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고양이의 모험 정사각형인 검은 봉투 위에 오렌지색 잉크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엘러리는 언짢은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저작권을 기꺼이 인정했다. 쾌활한 여조 수를 짐짓 흘겨보긴 했지만, 그녀는 정열적인 사고와 추진력의 소유자로, 좀 더 성능이 뛰어난 쥐덫을 개발하기 위해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사내의 적 잖은 돈을 축낼 정도였다. 걸핏하면 생쥐 신세가 되어야 했던 엘러리는 편 지 겉봉에 '미스 니키 포터' 라고 적혀 있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당신 아파트로 온 거죠?" 니키는 검은 봉투를 앞뒤로 살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한 장난이겠지. 정직한 처녀의 명성을 한방에 무너뜨리려는 악취미를 가진 여자가 보낸 게 분명해. 열어 보지 마. 그냥 불속에 처넣고 하던 일이 나 계속하라구." 하지만 니키는 평소의 그녀답게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는 고양이 형태의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난 은유의 대가지."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뭐라구요?" 접힌 고양이를 펴면서 니키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계속해서 생쥐를 갖고 놀고 싶다면, 어디 한 번 읽어 보라 구."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또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유령 친구에게...." 니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읽지 마. 다음 얘기야 뻔하......" "입좀 다물어요. '검은 고양이 인너 서클 비밀 집회가 10월 31일 첸셀러 호텔 1313호에서 열립니다.' " "다음 얘기도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뻔하겠지." 엘러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 '도미노 마스크를 쓰고 정장 차림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9시 5분 에 도착해야 합니다. 유령.' 이상이에요." "단서는 없나?" "없어요. 필체도 못 알아보겠구......" "물론 안 가겠지?" "당연히 갈 거에요!" "친구이자 보호자, 그리고 고용주로서 나의 도덕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충고를 하지. 그 형편없는 편지를 내던지고 타자기 앞에 앉으라고." "한가지 더 있어요. 당신도 함께 가는 거에요." 니키가 덧붙였다. 엘러리는 세 번째로 손꼽히는 그의 미소---이를 드러내는---를 떠올렸다. "내가?" "뒷면에 후기가 있어요. '당신의 그 두목 고양이를 데리고 올 것. 역시 정장 차림임.' "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고양이들에게 무소 가죽 채찍을 휘두르는 장화 신은 고양이를 엘러리는 눈 앞에 떠올렸다. '오..끔찍해.' "난 기꺼이 사양하지." "당신은 너무 점잔을 빼요." "난 지적인 사람이야." "어떻게 해야 즐겁게 지낼 수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구요." "이런 자리는 빤해. 훤칠하고, 살결이 검고, 잘생긴 낯선 사내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편이 핏대를 올리는 장면으로 끝날 거라구." "겁쟁이......" "하느님께 맹세코, 난......"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첸셀러 호텔 13층의 한 객실 앞에서 엘러리는 드루이드(고대 골 및 켈트족 의 사제이자 마법사)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서 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10월의 그 어리석은 행사의 근원에는 사마인(Samain)이라 불리던 축제의 이끼 낀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과거에 의식을 집행하던 게일(스코틀랜드 고지대 사람이나 아일랜드의 켈트인)족에게는 숲 속 빈터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지극히 자연스러웠으리라. 골(고대 프랑스)의 숲 또한 유령과 마녀들의 연례적인 모임을 위한 장소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 을 것이다. 심지어 이교도의 신에 대한 책임감이 일시적인 연대 수준을 지나 좀더 멀리까지 나아갔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드루이드의 죽음의 신은 맨해 튼의 한 호텔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횃불이 피어오를 거라고 예언했을 터 였다.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말할 것도 없이. 엘러리는 막 움트기 시작하던 할로윈 전설에 호두와 사과를 갖다붙인 과일 의 여신인 포모나를 기억에 떠올렸다. 그리고 나서 로마인들에게 저주를 퍼 부었다. 사실 사립탐정 퀸은 모든 것을 무시하기로, 마음을 편하게 먹자고 쉽게 결 론을 내렸었다. 동성연애자 모임에 가느냐고 묻던 택시 운전사의 은근한 비 웃음, 널찍한 첸셀러 로비를 가로지를 때 들려오던 고양이들의 끔찍한 합창, 그리고 엘리베이터 속에서 꼬리로 엘러리 몸을 휘감으려 애쓰며 고약한 냄 새를 풍기던 사내, 정말이지 그 녀석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계집 티를 내고 있었다. 엘러리는 고통을 더 이 상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다시는 결코, 결코, 결코 이런 짓을......" "그만 투덜거리고 여길 좀 보세요." 도미노 마스크 속에서 니키의 눈이 반짝거렸다. "도대체 뭘 보라는 거야? 이 빌어먹을 물건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 "문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검은 고양이면, 들어오시오!' " "좋아, 좋아. 