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똑같다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모형을 놓고 오려낸 것처럼 아더의 눈에는 똑같아 보였다. 모두들 늘씬한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알맞게 볕에 그을린 얼굴은 수수하게 생겼으며 머리는 시원스럽게 깍아올렸다. 입고 있는 옷은 좀 비싼 듯 점잖아보였으며, 행동에도 실수가 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있 는 학교를 나왔으며, 본인을 그런 것이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 표정들이었다. 벌집처럼 혼잡한 사람들 틈에서 금테를 두른 유가증권 냄새가 기분좋게 코를 간지럽히는 고딕 식 건물이며 미래파 화가의 화구인 작은 접시와 비슷한 유리 첨탑의 그림자 속을 헤집고 다니며, 그들은 조심스 럽게 행동하여 주위에 휩쓸려 길을 잃는 일이 없었다. 취직의 밑천으로 그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가문과, 출신 학교와, 윗사 람이 말을 걸면 너무 성급한 나머지 허둥대어 예의를 잃는 일이 없는 마음 가짐이었다. 사실 그들은 다른 모든 일에서도 그렇지만 자기의 직업에 온통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았다. 돈에 곤란을 받지 않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 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아더는 그들을 미워했으며, 동시에 자기가 그들 사이에 낄 수만 있다면 영혼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 었다. 육체적인 조건만이라면 아더도 합격이다. 키가 크고 훌륭한 호남자로, 그 옆을 지나치는 여자라면 누구나 곁눈질을 할 정도였다. 곁눈질이란 상대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뜻하는 증거이다. 그는 또한 빈틈 없는 관찰과 자제심으로 아주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유명한 학교를 나온 처지도 아니며, 그다지 많지 않은 급료 위엔 이렇다할 수입원도 없었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으며 ― 유 산은 장례식 비용을 지불하기도 빠듯했다. ― 고등학교를 중퇴한 다음 일자 리를 찾아나섰던 것이다. 그 뒤로 마치 초조하게 쫓기듯 몇 번이나 직업을 바꾸어 오다 최근에 와서야 가까스로 호튼 앤드 샘 회사에 자리를 잡게 된 셈이다. 만일 누군가 그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진짜 값어치를 1페니의 에누리도 없이 ― 은행의 예금과 지갑 속의 돈과 주 머니 속에 든 잔돈까지도 다 합쳐서 얼마인지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과 연 남자답게 활발히 행동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은 그런 면에도 나타나 있었 다. 호남자 ― 그야말로 그가 죽도록 미워하는 무리를 상징하는 호칭이었다. 말 하자면 그는 그 테두리 밖에 있었다. 어느 날 오전에 호튼 앤드 샘 사무실문 이 열리고 어느 단골 손님의 두 아들이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그들은 1초의 몇 분의 1동안 아더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순간 상대방이 자기들과 같은 계 층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모르는 체 외면했다. 한 마디 말을 나눈 것 도 아니고 무슨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그 순간 아더는 증오와 분노를 불태 우며 서 있었다. 보복할 수는 없다. 그 점이 가장 화가 치미는 일이기도 했 다.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다. ― 그들의 가정, 그들이 출입하는 클럽, 어 디를 막론하고 그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드나드는 문은 아더의 눈 앞에 서 굳게 닫혀 있었다. 뒷모습을 보이며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비로소 호튼 씨 는 아더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 쪽으 로 몸을 가리키며 거의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좋은 젊은이들이지. " 그 말은 아더의 가슴에 콱 박혔다. 뿐만 아니라 호튼 씨의 이 감탄한 듯한 말투는 증오에 불타는 아더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내뱉은 말처럼 굉장한 효 과를 가져다주었다. ― 저 두 사람은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지만 너는 그 렇지 않다 라는 …… 게다가 그 자리에는 앤이 있었던 것이다. …… 앤 호튼이. 일에 한결같은 열의로써 열중하고, 로맨스에 꽃을 피우려고 애쓰고, 운이 좋으면 사장이나 중역의 딸을 손에 넣어 일석이조의 성공을 기도하는 것은 적어도 야심에 찬 젊은이들의 전통적인 권리이다. 뿐만아니라 그 딸이 앤 호 튼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그러면서도 ―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동경어 린 표현을 빌면 ― <조금도 제멋대로 구는 일이 없는 정숙한 아가씨>이고 보면 더욱 뜻하지 않은 행운이라 할 것이다. 조금도 제멋대로 굴지 않는다 해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사 실을 아더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본심으로는 50피트 길이의 선실이 딸 린 쾌유선을 갖고 싶지만, 결국은 20피트의 스피드 보트로 참아주는 여자가 제멋대로 구는 여자가 아니라면 분명히 앤 호튼은 제멋대로 군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여자에게 불타는 정열과 무엇이든 단번에 해치울 수 있 는 의기만 가지고 가까이 하려 해봐야 헛일이다. 황금 갑옷을 입고, 순수한 혈통의 명마를 타고, 시내에서 제일가는 뮤지컬 극장의 오케스트라 좌석 지 정권 같은 것을 군기 처럼 펄럭이며 가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구혼자의 뜻을 명백히 해두고 싶다면 가끔씩이 아니라 자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더는 매슈 부인의 하숙집 방 침대에 드러누워 이런 모든 일들을 생각하 며 여러 가지 망상을 했다. 그리고 밤마다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며 천장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의 사고는 어떤 괴상한 책에 나오는 뱀 ― 자기의 꼬리 를 물고 자신의 몸을 먹어들어가는 그 뱀처럼 빙빙 돌아 미칠 것만 같았다. 앤 호튼도 다른 모든 여자들과 같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가 요구하는 조건을 들 어줄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반드시 결혼하지 못할 것도 없 지 않은가? 