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너머의 목격자 그들 사이에는 벽이 있었다. 벽이라고 해야 얇은 날림 간막이 벽이었으므로 그것이 방과 방 사 이의 음향판 구실을 해서 로버트는 그 여자를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발자국 소리였다. 자기 방 둘레를 돌아다니는 작고 딱딱한 하이힐 소리였다. 틀림없 이 젊은 여자구나 하고 그는 상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무렵 그가 허드슨의 《녹 색의 장원》에 열중하여 미궁과 같은 아마존의 정글 속에서 그 빛나는 리마를 뒤쫓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윽고 목소리도 귀에 익게 되었다. 그 이야기 소리는 가볍고 숨쉬는 소리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무슨 유행가에 맞춰 좀 큰 소리로 노래부를 때는 아주 즐겁게 들렸다. 그는 마침내 틀림없이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겠지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그 뒤부터는 일부러 귀를 기울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그녀에게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여자의 이름은 에미라고 했으며 남편도 있었다. 단조롭고 불쾌한 목소리를 지닌 빈스라는 이름 의 사나이로 어딘가 모르게 음울한 느낌을 주었다. 가끔 말다툼이 벌어지면 반드시 마지막에는 남자가 방문을 쾅 닫고 우뢰같이 요란한 발자국 소리를 쿵쿵 울리며 복도로 멀어져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자는 목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러면 간막이 벽에 찰싹 붙어 서 있는 로버트 는 마치 누군가가 가슴 속에 손을 디밀어 심장을 움켜쥐고 비틀어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는 겨우 두세 발자국밖에 안되는 거리를 달려가서 여자의 방문을 두드리고 여기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언제라도 ― 아니,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처럼 마음은 줄달음을 치지만 로버트는 어쩔 수 없이 몸이 굳어져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 었다. 게다가 이 일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만한 상대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괴로왔다. 이 세상에서 그가 친구라고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은 사무실의 동료 정도인데, 그들에게 말해 봐 야 이해해 주지 못할 것이다. 특별히 말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는 시에서 손꼽는 큰 백화점 의 신용 판매부(외상 판매부)에 근무하고 있으며, 그곳에 있는 그의 주변 동료들이란 여러 해 동안 무엇이고 냉담하게 코웃음치는 버릇이 완전히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남의 경력을 들춰내 고 세금의 미납.체납, 돈이 드는 여자들과의 비밀 교섭,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따르기 마련인 수상쩍은 일 ― 이런 것들을 들추다 보니 어느결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로버트도 오래 근무하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로버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 " 옆방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고? 남편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그거 좋겠군. ― 어 서 오세요, 이리 오세요! "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자기가 구하고 있는 것은 이 러한 그의 감정을 이해해 주는 자, 밤마다 밀려드는 암흑의 시간 중에 일종의 돌처럼 자기 속에 가라앉은 차가운 고독감에 결정을 내려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만 벽에 달라붙어 거기서 빨아들 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이미 그 여자를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이윽고 실제로 그 여자를 만났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파트에 온 우편물은 모두 아래층 현관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우연히 그날 아침 그가 출근하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노라니 그녀가 테이블 위에서 편지 한 통을 집어 들고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 여자라는 데 대해서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가냘프고 자그마한 몸매에 검은 머리칼, 그리고 용모에도 그가 벽을 사이에 두고 상상했던 대로 사랑스러움이 그대로 담겨 있었 다. 그녀는 홈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계단에서 그와 지나칠 때는 한층 더 가슴께를 여미며 마 치 그를 두려워하듯 옆을 빠져나갔다. 그는 자기가 뻔뻔스럽게 상대방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 실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얼굴을 붉히며 계단 모퉁이를 돌아서 거리로 나갔다. 그 러나 근무처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머리는 지금 받은 놀라움으로 착잡했다. 그 뒤로도 두세 번 역시 같은 조건 아래 그녀를 만났지만, 계단 아래 서서 머리 위로 사라져가 는 그녀의 뒷모습을 돌아다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까지는 그로부터 여러 주일이 지난 뒤였다. 귀엽고 화사한 복사뼈의 선, 통통한 장딴지, 또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을 통해 드러난 몸의 곡선, 그리고 계단 위까지 올라가면 마치 그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 린 듯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심장의 고동도 멎을 듯한 순간 로버트가 여자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읽으려고 했을 때, 그녀 의 방에서 남편이 나무라는 듯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미! " 하고 그 소리는 말했다. " 뭘 꾸물대고 있어! " 그러자 여자는 사라지고, 그녀와 만난 짧은 순간도 사라져버렸다. 그는 그 남편을 보았을 때, 그녀는 왜 이런 남자를 택했을까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그 마한 몸집에 싸움닭 같은 사나움과 냉정함이 있어 일종의 호남자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광대뼈가 툭 불거져나올 정도로 피부가 옥죄었고 얇은 입술을 적의를 나타내듯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스쳐갈 때 그는 눈을 하얗게 하여 흘끔 로버트를 노려보았으므로, 순간 로버트는 언젠 가 여자의 얼굴에 나타났던 표정의 일부를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 사나이는 누가 어떤 일로 건 드리기만 하면 지체없이 물어뜯을 것 같은 기세를 보이는 반쯤 길들여진 야수 같은 위험 인물 이었다. 