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수 그날 밤 근무처에서 돌아온 조지 휴네커는 분명히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느 때에는 생기에 찬 볼이 불그레하고 테 없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번쩍였다. 그리고 여느 때 같으면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구두에서 덧신을 벗겨내어 복도 구석 에 깔린 매트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을 텐데, 오늘은 마치 초조한 듯이 벗어서 옆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모자도 외투도 벗지 않은 채 가지고 온 꾸러미를 풀어 작고 납작 한 가죽 케이스를 끄집어냈다. 그 케이스를 열자 낡은 녹색 빌로도로 싼 상자 안에 간 소한 세공을 한 체스(서양 장기)의 검고 흰 말이 루이즈의 눈에 들어왔다. " 어때, 아름답지? " 하고 조지가 말했다. 그는 말 하나를 사랑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 이 세공을 봐, 물론 정중하게 유리장 안에 신주 모시듯 모셔놓은 진품은 아니지만 어느 것이나 다 예쁘고, 언제든지 활기있게 움직일 것 같잖아 ― 체스라는 것이 본디 그러했던 것처럼 모두 기성품이 아니라 진짜 상아와 흑단으로 일일이 세공 한 거야. " 루이즈는 눈을 가늘게 떴다. " 당신 이거 얼마 주고 사셨어요? " " 돈은 하나도 주지 않았어. " 하고 조지가 대답했다. " 산 게 아니라 올리치스 씨가 준거야. " " 올리치스 씨라고요? " 하고 루이즈는 말했다. " 언젠가 당신이 우리 집 점심식사에 초대했었던 그 별난 노인 말이지요? 의자에 앉아 카나리아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멍하 니 우리를 쳐다보소, 이쪽이 말을 꺼내지 않는 한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으려던 그 사 람말이지요? " " 여보, 루이즈! " " '여보, 루이즈'라는 말은 제발 그만두세요.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는 벌써 오래 전에 당신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을 텐데요. 그러니까 조금 물어봐도 괜 찮겠지요? ― 그 훌륭한 올리치스 씨가 왜 갑자기 이런 물건을 당신에게 줄 마음이 생 겼을까요? " " 그건 말이오 " 조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 으음 …… 그 사람은 줄곧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는데, 이제 앞으로 두세 달만 더 근무하면 원만히 정년퇴직에 된다는군. 그런 데 내가 그 사람의 일을 거의 다 대신해 줬었거든, 그런데 오늘로서 그만 돌봐주어도 된다며, 고맙다는 표시로 이것을 선물한 거요. 무척 아끼던 물건인데, 그 사람으로서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푸는 뜻으로 이것을 준 모양이오. " " 어머나, 너그러우신 올리치스님! " 하고 루이즈는 쌀쌀맞게 말했다. " 당신의 노고에 대한 보답이라면, 좀더 실용적인 것이 우리에게 좋다는 것을 그분은 생각할 수 없었을 까요? " "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루이즈. 그러니까 돈이나 다른 물건을 주었다 면 받을 리가 없지. " " 결국 핑계없는 무덤을 없단 말이군요. " 루이즈는 코를 킁킁거렸다. " 좋아요, 자기 것은 자기가 치우세요 ― 모두 제자리에 질서정연하게. 자아, 그럼, 저녁을 들기로 해 요. 이제 준비가 거의 다 되었으니까요. " 그녀가 부엌 쪽으로 가자 조지는 어떻게든지 그 녀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뒤를 따라 갔다. " 루이즈, 올리치스 씨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 " 그러셨겠지요. " " 세상에는 체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거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체스에 숙달 됨에 따라 자기가 얼마나 그것을 필요로 했던가를 알게 된다더군. 그런데 내가 생각하 기에 당신과 내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전혀 …… " 그녀는 걸음을 딱 멈추더니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그를 노려보았다. " 당신은 내가 집 안을 치우고, 시장을 보아오고, 따뜻한 요리를 만들고, 바느질을 하 여 녹초가 된 뒤 느긋하게 앉아서 당신과 놀이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50고 개를 넘은 분치고는 당신도 꽤 묘한 생각을 해냈군요. " 그는 복도에서 외투를 벗으며 (정말 나에게는 나이를 잊어버릴 기회가 거의 주어져 있지 않아 ― 적어도 루이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 )하고 생각했다. 그가 30살이 다 되어갈 무렵, 즉 결혼하고 몇 달 뒤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이제 좀 나잇값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나이 타령이 나왔었다. 그 뒤 해가 바뀜에 따라 늘 우연 한 일이 동기가 되어 그 나이 타령이 나오곤 했다. 그녀의 바램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다만 한 가지 성가시게도 으례 루이즈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처럼의 확실하 고 좋은 일을 버리게 된다든가 생활이 편치 않을 때 ― 루이즈의 의견으로는 그런 때 는 없었다고 하지만 ― 아이를 낳는다든가, 아주 싼값으로 빌 수 있는 집이 있는데도 현금으로 집을 산다든가 하는 일에 그녀가 반드시 시시비비 따지고 들어 단호한 태도 를 취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 손님을 부르거나, 그가 읽어보고 재 미있었던 책을 권하는 일에나, 협주곡 방송에 라디오 다이얼을 맞추는 일에나, 또는 지 금의 경우처럼 체스를 해보려는 생각을 말했을 때 그녀가 이처럼 통렬하게 반대한다는 것은 그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잘라 말했다. ― 손님을 부른다는 것은 번거로운데다가 돈이 들 뿐이 며, 작은 활자는 눈을 버리게 하고, 협주곡은 깨질 것 같은 두통의 원인이 되고, 그리 고 체스에 허비할 시간은 내려야 낼 수가 없다고.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는 모든 면에서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조지는 불만스럽 게 회상했다. 