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의 밤 " 아니, 정신이 든 모양인데 " 하고 그 목소리는 말했다. 그는 떨어져내려갔다. 돌처럼 차갑고 캄캄한 허공에 두 팔을 버티고 떨어져내리면서 그는 몸을 힘껏 뒤로 젖히고 머리를 위로 발을 아래로 하여 공중제비를 돌았다. 아래 쪽에 무엇이 있는지, 최후의 순간에 그의 몸을 맞아 안을 나락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았다면 이처럼 심한 공포심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멍 속으로 곧장 떨어져내려가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 몸은 지향도 없이 아래쪽으로 떨어져내려가며 마음은 이 대항할 수 없는 힘에서 도망치려고 몸부림쳤다. " 잘됐어 ― " 그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마치 누군가가 그 구멍 밑바닥에서 조용 하게 기쁜 듯이 그에게 말을 건 것 처럼 들려왔다. " 잘됐어. " 그는 눈을 떴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아프게 스며들었다. 잠시 뒤 약간 뒤로 젖히는 듯 가늘게 눈을 뜨니 빙 둘러서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얼굴들이 흐릿하게 우유빛으로 번져보였다. 그는 등을 아래로 하고 누워 있었다. 거기 닿는 쿠션의 탄력으로 미루어보아 몸에 익 은 긴의자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유빛 안개가 차츰 걷히고, 동시에 당황하 게 되었다 …… 오랫동안 살아온 나이약의 그의 집, 여느 때와 다름없는 거실, 늘 벽 에 걸려 있던 위트릴로의 그림, 머리 위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샹들리에 불빛. 모든 것 이 ― 그렇다. 빙 둘러선 얼굴들까지 모두 전과 다름없다는 씁쓸한 생각이 그의 가슴 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나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눈물에 젖어 반짝반짝 빛났으며 ― 그녀는 언제 나 수도꼭지를 틀 듯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 ― 그녀의 손은 그의 손을 꼭 쥐고 있어 손가락이 바보처럼 감각을 잃었다 모성적인 애정이 지나친 한나 ― 더구나 그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상대라고는 남편 하나뿐이다. 잎담배를 씹고 있는 것은 에이벨 로스이다 ― 이런 때인데도 여전히 그 지독한 잎담배를 입에 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5년 이래 처음으로 성공한 흥행을 여기에서 망치게 된다면 큰일인 것 이다 …… 언제까지나 시골티를 벗지 못하는 벤 세이어와 할리에트, 그리고 제이크 홀, 토미 맥그완 …… 모든 것이 전과 똑같은 지겨운 느낌이 드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처음 보는 얼굴도 하나 섞여 있었다. 붙임성있는 표정을 짓고, 머리는 마치 일본의 무사처럼 머리 주위에 조금 남아 있는 백발을 제외하면 기분좋을 정도로 깨끗 이 벗어진 뚱뚱하고 자그마한 사나이였다. 그는 마일즈와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손가락으로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어떻습니까, 기분은? " 하고 그는 물어보았다. " 글쎄, 어떻게 된 건지 …… " 마일즈는 한나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러나 도중에 늑골 사이에 달군 바늘을 비틀어박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 었다. 한나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안타까와할 겨를도 없이 낯모르는 손님이 우악스러운 손가락으로 그곳을 더듬자 그 손가락 끝에서 통증이 봄눈녹듯 사라졌다. " 보십시오 " 하고 그 사나이는 말했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마일즈는 두 다리를 구부리고 힘을 주어서 긴의자에 일어나앉았다. 한 번 두 번, 크 게 숨을 쉬고 난 다음 그는 말했다. " 어쩌면 심장이 마비되지 않았나 생각했지요, 아까 당했을 때는 ― " " 아아 ― " 하고 그 사나이는 말했다. " 당신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설명해 주지 않아 도 잘 압니다. 그러나 심장과는 절대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모 든 것이 상대방에게 통한다고 생각하는 듯 그는 천천히 덧붙여 말했다. " 나는 매스, 빅터 매스 박사 입니다. " " 정말 하느님께서 돌봐주신 거예요. " 한나는 숨차하며 말했다. " 매스 박사님이 발 견하고 데려다주셨어요, 밖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마치 천사처럼 말이에요. 만일 이분 이 그곳을 지나가시지 않았더라면― " 마일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빙 둘러서서 걱정스러운 듯이 자기를 들여다보고 있 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말투에 힘을 주어 설명을 요구했다. "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정신을 잃은 원인이 뭡니까? 심장인가요? 뇌일 혈? 아니면 건망증? 나는 한두 살 먹은 아이가 아니므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해 서 그 말을 믿고 안심하지는 않습니다. " 에이벨은 잎담배를 문 채 왼쪽 입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굴렸다. "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덮어놓고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추운 바 깥에서 15분이나 쓰러져 있었으니 본인으로서도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겠지요. 어떻 습니까, 박사님, 우선 마음이라도 놓게 건사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 뭐, 혈압 검사 같은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러면 본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 마음놓을 수 있겠지요. " 마일즈는 이 말과, 그리고 나아가서 그 말을 한 에이벨 로스에 대해 그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가슴 속에서 기분좋게 씹었다. " ― 분명 그렇겠지, 에이벨. " 마일즈가 말했다. " 아마 극장 예매권은 앞으로 16주 일분이나 팔려서 매일 밤 SRO (Standing Room Only의 약자. 입석 외는 매진)의 푯말 이 나붙을 걸세. 우리는 마침내 보물산을 발견한 거지 ― 문제없이. 나는 삽이나 다름 없는 존재야. 매주 여덟 번 내가 거르지 않고 무대에 서면 보물이 우르르 쏟아져나올 걸세! " 에이벨은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 여보게, 마일즈, 자네의 그 말은 ― " " 뭐라고? " 마일즈는 되물었다. " 내 말이 어떻다는 건가? " 벤 세이어는 천천히 무게있게 고개를 내저으며 점잖게 말했다. " 마일즈, 그처럼 시비하듯이 말하는 태도는 좀 삼가 주게. 자네는 이야기를 좀더 침 착하게 ― " " 조용하시오! " 매스 박사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여러분 조용히 하십시오! " 그는 모두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 한 가지 여러분들에게 해둘 말이 있는데, 즉 나는 임상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정신 병리학 분야로 당신들이 요구하는 검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지만, 나로서도 그런 것을 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게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오웬 씨를 위해 말해 두겠는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그런 검사를 할 필요는 조금 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보증합니다. " " 그리고 나는 매스 박사님의 말을 믿습니다. " 마일즈는 조심스럽게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그러나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 에서는 전혀 염려하는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 박사님, 상관없으시다면 우리와 함께 놀다 가십시오. 