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칼의 날(하) -포사이즈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제 21 장 제 15 장 파리의 프랑스 내무부에서 있는 세 번째 회의는 내무장관이 외무부 관계의 리셉션에서 돌아오는 도중, 교통체증 속에 끼어들어 늦어졌기 때문에 10시가 지나서야 열렸다. 내무장관은 자리에 앉자마자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첫번째로 보고를 한 것은 SDECE 국장인 기보 장군이었다. 장군의 보고는 간결하면서도 요령 있는 것이었다. 전 나치의 살인자 카셀의 거처가 SDECE의 마드리드 지부 요원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마드리드 시내 고급 아파트의 가장 위층에서 조용히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는 카셀은 역시 전 친위대 장교와 공동으로 사업을 해서 성공해 있으며, 않고 있다. SDECE의 마드리드 지부는 더욱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에 따라서 조사를 진행시켰지만, 그가 OAS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카셀은 고령으로서 때때로 다리의 류머티스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더구나 그 많은 음주량으로 보아서도 그가 재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다. 기보 장군의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참석자의 시선은 일제히 르베르에게로 쏠렸다. 르베르의 보고는 신통치 않았다. 그날 사법경찰에 연락을 해온 것은 24시간 전에 가능성이 있다는 인물을 통보한 4개국 중에서 서독을 제외한 3개국이었다. 먼저, 미국이 알려 온 찰스 아놀드. 이 무기상의 세일즈맨은 현재 콜롬비아의 미 육군에서 참모본부에 팔아 넘기려고 공작하고 있다. 그의 행동은 항상 CIA의 감시하에 있으며, 현재로서는 그가 무기 판매 이외의 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찰스 아놀드에 관한 자료는 혹시나 해서 비텔리노의 자료와 함께 텔렉스로 파리로 전성되어 왔다. 비텔리노의 경우도 역시 자료에 의하면 부정적이다. 이 코사 노스트라의 전 살인자의 거처는 아직 불명이지만, 키가 160cm에 옆으로만 퍼진 땅딸보로서, 검은 머리칼에 꺼벙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빈의 팡숑 호텔 프런트 직원이 말한 재칼의 특징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제외해도 좋겠다고 르베르는 생각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서아프리카의 모 국내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회사의 사병대(私兵隊) 대장으로 있다고 한다. 그의 임무는 회사 소유의 광대한 광구의 경계선을 순찰하며 도굴자의 침입을 막는 데에 있다. 어떤 방법을 쓰고 있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심문하지 않았으나, 회사는 그가 일하는 태도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가 그 광구 안에 있는 것은 회사측에서 확인하고 있다. 벨기에 경찰도 용의자에 대한 조사를 끝내 놓았다. 카리브 해 연안의 한 대사관에서 보고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에 의하면 카탕가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던 그 살인자는 3개월 전, 과테말라에 있는 어떤 술집에서 싸움에 말려들어 사망했다고 르베르는 각국 경찰에서 온 보고를 모두 소개했다. 파일에서 얼굴을 들자 14쌍의 눈동자가 차갑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전부인가?" 라는 롤랑 대령의 질문은 전원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즉각 생클레아가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은 형사가 할 일이라며 맡겨두라고 큰소리친 결과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그는 방안의 분위기가 자기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서 부비에와 르베르를 밉살스러운 듯이 노려보았다. 내무장관은 두 사람을 의식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Q?'?꾁(씈B쭯t*븖2 "애석하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하고 르베르가 대답했다. 부비에가 르베르를 대신해서 해명을 시도했다. "르베르는 사실 단서라고는 하나도 없이 가장 찾기 어려운 상대를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상대는 자기의 일이나 거처를 알리고 다니지 않으니까요." "그런 정도는 알고 있어." 내무장관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문제는 -- ." 노크소리에 말이 끊겼다. 내무장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긴급한 경우 이외에는 출입금지를 지시해 두었던 것이다. "예." 문이 열렸다. 사환이 머뭇거리면서 서 있다. "실례합니다. 르베르 총경님께 전화가 험악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긴급연락인 모양이라서......" 르베르는 일어났다. "잠깐 실례합니다." 5분도 안되어 르베르는 돌아왔다. 방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후속조치에 대해서 격렬한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생클레아 대령이 신랄한 비난을 해대고 있다가 르베르가 자리에 앉자 입을 다물었다. 자그마한 총경은 뒤에 뭔가를 갈겨쓴 봉투를 손에 가지고 있었다. "겨우 상대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회의는 30분 뒤에 끝났지만 그때의 분위기는 경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연락에 대해 설명을 하자 일동은 긴 여행을 끝내고 마침내 플랫폼에 도착한 기차처럼 훅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적어도 이제는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극비리에 프랑스 전역에서 찰스 칼스로프를 수색, 찾아내고, 필요한 때에는 그 자리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점으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칼스로프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다음날 아침 런던에서 텔렉스로 전송될 것이지만, 그때까지 RG는 칼스로프가 이미 프랑스에 침입해 있을 경우를 생각해서 그의 입국 카드와 숙박 카드를 찾아내는 데 힘을 다하기로 했다. 파리 경시청은 그가 파리 시내의 호텔에 잠복해 있을 경우를 숙박 카드를 점검하기로 했다. 또, DST는 전 프랑스의 국경검문소, 항만, 공항에 칼스로프의 이름과 특징을 알리고 이런 인물을 발견하면 즉시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그가 아직 프랑스에 잠입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런데로 좋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완전히 비밀을 유지하고 도착과 동시에 체포하는 거다. "칼스로프인가 하는 악당은 이미 독안에 든 쥐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날 밤 생클레아 대령은 잠자리에서 그 말을 정부에게 자랑삼아 했다. 자클린이 겨우 그의 오르가즘을 쏟아내게 하고 잠재운 것은 맨틀피스의 시계가 12시를 치고 8월 14일이 된 뒤였다. 내려놓은 토머스 총경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끌어모은 6명의 경감을 둘러보았다. 여름밤의 정적 속에 빅벤이 한밤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토머스는 장장 한 시간에 걸쳐서 오늘밤의 조사에 관해 설명하고 일의 분담을 결정했다. 경감 하나는 칼스로프의 소년 시절에 대해서 조사하기로 되었다. 그 밖에 부모가 있다면 현재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학교는 어디에, 학창시절 군사훈련 때에 사격 성적은 어땠었나, 성격적 특징이며 특별히 뛰어난 점은 무엇인가 등등. 또 한 경감은 청년시절에 관한 것, 학교를 졸업하고 병역에 임해서 -- 근무성적과 사격의 솜씨 -- 제대 후 어떤 직업을 거쳤으며, 해고된 무기회사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번째와 네 번째 경감은 1961년 무기회사에서 해고된 이후로 어떤 길을 밟아왔는지 그것을 캐기로 했다. 어디서 살면서 누구와 접촉하고, 어디서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었는가? 경찰에는 기록이 없고, 아마 지문도 떠놓은 것이 없을 테니까 가장 최근의 사진이 아무래도 필요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현 시점의 거처를 찾아내는 일을 맡았다. 아파트에서 지문을 채취하여 어디서 차를 구입했는지를 밝혀내고, 런던시 교통위원회에서 운전면허증 발행의 기록을 체크해 보고, 기록이 없을 경우에는 지방의 관계부서에서 자료를 조사한다. 그 밖에 차의 모양, 몇 년식, 색깔, 번호를 조사하고, 아파트 드라이브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등을 체크하고, 다시 도버 해협의 페리 회사를 탐문하고, 모든 항공회사에서 행선지에 관계없이 좌석을 예약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로 했다. 여섯 사람은 열심히 메모했다. 마침내 토머스의 지시가 끝났다. 그들은 일제히 사무실에서 나갔다. 복도로 나간 마지막 두 사람이 옆눈으로 서로 눈짓을 했다. "골치아픈 일거리를 맡게 되었군." "그것도 그렇지만, 이 칼스로프라는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또는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그 부근의 설명이 없다는 것은 이상해." "이것만은 분명해. 이것은 아주 고위층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칼스로프는 판사를 깨워 가택수색영장에 사인을 받는 데 시간이 걸려서 두 경감이 칼스로프의 아파트에 간 것은 새벽이 가까워서였다. 그 무렵 특별국 사무실에서는 지칠 대로 지친 토머스가 팔걸이 의자에서 졸고 있었으며, 파리에서는 초췌한 얼굴의 르베르가 진한 블랙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두 경감은 곧 그 플랫의 가택수색을 시작했다. 둘 다 모두 베테랑이라 솜씨 좋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먼저 책상 서랍을 하나씩 빼내어 안에 든 것을 시트에 쏟아넣고서 그것을 선별했다.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자 다음에는 책상의 몸체 자체를 여기저기 살펴서 비밀장치의 유무를 조사했다. 그 밖의 목제 가구류는 모두 분해해 버렸다. 이 작업이 한바탕 사육장같이 온통 엉망으로 어질러졌다. 한 사람은 거실을, 또 한 사람은 침실을 조사했다. 그곳이 끝나자 다음은 부엌과 욕실이다. 이렇게 가구, 쿠션, 베개, 양복에 이르기까지 조사를 끝낸 다음, 두 사람은 마루, 천장, 그리고 벽까지 찾아보았다. 아침 6시까지 플랫은 완전히 발가벗긴 모습이 되었다. 아파트의 이웃 사람들은 처음에는 층계참에 모여서 의미 있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니, 어느새 닫혀 있는 문 앞까지 와서 수군수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감들이 나오자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경감 하나는 압수한 서류며 물건들을 가방에 넣은 채 들고 있었다. 그는 곧 밑으로 내려가서 차를 타고 아파트에 남아있기로 했다. 아파트의 주민은 거의가 직장을 가진 사람들로서, 출근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먼저 그들부터 시작했다. 상인들은 뒤로 돌렸다. 토머스는 사무실 바닥에 펼쳐 놓은 칼스로프의 소지품을 한동안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온 경감이 푸른색 표지의 여권을 발견하고는 주워들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창가로 다가가서 아침 햇살에 비춰 보면서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이걸 잠깐 보십시오." 그는 여권의 어떤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십시오, 여기입니다...... '1960년 12월 입국. 시우더드 트루히요 공항, 시간적으로 일치합니다. 녀석이 재칼입니다." 토머스는 경감에게서 여권을 받아서 여기저기 뒤져보더니 이윽고 문득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이 틀림없어. 그러나 여권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나?" "아, 그렇군요 -- ." 경감은 마른 침을 삼켰다. 토머스는 절대로 난폭한 말을 쓰지 않았다. "이 여권을 쓰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이봐, 빨리 전화해. 파리를 불러내!" 같은 날 같은 시각, 재칼은 이미 있었다. 밀라노에서 제노바에 이르는 고속 7호선은 아침 햇살을 받아서 밝게 빛나고 있다. 알파 로메오는 시속 130km로 넓은 차도를 달리고 있다. 타코미터의 바늘은 적색 표시 밑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다. 시원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지만, 눈은 선글라스로 보호되어 있다. 도로지도에 의하면 벤티밀리아(반테밀)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경까지 210km이며 약 두 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정보다 페이스가 빨랐다. 제노바에 도착한 것이 오전 7시 조금 지나서였고, 항구로 가는 차의 행렬에 휩쓸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7시 15분에는 시가지를 빠져나와 산레모로 가는 10호선으로 도착했는데, 그때는 이미 차도 많아지고 기온도 올라가 있었다. 10분쯤 기다린 뒤에 세관의 지시에 따라 주차 램프에 차를 넣었다. 여권을 손에 든 경관은 신중하게 그것을 살펴보고는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세관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지나서 그는 사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 나왔다. 여권은 그 사복의 남자가 가지고 있었다. "봉주르, 무슈." "봉주르." "이건 당신 여권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복은 다시 여권을 조사했다. "프랑스에 오시는 이유는?" "관광여행입니다. 아직 코트 해안으로서, 칸-니스-모나코 등으로 연결된 리비에라 해안을 가리킨다.)를 가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자신의 차입니까?" "아니, 렌터카입니다. 사업상 밀라노에 왔다가 예상외로 1주일쯤 시간이 남아서 렌터카로 관광여행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흠, 그럼, 면허증이나 그 밖의 서류는?" 재칼은 국제면허증, 렌터카의 계약서, 그리고 두 종류의 보험증서를 꺼냈다. 사복은 그것들을 꼼꼼하게 조사했다. "짐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 트렁크에 넣어둔 여행가방 세 개와 아타셰 케이스입니다." "그것을 모두 세관의 홀로 사복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관이 여행가방을 꺼내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그리고 둘이서 건물 안으로 운반해 들어갔다. 밀라노를 출발하기 전 낡은 군용 외투와 앙드레 마르탱의 바지와 구두는 한데 뭉쳐서 트렁크의 구석에 처박아 두었었다.(이 가공의 프랑스인 서류는 세 번째 여행가방의 안감 속에 넣고 꿰매어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여행가방에 들어 있던 의류는 셋으로 나누어 세 개의 여행가방에 적당히 다시 넣어두었었다. 훈장류는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 담당관 두 사람이 가방을 하나씩 검사했다. 그 동안에 재칼은 관광객용의 입국 카드에 필요사항을 기재해 넣었다. 담당관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머리 염색약이 들어 있는 병을 손에 들었을 때에는 순간 그도 불안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경우를 가상해서 미리 면도 로션의 병에 바꾸어 넣어둔 거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아직 면도 로션이 유행하지 않았으며, 거리의 상점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담당관은 흘끗 시선을 보냈으나 그대로 말없이 병을 아타셰 케이스 속에 도로 넣었다. 옆눈으로 흘끔 창밖을 보니 다른 담당관이 알파 로메오의 트렁크와 엔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행히 섀시 밑에까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담당관은 트렁크에서 외투 뭉치를 꺼내어 펴보고는 더러운 듯이 쳐다보았으나, 외투는 겨울의 또 낡은 바지는 길가에서 수리라도 할 때에 쓰기 위해서일 거라고 혼자 짐작하고는 트렁크에 도로 넣었다. 재칼이 입국 카드의 기재가 끝남과 동시에 두 담당관은 가방을 닫으면서 사복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복은 입국 카드를 손에 들고서 한번 훑어보고는 여권과 대조한 다음 여권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베르시, 무슈. 봉 보아주." 10분 뒤 이미 알파는 망통 시의 교외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래 된 항구와 요트항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천천히 아침을 마친 뒤 재칼은 코르니시 가도를 모나코, 니스, 칸 방면을 향해서 더듬어 갔다. 런던 경시청 특별국 사무실에서 토머스 휘저으면서 텁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칼스로프의 거처를 찾아내는 일을 지시받은 경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세 사람은 새로 스카우트해서 팀으로 오게 된 6명의 부장형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특별국 사람들로서, 통상의 임무에서 풀려나고 토머스의 팀에 편입되기로 된 것이다. 오전 9시 조금 지나 이동 지시를 받은 그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왔다. 전원이 모이자 토머스는 일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어떤 남자를 찾고 있어. 왜 그 남자를 잡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힐 수는 없으며, 자네들이 알 필요도 없어. 중요한 것은 그 남자를 한시라도 빨리 잡는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해. 가짜 여권으로 여행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어. 이것이 -- ." 그는 칼스로프의 여권 신청서에 붙어 있었던 사진을 복사해서 확대한 것을 여섯 명에게 건네주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야. 그러나 변장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꼭 이 사진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어. 자네들은 지금부터 여권발행국에 가서 최근에 제출된 신청서의 명단을 받아 오도록. 지난 50일 동안의 것이면 되네. 그것으로 안되면 100일 전까지의 것을 조사하는 거야. 끈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애써 주도록." 거기서 토머스는 가짜 여권을 손에 넣는 가장 흔한 방법에 관해서 죽 설명했다. 녵D? 토머스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명심하게, 출생증명서만을 조사하고 끝내서는 안돼. 사망증명서도 조사해야 되네. 그러니까 여권발행국에서 명단을 받으면 전원이 중앙등록소에 가서 분담하여 사망증명서와 대조하는 거야. 이미 사망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청서가 제출되었다면 그자가 범인이야. 자, 당장 가게." 8명의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나갔다. 토머스는 곧 여권발행국과 서머셋 하우스에 전화를 걸어서 최대한의 협조를 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그가 빌려온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깎고 있으려니까 선임 경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과거 100일 사이에 제출된 여권 신청서는 8,041건이나 있다고 한다. 마침 신청이 많은 것이다. 토머스는 전화를 끊고 손수건을 대고 재채기를 했다. "지긋지긋한 여름이야." 이날 아침 11시가 지나서 재칼은 칸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 때에는 언제나 그렇지만, 그는 최고급 호텔을 찾았다. 몇 분 동안 시내를 돌아본 다음 마제스틱 호텔의 앞뜰에 알파를 세웠다. 그리고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현관 로비로 들어갔다. 한낮이 가까운 시간이라 손님은 거의 나가고 로비는 한산했다. 그의 품위 있는 복장과 자신에 찬 매너는 과연 영국 신사란 이름에 어울렸고, 전화의 부스가 어디냐고 보이에게 물어도 수상쩍은 눈으로 보는 자는 없었다. 전화교환대와 카운터 안에 있던 여자가 다가오는 그의 기척에 얼굴을 들었다. "파리를 부탁해요. 모리틀 5901입니다." 얼마 뒤 교환수는 교환대 옆에 있는 부스를 손으로 가리키더니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방음이 된 문을 닫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쪽은 재칼." "여보세요, 이쪽은 바르미. 아, 전화를 마침 잘 해주었습니다. 오늘로써 벌써 3일째 당신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재칼이 순간 몸이 굳어져서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유리 너머로 분명하게 보였다. 10분 정도 통화하는 사이에 그는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오로지 듣고만 있었다. 가끔 짧고 날카롭게 동정을 살피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교환수는 애정소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든 그녀는 아까 그 신사가 눈앞으로 가로막고 서서 선글라스 저쪽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황급히 교환대의 미터를 보고 통화요금을 알렸다. 보기좋게 몸을 태운 피서객들이 노니는, 햇빛이 눈부신 바다가 눈 아래에 보였다. 재칼은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서 그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코와르스키에 대한 것은 기억하고 있다. 빈의 팡숑에서 만난 거구의 폴란드인이다. 다만, 그 경호원이 어떻게 그의 암호명과 일의 내용을 알았는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프랑스의 경찰이 또는 코와르스키 자신도 살인자였으니까 본능적으로 그의 정체를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재칼은 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바르미는 일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지만, 스스로 인정했듯이 작전중지를 결정할 권한은 그에게 주지 않았다. 재칼은 처음부터 OAS의 기밀유지능력에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로 그의 불안이 증명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도 유리한 점은 있었다. 프랑스 관리의 처지와 비교하면 그가 훨씬 유리한 편이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여 그 이름으로 취득한 정규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종류나 되는 증명서와, 또 거기에 걸맞는 변장을 준비해 놓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프랑스의 르베르 총경인가 하는 사람은 어떤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 대충에 불과한 인상 특징 -- 키가 큰 금발의 외국인, 그것뿐이다. 8월의 프랑스에는 이런 외국인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그런 특징을 가진 모든 사람을 체포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두 번째로 유리한 점은 프랑스의 경찰이 찰스 칼스로프 명의의 여권을 휴대하고 있는 인물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거라면 얼마든지 찾아다녀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는 지금 알렉산더 댓건이며, 그것을 증명할 서류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와르스키가 죽고 없는 그의 정체나 거처를 모르고 있다. 이제 마침내 그는 혼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바라고 있었던 상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위험이 더해 가고 있는 것도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암살의 의도가 노출된 지금, 그는 엄중한 경계태세하에 있는, 말하자면 경비의 보루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계획이 경비망을 뚫을 수 있는가 없는 가이다. 공평하게 저울질해 보고, 그것은 가능하다고 그는 자신을 가졌다. 그래도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미해결인 채 남아 있다 -- 여기서 돌아설 것이냐, 아니면 전진할 것이냐? 돌아서면 스위스의 그의 은행구좌에 불입된 25만 달러의 소유권에 대해서 로댕 측과 말썽이 주저하지 않고 그를 몰아세우고 고문을 해서라도 그들이 지정하는 은행에 돈을 불입하는 의뢰서를 쓰게 하고, 그런 뒤에는 살해해 버릴 것이다. 계속 도망다니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아마 있는 돈을 몽땅 털어도 결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계획을 추진할 경우에도 일이 끝날 때까지 한층 더한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날이 다가올 수록 마지막 순간에 손을 빼기가 어렵게 된다. 계산서가 왔다. 그는 그것을 보고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턱없이 비싼 값이다! 이렇게 우아한 곳에서 우아한 생활을 하자면 달러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모자라겠지. 그는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를, 물가에서 노니는 날씬한 여자들의 도로에는 캐딜락이며 재규어가 오가고, 차에 탄 사내들은 한쪽 눈으로 인도 위를 헤매며 걸 헌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생활을 그는 오랫동안 꿈꾸어 왔다. 여행안내소의 창문에 코를 밀어붙이고 장부나 서류집계 등 더럽혀진 바다와는 딴 세상인, 통근전차의 비참함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말해 주는 포스터를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부터 가져온 동경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그 꿈꾸던 세계의 일단에 접해 왔다 -- 화려한 옷, 호화스러운 식사, 멋진 아파트, 스포츠카, 우아한 여성. 지금 여기서 뒤돌아선다면 그런 모든 것을 단념해야 한다. 재칼은 돈을 치르고 팁을 듬뿍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알파 로메오를 타고 향해서 핸들을 꺾었다. 르베르 총경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이제는 영원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뤼시앙 카롱은 한쪽 구석 간이침대에서 코를 골고 있다. 그는 칼스로프의 행적을 쫓는 일을 철야로 지휘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르베르와 교대한 것이다. 르베르의 책상에는 국내의 외국인 처소나 행동을 언제나 체크하고 있는 각 기관에서 들어온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어느 보고서도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즉, 파리 시내를 포함해서 전국의 호텔에 적어도 그런 이름으로 투숙한 외국인은 없다. 찰스 있지 않고, 어떠한 형태로든 프랑스 관저의 주의를 끌었던 적이 없는 것이다.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르베르는 칼스로프도 한번쯤은 프랑스를 다녀갔을지도 모르니,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 조사를 더 계속하라고 담당관에게 지시했다. 한 번이라도 다녀갔다면 그때의 기록에서 친구의 집이나 마음에 든 호텔 같은 단골 장소가 있는지 없는지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고, 이번에도 역시 가명으로 그런 곳에 묵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날 아침 토머스 총경에게서 온 전화는 예상외로 재칼을 빨리 체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관측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이 오갔지만, 다행히 오간 것이었다. 정례회의의 참석자들은 아직 찰스 칼스로프라는 이름은 이미 실마리가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 이 일을 르베르는 밤 10시부터 열리는 회의에서 보고해야만 한다. 그때 칼스로프를 대신할 다른 이름을 제시하지 못하면 또다시 생클레아의 비웃음을 사고 다른 무리들에게서도 말 없는 비난을 받아야만 한다. 다만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일이 꼭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칼스로프의 인상 특징과 정면을 향해 찍은 상반신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짜 여권을 사용하고 있다면 십중팔구 변장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사진이나 특징의 자료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또 하나는 회의구성원 중 누구나가 르베르가 현재 이외에는 달리 손을 쓸 길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경찰에서는 칼스로프가 어떤 볼일로 시내에 나간 사이에 아파트가 급습당하자, 아직 다른 여권이 준비되지 않아서 다급히 지하에 숨어 버리고 일은 그만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을 카롱이 내놓았지만 르베르는 한숨만 쉬었다. "그래만 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야. 런던 경시청의 특별국에서 온 연락에 의하면 세면도구나 면도기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하네. 이웃 사람들에게는 낚시여행을 떠난다고 해놓고 아파트를 나간 모양이야. 그런데 자기 이름의 여권을 그냥 두고 간 것은 그것이 이미 필요없기 녀석이야. 나도 차츰 재칼의 사람 됨됨이를 알게 되는 듯한 느낌이야." 영불 양국의 경찰이 눈을 까뒤집고 쫓고 있는 사나이는 그 무렵 교통체증이 심한 코르니시 가도의 칸과 마르세유를 경유하는 구간을 피해서 가려고 마음먹었다. 두 구간은 모두 8월이 되면 지옥의 혼잡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댓건으로 둔갑한 그는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유유히 알파 로메오를 몰고 있었다. 그는 코트 다쥐르에서 시원한 알프스 해안 지방으로 헤치고 들어가서, 거기서 다시 브루고뉴의 산지로 나아갈 예정이었다. 특별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살해 예정일은 아직 멀었고, 예정보다 조금 일찍 프랑스에 그는 칸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뻗은 국도 85호선에 차를 올려놓았다. 국도 85호선은 그림 같은 향수의 도시인 그라스를 지나 다시 카스텔란을 향해서 뻗어 있다. 카스텔란에서는 베르동 강의 급류가 몇 마일 상류의 댐에 막혀 그 위세가 사라지고 사보이에서 내려가 카다라슈에 이르러서는 뒤랑스 강에 합류되어 있다. 재칼은 카스텔란에서 다시 바렘으로 빠져, 거기서 조그만 온천 마을인 디뉴에에 이르렀다. 저지대의 열기는 이미 멀리 지나왔고, 산지의 공기는 낮에도 변함없이 달콤하고 시원했다. 차를 세우자 아직도 햇살은 따가웠지만, 달리기 시작하니 시원한 바람이 살갗에 닿는 기분이 상쾌했고, 싱그러운 소나무 냄새와, 농가에서 어렴풋이 어려 있었다. 디뉴를 나온 그는 뒤랑스 강을 건너서 수면이 내려다보이는, 작지만 깔끔한 호스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앞으로 100마일쯤 내려가면 뒤랑스 강은 카바용 시를 중심으로 하는 올공 평원으로 나가서 엷은 갈색 자갈의 강변을 굽이쳐 흐르는 맛도 멋도 없는 강이 되어버리지만, 여기서는 아직 강다운 강으로 양쪽 기슭에는 짙은 녹음이 시원하고, 낚시꾼들을 기쁘게 해준다. 오후에도 또 그는 북쪽을 향해서 구불구불 이어진 85호선을 더듬었다. 길은 시스트롱을 지나서도 뒤랑스 강의 좌안을 따라서 상류로 뻗어 있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는 가프 마을로 들어갔다. 그대로 서두르는 여행도 아니고, 또 관광 시즌이라 조그만 마을이 오히려 호텔도 붐비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시골풍의 호텔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래서 마을 외곽에서 암사슴 여관이라는 호텔을 발견했다. 옛날에는 사보이 공(公)의 수렵에 쓰이던 사냥막사처럼 보였는데, 아직도 시골의 면모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마음 편하고 맛있는 요리가 자랑거리였다. 방은 아직 몇 개 비어 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샤워로 끝내 버리지만, 그날은 느긋하게 욕탕에도 들어가고, 비단 셔츠에 니트 넥타이를 매고 회색 양복을 입었다. 낮에 입었던 체크 무늬의 양복은 하녀에게 다림질 해달라고 맡겼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젊은 하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식당은 수림이 우거진 산허리 쪽으로 나 있어서, 소나무 가지에서 우는 매미 소리가 귀찮을 정도였다.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식사 도중에 가슴께가 많이 파인, 소매 없는 드레스로 몸을 감싼 여자 손님이 좀 추워졌는지 창문을 닫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주인에게 말했다. 