어디 한 번 들어가 보자구." 잠겨 있지 않은 1313호의 문을 연 그들을 맞이한 것은 당연하게도 어둠이 었다. 그리고 침묵. "이제 뭘 한다?" 니키가 킥킥거리며 뒤쪽으로 껑충 뛰어갔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자구!" 엘러리가 소리쳤지만, 니키는 이미 어둠에 묻혀 버렸다. "기다려! 당신 손을 내밀라고, 니키." "미스터 퀸, 그건 내 손이 아니에요." "빌어먹을.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 말이야......"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저기 빨간 불빛이 비쳐요! 복도 끝인가 봐요." 엘러리는 니키를 껴안고 있는 뼈조각을 떼어 주었다. "엘러리! 장난이 아닌가 봐요." "동감이야." 두 사람은 불빛을 향해 더듬어 나갔다. 불빛이라기보다는 장밋빛 그늘이었 는데, 다양한 까마귀 박제가 진열대 위쪽에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빌 어먹을 마녀가 시장에서 검은 종이를 사다 사방에 발라놓은 모양이군' 투덜 거리는 엘러리의 눈에 진열 대 받침에 노랗게 적힌 고대 게르만 문자가 들어 왔다. '왼쪽으로!' "그래, 기꺼이 가마." 그가 으르렁거리며 왼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허공이 잡힐 뿐이다. 미스터리 를 해결하고 악마적인 유희를 즐기는 범인을 붙잡고 말겠다는 강렬한 욕구 가 두려움을 저 멀리 쫓아내 버렸다. 어둠 속으로 대담하게 걸음을 내딛는 엘러리 뒤를 니키가 바짝 붙어 따라왔다. "읔!" "왜 그래요?" 니키가 가쁜 숨을 내몰았다. "의자에 부딪혔어. 정강이가 얼얼해. 도대체 의자에 무슨 짓을......" 니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 가여운 엘러리, 오우!" "으...... 이걸 날려 버려!" "엘러리, 어디 있어요? 악!" "으, 내 발. 이게 뭐지? 탱크 트랩? 바닥에 베개와 방석들이 흩어져 있어." 어둠 속에서 엘러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갑고 축축한 뭔가가 있어요, 얼음통처럼...... 우!" 금속과 축축한 물체가 서로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들리고 나서 침묵이 찾 아왔다. "니키, 무슨 일이지?" "부젓가락 선반에 걸려 넘어진 것 같아요." 니키의 목소리가 바닥에서 위로 올라왔다. "맞아요, 부젓가락이에요." "멍청하고, 유치하고, 하나도 재미없는......" "읔.." "정신병원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 뭣 때문에 가구들을 이렇 게 어질러 놓 은 것일까?"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엘러리, 어디 있어요?" "런던의 베들렘 정신병원에 있다구. 니키, 머리를 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세인트 버나드가 달려와서 구해 줄 테니.? 니키가 비명을 질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엘러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방 안은 에디슨 조명기구의 불빛으로 가득했다. 고양이 의상과 마스크 차림 의 어른들이 깔깔대고 소리를 지르며 껑충껑충 뛰어댔다. 정신착란에 빠진 멍청한 유령들처럼. "놀랐지!" 오, 빌어먹을 할로윈데이! "앤, 앤 트렌트구나!" 니키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 앤, 이 바보야, 어떻게 날 찾아냈니?" "니키, 정말 놀랍게 변했구나. 오, 넌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모르 고 있어. 엘러리 퀸의 비서......" '솔직히 네 눈에는 내가 멍청하게 비치겠지, 안 그래?' 니키는 속으로 혼자 말을 했다. 앤은 무척 활기찼다. 점잔을 빼며 걷는 히피, 눈에 확 띄는 멋쟁 이, 달걀을 하나 잘못 부쳐도 쉽게 잊지 못하는 여자다운 여자. 그녀는 이런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앤 트렌트는 실제보다 다섯 살이나 더 먹어 보였다. "니키, 난 더 이상 트렌트가 아니야. 존 크롬비 부인, 조니!" "앤, 너 결혼했니? 그런데도 결혼식에 날 초대하지 않았단 말야?" "존은 영국인이야. 오, 지금은 아니지. 조니, 에디스 백스터와 그만 수다떨 고 이리 와봐요." "알았소, 앤. 오, 우아한 숙녀분께서 오셨군. 스카치? 아니면 버번을 들겠 소, 니키? 당신이 신중한 스타일이라면 스카치를 선택할 거요. 버번은 빨리 취하니까 말이오." 존 크롬비. 인공적인 파란색의 눈, 비굴한 미소, 반들반들한 얼굴, 올리비에 를 쏙 빼닮은 턱, 영국인 클럽과 여우 사냥개. 그는 거실에 앉아서 모든 것 을 처리하는 사람이었아. '언제고 미국인들을 혐오한다고 고백하겠지.' 니키 는 생각했다. 앤 트렌트 크롬비 또한 구역질나는 오물덩어리가 안에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존 크롬비는 자기 마누라인 앤은 경멸하지만, 그녀 의 친구들에게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니키에게 우월감에 가득 찬 영국식 미소로 알랑거리며 연약한 갈색 손을 살짝 흔들고는 했다. "조심해, 니키. 난 만나는 여자마다 올라타려고 애쓰는 사내에게 발목을 붙 잡혀 있으니까." 니키는 낯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친구들은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곤 했다. "오, 루시! 니키, 내 동생 루시를 기억......" "루시 트렌트! 정말 루시 맞니?" "내가 너무 커졌나, 니키 언니?" "맙소사!" "루시가 파티 장식을 혼자서 해냈어. 종일 이 안에 갇혀서 말이야. 영감이 번뜩이는 작업이었다고 생각지 않니? 불행하게도 난 아무 도움도 되지 못 했 지만." "언니 얘기는 자기 안목이 낮다는 얘기야. 니키 언니. 시골뜨기처럼." 묘한 웃음. 가여운 루시.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뉴욕 사람이 되려고 안간 힘을 쓰는 모습이라니. 잔을 채우고, 재떨이를 비우고, 부엌으로 달려가고.... 젠장!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여자. 형부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루시.