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녀석 위에 나는 녀석 그 하숙집은 어느 방이나 다 똑같았다. 지저분하고 바닥에 리놀륨을 깔았으 며, 놋쇠 침대가 놓여 있고 …… 그러나 클랩트리는 그 구인 광고에 응모한 날, 자기 방에 단 한 가지 다른 곳 보다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 은 복도에 있는 공용 전화가 바로 자기 방문 앞에 있어 귀만 잘 기울이고 있 으면 언제나 따르릉 울리자마자 금방 달려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구인 응모 편지 끝에 서명을 하고, 그 옆에 전화 번호를 써넣었다. 그 번호를 써넣을 때 펜을 잡은 그의 손이 조금 떨렸다. 그 편지를 읽는 사람에게 이 전화가 마치 자기의 소유물인 것 같은 인상을 줄지 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사기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런 수단에 의해 얻어지는 일종의 신용이 어쩌면 자신에게 유리 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결국 이겼다 ― 그러기 위해서 그때까지 소중한 간 직하고 있던 눈처럼 새하얀 양심을 많이 희생시키긴 했지만. 사실 그 광고라는 것이 전적으로 기적과도 같았다. <모집>난에 <남자 구 함. 능력 있고 착실.정직.근면한 사무 경험자고 45~50살. 대우 보통. 자세한 이력서 우송 바람. 사서함 1백 11호>라고 씌어 있었는데, 클랩트리는 안경 너머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한 눈초리로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보통 월 급을 받으며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하려는 사람이나 또는 같은 광고문을 자 기보다 몇 분, 아니, 어쩌면 몇 시간 먼저 읽었을지도 모르는 자기와 같은 나 이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그가 쓴 편지는 《편지 잘 쓰는 법》이라는 책의 <구직란>예문으로 살려도 될 만큼 잘된 것이었다. 나이는 48살, 건강상태는 최고, 현재까지 독신. 한 회 사에 30년 근속했음. 충실하게 과실없이 근무했음. 훌륭한 정근과 출근 시간 을 엄수하는 것으로 기록을 세웠음.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회사가 다른 큰 회사에 병합되어 그에 따라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유능한 사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음. 근무 시간 ― 문제가 안됨. 유일한 관심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맡은 일을 완성시켜 놓는다는 것임. 급료 ― 나를 고용해 주는 분의 처분에 맡기겠음. 전에는 주급 50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물론 이것 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나의 가치를 증명한 다음 받은 대우였음. 언제라도 면 접에 출두할 수 있음. 신용 및 신원 조회는 아래에 쓴 바와 같은 서명. 그리 고 전화번호. 그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필요한 어구가 한 자 한 구절도 빠지지 않고 각기 있을 자리에 있다고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십여 차례나 고쳐 썼다. 그리고 예전에 장부 정리하던 솜씨를 발휘하여 동판 인쇄와 같이 반듯반듯한 필적으 로 겨우 써낸 문장을 비상시에 대비해서 사두었던 특제 고급 편지지에 베껴 서 부쳤다. 이렇게 한 다음 답장이 우편으로 올 것인지, 전화로 올 것인지, 아니면 전혀 오지 않을 것인지 애타게 기다리며 클랩트리는 끝없이 길고 심장에도 좋지 않은 2주일을 보냈다. 그런 뒤 마침내 전화를 받은 그의 귀에 자기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우뢰 소리처럼 전화선을 타고 들려 온 순간이 왔다. " 네 " 하고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클랩트리입니다! 납니다, 편지를 드린 것은! " " 조용히 하시오, 클랩트리 씨, 조용히 " 하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것은 자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장을 하나씩 끊어서, 그리고 그것을 또 잘게 찢어서 잘 음미한 다음 수화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가늘고 또렷한 목 소리로, 마치 꽉 쥐어짜면 자비가 뚝뚝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수화기를 꼭 쥔 클랩트리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 었다. " 당신의 편지를 받았는데 " 하고 그 목소리는 여전히 괴로울 만큼 신중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을 하기 전에 우 선 고용조건을 분명히 해두고 싶소. 괜찮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말해도? " <고용>이라는 말이 클랩트리의 뇌리를 뚫고 울려퍼지자 그는 비틀거렸다. 15 " ―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 " 그럼, 우선 첫째로 당신은 스스로 사무실을 맡아서 해나갈 자신이 있습니 까? " " 사무실을 맡아서요? " " 아니, 뭐 얼마나 큰 사무실일까, 어떤 책임을 맡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어떤 종류의 비밀보고서를 정기적 으로 작성하는 것인데, 당신은 자신의 사무실을 갖고 그 문에다 당신 이름을 붙이며 ― 물론 직접적으로는 누구의 감독도 받지 않는 셈입니다. 아시겠지 요? 따라서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는 일이 …… " " 네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그러나 그 비밀보고서라는 것은 …… " " 당신 사무실에는 몇몇 회사의 이름을 써넣은 리스트가 준비되어 있습니 다. 그리고 그 리스트에 오른 회사의 일에 대해 자주 기사를 싣는 경제신문 과 잡지가 여러 가지 올 겁니다. 당신은 그러한 기사들을 언제나 주의해서 보아두었다가 날마다 그것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내게 우송해 주면 됩니다. 경제 이론이라든가 문장을 잘 쓴다든가 하는 것은 전혀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울러 말해 두겠습니다. 