바로 창가에 앉아 있던 재칼은, 주인이 닫아도 좋겠느냐고 물으면서 저쪽에 있는 손님이 원해서 그런다며 가리키는 여자 손님 쪽을 흘끗 보았다. 그녀는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30이 좀 넘은 미인으로서, 드러난 팔은 희고 부드러워 보였으며, 알맞게 부푼 가슴을 가지고 있다. 재칼은 주인에게 창문을 닫아도 좋다고 끄덕이고는 가볍게 머리를 기울여 그녀에게 가벼운 인사를 요리는 소문대로 굉장했다. 재칼은 모닥불에 구운 송어와 향료를 발라서 숯불에 구운 소의 등심을 먹었다. 와인은 '론의 언덕'이라는 향기 높고 맛이 좋은 그 지방 술로서, 라벨이 붙지 않은 병에 들어 있었다. 이것은 주인이 특별히 '암사슴 여관 와인'이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술창고의 통에서 방금 내온 것이었다. 손님들은 모두 그 와인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맛으로 보아서 당연한 일이었다. 재칼이 디저트로 나온 샤벳을 다 먹었을 때, 등뒤에서 아까 그 여자 손님이, 커피는 라운지에서 마시겠다며 낮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주인에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주인은 잘 알겠다면서 허리를 굽혔는데, 그때 그녀를 '남작 부인'이라고 불렀다. 몇 하고 그리로 갔다. 오후 10시 15분. 서머셋 하우스(중앙등록소)에서 토머스 총경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열어젖힌 창가에 앉아서 조용해진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도 이런 시각이 되면 지나는 행인도 뜸해지고 손님을 부르는 레스토랑의 불빛도 꺼져 버린다. 밀뱅크에서 스미스 광장에 걸친 사무실 거리는 깜깜해서 사람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국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만은 언제나 그렇듯이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거기서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서머셋 하우스에도 이날 밤은 휘황한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부장형사 6명과 경감 두 이름을 찾아내기 위해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담당자 한 사람이 남아서 일을 거들고 있다. 몇 분마다 그는 수사원 중 누군가를 끝없이 이어진 파일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다녔다. 전화를 건 사람은 팀의 책임자인 선임 경감이다. 목소리는 지쳐 있었으나, 지금부터 전하는 보고로 사망증명서를 체크하는 끝없는 고역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지 밝은 구석이 있었다. 전화를 받은 토머스에게 그가 말했다.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입니다." "그 사람이 어쨌다는 건가?" "1929년 4월 3일, 세인트 마크 교구. 샘본 피실레이 출생. 금년 7월 14일에 신청했습니다. 여권은 다음날 발행되어 신청서에 기재된 주소지로 7월 17일 우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소지는 아마 편의상의 것일 뿐 자택은 아니겠지요." "왜 그런가?" 토머스는 초조했다. 서두가 긴 이야기는 질색이다. "그거야 알렉산더 댓건은 두 살 반인 1931년 11월 8일, 태어난 마을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사망했거든요." 토머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과거 100일 이내에 발행된 여권 중에서 체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얼마나 남아 있나." "한 300개쯤 됩니다만." "그 안에도 가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그 여권이 우송된 주소지를 조사하러 가게. 찾는 대로 곧 전화로 보고하고. 사람이 살고 있으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게. 그리고 가짜 댓건에 관해서 알아낸 것이 있으면 그 자세한 것을 가지고 돌아오고. 신청서와 함께 제출한 사진의 사본도. 다른 사람으로 둔갑한 칼스로프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으니까." 선임 경감에게서 두 번째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11시 전이었다. 문제의 주소지에 있는 것은 패딩턴 지구의 조그만 담배가게 겸 신문판매대로서, 가게의 창문에는 매춘부의 명함이 잔뜩 붙어 있었다. 가게의 2층에 살고 있는 주인을 깨워서 물어 보았더니, 일정한 주소가 없는 손님을 받아 건네주고 있다고 자백했다. 댓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골손님은 없지만, 어쩌면 꼭 두 번 전화를 걸어 온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한번은 우편물을 받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또 한번은 배달된 봉투를 받으러 올 때. 경감은 주인에게 칼스로프의 사진을 보여 주었지만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신청서에 붙어 있던 댓건의 사진을 내보이자 그 사람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은 없다면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카운터 뒤에 죽 늘어놓은 에로 잡지를 사로 오는 손님은 거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했다. "그 주인을 관할서로 보내. 자네는 곧 이리로 돌아오고." 곧 또 수화기를 들어서 파리로 전화를 신청했다. 회의가 중간쯤 진행되었을 때, 그날 밤 두 번째의 전화가 런던에서 걸려왔다. 그때까지 르베르는 칼스로프가 어선으로 바다를 거쳐 밀입국했거나, 육상의 국경이라도 아주 외진 곳으로 몰래 넘어오지 않는 한, 적어도 본명으로 프랑스에 입국한 흔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밀입국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는, 프로는 그런 체신머리없는 짓은 안 한다는 의견이었다. 밀입국을 했더라도 언제고 어딘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여권에 입국허가 스탬프가 찍혀 있지 않는 것이 탄로나서 즉시 체포되고 만다. 또, 호텔에도 투숙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자료센터, DST 및 파리 경시청의 각 대표에 의해서도 입증되었기 때문에 의논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두 사실과 관련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고 르베르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 하나는 칼스로프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가짜 여권을 준비하지 않았을 경우인데, 만일 그렇다면 경찰이 런던의 아파트를 덮쳤을 때에 분명히 그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르베르는 이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그의 플랫의 옷장이나 서랍에는 옷을 꺼내간 듯한 빈 자리가 있었고, 세면도구나 면도기구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모두 계획적으로 플랫을 비웠다는 것을 말해 스코틀랜드로 드라이브 여행을 간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긴 이 스코틀랜드 여행 운운하는 이야기는 영불 양국의 경찰도 믿지 않고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칼스로프가 가짜 여권을 손에 넣고 있을 경우로서, 현재 런던 경시청이 쫓고 있는 것은 이 방향이다. 이 경우, 그는 아직 프랑스에 입국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견해와, 이미 공공연히 입국해 있을 것이라는 견해 등 두 가지로 추측을 할 수가 있다. 이 단계에서 몇몇 참석자가 거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놈이 이미 프랑스에, 이 파리 시내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인가?" 알렉상드르 송기네티가 분개한 얼굴로 "요는 칼스로프는 독자적인 시간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 자신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미 수사를 시작한 지 72시간이 되었습니다만, 우리가 그의 시간표의 어디쯤에서 개입되었는지 그것을 아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이쪽에도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는데, 칼스로프는 암살계획이 들통났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우리의 수사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새로 바꾼 이름을 밝혀내고 거처를 확인하기만 하면,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음놓고 있는 칼스로프를 체포할 기회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불안은 르베르의 파리 시내에 있을지도 모르고, 그 시간표에 의해서 암살의 실행이 내일로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모두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롤랑 대령이 그 불안을 덜어 주려는 듯이 말했다. "칼스로프는 바르미라는 레포를 통해서 음모가 들통난 것을 알고 증거를 없얘기 위해서 아파트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총이나 탄약을 스코틀랜드의 호수에 던져 버리고 멀쩡한 얼굴로 경찰에 출두하면 증거는 하나도 없으니까 무죄석방이 될 테니 말이오." 참석자들은 각각 롤랑의 의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동의하는 표정이 많이 보였다. "그럼, 묻겠네, 대령." 하고 내무장관이 계획이 들통난 것을 알기만 하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지 않았는데도 지금 말한 것과 같이 행동하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베테랑 살인자라면 어느 나라엔가는 파일에 자신의 기록이 올라 있을 것을 당연히 예상하고 있어야 하고, 또 계획이 폭로된 이상 경찰이 찾아와서 자택을 수색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니까요. 따라서 증거가 될 만한 것은 깡그리 처분하겠지요. 스코틀랜드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호수 같은 곳은 알맞은 장소가 아닐까요?" 웃는 얼굴들이 롤랑을 에워쌌다. 그 미소에는 롤랑의 의견이 옳다고 치고서, 마음에 깃든 불안을 지워 버리고 싶은 희망이 들어 있었다. 추적을 멈추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검거에 노력해야겠지요." 미소가 사라졌다. 침묵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자네가 하는 말은 모순처럼 들리는데, 왜 그럴까?" 기보 장군이 부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놈을 찾아내어 처치하라는 명령은 어디까지나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놈은 계획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발등의 불을 끄고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라 무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딘가에 숨겨 놓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열기가 좀 식은 뒤에 다시 계획을 진행시키는 거죠. 전보다 훨씬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서 말입니다." 경찰이 거처를 찾아내면 신병을 확보해 주지 않을까?" 누군가가 의견을 말했다. "글쎄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의문이군요. 증거가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있는 것은 그저 용의점뿐입니다. 게다가 영국인은 '시민권'인가 하는 것에 기막힐 정도로 예민하니까요. 아마 거처를 밝혀내고 심문하고, 그리고 나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하게 되겠지요." "대령의 말 그대로야." 하고 생클레아가 끼어들었다. "영국의 경찰이 칼스로프를 찾아낸 것은 상당한 요행이야. 녀석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으니까. 위험인물을 예사로 풀어놓거든. 차제에 롤랑 대령의 액션 서비스에게 전권을 주어서 녀석을 단숨에 없애버려야만 해." 내무장관은 르베르가 재미없는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말을 걸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칼스로프는 현재 이미 무기나 그 밖의 것들을 숨기거나 버렸을 것이라는 롤랑 대령의 추측에 동의하나?" 르베르는 테이블 양쪽에 줄지어 앉아 있는 기대에 찬 얼굴들을 잠깐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대령님의 의견이 옳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애석하게도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내무장관의 의문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르베르는 부드럽게 되받았다. 포기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만, 그 전제는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 만일 거꾸로 작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만일 로댕의 연락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거나, 전해지기는 했으나 그것을 무시하고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르베르의 의견에 반대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오갔다. 롤랑만이 여기에 끼지 않고 가만히 르베르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르베르라는 사람은 여기에 있는 누구보다도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그의 의견은 자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것이라고 롤랑은 탄복하고 있었다. 르베르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이때였다. 그는 침묵하고 있는 일동에게 전화의 내용을 설명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조치는?" 하고 내무장관이 르베르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다음에 물었다. 르베르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침착한 태도로, 장군이 부대의 전개를 지시할 때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참석자는 모두가 그보다는 관직이 높았지만, 누구 하나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새로 댓건으로 둔갑한 적을 전국적인 규모로, 더구나 비공개로 수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런던 경시청은 항공회사, 페리 회사 등의 조사를 진행시켜서 저쪽에서 먼저 그의 거처를 체포하고 영국령을 벗어나 있을 때에는 이쪽에 연락해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프랑스 국내에서 그를 발견했을 경우는 물론 즉시 검거합니다. 그리고 제3국에 있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그가 나타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국경에서 체포하거나, 아니면......다른 방법을 써도 좋겠지요. 다만 그때에는 그를 찾아내는 제 임무는 끝난 것이므로 그 수단 방법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아낼 때까지는 저의 방법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은 고압적이고 자신에 찬 언사였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치 않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생클레아마저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갑자기 있는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자택으로 돌아간 그는 자클린에게 그 분풀이를 했다. 그녀는 엎드려 있는 그의 목뒤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그 화풀이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새벽이 가까워서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와 홀에서 짧막한 전화를 걸었다. 책상 위에는 여권 신청서가 두 통, 그리고 사진 두 장이 스탠드의 조명 속에 떠올라 있다. 아까부터 토머스 총경은 그것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좋아, 다시 한 번 체크해 보세." 그는 한옆에 앉아 있는 선임 경감에게 말했다. "시작하세." "칼스로프 -- 키 178cm. 맞나?" "예." "댓건 -- 키 180cm." "구두 뒷굽을 높이는 겁니다. 굽을 손질하면 1인치나 2인치쯤 키를 크게 보이게 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쇼 비즈니스에서 키가 작은 녀석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지요. 게다가 여권발행국에 가봐야 아무도 발 아래는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이 옳아. 좋아, 뒷굽을 높인 구두라...... 다음, 칼스로프 -- 머리색은 갈색. 이것은 의미가 없겠군. 엷은 갈색부터 밤색까지 종류가 여러 가지 있으니까. 칼스로프의 머리칼은 이 사진으로 봐서는 짙은 갈색 같은데. 댓건의 금발이 섞여 있군." "그렇군요. 대체로 머리칼의 색은 사진으로 찍으면 진하게 나타납니다. 라이트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도 다르고, 라이트를 쓴 경우에도 위치나 빛의 정도에도 차이가 나니까요. 게다가 칼스로프는 댓건으로 둔갑하기 위해서 머리를 물들였을지도 모르지요." "좋아. 그 말에는 수긍이 되는군. 눈의 색깔 -- 칼스로프는 갈색. 댓건은 회색이야." "콘택트렌즈입니다. 간단한 속임수지요." "OK. 나이 -- 칼스로프, 37세. 댓건은 4월로서 34세로 되어 있군." "이 34세라는 것은 바꿀 방법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두 살 반에 죽은 진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지요. 하지만 37세 된 사람이 34세로 기입된 여권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여권의 기재를 그대로 믿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토머스는 두 장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칼스로프 쪽이 좀 무거울 것 같고, 얼굴도 크고, 체구도 듬직할 것 같다. 그러나 외모에 조금만 손질을 가하면 간단히 댓건으로 둔갑할 수가 있다. 로댕의 무리들과 처음 만났을 때에 이미 변장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으로 가짜 여권을 신청했을지도 모른다. 프로 살인자쯤 되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때로는 몇 달씩 다른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재주를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 칼스로프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런 교활한 조심성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도미니카의 술집에서 수군거렸다는 그 소문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런던 경시청의 특별국이라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머리를 물들이고, 콘택트렌즈를 끼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댓건으로 둔갑해 있다. 이런 특징을 여권 번호와 사진과 함께 파리로 전송하도록 토머스는 텔렉스실로 내려보냈다. 그는 시계를 보고 새벽 2시까지는 르베르의 손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계산했다. "나머지는 이제 파리에서 책임질 일이군요." 하고 경감이 말했다. "아니야, 우리 쪽에서도 지금부터 할 일이 잔뜩 있다네." "아침이 되면 제일 먼저 각 항공회사의 항공권 판매소, 도버 해협에 항로를 가지고 있는 각 페리 회사, 대륙횡단철도의 승차권 판매소 등, 모두를 체크해야만 해. 그의 정체뿐만 아니라 현재의 거처도 알아내야만 한다네." 이때 서머셋 하우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권 신청서의 나머지를 조사해 보았지만, 모두 이상 없다는 보고였다. "알았네. 그곳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귀가해도 좋네. 아침 8시 반에는 전원 이리로 오도록." 담배가게 주인을 관할서로 연행해서 심문한 부장형사가 진술서 사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토머스는 죽 그것을 훑어보았지만, 아까 경감의 질문에 대답한 것과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구치할 이유가 없군, 이것만 가지고는. 집으로 돌려보내도 좋다고 관할서에 연락하게." "예." 부장형사는 나갔다. 토머스는 잠깐 눈이라도 붙일 생각으로 팔걸이의자에 깊숙히 기대앉았다. 그가 경감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날짜는 이미 8월 15일로 바뀌어 있었다. 제 16 장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은 문 앞에 멈춰서서 그곳까지 그녀를 바래다 준 영국 신사 쪽을 돌아보았다. 복도는 어두컴컴하고 그의 얼굴은 실루엣으로 보일 뿐 자세한 표정 같은 것은 알 수 없었다. 즐거운 밤이었다. 그 즐거움을 문을 닫아서 쫓아내어 버릴 것인지 그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물음은 벌써 한 시간 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정사의 경험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상류사회의 착실한 가정부인이며,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유혹에 몸을 내맡길 정도의 분방함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것도 남몰래 인정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그날 바르슬로넷에 있는 사관학교에서 거행된 외아들의 소위 임관식에 참석했다. 아들은 옛날 아버지가 재직했었던 알프스 연대에서 근무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석자 중에서 그녀는 가장 매력적인 어머니였지만, 아들이 장교의 흉장을 받고 임관하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는 이제 어엿한 장교의 어머니이고, 앞으로 몇 달 지나면 40세가 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나이보다 5년은 젊게 보이고 스스로는 10년 이상 젊게 느낄 때조차 있었지만, 아들이 이미 스무 살이며 이제부터는 방학 때에 집에 돌아와서 성의 주변 숲속에서 토끼나 노루를 뒤쫓으며 노루는 고사하고 지금쯤 애인과 섹스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역시 자신의 나이에 저항을 느끼면서 이날 밤의 정사가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사관학교에서 그녀는 교장인 노 대령의 에스코트를 받았고, 그 젊어 보이는 모습을 아들의 동급생들이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껍질만 남아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파탄에 빠져 있었다. 남작은 젊은 파리지엔과 바람피우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여름 휴가에도 성에 돌아오지 않고, 아들의 임관식에조차 나타나지 않는 형편이다. 바르슬로넷에서 이 여관까지 차를 달리면서 그녀는 여자로서 완숙한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앞날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기껏해야 대령 같은 노인들의 상대가 되어 주거나,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상류사회의 유한마담들이 흔히 하는 자선운동에 헌실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직도 젊다는 자부심이 그녀 속에는 완강히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남편 앨프레드가 하고 다니는 짓은 아무리 정나미 떨어진 남편의 행동이긴 해도 역시 고민과 굴욕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언제나 틴에이저나 쫓아다니고 있는 앨프레드의 어리석은 짓은 사교계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고, 그 비웃음은 동시에 아내인 그녀에게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장래를 남작 부인으로서가 아니고 한 여자로서, 아름다운 암컷으로 대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영국인이 커피를 함께할 수 있겠느냐는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당황해서 노라고 말할 여유조차 없었다. 물론 곧 잘못했구나 싶었지만, 10분도 되지 않아서 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33~35세 정도(라고 그녀는 짐작했다)의 젊은 남자이고, 그것은 남자로서 가장 알찬 나이이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유창한 프랑스어가 막힘없이 술술 나오고, 게다가 용모도 그럴듯하고 유머도 있다. 그 교묘한 칭찬은 듣기 좋았으며, 오히려 그녀 쪽에서 바랄 된다면서 그녀가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12시가 다되어서였다. 그는 남작 부인을 에스코트해서 층계를 올라갔다. 두 사람은 층계참에 있는 창 앞에서 멈춰섰다. 창 유리를 통해서 달빛에 젖은 조용한 산비탈이 보였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시선은 바깥 경치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달빛에 창백하게 비친 가슴의 융기, 깊은 골짜기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알아차린 것을 알고서 그는 미소를 짓고는 귓가에 입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달빛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원시인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돌리고는 층계를 올라갔지만, 마음속에서는 그의 뻔뻔스러운 찬미의 눈길에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즐거웠어요." 그녀는 문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그가 자기에게 키스를 강요할까 하고 막연히 상상했다. 그리고 그랬으면 하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평정을 꾸미고 있었지만, 굶주린 몸뚱이는 이미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마신 와인이나 그가 커피와 함께 주문한 칼바도스 주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달빛에 비친 경치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밤이 이런 결말로 끝날 것으로 예상치 않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자의 손이 등뒤로 입술이었다. 여기서 그만두어야지 하고 그녀는 마음속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말없이 키스에 응하고 있었다. 와인의 취기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역시 와인 탓이 틀림없다. 그녀를 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강력한 손이었다. 그녀의 허벅지에 그의 하복부가 밀착해 왔다. 세틴 천의 드레스를 통해서 오만하게 단단해진 그의 남성을 느끼고 순간 그녀는 뒤로 물러났으나, 곧 다시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밀어붙이고 있었다. 익을 대로 익은 허벅지 사이에, 하복부에 밤이 샐 때까지 그를 잡아두고 싶었다. 두 사람의 무게로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저절로 포옹이 풀리고 그녀는 뒷걸음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밤을 새워가며 자료센터의 파일을 다시 조사했다. 댓건의 기록을 찾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수확이 있었다.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이 7월 22일 브뤼셀발의 브라방 급행으로 프랑스에 입국한 사실을 가리키는 카드가 발견된 것이다. 이어 한 시간 뒤, 브뤼셀 -- 파리 간의 급행열차에 탑승하여 통관업무를 취급하는 세관 팀에게서 온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거기에 의하면 7월 31일, 파리발 브뤼셀 행의 '북방의 별'호의 승객명단 안에 댓건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또 파리 경시청으로부터 댓건이라는 이름으로 기입된 숙박 카드가 보내져 왔다. 여권 번호도 런던에서 연락해 온 것과 7월 22일부터 30일까지 마들렌 광장 부근의 조그만 호텔에 묵었다. 카롱 경감은 지금 곧 그 호텔을 덮치자면서 흥분했지만, 르베르는 그를 말리고 이른 아침에 살짝 그 호텔을 찾아가서 주인과 만났다. 그리고 8월 15일 현재 댓건이 그곳에 묵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는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주인 쪽에서는 숙박객이 깨지 않도록 르베르가 신경을 써준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르베르는 사복형사 하나를 그 호텔에 묵도록 하고, 언제 댓건이 나타날지 모르니 절대로 호텔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 호텔 주인은 기꺼이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놈이 7월에 파리에 온 것은 -- ." 사무실에 돌아와서 르베르는 카롱에게 계획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완전히 짜여져 있다네." 르베르는 의자에 기대앉아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놈은 어째서 호텔에 묵은 것일까? OAS의 공작원들이 모두 그렇듯이 왜 심파(동조자)의 집에 은신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 비밀의 유지라는 점에서 그는 OAS의 심파를 조금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연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도 믿지 않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계획을 짜고 준비하여, 아마 아주 평범한 여행자로 가장하여 조금도 의심받지 않도록 신중히 행동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호텔의 주인도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정말로 나무랄 데라고는 없는 신사라고 존재라고 르베르는 생각했다. 신사라는 녀석은 경찰에게는 가장 귀찮은 상대다.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르베르는 런던에서 보내 온 칼스로프와 댓건의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칼스로프는 키, 머리칼과 눈의 색깔, 나이, 그리고 아마 몸가짐까지도 바꾸어 완전히 댓건으로 변신해 있을 것이다. 르베르는 그 이미지를 마음속에서 그려 보았다. 어떤 인물일까? 자신에 넘치고 오만하고, 절대로 붙잡히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나이. 위험하고 교활하고 세심하고, 모든 것을 다 계산하고 있다 -- . 물론 무장하고 있을 텐데, 그 무기는?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늘어뜨린 자동권총? 허리춤에 감춘 나이프? 라이플? 그러나 세관을 지날 때에는 어디다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통령의 신변 가까이에서는 여자의 핸드백조차 조사를 받으며, 가늘고 긴 포장물을 가지고 있으면 대통령이 나타나기도 전에 불문곡직하고 연행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재칼은 해낼 자신이 있는 것이다. 마술사 같은 녀석이다. 생클레아 대령은 그저 폭도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천만에! 그러나 르베르는 자기에게 유리한 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살인자의 새 이름을 알고 있지만, 살인업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마지막 카드였다. 이것 이외에는 모두가 재칼 쪽이 유리하다. 그러나 회의의 멤버는 누구 하나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또 하지도 못한다. 만일 재칼이 둔갑해 버리면 그때는, 클로드, 이미 손쓸 방법이 없어 -- 하고 르베르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는 소리까지 내어가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가 없지." 카롱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놈에게는 이미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르베르는 전에 없이 조급해 있었다. 수면부족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창으로 들어온 엷은 달빛이 차츰 흐트러진 담요 위를 지나서 지금은 침대와 문 사이에 벗어 던진 새틴 천의 드레스와 브래지어, 나일론 스타킹을 어렴풋이 어둠에 싸여 있다. 남작 부인 코렛은 반듯이 누워서 자신의 배를 베고 잠들어 있는 남자의 금발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밤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내고는 조금 열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영국인은 굉장히 강력하고 능숙했다. 