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네 가슴 때문에라도 말이야. "오, 엘러리. 이리 와요. 백스터 씨 부부를 소개시켜 드릴께요. 백스터 부인, 에디스, 그리고 이쪽은 엘러리 퀸......" 이게 뭐람? 등을 돌린 사람은 마치 벌레 같았다. 결혼생활에 지친 부부. 자그맣지만 옆으로 퍼진 몸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다시금 치장에 신경을 쓰 기 시작했다. 곱게 빗질한 머리를 창백한 얼굴 위로 들어올렸다. 두 번 다시 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했던 우리 속에서 거만한 걸음을 걷는 늙은 암말 처럼. 앤 크롬비를 바라볼 때마다, 깜빡거리는 갈색 눈에서는 은밀한 쾌감과 악의에 가까운 빛이 흘러나왔다. "제리 백스터, 에디스의 남편이에요. 여긴 엘러리 퀸이구요." "안녕하시오, 젊은이." "반갑습니다, 제리 씨." 세일즈맨? 광고회사 사원? 브로드웨이 대리인? 파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 . 술 석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런 삶. 사과를 담은 통에 가장 먼저 넘어 질 사람. 당나귀가 아니라 루시와 니키에게 먼저 꼬리를 들이밀 사람. 가장 먼저 욕지기를 하고, 뻗을 사람. 추파를 던지고, 비틀거리고, 땀을 흘리고, 고 함을 내지르고. 왜 소리를 지르는 거요, 제리 백스터? 엘러리는 뜨거워진 손바닥을 흔들고, 매력적으로 보이기를 기대하며 미소를 떠올렸다. '물론입니다, 전에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이런 얘기를 건네는 동안, 엘러리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 는 건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호텔 거실은 사과, 매쉬멜로우, 호두 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줄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호박, 검은 색과 오렌지 색 마분지로 만든 고양이, 해골, 마녀 따위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종이 줄에 역시 매달려 있었다. 방 안은 버번, 담배, 샤넬 5번 향수가 내뿜는 냄새로 인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중국산 랜턴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소란은 점점 광기를 띠었으며, 방 안을 가로지르는 단 순한 일에도 목숨을 거는 탐험 같은 대담함이 요구되었다. 여기저기 나동그 라진 가구와 장애물들---검은 고양이들이 덫에 빠지도록 교묘하게 설계된- --때문이었다. 엘러리는 손에 하이볼을 들고 안전한 구석에 처박혔다. 드루이드와 로마인 들은 니키에게 맡긴 채. 엘러리는 군소리없이 살인 게임을 받아들였다. 항의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뻔했으니까.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살인 게임을 하자고 아우 성이었다. 버스 운전수는 버스밖에 모르지 않느냐는 주장을 내세우며. 물론 그에게는 탐정 역이 떨어졌다. "그럼 시작하지요." 전통적인 할로윈 게임들을 모두 즐긴 뒤라, 그는 유쾌하게 말을 꺼냈다. 니 키는 낄낄거리는 제리 백스터를 한 번 찰싹 때리고, 영국인 조니는---그는 결코 웃지 않았다---두 번 때렸다. 그는 니키가 파티 요리를 적당히 즐겨 주기를 내심 간절하게 바랐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니키는 앤 크롬비와 루시 트렌트와 한데 어울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존 크롬비는 손을 니키의 어깨에 슬그 머니 올려 놓았고, 에디스 백스터는 버번을 그녀의 술잔에 가득 채웠다. 제리 백스터는 고양이처럼 바닥에 납작 엎어져 있었다. "금방 돌아올께요." 니키는 짧게 말은 남기고 부엌 쪽---도마 위에서 뛰어 다니는 칼 소리로 판단하건대---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롬비의 손은 허공에서 얼어붙어 버렸 다. 에디스 백스터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리, 어서 일어나지 못해요? 이게 무슨 꼴이에요!" 니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모두들 원을 그리며 모이세요. 제가 카드 를 돌릴 겁니다.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사람은 아무 말도 하면 안됩니다. 그가 바로 살인자니까요." "오우!" "앤, 엿보는 짓은 그만둬." "엿보긴 누가 엿본다구?" "당첨은 나지. 난 범죄형으로 생겼으니까." 크롬비가 낄낄거렸다. "살인자는 나라구! 흐흐흐!" 제리 백스터가 고함을 내질렀다. 엘러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엘러리, 눈을 떠요." "음?" 니키가 그를 흔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부엌 반대쪽 벽에 얼굴을 마주하 고 쭉 늘어섰다. 순간, 엘러리는 성 발렌타인 축일에 벌어진 대학살을 떠올 렸다.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벽을 보고 서세요. 살인자를 봐서는 안되니깐. 눈을 감고...." "내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군." 엘러리는 벽 쪽에 붙은 다섯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서로 간격을 두고서세요. 옆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안되니까요. 됐어요, 모두 눈을 감았지요?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사람, 그 러니까 살인범은 살짝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자리로 가세요." "크리켓 하곤 엄청나게 다른 놀이군. 이제 곧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겠 죠?" 약간 짜증이 섞인 저음으로 존 크롬비가 투덜거렸다. 에디스 백스터가 역시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물론, 불이 켜져 있으니까." "잡담은 나누지 마세요. 