 점점 높아져서 마지막에 가서는 절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리즈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당신 말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할 뿐이에요.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도 그런 나쁜 짓을 할 권리는 없어요. 죄없는 피들러를 죽이다니! 유태인이니까 죽여도 좋다는 건가요? 거기다가 문트는...." "소리칠 거 없어." 리머스가 거칠게 말했다. "당신들의 당도 언제나 투쟁 뿐이잖아. 대중을 위해서라며 예사로 개인을 짓밟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사회주의의 리얼리티라는 것을! 자나깨나 투쟁 또 투쟁.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걸 생각하면 당신이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지. 당신 당이었다면 어떻게 됐겠어? 나는 지금까지 공산주의자에게서 생명의 신성함을 들어본 적이 없어. 내 생각이 틀렸을까?" 하고 비꼬듯이, "어쨌든 당신은 죽을 뻔했어.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지. 상대가 문트이고 보면. 그놈은 당신을 살려서 보낼 이유가 없어. 당신에게는 이런 약속을 했겠지. 걱정할 건 없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런 약속을 언제까지나 머리에 담아두고 있을 놈이 아니야. 그래서 당신은 이 노동자의 천국에서 옥사할 뻔했지. 오늘이나, 내년이나, 20년 뒤가 될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나 또한 같은 운명이었지. 내가 보기엔 당신들 당은 모든 계급을 파괴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아. 어때, 내 생각이 잘못되었나?" 윗도리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그 안에서 담배 두 개비를 빼내 성냥갑과 함께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여 한 개비를 리머스에게 돌려주었다. "당신은 그런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군요?" "우리는 마침 이 작전의 조건에 적합했던 것 뿐이야. 운이지, 운이 나빴던 거야. 가장 비참한 것은 우리들이야. 다른 녀석들도 우리와 같이 되면 불쌍하겠지.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시비할 자격은 없어. 리즈, 당신 당에서도 같은 짓을 하고 있어. ‘적은 대가로 큰 이익을.’ ‘다수를 위해서 한 사람의 희생.’ 정 떨어지는 말이야. 선택받은 놈만 억울한 거지. 그런 문구가 당신네의 이른바 인민 사이에서 실행으로 옮겨진 일들을 생각해 봐."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발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도로 이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가슴속의 공포로 애가 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게 당신을 좋아하게 될 기회를 주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내게 당신을 믿고 사랑하게 해주었어요." 그러나 리머스는 무자비하게 대답했다. "놈들은 우리들을 이용했을 뿐이야. 필요하니까 그렇게 했을 뿐이야. 그것이 이번 경우에는 유일한 수단이었어. 피들러는 성공에 가까이 가고 있었어. 그냥 두면 문트가 체포돼." 리즈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짓을 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었나요? 피들러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그 선량한 인간이 정당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신의 말 한마디로 죽게 되는 거예요? 문트는 스파이이고 매국노예요. 그런 사내를 구해 주다니! 그 사내는 나치예요. 아시지요? 유태인만을 미워하는.... 대체 당신은 어느 편이에요? 어째서 그런 짓을?" "우리들의 승부에는 법칙이 하나 있을 뿐이야. 문트는 런던의 사나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넘겨주는 거지. 구해 주는 것이 당연하잖아? 전략상의 일시적인 제휴에 대해 말한 것이 누구였지? 레닌이 아니었던가? 당신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스파이야. 목사와는 달라. 성도나 순교자가 아니야. 어리석고 비열한 사내들의 집단이야. 물론 그 속에는 매국노도 있어. 남창(男娼), 새디스트, 알콜 중독자, 그 썩은 일생에 마지막 꽃을 장식하려는 녀석들뿐이지. 설마 당신은 그들이 런던에서 선과 악을 비교하는 수도승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겠지? 나 역시 될 수 있으면 문트를 죽이고 싶어. 