그러나 그 조건을 들어주려면 돈이 드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올 가망성이란 그녀와의 결혼이 성공되지 않는 한 있 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일이 잘만 되면 그 보기싫은 녀석들의 얼굴에 내던져줄 만큼 많은 돈이 수중에 들어올 텐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의 생각은 차츰 형태를 바꾸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앤 호튼 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목적 은? 말할 것도 없이 돈을 일일이 세어보는 인색한 짓을 하지 않고 무엇이든 제일 좋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훌륭한 신분이다. 무엇이든 제일 좋은 것 으로 …… 하고 아더는 꿈꾸듯 혼자서 중얼거리며 돈이 듬뿍 드는 아름다운 환상이 천장에 나타나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을 생생히 보았다. 찰리 프린스는 무엇이든 제일 좋은 것만 맛본 젊은이였다. 그가 아더의 생 활에 침입해 온 것은 어느 날 점심때의 일로, 때마침 아더는 눈 앞의 테이블 에 호튼 앤드 샘 사무실의 견적서를 펼쳐놓았지만, 마음은 그곳을 떠나 앤 호튼과 20피트의 스피드 보트를 함께 타고 있는 환상을 그리며 커피를 마시 고 있었다. " 실례합니다, 잠깐 묻겠는데요 " 하고 찰리 프린스가 말했다. " 당신은 호 튼 노인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까? " 그 목소리에서 가문과 명문 학교 출신의 냄새가 풍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 <노인>이라는 말 한 마디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것은 진짜 나이와는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그 즈음 <그들> 사화에 유행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더는 상대방의 구두에서 양복으로, 셔츠로, 넥타이로, 그리고 모자로 차례차례 시선을 옮기며 순서에 따라 반사 적으로 올리버 무어, 브룩스, 샐커, 블론지니, 캐버노(모두 일류 상품을 취급 하는 유명한 상점)하고 짐작해 가다 얼굴에서 딱 멎었다. 이 또한 에누리없 이 알맞게 햇볕에 그을린 잘생긴 용모였으며 다른 이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 았지만, 그밖에 뭔가 조화를 깨뜨리는 것이 있었다. 눈 가장자리의 잔주름과 일그러진 입술 …… " 그렇습니다 " 하고 아더는 나른한 듯이 말했다. " 호튼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 " 잠깐 여기 앉아도 될까요? 내 이름은 찰리 프린스라고 합니다. " 찰리 프린스 는 전에 호튼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므로 우연히 테이블 위의 견적서가 눈에 띄자 옛날에 있던 회사의 상태가 지금 어떤가 물어보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잘 되어나가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겁니다. " 아더는 대답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덧붙여 말했다. " 나는 아무래도 당신을 본 기억이 없는데요 …… " " 그럴 겁니다. 나는 당신이 근무하기 전에 있었고, 그만둔 뒤 회사에서 나 에 대한 말을 하며 떠들어댔을 리도 없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사실 나는 이 사무실에 해로운 존재였거든요. 결국은 완전히 신용을 잃어 물러난 셈이었지 요.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소? " " 네 " 아더는 특별히 누구를 지적해서라기보다, 호튼 사무실같이 훌륭한 곳에서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종하기 싫어 가벼운 마음으로 그만둘 수 있는 좋 은 신분을 가진 자들에 대해 순간적이긴 하지만 씁쓸한 부러움을 맛보았다. 찰리 프린스는 그의 마음의 움직임을 꽤 정확하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 아니, 그렇지 않소. 능력이 없어서 배겨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건 잘못된 거요. 그게 아니라 수표 위조니 ― 뭐, 그런 것으로 …… " 아더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 알겠소? " 하고 찰리 프린스는 기쁜 듯이 말했다. " 그것이 탄로나자 그만 별수없이 자책감에 못 이겨 눈물로 지새웠으리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 렇지 않소. 물론 후회하기는 했지요. 그 주제넘게 구는 굼벵이 같 은 회계 녀 석에게 꼬리가 잡힐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러나 그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볼 수 는 없는 일이었소. " " 그렇지만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 찰리 프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 내가 다만 스릴을 맛보기 위해 도둑질하는 정신이상자 같이 보이오? 물론 돈 때문이었지요. 나의 경우는 언제나 돈 때문이오. " " 언제나라고요? " " 그렇소, 나는 호튼 사무실 말고도 몇 군데서 같은 일을 하고 늘 그 일이 켕겨서 나오곤 했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호튼 사무실에서 그 짓을 할 때 는 가장 중요한 초보적 원칙을 아직 몰랐던 거요. " 그는 윗몸을 앞으로 내 밀며 뜻있게 둘째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 즉 남의 서명을 베낀다 는 것은 쓸개빠진 녀석이나 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요. 정말 바보 같은 짓이지. 가짜 서명을 하려면 진짜와 똑같이 쓸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거듭할 수밖에 없소 ―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소. " " 하지만 그렇게 해도 붙잡혔겠지요? " " 그것은 내가 몰랐던 탓이오. 나는 수표를 현금으로 하여 일일이 그것을 출납부에 기입하기가 귀찮아서 써넣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회계라는 녀석이 장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 그런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 아더는 자기가 완전히 상대방의 이야기에 빠져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됨 과 동시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말 투로 그것을 묻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실에서 …… 당신은 …… ? " " 체포되었다든가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든가 뭐 그런 것이오, 당신이 묻 고 싶은 말은? " 찰리 프린스는 딱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아더를 쳐다보았다. " 설마 그런 일을 당했겠소? 