눈을 꼭 감아야 해요. 살인범은 뒤로 나오세요. 됐 어요! 조용히 하세요! 잡담을 나누지 말라고 경고했잖아요! 퀸 씨는 목소리 로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이에요." "계속하라고, 니키." 엘러리가 점잔을 뺐다. "자, 살인범이 할 일은 바로 이거에요. 부엌 식탁 위에 얼굴이 완전히 가려 지는 마스크와 손전등, 식빵용 칼이 있어요. 잠깐 기다려요! 아직 부엌으로 향하진 말아요. 내가 이곳에서 불을 끄면 움직이세요. 부엌에 가면, 마스크 를 쓰고 손전등과 칼을 들고 다시금 이 방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거에요. 그리고 희생자를 고르는 거에요!" "우." "아......" "읔!" 퀸은 머리를 살짝 벽에 찧었다. 미치겠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니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범인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돼요. 당신이 원하는 한 사람을 찍어야 한 다는 것 말이에요. 물론 엘러리는 빼놓고. 그는 범인을 잡을 때 까지는 살 아 있어야 하니까요." '니키, 서두르지 않는다면 난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죽고 말 거라구.' "주위는 완전한 어둠에 파묻힐 거에요. 범인이 든 손전등 하나만 빼놓고 말이에요. 저도 희생자가 누군지 전혀 모르게 될 거에요." "칼의 용도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소? 사건 해결에 단서가 될 지도 모르니." 탐정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오, 칼은 가짜에요. 단지 분위기를 고조시킬 뿐이죠. 범인은 그걸로 희생자 어깨를 톡 건드리면 돼요. 그러면 희생자는 살인범을 따라 부엌으로 따라 가는 거에요." "부엌이 바로 살인현장이군." 퀸이 우울하게 말했다. "우...... 희생자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비명을 질러대야 해요. 칼에 찔린 것 처럼 말이에요. 실감나게 해야 돼요! 모두 들었죠? 준비됐습니까? 이제 내 가 불을 끄면, 살인범은 부엌으로 향하세요.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을 든 다음, 다시 돌아와서 희생자를 고르세요. 시작!" 전등 스위치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엘러리는 눈을 떴다. 예고한 대로 사방은 새까만 어둠에 덮여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깐!" 니키가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지? 왜 그래?" 엘러리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오, 당신한테 한 말이 아니에요, 엘러리. 살인범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 중에서 한가지 잊어버린 게 있어요. 지금 어디 있죠? 아니, 됐어요. 대답할 필요 없어요. 제 말 잘 들으세요. 부엌에서 희생자를 찌른 뒤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벽을 마주보고 서 있는 거에요. 소리는 물론 내지 않고 말 이죠. 누굴 만져서도 안 되구요. 지금처럼 조용해야 해요. 손전등은 돌아오 는 길을 찾는 데 쓰는 거에요. 하지만 벽을 마주하고 서는 즉시, 손전등을 끄고, 마스크와 손전등을 거실 한가운데로 던지세요. 물증을 없애야 할 것 아니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았죠? 물론 쉽진 않겠죠?" '정말 독특한 여자야 , 니키는.....' "비록 어둡긴 하지만, 모두 눈을 감으세요. 모두, 됐어요. 그럼 범인은 앞으 로 전진!" 엘러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니키의 음성이 들려 왔다. "방금 살인자가 희생자를 툭 쳤어요. 손전등을 조심히 다뤄요, 범인! 우리 탐정에게 단서를 주어서는 안 되니까요. 됐나요, 희생자? 이제 범인이 당 신을 부엌으로 데리고 갈 겁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눈을 뜨지 말고 계속 감고 있으세요. 뒤돌아 보지도 말고." 엘러리는 다시금 졸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남자의 비명에 엘러리는 졸음에서 깨어났다. "여기요! 무슨......" "엘러리 퀸, 또 졸았어요? 지금 부엌에서 토막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어요. 자, 됐어요! 범인의 손전등 불빛이군요. 벽 쪽으로 조용히 움직이고 있어요. 이제 불을 끄세요! 좋아요, 마스크와 함께 던지세요. 와장창! 끝났군요, 살인 범. 뒤로 돌아섰나요? 다른 사람들처럼? 모두 준비됐나요? 그럼 불을 켭니 다!" "자, 이제......" 엘러리가 활기차게 말했다. "존이 보이지 않아요." 루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여-운-존." 제리가 노래하듯 말했다. "오, 불쌍한 내 남편. 조-온, 내게 돌아와요!" 앤이 울부짖었다. "존!" 니키가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에디스 백스터도 보이지 않는데?" 엘러리가 말했다. "오, 내 마누라 말이오? 이봐, 어서 그 장작더미 속에서 빠져나오라구!" 제리의 고함에 루시가 덧붙였다. "이런, 희생자가 둘이면 안되잖아, 니키. 게임을 망치는 거라구." "사건 현장으로 갑시다. 가서 보면 알겠지." 니키가 말했다. 웃고 떠들면서 그들은 부엌으로 향했다. 왼쪽으로 모퉁이를 꺾고 현관 입 구를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간 그들은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존 을 발견했다. 퀸 경위와 유쾌한 전화 통화를 마치고 부엌으로 들어간 엘러리의 눈에 싱 크대에 머리를 처박고 욕지기를 하고 있는 앤 크롬비가 눈에 띄었다. 새파 랗게 질린 루시 트렌트의 역시 새파란 손이 그녀의 이마를 떠받치고 있었 다. 니키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제리 백스터는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내 아내는 어디 있지? 에디스 어디 있소?