정확, 간결, 명료 ― 이 세 가지가 모토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나는 ― " "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지요 " 하고 전화의 목소리가 말했다. " 지금 위치 와 방의 번호를 말할 테니 오늘부터 1주일이 지나거든 그곳에서 근무를 시작 해 주시오. " 연필도 종이도 손 가까이에 없어 클랩트리는 주소를 필사적으로 기억 속에 쑤셔넣었다. " 그곳에 가면 준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을 거요. 문도 잠겨 있지 않고, 책 상 서랍을 열면 열쇠 두 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방 열쇠, 또 하나는 서류장 열쇠입니다. 책상 속에는 아까 내가 말한 리스트와 보고서를 쓰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 있습니다. 서류장 속에는 우선 먼저 착수해야 할 간행 물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 " 실례지만 ―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그 보고서라는 것은? …… " " 리스트에 오른 회사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 고 ― 사업상 거래에서부터 인사 이동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포함해야 합니 다. 그리고 매일 귀가하는 길에 우체통에 넣어주시오. 알겠습니까? " "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일이 ―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누구 앞으 로 ― 어디로 보내야 합니까? " " 뻔한 일 아니오 " 하고 상대방은 꾸짖듯이 잘라말했다. 클랩트리는 몸이 움추러들었다. " 당신이 알고 있는 사서함으로 보내시오. " " 알았습니다. " 하고 클랩트리는 대답했다. " 다음으로 " 다행히도 목소리는 신중한 어조로 되돌아가 말했다. " 급료에 대한 일입니다. 아마 당신도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 지 고려해야 알 일이 있어 신중을 기했습니다. 결국 나는 옛날의 교훈을 따 르기로 했습니다. <좋은 직인은 보수를 아끼지 말고 고용하라>는 말인데 ―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 " 네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그리고 " 하고 그 목소리는 계속 말했다. " <무능한 직인은 언제나 바꿔 친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나는 당신에게 주급 52달러를 드릴 작정 인데, 그것으로 되겠습니까? " 클랩트리는 너무 놀라 전화기를 들여다본 다음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입을 열었다. " 네, 뭐 ― " 그는 숨을 헐떡였다. " 네, 그런 뭐, 뭐랄까요 …… " 전화의 목소리는 엄격하게 그를 가로막았다. "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입니다. 아시겠지요? 당신은 ― 이건 자주 하는 말이 아닙니다만 ― 자기의 역량을 증명할 때까지는 말하자면 임시 채 용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을 안전하게 해주느냐, 아니면 완전히 못쓰게 만드 느냐, 둘 중의 어느 하나일겁니다. " 클랩트리는 이처럼 겁을 주는 말에 모든 것이 헛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 다. " 있는 힘을 다해서 해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힘껏 해보겠습니다. " " 그리고 " 하고 전화의 목소리는 무자비하게 계속했다. " 이 일은 비밀스 러운 성격을 띤 것이라는 사실 ― 이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무에 게도 이 일에 대한 것을 말하지 말 것. 사무실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내가 준비해 줄 테니까, 누구에게 무슨 의논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변 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으면 써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 음이라 전화는 일부러 놓지 않았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근무자의 신분 으로서 근무 시간에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보내는 것을 보기 싫어한다고 나무라지는 않겠지요? "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 화제가 무엇이든 클랩트 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 네, 절대로 " 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그쳤다. " 그럼, 지금 이야기한 조건으로 승낙하는 거지요? " " 네 " 하고 클랩트리는 대답했다. " 뭐, 알아보고 싶은 일이라도 ……? " " 한 가지 있습니다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급료에 대한 것인데, 어떻 게 …… " " 매주 주말에 당신 앞으로 보내질 겁니다. " 하고 전화의 목소리가 대답했 다. " 현금으로. 그밖에 또? " 클랩트리의 마음 속에는 지금 저 목장에 쌓여 있는 나무처럼 질문이 산더미 같을 터인데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윽고 수화기를 놓는 금속적인 소리가 들렸다. 클랩트리는 자기도 수화기 를 놓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야 자기 손이 수화기를 너무 힘껏 쥐 고 있어 내려놓기가 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클랩트리가 전화의 목소리가 일러준 주소를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 그곳에 빌딩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곳에 는 빌딩이 있었고, 건물도 상당히 컸으며,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잔뜩 엘리베 이터를 타고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복도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은 다 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 겨를이 없다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지나쳐가곤 했다. 사무실도 있었다. 