당신도 그런 사무실들이 세상의 평판에 대해 얼 마나 신경쓰고 있는지 잘 알고 있잖소. 쓴 돈은 모두 나의 아버지가 메워주 시고, 그것으로 끝난 거지요. " " 그것으로 당신의 신상에는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 아더 는 놀라서 말했다. " 아니오. " 찰리 프린스는 한 발자국 양보하듯이 말했다. " 물론 일이 일어 나긴 했었지요. 특히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열을 받은 풍선처럼 터져버렸거든 요. 그러나 심한 일은 당하지 않았소. 다만 보증금은 받고 자유 이민이 되는 것으로 끝났답니다. " " 아니, 뭐라고요? " 아더는 바보처럼 물었다. " 보증금을 받고 자유 이민이 되었다고 말했소. 영국의 전통있는 명문 집안 에서 곧잘 쓰는 수법이지요. 흰 양의 무리에 한 마리의 검은 새끼가 태어난 것같이 눈에 거슬리고 변변치 못한 자식을 오스트레일리아나 어디 눈에 띄 지 않는 곳으로 쫓아내고 돈을 보내주는 겁니다. 어쨌든 눈에 띄는 곳에 나 타나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어김없이 정해진 때에 돈을 보내주지요. 나는 그 렇게 되어버렸소. 처음에 아버지는 나를 춥고 어두운 거리로 돈 한푼 주지 않고 내쫓겠다고 호통쳤으나, 우리 집 여자들은 모두 마음씨가 착해서 어떻 게 잘 봐주도록 아버지를 설득했지요. 나는 매달 정해진 액수의 돈을 받고 있습니다. ―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액수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것은 나중 에야 알았지만. 그 대신 나는 운전을 잘하여 앞으로 일생 동안 우리 가족이 나 친척친지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런데 이 친척친지의 눈에 띄는 범위라는 것이 여간 넓은 게 아니어서, 정말이지 그것만을 이해해 주어야 하는데 …… " " 그럼, 뉴욕 같은 곳에 있으면 안되겠군요? " " 나는 <자유 이민>이라고 말했었지요? 즉 나는 어디에 있으나 괜찮습니다. ― 나의 가족과 3백만 명쯤 될 친척친지의 눈과 귀에 띄지만 않으면. 나는 우리 집 고문변호사에게 거처를 알려주어 매달 1일에 돈을 받지요. " " 아아, 그렇군요. " 하고 아더는 말했다. " 지금 들은 것으로 판단하건대 아 버지가 아주 좋으신 분 같군요. " 찰리 프린스는 한숨을 쉬었다. " 사실 전적으로 나쁜 노인을 아니오. 다만 뭐랄까, 성인인체하는 착실한 젊 은이를 자기 아들로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굉장히 크지요 ― 그 때문에 인 과응보로 나 같은 자식을 두었겠지만.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지요? 겉보기에 도 빈틈이 없고, 알맹이도 빈틈이 없고, 쇠망치로 두들겨도 불꽃 하나 튀지 않는 그런 사람이오. 만일 내가 그렇다면 모든 일이 척척 풀려나갈 텐데, 공 교롭게도 나는 그렇지 못하지요. 가엾은 지고, 황야 의 이스마엘이여 ― 돈이 오려면 아직 2주일은 있어야 하는데, 호텔에선 쫓겨나고 …… " 아더는 흥분이 치솟아오름을 느꼈다. " 쫓겨나다니요? " " ― 숙박비를 지불하지 않는 손님에 대한 처분은 어디나 다 같은가 보지 요. 아마 법률이나 헌법 같은 것으로 그렇게 정해진 모양이오. 아뭏든 매정 한 방법이오. 하기야 이렇게 된 것이 남의 일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 어떻소, 지금 내가 들려준 신상 이야기와 교환 조건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어떻게 돈 좀 꿔줄 수 없겠소? 아니, 그렇지만 잔돈푼이라면 곤란하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액수를 부탁하고 싶소. 다음달 1일에는 어김없이 그 돈에 이자를 붙여 서 갚겠소. 제발 부탁이오. " 찰리 프린스의 목소리는 이제 애원투로 바뀌었 다. " 나에게 정직하지 못한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러나 빚돈을 갚지 않고 떼어먹은 일은 이 세상에 태어난 뒤 한 번도 없소. 사실 근본을 따지고 보면 여러 가지 골치아픈 일이 생기는 것도 그 빚돈을 갚는다는 점에서 너 무 의리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오. " 아더는 한 군데도 흠잡을 데가 없는 찰리 프린스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아주 허물없는 태도로 관찰했다. 기분좋게 울려오는 억양 조절이 잘된 목소 리를 음미하고 있노라니 서서히 솟아오르는 흥분이 갑자기 현실적인 뜻을 지니게 되었다. " 그건 그렇고 ― " 하고 아더는 말했다. " 지금 어디에 삽니까? " " 거처가 없습니다, 추방 처분이 풀 리지 않는 한은. 그러나 다음달 1일 약속 시간 정각에 이곳에 나타날 거요. 돈을 어김없이 갚겠소. 맹세해도 좋소. 절 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나의 이야기하는 태도로 보아 속이려 하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아줘도 될텐데 …… " " 그런 뜻이 아닙니다 " 하고 아더는 말했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방에서 같이 지내지 않겠느냐는 뜻이오. 내가 당신에게 숙박료를 지불하고 짐을 찾아올 만한 돈을 빌려드리면 내 방으로 이사올 마음이 있습니까? 좋은 방입니다. 오래된 집이지만, 손질이 아주 잘되어 있지요. 매슈 부인 ― 하숙 집 주인입니다. ― 은 조금 수다장이로 수선스럽기는 하지만 살림을 잘합니 다. 게다가 하숙비도 싸고. 꽤 절약이 되지요. " 여기서 아더는 자기가 무턱대고 물건을 떠맡기려는 강매꾼처럼 떠들어대고 있다는 것과, 찰리 프린스가 당황한 눈초리로 의심스러운 듯이 자기를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기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 무슨 말이오, 그게? " 하고 찰리 프린스가 말했다. " 당신도 돈이 없다는 거요? " " 아니, 돈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입니다. 그 증거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 잖습니까? " " 그럼, 왜 나와 함께 지내고 싶어하는 거요? 나 같은 사람하고? " 아더는 용기를 내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 별수 없이 말해야겠군요. 당신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몸에 지니고 있 기 때문입니다. " 찰리 프린스는 눈을 둥그랗게 떴다. " 내가요? " " 그렇습니다. " 하고 아더는 설명했다. " ― 당신이 지금까지 생활한 환경 이라든가 그밖의 것을 나는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어림없 이 겉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타납니다. 나는 그걸 압니다. 당신은 만일 지금 내가 아니라 당신 아버지 가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말은 하지 않겠지요? 