손가락과 혀와 페니스를 절묘한 기교로 구사하여 그녀를 다섯 차레나 절정으로 끌어올리고, 자신도 세 번 정점을 지났다. 그가 정점을 지날 때의 그 솟구치는 열기로 몸이 꿰뚫리는 듯한 느낌이 지금도 몸속에 남아 있었다. 이런 밤을 그녀는 몇 년이나 바라고 기다렸던가. 처음 그를 맞아들였을 때, 그녀는 몸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흘끗 보았다. 오전 5시 15분. 그녀는 금발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자요?" 영국인은 아직 몽롱한 상태인지 입 속에서 뭔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모두 완전한 알몸이었지만 중앙난방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갑자기 금발머리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양쪽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입김과 샘물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혀의 촉감이 전율처럼 그녀의 뇌리에 전해졌다. "안돼, 이젠 그만 해요." 그녀는 재빨리 허벅지를 오므리고 윗몸을 일으키고는 그의 머리칼을 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는 일단 침대에 묻혀서 자세를 가다듬더니 이번에는 풍만한 가슴의 "그만둬요." 놀란 듯이 그는 얼굴을 들었다. "이젠 충분히 즐겼어요. 나는 앞으로 두 시간이면 일어나야 해요. 당신도 방으로 돌아가서 자도록 해요, 착한 아기."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틀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가 옷을 찾았다. 그녀는 담요 밑으로 파고들어 발 근처에 휘감긴 시트를 팽팽하게 펴고서 담요를 턱 밑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셔츠와 바지를 챙켜 입고 윗도리와 넥타이를 한쪽 팔에 걸치고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자 가지런한 이빨이 하얗게 보였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오른손으로 그녀의 목을 안았다. 얼굴과 얼굴이 다가갔다. "응 -- 굉장히, 당신은?" 다시 그는 싱긋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녀가 웃었다. "당신 이름은 뭐예요?" 그는 잠깐 생각하고는, "알렉스." 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요? 아주 좋았어요, 알렉스. 하지만, 이젠 방으로 돌아가세요." 그는 엎드려서 입술에 키스했다. "그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안녕, 코렛." 재빨리 그는 방을 나가서 문을 닫았다. 오전 7시,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경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암사슴 프런트에서 모닝 콜이며 아침식사 준비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로비로 들어선 순경을 재빨리 발견하고는 경쾌하게 말을 걸었다. "오, 잘되가시오?" "그런대로요. 하지만 자전거로 여기까지 오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여기가 제일 마지막이 되지." "그만 하시지." 주인은 빙긋 웃었다. "대신 가프에서 제일 맛좋은 커피를 대접해 드리리다. 마리 루이즈, 경찰 아저씨에게 커피 올려라. 브랜디 좀 쳐서 말이야." 순경은 기쁜 듯이 웃었다. "자, 이것이 어젯밤의 것이오." 하고 카드를 순경에게 건네주었다. "어젯밤에 새로 온 손님은 셋뿐이라오." 순경은 카드를 받아서 허리의 벨트에 달아맨 가방 속에 넣었다. "이것뿐이라면 일부러 가지러 올 것도 없는데." 순경은 빙긋 웃고는 로비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가지고 온 마리 루이즈를 놀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숙박 카드를 가지고 가프 경찰서로 돌아온 것은 8시였다. 당직 경감은 귀찮은 듯이 잠깐 훑어보고는 선반에 던져 넣었다. 이 카드들은 나중에 리용의 지방경찰본부에 보내어지고, 거기서 다시 파리의 자료센터로 가게 된다. 늘 있어 온 일이기 때문에 경감은 제대로 카드를 살펴보지도 가혹하겠지. 그 무렵 암사슴 여관에서는 코렛 부인이 계산을 끝내고 차를 몰아 서쪽을 향해서 떠났다. 재칼은 9시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토머스 총경은 졸다가 눈을 떴다. 그것은 인터폰에 달려 있는 전화로 복도 건너편에 있는 방과 이어져 있었다. 그 방에서는 6명의 부장형사와 두 경감이 토머스의 지시에 따라서 전화에 매달려 있었다. 토머스는 시계를 보았다. 10시다. 졸았다니 나답지 않군 -- 하고 혀를 차고서 월요일 오후 딕슨 특별국장으로부터 이번 일의 명령을 받고, 그 동안 몇 시간이나 오늘이 벌써 목요일이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선임 경감의 소리가 느닷없이 보고를 했다. "댓건입니다. 월요일 아침에 BEA의 정기편으로 런던을 떠났습니다. 예약을 한 것은 토요일입니다. 이름도 틀림없습니다. 알렉산더 댓건입니다. 항공권은 현금으로 사갔습니다." "행선지는? 파리인가?" "아닙니다, 브뤼셀입니다." 졸음으로 흐려 있던 토머스의 머리가 순간 맑아졌다. "그래? 그러나 일단 출발했다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을 수 있어. 놈의 조사를 계속해 주게. 특히 오늘 이후의 비행기편을 말이야. 브뤼셀에서 돌아왔다면 문제는 간단한데,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 아무래도 놈을 놓쳐 버린 것 같군. 하긴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런던을 떠나 버렸으니까 이쪽에는 책임이 없는 거야, 그렇지?" "예. 그런데 칼스로프의 수색명령은 어떻게 합니까? 지방 경찰은 그렇잖아도 바쁘다면서 본청에다 불평을 해오는 모양입니다." 토머스는 잠깐 생각해 보고는 말했다. "좋아, 철회하지. 놈은 이미 국내에는 없다고 보아도 좋으니까." 그는 내선 전화 수화기를 들고 파리의 르베르 총경 사무실로 국제전화를 목요일 아침 카롱 경감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0시 5분, 영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것은 카롱이었는데, 토머스가 기어이 르베르와 통화하고 싶다고 해서 간이침대에 엎드려 자는 르베르를 깨우러 갔다. 르베르는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르베르가 수화기를 들었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곧 다시 카롱이 받아 쥐고 통역을 했다. 토머스의 보고를 다 듣고 난 르베르는 카롱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전하게. 벨기에의 조회는 이쪽에서 하겠다고. 여러 가지 협조해 주어서 더없이 감사하다. 재칼의 행방이 즉시 연락하겠다. 이상이야." 전화가 끊기고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브뤼셀 경시청에 전화를 걸어 주게나." 르베르는 조용히 카롱에게 말했다. 마침내 재칼이 잠에서 깨었을 때, 이미 해는 산 위에 올라 상쾌한 여름날을 예고라도 하듯이 밝은 햇빛을 내리쏟고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깨끗이 다림질된 체크 무늬의 양복을 입었다. 그것은 전날 하녀인 마리 루이즈에게 부탁해 두었던 여행복으로서, 방으로 가져온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10시 반 지나서 그는 알파를 몰고 시내로 나가 우체국에 들러 파리로 장거리전화를 입술을 꼭 깨물고 뭔지 굉장히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부근의 철물점에서 짙은 남색의 래커, 흰 페인트, 칠에 쓰이는 붓 두 자루 -- 한 자루는 글씨용으로서 낙타 털로 만든 가느다란 것, 또 하나는 보통 쓰이는 페인트 붓 -- , 그리고 드라이버를 샀다. 그는 이것들을 글로브 콤파트먼트에 밀어넣고 암사슴 여관으로 돌아와서 숙박료 계산을 부탁했다. 계산을 끝낼 때까지 그는 짐을 챙겨서 자기가 직접 차에까지 옮겼다. 세 개의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아타셰 케이스를 조수석에 던져넣고는 로비로 돌아와서 계산을 끝냈다. 그를 상대했던 낮 당번의 프런트 직원은 나중에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무엇인가 서두르는 눈치였으며, 빳빳한 그런데 프런트 직원은 보지 못해서 몰랐지만 영국인은 그가 거스름돈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카운터 위에 펼쳐 놓았던 숙박부에서 바로 앞날 페이지에 '코레즈 현 오트 샤로니 에르 마을,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훔쳐보았다. 계산이 끝나고 곧 차도에서 알파의 엔진 소리가 들리고는 영국인은 암사슴 여관에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정오 전에 새로운 정보가 르베르의 사무실에 날아들었다. 브뤼셀 경시청에서 온 전화인데, 댓건은 월요일에 겨우 5시간밖에 그곳에 묵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런던발 BEA기로 브뤼셀에 갔다고 한다. 밀라노행 좌석은 지난 주 토요일 런던에서 전화로 예약되어 있었던 것으로, 요금은 알리탈리아의 창구에서 현금으로 지불되었다. 르베르는 즉시 밀라노 경찰에 전화를 신청했다. 그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DST에서 온 것인데, 전날 아침 벤티밀리아의 국경에서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로 들어온 사람들의 입국 카드 안에서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이라는 이름이 기재된 카드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이었다. 르베르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벌써 30시간 가까이나 지났잖아! 하루 이상이나 무엇을......" 그는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카롱은 지겨운 듯이 말했다. "통상적인 절차로 입국 카드를 돌렸으니 벤티밀리아에서 파리까지 하루나 걸렸지. 오늘 아침부터 겨우 어제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전국에서 모인 카드가 2만 5천장 이상이나 되는 모양이야. 하루치가 그 정도야. 엄청난 숫자지. 소리를 질러서 DST의 녀석들에게 미안한데. 이젠 분명해졌어, 뤼시앙. 놈은 프랑스에 들어온 거야. 오늘 중으로 뭐라도 잡아내지 않으면 오늘밤 회의에서 큰 곤욕을 치를 거야. 참, 그래 그래, 런던에 전화 걸어서 토머스 총경에게 고맙다고 해주게. 재칼이 프랑스 국내에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힘만으로 해나가겠다고." 카롱이 런던과의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전화가 걸려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르베르는 승자의 얼굴로 카롱을 보았다. 그는 수하기를 손으로 막고서 말했다. "놈의 행방을 알었어. 가포의 암사슴 여관이라는 호텔에 어젯밤부터 이틀 예정으로 묵고 있어." 그는 수하기에서 손을 떼고 힘차게 말했다. "잘 들어, 과장, 왜 그 댓건이라는 남자를 잡아야 하는지 그 이유는 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것은 중대한 일이야. 그래서 말일세. 즉시 다음과 같이 손을 써주게." 르베르는 10분쯤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카롱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의 벨이 울렸다. 다시 렌터카를 타고 있다고 한다. 번호는'MI_61741.' "전지역에 이 차를 긴급수배해 놓을까요?" 카롱이 물었다. 르베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니, 아직 일러.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경관은 단순한 도난차의 수배라고 생각하고 그 차를 발견하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정지하라고 할 거야. 그렇게 되면 대번에 놈에게 사살당하게 되지. 차 안에 총을 숨겨 둔 것이 분명하니까. 다행히 놈은 2박 예정으로 여관에 묵고 있어. 경찰대를 총동원해서 호텔을 포위하도록 손을 써놓았어. 가능한 한 경찰의 부상자를 내고 싶지 않으니까. 자, 서두르게, 헬리콥터가 그 무렵 가프 경찰서에서는 전 대원을 동원해서 시내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호텔 주위에 몰래 감시원을 배치했다. 이런 명령은 리용 지방본부에서 전해졌다. 그 리용과 그르노블에서는 단기관총과 라이플로 무장한 경찰대가 병력수송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 교외의 사토리 공군기지에서는 르베르 총경을 가프에 긴급 수송할 헬리콥터의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있어도 한낮의 열기는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되도록 옷을 버리지 않도록 허리까지 알몸이 되어, 재칼은 꼬박 두 시간 동안 차와 씨름을 했다. 가프를 떠나서 그는 똑바로 서쪽으로 지나서 달렸다. 길은 거의 내리막이며 내던져 버린 리본처럼 구불구불 산속을 누비면서 이어져 있었다. 그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밟아댔다. 커브에서는 타이어가 흰 연기를 내며 비명을 지르고서 마주오는 차를 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릴 뻔한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아스프르에서 그는 93호선으로 들어섰다. 이 도로는 드롬 강을 따라서 서쪽으로 가다가 론 강에 부딪친다. 아스프르를 지나 30km 정도의 구간은 길이 강을 건넜다가 다시 건너왔다가 하며 저 혼자 바쁘다. 뤼상두아를 지나자마자 곧바로 그는 93호선을 벗어났다. 산이나 촌락으로 통하는 샛길이 얼마든지 있다. 그는 마음내키는 대로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알파를 몰아넣고 1마일쯤 간 곳에 있는 들어갔다. 오후 3시 넘어서 그는 마침내 페인트 칠을 끝내고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솜씨를 감상했다. 흰 알파는 짙은 남색으로 변하고 페인트는 이미 거의 말라 있었다. 직업페인트공같이 매끄러운 솜씨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않는 한 다시 칠한 표시가 나지는 않았다. 더구나 어둠 속에서라면 수상쩍다고 들킬 염려는 없었다. 앞뒤 두 장의 번호판을 떼어내어 뒤집어서 풀 위에 나란히 놓았다. 거기에는 흰 페인트로 프랑스의 가공 번호를 써넣어 두었다. 끝의 두 자리가 75로서, 이것은 파리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가장 흔하게 눈에 뜨이는 번호라고 할 수 있다. 적을 둔 흰 알파로 기재되어 있으니, 프랑스 번호의 짙은 남색 알파와는 분명히 다르다. 검문에 걸려서 서류 제시를 요구받으면 만사는 끝나는 거다. 휘발유에 적신 걸레 조각으로 손을 닦으면서, 지금 곧 출발하여 밝은 햇빛 아래에 풋내기의 서툰 도장 솜씨를 드러낼 위험을 저지를 것인가, 아니면 해질녘까지 기다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가명이 들통난 이상 프랑스에 입국한 경로나 지점도 곧 알려질 것이고, 당연히 차도 수배될 것이다. 그러나 암살을 실행할 날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만 된다. 잠복장소는 꼭 한 군데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가는 편이 가장 빠르다. 위험하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렇게 결정된 바에는 빨리 출발하는 편이 좋다. 이제 곧 전국의 교통경관이 금발머리의 영국인이 운전하는 알파 로메오를 찾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재빨리 새 번호판을 달고 페인트의 나머지와 붓은 멀리 던져 버리고서 목 없는 실크 스웨터와 윗도리를 입고 엔진을 걸었다. 93호선으로 되돌아왔을 때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41분이었다. 멀리 상공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는 헬리콥터를 그는 보았다. 디까지 앞으로 11km의 지점이었다. 디(Die)라는 이름은 영어로 읽으면 '다이'(죽는다는 뜻)로서 어쩐지 기분나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신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시내의 중심부 전승기념비 옆에 있는 네거리에 서 있던 검은 가죽 점퍼의 흰 오토바이 대원이 알파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어 도로의 오른쪽에 세우라고 하는 것이었다. 총은 아직 강관에 그대로 넣은 채 섀시에 고정해 놓았고, 권총이나 나이프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다. 재칼은 순간 망설였다. 경관을 차로 치어 넘어뜨리고 도망쳐서 시내를 멀리 벗어난 곳에서 차를 버리고 거울도 세면기도 없이 옌센 목사로 별장할 것인가(네 개의 짐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아니면 얌전히 명령에 따라서 차를 세울 것인가 --? 그를 망설임에서 구해 준 것은 경관 쪽에서였다. 속력을 늦추기 시작한 알파는 쳐다보지도 않고 길가에 차를 붙이고서 돌아가는 형편을 지켜보았다. 곧 시내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이미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윽고 네 대의 순찰차와 여섯 대의 병력수송차가 시내로 들어왔다. 도로 옆으로 비켜선 교통경찰의 거수경례를 받으면서 차의 행렬은 알파 옆을 지나 재칼이 방금 지나온 길을 거꾸로 달려갔다. 쇠그물을 친 창문(이것 때문에 '샐러드 바구니'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너머에 헬멧을 쓰고 단기관총을 무릎에 올려놓은 무장경관의 모습이 보였다. 차의 행렬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교통경찰이 경례하던 손을 내리고 이젠 가도 좋다고 거만한 태도로 재칼에게 신호를 하고서, 기념비에 기대어 세워둔 흰 엔진을 걸고 있는 사이에 알파는 모퉁이를 돌아서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후 4시 50분, 경찰대는 암사슴 여관을 급습했다. 시내의 반대쪽에 착륙하여 순찰차로 그 여관으로 달려간 르베르 총경은 카롱을 거느리고 현관 앞 층계를 올라갔다. 카롱은 오른팔에 걸친 외투 밑에 MAT49형의 단기관총을 숨겨 가지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이미 시내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여관 주인뿐이었다. 여관은 아침부터 다섯 시간이나 고립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지내는 생활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매일 들르는 송어장사가 안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면 프런트 직원이 하는 말을 듣고 사무실에서 경리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주인이 홀에 모습을 나타냈다. 카롱이 심문하는 것을 르베르는 옆에서 듣고 있었다. 주인은 카롱이 싸가지고 있는 기묘한 물건에 불안한 눈길을 보내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질문에 대답했다. 그로부터 5분 뒤, 여관은 제복경찰관으로 넘쳐 버릴 것 같았다. 그들은 종업원에게 질문을 퍼붓고, 방을 수색하고, 여관 안팎을 이잡듯이 뒤졌다. 르베르는 혼자 차도로 나와서 주위의 산을 바라보았다. 카롱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정말로 사라진 걸까요?" 르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적도 없이 말이야." 여관 주인이 놈과 한패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야. 그 주인이나 종업원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야. 놈은 오늘 아침이 되자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출발한 거겠지. 문제는 어디로 갔느냐야. 그리고 우리가 놈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을 과연 알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야." "알 리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지요. 우연입니다, 이것은.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그렇겠지, 뤼시앙. 그렇기를 빌어 보세." "우선 당장의 유일한 실마리는 차의 번호입니다." "그래. 자네가 차를 수배하자고 했을 때 무선으로 리용에 연락해서 전지역에 긴습수배를 발령하세. '최우선. 흰 알파 로메오, 이탈리아 국적, MI-61741. 접근할 때에는 주의를 요함. 운전자는 무기를 휴대. 위험인물임.' 요점은 이런 정도면 되겠지. 그리고 보도진에게는 절대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려 두세. 피의자는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아마 모를 거야. 그러니까 라디오나 신문에 새어나가 본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엄중히 주의시킬 것이라고 덧붙여 둘까? 그럼, 뒷처리는 리용 지방본부의 가야르에게 맡겨 놓고 우리는 파리로 돌아가세." 짙은 남색 알파가 발랑스 시내에 들어간 것은 오후 6시가 가까워서였다. 여기서는 마르세유와 리용을 연결하고, 다시 파리와 대동맥인 국도 7호선이 있으며, 론 강의 양쪽 기슭에는 끊임없이 차의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알파는 남쪽으로 뻗어 있는 고속도로를 횡단하여 왼쪽 강기슭의 생 페레이 방면으로 가는 533호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다리를 건넜다. 다리 밑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강의 흐름이 저녁노을을 받으며 바쁘게 남으로 달리는 철제 곤충의 무리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유연한 자세로 지중해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땅거미가 계곡을 감싸기 시작할 무렵, 생 페레이를 빠져나온 재칼은 조그만 스포츠카를 채찍질해 가면서 오베르뉴 지방에 솟아오른 중앙고원 깊숙이로 올라갔다. 르 퓌이를 지나니 길은 갈수록 온천 마을이 있었다. 중앙고원의 바위산에서 분출되는 생명의 샘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도시인을 끌어들여 교활하기로 유명한 오베르뉴의 백성들에게 부(富)를 가져다 준다. 브리우드를 지나니 알리에 강의 계곡은 이미 등뒤로 숨어 버리고 고원 목초지의 히스나 건초의 냄새가 밤 공기에 스며든다. 재칼은 이수아르에서 차에 기름을 보충하고 거기서 몽도레, 부르불로 향했다. 도르도뉴 강의 상류지대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 전이었다. 도르도뉴 강은 오베르뉴의 고원에서 발원하여, 거기서 남서로 여러 개의 댐을 지나고 흘러서 마지막에는 보르도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부르불에서 그는 85호선을 타고 코레즈 현의 중심지인 위셀로 향했다. "우둔하기 짝이 없군, 르베르. 그 손으로 놈을 잡아 놓고도 빠져나가게 하다니, 이 무슨 꼴인가?" 생클레아는 반쯤 의자에서 일어서서 르베르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르베르는 생클레아의 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료를 보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의 오만한 대령을 다루는 방법은 그러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생클레아 쪽은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의 태도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인지, 아니면 태연하게 자기를 무시하는 태도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생클레아로서는 물론 앞쪽 것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그가 말을 끝내고 의자에 도로 앉기를 기다렸다가 르베르는 얼굴을 "나누어 드린 보고서를 보시면 아실 줄 압니다만, 우리가 그를 손 안에 잡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댓건이라고 하는 남자가 어젯밤부터 가프의 여관에 묵고 있다는 보고가 리용에서 들어온 것은 오늘 오후 12시 15분입니다. 그런데 재칼은 11시 5분에 급히 호텔을 떠났습니다. 리용에서 들어온 보고가 도착되는 것과 동시에 손을 썼다 하더라도 그때 이미 한 시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나라의 경찰이 일반적으로 비능률적이라는 당신의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태를 극비로 처리하라는 것이 대통령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댓건이라는 남자를 검거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입니다만, 그렇게 했다가는 대번에 보도진의 귀에 들어가고 마니까 그 방법은 당연히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암사슴 여관에 묵은 댓건의 숙박 카드는 통상적인 시간에 통상적인 방법으로 주고받아 정시의 비행기편으로 리용의 지방본부로 보내졌습니다. 그 리용에서 비로소 댓건이 수배중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며, 이 시간적인 지연은 거국적으로 댓건의 이름을 떠들어대는 방법을 쓰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댓건은 이틀밤 예정으로 그 여관에 투숙했습니다만, 오늘 오전 11시에 무슨 변경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변하게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경관이 호텔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그자가 본 게 아닌가?" 생클레아는 다시 악담을 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댓건이 투숙한 것을 알게 된 시간이 12시 15분이며, 그는 그보다 70분 전에 여관을 떠났으니까요." "요컨대 재수가 없었다, 아주 운이 나빴다는 거군." 내무장관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만 아무래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즉시 재칼의 차를 수배하지 않았는가 하는 거야. 이 점은 어떻게 된 것인가, 르베르?" 저의 실책이었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그가 오늘밤에도 그 호텔에서 묵으리라고 판단했었던 겁니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부근을 드라이브라도 하고 있는 중에 경찰관에게 정지명령이라도 받게 되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경찰관을 쏘겠지요. 그리고 자신의 정체가 경찰에게 탄로났다고 생각하고 즉시 도주를 -- " "사실 도주하지 않았는가?" 생클레아가 단정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정체가 드러났다고 생각하고 달아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그것을 입증할 자료가 없습니다. 다만 어쩐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래서 보고가 들어옵니다. 차가 발견되었을 경우에도 즉각 연락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흰색 알파의 수배는 몇 시에 발령했는가?" 사법경찰국장관인 마크스 페르네가 물었다. "오후 5시 15분에 그 여관의 뜰에서 지시를 했습니다. 7시까지는 각 교통순찰대에까지 하달되었을 겁니다. 또 각 시내 중요 경찰서에도 당직자에게 철저하게 지시하도록 연락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재칼은 이러이러한 위험인물이니까 그 점을 생각해서, 수배할 때는 '도난차'라고만 지정하고 발견되면 즉각 지방경찰본부에 연락하고 경찰관 혼자서는 시켰습니다. 이 조치가 잘 못되었다면 철회하겠습니다만, 그 결과로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은 지지 않겠습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안됐지만 한 경찰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대통령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 롤랑 대령이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한숨이 나왔다. 르베르가 말했다. "그 생각에는 저도 찬성입니다만, 단 그것은 경찰관 혼자서라도 재칼을 잡을 수 있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런데 교통경관이든 순찰경관이든 일반적인 경찰관은 프로 총잡이는 아닙니다. 그러나 재칼은 프로 중에서도 프로입니다. 만일에 그가 차를 정지당하면 경관 하나둘은 버리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중의 어려움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 하나는 재칼이 변신한 것이 탄로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별개의 인간으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인물로 둔갑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찰관이 사살되었다는 사건이 전국의 신문에 보도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미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재칼이 프랑스에 잠입한 진짜 목적 또한 48시간이면 들통나 버리겠지요. 기자들은 민감합니다. 아무리 숨겨도 재칼이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는 낌새를 채고 맙니다. 그런 사태에 직면했을 때에 자신이 그 동안의 사정을 대통령께 설명하시겠다고 나설 분이 여러분 중에 계시다면 저는 기꺼이 그분에게 이 수사를 좋아, 내가 하지 -- 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는 언제나처럼 12시 전에 끝났다. 그리고 곧 8월 16일, 금요일로 들어섰다. 제 17 장 짙은 남색 알파 로메오는 새벽 1시 전에 위셀의 역전 광장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역 바로 맞은편의 카페 한 집만이 아직 영업중이고,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손님 몇몇이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재칼은 머리에 빗질을 하고서 이제 막 가게 문을 닫으려고 의자를 쌓아올린 테이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테라스를 지나 안쪽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는 추웠다. 시속 60마일 이상으로 달리면 산의 밤 공기는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차갑다. 또한 커브가 많은 산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손발이 굳어져서 쑤시고 있었다. 그리고 또 24시간 전에 저녁을 먹고 이날 아침 버터를 것이 없어서 굉장히 배가 고팠다. 그는 길쭉한 빵 한가운데에 칼집을 내고 거기에 버터를 넣고서, 얇게 썬 타르틴 뷔레를 둘 주문하고는 카운터 위에 있던 더운 물에 달걀을 네 개 넣었다. 바텐더가 타르틴 뷔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커피가 퍼콜레이터의 여과지에서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 그는 전화박스가 없는가 싶어서 부근을 둘러보았다. 박스는 없었지만 카운터 끝에 전화가 놓여 있었다. "전화번호부는 있소?" 그는 바텐더에게 물었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 바텐더는 카운터 뒤 선반에 쌓아 놓은 전화번호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직접 꺼내어 보시지요." 있었다. 주소는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의 성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도로지도에는 그 마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는 에글르통 국의 번호였기 때문에 그쪽으로 알아보니 곧 마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국도 89호선을 위셀에서 다시 30km 간 곳에 있다. 그는 차분히 앉아서 달걀과 버터빵을 먹기 시작했다. '에글르통 -- 6km'라는 돌의 도표를 만난 것은 새벽 2시 전이었다. 그는 도로에 접한 숲속 어딘가에 차를 놓아 두기로 했다. 아마도 시골 귀족의 영지쯤 되겠지만, 그곳은 깊은 숲으로서 옛날에는 멧돼지 사냥의 명소였다고 한다. 아마 지금도 멧돼지 사냥은 하고 있겠지. 하긴 코레즈 변화가 없는 곳이 여기저기 적지 않으니까. 도로표식에서 수백 - 더 들어가니 숲속으로 뻗은 좁은 길이 나왔다. 입구에 통나무 기둥이 하나 가로 걸쳐 있고, '사유지'라고 쓴 간판을 못으로 박아 놓았다. 그는 통나무를 치우고 차를 타고 들어가서 다시 본래대로 해놓았다. 그리고 반 마일쯤 숲속으로 들어갔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수목은 불법침입자를 나뭇가지로 후려치는 유령처럼 보였다. 그는 차를 세우고 헤드라이트를 끄고서 글로브 콤파트먼트에서 펜치와 손전등을 꺼냈다.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작업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등은 밤이슬에 완전히 젖어 버렸다. 간신히 그는 분해한 저격용 총이 들어 있는 강관을 60시간 만에 섀시에서 있는 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차 안에 운전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만한 것이 남아 있는지 확인한 다음, 부근에 무성하게 자란 석남화(石南花) 한가운데로 차를 몰아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쯤 걸려서 부근에서 석남화 가지를 꺾어 와서 차가 뚫고 들어온 자국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이것으로 차의 모습은 완전히 안 보이게 되었다. 다음에 그는 넥타이의 양쪽 끝을 두 개의 여행가방 손잡이에 묶었다. 이것을 앞뒤로 나누어 어깨에 메고 나머지 한 개의 여행가방과 아타셰 케이스를 두 손에 들고서 국도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0미터쯤 가서는 짐을 내려놓고 되돌아가서 이끼나 잡초에 난 지우고는 다시 돌아나오는 것이었다. 한 시간쯤 걸려서 겨우 성의 입구까지 되돌아온 그는 통나무 밑으로 빠져나와 거기서 반 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체크 무늬의 양복은 흙투성이고, 목 없는 스웨터는 땀에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손발의 근육이 화가 치밀 정도로 욱씬거렸다. 