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비 씨의 질서바른 세계 애플비 씨는 테없는 안경을 쓰고 희끗희끗한 머리를 앞가리마를 타서 빗고, 질서있게 구성된 세계에 우연이란 없다로 확인하는 일에 참된 기쁨을 맛보는 자그마한 몸집의 꼼꼼한 사나이였다. 따라서 자기 아내를 처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탐색할 때도 어디를 찾으면 발견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책 ― 그것은 법의학 교과서였다. ― 을 발견한 건 몇 권의 비슷한 책이 꽂힌 헌 책방 책꽂이에서 였다. 하나같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참히 낡아서 개의 귀처럼 늘어진 책들 속에서 그 한 권만이 그럭 저럭 참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것을 골랐던 것이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속에 수록된 것은 대부분 광기와 욕망의 가공할 만한 연구였으며 ― 참으로 긴박감을 주는 사진이 여러 장 삽입되 어 있었다.― 선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체 이 세상에는 이렇게 무서운 도깨비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 다니고 있을까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가지 예만은 정당하게 자기 가 구하고 있는 것과 같았으므로 그는 최고의 열성으로 그 연구를 시작했다. 그것은 X라는 부인 ― 그 책에는 X부인이니 Y씨니 Z양이니 하는 이름이 많았다. ― 에 관한 사건으 로, 그녀는 자택에서 우연히 조그만 융단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나뒹굴어 죽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고인 의 이익을 대표하는 변호사는 그녀의 남편을 살인죄로 고발하고, 검시관의 심문 석상에서 그의 죄상을 입증하려는 참에 피고가 뇌일혈로 급사했기 때문에 사건은 갑작스럽게 그대로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아내의 재산을 조급히 자기 것으로 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 남편의 동기로 지목한 점에 서 애플비 씨의 처지와 너무도 비슷하여 상당한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의 실제적인 디테일이었다. 남편의 주장에 의하면 X부인은 그에게 물잔을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그때 우연히 그녀의 발치에 있는 조그만 융단이 미끄러졌다는 것이었다. ― 조그만 융단은 곧잘 미끄러 지는 법이다. 이에 대해 끈기있는 변호사는 의학계의 권위자 모씨를 참고인으로 출정케 하였다. 이 권위자는 수많은 도면을 인용하여서 ― 그것은 모두 솜씨있게 복제하여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다. 물잔을 받는 시늉을 하며 한쪽 손은 아내의 어깨에, 또 한쪽 손을 턱에 대고 갑자기 밀어냄으로써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고 피해자가 융단 위에서 구른 것과 같은 격렬한 결과를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남편에게 있어 아이 들 놀이처럼 손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밝혔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할 일은, 이 도면과 설명을 싫증 느끼지 않고 연구함으로써 애플비 쌔가 의도한 것은 탐욕스럽고 비도한 사나이가 정도가 심하든 어쨌든 도리에 어긋난 욕망을 채우려던 행위 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로서도 돈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신성한 삶의 보 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 삶의 보람이란 즉 세상에 둘도 없는 그의 가게 ― <애플비 미술 골동품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가게야말로 애플비 씨의 우주에 있어서는 태양이었다. 20년 전에 아버지가 남겨준 약간의 유산으로 사들인 것인데, 아주 잘 운 영될 때도 가난한 생활을 겨우 꾸려나갈 정도였다. 따라서 최악의 경우에는 ― 늘 그렇긴 했지만 ― 아무래도 어머니의 조그마한 선의와 숨겨둔 돈 몇 푼을 끌어낼 수박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순순히 돈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 단돈 1페니라도 ― 가 게가 위기에 처했던 일이 벌써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도 결국은 지금까지 끌어나왔다. ― 다시 말해서 이 가게는 애플비 씨에게 있어, 어머니에게 있어서의 애플비 씨와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 다. 이 불행한 삼각관계는 결국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결판이 났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애플비 씨는 어머니가 이 질서정연한 작은 세계를 유지해 오는 데 있어 그의 생각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큰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가끔 마련해 준 돈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평상시의 습관에도 관계된 일이었다. 그는 음식에 까다로운데다 조심스러웠다. 그의 어머니는 요리를 함에 있어 굽는 것이며 익히는 것에 완전히 숙달되어 있었다. 또 집 안에 물건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으면 그의 신경은 곤두서게 마련인 데, 살아 있을 때의 어머니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보증해 주는 신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그의 생활에 어마어마하게 크고 형편이 좋지 않은 공간을 남기에 되었다. 이 공간을 메 우는 방법을 생각하다 결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되었으며, 이어서 이번에는 마침내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의 아내는 안색이 맑지 못하고 입술이 얇은 여자로, 외모며 거동이 돌아가신 어머니와 너무나도 비 슷하여 이따금 방에 들어설 때 깜짝 놀라곤 했다. 아내는 다만 한 가지 점에서 그를 실망시켰다. 즉 그 녀는 <가게>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 거기에 대한 그의 감정을 이해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영업상 잃은 비용을 얼마쯤이나마 메울 수 있는 융자문 제에 대해 그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애플비 부인은 장래의 남편에게서 구혼을 받았을 때 이미 한창때를 지나 어느 정도 시들어가고 있었 기는 하나, 그녀를 위해 공정하게 이야기한다면 자기에게 마침내 결혼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기분만으로 그 구혼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마음의 비밀을 노골적으로 입 밖에 내어 말한다면 틀림없이 그녀는 볼을 붉히겠지만 그녀에게 구혼을 승낙하게 한 것은 테 없는 안경 뒤에 있는 그의 크고 슬퍼보 이는 두 눈이었다. 그 눈은 겉으로는 진지한 체하면서 그 바닥에 무언가 깊은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처 럼 보였다. 