그러 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는 단지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나, 무엇이 그들을 모두 그렇게 만들었나 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것은 좋은 가정에서 나라났다는 증거로서, 돈이 당신에게 칠한 절대로 벗겨지지 않는 왁스 같은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감화되고 싶은 겁니다. " 찰리 프린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더를 지켜보았다. " 그래, 당신은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내면 그 이상한 왁스인지 뭔지가 당신 몸에도 배리라고 생각하는 거요? " " 그런 걱정은 내가 하지요 " 하고 아더는 말하며 수표책과 펜을 꺼내어 눈 앞 테이블위에 놓았다. " 자아 ― " 찰리 프린스는 수표책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당신이 나에게서 무엇을 사려고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소만 ― 아뭏 든 사겠다면 팔지요! " 오래지 않아 알게 된 일이지만, 동거인으로서 이 두사람은 멋진 짝이었다. 왜냐하면 열심히 지껄이는 사람과 열심히 듣는 사람만큼 잘 어울리는 친구 는 없기 때문이다. 찰리 프린스로서는 일화며 추억담을 마치 우물 속에서 물 을 퍼내듯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것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없었고, 아더는 마 치 열병을 않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매슈 부인의 하숙집 2층 방에는 따사로운 분위기가 가득차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물론 아주 작은 파리가 기름 속으로 뛰어드는 정도의 번 거로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더가 세밀한 점에 이르기까지 소홀히 하지 않고 자세한 지식을 얻으려고 너무 열심이었으므로 이따금 찰리 프린 스는 지나치게 열성적인 청취자를 떠맡게 된 일을 한탄하게 되었다. 예를 들 어 막 요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 아니, 잠깐만 " 하고 그 요트의 크기 며 구조며 조정방법 등을 물은 다음, 각종 작은 배의 특징과 성능 같은 것을 비교하는 강의를 닫고 나서 다시 본디 이야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성가신 절차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기세를 이만저만 꺾는 것이 아니었다. 또 는 어떤 레스토랑에서 만난 젊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급사장에 게는 어떤 말을 하느냐, 어떻게 주문을 하느냐, 팁은 어떻게 주느냐부터 시 작하여 그런 자리에 맞는 옷차림 같은 것에 대해서까지 주석을 달아줘야 했 으므로 모처럼 하려던 이야기의 묘미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비범한 관찰안을 갖춘 찰리 프린스는 아더가 차츰 자기와 비슷해져가 는 것을 보자 웬일인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의 억양, 단어의 선택 과 사용방법, 앉음새, 걸음걸이, 서 있는 태도 등 아더가 교묘하게 자기 것으 로 받아들인 미묘한 표현은 모두 마치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일종의 불안감을 찰리 프린스에게 주었다. 아더 쪽에서 볼 때 찰리 프린스와의 교제를 통해 진심으로 놀란 일은 상대 방이 너무도 어린아이 같고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보고 듣고 한 모 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찰리 프린스와 그 동류의 사람들은 유년기에서 청년 기에 이르러 그때부터 발육이 멈춰 버린 것이라고 아더는 어두운 마음으로 판정을 내렸다. 몸집은 크게 자가 멋진 모습을 갖추게 되지만, 머리와 마음 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어른다운 말투와 태도도 머지않아 익히게 되겠지만 ― 그러나 외모가 아닌 속은 어떨까? 그 대답은 물론 찰리 프린스 앞에서 공언하기가 꺼려지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한 그의 감회는 찰리 프린스가 매달 받는 송금으로 한층 더 강 해졌다. 매달 1일 매슈 부인은 찰리 프린스에게 오는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방으로 들어온다. 얼른 보아도 고급 봉투인데다, 그것을 밝 은 빛에 비춰보면 ― 사실 찰리 프린스는 언제나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었지만 ― 아주 반가운 종이쪽지의 윤곽이 보인다. <제임스 르웰린>이라는 발행인의 서명이 든 5백 달러짜리 수표이다. " 우리 집 고문변호사지요 " 하 고 언젠가 찰리 프린스는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약간 씁쓰레하게 내뱉듯이 덧붙여 말했다. " 아버지 혼자로는 나를 억 누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르웰린 영감이 또 한 사람 의 여벌 아버지처럼 군다니까. " 찰리 프린스의 말에 의하면 그 금액은 마치 모기의 눈물 정도밖에 안된다 는 것이었다. 게다가 매달 두세 시간 동안은 그것이 전부 자기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이 아더를 한층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찰리 프린스가 그 수표에 이서를 해 주면 아더는 거의 비어 있는 자기의 예금 구좌가 있는 은행에 들러 그것을 현금으로 바꾼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하숙비 중 찰리 프린스가 내야 할 돈 과, 지난달 끝무렵 한두 주일 동안 찰리 프린스가 그에게서 빌어간 금액을 빼고 난 나머지를 같은 방에 있는 친구의 손에 넘겨준다. 이것은 찰리 프린 스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 하숙비와 나에게 꾸어준 돈을 어김없이 받으려면 ― " 하고 그는 말했다. "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소. 게다가 당신은 문제없이 수표를 현금으로 바 꿀수 있잖소. 그러나 나는 성가시게 된단 말이오 ― 아무래도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 그리하여 매달 몇 시간은 아더가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찰리 프린스는 싫은 표정도 짓지 않고서 옷을 빌려주므로 아더는 수표를 바꾸러 가는 날에는 특별히 맞춘 양복을 입었다. 그것은 마치 그가 마춰입은 것처럼 그의 몸에 꼭 맞았다. 그 가슴 주머니에는 빳빳한 새 지폐로 50 달러가 들어 있는 것이다. 하루 동안 마치 여느 때 꿈꾸고 있던 일이 마침내 현실이 된 듯한 환각을 품게 되었다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날 아더가 사장실로 들어가자 앤 호튼이 책상 모퉁이에 걸터앉아 아버지 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오는 아더를 흘끗 쳐다보 았다. 