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엘러리가 제리 백스터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제리, 긴장을 풀어요. 긴 밤이 될테니. 니키......" "알았어요." 그녀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이 바보같은 게임에서 누가 범인이었지?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사람 말야 . 당신은 누구인지 알고 있잖아?" 엘러리가 다그쳤다. "에디스 백스터, 그녀가 에이스를 쥐었어요." 제리 백스터가 엘러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거짓말! 이 구역질나는 사건에 내 아내를 개입시키지 말라고! 이 거짓말 쟁이!" 싱크대에서 기어내려온 앤이, 천으로 덮인 주검과 다른 사람들을 피해 부 엌 입구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다 부엌 바로 바깥에 있는 화장실 문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뒤에서 따라 기어가던 루시가 그녀를 안고 훌쩍였다. 앤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에디스 백스터가 범인이에요. 어디까지나 게임이지만." 니키가 몽롱하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 또 거짓 말을......" 엘러리가 아프지 않게 그의 입을 탁 쳤다. 그러자 제리 백스터는 다시금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사람의 목이 잘려 있지 않았으면 좋겠군." 엘러리는 부엌에서 빠져나왔다.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에디스 백스터가 살인범 역할을 너무 진지하게 해내 다 그만 사람을 죽이고 달아난 것은 아닐까? 이 추측은 상당히 매력적이었 다. 존 크롬비의 아내를 바라보던 에디스 백스터의 눈에서 빛나던 악의, 밤 새도록 니키를 쫓아다니던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서린 분노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에디스 백스터가 존 크롬비를 희생자로 찍고 그의 어깨 에 손을 얹은 것은 절대로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 에디스 백스터는 결국 충동에 무릎을 꿇고 크롬비의 목을 그의 영국제 옷깃에서 떼어낸 것이리라. 하지만 조사가 진행되자, 엘러리의 추측은 빗나가 버렸다. 현관은 안쪽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니키는 순간적인 '영감' 에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 바로 자신이 그 현관문을 잠갔다고 말했다. 창문을 통해 도망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페가수스처럼 에디스 백스터에게 날개가 달려 있다면 몰라도. 에디스 백스터는 도망치려는 시도를 젼혀 하지 않았다. 엘러리는 존 크롬비 의 아내와 그녀의 동생이 훌쩍이며 등을 기대고 있던 화장실 문 안쪽에서 에디스 백스터를 발견했다. 백스터 부인은 의식을 잃은 채 내팽개쳐져 있었 다. 에디스 백스터가 탄산암모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는 순간, 엘 러리의 부친인 퀸 경감과 벨리 경사가 부하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크롬비라는 사내의 목이 잘렸다고?" 벨리 경사가 다짜고짜 윽박질렀다. 에디스 백스터의 눈이 까뒤집어지자, 니키는 냄새나는 탄산암모늄을 다시 써야 했다. "살인 게임이군. 할로윈. 그렇지, 얘야?" 퀸 경감이 아들 엘러리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엘러리는 낯을 붉히고, 자초 지종을 설명했다. "알았다. 우리가 곧 해결해 주마." 경감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는 백스터 부인의 턱을 두 눈이 번 쩍 뜨일 때 까지 흔들어댔다. "부인, 우리 처지로서는 도저히 이런 파티를 이해할 수 없군요. 도대체 화 장실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에디스가 비명을 질렀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에요? 제리 백스터, 당신은 왜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에디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남편은 허리를 숙이며 그녀 의 시선을 피했다. 엘러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니키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소. 에디스, 그녀가 불을 끄자 당신은 거실에서 부엌으로 향했지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날 함부로 다루지 말아요!" 백스터 부인이 고함을 질러댔다. "부엌 입구를 막 지나치는데, 등뒤에서 누군가 내 코와 입을 틀어막았어요. 그리고 난 의식을 잃었지요. 제리 백스터, 당신은 아내를 보호하지도 못하 면서 어떻게 남편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난, 난......" "목이 잘렸다구?" 벨리 경사가 중얼거렸다. 경사는 아이들과 함께 동네 할로윈 파티에 참석 했다가,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것이다. 엘러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살인자, 진짜 살인자에요, 아버님. 니키가 불을 껐을 때, 에디스 백스터는 니키의 마지막 지시를 받느라고 방 안에 있었습니다. 벽에 늘어서 있던 나 머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니키와 에디스 백스터를 지나 방 안을 가로지 른 다음, 어딘가에 숨어......" "부인을 때려눕히기 위해서겠지." 