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의 흉사 아직 어렸을 때 나의 눈에는 벨람 저택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비쳤었다. 당 시 새로 지은 저택은 어디를 보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빅토리 아 왕조풍의 기와, 벽의 돋을새김, 색유리 …… 이러한 것들이 혼돈과 뒤얽혀 서 거대한 퇴적을 이루어 한눈에 도저히 전체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러나 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황혼 무렵 그 앞에 서 있는 내 가슴에 이미 지난 날의 인상을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번쩍거림은 퇴색한 지 이미 오래 였고 목조 부분도 유리도 금속도 모두 음울한 잿빛으로 변했다. 햇빛을 가리 기 위해 커튼을 쳐놓은 창문은 마치 지나가는 사람들을 흰 눈으로 흘겨보고 있는 것 같았다. 스틱으로 두드리니 셀리아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말했다. " 바로 손 밑에 초인종이 있는데 …… " 셀리아는 어머니의 장롱 속에서 꺼낸 것으로 보이는,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주름이 많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전보다도 더 캐롤린, 즉 죽은 그녀 어머니의 늘그막 모습과 닮아보였다. 뼈가 앙상한 몸매, 꼭 다문 입술, 이마 의 주름살이 다 펴질 정도로 꼭 잡아당겨서 묶은 머리에는 거의 빛깔이 없 다. 그녀는 잘못하여 건드리기라도 하면 누구든지 물어뜯을 것처럼 버티고 있는 강철로 만든 덫을 연상케 했다. " 나는 알고 있소, 셀리아, 초인종에 전선이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 나는 그녀의 앞을 지나 부지런히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다보지 않아도 그녀 가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난 듯 경멸하는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문을 거칠게 닫았다. 순간 음침한 어둠이 깔리며 메마르고 황폐한 냄새가 목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벽의 스위 치를 더듬었는데, 곧 셀리아가 날카롭게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안돼요, 불을 켜선 안돼요! " 나는 어둠 속에 허옇게 보이는 상대방을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 셀리아 ― 연극 같은 짓은 질색이오. " " 우리 집에는 불행이 있었어요. 당신도 아실 텐데요. " " 물론 " 하고 나는 대답했다. " 그러나 아무리 연극을 해보여도 나에겐 통 하지 않소. " " 남동생의 아내가 죽었어요. 나와 아주 친했던 사람이 …… " 나는 어둠 속에서 한 발자국 그녀 쪽으로 다가서서 스틱 끝을 그녀의 어깨 에 걸쳤다. " 셀리아, 당신 집안의 고문변호사로서 한 마디 주의를 해두겠소. 그야 사인 심문이 끝나고 당신은 완전히 깨끗한 몸이 되었소. 그러나 당신이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고인 추도의 말을 단 한 마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을 앞으로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 사실을 잘 알아둬야 하오, 셀리아. " 그녀가 갑자기 뒤로 물러섰으므로 나는 하마터면 스틱을 떨어뜨릴 뻔했다. " 그런 말을 하러 일부러 오셨나요? " " 나는 당신의 동생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여 온 것이오. 말이 나온 김에 말하겠지만, 기분 나빠하지 마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동안 당신 은 다 른 곳에 가 있는 것이 좋을 거요. 떠드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 " 그렇다면 당신이 그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 하고 그녀 는 큰 소리로 말했다. " 그 아이는 심문에 입회했어요. 그는 나의 혐의가 풀 려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했단 말이에요. 머지않아 나에게 품은 좋 지 않은 감정도 없어질 거예요. 하루라도 빨리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그 아이 를 가까이하지 말아요. " 그녀는 분노의 감정이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험악한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 기세를 꺾기 위해 몸을 홱 돌려 한 손으로 어두운 계단의 난간을 잡 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삐걱거리는 발밑의 계단 소리와 내기라도 하듯 커다랗고 기분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 만일 그 아이 쪽에서 숙여들면 나는 용서해 주겠어요. 