아뭏든 그 <숨겨진 것이> ― 정말 숨겨져 있다고 한다면 ―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길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서였는데, 그녀는 다만 어깨를 움츠 리며 그 일을 염두에서 쫓아내고 그 뒤로는 그의 음식을 되도록 정성껏 만드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안 된 일이지만, 애플비 미술 골동품점이 실은 빛좋은 개살구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의 감정 은 그와 달랐다. 그녀는 민첩하게 필요한 조사를 한 뒤 거기에 대한 의견을 약간 열을 올리며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 골동품이라고요! " 그녀는 째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아니, 그건 ― 잡동사니를 모아다놓은 게 아니 에요? 한푼의 값어치도 없고 먼지만 쌓이게 하는 쓰레기더미지 뭐예요! " 그녀로서는 돈만 하는 범속한 평가자의 눈에는 마루 가치가 없는 것으로 비칠 그 물건들이 애플비 씨 에게는 생명과 다름없이 귀중한 보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게는 어렸을 때부터 손이 닿 는 물건은 거의 다 수집하고 분류하고 정리하여 보존하지 않고는 못 배겼던 그의 이상한 버릇에 집적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금이 간 모조품인 세브르(프랑스 세느 강 하류지방) 도자기며 매끈하지 못한 가짜 치펜델 가구며 녹슨 사벨 등 <가게>에 있는 물건은 무엇이나 그의 소유에 속하는 기간이 길 어지면 길어질수록 값어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애플비 씨에게는 어느 물건이고 다 영원히 변치 않는 귀중품이었다. 그러므로 기묘한 일이긴 하지만 이따금 상담이 성립되어 어떤 물건을 내놓게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절실한 고통을 느꼈다. 몰건 평가에 자신이 없는 손님은 그 고통스러운 표정을 슬쩍 훔쳐보고 이것은 여간해서 만나기 힘든 귀한 물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행 히도 애플비 씨의 여윈 얼굴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지는 것은 물건 그자체에 대한 애석함에서 가 아니라, 그 물건이 없어짐으로써 생기는 공간 ― 얼마 안되는 공간이긴 하지만 ― 이 가져오는 무질 서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순간이라도 알아차린 손님은 없었다. 아뭏든 애플비 부인은 모르는 척 동정심도 없이 몰아세웠다. " 많지도 않지만, 나의 재산은 내가 죽은 뒤에 마음대로 하세 요. 아셨지요, 내가 죽은 뒤에라야 해요." 이리하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심판하고, 나아가서는 살해당하고 싶어하고, 마침내 실제로 살 해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마침내 그 시기가 오자 애플비 씨는 헤아릴 길 없을 정도로 가치있는 그 교과서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하여 그 가르침이 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것을 알았다. 일은 신속하고 평온한 가운데 ― 바지에 물이 조금 튄 것을 제외하고는 ― 아주 멋지게 끝났다. 경찰의사는 이처럼 작은 융단은 주정뱅이가 운전하는 차보다도 더 많은 인명을 빼앗아 간다고 하였으며, 조사를 담당한 경관은 장례식을 치르는 데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 이든 해주겠다고 친절하게 말하여 그것으로 만사는 무사히 끝나게 되었다. 너무도 간단하게 ― 사실 드라마틱한 점은 약으로 쓰려고 해도 없었다. ― 정리가 되었으므로, 그로부 터 1주일쯤 뒤 적당히 동정을 나타낸 변호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내의 유산을 정리하게 되 었을 때에야 비로소 애플비 씨는 갑자기 훌륭한 새 세계가 자기 앞에 펼쳐져 있음을 깨달았을 정도였 다. 때로는 감정보다 사려분별을 중히 여겨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애플비 씨는 무엇보다도 우선 사려분 별이 있는 사람이었다. 죽은 아내의 유산이 정리되자 <가게>를 본디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으 로 옮겼고, 여섯 사람째의 애플비 부인이 처치되었을 때도 가게를 옮기는 일은 이제 실속있는 정식적인 재산 취득 순서의 한부분이 되었다. 죽은 부인들은 모두 혈색이 나쁘고 얇은 입술을 꼭 다문 여윈 여자들로, 음식 솜씨가 뛰어난데다 일상 생활의 규율과 질서를 어김없이 지키는 점에서 너무도 비슷했으므로 애플비 씨는 그녀들을 개별적으로 가 아니라 <전체로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단 한가지 ― 각자의 은행예 금 합계를 상징하는 숫자였다. 그래서 애플비 씨는 처음 두 사람은 각기 4로, 세 사람째는 놀랍게도 3 으로, 그리고 마지막 세 사람은 각기 5로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사람의 기준에 비춰보아도 그 총 액은 상당한 자산임에 틀림없었지만, 각 부분은 마차 파리가 한 마리씩 굶주린 카멜레온에게 잡아먹히 듯 차례차례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애플비 미술 골동품점에게 잡아먹혔으므로 여섯 사람째의 애플비 부인을 파묻은 지 얼마 안되어 애플비 씨는 지난 어느 때보다도 곤란한 재정상태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태가 너무 궁핍했으므로 솔직히 말해서 5의 상대를 맞아들이고 싶지만, 4로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 을 정도였다. 마사 스태지스가 그의 인생에 뛰어든 것은 아주 적절한 시기였으므로 겨우 15분 동안 대 화를 나누었는데도 그는 마음 속에 자리한 4니 5니 하는 일을 완전히 쫓아낼 수 있었다. 마사 스태지스는 아무리 적게 보아도 6은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애플비 씨가 만난 여자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재산이 많다는 점뿐이 아니었다. 과 거의 아내들과는 달리 마사 스태지스는 사람 그 자체에 있어서도, 옷차림에 있어서도, 또 행동에 있어 서도 아주 <칠칠치 못한> ― 이러한 표현이 떠올라 그는 약간 몸서리가 쳐졌다. ― 여자라 해도 지나 치지 않은, 말하자면 보기 흉한 커다란 몸집의 여자였다. 제대로 화장을 하고 옷이며 머리 모양을 매만진다 하더라도 사람 앞에 내놓아 부끄럽지 않게 되기는 까마득한 이야기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보아 마사 스태지스는 일부러 그런 평범한 여자 들의 차림새에 도전하고 있는 듯한 데가 있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오렌지 빛깔로 붉게 물들인 머리 는 위로 아무렇게나 틀어올렸으며 퉁퉁하니 살진 얼굴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려는 듯 무섭게 분을 처 발랐고, 옷차림은 본인은 물론 입기가 편하겠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할 정도로 화려 했다. 그리고 구두에도 잘 손질하여 보관하지 않고 오랫동안 발만 편하게 신고 다닌 낡은 흔적이 뚜렷 했다. 이런 것들과, 그것이 보는 이에게 주는 효과에 대해서 마사 스태지스는 전혀 무관심한 듯했다. 그녀는 애플비 미술 골동품점 안을 정력적으로 성큼성큼 걸어다니며 그 근처에 있는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을 덜컹덜컹 움직여보았다. 