늘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썩하니 책이며 음악 같은 것이 화제의 대상에 오르면 루이즈는 밝고 활기차게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매일 밤 뜨개질거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 라디 오에서 떠들어대는 만담 같은 것을 듣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그런 것이 원인일는지 모른다. 번갈아가며 쑤시고 결리어, 마치 통증이 늘 붙어 살고 있는 듯 계속 아픔에 시달렸다. 가끔씩 그 아픔이 너무도 뼈아프게 느껴져 조지까지 동정의 통증이 온 몸을 치닫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 을 정도였다. 집 안에 있는 약상자에는 약이 넘칠 듯 가득차 있고, 두 사람의 식사는 점점 더 빈약해져 부드럽고 맛없는 조제 약같이 변했으며, 마침내는 조지가 막연히 <부 인병>이라고 추측하는 병의 치료를 위해 매달 루이즈 앞으로 오는 의사의 청구서가 상당한 액수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도 조지는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루이즈가 남편이 바라는 최대한의 훌륭한 아내라는 것을 인정하기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의 급료는 결코 쓰고 남을 정도가 아니 었지만, 루이즈는 그 돈을 한푼두푼 절약하여 1만 5천 달러의 예금을 은행에 저금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두 부부 이외에 없었다. 루이즈는 누구와 말을 하든, 보다시피 이렇게 가난한 생황을 하고 있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아 옆에서 듣고 있는 조 지로 하여금 늘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루이즈는 돈은 저축하는 최선의 길은 얼마가 되든 자기가 저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라며, <저축 한 1센트는 번 1센트>와 마찬가지니까 그녀도 돈을 버는 조지와 같이 두 사람의 수입 에 기여하고 있는 거라고 주장했다. 이 말이 조지의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혀주지는 못 했지만, 루이즈의 지혜와 융통성에 대한 경의로 일단 겉으로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집이 언제나 반짝거리는 바늘처럼 깨끗하고 그가 입는 옷은 정성껏 손질 이 되었으며, 그의 건강에 대해서도 유난스러울 정도로 신경쓰고 있다는 점을 아는 한 아내를 체스의 상대역으로 삼으려다 실패한 사소한 일을 문제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 에게 주어진 축복받은 모든 혜택을 세는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만일 다 그쳐 캐물었다면 조지 자신도 아마 인정했 겠지만, 아뭏든 이것은 말하자면 희생적인 행위이긴 했다. 왜냐하면 일단 아내와 함께 체스의 말을 손에 잡았다면 그 순간 그는 열렬한 체스애호가가 되어버렸을 터이니까. 라디오 소리가 크게 울리고, 루이즈가 여념 없이 뜨개질 바늘을 움직이고 있는 옆에서 밤마다의 즐거움인 체스판을 노려보며, 이 게임을 상대방이 있음으로써 보다 놓은 흥취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고 그는 이따금 생각하곤 했다. 그는 결코 비꼬아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비꼰다는 것은 본디 조지의 성질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올리치스 씨는 그에게 이 체스 세트를 줄 때 언제든지 상대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러 나 루이즈는 이미 그 신사가 그녀의 집에서 환영받을 만한 손님이 아님을 지적했으며 또한 별이유도 없이 가정을 비우고 돌아다니는 사람에 대해서도 분명한 의견을 가끔 이야기했으므로 조지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그는 《체스를 권함》이라고 적절한 제목을 붙인 소책자를 읽고, 그 권유에 따라 다른 논문과 좀더 어려운 교본을 보았으며, 나아가서 체스에 대해 쓴 여러 가지 문헌의 세 계로 ― 그 크고 복잡한 세계로 비틀거리며 끌려들어갔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잠잘 때도 체스에 대한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고금 의 명인들 솜씨를 연구하여, 마침내 그들이 거둔 작은 승리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는 장과 절까지 들추어 인용할 정도에 이르렀다. 서반, 중반, 그리고 종반의 전법을 그는 공부했다. 교묘한 책략을 쓴 술책에서부터 일방적으로 가차없 는 힘을 모아 다짜고짜 적을 쳐부수는 급전으로 돌진하는 국부 전투에 치우치기 쉬운 분별없는 침략을 삼가는 법도 배웠다. 그때까지 들어본 일도 없었던 이름이 그가 사는 먼 지평선 위에서 춤을 추었다. 앨레카인, 캐퍼블랑카, 라스카, 님조비치 …… 그는 발견의 기쁨에 취하여, 그 들의 우주인 흑단과 상아의 미로를 더듬어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아직 부족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적수 ― 자기와 부딪쳐 시험해 볼 수 있는 상대자였다. 가끔 그는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 책을 가까이 놓고 마음 속으 로 따지며 수를 놓아보는 것도 분명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똑같은 수를 생각함에 있어서도 체스 판을 앞에 놓고 마주앉아 판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전개하면 이쪽을 쳐부수려고 버티고 있는 상대방이 있다면 더욱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이쪽이 말을 하나 움직이면 거기에 대해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서 응수해 오는 장면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차츰 굶주림처럼 심해져갔다. 이윽고 그것은 일종의 기묘한 강 박관념이 되어서, 그 때문에 벽이나 난로의 통나무에 비친 루이즈의 그림자다 갑자기 움직이거나 하면 조지는 아무도 없는 맞은쪽 의자에 누군가가 눈에 띄기를 기대하며 깜짝 놀라 눈을 드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럭저럭하는 동안 그는 그 인물을 상당히 뚜렷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꽤 그를 많이 닮은 조용하고 명상적인 인물로,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며 체스 판을 향해 몸을 구부릴 때 자칫하다가는 흘러내릴 듯한 테 없는 안경이 정말 그와 똑같았다. 