저기 뭐가 준비된 모양입니다. 요리는 보증할 수 없지만 술만은 아주 고급품입니다. " 마일즈의 권유에 의사는 얼굴 가득 토실토실 살찐 어린이같이 순진한 미소를 띠었다. " 그거 참, 고맙군요. " 그는 곧 손가락질한 쪽으로 걸어갔다. 에이벨이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의사가 아직 음식을 차려놓은 곳까지 가기도 전에 입에 문 잎담배의 불이 상대방 귀에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선 것을 알았다. 에이벨은 매주 세 시간씩 정신분석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는데, 말솜씨가 좋고 잘 먹어 살찐 파 크 거리 개업의의 진료소로 찾아가 조금도 앞뒤가 맞지 않는 자각 증상을 거침없이 지껄이게끔 되었다. 가엾게도 매스 박사가 에이벨 녀석의 끈질긴 말상대가 되었군 하 고 마일즈는 심술궂게, 그러나 한편 동정심을 가지고 생각했다. 긴의자 둘레에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흩어지고, 이제 한나만 남았다. 그녀 는 갑자기 힘주어 마일즈의 팔을 붙잡으며 다짐했다. " 정말 괜찮겠어요? 만일 어디 몸이 이상하거든 곧 나에게 말씀하세요! " 몸이 이상하거든 말하라고? 그녀가 이런 식으로 그를 붙잡아 몸 가까이 끌어들이려 고 할 때마다 그는 마치 거미가 자기를 향해 실을 뽑아 얽어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필사적으로 저항해야만 했다. 처음에 사귈 때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빛나기만 했고, 이 여자하고 라면 지금까지 알았던 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가 전개될 줄 알았다. 함께 일어나고, 함께 먹고, 함께 지껄이는 끝없는 결혼생활도 이처럼 아름답고 사랑스 러운 여자하고라면 견뎌나갈 수 있으려니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그 녀의 아름다움은 역겹고, 애정도 짐스러우며, 변함없는 일상생활은 무거운 부담이 되 고 말았다. 그는 한 15분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 동안에 헛소리를 하여 릴리와의 사이를 눈치채게 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괜찮다. 느닷없이 말하여 한나 의 마음을 괴롭히느니, 차라리 그런 헛소리를 듣고 거기에 맞설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해주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한나에게는 큰 충격이 될 것이다. 그때의 광경이 눈 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것은 결코 기분좋은 정경이 아니었 다. 그는 어깨를 움츠려서 한나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 아무 데도 이상하지 않아. " 그는 뒤이어 말을 계속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 다. " 내가 좀 조용히 쉬고 싶다고 생각할 때면 언제나 당신이 이렇게 파티를 여니 정 말 곤란한 일이야. " " 내가요? " 한나는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 내가 이런 파티와 무슨 관계가 있느 냐고 말씀하실 작정인가요? " " 모든 것이 다 그래,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그 여주인인 척하고 팔방미인이 되려는 버릇 때문이오. " " 손님은 모두 당신 친구분들이에요 " 하고 한나는 말했다. " 내 친구가 아니에요. " " 그럼, 말하겠는데, 당신도 1년이나 나하고 부부 생활을 했으니 이젠 저 사람들이 나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쯤은 깨달았을 거야. 나는 지금까지 벌써 백 번도 넘게 다른 표현과 표정을 써서 저런 사람들은 딱 질색이며, 그 중에서 단 하나도 좋아하는 사람 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일러주었소. 저 사람들은 내 친구가 아니오. 1중일에 단 한 번 저 사람들에게서 풀려나서 숨을 돌리려고 할 때 일부러 파티를 열어 불러들여서 음식 을 제공하고 접대할 의무가 나에게 있단 말이오? " "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 한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 당신이 이곳에 집은 산 것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고 싶었 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의 당신은 ― "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또 자꾸만 얽어매어온다. " 알았어! " 하고 그는 소리쳤다. " 알았어, 이제 됐어! " 이제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가 도망친 다음 이 여자는 직성이 풀릴 때 까지 매일 밤이라도 파티를 열면 될 것이다. 이런 집 따위는 불을 질러 태워버리든 어 쨌든 그가 알 바 아니다. 그런 것은 일체 그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매주 월요일 에서 토요일까지 아무 변화도 없는 무대 출연, 집에 돌아오면 무미한 시골 신사의 일 상생활, 게다가 릴리의 표현을 빌면 센트럴 파크에는 <지겨울 정도로> 나무가 잔뜩 우거져 있다. 모든 것이 다 이만하면 된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여행 가방을 들고 여기서 도망쳐나갈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러니저러니 시끄럽게 굴 필요도 없다. 보브와 엘리자베드 글레고리 두 사람은 1주일에 6일 동안 라디오의 마이크 앞에서 얼굴을 마주대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듯 멍하니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 세이어는 제이크 홀을 향해 이번 연극의 마지막 장면 연기가 얼마나 힘든 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에이벨은 매스 박사에게 뭔가 정신 병리학에 대한 견 해를 말하고 있었다. 박사는 한쪽 손에 높다란 잔을 들고 또 한쪽 손에는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다. " 아아, 그거 재미있는 현상이군요 " 하고 박사는 말했다. " 그거 참, 재미있는 …… " 마일즈는 그들 옆을 지나 식기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사람들의 이야깃소리에 귀를 막고 더블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리고 잔뜩 찌 푸린 얼굴로 잔을 노려보았다. 그 술은 마치 물처럼 아무 맛도 없었다. 요전에 고용한 이 고장 사람인 하인이 청소하다가 술장 열쇠를 발견하여 그 병을 거의 비우다시피한 다음 마신 양만큼 물을 부어놓았을 것이다. 바보 같은 녀석! 훔쳐 마셨으면 마셨지, 이런 식으로 하여 남은 술까지 못 먹 게 하다니 …… 에이벨이 뜻있는 듯 마일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나는 지금 매스 박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던 참일세 ― 만일 하룻밤 정도 시간이 있다면 <매복>의 일등 좌석을 잡아주겠다고. 만일 마일즈 오웬이 연기하는 <매복>을 보지 않으면 아깝게도 고금의 명배우의 연기를 놓치고 마는 것이 된다고 말일세. 자네 는 어떻게 생각하나, 마일즈? " 마일즈는 다른 병을 집어들어 마개가 따졌나 어떤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에이벨을 흘끔 쳐다보고 난 다음 술병을 조심스럽게 살짝 내려놓았다. " 모처럼 묻는 말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도 나로선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 네, 에이벨. 