애플비 씨가 새삼스럽게 얼굴 앞의 공기를 손으로 휘저으며 기침을 해보였지 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워대며 연달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 큰 소 리로 지껄여댔다. 그 나직하고 쉰 목소리는, 여느 때에는 좀더 놓고 음량이 시원치 않은 목소리에 익어 온 <가게>안의 공기를 묘하게 흔들어 놓았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 14분이 지나자 그녀는 비록 약간이긴 하지만 애플비 씨의 첫 인상을 바꾸도 록 만드는 하나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즉 각 물건의 값에 대해 나타내는 고려의 정도였다. 그녀는 물건 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정찰가격을 보고, 그리고 나서 좀더 자세히 이리저리 음미한 다음 분명히 신통 치 않은 듯한 얼굴로 다음 물건으로 옮겨가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애플비 씨는 가게 물건과 자기의 인내력에 이변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는 빨리 그녀를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옆에서 따라다녔다. 그러 나 15분 만에 그녀는 그 말을 한 것이다. " 나는 은행에 50만 달러의 예금이 있어요"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즐거운 듯이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 다. " 그러나 이런 잡동사니에는 동전 한 푼도 쓸 마음이 없어요. " 마침 그때 애플비 씨는 주위에 풍기는 담배연기를 조금이나마 없애려는 준비 동작으로 손을 얼굴 앞 으로 올리고 있었다. 그 손이 힘없이 옆으로 떨어지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놀라울 만한 여러 가지 문 제가 떠올라왔다. 그중 하나는 그녀의 왼손 중요한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밖에는 주로 단기 채권이나 장기 채권이나 이식율에 관계된 일종의 수학적인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손이 옆구리에 닿았을 때 이런 문제들은 이미 해결 도상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마사 스태지스의 칠칠치 못하고 눈에 거슬리는 성격이 일의 진행에 박차를 가했다는 것도 주 의할 문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가 <그 말>을 입 밖에 낸 뒤에 있어 카메라의 렌즈에 끼 는 일종의 필터를 통해 보듯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기만을 할 수 없는 애플비 씨는 그 대신 짐을 내릴 때의 기쁨을 상상하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남자를 자신에게 견주기로 했다. 마사 스태지스와 결혼한다는 것은 중요한 수학적인 문제를 몇 가지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더 없이 불쾌한 존재를 하나 없애주는 의인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전에 없이 슬픈 빛을 눈에 담고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 정말, 미안합니다, 미시즈 …… " <미시즈>라고 불린 여자는 이름 앞에 오는 미시즈라는 말 뒤에 힘을 주어 자기 이름을 말했으며, 애 플비 씨는 변명하듯 미소를 지었다. " 아니, 갑작스럽게 …… 그런데 나로서는 세련된 취미와 교양을 지닌 ― <당신과 같은>이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 분이 훌륭한 예술 작품을 소유하는 기쁨을 모르시다니 말할 수 없 이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하듯 <생각난 날이 길일>이라던가요 ― 그렇지 않습니까? " 마사 스태지스는 날카롭게 그를 쳐다보며 귀의 고막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순간 유머라고는 잘 모르는 애플비 씨는 혹시 자기가 잘못하여 걱정스러운 효과를 가져오는 큰 실언 을 한 게 아닐까 하고 어두운 의혹에 사로잡혔다. " 잠깐만! "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말했다. " 내가 이런 소름끼치는 물건을 사다 보관하려고 왔다 고 생 각한다면, 그건 큰 오해예요. 나는 친구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려고 온 거예요. 그 친구는 강철몽둥이처 럼 단단하고 멋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야말로 울화통이 터질 만큼 따분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마음을 나타내기에 적당한 물건을 선물하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 이 만성마춤일 것 같군요.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그 물품을 받는 현장에 내가 있을 수 있도록 배달해 줬으면 좋겠어요. " 애플비 씨는 이 말에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으나 늠름하게 곧 다시 똑바로 섰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 으며 분명히 말했다. " 그런 일이라면 거절합니다, 절대로 거절합니다! " "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말했다. " 당신이 배달해 주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수배를 하겠어요. 이런 일을 하려면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는 보람이 없다는 것쯤은 당신도 아실 텐데요 …… " 애플비 씨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 배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손님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분에게는 이 가게의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 아무리 많은 돈을 내더라도. " 마사 스태지스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되물었다. " 그게 무슨 말이지요? " 이것은 위험을 내포한 순간으로, 애플비 씨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의 다음말을 또다시 그 요란 스러운 웃음의 발작을 일으키게 할 것이고, 그것은 그를 완전히 때려눕힐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를 영 원히 <가게>에서 몰아내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며, 반대로 그때 그 자리에서 그에게 유리한 문제를 결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라고 애플비 씨 는 자포자기하며 생각했다. ― 어찌되었든 마사 스태지스도 여자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애플비 씨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 이 가게의 영업 방침입니다. 손님이 사려는 물건의 가치를 완전히 인정하고 거기에 알맞는 보존상의 주의와 애착을 보증해 주지 않는 한 절대로 팔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줄곧 그런 방침으로 해왔고, 내가 여기에 버티고 있는 한 이것은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겁니다. 