그것은 맨 위층, 구부러진 복도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는 데, 그 복도를 지나 다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활짝 열려 있는 문 저쪽으로 계속되고, 그 너머로 납작하게 잿빛으로 붙어 있는 하늘이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문에 <클랩트리 연합통신사>라고 굵게 쓴 글씨였다. 문 안쪽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좁은 방이었는데, 안에 놓인 물 건들이 터무니없이 커서 실제보다 더욱 작아보였다. 문으로 들어서자 바로 오른쪽에 주착없이 큰 서류장이 있었다. 그 옆에 바싹 붙여져 책상이 놓여 있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그쪽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옛스러운 책 상 앞에 회전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반대쪽 벽에 나 있는 창문도 이 물건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폭이 넓고 꽤 길다란 창문으로, 창턱 높이가 클랩트리의 무릎까지 왔다. 그제야 그는 흘 금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려 바로 옆 빌딩에 이쪽으로 난 창문이 없기 때문 에 두드러지게 효과를 드러낸 까마득한 아래쪽에 펼쳐진 거리를 내려다보았 다. 순 간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클랩트리는 창문 밑부분이 열리지 않도록 걸쇠를 단단히 걸고, 윗부분만 여닫을 수 있게 했다. 열쇠는 서랍 속에 들어 있었다. 펜과 잉크와 한 통의 펜촉과 압지, 그리고 필 요할 것 같다기보다 우선 감명을 갖게 하는 대여섯 가지의 소도구가 다른 서 랍 속에 들어 있었다. 우표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클랩트 리 연합통신사>라는 직함과 사무실 번호와 빌딩 이름이 새겨진 편지지와 봉 투가 많이 들어 있는 점이었다. 그것은 보고 클랩트리는 기쁜 나머지 곧 펜 을 들어서 몇 줄 시험삼아 써본 다음, 그 낭비에 놀라 그 페이지를 뜯어 내 어 잘게 찢어 발치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17 이윽고 많은 분량의 간행물이 있었다. 그것을 한 줄 한 줄 자세히 조사해 나가야 하므로 클랩트리는 한 페이지씩 읽어나가며 줄곧 약속한 대로 책상 속에 있는 리스트에 실린 회사의 이름이 나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마치 장난삼아 일하고 있는 듯한 자책감에 쫓기며 같은 페이지를 되읽었다. 그러나 찾아내 고 싶지 않았던 잘못은 결국 마지막가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끝부분에 와서 야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한순간 그는 자기 앞에 쌓여 있는 간행물의 산더미를 영원히 완전하게 해치 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은 일이 진척되어 간 다는 생각에 기쁜 나머지 한숨을 쉬는 동시에, 내일 아침이면 틀림없이 또 새로 많은 우편물이 와서 결국 일이 다시 잔뜩 밀릴 것이라 생각하고 풀이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골치아픈 일만 계속되는 동안에도 숨돌린 틈이 전혀 없는 것 은 아니었다. 즉 그중 한가지는, 매일 보고서를 만들다 보니 어느 틈에 자기 가 그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사실을 알고 클랩트리는 얼마쯤 놀랐던 것 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매주 어김없이 1달러짜리 지폐 한 장 모자라는 일 없이 그의 급료가 든 네모 봉투가 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순수 하게 기쁘기만 한 순간을 아니었다. 클랩트리는 조심스럽게 봉투 끝을 뜯어 돈을 꺼낸 다음 세어서 낡은 지갑 속에 가지런히 넣었다. 그리고 나서는 언젠가 내일 아침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무서운 경험을 생각하면서 손 끝을 봉투 속에 넣어 살펴보았다. 이것은 언제나 싫은 순간으로, 그런 일이 잇고 나면 반드시 기분이 나빠지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한동안 다시 일에 몰두한 뒤라야 겨우 가라앉곤 했다. 이윽고 일은 그의 일부가 되었다. 이미 타이프로 친 리스트를 볼 필요도 없 었다. 거기 씌어 있는 회사 이름은 그의 머릿속에 뚜렷이 새겨져서, 밤에 잠 이 안 올 때면 그 리스트를 두세 번 외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아 잠을 잘 수 있게 될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 히 한 회사의 이름이 그의 주의를 끌어 마음에 걸렸다. <능률 기계 주식회사?가 그것인데, 그 회사는 분명 위 기에 처해 있었다. 대폭적인 인사 이동이 있었고, 다른 회사와 합병한다는 소 문이 떠돌았으며, 주가가 증권 시장에서 급격히 오르내렸다.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되는 동안에 리스트에 있는 어떤 회사의 이름에 서나 생생한 개성이 느껴지게 된 일을 자각하자 클랩트리는 몹시 유쾌했다. 아말가메테드 회사는 차근차근 성공을 거두어 바위처럼 견실했다. 유니버설 회사는 새 기술의 개척에 바쁘고 성급했다. 나머지 회사들도 모두 그 나름대 로 …… 그러나 클랩트리의 마음에 드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능률 기계 회사 로, 그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나 자신이 해야 할 의무보다 더 깊은 관심을 거기에 쏟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그때마다 당황하여 마음을 가다 듬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성이라는 것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 그것은 정말 맑은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그가 여느 때와 다름없 이 제 시간에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 사무실문을 여니, 바로 앞에 고용주가 서 있었다. " 들어오시오, 클랩트리 씨. " 그 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말했다. " 문을 닫 고. " 클랩트리는 문을 닫고 소리없이 그 자리에 섰다. " 아무래도 나는 뚜렷한 인상을 남에게 주는 모양이오 " 하고 그 방문객은 좀 재미있는 듯이 말했다. " 당신까지도 알아보는 것을 보니 말리오. 