그런가 했더니 하던 말을 도중에서 삼켜버리고 다시 그를 훑어보았다. " 어머나 " 하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 나는 여기에 와서 이분을 벌 써 여러 번 뵈었어요. 이젠 서로 소개해 줘도 좋지 않겠어요? " 그녀의 말투는 호튼 씨를 마치 산 위에 버티고 서서 우뢰를 내리는 거인처 럼 생각하고 있던 아더에게 더없이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호튼 씨가 주저하 듯 아더를 바라본 다음 그의 귀에 묘한 음악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소개해 준 것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아더는 호감이 가는 젊은이므로 기꺼이 소개하겠다고 호튼 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아더는 이것을 여지없이 수포 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였다. 그는 전혀 요령을 알 수 없는 말을 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보다 더 애매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앤 호튼의 얼굴에 나타났던 환한 빛이 사라져가 는 걸 바라보며 그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지금 주머니에 있는 돈은 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게 그 원인이었다. 만일 그 돈이 그의 것이라면 오늘 밤을 그녀와 함께 지내고, 다음날 밤도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 지갑의 < 불룩함>은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여기까지 밀고 온 것이 고작이지 더 이상은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자 그밖의 모든 일들이 뜻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옷도, 행동도, 고심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든 모든 것들이. 돈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돈만 있으면 …… 돈만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 때까지는 다만 갈팡질팡하고 있었을 뿐이었 다. 그러나 그 생각에 사로잡히자 그는 마치 육체적인 병에 걸린 사람처럼 헐떡였다. 앤 호튼의 사랑스러운 눈에 흘끔 걱정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분명 히 그녀는 모성적인 충동이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말했다. " 기분이 언짢으신 게 아니에요? " 그 생각, 빛나는 영감이 이제 그의 몸 속을 꿰뚫고 나와 불꽃처럼 타올랐 다. 거기에 힘입어 그는 불사조처럼 일어섰다. " 네, 조금. " 그의 꺼져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는 자기의 귀에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 였다. "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 " 어머나, 댁으로 돌아가셔야지요 " 하고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 저 밑 에 차를 세워놓았어요. 만일 괜찮다면 …… " 아더는 마음속으로 자기 주먹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힘껏 쳤다. 이미 하나 의 기회는 놓쳐버렸다. 이제 이 기회도 그냥 보내야만 한단 말인가? 매슈 부 인의 하숙집이 이때처럼 초라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그렇게 누추한 집을 그녀에게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때마침 영감이 눈 앞에 있는 앤 호튼에 대해 효과적인 적절한 대답을 그의 입 속에 불어넣었다. "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밀려 있어서요 " 하고 아더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 그냥 두고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 그런 다음 그는 마치 몇 시간은 연습한 대사처럼 거침없이 덧붙여 말했다. " 그러나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 내일 밤이라도 지장이 없으시다면 ……? "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뭔가 불 같은 것이 몸 속 어딘가에서 이상하게 끓 어오르면 그 유혹에 이끌려 나 자신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니까) 하고 그는 집요하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런 상황이 된 이상 물론 찰리 프린스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틀어막혀진 입에서 괴로운 항의의 신음 소리가 한동안 흘러나왔으며, 그 주위를 뒹굴다가 찰리 프린스는 침대에 죽어 넘어져버렸 다. 완전히 죽어 있었다. 그러나 아더의 손가락은 그 뒤에도 꼬박 1분쯤 그 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이것은 다만 완전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살인을 하고 감쪽같이 도망치고 싶다면 군중 속에서 상대방을 노려 그의 배에 탄환을 쏜 다음 재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그 말 자체 가 진실이라기보다는 지나치도록 교묘하게 궁리한 살인방법은 범인이 붙잡 히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리라. 그런 뜻에서 본다면 과연 아더는 현명하게 살인을 한 셈이었다. ― 본인이 그런 것을 다 알고 한 일은 아니지만. 사실 앤 호튼과 헤어진 순간부터 그의 손가락이 가까스로 찰리 프린스의 목을 떠난 순간까지 그는 다만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즉 일종의 맹목적인 열병상 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한 공포에 소스라쳐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일어섰을 때, 그는 어찌할 바를 몰 랐다. 찰리 프린스의 영혼은 어딘가로 가버 렸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육체는 남아 있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벽장 속에 넣으면 적어도 눈에 띄지 않겠지만, 그렇게 해봐야 무슨 소용이 겠는가? 매슈 부인이 매일 아침 방을 청소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올라 온다. 벽장문은 잠글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 문을 전대로 열어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보다 저 구석에 놓여 있는 찰리 프린스의 트렁크는 어떨까? 