처음에는 용서해 줄 수 있을지 어떨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깨달았어요. 너 그러운 마음으로 저의 갈길을 밝혀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인생 은 짧을 것이므로 그렇게 사람을 미워하면 안된다는 계시가 있었어요. 그러 니 그 아이 쪽에서 숙이고 들어오면 나는 용서해 주겠어요. " 계단 맨 위에 이르렀을 때 나는 갑자기 발이 걸려 하마터면 엎어질 뻔했다. 나는 허둥지둥 일어서며 소리쳤다. " 불을 켜지 않으려거든 셀리아, 하다못해 다니는 길이라도 깨끗이 치워두 는 게 어떻소. 왜 이런 것을 이런데 내동댕이쳐두는 거요? "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것은 모두 제시의 거예요. 괜히 찰리의 눈에 띄게 되면 또 생각이 나서 괴로와할테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 모두 밖에 내던져두는 것이 좋아요." 그러더니 그녀의 목소리가 경계하는 빛을 띠었다. " 하지만 당신은 그런 일을 찰리에게 말하지는 않겠지요? 그런 쓸데없는 말 을 하지 않겠지요? " 그녀는 도망치려는 나의 귓가에 대고 끈질기게 같은 말을 되풀이할 때마다 목소리가 한층 높아져, 가까스로 찰리의 방으로 들어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을 때는 마치 끽끽 울어대며 머리 둘레를 날아다니는 박쥐를 간신히 쫓 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찰리의 방도 빈틈없이 커튼을 쳐놓았다. 그러나 머리 위의 샹들리에에 켜져 있는 단 하나의 전구 빛이 한순간 나의 눈을 현혹시켰 으므로 두 번이나 다시 본 뒤에야 겨우 침대에서 몸을 내밀어 한쪽 팔꿈치를 눈 위에 올려놓은 찰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는 턱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으음 ― 누님은 당신에게도 불을 켜주지 않았군요? " " 그렇다네 " 하고 나는 말했다. " 그러나 길은 알고 있지. " " 그녀는 두더지 같답니다. " 하고 그는 말했다. " 어둠 속에서 내가 밝은 곳을 걸어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잘 돌아다니지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 한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 무서워서 기절할 테지요." " 아아 " 하고 나는 말했다. " 그녀는 몹시 깊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 그는 강치(물개과에 속하는 바다짐승)가 우는 것 같은 짧고 날카로운 웃음 소리를 내었다. " 그것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죄에 대해 겁을 먹고 있다는 증거지요. 지 금 그녀가 하는 말리란 자기가 제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며, 그런데 그 만 죽어서 얼마나 슬픈지 모른다는 ― 이 두 가지뿐입니다. 틀림없이 그녀는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모두가 믿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 고 있을 겁니다. 앞으로 두고 보면 알겠지요. " 나는 모자와 스틱을 침대 위에 집어던지고 그 옆에 코트를 놓았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어 상대방이 성냥을 찾아 불을 붙여주기를 기다렸다. 그의 손이 몹시 떨려 성냥불일 잘 켜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투덜투덜 입 속으로 자기에 게 화를 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천천히 연기 구름을 천장으로 뿜어내며 잠 자코 기다렸다. 찰리는 셀리아보다 다섯 살 아래일 텐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그 가 더 나이들어 보여 깜짝 놀랐다. 백발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어떤 구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볼은 멋진 온 백색 귀밑털로 덮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피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셀리아는 웬만해서는 휠 것 같지 않은 특특한 철 근 같은 등뼈가 한 가닥 있는데, 찰리는 서 있든 앉아 있든 마치 금방이라도 앞으로 쓰러지지나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 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입 양쪽으로 늘어진 수염을 비틀었다. " 내가 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지 알고 계시지요? " " 대개 짐작은 가네 " 하고 나는 말했다. " 그러나 일단 자네 입을 통해서 듣고 싶군. " " 솔직히 말하지요 " 하고 그는 말했다. " 셀리아에 대한 일입니다. 