실은 그 일로 자네에게 할 말이 있는데, 말이 나온 김이니 이제야말로 이 야기를 꺼낼 더없이 좋은 기회인지도 모르겠군. " " 이야기가 있다고? " 에이벨은 유쾌한 듯이 말했으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불 안한 빛이 눈에 떠오르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한 표정이 얼굴이 나타났다. " 비밀 이야기일세, 에이벨. " 마일즈는 흥미있는 듯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매스 박 사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박사님, 에이벨과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 " "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 박사는 재빨리 대답했다. " 나는 이것만 있으면 ― " 하고 그는 잔을 들어올려보였다. " 오웬 씨, 분명히 당신이 자랑한 것처럼 훌륭한 술입니다." " 다행이군요 ― " 마일즈는 말했다. " 그럼, 에이벨, 잠깐 이리 와보게나. " 그는 사람들은 헤치며 에이벨을 데리고 방을 가로질러서 서재 쪽으로 갔다. 서재의 문을 닫고 전기 스탠드의 스위치를 켜자 텅 비어 있던 방 안의 축축한 냉기가 갑자기 뼛속으로 스며들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작과 불쏘시개를 넣어 둔 난로앞에 앉아 그는 줄곧 성냥을 그었다. 이윽고 불이 붙어 나무가 탁탁 튀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서 깊이 빨아들였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듯이 그 담배를 들여 다보았다. 전혀 맛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확인하듯 혀로 양쪽 입술을 핥아보았다. 처 음에는 술, 이번에는 담배가 …… 그는 생각했다. 과연 매스 박사는 프로이드 학파의 정신 분석에 조예가 깊은 명의 일지도 모른지만, 월요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지식 한 개업의에게 가서 진찰을 받아봐야지 …… 이렇게 단번에 맛을 모르게 되다니, 불쾌 한 일이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말해 봐야 불쾌함을 떨 쳐낼 수는 없었다. 에이벨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 보게나, 저기 저 안개를. 언젠가 <희극>의 흥행으로 런던에 갔던 그날 밤에도 역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그때 나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안개라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오 늘밤의 안개에 비하면 그것은 안개라고 할 수도 없겠군. 보게, 삽으로 깎아내는 듯한 느낌이야. " 안개는 마치 형태가 있는 것처럼 창가로 밀려와서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유리창을 향 해 계속 거무스름한 연기의 주름을 밀어붙였다. 그 주름이 닿은 부분에서는 물방울이 유리에 줄을 그으며 떨어졌다. " 저 정도의 안개라면 여기서는 1년에도 여러 번 있어 " 하고 마일즈는 초조한 목소 리로 말했다. " 나는 안개 이야기를 들으려고 이리로 데려온 게 아닐세. " 에이벨은 창가에서 떠나 어색하게 마일즈 앞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 그야 그럴 테지. 그래,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마일즈? " " <매복>이. " 마일즈는 대답했다. " <매복>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일세. " 에이벨은 낙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어디가 마음에 안드나? 프로그램? 자네 이름은 제일 큼 활자로 나와 있을 텐데. 선 전이 부족하다는 건가? 자네가 언제라도 시간을 정해주면 텔레비전에든 라디오에든 좋아하는 프로에 출현시켜주겠네. 첫날 밤에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 자네가 시 간만 정해주면 나의 힘이 미치는 한 그 계약을 주선해 주겠다고. " 마일즈는 문득 자기가 그 자리의 움직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느 때 같으면 이런 경우 에는 틀림없이 소름끼치는 불쾌감을 느꼈을 텐데 …… " 이상한 일이군. 자네는 지금 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 아니 면 내가 듣지를 못했나? 아무리 둔한 자라도 지금 말한 자네의 짤막한 이야기를 알아 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 " 에이벨은 힘없이 의지등받이에 기대어 환자처럼 한숨을 쉬었다. " 아아, 역시 이야기는 그거였군. 지금까지 나와 계약한 배우에게 지불한 최대 금액 의 두 배를 주어도 자네는 틀림없이 이 이야기를 꺼내리라 생각했네. 알았네, 조건을 말해보게! " " 모처럼이지만 ― " 하고 마일즈는 대답했다. " 조건은 없네." " 없어? " " 전혀 없어. " "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 에이벨은 비난하듯 말했다. "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 마일즈는 미소지었다. "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네, 에이벨. 다만 도망치고 싶을 뿐이야. 이번 연극에 서 빼주게. " 마일즈는 에이벨이 당황하는 것은 전에도 몇 번 본 일이 있었다. 그가 어떤 동작을 할 것이지 손놀림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언할 수 있었다. 얼굴이 가면처럼 무표정해지 고, 한쪽손으로 성냥을 긋는다. 그 켜진 성냥불에 엄지손톱이 빛나고, 빨아들이는 잎담 배의 끝이 빨갛게 타고, 어두운 벽에 닿은 성냥불이 크게 흔들린다 …… 에이벨은 아 직도 자기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이윽고 에이벨이 손을 한 번 크게 흔들자 성냥이 탁 꺼졌다. 에이벨은 그 꺼진 성냥개비를 아직 버리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 끼워 앞뒤로 굴리며 말했다. " 본디 자네는 말기를 잘 알아듣는 사람일세, 마일즈. 이 어리석은 장난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취향이 아니겠지? " " 나는 빠지겠다고 했네, 에이벨. 오늘 밤에도 억지로 했네. 내일을 일요일이니까 월 요일 밤에 막이 열릴 때까지 하루의 여유가 있는 셈이지. 그 동안에 다른 배우에게 연 습을 시키면 될 걸세. " " 누가 대역을 맡나? " " 아마 제이 웰커라면 다른 일을 제쳐두고 덤벼들 걸세. 녀석은 전부터 그럴 속셈으 로 5개월 동안이나 내 역할의 대사를 연습하고 매일 밤 내가 발목이라도 삐기를 기도 하고 있었다네. " " 제이는 1주일을 연습해도 <매복>을 해낼 수 없네. 그것은 자네 자신이 가장 잘 알 고 있지 않나? 자네 말고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배우는 없어. 자네도 그 점을 잘 알 고 있을 걸세. " 에이벨은 바짝 다가앉으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천천히 양쪽으로 내 젓고 있었다. " 그것을 알면서도 자네는 이런 말을 하는 걸세. 자네는 미국 연극 사상 가장 훌륭한 공연을 엉망으로 만들고 죽이 되든 밥이 되는 모르겠다고 말할 참인가? " 마일즈는 심장이 마구 뛰고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잠깐만, 에이벨, 욕은 나중에 해주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분명히 알 것이 꼭 한 가지 있네. 자네는 아직 내가 왜 빠지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한 마디도 들어보려고 하 지 않는군. 나는 아까 졸도했네. 어쩌면 나는 앞으로 한 시간 안에 죽게 될 상태에 놓 일지도 모르네. 그래도 자네는 자네의 공연을 계속하는 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 겠지! 