옆에 다가서기만 해도 위험한 냄새가 풍겨나오니, 아마 그 여자도 깨어 있는 동안을 계 속 그 냄새를 맡고 있을 게 틀림없다. 어느 날 밤, 그 사나이에게 배어 있는 흉포성이 폭발하여서 마침 깊이 잠들어 있던 로버트를 깨웠다. 그것은 단순히 목소리 탓만은 아니었다고 로버트는 잠이 덜 깬채 침대 위에 일어나앉으 며 생각했다. 왜냐하면 벽 저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낮았기 때 문이다. 두려운 것은 심상치 않은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 와 벽에 귀를 갖다 댔다. 그리고 선 채로 눈을 감고 이따금 들려오는 대화를 쫓고 있노라니, 경계를 이룬 벽이 스 르르 놀아버려 옆방에 마주앉아 있는 두 사람이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 흥, 알고 있다고? " 하고 사나이가 말했다. "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 " … 나가겠어요! " 하고 여자가 말했다. " 그래서 모든 사람 앞에서 폭로하겠다는 거야? 광고하고 다니겠단 말이지? " " 그런 짓은 안해요! " 여자는 소리쳤다. " 절대로 하지 않겠어요! " " 어쨌든 나에게 위험한 다리를 건너게 하겠다, 그 말이지? " 사나이는 이윽고 비웃는 듯 부드 러운 말투로 바뀌었다. " 1만 달러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큰돈을 만져볼 수 있겠어? 시궁창을 뒤져서 주워오기라도 한 줄 아는 모양이지? " " 차라리 그편이 더 나았을 거예요! 이럴 바엔 …… 나는 나가겠어요! " 사나이의 대답은 말이 아니라 폭력의 형태를 취했다. 너무도 심한 일격에 여자가 쓰러지듯 벽 에 부딪쳐 그 충격이 로버트의 얼굴을 스쳤다. " 빈스! "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 목소리는 날카로왔으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 그러지 말 아요, 빈스! " 다음 타격이 여자를 덮쳤을 때, 그 아픔 때문에 로버트의 신경을 구석구석까지 긴장했다. 여자 가 뒷걸음질치며 벽 저 쪽에서 비치적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듣자 그의 손톱을 벽으로 파고들었 다. " 아아, 살려줘요! ― " 여자가 외치는 소리에 이어서 곧 귀에 거슬리는 괴로운 숨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 소리도 이 미 반응이 없는 폐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부드러운 것이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서운 정적. 마치 벽이 여자의 차가운 시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로버트는 선뜻 거기서 물러나 공포에 휩싸 인 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사고는 거칠게 뒤척이며 몇 가락으로 나뉘어 서로 격투를 벌 였으나, 그 가운데 하나가 차츰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는 아무래도 이 사고 앞에 마주서서 그것 을 분명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즉 여자가 살해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 의 옆에 서서 보고 있었던 거나 다름없이 그 일을 본 목격자인 것이다! 사건은 만일 그 벽이 없었다면 팔을 내밀어 그녀의 몸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여자를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제 어쩔 수 없게 될 때까 지 그는 바보처럼 서 있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도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정신없이 스스로에게 타일렀 다. 옆방에 있는 살인범이 여기 목격자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이상, 손이 피투성이 가 되어 있는 현장을 잡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경찰에 전화를 걸면 5분도 안되서 …… 감각이 없어져버린 듯한 다리를 한 발자국 내딛으려고 했을 때, 로버트는 옆방에서 다시 슬며 시 활기가 되살아나는 듯한 기색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발자국 소리, 무언 가 치우는 소리, 그리고 분명히 다른 소리와 구별할 수 있는 ― 생명을 잃은 묵직한 것을 끌며 조심스럽게 여는 문소리 …… 로버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려주어 그를 괴롭히 고 놀라게 한 것은 이 마지막 소리였다. 괴물다운 살인범. 그러나 그 사나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이 조용한 한밤중에 시체를 안전 하게 처리하면 그는 살인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문 앞에서 로버트는 위태롭게 발길을 멈췄다.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무거 운 것을 끄는 소리와 함께 계단 쪽으로 멀어져갔다. 어쨌든 그는 사람을 죽인 사나이다. 그는 지금 무모하게도 자기가 손댄 희생자를 끌고 가는 현장을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 다. 이때 누구와 마주친다면 어떻게 될까? 로버트는 눈을 꼭 감고 마치 그 사나이의 손이 이미 목 언저리에 와닿는 것처럼 목이 죄고 숨 이 차서 힘없이 문에 기대었다. 비겁자! ― 그렇지 않다고 발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용기를 내 야 할 필요성이 생기자 그는 자신이 한낱 보잘것없는 비겁자임을 알았다. 여자의 얼굴이 이제는 공포가 아니라 경멸의 표정을 띠고 눈 앞에 떠올랐다. 그러나 ― 하고 그의 마음 속에 승리감이 스쳐갔다. ― 지금부터라도 경찰에 갈 수 있다. 자기 가 그렇게 하는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했으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승리감은 곧 흐려져서 사 라져버렸다. 그들은 그가 어떤 종류의 소리를 듣고 거기에서 살인사건은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 각할 것이다. 시체는? ― 없음. 범인은? ― 없음. 입씨름 끝에 나가버린 부인의 남편이 있을 뿐 이다. 고발자는? ― 혼자 사는 젊은이. 그는 악몽에 시달려 가위에 눌린 것이다. 바보 ― 즉 로 버트인 것이다. 그가 복도로 나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한 것은 아래층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부터였다. 도중에서 발견한 것이 있었다. 손수건 하나. 작게 뭉쳐진 더러운 손수건.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은 집어들어 활짝 펴서 머리 위로 비치는 어두컴컴한 불빛에 비춰보았다. 얼룩은 끈적끈적한 붉은빛이었는데, 한쪽 구석에 작게 <에미>라고 수놓여진 글씨에 묻어 있었 다. 피 ― 그녀의 피다. 이것만으로도 증서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 과연 " ― 그는 경관이 놀리듯이 대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 분명 증거이지 ― 코 피를 닦았군. " 절망이 그의 감각기관을 흩뜨려 놓았다. 그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깜짝 놀라 나머지 계단을 날 듯이 뛰어내려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현관문의 커튼에 얼굴을 묻었을 때 차는 꽁무니의 불빛을 악마의 눈처럼 번쩍이며 신음 소리를 내고 달려가버렸다. 