그녀에게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을 걷게 하는 겁니다. 감옥쯤으로는 안됩니다. 정의로운 법의 손이 그녀를 붙잡아서 교살하는 ― 그것을 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 타버린 담뱃재가 바닥에 떨어졌으므로 나는 구두로 그것을 정성껏 융단 속 에 비벼넣었다. " 자네는 심문에 입회했지, 찰리? 그 결과는 자네도 보았을 걸세. 셀리아의 혐의는 벗어졌네.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그녀를 죄에 빠뜨릴 수는 없 어. " " 증거라고요? 어떻게 그 이상의 증거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까? 계단 위에 서 두사람은 몹시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셀리아는 제시의 소매를 붙잡 고 밀어뜨려서 죽였습니다. 훌륭한 살인이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계단이 가까이 없었으면 닥치는 대고 권총이나 독약을 사용했을 겁니다. ― 그런 것 을 써서 살인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 나는 지루한 듯이 그 자리에 있는 가죽의자에 앉아, 타서 재가 된 잎담배 끝의 새로운 재를 들여다보았다. " 법률적인 각도에서 설명하지. " 나는 마치 작 익혀둔 공식을 외듯 단조로 운 목소리로 말했다. " 첫째, 목격자가 한 사람도 없네. " " 나는 제시가 비명을 지르며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하고 그는 내가 하는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말했다. " 그리고 내가 방에서 뛰어나가보니 마침 셀리아가 자기 방문을 쾅 닫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녀는 제시를 밀어서 떨어뜨려놓고 시궁쥐처럼 구멍 속으로 도망친 겁니다. " " 그러나 자네는 아무것도 본 게 없네. 셀리아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그 자 리에 없었으며, 또 달리 목격자도 없었다고 하더군. 즉 셀리아의 말과 자네의 말은 서로 같은 걸세. 아뭏든 자네는 목격자가 아니잖나. 단순한 사고였는지 도 모르는 일을 살인사건으로 꾸며낼 수는 없지. " 그는 천천히 머리를 내저으며 말했다. "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군요. 당신은 내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 지 않군요. 하기야 내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당장 이 방을 나가 다시는 보려 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 믿든 안 믿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닐세. 나는 다만 법률적인 견해를 말하 고 있을 뿐이니까. 동기는 어떤가? 제시를 죽여서 셀리아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나? 돈이나 재산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네. 그녀는 자네와 마찬 가지로 재정적으로는 완전히 자립하고 있으니까. " 찰리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내 쪽으로 몸을 내밀 었다. 그는 한숨을 쉬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 아아! 돈과 재산이 목표가 아니라 …… "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려보였다 . " 생각해 보게, 안 그런가? " " 그러나 당신은 아실 텐데요 " 하고 그는 말했다. " 목표가 바로 나라는 것을. 내가 나의 본심대로 인간답게 살려고 하면 언제나 반드시 방해꾼이 끼 어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처음에는 심장 발작이 있는 노인이었고, 그 어머니 가 돌아가시어 이제 겨우 자유롭게 살수 있나 보다 했더니 이번에는 셀리아 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어디를 가나 얼굴을 내미는 겁니다. 그녀에겐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 그 대역이 바로 나란 말입니다! " 나는 조용히 말했다. " 그녀는 자네의 누님일세, 찰리. 그녀는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 그는 아까와 똑같은 짧고 불쾌한 웃음 소리를 내었다. " 그녀는 담쟁이덩굴이 자기가 휘감은 나무를 사랑하듯 나를 사랑하고 있습 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독특 한 눈초리로 노려보면 나의 속에 있는 힘이 쑥 빠져버립니다. 제시와 알게 되기까지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왔지요 …… 제시를 집으로 데리고 와 우리 가 결혼했다고 셀리아에게 선언했던 날의 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 다. 