그놈의 용기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도 지금의 나로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야. 마침 그 사내가 런던에서는 없어서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지. 그들은 놈을 필요로 하고 있어. 그놈을 이용함으로써 당신이 찬미하는 어질고 어리석은 대중을 편히 잠자게 할 수가 있으니까. 그들은 놈을 필요로 해. 당신이나 나 같은 독이 될 수도 없는 대중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피들러를 죽인다는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괴롭지 않은가요?" "이건 전쟁이야." 리머스는 대답했다. "소규모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하는 전쟁이니까 좋지 않은 국면이 한층 뼈저리게 느껴질 뿐이야. 때로는 그것이 죄없는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때도 있지.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돼. 다른 전쟁과 비교해 보라고.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건 누구든지 알 거야. 지난번 전쟁과 바로 다음에 일어날 전쟁을 생각해 보라고." "당신은 모르는군요. 알려고도 하지 않는군요. 그런 식으로 당신 자신을 설득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은 아주아주 무서운 뜻이 있는 거예요. 내게 있어서나 또는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나 사람이면 가지고 있는 휴머니티를 찾아 이용해서 자기들의 무기로 바꾸어 살인을 위해 쓰는 거예요." "알았어, 그만해 둬!" 리머스는 소리쳤다. "인류는 이 세상이 시작되고부터 줄곧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어. 그밖에 뭘 했다고 할 수 있어? 나는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어. 허무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물론 살인은 싫어. 죽도록 싫어. 하지만 그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지? 개종을 권하는 신부가 아닌 거야. 설교단이나 당의 연단에 서서 평화를 위해, 신을 위해 싸우라고 떠벌일 수야 없지. 오히려 그 설교자들이 서로 동료끼리 해치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 불쌍한 우리인 거야." "아니에요, 당신이 틀렸어요." 리즈는 절망적인 소리를 냈다. "당신의 동료들은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나쁜 인간이에요." 리머스는 난폭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유혹했다고 해서 말인가? 불쌍한 실업자로 보이고 동정받고 있는 것을 이용해서?" "소중한 것을 업신여기기 때문이에요. 진실과 선의를 무시하고 애정을 경멸하고...." "옳은 말이야." 리머스는 갑자기 힘이 빠진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분명 그것이 우리들이 치르는 비싼 대가야. 하나님과 카를 마르크스를 다같이 경멸하는 사나이들. 당신은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그것이 당신 모습이에요." 리즈는 계속했다. "문트도 또 다른 사람도 모두 같아. 왜 난 몰랐을까? 도구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 사람들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아니, 생각할 것도 없었겠죠. 피들러만은 달랐겠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래요 당신들 나를 마치 인간도 아닌 듯이, 써버리는 돈이나 그런 것처럼.... 알렉, 당신도 그 중 한 사람이에요." "리즈! 믿어줘. 나만은 믿어줘. 당신처럼 나도 그것이 싫어 견딜 수 없어. 저주하고 있어. 갈수록 싫어져. 그러나 그것이 현실인 것은 부정 못해. 그것이 우리들의 사회인 거야. 인류는 미쳤어. 분명히 우리들은 잔돈 몇 푼으로도 살 수 있는 물건이지.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은 모두 서로 속이고 서로 거짓으로 대해. 예사로 생명을 빼앗고 사살하고 감옥에 처넣는단 말이야. 그룹이나 계급에 관계 없이 인간의 가치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일도 없어. 그리고 리즈, 당신네 당은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져 있어. 당신은 나같이 죽어가는 인간은 보지 못했을 거야. 리즈...." 그가 말하고 있는 사이에 리즈는 칙칙한 색깔에 둘러싸인 감옥의 안뜰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간수의 말을. ‘역사의 진행을 방해하려고 획책한 무리들.... 과오를 저지를 권리가 있다고 착각한 무리....’ 리머스가 갑자기 긴장했다. 앞쪽 유리를 통해 앞을 보았다. 헤드라이트의 빛이 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비쳤다. 