시체를 저 속 에 넣어서 어디로 보내버린다면? 그러나 어디로 보낸단 말인가? 그는 계속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신을 집중했으나, 결국은 시체를 넣은 트렁크를 보낼 말한 곳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살인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트렁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만은 그럴 듯한 일이었다. 마침내 해결 할 수 있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는 즉시 힘을 내어 그 일에 착수했다. 매슈 부인의 집 지하실에 있는 축축한 동굴 같은 광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무거운 문을 닫아둔 채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황폐하고 냉기를 띠고 있었다. 물론 그런 곳에 드나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시체는 거기서 아 무도 모르게 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은 문제없다. 그보다도 문 제는 트렁크에 넣는 일, 그리고 그 트렁크를 광까지 운반해 가는 일이었다. 막상 일을 하려고 보니 꽤 큰 트렁크인데도 집어넣기가 빠듯했으므로 밖으 로 비어져나오지 않게 놓느라고 무척 애를 썼다. 그래도 그럭저럭 잠가서 복 도로 내놓을 수 있었다. 사고가 생긴 것은 계단 중간 쯤에 왔을 때였다. 그 는 등에서 트렁크라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아 다시 잘 짊어지려고 추슬러 올렸는데, 다음 순간 그것이 그의 목뼈를 누르며 미끄러져내려가 마치 벼락 을 치듯 온 집 안을 진동시키며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허둥지둥 뒤쫓 아내려가 트렁크가 잠겨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숨돌리며 얼굴을 든 순간, 그의 눈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매슈 부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흰 잠옷을 입고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마치 무엇에 놀란 유령처럼 서 있었다. " 어머나, 저런! 조심해야지요! " 그녀가 트렁크 속을 꿰뚫어보는 투시력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듯 아더는 얼른 트렁크를 말아서며 더듬거렸다.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만 손이 미 끄러져 …… " 그녀는 체면을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 벽이 상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당신이 다치지는 않았나요? " " 아니오 " 하고 그는 얼른 대답했다. " 아무 데도 다친 곳은 없습니다, 전 혀. " 그녀는 그의 옆에서 뒤쪽을 넘겨다보았다. " 어머나, 그건 프린스 씨의 고급 트렁크가 아니에요? 이런 시간에 그런 것 을 어디로 가져가는 거지요? " 아더는 이마에 땀이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 아니 뭐, 아무 데도 …… " 그가 쉰 목소리로 대답하자 매슈 부인이 의심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아더는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 저어, 광으로 가지고 가는 겁니다. 찰리, 아니, 프린스 씨가 거들어줄 예정 이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내가 혼자 해보려고 했던 거지요. " " 하지만 상당히 무거워보이는군요. " 그녀의 따뜻한 동정적인 목소리가 그의 흥분된 신경을 가라앉혀주었다. 그 의 머릿속은 다시 고급 시계의 초침처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 그는 자기의 말을 취소하기라도 하듯 얼른 소 리내어 웃었다. " 아뭏든 프린스 씨가 돌아와서 거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기 보다 혼자서 해버리는 편이 확실합니다. 어쨌든 당신도 아시다시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아무 때나 제멋대로 뛰어나갔다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거든요. " " 곤란해요, 그런 하숙인은 " 하고 매슈 부인은 딱 잘라 말했다. " 아니, 좀 괴짜일 뿐이지 사귀고 보면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 아더는 트 렁크에 손을 댔다. " 그만 들어가보십시오. 이젠 나 혼자서도 문제없이 운반 할 수 있으니까요. " 그러자 매슈 부인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 아참, 그렇지. 결국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이 소리를 내어 내가 이렇게 뛰어나온 것은. 이번에 그 광에 자물쇠를 달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들어갈 수는 없어요. 내가 잠깐 가운을 걸치고 나와서 문 을 열어줄께요. " 그녀는 앞장서서 삐걱거리는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그가 트렁크 를 날라오는 동안 그 안에 들어가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었다. 희미한 등불이 하나 켜져 있을 뿐이었는데, 언젠가 그가 보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매슈 부인은 그 근처를 죽 둘러보며 고개 를 내저었다. " 굉장하지요? 하지만 손을 대봐야 별수없어요. 벌써 1년도 넘게 이 방을 쓴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방을 잠근 것은 다만 보험회사 직원이 잠그라고 했 기 때문이에요. " 아더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옮겨놓았다. 그는 빨리 일을 끝내고 이런 곳에 오래 머물 것 없이 얼른 나가고 싶었지만, 매슈 부인의 머리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 난 떠돌이는 질색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투덜거리지 않고 성가시 게 굴지 않는 침착하고 온순하며 신사적인 하숙인이에요. 자아, 그 트렁크는 저쪽으로 놓으세요. " 그녀는 뼈가 앙상한 둘째손가락으로 언뜻 보기에 잿더미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켰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몇 년 동안이나 먼지 속에 묻혀 있는 하나 의 트렁크였다. " 저 사람이 우리 집에 하숙하게 되었을 때는 …… " 아더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지껄이고 있는 동안 후들거리는 몸을 가까스 로 버티고 서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아래층 뒷방에 살 고 있던 사람, 2층 뒷방에 있던 젠틀맨, 3층 뒷 방에 세들어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봇물이 터진 듯 그칠 줄 모르 고 쏟아져나왔다. 