제시를 계단에서 밀어떨어뜨렸을때의 그녀 눈초리가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 다. " " 그러나 자네는 심문할 때 그녀가 제시를 위협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지 않았나? " "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시가 날이 갈수록 우울해져 마침내 는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지내고 밤마다 잠자리에서 훌쩍이므로 왜 그 러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요 ― 그러니 나로서도 대강 짐작할 수 밖에요. 제시가 어떤 여자였는지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다지 영리하지 도 않고 미인도 아니었지만 무던한 성격으로 나를 무척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 생명의 불꽃 같은 것이 결혼한 지 겨우 한 달도 못되어 그림자를 감춰버 렸으므로,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제시 에게도 말했고, 셀리아도 설득했지요. 그러나 둘 다 잠자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그 때 그때 임시변통으로 넘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파국이 찾 아와서 제시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기묘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정말 조금도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 " 셀리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겠지 " 하고 나는 말했 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범죄사건을 만들어낼 수야 없잖나. " 찰리는 꽉 쥔 주먹으로 두 무릎을 치고 초조한 듯이 몸을 양옆으로 흔들었 다. " 대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을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 어떻게 하 면 됩니까? 그녀 때문에 나는 계획한 일을 하나도 실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쳐야 합니까? 그녀는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나는 이대로 아무 것도 못한 채 끝나고, 그녀는 아주 멋지 게 죄를 벗어나려는 속셈이겠지요. 그 리고 나서 몇 달이 지나면 모든 일이 가라앉아 두 사람의 관계도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 " 찰리, 자네는 결코 결말이 나지 않는 일에 일생을 허비할 작정인가? " 그는 일어나서 문 쪽을 응시하고 있더니 이윽고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속 삭이듯 말했다. " 아니,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 찰리는 상대방이 대답하지 못할 게 뻔한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고 반응을 기 다릴 때처럼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와 얼굴을 마주보 며 일어나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 자네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 그런 생각은 머 릿속에서 내쫓아버리는 것이 좋을 걸세. " " 어물쩍 속이려 들지 마십시오 " 하고 그는 말했다. " 셀리아만큼 영리하 다면 살인죄를 숨기고 감쪽같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나도 셀리아만큼 영리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 나는 그의 두 어깨에 힘주어 손을 올려놓았다. " 여보게, 부탁일세, 찰리,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 그는 나의 두손을 뿌리치고 벽가로 물러섰다. 그의 눈은 불타고 입술이 말 려올라가 이가 드러나보였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나는! 제시는 이제 죽어서 무덤에 묻혔습 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하고 잊어버리란 말입니까! 셀리아가 언제까지나 나를 무서워하며 사는 것이 지겨워져서 마침내 나마저 없애버리 려고 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란 말입니까? " 이 말에 나는 나이도 잊고 위엄을 지녀야 할 침착성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거칠어졌다. " 잘 듣게, 자네는 심문이 있은 뒤부터 이 집에 들어앉아 꼼짝하지 않고 있 네. 