그 남자는 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손에 든 소형 전지를 깜박였다. "저 사람이다." 리머스는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엔진을 멈춰 차를 소리없이 그 남자 가까이로 접근시켰다. 차를 멈추자마자 리머스는 등뒤로 손을 뻗어 뒷문을 열었다. 남자는 차 안으로 뛰어들었으나 리즈는 돌아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온몸을 긴장시키고 앞만 보고 있었다. 어느새 비가 뿌리고 있었다. "30 킬로의 속력으로 달리시죠." 남자가 말했다. 높은 목소리에 불안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길은 내가 가르쳐 주겠소.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면 똑바로 벽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당신이 기어오를 장소는 서치라이트가 비춰줄 겁니다. 서치라이트 안에 서 있다가 빛이 이동하면 곧바로 올라가기 시작해요. 허락된 시간은 90초. 알겠소? 당신이 먼저 올라가는 겁니다." 하고 리머스에게 말하고, "여자는 당신 뒤를 따라야 하고. 벽 아래쪽에 쇠 사다리가 있소. 사다리에서 그 위쪽은 당신 힘으로 기어 올라 갑니다. 올라간 다음에 여자를 끌어올리고. 알겠소?" "알았어." 리머스가 대답했다. "얼마나 남았지?" "30 킬로로 달리면 9분이면 도착합니다. 정확히 1시 5분이면 서치라이트가 비칠 겁니다. 시간은 90초. 1초도 넘어서는 안 돼요." "90초가 지나면 어떻게 되나?" "90초만 허락되었소."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 이상은 위험해. 1분대 병력이 파견되어 있소. 그들은 당신들을 서베를린으로 잠입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유를 주지 말라는 명령도 받은 겁니다. 90초면 충분하긴 하지." "그랬으면 좋겠군." 리머스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지금 몇 시지?" "시계는 그 분대를 지휘하는 중사의 것과 맞추어 놓았소." 차 뒤쪽에서 짧은 간격으로 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현재 12시 40분. 5분전 1시에 차에서 내리게 돼 있소. 이제 7분 남았군." 완전한 정적의 세계. 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뿐이다. 길은 앞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있고 100 미터마다 우중충한 가로등이 보였다. 사람 그림자는 전혀 없다. 머리 위에서는 아크 등의 부자연스러운 빛으로 날이 밝아오는 듯했다. 가끔 서치라이트가 번쩍이다가는 사라지고 있었다. 왼쪽편 지평선 조금 위에는 끊임없이 밝기가 변하면서 이동하는 빛이 있었다. 마치 화재 때의 불빛의 반사를 연상시킨다. "저건 뭐지?" 리머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정보국이오." 남자가 대답했다. "전광 뉴스를 끊임없이 동베를린으로 보내고 있지." "저거로구먼." 리머스가 중얼거렸다. 여로의 끝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되돌아오지는 못해." 남자가 말했다. "그 말은 들었겠죠? 두번째 기회는 없소." "알고 있어." 리머스가 말했다. "실패해도 - 발이 미끄러졌다든가 어디를 다쳤다든가 해도 - 되돌아올 수는 없소. 벽에 접근하는 자를 사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니까.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넘지 않으면 안 돼요." "알고 있어." 리머스는 되풀이했다. "그 사람에게서도 들었어." "차 밖에 나서면 벽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이젠 됐어. 그만해 둬." 리머스는 귀찮은 듯이 말하고는 다시 물었다. "이 차는 당신이 운전하고 돌아가나?" "당신들이 내리는 것과 동시에 달릴 거요. 나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렇겠군." 리머스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다시 침묵이 흐른 뒤에 리머스가 물었다. "당신, 권총 가지고 있나?" "물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그러나 당신에게 줄 수는 없소. 그도 그런 주의를 주더군. 당신은 틀림없이 탐을 낼 테지만 주어선 안 된다고." 리머스는 웃으며, "그 사람이 할 만한 소리로군." 그리고 스타터를 당겼다. 마을 전체에 울려퍼지는 듯한 소리를 내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300 미터쯤 가니 남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소리쳤다. "저기에서 오른쪽. 다음에는 곧장 왼쪽으로." 거기는 좁은 길이었으며 양쪽은 인기척 없는 시장. 그 사이를 그들의 차는 달렸다. "저기요! 저기서 왼쪽!" 차는 다시 모퉁이를 돌았다. 이번에는 높은 빌딩들만 줄지어 서 있는 사이를 맹렬한 속력으로 지나갔다. 