이 상대 방의 체스 실력은 그보다 좀 나은 편으로, 그를 이길 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래 도 조지로서는 이따금 승리를 거두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그 인물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체스의 관례에 구애받는 자는 아마 이것을 어느 정도 이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 다. 즉 그 인물을 으례 백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백을 잡은 쪽은 언제나 선수를 달 려 어쩌다가 전세가 달라지기 전에는 줄곧 공세를 편다. 조지는 언제나 흑을 쥐고 백 의 돌격과 침공을 빗나가게 하는 한편, 서서히 그 총공격에 대비하는 견고한 벽을 구 축하는 일을 좋아했다. 이 방법이야말로 체스 게임을 습득한 이상 무슨 공격인들 막지 못하였다. ― 방어를 철저히 하여 불패의 방법을 습득한 이상 무슨 공격인들 막지 못 하겠느냐 라고. 그러나 방어를 하려면 역시 공격을 가하는 수법을 알아야 하므로 결국 조지는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한 가지 독창적인 해결에 이르렀다. 즉 체스 판에 말을 늘어놓고 흑의 진지 뒤쪽에 자리를 차지한 다음, 백을 대신해서 첫수를 둔다. 그런 다음 그것을 흑으로 맞겨누고, 또다시 백을 대신 움직인다. 이처럼 승부가 날 때까지 같은 일을 되 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처롭게도 오래지 않아 그 방법의 결함이 명백히 드러났던 것이다. 물론 그 는 흑의 편을 들었고, 처음부터 양쪽 전략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흑은 한 판 또 한 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미한 경험을 20번이나 거듭하고 난 뒤 조지는 절망에 빠져 의자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 만일 한쪽을 대신해서 말을 움직이는 동안 또 한쪽의 일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언젠가 책에서 읽은 아득한 옛날 기억과 궤도를 같이한 기대라는 데 생각이 미치어 그는 안타까왔다. 그것은 만일 두 마리의 뱀에게 서로의 꼬리를 물게 한다면, 상대방을 완전히 삼켜버리기까지 무섭게 투쟁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울하게 그 일을 생각해 본 다음 그는 다시 말을 늘어놓고 테이블을 빙 돌아서 백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만일 자기가 백이라면 어떤 수를 쓸 것인가? 게임이란 한편의 실력만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적수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도 좌우된다고 그는 스스 로에게 말하였다. 또한 상대방의 게임을 이끌어가는 방법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인 격, 성격, 천성적인 자질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고. 조지는 비어 있는 흑의 의자를 테 이블 너머로 엄숙하게 바라보며 그 사실을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신중하게 첫수를 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재빨리 테이블을 돌아서 흑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하는 편이 훨씬 쉽다고 그는 생각하며 거의 반사적으로 백에 대해 응수를 했다. 마음 속에 가슴설레는 스릴을 느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빨리 이번에는 흑의 일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몰 아내려고 애쓰면서 다시 체스 판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 대체 당신을 무얼 하고 있는 거 예요? " 조지는 깜짝 놀라 눈 앞이 캄캄해져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루이즈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뜨개질거리를 무릎 위에 놓고, 마치 방 전제가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듯 못마땅한 태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설명하려고 입 을 벌리다가 허둥지둥 생각을 달리했다. "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 " 아무 일도 아니라고요! " 루이즈는 엄격하게 나무랐다. " 누가 이 근처를 돌아다니 다 그 모습을 보면, 아마 이 집에는 당신이 편히 앉을 만한 의자가 하나도 없나 보다 고 오해하겠어요. 아시겠어요, 나는 …… " 거기서 그녀의 목소리는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눈이 유리알처럼 생기있게 빛났으며, 몸은 온 힘을 다해 주의를 집중하고 있어서,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라디오에 출연하 고 있는 희극배우가 상대방의 모욕에 대해 스튜디오의 청중들이 분명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심한 다른 모욕적인 말로 응수한 것과 같았다. 루이즈는 다시 뜨 개질거리로 손을 뻗쳤다. 그녀의 입술 양쪽 끝이 약간 위쪽으로 치켜 올라가는 듯했다. 조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회를 놓칠세라 흑 뒤쪽에 있는 의자에 파묻히듯 앉 았다. 그는 지금 막 굉장한 발견을 하려는 찰나에 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무슨 발견이었을까? 육체적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 그를 객관적인 두 사람의 실체로 분리하여 명백히 다른 두 사람의 기사를 가상하는 일을 가능케 했던 것 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제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빠진 것이라고 그는 체념했다. 왜 냐하면 그렇게 일어나서 빙빙 돌며 왔다갔다하는 까닭을 루이즈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체스 판 그 자체가 한 수를 둘 때마다 빙그르르 회전한다면 어떨까? 아 니면 ― 하고 생각하면 조지는 차츰 더해가는 흥분을 느꼈다. ― 체스라는 것은 완전 히 지능적인 게임이므로 만일 충분히 게임에 숙달한다면 판 따위는 전혀 필요없을 정 도니까, 요컨대 중요한 것은 둘 차례가 되었을 때 자기를 완전히 상대방으로 탈바꿈하 는 일이 아닐까? 자아, 이번에는 백이 둘 차례다, 하고 조지는 자기가 이행할 역할에다 관심을 쏟았다. 그는 백 쪽에서 두는 것이므로 틀림없이 백이 둘 것으로 보이는 수를 두어야 한다. ― 뿐만 아니라 백의 기사가 느낄 것으로 보이는 감정을 전적으로 실감있게 느껴야만 한 다. ―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할수록 그가 노리는 목표는 잡기 힘들어졌다. 