그는 여행가방을 한데 모아놓고 그 위에 앉았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시골 버스는 아침 일찍부터 운행한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자고 그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재수가 좋았다. 5시 50분이 되어 시장으로 가는 농가의 트럭이 건초를 잔뜩 실은 트레일러를 끌고서 그 앞을 지나가는 속력을 늦추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차가 망가졌소?" "아니오. 1주일 동안 휴가를 받아서 기지에서 히치하이크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오. 어젯밤 위셀에 도착했는데, 기왕 나선 김에 아주 튈까지 갈까 합니다. 튈까지만 가면 아저씨가 있으니까 트럭으로 보르도까지 데려다 줄 거요. 그래서 위셀에서 지금 겨우겨우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는 운전대에 앉은 사람을 보고 싱긋 웃었다. 운전사는 크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밤새 걷다니 별난 사람도 다 있군. 이 부근의 길은 어두워지면 사람 새끼라고는 하나도 안 다니는데. 트레일러에 타시오. 싶으면 거기서 다시 걸어 보시고." 트럭은 15분 전 7시에 에글르통에 도착했다. 재칼은 농부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역의 뒤로 돌아서 그를 따돌리고 어떤 카페로 들어갔다. "이 마을에 택시는 있소?"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바텐더에게 물었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기에 택시 회사에 문의해 보니 앞으로 30분 뒤에는 한 대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서 그는 카페의 손 씻는 곳에서 얼굴과 손을 씻고서 회색 양복으로 가라입고는 담배와 커피로 냄새나는 입안을 헹궜다. 택시는 7시 반에 왔다. 고물이 다 된 르노였다.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을 알고 있소?" "물론 알지요." "멉니까?" "18km쯤." 운전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산 쪽을 가리켰다. "산속이지요." "거기까지 부탁합시다." 재칼은 가방을 모두 지붕 위로 올리고 아타셰 케이스만 가지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마을에 도착하자 재칼은 광장에 있는 '우체통'이라는 카페 앞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자기가 성으로 간다는 것을 운전사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택시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그는 짐을 카페로 끌어들였다. 이미 마을 광장은 찌는듯이 더웠다. 건초를 잔뜩 실은 짐수레에 매어져 있는 두 마리의 암소가 처음 먹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 가장자리를 살찐 검은 파리가 거침없이 산책하고 있다. 카페 안은 어두컴컴하고 썰렁했다. 먼저 온 손님들이 새로 들어선 사람을 평가하려고 의자를 고쳐 앉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노파가 농부들의 무리에서 떠나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나막신 끄는 소리가 타일 바닥에 울렸다. "뭘로 할까요, 무슈?" 재칼은 짐을 내려놓고 카운터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곳 손님들은 모두 붉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붉은 것으로 한잔 주시오." 와인이 나왔다. "성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노파는 검은 눈을 번득이며 날카롭게 그를 쳐다보았다. "2km요." 그는 지겨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 바보 같은 운전사가 여기에는 성 같은 것이 없다면서 억지로 광장에 내려놓더니." "그 자식은 에글르통 인간이로군?" 하고 노파가 물었다. 재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글르통의 인간들은 모조리 바보들뿐이니까." "이거, 낭팬데. 지금부터 성에 가야만 하는데......" 손님으로 와 있는 농부들은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성에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되는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그는 깔깔한 100프랑짜리 지폐를 꺼냈다. "와인 값이 얼마요?" 노파는 날카로운 눈길로 지폐를 보았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농부들이 들먹들먹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거스름돈이 없는데." 하고 노파가 말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트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잔돈도 가지고 있을 테고." 누군가가 일어나서 등뒤로 다가왔다. "트럭이라면 있소, 선생." 걸직한 목소리가 말했다. 재칼은 깜짝 놀란 듯이 돌아다보았다. "그렇지는 않소만. 하지만 내가 트럭 가진 친구를 알거든. 내가 부탁하면 성까지 태워다 줄지도 모르지." 그거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재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마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양 말고 드시오." 농부는 노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는 와인을 큰 잔에 따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소, 이렇게 더운 날에는 목이 탈 텐데?"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커다란 얼굴이 싱글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농부는 다시 노파에게 고개짓을 했다. 그녀는 커다란 병 두 개를 대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농부들에게로 가지고 갔다. 아까 그 남자가 말했다. 농부 하나가 단숨에 와인을 마셔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성으로 가는 길을 흔들리는 트럭에 앉아 재칼은 생각했다 -- 오베르뉴 농부들의 장점은 적어도 외부인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입이 무겁다는 점에 있다고.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 코렛은 침대 속에서 일어나 앉은 채 커피를 마시면서 또 한 번 그 편지를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분노는 사라져 버리고, 지금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일종의 울적한 혐오감뿐이었다. 지금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단 말인가? 그녀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갈팡질팡했다. 어제 오후 가프에서 느긋하게 차를 몰아 성으로 돌아온 그녀는 집을 지키는 충실한 두 고용인의 마중을 에르네스틴으로서, 남작 앨프레드의 아버지 때부터 성에서 일해 오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루이종이라는, 에르네스틴이 겨우 허드렛일을 하고 있을 무렵 그녀와 결혼한 농부 출신의 정원지기이다. 현재 성은 방의 3분의 2는 잠가둔 채 쓰지 않고 있지만, 그 성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이 부부다. 코렛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정원에서 뛰노는 아이들 모습도 없으며, 승마용 말을 나무라는 주인의 씩씩한 모습도 없는, 빈집이나 다름없는 성의 가엾은 여주인일 뿐이다. 코렛은 친구가 일부러 보내 준 파리의 사교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젊은 여자의 어깨 너머에서 얼굴을 내민 남편 앨프레드가 바보같이 눈으로 여자의 부풀어오른 가슴을 들여다보고 있다. 호스티스 출신의 댄서인 그녀가 남작이 자기와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이며, '언젠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설명문 가운데 있었다. 사진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이고 목에는 굵은 줄이 몇 가닥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면서 레지스탕스의 대장이었던 그 젊고 핸섬한 앨프레드는 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것인가 하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늠름한 청년과 사랑을 하고 1년 뒤에 결혼을 했을 때에는 아들을 뱃속에 안고 있었다. 산속에 있는 비밀기지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10대로서 레지스탕스의 레포를 맡고 있었다. 그는 30대 중반으로 페가사스라는 암호명으로 모습에 그녀는 반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레지스탕스 신부의 집전으로 지하 교회에서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종전과 함께 남작 집안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그가 상속받았다. 아버지는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한 해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고 없었으므로 그는 새로운 샤로니에르 남작 집안의 영주가 되어 근처에 사는 농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그는 성의 생활에 싫증이 나버렸다. 파리의 매력과 환락가의 불빛 속에서 지하운동으로 보낸 젊은 날들을 보상받고 싶은 충동을 그는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그는 57세지만, 70이라고 해도 코렛은 사진과 편지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실내복의 앞자락을 젖혔다. 발돋움을 하고 서서 하이힐을 신었을 때처럼 허벅지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나쁘지 않아, 이 나이에 이 정도라면 -- 그녀는 생각했다. 풍만하게 성숙한 여체가 거기에 있었다. 히프는 크지만 허리는 승마를 하고 산을 걸어다닌 덕분에 꼭 죄어져 있다. 젖가슴을 두 손으로 들어서 무게를 짐작해 보았다. 아주 예쁜 모양보다는 조금 큰 듯하지만, 아직 침대에서 남자를 흥분시킬 만한 매력은 충분했다. 좋아, 앨프레드, 바람피우기 경쟁이라면 자신 있어요 -- 하고 그녀는 남편의 이미지에 도전하고, 머리를 풀어내렸다. 그 한 가닥이 뺨을 흘러내려서 젖가슴 위에서 멈췄다. 그녀는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넣고는 24시간 전에 그곳을 애무해 주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는 노련했다. 그대로 가프에 그냥 있을 걸 그랬다고 그녀는 새삼스럽게 후회했다. 둘이서 실컷 즐길 수 있었는데. 사랑의 도피행을 떠나온 연인들처럼 가명을 쓰면서 이곳저곳에서 묵어 가며 -- 왜 이런 성으로 돌아온 것일까 ? 앞뜰에서 트럭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듯이 그녀는 실내복의 앞자락을 여미고 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마을에서 온 덮개 있는 트럭이 서 있었다. 뒤쪽의 문을 열고 남자 둘이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다. 잔디밭의 잡초를 거들었다. 트럭에 가려져 있던 남자가 바지 호주머니에 종이쪽지 같은 것을 쑤셔넣으면서 모습을 나타내더니 훌쩍 운전대에 뛰어올라서 클러치를 밟았다. 누가 저런 짐을 가져오게 했을까? 그녀로서는 짐작되는 게 없었다.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세 개의 여행가방과 아타셰 케이스 옆에 한 남자가 서 있다. 햇빛에 비친 금발머리를 보고 그녀는 환희의 미소를 떠올렸다. "짐승, 아름다운 원시의 짐승. 정말 잘 왔어요."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방을 나가 층계참까지 가자 아래층 무슨 일이냐고 남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남작 부인께서는 댁에 계신지요?" 곧 에르네스틴이 늙은 다리를 애써 이끌고 층계를 올라왔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금요일 밤의 내무부 회의는 여느때보다 일찍 끝났다. 아무것도 없음이 유일한 보고였기 때문이다. 과거 24시간 동안 차의 특징을 기재한 수배서가 지나친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통상적인 절차를 밟아 프랑스 전국에 부려졌다. 그러나 차는 발견되지 않았다. 같은 요령으로 사법경찰의 각 지방본부는 관할구역 내의 경찰서에, 관할 내의 모든 호텔의 숙박 카드를 본부에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각 즉시 분류하여 댓건의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이 또한 결국 헛수고로 끝났다. 이 사실은 그가 어젯밤엔 적어도 댓건이라는 이름으로는 호텔에 묵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전제를 설정해 보겠습니다." 마땅찮은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일동에게 르베르가 말을 꺼냈다. "그 하나는 그가 아직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갑자기 암사슴 여관을 떠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우연이었다는 쪽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전제라면 그가 태연히 알파 로메오를 타고 돌아다니며 당당하게 댓건이라는 경우라면 쉽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두 번째 전제는 그가 어딘가에 차를 버리고, 그리고는 자신의 재치에만 의존하여 잠복해서 이동을 꾀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 경우에는 다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그는 다시 변신할 준비가 없는 경우로서 조만간 호텔에 묵거나 프랑스를 탈출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으려고 하겠지요. 또 하나는, 다시 다른 인간으로 변신해 있을 경우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당신 생각은 어떻소? 놈이 다른 신분을 준비하고 있을까?" 롤랑 대령이 물었다. 한 것은 틀림없으니까 아마도 세계 최고의 살인자 중 하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살인자로서의 비즈니스에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어느 나라의 관헌에서도 지금까지 그에게 아무런 혐의도 두지 않았고, 자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가명을 써서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변장의 명수이기도 하다는 거지요. 그의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 보니 칼스로프에게 뒷굽이 높은 구두를 신기고, 키를 높이고, 체중을 몇 -- 줄이고, 콘택트렌즈로 눈빛을 바꾸고, 머리에 염색을 하면 댓건이 완성됩니다. 그런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좀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놈 쪽에서는 대통령에게 접근할 때까지 정체가 드러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생클레아가 이의를 제기했다. "놈이 변신할 재료를 몇 가지나 준비해 가면서까지 철저하게 조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아닙니다. 지금도 철저하게 조심하고 있는 거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옛날에 붙잡혔을 겁니다." "런던 경시청에서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칼스로프는 전후에 공수부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산속에 숨어 노숙을 하는 것은 아닐까 ?" 말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르베르는 동의했다. "그렇다고 하면 이미 살인자로서의 위험한 존재는 아니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르베르는 생각해 보았다. "그를 붙잡을 때까지는 위험이 사라질 수 없다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 "또는 죽을 때까지는." 하고 롤랑이 덧붙였다. "놈도 바보가 아닌 바에야 목숨이 붙어 있을 때에 프랑스에서 탈출할 궁리를 하겠지." 생클레아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나 버렸다. 사무실에 돌아온 르베르는 카롱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현재 살아 있고, 또 무기를 가진 채 행방이 묘연해.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그자와 차를 찾아내야만 해. 그는 짐을 세 개 가지고 있으니까 걸어서는 멀리 못 갔을 거야. 먼저 차를 찾아내고, 거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세." 르베르의 지휘 아래 모두가 눈을 까뒤집어가며 찾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은 코레즈 현의 한가운데에 있는 성에서 새 시트에 감싸인 채 누워 뒨굴고 있었다. 붉은 와인과 함께 퍼티와 토끼고기로 뱃속을 채우고, 식후에는 커피와 브랜디로 입가심을, 그 다음에는 느긋하게 목욕을 소용돌이 무늬의 금박을 바라보면서 그는 파리에서 계획을 실행하는 날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1주일 이내에 이 성에서 나가야만 한다. 남작 부인이 얌전히 놓아 줄지는 의문이지만, 그건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은 성에서 나갈 이유를 생각해 두어야만 한다. 문이 열리고 코렛이 들어왔다. 머리를 풀어 어깨에 늘어뜨리고, 실내복은 맨 위에 있는 단추만을 잠그고서 그 밑은 열려진 채다. 움직일 때마다 앞자락이 열렸다. 실내복 안은 완전한 알몸이며, 저녁 먹을 때에 신었던 스타킹과 하이힐 그대로였다. 재칼은 한쪽 팔꿈치를 괴고서 그녀가 문을 닫고 침대로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리본을 풀었다. 잠옷 자락이 열리고 가슴이 드러났다. 다시 그는 몸을 일으켜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얇은 드레스를 그녀의 어깨에서 벗겼다. 그것은 소리도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밀어서 침대 위에서 천장을 보게 넘어뜨리고는, 양쪽 손목을 잡고 베개에 밀어붙이면서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넓적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앉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생긋 웃었다. 머리칼이 밑으로 흘러내려 젖꼭지에 닿아 있다. "자, 귀여운 원시인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보여 줘요." 그녀는 히프를 조금 들었다. 그는 머리를 그로부터 사흘, 피나는 수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매일 밤 회의에서는 이미 재칼은 기가 죽어 프랑스를 탈출해 버렸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일의 회의에서는 재칼은 프랑스의 어딘가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르베르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생클레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놈이 아직 프랑스 국내에 있다고 쳐도, 지금 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경을 향해 도망칠 기회를 노릴 뿐이야. 그러나 모습을 나타냈다가는 그때가 마지막이지. 놈이 OAS나 그 당신의 가설이 틀리지 않는다면, 놈에게는 갈 곳도 감싸 줄 인간도 없고 주위에는 온통 적이 있을 뿐이지." 찬성하는 웅성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참석자들 중 대부분은 경찰이 실패했으며, 살인자의 거처를 알아내는 일은 순수한 형사의 역할이라고 한 부비에 형사부장의 말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르베르는 녹초가 되어 머리를 흔들었다. 수면부족과 긴장과 정신적인 피로와, 경험이나 실적보다는 정치적인 술수로 고관의 지위를 얻은 무리들의 학대로부터 자신과 경찰을 지켜야 하는 불필요한 신경의 혹사로 말미암아 그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만일에 그의 주장이나 방법이 생명이 끝난다. 참석자들 중에는 그렇게 되도록 일을 이끌어 갈 인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옳다면? 재칼이 아직도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면? 경계망을 뚫고 들어와서 목적을 달성한다면? 참석자들은 결사적이 되어 속죄양을 물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죄양이란, 즉 르베르인 것이다. 여하튼 경찰관으로서의 긴 경력은 그 시점에서 끝나게 된다 -- 재칼을 찾아내어 검거하지 않는 한. 검거해야 비로소 그들에게 자기가 옳았음을 시인하도록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재칼은 아직 프랑스 국내에 있으면서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뜻은 다르지만 재칼도 자기도 똑같은 해내는 것이라는, 물론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신념뿐이었다. 갑자기 이 골칫거리를 떠맡은 지 벌써 8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르베르는 만일의 경우에 있을 조치까지 포함해서 세부적인 것까지 계산을 다하고 있는 듯한 이 신출귀몰한 상대에 대해서 존경심마저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감정을 회의석상에서 공공연히 입 밖에 낼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안 한다. 즉시 해고당할 게 뻔하다. 르베르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은 바로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는 부비에의 존재였다. 부비에도 역시 형사인 것이다. "재칼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고 르베르는 대답했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듭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긴 어렵습니다만." "느낌이 든다고?" 생클레아는 비웃듯이 말했다. "어떤 특정한 날이라고?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총경? 추리소설을 너무 읽었거나. 이건 소설이 아니야, 현실이라네. 재칼은 달아나 버렸어 -- . 그렇게 되면 문제없는 거 아닌가?" 자신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면서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르베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기를 빌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이 일에서는 손을 떼고 본래의 임무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수사를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르베르? 위험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 "뒤에 하신 질문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 하신 질문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절대로 확신을 갖게 될 때까지는 수사를 계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그럼, 여러분, 계속 르베르 총경에게 수사를 부탁하고 이 회의도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여기서 끝내고 싶소 -- . 당분간은." 8월 20일 아침, 에글르통과 위셀의 중간에 있는 고용주의 영지에서 들쥐 사냥을 하고 있던 마르캉쥬 카레라는 사냥 당번이 상처입은 들비둘기를 쫓아서 마가목 들비둘기는 분명히 버린 것으로 보이는 스포츠카의 운전석으로 들어가서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비둘기의 목을 조르면서 사냥 당번은 숲 입구에 가로질러 놓은 통나무에 못질한 '사유지'라는 간판을 무시하고 아베크가 들어와서 차를 거기에 세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차를 덮어서 감춘 잡목은 그곳에 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흙에 꽂아 놓았을 뿐이었다. 다시 주변을 살펴보니 부근의 나뭇 가지를 꺾어낸 자국이 있고, 그 잘린 자국을 감추기 위해서 흙으로 문질러 놓은 것이었다. 시트에 쌓인 새똥의 양으로 미루어 차가 거기에 버려진 지 적어도 2~3일은 지났다고 그는 판단했다. 총과 그는 나중에 마을로 토끼사냥에 쓸 올가미를 사러 갈 때 순경에게 차에 대한 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을 순경이 자기 집에 있는 수동식 전화로 위셀의 본서에다, 부근의 숲속에서 버려진 차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보낸 것은 정오 가까이 되어서였다. 차의 색깔은 흰색이냐는 질문에 그는 메모를 보았다. 아뇨, 청색입니다. 이탈리아 번호인가? 아니, 프랑스입니다. 차종은 모르겠습니다. 알았다고 위셀의 본서에서는 말했다. 오후에라도 레커차를 보낼 테니까, 그때는 현장 안내를 부탁하네. 파리의 높은 양반들이 이탈리아 번호의 흰 스포츠카를 찾아달라고 해서 모두 총동원되었기 때문에 손이 모자란다네 -- . 순경은 알겠다고 레커차가 문제의 차를 끌고 위셀 경찰서로 돌아온 것은 오후 4시였다. 그리고 5시 조금 전에 그 차를 조사하던 차량정비과 한 사람이 차의 도장 솜씨가 너무 형편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험삼아 드라이버로 문질러 보니 짙은 남색 도료 밑에서 흰색이 나타났다. 이상히 여겨 번호판을 살펴보니, 그것은 앞뒷면이 바뀌어 있었다. 떼어내어 앞쪽을 보니 'MI-61741'이라고 되어 있다. 당황해서 그는 경찰서로 뛰어갔다. 그 소식이 르베르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오후 6시쯤이었다. 오베르뉴의 중심지, 클레르몽페랑의 지방본부에서 바랑탕 총경이 전화로 알려 온 것이다. 바랑탕이 벌떡 일어났다. "명심하게, 이건 중요한 일이야. 왜 중요한지 그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일이야. 그래, 이례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전권을 위임받았다네. 미심쩍으면 장관에게 문의해도 좋아. 여하튼 지금 곧 위셀로 경찰대를 파견하게. 솜씨 좋은 녀석들을 골라서 말이야. 되도록 숫자가 많은 편이 좋아. 차가 발견된 곳을 중심으로 해서 탐문수사를 벌이는 거야. 지도를 준비해서 그 지점을 중심으로 바둑판을 그려넣고, 하나씩 이잡듯이 탐문하게. 농가는 물론이고 상점, 카페, 호텔, 그리고 나뭇꾼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가야 해. 그 국도를 늘 지나다니는 키가 큰 금발의 남자로서, 영국인이지만 프랑스어가 유창해. 여행가방 세 개와 아타셰 케이스를 가지고 있을 걸세. 그리고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고, 비싼 옷을 입고 있겠지만, 지금은 아마 들잠을 잔 것처럼 꾀죄죄한 모습이겠지. 탐문의 요점은 그가 어디에 있었나, 어디로 갔는가, 무엇을 사려고 했는가 -- 이 세 가지일세. 아, 그리고 신문기자의 귀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되네. 무슨 뜻인가, 어렵다는 것은? 그야 물론 눈치가 빠른 녀석들이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겠지. 글쎄, 자동차 사고가 있었는데 타고 있었던 사람이 혼자 몽유병 상태로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수색중이라고나 해두지. 그래, 인도상의 해서든지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하게. 부탁하네. 지금은 여름 휴가철이라 하루 500건이나 사고가 발생해. 전국지에 실을 만한 기삿거리는 없다고 잡아떼면 돼. 그러니까 재주껏 속여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그의 거처를 알아냈다 해도 가까이 가면 안돼. 멀리서 에워싸서 달아나지 못하게만 하면 되네. 나도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갈 테니까." 부숴 버릴 듯이 수화기를 놓고 르베르는 카롱 쪽을 보았다. "곧 장관께 연락해서 회의를 8시로 앞당기도록 해주게. 저녁식사 때라는 건 알고 있어. 괜찮네, 곧 끝날 테니까. 그리고 공군기지에 전화해서 헬리콥터 준비를 부탁하게. 야간비행으로 위셀까지 놓게, 마중나올 차를 대기시켜야 하니까. 자네는 여기를 지키게. 잘 부탁하네." 클레르몽페랑에서 파견된 경찰대는 위셀에서 합류한 응원대와 함께 차가 발견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광장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서서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바랑탕은 무선차에서 그 지역의 다른 여러 마을에 파견되어 있는 순찰차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차가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한 반경 8km 지역부터 우선 탐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탐문은 철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대개 집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정이 좋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복잡한 지형을 가진 지역이어서 수사원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거나, 오두막을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또 한 가지 바랑탕이 전화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요소, 르베르에게 대놓고 말하고 싶지 않은 기질이 이 지방에는 있었다. 공교롭게도 부하가 그것과 부딪히게 되었다. 한밤중인 12시경, 한 조의 수사원이 알파가 발견된 지점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농가에서 농부 한 사람을 심문했다. 그 농부는 잠옷바람으로 입구에 막아서서 수사원들이 안에 들어가는 거부했다. 손에 든 등잔의 불빛이 수사원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비췄다. "이봐, 가스통, 자네는 가끔 그 길을 지나서 시장을 다니고 있잖아. 금요일 아침에도 그 길을 지나서 에글르통에 갔었지?"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 말해 보게." "갔었나, 안 갔었나?" "생각이 안 나는데." "길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았었나?" "남의 일은 몰라." "그런 게 아니라, 누구 만난 사람이 없었는지 그것을 묻는 거야." "못 봤어, 아무것도." "금발에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야. 여행가방 세 개와 손가방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난. 몇 번 말해야 아나?" 그런 식의 대화가 20분이나 계속되었다. 수사원 하나는 꼼꼼하게 메모를 하고 되돌아갔다. 돌아나오는데 사슬에 매어둔 개가 짖어대고, 한 사람은 자칫 다리를 물릴 것 같아서 둘다 엉겁결에 옆으로 피한다는 것이 퇴비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농부는 그들이 도로로 나가서 차를 타고 돌아갈 때까지 꼼짝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문을 거칠게 닫고서 다가오는 염소를 발로 차 버리고는 마누라가 자고 있는 침대로 돌아왔다. "당신이 태워 주었다는 남자 얘기네, 무슨 나쁜 짓을 했나?" "알 게 뭐야. 하지만 나는 말이야, 불쌍한 사람을 경찰에게 고자질하는 그런 짓은 안 해. 그런 짓을 했다간 이 가스통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거지." 그는 기침을 하고 벌개진 숯불에 "더러운 개들!" 그는 등잔불을 입으로 불어서 끄고 침대로 들어가서 살집 좋은 마누라 곁으로 다가갔다. "잡히지 마, 젊은 친구.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말야 -- ." 르베르는 서류를 내려놓고 일동을 둘러보았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위셀로 달려가서 수사를 지휘할 생각입니다." 1분 가까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내무장관이 르베르에게 물었다. "이번 일로 미루어 현재로선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페인트를 사서 차에 칠을 다시 했는데, 사이에 가프에서 위셀까지 몰고 갔다면, 그때는 이미 칠을 다시 한 뒤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페인트를 산 곳은 가프라는 것이 됩니다. 지금 그쪽을 조사하라고 일러놓았습니다만, 틀림없이 그 사실은 드러날 겁니다. 그가 급히 가프의 여관을 떠난 것은 어디에선가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전화를 했거나, 그가 파리나 런던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거나, 여하튼 댓건으로 둔갑한 것이 드러났다는 정보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정오까지는 우리의 손이 뻗을 것으로 계산하고 즉시 여관에서 사라진 거지요. 십중팔구는 그렇게 되었겠지요." 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차고, 그 금이라도 갈 것 같았다. 공허한 소리가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 왔다. "이 방에서 기밀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뜻인가?"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기밀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은 여기 말고도 있습니다. 