어둠 속이라 번호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빨랐어도 …… ) 하고 그 는 자신은 원망했다. 아니면 범인이 차로 도망치리라는 것을 예상할 만한 분별력이 있었다면 쉽 게 차를 식별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 기회마저도 놓쳐버리고 말았다. 기회는 모두 사라졌 다. 열에 들뜬 사람처럼 방 안을 서성이다 보니 30분도 되기 전에 살인범이 돌아온 것을 알려주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당연한 일이라고 로버트는 생각했다. 이제 여자의 시체는 처치해 버렸다. 그러므로 안전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모르는 체 하고 있으면 된다. 만일 자기가 옆방으로 들어가 실토하게 만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 이렇게 생각하자 가슴 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상대해 줄 수 있을 정 도의 재력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 그러나 그런 일은 모두 여자에 대한 그의 정열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었다. 대체 자기에게 어떤 복수의 무기가 남아 잇단 말인가? 보잘것없는 월급장이, 그리고 그 직장이라는 것은 …… 로버트는 갑자기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 어떤 영감이 온 몸을 씻어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 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그 생각을 한 마디 한 마디 조그만 글씨로 그곳에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털면 먼지가 나오는 법이라고 그의 직장 선배들은 늘 말하고 있었다. 누구나 다 범죄용 의자이다. 옆방 사나이는 폭력으로 치닫기 쉬운 성질인데다, 뭔가 예사롭지 않은 수단으로 1만 달러를 손에 넣을 듯한 냄새를 풍기는 말을 했었다. 틀림없이 그의 경력에는 아직 당국에서 모 르고 있지만, 알게 되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검은 얼룩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범죄수사에 숙달된 누군가가 그 사나이의 과거를 덮고 있는 덮개를 한 장 한 장 벗겨내보인다면 정의는 반 드시 그이게 벌을 줄 것이다. 이것이 무기이다. 그의 경력에 담겨진 어두운 과거야말로 바로 방 아쇠를 당겨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기인 것이다! 조용히 생각하면 로버트는 여자의 손수건을 봉투 속에 넣고 봉했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 정확하게 생각해 내려고 애쓰며 그는 살인범과 그 희생자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를 종이에 적 었다. 그 종이와 봉투를 양복장 서랍 속에 넣었으니 이미 첫발을 내딛은 셈이었다. (그런데)하고 로버트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 사나이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이 름이 빈스라는 것, 그것뿐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과거로 통하는 어두운 복도를 수색하러 나서는 출발점으로는 도저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빈약한 자료이다. 뭔가 좀더 있을 것 같다. 단서 로서 도움이 될 만한 그 무엇인가가. ) 그날 밤 줄곧 자지도 않고 생각한 끝에 가까스로 아파트의 여주인이 떠올랐다. 늘 졸린 듯한 눈을 한 뚱뚱한 여자로, 방값을 꼬박꼬박 받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혹시 그 사나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래층 뒷방에 살고 있었으 므로 로버트는 최대한의 용기를 내어 아침 일찍 그 문을 두드렸다. 그의 질문을 들으면서 그녀는 여느 때보다 더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 그 사람들 말인가요? " 하고 그녀는 가까스로 말했다. " 스나이더 씨라고, 아주 말할 수 없이 좋은 분이에요. " 그녀는 로버트를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 " 그 사람들과 싸운 건 아니겠지요, 설마? " " 아니,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데 그것밖에 모르십니까, 그 두 사람에 대해서? 이를 테면 그전 에 어디에 살고 있었다든가, 뭐 그런 것은 ― ? "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 그런 일은 내가 알 바 아니지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 매달 1일이면 어김없이 집세를 내준다는 것뿐이에요. 어쨌든 착실한 사람들이에 요. " 그라 무거운 마음으로 상대방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 한길 쪽으로 난 문을 닫고 나가는 우체부 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눈 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주인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우편물 앞에 서 있는 것은 그 혼자였다. 그 우편물 속에서 아름다운 필적으로 <빈센트 스나이더 부인>이라고 쓴 한 장의 봉투가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줄곧 그 봉투를 안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다. 이윽고 자기가 쓰는 작은 방에 들어간 뒤에야 조심스럽게 뜯어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한 장의 편지지에 겨우 두세 줄, 가족이 모두 잘 잇다는 말과 셀리아라는 서명이 있었다. <언니로부터>라고 씌여 있는 것으 로 보아 자매간인 모양이었다.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군 ― 그러나 잠깐만, 봉투에는 보 낸 사람의 주소가 씌여 있었다. 주의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로버트는 한순간 망설이다가 곧 그 봉투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시 옷차림을 매만진 다음 부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부장은 직장의 물이 가장 많이 든 사람으로 빈정대는 버릇 도 제일 심했다. 스플레이그 부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무슨 볼일인가? " " 죄송스러운 부탁입니다만 ―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 2, 3일 휴가를 얻고 싶습니다. 즉 그 ― 사람이 죽어서요. " 스플레이그 부장은 자기가 감독하는 직장의 평온한 사무에 돌을 던진 일에 대해 한숨을 쉬었 으나 얼굴에는 적당히 동정어린 표정을 떠올렸다. " 누군데, 친한 사람인가? " " 네, 아주 친한 …… " 하고 로버트는 대답했다. 철도 역에서 그 집까지는 걸어서 얼마 안되었다. 그 집 주위에는 일종의 엄격하고 금제적인 분 위기가 감돌고 있었는데, 로버트의 노크 소리를 듣고 나온 젊은 부인에게서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네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에미 스나이더는 내 동생입니다. 