물론 알 겠지요, 내가 누구인지? " 클랩트리의 마비된 감각기관은 툭 튀어나온 큰 구근 같은 눈을 자기에게 고 정시키고 있는 그 사람으로부터 탄력있어 보이는 큰 입을 가진 통처럼 키가 작고 동그란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 그보다 그 사나이는 늪 언저리 에 여유있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개구리와 똑같았고, 자신은 우연히도 재수 없게 그 옆에 기어가서 잡아먹히기 직전인 파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편이 더 적당할 것이다. " 아마도 " 하고 클랩트리는 떨리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 나를 고용하고 계신 미스터 …… 미스터 …… " 굵은 둘째손가락이 클랩트리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듯 쿡 찔렀다. " 급료만 어김없이 지불하고 있으면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떻소 ― 안 그렇 소, 클랩트리 씨? 그러나 편의상 ― 조지 스펠빈이라고 해둡시다. 아주 흔한 이름이지요. 당신은 지금까지 스펠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소, 클랩트리 씨? " " 없습니다 " 하고 클랩트리는 비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 그러면 당신은 연극 같은 것을 그리 많이 보러 가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 거 참, 다행한 일이오. 말이 나온 김에 상상을 해본 일인데, 소설이나 영화에 정신없이 몰두하는 일도 없겠지요? " " 나는 매일 신문을 읽고 있습니다. " 하고 클랩트리는 반발했다. " 신문에 는 읽을 만한 것이 많지요. 그리고 이 점만은 알아주셔야겠는데요, 스펠빈 씨, 즉 이곳에서 일하고 신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밖의 일에 마음쓰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신문만은 빼놓지 않고 다 읽고 있습니다. " 상대방의 커다란 입니 양쪽 끝을 향해 일그러지며 나타난 표정을 클랩트리 는 미소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그 말이야말로 당신에게서 듣고 싶었던 답변이오. 사실이오, 클랩트리 씨 ― 이건 정말 사실이오! 나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을 원했었는데, 지 금 한 당신의 말은 처음에 받은 당신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사람을 올바 르게 골랐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소. 나는 크게 만족했습니다, 클랩트리 씨! " 클랩트리는 그제야 몸 속의 피가 혈관으로 힘차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 정말 고맙습니다, 스펠빈 씨. 나는 열심히 일하고는 있습니다만 도무지 뭐 가 뭔지 …… 좀 앉으시지 않겠습니까? " 클랩트리는 자기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통 같은 물체를 끌어안듯이 팔을 돌 리며 저쪽에 있는 의자를 제자리로 끌어당기려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그 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 방이 좀 좁아서요. 물론 이것으로 훌륭합니다만 ― " " ― 그럴 테지요, 물론. " 스펠빈은 창문으로 끼어들 것 같은 곳까지 뒤로 물러나서 의자를 가리켰다. " 자아, 당신이 앉는 게 좋겠고, 클랩트리 씨, 내 가 이렇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는 동안. " 명령하는 것 같은 손짓의 마력에 희롱당하듯 클랩트리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의자를 빙글 돌려 창문과 그를 등지고 있는 작달막한 사 나이 쪽을 보았다. " 만인 오늘의 보고에 대해 여쭤보실 게 있다면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능률 기계 주식회사가 …… " 스펠빈을 쌀쌀하게 그 화제를 뿌리쳤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 그런 것을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니오. 내가 지금 당면해 있는 문제의 해답 을 찾으러 온 거요. 당신은 그 해답을 찾는 일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 니다 ― " " 문제라니요? " 클랩트리는 갑자기 자기가 위대해진 것 같은 느긋한 기분 을 맛보았다. "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스펠빈 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온 힘을 다해서. " 사나이의 튀어나온 눈알이 그의 눈을 걱정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 그럼 묻겠는데, 클랩트리 씨, 사람을 한 명 죽여줬으면 하는데, 어떻겠소? " " 뭐라고요? " 하고 클랩트리는 소리쳤다. " 나로서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 인지 뜻을 알 수가 없는데요. " " 이렇게 말한 거요. " 스펠빈은 신중하게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끊어 서 다시 말했다. " 사람을 한 명 죽여줬으면 하는데, 어떻겠소? " 클랩트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난 못해요, 그런 일은!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그런 일을 하면 살인자가 될 게 아닙니까! " " 그렇지요 " 하고 스펠빈이 말했다. " 농담이겠지요, 그건? " 클랩트리는 웃으려고 했으나, 굳어버린 목에서 가까스로 나온 것은 헐떡이 는 듯한 씩씩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억지로 웃는 그 가엾은 웃음마저 바로 앞에 버티고 있는 돌 같은 얼음을 대하자 도중에 쑥 들어가고 말았다. " 정말 죄송합니다, 스펠빈 씨. 죄송합니다, 참으로. 그러나 그런 일을 경솔 하게 ……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 " " 클랩트리 씨, 사실을 말하자면 내 이름 ― 제 본명은 당신이 부지런히 읽 고 있는 재계잡지에 계속 나오고 있소. 나는 끊임없이 파이에 손가락을 디밀 어서 언젠가는 반드시 속에 든 자두를 찾아낼 거요. 아예 툭 터놓고 말하자 면, 나는 당신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 물론 당신도 이따 금 그런 꿈을 꾸리라 보고서 하는 말이지만 ― 큰 부자이며 유력한 사람이 오. 적어도 그런 신분에 있는 사람이 하찮은 농담을 하거나 한낱 고용인과 시시덕거려 쓸데없이 시간은 보내지는 않소. 