이제는 슬슬 밖에 나가서 거리라도 거닐며 자기 주위로 논을 돌려봐도 좋을 때가 되었지 않나. " " 그렇게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남의 손가락질을 받고 웃음거리가 되란 말입니까! " " 그렇게 해보게 " 하고 나는 말했다. " 그런지 어떤지 시험해 보지도 않고 결정내리는 것은 비겁하네. 알 샤프가 오늘 밤 그의 술집에 자네 친구들이 몇 명 모이니까 자네도 와서 오래간만에 얼굴이나 좀 보이라고 하더군. 그렇 게 해보게 ― 그렇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뭏든 이 것이 나의 충고일세. " " 그런 데 가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거예요 " 하고 셀리아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방 안의 불빛을 받아 눈을 가늘게 뜨며 문가에 우뚝서 있었다. 찰리는 그녀 쪽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폈다했다. " 셀리아, 이 방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 그녀의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 들어가지 않았어. 저녁식사가 다 되어 알리러 왔을 뿐이야. " 찰리는 거칠게 그녀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 셀리아, 저 문에 귀를 대고 내 말을 엿듣고 있었지? 안 들었다면 다시 한 번 말해 줄까? " " 무섭고 부정한 말을 들었다. " 하고 그녀는 쌀쌀하게 말했다. " 집 안에 불행한 일이 있는데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시고 떠들어보라는 말을. 나는 그 말에 절대로 반대야. " 찰리는 어이가 없는 듯 상대방을 뚫어지게 쳐다본 체 그 자리에서 해야 할 말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 셀리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게! 세상에서 가장 뱃속이 검은 위선자 나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거야! " 그 말은 그녀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고함을 질렀다. " 미치광이라고? 너야말로 그런 말을 잘도 지껄이는구나. 방에만 틀어박혀 앉아서 중얼거리며 마음 속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다! " 그녀는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섰다. " 당신은 찰리와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렇다면 알았겠군요. 어쩌면 이 아이 는 ― " " 동생은 당신이나 다름없이 제정신이오, 셀리아. " 하고 나는 힘주어 말했 다. " 그렇다면 이런 때 찰리가 술집에 가야 할지 어떨지 잘 아시잖아요. 당신 은 어떻게 그런 일을 권하시지요? " 그녀는 사악한 승리감을 드러내보이며 마지막 한 마디를 갑자기 나에게 던 졌으므로 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 만일 당신이 제시의 물건을 처분하려들지만 않았더라도, 셀리아, 그 말을 좀더 솔직 히 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 " 이런 말을 한 것은 분명히 경솔한 일이어서 입 박에 내는 순간 나는 후회했 다. 말릴 틈도 없이 찰리는 내 앞을 지나쳐서 떨리는 두 손으로 셀리아의 팔 을 와락 낚아챘다. " 아아, 셀리아 …… 제시의 방에 들어갔단 말이지? " 그는 상대방을 거칠 게 흔들며 화를 냈다. " 대답해 봐! " 그는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난 두려움과 당황한 표정에서 곧 무언의 대답을 알아차리자 마치 손 안에 있는 그녀의 팔이 새빨갛게 단 쇠라도 되는 것처럼 내던지며 머리를 떨구고 앞으로 고꾸라지듯 몸을 숙였다. " 찰리, 하지만 …… 그녀의 물건이 옆에 있으면 네가 괴로와할 게 아니니? 너를 위해서 한 일이야. " " 어디에 있지? " " 계단 옆에 있어, 찰리 거기에 다 있다. " 그는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복도로 나갔다. 그 발자국 소리가 차츰 멀어짐에 따라 나의 심장의 고동도 차츰 여느 때의 상태로 돌아왔다. 셀리아는 이쪽으 로 돌아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 나타난 증오의 표정을 보고 나는 곧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침대 위에서 내 물건을 집 어들고 그녀의 앞을 지나치려고 했으나 상대방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 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당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그것을 모조리 다시 제자 리에 갖다 놓아야 할 것 아니에요. 정말 귀찮아요! 나는 그걸 다 제자리에 갖다놓아야 한단 말이에요! " " 자업자득이지요, 셀리아 " 하고 나는 차갑게 말했다. " 이 ―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이 늙은이, 차라리 그녀와 함께 당신을 ― " 나는 그녀를 향해 힘껏 스틱을 내리쳤다. 