몇 번이나 백의 말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틀림없이 흑이 둘 것으로 보이는 수 에 대한 지식이 한 방울의 수은처럼 머릿속으로 대구루루 굴러들어와 미칠 것만 패배 감을 느꼈다. 이처럼 밖으로 보이지 않는 괴로움이 그를 괴롭혔다. 바야흐로 이것은 그에게 달라붙어 밤마다 그는 연습에 열중했다. 몸무게가 줄고, 얼굴 이 여위어 쪼글쪼글해졌다. 그래서 루이즈는 식사 때마다 그의 옆에 붙어앉아 그에게 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그녀의 고심거리인 메뉴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애썼 다. 일에 대한 흥미도 없어져서, 당장 그 자리만 모면하는 식으로 일을 했으므로 처음에는 좀 놀랍게 생각하고 초조해 하던 상사도 마침내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하고 머리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의 승부가 있을 때마다, 한 수를 둘 때마다, 하나의 노력을 기울일 때마 다 조지는 그만큼 목적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고 환희에 가슴을 설레었다. 틀림없이 그 순간이 올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타일렀다. ― 체스 판 맞은쪽을 객관적으로, 전혀 무관심하게, 그 의도며 계획에 대해 정말 거기에 앉아 있는 산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경우나 다름없는 지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가. 그리고 그 날이 오면 그는 자기를 능가하는 어떤 명인 기사를 물리쳤다고 주장할 수 있는 승리를 얻은 셈이 된다. 그는 한 수를 둘 때마다 다음 수 뒤에는 틀림없이 그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데 너 무도 굳은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 승리가 찾아왔을 때는 다만 기분좋은 만족과 온 신경이 해방되는 평온함을 느낄 뿐이었다. 마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뒤 잠자리에 들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 그는 기쁘게 생각했다. 정말 그런 종류의 느낌이었 다. 그는 사소한 실수로 흑 쪽을 위험한 국면으로 몰아넣게 되었으므로, 잘 생각한 뒤 승 정의 말을 백 쪽에게 큰 타격을 주는 멋진 방어를 할 수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기 에 대해 백이 어떻게 응수할 것인가를 연구하려고 얼굴을 들었을 때, 그는 <백>이 테 이블 맞은쪽 자리에 두 손 끝을 가볍게 맞대고 입술에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며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 아하! " 하고 백은 기분좋은 듯 말했다. " 당신으로선 아주 멋진 수인데, 조지. " 그리하여 조지의 만족감은 경솔한 손가락에 닿아서 터져버린 비누방울처럼 사라져버 렸다. 그 말은 그를 노하게 만든 동시에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쾌 했던 것은, 백이 조지가 예상하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백이 쌍둥이 처럼 조지와 닮았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실제 얼굴 모습을 어디를 보나 너무도 비슷 하여 마치 그가 매일 아침 면도할 때 들여다보는 거울 속에서 본 영상이라고 해도 지 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영상에는 조지의 진짜 영상과는 달리 아주 압도적인 힘과 거만함이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있는 것은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재미없는 숫자 의 나열을 계산하는 그런 사나이가 아니라 긴 회의 테이블 윗자리에 앉아 과단성과 생 기있는 재치로 중대한 결재를 내리는 그런 인물이라는 걸 깨닫고 조지는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의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그보다는 오늘의 일, 오늘 이 제공해 주는 좋은 일만 생각하는 사나이 ― 거기에 대한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그런 사나이였다. 백이 입고 잇는 최고급 양복에서, 손톱을 잘 손질한 날씬한 손에서, 눈에 보이는 기품 과 힘에서, 조지의 눈을 바라보는 엄격하면서도 명랑한 눈의 반짝임에서 그런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지가 자기 바로 앞에 굴러다니고 잇는 것으로 보이는 생 각을 잡으려고 손을 멈칫멈칫하고 있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백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그 눈 속에는 자기의 영상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영 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 백이 자기의 말을 하나 움직였으므로 조지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 당신 차례요 " 하는 백이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 게임을 더 계속하려는 생각 이 당신에게 있다고 보고서 하는 말이오만 …… " 조지는 체스 판을 보고, 아직 자기 쪽 형세가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 어째서 내가 계속할 마음이 없겠소? 이쪽 형세는 …… " " 지금으로 보아서는 좋지만 " 하고 백은 그 자리에서 말참견을 했다. " 당신은 먼 앞 을 내다보는 일을 잊어버리고 있소. 나는 이길 것을 목표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거요. 그 런데 당신을 다만 지지 않으려는 생각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오. " " 둘러치나 메어치나 같은 말 아니오! " 조지가 대답했다. " 아니, 다르지 " 하고 백은 말했다. " 그 증거를 말해 볼까요? 