자네는 사물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 일이 있나? " " 어떤 식으로 말인가? 나는 의사가 이젠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이 귀로 똑똑히 들었 네. 그 이상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전국 의사회의 높은 분들로부터 선서 공술서라 도 받아오라는 말인가? " " 그럼, 자네는 내가 장난삼아서 빠지겠다고 말한 줄 아나? " " 서로 농담은 그만두도록 하세, 마일즈. 자네는 5년 전에 밸로우에게 지금과 똑같은 태도를 취했네. 그리고 골드슈미트에게도, 그리고 불과 1년 전에는 하우이 플리먼에게 도 같은 일을 했지. 나는 잘 알고 있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자네는 이번 <매복>의 주역을 맡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자네를 놓친 자들은 자네를 조종 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며, 자네가 없으면 연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고 하게 믿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네. 그러나 역시 나의 오산이었어. 나는 큰 바 보야. 자네를 놓친 자들은 입을 모아 나에게 충고했네 ― ' 그만두는 게 좋아. 그 사람 은 분명히 역할도 잘 해내고 곧잘 하지. 그러나 갑자기 머리가 돌아버린단 말이야' 라 고 말일세. 머리가 돌아버린 거야, 마일즈. 자네는 변덕이라고 했지만, 내 식으로 속되 게 말하면 머리가 돈 거야.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잖은가! " 에이벨은 숨을 쉬었다. " 다만 나와 그들과의 차이는, 그때까지 한 번도 햇볕을 본 일이 없어 깔보았던 <공연 중 탈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출연 계약을 자네로부터 내가 받아놓은 점일세. 그 계 약을 어기고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건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주지 않겠나? " 마일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괴로운 듯이 말했다. " 알았네, 생각해 보고 있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들어주겠나? " " 듣지 않고 어쩌겠나? 제발 부탁일세. " " 나는 매주 여덟 번 무대에 서고 있네, 에이벨, 1주일에 여덟 번. 나는 같은 대사를 지껄이고, 같은 동작을 하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 그것을 벌써 5개월 동안이나 계 속해 왔어. 이만큼 계속된 것만도 자네로선 최대의 성공인데, 만일 줄곧 이런 식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면 자네는 아마 5년이라도 이대로 계속시키겠지. 똑같은 것을 끊임 없이 되풀이하는 것 ― 이것은 악몽과 같은 두려움일세. 그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은 자 네가 고루한 속인이기 때문일세!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아. 일시적인 흥분이 사라지고 나면 감옥 속이 있는 듯한 괴로움이 있을 뿐일세. 감옥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죄수에 게 도망치고 싶어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 <일생 동안 감옥에 있어라. 그러다 보면 좋 아질 것이다> ― 이렇게 말할 참인가? " " 감옥이라고! " 에이벨을 소리쳤다. " 지금 이 나라에 자네가 갇혀 있는 감옥에 들어 가기 위해서라면 오른쪽 눈을 빼어서 바쳐도 좋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보고 싶군. 호강에 겨우면 잠자코나 있게! " " 내 말을 좀 들어보게, 에이벨. " 하고 마일즈는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진지 하게 호소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날 밤 열 번, 열 다섯 번, 아니 스무 번이나 되풀이하 여 연습했던 일은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 그때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알겠나? 나로선 마치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같았네. 끝도 없이 내사와 연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네. 내가 말하는 감옥이 란 바로 이런 일을 말하는 걸세, 에이벨. 같은 것을, 배경도 같은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걸세. 그것을 해야 하는 당사자 는 함부로 화풀이조차 할 수 없네. 관객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때문일세. 알아주겠 나? 그것을 안다면 내가 <매복>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 " " 알았네! " 하고 에이벨은 말했다. " 그런데 나의 금고 속에는 그 <공연 중 탈퇴를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계약서가 소중히 보관되어 있네. 자네는 지금 무대 연습의 반 복이 지옥의 괴로움과 같다고 말했는데, 그 견해가 배우 조합에서도 통과되는지 어떤 지 시도해보게. 나로서는 보나마나 조합 심판 위원의 생각은 자네 의견과 조금 다르리 라고 생각하지만 말일세. " " 위협적으로 나와도 소용없네, 에이벨. " " 위협이라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나는 계약 위반으로 자네를 소송하겠네, 진 정이야, 마일즈! " " 그것도 좋겠지. 그러나 환자를 상대로 하여 소송에 이기기는 어려울걸. " 에이벨은 냉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자네는 틀림없이 그 길로 도망칠 줄 알았네. 그러면 나는 환자를 혹사하는 파렴치 한이 되는 거겠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네. 자네는 현관 앞에서 잠깐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의 사가 자네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네. 이것을 본 증인을 20면이나 있네. 잘 꾸몄군, 마일즈. 그러나 멋대로 구는 자네의 주장을 통과시키려면 그 런 속들여다보이는 잔재주 와 흔해빠진 돌파리 의사로는 좀 부족할걸. " 마일즈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 이것을 나의 트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네 자유겠지만 ― " " 아니, 무엇이 트릭인가요? " 하는 할리에트 세이어의 유쾌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 려왔다. 할리에트와 벤 두 사람이 문 앞에 서서 호기심에 찬 태도로 마일즈 쪽을 보고 있었 다. 마르고 키가 큰 벤이 여자아이같이 나약한 할리에트 옆에 붙어 서 있었다. 아주 어울리지 않는 한 쌍 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탐색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 아주 친한 듯이 구는 그 촌스러 운 꼴은 마치 손톱으로 석판을 긁어대듯이 마일즈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였다. " 무슨 일이지요? 굉장히 흥분하신 것을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인가 보지요? " 하고 할리에트가 말했다. " 어서 사양 마시고 계속하세요. " 에이벨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일즈를 가리키며 말했다. " 말은 그렇게 해도 자네들 도 뭐라고 할 말이 없을 걸세. 다시는 말하지 않겠네. 잘 들어보게. 여기 있는 이 사나 이는 두 번 다시 <매복>의 무대에 서고 싶지 않다는 걸세. 자네들 둘이서 할 수 있다 면 이 사람의 마음을 돌려보게! " 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의아한 얼굴로 마일즈를 쳐다보았다. 