나는 바쁜 몸이오, 클랩트리 씨. 만 일 나의 부탁에 대답해 줄 수 없다면 분명히 거절하고 뒷일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 " 나로선 할 수 없습니다. " 하고 클랩트리는 연약하게 말했다. " 곧 그렇게 말했어야지 " 하고 스펠빈은 말했다. " 그리고 나를 화나게 하 지 말아야 하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즉석에서 대답하리라고는 나도 생각 지 않았고, 만일 그렇게 했다면 나는 사람을 잘못 보아도 이만저만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생각했었을 거요. 알겠소, 클랩트리 씨, 그런 질문이 단 한번도 침입할 여지가 없었던 당신의 평온무사한 생활이 나로서는 부럽소 ― 아니, 정말이오. 나는 한 가지 ― 부자가 되기까지의 경력 중에서 단 한 가지 오점 이라 할 수 있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소. 그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잔인 하고 빈틈없고 위험성을 잔뜩 지닌 어떤 사나이에게 발각되어, 그 뒤로 줄곧 나는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게끔 되어버렸소. 즉 그 사나이는 공갈범 이오 ― 자기가 파는 물건에 너무 비싼 값을 매겨서 결국 스스로 그 댓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는, 다시 말해서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그런 흔해빠진 공갈자에 지나지 않는 거요. " " 당신은 " 하고 클랩트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사나이를 죽일 작정 입니까? " 스펠빈을 터질 것처럼 부푼 머리를 흔들며 엄격하게 항의했다. " 비록 파리가 내 손바닥에 앉아도 그것을 꼭 쥐어 목숨을 빼앗을 만한 용 기조차 나에게는 없소. 솔직히 말해서 클랩트리 씨, 나는 아무래도 폭력을 휘 두는 일을 할 수 없는 성질이오. 이것은 여러 가지 뜻에서 괜찮은 일이긴 해 도 지금 이러한 경우에는 너무 힘에 겨워서 …… 왜냐하면 아무래도 그 사나 이를 죽여야 하니까요. " 스펠빈은 한숨을 쉬었다. "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돈을 주고 살인청부업자에게 부탁할 일은 아니오. 만일 임시변통으로 그런 자에게 부탁하게 되면 요컨대 한 사람의 공갈자를 처치하고 또 다른 공갈자 를 얻게 되는 셈이므로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아니오. " 스펠빈은 또 한숨을 쉬었다. " 그러니 클랩트리 씨, 결론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걸 당 신도 알겠지요? 즉 그 골치아픈 녀석을 처치하는 책임은 오로지 당신 어깨에 걸려 있는 거오." " 나에게요! " 클랩트리는 큰 소리로 말했다. " 대체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 당치도 않습니다! " " 글쎄, 어떨까요 " 하고 스펠빈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 당신은 뻔히 알면 서도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군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리기 전에, 클랩트리 씨, 만일 당신이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면 오 늘 이곳을 나간 뒤 다시는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두겠소. 나는 자기의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고용인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가 없으므로 …… " " 너그럽게 보아줄 수가 없다고요!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그건 너무 합니다, 스펠빈 씨. 그건 너무 ……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 " 안경이 흐 릿하게 흐려졌다. 그는 그것을 벗어 잘 닦은 다음 다시 코 위에 올려놓았다. " 게다가 나에게 그런 비밀을 털어놓으시다니,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 " 그는 당황하며 덧붙였다. " 이것은 경찰이 해결할 문 제입니다! " 놀랍게도 스펠빈 씨는 저래도 괜찮을까 여겨질 만큼 얼굴이 새빨개져서 온 몸을 흔들며 웃음 소리를 온 방 안에 퍼뜨렸다. " 용서해 주시오. " 이윽고 그는 헐떡이며 가까스로 말했다. " 용서해 주시 오. 나는 다만 당신이 경찰에 출두하여 나의 고용주가 이렇게 도리에 벗어난 말을 했다면서 묘한 얼굴로 일러바치는 장면을 상 20 상해 보았을 뿐이오. " " 오해하지 마십시오. " 클랩트리 씨는 말했다. " 나는 협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펠빈 씨. 나는 다만 …… " " 나를 협박한다고? 당신이? 그거 참, 클랩트리 씨, 대체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보시오. " " 관련이라고요? 나는 당신이 고용한 고용인이 아닙니까? 여기 이렇게 방까 지 마련해 주시고 …… " 스펠빈 씨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참 어리석은 망상이오. 누가 보나 당신은 나 같은 사람과는 도저히 관계 있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일을 하고 있는 작자요. " " 하지만 나를 고용한 것은 당신이 아닙니까, 스펠빈 씨! 나는 구인 광고를 보고 응모 편지를 써서 …… " " 분명히 그렇긴 하오. " 스펠빈은 말했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광고로 응모한 결원은 그전에 이미 마감이 되었었소 ― 내가 공손한 거절 편지에서 당신에게 설명한 것처럼. 왜 그렇게 묘산 표정을 짓고 있지요, 클랩트리 씨? 당신 편지와 거기에 대한 나의 거절 편지의 사본을 분명히 함께 묶어 서류철 에 보관해 두었으므로,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내보일 수 있게 되어 있소. " "하지만 이 사무실이 …… 이 방 안의 것과 여기서 받고 있는 신문이며 잡 지는 ……! " 스펠빈은 정중하게 머리를 내저으면서 말했다. " 클랩트리 씨,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매주 받는 수임의 출처를 의심해 본 일이 있소? 이 빌딩의 지배인에 대해서도, 이 방 안에 있는 물건을 판 장사 꾼에 대해서도, 이곳에서 받고 있는 신문이며 잡지를 내고 있는 출판자에 대 해서도. 이 사무실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아무도 당신만큼 중요시하고 있지 않소. 