나는 이 승부에서도, 그 밖에 언제 승부를 해도 틀림없이 이기오. " 그 뻔뻔스러움이란 조지를 아찔하게 할 정도였다. " 마로치는 체스의 명수였지만, 끈질기게 버티어나가는 전술을 쓰지 않았소 " 하고 조 지는 반박했다. " 만일 그의 게임 솜씨를 잘 알고 있다면 …… " " 마로치의 게임이라면 나도 당신이나 다름없이 잘 알고 있소. " 하고 백은 말했다. " 만일 나에게 그와 승부를 겨룰 수 있는 기화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내가 계속 이겼으리 라고 단언할 수 있소. " 조지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49 " 당신은 자기 자신을 꽤 높이 평가하는군. " 그런데 백이 그 말에 대해 반격하는 대신 딱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 어 뜻밖의 감명을 받았다. " 아니 ― " 하고 백은 천천히 말했다. " 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쪽은 당신이오. " 그는 마치 감쪽같이 파놓은 함정을 발견하고 문제없이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지 머리를 저으며 입술을 약간 벌려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일그러뜨렸다. " 당신차례요. " 조지는 머릿속에 떼지어 밀려온 막연하고 불안한 생각들을 애써 옆으로 밀어놓고, 당 면한 수를 두었다. 그리고 나서는 분명 자지가 수습할 수 없는 꼴사나운 패배를 당했 음을 깨달았다. 그는 두 번째 게임에서도 지고, 그 다음에도 또 지자 네 번째 게임에 들어가 온힘을 다 기울여 전법을 바꾸려고 했다. 열한 번째의 수를 두려고 할 때 그는 총공격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망설이다가 결국 그 기회를 놓쳐 또 지고 말았다. 그래서 조지는 찌푸린 얼굴로 상자 속에 말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 내일 또 와주시겠지요? " 이 말로 조지는 자신이 완전히 백의 위안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 지장이 없다면. " 조지는 갑자기 공포에서 오는 한기를 느끼며 가까스로 말했다. " 지장이 있을 리가 있겠소? " 백은 백의 여왕말을 집어들고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굴렸다. " 루이즈가 방해할지도 모르오, 어쩌면. 만일 루이즈가 당신이 이처럼 게임에 열중하 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결심하면 어떻게 되겠소? " " 왜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하겠소? 지금까지 조금도 그런 눈치를 보인 적이 없소! " " 루이즈는 극단적으로 어리석고 화를 잘 내는 여자라서 …… " " 아니, 여보시오,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 하고 조지는 아픈 곳을 찔려 자신도 모르게 지껄였다. " " 게다가 ― " 백은 옆에서 하는 불평 같은 건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계속 했다. " 그녀는 이 집의 주권자니까. 그런 종류의 사람은 이따금 아무 까닭 없이 자신 의 주권을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법이오. 사실 그것은 그런 사람들의 허영심을 채워주 는 양식으로 ― 호흡하는 공기나 다름없이 필요한 것이오. " " 만일 그것이 당신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생각이라면 ― 당신에게는 다시 이 집의 문지방을 넘을 권리가 …… " 그의 말이 끝나려는 순간 루이즈가 안락의자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남편 쪽을 보았 다. 그녀는 활기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 여보, 오늘 밤에는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뭔가 좀더 나은 일을 하며 보낼 수는 없나요? " " 지금 치우려던 참이오. " 하고 조지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직도 그의 체스 상대자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말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백이 소름끼치는 눈으로 루이즈를 관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백은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앉았는데, 그 두 눈이 검은 유리알처럼 반짝였으며 그 속에서 불꽃같이 강렬한 빛이 새나오는 것 같았다. " 그렇지 " 하고 백은 천천히 말했다. " 저 여자의 사람됨됨이와, 저 여자가 당신에게 취해온 처사를 생각하면 미워서 몸이 마를 지경이오.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당신은 나에게 고 와주기를 바라는 거요? " 지금의 상대방 눈은 냉혹하고 무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또 백이 그의 손에 돌려준 체 스 말을 따뜻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조지는 머뭇거리면서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이윽고 말했다. " 그럼, 내일 또. " 백의 입술이 또 일그러지며 그 차갑게 비웃는 듯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오겠소. 그러나 아 무니 해봐야 똑같은 일이오. 당신은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을 거요. " 백이 자기를 평가함에 있어 결코 잘못 생각하지 앉았다는 사실은 시간이 증명해 주었 다. 그리고 시간 그 자체도 달력이나 시계 같은 수단에 의하는 것보다 무한히 되풀이 되는 체스의 승부에 의해, 또 한 판의 승부를 새기는 서로의 말의 움직임에 의해 훨씬 더 재기 쉽다는 것을 조지는 배웠다. 그것은 즐거운 발견이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란 똑똑히 바라보면 마치 쌍안경을 거꾸로 들여다본 대상물 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함부로 남을 밀어내고 찌르고 흔들어대고 끊 임없이 설명이며 변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게 보였으나, 요컨대 그것은 단순한 저 먼 뒤쪽 전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들이 아무리 가까이 밀려와 도 그의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루이즈였다. 밤마다 세계는 체스 판과 그 맞은 쪽 자리에 앉아 있는 백의 모습을 중심으로 둘러싸였다. 