그 이외의 방법은 나로서는 신성함을 더럽히는 행위로밖에 복 수가 없습니다. " 그는 노기를 띠고 마사 스태지스를 쳐다보았다. 손 가까이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거기에 털썩 주저앉았으므로 쩍 벌린 다리에 치마가 달라붙어 그 보기 흉한 구두가 무참하게 드러나보였다. 그녀는 또 한개비의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성냥의 불꽃을 통해 가늘게 뜬 실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공기를 조금 휘저은 다음 연기를 뿜어냈다. "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좀더 자세히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 경험이 없는 이로서는 그때까지 전혀 모르던 사람에게서 아주 개인적인 지식을 끌어내는 일이 상당히 복잡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몇 번이나 그러한 지식에 자기의 이해를 걸어온 애플비 씨로 서는 식은 죽 먹기였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는 마사 스태지스의 재산에 대한 자기의 평가가 상당히 정확했으며 그녀는 친척도 없이 고독한 처지인데다 결혼 반대론자도 아니라는 증거를 잡았다. 이 마지막 증거는 그 뒤로 매일처럼 가게에 찾아와서 의자에 버티고 앉아 끝도 없이 지껄여대는 그녀 에게서 끌어낸 것이었다. 그녀가 지껄이는 말은 대개 애플비 씨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그녀의 아버지 에 대한 것이었다. " 옷차림까지 똑같아요. "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회상하는 어조로 말했다. "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단 정하고, 그것도 자기 자신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날마다 집 안을 두루 살피고 다니며 구석구석까지 잘 정리되어 있는가 확인하는 거예요. 돌아가시는 날까지 늘 그랬어요. 돌아가시기 한 시간 전에 벽에 걸 린 그림이 비뚤어져 있는 것을 일어서서 바로 잡았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 <가게>의 벽에 걸린 그림이 조금 비뚤어져 있어 약간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애플비 씨는 마 지못해 그곳에서 주의를 다른 데로 옮겼다. " 그래,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은 곁에 있어 드렸군요? " 하고 그는 동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 네, 그래요. " " 그랬었군요 " 하고 애플비 씨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만한 희생에 대해서는 뭔가가 그 자름의 보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특별히 ― 이렇게 말하면 뭣하지만 ― 당신만한 분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늙은 아버지 곁을 떠나서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 마사 스태지스는 한숨을 쉬었다. "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는 것만 은 부인하지 않겠어요. 그러 나 꿈은 역시 꿈일 뿐이고, 앞으로도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 거예요 ." " 어째서요? " 하고 애플비 씨는 격려하듯이 물었다. " 왜냐하면 " 마사 스태지스는 우울하게 말했다. " 나는 아직 나의 꿈에 꼭 맞는 남자를 한 사람도 만 나지 못했으니까요. 나도 이제 여학생이 아니에요, 애플비 씨. 누가 나에게 진지한 마음으로 열중해 오 지 않나 확인하기 위해 은행예금을 축낼 생각도 없고, 솔직히 말해서 상대방의 동기 같은 거야 아무래 도 괜찮아요. 다만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정도의 온당한 사람으로, 잠시라도 나를 소홀히 여기지 않고 소중히 알아주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이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않는다 면 …… " 애플비 씨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살짝 올려놓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 미스 스태지스, 그런 상대방을 만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 그녀는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한층 더 부어오른 듯한 못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진심으로 하시는 말인가요, 애플비 씨? " 하고 그녀는 물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짓는 애플비 씨의 눈에는 성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따듯하게 말했다. "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 지급까지의 경험은 애플비 씨에게 일단 얼음이 깨지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용기를 내어 뛰어 드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그는 며칠 뒤 느닷없이 최후의 신청을 했다. " 미스 스태지스, 고독한 남자에게는 이제 더 이상 고독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반드시 오기 마 련입니다. 그럴 때 운좋게도 존경과 애정을 아낌없이 쏟을 수 있는 여성을 만나게 되면, 그 사나이는 그야말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지요. 미스 스태지스 ― 실은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 " 어머나, 애플비 씨! "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볼을 붉히며 말했다. " 정말 지나친 칭찬을 …… 하지만 …… " 마음을 결정짓지 못하는 것 같은 그녀의 어조에 그의 마음을 가라앉았다. " 잠깐만! " 하고 그는 급히 말을 가로막았다. " 만일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할 수 있도록 얼른 말씀해 주십시오. 나의 마음을 저울에 단다면 이렇게 부탁했다고 해서 벌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 " 그야 그렇지도 모르지만 …… "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말했다. " 애플비 씨, 나는 결혼이라는 것에 내가 걸고 있는 기대를 그대로 채워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예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 고 생각해요. 즉 앞으로 남은 생애를 다 걸 만큼 절대적인 헌신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 " " 미스 스태지스 " 하고 애플비 씨는 엄숙하게 말했다. " 나는 꼭 그렇게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 " 남자들이란 아주 간단하게 그런 말을 하지요. "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 그러나 ― 물론 생각은 해 보겠어요, 애플비 씨. " 그토록 칠칠치 못한 여자가 마음을 결정짓기를 기한도 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우울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애플비 씨는 게인즈보로 게인즈보로 앤드 골딩 법률사무소로 출두하라는 불 손한 편지를 별안간 받았지만, 그의 우울함을 조금도 덮어주지 못했다. 