그동안 줄곧 그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 ― 이제 살인을 완 전히 마쳤다는 생각에 지탱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광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찰리 프린스는 이 세상의 아무도 모르게 썩어져버릴 운명에 놓인 것이다. 수 표는 앞으로도 매달 올 것이다. 한 달에 5백 달러! 그리고 앞길에는 앤 호튼 과 빛나는 세계가 아더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최고급품을 가질 수 있 다고 그는 꿈꾸듯 생각했다. 매슈 부인의 한결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하늘 에라도 오를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멋대로 지껄이는 말도 언젠가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무거운 문은 잠겨서 다시 열릴 일이 없게 되자, 아더는 자신만만하게 인생의 새로운 날을 향하여 발을 내딛었다. 이러한 자신감이란 대개 떳떳치 못한 점이 없는 올바른 사람 들의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살인을 하고 깨끗이 뒤처리를 해버린 사람들의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2, 3주일이 지나 복도에서 매슈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뒤 얼마쯤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 져버렸다. " 당신 말이 맞았어요 " 하고 그녀는 딱하다는 표정을 입가에 띠며 말했다. " 프린스 씨가 괴짜라고 하신 말 말이에요. " " ― 그럴까요? " 하고 아더는 애매하게 말했다. " 그렇고 말고요. 그 사람은 손 가까운 곳에 잇는 종이쪽지마다 자기 이름 을 서놓았으니 말이에요. 한 장 또 한 장,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써놓았 어요! " 순간 아더는 자기 방에 있는 쓰레기통을 생각하고, 모든 일이 ― 그대로 넘 어갈 수 없는 부주의까지도 ―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어가는 행운에 경탄하 고 말았다. "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남자가 그런 짓을 하다니 …… 시간을 보내도 좀더 보람있게 보낼 수 있는 일이 있을 텐데. 그것으로 다 알았어요, 상당히 괴짜 라는 것을. " " 아아 " 하고 아더는 말했다. " 과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 이리하여 매슈 부인의 하숙집에는 평온무사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뿐만 아 니라 밖에서도 평온무사했다. 즉 아더가 이서한 수표는 그때마다 문제없이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 입수한 돈을 쓰는 일은 그보다 더 쉬 웠던 것이다. 찰리 프린스의 양복장 침략으로 부터 시작하여 그는 하나하나 쾌적한 새로운 생활을 다져나갔다. 찰리 프린스를 통해 흡수해 둔 지식을 바 탕으로 그는 갈 만한 장소는 다 사보며 의젓하게 행동했다. 호튼 씨는 따뜻 한 눈길을 보내주었다. 특히 관대하신 백모님께서 매달 수표를 보내준다는 말을 했을 때 그의 눈은 이상할 정도로 자애로운 빛을 띠는 것 같았다. 처음 함께 보낸 밤부터 이상하게 그에게 끌린 듯한 앤 호튼과의 교제는 이윽고 사랑의 꽃을 피웠다. 알면 알수록 앤 호튼은 그가 꿈꾸었던 아름다운 점을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었다. ― 정열적이고, 매력적이고, 꾸준했다. 구태여 꼬집어 말하자면, 가끔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한동안 잠자코 있을 때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그녀의 신 상에도 뭔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더로서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어찌 그녀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아뭏든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될 때까지 아더의 태도는 훌륭했다. 그런데 비로소 말다툼이 생겼다. 결혼한다는 그 일 자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날짜는 6월, 식이 끝나면 호화판의 신혼여행. 그 여행에서 돌아오면 아더는 호튼 앤드 샘 회사의 중요 한 자리에 앉게 된다. 이에 따라서 급료도 그 지위에 걸맞는 액수로 오를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결혼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찌기 앤 호튼을 곁눈질해 보던 젊은이들의 눈에 나타난 선망의 빛 도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결혼 그자체가 아니라 문제는 결혼식의 방법이었다. " 아니, 왜 그렇게 식을 야단스럽게 하려는 거예요? " 하고 그녀는 화를 내 듯 물었다. " 난 소름이 끼쳐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떠들어댈 뿐이잖아요? 마치 옛날 로마의 경기대회처럼 말이에요 " 그는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아 뭏든 어떤 여자에게 그녀의 결혼식은, 다만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통쾌한 복 수의 수단이라는 것을 그를 듯하게 설명할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신문에 크게 광고를 내는 것이다! 그 지방 젊은이들을 다 불러다 보 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처럼 여기까지 끌고 온 보람이 없다. " 당신이야말로 왜 집안 식구끼리만 모여서 도둑 결혼 하듯 볼품없는 결혼 식을 하자고 고집하는 거지? 나는 결혼식이란 여자의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가장 중대한 행사라고 생각해. 여자로서 자랑할 수 있는 화려한 무대가 아니 오? 당신 아버지와 나의 백모님만이 손님이라니, 그게 어디 식이라고 할 수 있겠소? " " 당신과 나 두 사람만 있으면 돼요 " 하고 그녀는 말했다. " 본디 결혼식이 란 두 사람을 위한 것이잖아요. " 그러나 그런 여자다운 생각에 굴복할 아더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점 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결국 그녀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으며 고집스러운 주장을 바꾸지 않는 그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뛰어나가버렸다. " 비록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 " 하고 그는 분노를 씹어삼키며 스스 로에게 말했다. " 마치 임기응변으로 마련한 보잘것없는 물건을 진짜라고 내 민다 해서 내가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은가! 