동생은 결혼하여 성이 바뀌었지 만, 나는 셀리아 톰프슨이라고 합니다. " " 좀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 그 부인에 대해서, 즉 당신 동생에 대해서 …… " 상대방 부인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아이에게? " " 네, 저어 …… " 하고 로버트는 말을 얼버무리면서 세게 헛기침을 했다. " 그녀가 아파트에서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래서 지금 조사하고 있는 겁니다. 만일 …… " " 경찰분입니까? " " 그 대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로버트는 이 애매한 대답이 자기 소개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이 바램은 성취되어 그녀는 그를 집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다지 손님을 많이 접 대하는 것 같지 않은 검소한 거실에 그녀와 마주앉게 되었다. "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 하고 여자는 말했다. " 언젠가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았 어요. "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괴로운 듯 윗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로버트는 몸을 굽혀 여자의 손을 부드럽게 만졌다. "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 " 어째서라니요? 그 어린아 이를 집에서 내쫓고 문을 닫아버렸으니 달리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자기 자신의 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아이를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내쫓다니! " 로버트는 당황해서 손을 떼었다. " 당신이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 " 우리 아버지에요. 아니 그러니까 그 아이의 아버지이지요. " "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 "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 하고 여자는 말했다. " 아버지의 눈에는 아름다운 것은 모 두 죄많은 것으로 보이는 법이랍니다. 지옥의 불에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어떻게든 지옥에 가 지 않도록 하려다가 오히려 가족들을 일생 동안 지옥에 가둬두는 결과를 빚어내었던 거예요! 그 아이가 커감에 따라 차츰 아름다와지자 남자아이들이 줄줄 따라 다녔답니다. 그러자 아버지 는 갑자기 그 아이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남자와 문제를 일으키자 소지품을 들려 집에서 쫓아냈어요. 만일 내가 그 아이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 " 하 고 그녀는 두려운 듯이 말했다. " 나도 보나마나 쫓겨날 거예요. 아버지 앞에서는 그 아이의 이 름도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야단이랍니다. " " 잠깐 ― 하고 로버트는 열심히 말했다. " 저어, 그 동생과 문제를 일으켰다는 남자말입니다 만, 동생이 결혼한 사람입니까? ― 빈센트 스나이더라던가? " " 글쎄요 " 하고 여자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 모르겠어요. 에미와 아버지 둘만 아니까요. 어쨌 든 무섭게 비밀에 붙여졌었어요. 동생이 결혼한 것도 갑자기 날아온 그 아이의 편지를 받고 알 았어요. " " 아버님이 알고 계신다면 그분께 여쭤보기로 하지요. " " 안돼요!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만일 아버지가 지금 이런 말을 내가 당신에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 " " 그러나 나로서도 이 정도로 물러선다는 건 곤란합니다. " 하고 그는 말했다. " 꼭 그녀에 대 한 것을 물어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단번에 분명해질지도 모르니까요. " " 그럼, 할 수 없군요 " 하고 여자는 피로한 듯이 말했다. " 물어보세요.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묻지 마세요 ― 제발 부탁이니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시고 말이에요. 그 대신 고등학교 선생으 로 미스 벤슨이라는 분에 계시답니다. 그분에게 물어보세요. 에미를 귀여워해주신 분이지요. 나 에게 오는 편지도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시도록 거기서 받고 있답니다. 그분이 이야기해 주실 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로 이야기해 주시지 않겠지만, 내가 써주는 편지를 가져가시 면 ― " 문 앞에서 그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녀는 강한 눈초리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 아름답지만 않으면 골치아픈 일에 말려들어가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게는 절 대로 그런 걱정이 없답니다. 그러나 에미는 …… 꼭 그 아이를 찾아서 잘해주세요. " " 네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학교로 찾아가보니 미스 벤슨은 타이프라이터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3시까지 수업이 있으니 만나려면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초조한 마음을 꾹 참고 호기심에 찬 통행 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좁은 시골 거리를 에미의 생각에 잠겨 몇 시간이나 거닐었다. 에미도 이 거리를 많이 걸었을 것이다. 거리에 늘어선 가게의 유리창이 그녀의 모습을 비춰주었을 것이다 ― 혼자 있는 모습뿐만아니라 …… 그는 질투를 느끼며 생각했다. 남자들이 줄줄 따라다녔다고? 그렇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끌린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도 그녀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 지 못하고 결국 그런 운명을 걷게 하다니! 만일 자기가 그 무렵 그녀를 알았더라면, 자기가 그 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더라면 이렇게 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시가 되자 그는 학생들이 다 나갈 때까지 학교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초조한 마음에 쫓겨 안으로 들어갔다. 미스 벤슨은 잿빛 머리의 자그마한 부인으로 덮개를 덮은 타이프라이터들이 묘비처럼 늘어선 사이에 서서 뜻하지 않은 방문객을 맞아 당황하고 있었다. 로버트가 사정을 설 명하고 셀리아 톰프슨의 편지를 내놓자 그것을 읽고 나서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 세상에! 당신을 나에게로 보내다니, 정말 난처한 일이에요. 그만한 일은 알 만한 사람이면서 도 ……" " 어째서 난처합니까? " " 어째서라니요? 내가 <그 말을> 아무에게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여자는 알아요. 