굶주린 이리 같은 채권자들에게 쫓기도 있는 때인지라 그로서는 최악의 사태 밖에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보고 나서 게인즈보로 게인즈보로 앤드 골딩은 채권자가 아니라 마사 스태지스를 대표하는 것임을 알자 놀라움과 아울러 가 슴을 쓸어내렸다. 언뜻 보기에 그 법률사무소의 지도자인 듯한 나이든 게인즈보로는 목의 살이 축 늘어져 칼라가 거의 덮일 정도로 살찐 작달막한 사나이였는데, 큰 물고기와 같은 눈으로 애플비 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이가 아래인 게인즈보로도 그 형과 꼭 닮았으나 목의 살이 형만큼은 늘어지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인 골딩은 뾰족한 얼굴을 한 침착한 젊은이였다. " 이것은 아주 미묘한 문제라서 …… " 하고 나이든 게인즈보로가 유리알 같은 눈으로 애플비 씨를 바 라보며 말했다. " 우리들의 소중한 의뢰인인 ― " 그러자 나이 아래인 게인즈보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덧붙였다. " 미스 스태지스가 당신과 결혼 하고 싶다는 뜻을 비추셨습니다. " 거북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애플비 씨는 기분좋은 흥분에 사로잡혀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거렸다. 그는 말했다. " 그래서요? " " 그래서 " 하고 나이든 게인즈보로는 말을 계속했다. " 미스 스태지스는 자신의 재산이 어떤 구혼자 의 눈에나 좋은 미끼로 보이리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 " 게인즈보로는 놀라 항의하려는 애플비 씨를 퉁퉁한 손을 들어 말렸다. " 그 문제는 그대로 덮어두기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 " " 무시한다 ― 즉 보류하겠다는 뜻입니다. " 하고 나이 아래인 게인즈보로가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 다만 구혼자에게 결혼생활에서 다른 기대를 완전히 이루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 한한다 는 조건부입니다. " 애플비 씨는 열성을 띠고 말했다. "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 " 애플비 씨 " 나이든 게인즈보로가 불쑥 말했다. " 전에 결혼하신 일이 없었습니까? " 애플비 씨는 재빨리 궁리했다. 과거의 전력에 대하여 거짓말했다가는 자칫 스스로 목을 죄는 함정을 파는 결과를 가져올는지도 모른다. 아예 솔직히 인정하면 그것을 예방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군소리 할 수도 없을 것이다. " 있습니다. " 하고 그는 대답했다. " 이혼하셨습니까? " " 천만에요! " 하고 애플비 씨는 진심으로 놀라며 말했다. 게인즈보로 형제는 만족한 듯이 서로 마주보았다. " 좋습니다. '"하고 나이 위인 게인즈보로가 말했다. "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애플비 씨, 어쩌면 실례 되는 질문인지도 모릅니다만, 도덕감이 느슨해진 요즈음에는 …… " " 그런 일이라면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 하고 애플비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 나는 부도덕이라는 것 과는 인연이 없습니다. 담배라든가, 독한 술이라든가, 그리고 …… " " 방종한 여자라든가? " 하고 나이 아래인 게인즈보로가 딱 잘라 말했다. " 네 " 하고 애플비 씨는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했다. " 그런 것들은 나와 인연이 멉니다. " 나이든 게인즈보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뭏든 미스 스태지스는 경솔한 결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앞으로 한 달 이내에 당신에게 답변을 할 테니까, 그 동안에 ― 이 늙은이의 충고를 들을 생각이 있다면 말하겠는데 ― 부지런히 그녀의 비위를 맞추시오. 아무래도 여자니까요, 애플비 씨. 여자들이란 누구나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 " 그렇겠지요. " 하고 애플비 씨는 대답했다. " 헌신입니다. " 하고 나이 아래인 게인즈보로가 말했다. " 시종일관 변함없는 헌신 ― 이것이 결정의 열쇠가 될겁니다. " 애플비 씨는 혼자 있게 되자 그 말은 <가게>와 그것이 상징하는 질서바른 세계를 옆으로 밀어놓고, 그 대신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는 마사 스태지스의 모습을 들어앉히라고 자기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 실을 알게되었다. 물론 일시적인 방편이다. 일단 마사 스태지스가 정당한 혼인 수속을 마치고 여섯 명 의 애플비 부인과 마찬가지로 저 세상 사람이 되기만 하면 풍족한 보수가 약속될 것은 확실했지만, 그 렇다고 해서 그녀와의 강제적인 친교를 조금이나마 견디기 쉽게 해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애플비 씨는 장래의 신랑으로만이 아니라 동시에 장래의 홀아비로서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결 혼문제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재미도 없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뜻하지 않게 내포되어 있는 빈정 거림에 역겹고 아니꼬운 느낌이 치밀어 올랐다. " 나는 말이에요. "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열변을 토했다. " 어쨌든 이혼 같은 것을 한 사나이는 누구 와 결혼하든 다시 이혼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요즈음 파혼하는 이들을 보세요. 거의 어느 경우나 마치 쇼핑이라도 하듯 값만 물어보며 그 일대를 돌아다니다 결국 자기가 구하는 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그런 남자가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나와 결혼할 남자는 ― " 그녀는 충분히 겨냥한 것처 럼 말했다. " 물론 그렇고말고요. " 하고 애플비 씨는 말했다. "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 " 하고 마사 스태지스는 다시 애플비 씨가 유난히 초조해하고 있을 때 말 을 꺼냈다. " 원만한 결혼은 여자의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하더군요. 결혼에 대한 말 가운데 가장 뛰어 난 말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 "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말고요. " 애플비 씨는 말했다. 이 시험기간 중인 한 달 동안 내내 그는 때에 따라 억양의 변화를 주긴 했지만 대사는 <물론이지요> 라는 한 마디만을 하기로 작정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달이 끝나갈 무렵 축하객이라고는 게인즈보로 형제와 골딩밖에 없는 결혼식에서 그 하나뿐이던 바보스러운 대답 대신 ― 주례인 목사와 의 문답에서 ― " 네 " 라고 대답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므로 작전으로는 우선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식이 끝나자 곧 애플비 씨는 ― 불쾌하게도 ―신부와 함께 사진실로 끌려들어가 골딩의 끈질긴 감독 아래 여러 장의 사진을 찍힌 다음 ― 기쁘게도 ― 신랑 신부 각자가 상대방을 자기 재산과 소유물 및 그밖에 일체의 상속인으로 지정하는 서류를 교환했다. 