전화 교환수, 텔렉스 오퍼레이터, 명령전달의 중개를 하는 중급, 하급의 담당관들. 그들 중에 OAS의 요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것만은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재칼은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계획 자체가 들통나서 그것을 그만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을 추진해 나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알렉산더 댓건으로 둔갑해 있다는 것이 탄로났다는 한 사람입니다. 아마 그것은 지난번 로마의 호텔로 전화 연락하는 것을 DST에게 탐지당한 바르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 ." DST 국장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때 우체국에서 체포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 르베르, 또 하나의 결론이라는 것은 뭔가?" 하고 내무장관이 물었다. "그는 댓건으로 변신한 것이 탄로났어도 프랑스를 떠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은 고사하고 파리로 오려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아직도 대통령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오만하게도 도전해 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내무장관은 일어나서 서류를 끌어모았다. 반드시 재칼을 찾아내게. 오늘밤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하다면 사살해도 좋아. 이것은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생각해 주기 바라네." 엄숙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프레이 내무장관은 회의실에서 나갔다. 한 시간 뒤, 르베르를 태운 헬리콥터는 기지를 떠나 어두운 밤하늘에서 남으로 진로를 잡았다. "무례한 놈이야. 용서할 수 없어. 실질적으로 프랑스를 움직이고 있는 우리 고관들에게 미스가 있다고 넌지시 비치고도 태연해 하다니. 다음 보고서에는 분명히 그에 대한 것을 쓰겠어." 자클린은 슬립의 끈을 어깨에서 벗겼다. 그것은 밑으로 흘러내려 허리에서 걸렸다. 그녀는 두 팔로 양쪽에서 젖가슴을 누르고 얼굴을 밀어붙였다. "자세하게 말해 줘요." 그녀는 노란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제 18 장 8월 초순 이후 줄곧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8월 21일 아침도 밝고 맑았다. 크게 기복을 이룬 구릉이 멀리 바라다보이는 샤로니에르 성의 창문에서 보는 경치는 정말로 평화로웠으며, 18km 떨어진 에글르통에서 경찰이 펼치고 있는 탐문수사의 소동은 딴 세상의 일이었다. 알몸 위에 가운을 걸친 재칼은 남작의 서재 창가에 서서 파리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남작 부인 코렛은 이틀 밤 계속된 섹스 놀이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2층 침실에서 자고 있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는 늘 그렇듯이 암호를 댔다. "이쪽은 재칼." 쉰 목소리가 응답을 했다. "또 정세가 변했소. 적은 차를 발견하고 -- ." 재칼은 때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해가며 2분쯤 바르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메르시'라고 인사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바르미의 정보에 의해서 싫든 좋든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 예정으로는 앞으로 2일 더 성에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급히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게다가 지금의 전화에는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그 순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었지만, 담배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창밖으로 내던질 때에 그 불안의 정체에 대해 짐작이 갔다. 수화기를 들어올리고 나서 곧 희미하게 툭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성에 온 지 나흘, 어제까지 세 번 파리에 전화를 걸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침실에는 같이 연결된 전화가 있지만, 그가 나올 때 코렛은 분명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분명히...... 그는 맨발 그대로 소리도 없이 층계를 올라가서 얼른 침대로 뛰어들었다. 수화기는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옷장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가방도 모두 열린 채 바닥에 내던져져 있었다. 열쇠 꾸러미가 옆에 떨어져 있다. 코렛은 부근에 마구 어질러 놓은 물건들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가느다란 강관이 흩어져 있었다. 모두 마개 대신에 밀어넣어 두었던 마직 천이 빠져나와 있고, 어떤 강관에서는 망원조준기의 끝부분이, 또 다른 강관에서는 소음기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그녀는 그가 들어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바라보던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은 라이플의 총신과 노리쇠 뭉치였다. 두 사람 모두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칼 쪽에서 먼저 정신을 차렸다. "엿들었군." "난......아침마다 당신이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알고 싶어서......"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뇨. 당신이 침대에서 빠져나가면 그 기척에 반드시 잠을 깨요. 이......이것은 반은 심문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어조에는 아니, 그저 장난감일 뿐이라고 그가 부정하기를 바라는 듯한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때 그녀는 비로소 그의 눈 속에서 회색 반점이 확산되어 눈의 표정을 덮어 감추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생명 없는 기계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총신이 손을 떠나 소리를 내면서 다른 부품 사이로 굴렀다. 그녀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당신, 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군요. 당신 OAS지요? 이것으로 드골을 죽일 생각이지요?" 재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대답이 되었다. 그녀는 문을 발자국으로 따라가 그녀를 잡아서 침대에까지 다시 끌고 왔다. 흩어진 시트 위에서 팔딱팔딱 뛰면서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 경동맥(頸動脈)에 가해진 일격이 소리를 막았다. 이어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머리를 침대 끝에서 밑을 향해 엎드린 자세로 눌렀다. 순간 양탄자의 무늬가 그녀의 망막에 비쳤으나, 목뒤에서 내리친 일격이 완전히 의식을 앗아가 버렸다. 그는 문으로 다가가서 바깥 동정을 살폈으나 층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르네스틴은 집 뒤쪽에 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루이종은 곧 시장에 갈 것이고. 다행히 둘 다 귀가 어둡다. 그것을 군용 외투와 앙드레 마르탱의 더러워진 옷이 들어 있는 세 번째의 여행가방에 넣었다. 여행가방의 안감을 두들겨 보았으나 안에 숨겨둔 증명서류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그 가방을 열쇠로 잠갔다. 덴마크의 펠 옌센 목사의 옷을 넣어둔 두 번째 가방을 열어놓기는 했으나, 안을 뒤진 흔적은 없었다. 침실 옆에 있는 욕실에서 그는 재빨리 얼굴을 씻고 면도를 했다. 그리고 10분쯤 걸려서 긴 금발을 가위로 5cm 정도 잘라내고, 다음에는 브러시로 염색약을 묻혀서 꼼꼼하게 머리를 빗어서 중년 남자같이 회색으로 물들였다. 선반에 세워 놓은 옌센 목사의 여권 사진을 보면서 염색약 덕분에 촉촉해진 머리칼을 사진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른색 콘택트렌즈를 끼었다. 세면기에 튄 염색약이나 비누거품을 깨끗이 닦아낸 그는 면도기구를 챙겨서 침실로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코렛의 발가벗은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산 조끼, 바지, 양말, 셔츠를 재빨리 입은 다음에 검은 흉배를 목에서부터 걸치고, 그 위에 목사용의 흰 칼라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 검은 윗도리를 걸치고 촌스러운 구두를 신었다. 갑자기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다음에는 금테 안경을 안주머니에 넣고 세면도구와 프랑스의 성당에 관한 덴마크어로 된 책을 아타셰 케이스에 넣었다. 안주머니에는 덴마크의 여권과 옷가지는 본래의 여행가방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은 8시가 가까워서였고 에르네스틴이 아침 커피를 가지고 올 시간이었다. 에르네스틴과 루이종은 남작이 어릴 때부터 섬겨 온 충복이기 때문에 코렛은 그들에게 정사가 탄로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창에서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자니까 루이종이 자전거로 문 쪽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짐 싣는 곳에서는 바구니가 흔들리고 있다. 그때 에르네스틴이 문을 노크했다. 그는 숨을 죽였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커피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님." 높은 목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재칼은 "거기 그냥 두고 가시오. 나중에 마실 테니까." 문밖에서 에르네스틴이 아연하여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감히 서방님 침실에서 -- . 그녀는 황급히 루이종을 찾으러 갔지만, 그는 이미 밖에 나가고 없었다. 혼자 부엌 개수대를 향해서 요즘 인간들은 썩어빠졌어, 큰나리께서 살아 계실 때와 비교하면 말도 안된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침실의 창문으로 시트에 달아맨 네 개의 짐이 집 앞에 있는 화단에 툭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물론 침실의 문이 안쪽에서 잠기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릴 리도 없었다. 재칼은 코렛의 덮어서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놓았다. 그리고는 창문 턱에 나가서 창문을 꼭 닫아 두고 밑의 잔디 위로 뛰어내렸다. 성 옆에 있는, 마구간을 개조한 차고 안에서 코렛의 르노에 엔진이 걸렸다. 그래도 그 소리만은 에르네스틴에게도 들렸다. 황급히 식기만 넣어두는 방의 창문으로 내다본 그녀의 눈에 앞뜰로 통하는 차도로 들어가 그곳에서 멀어져 가는 르노의 모습이 보였다. "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이지, 저 마님은?" 층계를 오르면서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침실 문 앞에 놓아둔 커피는 아직 미지근했지만, 입을 대지는 않았다. 몇 번 노크한 다음에 그녀는 문을 방문도 잠겨 있었다. 양쪽 방 모두 안에서 응답하는 기척이 없었다. 어쩐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불길한 일이라면 전쟁중에 독일군 장교가 큰서방님이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밀고 들어와 묵으면서 작은 서방님에 대해 쓸데없는 것을 이것저것 캐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기분나쁜 일은 그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 . 그녀는 루이종에게 의논해 보기로 했다. 마을의 카페에 전화를 걸어서 시장에 있는 루이종을 불러 달라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전화의 기계장치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화기를 손에 들기만 하면 누군가가 곧 대답해 줄 데려와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무지한 그녀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어서 귀에다 대고 10분 동안이나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응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화 코드는 도서실 벽 아래 부분에서 나와 있는데, 그 뿌리짬이 날카로운 칼 같은 것으로 비스듬히 반이나 잘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침식사 때가 지났을 무렵, 르베르는 헬리콥터로 파리에 돌아왔다. 뒤에 그가 카롱에게 말했듯이 바랑탕의 일 처리는 농부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훌륭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식사 때까지 며칠 전 이른 아침에 재칼이 아침을 먹은 에글르통의 카페를 찾아내고, 이어서 에글르통을 중심으로 반경 20-- 지역 안의 모든 도로를 봉쇄하기로 하고, 정오까지 그 작업을 끝내도록 이미 손을 써놓았다. 르베르는 바랑탕의 성격을 계산에 넣고 재칼을 찾아야 할 중대성을 넌지시 비쳐서, 바랑탕은 그 바람에 우쭐해서 에글르통 주변에 감시망을, 그의 말대로 흉내내면, '쥐의 뒷구멍보다 굳게' 펴게 된 것이다.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에서 나온 조그만 르노는 산지를 빠져나가서 튈로 가고 있었다. 경찰이 알파가 발견된 지점에서 지난 밤부터 계속 탐문수사를 해오고 있다면 새벽 전에는 에글르통까지 손이 뻗쳤을 것이라고 재칼은 추측했다. 카페의 바텐더나 택시 운전사의 진술로 오후에는 성에까지 손이 뻗치겠지. 영국인이지 회색 머리칼의 목사는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참으로 위기일발의 탈출이었다. 그는 산 옆길을 빠져나가 에글르통의 남서쪽 18km 지점에서 국도 8호선으로 나갔다. 거기서 튈까지 20km는 더 가야 된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10분 전 10시. 그가 직선 코스에서 커브를 다 돌았을 때, 에글르통에서 몇 대의 차가 그리로 왔다. 순찰차와 두 대의 트럭이다. 차는 직선 코스의 중간쯤에서 멈춰서고, 밖으로 뛰어내린 6명의 경찰관이 거기에 철제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뭐라고, 없다고?" 에글르통에서 바랑탕은 흐느껴 우는 택시 "어디 갔소?" "모릅니다. 정말 몰라요. 우리 주인은 매일 위셀에 가서 아침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역전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손님이 없을 때에는 이 차고에 돌아와서 수리 같은 걸 합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손님을 태우고 어디로 갔을 거예요." 바랑탕은 어두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에게 호통을 쳐 봐야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택시 회사라고는 해도 사장이 운전사와 정비공을 겸하고 있는 개인영업이다. 본인이 없고서야 이야기가 안된다. "금요일 아침 사람을 어딘가에 태워다 주지 않았소?" 바랑탕은 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때 카페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마침 타이어를 하나 빼내었을 때인데, 하필 지금이냐면서 어물거리다가는 손님이 기다리다가 다른 택시를 타 버린다며 얼른 타이어를 끼우고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손님을 어디로 태우고 갔는지는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우리 그이는 내게 말도 잘 안 해요." 하고 내친 김에 불평까지 했다. 바랑탕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알겠소, 부인. 이젠 그만해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기다리겠소." 그는 부장형사 한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내어 지키도록 하게. 택시의 번호는 알고 있지? 이 집주인이 나타나면 즉시 내게 데리고 와." 바랑탕은 차고를 나와서 자기 차에 올라탔다. "에글르통 경찰서로 가세." 이때 그는 이미 수사본부를 에글르통 경찰서로 옮겨놓았다. 덕분에 경찰서는 그곳이 생긴 이래 처음 그렇게 떠들썩했다. 튈 못 미처 10km 지점에 있는 산속의 험한 골짜기 아래로 재칼은 댓건의 옷과 여권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내던졌다. 이제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해 주었다. 다리의 난간에서 떨어진 가방은 골짜기의 짙은 덤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곳을 일부러 지나 세 블록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서 남은 두 개의 가방과 아타셰 케이스를 가지고 역의 표 파는 곳으로 갔다. "파리까지 한 장, 2등으로 부탁합시다. 얼마지요?" 그는 창구에서 역원이 앉아 있는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97 신 프랑입니다." "파리행 다음 기차는 몇 시에 있습니까?" "11시 50분입니다. 아직 한 시간쯤 남았습니다. 플랫폼에 레스토랑이 있으니까, 거기서 기다리시지요. 파리행 기차가 도착하는 1번 홈에 있으니까 좋으시다면 이용하십시오." 재칼은 짐을 가지고 개찰구로 갔다. 다시 짐을 두 손에 들고 개찰구를 빠져 나갔다. 거기서 그는 푸른 제복에게 가던 길을 제지당했다. "신분증을 보여 주시지요." CRS의 대원은 아직 젊은데도 위엄을 보이려고 나이 이상으로 엄숙한 표정을 애써 짓고 있었다. 그는 자동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다. 재칼은 다시 짐을 내려놓고 덴마크의 여권을 꺼냈다. CRS 대원은 그것을 한장 한장 넘겨 보았지만 한 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덴마크인입니까?" "뭐라고요?" "당신은......덴마크인?" 그는 여권의 표지를 두드렸다. 재칼은 미소를 지으며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CRS 대원은 여권을 돌려주고서 플랫폼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재칼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듯 개찰구로 들어온 다음 손님을 제지했다. 루이종이 시장에서 돌아온 것은 1시가 가까워서였다. 어딘가에서 와인을 한잔 한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고민하고 있던 에르네스틴은 단숨에 불만과 하소연을 쏟아놓았다. 루이종은 겨우 사정을 알아차렸다. "알았어, 창문까지 기어올라가서 안을 들여다보지." 그러나 사다리를 세우는 일부터 야단법석이었다. 제멋대로 이리저리 흔들려서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었다. 세우고서 루이종은 벌벌 떨면서 올라갔다. 그리고는 곧 다시 내려왔다. "마님은 주무시고 계셔." "하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자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특별한 거야. 억지로 깨우면 안돼." 파리행 기차는 정시보다 꽤 늦어져서 1시 정각에 튈 역에 도착했다. 튈에서 탄 손님 중에 회색 머리를 한 프로테스탄트의 목사가 있었다. 그는 중년 여자 둘만이 앉아 있는 콤파트먼트의 구석에 앉아서 금테 안경을 끼고 아타셰 케이스에서 꺼낸 교회나 성당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파리에는 그날 밤 8시 10분에 도착할 샤를 보베는 고장난 택시 옆에 서서 시계를 보며 혀를 찼다. 오후 1시 반, 점심 먹을 시간인데 에글르통과 라마티에르 마을 사이에서 샤프트가 브러져서 그만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는 벌써 몇 번째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택시를 그 자리에 두고 이웃 마을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버스를 타고 에글르통으로 돌아가면, 밤까지는 레커차로 끌어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1주일 동안의 벌이가 날아가 버린다. 게다가 그의 전재산인 택시는 문이 잠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대로 두고 가면 동네 불량배들이 달려들어 몸체만 남겨두고 몽땅 다 가져갈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역시 끈기 있게 트럭이 부탁을 해서 에글르통까지 끌어다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도시락은 없었지만, 글로브 컴파트먼트에 와인 한 병이 들어 있었다. 병은 거의 비어 있었다. 택시는 수지가 안 맞는 장사다. 그는 뒷좌석에 기어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도로는 불볕에 타는 듯했고, 해가 기울어서 시원해지기 전에는 트럭 같은 것은 지나갈 것 같지도 않았다. 농부들은 지금쯤 시에스타(낮잠)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운전사도 잠들어 버렸다. "아직 안 돌아왔다고? 대체 어디에 간 거야?" 바랑탕은 수화기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는 지금 에글르통 경찰서에서 운전사 집에 있는 부하와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는 대꾸했다. 바랑탕은 수화기를 내던지듯 도로놓았다. 오전부터 점심시간까지 각 도로의 검문소에서 끊임없이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에글르통을 중심으로 하는 반경 20km의 지역에서 나간 사람들 중에 장신, 금발의 영국인에 해당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잠자고 있는 듯한 시장 마을 에글르통은 위셀과 클레르몽페랑에서 끌어모은 200명에 달하는 경찰관이 어느 구석에 박혔는지 지금 여름의 열기 속에 고요하기만 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에르네스틴은 이제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창으로 올라가서 마님을 깨워 봐요." 하고 그녀는 남편 루이종을 들볶았다. 예삿일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루이종은 자고 싶은 사람은 자도록 내버려두면 그만이라고 하며, 자기는 몸도 피곤하다며 마음내켜 하지 않았지만, 에르네스틴이 일단 그렇게 정하면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 그는 다시 사다리를 기어올라갔다. 이번에는 먼젓번보다 잘 올라갔다. 그는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밑에서는 에르네스틴이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분 뒤, 루이종이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큰소리를 쳤다. "이봐, 마님이 죽어 있어!" 당황해서 사다리로 내려오려는 그에게 늙은 아내가 안으로 잠긴 침실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눈이 바로 옆에 있는 베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요, 루이종." "뭐야." "마을에 가서 마티우 선생을 불러와요, 빨리." 루이종은 와들와들 떨리는 다리로 페달을 밟으며 저택에서 달려나갔다. 이미 40년 이상이나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의 환자들을 돌봐 온 마티우 의사는 자택의 뜰에 있는 살구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가 루이종의 이야기를 듣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를 태운 차가 성에 도착한 것은 4시 반쯤이며, 의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코렛을 진찰하고는 방 입구에 서 있는 노부부 쪽을 돌아다보았다. 의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빨리 경찰을 불러야 해." 카이요 순경은 일에 관해서는 굉장히 딱딱한 사람이며, 경찰관의 임무의 중대성을 언제나 자신에게 타이르며, 조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사실 그대로를 이끌어내는 일이 제일이라는 좌우명을 꿈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부엌의 테이블에 앉은 그는 에르네스틴, 루이종, 그리고 마티우 의사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기록하여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의사가 자신의 진술서에 사인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살인사건입니다. 첫번째 용의자는 여기에 묵었다가 마님의 차로 도망쳤다는 금발의 영국인이오. 당장 그리고 순경은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갔다. 오후 6시 반, 르베르는 파리에서 바랑탕 총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바랑탕?" "아직 수확이 없어." 갑자기 바랑탕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침 10시 이전에 작은 샛길까지 모든 도로를 봉쇄했는데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어. 차를 버린 뒤에 멀리 도망쳤다면 모르지만, 놈은 틀림없이 아직 포위망 속에 있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금요일 아침 놈을 에글르통에서 어디론가 태워다 준 택시 운전사가 아직 안 돌아오는 거야. 사방으로 찾고는 있지만......잠깐 기다려, 수화기를 통해서 누군가와 빠른 말씨로 무슨 일인지 의논하는 바랑탕의 소리가 르베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이윽고 다시 바랑탕이 전화에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살인사건이 발생했어." "어디서?" 사이를 두지 않고 르베르가 물었다. "부근 마을에 있는 성이야. 방금 순경에게서 연락이 왔네." "피살자는 누군가?" "성의 여주인이야. 잠깐 기다려......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이라는 여자야." 르베르의 얼굴색이 변했다. 옆에 있던 카롱조차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자는 성에 이미 없나?" 다시 바랑탕은 누군가와 잠깐 이야기를 하는 눈치였다. "오늘 아침 남작 부인의 차를 타고 자취를 감추었다는군. 조그만 르노야. 시체를 발견한 것은 정원지기인데, 오후가 되어서야 알았다는군. 아마 늦잠을 자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창으로 기어올라가서 안을 들여다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고 하니까." "르노의 번호와 특징은 알고 있겠지?" "그래." "그럼, 긴급수배하게. 이젠 비밀로 할 필요도 없어. 살인범으로 공공연히 수배할 수 있으니까. 내 쪽에서도 전국에 지명수배하겠네. 자네 쪽에서는 가능하면 방향으로 도주했는지, 대강의 방향이라도 알면 좋겠네." "알겠네. 지금부터가 정작 시작이로군." 르베르는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꼴이야, 나도 이젠 늙었군. 둔해졌어.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의 이름은 암사슴 여관 숙박부에 이미 기재되어 있었어. 재칼과 같은 날 그 호텔에 묵었단 말이야." 오후 7시 반, 튈의 골목길을 순찰중인 경찰관이 르노를 발견했다. 45분에 경관은 튈 경찰서로 돌아가서 보고하고, 55분에 튈 경찰서는 바랑탕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8시 5분 그는 르베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에서 500-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네." "응, 어딘가에 있을 거야." "파리행 아침 기차의 튈발 시간과 파리의 오스테를리츠 역 도착시간을 찾아보게, 빨리. 부탁일세, 빨리 빨리." 다급한 말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파리행은 하루에 두 번뿐이야. 아침 기차는 튈을 11시 50분에 출발, 파리 도착은......음, 여기 있군. 8시 10분이야 -- ." 르베르는 수화기를 내던지고 방에서 뛰어나가면서,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8시 10분 도착하는 급행열차는 정각에 오스테를리츠 역에 와 닿았다. 기차가 멈춰서자마자 일제히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마중을 받고 서로 끌어안는 사람도 있고, 빠른 걸음으로 구내를 빠져나가 택시 승차장으로 서둘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흰 칼라를 세운 장신에 회색 머리칼을 한 그 인물도 그런 사람 중 하나로서, 그는 제일 먼저 택시 승차장에 도착하여 벤츠의 뒷좌석에 세 개의 짐을 던져 넣었다. 운전사는 요금기를 꺾고 큰길로 나가는 비탈을 내려갔다. 이 역전 광장에는 반원을 그린 듯한 차도가 나 있는데, 한쪽은 입구로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출구로 되어 있다. 택시는 출구를 향해서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택시를 서로 먼저 타려고 불러대는 소음을 제압이라도 하듯이 울려왔다. 택시가 비탈길을 다 내려가서 길거리로 들어가려고 일단 호송차가 역전 광장으로 들어가서 정면 출입구 앞에 멈췄다. "흥, 경찰은 오늘밤도 바쁜 모양이군요." 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손님은 그랑 조귀스탕 강가에 있는 어떤 조그만 호텔의 번지를 댔다. 오후 9시, 르베르가 사무실로 돌아오니 튈에 있는 바랑탕 총경에게 전화를 걸어달라는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는 5분 만에 연결이 되었다. 르베르는 바랑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메모를 해나갔다. "차의 지문을 채취했나?" "물론. 성의 방에 있는 것도 전부 떴네. 일치해." "가능한 한 빨리 이리로 보내 주게." "곧 보내지. 튈 역에서 놈을 만났던 CRS 대원도 파리로 보내 줄까?"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네. 증언 내용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직접 들어 봐야 그 이상은 없을 테고. 정말 이번에는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았네. 고맙네. 그쪽은 이제 수사를 종결해도 돼. 놈은 이쪽 관할로 들어왔으니까. 앞으로는 이쪽에서 해나가겠네." "정말로 덴마크의 목사가 그놈이란 말인가? 아닐지도 모르잖은가?" "아니야, 놈이 분명해. 여행가방 중에서 하나는 오트 샤로니에르와 튈 사이에서 버린 거야. 강이나 계곡에서 찾아보게. 딱 들어맞잖나. 걱정 말게. 놈이 틀림없으니까." 르베르는 전화를 끊고 떫은 얼굴로 카롱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목사야. 덴마크의 목사로 둔갑했어. 이름은 몰라. CRS 대원은 여권에 기재되어 있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인간이란 정말 불완전한 거지. 언제나 이 인간적인 요소가 사태를 복잡하게 한단 말이야. 택시 운전사는 길가에서 낮잠을 자고, 정원지기는 여주인이 점심때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동정을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경찰관은 여권의 이름을 기억 못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뤼시앙, 나도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해야겠어. 이젠 나도 그럴 나이야. 준비를 해주게나. 들볶이러 갈 시간이니까." 내무부에서 열린 회의는 날카롭게 긴장된 공기에 쌓여 있었다. 르베르는 40분에 걸쳐서 알파가 발견된 숲에서 에글르통까지의 재칼의 도주경로, 요긴한 정보를 줄 택시 운전사가 행방불명이었던 일, 성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튈에서 파리행 급행을 탄 목사 이야기 등에 관해서 차례차례 자세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생클레아가 차갑게 빈정거렸다. "요컨대 새 이름과 얼굴을 가진 살인자가 파리 시내로 들어왔다는 말이군? 또 실패를 한 모양이군, 총경?" "책임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야." 하고 내무장관이 생클레아를 막았다. 덴마크인 여행자가 몇이나 있을 것 같은가?" "200~300명 정도 아닐까요?" "조사할 수 있겠나?" "내일 아침 호텔의 숙박 카드가 경시청에 도착되기 전에는 무리입니다." "오늘밤 12시, 2시, 4시, 세 번에 걸쳐 시내의 전 호텔에 담당자를 파견해서 카드를 모아오도록 하지." 하고 경시총감이 의견을 제시했다. "직업란에는 틀림없이 '목사'라고 기입하겠지. 목사 차림을 하고 다른 직업을 써넣는다면 종업원이 의심할 테니까." 일동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상대는 재칼입니다. 아마 흰 칼라 위에 스카프를 감거나, 칼라를 떼어내 기입하겠지요." 하고 르베르는 경시총감의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몇몇은 미워 죽겠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무장관이 결론을 내렸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재칼을 찾아내어 검거할 때까지 대통령께서 공개석상에 참석하실 일체의 예약을 취소하도록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 당장 대통령을 뵙고 간청해 보겠네. 그리고 오늘밤 파리 시내의 호텔에 투숙해 있는 덴마크인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내일 아침 제일 먼저 조사할 것. 이것은 르베르와 경시총감에게 일임하겠네." 르베르와 파퐁 총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폐회하지." 사무실에 돌아온 르베르는 카롱에게 말했다. "모두들 재칼이 수사의 눈을 피해 파리에까지 숨어든 것은 그의 행운과 우리가 우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긴 그에게는 행운도 따랐고, 동시에 악마적인 교활함을 발휘했어. 