막다른 골목 같은 지점에서 도로 위쪽에 세탁물이 가로널려 있었다. 이 밑을 지나갈 것인가? 하고 리즈는 이상하게 여겼다. 길이 끝난 듯한 곳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저기서 왼쪽. 인도로 그냥 가시오." 리머스의 차는 인도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인도 위를 달렸다. 길은 생각보다 넓었으며, 왼쪽은 찌그러진 철책이 넘어져 있고 오른쪽은 창이 없는 고층 건물이 이어져 있었다. 어딘지 위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소리다. 리머스는 입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길은 다시 오른쪽으로 약간 구부러지고서 그 조금 앞에 한길이 보였다. "어디로 가지?" "똑바로 - 도로를 가로질러 - 약국 옆으로 - 약국과 우체국 사이 - 저기, 저기요!" 사나이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어서 얼굴은 리머스와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리머스의 겨드랑 밑에서 내민 손끝을 앞쪽 유리에서 떼지 않았다. "물러나 있어!" 리머스가 나무랐다. "손을 치워. 손에 가려서 앞이 안 보여!" 곧바로 기어를 1단에 넣고 날쌔게 넓은 도로를 가로질렀다. 왼쪽을 보고는 놀랐다. 300 미터쯤 앞에 브란덴부르크 문의 커다란 모습과, 거기에 집결해 있는 여러 대의 군용차가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어디로 가지?" 리머스가 갑자기 물었다. "바로 저기요. 천천히. 왼쪽, 왼쪽으로 꼬부라져!" 그는 외쳤다. 순간 리머스는 핸들을 꺾었다. 차는 좁고 둥근 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갔다. 창의 반은 칠을 해버렸고 나머지 반은 판자로 막아버렸다. 문짝이 없는 출입구가 캄캄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안뜰 저쪽으로 또 하나의 출입구가 보인다. "저리로 들어가요." 속삭이는 듯한 지시가 어둠 속에서 긴장을 더해 준다.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급 커브. 오른쪽으로 가로등이 이어져 있소. 두 번째부터는 불이 켜져 있지 않소. 그 가로등에서 엔진을 끄고. 그 다음엔 소화전까지 천천히 가도록 하시오. 거기가 당신 자리요." "어째서 당신이 운전하지 않지?" "당신에게 운전을 맡기라는 명령이오. 그러는 편이 안전하다고 했소." 차는 출입구를 지나자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었다. 좁은 통로이며 칠흑보다 어둡다. "라이트를 꺼!" 리머스는 스위치를 돌렸다. 천천히 첫번째 가로등까지 전진했다. 그 앞에 두 번째 가로등이 보였다. 거기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엔진을 끄고 소리없이 가로등을 지나갔다. 20미터 앞에 소화전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리머스는 브레이크를 밟고서 차를 세웠다. "여긴 어디야?" 리머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까 가로지른 곳이 레닌 거리였지?" "그라이프스발더 가(街)요. 거기서 북쪽으로 꼬부라져서 여기는 베르나우어 가(街)의 북쪽이 됩니다." "판코 지구 (동베를린의 관청이 밀집한 거리) 인가?" "대강 그렇소. 자!" 하고 남자는 왼편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 끝에 희미한 아크 등에 비치어 엷은 갈색으로 보이는 벽이 길 폭만큼 보였다. 벽 위에는 세 갈래로 엉클어진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여자가 있는데 저 철조망을 어떻게 넘지?" "당신이 올라갈 부분은 잘라놓았소. 폭이 좁으니까 조심하시오. 1분이면 벽까지 갈 수 있소. 그럼 조심하시고." 그들은 세 사람 다 차에서 내렸다. 리머스가 리즈의 팔을 잡으니 그녀는 놀란 듯이 움찔했다. "조심해요." 독일인이 말했다. 리머스는 낮은 소리로, "우리가 벽을 넘어갈 때까지 차를 움직이지 말게." 리즈는 불안한 불빛 속에서 독일인을 흘끔 보았다. 초조해 보이는 젊은 얼굴. 용기 있는 척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소년 같은 얼굴. "안녕." 리즈는 말했다. 팔을 잡힌 채 리머스의 뒤를 따라 도로를 가로질러 좁은 골목길을 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골목에 들어서자 등뒤에서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들었다. 방금 온 방향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리머스는 멀어져 가는 차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사다리를 없애놓아야지. 바보 같은 녀석이야." 리즈는 듣고 있지 않았다. 제26장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오다 두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리머스는 가끔 뒤를 돌아다보며 그녀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골목 끝에까지 가서는 출입구 그늘에 몸을 숨기고 시계를 보았다. "앞으로 2분." 