물론 당신의 이름으로 된 편지와 거기에 동봉한 돈만으로도 지금 까지 해온 일이 좀 변칙적이라고는 생각하오. 그러나 나도 두려워할 건 하나 도 없소. 장사꾼이란 돈만 제대로 지불해 주면 그뿐, 다른 일은 조금도 염두 에 두지 않으니까요. " " 하지만 나의 보고서는! " 하고 클랩트리는 그제야 자기가 대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걱정되기 시작하여 소리쳤다. " 분명히 보고서라는 것은 있고. 즉 그것은 이렇게 된 거요. 발명의 재주가 뛰어난 클랩트리 씨는 내가 보낸 거절의 편 지를 받자 그럼 자기도 독립해야 겠다고 결심했소. 그리고 당신은 경제계 정보 통신이라는 일을 생각해 내고, 나에게까지 그 통신을 구독시키려고 한 것이오! 물론 나는 딱 잘라 거절했지 요 ― 처음에 당신이 보낸 정보 통신과 거기에 대한 나의 거절장이 분명히 보관되어 있소. 당신은 어리석은 자의 집념으로 도무지 단념하려들지 않았소. 어리석은 자라고 한 까닭은, 그런 통신은 나에게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오. 나는 그 통신에 나오는 회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므로 당신이 외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소. 사실 아무래도 클랩트리라는 사나 이는 괴짜 중에서도 가장 정도가 심한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그 런 일에는 숙달이 되어 있었으므로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매일 보내져오는 것을 받자마자 곧 찢어없애기로 하고 있었던 거요. " " 찢어없앴다고요! " 클랩트리는 멍해져서 말했다. " 그렇다고 해서 불평할 수는 없을 텐데요? " 하고 스펠빈은 조금 머뭇거리 며 말했다. " 당신 같은 성격의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광고에는 아무래도 부지런하고 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거요. 그렇게 말한 이상 열심히 일하는 데 대한 댓가를 지불해 주는 것은 나의 의 무라 하더라도, 그 결과를 어떻게 처분하건 당신에겐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라고 생각합니다. " " 나와 같은 성격 …… " 클랩트리는 그 말을 되뇌며 절망적으로 말했다. " 살인을 하기에 알맞다는 말인가요 ? " " 그렇고말고요. " 커다란 입이 꽉 다물어져 불길함을 느끼게 했다. " 좀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줄까요, 클랩트리 씨? 즐거움도 되고 도 움도 되는 일이어서 지금까 21 지 살아오는 동안 나는 인간에 대해 잘 관찰해 보았소. 마치 과학자가 현미 경으로 벌레를 관찰하듯.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소, 클랩트리 씨 ―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오늘날의 나로 성공 시켜 주는 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하나의 결론에. 그것은 즉 인간이라는 동 물의 대다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동기나 결과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사실이오. 내가 낸 광고는 클랩트리 씨, 그런 인간을 한 사람 고 용하는 게 목적이었소. 그것도 틀에 박혀 있는 사람을. 그 광고에 응모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한 번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 소. 동기도 결과도 염두에 두지 않고서 오로지 맹목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해 왔소. 그래서 이번에는 살인이 당신의 역할이 된 셈이오. 특 이 이번에는 동기도 설명하고 결과까지 분명히 일러주었소. 지금까지 해 왔 던 것처럼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이행하든가, 아니면 모든 일을 어기고 모 처럼의 일을 허사로 돌리든가, 둘 중의 하나요. " " 일이라고요! " 클랩트리는 분명히 소리쳤다. " 감옥 속 에 들어가 앉아 있 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교수형을 당할 사람에게 무슨 일입니까! " " 아니, 아니지요. " 스펠빈은 조용히 말렸다. " 내가 나 자신까지 말려들어 갈지도 모르는 함정에 당신을 빠뜨릴 것 같소? 당신은 지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오? 그렇지 않다면 내 몸의 안전은 당신의 안전이나 다름없다는 것쯤 분명히 알아줘야 하잖소. 그리고 그 안전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이 사무실에 두고 일에 열중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야 하오. " " 가명을 쓰고 시치미 뚝 떼고 하는 일이니까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겠지 요! " 클랩트리는 원망스러운 듯이 말했다. " 이걸 알아야 하오, 클랩트리 씨, 현지의 내 지위로 보아 나의 정체를 폭로 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 소 ― 만일 당신이 나의 부탁을 듣고 실행하면, 그때부터 당신은 범죄자이므 로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오. 반대로 나의 부탁을 듣지 않는다면 ― 미리 말해 두지만,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당신의 자유요 ― 당신이 나를 어떤 위치로 몰아붙이든 당신은 위험한 입장에 설 뿐이오. 이 세상에서 당신과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을 아무도 없소. 그리고 지 금까지 나를 협박해 왔으며, 그 때문에 이제 나의 밥이 되어야 할 그 협박자 의 일도 아무도 모르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죽든 당신이 나를 고발하든 나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단 말이오, 클랩트리 씨. 나의 정체를 알아 내는 것은 지금 말했듯이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러나 클랩트리 씨, 그것을 미끼로 하여 뭔가 내게 수작을 걸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 오. " 클랩트리는 자기 기력의 마지막 한 방울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리는 것을 느 꼈다. "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군요. " " 그렇소, 모든 것이 계획적이지요. 