한편, 우리들은 불운의 연속에다가, 더구나 실수까지 저질렀어. 실수는 내 책임이지만. 그러나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면에는 다른 요인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두 번이나 단 몇 시간의 차로 그를 놓치고 말았단 말이야. 한번은 가프에서 정말 간발의 차로 색을 바꾸어 칠한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다음에는 알파 로메오가 발견되고 불과 몇 시간 뒤에 남작 번 모두 내가 내무부 회의에서 이번에야말로 꼬리를 잡았으며, 12시간 이내에 체포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야. 이봐, 뤼시앙, 기왕 전권을 위임받은 김에 그 권한을 이용해서 전화로 도청해 보기로 하세." 르베르는 창틀에 기대어 천천히 흐르는 센 강 너머 불빛 밝은 카르체 라탕을 바라보았다.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밖에 비친 수면을 건너 흘러내려온다. 거기서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또 한 남자가 역시 창에서 상체를 내밀고 노트르담 대성당의 조명 속에 떠오른 첨탑의 왼쪽에 웅크리고 있는 사법경찰본부의 건물을 묵묵히 바라보고 신고 흰 셔츠와 검은 흉배 위로 목 없는 실크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영국제 킹사이즈 필터 담배를 입에 문 젊은 얼굴, 그 위에 나 있는 회색 머리칼과는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그런 줄도 모르고 서로의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데, 교회의 종이 8월 22일이 온 것을 알리면서 울려퍼졌다. 제 19 장 그날 밤도 르베르는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 1시 반, 이제 막 눈을 붙인 그를 카롱이 흔들어 깨웠다. "죄송합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 남자, 재칼은 덴마크의 여권을 가지고 있다지요?" 르베르는 머리를 흔들어 졸음을 쫓았다. "그래서?" "위조했거나 훔쳤거나 그 어느쪽이겠지요. 그가 머리를 물들인 것은 아마도 여권의 사진과 같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며, 그렇다면 훔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론상으론 그렇게 되는군. 그래서?" 그는 주로 런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권을 훔친 것은 파리와 런던, 둘 중 하나가 되겠지요. 여권을 잃어버렸거나 도둑맞았을 때 그 덴마크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제일 먼저 영사관으로 갔을 겁니다." 르베르는 간이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자네는 가끔 사람의 맹점을 곧잘 찌르는군. 런던의 토머스 총경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주게. 그리고 다음은 파리의 덴마크 총영사 관저야. 순서를 틀리지 말게." 그로부터 한 시간, 르베르는 전화에 매달려서 토머스와 총영사에게 각각 그들의 사무실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3시가 가까워서야 겨우 침대로 돌아왔지만, 시내의 호텔에 묵고 있는 덴마크인의 숙박 카드를 12시와 2시, 두 번에 걸쳐서 모아 보았더니 980여 장이 되었고, 현재 그것을 '가능성 있음', '수상함', '기타'의 세 종류로 분류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오전 6시, 더 자지 못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DST의 기술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12시 지나서 회의에 참석한 전원의 전화를 도청, 녹음하도록 지시해 놓았더니 마침내 수확이 있었다는 보고였다. 르베르는 즉시 카롱을 대동하고 DST의 본부로 차를 달렸다. 지하에 있는 통신연구실에서 두 사람은 테이프레코드로 녹음을 재생했다. 처음에 윙 하고 발신음이 들리고, 이어서 따르륵따르륵 하는 소리가 전화번호를 돌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다음에 신호음이 여러 번 길게 계속되고, 마지막으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찰칵 하고 들리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쉰 목소리가 먼저, "여보세요." 다음에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자클린."교꼭 목소리가 대답했다. "여기는 바르미." 이어서 여자의 빠른 말소리가 들렸다. "그가 덴마크인 목사로 변장한 것이 탄로났어요. 오늘밤 12시, 2시, 4시, 세 번에 걸쳐 시내에 있는 모든 호텔에서 숙박 카드를 거두어 오고, 파리에 묵고 있는 덴마크인을 조사하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형사가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러 가나 봐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소." 그리고 먼저 남자가 수화기를 놓고, 이어서 여자도 수화기를 놓았다. 천천히 계속 돌아가고 있는 테이프의 릴을 르베르는 잠자코 쳐다보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어 기술직원에게 물었다. "여자가 돌린 번호는 알았나?" "예. 다이얼의 디스크가 제로로 되돌아가는 시간을 재면 숫자가 나옵니다. 여자가 건 번호는 모리틀의 5901입니다." "소재지는?" 기술직원은 르베르에게 메모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것을 한번 훑어보았다. "자, 뤼시앙, 바르미를 찾아뵈러 가세." "여자는 어떻게 하지요?" "언제고 고발해야만 되겠지." 오전 7시,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바르미는 가스 난로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노크 소리를 듣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가스 불을 끄고는 문을 열려고 갔다. 네 명의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두 명이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키가 작고 온화해 보이는 남자가 가만 있으라고 손을 들어 둘을 막았다. "전화를 들었소." 키 작은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바르미 씨지요?" 전 국민학교 교장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비켜서서 남자들을 방으로 들였다. "옷을 갈아입어도 좋소?" 하고 그는 "물론." 제복 경찰관의 감시를 받아가며 그는 파자마 위에다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쳤다. 사복을 입은 젊은 남자는 그 동안 계속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키 작고 나이 든 남자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잔뜩 쌓아둔 책과 서류들을 보고 다녔다. "이것을 모두 정리해서 조사를 하자면 큰일인걸, 뤼시앙."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신음하듯 대답했다. "우리 일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이젠 준비가 끝났소?" 키 작은 남자가 바르미에게 물었다. "예." "그럼, 자네들은 밑에서 기다리게." 평교사로 밀려난 전 교장이 어젯밤에 본, 두툼하게 철해 있는 종이 뭉치를 넘겨다보았다. 별것 아니었다. 채점중인 시험 답안지였다. 하지만 그가 학교에 나가고 있을 리는 없다. 재칼에게 언제 전화가 걸려와도 받을 수 있도록 온 종일 지키고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7시 10분, 전화벨이 울렸다. 르베르는 잠깐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억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재칼." 르베르는 열심히 응답할 말을 찾다가, "여기는 바르미." 하고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 뒤 뭐라도?" 하고 저쪽에서 물었다. "아무것도 없소. 놈들은 코레즈 현에서 당신 행방을 놓쳤소."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 있었다. 적어도 앞으로 몇 시간은 재칼이 현재 있는 그 장소에다 묶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르베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차에 뛰어올라 운전사에게 소리쳤다. "본부로 가는 거야." 센 강변 조그만 호텔 로비에 있는 전화 박스 안에서 재칼은 미심쩍은 얼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지. 르베르인가 하는 총경은 운전사를 추적해서, 그 줄을 따라 오트 사로니에르 마을까지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성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르노가 없어진 것을 알았을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는 튈에서 르노를 발견한 뒤 역에 있었던 녀석들을 심문하고, 그리고......" 그는 전화 박스에서 나와 프런트로 다가갔다. "계산을 부탁합시다. 5분 뒤에 내려올 테니까." 오전 7시 반, 르베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런던의 토머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회답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 하고 런던 경시청 특별국 총경이 말했다. 사무실로 끌고 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려서요. 결과는 당신 말대로였습니다. 7월 14일에 덴마크의 목사가 여권분실 신고서를 냈더군요. 본인은 웨스트 엔드의 호텔 방에서 도둑맞은 것 같다고 한 모양입니다만, 도둑맞았다는 증거도 없고 호텔 측의 입장도 생각해서 결국 경찰에까지 신고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목사의 이름은 페르 옌센. 주소는 코펜하겐. 특징은 키 180cm, 눈은 청색, 머리칼은 회색, 이상입니다." "바로 그자가 틀림없습니다. 정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르베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카롱에게 말했다. "경시청으로 전화." 강변의 호텔에 도착했다. 그리고 37호실은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온통 어질러졌다. "정말 안됐습니다만." 지배인은 수색대를 지휘하고 있는, 지쳐 버린 듯한 키 작은 남자에게 말했다. "옌센 목사님은 한 시간 전에 체크아웃 하셨습니다." 재칼은 빈 택시를 잡아타고 어젯밤에 도착한 오스테를리치 역으로 갔다. 수사의 손이 이미 다른 곳으로 뻗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하물 보관소에 총과 군용외투, 그리고 가공의 프랑스인 앙드레 마르탱의 옷가지가 들어 있는 가방을 맡겼다. 이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미국인 학생인 마티 슐버그의 넣은 아타셰 케이스뿐이었다. 이 둘을 들고 그는 역 바로 옆에 있는 싸구려 호텔로 들어갔다. 아직 검은 양복을 입은 채이고, 목사용 흰 칼라는 목 없는 스웨터를 입어서 감추고 있었다. 프런트 직원은 게으른 사람이라 그가 필요사항을 기입한 숙박 카드를 규칙대로 여권과 대조해 보지도 않았다. 재칼은 맡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프런트 직원의 성격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성명란에 페르 옌센과는 다른 이름을 써넣고 넘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재칼은 얼굴과 머리의 작업에 착수했다. 회색의 염색약을 용해재로 씻어내니 본래의 금발이 나타났다. 그것을 이번에는 마티 슐버그의 머리칼 색에 맞추어 밤색으로 물들였다. 금테 안경은 미제의 굵은 테 안경과 바꾸어 썼다. 검은 구두, 양말, 셔츠, 흉배, 그리고 목사용 양복은 한데 뭉쳐서 옌센 목사의 여권과 함께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운동화에 청바지, T셔츠에 점퍼 차림의 뉴욕 주 시라큐스 시의 대학생으로 탈바꿈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여권과 프랑 화폐 다발을 양쪽 안주머니에 넣고서 완전히 준비가 끝난 것은 10시경이었다. 옌센 목사의 의류 등을 넣은 가방은 옷장에 던져 넣고, 옷장의 열쇠는 하수구에 버렸다. 그리고 비상계단으로 해서 몰래 밖으로 나가서 다시는 그 호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 분 뒤, 다시 오스테를리치 역의 수하물 보관소에 나타난 그는 아타셰 케이스를 보관증과 함께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택시로 왼쪽 강변으로 되돌아가서 생 미셀 대로와 위셋 로(路)의 모퉁이에서 차를 내려 카르체 라탕에 몰려 있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틈에 섞여들었다. 우중충한 싸구려 식당의 구석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는 오늘밤 어디서 묵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르베르는 이미 옌센 목사의 정체를 벗겨 버렸을 것이고, 마티 슐버그로 있을 수 있는 것도 고작 24시간의 여유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르베르란 놈!" 그는 마음속으로는 욕을 퍼부었지만, 웨이트리스에게는 싱긋 웃으면서 시원스럽게 말을 걸었다. "오, 멋진데." 오전 10시, 르베르는 다시 런던의 토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부탁을 들은 토머스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겠다고 정중한 어조로 승낙했다. 전화를 끊고서 토머스는 지난 주 조사에서 협조해 준 선임 경감을 방으로 불렀다. "우선 앉게." 경감을 보고 그가 말했다. "또다시 프랑스에서 조사를 부탁해 왔네. 아무래도 그를 놓친 것 같아. 마침내 그는 파리로 들어갔는데, 또다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거야. 그래서 말일세, 지금부터 런던에 있는 각국 영사관에 모조리를 전화를 걸어서 7월 1일 이후 영국을 방문한 각국 사람들 중에서 물어 보는 거야. 흑인과 아시아인은 제외하고, 백인 중에서 말일세. 이름과 함께 키도 알아보게. 180cm 이상인 남자는 모두 용의자야. 자, 서두르게. 부탁하네." 이날 내무부의 정례회의는 오후 2시로 앞당겨졌다. 르베르의 보고는 늘 그렇듯이 담담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이젠 지긋지긋해!" 프레이 내무장관은 설명을 듣다 말고 소리쳤다. "놈은 악마의 부적이라도 차고 다닌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관님. 적어도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비밀리에 겁니다. 부랴부랴 가프를 떠난 것도, 또 오트 샤로니에르에서 여자를 살해하고 수사망에 걸려들기 직전에 탈출한 것도, 그때 그때 이쪽의 움직임을 정확히 보고받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밤 저는 이 자리에서 수사의 진척상황을 보고드렸습니다만, 지금까지 세 번 불과 몇 시간의 차로 그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의 경우는 바르미를 체포한 일과, 전화로 제가 바르미 흉내를 낸 것에 그가 의혹을 품게 되어, 그때까지 있었던 곳에서 갑자기 사라져서는 또다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 번의 경우는 모두 제가 회의에서 보고를 드린 다음날 이름 아침에 정보를 통보받았습니다." 메웠다. "자네는 지난번에도 분명히 같은 뜻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내무장관은 쌀쌀하게 말했다. "확증이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 대답 대신에 르베르는 소형 테이프레코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스위치를 눌렀다. 전화에서 녹음한 대화가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금속성 소리를 내면서 흘러나왔다. 재생이 끝났는데도 조그만 기계에 모인 일동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생클레아 대령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서류들을 그러모아서 가방에 넣었다. "저건 누구의 소리인가?" 하고 내무장관이 침묵을 깨뜨렸다. 르베르는 일어섰다. 일동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참으로 유감입니다만......장관님......그것은.... ..제 친구 목소리입니다...... 그녀는 지금 제 아파트에 있습니다......이만 실례." 그는 엘리제궁으로 돌아가서 사표를 쓰기 위해서 황망히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말없이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르베르." 내무장관은 조용히 말했다. "다음을 계속해 주게." 르베르는 토머스에게 부탁해서 지난 50일 사이에 런던에서 분실된 여권을 깡그리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 결과는?" 하고 그는 물었다. "저녁때까지 연락이 올 것으로 재칼의 특징과 유사한 사람이 아마 한둘은 있을 겁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즉시 그 여행자의 본국에 연락해서 사진을 전송해 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칼스로프나 댓건이나 옌센과는 다른 네 번째 인물이 어떤 인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지요. 잘되면 내일 정오까지는 그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는 -- ." 하고 내무장관이 말했다. "이번에 대통령을 뵐 때에 이 일을 보고하겠네. 대통령은 살인자가 두려워서 공식 일정을 변경한다는 것은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내 요청을 거절하셨어. 솔직히 말해서 예상치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한 가지는 양보해 걸세.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이야. 즉, 재칼은 살인범이다. 그는 보석을 강탈하려고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을 살해했다. 그는 파리로 도망쳐서 숨어 있는 모양이다. 이런 내용이야. 알겠나?" 이것은 석간 최종판에는 실리도록 발표할 생각이야. 그리고, 르베르, 재칼이 새로 변신한 인물이 확인되면 곧 그 이름을 신문에 발표하게. 내일 조간에 크게 나오겠지. 그리고 그 인물의 사진이 내일 오전 중에 도착되면 살인사건의 최신 정보로서 신문, 라디오, TV에 발표하는 걸세. 이것과는 별도로 이름이 알게 되는 대로 파리에 있는 모든 경찰관과 CRS 대원을 동원해서 거리로 내보내 거동 수상한 조사하도록." 경시총감, CRS 국장, 그리고 사법경찰국장, 이렇게 세 사람은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내무장관은 계속했다. "DST는 RG(종합정보부)의 자료 센터의 협조하에 OAS의 동조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조사하도록. 알겠소?" DST와 RG의 국장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법경찰은 전 수사원을 통상의 임무에서 재칼 수색으로 돌려 주기 바라오." 마크스 페르네 국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신변 경비에 관해서 말인데, 앞으로의 대통령 스케줄은 대소를 막논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히 파악하여 말미암아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도 어쩔 수 없어. 경호대는 신변경비를 특히 엄중히 하여 끊임없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알겠나, 뒤크레?" 대통령 경호대장인 장 뒤크레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법경찰의 형사부는 -- ." 프레이 내무장관은 부비에 부장의 눈을 지켜보았다. "전부터 늘 암흑가의 악당들을 끄나풀로 쓰고 있는데, 그자들에게 재칼의 새 이름과 인상, 특징을 알려 주어 수색에 협조시키도록 하게. 알겠나?" 모리스 부비에는 무뚝뚝하게 끄덕였다. 실은 그도 아까부터 내심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도 맨헌트는 몇 번인가 경험해 왔지만, 이토록 대대적인 예는 번호를 알아내는 것과 동시에 경찰관은 물론이고 암흑가의 앞잡이까지 무려 10만이나 되는 사람이 한 남자를 찾아서 거리, 호텔, 바, 레스토랑을 휘저어대는 것이다. "그밖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캐낼 만한 곳은 없소?" 하고 내무장관이 일동에게 물었다. SDECE의 액션 서비스 책임자 롤랑 대령이 얼른 기보 장군을 쳐다보고, 이어 부비에에게로 시선을 옮겨서 가볍게 기침소리를 냈다. "유니온 콜스가 있습니다." 기보는 딴전을 피우며 손톱을 바라보고 있다. 부비에는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참석자들도 태반은 찌푸린 얼굴이었다. 유니온 콜스는 피의 복수라는 전통을 프랑스 최대의 조직범죄 신디케이트로 악명높은 존재이다.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해서 코트 다쥐르의 대부분은 그들의 세력하에 있다. 그들이 마피아보다 더 교활하고 위험하다고 하는 전문가조차 있다. 20세기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마피아는 자신들의 존재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마피아라는 말은 아이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니온 콜스는 신경질적이리만큼 그런 점에 대해서는 경계해 왔다. 지금까지 드골파는 이미 두 번 유니온 콜스의 힘을 빌린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언제나 당혹하곤 했다. 그들은 협조할 부정사업에 대한 경찰의 단속을 늦추어 달라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그들은 연합군의 남프랑스 진격작전에 협력하고서 그 이후로 마르세유와 툴롱은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1년 4월부터 시작된 대(對) OAS 및 알제리 거류민과의 싸움에도 다시 힘을 빌려주고 그 보상으로 파리에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경찰관인 부비에는 그들의 존재를 혐오하여 롤랑 대령의 액션 서비스가 그들을 자주 이용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움이 될 것 같은가?" 하고 내무장관이 물었다. "재칼은 교활한 남자인 것 같습니다만, 유니온도 그 점에서는 뒤지지 않습니다. 생각합니다." "파리에는 몇 명이나 있나?" 내무장관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약 8천 명 정도일 겁니다. 경찰, 세관, CRS, SDECE 등에도 끼어 있고, 물론 암흑가의 주류는 전부다 그들입니다. 게다가 녀석들은 하나의 조직으로 이어져 있어서 더욱 강하지요." "부디 신중을 기해서 잘 부탁하네." 그밖에는 발언자가 없었다. "그럼, 이런 정도로 해두지. 르베르, 한시 바삐 이름과 인상, 특징을 알아내고, 사진을 구해 주게. 그래만 주면 6시간 이내에 재칼을 잡아 보겠네." "아직 3일 여유가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르베르가 문득 "무슨 뜻인가?" 하고 마크스 페르네가 물었다. 르베르는 바쁘게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여태까지 깨닫지 못한 것은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이미 1주일 전부터 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재칼은 스케줄을 짜놓고 있습니다. 대통령 암살의 날을 정해 놓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가프에서 탈출했을 때 어째서 즉시 옌센 목사로 둔갑하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파리행 급행을 타지 않고 발랑스 같은 곳에 갔을까요? 어째서 프랑스에 잡입한 뒤 1주일이나 쓸데없는 시간을 보낸 것일까요?" "어째선가?" 누군가가 물었다. 때문입니다. 그날 결행할 예정으로 모든 일정을 짜놓았기 때문이지요. 뒤크레 총경님, 오늘이나 내일, 또는 모레 토요일에 대통령께서 엘리제궁 밖으로 나와서 무슨 행사에 참석하실 예정은 없습니까?" 뒤크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8월 25일, 일요일은요?" 테이블 주변에서 한숨이 터졌다. 내무장관이 신음하듯 말했다. "8월 25일은 해방기념일이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거의 모두가 1944년 그 파리 해방의 날, 대통령과 더불어 승리를 축하했었지." "재칼은 상당한 심리학자이기도 합니다. 1년 중에서 그날 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념식에 참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장군에게는 영광의 날이니까요. 재칼은 그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고 내무장관은 시원시원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놈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야. 놈의 정보선이 끊겨진 지금 파리의 어디에도 그자가 숨을 곳은 없어. 마지못해서라도 녀석을 감싸 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야. 반드시 녀석의 덜미를 잡아 보겠네. 르베르, 빨리 이름을 부탁해." 르베르는 일어나서 문으로 갔다. 다른 참석자들도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그때 갑자기 내무장관이 르베르를 불러세웠다. "자네에게 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것은 특별히 그를 의심할 이유라도 있었나?" 르베르는 입구에서 내무장관 쪽을 돌아다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그래서 어젯밤 여러분 전원의 전화를 도청하게 했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그날 오후 5시, 오데옹 광장의 외곽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선글라스로 강한 햇빛을 막고 맥주를 마시면서 재칼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지나가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고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는 맥주값을 치르고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100미터쯤 들어가서 두세 가지 물건을 샀다. 오후 6시, 석간 마지막 판에 일제히 다음과 같이 톱으로 실렸다. 최상단에 커다란 표제가 시선을 끌었다 -- '남작 부인 살해범, 파리에 잠입.' 표제 밑에 부인이 5년 전 파리에 와서 어느 파티에 참석했을 때 사교잡지에 실렸던 사진이 나와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진 대리점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각 신문은 모두 그 사진을 싣고 있었다. 오후 6시 반, '프랑스 수아르' 신문을 겨드랑이에 낀 롤랑 대령이 워싱턴 가(街)에 있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갔다. 턱수염이 짙은 바텐더가 날카롭게 대령을 훑어보고는 안쪽에 있는 남자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롤랑 대령입니까?" 액션 서비스의 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로 오십시오." 남자는 안쪽 문을 빠져나가서 그 카페의 경영자의 거처로 보이는 2층 거실로 올라가서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들어간 롤랑은 팔걸이 의자에서 일어선 남자의 마중을 받고 내민 손을 잡았다. "롤랑 대령님이시죠?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유니온 콜스의 책임자입니다. 어떤 남자를 찾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런던의 토머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후 8시였다. 완전히 지쳐 버린 목소리였다. 각국 영사관이 하나같이 개중에는 잔뜩 투덜거리기만 하고 협조를 꺼리는 곳도 있어서 아침부터 굉장히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여성, 흑인, 아시아인, 그리고 키 작은 남자를 제외하니 과거 50일 사이에 런던에서 여권을 분실한 남성 여행자는 모두 8명이었으며 토머스는 각자에 대해서 정확히 그 이름, 여권 번호, 특징을 알려 주었다. "그럼, 이 8명 중에서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제외시켜 나가기로 하십시다. 8명 중 3명은 재칼이 런던에 없을 때에 여권을 분실했습니다. 우리는 7월 1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각 항공회사의 예약자 명단과 창구의 항공권 판매대장을 조사해 보았는데, 그는 7월 18일에 BEA의 야간 그리고 그 항공사의 브뤼셀 지점에서 현금으로 항공권을 사고 8월 6일 밤, 영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쪽의 조사결과와도 일치합니다." 하고 르베르가 말했다. "그 동안 그는 파리에 있었던 거지요. 7월 22일부터 31일까지 말입니다." "그렇군요." 국제전화라서 그런지 토머스의 목소리는 갈라진 느낌이었다. "문제의 여권 중에서 3통은 그가 없을 때에 분실한 것이니까 이것은 제외해도 되겠지요?" "예." "나머지 5명 중 한 명은 엄청나게 키가 큰 사람입니다. 6피트 6인치이니까요. 셈이지요. 게다가 이 남자는 이탈리아인이며 여권에도 키가 --로 기입되어 있을 테니까 프랑스 세관원이라면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고, 재칼과의 키 차이도 금방 알았을 겁니다. 혹 재칼이 죽마라도 타고 다녔다면 몰라도." "정말 거인이군요. 그것은 제외하지요. 그래, 나머지 넷은?" "하나는 뚱보로서 체중이 242파운드, 그러니까 100kg이 넘습니다. 재칼이 이렇게 뚱뚱하게 보이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옷을 껴입어야 할 겁니다." "그것도 제외하지요. 다음을 부탁합니다." "또 한 사람은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키는 일치합니다만, 나이가 70몇인가 않는 한 70몇 살로 둔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괌갚陋孤 제외해야겠군요. 그럼, 나머지 둘은?" "하나는 노르웨이인이고, 또 한 사람은 미국인입니다. 이 둘은 모두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키가 크고 어깨 폭이 넓고, 나이는 20부터 50 사이. 다만 노르웨이인의 경우는 부정적인 요소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금발이라는 점입니다. 재칼은 댓건의 허물을 벗은 다음 자기 본래의 머리 색깔로 되돌아갔을 거라고는 얼른 생각되지 않는군요. 본래 댓건을 닮은 남자니까요. 또 하나는 이 노르웨이인이 영사관에서 한 말 때문입니다. 하이드 파크의 호수에서 걸프렌드와 보트 놀이를 하다가 옷을 입은 채로 연못에 빠졌다니까, 그때 여권이 연못에 빠지기 전까지는 틀림없이 가슴이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는데, 나와서 보니 없어졌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미국인은 런던 공항 중앙 홀에서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여권이 들어 있는 손가방을 날치기 당했다고 공항경비소에 신고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미국인, 마티 슐버그의 자료를 보내 주십시오. 얼굴 사진은 워싱턴에 연락해서 전송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습니다." 오후 10시부터 이날 두 번째 회의가 내무부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열린 회의 중에서는 가장 짧은 회의였다. 이미 한 시간 전에 프랑스의 전 치안기구의 각 자료를 등사판으로 밀어서 배포되었다. 사진도 아침까지는 전송되어 올 예정이라, 아침 10시에 가두 판매될 신문에는 실을 수 있을 것이다. 내무장관이 일어섰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첫번째 회의에서 재칼이라는 암살자의 신원을 알아내는 일은,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순수한 형사적인 일이라고 한 부비에의 의견에 찬성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 의견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소. 지난 10일 동안 르베르 총경은 참으로 훌륭하게 그 임무를 수행해 주었소. 암살자는 세 번이나, 칼스로프에서 댓건으로, 댓건에서 옌센으로, 옌센에서 슐버그로 변신했고, 게다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정보가 변신할 때마다 그 가면을 벗기고 마침내 적의 덜미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에 이르게 되었소. 우리는 그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고 감사해야만 할 것이오." 내무장관은 당황해서 있는 르베르에게 가볍게 인사를 보냈다. "앞으로의 일은 우리가 해야만 하오. 이미 그의 이름, 특징, 여권의 번호, 국적까지 알고 있소. 몇 시간 뒤에는 사진까지 손에 넣게 될 것이오. 사진이 도착되면 단시간 내에 반드시 재칼을 잡게 될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있소. 이미 파리의 전 경찰관, CRS 대원, 형사에게 명령이 하달되어 있소. 아침까지는, 늦어도 내일 정오까지는 재칼은 숨을 곳이 없게 될 것이오. 르베르, 다시 한 번 고맙다는 10일에 걸친 수사의 무거운 짐과 긴장에서 자네를 해방시켜 주겠네. 사진의 입수와 동시에. 그 뒤는 우리가 맡겠네. 자네 임무는 이제 끝난 걸세. 정말 잘 해주었어. 고맙네." 르베르는 내무장관의 찬사가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당황해서 몇 번 눈만 껌벅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의 치안기구를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들을 향해서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모두 미소로 답했다. 르베르는 조용히 회의실에서 나왔다. 실로 열흘 만에 르베르는 잠을 자러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서 돌리는 것과 동시의 아내의 찢어지는 듯한 불평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는 12시를 치고, 8월 제 20 장 재칼이 그 바에 들어간 것은 오후 11시경이었다. 