이런 경사가 진행 중인데도 불구하고 가끔 애플비 씨가 방심한 태도로 보인 것은 다만 이제 눈 앞에 펼쳐질 장래에 대한 계획에 사고를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융단 ― 지난 여섯 차례에 걸쳐 참 으로 멋지게 도움이 되어주었던, 말하자면 정평이 있는 작은 융단을 싹 깔아놓고 이윽고 때가 오면 물 을 한 잔 갖다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한쪽 손을 여자의 어깨에, 또 한쪽 손을 …… 그때까지는 적당 한 날짜를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게>를 노린 탐욕스러운 채권자들이 가해올 압력에서 너무 멀리 연장해도 안된다. 유언장에 서명하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펜을 바라보며 우선 그 시기를 2, 3주일 안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유언장을 손 안에 넣은 이상 더 오래 기다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최초의 1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애플비 씨는 2, 3주일로 결정했던 그 예정을 눈 딱 감고 고 쳐야겠음을 깨달았다. 머뭇거릴 여지가 없었다. 아뭏든 그는 그 결혼 생활을 영위해 나갈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마사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갈색 사암으로 지어진 동굴 같은 집 ― 그녀의 집인 동시에 이제는 그의 집이기도 하지만 ― 은 난잡함의 본보기와도 같았다. 이 집에서는 무엇이 옆에 굴 러다니든 주워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원칙인 듯했다. ― 왜냐하면 어차피 언젠가는 어디로 굴러들어 갈 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뭏든 방마다 기절할 정도로 난잡한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안 에 든 것들이 넘쳐나올듯한 벽장이며 서랍 속의 물건들은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자리가 바뀌어서 그 근 처에 흩어져 있는 물건과 뒤범벅이 되었으며, 어디를 보나 먼지가 얇은 막이 되어 쌓여 있었다. 이런 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흑판에 손톱으로 한 가닥 자국을 내어 계속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섬약한 그의 신경을 닳아들어가게 하였다. 새 아내가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참으로 공교롭게도 애플비 씨가 무엇보다도 신경을 써주기 바라는 일이었다. 즉 그녀는 많은 요리를 만들곤 하여 식사 때가 되면 부엌과 식당 사이를 쉬지도 않고 왔다갔 다 강행군하며 애플비 씨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수많은 요리 접시를 테이블 위에 늘 어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머뭇머뭇 항의도 해보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새 아내는 아직 처음이기 때문이라며 특별히 설 명까지 해주었다. 특히 요리에 관한 한 어떠한 비평에도 ― 어떤 접시의 것을 남김으로써 하는 무언의 비평에까지도 ―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하여 분명히 불만을 표시했으므로, 그 뒤부터 애플비 씨는 울며 겨자먹기로 설익은 고기며 진한 소스며 맛없는 파이 같은 요리의 총공격을 받아 마침내 끊임없는 소화불량으로 고통을 받기에 이르렀다. 자기가 정열을 다해 만든 요리를 자꾸 먹음으로써 이상적인 남 편임을 증명해 달라고 졸라대는 아내의 강요도 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하였다. 그녀가 불소화물을 가득 담은 접시를 실룩거리는 그의 코 밑에 밀어놓으면, 애플비 씨는 사자떼 앞에 끌려나온 순교자같이 용기를 내어 적당히 익은 담백한 음식을 달라고 울부짖는 소화기관에 강제로 할당된 몫을 쑤셔넣는 것 이었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묘지에서 돌아와 뜨거운 홍차와, 토스트와, 운이 좋으면 알맞게 삶아진 달걀 이라도 하나 곁들여 산뜻한 식사를 하고 쉬는 환상은 그가 가장 흐뭇하게 느끼는 백일몽의 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꿈도, 그리고 그 계속도 ― 그 속에서 그는 집 안을 깨끗이 치우려고 하지만 ― 날마다 눈을 뜨면 벌어질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그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는 불충분 했다. 자기에게 관심을 쏟도록 요구하는 아내의 강요는 날이 갈수록 더해갈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 가 남편에게 자기보다 <가게>일에 더 열중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 했을 때, 애플비 씨는 마침내 마지막 행위를 준비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 그는 작은 융단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 거 실과 부엌으로 통하는 복도 사이에 조심스럽게 깔았다. 마사 애플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 상당히 낡았군요. " 그녀가 말했다. " 뭐예요, 아피 ― 오래된 미술품인가요? " 그녀는 남편을 아피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는 것을 그가 싫어한다는 것은 전혀 염두에 없는 듯이 아 주 태연했다. ― 지금도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 미술품이라고까지 할 것은 못돼 " 하고 애플비 씨는 일단 양보했다. "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에서 추 억이 담긴 물건이지.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오. " 다행히도 애플비 부인을 그를 보고 미소지었다. " 나를 위해 그것을 가지고 오셨군요. " " 물론 ― " 하고 애플비 씨는 말했다. " 그렇지. " " 어쩌면, 자상하기도 하셔라! " 하고 애플비 부인은 말했다. " 당신은 정말 자상한 분이에요. " 그는 아내가 뒤축이 찌그러진 신을 질질 끌며 그 융단을 밟고 복도 반대쪽의 작은 테이블에 있는 전 화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매일 밤 대개 같은 시간에 전화를 하니까 그 시간에 사고를 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유리할 것이다. 그 전화는 대수로운 볼일도 없는 데 그냔 습관상 거는 모양이므로 틀림없이 그 시간에 또 그 융단 위를 지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단번에 결판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최선의 방법일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애플비 씨는 안경을 닦으며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최선의 방법임에는 분명하지만, 전화를 거는 일과 물잔을 가져오게 하는 일을 동시에 연결시킨 수만 있다면 …… " 무엇을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지요, 아피? " 하고 애플비 부인이 명랑하게 말했다. 그녀는 수화기를 놓고 복도로 가로질러와서 마침 융단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애플비 씨는 안경을 코 위에 다시 걸치고 안경을 통해 그녀를 관찰했다. 