당신을 이 계획에 끌어들인 뒤부터 목적 을 향해 그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을 뿐이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나는 깊이 생각하고, 검토하고 또다시 연구하여 관전한 것으로 만들었소. 이를테면 이 방, 지금 내가 있는 이 방도 나의 목적에 꼭 맞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꽤 오랫동안 애를 써서 찾았지요. 가구와 도구류들도 이 목적에 맞는 것으로 골 라 이런 식으로 배치한 거요. 어떻게 했느냐고요? 그건 이렇소. 당신이 거기 그렇게 앉아 있으면 이방을 찾아온 손님을 아무래도 이 자리에 ―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 갇히게 될 것이오. 그 손님이란 물론 아까 말한 그 사나이이 요. 그 사나이는 들어와서 이곳에 설 거요 ― 열어놓은 창문을 뒤로 하고. 그 리고 그는 당신에게 친구가 맡기고 간 봉투를 달라고 할 것이오. 그러면 이 봉투를 ― " 스펠빈을 봉투를 책상 위로 던져주었다. " 당신은 책상 속에서 꺼내어 그에게 주어야 하오. 그러면 그 사나이는 ― 언제나 취하는 태도를 결코 바꾸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연구가 끝났 소 ― 틀림없이 그것을 웃옷 안주머니에 넣으려고 할 거요. 그러 면 그때를 노려서 힘껏 떠밀면 상대방은 단번에 창문 아래로 떨어져버릴 것 이오. 모두 해서 1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요. 그렇게 하고 나서 곧 ― " 스펠 빈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 당신은 창문을 닫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거요. " " 누군가가 …… " 하고 클랩트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경찰이 …… " 22 스펠빈은 말했다. " 발견하겠지요, 가없게도 그곳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 은 남자의 시체를. 그 가엾은 사나이의 안주머니에서는 이 슬픈 사건의 동기 를 설명하고, 이런 일을 하여 옆사람들에게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변명 ― 자살이라는 것은 변명에 도움이 되는 구실이니까요, 클랩트리 씨 ― 과 조용 히 평화로운 무덤에 묻어달라는 열렬한 부탁의 말을 깨끗이 타이프로 친 유 서가 나올 것이오. 그리고 ―" 스펠빈은 기도하듯 두 손 끝을 마주 합쳤다. " 유서에 있는 마지막 부탁을 어김없이 이루어질 거요. " " 하지만 만일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만일 어쩌다 잘못되면? 그 사 나이가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어 안에 든 것을 꺼내어 본다면? 아니면 …… 그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 스펠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러면 그 사나이는 잠자코 이 방을 나와 나중에 직접 나에게로 담판하러 올 것이오. 알겠소, 클랩트리 씨?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은 상대방 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일이 좀 처럼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을 경우에는 농담으로 돌리고 웃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오. 그렇지 않으면 애써 잡은 금달걀 낳는 닭 을 죽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니까. 아니, 클랩트리 씨, 만일 지금 당신 이 말한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즉 내가 함정을 ― 좀더 교묘 한 함정을 다시 파놓아야 할 필요가 생길 뿐이오." 스펠빈을 주머니에서 커다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보더니 다시 집어넣었 다. " 자아, 그만 가볼까.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지 금 말한 그 사나이가 머지않아 이곳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오. 뒷일 은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소. 조심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 그 사나이가 찾아왔을 때 이 창문이 활짝 열어놓여져 있는 일이오. " 스펠빈은 창문을 들어올려 활짝 열어놓고서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봉투는 서랍 속에 " 그는 서랍을 열고 봉투를 넣은 다음 다시 꼭 닫았다. " 어떻게 할 것인가, 일이 닥쳐왔을 때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당신의 자 유요." " 자유? " 하고 클랩트리는 나무라듯이 말했다. " 하지만 그 사나이는 봉투 를 달라고 하기 위해 오는 거라고 당신이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 그야 그렇게 말하겠지요, 달라고. 그러나 그런 것은 모른다고 말하면 그는 잠자코 돌아가서 나중에 나에게 연락을 취할 거요. 만일 그렇게 되면 결과적 으로 당신과 나의 고용관계는 끊어진 것으로 알아주기 바라오. " 스펠빈을 문 앞까지 가서 문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 그러나 만일 그 사나이가 나 있는 곳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이 임시 채용의 시험기간을 마치고 유능하고 충실한 고용인이라 는 신용을 확보하는 게 되는 거요. " " 하지만 보고서를 …… " 클랩트리는 말했다. " 찢어서 버린다고 …… " " 물론이지요 " 하고 스펠빈은 조금 놀란 듯이 말했다. " 그러나 당신은 지 금까지 해온 것 처럼 꼬박꼬박 보고를 해주면 되는 거요. 다시 말해 두지만, 당신의 보고서 내용이 나에게 무의미하건말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소, 클 랩트리 씨. 그것은 형식적인 일이니까. 이 형식적인 일을 당신이 지키는 것이 야말로 아까도 말했듯이 나의 안전을 보증하는 최선의 길이지요. " 문이 열리고 또 소리도 없이 닫히자 클랩트리는 그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이웃 빌딩의 그림자가 무겁게 책상 위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클랩트리 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려다가 이제 방이 어두워져 문자판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머리 위의 전등 끈을 잡아당기려고 일어섰다. 