만일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내가 어떤 꼴을 당할는지 잘 알 텐데! " " 잠깐만 ― " 로버트는 꾹 참고 말했다. "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물어보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다만 에미와 문제를 일으켰다는 남자 의 이름과, 그 사람이 본디 어디에 살고 있 었는지, 어디를 가면 그에 대한 것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는지, 그것을 묻고 있는 겁니다. " " 안돼요. " 미스 벤슨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 " 말할 수 없다고요! ― " 로버트는 화를 내며 말했다. " 사람이 모습을 감춰버렸습니다. 이 일 의 밑바닥에는 그 사나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로 끝내버리려는 겁니까? " 미스 벤슨은 턱의 근육에서 힘을 뺐다. " 그럼, 그 사람이 ― 뭔가 그 아이에 대해서 일을 저질렀다는 건가요? " " 그렇습니다. " 로버트는 힘없이 흔들거리며 기절하기 직전에 있는 그녀의 팔을 재빨리 붙잡아주어야만 했다. "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야 했던 거에요 " 하고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처음부터 언젠가는 이런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야 했던 거예요. 그러나 그때는 …… " 그때 에미는 그녀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좋은 학생 ― 그렇다고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좋은 학생이었다. 예의바르고, 오늘날 전후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여자와는 전혀 달랐다. 그 소동이 일어난 날 오후 미스 벤슨은 에미로부터 수업이 끝난 뒤 학과에 대한 일로 주의를 받기 위해서 교장선생님 방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만일 뭔가 나쁜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그런 말을 일부러 남에게 했겠는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더라도 증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 증거라고요? " 하고 로버트는 당황해서 물었다. 그렇다, 증거다. 교장실에서 비명이 들려왔을 때 학교에는 미스 벤슨 혼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얼른 교장실로 달려가서 느닷없이 문을 열었다가 거기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만 것이다. 에미의 옷을 찢어져서 반쯤 벗겨져 있고, 그녀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플래이스 씨는 그녀의 뒤에 서 서 열린 문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믿을 수 없을 만큼 험악한 눈초리고 미스 벤슨을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 플래이스 씨라고요?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그는 시원하게 내다볼 수 없는 젤라틴 같은 반투명의 물체 밑에서 마구 손발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래요. 플래이스 씨 ― 교장선생님이지요. 플래이스 씨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그녀를 노려보 고 서 있었어요. 그러자 에미는 몸을 홱 돌려 문으로 뛰어나갔지요. 플래이스 씨는 붙잡으려고 한 발자국 내딛었으나, 곧 생각을 달리했는지 나는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들 닫더니 설명하기 시 작했어요. 간단히 말해서 그의 설명에 의하면 에미가 아주 닳고 닳은 여자라는 것이었어요. 그 녀는 불쑥 교장실로 들어오더니 그를 협박하더랍니다. 그래서 흥분을 가라앉혀주려고 했더니 일 부러 미친 듯 소동을 벌였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의 처사는 너그러웠어요. 참으로 너그러웠어요. 당국에 보고하여 학교의 명예와 그녀가 존경해야 할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 없이 다만 그녀를 퇴학 처분하고, 아버지에게 곧 딸을 이 고장에서 다른 곳을 내보내라는 충고만으로 끝내 버린 거예요. " 그리고 플래이스 씨는 미스 벤슨에게 마침 와서 현장의 목격자가 되어주어 참으로 다행한 일 이라고 뜻있는 듯한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만일 미스 벤슨이 현장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면 그녀에게 아주 불행한 결과가 되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 그만한 일은 사실 있을 수 있는 거니까요 " 하고 미스 벤슨은 괴로운 듯이 말했다. " 이 고장 과 이 고장에서의 모든 일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플래이스 씨 일족입니다. 그때 내가 직감한 것 을 그대로 지껄였다면, 한 마디라도 입 밖에 내어 말했다면 아무 데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이야기를 해야 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해야 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 특히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 " 미스 벤슨은 그때 교장실에서 나와 복도 반대쪽 맨 끝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상 태로 거기까지 걸어갈 힘이 어디에 남아 있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방 안에 들어간 순간 게시 판 밑에 쓰러져 있는 에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느 때 같으면 상비용 가위가 게시판에 매달 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가위는 그곳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와들와들 떨리는 주먹 속 에 쥐어져 있었으며 그 근처는 온통 피바다였다. " 그런 성질을 지닌 아이였어요 " 하고 미스 벤슨은 아무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남에게 꾸중을 듣게 되면 서 있는 바닥 밑으로 사라져버리든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지요. 그러니까 그때도 그런 사건이 일어나자 곧 그 아이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그런 생각이었을 거예요 ― 자기 같은 건 없어져버려야 한다고 말 이에요. 그때 자살이 미수로 끝난 것은 하느님의 보살피심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 그녀는 입이 무거운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불렀다. 그리고 에미가 집에서 쫓겨난 뒤 그녀를 돌봐준 것도 미스 벤슨이었다. " 그리고 에미가 마을을 가라앉히게 되자 ― " 하고 미스 벤슨은 말을 이었다. " 나는 그 아이 를 주청이 있는 어떤 도시의 회사에 취직시켜 주었습니다. 물론 졸업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 꼭 도와줘야겠다는 편지를 써보내어 어떻게 채용이 된 거 였지요. " 미스 벤슨은 손가락을 앞머리에 파묻듯이 이마를 짚었다. " 정말이지 분명히 말해야 할 때 말을 했었더라면 …… 그 사나이가 안심이 안되어 어디까지 나 그녀를 뒤쫓아가서 …… " " 그러나 그 사나이가 아닙니다! " 로버트는 거칠게 말했다. "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한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 하지만 당신은 …… " " 그렇지 않습니다. " 하고 로버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 내가 조사하고 있는 것은 다 른 사람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 그녀는 몸을 뒤로 젖혔다. " 당신은 나를 속이고 ― " " 천만에요! 