안은 어두워서 금방 내부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왼쪽에 기다란 카운터가 있고, 그 뒤쪽 벽은 거울로 되어 있으며, 술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바텐더는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게 안은 좁고 길었으며, 안쪽에까지 카운터가 길게 뻗어 있으며, 오른쪽 벽을 따라서 조그만 테이블이 한 줄로 놓여 있다. 안쪽은 좀 넓은 편이어서 거기엔 약간 큰 테이블이 몇 개 있었고, 5~6명의 손님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카운터 앞에는 걸상이 놓여 있다. 테이블의 자리도 재칼이 가게에 들어서자 바로 문 가까이에 놓인 테이블의 손님이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도 이내 동료의 반응을 깨닫고 잡담을 멈추고서 문 옆에 서 있는 늘씬하고 균형잡힌 체격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조그맣게 소곤거리는가 하면,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재칼은 가장 안쪽 끝의 걸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카운터와 테이블 사이를 걸어가서 앉았다. 등뒤에서 빠른 어조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 저것 봐! 저 근육, 난 그냥 미칠 것 같아." 바텐더가 앞으로 다가와서 찬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홍색 입술을 조금 벌리고 아양 섞인 미소를 지었다. 등뒤에서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거의 모두가 반감이 섞인 웃음소리였다. "스카치로 해볼까." 꽤나 신이 나는 모양인지 바텐더는 뛰다시피 그곳을 떠났다. 남자, 사나이, 사내. 오늘밤은 멋진 밤이 되겠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그들'이 손톱을 세우고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거의 대부분은 단골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개중에는 약속이 없어서 봉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 양반이면 되겠다며 바텐더는 가슴이 뛰었다. 이 친구라면 틀림없이 모두를 흥분시킬 수 있을 거야.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금속 같은 빛을 내는 금발이 고대 그리스 신의 동상처럼 곱슬거리며 갈라져 내려와서 이마를 덮고 있다. 그러나 신의 초상을 닮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눈은 짙은 마스카라로 인해 끔찍했으며, 입술은 산호같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볼은 연지빛으로 발그레하다. 그러나 지치고 나이먹은 주름살은 화장으로도 감출 길 없고, 윤기를 잃은 탐욕스러운 눈은 마스카라로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한잔 사줄래?" 풋내나는 소녀 같은 말투였다. 재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호모는 어깨를 으쓱하고 일행 쪽으로 돌아앉았다. 둘은 수군수군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가끔 재칼은 점퍼를 벗고 있었다. 바텐더가 내미는 술잔에 손을 뻗으니 어깨와 등의 근육이 T셔츠 밑에서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텐더는 미칠 듯이 기뻤다. '스트레이트'일까? 설마. 그럴 리는 없다. '스트레이트'라면 이런 곳에 올 리가 없다. 그러나 그저 무작정 호모를 탐내고 온 친구도 아니다. 아니면, 술 한잔 사달라고 조르는 코린을 딱지놓을 리가 없지. 틀림없이 그거야...... 멋져! 젊고 핸섬한 '사내'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찾으러 온 거야. 아무래도 오늘밤은 재미있게 될 것 같다. 12시가 가까워 오자 술집에 있던 '사내'들이 각기 상대를 고르기 시작했다. 불러서 무엇인가 의논한다. 바텐더는 카운터에 돌아가서 호모들 중 하나에게 사인을 보낸다. "무슈 피에르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군요, 달링. 아주 얌전한 얼굴로 예의바르게 상대해요. 잘못되어 지난번처럼 울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해요." 재칼은 12시가 지나서야 겨우 그럴듯한 상대를 발견했다. 안쪽에 있던 두 남자가 아까부터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은 각각 다른 테이블에 있으면서 가끔 라이벌을 밉살스러운 듯이 노려보곤 했다. 양쪽이 모두 중년인데, 하나는 뒤룩뒤룩 살이 쪄서 조그맣게 튀어나온 눈이 눈두덩이에 파묻히고, 목덜미의 살이 칼라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다. 천박하고 돼지 체격에 품위가 있어 보였으며, 목은 새처럼 가늘게 여위었고, 벗겨진 머리에는 성근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붙였다. 복장을 보니 고급 양복에 통 좁은 바지, 윗도리 소매 사이로는 레이스가 보이는 멋쟁이 차림이다. 목 밑으로 보이는 실크 넥타이는 마치 미술품처럼 보였다. 미술이나 패션이나 헤어 모드에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고 재칼은 생각했다. 뚱보 쪽에서 바텐더를 불러서 무슨 말인가 소곤거렸다. 지폐 한 장을 바텐더의 착 달라붙은 바지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그는 재칼 앞으로 돌아왔다. "저이가 샴페인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하고 그는 속삭였다. 장난기 어린 얼굴로 쳐다본다. "그럼, 이렇게 전해 줘." 부근에 있는 호모들이 들리도록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매력이 없어." 여기저기서 훅 하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칼날처럼 여윈 젊은이들이 몇 명,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걸상에서 내려 다가왔다. 바텐더는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샴페인을 한턱 내시겠다는 거예요. 저분은 굉장한 부자라고요. 처음 와서 이런 행운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어요." 대답 대신에 재칼은 걸상에서 내려와서 위스키 잔을 들고 또 한 사람인 그 마른 남자에게로 갔다. "여기 앉아도 좋습니까?" 그는 물었다. "어떤 양반이 귀찮게 굴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뚱보 쪽에서는 이 노골적인 모욕에 화가 잔뜩 나서 술집에서 나갔다. 라이벌인 여윈 예술가는 앙상한 손으로 젊은 미국인의 손을 잡고는 그 뚱보가 정말로 무례한 사람이라며 헐뜯었다. 재칼과 예술가 타입은 1시가 지나서 그 술집을 나왔다. 그전에 쥘 베르나르라는 그 '호모'가 지금 어디에 묵고 있느냐고 재칼에게 물었다. 재칼은 부끄러운 듯이 우물쭈물하면서 실은 아무데도 묵을 곳이 없으며, 한푼 없는 학생이라고 대답했다. 베르나르는 자신의 행운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천만다행이라는 듯이 자기는 아주 멋지고 조용한 플랫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 살고 있으며, 아무도 있는 무리들은 모두가 무례한 녀석들뿐이라서 일체 사귀지 않고 있다. 하다못해 파리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동거생활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설득조로 말했다. 재칼은 고맙다는 표정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술집에서 나가기 직전에 그는 화장실(하나밖에 없었다)에 들어가서 얼른 눈가에 마스카라를 칠하고, 볼에는 파우더를 바르고, 입술에는 루즈를 그렸다. 베르나르는 화장한 그를 보고 뾰로통했지만, 술집에서 나갈 때까지는 참았다. 거리로 나간 순간 베르나르는 잔소리를 했다. "그런 것을 다 바르나? 난 싫은데. 거기 있었던 녀석들과 마찬가지잖아. 당신은 돼." "당신이 좋아할 줄 알고 했는데요. 집에 가서는 지워 버리지요." 조금 기분이 풀어진 베르나르는 차로 다가갔다. 플랫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스테를리츠 역으로 새 애인의 짐을 가지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첫번째 교차로에서 차도를 내려온 경찰관이 정지하라고 했다. 경관의 얼굴이 운전석 창으로 가까이 왔을 때 재칼은 실내등을 켰다. 경관은 두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황급히 물러났다. "빨리 꺼져!" 불심검문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움직이기 시작한 차 뒤꽁무니를 보면서 "구역질나는 호모 같으니!" 두 사람은 역 옆에까지 가서 또다시 경찰의 제지를 받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말을 들었다. 재칼은 아양을 떨듯이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다른 볼일은 없으세요?"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잔소리 말고 어서 가!" 경찰관은 당황해서 물러났다. "경찰 아저씨들을 놀리면 안돼." 베르나르가 타일렀다. "체포당한단 말이야." 재칼은 수하물 보관소에서 얼굴을 돌리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두 개의 가방을 받아가지고는 베르나르의 차 속으로 던졌다. 정지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는 2인조의 CRS대원이었는데, 한 사람은 하사관이고, 또 한 사람은 졸병이었다. 아파트까지 겨우 몇백 -를 남겨 놓은 교차로에 접어들었는데 졸병이 손을 들어 멈추라고 하고는 조수석의 창으로 재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는 질려 버렸다. "에이, 징그러워. 당신들, 어딜 가는 거야?" 하고 그는 꽥 소리를 질렀다. 재칼은 입을 이쁘게 오므려 아양을 떨면서 말했다. "어디일 것 같아요, 오빠?" CRS 대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속이 다 뒤집히는군, 얼른 꺼져." 순식간에 후미등의 불빛이 멀어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상관이 졸병에게 "어째서 신분증 조사를 하지 않았나?" "농담이십니까?" 졸병은 항의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작 부인을 안고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죽여 버렸다는 놈입니다. 저런 기분나쁜 호모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베르나르와 재칼이 아파트의 플랫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경이었다. 재칼은 거실에 있는 긴 의자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베르나르의 반대를 끝내 물리쳤다. 우선은 양보를 한 베르나르는 침실 문틈으로 재칼이 옷을 벗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뉴욕에서 왔다는 이 근육 덩어리 학생을 설득해 내기는 어렵겠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클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전에 재칼은 예쁘게 꾸며 놓은 부엌에 있는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식료품은 혼자라면 어떻게 사흘은 버티겠지만, 둘이서는 아무래도 모자란다. 아침이 되어 베르나르가 우유를 사러 나가려고 했지만, 재칼은 커피에 넣을 거라면 깡통에 든 우유가 더 좋아한다면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둘은 오전 내내 방안에서 보냈다. 재칼이 정오의 TV 뉴스를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첫 뉴스에서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 살해범 수사의 상황이 나왔다. 베르나르는 공포에 떨면서 소리쳤다. "어머, 싫어, 폭력은 나빠." 다음 순간 TV 화면 가득히 얼굴 모습이 비쳤다. 젊고 핸섬한 남자로서, 밤색 아나운서는 계속 설명했다. 범인의 미국인 학생 마티 슐버그이며, 이 남자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있는 분은 -- . 소파에 앉아 있던 베르나르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재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아나운서가 슐버그의 눈이 청색이라고 했으나 그건 틀렸다는 점이었다. 목을 조르면서 내려다보고 있는 눈은 회색이었다...... 몇 분 뒤, 흐트러진 머리칼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혀를 빼어문 쥘 베르나르의 시체를 재칼은 옷장 안에 숨겼다. 그리고 거실에 있은 잡지대에서 한 권을 뽑아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부터 이틀 동안 기다려야만 한다. 없었던 정도로 철저한 수색이 진행되었다. 초일류 호텔에서 싸구려 매음굴에 이르기까지 숙박업소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수사관이 찾아가서 숙박객 명단을 조사했다. 팡숑, 하숙집, 호스텔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카바레, 카페 등에는 사복형사가 찾아가서 범인의 사진을 웨이터나 바텐더에게 보여 주며 다녔다. OAS 동조자의 집은 모조리 경찰관의 기습을 받고서 수색을 당했다. 70명 이상의 젊은이가 범인과 조금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심문을 받기 위해 연행당했다가 끝에 가서는 그저 형식적인 사과의 말과 함께 풀려났다. 형식적으로라도 사과를 받은 것은 이들 젊은이가 모두 외국인이었기 취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상식에 따랐을 뿐이다. 거리에서, 택시에서, 버스에서 몇십 만이나 되는 사람이 정지명령을 받고 신분증 조사를 받았다. 파리로 통하는 주요 간선도로에는 각처에 검문소가 설치되었고, 차는 1~2마일쯤 가면 반드시 정지당하고 검문을 받았다. 지하의 암흑가에서는 코르시카인들이 거들었다. 그들은 난봉꾼, 매춘부, 노름꾼, 소매치기, 도둑, 사기꾼 등이 꼬이는 곳에 소리 없이 나타나서 섣불리 감추어 주었다가는 유니온이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겁을 주면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형사는 물론 군인, 헌병에 이르기까지 명에 달하는 조직폭력단원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관광회사의 종업원들은 손님의 인상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회사 간부에게서 지시를 받았다.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 바, 클럽, 그리고 여러 학생단체의 모임이나 연락장소에는 젊은 사복형사가 숨어들었다. 외국의 교환학생을 프랑스인 가정에 배치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에는 형사가 찾아가서 경고를 해두었다. 카디건에 낡은 바지 차림으로 정원 일을 하면서 8월 24일(토요일)의 오후를 보낸 르베르는 저녁때가 되어 갑자기 내무부의 장관 집무실까지 나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6시에 차가 데리러 왔다. 내무장관의 모습을 보자 르베르는 자신의 좌우하는 그 정력적인 실력자가 완전히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8시간 사이에 갑자기 늙어빠진 것 같았으며, 눈가에는 수면부족으로 말미암아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내무장관은 르베르에게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권하고, 자신은 회전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는 그 회전의자를 돌려서 창밖의 보보 광장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여유는 없었다. "안 나타나." 내무장관은 짧막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네. OAS 쪽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을 거야. 암흑가의 무리들도 그의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고 하네. 유니온 의견이야." 그는 말없이 한숨을 쉬고는 앞에 있는 자그마한 형사를 바라보았다. 르베르는 몇 번 눈만 깜박였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2주일 동안 자네가 뒤쫓던 사나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네. 자네 의견을 말해 주지 않겠나?" "그는 파리에 있습니다. 파리 어딘가에. 내일 있을 행사의 예정을 말씀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프레이 내무장관의 얼굴은 고뇌로 일그러졌다. "대통령은 공식 일정의 변경을 일체 허락치 않으시네. 실은 오늘 아침에도 불쾌한 얼굴을 하실 뿐 상대도 안 하시더군. 그러니까 내일 예정은 이미 발표한 그대로일세. 오전 10시에 대통령은 개선문 밑에서 '영원의 불'에 점화하고 11시부터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 12시 30분에 몽발레리랑의 레지스탕스 전몰자 묘지에 참예하여 묵도를 올리고 엘리제궁으로 돌아가 점심과 시에스터, 그리고 오후의 행사는 하나뿐인데, 지금까지 별로 공훈을 인정받지 못했던 레지스탕스의 전(前) 전사(戰士) 10명에 대한 '해방훈장' 수여식이 있어. 식전은 몽파르나스 역의 역전 광장이며, 오후 4시부터 시작되네. 장소는 대통령이 직접 선택하신 곳이야. 자네도 아다시피 이미 새 역의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있어. 현재의 역이 있는 터에는 사무실 전용 빌딩이 들어서고, 나머지는 쇼핑 센터가 될 걸세. 예정대로 공사가 진행되면 내년 해방기념일에는 지금의 역은 없어지게 될 테지. 말하자면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뜻으로 그곳에서 식을 거행하는 셈이라네." "군중 정리는 어떤 방법으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 때문에 머리를 짜내고 또 짜내고 있다네. 각 식장에서는 구경온 군중을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멀리 격리시켜 놓을 생각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식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식장을 철책으로 에워싸고, 그 안에 있는 건물은 지하실에서 지붕까지, 하수도까지 포함해서 철저하게 조사할 물론 예외는 아니지. 그리고 식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총을 가진 감시원을 주위의 건물 옥상에 잠복시켜서 반대쪽 건물의 지붕이나 창을 감시시킬 예정이야. 철책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경비원과 식에 참석할 사람들뿐이며, 다른 사람들은 일체 접근금지할 생각이네. 이번에는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철저한 경계조치를 취하기로 했다네. 노트르담 새 성당에는 옥상이나 첨탑은 말할 것도 없고 종각 안팎에까지 경찰을 잠복시킬 걸세. 미사에 참석하는 신부는 물론이고 신부의 종자나 합창대의 아이들까지도 혹시 흉기를 숨겨 가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엄중한 신체검사를 하기로 되어 있어. 그리고 재칼이 있으니까 경찰관이나 CRS 대원에게는 내일 새벽에 특수한 배지를 나눠 주기로 했네. 그리고 대통령께서 탈 시트로엥의 창에는 몰래 방탄유리를 끼워두었어. 이 일은 절대로 밖에서 말해선 안되네. 대통령께 들키는 날에는 벼락이 떨어질 테니까. 공용차의 운전사는 평소대로 마르이지만, 재칼이 차에 타고 있는 대통령을 저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여느때보다는 빨리 달리도록 몰래 명령을 내려놓았다네. 또 경호대장인 뒤크레는 특별히 키가 큰 녀석들을 골라서 대통령의 주변에 사람으로 울타리를 만들 예정이야. 이것도 물론 대통령께는 비밀일세. 이상의 조치 이외에 대통령의 신변 200 미터 이내에 접근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되어 있어. 외교단은 잔소리를 할 것이고 보도진은 화를 내겠지만, 그런 일에 구애받을 수는 없네. 기자들과 외교관용의 통행증은 내일 아침 일제히 전부를 바꿔 버릴 예정이야. 재칼이 그들 중 하나로 둔갑할 경우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 밖에 짐이나 기다란 물건을 가지고 있는 녀석은 눈에 뜨이는 대로 쫓아 버릴 생각이야. 어떤가, 무슨 의견 없나?" 르베르는 교장선생님 앞에 앉은 국민학생처럼 무릎 사이에서 손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제5공화국의 권력기구의 어마어마함에 압도당해 있었다. 시골 순경으로 출발하여 남보다 눈치가 조금 빠른 덕분에 범죄자를 잡는 일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렇게 착실하게 외길 메카니즘의 강대함이 거의 두려움으로 느껴지기조차 했다. "아마 재칼은 -- ."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죽을 것으로 생각지는 않을 겁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하지 않아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는 프로 살인자이며 돈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죽어 버리면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현장에서 무사히 탈출해서 번 돈을 쓸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죠. 그는 7월 말에 파리로 사전 조사를 와서 그때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성공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탈출이 가능한가 어떤가, 그 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영국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승산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드골 장군이 1년 365일 중에서 어느 날, 즉 파리 해방기념일에는 아무리 위험하게 생각되더라도 긍지와 체통을 위해서라도 군중 앞에서 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재칼은 계산했겠지요. 대통령의 신변 경호가 그의 존재가 폭로된 뒤에 더욱 엄중해졌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르베르는 일어나서 내무장관 앞이라는 것도 잊고 방안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돌아가지 않겠지요. 왜? 목적을 이루고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보통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없는, 그런 아이디어를 준비하고 있을 라이플일 겁니다. 그러나 폭탄은 발견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총일 수밖에 없지요. 차를 타고 프랑스로 들어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총은 그 차에 감추어져 있었던 겁니다. 섀시에 용접을 했거나 내부 어딘가에 넣어서." "그러나 총을 가지고 대통령께 접근할 수는 없네!" 내무장관이 소리쳤다. "극소수의 몇몇 사람 말고는 아무도 장군에게 접근할 수 없어. 그 소수의 몇 사람도 엄중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만 해. 어떤 방법으로 철책의 경비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르베르는 다시 일어나서 내무장관 쪽을 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는 아직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니까요.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영불 두 나라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마침내 파리에 잠입했습니다. 지금쯤 아마 또 다른 얼굴로 둔갑해서 다른 신분증을 준비해 가지고 총을 안고는 어딘가에서 꼼짝 않고 숨어 있을 겁니다.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장관님. 그가 지금 어디에 있든지 내일은 틀림없이 나타납니다. 나타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막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풋내기 형사에게 고참이 해주는 말은 끊임없이 눈을 크게 뜨고 있어라 --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것은 이런 정도입니다. 설명해 주신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면 참으로 완벽한 체제입니다. 내일은 각 식에 따라다니면서 재칼의 출현을 눈을 크게 뜨고 지키지요. 남은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프레이 내무장관은 실망했다. 그는 부비에가 프랑스 제일의 형사라고 보증한 이 남자에게서 앗 하고 탄복할 만한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멋진 아이디어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남자는 겨우 눈을 크게 뜨자는 것이다. 내무장관은 일어섰다. "알았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한껏 눈을 크게 뜨고 지켜 주게나." 그날 밤 재칼은 베르나르의 침실에서 늘어놓았다. 밑창이 닳아빠진 검은 구두, 회색 양말, 바지와 노타이 셔츠, 종군기장으로 장식한 긴 군용 외투, 그리고 재향군인의 검은 베레모, 그 모두가 가공의 프랑스인 앙드레 마르탱의 옷이다. 그는 이것들 위에 브뤼셀에서 위조해 받은 신분증명서와 상이군인증을 꺼내 놓았다. 다시 그는 가벼운 망사직 벨트와 개머리판, 노리쇠 뭉치, 총신, 소음기, 그리고 조준기를 넣은 알루미늄 같은 광택을 내는 스테인리스 강관 다섯 개를 거기에 늘어놓았다. 그 옆에 다섯 발의 작약탄을 박아놓은 검은 고무 물미를 꺼냈다. 그는 작약탄 두 발을 고무 물미에서 빼내어 부엌 개수대 밑 도구상자에서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탄두대에서 연필 모양의 화약을 빼내어 버리고 못쓰게 된 두 발의 총알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작약탄은 세 발이 남아 있다. 세 발이면 충분했다. 그는 이틀 동안이나 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턱에는 황금색 수염이 더부룩하다. 그는 그것을 파리에 숨어들어온 날 사두었던 싸구려 면도칼로 일부러 피부에 상처를 내가면서 서툴게 깎았다. 욕실 선반에는 옌센 목사로 변신할 때에 쓰던 회색 머리 염색약이 들어 있는 면도용 로션의 병과 용해액이 놓여 있다. 마티 슐버그로 변신하기 위해서 밤색으로 물들였던 머리칼은 이미 본래의 금발로 돌려 놓았기 때문에 그는 거울 앞에 앉아서 그 금발을 짧막하게 군인 모양으로 잘랐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전체를 점검했다. 그리고 오므렛을 만들어 먹고는 TV 앞에 앉아서 잠잘 시간까지 버라이어티 쇼를 즐겼다. 1963년 8월 25일 일요일은 굉장한 더위였다. 1년 하고도 3일 전, 장 마리 바스찬 칠리 중령과 그의 저격대가 프티 클라마르에서 드골을 기습한 날과 마찬가지로 여름의 열기가 거리를 태울 듯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 저격대원 중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그들의 행동은 이날 단숨에 대단원을 맞으려 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을 야기시킨 것이었다. 파리는 이날 19년 전에 독일군에게서 해방된 기념일을 축하하려 하고 있었다. 7만 5천 명의 치안요원이 온통 땀에 젖어서 축제를 경비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보도 탓인지 해방기념의 여러 행사에는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식의 운영을 담당하는 경비원이 쳐놓은 인간 울타리에 시야가 가려져서 거의 드골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식에 참석하게 된 무관이나 문관은 실은 초대의 기준이 키의 크기에 따른 것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대통령을 지키는 방패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철없이 기뻐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에워싸여 군중들의 시야에서 차단된 드골 장군은 그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서도 다시 네 사람의 경호원의 호위 속에 있었다. 근시인데다 더구나 군중 앞에서는 절대로 안경을 쓰지 않는 습관이라 양쪽 팔꿈치 바로 뒤와 좌우에 각각 한 사람씩 경호원이 따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로제 테시에, 폴 코미티, 레미몽 사샤, 앙리 드쥐다, 이렇게 네 사람이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그들은 '고릴라'로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의 특징을 야유하는 별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히 걸음걸이 같은 데에 고릴라와 비슷한 데가 있었지만, 거기에는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온갖 전투기술을 몸에 익힌 전문가이며, 가슴과 어깨는 강인한 근육으로 다져져 있다. 그리고 그 근육에 힘을 주면 저절로 두 팔이 옆으로 벌어지고, 몸과 팔이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자동권총을 매달고 있어서 걷는 모습이 더욱 고릴라처럼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걸을 때에도 수상한 것이 보이면 즉각 권총을 뽑아서 발사할 수 있도록 언제나 두 손바닥을 반쯤 펴고 있다. 그러나 수상쩍은 사람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개선문에서의 식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그 동안에도 에투알 광장 주변에 있는 건물 옥상에서는 쌍안경과 라이플을 가진 수백 명의 사나이들이 굴뚝 뒤에 숨어서 감시를 계속하고 있었다. 식을 끝낸 대통령 일행이 탄 차들이 줄을 이어 노트르담 새 성당 쪽으로 사라져 가자 경비원들은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옥상에서 노트르담 새 성당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추기경이 다수의 고위 성직자를 거느리고 미사를 집전했으나, 성직자들은 성의를 입을 때부터 이미 엄중하게 감시를 받았다. 파이프오르간의 거대한 파이프 사이에는 라이플을 든 두 경관이 숨어서(물론 추기경은 몰랐지만)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참석자 사이에는 다수의 사복형사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지도 않고 눈도 감지 않고 오로지 주위의 감시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기도 때만은 근무중의 경관이 언제나 잊지 않는 그것을 열심히 외웠다 -- 주여! 내가 근무중에만은 제발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떨어진 곳에 있었던 두 구경꾼이 안주머니 쪽으로 손을 집어넣었을 뿐인데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 사람은 겨드랑이를 긁으려고 한 것이고, 또 한 사람은 담배를 꺼내려 한 것인데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이플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관들은 재콜이 경관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날 아침 일찍 지급받은 표식용 배지를 서로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배지를 분실한 어떤 CRS 대원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죄수 호송차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카빈총은 압수되었다. 가엾은 그 대원은 저녁때까지 유치장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것도 20명이나 되는 증언하고서야 비로소 석방되었다. 몽발레리앙에서는 경비진이 초긴장 속에서 경계에 임하고 있었으나, 대통령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비진의 수뇌부에서는 적어도 대통령이 납골당에 들어가 있는 동안만은 안전하리라고 생각했고, 문제는 갈 때와 올라올 때 차가 묘소 부근을 통과하는 순간이다. 그 부근은 노동자 계층이 살고 있는 구질구질한 동네로서,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했다. 차가 한 모퉁이에 접어들면서 속력을 늦추는 순간을 노려서 암살자가 덮쳐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재칼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피에르 발레미는 만사가 귀찮았다. 카빈총의 가죽끈이 어깨에 파고들어 아팠다. 목은 타는 듯이 바짝 말라 있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지만, 도저히 요기 같은 것은 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CRS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루앙의 공장에서 레이오프(일시 해고)되어 직업소개소에서 CRS 대원모집의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아직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포스터는 CRS의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보람 있는 CRS 생활을 자랑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제복은 일류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것처럼 멋지게 보였다. 발레미는 거기에 끌려서 CRS에 응모해 버렸다. 그러나 현실은 포스터처럼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숙소는 교도소 -- 사실 전에는 연습. 멋지게 보이던 남색 사지천 셔츠는 살갗에 따갑기만 했다. 살을 에는 듯한 혹한과 타는 듯한 혹서 속에서 가두에 마냥 선 채, 한 번도 현실로서 겪어본 적 없는 '거물 체포'에 참가한 허망함. 거리에 나가서 통행인의 신분증을 조사한다고 쉽사리 수상한 인물이 눈에 띌 리도 없고, 매번 힘겹고 지치기만 하니 그 허무함을 술로 달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급히 파리로 끌려온 것이다. 루앙에서 나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휘황한 거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바르비셰 중사의 분대에 있는 한 그것은 좀처럼 바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루앙의 부대 안에 있을 "봐! 