그러나 방 한쪽 구석에 서 뜨개질거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는 루이즈의 주위에는 시끄러운 불평과 피할 길 없이 터질 것 같은 비난의 분위기가 조지를 에워싸며 가득 차 있었다. " 왜 그렇게 틈만 있으면 바보 같은 장난에 열중하지요? " 하고 그녀는 나무랐다. " 뭔가 나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도 없어요? "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결혼한 지 몇 년 동안에 그는 집안살림에 대해서는 아무 발 언권이 없다는 것, 또 그의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의 일 따위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인텔리 냄새가 풍기는> 문제에 대 해 그가 생각하는 일은 본인의 가슴에 묻어두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안 뒤부터 그녀에게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 사실 그녀의 방법은 적절하지 않소 " 하고 백은 비웃듯이 말했다. " 만일 당신이 집 안에 필요한 가구 같은 것을 들여놓거나 하면 아주 깨끗해져서 루이즈는 쑥스럽고 이 상한 느낌이 들 거요. 또 만일 당신 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너무 잘 알게 되면 루이 즈는 그 사람들과 사귀고 대접해야 하므로 자기가 교양이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의 판 단 앞에 드러내놓게 될지 모르오. 이런 상황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비참한 판정을 받 는 일을 피하여 자기 혼자만의 진공 같은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편이 그녀에게 훨씬 좋지요. " 늘 그렇기는 했지만, 백의 태도는 조지를 크게 화나게 만들었다. " 중산모 속에서 꺼낸 듯한 고견을 아주 그럴 듯하게 들리는군요. 그럼, 좀 알아야 겠 소. ― 어떻게 당신은 루이즈의 일을 그처럼 잘 알고 있소? " 백은 멍청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나는 당신이 아는 일을 알고 있을 뿐이오. 당신이 아는 것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소. " 이 말은 주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했지만, 게임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꾹 참았다. 루이즈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온 세계는 다시 비현실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제 현실의 것은 체스 판과 그 위를 너울너울 날아다니며 공격하고, 조지를 감 탄케 하고, 실망과 낙담으로 몰아넣는 대담무쌍한 산뜻한 솜씨로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차례차례 쓰러뜨려하는 백의 손이 있을 뿐이었다. 만일 백에게 뭔가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체스 솜씨가 아니라 게임을 할 때마다 체스의 철학에 대해 약간의 잔소리를 늘어놓는 ― 그래서 언제나 마지막에는 주제넘게 도 으례 조지의 개인문제에 대한 빈정거리는 말을 늘어놓는 ― 불쾌한 화술에 있었다. " 이것 보오, 체스 두 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다 알 수 있다고 하는데 ― " 하 고 백은 언젠가 말했다. " 그 사실을 알리라 여기고 말하겠소만, 당신은 자기가 언제나 수세를 취하기를 택하고 ― 그리고 언제나 진다는 사실에 중대한 뜻이 있다는 것을 모 르겠소? " 이 정도만이라면 참겠는데, 백이 가장 사납고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루이즈가 게 임을 방해할 때 ― 조지를 비난하거나 체스 판을 치우라고 말할 때였다. 그런 때 백은 턱에 힘을 주고 그녀를 쳐다보았는 51 데, 그 눈 속에서 무서운 증오가 연기를 뿜으며 불타고 있었다. 한 번은 루이즈가 체스 판 위에서 말을 하나 집어들어 상자 속에다 거칠게 던져넣었 는데, 그때 백이 증오를 참을 수 없는 듯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으므로 조지는 그가 어 떤 행동으로 나올까 두려워 그를 막기 위해서 일어났을 정도였다. " 그렇게 놀라 일어날 건 없어요 " 하고 루이즈는 나무랐다. " 부수지는 않을 테니까 요. 그러나 이건 알아야 해요. 만일 당신이 지금처럼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면 내가 손을 끊게 해줄 테니까요. 당신을 그전처럼 착실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면 그런 것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부숴버리겠어요! " " 대답해 주시오! " 하고 백은 말했다. " 멍하니 있지 말고 …… 왜 딱 잘라 말해 주 지 못하는 거요! " 조지는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멍청히 서서 머리를 내젓 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사건이 백의 태두에 한 가지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즉 그 뒤부터 말 끝마다 사악한 의도를 비추는 태도가 시작된 것이다. " 저 여자도 만일 체스를 할 줄 안다면 이렇게 소홀히 여기지는 않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두려워할 일이 없어질 거요. " " 안됐지만 " 하고 조지는 소극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 루이즈는 바빠서 체스할 시간 이 없답니다. " 백은 의자에 앉은 채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독기어린 미소를 띠고 다시 돌아앉았다. " 뜨개질을 하고 있군. 저 여자는 언제나 뜨개질만 하던데, 당신은 그것을 바쁘다고 하는 거요? " " 당신도, 참! " " 아니 " 하고 백은 말했다. "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소. 옛날에 페넬로페는 남편 일 돌아올 때까지 몇 년 동안이나 베를 짜서 끈질기게 치근대는 남자들을 가까이 못 오게 했소. 그런 신화에서처럼 루이즈는 몇 년이고 뜨개질에만 열중하여 죽음이 찾아 오는 날까지 생명을 근접 못하게 하려는 거요.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하든 기쁨을 느끼 지 못하오. 그것은 누구나 외눈의 반만 있어도 알아볼 수 이는 일이오. 뜨개질을 하여 바늘에서 하나하나 빠져나가는 코는 그대로 죽음으로 다가가는 표시인데, 저 여자는 한순간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거요. " " 그래서 어떻다는 거요! 