그럴 생각은 조금도 …… " "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 하고 그녀는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이 지금 한 말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단 한마디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거짓말장이고, 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할 테니까요! " " 그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 다만 그녀에게 알선해 준 그 취직 처를 일러주십시오. 그러면 다른 일은 다 없던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 그려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그를 쳐다보더니 놀란 듯한 눈빛으로 갑자기 밝아졌다. 그녀는 마침 내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좋아요. " 그가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걱정이 되는지 그의 팔을 잡았다. " 일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부디 나를 불친절한 여자라고 생각지는 마세요. " " 물론입니다.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겠습니까? " 그 뒤 오후 내내 버스에 흔들려 녹초가 되었고, 그날 밤 묵은 호텔의 침대도 버스의 좌석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 다음 찾아간 글레이스 회사 ― 글레이스 앤드 파디 회사의 파디 씨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목소리며 태도가 너무 허풍스러워서 그 작은 사무실에는 어울리지 않 는 명랑한 사나이였다. 그는 로버트가 내민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 신용 조사 입니까? " 하고 몹시 감동한 듯 인 말했다. " 정말이지 당신네들이 미주알고주알 다 캐내는 데는 놀랄 뿐입니다. 실업계의 숙청 을 하는 북서 기마 경관대라고나 할까요? 그래, 내가 뭐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 " 에미에 대해서라면 ― 그가 잘 알고 있었다. " 아뭏든 이런 사무실에서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만큼 아주 귀여운 아이였지요. " 그는 깊이 생각하면서 말했다. "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통치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러나 여 기저기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월급을 줄 만한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 로버트는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 누군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남자는 없었습니까? 지금 여기 근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좋습니다. 이 회사 사람이 아니더라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 ? " 파디 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 으음, 전혀 짐작가는 사람이 없는데요. 물론 그 아이를 쫓아다니던 남자들은 많았겠지만 ― 그러나 거기에 대한 것을 옆사람이 알 수는 없지요. 별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성질도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요. 결국 그렇게 된 것도 사실은 그러한 성격이 원인이었습니다. " " 그렇게 되다니요? " " 아니, 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너무 자주 사무실의 돈을 훔쳐내는 것 같았는데, 여기 사람들 가운데 그 아이만이 그런 태도여서 범인처럼 보인 거지요. 게다가 취직할 때 소개 편지에 <복잡한 사정>이라고 씌여 있었기 때문에 마치 …… 그래서 그만두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야 ― " 파디 씨는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 그 아이가 아 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모든 것이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어디로 알아봐야 연락이 되는 지도 몰랐지요 …… " 그는 손가락 마디를 꺾어 큰 소리를 내었다. ― 딱딱 하고. " 이미 가버렸 으니까요. " 로버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설득하듯 말했다. " 그러나 친구라든가 누가 있었을 게 아닙니까? " " 아아, 그거라면 ― " 하고 파디 씨는 말했다. " 지금 말했듯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아이 였지만, 가끔 전화 교환수인 제니 리조를 찾아가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것을 보았지요. 만일 제니 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또 내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 " 그러나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어준 것은 제니였다. 트집을 잡으려면 잡아보라는 듯이 악취미를 그대로 드러낸 옷을 입은 애교없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물건이라도 쳐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그 를 관찰한 뒤, 에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다고 냉담하게 말했다. 가엾게도 에미 는 여기서도 이미 어느 정도 들볶였으니 조금쯤은 그냥 내버려둬도 되지 않겠느냐고. " 나는 그 여자에게 관심있는 게 아닙니다.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 그 여자가 결혼한 남자 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빈센트 스나이더라는 사나이인데, 모르십니까? " 그는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놀란 표정으로 보아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운이 솟아났 다. " 그 자식!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그럼, 에미는 기어코 그 사람하고 결혼했군요! " " 어떻게 된 거지요? " " 어떻게 된 거라니요? 내가 입이 아플 정도로 그 사람은 안된다고 했는데 ……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 " 왜지요? " "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주 잘난 체하고 언제나 주머니 속에 돈을 넣 고 다녔지만, 어디서 어떻게 벌어온 건지 알 게 뭐예요! 보나마나 제대로 번 돈이 아니지만 약 삭빨라서 붙잡히지 않는 걸 거예요. 