그는 설득하듯이 말했다. " 부탁이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오. 내가 싫어한다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소. " " 참 당신도! " 하고 아내는 딱 잘라 말했다. " 나는 귀여운 호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 "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 " " 하지만 나는 좋은걸요 " 하고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말했다. " 아뭏든 " 하고 그녀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말했다. " ― 내가 이야기를 걸기 전에 당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 " 그 뚱뚱하고 헤식어보이는 여자가 입을 뾰죽이 내민 모습은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손길에 스쳐 닳아서 형태가 달라진 납인형과 똑같다고 생각하며 애플비 씨는 정말 감동했다. 그러나 뭔가 좀더 그럴 듯한 대답을 생각해 내기 위해 감동은 일단 제쳐놓기로 했다. " 실은 요즈음 내 옷이 형편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오, 전에도 말했었지만, 만족스럽게 단추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한 벌도 없는 정도거든. " 애플비 부인은 사납게 말했다. " 곧 달아놓지요. " " 그럼, 내일쯤 해주겠소? " " 글쎄요. " 하고 그녀는 말하며 계단 쪽으로 갔다. " 그만 자요, 아피. 나는 굉장히 피곤해요. " 애플비 씨는 생각에 잠기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내일은 ― 하고 그는 생각했다. ― 장례식 때 단정 한 옷을 입으려면 내일쯤 아무 양복이나 한 벌 양복점으로 가지고 가서 손질해 달라고 부탁해 둬야지 …… 그는 그 옷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서 잘 걸었다. 이윽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거의 무한이 라고 느껴질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아내의 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하기야 시계는 아직 9시도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방에서 복도 쪽으로 나가는 것을 보자 그는 흥분 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전화기를 잡으려고 할 때 애플비 씨는 헛기침을 세게 하며 말했다. " 미안하지만 여보, 물을 좀 갖다주지 않겠소? " 애플비 부인은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 물이요? " " ― 미안하오. " 하고 애플비 씨는 말하고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더니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부엌 쪽으로 갔다. 부엌에서 물잔 씻는 소리가 들리 고 잠시 뒤 그녀는 물잔을 들고 그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 수고를 위로하듯 그녀의 디룩디룩 살찐 어깨 위에 한쪽 손을 놓고, 또 한쪽 손으로는 마치 그 녀의 볼에 헝클어져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려는 듯 위로 올렸다. " 다른 부인들한테도 다 이렇게 해주었나요? " 하고 애플비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애플비 씨는 손이 공중에서 얼어붙고, 그 차가움이 뼛속까지 전류처럼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 다른? " 하고 그는 가까스로 말했다. " 다른 부인들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 아내는 그를 향해 기분나쁜 미소를 보이고 있었으나 그녀가 들고 있는 물잔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 다른 여섯 명의 부인 말이에요.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그것도 내 계산으로 여섯 명이지만. 어때요, 그 밖에 또 있었나요? " " 천만에! " 하고 그는 말하다 말고 그는 허둥지둥 자기에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 무슨 말인지 나로서 는 전혀 알 수가 없군! " " 이봐요, 아피, 설마 여섯 명의 부인을 그렇게 잊어버릴 수는 없겠지요? 물론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다른 부인들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면 또 모르지만 말이에요. 그렇다면 정말 멎진 일이에요. 그렇지 않 아요 ? " " 전에 결혼한 일은 있지 " 하고 애플비는 커다랗게 말했다. " 그 일은 분명히 말해 두었잖소? 그러나 여섯 명의 부인이라니, 그건 당치도 않은 말이오! " " 물론 당신은 결혼한 일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 결혼 상대자가 누구였었는지 알아내기는 쉬운 일이었 지요. 그전 상대자가 누구었는지 조사하는 것도 문제없었어요 ― 그밖에 다른 사람의 일도. 당신 어머 니의 일도. 알겠어요, 아피? 게인즈보로 씨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에요. " " 그럼, 게인즈보로가 그런 말을 했군! " " 천만에요, 이 어리석은 양반! " 하고 그의 아내는 얕보듯이 말했다. " 나는 줄곧 당신보다 판 발 앞 서 있었어요. 처음에 당신을 척 보았을 때부터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을 다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어때 요, 이런 말을 듣고 놀랐겠지요? " 애플비 씨는 나뭇가지인 줄 알고 살무사를 붙잡은 사나이와도 같은 충격을 받고 싸웠다. 그는 헐떡거 리며 물었다. " 어떻게 알았지? " " 어떻게라니요? 당신은 우리 아버지와 똑같았기 때문이에요, 모든 점에서 ―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깔 끔한 옷차림, 거만한 태도로 들려준 도덕 이야기까지 ― 당신은 아버지와 똑같았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런 아버지를, 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취한 처사를 생각하고 일생 동안 미워했었지요. 아버지는 돈을 목적으로 어머니와 결혼했고, 악몽 같은 하루하루가 계속되다가 결국 재산이 탐나 어머니를 죽여버렸었 어요! " " 죽였다고? " 하고 애플비 씨는 놀라서 물었다. " 뭘 새삼스럽게 놀라지요! " 하고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 당신은 그런 일을 자기밖에 할 수 없는 줄 알았나 보지요? 그래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였어요. 계획적인 살인이었다고 말해도 돼요 ― 그렇 게 말하는 것이 당신 마음에 든다면. 컵에 물을 한 잔 갖다달라고 부탁하고는 어머니가 물잔을 내밀자 붙잡아서 목을 꺾어버렸던 거예요. 당신의 방법과 너무도 비슷하지 뭐예요! " 애플비는 현재의 사태를 뚫고나갈 믿기 어려운 계시가 마음 속에 떠오름을 느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 다. 그는 다그쳐 물었다. " 어떻게 됐소, 그 아버지는? 말해 주오, 어떻게 됐는지! 붙잡혔소? " " 아니, 붙잡히지 않았어요. 증인이 없었거든요. 그러나 게인즈보로 씨는 어머니의 변호사인 동시에 친 한 친구였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에 의심을 품고 심문을 청구했지요. 