그녀는 말없이 있었다. 얼굴은 똑바로 벽을 향하고 그 저쪽에 검게 이어진 폐허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 2분." 리머스가 다시 말했다. 그들 앞 30미터쯤 되는 곳에 벽을 따라서 널찍한 빈터가 좌우에 있었다. 70미터쯤 떨어져 있을까. 오른쪽에 감시대가 보였다. 서치라이트의 빛이 빈터 위를 기어다닌다. 가느다란 비를 뿌리고 있었으므로 아크 등에서의 불빛이 푸른 안개처럼 그 너머의 세계를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 그림자도 없고 소리도 없다. 배우가 없는 무대. 감시탑의 서치라이트가 벽 위를 살피고는 망설이듯이 두 사람 쪽으로 접근해 왔다. 빛이 멈출 때마다 군데군데 갈라진 벽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광선은 두 사람 앞에까지 오더니 딱 멈췄다. 리머스는 시계를 보고, "됐어?" 하고 물었다.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팔을 잡고 그는 빈터를 일부러 천천히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리즈는 뛰고 싶었지만 팔이 잡혀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벽까지의 거리를 중간까지 갔는데 반원형의 휘황한 불빛이 두 사람 쪽으로 향해 다가왔다. 광선은 바로 위에 있었다. 리머스는 리즈를 잡아끌어 놓치지 않기로 다짐을 한 듯했다. 문트가 마지막 순간에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빼앗아갈까 봐 겁내고 있는 듯이. 벽까지 몇 걸음 남겨둔 순간 광선은 두 사람을 떠나 북쪽으로 달려갔다. 주위를 완전한 어둠이 감쌌다. 리머스는 리즈의 팔을 잡고 덮어놓고 뛰었다.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돌진하니 갑자기 꺼칠꺼칠한 신더(석탄 재) 벽돌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만져졌다. 벽이다! 얼굴을 들어보니 철조망과 그것을 누르고 있는 갈고리쇠가 어디 있는지 짐작이 갔다. 벽면의 벽돌에 산악인이 쓰는 피턴 비슷한 금속 쐐기가 박혀 있었다. 가장 높은 것을 손에 잡고 리머스는 재빨리 기어올라 순식간에 벽 위로 올라갔다. 쇠줄의 낮은 부분을 힘껏 잡아당기니 이미 절단되어 있어서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빨리!" 서두르며 낮게 외쳤다. "리즈, 올라와." 그 자신은 벽 위에 배를 깔고서 뻗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다리가 첫번째 쇠못에 걸렸다고 짐작하고 서서히 끌어올리려 했다. 갑자기 전세계가 불바다에 떨어진 듯했다. 위에서, 좌우에서, 모든 곳에서 강렬한 광선이 집중되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너무도 뚜렷이 비췄다. 리머스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돌리고 리즈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그녀의 몸은 허공에 떠 있다. 발이 미끄러졌나? 목청껏 소리쳐 보고는 팔을 잡아끌었다. 번쩍거리는 빛으로 눈은 쓸모가 없다. 혼란한 색채가 미친 듯이 춤추고 있을 뿐이다. 신경질적으로 사이렌이 울리고 미친 듯한 호령과 고함소리가 섞여서 날고 있다. 벽에서 반이나 무릎을 내밀고 리머스는 그녀의 두 손을 1인치씩 끌어올렸다. 자기 자신도 굴러떨어지기 직전인데. 그때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의 손에 그녀의 경련이 느껴지고 그 가느다란 팔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벽의 서쪽에서 영어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내려, 알렉! 뛰란 말이야!" 이제는 모두가 거침없이 소리질렀다. 영어, 불어, 독일어. 바로 가까이에서 스마일리의 소리도 들렸다. "여자는? 여자는 어디 있어?" 리머스는 광선을 손으로 가리고 벽 밑을 내려다보고는 겨우 그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은 채 나뒹굴어져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는 천천히 피턴 사다리를 내려갔다. 퍼붓는 비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듯이. 다음 사격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호령을 하는 자는 있었지만 누구 하나 발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최후의 총탄이 그를 붙잡았다. 두 발인가 세 발. 리머스는 버티고 선 채 투우장에서 눈이 멀어버린 황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쓰러지면서 그는 보았다. 대형 트럭 두 대 사이에 끼어 여지없이 찌그러져 버린 소형차를. 신나게 창문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던 아이들 모습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