그러니까 …… " "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 " 잘 아는 것 같다구요? 우리 집 근처에 살던 개구장이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어요. 봐요 ― " 제니는 책상 서랍에 있는 물건을 뒤적이더니 한묶음의 사진을 꺼내어 로버트에게 내밀었다. " 우리는 곧잘 함께 데이트를 했어요. 빈스와 에미와 나와 내 남자친구와 함께. 나는 빈스가 있는 앞에서 저 사나이는 못쓴다고 여러 차례나 말해 줬어요. 그는 에미가 내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정도로 구워삶았던 모양이에요. 하기야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에미는 어린애 같았으니까요. 누가 좀 친절하게 대해주면 곧 정사라도 할 수 있는 아이였지요. ' 그다지 잘 찍힌 사진은 아니었지만, 빈센트와 에미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 이 사진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 로버트는 되도록 대수롭지 않은 듯이 물었다. " 마음대로 하세요. 필요하시다면 " 하고 그녀는 승락했다. 로버트는 사진을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 그런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즉 에미와 그 사나이는? " " 물어보시니까 말하겠지만, 에미가 직장에서 쫓겨나자 둘이서 이 고장을 떠나버렸어요. 에미 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조금 떨어진 남쪽 ― 새튼이라는 고장에 빈스의 일자리가 생겼다는 거 였어요. 그것이 두 사람을 본 마지막이었어요. 그 사나이가 정말 정직하게 일하고 있다면 내 눈 으로 보고 싶군요. 그 아이의 말투로 보아서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 뒤로는 소식이 없었어요. " " 에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생각납니까? 그 두 사람이 새튼으로 떠난 것이 언제였지요? " 제니는 생각해 냈다. 물어보면 좀더 많은 것을 생각해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깜짝 놀라 멍 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그녀를 그 자리에 놓아둔 채 로버트는 벌써 문 바깥쪽으로 나가고 있었 다. 새튼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도 안 걸렸다. 로버트가 큰 테이블 앞에서 새튼 시의 신문철을 넘기 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새튼 시의 신문사는 크고 믿을만했으며 신문 철도 잘 정리해서 보존하고 있었다. 제니 리조가 일러준 날짜보다 이틀 뒤의 신문에 로버트가 기대하고 있던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제 1면 꼭대기에 <1만 달러의 강도>라는 큰 표제가 붙어서. 대담무쌍한 강도가 혼자 새튼 신탁은행에 들어가 주의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않게 지배인 과 직접 부딪혀 1만 달러의 지폐가 들어 있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 유유히 나갔다. 경찰은 그 사나이의 행방의 뒤쫓고 있는데, 체포는 시간 문제로 보인다 …… 로버트는 떨리는 손으로 그 날짜 뒤의 기사를 조사해 보았다. 경찰은 마침내 수사를 단념했다. 용의자는 한 사람도 체포하지 못한 채 …… 로버트는 조심스럽게 사진에 가위를 넣어 빈센트가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은행 지배인은 귀찮은 듯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문득 뭔가 억지로 삼키려는 듯한 표정이 되었 다. 이윽고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 이 녀석입니다! 이 사람입니다! 이 얼굴을 잊어버릴 리가 있겠소! 만일 이 녀석이 잡히기만 하면 …… " " 그러기 전에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하고 로버트가 말했다. " 흥정은 거절합니다. " 하고 지배인은 항의했다. "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나이를 붙잡고 말 겁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돈을 한푼도 남기지 않고 다 찾을 겁니다. " " 흥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 하고 로버트가 말했다. " 내가 바라는 일은 이 사나이가 분명히 강도범이라는 사실을 종이에 써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경찰은 내일 이 사나이를 붙잡아 서 당신 눈 앞에 끌고 올 겁니다. " " 그것뿐이오? " 하고 상대방은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 그것뿐입니다. " 하고 로버트가 대답했다. 그는 다시 자기 방에 앉아 서류와 증거물을 앞에 늘어놓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살인범이 무슨 일로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가 그가 집을 나갈 때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되기까지 안심하고 숨도 제 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애써서 준비한 서류 ― 여러 사람과 나눈 대화의 기록을 다시 한번 신중 하게 검토했다. 이제 법의 정의에 호소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는 완전히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 로써 다 된 것은 아니라고 그는 엄격하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것은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축 도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차례차례 친한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한 한 여자의 기록. 그녀와 관 계를 가졌던 남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배신의 명수였다. 아버지, 학교 교장, 고용주, 그리고 마지 막엔 남편까지도. 저마다 모두 죄가 있다. 제니 리조의 말이 로버트의 귓가에 왱왱 울리는 것 같았다. <누가 좀 친절하게 대해주면 곧 정사라도 할 수 있는 여자>. 만일 그가 이야기를 걸었 다면, 만일 그가 먼저 행동적으로 나왔다면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해주었을는지 모른다. 계단 위에 서서 그를 돌아보았을 때, 어쩌면 그녀는 그가 말을 걸어오거나 행동적으로 나오기를 기다 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 이 종이에 적은 일이며, 그가 그녀를 위해 해준 일에 대해 그녀에게 알려줄 도리도 없다 …… 경찰의 태도는 로버트가 예기하고 있던 대로였다. ― 은행지배인의 공술서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해서 읽고 사진을 들여다본 다음 로버트를 정중하게 상관 앞으로 보내더니, 마지막으로 <카이 저링 경감>이라고 씌여진 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방 저쪽에는 늘씬한 키에 부드러운 목소 리를 지닌 사나이가 있었다. 긴 이야기였다. 