퀸 경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다음 화장실에 처넣고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경사가 시를 읊듯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퀸 경감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스터 부인을 화장실에 넣고, 부엌으로 가서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 을 집어들고 나서, 다시 거실로 돌아와 존 크롬비를 툭 친 다음, 그를 부엌 으로 유인해 목을 베었다는 결론인데...... 물론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지. 크롬비는 아무 의심없이 부엌으로 향했을 테니까. 하지만 백스터 부인이 기 절했다는 부분은 아무래도 좀 그래. 범인이 의식을 잃은 부인을 화장실로 끌고가는 동안 아무 소리도 안 났단 말이오?" "전 졸고 있었습니다......" 엘러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니키가 나섰다. "아무 소리도 안 났습니다, 경감님. 게임 도중에는요. 제가 불을 끄고 나서 들린 첫 번째 소리는 존의 비명이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범인이 손전등 을 방 한가운데에다가 내던지는 소리였구요. 그녀는...... 아니 범인이 누구인 지는 몰라도...... 일을 마친 후 원래 자리인 벽에 가 선 거에요." 제리 백스터가 땀이 흥건한 얼굴을 들어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퀸 경감이 말을 꺼내려 했지만, 벨리 경사의 탄식이 가로막았다. "이런!" 늙은 신사의 주검을 살피다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벨리 경사가 자기도 모 르게 탄식을 내뱉은 것이었다. 다시 엘러리가 끼여들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고,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에디스는 몸집이 아 주 작습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그녀를 몇걸음 떨어지지 않은 화장실로 옮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죠. 힘이 센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순간 앤 크롬비와 루시 트렌트, 제리 백스터는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에디 스 백스터는 오히려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트렌트 자 매는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타고난 체격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제리으 경우 상당한 효과를 보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체구는 코끼리를 연상 케 했다. 엘러리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니키를 바라보았다. "니키, 불이 켜져 있었을 때, 벼겡서 발을 뒤쪽으로 살짝 내민 사람이 에디 스가 분명해?" "틀림없어요, 엘러리." "그럼 희생자를 고르기 위해서 부엌에 돌아온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 나?" "불을 끈 다음에 말이에요? 물론이에요. 손전등 불빛에 마스크가 비쳤으니 까." "남자였소, 여자였소? 생각보다 결론이 쉽게 날 지도 모르겠군. 범인이 남 자라면......" 경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니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전등 불빛은 아주 희미했어요, 경사님. 그리고 우리 모두 검은 고양이 차림이었구요." "난 테크닉이 뛰어난 권투선수는 아니오." 퀸 경감이 느닷없이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한 남자가 살해됐소. 내가 알고 싶은 건 누가 언제 어디서 살인을 저질렀 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는 것이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움츠림이 네 사람의 목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모두들 알고 있어.' 엘러리는 생각했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존 크롬비와 에디스 백스터 사이에......" "이건 생명이 달린 문제예요!" 에디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들 듯이 앞으로 나서며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조노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일도. 아무 일도 없다구요! 제리, 저 사람들 말을 믿어서는 안돼요." 제리 백스터의 눈길이 다시 떨구어 졌다. 그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 관계? 나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구. 나를 얽어매려는 수작이야." 놀랍게도 그는 아내가 아니라 앤 크롬비에게 시선을 던졌다. "앤?" 하지만 앤의 입술은 공포로 인해 젤리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구요!" 제리의 아내가 고함을 질러댔다.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루시 차례였다. 충격이 커서 용기가 생긴 것일까. "존은...... 그러니까...... 만나는 모든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어요. 저와도......" "너와 말이지?" 앤이 동생을 향해 눈을 끔뻑였다. "그래. 그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어. 난......" 에디스 백스터를 향하는 루시의 눈은 비웃음과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겠지, 에디스." 에디스도 지지 않고 루시를 노려보았다. "에디스, 당신은 그와 4주일을 함께 지냈어. 어느날 밤, 디너 파티에서 당신 들 두 사람은 슬쩍 자리를 피했지. 당신은 내가 엿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당신은 결혼해 달라고 그에게 매달렸어." "더러운 계집 같으니라고......" 