마일즈는 그 모 습을 보고 언제나처럼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매복>의 대본에 있는 재치 있는 대사 몇 줄쯤은 생각해 낼 재주꾼인 벤이 막상 자기가 사건에 휩쓸리게 되면 어 째서 이토록 반응이 느린지 모르겠다. "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데 " 하고 벤은 말했다. " 자네의 출연 계약은 <공연 중 탈퇴 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지 않나? " " 그렇지 " 하고 에이벨은 비웃었다. " 그러나 그는 환자일세. 쓰러져 정신을 잃었지 ― 당신도 보지 않았소! " 할리에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네, 하지만 설마 ― " " 그렇고말고 " 하고 에이벨은 말했다. " 이 사나이는 정당히 연극을 꾸미려 했던 걸 세. 돈도 잔뜩 들어왔겠다,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통에 이름도 팔렸겠다 ― 그러니 남 이야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겠지. 그뿐이라네. 참 편한 신분이지. " 마일즈는 손으로 에이벨이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 좋아, 자네는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대충 다 한 모양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묻지. 만 일 <매복>이 정말 좋은 연극이라면 나라는 단 하 사람의 배우가 그만뒀다고 해서 망 쳐지지는 않겠지? 자네는 손님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자네의 인색한 연극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손님은 다만 그 연극에 나오는 나의 연기 를 보려고 오는 걸세. <매복>이건 <캬캬>건 내가 무대에 서기만 하면 손님은 오는 걸 세! 본디 일인극의 주인공을 맡은 사람이 싫다고 해도 강제로 시킬 권리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 " 아니에요, <매복>은 좋은 연극이에요! " 하고 할리에트가 소리쳤다. " 당신이 주역 을 맡은 연극 중에서 가장 멋 있어요. 만일 그것을 모르신다면 ― " 마일즈는 이제 이성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다 시키면 될 게 아니오! 나로선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마음편해! " 벤은 두 손을 내밀어 상대방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 그러나 마일즈, 우연히 자네가 맨 처음 그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관객들의 머릿속 에는 자네가 이 연극의 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겨 이제 와서 대역으로 바꿀 수는 없네. 게다가 나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게, 마일즈. 나는 15년 동안이나 연극을 써 왔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빛을 본 걸세 …… " 마일즈는 일어서서 천천히 상대방 앞으로 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이런 바보 ― 자네에게는 한 조각의 자존심도 없나? " 그는 서재를 나와 돌아선 채 문을 쾅 닫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여기저기 떼를 지어 서서 저마다 지껄여대고있었다. 그 목소리가 파도처럼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으나 이야기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그리고 보랏빛 담배연기가 바닥과 천장 중간에 죽 깔아놓은 투명한 깔개처럼 나 부끼고 있었다. 누가 피아노 위에서 술잔을 엎었구나 하고 마일즈는 생각했다. 그 술 방울은 피아노의 마호가니 판에 줄을 긋고 아래로 흘러내려서 윌튼 융단에 얼룩을 남 겼다. 토미 맥그완과 최근에 생긴 정부 ― 보나마나 노마니 알마니 하는 이름이겠지 ― 인 금발 여인은 마룻바닥에 앉아서 레코드 판을 고르며 곧 쓰러질 듯이 높이 쌓아 놓았거나, 아니면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휙 옆으로 집어던졌을 것이다. 식탁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빈 접시가 몇 개나 뒹굴어 있고, 남은 것 이라고는 빵부스러기 정도였다. 흥, 오늘 밤의 파티도 대성황을 이루었군 하고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방에 가득차 있는 열기와 흥분도 마일즈가 서재에서 묻혀온 한기를 씻어 버릴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을 마구 비벼댔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알자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자기 몸에 정말 이상이 생겼다면 어떻게 될까? 릴리는 병든 남 자 옆에 붙어서서 간호원 노릇을 할 만큼 기특한 여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 를 나무랄 수는 없다. 아니, 상대방이 릴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그럴 것이 다. 그렇다면 의사에게 진찰받는 일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만일 어딘가에 이상이 생 겼다 하더라고 그것을 알릴 수는 없다! " 뭔가 걱정되는 일이 있는 모양이지요? "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매스 박사였다. 박사는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대서듯 뒤로 젖힌 자세로 서서 두 손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마일즈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변변치 못한 학자가 현미경으로 벌레를 검사하는 듯한 눈초리로 보고 있군)하 고 생각하니 마일즈는 화가 치밀었다. " 아니오 " 하고 마일즈는 부인했다. 그러나 좀더 좋은 생각이 나서 다시 고쳐 말했 다. " 실은 잘 보셨습니다. " " 그래요? " " 아무래도 정상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아까 괜찮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 " 몸이 말입니까? " " 물론이지요! 당신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정신이 이상하다느니 뭐 그런 말을 할 생각이십니까? " " 나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소. 오웬 씨, 당신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거지요. " " 그래요? 그럼, 여쭤보겠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자신만만합니까? 진찰도 하지 않고 엑스레이도 찍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토록 쉽게 <문제없다> 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으로서는 몸에 별탈이 없다는 데서 그치고 있지만, 만일 내가 당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돈이 드 는 복잡한 정신분석을 부탁하거나 또는 ― " " 그만해 두시오, 오웬 씨 ― " 매스 박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은 지금 무언가 곤란한 일에 쫓기고 있어 예의범절을 차릴 여유가 없다고 보고 참아두겠소. 그 러나 너무 지나친 공상을 해서는 곤란합니다. 나는 정신분석을 하지는 않소. 하겠다고 말한 일도 없소. 나는 병의 치료 같은 것은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항상 상대로 하는 것은 이미 무슨 치료를 받아도 듣지 않는 상태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이 지요. 