그것이 얼마나 긴 이야기이고, 얼마나 세밀한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인지 그는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을 끝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카이저링 경감은 서류와 손수건과 사진을 차례차례 집어들어 자 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로버트에게로 흥미있는 눈길을 보냈다. " 과연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군요. 단 한 가지 왜 이렇게 애쓰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설 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뭡니까, 그 동기가? " 자기 혼자의 가슴 속에 간직해 둔 꿈을 생전 처음 보는 상대방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버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 여자 때문입니다. 이 여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마음 때문입니다. " " 아아! " 카이저링 경감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로부터 미리 부탁을 받았었 군요? " " 아닙니다 " 하고 로버트는 분연히 말했다. " 말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 카이저링 경감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려서 박자를 맞췄다. " 아아, 알았습니다. 그거야 어쨌든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주 훌륭한 솜씨로군 요. 정말입니다. 사실 어제 우리는 당신이 사는 곳에서 2, 3백미터 떨어진 곳에 버려진 자동차 안에서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차가 한 달 전에 도난당한 것이라는 사실만 알 뿐, 피해자가 입고 있는 옷이며 무엇을 보아도 전혀 단서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큰 상처 가 난 시체뿐이었습니다. 사실 당신이 알파벳의 A에서 Z까지 이처럼 조리있게 조사 결과를 가 지고 찾아와주시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백 년이 넘어도 미해결로 남아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 "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 하고 로버트는 말했다. " 이것으로 나의 목적도 이루어진 셈이니까요. " " ― 그렇군요 " 하고 카이저링이 말했다. " 언제든 경찰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나를 찾아와서 말씀해 주십시오. " 그런 다음 경감은 방을 나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음울한 미소를 띤 건강해 보이는 사복차림의 사나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 둘이서 당장에 해치우기로 했습니다. " 하고 카이저링 경감은 로버트에게 말하고 나서 데리 고 온 사나이에게 몸짓으로 재촉했다. 그들은 소리없이 아파트의 계단을 올라가 문 옆에 섰다. 카이저링 경감이 문에 귀를 대고 들려 오는 소리로 방 안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이윽고 경감은 사복을 입은 사나이를 향해 고개를 살 짝 끄덕이더니 힘껏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 문 열어! 경찰이다! " " 귀가 멍하게 울리는 듯한 정적. 카이저링 경감과 사복차림의 사나이가 어깨에서 차가운 빛을 내뿜는 권총을 빼는 것을 보자 로버트는 입 속이 바싹 말랐다. " 이런 어설픈 작자에겐 이런 게 필요치 않아. " 카이저링 경감은 신음하듯 말하고 나서 갑자 기 발을 들어 뒤꿈치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활짝 열리고, 로버트는 계단 난간 뒤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녀를 보았다. 여자는 방 한가운데 서서 이성을 잃은 흩어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한 사람 또 한 사람, 상대방이 배신자라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보였던 표정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마치 꿈꾸고 있는 듯한 순간에 이해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몸을 홱 돌려서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 아아, 용서해 줘요! ― " 하고 그녀는 로버트가 전에 들었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유리창밖으로 떨어졌다. 오장육부를 찢는 듯한 절규가 들리고,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로버트는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갑자기 눈에 찝찔한 땀이 스며들고,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의 맛이 느껴졌다. 창문까지는 무한한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래도 그럭저럭 창문 가까지 다다르자 로버트는 카이저링 경감을 옆으로 밀어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납작하게 포석 위에 쓰러져 있었다. 흩어진 숱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보는 이들의 호기 심어린 눈길로부터 얼굴을 감싸주고 있었다. 사복차림의 사나이는 가버렸으나, 카이저링 경감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동정어린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 나는 남자 쪽에서 여자를 죽인 줄 알았는데 …… " 하고 로버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 다. " 틀림없이 그런 줄 알았는데 …… 설마 …… " " 발견된 것은 남자의 시체였습니다. " 하고 카이저링 경감은 말했다. " 여자 쪽이 가해자 입니 다. " " 그럼, 왜 그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까? " 로버트는 나무라듯이 물었다. " 왜 곧 일러주 지 않았습니까? " 카이저링 경감은 현명해 보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글쎄요 ……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은 저 여자에게 사정을 알려주어 도망치 게 했을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골치아픈 결과를 가져왔겠지요. " 로버트는 대답이 없었다 ― 전혀. " 저 여자는 폭발한 겁니다. " 하고 카이저링 경감은 달래듯이 말했다. " 여기 이렇게 갇혀서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놓인데다 누구 하나 의지할 만한 상대도 없고 ……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 로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당신의 죄가 아닙니다. " 그리고 나서 경감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로버트 혼자만 그녀의 방에 남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 있는 그녀가 남긴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 주 조용히 의자 하나를 집어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더니 벽을 향해 내던졌다, 있는 힘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