시내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시 내에 사는 중요한 인물을 모두 모아놓고 ― 하나에서 열까지 다 최고급으로 하는 것이다. " 그 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어느 정도 풀이 죽어서 다소곳해보였으므로 그도 적당히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 아더, 내가 그렇게 고집부려서 바보라고 생각하세요? " " 아니, 그렇게 생각지 않아. 당신이 너무 민감하고 흥분하기 쉽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이번 일로 당신이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 " 당신은 참 상냥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정말 반드시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 겠다고 당신이 양보해 주시지 않는 일은 어떤 뜻에서 당신이 알 수 없을 정 도로 큰 결과를 가져올지도 몰라요. " " 말하자면? " 하고 그는 물었다. " 지금은 아직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만일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일이 진행 되면 요 몇 년 동안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내가 행복해지리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 "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는 여자답게 변죽을 울리는 그 말에 당황해서 물었다. "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대답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아더. 그리 고 부탁이에요, 거짓없는 진실을 말해 주세요. " " 물론 당연한 일이지. " "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마주 못된 일을 한 상대방을 용서해 주실 수 있어요? 못된 일을 하여 지금도 그 일로 괴로와하고 있는 상대방을? " " 물론 용서하지. 누가 무슨 일을 했든 신경쓰지 않겠소. 나는 무슨 일을 꽁 하게 묻어 두지 않는 성격이니까. " 그는 <누가>라고 하는 데서 하마터면 <당신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 나 꾹 삼켜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 여자가 이런 절차를 밟아 잠꼬대 같은 참회의 고백을 하고 싶어한다면 구태여 막을 필요는 없다. 그러 나 고백을 바로 뒤이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다시 입 밖에 내지도 않았 다. 그날 밤의 화제는 결혼식 계획에 대한 의논으로 옮겨져서, 그녀가 꺼냈 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날 오후 그는 호튼 씨가 사무실에서 불러 가보니, 거기에는 앤이 자리 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녀와 그녀 아버지의 표정을 보아 그들이 그때까지 무 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있어 기분좋은 승리감을 맛보았다. " 아더 " 하고 호튼 씨는 말했다. " 거기 앉게. " 아더는 다리를 꼬고 앉아 앤에게 미소를 보냈다. " 아더 " 하고 호튼 씨는 다시 한 번 말했다. " 진지하게 이야기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 " " 말씀하십시요. " 아더는 호튼 씨가 거북한 듯 세 자루의 연필과 펜과 종이 자르는 칼과 메 모 종이와 전화기를 가지런히 책상 위에 늘러놓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아더 " 하고 호튼 씨는 이윽고 세 번째로 되풀이해서 불렀다. " 내가 지금 부터 하는 말은 나 이외에 두세 사람밖에 모르는 일일세. 그리고 다 듣거든 자네도 그 두세 사람들처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게. " " 네 " 하고 아더는 대답했다. " 앤에게서 이야기를 듣자니 자네는 결혼식을 정식으로 성대하게 하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기네. 그냥 집안 식구끼리만 모여서 올린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알겠나, 내가 하는 말을? " " 네 " 하고 아더는 눈 딱 감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슬쩍 앤 쪽을 보았으나 그녀로부터는 아무 해명의 실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 ― 물론입니다. " " 그래서 말인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성격이니까 분명히 말하 겠네. 실은 나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네. <나의 아들은 자네와 똑같아서> ― 앤도 나도 언젠가 그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지. 유감스럽게도 그 아이 는 변변치 못한 말썽꾸러기였네. 너무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 나는 다 만 정해진 돈을 매달 보내주겠으니 혼자서 멋대로 살라고 집에서 쫓아냈지. 그 쥐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일이 없네 ― 자질구레한 일은 변호사 에게 맡겼으니까. 그러나 성대한 식을 올리게 되면 오는 손님들이 모두 아들 이 왜 보이지 않느냐고 물을 걸세. 물론 이해해 주겠지, 그건? " 아더는 방이 갑자기 죄어들어와 자기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호 튼 씨의 얼굴이 갑자기 벽에 걸린 채 흔들거리는 마왕의 얼굴처럼 보였다. " 네 " 하고 아더는 속삭이듯 대답했다. " 이런 사정이 있어 마침내 나는 늘 앤이 졸라댄 일은 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네. 아들의 거처는 알고 있네. 지금 곧 우리 셋이 그애를 찾아가 만나고, 이야기를 잘해서 자네를 거울삼아 인생을 새출발할 수 있을는지 한 번 기회 를 주어볼까 하네. " " 프린스 찰리하고 해요 ― " 하고 앤은 그리운 듯이 말했다. " 그렇게 불렀 어요, 집에서는. 마치 왕자님처럼 멋진 오빠였지요 (프린스는 왕자라는 뜻. 그러나 프린스 찰리라고 하면 찰리 왕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반대로 찰리 프린스라고 하면 단순한 이름이 된다). " 사면의 벽이 가까이까지 다가와 검게 그를 바짝 에워쌌다. 마침내 앤의 얼 굴이 흐르듯 아버지의 얼굴 옆으로 갔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매슈 부인의 얼 굴까지 …… 싹싹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매슈 부인의 얼굴은 다른 두 얼굴보 다 더 크게 부풀어올라보였다. 그리고 그 트렁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