그리고 그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학구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 " 아, 아니! " 마일즈는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 째서 이렇게 되는지 나 자신 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원인은 이 파티인 것 같습니다. 나는 파티를 굉장히 싫어하니까요. 언제나 싫은 일뿐입니다. 아니, 원인이야 어째되었 든 그 결과로서 빚어진 불쾌함을 당신께 퍼붓다니,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 박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습니다,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으면 됐지요. " 그는 신경질적으로 대머리를 쓰 다듬었다. " 그밖에 또 한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비난하는 것으로 받 아들일지도 모르므로 ― " 마일즈가 소리내어 웃었다. " 말씀하십시오. 내가 무례하게 굴었으니까, 만일 그렇대 해도 피장파장이지요. " 박사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서재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 말하기 거북한 일인데, 오웬 씨, 저 방에서 하신 이야기를 듣고 말았습니다. 나는 일부러 엿듣는 그 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 뭐랄까요, 상당히 큰 목소리로 떠들었으 니까요. 그래서 여기서도 저절로 듣게 되었지요. " " 그래서요? " 하고 마일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당신의 현재 상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웬 씨, 그 토론 속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신은 도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른바 고루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느낌, 거기서 벗어나려 하고 있는 겁니다. " 마일즈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 <이른바>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달리 할 말이 있습니까? " " 나보고 말하라면 <책임>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의 한 가지 행위는 대개 그 사람이 그때까지 살아온 생애를 말해 주고 있지요. 따라서 지금의 예로 판단해 보면, 당신은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종류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일로 일생의 태반을 허비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웬 씨, 아무리 멀리, 또 아무리 빨리 도망쳐도 당 신은 머지않아 또 같은 문제로 괴로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놀라시겠지요? " 마일즈는 주먹을 쥐었다폈다했다. " 그렇습니다. " 하고 그는 대답했다. " 그러나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습니다. " " 그게 당신이 잘못 생각한 점입니다, 오웬 씨. 당신이 연극 속의 자기 역할을 팽개 친다면 그 연극에 관계있는 모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들과 관계 가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여자들과의 교제에 있어서도 당신은 수없이 편력을 되풀이해 왔겠지요. 그러나 상대자인 여자도 혼이 빠진 인형은 아닙니다. 그녀들도 각기 다르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을 다치게 되기도 하고 남을 다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합니다. 기분을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오웬 씨.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돌 을 물에 던지면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당신이 말하는 이른 바 <고루한 일>을 되풀이한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 자기만을 적용시켜 생각하기 때문 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 책임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 " 그래, 처방전에는 뭐라고 쓰셨습니까, 박사님? " 마일즈가 물었다. " 혹시 도망치다 다른 사람의 발을 밟을까 무서워서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답답한 우리 속에 갇힌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라 ― 이렇게 쓰셨습니까? " " 도망친다고? " 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 당신은 정말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 세상에는 당신이 모르시는 일도 있습니다, 박사님. 어쨌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계 십시오. "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보고 있습니다, 오웬 씨.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이것은 순 수한 학문적인 견지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좁고 답답한 우리>라고 당신 멋대로 이 름붙인 그 속에서 도망치려고 버둥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굉장히 흥미있는 일이지요. 사실은 그 자신이 우리를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있을 뿐인데. " 마일즈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리려다 말고 힘없이 떨구며 비웃듯이 말했다. " 그렇다면 당신은 유황 벽으로 둘러싸인 옛부터 내려오는 무서운 지옥이 더 살기 좋 으니, 좋은 곳을 찾아 도망칠 생각은 아예 버리고 거기에 눌러살라고 하시는 거로군 요? " 박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 그렇소.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 " " 물론 믿지 않지요 " 하고 마일즈는 말했다. " 절대로! " " 사실을 말하자면, 오웬 씨 ― " 하고 박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 이 다시금 복스럽고 천진난 만한 어린아이의 얼굴로 바뀌었다. " 나는 당신이 내 말을 도저히 믿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말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었던 거지요. " " 순수한 학문적인 흥미에서 말입니까? " " 그렇소. " 마일즈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 어쨌든 당신이라는 사람도 상당한 분이시군요. 좀더 깊이 사귀고 싶습니다. " " 그럽시다. 그런데 오웬 씨, 누군가 아까부터 당신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군요. 보시오, 저기 문 있는 데서 …… " 마일즈는 박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같이 놀랐다. 그 는 오로지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말기를 바라며 급히 방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그 방으로 들어오려던 여자를 몸으로 막으며 밀어냈다. 그는 여자의 등을 벽 에 밀어붙이듯이 말고 화가 나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나무랐다. " 미쳤어? 그런 모습으로 이런 데까지 찾아올 만큼 생각이 없어? " 그녀는 몸을 틀어 상대방의 손을 뿌리치며 지금 붙잡혔던 깃 쪽을 손가락 끝으로 잘 매만졌다. 