에디스가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난 똑똑히 들었어. 만약 존이 앤과 이혼한다면, 당신도 제리와 이혼하겠노 라고. 그러자 존은 낄낄대며 당신을 비웃었지, 안 그래? 별 더러운 여자를 다 보겠다는 듯이. 난 당신 눈을 보았지, 에디스. 당신 눈......" 그러자 모두들 에디스 백스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말할 수 없었어, 앤. 할 수 없었다구, 할 수 없었어......" 루시는 얼굴을 손에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리 백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는 거요?" 벨리 경사가 친절하게 물었다. 제리 백스터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롬비 부인,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습니까?" 퀸 경감이 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녀는 에디스 백스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에디스 백스터는 육중한 몸을 의자에 의지한 채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늙은 여 인. 앤이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어요." 팽팽하게 당겨진 그녀의 입 근육이 느슨해졌다. "하지만 전 겁이 많아요. 전 그와 부딪칠 수 없었어요. 제가 아무 일 없었 다는 듯이 못 본 체 한다면......" "나도 겁이 많지." "뭐라구? 지금 뭐라고 했느냐? 무슨 말인지 못 들었다." 퀸 경감이 고개를 돌렸다. "크롬비의 목을 자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실 한쪽 벽을 마주한 채 늘어서 있었다. 앤 크롬비, 루시 트렌트, 에디스 백스터, 제리 백스터. 백스터 부부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족히 들어 갈 만한 정도의 틈이 자리했다. 니키는 전등 스위치 옆에 서 있었고, 퀸 경 감과 벨리 경사는 부엌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엘러리는 방 한가운 데 놓인 방석에 앉아 있었는데, 두 무릎 사이에서 손이 달랑거렸다. "몇 시간 전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것입니다, 아버님. 저와 존 크롬비가 벽에 있었다는 점만 빼놓는다면요. 저 빈자리가 바로 그의 자리입니다." 퀸 경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처럼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니키는 살인자더러 벽에서 돌아서서 방 안을 가로지르라고 했습니다. 지금 두 분이 서 계신 쪽으로 말이죠.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에디스." "당신 지금......" "부탁입니다." 에디스 백스터는 벽에서 살짝 뒷걸음질을 친 다음 등을 돌리고 잔뜩 어질 러진 가구들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경감과 경사 바로 앞에서 걸음 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니까 에디스가 바로 저 지점에 서 있었을 때, 그녀더러 부엌으로 가 라고 지시했다, 이거지, 니키? 마스크를 쓴 채 손전등과 칼을 들고 돌아와 희생자를 선택하라고 말이야. 맞나?" "그래요......" "그런 다음에 불을 내렸고, 니키? 맞아?" "그래요......" "해 봐." "해 보라뇨, 엘 러리?" "그대로 해 보라고, 니키." 어두워지자, 벽 쪽에 서 있는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침묵이 찾 아왔다. 잠시 후, 엘러리의 지친 목소리가 울렸다. "바로 이 때, 니키 당신이 에디스더러 '잠깐!' 이라고 소리를 친 다음 몇가 지 지시를 더 내렸지. '범죄'를 저지른 다음 어떻게 하라고 말이야. 방금 전에 지적했듯이, 아버님, 그러니까 에디스가 니키의 지시를 받느라고 잠 깐 서 있는 동안, 방 안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진 짜 살인자는 몰래 벽에서 등을 돌린 다음 방 안을 가로지른 겁니다. 그리 고 니키와 에디스를 지나 부엌 입구에서 에디스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건 확실하구나, 그래서?" "그런데 문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범인이 어떻게 아무런 소리도 내 지 않고 방 안을 가로지를 수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벽에 서 있던 제리 백스터가 쉰 음성으로 말했다. "난 여기 서 있을 이유가 없다구.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단 말이야!" "놀랍게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니키, 당신은 분명 이렇게 말했 어. '바로 지금처럼 조용해야 합니다.' 라고. 방금 전에 당신은, 전등을 끈 다음 처음 들은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온 존의 비명이라고 했지. 그리고 살 인자가 벽으로 돌아온 뒤에 손전등을 방 안에 내던질 때 난 소리가 두 번 째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반복하는데, 문제는 살인자가 어떻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 안을 가로지를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벨리 경사가 투덜거렸다. "경사님, 방 안을 이미 둘러보셨지요? 가구, 베게, 방석 따위의 잡동사니로 온통 난장판이잖습니까? 경사님은 이런 난장판 속을 아무 소리도 내지 않 고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니키, 우린 이 곳에 도착하고 나서 한 참을 헤매......" "어둠 때문에 우왕좌왕 했지요. 여기저기 긁히고 말이에요. 전 넘어......" "그런데 왜 살인범은 그러지 않았을까?" 퀸 경감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내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아무도 방 안을 가로지르지 않았던 거야. 