당신은 그녀가 체스를 하려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런 당 치도 않은 결론을 만들어내려는 거요? " 하고 조지는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듯 큰 소 리로 말했다. " 체스에 대해서만이 아니오 " 하고 백은 말했다. " 생명을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이 오. " " 그래, 그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지요 ― 지금 당신이 말한 그런 경우에는? " " 여러 가지 것을 뜻하지요 " 하고 백이 말했다. "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 의욕, 창조 하려는 욕망, 깊은 정서를 느끼는 능력 ― 그밖에도 많지. " " 그야 많겠지요 " 하고 조지는 비웃었다. " 엄청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을 그게 모 두가 아니오. " 그러나 백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냉소적인 찌푸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아아, 대단한 일이오. 루이즈에겐 너무 대단한 일이라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 이 드는군요. " 그리고 나서 백은 말을 움직여 조지의 관심을 다시 체스 판 위로 쏟게 했다. 마치 백은 조지의 급소를 찾아내어 몇 번이고 탐색을 거듭하는 일에 잔혹한 쾌락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체스의 말을 움직이는 한편 말로 상대편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잔혹하고, 빈틈없고, 언제나 반스디 홍수처럼 쏟아붓는 거만한 말투로 피할 수 없는 결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조지는 절망적으로 괴로와하며 루이즈의 이야기는 앞으로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해보았지만, 실제 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조지의 머릿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백의 대화에 나오는 기호는 체스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분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조지가 그에게 상대역을 부탁하려면 백의 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조지는 백을 상대역으로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턱대고 원하고 있었으며, 집 에 돌아가 루이즈에게 한동안 회사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 무서운 날 밤에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파면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몸의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쉬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은 것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루이즈의 얼굴에서 맥이 빠지며 파래지는 것을 보로, 조지는 일생을 통해 지금처럼 건강하게 느껴진 적은 없다고 당황해서 곧 덧붙이기는 했지만. 이어서 루이즈가 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지겹게 들어온 잔소리를 열심히 지껄여대는 광경이 전개되었다. 그런 경황 중에 조지는 백이 했던 말이 격한 분류처럼 뇌리를 치 닫는 것을 느꼈다. 루이즈가 기운이 빠져 의자에 주저앉아 멍한 시선을 앞쪽 벽에 못 박은 채 위안으로 삼는 뜨개질거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조지는 테이블을 향해 체스의 말을 늘어놓으려고 했다. ― 그제야 비로소 그는 소금기를 띤 고통의 흐 름이 물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러나 이런 일에 완전히 결정을 내버리는 해결법이 없는 것은 아니오 " 하고 백은 조용히 말하고 나서 루이즈 쪽으로 눈을 돌렸다. " 알고 보면 참으로 간단한 해결법이 지. " 조지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소 " " 당신은 알아차린 일이 있소, 조지? " 하고 백은 말을 계속했다. " ― 루이즈가 굉장 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바로크 풍의 액자에 넣어 저기 벽에 걸어놓은 저 보잘것없는 그림은 마치 최대한의 소리를 내어 연주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와 맞서서 자기의 소리를 내려 하고 있는 히스테리컬한 작은 피리와 같다는 사실을. " 조지는 체스 판을 가리키며 " 당신이 선이오 " 하고 말했다. " 아아, 게임 말이오? 게임은 도망치지 않소, 조지. 그보다 지금 나는 이방이 ― 아니, 이 훌륭한 집 전체가 완전히 당신 것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당 신 혼자의 것이라면. " " 나는 체스를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소 " 하고 조지는 항의했다. " 그리고 또 이런 방법도 있지요, 조지. " 백은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의 두 눈에서 조지는 다름아닌 자신의 영상이 기묘한 눈 초리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또 한가지 다른 방법이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되는 재미있는 것이오. 만일 이 방에 당신 혼자만 있다면, 알겠소, 당신보고 체스를 그만두라고 할 사람을 아무도 없을 거요. 당신은 밤낮으로 체스를 둘 수 있고, 그래도 더 하고 싶다면 다음날 아침까 지 밤을 새워 해도 상관없단 말이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된 게 아니오, 조지. 저 그림 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좀더 좋은 다른 그림을 걸 수도 있을 것이오. 알겠소? ― 그 러나 매일 당신이 이 방에 들어와 그것을 보는 순간 기운이 솟아날 수 있는 느낌의 그 림을 두세 장 걸면 되는 거요. 게다가 레코드 판도! 요즈음 멋진 판이 많다는 것을 나 도 알고 있지만, 조지, 방안에 그런 것이 가득 있다면 어떻겠소? ― 오페라를 비롯하여 교향곡, 협주곡, 4중주 등 무엇이든 다 ― 그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실컷 즐기는 거 요! " 천천히 계속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그 눈 속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쳐다보며 조지는 기쁨에 넘친 말의 흐름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그 말에 내포된 무서운 뜻을 생각하자 그만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미친 듯 머리를 저었다. " 당신은 미치광이요! " 하고 조지는 소리쳤다. " 그만해 두시오! " 그러나 귀를 막았는데도 백의 목소리가 여전히 무섭도록 뚜렷하게 들려오는 것을 조 지는 알았다. "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고독이지요, 조지?