그때 문을 크게 노 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 들어오시오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문이 열리고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한 사람은 자그마하고 단정한 사 나이였으며, 또 한 사람은 키가 큰 순경으로 같이 온 사나이를 위압하듯 서 있었다. 자그마한 사나이가 안으로 들어와 요술장이 23 가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내는 것 같은 손짓으로 큰 지갑을 꺼내 잠깐 열어 안에 있는 카드를 보인 다음 곧 접어서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 경찰입니다. " 하고 그 사나이는 짤막하게 말했다. " 샤프 부장이라고 합 니다. " " 아아, 그렇습니까? " 하로 클랩트리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일을 방해하여 죄송합니다만 " 하고 작은 사나이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 몇 가지 물어 볼 일이 있어서 …… " 그것이 신호인 듯 몸집 큰 순경이 꼭 요령만을 적기에 알맞아보이는 수첩과 연필을 가지고 들어와서 곧 받아쓸 수 있게끔 준비를 갖추었다. 클랩트리는 안경 너머로 그 수첩과 작은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 네 네, 물어보십시오. 뭐든지 상관없습니다, 조금도. " " 클랩트리 씨지요? " 하고 작은 사나이가 말했다. 클랩트리는 깜짝 놀랐으나 곧 문에 자기 이름이 씌어 잇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 네 " 하고 대답했다. 샤프는 차가운 눈초리를 흘끔 그에게 던지더니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 당신 사무실입니까? " " 네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오후에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 " " 1시부터 줄곧 ― 12시에 식사를 하고 1시 정각에 돌아오지요. " " 틀림없이 ― " 샤프는 자기 어깨 너머로 턱을 치켜올렸다. " 저 문은 낮 부터 계속 열려 있었겠지요? " " 일을 하는 동안에는 늘 닫아두고 있습니다."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그럼, 누가 계단으로 저 복도 어딘가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이 방에서는 보이지 않겠군요? " " 네 "하고 클랩트리는 대답했다. " 보이지 않겠지요, 나의 눈에는. " 샤프는 책상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엄지손가락을 턱으로 가져갔다. " 혹시 창 밖을 내다보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 " 그거야 " 하고 클랩트리는 말했다. " 일하는 동안에는 내다볼 틈이 없어 서 …… " " 그럼 " 하고 샤프는 말했다. " 점심때가 지난 다음 창문 밖에서 무슨 소 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예사롭지 않은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 습니까? " " 예사롭지 않은 소리라고요? " 클랩트리는 애매하게 지껄였다. " 고함 소리 말입니다 ― 누가 외치는 소리. …… 들리지 않았습니까? " 클랩트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 그러고 보니 들렸습니다, 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분명히 들렸습니 다. 누군가가 깜짝 돌란 듯한 겁을 먹은 듯한 꽤 큰 소리였지요. 이곳은 언제 나 조용하므로 싫어도 들리게 마련이지요. " 샤프는 어깨 너머로 천천히 수첩을 접고 있는 동료 경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그럼, 이야기가 맞아들어가는군. 녀석은 뛰어내리는 순간에 마음이 변하여 줄곧 무서운 고함을 지르며 떨어진 걸세. 아니 ― " 샤프는 클랩트리 쪽으로 돌아서며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진상을 털어놓았다. " 당신도 알 권리가 있 을 겁니다. 이렇게 폐를 끼쳐드렸으니까요. 약 한 시간 전에 어떤 사나이가 옥상에서 거꾸로 뛰어내렸습니다. 주머니 속에 든 유서로 자살임이 분명해졌 지만, 일단 조사해 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니까요. " " 그 사나이가 누구인지 아셨습니까? " 클랩트리가 말했다. 샤프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괴로움을 지나치게 짊어진 사람들이 흔히 있는 법입니다. 젊고 잘생기고, 입고 있는 옷도 고급이었지요. 다만 납득이 안 가는 것은 그렇게 좋은 옷을 입을 만큼 여유있는 사람에게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있었다니, 그것이 무 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 제복을 입은 순경이 비로소 입을 열어 윗사람을 대하는 어조로 말했다. " 그가 남긴 유서로 보건대 조금 정신이 돈 사람이 아닐까요? " " 그런 식으로 죽으려면 조금 정신이 돌지 않고서는 안될 거야. " 샤프가 말했다. " 부장님은 정말 냉정하시군요 " 하고 순경은 찬탄하듯 말했다. 샤프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잠깐 망설이더니 클랩트리를 향해 말했다. " 실례했습니다.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아뭏든 당신은 어떤 뜻으로는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층에서는 그 사나이가 바로 이 방 창 문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여자아이가 몇 있었으니까요. " 샤프는 문을 닫으며 한 쪽눈을 찡긋해 보였다. 클랩트리는 무거운 구두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의자에 앉아 책상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잡 지며 편지지가 좀 난잡하게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 잡지를 차곡 차곡 귀가 맞도록 쌓아놓았다. 클랩트리는 펜을 들자 펜촉을 잉크 병에 담그며 또 한 손으로는 자기 앞에 놓인 종이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는 신중하게 써내려갔다. " 능률 기계 주식회사는 두드러지게 경영 개선의 징후를 나타내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