불이 꺼진 상태에서 그런다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그때 방 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니키가 정확히 목격했을 테고 말이야."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하겠군요, 경감님." 경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가 알기로 방을 가로지른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니키는 똑똑히 볼 수 있었지. 그 사람은 바로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네, 벨리. 에디스 백스터!" "오, 아니야. 난 아니라구!" 에디스가 꺽꺽거리며 부인했다. "오, 물론 그러시겠지요, 백스터 부인. 당신은 부엌으로 가서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을 집어들었소. 그리고는 돌아와서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 을 집어들었소. 그리고는 돌아와서 존 크롬비 를 지목했소. 그가 따라나오자 부엌에서 그의 목을......" "아니야!" "일을 마치고 나서 당신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실신한 척 꾸몄지. 사람들이 당신을 발견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고 엄청난 거짓 말을 해 대고." "아버님." 엘러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응? 왜 그러느냐?" 이와 유사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 뚜렷했기 때문에, 경감의 목소리는 약간 거칠었다. "내가 틀렸다는 얘길 하려는 거냐, 엘러리!" "에디스 백스터는 존 크롬비를 죽일 수 없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오늘 밤 판명되었잖습니까?" "당신은 알고 있군요?" 에디스가 신음 소리를 냈다. 헐떡거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크롬비가 비명을 지른 뒤에 누군가 손전등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을 니키 가 목격했습니다. 범인이 벽으로 다가가서 손전등을 방 한가운데다가 던지 는 소리도 들었구요. 니키가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린 진짜 범인이 누구 인지 이미 추론해 냈습니다. 손전등이 떨어지는 소리가난 직후, 니키는 불 을 켰습니다. 에디스 백스터가 범인이라면, 벽에 붙어 있던 나머지 사람들 은 불이 켜진 즉시 그녀를 발견해야 하잖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 았습니다. 그녀는 거실에 없었지요. 우린 그녀를 화장실에서 발견했습니다. 진짜 범인에게 얻어맞아 의식을 잃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녀는 크롬 비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에디스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가 범인이란 말이냐?" 경감이 다그쳤다. 이 황당한 살인사건을 어서 마무리짓고 집에 돌아가 푹 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그의 음성에서 뚝뚝 묻어나왔다. 엘러리 역시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범인은 어둠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가로지를 수 있는 사람 입니다. 에디스는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으니, 이제 초점은 벽에 서 있 는 세 사람에게로 옮겨진 셈이지요. 저 중 한 사람이 바로 아무도 몰래 방 안을 가로지른 겁니다." 엘러리의 설명에는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었다. 퀸 경감이 다 시 끼어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이 난장판 속을 헤쳐나갈 수 있단 말이냐? 깜쪽같이 말이야!" "오직 한 가지 해석만이 가능합니다." 갑자기 엘러리의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다. 그는 칼을 집어들고 끝을 매만 졌다.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내가 완전히 탈진한 채 방석에 앉아 있 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어리석은...... 장면이지요." 벨리가 울부짖었다. "스위치는 어디 있지? 니키 포터 양, 불을 켜주겠소?"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니키가 흐느꼈다. "모두들 꼼짝 말아요!" 경위가 소리쳤다. "자, 이제 칼을 던지겠습니다." 엘러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을 던집니다." 자그마한 소리에 이어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이 미로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은,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미로를 꾸민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엘러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달리 얘기한다면, 난장판은 우연이 아니고 아주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겁니 다. 머릿속에 장애물 코스를 입력시켜 놓고, 예행 연습을 했겠지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우린 당신이 파티 준비를 하기 위해 온종일 이 방에서 혼 자 지냈다는 얘길 들었소." "여기 있어요!" 흐느낌을 멈추고 니키가 스위치를 올렸다. 엘러리는 부드럽게 처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트렌트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 겠지, 루시......"