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오. 기꺼이 당신의 친구가 되어주고, 당신에게 이야기를 걸어오고, 나아가서 고맙게도 당신 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소.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당신을 사 랑해 주려는 사람도 얼마쯤 있소. " " 고독이라고? " 하고 조지는 잘못 들은 게 아닌 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 당신은 내 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고독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 " 그렇지 않다면 뭐요? " " 당신은 나 자신과 다름없이 모두 잘 알고 있잖소 " 하고 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당신은 자신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하는가를 잘 알고 있소. 당신을 내가 ― 아니, 누구이든 이 처럼 선량한 사나이가 그런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다고 보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소! " 백은 경멸하듯 이를 드러냈다. " 그럼, 한 가지 묻겠는데, 자신은 결점투성이의 어리석은 여자인 주제에 자기보다 굉 장히 훌륭한 사나이와 결혼하여 그 사나이를 자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도 부족 하여 자기의 약점과 어리석음을 감추는 일을 생애의 과업으로 삼고 있는 여자보다 더 잔혹한 존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 " 당신에겐 루이즈에 대해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소! " " 권리는 다 갖추어져 있소 " 하고 백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지는 속으로 이 말이 무서운 진실임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허둥거리며 테이블 끝을 꽉 움켜잡았다. 그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 싫소,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그런 일은 하지 않겠소, 절대로! "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 하고 백도 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무서운 결의가 나타나 있어 조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 을 들었다. 마침 루이즈가 날카롭고 작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분노로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는 혼란된 사고의 중간중간에 그녀가 되풀이 퍼붓고 있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거칠 게 악을 쓰고 있었다. " 바보! 바보! 이 체스 탓이에요! 이제 지긋지긋해요! " 그리고 나서 그녀는 갑자기 체스 판 위로 손을 뻗쳐 말들을 쓸어냈다. " 그만두지 못해! " 하고 조지는 루이즈가 아니라 그녀 앞에 서서 무거운 쇠부지깽이 를 휘두르고 있는 백을 향해 소리쳤다. " 그만두지 못해! " 조지는 거듭 소리를 지르며 그 부지깽이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달려나갔으나, 이 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루이즈가 경찰의 시체 수용 궤짝 안에 자신이 보기흉하게 나뒹굴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아마 시끄럽게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 수용 궤짝이 질질 끌려 현관문으로 운 반 될 때, 닦아놓을 마룻바닥에 보일까말까한 조그마한 흠집이 생긴 것을 보았다면 그 녀는 틀림없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을 것이다 ― 물론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 에 있었다고 가정하고 이야기지만. 그러나 랜드 경감을 부하들이 그 짐을 운반하여 나 간뒤 아무렇게나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경감보는 분명 체스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조용한 작은 사나이의 심문을 이미 끝낸 것 같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우울해 보였다. 작은 사나이가 잠자코 앉아 자기 쪽 을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수첩에 적어놓은 것은 음미하면 서 방 한 가운데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 그래서? " 랜드 경감이 물었다. " 네 " 하고 경감보는 대답했다. " 꼭 한 가지 납득이 안 가는 접이 있습니다. 사실을 종합해서 말씀드리자면, 여기에 지금까지 아무 이상도 없이 인생을 살아왔으며 모든 일을 순조롭게 해결해 온 한 사나이가 있는데, 그 사나이가 갑자기 또 한 사람의 자기, 즉 다른 인격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즉 주 부분으로 분열해 버린 사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 정신분열증인가? " 하고 랜드 경감이 말했다. "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잫나. " " 그럴지도 모릅니다 " 하고 경감보는 대답했다. " 아뭏든 그 또 한 사람의 자기라는 것이 아주 나쁜 녀석으로 그가 이 살인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 " 모든 사실이 다 들어맞는 것 같군 ― " 하고 랜드 경감이 말했다. " 납득이 안 가는 점이 뭔가? " " 꼭 한 가지 ― 이름 확인에 대한 일입니다. " 경감보는 눈살을 찌푸리고 수첩을 들여다보더니 체스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작 은 사나이 쪽으로 향했다. " 당신의 이름은 뭐라고 했지요? " 작은 사나이는 비난하는 듯 차갑게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 아니, 그렇게 여러 차례나 말씀드렸는데 또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 작은 사나이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띠었다. " 나의 이름은 화이트(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