그 외투는 마일즈가 한 달치 급료를 다 털어 사준 것이다. " 어머나, 꽤 상냥한 인사군요. 그것이 댁에서 손님을 맞는 예의인가요? " 어두컴컴한 복도의 불빛에 비춰봐도 그녀의 모습은 남의 눈을 끌 만했다. 치차같이 샛노란 얼굴에 광대뼈가 불거져나왔으며, 입술이 원망스러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 녀는 화가 난 듯 곁눈질로 그를 쏘아 보았다. 그는 풀이 죽었다. "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하지. 그러나 릴리, 생각해 봐. 저 방에는 브로드웨이에 서 제일가는 수다장이들이 두 다스나 모여 있어. 당신이 진심으로 나와의 관계를 선전 하고 싶거든 선전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게 좋을 거야! " 그녀는 이미 자기가 승리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그렇게 생각지는 않아요.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천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딱 질색이거든요. 그리고 사실 우리는 그렇게 불결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 " ―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릴리. 그러나 좀더 머리 를 쓰란 말이야. 남의 입에 문을 해달 수는 없으니까. " " 하지만 똑같은 말을 지겨울 정도로 듣고 있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보세요. 벌써 두 달 동안이나 당신은 나에게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 조금도 실행해 주지 않았잖아 요? " 마일즈는 화가 나서 말했다. " 그것은 늘 말했듯이 모든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야. 지금 막 에이벨에게 연극에 서 빼달라고 말했다. 한나에게도 말할 생각이었는데, 당신도 보다시피 이렇게 혼잡하 니 틈이 있어야지. 내일 둘이 있게 되면 꼭 ― " " 그래요? 내일이라는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 당신이 생가하고 있는 것처럼은. " " 그건 무슨 뜻이지? " 그녀는 지갑을 찾아내어 그 속에서 봉투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상대방 코 끝에서 분명히 승리의 빛을 보 이며 그 봉투를 흔들어보였다. " 뜻은 이 속에 있어요. 외국으로 가는 배의 예약표가 두 장 들어 있어요. 출항은 내 일 아침. 어때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 " 내일이라고! 선실 예약계에서는 앞으로 한 달쯤은 도저히 빈 자리가 없을 거라고 했잖아! " " 그 풋나기는 다른 사람이 예약을 취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거예요. 이것도 겨우 두 시간 전에 왔어요. 이걸 받자마자 곧 이리로 뛰어오는데 그만 한 시간이나 걸렸어요 ― 안개가 이렇게 많이 끼지 않았으면 좀더 빨리 올 수 있었을 텐데. 내 차를 밖에 세워놓았어요, 마일즈. 무엇이든 좋으니 손 가까이 있는 물건만 가 방에 챙겨넣어요. 필요한 것은 나중에 배를 타고 난 뒤에 준비해도 되니까요. 난 당신 을 꼭 데리고 가야겠어요. 그러나 당신이 가든 안 가든 나는 내일 배로 떠나기로 결정 했어요. 내가 그렇게 결심했다고 해서 나무라지는 않겠지요? 둘 다 이러는 동안에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으니까요. " 그는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는 한나가 던지는 거미줄의 속박에 서 벗어나려고 했 다. 그러나 아무래도 다음 속박이 이미 그의 앞길에 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 다. 도망쳐라 ― 그러나 도망쳐 봐야 절대로 편히 발붙일 곳은 없을 것이라고 박사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팔에, 다리에, 몸 전체에 견딜 수 없는 무게를 느꼈다. 너무 도 망쳐 다닌 그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 자아 ― " 하고 릴리는 재촉했다. " 마음을 정하세요. " 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 차는 어디 있지? " " 길에, 바로 저 맞은쪽에 있어요. " " 좋아 " 하고 마일즈는 대답했다. "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어. 단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야해. 경정을 울려서 불러낸다든가 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마. 10분 뒤에 나갈 테 니까. 아무리 길어도 15분을 넘지는 않겠어. 내 물건은 이미 시내에 갖다두었으니까 부두로 가는 도중에 싣고 가면 돼. " 그는 현관문을 열고 조용히 여자를 밖으로 밀어냈다. " 차가 있는 곳까지 손으로 더듬어서 와야 해요. 이렇게 심한 안개는 처음이에요. " " 문제없어 " 하고 그는 말했다. " 당신은 그냥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돼. " 그는 문은 닫고 거기에 기대선 채 여전히 목께로 치밀어오르는 불쾌감과 싸웠다. 옆 방에서는 시끄러운 이야기 소리에 때마침 날카로운 웃음 소리가 섞여서 들려오는데다 음량을 잔뜩 올린 전축의 음악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일부러 그의 의지를 거스르고, 그를 혼자 내버려두려 하지 않고, 사고의 통일을 방해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취한 듯한 걸음으로 2층에 올라가 침실로 들어갔다. 야행가방을 꺼내어 닥치는 대로 손 가까이 있는 물건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셔츠, 양말, 옷장 위에 놓인 보석상자 속의 보석들 …… 그는 온 몸의 무게로 꾹꾹 눌러 되도록 많이 집어넣으려고 가방과 씨름을 벌였다. "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일즈? " 그는 눈을 들지 않았다. 상대방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나타나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 나는 나갈 거요, 한나. " " 그 여자하고요? " 멍하니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는 갑자기 상대방을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투명한 흰 피부와 대조적으로 파란 두 눈이 커다랗게 뜨여져 그를 쳐다보았다. 그 손은 무의식적으로 가슴에 드리워진 목 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와 결혼하기 1주일 전에 그가 5번 거리의 가 게에서 사서 선물한 은으로 만든 희극 가면의 모형이었다. 그녀는 의아한 듯이 말했 다. " 당신이 그 여자와 함께 복도에 계신 것을 보았어요.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에 요. 다만 의사 선생님께 당신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 " " 그만! " 하고 마일즈는 소리쳤다. " 당신이 나한테 변명할 필요는 없잖아! " " 하지만 역시 그여자지요? " " 그렇소. " " 당신은 정말 그 여자와 함께 가버리시는 거예요? " 그는 두 손을 가방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체중 을 온통 거기에 기대며 용기를 내어서 말했다. " 그래, 그렇게 되는 셈이요. " " 아니에요! " 그녀는 갑자기 열띤 목소리로 외쳤다. "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 은게 아니에요. 그런 여자는 당신과 함께 살 가치가 없어요. 당신 자신도 잘 아시잖아 요.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나밖에 없어요! " 그는 힘주어 가방 뚜껑을 눌렀다. 짤깍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이 잠겼다. " 한나, 이런 데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렇잖아도 편지로 이유를 써서 잘 설명할 예정이었 는데 ― " " 설명하신다고요? 모든 것이 다 지난 뒤에요? 