그리고 심문 장소에 있던 의 사를 불러다 물어보았어요. 그 의사는 아버지가 실은 어머니를 죽이고 마치 융단 위에서 미끄러져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했어요. 그러나 판결이 내리기 전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어 버렸지요. " " 그럼, 바로 그 사건이군 ― 내가 읽은 그 사건 " 하고 애플비 씨는 신음하듯 말하다가 차갑게 비웃 는 아내의 시선을 받자 입을 다물었다. " 아버지가 죽었을 때 ― " 그녀는 서슴없이 말을 계속했다. " 나는 맹세했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아버 지와 똑같은 사람을 찾아내어 그 사람에게 아버지가 당연히 보내야 했을 그런 생활을 하게끔 하리라고. 나는 그 사람의 버릇과 취향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 전혀 만족시켜 주지 않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 와 결혼한 건 돈이 목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는 단돈 1페니도 마음대로 쓰지 못 하게 해주는 거예요. 내가 눈을 감으려면 아직도 까마득해요 ― 왜냐하면 그 사나이는 내가 되도록 오 래 살 수 있도록 열심히 시중들어 주기 때문이지요. " 애플비 씨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녀가 그렇게 흥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디와 같은 위치에 서 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 어째서 그 사나이는 그런 일을 당하는 거지? " 하고 그는 부드럽게 말하며 1인치쯤 거리를 좁혔다. " 이상하게 들리지요, 아피?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그러나 당신의 여섯 부인이 하나 같이 다 물잔 ― 이것과 너무도 비슷한 물잔이지요? ― 을 가지고 오는 도중 융단 ― 이것과 아주 비슷한 융단이지요 ― 위에서 미끄러져 쓰러져서 죽은 것에 비한다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어요. 아주 기묘하지요. 이처 럼 여러 차례 우연이 거듭되면 누군가를 살인 용의자로 재판에 끌어낼 수 있는 근거가 될 구실이 있다 면. " 애플비 씨는 갑자기 칼라가 꽉 끼어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안되는데? " 하고 그는 교묘하게 화제의 방향을 돌렸다. " 어째서 내가 당신의 목숨을 연장시키시 위해 열심히 일하리라 자신하고 있는 거지? " " 자기를 교수형에 처할 입장에 있는 부인을 거느린 남편이라면, 누구나 다 그만한 일을 알 텐데요. " " 그렇지 않아! " 하고 애플비 씨는 숨막힌 목소리로 소리쳤다. ' 내 생각엔 그런 사나이는 되도록 빨 리 상대방을 처치해 버릴 것 같은데. " "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준비해 두었던 자료가 말을 하는 거예요. " " 준비? 무슨 준비지? " 하고 애플비 씨는 다그쳐물었다. " 기쁘군요, 설명하게 해주셔서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사실 이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 것 같아요. 그러나 이렇게 여기 서 있는 것은 힘들어요. " " 그런 건 아무래도 좋소 " 하고 애플비 씨는 초조하게 말하며 어깨를 움추렸다. " 좋아요, 그럼, 설명하지요 " 하고 그녀는 쌀쌀맞게 말했다. " 게인즈보로 씨는 당신의 결혼에 대한 서류를 다 갖고 있어요 ― 지금까지의 부인이 왜 죽었는가, 그리고 그 유산을 당신이 손이 넣은 시기가 늘 가게의 빚돈을 치러야 할 시기와 똑같았다는 사실도. 게다가 만일 내가 죽으면 곧 조사를 하여, 거 기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부탁한 내 편지도 가지고 있어요. 게인즈보로 씨는 정말 실력자예 요. 지문이며 사진도 …… " " 지문과 사진! " 애플비 씨는 소리쳤다. " 물론이지요. 아버지가 생전에 외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다 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었지요. 그러나 게인즈보로 씨는 만일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일찌감 치 포기해 버리는 것이 당신을 위한 길임을 보증해 주었어요. 어디로 도망을 치든 당신을 찾아오는 것 은 식은 죽 먹기니까요. " " 대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 하고 애플비 씨는 못 참겠다는 듯이 물었다. " 이렇게 된 이상 함께 있을 생각은 없을 테고, 그렇다면 ― " " 천만에요, 이제 당신은 그런 너절한 가게는 그만 집어치우고 앞으로는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집에 있 어야 해요. " " 가게를 집어치우라고! " 그는 비명을 질렀다. " 알겠어요, 아피? 내가 죽었을 경우 사정을 잘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편지에 특별히 어떻게 죽었을 경우라는 것을 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는 사시사철 당신을 옆에 거느리고서 길고 즐 거운 인생을 보낼 생각이에요. 그러다가 어쩌면 ― 이건 어디까지나 <어쩌면>이지만 ― 그 편지와 증 거 일체를 당신에게 넘겨줄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요. 아주 신중히 나를 위해 신경써 주는 편이 얼마나 당신을 위하는 일인지 아셨겠지요? " 갑자기 요란스레 전화 벨이 울렸다. 애플비 부인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저렇게 전화를 걸어오는 게인즈보로처럼 신중하게 말이에요. 그는 매일 밤 9시에 내가 무사히 행복 하게 있다는 것을 전화로 확인하지 않으면 당장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결론을 향해 뛰어들 거예요. ' " 잠깐! " 하고 애플비 씨는 소리쳤다. 그라 수화기를 귀에 대자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어김없이 게인즈보로였다. " 여보세요 " 하고 나이든 게인즈보로의 목소리가 말했다. " 아내는 지금 전화받을 수가 없는데요. 무슨 용건이지요? " 그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차가운 적의를 띠고 있었다. " 애플비 씨, 나는 게인즈보로입니다. 나는 당신 부인과 급히 할 말이 있습니다. 10초만 기다릴 테니 부인을 전화기 앞으로 나오게 해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 애플비 씨는 마지못해 아내 쪽으로 돌아서서 수화기를 내밀었다. " 자아 ― " 그녀가 물잔을 놓으려고 몸의 방향을 바꾼 순간 발 밑에 있는 용단이 쭉 미끄러져나오는 것을 보고 그 는 놀라움에 숨을 삼켰다.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허위적거리는 그녀의 팔이 허공에서 버둥거렸고, 물잔 이 그의 발치에 내동댕이쳐져 말끔히 줄을 세운 바지를 적셨다. 그녀의 얼굴은 째지는 듯한 비명으로 일그러졌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마룻바닥을 구르듯 나가떨어져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보아온 낯익은 자 세로 축 늘어져버렸다. 그것을 바라보며 애플비 씨는 손에 든 수화기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의식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계속 말했다. " 이제 10초가 지났소, 애플비 씨! 아십니까? 시간이 지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