상대방이 신음 소리를 내었다. " 당신네들의 고문변호사로서, 셀리아 ― " 하고 나는 말했다. " 주의해 두 겠는데, 분명히 자기를 위해 이롭지 않은 말은 자고 있을 때 외에는 하지 않 도록 하시오! " 그녀는 곧 입을 다물었으나, 만일을 위해 나는 다시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줄곧 그녀를 앞장서게 했다. 벨람 저택에서 알 샤프의 술집까지는 걸어서 겨우 2, 3분 거리인데다 살을 에는 듯한 매운 겨울의 공기 속을 혼자 걷자니 발걸음이 자연히 빨라져 잠시 뒤 그곳에 닿았다. 알 샤프는 카운터 너머에 서서 바쁘게 유리잔을 닦고 있 었는데,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쾌활하게 인사했다. " 메리 크리스마스! 잘 오셨습니다, 선생님. " " 메리 크리스마스! " 하고 나도 말하고 나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 는 술병과 술잔을 카운터 위에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 선생님은 마치 크리스마스 같군요. " 하고 그는 순수하고 독한 술을 두 잔 따르며 말했다. "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 틀림없이 올해도 오실 때가 되었다고. " 우리 두 사람은 건배를 했다. 그러고 나자 알 샤프는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카운터 너머로 어깨를 내밀었다. " 거기서 곧장 오셨습니까? " " 그렇다네 " 하고 나는 대답했다. " 찰리를 만나셨습니까? " " 물론, 셀리아도. " " 그래요. " 알 샤프는 말했다. " 뭐, 이렇다할 일은 없지요. 나도 그녀가 쇼 핑하러 가는지, 밖으로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머리를 푹 숙이고 검은 숄을 어깨에 두른 채 마치 무엇에 쫓기듯 종종걸음으로 가더군요. 그야 실제로도 그런 기분이겠지만 …… " " ― 그럴 테지 " 하고 나는 말했다. " 그러나 문제는 찰리입니다. 밖에 나온 것을 전혀 보지 못했지요. 얼 굴 좀 보게 나오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하셨습니까, 선생님? " " 물론 " 하고 나는 대답했다. " 그렇게 전했네. " "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 " 불행한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되는데, 그런 곳에 가면 안된다고 셀리아가 말하더군. " 알 샤프는 뜻이 담긴 휘파람을 부드럽게 불며 둘째손가락으로 이마를 비볐 다. " 어떨까요 ― ? 그 두사람을 저렇게 함께 있도록 내버려두어도 괜찮을까 요? 사정이 그러했으니, 찰리가 마음 속으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 냐 하는 것으로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요. " " 오늘 밤에도 좀 그런 기미가 보였네 " 하고 나는 말했다. " 그러나 위험 은 모면했지. " " 일단 요다음까지는 말이지요? " " 그때는 내가 또 그곳에 가 있기로 하지. " 알 샤프는 나를 보며 머리를 내저었다. " 그 집은 아무것도 바뀌는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아무것도. 그러니 까 선생님은 처음부터 대답을 알고 있는 겁니다. 선생님이 지금 이렇게 여기 오셔서 거기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시리라고 처음부터 내가 알고 있었던 것 도 그 때문입니다. " 나의 콧구멍에는 아직 그 집의 낡아빠진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냄새가 입 고 있는 옷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려면 앞으로 며칠이나 걸릴까 …… " 오늘이라는 날만은 그야말로 영원히 해마다의 달력에서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네 " 하 고 나는 말했다. " 제시를 잊으면 안되네. 그 집과 그 집 안에 있 는 모든 것이 망해버릴 때까지 제시는 줄곧 그 두 사람에게 달라붙어 떨어지 지 않을 걸세. " 알 샤프는 미간을 좁혔다. " 정말이지 이 거리에서 그처럼 기분나쁜 사건은 날리 없을 겁니다. 낡아빠 진 도깨비집, 무엇에 쫓기고 있는 듯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달려가는 그 여자. 그리고 그 사나이는 방에 틀어박힌 채 벽만 노려보고 …… 도대체 그때부터 ― 언제였지요, 선생님, 제시가 굴러떨어진 것은? "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리자 알 샤프의 등 뒤에 있는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 다. ― 혈색이 좋고 턱이 튀어나온 얼마쯤 회의적인 얼굴. " 20년 전 …… " 나는 지루한 듯 얼빠진 나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 꼭 20년 전 오늘 밤이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