자신이 한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 이었다는 것을 아신 뒤에요? 내 말을 들어주세요, 마일즈, 들어줘요, 부탁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 굉장히 큰 잘못을 저지르려 하고 있어요. " " 몸으로 직접 그것을 시도할 수밖에 없소, 나는. " 그는 일어났다. 그녀는 그 앞으로 바싹 다가와 그의 팔을 꽉 잡으며 속삭였다. " 내 눈을 봐요, 마일즈, 내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이처럼 당신이 버리고 간 뒤 아무 살 보람이 없는 세계에 혼자서 남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둘 다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 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 견딜 수 없다 바고 이것이다. 이렇게 꾸물대고 있다가는 도망칠 힘을 빼앗기고 만다, 칭칭 얽어매는 거미줄에. 그러나 그는 힘을 내었다 ― 짐승 같은 힘을 내어 상대방을 밀쳤다. 순간 그녀가 옷장 쪽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은 혼란된 시각으로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홱 돌아서서 다시 남자 앞으로 왔다. 그녀의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 었다. 그것은 여자의 손 안에서 차갑고 파랗게 빛났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손이 부들 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도 그 자신 못지않게 권총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고 그로테스크한 잔꾀인가! 이 생각이 그를 압도 하자 그것이 공포를 쫓아내고 대신 격렬한 분노를 치솟게 했다. 그는 소리쳤다. " 그 손 내려! " " 싫어요! " 그 목소리는 가까스로 들릴 정도로 작았다. " 당신이 가지 않겠다고 말하 지 않는 한. " 그는 여자 쪽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고 상대방은 거기에 따라 한 발자국 옷장 쪽으로 물러섰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살살 구슬러서 장난감을 빼앗으려 하자 대항하는 아이들 같았다. 그는 거기서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긴장된 무관심을 가장해 보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 한나. 배우가 무대 위에서 그런 연극을 하면 보수나 받지. 그러나 집 안에서 하는 연극은 한푼의 보수도 없어. " 그녀의 머리는 천천히 확실치 않은 움직임으로 좌우로 흔들렸다. " 당신 아직 내가 본심으로 이러는 줄 모르는 모양이지요. 마일즈? " " 으음, 그렇게 생각지 않아. "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올 것을 예기하 면서 견골 사이에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가방을 집 어들고 문을 향해 걸었다. " 잘 있소, 한나. " 그는 그녀를 더 이상 돌아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무릎이 후들거려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확인하면서 걸어 가야 했다. 계단밑에서 가방 을 한쪽 손에서 다른 손으로 바꿔쥐려고 섰다가 모자를 들고 외투를 팔에 걸쳐는 매 스 박사가 거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박사가 묻듯이 말했다. " 아니! 당신도 마침내 이 파티와 작별인사를 나눌 모양이군요, 오웬 씨? " " 파티에 작별인사라고요? " 그는 짤막하고 날카로운 웃음 소리를 내었다. " 아니, 악 몽에 인사를 하려는 참이라고 고쳐 말해 주십시오, 매스 박사님. 손님이신 당신께 이 런 말을 한다는 것은 좀 뭣합니다만, 당신이시라면 이 한 시간이 나에게는 한 발 한 발 진창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악몽이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내가 잘 있 으라는 인사를 하려는 것은 그 악몽입니다. 따라서 그로 인해 내가 기쁜 해방감에 취 해 있다고 해서 당신은 나무라지 않으시겠지요? " " 물론 " 하고 매스 박사는 말했다. " 기분은 잘 압니다. " 밖에서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 어디로 나가시는 길이라면 바래다 ― " " 아니, 걱정 마시오 " 하고 박사는 말했다. " 나는 그리 멀리 가지 않으니까. " 두 사람은 함께 현관으로 나가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안개가 와락 몰려와 차갑고 축축하게 두 사람을 감쌌으므로 마일즈는 코트 깃을 세웠다. " 날씨가 나쁘군요. " 하고 마일즈는 말했다. " 그렇군요 " 하고 박사가 맞장구를 쳤다. 그는 흘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한 말 앞서서 마치 바다코끼리가 눈구덩이 속으로 파고들어가듯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 그럼, 또 봅시다, 오웬 씨. " 마일즈는 그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가방을 집어들고 코 둘 레로 밀려드는 습기에 옷깃을 세우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았 을 때 그는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뼈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무서운 속삭임을 들었다. 그는 돌아다보았다. 예기했던 대로 그것은 한나였다. 아직도 권총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으며, 그 태도에 확고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 여보, 그만큼 말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시는군요, 마일즈. " 그녀는 아이들이 책이 라도 외듯 한 마디씩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 당신은 기어코 내 말을 듣지 않으셨 어요. " 그는 미친 듯이 두 팔을 휘둘렀다. " 그만두지 못해! " 그는 무엇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소리쳤다. " 잠깐만! " 그런 다음 그는 귀가 멍해지는 총소리를 들었다. 화약 냄새가 싹 퍼지면서 무거운 충 격을 가슴에 받자 차츰 세계가 시야 속에서 흐려져갔다. 그 속에 단 한 가지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비쳤다. 환영처럼 그 그림자는 차츰 가까이 다가와 거기 쓰러진 마일즈 위로 덮치듯이 쓰러졌다 ― 얼굴에는 냉혹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악마적인 표 정을 띠고 …… 매스 박사였다. 그 순가 마일즈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자기는 전에도 여기 이렇게 있었던 적이 있 다. 지금까지 수백 번이나 같은 일을 되풀이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끝없이 같은 일 을 되풀이해 갈 것 이다. 무대의 막을 벌써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한 번 올라갈 때면 무대 장치는 또 아까와 같은 파티 장면으로 바뀌어진다. 비극은 바로 그가 진실로 이 산 지옥에 유폐되어 있으며, 막이 내리는 순간에도 그것을 스스로의 연기로서 느끼는 동시에 끝없는 절망의 톱니바퀴 발판을 밟으며 몸부림치는 자기 운 명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박수 소리가 조용해지 자 동시에 진짜 암흑이 찾아와 모처럼 밝아졌던 연극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조작을 다시 무명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 다음 막이 열릴 때까지. " 아니, 정신이 든 모양인데 " 하고 그 목소리는 말했다. 그는 떨러져내려갔다. 돌처럼 차갑고 캄캄한 허공으로 두 팔을 버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