저기 철책이 보이지, 발레미? 너는 저기를 감시하는 거야. 철책이 움직이지 않도록 잘 지키고 있어. 관계자 이외에는 통과시키면 안돼. 정신 바짝 차려, 책임이 막중한 일이니까." 흥, 뭐가 책임이야! 해방기념일인지 뭔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지방에서까지 경비 지원을 하기 위해서 몇만 명이나 끌고 오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냐! 내 숙사에만도 지방의 10개 현의 사람이 모여 있어. 파리의 녀석들은 누군가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한다 해서 모두들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소문이었지만, 소문 같은 것을 어떻게 믿나? 소문은 절대로 사실로 바뀌지 않는 거야 -- . 그가 감시하고 있는 통행금지 철책은 '6월 18일 광장'에서 250 미터쯤 들어간 곳에 있었으며, 거리의 양쪽에 있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막아 놓았다. 몽파르나스 역은 광장 저쪽 200 미터 떨어진 곳에 있고, 그 앞에 식이 거행될 역전 광장이 있다. 거기서 식장 정비를 하고 있는 경관과 군악대들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앞으로 세 시간이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 . 통행금지 철책 너머에는 벌써 구경꾼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말 할 일도 없는가 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더위 속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 봐야 결국 볼 수 있는 것은 저 멀리에 있는 사람의 무리들뿐이며, 그곳 어딘가에 드골이 있는가 보다고 짐작밖에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샤를 구경하러 모여든다. 철책 너머에는 벌써 200명 정도의 구경꾼이 모여 있다. 그때 발레미의 눈에 그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노인은 비틀거리면서 목발에 몸을 의지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베레모는 땀과 기름투성이이고, 긴 군용 외투 자락이 무릎 아래까지 덮여 있다. 가슴에 매단 훈장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동정 어린 눈으로 노인을 훔쳐보고 있다. 발레미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괴팍한 영감들은 자기에게는 이게 전부라는 듯이 언제나 훈장을 차고 다닌단 말이야. 하긴 개중에는 정말로 훈장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노인도 있겠지. 전쟁으로 발 하나를 잃어버린 사람 같은 경우에는 다리가 온전할 때에는 거침없이 뛰어다녔을 텐데, 지금은 마치 언젠가 해안에서 본 외다리 갈매기 같다. 저렇게 알루미늄 목발을 짚고 죽을 때까지 절뚝절뚝 걸어야만 하다니 불쌍하기 짝이 없군 -- . 노인이 다가와서, "지나가게 해 주구려." 하고 미안한 듯이 부탁했다. "우선 신분증을 보여 주십시오." 노인은 낡아빠진 셔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두 개의 증명서를 꺼냈다. 발레미는 그것을 받아서 훑어보았다. 성명 앙드레 마르탱, 나이 53세. 출신지 알자스의 콜마르. 현주소 파리. 나머지 하나도 소지인은 같고, 맨 위에 커다랗게 '상이군인'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분명히 상이군인이야, 이 노인은. 증명서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았다. 같은 얼굴이지만 찍은 지가 꽤 오래 된 모양이다. 그는 얼굴을 들고서 말했다. "베레모를 벗어 주십시오." 노인은 베레모를 벗어서 손바닥에서 꼬기작거렸다. 발레미는 눈앞에 있는 얼굴과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똑같다. 다만 지금의 얼굴은 병색이 있다. 면도를 하다가 베인 거겠지. 조그만 상처가 여러 개 있고, 거기에 발라 붙인 화장지에는 피가 배어나와 있다. 얼굴은 회색이고, 진땀으로 온통 얼룩져 있다. 짧게 깎은 회색 머리칼이 베레모를 벗을 때 흐트러졌는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다. 발레미는 증명서를 돌려주었다. "그쪽에 왜 가려고 하나요?"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지. 디락방을 빌려서." 발레미는 증명서를 도로 빼앗았다. 현주소는 분명히 파리 6구, 렌 가(街) 154번지로 되어 있다. 발레미는 옆에 있는 집을 올려다보았다. 문 위에는 132번지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154번지는 훨씬 더 저쪽이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노인을 말릴 수는 없었으며, 그런 명령도 받은 바 없다. "그럼, 가도 좋습니다.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가야 해요. 이제 곧 대통령이 오니까요."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증명서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그 바람에 비틀거려서 발레미가 부축해 주었다. 받게 돼. 나도 2년 전에 받았지만." 노인은 가슴에 단 '해방 훈장'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다만 그때에는 국방장관이 주었었지." 발레미는 훈장을 들여다보았다. 아, 이것이 '해방 훈장'이라는 물건이로군. 이따위 것 받아봐야 다리 하나를 날렸다면 수지가 안맞지 -- . 그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고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목발을 짚고 거리를 걸어갔다. 발레미는 그때 철책을 타고 넘으려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뛰어갔다. "안돼, 안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자, 내려가요, 내려가." 상이군인은 거리의 가장 끝 쪽, 발레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현관으로 사라져 가는 외투였다. 관리인인 마담 베르트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 그림자에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이날 아침부터 경관이 찾아와서 아파트의 방이란 방은 모조리 살펴보았는데, 만일 사는 사람들이 그냥 있었더라면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을지 몰라서 그녀는 한숨이 다 나왔다. 다행히 방에 남아 있는 사람은 셋뿐이고, 나머지는 모두들 여름 휴가로 시골에 가고 없었다. 겨우 경관이 돌아가고 그녀는 평소대로 현관 입구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바로 옆 역전 광장에서 두 시간 뒤에 있을 식에는 아무 흥미도 없었다. 미안합니다만...... 물 한잔 얻어 마실 수가 없겠습니까? 식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더워서......" "그녀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옛날 죽은 남편이 입었던 그런 군용 외투를 입고 왼쪽 가슴에는 훈장이 대롱거리고 있다. 반신을 목발에 의지하고, 외투자락 밑으로 나와 있는 다리는 하나뿐이다. 초췌한 얼굴은 회색이며, 온통 땀이 배어 있다. 마담 베르트는 뜨개질거리를 맡아서 앞치마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어머, 저런! 그런 몸에다...... 이 더운 날씨니. 식이 시작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지금부터 기다리려면...... 자, 들어오세요, 이리로......" 관리용 플랫으로 갔다. 상이군인이 그 뒤를 따랐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소리 때문에 입구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그녀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뒤에서 뻗어온 남자의 왼손에 턱이 붙잡히고, 오른쪽 귀 뒤에 있는 유두골(乳頭骨) 밑을 단단한 주먹으로 일격을 당했다. 그것은 완전히 불의의 기습이었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그 물을 받고 있는 잔의 영상이 안구 깊숙한 곳에서 검은 파편처럼 튀어 흩어졌다. 그리고 기절한 그녀의 몸은 소리도 없이 다박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재칼은 외투 앞자락을 젖히고 허리로 손을 돌려 다리를 구부려서 엉덩이에 붙여 고정시켜 두었던 그물처럼 짠 허리끈을 풀었다. 그리고 굽히고 있었던 무릎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오른쪽 다리에 피가 통하기 시작할 때까지 몇 분 동안 다리를 쓰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5분 뒤, 그는 개수대 밑에 있던 단단한 끈으로 마담 베르트의 손발을 묶고 대형 반창고를 입에다 붙인 뒤 식기실에 밀어넣고서 문을 닫았다. 거실로 가서 실내를 뒤져 보니 테이블 서랍에 열쇠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그는 외투의 단추를 잠그고 목발을 주워들었다. 12일 전, 브뤼셀에서 밀라노로 갔을 때 쓰던 바로 그 목발이다. 그는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현관 홀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관리인의 플랫에서 나와 문을 잠그고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6층에 올라간 그는 마드무아젤 베랑제의 조용했다. 다시 한 번 노크했지만 역시 응답이 없었다. 옆집인 샤리에 부부의 플랫 역시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열쇠 꾸러미에서 베랑제라는 명찰이 달린 열쇠를 골라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잠갔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보았다.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는 남색 제복을 입은 CRS의 대원들이 각자의 위치에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자칫 늦을 뻔했다. 그는 손을 뻗어서 창문 고리를 벗긴 뒤, 안으로 당겨서 열게 되어 있는 두짝 문을 조용히 열어서 좌우의 벽에 완전히 붙여 버렸다. 그리고 그는 창문에서 훨씬 뒤로 물러섰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융단의 일부를 밝게 비추어 방의 다른 부분은 오히려 어두웠다. 맞은편에 있는 감시원도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한쪽으로 몰아놓은 커튼 뒤에 숨어서 밑을 내려다보니 밑으로 비스듬히 130 미터 저쪽으로 역전 광장이 보였다. 그는 창에서 2미터 정도 물러난 곳에다 거실에 있던 테이블을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 테이블보와 조화 화분을 치우고 팔걸이의자 위에 있던 두 개의 쿠션을 포개 놓았다. 총좌(銃座)이다. 그는 외투를 벗고 팔을 걷어붙이고서 목발을 분해했다. 먼저 검은 고무 물미를 빼냈다. 남아 있는 세 발의 작약탄의 뇌관이 번쩍거리고 있다. 다른 두 발의 화약은 뽑아내어 얼굴색을 검게 하고 땀이 나게 하기 위해서 그 화약을 먹었었는데, 목발의 다음 부분을 빼내어 안에서 소음기를 꺼냈다. 그 다음 부분에는 망원조준기가 들어 있었다. Y자 모양의 겨드랑이에 끼는 부분 바로 밑, 목발 중에서 가장 구경이 굵은 부분에서는 노리쇠 뭉치와 총신이 나왔다. 그리고 Y자 모양으로 된 두 개의 가지 부분에는 두 개의 강철봉이 들어 있으며, 그것은 프레임 개머리판의 아래 위 뼈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가죽을 붙여 놓은 겨드랑이 받침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가죽 속에 방아쇠를 숨겨 두었을 뿐이다. 이 겨드랑이 받침은 그대로 개머리판의 어깨받이가 되는 것이다. 마치 애무하듯 그는 조심스럽게 총을 조립했다. 노리쇠뭉치와 총신, 개머리판의 방아쇠. 마지막으로 조준기를 끼워서 단단히 고정시켰다. 테이블 앞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서 두 개를 포개 놓은 쿠션 위에 총신을 안정시킨 그는 한쪽 눈을 감고 조준기를 들여다보았다. 밝은 햇빛이 비친 광장이 렌즈 속으로 들어왔다. 식의 참석자들이 정열할 장소를 아스팔트 위에 그리고 있는 작업원 하나가 조준기의 십자선을 가로질러서 지나갔다. 그는 그 남자를 쫓았다. 남자의 머리가 아르덴의 숲속에서 시험사격 했을 때에 썼던 멜론처럼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만족한 얼굴로 테이블 끝에 세 발의 작약탄을 병정처럼 줄지어 세웠다. 그리고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장전 손잡이를 후퇴시켜 노리쇠 뭉치에 첫번째 총알을 밀어넣었다. 한 발이면 일은 끝날 것이지만, 만일을 위해서 예비로 두 발을 더 준비해 온 것이다. 그는 노리쇠를 전진시켜서 총알을 약실로 보내고, 다시 노리쇠 뭉치를 오른쪽으로 반 회전시켜서 잠갔다. 그리고 총을 조심스럽게 쿠션 위에 눕혀 놓고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첫 개비를 힘껏 빨아들이면서 그는 의자에 깊숙히 기대앉았다. 앞으로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제 21 장 르베르는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물을 마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목은 타는 듯이 마르고, 혀는 마치 용접이라도 해놓은 듯이 입천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 갈증은 반드시 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긴 인생에서 비로소 그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오후에는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공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오전중에는 식의 차례에 따라서 그 역시 개선문,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몽발레리앙으로 옮겨 다녔다. 아무 일도 지나서야 그날 새벽 내무부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에 참석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그곳의 분위기는 긴장과 분노가 차츰 일종의 해방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남은 식은 앞으로 계속 되지만, '6월 18일 광장'은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고 참석자들은 장담했다. 드골 대통령이 점심을 들기 위해서 엘리제궁으로 돌아간 다음 그들은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갔었는데,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롤랑 대령이 말했다. "놈은 돌아간 거야. 일을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린 거지. 하긴 그것이 현명한 짓이라고 해야겠지. 그러나 놈은 언제 어딘가에서 반드시 꼬리를 드러낼 거야. 그때는 액션 서비스가 틀림없이 잡아서 르베르는 지금 몽파르나스 대로에 있었다. 군중은 광장으로부터 200 미터 떨어진 곳에서 진로를 제지당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광장 저쪽에서 무슨 일이 거행되는지 볼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봉쇄선을 맡고 있는 경관이나 CRS 대원은 르베르의 질문에 대해서 똑같은 대답을 했다. 정오에 철책을 세운 뒤로는 안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대로도 옆길도 골목도 모두 봉쇄되어 있었다. 광장 주변에 있는 건물 옥상에는 감시원이 제각기 자리를 잡고 감시를 계속하고 있다. 역 건물도 경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역전 광장을 내려다보는 옥상에는 CRS 대원이 무리를 짓고 있다. 또 사람이라곤 없는 플랫폼의 높은 지붕 위와 자세로 찰싹 달라붙어 있다. 기관차나 기차는 모두 생 라자르 역으로 되돌려보내고 역 구내는 텅 비어 있었다. 봉쇄선 안쪽에 있는 건물은 모두 지하실에서 다락까지 철저히 조사를 끝냈다. 아파트는 그곳에 살던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여름 휴가로 산과 바다로 떠났기 때무에 빈집이 많았다. 요컨대 '6월 18일 광장'은 바랑탕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쥐의 뒷구멍보다 굳게'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르베르는 정말 오베르뉴 사람다운 바랑탕의 말이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바랑탕도 재칼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르베르는 질러 가기 위해서 통행허가증을 나왔다. 거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광장에서 200 미터 지점에 봉쇄선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에는 군중이 벌떼처럼 모여 있으며, 안쪽으로는 경계에 임하는 CRS 대원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르베르는 여기서도 또 CRS 대원들에게 물어 보기 시작했다. 수상한 사람이 있었나? 아니오. 봉쇄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습니다. 역전 광장에서 군악대가 연주 전에 음정을 맞추는지 갖가지 악기의 높고 낮은 소리가 소음이 되어 들려왔다. 르베르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거의 대통령이 도착할 시간이다. 여기를 빠져나간 자는 없나? 예, 하나도 없습니다. 좋아, 정신 바짝 차려야 하네. 몽파르나스 대로에서 대통령 일행이 탄 차의 행렬이 '6월 18일 광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차렷 자세로 경례하는 경관 앞을 지나서 역전 광장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시선이 검은 차로 빨려들고 있다. 군중이 몰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밀려나오고 있다. 르베르는 주위의 옥상을 올려다보면서 모두들 잘 해나가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옥상의 감시원들은 밑에서 일어나는 광경에 한눈팔지 않고 각자 건너편 건물의 옥상이나 창에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없는가 해서 끊임없이 경계의 눈을 번득이고 있다. 르베르는 렌 가의 서쪽으로 다가갔다. 젊은 CRS 대원이 132번지의 건물 벽과 봉쇄선의 철책 사이의 좁은 틈 사이에 신분증을 보였다. 순간 젊은 대원은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다. "여기를 빠져나간 사람은 없나?" "없습니다." "자네는 몇 시부터 여기를 지키고 있나?" "12시에 길을 봉쇄했을 때부터입니다." "정말 아무도 빠져 나가지 않았는가?" "예......실은......불구자 노인 하나가. 바로 저쪽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구자?" "예, 노인입니다. 환자 같았습니다. 신분증도 상이군인증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소는 렌 가 154번지였습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통과시켰습니다. 진땀을 뻘뻘 흘리고. 이 더위에 그런 외투를 입고 그 영감은, 미친 사람이에요." "외투라고?" "그렇습니다. 기장이 긴, 옛날 군인들이 입었던 군용 외투라던가요? 바로 그겁니다. 이 더위 속에선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어디가 아프다던가?" "더위를 먹었나 봅니다." "상이군인이었다고 했지? 어디를 다쳤던가?" "절름발이입니다. 다리가 하나 없었습니다. 목발을 짚고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트럼펫 소리가 울려퍼졌다. 자, 조국의 아들 딸들이여, 영광의 날은 왔도다...... 군중 속에서 '라 마르세이예즈'의 노래 소리가 울려 나왔다. 르베르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굉장히 작게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다리가 하나 없는 사람이 쓰는 거 말입니다. 그 사람이 알루미늄으로 만든......" 르베르는 뛰기 시작하면서 그 CRS 대원에게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대통령 일행이 탄 차의 행렬은 텅 빈 역전 광장으로 들어와서 역사(驛舍)의 정면에 죽 늘어서서 멈춰섰다. 그 반대쪽, 역전 광장과 '6월 18일 광장' 사이에 있는 철책을 따라서 이날 훈장을 수여받게 될 10명이 줄서 있었다. 역전 광장의 동쪽 구석에는 진한 회색의 하복을 입은 정부요인들과 외교단이 서 있었다. 약장(略章)이 보인다. 서쪽에는 의장대와, 그 조금 앞으로는 붉은 제복으로 단장한 군악대가 위엄 있게 정렬해 있었다. 차들 중에서 한 대의 차 주위에 의전국과 대통령 비서실의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군악대가 국가인 '라 마르세이예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재칼은 총을 들어 조준기로 역전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첫번째로 훈장을 수여받을 퇴역군인 모습이 렌즈 속으로 들어왔다. 통통하고 조그만 남자가 완전히 굳어져서 차렷 자세로 서 있다. 머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옆얼굴이다. 몇 분 뒤에는 이 남자 맞은편에 또 하나의 얼굴이, 황금 별 두 오만한 얼굴이 나타날 것이다. '마르숑, 마르숑 아 라 빅투아르......' 국가 연주가 끝나자 주위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의장대 지휘관의 구령이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받들어 -- 총! 흰 장갑이 일제히 3박자로 소총을 받들면서 양쪽 뒤꿈치가 일제히 부딪쳤다. 대통령 전용차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흩어져서 둘로 갈라졌다. 그 중앙에서 키 큰 사람이 나타나서 퇴역 군인들의 대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던 무리들은 퇴역군인들의 전방 50 미터 지점에서 멈춰서고, 수훈자를 대통령께 소개할 재향군인회 총재와 10개의 훈장과 붉은 약장을 받쳐 든 직원만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 앞을 샤를 드골은 "이 아파트인가?" 르베르는 헐떡이며 멈춰서서 현관을 가리켰다. "그런 것 같습니다. 예, 분명히 여기입니다. 광장에서 두 번째 집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그마한 총경은 안으로 뛰어들었다. 발레미도 뒤를 따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길에서 좀 들어온 곳이라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역전 광장의 철책을 따라서 서 있는 고관들은 이미 두 사람의 기묘한 행동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체포되어 심문당한다면 총경으로 둔갑한 묘한 남자가 있기에 그놈을 잡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발레미는 대답할 그가 현관 홀로 들어가자 총경은 관리인의 플랫 문을 흔들고 있었다. "관리인 어디 있나?" 하고 총경은 소리쳤다. "모릅니다." 발레미는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려 생각했지만, 그때 이미 총경은 문의 유리를 팔꿈치로 깨어 버리고 안으로 손을 넣어서 문을 열고 있었다. "이리 와!" 총경은 그렇게 말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지 말래도 간다고. 당신은 돌았어 하고 발레미는 마음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키가 작은 총경은 식기실 문 앞에 있었다. 그 어깨너머로 안을 들여다본 모습을 보았다. "아니!" 그는 총경이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 거짓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 사람은 진짜 총경이며, 범죄자를 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그가 꿈꾸어 오던 일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가장 위층이야." 총경은 발레미가 질려 버릴 정도로 빨리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카빈총을 벗어들면서 뒤따랐다. 드골 대통령은 열의 선두에 있는 퇴역군인 앞에 멈춰서서 약간 허리를 퇴역군인의 관등성명을 알려 주며 19년 전 이날 어떤 공을 세우고 이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총재의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은 그 퇴역군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훈장을 받쳐들고 뒤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직원 쪽으로 돌아서서 내미는 훈장을 받아들었다. 군악대가 '라 마르죠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장신의 장군은 앞에 있는 노인의 둥근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경례를 하기 위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거기서 130 미터 떨어진 아파트의 6층에서 재칼은 총을 들어 망원조준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굴의 특징까지 뚜렷하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군모 채양 군모 옆으로 올라갔었던 손이 내려오고 조준기의 십자선의 중심점이 관자놀이와 맞추어졌다. 살며시 부드럽게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 . 다음 순간 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역전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작약탄이 총구에서 튀어나가기 직전에 대통령은 갑자기 머리를 앞으로 숙인 것이다. 재칼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대통령은 앞에 있는 퇴역군인의 두 뺨에 엄숙하게 입을 맞추었다. 대통령은 장신이기 때문에 축복의 입맞춤을 해주기 위해서는 고개를 조금 앞으로 숙여야만 했던 것이다. 이 입맞춤은 프랑스나 그 밖의 라틴계 민족의 습관이었으나, 앵글로색슨인 재칼은 미처 그것을 몰랐었다. 대통령 머리 뒤 1인치를 빗겨 지나갔다. 날아가는 총알에서 나는 소리를 대통령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재향군인회 총재와 직원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로부터 50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여러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총알은 태양의 열기로 눅눅해진 아스팔트에 박혀 거기서 분해되었다. '라 마르죠렌'의 연주가 계속되고 있다. 입맞춤을 끝낸 대통령은 자세를 바로하고 조용히 다음 퇴역군인 쪽으로 옮겨 갔다. 재칼의 입에서 저주의 말이 튀어나왔다. 130 미터의 사정거리에서 정지되어 있는 표적을 노려 실패해 본 경험은 단 한 번도 아직 기회는 있다. 그는 노리쇠를 열어 탄피를 빼냈다. 그리고 두 발째 작약탄을 장진하고 노리쇠를 닫았다. 르베르는 헐떡이면서 6층까지 갔다.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와 층계참에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뉜 아파트 중에서 거리 쪽으로 난 문이 둘 있었다. 그는 그 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CRS 대원이 카빈총을 허리에 바짝 붙인 채 앞을 겨누고 다가갔다. 르베르가 두 개의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한쪽 문 안에서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르베르는 집게손가락으로 자물쇠를 가리키며, "쏘아 부숴!" 하고 명령하고 버티고 서서 쏘았다. 나무와 쇠 조각과 찌그러진 총알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문은 비틀거리듯 안으로 열렸다. 발레미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르베르도 뒤따랐다. 그 남자의 회색 머리칼이 발레미에게는 눈에 익었다. 그러나 그 밖에는 완전히 변신되어 있었다. 다리는 이상 없이 둘이 있었으며, 외투는 벗었고, 라이플을 들고 있는 손은 젊은이의 것이었다. 총잡이의 움직임은 빨랐다. 테이블 앞에서 일어서면서 빙글 몸을 돌려 총대를 허리에 댄 채 라이플을 쏘았다.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발레미의 귀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카빈총의 발포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총알은 그의 가슴으로 들어가 흉골에 맞으면서 작열했다. 살을 찢는 느낌이 먼저 그러나 그것도 곧 사라져 버렸다. 태양의 빛이 여름에서 겨울로 변한 것처럼 희미해졌다. 융단 조각이 튀어올라 그의 볼을 때렸다. 그때 그는 융단에 볼을 대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목으로 차츰 감각이 사라져 갔다. 마지막으로 의식에 남은 것은 켈마딕 바다로 수영하러 갔을 때에 맛본 것과 같은 짜고 쓴 맛이 입안에 가득했고, 그때 본 말뚝 위에 앉아 있던 다리가 하나뿐인 갈매기의 영상이었다. 이윽고 암흑이 찾아왔다. 발레미의 시체 옆에 서 있던 르베르는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심장은 멈춰 버린 듯이 소리도 없었다. "재칼......" 하고 그가 말했다. 라고만 말했다. 재칼은 라이플의 노리쇠를 열었다. 탄피의 약협(藥莢)이 반짝 빛나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재칼은 테이블 위에 있던 무엇인가를 집어서 노리쇠에 밀어넣었다. 회색 눈은 다만 르베르를 보고 있을 뿐이다. 놈은 나를 죽일 셈이로군 하고 르베르는 꿈속 같은 감각으로 생각했다. 놈은 쏘려 하고 있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 . 르베르는 바닥을 보았다. CRS의 젊은 대원이 옆으로 쓰러져 있다. 카빈총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르베르의 발 아래에 있었다. 분명히 의식하지도 않은 채 르베르는 무릎을 맞추어 한 손으로 MAT 49형 자동 카빈총을 집어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르베르는 방아쇠를 찾아내어 힘껏 당겼다. 굉장한 총소리가 조그만 방안을 진동시켰다. 그 소리는 광장에서도 들렸다. 나중에 그 소리에 대해서 질문한 신문기자는, 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식이 한창 진행중인데 근처 길에서 머플러(소음기)가 터져 버린 오토바이의 엔진을 거는 소리였다는 설명을 들었다. 탄창에 반이나 남아 있던 9mm 탄환이 재칼의 가슴에 벌집을 만들었다. 그의 몸은 허공으로 튀어올랐다가 반 회전해서 방 한구석에 넝마 뭉치처럼 뒨굴었다. 전기 스탠드가 그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역전 광장에서는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곧 선임 경감을 사무실로 불렀다. "놈을 처치했어." 입을 열자마자 그는 말했다. "파리에서. 이제 문제는 없지만, 일단 놈의 플랫에 가서 유품을 정리해 주어야겠네." 오후 8시, 경감이 칼스로프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열어젖힌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경감은 돌아다보았다. 한 남자가 찌푸린 얼굴로 서 있었다. 커다란 몸집에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무엇하러 왔소, 당신?" 경감이 물었다. "그것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대체 "시치미떼지 말고 이름을 대봐." "칼스로프라는 사람이오. 찰스 칼스로프. 여기는 내 집인데,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경감은 총을 가지고 올 걸 하고 후회했다. 그는 신중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그럼, 경시청까지 가 주어야겠소." "꼭 그래야만 하겠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줘야겠소." 그러나 오히려 설명을 하게 된 쪽은 칼스로프였다. 결국 그는 24시간 경시청에 구치되었다. 그 사이에 토머스 쪽에서는 재칼의 사망 사실을 세 번이나 파리에 확인하고, 스코틀랜드는 서틸랜드 군(郡)의 북부 여기저기에 있는 다섯 군데 여관의 3주일 동안 이 다섯 여관을 차례로 묵어 가며 등산과 낚시에 빠져 있었다는 증언을 듣게 되었다. 겨우 칼스로프는 석방이 되었지만, 토머스는 그를 보내면서 경감에게 말했다. "재칼이 찰스 칼스로프가 아니라면, 대체 놈은 누구란 말인가?" "물론 영국 정부가 -- ." 다음날 경시총감은 딕슨 특별국장과 토머스 총경 앞에서 말했다. "재칼을 영국인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어. 한때 어떤 영국인이 의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그 의심도 사라졌어. 또 재칼이 프랑스에 잠입한 뒤로 한때 불법으로 입수한 영국의 여권을 이용하여 영국인으로 둔갑했었던 덴마크인으로도, 또 미국인으로도, 그리고 프랑스인으로도 둔갑했었던 자야. 우리로서는 암살자가 댓건 명의의 여권을 써서 프랑스에 잠입하여 그 이름으로 가프라는 곳까지 간 것까지를 확인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한 거야. 그 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으로 둔갑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는 영국이 관여할 바 아니야.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야." 다음날 한 남자의 시체가 파리 교외의 묘지에 있는 무비명 무덤에 묻혔다. 사망증명서에 의하면 그 시체는 성명 미상의 외국인 관광객의 것으로서, 그 남자는 1963년 8월 25일, 파리 교외의 국도에서 뺑소니차에 치어 사망했다고 한다. 매장에 입회한 것은 신부와 경관 한 사람의 무덤을 파는 인부였다.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누구 하나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또 한 남자만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자 그는 곧 얼굴을 돌리고서 이름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묘지의 오솔길을 혼자 멀어져 갔다. 혼자 돌아가는 그 외로운 그림자에는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재칼의 날은 끝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